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62 At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에

Paper 162

At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에

“Master…bid fire come down from heaven…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도록 명하소서…”
1. The Dangers of the Visit to Jerusalem 위험한 예루살렘 방문
2. The First Temple Talk 첫 번째 성전 말씀
Eber the officer of the Sanhedrin 산헤드린의 관리 이버
3.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간통(姦通)으로 잡혀 온 여성
4.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
5. Sermon on the L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에 대한 설교
6. Discourse on the Water of Life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7. The Discourse on Spiritual Freedom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8. The Visit with Martha and Mary 마르다와 마리아 심방(尋訪 찾아서 방문)
9. At Bethlehem with Abner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함께

220612 절대적 예수 환대 눅9:52-56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54 When the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asked, “Lord, do you want us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m?”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 56 Then he and his disciples went to another village.

162:0.1 (1788.1) WHEN Jesus started up to Jerusalem with the ten apostles, he planned to go through Samaria, that being the shorter route. Accordingly, they passed down the eastern shore of the lake and, by way of Scythopolis, entered the borders of Samaria. Near nightfall Jesus sent Philip and Matthew over to a village on the eastern slopes of Mount Gilboa to secure lodging for the company. It so happened that these villagers were greatly prejudiced against the Jews, even more so than the average Samaritans, and these feelings were heightened at this particular time as so many were on their way to the feast of tabernacles. These people knew very little about Jesus, and they refused him lodging because he and his associates were Jews. When Matthew and Philip manifested indignation and informed these Samaritans that they were declining to entertain the Holy One of Israel, the infuriated villagers chased them out of the little town with sticks and stones. 예수께서 10 사도와 예루살렘으로 걷기 시작할 때(AD29. 9.26 월), 그는 사마리아를 거칠 작정이었는데 그것이 지름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호수 동쪽 기슭으로 내려가 스키토폴리스를 거쳐 사마리아 변경에 들어갔습니다. 황혼 무렵, 예수께서 일행이 숙박할 수 있도록 길보아 산 동쪽 경사지에 있는 마을로 빌립과 마태를 보냈습니다. 공교롭게 이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 보통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은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이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막절(帳幕節)에 가는 중이어서 이런 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거의 몰랐고, 예수와 그의 동료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투숙을 거부했습니다. 마태와 빌립이 분노한 얼굴로 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구세주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격분(激奮)한 마을 사람들이 막대기와 돌로 그들을 작은 마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162:0.2 (1788.2) After Philip and Matthew had returned to their fellows and reported how they had been driven out of the village, James and John stepped up to Jesus and said: “Master, we pray you to give us permission to bid fire come down from heaven to devour these insolent and impenitent Samaritans.” But when Jesus heard these words of vengeance, he turned upon the sons of Zebedee and severely rebuked them: “You know not what manner of attitude you manifest. Vengeance savors not of the outlook of the kingdom of heaven. Rather than dispute, let us journey over to the little village by the Jordan ford.” Thus because of sectarian prejudice these Samaritans denied themselves the honor of showing hospitality to the Creator Son of a universe. 빌립과 마태가 동료들에게 돌아와 자신들이 어떻게 마을 밖으로 쫓겨났는지 말한 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주여, 저희에게 명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무례하고 고집 센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삼키도록, 허락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수(怨讎)갚는 이런 말을 듣고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몸을 돌려 엄히 꾸짖었습니다(눅9:54-55). “너희는 자기 태도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모르느니라. 원수(怨讎) 갚기는 하늘나라 사고방식의 경향이 아니니라. 다투지 말고, 요단강 여울(얕은 곳) 가까이 작은 마을로 이동하자.” 종파적 편견 때문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우주의 창조자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영예(榮譽)를 사절(謝絶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침)했습니다.

162:0.3 (1788.3) Jesus and the ten stopped for the night at the village near the Jordan ford. Early the next day they crossed the river and continued on to Jerusalem by way of the east Jordan highway, arriving at Bethany late Wednesday evening. Thomas and Nathaniel arrived on Friday, having been delayed by their conferences with Rodan. 예수와 10 사도는 요단강 여울 근처의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다음날 일찍 그들은 강을 건너, 동쪽 요단 대로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서 수요일(AD29. 9. 28) 저녁 늦게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로단과 회의로 지체되었던, 도마와 나다니엘은 금요일에 도착했습니다.

162:0.4 (1788.4) Jesus and the twelve remained in the vicinity of Jerusalem until the end of the following month (October), about four and one-half weeks. Jesus himself went into the city only a few times, and these brief visits were made during the days of the feast of tabernacles. He spent a considerable portion of October with Abner and his associates at Bethlehem. 예수와 12 사도는 다음 달(10월) 말 약 4주 반까지 예루살렘 부근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도시 안으로 몇 번만 가셨고, 이런 짧은 방문은 장막절 며칠간이었습니다. 그는 10월 중 많은 날, 아브너 및 그 동료들과 베들레헴에서 보냈습니다.

1. The Dangers of the Visit to Jerusalem 위험한 예루살렘 방문

220619 장막절 공적 전도의 동력 요7:2-6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2 But when the Jewish Festival of Tabernacles was near, 3 Jesus’ brothers said to him, “Leave Galilee and go to Judea, so that your disciples there may see the works you do. 4 No one who wants to become a public figure acts in secret. Since you are doing these things, show yourself to the world.” 5 For even his own brothers did not believe in him. 6 Therefore Jesus told them, “My time is not yet here; for you any time will do.

162:1.1 (1788.5) Long before they fled from Galilee, the followers of Jesus had implored him to go to Jerusalem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in order that his message might have the prestige of having been preached at the center of Jewish culture and learning; but now that he had actually come to Jerusalem to teach, they were afraid for his life. Knowing that the Sanhedrin had sought to bring Jesus to Jerusalem for trial and recalling the Master’s recently reiterated declarations that he must be subject to death, the apostles had been literally stunned by his sudden decision to attend the feast of tabernacles. To all their previous entreaties that he go to Jerusalem he had replied, “The hour has not yet come.” Now, to their protests of fear he answered only, “But the hour has come.” 그들이 갈릴리에서 도피하기 오래전에,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메시지가 유대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에서 전파되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실제로 가르치러 예루살렘에 오자, 그들은 그의 목숨을 걱정했습니다. 산헤드린이 재판을 위해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했음을 알고, 최근에 주께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반복했던 선언이 생각나서, 장막절에 참석한다는 갑작스러운 주님의 결정에 사도들은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그들의 모든 이전 간청에 대해 그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두려움으로 인한 그들의 이의(異議)제기에, 그는 “하지만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162:1.2 (1789.1)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went boldly into Jerusalem on several occasions and publicly taught in the temple. This he did in spite of the efforts of his apostles to dissuade him. Though they had long urged him to proclaim his message in Jerusalem, they now feared to see him enter the city at this time, knowing full well that the scribes and Pharisees were bent on bringing about his death. 장막절 기간에 예수는 대담하게 여러 번 예루살렘 안으로 가셨고 성전에서 공공연히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기 사도들이 그를 단념시키려고 애썼지만 이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오랫동안 재촉했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기에, 이때 도시로 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그들은 이제 두려웠습니다.

162:1.3 (1789.2) Jesus’ bold appearance in Jerusalem more than ever confused his followers. Many of his disciples, and even Judas Iscariot, the apostle, had dared to think that Jesus had fled in haste into Phoenicia because he feared the Jewish leaders and Herod Antipas. They failed to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the Master’s movements. His presence in Jerusalem at the feast of tabernacles, even in opposition to the advice of his followers, sufficed forever to put an end to all whisperings about fear and cowardice.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대담한 모습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여느 때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그의 여러 제자가, 사도 가롯 유다도,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 안티파스를 두려워해서 그가 서둘러 페니키아로 도피했다고 주제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主)의 동정(動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추종자들의 권고에 반대하기까지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존재는 두려움과 비겁에 대한 모든 소문이 영원토록 그치기에 충분했습니다.

162:1.4 (1789.3)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thousands of believers from all parts of the Roman Empire saw Jesus, heard him teach, and many even journeyed out to Bethany to confer with him regarding the progress of the kingdom in their home districts. 장막절 기간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수천의 신자(信者)들이 예수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다수가 자신들의 고향 지역에서 하느님 나라 왕국의 진보에 관해 그와 의논하려고 베다니로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162:1.5 (1789.4) There were many reasons why Jesus was able publicly to preach in the temple courts throughout the days of the feast, and chief of these was the fear that had come over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as a result of the secret division of sentiment in their own ranks. It was a fact that many of the members of the Sanhedrin either secretly believed in Jesus or else were decidedly averse to arresting him during the feast, when such large numbers of people were present in Jerusalem, many of whom either believed in him or were at least friendly to the spiritual movement which he sponsored. 예수께서 절기 내내 성전 뜰에서 공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가 있었고, 이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헤드린 자체 계층에서 비밀리에 정서가 분열된 결과로서 그들에게 엄습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여러 회원이 은밀히 예수를 믿거나 그렇지 않으면 절기 동안 그를 체포하기를 단호히 반대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그중 다수가 그를 믿었거나, 적어도 자신이 후원한 영적 운동에 우호적이었음이 사실이었습니다.

162:1.6 (1789.5) The efforts of Abner and his associates throughout Judea had also done much to consolidate sentiment favorable to the kingdom, so much so that the enemies of Jesus dared not be too outspoken in their opposition. This was one of the reasons why Jesus could publicly visit Jerusalem and live to go away. One or two months before this he would certainly have been put to death. 예수의 대적들이 감히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못할 만큼, 유대 전역에서 아브너와 그 동료들의 노력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호의적인 정서의 강화에 또한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살아서 떠나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두 달 전에 그는 반드시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220626 예수 신성(神性)의 정식 발표 요7:11-15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1 Now at the festival the Jewish leaders were watching for Jesus and asking, “Where is he?” 12 Among the crowds there was widespread whispering about him. Some said, “He is a good man.” Others replied, “No, he deceives the people.” 13 But no one would say anything publicly about him for fear of the leaders. 14 Not until halfway through the festival did Jesus go up to the temple courts and begin to teach. 15 The Jews there were amazed and asked, “How did this man get such learning without having been taught?”

162:1.7 (1789.6) But the audacious boldness of Jesus in publicly appearing in Jerusalem overawed his enemies; they were not prepared for such a daring challenge. Several times during this month the Sanhedrin made feeble attempts to place the Master under arrest, but nothing came of these efforts. His enemies were so taken aback by Jesus’ unexpected public appearance in Jerusalem that they conjectured he must have been promised protection by the Roman authorities. Knowing that Philip (Herod Antipas’s brother) was almost a follower of Jesus, the members of the Sanhedrin speculated that Philip had secured for Jesus promises of protection against his enemies. Jesus had departed from their jurisdiction before they awakened to the realization that they had been mistaken in the belief that his sudden and bold appearance in Jerusalem had been due to a secret understanding with the Roman officials. 그러나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신 예수의 대담한 배짱이 그의 대적들을 무서워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대담한 도전에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달에 여러 번 산헤드린은 주님을 잡아 가두려고 미약하게 시도했지만 이런 노력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예수님의 예기치 않은 예루살렘 공적 출현으로 인해 너무 깜짝 놀라서 그들은 그가 로마 당국의 보호를 틀림없이 약속받았다고 추측했습니다. 빌립(헤롯 안티파스의 형제)이 거의 예수의 추종자였음을 알았기에, 산헤드린 회원들은 빌립이 예수에게 그의 대적들에 대해 보호의 약속을 책임졌다고 추측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갑자기 대담하게 출현한 것은 로마 관리들과 비밀 약정 때문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실상을 그들이 깨닫기 전에, 예수는 그들의 관할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162:1.8 (1789.7) Only the twelve apostles had known that Jesus intended to attend the feast of tabernacles when they had departed from Magadan. The other followers of the Master were greatly astonished when he appeared in the temple courts and began publicly to teach, and the Jewish authorities were surprised beyond expression when it was reported that he was teaching in the temple. 그들이 마가단에서 출발할 때 예수께서 장막절에 참석할 생각이었음을 열두 사도만이 알았습니다. 주께서 성전 뜰에 나타나 공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자 주(主)님의 다른 추종자들은 대단히 놀랐고, 유대 당국은 그가 성전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놀랐습니다.

162:1.9 (1790.1) Although his disciples had not expected Jesus to attend the feast, the vast majority of the pilgrims from afar who had heard of him entertained the hope that they might see him at Jerusalem. And they were not disappointed, for on several occasions he taught in Solomon’s Porch and elsewhere in the temple courts. These teachings were really the official or formal announcement of the divinity of Jesus to the Jewish people and to the whole world.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절기에 참석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멀리서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순례자의 대다수는 예루살렘에서 그를 만나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러 번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과 여러 성전 뜰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실제로 예수의 신성(神性)을 유대 민족과 온 세상에 공식적(公式的)으로 정식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162:1.10 (1790.2) The multitudes who listened to the Master’s teachings were divided in their opinions. Some said he was a good man; some a prophet; some that he was truly the Messiah; others said he was a mischievous meddler, that he was leading the people astray with his strange doctrines. His enemies hesitated to denounce him openly for fear of his friendly believers, while his friends feared to acknowledge him openly for fear of the Jewish leaders, knowing that the Sanhedrin was determined to put him to death. But even his enemies marveled at his teaching, knowing that he had not been instructed in the schools of the rabbis.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군중은 그들의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어떤 이들을 그를 선한 사람이라, 어떤 이들은 선지자라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가 진실로 메시아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말썽을 일으키는 참견쟁이로 자기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대적들은 예수를 지지하는 신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어 그를 비난할 수 없었던 반면에 예수의 지지자들은 산헤드린이 그를 처형하기로 정했음을 알고 유대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어 그를 인정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도 그가 랍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음을 알고, 그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162:1.11 (1790.3) Every time Jesus went to Jerusalem, his apostles were filled with terror. They were the more afraid as, from day to day, they listened to his increasingly bold pronouncements regarding the nature of his mission on earth. They were unaccustomed to hearing Jesus make such positive claims and such amazing assertions even when preaching among his friends.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사도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의 사명의 본질에 대해 점점 더 대담한 그의 선언을 들을수록 그들은 나날이 더 두려웠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지지자들 사이에서 전하실 때도 그렇게 단호하게 주장하고 그렇게 놀랍게 단언하는 예수님의 진술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보기 드물었습니다.

2. The First Temple Talk 첫 번째 성전 말씀

220703 참된 영적 판단 요7:16-30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16 Jesus answered, “My teaching is not my own. It comes from the one who sent me. 17 Anyone who chooses to do the will of God will find out whether my teaching comes from God or whether I speak on my own. 18 Whoever speaks on their own does so to gain personal glory, but he who seeks the glory of the one who sent him is a man of truth; there is nothing false about him. 19 Has not Moses given you the law? Yet not one of you keeps the law. Why are you trying to kill me?” 20 “You are demon-possessed,” the crowd answered. “Who is trying to kill you?” 21 Jesus said to them, “I did one miracle, and you are all amazed. 22 Yet, because Moses gave you circumcision (though actually it did not come from Moses, but from the patriarchs), you circumcise a boy on the Sabbath. 23 Now if a boy can be circumcised on the Sabbath so that the law of Moses may not be broken, why are you angry with me for healing a man’s whole body on the Sabbath? 24 Stop judging by mere appearances, but instead judge correctly.” 25 At that point some of the people of Jerusalem began to ask, “Isn’t this the man they are trying to kill? 26 Here he is, speaking publicly, and they are not saying a word to him. Have the authorities really concluded that he is the Messiah? 27 But we know where this man is from; when the Messiah comes, no one will know where he is from.” 28 Then Jesus, still teaching in the temple courts, cried out, “Yes, you know me, and you know where I am from. I am not here on my own authority, but he who sent me is true. You do not know him, 29 but I know him because I am from him and he sent me.” 30 At this they tri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a hand on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162:2.1 (1790.4) The first afternoon that Jesus taught in the temple, a considerable company sat listening to his words depicting the liberty of the new gospel and the joy of those who believe the good news, when a curious listener interrupted him to ask: “Teacher, how is it you can quote the Scriptures and teach the people so fluently when I am told that you are untaught in the learning of the rabbis?” Jesus replied: “No man has taught me the truths which I declare to you. And this teaching is not mine but His who sent me. If any man really desires to do my Father’s will, he shall certainly know about my teaching, whether it be God’s or whether I speak for myself. He who speaks for himself seeks his own glory, but when I declare the words of the Father, I thereby seek the glory of him who sent me. But before you try to enter into the new light, should you not rather follow the light you already have? Moses gave you the law, yet how many of you honestly seek to fulfill its demands? Moses in this law enjoins you, saying, ‘You shall not kill’; notwithstanding this command some of you seek to kill the Son of Man.”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쳤던 첫날 오후에 꽤 많이 모인 사람이 앉아서 새로운 복음의 해방과 복음을 믿는 자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의 말씀을 들었는데, 호기심으로 잘 듣던 사람이 끼어들어 그에게 “선생님, 당신은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제가 들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아주 거침없이 성서를 인용하고 백성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요7:15)?”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진리를 내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그리고 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그분의 것이니라(요7:16). 사람이 내 아버지의 뜻을 참으로 행하려고 하면, 그는 내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것인지 내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 것이니라(요7:17).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는 그 자신의 영광을 구하나,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선포할 때, 나는 그렇게 하여 나를 보낸 그의 영광을 구하느니라(요7:18). 그러나 너희가 새 빛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전에 도리어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빛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너희 중 몇 명이 정말로 그 요건을 이행하려 하느냐? 모세는 이 율법으로 너희에게 요구하여 ‘살인하지 말라(출20:13).’라고 말하느니라.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너희 중 일부는 인자(人子)를 죽이려고 하느니라(요7:19).”

