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43 Going Through Samaria 사마리아를 통과(通過거쳐 지나감)

Paper 143

Going Through Samaria 사마리아를 통과(通過거쳐 지나감)

190428 사랑에 담겨 있는 훈련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8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39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143:0.1 (1607.1) AT THE end of June, A.D. 27, because of the increasing opposition of the Jewish religious rulers, Jesus and the twelve departed from Jerusalem, after sending their tents and meager personal effects to be stored at the home of Lazarus at Bethany. Going north into Samaria, they tarried over the Sabbath at Bethel. Here they preached for several days to the people who came from Gophna and Ephraim. A group of citizens from Arimathea and Thamna came over to invite Jesus to visit their villages. The Master and his apostles spent more than two weeks teaching the Jews and Samaritans of this region, many of whom came from as far as Antipatris to hear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서기(西紀) 27년 6월말에, 유대 종교 통치자들의 반대가 커져서 예수님과 12사도들은 천막과 소소한(小少얼마되지 않은) 사물들을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보관하도록 보낸 후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북쪽 사마리아로 가면서 베델에서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고프나와 에브라임에서 온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전도했습니다. 아리마대와 탐나에서 온 일단(一團)의 시민들이 자기네 마을을 방문하도록 예수님을 초청하려고 건너왔습니다. 주(主)님과 사도들은 이 지역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며 2주 이상 보냈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안티파트리스처럼 먼 곳에서 왔습니다.

143:0.2 (1607.2) The people of southern Samaria heard Jesus gladly, and the apostles, with the exception of Judas Iscariot, succeeded in overcoming much of their prejudice against the Samaritans. It was very difficult for Judas to love these Samaritans. The last week of July Jesus and his associates made ready to depart for the new Greek cities of Phasaelis and Archelais near the Jordan. 남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으며, 가룟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을 많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7월 마지막 주에 예수님과 동료들은 요단 근처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새로운 그리스 도시들로 떠나려고 준비했습니다.

1. Preaching at Archelais 아켈라이스에서 전도함

143:1.1 (1607.3) The first half of the month of August the apostolic party made its headquarters at the Greek cities of Archelais and Phasaelis, where they had their first experience preaching to well-nigh exclusive gatherings of gentiles — Greeks, Romans, and Syrians — for few Jews dwelt in these two Greek towns. In contacting with these Roman citizens, the apostles encountered new difficulties in the proclamation of the message of the coming kingdom, and they met with new objections to the teachings of Jesus. At one of the many evening conferences with his apostles, Jesus listened attentively to these objections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as the twelve repeated their experiences with the subjects of their personal labors. 8월 전반부에 사도 일행은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그리스 도시들에 본부를 두고 거기에서 그들은 거의 이방인들그리스인들, 로마인들, 시리아인들-만의 모임에서 설교하는 첫 경험을 했는데, 이 두 그리스 도시들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사도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새로운 어려움에 부닥쳤으며,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대한 새로운 반대를 겪었습니다. 사도들과 가졌던 여러 저녁 회의 중 하나에서, 12사도들이 개인적으로 애썼던 자신들의 체험을 주제로 반복해서 말하자,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에 대한 이 반대이유들주의 깊게 경청하셨습니다.

143:1.2 (1607.4) A question asked by Philip was typical of their difficulties. Said Philip: “Master, these Greeks and Romans make light of our message, saying that such teachings are fit for only weaklings and slaves. They assert that the religion of the heathen is superior to our teaching because it inspires to the acquirement of a strong, robust, and aggressive character. They affirm that we would convert all men into enfeebled specimens of passive nonresisters who would soon perish from the face of the earth. They like you, Master, and freely admit that your teaching is heavenly and ideal, but they will not take us seriously. They assert that your religion is not for this world; that men cannot live as you teach. And now, Master, what shall we say to these gentiles?” 빌립이 여쭌 질문이 그들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이었습니다.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主)여, 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그런 가르침들이 약한 자들이나 노예들에게만 어울린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메시지를 가볍게 여깁니다. 이교도의 종교는 강하고 튼튼하며 적극적인 성품을 얻게 하므로 우리의 가르침보다 뛰어나다고 그들이 주장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약한 사람들, 즉 수동적 무저항(無抵抗)자들로 만들어, 이 지상에서 곧 사라지리라고 그들이 단언합니다. (), 그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교훈이 하늘의 이상(理想)적 가르침이라고 거리낌 없이 인정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종교는 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합니다. 주(主)여, 이제 우리가 이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될까요?”

143:1.3 (1607.5) After Jesus had heard similar objections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presented by Thomas, Nathaniel, Simon Zelotes, and Matthew, he said to the twelve: 도마, 나다니엘, 시몬 젤로떼, 마태가 제시한 (하늘)나라 복음에 대한 비슷한 반대이유들을 들으신 후 예수께서 12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3:1.4 (1608.1) “I have come into this world to do the will of my Father and to reveal his loving character to all mankind. That, my brethren, is my mission. And this one thing I will do, regardless of the misunderstanding of my teachings by Jews or gentiles of this day or of another generation. But you should not overlook the fact that even divine love has its severe disciplines. A father’s love for his son oftentimes impels the father to restrain the unwise acts of his thoughtless offspring. The child does not always comprehend the wise and loving motives of the father’s restraining discipline. But I declare to you that my Father in Paradise does rule a universe of universes by the compelling power of his love. Love is the greatest of all spirit realities. Truth is a liberating revelation, but love is the supreme relationship. And no matter what blunders your fellow men make in their world management of today, in an age to come the gospel which I declare to you will rule this very world. The ultimate goal of human progress is the reverent recognition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loving materialization of the brotherhood of man.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랑하는 성품을 모든 인류에게 계시하러 이 세상에 왔노라. 내 형제들아, 그것이 나의 사명이니라. 그래서 오늘날 또는 다른 세대의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내 가르침들을 오해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나는 이 한 가지를 행할 것이라. 그러나 신적 사랑에도 엄격한 훈련이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간과(看過대충 넘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버지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경솔한 자녀의 어리석은 행위를 종종 제한하느니라. 자녀는 아버지의 제한하는 훈련에 담긴 지혜와 사랑의 동기들을 항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천국의 내 아버지는 강력한 사랑의 권능으로 온 우주들을 다스린다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라. 사랑은 모든 영 실체들 중에서 최고이니라. 진리는 자유롭게 하는 계시이지만, 사랑은 최극 관계니라. 그리고 너희 동료 인간들이 현재 자신들의 세상 관리에 있어서 무슨 큰 실책들을 저질러도, 다가오는 시대에는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복음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니라. 인간 진보의 궁극적 목적하나님의 아버지 되심(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경건히 인식하고 사람의 형제애(兄弟愛형제 사랑) 깊은 애정으로 실현하는 것이니라.

143:1.5 (1608.2) “But who told you that my gospel was intended only for slaves and weaklings? Do you, my chosen apostles, resemble weaklings? Did John look like a weakling? Do you observe that I am enslaved by fear? True, the poor and oppressed of this generation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The religions of this world have neglected the poor, but my Father is no respecter of persons. Besides, the poor of this day are the first to heed the call to repentance and acceptance of sonship.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to be preached to all men — Jew and gentile, Greek and Roman, rich and poor, free and bond — and equally to young and old, male and female. “그러나 내 복음이 노예들과 약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 너희에게 말하더냐? 내가 택한 너희 사도들이 약한 자들을 닮았느냐? 요한이 약한 자와 같더냐?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를 너희가 보느냐? 이 세대의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이 선포된 복음을 지닌 것은 사실이라.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했지만, 내 아버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느니라. 게다가, 오늘 가난한 자들회개의 부르심과 자녀 됨의 수용(受容받아들임)마음을 두는 첫째들이라. (하늘)나라의 복음모든 사람들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인과 매인 자 및 젊은이와 노인,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전해져야 하니라.

