Paper 148 Training Evangelists at Bethsaida 벳새다에서 전도자들 훈련

Paper 148

Training Evangelists at Bethsaida 벳새다에서 전도자들 훈련

1. A New School of the Prophets 새 선지자들 학교
2. The Bethsaida Hospital 벳새다 병원
3. The Father’s Business 아버지의 사업
4. Evil, Sin, and Iniquity 악(惡), 죄(罪) 및 사악(肆惡)
5. The Purpose of Affliction 고통의 목적
6. The Misunderstanding of Suffering — Discourse on Job 고통에 대한 오해─욥에 대한 강연
7. The Man with the Withered Hand 손 마른 사람
8. Last Week at Bethsaida 벳새다에서 마지막 주간
Kirmeth of Bagdad 바그다드의 커르메스
9. Healing the Paralytic 중풍병자의 치유
Baptism of three of the spies 세 첩자들의 세례

200223 벳새다 야영지의 조직적 양육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Once again Jesus went out beside the lake. A large crowd came to him, and he began to teach them.

148:0.1 (1657.1) FROM May 3 to October 3, A.D. 28, Jesus and the apostolic party were in residence at the Zebedee home at Bethsaida. Throughout this five months’ period of the dry season an enormous camp was maintained by the seaside near the Zebedee residence, which had been greatly enlarged to accommodate the growing family of Jesus. This seaside camp, occupied by an ever-changing population of truth seekers, healing candidates, and curiosity devotees, numbered from five hundred to fifteen hundred. This tented city was under the general supervision of David Zebedee, assisted by the Alpheus twins. The encampment was a model in order and sanitation as well as in its general administration. The sick of different types were segregated and were under the supervision of a believer physician, a Syrian named Elman. AD 28년 5월 3일에서 10월 3일까지 예수님과 사도 일행은 벳새다에서 세베대의 집에 거주했습니다. 건기(乾期)의 이 다섯 달 내내 세베데의 주택에 인접한 해변에 거대한 야영지(野營地)가 유지되었고, 그것은 늘어나는 예수 일행을 수용하기 위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구도자(求道者)들, 치유 희망자들, 호기심 많은 신봉(信奉)자들이 차지한 이 해변 야영지의 변동 인구 숫자는 늘 500명에서 1,500명이었습니다. 이 천막 도시는 다윗 세베데의 총(總)감독 아래에서 알패오 쌍둥이 형제가 거들었습니다. 야영지는 전반적 경영만이 아니라, 질서와 위생(衛生)도 모델이었습니다. 다른 유형의 환자들은 격리(隔離)되었고 신자(信者)로서 의사(醫師)였던 시리아인(人) 엘만의 감독 아래에 있었습니다.

148:0.2 (1657.2) Throughout this period the apostles would go fishing at least one day a week, selling their catch to David for consumption by the seaside encampment. The funds thus received were turned over to the group treasury. The twelve were permitted to spend one week out of each month with their families or friends. 이 기간 내내 사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물고기 잡으러 나가곤 했으며,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다윗에게 팔아서 해변 야영지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받은 재원(財源)은 사도 일행의 기금으로 운용했습니다. 12사도들은 매월 한 주간 밖으로 나가서 그들 가족 및 친구들과 지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148:0.3 (1657.3) While Andrew continued in general charge of the apostolic activities, Peter was in full charge of the school of the evangelists. The apostles all did their share in teaching groups of evangelists each forenoon, and both teachers and pupils taught the people during the afternoons. After the evening meal, five nights a week, the apostles conducted question classes for the benefit of the evangelists. Once a week Jesus presided at this question hour, answering the holdover questions from previous sessions. 안드레는 사도 활동의 총(總)책임을 계속 맡았으며, 베드로는 전도자들 학교를 전적으로 담당했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오전마다 분담해서 전도자들 일행을 가르쳤고,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 오후에는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저녁식사 후 한 주에 5일간 밤마다 사도들이 전도자들을 위해 질문 교실을 운영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주일에 한 번 이 질문 시간을 맡으셨고, 이전(以前) 수업에서 남겨진 질문들에 답하셨습니다.

148:0.4 (1657.4) In five months several thousand came and went at this encampment. Interested persons from every part of the Roman Empire and from the lands east of the Euphrates were in frequent attendance. This was the longest settled and well-organized period of the Master’s teaching. Jesus’ immediate family spent most of this time at either Nazareth or Cana. 5개월간 수천 명이 이 야영지에 다녀갔습니다. 로마제국 전(全) 지역과 유프라테스 동쪽 지역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주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주(主)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면서 잘 조직해서 가르친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계 가족은 이 시간의 대부분을 나사렛이나 가나에서 보냈습니다.

148:0.5 (1657.5) The encampment was not conducted as a community of common interests, as was the apostolic family. David Zebedee managed this large tent city so that it became a self-sustaining enterprise, notwithstanding that no one was ever turned away. This ever-changing camp was an indispensable feature of Peter’s evangelistic training school. 야영지는 사도 일행들이 했듯이, 공동 이익의 공동체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다윗 세베데는,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이 커다란 텐트 도시가 자립(自立)체가 되도록 관리했습니다. 늘-변화하는 이 야영지가 베드로의 전도자 훈련 학교에서 필수적 특성(特性)이었습니다.

1. A New School of the Prophets 새 선지자들 학교

200301 새 선지자들 학교 눅10:1-2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1 After this the Lord appointed seventy-two others and sent them two by two ahead of him to every town and place where he was about to go. 2 He told them,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herefore,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field.

148:1.1 (1657.6) Peter, James, and Andrew were the committee designated by Jesus to pass upon applicants for admission to the school of evangelists. All the races and nationalities of the Roman world and the East, as far as India, were represented among the students in this new school of the prophets. This school was conducted on the plan of learning and doing. What the students learned during the forenoon they taught to the assembly by the seaside during the afternoon. After supper they informally discussed both the learning of the forenoon and the teaching of the afternoon.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및 안드레를 임명하셔서, 이들은 전도자들 학교의 입학(入學) 지원자들을 선발하는 위원회가 되었습니다. 로마 세계, 동쪽 및 인도까지 모든 종족들과 국가들이 새로운 이 선지자들 학교의 학생들에 해당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배우며 실천하는 계획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오전에 배운 것을 오후에 해변에 모인 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그들은 스스럼없이 오전에 배운 것과 오후에 가르친 것을 토론했습니다.

148:1.2 (1658.1) Each of the apostolic teachers taught his own view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y made no effort to teach just alike; there was no standardized or dogmatic formulation of theologic doctrines. Though they all taught the same truth, each apostle presented his own personal interpretation of the Master’s teaching. And Jesus upheld this presentation of the diversity of personal experience in the things of the kingdom, unfailingly harmonizing and co-ordinating these many and divergent views of the gospel at his weekly question hours. Notwithstanding this great degree of personal liberty in matters of teaching, Simon Peter tended to dominate the theology of the school of evangelists. Next to Peter, James Zebedee exerted the greatest personal influence. 사도 교사들 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자기 견해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 교리(敎理)들에 대한 표준화, 즉 교의(敎義) 공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진리를 가르쳤지만, 사도마다 주(主)님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이런 다양한 발표를 지지하셨고, 매주 자신의 질문 시간에 이런 여러 다양한 복음의 견해들을 정확히 조화시켜 정합(整合통합 조정)하셨습니다. 가르침에 관해 이렇게 커다란 정도로 개인적 자유가 있었지만, 시몬 베드로가 전도자들 학교의 신학을 좌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다음으로 야고보 세베대가 가장 크게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148:1.3 (1658.2) The one hundred and more evangelists trained during this five months by the seaside represented the material from which (excepting Abner and John’s apostles) the later seventy gospel teachers and preachers were drawn. The school of evangelists did not have everything in common to the same degree as did the twelve. 이 5개월간 해변에서 훈련된 100명 이상의 전도자들은, 아브너와 요한의 사도들을 제외하고 나중에 70명의 복음 교사들과 설교자들이 나왔던, 요소에 해당되었습니다. 전도자들 학교는, 12사도들이 했던 동일한 정도로 공동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148:1.4 (1658.3) These evangelists, though they taught and preached the gospel, did not baptize believers until after they were later ordained and commissioned by Jesus as the seventy messengers of the kingdom. Only seven of the large number healed at the sundown scene at this place were to be found among these evangelistic students. The nobleman’s son of Capernaum was one of those trained for gospel service in Peter’s school. 이 전도자들은 복음을 가르쳤고 설교했지만, 예수께서 나중에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70인 메신저로서 임직해서 임명하기까지, 그들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해질녘 장면 중에 치유된 큰 무리(AD 28. 1월 17일 토 145.3) 중에서 7명만이 이곳에서 이 전도하는 학생들 가운데 발견되었습니다. 가버나움 귀인(貴人)의 아들(타이투스의 아들 146.5.2)은 베드로의 학교에서 복음 봉사를 위해 훈련된 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2. The Bethsaida Hospital 벳새다 병원

200308 벳새다 병원 마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News about him spread all over Syria, and people brought to him all who were ill with various diseases, those suffering severe pain, the demon-possessed, those having seizures, and the paralyzed, and he healed them.

148:2.1 (1658.4) In connection with the seaside encampment, Elman, the Syrian physician, with the assistance of a corps of twenty-five young women and twelve men, organized and conducted for four months what should be regarded as the kingdom’s first hospital. At this infirmary, located a short distance to the south of the main tented city, they treated the sick in accordance with all known material methods as well as by the spiritual practices of prayer and faith encouragement. Jesus visited the sick of this encampment not less than three times a week and made personal contact with each sufferer. As far as we know, no so-called miracles of supernatural healing occurred among the one thousand afflicted and ailing persons who went away from this infirmary improved or cured. However, the vast majority of these benefited individuals ceased not to proclaim that Jesus had healed them. 해변 야영지에 관련하여, 시리아인(人) 의사 엘만이 젊은 여성 25명과 남성 12명의 도움으로, 4개월간 하나님 나라의 첫 병원으로 여겨져야 할 것을 조직하여 운영했습니다. 본 천막 도시의 남쪽 가까이에 있는 이 진료소에서, 그들은 기도와 신앙으로 격려하는 영적 실천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물질적 방법에 따라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야영지의 환자들을 한 주에 적어도 세 번 방문하셨고, 병자들을 직접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호전(好轉)되고 치료되어 이 진료소를 떠난 1천 명의 병들어 앓던 사람들 가운데 소위 초자연적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혜택을 입은 대다수의 개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고쳤다고 끊임없이 선포했습니다.

148:2.2 (1658.5) Many of the cures effected by Jesus in connection with his ministry in behalf of Elman’s patients did, indeed, appear to resemble the working of miracles, but we were instructed that they were only just such transformations of mind and spirit as may occur in the experience of expectant and faith-dominated persons who are under the immediate and inspirational influence of a strong, positive, and beneficent personality whose ministry banishes fear and destroys anxiety. 엘만의 환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보살핌과 관련하여 그가 행하신 여러 치료는 참으로 기적의 작용과 닮은 듯하지만, 강하고 긍정적이며 인정 많은 고유성의 보살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걱정을 없애는, 즉각적 영감(靈感)의 영향 아래에서, 신앙에 사로잡혀 기대하는 사람들의 체험에서 일어날 수도 있듯이, 그것들은 바로 그런 마음과 영의 변환들일 뿐이었다고 우리는 전달을 받았습니다.

148:2.3 (1658.6) Elman and his associates endeavored to teach the truth to these sick ones concerning the “possession of evil spirits,” but they met with little success. The belief that physical sickness and mental derangement could be caused by the dwelling of a so-called unclean spirit in the mind or body of the afflicted person was well-nigh universal. 엘만과 그의 동료들은 이 환자들에게 “악령들에게 사로잡힘”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소위 악령이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이나 몸에 내주하여 육체적 질병과 정신 착란을 일어나게 된다는 믿음이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148:2.4 (1659.1) In all his contact with the sick and afflicted, when it came to the technique of treatment or the revelation of the unknown causes of disease, Jesus did not disregard the instructions of his Paradise brother, Immanuel, given ere he embarked upon the venture of the Urantia incarnation. Notwithstanding this, those who ministered to the sick learned many helpful lessons by observing the manner in which Jesus inspired the faith and confidence of the sick and suffering. 예수께서 환자 및 앓는 자들과 모두 만나시며, 치료의 기법이나 알려지지 않은 병의 원인을 드러낼 경우, 예수님은 유란시아 성육신(成肉身)의 모험에 착수하기 전에 주어진, 자신의 천국 형(兄) 임마누엘의 지시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지만, 예수께서 환자와 고통받는 자들의 신앙과 확신을 일으키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환자를 보살피던 사람들은 유익한 교훈을 많이 배웠습니다.

148:2.5 (1659.2) The camp disbanded a short time before the season for the increase in chills and fever drew on. 야영지는 오한과 발열이 늘어나는 철이 다가오기 직전에 해산했습니다.

3. The Father’s Business 아버지의 업무

200315 아버지의 업무 눅2:49-50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49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sought me? wist ye not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50 And they understood not the saying which he spake unto them.

148:3.1 (1659.3) Throughout this period Jesus conducted public services at the encampment less than a dozen times and spoke only once in the Capernaum synagogue, the second Sabbath before their departure with the newly trained evangelists upon their second public preaching tour of Galilee. 이 기간 내내, 예수님은 야영지에서 12회 이내로 공(公)예배를 인도하셨고, 새로 훈련받은 전도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그들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한 번만 말씀하셨습니다.

148:3.2 (1659.4) Not since his baptism had the Master been so much alone as during this period of the evangelists’ training encampment at Bethsaida. Whenever any one of the apostles ventured to ask Jesus why he was absent so much from their midst, he would invariably answer that he was “about the Father’s business.” 주(主)님의 세례 이후, 벳새다에서 전도자들의 이 야영 훈련 기간처럼 그토록 오래 주(主)님이 홀로 계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사도 중 누구라도 예수께서 그렇게 많이 자신들로부터 왜 떠나 계시냐고 감히 예수께 여쭐 때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버지의 업무를 보는 중”이라고 대답하시곤 했습니다.

148:3.3 (1659.5) During these periods of absence, Jesus was accompanied by only two of the apostles. He had released Peter, James, and John temporarily from their assignment as his personal companions that they might also participate in the work of training the new evangelistic candidates, numbering more than one hundred. When the Master desired to go to the hills about the Father’s business, he would summon to accompany him any two of the apostles who might be at liberty. In this way each of the twelve enjoyed an opportunity for close association and intimate contact with Jesus. 자리를 비우신 이 기간에, 사도 중 둘만 예수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자신의 개인 비서 업무에서 잠시 풀어놓아서, 100명 이상의 새 전도 후보자들의 훈련 업무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주(主)께서 아버지의 업무로 언덕에 가려고 하실 때, 그는 한가한 사도 중 둘을 불러 동반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각 12사도는 예수님과 가깝게 사귀며 친밀히 접촉하는 기회를 누렸습니다.

148:3.4 (1659.6) It has not been revealed for the purposes of this record, but we have been led to infer that the Master, during many of these solitary seasons in the hills, was in direct and executive association with many of his chief directors of universe affairs. Ever since about the time of his baptism this incarnated Sovereign of our universe had become increasingly and consciously active in the direction of certain phases of universe administration. And we have always held the opinion that, in some way not revealed to his immediate associates, during these weeks of decreased participation in the affairs of earth he was engaged in the direction of those high spirit intelligences who were charged with the running of a vast universe, and that the human Jesus chose to designate such activities on his part as being “about his Father’s business.” 이 기록의 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홀로 언덕에 계시던 이 기간에, 주님이 우주 업무를 맡은 자신의 여러 관리장(長)들과 공동으로 직접 실행 중이셨음을 우리가 추론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세례 무렵 이후 줄곧, 우리 우주의 이 성육신(成肉身)하신 주권자는 어떤 단계의 우주 경영 관리에 점차 의식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직계 동료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지상 업무의 참여를 줄였던 이 몇 주간에, 주님은 광대한 우주의 운영을 책임진 높은 영 지능 존재들을 지도하시느라 바쁘셨으며, 인간 예수님은 자신의 편에서 그런 활동들을 “자기 아버지의 업무 중”이라 부르기로 정하셨다는 의견을 우리는 언제나 갖고 있습니다.

148:3.5 (1659.7) Many times, when Jesus was alone for hours, but when two of his apostles were near by, they observed his features undergo rapid and multitudinous changes, although they heard him speak no words. Neither did they observe any visible manifestation of celestial beings who might have been in communication with their Master, such as some of them did witness on a subsequent occasion. 예수께서 몇 시간 홀로 계셨지만 사도 둘이 근처에 있었을 때, 그들은 그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했지만, 여러 번 그의 용모가 신속하게 무수히 변화되는 것을 주목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몇 사도가 목격했던 것처럼, 주(主)님과 소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천상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들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4. Evil, Sin, and Iniquity 악(惡), 죄(罪) 및 사악(肆惡)

200322 악(惡), 죄(罪) 및 사악(肆惡) (1)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148:4.1 (1659.8) It was the habit of Jesus two evenings each week to hold special converse with individuals who desired to talk with him, in a certain secluded and sheltered corner of the Zebedee garden. At one of these evening conversations in private Thomas asked the Master this question: “Why is it necessary for men to be born of the spirit in order to enter the kingdom? Is rebirth necessary to escape the control of the evil one? Master, what is evil?” When Jesus heard these questions, he said to Thomas: 매주 이틀 저녁에 세베대의 정원 구석에 있는 한적한 숙소에서, 자신과 이야기하려는 개인들과 특별히 대화하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이었습니다. 이 저녁 대화 중에 한 번, 도마가 사적으로 주(主)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영으로 거듭날 필요가 왜 있는지요? 악마(惡魔)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듭남이 필요한가요? 주(主)님, 악(惡)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런 질문들을 들으시고 도마에게 대답하셨습니다.

148:4.2 (1660.1) “Do not make the mistake of confusing evil with the evil one, more correctly the iniquitous one. He whom you call the evil one is the son of self-love, the high administrator who knowingly went into deliberate rebellion against the rule of my Father and his loyal Sons. But I have already vanquished these sinful rebels. Make clear in your mind these different attitudes toward the Father and his universe. Never forget these laws of relation to the Father’s will: 악(惡)과 악마(惡魔), 더 정확히 사악(肆惡 극악極惡스런 모진 성질로 사나운 악독惡毒을 함부로 독살毒煞스럽게 부려 해치는)자를 혼동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너희가 악마(惡魔)로 부르는 그는 이기심(자기만-사랑하는)의 아들, 내 아버지와 그의 충성스런 아들들의 통치에 적대하여 의도적인 반역(反逆권력 탈취)에 고의로 빠진 높은 경영자이니라. 그러나 나는 벌써 이 죄받을 반역자들을 정복했느니라. 아버지와 그의 우주를 향한 다른 이런 태도를 네 마음에 분명히 이해하라. 아버지의 뜻과 관련된 이 법칙을 절대로 잊지 말라.

148:4.3 (1660.2) “Evil is the unconscious or unintended transgression of the divine law, the Father’s will. Evil is likewise the measure of the imperfectness of obedience to the Father’s will. “악(惡)은 신적 법칙, 즉 아버지의 뜻을 의식하지 못하며, 의도하지 않은 위반(違反)이니라. 악(惡)은 아버지 뜻에 순종(順從)하는 불완전성(不完全性)의 척도(尺度)이니라.

148:4.4 (1660.3) “Sin is the conscious, knowing, and deliberate transgression of the divine law, the Father’s will. Sin is the measure of unwillingness to be divinely led and spiritually directed. “죄(罪)는 신적 법칙, 즉 아버지의 뜻을 의식하며, 알고 있는, 의도적인 위반(違反)이니라. 죄(罪)는 신적 인도(引導)와 영적 지도(指導)에 반항하는 척도(尺度)이니라.

148:4.5 (1660.4) “Iniquity is the willful, determined, and persistent transgression of the divine law, the Father’s will. Iniquity is the measure of the continued rejection of the Father’s loving plan of personality survival and the Sons’ merciful ministry of salvation. “사악(肆惡)은 신적 법칙, 즉 아버지의 뜻을, 옹고집(壅固執 극심한 억지로 아집我執을 부림)으로 단호히 결심한, 끈덕진 위반(違反)이니라. 사악(肆惡)은 고유성을 생존하게 하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계획과 아들들의 자비로운 구원 사역을 지속적으로 거절하는 척도(尺度)이니라.

148:4.6 (1660.5) “By nature, before the rebirth of the spirit, mortal man is subject to inherent evil tendencies, but such natural imperfections of behavior are neither sin nor iniquity. Mortal man is just beginning his long ascent to the perfection of the Father in Paradise. To be imperfect or partial in natural endowment is not sinful. Man is indeed subject to evil, but he is in no sense the child of the evil one unless he has knowingly and deliberately chosen the paths of sin and the life of iniquity. Evil is inherent in the natural order of this world, but sin is an attitude of conscious rebellion which was brought to this world by those who fell from spiritual light into gross darkness. “본래, 영으로 거듭나기 전에, 필사 사람은 타고난 악한 경향에 지배되지만, 천성적인 그런 행위의 결함은 죄(罪)도 아니고 사악(肆惡)도 아니라. 필사 사람은 천국 아버지의 완전에 이르는 자신의 오랜 상승을 시작할 뿐이니라. 천성적 자질에서 결함과 불완전은 죄(罪)가 되지 않느니라. 사람은 참으로 악에 지배되지만, 자기가 알면서 의도적으로 죄(罪)의 길과 사악(肆惡)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 한, 어떤 의미에서도, 악마(惡魔)의 자녀가 아니라. 악(惡)은 이 세상의 자연 질서에 본래적이지만, 죄(罪)는 영적 빛에서 짙은 어둠으로 타락한 자들이 이 세상에 가져온 의식적 반역(反逆)의 태도이니라.”

200329 악(惡), 죄(罪) 및 사악(肆惡) (2)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148:4.7 (1660.6) “You are confused, Thomas, by the doctrines of the Greeks and the errors of the Persians. You do not understand the relationships of evil and sin because you view mankind as beginning on earth with a perfect Adam and rapidly degenerating, through sin, to man’s present deplorable estate. But why do you refuse to comprehend the meaning of the record which discloses how Cain, the son of Adam, went over into the land of Nod and there got himself a wife? And why do you refuse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record which portrays the sons of God finding wives for themselves among the daughters of men? “도마야, 너는 그리스인(人)들의 교리들과 페르시아인(人95.6.6, 98.7.6, 146.1.3, 170.1.6)들의 실수로 혼동되어 있느니라. 너는 인류가 완전한 아담과 함께 지상에서 시작되어 죄를 통해 인간의 현재 비참한 상태로 급속히 타락했다고 보기 때문에, 네가 악(惡)과 죄(罪)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는 왜 아담의 아들 카인이 놋의 땅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아내를 얻었다고 드러내는 기록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느냐? (77.4.5, 창4:16-17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그리고 너는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찾는다고 표현한 기록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지 않느냐?(창6:1-2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ref. 77:4.5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econd garden it was customary to allude to this near-by Nodite settlement as “the land of Nod”; and during the long period of relative peace between this Nodite group and the Adamites, the two races were greatly blended, for it became more and more the custom for the Sons of God (the Adamites) to intermarry with the daughters of men (the Nodites).

146:1.3 (1637.5) Many of the better of the Babylonian and Persian ideas of light and darkness, good and evil, time and eternity, were later incorporated in the doctrines of so-called Christianity, and their inclusion rendered the Christian teachings more immediately acceptable to the peoples of the Near East. In like manner, the inclusion of many of Plato’s theories of the ideal spirit or invisible patterns of all things visible and material, as later adapted by Philo to the Hebrew theology, made Paul’s Christian teachings more easy of acceptance by the western Greeks.

170:1.6 (1858.8) 4. The Persian teachings portraying the establishment of a divine kingdom as the achievement of the triumph of good over evil at the end of the world.

98:7.6 (1084.4) 3. The Zoroastrian conception of the struggle between cosmic good and evil, which had already left its imprint on both Judaism and Mithraism. Through prolonged contact attendant upon the struggles between Mithraism and Christianity, the doctrines of the Iranian prophet became a potent factor in determining the theologic and philosophic cast and structure of the dogmas, tenets, and cosmology of the Hellenized and Latinized versions of the teachings of Jesus.

148:4.8 (1660.7) “Men are, indeed, by nature evil, but not necessarily sinful. The new birth — the baptism of the spirit — is essential to deliverance from evil and necessary for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none of this detracts from the fact that man is the son of God. Neither does this inherent presence of potential evil mean that man is in some mysterious way estranged from the Father in heaven so that, as an alien, foreigner, or stepchild, he must in some manner seek for legal adoption by the Father. All such notions are born, first, of your misunderstanding of the Father and, second, of your ignorance of the origin, nature, and destiny of man. “사람들은 참으로 본래 악(惡)하지만, 반드시 죄 있는 것은 아니니라. 새로 태어남, 즉 영(靈)의 세례가 악에서 해방되려면 필수적이며,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이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손상하지 않느니라. 본래 잠재적 악(惡)에 속한 이런 현존이, 사람이 이상하게 하늘 아버지로부터 멀어져, 이방인, 외국인 또는 의붓자식으로서 그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법적으로 입양되기를 찾아야만 함을, 뜻하지도 않느니라. 그런 모든 개념들은 첫째 너희가 아버지를 오해하고, 둘째 사람의 기원, 본성 및 운명을 너희가 몰라서 생기느니라.

148:4.9 (1660.8) “The Greeks and others have taught you that man is descending from godly perfection steadily down toward oblivion or destruction; I have come to show that man, by entrance into the kingdom, is ascending certainly and surely up to God and divine perfection. Any being who in any manner falls short of the divine and spiritual ideals of the eternal Father’s will is potentially evil, but such beings are in no sense sinful, much less iniquitous. “그리스인(人)들과 다른 이들은, 사람이 하나님 같은 완전함에서 꾸준히 망각(忘却) 또는 파멸로 내려가고 있다고 너희에게 가르쳤느니라.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입국하여, 하나님과 신적 완전을 향해 분명하게 확실히 올라가고 있음을 보이려고 내가 왔느니라. 어떤 면이라도 영원한 아버지의 뜻에 속한 신적·영적 이상(理想)들에 미달하는 존재는 잠재적으로 악(惡)하지만, 그런 존재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죄(罪)스럽지 않으며, 하물며 사악(肆惡)은 결코 아니니라.

148:4.10 (1661.1) “Thomas, have you not read about this in the Scriptures, where it is written: ‘You are the children of the Lord your God.’ ‘I will be his Father and he shall be my son.’ ‘I have chosen him to be my son — I will be his Father.’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even every one who is called by my name, for I have created them for my glory.’ ‘You are the sons of the living God.’ ‘They who have the spirit of God are indeed the sons of God.’ While there is a material part of the human father in the natural child, there is a spiritual part of the heavenly Father in every faith son of the kingdom.” “도마야, 이것에 대해 기록된 성서를 읽지 않았느냐? ‘너희는 주(主)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시82:6),’ ‘내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삼하7:14a),’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대상28:6b),’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고;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도 오게 하라,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그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라(사43:6b-7a),’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이라(호1:10b),’ ‘하나님의 영을 지닌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이라(롬8:14).’ 친자녀에게는 인간 아버지의 물질 부분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신앙 아들(자녀)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영적 부분이 있느니라.”

148:4.11 (1661.2) All this and much more Jesus said to Thomas, and much of it the apostle comprehended, although Jesus admonished him to “speak not to the others concerning these matters until after I shall have returned to the Father.” And Thomas did not mention this interview until after the Master had departed from this world. 예수께서 이 모두와 더 많이 도마에게 말씀하셨고, 그는 대부분 이해했지만, “내가 아버지께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이 문제들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하라.”고 예수님은 그에게 타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도마는 이 면담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5. The Purpose of Affliction 고통의 목적

200405 고통의 목적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If you are not disciplined (and everyone undergoes discipline), then you are illegitimate children and not true sons.

148:5.1 (1661.3) At another of these private interviews in the garden Nathaniel asked Jesus: “Master, though I am beginning to understand why you refuse to practice healing indiscriminately, I am still at a loss to understand why the loving Father in heaven permits so many of his children on earth to suffer so many afflictions.” The Master answered Nathaniel, saying: 정원의 이런 사적인 다른 면담에서 나다니엘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님, 주께서 왜 가리지 않고 치료하기를 거절하시는지 비로소 저는 이해하지만, 왜 하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지상에 있는 많은 자기 자녀들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시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다니엘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48:5.2 (1661.4) “Nathaniel, you and many others are thus perplexed because you do not comprehend how the natural order of this world has been so many times upset by the sinful adventures of certain rebellious traitors to the Father’s will. And I have come to make a beginning of setting these things in order. But many ages will be required to restore this part of the universe to former paths and thus release the children of men from the extra burdens of sin and rebellion. The presence of evil alone is sufficient test for the ascension of man — sin is not essential to survival. “나다니엘아, 너와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게 혼란에 빠진 이유는, 아버지의 뜻에 반역하는 어떤 배신자들의 죄받을 사건들로 인해, 이 세상의 자연 질서가 그토록 얼마나 여러 번 완전히 어지럽혀졌는지, 네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래서 내가 이것들을 비로소 정리하러 왔노라. 그러나 우주의 이 부분을 이전 경로로 회복하고, 사람의 자녀들을 죄와 반역의 추가 부담에서 그렇게 해방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게 되리라. 악(惡)의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상승을 위해 충분한 시련이니라. – 죄는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느니라.

148:5.3 (1661.5) “But, my son, you should know that the Father does not purposely afflict his children. Man brings down upon himself unnecessary affliction as a result of his persistent refusal to walk in the better ways of the divine will. Affliction is potential in evil, but much of it has been produced by sin and iniquity. Many unusual events have transpired on this world, and it is not strange that all thinking men should be perplexed by the scenes of suffering and affliction which they witness. But of one thing you may be sure: The Father does not send affliction as an arbitrary punishment for wrongdoing. The imperfections and handicaps of evil are inherent; the penalties of sin are inevitable; the destroying consequences of iniquity are inexorable. Man should not blame God for those afflictions which are the natural result of the life which he chooses to live; neither should man complain of those experiences which are a part of life as it is lived on this world. It is the Father’s will that mortal man should work persistently and consistently toward the betterment of his estate on earth. Intelligent application would enable man to overcome much of his earthly misery. “그러나 내 아들아,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일부로 괴롭히지 않으신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하니라. 사람은 신적 뜻에 속한 개선된 길로 걷기를 끊임없이 거절하는 결과로써 불필요한 고통을 자신에게 초래하느니라. 고통은 악(惡)에 잠재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고통은 죄(罪)와 사악(肆惡)으로 생기느니라. 여러 드믄 사건들이 이 세상에 일어났고, 생각이 깊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목격하는 괴로움과 고통의 장면으로 당혹스러워했던 것은 별나지 않느니라. 그러나 한 가지는 네가 확신할 수도 있느니라. 아버지는 범죄에 대한 독단적 징벌로써 고통을 보내지 않으시니라. 악(惡)의 불완전(결함)과 장애(불리한 불이익)는 본래적이라. 죄(罪)의 처벌은 피할 수 없느니라. 사악(肆惡)의 소멸하는 결과는 변경할 수 없느니라. 사람은 자신이 살려고 선택한 인생의 자연적 결과인 그런 고통들을 하나님 책임으로 돌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인생의 부분인 그런 체험들을 불평하지 말아야 하니라. 필사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상태가 개선되도록 끊임없이 일관되게 애쓰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라. 사람은 지상에서 대부분의 자기 불행을 지능적 적용으로 극복할 수 있느니라.

148:5.4 (1662.1) “Nathaniel, it is our mission to help men solve their spiritual problems and in this way to quicken their minds so that they may be the better prepared and inspired to go about solving their manifold material problems. I know of your confusion as you have read the Scriptures. All too often there has prevailed a tendency to ascribe to God the responsibility for everything which ignorant man fails to understand. The Father is not personally responsible for all you may fail to comprehend. Do not doubt the love of the Father just because some just and wise law of his ordaining chances to afflict you because you have innocently or deliberately transgressed such a divine ordinance. “나다니엘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렇게 그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그들이 더욱 잘 준비되고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다중적 물질 문제들의 해결에 착수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라. 네가 성서를 읽으면서 네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내가 아느니라. 거기에는 너무 자주, 무지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 탓으로 삼는 경향이 깔려 있느니라. 네가 파악할 수도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느니라. 네가 무심코 혹은 일부로 그런 신적 법령을 위반하여, 그가 규정한 우연(偶然)의 의롭고 현명한 법칙이 너를 괴롭힌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148:5.5 (1662.2) “But, Nathaniel, there is much in the Scriptures which would have instructed you if you had only read with discernment. Do you not remember that it is written: ‘My son, despise not the chastening of the Lord; neither be weary of his correction, for whom the Lord loves he corrects, even as the father corrects the son in whom he takes delight.’ ‘The Lord does not afflict willingly.’ ‘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do I keep the law. Affliction was good for me that I might thereby learn the divine statutes.’ ‘I know your sorrows. The eternal God is your refuge, while under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 ‘The Lord also is a refuge for the oppressed, a haven of rest in times of trouble.’ ‘The Lord will strengthen him upon the bed of affliction; the Lord will not forget the sick.’ ‘As a father shows compassion for his children, so is the Lord compassionate to those who fear him. He knows your body; he remembers that you are dust.’ ‘He heals the brokenhearted and binds up their wounds.’ ‘He is the hope of the poor, the strength of the needy in his distress, a refuge from the storm, and a shadow from the devastating heat.’ ‘He gives power to the faint, and to them who have no might he increases strength.’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he will not quench.’ ‘When you pass through the waters of affliction, I will be with you, and when the rivers of adversity overflow you, I will not forsake you.’ ‘He has sent me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to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to comfort all who mourn.’ ‘There is correction in suffering; affliction does not spring forth from the dust.’” “그러나 나다니엘아, 네가 단지 분별력으로 읽었다면 대부분의 성서가 너를 가르쳤으리라.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 아들아 주(主)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주(主)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주께서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a).’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법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나는 너희의 근심을 아노라(출3:7b).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영원하신 팔이 아래에 있도다(신33:27a).’ ‘주(主)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시9:9).’ ‘주(主)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시41:3a), 주(主)께서 병을 잊지 않으시리라.’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주(主)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그가 우리의 육체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그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 ‘그는 빈궁한 자의 희망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힘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라(사25:4b).’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a).’ ‘네가 고통의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역경의 강물이 네게 넘칠 때 내가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사43:2a).’ ‘그가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고(사61:1b-2b).’ ‘고통 중에 교정(敎正 바로잡음)이 있느니라(욥5:17-18 참조).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욥5:6a).’”

6. The Misunderstanding of Suffering —
Discourse on Job 고통에 대한 오해─욥에 대한 강연

200419 고통에 대한 오해 – 욥(1) 욥42:5-6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5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6 Therefore I despise myself and repent in dust and ashes.

148:6.1 (1662.3) It was this same evening at Bethsaida that John also asked Jesus why so many apparently innocent people suffered from so many diseases and experienced so many afflictions. In answering John’s questions, among many other things, the Master said: 바로 이날 저녁 벳새다에서, 요한도 예수께 언뜻 보기에 왜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은 질병으로 고생했고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여쭈었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다른 여러 가지들 중에, 주(主)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48:6.2 (1662.4) “My son, you do not comprehend the meaning of adversity or the mission of suffering. Have you not read that masterpiece of Semitic literature — the Scripture story of the afflictions of Job? Do you not recall how this wonderful parable begins with the recital of the material prosperity of the Lord’s servant? You well remember that Job was blessed with children, wealth, dignity, position, health, and everything else which men value in this temporal life. According to the time-honored teachings of the children of Abraham such material prosperity was all-sufficient evidence of divine favor. But such material possessions and such temporal prosperity do not indicate God’s favor. My Father in heaven loves the poor just as much as the rich; he is no respecter of persons. “내 아들아, 너는 역경의 의미나 고통의 임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셈족 문학의 걸작 – 욥의 고통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읽지 않았느냐? 너는 어떻게 이 놀라운 비유가 주(主)의 종의 물질적 번영의 낭독으로 시작하는지 생각나지 않느냐? 욥은 자녀들, 재산, 명예, 지위, 건강 및 사람들이 이 현세에서 가치를 두는 다른 모든 것에 복이 있었음을 너는 잘 기억하느니라(욥1:1-3). 아브라함 자손들의 유서 깊은 교훈에 의하면, 그런 물질적 번영은 완전히 충분한 신적 총애(寵愛)의 증거였느니라. 그러나 그런 물질적 재산과 그런 현세적 번영은 하나님의 총애(寵愛)를 나타내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부자와 똑같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라.

148:6.3 (1663.1) “Although transgression of divine law is sooner or later followed by the harvest of punishment, while men certainly eventually do reap what they sow, still you should know that human suffering is not always a punishment for antecedent sin. Both Job and his friends failed to find the true answer for their perplexities. And with the light you now enjoy you would hardly assign to either Satan or God the parts they play in this unique parable. While Job did not, through suffering, find the resolution of his intellectual troubles or the solution of his philosophical difficulties, he did achieve great victories; even in the very face of the breakdown of his theological defenses he ascended to those spiritual heights where he could sincerely say, ‘I abhor myself’; then was there granted him the salvation of a vision of God. So even through misunderstood suffering, Job ascended to the superhuman plane of moral understanding and spiritual insight. When the suffering servant obtains a vision of God, there follows a soul peace which passes all human understanding. “신적 법칙의 위반(違反)에는 조만간 처벌의 결과가 따르며, 한편 사람들은 반드시 언젠가 자신들이 뿌리는 것을 거두지만(욥4:8), 여전히 너는 인간 고통이 앞선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님을 언제나 알아야 하느니라. 욥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혼란들에 대한 참된 답을 찾지 못했느니라. 그리고 네가 지금 누리는 빛으로, 너는 도저히 사탄이나 하나님이 이 독특한 비유에서 그들이 담당하는 부분들을 선정할 수 없을 것이라. 욥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지적 고민과 철학적 곤경의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는 대단한 승리에 이르렀느니라. 눈앞에서 자신의 신학적 항변(抗辯자기 변호)이 부서지면서도, 그는 ‘저 자신을 혐오한다(욥42:6).’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영적 고지(高地)에 올라갔느니라. 그때 그에게 하나님이 보이는 구원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라. 그렇게 오해한 고통을 통해서도, 욥은 초(超)인간 단계의 도덕적 이해와 영적 통찰력에 올라갔느니라. 고통을 겪는 종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혼(魂)의 평화가 따르느니라.

148:6.4 (1663.2) “The first of Job’s friends, Eliphaz, exhorted the sufferer to exhibit in his afflictions the same fortitude he had prescribed for others during the days of his prosperity. Said this false comforter: ‘Trust in your religion, Job; remember that it is the wicked and not the righteous who suffer. You must deserve this punishment, else you would not be afflicted. You well know that no man can be righteous in God’s sight. You know that the wicked never really prosper. Anyway, man seems predestined to trouble, and perhaps the Lord is only chastising you for your own good.’ No wonder poor Job failed to get much comfort from such an interpretation of the problem of human suffering. “욥의 친구 중 첫째 엘리바스는 고통받는 자가 번영의 시절에 타인들에게 권했던 똑같은 인내를 고통 중에 드러내라고 권고했느니라. 이 거짓 위로자가 말했느니라. ‘욥이여, 너의 종교를 신뢰하라. 고통받는 자는 사악한 자이며 의로운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너는 이 처벌을 받아 마땅하니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받지 않았으리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네가 잘 아느니라. 사악한 자는 결코 정말 번영할 수 없음을 네가 아느니라. 어쨌든 사람은 고통을 받도록 예정된 듯하고 아마 주(主)께서 너를 위해 혼내실 뿐이라(욥4-5장)’. 가련한 욥이 인간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런 해석에서 큰 위로를 얻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148:6.5 (1663.3) “But the counsel of his second friend, Bildad, was even more depressing, notwithstanding its soundness from the standpoint of the then accepted theology. Said Bildad: ‘God cannot be unjust. Your children must have been sinners since they perished; you must be in error, else you would not be so afflicted. And if you are really righteous, God will certainly deliver you from your afflictions. You should learn from the history of God’s dealings with man that the Almighty destroys only the wicked.’ “그러나 그의 둘째 친구 빌닷의 조언은, 당시 인정된 신학의 관점에서 적절했지만, 심지어 더 억압적이었느니라. 빌닷이 말했느니라. ‘하나님은 부당할 수 없느니라. 너희 자녀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틀림없이 죄인들이니라(욥8:4). 너는 분명히 잘못되어 있으니, 그렇지 않다면 네가 그렇게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 네가 정말 의롭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네 고난에서 건지리라. 전능자는 사악한 자만 죽이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신 역사로부터 너는 배워야만 하리라(욥8).’

148:6.6 (1663.4) “And then you remember how Job replied to his friends, saying: ‘I well know that God does not hear my cry for help. How can God be just and at the same time so utterly disregard my innocence? I am learning that I can get no satisfaction from appealing to the Almighty. Cannot you discern that God tolerates the persecution of the good by the wicked? And since man is so weak, what chance has he for consideration at the hands of an omnipotent God? God has made me as I am, and when he thus turns upon me, I am defenseless. And why did God ever create me just to suffer in this miserable fashion?’ “그때 어떻게 욥이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며 대답했는지 너는 기억하느니라. ‘내가 잘 알거니와 하나님은 도와달라는 내 외침을 듣지 않으시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의로우신 동시에 그렇게 완전히 나의 무죄를 무시하실 수 있으신가? 전능자에게 호소해도 아무 만족도 얻을 수 없음을 내가 알게 되느니라. 사악한 자에 의한 선한 자의 박해를 묵인하시는 하나님을 너희는 깨달을 수 없느냐?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약한데, 전능한 하나님의 손에서 배려받을 무슨 기회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내 모습대로 나를 만드셨고(욥10:8), 그가 그렇게 나를 맞서시면, 나는 방어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단지 내가 고통을 받도록 도대체 왜 나를 만드셨는가(욥9-10)?”

148:6.7 (1663.5) “And who can challenge the attitude of Job in view of the counsel of his friends and the erroneous ideas of God which occupied his own mind? Do you not see that Job longed for a human God, that he hungered to commune with a divine Being who knows man’s mortal estate and understands that the just must often suffer in innocence as a part of this first life of the long Paradise ascent? Wherefore has the Son of Man come forth from the Father to live such a life in the flesh that he will be able to comfort and succor all those who must henceforth be called upon to endure the afflictions of Job.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조언과 그 자신의 마음을 차지했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의 관점에서, 누가 욥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는가? 욥은 인간적인 하나님을 갈망했으며, 그가 사람의 필사자 상태를 알고, 오랜 천국 상승 생애에 속한 이 첫 일부로서, 의로운 자가 종종 무죄 가운데 고통을 받아야 함을 이해하는, 신적 존재와 친밀히 소통하기에 갈급했음을 너는 모르느냐? 그러므로 이후 욥의 고통을 견디도록 요구받아야만 했던 모든 이들을 인자(人子)가 위로하고 도울 수 있도록 그가 육체로 그렇게 살려고 아버지에게서 왔느니라.

148:6.8 (1663.6) “Job’s third friend, Zophar, then spoke still less comforting words when he said: ‘You are foolish to claim to be righteous, seeing that you are thus afflicted. But I admit that it is impossible to comprehend God’s ways. Perhaps there is some hidden purpose in all your miseries.’ And when Job had listened to all three of his friends, he appealed directly to God for help, pleading the fact that ‘man, born of woman, is few of days and full of trouble.’ “다음에 욥의 셋째 친구 소팔은 더 위로되지 않게 말했느니라. ‘네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것을 보니, 의롭다고 주장하는 네가 어리석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내가 인정하노라. 아마 너의 모든 비극에 어떤 숨겨진 목적이 있도다(욥11).’ 그리고 자기 세 친구 모두의 이야기를 욥이 듣고 나서, 그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욥14:1).’는 사실을 탄원하면서 하나님께 직접 도움을 호소했느니라.

200426 고통에 대한 오해 – 욥(2) 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For he does not willingly bring affliction or grief to the children of men.

148:6.9 (1664.1) “Then began the second session with his friends. Eliphaz grew more stern, accusing, and sarcastic. Bildad became indignant at Job’s contempt for his friends. Zophar reiterated his melancholy advice. Job by this time had become disgusted with his friends and appealed again to God, and now he appealed to a just God against the God of injustice embodied in the philosophy of his friends and enshrined even in his own religious attitude. Next Job took refuge in the consolation of a future life in which the inequities of mortal existence may be more justly rectified. Failure to receive help from man drives Job to God. Then ensues the great struggle in his heart between faith and doubt. Finally, the human sufferer begins to see the light of life; his tortured soul ascends to new heights of hope and courage; he may suffer on and even die, but his enlightened soul now utters that cry of triumph, ‘My Vindicator lives!’ “그 후 그의 친구들과 두 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노라. 엘리바스는 더 통렬하고, 비난적이며, 신랄해졌느니라(욥15, 22). 빌닷은 친구들을 경멸하는 욥에게 분개(憤慨)했노라(욥18, 25). 소팔은 그의 우울한 충고를 반복했느니라(욥20). 이때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넌더리가 나서 하느님께 다시 호소했으며(욥16-17, 19, 21), 이제 그는 친구들의 철학으로 표현되었고, 그 자신의 종교적 태도에도 담겨 있는 부당한 하느님에 맞서 공정한 하느님께 간청했느니라(욥23-24, 26). 다음으로 욥은 필사 실존의 불공평이 더 공정하게 개정될 수도 있는, 미래 생애에서 위안을 찾았느니라(욥19:26).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여(욥19:13-19) 욥은 하느님을 찾게 되느니라(욥27-31). 그 후 그의 심정에서 신앙과 의심 사이에 큰 다툼이 계속 일어나느니라. 결국 고통받는 인간은 생명의 빛을 보기 시작하자, 시달리던 그의 혼(魂)은 희망과 용기의 새 고지(高地)에 이르느니라. 그는 괴로워하다 죽을 수도 있지만, 눈이 열린 그의 혼(魂)은 지금 승리의 탄성으로 ‘내 옹호(擁護)자가 살아 계시느니라!’라고 외치느니라(욥19:25).

148:6.10 (1664.2) “Job was altogether right when he challenged the doctrine that God afflicts children in order to punish their parents. Job was ever ready to admit that God is righteous, but he longed for some soul-satisfying revelation of the personal character of the Eternal. And that is our mission on earth. No more shall suffering mortals be denied the comfort of knowing the love of God and understanding the mercy of the Father in heaven. While the speech of God spoken from the whirlwind was a majestic concept for the day of its utterance, you have already learned that the Father does not thus reveal himself, but rather that he speaks within the human heart as a still, small voice, saying, ‘This is the way; walk therein.’ Do you not comprehend that God dwells within you, that he has become what you are that he may make you what he is!” “하나님이 부모를 처벌하기 위해 자녀들을 괴롭힌다는 교리에 욥이 이의(異意)를 제기했을 때, 그는 참으로 옳았느니라. 욥은 언제나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인정할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는 혼(魂)이-만족하는 영원자의 고유적 성품에 대한 계시를 갈망했느니라. 그리고 그것이 지상에서 우리의 사명이니라. 고통 받는 어떤 필사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를 이해함으로 얻는 위로를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리라. 말씀의 시절에는 하나님이 회오리바람으로 말씀하신다는 장엄한 개념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심정에 고요히, 세미한 음성으로 ‘여기가 길이니 이리로 걸으라.’고 그가 말씀하심을 너희는 이미 배웠느니라.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고, 그는 너희가 되셨으며, 그는 너희를 자신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너는 파악하지 못하느냐!”

148:6.11 (1664.3) Then Jesus made this final statement: “The Father in heaven does not willingly afflict the children of men. Man suffers, first, from the accidents of time and the imperfections of the evil of an immature physical existence. Next, he suffers the inexorable consequences of sin — the transgression of the laws of life and light. And finally, man reaps the harvest of his own iniquitous persistence in rebellion against the righteous rule of heaven on earth. But man’s miseries are not a personal visitation of divine judgment. Man can, and will, do much to lessen his temporal sufferings. But once and for all be delivered from the superstition that God afflicts man at the behest of the evil one. Study the Book of Job just to discover how many wrong ideas of God even good men may honestly entertain; and then note how even the painfully afflicted Job found the God of comfort and salvation in spite of such erroneous teachings. At last his faith pierced the clouds of suffering to discern the light of life pouring forth from the Father as healing mercy and everlasting righteousness.” 그런 후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진술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기꺼이 괴롭히지 않으시니라(애3:33). 사람은 먼저 시간의 사고(事故)와 미숙한 물리적 실존에 속한 악(惡)의 불완전(不完全)한 결함을 겪느니라. 다음으로 그는 죄 – 빛과 생명의 법칙 위반(違反) -의 냉혹한 결과를 겪느니라. 마지막으로, 사람은 지상에서 하늘의 공의로운 통치에 적대하는 반역으로 끈덕진 자기 사악(肆惡)의 결과를 거두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불행은 신적 심판의 개인적 천벌(天罰)이 아니니라. 사람은 자기 현세적 고난을 줄이기 위해 진력할 수 있고, 진력해야 하리라. 그러나 악마의 요청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에서 단호히 벗어나라. 선한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정말로 얼마나 많이 품을 수도 있는지 바로 발견하도록 욥기를 연구하라. 그런 후 그런 잘못된 교훈에도 불구하고, 쓰라리게 고난을 받던 욥까지도 어떻게 위로와 구원의 하나님을 발견했는지 주목하라. 드디어 그의 신앙은, 치유의 자비와 끝없는 공의(公義)로서, 아버지로부터 쏟아지는 생명의 빛을 알아보고, 고통의 구름을 꿰뚫었느니라.”

148:6.12 (1664.4) John pondered these sayings in his heart for many days. His entire afterlife was markedly changed as a result of this conversation with the Master in the garden, and he did much, in later times, to cause the other apostles to change their viewpoints regarding the source, nature, and purpose of commonplace human afflictions. But John never spoke of this conference until after the Master had departed. 요한은 이 말씀들을 심정에서 여러 날 깊이 생각했습니다. 정원에서 주(主)님과 나눈 이 대화의 결과로 그의 전(全) 여생은 뚜렷하게 변했으며, 그는 평범한 인간 고통의 근원, 본성 및 목적에 관해서 다른 사도들이 그들의 관점을 바꾸도록 나중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주(主)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까지 결코 이 논의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7. The Man with the Withered Hand 손 마른 사람

200503 안식일 선행(善行)은 아버지의 뜻 눅6:6-11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6 On another Sabbath he went into the synagogue and was teaching, and a man was there whose right hand was shriveled. 7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looking for a reason to accuse Jesus, so they watched him closely to see if he would heal on the Sabbath. 8 But Jesus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said to the man with the shriveled hand, “Get up and stand in front of everyone.” So he got up and stood there. 9 Then Jesus said to them, “I ask you, which is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evil,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 10 He looked around at them all, and then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did so,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11 But they were furious and began to discuss with one another what they might do to Jesus.

148:7.1 (1664.5) The second Sabbath before the departure of the apostles and the new corps of evangelists on the second preaching tour of Galilee, Jesus spoke in the Capernaum synagogue on the “Joys of Righteous Living.”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a large group of those who were maimed, halt, sick, and afflicted crowded up around him, seeking healing. Also in this group were the apostles, many of the new evangelists, and the Pharisaic spies from Jerusalem. Everywhere that Jesus went (except when in the hills about the Father’s business) the six Jerusalem spies were sure to follow. 사도들과 새 전도단(團)이 두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예수께서 “의로운 생활의 기쁨”에 대해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148.3.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큰 무리의 불구자(不具者), 절름발이, 병자, 앓는 자들이 치료받으려고 그를 둘러쌌습니다. 이 무리에는 사도들, 여러 새 전도자들 및 예루살렘 출신의 바리새인 첩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셨던 어디에나 (아버지의 업무로 언덕에 계셨을 때를 제외하고) 예루살렘의 첩자 여섯 명은 항상 따라 왔습니다.

148:7.2 (1665.1) The leader of the spying Pharisees, as Jesus stood talking to the people, induced a man with a withered hand to approach him and ask if it would be lawful to be healed on the Sabbath day or should he seek help on another day. When Jesus saw the man, heard his words, and perceived that he had been sent by the Pharisees, he said: “Come forward while I ask you a question. If you had a sheep and it should fall into a pit on the Sabbath day, would you reach down, lay hold on it, and lift it out? Is it lawful to do such things on the Sabbath day?” And the man answered: “Yes, Master, it would be lawful thus to do well on the Sabbath day.” Then said Jesus, speaking to all of them: “I know wherefore you have sent this man into my presence. You would find cause for offense in me if you could tempt me to show mercy on the Sabbath day. In silence you all agreed that it was lawful to lift the unfortunate sheep out of the pit, even on the Sabbath, and I call you to witness that it is lawful to exhibit loving-kindness on the Sabbath day not only to animals but also to men. How much more valuable is a man than a sheep! I proclaim that it is lawful to do good to men on the Sabbath day.” And as they all stood before him in silence, Jesus, addressing the man with the withered hand, said: “Stand up here by my side that all may see you. And now that you may know that it is my Father’s will that you do good on the Sabbath day, if you have the faith to be healed, I bid you stretch out your hand. ”예수께서 서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 첩자들 두목이 손 마른 사람을 설득하여 예수께 접근하여 안식일에 치료됨이 정당한지 아니면 다른 날에 도움을 구해야 할지 여쭤보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시고, 바리새인들이 그를 보냈음을 파악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질문할 것이니, 앞으로 나서라. 네가 소유한 한 마리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네가 몸을 아래로 뻗어, 그것을 잡아 건져내느냐?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이 정당하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主)여, 안식일에 그렇게 잘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왜 이 사람을 내 앞에 보냈는지 나는 알고 있느니라. 너희가 나를 부추겨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게 하여 너희는 내게서 위반 사유를 찾으려 하는구나. 안식일이라도 구덩이에서 불행한 양을 건져내는 일이 정당하다고 너희 모두 조용히 동의했으니, 안식일에 동물들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친절을 베풂이 정당하다고 내가 너희를 증인으로 내세우리라.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선을 행함이 정당하다고 내가 선포하노라.” 그들 모두 조용히 그 앞에 서 있을 때,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너를 볼 수 있게 여기 내 곁에 서라. 너희가 안식일에 선을 행함이 내 아버지의 뜻임을 이제 너희가 알 것이니, 네가 치유를 받을 신앙이 있다면, 내가 네게 명하노니 네 손을 펴라.”

148:7.3 (1665.2) And as this man stretched forth his withered hand, it was made whole. The people were minded to turn upon the Pharisees, but Jesus bade them be calm, saying: “I have just told you that it is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to save life, but I did not instruct you to do harm and give way to the desire to kill.” The angered Pharisees went away, and notwithstanding it was the Sabbath day, they hastened forthwith to Tiberias and took counsel with Herod, doing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arouse his prejudice in order to secure the Herodians as allies against Jesus. But Herod refused to take action against Jesus, advising that they carry their complaints to Jerusalem. 이 사람이 자기 마른 손을 펴자, 손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을 공격하려 했지만, 예수께서 그들을 진정하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함이 정당하다고 방금 너희에게 말했지만 해치고 살해하려는 욕망에 굽히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았느니라.” 성난 바리새인들은 사라졌고, 안식일이었지만, 그들은 바로 서둘러 티베리아스로 가서, 예수님을 거슬러 헤롯 일당을 동맹으로 확보하려고, 헤롯의 편견을 자극하기 위해 그들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모든 일을 하면서, 헤롯과 상의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들이 불만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충고하면서, 예수께 대해 조치 취하기를 거절했습니다.

148:7.4 (1665.3) This is the first case of a miracle to be wrought by Jesus in response to the challenge of his enemies. And the Master performed this so-called miracle, not as a demonstration of his healing power, but as an effective protest against making the Sabbath rest of religion a veritable bondage of meaningless restrictions upon all mankind. This man returned to his work as a stone mason, proving to be one of those whose healing was followed by a life of thanksgiving and righteousness. 이것이 그의 적들의 항의에 응하여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첫 사례입니다. 자기 치유 권능의 과시가 아니라, 안식일 종교 휴식을 모든 인류에게 의미 없이 제한하는 진실한 속박으로 만드는 일에 반대하는 효과적인 항의로써, 주(主)께서 소위(所謂) 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치유 이후 감사와 의로운 생활이 뒤따랐던 사람 중 하나로서 자기 직업인 석공으로 돌아갔습니다.

8. Last Week at Bethsaida 벳새다에서 마지막 주간

200510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필터(여과기) 눅4:43-44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3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44 And he kept on preaching in the synagogues of Judea.

148:8.1 (1665.4) The last week of the sojourn at Bethsaida the Jerusalem spies became much divided in their attitude toward Jesus and his teachings. Three of these Pharisees were tremendously impressed by what they had seen and heard. Meanwhile, at Jerusalem, Abraham, a young and influential member of the Sanhedrin, publicly espoused the teachings of Jesus and was baptized in the pool of Siloam by Abner. All Jerusalem was agog over this event, and messengers were immediately dispatched to Bethsaida recalling the six spying Pharisees. 벳세다에 머물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첩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많이 분열되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 중 세 명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것으로 굉장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의 젊고 유력한 산헤드린 회원 아브라함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지하였고, 실로암 못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든 예루살렘이 이 사건에 안달이 났으며, 여섯 첩자 바리새인들을 소환하려고 메신저들이 벳새다로 즉시 파견되었습니다.

148:8.2 (1666.1) The Greek philosopher who had been won for the kingdom on the previous tour of Galilee returned with certain wealthy Jews of Alexandria, and once more they invited Jesus to come to their city for the purpose of establishing a joint school of philosophy and religion as well as an infirmary for the sick. But Jesus courteously declined the invitation. 이전(以前) 갈릴리 여행에서 하나님 나라에 설복(說服수긍)된 그리스 철학자가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유대인들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은, 병자를 위한 진료소 뿐만이 아니라 철학과 종교의 공동 학교 설립의 목적으로, 자신들의 도시로 오시도록 예수님을 한 번 더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중히 그 제의를 사양했습니다.

148:8.3 (1666.2) About this time there arrived at the Bethsaida encampment a trance prophet from Bagdad, one Kirmeth. This supposed prophet had peculiar visions when in trance and dreamed fantastic dreams when his sleep was disturbed. He created a considerable disturbance at the camp, and Simon Zelotes was in favor of dealing rather roughly with the self-deceived pretender, but Jesus intervened and allowed him entire freedom of action for a few days. All who heard his preaching soon recognized that his teaching was not sound as judged by the gospel of the kingdom. He shortly returned to Bagdad, taking with him only a half dozen unstable and erratic souls. But before Jesus interceded for the Bagdad prophet, David Zebedee, with the assistance of a self-appointed committee, had taken Kirmeth out into the lake and, after repeatedly plunging him into the water, had advised him to depart hence — to organize and build a camp of his own. 이 무렵 바그다드에서 한 커르메스라는 최면 예언자가 벳새다 야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예언자로 소문난 이 사람은 최면 중에 별난 환상들이 있었고, 수면이 방해되면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야영지에서 상당한 소동을 일으켜서, 시몬 젤로떼가 자아-기만에 빠진 위선자를 조금 거칠게 다루려 했지만, 예수께서 중재하셔서 며칠간 완전히 자유롭게 행하도록 놔두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모든 이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평가할 때, 그의 가르침이 건전하지 않음을 곧 알았습니다. 그는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여섯 혼(魂)들만 데리고 자신과 함께 즉시 바그다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바그다드 예언자를 위해 중재하기 전에, 다윗 세베데가 자칭 위원회의 도움으로 커르메스를 호수로 데려가 연거푸 물 속에 집어 넣은 후, 여기를 떠나 자신의 야영지를 조직하고 세우라고 충고했습니다.

148:8.4 (1666.3) On this same day, Beth-Marion, a Phoenician woman, became so fanatical that she went out of her head and, after almost drowning from trying to walk on the water, was sent away by her friends. 바로 이 날 페니키아 여성, 베스-마리온이 너무 열광하여 정신이 나갔고, 물 위를 걸으려 하다 거의 물에 빠진 후, 그녀의 친구들이 돌려보냈습니다.

148:8.5 (1666.4) The new Jerusalem convert, Abraham the Pharisee, gave all of his worldly goods to the apostolic treasury, and this contribution did much to make possible the immediate sending forth of the one hundred newly trained evangelists. Andrew had already announced the closing of the encampment, and everybody prepared either to go home or else to follow the evangelists into Galilee. 예루살렘의 새 개종자, 바리새인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재화를 사도적 기금에 기부했으며, 이 기부금은 새로 훈련된 100명의 전도자들을 즉각적으로 파송할 수 있게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안드레는 이미 야영지 종료를 발표했고, 모든 사람들은 집으로 가거나 그 외 갈릴리로 전도자들을 따를 준비를 했습니다.

9. Healing the Paralytic 중풍병자의 치유

200517 결단의 신앙을 보시는 인자(人子) 눅5:18-26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18 Some men came carrying a paralytic on a mat and tried to take him into the house to lay him before Jesus. 19 When they could not find a way to do this because of the crow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his mat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of the crowd, right in front of Jesus. 20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Friend, your sins are forgiven.” 21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began thinking to themselves, “Who is this fellow who speaks blasphemy?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22 Jesus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asked, “Why are you thinking these things in your hearts? 23 Which is easier: to say,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walk’? 24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25 Immediately he stood up in front of them, took what he had been lying on and went home praising God. 26 Everyone was amazed and gave praise to God. They were filled with awe and said, “We have seen remarkable things today.”

148:9.1 (1666.5) On Friday afternoon, October 1, when Jesus was holding his last meeting with the apostles, evangelists, and other leaders of the disbanding encampment, and with the six Pharisees from Jerusalem seated in the front row of this assembly in the spacious and enlarged front room of the Zebedee home, there occurred one of the strangest and most unique episodes of all Jesus’ earth life. The Master was, at this time, speaking as he stood in this large room, which had been built to accommodate these gatherings during the rainy season. The house was entirely surrounded by a vast concourse of people who were straining their ears to catch some part of Jesus’ discourse. 10월 1일 금요일 오후에 예수께서 사도들, 전도자들 및 그리고 야영지(野營地)를 해산하는 다른 지도자들과 마지막 회의 중이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6명들도 넓게 확장한 세베데 집 거실에서 열린 이 모임의 앞줄에 앉았는데, 예수님의 모든 지상 일생에서 가장 이상하고 특이한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주(主)님은, 우기(雨期)에 이런 모임에 맞도록 지어진 이 커다란 방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강연 중 일부를 알아 들으려고 귀를 곤두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148:9.2 (1666.6) While the house was thus thronged with people and entirely surrounded by eager listeners, a man long afflicted with paralysis was carried down from Capernaum on a small couch by his friends. This paralytic had heard that Jesus was about to leave Bethsaida, and having talked with Aaron the stone mason, who had been so recently made whole, he resolved to be carried into Jesus’ presence, where he could seek healing. His friends tried to gain entrance to Zebedee’s house by both the front and back doors, but too many people were crowded together. But the paralytic refused to accept defeat; he directed his friends to procure ladders by which they ascended to the roof of the room in which Jesus was speaking, and after loosening the tiles, they boldly lowered the sick man on his couch by ropes until the afflicted one rested on the floor immediately in front of the Master. When Jesus saw what they had done, he ceased speaking, while those who were with him in the room marveled at the perseverance of the sick man and his friends. Said the paralytic: “Master, I would not disturb your teaching, but I am determined to be made whole. I am not like those who received healing and immediately forgot your teaching. I would be made whole that I might serve in the kingdom of heaven.” Now, notwithstanding that this man’s affliction had been brought upon him by his own misspent life, Jesus, seeing his faith, said to the paralytic: “Son, fear not; your sins are forgiven. Your faith shall save you.” 그 집이 그렇게 사람들로 혼잡하고 간절한 청취자들로 완전히 둘러싸인 동안에, 중풍으로 오래 고생하던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가버나움에서 작은 침상으로 내려다 놓았습니다. 이 중풍 병자는 예수께서 벳새다를 떠나려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최근에 건강을 회복한 석공(148.7), 아론과 이야기했으며, 자신이 치유될 수 있는 예수님 앞으로 옮겨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앞문과 뒷문 양쪽으로 세베대의 집 입구에 도달하려 했으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좌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 사다리를 얻어 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방의 지붕에 오르게 했으며, 기와를 벗긴 후 그들은 대담하게 침상에 있는 환자를 밧줄로 주(主)님 바로 앞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행동을 보고 말씀을 중단하셨고, 예수님과 함께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환자와 그 친구들의 끈기에 놀랐습니다. 중풍병자가 말했습니다. “주(主)여, 당신의 가르침에 폐가 되려하지 않지만, 저는 낫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치유받고 즉시 당신의 가르침을 잊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제가 하늘 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 이제, 자신이 삶을 낭비해서 이 사람의 병이 생겼지만,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두려워 말라,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너의 신앙이 너를 구하리라.”

148:9.3 (1667.1) When the Pharisees from Jerusalem, together with other scribes and lawyers who sat with them, heard this pronouncement by Jesus, they began to say to themselves: “How dare this man thus speak? Does he not understand that such words are blasphemy? Who can forgive sin but God?” Jesus, perceiving in his spirit that they thus reasoned within their own minds and among themselves, spoke to them, saying: “Why do you so reason in your hearts? Who are you that you sit in judgment over me? What is the difference whether I say to this paralytic, your sins are forgiven, or arise, take up your bed, and walk? But that you who witness all this may finall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and power on earth to forgive sins, I will say to this afflicted man, Arise, take up your bed, and go to your own house.” And when Jesus had thus spoken, the paralytic arose, and as they made way for him, he walked out before them all. And those who saw these things were amazed. Peter dismissed the assemblage, while many prayed and glorified God, confessing that they had never before seen such strange happenings.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함께 앉아 있던 서기관들 및 율법교사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이 선언을 듣자, 그들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감히 그렇게 말하는가? 그런 말은 신성모독임을 그가 모르는가?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 자기들끼리 그렇게 판단하고 있음을 자기 영으로 감지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심정으로 왜 그렇게 판단하느냐? 너희가 누구이기에 앉아서 나를 판단하느냐? 내가 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지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권능이 있음을,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너희가 결국 알도록, 내가 이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내가 말하리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그들이 그에게 길을 내주자, 그는 그들 모두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이것들을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집회를 해산했지만, 많은 이들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토록 이상한 일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148:9.4 (1667.2) And it was about this time that the messengers of the Sanhedrin arrived to bid the six spies return to Jerusalem. When they heard this message, they fell to earnest debate among themselves; and after they had finished their discussions, the leader and two of his associates returned with the messengers to Jerusalem, while three of the spying Pharisees confessed faith in Jesus and, going immediately to the lake, were baptized by Peter and fellowshipped by the apostles as children of the kingdom. 이 무렵 산헤드린의 메신저들이 여섯 첩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하려고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듣자, 그들끼리 신중히 토론하기 시작했는데, 논의를 마친 후, 지도자와 동료 둘은 메신저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한편 감시하던 3명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호수로 가서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가입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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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49 The Second Preaching Tour 두 번째 전도 여행

Paper 149

The Second Preaching Tour 두 번째 전도 여행

David’s intelligence organization 다윗의 정보 조직체
1. The Widespread Fame of Jesus 널리 퍼진 예수님의 명성
The healing phenomena 치유 현상
2. Attitude of the People 사람들의 태도
Two mistakes of early Christianity 초기 기독교의 2가지 실수
Jesus’ fame as a healer 치유자 예수님의 명성
His recognition of the equality of women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동등성 인식
Charm of his personality 매력있는 예수님의 고유성
3. Hostility of the Religious Leaders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4. Progress of the Preaching Tour 전도 여행의 진전
Comments on anger 분노에 대한 논평
Concerning well-balanced characters 잘 균형 잡힌 성품에 관하여
5. Lesson Regarding Contentment 만족에 대한 교훈
6. The “Fear of the Lord” “주(主)를 두려워함”
7. Returning to Bethsaida 벳새다로 돌아옴

200524 충성 – 길 멤버의 준비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

149:0.1 (1668.1) THE second public preaching tour of Galilee began on Sunday, October 3, A.D. 28, and continued for almost three months, ending on December 30. Participating in this effort were Jesus and his twelve apostles, assisted by the newly recruited corps of 117 evangelists and by numerous other interested persons. On this tour they visited Gadara, Ptolemais, Japhia, Dabaritta, Megiddo, Jezreel, Scythopolis, Tarichea, Hippos, Gamala, Bethsaida-Julias, and many other cities and villages. 갈릴리에서 두 번째 대중 전도 여행은 AD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거의 석 달간 계속되어 12월 30일에 끝났습니다. 이 수고에 예수님과 12사도들이 참여했고, 새로 모집된 117명의 전도자 무리와 관심 있는 수많은 다른 이들이 지원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가다라, 프톨레마이스, 야피아, 다바리타, 메기도, 예즈릴, 스키토폴리스, 타리키아, 히포, 가말라, 벳새다-율리아스 및 여러 다른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149:0.2 (1668.2) Before the departure on this Sunday morning Andrew and Peter asked Jesus to give the final charge to the new evangelists, but the Master declined, saying that it was not his province to do those things which others could acceptably perform. After due deliberation it was decided that James Zebedee should administer the charge. At the conclusion of James’s remarks Jesus said to the evangelists: “Go now forth to do the work as you have been charged, and later on, when you have shown yourselves competent and faithful, I will ordain you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이 일요일 아침에 떠나기 전(前),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께 새 전도자들에게 마지막 권고를 부탁했으나, 주(主)님은 정중히 사양하면서, 다른 이들이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은 행하는 것은 자기 직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분한 토의 후 야고보 세배대가 그 권고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야고보가 말을 마칠 때, 예수께서 전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출발하여 너희가 맡은 업무를 행하라. 너희가 능력과 신의(信義믿음과 의리)를 보이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도록 너희를 임명하리라.”

149:0.3 (1668.3) On this tour only James and John traveled with Jesus.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each took with them about one dozen of the evangelists and maintained close contact with them while they carried on their work of preaching and teaching. As fast as believers were ready to enter the kingdom, the apostles would administer baptism. Jesus and his two companions traveled extensively during these three months, often visiting two cities in one day to observe the work of the evangelists and to encourage them in their efforts to establish the kingdom. This entire second preaching tour was principally an effort to afford practical experience for this corps of 117 newly trained evangelists. 이 여행에서 야고보와 요한만 예수님과 다녔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각자 거의 전도자 12명씩 데리고, 그들과 밀접히 접촉을 유지하면서 전도와 가르침의 업무를 계속했습니다. 신자(信者)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대로 신속히, 사도들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곤 했습니다. 예수님과 두 동행은 이 석 달 간 널리 여행했는데, 가끔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하여 전도자들의 업무를 지켜보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그들의 노력을 격려했습니다. 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은 전부 주로 새로 훈련된 이 117명 전도자에게 실제로 체험하게 하려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149:0.4 (1668.4) Throughout this period and subsequently, up to the time of the final departure of Jesus and the twelve for Jerusalem, David Zebedee maintained a permanent headquarters for the work of the kingdom in his father’s house at Bethsaida. This was the clearinghouse for Jesus’ work on earth and the relay station for the messenger service which David carried on between the workers in various parts of Palestine and adjacent regions. He did all of this on his own initiative but with the approval of Andrew. David employed forty to fifty messengers in this intelligence division of the rapidly enlarging and extending work of the kingdom. While thus employed, he partially supported himself by spending some of his time at his old work of fishing. 이 기간과 그 뒤 내내, 예수님과 12사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으로 떠날 때까지, 다윗 세베대는 벳새다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 하나님 나라 업무를 위한 상설 본부를 유지했습니다. 이곳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업무를 위한 정보센터와 팔레스타인 및 주변 지역의 여러 곳에서 일꾼들 사이에 다윗이 수행했던 메신저 업무를 위한 중계역(中繼驛)이었습니다. 그는 안드레의 승인을 제외하고 이 모두를 솔선해서 행했습니다. 다윗은 신속히 확대되고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업무에 속한 이 정보과(情報課)에 40에서 50명의 메신저를 고용했습니다. 이렇게 고용하면서 그는 자신의 옛 직업인 어업에 어느 정도 시간을 드려서 자활(自活)했습니다.

1. The Widespread Fame of Jesus 널리 퍼진 예수님의 명성

200531 치유 기적의 실상 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and the people all tried to touch him, because power was coming from him and healing them all.

149:1.1 (1668.5) By the time the camp at Bethsaida had been broken up, the fame of Jesus, particularly as a healer, had spread to all parts of Palestine and through all of Syria and the surrounding countries. For weeks after they left Bethsaida, the sick continued to arrive, and when they did not find the Master, on learning from David where he was, they would go in search of him. On this tour Jesus did not deliberately perform any so-called miracles of healing. Nevertheless, scores of afflicted found restoration of health and happiness as a result of the reconstructive power of the intense faith which impelled them to seek for healing. 벳세다의 야영지가 해산되었을 때, 특히 치유자로서 예수의 명성이 모든 팔레스타인 지방과 시리아 전역 및 인근 지방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들이 벳새다를 떠난 후 수 주간 병자들이 계속 도착했으며, 그들이 주(主)님을 찾지 못하자, 그가 계신 곳을 다윗에게서 듣고, 그를 찾으러 가곤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예수님은 일부러 소위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환자 수십 명은 신앙이 진지한 나머지 치유하려는 복원 권능의 결과로써 건강과 행복을 회복했습니다.

149:1.2 (1669.1) There began to appear about the time of this mission — and continued throughout the remainder of Jesus’ life on earth — a peculiar and unexplained series of healing phenomena. In the course of this three months’ tour more than one hundred men, women, and children from Judea, Idumea, Galilee, Syria, Tyre, and Sidon, and from beyond the Jordan were beneficiaries of this unconscious healing by Jesus and, returning to their homes, added to the enlargement of Jesus’ fame. And they did this notwithstanding that Jesus would, every time he observed one of these cases of spontaneous healing, directly charge the beneficiary to “tell no man.” 이 사명을 행하던 무렵과 지상에서 예수님의 여생(餘生) 내내, 특이한 일련의 설명할 수 없는 치유 현상이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석 달의 여행 과정에서 유대, 이두미아, 갈릴리, 시리아, 티레, 시돈 및 요단강을 건너온 백 명 이상의 남녀와 아이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이 무의식적 치유의 혜택을 입었는데,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명성을 더 퍼뜨렸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자동적인 치유의 경우를 보실 때마다, 혜택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직접 명하셨지만, 그들은 더 소문을 냈습니다.

149:1.3 (1669.2) It was never revealed to us just what occurred in these cases of spontaneous or unconscious healing. The Master never explained to his apostles how these healings were effected, other than that on several occasions he merely said, “I perceive that power has gone forth from me.” On one occasion he remarked when touched by an ailing child, “I perceive that life has gone forth from me.” 이런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치유의 경우가 정말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 단지 “내게서 권능이 나간 것을 내가 안다. ”라고 말씀하신 것 외에, 주님은 이런 치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사도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병든 아이가 그를 만지자, “내게서 생명이 나갔음을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9:1.4 (1669.3) In the absence of direct word from the Master regarding the nature of these cases of spontaneous healing, it would be presuming on our part to undertake to explain how they were accomplished, but it will be permissible to record our opinion of all such healing phenomena. We believe that many of these apparent miracles of healing, as they occurred in the course of Jesus’ earth ministry, were the result of the coexistence of the following three powerful, potent, and associated influences: 이렇게 자동적 치유 사례의 본질에 대해 직접적인 주님의 말씀이 없는 경우,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설명하기는 주제넘겠지만, 그런 모든 치유 현상에 대해 우리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무방할 것입니다. 예수님 지상 사역의 경우에 일어났듯이, 이렇게 명백한 치유 기적의 대부분은 다음의 세 가지 강력하고, 잠재적이며, 관련된 영향이 공존한 결과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149:1.5 (1669.4) 1. The presence of strong, dominant, and living faith in the heart of the human being who persistently sought healing, together with the fact that such healing was desired for its spiritual benefits rather than for purely physical restoration. 순전한 육체적 회복(回復)을 위해서라기보다 영적 은혜를 위해 그런 치유가 바람직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집요하게 치유하려는 인간의 심정에 있는 굳세게, 사로잡고 있는, 살아 있는 신앙의 현존.

149:1.6 (1669.5) 2. The existence, concomitant with such human faith, of the great sympathy and compassion of the incarnated and mercy-dominated Creator Son of God, who actually possessed in his person almost unlimited and timeless creative healing powers and prerogatives. 그런 인간의 신앙과 동시에, 자신 안에, 거의 제한 없이, 무시간적인 창조적 치유의 권능과 특권을 실제로 소유했으며, 성육신(成肉身)하여 자비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창조자 아들이 지닌 커다란 공감과 긍휼의 실존.

149:1.7 (1669.6) 3. Along with the faith of the creature and the life of the Creator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this God-man was the personified expression of the Father’s will. If, in the contact of the human need and the divine power to meet it, the Father did not will otherwise, the two became one, and the healing occurred unconsciously to the human Jesus but was immediately recognized by his divine nature. The explanation, then, of many of these cases of healing must be found in a great law which has long been known to us, namely, What the Creator Son desires and the eternal Father wills IS. 창조물의 신앙과 창조자의 생명과 함께, 이 하나님-사람은 아버지 뜻의 체현(體現)이었음을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적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신적 권능의 접촉에서,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둘은 하나가 되었고, 인간 예수께 무의식적으로 치유가 일어났지만, 신적 본성으로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치유 사례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오래 알고 있었던 것, 즉 창조자 아들이 원하고 영원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위대한 법칙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149:1.8 (1669.7) It is, then, our opinion that, in the personal presence of Jesus, certain forms of profound human faith were literally and truly compelling in the manifestation of healing by certain creative forces and personalities of the universe who were at that time so intimately associated with the Son of Man. It therefore becomes a fact of record that Jesus did frequently suffer men to heal themselves in his presence by their powerful, personal faith. 그렇게, 예수께서 바로 계신 가운데, 어떤 형태의 심오한 인간 신앙은, 그때 인자(人子)와 밀접하게 연결된 우주의 창조적 기세들과 고유성들로 인한 치유의 모습으로, 글자 그대로, 진정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음이 우리의 의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주 사람들이 자신의 현존 가운데, 자신들의 강력한, 개인적 신앙으로 스스로 치유하게 하셨다는 기록은 사실입니다.

149:1.9 (1670.1) Many others sought healing for wholly selfish purposes. A rich widow of Tyre, with her retinue, came seeking to be healed of her infirmities, which were many; and as she followed Jesus about through Galilee, she continued to offer more and more money, as if the power of God were something to be purchased by the highest bidder. But never would she become interested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it was only the cure of her physical ailments that she sought. 여러 다른 이들은 아주 이기적인 목적으로 치유를 추구했습니다. 티레의 부유한 과부는 수행원과 함께 여러 질병을 고치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갈릴리 도처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최고 입찰자가 하나님의 권능을 구매할 수 있는 것처럼, 계속 돈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나라 복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찾았던 것은 자기 육체적 질병의 치료뿐이었습니다.

2. Attitude of the People 사람들의 태도

200607 예수님에 대한 바른 태도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149:2.1 (1670.2) Jesus understood the minds of men. He knew what was in the heart of man, and had his teachings been left as he presented them, the only commentary being the inspired interpretation afforded by his earth life, all nations and all religions of the world would speedily have embraced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well-meant efforts of Jesus’ early followers to restate his teachings so as to make them the more acceptable to certain nations, races, and religions, only resulted in making such teachings the less acceptable to all other nations, races, and religions.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심정(心情)에 있던 것을 아셨으며, 그가 주셨던 가르침대로, 자신의 지상 생활로 마련한 영감(靈感) 받은 해석이 유일한 주석(註釋)이었던, 그의 가르침이 남아있었더라면, 세상 모든 국가와 모든 종교는 신속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신봉(信奉믿고 받듦)했을 것입니다. 특정 국가들, 인종들 및 종교들이 더 받아들이도록 그의 가르침을 고쳐서 말한 초기 예수 추종자들이 수고한 선의(善意)는 다른 모든 국가들, 인종들 및 종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149:2.2 (1670.3) The Apostle Paul, in his efforts to bring the teachings of Jesus to the favorable notice of certain groups in his day, wrote many letters of instruction and admonition. Other teachers of Jesus’ gospel did likewise, but none of them realized that some of these writings would subsequently be brought together by those who would set them forth as the embodiment of the teachings of Jesus. And so, while so-called Christianity does contain more of the Master’s gospel than any other religion, it does also contain much that Jesus did not teach. Aside from the incorporation of many teachings from the Persian mysteries and much of the Greek philosophy into early Christianity, two great mistakes were made: 사도 바울은 당시에 특정 집단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호의(好意)를 가지고 주목하도록 여러 교육과 권면의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 복음의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통합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나중에 이 편지 중 얼마를 모을 것이라고 그들 중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소위(所謂)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주(主)님의 복음을 더 담고 있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신비 의식(儀式)의 여러 가르침과 여러 헬라(그리스) 철학이 초기 기독교에 포함된 것 외에도, 두 가지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149:2.3 (1670.4) 1. The effort to connect the gospel teaching directly onto the Jewish theology, as illustrated by the Christian doctrines of the atonement — the teaching that Jesus was the sacrificed Son who would satisfy the Father’s stern justice and appease the divine wrath. These teachings originated in a praiseworthy effort to make the gospel of the kingdom more acceptable to disbelieving Jews. Though these efforts failed as far as winning the Jews was concerned, they did not fail to confuse and alienate many honest souls in all subsequent generations. 복음의 가르침을 직접 유대교 신학으로 연결하려는 노력, 즉 기독교 속죄(贖罪) 교리- 예수께서 아버지의 용서 없는 정의(正義)를 만족시키고, 신적 진노를 달래시려고 희생당한 아들이셨다는 가르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 받아들이게 하려는 칭찬할만한 노력에서 비롯했습니다. 유대인들 개종에 관해 이런 노력이 실패했지만, 이후 모든 세대의 여러 정직한 혼(魂)들을 분명히 혼란스럽게 하여 떠나게 했습니다.

149:2.4 (1670.5) 2. The second great blunder of the Master’s early followers, and one which all subsequent generations have persisted in perpetuating, was to organize the Christian teaching so completely about the person of Jesus. This overemphasis of the personality of Jesus in the theology of Christianity has worked to obscure his teachings, and all of this has made it increasingly difficult for Jews, Mohammedans, Hindus, and other Eastern religionists to accept the teachings of Jesus. We would not belittle the place of the person of Jesus in a religion which might bear his name, but we would not permit such consideration to eclipse his inspired life or to supplant his saving message: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주(主)님의 초기 추종자들의 두 번째 큰 실책은, 이후 모든 세대도 고집스럽게 보존하며 되풀이 했는데, 기독교 가르침을 그렇게 철저히 고유자 예수님에 대해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님의 고유성을 이렇게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의 가르침이 약화되었고, 이 모두로 인해 유대교, 회교, 힌두교 및 다른 동방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점점 더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종교에서 고유자 예수님의 위치를 과소 평가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고려로 인해 그의 영감(靈感) 받은 생애를 가리거나 그의 구원 메시지,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사랑을 빼앗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149:2.5 (1670.6) The teachers of the religion of Jesus should approach other religions with the recognition of the truths which are held in common (many of which come directly or indirectly from Jesus’ message) while they refrain from placing so much emphasis on the differences. 예수님의 종교 교사들은 (직·간접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있는 여러) 공통된 진리를 인정하면서, 다른 종교들에게 접근해야 하며, 반면에, 차이점에 대해 많이 강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149:2.6 (1671.1) While, at that particular time, the fame of Jesus rested chiefly upon his reputation as a healer, it does not follow that it continued so to rest. As time passed, more and more he was sought for spiritual help. But it was the physical cures that made the most direct and immediate appeal to the common people. Jesus was increasingly sought by the victims of moral enslavement and mental harassments, and he invariably taught them the way of deliverance. Fathers sought his advice regarding the management of their sons, and mothers came for help in the guidance of their daughters. Those who sat in darkness came to him, and he revealed to them the light of life. His ear was ever open to the sorrows of mankind, and he always helped those who sought his ministry.  바로 그때, 예수님의 명성은 주로 치유자로서 평판에 쏠려 있었지만, 계속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이 영적 도움을 위해 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즉각적 매력은 육체적 치료였습니다. 도덕적 노예상태와 정신적 시달림의 희생자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찾았으며, 그는 변함없이 그들에게 해방의 길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들의 관리에 대한 충고를 구했고, 어머니들은 자기 딸들의 지도에 대해 도움을 얻으러 왔습니다. 어둠에 앉았던 자들이 그에게 왔고, 그는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드러냈습니다(요8:12, 사9:2). 그의 귀는 언제나 인류의 슬픔에 열려 있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보살핌을 찾는 자들을 도왔습니다.

149:2.7 (1671.2) When the Creator himself was on earth, incarnated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it was inevitable that some extraordinary things should happen. But you should never approach Jesus through these so-called miraculous occurrences. Learn to approach the miracle through Jesus,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approaching Jesus through the miracle. And this admonition is warranted, notwithstanding that Jesus of Nazareth is the only founder of a religion who performed supermaterial acts on earth. 창조자 자신이 지상에,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성육신(成肉身)하셨을 때, 놀라운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은 부득이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소위(所謂) 이런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결코 예수님께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기적에 이르기를 배우고,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 접근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나사렛 예수가 지상에서 초(超)물질적 행동을 하신 종교의 유일한 창시자이지만, 이 권고는 정당합니다.

200614 예수님의 태도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149:2.8 (1671.3) The most astonishing and the most revolutionary feature of Michael’s mission on earth was his attitude toward women. In a day and generation when a man was not supposed to salute even his own wife in a public place, Jesus dared to take women along as teachers of the gospel in connection with his third tour of Galilee. And he had the consummate courage to do this in the face of the rabbinic teaching which declared that it was “better that the words of the law should be burned than delivered to women.” 지상의 미가엘 사명 중 가장 놀랍고 혁명적인 특징은 여성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남자가 공공장소에서 자기 아내에게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했던 당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갈릴리 세 번째 여행에 대담하게 여성들을 복음의 교사들로 동행시켰습니다. 그는 “율법의 말씀을 여성들에게 주느니 태우는 것이 더 좋다.”고 선포했던 라비(율법학자)의 가르침에 거슬러 이렇게 행하는 완전한 용기를 지녔습니다.

149:2.9 (1671.4) In one generation Jesus lifted women out of the disrespectful oblivion and the slavish drudgery of the ages. And it is the one shameful thing about the religion that presumed to take Jesus’ name that it lacked the moral courage to follow this noble example in its subsequent attitude toward women. 예수께서 한 세대에 오랫동안 경시되어 무시된 상태 및 노예적 고역에서부터 여성들을 높이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종교에 대해 부끄러운 한 가지는 그 종교의 여성에 대한 후대의 태도에 있어서 이 고귀한 실례를 따를 도덕적 용기가 결핍된 것입니다.

149:2.10 (1671.5) As Jesus mingled with the people, they found him entirely free from the superstitions of that day. He was free from religious prejudices; he was never intolerant. He had nothing in his heart resembling social antagonism. While he complied with the good in the religion of his fathers, he did not hesitate to disregard man-made traditions of superstition and bondage. He dared to teach that catastrophes of nature, accidents of time, and other calamitous happenings are not visitations of divine judgments or mysterious dispensations of Providence. He denounced slavish devotion to meaningless ceremonials and exposed the fallacy of materialistic worship. He boldly proclaimed man’s spiritual freedom and dared to teach that mortals of the flesh are indeed and in truth sons of the living God.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셨지만, 그들은 그가 그 무렵의 미신(迷信)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종교적 편견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편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정(心情)에 사회적 적개심(敵愾心) 비슷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선조들의 종교에서 좋은 것은 따르셨지만, 사람이 만든 미신(迷信)과 속박(束縛)의 전통(傳統)은 주저없이 무시하셨습니다. 그는 대담하게 큰 자연재해, 시간적 재난 및 다른 비참한 사건들은 신적 심판이나 신비한 섭리적 천재(天災재앙)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의미 없는 의식에 속한 노예적 헌신을 비난하셨으며 물질적 경배의 오류를 폭로하셨습니다. 그는 용기 있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하셨고, 육신을 지닌 필사자들이 정말로 사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대담하게 가르쳤습니다.

149:2.11 (1671.6) Jesus transcended all the teachings of his forebears when he boldly substituted clean hearts for clean hands as the mark of true religion. He put reality in the place of tradition and swept aside all pretensions of vanity and hypocrisy. And yet this fearless man of God did not give vent to destructive criticism or manifest an utter disregard of the religious,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usages of his day. He was not a militant revolutionist; he was a progressive evolutionist. He engaged in the destruction of that which was only when he simultaneously offered his fellows the superior thing which ought to be. 예수께서 참된 종교의 표지로써 청결한 심정(心情)으로 청결한 손을 담대히 바꾸셨을 때, 그는 자기 선조들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하셨습니다. 그는 전통의 자리에 실체를 두셨고, 모든 허영(虛榮겉치레)와 위선(僞善겉으로만 체함)의 허식(虛飾겉만 꾸밈)을 일소(一掃모조리 쓸어버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 없는 하나님의 사람은 파괴적 비판을 터뜨리거나 당시 종교적·사회적·경제적 및 정치적 관습에 대해 철저히 무시(無視)하는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투쟁적인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보적인 진화론자였습니다. 그는 있어야만 하는 뛰어난 것을 동료들에게 동시에 제공할 때에만 있던 것을 파괴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49:2.12 (1672.1) Jesus received the obedience of his followers without exacting it. Only three men who received his personal call refused to accept the invitation to discipleship. He exercised a peculiar drawing power over men, but he was not dictatorial. He commanded confidence, and no man ever resented his giving a command. He assumed absolute authority over his disciples, but no one ever objected. He permitted his followers to call him Master. 예수는 강요 없이 추종자들의 순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개인적 소명(召命부르심)을 받은 세 명만 제자도의 초대 수락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끄는 특유의 권능을 행하셨지만 독재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명령하셨으며, 누구도 그의 명령에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 대해 절대적 권위가 있었지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추종자들이 자신을 주(主)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149:2.13 (1672.2) The Master was admired by all who met him except by those who entertained deep-seated religious prejudices or those who thought they discerned political dangers in his teachings. Men were astonished at the originality and authoritativeness of his teaching. They marveled at his patience in dealing with backward and troublesome inquirers. He inspired hope and confidence in the hearts of all who came under his ministry. Only those who had not met him feared him, and he was hated only by those who regarded him as the champion of that truth which was destined to overthrow the evil and error which they had determined to hold in their hearts at all cost. 고질적인 종교적 편견을 품거나 주님의 가르침에서 정치적 위험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주(主)님을 만난 모든 이들이 그를 감탄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퇴보적이며 골치아픈 탐구자들을 다루는 그의 참을성에 놀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살핌을 받은 모든 이들의 심정에 소망과 확신을 일으켰습니다. 그를 만난 적이 없었던 자들만 그를 두려워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심정에 붙잡기로 결정한, 악(惡)과 실수(失手)를 무너뜨리도록 정해진 그 진리의 옹호자로 그를 간주한 자들만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149:2.14 (1672.3) On both friends and foes he exercised a strong and peculiarly fascinating influence. Multitudes would follow him for weeks, just to hear his gracious words and behold his simple life. Devoted men and women loved Jesus with a well-nigh superhuman affection. And the better they knew him the more they loved him. And all this is still true; even today and in all future ages, the more man comes to know this God-man, the more he will love and follow after him. 그는 친구들과 적대자들에게 강렬하며 특이한 매력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군중들은 다만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의 소탈한 삶을 보려고 몇 주간 그를 따르곤 했습니다. 헌신적인 남녀들은 거의 초(超)인간적 애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그를 알면 알수록 그들은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이 모두는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미래 모든 시대에도, 사람이 이 하나님-사람을 알려고 오면 올수록, 그는 그를 더 사랑하고 따를 것입니다.

3. Hostility of the Religious Leaders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200621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요7: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After this, Jesus went around in Galilee, purposely staying away from Judea because the Jews there were waiting to take his life.

149:3.1 (1672.4) Notwithstanding the favorable reception of Jesus and his teachings by the common people, the religious leaders at Jerusalem became increasingly alarmed and antagonistic. The Pharisees had formulated a systematic and dogmatic theology. Jesus was a teacher who taught as the occasion served; he was not a systematic teacher. Jesus taught not so much from the law as from life, by parables. (And when he employed a parable for illustrating his message, he designed to utilize just one feature of the story for that purpose. Many wrong ideas concerning the teachings of Jesus may be secured by attempting to make allegories out of his parables.) 일반인들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 경계하며 적대(敵對적으로 맞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조직적인 교의 신학을 형성했는데, 예수님은 기회가 되는대로 가르친 교사였습니다. 그는 조직적인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율법으로 많이 가르치지 않고 생활에서 비유로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설명하려고 비유를 사용했을 때, 그는 그 목적을 위해 이야기의 한 면(面)만을 이용하려 하셨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해 여러 잘못된 개념이 그의 비유(比喩간접 설명)에서 우의(寓意빗대어 표현한 풍유)를 만들려는 시도로 일어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149:3.2 (1672.5) The religious leaders at Jerusalem were becoming well-nigh frantic as a result of the recent conversion of young Abraham and by the desertion of the three spies who had been baptized by Peter, and who were now out with the evangelists on this second preaching tour of Galilee. The Jewish leaders were increasingly blinded by fear and prejudice, while their hearts were hardened by the continued rejection of the appealing truth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When men shut off the appeal to the spirit that dwells within them, there is little that can be done to modify their attitude.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최근 젊은 아브라함의 개종(改宗)과 베드로가 세례를 준 세 첩자들의 이탈로 인해 거의 미쳐 날뛰게 되었는데(148.8.1), 이들은 이 갈릴리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지금 전도자들과 함께 다니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점차 두려움과 편견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렸으며, 게다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매력적인 진리들을 계속 거절하여 그들의 심정은 완고(頑固)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 안에 내주하는 영(靈)에게 호소하기를 차단하면, 그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149:3.3 (1672.6) When Jesus first met with the evangelists at the Bethsaida camp, in concluding his address, he said: “You should remember that in body and mind — emotionally — men react individually. The only uniform thing about men is the indwelling spirit. Though divine spirits may vary somewhat in the nature and extent of their experience, they react uniformly to all spiritual appeals. Only through, and by appeal to, this spirit can mankind ever attain unity and brotherhood.” But many of the leaders of the Jews had closed the doors of their hearts to the spiritual appeal of the gospel. From this day on they ceased not to plan and plot for the Master’s destruction. They were convinced that Jesus must be apprehended, convicted, and executed as a religious offender, a violator of the cardinal teachings of the Jewish sacred law. 예수께서 처음 벳새다 야영지에서 전도자들과 만났을 때, 자신의 연설을 마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와 마음에서 – 감정적으로 – 개인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너희는 기억해야 하리라.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것은 내주하는 영(靈)뿐이니라. 신적 영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본질과 정도가 얼마간 다양하지만, 그들은 모든 영적 호소들에 동일하게 반응하느니라. 오직 이 영(靈)을 통해서, 호소에 의해서만, 인류는 언제나 일치와 형제 사랑에 이를 수 있느니라.” 그러나 여러 유대교 지도자들은 복음의 영적 호소에 자신들 심정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 날부터 그들은 주님을 없애려는 계획과 음모(陰謀)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종교범, 즉 유대 신성한 율법에 속한 주요 가르침들의 위반자로 체포되고, 유죄로 입증되어, 처형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4. Progress of the Preaching Tour 전도 여행의 진전

200628 분노와 균형 잡힌 성품 잠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Like a city whose walls are broken down is a man who lacks self-control.

149:4.1 (1673.1) Jesus did very little public work on this preaching tour, but he conducted many evening classes with the believers in most of the cities and villages where he chanced to sojourn with James and John. At one of these evening sessions one of the younger evangelists asked Jesus a question about anger, and the Master, among other things, said in reply: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님은 거의 대중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야보보와 요한과 함께 어쩌다가 머물게 된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신자들과 여러 저녁 수업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저녁 수업 중에 한 번, 젊은 전도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께 분노에 대해 질문하자, 주님께서 다른 것들과 함께 대답하셨습니다.

149:4.2 (1673.2) “Anger is a material manifestation which represents, in a general way, the measure of the failure of the spiritual nature to gain control of the combined intellectual and physical natures. Anger indicates your lack of tolerant brotherly love plus your lack of self-respect and self-control. Anger depletes the health, debases the mind, and handicaps the spirit teacher of man’s soul.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s that ‘wrath kills the foolish man,’ and that man ‘tears himself in his anger’? That ‘he who is slow of wrath is of great understanding,’ while ‘he who is hasty of temper exalts folly’? You all know that ‘a soft answer turns away wrath,’ and how ‘grievous words stir up anger.’ ‘Discretion defers anger,’ while ‘he who has no control over his own self is like a defenseless city without walls.’ ‘Wrath is cruel and anger is outrageous.’ ‘Angry men stir up strife, while the furious multiply their transgressions.’ ‘Be not hasty in spirit, for anger rests in the bosom of fools.’” Before Jesus ceased speaking, he said further: “Let your hearts be so dominated by love that your spirit guide will have little trouble in delivering you from the tendency to give vent to those outbursts of animal anger which are inconsistent with the status of divine sonship.” “분노(忿怒)는 대개 영적 본성이, 결합된 지적(知的) 및 육체적 본성을, 장악하지 못한 척도를 나타내는 물질적 현상이니라. 분노는 너의 형제 사랑에 대한 관용(寬容) 부족에 더해서 자중(自重자기 존중) 부족과 자제(自制자기 절제) 부족을 가리키느니라. 분노는 건강을 소모하고 마음을 저하시키며 사람 혼(魂)의 영(靈) 교사를 방해하느니라.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욥5:2a),’ ‘울분을 터뜨리며 자신을 찢는(욥18:4a)’ 사람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성미가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14:29).’를 너희가 성경에서 읽지 않았느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며’ 어떻게 ‘과격한 말이 노를 격동하는지(잠15: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슬기(잠19:11a)요,’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벽이 없어 방어할 수 없는 성읍과 같으니라(잠25:28),’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넘치는 물) 같거니와(잠27:4a),’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늘어나느니라(잠29:22),’ ‘영(靈)으로 조급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7:9).’를 너희는 모두 알고 있느니라.” 예수께서 끝내기 전에,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너희 영(靈) 안내자가, 신적 아들됨의 신분에 맞지 않는, 동물적 분노의 그런 격발을 터뜨리려는 경향에서, 너희를 구해내는 일에 문제가 없도록, 사랑이 너희 심정을 그렇게 다스리게 하라.”

149:4.3 (1673.3) On this same occasion the Master talked to the group about the desirability of possessing well-balanced characters. He recognized that it was necessary for most men to devote themselves to the mastery of some vocation, but he deplored all tendency toward overspecialization, toward becoming narrow-minded and circumscribed in life’s activities. He called attention to the fact that any virtue, if carried to extremes, may become a vice. Jesus always preached temperance and taught consistency — proportionate adjustment of life problems. He pointed out that overmuch sympathy and pity may degenerate into serious emotional instability; that enthusiasm may drive on into fanaticism. He discussed one of their former associates whose imagination had led him off into visionary and impractical undertakings. At the same time he warned them against the dangers of the dullness of overconservative mediocrity. 바로 이때, 주(主)님은 무리에게 균형 잡힌 성품을 갖는 바람직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직업에 숙달하려면 헌신이 필연적이었음을 그가 인정했지만, 그는 삶의 활동에서 지나친 특화, 즉 편협(偏狹)함으로 삶의 활동을 제한하는 모든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덕(美德)도 극단으로 가면 악덕(惡德)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위를 환기(喚起)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절제를 설교하셨고, 일관성- 인생 문제의 균형 잡힌 조율을 가르쳤습니다. 과도한 동정심(同情心)과 연민(憐愍)이 심각한 감정적 불안정으로 악화(惡化)할 수도 있다고 그가 지적하셨습니다. 열광(熱狂)이 광신(狂信)으로 몰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상상력으로 몽상과 비현실적인 일에 이끌렸던 옛 동료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평범한 답답함의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149:4.4 (1673.4) And then Jesus discoursed on the dangers of courage and faith, how they sometimes lead unthinking souls on to recklessness and presumption. He also showed how prudence and discretion, when carried too far, lead to cowardice and failure. He exhorted his hearers to strive for originality while they shunned all tendency toward eccentricity. He pleaded for sympathy without sentimentality, piety without sanctimoniousness. He taught reverence free from fear and superstition. 그런 다음 예수님은 용기와 신앙의 위험에 대해, 어떻게 그것들이 경솔한 혼(魂)들을 때로 무모(無謀신중하지 못함)함과 억측(臆測이유와 근거가 없는 짐작)으로 이끄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신중함과 분별력이 너무 지나치면 어떻게 소심과 실패로 이끄는지 보이셨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모든 별난 경향을 피하는 동시에 독창성을 위해 애쓰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공감(共感), 경건한 체하지 않는 경건(敬虔)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미신이 없는 경의(敬意)를 가르쳤습니다.

149:4.5 (1674.1) It was not so much what Jesus taught about the balanced character that impressed his associates as the fact that his own life was such an eloquent exemplification of his teaching. He lived in the midst of stress and storm, but he never wavered. His enemies continually laid snares for him, but they never entrapped him. The wise and learned endeavored to trip him, but he did not stumble. They sought to embroil him in debate, but his answers were always enlightening, dignified, and final. When he was interrupted in his discourses with multitudinous questions, his answers were always significant and conclusive. Never did he resort to ignoble tactics in meeting the continuous pressure of his enemies, who did not hesitate to employ every sort of false, unfair, and unrighteous mode of attack upon him. 균형 잡힌 성품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친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 자신의 생활이 그의 가르침의 감동적인 그런 예증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동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압박과 격동 가운데 살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적들이 계속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들은 결코 그를 속일 수 없었습니다. 유식하고 박식한 자들이 그를 넘어뜨리려 했지만, 그는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논쟁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영적 통찰력을 주고, 위엄이 있었으며, 최종적이었습니다. 그의 강연 중 여러 질문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중대하며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며, 불의한 방식을 주저없이 사용하던 대적들의 계속적인 압박에 직면해서 결코 비열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49:4.6 (1674.2) While it is true that many men and women must assiduously apply themselves to some definite pursuit as a livelihood vocation, it is nevertheless wholly desirable that human beings should cultivate a wide range of cultural familiarity with life as it is lived on earth. Truly educated persons are not satisfied with remaining in ignorance of the lives and doings of their fellows. 여러 남녀가 생계 수단의 직업으로서 뚜렷한 어떤 업무에 부지런히 전념해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살면서, 인간 존재들은 생활에 관련된 광범위한 문화적 친밀성을 계발해야 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합니다. 참으로 교양 있는 사람들은 동료들의 생활과 처신을 모르고 지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5. Lesson Regarding Contentment 만족에 대한 교훈

200705 만족(滿足)에 대한 교훈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149:5.1 (1674.3) When Jesus was visiting the group of evangelists working under the supervision of Simon Zelotes, during their evening conference Simon asked the Master: “Why are some persons so much more happy and contented than others? Is contentment a matter of religious experience?” Among other things, Jesus said in answer to Simon’s question: 예수께서 시몬 젤로떼의 관리 아래에서 일하는 전도자 무리를 방문했을 때, 저녁 회의에서 시몬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하는지요? 만족이 종교 체험의 문제인가요?” 다른 것들 가운데, 예수께서 시몬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149:5.2 (1674.4) “Simon, some persons are naturally more happy than others. Much, very much, depends upon the willingness of man to be led and directed by the Father’s spirit which lives within him.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s the words of the wise man, ‘The spirit of man is the candle of the Lord, searching all the inward parts’? And also that such spirit-led mortals say: ‘The lines are fallen to me in pleasant places; yes, I have a goodly heritage.’ ‘A little that a righteous man has is better than the riches of many wicked,’ for ‘a good man shall be satisfied from within himself.’ ‘A merry heart makes a cheerful countenance and is a continual feast. Better is a little with the reverence of the Lord than great treasure and trouble therewith. Better is a dinner of herbs where love is than a fatted ox and hatred therewith. Better is a little with righteousness than great revenues without rectitude.’ ‘A merry heart does good like a medicine.’ ‘Better is a handful with composure than a superabundance with sorrow and vexation of spirit.’ “시몬아, 어떤 사람들은 원래 다른 이들보다 더 행복하니라. 사람 내부에 살고 있는 아버지 영(靈)의 인도와 지도에 대한 사람의 자발성(自發性)에 많은 것,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느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지혜자의 말씀을 읽지 않았느냐? ‘사람의 영(靈)은 주님의 등불이라 모든 내부를 살피느니라(잠20:27).’ 그렇게 영(靈)의 인도를 받는 필사자들도 말하느니라.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37:16).’ 왜냐하면 ‘선한 사람도 자기 내부에서 나온 것으로 만족할 것이기(잠14:14b)’ 때문이라.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며(잠15:13a)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c).’ ‘가산이 적어도 주님을 존경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그것으로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그것으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6-17).’ ‘적은 소득이 공의(公義)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16:8).’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良藥효험있는 약)이니라(잠17:22a).’ ‘한 손으로 평온함이 영(靈)의 슬픔과 고뇌가 과도히 가득함보다 나으니라(전4:6).’

149:5.3 (1674.5) “Much of man’s sorrow is born of the disappointment of his ambitions and the wounding of his pride. Although men owe a duty to themselves to make the best of their lives on earth, having thus sincerely exerted themselves, they should cheerfully accept their lot and exercise ingenuity in making the most of that which has fallen to their hands. All too many of man’s troubles take origin in the fear soil of his own natural heart. ‘The wicked flee when no man pursues.’ ‘The wicked are like the troubled sea, for it cannot rest, but its waters cast up mire and dirt; there is no peace, says God, for the wicked.’ “대부분의 사람의 슬픔은 기대에 어긋난 자기 야심과 상처를 입은 자기 자만심에서 생기느니라. 사람들은 지상에서 자신들의 인생에 최선을 행할 본분이 있어서, 성실히 애써야 하며, 그들은 기쁘게 자신의 몫을 받아들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최고를 만드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느니라. 너무 많은 모든 인간 문제들은 타고난 자기 심정에 속한 두려움의 토양에서 비롯되느니라.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느니라(잠28:1a).’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 그 물이 진흙과 쓰레기를 늘 솟구쳐 내느니라.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라(사57:20-21).’

149:5.4 (1674.6) “Seek not, then, for false peace and transient joy but rather for the assurance of faith and the sureties of divine sonship which yield composure, contentment, and supreme joy in the spirit.” “그래서 거짓된 평화와 일시적 기쁨을 찾지 말고, 오히려 신앙의 확신과 신적 아들(자녀)됨의 보증(保證안전성)을 찾을 것이니, 신적 아들(자녀)됨은 영(靈) 안에서 평정(平靜), 만족(滿足) 및 최극의 기쁨을 낳느니라.

149:5.5 (1675.1) Jesus hardly regarded this world as a “vale of tears.” He rather looked upon it as the birth sphere of the eternal and immortal spirits of Paradise ascension, the “vale of soul making.” 예수님은 이 세상을 조금도 “눈물의 골짜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상승하는 영원한 불멸의 영(靈)들이 탄생하는 구체, “혼(魂)을 만드는 골짜기”로 여겼습니다.

6. The “Fear of the Lord” “주(主)를 두려워함”

200712 “주(主)를 두려워함” (1)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Now all has been heard; here is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

149:6.1 (1675.2) It was at Gamala, during the evening conference, that Philip said to Jesus: “Master, why is it that the Scriptures instruct us to ‘fear the Lord,’ while you would have us look to the Father in heaven without fear? How are we to harmonize these teachings?” And Jesus replied to Philip, saying: 가말라의 저녁 회의에서 빌립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 “주(主)여, 당신은 두려움 없이 하늘 아버지를 보라고 하시는데, 어째서 성서는 우리에게 ‘주를 두려워하라(시34:9a).’고 가르치는지요? 이 가르침들을 우리가 어떻게 조화시킬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빌립에게 대답하셨습니다.

149:6.2 (1675.3) “My children, I am not surprised that you ask such questions. In the beginning it was only through fear that man could learn reverence, but I have come to reveal the Father’s love so that you will be attracted to the worship of the Eternal by the drawing of a son’s affectionate recognition and reciprocation of the Father’s profound and perfect love. I would deliver you from the bondage of driving yourselves through slavish fear to the irksome service of a jealous and wrathful King-God. I would instruct you in the Father-son relationship of God and man so that you may be joyfully led into that sublime and supernal free worship of a loving, just, and merciful Father-God. “내 자녀들아, 너희의 그런 질문에 나는 놀라지 않느니라. 사람은 처음에 두려움을 통해서만 경의(敬意존경의 뜻)를 배울 수 있었지만,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계시하러 왔으니, 애정 깊은 아들의 인식과 심오하고 완전한 아버지 사랑의 교환을 그려서, 너희를 영원자의 경배로 이끌 것이라. 너희를 노예적 두려움을 통해 질투하며 격노하는 왕-하나님을 지겹게 섬기도록 스스로 몰아가는 속박에서, 내가 너희를 건지리라.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아버지-아들 관계로 너희에게 가르쳐서, 애정이 깊고, 공정하며, 자비로운 아버지-하나님을 숭고한, 속박 없는 천상의 경배로, 너희를 기쁘게 이끌 수 있느니라.

149:6.3 (1675.4) “The ‘fear of the Lord’ has had different meanings in the successive ages, coming up from fear, through anguish and dread, to awe and reverence. And now from reverence I would lead you up, through recognition, realization, and appreciation, to love. When man recognizes only the works of God, he is led to fear the Supreme; but when man begins to understand and experience the personality and character of the living God, he is led increasingly to love such a good and perfect, universal and eternal Father. And it is just this changing of the relation of man to God that constitutes the mission of the Son of Man on earth. “‘주(主)를 두려워함’은 두려움에서 생겨서, 고통과 무서움을 통해서, 외경(畏敬)과 경의(敬意)까지, 연이은 시대에 다른 의미들을 지녔느니라. 이제 경의(敬意)로부터 내가, 인식, 깨달음 및 감사(진가 인정)를 통해, 사랑까지 너희를 이끌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일만 인식하면, 그는 최극자를 두려워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고유성과 성품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시작하면, 그는 점차 그렇게 선하고 완전하며, 우주적이고 영원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느니라.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지상에서 인자(人子)의 사명이니라.”

149:6.4 (1675.5) “Intelligent children do not fear their father in order that they may receive good gifts from his hand; but having already received the abundance of good things bestowed by the dictates of the father’s affection for his sons and daughters, these much loved children are led to love their father in responsive recognition and appreciation of such munificent beneficence. The goodness of God leads to repentance; the beneficence of God leads to service; the mercy of God leads to salvation; while the love of God leads to intelligent and freehearted worship. “총명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좋은 선물을 받으려고 자기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그래서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 애정의 지시로, 좋은 것들을 이미 풍성히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그토록 아낌 없는 혜택을 알아보고 감사(진가 인정)로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선(善)은 회개로 이끄느니라. 하나님의 혜택은 봉사로 이끄느니라. 하나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이끄느니라.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지능적이며 거리낌 없는 경배로 이끄느니라.

149:6.5 (1675.6) “Your forebears feared God because he was mighty and mysterious. You shall adore him because he is magnificent in love, plenteous in mercy, and glorious in truth. The power of God engenders fear in the heart of man, but the nobility and righteousness of his personality beget reverence, love, and willing worship. A dutiful and affectionate son does not fear or dread even a mighty and noble father. I have come into the world to put love in the place of fear, joy in the place of sorrow, confidence in the place of dread, loving service and appreciative worship in the place of slavish bondage and meaningless ceremonies. But it is still true of those who sit in darkness that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But when the light has more fully come, the sons of God are led to praise the Infinite for what he is rather than to fear him for what he does. “하나님이 강력하고 신비했기 때문에, 너희 선조들은 그를 두려워했느니라. 그는 최상으로 사랑하고, 자비가 풍성하며, 진리에 대해 영광이 넘치기 때문에, 너희는 그를 찬미할 것이라.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심정에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의 고유성에 속한 기품(氣品고상한 품격)과 공의(公義)는 경의(敬意), 사랑 및 자발적 경배를 일으키느니라. 본분을 다하며 애정 깊은 아들은 강력하고 고상한 아버지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느니라. 나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대신하고, 기쁨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신뢰로 무서움을 대신하고, 애정이 깊은 봉사와 감사하는 경배로 노예적 속박과 무의미한 의식을 대신 두려고 세상에 왔느니라. 그러나 ‘주(主)를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시111:10a).’는 어둠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여전히 진실이니라. 그러나 더 충분히 빛이 오면,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은 무한자(無限者)가 하시는 일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기 보다 그 품격(品格됨됨이) 때문에 그를 찬양하게 되리라.

149:6.6 (1675.7) “When children are young and unthinking, they must necessarily be admonished to honor their parents; but when they grow older and become somewhat more appreciative of the benefits of the parental ministry and protection, they are led up, through understanding respect and increasing affection, to that level of experience where they actually love their parents for what they are more than for what they have done. The father naturally loves his child, but the child must develop his love for the father from the fear of what the father can do, through awe, dread, dependence, and reverence, to the appreciative and affectionate regard of love. “자녀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존경하도록 반드시 깨우쳐야 하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자라서 부모의 보살핌과 보호의 혜택을 어느 정도 감사하게 되면, 그들은 존중을 이해하고 증가된 애정을 통해, 부모가 했던 것보다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여서 실제로 사랑하는 체험의 수준까지 이끌리느니라. 아버지는 당연히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만, 자녀는 아버지를 위한 사랑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경(畏敬), 무서움, 의존 및 경의(敬意) 통하여, 감사와 애정이 깊은, 사랑에 대한 존경까지, 개발해야 하느니라.

200719 “주(主)를 두려워함” (2)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s showe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To act justly and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149:6.7 (1676.1) “You have been taught that you should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at is the whole duty of man.’ But I have come to give you a new and higher commandment. I would teach you to ‘love God and learn to do his will, for that is the highest privilege of the liberated sons of God.’ Your fathers were taught to ‘fear God — the Almighty King.’ I teach you, ‘Love God — the all-merciful Father.’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그것이 사람의 모든 본분이니라(전12:13b).’라고 너희는 배웠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더 높은 새 계명을 주러 왔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배우라 그것이 해방된 하나님 아들(자녀)들의 최고 특권이기 때문이니라.’를 너희에게 가르치겠노라. 너희 선조들은 ‘하나님 – 전능한 왕을 두려워하라.’고 배웠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 –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노라.

149:6.8 (1676.2) “In the kingdom of heaven, which I have come to declare, there is no high and mighty king; this kingdom is a divine family. The universally recognized and unreservedly worshiped center and head of this far-flung brotherhood of intelligent beings is my Father and your Father. I am his Son, and you are also his sons. Therefore it is eternally true that you and I are brethren in the heavenly estate, and all the more so since we have become brethren in the flesh of the earthly life. Cease, then, to fear God as a king or serve him as a master; learn to reverence him as the Creator; honor him as the Father of your spirit youth; love him as a merciful defender; and ultimately worship him as the loving and all-wise Father of your more mature spiritual realization and appreciation. “내가 선포하러 온 하늘나라에는 높고 강력한 왕이 없느니라. 이 나라는 신적 가족이니라. 이 광범위한 지능적 존재들의 형제 모임이, 우주적으로 인정하고 순전히 경배하는, 중심과 좌장(座長어른)이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니라. 나는 그의 아들이며, 너희도 그의 아들(자녀)들이니라. 그러므로 너희와 내가 하늘 신분으로 형제들임은 영원히 진실이며, 우리는 지상 생활에서 육신으로 형제들이 되었기에 더 그러하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왕으로 두려워하거나 그를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 그를 창조자로서 존경하기를 배우라. 너희 영(靈) 젊은이의 아버지로서 그를 존중하라. 그를 자비로운 옹호(擁護두둔하고 편들어 지켜줌)자로서 사랑하라. 너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하여 깨닫고 감사하면서, 애정이 깊고 가장 현명한 아버지로서 궁극적으로 그를 경배하라.

149:6.9 (1676.3) “Out of your wrong concepts of the Father in heaven grow your false ideas of humility and springs much of your hypocrisy. Man may be a worm of the dust by nature and origin, but when he becomes indwelt by my Father’s spirit, that man becomes divine in his destiny. The bestowal spirit of my Father will surely return to the divine source and universe level of origin, and the human soul of mortal man which shall have become the reborn child of this indwelling spirit shall certainly ascend with the divine spirit to the very presence of the eternal Father. 하늘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겸손에 대한 거짓된 관념들이 자라나 대부분의 너희 위선이 생기느니라. 사람은 본래 기원이 흙의 벌레일지 몰라도, 내 아버지의 영(靈)이 그에게 내주하면, 그 사람의 운명은 신적이 되느니라. 내 아버지의 증여 영(靈)은 반드시 신적 근원과 기원된 우주 수준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내주하는 영(靈)의 거듭난 자녀인, 필사자의 인간 혼(魂)은, 신적 영(靈)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바로 면전으로 확실히 상승할 것이라.

149:6.10 (1676.4) “Humility, indeed, becomes mortal man who receives all these gifts from the Father in heaven, albeit there is a divine dignity attached to all such faith candidates for the eternal ascent of the heavenly kingdom. The meaningless and menial practices of an ostentatious and false humility are incompatible with the appreciation of the source of your salvation and the recognition of the destiny of your spirit-born souls. Humility before God is altogether appropriate in the depths of your hearts; meekness before men is commendable; but the hypocrisy of self-conscious and attention-craving humility is childish and unworthy of the enlightened sons of the kingdom.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승을 위한 그런 모든 신앙 후보자들에게 신적 위엄이 있지만, 하늘 아버지로부터 모든 이 선물들을 받는 필사자에게 정말로 겸손이 어울리느니라. 과시하는 거짓 겸손의 무의미하고 비천한 관행은, 너희 구원의 근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영-으로 거듭난 너희 혼(魂)들의 운명에 대한 인식과 맞지 않느니라. 너희의 깊은 심정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함은 아주 적절하니라. 사람 앞에서 온유함은 칭찬할 만한 것이라. 그러나 자기-의식의 위선과 관심을-갈망하는 겸손은 유치하며 하나님 나라의 깨우친 아들(자녀)들에게 어울리지 않느니라.

149:6.11 (1676.5) “You do well to be meek before God and self-controlled before men, but let your meekness be of spiritual origin and not the self-deceptive display of a self-conscious sense of self-righteous superiority. The prophet spoke advisedly when he said, ‘Walk humbly with God,’ for, while the Father in heaven is the Infinite and the Eternal, he also dwells ‘with him who is of a contrite mind and a humble spirit.’ My Father disdains pride, loathes hypocrisy, and abhors iniquity. And it was to emphasize the value of sincerity and perfect trust in the loving support and faithful guidance of the heavenly Father that I have so often referred to the little child as illustrative of the attitude of mind and the response of spirit which are so essential to the entrance of mortal man into the spirit realities of the kingdom of heaven.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온유(溫柔)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제(自制자기-절제)함은 잘하는 일이지만, 너희 온유함을 영적 기원에 두며 독선적 우월성에 속한 자의식(自意識)의 자기-기만적 과시에 두지 말라. 선지자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미6:8c).’고 말했을 때, 하늘 아버지는 무한자이며 영원자이지만, 그는 또한 ‘통회(痛悔몹시 뉘우침)하는 마음과 겸손한 영(靈)의 사람과 함께(사57:15b)’ 살기 때문이라고 신중히 나타냈던 것이라. 내 아버지는 거만(倨慢잘난 척 남을 업신여김)을 멸시하고, 위선(僞善겉으로만 체함)을 몹시 싫어하며, 사악(肆惡악독한 성질을 함부로 부림)을 싫어하고 미워하시느니라. 필사자가 하늘나라의 영(靈) 실체들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아주 필수적인, 마음의 태도와 영(靈) 응답의 실례로써, 내가 그렇게 자주 어린 아이를 실례로 언급한 것은(마18:2-4;19:13-14, 막9:33-37;10:13-16, 눅9:46-48;18:15-17), 순수함의 가치와 하늘 아버지의 애정이 깊은 지원과 신실한 안내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강조한 것이었느니라.

149:6.12 (1677.1) “Well did the Prophet Jeremiah describe many mortals when he said: ‘You are near God in the mouth but far from him in the heart.’ And have you not also read that direful warning of the prophet who said: ‘The priests thereof teach for hire, and the prophets thereof divine for money. At the same time they profess piety and proclaim that the Lord is with them.’ Have you not been well warned against those who ‘speak peace to their neighbors when mischief is in their hearts,’ those who ‘flatter with the lips while the heart is given to double-dealing’? Of all the sorrows of a trusting man, none are so terrible as to be ‘wounded in the house of a trusted friend.’” “선지자 예레미야가 ‘너희 입은 하나님께 가까우나 심정에서 멀리 있도다(렘12:2b).’라고 말했을 때, 많은 필사자들을 잘 묘사했느니라. 그리고 너희는 또한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가르치고, 선지자들은 돈을 위하여 점을 치는도다. 동시에 그들은 경건을 겉으로 내세우며 주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다고 선포하느니라(미3:11b).’고 말했던 선지자의 무서운 경고를 읽지 않았느냐? ‘그들의 심정에 악독이 있으면서 그들의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는(시28:3b)’ 자들, ‘심정은 일구이언(一口二言속임)하면서 혀로 아첨하는(시12:2b)’ 자들에 대하여 너희는 충분히 경고를 받지 않았느냐? 신뢰하는 사람의 모든 슬픔 중에서, ‘신뢰하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슥13:6b)’만큼 끔찍한 일이 없느니라.”

7. Returning to Bethsaida 벳새다로 돌아옴

200726 2차 전도여행의 마무리와 3차 준비 눅8: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After this, Jesus traveled about from one town and village to another,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he Twelve were with him,

149:7.1 (1677.2) Andrew, in consultation with Simon Peter and with the approval of Jesus, had instructed David at Bethsaida to dispatch messengers to the various preaching groups with instructions to terminate the tour and return to Bethsaida sometime on Thursday, December 30. By supper time on that rainy day all of the apostolic party and the teaching evangelists had arrived at the Zebedee home.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와 의논하고 예수님의 승인을 얻어, 벳새다에서 다윗에게 메신저들을 여러 전도 그룹에게 보내서 여행을 마치고 벳새다로 12월 30일, 목요일 언제든지 돌아오도록 지시했습니다. 비오는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사도 일행과 가르치는 전도자들 모두 세배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149:7.2 (1677.3) The group remained together over the Sabbath day, being accommodated in the homes of Bethsaida and near-by Capernaum, after which the entire party was granted a two weeks’ recess to go home to their families, visit their friends, or go fishing. The two or three days they were together in Bethsaida were, indeed, exhilarating and inspiring; even the older teachers were edified by the young preachers as they narrated their experiences. 무리는, 벳세다의 집들과 인근 가버나움에 있으면서, 함께 안식일까지 머문 후, 일행은 모두 2주간의 휴가를 받아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가고,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낚시하러 갔습니다. 그들이 벳새다에서 함께 지낸 2~3일은 정말로 즐겁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옛 교사들도 젊은 전도사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말할 때, 그들로 인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149:7.3 (1677.4) Of the 117 evangelists who participated in this second preaching tour of Galilee, only about seventy-five survived the test of actual experience and were on hand to be assigned to service at the end of the two weeks’ recess. Jesus, with Andrew, Peter, James, and John, remained at the Zebedee home and spent much time in conference regarding the welfare and extension of the kingdom. 갈릴리의 이 둘째 전도 여행에 참여했던 전도자 117명 중 약 75명만 실제 체험의 시험을 견디었고 2주간의 휴가 끝에 업무에 배정을 받으려고 준비 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세배대의 집에 남아서 하나님 나라의 복지(福祉)와 확장(擴張)에 관해 논의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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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0 The Third Preaching Tour 세 번째 전도 여행

Paper 150

The Third Preaching Tour 세 번째 전도여행

1. The Women’s Evangelistic Corps 여전도단(女傳道團)
2. The Stop at Magdala 막달라에 잠시 들르다
3. Sabbath at Tiberias 티베리아스에서 맞은 안식일
Discourse on “Magic and Superstition” “마술과 미신”에 대한 강연
4. Sending the Apostles Out Two and Two 사도들을 둘씩 파송함
5. What Must I Do to Be Saved?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지요?
6. The Evening Lessons 저녁 수업
7. The Sojourn at Nazareth 나사렛에 머무름
8. The Sabbath Service 안식일 예배
9. The Nazareth Rejection 나사렛의 배척

150:0.1 (1678.1) ON SUNDAY evening, January 16, A.D. 29, Abner, with the apostles of John, reached Bethsaida and went into joint conference with Andrew and the apostles of Jesus the next day. Abner and his associates made their headquarters at Hebron and were in the habit of coming up to Bethsaida periodically for these conferences. AD 29년 1월 16일 일요일 저녁에, 아브너가 요한의 사도들과 함께 벳새다에 도착했고, 다음날 안드레와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연합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너와 그 동료들은 헤브론에 본부를 두었고 이 회의를 위해 정기적으로 벳세다에 올라오곤 했습니다.

150:0.2 (1678.2) Among the many matters considered by this joint conference was the practice of anointing the sick with certain forms of oil in connection with prayers for healing. Again did Jesus decline to participate in their discussions or to express himself regarding their conclusions. The apostles of John had always used the anointing oil in their ministry to the sick and afflicted, and they sought to establish this as a uniform practice for both groups, but the apostles of Jesus refused to bind themselves by such a regulation. 이 연합 회의에서 충분히 다룬 여러 문제 가운데, 환자에게 치유기도와 관련하여 일정한 형태의 기름으로 도유(塗油기름을 바름)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논의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결론에 관해 자기 표현하기를 또 거절했습니다. 요한의 사도들은 환자와 시달리는 자들에게 사역하면서 언제나 기름을 바르곤 했으며, 그들은 이것을 두 그룹에게 동일한 관행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사도들은 그런 규칙에 묶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150:0.3 (1678.3) On Tuesday, January 18, the twenty-four were joined by the tested evangelists, about seventy-five in number, at the Zebedee house in Bethsaida preparatory to being sent forth on the third preaching tour of Galilee. This third mission continued for a period of seven weeks. 1월 18일 화요일에, 벳새다의 세배데 집에서 갈릴리의 셋째 전도 여행에 파송하기로 준비된, 시험을 마친 전도자들 약 75명에, 24명이 합류했습니다. 이 세 번째 사명은 7주간 계속되었습니다.

150:0.4 (1678.4) The evangelists were sent out in groups of five, while Jesus and the twelve traveled together most of the time, the apostles going out two and two to baptize believers as occasion required. For a period of almost three weeks Abner and his associates also worked with the evangelistic groups, advising them and baptizing believers. They visited Magdala, Tiberias, Nazareth, and all the principal cities and villages of central and southern Galilee, all the places previously visited and many others. This was their last message to Galilee, except to the northern portions. 전도자들을 5그룹으로 보냈으며, 그 동안 예수님과 12사도는 대부분의 시간에 같이 여행했는데, 사도들은 둘씩 나가서 필요할 때마다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거의 3주간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도 전도 그룹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에게 조언하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티베리아스, 나사렛 및 갈릴리 중부와 남부의 주요한 모든 도시와 마을, 즉 이전에 방문했던 모든 곳과 여러 다른 곳을 방문했습니다. 북쪽 부분을 제외하고, 이것은 갈릴리에 보낸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11분 21초부터

1. The Women’s Evangelistic Corps 여전도단(女傳道團)

200802 여성 해방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150:1.1 (1678.5) Of all the daring things which Jesus did in connection with his earth career, the most amazing was his sudden announcement on the evening of January 16: “On the morrow we will set apart ten women for the ministering work of the kingdom.” At the beginning of the two weeks’ period during which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were to be absent from Bethsaida on their furlough, Jesus requested David to summon his parents back to their home and to dispatch messengers calling to Bethsaida ten devout women who had served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former encampment and the tented infirmary. These women had all listened to the instruction given the young evangelists, but it had never occurred to either themselves or their teachers that Jesus would dare to commission women to t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minister to the sick. These ten women selected and commissioned by Jesus were: Susanna, the daughter of the former chazan of the Nazareth synagogue; Joanna, the wife of Chuza, the steward of Herod Antipas; Elizabeth, the daughter of a wealthy Jew of Tiberias and Sepphoris; Martha, the elder sister of Andrew and Peter; Rachel, the sister-in-law of Jude, the Master’s brother in the flesh; Nasanta, the daughter of Elman, the Syrian physician; Milcha, a cousin of the Apostle Thomas; Ruth, the eldest daughter of Matthew Levi; Celta, the daughter of a Roman centurion; and Agaman, a widow of Damascus. Subsequently, Jesus added two other women to this group — Mary Magdalene and Rebecca, the daughter of Joseph of Arimathea. 예수의 지상 생애와 관련해 그가 했던 모든 대담한 일 중 가장 놀라운 것은 1월 16일 저녁 갑작스런 그의 공표였습니다. “내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역 업무를 위해 10명의 여성을 따로 둘 것이라.”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휴가로 인해 벳새다에 없는 2주간의 처음에 예수님은 다윗을 요청하여, 그의 부모를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메신저들을 보내어 벳새다로 헌신된 여성 10명을 불러오게 했는데, 이들은 이전(以前) 야영지와 천막 진료소의 경영에 봉사했었습니다. 이 여성들 모두 젊은 전도자들에게 주었던 가르침을 경청했지만, 예수께서 대담하게 여성들을 임명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며 환자들을 돌보게 하실 줄은 자신들이나 그들의 선생들도 결코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택하여 임명한 여성 10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산나, 나사렛 회당의 이전(以前) 예배 인도자의 딸; 요안나, 헤롯 안티파스의 사무장 추자의 아내; 엘리자벳, 티베리아스와 셉포리스의 부유한 유대인의 딸; 마르타, 안드레와 베드로의 큰 누님; 라헬, 육신으로 주님의 동생 유다의 처제; 나산타, 시리아인(人) 의사 엘만의 딸; 밀카, 사도 도마의 사촌; 룻, 마태 레위의 장녀; 켈타, 로마 백부장의 딸; 아가만, 다마스커스의 과부; 나중에 예수님은 이 무리에 다른 두 여성 – 막달라 마리아와 레베카, 아리마대 요셉의 딸을 추가했습니다.