162:2.2 (1790.5) When the crowd heard these words, they fell to wrangling among themselves. Some said he was mad; some that he had a devil. Others said this was indeed the prophet of Galilee whom the scribes and Pharisees had long sought to kill. Some said the religious authorities were afraid to molest him; others thought that they laid not hands upon him because they had become believers in him. After considerable debate one of the crowd stepped forward and asked Jesus, “Why do the rulers seek to kill you?” And he replied: “The rulers seek to kill me because they resent my teaching about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 gospel that sets men free from the burdensome traditions of a formal religion of ceremonies which these teachers are determined to uphold at any cost. They circumcise in accordance with the law on the Sabbath day, but they would kill me because I once on the Sabbath day set free a man held in the bondage of affliction. They follow after me on the Sabbath to spy on me but would kill me because on another occasion I chose to make a grievously stricken man completely whole on the Sabbath day. They seek to kill me because they well know that, if you honestly believe and dare to accept my teaching, their system of traditional religion will be overthrown, forever destroyed. Thus will they be deprived of authority over that to which they have devoted their lives since they steadfastly refuse to accept this new and more glorious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And now do I appeal to every one of you: Judge not according to outward appearances but rather judge by the true spirit of these teachings; judge righteously.” 군중이 이런 말을 듣자, 그들 중에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일부는 그에게 악마가 있다고 했습니다(요7:20a). 다른 이들은, 이 사람이 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오랫동안 죽이려 했던 갈릴리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요7:25). 어떤 이들은 종교 당국이 그를 괴롭히기 주저한다고 말했습니다(요7:26).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믿게 되어서 그들은 그를 체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당한 토론 후 무리 중 하나가 앞으로 나가 예수께 “통치자들이 왜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요7:20b)?”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답했습니다. “통치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좋은 소식, 이런 선생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옹호하기로 결심한 의례적 형식 종교의 번거로운 전통에서 사람들을 해방하는 복음에 대한 내 가르침에 분개(憤慨)해서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요7:21). 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나, 내가 이전에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을 안식일에 자유롭게 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느니라. 그들이 나를 감시하려고 안식일에 나를 따라다니지만, 또 다른 경우에 내가 심하게 시달리는 사람을 안식일에 완전히 건강하게 되도록 결정했다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요7:22-23). 그들은 너희가 내 가르침을 정직하게 믿고 대담하게 받아들이면, 전통 종교에 속한 자신들의 체계가 무너져, 영원하게 파괴될 것을, 자신들이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이 새로우며 더 영광스러운 복음을 자신들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일생을 바쳤던 것에 대해 지배하는 권위를 빼앗길 것이니라. 그래서 이제 내가 너희 각자에게 호소하느니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가르침의 참된 영(靈)으로 판단하라. 올바로 판단하라(요7:24).”

162:2.3 (1791.1) Then said another inquirer: “Yes, Teacher, we do look for the Messiah, but when he comes, we know that his appearance will be in mystery. We know whence you are. You have been among your brethren from the beginning. The deliverer will come in power to restore the throne of David’s kingdom. Do you really claim to be the Messiah?” And Jesus replied: “You claim to know me and to know whence I am. I wish your claims were true, for indeed then would you find abundant life in that knowledge. But I declare that I have not come to you for myself; I have been sent by the Father, and he who sent me is true and faithful. By refusing to hear me, you are refusing to receive Him who sends me. You, if you will receive this gospel, shall come to know Him who sent me. I know the Father, for I have come from the Father to declare and reveal him to you.” 그러자 또 다른 질문자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메시아를 기대하지만, 그가 올 때, 우리는 그가 신비하게 출현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의 근원을 압니다(요7:27). 당신은 처음부터 당신의 형제 중에 있었습니다. 해방자는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권능으로 올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메시아라고 주장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너는 나와 나의 근원을 안다고 주장하도다. 나는 너희 주장이 진실하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그러면, 너희가 그런 지식으로 풍성한 생명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나는 스스로 너희에게 오지 않았음을 선언하노라.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나를 보내신 그분은 참되고 신실(信實)하시니라. 내 말을 거절하면 나를 보내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니라. 너희가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너희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게 되리라.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그를 선언하고 계시하려고 아버지에게서 왔기 때문이니라(요7:28-29).”

162:2.4 (1791.2) The agents of the scribes wanted to lay hands upon him, but they feared the multitude, for many believed in him. Jesus’ work since his baptism had become well known to all Jewry, and as many of these people recounted these things, they said among themselves: “Even though this teacher is from Galilee, and even though he does not meet all of our expectations of the Messiah, we wonder if the deliverer, when he does come, will really do anything more wonderful than this Jesus of Nazareth has already done.” 서기관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지만(요7:30a),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했습니다. 예수 세례 이후 그의 활동은 온 유대 민족에 잘 알려져 있었고, 이 민족 중 다수가 이런 일들을 자세히 얘기하면서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이 선생님이 갈릴리 출신이고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대를 채우지 않긴 해도, 해방자, 그가 와서, 이 나사렛 예수가 이미 행한 일보다 더 놀라운 어떤 일을 실로 행할지 우리는 미심쩍게 여깁니다(요7:31).”

162:2.5 (1791.3) When the Pharisees and their agents heard the people talking this way, they took counsel with their leaders and decided that something should be done forthwith to put a stop to these public appearances of Jesus in the temple courts. The leaders of the Jews, in general, were disposed to avoid a clash with Jesus, believing that the Roman authorities had promised him immunity. They could not otherwise account for his boldness in coming at this time to Jerusalem; but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did not wholly believe this rumor. They reasoned that the Roman rulers would not do such a thing secretly and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highest governing body of the Jewish nation.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관리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요7:32a), 자기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예수께서 이렇게 공적으로 성전 뜰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즉시 뭔가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대체로 로마 당국이 그에게 보호를 약속했다고 생각하고 예수와 충돌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때 예루살렘에 온 그의 대담함의 이유를 달리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임원들은 이런 소문을 완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 국가 최고 관리 기관에 알리지 않고 몰래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220710 새롭게 살아 있는 길 예수 요7:31-36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31 Still, many in the crowd believed in him. They said, “When the Messiah comes, will he perform more signs than this man?” 32 The Pharisees heard the crowd whispering such things about him. Then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sent temple guards to arrest him. 33 Jesus said, “I am with you for only a short time, and then I am going to the one who sent me. 34 You will look for me, but you wi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35 The Jews said to one another, “Where does this man intend to go that we cannot find him? Will he go where our people live scattered among the Greeks, and teach the Greeks? 36 What did he mean when he said, ‘You will look for me, but you will not find me,’ and ‘Where I am, you cannot come’?”

162:2.6 (1791.4) Accordingly, Eber, the proper officer of the Sanhedrin, with two assistants was dispatched to arrest Jesus. As Eber made his way toward Jesus, the Master said: “Fear not to approach me. Draw near while you listen to my teaching. I know you have been sent to apprehend me, but you should understand that nothing will befall the Son of Man until his hour comes. You are not arrayed against me; you come only to do the bidding of your masters, and even these rulers of the Jews verily think they are doing God’s service when they secretly seek my destruction. 따라서, 산헤드린의 정식 관리, 이버가 두 보좌관과 함께 예수를 체포하도록 급히 파송되었습니다(요7:32). 이버가 예수를 향해 나아가자, 주(主)께서 말했습니다. “내게 다가오기를 두려워 말라. 내 가르침을 들으면서 가까이 오라. 나는 네가 나를 체포하라고 파송된 줄 알지만, 인자(人子)의 때가 오기까지 그에게 아무 일도 생길 수 없음을 네가 알아야 하리라(요7:30). 너는 나를 대적하지 않느니라. 너는 네 상관의 명령대로 왔을 뿐이고, 이 유대 통치자들도 몰래 나를 파멸시키려 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정말로 생각하느니라.

162:2.7 (1792.1) “I bear none of you ill will. The Father loves you, and therefore do I long for your deliverance from the bondage of prejudice and the darkness of tradition. I offer you the liberty of life and the joy of salvation. I proclaim the new and living way, the deliverance from evil and the breaking of the bondage of sin. I have come that you might have life, and have it eternally. You seek to be rid of me and my disquieting teachings. If you could only realize that I am to be with you only a little while! In just a short time I go to Him who sent me into this world. And then will many of you diligently seek me, but you shall not discover my presence, for where I am about to go you cannot come. But all who truly seek to find me shall sometime attain the life that leads to my Father’s presence.” “나는 너희 중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느니라.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시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희가 편견의 굴레와 전통의 무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권하노라. 나는 새롭게 살아있는 길, 악(惡)으로부터의 해방과 죄(罪)의 속박에 대한 절단을 선포하노라. 나는 너희가 생명을 갖되, 영원하게 그것을 가지도록 왔노라. 너희는 나와 동요시키는 내 가르침을 제거하려 하도다. 내가 잠시만 너희와 함께 있음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조금 있으면 나는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그분께 가느니라(요7:33). 그러면 너희 중 여럿이 부지런히 나를 찾을 것이나, 너희가 내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내가 막 가려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음이라(요7:34). 그러나 진실로 나를 찾으려는 누구나 내 아버지의 앞으로 이끄는 생명을 언젠가 얻으리라.”

162:2.8 (1792.2) Some of the scoffers said among themselves: “Where will this man go that we cannot find him? Will he go to live among the Greeks? Will he destroy himself? What can he mean when he declares that soon he will depart from us, and that we cannot go where he goes?” 비웃던 몇 명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그를 발견할 수 없도록 어디로 가려느냐? 그는 그리스인(人) 중에 살려고 가려는가? 그가 자살하려는가? 그가 곧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가 가는 곳에 우리가 갈 수 없다고 그가 선언하니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7:35-36)?”

162:2.9 (1792.3) Eber and his assistants refused to arrest Jesus; they returned to their meeting place without him. When, therefore, the chief priests and the Pharisees upbraided Eber and his assistants because they had not brought Jesus with them, Eber only replied: “We feared to arrest him in the midst of the multitude because many believe in him. Besides, we never heard a man speak like this man. There is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about this teacher. You would all do well to go over to hear him.” And when the chief rulers heard these words, they were astonished and spoke tauntingly to Eber: “Are you also led astray? Are you about to believe in this deceiver? Have you heard that any of our learned men or any of the rulers have believed in him? Have any of the scribes or the Pharisees been deceived by his clever teachings? How does it come that you are influenced by the behavior of this ignorant multitude who know not the law or the prophets? Do you not know that such untaught people are accursed?” And then answered Eber: “Even so, my masters, but this man speaks to the multitude words of mercy and hope. He cheers the downhearted, and his words were comforting even to our souls. What can there be wrong in these teachings even though he may not be the Messiah of the Scriptures? And even then does not our law require fairness? Do we condemn a man before we hear him?” And the chief of the Sanhedrin was wroth with Eber and, turning upon him, said: “Have you gone mad? Are you by any chance also from Galilee? Search the Scriptures, and you will discover that out of Galilee arises no prophet, much less the Messiah.” 이버와 그의 보좌관들은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없이 자기들이 만날 장소로 돌아갔습니다(요7:45).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예수를 데려오지 않아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버와 그 보좌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자, 이버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믿기 때문에 무리 가운데 있는 그를 체포하기에 우리는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요7:46). 이 선생에 대해서 특이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으러 가는 게 모두 좋을 것입니다.” 수석 통치자들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조롱하며 이버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미혹되었느냐(요7:47)? 너는 이 사기꾼을 믿으려느냐? 우리 배운 사람들이나 통치자 중에서 누가 그를 믿었다는 말을 네가 들어봤느냐(요7:48)?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중 누가 그의 교묘한 가르침에 속았느냐? 너희가 어떻게,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모르는, 이런 무지한 군중의 태도에 영향을 받느냐?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이 저주받은 줄 너는 모르느냐(요7:49)?” 그러자 이버가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내 상관들이여, 하지만 이 사람은 군중에게 자비와 소망의 말씀을 강연합니다. 그는 낙담한 자들을 격려하고, 그의 말씀은 우리 혼(魂)들까지 위로했습니다. 그가 성서의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이런 가르침에 무슨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래도, 우리 율법이 공평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 전에 그를 비난합니까(요7:51)?” 그러자 산헤드린의 수석이 이버에게 격노하여 그를 향해 말했습니다. “네가 미쳤느냐? 너도 혹시 갈릴리 출신이냐? 성서를 살펴보라, 그러면 메시아는 고사하고, 갈릴리 출신의 어떤 선지자도 나올 수 없음을 네가 발견할 것이라(요7:52).”

162:2.10 (1792.4) The Sanhedrin disbanded in confusion, and Jesus withdrew to Bethany for the night. 산헤드린은 당황하여 해산했고(요7:53), 예수께서 잠자기 위해 베다니로 물러가셨습니다.

3.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간통(姦通)으로 잡혀 온 여성

220717 우리를 아시는 예수 요8:2-11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2 Now early in the morning He came again into the temple, and all the people came to Him;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3 Then the scribes and Pharisees brought to Him a woman caught in adultery. And when they had set her in the midst, 4 they said to Him, “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adultery, in the very act. 5 Now Moses, in the law, commanded us that such should be stoned. But what do You say?” 6 This they said, testing Him, that they might have something of which to accuse Him. But Jesus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with His finger, as though He did not hear. 7 So when they continued asking Him, He raised Himself up and said to them, “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throw a stone at her first.” 8 And again He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9 Then those who heard it, being convicted by their conscience, went out one by one, beginning with the oldest even to the last. And Jesus was left alone, and the woman standing in the midst. 10 When Jesus had raised Himself up and saw no one but the woman, He said to her, “Woman, where are those accusers of yours? Has no one condemned you?” 11 She said, “No one, Lord.” And Jesus said to her,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162:3.1 (1792.5) It was during this visit to Jerusalem that Jesus dealt with a certain woman of evil repute who was brought into his presence by her accusers and his enemies. The distorted record you have of this episode would suggest that this woman had been brought before Jesus by the scribes and Pharisees, and that Jesus so dealt with them as to indicate that these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might themselves have been guilty of immorality. Jesus well knew that, while these scribes and Pharisees were spiritually blind and intellectually prejudiced by their loyalty to tradition, they were to be numbered among the most thoroughly moral men of that day and generation. 이렇게 예루살렘을 방문한 기간에 예수께서 여성의 고발(告發)자와 그의 대적들이 예수 앞에 데려온, 평판이 나쁜 어떤 여성을 다루셨습니다. 이 일화에 대해 너희가 지닌 왜곡된 기록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성을 예수 앞에 데려왔고,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 자신이 부도덕한 짓을 했다고 암시하면서 예수께서 그들을 다루셨다고 말합니다(요8:2-11).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으로 영적으로 눈이 멀고 지적으로 편견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 당시 가장 철저히 도덕적인 사람들로 간주해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162:3.2 (1793.1) What really happened was this: Early the third morning of the feast, as Jesus approached the temple, he was met by a group of the hired agents of the Sanhedrin who were dragging a woman along with them. As they came near, the spokesman said: “Master, this woman was taken in adultery — in the very act. Now, the law of Moses commands that we should stone such a woman. What do you say should be done with her?”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러했습니다. 절기의 셋째 날 일찍, 예수께서 성전에 가까이 갔을 때, 한 여성을 끌고 가는 산헤드린의 고용인 집단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그 대변인이 말했습니다. “주(主)여, 이 여성은 바로 간통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바로 모세 율법은, 우리가 그런 여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당신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162:3.3 (1793.2) It was the plan of Jesus’ enemies, if he upheld the law of Moses requiring that the self-confessed transgressor be stoned, to involve him in difficulty with the Roman rulers, who had denied the Jews the right to inflict the death penalty without the approval of a Roman tribunal. If he forbade stoning the woman, they would accuse him before the Sanhedrin of setting himself up above Moses and the Jewish law. If he remained silent, they would accuse him of cowardice. But the Master so managed the situation that the whole plot fell to pieces of its own sordid weight. 예수께서 자인(自認 스스로 인정)하는 죄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요구하는 모세의 율법을 지지하면, 로마 법정의 승인 없이 유대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로마 통치자들과 논쟁에 그를 빠뜨리려는 것이 예수 대적들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가 여성을 돌로 쳐 죽이지 말라고 하면, 그들은 산헤드린 앞에서 모세와 유대의 율법보다 높은 체한다고 그를 고발하려 했습니다. 그가 침묵을 지키면, 그들은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主)님이 그 상황을 잘 다루어 모든 계략이 그 자체의 야비한 무게로 좌절되었습니다.

162:3.4 (1793.3) This woman, once comely, was the wife of an inferior citizen of Nazareth, a man who had been a troublemaker for Jesus throughout his youthful days. The man, having married this woman, did most shamefully force her to earn their living by making commerce of her body. He had come up to the feast at Jerusalem that his wife might thus prostitute her physical charms for financial gain. He had entered into a bargain with the hirelings of the Jewish rulers thus to betray his own wife in her commercialized vice. And so they came with the woman and her companion in transgression for the purpose of ensnaring Jesus into making some statement which could be used against him in case of his arrest. 한때 아름다웠던 이 여성은, 예수의 청년 시절 내내 예수께 말썽꾼이었던 사람, 나사렛의 질 낮은 시민의 아내였습니다. 이 여성과 결혼한 그 사람은 그녀의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도록 가장 치욕스럽게 그녀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자기 아내가 그녀의 육체적 매력을 이렇게 팔 수 있도록 예루살렘 절기에 왔습니다. 그는 유대 통치자들의 고용인들과 흥정하여 이렇게 자기 아내를 상업적 매춘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들은 예수가 체포될 때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진술을 만들려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죄를 범한 여성 및 그녀의 짝패와 함께 왔습니다.