143:1.6 (1608.3) “Because my Father is a God of love and delights in the practice of mercy, do not imbibe the idea that the service of the kingdom is to be one of monotonous ease. The Paradise ascent is the supreme adventure of all time, the rugged achievement of eternity. The service of the kingdom on earth will call for all the courageous manhood that you and your coworkers can muster. Many of you will be put to death for your loyalty to the gospel of this kingdom. It is easy to die in the line of physical battle when your courage is strengthened by the presence of your fighting comrades, but it requires a higher and more profound form of human courage and devotion calmly and all alone to lay down your life for the love of a truth enshrined in your mortal heart. “내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실천을 아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봉사가 단조롭고 쉬운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라. 천국 상승언제나 최극 모험이며, 영원의 험난한 성취라. 지상의 (하늘)나라 봉사너희와 너희 동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용기 있는 남성다움을 요구할 것이라. 너희 중 여럿이 (하늘)나라 복음에 충성(忠誠)하다가 처형되리라. 전투하는 너희 전우(戰友)의 존재로 너희 용기가 강화되면, 물리적 전투 중에 죽는 것은 쉽지만, 너희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인간의 심정에 간직된 진리를 사랑해서, 차분하게 온전히 홀로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더 높고, 더 심오한 형태의 인간적 용기와 헌신을 요구하느니라.

143:1.7 (1608.4) “Today, the unbelievers may taunt you with preaching a gospel of nonresistance and with living lives of nonviolence, but you are the first volunteers of a long line of sincere believers in the gospel of this kingdom who will astonish all mankind by their heroic devotion to these teachings. No armies of the world have ever displayed more courage and bravery than will be portrayed by you and your loyal successors who shall go forth 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e good news —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The courage of the flesh is the lowest form of bravery. Mind bravery is a higher type of human courage, but the highest and supreme is uncompromising loyalty to the enlightened convictions of profound spiritual realities. And such courage constitutes the heroism of the God-knowing man. And you are all God-knowing men; you are in very truth the personal associates of the Son of Man.” “오늘날, 불신자들이 무저항의 복음전하며 비폭력의 삶사는 너희를 조롱할 수도 있지만, 너희는 이 가르침들에 영웅적으로 헌신하여 모든 인류를 놀라게 할 자들, 즉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는 신실한 신자들의 긴 행렬에 속한 첫 번째 자원(自願스스로 나선)자들이니라. 복음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아버지 사랑)과 인간의 형제 됨(형제 사랑)선포하면서 온 세상에 나아갈 너희와 너희의 충직한 후계자들이 생생하게 묘사할 용기와 용맹보다 더한 것세상의 어떤 군대도 결코 보여주지 못했느니라. 육신의 용기가장 낮은 형태의 용맹이니라. 마음의 용맹더 높은 유형의 인간적 용기이지만, 최고 및 최극의 용맹심오한 영적 실체들을 깨우친 확신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충성이니라. 그리고 그런 용기하나님을아는 사람의 영웅적 행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니라. 정말 진실로 너희는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의 개인적 동료들이기 때문이니라.”

143:1.8 (1608.5) This was not all that Jesus said on that occasion, but it is the introduction of his address, and he went on at great length in amplification and in illustration of this pronouncement. This was one of the most impassioned addresses which Jesus ever delivered to the twelve. Seldom did the Master speak to his apostles with evident strong feeling, but this was one of those few occasions when he spoke with manifest earnestness, accompanied by marked emotion. 이것은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두가 아니었지만, 연설의 서론으로, 그는 이 선언을 확대하고 실례를 들어 장시간 계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일찍이 12사도들에게 하셨던 가장 열정적인 연설들 중 하나였습니다. 주(主)님은 좀처럼 사도들에게 뚜렷이 격렬한 감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이것은 두드러진 감동과 더불어 분명한 진지함으로 말씀하셨던 그 드문 경우들 중 하나였습니다.

143:1.9 (1609.1) The result upon the public preaching and personal ministry of the apostles was immediate; from that very day their message took on a new note of courageous dominance. The twelve continued to acquire the spirit of positive aggression in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From this day forward they did not occupy themselves so much with the preaching of the negative virtues and the passive injunctions of their Master’s many-sided teaching. 사도들의 대중 설교와 개인적 사역의 결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부터 그들의 메시지는 새로운 음조(音調)의 용기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12사도들은 (하늘)나라의 새 복음으로 긍정적인 적극성의 영(정신)을 계속 얻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그들은 주(主)님의 다면(多面)적인 가르침에 있는 소극적 덕목과 수동적 명령의 설교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2. Lesson on Self-Mastery 자아-통달(정복)에 대한 교훈

190505 자아통달(정복)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When he was reviled, reviled not again; when he suffered, he threatened not; but committed himself to him that judgeth righteously:

143:2.1 (1609.2) The Master was a perfected specimen of human self-control. When he was reviled, he reviled not; when he suffered, he uttered no threats against his tormentors; when he was denounced by his enemies, he simply committed himself to the righteous judgment of the Father in heaven. 주(主)님은 인간적 자아통제(자제, 극기)의 완전한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욕설을 듣고도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고통을 받았을 때 괴롭히는 자에 대항해서 어떤 위협의 말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이 비난했을 때, 그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올바른 판단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143:2.2 (1609.3) At one of the evening conferences, Andrew asked Jesus: “Master, are we to practice self-denial as John taught us, or are we to strive for the self-control of your teaching? Wherein does your teaching differ from that of John?” Jesus answered: “John indeed taught you the way of righteousness in accordance with the light and laws of his fathers, and that was the religion of self-examination and self-denial. But I come with a new message of self-forgetfulness and self-control. I show to you the way of life as revealed to me by my Father in heaven. 한 저녁 회의에서 안드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쳤듯이 우리가 자아부정(금욕禁慾)을 실천해야 합니까? 아니면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자아통제(자제, 극기)를 열심히 해야 합니까? 선생님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은 진실로 자기 선조들의 빛과 율법에 따라서 정의(正義)의 길을 너희에게 가르쳤으며, 그것은 자아반성자아-부정(금욕禁慾)의 종교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자아망각(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욕심이 없음)자아통제(자제, 극기)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가지고 오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게 계시한 대로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노라.

143:2.3 (1609.4) “Verily, verily, I say to you, he who rules his own self is greater than he who captures a city. Self-mastery is the measure of man’s moral nature and the indicator of his spiritual development. In the old order you fasted and prayed; as the new creature of the rebirth of the spirit, you are taught to believe and rejoice. In the Father’s kingdom you are to become new creatures; old things are to pass away; behold I show you how all things are to become new. And by your love for one another you are to convince the world that you have passed from bondage to liberty, from death into life everlasting.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자기 자아를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니라. 자아통달(자아정복)은 사람의 도덕적 본성의 척도(尺度판단 기준)이며 그의 영적 발전의 지표(指標방향, 목적, 기준의 표지)니라. (낡은)체제에서 너희는 금식하고 기도했느니라. 영으로 거듭난 새 창조물로서, 너희는 믿고 기뻐하라고 배우느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는 새 창조물이 되어야 하니라. 이전 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이니라. 보라, 만물이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내가 너희에게 보이노라.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여서, 너희가 포로(捕虜속박)에서 해방(解放자유롭게 함), 죽음에서 영생(永生)으로 옮긴 것을 세상에 알게 하라.