150:1.2 (1679.1) Jesus authorized these women to effect their own organization and directed Judas to provide funds for their equipment and for pack animals. The ten elected Susanna as their chief and Joanna as their treasurer. From this time on they furnished their own funds; never again did they draw upon Judas for support. 예수님은 이 여성들에게 그들 스스로 조직하도록 위임했으며, 그들의 장비와 짐 싣는 동물을 위해 기금을 주라고 유다에게 지시했습니다. 10명은 수산나를 그들의 단장(團長)으로, 요안나를 회계로 선임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그들 스스로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다시 후원을 위해 유다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150:1.3 (1679.2) It was most astounding in that day, when women were not even allowed on the main floor of the synagogue (being confined to the women’s gallery), to behold them being recognized as authorized teachers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The charge which Jesus gave these ten women as he set them apart for gospel teaching and ministry was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which set free all women and for all time; no more was man to look upon woman as his spiritual inferior. This was a decided shock to even the twelve apostles. Notwithstanding they had many times heard the Master say that “in the kingdom of heaven there is neither rich nor poor, free nor bond, male nor female, all are equally the sons and daughters of God,” they were literally stunned when he proposed formally to commission these ten women as religious teachers and even to permit their traveling about with them. The whole country was stirred up by this proceeding, the enemies of Jesus making great capital out of this move, but everywhere the women believers in the good news stood stanchly behind their chosen sisters and voiced no uncertain approval of this tardy acknowledgment of woman’s place in religious work. And this liberation of women, giving them due recognition, was practiced by the apostles immediately after the Master’s departure, albeit they fell back to the olden customs in subsequent generations. Throughout the early days of the Christian church women teachers and ministers were called deaconesses and were accorded general recognition. But Paul, despite the fact that he conceded all this in theory, never really incorporated it into his own attitude and personally found it difficult to carry out in practice. 여성들이 (여성용 자리에 한정되어) 회당의 1층(본당)에도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새 복음의 공인된 교사들로 승인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놀라웠습니다. 예수께서 이 10명의 여성이 복음을 가르치고 사역하도록 따로 세워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은 모든 여성을 영원히 해방하는 해방 선언이었습니다. 남성은 여성을 더는 영적 아랫사람으로 여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2 사도에게도 명백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여러 번 “하늘나라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동등하게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니라(갈3:28).”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그가 정식으로 이 10명의 여성을 종교 교사들로 임명하고 자신들과 함께 여행하도록 허락하기까지 지명하시자, 그들은 정말로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이 처리로 들끓었고, 예수의 대적들은 이 조처를 잘 이용했지만, 사방에서 복음을 믿는 여성들은 선택된 그들의 자매들 뒤에 확고히 서서, 종교적 업무에서 여성의 입장에 대한 때늦은 인정에 찬성을 표명했습니다. 사도들은, 주(主)가 떠난 직후, 여성들을 마땅히 인정한 이 여성 해방을 실행했지만, 그들은 이후 세대에 옛 관습에 빠졌습니다. 기독 교회의 초기에 줄곧, 여성 교사들과 사역자들은 여집사들로 불렸고 일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칙적으로 이 모두를 인정했지만, 결코 실제로 그 자신의 태도에 적용하지 않았고, 실제로 몸소 실행하기가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2. The Stop at Magdala 막달라에 잠시 들르다

200809 신실한 여성들 막15:40-41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40 Some women were watching from a distance. Among them were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James the younger and of Joses, and Salome. 41 In Galilee these women had followed him and cared for his needs. Many other women who had come up with him to Jerusalem were also there.

150:2.1 (1679.3) As the apostolic party journeyed from Bethsaida, the women traveled in the rear. During the conference time they always sat in a group in front and to the right of the speaker. Increasingly, women had become believers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it had been a source of much difficulty and no end of embarrassment when they had desired to hold personal converse with Jesus or one of the apostles. Now all this was changed. When any of the women believers desired to see the Master or confer with the apostles, they went to Susanna, and in company with one of the twelve women evangelists, they would go at once into the presence of the Master or one of his apostles. 사도 일행이 벳새다에서 여행하자, 여성들은 뒤에서 이동했습니다. 회의 시간에 그들은 늘 강사(講士)의 우측 앞에 무리를 지어 앉았습니다. 점차, 여성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예수님 혹은 사도 중 한 명과 개인적으로 대화하기를 바라자, 그것은 여러 어려움의 근원이었고 한없이 곤란했습니다. 이제 이 모두가 달라졌습니다. 믿는 여성 중 누구라도 주(主)를 뵙거나 사도들과 의논하려면, 그들은 수산나에게 갔고, 12 여전도자들 중 한 명과 함께, 주(主)님 혹은 사도 중 한 명이 있는 자리로 즉시 가곤 했습니다.

150:2.2 (1680.1) It was at Magdala that the women first demonstrated their usefulness and vindicated the wisdom of their choosing. Andrew had imposed rather strict rules upon his associates about doing personal work with women, especially with those of questionable character. When the party entered Magdala, these ten women evangelists were free to enter the evil resorts and preach the glad tidings directly to all their inmates. And when visiting the sick, these women were able to draw very close in their ministry to their afflicted sisters. As the result of the ministry of these ten women (afterward known as the twelve women) at this place, Mary Magdalene was won for the kingdom. Through a succession of misfortunes and in consequence of the attitude of reputable society toward women who commit such errors of judgment, this woman had found herself in one of the nefarious resorts of Magdala. It was Martha and Rachel who made plain to Mary that the doors of the kingdom were open to even such as she. Mary believed the good news and was baptized by Peter the next day. 여성들은 막달라에서 그들의 유용성을 처음 증명하고 그들을 선정(選定)한 지혜를 입증했습니다. 안드레는 여성들, 특히 미심쩍은 성품의 여성과 개인적으로 업무를 보는 자기 동료들에게 상당히 엄한 규칙을 정했습니다. 일행이 막달라에 들어갔을 때, 이 여성 전도자 10명은 유흥업소들로 들어가 모든 업소 거주자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데 자유로웠습니다. 환자들을 방문할 때, 이 여성들은 시달리는 그들의 자매들을 돌보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이 여성 10명(후에 여성 12명으로 알려짐)이 사역한 결과, 막달라 마리아가 하나님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줄곧 연속된 불행과 그렇게 판단의 실수를 범한 여성을 향한 표준적 사회의 태도로 인해, 이 여성은 막달라의 극악한 유흥업소 중 하나에 있었습니다. 마르타와 라헬은 마리아에게 그녀와 같은 자에게도 하나님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을 믿었고 다음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50:2.3 (1680.2) Mary Magdalene became the most effective teacher of the gospel among this group of twelve women evangelists. She was set apart for such service, together with Rebecca, at Jotapata about four weeks subsequent to her conversion. Mary and Rebecca, with the others of this group, went on through the remainder of Jesus’ life on earth, laboring faithfully and effectively for the enlightenment and uplifting of their downtrodden sisters; and when the last and tragic episode in the drama of Jesus’ life was being enacted, notwithstanding the apostles all fled but one, these women were all present, and not one either denied or betrayed him. 막달라 마리아는 12명의 이 여전도자 무리에서 가장 유능한 복음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개종(改宗)한지 약 4주(週) 후, 요타파타에서 레베카와 함께 그렇게 봉사하도록 따로 세워졌습니다. 마리아와 레베카는, 이 무리의 다른 이들과 함께, 예수님의 나머지 지상 생애 동안, 짓밟힌 자기 자매들의 계몽과 향상을 위해 계속 신실하게 실제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일생의 드라마 중 마지막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달아났지만, 이 여성들은 모두 있었고, 한 명도 그를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3. Sabbath at Tiberias 티베리아스에서 맞은 안식일

200816 마술(魔術)과 미신(迷信) 마2: 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1 After Jesus was born in Bethlehem in Judea, during the time of King Herod, Magi from the east came to Jerusalem 2 and asked, “Where is the one who has been born king of the Jews? We saw his star in the east and have come to worship him.”

150:3.1 (1680.3) The Sabbath services of the apostolic party had been put in the hands of the women by Andrew, upon instructions from Jesus. This meant, of course, that they could not be held in the new synagogue. The women selected Joanna to have charge of this occasion, and the meeting was held in the banquet room of Herod’s new palace, Herod being away in residence at Julias in Perea. Joanna read from the Scriptures concerning woman’s work in the religious life of Israel, making reference to Miriam, Deborah, Esther, and others. 안드레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사도 일행의 안식일 예배를 여성들의 손에 맡겼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새 회당에서 (예배)할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여성들은 이 행사 담당으로 요안나를 뽑았고, 헤롯이 페뢰아의 줄리아스 관저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모임은 헤롯의 새 궁전 연회장에서 열렸습니다. 요안나는 미리암, 드보라, 에스더 및 다른 여성들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종교 생활에서 여성의 업무에 관한 성서를 읽었습니다.

150:3.2 (1680.4) Late that evening Jesus gave the united group a memorable talk on “Magic and Superstition.” In those days the appearance of a bright and supposedly new star was regarded as a token indicating that a great man had been born on earth. Such a star having then recently been observed, Andrew asked Jesus if these beliefs were well founded. In the long answer to Andrew’s question the Master entered upon a thoroughgoing discussion of the whole subject of human superstition. The statement which Jesus made at this time may be summarized in modern phraseology as follows: 그날 늦은 저녁에 예수님은 연합 집단에게 “마술(魔術)과 미신(迷信)”에 대해 잊지 못할 얘기를 하셨습니다. 당시에 밝은, 소위 새 별의 출현은 지상에 위대한 사람의 탄생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겼습니다. 최근에 그런 별을 보게 되자, 이러한 믿음이 근거가 있는지 안드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안드레의 질문에 길게 대답하면서, 주(主)님은 인간의 미신(迷信)에 관한 전(全) 주제에 대해 철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현대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

150:3.3 (1680.5) 1. The courses of the stars in the heavens have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e events of human life on earth. Astronomy is a proper pursuit of science, but astrology is a mass of superstitious error which has no place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하늘에 있는 별들의 경로는 지상의 인간 생활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천문학은 과학의 적절한 추구이지만, 점성술은 하나님나라 복음에서 어디에도 없는 미신적 오류(誤謬) 덩어리입니다.

150:3.4 (1680.6) 2. The examination of the internal organs of an animal recently killed can reveal nothing about weather, future events, or the outcome of human affairs. 최근에 죽인 동물의 내장(內臟)을 검사해서, 날씨, 미래 사건, 또는 인간 업무의 결과를 아무 것도 밝힐 수 없습니다.

150:3.5 (1680.7) 3. The spirits of the dead do not come back to communicate with their families or their onetime friends among the living. 죽은 자들의 영(靈)들은 살아있는 자기 가족들 혹은 옛 친구들과 소통하러 돌아오지 않습니다.

150:3.6 (1681.1) 4. Charms and relics are impotent to heal disease, ward off disaster, or influence evil spirits; the belief in all such material means of influencing the spiritual world is nothing but gross superstition. 부적(符籍)이나 유물(遺物)은 질병을 치유하고 재난을 막거나 악령들에게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를 움직이는 그런 모든 물질적 수단을 믿는 것은 철저한 미신(迷信)일 뿐입니다.

150:3.7 (1681.2) 5. Casting lots, while it may be a convenient way of settling many minor difficulties, is not a method designed to disclose the divine will. Such outcomes are purely matters of material chance. The only means of communion with the spiritual world is embraced in the spirit endowment of mankind,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Father, together with the outpoured spirit of the Son and the omnipresent influence of the Infinite Spirit. 제비 뽑기는 여러 사소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편리한 방법일 수 있지만, 신적 뜻을 밝히도록 고안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 결과는 순전히 물질적 우연의 문제입니다. 영적 세계와 교감(交感)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들이 유출(流出흘려 보낸)한 영(靈)과 무한 영(靈)의 전재(全在)력과 함께, 인류의 영(靈) 자질(資質), 아버지의 내주하는 영(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150:3.8 (1681.3) 6. Divination, sorcery, and witchcraft are superstitions of ignorant minds, as also are the delusions of magic. The belief in magic numbers, omens of good luck, and harbingers of bad luck, is pure and unfounded superstition. 점(占), 마법(魔法), 요술(妖術)은, 무지한 사람(마음)들의 미신(迷信)이며, 또한 마술(魔術)의 미혹도 그렇습니다. 마법의 숫자, 행운(幸運)의 징조(徵兆)와 불운(不運)의 전조(前兆)를 믿는 것은 순전히 근거 없는 미신(迷信)입니다.

150:3.9 (1681.4) 7.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is largely a superstitious and groundless system of ignorant and fantastic speculation. The gospel of the kingdom must have nothing in common with the soothsayer priests of primitive religion. 꿈의 해석은 대개 무지하고 터무니없는 억측(臆測짐작)에 속한 미신적이고 근거 없는 체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원시 종교의 점쟁이 사제들과 공통점이 없어야 합니다.

150:3.10 (1681.5) 8. The spirits of good or evil cannot dwell within material symbols of clay, wood, or metal; idols are nothing more than the material of which they are made. 선(善)하거나 악(惡)한 영(靈)들은 진흙, 나무 혹은 금속의 물질적 상징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우상(偶像)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진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150:3.11 (1681.6) 9. The practices of the enchanters, the wizards, the magicians, and the sorcerers, were derived from the superstitions of the Egyptians, the Assyrians, the Babylonians, and the ancient Canaanites. Amulets and all sorts of incantations are futile either to win the protection of good spirits or to ward off supposed evil spirits. 매혹(魅惑)자들, 요술쟁이들, 마술사들 및 마법사들의 수단은 이집트인(人), 아시리아인(人), 바빌로니아인(人) 및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미신(迷信)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호부(護符액막이 부적)와 모든 종류의 주문(呪文)은 선한 영(靈)들의 보호를 얻거나 소위 악한 영(靈)들을 피하는데 쓸데없습니다.

150:3.12 (1681.7) 10. He exposed and denounced their belief in spells, ordeals, bewitching, cursing, signs, mandrakes, knotted cords, and all other forms of ignorant and enslaving superstition. 그는 주문(呪文), 시련 재판, 매혹, 저주, 기호, 약물(유독성 마취제 식물), 매듭 끈 및 무지하고 노예로 삼는 다른 모든 형태의 미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폭로하고 알렸습니다.

4. Sending the Apostles Out Two and Two 사도들을 둘씩 파송함

200823 천국 복음: 사람은 하나님 자녀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As you go, preach this message: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150:4.1 (1681.8) The next evening, having gathered together the twelve apostles, the apostles of John, and the newly commissioned women’s group, Jesus said: “You see for yourselves that the harvest is plenteous, but the laborers are few. Let us all, therefore, pray the Lord of the harvest that he send forth still more laborers into his fields. While I remain to comfort and instruct the younger teachers, I would send out the older ones two and two that they may pass quickly over all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while it is yet convenient and peaceful.” Then he designated the pairs of apostles as he desired them to go forth, and they were: Andrew and Peter, James and John Zebedee, Philip and Nathaniel, Thomas and Matthew, James and Judas Alpheus, Simon Zelotes and Judas Iscariot. 다음 날 저녁 12사도들, 요한의 사도들, 및 새로 임명된 여성 일행이 모두 모이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스스로 알거니와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적으니 우리 모두 추수하는 주인에게 그의 밭에 훨씬 더 많은 일꾼을 보내시도록 기도하자(마9:37-38). 내가 남아서 새 교사들을 위로하고 가르치는 동안, 아직 형편이 좋고 평화로울 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모든 갈릴리 전역을 신속히 통과하도록 옛 교사들을 둘씩 보내려 하노라.” 그때 그의 희망대로 사도들을 한 쌍씩 정해 그들을 출발시켰는데, 그들은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베데, 빌립과 나다니엘, 도마와 마태,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열심당 시몬과 가룟 유다였습니다(마10:2-4).

150:4.2 (1681.9) Jesus arranged the date for meeting the twelve at Nazareth, and in parting, he said: “On this mission go not to any city of the gentiles, neither go into Samaria, but go instead to the lost sheep of the house of Israel.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proclaim the saving truth that man is a son of God. Remember that the disciple is hardly above his master nor a servant greater than his lord.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o be equal with his master and the servant to become like his lord. If some people have dared to call the master of the house an associate of Beelzebub, how much more shall they so regard those of his household! But you should not fear these unbelieving enemies. I declare to you that there is nothing covered up that is not going to be revealed; there is nothing hidden that shall not be known. What I have taught you privately, that preach with wisdom in the open. What I have revealed to you in the inner chamber, that you are to proclaim in due season from the housetops. And I say to you, my friends and disciples, be not afraid of those who can kill the body, but who are not able to destroy the soul; rather put your trust in Him who is able to sustain the body and save the soul.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12사도와 만날 기일을 정하셨고 떠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전도에는 이방인의 도시나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고, 대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자녀)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라. 제자는 도저히 그의 선생보다 높지 않으며, 하인이 그의 상전보다 위대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제자가 그의 선생과 같고, 하인이 그의 상전과 같이 되면 충분하니라. 어떤 사람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의 동료라고 감히 말했으니, 그 집 사람들을 얼마나 더 그렇게 여길 것인가!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 이 대적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리니,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4-26). 내가 은밀히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지혜롭게 공공연히 전도하라. 내가 내실(內室안방)에서 너희에게 드러낸 것을 너희가 적절한 시기에 지붕에서 선포하리라. 내가 너희, 내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일 수 있어도 혼(魂)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 오히려 너희는 몸을 유지하고 혼을 구원할 수 있는 그를 신뢰하라(마10:27-28).

150:4.3 (1682.1) “Are not two sparrows sold for a penny? And yet I declare that not one of them is forgotten in God’s sight. Know you not that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Fear not, therefore; you are of more value than a great many sparrows. Be not ashamed of my teaching; go forth proclaiming peace and good will, but be not deceived — peace will not always attend your preaching. I came to bring peace on earth, but when men reject my gift, division and turmoil result. When all of a family receive the gospel of the kingdom, truly peace abides in that house; but when some of the family enter the kingdom and others reject the gospel, such division can produce only sorrow and sadness. Labor earnestly to save the whole family lest a man’s foes become those of his own household. But, when you have done your utmost for all of every family, I declare to you that he who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this gospel is not worthy of the kingdom.” “참새 두 마리가 한 페니(10원)에 팔리지 않느냐? 그래도 내가 선언하노니, 그중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잊혀지지 않느니라. 너희 머리 털까지도 모두 헤아리는 것을 너희가 모르느냐? 그러므로 두려워말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들보다 귀하니라(마10:29-31). 내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가서 평화와 선한 뜻을 선포하지만, 속지말라 – 평화가 너희의 전도에 언제나 함께 할 것은 아니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 왔으나 사람들이 내 선물을 거절하면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느니라. 모든 가족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면, 진실로 평화가 그 집에 머물지만, 가족 일부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다른 이들이 복음을 거절할 때, 그런 분열로 슬픔과 비애만 일어날 수 있느니라. 사람의 대적이 자기 집안 사람이 되지 않도록 온 가족을 구원하려고 열심히 수고하라. 하지만, 너희가 가족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 이 복음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내가 선포하노라(마10:37a).”

150:4.4 (1682.2) When the twelve had heard these words, they made ready to depart. And they did not again come together until the time of their assembling at Nazareth to meet with Jesus and the other disciples as the Master had arranged. 12사도들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主)께서 정하신 대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나사렛에서 만나려고 모일 때까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5. What Must I Do to Be Saved?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지요?

200830 구원(救援)의 길: 신앙(信仰)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150:5.1 (1682.3) One evening at Shunem, after John’s apostles had returned to Hebron, and after Jesus’ apostles had been sent out two and two, when the Master was engaged in teaching a group of twelve of the younger evangelists who were laboring under the direction of Jacob, together with the twelve women, Rachel asked Jesus this question: “Master, what shall we answer when women ask us, What shall I do to be saved?” When Jesus heard this question, he answered: 요한의 사도들이 헤브론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의 사도들이 둘씩 파송된 후, 슈넴의 어느날 저녁, 주(主)께서, 야곱의 지도를 받으며 수고하던, 젊은 전도자들 12명 일행을 가르치셨을 때, 12 여성들과 함께 있던 라헬이 예수께 이 질문을 했습니다. “주(主)여, 여성들이 우리에게 ‘내가 구원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예수께서 이 질문을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150:5.2 (1682.4) “When men and women ask what shall we do to be saved, you shall answer, Believe this gospel of the kingdom; accept divine forgiveness. By faith recognize the indwelling spirit of God, whose acceptance makes you a son of God.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s where it says, ‘In the Lord have I righteousness and strength.’ Also where the Father says, ‘My righteousness is near; my salvation has gone forth, and my arms shall enfold my people.’ ‘My soul shall be joyful in the love of my God, for he has clothed me with the garments of salvation and has covered me with the robe of his righteousness.’ Have you not also read of the Father that his name ‘shall be called the Lord our righteousness.’ ‘Take away the filthy rags of self-righteousness and clothe my son with the robe of divine righteousness and eternal salvation.’ It is forever true,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Entrance into the Father’s kingdom is wholly free, but progress — growth in grace — is essential to continuance therein. “남녀들이 ‘우리가 구원되려면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을 때,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믿고 신적 용서를 받아들이라고 너희는 대답하라.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靈)을 신앙으로 인정하라, 그의 수용(嘉納받음)으로 너희가 하나님 아들(자녀)가 되느니라. 너희는 성서에서 말하는 다음 구절을 읽지 않았느냐? ‘주(主) 안에서 내가 공의(公義)와 강함을 얻느니라(사45:24a).’ 또한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공의(公義)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로 내 백성을 안으리라(사51:5a).’ ‘내 혼(魂)이 내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뻐하리니 그가 나를 구원의 예복으로 입히셨고 그의 공의(公義)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사61:10a).’ 너희는 또한 아버지에 대해 그의 이름이 ‘주(主) 우리 공의(公義)로 불릴 것이라(렘23:6b).’고 읽지 않았느냐? ‘독선(獨善)의 더러운 누더기를 벗고(슥3:4b) 신적 공의(公義)와 영원한 구원의 예복으로 내 아들을 입히라.’ ‘의인은 신앙으로 살리라(합2:4b).’는 언제나 참이라.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무료이지만, 거기에 계속 있으려면 진보 – 은혜의 성장-가 필수적이라.

150:5.3 (1682.5) “Salvation is the gift of the Father and is revealed by his Sons. Acceptance by faith on your part makes you a partaker of the divine nature, a son or a daughter of God. By faith you are justified; by faith are you saved; and by this same faith are you eternally advanced in the way of progressive and divine perfection. By faith was Abraham justified and made aware of salvation by the teachings of Melchizedek. All down through the ages has this same faith saved the sons of men, but now has a Son come forth from the Father to make salvation more real and acceptable.” “구원은 아버지의 선물이며, 그의 아들들이 계시하느니라. 너희 편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너희는 신적 본성의 참여자,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 되느니라. 너희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며, 너희는 신앙으로 구원되느니라. 너희는 바로 이 신앙으로, 진보하는 신적 완전의 길로 영원히 전진하느니라. 신앙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고, 멜기세덱의 가르침으로 구원을 깨달았느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바로 이 신앙이 사람들의 아들(자녀)들을 구원했지만, 구원을 더 실제로 받아들이도록 아버지로부터 이제 아들이 왔느니라.”

150:5.4 (1683.1) When Jesus had left off speaking, there was great rejoicing among those who had heard these gracious words, and they all went on in the days that followed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with new power and with renewed energy and enthusiasm. And the women rejoiced all the more to know they were included in these plan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n earth.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은혜로운 이 말씀을 들었던 자들 사이에 큰 기쁨이 있었고, 그들 모두 이어서 여러날 새 권능과 에너지와 열정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이 계획에 자신들이 포함되었음을 알고 더 기뻐했습니다.

150:5.5 (1683.2) In summing up his final statement, Jesus said: “You cannot buy salvation; you cannot earn righteousness. Salvation is the gift of God, and righteousness is the natural fruit of the spirit-born life of sonship in the kingdom. You are not to be saved because you live a righteous life; rather is it that you live a righteous life because you have already been saved, have recognized sonship as the gift of God and service in the kingdom as the supreme delight of life on earth. When men believe this gospel, which is a revelation of the goodness of God, they will be led to voluntary repentance of all known sin. Realization of sonship is incompatible with the desire to sin. Kingdom believers hunger for righteousness and thirst for divine perfection.” 예수님은 마지막 자기 말씀을 간추려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구원을 살 수 없으며 공의(公義)를 얻을 수도 없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공의(公義)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영(靈)으로-태어난 생명이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니라. 너희가 의로운 생활을 살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이미 구원되었고, 아들(자녀)됨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지상에서 최극 생활의 기쁨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너희가 의로운 생활을 사는 것이라. 사람들이, 하나님 선함의 계시인, 이 복음을 믿을 때, 그들은 알려진 모든 죄를 자발적으로 회개하도록 이끌릴 것이라. 아들(자녀)됨의 실상을 아는 것은 죄의 욕망과 맞지 않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들은 공의(公義)와 신적 완전을 갈망(渴望)하느니라.”

6. The Evening Lessons 저녁 수업

200906 저녁 수업 막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Jesus left there and went to his hometown, accompanied by his disciples.

150:6.1 (1683.3) At the evening discussions Jesus talked upon many subjects. During the remainder of this tour — before they all reunited at Nazareth — he discussed “The Love of God,” “Dreams and Visions,” “Malice,” “Humility and Meekness,” “Courage and Loyalty,” “Music and Worship,” “Service and Obedience,” “Pride and Presumption,” “Forgiveness in Relation to Repentance,” “Peace and Perfection,” “Evil Speaking and Envy,” “Evil, Sin, and Temptation,” “Doubts and Unbelief,” “Wisdom and Worship.” With the older apostles away, these younger groups of both men and women more freely entered into these discussions with the Master. 저녁 토론에서 예수님은 계속 여러 주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남은 이 여행 기간, 나사렛에서 그들 모두 다시 만나기 전(前)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 “꿈과 환상,” “적의(敵意해하려는 마음),” “겸손과 온유,” “용기와 충성,” “음악과 경배,” “봉사와 순종,” “오만(傲慢건방지고 거만함)과 추정(推定추측으로 판정),” “회개와 관련된 용서,” “평화와 완전,” “악한 말과 질투,” “악(惡), 죄(罪) 및 유혹,” “의심과 불신,” “지혜와 경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연상의 사도들이 떠나자, 이 젊은 남녀 일행들은 자유롭게 주님과 이런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150:6.2 (1683.4) After spending two or three days with one group of twelve evangelists, Jesus would move on to join another group, being informed as to the whereabouts and movements of all these workers by David’s messengers. This being their first tour, the women remained much of the time with Jesus. Through the messenger service each of these groups was kept fully informed concerning the progress of the tour, and the receipt of news from other groups was always a source of encouragement to these scattered and separated workers. 전도자 12명의 한 일행과 2~3일을 보낸 후, 다윗의 메신저들로부터 모든 이 일군들의 소재와 움직임에 대해 보고를 받고, 예수님은 다른 집단에 합류하려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첫 여행이라서, 그들은 여러 시간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이들 각 일행은 메신저 봉사를 통해 여행의 경과를 충분히 알았고, 다른 일행의 소식을 받는 일은 흩어져 분리된 일군들에게 언제나 격려의 원천이었습니다.

150:6.3 (1683.5) Before their separation it had been arranged that the twelve apostles, together with the evangelists and the women’s corps, should assemble at Nazareth to meet the Master on Friday, March 4. Accordingly, about this time, from all parts of central and southern Galilee these various groups of apostles and evangelists began moving toward Nazareth. By midafternoon, Andrew and Peter, the last to arrive, had reached the encampment prepared by the early arrivals and situated on the highlands to the north of the city. And this was the first time Jesus had visited Nazareth since the beginning of his public ministry. 그들이 흩어지기 전에 12사도들은 전도자들 및 여성단(團)과 함께, 3월 4일 금요일에 주(主)님과 만나려고 나사렛에 모이도록 정했습니다. 따라서 이 무렵, 중부와 남부 갈릴리의 전 지역에서, 이 여러 사도들과 전도자들 일행이 나사렛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중반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안드레와 베드로는, 일찍 도착한 자들이 준비한, 도시 북쪽 고지(高地)에 있는 야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공(公) 사역의 시작 이후 나사렛을 방문한 첫 번째였습니다.

7. The Sojourn at Nazareth 나사렛에 머무름

200913 나사렛에 머무름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He went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on the Sabbath day he went into the synagogue, as was his custom. And he stood up to read.

150:7.1 (1683.6) This Friday afternoon Jesus walked about Nazareth quite unobserved and wholly unrecognized. He passed by the home of his childhood and the carpenter shop and spent a half hour on the hill which he so much enjoyed when a lad. Not since the day of his baptism by John in the Jordan had the Son of Man had such a flood of human emotion stirred up within his soul. While coming down from the mount, he heard the familiar sounds of the trumpet blast announcing the going down of the sun, just as he had so many, many times heard it when a boy growing up in Nazareth. Before returning to the encampment, he walked down by the synagogue where he had gone to school and indulged his mind in many reminiscences of his childhood days. Earlier in the day Jesus had sent Thomas to arrange with the ruler of the synagogue for his preaching at the Sabbath morning service. 이날 금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조용히 눈에 띄지 않고 아예 알아채지 못하게 나사렛을 거니셨습니다. 그는 자기 유년기의 집과 목공소를 지나서 소년기에 그토록 즐겼던 언덕에서 30분간 보냈습니다. 그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은 날 이후 인자(人子)는 자기 혼(魂)에서 이토록 인간적 감정이 넘쳐서 고무된 적이 없었습니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동안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는 소년이었을 때 아주 여러 번 그가 들었던 것처럼, 일몰(日沒해가 짐)을 알리는 나팔 부는 익숙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영지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학교에 다녔던 회당 옆으로 걸어 내려갔고 그의 마음은 유년 시절의 여러 추억에 잠겼습니다. 그날 일찍 예수님은 안식일 아침 예배에 자신의 설교를 위해 회당장과 준비하도록 도마를 보냈습니다.

150:7.2 (1684.1) The people of Nazareth were never reputed for piety and righteous living. As the years passed, this village became increasingly contaminated by the low moral standards of near-by Sepphoris. Throughout Jesus’ youth and young manhood there had been a division of opinion in Nazareth regarding him; there was much resentment when he moved to Capernaum. While the inhabitants of Nazareth had heard much about the doings of their former carpenter, they were offended that he had never included his native village in any of his earlier preaching tours. They had indeed heard of Jesus’ fame, but the majority of the citizens were angry because he had done none of his great works in the city of his youth. For months the people of Nazareth had discussed Jesus much, but their opinions were, on the whole, unfavorable to him. 나사렛 사람들은 경건과 의로운 생활로 소문난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마을은 인근 셉포리스의 낮은 도덕적 기준으로 점차 오염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청소년 및 청년기 내내, 그에 대해 나사렛에는 의견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가 가버나움으로 이사했을 때 분노가 많았습니다. 나사렛 주민들이 그들의 옛 목수의 행위에 대해 들었지만, 그의 초기 전도 여행 어디에도 그의 출신 마을이 들어 있지 않아서 그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의 명성을 들었지만, 그가 청춘을 보낸 도시에서 위대한 일을 행한 적이 없어서 대다수 시민은 화를 냈습니다. 여러 달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많이 얘기했지만, 대체로 그들의 의견은 그에게 좋지 않았습니다.

150:7.3 (1684.2) Thus did the Master find himself in the midst of, not a welcome homecoming, but a decidedly hostile and hypercritical atmosphere. But this was not all. His enemies, knowing that he was to spend this Sabbath day in Nazareth and supposing that he would speak in the synagogue, had hired numerous rough and uncouth men to harass him and in every way possible make trouble. 따라서 주님은 환영받는 귀향이 아니라, 확실히 적대적이고 혹평(酷評)하는 분위기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그가 이 안식일을 나사렛에서 보낼 것을 알고 회당에서 말씀하리라고 짐작하여, 그를 괴롭히고 모든 방법으로 분쟁을 만들려고, 여러 거칠고 난폭한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150:7.4 (1684.3) Most of the older of Jesus’ friends, including the doting chazan teacher of his youth, were dead or had left Nazareth, and the younger generation was prone to resent his fame with strong jealousy. They failed to remember his early devotion to his father’s family, and they were bitter in their criticism of his neglect to visit his brother and his married sisters living in Nazareth. The attitude of Jesus’ family toward him had also tended to increase this unkind feeling of the citizenry. The orthodox among the Jews even presumed to criticize Jesus because he walked too fast on the way to the synagogue this Sabbath morning. 예수를 끔찍이 사랑하던 그의 소년 시절 회당 예배 인도자 교사를 포함해서, 그의 옛 친구 대부분은 별세했거나 나사렛을 떠났으며, 젊은 세대들은 강한 질투심으로 그의 명성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 아버지 가족에 대한 그의 초기 헌신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사렛에 살고 있는 그의 동생들과 결혼한 누이들을 방문하는 일에 게을렀다고 신랄하게 흠을 잡았습니다. 예수를 향한 그 가족의 태도도 이 매정한 시민들의 감정이 커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유대 정통파들은 예수가 이 안식일 아침에 회당으로 가는 길에서 너무 빨리 걸었다고 그를 감히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8. The Sabbath Service 안식일 예배

200920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눅4:17-22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17 The scroll of the prophet Isaiah was handed to him. Unrolling it, he found the place where it is written: 18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 19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20 Then he rolled up the scroll, gave it back to the attendant and sat down. The eyes of everyone in the synagogue were fastened on him, 21 and he began by saying to them, “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 22 All spoke well of him and were amazed at the gracious words that came from his lips. “Isn’t this Joseph’s son?” they asked.

150:8.1 (1684.4) This Sabbath was a beautiful day, and all Nazareth, friends and foes, turned out to hear this former citizen of their town discourse in the synagogue. Many of the apostolic retinue had to remain without the synagogue; there was not room for all who had come to hear him. As a young man Jesus had often spoken in this place of worship, and this morning, when the ruler of the synagogue handed him the roll of sacred writings from which to read the Scripture lesson, none present seemed to recall that this was the very manuscript which he had presented to this synagogue. 이 안식일은 화창한 날이었고, 모든 나사렛의 친구들과 대적들이 이 옛 시민의 시내 강연을 들으려고 회당에 모였습니다. 여러 사도 수행원들은 회당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으러 온 모두를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청년 시절 예수께서 이 경배의 자리에서 가끔 설교하셨듯이, 이 아침에 회당장이 그에게 성서 교훈을 읽을 신성한 기록의 두루마리를 건네 주었을 때, 참석자 중 아무도, 이것이 그가 이 회당에 기증했던 바로 그 필사본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126.5.6).

150:8.2 (1684.5) The services on this day were conducted just as when Jesus had attended them as a boy. He ascended the speaking platform with the ruler of the synagogue, and the service was begun by the recital of two prayers: “Blessed is the Lord, King of the world, who forms the light and creates the darkness, who makes peace and creates everything; who, in mercy, gives light to the earth and to those who dwell upon it and in goodness, day by day and every day, renews the works of creation. Blessed is the Lord our God for the glory of his handiworks and for the light-giving lights which he has made for his praise. Selah. Blessed is the Lord our God, who has formed the lights.” 이날의 예배는 예수께서 소년으로 참석했을 때처럼 똑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회당장과 함께 강단에 올랐고, 두 개의 기도문 낭독으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복되신 주는 세상의 왕이시며,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시며, 평화를 만들고 만물을 창조하시도다. 그는 자비로, 땅과 거기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을 주시며, 매일 날마다 선(善)으로 창조의 행사를 새롭게 하시도다. 주 우리 하나님은 복되시니 그 솜씨의 영광과 그를 찬양하도록 그가 만드신 빛을-내는 빛들로 인함이로다. 셀라(멈춰서 묵상하라). 빛들을 만드신 주 우리 하나님은 복되시도다.”

150:8.3 (1685.1) After a moment’s pause they again prayed: “With great love has the Lord our God loved us, and with much overflowing pity has he pitied us, our Father and our King, for the sake of our fathers who trusted in him. You taught them the statutes of life; have mercy upon us and teach us. Enlighten our eyes in the law; cause our hearts to cleave to your commandments; unite our hearts to love and fear your name, and we shall not be put to shame, world without end. For you are a God who prepares salvation, and us have you chosen from among all nations and tongues, and in truth have you brought us near your great name — selah — that we may lovingly praise your unity. Blessed is the Lord, who in love chose his people Israel.” 잠시 후 그들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은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를 신뢰했던 우리 조상으로 인해 우리 아버지와 우리 왕이신 그가 넘치는 긍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도다. 당신은 그들에게 생명의 법도를 가르치셨나이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가르치소서. 율법으로 우리의 눈을 밝히소서. 우리 심정으로 당신의 계명을 붙들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도록 우리 심정을 하나되게 하시면 우리는 끝없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이다. 당신을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이시며, 당신은 만국과 만민 중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가 깊은 애정으로 당신의 유일성을 찬양할 수 있도록 당신은 참으로 우리를 당신의 위대한 이름에 가까이 두셨나이다. 셀라. 사랑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신 주님은 복되시도다.”

150:8.4 (1685.2) The congregation then recited the Shema, the Jewish creed of faith. This ritual consisted in repeating numerous passages from the law and indicated that the worshipers took upon themselves the yoke of the kingdom of heaven, also the yoke of the commandments as applied to the day and the night. 그후 회중은 유대인의 신앙 신조를 낭독했습니다. 이 의식은 율법의 여러 구절들을 반복하는 것이며, 경배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멍에, 또한 낮과 밤에 적용되는 계명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졌다는 표시였습니다.

150:8.5 (1685.3) And then followed the third prayer: “True it is that you are Yahweh, our God and the God of our fathers; our King and the King of our fathers; our Savior and the Savior of our fathers; our Creator and the rock of our salvation; our help and our deliverer. Your name is from everlasting, and there is no God beside you. A new song did they that were delivered sing to your name by the seashore; together did all praise and own you King and say, Yahweh shall reign, world without end. Blessed is the Lord who saves Israel.” 그후 세번째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진실로 당신은 야훼, 우리 하나님이며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우리 왕이며 우리 조상들의 왕, 우리 구주이며 우리 조상들의 구주, 우리 창조자이며 우리 구원의 바위, 우리의 도움과 우리의 구원자이시나이다. 당신의 이름은 영원부터 계시고, 당신 외에 하나님이 없나이다. 구원된 그들이 해변에서 당신의 이름을 새 노래로 노래했나이다. 모두 함께 찬양하고 당신의 다스림을 인정하며 말하기를, 야훼가 끝없이 세상을 다스릴지라.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주는 복되도다.”

150:8.6 (1685.4) The ruler of the synagogue then took his place before the ark, or chest, containing the sacred writings and began the recitation of the nineteen prayer eulogies, or benedictions. But on this occasion it was desirable to shorten the service in order that the distinguished guest might have more time for his discourse; accordingly, only the first and last of the benedictions were recited. The first was: “Blessed is the Lord our God, and the God of our fathers, 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the great, the mighty, and the terrible God, who shows mercy and kindness, who creates all things, who remembers the gracious promises to the fathers and brings a savior to their children’s children for his own name’s sake, in love. O King, helper, savior, and shield! Blessed are you, O Yahweh, the shield of Abraham.” 그후 회당장은 신성한 글들이 들어있는 궤, 상자 앞에 앉아서 19개 기도 찬송, 즉 축도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귀빈이 강연할 시간을 더 갖도록 예배 축소가 더 나아서 축도의 처음과 마지막만 낭독했습니다. 처음은 이러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복되시도다. 크고 강하시며 두려운 하나님,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고, 만물을 창조하시며, 조상들에게 하신 은혜로운 약속들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랑으로 그 자손들의 자손들에게 구주를 보내시도다. 오, 왕, 돕는 이, 구세주, 방패여! 당신, 오, 야훼, 아브라함의 방패가 복되도다.”

150:8.7 (1685.5) Then followed the last benediction: “O bestow on your people Israel great peace forever, for you are King and the Lord of all peace. And it is good in your eyes to bless Israel at all times and at every hour with peace. Blessed are you, Yahweh, who blesses his people Israel with peace.” The congregation looked not at the ruler as he recited the benedictions. Following the benedictions he offered an informal prayer suitable for the occasion, and when this was concluded, all the congregation joined in saying amen. 그후 마지막 축도가 계속되었습니다. “당신은 왕이요 모든 평화의 주님이시니, 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큰 평화를 영원히 베푸소서. 항상 평화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심이 당신 보시기에 선하나이다.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평화로 축복하시는 당신, 야훼는 복되도다.” 회당장이 축도문을 낭독할 때 회중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축도 후 그는 그 경우에 어울리는 약식 기도를 드렸고, 이것이 끝나자, 온 회중이 함께 ‘아멘’을 했습니다.

150:8.8 (1685.6) Then the chazan went over to the ark and brought out a roll, which he presented to Jesus that he might read the Scripture lesson. It was customary to call upon seven persons to read not less than three verses of the law, but this practice was waived on this occasion that the visitor might read the lesson of his own selection. Jesus, taking the roll, stood up and began to read from Deuteronomy: “For this commandment which I give you this day is not hidden from you, neither is it far off. It is not in heaven, that you should say, who shall go up for us to heaven and bring it down to us that we may hear and do it? Neither is it beyond the sea, that you should say, who will go over the sea for us to bring the commandment to us that we may hear and do it? No, the word of life is very near to you, even in your presence and in your heart, that you may know and obey it.” 그후 회당 예배 인도자가 궤로 가서 두루마리를 꺼내 예수께 건네어 그가 성서 교훈을 읽도록 했습니다. 관례로 7명이 율법의 3구절 이상 읽어야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이 관행을 보류하여 방문객이 자신이 선택한 교훈을 읽게 했습니다. 두루마리를 받은 예수님은 일어서서 신명기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주는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어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다 밖에 있어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그렇지 않으니라. 생명의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존재와 네 심정에도 있으니 네가 이를 듣고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150:8.9 (1686.1) And when he had ceased reading from the law, he turned to Isaiah and began to read: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release to the captives and the recovering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at liberty those who are bruised and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그가 율법 읽기를 마치고 이사야를 참조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며, 상한 자들을 해방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사61:1-2).”

150:8.10 (1686.2) Jesus closed the book and, after handing it back to the ruler of the synagogue, sat down and began to discourse to the people. He began by saying: “Today are these Scriptures fulfilled.” And then Jesus spoke for almost fifteen minutes on “The Sons and Daughters of God.” Many of the people were pleased with the discourse, and they marveled at his graciousness and wisdom. 예수께서 책을 덮고 그것을 회당장에게 넘겨주신 후, 앉아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라고 말씀하시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거의 15분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말씀을 기뻐했고 그의 품위와 지혜에 놀랐습니다.

150:8.11 (1686.3) It was customary in the synagogue, after the conclusion of the formal service, for the speaker to remain so that those who might be interested could ask him questions. Accordingly, on this Sabbath morning Jesus stepped down into the crowd which pressed forward to ask questions. In this group were many turbulent individuals whose minds were bent on mischief, while about the fringe of this crowd there circulated those debased men who had been hired to make trouble for Jesus. Many of the disciples and evangelists who had remained without now pressed into the synagogue and were not slow to recognize that trouble was brewing. They sought to lead the Master away, but he would not go with them. 정식 예배가 마친 후, 관심 있는 자들이 그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설교자가 남아 있는 것이 회당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님은 질문하려고 밀어닥치는 군중 속으로 걸어 내려가셨습니다. 이 일행 중에 마음으로 못된 짓에 골몰한 난폭한 개인들이 많이 있는 데다가 이 군중의 주변에는 예수님께 분쟁을 만들려고 고용된 그 타락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밖에 머물던 여러 제자들과 전도자들이 이제 회당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바로 문제가 터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딴 데로 이끌려 했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9. The Nazareth Rejection 나사렛의 배척

200927 은혜의 변화 눅4:23-24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3 Jesus said to them, “Surely you will quote this proverb to me: ‘Physician, heal yourself! Do here in your hometown what we have heard that you did in Capernaum.’ ” 24 “I tell you the truth,” he continued,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hometown.

150:9.1 (1686.4) Jesus found himself surrounded in the synagogue by a great throng of his enemies and a sprinkling of his own followers, and in reply to their rude questions and sinister banterings he half humorously remarked: “Yes, I am Joseph’s son; I am the carpenter, and I am not surprised that you remind me of the proverb, ‘Physician heal yourself,’ and that you challenge me to do in Nazareth what you have heard I did at Capernaum; but I call you to witness that even the Scriptures declare that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save in his own country and among his own people.’” 예수께서는 자신이 수많은 대적으로 에워싸여 있고 자신의 추종자들은 소수임을 알았으며, 그들의 무례한 질문과 못된 조롱에 대답하여 그는 다소 익살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요셉의 아들이라. 내가 목수이니라. 너희가 내게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며, 너희가 들은 대로, 내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나사렛에서 행하라는 너희의 요구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러나 나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사람들을 제외하고 존경받지 못함이 없다.’라는 성서의 선언도 너희가 증언하기를 요청하노라(눅4:23-24).”

150:9.2 (1686.5) But they jostled him and, pointing accusing fingers at him, said: “You think you are better than the people of Nazareth; you moved away from us, but your brother is a common workman, and your sisters still live among us. We know your mother, Mary. Where are they today? We hear big things about you, but we notice that you do no wonders when you come back.” Jesus answered them: “I love the people who dwell in the city where I grew up, and I would rejoice to see you 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the doing of the works of God is not for me to determine. The transformations of grace are wrought in response to the living faith of those who are the beneficiaries.” 그러나 그들은 그를 난폭하게 떠밀었고, 손가락으로 비난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나사렛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여기고 있느니라. 당신은 우리를 떠났지만, 당신의 형제는 평범한 노동자이고 당신의 누이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노라. 우리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아노라. 그들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당신에 대해 큰 소문을 듣지만, 당신이 돌아와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고 있음을 우리가 아노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너희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은혜의 변화는 은혜를 받는 자들의 살아 있는 신앙에 응답하여 일어나느니라.”

150:9.3 (1686.6) Jesus would have good-naturedly managed the crowd and effectively disarmed even his violent enemies had it not been for the tactical blunder of one of his own apostles, Simon Zelotes, who, with the help of Nahor, one of the younger evangelists, had meanwhile gathered together a group of Jesus’ friends from among the crowd and, assuming a belligerent attitude, had served notice on the enemies of the Master to go hence. Jesus had long taught the apostles that a soft answer turns away wrath, but his followers were not accustomed to seeing their beloved teacher, whom they so willingly called Master, treated with such discourtesy and disdain. It was too much for them, and they found themselves giving expression to passionate and vehement resentment, all of which only tended to arouse the mob spirit in this ungodly and uncouth assembly. And so, under the leadership of hirelings, these ruffians laid hold upon Jesus and rushed him out of the synagogue to the brow of a near-by precipitous hill, where they were minded to shove him over the edge to his death below. But just as they were about to push him over the edge of the cliff, Jesus turned suddenly upon his captors and, facing them, quietly folded his arms. He said nothing, but his friends were more than astonished when, as he started to walk forward, the mob parted and permitted him to pass on unmolested. 예수님의 사도 중 하나, 시몬 젤로테가 젊은 전도자 중 하나, 나호르의 도움을 받아, 그 사이에 군중에서 예수님의 친구 일행을 모아서, 호전적인 태도로, 주님의 대적들에게 여기에서 떠나라고 경고했던, 임시변통의 큰 실수가 없었다면 그는 온화하게 군중들을 다루고 효과적으로 그의 폭력적인 대적들까지 진정시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잠15:1a)고 내내 가르쳤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기꺼이 주님이라 불렀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생님을 그런 무례와 경멸로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 지나쳐서, 그들은 격렬하게 맹렬히 분개를 드러냈는데, 이 모든 것은 이 신앙 없는 난폭한 집회자들 안에 있는 폭도의 정신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고용된 자들의 지휘 아래, 이 폭력배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회당 밖, 근처 가파른 언덕의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고, 거기에서 그들은 그가 밑에서 죽도록 그를 가장자리로 떠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낭떠러지 끝에서 그를 막 밀치려했을 때, 예수께서 갑자기 자신을 잡고 있는 자들을 향해 그들을 마주보며 조용히 팔을 접으셨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폭도들은 갈라졌고 평온히 그가 지나가도록 허락하자, 예수의 친구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150:9.4 (1687.1) Jesus, followed by his disciples, proceeded to their encampment, where all this was recounted. And they made ready that evening to go back to Capernaum early the next day, as Jesus had directed. This turbulent ending of the third public preaching tour had a sobering effect upon all of Jesus’ followers. They were beginning to realize the meaning of some of the Master’s teachings; they were awaking to the fact that the kingdom would come only through much sorrow and bitter disappointment. 예수님은 뒤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야영지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모든 이것이 차례대로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다음날 일찍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도록, 그날 저녁에 준비했습니다. 셋째 대중 전도 여행이 이렇게 소란스럽게 마치게 되어 모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해졌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 중 일부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많은 슬픔과 쓰라린 실망을 통해서만 온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150:9.5 (1687.2) They left Nazareth this Sunday morning, and traveling by different routes, they all finally assembled at Bethsaida by noon on Thursday, March 10. They came together as a sober and serious group of disillusioned preachers of the gospel of truth and not as an enthusiastic and all-conquering band of triumphant crusaders. 그들은 이 일요일 아침에 나사렛을 떠났고, 다른 경로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모두 3월 10일 목요일 정오에 마침내 벳새다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모두를 정복하는 승리의 십자군단이 아니라,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진지하고 엄숙한 진리 복음의 전도자들 일행으로서 함께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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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1 Tarrying and Teaching by the Seaside 바닷가에 머물러 가르침

Paper 151

Tarrying and Teaching by the Seaside 바닷가에 머물러 가르침

1.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비유의 해석
3. More About Parables 비유에 대한 추가 정보
4. More Parables by the Sea 해변의 더 많은 비유들
5. The Visit to Kheresa 케레사를 방문하다
The storm on the lake 호수의 폭풍우
6. The Kheresa Lunatic 케레사의 미치광이

201004 역경의 사명과 실망의 영적 가치 행14: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they said.

151:0.1 (1688.1) BY MARCH 10 all of the preaching and teaching groups had forgathered at Bethsaida. Thursday night and Friday many of them went out to fish, while on the Sabbath day they attended the synagogue to hear an aged Jew of Damascus discourse on the glory of father Abraham. Jesus spent most of this Sabbath day alone in the hills. That Saturday night the Master talked for more than an hour to the assembled groups on “The mission of adversity and the spiritual value of disappointment.” This was a memorable occasion, and his hearers never forgot the lesson he imparted. 모든 전도 및 양육 일행은 3월 10일까지 벳새다에 모였습니다. 목요일 밤과 금요일에 그들 대부분은 고기 잡으러 나갔고, 한편 안식일에 그들은 회당에 참석하여 다마스쿠스의 연로한 유대인이 조상 아브라함의 영광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부분의 안식일을 홀로 언덕에서 지냈습니다. 그 토요일 밤에 주님은 모인 일행들에게 1시간 이상 “역경의 사명과 실망의 영적 가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상적이었고, 청중은 그가 전해주신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151:0.2 (1688.2) Jesus had not fully recovered from the sorrow of his recent rejection at Nazareth; the apostles were aware of a peculiar sadness mingled with his usual cheerful demeanor. James and John were with him much of the time, Peter being more than occupied with the many responsibilities having to do with the welfare and direction of the new corps of evangelists. This time of waiting before starting for the Passover at Jerusalem, the women spent in visiting from house to house, teaching the gospel, and ministering to the sick in Capernaum and the surrounding cities and villages. 예수님은 최근 나사렛에서 배척당한 슬픔에서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평소 그의 유쾌한 태도에 섞인 특이한 슬픔을 알아차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으며, 베드로는 새 전도단(傳道團)의 번영과 관리에 관련된 여러 책임을 많이 맡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前) 기다리는 이 시간에, 여성들은 집마다 방문하여 복음을 가르치고 가버나움과 주변 도시와 마을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며 보냈습니다.

1.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0101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막4:3-9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3 “Listen! A farmer went out to sow his seed. 4 As he was scattering the seed, some fell along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5 Some fell on rocky places, where it did not have much soil. It sprang up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6 But when the sun came up, the plants were scorched, and they withered because they had no root. 7 Other seed fell among thorns, which grew up and choked the plants, so that they did not bear grain. 8 Still other seed fell on good soil. It came up, grew and produced a crop, multiplying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9 Then Jesus said,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151:1.1 (1688.3) About this time Jesus first began to employ the parable method of teaching the multitudes that so frequently gathered about him. Since Jesus had talked with the apostles and others long into the night, on this Sunday morning very few of the group were up for breakfast; so he went out by the seaside and sat alone in the boat, the old fishing boat of Andrew and Peter, which was always kept at his disposal, and meditated on the next move to be made in the work of extending the kingdom. But the Master was not to be alone for long. Very soon the people from Capernaum and near-by villages began to arrive, and by ten o’clock that morning almost one thousand were assembled on shore near Jesus’ boat and were clamoring for attention. Peter was now up and, making his way to the boat, said to Jesus, “Master, shall I talk to them?” But Jesus answered, “No, Peter, I will tell them a story.” And then Jesus began the recital of the parable of the sower, one of the first of a long series of such parables which he taught the throngs that followed after him. This boat had an elevated seat on which he sat (for it was the custom to sit when teaching) while he talked to the crowd assembled along the shore. After Peter had spoken a few words, Jesus said: 이 무렵 예수님은 자신에게 그토록 자주 모이는 군중들에게 처음으로 비유 교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도들 및 다른 사람들과 밤새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셔서 이 일요일 아침에 일행 중 거의 아무도 아침 식사를 먹으려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변으로 나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남겨둔, 안드레와 베드로의 옛 어선, 작은 배에 홀로 앉아 다음에 진행할 하나님 나라의 확장 업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主)님은 오래 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내 사람들이 가버나움과 인근 마을에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날 아침 10시에 거의 1,000명이 예수님의 배 근처 해변에 모여서 주목을 받으려고 외쳤습니다. 베드로가 이때 일어나 배로 가면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저들에게 말할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베드로야 내가 저들에게 이야기하리라.” 그후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그가 가르쳤던 그런 일련의 긴, 첫 비유 중 하나였습니다. 앉아서 가르치는 것이 관례였기에, 해변을 따라 모인 군중에게 그가 말하는 동안, 그는 이 배의 높여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몇 마디를 한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51:1.2 (1688.4) “A sower went forth to sow, and it came to pass as he sowed that some seed fell by the wayside to be trodden underfoot and devoured by the birds of heaven. Other seed fell upon the rocky places where there was little earth, and immediately it sprang up because there was no depth to the soil, but as soon as the sun shone, it withered because it had no root whereby to secure moisture. Other seed fell among the thorns, and as the thorns grew up, it was choked so that it yielded no grain. Still other seed fell upon good ground and, growing, yielded, some thirtyfold, some sixtyfold, and some a hundredfold.” And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this parable, he said to the multitude,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발 밑에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치웠느니라. 더러는 거의 흙이 없는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않아서 즉시 싹이 났으나, 수분을 머금을 뿌리가 없어서 해가 비추자마자 그것이 시들었느니라.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면서 질식하여 곡물이 없었더라.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서 어떤 것은 30배 정도, 60배 정도, 100배 정도로 결실했더라.” 그리고 그는 이 비유 말씀을 마치면서 군중에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1:1.3 (1689.1) The apostles and those who were with them, when they heard Jesus teach the people in this manner, were greatly perplexed; and after much talking among themselves, that evening in the Zebedee garden Matthew said to Jesus: “Master, what is the meaning of the dark sayings which you present to the multitude? Why do you speak in parables to those who seek the truth?” And Jesus answered: 예수께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들었을 때, 사도들 및 그들과 함께 있던 자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한 후, 저녁에 세베대 정원에서 마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군중들에게 주신 알기어려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진리를 찾는 저들에게 당신은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151:1.4 (1689.2) “In patience have I instructed you all this time. To you it is given to know the mysteries of the kingdom of heaven, but to the undiscerning multitudes and to those who seek our destruction, from now on, the mysteries of the kingdom shall be presented in parables. And this we will do so that those who really desire to enter the kingdom may discern the meaning of the teaching and thus find salvation, while those who listen only to ensnare us may be the more confounded in that they will see without seeing and will hear without hearing. My children, do you not perceive the law of the spirit which decrees that to him who has shall be given so that he shall have an abundance; but from him who has not shall be taken away even that which he has. Therefore will I henceforth speak to the people much in parables to the end that our friends and those who desire to know the truth may find that which they seek, while our enemies and those who love not the truth may hear without understanding. Many of these people follow not in the way of the truth. The prophet did, indeed, describe all such undiscerning souls when he said: ‘For this people’s heart has waxed gross, and their ears are dull of hearing, and their eyes they have closed lest they should discern the truth and understand it in their hearts.’” “인내로 항상 내가 너희를 가르쳤노라.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주어졌지만, 분별없는 군중과 우리의 멸망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의 신비가 비유로 주어질 것이라.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정말로 들어가려는 자들은 가르침의 의미를 분별하고 구원될 수 있는 반면에 단지 우리를 잡으려고 경청하는 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더 혼동하리라. 내 자녀들아, 있는 자는 풍족해지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도록 정해진 영(靈)의 법칙을 너희는 파악하지 못하느냐? 따라서 나는 이후로 사람들에게 끝까지 비유로 많이 말하리니, 우리 친구들과 진리를 알려는 자들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찾는 반면에, 우리 대적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이 사람들 중 다수가 진리를 따르지 않느니라. 진실로 선지자가 그렇게 분별없는 모든 혼(魂)들을 다음 말로 묘사했느니라. ‘이 백성의 심정이 아둔해졌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이 진리를 분별하고 심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자기 눈을 감았느니라(사6:10).’”

151:1.5 (1689.3) The apostles did not fully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the Master’s words. As Andrew and Thomas talked further with Jesus,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withdrew to another portion of the garden where they engaged in earnest and prolonged discussion. 사도들은 주(主)께서 하신 말씀의 중요성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와 도마가 예수님과 더 이야기할 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정원의 다른 쪽으로 물러나 진지하게 오래 토론했습니다.

2.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비유의 해석

201018 비유의 해석 막4:14-20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14 The farmer sows the word. 15 Some people are like seed along the path, where the word is sown. As soon as they hear it, Satan comes and takes away the word that was sown in them. 16 Others, like seed sown on rocky places, hear the word and at once receive it with joy. 17 But since they have no root, they last only a short time. When trouble or persecution comes because of the word, they quickly fall away. 18 Still others, like seed sown among thorns, hear the word; 19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20 Others, like seed sown on good soil,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what was sown.”

151:2.1 (1689.4) Peter and the group about him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parable of the sower was an allegory, that each feature had some hidden meaning, and so they decided to go to Jesus and ask for an explanation. Accordingly, Peter approached the Master, saying: “We are not able to penetrate the meaning of this parable, and we desire that you explain it to us since you say it is given us to know the mysteries of the kingdom.” And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to Peter: “My son, I desire to withhold nothing from you, but first suppose you tell me what you have been talking about; what is your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베드로와 그를 둘러싼 일행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比喩간접 설명)가 우의(寓意빗대어 표현한 풍유)였고 장면마다 어떤 숨은 의미를 지녔다는 결론에 이르러서 그들은 예수께 가서 설명을 요청하기로 정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주님께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는 하나,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주셨다고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얘야), 나는 너에게 남김없이 주고 싶지만, 너희가 무엇을 말했는지 먼저 내게 말하지 않겠느냐? 무엇이 비유에 대한 너희 해석이냐?”

151:2.2 (1689.5) After a moment of silence, Peter said: “Master, we have talked much concerning the parable, and this is the interpretation I have decided upon: The sower is the gospel preacher; the seed is the word of God. The seed which fell by the wayside represents those who do not understand the gospel teaching. The birds which snatched away the seed that fell upon the hardened ground represent Satan, or the evil one, who steals away that which has been sown in the hearts of these ignorant ones. The seed which fell upon the rocky places, and which sprang up so suddenly, represents those superficial and unthinking persons who, when they hear the glad tidings, receive the message with joy; but because the truth has no real root in their deeper understanding, their devotion is short-lived in the face of tribulation and persecution. When trouble comes, these believers stumble; they fall away when tempted. The seed which fell among thorns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word willingly, but who allow the cares of the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to choke the word of truth so that it becomes unfruitful. Now the seed which fell on good ground and sprang up to bear, some thirty, some sixty, and some a hundredfold, represents those who, when they have heard the truth, receive it with varying degrees of appreciation — owing to their differing intellectual endowments — and hence manifest these varying degrees of religious experience.” 잠시 침묵한 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비유에 대해 많이 의논했는데, 이것이 제가 결정한 해석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복음 전도자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복음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굳어진 땅에 떨어진 씨를 낚아챈 새들은, 이 무지(無知미련하고 어리석음)한 자들의 심정에 뿌려진 것을 훔쳐 가는, 사탄이나 악마를 말합니다. 돌밭에 떨어져 그렇게 갑자기 싹튼 씨는, 복음을 들을 때 기쁨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피상적(皮相的겉현상만 관계함)이고 분별(分別)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참 뿌리가 그들의 깊은 이해에 없으므로, 고난과 박해 앞에서 그들의 헌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곤란이 오면 이런 신자들은 넘어집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으면 저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기쁘게 말씀을 들으나 세상 근심과 부(富)의 속임수가 진리의 말씀을 질식하도록 허락하여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제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서 30배 정도, 60배 정도, 100배 정도로 열매를 맺는 씨는, 진리를 들을 때 그들의 다른 지적 자질(資質)로 인해 이해의 정도가 다양하게 그것을 받아들여서 다양한 종교적 체험의 이런 정도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151:2.3 (1690.1) Jesus, after listening to Peter’s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asked the other apostles if they did not also have suggestions to offer. To this invitation only Nathaniel responded. Said he: “Master, while I recognize many good things about Simon Peter’s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I do not fully agree with him. My idea of this parable would be: The seed represents the gospel of the kingdom, while the sower stands for the messengers of the kingdom. The seed which fell by the wayside on hardened ground represents those who have heard but little of the gospel, along with those who are indifferent to the message, and who have hardened their hearts. The birds of the sky that snatched away the seed which fell by the wayside represent one’s habits of life, the temptation of evil, and the desires of the flesh. The seed which fell among the rocks stands for those emotional souls who are quick to receive new teaching and equally quick to give up the truth when confronted with the difficulties and realities of living up to this truth; they lack spiritual perception. The seed which fell among the thorns represents those who are attracted to the truths of the gospel; they are minded to follow its teachings, but they are prevented by the pride of life, jealousy, envy, and the anxieties of human existence. The seed which fell on good soil, springing up to bear, some thirty, some sixty, and some a hundredfold, represents the natural and varying degrees of ability to comprehend truth and respond to its spiritual teachings by men and women who possess diverse endowments of spirit illumination.” 예수께서, 베드로의 비유 해석을 들으신 후, 다른 사도들에게 그들 또한 제안할 것이 없는지 물으셨습니다. 이 권유에 나다니엘만 응답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저는 시몬 베드로의 비유 해석에 대해 여러 좋은 것을 인정하지만, 그에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씨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는 한편 씨 뿌리는 자는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를 나타냅니다. 길가 굳어진 땅에 떨어진 씨는, 메시지에 무관심하고 둔감한 심정을 가진 자들과 함께 복음을 거의 듣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를 낚아챈 공중의 새들은 사람의 생활 습관, 악의 유혹 및 육신의 욕망을 말합니다. 돌투성이에 떨어진 씨는, 새 가르침을 빨리 받아들이나, 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어려움과 실체를 만나면, 똑같이 빨리 진리를 포기하는, 감정적 이런 혼(魂)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영적 지각(知覺깨달음)이 부족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복음의 진리에 끌리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만, 생활의 자랑, 질투, 시기심 및 인간 존재의 걱정들로 방해받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서 30배 정도, 60배 정도, 100배 정도 열매를 맺는 씨는, 영(靈) 조명의 다른 자질을 소유한 남녀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영적 가르침에 응답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다양한 능력의 정도를 말합니다.

151:2.4 (1690.2) When Nathaniel had finished speaking, the apostles and their associates fell into serious discussion and engaged in earnest debate, some contending for the correctness of Peter’s interpretation, while almost an equal number sought to defend Nathaniel’s explanation of the parable. Meanwhile Peter and Nathaniel had withdrawn to the house, where they were involved in a vigorous and determined effort the one to convince and change the mind of the other. 나다니엘이 말씀을 마치자 사도들과 동료들은 진지한 토론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토의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는 베드로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는 반면, 거의 같은 수는 나다니엘의 비유 설명을 지지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집으로 물러갔고 거기서 그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여 바꾸려는 강하고 단호한 노력에 몰두했습니다.

201025 비유의 해석(2) 막4:14-20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14 The farmer sows the word. 15 Some people are like seed along the path, where the word is sown. As soon as they hear it, Satan comes and takes away the word that was sown in them. 16 Others, like seed sown on rocky places, hear the word and at once receive it with joy. 17 But since they have no root, they last only a short time. When trouble or persecution comes because of the word, they quickly fall away. 18 Still others, like seed sown among thorns, hear the word; 19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20 Others, like seed sown on good soil,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what was sown.”

151:2.5 (1690.3) The Master permitted this confusion to pass the point of most intense expression; then he clapped his hands and called them about him. When they had all gathered around him once more, he said, “Before I tell you about this parable, do any of you have aught to say?” Following a moment of silence, Thomas spoke up: “Yes, Master, I wish to say a few words. I remember that you once told us to beware of this very thing. You instructed us that, when using illustrations for our preaching, we should employ true stories, not fables, and that we should select a story best suited to the illustration of the one central and vital truth which we wished to teach the people, and that, having so used the story, we should not attempt to make a spiritual application of all the minor details involved in the telling of the story. I hold that Peter and Nathaniel are both wrong in their attempts to interpret this parable. I admire their ability to do these things, but I am equally sure that all such attempts to make a natural parable yield spiritual analogies in all its features can only result in confusion and serious misconception of the true purpose of such a parable. That I am right is fully proved by the fact that, whereas we were all of one mind an hour ago, now are we divided into two separate groups who hold different opinions concerning this parable and hold such opinions so earnestly as to interfere, in my opinion, with our ability fully to grasp the great truth which you had in mind when you presented this parable to the multitude and subsequently asked us to make comment upon it.” 주님은 이 혼란이 가장 치열하게 표출되는 때까지 허용하셨습니다. 그 후 그는 손뼉을 쳐서 그들을 자기 주위로 불렀습니다. 그들이 모두 자신 주위에 한 번 더 모이자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비유에 대해 너희에게 말하기 전에 너희 중 누구라도 말할 것이 있느냐?” 잠시 침묵한 뒤 도마가 말했습니다. “네, 주여, 제가 몇 마디 하려 합니다. 당신께서 바로 이것을 주의하라고 저희에게 한번 말씀하셨던 것을, 제가 기억합니다. 우리의 전도를 위해 예화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화가 아닌 실제 이야기들을 사용해야 하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하나의 중심적인 핵심 진리에 속한 예화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며, 그 이야기를 사용할 때,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에 포함된 사소한 모든 항목을 영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신께서 저희에게 가르치셨습니다(149.3.1). 저는 베드로와 나다니엘 둘 다 이 비유를 해석하는 그들의 시도가 부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저들의 능력에 감탄하지만, 동시에 자연 비유의 모든 면에서 영적 유사성을 만들려는 그런 모든 시도는 그런 비유의 참된 목적에 혼란과 심각한 오해로 끝날 뿐이라고 확신합니다. 한 시간 전에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었지만, 제 의견에는, 당신께서 군중에게 이 비유를 주시고 후에 저희에게 그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라고 하셨을 때, 당신께서 마음에 두셨던, 위대한 진리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우리 능력으로, 지금은 우리가 분리된 두 집단으로 나뉘어 이 비유에 관해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간섭하려고 그런 견해를 그토록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제가 옳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151:2.6 (1691.1) The words which Thomas spoke had a quieting effect on all of them. He caused them to recall what Jesus had taught them on former occasions, and before Jesus resumed speaking, Andrew arose, saying: “I am persuaded that Thomas is right, and I would like to have him tell us what meaning he attaches to the parable of the sower.” After Jesus had beckoned Thomas to speak, he said: “My brethren, I did not wish to prolong this discussion, but if you so desire, I will say that I think this parable was spoken to teach us one great truth. And that is that our teaching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no matter how faithfully and efficiently we execute our divine commissions, is going to be attended by varying degrees of success; and that all such differences in results are directly due to conditions inherent in the circumstances of our ministry, conditions over which we have little or no control.” 도마가 한 말에 그들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이전에 여러 번 자신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생각나게 했으며,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 전에, 안드레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저는 도마가 옳다고 확신하며, 그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어떤 의미를 두는지 그가 우리에게 말해 주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도마가 말하도록 손짓하신 후, 그가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나는 이 토의를 늘리고 싶지 않았지만, 너희들이 바란다면, 내 생각에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적 임무를 아무리 성실하게 효과적으로 실행해도, 하느님 나라 복음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은 다양한 단계의 좋은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결과의 차이는 바로 우리 사역 상황에 들어있는 조건들, 우리가 거의 또는 전혀 조정할 수 없는 조건 때문입니다.”

151:2.7 (1691.2) When Thomas had finished speaking, the majority of his fellow preachers were about ready to agree with him, even Peter and Nathaniel were on their way over to speak with him, when Jesus arose and said: “Well done, Thomas; you have discerned the true meaning of parables; but both Peter and Nathaniel have done you all equal good in that they have so fully shown the danger of undertaking to make an allegory out of my parables. In your own hearts you may often profitably engage in such flights of the speculative imagination, but you make a mistake when you seek to offer such conclusions as a part of your public teaching.” 도마가 말을 마치자, 그의 동료 전도자 대부분이 바로 그에게 동의하려 했으며, 베드로와 나다니엘도 그에게 말하려는데, 예수께서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잘했구나, 도마야. 너는 비유의 참 의미를 포착했도다. 그러나 베드로와 나다니엘 너희 둘 다, 그들이 내 비유에서 우의(빗대어 표현한 풍유)를 만들려는 위험을 그렇게 충분히 보였다는 점에서 똑같이 잘했도다. 너희 자신의 심정에 가끔 그런 이론적 상상의 비약이 너희에게 이로울 수도 있지만, 너희가 그런 결론을 공적 가르침의 일부로써 제안하려 할 때 너희는 실수하는 것이니라.”

151:2.8 (1691.3) Now that the tension was over, Peter and Nathaniel congratulated each other on their interpretations, and with the exception of the Alpheus twins, each of the apostles ventured to make an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of the sower before they retired for the night. Even Judas Iscariot offered a very plausible interpretation. The twelve would often, among themselves, attempt to figure out the Master’s parables as they would an allegory, but never again did they regard such speculations seriously. This was a very profitable session for the apostles and their associates, especially so since from this time on Jesus more and more employed parables in connection with his public teaching. 이제 긴장이 해소되자,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자신들의 해석에 대해 서로 축하했고,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하고 사도들 각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과감히 해석하려 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아주 그럴듯한 해석을 제안했습니다. 열둘은 가끔 자기들끼리 주님의 비유들을 우의(빗대어 표현한 풍유)로써 해석하려 했으나 두 번 다시 그런 억측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렇게 이때부터 예수께서 자신의 공적 가르침과 관련해서 비유를 더욱더 사용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사도들과 동료들에게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3. More About Parables 비유에 대한 추가 정보

201101 비유 교수법(敎授法) 막4:21-29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21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 22 For whatever is hidden is meant to be disclosed, and whatever is concealed is meant to be brought out into the open. 23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24 “Consider carefully what you hear,” he continue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and even more. 25 Whoever has will be given more; whoever does not have, even what he has will be taken from him.” 26 He also said, “This is what the kingdom of God is like. A man scatters seed on the ground. 27 Night and day, whether he sleeps or gets up, the seed sprouts and grows, though he does not know how. 28 All by itself the soil produces grain–first the stalk, then the head, then the full kernel in the head. 29 As soon as the grain is ripe, he puts the sickle to it,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151:3.1 (1691.4) The apostles were parable-minded, so much so that the whole of the next evening was devoted to the further discussion of parables. Jesus introduced the evening’s conference by saying: “My beloved, you must always make a difference in teaching so as to suit your presentation of truth to the minds and hearts before you. When you stand before a multitude of varying intellects and temperaments, you cannot speak different words for each class of hearers, but you can tell a story to convey your teaching; and each group, even each individual, will be able to make his own interpretation of your parable in accordance with his own intellectual and spiritual endowments. You are to let your light shine but do so with wisdom and discretion. No man, when he lights a lamp, covers it up with a vessel or puts it under the bed; he puts his lamp on a stand where all can behold the light. Let me tell you that nothing is hid in the kingdom of heaven which shall not be made manifest; neither are there any secrets which shall not ultimately be made known. Eventually, all these things shall come to light. Think not only of the multitudes and how they hear the truth; take heed also to yourselves how you hear. Remember that I have many times told you: To him who has shall be given more, while from him who has not shall be taken away even that which he thinks he has.” 사도들은 비유에 빠져서 아주 그렇게 다음 날 저녁(3/14월) 내내 비유에 대한 추가적 토론에 몰두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녁 회의를 소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진리를 제시하며 가르칠 때 너희 앞에 있는 마음과 심정에 어울리도록 언제나 차이를 두어야 하느니라. 너희가 다양한 지성과 기질의 군중 앞에 섰을 때, 너희는 청중의 각 부류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없지만, 이야기로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각 집단과 각 개인도 자신의 지적이며 영적 자질에 따라 너희 비유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너희는 너희 빛을 비추되 지혜와 분별로 그렇게 하라. 아무도 횃불을 밝히면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지 않느니라. 그는 횃불을 세워서 모두 빛을 보게 하느니라. 내가 이르노니, 하늘나라에는 드러나지 않을, 숨겨진 것이 없느니라. 결국 알려지지 않을 어떤 비밀들도 없느니라. 결국 이 모든 것이 알려지리라. 단지 군중들과 그들이 어떻게 진리를 듣는지 생각하지 말고, 너희 자신들이 어떻게 듣는지도 주의하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라.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며, 없는 자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51:3.2 (1692.1) The continued discussion of parables and further instruction as to their interpretation may be summarized and expressed in modern phraseology as follows: 계속된 비유 토론과 그들의 해석에 관해 추가된 가르침을 현대 문체로 요약하고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51:3.3 (1692.2) 1. Jesus advised against the use of either fables or allegories in teaching the truths of the gospel. He did recommend the free use of parables, especially nature parables. He emphasized the value of utilizing the analogy existing between the natural and the spiritual worlds as a means of teaching truth. He frequently alluded to the natural as “the unreal and fleeting shadow of spirit realities.” 예수님은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면서 우화(寓話)나 우의(寓意풍유:빗댄 풍자)를 사용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는 비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되 특히 자연 비유를 추천하셨습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써 자연과 영적 세계 사이에 있는 유사성의 활용 가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자연을 “영(靈) 실체들의 실재하지 않고 덧없는 그림자”로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151:3.4 (1692.3) 2. Jesus narrated three or four parables from the Hebrew scriptures, call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is method of teaching was not wholly new. However, it became almost a new method of teaching as he employed it from this time onward. 예수님은 가르치는 이 방법이 전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불러일으키며 히브리 성서에서 서너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삼하12:1-4, 사5:1-6, 암7:8, 왕하14:9 등). 그러나 이후 그가 비유를 사용하신 대로 그것은 거의 새로운 교수법(敎授法가르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151:3.5 (1692.4) 3. In teaching the apostles the value of parables, Jesus called attention to the following points: 사도들에게 비유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다음 사항에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151:3.6 (1692.5) The parable provides for a simultaneous appeal to vastly different levels of mind and spirit. The parable stimulates the imagination, challenges the discrimination, and provokes critical thinking; it promotes sympathy without arousing antagonism. 비유는 굉장히 다른 수준의 마음과 영(靈)에 동시에 호소합니다.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분별력에 도전하며, 비평(批評가치를 논함)적 사고를 일으킵니다. 비유는 반감을 일으키지 않고 공감을 증진합니다.

151:3.7 (1692.6) The parable proceeds from the things which are known to the discernment of the unknown. The parable utilizes the material and natural as a means of introducing the spiritual and the supermaterial. 비유는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인식하게 합니다. 비유는 영적이고 초(超)물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써 물질적이며 자연적인 것을 활용합니다.

151:3.8 (1692.7) Parables favor the making of impartial moral decisions. The parable evades much prejudice and puts new truth gracefully into the mind and does all this with the arousal of a minimum of the self-defense of personal resentment. 비유는 편견 없이 도덕적으로 결정하게 합니다. 비유는 많은 선입관을 피하고, 새 진리를 기품 있게 마음에 두며, 개인적 원한에 의한 자기 방어를 최소화하면서 이 모두를 이룹니다.

151:3.9 (1692.8) To reject the truth contained in parabolical analogy requires conscious intellectual action which is directly in contempt of one’s honest judgment and fair decision. The parable conduces to the forcing of thought through the sense of hearing. 비유의 유사성에 포함된 진리를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정직한 판단과 공정한 결정을 직접 무시하는, 의식적인 지적 행동이 요구됩니다. 비유는 청각을 통해 강제로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151:3.10 (1692.9) The use of the parable form of teaching enables the teacher to present new and even startling truths while at the same time he largely avoids all controversy and outward clashing with tradition and established authority. 가르침의 비유 형태 사용으로 교사는 놀라운 새 진리들까지도 제시하는 동시에 모든 논쟁과 전통 및 확립된 권위와 외적 충돌을 대부분 피하게 합니다.

151:3.11 (1693.1) The parable also possesses the advantage of stimulating the memory of the truth taught when the same familiar scenes are subsequently encountered. 비유는 또한, 나중에 똑같이 익숙한 장면을 만나면, 배운 진리가 기억이 나도록 자극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151:3.12 (1693.2) In this way Jesus sought to acquaint his followers with many of the reasons underlying his practice of increasingly using parables in his public teaching. 이 방식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공적 가르침에서 더욱 비유를 사용하는 자기 관행 아래에 놓인, 여러 이유를 자기 추종자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151:3.13 (1693.3) Toward the close of the evening’s lesson Jesus made his first comment on the parable of the sower. He said the parable referred to two things: First, it was a review of his own ministry up to that time and a forecast of what lay ahead of him for the remainder of his life on earth. And second, it was also a hint as to what the apostles and other messengers of the kingdom might expect in their ministry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s time passed. 저녁 수업을 마칠 때,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먼저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는 그 비유가 2가지를 언급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그것은 그때까지 자기 사역의 평가와 지상에서 남은 생애 앞에 놓인 전망이었습니다. 둘째,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 나라의 사도들과 다른 메신저들이 대대로 사역하면서 기대할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습니다.

151:3.14 (1693.4) Jesus also resorted to the use of parables as the best possible refutation of the studied effort of the religious leaders at Jerusalem to teach that all of his work was done by the assistance of demons and the prince of devils. The appeal to nature was in contravention of such teaching since the people of that day looked upon all natural phenomena as the product of the direct act of spiritual beings and supernatural forces. He also determined upon this method of teaching because it enabled him to proclaim vital truths to those who desired to know the better way while at the same time affording his enemies less opportunity to find cause for offense and for accusations against him. 예수님은 또한, 자신의 모든 사역이 귀신들의 지원과 악령들의 왕자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고의적 노력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논박으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든 자연 현상을 영적 존재와 초자연적 기세들의 직접적 행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호소는 그런 가르침을 위반(違反)했습니다. 그는 이 교수법으로, 더 나은 길을 알려고 하는 자들에게 생생한 진리들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의 대적들이 자신에 대한 공격과 고발의 원인을 찾을 기회를 줄이게 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이 교수법을 결정했습니다.

151:3.15 (1693.5) Before he dismissed the group for the night, Jesus said: “Now will I tell you the last of the parable of the sower. I would test you to know how you will receive this: The kingdom of heaven is also like a man who cast good seed upon the earth; and while he slept by night and went about his business by day, the seed sprang up and grew, and although he knew not how it came about, the plant came to fruit. First there was the blade, then the ear, then the full grain in the ear. And then when the grain was ripe, he put forth the sickle, and the harvest was finished. He who has an ear to hear, let him hear.” 그날 밤 그가 일행을 해산시키기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씨 뿌리는 자 비유의 마지막을 말하리라. 나는 너희가 이것을 받아들일 방법을 알도록 시험하려 하노라. 하늘나라는 또한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으니라. 그가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동안, 씨가 나서 자랐으며, 그는 어떻게 그것이 생겼는지 몰랐지만, 그 식물은 열매를 맺었느니라. 처음에 잎이 났고, 다음은 이삭이, 그 후 이삭에 충실한 알곡이었더라. 그런 다음 알곡이 무르익자, 그가 낫으로 잘라서, 추수가 끝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151:3.16 (1693.6) Many times did the apostles turn this saying over in their minds, but the Master never made further mention of this addition to the parable of the sower. 여러 번 사도들은 이 말씀을 마음으로 숙고했지만,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이런 추가 사항에 결코 그 이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4. More Parables by the Sea 해변의 더 많은 비유들

201108 해변의 더 많은 비유들 마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24 Jesus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an who sowed good seed in his field. 25 But while everyone was sleeping, his enemy came and sowed weeds among the wheat, and went away. 26 When the wheat sprouted and formed heads, then the weeds also appeared. 27 “The owner’s servants came to him and said, ‘Sir, didn’t you sow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then did the weeds come from?’ 28 ” ‘An enemy did this,’ he replied. “The servants asked him, ‘Do you want us to go and pull them up?’ 29 ” ‘No,’ he answered, ‘because while you are pulling the weeds, you may root up the wheat with them. 30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 “

151:4.1 (1693.7) The next day Jesus again taught the people from the boat,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an who sowed good seed in his field; but while he slept, his enemy came and sowed weeds among the wheat and hastened away. And so when the young blades sprang up and later were about to bring forth fruit, there appeared also the weeds. Then the servants of this householder came and said to him: ‘Sir, did you not sow good seed in your field? Whence then come these weeds?’ And he replied to his servants, ‘An enemy has done this.’ The servants then asked their master, ‘Would you have us go out and pluck up these weeds?’ But he answered them and said: ‘No, lest while you are gathering them up, you uproot the wheat also. Rather let them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time of the harvest, when I will say to the reapers, Gather up first the weeds and bind them in bundles to burn and then gather up the wheat to be stored in my barn.’” 다음 날(3/15화) 예수는 다시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가 자는 동안 그의 대적이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급히 떠났느니라. 그래서 어린 잎이 돋아나 후에 열매를 맺을 즈음에, 잡초도 보였더라. 그러자 이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했느니라. ‘주여, 당신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이 잡초들이 생겼습니까?’ 그러자 그가 자기 종들에게 ‘대적이 이렇게 했구나.’라고 대답했느니라. 그때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 ‘우리가 나가서 이 잡초들을 뽑아낼까요?’라고 여쭈었느니라.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대답했느니라. ‘아니라, 너희가 잡초들을 그러모으다가 밀까지 뿌리째 뽑을까 염려하노라. 차라리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두라, 내가 거두는 자들에게 말할 때, 먼저 잡초들을 그러모아 다발로 묶어 불사른 후, 밀을 그러모아 내 곳간에 저장하라(마13:24-30).’”

151:4.2 (1693.8) After the people had asked a few questions, Jesus spoke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sowed in his field. Now a mustard seed is the least of seeds, but when it is full grown, it becomes the greatest of all herbs and is like a tree so that the birds of heaven are able to come and rest in the branches thereof.” 사람들이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라. 지금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지만, 다 자라면, 모든 풀 중에서 가장 크게 되고, 나무와 같이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서 쉴 수 있느니라(마13:31-32).”

151:4.3 (1694.1) “The kingdom of heaven is also like leaven which a woman took and hid in three measures of meal, and in this way it came about that all of the meal was leavened.” “하늘나라는 또한 여성이 세 그릇의 가루 속에 갖다 넣은 효모와 같으니, 이렇게 모든 가루가 발효되었느니라(마13:33).”

151:4.4 (1694.2) “The kingdom of heaven is also like a treasure hidden in a field, which a man discovered. In his joy he went forth to sell all he had that he might have the money to buy the field.” “하늘나라는 또한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 한 사람이 그것을 알았더라. 그가 기뻐하며 밭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러 나갔느니라(마13:44).”

151:4.5 (1694.3) “The kingdom of heaven is also like a merchant seeking goodly pearls; and having found one pearl of great price, he went out and sold everything he possessed that he might be able to buy the extraordinary pearl.” “하늘나라는 또한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으니라. 아주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자, 나가서, 그 특별한 진주를 살 수 있도록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나가서 팔았느니라(마13:45-46).”

151:4.6 (1694.4) “Again,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sweep net which was cast into the sea, and it gathered up every kind of fish. Now, when the net was filled, the fishermen drew it up on the beach, where they sat down and sorted out the fish, gathering the good into vessels while the bad they threw away.” “또 한편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진 후릿그물과 같으니, 온갖 생선을 거두어 들였느니라. 그래서, 그물이 가득했을 때, 어부들이 그것을 해변에 끌어올렸고, 앉아서 생선을 가려냈으니, 좋은 것은 그릇에 모으는 동시에 나쁜 것은 내버렸더라(마13:47-48).

151:4.7 (1694.5) Many other parables spoke Jesus to the multitudes. In fact, from this time forward he seldom taught the masses except by this means. After speaking to a public audience in parables, he would, during the evening classes, more fully and explicitly expound his teachings to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예수께서 여러 다른 비유를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시간 이후로 그는 이 방법 외에는 일반 대중들을 좀처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청중에게 말씀한 후, 그는 저녁 수업 중에 사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더 완전히, 명백하게 소상(昭詳)히 설명하셨습니다(막4:33-34).

5. The Visit to Kheresa 케레사를 방문하다.

201115 신앙과 두려움 막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35 That day when evening came,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36 Leaving the crowd behind, they took him along, just as he was, in the boat. There were also other boats with him. 37 A furious squall came up, and the waves broke over the boat, so that it was nearly swamped. 38 Jesus was in the stern, sleeping on a cushion. The disciples woke him and said to him, “Teacher, don’t you care if we drown?” 39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40 He said to his disciples, “Why are you so afraid? Do you still have no faith?” 41 They were terrified and asked each other, “Who is this? Even the wind and the waves obey him!”

151:5.1 (1694.6) The multitude continued to increase throughout the week. On Sabbath Jesus hastened away to the hills, but when Sunday morning came, the crowds returned. Jesus spoke to them in the early afternoon after the preaching of Peter, and when he had finished, he said to his apostles: “I am weary of the throngs; let us cross over to the other side that we may rest for a day.” 그 주간 내내 계속 군중이 늘었습니다. 안식일(3/19 토)에 예수께서 언덕으로 급히 가셨지만, 일요일(3/20) 아침이 오자, 군중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후 예수께서 이른 오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며, 말씀을 마치자 그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군중들로 지쳤으니, 하루 쉬도록 저쪽으로 건너가자.”

151:5.2 (1694.7) On the way across the lake they encountered one of those violent and sudden windstorms which are characteristic of the Sea of Galilee, especially at this season of the year. This body of water is almost seven hundred feet below the level of the sea and is surrounded by high banks, especially on the west. There are steep gorges leading up from the lake into the hills, and as the heated air rises in a pocket over the lake during the day, there is a tendency after sunset for the cooling air of the gorges to rush down upon the lake. These gales come on quickly and sometimes go away just as suddenly. 호수를 건너다가 그들은 별안간 격렬한 폭풍 하나를 만났는데, 그런 폭풍은 특히 해마다 이 계절에 갈릴리 바다의 특성입니다. 이 수역은 해면 아래로 거의 700피트(213미터)이고, 높은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서쪽이 그러합니다. 호수에서 언덕으로 가파른 골짜기가 이어지며, 낮에는 호수 위쪽의 가득한 공기가 가열되어 올라가고, 해가 지면 골짜기의 찬 공기가 아래 호수 수면으로 쇄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강풍은 급히 오고 종종 갑자기 사라집니다.

151:5.3 (1694.8) It was just such an evening gale that caught the boat carrying Jesus over to the other side on this Sunday evening. Three other boats containing some of the younger evangelists were trailing after. This tempest was severe, notwithstanding that it was confined to this region of the lake, there being no evidence of a storm on the western shore. The wind was so strong that the waves began to wash over the boat. The high wind had torn the sail away before the apostles could furl it, and they were now entirely dependent on their oars as they laboriously pulled for the shore, a little more than a mile and a half distant. 이 일요일 저녁에 예수를 태우고 저편으로 건너는 배가 바로 그런 저녁 강풍에 부딪혔습니다. 일부의 젊은 전도자들을 태운 3척의 다른 배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서쪽 해변에는 폭풍의 징후가 없었고, 호수의 이 지역에 폭풍이 국한되었지만, 이 폭풍우는 맹렬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파도가 배 위로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돛을 걷기 전에 강풍이 그것을 떼어내서, 그들은 1.5마일(2.4km) 조금 넘게 떨어진 해변으로 고생하여 노를 저으면서, 이제 그들은 완전히 노만 의지했습니다.

151:5.4 (1694.9) Meanwhile Jesus lay asleep in the stern of the boat under a small overhead shelter. The Master was weary when they left Bethsaida, and it was to secure rest that he had directed them to sail him across to the other side. These ex-fishermen were strong and experienced oarsmen, but this was one of the worst gales they had ever encountered. Although the wind and the waves tossed their boat about as though it were a toy ship, Jesus slumbered on undisturbed. Peter was at the right-hand oar near the stern. When the boat began to fill with water, he dropped his oar and, rushing over to Jesus, shook him vigorously in order to awaken him, and when he was aroused, Peter said: “Master, don’t you know we are in a violent storm? If you do not save us, we will all perish.” 그동안 예수님은 배의 선미(船尾고물)에서 머리를 보호하는 작은 차양 밑에 누워 자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벳새다를 떠났을 때 주님은 피곤으로 지쳐 있어서, 휴식하려고 그들이 자신을 배에 태워 저편으로 건너도록 지시했습니다. 예전의 굳센 이 어부들은 노 젓기에 노련했지만, 일찍이 그들이 부닥친 최악의 강풍 중 하나였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장난감 배처럼 그들의 배를 흔들었지만, 예수님은 방해받지 않고 주무셨습니다. 베드로는 선미 근처에서 우측 노를 저었습니다. 배가 물로 차기 시작하자, 그는 노를 내려놓고 예수께 달려들어 깨우려고 힘차게 흔들었고 예수께서 깨어나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맹렬한 폭풍 속에 있는 줄 모르십니까? 당신께서 우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151:5.5 (1695.1) As Jesus came out in the rain, he looked first at Peter, and then peering into the darkness at the struggling oarsmen, he turned his glance back upon Simon Peter, who, in his agitation, had not yet returned to his oar, and said: “Why are all of you so filled with fear? Where is your faith? Peace, be quiet.” Jesus had hardly uttered this rebuke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he had hardly bidden Peter seek peace wherewith to quiet his troubled soul, when the disturbed atmosphere, having established its equilibrium, settled down into a great calm. The angry waves almost immediately subsided, while the dark clouds, having spent themselves in a short shower, vanished, and the stars of heaven shone overhead. All this was purely coincidental as far as we can judge; but the apostles, particularly Simon Peter, never ceased to regard the episode as a nature miracle. It was especially easy for the men of that day to believe in nature miracles inasmuch as they firmly believed that all nature was a phenomenon directly under the control of spirit forces and supernatural beings. 예수께서 빗속으로 나오셨을 때, 그는 먼저 베드로를 보시고, 다음에 고투하며 노 젓는 자들을 어둠을 뚫고 자세히 보시며, 흥분해서 아직 자기 노로 돌아가지 않았던 시몬 베드로를 돌이켜 한번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너희 모두 그렇게 두려움에 차 있느냐? 너희 신앙이 어디에 있느냐? 조용히, 진정하라.” 예수께서 이렇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나무라며, 베드로의 불안한 혼을 진정시키면서 평온을 찾으라고 명령하자마자, 동요했던 분위기가 평온해지면서 고요해졌습니다. 성난 파도가 거의 즉시 가라앉았고, 게다가 짧은 소나기로 고갈된 검은 구름은 사라졌으며, 하늘의 별들이 높이 반짝였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한 이 모두는 아주 우연의 일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특히 시몬 베드로는 자연 기적의 사건으로 여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자연은 바로 영(靈) 기세들과 초(超)자연적 존재들의 조정을 받는 현상이라고 사람들이 굳게 믿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특히 쉽게 자연 기적들을 믿었습니다.

151:5.6 (1695.2) Jesus plainly explained to the twelve that he had spoken to their troubled spirits and had addressed himself to their fear-tossed minds, that he had not commanded the elements to obey his word, but it was of no avail. The Master’s followers always persisted in placing their own interpretation on all such coincidental occurrences. From this day on they insisted on regarding the Master as having absolute power over the natural elements. Peter never grew weary of reciting how “even the winds and the waves obey him.” 예수께서 분명하게 12사도에게, 자신은 사도들의 불안한 영들에게 말했고, 두려움으로-흔들리는 그들의 마음들에 말한 것이지, 자신의 말에 순종하도록 폭풍우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셨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런 모든 우연의 일치에 의한 사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내놓으려고 항상 집착했습니다. 이날부터 그들은 주님이 자연환경을 다스리는 절대적 권세가 있다고 여기며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도 지치지 않고 “바람과 파도까지 어떻게 그에게 복종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151:5.7 (1695.3) It was late in the evening when Jesus and his associates reached the shore, and since it was a calm and beautiful night, they all rested in the boats, not going ashore until shortly after sunrise the next morning. When they were gathered together, about forty in all, Jesus said: “Let us go up into yonder hills and tarry for a few days while we ponder over the problems of the Father’s kingdom.” 예수님과 동료들이 해안에 이른 것은 늦은 저녁(3/20 일요일)이었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었기에, 잠시 후 다음 날(3/21월) 아침 해가 뜨기까지 해변에 오르지 않고, 그들 모두 배에서 쉬었습니다. 약 40명이 모두 함께 모이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나라의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저쪽 언덕에 올라 며칠간 머무르자.”

6. The Kheresa Lunatic 케레사의 미치광이

201122 지성(知性) 변화의 복음 막 5: 1-20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1 They went across the lake to the region of the Gerasenes. 2 When Jesus got out of the boat, a man with an evil spirit came from the tombs to meet him. 3 This man lived in the tombs, and no one could bind him any more, not even with a chain. 4 For he had often been chained hand and foot, but he tore the chains apart and broke the irons on his feet. No one was strong enough to subdue him. 5 Night and day among the tombs and in the hills he would cry out and cut himself with stones. 6 When he saw Jesus from a distance, he ran and fell on his knees in front of him. 7 He shouted at the top of his voice, “What do you want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Swear to God that you won’t torture me!” 8 For Jesus had said to him, “Come out of this man, you evil spirit!” 9 Then Jesus asked him, “What is your name?” “My name is Legion,” he replied, “for we are many.” 10 And he begged Jesus again and again not to send them out of the area. 11 A large herd of pigs was feeding on the nearby hillside. 12 The demons begged Jesus, “Send us among the pigs; allow us to go into them.” 13 He gave them permission, and the evil spirits came out and went into the pigs. The herd, about two thousand in number, rushed down the steep bank into the lake and were drowned. 14 Those tending the pigs ran off and reported this in the town and countryside, and the people went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15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saw the man who had been possessed by the legion of demons, sitting there, dressed and in his right mind; and they were afraid. 16 Those who had seen it told the people what had happened to the demon-possessed man–and told about the pigs as well. 17 Then the people began to plead with Jesus to leave their region. 18 As Jesus was getting into the boat, the man who had been demon-possessed begged to go with him. 19 Jesus did not let him, but said, “Go home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how much the Lord has done for you, and how he has had mercy on you.” 20 So the man went away and began to tell in the Decapolishow much Jesus had done for him. And all the people were amazed.

151:6.1 (1695.4) Although most of the near-by eastern shore of the lake sloped up gently to the highlands beyond, at this particular spot there was a steep hillside, the shore in some places dropping sheer down into the lake. Pointing up to the side of the near-by hill, Jesus said: “Let us go up on this hillside for our breakfast and under some of the shelters rest and talk.” 호수 인근 동쪽의 해안 대부분은 고지 저쪽까지 경사가 완만히 올라갔지만, 이쪽 특정한 장소에는 가파른 언덕의 비탈, 호수로 깎아지르며 내려가는 어떤 장소의 해안이 있었습니다. 인근 언덕의 비탈을 향해 위로 가리키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이 언덕비탈로 올라가, 피할 곳에서 쉬면서 이야기하자.”

151:6.2 (1695.5) This entire hillside was covered with caverns which had been hewn out of the rock. Many of these niches were ancient sepulchres. About halfway up the hillside on a small, relatively level spot was the cemetery of the little village of Kheresa. As Jesus and his associates passed near this burial ground, a lunatic who lived in these hillside caverns rushed up to them. This demented man was well known about these parts, having onetime been bound with fetters and chains and confined in one of the grottoes. Long since he had broken his shackles and now roamed at will among the tombs and abandoned sepulchres. 이 언덕비탈 전체는 바위를 깎아 만들어진 동굴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이런 대부분의 벽감(壁龕움푹 들어간 벽면)들은 옛 무덤들이었습니다. 언덕비탈 위쪽 중간쯤, 작고 비교적 평평한 장소에 작은 마을 케레사의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동료들이 이 묘지 근처를 지나갔을 때, 이런 언덕비탈 동굴에 살던 미치광이가 그들에게 돌진했습니다. 이 미친 사람은, 한때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석굴(石窟)에 감금되어서, 이 근방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오래전 그가 쇠고랑을 부쉈고 이제 무덤과 버려진 벽 무덤 사이를 마음대로 돌아다녔습니다.

151:6.3 (1696.1) This man, whose name was Amos, was afflicted with a periodic form of insanity. There were considerable spells when he would find some clothing and deport himself fairly well among his fellows. During one of these lucid intervals he had gone over to Bethsaida, where he heard the preaching of Jesus and the apostles, and at that time had become a halfhearted believer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soon a stormy phase of his trouble appeared, and he fled to the tombs, where he moaned, cried out aloud, and so conducted himself as to terrorize all who chanced to meet him. 이 사람의 이름은 아모스로, 주기적 형태의 정신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가 얼마간 옷을 찾아 입고 자기 동료 중에서 아주 잘 처신하곤 했던 때가 여러 차례였습니다. 제정신의 이런 기간 중 한번, 그가 벳새다로 건너가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고, 그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내키지 않은 채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격렬한 단계의 병이 일어나 무덤으로 피했는데, 거기서 그는 신음하며 크게 비명을 질렀고, 우연히 그를 만났던 모든 자들이 무서워하도록 했습니다.

151:6.4 (1696.2) When Amos recognized Jesus, he fell down at his feet and exclaimed: “I know you, Jesus, but I am possessed of many devils, and I beseech that you will not torment me.” This man truly believed that his periodic mental affliction was due to the fact that, at such times, evil or unclean spirits entered into him and dominated his mind and body. His troubles were mostly emotional — his brain was not grossly diseased. 아모스가 예수님을 알아봤을 때, 그는 발 앞에 굽히며 외쳤습니다. “저는 당신, 예수님을 알지만, 저는 많은 귀신이 들렸으니, 당신이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 사람은, 자신의 주기적인 정신병이, 당시 악한 악령들이 자신에게 들어와 자신의 마음과 몸을 지배하는 사실 때문이라고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대부분 감정에 기인했습니다. 그의 뇌는 심하게 병들지 않았습니다.

151:6.5 (1696.3) Jesus, looking down upon the man crouching like an animal at his feet, reached down and, taking him by the hand, stood him up and said to him: “Amos, you are not possessed of a devil; you have already heard the good news that you are a son of God. I command you to come out of this spell.” And when Amos heard Jesus speak these words, there occurred such a transformation in his intellect that he was immediately restored to his right mind and the normal control of his emotions. By this time a considerable crowd had assembled from the near-by village, and these people, augmented by the swine herders from the highland above them, were astonished to see the lunatic sitting with Jesus and his followers, in possession of his right mind and freely conversing with them. 예수님은 자기 발 앞에 동물처럼 웅크린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모스야, 너는 귀신 들리지 않았느니라. 너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이미 들었느니라.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이 발작에서 벗어나라.” 아모스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지성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 그는 즉시 건강한 마음으로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당수의 군중이 근처 마을로부터 모였고, 고지의 돼지 목축업자들이 와서 수가 늘어난, 이 사람들은, 예수님 및 추종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미치광이가 건강한 마음으로 그들과 자유로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51:6.6 (1696.4) As the swine herders rushed into the village to spread the news of the taming of the lunatic, the dogs charged upon a small and untended herd of about thirty swine and drove most of them over a precipice into the sea. And it was this incidental occurrence, in connection with the presence of Jesus and the supposed miraculous curing of the lunatic, that gave origin to the legend that Jesus had cured Amos by casting a legion of devils out of him, and that these devils had entered into the herd of swine, causing them forthwith to rush headlong to their destruction in the sea below. Before the day was over, this episode was published abroad by the swine tenders, and the whole village believed it. Amos most certainly believed this story; he saw the swine tumbling over the brow of the hill shortly after his troubled mind had quieted down, and he always believed that they carried with them the very evil spirits which had so long tormented and afflicted him. And this had a good deal to do with the permanency of his cure. It is equally true that all of Jesus’ apostles (save Thomas) believed that the episode of the swine wa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cure of Amos. 돼지 목축업자들이 미치광이가 유순해진 소식을 전하려고 마을로 급히 달려가자, 개들이, 돌보는 사람이 없는 작은 돼지, 약 30마리를 공격해서 대부분을 절벽 너머 바다로 몰았습니다. 이 우발적 사건이, 예수님의 존재와 미치광이의 기적적 치유 소문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서 아모스를 치유했고, 이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즉시 거꾸로 돌진하여 아래에 있는 바다에 빠져 죽게 했다는, 전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날이 저물기 전에, 돼지를 돌보는 자들이 이 사건을 널리 퍼뜨렸고, 온 마을이 그것을 믿었습니다. 아모스가 가장 확실히 이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평정을 되찾은 직후에 돼지 떼가 언덕의 벼랑가 너머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학대하던 바로 그 악령들을 돼지 떼가 데려갔다고 언제나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속적 치유와 상당히 관계가 있었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예수의 사도들 모두, 돼지 떼 일화(逸話)가 아모스의 치유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고 믿었던 것은 똑같이 사실입니다.

151:6.7 (1696.5) Jesus did not obtain the rest he was looking for. Most of that day he was thronged by those who came in response to the word that Amos had been cured, and who were attracted by the story that the demons had gone out of the lunatic into the herd of swine. And so, after only one night of rest, early Tuesday morning Jesus and his friends were awakened by a delegation of these swine-raising gentiles who had come to urge that he depart from their midst. Said their spokesman to Peter and Andrew: “Fishermen of Galilee, depart from us and take your prophet with you. We know he is a holy man, but the gods of our country do not know him, and we stand in danger of losing many swine. The fear of you has descended upon us, so that we pray you to go hence.” And when Jesus heard them, he said to Andrew, “Let us return to our place.” 예수님은 찾고 있던 휴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날(3/21 월요일) 대부분 예수님은, 아모스가 치유되었다는 말에 반응하고, 귀신들이 미치광이로부터 떠나가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이끌린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룻밤만 쉬고 난 뒤, 화요일(3/2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자신들로부터 떠나도록 재촉하러 왔던 이 돼지를 기르는 이방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을 깨웠습니다. 그들의 대변인이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여, 우리를 떠나시고 당신들과 당신들의 선지자를 데려가십시오. 우리는 그가 성자(聖者)인 줄 알지만, 우리 고향의 신들은 그를 모르며, 우리는 많은 돼지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당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닥쳤으니 우리는 당신들이 여기에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안드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지역으로 돌아가자.”

151:6.8 (1697.1) As they were about to depart, Amos besought Jesus to permit him to go back with them, but the Master would not consent. Said Jesus to Amos: “Forget not that you are a son of God. Return to your own people and show them what great things God has done for you.” And Amos went about publishing that Jesus had cast a legion of devils out of his troubled soul, and that these evil spirits had entered into a herd of swine, driving them to quick destruction. And he did not stop until he had gone into all the cities of the Decapolis, declaring what great things Jesus had done for him. 그들이 떠나려 하자, 아모스가 그들과 함께 돌아가기를 요청했지만, 주께서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아모스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 자신의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너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보이라.” 아모스는 예수께서 고통받았던 자기 혼에서 군대 귀신들을 쫓아냈고 이 악령들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바로 몰살되었다고 퍼뜨리며 다녔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그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드러내면서, 모든 데카폴리스의 도시로 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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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2 Events Leading up to the Capernaum Crisis 가버나움 위기로 이끈 사건들

Paper 152

Events Leading up to the Capernaum Crisis 가버나움 위기로 이끈 사건들

Veronica of Caesarea-Philippi 케사리아-필립피의 베로니카
1. At Jairus’s House 야이러스의 집에서
2. Feeding the Five Thousand 5,000명을 먹이다
3. The King-Making Episode 왕-추대 일화(逸話)
4. Simon Peter’s Night Vision 시몬 베드로의 밤 환상
5. Back in Bethsaida 벳새다로 돌아옴
6. At Gennesaret 게네사렛에서
More about the parable of the sower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추가
7.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201129 순수한 살아있는 신앙 막5:21-34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21 When Jesus had again crossed over by boat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a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while he was by the lake. 22 Then one of the synagogue rulers, named Jairus, came there. Seeing Jesus, he fell at his feet 23 and pleaded earnestly with him, “My little daughter is dying. Please come and put your hands on her so that she will be healed and live.” 24 So Jesus went with him. A large crowd followed and pressed around him. 25 And a woman was there who had been subject to bleeding for twelve years. 26 She had suffered a great deal under the care of many doctors and had spent all she had, yet instead of getting better she grew worse. 27 When she heard about Jesus, she came up behind him in the crowd and touched his cloak, 28 because she thought, “If I just touch his clothes, I will be healed.” 29 Immediately her bleeding stopped and she felt in her body that she was freed from her suffering. 30 At once Jesus realized that power had gone out from him. He turned around in the crowd and asked, “Who touched my clothes?” 31 “You see the people crowding against you,” his disciples answered, “and yet you can ask, ‘Who touched me?’ ” 32 But Jesus kept looking around to see who had done it. 33 Then the woman, knowing what had happened to her, came and fell at his feet and, trembling with fear, told him the whole truth. 34 He said to her, “Daughter, your faith has healed you. Go in peace and be freed from your suffering.”

152:0.1 (1698.1) THE story of the cure of Amos, the Kheresa lunatic, had already reached Bethsaida and Capernaum, so that a great crowd was waiting for Jesus when his boat landed that Tuesday forenoon. Among this throng were the new observers from the Jerusalem Sanhedrin who had come down to Capernaum to find cause for the Master’s apprehension and conviction. As Jesus spoke with those who had assembled to greet him, Jairus, one of the rulers of the synagogue, made his way through the crowd and, falling down at his feet, took him by the hand and besought that he would hasten away with him, saying: “Master, my little daughter, an only child, lies in my home at the point of death. I pray that you will come and heal her.” When Jesus heard the request of this father, he said: “I will go with you.” 케레사의 미치광이 아모스의 치유 이야기가 이미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펴져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기다리던 중 그의 배가 화요일(3/22)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이 무리 중에 예루살렘 산헤드린에서 가버나움에 내려와서 주님의 체포와 유죄 판결의 구실을 찾으려는 새 감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에게 인사하려고 모였던 자들과 담화했을 때, 회당장 중 한 사람, 야이러스가 군중을 헤쳐나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손으로 잡고 자신과 함께 서둘러 가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여, 저의 작은 외동딸이 집에 누워있는데 죽기 직전입니다. 당신께서 오셔서 딸을 치유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이 아버지의 요청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152:0.2 (1698.2) As Jesus went along with Jairus, the large crowd which had heard the father’s request followed on to see what would happen. Shortly before they reached the ruler’s house, as they hastened through a narrow street and as the throng jostled him, Jesus suddenly stopped, exclaiming, “Someone touched me.” And when those who were near him denied that they had touched him, Peter spoke up: “Master, you can see that this crowd presses you, threatening to crush us, and yet you say ‘someone has touched me.’ What do you mean?” Then Jesus said: “I asked who touched me, for I perceived that living energy had gone forth from me.” As Jesus looked about him, his eyes fell upon a near-by woman, who, coming forward, knelt at his feet and said: “For years I have been afflicted with a scourging hemorrhage. I have suffered many things from many physicians; I have spent all my substance, but none could cure me. Then I heard of you, and I thought if I may but touch the hem of his garment, I shall certainly be made whole. And so I pressed forward with the crowd as it moved along until, standing near you, Master, I touched the border of your garment, and I was made whole; I know that I have been healed of my affliction.” 예수께서 야이러스와 동행하시자, 그 아버지의 요청을 들었던 많은 군중이 일어날 일을 보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기 직전, 좁은 길로 서두르는데, 군중이 그를 떠밀자, 예수께서 갑자기 멈추어 외쳤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구나.”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이 그를 만지지 않았다고 부인하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이 군중들이 당신을 밀고, 우리를 밀어붙이는 것을 보시면서 여전히 ‘누가 나를 만졌다.’고 하시니,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서 생명의 에너지가 나간 것을 내가 감지했기 때문에, 누가 나를 만졌는지 물었노라.” 예수께 주위를 보시다가, 근처 여인에게 시선을 두자, 그녀가 앞으로 나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여러 해, 저는 불행한 출혈을 앓고 있었습니다. 저는 많은 의사에게서 여러 고생을 했고, 제 모든 재산을 썼지만 아무도 저를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당신의 소문을 들었고, 내가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는 확실히 건강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근처에 설 때까지 군중과 함께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아가, 당신 옷 가를 만졌고, 제가 건강해졌습니다. 저는 제 고통이 치료된 것을 압니다.”

152:0.3 (1698.3) When Jesus heard this, he took the woman by the hand and, lifting her up, said: “Daughter,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go in peace.” It was her faith and not her touch that made her whole. And this case is a good illustration of many apparently miraculous cures which attended upon Jesus’ earth career, but which he in no sense consciously willed. The passing of time demonstrated that this woman was really cured of her malady. Her faith was of the sort that laid direct hold upon the creative power resident in the Master’s person. With the faith she had, it was only necessary to approach the Master’s person. It was not at all necessary to touch his garment; that was merely the superstitious part of her belief. Jesus called this woman, Veronica of Caesarea-Philippi, into his presence to correct two errors which might have lingered in her mind, or which might have persisted in the minds of those who witnessed this healing: He did not want Veronica to go away thinking that her fear in attempting to steal her cure had been honored, or that her superstition in associating the touch of his garment with her healing had been effective. He desired all to know that it was her pure and living faith that had wrought the cure.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그 여성을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딸아, 너의 신앙이 너를 건강하게 했으니, 평안히 가라.” 그녀의 만짐이 아니라 그녀의 신앙으로 그녀는 건강해졌습니다. 이 경우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동반된, 명백한 여러 기적 치유의 좋은 실례(實例)이지만, 결코 그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성의 질병이 정말로 치유된 것은, 시간이 지나자 드러났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주님의 고유 존재에 내재한 창조적 권능을 직접 붙들었던 종류였습니다. 그녀가 가진 그 신앙으로, 주님의 고유 존재에 접근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옷을 만질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 믿음의 미신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거나 이 치유를 목격한 자들의 마음이 집착할 수 있는, 잘못된 2가지 생각을 바로잡으려고 이 여성, 가이사랴-빌립보의 베로니카를 자신 앞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치료를 몰래 얻으려는 두려움이 승낙되었다거나, 그녀의 치유와 함께 자신의 옷을 만진 것과 관련된 그녀의 미신이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으로 베로니카가 떠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치료하게 된 것은 그녀의 순수한 살아있는 신앙이었음을 그는 모두 알기를 원했습니다.

1. At Jairus’s House 야이러스의 집에서

201206 강한, 살아있는 신앙 막5: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35 While Jesus was still speaking, some men came from the house of Jairus, the synagogue ruler. “Your daughter is dead,” they said. “Why bother the teacher any more?” 36 Ignoring what they said, Jesus told the synagogue ruler, “Don’t be afraid; just believe.” 37 He did not let anyone follow him except Peter, James and John the brother of James. 38 When they came to the home of the synagogue ruler, Jesus saw a commotion, with people crying and wailing loudly. 39 He went in and said to them, “Why all this commotion and wailing? The child is not dead but asleep.” 40 But they laughed at him. After he put them all out, he took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and the disciples who were with him, and went in where the child was. 41 He took her by the hand and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means, “Little girl, I say to you, get up!” ). 42 Immediately the girl stood up and walked around (she was twelve years old). At this they were completely astonished. 43 He gave strict orders not to let anyone know about this, and told them to give her something to eat.

152:1.1 (1699.1) Jairus was, of course, terribly impatient of this delay in reaching his home; so they now hastened on at quickened pace. Even before they entered the ruler’s yard, one of his servants came out, saying: “Trouble not the Master; your daughter is dead.” But Jesus seemed not to heed the servant’s words, for, taking with him Peter, James, and John, he turned and said to the grief-stricken father: “Fear not; only believe.” When he entered the house, he found the flute-players already there with the mourners, who were making an unseemly tumult; already were the relatives engaged in weeping and wailing. And when he had put all the mourners out of the room, he went in with the father and mother and his three apostles. He had told the mourners that the damsel was not dead, but they laughed him to scorn. Jesus now turned to the mother, saying: “Your daughter is not dead; she is only asleep.” And when the house had quieted down, Jesus, going up to where the child lay, took her by the hand and said, “Daughter, I say to you, awake and arise!” And when the girl heard these words, she immediately rose up and walked across the room. And presently, after she had recovered from her daze, Jesus directed that they should give her something to eat, for she had been a long time without food. 야이러스는 자기 집에 가기가 이렇게 지체되어 당연히 참기에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빠른 걸음으로 서둘렀습니다. 그들이 회당장의 뜰에 미처 들어가기 전에, 그의 하인 한 사람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주님께 폐를 끼치지 마십시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인의 말에 개의(介意)치 않으시는 듯했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비탄에 잠긴 아버지에게 돌이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는 이미 거기에서 어울리지 않게 소란스러운 문상객들과 함께 피리를 부는 자들을 발견하셨습니다. 친척들은 이미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가 문상객들을 방 밖으로 모두 내보내시자, 그는 부모와 세 사도와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문상객들에게 소녀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제 어머니를 돌아보시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은 죽지 않았으며, 단지 자고 있느니라.” 집이 진정되자, 예수께서 아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가셔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딸아,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깨어 일어나라!” 소녀가 이 말씀을 듣자, 그녀는 즉시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걸었습니다. 그녀가 멍한 상태에서 회복된 후, 그녀가 오랫동안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바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그녀에게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152:1.2 (1699.2) Since there was much agitation in Capernaum against Jesus, he called the family together and explained that the maiden had been in a state of coma following a long fever, and that he had merely aroused her, that he had not raised her from the dead. He likewise explained all this to his apostles, but it was futile; they all believed he had raised the little girl from the dead. What Jesus said in explanation of many of these apparent miracles had little effect on his followers. They were miracle-minded and lost no opportunity to ascribe another wonder to Jesus. Jesus and the apostles returned to Bethsaida after he had specifically charged all of them that they should tell no man. 가버나움에는 예수님에 대한 반대 운동이 많아서, 그는 가족을 불러 모아 소녀가 오랜 열병 이후 혼수상태에 있었고, 자신은 그녀를 깨웠을 뿐이지 그녀를 죽음에서 되살리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똑같이 이 모두를 그의 사도들에게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께서 어린 소녀를 죽음에서 되살렸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표면상 여러 기적을 설명하여 말했지만, 추종자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바랐고 또 다른 이적(異蹟)을 예수님 탓으로 삼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그들 모두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신 후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벳새다로 돌아왔습니다.

152:1.3 (1699.3) When he came out of Jairus’s house, two blind men led by a dumb boy followed him and cried out for healing. About this time Jesus’ reputation as a healer was at its very height. Everywhere he went the sick and the afflicted were waiting for him. The Master now looked much worn, and all of his friends were becoming concerned lest he continue his work of teaching and healing to the point of actual collapse. 그가 야이러스의 집에서 나왔을 때, 두 시각장애인이 언어장애 소년에게 이끌려 그를 따라와 고쳐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무렵 치유자로서 예수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가 어디에 가든지 환자와 병에 시달리는 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너무 지쳐 보였고, 그가 실제로 쓰러질 때까지 가르치고 치유하는 사역을 계속하지나 않을까 모든 그의 친구들은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152:1.4 (1699.4) Jesus’ apostles, let alone the common people, could not understand the nature and attributes of this God-man. Neither has any subsequent generation been able to evaluate what took place on earth in the person of Jesus of Nazareth. And there can never occur an opportunity for either science or religion to check up on these remarkable events for the simple reason that such an extraordinary situation can never again occur, either on this world or on any other world in Nebadon. Never again, on any world in this entire universe, will a being appear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t the same time embodying all the attributes of creative energy combined with spiritual endowments which transcend time and most other material limitations.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의 사도들도 이 하느님-사람의 본성과 속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후세대도 지상에서 고유자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상황이 이 세상이나 네바돈의 다른 세계 어디에서도 결코 다시 발생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과학이나 종교가 이 놀라운 사건들을 살펴보는 기회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우주 전체의 어떤 세계에도, 필사자 육신의 모습과 동시에 시간 및 대부분의 다른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는 영적 재질을 겸해서 모든 창조적 에너지 속성을 체현하는 존재는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152:1.5 (1700.1) Never before Jesus was on earth, nor since, has it been possible so directly and graphically to secure the results attendant upon the strong and living faith of mortal men and women. To repeat these phenomena, we would have to go into the immediate presence of Michael, the Creator, and find him as he was in those days — the Son of Man. Likewise, today, while his absence prevents such material manifestations, you should refrain from placing any sort of limitation on the possible exhibition of his spiritual power. Though the Master is absent as a material being, he is present as a spiritual influence in the hearts of men. By going away from the world, Jesus made it possible for his spirit to live alongside that of his Father which indwells the minds of all mankind.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기 전이나 그 이후도, 그렇게 똑바로 생생하게 필사 남녀들의 강한, 살아있는 신앙에 따르는 결과를 결코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현상을 반복하려면, 우리는 미가엘, 창조자의 존재 바로 앞에 가서 당시에 인자(人子)로 계셨던 그를 발견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그가 계시지 않아서 그를 물질적으로 볼 수 없어도, 너희는 그의 영적 권능이 나타나는 가능성에 어떤 종류의 제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물질 존재로 계시지 않지만, 그는 사람들의 심정에 영적 영향으로서 계십니다. 세상을 떠나셔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마음에 내주하는 자기 아버지의 영(靈)과 함께 자신의 영(靈)이 살게 하셨습니다.

2. Feeding the Five Thousand 5,000명을 먹이다

201213 첫 번째, 유일한 자연 기적 막6:32-44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32 So they went away by themselves in a boat to a solitary place. 33 But many who saw them leaving recognized them and ran on foot from all the towns and got there ahead of them. 34 When Jesus landed and saw a large crowd,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So he began teaching them many things. 35 By this time it was late in the day, so his disciples came to him. “This is a remote place,” they said, “and it’s already very late. 36 Send the people away so they can go to the surrounding countryside and villages and buy themselves something to eat.” 37 But he answered,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ey said to him, “That would take eight months of a man’s wages! Are we to go and spend that much on bread and give it to them to eat?” 38 “How many loaves do you have?” he asked. “Go and see.” When they found out, they said, “Five—and two fish.” 39 Then Jesus directed them to have all the people sit down in groups on the green grass. 40 So they sat down in groups of hundreds and fifties. 4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gave thanks and broke the loaves. Then he gave them to his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He also divided the two fish among them all. 42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43 and the disciples picked up twelve basketfuls of broken pieces of bread and fish. 44 The number of the men who had eaten was five thousand.

152:2.1 (1700.2) Jesus continued to teach the people by day while he instructed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at night. On Friday he declared a furlough of one week that all his followers might go home or to their friends for a few days before preparing to go up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But more than one half of his disciples refused to leave him, and the multitude was daily increasing in size, so much so that David Zebedee desired to establish a new encampment, but Jesus refused consent. The Master had so little rest over the Sabbath that on Sunday morning, March 27, he sought to get away from the people. Some of the evangelists were left to talk to the multitude while Jesus and the twelve planned to escape, unnoticed, to the opposite shore of the lake, where they proposed to obtain much needed rest in a beautiful park south of Bethsaida-Julias. This region was a favorite resorting place for Capernaum folks; they were all familiar with these parks on the eastern shore. 예수님은 낮에 사람들을 계속 가르쳤지만, 밤에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교육하셨습니다. 그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前), 모든 추종자가 며칠간 집이나 친구들에게 가도록 한 주간의 휴가를 금요일(3/25)에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절반이 넘는 제자들이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군중들은 매일 규모가 늘어나고 있어서 다윗 세베데가 새 야영지를 세우려 했지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안식일(3/26 토)에 종일 쉬지 못해서 3월 27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푹 쉬려고 했습니다. 몇몇 전도자가 남아서 군중과 말하는 동안, 예수님과 12 사도는, 벳새다-율리아스의 남쪽 아름다운 공원에서 아주 필요한 휴식을 얻기 위해 그들이 제안했던 건너편 호숫가로 눈에 띄지 않게 벗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였습니다. 그들은 동쪽 해안에 있는 이 공원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2:2.2 (1700.3) But the people would not have it so. They saw the direction taken by Jesus’ boat, and hiring every craft available, they started out in pursuit. Those who could not obtain boats fared forth on foot to walk around the upper end of the lake.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배가 가는 방향을 봤고, 가능한 모든 배를 빌려서 그들은 뒤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얻지 못한 자들은 호수 위쪽 끝을 돌아서 걸어갔습니다.

152:2.3 (1700.4) By late afternoon more than a thousand persons had located the Master in one of the parks, and he spoke to them briefly, being followed by Peter. Many of these people had brought food with them, and after eating the evening meal, they gathered about in small groups while Jesus’ apostles and disciples taught them. 늦은 오후(3/27 일요일)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공원에 계신 주님을 찾아내서, 그는 그들에게 잠시 말씀하셨고 베드로가 뒤를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 사람들은 음식을 가져왔는데, 저녁 식사 후에,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들은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152:2.4 (1700.5) Monday afternoon the multitude had increased to more than three thousand. And still — way into the evening — the people continued to flock in, bringing all manner of sick folks with them. Hundreds of interested persons had made their plans to stop over at Capernaum to see and hear Jesus on their way to the Passover, and they simply refused to be disappointed. By Wednesday noon about five thousand men, women, and children were assembled here in this park to the south of Bethsaida-Julias. The weather was pleasant, it being near the end of the rainy season in this locality. 월요일(3/28) 오후에 군중은 삼 천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녁이 되어도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아픈 사람들을 데리고, 계속 모여들었습니다. 관심 있는 수백 명의 사람이 유월절 잔치에 가는 도중에 가버나움에 들러 예수님을 보고 듣고자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쉽게 실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요일(3/30) 정오까지 남녀와 아이들 거의 5,000명이 여기 벳새다-율리아스 남쪽의 이 공원에 모였습니다. 이 지역은 우기(雨期)의 끝이 다가와, 날씨는 쾌적했습니다.

152:2.5 (1700.6) Philip had provided a three days’ supply of food for Jesus and the twelve, which was in the custody of the Mark lad, their boy of all chores. By afternoon of this, the third day for almost half of this multitude, the food the people had brought with them was nearly exhausted. David Zebedee had no tented city here to feed and accommodate the crowds. Neither had Philip made food provision for such a multitude. But the people, even though they were hungry, would not go away. It was being quietly whispered about that Jesus, desiring to avoid trouble with both Herod and the Jerusalem leaders, had chosen this quiet spot outside the jurisdiction of all his enemies as the proper place to be crowned king. The enthusiasm of the people was rising every hour. Not a word was said to Jesus, though, of course, he knew all that was going on. Even the twelve apostles were still tainted with such notions, and especially the younger evangelists. The apostles who favored this attempt to proclaim Jesus king were Peter, John, Simon Zelotes, and Judas Iscariot. Those opposing the plan were Andrew, James, Nathaniel, and Thomas. Matthew, Philip, and the Alpheus twins were noncommittal. The ringleader of this plot to make him king was Joab, one of the young evangelists. 빌립은 예수와 12 사도를 위해 3일분의 양식을 마련했고, 잡일꾼 소년 마가가 그것을 맡았습니다. 3일째 되는 이날(3/30 수) 오후 이 군중의 거의 절반의 사람들은 가져왔던 음식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다윗 세베데는 여기에서 무리를 먹이고 수용할 천막 도시가 없었습니다. 빌립도 그런 군중을 위한 식량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가 고팠지만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헤롯과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분쟁을 피하려고, 왕으로 앉을 적당한 장소로써 그의 모든 대적들의 관할권 밖에 있는 조용한 장소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은밀히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이 매시간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 한 마디도 없었지만, 물론 예수님은 일어나고 있었던 모두를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12 사도들과 특히 젊은 전도자들도 여전히 그런 생각으로 물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려는 이 시도를 지지했던 사도들은 베드로, 요한, 시몬 젤로테스와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 계획을 반대하는 자들은 안드레, 야고보, 나다니엘과 도마였습니다. 마태, 빌립과 알패오 쌍둥이는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왕으로 만들려는 이 계획의 주모자는 젊은 전도자 중 하나, 요압이었습니다.

152:2.6 (1701.1) This was the stage setting about five o’clock on Wednesday afternoon, when Jesus asked James Alpheus to summon Andrew and Philip. Said Jesus: “What shall we do with the multitude? They have been with us now three days, and many of them are hungry. They have no food.” Philip and Andrew exchanged glances, and then Philip answered: “Master, you should send these people away so that they may go to the villages around about and buy themselves food.” And Andrew, fearing the materialization of the king plot, quickly joined with Philip, saying: “Yes, Master, I think it best that you dismiss the multitude so that they may go their way and buy food while you secure rest for a season.” By this time others of the twelve had joined the conference. Then said Jesus: “But I do not desire to send them away hungry; can you not feed them?” This was too much for Philip, and he spoke right up: “Master, in this country place where can we buy bread for this multitude? Two hundred denarii worth would not be enough for lunch.” 예수께서 야고보 알패오에게 안드레와 빌립을 부르라고 요청했던 이때가 수요일 오후 5시경의 준비 상태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군중을 어떻게 할까? 그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3일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허기(虛飢)졌고, 음식이 없구나.” 빌립과 안드레가 서로 눈짓을 한 후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이 사람들이 인근 마을에 가서 음식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보내야 합니다.” 구체적인 왕 계획을 걱정하는 안드레가 재빨리 빌립과 함께하여 말했습니다. “예, 주여, 당신께서 잠시 쉬는 동안, 그들이 가서 음식을 사도록 당신께서 군중을 해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때 12명 중 다른 사도들이 그 논의에 합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굶주린 그들을 보내고 싶지 않구나. 너희가 그들을 먹일 수 없느냐?” 이것은 빌립에게 너무 벅찼고, 그래서 그가 바로 말했습니다. “주여, 이런 시골 어디에서 우리가 이 군중을 위해 빵을 살 수 있겠습니까? 200 데나리(일당 노임) 값도 점심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152:2.7 (1701.2) Before the apostles had an opportunity to express themselves, Jesus turned to Andrew and Philip, saying: “I do not want to send these people away. Here they a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I would like to feed them. What food have we with us?” While Philip was conversing with Matthew and Judas, Andrew sought out the Mark lad to ascertain how much was left of their store of provisions. He returned to Jesus, saying: “The lad has left only five barley loaves and two dried fishes” — and Peter promptly added, “We have yet to eat this evening.” 사도들이 각자 의견을 말하기 전에, 예수께서 안드레와 빌립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구나. 여기에서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도다. 내가 그들을 먹이고 싶구나. 우리에게 어떤 음식이 있느냐?” 빌립이 마태, 유다와 대화하는 동안, 안드레는 소년 마가를 찾아 비축한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습니다. 그가 예수께 돌아와 말했습니다. “소년에게 보리 빵 5개와 말린 생선 2마리만 남았습니다.” – 그러자 베드로가 재빠르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곧 오늘 저녁에 먹어야 합니다.”

152:2.8 (1701.3) For a moment Jesus stood in silence. There was a faraway look in his eyes. The apostles said nothing. Jesus turned suddenly to Andrew and said, “Bring me the loaves and fishes.” And when Andrew had brought the basket to Jesus, the Master said: “Direct the people to sit down on the grass in companies of one hundred and appoint a leader over each group while you bring all of the evangelists here with us.” 잠시 예수께서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눈이 꿈꾸는 듯했습니다. 사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갑자기 안드레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에게 그 빵과 생선을 가져오라.” 안드레가 바구니를 예수께 가져오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모든 전도자를 우리와 함께 여기로 데려오는 동안, 사람들을 100명씩 풀밭에 앉히고 각 그룹에 지도자를 정하도록 지시하라.”

152:2.9 (1701.4) Jesus took up the loaves in his hands, and after he had given thanks, he broke the bread and gave to his apostles, who passed it on to their associates, who in turn carried it to the multitude. Jesus in like manner broke and distributed the fishes. And this multitude did eat and were filled. And when they had finished eating, Jesus said to the disciples: “Gather up the broken pieces that remain over so that nothing will be lost.” And when they had finished gathering up the fragments, they had twelve basketfuls. They who ate of this extraordinary feast numbered about five thousand men, women, and children. 예수께서 손에 빵을 들고, 감사를 하신 후, 빵을 떼어 자기 사도들에게 주셨고, 사도들은 그들의 동료들에게 건넸으며, 그 동료들은 차례로 군중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이 생선도 떼어 나눠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군중들은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식사를 마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도록 남은 조각을 모으라.” 그들이 부스러기를 다 거두자, 그것은 열두 바구니에 가득했습니다. 이 엄청난 잔치에서 먹은 자들의 수(數)는 남녀와 아이들, 약 5,000명이었습니다.

152:2.10 (1702.1) And this is the first and only nature miracle which Jesus performed as a result of his conscious preplanning. It is true that his disciples were disposed to call many things miracles which were not, but this was a genuine supernatural ministration. In this case, so we were taught, Michael multiplied food elements as he always does except for the elimination of the time factor and the visible life channel. 이것은 예수께서 의식적으로 미리 계획해 둔 결과로서 행한 첫 번째 유일한 자연 기적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기적이 아니었던 많은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진짜 초자연적 사역(돌봄)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미가엘이 시간 요소와 눈에 보이는 생명 경로의 제거 외에, 그가 늘 하듯이 음식의 원소를 늘였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3. The King-Making Episode 왕-추대 일화(逸話)

201220 빛의 아버지로 모시라 요6:14-15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4 After the people saw the miraculous sign that Jesus did, they began to say, “Surely this is the Prophet who is to come into the world.” 15 Jesus, knowing that they intended to come and make him king by force, withdrew again to a mountain by himself.

152:3.1 (1702.2)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by supernatural energy was another of those cases where human pity plus creative power equaled that which happened. Now that the multitude had been fed to the full, and since Jesus’ fame was then and there augmented by this stupendous wonder, the project to seize the Master and proclaim him king required no further personal direction. The idea seemed to spread through the crowd like a contagion. The reaction of the multitude to this sudden and spectacular supplying of their physical needs was profound and overwhelming. For a long time the Jews had been taught that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when he should come, would cause the land again to flow with milk and honey, and that the bread of life would be bestowed upon them as manna from heaven was supposed to have fallen upon their forefathers in the wilderness. And was not all of this expectation now fulfilled right before their eyes? When this hungry, undernourished multitude had finished gorging itself with the wonder-food, there was but one unanimous reaction: “Here is our king.” The wonder-working deliverer of Israel had come. In the eyes of these simple-minded people the power to feed carried with it the right to rule. No wonder, then, that the multitude, when it had finished feasting, rose as one man and shouted, “Make him king!” 초자연적 에너지로 5,000명을 먹인 것은, 인간적 공감에 창조적 권능이 더해져서 일어난 또 다른 경우였습니다. 이제 군중이 배부르게 먹었고, 당시 거기에서 예수의 명성이 엄청난 이 이적으로 증대되어, 주님을 붙들어 왕으로 선포하려는 계획에 개인적인 지시가 그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이 군중을 통해 전염병처럼 퍼지는 듯했습니다. 그들 육신의 필요를 이렇게 갑자기 극적으로 공급한 것에 군중은 격심하게 압도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 오면 그 땅을 젖과 꿀로 다시 흐르게 하며, 하늘에서 만나가 광야의 그들 조상에게 떨어졌듯이, 생명의 빵이 그들에게 주어지리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대가 지금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배고파서 영양이 부족한 이 군중이 이적-음식으로 실컷 먹은 후, 만장일치의 한 가지 반응만 있었습니다. “우리 왕이 여기 계시도다.” 이적을-행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오셨습니다. 순진한 이 사람들의 눈에, 먹일 수 있는 권능은 다스릴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그때, 잔치를 마치자 군중이 한 사람처럼 일어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라!”고 외친 것은 당연합니다.