162:3.5 (1793.4) Jesus, looking over the crowd, saw her husband standing behind the others. He knew what sort of man he was and perceived that he was a party to the despicable transaction. Jesus first walked around to near where this degenerate husband stood and wrote upon the sand a few words which caused him to depart in haste. Then he came back before the woman and wrote again upon the ground for the benefit of her would-be accusers; and when they read his words, they, too, went away, one by one. And when the Master had written in the sand the third time, the woman’s companion in evil took his departure, so that, when the Master raised himself up from this writing, he beheld the woman standing alone before him. Jesus said: “Woman, where are your accusers? did no man remain to stone you?” And the woman, lifting up her eyes, answered, “No man, Lord.” And then said Jesus: “I know about you; neither do I condemn you. Go your way in peace.” And this woman, Hildana, forsook her wicked husband and joined herself to the disciples of the kingdom. 군중을 살펴본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 뒤에 서 있는 그녀의 남편을 봤습니다. 그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아시고, 그가 비열한 거래의 패거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는 먼저 이렇게 타락한 남편이 서 있는 근처 주위로 가서, 모래 위에 몇 마디를 써서 그가 허둥지둥 떠나게 했습니다. 그다음에 그는 여성 앞에 돌아와 그녀를 고발하려는 자들을 위해 땅 위에 다시 썼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의 말을 읽고 그들도 하나씩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主)께서 세 번째 모래에 쓰자, 여성의 악한 짝패가 떠나갔고, 그리하여 주(主)께서 이런 글에서 일어서자, 그는 자신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너의 고발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더냐?” 그러자 여성이 눈을 들어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노라. 나도 너를 비난하지 않노라. 평안히 네 길을 가거라.” 그리고 이 여성, 힐다나는 그녀의 사악한 남편을 저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에 들어갔습니다(*아나마르테토스 – 범죄의 가능성이 없는 자만이 자격이 있느니라. 모태에서 태어나면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 것).

4.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帳幕節)

220724 신성(神性)을 선포하는 장막절(帳幕節) 레23:39-43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9 “ ‘So beginning with the fifte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after you have gathered the crops of the land, celebrate the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the first day is a day of sabbath rest, and the eighth day also is a day of sabbath rest. 40 On the first day you are to take branches from luxuriant trees—from palms, willows and other leafy trees—and rejoice before the LORD your God for seven days. 41 Celebrate this as a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each year. This is to be a lasting ordinance for the generations to come; celebrate it in the seventh month. 42 Live in temporary shelters for seven days: All native-born Israelites are to live in such shelters 43 so your descendants will know that I had the Israelites live in temporary shelters when I brought them out of Egypt. I am the LORD your God.’ ”

162:4.1 (1793.5) The presence of people from all of the known world, from Spain to India, made the feast of tabernacles an ideal occasion for Jesus for the first time publicly to proclaim his full gospel in Jerusalem. At this feast the people lived much in the open air, in leafy booths. It was the feast of the harvest ingathering, and coming, as it did, in the cool of the autumn months, it was more generally attended by the Jews of the world than was the Passover at the end of the winter or Pentecost at the beginning of summer. The apostles at last beheld their Master making the bold announcement of his mission on earth before all the world, as it were.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알려진 세상 모두에서 사람들이 참석하여서, 장막절(帳幕節)은 예수께서 처음 공적으로 자신의 충만한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호기(好機)였습니다. 이 절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야외 초막(草幕)에서 지냈습니다. 이것은 추수(秋收) 수확 절기로, 가을철 서늘할 때, 다가왔듯이, 겨울 끝의 유월절이나 여름 시작의 오순절보다 대개 세상의 유대인들이 더 많이 참석했습니다. 사도들은 이를테면 결국 온 세상 앞에 자신의 지상 사명을 담대히 선언하는 자기들의 주(主)를 지켜보았습니다.

162:4.2 (1794.1) This was the feast of feasts, since any sacrifice not made at the other festivals could be made at this time. This was the occasion of the reception of the temple offerings; it was a combination of vacation pleasures with the solemn rites of religious worship. Here was a time of racial rejoicing, mingled with sacrifices, Levitical chants, and the solemn blasts of the silvery trumpets of the priests. At night the impressive spectacle of the temple and its pilgrim throngs was brilliantly illuminated by the great candelabras which burned brightly in the court of the women as well as by the glare of scores of torches standing about the temple courts. The entire city was gaily decorated except the Roman castle of Antonia, which looked down in grim contrast upon this festive and worshipful scene. And how the Jews did hate this ever-present reminder of the Roman yoke! 다른 절기에 드리지 않은 제물을 이때 드렸기 때문에, 이것은 절기 중 절기였습니다. 이때 성전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휴가를 보내는 즐거움과 종교적 숭배의 엄숙한 의식(儀式)의 결합이었습니다. 이때는 제물, 레위인(人)의 성가와 제사장들의 장중한 은빛 나팔 소리가 섞여, 민족이 기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밤에는, 성전 뜰 주위에 서 있는 번쩍이는 수십 개의 횃불과 동시에 여인의 뜰에서 밝게 타올랐던 나뭇가지 모양의 커다란 촛대로, 성전과 그 순례자 무리의 인상적인 장관이 번쩍번쩍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흥겨운 숭배 장면과 엄연히 대조적으로 내려다보던 로마의 안토니아 성곽을 제외한 전(全) 도시가 호화스럽게 꾸며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항상 있어서, 로마의 속박을 생각나게 하는 이 성곽을 얼마나 몹시 싫어했는지!

162:4.3 (1794.2) Seventy bullocks were sacrificed during the feast, the symbol of the seventy nations of heathendom. The ceremony of the outpouring of the water symbolized the outpouring of the divine spirit. This ceremony of the water followed the sunrise procession of the priests and Levites. The worshipers passed down the steps leading from the court of Israel to the court of the women while successive blasts were blown upon the silvery trumpets. And then the faithful marched on toward the Beautiful Gate, which opened upon the court of the gentiles. Here they turned about to face westward, to repeat their chants, and to continue their march for the symbolic water. 절기 중에 이교도 70개 국가를 상징하는, 황소 70마리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예식(禮式)은 신적 영(靈)의 흘러나옴을 상징했습니다. 이런 물 예식은 제사장들과 레위인(人)들의 해돋이 행진 뒤에 일어났습니다. 예배자들은 은빛 나팔 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이끄는 계단 아래로 지나갔습니다. 그런 후 충실한 신자들이, 이방인의 뜰 쪽을 향해 있는, 미문(美文)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서쪽을 향해 회전하여, 성가를 반복하면서 상징적인 물을 향해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162:4.4 (1794.3) On the last day of the feast almost four hundred and fifty priests with a corresponding number of Levites officiated. At daybreak the pilgrims assembled from all parts of the city, each carrying in the right hand a sheaf of myrtle, willow, and palm branches, while in the left hand each one carried a branch of the paradise apple — the citron, or the “forbidden fruit.” These pilgrims divided into three groups for this early morning ceremony. One band remained at the temple to attend the morning sacrifices; another group marched down below Jerusalem to near Maza to cut the willow branches for the adornment of the sacrificial altar, while the third group formed a procession to march from the temple behind the water priest, who, to the sound of the silvery trumpets, bore the golden pitcher which was to contain the symbolic water, out through Ophel to near Siloam, where was located the fountain gate. After the golden pitcher had been filled at the pool of Siloam, the procession marched back to the temple, entering by way of the water gate and going directly to the court of the priests, where the priest bearing the water pitcher was joined by the priest bearing the wine for the drink offering. These two priests then repaired to the silver funnels leading to the base of the altar and poured the contents of the pitchers therein. The execution of this rite of pouring the wine and the water was the signal for the assembled pilgrims to begin the chanting of the Psalms from 113 to 118 inclusive, in alternation with the Levites. And as they repeated these lines, they would wave their sheaves at the altar. Then followed the sacrifices for the day, associated with the repeating of the Psalm for the day, the Psalm for the last day of the feast being the eighty-second, beginning with the fifth verse. 절기의 마지막 날, 거의 450명의 제사장과 그에 상응하는 레위인들이 함께 집례(執禮)했습니다. 동틀녘 순례자들이, 각자 오른손에 한 다발의 도금양, 버드나무,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동시에 왼손에는 천국 사과 – 유자(柚子) 또는 “금단의 열매” 가지를 들고, 도시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이런 순례자들은 이른 아침 예식을 위해 세 집단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아침 제사에 참석하려고 성전에 남았습니다. 다른 집단은 희생 제단을 꾸미는 버드나무 가지를 자르려고 마자 근처, 예루살렘 아래로 행진하며 내려갔고 동시에, 셋째 집단은 은빛 나팔 소리에 따라, 상징적 물을 담을 금빛 단지를 메고 있던 물 제사장 뒤에서 성전에서부터 행진하려고 행렬을 지어, 오펠을 통해 실로암 근처로 나갔는데, 그곳에는 샘문(門)이 있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금빛 단지를 다 채운 뒤, 행렬은 성전으로 되돌아 행진하여, 수문(水門)으로 들어가 곧바로 제사장의 뜰로 가서, 그곳에서 물단지를 멘 제사장은 제주(祭酒 제삿술)용 포도주를 멘 제사장과 합류했습니다. 그다음 이 두 제사장은 제단 바닥으로 이어진 좁은 은(銀)통로로 가서 거기에 단지의 내용물을 부었습니다. 포도주와 물을 붓는 이런 예식 집행은 모인 순례자들이 레위인(人)과 교대로, 시편113편에서 118편까지 포함하여 성가(聖歌)를 시작하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구절들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제단을 향해 자신들의 다발을 흔들곤 했습니다. 그런 후, 절기 중 마지막 날의 시편은 5번째 절로 시작하는 82번째 절이며, 그날의 시편 반복과 관련된, 그날 제사가 뒤따랐습니다.

5. Sermon on the L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에 대한 설교

220731 세상의 빛, 예수 요8:12-30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12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13 The Pharisees challenged him, “Here you are, appearing as your own witness; your testimony is not valid.” 14 Jesus answered, “Even if I testify on my own behalf, my testimony is valid, for I know where I came from and where I am going. But you have no idea where I come from or where I am going. 15 You judge by human standards; I pass judgment on no one. 16 But if I do judge, my decisions are true, because I am not alone. I stand with the Father, who sent me. 17 In your own Law it is written that the testimony of two witnesses is true. 18 I am one who testifies for myself; my other witness is the Father, who sent me.” 19 Then they asked him, “Where is your father?” “You do not know me or my Father,” Jesus replied. “If you knew me, you would know my Father also.” 20 He spoke these words while teaching in the temple courts near the place where the offerings were put. Yet no one seized him, because his hour had not yet come. 21 Once more Jesus said to them, “I am going away, and you will look for me, and you will die in your sin. Where I go, you cannot come.” 22 This made the Jews ask, “Will he kill himself? Is that why he says, ‘Where I go, you cannot come’?” 23 But he continued,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24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h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25 “Who are you?” they asked. “Just what I have been telling you from the beginning,” Jesus replied. 26 “I have much to say in judgment of you. But he who sent me is trustworthy, and what I have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27 They did not understand that he was telling them about his Father. 28 So Jesus said, “When you have lifted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speak just what the Father has taught me. 29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for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30 Even as he spoke, many believed in him.

162:5.1 (1794.4) On the evening of the next to the last day of the feast, when the scene was brilliantly illuminated by the lights of the candelabras and the torches, Jesus stood up in the midst of the assembled throng and said: 절기의 끝날 전야(前夜)에 가지 촛대와 횃불의 광명으로 번쩍번쩍 조명을 받는 현장(現場)에, 예수께서 모인 무리 중에 일어나 말했습니다.

162:5.2 (1795.1) “I am the light of the world. He who follows me shall not walk in darkness but shall have the light of life. Presuming to place me on trial and assuming to sit as my judges, you declare that, if I bear witness of myself, my witness cannot be true. But never can the creature sit in judgment on the Creator. Even if I do bear witness about myself, my witness is everlastingly true, for I know whence I came, who I am, and whither I go. You who would kill the Son of Man know not whence I came, who I am, or whither I go. You only judge by the appearances of the flesh; you do not perceive the realities of the spirit. I judge no man, not even my archenemy. But if I should choose to judge, my judgment would be true and righteous, for I would judge not alone but in association with my Father, who sent me into the world, and who is the source of all true judgment. You even allow that the witness of two reliable persons may be accepted — well, then, I bear witness of these truths; so also does my Father in heaven. And when I told you this yesterday, in your darkness you asked me, ‘Where is your Father?’ Truly, you know neither me nor my Father, for if you had known me, you would also have known the Father.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나를 재판에 넘겨 나의 재판관으로 앉으려는 너희는, 내가 스스로 증언하면, 내 증언이 참될 수 없다고 밝히는구나(요8:13). 그러나 창조물은 결코 창조주를 재판할 수 없느니라. 내가 자신에 대해 증언해도 내 증언이 한없이 참되니, 이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니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죽이려는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느니라(요8:14). 너희는 육신의 모습으로 판단할 뿐이니라. 너희는 영(靈)의 실체를 알아채지 못하느니라. 나는 아무도, 내 대적(大敵)도 심판하지 않노라(요8:15). 그러나 내가 심판하기로 해도, 내 심판은 참되고 공정하니, 이는 내가 단독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보내셨고, 모든 참된 심판의 근원이신, 내 아버지와 공동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니라(요8:16). 너희가 믿음직한 2명의 증언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도 하니(요8:17), 자, 그러면 내가 이런 실상의 증인이 되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도 그러하니라(요8:18). 내가 어제 이것을 너희에게 말했을 때, 너희 어둠 속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내게 물었도다. 참으로, 너희는 나도, 내 아버지도 모르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너희가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니라(요8:19).

162:5.3 (1795.2) “I have already told you that I am going away, and that you will seek me and not find me, for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You who would reject this light are from beneath; I am from above. You who prefer to sit in darkness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and I live in the eternal light of the Father of lights. You all have had abundant opportunity to learn who I am, but you shall have still other evidence confirming the identity of the Son of Man. I am the light of life, and every one who deliberately and with understanding rejects this saving light shall die in his sins. Much I have to tell you, but you are unable to receive my words. However, he who sent me is true and faithful; my Father loves even his erring children. And all that my Father has spoken I also proclaim to the world. “내가 떠날 것이며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가려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느니라(162:2.7). 이 빛을 거절하려는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느니라. 어둠에 앉아 있는 편을 좋아하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들의 아버지에게 속한 영원한 빛 안에 살고 있느니라(요8:23). 너희는 모두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신원(身元)을 증명하는 다른 증거를 여전히 가지려 하는구나. 나는 생명의 빛이며, 구원의 이 빛을 고의로, 이해하면서 거절하는 누구나 자기 죄(罪) 가운데 죽을 것이라(요8:24).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나를 보낸 그분은 참되고 신실하시니라. 내 아버지는 실수하는 자기 자녀들까지 사랑하시느니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나도 세상에 선포하노라(요8:26).

162:5.4 (1795.3) “When the Son of Man is lifted up, then shall you all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have done nothing of myself but only as the Father has taught me. I speak these words to you and to your children. And he who sent me is even now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for I do always that which is pleasing in his sight.”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들려 오를 그때, 내가 그인 것과 내가 스스로 전혀 하지 않고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대로만 했음을 너희가 모두 알리라. 나는 이 말을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하노라. 나를 보낸 그분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셨으니, 내가 늘 그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니라(요8:28-29).”

162:5.5 (1795.4) As Jesus thus taught the pilgrims in the temple courts, many believed. And no man dared to lay hands upon him. 예수께서 이렇게 성전 뜰에서 순례자들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요8:30).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6. Discourse on the Water of Life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220807 생명의 물, 예수 요7:37-44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37 On the last and greatest day of the festival, Jesus stood and said in a loud voice, “Let anyone who is thirsty come to me and drink. 38 Whoever believes in me, as Scripture has said,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39 By this he meant the Spirit, whom those who believed in him were later to receive. Up to that time the Spirit had not been given, since Jesus had not yet been glorified. 40 On hearing his words, some of the people said, “Surely this man is the Prophet.” 41 Others said, “He is the Messiah.” Still others asked, “How can the Messiah come from Galilee? 42 Does not Scripture say that the Messiah will come from David’s descendants and from Bethlehem, the town where David lived?” 43 Thus the people were divided because of Jesus. 44 Some want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a hand on him.

162:6.1 (1795.5) On the last day, the great day of the feast, as the procession from the pool of Siloam passed through the temple courts, and just after the water and the wine had been poured down upon the altar by the priests, Jesus, standing among the pilgrims, said: “If any man thirst,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From the Father above I bring to this world the water of life. He who believes me shall be filled with the spirit which this water represents, for even the Scriptures have said, ‘Out of him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s.’ When the Son of Man has finished his work on earth, there shall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the living Spirit of Truth. Those who receive this spirit shall never know spiritual thirst.” 절기 끝날, 큰 날에 실로암 못에서 행렬이 성전 뜰을 지나, 제사장들이 물과 포도주를 제단에 부은 직후에, 예수께서 순례자 중에 선 채로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내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생명의 물을 이 세상에 가져오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이 물이 상징하는 영(靈)으로 충만하리니, ‘그 안에서부터 생수(生水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라고 성서도 말했느니라(사44:3, 슥14:8).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 지상에서 자기 일을 마치면 살아있는 진리의 영(靈)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리라. 이 영(靈)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적 목마름을 결코 모를 것이라.”