143:2.4 (1609.5) “By the old way you seek to suppress, obey, and conform to the rules of living; by the new way you are first transformed by the Spirit of Truth and thereby strengthened in your inner soul by the constant spiritual renewing of your mind, and so are you endowed with the power of the certain and joyous performance of the gracious, acceptable, and perfect will of God. Forget not — it is your personal faith in the exceedingl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of God that ensures your becoming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Thus by your faith and the spirit’s transformation, you become in reality the temples of God, and his spirit actually dwells within you. If, then, the spirit dwells within you, you are no longer bondslaves of the flesh but free and liberated sons of the spirit. The new law of the spirit endows you with the liberty of self-mastery in place of the old law of the fear of self-bondage and the slavery of self-denial. “옛 방식에 따라 너희는 억누르고, 복종하며, 생활의 규칙에 순응하려 하느니라. 새 방식에 따라 너희는 먼저 진리의 영으로 변화되어서, 너희는 계속 영적으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너희 내적 혼을 강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너희는 은혜롭고, 기뻐하며, 온전한 하나님의 뜻확실히 기쁘게 이행하는 권능을 받게 되느니라. 너희를 신적 본성에 참여자가 되도록 보장하는 것아주 위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너희의 개인적 신앙임잊지 말라. 이렇게 너희 신앙과 영의 변화로 너희는 정말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그의 영은 실제로 너희 안에 거하느니라. 그런즉 그 영이 네 안에 거하면, 너희는 더 이상 육신의 노예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된 영의 아들(자녀)이니라. 자아속박의 두려움자아부정의 노예에 속한 옛 율법 대신에, 영의 새로운 법은 너희에게 자아통달(자아정복)의 해방을 주느니라.

143:2.5 (1609.6) “Many times, when you have done evil, you have thought to charge up your acts to the influence of the evil one when in reality you have but been led astray by your own natural tendencies. Did not the Prophet Jeremiah long ago tell you that the human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sometimes even desperately wicked? How easy for you to become self-deceived and thereby fall into foolish fears, divers lusts, enslaving pleasures, malice, envy, and even vengeful hatred! “너희가 악을 행했을 때, 너희는 너희 행동들을 악한 자의 영향으로 그 책임을 돌리려고 여러 번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너희 자신의 자연적 경향으로 미혹된 것이라. 인간의 심정무엇보다 거짓되어 속이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 몹시 사악하기까지 하다(17:9)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오래 전에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더냐? 자아기만으로 어리석은 두려움, 여러 욕망, 노예로 삼는 쾌락, 악의, 질투 및 복수하려는 원한너희가 얼마나 쉽게 빠지는가?

143:2.6 (1610.1) “Salvation is by the regeneration of the spirit and not by the self-righteous deeds of the flesh. You are justified by faith and fellowshipped by grace, not by fear and the self-denial of the flesh, albeit the Father’s children who have been born of the spirit are ever and always masters of the self and all that pertains to the desires of the flesh. When you know that you are saved by faith, you have real peace with God. And all who follow in the way of this heavenly peace are destined to be sanctified to the eternal service of the ever-advancing sons of the eternal God. Henceforth, it is not a duty but rather your exalted privilege to cleanse yourselves from all evils of mind and body while you seek for perfection in the love of God. “자기 혼자 옳다는 육신의 독선적 행위가 아니라, ()의 거듭남으로 구원되니느라. 영으로 태어난 아버지의 자녀들은 언제나 항상 자아 및 육신의 욕망에 속한 모든 것들의 주인들이므로, 육신의 두려움자아부정(금욕禁慾)이 아니라, 너희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며, 은혜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느니라. 신앙으로 구원됨을 너희가 알 때, 너희는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갖느니라. 그리고 이 하늘 평화의 길을 따르는 모든 이들영원한 하나님의 늘진보하는 아들들의 영원한 봉사거룩히 바치도록 예정되어 있느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을 추구하면서 마음과 육체의 모든 악으로부터 너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의 고귀한 특권이니라.

143:2.7 (1610.2) “Your sonship is grounded in faith, and you are to remain unmoved by fear. Your joy is born of trust in the divine word, and you shall not therefore be led to doubt the reality of the Father’s love and mercy. It is the very goodness of God that leads men into true and genuine repentance. Your secret of the mastery of self is bound up with your faith in the indwelling spirit, which ever works by love. Even this saving faith you have not of yourselves; it also is the gift of God. And if you are the children of this living faith, you are no longer the bondslaves of self but rather the triumphant masters of yourselves, the liberated sons of God. “너희의 아들(자녀)됨의 근거는 신앙이므로,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라. 너희 기쁨은 신적 말씀의 신뢰에서 생기므로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실체를 의심하게 되지 않아야 하리라. 하나님의 바로 그 선()사람을 참되고 진정한 회개로 이끄느니라. 자아 통달(정복)의 너희 비결내주하시며 늘 사랑으로 일하시는 영을 믿는 너희 신앙과 깊이 관련되느니라. 이 구원하는 신앙조차 너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너희가 살아있는 이 신앙의 자녀들이면, 너희는 더 이상 자신의 노예들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들의 승리한 주인들, 즉 하나님의 해방된 자녀(아들)이라.

143:2.8 (1610.3) “If, then, my children, you are born of the spirit, you are forever delivered from the self-conscious bondage of a life of self-denial and watchcare over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you are translated into the joyous kingdom of the spirit, whence you spontaneously show forth the fruits of the spirit in your daily lives; and the fruits of the spirit are the essence of the highest type of enjoyable and ennobling self-control, even the heights of terrestrial mortal attainment — true self-mastery.” “내 자녀들아, 너희가 영으로 태어나면, 너희는 자아부정의 삶에 속한 자아의식적 속박과 모든 육신의 욕망의 걱정에서 영원히 해방되어, 영에 속한 기쁨의 나라로 옮겨지며 거기에서 너희 일상생활에서 저절로 영의 열매를 드러내느니라. 영의 열매들은 가장 높은 유형의 즐겁고 고상한 자아통제, 즉 세상에서 필사자가 절정에까지 도달하는 참된 자아통달(정복)의 핵심이니라.”

3. Diversion and Relaxation 기분전환과 긴장완화

190512 기분전환과 긴장완화 요4:3-4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3 When the Lord learned of this, he left Judea and went back once more to Galilee. 4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143:3.1 (1610.4) About this time a state of great nervous and emotional tension developed among the apostles and their immediate disciple associates. They had hardly become accustomed to living and working together. They were experiencing increasing difficulties in maintaining harmonious relations with John’s disciples. The contact with the gentiles and the Samaritans was a great trial to these Jews. And besides all this, the recent utterances of Jesus had augmented their disturbed state of mind. Andrew was almost beside himself; he did not know what next to do, and so he went to the Master with his problems and perplexities. When Jesus had listened to the apostolic chief relate his troubles, he said: “Andrew, you cannot talk men out of their perplexities when they reach such a stage of involvement, and when so many persons with strong feelings are concerned. I cannot do what you ask of me — I will not participate in these personal social difficulties — but I will join you in the enjoyment of a three-day period of rest and relaxation. Go to your brethren and announce that all of you are to go with me up on Mount Sartaba, where I desire to rest for a day or two. 이 무렵에 신경과민과 감정적 긴장이 사도들과 직계 제자 동료들 사이에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며 일하기에 거의 길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점차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이 유대인들에게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외에, 예수님의 최근 설교가 그들의 불안한 마음 상태를 늘렸습니다. 안드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 몰라서, 자기 문제들과 난문제들을 가지고 주(主)님께로 갔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도가 설명하는 고민을 들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야, 그들이 그런 난처한 단계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에 관련되어 있을 때 그들의 난국에서 벗어나서 너는 그들과 의논할 수 없느니라. 나는 너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노라. 나는 이 개인적인 사회적 곤경에 관여하지 않겠으나 사흘 간 휴식하고 긴장완화로 보낼 때 너희와 합류하리라. 네 형제들에게 가서 너희 모두 나와 함께 사르타바 산에 가서 내가 하루나 이틀 쉬고자 한다고 알리라.