152:3.2 (1702.3) This mighty shout enthused Peter and those of the apostles who still retained the hope of seeing Jesus assert his right to rule. But these false hopes were not to live for long. This mighty shout of the multitude had hardly ceased to reverberate from the near-by rocks when Jesus stepped upon a huge stone and, lifting up his right hand to command their attention, said: “My children, you mean well, but you are shortsighted and material-minded.” There was a brief pause; this stalwart Galilean was there majestically posed in the enchanting glow of that eastern twilight. Every inch he looked a king as he continued to speak to this breathless multitude: “You would make me king, not because your souls have been lighted with a great truth, but because your stomachs have been filled with bread. How many times have I told you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This kingdom of heaven which we proclaim is a spiritual brotherhood, and no man rules over it seated upon a material throne. My Father in heaven is the all-wise and the all-powerful Ruler over this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on earth. Have I so failed in revealing to you the Father of spirits that you would make a king of his Son in the flesh! Now all of you go hence to your own homes. If you must have a king, let the Father of lights be enthroned in the heart of each of you as the spirit Ruler of all things.” 이런 강력한 외침은, 예수께서 자기 통치권 주장을 여전히 보려고 기대했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헛된 기대는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군중의 강력한 이런 외침이 거의 쉼 없이 인근 바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큰 바위에 올라, 자기 오른손을 들어 주의를 집중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녀들아, 너희는 선의를 지니고 있지만, 근시적이며 물질-마음을 지니고 있느니라.” 잠시 멈췄습니다. 건장한 이 갈릴리 사람이 거기에서 동쪽 황혼의 황홀한 노을 속에서 장엄하게 있었습니다. 그가 숨을 죽인 이 군중에게 계속 말할 때, 그는 완전히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너희 혼들이 위대한 진리로 밝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 배가 빵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몇 번이나 너희에게 말했느냐? 우리가 선포하는 이 하늘나라는 영적 형제 사랑 단(團)이며, 아무도 물질적 왕위에 앉아서 다스리지 않느니라. 하늘의 내 아버지는 지상에서 하느님 아들(딸)들이 속한 이 모든 영적 형제 사랑 단(團)의 완전히 현명하고 전능한 통치자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영(靈)들의 아버지 계시에 그토록 실패해서 너희가 육신으로 있는 그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느냐! 이제 너희 모두 여기에서 자기 집으로 가라. 너희가 왕을 가져야 한다면, 빛의 아버지를 만물의 영(靈) 통치자로서 너희 각자의 심정에 왕으로 추대하라.”

152:3.3 (1702.4) These words of Jesus sent the multitude away stunned and disheartened. Many who had believed in him turned back and followed him no more from that day. The apostles were speechless; they stood in silence gathered about the twelve baskets of the fragments of food; only the chore boy, the Mark lad, spoke, “And he refused to be our king.” Jesus, before going off to be alone in the hills, turned to Andrew and said: “Take your brethren back to Zebedee’s house and pray with them, especially for your brother, Simon Peter.” 군중은 예수의 이런 말씀에 너무 놀라 낙담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를 믿었던 많은 이들이 그날부터 돌아섰고 그를 더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음식 부스러기 가득한 12 바구니 주위에 모여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잡일꾼 소년 마가만이 “그가 우리 왕이 되기를 거절하셨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언덕에 있으려고 떠나가기 전에 안드레를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 형제들을 세베데의 집으로 데려가고 그들과 함께, 특히 너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라.”

4. Simon Peter’s Night Vision 시몬 베드로의 밤 환상

201227 시몬 베드로의 밤 환상 막6:45-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45 Immediately Jesus made his disciples get into the boat and go on ahead of him to Bethsaida, while he dismissed the crowd. 46 After leaving them,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to pray. 47 When evening came, the boat was in the middle of the lake, and he was alone on land. 48 He saw the disciples straining at the oars, because the wind was against them. About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he went out to them, walking on the lake. He was about to pass by them, 49 but when they saw him walking on the lake, they thought he was a ghost. They cried out, 50 because they all saw him and were terrified. Immediately he spoke to them and said,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fraid.” 51 Then he climbed into the boat with them, and the wind died down. They were completely amazed, 52 for they had not understood about the loaves; their hearts were hardened.

152:4.1 (1703.1) The apostles, without their Master — sent off by themselves — entered the boat and in silence began to row toward Bethsaida on the western shore of the lake. None of the twelve was so crushed and downcast as Simon Peter. Hardly a word was spoken; they were all thinking of the Master alone in the hills. Had he forsaken them? He had never before sent them all away and refused to go with them. What could all this mean? 주님 없이 자기들만 가게 된 사도들은 배에 올라 호수 서쪽 해안 벳새다를 향해 조용히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열둘 중 누구도 시몬 베드로만큼 그렇게 희망이 꺾여서 풀이 죽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언덕에 홀로 있는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버리셨는가? 그는 이전에 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두가 무슨 의미일까요?

152:4.2 (1703.2) Darkness descended upon them, for there had arisen a strong and contrary wind which made progress almost impossible. As the hours of darkness and hard rowing passed, Peter grew weary and fell into a deep sleep of exhaustion. Andrew and James put him to rest on the cushioned seat in the stern of the boat. While the other apostles toiled against the wind and the waves, Peter dreamed a dream; he saw a vision of Jesus coming to them walking on the sea. When the Master seemed to walk on by the boat, Peter cried out, “Save us, Master, save us.” And those who were in the rear of the boat heard him say some of these words. As this apparition of the night season continued in Peter’s mind, he dreamed that he heard Jesus say: “Be of good cheer; it is I; be not afraid.” This was like the balm of Gilead to Peter’s disturbed soul; it soothed his troubled spirit, so that (in his dream) he cried out to the Master: “Lord, if it really is you, bid me come and walk with you on the water.” And when Peter started to walk upon the water, the boisterous waves frightened him, and as he was about to sink, he cried out, “Lord, save me!” And many of the twelve heard him utter this cry. Then Peter dreamed that Jesus came to the rescue and, stretching forth his hand, took hold and lifted him up, saying: “O, you of little faith, wherefore did you doubt?” 전진이 거의 불가능한 세찬 역풍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둠이 찾아들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노를 젓는 힘겨운 시간이 지나자, 베드로는 지쳐서 기진맥진하여 깊이 잠들었습니다. 안드레와 야고보는 그를 배의 뒷부분, 부드러운 자리에 두어 쉬게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바람과 파도에 맞서 애쓰는 동안, 베드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배 가까이에서 걷는 듯이 보였을 때, 그가 외쳤습니다. “우리를 구하소서,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배의 뒤에 있던 자들은 그가 말하는 몇 마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밤의 이런 환영(幻影)이 베드로의 마음에 계속될 때, 그는 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힘내라. 나다. 두려워 말라.” 이것은 불안한 베드로의 혼(魂)에 길르앗의 향유(香油)와 같았습니다. 그의 어수선한 영(靈)이 진정되자, (그의 꿈속에서) 그는 주님께 외쳤습니다. “주여, 정말 당신이시면, 오라고 제게 명령하여 당신과 함께 물 위를 걷게 하소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했을 때, 사나운 파도에 그가 놀라서 거의 가라앉게 되자, 그가 외쳤습니다. “주여, 저를 구하소서!” 열둘 중 여럿이 그의 이런 외침을 들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구하러 와서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건져 올리며, “아, 신앙이 적은 자여, 네가 왜 의심했느냐?”고 말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152:4.3 (1703.3) In connection with the latter part of his dream Peter arose from the seat whereon he slept and actually stepped overboard and into the water. And he awakened from his dream as Andrew, James, and John reached down and pulled him out of the sea. 베드로는 자신의 후반부 꿈에 연결하여, 자신이 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현실에서 배 밖 물 위로 발을 들어 내려놓았습니다.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아래로 몸을 뻗어 그를 바다에서 건졌을 때 그는 자기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152:4.4 (1703.4) To Peter this experience was always real. He sincerely believed that Jesus came to them that night. He only partially convinced John Mark, which explains why Mark left a portion of the story out of his narrative. Luke, the physician, who made careful search into these matters, concluded that the episode was a vision of Peter’s and therefore refused to give place to this story in the preparation of his narrative. 베드로에게 이 체험은 언제나 진짜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그날 밤 그들에게 오셨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겨우 일부만 요한 마가를 설득했는데, 마가가 자기 이야기(마가복음)에서 왜 그 이야기의 일부만 남겼는지를 설명합니다(막6:45-52). 의사 누가는 이 문제를 신중히 조사했고, 그 일화(逸話)는 베드로의 환상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서, 자기 이야기(누가복음)을 준비하면서 이 이야기를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5. Back in Bethsaida 벳새다로 돌아옴

210103 새로운 복음 선포 준비 요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

152:5.1 (1703.5) Thursday morning, before daylight, they anchored their boat offshore near Zebedee’s house and sought sleep until about noontime. Andrew was first up and, going for a walk by the sea, found Jesus, in company with their chore boy, sitting on a stone by the water’s edge. Notwithstanding that many of the multitude and the young evangelists searched all night and much of the next day about the eastern hills for Jesus, shortly after midnight he and the Mark lad had started to walk around the lake and across the river, back to Bethsaida. 목요일(3/31) 아침, 동트기 전, 그들은 세베대의 집 근처 앞바다에 배를 정박하고 정오 때쯤까지 잠을 잤습니다. 안드레가 먼저 일어나 바닷가에 산책하러 갔다가 잡일꾼 소년과 함께 물가 바위에 앉아계신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여러 군중과 젊은 전도자들이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 날 내내 동쪽 언덕 부근에서 예수님을 찾았지만, 한밤중 직후, 예수님과 소년 마가는 호수를 돌아서 걷기 시작하여, 강을 건너 벳새다로 돌아왔습니다.

152:5.2 (1704.1) Of the five thousand who were miraculously fed, and who, when their stomachs were full and their hearts empty, would have made him king, only about five hundred persisted in following after him. But before these received word that he was back in Bethsaida, Jesus asked Andrew to assemble the twelve apostles and their associates, including the women, saying, “I desire to speak with them.” And when all were ready, Jesus said: 기적적으로 먹고, 배가 부르자, 심정이 공허해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던 5,000명 중 거의 500명만 계속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그가 벳새다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12 사도와 여성들을 포함한 그 동료들을 소집하라고 요청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할 말이 있노라.” 그리고 모두 준비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52:5.3 (1704.2)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Are you all slow of spiritual comprehension and deficient in living faith? All these months have I taught you the truths of the kingdom, and yet are you dominated by material motives instead of spiritual considerations. Have you not even read in the Scriptures where Moses exhorted the unbelieving children of Israel, saying: ‘Fear not, stand still and see the salvation of the Lord’? Said the singer: ‘Put your trust in the Lord.’ ‘Be patient, wait upon the Lord and be of good courage. He shall strengthen your heart.’ ‘Cast your burden on the Lord, and he shall sustain you. Trust him at all times and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your refuge.’ ‘He who dwells in the secret place of the Most High shall abide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It is better to trust the Lord than to put confidence in human princes.’ “내가 얼마나 오래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너희 다 영적 이해력이 더디고 살아있는 신앙이 부족하냐? 이 여러 달 내내 내가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너희에게 가르쳤는데, 너희는 아직도 영적 이유보다 물질적 동기를 앞세우고 있느니라. 너희는, 모세가 믿지 않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권면하여,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라(출14:13)?’고 말한 대목을, 성서에서 읽지도 못했느냐? 시인이 말하기를 ‘주를 신뢰하라(시4:5).’ ‘참고, 주를 기다리며 용기를 내라. 그가 너의 심정을 담대하게 하리라(시27:14).’ ‘네 짐을 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시55:22). 하느님은 너의 피난처이시니, 항상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너의 심정을 쏟아 놓으라(시62:8).’ ‘지고(至高)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그는 전능자의 그늘에 거하리로다(시91:1).’ ‘주를 신뢰함이 인간 고관(高官)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시118:9).’

152:5.4 (1704.3) “And now do you all see that the working of miracles and the performance of material wonders will not win souls for the spiritual kingdom? We fed the multitude, but it did not lead them to hunger for the bread of life neither to thirst for the waters of spiritual righteousness. When their hunger was satisfied, they sought not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rather sought to proclaim the Son of Man king after the manner of the kings of this world, only that they might continue to eat bread without having to toil therefor. And all this, in which many of you did more or less participate, does nothing to reveal the heavenly Father or to advance his kingdom on earth. Have we not sufficient enemies among the religious leaders of the land without doing that which is likely to estrange also the civil rulers? I pray that the Father will anoint your eyes that you may see and open your ears that you may hear, to the end that you may have full faith in the gospel which I have taught you.” “그리고 기적의 작용과 물질적 이적 실행으로, 영적 하느님 나라에, 혼(魂)들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을, 너희 모두 이제 아느냐? 우리가 군중을 먹였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생명의 빵을 갈망하거나 영적 공의(公義)의 물에 목마르도록 이끌지도 않았느니라. 그들의 배고픔이 채워지자,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의 아들을, 이 세상의 왕들을 따라, 그들이 수고하지 않고, 대신에 계속 빵을 먹을 수 있으면 그뿐인, 왕으로 선포하려고 했었느니라. 너희 대부분이 다소간 참여했던 이 모든 일은,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거나 지상에서 그 하느님 나라의 증진에, 아무것도 아니니라. 또한 시민 통치자들과 틀어질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는 대적들로 충분하지 않으냐?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복음을 너희가 충분히 신앙하도록, 아버지께서 너희 눈에 기름을 부어 너희가 보고, 너희 귀를 열어 너희가 듣도록, 내가 기도하노라.”

152:5.5 (1704.4) Jesus then announced that he wished to withdraw for a few days of rest with his apostles before they made ready to go up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and he forbade any of the disciples or the multitude to follow him. Accordingly they went by boat to the region of Gennesaret for two or three days of rest and sleep. Jesus was preparing for a great crisis of his life on earth, and he therefore spent much time in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heaven. 예수님은 그다음, 그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에, 물러나서 며칠간 사도들과 함께 쉬려고 한다고 밝히면서, 제자들이나 무리 중 누구도 자신을 따르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삼일 쉬고 잠을 자려고 게네사렛 지역으로 배편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일생의 큰 위기를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와 교제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52:5.6 (1704.5) The news of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and the attempt to make Jesus king aroused widespread curiosity and stirred up the fears of both the religious leaders and the civil rulers throughout all Galilee and Judea. While this great miracle did nothing to further the gospel of the kingdom in the souls of material-minded and halfhearted believers, it did serve the purpose of bringing to a head the miracle-seeking and king-craving proclivities of Jesus’ immediate family of apostles and close disciples. This spectacular episode brought an end to the early era of teaching, training, and healing, thereby preparing the way for the inauguration of this last year of proclaiming the higher and more spiritual phases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 divine sonship, spiritual liberty, and eternal salvation. 5,000명을 먹이고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한 소식이 널리 호기심을 일으켰고, 온 갈릴리와 유대에 두루, 종교 지도자들과 시민 통치자들 모두의 두려움을 자극했습니다. 이런 큰 기적은 물질-마음과 성의 없는 신자들의 혼(魂)들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혀 진전시키지 않았던 반면에, 사도들과 친밀한 제자들로 구성된 예수 직계 가족들의 기적을-찾고, 왕을-갈망하는 습관(習慣)을 곪아 터지게 하려는 목적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극적인 일화(逸話)로 가르침, 훈련 및 치유의 초기 시대가 끝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느님 나라의 새 복음 – 신적 아들됨, 영적 자유 및 영원한 구원에 속한 더 높은, 영적 단계를 선포하는, 이 마지막 해가 시작하는 길이 준비되었습니다.

6. At Gennesaret 게네사렛에서

210110 하느님 나라의 대사(大使)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52:6.1 (1705.1) While resting at the home of a wealthy believer in the Gennesaret region, Jesus held informal conferences with the twelve every afternoon. The ambassadors of the kingdom were a serious, sober, and chastened group of disillusioned men. But even after all that had happened, and as subsequent events disclosed, these twelve men were not yet fully delivered from their inbred and long-cherished notions about the coming of the Jewish Messiah. Events of the preceding few weeks had moved too swiftly for these astonished fishermen to grasp their full significance. It requires time for men and women to effect radical and extensive changes in their basic and fundamental concepts of social conduct, philosophic attitudes, and religious convictions. 게네사렛 지역에 있는 부유한 신자(信者)의 집에서 쉬는 동안, 예수님은 매일 오후에 12 사도와 비공식적 회의를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대사(大使)들은 진지하고 침착했으며, 환멸(幻滅 깨어진 환상으로 느끼는 허무함과 쓰라린 마음)로 단련된 집단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일어난 이후에도, 나중의 사건들에서 드러났듯이, 이 열두 사람은 유대인 메시아의 도래(到來)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오랫동안 바라던 관념에서 아직도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로 몇 주 전의 사건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깜짝 놀란 이 어부들은 그 충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2~3주간 직전의 사건들: AD 29. 3/13일~15화 씨뿌리는 자의 비유, 3/20일 케레사의 폭풍, 3/21월 케레사의 아모스, 3/22화 가이사랴-빌립보의 베로니카 & 야이러스의 딸, 3/30수 오병이어 5,000명 & 베드로의 밤 환상, 3/31목 후기 사역 시작). 남성과 여성들이 사회적 행위, 철학적 태도 및 종교적 신념에 대한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개념에서 철저히 전반적으로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152:6.2 (1705.2) While Jesus and the twelve were resting at Gennesaret, the multitudes dispersed, some going to their homes, others going on up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In less than one month’s time the enthusiastic and open followers of Jesus, who numbered more than fifty thousand in Galilee alone, shrank to less than five hundred. Jesus desired to give his apostles such an experience with the fickleness of popular acclaim that they would not be tempted to rely on such manifestations of transient religious hysteria after he should leave them alone in the work of the kingdom, but he was only partially successful in this effort. 예수님과 열둘이 게네사렛에서 쉬는 동안, 군중은 흩어져서, 어떤 이들은 집으로 가고, 다른 이들은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갈릴리에서만 5만 명 이상(以上)이 열성적으로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한 달이 안 되어, 그 수(數)가 500명 미만으로 줄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과업에 사도들만 남겨놓은 후, 그렇게 나타나는, 덧없는 종교적 히스테리(병적 흥분)를 그들이 의지하게 되지 않도록, 자기 사도들에게 그런 변덕스러운 대중적 환호(歡呼)의 체험을 주려고 하셨지만, 그는 이런 노력으로 일부분만 성공했습니다.

152:6.3 (1705.3) The second night of their sojourn at Gennesaret the Master again told the apostles the parable of the sower and added these words: “You see, my children, the appeal to human feelings is transitory and utterly disappointing; the exclusive appeal to the intellect of man is likewise empty and barren; it is only by making your appeal to the spirit which lives within the human mind that you can hope to achieve lasting success and accomplish those marvelous transformations of human character that are presently shown in the abundant yielding of the genuine fruits of the spirit in the daily lives of all who are thus delivered from the darkness of doubt by the birth of the spirit into the light of faith — the kingdom of heaven.” 게네사렛에 머문 둘째 날 밤에, 주(主)께서 다시 사도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 자녀들아, 너희가 보듯이, 인간 감정에 대한 호소는 일시적이며 아주 실망스러우니라. 인간의 지성에만 호소하는 것도 똑같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너희가 영속적인 성공의 성취와 영(靈)의 탄생으로 의심의 어둠에서 신앙의 빛 – 하느님 나라 안으로 그렇게 해방된, 모든 이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참된 영(靈)의 열매를 풍성한 맺음으로 즉시 나타나는, 그런 놀라운 인간 성품의 변환에 이르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인간 마음 내부에 살아있는 영(靈)에 호소할 때만 되느니라.

152:6.4 (1705.4) Jesus taught the appeal to the emotions as the technique of arresting and focusing the intellectual attention. He designated the mind thus aroused and quickened as the gateway to the soul, where there resides that spiritual nature of man which must recognize truth and respond to the spiritual appeal of the gospel in order to afford the permanent results of true character transformations. 예수님은 감정에 대한 호소를, 지능적 관심으로 주의를 끌고 집중시키는 기법으로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극되어 고무된 마음을, 혼(魂)에 이르는 통로라고 부르셨는데, 혼(魂)에는, 참된 성품이 변환하는 영속적 결과를 위해서 진리를 알아보고 복음의 영적 호소에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이 있습니다.

152:6.5 (1705.5) Jesus thus endeavored to prepare the apostles for the impending shock — the crisis in the public attitude toward him which was only a few days distant. He explained to the twelve that the religious rulers of Jerusalem would conspire with Herod Antipas to effect their destruction. The twelve began to realize more fully (though not finally) that Jesus was not going to sit on David’s throne. They saw more fully that spiritual truth was not to be advanced by material wonders. They began to realize that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and the popular movement to make Jesus king was the apex of the miracle-seeking, wonder-working expectance of the people and the height of Jesus’ acclaim by the populace. They vaguely discerned and dimly foresaw the approaching times of spiritual sifting and cruel adversity. These twelve men were slowly awaking to the realization of the real nature of their task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they began to gird themselves for the trying and testing ordeals of the last year of the Master’s ministry on earth. 그래서 예수님은, 임박한 충격 – 며칠 만에 냉랭한 자신을 향한 대중적 태도의 위기에 대해, 사도들을 준비시키려 하셨습니다. 그는 열 둘에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헤롯 안티파스와 공모(共謀)하리라고 설명했습니다. 열둘은 결정적으로는 아니지만, 예수께서 다윗의 왕좌에 앉지 않으실 것을 더 자세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진리는 물질적 이적으로 증진될 수 없다는 것을 더 온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5,000명을 먹이고 예수를 왕으로 추대한 대중 운동은, 사람들이 기적을-추구하고, 이적(異蹟)-실행을 기대하는 절정(絶頂)과 예수에 대한 대중적 환호(歡呼)의 극치(極致)였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가려내는, 끔찍한 역경의 시간이 다가옴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희미하게 예감했습니다. 이 열두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대사(大使)들로서 자기 과업의 참된 본성에 대한 실상에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고, 그들은 지상에서 주(主)님의 사역 중 마지막 해의 견디기 어렵고 힘겨운 시련에 단단히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52:6.6 (1706.1) Before they left Gennesaret, Jesus instructed them regarding the miraculous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telling them just why he engaged in this extraordinary manifestation of creative power and also assuring them that he did not thus yield to his sympathy for the multitude until he had ascertained that it was “according to the Father’s will.” 그들이 게네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 창조적 권능을 이렇게 특별히 드러낸 바로 그 이유를 그들에게 말하고, 그것이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고 자신이 확인하기까지, 자신이 군중을 향한 동정심에 그렇게 빠진 것이 아니었다고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5,000명을 먹인 기적에 관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7.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210117 살리는 영(靈)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152:7.1 (1706.2) Sunday, April 3, Jesus, accompanied only by the twelve apostles, started from Bethsaida on the journey to Jerusalem. To avoid the multitudes and to attract as little attention as possible, they journeyed by way of Gerasa and Philadelphia. He forbade them to do any public teaching on this trip; neither did he permit them to teach or preach while sojourning in Jerusalem. They arrived at Bethany, near Jerusalem, late on Wednesday evening, April 6. For this one night they stopped at the home of Lazarus, Martha, and Mary, but the next day they separated. Jesus, with John, stayed at the home of a believer named Simon, near the house of Lazarus in Bethany. Judas Iscariot and Simon Zelotes stopped with friends in Jerusalem, while the rest of the apostles sojourned, two and two, in different homes. 4월 3일 일요일에 예수님은 12사도만 데리고, 벳새다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군중을 피하고 되도록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그들은 게라사와 필라델피아를 경유해서 여행했습니다. 그는 이 여행에서 그들의 어떤 공적 가르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가르치거나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4월 6일 수요일 저녁 늦게 도착했습니다. 당일 밤 그들은 나사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묵었지만, 다음날 그들은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함께 베다니의 나사로 집 근처, 시몬이라는 신자(信者)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가룟 유다와 시몬 젤로테스는 예루살렘의 친구들과 함께 묵는 한편, 나머지 사도들은 둘씩 다른 집에 머물렀습니다.

152:7.2 (1706.3) Jesus entered Jerusalem only once during this Passover, and that was on the great day of the feast. Many of the Jerusalem believers were brought out by Abner to meet Jesus at Bethany. During this sojourn at Jerusalem the twelve learned how bitter the feeling was becoming toward their Master. They departed from Jerusalem all believing that a crisis was impending. 예수님은 이 유월절에 한 번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데, 그날은 잔치의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아브너가 예루살렘의 여러 신자(信者)를 데리고,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열두 사도는 주(主)님을 향해 얼마나 신랄(辛辣)해지던 감정인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기가 가까이 닥쳐왔다고 믿으면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152:7.3 (1706.4) On Sunday, April 24, Jesus and the apostles left Jerusalem for Bethsaida, going by way of the coast cities of Joppa, Caesarea, and Ptolemais. Thence, overland they went by Ramah and Chorazin to Bethsaida, arriving on Friday, April 29. Immediately on reaching home, Jesus dispatched Andrew to ask of the ruler of the synagogue permission to speak the next day, that being the Sabbath, at the afternoon service. And Jesus well knew that that would be the last time he would ever be permitted to speak in the Capernaum synagogue. 4월 24일 일요일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해안 도시들, 욥바, 가이사랴, 프톨레마이스를 경유해서, 벳새다를 향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육로로 라마, 코라진을 거쳐 4월 29일 금요일에 벳새다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예수님은 안드레를 보내 안식일인 다음날 오후 예배에서 말하도록 회당장에게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자신이 말하도록 허락되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예수님은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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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3 The Crisis at Capernaum 가버나움에서 겪은 위기

Paper 153

The Crisis at Capernaum 가버나움에서 겪은 위기

1. The Setting of the Stage 무대의 배경
2. The Epochal Sermon 획기적 설교
“I am the bread of life.” “나는 생명의 빵이라.”
3. The After Meeting 모임 후
4. Last Words in the Synagogue 회당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The boy possessed by the evil spirit 악령 들린 소년
“How can Satan cast out Satan?”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5. The Saturday Evening 토요일 밤
Desertion of the halfhearted followers 성의 없는 추종자들의 저버림

210124 설교 직전의 위기 요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He said this while teaching in the synagogue in Capernaum.

153:0.1 (1707.1) ON FRIDAY evening, the day of their arrival at Bethsaida, and on Sabbath morning, the apostles noticed that Jesus was seriously occupied with some momentous problem; they were cognizant that the Master was giving unusual thought to some important matter. He ate no breakfast and but little at noontide. All of Sabbath morning and the evening before, the twelve and their associates were gathered together in small groups about the house, in the garden, and along the seashore. There was a tension of uncertainty and a suspense of apprehension resting upon all of them. Jesus had said little to them since they left Jerusalem. 그들이 벳새다에 도착한 금요일(AD29. 4/29) 저녁과 안식일(토 4/30)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어떤 쉽지 않은 문제로 여념이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중요한 어떤 문제로 여느 때와 달리 곰곰이 생각하고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침 식사를 거르셨고 정오에도 거의 드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아침 내내 그리고 저녁 전에, 열두 사도와 동료들은 집 주위와 정원 및 해변을 따라 작은 그룹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확실히 알 수 없는 긴장과 염려에 대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이후 예수님은 그들에게 거의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153:0.2 (1707.2) Not in months had they seen the Master so preoccupied and uncommunicative. Even Simon Peter was depressed, if not downcast. Andrew was at a loss to know what to do for his dejected associates. Nathaniel said they were in the midst of the “lull before the storm.” Thomas expressed the opinion that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is about to happen.” Philip advised David Zebedee to “forget about plans for feeding and lodging the multitude until we know what the Master is thinking about.” Matthew was putting forth renewed efforts to replenish the treasury. James and John talked over the forthcoming sermon in the synagogue and speculated much as to its probable nature and scope. Simon Zelotes expressed the belief, in reality a hope, that “the Father in heaven may be about to intervene in some unexpected manner for the vindication and support of his Son,” while Judas Iscariot dared to indulge the thought that possibly Jesus was oppressed with regrets that “he did not have the courage and daring to permit the five thousand to proclaim him king of the Jews.” 그들은 몇 달간 그렇게 몰두하여 말 없는 주(主)님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기(氣)가 꺾이지는 않았지만 울적(鬱寂)했습니다. 안드레는 기운 없는 동료들을 위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자신들이 “폭풍 전의 고요” 가운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특별한 일이 이제 곧 일어날 참”이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다윗 세베대에게 “주께서 하시는 생각을 우리가 알 때까지 군중을 먹이고 투숙시키는 계획에 대해 마음에 두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마태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회당의 이번 설교에 대해 말하면서 예상되는 성격과 의도에 대해 많이 추측했습니다. 시몬 젤로테스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옹호하고 지지하기 위해 의외의 방식으로 이제 곧 나설 수 있다.”라고 실제로 기대하면서 믿음을 나타냈던 반면에 가룟 유다는 아마 예수님이 “ 5,000명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도록 허락할 용기와 대담성이 없었던” 후회로 억눌려 있다는 생각에 감히 빠져 있었습니다.

153:0.3 (1707.3) It was from among such a group of depressed and disconsolate followers that Jesus went forth on this beautiful Sabbath afternoon to preach his epoch-making sermon in the Capernaum synagogue. The only word of cheerful greeting or well-wishing from any of his immediate followers came from one of the unsuspecting Alpheus twins, who, as Jesus left the house on his way to the synagogue, saluted him cheerily and said: “We pray the Father will help you, and that we may have bigger multitudes than ever.” 이 아름다운 안식일(AD29. 4/30 토) 오후에, 그렇게 울적하고 수심에 잠긴 신봉(信奉)자 중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획시대적(劃時代的시대의 구획을 긋는) 설교를 하려고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으로 가려고 집을 떠날 때, 그의 직계 신봉자 중 유쾌한 인사, 즉 유일한 덕담(德談)은, 영문을 모르는 알패오 쌍둥이 중 하나가 했는데, 그에게 기분 좋게 경의를 표해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돕고, 여느 때보다 더 많은 군중이 참여하기를 저희가 기원합니다.”

1. The Setting of the Stage 무대의 배경

210131 설교 직전의 위기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All that the Father giveth me shall come to me; and him that cometh to me I will in no wise cast out.

153:1.1 (1707.4) A distinguished congregation greeted Jesus at three o’clock on this exquisite Sabbath afternoon in the new Capernaum synagogue. Jairus presided and handed Jesus the Scriptures to read. The day before, fifty-three Pharisees and Sadducees had arrived from Jerusalem; more than thirty of the leaders and rulers of the neighboring synagogues were also present. These Jewish religious leaders were acting directly under orders from the Sanhedrin at Jerusalem, and they constituted the orthodox vanguard which had come to inaugurate open warfare on Jesus and his disciples. Sitting by the side of these Jewish leaders, in the synagogue seats of honor, were the official observers of Herod Antipas, who had been directed to ascertain the truth concerning the disturbing reports that an attempt had been made by the populace to proclaim Jesus the king of the Jews, over in the domains of his brother Philip. 새 가버나움 회당에서 날씨가 좋은 이 안식일 오후 3시에 쟁쟁한 신자들이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야이러스가 진행을 맡아 예수께 읽을 성서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전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3명이 예루살렘에서 도착했습니다. 또한 인근 회당의 지도자와 회당장 30명 이상이 참석했습니다. 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의 명령을 받아 바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러 왔던 정통파 선봉대였습니다. 이 유대 지도자들 옆, 회당의 귀빈석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관직에 있는 감시인들이 앉았는데, 그의 형제 빌립의 영토에서 대중이 예수를 유대의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는 시도에 대한 불온한 보고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153:1.2 (1708.1) Jesus comprehended that he faced the immediate declaration of avowed and open warfare by his increasing enemies, and he elected boldly to assume the offensive. At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he had challenged their ideas of the material Messiah; now he chose again openly to attack their concept of the Jewish deliverer. This crisis, which began with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and which terminated with this Sabbath afternoon sermon, was the outward turning of the tide of popular fame and acclaim. Henceforth, the work of the kingdom was to be increasingly concerned with the more important task of winning lasting spiritual converts for the truly religious brotherhood of mankind. This sermon marks the crisis in the transition from the period of discussion, controversy, and decision to that of open warfare and final acceptance or final rejection. 예수님은, 늘어나는 자기 대적들이 공언한 즉각적 공개 전쟁의 선포에 자신이 직면해 있음을 파악했으며, 그는 대담하게 공격하기로 정했습니다. 5,000명을 먹이면서, 그는 물질적 메시아 관념에 도전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그들의 유대 해방자 개념을 공공연히 공격하려고 결정했습니다. 5,000명을 먹이면서 시작하여 이 안식일 오후 설교로 끝난 이 위기는 대중적 명성과 환호의 형세를 표면적으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의 업무는 점차 인류의 참된 종교적 형제 사랑을 위해 지속적인 영적 개종자를 얻는, 더 중요한 과업에 관여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설교는, 토론, 논쟁 및 결정의 시기에서부터 공개적 전쟁과 최종적 수용 또는 최종적 거절의 시기로 변하는 위기를 나타냅니다.

153:1.3 (1708.2) The Master well knew that many of his followers were slowly but surely preparing their minds finally to reject him. He likewise knew that many of his disciples were slowly but certainly passing through that training of mind and that discipline of soul which would enable them to triumph over doubt and courageously to assert their full-fledged faith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Jesus fully understood how men prepare themselves for the decisions of a crisis and the performance of sudden deeds of courageous choosing by the slow process of the reiterated choosing between the recurring situations of good and evil. He subjected his chosen messengers to repeated rehearsals in disappointment and provided them with frequent and testing opportunities for choosing between the right and the wrong way of meeting spiritual trials. He knew he could depend on his followers, when they met the final test, to make their vital decisions in accordance with prior and habitual mental attitudes and spirit reactions. 주(主)님은, 자신의 여러 추종자가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자신을 마침내 거절하기로 마음을 준비하고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 제자들이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그런 마음의 훈련과 그런 혼(魂)의 단련을 무사히 통과하여, 의심을 이겨내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성숙한 신앙을 용기 있게 주장할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반복되는 선과 악의 상황 사이에서 반복해서 선택하는 느린 과정으로, 위기의 결정과 용기 있게 결정하는 갑작스러운 행위를 실행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준비하는지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메신저들이 실망하도록 예행 연습을 반복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시련에 대처하는 옳고 그른 방법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자주 극히 곤란한 기회들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자기 추종자들이 최종적인 시련을 만났을 때, 이전 및 습관적 정신 태도와 영(靈) 반응에 따라서 자신들이 지극히 중요한 결정을 하도록,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153:1.4 (1708.3) This crisis in Jesus’ earth life began with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and ended with this sermon in the synagogue; the crisis in the lives of the apostles began with this sermon in the synagogue and continued for a whole year, ending only with the Master’s trial and crucifixion.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서 이 위기는 5,000명을 먹이면서 시작하여 회당의 이 설교로 끝났습니다. 사도들의 삶에서 위기는 회당의 이 설교로 시작해서 1년 내내 계속되었고, 주님의 재판과 십자가형(刑)으로 겨우 끝났습니다.

153:1.5 (1708.4) As they sat there in the synagogue that afternoon before Jesus began to speak, there was just one great mystery, just one supreme question, in the minds of all. Both his friends and his foes pondered just one thought, and that was: “Why did he himself so deliberately and effectively turn back the tide of popular enthusiasm?” And it was immediately before and immediately after this sermon that the doubts and disappointments of his disgruntled adherents grew into unconscious opposition and eventually turned into actual hatred. It was after this sermon in the synagogue that Judas Iscariot entertained his first conscious thought of deserting. But he did, for the time being, effectively master all such inclinations. 예수께서 말씀을 시작하기 전, 그들이 그날 오후 회당에 앉아 있을 때, 모두의 마음에는 단 하나의 커다란 신비,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대적들 모두 단 하나의 생각을 깊이 헤아렸는데, 그것은 “그는 왜 스스로 대중적 열광의 형세를 그렇게 일부러 그리고 실제로 저지(沮止)했을까?”였습니다. 이 설교의 직전과 직후에, 기분이 상한 신봉자들의 의심과 실망은 무의식적 반대로 커져서 결국 실제로 증오가 되었습니다. 회당의 이 설교 이후에 가룟 유다는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버리고 떠날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그런 모든 의향을 실제로 억눌렀습니다.

153:1.6 (1708.5) Everyone was in a state of perplexity. Jesus had left them dumfounded and confounded. He had recently engaged in the greatest demonstration of supernatural power to characterize his whole career.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was the one event of his earth life which made the greatest appeal to the Jewish concept of the expected Messiah. But this extraordinary advantage was immediately and unexplainedly offset by his prompt and unequivocal refusal to be made king. 모두 당혹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놀라서 말문이 막혀 당황스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전(全) 생애를 특징짓는 초자연적 권능을 가장 위대하게 드러냈습니다. 5,000명을 먹인 일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에 가장 크게 호소했던 그의 지상 생애 중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이점(利點)은, 그가 신속하고, 명료하게 왕이 되기를 거절하여, 설명도 없이 바로 효과가 없어졌습니다.

153:1.7 (1709.1) On Friday evening, and again on Sabbath morning, the Jerusalem leaders had labored long and earnestly with Jairus to prevent Jesus’ speaking in the synagogue, but it was of no avail. Jairus’s only reply to all this pleading was: “I have granted this request, and I will not violate my word.” 금요일 밤과 안식일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막으라고 오랫동안 열심히 야이러스를 괴롭혔지만,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간청에 대한 야이러스의 유일한 대답은 “내가 이 요청을 허락했으니 나는 내 말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였습니다.

2. The Epochal Sermon 획기적 설교

210207 결단의 갈림길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But if serving the LORD seems undesirable to you, then choose for yourselves this day whom you will serve, whether the gods your forefathers served beyond the River, or the gods of the Amorites, in whose land you are living. But as for me and 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153:2.1 (1709.2) Jesus introduced this sermon by reading from the law as found in Deuteronomy: “But it shall come to pass, if this people will not hearken to the voice of God, that the curses of transgression shall surely overtake them. The Lord shall cause you to be smitten by your enemies; you shall be removed into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And the Lord shall bring you and the king you have set up over you into the hands of a strange nation. You shall become an astonishment, a proverb, and a byword among all nations.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go into captivity. The strangers among you shall rise high in authority while you are brought very low. And these things shall be upon you and your seed forever because you would not hearken to the word of the Lord. Therefore shall you serve your enemies who shall come against you. You shall endure hunger and thirst and wear this alien yoke of iron. The Lord shall bring against you a nation from afar, from the end of the earth, a nation whose tongue you shall not understand, a nation of fierce countenance, a nation which will have little regard for you. And they shall besiege you in all your towns until the high fortified walls wherein you have trusted come down; and all the land shall fall into their hands.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you will be driven to eat the fruit of your own bodies, the flesh of your sons and daughters, during this time of siege, because of the straitness wherewith your enemies shall press you.” 예수님은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을 읽으면서 이 설교의 서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어날 일은, 범죄의 저주가 반드시 그들에게 덮칠 것이라(신28:15). 주께서 너희 대적들로 너희를 쳐부술 것이라. 너희는 지상의 모든 나라들로 흩어지리라(신28:25). 주께서 너희와 너희 위에 너희가 세운 왕을 낯선 나라의 지배에 두리라(신28:36). 너희는 모든 나라 중에서 놀람과 속담과 웃음거리가 되리라(신28:37). 너희 아들과 딸들은 사로잡힐 것이라(신28:41). 너희 중 이방인들은 권위가 높아질 것이나, 너희는 아주 낮아지리라(신28:43). 그리고 이런 일들은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끊임없이 임하리니, 너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니라(신28:4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를 적대할 너희 대적을 섬기리라. 너희는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고 낯선 이 철 멍에를 멜 것이라(신28:48). 주님께서 너희를 대적할 나라를 멀리 땅끝에서 오게 하리니, 너희는 그 나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니(신28:49), 용모가 흉악한 나라이며, 너희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을 나라이니라(신28:50). 그리고 그들은, 너희가 의뢰하던 높고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너희 모든 성읍을 포위 공격하리라. 그리고 모든 땅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리라(신28:52). 그리고 이루어질 것은, 너희 대적이 너희를 밀어붙이는 곤란 때문에, 이런 포위 공격의 기간에 너희가 너희 몸의 열매, 즉 너희 아들들과 딸들의 살까지 먹을 것이라(신28:53).”

153:2.2 (1709.3) And when Jesus had finished this reading, he turned to the Prophets and read from Jeremiah: “‘If you will not hearken to the words of my servants the prophets whom I have sent you, then will I make this house like Shiloh, and I will make this city a curse to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And the priests and the teachers heard Jeremiah speak these words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Jeremiah had made an end of speaking all that the Lord had commanded him to speak to all the people, the priests and teachers laid hold of him, saying, ‘You shall surely die.’ And all the people crowded around Jeremiah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when the princes of Judah heard these things, they sat in judgment on Jeremiah. Then spoke the priests and the teachers to the princes and to all the people, saying: ‘This man is worthy to die, for he has prophesied against our city, and you have heard him with your own ears.’ Then spoke Jeremiah to all the princes and to all the people: ‘The Lord sent me to prophesy against this house and against this city all the words which you have heard. Now, therefore, amend your ways and reform your doings and obey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that you may escape the evil which has been pronounced against you. As for me, behold I am in your hands. Do with me as seems good and right in your eyes. But know you for certain that, if you put me to death, you shall bring innocent blood upon yourselves and upon this people, for of a truth the Lord has sent me to speak all these words in your ears.’ 그리고 예수께서 이렇게 읽은 후, 선지서로 옮겨 예레미야서를 읽었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보낸 내 종들,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가 이 성전을 실로와 같이 되게 하며, 내가 이 도시를 지상의 모든 나라에 저주로 만들리라.’ 예레미야가 주의 성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제사장들과 선생들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그가 마쳤을 때, 제사장들과 선생들이 그를 잡고,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고 말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주의 성전에서 예레미야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고관(高官)들이 이런 일들을 듣고 예레미야를 재판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과 선생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도시에 반대하여 예언했기 때문에 그는 죽는 것이 합당하며, 당신들 귀로 들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 성전과 이 도시를 향해 너희가 들은 모든 말로 예언하라고 주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그런즉 너희를 향해 선언된 재앙에서 벗어나도록, 이제 너희 길을 바로잡고 너희 행위를 개선하며 주(主) 너희 하느님의 목소리에 순종하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느니, 너희 의견에 선하고 좋을 대로 내게 행하라. 그러나 너희가 분명히 알 것은, 주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서 너희 귀에 이 모든 말을 하게 하셨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죽이면 너희가 무죄한 피를 너희 자신과 이 백성에게 돌리게 되리라(렘26:4-15).’

153:2.3 (1710.1) “The priests and teachers of that day sought to kill Jeremiah, but the judges would not consent, albeit, for his words of warning, they did let him down by cords in a filthy dungeon until he sank in mire up to his armpits. That is what this people did to the Prophet Jeremiah when he obeyed the Lord’s command to warn his brethren of their impending political downfall. Today, I desire to ask you: What will the chief priests and religious leaders of this people do with the man who dares to warn them of the day of their spiritual doom? Will you also seek to put to death the teacher who dares to proclaim the word of the Lord, and who fears not to point out wherein you refuse to walk in the way of light which leads to the entrance to the kingdom of heaven? “당시 제사장들과 선생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으나 재판관들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경고의 말로 인해 그들은 더러운 지하 감옥에 그를 줄에 달아 내려 그의 겨드랑이까지 진창에 빠지게 했습니다(렘38:6). 예레미야 선지자가 임박한 정치적 몰락에 대해 자기 형제들에게 경고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그가 순종했을 때, 이 백성들이 그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니라.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묻겠노라. 이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파멸의 날을 대담하게 경고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너희도 대담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하늘나라 입구로 이끄는 빛의 길로 행하기를, 너희가 거절한다고, 두려움 없이 지적하는 교사를 죽이려 하느냐?

153:2.4 (1710.2) “What is it you seek as evidence of my mission on earth? We have left you undisturbed in your positions of influence and power while we preached glad tidings to the poor and the outcast. We have made no hostile attack upon that which you hold in reverence but have rather proclaimed new liberty for man’s fear-ridden soul. I came into the world to reveal my Father and to establish on earth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the kingdom of heaven. And notwithstanding that I have so many times reminded you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still has my Father granted you many manifestations of material wonders in addition to more evidential spiritual transformations and regenerations. “너희는 지상에서 내 사명의 증거로서 무엇을 찾느냐? 우리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권세와 권력의 지위에 있는 너희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느니라. 우리는 너희가 존경하는 어떤 것도 반대로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두려움에-질린 사람의 혼(魂)에 새로운 자유를 선포했느니라. 나는 내 아버지를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자녀)들의 영적 형제 사랑, 하늘나라를 지상에 세우려고 세상에 왔노라. 그리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여러 번 상기시켰지만, 여전히 내 아버지는 더 많은 영적 변환과 거듭남에 더하여 너희에게 여러 물질적 이적을 허락하셨느니라.

153:2.5 (1710.3) “What new sign is it that you seek at my hands? I declare that you already have sufficient evidence to enable you to make your decision. Verily, verily, I say to many who sit before me this day, you are confronted with the necessity of choosing which way you will go; and I say to you, as Joshua said to your forefathers, ‘choose you this day whom you will serve.’ Today, many of you stand at the parting of the ways. “너희가 내 손에서 새로운 어떤 표적을 찾느냐? 너희는 이미 너희가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내가 선언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오늘 내 앞에 앉은 많은 이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너희가 갈 길을 선택하는 숙명에 직면해 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호수아가 너희 조상에게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라고 했듯이, 너희 중 많은 이가 결단의 갈림길에 서 있느니라.

153:2.6 (1710.4) “Some of you, when you could not find me after the feasting of the multitude on the other side, hired the Tiberias fishing fleet, which a week before had taken shelter near by during a storm, to go in pursuit of me, and what for? Not for truth and righteousness or that you might the better know how to serve and minister to your fellow men! No, but rather that you might have more bread for which you had not labored. It was not to fill your souls with the word of life, but only that you might fill the belly with the bread of ease. And long have you been taught that the Messiah, when he should come, would work those wonders which would make life pleasant and easy for all the chosen people. It is not strange, then, that you who have been thus taught should long for the loaves and the fishes. But I declare to you that such is not the mission of the Son of Man. I have come to proclaim spiritual liberty, teach eternal truth, and foster living faith. “너희 중 몇몇은, 호수 건너편에서 군중들이 배부른 후 나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나를 찾으려고, 일주일 전(前) 폭풍으로 근처에 대피한 티베리아스 어선단을 빌렸는데, 무엇 때문이었는가? 진리와 공의(公義)를 찾거나, 너희가 너희 동료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는 방법을 더 알고자 함이 아니라! 아니며, 오히려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빵을 더 얻고자 함이라. 그것은 생명의 말씀으로 너희 혼(魂)들을 채우려 함이 아니라, 쉽게 얻은 빵으로 배를 채우려 함일 뿐이었느니라. 너희는 메시아가 오면 그가 선택된 모든 사람의 삶을 즐겁고 편하게 할 그런 이적들을 행하리라고 오랫동안 배웠느니라. 그래서 이렇게 배운 너희가 빵과 물고기를 갈망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러나 그런 것은 인자(人子)의 사명이 아니라고 내가 선언하노라. 나는 영적 해방을 선포하고,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며, 살아있는 신앙을 돌보려고 왔느니라.

153:2.7 (1710.5) “My brethren, hanker not after the meat which perishes but rather seek for the spiritual food that nourishes even to eternal life; and this is the bread of life which the Son gives to all who will take it and eat, for the Father has given the Son this life without measure. And when you asked me, ‘What must we do to perform the works of God?’ I plainly told you: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him whom he has sent.’” “내 형제들아, 썩을 고기를 열망하지 말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까지 키우는 영적 양식(糧食)을 구하라(요6:27). 그리고 이것은 받아서 먹을 모두에게 아들이 주는 생명의 빵이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생명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이라. 그리고 너희가 나에게,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했느니라. ‘그가 보낸 그를 너희가 믿는, 이것이 하느님의 일이니라(요6:28-29).’”

210214 나는 생명의 빵이라 요6:47-50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47 I tell you the truth, he who believes has everlasting life. 48 I am the bread of life. 49 Your forefathers ate the manna in the desert, yet they died. 50 But here is the bread that comes down from heaven, which a man may eat and not die.

153:2.8 (1710.6) And then said Jesus, pointing up to the device of a pot of manna which decorated the lintel of this new synagogue, and which was embellished with grape clusters: “You have thought that your forefathers in the wilderness ate manna — the bread of heaven — but I say to you that this was the bread of earth. While Moses did not give your fathers bread from heaven, my Father now stands ready to give you the true bread of life. The bread of heaven is that which comes down from God and gives eternal life to the men of the world. And when you say to me, Give us this living bread, I will answer: I am this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shall not hunger, while he who believes me shall never thirst. You have seen me, lived with me, and beheld my works, yet you believe not that I came forth from the Father. But to those who do believe — fear not. All those led of the Father shall come to me, and he who comes to me shall in nowise be cast out. 그 후 예수께서 새로운 이 회당의 인방(引枋)에 포도송이로 꾸며, 장식된 만나 단지 무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이 광야에서 만나 – 하늘의 빵 –을 먹었다고 너희가 생각했으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지상의 빵이었느니라. 모세는 너희 조상들에게 하늘의 빵을 주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는 이제 너희에게 참된 생명의 빵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하늘의 빵은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와 세상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느니라. 이 살아있는 빵을 우리에게 달라고 너희가 내게 말하면, 내가 대답하리라.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나에게 오는 자는 굶주리지 않겠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너희가 나를 보았고, 나와 함께 살았으며, 나의 일을 보았지만, 너희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왔음을 아직도 믿지 않느니라.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 두려워 말라. 아버지가 이끄신 자들은 모두 내게 오겠고,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으리라(요6:32-37).

153:2.9 (1711.1) “And now let me declare to you, once and for all time, that I have come down upon the earth,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his is the final will of Him who sent me, that of all those he has given me I should not lose one. And this is the will of the Father: That every one who beholds the Son and who believes him shall have eternal life. Only yesterday did I feed you with bread for your bodies; today I offer you the bread of life for your hungry souls. Will you now take the bread of the spirit as you then so willingly ate the bread of this world?”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완전히 선언하노니, 내가 지상에 온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그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나를 보내신 그의 최종적 뜻이니, 그가 내게 주신 모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요6:38-40). 어제만 내가 너희 몸을 위해 빵을 먹였고, 오늘 내가 너희 굶주린 혼(魂)을 위해 너희에게 생명의 빵을 주노라. 너희가 그때 이 세상의 빵을 기꺼이 먹었듯이, 이제 영(靈)의 빵을 받겠느냐?”

153:2.10 (1711.2) As Jesus paused for a moment to look over the congregation, one of the teachers from Jerusalem (a member of the Sanhedrin) rose up and asked: “Do I understand you to say that you are the bread which comes down from heaven, and that the manna which Moses gave to our fathers in the wilderness did not?” And Jesus answered the Pharisee, “You understood aright.” Then said the Pharisee: “But are you not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 the carpenter? Are not your father and mother, as well as your brothers and sisters, well known to many of us? How then is it that you appear here in God’s house and declare that you have come down from heaven?” 예수께서 회중을 보시려고 잠시 멈추자, 산헤드린 회원으로 예루살렘에서 온 한 선생이 일어나서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린 빵이며, 모세가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준 만나는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말한 것으로 제가 이해해도 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바로 이해했도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사렛 예수, 요셉의 아들, 목수가 아닙니까? 당신의 형제, 자매들처럼 당신의 부모도 우리 중 여럿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여기 하느님의 집에 나타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선언합니까(요6:41-42)?”

153:2.11 (1711.3) By this time there was much murmuring in the synagogue, and such a tumult was threatened that Jesus stood up and said: “Let us be patient; the truth never suffers from honest examination. I am all that you say but more. The Father and I are one; the Son does only that which the Father teaches him, while all those who are given to the Son by the Father, the Son will receive to himself. You have read where it is written in the Prophets, ‘You shall all be taught by God,’ and that ‘Those whom the Father teaches will hear also his Son.’ Every one who yields to the teaching of the Father’s indwelling spirit will eventually come to me. Not that any man has seen the Father, but the Father’s spirit does live within man. And the Son who came down from heaven, he has surely seen the Father. And those who truly believe this Son already have eternal life. 이때 회당에 불평이 많아져 그렇게 소란이 임박하자 예수께서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하라. 진리는 정직한 검진으로 고민하지 않느니라. 나는 너희가 말하는 모든 것이지만 그 이상(以上)이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10:30). 아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친 것만 행하는 한편, 아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를 받을 것이라. 너희는 ‘너희가 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며,’ ‘아버지가 가르친 자들은 또한 그의 아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라.’라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었느니라(사54:13, 요6:45). 아버지의 내주하는 영(靈)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는 결국 내게 오리라(요6:44). 아버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요6:46a), 아버지의 영(靈)은 사람 안에 살고 있느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아들, 그는 분명히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6:46b). 그리고 이 아들을 진실로 믿는 자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느니라(요6:47).

153:2.12 (1711.4) “I am this bread of life. Your fathers ate manna in the wilderness and are dead. But this bread which comes down from God, if a man eats thereof, he shall never die in spirit. I repeat, I am this living bread, and every soul who attains the realization of this united nature of God and man shall live forever. And this bread of life which I give to all who will receive is my own living and combined nature. The Father in the Son and the Son one with the Father — that is my life-giving revelation to the world and my saving gift to all nations.”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느니라.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이 빵은,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그는 결코 영(靈)으로 죽지 않으리라(요6:48-50). 내가 거듭 말하노니, 나는 살아있는 이 빵이며(요6:51a), 하느님과 사람의 연합된 이 본성의 실감(實感)에 도달하는 모든 혼(魂)은 영원히 살리라. 받아들이려 하는 모든 자에게 내가 주는 이 생명의 빵은 나의 살아 있는 통합된 본성이니라.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버지와 하나인 아들, 그것이 세상에 생명을-주는 나의 계시이며, 모든 나라에 내 구원의 선물이니라.”

153:2.13 (1711.5)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the ruler of the synagogue dismissed the congregation, but they would not depart. They crowded up around Jesus to ask more questions while others murmured and disputed among themselves. And this state of affairs continued for more than three hours. It was well past seven o’clock before the audience finally dispersed.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회당장이 회중을 해산시켰지만, 그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질문을 더 하려고 예수 주위에 밀어닥치는 동안 다른 이들은 투덜거리며 자기들끼리 논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이런 상태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7시를 훨씬 지나서 마침내 청중이 흩어졌습니다.

3. The After Meeting 모임 후

210214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 막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You have let go of the commands of God and are holding on to the traditions of men.

153:3.1 (1712.1) Many were the questions asked Jesus during this after meeting. Some were asked by his perplexed disciples, but more were asked by caviling unbelievers who sought only to embarrass and entrap him. 이 모임이 끝나는 내내 많은 사람이 예수께 질문을 했습니다. 당혹한 그의 제자들 일부가 질문을 했지만, 그에게 흠집을 만들어 함정에 빠뜨리려고만 했던, 트집을 잡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질문을 했습니다.

153:3.2 (1712.2) One of the visiting Pharisees, mounting a lampstand, shouted out this question: “You tell us that you are the bread of life. How can you give us your flesh to eat or your blood to drink? What avail is your teaching if it cannot be carried out?” And Jesus answered this question, saying: “I did not teach you that my flesh is the bread of life nor that my blood is the water thereof. But I did say that my life in the flesh is a bestowal of the bread of heaven. The fact of the Word of God bestowed in the flesh and the phenomenon of the Son of Man subject to the will of God, constitute a reality of experience which is equivalent to the divine sustenance. You cannot eat my flesh nor can you drink my blood, but you can become one in spirit with me even as I am one in spirit with the Father. You can be nourished by the eternal word of God, which is indeed the bread of life, and which has been bestowed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you can be watered in soul by the divine spirit, which is truly the water of life. The Father has sent me into the world to show how he desires to indwell and direct all men; and I have so lived this life in the flesh as to inspire all men likewise ever to seek to know and do the will of the indwelling heavenly Father.” 방문한 바리새인 중 하나가 등대 받침대에 올라 이렇게 소리치며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줘서 먹거나 자기 피를 마시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가르침을 행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이 생명의 빵이고 내 피가 생명의 물이라고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니라. 그러나 육신으로 있는 내 생명이 하늘 빵의 증여라고 내가 말했느니라. 육신으로 증여된 하느님 말씀의 사실과 하느님 뜻에 복종하는 인자(人子)의 현상은 신적 양식에 해당하는 체험의 실체이니라. 너희가 내 살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실 수 없으나, 내가 영(靈)으로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너희가 영(靈)으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너희는, 정말로 생명의 빵이며,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증여된,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양육(養育)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너희는 참으로 생명의 물인, 신적 영(靈)으로 혼(魂)에 물이 공급될 수 있느니라. 아버지가 어떻게 모든 인간에 내주하여 안내하려 하시는지 보이려고 그가 나를 세상에 보내셨느니라. 그리고 똑같이 내주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려 하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서, 내가 육신으로 이 생명을 살고 있느니라.”

153:3.3 (1712.3) Then one of the Jerusalem spies who had been observing Jesus and his apostles, said: “We notice that neither you nor your apostles wash your hands properly before you eat bread. You must well know that such a practice as eating with defiled and unwashed hands is a transgression of the law of the elders. Neither do you properly wash your drinking cups and eating vessels. Why is it that you show such disrespect for the traditions of the fathers and the laws of our elders?” And when Jesus heard him speak, he answered: “Why is it that you transgress the commandments of God by the laws of your tradition? The commandment says,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and directs that you share with them your substance if necessary; but you enact a law of tradition which permits undutiful children to say that the money wherewith the parents might have been assisted has been ‘given to God.’ The law of the elders thus relieves such crafty children of their responsibility, notwithstanding that the children subsequently use all such monies for their own comfort. Why is it that you in this way make void the commandment by your own tradition? Well did Isaiah prophesy of you hypocrites, saying: ‘This people honors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 is far from me. In vain do they worship me, teaching as their doctrines the precepts of men.’ 그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감시하던 예루살렘의 한 첩자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니까, 당신이나 당신의 사도들은 빵을 먹기 전(前)에 제대로 손을 씻지 않습니다. 더럽게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그런 관습은 장로들의 율법을 범하는 것임을 당신들이 잘 알아야만 합니다. 당신들은 물컵과 식기도 제대로 씻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조상들의 전통과 우리 장로들의 율법에 대해 왜 그토록 무례를 드러냅니까?” 그러자 그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전통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왜 범하느냐? 계명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하고, 필요하면 너희 재산을 그들과 나누라고 지시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부모를 도울 돈으로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불효 자녀가 말하도록 허락하는 전통의 율법을 정하느니라. 장로들의 율법은, 나중에 자녀들이 그런 돈을 모두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활한 자녀들의 자기 책임을 그렇게 없애주느니라. 왜 너희는 이렇게 너희의 전통으로 계명을 쓸모없게 만드느냐?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해 잘 예언하였느니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심정은 내게서 멀리 있도다. 사람의 교훈을 자신의 교리로 가르치니, 그들은 나를 헛되어 경배하느니라(사29:13, 마15:1-9, 막7:1-13).’

153:3.4 (1712.4) “You can see how it is that you desert the commandment while you hold fast to the tradition of men. Altogether willing are you to reject the word of God while you maintain your own traditions. And in many other ways do you dare to set up your own teachings above the law and the prophets.” “너희가 사람의 전통을 굳게 붙들면서 너희가 어떻게 계명을 버리는지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너희가 자기 전통을 유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아주 기꺼이 거절하느니라. 그리고 다른 여러 방법으로 너희는 너희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과 선지자들 위에 감히 세우고 있느니라(막7:8-9, 13).”

153:3.5 (1712.5) Jesus then directed his remarks to all present. He said: “But hearken to me, all of you. It is not that which enters into the mouth that spiritually defiles the man, but rather that which proceeds out of the mouth and from the heart.” But even the apostles failed fully to grasp the meaning of his words, for Simon Peter also asked him: “Lest some of your hearers be unnecessarily offended, would you explain to us the meaning of these words?” And then said Jesus to Peter: “Are you also hard of understanding? Know you not that every plant which my heavenly Father has not planted shall be rooted up? Turn now your attention to those who would know the truth. You cannot compel men to love the truth. Many of these teachers are blind guides. And you know that, if the blind lead the blind, both shall fall into the pit. But hearken while I tell you the truth concerning those things which morally defile and spiritually contaminate men. I declare it is not that which enters the body by the mouth or gains access to the mind through the eyes and ears, that defiles the man. Man is only defiled by that evil which may originate within the heart, and which finds expression in the words and deeds of such unholy persons. Do you not know it is from the heart that there come forth evil thoughts, wicked projects of murder, theft, and adulteries, together with jealousy, pride, anger, revenge, railings, and false witness? And it is just such things that defile men, and not that they eat bread with ceremonially unclean hands.” 그때 예수께서 참석한 모두에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모두 내게 귀를 기울이라. 영적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 밖으로,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니라.” 그러나 사도들까지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는데, 시몬 베드로 역시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청중이 불필요하게 거슬리지 않도록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이해하기 어려우냐? 내 하늘 아버지가 심지 않은 모든 식물은 뿌리째 뽑힐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진리를 알려는 자들에게 너의 주의(注意)를 기울이라. 사람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라고 네가 강요할 수 없느니라. 이 선생들 대부분은 눈먼 안내자들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 맹인(盲人)이 맹인(盲人)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느니라.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더럽히고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그런 것들에 관한 진리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동안 귀를 기울이라. 입으로 몸에 들어가거나 눈과 귀를 통해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내가 선언하노라. 심정에서 비롯하고, 그렇게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표현에서 발견되는 그런 악(惡)으로 사람은 더럽혀질 뿐이니라. 질투(嫉妬)·자만(自慢)·분노(忿怒)·복수(復讎)·폭언(暴言욕설)·거짓 증언(證言)과 함께, 악한 생각들, 살인(殺人)·절도(竊盜)·간음(姦淫)의 사악한 계획들이 심정에서 나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바로 그런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히며, 의식에서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히지 않느니라.”

153:3.6 (1713.1) The Pharisaic commissioners of the Jerusalem Sanhedrin were now almost convinced that Jesus must be apprehended on a charge of blasphemy or on one of flouting the sacred law of the Jews; wherefore their efforts to involve him in the discussion of, and possible attack upon, some of the traditions of the elders, or so-called oral laws of the nation. No matter how scarce water might be, these traditionally enslaved Jews would never fail to go through with the required ceremonial washing of the hands before every meal. It was their belief that “it is better to die than to transgress the commandments of the elders.” The spies asked this question because it had been reported that Jesus had said, “Salvation is a matter of clean hearts rather than of clean hands.” But such beliefs, when they once become a part of one’s religion, are hard to get away from. Even many years after this day the Apostle Peter was still held in the bondage of fear to many of these traditions about things clean and unclean, only being finally delivered by experiencing an extraordinary and vivid dream. All of this can the better be understood when it is recalled that these Jews looked upon eating with unwashed hands in the same light as commerce with a harlot, and both were equally punishable by excommunication.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바리새인 위원들은, 예수께서 신성 모독의 죄나 유대인들의 신성한 율법을 경멸한 것으로 체포되어야 한다고, 이제 대체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장로들의 일부 전통들, 즉 소위 국가의 구전(口傳) 율법을 토론하고 가능하면 공격하도록 끌어들이려고 그들이 애썼습니다. 아무리 물이 부족해도, 이렇게 전통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매 식전(食前)에 의식적인 필수적 손 씻기를 반드시 거행하려 했습니다. “장로들의 계명을 어기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첩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예수께서 “구원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한 심정의 문제라.”고 말했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그들이 한 종교의 일부가 되면, 그런 믿음들은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날 후 여러 해까지도 사도 베드로는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해, 이런 여러 전통에 대한 두려움에 여전히 묶여 있다가, 특별히 생생한 꿈을 경험한 후 결국 겨우 벗어났습니다(행10:9-16). 이런 유대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 매춘부와 거래하는 것과 똑같이 여겼고, 둘 다 똑같이 추방으로 처벌했음을 생각할 때, 이런 모든 것은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153:3.7 (1713.2) Thus did the Master elect to discuss and expose the folly of the whole rabbinic system of rules and regulations which was represented by the oral law — the traditions of the elders, all of which were regarded as more sacred and more binding upon the Jews than even the teachings of the Scriptures. And Jesus spoke out with less reserve because he knew the hour had come when he could do nothing more to prevent an open rupture of relations with these religious leaders. 그래서 주님은, 성서의 가르침보다도 더 신성하게 여겨져 유대인들을 더 속박하던 모든 것, 구전(口傳) 율법 – 장로들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규칙과 규례에 속한 모든 랍비 체계의 어리석음을 토론하고 밝히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공개적 관계의 단절을 더 이상으로 막을 수 없는 시간이 왔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4. Last Words in the Synagogue 회당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210228 열매로 알려진 하느님 나라 마12: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Make a tree good and its fruit will be good, or make a tree bad and its fruit will be bad, for a tree is recognized by its fruit.

153:4.1 (1713.3) In the midst of the discussions of this after meeting, one of the Pharisees from Jerusalem brought to Jesus a distraught youth who was possessed of an unruly and rebellious spirit. Leading this demented lad up to Jesus, he said: “What can you do for such affliction as this? Can you cast out devils?” And when the Master looked upon the youth,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and, beckoning for the lad to come to him, took him by the hand and said: “You know who I am; come out of him; and I charge one of your loyal fellows to see that you do not return.” And immediately the lad was normal and in his right mind. And this is the first case where Jesus really cast an “evil spirit” out of a human being. All of the previous cases were only supposed possession of the devil; but this was a genuine case of demoniac possession, even such as sometimes occurred in those days and right up to the day of Pentecost, when the Master’s spirit was poured out upon all flesh, making it forever impossible for these few celestial rebels to take such advantage of certain unstable types of human beings. 이 모임 후 토론 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사납고 고집 센 영(靈)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청년을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발광하는 청년을 예수께 데려와, 그가 말했습니다. “이처럼 그렇게 고통받는 자를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주(主)께서 청년을 보자 불쌍해서 청년에게 오라고 불러서 그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알고 있느니라. 그에게서 나오라. 네가 돌아오지 않도록 너의 충실한 동료 하나에게 내가 지시하노라.” 즉시 청년이 정상적인 제정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실제로 인간 밖으로 “악령”을 쫓아낸,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전의 모두는 귀신 들렸다고 여겼던 경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당시 및 주(主)의 영(靈)이 모든 육체에 부어져, 이런 극소수 천상의 반역자들이 인간 중 불안정한 유형을 영원히 이용하지 못하게 만든, 오순절, 그날까지 종종 일어났던 것과 같이, 진짜 귀신 들린 경우였습니다.

153:4.2 (1714.1) When the people marveled, one of the Pharisees stood up and charged that Jesus could do these things because he was in league with devils; that he admitted in the language which he employed in casting out this devil that they were known to each other; and he went on to state that the religious teachers and leaders at Jerusalem had decided that Jesus did all his so-called miracles by the power of Beelzebub, the prince of devils. Said the Pharisee: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man; he is in partnership with Satan.”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한 바리새인이 일어나, 예수께서 귀신들과 결탁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고, 그가 이 귀신을 쫓아내면서 사용한 언어로, 그들이 서로 알고 있음을 그가 인정했다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가 귀신들의 왕(王), 바알세불(악마)의 권세로 소위 그의 모든 기적을 행한 것으로 예루살렘의 종교 교사들과 지도자들이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마12:24). 그 바리새인은, “이 사람과 아무것도 관계하지 말라. 그는 사탄과 함께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153:4.3 (1714.2) Then said Jesus: “How can Satan cast out Satan? A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if a house be divided against itself, it is soon brought to desolation. Can a city withstand a siege if it is not united? If Satan casts out Satan, he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then shall his kingdom stand? But you should know that no one can enter into the house of a strong man and despoil his goods except he first overpower and bind that strong man. And so, if I by the power of Beelzebub cast out devils, by whom do your sons cast them out? Therefore shall they be your judges. But if I, by the spirit of God, cast out devils, then has the kingdom of God truly come upon you. If you were not blinded by prejudice and misled by fear and pride, you would easily perceive that one who is greater than devils stands in your midst. You compel me to declare that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while he who gathers not with me scatters abroad. Let me utter a solemn warning to you who would presume, with your eyes open and with premeditated malice, knowingly to ascribe the works of God to the doings of devils! Verily, verily, I say to you, all your sins shall be forgiven, even all of your blasphemies, but whosoever shall blaspheme against God with deliberation and wicked intention shall never obtain forgiveness. Since such persistent workers of iniquity will never seek nor receive forgiveness, they are guilty of the sin of eternally rejecting divine forgiveness.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스스로 분쟁하는 왕국은 서지 못하느니라.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곧 황폐해지느니라(마12:25). 연합하지 않으면, 도시가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마12:26)? 그래서 그렇게 강한 자를 먼저 제압해서 결박하지 않으면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약탈할 수 없음(마12:29)을 너희가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니, 내가 바알세불의 권세로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마12:27). 그러나 하느님의 영(靈)으로 내가 귀신들을 쫓아냈다면, 진실로 하느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느니라. 너희가 편견으로 분별이 없고, 두려움과 자만심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귀신들보다 더 큰 이가 너희 중에 있음을 너희는 쉽게 눈치챘을 것이니라.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며,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를 널리 흩어지리라(마12:30)고 내가 선언하게 하느니라. 너희가 뻔히 알면서 계획적인 악의(惡意)로, 고의로 하느님이 하신 일을 귀신들의 소행으로 여기면서 주제를 넘는 너희에게 내가 엄중히 경고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모든 신성(神性) 모독(冒瀆)까지, 너희 모든 죄는 용서될 것이지만, 신중(愼重)하고 사악한 의도로 하느님을 적대하여 모독하는 누구든지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토록 집요하게 사악한 일꾼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영원히 신적 용서를 거절하는 죄를 범하고 있느니라.

153:4.4 (1714.3) “Many of you have this day come to the parting of the ways; you have come to a beginning of the making of the inevitable choice between the will of the Father and the self-chosen ways of darkness. And as you now choose, so shall you eventually be. You must either make the tree good and its fruit good, or else will the tree become corrupt and its fruit corrupt. I declare that in my Father’s eternal kingdom the tree is known by its fruits. But some of you who are as vipers, how can you, having already chosen evil, bring forth good fruits? After all, out of the abundance of the evil in your hearts your mouths speak.” “오늘 너희 대부분이 갈림길까지 왔느니라. 너희는 아버지의 뜻과 스스로-선택한 암흑의 길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결정하는 시점에 왔느니라. 지금 너희가 선택하는 대로, 너희는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 너희는 나무를 좋게 만들어 그 열매를 좋게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무가 썩어 그 열매도 썩게 되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느니라(마12:33). 그러나 독사처럼 너희 일부는 이미 악(惡)을 선택했으니, 너희가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결국 너희 심정에 가득한 악(惡)을 너희 입 밖으로 말하느니라(마12:34).”

153:4.5 (1714.4) Then stood up another Pharisee, who said: “Teacher, we would have you give us a predetermined sign which we will agree upon as establishing your authority and right to teach. Will you agree to such an arrangement?” And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This faithless and sign-seeking generation seeks a token, but no sign shall be given you other than that which you already have, and that which you shall see when the Son of Man departs from among you.” 그때 다른 바리새인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가르칠 권위와 권리를 세우는 것으로, 우리가 의견을 같이할, 예정된 표적(表迹)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마12:38). 그런 합의에 동의하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없고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가 표징(表徵)을 구하지만, 너희가 이미 가진 것과 인자(人子)가 너희 중에서 떠날(죽을) 때 너희가 보게 될 것 외에, 아무 표적도 너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153:4.6 (1714.5) And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his apostles surrounded him and led him from the synagogue. In silence they journeyed home with him to Bethsaida. They were all amazed and somewhat terror-stricken by the sudden change in the Master’s teaching tactics. They were wholly unaccustomed to seeing him perform in such a militant manner. 그가 말씀을 마치자, 그의 사도들이 그를 에워쌌고 그를 회당 밖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벳새다까지 그와 함께 집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놀랐으며, 주(主)님의 교수법(敎授法가르치는 기술)이 갑자기 바뀌어서, 얼마간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공격적인 방식으로 행하시는 그를 보면서 완전히 길이 들지 않았습니다.

5. The Saturday Evening 토요일 밤

210307 살리는 것은 영(靈)이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153:5.1 (1715.1) Time and again had Jesus dashed to pieces the hopes of his apostles, repeatedly had he crushed their fondest expectations, but no time of disappointment or season of sorrow had ever equaled that which now overtook them. And, too, there was now admixed with their depression a real fear for their safety. They were all surprisingly startled by the suddenness and completeness of the desertion of the populace. They were also somewhat frightened and disconcerted by the unexpected boldness and assertive determination exhibited by the Pharisees who had come down from Jerusalem. But most of all they were bewildered by Jesus’ sudden change of tactics. Under ordinary circumstances they would have welcomed the appearance of this more militant attitude, but coming as it did, along with so much that was unexpected, it startled them. 되풀이하여 예수께서 자기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부수셨고, 몇 번이고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대를 꺾으셨지만, 지금 그들에게 닥친 것에 못지않은 실망의 시간이나 슬픔의 시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게다가 지금은 그들의 안전에 대한 현실의 두려움이 자신들의 의기소침에 섞였습니다. 그들은 대중의 느닷없는 철저한 저버림으로 인해 의외로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보인 뜻밖의 무모함과 독단적 결정으로 인해 어느 정도 흠칫 놀라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전술 변화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일반적 상황에서 그들은 이렇게 투쟁적인 태도의 현상을 환영했을 것이었지만, 돌발 사건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153:5.2 (1715.2) And now, on top of all of these worries, when they reached home, Jesus refused to eat. For hours he isolated himself in one of the upper rooms. It was almost midnight when Joab, the leader of the evangelists, returned and reported that about one third of his associates had deserted the cause. All through the evening loyal disciples had come and gone, reporting that the revulsion of feeling toward the Master was general in Capernaum. The leaders from Jerusalem were not slow to feed this feeling of disaffection and in every way possible to seek to promote the movement away from Jesus and his teachings. During these trying hours the twelve women were in session over at Peter’s house. They were tremendously upset, but none of them deserted. 그리고 이제 그들이 집에 이르렀을 때, 이런 모든 걱정에 더해 예수께서 식사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한 윗방에서 홀로 계셨습니다. 거의 한밤중에 전도자들의 지도자 요압이 돌아와 자기 동료 약 1/3이 (하느님 나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버렸다고 보고했습니다. 주(主)님을 향해 급격히 변한 감정이 가버나움에 널리 퍼졌다고 보고하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밤 중 내내, 오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은 빠르게 이런 불만의 감정을 조장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떠나는 운동을 진전시키려 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이런 시간에 12 여성들은 베드로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아무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53:5.3 (1715.3) It was a little after midnight when Jesus came down from the upper chamber and stood among the twelve and their associates, numbering about thirty in all. He said: “I recognize that this sifting of the kingdom distresses you, but it is unavoidable. Still, after all the training you have had, was there any good reason why you should stumble at my words? Why is it that you are filled with fear and consternation when you see the kingdom being divested of these lukewarm multitudes and these halfhearted disciples? Why do you grieve when the new day is dawning for the shining forth in new glory of the spiritual teachings of the kingdom of heaven? If you find it difficult to endure this test, what, then, will you do when the Son of Man must return to the Father? When and how will you prepare yourselves for the time when I ascend to the place whence I came to this world? 한밤중이 조금 지나 예수께서 윗방에서 내려와 12사도와 그들의 동료들 사이에 섰는데, 모두 30명 정도였습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이런 체질(감별)이 너희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내가 알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느니라. 그래도, 너희가 모든 훈련을 받은 후에, 너희가 내 말에 실족하여 넘어져야 하는 적절한 이유가 있었느냐? 열의 없는 이런 군중들과 성의 없는 이런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벗어난 것을 너희가 보면서, 왜 너희는 두려움과 경악으로 가득하여 있느냐?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이 새로운 영광 속에서 빛나는 새날이 밝아오는 때에 어찌하여 너희는 슬퍼하느냐? 너희가 이런 시련을 견디기 어려워하면, 인자(人子)가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그때, 너희는 어떻게 하려느냐? 내가 이 세상에 왔던 그곳으로 상승할 때를 위하여, 너희는 언제 어떻게 자신을 준비하려느냐?

153:5.4 (1715.4) “My beloved, you must remember that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s; the flesh and all that pertains thereto is of little profit. The words which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life. Be of good cheer! I have not deserted you. Many shall be offended by the plain speaking of these days. Already you have heard that many of my disciples have turned back; they walk no more with me. From the beginning I knew that these halfhearted believers would fall out by the way. Did I not choose you twelve men and set you apart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now at such a time as this would you also desert? Let each of you look to his own faith, for one of you stands in grave danger.” And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Simon Peter said: “Yes, Lord, we are sad and perplexed, but we will never forsake you. You have taught us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have believed in you and followed with you all this time. We will not turn back, for we know that you are sent by God.” And as Peter ceased speaking, they all with one accord nodded their approval of his pledge of loyalty. “내 사랑하는 자들아, 살리는 것은 영(靈)임을 너희가 기억해야 하느니라. 육신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靈)과 생명이니라. 기운을 내라!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느니라. 요즘의 명백한 말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실족하리라. 여러 내 제자들이 되돌아갔다고 너희가 이미 들었느니라. 그들은 이제는 나와 함께 걷지 않느니라. 열의 없는 이런 신자들이 도중에 떨어져 나갈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내가 너희 12사람을 택하여 하느님 나라 대사(大使)들로 따로 세우지 않았느냐? 이제 이처럼 이런 때에 너희도 저버리려느냐? 너희 중 하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으니, 너희 각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네, 주님, 우리가 슬퍼서 당혹스럽지만, 우리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영생(永生)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고 지금껏 내내 당신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그들 모두 똑같이 그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53:5.5 (1716.1) Then said Jesus: “Go to your rest, for busy times are upon us; active days are just ahead.”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쁜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가서 쉬어라. 일할 날이 바로 앞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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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4 Last Days at Capernaum 가버나움에서 지낸 마지막 날들

Paper 154

Last Days at Capernaum 가버나움에서 지낸 마지막 며칠

1. A Week of Counsel 한 주간의 회의
2. A Week of Rest 한 주간의 휴식
Closing of the synagogues 회당들의 폐쇄
3. The Second Tiberias Conference 두 번째 티베리아스 회의
4. Saturday Night in Capernaum 토요일 밤 가버나움에서
“What shall we do with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
5. The Eventful Sunday Morning 파란(波瀾) 많은 일요일 아침
6. Jesus’ Family Arrives 예수님의 가족이 도착하다
7. The Hasty Flight 황급(遑急)한 도피

210314 영적(靈的)인 하느님 나라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I declare to you, brothers, that flesh and blood can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nor does the perishable inherit the imperishable.

154:0.1 (1717.1) ON THE eventful Saturday night of April 30, as Jesus was speaking words of comfort and courage to his downcast and bewildered disciples, at Tiberias a council was being held between Herod Antipas and a group of special commissioners representing the Jerusalem Sanhedrin. These scribes and Pharisees urged Herod to arrest Jesus; they did their best to convince him that Jesus was stirring up the populace to dissension and even to rebellion. But Herod refused to take action against him as a political offender. Herod’s advisers had correctly reported the episode across the lake when the people sought to proclaim Jesus king and how he rejected the proposal. 4월 30일 중대한 그 토요일 밤, 예수께서 기가 꺾여 당황한 그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하시고 계실 때, 티베리아스에서 헤롯 안티파스와 예루살렘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한 무리의 특별 위원회원들 사이에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헤롯이 예수를 체포하도록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대중에게 분쟁과 반역까지 선동하고 있었다고 최선을 다해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정치범(政治犯)으로 단속(團束)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선포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 제안을 어떻게 거절했는지, 헤롯의 조언자들이 호수 건너편의 사건을 정확히 보고했었습니다.

154:0.2 (1717.2) One of Herod’s official family, Chuza, whose wife belonged to the women’s ministering corps, had informed him that Jesus did not propose to meddle with the affairs of earthly rule; that he was only concern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his believers, which brotherhood he called the kingdom of heaven. Herod had confidence in Chuza’s reports, so much so that he refused to interfere with Jesus’ activities. Herod was also influenced at this time, in his attitude toward Jesus, by his superstitious fear of John the Baptist. Herod was one of those apostate Jews who, while he believed nothing, feared everything. He had a bad conscience for having put John to death, and he did not want to become entangled in these intrigues against Jesus. He knew of many cases of sickness which had been apparently healed by Jesus, and he regarded him as either a prophet or a relatively harmless religious fanatic. 헤롯의 내각(內閣) 중 한 사람 추자의 아내가 여성 사역단(團)에 속했는데, 예수는 지상 통치 업무에 관련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자기 신자들의 영적 형제 사랑, 자신이 하늘나라로 부르는 형제 사랑 확립에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추자가 헤롯에게 보고했습니다. 헤롯은 추자의 보고를 신뢰해서, 그만큼 예수의 활동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또한 이 무렵에, 세례 요한을 미신적으로 두려워하여 예수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헤롯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두려워했던 그런 배교자 유대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요한을 죽여서 꺼림칙했으며, 예수를 적대하는 이런 음모에 얽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명백히 치유했던 여러 질병의 사례를 알고 있었으며, 그는 그를 예언자나 비교적 해롭지 않은 종교적 광신자로 여겼습니다.

154:0.3 (1717.3) When the Jews threatened to report to Caesar that he was shielding a traitorous subject, Herod ordered them out of his council chamber. Thus matters rested for one week, during which time Jesus prepared his followers for the impending dispersion. 헤롯이 배신자를 감싸고 있었다고, 유대인들이 카이사르에게 보고하겠다고 협박하자, 헤롯이 명령하여 그들을 자기 회의실에서 내보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한 주간 그대로 있었고, 그동안 예수님은 임박한 분산(分散 갈라져 흩어짐)을 위해 자기 추종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1. A Week of Counsel 한 주간의 회의

154:1.1 (1717.4) From May 1 to May 7 Jesus held intimate counsel with his followers at the Zebedee house. Only the tried and trusted disciples were admitted to these conferences. At this time there were only about one hundred disciples who had the moral courage to brave the opposition of the Pharisees and openly declare their adherence to Jesus. With this group he held sessions morning, afternoon, and evening. Small companies of inquirers assembled each afternoon by the seaside, where some of the evangelists or apostles discoursed to them. These groups seldom numbered more than fifty. (AD29년) 5월 1일에서 5월 7일까지, 예수님은 세베대 집에서 자기 추종자들과 자세히 의논했습니다. 믿음직하게 신뢰할 수 있는 제자들만 이 모임에 들였습니다. 이 무렵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용감히 맞서며 예수님을 숨김없이 자기들이 지지한다고 선포할 도덕적 용기를 지닌 제자들은 약 1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이 무리와 오전, 오후, 저녁에 회의를 열었습니다. 작은 질문자 일행이 오후마다 해변에 모였고, 일부 전도자들이나 사도들이 그들에게 강연했습니다. 이런 그룹은 좀처럼 50개를 넘지 않았습니다.

154:1.2 (1717.5) On Friday of this week official action was taken by the rulers of the Capernaum synagogue closing the house of God to Jesus and all his followers. This action was taken at the instigation of the Jerusalem Pharisees. Jairus resigned as chief ruler and openly aligned himself with Jesus. 이 주간 금요일(AD29. 5월 6일)에 가버나움 회당장들이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느님의 집을 폐쇄한다고 공식으로 조치했습니다. 이 조처는 예루살렘 바리새인들의 선동으로 취해졌습니다. 야이러스는 수석 회당장을 사임했고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편들었습니다.

154:1.3 (1718.1) The last of the seaside meetings was held on Sabbath afternoon, May 7. Jesus talked to less than one hundred and fifty who had assembled at that time. This Saturday night marked the time of the lowest ebb in the tide of popular regard for Jesus and his teachings. From then on there was a steady, slow, but more healthful and dependable growth in favorable sentiment; a new following was built up which was better grounded in spiritual faith and true religious experience. The more or less composite and compromising transition stage between the materialistic concepts of the kingdom held by the Master’s followers and those more idealistic and spiritual concepts taught by Jesus, had now definitely ended. From now on there was a more open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in its larger scope and in its far-flung spiritual implications. 마지막 해변 모임이 5월 7일 안식일 오후에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때 모인, 150명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토요일 밤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가장 낮은 쇠퇴기였습니다. 그때부터 안정적으로, 더디었지만, 호의적인 정서에 있어서, 더 건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장이 있었습니다. 영적 신앙과 참된 종교적 체험에 더 입각한 새 추종자들이 집결했습니다. 주(主)의 추종자들이 지녔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물질적 개념과 예수가 가르쳤던, 그렇게 더 이상(理想)적이며 영적인 개념 사이에 얼마간 혼합하고 타협하는 과도기 단계가 이제 분명히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더 넓은 범위와 광범위한 영적 영향으로 하느님 나라 복음을 더 버젓이 선포했습니다.

2. A Week of Rest 한 주간의 휴식

210321 혼(魂)의 영화(靈化)를 위한 문제와 노력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they said.

154:2.1 (1718.2) Sunday, May 8, A.D. 29, at Jerusalem, the Sanhedrin passed a decree closing all the synagogues of Palestine to Jesus and his followers. This was a new and unprecedented usurpation of authority by the Jerusalem Sanhedrin. Theretofore each synagogue had existed and functioned as an independent congregation of worshipers and was under the rule and direction of its own board of governors. Only the synagogues of Jerusalem had been subject to the authority of the Sanhedrin. This summary action of the Sanhedrin was followed by the resignation of five of its members. One hundred messengers were immediately dispatched to convey and enforce this decree. Within the short space of two weeks every synagogue in Palestine had bowed to this manifesto of the Sanhedrin except the synagogue at Hebron. The rulers of the Hebron synagogue refused to acknowledge the right of the Sanhedrin to exercise such jurisdiction over their assembly. This refusal to accede to the Jerusalem decree was based on their contention of congregational autonomy rather than on sympathy with Jesus’ cause. Shortly thereafter the Hebron synagogue was destroyed by fire. AD 29년 5월 8일 일요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을 폐쇄한다는 판결을 가결(可決 옳다고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산헤드린에 의한 새롭고 전례가 없는 권위의 불법 사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각 회당은 경배자들의 독립된 모임으로 존재하고 활동했었고, 자체 간사(幹事)회의 규칙과 관리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당들만 산헤드린의 권위에 복종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이런 정식 절차를 생략한 조처 후에 다섯 위원이 사임했습니다. 100명의 메신저가 이 판결을 전달하고 시행하도록 즉시 급파(急派)되었습니다. 짧은 2주 사이에, 헤브론의 회당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이 산헤드린의 이 선언을 따랐습니다. 헤브론 회당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렇게 지배하려는 산헤드린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운동에 공감하기보다는 자기들 모임의 자치권 취지(趣旨)에 근거하여 예루살렘 판결에 대해 이렇게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바로 헤브론 회당은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154:2.2 (1718.3) This same Sunday morning, Jesus declared a week’s holiday, urging all of his disciples to return to their homes or friends to rest their troubled souls and speak words of encouragement to their loved ones. He said: “Go to your several places to play or fish while you pray for the extension of the kingdom.” 바로 이 일요일 아침에 예수께서 1주간 휴가를 밝히시며, 그의 모든 제자가 고향이나 친구들에게 돌아가 어수선한 혼들을 쉬게 하고 자신들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러 곳으로 놀거나 낚시하러 가라.”

154:2.3 (1718.4) This week of rest enabled Jesus to visit many families and groups about the seaside. He also went fishing with David Zebedee on several occasions, and while he went about alone much of the time, there always lurked near by two or three of David’s most trusted messengers, who had no uncertain orders from their chief respecting the safeguarding of Jesus. There was no public teaching of any sort during this week of rest. 이런 휴식 주간에 예수님은 해변 근처의 여러 가정과 무리를 방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다윗 세베대와 여러 번 낚시를 갔고, 그가 여러 시간 홀로 다니는 동안 언제나 다윗이 가장 신임(信任)하는 두세 명의 메신저가, 예수님을 보호하도록 그들 상관의 분명한 명령을 받아, 근처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런 휴식 주간에 어떤 종류의 대중 가르침도 없었습니다.

154:2.4 (1718.5) This was the week that Nathaniel and James Zebedee suffered from more than a slight illness. For three days and nights they were acutely afflicted with a painful digestive disturbance. On the third night Jesus sent Salome, James’s mother, to her rest, while he ministered to his suffering apostles. Of course Jesus could have instantly healed these two men, but that is not the method of either the Son or the Father in dealing with these commonplace difficulties and afflictions of the children of men 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Never once, throughout all of his eventful life in the flesh, did Jesus engage in any sort of supernatural ministration to any member of his earth family or in behalf of any one of his immediate followers. 이 주간에 나다니엘과 야고보 세베대가 가볍지 않은 질병으로 앓아누웠습니다. 3일 밤낮 그들은 고통스러운 급성 소화 장애를 앓았습니다. 3일 밤에 예수께서 살로메, 야고보의 어머니를 쉬라고 보내는 한편 자신이 고생하는 사도들을 돌보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즉시 이 두 사람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사람 자녀들의 이런 일상적 어려움과 질병을 다루는 아들이나 아버지의 방식이 아닙니다. 파란 많은 예수의 모든 육신 생활 내내, 그는 자신의 지상 가족 중 어느 식구나 자신의 직계 추종자 중 누구를 위해서도,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보살핌을 결코 한 번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154:2.5 (1719.1) Universe difficulties must be met and planetary obstacles must be encountered as a part of the experience training provided for the growth and development, the progressive perfection, of the evolving souls of mortal creatures. The spiritualization of the human soul requires intimate experience with the educational solving of a wide range of real universe problems. The animal nature and the lower forms of will creatures do not progress favorably in environmental ease. Problematic situations, coupled with exertion stimuli, conspire to produce those activities of mind, soul, and spirit which contribute mightily to the achievement of worthy goals of mortal progression and to the attainment of higher levels of spirit destiny. 필사 창조물들의 진화하는 혼(魂)들의 성장과 발전, 즉 점진적 완전을 위해 마련된, 체험 훈련의 일부로써, 우주 어려움은 겪어야 하고 행성의 장애물들에 부닥쳐야 합니다. 인간 혼(魂)의 영화(靈化)는 광범위한 실제 우주 문제를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일신상(一身上)의 직접적 체험이 필요합니다. 동물 본성과 의지 창조물들의 낮은 형태는 환경이 편안하면, 순조롭게 진보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상황들은, 격심하게 계속 노력하는 자극과 결부하여, 필사자 진보에 어울리는 목표 성취와 영(靈) 운명의 더 높은 수준 도달에 대단히 도움이 되는, 그런 마음, 혼(魂) 및 영(靈)의 활동들이 생기도록 서로 협력합니다.

3. The Second Tiberias Conference 두 번째 티베리아스 회의

21032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154:3.1 (1719.2) On May 16 the second conference at Tiberias between the authorities at Jerusalem and Herod Antipas was convened. Both the religious and the political leaders from Jerusalem were in attendance. The Jewish leaders were able to report to Herod that practically all the synagogues in both Galilee and Judea were closed to Jesus’ teachings. A new effort was made to have Herod place Jesus under arrest, but he refused to do their bidding. On May 18, however, Herod did agree to the plan of permitting the Sanhedrin authorities to seize Jesus and carry him to Jerusalem to be tried on religious charges, provided the Roman ruler of Judea concurred in such an arrangement. Meanwhile, Jesus’ enemies were industriously spreading the rumor throughout Galilee that Herod had become hostile to Jesus, and that he meant to exterminate all who believed in his teachings. 5월 16일(AD29, 월) 티베리아스에서 예루살렘 당국과 헤롯 안티파스 사이에 두 번째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헤롯에게, 갈릴리와 유대의 거의 모든 회당이 예수의 가르침을 차단했다고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새로 시도했지만, 노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5월 18일(수)에 헤롯은, 유대 로마 통치자가 그런 합의에 동의한다면, 산헤드린 당국이 예수를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종교적 혐의로 재판에 넘기도록 허락한다는 안건(案件)에 동의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적(敵)들은 갈릴리 전역에 헤롯이 예수를 반대하게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믿는 모두를 몰살할 작정이라고 부지런히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154:3.2 (1719.3) On Saturday night, May 21, word reached Tiberias that the civil authorities at Jerusalem had no objection to the agreement between Herod and the Pharisees that Jesus be seized and carried to Jerusalem for trial before the Sanhedrin on charges of flouting the sacred laws of the Jewish nation. Accordingly, just before midnight of this day, Herod signed the decree which authorized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to seize Jesus within Herod’s domains and forcibly to carry him to Jerusalem for trial. Strong pressure from many sides was brought to bear upon Herod before he consented to grant this permission, and he well knew that Jesus could not expect a fair trial before his bitter enemies at Jerusalem. 5월 21일 토요일 밤에 예루살렘의 시민 당국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산헤드린 앞에서 유대 민족의 신성한 율법 모욕 혐의로 재판한다는, 헤롯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합의에, 이의(異意 다른 의견)가 없었다는 소식이 티베리아스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날 밤 12시 직전에 헤롯이, 헤롯의 영토 내에서 예수를 체포하여 재판을 위해 그를 강제로 예루살렘에 데려가도록 산헤드린의 관리들에게 위임한다는 판결에 서명했습니다. 헤롯이 이 허가에 승인하기 전에 그는 여러 편에서 강한 압력을 받았으며,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의 신랄한 적(敵)들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4. Saturday Night in Capernaum 토요일 밤 가버나움에서

154:4.1 (1719.4) On this same Saturday night, in Capernaum a group of fifty leading citizens met at the synagogue to discuss the momentous question: “What shall we do with Jesus?” They talked and debated until after midnight, but they could not find any common ground for agreement. Aside from a few persons who inclined to the belief that Jesus might be the Messiah, at least a holy man, or perhaps a prophet, the meeting was divided into four nearly equal groups who held, respectively, the following views of Jesus: 바로 이 토요일 밤 가버나움에서 50명의 지도적 시민들이 회당에서 만나 중대한 질문을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밤 12시 이후까지 그들이 이야기하고 논의했지만, 합의할 공통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 적어도 거룩한 사람 아니면 아마 선지자일 수도 있다고 믿으려 했던 몇 사람을 제외하고, 그 모임은 거의 동등한 네 집단으로 나뉘어 각기 예수님에 대해 다음의 견해를 가졌습니다.

154:4.2 (1719.5) 1. That he was a deluded and harmless religious fanatic. 그는 미혹되었고 해가 없는 종교적 광신자였습니다.

154:4.3 (1719.6) 2. That he was a dangerous and designing agitator who might stir up rebellion. 반역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하고 교활한 선동가였습니다.

154:4.4 (1720.1) 3. That he was in league with devils, that he might even be a prince of devils. 그는 악령(惡靈)들과 연합되어 있으며, 악령(惡靈)들의 왕일 수도 있습니다.

154:4.5 (1720.2) 4. That he was beside himself, that he was mad, mentally unbalanced. 그는 이성을 잃었고, 미쳤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154:4.6 (1720.3) There was much talk about Jesus’ preaching doctrines which were upsetting for the common people; his enemies maintained that his teachings were impractical, that everything would go to pieces if everybody made an honest effort to live in accordance with his ideas. And the men of many subsequent generations have said the same things. Many intelligent and well-meaning men, even in the more enlightened age of these revelations, maintain that modern civilization could not have been built upon the teachings of Jesus — and they are partially right. But all such doubters forget that a much better civilization could have been built upon his teachings, and sometime will be. This world has never seriously tried to carry out the teachings of Jesus on a large scale, notwithstanding that halfhearted attempts have often been made to follow the doctrines of so-called Christianity. 일반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던 예수님의 설교 교리에 대해서 많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의 적(敵)들은 그의 가르침이 비현실적(非現實的)이어서, 모든 사람이 그의 관념에 따라서 살려고 정직하게 노력하면 모두 엉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후대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런 계시를 받은 더 진보된 시대에도, 지능적이며 좋은 뜻을 지닌 여러 사람이, 현대 문명은 예수의 가르침들 위에 세워질 수 없으며 자신들이 부분적으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혹을 품는 모든 자는 훨씬 더 나은 문명이 그의 가르침들 위에 세워질 수 있었고 언젠가 그럴 것임을 잊어버립니다. 열의 없이 가끔 소위 기독교 교리를 따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 세상은 결코 진지하게 대규모로 예수의 가르침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5. The Eventful Sunday Morning 파란(波瀾) 많은 일요일 아침

210404 고난 중에 격려하시는 예수님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154:5.1 (1720.4) May 22 was an eventful day in the life of Jesus. On this Sunday morning, before daybreak, one of David’s messengers arrived in great haste from Tiberias, bringing the word that Herod had authorized, or was about to authorize, the arrest of Jesus by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The receipt of the news of this impending danger caused David Zebedee to arouse his messengers and send them out to all the local groups of disciples, summoning them for an emergency council at seven o’clock that morning. When the sister-in-law of Jude (Jesus’ brother) heard this alarming report, she hastened word to all of Jesus’ family who dwelt near by, summoning them forthwith to assemble at Zebedee’s house. And in response to this hasty call, presently there were assembled Mary, James, Joseph, Jude, and Ruth. 예수님의 일생에서 5월 22일은 파란(波瀾) 많은 날이었습니다. 이 일요일 아침 동트기 전에 다윗의 한 메신저가 티베리아스에서 몹시 급하게 도착해서,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헤롯이 권한을 부여했거나 막 위임하려 했었다는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이 임박한 위험의 소식을 받고 다윗 세베대는 자기 메신저들을 깨워서 그들을 그 지역의 모든 제자 집단에 보내어 그날 아침 7시에 비상 회의로 소집했습니다. 유다(예수의 동생)의 처제가 놀랄만한 이 보고를 듣고, 서둘러 근처에 살던 예수의 모든 가족에게 가서 세베대의 집에 당장 모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급한 이런 소집에 응해서 마리아, 야고보, 요셉, 유다와 룻이 즉시 모였습니다.

154:5.2 (1720.5) At this early morning meeting Jesus imparted his farewell instructions to the assembled disciples; that is, he bade them farewell for the time being, knowing well that they would soon be dispersed from Capernaum. He directed them all to seek God for guidance and to carry on the work of the kingdom regardless of consequences. The evangelists were to labor as they saw fit until such time as they might be called. He selected twelve of the evangelists to accompany him; the twelve apostles he directed to remain with him no matter what happened. The twelve women he instructed to remain at the Zebedee house and at Peter’s house until he should send for them. 이 이른 아침 회의에서 예수께서 모인 제자들에게 작별 지시를 전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가버나움에서 곧 흩어질 것을 잘 알았기에 당분간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 하느님의 인도를 구하고 결과를 개의치 말고 하느님 나라 과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부름을 받을 그때까지 자신들이 적절히 생각한 대로 수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갈 12명의 전도자를 택했습니다. 12 사도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함께 남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2 여성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전할 때까지 세베대와 베드로의 집에 남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54:5.3 (1720.6) Jesus consented to David Zebedee’s continuing his countrywide messenger service, and in bidding the Master farewell presently, David said: “Go forth to your work, Master. Don’t let the bigots catch you, and never doubt that the messengers will follow after you. My men will never lose contact with you, and through them you shall know of the kingdom in other parts, and by them we will all know about you. Nothing that might happen to me will interfere with this service, for I have appointed first and second leaders, even a third. I am neither a teacher nor a preacher, but it is in my heart to do this, and none can stop me.” 예수님은 다윗 세베대의 계속되는 전국적 메신저 봉사를 허락하시자, 다윗이 즉시 주님께 작별을 고하며 말했습니다. “주(主)여, 당신의 일을 하십시오. 완고한 자들에게 붙들리지 마시고, 메신저들이 당신을 따르고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제 사람들은 결코 당신과 연락을 끊지 않을 것이니, 그들을 통해 당신께서 다른 지역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 것이며, 그들로 인해 우리 모두 당신에 대해 알 것입니다. 제가 첫째, 둘째 지도자, 셋째까지도 임명했으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업무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교사도 전도자도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제 심정에 있으니 누구도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154:5.4 (1720.7) About 7:30 this morning Jesus began his parting address to almost one hundred believers who had crowded indoors to hear him. This was a solemn occasion for all present, but Jesus seemed unusually cheerful; he was once more like his normal self. The seriousness of weeks had gone, and he inspired all of them with his words of faith, hope, and courage. 이 아침 7시 30분경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들으러 실내에 모여든 거의 100명의 신자에게 고별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참석자에게 엄숙한 때였지만, 예수님은 전에 없이 밝아 보였습니다. 그는 또다시 평소와 같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몇 주가 지나갔고, 그는 신앙, 희망, 용기의 말로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6. Jesus’ Family Arrives 예수의 가족이 도착하다

210418 예수님의 가족 1 마12: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46 While Jesus was still talking to the crowd, his mother and brothers stood outside, wanting to speak to him. 47 Someone told him, “Your mother and brothers are standing outside, wanting to speak to you.” 48 He replied to him, “Who is my mother, and who are my brothers?” 49 Pointing to his disciples,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154:6.1 (1721.1) It was about eight o’clock on this Sunday morning when five members of Jesus’ earth family arrived on the scene in response to the urgent summons of Jude’s sister-in-law. Of all his family in the flesh, only one, Ruth, believed wholeheartedly and continuously in the divinity of his mission on earth. Jude and James, and even Joseph, still retained much of their faith in Jesus, but they had permitted pride to interfere with their better judgment and real spiritual inclinations. Mary was likewise torn between love and fear, between mother love and family pride. Though she was harassed by doubts, she could never quite forget the visit of Gabriel ere Jesus was born. The Pharisees had been laboring to persuade Mary that Jesus was beside himself, demented. They urged her to go with her sons and seek to dissuade him from further efforts at public teaching. They assured Mary that soon Jesus’ health would break, and that only dishonor and disgrace could come upon the entire family as a result of allowing him to go on. And so, when the word came from Jude’s sister-in-law, all five of them started at once for Zebedee’s house, having been together at Mary’s home, where they had met with the Pharisees the evening before. They had talked with the Jerusalem leaders long into the night, and all were more or less convinced that Jesus was acting strangely, that he had acted strangely for some time. While Ruth could not explain all of his conduct, she insisted that he had always treated his family fairly and refused to agree to the program of trying to dissuade him from further work. 이 일요일(AD29. 5.22) 아침 8시경에 예수님의 지상 가족 5명이 유다 처제의 긴급 전갈에 응해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모든 육신의 가족 중 룻Ruth만 전심으로 계속해서 지상에서 그의 사명이 신성(神性)하다고 믿었습니다. 유다, 야고보 그리고 요셉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대부분 유지했지만, 그들은 자부심(自負心)이 자신들의 더 나은 분별과 진정한 영적 의향(意向)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마리아도 사랑과 두려움 사이, 모성애와 가족의 자부심(自負心) 사이에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녀는 의심으로 시달렸지만,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前)에 있었던 가브리엘의 방문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성을 잃고 미쳤다고 마리아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가서 그를 설득하여 더 이상의 공적 가르침을 단념하도록 다그쳤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곧 예수의 건강이 약해질 것이며, 그가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결과로 가족 전체에게 수치와 망신만 당하리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날 저녁에 바리새인들과 만났던 마리아의 집에서 함께 있다가 유다 처제의 말을 듣고, 그들 다섯 명 모두 세베대의 집으로 즉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밤이 깊도록 오래 이야기했고, 예수가 이상하게 행동했고 한동안 이상하게 행동했었다고 모두 거의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룻은 그의 행위를 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기 가족을 공정하게 대하셨다고 주장했으며, 그를 설득해서 더 이상의 일을 단념하게 하려는 계획에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154:6.2 (1721.2) On the way to Zebedee’s house they talked these things over and agreed among themselves to try to persuade Jesus to come home with them, for, said Mary: “I know I could influence my son if he would only come home and listen to me.” James and Jude had heard rumors concerning the plans to arrest Jesus and take him to Jerusalem for trial. They also feared for their own safety. As long as Jesus was a popular figure in the public eye, his family allowed matters to drift along, but now that the people of Capernaum and the leaders at Jerusalem had suddenly turned against him, they began keenly to feel the pressure of the supposed disgrace of their embarrassing position. 세베대의 집으로 가면서 그들은 이런 일들을 다시 이야기했고, 마리아는 “그가 집에 와서 내 말을 듣기만 하면 내가 그를 감화할 수 있는 줄 내가 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들과 함께 집에 오도록 예수님을 설득하기로 자기들끼리 찬성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를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재판하려는 계획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인 한, 그의 가족은 흐르는 대로 문제들을 놔뒀지만, 가버나움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갑자기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곤란한 입장에 대한 소위 수치심의 압박을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54:6.3 (1721.3) They had expected to meet Jesus, take him aside, and urge him to go home with them. They had thought to assure him that they would forget his neglect of them — they would forgive and forget — if he would only give up the foolishness of trying to preach a new religion which could bring only trouble to himself and dishonor upon his family. To all of this Ruth would say only: “I will tell my brother that I think he is a man of God, and that I hope he would be willing to die before he would allow these wicked Pharisees to stop his preaching.” Joseph promised to keep Ruth quiet while the others labored with Jesus. 그들은 예수를 만나,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 자신들과 함께 집에 가도록 강권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에게 곤란과 그의 가족에게 수치만 일으키는 새 종교를 전하려는 어리석음을 포기만 하면, 그가 자신들을 돌보지 않은 것을 자신들이 잊어버릴 것임 – 그들이 용서하고 잊으려 한다고 그에게 딱 잘라 말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룻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단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악한 바리새인들이 그의 전도를 가로막도록 그가 놔두기 전에 그가 기꺼이 죽기를 내가 바란다고 나는 내 오빠에게 말하렵니다.” 다른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애쓰는 동안, 요셉은 룻을 달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54:6.4 (1721.4) When they reached the Zebedee house, Jesus was in the very midst of delivering his parting address to the disciples. They sought to gain entrance to the house, but it was crowded to overflowing. Finally they established themselves on the back porch and had word passed in to Jesus, from person to person, so that it finally was whispered to him by Simon Peter, who interrupted his talking for the purpose, and who said: “Behold, your mother and your brothers are outside, and they are very anxious to speak with you.” Now it did not occur to his mother how important was the giving of this parting message to his followers, neither did she know that his address was likely to be terminated any moment by the arrival of his apprehenders. She really thought, after so long an apparent estrangement, in view of the fact that she and his brothers had shown the grace actually to come to him, that Jesus would cease speaking and come to them the moment he received word they were waiting. 그들이 세베대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창 고별 연설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려 했지만, 만원(滿員)이 되어 붐비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뒤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예수께 기별을 전해서, 마침내 시몬 베드로가 그 목적으로 그의 말을 중단시키며, 그에게 속삭여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밖에 있는데, 당신과 대화하기를 몹시 바랍니다.” 이때 그의 모친은 이 고별 메시지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으며, 그의 연설이 그를 체포하는 자들의 도착으로 어느 순간에 끝나게 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오래 멀어진 것으로 여겨진 후, 자신과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사실 자비를 보이려고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별을 받는 순간, 그는 연설을 그치고 자신들에게 올 것이라고 그녀는 정말로 생각했습니다.

154:6.5 (1722.1) It was just another of those instances in which his earth family could not comprehend that he must be about his Father’s business. And so Mary and his brothers were deeply hurt when, notwithstanding that he paused in his speaking to receive the message, instead of his rushing out to greet them, they heard his musical voice speak with increased volume: “Say to my mother and my brothers that they should have no fear for me. The Father who sent me into the world will not forsake me; neither shall any harm come upon my family. Bid them be of good courage and put their trust in the Father of the kingdom. But, after all, who is my mother and who are my brothers?” And stretching forth his hands toward all of his disciples assembled in the room, he said: “I have no mother; I have no brothers. Behold my mother and behold my brethren! For whosoever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the same is my mother, my brother, and my sister.” 그가 자기 아버지의 업무에 관련되어야 함을 그의 지상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또 다른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갈(傳喝)을 받고 연설을 잠시 멈췄지만, 자신들에게 인사하러 달려 나오는 대신에, 더 큰 소리로 말하는 듣기 좋은 그의 음성을 그들이 들었을 때,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은 깊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내 모친과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 나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가 나를 버리지 않으시리라. 내 가족에게 어떤 해도 없으리라. 용기를 내어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께 맡기라고 그들에게 이르라. 그러나 결국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겠느냐?” 그리고 방에 모인 그의 제자들 모두에게 그의 손을 펴며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모친이 없느니라. 나는 형제들이 없느니라. 내 모친과 내 형제들을 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내 모친, 내 형제, 내 자매이니라.”

210425 말씀에 순종(順從)하려는 자 눅11:27-28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7 As Jesus was saying these things, a woman in the crowd called out, “Blessed is the mother who gave you birth and nursed you.” 28 He replied, “Blessed rather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ey it.”

154:6.6 (1722.2) And when Mary heard these words, she collapsed in Jude’s arms. They carried her out in the garden to revive her while Jesus spoke the concluding words of his parting message. He would then have gone out to confer with his mother and his brothers, but a messenger arrived in haste from Tiberias bringing word that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were on their way with authority to arrest Jesus and carry him to Jerusalem. Andrew received this message and, interrupting Jesus, told it to him. 마리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유다의 품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들이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도록 밖에 있는 정원으로 옮기는 동안 예수님은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끝맺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 모친과 동생들과 서로 의논하려고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메신저가 티베리아스에서 급히 도착하여,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갈 위임장(委任狀)을 가지고 오는 중이라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안드레가 이 소식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중단시키며 그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154:6.7 (1722.3) Andrew did not recall that David had posted some twenty-five sentinels about the Zebedee house, and that no one could take them by surprise; so he asked Jesus what should be done. The Master stood there in silence while his mother, having heard the words, “I have no mother,” was recovering from the shock in the garden. It was at just this time that a woman in the room stood up and exclaimed, “Blessed is the womb that bore you and blessed are the breasts that nursed you.” Jesus turned aside a moment from his conversation with Andrew to answer this woman by saying, “No, rather is the one blessed who hears the word of God and dares to obey it.” 안드레는 다윗이 약 25명의 감시병을 세베대의 집 주변에 배치해서 아무도 그들을 불시에 덮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뭘 해야 하는지 여쭈었습니다. “내게는 모친이 없다.”라는 말을 들었던 그의 모친이 정원에서 충격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 주(主)님은 조용히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방에 있던 한 여성이 일어나서 “당신을 밴 태(胎)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눅11:27).”라고 외쳤습니다. 안드레와 대화하던 예수께서 이 여성에게 답하려고 잠시 돌이키며 말했습니다.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 있게 그것에 순종(順從)하려는 자가 복되니라(눅11:28).”

154:6.8 (1722.4) Mary and Jesus’ brothers thought that Jesus did not understand them, that he had lost interest in them, little realizing that it was they who failed to understand Jesus. Jesus fully understood how difficult it is for men to break with their past. He knew how human beings are swayed by the preacher’s eloquence, and how the conscience responds to emotional appeal as the mind does to logic and reason, but he also knew how far more difficult it is to persuade men to disown the past.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면서, 예수께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의 과거와 관계를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설교자의 웅변으로 어떻게 좌우되며, 마음이 논리와 이성에 반응하는 것처럼, 양심이 감정적 호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셨지만, 그는 또한 사람을 설득해서 과거와 인연을 끊게 하기가 얼마나 훨씬 어려운지, 아셨습니다.

154:6.9 (1722.5) It is forever true that all who may think they are misunderstood or not appreciated have in Jesus a sympathizing friend and an understanding counselor. He had warned his apostles that a man’s foes may be they of his own household, but he had hardly realized how near this prediction would come to apply to his own experience. Jesus did not forsake his earth family to do his Father’s work — they forsook him. Later on, after the Master’s death and resurrection, when James became connected with the early Christian movement, he suffered immeasurably as a result of his failure to enjoy this earlier association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자신들이 오해받거나 정당히 평가받지 못한다고 여기는 모든 자는 예수 안에서 자기 편과 이해하는 의논 상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영원히 참말입니다. 그는 자기 사도들에게, 사람의 원수들이 자신의 집안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었지만, 이런 예언이 자신의 체험에 이렇게 가깝게 적용될 것이라고, 그는 거의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자신의 지상 가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그를 버렸습니다. 나중에 주(主)의 별세와 부활 후, 야고보가 초기 기독교 운동에 관련되자, 그는 예수 및 그의 제자들과 더 일찍 이런 친밀한 관계를 누리지 못한 결과로, 헤아릴 수 없이 고생했습니다.

154:6.10 (1723.1) In passing through these events, Jesus chose to be guided by the limited knowledge of his human mind. He desired to undergo the experience with his associates as a mere man. And it was in the human mind of Jesus to see his family before he left. He did not wish to stop in the midst of his discourse and thus render their first meeting after so long a separation such a public affair. He had intended to finish his address and then have a visit with them before leaving, but this plan was thwarted by the conspiracy of events which immediately followed.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 마음에 속한 제한된 지식을 따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료들과 함께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인간적 마음에, 자신이 떠나기 전에 자기 가족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강연 중에 멈춰서, 그렇게 오랫동안 떠난 이후, 자신들의 첫 만남을 그런 공적 행사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연설을 마치고 떠나기 전에 그들과 만나려 했지만, 이 계획은 바로 뒤이은 사건들이 겹쳐서 꺾였습니다.

154:6.11 (1723.2) The haste of their flight was augmented by the arrival of a party of David’s messengers at the rear entrance of the Zebedee home. The commotion produced by these men frightened the apostles into thinking that these new arrivals might be their apprehenders, and in fear of immediate arrest, they hastened through the front entrance to the waiting boat. And all of this explains why Jesus did not see his family waiting on the back porch. 세베대의 집 뒷문에 다윗의 메신저 일생이 도착하여 그들은 도피를 더 서둘렀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해 사도들이 놀라서, 이 새로 도착한 자들을 자신들을 체포하는 자들로 여기고, 당장 잡힐까 봐 두려워서, 그들은 앞문을 통해 대기해 놓은 보트로 서둘러 갔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뒤 베란다에서 기다리던 자기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 이유를 말합니다.

154:6.12 (1723.3) But he did say to David Zebedee as he entered the boat in hasty flight: “Tell my mother and my brothers that I appreciate their coming, and that I intended to see them. Admonish them to find no offense in me but rather to seek for a knowledge of the will of God and for grace and courage to do that will.” 그러나 그는 급히 도피하는 보트에 타면서 다윗 세베대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와 주어서 내가 감사하며, 내가 그들을 만나려고 했었다고, 내 모친과 내 동생들에게 전하라. 나로 인해 실족(失足)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할 은혜와 용기를 구하도록 그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라.”

7. The Hasty Flight 황급(遑急)한 도피

210502 머리를 둘 곳이 없으셨던 예수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Jesus replied,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154:7.1 (1723.4) And so it was on this Sunday morning, the twenty-second of May, in the year A.D. 29, that Jesus, with his twelve apostles and the twelve evangelists, engaged in this hasty flight from the Sanhedrin officers who were on their way to Bethsaida with authority from Herod Antipas to arrest him and take him to Jerusalem for trial on charges of blasphemy and other violations of the sacred laws of the Jews. It was almost half past eight this beautiful morning when this company of twenty-five manned the oars and pulled for the eastern shore of the Sea of Galilee.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12 사도 및 12 전도자와 함께 AD 29년 5월 22일 이 일요일 아침에, 신성 모독(冒瀆)과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에 대한 나머지 위반사항들의 혐의로 재판하기 위해 자신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헤롯 안티파스에게서 받은 위임장을 가지고 벳새다로 오고 있는 산헤드린 관리들로부터 이렇게 황급히 도피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아침, 거의 8시 반에, 이 일행 25명은 노(櫓)를 저어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54:7.2 (1723.5) Following the Master’s boat was another and smaller craft, containing six of David’s messengers, who had instructions to maintain contact with Jesus and his associates and to see that information of their whereabouts and safety was regularly transmitted to the home of Zebedee in Bethsaida, which had served as headquarters for the work of the kingdom for some time. But Jesus was never again to make his home at the house of Zebedee. From now on, throughout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the Master truly “had not where to lay his head.” No more did he have even the semblance of a settled abode. 주(主)님의 배 뒤에, 예수님 및 그의 동료들과 계속 접촉하고 그들의 행방과 안전의 소식을, 잠시 하느님 나라 업무를 위해 본부로 사용했던, 벳새다에 있는 세베대의 집에 정기적으로 전하도록 지시를 받은 다윗의 메신저 6명을 태운 다른 작은 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베대의 집을 결코 다시 자기 본부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그의 나머지 지상 생애 내내, 주(主)님은 참으로 “그의 머리를 둘 곳이 없었습니다(마8:20).” 그에게 더는 일정한, 거처 비슷한 것조차 없었습니다.

154:7.3 (1723.6) They rowed over to near the village of Kheresa, put their boat in the custody of friends, and began the wanderings of this eventful last year of the Master’s life on earth. For a time they remained in the domains of Philip, going from Kheresa up to Caesarea-Philippi, thence making their way over to the coast of Phoenicia. 그들은 케레사 마을 근처까지 노를 저었고, 배를 친구들의 관리에 맡겼으며, 지상에서 이렇게 주(主)님 생애의 파란(波瀾) 많은 마지막 해의 방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케레사에서 가이사랴-빌립보까지 올라가면서 빌립의 영토에 머물렀다가 거기에서 페니키아 해안으로 갔습니다.

154:7.4 (1723.7) The crowd lingered about the home of Zebedee watching these two boats make their way over the lake toward the eastern shore, and they were well started when the Jerusalem officers hurried up and began their search for Jesus. They refused to believe he had escaped them, and while Jesus and his party were journeying northward through Batanea, the Pharisees and their assistants spent almost a full week vainly searching for him in the neighborhood of Capernaum. 군중들은 이 두 척의 배가 호수를 건너 동쪽 해안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세베대의 집에 남아 있다가, 예루살렘 관리들이 서둘러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떠났습니다. 예루살렘 관리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벗어났음을 믿으려 하지 않아서, 예수님과 그의 일행이 바타니아를 거쳐서 북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바리새인들과 그 협력자들은 거의 꼬박 한 주간을 보내며 가버나움 인근에서 그를 헛되이 수색했습니다.

154:7.5 (1724.1) Jesus’ family returned to their home in Capernaum and spent almost a week in talking, debating, and praying. They were filled with confusion and consternation. They enjoyed no peace of mind until Thursday afternoon, when Ruth returned from a visit to the Zebedee house, where she learned from David that her father-brother was safe and in good health and making his way toward the Phoenician coast. 예수님의 가족은 가버나움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와 거의 한 주간 이야기하며, 논의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혼란과 경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목요일 오후에 룻이 세베대 집을 방문하여, 다윗으로부터 그녀의 아버지-오빠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페니키아 해안으로 가고 있다고 듣고 돌아와서야 비로소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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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5 Fleeing Through Northern Galilee 북(北) 갈릴리를 거쳐 도피함

Paper 155

Fleeing Through Northern Galilee 북(北)갈릴리를 거쳐 도피함

1. Why Do the Heathen Rage? 왜 이교도(異敎徒)가 분노하는가?
2. The Evangelists in Chorazin 코라진의 전도자들
3. At Caesarea-Philippi 가이사랴-빌립보에서
Truth and creed 진리와 신조(信條)
Origin of religious traditions 종교적 전통의 기원
4. On the Way to Phoenicia 페니키아로 가는 길
5. The Discourse on True Religion 참 종교에 대한 강론
6. The Second Discourse on Religion 두 번째 종교 강론

155:0.1 (1725.1) SOON after landing near Kheresa on this eventful Sunday, Jesus and the twenty-four went a little way to the north, where they spent the night in a beautiful park south of Bethsaida-Julias. They were familiar with this camping place, having stopped there in days gone by. Before retiring for the night, the Master called his followers around him and discussed with them the plans for their projected tour through Batanea and northern Galilee to the Phoenician coast. 파란(波瀾) 많은 이 일요일에 케레사 근처에 하선한 직후, 예수님과 24명은 북쪽으로 조금 갔으며, 벳새다-율리아스 남쪽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지난 시절 며칠간 거기서 보냈었기 때문에, 이 야영지에 익숙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主)께서 자기 제자들을 주위로 불러 바타니아와 북(北)갈릴리를 거쳐 페니키아 해안에 이르는 예상 여행 계획을 함께 의논했습니다.

1. Why Do the Heathen Rage? 왜 이교도(異敎徒)가 분노하는가?

210509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진리 순종 시2:1-12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 Why do the nations conspire and the peoples plot in vain? 2 The kings of the earth take their stand and the rulers gather together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his Anointed One. 3 “Let us break their chains,” they say, “and throw off their fetters.” 4 The One enthroned in heaven laughs; the Lord scoffs at them. 5 Then he rebukes them in his anger and terrifies them in his wrath, saying, 6 “I have installed my King on Zion, my holy hill.” 7 I will proclaim the decree of the LORD : He said to me, “You are my Son ; today I have become your Father. 8 Ask of me, and I will make the nations your inheritance, the ends of the earth your possession. 9 You will rule them with an iron scepter ; you will dash them to pieces like pottery.” 10 Therefore, you kings, be wise; be warned, you rulers of the earth. 11 Serve the LORD with fear and rejoice with trembling. 12 Kiss the Son, lest he be angry and you be destroyed in your way, for his wrath can flare up in a moment. Blessed are all who take refuge in him.

155:1.1 (1725.2) Said Jesus: “You should all recall how the Psalmist spoke of these times, saying, ‘Why do the heathen rage and the peoples plot in vain? The kings of the earth set themselves, and the rulers of the people take counsel together, against the Lord and against his anointed, saying, Let us break the bonds of mercy asunder and let us cast away the cords of love.’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시편(詩篇) 기자(記者)가 이 시대를 어떻게 말했는지 모두 생각해 내야 하느니라. ‘어찌하여 이교도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되어 음모를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백성의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하느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우리가 자비의 유대(紐帶 끈과 띠)를 둘로 쪼개고 사랑의 구속을 던져 버리자 하도다(시2:2-3).’

155:1.2 (1725.3) “Today you see this fulfilled before your eyes. But you shall not see the remainder of the Psalmist’s prophecy fulfilled, for he entertained erroneous ideas about the Son of Man and his mission on earth. My kingdom is founded on love, proclaimed in mercy, and established by unselfish service. My Father does not sit in heaven laughing in derision at the heathen. He is not wrathful in his great displeasure. True is the promise that the Son shall have these so-called heathen (in reality his ignorant and untaught brethren) for an inheritance. And I will receive these gentiles with open arms of mercy and affection. All this loving-kindness shall be shown the so-called heathen, notwithstanding the unfortunate declaration of the record which intimates that the triumphant Son ‘shall break them with a rod of iron and dash them to pieces like a potter’s vessel.’ The Psalmist exhorted you to ‘serve the Lord with fear’ — I bid you enter into the exalted privileges of divine sonship by faith; he commands you to rejoice with trembling; I bid you rejoice with assurance. He says, ‘Kiss the Son, lest he be angry, and you perish when his wrath is kindled.’ But you who have lived with me well know that anger and wrath are not a part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en. But the Psalmist did glimpse the true light when, in finishing this exhortation, he said: ‘Blessed are they who put their trust in this Son.’” “오늘날 너희는 너희 눈앞에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시편 기자의 나머지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리니, 그가 인자(人子)와 그의 지상 사명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니라. 내 나라는 사랑에 토대를 두고, 자비로 선포되며, 이타적 섬김으로 세워지느니라. 내 아버지는 하늘에 앉아서 이교도들을 조롱하면서 웃지 않으시니라(시2:4). 그는 매우 불쾌하여 격노하지 않으시니라(시2:5). 아들이 소위 이런 이교도들(실은 자신의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형제들)을 유업(遺業)으로 받으리라는 약속(2:8)은 참이니라. 그리고 나는 자비와 애정으로 이런 이방인들을 대환영하리라. 승리한 아들이 ‘철장(鐵杖 쇠 지팡이)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질그릇같이 그들을 산산(散散)이 부수리라.’고 공표한 기록(시2:9)의 부적당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자애(慈愛 도타운 사랑)를 소위 이교도들에게 베풀 것이라. 시편 기자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시2:11a).’고 권고했지만, – 나는 너희에게 신앙으로 신적 아들 된 고귀한 특혜(特惠)를 받으라고 명하노라. 그는 너희에게 떨며 즐거워하라(시2:11b)고 명령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확신으로 기뻐하라고 명하노라. 그는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화를 내며 그의 진노가 타올라 너희가 망하리라(시2:12a).’라고 말하지만, 나와 함께 살아온 너희는, 분노와 격노가 사람의 심정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부분이 아님을, 잘 아느니라. 그러나 이 권고를 마치면서 ‘이 아들을 신뢰하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시2:12b).’라고 말했을 때, 시편 기자는 참 빛을 얼핏 보았느니라.”

155:1.3 (1725.4) Jesus continued to teach the twenty-four, saying: “The heathen are not without excuse when they rage at us. Because their outlook is small and narrow, they are able to concentrate their energies enthusiastically. Their goal is near and more or less visible; wherefore do they strive with valiant and effective execution. You who have professed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are altogether too vacillating and indefinite in your teaching conduct. The heathen strike directly for their objectives; you are guilty of too much chronic yearning. If you desire to enter the kingdom, why do you not take it by spiritual assault even as the heathen take a city they lay siege to? You are hardly worthy of the kingdom when your service consists so largely in an attitude of regretting the past, whining over the present, and vainly hoping for the future. Why do the heathen rage? Because they know not the truth. Why do you languish in futile yearning? Because you obey not the truth. Cease your useless yearning and go forth bravely doing that which concerns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예수님은 계속 24명을 가르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교도들이 우리에게 분노할 때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야가 작고 좁아서, 그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열광적으로 집중할 수 있느니라. 그들의 목표는 가깝고 거의 눈에 보이는 것이므로, 그들은 용감히 효과적으로 실행하려고 싸우느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고백한 너희는 가르칠 때 모두 너무 망설이며 불명확하니라. 이교도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직접 공격하느니라. 너희는 과도하게 오래 끄는 갈망을 범하고 있느니라. 너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이교도들이 포위 공격하여 도시를 차지하듯이 영적 강습(强襲 세차게 습격함)으로 왜 그것을 차지하지 않느냐? 너희 섬김이 그렇게 주로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푸념하면서, 미래를 헛되이 바라는 태도라면 너희는 도저히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느니라. 왜 이교도들이 분노하는가? 그들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니라. 왜 너희는 쓸데없는 갈망으로 쇠약해지느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헛된 갈망을 그만두고 하느님 나라 설립에 관련된 일을 용감히 하면서 나아가라.

155:1.4 (1726.1) “In all that you do, become not one-sided and overspecialized. The Pharisees who seek our destruction verily think they are doing God’s service. They have become so narrowed by tradition that they are blinded by prejudice and hardened by fear. Consider the Greeks, who have a science without religion, while the Jews have a religion without science. And when men become thus misled into accepting a narrow and confused disintegration of truth, their only hope of salvation is to become truth-co-ordinated — converted.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지나치게 전문화하지 말라.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자신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그들은 전통으로 너무 편협해져서, 편견으로 분별이 없고 두려움으로 냉혹해져 있느니라. 그리스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종교 없이 과학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과학 없이 종교를 가지고 있느니라.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이끌려 편협하고 혼란스럽게 분해된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은 진리를-통합하고 조정하여 개종(改宗)하는 것이니라.

155:1.5 (1726.2) “Let me emphatically state this eternal truth: If you, by truth co-ordination, learn to exemplify in your lives this beautiful wholeness of righteousness, your fellow men will then seek after you that they may gain what you have so acquired. The measure wherewith truth seekers are drawn to you represents the measure of your truth endowment, your righteousness. The extent to which you have to go with your message to the people is, in a way, the measure of your failure to live the whole or righteous life, the truth-co-ordinated life.” “내가 이 영원한 진리를 단호하게 주장하노라. 너희가 진리를 통합-조정하여 이 아름다운 온전함의 공의(公義 고결성)를 너희 생활에서 실증하기를 배운다면, 그때 너희 동료들이 너희가 그렇게 얻은 것을 자신들이 얻을 수 있도록 너희를 찾을 것이니라. 구도자(求道者)들이 너희에게 끌리는 정도(程度)가 너희가 지닌 진리 재질, 너희 공의(公儀 고결성)의 정도(程度)를 나타내느니라. 너희가 메시지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야 하는 정도(程度)는, 어떤 면에서, 너희가 온전한, 공의(公義 고결성)의 생활 즉, 진리에 통합-조정한 생활에 실패한 정도(程度)니라.”

155:1.6 (1726.3) And many other things the Master taught his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before they bade him good night and sought rest upon their pillows. 주(主)님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자신에게 밤 인사를 하고 베개를 베기 전, 그들에게 여러 다른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2. The Evangelists in Chorazin 고라진의 전도자들

210516 혼(魂)의 진보(進步)를 점검(點檢)하는 신앙 마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Woe to you, Korazin! Woe to you, Bethsaida!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155:2.1 (1726.4) On Monday morning, May 23, Jesus directed Peter to go over to Chorazin with the twelve evangelists while he, with the eleven, departed for Caesarea-Philippi, going by way of the Jordan to the Damascus-Capernaum road, thence northeast to the junction with the road to Caesarea-Philippi, and then on into that city, where they tarried and taught for two weeks. They arrived during the afternoon of Tuesday, May 24. 5월 23일 월요일 아침,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여 12 전도자들과 함께 고라진으로 건너가게 하면서 자신은 11명과 함께 가이사랴-빌립보로 떠났는데, 요단강을 거쳐 다마스쿠스-가버나움 길로 가서, 거기에서 가이사랴-빌립보로 가는 길과 만나는 교차점까지 북동쪽으로 간 후, 그 도시로 들어가, 거기에서 2주간 머물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5월 24일 화요일 오후에 도착했습니다.

155:2.2 (1726.5) Peter and the evangelists sojourned in Chorazin for two weeks,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to a small but earnest company of believers. But they were not able to win many new converts. No city of all Galilee yielded so few souls for the kingdom as Chorazin. In accordance with Peter’s instructions the twelve evangelists had less to say about healing — things physical — while they preached and taught with increased vigor the spiritual truths of the heavenly kingdom. These two weeks at Chorazin constituted a veritable baptism of adversity for the twelve evangelists in that it was the most difficult and unproductive period in their careers up to this time. Being thus deprived of the satisfaction of winning souls for the kingdom, each of them the more earnestly and honestly took stock of his own soul and its progress in the spiritual paths of the new life. 베드로와 전도자들은 2주간 코라진에 머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진지한 신도 일행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 개종자들을 많이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온 갈릴리 도시 중 코라진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혼(魂)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지시대로, 12 전도자들은 육체적 치유에 대한 것들을 적게 말했던 반면에 하늘나라의 영적 진리를 더욱 힘차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코라진의 2주간은 이때까지 12 전도자들의 이력에서 가장 어렵고 결과가 없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참으로 괴로운 역경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혼(魂)들을 얻는 만족을 이렇게 잃어버리게 되자, 그들 각자 더 진심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혼(魂)과 새 생명의 영적 경로에서 혼(魂)의 진보를 점검했습니다.

155:2.3 (1726.6) When it appeared that no more people were minded to seek entrance into the kingdom, Peter, on Tuesday, June 7, called his associates together and departed for Caesarea-Philippi to join Jesus and the apostles. They arrived about noontime on Wednesday and spent the entire evening in rehearsing their experiences among the unbelievers of Chorazin. During the discussions of this evening Jesus made further reference to the parable of the sower and taught them much about the meaning of the apparent failure of life undertakings.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써서 찾는 사람들이 더 없는 듯이 보이자, 베드로가 6월 7일 화요일에 자기 동료들을 함께 불러 모아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합세하려고 가이사랴-빌립보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수요일 정오 무렵에 도착해서 코라진의 불신자들 사이에 겪었던 체험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저녁 내내 보냈습니다. 이날 저녁 토론하면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더 언급하셨고, 그들에게 명백히 실패한 인생 모험의 의미에 대해 많이 가르쳤습니다.