162:6.2 (1795.6) Jesus did not interrupt the service to speak these words. He addressed the worshipers immediately after the chanting of the Hallel, the responsive reading of the Psalms accompanied by waving of the branches before the altar. Just here was a pause while the sacrifices were being prepared, and it was at this time that the pilgrims heard the fascinating voice of the Master declare that he was the giver of living water to every spirit-thirsting soul.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려고 예배를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단 앞에서 가지를 흔들면서 시편을 교독하는, 할렐의 성가(聖歌) 직후에 예배자들에게 연설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물이 준비되는 동안 잠시 멈췄고, 이때 순례자들은 주(主)께서 영적으로 목마른 모든 혼(魂)에게 생명수(生命水)를 주는 자라고 선언하는 그의 매혹적인 음성을 들었습니다.

162:6.3 (1796.1) At the conclusion of this early morning service Jesus continued to teach the multitude, saying: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 ‘Behold, as the waters are poured out upon the dry ground and spread over the parched soil, so will I give the spirit of holiness to be poured out upon your children for a blessing even to your children’s children’? Why will you thirst for the ministry of the spirit while you seek to water your souls with the traditions of men, poured from the broken pitchers of ceremonial service? That which you see going on about this temple is the way in which your fathers sought to symbolize the bestowal of the divine spirit upon the children of faith, and you have done well to perpetuate these symbols, even down to this day. But now has come to this generation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of spirits through the bestowal of his Son, and all of this will certainly be followed by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upon the children of men. To every one who has faith shall this bestowal of the spirit become the true teacher of the way which leads to life everlasting, to the true waters of life in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and in the Father’s Paradise over there.” 이런 이른 아침 예배가 끝나자 예수께서 계속 군중을 가르치며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보라, 물이 마른 땅에 부어져 마른 흙을 덮듯이, 내가 거룩한 영(靈)을 너희 자녀 위에 부어서, 너희 자녀의 자녀까지 축복하리라.’라는 말씀을 읽지 않았느냐(사44:3)? 너희가 의식적 예배의 깨진 단지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전통으로 너희 혼(魂)들에 물을 주려 하는 한, 너희가 왜 영(靈)의 사역을 갈망하겠느냐? 너희가 보는 대로 이 성전 주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자녀들에게 주는 신적 영(靈)을 상징하려 했던 너희 조상들의 방식이며, 너희는 이런 상징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영속시켰노라. 그러나 이제 이 세대에 아버지 아들의 증여를 통해 영(靈)들의 아버지를 계시했고, 이런 모든 일에 뒤이어 아버지와 아들에 속한 영(靈)의 증여가 사람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따라오리라. 신앙을 가진 모두에게 이 영(靈)의 증여는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와 저기 아버지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수(生命水)로 이끄는 길의 참된 선생이 되리라.”

162:6.4 (1796.2) And Jesus continued to answer the questions of both the multitude and the Pharisees. Some thought he was a prophet; some believed him to be the Messiah; others said he could not be the Christ, seeing that he came from Galilee, and that the Messiah must restore David’s throne. Still they dared not arrest him.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계속 대답하셨습니다. 일부는 그를 선지자로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그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가 갈릴리 출신이며 메시아는 다윗의 보좌를 회복해야 하므로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를 체포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7. The Discourse on Spiritual Freedom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220814 영적 자유를 주시는 예수 요8:31-59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31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32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33 They answered him, “We are Abraham’s descendants and have never been slaves of anyone. How can you say that we shall be set free?” 34 Jesus replied, “Very truly I tell you, everyone who sins is a slave to sin. 35 Now a slave has no permanent place in the family, but a son belongs to it forever. 36 So if the Son sets you free, you will be free indeed. 37 I know that you are Abraham’s descendants. Yet you are looking for a way to kill me, because you have no room for my word. 38 I am telling you what I have seen in the Father’s presence, and you are doing what you have heard from your father.” 39 “Abraham is our father,” they answered. “If you were Abraham’s children,” said Jesus, “then you would do what Abraham did. 40 As it is, you are looking for a way to kill me, a man who has told you the truth that I heard from God. Abraham did not do such things. 41 You are doing the works of your own father.” “We are not illegitimate children,” they protested. “The only Father we have is God himself.” 42 Jesus said to them, “If God were your Father, you would love me, for I have come here from God. I have not come on my own; God sent me. 43 Why is my language not clear to you? Because you are unable to hear what I say. 44 You belong to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carry out your father’s desires.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not holding to the truth, for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his native languag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45 Yet because I tell the truth, you do not believe me! 46 Can any of you prove me guilty of sin? If I am telling the truth, why don’t you believe me? 47 Whoever belongs to God hears what God says. The reason you do not hear is that you do not belong to God.” 48 The Jews answered him, “Aren’t we right in saying that you are a Samaritan and demon-possessed?” 49 “I am not possessed by a demon,” said Jesus, “but I honor my Father and you dishonor me. 50 I am not seeking glory for myself; but there is one who seeks it, and he is the judge. 51 Very truly I tell you, whoever obey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52 At this they exclaimed, “Now we know that you are demon-possessed! Abraham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yet you say that whoever obeys your word will never taste death. 53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He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Who do you think you are?” 54 Jesus replied, “If I glorify myself, my glory means nothing. My Father, whom you claim as your God, is the one who glorifies me. 55 Though you do not know him, I know him. If I said I did not, I would be a liar like you, but I do know him and obey his word. 56 Your father Abraham rejoiced at the thought of seeing my day; he saw it and was glad.” 57 “You are not yet fifty years old,” they said to him, “and you have seen Abraham!” 58 “Very truly I tell you,” Jesus answered, “before Abraham was born, I am!” 59 At this, they picked up stones to stone him, but Jesus hid himself, slipping away from the temple grounds.

162:7.1 (1796.3) On the afternoon of the last day of the feast and after the apostles had failed in their efforts to persuade him to flee from Jerusalem, Jesus again went into the temple to teach. Finding a large company of believers assembled in Solomon’s Porch, he spoke to them, saying: 절기의 끝날 오후 사도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피하도록 설득하는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 가르쳤습니다.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에 모인 많은 신자 일행을 발견하자,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62:7.2 (1796.4) “If my words abide in you and you are minded to do the will of my Father, then are you truly my disciples.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I know how you will answer me: We are the children of Abraham, and we are in bondage to none; how then shall we be made free? Even so, I do not speak of outward subjection to another’s rule; I refer to the liberties of the soul. Verily, verily, I say to you, everyone who commits sin is the bond servant of sin. And you know that the bond servant is not likely to abide forever in the master’s house. You also know that the son does remain in his father’s house. If, therefore, the Son shall make you free, shall make you sons, you shall be free indeed.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너희는 진실로 내 제자이니라.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내게 어떻게 대답할지 나는 아노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우리는 아무에게도 노예가 아닌데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되나요(요8:31-33)? 그렇지만 내 말은 다른 사람의 통치에 대한 외적 복종이 아니니라. 나는 혼(魂)의 해방을 언급하고 있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罪)를 범하는 자마다 죄(罪)의 종이라. 너희가 알거니와 종은 주인의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느니라. 또한 너희가 알거니와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여 너희를 아들들로 삼으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요8:34-36).

162:7.3 (1796.5) “I know that you are Abraham’s seed, yet your leaders seek to kill me because my word has not been allowed to have its transforming influence in their hearts. Their souls are sealed by prejudice and blinded by the pride of revenge. I declare to you the truth which the eternal Father shows me, while these deluded teachers seek to do the things which they have learned only from their temporal fathers. And when you reply that Abraham is your father, then do I tell you that, if you were the children of Abraham, you would do the works of Abraham. Some of you believe my teaching, but others seek to destroy me because I have told you the truth which I received from God. But Abraham did not so treat the truth of God. I perceive that some among you are determined to do the works of the evil one. If God were your Father, you would know me and love the truth which I reveal. Will you not see that I come forth from the Father, that I am sent by God, that I am not doing this work of myself? Why do you not understand my words? Is it because you have chosen to become the children of evil? If you are the children of darkness, you will hardly walk in the light of the truth which I reveal. The children of evil follow only in the ways of their father, who was a deceiver and stood not for the truth because there came to be no truth in him. But now comes the Son of Man speaking and living the truth, and many of you refuse to believe. “내가 알거니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너희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변화시키는 내 말의 감화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그들의 혼(魂)은 편견(偏見)으로 막혀있고 복수의 자만심으로 눈이 멀어 있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신 진리를 선언하는 반면에, 미혹된 이 선생들은 단지 자기 현세 조상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너희가 대답하면,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행위를 해야 하리라고 말하게 되느니라. 너희 중 일부가 내 가르침을 믿지만, 내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는 다른 사람들도 있느니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진리를 그렇게 다루지 않았느니라. 너희 중 일부가 악마의 행위를 하려고 결심한 것을 내가 아노라. 하느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계시한 진리를 사랑하리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하느님이 나를 보내시며, 내가 스스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왜 너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惡)의 자녀가 되기로 택했기 때문이냐? 너희가 어둠의 자녀라면 너희는 내가 계시한 진리의 빛 가운데 거의 걷지 못할 것이라. 악(惡)의 자녀는, 사기(詐欺)꾼이며 자기 안에 진리가 없어서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은, 그들 아버지의 길을 따를 뿐이라. 이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와서 진리를 말하고 살지만, 너희 대부분이 믿으려 하지 않도다(요8:37-45).

162:7.4 (1797.1) “Which of you convicts me of sin? If I, then, proclaim and live the truth shown me by the Father, why do you not believe? He who is of God hears gladly the words of God; for this cause many of you hear not my words, because you are not of God. Your teachers have even presumed to say that I do my works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One near by has just said that I have a devil, that I am a child of the devil. But all of you who deal honestly with your own souls know full well that I am not a devil. You know that I honor the Father even while you would dishonor me. I seek not my own glory, only the glory of my Paradise Father. And I do not judge you, for there is one who judges for me. “너희 중 누가 나의 유죄를 입증하느냐? 그럼,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신 진리를 내가 선포하고 산다면,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 하느님께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느니라. 이 때문에 너희 다수가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너희가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함이니라. 너희 선생들은 내가 악령의 괴수(魁首)에 속한 권세로 내가 행한다고 주제넘게 나서기까지 했느니라. 가까이 있던 사람이 방금 나에게 악마가 있으며 악마의 자녀라고 말했느니라. 그러나 너희 자신의 혼(魂)들을 정직하게 다루는 너희는 모두 내가 악마가 아님을 아주 잘 아느니라. 너희가 나를 모욕하는 동안에도 내가 아버지께 영광 돌림을 너희가 아느니라. 나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내 천국 아버지의 영광만 구하느니라. 그리고 나를 위해 심판하는 분이 있어서 나는 너희를 심판하지 않느니라(요8:46-50).

162:7.5 (1797.2) “Verily, verily, I say to you who believe the gospel that, if a man will keep this word of truth alive in his heart, he shall never taste death. And now just at my side a scribe says this statement proves that I have a devil, seeing that Abraham is dead, also the prophets. And he asks: ‘Are you so much greater than Abraham and the prophets that you dare to stand here and say that whoso keeps your word shall not taste death? Who do you claim to be that you dare to utter such blasphemies?’ And I say to all such that, if I glorify myself, my glory is as nothing. But it is the Father who shall glorify me, even the same Father whom you call God. But you have failed to know this your God and my Father, and I have come to bring you together; to show you how to become truly the sons of God. Though you know not the Father, I truly know him. Even Abraham rejoiced to see my day, and by faith he saw it and was glad.” “진실로 진실로 내가 복음을 믿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이 진리의 말씀을 자기 심정에 살아 있는 상태로 간직하면 그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조금 전에 내 옆의 서기관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은 것으로 보아 내게 악마가 있음을 이 진술로 입증한다고 말하느니라. 그리고 그가 묻기를 ‘당신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훨씬 위대하여 감히 여기에 서서 당신의 말을 지키는 누구나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감히 그런 신성모독을 발언하니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합니까?’ 내가 모두에게 이르노니, 내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이니라. 그러나 나를 영화롭게 하실 아버지는 너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정말로, 바로 그 아버지시니라. 그러나 너희가 끝내 너희 하느님과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말아서, 내가 너희를 불러 모아,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되는지 너희에게 보이려고 왔느니라. 너희는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나는 진실로 그를 아느니라. 아브라함조차 나의 때 보기를 기뻐했고 그는 신앙으로 그것을 보고 기뻐했느니라(요8:51-56).”

162:7.6 (1797.3) When the unbelieving Jews and the agents of the Sanhedrin who had gathered about by this time heard these words, they raised a tumult, shouting: “You are not fifty years of age, and yet you talk about seeing Abraham; you are a child of the devil!” Jesus was unable to continue the discourse. He only said as he departed, “Verily, verily, I say to you, before Abraham was, I am.” Many of the unbelievers rushed forth for stones to cast at him, and the agents of the Sanhedrin sought to place him under arrest, but the Master quickly made his way through the temple corridors and escaped to a secret meeting place near Bethany where Martha, Mary, and Lazarus awaited him. 이때 주위에 모였던,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이런 말을 듣고, 소동을 일으켜 외쳤습니다. “당신은 오십이 아닌 데도 아브라함을 본 것에 대해 말하니, 당신은 악마의 자녀라!” 예수님은 계속 강연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떠나시며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믿으려 하지 않는 다수가 그에게 돌을 던지려고 앞으로 달려들었고,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그를 구속하려 했지만, 주님은 급히 성전 회랑을 지나가 마르다, 마리아와 나사로가 그를 기다리던 베다니 근처 비밀 합류점으로 피했습니다(요8:57-59).

8. The Visit with Martha and Mary 마르다와 마리아 심방(尋訪 찾아서 방문)

220828 때와 우선순위 눅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8 As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n their way, he came to a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opened her home to him. 39 She had a sister called Mary, who sat at the Lord’s feet listening to what he said. 40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all the preparations that had to be made. She came to him and asked, “Lord, don’t you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to do the work by myself? Tell her to help me!” 41 “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42 but few things are needed—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162:8.1 (1797.4) It had been arranged that Jesus should lodge with Lazarus and his sisters at a friend’s house, while the apostles were scattered here and there in small groups, these precautions being taken because the Jewish authorities were again becoming bold with their plans to arrest him. 예수께서 나사로 및 그의 자매들과 친구 집에 유숙(留宿)하기로 정했고, 한편 사도들은 소그룹으로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이런 예방책을 취한 것은 유대 당국이 그를 체포하려는 계획에 다시 대담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8.2 (1797.5) For years it had been the custom for these three to drop everything and listen to Jesus’ teaching whenever he chanced to visit them. With the loss of their parents, Martha had assumed the responsibilities of the home life, and so on this occasion, while Lazarus and Mary sat at Jesus’ feet drinking in his refreshing teaching, Martha made ready to serve the evening meal. It should be explained that Martha was unnecessarily distracted by numerous needless tasks, and that she was cumbered by many trivial cares; that was her disposition. 수년 동안 그가 그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셋은 모두 내려놓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부모를 잃고, 마르다가 가정생활의 책임을 떠맡았고, 이 경우에도 그렇게 나사로와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후련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눅10:39), 마르다는 저녁 식사를 차리려고 준비했습니다. 마르다가 쓸데없는 여러 일로 헛되어 산만해져서 사소한 여러 걱정에 시달렸다고 밝혀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녀의 기질이었습니다.

162:8.3 (1798.1) As Martha busied herself with all these supposed duties, she was perturbed because Mary did nothing to help. Therefore she went to Jesus and said: “Master, do you not care that my sister has left me alone to do all of the serving? Will you not bid her to come and help me?” Jesus answered: “Martha, Martha, why are you always anxious about so many things and troubled by so many trifles? Only one thing is really worth while, and since Mary has chosen this good and needful part, I shall not take it away from her. But when will both of you learn to live as I have taught you: both serving in co-operation and both refreshing your souls in unison? Can you not learn that 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 that the lesser matters of life should give way before the greater things of the heavenly kingdom?” 마르다가 이렇게 하기로 한 모든 의무로 바쁠 때, 마리아가 전혀 돕지 않아서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께 가서 말했습니다. “주여, 제 동생이 음식 차리는 모든 일을 나 혼자 하게 버려두니 신경 쓰지 않으시나요? 그녀에게 가서 나를 도우라고 시키지 않으실 건가요?(눅10:40)”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언제나 왜 그렇게 많은 일로 걱정하고 그렇게 여러 사소한 일로 불안해하느냐? 한 가지만 정말 가치 있으며, 마리아가 이렇게 유익하고 필요한 부분을 선택했으니 내가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않으리라(눅10:41-4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둘이 협력해 섬기고 둘이 조화롭게 너희 혼(魂)을 새롭게 하여 사는 법을 둘 다 언제 익히려느냐? 만사에 때가 있으니, 생활의 더 작은 문제들은 하늘나라의 더 큰 일들 앞에 양보해야 함을 너희가 익힐 수 없느냐?”

9. At Bethlehem with Abner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함께

220904 예수께 합세한 아브너와 그 동료 렘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I will give them a heart to know me, that I am the LORD. They wi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for they will return to me with all their heart.