143:3.2 (1610.5) “Now you should go to each of your eleven brethren and talk with him privately, saying: ‘The Master desires that we go apart with him for a season to rest and relax. Since we all have recently experienced much vexation of spirit and stress of mind, I suggest that no mention be made of our trials and troubles while on this holiday. Can I depend upon you to co-operate with me in this matter?’ In this way privately and personally approach each of your brethren.” And Andrew did as the Master had instructed him. “이제 너는 가서 11명의 형제들 각자에게 사적(私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느니라. ‘()께서 잠시 쉬면서 긴장을 풀려고 우리가 그와 함께 각자 가기를 원하시니라. 우리 모두 최근에 많이 속상하고 마음의 긴장을 겪었으니, 이번 휴가에는 우리 시련과 곤경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도록 내가 제안한다. 이 문제로 네가 내게 협조하기를 내가 기대해도 되겠는가?’ 이렇게 사적으로 직접 네 형제들 각자에게 이야기하라.” 안드레는 주(主)님께서 자신에게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143:3.3 (1611.1) This was a marvelous occasion in the experience of each of them; they never forgot the day going up the mountain. Throughout the entire trip hardly a word was said about their troubles. Upon reaching the top of the mountain, Jesus seated them about him while he said: “My brethren, you must all learn the value of rest and the efficacy of relaxation. You must realize that the best method of solving some entangled problems is to forsake them for a time. Then when you go back fresh from your rest or worship, you are able to attack your troubles with a clearer head and a steadier hand, not to mention a more resolute heart. Again, many times your problem is found to have shrunk in size and proportions while you have been resting your mind and body.” 이것은 각자의 체험에 있어서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산으로 오르던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행 내내 그들의 걱정에 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산 정상에 이르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자기 주위에 앉히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모두 휴식의 소중함과 긴장 완화의 효험을 배워야 하니라. 뒤얽힌 문제들을 푸는 최선책잠시 그것들을 버려두는 것임을 너희가 깨달아야만 하니라. 그 후, 휴식이나 경배에서 원기를 회복해 돌아오면, 더 단호한 심정은 물론이고 더 맑은 머리와 더 안정된 손길너희 문제들에 착수할 수 있느니라. 게다가 너희 마음과 몸을 쉬는 동안 너희 문제의 크기와 정도가 축소된 것을 여러 번 발견하게 되느니라.”

143:3.4 (1611.2) The next day Jesus assigned to each of the twelve a topic for discussion. The whole day was devoted to reminiscences and to talking over matters not related to their religious work. They were momentarily shocked when Jesus even neglected to give thanks — verbally — when he broke bread for their noontide lunch. This was the first time they had ever observed him to neglect such formalities. 다음 날 예수님은 토의 주제를 12사도들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업무와 관계없는 문제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온 종일을 보냈습니다. 한낮 점심에 빵을 나누며 예수께서 감사의 말조차 하지 않으시는 그 순간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그런 절차를 건너뛰는 것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43:3.5 (1611.3) When they went up the mountain, Andrew’s head was full of problems. John was inordinately perplexed in his heart. James was grievously troubled in his soul. Matthew was hard pressed for funds inasmuch as they had been sojourning among the gentiles. Peter was overwrought and had recently been more temperamental than usual. Judas was suffering from a periodic attack of sensitiveness and selfishness. Simon was unusually upset in his efforts to reconcile his patriotism with the love of the brotherhood of man. Philip was more and more nonplused by the way things were going. Nathaniel had been less humorous since they had come in contact with the gentile populations, and Thomas was in the midst of a severe season of depression. Only the twins were normal and unperturbed. All of them were exceedingly perplexed about how to get along peaceably with John’s disciples. 그들이 산에 오를 때, 안드레의 머리는 문제로 꽉 차 있었습니다. 요한의 심정은 과도히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의 혼은 슬픔으로 번거로웠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인들 사이에 머물고 있었기에 마태는 자금 때문에 몹시 시달렸습니다. 베드로는 과로했고 평소보다 최근에 더 신경질적이었습니다. 유다는 주기적인 신경과민과 이기심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애국심을 인간의 형제 사랑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으로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빌립은 일이 진행되는 방식으로 인해 점점 더 당혹스러웠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사람들과 접촉한 이후 나다니엘은 유머가 줄어들었고, 도마는 한창 심한 우울증 기간 중에 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들만 정상적이었고 침착했습니다. 그들 모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 몹시 당혹스러웠습니다.

143:3.6 (1611.4) The third day when they started down the mountain and back to their camp, a great change had come over them. They had made the important discovery that many human perplexities are in reality nonexistent, that many pressing troubles are the creations of exaggerated fear and the offspring of augmented apprehension. They had learned that all such perplexities are best handled by being forsaken; by going off they had left such problems to solve themselves. 셋째 날 그들이 산을 내려와 야영지로 돌아오자, 큰 변화가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여러 인간의 혼란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절실한 여러 고민들은 지나친 두려움의 산물이며 불안이 확대된 결과라는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을 내버려둘 때 가장 잘 처리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두 배웠습니다. 그들이 떠나버려서 그런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143:3.7 (1611.5) Their return from this holiday marked the beginning of a period of greatly improved relations with the followers of John. Many of the twelve really gave way to mirth when they noted the changed state of everybody’s mind and observed the freedom from nervous irritability which had come to them as a result of their three days’ vacation from the routine duties of life. There is always danger that monotony of human contact will greatly multiply perplexities and magnify difficulties. 이 휴가에서 돌아오자 요한의 추종자들과 크게 개선된 관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적 생활의 의무에서 떠난 3일간 휴가의 결과로써, 그들은 모두의 마음 상태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생겼던 신경과민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여러 12사도들은 정말로 주체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단조로운 인간적 접촉으로 혼란이 크게 늘어나고 어려움이 확대될 위험이 언제나 있습니다.

143:3.8 (1611.6) Not many of the gentiles in the two Greek cities of Archelais and Phasaelis believed in the gospel, but the twelve apostles gained a valuable experience in this their first extensive work with exclusively gentile populations. On a Monday morning, about the middle of the month, Jesus said to Andrew: “We go into Samaria.” And they set out at once for the city of Sychar, near Jacob’s well. 두 그리스 도시들 즉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이방인들이 많이 복음을 믿지는 않았지만, 12사도들은 온전히 이방사람들과 이렇게 처음으로 넓게 일하면서 귀중한 체험을 얻었습니다. 그 달 중순경(AD 27년 8월) 어느 월요일 아침에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로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은 야곱의 우물 근처 시카 시(市)로 즉시 출발했습니다.