3. At Caesarea-Philippi 가이사랴-빌립보에서

210523 형제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길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The King will reply, ‘I tell you the truth,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155:3.1 (1727.1) Although Jesus did no public work during this two weeks’ sojourn near Caesarea-Philippi, the apostles held numerous quiet evening meetings in the city, and many of the believers came out to the camp to talk with the Master. Very few were added to the group of believers as a result of this visit. Jesus talked with the apostles each day, and they more clearly discerned that a new phase of the work of preaching the kingdom of heaven was now beginning. They were commencing to comprehend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not meat and drink but the realization of the spiritual joy of the acceptance of divine sonship.” 예수께서 가이사랴-빌립보 인근에서 이렇게 두 주간 머물면서 공적인 일을 하지 않았지만, 사도들은 도시에서 수없이 조용한 저녁 모임을 열었고, 여러 신자가 주(主)님과 이야기하려고 야영지로 나왔습니다. 이런 방문의 결과로 신자 집단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사도들과 이야기했고, 그들은 하늘나라를 전하는 과업의 새로운 국면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더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가 먹고 마심이 아니라 신적 아들 됨을 수용하는 영적 기쁨의 실현임(롬14:17)”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55:3.2 (1727.2) The sojourn at Caesarea-Philippi was a real test to the eleven apostles; it was a difficult two weeks for them to live through. They were well-nigh depressed, and they missed the periodic stimulation of Peter’s enthusiastic personality. In these times it was truly a great and testing adventure to believe in Jesus and go forth to follow after him. Though they made few converts during these two weeks, they did learn much that was highly profitable from their daily conferences with the Master. 가이사랴-빌립보에 머물렀던 것은 11 사도들에게 진정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2주간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거의 풀이 죽었고, 그들은 베드로의 열렬한 성격에서 나온 간헐적 자극이 그리웠습니다. 이 기간에 예수를 믿고 그를 따라 나아가는 것은 정말로 고도로 노력이 요구되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2주간에 거의 개종자들이 없었지만, 그들은 주(主)님과 매일 회의하면서 아주 유익한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155:3.3 (1727.3) The apostles learned that the Jews were spiritually stagnant and dying because they had crystallized truth into a creed; that when truth becomes formulated as a boundary line of self-righteous exclusiveness instead of serving as signposts of spiritual guidance and progress, such teachings lose their creative and life-giving power and ultimately become merely preservative and fossilizing.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진리를 신조(信條)로 명확히 정리했기 때문에 그들이 영적으로 침체하여 죽어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영적 안내와 진보의 명확한 길잡이로 섬기는 대신에 독선적(獨善的) 배타주의(排他主義)의 경계선으로 나타날 때, 그런 가르침은 그 창조적인 생명력을 잃고, 결국 보존된 화석이 될 뿐임을 알았습니다.

155:3.4 (1727.4) Increasingly they learned from Jesus to look upon human personalities in terms of their possibilities in time and in eternity. They learned that many souls can best be led to love the unseen God by being first taught to love their brethren whom they can see. And it was in this connection that new meaning became attached to the Master’s pronouncement concerning unselfish service for one’s fellows: “Inasmuch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my brethren, you did it to me.” 그들은 예수로부터 인간 고유성들을, 시간과 영원 안에 있는 그들의 장래성(將來性)으로 환산하기를 점차 배웠습니다. 그들은, 여러 혼(魂)이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들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움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가장 잘 이끌릴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타적으로 동료들을 섬기는 주(主)님의 선언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은, 너희가 내게 행한 것이니라(마25:40).”

155:3.5 (1727.5) One of the great lessons of this sojourn at Caesarea had to do with the origin of religious traditions, with the grave danger of allowing a sense of sacredness to become attached to nonsacred things, common ideas, or everyday events. From one conference they emerged with the teaching that true religion was man’s heartfelt loyalty to his highest and truest convictions. 가이사랴에 이렇게 머물면서 얻은 위대한 교훈 중 하나는, 신성하지 않은 것들, 즉 평범한 생각들 혹은 일상적 사건들에 신성한 느낌을 부여하도록 허용하는, 아주 심각한 위험이 따르는, 종교적 전통의 기원과 관련되었습니다. 한 회의에서, 참된 종교는, 인간 최고의 가장 참된 확신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충성이라는 교훈이, 그들에게 분명해졌습니다.

155:3.6 (1727.6) Jesus warned his believers that, if their religious longings were only material, increasing knowledge of nature would, by progressive displacement of the supposed supernatural origin of things, ultimately deprive them of their faith in God. But that, if their religion were spiritual, never could the progress of physical science disturb their faith in eternal realities and divine values. 예수는 자기 신자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열망이 단지 물질적이었다면, 사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가정했던 것이, 자연에 대한 지식의 증가로, 점차 치환되어, 결국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빼앗길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가 영적이었다면, 물리적 과학의 진보가 영원한 실체와 신적 가치들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결코 방해할 수 없으리라.

155:3.7 (1727.7) They learned that, when religion is wholly spiritual in motive, it makes all life more worth while, filling it with high purposes, dignifying it with transcendent values, inspiring it with superb motives, all the while comforting the human soul with a sublime and sustaining hope. True religion is designed to lessen the strain of existence; it releases faith and courage for daily living and unselfish serving. Faith promotes spiritual vitality and righteous fruitfulness. 종교의 동기가 완전히 영적이면, 숭고한 지속적 희망으로 인간의 혼(魂)을 계속 격려하면서, 그것은 모든 삶을 더 가치 있게 하고, 그것을 높은 목적으로 채우며, 그것을 초월적 가치로 품위를 높이고, 그것을 훌륭한 동기로 고무(鼓舞)한다는 것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참된 종교는 존재의 긴장을 줄이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생활과 이타적 섬김을 위한 신앙과 용기를 내보냅니다. 신앙은 영적 활력과 의로운 결실을 증진합니다.

155:3.8 (1727.8) Jesus repeatedly taught his apostles that no civilization could long survive the loss of the best in its religion. And he never grew weary of pointing out to the twelve the great danger of accepting religious symbols and ceremonies in the place of religious experience. His whole earth life was consistently devoted to the mission of thawing out the frozen forms of religion into the liquid liberties of enlightened sonship. 예수님은 자기 사도들에게, 어떤 문명도 그 종교의 최고를 상실하고,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고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치지 않고 12명에게, 종교적 체험 대신에 종교적 상징과 의식(儀式)을 수용하는 심각한 위험을 지적했습니다. 그의 모든 지상 생활은, 얼어붙은 형태의 종교를 아들 된 영적 통찰력의 자유가 흘러가도록 녹이는 사명에 시종일관 바쳐졌습니다.

4. On the Way to Phoenicia 페니키아로 가는 길

210530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Paul then stood up in the meeting of the Areopagus and said: “Men of Athens! I see that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

155:4.1 (1728.1) On Thursday morning, June 9, after receiving word regarding the progress of the kingdom brought by the messengers of David from Bethsaida, this group of twenty-five teachers of truth left Caesarea-Philippi to begin their journey to the Phoenician coast. They passed around the marsh country, by way of Luz, to the point of junction with the Magdala-Mount Lebanon trail road, thence to the crossing with the road leading to Sidon, arriving there Friday afternoon. 6월 9일(AD 29) 목요일 아침에, 벳새다의 다윗 메신저들이 전해준 하느님 나라의 진행에 관한 소식을 받은 후, 25명의 이 진리 교사들은 가이샤라-빌립보를 떠나 페니키아 연안으로 여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습지대를 돌아, 루스를 거쳐, 막달라-산 레바논 오솔길과 만나는 분기점까지 갔고, 거기서 시돈으로 이어지는 길을 건너, 금요일 오후에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155:4.2 (1728.2) While pausing for lunch under the shadow of an overhanging ledge of rock, near Luz, Jesus delivered one of the most remarkable addresses which his apostles ever listened to throughout all their years of association with him. No sooner had they seated themselves to break bread than Simon Peter asked Jesus: “Master, since the Father in heaven knows all things, and since his spirit is our support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why is it that we flee from the threats of our enemies? Why do we refuse to confront the foes of truth?” But before Jesus had begun to answer Peter’s question, Thomas broke in, asking: “Master, I should really like to know just what is wrong with the religion of our enemies at Jerusalem. What is the real difference between their religion and ours? Why is it we are at such diversity of belief when we all profess to serve the same God?” And when Thomas had finished, Jesus said: “While I would not ignore Peter’s question, knowing full well how easy it would be to misunderstand my reasons for avoiding an open clash with the rulers of the Jews at just this time, still it will prove more helpful to all of you if I choose rather to answer Thomas’s question. And that I will proceed to do when you have finished your lunch.” 루스 근처 바위의 돌출된 바위 턱 그늘 밑에서 점심을 위해 잠시 멈췄을 때, 예수님은, 자기 사도들이 지금까지 여러 해 자신과 교제하며 들었던 가장 놀라운 연설 중 하나를 하셨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려고 앉자마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하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아시며, 그의 영(靈)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우리를 후원하는데, 우리가 왜 우리 대적들의 위협에서 도망하나요? 우리가 왜 진리의 적들에 맞서지 않는지요?” 예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기 전에, 도마가 끼어들어 질문했습니다. “주(主)여,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 적들의 종교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정말로 바로 알고 싶습니다. 그들의 종교와 우리 종교에서 실제로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 같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 왜 우리는 그렇게 다양하게 믿고 있습니까?” 도마가 그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번에 유대인들의 통치자들과 공개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내 이유는 오해하기 쉽다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내가 베드로의 질문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오히려 도마의 질문에 답하기를 택한다면, 그것이 너희 모두에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라. 너희가 점심을 마치면 내가 계속 말할 것이라.”

5. The Discourse on True Religion 참 종교에 대한 강론

155:5.1 (1728.3) This memorable discourse on religion, summarized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gave expression to the following truths: 종교에 관해 잊지 못할 이 강연을 현대적 표현으로 요약하고 다시 진술하여, 다음의 진리를 표명했습니다.

155:5.2 (1728.4) While the religions of the world have a double origin — natural and revelatory — at any one time and among any one people there are to be found three distinct forms of religious devotion. And these three manifestations of the religious urge are: 세상의 종교들은 이중 기원 – 자연적인 것과 계시적인 것 –이 있지만, 언제나, 어떤 한 민족 중에서도, 세 가지 독특한 형태의 종교적 헌신이 발견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충동은 다음의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155:5.3 (1728.5) 1. Primitive religion. The seminatural and instinctive urge to fear mysterious energies and worship superior forces, chiefly a religion of the physical nature, the religion of fear. 원시 종교.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를 두려워하고 초자연적인 기세를 경배하려는 자연 그대로의 본능적 충동, 주로 물리적 자연 종교, 두려움의 종교.

155:5.4 (1728.6) 2. The religion of civilization. The advancing religious concepts and practices of the civilizing races — the religion of the mind — the intellectual theology of the authority of established religious tradition. 문명 종교. 진보한 종교적 개념과 문명 인종의 관례 – 마음의 종교 – 확립된 종교 전통 권위의 지적 신학.

155:5.5 (1728.7) 3. True religion — the religion of revelation. The revelation of supernatural values, a partial insight into eternal realities, a glimpse of the goodness and beauty of the infinite character of the Father in heaven — the religion of the spirit as demonstrated in human experience. 참 종교 – 계시 종교. 초자연적 가치의 계시, 영원한 실체들에 대한 부분적 통찰력,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성품에 속한 선(善)과 미(美)의 섬광(閃光 번쩍이는 빛) – 인간 체험으로 드러난 영(靈)의 종교.

155:5.6 (1729.1) The religion of the physical senses and the superstitious fears of natural man, the Master refused to belittle, though he deplored the fact that so much of this primitive form of worship should persist in the religious forms of the more intelligent races of mankind. Jesus made it clear that the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religion of the mind and the religion of the spirit is that, while the former is upheld by ecclesiastical authority, the latter is wholly based on human experience. 주(主)님은 그렇게 많은 이런 원시적 형태의 경배가 인류의 더 지능적인 종족의 종교적 형태로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여기셨지만, 그는 물리적 감각의 종교와 자연인(自然人)의 미신적 두려움을 하찮게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종교와 영(靈)의 종교 사이에서 가장 큰 차이가, 전자(前者)는 교회의 권위로 유지되는 반면에, 후자(後者)는 인간 체험에 전부 토대를 두고 있음을 확연히 밝히셨습니다.

210606 권위-마음의 종교와 참-영(靈)의 종교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155:5.7 (1729.2) And then the Master, in his hour of teaching, went on to make clear these truths: 그런 후 주님은, 가르침의 시간에, 이런 진리를 계속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155:5.8 (1729.3) Until the races become highly intelligent and more fully civilized, there will persist many of those childlike and superstitious ceremonies which are so characteristic of the evolutionary religious practices of primitive and backward peoples. Until the human race progresses to the level of a higher and more general recognition of the realities of spiritual experience, large numbers of men and women will continue to show a personal preference for those religions of authority which require only intellectual assent, in contrast to the religion of the spirit, which entails active participation of mind and soul in the faith adventure of grappling with the rigorous realities of progressive human experience. 인종의 지능이 더 높아지고 충분히 더 문명화될 때까지, 원시적으로 퇴보한 사람들의 진화적 종교 관례의 특색인, 그런 어린애 같고 미신적인 여러 의식이 지속할 것입니다. 인류가 영적 체험의 실체를, 더 높고, 더 넓게 인식하는 수준으로 진보할 때까지, 많은 남녀가, 진보적 인간 체험의 엄격한 실체들과 씨름하는 신앙 모험 안에서, 마음과 혼(魂)의 적극적 참여가 수반되는 영(靈)의 종교와 현저히 다르게, 지적 동의만 요구하는 그런 권위의 종교들을 개인적으로 계속 더 좋아할 것입니다.

155:5.9 (1729.4) The acceptance of the traditional religions of authority presents the easy way out for man’s urge to seek satisfaction for the longings of his spiritual nature. The settled, crystallized, and established religions of authority afford a ready refuge to which the distracted and distraught soul of man may flee when harassed by fear and tormented by uncertainty. Such a religion requires of its devotees, as the price to be paid for its satisfactions and assurances, only a passive and purely intellectual assent. 전통적 권위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영적 본성의 갈망을 채우려는 자기 충동을 위해, 쉬운 탈출구를 마련해 줍니다. 정해지고, 결정화되어, 확립된 권위종교는 괴롭고 산란해진 인간의 혼(魂)이 두려움에 시달리고 불확실성으로 고통을 받을 때, 피할 수 있는, 준비된 피난처를 제공합니다. 그런 종교는 만족과 확신을 얻는 값으로, 신자들에게 단지 수동적이며 순전히 지적인 동의만 요구합니다.

155:5.10 (1729.5) And for a long time there will live on earth those timid, fearful, and hesitant individuals who will prefer thus to secure their religious consolations, even though, in so casting their lot with the religions of authority, they compromise the sovereignty of personality, debase the dignity of self-respect, and utterly surrender the right to participate in that most thrilling and inspiring of all possible human experiences: the personal quest for truth, the exhilaration of facing the perils of intellectual discovery, the determination to explore the realities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the supreme satisfaction of experiencing the personal triumph of the actual realization of the victory of spiritual faith over intellectual doubt as it is honestly won in the supreme adventure of all human existence — man seeking God, for himself and as himself, and finding him. 그리고 권위의 종교에 자신들의 운명을 그렇게 내던져서, 그들은 고유성의 주권을 위태롭게 하고, 스스로 품위를 지키는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가능한 모든 인간 체험, 즉 개인적인 진리 추구, 지적 발견의 모험에 직면하는 흥분, 개인적 종교 체험의 실체를 탐험하는 결정, 모든 인간 존재 – 스스로, 자신으로서 하느님을 찾고 그를 발견하는 인간의 최극 모험으로 정직하게 얻는 것처럼, 지적 의심에 대한 영적 신앙 승리의 실제 실현에 속한 개인적 승리를 체험하는 최고의 만족에 가장 감격적으로 고무(鼓舞)하도록 참여할 권리를 완전히 포기할지라도, 차라리 그렇게 자신의 종교적 위로 얻기를 더 좋아할 개인들이 그렇게 소심하고 걱정하며 머뭇거리면서, 오랫동안 지상에 살 것입니다.

155:5.11 (1729.6) The religion of the spirit means effort, struggle, conflict, faith, determination, love, loyalty, and progress. The religion of the mind — the theology of authority — requires little or none of these exertions from its formal believers. Tradition is a safe refuge and an easy path for those fearful and halfhearted souls who instinctively shun the spirit struggles and mental uncertainties associated with those faith voyages of daring adventure out upon the high seas of unexplored truth in search for the farther shores of spiritual realities as they may be discovered by the progressive human mind and experienced by the evolving human soul. 영(靈)의 종교는 노력, 분투, 갈등, 신앙, 결단, 사랑, 충성 및 진보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종교 – 권위의 신학 –는 형식적 신자들에게 이러한 노력을 거의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영적 실체들이 진보하는 인간 마음으로 발견되고 진화하는 인간 혼(魂)으로 체험되는 것처럼, 영적 실체들의 먼 해안을 찾아, 탐험 되지 않은 진리의 높은 바다로 대담하게 모험하는 그런 신앙 항해와 관련된 정신적 불확실성과 영(靈) 분투를 본능적으로 피하는 혼(魂)들, 그렇게 걱정하며 열의가 없는 혼(魂)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이며 쉬운 길이 전통입니다.

210613 하느님 자녀의 새 종교 롬 8:16-17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6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17 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155:5.12 (1729.7) And Jesus went on to say: “At Jerusalem the religious leaders have formulated the various doctrines of their traditional teachers and the prophets of other days into an established system of intellectual beliefs, a religion of authority. The appeal of all such religions is largely to the mind. And now are we about to enter upon a deadly conflict with such a religion since we will so shortly begin the bold proclamation of a new religion — a religion which is not a religion in the present-day meaning of that word, a religion that makes its chief appeal to the divine spirit of my Father which resides in the mind of man; a religion which shall derive its authority from the fruits of its acceptance that will so certainly appear in the personal experience of all who really and truly become believers in the truths of this higher spiritual communion.”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교사들과 다른 시대 예언자들의 다양한 교리들을 지적 믿음의 확립된 체계, 권위의 종교로 공식화했느니라. 그런 종교들은 대개 마음에 호소하느니라.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런 종교와 치명적인 투쟁을 시작할 참이니, 우리가 즉시 새 종교 – 오늘날 그 단어가 의미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내주하는 내 아버지의 신적 영(靈)에 주로 호소하는 종교, 더 높은 이런 신적 친교의 진리 안에서 정말 참으로 신자들이 되는 모든 자의 개인적 체험으로 아주 확실히 나타날, 그 받아들이는 열매에서 그 권위가 나오는 종교를 과감히 선포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155:5.13 (1730.1) Pointing out each of the twenty-four and calling them by name, Jesus said: “And now, which one of you would prefer to take this easy path of conformity to an established and fossilized religion, as defended by the Pharisees at Jerusalem, rather than to suffer the difficulties and persecutions attendant upon the mission of proclaiming a better way of salvation to men while you realize the satisfaction of discovering for yourselves the beauties of the realities of a living and personal experience in the eternal truths and supreme grandeurs of the kingdom of heaven? Are you fearful, soft, and ease-seeking? Are you afraid to trust your future in the hands of the God of truth, whose sons you are? Are you distrustful of the Father, whose children you are? Will you go back to the easy path of the certainty and intellectual settledness of the religion of traditional authority, or will you gird yourselves to go forward with me into that uncertain and troublous future of proclaiming the new truths of the religion of the spirit,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en?” 예수님은 각 24명을 가리켜 부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 중 누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진리와 최고의 위엄 안에서, 살아서 직접 체험하는 실체들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하는 만족을 너희가 실감하면서, 사람들에게 더 나은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사명에 따라붙는 어려움과 박해를 겪기보다는,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옹호(擁護)하는 것처럼, 확립되어 화석화된 종교에 순응하는 쉬운 이 길을 택하려느냐? 너희는 두려워하며 나약하게 안일을 꾀하느냐? 너희는 너희 앞날을 진리의 하느님 손에 맡기기에 두려워하느냐, 너희는 누구의 아들들이냐? 너희는 아버지를 믿지 않느냐, 너희는 누구의 자녀들이냐? 너희는 전통적 권위종교의 확실성과 지적 안정성의 쉬운 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영(靈)의 종교에 속한 새 진리, 인간의 심정에 있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단언할 수 없는 거친 미래로 뛰어들어 전진하겠느냐?”

155:5.14 (1730.2) All twenty-four of his hearers rose to their feet, intending to signify their united and loyal response to this, one of the few emotional appeals which Jesus ever made to them, but he raised his hand and stopped them, saying: “Go now apart by yourselves, each man alone with the Father, and there find the unemotional answer to my question, and having found such a true and sincere attitude of soul, speak that answer freely and boldly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whose infinite life of love is the very spirit of the religion we proclaim.” 그의 말씀을 듣던 24명 모두가, 예수께서 일찍이 자신들에게 하셨던 몇 번 되지 않는 감정적 호소 중 하나인, 이 말씀에 일심동체로 충성스러운 반응을 나타내려고, 일어섰지만, 그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홀로 떨어져, 아버지와 함께 각자 홀로 가서, 내 질문에 대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대답을 찾아, 혼(魂)의 그런 참된 신실한 태도를 발견하고, 사랑에 속한 그의 무한한 생명이 바로 우리가 선포하는 종교의 영(靈)이신,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께 그 대답을 마음껏 대담하게 말씀드리라.”

155:5.15 (1730.3) The evangelists and apostles went apart by themselves for a short time. Their spirits were uplifted, their minds were inspired, and their emotions mightily stirred by what Jesus had said. But when Andrew called them together, the Master said only: “Let us resume our journey. We go into Phoenicia to tarry for a season, and all of you should pray the Father to transform your emotions of mind and body into the higher loyalties of mind and the more satisfying experiences of the spirit.” 전도자들과 사도들은 잠시 그들 각자 떨어져 갔습니다. 그들의 영(靈)들은 고양(高揚)되었고, 그들의 마음은 고취(鼓吹)되었으며,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으로, 그들의 감정은 힘차게 감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그들은 함께 불렀을 때, 주님은 “우리 여행을 다시 계속하자. 우리는 페니키아로 가서 잠시 머물 것이며, 너희 모두 아버지께 너희 마음과 몸의 감정들이, 더 높은 마음의 충성과 더 만족스러운 영(靈)의 체험으로 바뀌도록 기도해야 하니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155:5.16 (1730.4) As they journeyed on down the road, the twenty-four were silent, but presently they began to talk one with another, and by three o’clock that afternoon they could not go farther; they came to a halt, and Peter, going up to Jesus, said: “Master, you have spoken to us the words of life and truth. We would hear more; we beseech you to speak to us further concerning these matters.” 그들이 길 아래로 여행할 때, 24명은 말이 없었지만, 이내 그들은 서로 말하기 시작했고, 그날 오후 3시에 그들은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멈췄고, 베드로가 예수께 올라가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희에게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더 듣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이런 문제들에 관해 저희에게 더 말해주시기를 저희가 간청합니다.”

6. The Second Discourse on Religion 두 번째 종교 강론

210620 권위종교와 영(靈)의 종교 1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You will keep in perfect peace him whose mind is steadfast, because he trusts in you.

155:6.1 (1730.5) And so, while they paused in the shade of the hillside, Jesus continued to teach them regarding the religion of the spirit, in substance saying: 그래서 그들이 언덕 비탈의 그늘에 멈췄을 때, 예수께서 영(靈)의 종교에 관해 계속 가르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55:6.2 (1730.6) You have come out from among those of your fellows who choose to remain satisfied with a religion of mind, who crave security and prefer conformity. You have elected to exchange your feelings of authoritative certainty for the assurances of the spirit of adventurous and progressive faith. You have dared to protest against the grueling bondage of institutional religion and to reject the authority of the traditions of record which are now regarded as the word of God. Our Father did indeed speak through Moses, Elijah, Isaiah, Amos, and Hosea, but he did not cease to minister words of truth to the world when these prophets of old made an end of their utterances. My Father is no respecter of races or generations in that the word of truth is vouchsafed one age and withheld from another. Commit not the folly of calling that divine which is wholly human, and fail not to discern the words of truth which come not through the traditional oracles of supposed inspiration. 너희는 마음의 종교에 남아 만족하기로 선택하여, 안전을 갈망하고 차라리 순응하기를 택한, 그런 너희 시대 사람 중에서 빠져나왔느니라. 너희는 권위를 확신하는 너희 감정을 버리고, 모험적이고 진보적인 신앙에 속한 영(靈)의 확신을 택하였느니라. 너희는 대담하게 제도적 종교의 가혹한 속박에 맞서 항의하고, 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겨진 기록된 전통의 권위를 거절했느니라.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모세,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이런 옛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마쳤을 때, 그는 세상에 진리의 말씀을 멈추지 않고 공급하셨느니라. 내 아버지는, 진리의 말씀을 한 세대에는 허락하고 다른 세대에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종이나 세대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니라. 완전히 인간적인 것을, 신적이라고 부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영감(靈感)으로 여겨진, 전통적 성언(聖言)을 통해 오지 않은 진리의 말씀을 반드시 분별(分別)하라.

155:6.3 (1731.1) I have called upon you to be born again, to be born of the spirit. I hav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of authority and the lethargy of tradition into the transcendent light of the realization of the possibility of making for yourselves the greatest discovery possible for the human soul to make — the supernal experience of finding God for yourself, in yourself, and of yourself, and of doing all this as a fact in your own personal experience. And so may you pass from death to life, from the authority of tradition to the experience of knowing God; thus will you pass from darkness to light, from a racial faith inherited to a personal faith achieved by actual experience; and thereby will you progress from a theology of mind handed down by your ancestors to a true religion of spirit which shall be built up in your souls as an eternal endowment. 나는 너희가 거듭나서, 영(靈)으로 태어나기를 요청하노라. 나는 너희를, 권위의 어둠과 전통의 무기력에서, 스스로 인간 혼(魂)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발견 – 스스로, 그 자체로, 저절로, 하느님을 발견하고, 너희 자신의 고유한 체험에서 사실 이 모두를 행하는, 숭고한 체험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초월적 빛 안으로, 소집했느니라. 그리고 그렇게 너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전통의 권위에서 하느님을 아는 체험으로 건널 갈 수 있느니라. 그렇게 너희는 어둠에서 빛으로, 물려받은 민족 신앙에서 현실 체험의 노력으로 성취한 개인적 신앙으로 건너갈 것이니라. 그리고 그것에 의해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유산으로 남긴 마음의 신학에서 영원한 재질로 너희 혼(魂)들에 축적될 영(靈)의 참 종교로 진보하리라. 

155:6.4 (1731.2) Your religion shall change from the mere intellectual belief in traditional authority to the actual experience of that living faith which is able to grasp the reality of God and all that relates to the divine spirit of the Father. The religion of the mind ties you hopelessly to the past; the religion of the spirit consists in progressive revelation and ever beckons you on toward higher and holier achievements in spiritual ideals and eternal realities. 너희 종교는 전통적 권위의 단순한 지적 믿음에서 하느님의 실체와 아버지의 신적 영(靈)에 관련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신앙의 현실 체험으로 바뀔 것이라. 마음의 종교는 너희를 절망적으로 과거에 동여매느니라. 영(靈)의 종교는 진보적 계시에 있으며, 영적 이상(理想)들과 영원한 실체들에서 더 높고 더 거룩한 성취를 향하도록 언제나 너희에게 손짓하느니라.

155:6.5 (1731.3) While the religion of authority may impart a present feeling of settled security, you pay for such a transient satisfaction the price of the loss of your spiritual freedom and religious liberty. My Father does not require of you as the price of entering the kingdom of heaven that you should force yourself to subscribe to a belief in things which are spiritually repugnant, unholy, and untruthful. It is not required of you that your own sense of mercy, justice, and truth should be outraged by submission to an outworn system of religious forms and ceremonies. The religion of the spirit leaves you forever free to follow the truth wherever the leadings of the spirit may take you. And who can judge — perhaps this spirit may have something to impart to this generation which other generations have refused to hear? 권위의 종교는 현재 정해진 안도감을 줄 수도 있지만, 너희는 그런 일시적 만족을 위해 너희 영적 자유와 종교적 해방을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르고 있느니라.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대가로, 너희가 영적으로 혐오스럽고, 신앙이 없으며, 진실성이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에 동의하도록 스스로 강요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시니라. 낡은 종교적 형태와 예식 체계에 복종하여, 너희 자신의 자비·정의·진리에 대한 감각이 짓밟혀야 한다고 너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니라. 영(靈)의 종교는 영원히 너희를 자유롭게 하여, 영(靈)의 이끄심이 너희를 어디로 데려가든지, 진리를 따르게 하느니라. 아마 이 영(靈)이 다른 세대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이 세대에 나눠줄지 누가 판단할 수 있느냐?

155:6.6 (1731.4) Shame on those false religious teachers who would drag hungry souls back into the dim and distant past and there leave them! And so are these unfortunate persons doomed to become frightened by every new discovery, while they are discomfited by every new revelation of truth. The prophet who said, “He will be kept in perfect peace whose mind is stayed on God,” was not a mere intellectual believer in authoritative theology. This truth-knowing human had discovered God; he was not merely talking about God. 굶주린 혼(魂)들을 끌고 어두운 먼 과거로 돌아가 그곳에 그들을 버리는, 그런 거짓 종교 선생들은 수치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유감스러운 사람들은 온갖 새로운 발견으로 몹시 두려워하게 되어 있으며, 게다가 그들은 온갖 새로운 진리의 계시로 당황하느니라.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자는 완전한 평온을 누릴 것이라(사26:3).”라고 말했던 선지자는 단지 권위 신학의 지적 신자가 아니었도다. 진리를 아는 이 사람은 하느님을 발견했었고, 그는 단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느니라.

210627 권위종교와 영(靈)의 종교 2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155:6.7 (1731.5) I admonish you to give up the practice of always quoting the prophets of old and praising the heroes of Israel, and instead aspire to become living prophets of the Most High and spiritual heroes of the coming kingdom. To honor the God-knowing leaders of the past may indeed be worth while, but why, in so doing, should you sacrifice the supreme experience of human existence: finding God for yourselves and knowing him in your own souls? 내가 권하노니, 너희가 항상 옛 선지자들을 인용하고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습관을 버리고, 대신에 지고(至高)자의 살아있는 선지자들과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영적 영웅들이 되기를 갈망하라. 과거 하느님을-아는 지도자들은 실로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 너희는 인간 존재- 스스로 하느님을 발견하고 너희 자신의 혼(魂)들 안에서 그를 아는 -의 최고 체험을 왜 희생해야 하느냐?

155:6.8 (1732.1) Every race of mankind has its own mental outlook upon human existence; therefore must the religion of the mind ever run true to these various racial viewpoints. Never can the religions of authority come to unification. Human unity and mortal brotherhood can be achieved only by and through the superendowment of the religion of the spirit. Racial minds may differ, but all mankind is indwelt by the same divine and eternal spirit. The hope of human brotherhood can only be realized when, and as, the divergent mind religions of authority become impregnated with, and overshadowed by, the unifying and ennobling religion of the spirit — the religion of personal spiritual experience. 모든 인종은 인간 존재에 대해 각각 정신적 견해를 지니고 있느니라. 따라서 마음의 종교는 이런 다양한 인종적 관점에 늘 충실해야 하니라. 권위종교들은 결코 통일될 수 없느니라. 인간 일치와 필사자 형제사랑은 영(靈) 종교의 오직 초(超)자질에 의해서, 이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느니라. 종족 마음들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인류는 다름없는 신적인, 영원한 영(靈)이 내주하느니라. 인간의 형제 사랑 소망은, 권위의 서로 다른 마음 종교들이, 통일하여 고귀하게 하는 영(靈)의 종교 – 개인적 영적 체험의 종교로 채워지게 될 때, 그것으로 무색(無色)해지는 만큼만, 실현될 수 있느니라.

155:6.9 (1732.2) The religions of authority can only divide men and set them in conscientious array against each other; the religion of the spirit will progressively draw men together and cause them to become understandingly sympathetic with one another. The religions of authority require of men uniformity in belief, but this is impossible of realization in the present state of the world. The religion of the spirit requires only unity of experience — uniformity of destiny — making full allowance for diversity of belief. The religion of the spirit requires only uniformity of insight, not uniformity of viewpoint and outlook. The religion of the spirit does not demand uniformity of intellectual views, only unity of spirit feeling. The religions of authority crystallize into lifeless creeds; the religion of the spirit grows into the increasing joy and liberty of ennobling deeds of loving service and merciful ministration. 권위종교는 사람들을 분열하고 양심적 배열에서 서로 거슬러 배치할 뿐이니라. 영(靈)의 종교는 점차 사람들을 함께 끌어들여 서로 이해심을 가지고 공감하게 하느니라. 권위종교는 사람에게 믿음의 획일성을 요구하지만, 이것은 현 상태의 세상에서 실현 불가능하니라. 영(靈)의 종교는, 믿음의 다양성을 최대한 허용하면서, 체험의 통일성 – 운명의 획일성만 요구하느니라. 영(靈)의 종교는, 관점과 견해의 획일성이 아니라, 통찰력의 획일성만 요구하느니라. 영(靈)의 종교는 지적 견해의 획일성이 아니라, 영(靈) 느낌의 통일성만 요구하느니라. 권위종교는 생명을 잃은 신조로 결정(結晶)화하느니라. 영(靈)의 종교는 점차 애정을 품고 섬기고 자비롭게 보살피는, 품위 있는 행위에 속한 기쁨과 자유로 점점 더 자라느니라.

155:6.10 (1732.3) But watch, lest any of you look with disdain upon the children of Abraham because they have fallen on these evil days of traditional barrenness. Our forefathers gave themselves up to the persistent and passionate search for God, and they found him as no other whole race of men have ever known him since the times of Adam, who knew much of this as he was himself a Son of God. My Father has not failed to mark the long and untiring struggle of Israel, ever since the days of Moses, to find God and to know God. For weary generations the Jews have not ceased to toil, sweat, groan, travail, and endure the sufferings and experience the sorrows of a misunderstood and despised people, all in order that they might come a little nearer the discovery of the truth about God. And, notwithstanding all the failures and falterings of Israel, our fathers progressively, from Moses to the times of Amos and Hosea, did reveal increasingly to the whole world an ever clearer and more truthful picture of the eternal God. And so was the way prepared for the still greater revelation of the Father which you have been called to share.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이렇게 전통적으로 결실이 없는 악한 시대에 넘어졌다는 이유로 너희가 그들을 경멸의 태도로 바라보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이 열렬하게 하느님 찾기에 몰두했으며, 아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알았던, 아담의 시대 이후로 다른 전(全) 인류가 아무도 하느님을 몰랐을 때, 그들은 하느님을 발견했느니라. 내 아버지는 모세의 시절 이래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알려고 오랫동안 꾸준히 분투한 이스라엘을 주목하셨느니라. 지친 여러 세대에 유대인들은, 모두 하느님에 대한 진리의 발견에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그들은 그침 없이, 수고하고, 땀 흘리며, 신음하고, 고생하며, 고통을 견디고, 오해받고 경멸당하는 민족의 슬픔을 경험했느니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실패와 비틀거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점차, 모세로부터 아모스와 호세아의 시대까지, 전(全) 세계에 영원한 하느님을 더 분명하고 더 진실하게 더욱더 드러나도록 묘사했느니라. 그래서 너희가 나누도록 부르신, 아버지를 훨씬 위대하게 계시하는 길이 준비되었느니라.

155:6.11 (1732.4) Never forget there is only one adventure which is more satisfying and thrilling than the attempt to discover the will of the living God, and that is the supreme experience of honestly trying to do that divine will. And fail not to remember that the will of God can be done in any earthly occupation. Some callings are not holy and others secular. All things are sacred in the lives of those who are spirit led; that is, subordinated to truth, ennobled by love, dominated by mercy, and restrained by fairness — justice. The spirit which my Father and I shall send into the world is not only the Spirit of Truth but also the spirit of idealistic beauty. 살아 계신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시도보다 더 만족스럽고 감동적인 모험은 하나뿐임을 잊지 말지니, 그것은 신적 뜻을 정말로 행하려는 최상의 체험이니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지상의 어떤 직업으로도 이룰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어떤 직업은 거룩하지 않고, 어떤 것은 세속적이니라. 영(靈)에 이끌려, 즉 진리를 따르고, 사랑으로 고귀해지며, 자비에 좌우되고, 공평 – 정의(正義)로 삼가는 자들의 삶에서, 모든 것은 신성하니라. 내 아버지와 내가 세상에 보낼 영(靈)은 진리의 영(靈)뿐만 아니라 또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영(靈)이니라.

210704 권위종교와 영(靈)의 종교3 마18: 2-3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 He called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among them. 3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155:6.12 (1732.5) You must cease to seek for the word of God only on the pages of the olden records of theologic authority. Those who are born of the spirit of God shall henceforth discern the word of God regardless of whence it appears to take origin. Divine truth must not be discounted because the channel of its bestowal is apparently human. Many of your brethren have minds which accept the theory of God while they spiritually fail to realize the presence of God. And that is just the reason why I have so often taught you that the kingdom of heaven can best be realized by acquiring the spiritual attitude of a sincere child. It is not the mental immaturity of the child that I commend to you but rather the spiritual simplicity of such an easy-believing and fully-trusting little one. It is not so important that you should know about the fact of God as that you should increasingly grow in the ability to feel the presence of God. 너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학적 권위에 속한 옛 기록의 구절에서만 찾기를 멈춰야 하느니라. 하느님의 영(靈)으로 태어난 자들은 하느님 말씀의 출처로 여기는 것과 관계없이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볼 것이니라. 신적 진리의 경로가 언뜻 보기에 인간적이라 해서 그것을 얕잡아보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희 형제들 다수가 하느님의 현존을 영적으로 실감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느니라.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순수한 어린이의 태도로 하늘나라를 가장 잘 실감할 수 있다고, 내가 그토록 자주 너희를 가르친 이유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어린이의 정신적 미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쉽게-믿고 완전히-신뢰하는 어린이의 영적 단순성이니라. 너희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능력이 점차 자라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실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그토록 중요하지 않도다.

155:6.13 (1733.1) When you once begin to find God in your soul, presently you will begin to discover him in other men’s souls and eventually in all the creatures and creations of a mighty universe. But what chance does the Father have to appear as a God of supreme loyalties and divine ideals in the souls of men who give little or no time to the thoughtful contemplation of such eternal realities? While the mind is not the seat of the spiritual nature, it is indeed the gateway thereto. 너희가 일단 너희 혼(魂)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즉시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혼(魂)에서, 또한 결국 막강한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창조계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라. 그러나 그런 영원한 실체들의 주의 깊은 심사숙고에 거의 또는 전혀 시간이 없는 사람들의 혼(魂) 안에, 아버지가 최상의 충성과 신적 이상(理想)으로, 나타날 무슨 가망이 있겠느냐? 마음은 영적 본성의 자리가 아니지만, 실로 그에 이르는 통로이니라.

155:6.14 (1733.2)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trying to prove to other men that you have found God; you cannot consciously produce such valid proof, albeit there are two positive and powerful demonstrations of the fact that you are God-knowing, and they are: 그러니 너희가 하느님을 찾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려고 실수하지 말라. 너희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근거가 확실한 증거를 만들 수 없지만, 너희가 하느님을-안다는 사실을 확실히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으니라.

155:6.15 (1733.3) 1. The fruits of the spirit of God showing forth in your daily routine life. 너희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하느님 영(靈)의 열매들.

155:6.16 (1733.4) 2. The fact that your entire life plan furnishes positive proof that you have unreservedly risked everything you are and have on the adventure of survival after death in the pursuit of the hope of finding the God of eternity, whose presence you have foretasted in time. 너희가 시간 안에서 미리 맛본 하느님의 현존, 영원의 하느님을 발견하는 희망을 찾아 사후(死後) 생존의 모험에, 기탄없이 자신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무릅썼던 확실한 증거를 너희 전체 인생 계획이 제공한다는 사실.

155:6.17 (1733.5) Now, mistake not, my Father will ever respond to the faintest flicker of faith. He takes note of the physical and superstitious emotions of the primitive man. And with those honest but fearful souls whose faith is so weak that it amounts to little more than an intellectual conformity to a passive attitude of assent to religions of authority, the Father is ever alert to honor and foster even all such feeble attempts to reach out for him. But you who have been called out of darkness into the light are expected to believe with a whole heart; your faith shall dominate the combined attitudes of body, mind, and spirit. 이제 실수하지 말라. 내 아버지는 가장 연약한 신앙의 깜박임에도 언제나 응답하시느니라. 그는 원시인의 육체적이며 미신적인 감정들도 알아보시느니라. 그리고 신앙이 너무 약해서 권위종교에 동의하는 수동적 태도에 대한 지적 순응에 불과한, 그렇게 정직하지만 두려워하는 혼(魂)들과 함께, 아버지께 손을 내밀려는 그런 모든 연약한 시도들도, 그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 존중하고 마음에 품으시느니라. 그러나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낸 너희들은 전심으로 믿어야 하느니라. 너희 신앙이 몸, 마음 및 영의 합한 태도를 다스릴 것이라.

155:6.18 (1733.6) You are my apostles, and to you religion shall not become a theologic shelter to which you may flee in fear of facing the rugged realities of spiritual progress and idealistic adventure; but rather shall your religion become the fact of real experience which testifies that God has found you, idealized, ennobled, and spiritualized you, and that you have enlisted in the eternal adventure of finding the God who has thus found and sonshipped you. 너희는 내 사도들이며, 너희에게 종교는 영적 진보와 이상적인 모험의 거친 실체들을 똑바로 보기 두려워서 도망하는 신학적 피난처가 되지 말아야 하리라. 그러나 오히려 너희 종교는, 하느님이 너희를 발견하고, 이상화하며, 품위 있게 하고, 영화(靈化)했으며, 그렇게 너희를 발견하여 자녀로 삼은 하느님을 찾는 영원한 모험에 너희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입증하는 실제 체험의 사실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

155:6.19 (1733.7) And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he beckoned to Andrew and, pointing to the west toward Phoenicia, said: “Let us be on our way.”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안드레를 불러, 페니키아를 향해 서쪽을 가리키며, “우리 길을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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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6 The Sojourn at Tyre and Sidon 티레와 시돈에서 체류(滯留)

Paper 156

The Sojourn at Tyre and Sidon 티레와 시돈에서 체류(滯留)

1. The Syrian Woman 시리아 여성
2. Teaching in Sidon 시돈에서 가르침
“This world is only a bridge…” “이 세상은 다리에 불과하니라…”
3. The Journey up the Coast 해안을 올라가며 여행함
4. At Tyre 티레에서
5. Jesus’ Teaching at Tyre 티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
Parable of the foolish carpenter 어리석은 목수의 비유
Temptation and human nature 유혹과 인간 본성
The essentials of material success 물질적 성공의 필수 요소
Spiritual living and self-respect 영적 생활과 자존심
Ideals and ideas 이상(理想)들과 생각들
Tact, charm, and wisdom 기지, 매력과 현명함
6. The Return from Phoenicia 페니키아에서 돌아옴
Attitude of the Jewish leaders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

210711 영(靈) 종교의 의미(意味)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156:0.1 (1734.1) ON FRIDAY afternoon, June 10, Jesus and his associates arrived in the environs of Sidon, where they stopped at the home of a well-to-do woman who had been a patient in the Bethsaida hospital during the times when Jesus was at the height of his popular favor. The evangelists and the apostles were lodged with her friends in the immediate neighborhood, and they rested over the Sabbath day amid these refreshing surroundings. They spent almost two and one-half weeks in Sidon and vicinity before they prepared to visit the coast cities to the north. 6월 10일(AD 29년) 금요일 오후에 예수님과 동료들은 시돈 주변에 도착하여, 예수님의 대중적 지지가 한창일 때 벳새다 병원의 환자였던 유복한 여성의 집에 들렀습니다. 전도자들과 사도들은 바로 이웃한 그녀의 친구들 집에 묵었고, 그들은 상쾌한 이런 환경에서 안식일 내내 쉬었습니다. 그들은 북쪽 해안 도시들을 방문하려고 준비하기 전에 시돈과 부근에서 거의 2주 반을 보냈습니다.

156:0.2 (1734.2) This June Sabbath day was one of great quiet. The evangelists and apostles were altogether absorbed in their meditations regarding the discourses of the Master on religion to which they had listened en route to Sidon. They were all able to appreciate something of what he had told them, but none of them fully grasped the import of his teaching. 6월의 이 안식일은 아주 평온했습니다. 전도자들과 사도들은 시돈으로 가는 도중에 들었던 주님의 종교 강론에 대한 묵상에 완전히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가 자신들에게 말한 것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그 가르침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1. The Syrian Woman 시리아 여성

210718 아버지 나라를 차지하는 충분한 신앙 막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24 Jesus left that place and went to the vicinity of Tyre. He entered a house and did not want anyone to know it; yet he could not keep his presence secret. 25 In fact, as soon as she heard about him, a woman whose little daughter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ame and fell at his feet. 26 The woman was a Greek, born in Syrian Phoenicia. She begged Jesus to drive the demon out of her daughter. 27 “First let the children eat all they want,” he told her, “for it is not right to take the children’s bread and toss it to their dogs.” 28 “Yes, Lord,” she replied, “but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crumbs.” 29 Then he told her, “For such a reply, you may go;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 30 She went home and found her child lying on the bed, and the demon gone.

156:1.1 (1734.3) There lived near the home of Karuska, where the Master lodged, a Syrian woman who had heard much of Jesus as a great healer and teacher, and on this Sabbath afternoon she came over, bringing her little daughter. The child, about twelve years old, was afflicted with a grievous nervous disorder characterized by convulsions and other distressing manifestations. 주(主)님이 묵고 있던 카루스카의 집 근처에 한 시리아 여성이 살았는데, 예수께서 위대한 치유자이며 교사라고 많이 들어서 알던, 그녀는 이 안식일 오후에 그녀의 어린 딸을 데리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12살쯤 된 아이는 경련과 다른 고통스러운 증세로 나타난 극심한 신경 질환을 앓았습니다.

156:1.2 (1734.4) Jesus had charged his associates to tell no one of his presence at the home of Karuska, explaining that he desired to have a rest. While they had obeyed their Master’s instructions, the servant of Karuska had gone over to the house of this Syrian woman, Norana, to inform her that Jesus lodged at the home of her mistress and had urged this anxious mother to bring her afflicted daughter for healing. This mother, of course, believed that her child was possessed by a demon, an unclean spirit. 예수님은 쉬고 싶다고 말씀하시며, 동료들에게 자신이 카루스카의 집에 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지시를 따랐지만, 카루스카의 하인이 이 시리아 여성, 노라나의 집에 건너가서 예수께서 그녀의 여주인 집에 투숙하셨다고 전하면서, 염려하는 이 어머니에게 병든 딸이 낫도록 데려오라고 재촉했습니다. 물론 이 어머니는 자기 딸이 귀신, 더러운 영(靈)이 들렸다고 믿었습니다.

156:1.3 (1734.5) When Norana arrived with her daughter, the Alpheus twins explained through an interpreter that the Master was resting and could not be disturbed; whereupon Norana replied that she and the child would remain right there until the Master had finished his rest. Peter also endeavored to reason with her and to persuade her to go home. He explained that Jesus was weary with much teaching and healing, and that he had come to Phoenicia for a period of quiet and rest. But it was futile; Norana would not leave. To Peter’s entreaties she replied only: “I will not depart until I have seen your Master. I know he can cast the demon out of my child, and I will not go until the healer has looked upon my daughter.” 노라나가 자기 딸과 함께 도착하자, 알페오 쌍둥이가 통역을 통해 주(主)님이 쉬는 중이라 방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노라나는 아이와 함께 주께서 휴식을 마칠 때까지 바로 거기에 남아 있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녀를 설득하여 집에 돌아가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많은 가르침과 치유로 지쳐서, 한동안 조용히 쉬러 페니키아에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었습니다. 노라나는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간청에 그녀는 “내가 당신의 주(主)를 만날 때까지 나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가 내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치유자가 내 딸을 볼 때까지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156:1.4 (1734.6) Then Thomas sought to send the woman away but met only with failure. To him she said: “I have faith that your Master can cast out this demon which torments my child. I have heard of his mighty works in Galilee, and I believe in him. What has happened to you, his disciples, that you would send away those who come seeking your Master’s help?” And when she had thus spoken, Thomas withdrew. 그때 도마가 여성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실패할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께서 내 아이를 괴롭히는 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나는 신앙합니다. 나는 갈릴리에서 그의 기적을 소문으로 들었고, 나는 그를 믿습니다. 그의 제자들인, 당신들이 당신 주님의 도움을 구하러 오는 자들을 돌려보내려 하다니, 어찌 된 까닭입니까?”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도마는 물러났습니다.

156:1.5 (1735.1) Then came forward Simon Zelotes to remonstrate with Norana. Said Simon: “Woman, you are a Greek-speaking gentile. It is not right that you should expect the Master to take the bread intended for the children of the favored household and cast it to the dogs.” But Norana refused to take offense at Simon’s thrust. She replied only: “Yes, teacher, I understand your words. I am only a dog in the eyes of the Jews, but as concerns your Master, I am a believing dog. I am determined that he shall see my daughter, for I am persuaded that, if he shall but look upon her, he will heal her. And even you, my good man, would not dare to deprive the dogs of the privilege of obtaining the crumbs which chance to fall from the children’s table.” 그 다음에 시몬 젤로테스가 노라나를 타이르려고 나섰습니다. 시몬이 말했습니다. “여자여, 당신은 헬라(그리스) 말을 하는 이방인입니다. 주께서 혜택받은 집안 자녀를 위한 빵을 가져다가 그것을 개들에게 던져주리라고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라나는 시몬의 혹평에 성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예, 선생님, 저는 당신의 말을 이해합니다. 나는 유대인들의 눈에 개에 불과하지만, 당신의 주(主)님에 대해서 나는 믿는 개입니다. 그가 내 딸을 보시도록 내가 결심한 것은, 그가 내 딸을 보기만 해도, 그가 그녀를 치유하리라고 내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선한 분인 당신까지도, 아이들의 식탁에서 어쩌다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얻는 은혜를 개들에게서 감히 빼앗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56:1.6 (1735.2) At just this time the little girl was seized with a violent convulsion before them all, and the mother cried out: “There, you can see that my child i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If our need does not impress you, it would appeal to your Master, who I have been told loves all men and dares even to heal the gentiles when they believe. You are not worthy to be his disciples. I will not go until my child has been cured.” 바로 이때, 어린 소녀가 그들 모두 앞에서 격렬한 경련이 엄습했고, 그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저기, 악령 들린 내 아이를 당신들이 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간절함에 관심이 없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이 믿으면 이방인들도 과감히 치유하기를 무릅쓰신다고 내가 들었던, 당신들의 주님께 간청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그의 제자가 되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병 낫기까지 내가 가지 않겠습니다.”

156:1.7 (1735.3) Jesus, who had heard all of this conversation through an open window, now came outside, much to their surprise, and said: “O woman, great is your faith, so great that I cannot withhold that which you desire; go your way in peace. Your daughter already has been made whole.” And the little girl was well from that hour. As Norana and the child took leave, Jesus entreated them to tell no one of this occurrence; and while his associates did comply with this request, the mother and the child ceased not to proclaim the fact of the little girl’s healing throughout all the countryside and even in Sidon, so much so that Jesus found it advisable to change his lodgings within a few days. 열린 창문으로 이 모든 대화를 들으신 예수께서, 그들이 아주 놀라게, 이제 밖으로 나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 여자여, 네 신앙이 크도다, 네가 바라는 것을, 내가 주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크도다. 평안히 네 길을 가라. 네 딸이 이미 건강해졌느니라.” 그 어린 소녀는 그 시각부터 튼튼했습니다. 노라나와 아이가 떠날 때, 예수님은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이 요청을 따랐지만, 어머니와 아이는 어린 소녀의 치유 사실을 모든 시골 곳곳과 시돈에서도 그치지 않고 너무 선포해서, 예수님은 그의 숙소를 며칠 내에 옮기는 것이 상책임을 알았습니다.

156:1.8 (1735.4) The next day, as Jesus taught his apostles, commenting on the cure of the daughter of the Syrian woman, he said: “And so it has been all the way along; you see for yourselves how the gentiles are able to exercise saving faith in the teaching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Verily, verily, I tell you that the Father’s kingdom shall be taken by the gentiles if the children of Abraham are not minded to show faith enough to enter therein.” 다음날 예수께서 사도들을 가르치면서, 시리아 여성의 딸 치유에 대해 언급하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줄곧 그랬었느니라. 이방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서 구원의 신앙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 너희가 스스로 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거기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신앙을 보일 마음이 없으면, 이방인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차지하리라.”

2. Teaching in Sidon 시돈에서 가르침

210725 영적 진보 히5:11-14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1 We have much to say about this, but it is hard to explain because you are slow to learn. 12 In fact, though by this time you ought to be teachers, you need someone to teach you the elementary truths of God’s word all over again. You need milk, not solid food! 13 Anyone who lives on milk, being still an infant, is not acquainted with the teaching about righteousness. 14 But solid food is for the mature, who by constant use have trained themselves to distinguish good from evil.

156:2.1 (1735.5) In entering Sidon, Jesus and his associates passed over a bridge, the first one many of them had ever seen. As they walked over this bridge, Jesus, among other things, said: “This world is only a bridge; you may pass over it, but you should not think to build a dwelling place upon it.” 시돈에 들어가면서, 예수님과 동료들은, 그들 중 여럿이 처음 본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들이 이 다리 위를 걸으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다리에 불과하니라. 너희가 그것을 건널 수 있지만, 너희는 그 위에 거처를 지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156:2.2 (1735.6) As the twenty-four began their labors in Sidon, Jesus went to stay in a home just north of the city, the house of Justa and her mother, Bernice. Jesus taught the twenty-four each morning at the home of Justa, and they went abroad in Sidon to teach and preach during the afternoons and evenings. 24명이 시돈에서 일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도시 바로 북쪽의 집, 유스타와 그녀의 어머니 버니게의 집에 머물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오전에 유스타의 집에서 24명을 가르쳤고, 그들은 오후와 저녁에 시돈으로 나가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156:2.3 (1735.7)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were greatly cheered by the manner in which the gentiles of Sidon received their message; during their short sojourn many were added to the kingdom. This period of about six weeks in Phoenicia was a very fruitful time in the work of winning souls, but the later Jewish writers of the Gospels were wont lightly to pass over the record of this warm reception of Jesus’ teachings by these gentiles at this very time when such a large number of his own people were in hostile array against him.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시돈의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크게 격려받았습니다. 그들이 짧게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더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페니키아에서 약 6주간의 이 기간은 혼(魂)들을 얻는 과업에서 아주 결실이 풍부한 시기였지만 나중에 복음서의 유대인 저자들은, 그렇게 많은 수의 동족이 그를 거슬러 적대적으로 정렬하던, 바로 이때 이런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따스하게 받아들인 기록을 경솔히 무시하곤 했습니다.

156:2.4 (1736.1) In many ways these gentile believers appreciated Jesus’ teachings more fully than the Jews. Many of these Greek-speaking Syrophoenicians came to know not only that Jesus was like God but also that God was like Jesus. These so-called heathen achieved a good understanding of the Master’s teachings about the uniformity of the laws of this world and the entire universe. They grasped the teaching that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races, or nations; that there is no favoritism with the Universal Father; that the universe is wholly and ever law-abiding and unfailingly dependable. These gentiles were not afraid of Jesus; they dared to accept his message. All down through the ages men have not been unable to comprehend Jesus; they have been afraid to. 여러 면에서 이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들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충분히 헤아렸습니다. 이 그리스(헬라)-말을 하는 이 여러 시리아-페니키아인(人)들은 예수께서 하느님과 같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예수님과 같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위 이 이방인들은 이 세상과 전 우주 법칙의 획일성에 대한 주(主)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 인종이나 국가를 차별하지 않는 분이고, 우주 아버지는 편애가 없으며, 우주는 전적으로 언제나 법률을 따르며 확실히 신뢰할 만하다는 가르침을 그들이 파악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담하게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해하기를 두려워했던 것이었습니다.

156:2.5 (1736.2) Jesus made it clear to the twenty-four that he had not fled from Galilee because he lacked courage to confront his enemies. They comprehended that he was not yet ready for an open clash with established religion, and that he did not seek to become a martyr. It was during one of these conferences at the home of Justa that the Master first told his disciples that “even though heaven and earth shall pass away, my words of truth shall not.” 예수님은 자신의 대적들을 맞설 용기가 부족해서 갈릴리에서 도피하지 않았다고 24명에게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가 아직 기성 종교와 공개적으로 충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가 순교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했습니다. 유스타 집의 이런 회의 중 하나에서 주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 진리의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막13: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6:2.6 (1736.3) The theme of Jesus’ instructions during the sojourn at Sidon was spiritual progression. He told them they could not stand still; they must go forward in righteousness or retrogress into evil and sin. He admonished them to “forget those things which are in the past while you push forward to embrace the greater realities of the kingdom.” He besought them not to be content with their childhood in the gospel but to strive for the attainment of the full stature of divine sonship in the communion of the spirit and in the fellowship of believers. 시돈에 머무는 동안 예수님의 교훈 주제는 영적 진보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공의(公義)로 전진하거나, 악과 죄로 퇴보해야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과거에 있는 그런 것들을 잊고, 반면에 하늘나라의 더 큰 실체들을 붙잡으려고 (곤란을 무릅쓰고) 밀고 나아가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 안에서 어린 단계로 만족하지 말고, 영의 교통과 신자의 친교 가운데 신적 자녀로 충분한 성장에 도달하도록 애쓰기를 강하게 바라셨습니다.

156:2.7 (1736.4) Said Jesus: “My disciples must not only cease to do evil but learn to do well; you must not only be cleansed from all conscious sin, but you must refuse to harbor even the feelings of guilt. If you confess your sins, they are forgiven; therefore must you maintain a conscience void of offense.”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제자들은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워야 하느니라. 너희는 의식적인 모든 죄를 씻어낼 뿐만 아니라 죄책감의 느낌도 품지 않으려 해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죄를 고백하면 그것은 용서받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양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라.”

156:2.8 (1736.5) Jesus greatly enjoyed the keen sense of humor which these gentiles exhibited. It was the sense of humor displayed by Norana, the Syrian woman, as well as her great and persistent faith, that so touched the Master’s heart and appealed to his mercy. Jesus greatly regretted that his people — the Jews — were so lacking in humor. He once said to Thomas: “My people take themselves too seriously; they are just about devoid of an appreciation of humor. The burdensome religion of the Pharisees could never have had origin among a people with a sense of humor. They also lack consistency; they strain at gnats and swallow camels.” 예수님은 이런 이방인들이 드러낸 명민한 유머 감각을 크게 즐거워하셨습니다. 시리아 여성 노라나의 커다란 불굴(不屈)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녀가 보여준 유머 감각도 주님의 심정을 그렇게 움직였고 주님의 자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 유대인-의 유머가 아주 부족하여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그가 이전에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내 민족은 스스로 너무 심각하니라. 그들은 거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부담스러운 종교는 유머 감각을 지닌 민족 사이에서 결코 생길 수 없느니라. 그들은 일관성도 부족하니라.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4).”

3. The Journey up the Coast 해안을 올라가며 여행함

210801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156:3.1 (1736.6) On Tuesday, June 28, the Master and his associates left Sidon, going up the coast to Porphyreon and Heldua. They were well received by the gentiles, and many were added to the kingdom during this week of teaching and preaching. The apostles preached in Porphyreon and the evangelists taught in Heldua. While the twenty-four were thus engaged in their work, Jesus left them for a period of three or four days, paying a visit to the coast city of Beirut, where he visited with a Syrian named Malach, who was a believer, and who had been at Bethsaida the year before. 6월 28일 화요일에 예수님과 동료들은 시돈을 떠나 해안을 따라 포르피리온과 헬두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을 완전히 받아들였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이 주간에 많은 이들이 하늘나라에 추가되었습니다. 사도들은 포르피리온에서 전도하고 전도자들은 헬두아에서 가르쳤습니다. 24명이 이렇게 일하는 동안, 예수님은 사나흘 간 그들을 떠나, 해안 도시 베이루트를 방문하여, 신자로서 작년에 벳새다에 왔었던 말라크라는 이름의 시리아인(人)을 방문했습니다.

156:3.2 (1737.1) On Wednesday, July 6, they all returned to Sidon and tarried at the home of Justa until Sunday morning, when they departed for Tyre, going south along the coast by way of Sarepta, arriving at Tyre on Monday, July 11. By this time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were becoming accustomed to working among these so-called gentiles, who were in reality mainly descended from the earlier Canaanite tribes of still earlier Semitic origin. All of these peoples spoke the Greek language. It was a great surprise to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to observe the eagerness of these gentiles to hear the gospel and to note the readiness with which many of them believed. 7월 6일 수요일에 그들 모두 시돈으로 돌아와 일요일 아침까지 유스타의 집에 머물렀고, 그들이 티레로 떠나, 사렙타를 거쳐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7월 11일 월요일에 티레에 도착했습니다. 이 무렵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소위 이런 이방인들 사이의 과업에 익숙해졌는데, 그들 대부분은 실제로, 훨씬 이른 셈족 기원의 초기 가나안 부족들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민족들 모두 그리스(헬라)어를 말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는 열망을 관찰하고 그들 대부분이 흔쾌히 믿는 것을 주목하면서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아주 놀랐습니다.

4. At Tyre 티레에서

156:4.1 (1737.2) From July 11 to July 24 they taught in Tyre. Each of the apostles took with him one of the evangelists, and thus two and two they taught and preached in all parts of Tyre and its environs. The polyglot population of this busy seaport heard them gladly, and many were baptized into the outward fellowship of the kingdom. Jesus maintained his headquarters at the home of a Jew named Joseph, a believer, who lived three or four miles south of Tyre, not far from the tomb of Hiram who had been king of the city-state of Tyre during the times of David and Solomon. 7월 11일(월)에서 24일(일요일)까지 그들은 티레에서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은 각자 전도자 한 명씩 데려가서 이렇게 둘씩 티레와 그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그들은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바쁜 이 항구 도시의 다국적 주민들은 즐거이 그들의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아 하늘나라의 눈에 보이는 회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티레 남쪽으로 3-4마일(4.8-6.4km) 떨어져 사는 요셉이라는 유대인 신자의 집을 본부로 유지했는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도시 국가 티레의 왕이었던 히람의 무덤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156:4.2 (1737.3) Daily, for this period of two weeks,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entered Tyre by way of Alexander’s mole to conduct small meetings, and each night most of them would return to the encampment at Joseph’s house south of the city. Every day believers came out from the city to talk with Jesus at his resting place. The Master spoke in Tyre only once, on the afternoon of July 20, when he taught the believers concerning the Father’s love for all mankind and about the mission of the Son to reveal the Father to all races of men. There was such an interest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mong these gentiles that, on this occasion, the doors of the Melkarth temple were opened to him, and it is interesting to record that in subsequent years a Christian church was built on the very site of this ancient temple. 이 2주간 매일,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소모임들을 인도하러 알렉산더의 방파제 항구를 거쳐 티레로 들어갔고, 그들 대부분이 매일 밤 도시의 남쪽 요셉의 집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매일 신자들이, 예수님의 휴식처에서 그와 얘기하려고 도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련하여 모든 인류에게 아버지를 계시하는 아들의 사명에 관해 신자들을 가르쳤던, 7월 20일(수) 오후에 겨우 한 번 티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방인들 사이에 하늘나라 복음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이때, 멜카트 신전의 문이 그에게 열렸고, 몇 년이 지나서, 이 고대 신전의 그 자리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진 기록은 흥미롭습니다.

156:4.3 (1737.4) Many of the leaders in the manufacture of Tyrian purple, the dye that made Tyre and Sidon famous the world over, and which contributed so much to their world-wide commerce and consequent enrichment, believed in the kingdom. When, shortly thereafter, the supply of the sea animals which were the source of this dye began to diminish, these dye makers went forth in search of new habitats of these shellfish. And thus migrating to the ends of the earth, they carried with them the message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 the gospel of the kingdom. 자주(紫朱)색, 전 세계에 티레와 시돈을 유명하게 만들어, 세계적인 그들 상업의 결과로 풍족함에 아주 많이 도움이 된, 염료를 제조하는 여러 지도자가 하늘나라를 믿었습니다. 그 후 머지않아 이 염료의 근원이었던 바다 동물(Murex brandaris & Purpura haemastoma)의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이 염료 제조업자들은 이런 조개의 새 서식지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리고 땅끝까지 이렇게 이동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사랑 –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5. Jesus’ Teaching at Tyre 티레에서 예수의 가르침

210808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156:5.1 (1737.5) On this Wednesday afternoon, in the course of his address, Jesus first told his followers the story of the white lily which rears its pure and snowy head high into the sunshine while its roots are grounded in the slime and muck of the darkened soil beneath. “Likewise,” said he, “mortal man, while he has his roots of origin and being in the animal soil of human nature, can by faith raise his spiritual nature up into the sunlight of heavenly truth and actually bear the noble fruits of the spirit.” 이 수요일 오후에 강연 중에 예수께서 따르는 자들에게 어두운 땅 아래 진흙과 거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햇빛에 순결하고 새하얀 꽃송이를 높이 들고 있는 흰 백합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하셨습니다. 그는 “마찬가지로, 필사자는 인간 본성의 동물성 토양에 자기 기원과 존재의 뿌리가 있지만, 신앙으로 자신의 영적 본성을 하늘 진리의 햇빛 속으로 일으켜 세워 영(靈)의 고상한 열매를 실제로 맺을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6:5.2 (1738.1) It was during this same sermon that Jesus made use of his first and only parable having to do with his own trade — carpentry. In the course of his admonition to “Build well the foundations for the growth of a noble character of spiritual endowments,” he said: “In order to yield the fruits of the spirit, you must be born of the spirit. You must be taught by the spirit and be led by the spirit if you would live the spirit-filled life among your fellows.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the foolish carpenter who wastes valuable time squaring, measuring, and smoothing his worm-eaten and inwardly rotting timber and then, when he has thus bestowed all of his labor upon the unsound beam, must reject it as unfit to enter into the foundations of the building which he would construct to withstand the assaults of time and storm. Let every man make sure that the intellectual and moral foundations of character are such as will adequately support the superstructure of the enlarging and ennobling spiritual nature, which is thus to transform the mortal mind and then, in association with that re-created mind, is to achieve the evolvement of the soul of immortal destiny. Your spirit nature — the jointly created soul — is a living growth, but the mind and morals of the individual are the soil from which these higher manifestations of human development and divine destiny must spring. The soil of the evolving soul is human and material, but the destiny of this combined creature of mind and spirit is spiritual and divine.” 이 설교를 하시며, 예수님은 자신의 직업 – 목수직과 관련된 비유를 처음 유일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영적 자질에 속한 고귀한 성품의 성장을 위한 토대를 잘 세우라.”고 권고하시며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영의 열매를 맺으려면 너희가 영으로 태어나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영(靈)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너희는 영의 가르침을 받고 영으로 인도되어야만 하느니라. 단연코, 벌레 먹어 내부가 썩은 목재를 직각이 되게 하고, 치수를 재며, 반반하게 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다음, 이런 식으로 썩은 기둥에 자신의 모든 수고를 쏟았을 때, 시간과 모진 비바람의 공격을 버티도록 자신이 세운 건물의 토대가 되기에 부적당하여, 그것을 버려야만 하는 어리석은 목수의 잘못을 범하지 말라. 그렇게 필사자 마음을 변환한 후, 다시-만들어진 그런 마음과 함께, 불멸의 운명에 속한 혼(魂)의 진화를 이루는 영적 본성, 확대되어 품위 있게 하는 영적 본성의 상부 구조를 충분히 버티도록, 그런 지적, 도덕적 성품의 토대가 있는지 각자 확보하라. 너희 영(靈) 본성–공동으로 창조된 혼(魂)-은 살아있는 성장이지만, 개인의 마음과 품행은, 이런 인간 개발의 더 높은 표명과 신적 운명이 솟아나야 하는, 토양이니라. 진화하는 혼(魂)의 토양은 인간적이고 물질적이지만, 이렇게 결합한 마음과 영을 지닌 창조물의 운명은 영적이고 신적이니라.”

156:5.3 (1738.2) On the evening of this same day Nathaniel asked Jesus: “Master, why do we pray that God will lead us not into temptation when we well know from your revelation of the Father that he never does such things?” Jesus answered Nathaniel: 바로 이날 저녁에 나다니엘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아버지께서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그에 대한 당신의 계시로 우리가 잘 아는데,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지 않도록 왜 우리가 기도하는지요?” 예수께서 나다니엘에게 대답하셨습니다.

156:5.4 (1738.3) “It is not strange that you ask such questions seeing that you are beginning to know the Father as I know him, and not as the early Hebrew prophets so dimly saw him. You well know how our forefathers were disposed to see God in almost everything that happened. They looked for the hand of God in all natural occurrences and in every unusual episode of human experience. They connected God with both good and evil. They thought he softened the heart of Moses and hardened the heart of Pharaoh. When man had a strong urge to do something, good or evil, he was in the habit of accounting for these unusual emotions by remarking: ‘The Lord spoke to me saying, do thus and so, or go here and there.’ Accordingly, since men so often and so violently ran into temptation, it became the habit of our forefathers to believe that God led them thither for testing, punishing, or strengthening. But you, indeed, now know better. You know that men are all too often led into temptation by the urge of their own selfishness and by the impulses of their animal natures. When you are in this way tempted, I admonish you that, while you recognize temptation honestly and sincerely for just what it is, you intelligently redirect the energies of spirit, mind, and body, which are seeking expression, into higher channels and toward more idealistic goals. In this way may you transform your temptations into the highest types of uplifting mortal ministry while you almost wholly avoid these wasteful and weakening conflicts between the animal and spiritual natures. “초기 히브리 선지자들이 아버지를 아주 희미하게 본 것과 다르게,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네가 그를 알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네가 그렇게 묻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니라. 너는 우리 조상들이 일어난 거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는지 잘 아느니라. 그들은 모든 자연 사건과 인간 경험의 모든 드문 사건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았느니라. 그들은 하느님을 선과 악으로 연결했느니라. 그들은 그가 모세의 심정을 누그러뜨렸고 바로의 심정을 완고하게 했다고 생각했도다(출4:21). 사람이 선이나 악, 어떤 것을 행할 강한 충동을 지녔을 때, 그는 이런 드문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습관적으로 설명했느니라. ‘주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이렇게 저렇게 하든지, 이리 저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그토록 격렬히 유혹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들을 시험하고, 벌하며, 강하게 하는, 그쪽으로 인도했다고 믿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습관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너는 정말 이제 잘 알고 있느니라. 너는, 사람들 모두 그들 자신의 이기적 충동과 자신들의 동물적 본성의 충동으로 너무 자주 유혹받았다는 것을 아느니라. 네가 이렇게 유혹되면, 내가 너를 권고하노니, 너는 유혹이 바로 무엇인지 정직하고 신실하게 알아내면서, 너는 더 높은 경로와 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표현하고 있는 영(靈), 마음 및 몸의 에너지 방향을, 영리하게 수정하라. 이렇게 너는, 동물적이며 영적인 본성 사이에 낭비하고 약하게 하는 이런 갈등을 거의 완전히 피하면서, 네 유혹을 필사자 보살핌을 향상하는 최고 유형들로 변환할 수 있느니라.

156:5.5 (1738.4) “But let me warn you against the folly of undertaking to surmount temptation by the effort of supplanting one desire by another and supposedly superior desire through the mere force of the human will. If you would be truly triumphant over the temptations of the lesser and lower nature, you must come to that place of spiritual advantage where you have really and truly developed an actual interest in, and love for, those higher and more idealistic forms of conduct which your mind is desirous of substituting for these lower and less idealistic habits of behavior that you recognize as temptation. You will in this way be delivered through spiritual transformation rather than be increasingly overburdened with the deceptive suppression of mortal desires. The old and the inferior will be forgotten in the love for the new and the superior. Beauty is always triumphant over ugliness in the hearts of all who are illuminated by the love of truth. There is mighty power in the expulsive energy of a new and sincere spiritual affection. And again I say to you, be not overcome by evil but rather overcome evil with good.” “그러나 하나의 욕망을, 인간 의지의 단순한 힘을 통해, 다른 욕망과 아마 우월한 욕망으로 대체하는 노력으로 유혹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음에 대해 내가 네게 경고하노라. 네가 더 모자라고 낮은 본성의 유혹을 진실로 이기려면, 네가 유혹이라고 알아차린, 이렇게 더 낮고 더 이상적(理想的)이지 않은 행실 습관을 네 마음이 대체하려는, 더 높고 더 이상적(理想的)인 행동 형태에 대해, 네가 정말 진실로 실제로 관심과 사랑을 개발한, 영적으로 우세한 자리로 네가 와야 하느니라. 너는 필사 욕망을 거짓으로 감추어 점차 과중한 부담이 되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영적 변환을 통해서 해방되리라. 낡고 열등한 것들은 새롭게 우월한 것을, 사랑하여 잊혀질 것이니라. 아름다움은, 진리의 사랑으로 빛을 받은 모든 자의 심정에서, 언제나 추악함을 이기느니라. 새롭고 신실한 영적 애정의 밀어 내보내는 에너지에는 강력한 권능이 있느니라. 다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210815 신적 사랑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Dear friends, 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156:5.6 (1739.1) Long into the night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continued to ask questions, and from the many answers we would present the following thoughts,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밤새도록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계속 질문했고, 여러 대답에서 우리는 현대적 표현으로 다시 진술하면서 다음의 생각들을 제시하려 합니다.

156:5.7 (1739.2) Forceful ambition, intelligent judgment, and seasoned wisdom are the essentials of material success. Leadership is dependent on natural ability, discretion, will power, and determination. Spiritual destiny is dependent on faith, love, and devotion to truth —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 the wholehearted desire to find God and to be like him. 강력한 야망, 지능적 판단 및 숙련된 지혜는 물질적 성공에 필수 요소입니다. 지도력은 타고난 능력, 재량권, 의지력 및 결단력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 운명은 신앙, 사랑, 및 진리에 대한 헌신 – 공의(公義)에 대한 갈망과 열망 – 하느님을 찾고 그를 닮으려는 전심의 요망(要望)에 달려 있습니다.

156:5.8 (1739.3) Do not become discouraged by the discovery that you are human. Human nature may tend toward evil, but it is not inherently sinful. Be not downcast by your failure wholly to forget some of your regrettable experiences. The mistakes which you fail to forget in time will be forgotten in eternity. Lighten your burdens of soul by speedily acquiring a long-distance view of your destiny, a universe expansion of your career. 너희가 인간이라는 발견으로 낙담하지 말라. 인간 본성이 악을 향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본래 죄가 되지 않습니다. 너희의 유감스러운 일부 체험을 완전히 잊지 못했다고 기운을 잃고 풀이 죽지 말라. 시간 안에서 잊지 못한 실수는 영원 안에서 잊혀질 것입니다. 너희 운명의 장거리 관점, 너희 생애의 우주 확장을 빨리 얻어서 너희 혼(魂)의 부담을 가볍게 하라.

156:5.9 (1739.4) Make not the mistake of estimating the soul’s worth by the imperfections of the mind or by the appetites of the body. Judge not the soul nor evaluate its destiny by the standard of a single unfortunate human episode. Your spiritual destiny is conditioned only by your spiritual longings and purposes. 마음의 불완전성이나 육체의 욕망으로 혼(魂)의 가치를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잘못된 인간의 사건 하나의 기준으로 혼(魂)을 판단하거나 그 운명을 평가하지 말라. 너희의 영적 운명은 너희의 영적 갈망과 목적만으로 결정됩니다. 

156:5.10 (1739.5) Religion is the exclusively spiritual experience of the evolving immortal soul of the God-knowing man, but moral power and spiritual energy are mighty forces which may be utilized in dealing with difficult social situations and in solving intricate economic problems. These moral and spiritual endowments make all levels of human living richer and more meaningful. 종교는 오로지 하느님을-아는 사람의 진화하는 불멸 혼(魂)이 겪는 영적 체험이지만, 도덕적 권능과 영적 에너지는 어려운 사회적 상황을 다루고 뒤얽힌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활용되는 강력한 세력입니다. 이런 도덕적이며 영적인 자질은 인간 생활의 모든 수준을 더 부유하고 더 의미 있게 만듭니다.

156:5.11 (1739.6) You are destined to live a narrow and mean life if you learn to love only those who love you. Human love may indeed be reciprocal, but divine love is outgoing in all its satisfaction-seeking. The less of love in any creature’s nature, the greater the love need, and the more does divine love seek to satisfy such need. Love is never self-seeking, and it cannot be self-bestowed. Divine love cannot be self-contained; it must be unselfishly bestowed.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너희가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너희는 편협하고 하잘것없는 삶을 살 것이 뻔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정말 상호적일 수 있지만, 신적 사랑은 만족을-추구하는 모든 점에서 개방적입니다. 어떤 창조물의 본성에서 사랑이 적을수록, 사랑의 필요가 더 커지며, 신적 사랑은 그런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더 많이 시도합니다. 사랑은 결코 이기적이 아니며, 그것은 자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신적 사랑은 자족(自足 스스로 필요를 채움)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 없이 증여되어야 합니다.

156:5.12 (1739.7) Kingdom believers should possess an implicit faith, a whole-souled belief, in the certain triumph of righteousness. Kingdom builders must be undoubting of the truth of the gospel of eternal salvation. Believers must increasingly learn how to step aside from the rush of life — escape the harassments of material existence — while they refresh the soul, inspire the mind, and renew the spirit by worshipful communion. 하느님 나라 신자들은, 공의(公義)의 확실한 승리에 대한 절대적 신앙, 마음에서 우러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축자들은 영원한 구원의 복음이 진리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은 분망한 생활에서 물러나 –물질 존재의 괴로움을 피하면서, 혼(魂)을 새롭게 하고, 마음에 영감을 주고, 경배의 친교로 영(靈)을 새롭게 하는 법을 점차 배워야 합니다.

156:5.13 (1739.8) God-knowing individuals are not discouraged by misfortune or downcast by disappointment. Believers are immune to the depression consequent upon purely material upheavals; spirit livers are not perturbed by the episodes of the material world. Candidates for eternal life are practitioners of an invigorating and constructive technique for meeting all of the vicissitudes and harassments of mortal living. Every day a true believer lives, he finds it easier to do the right thing. 하느님을-아는 개인들은 불행한 일로 낙담하거나 어긋한 기대로 풀이 죽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순전히 물질적인 격변의 결과로 일어나는 우울증에 면역되어 있습니다. 영(靈)으로 사는 자들은 물질 세상의 사건으로 당황하지 않습니다. 영생(永生)의 후보자들은, 필사자 생활의 모든 흥망과 괴로움에 대처하도록, 격려하는 건설적 기법의 수습(修習)자들입니다. 참 신자는 날마다 살면서, 옳은 일을 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56:5.14 (1740.1) Spiritual living mightily increases true self-respect. But self-respect is not self-admiration. Self-respect is always co-ordinate with the love and service of one’s fellows. It is not possible to respect yourself more than you love your neighbor; the one is the measure of the capacity for the other. 영적 생활은 참된 자존심(自尊心 자기 품위를 스스로 높임)을 대단히 증진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자화자찬(自畵自讚 자만)이 아닙니다. 자존심은 언제나 동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조화를 이룹니다. 너희가 너희 이웃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너희 자신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한 수용력의 척도입니다.

210822 거저 받고 거저 주는 사랑 마10:8b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156:5.15 (1740.2) As the days pass, every true believer becomes more skillful in alluring his fellows into the love of eternal truth. Are you more resourceful in revealing goodness to humanity today than you were yesterday? Are you a better righteousness recommender this year than you were last year? Are you becoming increasingly artistic in your technique of leading hungry souls into the spiritual kingdom? 날이 갈수록, 모든 참 신자는 자기 동료들을 영원한 진리의 사랑으로 아주 잘 매혹하게 됩니다. 너희는 어제보다 오늘 더 풍성하게 사람들에게 선(善)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너희는 작년보다 올해 더 공의(公義)를 추천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굶주린 혼(婚)들을 영적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너희 기법에서 점점 숙달되고 있습니까?

156:5.16 (1740.3) Are your ideals sufficiently high to insure your eternal salvation while your ideas are so practical as to render you a useful citizen to function on earth in association with your mortal fellows? In the spirit, your citizenship is in heaven; in the flesh, you are still citizens of the earth kingdoms. Render to the Caesars the things which are material and to God those which are spiritual. 너희 생각들은 너희 필사 동료와 함께 너희가 지상에서 유능한 시민의 역할을 하기에 그렇게 실용적이면서, 너희 이상(理想)들은 너희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기에 충분히 고결합니까? 영(靈)으로, 너희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육체로, 너희는 아직 지상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가이사에게, 영적인 것들은 하느님께 바치라.

156:5.17 (1740.4) The measure of the spiritual capacity of the evolving soul is your faith in truth and your love for man, but the measure of your human strength of character is your ability to resist the holding of grudges and your capacity to withstand brooding in the face of deep sorrow. Defeat is the true mirror in which you may honestly view your real self. 진화하는 혼(魂)의 영적 수용력의 척도는 진리에 대한 너희 신앙과 사람에 대한 너희 사랑이지만, 너희 인간적 성품의 강도(强度 강한 정도)는 품은 원한을 물리치는 너희 능력과 깊은 슬픔에 직면해 곱씹기에 저항하는 너희 수용력입니다. 실패는 너희가 실제 자신을 거짓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참 거울입니다.

156:5.18 (1740.5) As you grow older in years and more experienced in the affairs of the kingdom, are you becoming more tactful in dealing with troublesome mortals and more tolerant in living with stubborn associates? Tact is the fulcrum of social leverage, and tolerance is the earmark of a great soul. If you possess these rare and charming gifts, as the days pass you will become more alert and expert in your worthy efforts to avoid all unnecessary social misunderstandings. Such wise souls are able to avoid much of the trouble which is certain to be the portion of all who suffer from lack of emotional adjustment, those who refuse to grow up, and those who refuse to grow old gracefully. 너희가 더 나이가 들고 하느님 나라 업무를 더 경험하면서, 성가신 필사자들을 더 적절히 다루고 고집 센 동료들과 함께 살면서 더 관대해지고 있습니까? 기지(機智 재치 슬기)는 사회적 영향력의 받침점이며, 관용(寬容)은 위대한 혼(魂)의 표지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진기한 매력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날이 갈수록 너희는 불필요한 모든 사회적 오해를 피하려는 너희의 합당한 수고에 더 기민하게 숙달할 것입니다. 그렇게 현명한 혼(魂)들은, 감정적 부적응으로 고통을 받는 자들, 철들지 않으려는 자들 및 품위 있는 노인이 되지 않으려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 분명한, 대부분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156:5.19 (1740.6) Avoid dishonesty and unfairness in all your efforts to preach truth and proclaim the gospel. Seek no unearned recognition and crave no undeserved sympathy. Love, freely receive from both divine and human sources regardless of your deserts, and love freely in return. But in all other things related to honor and adulation seek only that which honestly belongs to you. 너희가 진리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려고 온전히 애쓸 때 부정직과 부당함을 피하라. 노력 없이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과분한 공감을 바라지 말라. 사랑, 너희의 공적(功績)에 상관없이, 신과 인간의 자원으로부터 거저 받고, 답례로 거저 사랑하라. 그러나 명예와 과찬(過讚)에 관련된 다른 모든 일에서는 정직하게 너희에게 속한 것만 구하라.

156:5.20 (1740.7) The God-conscious mortal is certain of salvation; he is unafraid of life; he is honest and consistent. He knows how bravely to endure unavoidable suffering; he is uncomplaining when faced by inescapable hardship. 하느님을-의식하는 필사자는 구원을 확신합니다. 그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직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용감히 견디는 방법을 압니다. 그는 불가피한 곤란에 직면할 때 불평하지 않습니다.

156:5.21 (1740.8) The true believer does not grow weary in well-doing just because he is thwarted. Difficulty whets the ardor of the truth lover, while obstacles only challenge the exertions of the undaunted kingdom builder. 참된 신자는 방해가 있다고 해서 선행에 지치지 않습니다. 어려움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의 열정을 자극하며, 게다가 장애물은 불굴의 하느님 나라 건축자들의 노력을 촉구(促求 재촉하여 요구)할 뿐입니다.

156:5.22 (1740.9) And many other things Jesus taught them before they made ready to depart from Tyre. 그리고 그들이 티레를 떠나려고 준비하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여러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156:5.23 (1740.10) The day before Jesus left Tyre for the return to the region of the Sea of Galilee, he called his associates together and directed the twelve evangelists to go back by a route different from that which he and the twelve apostles were to take. And after the evangelists here left Jesus, they were never again so intimately associated with him.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지역으로 돌아오려고 티레를 떠나기 전날, 그는 자기 동료들을 함께 불러서, 12 전도자가 자신과 12 사도가 가려고 택한 것과 다른 노선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했습니다. 전도자들이 여기에서 예수님을 떠난 후, 그들은 결코 다시 그렇게 친밀히 그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6. The Return from Phoenicia 페니키아에서 돌아옴

210829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靈) 종교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You, however, are controlled not by the sinful nature but by the Spirit, if the Spirit of God lives in you. And if anyone does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he does not belong to Christ.

156:6.1 (1741.1) About noon on Sunday, July 24, Jesus and the twelve left the home of Joseph, south of Tyre, going down the coast to Ptolemais. Here they tarried for a day, speaking words of comfort to the company of believers resident there. Peter preached to them on the evening of July 25. 7월 24일(AD29), 일요일 정오 무렵에, 예수님과 12사도는 티레의 남쪽, 요셉의 집을 떠나 해안을 따라 프톨레마이스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하루 머물면서 거기 사는 신자 일행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7월 25일(월) 저녁에 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156:6.2 (1741.2) On Tuesday they left Ptolemais, going east inland to near Jotapata by way of the Tiberias road. Wednesday they stopped at Jotapata and instructed the believers further in the things of the kingdom. Thursday they left Jotapata, going north on the Nazareth-Mount Lebanon trail to the village of Zebulun, by way of Ramah. They held meetings at Ramah on Friday and remained over the Sabbath. They reached Zebulun on Sunday, the 31st, holding a meeting that evening and departing the next morning. 그들은 화요일(7/26)에 프톨레마이스를 떠나 티베리아스 길을 거쳐 요타파타 근처까지 내륙 동쪽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수요일(7/27)에 요타파타에 도착해서 신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일에 대해 더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목요일(7/28)에 요타파타를 떠나 북쪽으로 나사렛-레바논 산 오솔길로 라마를 거쳐 스불론 마을까지 갔습니다. 그들은 금요일(7/29)에 라마에서 집회하고 안식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31일, 일요일에 스불론에 도착하여 그날 저녁 집회하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났습니다.

156:6.3 (1741.3) Leaving Zebulun, they journeyed over to the junction with the Magdala-Sidon road near Gischala, and thence they made their way to Gennesaret on the western shores of the lake of Galilee, south of Capernaum, where they had appointed to meet with David Zebedee, and where they intended to take counsel as to the next move to be made in the work of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그들은 스불론을 떠나(8/1월) 기샬라 부근 막달라-시돈 길의 교차로까지 여행했으며, 거기서 그들은, 다윗 세베대와 만나기로 약속하여,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과업의 다음 조처를 상의하려 했던, 가버나움의 남쪽, 갈릴리 호수의 서쪽 해변 게네사렛까지 나아갔습니다.

156:6.4 (1741.4) During a brief conference with David they learned that many leaders were then gathered together on the opposite side of the lake near Kheresa, and accordingly, that very evening a boat took them across. For one day they rested quietly in the hills, going on the next day to the park, near by, where the Master once fed the five thousand. Here they rested for three days and held daily conferences, which were attended by about fifty men and women, the remnants of the once numerous company of believers resident in Capernaum and its environs. 다윗과 간단히 회의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지도자가 그때 호수 맞은편 케레사 근처에 모였음을 알게 되어서, 바로 그날 밤에 배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조용히 언덕에서 쉬었고, 주(主)께서 이전에 5,000명을 먹였던 바로 근처 공원에 다음날 갔습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3일간 쉬면서, 매일 회의했는데,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한때 허다했던 신자 무리의 나머지, 약 50명의 남녀가 참석했습니다.

156:6.5 (1741.5) While Jesus was absent from Capernaum and Galilee, the period of the Phoenician sojourn, his enemies reckoned that the whole movement had been broken up and concluded that Jesus’ haste in withdrawing indicated he was so thoroughly frightened that he would not likely ever return to bother them. All active opposition to his teachings had about subsided. The believers were beginning to hold public meetings once more, and there was occurring a gradual but effective consolidation of the tried and true survivors of the great sifting through which the gospel believers had just passed. 예수께서 가버나움과 갈릴리를 비웠던, 페니키아 체류 기간에, 그의 적들은 모든 운동이 해산된 것으로 단정했고, 급하게 예수께서 물러난 것은, 그가 너무 두려워서 그가 자신들을 괴롭히려고 전혀 돌아올 것 같지 않다고 결말을 지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한 적극적인 모든 반대가 거의 진정되었습니다. 신자들은 한 번 더 공개 모임을 열기 시작했고, 복음 신자들이 바로 통과한 큰 체질(감별) 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생존자들의 완만하지만, 눈에 띄는 강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56:6.6 (1741.6) Philip, the brother of Herod, had become a halfhearted believer in Jesus and sent word that the Master was free to live and work in his domains. 헤롯(안티파스)의 동생 빌립(헤롯 빌립)은 예수님을 뜨뜻미지근하게 믿는 신자가 되어서, 주께서 자기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일하라고 기별을 보냈습니다.

156:6.7 (1741.7) The mandate to close the synagogues of all Jewry to the teachings of Jesus and all his followers had worked adversely upon the scribes and Pharisees. Immediately upon Jesus’ removing himself as an object of controversy, there occurred a reaction among the entire Jewish people; there was general resentment against the Pharisees and the Sanhedrin leaders at Jerusalem. Many of the rulers of the synagogues began surreptitiously to open their synagogues to Abner and his associates, claiming that these teachers were followers of John and not disciples of Jesus. 예수와 그의 모든 추종자의 가르침을 모든 유대 회당에서 차단하라는 명령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반대로 작용했습니다. 논쟁의 대상으로서 예수가 사라지자마자, 전(全) 유대 민족 사이에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전반적으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 지도자들을 반대하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여러 회당장이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회당을 비밀리에 열기 시작하면서, 이 선생들은 요한의 추종자이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156:6.8 (1741.8) Even Herod Antipas experienced a change of heart and, on learning that Jesus was sojourning across the lake in the territory of his brother Philip, sent word to him that, while he had signed warrants for his arrest in Galilee, he had not so authorized his apprehension in Perea, thus indicating that Jesus would not be molested if he remained outside of Galilee; and he communicated this same ruling to the Jews at Jerusalem. 헤롯 안티파스도 심경의 변화를 겪고,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자기 동생 빌립의 영토에 머물러 있음을 알고, 예수께 기별을 보내어, 자신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체포영장에 서명했지만, 자신이 페레아에서 예수의 체포를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갈릴리 밖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께서 간섭받지 않으리라고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판결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통보했습니다.

156:6.9 (1742.1) And that was the situation about the first of August, A.D. 29, when the Master returned from the Phoenician mission and began the reorganization of his scattered, tested, and depleted forces for this last and eventful year of his mission on earth. 그리고 그것이, 주(主)께서 페니키아 선교에서 돌아와, 지상에서 자신의 마지막 파란 많은 사명의 이 해에, 흩어지고, 시험을 거쳐, 고갈된 자기 집단을 재편하기 시작했던, AD 29년 8월 1일 무렵의 상황이었습니다.

156:6.10 (1742.2) The issues of battle are clearly drawn as the Master and his associates prepare to begin the proclamation of a new religion, the religion of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who dwells in the minds of men. 주(主)님과 그의 동료들이 새 종교, 사람들의 마음에 사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靈) 종교의 선포를 시작하려고 준비하면서, 확실히 전투의 쟁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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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7 At Caesarea-Philippi 가이사랴-빌립보에서

Paper 157

At Caesarea-Philippi 가이사랴-빌립보에서

Jesus attempts to see his family 예수께서 자기 가족을 만나려고 시도하다
1. The Temple-Tax Collector 성전-세(稅) 징수원
“The fish with a shekel in his mouth.” “한 세겔을 입에 물고 있는 생선”
2. At Bethsaida-Julias 벳새다-율리아스에서
3. Peter’s Confession 베드로의 고백
“Who do men say that I am?”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4. The Talk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담화(談話)
5. The New Concept 새로운 개념
6. The Next Afternoon 다음 날 오후
The four stages of Jesus’ life 예수 생애의 4단계
New authoritative pronouncements 새로운 권위적 선언
7. Andrew’s Conference 안드레의 회의(會議)

157:0.1 (1743.1) BEFORE Jesus took the twelve for a short sojourn in the vicinity of Caesarea-Philippi, he arranged through the messengers of David to go over to Capernaum on Sunday, August 7, for the purpose of meeting his family. By prearrangement this visit was to occur at the Zebedee boatshop. David Zebedee had arranged with Jude, Jesus’ brother, for the presence of the entire Nazareth family — Mary and all of Jesus’ brothers and sisters — and Jesus went with Andrew and Peter to keep this appointment. It was certainly the intention of Mary and the children to keep this engagement, but it so happened that a group of the Pharisees, knowing that Jesus was on the opposite side of the lake in Philip’s domains, decided to call upon Mary to learn what they could of his whereabouts. The arrival of these Jerusalem emissaries greatly perturbed Mary, and noting the tension and nervousness of the entire family, they concluded that Jesus must have been expected to pay them a visit. Accordingly they installed themselves in Mary’s home and, after summoning reinforcements, waited patiently for Jesus’ arrival. And this, of course, effectively prevented any of the family from attempting to keep their appointment with Jesus. Several times during the day both Jude and Ruth endeavored to elude the vigilance of the Pharisees in their efforts to send word to Jesus, but it was of no avail. 예수께서 12사도를 데리고 가이사랴-빌립보 부근에 잠시 머무르기 전에, 그는 자기 가족을 만나려고, 8월 7일 일요일에 가버나움으로 건너가도록 다윗의 메신저를 통해 준비하셨습니다. 이 방문은 세베대 배 작업장에서 만나기로 미리 정했습니다. 다윗 세배대가 예수님의 동생 유다와 함께 모든 나사렛 가족 – 마리아와 모든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참석하도록 준비했고, 예수님은 안드레 및 베드로와 함께 이 약속을 지키려고 갔습니다. 마리아와 자녀들은 이 약속을 분명히 지키려고 했지만, 우연히 바리새인 무리가 예수께서 빌립의 영토에 있는 호수 건너편에 있음을 알고, 그의 소재를 알려고 마리아를 방문하기로 정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밀정들의 도착으로 마리아는 매우 불안했으며, 온 가족의 긴장과 불안을 알아차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틀림없이 방문할 작정이라고 그들이 추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리아의 집에 앉아 증원군을 부른 후, 예수의 도착을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물론 가족 중 누구도 이것으로 인해 예수님과 약속을 실제로 지키려고 해 볼 수 없었습니다. 낮에 몇 번씩 유다와 룻은 바리새인들의 경계를 피해 예수님께 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57:0.2 (1743.2) Early in the afternoon David’s messengers brought Jesus word that the Pharisees were encamped on the doorstep of his mother’s house, and therefore he made no attempt to visit his family. And so again, through no fault of either, Jesus and his earth family failed to make contact. 이른 오후에 다윗의 메신저들이 예수께 소식을 가져와, 바리새인들이 그 모친의 집 문간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그는 가족을 방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누구의 잘못도 없이, 예수님과 지상 가족들은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1. The Temple-Tax Collector 성전-세(稅) 징수원

210905 성전-세(稅)의 진실 마17:24-27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24 After Jesus and his disciples arrived in Capernaum, the collectors of the two-drachma tax came to Peter and asked, “Doesn’t your teacher pay the temple tax?” 25 “Yes, he does,” he replied. When Peter came into the house, Jesus was the first to speak. “What do you think, Simon?” he asked.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collect duty and taxes–from their own sons or from others?” 26 “From others,” Peter answered. “Then the sons are exempt,” Jesus said to him. 27 “But so that we may not offend them, go to the lake and throw out your line. Take the first fish you catch; open its mouth and you will find a four-drachma coin. Take it and give it to them for my tax and yours.”

157:1.1 (1743.3) As Jesus, with Andrew and Peter, tarried by the lake near the boatshop, a temple-tax collector came upon them and, recognizing Jesus, called Peter to one side and said: “Does not your Master pay the temple tax?” Peter was inclined to show indignation at the suggestion that Jesus should be expected to contribute to the maintenance of the religious activities of his sworn enemies, but, noting a peculiar expression on the face of the tax collector, he rightly surmised that it was the purpose to entrap them in the act of refusing to pay the customary half shekel for the support of the temple services at Jerusalem. Accordingly, Peter replied: “Why of course the Master pays the temple tax. You wait by the gate, and I will presently return with the tax.” 예수께서 안드레 및 베드로와 함께 배 작업장 근처 호숫가에 머물 때, 성전-세(稅) 징수원이 그들에게 와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한편으로 베드로를 불러 말했습니다. “너의 주님이 성전 세(稅)를 내지 않는가?” 베드로는, 예수가 단언한 그의 적들의 종교적 활동 유지에 바쳐야 한다는 제안에 분개하려 했으나, 세(稅) 징수원의 기묘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봉사를 지원하는 관례적인 반 세겔의 납부를 거절했다는 법률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정확히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물론 주께서 성전 세(稅)를 내십니다. 당신이 문 옆에 기다리면 내가 곧 세금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157:1.2 (1743.4) Now Peter had spoken hastily. Judas carried their funds, and he was across the lake. Neither he, his brother, nor Jesus had brought along any money. And knowing that the Pharisees were looking for them, they could not well go to Bethsaida to obtain money. When Peter told Jesus about the collector and that he had promised him the money, Jesus said: “If you have promised, then should you pay. But wherewith will you redeem your promise? Will you again become a fisherman that you may honor your word? Nevertheless, Peter, it is well in the circumstances that we pay the tax. Let us give these men no occasion for offense at our attitude. We will wait here while you go with the boat and cast for the fish, and when you have sold them at yonder market, pay the collector for all three of us.” 그때 베드로는 성급히 말했습니다. 유다가 그들의 자금을 갖고 있었고, 그는 호수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제 및 예수님도 돈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찾는 줄 알면서, 그들은 돈을 가지러 벳새다에 바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징수원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돈을 약속했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네가 약속했으면, 네가 내야 하느니라. 하지만 무엇으로 네 약속을 지키려느냐? 네 말을 지키려고 네가 다시 어부가 되려느냐? 그렇지만, 베드로야,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니라. 이들이 우리 태도로 성나지 않게 하자. 네가 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동안 우리가 여기서 기다릴 것이니, 네가 저쪽 시장에 그것을 팔아서, 우리 셋 모두를 위해 징수원에게 내라.”

157:1.3 (1744.1) All of this had been overheard by the secret messenger of David who stood near by, and who then signaled to an associate, fishing near the shore, to come in quickly. When Peter made ready to go out in the boat for a catch, this messenger and his fisherman friend presented him with several large baskets of fish and assisted him in carrying them to the fish merchant near by, who purchased the catch, paying sufficient, with what was added by the messenger of David, to meet the temple tax for the three. The collector accepted the tax, forgoing the penalty for tardy payment because they had been for some time absent from Galilee. 근처에 서 있던 다윗의 비밀 메신저가 이 모든 말을 엿들은 후에, 해안 근처에서 고기를 낚는 동료에게 빨리 오라고 신호했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배로 나가려고 준비했을 때, 이 메신저와 그의 어부 친구가 그에게 커다란 생선 바구니 몇 개를 주었고, 그를 도와서 바로 근처에서 물고기를 사들여 충분히 지급하는 생선 상인에게 그것들을 옮겼고, 세 명의 성전 세(稅)를 채우려고 다윗의 메신저가 그것에 보탰습니다. 징수원은, 그들이 한동안 갈릴리에 없었기에 납부를 지체한 벌금 없이 세금을 받았습니다.

157:1.4 (1744.2) It is not strange that you have a record of Peter’s catching a fish with a shekel in its mouth. In those days there were current many stories about finding treasures in the mouths of fishes; such tales of near miracles were commonplace. So, as Peter left them to go toward the boat, Jesus remarked, half-humorously: “Strange that the sons of the king must pay tribute; usually it is the stranger who is taxed for the upkeep of the court, but it behooves us to afford no stumbling block for the authorities. Go hence! maybe you will catch the fish with the shekel in its mouth.” Jesus having thus spoken, and Peter so soon appearing with the temple tax,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episode became later expanded into a miracle as recorded by the writer of Matthew’s Gospel. 베드로가 한 세겔을 입에 물고 있는 생선을 잡았다는 기록을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마17:27)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당시 생선 입에 있는 보물의 발견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기적에 가까운 그런 이야기들은 흔해 빠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을 떠나 배를 향해 가자, 예수께서 다소 익살스럽게 말했습니다. “왕의 자녀들이 세금을 내야만 하다니, 이상하구나. 대개 외부인들이 왕실 유지를 위해 납세하지만, 우리는 당국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하느니라. 가라! 네가 입에 세겔이 있는 생선을 잡을지도 모르겠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했고, 베드로가 바로 성전 세(稅)를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저자가 기록했듯이 사건이 나중에 기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57:1.5 (1744.3) Jesus, with Andrew and Peter, waited by the seashore until nearly sundown. Messengers brought them word that Mary’s house was still under surveillance; therefore, when it grew dark, the three waiting men entered their boat and slowly rowed away toward the eastern shore of the Sea of Galilee. 예수님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거의 해가 질 때까지 해변에서 기다렸습니다. 메신저들은, 마리아의 집이 여전히 감시받고 있었다는 소식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날이 어두워지자, 기다리던 세 사람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을 향해 서서히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2. At Bethsaida-Julias 벳새다-율리아스에서

210912 위선의 누룩을 조심하라 마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Then Jesus said unto them, Take heed and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of the Sadducees.

157:2.1 (1744.4) On Monday, August 8, while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were encamped in Magadan Park, near Bethsaida-Julias, more than one hundred believers, the evangelists, the women’s corps, and others interes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came over from Capernaum for a conference. And many of the Pharisees, learning that Jesus was here, came also. By this time some of the Sadducees were united with the Pharisees in their effort to entrap Jesus. Before going into the closed conference with the believers, Jesus held a public meeting at which the Pharisees were present, and they heckled the Master and otherwise sought to disturb the assembly. Said the leader of the disturbers: “Teacher, we would like you to give us a sign of your authority to teach, and then, when the same shall come to pass, all men will know that you have been sent by God.” And Jesus answered them: “When it is evening, you say it will be fair weather, for the heaven is red; in the morning it will be foul weather, for the heaven is red and lowering. When you see a cloud rising in the west, you say showers will come; when the wind blows from the south, you say scorching heat will come. How is it that you so well know how to discern the face of the heavens but are so utterly unable to discern the signs of the times? To those who would know the truth, already has a sign been given; but to an evil-minded and hypocritical generation no sign shall be given.” 8월 8일 월요일에 예수님과 12사도는 벳새다-율리아스 근처 마가단 공원에서 야영하는 동안, 100명의 이상의 신자, 전도자들, 여성단(女性團) 및 하느님 나라 설립에 관심이 있는 다른 이들이 회의하려고 가버나움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바리새인도, 예수께서 여기 계신 것을 알고, 왔습니다. 이 무렵 일부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신자들과 비공개(非公開)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참석한 공개 모임을 열었으며, 그들은 주(主)님을 야유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회를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방해자들의 두목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당신이 가르치는 권한의 표적을 주시고, 그 후, 같은 표적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하느님이 보내신 줄 알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하늘이 붉으면, 너희는 날이 맑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잔뜩 흐리면, 날이 궂겠다 하니라(마16:1-3a). 너희가 서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너희는 소나기가 오리라 하고,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심히 더우리라 하니라(눅12:54-55). 어째서 너희는 하늘의 기상(氣像)을 분별할 줄 잘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그토록 아예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b)? 진리를 알려는 자들은 이미 표적을 받았지만, 악의로 해석하는 위선적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하리라.”

157:2.2 (1745.1) When Jesus had thus spoken, he withdrew and prepared for the evening conference with his followers. At this conference it was decided to undertake a united mission through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of the Decapolis as soon as Jesus and the twelve should return from their proposed visit to Caesarea-Philippi. The Master participated in planning for the Decapolis mission and, in dismissing the company, said: “I say to you,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the Sadducees. Be not deceived by their show of much learning and by their profound loyalty to the forms of religion. Be only concerned with the spirit of living truth and the power of true religion. It is not the fear of a dead religion that will save you but rather your faith in a living experience in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kingdom. Do not allow yourselves to become blinded by prejudice and paralyzed by fear. Neither permit reverence for the traditions so to pervert your understanding that your eyes see not and your ears hear not. It is not the purpose of true religion merely to bring peace but rather to insure progress. And there can be no peace in the heart or progress in the mind unless you fall wholeheartedly in love with truth, the ideals of eternal realities. The issues of life and death are being set before you — the sinful pleasures of time against the righteous realities of eternity. Even now you should begin to find deliverance from the bondage of fear and doubt as you enter upon the living of the new life of faith and hope. And when the feelings of service for your fellow men arise within your soul, do not stifle them; when the emotions of love for your neighbor well up within your heart, give expression to such urges of affection in intelligent ministry to the real needs of your fellows.”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그는 물러가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저녁 회의를 준비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과 12 사도가 제안을 받은 가이사랴-빌립보 방문에서 돌아오자마자 데카폴리스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널리 연합 선교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주(主)님은 데카폴리스 선교를 위한 계획에 참여하셨고, 일행을 해산시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6, 막8:15, 눅12:1b). 많은 학식의 과시와 종교 형식에 대한 뿌리 깊은 그들의 충성에 속지 말라. 살아있는 진리의 영(靈)과 참 종교의 권능에만 관여하라. 너희를 구원할 것은 죽은 종교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영적 실체 안에 있는 살아있는 체험에 대한 너희 신앙이라. 너희 자신이 편견으로 눈이 멀고 두려움으로 마비되게 하지 말라. 전통을 존중해서, 너희가 너무 잘못 이해하여 너희 눈으로 보지 못하고 너희 귀로 듣지 못하도록 용납하지 말라. 참 종교의 목적은 단순히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히 진보하는 것이라. 그리고 너희가 전심으로 진리, 영원한 실체들의 이상(理想)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어떤 심정의 평화나 마음의 진보가 조금도 있을 수 없느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 영원에 속한 의로운 실체들을 반대하는 시간에 속한 죄 많은 쾌락이 너희 앞에 놓여 있느니라. 너희는 신앙과 소망의 새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지금도, 너희는 두려움과 의심의 속박에서 해방을 찾아내기 시작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너희 혼(魂) 안에서 같은 너희 인간들을 섬기려는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들을 억누르지 말라. 너희 이웃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너희 심정에서 솟아나면, 너희 동료의 참된 필요를 지능적으로 돌보는 가운데, 그런 애정의 충동을 표현하라.”

3. Peter’s Confession 베드로의 고백

210919 해방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마16:13-17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3 When Jesus came to the region of Caesarea Philippi, he asked his disciples, “Who do people say the Son of Man is?” 14 They replied, “Some say John the Baptist; others say Elijah; and still others, Jeremiah or one of the prophets.” 15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16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17 Jesus replied, “Blessed are you, Simon son of Jonah, for this was not revealed to you by man, but by my Father in heaven.

157:3.1 (1745.2) Early Tuesday morning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left Magadan Park for Caesarea-Philippi, the capital of the Tetrarch Philip’s domain. Caesarea-Philippi was situated in a region of wondrous beauty. It nestled in a charming valley between scenic hills where the Jordan poured forth from an underground cave. The heights of Mount Hermon were in full view to the north, while from the hills just to the south a magnificent view was had of the upper Jordan and the Sea of Galilee. 화요일(8/9) 아침 일찍 예수님과 12 사도는 마가단 공원을 떠나 분봉(分封)왕 빌립 영토의 수도, 가이사랴-빌립보로 향했습니다. 가이사랴-빌립보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요단강이 지하 동굴에서 쇄도하는 경치 좋은 언덕 사이의 매력적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헤르몬 산의 정상이 북쪽으로 완전히 보였고, 한편 언덕에서 바로 남쪽으로 요단강 상류와 갈릴리 바다의 멋진 경관이 보였습니다.

157:3.2 (1745.3) Jesus had gone to Mount Hermon in his early experience with the affairs of the kingdom, and now that he was entering upon the final epoch of his work, he desired to return to this mount of trial and triumph, where he hoped the apostles might gain a new vision of their responsibilities and acquire new strength for the trying times just ahead. As they journeyed along the way, about the time of passing south of the Waters of Merom, the apostles fell to talking among themselves about their recent experiences in Phoenicia and elsewhere and to recounting how their message had been received, and how the different peoples regarded their Master.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업무에 대한 초기 체험으로 헤르몬산에 갔었고, 이제 그는 자기 업무의 획기적 막바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시련과 승리의 이 산에 돌아가려고 했고, 거기서 사도들이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얻고 눈앞의 곤경을 위해 새 힘을 얻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이 여행 과정에 메롬 물가 남쪽을 지나칠 무렵에 사도들은 페니키아와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최근 경험에 대해 자기들끼리 말하고, 자신들의 메시지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다른 민족들이 자신들의 주(主)님을 어떻게 존경하는지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157:3.3 (1745.4) As they paused for lunch, Jesus suddenly confronted the twelve with the first question he had ever addressed to them concerning himself. He asked this surprising question, “Who do men say that I am?” 그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잠시 멈췄을 때, 예수께서 갑자기, 자신에 관해 지금까지 12 사도에게 하지 않았던 첫 질문으로 그들을 마주 대하셨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57:3.4 (1746.1) Jesus had spent long months in training these apostles as to the nature and character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he well knew the time had come when he must begin to teach them more about his own nature and his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kingdom. And now, as they were seated under the mulberry trees, the Master made ready to hold one of the most momentous sessions of his long association with the chosen apostles.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본성과 특성에 관해 이 사도들을 훈련하며 수개월이나 보내서, 그는 그가 자신의 본성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고유 관계에 대해 더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뽕나무 밑에 앉았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도들과 오랜 교제 중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를 하려고 준비했습니다.

157:3.5 (1746.2) More than half the apostles participated in answering Jesus’ question. They told him that he was regarded as a prophet or as an extraordinary man by all who knew him; that even his enemies greatly feared him, accounting for his powers by the indictment that he was in league with the prince of devils. They told him that some in Judea and Samaria who had not met him personally believed he was John the Baptist risen from the dead. Peter explained that he had been, at sundry times and by various persons, compared with Moses, Elijah, Isaiah, and Jeremiah. When Jesus had listened to this report, he drew himself upon his feet, and looking down upon the twelve sitting about him in a semicircle, with startling emphasis he pointed to them with a sweeping gesture of his hand and asked, “But who say you that I am?” There was a moment of tense silence. The twelve never took their eyes off the Master, and then Simon Peter, springing to his feet, exclaimed: “You are the Deliverer, the Son of the living God.” And the eleven sitting apostles arose to their feet with one accord, thereby indicating that Peter had spoken for all of them. 사도 중 절반 이상이 예수의 질문에 답하며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아는 모든 이가 그를 선지자나 비범한 사람으로 여기며, 그의 적들조차, 그가 악령들의 왕과 결탁했다는 기소로 그의 권능을 설명하면서, 그를 매우 두려워한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직접 그를 만나지 못한 유대와 사마리아의 몇 사람은 그가 죽은 자 중에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믿는다고 그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러 차례,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모세, 엘리야, 이사야 및 예레미아와 비교했다고 베드로가 설명했습니다(마16:13-14). 예수께서 이런 보고를 들은 후, 그가 똑바로 서서, 반원으로 자기 주위에 앉은 12 사도를 내려 보면서, 그가 곡선을 그리는 손짓으로 그들을 가리켜, 놀라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하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긴장된 침묵의 순간이 흘렀습니다. 12 사도는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그때 시몬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 “당신은 해방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마16:15-16).”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앉아 있는 11 사도들이, 베드로가 자기 모두를 위해서 말했다는 표시로써, 함께 일어났습니다.

157:3.6 (1746.3) When Jesus had beckoned them again to be seated, and while still standing before them, he said: “This has been revealed to you by my Father. The hour has come when you should know the truth about me. But for the time being I charge you that you tell this to no man. Let us go hence.” 예수께서 손짓으로 그들에게 다시 앉으라고 하셨고, 여전히 그들 앞에 서서,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이것을 너희에게 계시하셨느니라(마16:17). 너희가 나에 대한 진상을 알아야 할 때가 왔느니라. 그러나 당분간 너희는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16:20). 이제 가자.”

157:3.7 (1746.4) And so they resumed their journey to Caesarea-Philippi, arriving late that evening and stopping at the home of Celsus, who was expecting them. The apostles slept little that night; they seemed to sense that a great event in their lives and in the work of the kingdom had transpired. 그래서 그렇게 그들은 가이사랴-빌립보로 다시 여행하여, 그날 저녁 늦게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던 셀수스의 집에서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을 풀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와 하느님 나라 과업에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4. The Talk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담화(談話)

210926 살아있는 성전(聖殿)의 실체 마16:18-20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8 And I tell you that you are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ades will not overcome it. 19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20 Then he warned his disciples not to tell anyone that he was the Christ.

157:4.1 (1746.5) Since the occasions of Jesus’ baptism by John and the turning of the water into wine at Cana, the apostles had, at various times, virtually accepted him as the Messiah. For short periods some of them had truly believed that he was the expected Deliverer. But hardly would such hopes spring up in their hearts than the Master would dash them to pieces by some crushing word or disappointing deed. They had long been in a state of turmoil due to conflict between the concepts of the expected Messiah which they held in their minds and the experience of their extraordinary association with this extraordinary man which they held in their hearts.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 이후로, 사도들은 여러 차례 그를 사실상 메시아로 받아들였습니다. 짧은 기간에 그들의 일부는 진심으로 그를 기대하는 해방자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정에 그런 희망들이 솟아나자마자 주님은 결정적인 말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행위로 그것들을 산산이 좌절시키곤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품은, 기대하는 메시아 개념과 자신들의 심정에 품은, 비범한 이 사람과 자신들과 엄청난 교제의 경험 사이에 있는 갈등 때문에 오랫동안 혼란 상태에 있었습니다.

157:4.2 (1746.6) It was late forenoon on this Wednesday when the apostles assembled in Celsus’ garden for their noontime meal. During most of the night and since they had arisen that morning, Simon Peter and Simon Zelotes had been earnestly laboring with their brethren to bring them all to the point of the wholehearted acceptance of the Master, not merely as the Messiah, but also as the divine Son of the living God. The two Simons were well-nigh agreed in their estimate of Jesus, and they labored diligently to bring their brethren around to the full acceptance of their views. While Andrew continued as the director-general of the apostolic corps, his brother, Simon Peter, was becoming, increasingly and by common consent, the spokesman for the twelve. 이 수요일(AD 29. 8/10) 오전 늦게 사도들이 정오 식사를 하려고 셀수스의 정원에 모였습니다. 밤새도록 그리고 그들이 그날 아침 일어난 이후, 시몬 베드로와 시몬 젤로떼는 형제들 모두가 주님을 전심으로, 메시아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적 아들로,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애썼습니다. 두 시몬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해서, 그들은 자기 형제들도 자신들의 관점을 최대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고 부지런히 수고했습니다. 안드레가 여전히 사도단(團)의 단장으로 있는 동안,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가 만장일치로 점차 12 사도의 대변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157:4.3 (1747.1) They were all seated in the garden at just about noon when the Master appeared. They wore expressions of dignified solemnity, and all arose to their feet as he approached them. Jesus relieved the tension by that friendly and fraternal smile which was so characteristic of him when his followers took themselves, or some happening related to themselves, too seriously. With a commanding gesture he indicated that they should be seated. Never again did the twelve greet their Master by arising when he came into their presence. They saw that he did not approve of such an outward show of respect. 그들은 바로 낮 12시 무렵 주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모두 정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엄 있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고, 그가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모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추종자들 스스로 혹은 자신들에게 관련된 어떤 사건을 너무 심각하게 여길 때, 자신의 매우 특징적인, 친절한 형제의 미소로 긴장을 풀었습니다. 그는 위엄 있는 손짓으로 그들에게 앉으라고 했습니다. 열두 사도는 주(主)께서 자기들 앞에 오셨을 때, 다시는 일어나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그런 외적인 존경의 표시를 좋게 여기지 않으셨음을, 알았습니다.

157:4.4 (1747.2) After they had partaken of their meal and were engaged in discussing plans for the forthcoming tour of the Decapolis, Jesus suddenly looked up into their faces and said: “Now that a full day has passed since you assented to Simon Peter’s declaration regarding the identity of the Son of Man, I would ask if you still hold to your decision?” On hearing this, the twelve stood upon their feet, and Simon Peter, stepping a few paces forward toward Jesus, said: “Yes, Master, we do. We believe that you are the Son of the living God.” And Peter sat down with his brethren. 그들이 함께 식사하고 이번 데카폴리스 여행 계획을 의논한 후에, 예수께서 갑자기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시몬 베드로의 선언에 동의한 후, 꼬박 하루가 지났기에, 너희가 여전히 너희의 결정을 굳게 지키는지 내가 알고자 하노라.” 이 말을 듣고, 12 사도가 일어서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로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예, 주(主)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형제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157:4.5 (1747.3) Jesus, still standing, then said to the twelve: “You are my chosen ambassadors, but I know that, in the circumstances, you could not entertain this belief as a result of mere human knowledge. This is a revelation of the spirit of my Father to your inmost souls. And when, therefore, you make this confession by the insight of the spirit of my Father which dwells within you, I am led to declare that upon this foundation will I build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of heaven. Upon this rock of spiritual reality will I build the living temple of spiritual fellowship in the eternal realities of my Father’s kingdom. All the forces of evil and the hosts of sin shall not prevail against this human fraternity of the divine spirit. And while my Father’s spirit shall ever be the divine guide and mentor of all who enter the bonds of this spirit fellowship, to you and your successors I now deliver the keys of the outward kingdom — the authority over things temporal — the social and economic features of this association of men and women as fellows of the kingdom.” And again he charged them, for the time being, that they should tell no man that he was the Son of God. 예수님은 여전히 서서 이내 열두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대사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너희가 단순히 인간 지식의 결과로써 이런 믿음을 품을 수 없음을 내가 아느니라. 이것은 너희 가장 깊은 혼들에 내 아버지의 영(靈)이 계시한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 안에 내주하시는 내 아버지 영(靈)의 통찰로 너희가 이 고백을 했으니, 내가 이 기초(基礎) 위에 하늘나라의 형제 사랑을 세우리라고 내가 선언하게 되느니라. 영적 실체(實體)의 이 반석(磐石) 위에 내가 내 아버지 나라의 영원한 실체 안에서 영적으로 교제하는 살아있는 성전(聖殿)을 세우리라. 모든 악(惡)의 세력과 죄(罪)의 무리가 신적 영(靈)의 이런 인간의 형제 사랑을 거슬러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내 아버지의 영(靈)이, 이런 영(靈) 친교의 유대(紐帶 끈과 띠)에 들어가는 모든 자에게, 언제나 신적 안내자와 스승이 되실 것이며, 게다가 나는 이제 너희와 너희 계승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들 – 현세적인 것에 대한 권위 – 하느님 나라의 동료로서 남녀의 이런 단체에 속한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특성을 전달하노라.” 그리고 다시 그는 그들에게 당분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57:4.6 (1747.4) Jesus was beginning to have faith in the loyalty and integrity of his apostles. The Master conceived that a faith which could stand what his chosen representatives had recently passed through would undoubtedly endure the fiery trials which were just ahead and emerge from the apparent wreckage of all their hopes into the new light of a new dispensation and thereby be able to go forth to enlighten a world sitting in darkness. On this day the Master began to believe in the faith of his apostles, save one. 예수님은 자기 사도들의 충성과 고결(高潔)을 신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선택한 대리자들이 최근에 경험한 것에 맞설 수 있는 신앙이, 틀림없이 눈앞에 닥친 격렬한 시련을 견디고, 그들의 모든 소망의 명백한 파멸에서 새로운 섭리의 새 빛으로 나타나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세계에 영적 통찰력을 주려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날 주님은 하나만 제외하고 자기 사도들의 신앙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157:4.7 (1747.5) And ever since that day this same Jesus has been building that living temple upon that same eternal foundation of his divine sonship, and those who thereby become self-conscious sons of God are the human stones which constitute this living temple of sonship erecting to the glory and honor of the wisdom and love of the eternal Father of spirits. 그리고 그날 이후로 바로 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아들 된 바로 그 영원한 기초 위에 살아 있는 성전을 세우고 계시며,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아들)들로 인식하게 된 자들은, 영(靈)들의 영원한 아버지의 지혜와 사랑에 속한 영광과 영예를 구축하면서, 아들 된 살아있는 이 성전(聖殿)을 이루는 인간 석재(石材 돌)들입니다.

157:4.8 (1747.6) And when Jesus had thus spoken, he directed the twelve to go apart by themselves in the hills to seek wisdom, strength, and spiritual guidance until the time of the evening meal. And they did as the Master admonished them.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열두 사도가 자기들끼리 따로 언덕에 가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 지혜, 힘 및 영적 인도를 구하라고 그가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자신들에게 권고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1. The New Concept 새로운 개념

211003 인자(人子)와 신자(神子)의 통합된 본성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157:5.1 (1748.1) The new and vital feature of Peter’s confession was the clear-cut recognition that Jesus was the Son of God, of his unquestioned divinity. Ever since his baptism and the wedding at Cana these apostles had variously regarded him as the Messiah, but it was not a part of the Jewish concept of the national deliverer that he should be divine. The Jews had not taught that the Messiah would spring from divinity; he was to be the “anointed one,” but hardly had they contemplated him as being “the Son of God.” In the second confession more emphasis was placed upon the combined nature, the supernal fact that he was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and it was upon this great truth of the union of the human nature with the divine nature that Jesus declared he would build the kingdom of heaven. 베드로 고백의 매우 중요한 새로운 특징은, 예수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그의 신성(神性)에 대해,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선명한 인식이었습니다. 그의 세례와 가나의 결혼식 이후 줄곧 이 사도들은 다양하게 그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그가 신적이어야 함은 유대 국가의 해방자 개념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신성(神性) 출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고백은 그가 인자(人子 인간의 아들)이며 신자(神子 하느님의 아들)라는 숭고한 사실, 통합된 본성에 더 중점을 두었고,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이 연합한 이 위대한 진리 위에 예수가 하늘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57:5.2 (1748.2) Jesus had sought to live his life on earth and complete his bestowal mission as the Son of Man. His followers were disposed to regard him as the expected Messiah. Knowing that he could never fulfill their Messianic expectations, he endeavored to effect such a modification of their concept of the Messiah as would enable him partially to meet their expectations. But he now recognized that such a plan could hardly be carried through successfully. He therefore elected boldly to disclose the third plan — openly to announce his divinity, acknowledge the truthfulness of Peter’s confession, and directly proclaim to the twelve that he was a Son of God. 예수는 지상에서 자기 생애를 살면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증여 사명을 완수하려 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기대하던 메시아로 여기려 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메시아적 기대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부분적으로 그들의 기대를 채우면서 그들의 메시아 개념을 그렇게 수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런 계획이 도저히 훌륭하게 달성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베드로 고백의 참됨을 인정하며, 12 사도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직접 선포하는, 세 번째 계획을 대담하게 드러내기로 정했습니다.

157:5.3 (1748.3) For three years Jesus had been proclaiming that he was the “Son of Man,” while for these same three years the apostles had been increasingly insistent that he was the expected Jewish Messiah. He now disclosed that he was the Son of God, and upon the concept of the combined nature of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he determined to build the kingdom of heaven. He had decided to refrain from further efforts to convince them that he was not the Messiah. He now proposed boldly to reveal to them what he is, and then to ignore their determination to persist in regarding him as the Messiah. 3년간 예수는, 자신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선포했던 반면에, 바로 이 3년간 사도들은, 그가 기대하던 유대 메시아라고 점차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털어놓았고,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통합된 본성의 개념 위에 하늘나라를 세우기로 자신이 결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추가 노력을 그만두기로 정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뚜렷이 밝힌 후, 자신을 메시아로 여겨 집착하는 그들의 결정을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6. The Next Afternoon 다음 날 오후

211010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길 요10:10b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157:6.1 (1748.4) Jesus and the apostles remained another day at the home of Celsus, waiting for messengers to arrive from David Zebedee with funds. Following the collapse of the popularity of Jesus with the masses there occurred a great falling off in revenue. When they reached Caesarea-Philippi, the treasury was empty. Matthew was loath to leave Jesus and his brethren at such a time, and he had no ready funds of his own to hand over to Judas as he had so many times done in the past. However, David Zebedee had foreseen this probable diminution of revenue and had accordingly instructed his messengers that, as they made their way through Judea, Samaria, and Galilee, they should act as collectors of money to be forwarded to the exiled apostles and their Master. And so, by evening of this day, these messengers arrived from Bethsaida bringing funds sufficient to sustain the apostles until their return to embark upon the Decapolis tour. Matthew expected to have money from the sale of his last piece of property in Capernaum by that time, having arranged that these funds should be anonymously turned over to Judas. 예수와 사도들은, 메신저들이 다윗 세베대가 보낸 자금을 갖고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셀수스의 집에 하루 더 머물렀습니다. 예수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기가 무너진 후, 수익이 크게 줄었습니다. 그들이 가이사랴-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기금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그런 때에 예수와 자기 형제들을 떠나기 싫었으며, 그는 과거에 그렇게 여러 번 했듯이, 자신이 유다에게 넘겨줄 준비된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세베대가 이런 수익의 감소를 미리 알아서, 자기 메신저들에게 그들이 유대, 사마리아 및 갈릴리를 지나갈 때, 자신들의 추방된 사도들과 주님에게 보낼 돈을 걷는 수금원처럼 행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이날 저녁에 이 메신저들이 벳새다로부터 사도들이 데카폴리스 여행을 시작하여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지원할 충분한 기금을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마태는 그 무렵 가버나움에 있는 자기의 마지막 구획의 땅을 매각(賣却)하여 돈을 확보할 작정이었고, 이 자금을 유다에게 익명으로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157:6.2 (1749.1) Neither Peter nor the other apostles had a very adequate conception of Jesus’ divinity. They little realized that this was the beginning of a new epoch in their Master’s career on earth, the time when the teacher-healer was becoming the newly conceived Messiah — the Son of God. From this time on a new note appeared in the Master’s message. Henceforth his one ideal of living was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while his one idea in teaching was to present to his universe the personification of that supreme wisdom which can only be comprehended by living it. He came that we all might have life and have it more abundantly.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해 그다지 적절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때가 자기들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교사-치유자가 새롭게 착상(着想)된 메시아-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때, 새로운 획시대적(劃時代的 시대의 구획을 긋는) 시작이었음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의 메시지에 새로운 특색이 나타났습니다. 이후 그가 사는 한 가지 이상(理想)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던 동시에, 그가 가르치는 한 가지 관념(觀念)은 그렇게 살아야만 파악될 수 있는, 그런 최극 지혜의 고유성(固有性)화를 자기 우주에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모두 생명을 얻고 그것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요10:10b).

157:6.3 (1749.2) Jesus now entered upon the fourth and last stage of his human life in the flesh. The first stage was that of his childhood, the years when he was only dimly conscious of his origin, nature, and destiny as a human being. The second stage was the increasingly self-conscious years of youth and advancing manhood, during which he came more clearly to comprehend his divine nature and human mission. This second stage ended with the experiences and revelations associated with his baptism. The third stage of the Master’s earth experience extended from the baptism through the years of his ministry as teacher and healer and up to this momentous hour of Peter’s confession at Caesarea-Philippi. This third period of his earth life embraced the times when his apostles and his immediate followers knew him as the Son of Man and regarded him as the Messiah. The fourth and last period of his earth career began here at Caesarea-Philippi and extended on to the crucifixion. This stage of his ministry was characterized by his acknowledgment of divinity and embraced the labors of his last year in the flesh. During the fourth period, while the majority of his followers still regarded him as the Messiah, he became known to the apostles as the Son of God. Peter’s confessio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new period of the more complete realization of the truth of his supreme ministry as a bestowal Son on Urantia and for an entire universe, and the recognition of that fact, at least hazily, by his chosen ambassadors. 예수는 이제 육신으로 자기 인간 생활의 넷째,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첫 단계는 그의 유년기(幼年期)로, 그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원, 본성 및 운명을 어렴풋이 의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둘째 단계는 점점 자신을 의식하던 청년기(靑年期)와 나이 든 성년기(成年期)로, 그는 자신의 신적 본성과 인간적 사명을 더 분명히 파악한 기간이었습니다. 이 둘째 단계는 자신의 세례와 관련된 체험과 계시로 끝났습니다. 주님의 지상 체험 중 셋째 단계는 세례로부터 교사와 치유자로서 돌보던 여러 해를 거쳐 가이사랴-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하던 이 중요한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지상 생활 중 이 셋째 시기는 그의 사도들과 직계 추종자들이 그를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로 알고 그를 메시아로 여겼던 시기가 포함되었습니다. 그의 지상 생애 중 넷째, 마지막 시기는 이곳 가이사랴-빌립보에서 시작되어 십자가 처형(處刑)까지 걸쳐 있습니다. 그가 돌보던 이 단계의 특징은 그의 신성(神性)을 승인(承認 마땅하다고 인정)한 것이었고, 육신으로 수고한 그의 마지막 해가 포함되었습니다. 넷째 시기에, 그의 추종자 대부분은 여전히 그를 메시아로 여겼던 반면에, 그는 사도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알려졌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전(全) 우주를 위한 증여 아들로서, 그가 최극으로 돌보는 진리가 더 철저히 실현되고, 자신이 선택한 대사들이 적어도 막연(漠然)히 그 사실을 알아본, 새 시기의 시작을 나타냈습니다.

157:6.4 (1749.3) Thus did Jesus exemplify in his life what he taught in his religion: the growth of the spiritual nature by the technique of living progress. He did not place emphasis, as did his later followers, upon the incessant struggle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 He rather taught that the spirit was easy victor over both and effective in the profitable reconciliation of much of this intellectual and instinctual warfare.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로 자신이 가르친 것, 살아있는 진보의 기법으로 영적 본성이 성장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로 예증(例證 예를 들어 증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대 추종자들이 했듯이, 혼(魂)과 몸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영(靈)이 이 둘을 쉽게 정복하고, 이런 지적이며 본능적인 대부분의 싸움을 유익하게 효과적으로 조화시킨다고 가르쳤습니다.

157:6.5 (1749.4) A new significance attaches to all of Jesus’ teachings from this point on. Before Caesarea-Philippi he presented the gospel of the kingdom as its master teacher. After Caesarea-Philippi he appeared not merely as a teacher but as the divine representative of the eternal Father, who is the center and circumference of this spiritual kingdom, and it was required that he do all this as a human being, the Son of Man. 이때부터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새로운 의미가 붙어 있습니다. 가이사랴-빌립보 이전에, 그는 하느님 나라 복음의 수석 교사로서 그것을 제시했습니다. 가이사랴-빌립보 이후에, 그는 교사만이 아니라, 이런 영적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자 그 영역이신, 영원 아버지의 신적 대리자로 나타났고, 그는 이 모두를 인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로서 행해야 했습니다.

157:6.6 (1749.5) Jesus had sincerely endeavored to lead his followers into the spiritual kingdom as a teacher, then as a teacher-healer, but they would not have it so. He well knew that his earth mission could not possibly fulfill the Messianic expectations of the Jewish people; the olden prophets had portrayed a Messiah which he could never be. He sought to establish the Father’s kingdom as the Son of Man, but his followers would not go forward in the adventure. Jesus, seeing this, then elected to meet his believers part way and in so doing prepared openly to assume the role of the bestowal Son of God. 예수님은 자기 추종자들을 영적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려고, 교사로서, 다음에는 교사-치유자로서 진정으로 애썼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지상 사명으로 유대 민족의 메시아적 기대를 아무리 해도 충족시킬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옛 선지자들은, 그가 결코 될 수 없는 메시아를 묘사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려 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모험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본 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어느 정도 맞추기로 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의 증여 아들의 임무를 드러내놓고 떠맡기로 준비했습니다.