162:9.1 (1798.2) Throughout the week that followed the feast of tabernacles, scores of believers forgathered at Bethany and received instruction from the twelve apostles. The Sanhedrin made no effort to molest these gatherings since Jesus was not present; he was throughout this time working with Abner and his associates in Bethlehem. The day following the close of the feast, Jesus had departed for Bethany, and he did not again teach in the temple during this visit to Jerusalem. 장막절 다음 주 내내, 많은 신자가 베다니에 모여 12 사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께서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모임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기간 내내 베들레헴에서 아브너 및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절기가 끝난 다음 날, 예수님은 베다니로 떠났고 그는 이 예루살렘 방문 동안 다시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162:9.2 (1798.3) At this time, Abner was making his headquarters at Bethlehem, and from that center many workers had been sent to the cities of Judea and southern Samaria and even to Alexandria. Within a few days of his arrival, Jesus and Abner completed the arrangements for the consolidation of the work of the two groups of apostles. 이때, 아브너는 베들레헴에 자기 본부를 두었고, 그 중심에서 여러 일꾼이 유대 도시들, 남부 사마리아 및 알렉산드리아까지 파송되었습니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안에, 예수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 활동의 통합을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162:9.3 (1798.4) Throughout his visit to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had divided his time about equally between Bethany and Bethlehem. At Bethany he spent considerable time with his apostles; at Bethlehem he gave much instruction to Abner and the other former apostles of John. And it was this intimate contact that finally led them to believe in him. These former apostles of John the Baptist were influenced by the courage he displayed in his public teaching in Jerusalem as well as by the sympathetic understanding they experienced in his private teaching at Bethlehem. These influences finally and fully won over each of Abner’s associates to a wholehearted acceptance of the kingdom and all that such a step implied. 장막절 방문 기간 내내, 예수는 베다니와 베들레헴에 자기 시간을 거의 똑같이 나눴습니다. 베다니에서 그는 자기 사도들과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그는 아브너 및 다른 요한의 이전 사도들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런 친밀한 접촉으로 그들은 결국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이전 사도들은 그가 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가르칠 때 자신들이 경험한 공감적 이해 뿐만 아니라 그가 공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드러낸 용기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향력으로 아브너의 동료들은 각각 마침내 완전히 설득받아 하느님 나라와 그런 단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62:9.4 (1798.5) Before leaving Bethlehem for the last time, the Master made arrangements for them all to join him in the united effort which was to precede the ending of his earth career in the flesh. It was agreed that Abner and his associates were to join Jesus and the twelve in the near future at Magadan Park.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에, 주님은 육신으로 자기 지상 생애를 마치기에 앞서 있을 예정 가운데 그들 모두 협력하여 자신과 합세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은 가까운 장래에 마가단 공원에서 예수 및 12 사도와 합세하기로 동의했습니다.

162:9.5 (1798.6) In accordance with this understanding, early in November Abner and his eleven fellows cast their lot with Jesus and the twelve and labored with them as one organization right on down to the crucifixion. 이런 약정에 따라서, 11월 초에 아브너와 그의 11 동료는 예수 및 12 사도와 운명을 같이하여 십자가 처형까지 그들과 한 조직으로써 수고했습니다.

162:9.6 (1798.7) In the latter part of October Jesus and the twelve withdrew from the immediate vicinity of Jerusalem. On Sunday, October 30, Jesus and his associates left the city of Ephraim, where he had been resting in seclusion for a few days, and, going by the west Jordan highway directly to Magadan Park, arrived late on the afternoon of Wednesday, November 2. 10월 후반에 예수와 12 사도는 예루살렘 바로 인근에서 물러났습니다. 10월 30일(AD 29) 일요일에 예수와 그의 동료들은 며칠간 은둔했던 에브라임 도시를 떠나, 요단 서쪽 대로를 따라서 바로 마가단 공원에 11월 2일 수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습니다.

162:9.7 (1799.1) The apostles were greatly relieved to have the Master back on friendly soil; no more did they urge him to go up to Jerusalem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사도들은 주께서 우호적인 지역으로 돌아와서 크게 안도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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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3 Ordination of the Seventy at Magadan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Paper 163

Ordination of the Seventy at Magadan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1. Ordination of the Seventy 70인 임직(任職)
The harvest is plenteous but the laborers are few 수확량(收穫量)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라
2. The Rich Young Man and Others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Riches and the love of wealth 재물과 재산에 대한 사랑
3. The Discussion About Wealth 재산에 관한 토론
Parable of the laborers in the vineyard 포도원의 인부들 비유
4. Farewell to the Seventy 70인 환송회(歡送會)
Jesus’ instructions 예수의 지시
Peter’s ordination sermon 베드로의 임직 설교
5. Moving the Camp to Pella 야영지를 펠라로 옮기다
6. The Return of the Seventy 70인의 귀환(歸還)
7. Preparation for the Last Mission 최후 사명 준비

220911 마가단에서 70인 임직(任職) 눅10:1a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After this the Lord appointed seventy others

163:0.1 (1800.1) A FEW days after the return of Jesus and the twelve to Magadan from Jerusalem, Abner and a group of some fifty disciples arrived from Bethlehem. At this time there were also assembled at Magadan Camp the evangelistic corps, the women’s corps, and about one hundred and fifty other true and tried disciples from all parts of Palestine. After devoting a few days to visiting and the reorganization of the camp, Jesus and the twelve began a course of intensive training for this special group of believers, and from this well-trained and experienced aggregation of disciples the Master subsequently chose the seventy teachers and sent them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This regular instruction began on Friday, November 4, and continued until Sabbath, November 19. 예수와 12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마가단으로 돌아온 며칠 후, 아브너와 대략 50명의 제자 일행이 베들레헴에서 도착했습니다. 이때 마가단 야영지에 전도단(團), 여성단(團) 및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온 약 150명의 진실하고 시련을 견뎌 믿을 수 있는 다른 제자들도 모였습니다. 시찰(視察)과 야영지 재편(再編)에 며칠간 몰두한 후, 예수와 12 사도는 이런 특별한 신자 일행을 위한 집중 훈련 과정을 시작했고, 주(主)께서 이렇게 잘 훈련되어 노련한 제자 집단에서 나중에 70명의 교사를 선택하여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정규 훈련은 11월 4일(AD29년) 금요일에 시작하여 11월 19일 안식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63:0.2 (1800.2) Jesus gave a talk to this company each morning. Peter taught methods of public preaching; Nathaniel instructed them in the art of teaching; Thomas explained how to answer questions; while Matthew directed the organization of their group finances. The other apostles also participated in this training in accordance with their special experience and natural talents. 예수께서 매일 아침 이 일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중 설교법을 가르쳤습니다. 나다니엘은 그들에게 가르치는 기술을 교육했습니다. 도마는 질문에 답하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한편 마태는 그들의 집단 재정의 조직을 지도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자신들의 특별한 체험과 타고난 재능에 따라 이 훈련에 참여했습니다.

 

1. Ordination of the Seventy 70인 임직(任職)

220918 70인 임직(任職) 눅10:1-9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 1 After this the Lord appointed seventy others and sent them two by two ahead of him to every town and place where he was about to go. 2 He told them,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herefore,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field. 3 Go! I am sending you out like lambs among wolves. 4 Do not take a purse or bag or sandals; and do not greet anyone on the road. 5 “When you enter a house,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 6 If someone who promotes peace i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them; if not, it will return to you. 7 Stay there, eating and drinking whatever they give you, for the worker deserves his wages. Do not move around from house to house. 8 “When you enter a town and are welcomed, eat what is offered to you. 9 Heal the sick who are there and tell them,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to you.’

163:1.1 (1800.3) The seventy were ordained by Jesus on Sabbath afternoon, November 19, at the Magadan Camp, and Abner was placed at the head of these gospel preachers and teachers. This corps of seventy consisted of Abner and ten of the former apostles of John, fifty-one of the earlier evangelists, and eight other disciples who had distinguished themselves in the service of the kingdom. 예수께서 11월 19일(AD29) 안식일 오후에 마가단 야영지에서 70인에게 임직(任職)했고, 아브너는 이 복음 전도자와 교사들의 수장(首長)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70인단(團)은 아브너와 요한의 이전 사도 중 10명, 51명의 초기 전도자들과 하느님 나라 봉사에서 두드러진 8명의 다른 제자들이었습니다.

163:1.2 (1800.4) About two o’clock on this Sabbath afternoon, between showers of rain, a company of believers, augmented by the arrival of David and the majority of his messenger corps and numbering over four hundred, assembled on the shore of the lake of Galilee to witness the ordination of the seventy. 이 안식일 오후 2시경 소나기 사이에 다윗과 그의 메신저 대부분이 도착하여 신자(信者) 일행이 늘어났고 4백 명 이상의 수(數)가 70인의 임직에 참석하려고 갈릴리호숫가에 모였습니다.

163:1.3 (1800.5) Before Jesus laid his hands upon the heads of the seventy to set them apart as gospel messengers, addressing them, he said: “The harvest is indeed plenteous, but the laborers are few; therefore I exhort all of you to pray that the Lord of the harvest will send still other laborers into his harvest. I am about to set you apart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I am about to send you to Jew and gentile as lambs among wolves. As you go your ways, two and two, I instruct you to carry neither purse nor extra clothing, for you go forth on this first mission for only a short season. Salute no man by the way, attend only to your work. Whenever you go to stay at a home, first say: Peace be to this household. If those who love peace live therein, you shall abide there; if not, then shall you depart. And having selected this home, remain there for your stay in that city, eating and drinking whatever is set before you. And you do this because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sustenance. Move not from house to house because a better lodging may be offered. Remember, as you go forth proclaiming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you must contend with bitter and self-deceived enemies; therefore be as wise as serpents while you are also as harmless as doves. 예수께서 70인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을 복음 메신저로 따로 떼어놓기 전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확량(收穫量)은 정말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수확(收穫)의 주인이 그의 수확(收穫)에 다른 일꾼을 더 많이 보내도록 너희 모두 기도하기를 내가 권고하노라(마9:37-38, 눅10:2). 나는 너희를 바로 지금 하느님 나라 메신저로 따로 떼어 놓으려 하노라. 나는 너희를 늑대 중에 어린 양들처럼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막 보내려 하느니라(마10:16a, 눅10:3). 너희가 둘씩 길을 갈 때, 너희가 잠깐만 이 첫 임무를 떠나므로 지갑이나 여분의 옷을 가져가지 않도록 내가 지시하노라(눅10:4a).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눅10:4b), 너희 업무만 힘쓰라. 너희가 집에 머물러 갈 때마다 먼저 이 가정이 평안할지어다 말하라(마10:12, 눅10:5).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거기에 살면 너희는 거기에 머물고(마10:11),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 이런 가정을 골라서, 네 앞에 차린 대로 먹고 마시며 그 도시에 묵는 동안 거기 머물라. 일꾼이 자기 생활 유지비를 받기에 마땅하므로 너희는 이렇게 하라. 더 좋은 숙소가 제공될 수도 있다고 하여 집집으로 옮기지 말라(눅10:7). 너희가 지상에서 평화와 사람 중에 선의(善意)를 선포하러 나갈 때(눅2:14b), 너희가 냉혹하고 자기-기만에 빠진 대적들과 싸워야 함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면서 마찬가지로 비둘기(페리스테라:전서구)처럼 순진하라(마10:16b).

163:1.4 (1801.1) “And everywhere you go, preach, saying,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minister to all who may be sick in either mind or body. Freely you have received of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freely give. If the people of any city receive you, they shall find an abundant entrance into the Father’s kingdom; but if the people of any city refuse to receive this gospel, still shall you proclaim your message as you depart from that unbelieving community, saying, even as you leave, to those who reject your teaching: ‘Notwithstanding you reject the truth, it remains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you.’ He who hears you hears me. And he who hears me hears Him who sent me. He who rejects your gospel message rejects me. And he who rejects me rejects Him who sent me.” “너희가 어디로 가든지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다.’라고 전도(傳道)하여 말하고(마10:7), 마음이나 육체가 병든 모든 자를 보살피라. 너희가 하느님 나라의 좋은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b). 어떤 도시의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라. 그러나 어떤 도시의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그래도 너희는 믿으려 하지 않는 그 공동체를 떠날 때 너희 가르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진리를 거절해도,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여전하니라.’라고 너희가 떠나기까지 너희 메시지를 선포할 것이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라(눅10:16a). 내 말을 듣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말을 듣는 것이라. 너희 복음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는 나를 거절하는 것이라. 나를 거절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거절하는 것이라(눅10:16b).”

163:1.5 (1801.2) When Jesus had thus spoken to the seventy, he began with Abner and, as they knelt in a circle about him, laid his hands upon the head of every man. 예수께서 70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이 그 둘레에 원형으로 무릎을 꿇자, 그는 아브너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의 머리에 안수(按手)했습니다.

163:1.6 (1801.3) Early the next morning Abner sent the seventy messengers into all the cities of Galilee, Samaria, and Judea. And these thirty-five couples went forth preaching and teaching for about six weeks, all of them returning to the new camp near Pella, in Perea, on Friday, December 30.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브너는 70인 메신저를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 모든 도시로 보냈습니다(눅10:1). 그래서 이 35쌍은 약 6주간 전도하고 가르치러 가서, 12월 30일(AD29) 금요일에 페레아의 펠라 근처, 새 야영지로 그들 모두 돌아왔습니다.

 

2. The Rich Young Man and Others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220925 부자 청년과 다른 사람들 막10:19-22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9 You know the commandments: ‘You shall not murder,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you shall not steal,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you shall not defraud,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20 “Teacher,” he declared, “all these I have kept since I was a boy.” 21 Jesus looked at him and loved him. “One thing you lack,” he said. “Go,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22 At this the man’s face fell. He went away sad, because he had great wealth.

163:2.1 (1801.4) Over fifty disciples who sought ordination and appointment to membership in the seventy were rejected by the committee appointed by Jesus to select these candidates. This committee consisted of Andrew, Abner, and the acting head of the evangelistic corps. In all cases where this committee of three were not unanimous in agreement, they brought the candidate to Jesus, and while the Master never rejected a single person who craved ordination as a gospel messenger, there were more than a dozen who, when they had talked with Jesus, no more desired to become gospel messengers. 이런 후보자들을 선정하도록 예수께서 임명한 위원회가 70인의 임직과 회원권 지위를 얻으려 했던 50명 이상의 제자들을 불합격시켰습니다. 이 위원회는 안드레, 아브너 및 전도단(團)의 대리 수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런 3인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은 모든 경우에, 그들은 후보자를 예수께 데려갔고, 주님은 복음 메신저로서 임직을 열망했던 단 한 사람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12명 이상은 예수님과 얘기하자 그들은 더 이상 복음 메신저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63:2.2 (1801.5) One earnest disciple came to Jesus, saying: “Master, I would be one of your new apostles, but my father is very old and near death; could I be permitted to return home to bury him?” To this man Jesus said: “My son, the foxes have holes, and the birds of heaven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where to lay his head. You are a faithful disciple, and you can remain such while you return home to minister to your loved ones, but not so with my gospel messengers. They have forsaken all to follow me and proclaim the kingdom. If you would be an ordained teacher, you must let others bury the dead while you go forth to publish the good news.” And this man went away in great disappointment. 한 진지한 제자가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저도 당신의 새 사도 중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제 아버지가 매우 연로해 거의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 장례(葬禮)를 치러도 될까요?”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젊은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둥우리가 있지만,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머리 둘 데가 없느니라. 너는 신실한 제자이니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러 집으로 돌아가 그렇게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내 복음 메신저들은 그렇지 않도다. 그들은 나를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모든 것을 버렸느니라. 네가 임직 교사가 되려면, 네가 복음을 널리 알리러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고인(故人)을 묻게 해야 하느니라(마8:20-22, 눅9:57-60).” 이 사람은 크게 실망하여 떠나갔습니다.

163:2.3 (1801.6) Another disciple came to the Master and said: “I would become an ordained messenger, but I would like to go to my home for a short while to comfort my family.” And Jesus replied: “If you would be ordained, you must be willing to forsake all. The gospel messengers cannot have divided affections. No man, having put his hand to the plough, if he turns back, is worthy to become a messenger of the kingdom.” 또 다른 제자가 주(主)께 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임직 메신저가 되려 하지만 잠시 저의 집에 가서 제 가족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네가 임직되려 한다면, 너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느니라. 복음 메신저들은 애착(愛着 단념할 수 없는 애정)을 나눌 수 없느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되돌아가는 자는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가 되기에 마땅치 않으니라(눅9:61-62).”

163:2.4 (1801.7) Then Andrew brought to Jesus a certain rich young man who was a devout believer, and who desired to receive ordination. This young man, Matadormus, was a member of the Jerusalem Sanhedrin; he had heard Jesus teach and had been subsequently instructed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by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Jesus talked with Matadormus concerning the requirements of ordination and requested that he defer decision until after he had thought more fully about the matter. Early the next morning, as Jesus was going for a walk, this young man accosted him and said: “Master, I would know from you the assurances of eternal life. Seeing that I have observed all the commandments from my youth, I would like to know what more I must do to gain eternal life?” In answer to this question Jesus said: “If you keep all the commandments — do not commit adultery, do not kill, do not steal, do not bear false witness, do not defraud, honor your parents — you do well, but salvation is the reward of faith, not merely of works. Do you believe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Matadormus answered: “Yes, Master, I do believe everything you and your apostles have taught me.” And Jesus said, “Then are you indeed my disciple and a child of the kingdom.” 그다음 안드레가 독실한 신자이며 임직받기를 원했던 어떤 부자 청년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이 청년 마타도르무스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가르치는 것을 듣고 그 후 베드로 및 다른 사도들에 의해 하느님 나라 복음에 밝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임직 자격에 관해 마타도루무스와 이야기하고 그가 그 문제에 대해 더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도록 요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께서 산책하실 때 이 청년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主)여, 저는 당신에게서 영생의 확신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으니, 제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질문의 대답으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말라,’ ‘속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모든 계명을 네가 지킨다면(마19:18-20a, 막10:18-20, 눅18:18, 20-21), 네가 잘하는 것이나, 구원은 신앙의 보답(報答)이지, 그저 행위의 보답(報答)이 아니라. 네가 하느님 나라의 이 복음을 믿느냐?” 그러자 마타도르무스가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저는 당신과 당신의 사도들이 저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실로 내 제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자녀니라.”