4. The Jews and the Samaritans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190519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왕하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The king of Assyria brought people from Babylon, Cuthah, Avva, Hamath and Sepharvaim and settled them in the towns of Samaria to replace the Israelites. They took over Samaria and lived in its towns.

143:4.1 (1612.1) For more than six hundred years the Jews of Judea, and later on those of Galilee also, had been at enmity with the Samaritans. This ill feeling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came about in this way: About seven hundred years B.C., Sargon, king of Assyria, in subduing a revolt in central Palestine, carried away and into captivity over twenty-five thousand Jews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nd installed in their place an almost equal number of the descendants of the Cuthites, Sepharvites, and the Hamathites. Later on, Ashurbanipal sent still other colonies to dwell in Samaria. 600년 이상, 유대의 유대인들과 나중에는 갈릴리의 유대인들사마리아인들과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악()감정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기원 전 700년경에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이 중부(中部) 팔레스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유대인 25,0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들의 자리를 거의 같은 수(數)의 큐트인, 세파르브인, 하마트인 후손들로 정착시켰습니다(왕하17:24, 30-31). 나중에 아숴바니팔이 다른 거류민(居留民타국에 머무는 사람)들을 보내 사마리아에 거주시켰습니다.

143:4.2 (1612.2) The religious enmity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dated from the return of the former from the Babylonian captivity, when the Samaritans worked to prevent the rebuilding of Jerusalem. Later they offended the Jews by extending friendly assistance to the armies of Alexander. In return for their friendship Alexander gave the Samaritans permission to build a temple on Mount Gerizim, where they worshiped Yahweh and their tribal gods and offered sacrifices much after the order of the temple services at Jerusalem. At least they continued this worship up to the time of the Maccabees, when John Hyrcanus destroyed their temple on Mount Gerizim. The Apostle Philip, in his labors for the Samaritans after the death of Jesus, held many meetings on the site of this old Samaritan temple.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종교적 반목은 유대인들의 이전 바빌론 유수(幽囚포로생활)에서 귀환하는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알렉산더의 점령군들에게 우호적인 지원을 확대하여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여 알렉산더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게리짐 산에 성전 건축을 허락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야훼 및 그들의 부족 신들(하나님들)을 경배했으며 예루살렘의 성전 봉사의 순서를 따라서 희생물을 바쳤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요한 히르카누스가 게리짐 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을 파괴했던, 마카비 시대까지 이 경배를 계속했습니다. 사도 빌립예수님의 사후(死後)사마리아인들을 위해 일하면서 이 사마리아 성전 옛터에서 여러 모임들을 했습니다.

143:4.3 (1612.3) The antagonisms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were time-honored and historic; increasingly since the days of Alexander they had had no dealings with each other. The twelve apostles were not averse to preaching in the Greek and other gentile cities of the Decapolis and Syria, but it was a severe test of their loyalty to the Master when he said, “Let us go into Samaria.” But in the year and more they had been with Jesus, they had developed a form of personal loyalty which transcended even their faith in his teachings and their prejudices against the Samaritans.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적대관계옛날부터 있었으며 역사적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시절 이후로 그들은 점차 서로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사도들은 그리스 또는 데카폴리스와 시리아의 다른 이방인 도시들에서 전도하기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주(主)께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자.”고 말씀하시자, 그것은 ()님께 충성하는 엄중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 이상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신앙하면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편견까지 뛰어넘는 일종의 개인적 충성심을 길렀습니다.

5. The Woman of Sychar 시카의 여인

190526 영생하는 생명수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143:5.1 (1612.4) When the Master and the twelve arrived at Jacob’s well, Jesus, being weary from the journey, tarried by the well while Philip took the apostles with him to assist in bringing food and tents from Sychar, for they were disposed to stay in this vicinity for a while. Peter and the Zebedee sons would have remained with Jesus, but he requested that they go with their brethren, saying: “Have no fear for me; these Samaritans will be friendly; only our brethren, the Jews, seek to harm us.” And it was almost six o’clock on this summer’s evening when Jesus sat down by the well to await the return of the apostles. 주(主)님과 12사도들이 야곱의 우물에 이르렀을 때, 여행으로 지친 예수님은 우물가에 머물렀으며, 빌립은 시카에서 음식과 천막 가져오는 일을 거들도록 사도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들이 이 근처에 당분간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님과 함께 남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들도 형제들과 함께 가라고 부탁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이 사마리아인들은 친절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우리 형제들인 유대인들만이 우리를 해치려고 하니라.” 예수님은 사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우물가에 앉으셨던 때는, 이 여름의 저녁, 거의 6시였습니다.

143:5.2 (1612.5) The water of Jacob’s well was less mineral than that from the wells of Sychar and was therefore much valued for drinking purposes. Jesus was thirsty, but there was no way of getting water from the well. When, therefore, a woman of Sychar came up with her water pitcher and prepared to draw from the well, Jesus said to her, “Give me a drink.” This woman of Samaria knew Jesus was a Jew by his appearance and dress, and she surmised that he was a Galilean Jew from his accent. Her name was Nalda and she was a comely creature. She was much surprised to have a Jewish man thus speak to her at the well and ask for water, for it was not deemed proper in those days for a self-respecting man to speak to a woman in public, much less for a Jew to converse with a Samaritan. Therefore Nalda asked Jesus, “How is it that you, being a Jew, ask for a drink of me, a Samaritan woman?” Jesus answered: “I have indeed asked you for a drink, but if you could only understand, you would ask me for a draught of the living water.” Then said Nalda: “But, Sir, you have nothing to draw with, and the well is deep; whence, then, have you this living water?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Jacob who gave us this well, and who drank thereof himself and his sons and his cattle also?” 야곱의 우물은 시카의 우물들보다 광물질이 적었으므로 식수(食水)로 매우 소중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말랐으나 우물에서 물을 길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카의 한 여인이 물주전자를 가져와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준비했을 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물을 주시오.” 이 사마리아의 여인은 그의 모습과 복장을 보고 예수께서 유대인임을 알았으며 그의 어투에서 그가 갈릴리 유대인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날다Nalda였고, 미모의 여인이었습니다. 유대 남자가 이렇게 우물가에서 그녀에게 말하며 물을 청해서 그녀는 매우 놀랐는데, 당시에 자존심 있는 남자가 공공연히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대화하는 것을 적절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다는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째서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에게 물을 요청했지만, 네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네가 내게 생명수(生命水) 한 모금을 청했을 것이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당신은 물을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그렇다면 어디서 이 생명수를 얻으시렵니까?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자신과 자기 아들들 및 자기 가축까지 마시게 했던, 우리 조상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하십니까?”

143:5.3 (1613.1) Jesus replied: “Everyone who drinks of this water will thirst again, but whosoever drinks of the water of the living spirit shall never thirst. And this living water shall become in him a well of refreshment springing up even to eternal life.” Nalda then said: “Give me this water that I thirst not, neither come all the way hither to draw. Besides, anything which a Samaritan woman could receive from such a commendable Jew would be a pleasure.”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살아있는 영(靈)의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생명수는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永生)에 이르기까지 솟아나는 상쾌한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습니다. “내게 이 물을 주셔서 목마르지 않고 멀리서 여기까지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훌륭한 유대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어떤 것도 만족될 것입니다.”