211017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시는 예수 요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I tell you the truth,” Jesus answered,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157:6.7 (1750.1) Accordingly, the apostles heard much that was new as Jesus talked to them this day in the garden. And some of these pronouncements sounded strange even to them. Among other startling announcements they listened to such as the following: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날 정원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새로운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언 중 일부는 그들에게도 낯설게 들렸습니다. 다른 놀라운 선언 중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들었습니다.

157:6.8 (1750.2) “From this time on, if any man would have fellowship with us, let him assume the obligations of sonship and follow me. And when I am no more with you, think not that the world will treat you better than it did your Master. If you love me, prepare to prove this affection by your willingness to make the supreme sacrifice.” “이후로, 누구든지 우리와 사귀려 하면, 아들(자녀)된 의무를 떠맡고 나를 따르게 하라(막8:34c). 그리고 내가 더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세상이 너희 주(主)에게 했던 것보다 너희를 더 낫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 말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기쁘게 최상의 희생으로 이런 애정을 입증하도록 준비하라.”

157:6.9 (1750.3) “And mark well my words: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to, but to minister and to bestow his life as the gift for all. I declare to you that I have come to seek and to save those who are lost.” “그리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의인(義人)이 아니라 죄인(罪人)을 부르러 왔노라(마9:13b). 사람의 아들(인자)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며 모두를 위한 선물로 자기 생명을 증여하려고 왔느니라(마20:28).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눅19:10).”

157:6.10 (1750.4) “No man in this world now sees the Father except the Son who came forth from the Father. But if the Son be lifted up, he will draw all men to himself, and whosoever believes this truth of the combined nature of the Son shall be endowed with life that is more than age-abiding.”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 외에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보는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요1:18, 6:46). 그러나 아들이 들리면, 그가 모두를 자신에게 끌어당길 것이며(요12:32), 아들의 통합된 본성의 이 진리를 믿는 자마다 영원(永遠) 이상(以上)의 생명을 얻으리라(요3:16).”

157:6.11 (1750.5) “We may not yet proclaim openly that the Son of Man is the Son of God, but it has been revealed to you; wherefore do I speak boldly to you concerning these mysteries. Though I stand before you in this physical presence, I came forth from God the Father. Before Abraham was, I am. I did come forth from the Father into this world as you have known me, and I declare to you that I must presently leave this world and return to the work of my Father.” “우리는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이 하느님의 아들(신자神)임을 아직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았지만, 너희에게는 계시되었느니라. 그래서 내가 이런 신비들에 관해 너희에게 거침없이 말하느니라. 내가 이런 육신(肉身 육체적 실존)으로 너희 눈앞에 서 있지만, 나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느니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요8:58). 너희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이 세상에 왔으며,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 내 아버지의 과업으로 돌아가야 하느니라(요16:28).”

157:6.12 (1750.6) “And now can your faith comprehend the truth of these declarations in the face of my warning you that the Son of Man will not meet the expectations of your fathers as they conceived the Messiah?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Can you believe the truth about me in the face of the fact that, though the foxes have holes and the birds of heaven have nests, I have not where to lay my head?” “그리고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이, 너희 조상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기대에 부응(副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경고해도, 너희 신앙으로 이제 이런 선언의 진상(眞想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느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요18:36a).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우리가 있지만, 나는 내 머리를 둘 곳이 없다(마8:20, 눅9:58)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에 대한 진상(眞想 참모습)을 믿을 수 있느냐?”

157:6.13 (1750.7) “Nevertheless, I tell you that the Father and I are one.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My Father is working with me in all these things, and he will never leave me alone in my mission, even as I will never forsake you when you presently go forth to proclaim this gospel throughout the world. 그렇지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는 나는 하나이니라(요10:30, 17:11, 22).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요12:45, 14:9). 내 아버지는 이 모든 일에서 나와 함께 일하시며, 너희가 곧 세상에 널리 이 복음을 선포하러 나갈 때,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과 같이, 그는 내 사명에 결코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시리라(히13:5b).

157:6.14 (1750.8) “And now have I brought you apart with me and by yourselves for a little while that you may comprehend the glory, and grasp the grandeur, of the life to which I have called you: the faith-adventure of the establishment of my Father’s kingdom in the hearts of mankind, the building of my fellowship of living association with the souls of all who believe this gospel.” “그리고 너희가, 인류의 심정에 내 아버지의 나라를 확립하고, 이 복음을 믿는 모든 혼(魂)과 함께 살아있는 교제로 내 공동체를 세우는 신앙 모험으로, 내가 너희를 부른 생명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 장엄함을 파악하도록, 이제 내가 잠시 너희를 나와 떨어지게 했느니라.”

157:6.15 (1750.9) The apostles listened to these bold and startling statements in silence; they were stunned. And they dispersed in small groups to discuss and ponder the Master’s words. They had confessed that he was the Son of God, but they could not grasp the full meaning of what they had been led to do. 사도들은 이렇게 힘차고 놀라운 성명(聲明)을, 조용히 경청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서 정신이 나간 듯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고 깊이 생각하려고 소그룹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를 하느님의 아들(신자 神者)로 고백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게 된 것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1. Andrew’s Conference 안드레의 회의(會議)

211024 하느님과 사귀는 사랑 요일 1:3b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An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157:7.1 (1750.10) That evening Andrew took it upon himself to hold a personal and searching conference with each of his brethren, and he had profitable and heartening talks with all of his associates except Judas Iscariot. Andrew had never enjoyed such intimate personal association with Judas as with the other apostles and therefore had not thought it of serious account that Judas never had freely and confidentially related himself to the head of the apostolic corps. But Andrew was now so worried by Judas’s attitude that, later on that night, after all the apostles were fast asleep, he sought out Jesus and presented his cause for anxiety to the Master. Said Jesus: “It is not amiss, Andrew, that you have come to me with this matter, but there is nothing more that we can do; only go on placing the utmost confidence in this apostle. And say nothing to his brethren concerning this talk with me.” 그날 저녁 안드레는 각 형제와 개인적으로 살피는 회의를 하기로 정하고,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동료와 유익하고 격려를 받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드레는, 다른 사도들과 했듯이, 유다와 그렇게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결코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유다가 사도단장(團長)인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말한 적이 없었음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이제 유다의 태도가 너무 걱정되어서, 모든 사도가 곤히 잠든 후, 그날 밤늦게, 그가 예수님을 찾아, 자신이 근심하는 이유를 주님께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야, 네가 이 문제로 내게 온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느니라. 단지 최대한 이 사도를 계속 신뢰하라. 그리고 나와 이렇게 말한 것에 관해 그 형제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157:7.2 (1751.1) And that was all Andrew could elicit from Jesus. Always had there been some strangeness between this Judean and his Galilean brethren. Judas had been shocked by the death of John the Baptist, severely hurt by the Master’s rebukes on several occasions, disappointed when Jesus refused to be made king, humiliated when he fled from the Pharisees, chagrined when he refused to accept the challenge of the Pharisees for a sign, bewildered by the refusal of his Master to resort to manifestations of power, and now, more recently, depressed and sometimes dejected by an empty treasury. And Judas missed the stimulus of the multitudes. 그리고 그것이 안드레가 예수님으로부터 알아낸 모두였습니다. 이 유대인과 그의 갈릴리 형제들 사이에는 항상 어떤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고, 몇 번 주님의 꾸지람으로 심하게 상처를 받았으며, 예수께서 왕이 되기를 물리치자 실망했고, 그가 바리새인들에게서 달아나자 창피(猖披)했으며, 그가 표적을 찾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자 원통(冤痛)히 여겼고, 그의 주님이 권능(權能)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때 당황했으며, 이제 아주 최근에는 비어있는 기금으로 풀이 죽고 때로 낙담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군중의 격려를 그리워했습니다.

157:7.3 (1751.2) Each of the other apostles was, in some and varying measure, likewise affected by these selfsame trials and tribulations, but they loved Jesus. At least they must have loved the Master more than did Judas, for they went through with him to the bitter end. 다른 사도들 각자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다양하게 이런 꼭 같은 갖가지 고난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쓰라린 최후까지 겪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은 유다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157:7.4 (1751.3) Being from Judea, Judas took personal offense at Jesus’ recent warning to the apostles to “beware the leaven of the Pharisees”; he was disposed to regard this statement as a veiled reference to himself. But the great mistake of Judas was: Time and again, when Jesus would send his apostles off by themselves to pray, Judas, instead of engaging in sincere communion with the spiritual forces of the universe, indulged in thoughts of human fear while he persisted in the entertainment of subtle doubts about the mission of Jesus as well as giving in to his unfortunate tendency to harbor feelings of revenge. 유대 출신, 유다는 최근에 사도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에 개인적으로 분개(憤慨)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자칫 자신에 대한 은근한 언급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가장 큰 실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번,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을 따로 기도하러 보내곤 할 때, 유다는 우주의 영적 기세와 신실한 교제(交際 사귐)에 들어가는 대신에 인간적 두려움의 생각에 빠져, 복수의 감정을 품어 불행을 초래하는 자기 성향에 굴복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미묘한 의혹을 고집스럽게 품었습니다.

157:7.5 (1751.4) And now Jesus would take his apostles along with him to Mount Hermon, where he had appointed to inaugurate his fourth phase of earth ministry as the Son of God. Some of them were present at his baptism in the Jordan and had witnessed the beginning of his career as the Son of Man, and he desired that some of them should also be present to hear his authority for the assumption of the new and public role of a Son of God. Accordingly, on the morning of Friday, August 12, Jesus said to the twelve: “Lay in provisions and prepare yourselves for a journey to yonder mountain, where the spirit bids me go to be endowed for the finish of my work on earth. And I would take my brethren along that they may also be strengthened for the trying times of going with me through this experience.” 그리고 이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기 지상 보살핌의 네 번째 단계를 열려고 정했던 헤르몬산(山)으로 자기 사도들을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그의 요단강 세례에 있었고 사람의 아들로서 시작한 그의 생애를 눈앞에서 봤으며, 그는 그들의 일부도 하느님 아들의 새로운 공적 역할을 떠맡는 그의 권위를 듣도록 현장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AD 29) 8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예수께서 열 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식량을 모아 비축하고, 영(靈)이 명(命)하여, 지상에서 내 과업의 마지막 단계가 마련되도록 내가 가야 하는, 저 산으로 여행을 준비하라. 그리고 내 형제들도 이런 체험을 통해 나와 함께 가는 곤경(困境)을 위해 힘을 얻도록 내가 그들을 데리고 가려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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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8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변모(變貌)의 산

Paper 158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변모(變貌)의 산

1. The Transfiguration 변모(變貌)
2. Coming Down the Mountain 산에서 내려옴
3. Meaning of the Transfiguration 변모(變貌)의 의미(意味)
4. The Epileptic Boy 뇌전증(간질癎疾) 소년
James of Safed 사펫의 야고보
5. Jesus Heals the Boy 예수께서 소년을 고치시다
“Lord I believe…help my unbelief.” “주여, 제가 믿습니다. …불신앙을 도우소서.”
6. In Celsus’ Garden 셀수스의 정원에서
7. Peter’s Protest 베드로의 항의(抗議)
8. At Peter’s House 베드로의 집에서

211031 죽기 전에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자녀 마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After six days Jesus took with him Peter, James and John the brother of James,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by themselves.

158:0.1 (1752.1) IT WAS near sundown on Friday afternoon, August 12, A.D. 29, when Jesus and his associates reached the foot of Mount Hermon, near the very place where the lad Tiglath once waited while the Master ascended the mountain alone to settle the spiritual destinies of Urantia and technically to terminate the Lucifer rebellion. And here they sojourned for two days in spiritual preparation for the events so soon to follow. 예수와 그의 동료들은 AD 29년 8월 12일 금요일 오후 거의 해 질 녘에 헤르몬산(山) 기슭에 도착했는데, 주께서 홀로 산에 올라 유란시아의 영적 운명을 결말짓고 루시퍼 반역의 최후를 원칙적으로 마무리하는 동안 소년 티글랏이 한때 기다렸던 바로 그 장소 근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서 곧 있을 사건을 위해 영적으로 준비하면서 이틀간 머물렀습니다.

158:0.2 (1752.2) In a general way, Jesus knew beforehand what was to transpire on the mountain, and he much desired that all his apostles might share this experience. It was to fit them for this revelation of himself that he tarried with them at the foot of the mountain. But they could not attain those spiritual levels which would justify their exposure to the full experience of the visitation of the celestial beings so soon to appear on earth. And since he could not take all of his associates with him, he decided to take only the three who were in the habit of accompanying him on such special vigils. Accordingly, only Peter, James, and John shared even a part of this unique experience with the Master. 대체로, 예수님은 산에서 무엇이 일어날지 사전(事前)에 아셨으며 모든 사도가 이렇게 체험하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들이 이런 자기 계시를 감당하도록, 그들과 함께 산기슭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곧 지상에 출현할 천상 존재들의 방문을 충분히 체험하도록, 자신들을 드러낼 자격이 있는, 그런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함께 모든 동료를 데리고 갈 수 없어서, 그는 그런 특별 철야에 자신과 함께 가곤 했던 세 명만 데려가기로 정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이 주님과 함께 하나뿐인 이 체험의 일부만이라도 나누었습니다.

  1. The Transfiguration 변모(變貌)

211107 변모의 예수께 주의하라 막9:2-8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2 After six days Jesus took Peter, James and John with him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where they were all alone. There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3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whiter than anyone in the world could bleach them. 4 And there appeared before them Elijah and Moses, who were talking with Jesus. 5 Peter said to Jesus, “Rabbi,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put up three shelters–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6 (He did not know what to say, they were so frightened.) 7 Then a cloud appeared and enveloped them, and a voice came from the cloud: “This is my Son, whom I love. Listen to him!” 8 Suddenly, when they looked around, they no longer saw anyone with them except Jesus.

158:1.1 (1752.3) Early on the morning of Monday, August 15, Jesus and the three apostles began the ascent of Mount Hermon, and this was six days after the memorable noontide confession of Peter by the roadside under the mulberry trees. 8월 15일 월요일 이른 아침에 예수님과 세 사도는 헤르몬산(山)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날은 뽕나무 아래 길가에서 베드로가 정오에 잊지 못할 고백을 한 지 6일 후였습니다.

158:1.2 (1752.4) Jesus had been summoned to go up on the mountain, apart by himself, for the transaction of important matters having to do with the progress of his bestowal in the flesh as this experience was related to the universe of his own creation. It is significant that this extraordinary event was timed to occur while Jesus and the apostles were in the lands of the gentiles, and that it actually transpired on a mountain of the gentiles.예수는, 이 체험이 자신이 직접 창조한 우주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육신으로 자기를 증여하는 진행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도록 홀로 따로 산에 오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와 사도들이 이방인의 땅에 있을 때 이 특별 사건이 일어나도록 시간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이 이방인의 산에서 실제로 발생한 것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합니다.

158:1.3 (1752.5) They reached their destination, about halfway up the mountain, shortly before noon, and while eating lunch, Jesus told the three apostles something of his experience in the hills to the east of Jordan shortly after his baptism and also some more of his experience on Mount Hermon in connection with his former visit to this lonely retreat. 그들은 정오 직전, 거의 산 중턱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렀고, 점심 식사할 때, 예수는 세 사도에게 자신의 세례 직후 요단강 동편 언덕에서 얼마간의 자기 체험과 이렇게 외진 은신처에 자신의 예전 방문과 관련하여 헤르몬산(山)의 자기 체험까지 조금 더 이야기했습니다.

158:1.4 (1752.6) When a boy, Jesus used to ascend the hill near his home and dream of the battles which had been fought by the armies of empires on the plain of Esdraelon; now he ascended Mount Hermon to receive the endowment which was to prepare him to descend upon the plains of the Jordan to enact the closing scenes of the drama of his bestowal on Urantia. The Master could have relinquished the struggle this day on Mount Hermon and returned to his rule of the universe domains, but he not only chose to meet the requirements of his order of divine sonship embraced in the mandate of the Eternal Son on Paradise, but he also elected to meet the last and full measure of the present will of his Paradise Father. On this day in August three of his apostles saw him decline to be invested with full universe authority. They looked on in amazement as the celestial messengers departed, leaving him alone to finish out his earth life as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소년 예수는 자기 집 근처 언덕에 올라 에스드랠론 평원에서 제국의 군대들이 싸웠던 전투를 꿈꾸곤 했습니다. 이제 그는 유란시아에 자신을 증여하는 마무리 장면을 일으키려고 요단 평원으로 내려가도록 그가 각오(覺悟)할 자질을 받으려고 헤르몬산(山)에 올랐습니다. 주님은 이날 헤르몬산(山)에서 투쟁을 그만두고 자신이 다스리는 우주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천국 영원 아들의 명령에 담긴 신적 아들된 자기 계열의 자격을 채우려고 택할 뿐만 아니라 천국 자기 아버지의 당면한 뜻을 마지막까지 완전하게 채우기로 정했습니다. 8월의 이날 그의 사도 중 세 명은 그가 주어진 완전한 우주 권위를 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천상의 메신저들이 그가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기 지상 생애를 끝까지 마치도록 홀로 남겨 두고 떠날 때, 놀라서 바라보았습니다.

158:1.5 (1753.1) The faith of the apostles was at a high point at the time of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and then it rapidly fell almost to zero. Now, as a result of the Master’s admission of his divinity, the lagging faith of the twelve arose in the next few weeks to its highest pitch, only to undergo a progressive decline. The third revival of their faith did not occur until after the Master’s resurrection. 사도들의 신앙은 5,000명을 먹일 때 최고점에 있었고 그다음 거의 밑바닥까지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이제 주께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시인한 결과로, 더딘 12의 신앙은, 단지 점차 내려가기 위해, 다음 몇 주간 그 최고조까지 올랐습니다. 주님의 부활 후에 비로소 그들 신앙의 세 번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58:1.6 (1753.2) It was about three o’clock on this beautiful afternoon that Jesus took leave of the three apostles, saying: “I go apart by myself for a season to commune with the Father and his messengers; I bid you tarry here and, while awaiting my return, pray that the Father’s will may be done in all your experience in connection with the further bestowal mission of the Son of Man.” And after saying this to them, Jesus withdrew for a long conference with Gabriel and the Father Melchizedek, not returning until about six o’clock. When Jesus saw their anxiety over his prolonged absence, he said: “Why were you afraid? You well know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wherefore do you doubt when I am not with you? I now declare that the Son of Man has chosen to go through his full life in your midst and as one of you. Be of good cheer; I will not leave you until my work is finished.” 이 아름다운 오후 세 시쯤에 예수께서 세 사도를 떠나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잠시 아버지와 그의 메신저들과 이야기하러 나 홀로 따로 가노라. 내가 명하노니,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사람의 아들의 추가적 증여 사명에 관련되어 너희 모든 체험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는 물러나, 6시쯤까지 돌아오지 않고, 가브리엘 및 아버지 멜기세덱과 내내 논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랜 부재로 그들이 염려하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왜 두려워했느냐? 내가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한다고 너희가 잘 아는데,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왜 너희가 의혹을 품느냐? 내가 이제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은 너희 가운데, 너희 중 하나로서, 자기 생애를 온전히 끝까지 마치려고 결정했느니라. 힘내라. 내 일이 마칠 때까지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 ”

158:1.7 (1753.3) As they partook of their meager evening meal, Peter asked the Master, “How long do we remain on this mountain away from our brethren?” And Jesus answered: “Until you shall see the glory of the Son of Man and know that whatsoever I have declared to you is true.” And they talked over the affairs of the Lucifer rebellion while seated about the glowing embers of their fire until darkness drew on and the apostles’ eyes grew heavy, for they had begun their journey very early that morning. 그들이 함께 조촐히 저녁 식사를 할 때, 베드로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우리 형제들과 떨어져 이 산에 머물러야 하는지요?”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영광을 보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한 무엇이나 참인 줄 알 때까지라.” 그리고 그들은 어둠이 다가올 때까지 타오르는 숯불 주위에 앉아 루시퍼 반란 사건에 대해 논의했으며, 그들이 그날 아침 너무 일찍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도들의 눈이 노곤해졌습니다.

158:1.8 (1753.4) When the three had been fast asleep for about half an hour, they were suddenly awakened by a near-by crackling sound, and much to their amazement and consternation, on looking about them, they beheld Jesus in intimate converse with two brilliant beings clothed in the habiliments of the light of the celestial world. And Jesus’ face and form shone with the luminosity of a heavenly light. These three conversed in a strange language, but from certain things said, Peter erroneously conjectured that the beings with Jesus were Moses and Elijah; in reality, they were Gabriel and the Father Melchizedek. The physical controllers had arranged for the apostles to witness this scene because of Jesus’ request. 셋은 거의 30분간 깊이 잠들었다가, 가까이에서 장작이 타는 탁탁 소리에 그들이 갑자기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그들은 천상 세계에 속한 빛의 옷을 입은 찬란한 두 존재와 친밀하게 서로 이야기하는 예수를 보고, 너무 깜짝 놀라 소스라쳤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모습은 하늘빛의 광명(光明)으로 빛났습니다. 이 세 명은 낯선 말로 서로 이야기했지만, 어떤 말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존재들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잘못 추측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 때문에 사도들이 눈앞에서 이 장면을 보도록, 물리 조정자들이 조정(調整)했습니다.

158:1.9 (1753.5) The three apostles were so badly frightened that they were slow in collecting their wits, but Peter, who was first to recover himself, said, as the dazzling vision faded from before them and they observed Jesus standing alone: “Jesus, Master, it is good to have been here. We rejoice to see this glory. We are loath to go back down to the inglorious world. If you are willing, let us abide here, and we will erect three tent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And Peter said this because of his confusion, and because nothing else came into his mind at just that moment. 세 사도는 아주 몹시 두려워서 좀처럼 제정신을 찾지 못했지만, 자신들 앞에서 눈부신 광경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홀로 서신 예수님을 보면서, 먼저 제정신이 들었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예수님, 주(主)여, 여기 있었던 게 좋습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보니 기쁩니다. 우리는 흉한 세상에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를 여기에 남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천막 셋을,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세울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여,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에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58:1.10 (1753.6) While Peter was yet speaking, a silvery cloud drew near and overshadowed the four of them. The apostles now became greatly frightened, and as they fell down on their faces to worship, they heard a voice, the same that had spoken on the occasion of Jesus’ baptism, say: “This is my beloved Son; give heed to him.” And when the cloud vanished, again was Jesus alone with the three, and he reached down and touched them, saying: “Arise and be not afraid; you sha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But the apostles were truly afraid; they were a silent and thoughtful trio as they made ready to descend the mountain shortly before midnight. 베드로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은빛 구름이 다가와 그들 넷을 가렸습니다. 사도들이 이제 너무 두려워서, 그들이 엎드려 경배할 때,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받을 때 말했던 바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에게 주의(注意 말을 잘 듣고 그에게 관심을 집중)하라.” 구름이 사라지자, 다시 예수님만 셋과 함께 계셨고, 그가 손을 뻗어 그들에게 대시며 말했습니다. “일어나고 두려워 말라. 너희는 이것보다 더 큰 일들을 보리라.” 그러나 사도들은 정말로 겁났습니다. 그들이 한밤중 직전에, 산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그들 셋 모두 말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2. Coming Down the Mountain 산에서 내려옴

211114 변모 입증에 대한 침묵 요구의 이유 막9:9-13 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9 As they were coming down the mountain, Jesus gave them orders not to tell anyone what they had seen until the Son of Man had risen from the dead. 10 They kept the matter to themselves, discussing what “rising from the dead” meant. 11 And they asked him, “Why do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Elijah must come first?” 12 Jesus replied, “To be sure, Elijah does come first, and restores all things. Why then is it written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uch and be rejected? 13 But I tell you, Elijah has come, and they have done to him everything they wished, just as it is written about him.”

158:2.1 (1754.1) For about half the distance down the mountain not a word was spoken. Jesus then began the conversation by remarking: “Make certain that you tell no man, not even your brethre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on this mountain until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dead.” The three apostles were shocked and bewildered by the Master’s words, “until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dead.” They had so recently reaffirmed their faith in him as the Deliverer, the Son of God, and they had just beheld him transfigured in glory before their very eyes, and now he began to talk about “rising from the dead”! 산 아래로 반쯤 내려오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다음의 말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너희가 이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너희는 너희 형제들만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세 사도는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라는 주님의 말로 깜짝 놀라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최근에 그를 해방자,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다시 단언(端言)했고,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그를 막 보았는데, 이제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158:2.2 (1754.2) Peter shuddered at the thought of the Master’s dying — it was too disagreeable an idea to entertain — and fearing that James or John might ask some question relative to this statement, he thought best to start up a diverting conversation and, not knowing what else to talk about, gave expression to the first thought coming into his mind, which was: “Master, why is it that the scribes say that Elijah must first come before the Messiah shall appear?” And Jesus, knowing that Peter sought to avoid reference to his death and resurrection, answered: “Elijah indeed comes first to prepare the way for the Son of Man, who must suffer many things and finally be rejected.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received him not but did to him whatsoever they willed.” And then did the three apostles perceive that he referred to John the Baptist as Elijah. Jesus knew that, if they insisted on regarding him as the Messiah, then must John be the Elijah of the prophecy.베드로는 주(主)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몸서리쳤습니다. – 생각을 하는 것도 너무 싫었고 야고보나 요한이 이 말과 관련하여 질문을 할까 봐 두려워서, 그는 재미있는 대화를 시작하려고 최선으로 생각했으며,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마음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주여! 메시아가 나타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왜 서기관들이 말하는지요? ”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가 자기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함을 알고,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참으로 먼저 와서 인자(사람의 아들)를 위해 길을 준비하며, 인자는 많은 일을 겪고 결국 버림받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오긴 했으나,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하려는 대로 그에게 했느니라.” 그러자 그때 세 사도는 그가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부르신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여겨 주장했다면, 요한은 예언서의 엘리야가 되어야 함을 예수께서 알았습니다.

158:2.3 (1754.3) Jesus enjoined silence about their observation of the foretaste of his postresurrection glory because he did not want to foster the notion that, being now received as the Messiah, he would in any degree fulfill their erroneous concepts of a wonder-working deliverer. Although Peter, James, and John pondered all this in their minds, they spoke not of it to any man until after the Master’s resurrection. 예수께서 부활-이후 영광을 미리 경험한 그들의 관찰에 대해 침묵을 요구한 것은, 그가, 이제 메시아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가 얼마든지 이적을-행하는 해방자라는 잘못된 개념을 충족시키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부추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이 모두를 마음에 깊이 생각했지만, 그들은 주님의 부활 이후까지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158:2.4 (1754.4) As they continued to descend the mountain, Jesus said to them: “You would not receive me as the Son of Man; therefore have I consented to be received in accordance with your settled determination, but, mistake not, the will of my Father must prevail. If you thus choose to follow the inclination of your own wills, you must prepare to suffer many disappointments and experience many trials, but the training which I have given you should suffice to bring you triumphantly through even these sorrows of your own choosing.” 그들이 산을 계속 내려갈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따라서 내가 너희의 확고한 결정에 따라 받아들이기로 찬성했지만, 잘못 생각하지 말라, 내 아버지의 뜻이 우선(優先)되어야 하니라. 따라서 너희가 바로 자기 뜻의 경향을 따르기로 택하면, 너희는 여러 실망과 많은 시련을 겪을 준비를 해야 하지만, 너희 스스로 선택한 이런 고통조차, 내가 너희에게 주었던 훈련으로, 너희는 충분히 승리하게 되리라. ”

158:2.5 (1754.5) Jesus did not take Peter, James, and John with him up to the mount of the transfiguration because they were in any sense better prepared than the other apostles to witness what happened, or because they were spiritually more fit to enjoy such a rare privilege. Not at all. He well knew that none of the twelve were spiritually qualified for this experience; therefore did he take with him only the three apostles who were assigned to accompany him at those times when he desired to be alone to enjoy solitary communion.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모산(變貌山)에 오르신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도 일어난 일을 입증하기에 다른 사도들보다 더 잘 준비되어 있었거나 그들이 그렇게 유례없는 특권을 누리기에 영적으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는 열둘 중 누구도 이런 체험을 위해 영적으로 자격이 없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독 친교를 누리려고 홀로 있기를 원했던 그런 때마다 자신과 함께 가도록 지명된 세 사도만 데려가셨습니다.

3. Meaning of the Transfiguration 변모(變貌)의 의미(意味)

211121 변모의 의미 막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Then a cloud appeared and enveloped them, and a voice came from the cloud: “This is my Son, whom I love. Listen to him!”

158:3.1 (1755.1) That which Peter, James, and John witnessed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was a fleeting glimpse of a celestial pageant which transpired that eventful day on Mount Hermon. The transfiguration was the occasion of: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변모산에서 목격한 것은, 헤르몬산(山)에서 그 중대한 날에 일어난 천상의 광경 중 쏜살같은 섬광이었습니다. 변모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58:3.2 (1755.2) 1. The acceptance of the fullness of the bestowal of the incarnated life of Michael on Urantia by the Eternal Mother-Son of Paradise. As far as concerned the requirements of the Eternal Son, Jesus had now received assurance of their fulfillment. And Gabriel brought Jesus that assurance. 천국 영원 어머니-아들이, 유란시아에서 성육신(成肉身)한 미가엘의 증여 생애가 충분하다고, 인정함. 영원 아들의 요구에 관한 한, 예수님이 그 요구를 완수했다는 확증(確證)을 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그 확증(確證)을 예수께 가져왔습니다.

158:3.3 (1755.3) 2. The testimony of the satisfaction of the Infinite Spirit as to the fullness of the Urantia bestowal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The universe representative of the Infinite Spirit, the immediate associate of Michael on Salvington and his ever-present coworker, on this occasion spoke through the Father Melchizedek. 무한 영(靈)이, 필사자 육신의 모습으로 유란시아에 증여한 충분함에 관해, 만족했다고 선언함. 무한 영(靈)의 우주 대리자, 샐빙톤에서 미가엘 바로 옆에 있는 동료이며 그와 상존(常存)하는 협력자가 이때 아버지 멜기세덱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158:3.4 (1755.4) Jesus welcomed this testimony regarding the success of his earth mission presented by the messengers of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but he noted that his Father did not indicate that the Urantia bestowal was finished; only did the unseen presence of the Father bear witness through Jesus’ Personalized Adjuster,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give heed to him.” And this was spoken in words to be heard also by the three apostles. 예수님은 영원 아들과 무한 영(靈)의 메신저들이 제시한 자기 지상 사명의 성공에 관해 이런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가 유란시아 증여가 완료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은 것을 주목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계(靈界) 존재가 예수의 고유성화 조율자를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에게 주의(注意 말을 잘 듣고 그에게 관심을 집중)하라.”라고 말하는 증언을 전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사도 역시 말로 했던 이것을 들었습니다.

158:3.5 (1755.5) After this celestial visitation Jesus sought to know his Father’s will and decided to pursue the mortal bestowal to its natural end. This was the significance of the transfiguration to Jesus. To the three apostles it was an event marking the entrance of the Master upon the final phase of his earth career as the Son of God and the Son of Man. 천상의 이 방문 이후에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의 뜻을 알고자 하셨고, 자연스럽게 필사자 증여를 끝내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변모(變貌)의 의미(意味)였습니다. 세 사도에게 그것은 주께서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지상 생애의 최종 단계로 들어감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158:3.6 (1755.6) After the formal visitation of Gabriel and the Father Melchizedek, Jesus held informal converse with these, his Sons of ministry, and communed with them concerning the affairs of the universe.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의 공식적 방문 이후에 예수님은 이들, 돌보며 사역하는 자기 아들들과 비공식적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우주 업무에 관해 그들과 친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4. The Epileptic Boy 뇌전증(간질癎疾) 소년

211128 뇌전증(간질癎疾) 소년 눅9:37-39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쌔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37 The next day,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 large crowd met him. 38 A man in the crowd called out,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for he is my only child. 39 A spirit seizes him and he suddenly screams; it throws him into convulsions so that he foams at the mouth. It scarcely ever leaves him and is destroying him.

158:4.1 (1755.7) It was shortly before breakfast time on this Tuesday morning when Jesus and his companions arrived at the apostolic camp. As they drew near, they discerned a considerable crowd gathered around the apostles and soon began to hear the loud words of argument and disputation of this group of about fifty persons, embracing the nine apostles and a gathering equally divided between Jerusalem scribes and believing disciples who had tracked Jesus and his associates in their journey from Magadan. 이 화요일(AD 29. 8. 16) 아침 식사 직전에, 예수님과 그의 동료들이 사도 야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접근했을 때, 그들은 사도들 주위에 모여 있는 꽤 많은 군중을 발견했고, 바로 아홉 사도와 예루살렘 서기관들과 마가단으로부터 여행했던 예수님과 그 동료들의 뒤를 쫓았던 믿는 제자들 사이에 동등하게 나뉜 모임을 포함해서 거의 오십 명의 이 무리가 언쟁하고 반박하는 시끄러운 논쟁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158:4.2 (1755.8) Although the crowd engaged in numerous arguments, the chief controversy was about a certain citizen of Tiberias who had arrived the preceding day in quest of Jesus. This man, James of Safed, had a son about fourteen years old, an only child, who was severely afflicted with epilepsy. In addition to this nervous malady this lad had become possessed by one of those wandering, mischievous, and rebellious midwayers who were then present on earth and uncontrolled, so that the youth was both epileptic and demon-possessed. 군중이 여러 논쟁을 벌였지만, 주된 말다툼은 전날 예수님을 찾아 도착한 어떤 티베리아스 시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사펫의 야고보에게 격렬하게 간질을 앓는 14살쯤 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신경병에 더하여 이 소년에게, 당시 지상에 있으면서 방치되어, 그렇게 헤매며, 해롭고 반역하는 중도자 중 하나가 들려서, 청소년은 뇌전증에다가 귀신이 들렸습니다.

158:4.3 (1755.9) For almost two weeks this anxious father, a minor official of Herod Antipas, had wandered about through the western borders of Philip’s domains, seeking Jesus that he might entreat him to cure this afflicted son. And he did not catch up with the apostolic party until about noon of this day when Jesus was up on the mountain with the three apostles. 거의 두 주간, 헤롯 안티파스의 하급관리였던, 걱정 많은 이 아버지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예수님을 찾아서 빌립의 영토 서쪽 경계선 여기저기를 헤맸습니다. 예수께서 세 사도와 산에 올라가 계셨던, 그날(AD 29. 8.15 월) 정오쯤 비로소 그는 사도 일행을 따라잡았습니다.

158:4.4 (1756.1) The nine apostles were much surprised and considerably perturbed when this man, accompanied by almost forty other persons who were looking for Jesus, suddenly came upon them. At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is group the nine apostles, at least the majority of them, had succumbed to their old temptation — that of discussing who should be greatest in the coming kingdom; they were busily arguing about the probable positions which would be assigned the individual apostles. They simply could not free themselves entirely from the long-cherished idea of the material mission of the Messiah. And now that Jesus himself had accepted their confession that he was indeed the Deliverer — at least he had admitted the fact of his divinity — what was more natural than that, during this period of separation from the Master, they should fall to talking about those hopes and ambitions which were uppermost in their hearts. And they were engaged in these discussions when James of Safed and his fellow seekers after Jesus came upon them. 아홉 사도는, 예수를 찾고 있던, 거의 40명의 다른 사람과 함께, 이 사람이 갑자기 자신들을 만났을 때, 매우 놀라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이 무리가 도착했을 때, 적어도 대부분의 아홉 사도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이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자신들의 오래된 유혹에 졌습니다. 그들은 각 사도에게 할당될 유망한 자리에 대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솔직히 오랫동안 바라던 메시아의 물질적 사명에 속한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그가 과연 해방자 – 적어도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사실을 인정한, 자신들의 고백을 받아들였고,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주님과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심정에 있는 최고의 그런 희망과 야심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찾는 사펫의 야고보와 그의 동료 수색자들이 사도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이런 토론 중이었습니다.

158:4.5 (1756.2) Andrew stepped up to greet this father and his son, saying, “Whom do you seek?” Said James: “My good man, I search for your Master. I seek healing for my afflicted son. I would have Jesus cast out this devil that possesses my child.” And then the father proceeded to relate to the apostles how his son was so afflicted that he had many times almost lost his life as a result of these malignant seizures. 안드레가 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가, “누구를 찾으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가 “내 선생님, 나는 당신의 주님을 찾습니다. 나는 내 아픈 아들을 고치려 합니다. 나는 예수께서 내 아이에게 들린 이 악령을 쫓아냈으면 합니다.” 그런 후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너무 앓고 있어서, 이런 악성 발작의 결과로 그가 여러 번 죽을 뻔했는지 관련하여 사도들에게 계속 설명했습니다.

158:4.6 (1756.3) As the apostles listened, Simon Zelotes and Judas Iscariot stepped into the presence of the father, saying: “We can heal him; you need not wait for the Master’s return. We are ambassadors of the kingdom; no longer do we hold these things in secret. Jesus is the Deliverer, and the keys of the kingdom have been delivered to us.” By this time Andrew and Thomas were in consultation at one side. Nathaniel and the others looked on in amazement; they were all aghast at the sudden boldness, if not presumption, of Simon and Judas. Then said the father: “If it has been given you to do these works, I pray that you will speak those words which will deliver my child from this bondage.” Then Simon stepped forward and, placing his hand on the head of the child, looked directly into his eyes and commanded: “Come out of him, you unclean spirit; in the name of Jesus obey me.” But the lad had only a more violent fit, while the scribes mocked the apostles in derision, and the disappointed believers suffered the taunts of these unfriendly critics. 사도들이 듣고 있을 때, 시몬 젤로떼와 가룟 유다가 그 아버지 앞에 나서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고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것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는 해방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우리가 넘겨받았습니다.” 이때까지 안드레와 도마는 한쪽에서 의논 중이었습니다. 나다니엘과 다른 사도들은 어이가 없어서 바라봤습니다. 그들은 모두, 뻔뻔함은 아니어도, 시몬과 유다의 느닷없는 배짱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이런 일들을 하도록, 받았다면, 내가 간절히 바라기는, 당신들이 이 속박에서 내 아이를 구해낼 그런 말을 해 주십시오.” 그때 시몬이 앞으로 나서서, 자기 손을 아이의 머리에 얹고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명령했습니다. “그에게서 나오라, 너 더러운 영(靈)아, 예수의 이름으로 내게 복종하라.” 그러나 소년은 더 격렬히 발작할 뿐이었던 반면에 서기관들은 사도들을 비웃으며 조롱했으며, 실망한 신자들은 이렇게 악의적인 혹평가들의 모욕을 당했습니다.

158:4.7 (1756.4) Andrew was deeply chagrined at this ill-advised effort and its dismal failure. He called the apostles aside for conference and prayer. After this season of meditation, feeling keenly the sting of their defeat and sensing the humiliation resting upon all of them, Andrew sought, in a second attempt, to cast out the demon, but only failure crowned his efforts. Andrew frankly confessed defeat and requested the father to remain with them overnight or until Jesus’ return, saying: “Perhaps this sort goes not out except by the Master’s personal command.” 안드레는 이런 경솔한 노력과 그 어리석은 실패를 아주 유감스레 여겼습니다. 그는 사도들을 따로 불러 모아 기도했습니다. 이때 묵상(默想 마음 기도)한 후, 자신들의 실패에 대한 가책(呵責)을 통렬히 느끼고 자신들 모두에게 쏠린 굴욕(屈辱)을 감지하면서, 안드레는 두 번째 시도하며 귀신을 쫓아내려 했으나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날 뿐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솔직히 실패를 인정하고, “이런 종류는 주께서 직접 명령해야 물러날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버지에게 하룻밤이나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자신들과 함께 남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58:4.8 (1756.5) And so, while Jesus was descending the mountain with the exuberant and ecstatic Peter, James, and John, their nine brethren likewise were sleepless in their confusion and downcast humiliation. They were a dejected and chastened group. But James of Safed would not give up. Although they could give him no idea as to when Jesus might return, he decided to stay on until the Master came back. 그래서 예수님이 열광적이며 황홀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아홉 형제도 혼란과 풀이 죽은 굴욕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낙담하여 누그러진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사펫의 야고보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예수께서 언제 오실지에 대해 알려 줄 수 없었지만, 주께서 돌아올 때까지 그는 계속 남아 있기로 정했습니다.

5. Jesus Heals the Boy 예수께서 소년을 고치시다.

211205 신앙의 신실함과 그 역량 막9:15-27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15 As soon as all the people saw Jesus, they were overwhelmed with wonder and ran to greet him. 16 “What are you arguing with them about?” he asked. 17 A man in the crowd answered, “Teacher, I brought you my son, who is possessed by a spirit that has robbed him of speech. 18 Whenever it seizes him, it throws him to the ground. He foams at the mouth, gnashes his teeth and becomes rigid. I asked your disciples to drive out the spirit, but they could not.” 19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20 So they brought him. When the spirit saw Jesus, it immediately threw the boy into a convulsion. He fell to the ground and rolled around, foaming at the mouth. 21 Jesus asked the boy’s father, “How long has he been like this?” “From childhood,” he answered. 22 “It has often thrown him into fire or water to kill him. But if you can do anything, take pity on us and help us.” 23 ” ‘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24 Immediately the boy’s father exclaimed, “I do believe;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25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unning to the scene, he rebuked the evil spirit. “You deaf and mute spirit,” he said,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26 The spirit shrieked, convulsed him violently and came out. The boy looked so much like a corpse that many said, “He’s dead.” 27 But Jesus took him by the hand and lifted him to his feet, and he stood up.

158:5.1 (1757.1) As Jesus drew near, the nine apostles were more than relieved to welcome him, and they were greatly encouraged to behold the good cheer and unusual enthusiasm which marked the countenances of Peter, James, and John. They all rushed forward to greet Jesus and their three brethren. As they exchanged greetings, the crowd came up, and Jesus asked, “What were you disputing about as we drew near?” But before the disconcerted and humiliated apostles could reply to the Master’s question, the anxious father of the afflicted lad stepped forward and, kneeling at Jesus’ feet, said: “Master, I have a son, an only child, who i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Not only does he cry out in terror, foam at the mouth, and fall like a dead person at the time of seizure, but oftentimes this evil spirit which possesses him rends him in convulsions and sometimes has cast him into the water and even into the fire. With much grinding of teeth and as a result of many bruises, my child wastes away. His life is worse than death; his mother and I are of a sad heart and a broken spirit. About noon yesterday, seeking for you, I caught up with your disciples, and while we were waiting, your apostles sought to cast out this demon, but they could not do it. And now, Master, will you do this for us, will you heal my son?” 예수께서 접근하자, 아홉 사도가 더욱 안심하면서 그를 환영했으며,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안색에 드러난 즐거운 표정과 여느 때와 다른 열의를 보고 대단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가 예수님과 세 형제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눌 때 군중이 다가오자, 예수께서 “우리가 다가올 때 너희는 무슨 일로 논쟁하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당황하여 불안한 사도들이 주님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시달리는 소년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앞에 나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습니다. “주(主)여, 저는 아들, 악령이 들린 외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입에서 게거품을 뿜으며, 발작할 때 죽은 사람처럼 쓰러짐은 말할 것도 없이, 종종 그에게 들린 이 악령이 그를 경련으로 쥐어뜯고 때로는 그를 물과 불 속에도 던졌습니다. 이를 많이 갈고 여러 타박상의 결과로 내 아이가 쇠약해집니다. 그의 삶은 죽음보다 더 형편이 없습니다. 아이 엄마와 저는 슬픈 심정으로 기가 꺾입니다. 당신을 찾다가, 어제 정오쯤, 제가 당신의 제자들을 따라잡았고,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사도들이 이 귀신을 내쫓으려 했으나 그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主)여, 당신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시렵니까? 당신께서 내 아들을 고치시렵니까?”

158:5.2 (1757.2) When Jesus had listened to this recital, he touched the kneeling father and bade him rise while he gave the near-by apostles a searching survey. Then said Jesus to all those who stood before him: “O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ere you learn that the works of faith come not forth at the bidding of doubting unbelief?” And then, pointing to the bewildered father, Jesus said, “Bring hither your son.” And when James had brought the lad before Jesus, he asked, “How long has the boy been afflicted in this way?” The father answered, “Since he was a very young child.” And as they talked, the youth was seized with a violent attack and fell in their midst, gnashing his teeth and foaming at the mouth. After a succession of violent convulsions he lay there before them as one dead. Now did the father again kneel at Jesus’ feet while he implored the Master, saying: “If you can cure him, I beseech you to have compassion on us and deliver us from this affliction.” And when Jesus heard these words, he looked down into the father’s anxious face, saying: “Question not my Father’s power of love, only the sincerity and reach of your faith.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really believes.” And then James of Safed spoke those long-to-be-remembered words of commingled faith and doubt, “Lord, I believe. I pray you help my unbelief.” 예수는 이 상세한 설명을 듣고, 바로 옆의 사도들을 엄중히 보시면서, 그가 무릎 꿇은 아버지에게 손대시고 일어나라고 명했습니다. 다음에 예수께서 자신 앞에 서 있던 모든 자에게 말했습니다. “아, 신앙 없이 비뚤어진 사람들아,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랴?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랴? 너희는 얼마나 오래 걸려야, 신앙의 효과가 의심하는 불신의 뜻에서 나오지 않음을 배우느냐?” 그다음 당황하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네 아들을 이리 데려오라.” 야고보가 예수 앞에 소년을 데려오자, 그가 물었습니다. “소년이 이렇게 앓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앓았습니다.” 그들이 말할 때, 젊은 소년이 격렬한 공격에 사로잡혀 그들 사이에 넘어져 이를 갈고 입에서 게거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연속적인 격렬한 경련 후, 그는 죽은 사람처럼 그들 앞에 누웠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다시 예수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님께 간청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를 고칠 수 있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이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시기를 제가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듣자, 그는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안색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사랑의 권능을 의심하지 말고, 네 신앙의 신실함과 그 역량(力量)만 의심하라. 진실로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그때 사펫의 야고보가, 신앙과 의심이 뒤섞여, 그렇게 오래 기억될 말을 했습니다. “주여, 제가 믿습니다. 당신께서 제 불신앙을 도우시기를 제가 간구합니다.”

158:5.3 (1757.3) When Jesus heard these words, he stepped forward and, taking the lad by the hand, said: “I will do this in accordance with my Father’s will and in honor of living faith. My son, arise! Come out of him, disobedient spirit, and go not back into him.” And placing the hand of the lad in the hand of the father, Jesus said: “Go your way. The Father has granted the desire of your soul.” And all who were present, even the enemies of Jesus, were astonished at what they saw. 예수께 이 말을 듣자, 그가 앞으로 나가, 손으로 소년을 잡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행함은 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있는 신앙을 존중함이니라. 내 아들아, 일어나라! 불순종하는 영(靈)아, 그에게서 나와 그에게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리고 소년의 손을 아버지의 손에 놓으면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갈 길을 가라. 아버지께서 네 혼(魂)의 소망을 허락하셨노라.” 현장에 있던 모두, 예수님의 대적들조차, 자신들이 본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158:5.4 (1757.4) It was indeed a disillusionment for the three apostles who had so recently enjoyed the spiritual ecstasy of the scenes and experiences of the transfiguration, so soon to return to this scene of the defeat and discomfiture of their fellow apostles. But it was ever so with these twelve ambassadors of the kingdom. They never failed to alternate between exaltation and humiliation in their life experiences. 아주 최근에 변모의 광경과 체험의 영적 황홀을 누렸던 세 사도는, 자기 동료 사도들의 이런 좌절과 실패의 광경으로 곧 돌아온 것에, 참으로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의 이 열두 대사는 늘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생활 체험의 광희(狂喜 미칠 듯이 기뻐함)와 굴욕(屈辱) 사이에서 언제나 오락가락했습니다.

158:5.5 (1758.1) This was a true healing of a double affliction, a physical ailment and a spirit malady. And the lad was permanently cured from that hour. When James had departed with his restored son, Jesus said: “We go now to Caesarea-Philippi; make ready at once.” And they were a quiet group as they journeyed southward while the crowd followed on behind. 이것은 이중 고통, 육체적 질병과 영(靈)적 질병을 정말로 치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그 시간부터 영구히 나았습니다. 야고보가 회복된 자기 아들과 떠나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가이사랴-빌립보로 가리니, 즉시 준비하라.” 그들이 남쪽으로 여행할 때 무리가 바싹 뒤를 따랐으며, 그들은 말이 없는 일행이었습니다.

6. In Celsus’ Garden 셀수스의 정원에서

211212 영적(靈的) 위대함 막9:28-32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28 After Jesus had gone indoors, his disciples asked him privately, “Why couldn’t we drive it out?” 29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30 They left that place and passed through Galilee. Jesus did not want anyone to know where they were, 31 because he was teaching his disciples. He said to them,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They will kill him, and after three days he will rise.” 32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meant and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it.

158:6.1 (1758.2) They remained overnight with Celsus, and that evening in the garden, after they had eaten and rested, the twelve gathered about Jesus, and Thomas said: “Master, while we who tarried behind still remain ignorant of what transpired up on the mountain, and which so greatly cheered our brethren who were with you, we crave to have you talk with us concerning our defeat and instruct us in these matters, seeing that those things which happened on the mountain cannot be disclosed at this time.” 그들은 셀수스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으며, 그날 저녁 정원에서, 식사하고 휴식한 후, 열둘이 예수님 주위에 모였고, 도마가 말했습니다. “주(主)님, 뒤에 머물던 우리는 산 위에서 일어난 일과 무엇이 당신과 함께 있던 우리 형제들을 그토록 아주 기운이 나게 했는지 아직 모르는 채 있지만, 산에서 일어난 그런 일들은 이때 밝힐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우리 실패에 관해 우리와 말하고 이런 일에 대해 우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158:6.2 (1758.3) And Jesus answered Thomas, saying: “Everything which your brethren heard on the mountain shall be revealed to you in due season. But I will now show you the cause of your defeat in that which you so unwisely attempted. While your Master and his companions, your brethren, ascended yonder mountain yesterday to seek for a larger knowledge of the Father’s will and to ask for a richer endowment of wisdom effectively to do that divine will, you who remained on watch here with instructions to strive to acquire the mind of spiritual insight and to pray with us for a fuller revelation of the Father’s will, failed to exercise the faith at your command but, instead, yielded to the temptation and fell into your old evil tendencies to seek for yourselves preferred places in the kingdom of heaven — the material and temporal kingdom which you persist in contemplating. And you cling to these erroneous concepts in spite of the reiterated declaration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너희 형제들이 산에서 들었던 모두는 적절한 때에 너희에게 알려질 것이라. 그러나 너희가 아주 분별없이 시도한 것에 대해, 너희 실패의 원인을, 내가 이제 너희에게 밝힐 것이라. 너희 주(主)와 그 동료, 너희 형제들이 아버지의 뜻을 더 크게 알고 그런 신적 뜻을 실제로 행할 더 풍성한 지혜의 자질을 얻기 위해 어제 저쪽 산에 올라갔을 때, 여기 남아 영적 통찰력의 마음을 얻고, 아버지의 뜻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우리와 함께 기도에 애쓰라는 지시를 받아 당직(當直)했던 너희가 그 명령에 따라 끝내 신앙하지 못하는 대신에, 유혹에 굴복하여, 너희가 집착하며 기대하는 하늘나라 – 물질적인 뜬세상의 나라에서 자신을 위해 우선적 자리를 찾는 너희의 악한 옛 경향에 빠졌느니라. 그리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반복하여 선언했지만, 너희는 잘못된 이런 개념에 집착하고 있노라.

158:6.3 (1758.4) “No sooner does your faith grasp the identity of the Son of Man than your selfish desire for worldly preferment creeps back upon you, and you fall to discussing among yourselves as to who should b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a kingdom which, as you persist in conceiving it, does not exist, nor ever shall. Have not I told you that he who would be greatest in the kingdom of my Father’s spiritual brotherhood must become little in his own eyes and thus become the server of his brethren? Spiritual greatness consists in an understanding love that is Godlike and not in an enjoyment of the exercise of material power for the exaltation of self. In what you attempted, in which you so completely failed, your purpose was not pure. Your motive was not divine. Your ideal was not spiritual. Your ambition was not altruistic. Your procedure was not based on love, and your goal of attainment was not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너희 신앙으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정체성을 파악하자마자, 세속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너희 이기적 욕망이 다시 슬그머니 너희에게 다가와, 너희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하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너희끼리 논의하기까지 하나, 너희가 집착하여 상상하는 것과 같은 하늘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결코 없을 것이라. 내 아버지의 영적 형제 사랑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그 스스로 보기에 작아져서 자기 형제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영적 위대함은 하느님과 같은 이해심 있는 사랑에 있고, 자신을 높이는 물질적 권세의 행사를 누리는 데에 있지 않으니라. 너희가 시도했던 것에서, 너희가 그렇게 완전히 실패한 것에서, 너희 목적(目的)은 순수하지 않았노라. 너희 동기(動機)는 신적이지 않았노라. 너희 이상(理想)은 영적(靈的)이지 않았노라. 너희 포부(抱負)는 애타적(愛他的 타인 사랑)이지 않았노라. 너희 절차(節次)는 사랑에 근거하지 않았고, 너희 도달(到達) 목표(目標)는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느니라.

158:6.4 (1758.5) “How long will it take you to learn that you cannot time-shorten the course of established natural phenomena except when such things are in accordance with the Father’s will? nor can you do spiritual work in the absence of spiritual power. And you can do neither of these, even when their potential is present, without the existence of that third and essential human factor,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possession of living faith. Must you always have material manifestations as an attraction for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kingdom? Can you not grasp the spirit significance of my mission without the visible exhibition of unusual works? When can you be depended upon to adhere to the higher and spiritual realities of the kingdom regardless of the outward appearance of all material manifestations?” “너희가 이미 정해진 자연 현상의 과정에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를 제외하고, 너희가 할 수 없음을 익히는 데 너희에게 얼마나 걸리겠느냐? 너희에게 영적 권능이 없으면 영적인 일도 할 수 없느니라. 그런 잠재력이 있어도, 그런 셋째 필수적인 인간 요소, 살아있는 신앙에 사로잡힌 개인적 체험 생활이 없으면, 너희는 이들 중 어떤 일도 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언제나 물질적 징후가 있어야만,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에 사로잡히겠느냐? 너희는 신기한 일들을 눈으로 보지 않으면, 내 사명의 영(靈)적 중요성을 파악할 수 없느냐? 물질적인 모든 징후의 외적 현상에 관계가 없이, 하느님 나라의 더 높은 영적 실체를 충실히 따르도록, 너희를 언제 믿을 수 있겠느냐?”

158:6.5 (1759.1) When Jesus had thus spoken to the twelve, he added: “And now go to your rest, for on the morrow we return to Magadan and there take counsel concerning our mission to the cities and villages of the Decapolis. And in the conclusion of this day’s experience, let me declare to each of you that which I spoke to your brethren on the mountain, and let these words find a deep lodgment in your hearts: The Son of Man now enters upon the last phase of the bestowal. We are about to begin those labors which shall presently lead to the great and final testing of your faith and devotion when I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the men who seek my destruction. And remember what I am saying to you: The Son of Man will be put to death, but he shall rise again.” 예수께서 열 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덧붙였습니다. “이제 너희는 가서 쉬어라, 내일 우리는 마가단으로 돌아가 데카폴리스 도시와 마을에 대한 우리 선교에 대해 거기에서 논의하리라. 그리고 오늘 체험의 결론으로, 내가 너희 각자에게 산에서 너희 형제들에게 내가 말한 것을 선언하리니, 이런 말을 너희 심정에 깊이 자리 잡게 하라. 사람의 아들은 이제 증여의 최종 단계에 들어가느니라. 내가 나를 죽이려는 자들의 손에 넘겨질 때, 너희 신앙과 헌신에 대한 중요한 최종적 테스트에 곧 이르게 할, 그런 수고를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려 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라. 사람의 아들은 죽을 것이지만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리라.”

158:6.6 (1759.2) They retired for the night, sorrowful. They were bewildered; they could not comprehend these words. And while they were afraid to ask aught concerning what he had said, they did recall all of it subsequent to his resurrection.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을 알아차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말했던 것에 관해 겁이 나서 도저히 질문하지 못했지만, 그의 부활 이후에 그들은 그런 모든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7. Peter’s Protest 베드로의 항의(抗議)

211219 예수를 따르는 행로 막8:31-38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31 He then began to teach them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teachers of the law, and that he must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32 He spoke plainly about this, and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33 But when Jesus turne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he rebuked Peter. “Get behind me, Satan!” he said. “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34 Then he called the crowd to him along with his disciples and said: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35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and for the gospel will save it. 36 What good is it for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yet forfeit his soul? 37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38 If anyone is ashamed of me and my words in this adulterous and sinful generation,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him when he comes in his Father’s glory with the holy angels.”

158:7.1 (1759.3) Early this Wednesday morning Jesus and the twelve departed from Caesarea-Philippi for Magadan Park near Bethsaida-Julias. The apostles had slept very little that night, so they were up early and ready to go. Even the stolid Alpheus twins had been shocked by this talk about the death of Jesus. As they journeyed south, just beyond the Waters of Merom they came to the Damascus road, and desiring to avoid the scribes and others whom Jesus knew would presently be coming along after them, he directed that they go on to Capernaum by the Damascus road which passes through Galilee. And he did this because he knew that those who followed after him would go on down over the east Jordan road since they reckoned that Jesus and the apostles would fear to pass through the territory of Herod Antipas. Jesus sought to elude his critics and the crowd which followed him that he might be alone with his apostles this day. 이 수요일(AD29. 8. 17) 아침 일찍, 예수님과 열둘은 가이사랴-빌립보를 떠나 벳새대-율리아스 근처 마가단 공원을 향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신경이 무딘 알페오 쌍둥이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런 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메롬 물가를 바로 건너 다마스커스 길에 이르자, 자신들을 뒤따라 바로 올 줄로 예수께서 알고 있는 서기관들과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고, 예수께서 지시하여, 그들이 다마스커스 길로 갈릴리를 거쳐 가버나움으로 계속 가게 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을 뒤쫓는 그들이, 예수와 사도들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를 지나기를 꺼릴 것으로 생각하여, 동쪽 요단 길로 내려갈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뒤쫓는 비난자들과 군중을 피해, 단지 자기 사도들과 이날 있으려 하셨습니다.

158:7.2 (1759.4) They traveled on through Galilee until well past the time for their lunch, when they stopped in the shade to refresh themselves. And after they had partaken of food, Andrew, speaking to Jesus, said: “Master, my brethren do not comprehend your deep sayings. We have come fully to believe that you are the Son of God, and now we hear these strange words about leaving us, about dying. We do not understand your teaching. Are you speaking to us in parables? We pray you to speak to us directly and in undisguised form.” 그들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날 때까지 갈릴리를 통해 이동했으며, 기운을 차리려고 그늘에 멈췄습니다. 그들이 같이 식사한 후 안드레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主)님, 내 형제들이 당신의 어려운 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믿게 되었는데 이제 우리를 떠나, 죽는다는 이런 놀라운 말을 우리가 듣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요? 당신께서 우리에게 똑바로 숨김없이 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58:7.3 (1759.5) In answer to Andrew, Jesus said: “My brethren, it is because you have confessed that I am the Son of God that I am constrained to begin to unfold to you the truth about the end of the bestowal of the Son of Man on earth. You insist on clinging to the belief that I am the Messiah, and you will not abandon the idea that the Messiah must sit upon a throne in Jerusalem; wherefore do I persist in telling you that the Son of Man must presently go to Jerusalem, suffer many things, be rejected by the scribes, the elders, and the chief priests, and after all this be killed and raised from the dead. And I speak not a parable to you; I speak the truth to you that you may be prepared for these events when they suddenly come upon us.” And while he was yet speaking, Simon Peter, rushing impetuously toward him, laid his hand upon the Master’s shoulder and said: “Master, be it far from us to contend with you, but I declare that these things shall never happen to you.”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대답하며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내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너희가 고백했기 때문에, 내가 지상에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 증여를 끝냄에 대한 진리를 부득이 너희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느니라. 너희는 내가 메시아라는 믿음을 우겨 집착하고,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왕좌(王座)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주장하여 말하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곧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일을 겪고, 서기관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버림을 받으며, 이 모든 일 후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해야 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비유를 말하지 않노라.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칠 때 너희가 이런 경우에 준비되도록 내가 너희에게 사실을 말하노라.” 그가 아직도 말하는데 시몬 베드로가 성급히 그에게 달려들어 주(主)님의 어깨에 자기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당신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내가 장담합니다.”

158:7.4 (1760.1) Peter spoke thus because he loved Jesus; but the Master’s human nature recognized in these words of well-meant affection the subtle suggestion of temptation that he change his policy of pursuing to the end his earth bestowal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his Paradise Father. And it was because he detected the danger of permitting the suggestions of even his affectionate and loyal friends to dissuade him, that he turned upon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saying: “Get you behind me. You savor of the spirit of the adversary, the tempter. When you talk in this manner, you are not on my side but rather on the side of our enemy. In this way do you make your love for me a stumbling block to my doing the Father’s will. Mind not the ways of men but rather the will of God.”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간 본성은 선의(善意)의 애정이 담긴 이런 말에서, 그의 천국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의 지상 증여를 마치려는 그의 방침을 그가 바꾸라는, 미묘한 유혹의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친구들이라도 자신을 단념시키려는 제안의 허용에 담긴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그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돌리며 말했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대적자, 유혹자 영(靈)의 낌새가 있도다. 네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너는 내 편이 아니라 우리 적대자의 편에 있는 것이라. 이런 식으로 너는 나를 위한 너희 사랑을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장애물로 만드느니라.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막8:33, 마16:23).”

158:7.5 (1760.2) After they had recovered from the first shock of Jesus’ stinging rebuke, and before they resumed their journey, the Master spoke further: “If any man would come after me, let him disregard himself, take up his responsibilities daily, and follow me. For whosoever would save his life selfishly, shall lose it, but whos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e gospel’s, shall save it. What does it profit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 What would a man give in exchange for eternal life? Be not ashamed of me and my words in this sinful and hypocritical generation, even as I will not be ashamed to acknowledge you when in glory I appear before my Father in the presence of all the celestial hosts. Nevertheless, many of you now standing before me shall not taste death till you see this kingdom of God come with power.” 그들이 예수님의 날카로운 힐책의 첫 충격에서 회복한 후, 그들이 다시 여행하기 전에, 주님이 덧붙여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나를 따르려면, 자신에게 주의하지 말고, 매일 자기 책임을 수행하며, 나를 따르라. 누구나 자기 생명을 이기적으로 구하려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지만, 누구나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할 것이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기 혼(魂)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취하겠느냐? 이런 죄 많은 위선적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내가 모든 천상 무리가 있는데 내 아버지 앞에 영광중에 나타날 때, 내가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하리라(마16:24-26, 막8:34-38). 그렇지만, 이제 내 앞에 서 있는 너희 대부분이 이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마16:28).”

158:7.6 (1760.3) And thus did Jesus make plain to the twelve the painful and conflicting path which they must tread if they would follow him. What a shock these words were to these Galilean fishermen who persisted in dreaming of an earthly kingdom with positions of honor for themselves! But their loyal hearts were stirred by this courageous appeal, and not one of them was minded to forsake him. Jesus was not sending them alone into the conflict; he was leading them. He asked only that they bravely follow.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열 둘에게, 그들이 자신을 따르려면, 자신들이 가야 하는, 수고하며 싸우는 행로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런 말들은 스스로 영예로운 지위로 함께 세상 나라를 꿈꾸며 집착했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얼마나 충격을 일으켰는지! 그러나 그들의 충성스러운 심정은 이런 용기 있는 호소로 감동되어, 그들 중 누구도 그를 저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만 전투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용감히 따르기만 요청했습니다.

158:7.7 (1760.4) Slowly the twelve were grasping the idea that Jesus was telling them something about the possibility of his dying. They only vaguely comprehended what he said about his death, while his statement about rising from the dead utterly failed to register in their minds. As the days passed, Peter, James, and John, recalling their experience upon the mount of the transfiguration, arrived at a fuller understanding of certain of these matters. 열둘은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가능성에 대해 자신들에게 무언가 말씀하고 계셨다는 생각을 서서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기 죽음에 대해 말했던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었고, 게다가 부활에 대한 그의 진술은 그들의 마음에 아예 새겨지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변모산에서 자신들의 체험을 생각해 내면서 이런 문제 중 어떤 것을 더 충분히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58:7.8 (1760.5) In all the association of the twelve with their Master, only a few times did they see that flashing eye and hear such swift words of rebuke as were administered to Peter and the rest of them on this occasion. Jesus had always been patient with their human shortcomings, but not so when faced by an impending threat against the program of implicitly carrying out his Father’s will regarding the remainder of his earth career. The apostles were literally stunned; they were amazed and horrified. They could not find words to express their sorrow. Slowly they began to realize what the Master must endure, and that they must go through these experiences with him, but they did not awaken to the reality of these coming events until long after these early hints of the impending tragedy of his latter days. 열둘이 자기 주님과 가졌던 모든 관계에서, 이 경우에 베드로와 나머지 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그런 번쩍이는 눈을 보고 그렇게 즉각적인 힐책의 말을 들은 것은 몇 번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인간적 결점은 언제나 참았지만, 자신의 나머지 지상 생애에 관해 자기 아버지의 뜻을 절대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을 거스르는 임박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정말로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라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무엇을 견디어야 하는지, 자신들이 그와 함께 이런 체험을 거쳐야 함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그의 말기의 임박한 비극에 대한 이런 초기 암시가 있은 지 오랜 후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이런 사건들의 실체를 알아챘습니다.

158:7.9 (1761.1) In silence Jesus and the twelve started for their camp at Magadan Park, going by way of Capernaum. As the afternoon wore on, though they did not converse with Jesus, they talked much among themselves while Andrew talked with the Master. 예수님과 열둘은 조용히 가버나움을 거쳐 마가단 공원에 있는 자신들의 야영지로 출발했습니다. 오후가 지나도록,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안드레가 주님과 말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8. At Peter’s House 베드로의 집에서

211226 하늘나라에서 진보하는 길 마18:2-6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2 He called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among them. 3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4 Therefore, whoever humbles himself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5 “And whoever welcomes a little child like this in my name welcomes me. 6 But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to have a large millstone hung around his neck and to be drowned in the depths of the sea.

158:8.1 (1761.2) Entering Capernaum at twilight, they went by unfrequented thoroughfares directly to the home of Simon Peter for their evening meal. While David Zebedee made ready to take them across the lake, they lingered at Simon’s house, and Jesus, looking up at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asked: “As you walked along together this afternoon, what was it that you talked about so earnestly among yourselves?” The apostles held their peace because many of them had continued the discussion begun at Mount Hermon as to what positions they were to have in the coming kingdom; who should be the greatest, and so on. Jesus, knowing what it was that occupied their thoughts that day, beckoned to one of Peter’s little ones and, setting the child down among them, said: “Verily, verily, I say to you, except you turn about and become more like this child, you will make little progress in the kingdom of heaven. Whosoever shall humble himself and become as this little one, the same shall becom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And whoso receives such a little one receives me. And they who receive me receive also Him who sent me. If you would be first in the kingdom, seek to minister these good truths to your brethren in the flesh. But whos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to stumble, it would be better for him if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he were cast into the sea. If the things you do with your hands, or the things you see with your eyes give offense in the progress of the kingdom, sacrifice these cherished idols, for it is better to enter the kingdom minus many of the beloved things of life rather than to cling to these idols and find yourself shut out of the kingdom. But most of all, see that you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s of the heavenly hosts.” 저물녘에 가버나움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즉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갔습니다. 다윗 세베대가 그들을 데리고 호수를 건널 준비를 하고, 그들이 시몬의 집에서 꾸물거리는 사이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올려 보시며 물었습니다. “오늘(AD 29. 8. 17 수) 오후에 너희가 함께 걸으면서, 너희끼리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했느냐?” 사도들 대부분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어떤 지위, 누가 가장 큰 자가 되어야 하는가 등에 대해 헤르본 산에서 시작한 논의를 계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날 무엇이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지 아시고 베드로의 어린 자녀 중 하나를 손짓하여 불러 그 아이를 그들 사이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더욱 이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않을 것이라. 누구나 스스로 겸손히 이 어린아이처럼 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되리라. 그리고 그런 작은 자를 받아들이는 누구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나를 받아들이는 그들은 나를 보내신 그분도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라(막9:33-37). 너희가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면, 육신으로 있는 너희 형제에게 이런 선한 진리를 주려고 애쓰라. 그러나 이런 작은 자들 중 하나를 실족(失足)하게 하는 누구나 맷돌이 그의 목에 걸려 바다에 던져짐이 더 나을 것이라. 너희가 너희 손으로 하는 것들이나, 너희 눈으로 보는 것들이, 하느님 나라 진보에서 해친다면, 이런 우상들에 매달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세상의 여러 소중한 것들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이렇게 아끼는 우상들을 버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작은 자들 중 하나도 얕보지 않도록 배려하라, 그들의 천사들이 언제나 하늘 무리의 얼굴을 보기 있기 때문이니라(마18:1-10).”

158:8.2 (1761.3)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they entered the boat and sailed across to Magadan.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그들은 배에 들어가 마가단으로 가로질러 나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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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59 The Decapolis Tour 데카폴리스 여행

Paper 159

The Decapolis Tour 데카폴리스 여행

1. the Sermon on Forgiveness 용서에 대한 설교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내 형제가 내게 몇 번 죄를 범할까요?”
Parable of the reckoning with the stewards 청지기들의 결산 비유
Dangers of personal judgment 개인적 판결의 위험성
2. The Strange Preacher 별난 설교자
3. Instruction for Teachers and Believers 교사(敎師)와 신자(信者) 교육
4. The Talk with Nathaniel 나다니엘과의 대화
“What is the truth about the scriptures?” “무엇이 성서에 대한 진실입니까?”

5. The Positive Nature of Jesus’ Religion 예수종교의 능동적 본질
“…carry the pack a second mile.” “…2마일이나 짐을 지라”

6. The Return to Magadan 마가단으로 복귀

220102 데카폴리스 여행 막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So the man went away and began to tell in the Decapolishow much Jesus had done for him. And all the people were amazed.

159:0.1 (1762.1) WHEN Jesus and the twelve arrived at Magadan Park, they found awaiting them a group of almost one hundred evangelists and disciples, including the women’s corps, and they were ready immediately to begin the teaching and preaching tour of the cities of the Decapolis. 예수님과 열둘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의 1백 명의 전도자들과 제자들 무리를 발견했는데, 여성단도 포함되었으며, 그들은 데카폴리스의 도시에서 즉시 가르치고 전도하는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159:0.2 (1762.2) On this Thursday morning, August 18, the Master called his followers together and directed that each of the apostles should associate himself with one of the twelve evangelists, and that with others of the evangelists they should go out in twelve groups to labor in the cities and villages of the Decapolis. The women’s corps and others of the disciples he directed to remain with him. Jesus allotted four weeks to this tour, instructing his followers to return to Magadan not later than Friday, September 16. He promised to visit them often during this time. In the course of this month these twelve groups labored in Gerasa, Gamala, Hippos, Zaphon, Gadara, Abila, Edrei, Philadelphia, Heshbon, Dium, Scythopolis, and many other cities. Throughout this tour no miracles of healing or other extraordinary events occurred. (AD 29) 8월 18일 목요일 이 아침에 주께서 따르는 자들을 불러 모아, 각 사도가 12 전도자 중 하나와 합하여, 데카폴리스 도시와 마을에서 다른 전도자들과 함께 12그룹으로 수고하러 나가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여성단과 다른 제자들은 자신과 함께 남도록 지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행에 4주를 배정하고, 9월 16일 금요일을 넘기지 말고 마가단에 돌아오도록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종종 그들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월내(月內)에 이 열두 그룹은 게라사, 가말라, 히포, 자폰, 가다라, 아빌라, 에드레이, 필라델피아, 헤스본, 디움, 스키토폴리스와 다른 여러 도시에서 수고했습니다. 이 여행 내내 치유의 기적이나 다른 놀라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 The Sermon on Forgiveness 용서에 대한 설교

220109 거저 받은 용서 마10:8b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159:1.1 (1762.3) One evening at Hippos, in answer to a disciple’s question, Jesus taught the lesson on forgiveness. Said the Master: 어느 날 저녁 히포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대답하여, 예수께서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주(主)께서 말했습니다.

159:1.2 (1762.4) “If a kindhearted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oes astray, does he not immediately leave the ninety and nine and go out in search of the one that has gone astray? And if he is a good shepherd, will he not keep up his quest for the lost sheep until he finds it? And then, when the shepherd has found his lost sheep, he lays it over his shoulder and, going home rejoicing, calls to his friends and neighbors,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my sheep that was lost.’ I declare that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 and nine righteous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Even so, it is not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should go astray, much less that they should perish. In your religion God may receive repentant sinners;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Father goes forth to find them even before they have seriously thought of repentance. “인정 많은 사람에게 일백 마리의 양이 있고 그중 하나가 길을 잃으면, 그가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길 잃은 하나를 바로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리고 그가 선한 목자(牧者)라면, 그가 잃은 양을 발견할 때까지 그것을 계속 수색(搜索)하지 않겠느냐? 그런 다음 목자(牧者)가 자기 잃은 양을 찾으면, 그가 그것을 자기 어깨에 메고 기쁘게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내가 잃었던 내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라며 부른다. 내가 선언하노니,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義人) 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하리라. 그렇지만, 이런 작은 자들 중 하나가 길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 너희 종교의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들을 찾으러 나가시느니라(마18:12-14, 눅15:4-7).

159:1.3 (1762.5) “The Father in heaven loves his children, and therefore should you learn to love one another; the Father in heaven forgives you your sins; therefore should you learn to forgive one another. If your brother sins against you, go to him and with tact and patience show him his fault. And do all this between you and him alone. If he will listen to you, then have you won your brother. But if your brother will not hear you, if he persists in the error of his way, go again to him, taking with you one or two mutual friends that you may thus have two or even three witnesses to confirm your testimony and establish the fact that you have dealt justly and mercifully with your offending brother. Now if he refuses to hear your brethren, you may tell the whole story to the congregation, and then, if he refuses to hear the brotherhood, let them take such action as they deem wise; let such an unruly member become an outcast from the kingdom. While you cannot pretend to sit in judgment on the souls of your fellows, and while you may not forgive sins or otherwise presume to usurp the prerogatives of the supervisors of the heavenly hosts, at the same time, it has been committed to your hands that you should maintain temporal order in the kingdom on earth. While you may not meddle with the divine decrees concerning eternal life, you shall determine the issues of conduct as they concern the temporal welfare of the brotherhood on earth. And so, in all these matters connected with the discipline of the brotherhood, whatsoever you shall decree on earth, shall be recognized in heaven. Although you cannot determine the eternal fate of the individual, you may legislate regarding the conduct of the group, for, where two or three of you agree concerning any of these things and ask of me, it shall be done for you if your petition is not inconsistent with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And all this is ever true, for, where two or three believers are gathered together,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하늘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하늘 아버지는 너희 죄를 용서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그에게 가서 슬기(처리 능력)와 인내로 그의 잘못을 밝히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와 그 형제 사이에서만 행하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 그러나 네 형제가 네 말을 듣지 않고, 그가 자기 잘못을 계속 고집하면, 너와 함께 서로 아는 한두 친구를 데리고 그에게 다시 가서 너는 이렇게 두세 증인까지 너의 증언을 확증하고 네가 너를 해친 형제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라. 그때 그가 네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회중에 전말(顚末 처음부터 끝까지의 양상)를 알려도 되고, 그가 형제 공동체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이 현명하게 여기는 그런 행동을 취하게 하라. 제멋대로 구는 그런 일원은 하느님 나라 밖으로 추방하라. 너희는 감히 너희 동료들의 혼(魂)들을 판가름할 수 없고, 너희가 죄를 용서하거나 달리 감히 하늘 무리 감독자들의 특권을 빼앗을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너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일시적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너희 손에 맡겨졌느니라. 너희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신적 판결에 간섭할 수 없지만, 그것들이 지상에서 형제 공동체의 일시적 복지에 있어서 중요한 행동 문제는 너희가 결정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렇게, 형제 공동체의 질서에 관련된 이런 모든 문제에서, 너희가 지상에서 판결한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승인(承認 마땅하다고 인정)될 것이라. 너희는 개인의 영원한 파멸을 결정할 수 없지만, 너희는 단체의 경영에 관해 법규를 제정할 수도 있는 것은, 이런 일 중 어떤 것에 관해 너희 중 둘 셋이 마음이 맞아 내게 구하고, 너희 간구가 내 하늘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것이 너희를 위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항상 틀림이 없으니, 두세 명의 신자가 함께 모인 곳에 내가 그들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니라(마18:15-20).”

159:1.4 (1763.1) Simon Peter was the apostle in charge of the workers at Hippos, and when he heard Jesus thus speak, he asked: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ntil seven times?” And Jesus answered Peter: “Not only seven times but even to seventy times and seven. Therefore may the kingdom of heaven be likened to a certain king who ordered a financial reckoning with his stewards. And when they had begun to conduct this examination of accounts, one of his chief retainers was brought before him confessing that he owed his king ten thousand talents. Now this officer of the king’s court pleaded that hard times had come upon him, and that he did not have wherewith to pay this obligation. And so the king commanded that his property be confiscated, and that his children be sold to pay his debt. When this chief steward heard this stern decree, he fell down on his face before the king and implored him to have mercy and grant him more time, saying, ‘Lord, have a little mor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you all.’ And when the king looked upon this negligent servant and his family,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He ordered that he should be released, and that the loan should be wholly forgiven. 시몬 베드로는 히포의 일꾼(전도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그가 듣고 질문했습니다.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내가 몇 번 그를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인가요?”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이라도 일곱 번 하라. 따라서 하늘나라는 자기 청지기들에게 재정 결산을 지시한 어떤 왕에 견줄 수 있느니라. 그들이 계정(計定) 심사 집행을 시작하자, 그의 수석 신하 중 하나가 그 앞에 끌려와 자기 왕에게 1만 달란트(6조 10만/일 경우, 1달란트=6,000데나리온, 드라크마)의 빚을 졌다고 고백했느니라. 그때 왕의 조정(朝廷)에 속한 이 관리가, 자기에게 궁핍한 시기가 엄습하여 이 채무를 갚을 것이 없다고 간청했느니라. 그러자 왕이 그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의 자녀를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더라. 이 수석 청지기가 이렇게 준엄한 판결을 듣고 왕 앞에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 자신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하여 말하기를 ‘주여, 조금 더 저를 참아 주시면 제가 모두 갚겠습니다.’ 왕이 이 게으른 하인과 그의 가족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느니라. 왕이 그를 놓아주고, 대출금을 완전히 탕감(蕩減)하라고 명령했느니라(마18:21-27).

159:1.5 (1763.2) “And this chief steward, having thus received mercy and forgiveness at the hands of the king, went about his business, and finding one of his subordinate stewards who owed him a mere hundred denarii, he laid hold upon him and, taking him by the throat, said, ‘Pay me all you owe.’ And then did this fellow steward fall down before the chief steward and, beseeching him, said: ‘Only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resently be able to pay you.’ But the chief steward would not show mercy to his fellow steward but rather had him cast in prison until he should pay his debt. When his fellow servant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so distressed that they went and told their lord and master, the king. When the king heard of the doings of his chief steward, he called this ungrateful and unforgiving man before him and said: ‘You are a wicked and unworthy steward. When you sought for compassion, I freely forgave you your entire debt. Why did you not also show mercy to your fellow steward, even as I showed mercy to you?’ And the king was so very angry that he delivered his ungrateful chief steward to the jailers that they might hold him until he had paid all that was due. And even so shall my heavenly Father show the more abundant mercy to those who freely show mercy to their fellows. How can you come to God asking consideration for your shortcomings when you are wont to chastise your brethren for being guilty of these same human frailties? I say to all of you: Freely you have received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therefore freely give to your fellows on earth.” “왕의 손에서 이렇게 자비와 용서를 받은 이 수석 청지기가 자기 업무를 시작하다가 자신에게 단지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하급 청지기 중 하나를 발견하고, 그를 붙잡아 그의 목을 조르며 ‘네가 빚진 모두를 내게 갚으라.’라고 말했더라. 그러자 이 동료 청지기가 수석 청지기 앞에 엎드려, 간청하며 ‘나를 조금만 참아 주시면, 제가 즉시 갚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더라. 그러나 수석 청지기는 자기 동료 청지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도리어 그가 자기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었더라. 그의 동료 하인들이 일어난 일을 보고, 너무 괴로워하다가 그들의 군주이며 주인인 왕에게 가서 말했더라. 왕이 자기 수석 청지기의 소행을 듣고, 은혜를 모르고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을 자기 앞에 불러 ‘너는 사악하고 쓸모없는 청지기니라. 네가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을 때, 내가 네 모든 빚을 기꺼이 탕감(蕩減)했도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풀었듯이, 너 또한 너의 동료 청지기에게 왜 자비를 베풀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더라. 그리고 왕은 아주 몹시 화가 나서 은혜를 모르는 자기 수석 청지기를 교도관들에게 넘겨서 그가 만기(滿期)된 모두를 갚을 때까지 그를 잡아두었더라. 바로 내 하늘 아버지는 자기 동료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는 자들에게 더 풍성한 자비를 베풀리라. 너희가 이와 같은 인간적 약점의 과실에 대해 늘 너희 형제를 호되게 책망하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나와 너희가 너희 결점을 헤아려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느냐? 내가 너희 모두에게 이르노라. 너희가 거저 하느님 나라의 좋은 것들을 받았으니, 지상에서 너의 동료들에게 거저 주어라(마18:28-35).”

159:1.6 (1764.1) Thus did Jesus teach the dangers and illustrate the unfairness of sitting in personal judgment upon one’s fellows. Discipline must be maintained, justice must be administered, but in all these matters the wisdom of the brotherhood should prevail. Jesus invested legislative and judicial authority in the group, not in the individual. Even this investment of authority in the group must not be exercised as personal authority. There is always danger that the verdict of an individual may be warped by prejudice or distorted by passion. Group judgment is more likely to remove the dangers and eliminate the unfairness of personal bias. Jesus sought always to minimize the elements of unfairness, retaliation, and vengeance. 예수께서 이렇게 위험을 가르치고, 자기 동료들을 개인적으로 판가름하는 부당성(不當性 이치에 맞지 않음)을 설명하셨습니다. 규율이 유지되고, 정의(正義)가 지배해야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형제 공동체의 지혜가 우세(優勢)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입법권과 사법적 권위를 맡겼습니다. 집단의 이런 권위 임명도 개인적 권위로 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의 판단은 편견으로 치우치거나 열정으로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언제나 있습니다. 집단 판결이 위험을 제거하고 개인적 편견의 부당성을 몰아낼 가능성이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부당성(不當性), 보복(報復)과 복수(復讎)의 요소를 최소로 하려고 애썼습니다.

159:1.7 (1764.2) [The use of the term seventy-seven as an illustration of mercy and forbearance was derived from the Scriptures referring to Lamech’s exultation because of the metal weapons of his son Tubal-Cain, who, comparing these superior instruments with those of his enemies, exclaimed: “If Cain, with no weapon in his hand, was avenged seven times, I shall now be avenged seventy-seven.”][자기 대적들의 무기들과 우수한 이런 도구들을 비교하면서, “카인의 손에 어떤 무기도 없이 그가 일곱 번 복수했다면, 나는 이제 일흔-일곱번 복수하리라.”라고 외치며, 자기 아들 투발-카인의 금속 무기 때문에, 미칠 듯이 기뻐하는 라멕을 언급하는 성서에서, 자비와 관용의 실례로 칠십-칠이라는 용어 사용이 유래되었습니다(창4:24).]

2. The Strange Preacher 별난 설교자

220116 다른 예수 가족을 기뻐하라 막9:38-41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38 “Teacher,” said John, “we saw a man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old him to stop, because he was not one of us.” 39 “Do not stop him,” Jesus said. “No one who does a miracle in my name can in the next moment say anything bad about me, 40 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41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gives you a cup of water in my name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will certainly not lose his reward.

159:2.1 (1764.3) Jesus went over to Gamala to visit John and those who worked with him at that place. That evening, after the session of questions and answers, John said to Jesus: “Master, yesterday I went over to Ashtaroth to see a man who was teaching in your name and even claiming to be able to cast out devils. Now this fellow had never been with us, neither does he follow after us; therefore I forbade him to do such things.” Then said Jesus: “Forbid him not. Do you not perceive that this gospel of the kingdom shall presently be proclaimed in all the world? How can you expect that all who will believe the gospel shall be subject to your direction? Rejoice that already our teaching has begun to manifest itself beyond the bounds of our personal influence. Do you not see, John, that those who profess to do great works in my name must eventually support our cause? They certainly will not be quick to speak evil of me. My son, in matters of this sort it would be better for you to reckon that he who is not against us is for us. In the generations to come many who are not wholly worthy will do many strange things in my name, but I will not forbid them. I tell you that, even when a cup of cold water is given to a thirsty soul, the Father’s messengers shall ever make record of such a service of love.” 예수님은 가말라로 건너가 요한과 그곳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날 저녁, 질의응답(質疑應答) 시간 후, 요한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主)여, 어제 제가 아스타롯으로 건너가 당신으로 이름으로 가르치고, 악령(惡靈)을 쫓아낼 수 있다고 주장도 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이제까지 이 사람이 우리와 함께한 적이 없고, 우리를 따르지도 않아서, 그가 그런 일을 하도록 제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금하지 말라. 너는 이 하느님 나라 복음이 곧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을 알아채지 못하느냐? 복음을 믿을 모두가 너의 지시를 받을 것이라고 네가 어떻게 요구할 수 있느냐? 우리 가르침이 벌써 직접적인 우리 영향력의 한계를 넘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기뻐하라. 요한아, 내 이름으로 큰일을 한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결국 우리 주장(主張)을 뒷받침해야 함을 너는 알지 못하느냐? 그들은 확실히 나를 신속하게 헐뜯어 말하지 않으리라. 여보게,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로 네가 여기는 것이 더 나으리라. 오는 세대에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여럿이 내 이름으로 별난 일들을 행할 것이나, 내가 그들을 금하지 않으리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잔을 줘도, 아버지의 메신저들이 그런 사랑의 봉사를 늘 기록하리라(막9:38-41, 눅9:49-50).”

159:2.2 (1764.4) This instruction greatly perplexed John. Had he not heard the Master say,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did not perceive that in this case Jesus was referring to man’s personal relation to the spiritual teachings of the kingdom, while in the other case reference was made to the outward and far-flung social relations of believers regarding the questions of administrative control and the jurisdiction of one group of believers over the work of other groups which would eventually compose the forthcoming world-wide brotherhood. 요한은 이 가르침으로 굉장히 어쩔 줄 몰랐습니다. 주(主)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대적하느니라(마12:30a, 눅11:23a).”라고 말한 것을, 그가 듣지 않았던가(153.4.3)? 그는, 이 경우에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영적 가르침에 대한 사람의 개인적 관계를 이야기했던 반면에, 다른 경우에 관리 통제 문제와 결국 다가오는 세계적인 형제 공동체를 구성할 다른 집단의 일에 대한 한 신자 집단의 관할권에 관하여 광범위한 외적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던 것으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159:2.3 (1765.1) But John oftentimes recounted this experience in connection with his subsequent labors in behalf of the kingdom. Nevertheless, many times did the apostles take offense at those who made bold to teach in the Master’s name. To them it always seemed inappropriate that those who had never sat at Jesus’ feet should dare to teach in his name. 그러나 요한은 자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신의 계속되는 수고와 관련하여 이 체험을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감히 주(主)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자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감히 가르치는 것은 그들에게 언제나 온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159:2.4 (1765.2) This man whom John forbade to teach and work in Jesus’ name did not heed the apostle’s injunction. He went right on with his efforts and raised up a considerable company of believers at Kanata before going on into Mesopotamia. This man, Aden, had been led to believe in Jesus through the testimony of the demented man whom Jesus healed near Kheresa, and who so confidently believed that the supposed evil spirits which the Master cast out of him entered the herd of swine and rushed them headlong over the cliff to their destruction.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는 것을 요한이 금지한 이 사람은 사도의 권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아주 계속 애썼고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전 카나타에서 상당한 신자 일행을 양육했습니다. 이 사람, 아덴은 케레사 근처에서 예수께서 치료한 미친 사람, 주께서 자신으로부터 쫓아냈다고 추정한 악령(惡靈)이 돼지 떼에 들어가 벼랑 넘어 그것들이 거꾸로 떨어져 죽도록 급습했다고 아주 자신 있게 믿은 그의 증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151.6.6).

3. Instruction for Teachers and Believers 교사(敎師)와 신자(信者) 교육(敎育)

220123 신앙 싸움 딤전6:12a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Fight the good fight of the faith.

159:3.1 (1765.3) At Edrei, where Thomas and his associates labored, Jesus spent a day and a night and, in the course of the evening’s discussion, gave expression to the principles which should guide those who preach truth, and which should activate all who t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Summarized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taught: 도마와 그의 동료들이 수고하던 에드레이에서 예수께서 꼬박 하루를 보내셨고, 저녁 토론 중에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인도해야 하고 하느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두를 활성화해야 하는 근본 방침을 표명했습니다. 현대 어법으로 요약하여 다시 진술하며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159:3.2 (1765.4) Always respect the personality of man. Never should a righteous cause be promoted by force; spiritual victories can be won only by spiritual power. This injunction against the employment of material influences refers to psychic force as well as to physical force. Overpowering arguments and mental superiority are not to be employed to coerce men and women into the kingdom. Man’s mind is not to be crushed by the mere weight of logic or overawed by shrewd eloquence. While emotion as a factor in human decisions cannot be wholly eliminated, it should not be directly appealed to in the teachings of those who would advance the cause of the kingdom. Make your appeals directly to the divine spirit that dwells within the minds of men. Do not appeal to fear, pity, or mere sentiment. In appealing to men, be fair; exercise self-control and exhibit due restraint; show proper respect for the personalities of your pupils. Remember that I have said: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and if any man will open, I will come in.” 언제나 사람의 고유성을 존중하십시오. 훌륭한 대의(大義 큰 도리)를 강제로 밀고 나가지 마십시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권능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영향력의 사용을 반대하는 이 명령은 물리력만 아니라 정신력도 적용됩니다. 남녀를 강요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압도적 주장과 정신적 우월성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단지 논리의 압박으로 짓밟거나 영리한 설득으로 위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결정의 요소로서 감정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지만, 하느님 나라의 대의(大義)를 증진하려는 자들의 가르침에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내주하는 신적 영(靈)에 직접 호소(呼訴)해야 합니다. 두려움, 연민 혹은 단순한 정서(情緖)에 호소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 사사롭게 치우치지 마십시오. 자기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마땅히 신중(愼重)하게 삼가십시오. 너희 학생들의 고유성을 품위 있게 존중하십시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열면 내가 들어가리라(계3:20).”라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159:3.3 (1765.5) In bringing men into the kingdom, do not lessen or destroy their self-respect. While overmuch self-respect may destroy proper humility and end in pride, conceit, and arrogance, the loss of self-respect often ends in paralysis of the will. It is the purpose of this gospel to restore self-respect to those who have lost it and to restrain it in those who have it. Make not the mistake of only condemning the wrongs in the lives of your pupils; remember also to accord generous recognition for the most praiseworthy things in their lives. Forget not that I will stop at nothing to restore self-respect to those who have lost it, and who really desire to regain it.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면서, 그들의 자중(自重 스스로 귀중히 여기는 자기 존중)을 꾸짖거나 파괴하지 마십시오. 과대 자기-존중은 적절한 겸손(謙遜 남을 존중하여 자신을 낮춤)을 파괴하여 결국 자랑, 자만(自慢 스스로 뽐냄)과 오만(傲慢 주제넘게 남을 업신여김)이 될 수도 있지만, 자기-존중의 상실은 종종 의지의 마비로 끝납니다. 이 복음의 목적은 자기-존중을 잃은 자들에게 그것을 회복하고 그것을 지닌 자들에게 그것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너의 학생들의 삶에서 잘못을 그저 비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십시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칭찬할 만한 일들을 관대하게 인정해 주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나는 자기-존중을 잃고 그것을 정말로 되찾으려는 자들에게,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을 잊지 마십시오.

159:3.4 (1765.6) Take care that you do not wound the self-respect of timid and fearful souls. Do not indulge in sarcasm at the expense of my simple-minded brethren. Be not cynical with my fear-ridden children. Idleness is destructive of self-respect; therefore, admonish your brethren ever to keep busy at their chosen tasks, and put forth every effort to secure work for those who find themselves without employment. 너희는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의 자존심(自尊心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수룩한 내 형제들을 비꼬는 데 빠져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공포에 떠는 내 자녀들을 비웃지 마십시오. 게으름이 자존심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너희 형제들을 타일러 자신들이 택한 일에 늘 바쁘게 지내며, 실직자들이 직업을 얻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십시오.

159:3.5 (1766.1) Never be guilty of such unworthy tactics as endeavoring to frighten men and women into the kingdom. A loving father does not frighten his children into yielding obedience to his just requirements. 남녀에게 겁을 주어 하느님 나라로 몰아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그런 비열한 술책의 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마십시오.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는 자기 자녀를 두렵게 하여 바로 자기 요구에 복종하게 하지 않습니다.

159:3.6 (1766.2) Sometime the children of the kingdom will realize that strong feelings of emotion are not equivalent to the leadings of the divine spirit. To be strongly and strangely impressed to do something or to go to a certain place,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such impulses are the leadings of the indwelling spirit. 머지않아 하느님 나라 자녀는 강렬한 느낌의 감정이 신적 영(靈)의 인도와 같지 않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에 가도록 강하고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그런 충동이 반드시 내주하는 영(靈)의 인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59:3.7 (1766.3) Forewarn all believers regarding the fringe of conflict which must be traversed by all who pass from the life as it is lived in the flesh to the higher life as it is lived in the spirit. To those who live quite wholly within either realm, there is little conflict or confusion, but all are doomed to experience more or less uncertainty during the times of transition between the two levels of living. In entering the kingdom, you cannot escape its responsibilities or avoid its obligations, but remember: The gospel yoke is easy and the burden of truth is light. 육체로 사는 생활에서 영(靈)으로 사는 고등 생활로 나아가는 모두가 거쳐야 하는 주변의 갈등에 대해 모든 신자에게 미리 경고합니다. 아주 완전히 한 영역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갈등이나 혼란이 거의 없지만, 두 생활 수준 사이에 있는 과도기에 모두가 거의 불안정을 겪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서, 너희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거나 그 의무를 피할 수 없지만, 기억하십시오.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습니다(마11:30).

159:3.8 (1766.4) The world is filled with hungry souls who famish in the very presence of the bread of life; men die searching for the very God who lives within them. Men seek for the treasures of the kingdom with yearning hearts and weary feet when they are all within the immediate grasp of living faith. Faith is to religion what sails are to a ship; it is an addition of power, not an added burden of life. There is but one struggle for those who enter the kingdom, and that is to fight the good fight of faith. The believer has only one battle, and that is against doubt — unbelief. 세상은 생명의 양식 바로 앞에서 굶어 죽는 배고픈 혼(魂)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살아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찾다가 죽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배들은 모두 바로 살아있는 신앙의 손안에 있는데, 사람들은 사모하는 심정과 지친 발로 하느님 나라의 보배를 얻으려 합니다. 신앙과 종교의 관계는 돛과 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에너지 근원(根源 권능 동력)의 확장이지, 삶의 짐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하나의 분투(奮鬪)만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딤전6:12, 딤후4:7). 신자(信者)는 하나의 전투만 있는데 그것은 의심 – 불신앙에 맞서는 것입니다(막9:24).

159:3.9 (1766.5) In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are simply teaching friendship with God. And this fellowship will appeal alike to men and women in that both will find that which most truly satisfies their characteristic longings and ideals. Tell my children that I am not only tender of their feelings and patient with their frailties, but that I am also ruthless with sin and intolerant of iniquity. I am indeed meek and humble in the presence of my Father, but I am equally and relentlessly inexorable where there is deliberate evil-doing and sinful rebellion against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할 때, 너희는 하느님과 친교를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남녀 둘 다 자신들 특유의 갈망과 이상(理想)을 가장 진심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발견하리라는 점에서, 이런 친교는 한결같이 남녀에게 매력적일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배려하고 그들의 약함을 인내할 뿐 아니라, 나는 또한 죄에 대해 무정(無情)하고 사악(肆惡)을 허용하지 않음을 내 자녀에게 전하십시오. 나는 내 아버지 앞에서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마11:29),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적대하는 고의적 악행과 죄 많은 반역이 있는 곳에서, 나는 마찬가지로 사정없이 차갑고 혹독합니다.

159:3.10 (1766.6) You shall not portray your teacher as a man of sorrows. Future generations shall know also the radiance of our joy, the buoyance of our good will, and the inspiration of our good humor. We proclaim a message of good news which is infectious in its transforming power. Our religion is throbbing with new life and new meanings. Those who accept this teaching are filled with joy and in their hearts are constrained to rejoice evermore. Increasing happiness is always the experience of all who are certain about God. 너희는 너희 선생을 슬픔의 사람으로 묘사하지 마십시오. 미래 세대는 우리 기쁨의 광휘(光輝), 우리 선의(善意)의 뜨는 힘과 쾌활한 우리의 감화력도 알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전염(傳染)되는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약동(躍動)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기쁨이 충만하고 그들의 심정은 언제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증가하는 행복은 언제나 하느님에 대해 확신하는 모든 자의 체험입니다.

159:3.11 (1766.7) Teach all believers to avoid leaning upon the insecure props of false sympathy. You cannot develop strong characters out of the indulgence of self-pity; honestly endeavor to avoid the deceptive influence of mere fellowship in misery. Extend sympathy to the brave and courageous while you withhold overmuch pity from those cowardly souls who only halfheartedly stand up before the trials of living. Offer not consolation to those who lie down before their troubles without a struggle. Sympathize not with your fellows merely that they may sympathize with you in return. 거짓 연민의 흔들거리는 버팀목에 기대지 않도록 모든 신자를 가르치십시오. 너희는 자기 연민에 빠진 상태에서 튼튼한 성품을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비참한 친교에 불과한, 남을 속이는 감화력을 피하도록 정말로 애쓰십시오. 너희는 생활의 시련 앞에서 단지 마지못해 일어서는 저 비겁한 자들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지 말고 반면에 용감하고 용기 있는 자들에게 공감을 표하십시오. 자기 문제 앞에서 싸우지 않고 누워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표하지 마십시오. 그저 너희 동료들이 보답으로 너희를 위로할 수 있도록 너희 동료들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159:3.12 (1766.8) When my children once become self-conscious of the assurance of the divine presence, such a faith will expand the mind, ennoble the soul, reinforce the personality, augment the happiness, deepen the spirit perception, and enhance the power to love and be loved. 내 자녀가 일단 신적 현존을 스스로 의식하여 확신하게 되면, 그런 신앙은 마음을 넓게 하고, 혼(魂)을 높이며, 고유성을 증진하고, 행복을 늘리며, 영적 인식을 깊게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향상합니다.

159:3.13 (1767.1) Teach all believers that those who enter the kingdom are not thereby rendered immune to the accidents of time or to the ordinary catastrophes of nature. Believing the gospel will not prevent getting into trouble, but it will insure that you shall be unafraid when trouble does overtake you. If you dare to believe in me and wholeheartedly proceed to follow after me, you shall most certainly by so doing enter upon the sure pathway to trouble. I do not promise to deliver you from the waters of adversity, but I do promise to go with you through all of them.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것으로 시간의 재난이나 자연의 일상적 격변에 대해 면제되지 않음을 모든 신자에게 가르치십시오. 복음을 믿는다고 곤란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지 못할 것이지만, 곤란이 너희에게 덮쳐올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책임질 것입니다. 너희가 과감히 나를 믿고 전심으로 내 뒤를 따라 전진하면, 그렇게 해서, 너희는 틀림없이 확실한 곤란의 길에 접어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역경의 파도에서 구한다고 약속하지 않지만, 나는 그 모든 것에서 너희와 동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159:3.14 (1767.2) And much more did Jesus teach this group of believers before they made ready for the night’s sleep. And they who heard these sayings treasured them in their hearts and did often recite them for the edification of the apostles and disciples who were not present when they were spoken. 예수께서 이 신자 일행이 밤잠을 준비하기 전에 그들에게 더 많이 가르쳤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그들은 자기 심정에 그것들을 새겼고,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참석하지 못한 사도들과 제자들의 훈도(薰陶 덕으로 감화)를 위해, 그들이 그것들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4. The Talk with Nathaniel 나다니엘과의 대화

220130 신성한 성서의 진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159:4.1 (1767.3) And then went Jesus over to Abila, where Nathaniel and his associates labored. Nathaniel was much bothered by some of Jesus’ pronouncements which seemed to detract from the authority of the recognized Hebrew scriptures. Accordingly, on this night, after the usual period of questions and answers, Nathaniel took Jesus away from the others and asked: “Master, could you trust me to know the truth about the Scriptures? I observe that you teach us only a portion of the sacred writings — the best as I view it — and I infer that you reject the teachings of the rabbis to the effect that the words of the law are the very words of God, having been with God in heaven even before the times of Abraham and Moses. What is the truth about the Scriptures?” When Jesus heard the question of his bewildered apostle, he answered: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나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수고하던 아빌라로 건너가셨습니다. 나다니엘은 알려진 히브리 성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 예수님의 일부 선언으로 많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날 밤에, 평소처럼 질의응답 시간 후, 나다니엘은 예수를 다른 이들에게서 데려가 여쭈었습니다. “주(主)님, 성서에 대한 진실을 알려고 하는 저를 믿을 수 있는지요? 제가 볼 때, 당신은 제가 보기에 가장 좋은, 성서의 부분만 가르치며, 제 추측으로, 당신은 율법의 말씀이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 이전에도 하늘 하느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의 바로 그 말씀이라는 취지의 랍비(율법 선생)들 가르침을 물리칩니다. 무엇이 성서에 대한 진실입니까?” 예수께서 갈피를 못 잡은 자기 사도의 질문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159:4.2 (1767.4) “Nathaniel, you have rightly judged; I do not regard the Scriptures as do the rabbis. I will talk with you about this matter on condition that you do not relate these things to your brethren, who are not all prepared to receive this teaching. The words of the law of Moses and the teachings of the Scriptures were not in existence before Abraham. Only in recent times have the Scriptures been gathered together as we now have them. While they contain the best of the higher thoughts and longings of the Jewish people, they also contain much that is far from being 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and teachings of the Father in heaven; wherefore must I choose from among the better teachings those truths which are to be gleaned for the gospel of the kingdom. “나다니엘아, 네가 바로 판단했도다. 나는 성서를 랍비들처럼 생각하지 않느니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일 어떤 준비도 안 된 네 형제에게 이런 것을 네가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너와 얘기할 것이라. 모세 율법의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느니라. 단지 최근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서가 모였느니라. 성서는 유대 민족 최고의 높은 사고와 갈망을 담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늘 아버지의 성품과 가르침의 표현과 거리가 먼 것 역시 많이 담고 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훌륭한 가르침 중에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조금씩 수집될 그런 진리를 선정해야만 했느니라.

159:4.3 (1767.5) “These writings are the work of men, some of them holy men, others not so holy. The teachings of these books represent the views and extent of enlightenment of the times in which they had their origin. As a revelation of truth, the last are more dependable than the first. The Scriptures are faulty and altogether human in origin, but mistake not, they do constitute the best collection of religious wisdom and spiritual truth to be found in all the world at this time. “이 글들은 사람의 저작(著作)인데, 그들의 일부는 거룩한 사람들이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거룩하지 않으니라. 이런 책의 가르침은 그것들이 유래된 시대적 깨우침의 관점과 정도를 말하느니라. 진리의 계시로서, 최근 것이 처음 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느니라. 성서는 결점이 있고 대체로 기원이 인간적이지만, 오해하지 말지니, 그것은 이때 온 세상에서 발견된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의 최고 수집품(粹集品)이라.

159:4.4 (1767.6) “Many of these books were not written by the persons whose names they bear, but that in no way detracts from the value of the truths which they contain. If the story of Jonah should not be a fact, even if Jonah had never lived, still would the profound truth of this narrative, the love of God for Nineveh and the so-called heathen, be none the less precious in the eyes of all those who love their fellow men. The Scriptures are sacred because they present the thoughts and acts of men who were searching for God, and who in these writings left on record their highest concepts of righteousness, truth, and holiness. The Scriptures contain much that is true, very much, but in the light of your present teaching, you know that these writings also contain much that is misrepresentative of the Father in heaven, the loving God I have come to reveal to all the worlds. 이 책 중에 다수는 그것들이 지닌 이름의 사람이 쓰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진리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느니라. 요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고, 요나가 살았던 적이 없었다고 해도, 여전히 이 이야기의 깊은 곳에 있는 진리, 니네베(니느웨)와 소위 이방인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볼 때 그래도 가치가 있느니라. 성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를 보여 주기 때문에 신성하며, 그들은 이런 글에 공의(公義), 진리 및 거룩에 대한 자신들의 최고 개념을 기록으로 남겼느니라. 성서에는 참된 것이 아주 많지만, 현재 너희 가르침의 관점에서, 이런 글이 하늘 아버지, 내가 온 세상에 드러내러 왔던 애정 깊은 하느님을 잘못 전하고 있는 대부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느니라.

159:4.5 (1768.1) “Nathaniel, never permit yourself for one moment to believe the Scripture records which tell you that the God of love directed your forefathers to go forth in battle to slay all their enemies — men, women, and children. Such records are the words of men, not very holy men, and they are not the word of God. The Scriptures always have, and always will, reflect the intellectual, moral, and spiritual status of those who create them. Have you not noted that the concepts of Yahweh grow in beauty and glory as the prophets make their records from Samuel to Isaiah? And you should remember that the Scriptures are intended for religious instruction and spiritual guidance. They are not the works of either historians or philosophers. “나다니엘아, 사랑의 하느님이 너희 조상들에게 전쟁터에 나가 그들의 모든 원수, 남녀노소를 죽이도록 지시했다고 네게 이르는 성서 기록(신20:16-17, 삼상15:3)을 한순간도 믿지 말라. 그런 기록은 사람들, 아주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는 그것을 만들어 낸 자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제나 나타내고 늘 나타내리라. 선지자들이 사무엘부터 이사야까지 자신들이 기록하면서, 야웨 개념이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발전하고 있음을 너는 알아차리지 못했느냐? 그리고 성서는 종교 훈련과 영적 안내를 위한 것임을 너는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것들은 역사가나 철학자들의 작품이 아니라.

159:4.6 (1768.2) “The thing most deplorable is not merely this erroneous idea of the absolute perfection of the Scripture record and the infallibility of its teachings, but rather the confusing misinterpretation of these sacred writings by the tradition-enslaved scribes and Pharisees at Jerusalem. And now will they employ both the doctrine of the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and their misinterpretations thereof in their determined effort to withstand these newer teaching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Nathaniel, never forget, the Father does not limit the revelation of truth to any one generation or to any one people. Many earnest seekers after the truth have been, and will continue to be, confused and disheartened by these doctrines of the perfection of the Scriptures. “가장 통탄(痛嘆)할 것은 성서 기록이 완전무결하다는 이런 잘못된 개념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에 사로잡힌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성서를 혼동하여 잘못 해석하는 것이라.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더 새로운 복음의 가르침을 거역하려고 자신들이 단호히 애쓰면서, 그 원인으로, 성서의 영감 교리와 자신들의 오역(誤譯 잘못된 번역)을 둘 다 사용할 것이라. 나다니엘아, 절대로 잊지 말라, 아버지는 어느 한 세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 진리의 계시를 한정하지 않느니라. 진지한 여러 진리 구도자(求道者)가 성서가 완전하다는 이런 교리들(신4:2, 12:32, 잠30:5-6, 갈1:6-9, 딤후3:16, 계22:18-19)로 당황하여 낙담했고, 계속 당황하여 낙담할 것이라.

159:4.7 (1768.3) “The authority of truth is the very spirit that indwells its living manifestations, and not the dead words of the less illuminated and supposedly inspired men of another generation. And even if these holy men of old lived inspired and spirit-filled lives, that does not mean that their words were similarly spiritually inspired. Today we make no record of the teachings of this gospel of the kingdom lest, when I have gone, you speedily become divided up into sundry groups of truth contenders as a result of the diversity of your interpretation of my teachings. For this generation it is best that we live these truths while we shun the making of records. “진리의 권위는 살아있는 그 표현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영(靈)이며, 다른 세대의 덜 조명되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 사람들의 죽은 말이 아니라. 그리고 이런 거룩한 옛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靈)-충만한 생활을 살았어도, 그것은 그들의 말이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떠난 후, 내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너희 해석의 결과로, 너희가 잡다한 진리 경쟁자 집단으로 빨리 분열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는 이 하느님 나라 복음의 가르침을 기록하지 않느니라. 이런 세대를 위해 우리가 기록하지 않고, 우리가 이 진리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

159:4.8 (1768.4) “Mark you well my words, Nathaniel, nothing which human nature has touched can be regarded as infallible. Through the mind of man divine truth may indeed shine forth, but always of relative purity and partial divinity. The creature may crave infallibility, but only the Creators possess it. “내 말을 잘 들으라, 나다니엘아, 인간 본성이 만진 아무것도 절대 옳은 것으로 생각될 수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을 통해 신적 진리가 밝게 빛날 수 있지만, 언제나 상대적 순수성과 불완전한 신성이니라. 창조물은 무오(無誤 오류 없음)을 열망하지만, 창조자들만 그것을 지니느니라.

159:4.9 (1768.5) “But the greatest error of the teaching about the Scriptures is the doctrine of their being sealed books of mystery and wisdom which only the wise minds of the nation dare to interpret. The revelations of divine truth are not sealed except by human ignorance, bigotry, and narrow-minded intolerance. The light of the Scriptures is only dimmed by prejudice and darkened by superstition. A false fear of sacredness has prevented religion from being safeguarded by common sense. The fear of the authority of the sacred writings of the past effectively prevents the honest souls of today from accepting the new light of the gospel, the light which these very God-knowing men of another generation so intensely longed to see. “그러나 성서에 대한 가르침 중 최대 잘못은 그것들이 민족의 현명한 사람만 감히 해석할 수 있는 신비와 지혜의 봉인(封印 열지 못하게 붙임)한 책이라는 교리이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고집불통과 편협한 옹졸 이외(以外)는 봉인되지 않느니라. 성서의 빛은 편견으로 어둑해지고 미신으로 어두워질 뿐이니라. 신성에 대한 거짓된 두려움 때문에, 종교는 상식으로 보호받지 못했느니라. 과거 성서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제로 오늘날의 정직한 사람들이 복음의 새 빛, 다른 세대에서 하느님을 아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토록 진지하게 보려고 갈망했던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느니라.

159:4.10 (1769.1) “But the saddest feature of all is the fact that some of the teachers of the sanctity of this traditionalism know this very truth. They more or less fully understand these limitations of Scripture, but they are moral cowards, intellectually dishonest. They know the truth regarding the sacred writings, but they prefer to withhold such disturbing facts from the people. And thus do they pervert and distort the Scriptures, making them the guide to slavish details of the daily life and an authority in things nonspiritual instead of appealing to the sacred writings as the repository of the moral wisdom, religious inspiration, and the spiritual teaching of the God-knowing men of other generations.”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통탄할 점은 이런 전통주의의 신성함을 가르치는 일부가 바로 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니라. 그들은 성서의 이런 한계를 거의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들은 지적으로 부정직한 도덕적 겁쟁이들이니라. 그들은 성서에 관한 진상을 알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그런 사실을 차라리 알리지 않기를 택하느니라. 이렇게 그들은, 다른 세대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과 영적 가르침의 귀중한 창고로서 성서에 호소하는 대신에, 성서를 일상생활의 노예적 세부 사항의 지침과 비(非)영적인 것들의 권위로 만들면서, 성서를 악용(惡用 잘못 사용)하고 왜곡(歪曲 사실을 비틀어 그릇되게 함)하느니라.”

159:4.11 (1769.2) Nathaniel was enlightened, and shocked, by the Master’s pronouncement. He long pondered this talk in the depths of his soul, but he told no man concerning this conference until after Jesus’ ascension; and even then he feared to impart the full story of the Master’s instruction. 나다니엘은 주(主)님의 선언으로 환하게 꿰뚫어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 혼 깊숙이 이 대화를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상승 이후까지 이 상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머뭇거리며 주님이 가르친 전모(全貌)를 전했습니다.

5. The Positive Nature of Jesus’ Religion 예수 종교의 능동적 본질

220206 예수 종교의 능동적 본질 행10:38b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and how he went around doing good

159:5.1 (1769.3) At Philadelphia, where James was working, Jesus taught the disciples about the positive nature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When, in the course of his remarks, he intimated that some parts of the Scripture were more truth-containing than others and admonished his hearers to feed their souls upon the best of the spiritual food, James interrupted the Master, asking: “Would you be good enough, Master, to suggest to us how we may choose the better passages from the Scriptures for our personal edification?” And Jesus replied: “Yes, James, when you read the Scriptures look for those eternally true and divinely beautiful teachings, such as: 야고보가 일하는 필라델피아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능동적 본질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말씀 중에 그가 성서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진리를 더 담고 있다고 넌지시 알리며 그의 청중들이 최고의 영적 양식으로 자기 혼(魂)를 먹이도록 타일렀을 때, 야고보가 끼어들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우리 개인의 계발(啓發)을 위해 성서에서 더 나은 구절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쳐 주시렵니까?”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그래, 야고보야, 네가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그렇게 영원히 참되고 신적으로 아름다운 교훈을 찾아라.

159:5.2 (1769.4)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Lord. “오 주여, 내 속에 깨끗한 심정을 창조하소서(시51:10a).

159:5.3 (1769.5)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주(主)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159:5.4 (1769.6) “You shoul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너는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19:18b).

159:5.5 (1769.7) “For I, the Lord your God, will hold your right hand, saying, fear not; I will help you. “이는 나, 주(主) 너의 하느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41:13).

159:5.6 (1769.8) “Neither shall the nations learn war any more.” “나라들이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2:4c, 미4:3c).”

159:5.7 (1769.9) And this is illustrative of the way Jesus, day by day, appropriated the cream of the Hebrew scriptures for the instruction of his followers and for inclusion in the teachings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ther religions had suggested the thought of the nearness of God to man, but Jesus made the care of God for man like the solicitude of a loving father for the welfare of his dependent children and then made this teaching the cornerstone of his religion. And thus did the doctrine of the fatherhood of God make imperative the practice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worship of God and the service of man became the sum and substance of his religion. Jesus took the best of the Jewish religion and translated it to a worthy setting in the new teaching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 훈련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의 교훈에 포함하려고 줄곧 히브리 성서의 진수(眞髓 알짜)를 사용하신 방법의 실례입니다. 타 종교는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깝다는 사상을 제시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 깊은 애정으로 염려하는 아버지처럼 하느님이 사람을 보살피며 게다가 이 교훈을 자기 종교의 초석(礎石)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가르침이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실천을 피할 수 없게 했습니다. 하느님 경배와 사람 섬김이 그의 종교의 골자와 요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유대교의 최선을 취하여 하느님 나라 복음의 새 교훈에서 훌륭한 배경으로 옮겼습니다.

159:5.8 (1769.10) Jesus put the spirit of positive action into the passive doctrines of the Jewish religion. In the place of negative compliance with ceremonial requirements, Jesus enjoined the positive doing of that which his new religion required of those who accepted it. Jesus’ religion consisted not merely in believing, but in actually doing, those things which the gospel required. He did not teach that the essence of his religion consisted in social service, but rather that social service was one of the certain effects of the possession of the spirit of true religion. 예수는 유대교의 수동적 교리에 능동적 행동의 영(靈)을 넣었습니다. 의식 요건의 소극적 준수 대신에, 예수는 자신의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것의 요구를 능동적으로 행하도록 명했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요구하는 그런 것들을 실제로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기 종교의 본질이 사회봉사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봉사는 참 종교의 영(靈)을 가진 확실한 결과 중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159:5.9 (1770.1) Jesus did not hesitate to appropriate the better half of a Scripture while he repudiated the lesser portion. His great exhortation,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took from the Scripture which reads: “You shall not take vengeance against the children of your people, bu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Jesus appropriated the positive portion of this Scripture while rejecting the negative part. He even opposed negative or purely passive nonresistance. Said he: “When an enemy smites you on one cheek, do not stand there dumb and passive but in positive attitude turn the other; that is, do the best thing possible actively to lead your brother in error away from the evil paths into the better ways of righteous living.” Jesus required his followers to react positively and aggressively to every life situation. The turning of the other cheek, or whatever act that may typify, demands initiative, necessitates vigorous, active, and courageous expression of the believer’s personality. 예수는 주저(躊躇) 없이 성서의 더 나은 절반을 사용했던 반면에, 그는 더 못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읽어서 아는 성서, “너는 네 민족의 자녀에게 앙갚음하지 말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19:18)”에서 그의 위대한 권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레19:18b)”를 취했습니다. 예수는 이 성서의 능동적 부분을 사용하는 반면에 부정적 부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부정적이거나 아주 수동적인 무저항(無抵抗)도 반대했습니다. 그는 “원수가 네 한쪽 뺨을 치면 거기에 잠자코 수동적으로 서 있지 말고 능동적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 대라(마5:39b). 말하자면 잘못한 네 형제를 악한 길에서 벗어나 의로운 생활의 더 나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이 모든 생활환경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반응하기를 요구했습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 즉 나타나는 행동이 무엇이든, 주도권이 요구되고 신자(信者)의 고유성이 활발하고, 활동적이며 용기 있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159:5.10 (1770.2) Jesus did not advocate the practice of negative submission to the indignities of those who might purposely seek to impose upon the practitioners of nonresistance to evil, but rather that his followers should be wise and alert in the quick and positive reaction of good to evil to the end that they might effectively overcome evil with good. Forget not, the truly good is invariably more powerful than the most malignant evil. The Master taught a positive standard of righteousness: “Whosoever wishes to be my disciple, let him disregard himself and take up the full measure of his responsibilities daily to follow me.” And he so lived himself in that “he went about doing good.” And this aspect of the gospel was well illustrated by many parables which he later spoke to his followers. He never exhorted his followers patiently to bear their obligations but rather with energy and enthusiasm to live up to the full measure of their human responsibilities and divine privileges in the kingdom of God. 예수는 악에 저항하지 않는 옹호자들을 일부러 위압하려는 자들의 경멸에 대해 소극적 복종의 관행을 편들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제자들이 선(善)으로 악(惡)을 실제로 끝까지 이겨내도록(롬12:21b), 악(惡)에 대해 신속하고 능동적인 선(善)으로 반응하면서 슬기롭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선(善)은 극악(極惡)보다 변함없이 더 강력함을 잊지 마십시오. 주(主)님은 공의(公義)의 능동적 기준을 가르쳤습니다. “누구나 네 제자가 되려면, 자신에게 주의하지 말고 나를 따라 매일 넉넉히 자기 책임을 다하라(마16:24, 막8:34, 눅9:23, 14:27).” 그리고 그 자신이 “그는 선(善)을 행하는 데 열중하셨다(행10:38b).”라는 점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이런 면은 그가 나중에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여러 비유로 잘 설명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절대로 자기 의무를 견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서 자기 인간적 책임과 신적 특권의 넉넉한 분량까지 기운찬 열의로 살라고 끈기 있게 권고했습니다.

159:5.11 (1770.3) When Jesus instructed his apostles that they should, when one unjustly took away the coat, offer the other garment, he referred not so much to a literal second coat as to the idea of doing something positive to save the wrongdoer in the place of the olden advice to retaliate — “an eye for an eye” and so on. Jesus abhorred the idea either of retaliation or of becoming just a passive sufferer or victim of injustice. On this occasion he taught them the three ways of contending with, and resisting, evil: 예수께서 자기 사도들에게 한 사람이 부당하게 외투를 빼앗으면, 다른 겉옷을 권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때(마5:40), 그는 글자 그대로 두 번째 외투가 아니라, “눈에는 눈으로(출21:24, 레24:20, 신19:21)” 따위로 보복하는 옛 충고 대신에 범법자를 건지기 위해 능동적인 뭔가를 하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예수는 보복 혹은 그저 수동적 피해자나 불법의 피해자가 되는 사고방식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이때 그는 악(惡)과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159:5.12 (1770.4) 1. To return evil for evil — the positive but unrighteous method. 악(惡)을 악(惡)으로 갚음 – 능동적이지만 옳지 못한 방법.

159:5.13 (1770.5) 2. To suffer evil without complaint and without resistance — the purely negative method. 불평이나 저항 없이 악(惡)을 견딤 – 아주 소극적인 방법.

159:5.14 (1770.6) 3. To return good for evil, to assert the will so as to become master of the situation, to overcome evil with good — the positive and righteous method. 악(惡)을 선(善)으로 갚음 – 상황의 지배자가 되려고 의지를 주장함, 선(善)으로 악(惡)을 이겨냄 – 능동적이며 의로운 방법.

159:5.15 (1770.7) One of the apostles once asked: “Master, what should I do if a stranger forced me to carry his pack for a mile?” Jesus answered: “Do not sit down and sigh for relief while you berate the stranger under your breath. Righteousness comes not from such passive attitudes. If you can think of nothing more effectively positive to do, you can at least carry the pack a second mile. That will of a certainty challenge the unrighteous and ungodly stranger.” 사도 중 하나가 이전에 여쭈었습니다. “주여, 낯선 사람이 나에게 1.6km나 자기 짐을 짊어지게 하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가 대답했습니다. “구시렁거리며 낯선 사람을 나무라면서 앉아서 벗어나려고 탄식하지 말라. 공의(公義 공정한 도의)는 그런 수동적 태도에서 생기지 않느니라. 너희가 실제로 더 능동적으로 행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면, 너희는 최소한 3.2km나 그 짐을 짊어질 수 있느니라(마5:41). 그것은 확실히 불의하고 신앙 없는 낯선 자를 자극할 것이라.”

159:5.16 (1770.8) The Jews had heard of a God who would forgive repentant sinners and try to forget their misdeeds, but not until Jesus came, did men hear about a God who went in search of lost sheep, who took the initiative in looking for sinners, and who rejoiced when he found them willing to return to the Father’s house. This positive note in religion Jesus extended even to his prayers. And he converted the negative golden rule into a positive admonition of human fairness. 유대인들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고 그들의 악행을 잊으려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들었지만(렘36:3),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마18:12-13), 솔선하여 죄인을 찾으시며(눅15:6,9), 기꺼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들을 발견하고 기뻐하신 하느님(눅15:32)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종교에 있는 이런 능동적 요소를 자기 기도에도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정적인 황금률(마7:12)을 인간적 공정성에 대한 능동적 훈계로 바꾸었습니다.

159:5.17 (1771.1) In all his teaching Jesus unfailingly avoided distracting details. He shunned flowery language and avoided the mere poetic imagery of a play upon words. He habitually put large meanings into small expressions. For purposes of illustration Jesus reversed the current meanings of many terms, such as salt, leaven, fishing, and little children. He most effectively employed the antithesis, comparing the minute to the infinite and so on. His pictures were striking, such as, “The blind leading the blind.” But the greatest strength to be found in his illustrative teaching was its naturalness. Jesus brought the philosophy of religion from heaven down to earth. He portrayed the elemental needs of the soul with a new insight and a new bestowal of affection. 예수는 자신의 모든 가르침에서 산만하게 하는 항목을 어김없이 피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표현을 피했고 말장난에 불과한 시적 이미지를 회피했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작은 표현에 큰 의미를 담았습니다. 예수는 예를 들어 밝히려고, 소금, 누룩( 효모), 낚시질, 어린아이와 같은 여러 현재 용어의 의미를 뒤집었습니다. 그는 순간(瞬間)을 무한(無限) 등으로 비유하는, 대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묘사는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시각장애인(마15:14)”처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드는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최고 장점은 그 자연스러움(꾸밈없음)이었습니다. 예수는 종교의 철학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는 혼(魂)의 본질적 필요를 새 통찰과 애정의 새 증여로 표현했습니다.

6. The Return to Magadan 마가단으로 복귀

220213 데카폴리스 선교보고 막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So the man went away and began to tell in the Decapolis how much Jesus had done for him. And all the people were amazed.

159:6.1 (1771.2) The mission of four weeks in the Decapolis was moderately successful. Hundreds of souls were received into the kingdom, and the apostles and evangelists had a valuable experience in carrying on their work without the inspiration of the immediate personal presence of Jesus. 데카폴리스에서 4주간의 선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수백 명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왔고, 사도와 전도자들은 바로 예수가 눈앞에 친히 계시는 감화력 없이 자신들의 과업을 행하는 값진 체험을 했습니다.

159:6.2 (1771.3) On Friday, September 16, the entire corps of workers assembled by prearrangement at Magadan Park. On the Sabbath day a council of more than one hundred believers was held at which the future plans for extending the work of the kingdom were fully considered. The messengers of David were present and made reports concerning the welfare of the believers throughout Judea, Samaria, Galilee, and adjoining districts. 9월 16일, 금요일에, 모든 사역단(團)이 예정대로 마가단 공원에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1백 명 이상의 신자 회의가 열렸고,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 사역을 확장하는 장래 계획이 충분히 검토되었습니다. 다윗의 메신저들이 참석하여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와 인근 지역 전체에 걸쳐서 신자들이 잘 있는지 보고했습니다.

159:6.3 (1771.4) Few of Jesus’ followers at this time fully appreciated the great value of the services of the messenger corps. Not only did the messengers keep the believers throughout Palestine in touch with each other and with Jesus and the apostles, but during these dark days they also served as collectors of funds, not only for the sustenance of Jesus and his associates, but also for the support of the families of the twelve apostles and the twelve evangelists. 이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메신저단(團)이 봉사하는 대단한 가치를 거의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메신저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신자들을 서로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이 연락을 취할 뿐만 아니라, 이런 암울한 시기에 그들은 예수와 그 동료들의 생활만이 아니라 12 사도 및 12 전도자 가족의 생활비를 위해 재원을 모금하는 자들로 또한 봉사했습니다.

159:6.4 (1771.5) About this time Abner moved his base of operations from Hebron to Bethlehem, and this latter place was also the headquarters in Judea for David’s messengers. David maintained an overnight relay messenger service between Jerusalem and Bethsaida. These runners left Jerusalem each evening, relaying at Sychar and Scythopolis, arriving in Bethsaida by breakfast time the next morning. 이 무렵에 아브너는 그의 작전 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고, 또한 이 나중 장소는 다윗의 메신저들을 위한 유대의 본부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새다 사이에 밤새 중계(中繼) 메신저 업무를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달리는 사람들은 매일 저녁 예루살렘을 떠나,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중계(中繼)하여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에 벳새다에 도착했습니다.

159:6.5 (1771.6) Jesus and his associates now prepared to take a week’s rest before they made ready to start upon the last epoch of their labors in behalf of the kingdom. This was their last rest, for the Perean mission developed into a campaign of preaching and teaching which extended right on down to the time of their arrival at Jerusalem and of the enactment of the closing episodes of Jesus’ earth career. 예수와 그의 동료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지막 획기적 수고에 착수할 준비를 하기 전에 이제 한 주간 쉬려고 채비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휴식이었는데, 예루살렘에 그들이 도착하고 예수 지상 생애의 종편(終篇) 상연(上演)까지 바로 연장되었던, 전도하고 가르치는 활동으로, 페레아 선교가 전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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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0 Rodan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Paper 160

Rodan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1. Rodan’s Greek Philosophy 로단의 그리스 철학
The three drives of life 삶의 3가지 욕구
Problem solving and worshipful meditation 문제 해결과 경배 묵상
Prejudice and the recognition of truth 선입관(先入觀)과 진리 인식
2. The Art of Living 생활의 기술
Socializing value of friendship 우정의 사회화하는 가치
The great value of marriage 결혼의 위대한 가치
3. The Lures of Maturity 성숙의 매력
4. The Balance of Maturity 성숙의 균형
Essentials of temporal life 현세 생활의 본질
Factors of material success 물질적 성공의 요소
The meaning of failure 실패의 의미
5. The Religion of the Ideal 이상(理想)적 종교
What is religion? 종교란 무엇인가?
The idea of God and the ideal of God 하느님의 개념과 이상(理想)
The Father is the final value 아버지는 최종 가치
“But are we willing to pay the price…?” “그러나 우리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220220 정중(鄭重)하신 예수 딤전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Deacons, likewise, are to be men worthy of respect, sincere, not indulging in much wine, and not pursuing dishonest gain.

160:0.1 (1772.1) ON SUNDAY morning, September 18, Andrew announced that no work would be planned for the coming week. All of the apostles, except Nathaniel and Thomas, went home to visit their families or to sojourn with friends. This week Jesus enjoyed a period of almost complete rest, but Nathaniel and Thomas were very busy with their discussions with a certain Greek philosopher from Alexandria named Rodan. This Greek had recently become a disciple of Jesus through the teaching of one of Abner’s associates who had conducted a mission at Alexandria. Rodan was now earnestly engaged in the task of harmonizing his philosophy of life with Jesus’ new religious teachings, and he had come to Magadan hoping that the Master would talk these problems over with him. He also desired to secure a firsthand and authoritative version of the gospel from either Jesus or one of his apostles. Though the Master declined to enter into such a conference with Rodan, he did receive him graciously and immediately directed that Nathaniel and Thomas should listen to all he had to say and tell him about the gospel in return. 9월 18일(AD 29) 일요일 아침, 안드레가 다음 주에는 업무 계획이 없을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나다니엘과 도마를 제외한 모든 사도는 가족을 방문하고 친구들 집에 있으려고 집으로 갔습니다. 이번 주 예수는 거의 온전한 휴식기를 누렸지만, 나다니엘과 도마는 로단이라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와 토론하느라 몹시 바빴습니다. 이 그리스인(人)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선교했던 아브너의 동료 중 하나의 가르침을 통해 최근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로단은 자기 생활 철학을 예수의 새 종교 가르침과 조화시키는 일에 이제 진심으로 몰두했고 주(主)께서 이런 문제들을 자신과 의논하리라고 기대하며 마가단에 왔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나 그 사도 중 하나에게서 직접 권위 있는 복음의 판(版)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주(主)는 로단과 그런 의논에 들어가기를 정중히 물리쳤지만, 그는 그를 품위 있게 환영했고 나다니엘과 도마가 그가 말해야 했던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에 대해 그에게 대답하여 말해야 한다고 바로 지시했습니다.

1. Rodan’s Greek Philosophy 로단의 그리스 철학

220227 경배 묵상1 눅22:42b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160:1.1 (1772.2) Early Monday morning, Rodan began a series of ten addresses to Nathaniel, Thomas, and a group of some two dozen believers who chanced to be at Magadan. These talks, condensed, combined,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present the following thoughts for consideration: 월요일 이른 아침에 로단은 나다니엘, 도마와 마침 마가단에 있는 어떤 신자 24명 일행에게 열 개의 연속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강연을 현대 어법으로 요약하고, 짜 맞추어, 고쳐서 다음 생각으로 헤아려 말하며 제시합니다.