163:2.5 (1802.1) Then said the young man: “But, Master, I am not content to be your disciple; I would be one of your new messengers.” When Jesus heard this, he looked down upon him with a great love and said: “I will have you to be one of my messengers if you are willing to pay the price, if you will supply the one thing which you lack.” Matadormus replied: “Master, I will do anything if I may be allowed to follow you.” Jesus, kissing the kneeling young man on the forehead, said: “If you would be my messenger, go and sell all that you have and, when you have bestowed the proceeds upon the poor or upon your brethren, come and follow me,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the kingdom of heaven.” 그러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여, 저는 당신의 제자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새 메신저 중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듣자, 그는 큰 사랑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기꺼이 값을 치르고, 네가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울 것이라면, 내가 너를 내 메신저 중 하나가 되게 하리라.” 마타도르무스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제가 당신을 따르도록 허락받으면 저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릎 꿇은 청년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습니다. “네가 내 메신저가 되려면,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 그리고 그 수입을 가난한 자들이나 네 형제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면,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보화(寶貨)를 얻을 것이라(마19:21. 막10:21, 눅18:22).”

163:2.6 (1802.2) When Matadormus heard this, his countenance fell. He arose and went away sorrowful, for he had great possessions. This wealthy young Pharisee had been raised to believe that wealth was the token of God’s favor. Jesus knew that he was not free from the love of himself and his riches. The Master wanted to deliver him from the love of wealth, not necessarily from the wealth. While the disciples of Jesus did not part with all their worldly goods, the apostles and the seventy did. Matadormus desired to be one of the seventy new messengers, and that was the reason for Jesus’ requiring him to part with all of his temporal possessions. 마타도르무스가 이 말을 듣자, 그의 안색이 침울(沈鬱)해졌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비탄에 잠겨 일어나 떠나갔습니다(막10:22, 눅18:23). 이 부유한 젊은 바리새인은, 많은 재산이 하느님 은혜의 표시라고 믿도록 양육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과 자기 재산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반드시 많은 재산으로부터가 아니라, 많은 재산에 대한 사랑에서 구해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 모든 재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도들과 70인은 포기했습니다. 마타도르무스는 70인의 새 메신저 중 하나가 되려고 했으며, 그것이 예수께서 그에게 현세의 모든 그의 재산을 포기하도록 요청한 이유였습니다.

221002 영적 충성과 물질적 애착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you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you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163:2.7 (1802.3) Almost every human being has some one thing which is held on to as a pet evil, and which the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requires as a part of the price of admission. If Matadormus had parted with his wealth, it probably would have been put right back into his hands for administration as treasurer of the seventy. For later 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at Jerusalem, he did obey the Master’s injunction, although it was then too late to enjoy membership in the seventy, and he became the treasurer of the Jerusalem church, of which James the Lord’s brother in the flesh was the head. 거의 모든 인간은 총애(寵愛 귀엽게 사랑하는) 악(惡)으로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부 입장료로 요구되는 어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타도르무스가 자기 재산을 포기했다면, 필시 70인의 회계 담당자로 그것을 관리하도록 그의 손에 바로 다시 넘겨졌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진 후, 그때는 70인의 회원 자격을 누리기에 너무 늦었지만, 그가 주(主)의 권고를 따랐고, 그는, 육신으로 주(主)님의 동생 야고보가 수장(首長)이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회계 담당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63:2.8 (1802.4) Thus always it was and forever will be: Men must arrive at their own decisions. There is a certain range of the freedom of choice which mortals may exercise. The forces of the spiritual world will not coerce man; they allow him to go the way of his own choosing. 그래서 항상 있었고 언제나 그럴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사자들이 행사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의 세력은 사람에게 마음에 없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도록 놔둡니다.

163:2.9 (1802.5) Jesus foresaw that Matadormus, with his riches, could not possibly become an ordained associate of men who had forsaken all for the gospel; at the same time, he saw that, without his riches, he would become the ultimate leader of all of them. But, like Jesus’ own brethren, he never became great in the kingdom because he deprived himself of that intimate and personal association with the Master which might have been his experience had he been willing to do at this time the very thing which Jesus asked, and which, several years subsequently, he actually did. 마타도르무스가 자기 재산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모두 포기한 사람들의 임직 동료가 아무리 해도 될 수 없음을 예수님을 내다 보셨습니다. 동시에 그가 자기 재산이 없으면, 그가 그들 모두의 최종적 지도자가 될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친형제들처럼, 몇 년 후 그가 실제로 했던, 예수께서 요구했던 바로 그것을 이때 그가 기꺼이 했더라면, 자기 체험일 수도 있었던 주(主)님과 그런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끊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해질 수 없었습니다.

163:2.10 (1803.1) Riches have nothing directly to do with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the love of wealth does. The spiritual loyalties of the kingdom are incompatible with servility to materialistic mammon. Man may not share his supreme loyalty to a spiritual ideal with a material devotion. 재산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재산을 사랑하는 것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영적 충성은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물질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배금(拜金 돈 숭배)에 대한 노예근성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마6:24). 사람은 영적 이상(理想)에 대한 자기 최상의 충성을 강한 물질적 애착과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163:2.11 (1803.2) Jesus never taught that it was wrong to have wealth. He required only the twelve and the seventy to dedicate all of their worldly possessions to the common cause. Even then, he provided for the profitable liquidation of their property, as in the case of the Apostle Matthew. Jesus many times advised his well-to-do disciples as he taught the rich man of Rome. The Master regarded the wise investment of excess earnings as a legitimate form of insurance against future and unavoidable adversity. When the apostolic treasury was overflowing, Judas put funds on deposit to be used subsequently when they might suffer greatly from a diminution of income. This Judas did after consultation with Andrew. Jesus never personally had anything to do with the apostolic finances except in the disbursement of alms. But there was one economic abuse which he many times condemned, and that was the unfair exploitation of the weak, unlearned, and less fortunate of men by their strong, keen, and more intelligent fellows. Jesus declared that such inhuman treatment of men, women, and children was incompatible with the ideals of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재산 소유가 잘못이라고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12 사도와 70인만 그들의 전 재산을 공동 목적에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사도 마태의 경우처럼 그들의 재산을 유익하게 청산(淸算)하도록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넉넉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로마의 부자를 가르친 것처럼, 여러 번 권했습니다. 주(主)님은 초과 이익의 현명한 투자를 미래와 어쩔 수 없는 역경에 대비한 합법적 형태의 보험으로 여겼습니다. 사도 기금이 넘치면, 그들의 수입이 크게 줄었을 때 나중에 쓰도록 유다가 기금을 저축했습니다. 유다는 안드레와 의논한 뒤에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는 의연금(義捐金 자선이나 공익을 위한) 지출을 제외하고 결코 개인적으로 사도 자금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번 나무랐던 재정 남용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강하고, 명민(明敏 총명하고 민첩)하며, 더 영리한 사람들이 약하고, 배우지 못한 불우이웃들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남녀와 아이들에 대한 그런 잔인(殘忍)한 대우(待遇)는 하늘나라에 속한 형제 공동체의 이상(理想)과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3. The Discussion About Wealth 재산에 관한 토론

221009 순전한 집중적 연모(戀慕) 마19:23-26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3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ruly I tell you, it is hard for some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24 Again I tell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some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25 When the disciples heard this, they were greatly astonished and asked, “Who then can be saved?” 26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With ma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163:3.1 (1803.3) By the time Jesus had finished talking with Matadormus, Peter and a number of the apostles had gathered about him, and as the rich young man was departing, Jesus turned around to face the apostles and said: “You see how difficult it is for those who have riches to enter fully into the kingdom of God! Spiritual worship cannot be shared with material devotions;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You have a saying that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the heathen to inherit eternal life.’ And I declare that it is as easy for this camel to go through the needle’s eye as for these self-satisfied rich ones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마타도르무스와 대화를 마칠 때까지 베드로와 여러 사도가 그 주위에 모였으며, 부자 청년이 떠나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돌이켜 말했습니다. “재산이 있는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느냐(마19:23, 막10:23, 눅18:24)! 영적 경배는 강한 물질적 애착과 함께 할 수 없도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a).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기가, 이방인이 영생을 물려받기보다 더 쉽다.’라는 속담이 있느니라. 그래서, 이런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기가, 스스로 만족한 이런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큼 쉽다(마19:24, 막10:25, 눅18:25)고 내가 선언하노라.”

163:3.2 (1803.4) When Peter and the apostles heard these words, they were astonished exceedingly, so much so that Peter said: “Who then, Lord, can be saved? Shall all who have riches be kept out of the kingdom?” And Jesus replied: “No, Peter, but all who put their trust in riches shall hardly enter into the spiritual life that leads to eternal progress. But even then, much which is impossible to man is not beyond the reach of the Father in heaven; rather should we recognize tha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주(主)여, 누가 구원될 수 있나요? 재산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나요?”라고 베드로가 말할 정도까지, 그들은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베드로야, 그러나 재산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진보에 이르는 영적 생활에 거의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그러나 그렇더라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많은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역량을 넘어서지 않느니라.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느니라(마19:25-26, 막10:26-27, 눅18:26-27).”

163:3.3 (1803.5) As they went off by themselves, Jesus was grieved that Matadormus did not remain with them, for he greatly loved him. And when they had walked down by the lake, they sat there beside the water, and Peter, speaking for the twelve (who were all present by this time), said: “We are troubled by your words to the rich young man. Shall we require those who would follow you to give up all their worldly goods?” And Jesus said: “No, Peter, only those who would become apostles, and who desire to live with me as you do and as one family. But the Father requires that the affections of his children be pure and undivided. Whatever thing or person comes between you and the love of the truths of the kingdom, must be surrendered. If one’s wealth does not invade the precincts of the soul, it is of no consequence in the spiritual life of those who would enter the kingdom.” 그들이 자기들끼리 자리를 뜨자, 예수는 마타도르무스가 그들과 함께 남아 있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그가 그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호숫가로 걸어 내려가, 거기 물가에 그들이 앉았고, 이때쯤 모두 참석한 12 사도를 대변하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하신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들의 전 재산을 포기하라고 우리가 요구해야 합니까? ”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아니라, 베드로야, 사도가 되어, 너희가 하듯이 한 가족으로 나와 함께 살려는 자들만이라.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자녀의 연모(戀慕 사모하여 그리워함)가 순전하고 집중되기를 요구하시느니라. 너희와 하느님 나라 진리에 대한 사랑 사이를 갈라놓는 어떤 것이나 사람이라도 포기해야 하느니라. 사람의 재산이 그 혼(魂)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의 영적 생활에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라.”

163:3.4 (1804.1) And then said Peter, “But, Master, we have left everything to follow you, what then shall we have?” And Jesus spoke to all of the twelve: “Verily, verily, I say to you, there is no man who has left wealth, home, wife, brethren, parents, or children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the kingdom of heaven who shall not receive manifold more in this world, perhaps with some persecutions, and in the world to come eternal life. But many who are first shall be last, while the last shall often be first. The Father deals with his creatures in accordance with their needs and in obedience to his just laws of merciful and loving consideration for the welfare of a universe.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당신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떠났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요(마19:27, 막10:28, 눅18:28)?” 예수께서 모든 열 둘에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하늘나라를 위해 재산, 집, 아내, 형제, 부모나 자녀를 떠난 사람은 이생에서 형편에 따라 약간의 박해와 함께 더 다양하게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많은 자가 나중이 될 것이며 반면에, 나중 된 자들이 종종 먼저가 될 것이니라(마19:29-30, 막10:29-31, 눅18:29-30). 아버지는 자기 창조물들의 필요에 따라, 우주의 행복을 위해 자비롭고 애정이 깊게 헤아리는 자신의 공정한 법칙에 순종하여, 자기 창조물들을 다루시느니라.”

163:3.5 (1804.2)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householder who was a large employer of men, and who went out early in the morning to hire laborers to work in his vineyard. When he had agreed with the laborers to pay them a denarius a day, he sent them into the vineyard. Then he went out about nine o’clock, and seeing others standing in the market place idle, he said to them: ‘Go you also to work in my vineyard, and whatsoever is right I will pay you.’ And they went at once to work. Again he went out about twelve and about three and did likewise. And going to the market place about five in the afternoon, he found still others standing idle, and he inquired of them, ‘Why do you stand here idle all the day?’ And the men answered, ‘Because nobody has hired us.’ Then said the householder: ‘Go you also to work in my vineyard, and whatever is right I will pay you.’ “하늘나라는 사람을 많이 고용한 세대주와 같으니, 그가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인부(人夫)들을 고용하려고 아침 일찍 나갔더라. 그가 인부들에게 일당 한 데나리온(로마시대 인부 일당)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자, 그는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더라. 그 후 9시경 나가, 장터에서 할 일이 없이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보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더라.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적절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지급하리라.’ 그러자 그들이 즉시 일하러 갔더라. 그가 12시와 3시쯤 다시 나가 똑같이 했더라. 그리고 오후 5시쯤 장터에 가서, 여전히 할 일 없이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발견하고 그가 그들에게 ‘너희는 왜 온종일 여기에서 할 일이 없이 서 있는지?’라고 묻더라. 사람들이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더라. 그러자 세대주가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적절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지급하리라.’라고 말했더라(마20:1-7).

163:3.6 (1804.3) “When evening came, this owner of the vineyard said to his steward: ‘Call the laborers and pay them their wages, beginning with the last hired and ending with the first.’ When those who were hired about five o’clock came, they received a denarius each, and so it was with each of the other laborers. When the men who were hired at the beginning of the day saw how the later comers were paid, they expected to receive more than the amount agreed upon. But like the others every man received only a denarius. And when each had received his pay, they complained to the householder, saying: ‘These men who were hired last worked only one hour, and yet you have paid them the same as us who have borne the burden of the day in the scorching sun.’ “저녁이 되자, 이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인부들을 불러 나중에 고용된 자들부터 시작해서 먼저 고용된 자들을 끝으로,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라고 말했더라. 5시쯤 고용된 자들이 왔을 때, 그들은 한 데나리온씩 받았고, 다른 인부들도 각자 그랬더라.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이 나중에 온 자들이 얼마나 받았는지 보고, 그들은 합의했던 액수보다 더 받기를 기대했더라. 그러나 다른 이들처럼 모두 한 데나리온만 받았더라. 각자 자기 임금을 받고 나서, 그들이 ‘나중에 고용된 이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 일했지만, 불볕에서 종일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그들에게 지급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세대주에게 불평했더라(마20:8-12).

163:3.7 (1804.4) “Then answered the householder: ‘My friends, I do you no wrong. Did not each of you agree to work for a denarius a day? Take now that which is yours and go your way, for it is my desire to give to those who came last as much as I have given to you.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with my own? or do you begrudge my generosity because I desire to be good and to show mercy?’” “그러자 세대주가 ‘내 친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잘못이 없느니라. 너희 각자 일당 한 데나리온에 일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내가 나중에 온 자들에게 너희에게 지급한 만큼 주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니, 바로 네 것을 가지고 자리를 떠나라. 내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법에 저촉(抵觸)되느냐? 아니면 내가 선하고 은혜를 베풀려고 해서 너희가 내 후한 마음을 아까워하느냐?’라고 대답했더라(마20:13-15).”

 

4. Farewell to the Seventy 70인 환송회(歡送會)

221016 70인 환송회(歡送會) 1 막12:30-31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0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31 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163:4.1 (1804.5) It was a stirring time about the Magadan Camp the day the seventy went forth on their first mission. Early that morning, in his last talk with the seventy, Jesus placed emphasis on the following: 마가단 야영지 근처에서 70인이 그들의 첫 선교를 출발하던 날은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른 아침에, 70인에게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께서 다음을 강조했습니다.

163:4.2 (1804.6) 1. The gospel of the kingdom must be proclaimed to all the world, to gentile as well as to Jew.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온 세상에,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선포되어야 하느니라.

163:4.3 (1804.7) 2. While ministering to the sick, refrain from teaching the expectation of miracles. 아픈 자들을 보살피면서, 기적을 기대하도록 가르치지 말라.

163:4.4 (1805.1) 3. Proclaim a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not an outward kingdom of worldly power and material glory. 세상 권세와 물질적 영광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자녀)들로 구성된 영적 형제 공동체를 선포하라.

163:4.5 (1805.2) 4. Avoid loss of time through overmuch social visiting and other trivialities which might detract from wholehearted devotion to preaching the gospel. 복음 전도에 대한 전심의 헌신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과도한 사교적 방문과 다른 사소한 이유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163:4.6 (1805.3) 5. If the first house to be selected for a headquarters proves to be a worthy home, abide there throughout the sojourn in that city. 본부로 정한 첫 집이 (본부에) 어울리는 가정으로 판명되면, 그 도시에 머무는 내내 거기 머물러 있으라.

163:4.7 (1805.4) 6. Make clear to all faithful believers that the time for an open break with the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at Jerusalem has now come. 예루살렘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노골적으로 단절(斷絶)할 때가 이제 왔다고 신실한 모든 신자에게 분명히 밝히라.