143:5.4 (1613.2) Nalda did not know how to take Jesus’ willingness to talk with her. She beheld in the Master’s face the countenance of an upright and holy man, but she mistook friendliness for commonplace familiarity, and she misinterpreted his figure of speech as a form of making advances to her. And being a woman of lax morals, she was minded openly to become flirtatious, when Jesus, looking straight into her eyes, with a commanding voice said, “Woman, go get your husband and bring him hither.” This command brought Nalda to her senses. She saw that she had misjudged the Master’s kindness; she perceived that she had misconstrued his manner of speech. She was frightened; she began to realize that she stood in the presence of an unusual person, and groping about in her mind for a suitable reply, in great confusion, she said, “But, Sir, I cannot call my husband, for I have no husband.” Then said Jesus: “You have spoken the truth, for, while you may have once had a husband, he with whom you are now living is not your husband. Better it would be if you would cease to trifle with my words and seek for the living water which I have this day offered you.” 예수께서 기꺼이 자신과 대화하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날다는 몰랐습니다. 그녀는 주(主)님의 용모에서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의 표정을 보았지만, 친절을 평범한 친숙함으로 오해하였으며, 그의 비유적 표현을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도덕적으로 단정치 못한 여인이어서, 버젓이 경박스럽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위엄 있는 음성으로, “여인아,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여기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으로 날다는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주(主)님의 친절을 잘못 판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투를 오해했음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두려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비범한 사람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기에 크게 당황하여 적당한 대답을 마음에서 더듬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저는 남편이 없어서 남편을 불러 올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진실을 말하였도다. 네가 한 때 남편이 있었을지 모르나 네가 지금 사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라. 내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수를 찾는 것이 더 좋으리라.”

143:5.5 (1613.3) By this time Nalda was sobered, and her better self was awakened. She was not an immoral woman wholly by choice. She had been ruthlessly and unjustly cast aside by her husband and in dire straits had consented to live with a certain Greek as his wife, but without marriage. Nalda now felt greatly ashamed that she had so unthinkingly spoken to Jesus, and she most penitently addressed the Master, saying: “My Lord, I repent of my manner of speaking to you, for I perceive that you are a holy man or maybe a prophet.” And she was just about to seek direct and personal help from the Master when she did what so many have done before and since — dodged the issue of personal salvation by turning to the discussion of theology and philosophy. She quickly turned the conversation from her own needs to a theological controversy. Pointing over to Mount Gerizim, she continued: “Our fathers worshiped on this mountain, and yet you would say that in Jerusalem is the place where men ought to worship; which, then, is the right place to worship God?” 이 때 날다는 진지하게 되었으며, 선한 자아가 깨어났습니다. 그녀는 전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그녀를 잔인하고 부당하게 버렸기 때문에 몹시 궁핍하여 결혼하지 않고 어떤 그리스인의 아내로 동거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날다는 이제 생각 없이 예수께 말한 것이 대단히 부끄러웠으며 후회 막심하여 주(主)님께 여쭈었습니다. “내 주여, 당신에게 한 저의 말투를 회개합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경건한 사람, 아마도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주님께로부터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도움을 간신히 구했을 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전과 이후에 했듯이 그녀는 신학과 철학의 논의로 화제를 돌려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교묘히 피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필요에서 신학적 논쟁으로 재빨리 대화를 돌렸습니다. 게리짐 산을 가리키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산에서 경배했는데, 아직도 당신들은 예루살렘이 사람들이 경배해야만 할 곳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바른 장소인지요?”

143:5.6 (1613.4) Jesus perceived the attempt of the woman’s soul to avoid direct and searching contact with its Maker, but he also saw that there was present in her soul a desire to know the better way of life. After all, there was in Nalda’s heart a true thirst for the living water; therefore he dealt patiently with her, saying: “Woman, let me say to you that the day is soon coming when neither on this mountain nor in Jerusalem will you worship the Father. But now you worship that which you know not, a mixture of the religion of many pagan gods and gentile philosophies. The Jews at least know whom they worship; they have removed all confusion by concentrating their worship upon one God, Yahweh. But you should believe me when I say that the hour will soon come — even now is — when all sincer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it is just such worshipers the Father seeks. God is spirit, and they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Your salvation comes not from knowing how others should worship or where but by receiving into your own heart this living water which I am offering you even now.” 예수님은 여인의 혼이 조물주(造物主)와 직접 탐구하는 접촉을 피하려는 시도를 아셨지만, 그녀의 혼에 더 나은 삶의 길을 알려는 열망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결국, 날다의 심정에는 생명수를 향한 참된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참을성 있게 그녀를 대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네게 이르노니,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며, 너희가 아버지를 경배할 때가 곧 오리라. 그러나 지금 너희는 많은 이교도 신(하나님)들의 종교와 이방인의 철학들이 혼합된,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니라. 적어도 유대인들은 경배하는 자를 아느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야훼 경배에 집중해서 모든 혼란을 제거했느니라. 그러나 모든 신실한 경배자들은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경배할 때가 곧 오리니, 지금이라고 내가 말할 때, 너희는 나를 믿어야 할지니라. 아버지는 바로 그런 경배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경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만 하니라. 너희 구원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혹은 어디에서 경배하는지 알아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너에게 주는 생명수를 너 자신의 심정에 받아들임으로 오느니라.”

143:5.7 (1614.1) But Nalda would make one more effort to avoid the discussion of the embarrassing question of her personal life on earth and the status of her soul before God. Once more she resorted to questions of general religion, saying: “Yes, I know, Sir, that John has preached about the coming of the Converter, he who will be called the Deliverer, and that, when he shall come, he will declare to us all things” — and Jesus, interrupting Nalda, said with startling assurance, “I who speak to you am he.” 그러나 날다는 지상에서 자기 개인적 일생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혼의 상태를 묻는 난처한 논의를 한 번 더 피하려 했습니다. 한 번 더 그녀는 일반적 종교 질문에 호소하며 말했습니다. “예, 선생님, 해방자로 불리게 될 개종시키는 분이 오셔서 만물을 우리에게 드러내리라고 요한이 설교한 것을 제가 압니다.” – 그러자 예수께서 날다의 말을 막으면서 깜짝 놀라게 하는 확신으로 말씀하기를,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143:5.8 (1614.2) This was the first direct, positive, and undisguised pronouncement of his divine nature and sonship which Jesus had made on earth; and it was made to a woman, a Samaritan woman, and a woman of questionable character in the eyes of men up to this moment, but a woman whom the divine eye beheld as having been sinned against more than as sinning of her own desire and as now being a human soul who desired salvation, desired it sincerely and wholeheartedly, and that was enough.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 본성과 지상에서 이룬 아들됨을 직접, 단언하며 숨기지 않는 최초의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순간까지 남자들 눈에 의심스러운 성격의 여인에게 선언되었지만, 그녀 자신의 열망으로 죄를 범하기 보다는 다른 이에 대항하여 죄를 지었으며 지금은 구원을 열망하는 인간 혼으로서, 구원을 신실하게 전심으로 열망했던 여인으로, 신적 눈은 보았으며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143:5.9 (1614.3) As Nalda was about to voice her real and personal longing for better things and a more noble way of living, just as she was ready to speak the real desire of her heart, the twelve apostles returned from Sychar, and coming upon this scene of Jesus’ talking so intimately with this woman — this Samaritan woman, and alone — they were more than astonished. They quickly deposited their supplies and drew aside, no man daring to reprove him, while Jesus said to Nalda: “Woman, go your way; God has forgiven you. Henceforth you will live a new life. You have received the living water, and a new joy will spring up within your soul, and you shall become a daughter of the Most High.” And the woman, perceiving the disapproval of the apostles, left her waterpot and fled to the city. 날다가 자기 심정의 실제 갈망을 말할 준비가 되었듯이, 그녀가 더 나은 일들과 더 고상한 삶의 길에 대한 자신의 실제 개인적 갈망을 말하려 했을 때, 12사도들이 시카에서 돌아와, 예수께서 이 여인과 – 이 사마리아 여인과 홀로 – 친근히 말하는 이 장면을 보고 그들은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재빨리 자기들의 물건들을 놓고 비켜서서, 아무도 감히 예수님을 비난하지 못할 때, 한편 예수께서 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길을 가라.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였느니라. 이제부터 너는 새 삶을 살리라. 네가 생명수를 받았으니 새 기쁨이 네 혼에서 넘칠 것이며 너는 지고자의 딸이 되리라.” 그 여인은 사도들의 불만을 감지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 도시로 달아났습니다.