160:1.2 (1772.3) Human life consists in three great drives — urges, desires, and lures. Strong character, commanding personality, is only acquired by converting the natural urge of life into the social art of living, by transforming present desires into those higher longings which are capable of lasting attainment, while the commonplace lure of existence must be transferred from one’s conventional and established ideas to the higher realms of unexplored ideas and undiscovered ideals. 인간 삶은 커다란 3가지 욕구 – 충동, 욕망, 매력에 있습니다. 튼튼한 성품, 당당한 고유성은, 타고난 삶의 충동을 사회적 생활의 기술로 바꾸고, 현재 욕망을 영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더 높은 그런 갈망으로 변환할 때만 얻어지며, 게다가, 존재의 평범한 매력은 사람의 관습적으로 이미 정해진 관념에서 더 높은 미답(未踏 밟지 않은) 관념과 미지(未知 알지 못한) 이상(理想)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160:1.3 (1772.4) The more complex civilization becomes, the more difficult will become the art of living. The more rapid the changes in social usage, the more complicated will become the task of character development. Every ten generations mankind must learn anew the art of living if progress is to continue. And if man becomes so ingenious that he more rapidly adds to the complexities of society, the art of living will need to be remastered in less time, perhaps every single generation. If the evolution of the art of living fails to keep pace with the technique of existence, humanity will quickly revert to the simple urge of living — the attainment of the satisfaction of present desires. Thus will humanity remain immature; society will fail in growing up to full maturity. 문명이 복잡해질수록 생활의 기술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사회적 관습이 빨리 변할수록 성품 발달의 과업이 더 까다로워질 것입니다. 진보가 계속되려면 인류는 10세대마다 생활의 기술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영리해져서 그가 더 빨리 사회를 복잡하게 늘리면, 생활의 기술은 아마 세대마다 잠깐 있다가 다시 숙달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생활 기술의 진화가 생존 기법과 끝내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인간성(人間性)은 곧 단순한 생활의 충동 – 현재 욕망의 만족 도달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성은 미숙하게 남을 것이고 사회는 충분히 성숙하게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160:1.4 (1773.1) Social maturity is equivalent to the degree to which man is willing to surrender the gratification of mere transient and present desires for the entertainment of those superior longings the striving for whose attainment affords the more abundant satisfactions of progressive advancement toward permanent goals. But the true badge of social maturity is the willingness of a people to surrender the right to live peaceably and contentedly under the ease-promoting standards of the lure of established beliefs and conventional ideas for the disquieting and energy-requiring lure of the pursuit of the unexplored possibilities of the attainment of undiscovered goals of idealistic spiritual realities. 사회적 성숙은, 영구 목표를 향한 진보적 발전의 더 풍성한 만족을 주는 사람의 달성 노력, 그런 높은 갈망을 품으려고 사람이 기꺼이 일시적인 단순한 현재의 욕망 충족을 포기하는 정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회 성숙의 표지는, 이상주의적 영적 실체의 미지(未知 알지 못한) 목표 달성에 속한 미답(未踏 밟지 못한) 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불안하고 에너지가 필요한 매력을 위해, 이미 정해진 믿음과 관습적 관념에 속한 매력의 쉬운-진척 기준에 따라,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자발성입니다.

160:1.5 (1773.2) Animals respond nobly to the urge of life, but only man can attain the art of living, albeit the majority of mankind only experience the animal urge to live. Animals know only this blind and instinctive urge; man is capable of transcending this urge to natural function. Man may elect to live upon the high plane of intelligent art, even that of celestial joy and spiritual ecstasy. Animals make no inquiry into the purposes of life; therefore they never worry, neither do they commit suicide. Suicide among men testifies that such beings have emerged from the purely animal stage of existence, and to the further fact that the exploratory efforts of such human beings have failed to attain the artistic levels of mortal experience. Animals know not the meaning of life; man not only possesses capacity for the recognition of values and the comprehension of meanings, but he also is conscious of the meaning of meanings — he is self-conscious of insight. 동물은 삶의 충동에 씩씩하게 반응하고, 인류 대부분이 살고 싶은 동물적 충동을 체험할 뿐이지만, 적어도 사람만 생활의 기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이런 맹목적인 본능적 충동만 알며, 사람은 당연히 작용하는 이런 충동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지능적 기술의 높은 수준, 천상의 기쁨과 영적 희열의 수준까지 선택하여 살 수 있습니다. 동물은 삶의 목적을 묻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걱정하지 않고 자살하지도 않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자살은 그런 존재가 단순히 동물 존재 단계에서 발생했고, 그런 인간의 탐사 노력이 인간 체험의 예술적 수준에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는 추가적 사실을 나타냅니다. 동물은 삶의 의미를 모릅니다. 인간은 가치를 인식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의미(意味)의 의미도 인식합니다. – 인간은 통찰력을 자각합니다.

160:1.6 (1773.3) When men dare to forsake a life of natural craving for one of adventurous art and uncertain logic, they must expect to suffer the consequent hazards of emotional casualties — conflicts, unhappiness, and uncertainties — at least until the time of their attainment of some degree of intellectual and emotional maturity. Discouragement, worry, and indolence are positive evidence of moral immaturity. Human society is confronted with two problems: attainment of the maturity of the individual and attainment of the maturity of the race. The mature human being soon begins to look upon all other mortals with feelings of tenderness and with emotions of tolerance. Mature men view immature folks with the love and consideration that parents bear their children. 사람들이 모험적 기술과 불확실한 논리를 자연스럽게 갈망하는 삶을 대담하게 버릴 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적, 감정적인 성숙에 도달할 때까지, 그들은 그 결과로 일어나는 감정적 상해 – 갈등, 불행 및 불확실의 위험을 감수(甘受 달게 받음)해야 합니다. 실망, 걱정과 게으름은 도덕적 미숙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인간 사회는 두 문제, 개인 성숙의 도달과 인류 성숙의 도달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숙한 인간은 다른 모든 필사자를 이내 다정한 감정과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미숙한 사람들을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품는 사랑과 배려로 바라봅니다.

160:1.7 (1773.4) Successful living is nothing more or less than the art of the mastery of dependable techniques for solving common problems. The first step in the solution of any problem is to locate the difficulty, to isolate the problem, and frankly to recognize its nature and gravity. The great mistake is that, when life problems excite our profound fears, we refuse to recognize them. Likewise, when the acknowledgment of our difficulties entails the reduction of our long-cherished conceit, the admission of envy, or the abandonment of deep-seated prejudices, the average person prefers to cling to the old illusions of safety and to the long-cherished false feelings of security. Only a brave person is willing honestly to admit, and fearlessly to face, what a sincere and logical mind discovers. 성공적인 생활은 평범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뢰할 수 있는 기법을 통달하는 기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문제 해결의 첫 단계는 어려움을 찾아내고, 문제를 분리하며, 숨김없이 문제의 본질과 중대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생활 문제로 우리의 깊은 두려움이 일어날 때,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큰 실수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려움을 인정한 결과로 오래 품었던 우리 자만심이 줄어들고, 질투를 시인하거나 고질적인 편견을 버리게 될 때, 보통 사람은 차라리 안전의 옛 망상과 오래 품었던 안심의 거짓 감정에 집착하기를 선택합니다. 용감한 사람만이 신실한 논리적 마음으로 깨달은 것을 기꺼이 거짓 없이 받아들이고 겁 없이 직면합니다.

160:1.8 (1773.5) The wise and effective solution of any problem demands that the mind shall be free from bias, passion, and all other purely personal prejudices which might interfere with the disinterested survey of the actual factors that go to make up the problem presenting itself for solution. The solution of life problems requires courage and sincerity. Only honest and brave individuals are able to follow valiantly through the perplexing and confusing maze of living to where the logic of a fearless mind may lead. And this emancipation of the mind and soul can never be effected without the driving power of an intelligent enthusiasm which borders on religious zeal. It requires the lure of a great ideal to drive man on in the pursuit of a goal which is beset with difficult material problems and manifold intellectual hazards. 어떤 문제를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선입관 및 격정과, 해결을 위해 생긴 문제 구성의 실제 요인에 대한 객관적 조사를 방해할 수도 있는, 아주 개인적인 다른 모든 편견이 없게 될 마음이 필요합니다. 삶의 문제 해결에 용기와 성실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고 용감한 개인들만이 까다롭고 혼란스러운 생활의 미로(迷路)를 거쳐, 두려움 없는 마음의 논리가 이끄는 곳까지, 씩씩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과 혼(魂)의 해방은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지능적 열정의 추진력 없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물질 문제와 지적인 다중 위험에 에워싸인 목표를 추구하도록 하려면 위대한 이상(理想)에 대한 매력이 필요합니다.

160:1.9 (1774.1) Even though you are effectively armed to meet the difficult situations of life, you can hardly expect success unless you are equipped with that wisdom of mind and charm of personality which enable you to win the hearty support and co-operation of your fellows. You cannot hope for a large measure of success in either secular or religious work unless you can learn how to persuade your fellows, to prevail with men. You simply must have tact and tolerance. 너희가 삶의 어려운 상황에 맞서도록 효과적으로 무장했어도, 너희가 너희 동료의 따뜻한 지원과 협력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지혜와 고유성의 매력을 갖추지 않으면, 너희는 거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동료를 설득하고, 사람들을 설복하는 방법을 익힐 수 없다면 세속 업무나 종교 업무에서 대단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정말 재치(才致)와 관용(寬容)이 있어야 합니다.

160:1.10 (1774.2) But the greatest of all methods of problem solving I have learned from Jesus, your Master. I refer to that which he so consistently practices, and which he has so faithfully taught you, the isolation of worshipful meditation. In this habit of Jesus’ going off so frequently by himself to commune with the Father in heaven is to be found the technique, not only of gathering strength and wisdom for the ordinary conflicts of living, but also of appropriating the energy for the solution of the higher problems of a moral and spiritual nature. But even correct methods of solving problems will not compensate for inherent defects of personality or atone for the absence of the hunger and thirst for true righteousness. 그러나 나는 너희 주(主), 예수에게서 가장 위대한 문제 해결 방법을 익혔습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한결같이 실천하는 것과 그가 그렇게 신실하게 너희에게 가르친 것, 경배 묵상의 고립을 언급합니다. 하늘 아버지와 교제하려고 그렇게 자주 홀로 사라지신 예수의 이런 습관에서, 평범한 생활 갈등을 위한 근력과 지혜를 모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본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정확한 방법이라도 고유성 본래의 결함을 보상(報償 갚아 줌)하거나 참된 공의(公義)의 기갈(飢渴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것을 보태어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160:1.11 (1774.3) I am deeply impressed with the custom of Jesus in going apart by himself to engage in these seasons of solitary survey of the problems of living; to seek for new stores of wisdom and energy for meeting the manifold demands of social service; to quicken and deepen the supreme purpose of living by actually subjecting the total personality to the consciousness of contacting with divinity; to grasp for possession of new and better methods of adjusting oneself to the ever-changing situations of living existence; to effect those vital reconstructions and readjustments of one’s personal attitudes which are so essential to enhanced insight into everything worth while and real; and to do all of this with an eye single to the glory of God — to breathe in sincerity your Master’s favorite prayer,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나는, 생활 문제를 홀로 살피는 이런 시간을 가지려고 혼자 따로 가시는 예수의 습관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사회봉사의 다중 요구에 맞추려고 지혜와 에너지를 새로 비축합니다. 신성(神性)과 접촉하는 의식에 총 고유성을 실제로 맡겨서 생활의 최극 목적을 활발하고 깊게 합니다. 늘 변하는 생활 존재의 상황에 스스로 조율하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의 입수를 파악합니다. 가치 있는 실재 만물의 통찰 향상에 그토록 본질적인 자기 고유적 태도의 필수적인 그런 재편성과 재조율을 실행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성심성의로 이 모두를 합니다. – 진실로 너희 주(主)께서 좋아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눅22:42b).”라고 속삭입니다.

220306 경배 묵상2 눅22:42b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160:1.12 (1774.4) This worshipful practice of your Master brings that relaxation which renews the mind; that illumination which inspires the soul; that courage which enables one bravely to face one’s problems; that self-understanding which obliterates debilitating fear; and that consciousness of union with divinity which equips man with the assurance that enables him to dare to be Godlike. The relaxation of worship, or spiritual communion as practiced by the Master, relieves tension, removes conflicts, and mightily augments the total resources of the personality. And all this philosophy, plus the gospel of the kingdom, constitutes the new religion as I understand it. 너희 주님의 이런 경배 습관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이완(弛緩), 혼(魂)에 영감(靈感)을 주는 조명(照明), 자기 문제에 용감히 맞서는 용기(勇氣), 쇠약하게 하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자각(自覺 자기 인식)과 사람이 감히 하느님을 닮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신성(神性)과 연합한 의식(意識)을 일으킵니다. 주께서 실천했듯이 경배의 이완, 즉 영적 친교로 긴장이 풀어지고, 갈등이 없어지며, 고유성의 전체 자원이 대단히 늘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원리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더해져 내가 이해하는 새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160:1.13 (1774.5) Prejudice blinds the soul to the recognition of truth, and prejudice can be removed only by the sincere devotion of the soul to the adoration of a cause that is all-embracing and all-inclusive of one’s fellow men. Prejudice is inseparably linked to selfishness. Prejudice can be eliminated only by the abandonment of self-seeking and by substituting therefor the quest of the satisfaction of the service of a cause that is not only greater than self, but one that is even greater than all humanity — the search for God, the attainment of divinity. The evidence of maturity of personality consists in the transformation of human desire so that it constantly seeks for the realization of those values which are highest and most divinely real. 선입관(先入觀)은 혼(魂)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선입관(先入觀)은 자기 동료들의 모두를 아울러 포함하는 대의(大意 마땅한 도리)에 대한 찬미(讚美)에 혼(魂)이 신실하게 헌신해야만 없앨 수 있습니다. 선입관(先入觀)은 이기심(利己心)과 떨어질 수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선입관(先入觀)은 이기주의를 버리는 대신, 자신보다 더 크고, 모든 인류보다 훨씬 더 큰 대의(大義), 하느님 추구, 신성(神性)에 도달하려고 섬기는 만족의 추구로 바꿔야만 없앨 수 있습니다. 고유성 성숙의 증거는, 최고로 가장 신적으로 실재하는 그런 가치를 계속 실현하려는 인간 욕망의 변환에 있습니다.

160:1.14 (1774.6) In a continually changing world, in the midst of an evolving social order, it is impossible to maintain settled and established goals of destiny. Stability of personality can be experienced only by those who have discovered and embraced the living God as the eternal goal of infinite attainment. And thus to transfer one’s goal from time to eternity, from earth to Paradise,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requires that man shall become regenerated, converted, be born again; that he shall become the re-created child of the divine spirit; that he shall gain entrance into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of heaven. All philosophies and religions which fall short of these ideals are immature. The philosophy which I teach, linked with the gospel which you preach, represents the new religion of maturity, the ideal of all future generations. And this is true because our ideal is final, infallible, eternal, universal, absolute, and infinite. 계속 변하는 세계, 진화하는 사회 질서 가운데, 정해져 확립된 운명의 목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무한 달성의 영원한 목표로서 살아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기꺼이 받아들인 자들만이 고유성의 안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지상에서 천국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바꾸려면, 사람이 개심(改心)하고 회심(回心)하며 거듭날 것이 요구됩니다. 그는 신적 영(靈)이 다시 창조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하늘나라의 형제 공동체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이상(理想)에 못 미치는 모든 철학과 종교는 미숙합니다. 너희가 전하는 복음과 이어진, 내가 가르치는 철학은 성숙한 새 종교, 모든 미래 세대의 이상(理想)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 것은, 우리 이상(理想)이 최종적이고, 확실하며, 영원하고, 우주적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160:1.15 (1775.1) My philosophy gave me the urge to search for the realities of true attainment, the goal of maturity. But my urge was impotent; my search lacked driving power; my quest suffered from the absence of certainty of directionization. And these deficiencies have been abundantly supplied by this new gospel of Jesus, with its enhancement of insights, elevation of ideals, and settledness of goals. Without doubts and misgivings I can now wholeheartedly enter upon the eternal venture. 내 철학은 내가 참된 도달의 실체들, 성숙의 목표를 살피도록 추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내 추진력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내 탐색은 추진력이 모자랐습니다. 내 탐구는 확실한 방향이 없어서 어려웠습니다. 통찰력 강화, 이상(理想)의 향상 및 목표의 확립과 함께, 예수의 이 새 복음으로 이런 결핍이 풍성히 채워졌습니다. 의심과 걱정 없이, 나는 이제 전심으로 영원한 모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2. The Art of Living 생활의 기술

220313 우정과 상호 애정 1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160:2.1 (1775.2) There are just two ways in which mortals may live together: the material or animal way and the spiritual or human way. By the use of signals and sounds animals are able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in a limited way. But such forms of communication do not convey meanings, values, or ideas. The one distinction between man and the animal is that man can communicate with his fellows by means of symbols which most certainly designate and identify meanings, values, ideas, and even ideals. fellows by means of symbols which most certainly designate and identify meanings, values, ideas, and even ideals. 필사자가 함께 살 수 있는 단 두 가지 길, 물질적인 짐승 같은 길과 영적인 인간다운 길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신호와 소리를 사용하여 제한된 방식으로 서로 소통(疏通)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소통은 의미, 가치, 관념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한 가지 차이는 사람이 의미, 가치, 관념 및 이상(理想)까지도 아주 확실히 정하고 분간(分揀)하는 상징의 수단으로 동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160:2.2 (1775.3) Since animals cannot communicate ideas to each other, they cannot develop personality. Man develops personality because he can thus communicate with his fellows concerning both ideas and ideals. 동물들은 서로 관념을 전달할 수 없어서, 동물은 고유성을 개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관념과 이상(理想) 모두에 관해 동료와 이렇게 소통할 수 있어서, 고유성을 발전시킵니다.

160:2.3 (1775.4) It is this ability to communicate and share meanings that constitutes human culture and enables man, through social associations, to build civilizations. Knowledge and wisdom become cumulative because of man’s ability to communicate these possessions to succeeding generations. And thereby arise the cultural activities of the race: art, science, religion, and philosophy. 소통(疏通)하고 의미(意味)를 공유하는 이 능력(能力)이 인간 문화를 구성하고 사회관계를 통해 인간에게 문명을 세울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재산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지식(知識)과 지혜(知慧)가 누적됩니다. 그 때문에, 인류의 문화 활동, 예술, 과학, 종교와 철학이 생깁니다.

160:2.4 (1775.5) Symbolic communication between human beings predetermines the bringing into existence of social groups. The most effective of all social groups is the family, more particularly the two parents. Personal affection is the spiritual bond which holds together these material associations. Such an effective relationship is also possible between two persons of the same sex, as is so abundantly illustrated in the devotions of genuine friendships. 인간 사이에 상징적 소통으로 사회 집단의 발생이 결정됩니다. 모든 사회 집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가족, 특히 두 부모(父母)입니다. 개인적 애정은 이런 물질 관계를 단결시키는 영적 결합력입니다. 효과적인 그런 관계는 진실한 우정의 헌신으로 아주 풍성히 예시되듯이, 동성(同姓)의 두 사람 사이에도 가능합니다.

160:2.5 (1775.6) These associations of friendship and mutual affection are socializing and ennobling because they encourage and facilitate the following essential factors of the higher levels of the art of living: 우정과 상호 애정의 이런 결합은, 생활의 기술 중에서 고등수준의 다음 필수 요소를 장려하고 촉진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회화하면서 품위 있게 됩니다.

160:2.6 (1775.7) 1. Mutual self-expression and self-understanding. Many noble human impulses die because there is no one to hear their expression. Truly, it is not good for man to be alone. Some degree of recognition and a certain amount of appreciation are essential to the development of human character. Without the genuine love of a home, no child can achieve the full development of normal character. Character is something more than mere mind and morals. Of all social relations calculated to develop character, the most effective and ideal is the affectionate and understanding friendship of man and woman in the mutual embrace of intelligent wedlock. Marriage, with its manifold relations, is best designed to draw forth those precious impulses and those higher motives which are indispensable to the development of a strong character. I do not hesitate thus to glorify family life, for your Master has wisely chosen the father-child relationship as the very cornerstone of this new gospel of the kingdom. And such a matchless community of relationship, man and woman in the fond embrace of the highest ideals of time, is so valuable and satisfying an experience that it is worth any price, any sacrifice, requisite for its possession. 상호 자기-표현과 자기-이해. 다수의 고결한 인간 충동은, 그 표현을 들을 사람이 없어서, 사라집니다. 사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인정과 얼마큼의 진가 인정은 인간 성품 발전에 필수적입니다. 가정의 참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아이도 충분한 정상적 성품 발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품(性品 됨됨이)은 단순한 마음과 품행 이상의 것입니다. 성품 발전에 적합한 모든 사회관계 중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理想的)인 것은, 서로 수용하는 지능적 결혼 생활에서 깊은 애정으로 이해하는 남녀의 우정입니다. 결혼은, 그 다양한 관계와 함께, 튼튼한 성품 발전에 절대 필요한, 그런 소중한 추진력과 그런 더 높은 동기를 끌어내기 위해 최고로 고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정생활을 찬미하는데, 너희 주(主)께서 이렇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 복음의 바로 그 초석으로서 아버지-자녀 관계를 현명하게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비할 데 없는 관계 공동체, 시간의 최고 이상(理想)에 속한 다정한 수용 가운데 있는 남녀는 너무 가치 있는 만족한 체험이어서, 그것을 얻기에 필요한 어떤 대가(代價)와 희생이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160:2.7 (1776.1) 2. Union of souls — the mobilization of wisdom. Every human being sooner or later acquires a certain concept of this world and a certain vision of the next. Now it is possible, through personality association, to unite these views of temporal existence and eternal prospects. Thus does the mind of one augment its spiritual values by gaining much of the insight of the other. In this way men enrich the soul by pooling their respective spiritual possessions. Likewise, in this same way, man is enabled to avoid that ever-present tendency to fall victim to distortion of vision, prejudice of viewpoint, and narrowness of judgment. Fear, envy, and conceit can be prevented only by intimate contact with other minds. I call your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Master never sends you out alone to labor for the extension of the kingdom; he always sends you out two and two. And since wisdom is superknowledge, it follows that, in the union of wisdom, the social group, small or large, mutually shares all knowledge. 혼(魂)들의 연합 – 지혜의 동원. 모든 인간은 머잖아 이 세상의 분명한 개념과 내세의 확실한 비전을 갖게 됩니다. 이제 고유성 결합을 통해 일시적 실존과 영원한 전망의 이런 관점의 연합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통찰력을 많이 얻어서 자신의 영적 가치가 강화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영적 재산을 공동출자(共同出資)하여 혼(魂)을 풍성(豊盛)하게 합니다. 똑같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람은 시야(視野)의 왜곡(歪曲), 관점(觀點)의 선입관(先入觀), 판단(判斷)의 편협(偏狹)에 희생되는, 그렇게 늘-존재하는 경향을 피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질투와 자기 과대평가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히 접촉해야만 예방될 수 있습니다. 나는 주(主)께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쓰도록 너희를 절대로 홀로 보내지 않은 사실에 여러분의 주의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너희를 항상 둘씩 보냅니다. 그리고 지혜(知慧)는 초(超)지식(知識)이므로, 사회 집단은 크든 작든, 지혜를 연합하면서, 모든 지식을 서로 나누게 됩니다.

220320 우정과 상호 애정 2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160:2.8 (1776.2) 3. The enthusiasm for living. Isolation tends to exhaust the energy charge of the soul. Association with one’s fellows is essential to the renewal of the zest for life and is indispensable to the maintenance of the courage to fight those battles consequent upon the ascent to the higher levels of human living. Friendship enhances the joys and glorifies the triumphs of life. Loving and intimate human associations tend to rob suffering of its sorrow and hardship of much of its bitterness. The presence of a friend enhances all beauty and exalts every goodness. By intelligent symbols man is able to quicken and enlarge the appreciative capacities of his friends. One of the crowning glories of human friendship is this power and possibility of the mutual stimulation of the imagination. Great spiritual power is inherent in the consciousness of wholehearted devotion to a common cause, mutual loyalty to a cosmic Deity. 생활의 의욕(意欲). 고립은 혼(魂)의 에너지 충전(充電)을 고갈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료 결합은 생활 열정의 재생에 필수이며, 고등 차원의 인간 생활로 상승하는 결과에 따르는 그런 투쟁의 용기 유지에 절대 필요합니다. 우정은 기쁨을 더하고 인생의 승리를 드높입니다. 애정이 깊은 친밀한 인간 결합은 고통의 슬픔과 쓰라린 여러 고난을 박탈(剝奪)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구 바로 앞에서 모든 아름다움이 더하고 모든 선이 높아집니다. 지능적 상징으로 사람은 자기 친구들의 진가를 식별하는 능력을 되살려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 우정의 더없는 영광 가운데 하나는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런 능력과 가능성입니다. 위대한 영적 권능은, 공동 대의(大義)에 대한 전심의 헌신, 질서 우주 신에 대한 상호 충성하는 의식에 본래부터 있습니다.

160:2.9 (1776.3) 4. The enhanced defense against all evil. Personality association and mutual affection is an efficient insurance against evil. Difficulties, sorrow, disappointment, and defeat are more painful and disheartening when borne alone. Association does not transmute evil into righteousness, but it does aid in greatly lessening the sting. Said your Master, “Happy are they who mourn” — if a friend is at hand to comfort. There is positive strength in the knowledge that you live for the welfare of others, and that these others likewise live for your welfare and advancement. Man languishes in isolation. Human beings unfailingly become discouraged when they view only the transitory transactions of time. The present, when divorced from the past and the future, becomes exasperatingly trivial. Only a glimpse of the circle of eternity can inspire man to do his best and can challenge the best in him to do its utmost. And when man is thus at his best, he lives most unselfishly for the good of others, his fellow sojourners in time and eternity. 모든 악에 맞서는 강화 방어. 고유성 결합과 상호 애정이 악에 맞서는 효과적 대비(對備)입니다. 어려움, 슬픔, 실망과 패배는 홀로 견딜 때 더 괴롭고 낙담시킵니다. 결합이 악(惡)을 공의(公義)로 바꾸지 못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너희 주(主)께서, 친구가 위로하려고 바로 옆에 있으면, “애통해하는 자는 행복하도다(마5:4a).”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이렇게 똑같이 다른 이들도 너희 행복과 증진을 위해 산다는 것을 알 때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고립으로 쇠약해집니다. 인간은 일시적 시간의 과정만 바라볼 때, 어김없이 낙담합니다. 과거 및 미래와 분리된 현재는 정말 짜증스럽게 하찮아집니다. 영원의 순환계를 흘끗만 봐도 사람은 격려받아 자기 최선을 다하고, 전력하려고 자신의 최선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렇게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 그는 다른 이들, 시간과 영원의 자기 동료 거류(居留)자의 선(善)을 위해 가장 이타적으로 삽니다.

160:2.10 (1777.1) I repeat, such inspiring and ennobling association finds its ideal possibilities in the human marriage relation. True, much is attained out of marriage, and many, many marriages utterly fail to produce these moral and spiritual fruits. Too many times marriage is entered by those who seek other values which are lower than these superior accompaniments of human maturity. Ideal marriage must be founded on something more stable than the fluctuations of sentiment and the fickleness of mere sex attraction; it must be based on genuine and mutual personal devotion. And thus, if you can build up such trustworthy and effective small units of human association, when these are assembled in the aggregate, the world will behold a great and glorified social structure, the civilization of mortal maturity. Such a race might begin to realize something of your Master’s ideal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While such a society would not be perfect or entirely free from evil, it would at least approach the stabilization of maturity.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격려하고 품위 있게 하는 결합은 인간의 결혼 관계에서 그 이상적인 가능성이 발견됩니다. 사실 결혼에서 많은 것이 달성되며, 아주 많은 결혼이 이런 도덕적, 영적 열매를 끝내 전혀 맺지 못하고 맙니다. 인간 성숙에 수반되는 이런 뛰어난 것들보다 더 낮은 다른 가치를 찾는 자들이 너무 많이 결혼을 시작합니다. 이상적(理想的) 결혼은 정서(情緖)의 변동과 단순한 성적 매력의 변덕(變德)보다 더 견고한 뭔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서로 개인적인 헌신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너희가 인간관계의 그렇게 신뢰할 만한 실제 작은 단위를 세울 수 있다면, 이것이 전체로 모일 때, 세상은 위대하고 영화(榮華)로운 사회 구조, 인간의 성숙한 문명을 볼 것입니다. 그런 종족은 “땅에서는 평화요, 사람 사이에 선한 뜻(눅2:14b)”이라는 너희 주(主)님의 이상(理想)을 어느 정도 실현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가 완전하거나 악(惡)이 온전히 없지 않지만, 적어도 성숙의 안정화에 가까울 것입니다.

3. The Lures of Maturity 성숙의 매력

220327 성숙의 매력: 경배와 조율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160:3.1 (1777.2) The effort toward maturity necessitates work, and work requires energy. Whence the power to accomplish all this? The physical things can be taken for granted, but the Master has well said, “Man cannot live by bread alone.” Granted the possession of a normal body and reasonably good health, we must next look for those lures which will act as a stimulus to call forth man’s slumbering spiritual forces. Jesus has taught us that God lives in man; then how can we induce man to release these soul-bound powers of divinity and infinity? How shall we induce men to let go of God that he may spring forth to the refreshment of our own souls while in transit outward and then to serve the purpose of enlightening, uplifting, and blessing countless other souls? How best can I awaken these latent powers for good which lie dormant in your souls? One thing I am sure of: Emotional excitement is not the ideal spiritual stimulus. Excitement does not augment energy; it rather exhausts the powers of both mind and body. Whence then comes the energy to do these great things? Look to your Master. Even now he is out in the hills taking in power while we are here giving out energy. The secret of all this problem is wrapped up in spiritual communion, in worship. From the human standpoint it is a question of combined meditation and relaxation. Meditation makes the contact of mind with spirit; relaxation determines the capacity for spiritual receptivity. And this interchange of strength for weakness, courage for fear, the will of God for the mind of self, constitutes worship. At least, that is the way the philosopher views it. 성숙을 향한 노력은 일이 필요하고, 일은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이 모든 일을 성취할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물리적인 것들은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주(主)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마4:4).”라고 잘 말씀하셨습니다. 정상적 신체와 양호한 건강이 있어도, 다음에 우리는 졸고 있는 사람의 영적 기세를 끌어내는 자극제로 작용할 그런 매력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사람 안에 살아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사람을 이끌어 혼에 묶인 이런 신성(神性)과 무한성의 권능을 풀어놓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놓아 하느님이 솟아올라 밖으로 나오면서 우리 자신의 혼(魂)들이 새롭게 된 후, 무수한 다른 혼(魂)을 비추어 영적 통찰력을 주고, 고양(高揚)하며, 축복하게 섬기도록, 이끌 것인가? 나는 어떻게 너희 혼(魂)들 안에서 잠자고 있는 이런 잠재력을 마지막으로 영원하게, 가장 잘 일깨울 수 있는가?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 감정적 흥분은 이상적(理想的) 영적 자극제가 아닙니다. 흥분은 에너지를 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과 신체의 모든 힘을 다 써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할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가? 너희 주(主)를 지켜보라. 우리는 여기에서 에너지가 바닥이 나는 반면에, 지금도 그는 떨어져 권능을 취하면서 언덕에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비결은 영적 교섭(交涉), 경배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것은 결합한 묵상(默想)과 이완(弛緩)의 문제입니다. 묵상(默想)이 마음을 영(靈)과 접촉하게 합니다. 이완(弛緩)이 영적 수용 능력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약점을 강점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자기 마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서로 바꾸는 이것이 경배의 구성요소입니다. 적어도 저것이 철학자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160:3.2 (1777.3) When these experiences are frequently repeated, they crystallize into habits, strength-giving and worshipful habits, and such habits eventually formulate themselves into a spiritual character, and such a character is finally recognized by one’s fellows as a mature personality. These practices are difficult and time-consuming at first, but when they become habitual, they are at once restful and timesaving. The more complex society becomes, and the more the lures of civilization multiply, the more urgent will become the necessity for God-knowing individuals to form such protective habitual practices designed to conserve and augment their spiritual energies. 이런 체험들이 자주 반복되면, 그것들은 습관, 힘을 주는 경건한 습관으로 구체화하고, 그런 습관이 드디어 영적 성품을 만들어 내며, 동료들이 그런 성품을 결국 성숙한 고유성으로 인정합니다. 이런 습관은 처음에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들이 습관화하면 그것들은 즉시 평온하게 시간을 절약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명의 유혹이 늘어날수록, 하느님을 아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영적 에너지를 보존하고 증대하도록 고안된, 그렇게 끊임없이 보호하는 습관 형성의 필요가 더 절박해질 것입니다.

160:3.3 (1778.1) Another requirement for the attainment of maturity is the co-operative adjustment of social groups to an ever-changing environment. The immature individual arouses the antagonisms of his fellows; the mature man wins the hearty co-operation of his associates, thereby many times multiplying the fruits of his life efforts. 성숙에 이르는 또 다른 자격은 늘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사회 집단의 협력적 조율입니다. 미숙한 개인은 자기 동료들의 반감(反感)을 자극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진심 어린 자기 동료의 협력을 얻어서, 자기 일생 노력의 결과를 여러 배 증대시킵니다.

160:3.4 (1778.2) My philosophy tells me that there are times when I must fight, if need be, for the defense of my concept of righteousness, but I doubt not that the Master, with a more mature type of personality, would easily and gracefully gain an equal victory by his superior and winsome technique of tact and tolerance. All too often, when we battle for the right, it turns out that both the victor and the vanquished have sustained defeat. I heard the Master say only yesterday that the “wise man, when seeking entrance through the locked door, would not destroy the door but rather would seek for the key wherewith to unlock it.” Too often we engage in a fight merely to convince ourselves that we are not afraid. 내 철학은, 내 공의(公義)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내가 싸워야 할 때가 있다고 내게 이르지만, 훨씬 성숙한 유형의 고유성을 지닌 주(主)님은 자신의 우수하고 매력적인 재치(才致)와 관용(寬容)의 기술로 순조로이 품위 있게 똑같은 승리하실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의(義 바른 도리)를 위해 싸울 때 승자(勝者)와 패자(敗者) 둘 다 너무 자주 패배로 끝납니다. 나는 바로 어제 주(主)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잠긴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문을 부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문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단지 스스로 확신하려고 너무 자주 싸웁니다.

160:3.5 (1778.3) This new gospel of the kingdom renders a great service to the art of living in that it supplies a new and richer incentive for higher living. It presents a new and exalted goal of destiny, a supreme life purpose. And these new concepts of the eternal and divine goal of existence are in themselves transcendent stimuli, calling forth the reaction of the very best that is resident in man’s higher nature. On every mountaintop of intellectual thought are to be found relaxation for the mind, strength for the soul, and communion for the spirit. From such vantage points of high living, man is able to transcend the material irritations of the lower levels of thinking — worry, jealousy, envy, revenge, and the pride of immature personality. These high-climbing souls deliver themselves from a multitude of the crosscurrent conflicts of the trifles of living, thus becoming free to attain consciousness of the higher currents of spirit concept and celestial communication. But the life purpose must be jealously guarded from the temptation to seek for easy and transient attainment; likewise must it be so fostered as to become immune to the disastrous threats of fanaticism.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이 복음은 더 높은 생활을 위해 새롭고 풍성한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생활의 기술에 대단히 유익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고귀한 운명의 목표, 최극 일생의 목적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실존의 영원한 신적 목표에 대한 이 새 개념은 자체로, 사람의 고등 본성에 내재하는, 바로 그 최선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초월적 자극입니다. 모든 지적(知的) 사색(思索)의 산꼭대기마다 마음을 위한 이완(弛緩), 혼(魂)을 위한 근력, 영(靈)을 위한 교섭(交涉)이 있어야 합니다. 고등 생활의 그런 유리한 지점에서, 사람은 더 낮은 수준의 생각 – 걱정, 질투(嫉妬), 시기(猜忌), 보복(報復)과 미숙한 고유성의 자랑에 속한 물질적 속태움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높이-상승하는 혼(魂)들은 생활의 하찮은 여러 상반되는 갈등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영(靈) 개념과 천상의 소통에 속한 고등 흐름의 의식에 자유로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생의 목적은 쉽게 일시적으로 달성하려는 유혹에서 빈틈없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광신(狂信)의 불길한 조짐에 면역되도록 그렇게 육성되어야 합니다.

4. The Balance of Maturity 성숙의 균형

220403 생활의 본질과 성공의 요소 전10:10b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but skill will bring success.

160:4.1 (1778.4) While you have an eye single to the attainment of eternal realities, you must also make provision for the necessities of temporal living. While the spirit is our goal, the flesh is a fact. Occasionally the necessities of living may fall into our hands by accident, but in general, we must intelligently work for them. The two major problems of life are: making a temporal living and the achievement of eternal survival. And even the problem of making a living requires religion for its ideal solution. These are both highly personal problems. True religion, in fact, does not function apart from the individual. 너희는 성심성의로 영원한 실체에 도달하는 동시에 현세 생활의 필요에도 대비해야만 합니다. 영(靈)은 우리의 목적지(目的地)이지만, 육체는 현실입니다. 때때로 생활의 필수품이 우연히 우리 수중에 들어올 수 있지만, 대체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 지혜롭게 재능으로 일해야 합니다. 일생의 두 가지 중요한 문제는 현세 생활을 꾸리며 영원한 생존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계 문제도 이상적(理想的)으로 해결하려면 종교가 필요합니다. 이런 둘 다 아주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참 종교는 개인과 별개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160:4.2 (1778.5) The essentials of the temporal life, as I see them, are: 내가 볼 때 현세 생활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160:4.3 (1778.6) 1. Good physical health. 건강한 신체.

160:4.4 (1778.7) 2. Clear and clean thinking. 명료하고 깨끗한 생각.

160:4.5 (1778.8) 3. Ability and skill. 능력과 기술.

160:4.6 (1778.9) 4. Wealth — the goods of life. 부(富) – 생활의 재산.

160:4.7 (1778.10) 5. Ability to withstand defeat. 패배를 견디는 능력.

160:4.8 (1778.11) 6. Culture — education and wisdom. 문화 – 교육과 지혜.

160:4.9 (1779.1) Even the physical problems of bodily health and efficiency are best solved when they are viewed from the religious standpoint of our Master’s teaching: That the body and mind of man are the dwelling place of the gift of the Gods, the spirit of God becoming the spirit of man. The mind of man thus becomes the mediator between material things and spiritual realities. 신체 건강과 능률의 육체적 문제도 우리 주(主)가 가르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좋게 해결됩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들의 선물,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의 영(靈)이 되는 거주지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 실체 사이에서 중재(仲裁)자가 됩니다.

160:4.10 (1779.2) It requires intelligence to secure one’s share of the desirable things of life. It is wholly erroneous to suppose that faithfulness in doing one’s daily work will insure the rewards of wealth. Barring the occasional and accidental acquirement of wealth, the material rewards of the temporal life are found to flow in certain well-organized channels, and only those who have access to these channels may expect to be well rewarded for their temporal efforts. Poverty must ever be the lot of all men who seek for wealth in isolated and individual channels. Wise planning, therefore, becomes the one thing essential to worldly prosperity. Success requires not only devotion to one’s work but also that one should function as a part of some one of the channels of material wealth. If you are unwise, you can bestow a devoted life upon your generation without material reward; if you are an accidental beneficiary of the flow of wealth, you may roll in luxury even though you have done nothing worth while for your fellow men. 사람이 일생에서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한 몫을 확보하려면 지능이 필요합니다. 매일 자신의 과업에 성실하면 부(富)의 보상이 확실할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가끔 우연한 부(富)의 획득을 제외하고, 현세적 생활의 물질적 보상은 잘 조직된 특정 경로로 흘러가도록 알려져 있으며, 이런 경로에 접근하는 자들만이 자신들의 현세적 노력에 충분히 보상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언제나 고립된 개별 경로에서 부(富)를 찾는 모든 사람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계획은 이 세상의 번영에 필수적인 한 가지입니다. 성공하려면 자기 과업에 헌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질적 부(富)의 경로 중 어느 한 부분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너희가 지혜롭지 않으면, 너희는 물질적 보상 없이 너희 세대를 위해 헌신적인 생활에 바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부(富)의 흐름에서 뜻밖에 이익을 받는 자라면, 너희가 동료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한 적이 없어도, 호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160:4.11 (1779.3) Ability is that which you inherit, while skill is what you acquire. Life is not real to one who cannot do some one thing well, expertly. Skill is one of the real sources of the satisfaction of living. Ability implies the gift of foresight, farseeing vision. Be not deceived by the tempting rewards of dishonest achievement; be willing to toil for the later returns inherent in honest endeavor. The wise man is able to distinguish between means and ends; otherwise, sometimes overplanning for the future defeats its own high purpose. As a pleasure seeker you should aim always to be a producer as well as a consumer. 능력은 너희가 물려받은 것이지만 기술은 너희가 습득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느 한 가지를 잘, 능숙하게 할 수 없는 자들에게,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기술은 생활에 만족하는 실제 근원 중 하나입니다. 능력은 선견(先見)의 재능,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시력을 뜻합니다. 부정직한 성취의 유혹하는 보상에 속지 마십시오. 정직한 노력에 본래부터 들어있는, 나중의 수익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십시오. 슬기로운 사람은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미래를 위한 과도한 계획이 그 자체의 높은 목적을 무너뜨립니다. 재미 추구자로서 너희는 언제나 소비자만 아니라 생산자도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60:4.12 (1779.4) Train your memory to hold in sacred trust the strength-giving and worth-while episodes of life, which you can recall at will for your pleasure and edification. Thus build up for yourself and in yourself reserve galleries of beauty, goodness, and artistic grandeur. But the noblest of all memories are the treasured recollections of the great moments of a superb friendship. And all of these memory treasures radiate their most precious and exalting influences under the releasing touch of spiritual worship. 너희가 너희 기쁨과 계발(啓發)을 위해 뜻대로 생각해 낼 수 있는, 힘을 주고, 가치 있는 생활의 사건들을 신성한 신뢰로 간직하도록 너희 기억을 단련하십시오. 이렇게 자신을 위해 단련하고 자신 안에 아름다움, 선(善)과 예술적 위엄(威嚴)의 미술관을 확보하십시오. 그러나 모든 기억 중 가장 고상한 것은, 훌륭한 우정의 위대한 순간을 마음에 새긴 추억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의 보배들은 영적 경배의 풀어놓는 접촉에 따라 가장 가치 있게 드높이는 영향력을 발산합니다.

220410 실패의 의미 잠4: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The beginning of wisdom is this: Get wisdom. Though it cost all you have, get understanding.

160:4.13 (1779.5) But life will become a burden of existence unless you learn how to fail gracefully. There is an art in defeat which noble souls always acquire; you must know how to lose cheerfully; you must be fearless of disappointment. Never hesitate to admit failure. Make no attempt to hide failure under deceptive smiles and beaming optimism. It sounds well always to claim success, but the end results are appalling. Such a technique leads directly to the creation of a world of unreality and to the inevitable crash of ultimate disillusionment. 그러나 너희가 기품(氣品) 있게 실패하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일생은 생존의 짐이 될 것입니다. 고매(高邁)한 혼(魂)들이 언제나 몸에 익히는 패배에는 요령(要領)이 있습니다. 너희는 기분 좋게 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저 없이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기만적인 미소와 밝은 낙관론(樂觀論) 아래에 실패를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성공을 주장(主張)하는 것이 언제나 좋게 들리지만, 최종 결과는 슬프고 끔찍합니다. 그런 기법은 바로 허구(虛構) 세계의 창조와 결정적 환멸(幻滅)의 필연적 몰락(沒落)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160:4.14 (1779.6) Success may generate courage and promote confidence, but wisdom comes only from the experiences of adjustment to the results of one’s failures. Men who prefer optimistic illusions to reality can never become wise. Only those who face facts and adjust them to ideals can achieve wisdom. Wisdom embraces both the fact and the ideal and therefore saves its devotees from both of those barren extremes of philosophy — the man whose idealism excludes facts and the materialist who is devoid of spiritual outlook. Those timid souls who can only keep up the struggle of life by the aid of continuous false illusions of success are doomed to suffer failure and experience defeat as they ultimately awaken from the dream world of their own imaginations. 성공이 용기를 낳고 확신을 증진하지만, 지혜는 자기 실패의 결과에 조율하는 체험에서 생길 뿐입니다. 실체(實體)보다 차라리 낙관적 망상을 택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현명해질 수 없습니다. 사실을 직면하고 그것들을 이상(理想)들에 조율하는 자들만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사실과 이상(理想)을 둘 다 포함하므로 그렇게 쓸모없는 철학의 두 극단 – 이상주의(理想主義)가 사실을 차단하는 사람과 영적 시야가 전혀 없는 물질주의(物質主義)자로부터 그 헌신자들을 건집니다. 성공에 대한 계속된 거짓 망상의 도움으로 삶의 투쟁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겁많은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 망상의 꿈 세계에서 깨어날 때, 실패를 겪고 패배를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160:4.15 (1780.1) And it is in this business of facing failure and adjusting to defeat that the far-reaching vision of religion exerts its supreme influence. Failure is simply an educational episode — a cultural experiment in the acquirement of wisdom — in the experience of the God-seeking man who has embarked on the eternal adventure of the exploration of a universe. To such men defeat is but a new tool for the achievement of higher levels of universe reality. 실패에 직면하고 패배에 조율하는 이런 일에, 종교의 원대한 시야가 그 최고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실패는, 우주 탐험의 영원한 모험에 착수한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체험에 담긴, 교육적 사건 – 지혜를 얻는 교양의 시도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패배는 우주 실체의 고등수준을 달성하는 새로운 도구일 뿐입니다.

160:4.16 (1780.2) The career of a God-seeking man may prove to be a great success in the light of eternity, even though the whole temporal-life enterprise may appear as an overwhelming failure, provided each life failure yielded the culture of wisdom and spirit achievement. Do not make the mistake of confusing knowledge, culture, and wisdom. They are related in life, but they represent vastly differing spirit values; wisdom ever dominates knowledge and always glorifies culture.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애는, 현세의 모든 생활 활동이 압도적인 실패로 보인다고 해도, 일생의 각 실패가 지혜의 교양과 영적 성취를 가져왔다면, 영원의 빛 안에서 위대한 성공으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지식, 교양 및 지혜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생활과 관련되지만, 그것들은 굉장히 다른 영(靈) 가치들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언제나 지식을 다스리고, 항상 교양에 영광을 더합니다.

5. The Religion of the Ideal 이상(理想)적 종교

220417 종교: 하느님의 개념과 이상(理想)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the one and only Son, who is himself God and is in closest relationship with the Father, has made him known.

160:5.1 (1780.3) You have told me that your Master regards genuine human religion as the individual’s experience with spiritual realities. I have regarded religion as man’s experience of reacting to something which he regards as being worthy of the homage and devotion of all mankind. In this sense, religion symbolizes our supreme devotion to that which represents our highest concept of the ideals of reality and the farthest reach of our minds toward eternal possibilities of spiritual attainment. 너희 주(主)께서 인간의 참 종교를 개인의 영적 실체 체험으로 생각한다고 너희가 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종교를, 인간이 모든 인류의 존경과 헌신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뭔가에 반응하는 인간의 체험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실체의 이상(理想)에 대한 우리의 최고 개념과 영원한 영적 도달의 가능성을 향한 우리 마음의 최대 역량을 표현하기 위한 우리의 최고 헌신을 나타냅니다.

160:5.2 (1780.4) When men react to religion in the tribal, national, or racial sense, it is because they look upon those without their group as not being truly human. We always look upon the object of our religious loyalty as being worthy of the reverence of all men. Religion can never be a matter of mere intellectual belief or philosophic reasoning; religion is always and forever a mode of reacting to the situations of life; it is a species of conduct. Religion embraces thinking, feeling, and acting reverently toward some reality which we deem worthy of universal adoration. 사람들이 부족, 국가 혹은 종족의 의미에서 종교에 반응할 때, 그것은 자신들이 그런 집단이 없는 자들을 실로 인간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종교적 충성의 대상을 모든 사람이 존경할만하다고 여깁니다. 종교는 결코 지적 믿음 혹은 철학적 추론(推論 생각한 논의)에 불과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언제나, 끊임없이 생활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종교는 일종의 행위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전반적으로 숭배하기에 훌륭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를 향한 경건한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을 포함합니다.

160:5.3 (1780.5) If something has become a religion in your experience, it is self-evident that you already have become an active evangel of that religion since you deem the supreme concept of your religion as being worthy of the worship of all mankind, all universe intelligences. If you are not a positive and missionary evangel of your religion, you are self-deceived in that what you call a religion is only a traditional belief or a mere system of intellectual philosophy. If your religion is a spiritual experience, your object of worship must be the universal spirit reality and ideal of all your spiritualized concepts. All religions based on fear, emotion, tradition, and philosophy I term the intellectual religions, while those based on true spirit experience I would term the true religions. The object of religious devotion may be material or spiritual, true or false, real or unreal, human or divine. Religions can therefore be either good or evil. 어떤 것이 너희 체험에서 종교가 되었다면, 너희는 너희 종교의 최고 개념을 모든 인류, 모든 우주 지능존재가 경배할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희는 이미 그 종교의 적극적 전도자가 되어 있음이 명백합니다. 너희가 너희 종교의 확신 있는 선교적 전도자가 아니라면, 너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전통적 믿음 혹은 단순한 지적 철학의 체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너희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습니다. 너희 종교가 영적 체험이라면, 너희 경배의 대상은 우주적 영(靈) 실체와 너희 모든 영성화(靈性化) 개념의 이상(理想)이어야 합니다. 나는 두려움, 감정, 전통과 철학에 근거한 모든 종교를 지적 종교로 부르는 한편, 나는 참된 영(靈) 체험에 근거한 종교를 참 종교로 부르곤 합니다. 종교적 헌신의 대상은 물질적 혹은 영적, 참 혹은 거짓, 실재 혹은 실재하지 않든, 인간적 혹은 신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종교는 선하거나 악할 수 있습니다.

160:5.4 (1780.6) Morality and religion are not necessarily the same. A system of morals, by grasping an object of worship, may become a religion. A religion, by losing its universal appeal to loyalty and supreme devotion, may evolve into a system of philosophy or a code of morals. This thing, being, state, or order of existence, or possibility of attainment which constitutes the supreme ideal of religious loyalty, and which is the recipient of the religious devotion of those who worship, is God. Regardless of the name applied to this ideal of spirit reality, it is God. 도덕과 종교는 반드시 똑같지 않습니다. 도덕 체계는 경배의 대상에 매달려 종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충성과 최고 헌신에 대한 보편적 매력을 상실한 종교가 철학 체계나 도덕 관례로 점차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충성의 최고 이상(理想)을 구성하고, 경배하는 자들의 종교적 헌신을 받는, 이런 분, 존재, 신분 혹은 존재 계열 혹은 도달 가능성이 하느님입니다. 이런 영(靈) 실체의 이상(理想)에 적용된 이름과 관계없이, 그것이 하느님이십니다.

160:5.5 (1781.1) The social characteristics of a true religion consist in the fact that it invariably seeks to convert the individual and to transform the world. Religion implies the existence of undiscovered ideals which far transcend the known standards of ethics and morality embodied in even the highest social usages of the most mature institutions of civilization. Religion reaches out for undiscovered ideals, unexplored realities, superhuman values, divine wisdom, and true spirit attainment. True religion does all of this; all other beliefs are not worthy of the name. You cannot have a genuine spiritual religion without the supreme and supernal ideal of an eternal God. A religion without this God is an invention of man, a human institution of lifeless intellectual beliefs and meaningless emotional ceremonies. A religion might claim as the object of its devotion a great ideal. But such ideals of unreality are not attainable; such a concept is illusionary. The only ideals susceptible of human attainment are the divine realities of the infinite values resident in the spiritual fact of the eternal God. 참종교의 사회적 특성은, 그것이 변함없이 개인을 개종하고 세상을 바꿔 놓으려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종교는, 가장 성숙한 문명 제도에서 최고의 사회적 관습으로까지 구체적으로 표현된, 알려진 윤리학과 도덕의 기준을 훨씬 초월하는, 발견되지 않은 이상(理想)들의 존재를 종교 안에 품고 있습니다. 종교는 손을 뻗어 발견되지 않은 이상(理想), 탐험 되지 않은 실체(實體), 초(超)인적 가치, 신적 지혜와 참된 영(靈) 달성에 이릅니다. 참종교는 이 모두를 행합니다. 다른 모든 믿음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최극, 천상의 이상(理想) 없이 너희는 진짜 영적 종교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이 없는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 생명 없는 지적 믿음과 의미 없는 감정적 예식의 인간적 제도입니다. 종교는 그 헌신의 대상으로써 위대한 이상(理想)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그런 이상(理想)들은 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개념은 실체가 없는 착각입니다. 인간적으로 도달이 가능한 유일한 이상(理想)들은, 영원한 하느님의 영적 사실에 내재한 무한한 가치의 신적 실체들입니다.

160:5.6 (1781.2) The word God, the idea of God as contrasted with the ideal of God, can become a part of any religion, no matter how puerile or false that religion may chance to be. And this idea of God can become anything which those who entertain it may choose to make it. The lower religions shape their ideas of God to meet the natural state of the human heart; the higher religions demand that the human heart shall be changed to meet the demands of the ideals of true religion. 하느님의 이상(理想)과 대조하면, 하느님이라는 단어, 하느님의 개념은, 그런 종교가 아무리 미숙하거나 사실이 아니어도, 어떤 종교의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 개념은 그것을 생각하는 자들이 그것을 만들기로 선택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습니다. 하등 종교는 인간 심정의 자연적 상태에 맞추어 자신들의 하느님 개념을 만듭니다. 상급 종교는 참종교의 이상(理想)적 요구에 인간의 심정을 맞추어 변화하도록 요구합니다.

160:5.7 (1781.3) The religion of Jesus transcends all our former concepts of the idea of worship in that he not only portrays his Father as the ideal of infinite reality but positively declares that this divine source of values and the eternal center of the universe is truly and personally attainable by every mortal creature who chooses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thereby acknowledging the acceptance of sonship with God and brotherhood with man. That, I submit, is the highest concept of religion the world has ever known, and I pronounce that there can never be a higher since this gospel embraces the infinity of realities, the divinity of values, and the eternity of universal attainments. Such a concept constitutes the achievement of the experience of the idealism of the supreme and the ultimate. 예수의 종교는, 예수가 자기 아버지를 무한 실체의 이상(理想)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선택하여, 하느님의 자녀 됨과 사람의 형제 공동체를 받아들여 인정하는, 모든 필사 창조물이 이런 신적 가치의 근원과 우주의 영원한 중심에 확실히 개인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절대적으로 선언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든 이전 경배의 관념에 대한 개념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이 알고 있는 최고의 종교 개념임을 내가 진술하며, 이 복음은 실체들의 무한성, 가치들의 신성(神性)과 우주적 달성의 영원성(永遠性)을 포함하므로 결코 더 높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내가 단언합니다. 그런 개념이 최극과 궁극에 속한 이상주의(理想主義)의 체험적 성취를 구성합니다.

220424 최종 가치의 아버지와 대가 지불 눅 9:24, 12:51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리느니라. 내가 화평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혼(魂) 투쟁(鬪爭)을 가져왔느니라 “Whoso would save his life must lose it. Think not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but rather a soul struggle”?

160:5.8 (1781.4) I am not only intrigued by the consummate ideals of this religion of your Master, but I am mightily moved to profess my belief in his announcement that these ideals of spirit realities are attainable; that you and I can enter upon this long and eternal adventure with his assurance of the certainty of our ultimate arrival at the portals of Paradise. My brethren, I am a believer, I have embarked; I am on my way with you in this eternal venture. The Master says he came from the Father, and that he will show us the way. I am fully persuaded he speaks the truth. I am finally convinced that there are no attainable ideals of reality or values of perfection apart from the eternal and Universal Father. 나는 너희 주님의 이런 종교적 이상(理想)에 흥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영(靈) 실체의 이런 이상(理想)들이 달성될 수 있고, 우리가 천국 입구에 결정적으로 확실히 도착한다는 그의 확신과 함께 너희와 내가 이런 길고 영원한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그의 공표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할 마음이 힘차게 일어납니다. 내 형제들이여, 나는 믿는 자이며, 나는 배에 올랐습니다. 나는 이런 영원한 모험에 너희와 함께 가는 중입니다. 주(主)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왔고,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줄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진리를 전한다고 확신할 뿐입니다. 나는 결국, 영원한 우주 아버지 외에는 도달할 수 있는 실체의 이상(理想)들이나 완전의 가치들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160:5.9 (1781.5) I come, then, to worship, not merely the God of existences, but the God of the possibility of all future existences. Therefore must your devotion to a supreme ideal, if that ideal is real, be devotion to this God of past, present, and future universes of things and beings. And there is no other God, for there cannot possibly be any other God. All other gods are figments of the imagination, illusions of mortal mind, distortions of false logic, and the self-deceptive idols of those who create them. Yes, you can have a religion without this God, but it does not mean anything. And if you seek to substitute the word God for the reality of this ideal of the living God, you have only deluded yourself by putting an idea in the place of an ideal, a divine reality. Such beliefs are merely religions of wishful fancy. 그래서 나는 실재의 하느님뿐만 아니라 모든 미래 실재의 가능성에 속한 하느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따라서 이상(理想)이 실제라면, 최극 이상(理想)에 대한 너희의 헌신은 사물과 존재의 과거, 현재와 미래 우주의 이 하느님을 향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다른 하느님은 결코 없으니, 어떤 다른 하느님이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하느님은 상상(想像)의 허구(虛構), 필사 마음의 환각(幻覺), 거짓 논리의 왜곡(歪曲)과 그것들을 만들어 낸 자들의 자기-기만적 우상(偶像)들입니다. 더구나, 너희는 이런 하느님 없이 종교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이런 이상(理想)의 실체 대신에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한다면, 너희는 이상(理想), 신적 실체의 자리에 개념을 두어서 망상(妄想)에 사로잡혔을 뿐입니다. 그런 믿음들은 희망에 근거한 공상(空想)의 종교일 뿐입니다.

160:5.10 (1782.1) I see in the teachings of Jesus, religion at its best. This gospel enables us to seek for the true God and to find him. But are we willing to pay the price of this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Are we willing to be born again? to be remade? Are we willing to be subject to this terrible and testing process of self-destruction and soul reconstruction? Has not the Master said: “Whoso would save his life must lose it. Think not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but rather a soul struggle”? True, after we pay the price of dedication to the Father’s will, we do experience great peace provided we continue to walk in these spiritual paths of consecrated living. 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최고 상태의 종교를 발견합니다. 이 복음으로 우리는 참 하느님을 추구하고 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로 이렇게 들어가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用意)가 있습니까? 우리는 거듭나서, 개조될 용의(用意)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파괴하고 혼(魂)을 재건하는 이 혹독하고 힘겨운 과정에 복종할 용의(用意)가 있습니까? 주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리느니라(눅9:24). 내가 화평을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혼(魂) 투쟁(鬪爭)을 가져왔느니라(눅12:51).”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헌신하는 대가를 지불한 후에, 우리가 봉헌된 생활의 이런 영적 경로로 계속 걷는다면, 우리는 위대한 평화를 체험합니다.

160:5.11 (1782.2) Now are we truly forsaking the lures of the known order of existence while we unreservedly dedicate our quest to the lures of the unknown and unexplored order of the existence of a future life of adventure in the spirit worlds of the higher idealism of divine reality. And we seek for those symbols of meaning wherewith to convey to our fellow men these concepts of the reality of the idealism of the religion of Jesus, and we will not cease to pray for that day when all mankind shall be thrilled by the communal vision of this supreme truth. Just now, our focalized concept of the Father, as held in our hearts, is that God is spirit; as conveyed to our fellows, that God is love. 이제 우리는, 신적 실체의 고등 이상주의(理想主義)에 속한 영(靈) 세계에서 모험의 미래 생활 실재의 알려지지 않고 탐험 되지 않은 계열의 매력에 대한 우리의 탐색 여행에 거리낌 없이 바치면서 알려진 생활 실재의 매력을 진심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종교의 이상주의(理想主義)에 속한 이런 실체의 개념을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에 담긴 그런 상징을 찾고, 우리는 모든 인류가 이런 최극 진리의 공동 비전으로 가슴이 설레게 될 그 날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제 우리가 초점에 맞춘 아버지의 개념은, 우리 심정에 담겨 있듯이, 하느님은 영(靈)이며, 우리 동료들에게 전달되었듯이,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160:5.12 (1782.3) The religion of Jesus demands living and spiritual experience. Other religions may consist in traditional beliefs, emotional feelings, philosophic consciousness, and all of that, but the teaching of the Master requires the attainment of actual levels of real spirit progression. 예수의 종교는 살아있는 영적 체험을 요구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전통적 믿음들, 감정적 감각들, 철학적 자각과 그런 모두에 있을 수도 있지만, 주(主)의 가르침은 진짜 영(靈) 진보의 실제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합니다.

160:5.13 (1782.4) The consciousness of the impulse to be like God is not true religion. The feelings of the emotion to worship God are not true religion. The knowledge of the conviction to forsake self and serve God is not true religion. The wisdom of the reasoning that this religion is the best of all is not religion as a personal and spiritual experience. True religion has reference to destiny and reality of attainment as well as to the reality and idealism of that which is wholeheartedly faith-accepted. And all of this must be made personal to us by the revelation of the Spirit of Truth. 하느님을 닮으려 하는 충동의 의식은 참종교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려는 감정의 느낌은 참종교가 아닙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려는 확신의 인식이 참종교가 아닙니다. 이 종교가 모든 종교 중 최고라는 추론의 지혜는 개인의 영적 체험으로서 종교가 아닙니다. 참종교는 마음을 다해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에 속한 실체 및 이상주의(理想主義)만 아니라 달성할 운명 및 실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리의 영(靈)의 계시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60:5.14 (1782.5) And thus ended the dissertations of the Greek philosopher, one of the greatest of his race, who had become a believer in the gospel of Jesus.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 종족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의 논술이 마쳤고, 그는 예수 복음을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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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1 Further Discussions with Rodan 로단과 추가적 토론

Paper 161

Further Discussions with Rodan 로단과 추가적 토론

1. The Personality of God 하느님의 고유성
Nathaniel’s five points 나다니엘의 5 요점
2. The Divine Nature of Jesus 예수의 신적 본성
Discourse by Nathaniel and Thomas 나다니엘과 도마의 강연
3. Jesus’ Human and Divine Minds 예수의 인간적 및 신적 마음
The midwayers’ views 중도자들의 견해

220501 들으시고 보시는 하느님 시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Does he who fashioned the ear not hear? Does he who formed the eye not see?

161:0.1 (1783.1) ON SUNDAY, September 25, A.D. 29,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assembled at Magadan. After a long conference that evening with his associates, Jesus surprised all by announcing that early the next day he and the twelve apostles would start for Jerusalem to attend the feast of tabernacles. He directed that the evangelists visit the believers in Galilee, and that the women’s corps return for a while to Bethsaida. AD 29년 9월 25일 일요일에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마가단에 모였습니다. 그날 저녁 자기 동료들과 오래 의논한 후, 예수는 다음 날 일찍 자신과 열두 사도가 장막절(帳幕節)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으로 떠날 것이라는 발표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갈릴리의 신자들을 방문하고, 여성단(團)은 잠시 벳새다로 돌아가라고 그가 지시했습니다.

161:0.2 (1783.2) When the hour came to leave for Jerusalem, Nathaniel and Thomas were still in the midst of their discussions with Rodan of Alexandria, and they secured the Master’s permission to remain at Magadan for a few days. And so, while Jesus and the ten were on their way to Jerusalem, Nathaniel and Thomas were engaged in earnest debate with Rodan. The week prior, in which Rodan had expounded his philosophy, Thomas and Nathaniel had alternated in present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to the Greek philosopher. Rodan discovered that he had been well instructed in Jesus’ teachings by one of the former apostles of John the Baptist who had been his teacher at Alexandria. 예루살렘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나다니엘과 도마는 알렉산드리아의 로단과 여전히 한창 토론 중이었으며, 그들은 마가단에 며칠간 머물도록 주님의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열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 나다니엘과 도마는 로단과 진지하게 토론했습니다. 로단이 자기 철학을 자세히 말했던 지난주에, 도마와 나다니엘은 교대로 그리스 철학자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의 교사였던 세례 요한의 이전 사도 중 하나가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잘 가르쳤음을 로단이 깨달았습니다.

1. The Personality of God 하느님의 고유성

161:1.1 (1783.3) There was one matter on which Rodan and the two apostles did not see alike, and that was the personality of God. Rodan readily accepted all that was presented to him regarding the attributes of God, but he contended that the Father in heaven is not, cannot be, a person as man conceives personality. While the apostles found themselves in difficulty trying to prove that God is a person, Rodan found it still more difficult to prove he is not a person. 로단과 두 사도가 똑같이 보지 않은 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고유성이었습니다. 로단은 하느님의 속성에 관해 자신에게 제시된 모두를 쾌히 받아들였지만, 그는, 사람이 인격을 이해하듯이, 하늘의 아버지는 인격 존재가 아니고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이 인격 존재임을 자신들이 증명하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지만, 로단은 그가 인격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61:1.2 (1783.4) Rodan contended that the fact of personality consists in the coexistent fact of full and mutual communication between beings of equality, beings who are capable of sympathetic understanding. Said Rodan: “In order to be a person, God must have symbols of spirit communication which would enable him to become fully understood by those who make contact with him. But since God is infinite and eternal, the Creator of all other beings, it follows that, as regards beings of equality, God is alone in the universe. There are none equal to him; there are none with whom he can communicate as an equal. God indeed may be the source of all personality, but as such he is transcendent to personality, even as the Creator is above and beyond the creature.” 로단은, 고유성의 사실은 대등한 존재들, 공감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충분한 상호 소통의 공존 사실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단이 말했습니다. “인격 존재가 되려면, 하느님은 자신과 접촉하는 자들이 하느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영(靈) 소통의 상징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다른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므로 따라서 대등한 존재에 대해, 하느님은 우주에 홀로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와 같은 자는 절대로 없습니다. 동등한 자로서 그가 소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고유성(인격 존재)의 근원일 수 있지만 그런 자격에 있어서 심지어 창조자는 창조물을 초월하여 그 밖에 계시는 것처럼, 그는 고유성(인격 존재)을 초월합니다.”

161:1.3 (1783.5) This contention greatly troubled Thomas and Nathaniel, and they had asked Jesus to come to their rescue, but the Master refused to enter into their discussions. He did say to Thomas: “It matters little what idea of the Father you may entertain as long as you are spiritually acquainted with the ideal of his infinite and eternal nature.” 도마와 나다니엘은 이런 주장으로 매우 난처해져서, 자신들을 건지러 와달라고 예수께 요청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토론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아버지의 무한하고 영원한 본성의 이상(理想)을 영적으로 알고 있는 한 너희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개념이 무엇이든 전혀 문제가 아니니라.”

161:1.4 (1784.1) Thomas contended that God does communicate with man, and therefore that the Father is a person, even within the definition of Rodan. This the Greek rejected on the ground that God does not reveal himself personally; that he is still a mystery. Then Nathaniel appealed to his own personal experience with God, and that Rodan allowed, affirming that he had recently had similar experiences, but these experiences, he contended, proved only the reality of God, not his personality. 도마는, 하느님은 인간과 소통하므로, 로단이 정의(定意)한 범위 안에서도, 아버지는 고유자(인격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인은 하느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지 않고 그는 여전히 신비라는 이유로 이것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나다니엘이 자기의 개인적 하느님 체험에 호소하자, 로단은 최근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고 긍정하며 인정했지만, 이런 체험은 그의 고유성(인격 존재성)이 아니라, 하느님 실체의 증명일 뿐이라고 그가 주장했습니다.

220508 하느님의 고유성(인격성) 마5:48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161:1.5 (1784.2) By Monday night Thomas gave up. But by Tuesday night Nathaniel had won Rodan to believe in the personality of the Father, and he effected this change in the Greek’s views by the following steps of reasoning: 월요일(AD29. 9. 26) 밤에 도마는 단념했습니다. 그러나 화요일 밤에 나다니엘은 로단을 설득하여 아버지의 고유성을 믿게 했고, 다음의 추론 단계로 그리스인(人)의 견해를 이렇게 변화시켰습니다.

161:1.6 (1784.3) 1. The Father in Paradise does enjoy equality of communication with at least two other beings who are fully equal to himself and wholly like himself —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In view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he Greek was compelled to concede the personality possibility of the Universal Father. (It was the later consideration of these discussions which led to the enlarged conception of the Trinity in the minds of the twelve apostles. Of course, it was the general belief that Jesus was the Eternal Son.) 천국 아버지는 적어도 자신과 완전히 같고 전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다른 두 존재, 영원 아들 및 무한 영(靈)과 동등하게 의사소통을 누립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비추어, 그리스인(人)은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인격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런 토론을 헤아려 보면서 열두 사도의 마음에 삼위일체의 확장된 개념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예수가 영원 아들이었다고 일반적으로 믿었습니다.)

161:1.7 (1784.4) 2. Since Jesus was equal with the Father, and since this Son had achieved the manifestation of personality to his earth children, such a phenomenon constituted proof of the fact, and demonstration of the possibility, of the possession of personality by all three of the Godheads and forever settled the question regarding the ability of God to communicate with man and the possibility of man’s communicating with God.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했고, 이 아들이 자기 지상 자녀들에게 고유성(인격성)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세 신격(神格) 모두가 고유성(인격성)을 지녔다는 사실의 증거와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사람과 소통하는 하느님의 능력과 사람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가능성에 관한 의문을 영원토록 해결했습니다.

161:1.8 (1784.5) 3. That Jesus was on terms of mutual association and perfect communication with man; that Jesus was the Son of God. That the relation of Son and Father presupposes equality of communication and mutuality of sympathetic understanding; that Jesus and the Father were one. That Jesus maintained at one and the same time understanding communication with both God and man, and that, since both God and man comprehended the meaning of the symbols of Jesus’ communication, both God and man possessed the attributes of personality in so far as the requirements of the ability of intercommunication were concerned. That the personality of Jesus demonstrated the personality of God, while it proved conclusively the presence of God in man. That two things which are related to the same thing are related to each other. 예수는 서로 사귀면서 사람과 온전히 소통하는 사이였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동등한 소통과 공감하여 이해하는 상호 관계를 뜻합니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였습니다. 예수는 하느님과 사람 둘 다 동시에 계속 이해하며 소통했고, 하느님과 사람 둘 다 예수의 소통하는 상징의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에, 상호 교통 능력의 조건에 관계되는 한, 하느님과 사람 둘 다 고유성(인격성)의 속성을 지녔습니다. 예수의 고유성(인격성)은 하느님의 고유성(인격성)의 증거였고 게다가, 그것은 사람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결정적인 입증이었습니다. 같은 것(예수의 고유 인격성)에 관련된 두 가지(하느님과 사람)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161:1.9 (1784.6) 4. That personality represents man’s highest concept of human reality and divine values; that God also represents man’s highest concept of divine reality and infinite values; therefore, that God must be a divine and infinite personality, a personality in reality although infinitely and eternally transcending man’s concept and definition of personality, but nevertheless always and universally a personality. 고유성(인격성)은 인간 실체와 신적 가치에 대한 인간의 최고 개념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느님은 신적 실체와 무한한 가치에 대한 인간의 최고 개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신적이며 무한한 고유성(인격성), 고유성(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정의(定義)를 무한하게 영원토록 초월하는 실제 고유성이지만, 언제나 예외 없이 고유성이어야 합니다.

161:1.10 (1784.7) 5. That God must be a personality since he is the Creator of all personality and the destiny of all personality. Rodan had been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teaching of Jesus, “Be you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하느님은 모든 고유성(인격 존재)의 창조자와 모든 고유성(인격 존재)의 운명이므로, 그는 고유성(인격 존재)이어야 합니다. 로단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엄청나게 감화되었습니다.

161:1.11 (1784.8) When Rodan heard these arguments, he said: “I am convinced. I will confess God as a person if you will permit me to qualify my confession of such a belief by attaching to the meaning of personality a group of extended values, such as superhuman, transcendent, supreme, infinite, eternal, final, and universal. I am now convinced that, while God must be infinitely more than a personality, he cannot be anything less. I am satisfied to end the argument and to accept Jesus as the personal revelation of the Father and the satisfaction of all unsatisfied factors in logic, reason, and philosophy.” 로단이 이런 줄거리를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고유성(인격성)의 의미에 초인간적, 초월적, 최극, 무한, 영원, 최종 및 우주와 같은 집단의 광대한 가치를 부여한 그런 믿음을 내가 적합하게 고백하도록 너희가 내게 기회를 주면, 나는 하느님을 고유 존재로 고백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고유성(인격 존재) 이상으로 무한해야 하지만, 그는 그 이하도 될 수 없다고 나는 지금 확신합니다. 나는 흡족하게 논쟁을 끝내고 예수를 아버지의 고유성(인격) 계시와 충족되지 않은 모든 논리, 이성 및 철학의 요소에 대한 흡족한 실현으로서 받아들입니다.”

2. The Divine Nature of Jesus 예수의 신적 본성

220515 예수의 신적 본성1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161:2.1 (1785.1) Since Nathaniel and Thomas had so fully approved Rodan’s view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re remained only one more point to consider, the teaching dealing with the divine nature of Jesus, a doctrine only so recently publicly announced. Nathaniel and Thomas jointly presented their views of the divine nature of the Master, and the following narrative is a condensed, rearranged, and restated presentation of their teaching: 나다니엘과 도마가 하느님 나라 복음에 대한 로단의 견해를 그렇게 충분히 승인했기에, 고려할 사항이 단 하나 더 있었는데, 예수의 신적 본성을 다루는 가르침, 바로 그렇게 최근에 공공연히 발표한 교리였습니다. 나다니엘과 도마는 공동으로 주(主)의 신적 본성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말했으며, 다음 이야기는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재정리하여 다시 진술한 발표입니다.

161:2.2 (1785.2) 1. Jesus has admitted his divinity, and we believe him. Many remarkable things have happened in connection with his ministry which we can understand only by believing that he is the Son of God as well as the Son of Man. 예수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사실로 인정했고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신자神子)이심도 믿어야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사역과 관련하여 여러 놀랄만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161:2.3 (1785.3) 2. His life association with us exemplifies the ideal of human friendship; only a divine being could possibly be such a human friend. He is the most truly unselfish person we have ever known. He is the friend even of sinners; he dares to love his enemies. He is very loyal to us. While he does not hesitate to reprove us, it is plain to all that he truly loves us. The better you know him, the more you will love him. You will be charmed by his unswerving devotion. Through all these years of our failure to comprehend his mission, he has been a faithful friend. While he makes no use of flattery, he does treat us all with equal kindness; he is invariably tender and compassionate. He has shared his life and everything else with us. We are a happy community; we share all things in common. We do not believe that a mere human could live such a blameless life under such trying circumstances. 우리와 사귀는 그의 생활은 이상적(理想的)인 인간 교우관계의 모범입니다. 신적 존재만이 그와 같은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진실로 가장 이타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심지어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그는 감히 자기 대적들을 사랑할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의리(義理)가 있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우리를 나무라지만, 그가 우리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분명합니다. 네가 그를 잘 알수록 너는 그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의 확고한 헌신에 너는 매료(魅了)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사명을 파악하지 못하던 이런 몇 년간 내내, 그는 신실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전혀 아첨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한결같이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는 변함없이 다정하고 인정이 많습니다. 그는 자기 생활과 나머지 모두를 우리와 공유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공유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인간이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 나무랄 데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161:2.4 (1785.4) 3. We think Jesus is divine because he never does wrong; he makes no mistakes. His wisdom is extraordinary; his piety superb. He lives day by day in perfect accord with the Father’s will. He never repents of misdeeds because he transgresses none of the Father’s laws. He prays for us and with us, but he never asks us to pray for him. We believe that he is consistently sinless. We do not think that one who is only human ever professed to live such a life. He claims to live a perfect life, and we acknowledge that he does. Our piety springs from repentance, but his piety springs from righteousness. He even professes to forgive sins and does heal diseases. No mere man would sanely profess to forgive sin; that is a divine prerogative. And he has seemed to be thus perfect in his righteousness from the times of our first contact with him. We grow in grace and in the knowledge of the truth, but our Master exhibits maturity of righteousness to start with. All men, good and evil, recognize these elements of goodness in Jesus. And yet never is his piety obtrusive or ostentatious. He is both meek and fearless. He seems to approve of our belief in his divinity. He is either what he professes to be, or else he is the greatest hypocrite and fraud the world has ever known. We are persuaded that he is just what he claims to be. 우리는 예수가 절대로 잘못하지 않으므로 그가 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떤 실수도 없습니다. 그의 지혜는 비범(非凡)합니다. 그의 신앙심은 비할 데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조금도 틀림없이 꼭 맞게 매일 삽니다. 그는 아버지의 어떤 율법도 어기지 않기 때문에 결코 그릇된 행위를 뉘우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기도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결같이 죄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한 자가 그런 삶을 살려고 항상 속이며 주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그가 그러하다고 인정합니다. 우리 신앙심은 회개에서 생기지만, 그의 신앙심은 공의(公義)에서 나옵니다. 그는 심지어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公言)하며 질병을 치료합니다. 한낱 사람에 불과한 자는 죄를 용서한다고 절대로 제정신으로 공언(公言)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적 특권입니다. 우리가 처음 그와 접촉할 때부터 그는 자신의 공의(公義)에서 이렇게 완전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의 지식으로 성장하지만, 우리 주(主)는 처음부터 성숙한 공의(公義)를 드러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모두 예수의 이런 선(善)한 요소를 알아봅니다. 그래도 그의 신앙심은 절대로 눈에 거슬리거나 허세 부리지 않습니다. 그는 온화하며 대담(大膽 용감)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우리 믿음을 찬성하는 듯합니다. 그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지금까지 세상이 알고 있는 최고 위선자와 사기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주장한 그대로라고 확신합니다.

220522 예수의 신적 본성2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161:2.5 (1785.5) 4. The uniqueness of his character and the perfection of his emotional control convince us that he is a combination of humanity and divinity. He unfailingly responds to the spectacle of human need; suffering never fails to appeal to him. His compassion is moved alike by physical suffering, mental anguish, or spiritual sorrow. He is quick to recognize and generous to acknowledge the presence of faith or any other grace in his fellow men. He is so just and fair and at the same time so merciful and considerate. He grieves over the spiritual obstinacy of the people and rejoices when they consent to see the light of truth. 우리는 독특한 그의 성품과 완전한 그의 감정 제어(制御)로 그가 인간성(人間性)과 신성(神性)의 결합체(結合體)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인간 필요성의 참상(慘狀)에 어김없이 반응합니다. 그의 마음을 끌지 않은 고통은 결코 없습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민 또는 영적 슬픔을 한결같이 측은(惻隱)하게 여깁니다. 그는 자기 동료 인간의 신앙이나 다른 은혜(恩惠)가 있음을 즉각 알아보고 너그럽게 인정합니다. 그는 아주 공명정대(公明正大 사사로움이 없이 정당하고 떳떳)한 동시에 아주 인정이 많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고집(固執)을 몹시 슬퍼하고 그들이 동감하여 진리의 빛을 볼 때 기뻐합니다.

161:2.6 (1786.1) 5. He seems to know the thoughts of men’s minds and to understand the longings of their hearts. And he is always sympathetic with our troubled spirits. He seems to possess all our human emotions, but they are magnificently glorified. He strongly loves goodness and equally hates sin. He possesses a superhuman consciousness of the presence of Deity. He prays like a man but performs like a God. He seems to foreknow things; he even now dares to speak about his death, some mystic reference to his future glorification. While he is kind, he is also brave and courageous. He never falters in doing his duty. 그는 사람 마음의 생각을 알고 그 심정의 갈망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불안한 우리 영(靈)에 언제나 공감을 나타냅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들은 비할 데 없이 찬란하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힘차게 선(善)을 사랑하지만, 똑같이 죄(罪)를 미워합니다. 그는 신(神)의 현존에 대한 초인간적 의식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처럼 기도하지만, 하느님처럼 행합니다. 그는 상황을 미리 아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도 대담하게 자기 죽음, 하느님께 영광스러운 자기 미래에 대해 뭔가 신비한 언급을 말합니다. 그는 마음씨가 곱지만, 그는 또한 씩씩하고 기운차며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임무 수행에 절대로 망설이지 않습니다.

161:2.7 (1786.2) 6. We are constantly impressed by the phenomenon of his superhuman knowledge. Hardly does a day pass but something transpires to disclose that the Master knows what is going on away from his immediate presence. He also seems to know about the thoughts of his associates. He undoubtedly has communion with celestial personalities; he unquestionably lives on a spiritual plane far above the rest of us. Everything seems to be open to his unique understanding. He asks us questions to draw us out, not to gain information. 우리는 그의 초인간적 지식의 현상으로 끊임없이 감명(感銘)받습니다. 바로 주(主)의 눈앞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주(主)께서 알고 있음이 드러나는 어떤 일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어납니다. 그는 또한 자기 동료의 생각에 대해 아는 것 같습니다. 그는 분명히 천상의 고유성들과 친밀히 사귀고 있습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나머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영적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독특한 식별력에 드러나 있는 듯합니다. 그는 정보 이득이 아니라, 우리와 대화하려고 질문합니다.

220529 예수의 신적 본성3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161:2.8 (1786.3) 7. Recently the Master does not hesitate to assert his superhumanity. From the day of our ordination as apostles right on down to recent times, he has never denied that he came from the Father above. He speaks with the authority of a divine teacher. The Master does not hesitate to refute the religious teachings of today and to declare the new gospel with positive authority. He is assertive, positive, and authoritative. Even John the Baptist, when he heard Jesus speak, declared that he was the Son of God. He seems to be so sufficient within himself. He craves not the support of the multitude; he is indifferent to the opinions of men. He is brave and yet so free from pride. 최근에 주(主)님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초(超)인간성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사도로 임직(任職)일부터 바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이 하늘 아버지에게서 왔음을 결코 부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신적 교사의 권위로 말합니다. 주(主)님은 망설임 없이 오늘날의 종교적 가르침에 대해 잘못된 점을 조리 있게 공격해서 말하고 단호한 권위로 새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는 단정적이고 단호하며 권위적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의 말씀을 듣자,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그 자신으로 아주 충분해 보입니다. 그는 대중의 지지를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여론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용감하지만, 우월감(優越感 뛰어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이 없습니다.

161:2.9 (1786.4) 8. He constantly talks about God as an ever-present associate in all that he does. He goes about doing good, for God seems to be in him. He makes the most astounding assertions about himself and his mission on earth, statements which would be absurd if he were not divine. He once declared, “Before Abraham was, I am.” He has definitely claimed divinity; he professes to be in partnership with God. He well-nigh exhausts the possibilities of language in the reiteration of his claims of intimate association with the heavenly Father. He even dares to assert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He says that anyone who has seen him has seen the Father. And he says and does all these tremendous things with such childlike naturalness. He alludes to his association with the Father in the same manner that he refers to his association with us. He seems to be so sure about God and speaks of these relations in such a matter-of-fact way.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하느님을 항상 존재하는 동료로서 변함없이 말합니다. 그가 계속 선(善)을 행하는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지상 사명에 대해 자신이 신적이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진술, 가장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합니다. 그는 이전에(157:6.11)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명백히 신성(神性)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협력한다고 공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라는 반복적 주장에 가능한 언어를 거의 다 사용합니다. 그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대담하게도 주장합니다. 그는 누구나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어린애다운 자연스러움으로 이 엄청난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합니다. 그는 우리와 자신의 관계를 말하는 것과 똑같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해 대단히 확신하고 그렇게 사무적으로 이런 관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161:2.10 (1786.5) 9. In his prayer life he appears to communicate directly with his Father. We have heard few of his prayers, but these few would indicate that he talks with God, as it were, face to face. He seems to know the future as well as the past. He simply could not be all of this and do all of these extraordinary things unless he were something more than human. We know he is human, we are sure of that, but we are almost equally sure that he is also divine. We believe that he is divine. We are convinced that he is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그는 자기 기도 생활에서 자기 아버지와 직접 소통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를 거의 듣지 못했지만, 말하자면 그가 하느님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심을 이런 몇 가지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는 과거만 아니라 미래도 아는 듯이 보입니다. 그가 인간 이상의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면, 그가 정말 이 모든 것일 수 없었고 이런 엄청난 모든 일들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인간임을 알고 그것을 확신하지만, 우리는 거의 똑같이 그가 또한 신적이심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가 신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며 신자(神者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신합니다.

161:2.11 (1787.1) When Nathaniel and Thomas had concluded their conferences with Rodan, they hurried on toward Jerusalem to join their fellow apostles, arriving on Friday of that week. This had been a great experience in the lives of all three of these believers, and the other apostles learned much from the recounting of these experiences by Nathaniel and Thomas. 나다니엘과 도마는 로단과 회의를 마치고, 자기 동료 사도들과 합하려고 서둘러 예루살렘을 향했고, 그 주간 금요일(AD 29. 9. 30)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이 모든 세 신자(信者)의 생활에서 커다란 체험이었고 나다니엘과 도마가 이런 체험을 자세히 이야기하여 다른 사도들이 많이 배웠습니다.

161:2.12 (1787.2) Rodan made his way back to Alexandria, where he long taught his philosophy in the school of Meganta. He became a mighty man in the later affairs of the kingdom of heaven; he was a faithful believer to the end of his earth days, yielding up his life in Greece with others when the persecutions were at their height. 로단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메간타 학교에서 자기 철학을 오랫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후 하늘나라 업무에서 세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충실한 신자였고, 박해가 한창일 때, 다른 이들과 함께 그리스에서 죽었습니다.

3. Jesus’ Human and Divine Minds 예수의 인간적 및 신적 마음

220605 예수의 인간적 및 신적 마음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161:3.1 (1787.3) Consciousness of divinity was a gradual growth in the mind of Jesus up to the occasion of his baptism. After he became fully self-conscious of his divine nature, prehuman existence, and universe prerogatives, he seems to have possessed the power of variously limiting his human consciousness of his divinity. It appears to us that from his baptism until the crucifixion it was entirely optional with Jesus whether to depend only on the human mind or to utilize the knowledge of both the human and the divine minds. At times he appeared to avail himself of only that information which was resident in the human intellect. On other occasions he appeared to act with such fullness of knowledge and wisdom as could be afforded only by the utilization of the superhuman content of his divine consciousness. 신성(神性)에 대한 의식은 그의 세례일(AD26.1.14 월 정오)까지 예수의 마음에서 점차 성장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신적 본성, 인간 이전(以前)의 존재 및 우주 특권을 스스로 완전히 의식한 후에, 그는 자기 신성에 대한 인간 의식을 다양하게 제한하는 권능을 소유한 것 같습니다. 그의 세례부터 십자가 처형(處刑)까지 인간 마음에만 의존할지, 인간적 및 신적 마음의 지식 둘 다 사용할지 완전히 예수 마음에 달려 있던 것으로 우리에게 보입니다. 가끔 그는 인간 지성에 내재한 그런 정보만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경우에 그는 자기 신적 의식의 초인적 내용을 이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충만한 지식과 지혜로 행한 듯이 보였습니다.

161:3.2 (1787.4) We can understand his unique performances only by accepting the theory that he could, at will, self-limit his divinity consciousness. We are fully cognizant that he frequently withheld from his associates his foreknowledge of events, and that he was aware of the nature of their thinking and planning. We understand that he did not wish his followers to know too fully that he was able to discern their thoughts and to penetrate their plans. He did not desire too far to transcend the concept of the human as it was held in the minds of his apostles and disciples. 우리는 그가 마음대로 자기 신성 의식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었다는 원리를 인정해야만 그의 독특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미리 알고 계신 사건을 자기 동료에게 여러 번 알리지 않았고, 그가 그들의 생각과 계획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있었음을 우리는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로, 그는 자신이 자기 지지자(支持者)들의 생각을 알아내고 그들 계획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음을 그들이 아주 잘 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사도와 제자들의 마음에 품고 있던, 인간의 개념을 너무 많이 초월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161:3.3 (1787.5) We are utterly at a loss to differentiate between his practice of self-limiting his divine consciousness and his technique of concealing his preknowledge and thought discernment from his human associates. We are convinced that he used both of these techniques, but we are not always able, in a given instance, to specify which method he may have employed. We frequently observed him acting with only the human content of consciousness; then would we behold him in conference with the directors of the celestial hosts of the universe and discern the undoubted functioning of the divine mind. And then on almost numberless occasions did we witness the working of this combined personality of man and God as it was activated by the apparent perfect union of the human and the divine minds. This is the limit of our knowledge of such phenomena; we really do not actually know the full truth about this mystery. 우리는 그의 신적 의식을 스스로 제한하는 그의 습관과 그의 사전(事前)지식을 감추고 자기 인간 동료로부터 생각을 알아내는 그의 기법 사이를 전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런 두 기법 모두 사용했다고 확신하지만, 특정한 경우에, 우리는 그가 사용한 방법을 언제나 명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인간 의식의 내용만으로 행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천상 무리의 관리자들과 회의 중인 그를 볼 때 명백히 신적 마음의 기능을 알아차리곤 했습니다. 그런 다음 거의 수없이 많은 경우에, 인간 및 신적 마음의 또렷이 완전한 연합으로 명백히 활성화되었을 때, 인간과 하느님이 이렇게 결합한 고유성의 작용을 우리 눈앞에서 봤습니다. 이것이 그런 현상에 대한 우리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신비에 대한 완전한 진리를 정말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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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2 At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에

Paper 162

At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에

“Master…bid fire come down from heaven…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도록 명하소서…”
1. The Dangers of the Visit to Jerusalem 위험한 예루살렘 방문
2. The First Temple Talk 첫 번째 성전 말씀
Eber the officer of the Sanhedrin 산헤드린의 관리 이버
3.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간통(姦通)으로 잡혀 온 여성
4.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
5. Sermon on the L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에 대한 설교
6. Discourse on the Water of Life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7. The Discourse on Spiritual Freedom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8. The Visit with Martha and Mary 마르다와 마리아 심방(尋訪 찾아서 방문)
9. At Bethlehem with Abner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함께

220612 절대적 예수 환대 눅9:52-56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54 When the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asked, “Lord, do you want us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m?”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 56 Then he and his disciples went to another village.

162:0.1 (1788.1) WHEN Jesus started up to Jerusalem with the ten apostles, he planned to go through Samaria, that being the shorter route. Accordingly, they passed down the eastern shore of the lake and, by way of Scythopolis, entered the borders of Samaria. Near nightfall Jesus sent Philip and Matthew over to a village on the eastern slopes of Mount Gilboa to secure lodging for the company. It so happened that these villagers were greatly prejudiced against the Jews, even more so than the average Samaritans, and these feelings were heightened at this particular time as so many were on their way to the feast of tabernacles. These people knew very little about Jesus, and they refused him lodging because he and his associates were Jews. When Matthew and Philip manifested indignation and informed these Samaritans that they were declining to entertain the Holy One of Israel, the infuriated villagers chased them out of the little town with sticks and stones. 예수께서 10 사도와 예루살렘으로 걷기 시작할 때(AD29. 9.26 월), 그는 사마리아를 거칠 작정이었는데 그것이 지름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호수 동쪽 기슭으로 내려가 스키토폴리스를 거쳐 사마리아 변경에 들어갔습니다. 황혼 무렵, 예수께서 일행이 숙박할 수 있도록 길보아 산 동쪽 경사지에 있는 마을로 빌립과 마태를 보냈습니다. 공교롭게 이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 보통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은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이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막절(帳幕節)에 가는 중이어서 이런 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거의 몰랐고, 예수와 그의 동료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투숙을 거부했습니다. 마태와 빌립이 분노한 얼굴로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구세주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격분(激奮)한 마을 사람들이 막대기와 돌로 그들을 작은 마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162:0.2 (1788.2) After Philip and Matthew had returned to their fellows and reported how they had been driven out of the village, James and John stepped up to Jesus and said: “Master, we pray you to give us permission to bid fire come down from heaven to devour these insolent and impenitent Samaritans.” But when Jesus heard these words of vengeance, he turned upon the sons of Zebedee and severely rebuked them: “You know not what manner of attitude you manifest. Vengeance savors not of the outlook of the kingdom of heaven. Rather than dispute, let us journey over to the little village by the Jordan ford.” Thus because of sectarian prejudice these Samaritans denied themselves the honor of showing hospitality to the Creator Son of a universe. 빌립과 마태가 동료들에게 돌아와 자신들이 어떻게 마을 밖으로 쫓겨났는지 말한 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주여, 저희에게 명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무례하고 고집 센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삼키도록, 허락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수(怨讎)갚는 이런 말을 듣고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몸을 돌려 엄히 꾸짖었습니다(눅9:54-55). “너희는 자기 태도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모르느니라. 원수(怨讎) 갚기는 하늘나라 사고방식의 경향이 아니니라. 다투지 말고, 요단강 여울(얕은 곳) 가까이 작은 마을로 이동하자.” 종파적 편견 때문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우주의 창조자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영예(榮譽)를 사절(謝絶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침)했습니다.

162:0.3 (1788.3) Jesus and the ten stopped for the night at the village near the Jordan ford. Early the next day they crossed the river and continued on to Jerusalem by way of the east Jordan highway, arriving at Bethany late Wednesday evening. Thomas and Nathaniel arrived on Friday, having been delayed by their conferences with Rodan. 예수와 10 사도는 요단강 여울 근처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일찍 그들은 강을 건너, 동쪽 요단 대로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서 수요일(AD29. 9. 28) 저녁 늦게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로단과 회의로 지체되었던, 도마와 나다니엘은 금요일에 도착했습니다.

162:0.4 (1788.4) Jesus and the twelve remained in the vicinity of Jerusalem until the end of the following month (October), about four and one-half weeks. Jesus himself went into the city only a few times, and these brief visits were made during the days of the feast of tabernacles. He spent a considerable portion of October with Abner and his associates at Bethlehem. 예수와 12 사도는 다음 달(10월) 말 약 4주 반까지 예루살렘 부근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도시 안으로 몇 번만 가셨고, 이런 짧은 방문은 장막절 며칠간이었습니다. 그는 10월 중 많은 날, 아브너 및 그 동료들과 베들레헴에서 보냈습니다.

1. The Dangers of the Visit to Jerusalem 위험한 예루살렘 방문

220619 장막절 공적 전도의 동력 요7:2-6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2 But when the Jewish Festival of Tabernacles was near, 3 Jesus’ brothers said to him, “Leave Galilee and go to Judea, so that your disciples there may see the works you do. 4 No one who wants to become a public figure acts in secret. Since you are doing these things, show yourself to the world.” 5 For even his own brothers did not believe in him. 6 Therefore Jesus told them, “My time is not yet here; for you any time will do.

162:1.1 (1788.5) Long before they fled from Galilee, the followers of Jesus had implored him to go to Jerusalem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in order that his message might have the prestige of having been preached at the center of Jewish culture and learning; but now that he had actually come to Jerusalem to teach, they were afraid for his life. Knowing that the Sanhedrin had sought to bring Jesus to Jerusalem for trial and recalling the Master’s recently reiterated declarations that he must be subject to death, the apostles had been literally stunned by his sudden decision to attend the feast of tabernacles. To all their previous entreaties that he go to Jerusalem he had replied, “The hour has not yet come.” Now, to their protests of fear he answered only, “But the hour has come.” 그들이 갈릴리에서 도피하기 오래전에,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메시지가 유대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에서 전파되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실제로 가르치러 예루살렘에 오자, 그들은 그의 목숨을 걱정했습니다. 산헤드린이 재판을 위해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했음을 알고, 최근에 주께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반복했던 선언이 생각나서, 장막절에 참석한다는 갑작스러운 주님의 결정에 사도들은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그들의 모든 이전 간청에 대해 그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두려움으로 인한 그들의 이의(異議)제기에, 그는 “하지만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162:1.2 (1789.1)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went boldly into Jerusalem on several occasions and publicly taught in the temple. This he did in spite of the efforts of his apostles to dissuade him. Though they had long urged him to proclaim his message in Jerusalem, they now feared to see him enter the city at this time, knowing full well that the scribes and Pharisees were bent on bringing about his death. 장막절 기간에 예수는 대담하게 여러 번 예루살렘 안으로 가셨고 성전에서 공공연히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기 사도들이 그를 단념시키려고 애썼지만 이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오랫동안 재촉했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기에, 이때 도시로 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그들은 이제 두려웠습니다.

162:1.3 (1789.2) Jesus’ bold appearance in Jerusalem more than ever confused his followers. Many of his disciples, and even Judas Iscariot, the apostle, had dared to think that Jesus had fled in haste into Phoenicia because he feared the Jewish leaders and Herod Antipas. They failed to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the Master’s movements. His presence in Jerusalem at the feast of tabernacles, even in opposition to the advice of his followers, sufficed forever to put an end to all whisperings about fear and cowardice.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대담한 모습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여느 때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그의 여러 제자가, 사도 가롯 유다도,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 안티파스를 두려워해서 그가 서둘러 페니키아로 도피했다고 주제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主)의 동정(動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추종자들의 권고에 반대하기까지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존재는 두려움과 비겁에 대한 모든 소문이 영원토록 그치기에 충분했습니다.

162:1.4 (1789.3)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thousands of believers from all parts of the Roman Empire saw Jesus, heard him teach, and many even journeyed out to Bethany to confer with him regarding the progress of the kingdom in their home districts. 장막절 기간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수천의 신자(信者)들이 예수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다수가 자신들의 고향 지역에서 하느님 나라 왕국의 진보에 관해 그와 의논하려고 베다니로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162:1.5 (1789.4) There were many reasons why Jesus was able publicly to preach in the temple courts throughout the days of the feast, and chief of these was the fear that had come over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as a result of the secret division of sentiment in their own ranks. It was a fact that many of the members of the Sanhedrin either secretly believed in Jesus or else were decidedly averse to arresting him during the feast, when such large numbers of people were present in Jerusalem, many of whom either believed in him or were at least friendly to the spiritual movement which he sponsored. 예수께서 절기 내내 성전 뜰에서 공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가 있었고, 이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헤드린 자체 계층에서 비밀리에 정서가 분열된 결과로서 그들에게 엄습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여러 회원이 은밀히 예수를 믿거나 그렇지 않으면 절기 동안 그를 체포하기를 단호히 반대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그중 다수가 그를 믿었거나, 적어도 자신이 후원한 영적 운동에 우호적이었음이 사실이었습니다.

162:1.6 (1789.5) The efforts of Abner and his associates throughout Judea had also done much to consolidate sentiment favorable to the kingdom, so much so that the enemies of Jesus dared not be too outspoken in their opposition. This was one of the reasons why Jesus could publicly visit Jerusalem and live to go away. One or two months before this he would certainly have been put to death. 예수의 대적들이 감히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못할 만큼, 유대 전역에서 아브너와 그 동료들의 노력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호의적인 정서의 강화에 또한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살아서 떠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두 달 전에 그는 반드시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220626 예수 신성(神性)의 정식 발표 요7:11-15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1 Now at the festival the Jewish leaders were watching for Jesus and asking, “Where is he?” 12 Among the crowds there was widespread whispering about him. Some said, “He is a good man.” Others replied, “No, he deceives the people.” 13 But no one would say anything publicly about him for fear of the leaders. 14 Not until halfway through the festival did Jesus go up to the temple courts and begin to teach. 15 The Jews there were amazed and asked, “How did this man get such learning without having been taught?”

162:1.7 (1789.6) But the audacious boldness of Jesus in publicly appearing in Jerusalem overawed his enemies; they were not prepared for such a daring challenge. Several times during this month the Sanhedrin made feeble attempts to place the Master under arrest, but nothing came of these efforts. His enemies were so taken aback by Jesus’ unexpected public appearance in Jerusalem that they conjectured he must have been promised protection by the Roman authorities. Knowing that Philip (Herod Antipas’s brother) was almost a follower of Jesus, the members of the Sanhedrin speculated that Philip had secured for Jesus promises of protection against his enemies. Jesus had departed from their jurisdiction before they awakened to the realization that they had been mistaken in the belief that his sudden and bold appearance in Jerusalem had been due to a secret understanding with the Roman officials. 그러나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신 예수의 대담한 배짱이 그의 대적들을 무서워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대담한 도전에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달에 여러 번 산헤드린은 주님을 잡아 가두려고 미약하게 시도했지만 이런 노력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예수님의 예기치 않은 예루살렘 공적 출현으로 인해 너무 깜짝 놀라서 그들은 그가 로마 당국의 보호를 틀림없이 약속받았다고 추측했습니다. 빌립(헤롯 안티파스의 형제)이 거의 예수의 추종자였음을 알았기에, 산헤드린 회원들은 빌립이 예수에게 그의 대적들에 대해 보호의 약속을 책임졌다고 추측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갑자기 대담하게 출현한 것은 로마 관리들과 비밀 약정 때문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실상을 그들이 깨닫기 전에, 예수는 그들의 관할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162:1.8 (1789.7) Only the twelve apostles had known that Jesus intended to attend the feast of tabernacles when they had departed from Magadan. The other followers of the Master were greatly astonished when he appeared in the temple courts and began publicly to teach, and the Jewish authorities were surprised beyond expression when it was reported that he was teaching in the temple. 그들이 마가단에서 출발할 때 예수께서 장막절에 참석할 생각이었음을 열두 사도만이 알았습니다. 주께서 성전 뜰에 나타나 공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자 주(主)님의 다른 추종자들은 대단히 놀랐고, 유대 당국은 그가 성전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놀랐습니다.

162:1.9 (1790.1) Although his disciples had not expected Jesus to attend the feast, the vast majority of the pilgrims from afar who had heard of him entertained the hope that they might see him at Jerusalem. And they were not disappointed, for on several occasions he taught in Solomon’s Porch and elsewhere in the temple courts. These teachings were really the official or formal announcement of the divinity of Jesus to the Jewish people and to the whole world.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절기에 참석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순례자의 대다수는 예루살렘에서 그를 만나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러 번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과 여러 성전 뜰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실제로 예수의 신성(神性)을 유대 민족과 온 세상에 공식적(公式的)으로 정식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162:1.10 (1790.2) The multitudes who listened to the Master’s teachings were divided in their opinions. Some said he was a good man; some a prophet; some that he was truly the Messiah; others said he was a mischievous meddler, that he was leading the people astray with his strange doctrines. His enemies hesitated to denounce him openly for fear of his friendly believers, while his friends feared to acknowledge him openly for fear of the Jewish leaders, knowing that the Sanhedrin was determined to put him to death. But even his enemies marveled at his teaching, knowing that he had not been instructed in the schools of the rabbis.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군중은 그들의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어떤 이들을 그를 선한 사람이라, 어떤 이들은 선지자라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진실로 메시아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말썽을 일으키는 참견쟁이로 자기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예수를 지지하는 신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어 그를 비난할 수 없었던 반면에 예수의 지지자들은 산헤드린이 그를 처형하기로 정했음을 알고 유대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어 그를 인정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도 그가 랍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음을 알고, 그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162:1.11 (1790.3) Every time Jesus went to Jerusalem, his apostles were filled with terror. They were the more afraid as, from day to day, they listened to his increasingly bold pronouncements regarding the nature of his mission on earth. They were unaccustomed to hearing Jesus make such positive claims and such amazing assertions even when preaching among his friends.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사도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의 사명의 본질에 대해 점점 더 대담한 그의 선언을 들을수록 그들은 나날이 더 두려웠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지지자들 사이에서 전하실 때도 그렇게 단호하게 주장하고 그렇게 놀랍게 단언하는 예수님의 진술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보기 드물었습니다.

2. The First Temple Talk 첫 번째 성전 말씀

220703 참된 영적 판단 요7:16-30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16 Jesus answered, “My teaching is not my own. It comes from the one who sent me. 17 Anyone who chooses to do the will of God will find out whether my teaching comes from God or whether I speak on my own. 18 Whoever speaks on their own does so to gain personal glory, but he who seeks the glory of the one who sent him is a man of truth; there is nothing false about him. 19 Has not Moses given you the law? Yet not one of you keeps the law. Why are you trying to kill me?” 20 “You are demon-possessed,” the crowd answered. “Who is trying to kill you?” 21 Jesus said to them, “I did one miracle, and you are all amazed. 22 Yet, because Moses gave you circumcision (though actually it did not come from Moses, but from the patriarchs), you circumcise a boy on the Sabbath. 23 Now if a boy can be circumcised on the Sabbath so that the law of Moses may not be broken, why are you angry with me for healing a man’s whole body on the Sabbath? 24 Stop judging by mere appearances, but instead judge correctly.” 25 At that point some of the people of Jerusalem began to ask, “Isn’t this the man they are trying to kill? 26 Here he is, speaking publicly, and they are not saying a word to him. Have the authorities really concluded that he is the Messiah? 27 But we know where this man is from; when the Messiah comes, no one will know where he is from.” 28 Then Jesus, still teaching in the temple courts, cried out, “Yes, you know me, and you know where I am from. I am not here on my own authority, but he who sent me is true. You do not know him, 29 but I know him because I am from him and he sent me.” 30 At this they tri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a hand on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162:2.1 (1790.4) The first afternoon that Jesus taught in the temple, a considerable company sat listening to his words depicting the liberty of the new gospel and the joy of those who believe the good news, when a curious listener interrupted him to ask: “Teacher, how is it you can quote the Scriptures and teach the people so fluently when I am told that you are untaught in the learning of the rabbis?” Jesus replied: “No man has taught me the truths which I declare to you. And this teaching is not mine but His who sent me. If any man really desires to do my Father’s will, he shall certainly know about my teaching, whether it be God’s or whether I speak for myself. He who speaks for himself seeks his own glory, but when I declare the words of the Father, I thereby seek the glory of him who sent me. But before you try to enter into the new light, should you not rather follow the light you already have? Moses gave you the law, yet how many of you honestly seek to fulfill its demands? Moses in this law enjoins you, saying, ‘You shall not kill’; notwithstanding this command some of you seek to kill the Son of Man.”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쳤던 첫날 오후에 꽤 많이 모인 사람이 앉아서 새로운 복음의 해방과 복음을 믿는 자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의 말씀을 들었는데, 호기심으로 잘 듣던 사람이 끼어들어 그에게 “선생님, 당신은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제가 들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아주 거침없이 성서를 인용하고 백성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요7:15)?”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진리를 내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그리고 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그분의 것이니라(요7:16). 사람이 내 아버지의 뜻을 참으로 행하려고 하면, 그는 내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것인지 내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 것이니라(요7:17).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는 그 자신의 영광을 구하나,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선포할 때, 나는 그렇게 하여 나를 보낸 그의 영광을 구하느니라(요7:18). 그러나 너희가 새 빛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전에 도리어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빛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너희 중 몇 명이 정말로 그 요건을 이행하려 하느냐? 모세는 이 율법으로 너희에게 요구하여 ‘살인하지 말라(출20:13).’라고 말하느니라.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너희 중 일부는 인자(人子)를 죽이려고 하느니라(요7:19).”

162:2.2 (1790.5) When the crowd heard these words, they fell to wrangling among themselves. Some said he was mad; some that he had a devil. Others said this was indeed the prophet of Galilee whom the scribes and Pharisees had long sought to kill. Some said the religious authorities were afraid to molest him; others thought that they laid not hands upon him because they had become believers in him. After considerable debate one of the crowd stepped forward and asked Jesus, “Why do the rulers seek to kill you?” And he replied: “The rulers seek to kill me because they resent my teaching about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 gospel that sets men free from the burdensome traditions of a formal religion of ceremonies which these teachers are determined to uphold at any cost. They circumcise in accordance with the law on the Sabbath day, but they would kill me because I once on the Sabbath day set free a man held in the bondage of affliction. They follow after me on the Sabbath to spy on me but would kill me because on another occasion I chose to make a grievously stricken man completely whole on the Sabbath day. They seek to kill me because they well know that, if you honestly believe and dare to accept my teaching, their system of traditional religion will be overthrown, forever destroyed. Thus will they be deprived of authority over that to which they have devoted their lives since they steadfastly refuse to accept this new and more glorious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And now do I appeal to every one of you: Judge not according to outward appearances but rather judge by the true spirit of these teachings; judge righteously.” 군중이 이런 말을 듣자, 그들 중에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일부는 그에게 악마가 있다고 했습니다(요7:20a). 다른 이들은, 이 사람이 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오랫동안 죽이려 했던 갈릴리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요7:25). 어떤 이들은 종교 당국이 그를 괴롭히기 주저한다고 말했습니다(요7:26).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믿게 되어서 그들은 그를 체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당한 토론 후 무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가 예수께 “통치자들이 왜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요7:20b)?”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답했습니다. “통치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좋은 소식, 이런 선생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옹호하기로 결심한 의례적 형식 종교의 번거로운 전통에서 사람들을 해방하는 복음에 대한 내 가르침에 분개(憤慨)해서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요7:21). 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나, 내가 이전에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을 안식일에 자유롭게 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느니라. 그들이 나를 감시하려고 안식일에 나를 따라다니지만, 또 다른 경우에 내가 심하게 시달리는 사람을 안식일에 완전히 건강하게 되도록 결정했다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요7:22-23). 그들은 너희가 내 가르침을 정직하게 믿고 대담하게 받아들이면, 전통 종교에 속한 자신들의 체계가 무너져, 영원하게 파괴될 것을, 자신들이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이 새로우며 더 영광스러운 복음을 자신들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일생을 바쳤던 것에 대해 지배하는 권위를 빼앗길 것이니라. 그래서 이제 내가 너희 각자에게 호소하느니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가르침의 참된 영(靈)으로 판단하라. 올바로 판단하라(요7:24).”

162:2.3 (1791.1) Then said another inquirer: “Yes, Teacher, we do look for the Messiah, but when he comes, we know that his appearance will be in mystery. We know whence you are. You have been among your brethren from the beginning. The deliverer will come in power to restore the throne of David’s kingdom. Do you really claim to be the Messiah?” And Jesus replied: “You claim to know me and to know whence I am. I wish your claims were true, for indeed then would you find abundant life in that knowledge. But I declare that I have not come to you for myself; I have been sent by the Father, and he who sent me is true and faithful. By refusing to hear me, you are refusing to receive Him who sends me. You, if you will receive this gospel, shall come to know Him who sent me. I know the Father, for I have come from the Father to declare and reveal him to you.” 그러자 또 다른 질문자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메시아를 기대하지만, 그가 올 때, 우리는 그가 신비하게 출현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의 근원을 압니다(요7:27). 당신은 처음부터 당신의 형제 중에 있었습니다. 해방자는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권능으로 올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메시아라고 주장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너는 나와 나의 근원을 안다고 주장하도다. 나는 너희 주장이 진실하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그러면, 너희가 그런 지식으로 풍성한 생명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나는 스스로 너희에게 오지 않았음을 선언하노라.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나를 보내신 그분은 참되고 신실(信實)하시니라. 내 말을 거절하면 나를 보내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니라. 너희가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너희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게 되리라.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그를 선언하고 계시하려고 아버지에게서 왔기 때문이니라(요7:28-29).”

162:2.4 (1791.2) The agents of the scribes wanted to lay hands upon him, but they feared the multitude, for many believed in him. Jesus’ work since his baptism had become well known to all Jewry, and as many of these people recounted these things, they said among themselves: “Even though this teacher is from Galilee, and even though he does not meet all of our expectations of the Messiah, we wonder if the deliverer, when he does come, will really do anything more wonderful than this Jesus of Nazareth has already done.” 서기관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지만(요7:30a),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예수 세례 이후 그의 활동은 온 유대 민족에 잘 알려져 있었고, 이 민족 중 다수가 이런 일들을 자세히 얘기하면서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이 선생님이 갈릴리 출신이고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대를 채우지 않긴 해도, 해방자, 그가 와서, 이 나사렛 예수가 이미 행한 일보다 더 놀라운 어떤 일을 실로 행할지 우리는 미심쩍게 여깁니다(요7:31).”

162:2.5 (1791.3) When the Pharisees and their agents heard the people talking this way, they took counsel with their leaders and decided that something should be done forthwith to put a stop to these public appearances of Jesus in the temple courts. The leaders of the Jews, in general, were disposed to avoid a clash with Jesus, believing that the Roman authorities had promised him immunity. They could not otherwise account for his boldness in coming at this time to Jerusalem; but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did not wholly believe this rumor. They reasoned that the Roman rulers would not do such a thing secretly and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highest governing body of the Jewish nation.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관리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요7:32a), 자기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예수께서 이렇게 공적으로 성전 뜰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즉시 뭔가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대체로 로마 당국이 그에게 보호를 약속했다고 생각하고 예수와 충돌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때 예루살렘에 온 그의 대담함의 이유를 달리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임원들은 이런 소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 국가 최고 관리 기관에 알리지 않고 몰래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220710 새롭게 살아 있는 길 예수 요7:31-36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31 Still, many in the crowd believed in him. They said, “When the Messiah comes, will he perform more signs than this man?” 32 The Pharisees heard the crowd whispering such things about him. Then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sent temple guards to arrest him. 33 Jesus said, “I am with you for only a short time, and then I am going to the one who sent me. 34 You will look for me, but you wi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35 The Jews said to one another, “Where does this man intend to go that we cannot find him? Will he go where our people live scattered among the Greeks, and teach the Greeks? 36 What did he mean when he said, ‘You will look for me, but you wi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162:2.6 (1791.4) Accordingly, Eber, the proper officer of the Sanhedrin, with two assistants was dispatched to arrest Jesus. As Eber made his way toward Jesus, the Master said: “Fear not to approach me. Draw near while you listen to my teaching. I know you have been sent to apprehend me, but you should understand that nothing will befall the Son of Man until his hour comes. You are not arrayed against me; you come only to do the bidding of your masters, and even these rulers of the Jews verily think they are doing God’s service when they secretly seek my destruction. 따라서, 산헤드린의 정식 관리, 이버가 두 보좌관과 함께 예수를 체포하도록 급히 파송되었습니다(요7:32). 이버가 예수를 향해 나아가자, 주(主)께서 말했습니다. “내게 다가오기를 두려워 말라. 내 가르침을 들으면서 가까이 오라. 나는 네가 나를 체포하라고 파송된 줄 알지만, 인자(人子)의 때가 오기까지 그에게 아무 일도 생길 수 없음을 네가 알아야 하리라(요7:30). 너는 나를 대적하지 않느니라. 너는 네 상관의 명령대로 왔을 뿐이고, 이 유대 통치자들도 몰래 나를 파멸시키려 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정말로 생각하느니라.

162:2.7 (1792.1) “I bear none of you ill will. The Father loves you, and therefore do I long for your deliverance from the bondage of prejudice and the darkness of tradition. I offer you the liberty of life and the joy of salvation. I proclaim the new and living way, the deliverance from evil and the breaking of the bondage of sin. I have come that you might have life, and have it eternally. You seek to be rid of me and my disquieting teachings. If you could only realize that I am to be with you only a little while! In just a short time I go to Him who sent me into this world. And then will many of you diligently seek me, but you shall not discover my presence, for where I am about to go you cannot come. But all who truly seek to find me shall sometime attain the life that leads to my Father’s presence.” “나는 너희 중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느니라.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시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희가 편견의 굴레와 전통의 무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권하노라. 나는 새롭게 살아있는 길, 악(惡)으로부터의 해방과 죄(罪)의 속박에 대한 절단을 선포하노라. 나는 너희가 생명을 갖되, 영원하게 그것을 가지도록 왔노라. 너희는 나와 동요시키는 내 가르침을 제거하려 하도다. 내가 잠시만 너희와 함께 있음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조금 있으면 나는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그분께 가느니라(요7:33). 그러면 너희 중 여럿이 부지런히 나를 찾을 것이나, 너희가 내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내가 막 가려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음이라(요7:34). 그러나 진실로 나를 찾으려는 누구나 내 아버지의 앞으로 이끄는 생명을 언젠가 얻으리라.”

162:2.8 (1792.2) Some of the scoffers said among themselves: “Where will this man go that we cannot find him? Will he go to live among the Greeks? Will he destroy himself? What can he mean when he declares that soon he will depart from us, and that we cannot go where he goes?” 비웃던 몇 명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그를 발견할 수 없도록 어디로 가려느냐? 그는 그리스인(人) 중에 살려고 가려는가? 그가 자살하려는가? 그가 곧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가 가는 곳에 우리가 갈 수 없다고 그가 선언하니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7:35-36)?”

162:2.9 (1792.3) Eber and his assistants refused to arrest Jesus; they returned to their meeting place without him. When, therefore,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upbraided Eber and his assistants because they had not brought Jesus with them, Eber only replied: “We feared to arrest him in the midst of the multitude because many believe in him. Besides, we never heard a man speak like this man. There is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about this teacher. You would all do well to go over to hear him.” And when the chief rulers heard these words, they were astonished and spoke tauntingly to Eber: “Are you also led astray? Are you about to believe in this deceiver? Have you heard that any of our learned men or any of the rulers have believed in him? Have any of the scribes or the Pharisees been deceived by his clever teachings? How does it come that you are influenced by the behavior of this ignorant multitude who know not the law or the prophets? Do you not know that such untaught people are accursed?” And then answered Eber: “Even so, my masters, but this man speaks to the multitude words of mercy and hope. He cheers the downhearted, and his words were comforting even to our souls. What can there be wrong in these teachings even though he may not be the Messiah of the Scriptures? And even then does not our law require fairness? Do we condemn a man before we hear him?” And the chief of the Sanhedrin was wroth with Eber and, turning upon him, said: “Have you gone mad? Are you by any chance also from Galilee? Search the Scriptures, and you will discover that out of Galilee arises no prophet, much less the Messiah.” 이버와 그의 보좌관들은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없이 자기들이 만날 장소로 돌아갔습니다(요7:45).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예수를 데려오지 않아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버와 그 보좌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자, 이버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믿기 때문에 무리 가운데 있는 그를 체포하기에 우리는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요7:46). 이 선생에 대해서 특이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으러 가는 게 모두 좋을 것입니다.” 수석 통치자들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조롱하며 이버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미혹되었느냐(요7:47)? 너는 이 사기꾼을 믿으려느냐? 우리 배운 사람들이나 통치자 중에서 누가 그를 믿었다는 말을 네가 들어봤느냐(요7:48)?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중 누가 그의 교묘한 가르침에 속았느냐? 너희가 어떻게,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모르는, 이런 무지한 군중의 태도에 영향을 받느냐?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저주받은 줄 너는 모르느냐(요7:49)?” 그러자 이버가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내 상관들이여, 하지만 이 사람은 군중에게 자비와 소망의 말씀을 강연합니다. 그는 낙담한 자들을 격려하고, 그의 말씀은 우리 혼(魂)들까지 위로했습니다. 그가 성서의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이런 가르침에 무슨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래도, 우리 율법이 공평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 전에 그를 비난합니까(요7:51)?” 그러자 산헤드린의 수석이 이버에게 격노하여 그를 향해 말했습니다. “네가 미쳤느냐? 너도 혹시 갈릴리 출신이냐? 성서를 살펴보라, 그러면 메시아는 고사하고, 갈릴리 출신의 어떤 선지자도 나올 수 없음을 네가 발견할 것이라(요7:52).”

162:2.10 (1792.4) The Sanhedrin disbanded in confusion, and Jesus withdrew to Bethany for the night. 산헤드린은 당황하여 해산했고(요7:53), 예수께서 잠자기 위해 베다니로 물러가셨습니다.

3.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간통(姦通)으로 잡혀 온 여성

220717 우리를 아시는 예수 요8:2-11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2 Now early in the morning He came again into the temple, and all the people came to Him;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3 Then the scribes and Pharisees brought to Him a woman caught in adultery. And when they had set her in the midst, 4 they said to Him, “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adultery, in the very act. 5 Now Moses, in the law, commanded us that such should be stoned. But what do You say?” 6 This they said, testing Him, that they might have something of which to accuse Him. But Jesus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with His finger, as though He did not hear. 7 So when they continued asking Him, He raised Himself up and said to them, “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throw a stone at her first.” 8 And again He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9 Then those who heard it, being convicted by their conscience, went out one by one, beginning with the oldest even to the last. And Jesus was left alone, and the woman standing in the midst. 10 When Jesus had raised Himself up and saw no one but the woman, He said to her, “Woman, where are those accusers of yours? Has no one condemned you?” 11 She said, “No one, Lord.” And Jesus said to her,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162:3.1 (1792.5) It was during this visit to Jerusalem that Jesus dealt with a certain woman of evil repute who was brought into his presence by her accusers and his enemies. The distorted record you have of this episode would suggest that this woman had been brought before Jesus by the scribes and Pharisees, and that Jesus so dealt with them as to indicate that these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might themselves have been guilty of immorality. Jesus well knew that, while these scribes and Pharisees were spiritually blind and intellectually prejudiced by their loyalty to tradition, they were to be numbered among the most thoroughly moral men of that day and generation. 이렇게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간에 예수께서 여성의 고발(告發)자와 그의 대적들이 예수 앞에 데려온, 평판이 나쁜 어떤 여성을 다루셨습니다. 이 일화에 대해 너희가 지닌 왜곡된 기록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성을 예수 앞에 데려왔고,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 자신이 부도덕한 짓을 했다고 암시하면서 예수께서 그들을 다루셨다고 말합니다(요8:2-11).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으로 영적으로 눈이 멀고 지적으로 편견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 당시 가장 철저히 도덕적인 사람들로 간주해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162:3.2 (1793.1) What really happened was this: Early the third morning of the feast, as Jesus approached the temple, he was met by a group of the hired agents of the Sanhedrin who were dragging a woman along with them. As they came near, the spokesman said: “Master, this woman was taken in adultery — in the very act. Now, the law of Moses commands that we should stone such a woman. What do you say should be done with her?”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러했습니다. 절기의 셋째 날 일찍, 예수께서 성전에 가까이 갔을 때, 한 여성을 끌고 가는 산헤드린의 고용인 집단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그 대변인이 말했습니다. “주(主)여, 이 여성은 바로 간통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바로 모세 율법은, 우리가 그런 여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162:3.3 (1793.2) It was the plan of Jesus’ enemies, if he upheld the law of Moses requiring that the self-confessed transgressor be stoned, to involve him in difficulty with the Roman rulers, who had denied the Jews the right to inflict the death penalty without the approval of a Roman tribunal. If he forbade stoning the woman, they would accuse him before the Sanhedrin of setting himself up above Moses and the Jewish law. If he remained silent, they would accuse him of cowardice. But the Master so managed the situation that the whole plot fell to pieces of its own sordid weight. 예수께서 자인(自認 스스로 인정)하는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요구하는 모세의 율법을 지지하면, 로마 법정의 승인 없이 유대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로마 통치자들과 논쟁에 그를 빠뜨리려는 것이 예수 대적들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가 여성을 돌로 쳐 죽이지 말라고 하면, 그들은 산헤드린 앞에서 모세와 유대의 율법보다 높은 체한다고 그를 고발하려 했습니다. 그가 침묵을 지키면, 그들은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主)님이 그 상황을 잘 다루어 모든 계략이 그 자체의 야비한 무게로 좌절되었습니다.

162:3.4 (1793.3) This woman, once comely, was the wife of an inferior citizen of Nazareth, a man who had been a troublemaker for Jesus throughout his youthful days. The man, having married this woman, did most shamefully force her to earn their living by making commerce of her body. He had come up to the feast at Jerusalem that his wife might thus prostitute her physical charms for financial gain. He had entered into a bargain with the hirelings of the Jewish rulers thus to betray his own wife in her commercialized vice. And so they came with the woman and her companion in transgression for the purpose of ensnaring Jesus into making some statement which could be used against him in case of his arrest. 한때 아름다웠던 이 여성은, 예수의 청년 시절 내내 예수께 말썽꾼이었던 사람, 나사렛의 질 낮은 시민의 아내였습니다. 이 여성과 결혼한 그 사람은 그녀의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도록 가장 치욕스럽게 그녀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자기 아내가 그녀의 육체적 매력을 이렇게 팔 수 있도록 예루살렘 절기에 왔습니다. 그는 유대 통치자들의 고용인들과 흥정하여 이렇게 자기 아내를 상업적 매춘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들은 예수가 체포될 때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진술을 만들려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죄를 범한 여성 및 그녀의 짝패와 함께 왔습니다.

162:3.5 (1793.4) Jesus, looking over the crowd, saw her husband standing behind the others. He knew what sort of man he was and perceived that he was a party to the despicable transaction. Jesus first walked around to near where this degenerate husband stood and wrote upon the sand a few words which caused him to depart in haste. Then he came back before the woman and wrote again upon the ground for the benefit of her would-be accusers; and when they read his words, they, too, went away, one by one. And when the Master had written in the sand the third time, the woman’s companion in evil took his departure, so that, when the Master raised himself up from this writing, he beheld the woman standing alone before him. Jesus said: “Woman, where are your accusers? did no man remain to stone you?” And the woman, lifting up her eyes, answered, “No man, Lord.” And then said Jesus: “I know about you; neither do I condemn you. Go your way in peace.” And this woman, Hildana, forsook her wicked husband and joined herself to the disciples of the kingdom. 군중을 살펴본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 뒤에 서 있는 그녀의 남편을 봤습니다. 그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아시고, 그가 비열한 거래의 패거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는 먼저 이렇게 타락한 남편이 서 있는 근처 주위로 가서, 모래 위에 몇 마디를 써서 그가 허둥지둥 떠나게 했습니다. 그다음에 그는 여성 앞에 돌아와 그녀를 고발하려는 자들을 위해 땅 위에 다시 썼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의 말을 읽고 그들도 하나씩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主)께서 세 번째 모래에 쓰자, 여성의 악한 짝패가 떠나갔고, 그리하여 주(主)께서 이런 글에서 일어서자, 그는 자신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너의 고발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더냐?” 그러자 여성이 눈을 들어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노라. 나도 너를 비난하지 않노라. 평안히 네 길을 가거라.” 그리고 이 여성, 힐다나는 그녀의 사악한 남편을 저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들어갔습니다(*아나마르테토스 – 범죄의 가능성이 없는 자만이 자격이 있느니라. 모태에서 태어나면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 것).

4.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

220724 신성(神性)을 선포하는 장막절(帳幕節) 레23:39-43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9 “ ‘So beginning with the fifte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after you have gathered the crops of the land, celebrate the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the first day is a day of sabbath rest, and the eighth day also is a day of sabbath rest. 40 On the first day you are to take branches from luxuriant trees—from palms, willows and other leafy trees—and rejoice before the LORD your God for seven days. 41 Celebrate this as a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each year. This is to be a lasting ordinance for the generations to come; celebrate it in the seventh month. 42 Live in temporary shelters for seven days: All native-born Israelites are to live in such shelters 43 so your descendants will know that I had the Israelites live in temporary shelters when I brought them out of Egypt. I am the LORD your God.’ ”

162:4.1 (1793.5) The presence of people from all of the known world, from Spain to India, made the feast of tabernacles an ideal occasion for Jesus for the first time publicly to proclaim his full gospel in Jerusalem. At this feast the people lived much in the open air, in leafy booths. It was the feast of the harvest ingathering, and coming, as it did, in the cool of the autumn months, it was more generally attended by the Jews of the world than was the Passover at the end of the winter or Pentecost at the beginning of summer. The apostles at last beheld their Master making the bold announcement of his mission on earth before all the world, as it were.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알려진 세상 모두에서 사람들이 참석하여서, 장막절(帳幕節)은 예수께서 처음 공적으로 자신의 충만한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호기(好機)였습니다. 이 절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야외 초막(草幕)에서 지냈습니다. 이것은 추수(秋收) 수확 절기로, 가을철 서늘할 때, 다가왔듯이, 겨울 끝의 유월절이나 여름 시작의 오순절보다 대개 세상의 유대인들이 더 많이 참석했습니다. 사도들은 이를테면 결국 온 세상 앞에 자신의 지상 사명을 담대히 선언하는 자기들의 주(主)를 지켜보았습니다.

162:4.2 (1794.1) This was the feast of feasts, since any sacrifice not made at the other festivals could be made at this time. This was the occasion of the reception of the temple offerings; it was a combination of vacation pleasures with the solemn rites of religious worship. Here was a time of racial rejoicing, mingled with sacrifices, Levitical chants, and the solemn blasts of the silvery trumpets of the priests. At night the impressive spectacle of the temple and its pilgrim throngs was brilliantly illuminated by the great candelabras which burned brightly in the court of the women as well as by the glare of scores of torches standing about the temple courts. The entire city was gaily decorated except the Roman castle of Antonia, which looked down in grim contrast upon this festive and worshipful scene. And how the Jews did hate this ever-present reminder of the Roman yoke! 다른 절기에 드리지 않은 제물을 이때 드렸기 때문에, 이것은 절기 중 절기였습니다. 이때 성전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휴가를 보내는 즐거움과 종교적 숭배의 엄숙한 의식(儀式)의 결합이었습니다. 이때는 제물, 레위인(人)의 성가와 제사장들의 장중한 은빛 나팔 소리가 섞여, 민족이 기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밤에는, 성전 뜰 주위에 서 있는 번쩍이는 수십 개의 횃불과 동시에 여인의 뜰에서 밝게 타올랐던 나뭇가지 모양의 커다란 촛대로, 성전과 그 순례자 무리의 인상적인 장관이 번쩍번쩍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흥겨운 숭배 장면과 엄연히 대조적으로 내려다보던 로마의 안토니아 성곽을 제외한 전(全) 도시가 호화스럽게 꾸며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항상 있어서, 로마의 속박을 생각나게 하는 이 성곽을 얼마나 몹시 싫어했는지!

162:4.3 (1794.2) Seventy bullocks were sacrificed during the feast, the symbol of the seventy nations of heathendom. The ceremony of the outpouring of the water symbolized the outpouring of the divine spirit. This ceremony of the water followed the sunrise procession of the priests and Levites. The worshipers passed down the steps leading from the court of Israel to the court of the women while successive blasts were blown upon the silvery trumpets. And then the faithful marched on toward the Beautiful Gate, which opened upon the court of the gentiles. Here they turned about to face westward, to repeat their chants, and to continue their march for the symbolic water. 절기 중에 이교도 70개 국가를 상징하는, 황소 70마리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예식(禮式)은 신적 영(靈)의 흘러나옴을 상징했습니다. 이런 물 예식은 제사장들과 레위인(人)들의 해돋이 행진 뒤에 일어났습니다. 예배자들은 은빛 나팔 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이끄는 계단 아래로 지나갔습니다. 그런 후 충실한 신자들이, 이방인의 뜰 쪽을 향해 있는, 미문(美文)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서쪽을 향해 회전하여, 성가를 반복하면서 상징적인 물을 향해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162:4.4 (1794.3) On the last day of the feast almost four hundred and fifty priests with a corresponding number of Levites officiated. At daybreak the pilgrims assembled from all parts of the city, each carrying in the right hand a sheaf of myrtle, willow, and palm branches, while in the left hand each one carried a branch of the paradise apple — the citron, or the “forbidden fruit.” These pilgrims divided into three groups for this early morning ceremony. One band remained at the temple to attend the morning sacrifices; another group marched down below Jerusalem to near Maza to cut the willow branches for the adornment of the sacrificial altar, while the third group formed a procession to march from the temple behind the water priest, who, to the sound of the silvery trumpets, bore the golden pitcher which was to contain the symbolic water, out through Ophel to near Siloam, where was located the fountain gate. After the golden pitcher had been filled at the pool of Siloam, the procession marched back to the temple, entering by way of the water gate and going directly to the court of the priests, where the priest bearing the water pitcher was joined by the priest bearing the wine for the drink offering. These two priests then repaired to the silver funnels leading to the base of the altar and poured the contents of the pitchers therein. The execution of this rite of pouring the wine and the water was the signal for the assembled pilgrims to begin the chanting of the Psalms from 113 to 118 inclusive, in alternation with the Levites. And as they repeated these lines, they would wave their sheaves at the altar. Then followed the sacrifices for the day, associated with the repeating of the Psalm for the day, the Psalm for the last day of the feast being the eighty-second, beginning with the fifth verse. 절기의 마지막 날, 거의 450명의 제사장과 그에 상응하는 레위인들이 함께 집례(執禮)했습니다. 동틀녘 순례자들이, 각자 오른손에 한 다발의 도금양, 버드나무,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동시에 왼손에는 천국 사과 – 유자(柚子) 또는 “금단의 열매” 가지를 들고, 도시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이런 순례자들은 이른 아침 예식을 위해 세 집단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아침 제사에 참석하려고 성전에 남았습니다. 다른 집단은 희생 제단을 꾸미는 버드나무 가지를 자르려고 마자 근처, 예루살렘 아래로 행진하며 내려갔고 동시에, 셋째 집단은 은빛 나팔 소리에 따라, 상징적 물을 담을 금빛 단지를 메고 있던 물 제사장 뒤에서 성전에서부터 행진하려고 행렬을 지어, 오펠을 통해 실로암 근처로 나갔는데, 그곳에는 샘문(門)이 있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금빛 단지를 다 채운 뒤, 행렬은 성전으로 되돌아 행진하여, 수문(水門)으로 들어가 곧바로 제사장의 뜰로 가서, 그곳에서 물단지를 멘 제사장은 제주(祭酒 제삿술)용 포도주를 멘 제사장과 합류했습니다. 그다음 이 두 제사장은 제단 바닥으로 이어진 좁은 은(銀)통로로 가서 거기에 단지의 내용물을 부었습니다. 포도주와 물을 붓는 이런 예식 집행은 모인 순례자들이 레위인(人)과 교대로, 시편113편에서 118편까지 포함하여 성가(聖歌)를 시작하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구절들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제단을 향해 자신들의 다발을 흔들곤 했습니다. 그런 후, 절기 중 마지막 날의 시편은 5번째 절로 시작하는 82번째 절이며, 그날의 시편 반복과 관련된, 그날 제사가 뒤따랐습니다.