163:4.8 (1805.5) 7. Teach that man’s whole duty is summed up in this one commandmen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mind and soul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This they were to teach as man’s whole duty in place of the 613 rules of living expounded by the Pharisees.) 사람의 모든 의무가 이 한 가지 명령에 요약되어 있다고 가르치라. 네 마음과 네 혼(魂)을 다해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들은 사람의 모든 의무로서 바리새인들이 상세하게 설명했던 613개 생활 규칙 대신에 이것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221023 70인 환송회(歡送會) 2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Then I heard the voice of the Lord saying,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And I said, “Here am I. Send me!”

163:4.9 (1805.6) When Jesus had talked thus to the seventy in the presence of all the apostles and disciples, Simon Peter took them off by themselves and preached to them their ordination sermon, which was an elaboration of the Master’s charge given at the time he laid his hands upon them and set them apart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Peter exhorted the seventy to cherish in their experience the following virtues: 예수께서 모든 사도와 제자들 앞에서 70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그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임직 설교를 전했는데, 그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안수하여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로서 그들을 따로 떼어놓을 때 주셨던 직무를 다듬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70인에게 다음의 가치를 품고 체험하라고 권고(勸告)했습니다.

163:4.10 (1805.7) 1. Consecrated devotion. To pray always for more laborers to be sent forth into the gospel harvest. He explained that, when one so prays, he will the more likely say, “Here am I; send me.” He admonished them to neglect not their daily worship. 봉헌(奉獻)된 헌신. 더 많은 일군이 복음 수확에 파견되도록 항상 기도하는 것.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6:8b).”라고 그가 아마 더 말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매일 경배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163:4.11 (1805.8) 2. True courage. He warned them that they would encounter hostility and be certain to meet with persecution. Peter told them their mission was no undertaking for cowards and advised those who were afraid to step out before they started. But none withdrew. 진정한 용기. 그는 그들이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박해는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면서, 그들의 사명은 겁쟁이들이 맡을 일이 아니며, 그들이 시작하기 전에 두려워하는 자들은 떠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163:4.12 (1805.9) 3. Faith and trust. They must go forth on this short mission wholly unprovided for; they must trust the Father for food and shelter and all other things needful. 신앙과 신뢰. 그들은 이 짧은 선교에 전혀 아무 지원 없이 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음식, 숙소 및 다른 모든 필수품에 대해 아버지를 신뢰해야 했습니다.

163:4.13 (1805.10) 4. Zeal and initiative. They must be possessed with zeal and intelligent enthusiasm; they must attend strictly to their Master’s business. Oriental salutation was a lengthy and elaborate ceremony; therefore had they been instructed to “salute no man by the way,” which was a common method of exhorting one to go about his business without the waste of time. It had nothing to do with the matter of friendly greeting. 열정과 창의력. 그들은 열성과 지능적 열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主)님의 일에 전적으로 힘써야 했습니다. 동양식 인사는 긴 정교한 예법이어서, 그들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시간 낭비 없이 일하러 다니는 자에게 훈계하던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은 친절한 인사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163:4.14 (1805.11) 5. Kindness and courtesy. The Master had instructed them to avoid unnecessary waste of time in social ceremonies, but he enjoined courtesy toward all with whom they should come in contact. They were to show every kindness to those who might entertain them in their homes. They were strictly warned against leaving a modest home to be entertained in a more comfortable or influential one. 친절과 예의. 주님은 그들에게 사교적 예식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들이 접해야 하는 모두에게 정중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자기 집에 대접하려는 자들에게 온갖 친절을 다 베풀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더 편안하거나 영향력 있는 집에 대접받으려고 평범한 집을 떠나지 않도록 엄하게 경고받았습니다.

163:4.15 (1805.12) 6. Ministry to the sick. The seventy were charged by Peter to search out the sick in mind and body and to do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bring about the alleviation or cure of their maladies. 환자 돌보기. 베드로는 70인에게 마음과 육체가 아픈 자를 조사해서 질병을 덜거나 치료하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63:4.16 (1805.13) And when they had been thus charged and instructed, they started out, two and two, on their mission in Galilee, Samaria, and Judea.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명령과 지시를 받은 후, 그들은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에서 둘씩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163:4.17 (1806.1) Although the Jews had a peculiar regard for the number seventy, sometimes considering the nations of heathendom as being seventy in number, and although these seventy messengers were to go with the gospel to all peoples, still as far as we can discern, it was only coincidental that this group happened to number just seventy. Certain it was that Jesus would have accepted no less than half a dozen others, but they were unwilling to pay the price of forsaking wealth and families. 유대인들이 숫자 70을 특별하게 여기며, 때때로 이교도 국가를 모두 70개로 간주하고, 이 70인 메신저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들고 가야 했지만, 우리가 알아보는 한, 이 집단이 바로 총수 70이 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다른 이들을 6명이나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들은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5. Moving the Camp to Pella 야영지를 펠라로 옮기다

221030 자발적 충성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

163:5.1 (1806.2) Jesus and the twelve now prepared to establish their last headquarters in Perea, near Pella, where the Master was baptized in the Jordan. The last ten days of November were spent in council at Magadan, and on Tuesday, December 6, the entire company of almost three hundred started out at daybreak with all their effects to lodge that night near Pella by the river. This was the same site, by the spring, that John the Baptist had occupied with his camp several years before. 이제, 예수와 12 사도는 주(主)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던 펠라 근처 페레아에 그들의 마지막 본부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11월의 마지막 열흘간은 마가단에서 회의(會議)하며 보냈고, 12월 6일 화요일에 거의 300명의 전체 일행이 강(江)가의 펠라 근처에서 그날 밤 숙박하려고 모든 물건을 가지고 새벽녘에 떠났습니다. 여기 샘물 옆은 세례 요한이 몇 년 전에 그의 야영지로 사용했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163:5.2 (1806.3) After the breaking up of the Magadan Camp, David Zebedee returned to Bethsaida and began immediately to curtail the messenger service. The kingdom was taking on a new phase. Daily, pilgrims arrived from all parts of Palestine and even from remote regions of the Roman Empire. Believers occasionally came from Mesopotamia and from the lands east of the Tigris. Accordingly, on Sunday, December 18, David, with the help of his messenger corps, loaded on to the pack animals the camp equipage, then stored in his father’s house, with which he had formerly conducted the camp of Bethsaida by the lake. Bidding farewell to Bethsaida for the time being, he proceeded down the lake shore and along the Jordan to a point about one-half mile north of the apostolic camp; and in less than a week he was prepared to offer hospitality to almost fifteen hundred pilgrim visitors. The apostolic camp could accommodate about five hundred. This was the rainy season in Palestine, and these accommodations were required to take care of the ever-increasing number of inquirers, mostly earnest, who came into Perea to see Jesus and to hear his teaching. 마가단 야영지를 해체한 후, 다윗 세베대는 벳새다로 돌아가 즉시 메신저 봉사를 축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순례자들이 팔레스타인 전역과 심지어 로마 제국의 먼 지역으로부터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가끔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 동쪽 지역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12월 18일 일요일에, 다윗은 자기 메신저 무리의 도움으로, 이전(148.0.1 AD28.5.3~10.3)에 호숫가 벳새다 야영지를 운영한 후 자기 아버지 집에 보관했던, 야영 장비를 짐 나르는 동물에 실었습니다. 당분간 벳새다에 작별을 고하고, 그는 호숫가로 내려가 요단강을 따라서 사도 야영지에서 약 0.5마일 (800m) 북쪽 지점까지 전진했습니다. 그는, 1주일도 못 되어, 거의 1,500명의 순례 방문자들을 환대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사도 야영지는 약 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의 우기(雨期 장마철 11월~3월)여서, 계속 늘어나는 탐구자들을 돌보기 위해 이런 숙박 시설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주로 예수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페레아로 왔던 진지한 자들이었습니다.

163:5.3 (1806.4) David did all this on his own initiative, though he had taken counsel with Philip and Matthew at Magadan. He employed the larger part of his former messenger corps as his helpers in conducting this camp; he now used less than twenty men on regular messenger duty. Near the end of December and before the return of the seventy, almost eight hundred visitors were gathered about the Master, and they found lodging in David’s camp. 다윗은 마가단에서 빌립과 마태와 상의했지만, 그는 자발적(自發的 스스로 책임짐)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 야영지를 운영하는 자기 조수들로 그의 이전 메신저 무리 대부분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이제 정규 메신저 임무에 20명 미만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12월 말, 70인이 돌아오기 전에, 거의 800명의 방문자가 모여 주(主)님을 에워쌌으며, 그들은 다윗의 야영지에서 숙소를 찾았습니다.

 

6. The Return of the Seventy 70인의 귀환(歸還)

221106 숨겨진 계시 눅10:17-24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7 The seventy-two returned with joy and said, “Lord, even the demons submit to us in your name.” 18 He replied, “I saw Satan fall like lightning from heaven. 19 I have given you authority to trample on snakes and scorpions and to overcome all the power of the enemy; nothing will harm you. 20 However, do not rejoice that the spirits submit to you, but rejoice that your names are written in heaven.” 21 At that time Jesus, full of joy through the Holy Spirit,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Yes, Father, for this is what you were pleased to do. 22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who the Son is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who the Father is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23 Then he turned to his disciples and said privately,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see. 24 For I tell you that many prophets and kings wanted to see what you see but did not see it, and to hear what you hear but did not hear it.”

163:6.1 (1806.5) On Friday, December 30, while Jesus was away in the near-by hills with Peter, James, and John, the seventy messengers were arriving by couples, accompanied by numerous believers, at the Pella headquarters. All seventy were assembled at the teaching site about five o’clock when Jesus returned to the camp. The evening meal was delayed for more than an hour while these enthusiasts for the gospel of the kingdom related their experiences. David’s messengers had brought much of this news to the apostles during previous weeks, but it was truly inspiring to hear these newly ordained teachers of the gospel personally tell how their message had been received by hungry Jews and gentiles. At last Jesus was able to see men going out to spread the good news without his personal presence. The Master now knew that he could leave this world without seriously hindering the progress of the kingdom. 12월 30일(AD 29년) 금요일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근처 언덕에 떨어져 있을 때, 메신저 70인이 둘씩 수많은 신자와 함께 펠라 본부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눅10:17a). 예수께서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70인 모두 가르치는 장소에 5시쯤 모였습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 복음의 팬들이 자기 체험을 말하는 동안 저녁 식사가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습니다. 다윗의 메신저들이 지난 몇 주간 대부분의 이런 소식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지만, 새로 임직한 이 복음 교사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열망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직접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없어도 기쁜 소식을 퍼뜨리려고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하느님 나라 진보의 심각한 방해가 없이,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163:6.2 (1807.1) When the seventy related how “even the devils were subject” to them, they referred to the wonderful cures they had wrought in the cases of victims of nervous disorders. Nevertheless, there had been a few cases of real spirit possession relieved by these ministers, and referring to these, Jesus said: “It is not strange that these disobedient minor spirits should be subject to you, seeing that I beheld Satan falling as lightning from heaven. But rejoice not so much over this, for I declare to you that, as soon as I return to my Father, we will send forth our spirits into the very minds of men so that no more can these few lost spirits enter the minds of unfortunate mortals. I rejoice with you that you have power with men, but be not lifted up because of this experience but the rather rejoice that your names are written on the rolls of heaven, and that you are thus to go forward in an endless career of spiritual conquest.” 70인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악령(惡靈)들도 복종했는지(눅10:17b)” 말하면서, 그들은 신경쇠약 희생자의 경우에 자신들이 했던 놀라운 치유를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이 사역자들이 영(靈)에 사로잡힌 몇 경우를 해방했지만, 이런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눅10:18), 이렇게 불순종하는 소수의 영(靈)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노라. 그러나 이런 일로 너무 많이 기뻐하지 말지니, 내가 내 아버지께 돌아가자마자, 우리가 우리 영(靈)들을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보내서, 더 이상 이런 소수의 잃어버린 영(靈)이 애처로운 필사자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할 것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사람들에 대해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너희와 함께 기뻐하지만, 너희 이름이 하늘 명부에 기록되어, 너희가 끝없는 영적 획득의 생애에서 이렇게 전진하는 것으로 오히려 기뻐하고(눅10:20), 이런 체험 때문에 용기를 내지 말라.”

163:6.3 (1807.2) And it was at this time, just before partaking of the evening meal, that Jesus experienced one of those rare moments of emotional ecstasy which his followers had occasionally witnessed. He said: “I thank you, my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that, while this wonderful gospel was hidden from the wise and self-righteous, the spirit has revealed these spiritual glories to these children of the kingdom. Yes, my Father, it must have been pleasing in your sight to do this, and I rejoice to know that the good news will spread to all the world even after I shall have returned to you an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perform. I am mightily moved as I realize you are about to deliver all authority into my hands, that only you really know who I am, and that only I really know you, and those to whom I have revealed you. And when I have finished this revelation to my brethren in the flesh, I will continue the revelation to your creatures on high.” 그리고 이때, 저녁 식사를 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가끔 목격했던, 그렇게 드문 감정적 황홀 중 하나를 체험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主宰)이신 내 아버지여, 이 놀라운 복음이 젠체(제가 제일인 체)하며 혼자 옳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겨졌지만, 영(靈)은 하느님 나라의 이런 자녀들에게 이렇게 영적 영광들을 드러냈기에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그렇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 보시기에 분명히 기쁘시나이다(마11:25-26, 눅10:21), 그리고 내가 당신과 당신께서 내게 행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간 후에도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퍼질 것을, 내가 알고 기뻐하나이다. 당신께서 모든 권위를 바로 내 손에 주려 하시고, 당신만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며(마11:27, 눅10:22), 나만이 당신과 내가 당신을 계시한 자들을 참으로 안다는 것을 내가 실감하기에 내가 심히 감격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내 형제들에게 직접 보고 들은 이 계시를 끝내면, 나는 하늘에 있는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계시를 계속하리이다.”

163:6.4 (1807.3) When Jesus had thus spoken to the Father, he turned aside to speak to his apostles and ministers: “Blessed are the eyes which see and the ears which hear these things. Let me say to you that many prophets and many of the great men of the past ages have desired to behold what you now see, but it was not granted them. And many generations of the children of light yet to come will, when they hear of these things, envy you who have heard and seen them.” 예수께서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린 뒤에, 그는 얼굴을 돌려 사도들과 사역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네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지난 시대의 여러 위대한 사람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느니라(마13:16-17, 눅10:23-24). 그리고 도래할 여러 빛의 자녀들 세대가 이런 일들을 들을 때, 그것들을 듣고 본 너희를 부러워하느니라.”

221113 참된 초대장 마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163:6.5 (1807.4) Then, speaking to all the disciples, he said: “You have heard how many cities and villages have receive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ow my ministers and teachers have been received by both the Jew and the gentile. And blessed indeed are these communities which have elected to believe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woe upon the light-rejecting inhabitants of Chorazin, Bethsaida-Julias, and Capernaum, the cities which did not well receive these messengers. I declare that, if the mighty works done in these places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 people of these so-called heathen cities would have long sinc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It shall indeed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in the day of judgment.” 그다음에, 그는 모든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내 사역자들과 교사들을 어떻게 환영했는지, 들었느니라.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기로 작정한 이런 공동체들은 참으로 복이 있느니라. 그러나 빛을 거부하는 코라진, 벳새다-쥴리아스와 가버나움, 이런 메신저들을 호의적으로 환영하지 않았던 도시들에는 화 있을진저. 내가 선언하노니, 이곳들에서 행한 기적을 티레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소위 이런 이방인 도시의 사람들이 오래전에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날에 티레와 시돈이 참으로 더 견딜 만하리라(마11:21-22, 눅10:13-14).”

163:6.6 (1807.5) The next day being the Sabbath, Jesus went apart with the seventy and said to them: “I did indeed rejoice with you when you came back bearing the good tidings of the recep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by so many people scattered throughout Galilee, Samaria, and Judea. But why were you so surprisingly elated? Did you not expect that your message would manifest power in its delivery? Did you go forth with so little faith in this gospel that you come back in surprise at its effectiveness? And now, while I would not quench your spirit of rejoicing, I would sternly warn you against the subtleties of pride, spiritual pride. If you could understand the downfall of Lucifer, the iniquitous one, you would solemnly shun all forms of spiritual pride. 다음날(AD29. 12.31) 안식일에, 예수께서 70인과 따로 나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아주 많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내가 참으로 너희와 함께 기뻐했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왜 그렇게 놀랄 정도로 우쭐했느냐? 너희 메시지가 전달될 때 권세가 드러나리라고 너희가 기대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이 복음을 그렇게밖에 신앙하지 않고 나갔다가 그 효과에 깜짝 놀라서 돌아왔느냐? 그래서 이제, 내가 기뻐하는 너희 사기를 가라앉히지 않겠지만 나는 너희에게 미묘한 우월감, 영적 자만심에 대해서 단호히 경고하고자 하노라. 너희가 루시퍼, 사악(肆惡)한 자의 파멸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희는 모든 형태의 영적 자만심을 진지하게 피할 것이니라.

163:6.7 (1808.1) “You have entered upon this great work of teaching mortal man that he is a son of God. I have shown you the way; go forth to do your duty and be not weary in well doing. To you and to all who shall follow in your steps down through the ages, let me say: I always stand near, and my invitation-call is, and ever shall be,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of me, for I am true and loyal, and you shall find spiritual rest for your souls.” “너희는 필사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그에게 가르치는 이 위대한 일에 접어들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그 길을 보였느니라. 가서 너희 본분을 다하고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갈6:9a, 살후3:13). 너희와 대대로 너희 본을 뒤따를 모두에게 이르노라. 내가 항상 가까이 서서, 이제 그리고 영원토록 내가 불러 초청하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나는 진실하고 충실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알면, 너희는 너희 혼(魂)의 영적 안식(安息)을 찾으리라(마11:29).”