143:5.10 (1614.4) As she entered the city, she proclaimed to everyone she met: “Go out to Jacob’s well and go quickly, for there you will see a man who told me all I ever did. Can this be the Converter?” And ere the sun went down, a great crowd had assembled at Jacob’s well to hear Jesus. And the Master talked to them more about the water of life, the gift of the indwelling spirit. 그녀는 도시에 들어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외쳤습니다. “야곱의 우물로 빨리 가십시오. 거기에 내가 전에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볼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개종시키는 분이지 않겠습니까?” 해 지기 전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야곱의 우물가에 모였습니다. 주(主)님은 그들에게 생명수, 즉 내주(內住)하는 영의 선물에 대해 더 말씀하셨습니다.

143:5.11 (1614.5) The apostles never ceased to be shocked by Jesus’ willingness to talk with women, women of questionable character, even immoral women. It was very difficult for Jesus to teach his apostles that women, even so-called immoral women, have souls which can choose God as their Father, thereby becoming daughters of God and candidates for life everlasting. Even nineteen centuries later many show the same unwillingness to grasp the Master’s teachings. Even the Christian religion has been persistently built up around the fact of the death of Christ instead of around the truth of his life. The world should be more concerned with his happy and God-revealing life than with his tragic and sorrowful death. 예수께서 여인들, 의심스러운 성격의 여인들, 심지어 부도덕한 여인들과 기꺼이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 사도들은 충격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인들, 소위 부도덕한 여인들도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선택할 수 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딸들과 영생의 후보자가 되는 혼을 소유하고 있음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19세기가 지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주(主)님의 가르침들을 똑같이 기꺼이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기독교조차 그의 일생의 진리 둘레 대신에 그리스도 죽으심의 사실 둘레에 지속적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세상은 그의 비극적인 슬픈 죽음보다 하나님을계시하신 예수님의 행복한 일생에 더 관심을 두었어야만 했습니다.

143:5.12 (1614.6) Nalda told this entire story to the Apostle John the next day, but he never revealed it fully to the other apostles, and Jesus did not speak of it in detail to the twelve. 날다가 다음 날 이 모든 이야기를 사도 요한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 결코 전부 밝히지 않았으며, 예수님도 12사도들에게 그것에 대해 상세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143:5.13 (1615.1) Nalda told John that Jesus had told her “all I ever did.” John many times wanted to ask Jesus about this visit with Nalda, but he never did. Jesus told her only one thing about herself, but his look into her eyes and the manner of his dealing with her had so brought all of her checkered life in panoramic review before her mind in a moment of time that she associated all of this self-revelation of her past life with the look and the word of the Master. Jesus never told her she had had five husbands. She had lived with four different men since her husband cast her aside, and this, with all her past, came up so vividly in her mind at the moment when she realized Jesus was a man of God that she subsequently repeated to John that Jesus had really told her all about herself. 날다는 예수께서 “자신이 했던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날다 이야기에 대해 예수께 여러 번 여쭙고 싶었지만, 결코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녀 자신에 대해 한 가지만 말씀하셨지만,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로 인해 한 순간 그녀의 마음에 자신의 파란만장한 모든 생애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는데, 그녀는 이렇게 계시된 자신의 모든 과거 생애를 주(主)님의 표정 및 말씀과 관련지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버린 뒤에 다른 네 명의 남자들과 동거했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람임을 그녀가 깨닫게 되는 순간, 이것이 그녀의 모든 과거와 함께, 너무나 생생하게 그녀의 마음에 떠올랐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께서 그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실제로 말했다고 그녀는 요한에게 반복했습니다.

  1. The Samaritan Revival 사마리아의 부흥

190616 예수님의 양식 요4:34-38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34 “My food,” said Jesus,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35 Do you not say, ‘Four months more and then the harvest’? I tell you,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fields! They are ripe for harvest. 36 Even now the reaper draws his wages, even now he harvests the crop for eternal life, so that the sower and the reaper may be glad together. 37 Thus the saying ‘One sows and another reaps’ is true. 38 I sent you to reap what you have not worked for. Others have done the hard work, and you have reaped the benefits of their labor.”

143:6.1 (1615.2) On the evening that Nalda drew the crowd out from Sychar to see Jesus, the twelve had just returned with food, and they besought Jesus to eat with them instead of talking to the people, for they had been without food all day and were hungry. But Jesus knew that darkness would soon be upon them; so he persisted in his determination to talk to the people before he sent them away. When Andrew sought to persuade him to eat a bite before speaking to the crowd, Jesus said, “I have meat to eat that you do not know about.” When the apostles heard this, they said among themselves: “Has any man brought him aught to eat? Can it be that the woman gave him food as well as drink?” When Jesus heard them talking among themselves, before he spoke to the people, he turned aside and said to the twelve: “My meat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accomplish His work. You should no longer say it is such and such a time until the harvest. Behold these people coming out from a Samaritan city to hear us; I tell you the fields are already white for the harvest. He who reaps receives wages and gathers this fruit to eternal life; consequently the sowers and the reapers rejoice together. For herein is the saying true: ‘One sows and another reaps.’ I am now sending you to reap that whereon you have not labored; others have labored, and you are about to enter into their labor.” This he said in reference to the preaching of John the Baptist. 날다가 예수님을 만나라고 시카에서 군중(群衆)을 이끌어낸 그 저녁에, 12사도는 음식을 가지고 막 돌아왔으며, 온종일 음식 없이 허기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대신에 자기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예수께 청(請)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이 곧 올 것을 아셨기에 그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려는 결정을 밀고 나갔습니다. 군중에게 말하기 전 뭐 좀 드시라고 안드레가 그를 설득하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이 말을 듣고 사도들끼리 말했습니다. “누가 드실 것을 그에게 갖다 드렸는가? 여인이 음료만이 아니라 음식도 드렸던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그들 사이에서 하는 말을 들으시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얼굴을 돌려 12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 너희는 추수까지 이러이러한 시간이 있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우리말을 들으려고 사마리아 도시에서 나오는 이 사람들을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밭이 벌써 희어져 추수 때니라. 거두는 자는 임금(賃金)을 받고 영생(永生)까지 이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 결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도록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느니라. 다른 이들이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한 결과를 막 거두려고 하느니라.” 그는 이것을 세례 요한의 전도와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43:6.2 (1615.3) Jesus and the apostles went into Sychar and preached two days before they established their camp on Mount Gerizim. And many of the dwellers in Sychar believed the gospel and made request for baptism, but the apostles of Jesus did not yet baptize. 예수님과 사도들은 시카로 들어갔으며 게리짐 산에 야영지를 세우기 전에 이틀 동안 전도했습니다. 시카의 여러 주민들이 복음을 믿었으며 세례 받기를 요청했지만, 예수님의 사도들은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143:6.3 (1615.4) The first night of the camp on Mount Gerizim the apostles expected that Jesus would rebuke them for their attitude toward the woman at Jacob’s well, but he made no reference to the matter. Instead he gave them that memorable talk on “The realities which are central in the kingdom of God.” In any religion it is very easy to allow values to become disproportionate and to permit facts to occupy the place of truth in one’s theology. The fact of the cross became the very center of subsequent Christianity; but it is not the central truth of the religion which may be derived from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of Nazareth. 게리짐 산에서 야영한 첫날밤에, 사도들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그 여인을 향한 자신들의 태도를 예수님께서 나무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실체들”에 관한 잊지 못할 강의를 하셨습니다. 어떤 종교나 그 신학에서 가치들이 균형을 잃어버리며, 사실들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허용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십자가의 사실이 나중에 기독교의 바로 그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에서 유래될 수 있는 그 종교의 중심 진리가 아닙니다.