5. Sermon on the L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에 대한 설교

220731 세상의 빛, 예수 요8:12-30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12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13 The Pharisees challenged him, “Here you are, appearing as your own witness; your testimony is not valid.” 14 Jesus answered, “Even if I testify on my own behalf, my testimony is valid, for I know where I came from and where I am going. But you have no idea where I come from or where I am going. 15 You judge by human standards; I pass judgment on no one. 16 But if I do judge, my decisions are true, because I am not alone. I stand with the Father, who sent me. 17 In your own Law it is written that the testimony of two witnesses is true. 18 I am one who testifies for myself; my other witness is the Father, who sent me.” 19 Then they asked him, “Where is your father?” “You do not know me or my Father,” Jesus replied. “If you knew me, you would know my Father also.” 20 He spoke these words while teaching in the temple courts near the place where the offerings were put. Yet no one seized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21 Once more Jesus said to them, “I am going away, and you will look for me, and you will die in your sin. Where I go, you cannot come.” 22 This made the Jews ask, “Will he kill himself? Is that why he says, ‘Where I go, you cannot come’?” 23 But he continued,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h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25 “Who are you?” they asked. “Just what I have been telling you from the beginning,” Jesus replied. 26 “I have much to say in judgment of you. But he who sent me is trustworthy, and what I have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27 They did not understand that he was telling them about his Father. 28 So Jesus said, “When you have lifted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speak just what the Father has taught me. 29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for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30 Even as he spoke, many believed in him.

162:5.1 (1794.4) On the evening of the next to the last day of the feast, when the scene was brilliantly illuminated by the lights of the candelabras and the torches, Jesus stood up in the midst of the assembled throng and said: 절기의 끝날 전야(前夜)에 가지 촛대와 횃불의 광명으로 번쩍번쩍 조명을 받는 현장(現場)에, 예수께서 모인 무리 중에 일어나 말했습니다.

162:5.2 (1795.1) “I am the light of the world. He who follows me shall not walk in darkness but shall have the light of life. Presuming to place me on trial and assuming to sit as my judges, you declare that, if I bear witness of myself, my witness cannot be true. But never can the creature sit in judgment on the Creator. Even if I do bear witness about myself, my witness is everlastingly true, for I know whence I came, who I am, and whither I go. You who would kill the Son of Man know not whence I came, who I am, or whither I go. You only judge by the appearances of the flesh; you do not perceive the realities of the spirit. I judge no man, not even my archenemy. But if I should choose to judge, my judgment would be true and righteous, for I would judge not alone but in association with my Father, who sent me into the world, and who is the source of all true judgment. You even allow that the witness of two reliable persons may be accepted — well, then, I bear witness of these truths; so also does my Father in heaven. And when I told you this yesterday, in your darkness you asked me, ‘Where is your Father?’ Truly, you know neither me nor my Father, for if you had known me, you would also have known the Father.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나를 재판에 넘겨 나의 재판관으로 앉으려는 너희는, 내가 스스로 증언하면, 내 증언이 참될 수 없다고 밝히는구나(요8:13). 그러나 창조물은 결코 창조주를 재판할 수 없느니라. 내가 자신에 대해 증언해도 내 증언이 한없이 참되니, 이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니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죽이려는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느니라(요8:14). 너희는 육신의 모습으로 판단할 뿐이니라. 너희는 영(靈)의 실체를 알아채지 못하느니라. 나는 아무도, 내 대적(大敵)도 심판하지 않노라(요8:15). 그러나 내가 심판하기로 해도, 내 심판은 참되고 공정하니, 이는 내가 단독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보내셨고, 모든 참된 심판의 근원이신, 내 아버지와 공동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니라(요8:16). 너희가 믿음직한 2명의 증언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도 하니(요8:17), 자, 그러면 내가 이런 실상의 증인이 되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도 그러하니라(요8:18). 내가 어제 이것을 너희에게 말했을 때, 너희 어둠 속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내게 물었도다. 참으로, 너희는 나도, 내 아버지도 모르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너희가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니라(요8:19).

162:5.3 (1795.2) “I have already told you that I am going away, and that you will seek me and not find me, for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You who would reject this light are from beneath; I am from above. You who prefer to sit in darkness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and I live in the eternal light of the Father of lights. You all have had abundant opportunity to learn who I am, but you shall have still other evidence confirming the identity of the Son of Man. I am the light of life, and every one who deliberately and with understanding rejects this saving light shall die in his sins. Much I have to tell you, but you are unable to receive my words. However, he who sent me is true and faithful; my Father loves even his erring children. And all that my Father has spoken I also proclaim to the world. “내가 떠날 것이며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가려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느니라(162:2.7). 이 빛을 거절하려는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느니라. 어둠에 앉아 있는 편을 좋아하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들의 아버지에게 속한 영원한 빛 안에 살고 있느니라(요8:23). 너희는 모두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신원(身元)을 증명하는 다른 증거를 여전히 가지려 하는구나. 나는 생명의 빛이며, 구원의 이 빛을 고의로, 이해하면서 거절하는 누구나 자기 죄(罪) 가운데 죽을 것이라(요8:24).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나를 보낸 그분은 참되고 신실하시니라. 내 아버지는 실수하는 자기 자녀들까지 사랑하시느니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나도 세상에 선포하노라(요8:26).

162:5.4 (1795.3) “When the Son of Man is lifted up, then shall you all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have done nothing of myself but only as the Father has taught me. I speak these words to you and to your children. And he who sent me is even now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for I do alway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들려 오를 그때, 내가 그인 것과 내가 스스로 전혀 하지 않고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대로만 했음을 너희가 모두 알리라. 나는 이 말을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하노라. 나를 보낸 그분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셨으니, 내가 늘 그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니라(요8:28-29).”

162:5.5 (1795.4) As Jesus thus taught the pilgrims in the temple courts, many believed. And no man dared to lay hands upon him. 예수께서 이렇게 성전 뜰에서 순례자들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요8:30).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6. Discourse on the Water of Life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220807 생명의 물, 예수 요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37 On the last and greatest day of the festival, Jesus stood and said in a loud voice, “Let anyone who is thirsty come to me and drink. 38 Whoever believes in me, as Scripture has said,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39 By this he meant the Spirit, whom those who believed in him were later to receive. Up to that time the Spirit had not been given, since Jesus had not yet been glorified. 40 On hearing his words, some of the people said, “Surely this man is the Prophet.” 41 Others said, “He is the Messiah.” Still others asked, “How can the Messiah come from Galilee? 42 Does not Scripture say that the Messiah will come from David’s descendants and from Bethlehem, the town where David lived?” 43 Thus the people were divided because of Jesus. 44 Some want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a hand on him.

162:6.1 (1795.5) On the last day, the great day of the feast, as the procession from the pool of Siloam passed through the temple courts, and just after the water and the wine had been poured down upon the altar by the priests, Jesus, standing among the pilgrims, said: “If any man thirst,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From the Father above I bring to this world the water of life. He who believes me shall be filled with the spirit which this water represents, for even the Scriptures have said, ‘Out of him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s.’ When the Son of Man has finished his work on earth, there shall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the living Spirit of Truth. Those who receive this spirit shall never know spiritual thirst.” 절기 끝날, 큰 날에 실로암 못에서 행렬이 성전 뜰을 지나, 제사장들이 물과 포도주를 제단에 부은 직후에, 예수께서 순례자 중에 선 채로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내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생명의 물을 이 세상에 가져오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이 물이 상징하는 영(靈)으로 충만하리니, ‘그 안에서부터 생수(生水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라고 성서도 말했느니라(사44:3, 슥14:8).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 지상에서 자기 일을 마치면 살아있는 진리의 영(靈)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리라. 이 영(靈)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적 목마름을 결코 모를 것이라.”

162:6.2 (1795.6) Jesus did not interrupt the service to speak these words. He addressed the worshipers immediately after the chanting of the Hallel, the responsive reading of the Psalms accompanied by waving of the branches before the altar. Just here was a pause while the sacrifices were being prepared, and it was at this time that the pilgrims heard the fascinating voice of the Master declare that he was the giver of living water to every spirit-thirsting soul.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려고 예배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단 앞에서 가지를 흔들면서 시편을 교독하는, 할렐의 성가(聖歌) 직후에 예배자들에게 연설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물이 준비되는 동안 잠시 멈췄고, 이때 순례자들은 주(主)께서 영적으로 목마른 모든 혼(魂)에게 생명수(生命水)를 주는 자라고 선언하는 그의 매혹적인 음성을 들었습니다.

162:6.3 (1796.1) At the conclusion of this early morning service Jesus continued to teach the multitude, saying: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 ‘Behold, as the waters are poured out upon the dry ground and spread over the parched soil, so will I give the spirit of holiness to be poured out upon your children for a blessing even to your children’s children’? Why will you thirst for the ministry of the spirit while you seek to water your souls with the traditions of men, poured from the broken pitchers of ceremonial service? That which you see going on about this temple is the way in which your fathers sought to symbolize the bestowal of the divine spirit upon the children of faith, and you have done well to perpetuate these symbols, even down to this day. But now has come to this generation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of spirits through the bestowal of his Son, and all of this will certainly be followed by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upon the children of men. To every one who has faith shall this bestowal of the spirit become the true teacher of the way which leads to life everlasting, to the true waters of life in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and in the Father’s Paradise over there.” 이런 이른 아침 예배가 끝나자 예수께서 계속 군중을 가르치며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보라, 물이 마른 땅에 부어져 마른 흙을 덮듯이, 내가 거룩한 영(靈)을 너희 자녀 위에 부어서, 너희 자녀의 자녀까지 축복하리라.’라는 말씀을 읽지 않았느냐(사44:3)? 너희가 의식적 예배의 깨진 단지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전통으로 너희 혼(魂)들에 물을 주려 하는 한, 너희가 왜 영(靈)의 사역을 갈망하겠느냐? 너희가 보는 대로 이 성전 주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자녀들에게 주는 신적 영(靈)을 상징하려 했던 너희 조상들의 방식이며, 너희는 이런 상징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영속시켰노라. 그러나 이제 이 세대에 아버지 아들의 증여를 통해 영(靈)들의 아버지를 계시했고, 이런 모든 일에 뒤이어 아버지와 아들에 속한 영(靈)의 증여가 사람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따라오리라. 신앙을 가진 모두에게 이 영(靈)의 증여는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와 저기 아버지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수(生命水)로 이끄는 길의 참된 선생이 되리라.”

162:6.4 (1796.2) And Jesus continued to answer the questions of both the multitude and the Pharisees. Some thought he was a prophet; some believed him to be the Messiah; others said he could not be the Christ, seeing that he came from Galilee, and that the Messiah must restore David’s throne. Still they dared not arrest him.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계속 대답하셨습니다. 일부는 그를 선지자로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가 갈릴리 출신이며 메시아는 다윗의 보좌를 회복해야 하므로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체포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7. The Discourse on Spiritual Freedom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220814 영적 자유를 주시는 예수 요8:31-59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31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32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33 They answered him, “We are Abraham’s descendants and have never been slaves of anyone. How can you say that we shall be set free?” 34 Jesus replied, “Very truly I tell you, everyone who sins is a slave to sin. 35 Now a slave has no permanent place in the family, but a son belongs to it forever. 36 So if the Son sets you free, you will be free indeed. 37 I know that you are Abraham’s descendants. Yet you are looking for a way to kill me, because you have no room for my word. 38 I am telling you what I have seen in the Father’s presence, and you are doing what you have heard from your father.” 39 “Abraham is our father,” they answered. “If you were Abraham’s children,” said Jesus, “then you would do what Abraham did. 40 As it is, you are looking for a way to kill me, a man who has told you the truth that I heard from God. Abraham did not do such things. 41 You are doing the works of your own father.” “We are not illegitimate children,” they protested. “The only Father we have is God himself.” 42 Jesus said to them, “If God were your Father, you would love me, for I have come here from God. I have not come on my own; God sent me. 43 Why is my language not clear to you? Because you are unable to hear what I say. 44 You belong to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carry out your father’s desires.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not holding to the truth, for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his native languag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45 Yet because I tell the truth, you do not believe me! 46 Can any of you prove me guilty of sin? If I am telling the truth, why don’t you believe me? 47 Whoever belongs to God hears what God says. The reason you do not hear is that you do not belong to God.” 48 The Jews answered him, “Aren’t we right in saying that you are a Samaritan and demon-possessed?” 49 “I am not possessed by a demon,” said Jesus, “but I honor my Father and you dishonor me. 50 I am not seeking glory for myself; but there is one who seeks it, and he is the judge. 51 Very truly I tell you, whoever obey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52 At this they exclaimed, “Now we know that you are demon-possessed! Abraham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yet you say that whoever obeys your word will never taste death. 53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He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Who do you think you are?” 54 Jesus replied, “If I glorify myself, my glory means nothing. My Father, whom you claim as your God, is the one who glorifies me. 55 Though you do not know him, I know him. If I said I did not, I would be a liar like you, but I do know him and obey his word. 56 Your father Abraham rejoiced at the thought of seeing my day; he saw it and was glad.” 57 “You are not yet fifty years old,” they said to him, “and you have seen Abraham!” 58 “Very truly I tell you,” Jesus answered,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59 At this, they picked up stones to stone him, but Jesus hid himself, slipping away from the temple grounds.

162:7.1 (1796.3) On the afternoon of the last day of the feast and after the apostles had failed in their efforts to persuade him to flee from Jerusalem, Jesus again went into the temple to teach. Finding a large company of believers assembled in Solomon’s Porch, he spoke to them, saying: 절기의 끝날 오후 사도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피하도록 설득하는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 가르쳤습니다.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에 모인 많은 신자 일행을 발견하자,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62:7.2 (1796.4) “If my words abide in you and you are minded to do the will of my Father, then are you truly my disciples.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I know how you will answer me: We are the children of Abraham, and we are in bondage to none; how then shall we be made free? Even so, I do not speak of outward subjection to another’s rule; I refer to the liberties of the soul. Verily, verily, I say to you, everyone who commits sin is the bond servant of sin. And you know that the bond servant is not likely to abide forever in the master’s house. You also know that the son does remain in his father’s house. If, therefore, the Son shall make you free, shall make you sons, you shall be free indeed.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너희는 진실로 내 제자이니라.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내게 어떻게 대답할지 나는 아노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우리는 아무에게도 노예가 아닌데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되나요(요8:31-33)? 그렇지만 내 말은 다른 사람의 통치에 대한 외적 복종이 아니니라. 나는 혼(魂)의 해방을 언급하고 있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罪)를 범하는 자마다 죄(罪)의 종이라. 너희가 알거니와 종은 주인의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느니라. 또한 너희가 알거니와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여 너희를 아들들로 삼으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요8:34-36).

162:7.3 (1796.5) “I know that you are Abraham’s seed, yet your leaders seek to kill me because my word has not been allowed to have its transforming influence in their hearts. Their souls are sealed by prejudice and blinded by the pride of revenge. I declare to you the truth which the eternal Father shows me, while these deluded teachers seek to do the things which they have learned only from their temporal fathers. And when you reply that Abraham is your father, then do I tell you that, if you were the children of Abraham, you would do the works of Abraham. Some of you believe my teaching, but others seek to destroy me because I have told you the truth which I received from God. But Abraham did not so treat the truth of God. I perceive that some among you are determined to do the works of the evil one. If God were your Father, you would know me and love the truth which I reveal. Will you not see that I come forth from the Father, that I am sent by God, that I am not doing this work of myself? Why do you not understand my words? Is it because you have chosen to become the children of evil? If you are the children of darkness, you will hardly walk in the light of the truth which I reveal. The children of evil follow only in the ways of their father, who was a deceiver and stood not for the truth because there came to be no truth in him. But now comes the Son of Man speaking and living the truth, and many of you refuse to believe. “내가 알거니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너희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변화시키는 내 말의 감화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그들의 혼(魂)은 편견(偏見)으로 막혀있고 복수의 자만심으로 눈이 멀어 있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신 진리를 선언하는 반면에, 미혹된 이 선생들은 단지 자기 현세 조상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너희가 대답하면,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행위를 해야 하리라고 말하게 되느니라. 너희 중 일부가 내 가르침을 믿지만, 내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는 다른 사람들도 있느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진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았느니라. 너희 중 일부가 악마의 행위를 하려고 결심한 것을 내가 아노라. 하느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계시한 진리를 사랑하리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하느님이 나를 보내시며, 내가 스스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왜 너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惡)의 자녀가 되기로 택했기 때문이냐? 너희가 어둠의 자녀라면 너희는 내가 계시한 진리의 빛 가운데 거의 걷지 못할 것이라. 악(惡)의 자녀는, 사기(詐欺)꾼이며 자기 안에 진리가 없어서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은, 그들 아버지의 길을 따를 뿐이라. 이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와서 진리를 말하고 살지만, 너희 대부분이 믿으려 하지 않도다(요8:37-45).

162:7.4 (1797.1) “Which of you convicts me of sin? If I, then, proclaim and live the truth shown me by the Father, why do you not believe? He who is of God hears gladly the words of God; for this cause many of you hear not my words, because you are not of God. Your teachers have even presumed to say that I do my works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One near by has just said that I have a devil, that I am a child of the devil. But all of you who deal honestly with your own souls know full well that I am not a devil. You know that I honor the Father even while you would dishonor me. I seek not my own glory, only the glory of my Paradise Father. And I do not judge you, for there is one who judges for me. “너희 중 누가 나의 유죄를 입증하느냐? 그럼,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신 진리를 내가 선포하고 산다면,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 하느님께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느니라. 이 때문에 너희 다수가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너희가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함이니라. 너희 선생들은 내가 악령의 괴수(魁首)에 속한 권세로 내가 행한다고 주제넘게 나서기까지 했느니라. 가까이 있던 사람이 방금 나에게 악마가 있으며 악마의 자녀라고 말했느니라. 그러나 너희 자신의 혼(魂)들을 정직하게 다루는 너희는 모두 내가 악마가 아님을 아주 잘 아느니라. 너희가 나를 모욕하는 동안에도 내가 아버지께 영광 돌림을 너희가 아느니라. 나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내 천국 아버지의 영광만 구하느니라. 그리고 나를 위해 심판하는 분이 있어서 나는 너희를 심판하지 않느니라(요8:46-50).

162:7.5 (1797.2) “Verily, verily, I say to you who believe the gospel that, if a man will keep this word of truth alive in his heart, he shall never taste death. And now just at my side a scribe says this statement proves that I have a devil, seeing that Abraham is dead, also the prophets. And he asks: ‘Are you so much greater than Abraham and the prophets that you dare to stand here and say that whoso keeps your word shall not taste death? Who do you claim to be that you dare to utter such blasphemies?’ And I say to all such that, if I glorify myself, my glory is as nothing. But it is the Father who shall glorify me, even the same Father whom you call God. But you have failed to know this your God and my Father, and I have come to bring you together; to show you how to become truly the sons of God. Though you know not the Father, I truly know him. Even Abraham rejoiced to see my day, and by faith he saw it and was glad.” “진실로 진실로 내가 복음을 믿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이 진리의 말씀을 자기 심정에 살아 있는 상태로 간직하면 그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조금 전에 내 옆의 서기관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은 것으로 보아 내게 악마가 있음을 이 진술로 입증한다고 말하느니라. 그리고 그가 묻기를 ‘당신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훨씬 위대하여 감히 여기에 서서 당신의 말을 지키는 누구나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감히 그런 신성모독을 발언하니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합니까?’ 내가 모두에게 이르노니, 내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이니라. 그러나 나를 영화롭게 하실 아버지는 너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정말로, 바로 그 아버지시니라. 그러나 너희가 끝내 너희 하느님과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말아서, 내가 너희를 불러 모아,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되는지 너희에게 보이려고 왔느니라. 너희는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나는 진실로 그를 아느니라. 아브라함조차 나의 때 보기를 기뻐했고 그는 신앙으로 그것을 보고 기뻐했느니라(요8:51-56).”

162:7.6 (1797.3) When the unbelieving Jews and the agents of the Sanhedrin who had gathered about by this time heard these words, they raised a tumult, shouting: “You are not fifty years of age, and yet you talk about seeing Abraham; you are a child of the devil!” Jesus was unable to continue the discourse. He only said as he departed, “Verily, verily, I say to you, before Abraham was, I am.” Many of the unbelievers rushed forth for stones to cast at him, and the agents of the Sanhedrin sought to place him under arrest, but the Master quickly made his way through the temple corridors and escaped to a secret meeting place near Bethany where Martha, Mary, and Lazarus awaited him. 이때 주위에 모였던,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이런 말을 듣고, 소동을 일으켜 외쳤습니다. “당신은 오십이 아닌 데도 아브라함을 본 것에 대해 말하니, 당신은 악마의 자녀라!” 예수님은 계속 강연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떠나시며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믿으려 하지 않는 다수가 그에게 돌을 던지려고 앞으로 달려들었고,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그를 구속하려 했지만, 주님은 급히 성전 회랑을 지나가 마르다, 마리아와 나사로가 그를 기다리던 베다니 근처 비밀 합류점으로 피했습니다(요8:57-59).

8. The Visit with Martha and Mary 마르다와 마리아 심방(尋訪 찾아서 방문)

220828 때와 우선순위 눅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8 As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n their way, he came to a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opened her home to him. 39 She had a sister called Mary, who sat at the Lord’s feet listening to what he said. 40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all the preparations that had to be made. She came to him and asked, “Lord, don’t you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to do the work by myself? Tell her to help me!” 41 “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42 but few things are needed—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162:8.1 (1797.4) It had been arranged that Jesus should lodge with Lazarus and his sisters at a friend’s house, while the apostles were scattered here and there in small groups, these precautions being taken because the Jewish authorities were again becoming bold with their plans to arrest him. 예수께서 나사로 및 그의 자매들과 친구 집에 유숙(留宿)하기로 정했고, 한편 사도들은 소그룹으로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이런 예방책을 취한 것은 유대 당국이 그를 체포하려는 계획에 다시 대담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8.2 (1797.5) For years it had been the custom for these three to drop everything and listen to Jesus’ teaching whenever he chanced to visit them. With the loss of their parents, Martha had assumed the responsibilities of the home life, and so on this occasion, while Lazarus and Mary sat at Jesus’ feet drinking in his refreshing teaching, Martha made ready to serve the evening meal. It should be explained that Martha was unnecessarily distracted by numerous needless tasks, and that she was cumbered by many trivial cares; that was her disposition. 수년 동안 그가 그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셋은 모두 내려놓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부모를 잃고, 마르다가 가정생활의 책임을 떠맡았고, 이 경우에도 그렇게 나사로와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후련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눅10:39), 마르다는 저녁 식사를 차리려고 준비했습니다. 마르다가 쓸데없는 여러 일로 헛되어 산만해져서 사소한 여러 걱정에 시달렸다고 밝혀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녀의 기질이었습니다.

162:8.3 (1798.1) As Martha busied herself with all these supposed duties, she was perturbed because Mary did nothing to help. Therefore she went to Jesus and said: “Master,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alone to do all of the serving? Will you not bid her to come and help me?” Jesus answered: “Martha, Martha, why are you always anxious about so many things and troubled by so many trifles? Only one thing is really worth while, and since Mary has chosen this good and needful part, I shall not take it away from her. But when will both of you learn to live as I have taught you: both serving in co-operation and both refreshing your souls in unison? Can you not learn that 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 that the lesser matters of life should give way before the greater things of the heavenly kingdom?” 마르다가 이렇게 하기로 한 모든 의무로 바쁠 때, 마리아가 전혀 돕지 않아서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께 가서 말했습니다. “주여, 제 동생이 음식 차리는 모든 일을 나 혼자 하게 버려두니 신경 쓰지 않으시나요? 그녀에게 가서 나를 도우라고 시키지 않으실 건가요?(눅10:40)”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언제나 왜 그렇게 많은 일로 걱정하고 그렇게 여러 사소한 일로 불안해하느냐? 한 가지만 정말 가치 있으며, 마리아가 이렇게 유익하고 필요한 부분을 선택했으니 내가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않으리라(눅10:41-4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둘이 협력해 섬기고 둘이 조화롭게 너희 혼(魂)을 새롭게 하여 사는 법을 둘 다 언제 익히려느냐? 만사에 때가 있으니, 생활의 더 작은 문제들은 하늘나라의 더 큰 일들 앞에 양보해야 함을 너희가 익힐 수 없느냐?”

9. At Bethlehem with Abner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함께

220904 예수께 합세한 아브너와 그 동료 렘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I will give them a heart to know me, that I am the LORD. They wi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for they will return to me with all their heart.

162:9.1 (1798.2) Throughout the week that followed the feast of tabernacles, scores of believers forgathered at Bethany and received instruction from the twelve apostles. The Sanhedrin made no effort to molest these gatherings since Jesus was not present; he was throughout this time working with Abner and his associates in Bethlehem. The day following the close of the feast, Jesus had departed for Bethany, and he did not again teach in the temple during this visit to Jerusalem. 장막절 다음 주 내내, 많은 신자가 베다니에 모여 12 사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께서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모임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기간 내내 베들레헴에서 아브너 및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절기가 끝난 다음 날, 예수님은 베다니로 떠났고 그는 이 예루살렘 방문 동안 다시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162:9.2 (1798.3) At this time, Abner was making his headquarters at Bethlehem, and from that center many workers had been sent to the cities of Judea and southern Samaria and even to Alexandria. Within a few days of his arrival, Jesus and Abner completed the arrangements for the consolidation of the work of the two groups of apostles. 이때, 아브너는 베들레헴에 자기 본부를 두었고, 그 중심에서 여러 일꾼이 유대 도시들, 남부 사마리아 및 알렉산드리아까지 파송되었습니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안에, 예수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 활동의 통합을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162:9.3 (1798.4) Throughout his visit to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had divided his time about equally between Bethany and Bethlehem. At Bethany he spent considerable time with his apostles; at Bethlehem he gave much instruction to Abner and the other former apostles of John. And it was this intimate contact that finally led them to believe in him. These former apostles of John the Baptist were influenced by the courage he displayed in his public teaching in Jerusalem as well as by the sympathetic understanding they experienced in his private teaching at Bethlehem. These influences finally and fully won over each of Abner’s associates to a wholehearted acceptance of the kingdom and all that such a step implied. 장막절 방문 기간 내내, 예수는 베다니와 베들레헴에 자기 시간을 거의 똑같이 나눴습니다. 베다니에서 그는 자기 사도들과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그는 아브너 및 다른 요한의 이전 사도들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런 친밀한 접촉으로 그들은 결국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이전 사도들은 그가 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가르칠 때 자신들이 경험한 공감적 이해 뿐만 아니라 그가 공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드러낸 용기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향력으로 아브너의 동료들은 각각 마침내 완전히 설득받아 하느님 나라와 그런 단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62:9.4 (1798.5) Before leaving Bethlehem for the last time, the Master made arrangements for them all to join him in the united effort which was to precede the ending of his earth career in the flesh. It was agreed that Abner and his associates were to join Jesus and the twelve in the near future at Magadan Park.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에, 주님은 육신으로 자기 지상 생애를 마치기에 앞서 있을 예정 가운데 그들 모두 협력하여 자신과 합세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은 가까운 장래에 마가단 공원에서 예수 및 12 사도와 합세하기로 동의했습니다.

162:9.5 (1798.6) In accordance with this understanding, early in November Abner and his eleven fellows cast their lot with Jesus and the twelve and labored with them as one organization right on down to the crucifixion. 이런 약정에 따라서, 11월 초에 아브너와 그의 11 동료는 예수 및 12 사도와 운명을 같이하여 십자가 처형까지 그들과 한 조직으로써 수고했습니다.

162:9.6 (1798.7) In the latter part of October Jesus and the twelve withdrew from the immediate vicinity of Jerusalem. On Sunday, October 30, Jesus and his associates left the city of Ephraim, where he had been resting in seclusion for a few days, and, going by the west Jordan highway directly to Magadan Park, arrived late on the afternoon of Wednesday, November 2. 10월 후반에 예수와 12 사도는 예루살렘 바로 인근에서 물러났습니다. 10월 30일(AD 29) 일요일에 예수와 그의 동료들은 며칠간 은둔했던 에브라임 도시를 떠나, 요단 서쪽 대로를 따라서 바로 마가단 공원에 11월 2일 수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습니다.

162:9.7 (1799.1) The apostles were greatly relieved to have the Master back on friendly soil; no more did they urge him to go up to Jerusalem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사도들은 주께서 우호적인 지역으로 돌아와서 크게 안도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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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3 Ordination of the Seventy at Magadan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Paper 163

Ordination of the Seventy at Magadan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1. Ordination of the Seventy 70인 임직(任職)
The harvest is plenteous but the laborers are few 수확량(收穫量)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라
2. The Rich Young Man and Others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Riches and the love of wealth 재물과 재산에 대한 사랑
3. The Discussion About Wealth 재산에 관한 토론
Parable of the laborers in the vineyard 포도원의 인부들 비유
4. Farewell to the Seventy 70인 환송회(歡送會)
Jesus’ instructions 예수의 지시
Peter’s ordination sermon 베드로의 임직 설교
5. Moving the Camp to Pella 야영지를 펠라로 옮기다
6. The Return of the Seventy 70인의 귀환(歸還)
7. Preparation for the Last Mission 최후 사명 준비

220911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눅10:1a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After this the Lord appointed seventy others

163:0.1 (1800.1) A FEW days after the return of Jesus and the twelve to Magadan from Jerusalem, Abner and a group of some fifty disciples arrived from Bethlehem. At this time there were also assembled at Magadan Camp the evangelistic corps, the women’s corps, and about one hundred and fifty other true and tried disciples from all parts of Palestine. After devoting a few days to visiting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camp, Jesus and the twelve began a course of intensive training for this special group of believers, and from this well-trained and experienced aggregation of disciples the Master subsequently chose the seventy teachers and sent them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This regular instruction began on Friday, November 4, and continued until Sabbath, November 19. 예수와 12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마가단으로 돌아온 며칠 후, 아브너와 대략 50명의 제자 일행이 베들레헴에서 도착했습니다. 이때 마가단 야영지에 전도단(團), 여성단(團) 및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온 약 150명의 진실하고 시련을 견뎌 믿을 수 있는 다른 제자들도 모였습니다. 시찰(視察)과 야영지 재편(再編)에 며칠간 몰두한 후, 예수와 12 사도는 이런 특별한 신자 일행을 위한 집중 훈련 과정을 시작했고, 주(主)께서 이렇게 잘 훈련되어 노련한 제자 집단에서 나중에 70명의 교사를 선택하여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정규 훈련은 11월 4일(AD29년) 금요일에 시작하여 11월 19일 안식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63:0.2 (1800.2) Jesus gave a talk to this company each morning. Peter taught methods of public preaching; Nathaniel instructed them in the art of teaching; Thomas explained how to answer questions; while Matthew directed the organization of their group finances. The other apostles also participated in this training in accordance with their special experience and natural talents. 예수께서 매일 아침 이 일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중 설교법을 가르쳤습니다. 나다니엘은 그들에게 가르치는 기술을 교육했습니다. 도마는 질문에 답하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한편 마태는 그들의 집단 재정의 조직을 지도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자신들의 특별한 체험과 타고난 재능에 따라 이 훈련에 참여했습니다.

 

1. Ordination of the Seventy 70인 임직(任職)

220918 70인 임직(任職) 눅10:1-9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 1 After this the Lord appointed seventy others and sent them two by two ahead of him to every town and place where he was about to go. 2 He told them,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herefore,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field. 3 Go! I am sending you out like lambs among wolves. 4 Do not take a purse or bag or sandals; and do not greet anyone on the road. 5 “When you enter a house,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 6 If someone who promotes peace i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them; if not, it will return to you. 7 Stay there, eating and drinking whatever they give you, for the worker deserves his wages. Do not move around from house to house. 8 “When you enter a town and are welcomed, eat what is offered to you. 9 Heal the sick who are there and tell them,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to you.’

163:1.1 (1800.3) The seventy were ordained by Jesus on Sabbath afternoon, November 19, at the Magadan Camp, and Abner was placed at the head of these gospel preachers and teachers. This corps of seventy consisted of Abner and ten of the former apostles of John, fifty-one of the earlier evangelists, and eight other disciples who had distinguished themselves in the service of the kingdom. 예수께서 11월 19일(AD29) 안식일 오후에 마가단 야영지에서 70인에게 임직(任職)했고, 아브너는 이 복음 전도자와 교사들의 수장(首長)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70인단(團)은 아브너와 요한의 이전 사도 중 10명, 51명의 초기 전도자들과 하느님 나라 봉사에서 두드러진 8명의 다른 제자들이었습니다.

163:1.2 (1800.4) About two o’clock on this Sabbath afternoon, between showers of rain, a company of believers, augmented by the arrival of David and the majority of his messenger corps and numbering over four hundred, assembled on the shore of the lake of Galilee to witness the ordination of the seventy. 이 안식일 오후 2시경 소나기 사이에 다윗과 그의 메신저 대부분이 도착하여 신자(信者) 일행이 늘어났고 4백 명 이상의 수(數)가 70인의 임직에 참석하려고 갈릴리호숫가에 모였습니다.

163:1.3 (1800.5) Before Jesus laid his hands upon the heads of the seventy to set them apart as gospel messengers, addressing them, he said: “The harvest is indeed plenteous, but the laborers are few; therefore I exhort all of you to pray that the Lord of the harvest will send still other laborers into his harvest. I am about to set you apart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I am about to send you to Jew and gentile as lambs among wolves. As you go your ways, two and two, I instruct you to carry neither purse nor extra clothing, for you go forth on this first mission for only a short season. Salute no man by the way, attend only to your work. Whenever you go to stay at a home, first say: Peace be to this household. If those who love peace live therein, you shall abide there; if not, then shall you depart. And having selected this home, remain there for your stay in that city, eating and drinking whatever is set before you. And you do this because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sustenance. Move not from house to house because a better lodging may be offered. Remember, as you go forth proclaiming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you must contend with bitter and self-deceived enemies; therefore be as wise as serpents while you are also as harmless as doves. 예수께서 70인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을 복음 메신저로 따로 떼어놓기 전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확량(收穫量)은 정말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수확(收穫)의 주인이 그의 수확(收穫)에 다른 일꾼을 더 많이 보내도록 너희 모두 기도하기를 내가 권고하노라(마9:37-38, 눅10:2). 나는 너희를 바로 지금 하느님 나라 메신저로 따로 떼어 놓으려 하노라. 나는 너희를 늑대 중에 어린 양들처럼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막 보내려 하느니라(마10:16a, 눅10:3). 너희가 둘씩 길을 갈 때, 너희가 잠깐만 이 첫 임무를 떠나므로 지갑이나 여분의 옷을 가져가지 않도록 내가 지시하노라(눅10:4a).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눅10:4b), 너희 업무만 힘쓰라. 너희가 집에 머물러 갈 때마다 먼저 이 가정이 평안할지어다 말하라(마10:12, 눅10:5).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거기에 살면 너희는 거기에 머물고(마10:11),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 이런 가정을 골라서, 네 앞에 차린 대로 먹고 마시며 그 도시에 묵는 동안 거기 머물라. 일꾼이 자기 생활 유지비를 받기에 마땅하므로 너희는 이렇게 하라. 더 좋은 숙소가 제공될 수도 있다고 하여 집집으로 옮기지 말라(눅10:7). 너희가 지상에서 평화와 사람 중에 선의(善意)를 선포하러 나갈 때(눅2:14b), 너희가 냉혹하고 자기-기만에 빠진 대적들과 싸워야 함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면서 마찬가지로 비둘기(페리스테라:전서구)처럼 순진하라(마10:16b).

163:1.4 (1801.1) “And everywhere you go, preach,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minister to all who may be sick in either mind or body. Freely you have received of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freely give. If the people of any city receive you, they shall find an abundant entrance into the Father’s kingdom; but if the people of any city refuse to receive this gospel, still shall you proclaim your message as you depart from that unbelieving community, saying, even as you leave, to those who reject your teaching: ‘Notwithstanding you reject the truth, it remains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you.’ He who hears you hears me. And he who hears me hears Him who sent me. He who rejects your gospel message rejects me. And he who rejects me rejects Him who sent me.” “너희가 어디로 가든지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다.’라고 전도(傳道)하여 말하고(마10:7), 마음이나 육체가 병든 모든 자를 보살피라. 너희가 하느님 나라의 좋은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b). 어떤 도시의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라. 그러나 어떤 도시의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그래도 너희는 믿으려 하지 않는 그 공동체를 떠날 때 너희 가르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진리를 거절해도,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여전하니라.’라고 너희가 떠나기까지 너희 메시지를 선포할 것이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라(눅10:16a). 내 말을 듣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말을 듣는 것이라. 너희 복음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는 나를 거절하는 것이라. 나를 거절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거절하는 것이라(눅10:16b).”

163:1.5 (1801.2) When Jesus had thus spoken to the seventy, he began with Abner and, as they knelt in a circle about him, laid his hands upon the head of every man. 예수께서 70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이 그 둘레에 원형으로 무릎을 꿇자, 그는 아브너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의 머리에 안수(按手)했습니다.

163:1.6 (1801.3) Early the next morning Abner sent the seventy messengers into all the cities of Galilee, Samaria, and Judea. And these thirty-five couples went forth preaching and teaching for about six weeks, all of them returning to the new camp near Pella, in Perea, on Friday, December 30.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브너는 70인 메신저를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 모든 도시로 보냈습니다(눅10:1). 그래서 이 35쌍은 약 6주간 전도하고 가르치러 가서, 12월 30일(AD29) 금요일에 페레아의 펠라 근처, 새 야영지로 그들 모두 돌아왔습니다.

 

2. The Rich Young Man and Others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220925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막10:19-22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9 You know the commandments: ‘You shall not murder,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you shall not steal,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you shall not defraud,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20 “Teacher,” he declared, “all these I have kept since I was a boy.” 21 Jesus looked at him and loved him. “One thing you lack,” he said. “Go,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22 At this the man’s face fell. He went away sad, because he had great wealth.

163:2.1 (1801.4) Over fifty disciples who sought ordination and appointment to membership in the seventy were rejected by the committee appointed by Jesus to select these candidates. This committee consisted of Andrew, Abner, and the acting head of the evangelistic corps. In all cases where this committee of three were not unanimous in agreement, they brought the candidate to Jesus, and while the Master never rejected a single person who craved ordination as a gospel messenger, there were more than a dozen who, when they had talked with Jesus, no more desired to become gospel messengers. 이런 후보자들을 선정하도록 예수께서 임명한 위원회가 70인의 임직과 회원권 지위를 얻으려 했던 50명 이상의 제자들을 불합격시켰습니다. 이 위원회는 안드레, 아브너 및 전도단(團)의 대리 수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런 3인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은 모든 경우에, 그들은 후보자를 예수께 데려갔고, 주님은 복음 메신저로서 임직을 열망했던 단 한 사람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12명 이상은 예수님과 얘기하자 그들은 더 이상 복음 메신저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63:2.2 (1801.5) One earnest disciple came to Jesus, saying: “Master, I would be one of your new apostles, but my father is very old and near death; could I be permitted to return home to bury him?” To this man Jesus said: “My son, the foxes have holes, and the birds of heaven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where to lay his head. You are a faithful disciple, and you can remain such while you return home to minister to your loved ones, but not so with my gospel messengers. They have forsaken all to follow me and proclaim the kingdom. If you would be an ordained teacher, you must let others bury the dead while you go forth to publish the good news.” And this man went away in great disappointment. 한 진지한 제자가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저도 당신의 새 사도 중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제 아버지가 매우 연로해 거의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 장례(葬禮)를 치러도 될까요?”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젊은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둥우리가 있지만,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머리 둘 데가 없느니라. 너는 신실한 제자이니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러 집으로 돌아가 그렇게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내 복음 메신저들은 그렇지 않도다. 그들은 나를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모든 것을 버렸느니라. 네가 임직 교사가 되려면, 네가 복음을 널리 알리러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고인(故人)을 묻게 해야 하느니라(마8:20-22, 눅9:57-60).” 이 사람은 크게 실망하여 떠나갔습니다.

163:2.3 (1801.6) Another disciple came to the Master and said: “I would become an ordained messenger, but I would like to go to my home for a short while to comfort my family.” And Jesus replied: “If you would be ordained, you must be willing to forsake all. The gospel messengers cannot have divided affections. No man, having put his hand to the plough, if he turns back, is worthy to become a messenger of the kingdom.” 또 다른 제자가 주(主)께 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임직 메신저가 되려 하지만 잠시 저의 집에 가서 제 가족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네가 임직되려 한다면, 너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느니라. 복음 메신저들은 애착(愛着 단념할 수 없는 애정)을 나눌 수 없느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되돌아가는 자는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가 되기에 마땅치 않으니라(눅9:61-62).”

163:2.4 (1801.7) Then Andrew brought to Jesus a certain rich young man who was a devout believer, and who desired to receive ordination. This young man, Matadormus, was a member of the Jerusalem Sanhedrin; he had heard Jesus teach and had been subsequently instructed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by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Jesus talked with Matadormus concerning the requirements of ordination and requested that he defer decision until after he had thought more fully about the matter. Early the next morning, as Jesus was going for a walk, this young man accosted him and said: “Master, I would know from you the assurances of eternal life. Seeing that I have observed all the commandments from my youth, I would like to know what more I must do to gain eternal life?” In answer to this question Jesus said: “If you keep all the commandments — do not commit adultery, do not kill, do not steal, do not bear false witness, do not defraud, honor your parents — you do well, but salvation is the reward of faith, not merely of works. Do you believe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Matadormus answered: “Yes, Master, I do believe everything you and your apostles have taught me.” And Jesus said, “Then are you indeed my disciple and a child of the kingdom.” 그다음 안드레가 독실한 신자이며 임직받기를 원했던 어떤 부자 청년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이 청년 마타도르무스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가르치는 것을 듣고 그 후 베드로 및 다른 사도들에 의해 하느님 나라 복음에 밝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임직 자격에 관해 마타도루무스와 이야기하고 그가 그 문제에 대해 더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도록 요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께서 산책하실 때 이 청년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主)여, 저는 당신에게서 영생의 확신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으니, 제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질문의 대답으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말라,’ ‘속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모든 계명을 네가 지킨다면(마19:18-20a, 막10:18-20, 눅18:18, 20-21), 네가 잘하는 것이나, 구원은 신앙의 보답(報答)이지, 그저 행위의 보답(報答)이 아니라. 네가 하느님 나라의 이 복음을 믿느냐?” 그러자 마타도르무스가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저는 당신과 당신의 사도들이 저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실로 내 제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자녀니라.”

163:2.5 (1802.1) Then said the young man: “But, Master, I am not content to be your disciple; I would be one of your new messengers.” When Jesus heard this, he looked down upon him with a great love and said: “I will have you to be one of my messengers if you are willing to pay the price, if you will supply the one thing which you lack.” Matadormus replied: “Master, I will do anything if I may be allowed to follow you.” Jesus, kissing the kneeling young man on the forehead, said: “If you would be my messenger, go and sell all that you have and, when you have bestowed the proceeds upon the poor or upon your brethren, come and follow me,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the kingdom of heaven.” 그러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여, 저는 당신의 제자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새 메신저 중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듣자, 그는 큰 사랑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기꺼이 값을 치르고, 네가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울 것이라면, 내가 너를 내 메신저 중 하나가 되게 하리라.” 마타도르무스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제가 당신을 따르도록 허락받으면 저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릎 꿇은 청년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습니다. “네가 내 메신저가 되려면,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 그리고 그 수입을 가난한 자들이나 네 형제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면,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보화(寶貨)를 얻을 것이라(마19:21. 막10:21, 눅18:22).”

163:2.6 (1802.2) When Matadormus heard this, his countenance fell. He arose and went away sorrowful, for he had great possessions. This wealthy young Pharisee had been raised to believe that wealth was the token of God’s favor. Jesus knew that he was not free from the love of himself and his riches. The Master wanted to deliver him from the love of wealth, not necessarily from the wealth. While the disciples of Jesus did not part with all their worldly goods, the apostles and the seventy did. Matadormus desired to be one of the seventy new messengers, and that was the reason for Jesus’ requiring him to part with all of his temporal possessions. 마타도르무스가 이 말을 듣자, 그의 안색이 침울(沈鬱)해졌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비탄에 잠겨 일어나 떠나갔습니다(막10:22, 눅18:23). 이 부유한 젊은 바리새인은, 많은 재산이 하느님 은혜의 표시라고 믿도록 양육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과 자기 재산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반드시 많은 재산으로부터가 아니라, 많은 재산에 대한 사랑에서 구해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 모든 재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도들과 70인은 포기했습니다. 마타도르무스는 70인의 새 메신저 중 하나가 되려고 했으며, 그것이 예수께서 그에게 현세의 모든 그의 재산을 포기하도록 요청한 이유였습니다.

221002 영적 충성과 물질적 애착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you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you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163:2.7 (1802.3) Almost every human being has some one thing which is held on to as a pet evil, and which the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requires as a part of the price of admission. If Matadormus had parted with his wealth, it probably would have been put right back into his hands for administration as treasurer of the seventy. For later 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at Jerusalem, he did obey the Master’s injunction, although it was then too late to enjoy membership in the seventy, and he became the treasurer of the Jerusalem church, of which James the Lord’s brother in the flesh was the head. 거의 모든 인간은 총애(寵愛 귀엽게 사랑하는) 악(惡)으로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부 입장료로 요구되는 어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타도르무스가 자기 재산을 포기했다면, 필시 70인의 회계 담당자로 그것을 관리하도록 그의 손에 바로 다시 넘겨졌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진 후, 그때는 70인의 회원 자격을 누리기에 너무 늦었지만, 그가 주(主)의 권고를 따랐고, 그는, 육신으로 주(主)님의 동생 야고보가 수장(首長)이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회계 담당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63:2.8 (1802.4) Thus always it was and forever will be: Men must arrive at their own decisions. There is a certain range of the freedom of choice which mortals may exercise. The forces of the spiritual world will not coerce man; they allow him to go the way of his own choosing. 그래서 항상 있었고 언제나 그럴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사자들이 행사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의 세력은 사람에게 마음에 없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도록 놔둡니다.

163:2.9 (1802.5) Jesus foresaw that Matadormus, with his riches, could not possibly become an ordained associate of men who had forsaken all for the gospel; at the same time, he saw that, without his riches, he would become the ultimate leader of all of them. But, like Jesus’ own brethren, he never became great in the kingdom because he deprived himself of that intimate and personal association with the Master which might have been his experience had he been willing to do at this time the very thing which Jesus asked, and which, several years subsequently, he actually did. 마타도르무스가 자기 재산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모두 포기한 사람들의 임직 동료가 아무리 해도 될 수 없음을 예수님을 내다 보셨습니다. 동시에 그가 자기 재산이 없으면, 그가 그들 모두의 최종적 지도자가 될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친형제들처럼, 몇 년 후 그가 실제로 했던, 예수께서 요구했던 바로 그것을 이때 그가 기꺼이 했더라면, 자기 체험일 수도 있었던 주(主)님과 그런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끊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해질 수 없었습니다.

163:2.10 (1803.1) Riches have nothing directly to do with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the love of wealth does. The spiritual loyalties of the kingdom are incompatible with servility to materialistic mammon. Man may not share his supreme loyalty to a spiritual ideal with a material devotion. 재산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재산을 사랑하는 것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영적 충성은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물질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배금(拜金 돈 숭배)에 대한 노예근성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마6:24). 사람은 영적 이상(理想)에 대한 자기 최상의 충성을 강한 물질적 애착과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163:2.11 (1803.2) Jesus never taught that it was wrong to have wealth. He required only the twelve and the seventy to dedicate all of their worldly possessions to the common cause. Even then, he provided for the profitable liquidation of their property, as in the case of the Apostle Matthew. Jesus many times advised his well-to-do disciples as he taught the rich man of Rome. The Master regarded the wise investment of excess earnings as a legitimate form of insurance against future and unavoidable adversity. When the apostolic treasury was overflowing, Judas put funds on deposit to be used subsequently when they might suffer greatly from a diminution of income. This Judas did after consultation with Andrew. Jesus never personally had anything to do with the apostolic finances except in the disbursement of alms. But there was one economic abuse which he many times condemned, and that was the unfair exploitation of the weak, unlearned, and less fortunate of men by their strong, keen, and more intelligent fellows. Jesus declared that such inhuman treatment of men, women, and children was incompatible with the ideals of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재산 소유가 잘못이라고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12 사도와 70인만 그들의 전 재산을 공동 목적에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사도 마태의 경우처럼 그들의 재산을 유익하게 청산(淸算)하도록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넉넉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로마의 부자를 가르친 것처럼, 여러 번 권했습니다. 주(主)님은 초과 이익의 현명한 투자를 미래와 어쩔 수 없는 역경에 대비한 합법적 형태의 보험으로 여겼습니다. 사도 기금이 넘치면, 그들의 수입이 크게 줄었을 때 나중에 쓰도록 유다가 기금을 저축했습니다. 유다는 안드레와 의논한 뒤에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는 의연금(義捐金 자선이나 공익을 위한) 지출을 제외하고 결코 개인적으로 사도 자금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번 나무랐던 재정 남용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강하고, 명민(明敏 총명하고 민첩)하며, 더 영리한 사람들이 약하고, 배우지 못한 불우이웃들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남녀와 아이들에 대한 그런 잔인(殘忍)한 대우(待遇)는 하늘나라에 속한 형제 공동체의 이상(理想)과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3. The Discussion About Wealth 재산에 관한 토론

221009 순전한 집중적 연모(戀慕) 마19:23-26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3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ruly I tell you, it is hard for some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24 Again I tell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some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25 When the disciples heard this, they were greatly astonished and asked, “Who then can be saved?” 26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With ma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163:3.1 (1803.3) By the time Jesus had finished talking with Matadormus, Peter and a number of the apostles had gathered about him, and as the rich young man was departing, Jesus turned around to face the apostles and said: “You see how difficult it is for those who have riches to enter fully into the kingdom of God! Spiritual worship cannot be shared with material devotions;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You have a saying that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the heathen to inherit eternal life.’ And I declare that it is as easy for this camel to go through the needle’s eye as for these self-satisfied rich ones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마타도르무스와 대화를 마칠 때까지 베드로와 여러 사도가 그 주위에 모였으며, 부자 청년이 떠나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돌이켜 말했습니다. “재산이 있는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느냐(마19:23, 막10:23, 눅18:24)! 영적 경배는 강한 물질적 애착과 함께 할 수 없도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a).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기가, 이방인이 영생을 물려받기보다 더 쉽다.’라는 속담이 있느니라. 그래서, 이런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기가, 스스로 만족한 이런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큼 쉽다(마19:24, 막10:25, 눅18:25)고 내가 선언하노라.”

163:3.2 (1803.4) When Peter and the apostles heard these words, they were astonished exceedingly, so much so that Peter said: “Who then, Lord, can be saved? Shall all who have riches be kept out of the kingdom?” And Jesus replied: “No, Peter, but all who put their trust in riches shall hardly enter into the spiritual life that leads to eternal progress. But even then, much which is impossible to man is not beyond the reach of the Father in heaven; rather should we recognize tha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주(主)여, 누가 구원될 수 있나요? 재산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나요?”라고 베드로가 말할 정도까지, 그들은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베드로야, 그러나 재산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진보에 이르는 영적 생활에 거의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그러나 그렇더라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많은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역량을 넘어서지 않느니라.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느니라(마19:25-26, 막10:26-27, 눅18:26-27).”

163:3.3 (1803.5) As they went off by themselves, Jesus was grieved that Matadormus did not remain with them, for he greatly loved him. And when they had walked down by the lake, they sat there beside the water, and Peter, speaking for the twelve (who were all present by this time), said: “We are troubled by your words to the rich young man. Shall we require those who would follow you to give up all their worldly goods?” And Jesus said: “No, Peter, only those who would become apostles, and who desire to live with me as you do and as one family. But the Father requires that the affections of his children be pure and undivided. Whatever thing or person comes between you and the love of the truths of the kingdom, must be surrendered. If one’s wealth does not invade the precincts of the soul, it is of no consequence in the spiritual life of those who would enter the kingdom.” 그들이 자기들끼리 자리를 뜨자, 예수는 마타도르무스가 그들과 함께 남아 있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그가 그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호숫가로 걸어 내려가, 거기 물가에 그들이 앉았고, 이때쯤 모두 참석한 12 사도를 대변하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하신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들의 전 재산을 포기하라고 우리가 요구해야 합니까? ”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아니라, 베드로야, 사도가 되어, 너희가 하듯이 한 가족으로 나와 함께 살려는 자들만이라.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자녀의 연모(戀慕 사모하여 그리워함)가 순전하고 집중되기를 요구하시느니라. 너희와 하느님 나라 진리에 대한 사랑 사이를 갈라놓는 어떤 것이나 사람이라도 포기해야 하느니라. 사람의 재산이 그 혼(魂)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의 영적 생활에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라.”

163:3.4 (1804.1) And then said Peter, “But, Master, we have left everything to follow you, what then shall we have?” And Jesus spoke to all of the twelve: “Verily, verily, I say to you, there is no man who has left wealth, home, wife, brethren, parents, or children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the kingdom of heaven who shall not receive manifold more in this world, perhaps with some persecutions, and in the world to come eternal life. But many who are first shall be last, while the last shall often be first. The Father deals with his creatures in accordance with their needs and in obedience to his just laws of merciful and loving consideration for the welfare of a universe.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당신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떠났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요(마19:27, 막10:28, 눅18:28)?” 예수께서 모든 열 둘에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하늘나라를 위해 재산, 집, 아내, 형제, 부모나 자녀를 떠난 사람은 이생에서 형편에 따라 약간의 박해와 함께 더 다양하게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많은 자가 나중이 될 것이며 반면에, 나중 된 자들이 종종 먼저가 될 것이니라(마19:29-30, 막10:29-31, 눅18:29-30). 아버지는 자기 창조물들의 필요에 따라, 우주의 행복을 위해 자비롭고 애정이 깊게 헤아리는 자신의 공정한 법칙에 순종하여, 자기 창조물들을 다루시느니라.”

163:3.5 (1804.2)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householder who was a large employer of men, and who went out early in the morning to hire laborers to work in his vineyard. When he had agreed with the laborers to pay them a denarius a day, he sent them into the vineyard. Then he went out about nine o’clock, and seeing others standing in the market place idle, he said to them: ‘Go you also to work in my vineyard, and whatsoever is right I will pay you.’ And they went at once to work. Again he went out about twelve and about three and did likewise. And going to the market place about five in the afternoon, he found still others standing idle, and he inquired of them, ‘Why do you stand here idle all the day?’ And the men answered, ‘Because nobody has hired us.’ Then said the householder: ‘Go you also to work in my vineyard, and whatever is right I will pay you.’ “하늘나라는 사람을 많이 고용한 세대주와 같으니, 그가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인부(人夫)들을 고용하려고 아침 일찍 나갔더라. 그가 인부들에게 일당 한 데나리온(로마시대 인부 일당)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자, 그는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더라. 그 후 9시경 나가, 장터에서 할 일이 없이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보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더라.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적절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지급하리라.’ 그러자 그들이 즉시 일하러 갔더라. 그가 12시와 3시쯤 다시 나가 똑같이 했더라. 그리고 오후 5시쯤 장터에 가서, 여전히 할 일 없이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발견하고 그가 그들에게 ‘너희는 왜 온종일 여기에서 할 일이 없이 서 있는지?’라고 묻더라. 사람들이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더라. 그러자 세대주가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적절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지급하리라.’라고 말했더라(마20:1-7).

163:3.6 (1804.3) “When evening came, this owner of the vineyard said to his steward: ‘Call the laborers and pay them their wages, beginning with the last hired and ending with the first.’ When those who were hired about five o’clock came, they received a denarius each, and so it was with each of the other laborers. When the men who were hired at the beginning of the day saw how the later comers were paid, they expected to receive more than the amount agreed upon. But like the others every man received only a denarius. And when each had received his pay, they complained to the householder, saying: ‘These men who were hired last worked only one hour, and yet you have paid them the same as us who have borne the burden of the day in the scorching sun.’ “저녁이 되자, 이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인부들을 불러 나중에 고용된 자들부터 시작해서 먼저 고용된 자들을 끝으로,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라고 말했더라. 5시쯤 고용된 자들이 왔을 때, 그들은 한 데나리온씩 받았고, 다른 인부들도 각자 그랬더라.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이 나중에 온 자들이 얼마나 받았는지 보고, 그들은 합의했던 액수보다 더 받기를 기대했더라. 그러나 다른 이들처럼 모두 한 데나리온만 받았더라. 각자 자기 임금을 받고 나서, 그들이 ‘나중에 고용된 이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 일했지만, 불볕에서 종일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그들에게 지급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세대주에게 불평했더라(마20:8-12).

163:3.7 (1804.4) “Then answered the householder: ‘My friends, I do you no wrong. Did not each of you agree to work for a denarius a day? Take now that which is yours and go your way, for it is my desire to give to those who came last as much as I have given to you.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with my own? or do you begrudge my generosity because I desire to be good and to show mercy?’” “그러자 세대주가 ‘내 친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잘못이 없느니라. 너희 각자 일당 한 데나리온에 일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내가 나중에 온 자들에게 너희에게 지급한 만큼 주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니, 바로 네 것을 가지고 자리를 떠나라. 내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법에 저촉(抵觸)되느냐? 아니면 내가 선하고 은혜를 베풀려고 해서 너희가 내 후한 마음을 아까워하느냐?’라고 대답했더라(마20:13-15).”

 

4. Farewell to the Seventy 70인 환송회(歡送會)

221016 70인 환송회(歡送會) 1 막12:30-31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31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163:4.1 (1804.5) It was a stirring time about the Magadan Camp the day the seventy went forth on their first mission. Early that morning, in his last talk with the seventy, Jesus placed emphasis on the following: 마가단 야영지 근처에서 70인이 그들의 첫 선교를 출발하던 날은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른 아침에, 70인에게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께서 다음을 강조했습니다.

163:4.2 (1804.6) 1. The gospel of the kingdom must be proclaimed to all the world, to gentile as well as to Jew.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온 세상에,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선포되어야 하느니라.

163:4.3 (1804.7) 2. While ministering to the sick, refrain from teaching the expectation of miracles. 아픈 자들을 보살피면서, 기적을 기대하도록 가르치지 말라.

163:4.4 (1805.1) 3. Proclaim a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not an outward kingdom of worldly power and material glory. 세상 권세와 물질적 영광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자녀)들로 구성된 영적 형제 공동체를 선포하라.

163:4.5 (1805.2) 4. Avoid loss of time through overmuch social visiting and other trivialities which might detract from wholehearted devotion to preaching the gospel. 복음 전도에 대한 전심의 헌신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과도한 사교적 방문과 다른 사소한 이유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163:4.6 (1805.3) 5. If the first house to be selected for a headquarters proves to be a worthy home, abide there throughout the sojourn in that city. 본부로 정한 첫 집이 (본부에) 어울리는 가정으로 판명되면, 그 도시에 머무는 내내 거기 머물러 있으라.

163:4.7 (1805.4) 6. Make clear to all faithful believers that the time for an open break with the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at Jerusalem has now come. 예루살렘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노골적으로 단절(斷絶)할 때가 이제 왔다고 신실한 모든 신자에게 분명히 밝히라.

163:4.8 (1805.5) 7. Teach that man’s whole duty is summed up in this one commandmen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mind and soul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This they were to teach as man’s whole duty in place of the 613 rules of living expounded by the Pharisees.) 사람의 모든 의무가 이 한 가지 명령에 요약되어 있다고 가르치라. 네 마음과 네 혼(魂)을 다해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들은 사람의 모든 의무로서 바리새인들이 상세하게 설명했던 613개 생활 규칙 대신에 이것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221023 70인 환송회(歡送會) 2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Then I heard the voice of the Lord saying,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And I said, “Here am I. Send me!”

163:4.9 (1805.6) When Jesus had talked thus to the seventy in the presence of all the apostles and disciples, Simon Peter took them off by themselves and preached to them their ordination sermon, which was an elaboration of the Master’s charge given at the time he laid his hands upon them and set them apart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Peter exhorted the seventy to cherish in their experience the following virtues: 예수께서 모든 사도와 제자들 앞에서 70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그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임직 설교를 전했는데, 그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안수하여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로서 그들을 따로 떼어놓을 때 주셨던 직무를 다듬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70인에게 다음의 가치를 품고 체험하라고 권고(勸告)했습니다.

163:4.10 (1805.7) 1. Consecrated devotion. To pray always for more laborers to be sent forth into the gospel harvest. He explained that, when one so prays, he will the more likely say, “Here am I; send me.” He admonished them to neglect not their daily worship. 봉헌(奉獻)된 헌신. 더 많은 일군이 복음 수확에 파견되도록 항상 기도하는 것.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6:8b).”라고 그가 아마 더 말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매일 경배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163:4.11 (1805.8) 2. True courage. He warned them that they would encounter hostility and be certain to meet with persecution. Peter told them their mission was no undertaking for cowards and advised those who were afraid to step out before they started. But none withdrew. 진정한 용기. 그는 그들이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박해는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면서, 그들의 사명은 겁쟁이들이 맡을 일이 아니며, 그들이 시작하기 전에 두려워하는 자들은 떠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163:4.12 (1805.9) 3. Faith and trust. They must go forth on this short mission wholly unprovided for; they must trust the Father for food and shelter and all other things needful. 신앙과 신뢰. 그들은 이 짧은 선교에 전혀 아무 지원 없이 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음식, 숙소 및 다른 모든 필수품에 대해 아버지를 신뢰해야 했습니다.

163:4.13 (1805.10) 4. Zeal and initiative. They must be possessed with zeal and intelligent enthusiasm; they must attend strictly to their Master’s business. Oriental salutation was a lengthy and elaborate ceremony; therefore had they been instructed to “salute no man by the way,” which was a common method of exhorting one to go about his business without the waste of time. It had nothing to do with the matter of friendly greeting. 열정과 창의력. 그들은 열성과 지능적 열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主)님의 일에 전적으로 힘써야 했습니다. 동양식 인사는 긴 정교한 예법이어서, 그들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시간 낭비 없이 일하러 다니는 자에게 훈계하던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친절한 인사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163:4.14 (1805.11) 5. Kindness and courtesy. The Master had instructed them to avoid unnecessary waste of time in social ceremonies, but he enjoined courtesy toward all with whom they should come in contact. They were to show every kindness to those who might entertain them in their homes. They were strictly warned against leaving a modest home to be entertained in a more comfortable or influential one. 친절과 예의. 주님은 그들에게 사교적 예식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들이 접해야 하는 모두에게 정중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자기 집에 대접하려는 자들에게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더 편안하거나 영향력 있는 집에 대접받으려고 평범한 집을 떠나지 않도록 엄하게 경고받았습니다.

163:4.15 (1805.12) 6. Ministry to the sick. The seventy were charged by Peter to search out the sick in mind and body and to do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bring about the alleviation or cure of their maladies. 환자 돌보기. 베드로는 70인에게 마음과 육체가 아픈 자를 조사해서 질병을 덜거나 치료하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63:4.16 (1805.13) And when they had been thus charged and instructed, they started out, two and two, on their mission in Galilee, Samaria, and Judea.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명령과 지시를 받은 후, 그들은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에서 둘씩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163:4.17 (1806.1) Although the Jews had a peculiar regard for the number seventy, sometimes considering the nations of heathendom as being seventy in number, and although these seventy messengers were to go with the gospel to all peoples, still as far as we can discern, it was only coincidental that this group happened to number just seventy. Certain it was that Jesus would have accepted no less than half a dozen others, but they were unwilling to pay the price of forsaking wealth and families. 유대인들이 숫자 70을 특별하게 여기며, 때때로 이교도 국가를 모두 70개로 간주하고, 이 70인 메신저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들고 가야 했지만, 우리가 알아보는 한, 이 집단이 바로 총수 70이 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다른 이들을 6명이나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들은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5. Moving the Camp to Pella 야영지를 펠라로 옮기다

221030 자발적 충성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

163:5.1 (1806.2) Jesus and the twelve now prepared to establish their last headquarters in Perea, near Pella, where the Master was baptized in the Jordan. The last ten days of November were spent in council at Magadan, and on Tuesday, December 6, the entire company of almost three hundred started out at daybreak with all their effects to lodge that night near Pella by the river. This was the same site, by the spring, that John the Baptist had occupied with his camp several years before. 이제, 예수와 12 사도는 주(主)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던 펠라 근처 페레아에 그들의 마지막 본부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11월의 마지막 열흘간은 마가단에서 회의(會議)하며 보냈고, 12월 6일 화요일에 거의 300명의 전체 일행이 강(江)가의 펠라 근처에서 그날 밤 숙박하려고 모든 물건을 가지고 새벽녘에 떠났습니다. 여기 샘물 옆은 세례 요한이 몇 년 전에 그의 야영지로 사용했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163:5.2 (1806.3) After the breaking up of the Magadan Camp, David Zebedee returned to Bethsaida and began immediately to curtail the messenger service. The kingdom was taking on a new phase. Daily, pilgrims arrived from all parts of Palestine and even from remote regions of the Roman Empire. Believers occasionally came from Mesopotamia and from the lands east of the Tigris. Accordingly, on Sunday, December 18, David, with the help of his messenger corps, loaded on to the pack animals the camp equipage, then stored in his father’s house, with which he had formerly conducted the camp of Bethsaida by the lake. Bidding farewell to Bethsaida for the time being, he proceeded down the lake shore and along the Jordan to a point about one-half mile north of the apostolic camp; and in less than a week he was prepared to offer hospitality to almost fifteen hundred pilgrim visitors. The apostolic camp could accommodate about five hundred. This was the rainy season in Palestine, and these accommodations were required to take care of the ever-increasing number of inquirers, mostly earnest, who came into Perea to see Jesus and to hear his teaching. 마가단 야영지를 해체한 후, 다윗 세베대는 벳새다로 돌아가 즉시 메신저 봉사를 축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순례자들이 팔레스타인 전역과 심지어 로마 제국의 먼 지역으로부터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가끔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 동쪽 지역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12월 18일 일요일에, 다윗은 자기 메신저 무리의 도움으로, 이전(148.0.1 AD28.5.3~10.3)에 호숫가 벳새다 야영지를 운영한 후 자기 아버지 집에 보관했던, 야영 장비를 짐 나르는 동물에 실었습니다. 당분간 벳새다에 작별을 고하고, 그는 호숫가로 내려가 요단강을 따라서 사도 야영지에서 약 0.5마일 (800m) 북쪽 지점까지 전진했습니다. 그는, 1주일도 못 되어, 거의 1,500명의 순례 방문자들을 환대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사도 야영지는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의 우기(雨期 장마철 11월~3월)여서, 계속 늘어나는 탐구자들을 돌보기 위해 이런 숙박 시설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주로 예수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페레아로 왔던 진지한 자들이었습니다.

163:5.3 (1806.4) David did all this on his own initiative, though he had taken counsel with Philip and Matthew at Magadan. He employed the larger part of his former messenger corps as his helpers in conducting this camp; he now used less than twenty men on regular messenger duty. Near the end of December and before the return of the seventy, almost eight hundred visitors were gathered about the Master, and they found lodging in David’s camp. 다윗은 마가단에서 빌립과 마태와 상의했지만, 그는 자발적(自發的 스스로 책임짐)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 야영지를 운영하는 자기 조수들로 그의 이전 메신저 무리 대부분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이제 정규 메신저 임무에 20명 미만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12월 말, 70인이 돌아오기 전에, 거의 800명의 방문자가 모여 주(主)님을 에워쌌으며, 그들은 다윗의 야영지에서 숙소를 찾았습니다.

 

6. The Return of the Seventy 70인의 귀환(歸還)

221106 숨겨진 계시 눅10:17-24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7 The seventy-two returned with joy and said, “Lord, even the demons submit to us in your name.” 18 He replied, “I saw Satan fall like lightning from heaven. 19 I have given you authority to trample on snakes and scorpions and to overcome all the power of the enemy; nothing will harm you. 20 However, do not rejoice that the spirits submit to you, but rejoice that your names are written in heaven.” 21 At that time Jesus, full of joy through the Holy Spirit,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Yes, Father, for this is what you were pleased to do. 22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who the Son is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who the Father is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23 Then he turned to his disciples and said privately,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see. 24 For I tell you that many prophets and kings wanted to see what you see but did not see it, and to hear what you hear but did not hear it.”

163:6.1 (1806.5) On Friday, December 30, while Jesus was away in the near-by hills with Peter, James, and John, the seventy messengers were arriving by couples, accompanied by numerous believers, at the Pella headquarters. All seventy were assembled at the teaching site about five o’clock when Jesus returned to the camp. The evening meal was delayed for more than an hour while these enthusiasts for the gospel of the kingdom related their experiences. David’s messengers had brought much of this news to the apostles during previous weeks, but it was truly inspiring to hear these newly ordained teachers of the gospel personally tell how their message had been received by hungry Jews and gentiles. At last Jesus was able to see men going out to spread the good news without his personal presence. The Master now knew that he could leave this world without seriously hindering the progress of the kingdom. 12월 30일(AD 29년) 금요일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근처 언덕에 떨어져 있을 때, 메신저 70인이 둘씩 수많은 신자와 함께 펠라 본부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눅10:17a). 예수께서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70인 모두 가르치는 장소에 5시쯤 모였습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 복음의 팬들이 자기 체험을 말하는 동안 저녁 식사가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습니다. 다윗의 메신저들이 지난 몇 주간 대부분의 이런 소식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지만, 새로 임직한 이 복음 교사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열망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직접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없어도 기쁜 소식을 퍼뜨리려고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하느님 나라 진보의 심각한 방해가 없이,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163:6.2 (1807.1) When the seventy related how “even the devils were subject” to them, they referred to the wonderful cures they had wrought in the cases of victims of nervous disorders. Nevertheless, there had been a few cases of real spirit possession relieved by these ministers, and referring to these, Jesus said: “It is not strange that these disobedient minor spirits should be subject to you, seeing that I beheld Satan falling as lightning from heaven. But rejoice not so much over this, for I declare to you that, as soon as I return to my Father, we will send forth our spirits into the very minds of men so that no more can these few lost spirits enter the minds of unfortunate mortals. I rejoice with you that you have power with men, but be not lifted up because of this experience but the rather rejoice that your names are written on the rolls of heaven, and that you are thus to go forward in an endless career of spiritual conquest.” 70인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악령(惡靈)들도 복종했는지(눅10:17b)” 말하면서, 그들은 신경쇠약 희생자의 경우에 자신들이 했던 놀라운 치유를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이 사역자들이 영(靈)에 사로잡힌 몇 경우를 해방했지만, 이런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눅10:18), 이렇게 불순종하는 소수의 영(靈)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노라. 그러나 이런 일로 너무 많이 기뻐하지 말지니, 내가 내 아버지께 돌아가자마자, 우리가 우리 영(靈)들을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보내서, 더 이상 이런 소수의 잃어버린 영(靈)이 애처로운 필사자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할 것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사람들에 대해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너희와 함께 기뻐하지만, 너희 이름이 하늘 명부에 기록되어, 너희가 끝없는 영적 획득의 생애에서 이렇게 전진하는 것으로 오히려 기뻐하고(눅10:20), 이런 체험 때문에 용기를 내지 말라.”

163:6.3 (1807.2) And it was at this time, just before partaking of the evening meal, that Jesus experienced one of those rare moments of emotional ecstasy which his followers had occasionally witnessed. He said: “I thank you, my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that, while this wonderful gospel was hidden from the wise and self-righteous, the spirit has revealed these spiritual glories to these children of the kingdom. Yes, my Father, it must have been pleasing in your sight to do this, and I rejoice to know that the good news will spread to all the world even after I shall have returned to you an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perform. I am mightily moved as I realize you are about to deliver all authority into my hands, that only you really know who I am, and that only I really know you, and those to whom I have revealed you. And when I have finished this revelation to my brethren in the flesh, I will continue the revelation to your creatures on high.” 그리고 이때, 저녁 식사를 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가끔 목격했던, 그렇게 드문 감정적 황홀 중 하나를 체험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主宰)이신 내 아버지여, 이 놀라운 복음이 젠체(제가 제일인 체)하며 혼자 옳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겨졌지만, 영(靈)은 하느님 나라의 이런 자녀들에게 이렇게 영적 영광들을 드러냈기에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그렇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 보시기에 분명히 기쁘시나이다(마11:25-26, 눅10:21), 그리고 내가 당신과 당신께서 내게 행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간 후에도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퍼질 것을, 내가 알고 기뻐하나이다. 당신께서 모든 권위를 바로 내 손에 주려 하시고, 당신만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며(마11:27, 눅10:22), 나만이 당신과 내가 당신을 계시한 자들을 참으로 안다는 것을 내가 실감하기에 내가 심히 감격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들에게 직접 보고 들은 이 계시를 끝내면, 나는 하늘에 있는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계시를 계속하리이다.”

163:6.4 (1807.3) When Jesus had thus spoken to the Father, he turned aside to speak to his apostles and ministers: “Blessed are the eyes which see and the ears which hear these things. Let me say to you that many prophets and many of the great men of the past ages have desired to behold what you now see, but it was not granted them. And many generations of the children of light yet to come will, when they hear of these things, envy you who have heard and seen them.” 예수께서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린 뒤에, 그는 얼굴을 돌려 사도들과 사역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네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지난 시대의 여러 위대한 사람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느니라(마13:16-17, 눅10:23-24). 그리고 도래할 여러 빛의 자녀들 세대가 이런 일들을 들을 때, 그것들을 듣고 본 너희를 부러워하느니라.”

221113 참된 초대장 마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163:6.5 (1807.4) Then, speaking to all the disciples, he said: “You have heard how many cities and villages have receive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ow my ministers and teachers have been received by both the Jew and the gentile. And blessed indeed are these communities which have elected to believe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woe upon the light-rejecting inhabitants of Chorazin, Bethsaida-Julias, and Capernaum, the cities which did not well receive these messengers. I declare that, if the mighty works done in these places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 people of these so-called heathen cities would have long sinc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It shall indeed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in the day of judgment.” 그다음에, 그는 모든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내 사역자들과 교사들을 어떻게 환영했는지, 들었느니라.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기로 작정한 이런 공동체들은 참으로 복이 있느니라. 그러나 빛을 거부하는 코라진, 벳새다-쥴리아스와 가버나움, 이런 메신저들을 호의적으로 환영하지 않았던 도시들에는 화 있을진저. 내가 선언하노니, 이곳들에서 행한 기적을 티레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소위 이런 이방인 도시의 사람들이 오래전에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날에 티레와 시돈이 참으로 더 견딜 만하리라(마11:21-22, 눅10:13-14).”

163:6.6 (1807.5) The next day being the Sabbath, Jesus went apart with the seventy and said to them: “I did indeed rejoice with you when you came back bearing the good tidings of the recep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by so many people scattered throughout Galilee, Samaria, and Judea. But why were you so surprisingly elated? Did you not expect that your message would manifest power in its delivery? Did you go forth with so little faith in this gospel that you come back in surprise at its effectiveness? And now, while I would not quench your spirit of rejoicing, I would sternly warn you against the subtleties of pride, spiritual pride. If you could understand the downfall of Lucifer, the iniquitous one, you would solemnly shun all forms of spiritual pride. 다음날(AD29. 12.31) 안식일에, 예수께서 70인과 따로 나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아주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내가 참으로 너희와 함께 기뻐했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왜 그렇게 놀랄 정도로 우쭐했느냐? 너희 메시지가 전달될 때 권세가 드러나리라고 너희가 기대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이 복음을 그렇게밖에 신앙하지 않고 나갔다가 그 효과에 깜짝 놀라서 돌아왔느냐? 그래서 이제, 내가 기뻐하는 너희 사기를 가라앉히지 않겠지만 나는 너희에게 미묘한 우월감, 영적 자만심에 대해서 단호히 경고하고자 하노라. 너희가 루시퍼, 사악(肆惡)한 자의 파멸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희는 모든 형태의 영적 자만심을 진지하게 피할 것이니라.

163:6.7 (1808.1) “You have entered upon this great work of teaching mortal man that he is a son of God. I have shown you the way; go forth to do your duty and be not weary in well doing. To you and to all who shall follow in your steps down through the ages, let me say: I always stand near, and my invitation-call is, and ever shall be,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of me, for I am true and loyal, and you shall find spiritual rest for your souls.” “너희는 필사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그에게 가르치는 이 위대한 일에 접어들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그 길을 보였느니라. 가서 너희 본분을 다하고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갈6:9a, 살후3:13). 너희와 대대로 너희 본을 뒤따를 모두에게 이르노라. 내가 항상 가까이 서서, 이제 그리고 영원토록 내가 불러 초청하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나는 진실하고 충실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알면, 너희는 너희 혼(魂)의 영적 안식(安息)을 찾으리라(마11:29).”

163:6.8 (1808.2) And they found the Master’s words to be true when they put his promises to the test. And since that day countless thousands also have tested and proved the surety of these same promises. 그리고 그들이 그의 약속을 시험해봤을 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참말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셀 수 없는 사람들도 시험해 보고 바로 이 약속의 확실성을 입증(立證)했습니다.

 

7. Preparation for the Last Mission 최후 사명 준비

221120 최후 사명 준비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As the time approached for him to be taken up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163:7.1 (1808.3) The next few days were busy times in the Pella camp; preparations for the Perean mission were being completed. Jesus and his associates were about to enter upon their last mission, the three months’ tour of all Perea, which terminated only upon the Master’s entering Jerusalem for his final labors on earth. Throughout this period the headquarters of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was maintained here at the Pella camp. 다음 며칠간 펠라 야영지는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페레아 선교 준비가 완료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그 동료들은 그들의 최후 사명에 막 들어갔는데, 주님께서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예루살렘 입성(入城)으로만 끝나는 3개월간 페레아 전역 여행(AD30. 1.3화~4.2일요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내내 예수와 12사도의 본부는 여기 펠라 야영지에 유지되었습니다.

163:7.2 (1808.4) It was no longer necessary for Jesus to go abroad to teach the people. They now came to him in increasing numbers each week and from all parts, not only from Palestine but from the whole Roman world and from the Near East. Although the Master participated with the seventy in the tour of Perea, he spent much of his time at the Pella camp, teaching the multitude and instructing the twelve. Throughout this three months’ period at least ten of the apostles remained with Jesus. 예수는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널리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전(全) 로마 세계와 근동(近東), 전역(全域)에서도 매주 그에게 오는 수(數)가 점점 더 늘었습니다. 주님은 70인과 함께 페레아 여행에 참여했지만, 그는 펠라 야영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군중을 가르치고 12사도를 교육했습니다. 적어도 이 석 달간 내내 열 명의 사도가 예수와 머물렀습니다.

163:7.3 (1808.5) The women’s corps also prepared to go out, two and two, with the seventy to labor in the larger cities of Perea. This original group of twelve women had recently trained a larger corps of fifty women in the work of home visitation and in the art of ministering to the sick and the afflicted. Perpetua, Simon Peter’s wife, became a member of this new division of the women’s corps and was intrusted with the leadership of the enlarged women’s work under Abner. After Pentecost she remained with her illustrious husband, accompanying him on all of his missionary tours; and on the day Peter was crucified in Rome, she was fed to the wild beasts in the arena. This new women’s corps also had as members the wives of Philip and Matthew and the mother of James and John. 여성단(團)도 70인과 함께 페레아의 대도시(大都市)에서 수고하기 위해 둘씩 나가려고 준비했습니다. 원래 12명의 이 여성 집단은 대심방(大尋訪) 사역과 환자와 앓는 자들을 보살피는 기법으로 최근에 50명의 더 큰 여성단(團)을 훈련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아내, 퍼페투아는 여성단(團) 중 이 새 부서원이 되었고, 아브너 아래에서 확대된 여성 사역의 지도를 맡았습니다. 오순절 이후 그녀는 빛나는 자기 남편과 함께 남아서 그의 모든 선교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날, 그녀는 투기장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여성단(團)에는 빌립과 마태의 아내들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역시 회원으로 있었습니다.

163:7.4 (1808.6) The work of the kingdom now prepared to enter upon its terminal phase under the personal leadership of Jesus. And this present phase was one of spiritual depth in contrast with the miracle-minded and wonder-seeking multitudes who followed after the Master during the former days of popularity in Galilee. However, there were still any number of his followers who were material-minded, and who failed to grasp the truth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founded on the eternal fact of the universal fatherhood of God. 하느님 나라 과업은 이제 예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단계는, 갈릴리에서 인기가 있던 이전 시절에 주님을 따랐던, 기적에 흥미를 두고 이적을 찾는 군중과 현저히 다르게, 영적으로 깊은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에 관심을 두고, 하늘나라는 하느님이 우주 아버지라는 영원한 사실에 근거한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라는 진리를 끝내 파악하지 못한 그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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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4 At the Feast of Dedication 봉헌(奉獻)절에

Paper 164

At the Feast of Dedication 봉헌(奉獻)절에

1. Story of the Good Samaritan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2.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3. Healing the Blind Beggar 눈먼 거지의 치유
4. Josiah Before the Sanhedrin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5. Teaching in Solomon’s Porch 솔로몬 행각의 가르침

221127 아버지의 마음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So he got up and went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for him; he ran to his son, threw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164:0.1 (1809.1) AS THE camp at Pella was being established, Jesus, taking with him Nathaniel and Thomas, secretly went up to Jerusalem to attend the feast of the dedication. Not until they passed over the Jordan at the Bethany ford, did the two apostles become aware that their Master was going on to Jerusalem. When they perceived that he really intended to be present at the feast of dedication, they remonstrated with him most earnestly, and using every sort of argument, they sought to dissuade him. But their efforts were of no avail; Jesus was determined to visit Jerusalem. To all their entreaties and to all their warnings emphasizing the folly and danger of placing himself in the hands of the Sanhedrin, he would reply only, “I would give these teachers in Israel another opportunity to see the light, before my hour comes.” 펠라에 야영지가 세워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다니엘과 도마를 데리고 봉헌절(하누카 AD29.12.25)에 참석하러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두 사도는 베다니 여울목에서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야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정말로 봉헌절에 참석하려 하심을 알아차리자, 그들은 그에게 정말 진심으로 간언(諫言)하고 온갖 이유를 들어 그들은 그를 단념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손에 자신을 두는 어리석음과 위험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든 간청과 경고에, 그는 “내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이스라엘의 이런 교사들에게 빛을 볼 또 다른 기회를 주려 하노라.”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164:0.2 (1809.2) On they went toward Jerusalem, the two apostles continuing to express their feelings of fear and to voice their doubts about the wisdom of such an apparently presumptuous undertaking. They reached Jericho about half past four and prepared to lodge there for the night.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가면서, 두 사도는 계속 자신들의 두려운 감정을 드러내고, 그토록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행동하는 판단에 대해 의혹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4시 30분쯤 도착하여 거기서 하룻밤 묵을 준비를 했습니다.

1. Story of the Good Samaritan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221204 인정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 눅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5 On one occasion an expert in the law stood up to test Jesus. “Teacher,” he aske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What is written in the Law?” he replied. “How do you read it?” 27 He answered, “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You have answered correctly,” Jesus replied.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But he wanted to justify himself,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In reply Jesus sai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when he was attacked by robber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 31 A priest happened to be going down the same road, and when he saw the man,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2 So too, a Levite, when he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But a Samaritan, as he traveled, came where the man was; and when he saw him, he took pity on him. 34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denarii and gave them to the innkeeper. ‘Look after him,’ he said, ‘and when I return, I will reimburse you for any extra expense you may have.’ 36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37 The expert in the law replied,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told him, “Go and do likewise.”

164:1.1 (1809.3) That evening a considerable company gathered about Jesus and the two apostles to ask questions, many of which the apostles answered, while others the Master discussed. In the course of the evening a certain lawyer, seeking to entangle Jesus in a compromising disputation, said: “Teacher, I would like to ask you just what I should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answered, “What is written in the law and the prophets; how do you read the Scriptures?” The lawyer, knowing the teachings of both Jesus and the Pharisees, answered: “To love the Lord God with all your heart, soul, mind, and strength,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n said Jesus: “You have answered right; this, if you really do, will lead to life everlasting.” 그날 저녁 꽤 많은 사람이 예수와 두 사도 주위에 모여 질문을 했는데 사도들이 그 대부분을 대답했고, 다른 질문들은 주께서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녁에 어떤 율법 교사가 평판을 떨어뜨리는 논쟁에 예수를 빠뜨리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 예수와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다 아는 그 율법 교사가, “주 하느님을 네 심정과 혼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네가 정말로 행하면, 이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리라(눅10:25-28).”

164:1.2 (1809.4) But the lawyer was not wholly sincere in asking this question, and desiring to justify himself while also hoping to embarrass Jesus, he ventured to ask still another question. Drawing a little closer to the Master, he said, “But, Teacher, I should like you to tell me just who is my neighbor?” The lawyer asked this question hoping to entrap Jesus into making some statement that would contravene the Jewish law which defined one’s neighbor as “the children of one’s people.” The Jews looked upon all others as “gentile dogs.” This lawyer was somewhat familiar with Jesus’ teachings and therefore well knew that the Master thought differently; thus he hoped to lead him into saying something which could be construed as an attack upon the sacred law. 그러나 그 율법 교사는 아주 신실하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예수를 난처하게 하려고 감히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눅10:29). 그는, 주께 좀 더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누가 바로 내 이웃인지 말해주시겠습니까?” 율법 교사는 예수를 속여서 그 이웃을 “그 민족의 자녀들”로 규정하는 유대 율법을 위반하는 진술에 빠져들도록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이방인의 개들”로 여겼습니다. 이 율법 교사는 어느 정도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있어서 주께서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성한 율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말을 하도록 예수를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164:1.3 (1810.1) But Jesus discerned the lawyer’s motive, and instead of falling into the trap, he proceeded to tell his hearers a story, a story which would be fully appreciated by any Jericho audience. Said Jesus: “A certain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he fell into the hands of cruel brigands, who robbed him, stripped him and beat him, and departing, left him half dead. Very soon, by chance, a certain priest was going down that way, and when he came upon the wounded man, seeing his sorry plight,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in like manner a Levite also, when he came along and saw the man, passed by on the other side. Now, about this time, a certain Samaritan, as he journeyed down to Jericho, came across this wounded man; and when he saw how he had been robbed and beaten,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and going over to him, he bound up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and setting the man upon his own beast, brought him here to the inn and took care of him. And on the morrow he took out some money and, giving it to the host, said: ‘Take good care of my friend, and if the expense is more, when I come back again, I will repay you.’ Now let me ask you: Which of these three turned out to be the neighbor of him who fell among the robbers?” And when the lawyer perceived that he had fallen into his own snare, he answered, “He who showed mercy on him.” And Jesus said, “Go and do likewise.”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 교사의 동기를 알아차리고, 함정에 빠지는 대신에 적어도 여리고의 청중이 잘 이해하는 이야기를 청중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잔인한 산적들의 손에 넘어가 약탈당하고 발가벗겨져 매를 맞고 거의 죽도록 버려두고 떠났는지라. 곧 우연히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부상자를 발견하고 그 비참한 처지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쳤더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레위인도 나타나 그를 보고 반대편으로 지나쳤더라. 이제 이 무렵,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리고에 이르도록 여행하다가 우연히 이 부상자를 발견했느니라. 그가 얼마나 약탈당해 기진맥진했는지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 가서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싸매고 그를 자기 가축에 실어 여기 여인숙에 데려와 그를 보살폈더라. 다음날 그가 얼마의 돈을 꺼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내 친구를 잘 돌봐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더라.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그의 이웃으로 판가름이 났느냐?” 그 율법 교사는 자신의 함정에 자기가 빠졌음을 눈치채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인정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서 마찬가지로 행하라(눅10:30-37).”

164:1.4 (1810.2) The lawyer answered, “He who showed mercy,” that he might refrain from even speaking that odious word, Samaritan. The lawyer was forced to give the very answer to the question, “Who is my neighbor?” which Jesus wished given, and which, if Jesus had so stated, would have directly involved him in the charge of heresy. Jesus not only confounded the dishonest lawyer, but he told his hearers a story which was at the same time a beautiful admonition to all his followers and a stunning rebuke to all Jews regarding their attitude toward the Samaritans. And this story has continued to promote brotherly love among all who have subsequently believed the gospel of Jesus. 그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런 끔찍한 단어를 말하기조차 꺼려서, “인정을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께 받고 싶었고, 예수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를 즉시 이단의 혐의로 말려들게 했었을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바로 그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하지 않은 율법 교사를 당황하게 했으며, 그의 모든 추종자에게 아름다운 훈계인 동시에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유대인의 태도에 대해 모든 유대인을 깜짝 놀라게 힐책(詰責 잘못을 따져 나무람)하는 이야기를 그가 자기 청중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예수의 복음을 믿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의 사랑을 계속 증진했습니다.

2.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221211 빛을 보는 또 다른 기회 요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But whoever lives by the truth comes into the light, so that it may be seen plainly that what they have done has been done in the sight of God.

164:2.1 (1810.3) Jesus had attended the feast of tabernacles that he might proclaim the gospel to the pilgrims from all parts of the empire; he now went up to the feast of the dedication for just one purpose: to give the Sanhedrin and the Jewish leaders another chance to see the light. The principal event of these few days in Jerusalem occurred on Friday night at the home of Nicodemus. Here were gathered together some twenty-five Jewish leaders who believed Jesus’ teaching. Among this group were fourteen men who were then, or had recently been, members of the Sanhedrin. This meeting was attended by Eber, Matadormus, and Joseph of Arimathea. 예수께서 제국 전역의 순례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도 있는 장막절에 참석하셨고, 그는 이제 단 한 가지 목적, 산헤드린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빛을 보는 또 다른 기회를 주려고 봉헌절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의 며칠 중 중요한 사건은 금요일 밤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은 약 25명의 유대 지도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 무리 중에 당시에 또는 최근에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남성 14명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 이버, 마타도르무스와 아리마대 요셉이 참석했습니다.

164:2.2 (1810.4) On this occasion Jesus’ hearers were all learned men, and both they and his two apostles were amazed at the breadth and depth of the remarks which the Master made to this distinguished group. Not since the times when he had taught in Alexandria, Rome, and in the islands of the Mediterranean, had he exhibited such learning and shown such a grasp of the affairs of men, both secular and religious. 이때 예수의 청중은 모두 학식이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과 그의 두 사도는 모두 주께서 이렇게 뛰어난 무리에게 하신 말씀의 폭과 깊이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지중해 섬들에서 가르쳤던 시절 이후로 그는 그러한 학식을 드러내고, 세속적이며 종교적인 인간사(人間事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 모두에 대한 그런 이해력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164:2.3 (1810.5) When this little meeting broke up, all went away mystified by the Master’s personality, charmed by his gracious manner, and in love with the man. They had sought to advise Jesus concerning his desire to win the remaining members of the Sanhedrin. The Master listened attentively, but silently, to all their proposals. He well knew none of their plans would work. He surmised that the majority of the Jewish leaders never would accept the gospel of the kingdom; nevertheless, he gave them all this one more chance to choose. But when he went forth that night, with Nathaniel and Thomas, to lodge on the Mount of Olives, he had not yet decided upon the method he would pursue in bringing his work once more to the notice of the Sanhedrin. 이 작은 모임이 끝나자, 모두 주님의 고유성(인격)에 신비로워하면서, 그의 우아한 태도에 매혹되었으며, 그분을 사랑하게 되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남아 있는 회원들을 설득하려는 예수의 요망에 관해 그에게 권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정중하지만, 조용히 그들의 모든 제안을 경청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어떤 계획도 소용없을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유대 지도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선택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날 밤 나다니엘과 도마와 함께 감람산(橄欖山)에서 묵으려고 나갔을 때, 그는 자기 일을 한 번 더 산헤드린의 눈길을 끌기 위해 추진할 방법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164:2.4 (1811.1) That night Nathaniel and Thomas slept little; they were too much amazed by what they had heard at Nicodemus’s house. They thought much over the final remark of Jesus regarding the offer of the former and present members of the Sanhedrin to go with him before the seventy. The Master said: “No, my brethren, it would be to no purpose. You would multiply the wrath to be visited upon your own heads, but you would not in the least mitigate the hatred which they bear me. Go, each of you, about the Father’s business as the spirit leads you while I once more bring the kingdom to their notice in the manner which my Father may direct.” 그날 밤 나다니엘과 도마는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그들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자신들이 들은 것으로 인해 버겁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전현직(前現職) 회원들이 70인 앞에 예수님과 함께 가자는 제언에 관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대해 많이 심사숙고했습니다. 주께서 말했습니다. “아니라, 내 형제들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덮칠 분노를 증대시킬 것이며, 너희는 나에게 품고 있는 그들의 미움을 조금도 완화하지 못할 뿐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지시할 방법으로 그들의 눈길을 하느님 나라로 한 번 더 이끄는 동안, 영(靈)이 너희를 이끄는 대로 너희는 각자 아버지의 일을 하라.”

3. Healing the Blind Beggar 눈먼 거지의 치유

221218 존재한 적이 없는 전생(前生) 요9:1-2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1 As he went along, he saw a man blind from birth. 2 His disciples asked him, “Rabbi, who sinned, this man or his parents, that he was born blind?”

164:3.1 (1811.2) The next morning the three went over to Martha’s home at Bethany for breakfast and then went immediately into Jerusalem. This Sabbath morning, as Jesus and his two apostles drew near the temple, they encountered a well-known beggar, a man who had been born blind, sitting at his usual place. Although these mendicants did not solicit or receive alms on the Sabbath day, they were permitted thus to sit in their usual places. Jesus paused and looked upon the beggar. As he gazed upon this man who had been born blind, the idea came into his mind as to how he would once more bring his mission on earth to the notice of the Sanhedrin and the other Jewish leaders and religious teachers.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아침을 먹으러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으로 갔다가 즉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와 그의 두 사도가 성전에 다가갔을 때, 그들은 잘 알려진 거지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타고난 시각 장애인으로 평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요9:1). 이런 거지들은 안식일에 구걸하거나 동냥을 받지 않았지만, 그들은 평소 자기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예수께서 잠시 멈추어 그 거지를 지켜보셨습니다. 그가 타고난 이 소경을 가만히 보다가, 한 번 더 자신의 지상 사명으로 산헤드린과 다른 유대 지도자들과 종교 교사들의 눈길을 끌 방법에 대해 그의 마음에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64:3.2 (1811.3) As the Master stood there before the blind man, engrossed in deep thought, Nathaniel, pondering the possible cause of this man’s blindness, asked: “Master, who did sin, this man or his parents, that he should be born blind?” 주께서 거기 시각 장애인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다니엘이 이 사람이 시각을 잃어버린 가능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며 여쭈었습니다. “주여,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타고난 것은 누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했습니까(요9:2)?”

164:3.3 (1811.4) The rabbis taught that all such cases of blindness from birth were caused by sin. Not only were children conceived and born in sin, but a child could be born blind as a punishment for some specific sin committed by its father. They even taught that a child itself might sin before it was born into the world. They also taught that such defects could be caused by some sin or other indulgence of the mother while carrying the child. 랍비(유대 율법 교사)들은 날 때부터 시각을 잃은 그런 모든 경우는 죄 때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죄 중에 잉태되어 태어날 뿐만 아니라 아이 아버지가 범한 어떤 특정 죄에 대한 처벌로 아이가 시각을 잃고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스스로 죄를 범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아이를 잉태하는 동안 엄마의 어떤 죄나 다른 방종 때문에 그런 결함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164:3.4 (1811.5) There was, throughout all these regions, a lingering belief in reincarnation. The older Jewish teachers, together with Plato, Philo, and many of the Essenes, tolerated the theory that men may reap in one incarnation what they have sown in a previous existence; thus in one life they were believed to be expiating the sins committed in preceding lives. The Master found it difficult to make men believe that their souls had not had previous existences. 이런 지역 전체에 환생(還生)에 대한 믿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더 오래된 유대교 교사들은 플라톤, 필로와 여러 에세네파 신도들과 함께 사람들이 전생에서 뿌린 것을 하나의 재탄생으로 거둘 수도 있다는 이론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생애에서 이전 생애들에서 범한 죄악들이 속죄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혼(魂)은 전생(前生)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그들에게 믿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64:3.5 (1811.6) However, inconsistent as it seems, while such blindness was supposed to be the result of sin, the Jews held that it was meritorious in a high degree to give alms to these blind beggars. It was the custom of these blind men constantly to chant to the passers-by, “O tenderhearted, gain merit by assisting the blind.”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시각을 잃는 것이 죄의 결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런 눈먼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는 것은 대단히 칭찬할만하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했습니다. 이런 눈먼 사람들은 행인들에게 “아, 인정이 많은 분이여, 시각 장애인을 도와서 공덕을 얻으소서.”라고 계속 외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230101 시각 장애인, 요시야의 치유 요9:3-12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3 “Neither this man nor his parents sinned,” said Jesus, “but this happened so that the works of God might be displayed in him. 4 As long as it is day, we must do the works of him who sent me. Night is coming, when no one can work. 5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6 After saying this, he spit on the ground, made some mud with the saliva, and put it on the man’s eyes. 7 “Go,” he told him, “wash in the Pool of Siloam” (this word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home seeing. 8 His neighbors and those who had formerly seen him begging asked, “Isn’t this the same man who used to sit and beg?” 9 Some claimed that he was. Others said, “No, he only looks like him.” But he himself insisted, “I am the man.” 10 “How then were your eyes opened?” they asked. 11 He replied, “The man they call Jesus made some mud and put it on my eyes. He told me to go to Siloam and wash. So I went and washed, and then I could see.” 12 “Where is this man?” they asked him. “I don’t know,” he said.

164:3.6 (1811.7) Jesus entered into the discussion of this case with Nathaniel and Thomas, not only because he had already decided to use this blind man as the means of that day bringing his mission once more prominently to the notice of the Jewish leaders, but also because he always encouraged his apostles to seek for the true causes of all phenomena, natural or spiritual. He had often warned them to avoid the common tendency to assign spiritual causes to commonplace physical events. 예수께서 나다니엘 및 도마와 이 일로 논의를 시작하신 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눈길에 자신의 사명이 한 번 더 눈에 띄도록 이끄는 그날의 방법으로 이 시각 장애인을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사도들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현상의 참된 원인을 찾도록 언제나 격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종 그들에게 흔히 있는 물리적 사건을 영적 원인의 탓으로 돌리는 일반적 성향을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164:3.7 (1812.1) Jesus decided to use this beggar in his plans for that day’s work, but before doing anything for the blind man, Josiah by name, he proceeded to answer Nathaniel’s question. Said the Master: “Neither did this man sin nor his parents that the works of God might be manifest in him. This blindness has come upon him in the natural course of events, but we must now do the works of Him who sent me, while it is still day, for the night will certainly come when it will be impossible to do the work we are about to perform. When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but in only a little while I will not be with you.” 예수께서 그날 일을 위한 자기 계획에 이 거지를 사용하기로 정했지만, 요시야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에게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나다니엘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그에게서 하느님 행위의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이 시각 상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의 경과로 그에게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이제 나를 보낸 그분의 행위를 행해야 하느니라, 아직 낮이지만, 우리가 막 행하려는 행위를 할 수 없는 밤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지만, 조금 있으면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라(요9:3-5).”

164:3.8 (1812.2) When Jesus had spoken, he said to Nathaniel and Thomas: “Let us create the sight of this blind man on this Sabbath day that the scribes and Pharisees may have the full occasion which they seek for accusing the Son of Man.” Then, stooping over, he spat on the ground and mixed the clay with the spittle, and speaking of all this so that the blind man could hear, he went up to Josiah and put the clay over his sightless eyes, saying: “Go, my son, wash away this clay in the pool of Siloam, and immediately you shall receive your sight.” And when Josiah had so washed in the pool of Siloam, he returned to his friends and family, seeing. 예수께서 답하신 다음, 그가 나다니엘과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기회를 본격적으로 갖도록 이 안식일에 우리가 이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자.” 그런 다음 그가 허리를 굽혀 땅에 침을 뱉고 흙과 침을 섞어서, 그 시각 장애인이 들을 수 있도록 이 모든 일을 말하면서, 요시야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시력이 없는 눈에 그 진흙을 덮어 붙이며, “내 아들아, 가서, 실로암 못에서 이 진흙을 씻어내면, 즉시 네 시력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실로암 못에서 그렇게 씻었을 때, 그는 눈을 떠 보면서, 자기 친구들과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요9:6-7).

164:3.9 (1812.3) Having always been a beggar, he knew nothing else; so, when the first excitement of the creation of his sight had passed, he returned to his usual place of alms-seeking. His friends, neighbors, and all who had known him aforetime, when they observed that he could see, all said, “Is this not Josiah the blind beggar?” Some said it was he, while others said, “No, it is one like him, but this man can see.” But when they asked the man himself, he answered, “I am he.” 언제나 거지였던 그는 그 외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이 떠지는 첫 흥분 상태가 지나가자, 그는 평소 구걸(求乞)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친구들, 이웃들과 원래 그를 알던 모두 그가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아차리자 모두 “이 사람이 시각 장애인 거지 요시야가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은 볼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인에게 묻자, 그는 “내가 그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9:8-9).

164:3.10 (1812.4) When they began to inquire of him how he was able to see, he answered them: “A man called Jesus came by this way, and when talking about me with his friends, he made clay with spittle, anointed my eyes, and directed that I should go and wash in the pool of Siloam. I did what this man told me, and immediately I received my sight. And that is only a few hours ago. I do not yet know the meaning of much that I see.” And when the people who began to gather about him asked where they could find the strange man who had healed him, Josiah could answer only that he did not know.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가 볼 수 있었는지 묻기 시작하자, 그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이리로 와서, 친구들과 내 얘기를 한 다음, 그가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내 눈에 바르고, 내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내게 말한 것을 했고, 즉시 나는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前)입니다. 나는 내가 보는 많은 의미를 아직 모릅니다.” 그 주위로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를 치료한 낯선 사람을 자신들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요시야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요9:10-12).

230108 진흙과 침을 사용한 3가지 이유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4 Now the day on which Jesus had made the mud and opened the man’s eyes was a Sabbath.

164:3.11 (1812.5) This is one of the strangest of all the Master’s miracles. This man did not ask for healing. He did not know that the Jesus who had directed him to wash at Siloam, and who had promised him vision, was the prophet of Galilee who had preached in Jerusalem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This man had little faith that he would receive his sight, but the people of that day had great faith in the efficacy of the spittle of a great or holy man; and from Jesus’ conversation with Nathaniel and Thomas, Josiah had concluded that his would-be benefactor was a great man, a learned teacher or a holy prophet; accordingly he did as Jesus directed him. 이것은 주님의 모든 기적에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사람은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지시하고 자신에게 시력을 약속한 예수가 장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했던 갈릴리의 선지자인 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시력을 얻으리라는 신앙이 거의 없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위대하거나 거룩한 사람의 침이 효험이 있다고 엄청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다니엘 및 도마와 나눈 대화에서, 요시야는 자신에게 은인(恩人)이 될 분이 위대한 사람, 학식이 있는 교사나 거룩한 선지자라고 추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자신에게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164:3.12 (1812.6) Jesus made use of the clay and the spittle and directed him to wash in the symbolic pool of Siloam for three reasons: 예수께서 세 가지 이유로 진흙과 침을 사용하여 상징적인 실로암 못에서 그에게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64:3.13 (1812.7) 1. This was not a miracle response to the individual’s faith. This was a wonder which Jesus chose to perform for a purpose of his own, but which he so arranged that this man might derive lasting benefit therefrom.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대한 기적적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하기로 택하고, 그는 이 사람이 그것에서 지속적인 혜택을 얻도록 그렇게 조정(調整)한, 이적이었습니다.

164:3.14 (1813.1) 2. As the blind man had not asked for healing, and since the faith he had was slight, these material acts were suggested for the purpose of encouraging him. He did believe in the superstition of the efficacy of spittle, and he knew the pool of Siloam was a semisacred place. But he would hardly have gone there had it not been necessary to wash away the clay of his anointing. There was just enough ceremony about the transaction to induce him to act. 시각 장애인이 치료를 요청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이 약했기 때문에, 그를 격려하려고, 이런 물질적인 행위를 꺼냈습니다. 그는 미신적인 침의 효험을 믿었고, 실로암 못을 어느 정도 신성한 장소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발랐던 진흙을 씻어낼 필요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거기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행동하도록 이끄는 처리에 대한 충분한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164:3.15 (1813.2) 3. But Jesus had a third reason for resorting to these material means in connection with this unique transaction: This was a miracle wrought purely in obedience to his own choosing, and thereby he desired to teach his followers of that day and all subsequent ages to refrain from despising or neglecting material means in the healing of the sick. He wanted to teach them that they must cease to regard miracles as the only method of curing human diseases. 그러나 예수께서 이런 독특한 처리에 관해 이런 물질적 방법을 사용한 셋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일어난 기적이었고, 그것에 대해 그는 당시와 이후 모든 세대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환자를 치료할 때 물질적 방법을 얕보거나 게을리하지 않도록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기적을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164:3.16 (1813.3) Jesus gave this man his sight by miraculous working, on this Sabbath morning and in Jerusalem near the temple, for the prime purpose of making this act an open challenge to the Sanhedrin and all the Jewish teachers and religious leaders. This was his way of proclaiming an open break with the Pharisees. He was always positive in everything he did. And it was for the purpose of bringing these matters before the Sanhedrin that Jesus brought his two apostles to this man early in the afternoon of this Sabbath day and deliberately provoked those discussions which compelled the Pharisees to take notice of the miracle. 예수는 이런 행위로 산헤드린과 모든 유대 교사들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주요한 목적을 위해서, 이 안식일 아침에 성전 근처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여 이 사람에게 그의 시력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는다고 선포하는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항상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런 문제를 산헤드린 앞에 제기하려고 자기 두 사도를 일찍 이 사람에게 데려왔고, 이 안식일 오후에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기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토론을 일으켰습니다(요9:14).

4. Josiah Before the Sanhedrin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230115 첫 번째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요9:13-23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13 They brought to the Pharisees the man who had been blind. 14 Now the day on which Jesus had made the mud and opened the man’s eyes was a Sabbath. 15 Therefore the Pharisees also asked him how he had received his sight. “He put mud on my eyes,” the man replied, “and I washed, and now I see.” 16 Some of the Pharisees said, “This man is not from God, for he does not keep the Sabbath.” But others asked, “How can a sinner perform such signs?” So they were divided. 17 Then they turned again to the blind man, “What have you to say about him? It was your eyes he opened.” The man replied, “He is a prophet.” 18 They still did not believe that he had been blind and had received his sight until they sent for the man’s parents. 19 “Is this your son?” they asked. “Is this the one you say was born blind? How is it that now he can see?” 20 “We know he is our son,” the parents answered, “and we know he was born blind. 21 But how he can see now, or who opened his eyes, we don’t know. Ask him. He is of age; he will speak for himself.” 22 His parents said thi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 who already had decided that anyone who acknowledged that Jesus was the Messiah w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23 That was why his parents said, “He is of age; ask him.”

164:4.1 (1813.4) By midafternoon the healing of Josiah had raised such a discussion around the temple that the leaders of the Sanhedrin decided to convene the council in its usual temple meeting place. And they did this in violation of a standing rule which forbade the meeting of the Sanhedrin on the Sabbath day. Jesus knew that Sabbath breaking would be one of the chief charges to be brought against him when the final test came, and he desired to be brought before the Sanhedrin for adjudication of the charge of having healed a blind man on the Sabbath day, when the very session of the high Jewish court sitting in judgment on him for this act of mercy would be deliberating on these matters on the Sabbath day and in direct violation of their own self-imposed laws. 이른 오후(3~4 p.m. 전후)까지 요시야의 치유가 성전 주변에서 너무 토론을 일으켜서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평소 성전 모임 장소에서 의회를 소집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산헤드린의 모임을 금지한 정관(定款 기본 규칙)을 어기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최후 시험이 왔을 때, 안식일 위반이 자신을 고발하는 하나의 주요한 혐의가 될 것을 알았고, 이런 자비의 행위로 그를 재판하는 바로 그 유대 최고 법정 회의가 안식일에 이런 문제를 심의하게 되어 바로 자신들이 시행한 법을 직접 위반하도록, 그는 안식일에 시각 장애인을 치료한 혐의에 대한 판결로 산헤드린 앞에 넘겨지기를 원했습니다.

164:4.2 (1813.5) But they did not call Jesus before them; they feared to. Instead, they sent forthwith for Josiah. After some preliminary questioning, the spokesman for the Sanhedrin (about fifty members being present) directed Josiah to tell them what had happened to him. Since his healing that morning Josiah had learned from Thomas, Nathaniel, and others that the Pharisees were angry about his healing on the Sabbath, and that they were likely to make trouble for all concerned; but Josiah did not yet perceive that Jesus was he who was called the Deliverer. So, when the Pharisees questioned him, he said: “This man came along, put clay upon my eyes, told me to go wash in Siloam, and I do now see.”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앞에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즉시 요시야를 부르러 보냈습니다. 약간의 사전 질문 후에, 약 50명이 참석한 산헤드린의 대변인이 요시야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가 치유된 그날 아침 이후, 요시야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자신의 치유에 대해 화를 내고, 그들이 관련된 모두에게 소란을 일으킬 것 같다는 사실을 도마,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예수가 해방자로 불리는 분임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그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이 사람이 나타나서, 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내게 말했고, 이제 나는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요9:13-15).

164:4.3 (1813.6) One of the older Pharisees, after making a lengthy speech, said: “This man cannot be from God because you can see that he does not observe the Sabbath. He violates the law, first, in making the clay, then, in sending this beggar to wash in Siloam on the Sabbath day. Such a man cannot be a teacher sent from God.” 나이 든 바리새인 하나가 길게 연설한 다음에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니, 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없습니다. 그는 먼저 진흙을 만든 다음에 이 거지를 보내서 안식일에 실로암에서 씻게 하여서, 율법을 어깁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요9:16a).”

164:4.4 (1813.7) Then one of the younger men who secretly believed in Jesus, said: “If this man is not sent by God, how can he do these things? We know that one who is a common sinner cannot perform such miracles. We all know this beggar and that he was born blind; now he sees. Will you still say that this prophet does all these wonders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And for every Pharisee who dared to accuse and denounce Jesus one would arise to ask entangling and embarrassing questions, so that a serious division arose among them. The presiding officer saw whither they were drifting, and in order to allay the discussion, he prepared further to question the man himself. Turning to Josiah, he said: “What do you have to say about this man, this Jesus, whom you claim opened your eyes?” And Josiah answered, “I think he is a prophet.” 그때 몰래 예수를 믿던 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평범한 죄인이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고 우리가 압니다. 우리 모두 이 거지와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아는데, 그는 이제 봅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 선지자가 악령들 괴수(魁首)의 권세로 이런 모든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려 합니까?” 감히 예수를 고발하고 비난했던 바리새인마다 한 사람씩 일어나 난처하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하곤 해서, 그들 중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자는 그들이 어디로 헤매는지 보고 토론을 가라앉히려고, 그는 당사자에게 더 질문하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는 요시야를 향해 말했습니다. “너는 이 사람, 네 눈을 뜨게 했다고 네가 주장하는 이 예수에 대해 너는 할 말이 있느냐?” 요시야가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는 선지자입니다(요9:16b-17).”

164:4.5 (1814.1) The leaders were greatly troubled and, knowing not what else to do, decided to send for Josiah’s parents to learn whether he had actually been born blind. They were loath to believe that the beggar had been healed. 지도자들은 아주 난처해하면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요시야가 정말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는지 알려고 그의 부모를 부르러 보내기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지가 치유된 것을 믿는 것이 꺼림칙했습니다(요9:18).

164:4.6 (1814.2) It was well known about Jerusalem, not only that Jesus was denied entrance into all synagogues, but that all who believed in his teaching were likewise cast out of the synagogue, excommunicated from the congregation of Israel; and this meant denial of all rights and privileges of every sort throughout all Jewry except the right to buy the necessaries of life. 예수께서 모든 회당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믿는 모든 자도 똑같이 회당에서 쫓겨나, 이스라엘 회중에서 파문(破門)당하는 것도 예루살렘 주변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생활필수품을 살 권리 외에는 모든 유대 민족 전체에서 모든 권리와 모든 종류의 특권이 거부된다는 의미였습니다.

164:4.7 (1814.3) When, therefore, Josiah’s parents, poor and fear-burdened souls, appeared before the august Sanhedrin, they were afraid to speak freely. Said the spokesman of the court: “Is this your son? and do we understand aright that he was born blind? If this is true, how is it that he can now see?” And then Josiah’s father, seconded by his mother, answered: “We know that this is our son, and that he was born blind, but how it is that he has come to see, or who it was that opened his eyes, we know not. Ask him; he is of age; let him speak for himself.” 따라서 요시야의 부모, 가난과 두려움에 짓눌린 혼(魂)들이 위엄있는 산헤드린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무서워서 구애받지 않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법정 대변인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냐? 그리고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고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지금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그러자 요시야의 어머니가 지지하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가 우리 아들이고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혹은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는 성인이니까 그에게 물으소서. 그가 직접 말하게 하소서(요9:19-23).”

230122 두 번째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요9:24-34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24 A second time they summoned the man who had been blind. “Give glory to God by telling the truth,” they said. “We know this man is a sinner.” 25 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26 Then they asked him, “What did he do to you? How did he open your eyes?” 27 He answered, “I have told you already and you did not listen. Why do you want to hear it again? Do you want to become his disciples too?” 28 Then they hurled insults at him and said, “You are this fellow’s disciple! We are disciples of Moses! 29 We know that God spoke to Moses, but as for this fellow, we don’t even know where he comes from.” 30 The man answered, “Now that is remarkable! You don’t know where he comes from, yet he opened my eyes. 31 We know that God does not listen to sinners. He listens to the godly person who does his will. 32 Nobody has ever heard of opening the eyes of a man born blind. 33 If this man were not from God, he could do nothing.” 34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164:4.8 (1814.4) They now called Josiah up before them a second time. They were not getting along well with their scheme of holding a formal trial, and some were beginning to feel strange about doing this on the Sabbath; accordingly, when they recalled Josiah, they attempted to ensnare him by a different mode of attack. The officer of the court spoke to the former blind man, saying: “Why do you not give God the glory for this? why do you not tell us the whole truth about what happened? We all know that this man is a sinner. Why do you refuse to discern the truth? You know that both you and this man stand convicted of Sabbath breaking. Will you not atone for your sin by acknowledging God as your healer, if you still claim that your eyes have this day been opened?” 그들은 이제 자신들 앞에 요시야를 두 번째 불렀습니다. 그들은 정식으로 재판하려는 그들의 획책(劃策)이 잘되지 않았고, 일부는 안식일에 이렇게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시야를 되불렀을 때 그들은 다른 공격방식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집행관이 이전의 시각 장애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이런 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가? 너는 왜 일어난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느냐? 우리 모두 이 사람을 죄인으로 아노라. 너는 왜 진실을 분간하려 하지 않느냐? 너와 이 사람 둘 다 안식일 파괴죄의 선고를 받고 있음을 네가 아느니라. 네가 여전히 네 눈이 오늘 떠졌다고 주장한다면, 하느님을 너희 치료자로 인정하여, 네 죄를 속죄(贖罪 면죄)하지 않겠느냐(요9:24)?”

164:4.9 (1814.5) But Josiah was neither dumb nor lacking in humor; so he replied to the officer of the court: “Whether this man is a sinner, I know not; but one thing I do know — that, whereas I was blind, now I see.” And since they could not entrap Josiah, they sought further to question him, asking: “Just how did he open your eyes? what did he actually do to you? what did he say to you? did he ask you to believe in him?” 그러나 요시야는 어리석지도 유머가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정관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나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요시야를 함정에 빠뜨릴 수 없어서, 더 캐내어 물으려고 질문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했느냐? 그가 정말로 너에게 무엇을 했느냐? 그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느냐? 그가 너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했느냐(요9:25-26)?”

164:4.10 (1814.6) Josiah replied, somewhat impatiently: “I have told you exactly how it all happened, and if you did not believe my testimony, why would you hear it again? Would you by any chance also become his disciples?” When Josiah had thus spoken, the Sanhedrin broke up in confusion, almost violence, for the leaders rushed upon Josiah, angrily exclaiming: “You may talk about being this man’s disciple, but we are disciples of Moses, and we are the teachers of the laws of God. We know that God spoke through Moses, but as for this man Jesus, we know not whence he is.” 요시야는 약간 짜증을 내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당신들에게 그대로 말했는데. 당신들이 내 증언을 믿지 않는다면, 왜 다시 들으려 합니까? 혹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요시야가 이렇게 말하자, 지도자들이 요시야에게 갑자기 덤벼들어 “너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들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율법 선생들이라. 우리는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말한 것을 알지만 이 사람 예수에 관해서, 우리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노라.”라고 화내며 외쳤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혼란해져서 거의 격렬하게 흩어졌습니다(요9:27-29).

164:4.11 (1814.7) Then Josiah, standing upon a stool, shouted abroad to all who could hear, saying: “Hearken, you who claim to be the teachers of all Israel, while I declare to you that herein is a great marvel since you confess that you know not whence this man is, and yet you know of a certainty, from the testimony which you have heard, that he opened my eyes. We all know that God does not perform such works for the ungodly; that God would do such a thing only at the request of a true worshiper — for one who is holy and righteous. You know that not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have you ever heard of the opening of the eyes of one who was born blind. Look, then, all of you, upon me and realize what has been done this day in Jerusalem! I tell you, if this man were not from God, he could not do this.” And as the Sanhedrists departed in anger and confusion, they shouted to him: “You were altogether born in sin, and do you now presume to teach us? Maybe you were not really born blind, and even if your eyes were opened on the Sabbath day, this was done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And they went at once to the synagogue to cast out Josiah. 그러자 요시야가 걸상 위에 서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자에게 널리 외쳤습니다. “자칭 모든 이스라엘의 선생들이라는 당신들은 들으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은, 당신들이 이 사람의 출신을 모른다고 고백하니 여기에 아주 놀라운 일이 있도다, 그러나 당신들이 들은 증언으로, 당신들은 그가 내 눈을 뜨게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도다. 하느님은 신앙 없는 자를 위해 그런 일을 행하지 않으며, 하느님은 진실한 경배자 – 거룩하고 의로운 자의 요구에만 그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압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이 떠졌다는 것을 당신들이 들은 적이 없음을 당신들도 압니다. 그러니, 당신들 모두 나를 보고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을 실제로 느껴보시라!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 그러자 산헤드린 회원들은 분노와 혼란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네가 아주 죄 가운데 태어났는데, 이제는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어쩌면 너는 사실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안식일에 네 눈이 떠졌지만, 악령 괴수의 권세로 이렇게 되었도다.” 그들은 요시야를 쫓아내려고 즉시 회당으로 갔습니다(요9:30-34).

164:4.12 (1815.1) Josiah entered this trial with meager ideas about Jesus and the nature of his healing. Most of the daring testimony which he so cleverly and courageously bore before this supreme tribunal of all Israel developed in his mind as the trial proceeded along such unfair and unjust lines. 요시야는 예수와 그 치유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모르는 상태로 이 재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온 이스라엘의 이런 최고 법정 앞에서 그렇게 영리하고 용감하게 행한 대부분의 대담한 증언은 재판이 그렇게 편파적이고 부당한 노선에 따라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에서 전개되었습니다.

5. Teaching in Solomon’s Porch 솔로몬 행각의 가르침

230129 설교자로 산 요시야 요10:22-33, 36-39, 9:35-38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9:35-38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164:5.1 (1815.2) All of the time this Sabbath-breaking session of the Sanhedrin was in progress in one of the temple chambers, Jesus was walking about near at hand, teaching the people in Solomon’s Porch, hoping that he would be summoned before the Sanhedrin where he could tell them the good news of the liberty and joy of divine sonship in the kingdom of God. But they were afraid to send for him. They were always disconcerted by these sudden and public appearances of Jesus in Jerusalem. The very occasion they had so ardently sought, Jesus now gave them, but they feared to bring him before the Sanhedrin even as a witness, and even more they feared to arrest him. 성전의 한 회의실에서 이런 안식일 파기(破棄)에 대한 산헤드린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예수는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신적 아들(자녀)된 자유와 기쁨의 복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바로 가까이에서 거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부르러 보내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갑자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언제나 쩔쩔맸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찾던 그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산헤드린 앞에 그를 증인으로 데려오기도 두려워했고, 체포하기는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164:5.2 (1815.3) This was midwinter in Jerusalem, and the people sought the partial shelter of Solomon’s Porch; and as Jesus lingered, the crowds asked him many questions, and he taught them for more than two hours. Some of the Jewish teachers sought to entrap him by publicly asking him: “How long will you hold us in suspense? If you are the Messiah, why do you not plainly tell us?” Said Jesus: “I have told you about myself and my Father many times, but you will not believe me. Can you not see that the works I do in my Father’s name bear witness for me? But many of you believe not because you belong not to my fold. The teacher of truth attracts only those who hunger for the truth and who thirst for righteousness. My sheep hear my voice and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And to all who follow my teaching I give eternal life; they shall never perish, and no one shall snatch them out of my hand. My Father, who has given me these children, is greater than all, so that no one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The Father and I are one.” Some of the unbelieving Jews rushed over to where they were still building the temple to pick up stones to cast at Jesus, but the believers restrained them.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한겨울이었고,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의 한쪽을 피난처로 찾았습니다. 예수께서 거닐었을 때, 군중이 그에게 여러 질문을 했고, 그는 2시간이 넘게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일부 유대교 선생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공개적으로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려 하십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왜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 자신과 내 아버지에 대해 여러 번 말했지만,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의 증인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너희 중 여럿이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의 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진리의 선생은 진리에 굶주리고 공의에 목마른 자들만 끌어들이느니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고 나는 내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라. 그들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하느니라. 이 자녀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믿지 않는 일부 유대인이 예수에게 던질 돌을 주우려고 여전히 건축 중인 성전 쪽으로 돌진했지만 믿는 자들이 그들을 말렸습니다(요10:22-31).

164:5.3 (1815.4) Jesus continued his teaching: “Many loving works have I shown you from the Father, so that now would I inquire for which one of these good works do you think to stone me?” And then answered one of the Pharisees: “For no good work would we stone you but for blasphemy, inasmuch as you, being a man, dare to make yourself equal with God.” And Jesus answered: “You charge the Son of Man with blasphemy because you refused to believe me when I declared to you that I was sent by God. If I do not the works of God, believe me not, but if I do the works of God, even though you believe not in me, I should think you would believe the works. But that you may be certain of what I proclaim, let me again assert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and that, as the Father dwells in me, so will I dwell in every one who believes this gospel.” And when the people heard these words, many of them rushed out to lay hands upon the stones to cast at him, but he passed out through the temple precincts; and meeting Nathaniel and Thomas, who had been in attendance upon the session of the Sanhedrin, he waited with them near the temple until Josiah came from the council chamber. 예수께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여러 일을 보였는데 그런즉 이제 내가 묻노니, 이런 선한 일 중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그러자 바리새인 중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선한 일 때문에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 때문이니, 당신은 사람이면서 감히 자신을 하느님과 같다고 하기 때문이라(요10:32-3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신성 모독으로 비난하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보냈다고 내가 너희에게 밝혔을 때,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희가 그 일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노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는 것을, 너희가 아마 확신할 수도 있도록, 내가 다시 단언(斷言)하노니,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주하는 것처럼,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 안에 내가 내주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자, 그들 중 여럿이 돌 위에 손을 얹어 그에게 던지려고 달려 나왔지만, 그는 성전 경내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했던 나다니엘과 도마를 만나서, 요시야가 대회의실에서 나올 때까지, 성전 근처에서 그들과 함께 기다렸습니다(요10:36-39).

164:5.4 (1816.1) Jesus and the two apostles did not go in search of Josiah at his home until they heard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When they came to his house, Thomas called him out in the yard, and Jesus, speaking to him, said: “Josiah, do you believe in the Son of God?” And Josiah answered, “Tell me who he is that I may believe in him.” And Jesus said: “You have both seen and heard him, and it is he who now speaks to you.” And Josiah said, “Lord, I believe,” and falling down, he worshiped. 예수와 두 사도는 요시야가 회당에서 쫓겨났다고 듣기까지 그를 찾으러 그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의 집에 이르자, 도마가 그를 마당으로 불렀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요시야야,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느냐?” 요시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를 믿을 수 있도록 그가 누구인지 제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를 보고 그의 말도 들었으며, 지금 너에게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시야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요9:35-38).

164:5.5 (1816.2) When Josiah learned that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he was at first greatly downcast, but he was much encouraged when Jesus directed that he should immediately prepare to go with them to the camp at Pella. This simple-minded man of Jerusalem had indeed been cast out of a Jewish synagogue, but behold the Creator of a universe leading him forth to become associated with the spiritual nobility of that day and generation. 요시야는 자신이 회당에서 쫓겨났음을 알게 되자, 그는 처음에 아주 풀이 죽었지만, 그가 즉시 그들과 함께 펠라 야영지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예수께서 지시하시자, 그는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순진한 이 사람은 정말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났지만, 이후 그를 그날 그 세대의 영적으로 고귀한 집단의 동료가 되도록 인도하는 우주의 창조자를 보십시오.

164:5.6 (1816.3) And now Jesus left Jerusalem, not again to return until near the time when he prepared to leave this world. With the two apostles and Josiah the Master went back to Pella. And Josiah proved to be one of the recipients of the Master’s miraculous ministry who turned out fruitfully, for he became a lifelong preacher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할 때가 다가오기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두 사도와 요시야와 함께 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풍성한 결실로 끝난 주님의 기적 사역의 수혜자(受惠者 은혜를 입은 자) 중 하나임을 입증했는데, 그가 하느님 나라 복음의 평생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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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5 The Perean Mission Begins 페레아 전도 시작

Paper 165

The Perean Mission Begins 페레아 전도 시작

1. At the Pella Camp 펠라 야영지에서
2. Sermon on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3. Sabbath Sermon at Pella 펠라에서 안식일 설교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바라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numbered 바로 너희 머리카락에 번호를 매기느니라.”
4. Dividing the Inheritance 유산 나누기
Parable of the foolish rich man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을 것이니라”
“What shall it profit if you gain the whole world…?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
5. Talks to the Apostles on Wealth 재산에 대해 사도들에게 하신 강연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6. Answer to Peter’s Question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230205 페레아 전도 시작 요10: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Then Jesus went back across the Jordan to the place where John had been baptizing in the early days. There he stayed,

165:0.1 (1817.1) ON TUESDAY, January 3, A.D. 30, Abner, the former chief of the twelve apostles of John the Baptist, a Nazarite and onetime head of the Nazarite school at Engedi, now chief of the seventy messengers of the kingdom, called his associates together and gave them final instructions before sending them on a mission to all of the cities and villages of Perea. This Perean mission continued for almost three months and was the last ministry of the Master. From these labors Jesus went directly to Jerusalem to pass through his final experiences in the flesh. The seventy, supplemented by the periodic labors of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worked in the following cities and towns and some fifty additional villages: Zaphon, Gadara, Macad, Arbela, Ramath, Edrei, Bosora, Caspin, Mispeh, Gerasa, Ragaba, Succoth, Amathus, Adam, Penuel, Capitolias, Dion, Hatita, Gadda, Philadelphia, Jogbehah, Gilead, Beth-Nimrah, Tyrus, Elealah, Livias, Heshbon, Callirrhoe, Beth-Peor, Shittim, Sibmah, Medeba, Beth-Meon, Areopolis, and Aroer. AD 30년 1월 3일 화요일에, 세례 요한의 12 사도 중 이전(以前) 수석, 나실인으로 한때 엔게디 나실인 학교의 수장이었고, 지금은 하느님 나라 70인 메신저 중 수석 아브너가 자기 동료를 함께 불러서,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전도하러 그들을 보내기 전에,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번 페레아 전도는 거의 석 달간 계속되었고, 주님의 마지막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다가 예수께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육신으로 최종적인 체험을 하셨습니다. 70인은, 예수와 12사도의 주기적인 수고로 보완을 받아, 다음의 도시, 도읍과 약 50개의 추가 마을에서 일했습니다. 자폰, 가다라, 마캇, 아르벨라, 라맛, 에드레이, 보소라, 카스핀, 미스페, 게라사, 라가바, 수콧, 아마투스, 아담, 페누엘, 카피톨리아스, 디온, 하티타, 갓다, 필라델피아, 욕베하, 길르앗, 벳-님라, 티루스, 엘르알라, 리비아스, 헤스본, 칼릴로에, 벳-브올, 싯팀, 십마, 메베바, 벳-므온, 아레오폴리스, 아로에르.

165:0.2 (1817.2) Throughout this tour of Perea the women’s corps, now numbering sixty-two, took over most of the work of ministration to the sick. This was the final period of the development of the higher spiritual aspect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there was, accordingly, an absence of miracle working. No other part of Palestine was so thoroughly worked by the apostles and disciples of Jesus, and in no other region did the better classes of citizens so generally accept the Master’s teaching. 이제 62명이 된 여성단(團)은 이번 페레아 여행 내내, 환자를 돌보는 대부분의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때는 하느님 나라 복음의 더 영적인 측면이 발전하는 최종 시기였으며, 따라서 기적 행위가 없었습니다. 사도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아주 철저히 일했으며,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더 나은 계층의 시민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그토록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5:0.3 (1817.3) Perea at this time was about equally gentile and Jewish, the Jews having been generally removed from these regions during the times of Judas Maccabee. Perea was the most beautiful and picturesque province of all Palestine. It was generally referred to by the Jews as “the land beyond the Jordan.” 이때 페레아에는 거의 비슷한 수(數)의 이방인과 유대인이 있었고, 대체로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 시절에 이런 지역에서 이동했습니다. 페레아는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림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이 그곳을 “요단 저편 땅”으로 불렀습니다.

165:0.4 (1817.4) Throughout this period Jesus divided his time between the camp at Pella and trips with the twelve to assist the seventy in the various cities where they taught and preached. Under Abner’s instructions the seventy baptized all believers, although Jesus had not so charged them. 이 기간 내내 예수는 펠라의 야영지에, 그리고 70인이 가르치고 전도했던 여러 도시에서 그들을 지원하려고 12 사도와 함께 여행하는 데에, 자신의 시간을 분배했습니다. 예수께서 70인에게 그렇게 맡기지 않았지만, 아브너의 지시에 따라 70인은 모든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 At the Pella Camp 펠라 야영지에서

230212 기적이 없는 절정 단계 요10:41-42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41 Then many came to Him and said, “John performed no sign, but all the things that John spoke about this Man were true.” 42 And many believed in Him there.

165:1.1 (1817.5) By the middle of January more than twelve hundred persons were gathered together at Pella, and Jesus taught this multitude at least once each day when he was in residence at the camp, usually speaking at nine o’clock in the morning if not prevented by rain.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taught each afternoon. The evenings Jesus reserved for the usual sessions of questions and answers with the twelve and other advanced disciples. The evening groups averaged about fifty. 1월 중순까지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펠라에 모였고, 예수께서 야영지에 계실 때 매일 적어도 한 번 이런 무리를 가르쳤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보통 아침 9시에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매일 오후에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 12 사도 및 다른 진보한 제자들과 평소의 질의응답 시간을 저녁마다 잡아두었습니다. 저녁 그룹은 평균 50명 정도였습니다.