143:6.4 (1615.5) The theme of Jesus’ teaching on Mount Gerizim was: That he wants all men to see God as a Father-friend just as he (Jesus) is a brother-friend. And again and again he impressed upon them that love is the greatest relationship in the world — in the universe — just as truth is the greatest pronouncement of the observation of these divine relationships. 게리짐 산에서 예수님 교훈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원하신 것은 자신(예수님)이 바로 형제-친구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친구로 보는 것입니다. 이 신적 관계의 소견에서 진리가 가장 위대한 선언인 것과 똑같이, 사랑이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관계임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143:6.5 (1616.1) Jesus declared himself so fully to the Samaritans because he could safely do so, and because he knew that he would not again visit the heart of Samaria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예수께서 자신을 사마리아인들에게 충분히 드러내신 것은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사마리아의 중심부에 다시 방문하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143:6.6 (1616.2) Jesus and the twelve camped on Mount Gerizim until the end of August. They preache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 the fatherhood of God — to the Samaritans in the cities by day and spent the nights at the camp. The work which Jesus and the twelve did in these Samaritan cities yielded many souls for the kingdom and did much to prepare the way for the marvelous work of Philip in these regions after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subsequent to the dispersion of the apostles to the ends of the earth by the bitter persecution of believers at Jerusalem. 예수님과 12사도들은 8월 말까지 게리짐 산에서 야영했습니다. 그들은 낮에 여러 도시의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전했으며 밤에는 야영지에서 보냈습니다. 이 사마리아 도시들에서 예수님과 12사도들이 했던 일로 많은 혼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갔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에 대한 모진 박해로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진 후에, 이 지역에서 빌립의 놀라운 사역을 위한 길이 충분히 준비되도록 했습니다.

  1. Teachings About Prayer and Worship 기도와 경배에 대한 교훈들

190623 기도와 경배 요4:23-24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3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24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143:7.1 (1616.3) At the evening conferences on Mount Gerizim, Jesus taught many great truths, and in particular he laid emphasis on the following: 게리짐 산의 저녁 회의에서 예수님은 여러 위대한 진리들을 가르치셨으며, 특히 다음을 강조하셨습니다.

143:7.2 (1616.4) True religion is the act of an individual soul in its self-conscious relations with the Creator; organized religion is man’s attempt to socialize the worship of individual religionists. 참된 종교는 창조자와 자아-의식 관계 가운데 있는 개인적 혼(魂)의 행동입니다. 조직된 종교는 개인적 신앙인들의 경배를 사회화하려는 인간의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143:7.3 (1616.5) Worship — contemplation of the spiritual — must alternate with service, contact with material reality. Work should alternate with play; religion should be balanced by humor. Profound philosophy should be relieved by rhythmic poetry. The strain of living — the time tension of personality — should be relaxed by the restfulness of worship. The feelings of insecurity arising from the fear of personality isolation in the universe should be antidoted by the faith contemplation of the Father and by the attempted realization of the Supreme. 경배 – 영적 묵상-는 봉사, 즉 물질적 실체 접촉과 번갈아 해야만 합니다. 업무는 놀이와 번갈아 해야 합니다. 종교는 유머로 균형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심오한 철학은 운율적 시(詩)로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생활의 긴장 – 고유성의 시간 긴장-은 경배의 평온으로 긴장이 풀려야 합니다. 우주에서 고유성 고립의 두려움에서 발생한 불안감은, 아버지를 신앙으로 묵상하고 최극자를 자각하려는 시도로 해독(解毒)되어야만 합니다.

143:7.4 (1616.6) Prayer is designed to make man less thinking but more realizing; it is not designed to increase knowledge but rather to expand insight. 기도는 사람이 덜 생각하고 더 자각하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지식 증가가 아니라 오히려 통찰력 확대를 위해 고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3:7.5 (1616.7) Worship is intended to anticipate the better life ahead and then to reflect these new spiritual significances back onto the life which now is. Prayer is spiritually sustaining, but worship is divinely creative. 경배는 앞으로 개선된 생활을 예상하고 이 새로운 영적 중요성을 현재 생활에 돌이켜 반영하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유지하지만, 경배는 신적으로 창조적입니다.

143:7.6 (1616.8) Worship is the technique of looking to the One for the inspiration of service to the many. Worship is the yardstick which measures the extent of the soul’s detachment from the material universe and its simultaneous and secure attachment to the spiritual realities of all creation. 경배는 다수에게 봉사하는 감화력(感化力)을 위해 한 분을 바라보는 기법입니다. 경배는 혼(魂)이 물질 우주에서 초연한(超然벗어나 구애되지 않는) 동시에 모든 창조계의 영적 실체들에 안전히 결속되어 있는 정도를 재는 척도입니다.

143:7.7 (1616.9) Prayer is self-reminding — sublime thinking; worship is self-forgetting — superthinking. Worship is effortless attention, true and ideal soul rest, a form of restful spiritual exertion. 기도는 자아를-상기하는 – 숭고한 사고입니다. 경배는 자아를-망각하는 – 초(超)사고입니다. 경배는 수월한 집중이며, 참된 이상적 혼(魂)의 평안이며, 평안한 영적 노력의 형태입니다.

143:7.8 (1616.10) Worship is the act of a part identifying itself with the Whole; the finite with the Infinite; the son with the Father; time in the act of striking step with eternity. Worship is the act of the son’s personal communion with the divine Father, the assumption of refreshing, creative, fraternal, and romantic attitudes by the human soul-spirit. 경배는 부분이 자신을 전체와, 유한자가 무한자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화로 공감하는 행위이며, 시간이 영원에 부딪치는 보폭의 행위입니다. 경배는 아들이 신적 아버지와 개인적인 친교로 인해, 인간의 혼(魂)-영(靈)이 새로워지고, 창조적이며, 형제우애 및 낭만적 태도에 사로잡히는 행위입니다.

143:7.9 (1616.11) Although the apostles grasped only a few of his teachings at the camp, other worlds did, and other generations on earth will. 사도들은 야영지에서 그의 교훈들 중에서 단지 몇 가지를 파악했지만, 다른 세계들은 그 교훈들을 이해했으며, 지상의 다른 세대들도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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