165:1.2 (1817.6) By the middle of March, the time when Jesus began his journey toward Jerusalem, over four thousand persons composed the large audience which heard Jesus or Peter preach each morning. The Master chose to terminate his work on earth when the interest in his message had reached a high point, the highest point attained under this second or nonmiraculous phase of the progress of the kingdom. While three quarters of the multitude were truth seekers, there were also present a large number of Pharisees from Jerusalem and elsewhere, together with many doubters and cavilers.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셨던 3월 중순에는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예수님이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큰 청중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메시지에 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고, 하느님 나라의 진보 중 이런 두 번째 즉 기적이 없는 단계에서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지상에서 자신의 과업을 끝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군중의 3/4이 진리 구도자(求道者)들이었지만, 의혹을 품고 트집 잡는 여러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온 여러 바리새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165:1.3 (1818.1)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devoted much of their time to the multitude assembled at the Pella camp. The twelve paid little or no attention to the field work, only going out with Jesus to visit Abner’s associates from time to time. Abner was very familiar with the Perean district since this was the field in which his former master, John the Baptist, had done most of his work. After beginning the Perean mission, Abner and the seventy never returned to the Pella camp. 예수와 12 사도는 펠라 야영지에 모인 군중에게 자신들의 시간을 많이 쏟았습니다. 12 사도는 현장 과업에 거의 또는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때때로 아브너의 동료들을 방문하려고 예수와 함께 나갔을 뿐이었습니다. 아브너는 페레아 지역을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이전 선생, 세례 요한이 대부분의 일을 했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페레아 전도가 시작된 후, 아브너와 70인은 펠라 야영지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 Sermon on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230219 참된 목자를 따르고 있나요? 요10:1-6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 “Very truly I tell you Pharisees, anyone who does not enter the sheep pen by the gate, but climbs in by some other way, is a thief and a robber. 2 The one who enters by the gate is the shepherd of the sheep. 3 The gatekeeper opens the gate for him, and 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4 When he has brought out all his own, he goes on ahead of them, and his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5 But they will never follow a stranger; in fact, they will run away from him because they do not recognize a stranger’s voice.” 6 Jesus used this figure of speech, but the Pharisees did not understand what he was telling them.

165:2.1 (1818.2) A company of over three hundred Jerusalemites, Pharisees and others, followed Jesus north to Pella when he hastened away from the jurisdiction of the Jewish rulers at the ending of the feast of the dedication; and it was in the presence of these Jewish teachers and leaders, as well as in the hearing of the twelve apostles, that Jesus preached the sermon on the “Good Shepherd.” After half an hour of informal discussion, speaking to a group of about one hundred, Jesus said: 봉헌절이 끝날 때 예수께서 유대 통치자들의 관할권에서 급히 떠나자, 300명이 넘는 예루살렘 사람들, 바리새인들 및 다른 사람들이 펠라까지 북쪽으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이런 유대 선생들과 지도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12 사도가 듣고 있을 때, 예수께서 “선한 목자(요10:11)”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격식을 가리지 않고 30분간 토론한 후, 약 100명의 일행에게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65:2.2 (1818.3) “On this night I have much to tell you, and since many of you are my disciples and some of you my bitter enemies, I will present my teaching in a parable, so that you may each take for yourself that which finds a reception in your heart. “오늘 밤에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은데, 너희 중 내 제자가 많고 일부는 내게 원한이 있는 대적들이므로 내가 비유로 내 가르침을 전할 것이니, 각자 마음에 이해되는 것을 스스로 취해도 되느니라.

165:2.3 (1818.4) “Tonight, here before me are men who would be willing to die for me and for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some of them will so offer themselves in the years to come; and here also are some of you, slaves of tradition, who have followed me down from Jerusalem, and who, with your darkened and deluded leaders, seek to kill the Son of Man.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shall judge both of you, the true shepherds and the false shepherds. If the false shepherd were blind, he would have no sin, but you claim that you see; you profess to be teachers in Israel; therefore does your sin remain upon you. “오늘 밤 여기 내 앞에는 기꺼이 나와 하느님 나라의 이 복음을 위해 죽으려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 그렇게 자신을 바치리라. 그리고 또한 여기에 너희 중 일부, 전통의 노예들은 예루살렘에서 나를 따라 내려와 어두워져 착각에 빠진 너희 지도자들과 함께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지금 육신으로 사는 생활로 너희 참된 목자들과 거짓 목자들을 판가름하리라. 거짓 목자가 눈이 멀었다면, 그에게 아무 죄가 없을 것이나, 너희가 본다고 우기면서 이스라엘의 선생들이라고 주장하니, 너희 죄가 너희에게 여전히 남아있느니라(요9:41).

165:2.4 (1818.5) “The true shepherd gathers his flock into the fold for the night in times of danger. And when the morning has come, he enters into the fold by the door, and when he calls, the sheep know his voice. Every shepherd who gains entrance to the sheepfold by any other means than by the door is a thief and a robber. The true shepherd enters the fold after the porter has opened the door for him, and his sheep, knowing his voice, come out at his word; and when they that are his are thus brought forth, the true shepherd goes before them; he leads the way and the sheep follow him. His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they will not follow a stranger. They will flee from the stranger because they know not his voice. This multitude which is gathered about us here a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but when we speak to them, they know the shepherd’s voice, and they follow after us; at least, those who hunger for truth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do. Some of you are not of my fold; you know not my voice, and you do not follow me. And because you are false shepherds, the sheep know not your voice and will not follow you.” “참된 목자는 밤, 위험할 때 자기 양 떼를 우리 안으로 모으느니라. 그리고 아침이 오면, 그가 문으로 우리에 들어가, 그가 부르면,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느니라. 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양우리에 들어가는 목자는 모두 도둑이며 강도이니라. 참된 목자는 문지기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준 다음에, 우리에 들어가며,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 그의 양들은 그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오느니라. 그의 양 떼가 이렇게 쏟아져 나오면, 참된 목자는 그들 앞에서 가느니라. 그는 길을 인도하고 양들은 그를 따르느니라. 그의 양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들이 그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라. 그들은 낯선 자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들이 낯선 자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그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기 우리 주위에 모인 이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은 우리의 뒤를 따르나니, 적어도 진리에 굶주리고 공의에 목마른 자들은 그러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내 우리에 속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지 않느니라. 너희는 거짓 목자들이므로, 양들이 너희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너희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요10:1~5).”

165:2.5 (1819.1) And when Jesus had spoken this parable, no one asked him a question. After a time he began again to speak and went on to discuss the parable: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자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면서 계속 비유를 화제로 삼았습니다.

165:2.6 (1819.2) “You who would be the undershepherds of my Father’s flocks must not only be worthy leaders, but you must also feed the flock with good food; you are not true shepherds unless you lead your flocks into green pastures and beside still waters. “내 아버지 양 떼의 부(副)목자들이 되려는 너희는 그에 어울리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너희는 또한 좋은 양식으로 양 떼를 먹여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푸른 목초지(牧草地)와 잔잔한 물가로 너희 양 떼를 인도하지 않으면 너희는 참된 목자들이 아니라(시23:2).

230226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보십니까? 요10:7-21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65:2.7 (1819.3) “And now, lest some of you too easily comprehend this parable, I will declare that I am both the door to the Father’s sheepfold and at the same time the true shepherd of my Father’s flocks. Every shepherd who seeks to enter the fold without me shall fail, and the sheep will not hear his voice. I, with those who minister with me, am the door. Every soul who enters upon the eternal way by the means I have created and ordained shall be saved and will be able to go on to the attainment of the eternal pastures of Paradise. “그리고 이제 너희 일부가 이 비유를 너무 쉽게 이해하지 않도록, 나는 아버지 양 우리의 문이며 동시에 내 아버지 양 떼의 참된 목자임을 내가 선언하노라. 나 없이 우리에 들어가려는 목자마다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니라. 나는, 나와 함께 돌보는 자들과 함께, 문이라. 내가 만들고 정한 방법으로 영원한 길에 들어가는 모든 혼(魂)은 구원을 얻고 계속해서 영원한 천국 목초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요10:7-9).

165:2.8 (1819.4) “But I also am the true shepherd who is willing even to lay down his life for the sheep. The thief breaks into the fold only to steal, and to kill, and to destroy; but I have come that you all may have life and have it more abundantly. He who is a hireling, when danger arises, will flee and allow the sheep to be scattered and destroyed; but the true shepherd will not flee when the wolf comes; he will protect his flock and, if necessary, lay down his life for his sheep. Verily, verily, I say to you, friends and enemies, I am the true shepherd; I know my own and my own know me. I will not flee in the face of danger. I will finish this service of the completion of my Father’s will, and I will not forsake the flock which the Father has intrusted to my keeping. 그러나 나는 또한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던지는 참된 목자이니라. 도둑은 단지 훔치고 죽이며 파괴하려고 우리에 침입하지만, 내가 온 것은 너희 모두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삯꾼은 위험이 닥치면 도망하여 양들이 흩어져 멸망하도록 놔둘 것이라. 그러나 참된 목자는 이리가 올 때 도망하지 않으리라. 그는 자기 양 떼를 보호하고 필요하면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지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 친구들과 대적자들에게 이르노니, 나는 참된 목자이니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아느니라. 나는 위험에 직면하여 도망하지 않으리라.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마치는 이 봉사를 마무리 지을 것이며, 아버지께서 지키라고 내게 맡기신 양 떼를 내버리지 않으리라(요10:10-15).

165:2.9 (1819.5) “But I have many other sheep not of this fold, and these words are true not only of this world. These other sheep also hear and know my voice, and I have promised the Father that they shall all be brought into one fold, one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And then shall you all know the voice of one shepherd, the true shepherd, and shall all acknowledge the fatherhood of God.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말은 이 세상에만 해당하지 않느니라. 이런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며, 그들 모두 한 우리, 하느님 아들(자녀)들의 한 형제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겠다고 내가 아버지께 약속했느니라. 그러면 너희 모두 한 목자, 참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보며,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모두 인정할 것이라(요10:16).

165:2.10 (1819.6) “And so shall you know why the Father loves me and has put all of his flocks in this domain in my hands for keeping; it is because the Father knows that I will not falter in the safeguarding of the sheepfold, that I will not desert my sheep, and that, if it shall be required, I will not hesitate to lay down my life in the service of his manifold flocks. But, mind you, if I lay down my life, I will take it up again. No man nor any other creature can take away my life. I have the right and the power to lay down my life, and I have the same power and right to take it up again. You cannot understand this, but I received such authority from my Father even before this world was.”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여 이 영역의 모든 자기 양 떼를 내 손에 맡겨 지키게 한 이유를 너희가 알리라. 그것은 내가 양우리의 보호에 흔들리지 않고, 내 양들을 버리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그의 다양한 양 떼를 돌보면서 망설임 없이 내 목숨을 내던질 것을 아버지가 알기 때문이라. 하지만, 내가 내 목숨을 내던진다면, 내가 그것을 다시 얻을 것임을 너희는 명심하라.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떤 창조물도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는 내 목숨을 내던질 권리와 권세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다시 얻을 바로 그 권세와 권리가 있느니라. 너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그런 권한을 받았느니라(요10:17-18).”

165:2.11 (1819.7) When they heard these words, his apostles were confused, his disciples were amazed, while the Pharisees from Jerusalem and around about went out into the night, saying, “He is either mad or has a devil.” But even some of the Jerusalem teachers said: “He speaks like one having authority; besides, who ever saw one having a devil open the eyes of a man born blind and do all of the wonderful things which this man has done?” 그들이 이런 말씀을 듣자, 그의 사도들은 어리둥절했고, 그의 제자들은 깜짝 놀랐으며,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온 바리새인들은 “그는 미쳤거나 악령이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밤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일부 선생들조차 “그는 권세 있는 사람처럼 말하며, 게다가 악령 들린 사람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사람이 했던 모든 놀라운 일들을 하는 것을, 누가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요10:19-21).

165:2.12 (1819.8) On the morrow about half of these Jewish teachers professed belief in Jesus, and the other half in dismay returned to Jerusalem and their homes. 다음날 이런 유대 선생 중 거의 절반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고, 나머지 절반은 당황하여 예루살렘과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 Sabbath Sermon at Pella 펠라에서 안식일 설교

230305 신뢰와 영적 준비 눅12:1-12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165:3.1 (1819.9) By the end of January the Sabbath-afternoon multitudes numbered almost three thousand. On Saturday, January 28, Jesus preached the memorable sermon on “Trust and Spiritual Preparedness.” After preliminary remarks by Simon Peter, the Master said: 1월 말까지 안식일 오후에 모인 무리는 거의 3천 명에 달했습니다. 1월 28일 토요일, 예수님은 “신뢰와 영적 준비”에 대해 잊지 못할 설교를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예비 발언이 끝난 후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5:3.2 (1820.1) “What I have many times said to my apostles and to my disciples, I now declare to this multitude: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born of prejudice and nurtured in traditional bondage, albeit many of these Pharisees are honest of heart and some of them abide here as my disciples. Presently all of you shall understand my teaching, for there is nothing now covered that shall not be revealed. That which is now hid from you shall all be made known when the Son of Man has completed his mission on earth and in the flesh. “내가 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했던 것을 이제 이 무리에게 선언하노라: 이들 바리새인 중에는 심정이 정직한 사람이 많고 그중 일부는 내 제자로 여기 남아있지만, 바리새인의 누룩(고칠 수 없는 낡은 습관)을 조심할지니, 그것은 편견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인 굴레 속에서 자란 위선(僞善)이니라. 즉시 너희 모두 내 가르침을 알아들을 것이니, 이제 감춰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지금 너희에게 감춰진 것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지상에서 육신으로 자기 사명을 마무리하면 모두 알려질 것이라(마10:26).

165:3.3 (1820.2) “Soon, very soon, will the things which our enemies now plan in secrecy and in darkness be brought out into the light and be proclaimed from the housetops. But I say to you, my friends, when they seek to destroy the Son of Man, be not afraid of them. Fear not those who, although they may be able to kill the body, after that have no more power over you. I admonish you to fear none, in heaven or on earth, but to rejoice in the knowledge of Him who has power to deliver you from all unrighteousness and to present you blameless before the judgment seat of a universe. 곧, 아주 곧, 우리 대적들이 지금 몰래 어둠 속에서 계획하는 것들이 빛 가운데로 폭로되어 세상에 선포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 내 친구들에게 이르노니, 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죽이려 할 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몸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후 더 이상 너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하늘과 땅에서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를 모든 불의에서 구원하여 우주의 법정 앞에 너희를 떳떳하게 하는 권세 있는 그를 아는 지식으로 다만 기뻐하라(마10:27-28, 눅12:3-5, 유1:24).

165:3.4 (1820.3) “Are not five sparrows sold for two pennies? And yet, when these birds flit about in quest of their sustenance, not one of them exists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Father, the source of all life. To the seraphic guardians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numbered. And if all of this is true, why should you live in fear of the many trifles which come up in your daily lives? I say to you: Fear not; you are of much more value than many sparrows.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래도 이런 새들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날아다닐 때, 모든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를 모르면, 그 중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느니라. 세라핌 수호자들에게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느니라. 이 모두가 사실이면, 너희가 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여러 참새보다 훨씬 더 소중하니라(마10:29-31, 눅12:6-7).

165:3.5 (1820.4) “All of you who have had the courage to confess faith in my gospel before men I will presently acknowledge before the angels of heaven; but he who shall knowingly deny the truth of my teachings before men shall be denied by his guardian of destiny even before the angels of heaven.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복음을 신앙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는 너희 모두를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즉시 인정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진리를 고의로 부인하는 자는, 자기 운명의 수호자가 하늘의 천사들 앞에 서기도 전에 부인할 것이라(마10:32-33, 눅12:8-9).

165:3.6 (1820.5) “Say what you will about the Son of Man, and it shall be forgiven you; but he who presumes to blaspheme against God shall hardly find forgiveness. When men go so far as knowingly to ascribe the doings of God to the forces of evil, such deliberate rebels will hardly seek forgiveness for their sins. “너희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 대해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그것은 용서받을 것이라. 그러나, 감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고의로 하느님의 행위를 심지어 악의 세력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하면, 그런 의도적인 반역자들은 거의 자신들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마12:31-32, 눅12:10).

165:3.7 (1820.6) “And when our enemies bring you before the rulers of the synagogues and before other high authorities, be not concerned about what you should say and be not anxious as to how you should answer their questions, for the spirit that dwells within you shall certainly teach you in that very hour what you should say in honor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그리고 우리 대적들이 너희를 회당의 통치자들과 다른 고위 당국 앞에 데려갈 때,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고, 너희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 것이니, 너희 안에 내주하는 영(靈)이 하느님 나라 복음을 받들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시간에 반드시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라(마10:19-20, 막13:11, 눅12:11-12, 21:12-15).

165:3.8 (1820.7) “How long will you tarry in the valley of decision? Why do you halt between two opinions? Why should Jew or gentile hesitate to accept the good news that he is a son of the eternal God? How long will it take us to persuade you to enter joyfully into your spiritual inheritance? I came into this world to reveal the Father to you and to lead you to the Father. The first I have done, but the last I may not do without your consent; the Father never compels any man to enter the kingdom. The invitation ever has been and always will be: Whosoever will, let him come and freely partake of the water of life.” “너희는 결단의 때에 얼마나 꾸물대려느냐? 너희는 두 판단 사이에서 왜 멈추느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신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복음 받아들이기를 왜 주저해야 하느냐? 너희가 너희 영적 유산에 기쁘게 참여하도록 우리가 너희를 설득하기에 얼마나 걸리겠느냐?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내고 너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려고 이 세상에 왔느니라. 내가 처음을 했지만, 너희 찬성(贊成) 없이, 나는 마지막을 할 수 없느니라.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느니라. 초청은 늘 있었고 언제나 있을 것이라.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생명의 물을 자유롭게 마시라(마11:27, 계22:17b).”

165:3.9 (1820.8)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many went forth to be baptized by the apostles in the Jordan while he listened to the questions of those who remained.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많은 사람이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나섰고 예수는 남아 있는 자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요10:42).

4. Dividing the Inheritance 유산 나누기

230312 하늘에 보물을 저축하기 눅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65:4.1 (1821.1) As the apostles baptized believers, the Master talked with those who tarried. And a certain young man said to him: “Master, my father died leaving much property to me and my brother, but my brother refuses to give me that which is my own. Will you, then, bid my brother divide this inheritance with me?” Jesus was mildly indignant that this material-minded youth should bring up for discussion such a question of business; but he proceeded to use the occasion for the impartation of further instruction. Said Jesus: “Man, who made me a divider over you? Where did you get the idea that I give attention to the material affairs of this world?” And then, turning to all who were about him, he said: “Take heed and keep yourselves free from covetousness; a man’s life consists not in the abundance of the things which he may possess. Happiness comes not from the power of wealth, and joy springs not from riches. Wealth, in itself, is not a curse, but the love of riches many times leads to such devotion to the things of this world that the soul becomes blinded to the beautiful attractions of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kingdom of God on earth and to the joys of eternal life in heaven. 사도들이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주님은 꾸물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 아버지가 저와 제 형제에게 많은 재산을 남기고 돌아가셨으나 제 형제가 제 것을 제게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제 형에게 지시하여 이 유산을 저와 나누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예수는 물질에 집착하는 이 젊은이가 그런 용건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가볍게 분개했으나, 추가로 교훈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계속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누가 나를 네 일에 대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내가 이 세상의 물질적 업무를 돌본다는 생각을 너는 어디에서 얻었느냐?” 그런 후 자기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돌아서서 그가 말했습니다. “조심하여 탐욕에 빠지지 말라. 사람의 생명은 그가 소유한 많은 것에 있지 않으니라. 행복은 부(富)의 힘에서 오지 않으며, 기쁨은 재물에서 나오지 않느니라. 재산 자체는 저주가 아니지만, 재물에 대한 사랑은 여러 번 이 세상 것들에 그렇게 헌신하도록 이어져 혼(魂)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영적 실체들에 대한 아름다운 매력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들에 대해 눈이 멀게 되느니라(눅12:13-15).

165:4.2 (1821.2) “Let me tell you a story of a certain rich man whose ground brought forth plentifully; and when he had become very rich, he began to reason with himself, saying: ‘What shall I do with all my riches? I now have so much that I have no place to store my wealth.’ And when he had meditated on his problem, he said: ‘This I will do; I will pull down my barns and build greater ones, and thus will I have abundant room in which to store my fruits and my goods. Then can I say to my soul, soul, you have much wealth laid up for many years; take now your ease; eat, drink, and be merry, for you are rich and increased in goods.’ “내가 소산이 풍성한 땅을 가진 어떤 부자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이르겠노라. 그가 매우 부유해지자, 그는 스스로 의논하여 말하기 시작했느니라. ‘나의 이 모든 재물로 내가 무엇을 할까? 이제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내 재산을 저장할 곳이 없구나.’ 그가 자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 후, 그가 말했더라. ‘나는 이렇게 하리라. 내가 내 곳간을 헐고 훨씬 큰 것들을 지으리라, 그러면 나는 내 과실류와 물건을 저장할 넉넉한 공간을 가지게 되리라. 그러면 나는 내 혼(魂)에게 말할 수 있으니, 혼(魂)아, 너는 여러 해 저장한 많은 재산이 있도다. 너는 이제 쉬라. 먹고 마시고 즐기라, 네가 부요하고 재산이 늘었기 때문이니라 (눅12:16-19).’

165:4.3 (1821.3) “But this rich man was also foolish. In providing for the material requirements of his mind and body, he had failed to lay up treasures in heaven for the satisfaction of the spirit and for the salvation of the soul. And even then he was not to enjoy the pleasure of consuming his hoarded wealth, for that very night was his soul required of him. That night there came the brigands who broke into his house to kill him, and after they had plundered his barns, they burned that which remained. And for the property which escaped the robbers his heirs fell to fighting among themselves. This man laid up treasures for himself on earth, but he was not rich toward God.” “그러나 이 부자는 또한 어리석었느니라. 그의 마음과 몸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면서 영(靈)의 만족과 혼(魂)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 보물을 끝내 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설령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저축한 재산을 소비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으니, 바로 그날 밤 그에게서 그의 혼(魂)이 불려 갔기 때문이니라. 그날 밤 강도들이 그의 집에 침입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곳간을 약탈한 후에 남은 것을 불태웠더라. 그리고 강도들이 놓친 재산 때문에, 그의 상속인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더라. 이 사람은 땅에서 자기를 위해 보물을 모았지만, 그는 하느님을 향해 부유하지 않았더라(눅12:20-21).”

165:4.4 (1821.4) Jesus thus dealt with the young man and his inheritance because he knew that his trouble was covetousness. Even if this had not been the case, the Master would not have interfered, for he never meddled with the temporal affairs of even his apostles, much less his disciples. 예수께서 이렇게 젊은이와 그의 유산을 다룬 것은, 그의 고민이 탐욕임을 예수께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참견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는 자기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자기 사도들의 현세적인 일에도 결코, 참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0326 마음이 결정하는 인간 운명 눅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165:4.5 (1821.5) When Jesus had finished his story, another man rose up and asked him: “Master, I know that your apostles have sold all their earthly possessions to follow you, and that they have all things in common as do the Essenes, but would you have all of us who are your disciples do likewise? Is it a sin to possess honest wealth?” And Jesus replied to this question: “My friend, it is not a sin to have honorable wealth; but it is a sin if you convert the wealth of material possessions into treasures which may absorb your interests and divert your affections from devotion to the spiritual pursuits of the kingdom. There is no sin in having honest possessions on earth provided your treasure is in heaven,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wealth which leads to covetousness and selfishness and that which is held and dispensed in the spirit of stewardship by those who have an abundance of this world’s goods, and who so bountifully contribute to the support of those who devote all their energi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Many of you who are here and without money are fed and lodged in yonder tented city because liberal men and women of means have given funds to your host, David Zebedee, for such purposes. 예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사도들이 당신을 따르려고 자신들의 세상 재산을 다 팔았고, 그들은 에세네파(派) 신도들이 하듯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을 제가 알지만,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가 모두 마찬가지로 하기를 바라십니까? 정직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내 친구여, 정당한 재산을 가지는 것이 죄(罪)는 아니라. 그러나 네가 풍부한 물질적 재산을 보물로 바꾸어 너의 관심을 빼앗고 하느님 나라의 영적 추구에 대한 헌신에서 너의 애정을 딴 데로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죄(罪)니라. 너희 보물이 하늘에 있다면 땅에서 정직한 재산을 갖는 것이 죄(罪)는 아니니,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심정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눅12:34).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끄는 재산과 이 세상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사역에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자들을 지원하려고 그렇게 아낌없이 기부하는 자들이 청지기(재산 관리인) 직무의 정신으로 맡아서 분배하는 재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느니라. 그런 목적으로 재력 있는, 아끼지 않는 남성들과 여성들이 너희 접대자 다윗 세베대에게 재원을 주었기 때문에, 너희 중 여기서 돈 없이 있는 대부분이 저기 야영 도시에서 먹고 투숙하고 있느니라.

165:4.6 (1822.1) “But never forget that, after all, wealth is unenduring. The love of riches all too often obscures and even destroys the spiritual vision. Fail not to recognize the danger of wealth’s becoming, not your servant, but your master.” “그러나 어쨌든, 재산은 절대로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말라. 재산에 대한 사랑이 영적 시력을 어둡게 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너무 흔하니라. 재산이 너희 종이 아니라 너희 주인이 되는 위험성을 반드시 분간하라.”

165:4.7 (1822.2) Jesus did not teach nor countenance improvidence, idleness, indifference to providing the physical necessities for one’s family, or dependence upon alms. But he did teach that the material and temporal must be subordinated to the welfare of the soul and the progress of the spiritual nature in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절약 정신이 없는 것, 게으름, 가족의 육체적 필요를 마련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나 자선에 대한 의존을 가르치지도, 묵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인 세상의 것은, 혼(魂)의 행복과 하늘나라에 있는 영적 본성의 진보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65:4.8 (1822.3) Then, as the people went down by the river to witness the baptizing, the first man came privately to Jesus about his inheritance inasmuch as he thought Jesus had dealt harshly with him; and when the Master had again heard him, he replied: “My son, why do you miss the opportunity to feed upon the bread of life on a day like this in order to indulge your covetous disposition? Do you not know that the Jewish laws of inheritance will be justly administered if you will go with your complaint to the court of the synagogue? Can you not see that my work has to do with making sure that you know about your heavenly inheritance? Have you not read the Scripture: ‘There is he who waxes rich by his wariness and much pinching, and this is the portion of his reward: Whereas he says, I have found rest and now shall be able to eat continually of my goods, yet he knows not what time shall bring upon him, and also that he must leave all these things to others when he dies.’ Have you not read the commandment: ‘You shall not covet.’ And again, ‘They have eaten and filled themselves and waxed fat, and then did they turn to other gods.’ Have you read in the Psalms that ‘the Lord abhors the covetous,’ and that ‘the little a righteous man has is better than the riches of many wicked.’ ‘If riches increase, set not your heart upon them.’ Have you read where Jeremiah said, ‘Let not the rich man glory in his riches’; and Ezekiel spoke truth when he said, ‘With their mouths they make a show of love, but their hearts are set upon their own selfish gain.’” 그 후, 사람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눈앞에서 보려고 강가로 내려갈 때, 처음에 왔던 사람이 예수께서 자신을 엄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여 자기 유산의 일로 은밀히 예수께 왔습니다. 주께서 다시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너는 왜 너의 탐내는 성향을 채우려고 오늘 같은 날에 생명의 양식을 먹을 기회를 놓치느냐? 네가 회당 법정에 너의 고충을 가지고 가면, 유산에 대한 유대교 율법이 마땅하게 시행될 것을 네가 모르느냐? 너의 하늘 유산에 대해 네가 알도록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내 일임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네가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부유해지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돌아갈 몫은 이러하다. 나는 휴식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재산으로 계속 먹고 즐기리라.”라고 그가 말하지만, 그는 어떤 시간이 자기에게 임할지, 자기가 죽을 때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겨야 한다는 것도 모르느니라(집11:18-19).’ 너는 계명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탐내지 말라(출20:17, 신5:21).’ 그리고 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점차 살찌게 되어, 그 후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이켰더라(신31:20).’ 너는 ‘주께서 탐욕을 부리는 자들을 아주 싫어하느니라(시10:3b).’ 그리고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들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37:16).’라는 시편을 읽어보았느냐.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b).’ 예레미야가 ‘부자는 자기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9:23c).’고 말한 곳을 읽어보았느냐. 그리고 에스겔이 ‘그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그들의 심정으로는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에 가치를 두느니라(겔33:31b).’라고 말할 때 그는 진리를 말했느니라.”

165:4.9 (1822.4) Jesus sent the young man away, saying to him, “My son, what shall it profit you if you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your own soul?” “여보게 젊은이, 네가 온 세상을 얻고 너 자신의 혼(魂)을 잃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마16:26, 막8:36, 눅9:25)?”

230326 물질생활의 심판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65:4.10 (1822.5) To another standing near by who asked Jesus how the wealthy would stand in the day of judgment, he replied: “I have come to judge neither the rich nor the poor, but the lives men live will sit in judgment on all. Whatever else may concern the wealthy in the judgment, at least three questions must be answered by all who acquire great wealth, and these questions are: 근처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이 심판 날에 부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 예수께 물어보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생활이 모두를 심판하리라. 무엇이든 간에 심판의 때에 부자들과 관련하여, 큰 재산을 얻은 모든 자는 적어도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하며, 이 질문들은 다음과 같으니라.

165:4.11 (1822.6) “1. How much wealth did you accumulate? “너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느냐?

165:4.12 (1822.7) “2. How did you get this wealth? “너는 이런 재산을 어떻게 얻었느냐?

165:4.13 (1822.8) “3. How did you use your wealth?” “너는 너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165:4.14 (1822.9) Then Jesus went into his tent to rest for a while before the evening meal. When the apostles had finished with the baptizing, they came also and would have talked with him about wealth on earth and treasure in heaven, but he was asleep. 그런 후 예수께서 저녁 식사 전에 잠시 쉬러 자기 텐트로 들어갔습니다. 사도들이 세례 베풀기를 마치자, 그들도 와서 세상의 재산과 하늘의 보물에 대하여 그와 얘기하려 했지만, 그는 자고 계셨습니다.

5. Talks to the Apostles on Wealth 재산에 대해 사도들에게 하신 강연

230402 헌신과 필요 공급 눅12:22-40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165:5.1 (1823.1) That evening after supper, when Jesus and the twelve gathered together for their daily conference, Andrew asked: “Master, while we were baptizing the believers, you spoke many words to the lingering multitude which we did not hear. Would you be willing to repeat these words for our benefit?” And in response to Andrew’s request, Jesus said: 그날 저녁 식사 후, 예수께서 12사도와 일일 회의로 함께 모였을 때, 안드레가 여쭈었습니다. “주여, 저희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당신께서 꾸물거리는 군중에게 저희가 듣지 못한 많은 말을 했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 말씀을 반복해 주시겠습니까?” 안드레의 요청에 응답하여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165:5.2 (1823.2) “Yes, Andrew, I will speak to you about these matters of wealth and self-support, but my words to you, the apostles, must be somewhat different from those spoken to the disciples and the multitude since you have forsaken everything, not only to follow me, but to be ordained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lready have you had several years’ experience, and you know that the Father whose kingdom you proclaim will not forsake you. You have dedicated your lives to the ministry of the kingdom; therefore be not anxious or worried about the things of the temporal life, what you shall eat, nor yet for your body, what you shall wear. The welfare of the soul is more than food and drink; the progress in the spirit is far above the need of raiment. When you are tempted to doubt the sureness of your bread, consider the ravens; they sow not neither reap, they have no storehouses or barns, and yet the Father provides food for every one of them that seeks it. And of how much more value are you than many birds! Besides, all of your anxiety or fretting doubts can do nothing to supply your material needs. Which of you by anxiety can add a handbreadth to your stature or a day to your life? Since such matters are not in your hands, why do you give anxious thought to any of these problems? “그래, 안드레야, 내가 너희에게 재산과 자급(自給 자기가 마련함)의 이런 일에 대해 말할 것이지만, 사도들인 너희에게 하는 내 말은 제자들과 군중에게 한 그런 말과 어느 정도 달라야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대사들로 임직했기 때문이라. 이미 너희는 수년간 겪어서, 너희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가 너희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사역에 너희 평생을 바쳤으니, 현세의 생활 일들, 즉 무엇을 먹을까 또는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도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라. 혼(魂)의 행복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중요하므로, 영(靈)의 진보는 의복의 필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라. 너희가 너희 생계의 확신에 의혹이 일어날 때, 까마귀를 헤아려 보라. 까마귀는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나 헛간도 없지만, 아버지는 양식을 찾는 까마귀마다 그것을 주시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허다한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냐! 게다가 너희 모든 걱정이나 애타는 의심으로 너희 물질적 필요를 아예 채울 수 없느니라. 너희 중 누가 걱정으로 너희 키를 한 뼘 더하거나 너희 목숨에 하루를 더할 수 있느냐? 그런 문제들은 너희 손에 있지 않은데 너희는 왜 이런 문제들로 걱정스럽게 생각하느냐(마6:25-27, 31, 눅12:22-26)?

165:5.3 (1823.3)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they toil not, neither do they spin; yet I say to you,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arrayed like one of these. If God so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alive today and tomorrow is cut down and cast into the fire, how much more shall he clothe you, the ambassadors of the heavenly kingdom. O you of little faith! When you wholeheartedly devote yourselves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should not be of doubtful minds concerning the support of yourselves or the families you have forsaken. If you give your lives truly to the gospel, you shall live by the gospel. If you are only believing disciples, you must earn your own bread and contribute to the sustenance of all who teach and preach and heal. If you are anxious about your bread and water, wherein are you different from the nations of the world who so diligently seek such necessities? Devote yourselves to your work, believing that both the Father and I know that you have need of all these things. Let me assure you, once and for all, that, if you dedicate your liv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all your real needs shall be supplied. Seek the greater thing, and the lesser will be found therein; ask for the heavenly, and the earthly shall be included. The shadow is certain to follow the substance.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헤아려 보라.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실을 만들지도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환희의 절정에 있던 솔로몬조차 이런 꽃 중 하나처럼 차려입지 않았느니라. 오늘 살아 있다가 내일 꺾여 불에 던져지는 들풀을 하느님이 그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늘나라 대사들인 너희를 얼마나 잘 입히시겠느냐. 오, 너희 신앙이 적은 자들아! 너희가 하느님 나라 복음의 선포에 전심으로 헌신할 때, 너희는 자신들이나 너희가 버린 가족들의 부양(扶養 생활을 돌봄)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희가 진심으로 복음에 너희 목숨을 드린다면 너희는 복음으로 살 것이라. 너희가 단지 믿는 제자들이라면, 너희는 자기 양식을 벌고, 가르치고 전하며 고치는 모든 자의 생계(生計)에 기부해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너희 음식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런 필수품을 아주 열심히 찾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와 내가 둘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너희 일에 헌신하라. 내가 최종적으로 단언하건대, 너희가 하느님 나라의 일에 너희 목숨을 헌신하면, 너희 모든 실제 필요가 공급될 것이라.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러면 더 작은 것이 거기서 발견될 것이라. 하늘의 것을 구하면, 땅의 것이 포함되리라. 그림자는 반드시 본체를 따르느니라(마6:28-33, 눅12:27-31).

165:5.4 (1823.4) “You are only a small group, but if you have faith, if you will not stumble in fear, I declare that it is my Father’s good pleasure to give you this kingdom. You have laid up your treasures where the purse waxes not old, where no thief can despoil, and where no moth can destroy. And as I told the people,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너희는 적은 무리에 불과하나, 너희에게 신앙이 있고, 너희가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선언하노니, 이런 하느님 나라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 내 아버지의 선한 기쁨이니라. 너희는 너희 지갑이 낡아지지 않고, 어떤 도둑도 약탈할 수 없고, 좀이 해하지 못하는 곳에 너희 보물을 저축하라.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으리라(마6:19-21, 눅12:32-34).

165:5.5 (1824.1) “But in the work which is just ahead of us, and in that which remains for you after I go to the Father, you will be grievously tried. You must all be on your watch against fear and doubts. Every one of you, gird up the loins of your minds and let your lamps be kept burning. Keep yourselves like men who are watch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the marriage feas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you may quickly open to him. Such watchful servants are blessed by the master who finds them faithful at such a great moment. Then will the master make his servants sit down while he himself serves them. Verily, verily, I say to you that a crisis is just ahead in your lives, and it behooves you to watch and be ready. “우리 바로 앞에 놓인 일과 내가 아버지께 간 다음에 너희에게 남아 있는 것에서, 너희는 비통하게 시험을 받을 것이라. 너희는 두려움과 의심에 대비하여 모두 경계해야만 하느니라. 너희 각자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너희 등불을 계속 켜 두라. 결혼 잔치에서 돌아오는 자기 주인을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자신을 지켜서, 주인이 와서 두드리면 너희가 빨리 문을 열 수 있도록 하라. 그렇게 주의 깊은 하인들은 그런 중요한 순간에 충실한 종들을 발견한 주인의 축복을 받느니라. 그러면 주인이 자기 하인들을 앉혀서 자신이 직접 그들을 섬기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삶에서 위기가 바로 앞에 있으며, 너희는 마땅히 경계하고 준비해야 하느니라(눅12:35-38).

165:5.6 (1824.2) “You well understand that no man would suffer his house to be broken into if he knew what hour the thief was to come. Be you also on watch for yourselves, for in an hour that you least suspect and in a manner you think not, shall the Son of Man depart.”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안다면 자기 집에 도둑이 들도록 놔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너희가 잘 알고 있느니라. 너희도 스스로 경계하라, 너희가 가장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에,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떠날 것이기 때문이라(눅12:39-40).”

165:5.7 (1824.3) For some minutes the twelve sat in silence. Some of these warnings they had heard before but not in the setting presented to them at this time. 열두 사도는 몇 분간 말없이 앉았습니다. 이런 경고 중 일부는 그들이 전에 들어 봤지만, 이때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아니었습니다.

6. Answer to Peter’s Question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230416 진실로 검증된 신앙 눅12:41-53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65:6.1 (1824.4) As they sat thinking, Simon Peter asked: “Do you speak this parable to us, your apostles, or is it for all the disciples?” And Jesus answered: 그들이 앉아서 생각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이런 비유를 당신의 사도들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모든 제자에게 하신 말씀인가요(눅12:41)?”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165:6.2 (1824.5) “In the time of testing, a man’s soul is revealed; trial discloses what really is in the heart. When the servant is tested and proved, then may the lord of the house set such a servant over his household and safely trust this faithful steward to see that his children are fed and nurtured. Likewise, will I soon know who can be trusted with the welfare of my children when I shall have returned to the Father. As the lord of the household shall set the true and tried servant over the affairs of his family, so will I exalt those who endure the trials of this hour in the affairs of my kingdom. “극히 곤란한 때에, 사람의 혼이 드러나리라. 시련(試鍊)이 심정에 무엇이 실제로 있는지 들추어내느니라. 하인이 시험을 받아 입증된 다음에, 집주인은 그런 하인에게 자기 집 안을 감독하며, 자기 자녀를 먹이고 양육하도록 충실한 이런 청지기를 마음 놓고 신뢰하느니라. 똑같이, 내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누가 내 자녀들의 행복을 맡을 수 있는지 내가 곧 알 것이니라. 집주인이 진실하고 검증된 하인을 자기 가족 업무의 감독자로 정하듯이, 나는 내 하느님 나라 업무에서 이런 시련의 시간을 견디는 자들을 대단히 칭찬하리라(마24:45-47, 눅12:42-44).

165:6.3 (1824.6) “But if the servant is slothful and begins to say in his heart, ‘My master delays his coming,’ and begins to mistreat his fellow servants and to eat and drink with the drunken, then the lord of that servant will come at a time when he looks not for him and, finding him unfaithful, will cast him out in disgrace. Therefore you do well to prepare yourselves for that day when you will be visited suddenly and in an unexpected manner. Remember, much has been given to you; therefore will much be required of you. Fiery trials are drawing near you. I have a baptism to be baptized with, and I am on watch until this is accomplished. You preach peace on earth, but my mission will not bring peace in the material affairs of men — not for a time, at least. Division can only be the result where two members of a family believe in me and three members reject this gospel. Friends, relatives, and loved ones are destined to be set against each other by the gospel you preach. True, each of these believers shall have great and lasting peace in his own heart, but peace on earth will not come until all are willing to believe and enter into their glorious inheritance of sonship with God. Nevertheless, go in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to all nations, to every man, woman, and child.” “그러나 하인이 게을러 자기 심정으로 ‘내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말하기 시작하여, 자기 동료 하인들을 학대하고 술에 취한 자들과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그런 하인의 주인이 하인을 찾지 않는 때에 와서 성실하지 않은 하인을 발견하고 그를 수치스럽게 쫓아내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돌연(突然) 예기치 않게 닥칠 그날을 준비하는 것이, 온당하니라. 너희에게 많이 주어졌으니, 너희에게 많이 요구될 것을 기억하라. 격렬한 시련이 너희에게 다가오고 있느니라.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어서 이것이 마치기까지 나는 깨어있느니라. 너희가 지상에 평화를 전하지만, 내 사명은 사람의 물질적인 업무에 아무튼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가족 중 두 명이 나를 믿고 세 명이 이 복음을 거부하는 곳에서, 분열이 그 결과일 뿐이라. 너희가 전하는 복음으로 친구들, 친척들 및 사랑하는 자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어 있느니라(마24:48-51, 눅12:45-46, 48b, 50-53). 정확히, 이런 신자들 각자는 자기 심정에 커다란 지속적인 평화를 가질 것이나, 모든 사람이 기꺼이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상속에 참여하기까지, 지상에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 그렇지만 온 세상에 들어가, 모든 나라, 모든 남녀와 어린이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마28:19a, 막16:15).”

165:6.4 (1824.7) And this was the end of a full and busy Sabbath day. On the morrow Jesus and the twelve went into the cities of northern Perea to visit with the seventy, who were working in these regions under Abner’s supervision. 그리고 이것은 풍성하고 바쁜 안식일의 끝이었습니다. 이튿날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넬의 감독에 따라 이런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70인을 방문하러 페레아 북부 도시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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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6 Last Visit to Northern Perea 마지막 북(北) 페레아 방문

Paper 166

Last Visit to Northern Perea 마지막 북(北) 페레아 방문

1. The Pharisees at Ragaba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Ceremonial hand washing 의식용 손 씻기
2. The Ten Lepers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3. The Sermon at Gerasa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The straight and narrow way 곧고 좁은 길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첫째가 나중되는 자가 많으니라.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4. Teaching About Accidents 재난에 대한 가르침
5. The Congregation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의 회중
The later ministry and death of Abner 아브너의 말년 사역과 죽음

230423 예수 복음의 근거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66:0.1 (1825.1) FROM February 11 to 20, Jesus and the twelve made a tour of all the cities and villages of northern Perea where the associates of Abner and the members of the women’s corps were working. They found these messengers of the gospel meeting with success, and Jesus repeatedly called the attention of his apostles to the fact that the gospel of the kingdom could spread without the accompaniment of miracles and wonders. 2월 11일(토)부터 20일(월)까지,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너의 동료들과 여성 단원들이 일하고 있는 북(北)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순회(巡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복음의 메신저들이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적과 이적을 동반하지 않고도 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도들의 주의(注意)를 거듭하여 환기(喚起)시켰습니다.

166:0.2 (1825.2) This entire mission of three months in Perea was successfully carried on with little help from the twelve apostles, and the gospel from this time on reflected, not so much Jesus’ personality, as his teachings. But his followers did not long follow his instructions, for soon after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they departed from his teachings and began to build the early church around the miraculous concepts and the glorified memories of his divine-human personality. 페레아에서 3개월간의 이 모든 선교(宣敎)는 거의 열두 사도의 도움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이때부터 복음은 예수의 인격(고유성)이라기보다 그의 가르침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오래되지 않아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 직후 그의 가르침에서 이탈하여 기적적인 개념과 그의 신적-인간적 인격(고유성)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억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 The Pharisees at Ragaba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230430 더 중요한 요구사항 눅11:37-43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66:1.1 (1825.3) On Sabbath, February 18, Jesus was at Ragaba, where there lived a wealthy Pharisee named Nathaniel; and since quite a number of his fellow Pharisees were following Jesus and the twelve around the country, he made a breakfast on this Sabbath morning for all of them, about twenty in number, and invited Jesus as the guest of honor. 2월 18일(AD 30) 안식일에 예수는 나다니엘이라는 부유한 바리새인이 살았던 라가바에 계셨습니다. 그 지방 주변에서 제법 많은 그 동료가 예수와 열두 사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안식일 아침에 20명쯤 되는 그들 모두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예수를 귀빈(貴賓)으로 초대했습니다(눅11:37).

166:1.2 (1825.4) By the time Jesus arrived at this breakfast, most of the Pharisees, with two or three lawyers, were already there and seated at the table. The Master immediately took his seat at the left of Nathaniel without going to the water basins to wash his hands. Many of the Pharisees, especially those favorable to Jesus’ teachings, knew that he washed his hands only for purposes of cleanliness, that he abhorred these purely ceremonial performances; so they were not surprised at his coming directly to the table without having twice washed his hands. But Nathaniel was shocked by this failure of the Master to comply with the strict requirements of Pharisaic practice. Neither did Jesus wash his hands, as did the Pharisees, after each course of food nor at the end of the meal. 예수께서 이 아침 식사에 도착하셨을 때, 바리새인들 대부분은 두셋의 율법사와 함께 이미 거기에 있었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주님은 손을 씻으러 물동이로 가지 않고 나다니엘의 왼쪽에 바로 앉았습니다. 여러 바리새인, 특히 예수의 가르침에 호의적인 자들은, 그가 청결의 목적으로만 그의 손을 씻고, 그가 이런 순전한 의식용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손을 두 번 씻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주께서 바리새인의 엄격한 규칙 습관을 따르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음식의 각 요리를 먹은 후에 또는 식후에도 그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눅11:38).

166:1.3 (1825.5) After considerable whispering between Nathaniel and an unfriendly Pharisee on his right and after much lifting of eyebrows and sneering curling of lips by those who sat opposite the Master, Jesus finally said: “I had thought that you invited me to this house to break bread with you and perchance to inquire of me concerning the proclamation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but I perceive that you have brought me here to witness an exhibition of ceremonial devotion to your own self-righteousness. That service you have now done me; what next will you honor me with as your guest on this occasion?” 나다니엘과 그 오른편의 악의를 지닌 바리새인 사이에 상당한 귓속말을 하고, 주님의 맞은편에 앉은 자들이 사뭇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비쭉여 비웃은 다음에, 마침내 주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이 집에 나를 초대하여 너와 함께 식사하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 선포에 대해 어쩌면 내게 질문하리라고 생각했노라. 그러나 너 자신의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에 대한 의식용 헌신의 표시를 보라고 네가 나를 여기 데려온 것으로 알겠노라. 네가 지금 내게 그렇게 접대했으니, 네가 이 기회에 너의 손님으로서 나에게 다음의 어떤 것으로 경의를 표할 것이냐?”

166:1.4 (1826.1) When the Master had thus spoken, they cast their eyes upon the table and remained silent. And since no one spoke, Jesus continued: “Many of you Pharisees are here with me as friends, some are even my disciples, but the majority of the Pharisees are persistent in their refusal to see the light and acknowledge the truth, even when the work of the gospel is brought before them in great power. How carefully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s and the platters while the spiritual-food vessels are filthy and polluted! You make sure to present a pious and holy appearance to the people, but your inner souls are filled with self-righteousness, covetousness, extortion, and all manner of spiritual wickedness. Your leaders even dare to plot and plan the murder of the Son of Man. Do not you foolish men understand that the God of heaven looks at the inner motives of the soul as well as on your outer pretenses and your pious professions? Think not that the giving of alms and the paying of tithes will cleanse you from unrighteousness and enable you to stand clean in the presence of the Judge of all men. Woe upon you Pharisees who have persisted in rejecting the light of life! You are meticulous in tithing and ostentatious in almsgiving, but you knowingly spurn the visitation of God and reject the revelation of his love. Though it is all right for you to give attention to these minor duties, you should not have left these weightier requirements undone. Woe upon all who shun justice, spurn mercy, and reject truth! Woe upon all those who despise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while they seek the chief seats in the synagogue and crave flattering salutations in the market places!”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식탁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계속하셨습니다. “너희 중 여러 바리새인이 친구들로서 나와 함께 여기에 있고 일부는 심지어 내 제자들이지만, 바리새인들 대부분은 그들 앞에 복음의 행위가 큰 권세로 주어져도, 빛을 보고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도다. 너희가 얼마나 신중하게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지만, 영적 양식의 그릇이 더럽게 오염되어 있는가(마23:25, 눅11:39)! 너희가 사람들에게 위선적인 거룩한 모습을 확실히 보이려 하지만 너희 내부의 혼(魂)들은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 탐욕, 강탈(强奪) 및 온갖 방식의 영적 사악함이 가득 차 있도다(마23:28). 너희 지도자들은 감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살해를 꾀하고 계획까지 하도다.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의 하느님이 너희 외적인 겉치레와 너희 위선적인 신앙고백만 아니라 혼(魂)의 내적 동기(動機)를 보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눅16:15)? 자선을 베풀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해서 너희가 불의(不義)에서 깨끗해지고 너희가 모든 사람의 심판자 앞에서 깨끗하게 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생명의 빛을 고집스럽게 거절하는 너희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으리라! 너희가 십일조에 매우 신중하고 보란 듯이 자선(慈善)하지만, 너희는 고의로 하느님의 은총을 경멸하고 그의 사랑의 계시를 거절하도다(마23:23, 눅11:42). 너희가 이런 사소한 본분에 주의하는 것이 괜찮아도, 이렇게 더 중요한 요구사항을 그대로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정의(正義)를 피하고, 자비를 경멸하며, 진리를 거절하는 모든 자에게 화 있으리라! 아버지의 계시를 멸시하면서, 회당의 윗자리를 추구하며 시장에서 아첨하는 인사(人事)를 열망하는 모든 자에게 화 있으리라(마23:6-7, 막12:38-39, 눅11:43)!”

230507 하늘나라의 열린 문 눅11:45-54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166:1.5 (1826.2) When Jesus would have risen to depart, one of the lawyers who was at the table, addressing him, said: “But, Master, in some of your statements you reproach us also. Is there nothing good in the scribes, the Pharisees, or the lawyers?” And Jesus, standing, replied to the lawyer: “You, like the Pharisees, delight in the first places at the feasts and in wearing long robes while you put heavy burdens, grievous to be borne, on men’s shoulders. And when the souls of men stagger under these heavy burdens, you will not so much as lift with one of your fingers. Woe upon you who take your greatest delight in building tombs for the prophets your fathers killed! And that you consent to what your fathers did is made manifest when you now plan to kill those who come in this day doing what the prophets did in their day — proclaiming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revealing the mercy of the heavenly Father. But of all the generations that are past, the blood of the prophets and the apostles shall be required of this perverse and self-righteous generation. Woe upon all of you lawyers who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from the common people! You yourselves refuse to enter into the way of truth, and at the same time you would hinder all others who seek to enter therein. But you cannot thus shut up the doors of the kingdom of heaven; these we have opened to all who have the faith to enter, and these portals of mercy shall not be closed by the prejudice and arrogance of false teachers and untrue shepherds who are like whited sepulchres which, while outwardly they appear beautiful, are inwardly full of dead men’s bones and all manner of spiritual uncleanness.” 예수께서 떠나려고 일어나시자, 식탁에 있던 율법사 한 사람이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의 말씀 중 일부에서 당신은 저희 또한 책망하십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또는 율법사들에게는 올바른 것이 없습니까?” 그러자 예수는, 선 채로 율법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바리새인들처럼 잔치의 상석에서 긴 예복을 즐기면서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로 짊어지게 하도다. 사람의 혼(魂)들이 이렇게 무거운 짐 아래서, 휘청거릴 때, 너희는 손가락 하나조차 들어 올리지 않으리라. 너희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위해 무덤 세우기를 최고로 즐거워하는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그리고 선지자들이 당시에 했던, 하느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의 자비를 계시하는 것을 오늘날 와서 행하는 자들을 너희가 이제 죽이려고 계획할 때, 너희 조상들이 한 것에 너희가 동의하는 것이 명백하니라. 하지만 이렇게 고집스러운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적인 세대가 지나간 모든 세대 중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요구하리라. 서민에게서 지식의 열쇠를 제거한 너희 율법사 모두에게 화 있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진리의 길로 들어가기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동시에 너희는 그 안에 들어가려는 다른 모든 사람을 방해하곤 했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우리가 들어갈 신앙이 있는 모두에게 이런 문들을 열었고,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영적 더러움으로 가득한, 거짓 교사들과 거짓 목자들의 편견과 오만으로, 이런 자비의 입구들이 닫히지 않으리라(마23:13, 27-29, 35-36, 눅11:45-48, 52).”

166:1.6 (1826.3) And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at Nathaniel’s table, he went out of the house without partaking of food. And of the Pharisees who heard these words, some became believers in his teaching and entered into the kingdom, but the larger number persisted in the way of darkness, becoming all the more determined to lie in wait for him that they might catch some of his words which could be used to bring him to trial and judgment before the Sanhedrin at Jerusalem. 그리고 예수께서 나다니엘의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그는 함께 먹지 않고 집을 떠났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 중 일부는 그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으나, 더 많은 수가 어둠의 길을 고집하여,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 그를 검거하여 재판에 사용될 그의 일부 말씀을 자신들이 캐내려고 숨어서 그를 기다리기로 더욱더 결정하게 되었습니다(눅11:53-54).

166:1.7 (1827.1) There were just three things to which the Pharisees paid particular attention: 바리새인들이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은 바로 세 가지였습니다.

166:1.8 (1827.2) 1. The practice of strict tithing. 엄격한 십일조 관행.

166:1.9 (1827.3) 2. Scrupulous observance of the laws of purification. 빈틈없는 정화(淨化)법 준수.

166:1.10 (1827.4) 3. Avoidance of association with all non-Pharisees.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과 관계 회피.

166:1.11 (1827.5) At this time Jesus sought to expose the spiritual barrenness of the first two practices, while he reserved his remarks designed to rebuke the Pharisees’ refusal to engage in social intercourse with non-Pharisees for another and subsequent occasion when he would again be dining with many of these same men. 이때 예수는 영적으로 알맹이가 없는 처음 두 관행을 폭로하려 했지만, 바리새인이 아닌 사람들과 사회적인 교류 참여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거절을 꾸짖으려는 그의 언급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 중 여럿과 다시 식사하는 나중의 또 다른 기회를 위해 훗날로 미뤘습니다.

2. The Ten Lepers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230514 감사와 애정이 깊은 자비 눅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66:2.1 (1827.6) The next day Jesus went with the twelve over to Amathus, near the border of Samaria, and as they approached the city, they encountered a group of ten lepers who sojourned near this place. Nine of this group were Jews, one a Samaritan. Ordinarily these Jews would have refrained from all association or contact with this Samaritan, but their common affliction was more than enough to overcome all religious prejudice. They had heard much of Jesus and his earlier miracles of healing, and since the seventy made a practice of announcing the time of Jesus’ expected arrival when the Master was out with the twelve on these tours, the ten lepers had been made aware that he was expected to appear in this vicinity at about this time; and they were, accordingly, posted here on the outskirts of the city where they hoped to attract his attention and ask for healing. When the lepers saw Jesus drawing near them, not daring to approach him, they stood afar off and cried to him: “Master, have mercy on us; cleanse us from our affliction. Heal us as you have healed others.” 다음 날(AD30.2.19. 일요일) 예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사마리아 변경 근처의 아마투스로 건너가셨고, 그들이 도시에 접근하자, 이곳 근처에 머물던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이 중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대개 이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과 모든 사귐이나 접촉을 꺼렸을 것이지만, 그들의 공통된 고통은 모든 종교적 편견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초기 치유 기적에 대해 많이 들었고, 70인 사도가, 주께서 이런 여행에 열두 사도와 함께 외출하는 예수님의 예상 도착 시간을, 습관적으로 알렸기 때문에,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는 그가 이 무렵 이 부근에 나타나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주의를 끌어 치유를 요청하기를 바라며 이곳 도시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환자(癩患者 한센병)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자,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 서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고통에서 우리를 고쳐주소서. 당신께서 다른 이들을 치유했듯이 우리를 치유하소서(눅17:11-13).”

166:2.2 (1827.7) Jesus had just been explaining to the twelve why the gentiles of Perea, together with the less orthodox Jews, were more willing to believe the gospel preached by the seventy than were the more orthodox and tradition-bound Jews of Judea. He had called their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ir message had likewise been more readily received by the Galileans, and even by the Samaritans. But the twelve apostles were hardly yet willing to entertain kind feelings for the long-despised Samaritans.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왜 페레아의 이방인들이, 덜 정통적인 유대인들과 함께, 더 정통적이고 전통에 묶인 유대의 유대인들보다, 70인 사도가 전파한 복음을 기꺼이 더 믿는지 막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찬가지로 갈릴리인(人)들과 심지어 사마리아인(人)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더 쉽게 받아들였던 사실에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는 오래 괄시 받던 사마리아인(人)들에 대한 친절한 감정을 아직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166:2.3 (1827.8) Accordingly, when Simon Zelotes observed the Samaritan among the lepers, he sought to induce the Master to pass on into the city without even hesitating to exchange greetings with them. Said Jesus to Simon: “But what if the Samaritan loves God as well as the Jews? Should we sit in judgment on our fellow men? Who can tell? if we make these ten men whole, perhaps the Samaritan will prove more grateful even than the Jews. Do you feel certain about your opinions, Simon?” And Simon quickly replied, “If you cleanse them, you will soon find out.” And Jesus replied: “So shall it be, Simon, and you will soon know the truth regarding the gratitude of men and the loving mercy of God.” 그래서 시몬 젤로떼가 나환자들 사이에서 사마리아인(人)을 알아보자, 주님을 설득하여 그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멈춰 서지 않고, 도시로 나아가도록 애썼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우리가 우리 동료를 판가름해야 하느냐? 누가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런 열 명을 건강하게 한다면, 아마 사마리아인(人)이 유대인들보다도 더 고마움을 표할 것이라. 시몬아, 너는 네 의견에 확신이 있느냐?” 그러자 시몬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고치면, 당신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시몬아, 그렇게 될 것이며, 너는 사람들의 감사와 하느님의 애정이 깊은 자비에 관한 진리를 곧 알게 될 것이니라.”

166:2.4 (1827.9) Jesus, going near the lepers, said: “If you would be made whole, go forthwith and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s required by the law of Moses.” And as they went, they were made whole. But when the Samaritan saw that he was being healed, he turned back and, going in quest of Jesus, began to glorify God with a loud voice. And when he had found the Master, he fell on his knees at his feet and gave thanks for his cleansing. The nine others, the Jews, had also discovered their healing, and while they also were grateful for their cleansing, they continued on their way to show themselves to the priests. 예수께서 나환자들에게 가까이 가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건강해지면 바로 가서 모세의 율법대로 사제들에게 너희 모습을 보이라.” 그리고 그들이 가다가, 그들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은 자신이 치유된 것을 알자, 그는 되돌아서, 예수를 찾으러 가면서, 큰 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발견하자, 그는,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자신의 깨끗해짐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도 자신의 치유를 깨닫고, 자신들의 깨끗해짐에 대해 감사하면서, 사제들에게 모습을 보이려고 계속 길을 갔습니다(눅17:14-16).

166:2.5 (1828.1) As the Samaritan remained kneeling at Jesus’ feet, the Master, looking about at the twelve, especially at Simon Zelotes, said: “Were not ten cleansed? Where, then, are the other nine, the Jews? Only one, this alien, has returned to give glory to God.” And then he said to the Samaritan, “Arise and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사마리아인(人)이 여전히 예수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주께서 열두 사도, 특히 시몬 젤로떼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열 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러면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한 명만 하느님에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왔느니라.” 그런 후 그가 사마리아인(人)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네 길을 가라. 너의 신앙이 너를 건강하게 만들었느니라(눅17:17-19).”

166:2.6 (1828.2) Jesus looked again at his apostles as the stranger departed. And the apostles all looked at Jesus, save Simon Zelotes, whose eyes were downcast. The twelve said not a word. Neither did Jesus speak; it was not necessary that he should. 그 사람이 떠나자 예수께서 다시 자기 사도들을 보셨습니다. 눈을 내리깐, 시몬 젤로떼만 제외하고 사도들 모두 예수를 보았습니다. 열두 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66:2.7 (1828.3) Though all ten of these men really believed they had leprosy, only four were thus afflicted. The other six were cured of a skin disease which had been mistaken for leprosy. But the Samaritan really had leprosy. 이런 열 명 모두 자신들이 나병(한센병)에 걸렸다고 정말로 믿었지만, 네 명만 그렇게 병에 걸려 고통을 겪었습니다. 다른 여섯 명은 나병(癩病)으로 잘못 알았던 피부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은 정말 나병(한센병)에 걸렸습니다.

166:2.8 (1828.4) Jesus enjoined the twelve to say nothing about the cleansing of the lepers, and as they went on into Amathus, he remarked: “You see how it is that the children of the house, even when they are insubordinate to their Father’s will, take their blessings for granted. They think it a small matter if they neglect to give thanks when the Father bestows healing upon them, but the strangers, when they receive gifts from the head of the house, are filled with wonder and are constrained to give thanks in recognition of the good things bestowed upon them.” And still the apostles said nothing in reply to the Master’s words.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나환자(癩患者)들의 깨끗해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했고, 그들이 아마투스로 들어갈 때, 말했습니다. “너희는 집의 자녀들이 자기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때도,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아느니라. 그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치료하실 때,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지만, 남들은 가장(家長)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놀라움으로 뿌듯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한 것들을 알아보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그러자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3. The Sermon at Gerasa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230521 누가 구원을 받을까? 눅13:22-30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166:3.1 (1828.5) As Jesus and the twelve visited with the messengers of the kingdom at Gerasa, one of the Pharisees who believed in him asked this question: “Lord, will there be few or many really saved?” And Jesus, answering, said: 예수님과 열두 사도가 게라사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들과 이야기했을 때, 그를 믿던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이 적을까요, 아니면 많을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했습니다(눅13:22-23).

166:3.2 (1828.6) “You have been taught that only the children of Abraham will be saved; that only the gentiles of adoption can hope for salvation. Some of you have reasoned that, since the Scriptures record that only Caleb and Joshua from among all the hosts that went out of Egypt lived to enter the promised land, only a comparatively few of those who seek the kingdom of heaven shall find entrance thereto.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만 구원받을 것이며, 양자로 입양된 이방인들만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배웠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성서에 이집트를 떠난 모든 무리 중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하느님 나라를 찾는 자 중에서 비교적 적은 수만 거기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느니라(민14:30, 38, 26:65, 32:11-12).

166:3.3 (1828.7) “You also have another saying among you, and one that contains much truth: That the way which leads to eternal life is straight and narrow, that the door which leads thereto is likewise narrow so that, of those who seek salvation, few can find entrance through this door. You also have a teaching that the way which leads to destruction is broad, that the entrance thereto is wide, and that there are many who choose to go this way. And this proverb is not without its meaning. But I declare that salvation is first a matter of your personal choosing. Even if the door to the way of life is narrow, it is wide enough to admit all who sincerely seek to enter, for I am that door. And the Son will never refuse entrance to any child of the universe who, by faith, seeks to find the Father through the Son. 너희는 너희 중 다른 격언도 있는데,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곧고 좁으며, 거기로 인도하는 문도 마찬가지로 좁아서, 구원을 찾는 자 중에서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여러 실태를 담고 있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거기로 들어가는 입구도 넓어서, 이 길을 가려고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가르침도 너희에게 있느니라. 이런 속담은 그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구원은 먼저 너희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이니라. 생명의 길로 가는 문이 좁다고 해도, 진심으로 들어가려고 찾는 모두를 받아 들일만큼 넓으니, 내가 그 문이기 때문이라. 그리고 아들은, 신앙으로,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우주의 어떤 자녀라도 들어가기를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라(마7:13-14, 눅13:24).

166:3.4 (1829.1) “But herein is the danger to all who would postpone their entrance into the kingdom while they continue to pursue the pleasures of immaturity and indulge the satisfactions of selfishness: Having refused to enter the kingdom as a spiritual experience, they may subsequently seek entrance thereto when the glory of the better way becomes revealed in the age to come. And when, therefore, those who spurned the kingdom when I came in the likeness of humanity seek to find an entrance when it is revealed in the likeness of divinity, then will I say to all such selfish ones: I know not whence you are. You had your chance to prepare for this heavenly citizenship, but you refused all such proffers of mercy; you rejected all invitations to come while the door was open. Now, to you who have refused salvation, the door is shut. This door is not open to those who would enter the kingdom for selfish glory. Salvation is not for those who are unwilling to pay the price of wholehearted dedication to doing my Father’s will. When in spirit and soul you have turned your backs upon the Father’s kingdom, it is useless in mind and body to stand before this door and knock, saying, ‘Lord, open to us; we would also be great in the kingdom.’ Then will I declare that you are not of my fold. I will not receive you to be among those who have fought the good fight of faith and won the reward of unselfish service in the kingdom on earth. And when you say, ‘Did we not eat and drink with you, and did you not teach in our streets?’ then shall I again declare that you are spiritual strangers; that we were not fellow servants in the Father’s ministry of mercy on earth; that I do not know you; and then shall the Judge of all the earth say to you: ‘Depart from us, all you who have taken delight in the works of iniquity.’ “그러나 미숙한 쾌락을 계속 추구하고 이기심의 만족을 채우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미루는 모든 자에게 이 점에서 위험이 있도다. 영적 체험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그들이, 그 후에 다가오는 시대에 더 나은 길의 영광이 계시될 때, 거기로 들어가려 할 수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왔을 때 하느님 나라를 거절한 자들이 신성(神性)의 모습이 계시될 때 들어가려고 애쓴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이기적인 모든 자에게 말하리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노라. 너희는 이런 하늘의 시민권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모든 자비의 제안(提案)을 거절했도다. 너희는 문이 열려 있는 동안 오라는 모든 초대를 거절했도다. 이제 구원을 거절한 너희에게는 문이 닫혔도다. 이 문은 이기적 영광을 위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는 열려 있지 않으니라. 구원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전심으로 헌신하는 값을 마지못해 치르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영(靈)과 혼(魂)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외면하면서, 마음과 몸으로 이 문 앞에서 서서 두드리며, ‘주님, 우리에게 문을 여소서,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느니라. 그때 너희는 내 우리 안의 양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선언하리라. 나는,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전6:12a, 딤후4:7a),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타적인 섬김의 보상을 얻은 자들 사이에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가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당신께서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면, 너희는 영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역에서 동료 봉사자들이 아니었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내가 다시 선언하리라. 그러면 온 지상의 심판자가 너희에게 ‘사악한 일을 즐겼던 너희는 다 우리에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눅13:25-27).

166:3.5 (1829.2) “But fear not; every one who sincerely desires to find eternal life by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God shall certainly find such everlasting salvation. But you who refuse this salvation will some day see the prophets of the seed of Abraham sit down with the believers of the gentile nations in this glorified kingdom to partake of the bread of life and to refresh themselves with the water thereof. And they who shall thus take the kingdom in spiritual power and by the persistent assaults of living faith will come from the north and the south and from the east and the west. And, behold,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ose who are last will many times be first.”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 얻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런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이런 구원을 거절하는 너희는 언젠가, 아브라함 자손의 선지자들이 이렇게 영화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이방 민족의 신자들과 함께 앉아서 생명의 빵을 먹고 거기의 물로 기운을 되찾는 것을 볼 것이라. 그리고 이렇게 영적 권세와 살아있는 신앙의 집요한 공격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그들이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에서 올 것이라. 그리고 보라, 먼저 된 많은 자들이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자들이 여러 번 먼저 되리라(마8:11, 19:30, 20:16, 막10:31, 눅13:28-30).”

166:3.6 (1829.3) This was indeed a new and strange version of the old and familiar proverb of the straight and narrow way. 이것은 곧고 좁은 길이라는 오래되어 잘 알려진 속담을 정말로 새롭게 설명한 생소한 해석이었습니다.

166:3.7 (1829.4) Slowly the apostles and many of the disciples were learning the meaning of Jesus’ early declaration: “Unless you are born again, born of the spirit, you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Nevertheless, to all who are honest of heart and sincere in faith, it remains eternally true: “Behold, I stand at the doors of men’s hearts and knock, and if any man will open to me, I will come in and sup with him and will feed him with the bread of life; we shall be one in spirit and purpose, and so shall we ever be brethren in the long and fruitful service of the search for the Paradise Father.” And so, whether few or many are to be saved altogether depends on whether few or many will heed the invitation: “I am the door, I am the new and living way, and whosoever wills may enter to embark upon the endless truth-search for eternal life.” 사도들과 여러 제자는 “너희가 거듭나, 영(靈)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너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3).”라는 예수의 초기 선언의 의미를 서서히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심정이 정직하고 신앙이 진실한 모든 이에게 영원히 진실로 남아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사람들의 심정 문간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게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를 생명의 빵으로 먹이리라(계3:20). 우리는 영(靈)과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천국 아버지를 찾는, 오래도록 열매가 많이 열리는 섬김 가운데 우리는 그렇게 늘 형제가 될 것이라.” 따라서 소수가 구원되는지, 다수가 구원되는지는 “나는 문이라(요10:7, 9), 나는 새롭게 살아 있는 길이며(요14:6),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영생의 끝없는 진리-추구의 시작에 참여할 수 있느니라.”라는 초대에 소수나 다수가 주의를 기울일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166:3.8 (1829.5) Even the apostles were unable fully to comprehend his teaching as to the necessity for using spiritual force for the purpose of breaking through all material resistance and for surmounting every earthly obstacle which might chance to stand in the way of grasping the all-important spiritual values of the new life in the spirit as the liberated sons of God. 사도들조차, 모든 물질적 저항을 돌파하고, 해방된 하느님의 아들(자녀)들로서 영(靈) 안에서 새 생명에 속한 가장 중요한 영적 가치의 파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모든 현세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영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4. Teaching About Accidents 재난에 대한 가르침

230528 무엇으로 영적 은혜가 결정되는가? 눅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166:4.1 (1830.1) While most Palestinians ate only two meals a day, it was the custom of Jesus and the apostles, when on a journey, to pause at midday for rest and refreshment. And it was at such a noontide stop on the way to Philadelphia that Thomas asked Jesus: “Master, from hearing your remarks as we journeyed this morning, I would like to inquire whether spiritual beings are concerned in the production of strange and extraordinary events in the material world and, further, to ask whether the angels and other spirit beings are able to prevent accidents.” 팔레스타인 사람 대부분은 하루에 두 끼만 먹었으나, 예수와 사도들은 여행할 때 한낮에 잠시 멈춰 쉬면서 기운을 차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로 가는 도중에 그렇게 한낮에 멈추었을 때 도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오늘 아침에 우리가 여행할 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 존재들이 물질계에서 기이하고 비상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는지, 게다가 천사들과 다른 영(靈) 존재들이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지, 제가 질문하고 싶습니다.”

166:4.2 (1830.2) In answer to Thomas’s inquiry, Jesus said: “Have I been so long with you, and yet you continue to ask me such questions? Have you failed to observe how the Son of Man lives as one with you and consistently refuses to employ the forces of heaven for his personal sustenance? Do we not all live by the same means whereby all men exist? Do you see the power of the spiritual world manifested in the material life of this world, save for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and the sometime healing of his afflicted children?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여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오래 너와 같이 있었는데도, 내게 그런 질문을 계속하느냐? 너희는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이 너희와 하나가 되어 살면서 자기 개인의 생계를 위해 하늘의 기세를 시종일관 사용하려 하지 않는지 네가 지켜보지 않았느냐? 우리 모두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느냐? 너는 아버지의 계시와 때때로 그의 고통받는 자녀들의 치유를 제외하고, 이 세상의 물질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영적 세계의 권세를 보고 있느냐?

166:4.3 (1830.3) “All too long have your fathers believed that prosperity was the token of divine approval; that adversity was the proof of God’s displeasure. I declare that such beliefs are superstitions. Do you not observe that far greater numbers of the poor joyfully receive the gospel and immediately enter the kingdom? If riches evidence divine favor, why do the rich so many times refuse to believe this good news from heaven? “너희 조상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번영은 신적 찬성의 신호이고 불행은 하느님이 진노한 증거라고 믿었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그런 믿음은 미신적 관습이니라. 너희는, 훨씬 더 많은 가난한 자가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여 즉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느냐? 재산이 신적 은혜의 증거라면 부자들은 어째서 하늘의 이 복음을 그토록 여러 번 믿으려 하지 않는가?

166:4.4 (1830.4) “The Father causes his rain to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the sun likewise shines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You know about those Galileans whose blood Pilate mingled with the sacrifices, but I tell you these Galileans were not in any manner sinners above all their fellows just because this happened to them. You also know about the eighteen men upon whom the tower of Siloam fell, killing them. Think not that these men who were thus destroyed were offenders above all their brethren in Jerusalem. These folks were simply innocent victims of one of the accidents of time. “아버지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자신의 비를 내리시고,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햇빛을 비추느니라(마5:45). 너희는 빌라도가 희생제물에 피를 섞은 그런 갈릴리인(人)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네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갈릴리인(人)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면에서 그들의 어떤 동료들보다 죄인들이 아니었느니라. 너희는 또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에 대해 아느니라. 그렇게 죽은 이런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어떤 형제들보다 범죄자들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사람들은 시간의 돌발 사고 중 하나의 무고한 희생자들이었을 뿐이니라(눅13:1-4).

166:4.5 (1830.5) “There are three groups of events which may occur in your lives: “너희 삶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들은 세 가지 종류니라.

166:4.6 (1830.6) “1. You may share in those normal happenings which are a part of the life you and your fellows live on the face of the earth. 너희는 지구상에서 너희와 너희 동료가 사는 생활의 일부인 그런 평범한 사건들을 함께 나눌 수도 있느니라.

166:4.7 (1830.7) “2. You may chance to fall victim to one of the accidents of nature, one of the mischances of men, knowing full well that such occurrences are in no way prearranged or otherwise produced by the spiritual forces of the realm. 너희는 자연계의 돌발 사고 중 하나, 사람들의 재난 중 하나에 우연히 희생될 수도 있는데, 그런 사건들은 영역의 영적 기세들이 예정한 것도, 또한 그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느니라.

166:4.8 (1830.8) “3. You may reap the harvest of your direct efforts to comply with the natural laws governing the world.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연법칙을 좇는 직접적인 너희 노력의 결과를 거둘 수도 있느니라.

166:4.9 (1830.9) “There was a certain man who planted a fig tree in his yard, and when he had many times sought fruit thereon and found none, he called the vinedressers before him and said: ‘Here have I come these three seasons looking for fruit on this fig tree and have found none. Cut down this barren tree; why should it encumber the ground?’ But the head gardener answered his master: ‘Let it alone for one more year so that I may dig around it and put on fertilizer, and then, next year, if it bears no fruit, it shall be cut down.’ And when they had thus complied with the laws of fruitfulness, since the tree was living and good, they were rewarded with an abundant yield. “어떤 사람이 자기 마당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곧이어 여러 번 열매를 구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그가 자기 앞에 포도원 일꾼들을 불러 말했더라.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아 삼 년을 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도다. 이런 메마른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째서 그것이 땅을 거치적거리게 하느냐?’ 그러나 정원사 단장이 그의 주인에게 대답했더라. ‘1년간 그대로 둬서 제가 땅을 두루 파서 거름을 준 다음 내년에 열매가 없으면 베어 버릴 것이라.’ 그들이 그렇게 열매 맺는 법칙을 따르자, 나무가 살아서 튼튼해져서, 그들은 풍부한 수확으로 보상받았더라(눅13:6-9).

166:4.10 (1831.1) “In the matter of sickness and health, you should know that these bodily states are the result of material causes; health is not the smile of heaven, neither is affliction the frown of God. “질병과 건강 문제에서, 너희는 이런 육체적 상태는 물질적 원인의 결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건강은 하늘의 은총이 아니며, 질병도 하느님의 화난 얼굴이 아니라.

166:4.11 (1831.2) “The Father’s human children have equal capacity for the reception of material blessings; therefore does he bestow things physical upon the children of men without discrimination. When it comes to the bestowal of spiritual gifts, the Father is limited by man’s capacity for receiving these divine endowments. Although the Father is no respecter of persons, in the bestowal of spiritual gifts he is limited by man’s faith and by his willingness always to abide by the Father’s will.” “아버지의 인간 자녀들은 물질적 축복을 받아들이는 동등한 능력이 있도다. 따라서 그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육신의 것들을 차별 없이 주시느니라. 영적 은혜를 주실 때, 아버지는 이런 신적 자질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용력에 의해 제한되느니라. 아버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지만, 영적 은혜를 주실 때, 그는 사람의 신앙과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그의 기꺼이 하는 마음(자발성)으로 제한되느니라.”

166:4.12 (1831.3) As they journeyed on toward Philadelphia, Jesus continued to teach them and to answer their questions having to do with accidents, sickness, and miracles, but they were not able fully to comprehend this instruction. One hour of teaching will not wholly change the beliefs of a lifetime, and so Jesus found it necessary to reiterate his message, to tell again and again that which he wished them to understand; and even then they failed to grasp the meaning of his earth mission until after his death and resurrection. 그들이 필라델피아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면서, 예수께서 계속 그들을 가르치고 재난, 질병 및 기적에 관련된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의 가르침으로 평생의 믿음이 완전히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을 몇 번이고 말할 필요를 간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그들은 그의 지상 사명의 의미를 끝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5. The Congregation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의 회중

230604 예수 복음을 믿고 가르친 아브너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66:5.1 (1831.4) Jesus and the twelve were on their way to visit Abner and his associates, who were preaching and teaching in Philadelphia. Of all the cities of Perea, in Philadelphia the largest group of Jews and gentiles, rich and poor, learned and unlearned, embraced the teachings of the seventy, thereby entering into the kingdom of heaven. The synagogue of Philadelphia had never been subject to the supervision of the Sanhedrin at Jerusalem and therefore had never been closed to the teachings of Jesus and his associates. At this very time, Abner was teaching three times a day in the Philadelphia synagogue. 예수와 열두 사도는 필라델피아에서 전도하고 가르치는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을 방문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페레아의 모든 도시 중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유대인과 이방인 집단,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이 70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회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의 감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예수와 그 동료들의 가르침을 금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회당에서 하루에 세 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166:5.2 (1831.5) This very synagogue later on became a Christian church and was the missionary headquarters for the promulgation of the gospel through the regions to the east. It was long a stronghold of the Master’s teachings and stood alone in this region as a center of Christian learning for centuries. 바로 이 회당이 나중에 기독교 교회가 되었고 그 지역을 통해 동쪽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본부였습니다. 그곳은 오랫동안 주(主)의 가르침의 본거지였고, 이 지역에서 수 세기 동안 독보적인 기독교 학습의 중심지였습니다.

166:5.3 (1831.6) The Jews at Jerusalem had always had trouble with the Jews of Philadelphia. And after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the Jerusalem church, of which James the Lord’s brother was head, began to have serious difficulties with the Philadelphia congregation of believers. Abner became the head of the Philadelphia church, continuing as such until his death. And this estrangement with Jerusalem explains why nothing is heard of Abner and his work in the Gospel records of the New Testament. This feud between Jerusalem and Philadelphia lasted throughout the lifetimes of James and Abner and continued for some time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Philadelphia was really the headquarters of the early church in the south and east as Antioch was in the north and west.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필라델피아의 유대인들과 언제나 시끄러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수장이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필라델피아 신자들 회중과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수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머물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런 반목(反目)이 신약성서의 복음서 기록에서 아브너와 그의 사역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이런 불화는 야고보와 아브너의 일생 내내 이어졌고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얼마간 계속되었습니다. 안디옥이 북쪽과 서쪽에서 초기 교회의 본부였듯이, 필라델피아는 남쪽과 동쪽에서 초기 교회의 실제 본부였습니다.

166:5.4 (1831.7) It was the apparent misfortune of Abner to be at variance with all of the leaders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He fell out with Peter and James (Jesus’ brother) over questions of administration and the jurisdiction of the Jerusalem church; he parted company with Paul over differences of philosophy and theology. Abner was more Babylonian than Hellenic in his philosophy, and he stubbornly resisted all attempts of Paul to remake the teachings of Jesus so as to present less that was objectionable, first to the Jews, then to the Greco-Roman believers in the mysteries. 아브너가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든 지도자와 불화를 겪은 것은 명백히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경영과 관할권 문제로 베드로 및 야고보(예수의 형제)와 사이가 틀어졌고, 그는 철학과 신학의 차이로 바울과 뜻을 달리했습니다. 아브너는 그리스 철학보다 바빌로니아 철학에 더 가까웠고, 그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나중에 신비를 믿는 그리스·로마의 신자들에게 불쾌한 것을 덜 제시하려고 예수의 가르침을 개조하려는 바울의 모든 시도에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166:5.5 (1832.1) Thus was Abner compelled to live a life of isolation. He was head of a church which was without standing at Jerusalem. He had dared to defy James the Lord’s brother, who was subsequently supported by Peter. Such conduct effectively separated him from all his former associates. Then he dared to withstand Paul. Although he was wholly sympathetic with Paul in his mission to the gentiles, and though he supported him in his contentions with the church at Jerusalem, he bitterly opposed the version of Jesus’ teachings which Paul elected to preach. In his last years Abner denounced Paul as the “clever corrupter of the life teachings of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the living God.” 이렇게 아브너는 고립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신분이 없는 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베드로가 지지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게 감히 도전했습니다. 그는 그런 행위로 자기의 이전 동료들로부터 실제로 헤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대담하게 바울에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완전히 공감했고,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지지했지만, 그는 바울이 전하려고 뽑아낸 예수 가르침의 변형을 몹시 반대했습니다. 말년에 아브너는 바울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삶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부패시킨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166:5.6 (1832.2) During the later years of Abner and for some time thereafter, the believers at Philadelphia held more strictly to the religion of Jesus, as he lived and taught, than any other group on earth. 아브너의 말년과 그 후 얼마간, 필라델피아의 신자들은 예수께서 살고 가르쳤던 대로 지상에 있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예수의 종교를 훨씬 더 순전하게 고수했습니다.

166:5.7 (1832.3) Abner lived to be 89 years old, dying at Philadelphia on the 21st day of November, A.D. 74. And to the very end he was a faithful believer in, and teacher of, the gospel of the heavenly kingdom. 아브너는 89세까지 살다가 AD74년 11월 21일에 필라델피아에서 별세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충실하게 믿는 신자이며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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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7 The Visit to Philadelphia 필라델피아 방문

Paper 167

The Visit to Philadelphia 필라델피아 방문

1. Breakfast with the Pharisees 바리새인들과 아침식사
Healing the believer 믿는 자의 치유
“…sit not down in the chief seat…”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2. Parable of the Great Supper 만찬의 비유
3. The Woman with the Spirit of Infirmity 허약한 기질의 여인
4. The Message from Bethany 베다니에서 온 메시지
5. On the Way to Bethany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바리새인과 세리(稅吏)
Teaching about marriage 결혼에 대한 가르침
6. Blessing the Little Children 어린이들을 축복함
Beauty as an influence to worship 경배하는 영향력으로서 아름다움
7. The Talk About Angels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

230611 길교회의 미래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7:0.1 (1833.1) THROUGHOUT this period of the Perean ministry, when mention is made of Jesus and the apostles visiting the various localities where the seventy were at work, it should be recalled that, as a rule, only ten were with him since it was the practice to leave at least two of the apostles at Pella to instruct the multitude. As Jesus prepared to go on to Philadelphia, Simon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returned to the Pella encampment to teach the crowds there assembled. When the Master left the camp at Pella to visit about Perea, it was not uncommon for from three to five hundred of the campers to follow him. When he arrived at Philadelphia, he was accompanied by over six hundred followers. 이런 페레아 사역 기간 내내, 70인이 활동하는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예수와 사도들을 언급할 때, 적어도 사도 중 두 명은 펠라에 남겨서 군중을 가르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10명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필라델피아로 갈 준비를 하자,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 안드레는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 거기에 모인 군중을 가르쳤습니다. 주(主)께서 펠라 야영지를 떠나 페레아 인근을 방문할 때, 보통 300명에서 500명의 야영자들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가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600명이 넘는 추종자들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167:0.2 (1833.2) No miracles had attended the recent preaching tour through the Decapolis, and, excepting the cleansing of the ten lepers, thus far there had been no miracles on this Perean mission. This was a period when the gospel was proclaimed with power, without miracles, and most of the time without the personal presence of Jesus or even of his apostles. 최근에 데카폴리스 여러 곳의 전도 여행에는 기적이 없었고, 10명의 나환자가 깨끗해진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이 페레아 선교에 기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기적 없이, 대부분 시간에 예수님이나 그 사도들조차 친히 그 자리에 없는 가운데 복음이 권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67:0.3 (1833.3) Jesus and the ten apostles arrived at Philadelphia on Wednesday, February 22, and spent Thursday and Friday resting from their recent travels and labors. That Friday night James spoke in the synagogue, and a general council was called for the following evening. They were much rejoiced over the progress of the gospel at Philadelphia and among the near-by villages. The messengers of David also brought word of the further advancement of the kingdom throughout Palestine, as well as good news from Alexandria and Damascus. 예수와 열 명의 사도는 (AD30년) 2월 22일 수요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최근의 여행과 수고로 지친 몸을 쉬면서 목요일과 금요일을 보냈습니다. 그 금요일 밤에 야고보가 회당에서 설교했고, 다음 날 저녁에 총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와 바로 이웃 마을에서 복음이 진행되는 상태를 매우 기뻐했습니다. 다윗의 메신저들도 알렉산드리아와 다마스쿠스에서 들려온 좋은 소식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하느님 나라가 더욱 촉진된다는 소식도 가져왔습니다.

1. Breakfast with the Pharisees 바리새인들과 아침식사

230618 복 받는 비결 눅14:1-14a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167:1.1 (1833.4) There lived in Philadelphia a very wealthy and influential Pharisee who had accepted the teachings of Abner, and who invited Jesus to his house Sabbath morning for breakfast. It was known that Jesus was expected in Philadelphia at this time; so a large number of visitors, among them many Pharisees, had come over from Jerusalem and from elsewhere. Accordingly, about forty of these leading men and a few lawyers were bidden to this breakfast, which had been arranged in honor of the Master. 필라델피아에 아브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아주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 살았는데, 그가 안식일 아침에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눅14:1a). 이때 예수께서 필라델피아에 오기로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방문자 중에 여러 바리새인이 예루살렘과 다른 지역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력자 중 약 40명과 율법사 몇 명이 주님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 조찬에 초대되었습니다.

167:1.2 (1833.5) As Jesus lingered by the door, speaking with Abner, and after the host had seated himself, there came into the room one of the leading Pharisees of Jerusalem, a member of the Sanhedrin, and as was his habit, he made straight for the seat of honor at the left of the host. But since this place had been reserved for the Master and that on the right for Abner, the host beckoned the Jerusalem Pharisee to sit four seats to the left, and this dignitary was much offended because he did not receive the seat of honor. 예수께서 아브너와 이야기하면서 문 옆에 머무셨고, 집주인이 앉은 후 예루살렘의 유력한 바리새인 중 한 사람, 산헤드린의 회원이 방으로 들어와 자기 습관대로 집주인의 왼쪽 주빈(主賓)석으로 바로 갔습니다(눅14:7a). 그러나 이 자리는 주님을 위해, 오른쪽 자리는 아브너를 위해 예약되어 있어서, 집주인이 예루살렘 바리새인에게 네 자리 왼쪽에 앉도록 손짓하자, 이 고위 성직자는 주빈석을 받지 못해서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167:1.3 (1834.1) Soon they were all seated and enjoying the visiting among themselves since the majority of those present were disciples of Jesus or else were friendly to the gospel. Only his enemies took notice of the fact that he did not observe the ceremonial washing of his hands before he sat down to eat. Abner washed his hands at the beginning of the meal but not during the serving. 그렇게 참석한 대부분은 예수의 제자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복음에 우호적이어서 그들은 곧 모두 앉아서 서로 방문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대적들만이 그가 식사 자리에 앉기 전에 손 씻는 예식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주목했습니다(눅14:1b). 아브너는 식사를 시작할 때 손을 씻었으나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는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167:1.4 (1834.2) Near the end of the meal there came in from the street a man long afflicted with a chronic disease and now in a dropsical condition. This man was a believer, having recently been baptized by Abner’s associates. He made no request of Jesus for healing, but the Master knew full well that this afflicted man came to this breakfast hoping thereby to escape the crowds which thronged him and thus be more likely to engage his attention. This man knew that few miracles were then being performed; however, he had reasoned in his heart that his sorry plight might possibly appeal to the Master’s compassion. And he was not mistaken, for, when he entered the room, both Jesus and the self-righteous Pharisee from Jerusalem took notice of him. The Pharisee was not slow to voice his resentment that such a one should be permitted to enter the room. But Jesus looked upon the sick man and smiled so benignly that he drew near and sat down upon the floor. As the meal was ending, the Master looked over his fellow guests and then, after glancing significantly at the man with dropsy, said: “My friends, teachers in Israel and learned lawyers, I would like to ask you a question: Is it lawful to heal the sick and afflicted on the Sabbath day, or not?” But those who were there present knew Jesus too well; they held their peace; they answered not his question. 식사를 마칠 무렵, 오랫동안 만성병을 앓다가 지금은 수종(水腫 부종, 체액의 유출로 붓는) 상태인 한 사람이 거리에서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최근에 아브너의 동료들에게 세례를 받은 믿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앓고 있는 이 사람이 예수에게 모여드는 군중을 피해서 주님의 관심을 더 끌려는 기대로 이 조찬에 왔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에 기적이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고 알았지만, 자신의 딱한 처지가 아마 주님의 연민(憐愍)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자기 심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잘못 생각하지 않은 것은, 그가 방에 들어가자, 예수와 예루살렘의 독선적인 바리새인 모두 그를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 방에 들어오도록 허용한 것에 주저하지 않고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병자를 바라보며, 너무 따스한 미소를 보내서, 그가 다가와 바닥에 앉았습니다. 식사가 끝날 때, 주께서 동료 손님들을 둘러본 다음, 수종에 걸린 사람을 유심히 보신 후 말했습니다. “내 친구들, 이스라엘의 선생과 학식 있는 율법사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질문이 있노라. 안식일에 병으로 앓는 자를 고치는 것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은 잠자코 있으면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눅14:2-4a).

167:1.5 (1834.3) Then went Jesus over to where the sick man sat and, taking him by the hand, said: “Arise and go your way. You have not asked to be healed, but I know the desire of your heart and the faith of your soul.” Before the man left the room, Jesus returned to his seat and, addressing those at the table, said: “Such works my Father does, not to tempt you into the kingdom, but to reveal himself to those who are already in the kingdom. You can perceive that it would be like the Father to do just such things because which one of you, having a favorite animal that fell in the well on the Sabbath day, would not go right out and draw him up?” And since no one would answer him, and inasmuch as his host evidently approved of what was going on, Jesus stood up and spoke to all present: “My brethren, when you are bidden to a marriage feast, sit not down in the chief seat, lest, perchance, a more honored man than you has been invited, and the host will have to come to you and request that you give your place to this other and honored guest. In this event, with shame you will be required to take a lower place at the table. When you are bidden to a feast, it would be the part of wisdom, on arriving at the festive table, to seek for the lowest place and take your seat therein, so that, when the host looks over the guests, he may say to you: ‘My friend, why sit in the seat of the least? come up higher’; and thus will such a one have glory in the presence of his fellow guests. Forget not, every one who exalts himself shall be humbled, while he who truly humbles himself shall be exalted. Therefore, when you entertain at dinner or give a supper, invite not always your friends, your brethren, your kinsmen, or your rich neighbors that they in return may bid you to their feasts, and thus will you be recompensed. When you give a banquet, sometimes bid the poor, the maimed, and the blind. In this way you shall be blessed in your heart, for you well know that the lame and the halt cannot repay you for your loving ministry.” 그다음 예수께서 병자가 앉은 곳으로 가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일어나 네 길을 가라. 네가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으나, 나는 네 마음의 소망과 네 혼의 신앙을 알고 있노라.” 그 사람이 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식탁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하는 이런 일은 너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니라. 너희 중 하나가 아끼던 짐승이 안식일에, 우물에 빠지면 바로 나가 그것을 끌어올리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차릴 수 있느니라.” 그에게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집주인이 무슨 일이 있는지 분명히 좋게 생각하자, 예수께서 일어나 참석한 모든 자에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너희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아마 너희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잔치에 초대받아, 집주인이 너희에게 와서 이렇게 존경받는 다른 손님에게 너희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라. 이런 경우, 너희는 부끄럽게 식탁의 낮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너희가 잔치에 초대받아 잔치 식탁에 이르면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서 거기에 너희 자리를 잡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되리니, 집주인이 손님들을 살펴보고 그가 너희에게 ‘내 친구여, 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가? 더 높이 올라오라.’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그런 사람은 그의 동료 손님들 앞에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 잊지 말지니, 자기를 높이는 자마다 낮아지고 진실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만찬에 초대하거나 저녁 식사를 대접할 때, 언제나 너희 친구, 너희 형제, 너희 친척이나 너희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지니, 그들이 답례로 너희를 그들의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는 보상받게 되리라. 너희가 연회를 베풀 때, 때로는 가난한 자, 장애인과 시각 장애인들을 초대하라. 이렇게 하면 너희는 너희 심정에 복을 받으리니, 장애인과 저는 자들은 너희의 애정 어린 봉사에 너희에게 보답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잘 알기 때문이라(눅14:4b-14a).”

2. Parable of the Great Supper 만찬의 비유

230625 초대장의 의미 눅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7:2.1 (1835.1) As Jesus finished speaking at the breakfast table of the Pharisee, one of the lawyers present, desiring to relieve the silence, thoughtlessly said: “Blessed is he who shall eat bread in the kingdom of God” — that being a common saying of those days. And then Jesus spoke a parable, which even his friendly host was compelled to take to heart. He said: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아침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참석한 율법사 중 하나가 침묵에서 누그러뜨리려고 무심코 “하느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을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당시의 흔히 하는 말을 했습니다(눅14:15).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지지하던 집주인도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없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167:2.2 (1835.2) “A certain ruler gave a great supper, and having bidden many guests, he dispatched his servants at suppertime to say to those who were invited, ‘Come, for everything is now ready.’ And they all with one accord began to make excuses. The first said, ‘I have just bought a farm, and I must needs go to prove it; I pray you have me excused.’ Another said, ‘I have bought five yoke of oxen, and I must go to receive them; I pray you have me excused.’ And another said, ‘I have just married a wife, and therefore I cannot come.’ So the servants went back and reported this to their master. When the master of the house heard this, he was very angry, and turning to his servants, he said: ‘I have made ready this marriage feast; the fatlings are killed, and all is in readiness for my guests, but they have spurned my invitation; they have gone every man after his lands and his merchandise, and they even show disrespect to my servants who bid them come to my feast. Go out quickly, therefore, into the streets and lanes of the city, out into the highways and the byways, and bring hither the poor and the outcast, the blind and the lame, that the marriage feast may have guests.’ And the servants did as their lord commanded, and even then there was room for more guests. Then said the lord to his servants: ‘Go now out into the roads and the countryside and constrain those who are there to come in that my house may be filled. I declare that none of those who were first bidden shall taste of my supper.’ And the servants did as their master commanded, and the house was filled.” “어떤 통치자가 만찬을 베풀고,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때 자기 하인들을 초청한 자들에게 보내서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내가 막 농장을 샀으니 확인하러 가봐야 합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소 다섯 멍에를 샀으니 받으러 가야 합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막 아내를 맞이했으니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런 일을 보고했습니다. 집주인이 이런 일을 듣자, 크게 노하여 자기 하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내가 이 결혼 잔치를 준비하여 살찌운 가축들을 잡고 내 손님들을 위해 모두 준비했으나 그들이 내 초청을 거절했도다. 그들은 각자 자기 땅을 얻으러, 자기 물품을 거래하러 갔고, 내 잔치에 오도록 초청했던 내 하인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는구나. 그러니 빨리 도시의 중심가와 골목길로, 큰길과 샛길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 시각 장애인들과 저는 자들을 여기로 데려와 결혼 잔치에 손님들이 있게 하라.’ 그러자 하인들이 자기 주인의 명령대로 했으나 그때까지도 손님을 위한 자리가 더 있었더라. 그때 주인이 자기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길거리와 시골로 나가서 거기에 있는 자들을 강권(强勸 오지 않을 수 없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내가 선언하노니, 먼저 초대받은 자 중 누구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더니, 집이 가득하더라(눅14:16-24).”

167:2.3 (1835.3) And when they heard these words, they departed; every man went to his own place. At least one of the sneering Pharisees present that morning comprehended the meaning of this parable, for he was baptized that day and made public confession of his faith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bner preached on this parable that night at the general council of believers. 그들은 이런 말을 듣고 떠나 각자 자기 자리로 갔습니다. 적어도 그날 아침에 참석하여 비웃던 바리새인 중 하나가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했는데, 그는 그날 세례를 받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자기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너는 그날 밤 신자들의 총회에서 이 비유로 설교했습니다.

167:2.4 (1835.4) The next day all of the apostles engaged in the philosophic exercise of endeavoring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is parable of the great supper. Though Jesus listened with interest to all of these differing interpretations, he steadfastly refused to offer them further help in understanding the parable. He would only say, “Let every man find out the meaning for himself and in his own soul.” 다음날(AD 30, 2. 26 일요일) 모든 사도가 만찬의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애쓰는 철학적 과제에 참여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서로 다른 모든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들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더 이상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자 자신과 자신의 혼(魂)으로 그 의미를 알아내라.”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3. The Woman with the Spirit of Infirmity 허약한 기질의 여인

230702 자유와 생명은 무시로 필요한 것 눅13:10-17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67:3.1 (1835.5) Abner had arranged for the Master to teach in the synagogue on this Sabbath day, the first time Jesus had appeared in a synagogue since they had all been closed to his teachings by order of the Sanhedrin. At the conclusion of the service Jesus looked down before him upon an elderly woman who wore a downcast expression, and who was much bent in form. This woman had long been fear-ridden, and all joy had passed out of her life. As Jesus stepped down from the pulpit, he went over to her and, touching her bowed-over form on the shoulder, said: “Woman, if you would only believe, you could be wholly loosed from your spirit of infirmity.” And this woman, who had been bowed down and bound up by the depressions of fear for more than eighteen years, believed the words of the Master and by faith straightened up immediately. When this woman saw that she had been made straight, she lifted up her voice and glorified God. 아브너는 이 안식일(AD30. 2. 25 토)에 주(主)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도록 준비했는데, 산헤드린의 명령으로 회당에서 그의 가르침을 모두 닫은 이후 예수께서 처음 회당에 나타났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 예수께서 우울(憂鬱)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있는, 몸이 많이 굽은 노년의 여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었고 삶에서 모든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설교단에서 내려오자, 그녀에게 건너가서 그녀의 구부러진 형태의 어깨에 손을 대며 말했습니다. “여인아, 네가 단지 믿고자 하면, 너의 허약한 기질에서 완전히 풀려날 수 있으리라.” 그러자 18년 이상 두려움의 우울증으로 풀이 죽어 묶여 있던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으로 즉시 곧게 펴졌습니다. 이 여인은 꼿꼿해진 자신을 보자,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눅13:10-13).

167:3.2 (1836.1) Notwithstanding that this woman’s affliction was wholly mental, her bowed-over form being the result of her depressed mind, the people thought that Jesus had healed a real physical disorder. Although the congregation of the synagogue at Philadelphia was friendly toward the teachings of Jesus,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was an unfriendly Pharisee. And as he shared the opinion of the congregation that Jesus had healed a physical disorder, and being indignant because Jesus had presumed to do such a thing on the Sabbath, he stood up before the congregation and said: “Are there not six days in which men should do all their work? In these working days come, therefore, and be healed, but not on the Sabbath day.” 이 여인의 고통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으로, 그녀의 구부러진 형태는 우울한 마음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육체적 장애를 고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당의 회중은 예수의 가르침을 찬성했지만, 회당장의 대표는 우호적이지 않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육체적 장애를 고쳤다는 회중의 의견을 나누다가 예수께서 감히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분개하여, 회중 앞에 일어서서 그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모두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일하는 날에 와서 고침을 받으라, 그러나 안식일에는 아니라(눅13:14).”

167:3.3 (1836.2) When the unfriendly ruler had thus spoken, Jesus returned to the speaker’s platform and said: “Why play the part of hypocrites? Does not every one of you, on the Sabbath, loose his ox from the stall and lead him forth for watering? If such a service is permissible on the Sabbath day, should not this woman, a daughter of Abraham who has been bound down by evil these eighteen years, be loosed from this bondage and led forth to partake of the waters of liberty and life, even on this Sabbath day?” And as the woman continued to glorify God, his critic was put to shame, and the congregation rejoiced with her that she had been healed. 적개심을 가진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자, 예수께서 연설자의 연단으로 돌아가 말했습니다. “왜 위선자 측의 태도를 취하느냐? 안식일에 너희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소를 풀어 물을 먹이러 끌어내지 않느냐? 안식일에 그런 수고가 허용된다면, 이렇게 18년간 불행하게 묶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이런 안식일에라도 이런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와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이끌려 나와야 하지 않느냐?” 그 여인이 하느님께 계속 영광을 돌리자, 예수님을 혹평하던 자는 면목을 잃었고, 회중은 여인이 치유된 것을 그녀와 함께 기뻐했습니다(눅13:15-17).

167:3.4 (1836.3) As a result of his public criticism of Jesus on this Sabbath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was deposed, and a follower of Jesus was put in his place. 이 안식일에 그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결과로 회당장의 대표는 해임되었고, 예수의 추종자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167:3.5 (1836.4) Jesus frequently delivered such victims of fear from their spirit of infirmity, from their depression of mind, and from their bondage of fear. But the people thought that all such afflictions were either physical disorders or possession of evil spirits. 예수는 종종 그런 두려움의 희생자들을 그들의 허약한 기질에서, 그들의 우울한 마음에서, 그들 두려움의 속박에서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모든 고통은 육체적 장애나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67:3.6 (1836.5) Jesus taught again in the synagogue on Sunday, and many were baptized by Abner at noon on that day in the river which flowed south of the city. On the morrow Jesus and the ten apostles would have started back to the Pella encampment but for the arrival of one of David’s messengers, who brought an urgent message to Jesus from his friends at Bethany, near Jerusalem. 예수께서 일요일(AD30. 2.26)에 다시 회당에서 가르쳤고, 많은 사람이 그날 정오에 도시의 남쪽으로 흐르는 강에서 아브너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예수와 열 명의 사도는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하려 했으나 다윗 메신저 중 하나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있는 그의 친구들로부터 예수께 긴급 메시지를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4. The Message from Bethany 베다니에서 온 메시지

230709 예수 믿는 새 근거를 찾으라 요11:1-16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67:4.1 (1836.6) Very late on Sunday night, February 26, a runner from Bethany arrived at Philadelphia, bringing a message from Martha and Mary which said, “Lord, he whom you love is very sick.” This message reached Jesus at the close of the evening conference and just as he was taking leave of the apostles for the night. At first Jesus made no reply. There occurred one of those strange interludes, a time when he appeared to be in communication with something outside of, and beyond, himself. And then, looking up, he addressed the messenger in the hearing of the apostles, saying: “This sickness is really not to the death. Doubt not that it may be used to glorify God and exalt the Son.” (AD30) 2월 26일 아주 늦은 일요일 밤에 베다니에서 온 전달자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그가 매우 아픕니다.”라고 말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메시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메시지는 저녁 회의가 끝나서 예수께서 밤에 사도들에게 막 작별하고 있을 때 예수께 전해졌습니다. 예수는 처음에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자기 외부 및 그 너머의 무언가와 대화하듯이 보였던 그런 낯선 막간의 시간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 그는, 올려다보며, 사도들이 듣는 가운데 메신저에게 “이 병은 실제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것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을 높이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요11:1-4).

167:4.2 (1837.1) Jesus was very fond of Martha, Mary, and their brother, Lazarus; he loved them with a fervent affection. His first and human thought was to go to their assistance at once, but another idea came into his combined mind. He had almost given up hope that the Jewish leaders at Jerusalem would ever accept the kingdom, but he still loved his people, and there now occurred to him a plan whereby the scribes and Pharisees of Jerusalem might have one more chance to accept his teachings; and he decided, his Father willing, to make this last appeal to Jerusalem the most profound and stupendous outward working of his entire earth career. The Jews clung to the idea of a wonder-working deliverer. And though he refused to stoop to the performance of material wonders or to the enactment of temporal exhibitions of political power, he did now ask the Father’s consent for the manifestation of his hitherto unexhibited power over life and death. 예수께서 마르다, 마리아와 그들의 형제 나사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요11:5). 그는 열렬한 애정으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인간적 생각은 즉시 그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었으나, 그의 결합한 마음에 다른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했고,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기회를 한 번 더 가질 수도 있는 계획이 그에게 이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별일이 없다면, 예루살렘에 대한 이 마지막 호소를 자기의 전(全) 지상 생애에서 가장 뜻깊고 엄청난 외적 활동이 되도록 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행하는 구원자의 개념에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질적 이적의 실행이나 정치적 권력을 일시적으로 과시(誇示)해서 보일 정도로 비굴해지지 않았으나, 그는 이제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은 생살권(生殺權 살리고 죽이는 권리)을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의 승낙(承諾)을 구했습니다.

167:4.3 (1837.2) The Jews were in the habit of burying their dead on the day of their demise; this was a necessary practice in such a warm climate. It often happened that they put in the tomb one who was merely comatose, so that on the second or even the third day, such a one would come forth from the tomb. But it was the belief of the Jews that, while the spirit or soul might linger near the body for two or three days, it never tarried after the third day; that decay was well advanced by the fourth day, and that no one ever returned from the tomb after the lapse of such a period. And it was for these reasons that Jesus tarried yet two full days in Philadelphia before he made ready to start for Bethany.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을 죽은 날에 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온난한 기후에서 필요한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혼수상태의 사람을 무덤에 두어서 둘째 날 혹은 셋째 날에도, 그런 사람이 종종 무덤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영(靈)이나 혼(魂)이 이삼일 동안 육체 곁에 서성거리지만, 삼일 이후에 절대로 지체하지 않고, 넷째 날에 부패가 진행되기 쉬워서, 그런 기간이 지난 후 절대로 아무도 무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 베다니로 출발할 준비를 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꼬박 이틀을 (AD30. 2월 28일 화요일까지) 더 머물렀습니다(요11:6).

167:4.4 (1837.3) Accordingly, early on Wednesday morning he said to his apostles: “Let us prepare at once to go into Judea again.” And when the apostles heard their Master say this, they drew off by themselves for a time to take counsel of one another. James assumed the direction of the conference, and they all agreed that it was only folly to allow Jesus to go again into Judea, and they came back as one man and so informed him. Said James: “Master, you were in Jerusalem a few weeks back, and the leaders sought your death, while the people were minded to stone you. At that time you gave these men their chance to receive the truth, and we will not permit you to go again into Judea.” 따라서 수요일 아침 일찍 그가 자기 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즉시 다시 유대로 가기 위해 준비하자.” 사도들은 주님의 이 말을 듣자, 그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물러나 서로 의논했습니다. 야고보가 회의를 통솔했으며,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유대로 들어가도록 놔두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라고 모두 동감하여, 그들은 한 사람처럼 돌아와 그에게 그렇게 알렸습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지난번(장막절) 몇 주간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이려 했고,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162.7.6). 그때 당신께서 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를 주셨으니, 우리는 당신께서 다시 유대로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요11:7-8).”

167:4.5 (1837.4) Then said Jesus: “But do you not understand that there are twelve hours of the day in which work may safely be done? If a man walks in the day, he does not stumble inasmuch as he has light. If a man walks in the night, he is liable to stumble since he is without light. As long as my day lasts, I fear not to enter Judea. I would do one more mighty work for these Jews; I would give them one more chance to believe, even on their own terms — conditions of outward glory and the visible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the Father and the love of the Son. Besides, do you not realize that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and I would go to awake him out of this sleep!”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너희는 하루에 안전하게 일할 수도 있는 시간으로 열두 시간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그가 빛이 있어서, 넘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이 밤에 다니면 그는 빛이 없어서, 넘어지기 쉬우니라. 내 일이 지속되는 한 내가 유대로 들어가기가 두렵지 않도다. 나는 이런 유대인들을 위해 한 번 더 강력한 일을 행할 것이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방식으로 – 외적 영광의 현상과 아버지의 권능과 아들의 사랑을 눈으로 보기까지, 한 번 더 믿을 기회를 주려고 하노라. 게다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가서 그를 이런 잠에서 깨우려 한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냐(요11:9-11)!”

167:4.6 (1837.5) Then said one of the apostles: “Master, if Lazarus has fallen asleep, then will he the more surely recover.” It was the custom of the Jews at that time to speak of death as a form of sleep, but as the apostles did not understand that Jesus meant that Lazarus had departed from this world, he now said plainly: “Lazarus is dead. And I am glad for your sakes, even if the others are not thereby saved, that I was not there, to the end that you shall now have new cause to believe in me; and by that which you will witness, you should all be strengthened in preparation for that day when I shall take leave of you and go to the Father.” 그러자 사도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더 확실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당시 죽음을 수면의 형태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지만, 나사로가 이 세상을 떴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말한 것을,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가 이제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다른 이들이 그로 인해 구원받지 못할지라도, 너희가 이제 나를 믿을 새로운 근거를 가지도록, 내가 거기에 없었음을, 너희를 위해 내가 기뻐하노라. 그리고 너희가 눈앞에서 볼 것으로 인해, 내가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갈 그날을 대비하여 너희 모두 힘을 얻어야 하리라(요11:12-15a).”

167:4.7 (1838.1) When they could not persuade him to refrain from going into Judea, and when some of the apostles were loath even to accompany him, Thomas addressed his fellows, saying: “We have told the Master our fears, but he is determined to go to Bethany. I am satisfied it means the end; they will surely kill him, but if that is the Master’s choice, then let us acquit ourselves like men of courage; let us go also that we may die with him.” And it was ever so; in matters requiring deliberate and sustained courage, Thomas was always the mainstay of the twelve apostles. 그들은 그가 유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권유할 수 없었고, 일부 사도는 그와 동행하기조차 싫어하자, 도마가 자기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두려움을 말했으나 그는 베다니에 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끝을 뜻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를 죽일 것이지만, 그것이 주님의 선택이라면 용감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처신합시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을 수 있도록 함께 갑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습니다. 신중하고 지속된 용기가 필요한 문제에서, 도마는 언제나 열두 사도의 중심이었습니다(요11:15b-16).

5. On the Way to Bethany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230716 구원의 조건과 영예로운 결혼 눅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67:5.1 (1838.2) On the way to Judea Jesus was followed by a company of almost fifty of his friends and enemies. At their noon lunchtime, on Wednesday, he talked to his apostles and this group of followers on the “Terms of Salvation,” and at the end of this lesson told the parable of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a tax collector). Said Jesus: “You see, then, that the Father gives salvation to the children of men, and this salvation is a free gift to all who have the faith to receive sonship in the divine family. There is nothing man can do to earn this salvation. Works of self-righteousness cannot buy the favor of God, and much praying in public will not atone for lack of living faith in the heart. Men you may deceive by your outward service, but God looks into your souls. What I am telling you is well illustrated by two men who went into the temple to pray, the one a Pharisee and the other a publican. The Pharisee stood and prayed to himself: ‘O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the rest of men, extortioners, unlearned, unjust, adulterers, or even like this publican. I fast twice a week; I give tithes of all that I get.’ But the publican, standing afar off, would not so much as lift his eyes to heaven but smote his breast, saying, ‘God be merciful to me a sinner.’ I tell you that the publican went home with God’s approval rather than the Pharisee, for every one who exalts himself shall be humbled, but he who humbles himself shall be exalted.” 유대로 가는 길에 50명 가까운 예수의 친구와 대적들 일행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수요일(AD30. 3.1) 정오 점심시간에 그가 자기 사도들과 이렇게 따르는 무리에게 “구원의 조건”에 대해 말했고, 이 교훈의 끝에 바리새인과 세리(稅吏 세금 징수관)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이 구원은 신적 가족으로 자녀의 신분을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진 모두에게 무료로 주는 선물임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독선적(獨善的 혼자만이 옳다는) 행위로 하느님의 은혜를 살 수 없으며, 공개적인 많은 기도로 심정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이 없는 것을 보태어 채울 수 없느니라. 너희가 외적 봉사로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너희 혼(魂)들의 속을 들여다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성전으로 기도하러 들어간 두 사람, 바리새인 하나와 다른 세리 하나로 잘 설명되느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신에게 기도했느니라. ‘오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 강탈자, 무식한 자, 불의한 자, 간음한 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눈을 하늘로 들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했더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보다 오히려 세리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집으로 갔으니,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질 것이지만, 자신을 낮추는 그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니라(눅18:9-14).”

167:5.2 (1838.3) That night, in Jericho, the unfriendly Pharisees sought to entrap the Master by inducing him to discuss marriage and divorce, as did their fellows one time in Galilee, but Jesus artfully avoided their efforts to bring him into conflict with their laws concerning divorce. As the publican and the Pharisee illustrated good and bad religion, their divorce practices served to contrast the better marriage laws of the Jewish code with the disgraceful laxity of the Pharisaic interpretations of these Mosaic divorce statutes. The Pharisee judged himself by the lowest standard; the publican squared himself by the highest ideal. Devotion, to the Pharisee, was a means of inducing self-righteous inactivity and the assurance of false spiritual security; devotion, to the publican, was a means of stirring up his soul to the realization of the need for repentance, confession, and the acceptance, by faith, of merciful forgiveness. The Pharisee sought justice; the publican sought mercy. The law of the universe is: Ask and you shall receive; seek and you shall find. 그날 밤 여리고에서 적개심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 한때 자기 동료들이 했듯이(147.6.4) 결혼과 이혼에 관해 의논하도록 주님을 꾀어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지만(마19:3, 막10:2), 예수는 이혼에 관한 그들의 율법과 충돌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을 솜씨 좋게 피했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선한 종교와 나쁜 종교의 실례가 되었듯이, 그들의 이혼 관습은 유대 율법의 더 나은 결혼 법규와 이런 모세의 이혼법령에 대해 바리새(형식주의 및 위선)적으로 해석하는 수치스러운 방종을 대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가장 낮은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했고, 세리는 가장 높은 이상(理想)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헌신은 독선적(獨善的 자기 혼자만이 옳다는) 게으름과 거짓된 영적 방심의 확신으로 이끄는 수단이었습니다. 세리에게 헌신은 회개와 고백 및 신앙으로 자비로운 용서를 받아들일 필요를 깨닫도록 자기 혼(魂)을 일으키는 수단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정의를 추구했고 세리는 자비를 추구했습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렇습니다. 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라. 찾으면 너희가 찾을 것이라(마7:7-8, 눅11:9-10).

167:5.3 (1838.4) Though Jesus refused to be drawn into a controversy with the Pharisees concerning divorce, he did proclaim a positive teaching of the highest ideals regarding marriage. He exalted marriage as the most ideal and highest of all human relationships. Likewise, he intimated strong disapproval of the lax and unfair divorce practices of the Jerusalem Jews, who at that time permitted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the most trifling of reasons, such as being a poor cook, a faulty housekeeper, or for no better reason than that he had become enamored of a better-looking woman. 예수는 이혼에 관해 바리새인과 논쟁에 말려들기를 물리쳤지만, 결혼에 관해 최고 이상(理想)의 긍정적 가르침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이상(理想)적인 최고로 높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시 요리에 서투르고, 살림을 잘 꾸리지 못한다는 아주 하찮은 이유나 아무 이유 없이 남편이 더 잘생긴 여성에게 반했다고, 남성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도록 허용했던, 예루살렘 유대인의 태만하고 부당한 이혼 관행에 대해 강한 반대를 드러냈습니다.

167:5.4 (1839.1) The Pharisees had even gone so far as to teach that divorce of this easy variety was a special dispensation granted the Jewish people, particularly the Pharisees. And so, while Jesus refused to make pronouncements dealing with marriage and divorce, he did most bitterly denounce these shameful floutings of the marriage relationship and pointed out their injustice to women and children. He never sanctioned any divorce practice which gave man any advantage over woman; the Master countenanced only those teachings which accorded women equality with men.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쉬운 다양한 이혼이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허락된 특별 섭리라고 가르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해 선언하기를 거절했지만, 그는 이렇게 못된 경멸적 태도의 결혼 관계를 가장 통렬히 공격했고 여성과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불법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유리한 어떤 이혼 관행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대등한 입장을 주는 그런 가르침들만 지지했습니다.

167:5.5 (1839.2) Although Jesus did not offer new mandates governing marriage and divorce, he did urge the Jews to live up to their own laws and higher teachings. He constantly appealed to the written Scriptures in his effort to improve their practices along these social lines. While thus upholding the high and ideal concepts of marriage, Jesus skillfully avoided clashing with his questioners about the social practices represented by either their written laws or their much-cherished divorce privileges. 예수께서 결혼과 이혼을 결정하는 새 명령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과 더 높은 가르침들에 이르기까지 살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이런 사회적 방침을 따라 그들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끊임없이 기록된 성서에 호소했습니다. 이렇게 높고 이상적(理想的)인 결혼 개념을 지지하면서, 예수는 그들의 성문법이나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이혼 특권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관행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하는 자들과 충돌하는 것을 능숙하게 피했습니다.

167:5.6 (1839.3) It was very difficult for the apostles to understand the Master’s reluctance to make positive pronouncements relative to scientific,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They did not fully realize that his earth mission was exclusively concerned with revelations of spiritual and religious truths. 사도들은 과학적,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단정적으로 발표하기를 꺼리는 주님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지상 사명이 오로지 영적, 종교적 진리의 계시에 관련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167:5.7 (1839.4) After Jesus had talked about marriage and divorce, later on that evening his apostles privately asked many additional questions, and his answers to these inquiries relieved their minds of many misconceptions. At the conclusion of this conference Jesus said: “Marriage is honorable and is to be desired by all men. The fact that the Son of Man pursues his earth mission alone is in no way a reflection on the desirability of marriage. That I should so work is the Father’s will, but this same Father has directed the creation of male and female, and it is the divine will that men and women should find their highest service and consequent joy in the establishment of homes for the reception and training of children, in the creation of whom these parents become copartners with the Makers of heaven and earth. And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to his wife, and they two shall become as one.” 예수께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씀한 후, 그날 저녁 늦게 그의 사도들이 은밀히 여러 추가 질문을 했고, 이런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여러 그릇된 생각들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런 회의의 마지막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바랄 것이니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홀로 자기 지상 사명을 추구하는 사실은 결혼의 바람직함에 대한 반영이 절대로 아니니라. 내가 그렇게 일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지만, 바로, 이 아버지는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지시하셨고, 남성들과 여성들이 자녀들을 받아들여 훈련하는 가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최고 봉사와 결과로 일어나는 기쁨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신적 뜻이며 이런 부모들은 그들을 창조하면서 하늘과 땅의 조물주들과 협조자가 되느니라.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에게 연합(충실히 대)하여 그들 둘이 하나로 될 것이라(창2:24, 마19:4-5, 막10:6-8, 엡5:31).”

167:5.8 (1839.5) And in this way Jesus relieved the minds of the apostles of many worries about marriage and cleared up many misunderstandings regarding divorce; at the same time he did much to exalt their ideals of social union and to augment their respect for women and children and for the home. 그리고 이렇게 예수는 결혼에 대해 많이 근심하는 사도들의 마음을 안심시켰고 이혼에 관한 여러 오해를 풀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 연합에 대한 그들의 이상(理想)을 높이고 여성과 자녀들, 가정에 대한 그들의 존중을 증대하려고 많이 진력했습니다.

6. Blessing the Little Children 어린이들을 축복함

230723 경배의 체질로 성장하기 막10: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67:6.1 (1839.6) That evening Jesus’ message regarding marriage and the blessedness of children spread all over Jericho, so that the next morning, long before Jesus and the apostles prepared to leave, even before breakfast time, scores of mothers came to where Jesus lodged, bringing their children in their arms and leading them by their hands, and desired that he bless the little ones. When the apostles went out to view this assemblage of mothers with their children, they endeavored to send them away, but these women refused to depart until the Master laid his hands on their children and blessed them. And when the apostles loudly rebuked these mothers, Jesus, hearing the tumult, came out and indignantly reproved them, saying: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to me;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Verily, verily, I say to you, whosoever receives not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hardly enter therein to grow up to the full stature of spiritual manhood.” 그날 저녁(AD30. 3.1 수) 결혼과 어린이들의 행복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가 온 여리고에 퍼져서, 다음 날 아침, 예수와 사도들이 떠나려고 준비하기 훨씬 이전, 심지어 아침 식사 시간 전에, 수십 명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안고 그들의 손을 이끌며 예수께서 묵은 곳에 와서 그가 그 어린이들을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들이 밖으로 나가 이렇게 모인 어머니와 자녀들을 보고 그들을 내쫓으려 했으나, 이 여성들은 주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기까지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이 어머니들을 큰 소리로 꾸짖자, 소동을 들은 예수께서 나와 성을 내는 기색으로 그들을 나무라며 말했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하고 그들을 금하지 말지니, 하늘나라가 그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도저히 그 안에 들어가 영적으로 완전히 장성한 수준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라(마19:13-14, 막10:13-15, 눅18:15-17).”

167:6.2 (1840.1) And when the Master had spoken to his apostles, he received all of the children, laying his hands on them, while he spoke words of courage and hope to their mothers. 주께서 자기 사도들에게 말한 뒤 곧 모든 어린이를 맞아들이며 그들에게 손을 얹으면서 그 어머니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씀을 했습니다(마19:15, 막10:16).

167:6.3 (1840.2) Jesus often talked to his apostles about the celestial mansions and taught that the advancing children of God must there grow up spiritually as children grow up physically on this world. And so does the sacred oftentimes appear to be the common, as on this day these children and their mothers little realized that the onlooking intelligences of Nebadon beheld the children of Jericho playing with the Creator of a universe. 예수는 자주 천상의 저택들에 대해 자기 사도들에게 말했고,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성장하듯이, 하느님의 진보하는 자녀들은 거기에서 영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관찰하는 네바돈의 지능 존재들이 우주의 창조주와 놀고 있는 여리고의 자녀들을 바라본다고 이날 이런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신성한 것은 자주 평범한 듯합니다.

167:6.4 (1840.3) Woman’s status in Palestine was much improved by Jesus’ teaching; and so it would have been throughout the world if his followers had not departed so far from that which he painstakingly taught them.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의 지위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자신들에게 공들여 가르친 데서 그렇게 멀리 떠나지 않았더라면 전 세계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167:6.5 (1840.4) It was also at Jericho, in connection with the discussion of the early religious training of children in habits of divine worship, that Jesus impressed upon his apostles the great value of beauty as an influence leading to the urge to worship, especially with children. The Master by precept and example taught the value of worshiping the Creator in the midst of the natural surroundings of creation. He preferred to commune with the heavenly Father amidst the trees and among the lowly creatures of the natural world. He rejoiced to contemplate the Father through the inspiring spectacle of the starry realms of the Creator Sons. 또한 여리고에서, 신적 경배의 체질로 어린이들을 어릴 적에 종교적으로 훈련하는 논의와 관련하여, 예수는 경배의 충동으로 이끄는 영향력으로써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아름다움의 위대한 가치를 자기 사도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주님은 교훈과 모범을 통해 창조의 자연환경 속에서 창조주를 경배하는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오히려 자연 세계의 초라한 창조물 사이에서 하늘 아버지와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창조자 아들들의 별이 총총한 영역의 감동적 장관을 통해 아버지를 깊이 상세하게 곰곰이 생각하기를 기뻐했습니다.

167:6.6 (1840.5) When it is not possible to worship God in the tabernacles of nature, men should do their best to provide houses of beauty, sanctuaries of appealing simplicity and artistic embellishment, so that the highest of human emotions may be aroused in association with the intellectual approach to spiritual communion with God. Truth, beauty, and holiness are powerful and effective aids to true worship. But spirit communion is not promoted by mere massive ornateness and overmuch embellishment with man’s elaborate and ostentatious art. Beauty is most religious when it is most simple and naturelike. How unfortunate that little children should have their first introduction to concepts of public worship in cold and barren rooms so devoid of the beauty appeal and so empty of all suggestion of good cheer and inspiring holiness! The child should be introduced to worship in nature’s outdoors and later accompany his parents to public houses of religious assembly which are at least as materially attractive and artistically beautiful as the home in which he is daily domiciled. 자연의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과 영적으로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지적 접근과 관련하여 최고의 인간 감정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집, 매력적인 간소(簡素 간략하여 꾸밈이 없음)한 예술적 장식의 경배당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진리,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참된 경배에 강력하게 효과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교한 과시적(誇示的) 예술로 꾸민 거대한 화려함과 너무 많은 장식만으로 영(靈) 친교가 진척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가장 꾸밈없이 자연과 같을 때 가장 종교적입니다. 어린이들이 아름다움의 매력이 그토록 전혀 없고 기분 좋게 감동적인 거룩함의 모든 암시적 낌새가 도무지 없는 차갑고 메마른 방에서 공적 예배의 개념을 그들이 처음 대면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어린이는 자연의 야외에서 경배를 대면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가 매일 거주하는 집처럼 적어도 상당히 매력적이며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종교적 모임의 공적 경배당에 자기 부모와 함께 가야 합니다.

7. The Talk About Angels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

230730 혼(魂)을 안내하는 천사(天使)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167:7.1 (1840.6) As they journeyed up the hills from Jericho to Bethany, Nathaniel walked most of the way by the side of Jesus, and their discussion of children in relation to the kingdom of heaven led indirectly to the consideration of the ministry of angels. Nathaniel finally asked the Master this question: “Seeing that the high priest is a Sadducee, and since the Sadducees do not believe in angels, what shall we teach the people regarding the heavenly ministers?” Then, among other things, Jesus said: 그들이 여리고에서 베다니로 언덕을 오를 때, 나다니엘은 거의 내내 예수 옆에서 걸었고,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논의가 부차적으로 천사의 사역에 대한 항목으로 이어졌습니다(113.1.1,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나다니엘이 결국 주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두개인(人)인 것으로 보아서, 사두개인들은 천사를 믿지 않으니, 우리는 하늘 사역자들에 관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그러자 여러 말 가운데서 예수는 다음의 말도 했습니다.

167:7.2 (1841.1) “The angelic hosts are a separate order of created beings; they are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aterial order of mortal creatures, and they function as a distinct group of universe intelligences. Angels are not of that group of creatures called ‘the Sons of God’ in the Scriptures; neither are they the glorified spirits of mortal men who have gone on to progress through the mansions on high. Angels are a direct creation, and they do not reproduce themselves. The angelic hosts have only a spiritual kinship with the human race. As man progresses in the journey to the Father in Paradise, he does traverse a state of being at one time analogous to the state of the angels, but mortal man never becomes an angel. “천사 무리는 창조된 존재 중 독립된 계층이니라. 그들은 필사 창조물의 물질 계층과 완전히 다르며, 그들은 우주 지능 존재 중 별개의 집단으로 활동하느니라. 천사들은 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창조물 집단 소속이 아니라. 그들은 높은 곳의 저택들(요14:2)을 통해 계속 진보한 필사자들의 영화(靈化)된 영(靈)들도 아니니라. 천사들은 직접 창조되며 그들은 스스로 생식하지 않느니라. 천사 무리는 인류와 영적(靈的) 유사성(類似性)만 있느니라. 사람이 천국의 아버지를 향한 여정으로 전진할 때, 그는 한때 천사의 상태와 유사(類似)한 존재 상태로 횡단(橫斷)하지만, 필사 사람은 절대로 천사가 되지 않느니라.

167:7.3 (1841.2) “The angels never die, as man does. The angels are immortal unless, perchance, they become involved in sin as did some of them with the deceptions of Lucifer. The angels are the spirit servants in heaven, and they are neither all-wise nor all-powerful. But all of the loyal angels are truly pure and holy. “천사들은 결코, 사람처럼 죽지 않느니라. 천사 중 일부가 루시퍼의 속임수에 휩쓸렸듯이 어쩌다 죄에 말려들지 않는 한, 그들은 불멸이니라. 천사들은 하늘의 영(靈) 봉사자들이며, 그들은 모든 점에서 현명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으니라. 그러나 모든 충성스러운 천사들은 참으로 순전(純全)하고 거룩하니라.

167:7.4 (1841.3) “And do you not remember that I said to you once before that, if you had your spiritual eyes anointed, you would then see the heavens opened and behol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It is by the ministry of the angels that one world may be kept in touch with other worlds, for have I not repeatedly told you that I have other sheep not of this fold? And these angels are not the spies of the spirit world who watch upon you and then go forth to tell the Father the thoughts of your heart and to report on the deeds of the flesh. The Father has no need of such service inasmuch as his own spirit lives within you. But these angelic spirits do function to keep one part of the heavenly creation informed concerning the doings of other and remote parts of the universe. And many of the angels, while functioning in the government of the Father and the universes of the Sons, are assigned to the service of the human races. When I taught you that many of these seraphim are ministering spirits, I spoke not in figurative language nor in poetic strains. And all this is true, regardless of your difficulty in comprehending such matters. 너희 영적 눈이 기름 부음을 받으면 하늘이 열려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라고 내가 전에 한번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느냐(요1:51)? 천사들의 사역으로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접촉을 유지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이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나에게 있다(165.2.9, 요10:16)고 내가 너희에게 두고두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이런 천사들은 너희를 감시한 다음 너희 심정의 생각을 아버지께 말하고 육체의 행위를 보고하도록 나간 영(靈) 세계의 첩자(諜者)들이 아니라. 아버지는 너희 안에 그 자신의 영(靈)이 살고 계시므로(겔37:14, 마10:20, 고전3:16, 요일3:24, 4:13) 그런 봉사가 필요 없으시니라. 그러나 이런 천사 영(靈)들은 하늘 창조계의 한 부분에게 우주의 다른 먼 부분의 행위에 관해 계속 알려주기 위해 활동하느니라. 그리고 여러 천사는 아버지의 정부(政府)와 아들들의 우주에서 활동하면서, 인류에게 봉사하도록 배정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세라핌들은 사역하는 영(靈)들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쳤을 때(히1:14), 나는 비유적 언어나 시적 가락으로 말하지 않았느니라. 너희가 그런 문제를 이해하기에 어렵더라도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니라.

167:7.5 (1841.4) “Many of these angels are engaged in the work of saving men, for have I not told you of the seraphic joy when one soul elects to forsake sin and begin the search for God? I did even tell you of the joy in the presence of the angels of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ereby indicating the existence of other and higher orders of celestial beings who are likewise concerned in the spiritual welfare and with the divine progress of mortal man. 이런 천사 중 여럿이 사람을 구원하는 과업에 관여하는데, 그래서 한 혼(魂)이 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을 찾기 시작할 때 천사의 기쁨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더냐? 내가 회개하는 한 죄인에 대한 하늘 천사들의 기쁨에 대해 심지어 너희에게 말해서 필사 인간의 영적 행복과 신적 진보에 똑같이 관여하는 다른, 더 높은 천상 존재 계층의 존재를 가리켰느니라(눅15:10).

167:7.6 (1841.5) “Also are these angels very much concerned with the means whereby man’s spirit is released from the tabernacles of the flesh and his soul escorted to the mansions in heaven. Angels are the sure and heavenly guides of the soul of man during that uncharted and indefinite period of time which intervenes between the death of the flesh and the new life in the spirit abodes.” “또한 이런 천사들은 사람의 영(靈)이 육체(육신의 장막)에서 벗어나 그의 혼(魂)을 하늘의 저택들로 호송하는 수단과 굉장히 관련되어 있느니라. 천사들은 육신의 죽음과 영(靈) 거처의 새 생명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애매한 기간에 사람 혼(魂)에 대한 확실한 하늘의 안내자들이니라.”

167:7.7 (1841.6) And he would have spoken further with Nathaniel regarding the ministry of angels, but he was interrupted by the approach of Martha, who had been informed that the Master was drawing near to Bethany by friends who had observed him ascending the hills to the east. And she now hastened to greet him. 그리고 그는 나다니엘과 천사들의 사역에 관해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동쪽에 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을 알아본 친구들로부터 그가 베다니로 다가온다고 들었던 마르다가 접근하자 그는 중간에 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서둘러 그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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