163:6.8 (1808.2) And they found the Master’s words to be true when they put his promises to the test. And since that day countless thousands also have tested and proved the surety of these same promises. 그리고 그들이 그의 약속을 시험해봤을 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참말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셀 수 없는 사람들도 시험해 보고 바로 이 약속의 확실성을 입증(立證)했습니다.

 

7. Preparation for the Last Mission 최후 사명 준비

221120 최후 사명 준비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As the time approached for him to be taken up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163:7.1 (1808.3) The next few days were busy times in the Pella camp; preparations for the Perean mission were being completed. Jesus and his associates were about to enter upon their last mission, the three months’ tour of all Perea, which terminated only upon the Master’s entering Jerusalem for his final labors on earth. Throughout this period the headquarters of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was maintained here at the Pella camp. 다음 며칠간 펠라 야영지는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페레아 선교 준비가 완료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그 동료들은 그들의 최후 사명에 막 들어갔는데, 주님께서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예루살렘 입성(入城)으로만 끝나는 3개월간 페레아 전역 여행(AD30. 1.3화~4.2일요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내내 예수와 12사도의 본부는 여기 펠라 야영지에 유지되었습니다.

163:7.2 (1808.4) It was no longer necessary for Jesus to go abroad to teach the people. They now came to him in increasing numbers each week and from all parts, not only from Palestine but from the whole Roman world and from the Near East. Although the Master participated with the seventy in the tour of Perea, he spent much of his time at the Pella camp, teaching the multitude and instructing the twelve. Throughout this three months’ period at least ten of the apostles remained with Jesus. 예수는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널리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전(全) 로마 세계와 근동(近東), 전역(全域)에서도 매주 그에게 오는 수(數)가 점점 더 늘었습니다. 주님은 70인과 함께 페레아 여행에 참여했지만, 그는 펠라 야영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군중을 가르치고 12사도를 교육했습니다. 적어도 이 석 달간 내내 열 명의 사도가 예수와 머물렀습니다.

163:7.3 (1808.5) The women’s corps also prepared to go out, two and two, with the seventy to labor in the larger cities of Perea. This original group of twelve women had recently trained a larger corps of fifty women in the work of home visitation and in the art of ministering to the sick and the afflicted. Perpetua, Simon Peter’s wife, became a member of this new division of the women’s corps and was intrusted with the leadership of the enlarged women’s work under Abner. After Pentecost she remained with her illustrious husband, accompanying him on all of his missionary tours; and on the day Peter was crucified in Rome, she was fed to the wild beasts in the arena. This new women’s corps also had as members the wives of Philip and Matthew and the mother of James and John. 여성단(團)도 70인과 함께 페레아의 대도시(大都市)에서 수고하기 위해 둘씩 나가려고 준비했습니다. 원래 12명의 이 여성 집단은 대심방(大尋訪) 사역과 환자와 앓는 자들을 보살피는 기법으로 최근에 50명의 더 큰 여성단(團)을 훈련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아내, 퍼페투아는 여성단(團) 중 이 새 부서원이 되었고, 아브너 아래에서 확대된 여성 사역의 지도를 맡았습니다. 오순절 이후 그녀는 빛나는 자기 남편과 함께 남아서 그의 모든 선교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날, 그녀는 투기장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여성단(團)에는 빌립과 마태의 아내들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역시 회원으로 있었습니다.

163:7.4 (1808.6) The work of the kingdom now prepared to enter upon its terminal phase under the personal leadership of Jesus. And this present phase was one of spiritual depth in contrast with the miracle-minded and wonder-seeking multitudes who followed after the Master during the former days of popularity in Galilee. However, there were still any number of his followers who were material-minded, and who failed to grasp the truth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founded on the eternal fact of the universal fatherhood of God. 하느님 나라 과업은 이제 예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단계는, 갈릴리에서 인기가 있던 이전 시절에 주님을 따랐던, 기적에 흥미를 두고 이적을 찾는 군중과 현저히 다르게, 영적으로 깊은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에 관심을 두고, 하늘나라는 하느님이 우주 아버지라는 영원한 사실에 근거한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라는 진리를 끝내 파악하지 못한 그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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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4 At the Feast of Dedication 봉헌(奉獻)절에

Paper 164

At the Feast of Dedication 봉헌(奉獻)절에

1. Story of the Good Samaritan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2.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3. Healing the Blind Beggar 눈먼 거지의 치유
4. Josiah Before the Sanhedrin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5. Teaching in Solomon’s Porch 솔로몬 행각의 가르침

221127 아버지의 마음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So he got up and went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for him; he ran to his son, threw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164:0.1 (1809.1) AS THE camp at Pella was being established, Jesus, taking with him Nathaniel and Thomas, secretly went up to Jerusalem to attend the feast of the dedication. Not until they passed over the Jordan at the Bethany ford, did the two apostles become aware that their Master was going on to Jerusalem. When they perceived that he really intended to be present at the feast of dedication, they remonstrated with him most earnestly, and using every sort of argument, they sought to dissuade him. But their efforts were of no avail; Jesus was determined to visit Jerusalem. To all their entreaties and to all their warnings emphasizing the folly and danger of placing himself in the hands of the Sanhedrin, he would reply only, “I would give these teachers in Israel another opportunity to see the light, before my hour comes.” 펠라에 야영지가 세워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다니엘과 도마를 데리고 봉헌절(하누카 AD29.12.25)에 참석하러 비밀리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두 사도는 베다니 여울목에서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야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정말로 봉헌절에 참석하려 하심을 알아차리자, 그들은 그에게 정말 진심으로 간언(諫言)하고 온갖 이유를 들어 그들은 그를 단념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손에 자신을 두는 어리석음과 위험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든 간청과 경고에, 그는 “내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이스라엘의 이런 교사들에게 빛을 볼 또 다른 기회를 주려 하노라.”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164:0.2 (1809.2) On they went toward Jerusalem, the two apostles continuing to express their feelings of fear and to voice their doubts about the wisdom of such an apparently presumptuous undertaking. They reached Jericho about half past four and prepared to lodge there for the night.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가면서, 두 사도는 계속 자신들의 두려운 감정을 드러내고, 그토록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행동하는 판단에 대해 의혹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4시 30분쯤 도착하여 거기서 하룻밤 묵을 준비를 했습니다.

1. Story of the Good Samaritan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221204 인정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 눅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5 On one occasion an expert in the law stood up to test Jesus. “Teacher,” he aske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What is written in the Law?” he replied. “How do you read it?” 27 He answered, “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You have answered correctly,” Jesus replied.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But he wanted to justify himself,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In reply Jesus sai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when he was attacked by robber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 31 A priest happened to be going down the same road, and when he saw the man,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2 So too, a Levite, when he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But a Samaritan, as he traveled, came where the man was; and when he saw him, he took pity on him. 34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denarii and gave them to the innkeeper. ‘Look after him,’ he said, ‘and when I return, I will reimburse you for any extra expense you may have.’ 36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37 The expert in the law replied,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told him, “Go and do likewise.”

164:1.1 (1809.3) That evening a considerable company gathered about Jesus and the two apostles to ask questions, many of which the apostles answered, while others the Master discussed. In the course of the evening a certain lawyer, seeking to entangle Jesus in a compromising disputation, said: “Teacher, I would like to ask you just what I should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answered, “What is written in the law and the prophets; how do you read the Scriptures?” The lawyer, knowing the teachings of both Jesus and the Pharisees, answered: “To love the Lord God with all your heart, soul, mind, and strength,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n said Jesus: “You have answered right; this, if you really do, will lead to life everlasting.” 그날 저녁 꽤 많은 사람이 예수와 두 사도 주위에 모여 질문을 했는데 사도들이 그 대부분을 대답했고, 다른 질문들은 주께서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녁에 어떤 율법 교사가 평판을 떨어뜨리는 논쟁에 예수를 빠뜨리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 예수와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다 아는 그 율법 교사가, “주 하느님을 네 심정과 혼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네가 정말로 행하면, 이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리라(눅10:25-28).”

164:1.2 (1809.4) But the lawyer was not wholly sincere in asking this question, and desiring to justify himself while also hoping to embarrass Jesus, he ventured to ask still another question. Drawing a little closer to the Master, he said, “But, Teacher, I should like you to tell me just who is my neighbor?” The lawyer asked this question hoping to entrap Jesus into making some statement that would contravene the Jewish law which defined one’s neighbor as “the children of one’s people.” The Jews looked upon all others as “gentile dogs.” This lawyer was somewhat familiar with Jesus’ teachings and therefore well knew that the Master thought differently; thus he hoped to lead him into saying something which could be construed as an attack upon the sacred law. 그러나 그 율법 교사는 아주 신실하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예수를 난처하게 하려고 감히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눅10:29). 그는, 주께 좀 더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누가 바로 내 이웃인지 말해주시겠습니까?” 율법 교사는 예수를 속여서 그 이웃을 “그 민족의 자녀들”로 규정하는 유대 율법을 위반하는 진술에 빠져들도록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이방인의 개들”로 여겼습니다. 이 율법 교사는 어느 정도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있어서 주께서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성한 율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말을 하도록 예수를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164:1.3 (1810.1) But Jesus discerned the lawyer’s motive, and instead of falling into the trap, he proceeded to tell his hearers a story, a story which would be fully appreciated by any Jericho audience. Said Jesus: “A certain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he fell into the hands of cruel brigands, who robbed him, stripped him and beat him, and departing, left him half dead. Very soon, by chance, a certain priest was going down that way, and when he came upon the wounded man, seeing his sorry plight,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in like manner a Levite also, when he came along and saw the man, passed by on the other side. Now, about this time, a certain Samaritan, as he journeyed down to Jericho, came across this wounded man; and when he saw how he had been robbed and beaten,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and going over to him, he bound up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and setting the man upon his own beast, brought him here to the inn and took care of him. And on the morrow he took out some money and, giving it to the host, said: ‘Take good care of my friend, and if the expense is more, when I come back again, I will repay you.’ Now let me ask you: Which of these three turned out to be the neighbor of him who fell among the robbers?” And when the lawyer perceived that he had fallen into his own snare, he answered, “He who showed mercy on him.” And Jesus said, “Go and do likewise.”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 교사의 동기를 알아차리고, 함정에 빠지는 대신에 적어도 여리고의 청중이 잘 이해하는 이야기를 청중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잔인한 산적들의 손에 넘어가 약탈당하고 발가벗겨져 매를 맞고 거의 죽도록 버려두고 떠났는지라. 곧 우연히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부상자를 발견하고 그 비참한 처지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쳤더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레위인도 나타나 그를 보고 반대편으로 지나쳤더라. 이제 이 무렵,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리고에 이르도록 여행하다가 우연히 이 부상자를 발견했느니라. 그가 얼마나 약탈당해 기진맥진했는지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 가서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싸매고 그를 자기 가축에 실어 여기 여인숙에 데려와 그를 보살폈더라. 다음날 그가 얼마의 돈을 꺼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내 친구를 잘 돌봐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더라.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그의 이웃으로 판가름이 났느냐?” 그 율법 교사는 자신의 함정에 자기가 빠졌음을 눈치채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인정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서 마찬가지로 행하라(눅10:30-37).”

164:1.4 (1810.2) The lawyer answered, “He who showed mercy,” that he might refrain from even speaking that odious word, Samaritan. The lawyer was forced to give the very answer to the question, “Who is my neighbor?” which Jesus wished given, and which, if Jesus had so stated, would have directly involved him in the charge of heresy. Jesus not only confounded the dishonest lawyer, but he told his hearers a story which was at the same time a beautiful admonition to all his followers and a stunning rebuke to all Jews regarding their attitude toward the Samaritans. And this story has continued to promote brotherly love among all who have subsequently believed the gospel of Jesus. 그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런 끔찍한 단어를 말하기조차 꺼려서, “인정을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께 받고 싶었고, 예수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를 즉시 이단의 혐의로 말려들게 했었을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바로 그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하지 않은 율법 교사를 당황하게 했으며, 그의 모든 추종자에게 아름다운 훈계인 동시에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유대인의 태도에 대해 모든 유대인을 깜짝 놀라게 힐책(詰責 잘못을 따져 나무람)하는 이야기를 그가 자기 청중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예수의 복음을 믿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의 사랑을 계속 증진했습니다.

2. At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221211 빛을 보는 또 다른 기회 요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But whoever lives by the truth comes into the light, so that it may be seen plainly that what they have done has been done in the sight of God.

164:2.1 (1810.3) Jesus had attended the feast of tabernacles that he might proclaim the gospel to the pilgrims from all parts of the empire; he now went up to the feast of the dedication for just one purpose: to give the Sanhedrin and the Jewish leaders another chance to see the light. The principal event of these few days in Jerusalem occurred on Friday night at the home of Nicodemus. Here were gathered together some twenty-five Jewish leaders who believed Jesus’ teaching. Among this group were fourteen men who were then, or had recently been, members of the Sanhedrin. This meeting was attended by Eber, Matadormus, and Joseph of Arimathea. 예수께서 제국 전역의 순례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도 있는 장막절에 참석하셨고, 그는 이제 단 한 가지 목적, 산헤드린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빛을 보는 또 다른 기회를 주려고 봉헌절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의 며칠 중 중요한 사건은 금요일 밤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은 약 25명의 유대 지도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 무리 중에 당시에 또는 최근에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남성 14명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 이버, 마타도르무스와 아리마대 요셉이 참석했습니다.

164:2.2 (1810.4) On this occasion Jesus’ hearers were all learned men, and both they and his two apostles were amazed at the breadth and depth of the remarks which the Master made to this distinguished group. Not since the times when he had taught in Alexandria, Rome, and in the islands of the Mediterranean, had he exhibited such learning and shown such a grasp of the affairs of men, both secular and religious. 이때 예수의 청중은 모두 학식이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과 그의 두 사도는 모두 주께서 이렇게 뛰어난 무리에게 하신 말씀의 폭과 깊이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지중해 섬들에서 가르쳤던 시절 이후로 그는 그러한 학식을 드러내고, 세속적이며 종교적인 인간사(人間事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 모두에 대한 그런 이해력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164:2.3 (1810.5) When this little meeting broke up, all went away mystified by the Master’s personality, charmed by his gracious manner, and in love with the man. They had sought to advise Jesus concerning his desire to win the remaining members of the Sanhedrin. The Master listened attentively, but silently, to all their proposals. He well knew none of their plans would work. He surmised that the majority of the Jewish leaders never would accept the gospel of the kingdom; nevertheless, he gave them all this one more chance to choose. But when he went forth that night, with Nathaniel and Thomas, to lodge on the Mount of Olives, he had not yet decided upon the method he would pursue in bringing his work once more to the notice of the Sanhedrin. 이 작은 모임이 끝나자, 모두 주님의 고유성(인격)에 신비로워하면서, 그의 우아한 태도에 매혹되었으며, 그분을 사랑하게 되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남아 있는 회원들을 설득하려는 예수의 요망에 관해 그에게 권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정중하지만, 조용히 그들의 모든 제안을 경청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어떤 계획도 소용없을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유대 지도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선택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날 밤 나다니엘과 도마와 함께 감람산(橄欖山)에서 묵으려고 나갔을 때, 그는 자기 일을 한 번 더 산헤드린의 눈길을 끌기 위해 추진할 방법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164:2.4 (1811.1) That night Nathaniel and Thomas slept little; they were too much amazed by what they had heard at Nicodemus’s house. They thought much over the final remark of Jesus regarding the offer of the former and present members of the Sanhedrin to go with him before the seventy. The Master said: “No, my brethren, it would be to no purpose. You would multiply the wrath to be visited upon your own heads, but you would not in the least mitigate the hatred which they bear me. Go, each of you, about the Father’s business as the spirit leads you while I once more bring the kingdom to their notice in the manner which my Father may direct.” 그날 밤 나다니엘과 도마는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그들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자신들이 들은 것으로 인해 버겁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의 전현직(前現職) 회원들이 70인 앞에 예수님과 함께 가자는 제언에 관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대해 많이 심사숙고했습니다. 주께서 말했습니다. “아니라, 내 형제들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덮칠 분노를 증대시킬 것이며, 너희는 나에게 품고 있는 그들의 미움을 조금도 완화하지 못할 뿐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지시할 방법으로 그들의 눈길을 하느님 나라로 한 번 더 이끄는 동안, 영(靈)이 너희를 이끄는 대로 너희는 각자 아버지의 일을 하라.”

3. Healing the Blind Beggar 눈먼 거지의 치유

221218 존재한 적이 없는 전생(前生) 요9:1-2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1 As he went along, he saw a man blind from birth. 2 His disciples asked him, “Rabbi, who sinned, this man or his parents, that he was born blind?”

164:3.1 (1811.2) The next morning the three went over to Martha’s home at Bethany for breakfast and then went immediately into Jerusalem. This Sabbath morning, as Jesus and his two apostles drew near the temple, they encountered a well-known beggar, a man who had been born blind, sitting at his usual place. Although these mendicants did not solicit or receive alms on the Sabbath day, they were permitted thus to sit in their usual places. Jesus paused and looked upon the beggar. As he gazed upon this man who had been born blind, the idea came into his mind as to how he would once more bring his mission on earth to the notice of the Sanhedrin and the other Jewish leaders and religious teachers.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아침을 먹으러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으로 갔다가 즉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와 그의 두 사도가 성전에 다가갔을 때, 그들은 잘 알려진 거지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타고난 시각 장애인으로 평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요9:1). 이런 거지들은 안식일에 구걸하거나 동냥을 받지 않았지만, 그들은 평소 자기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예수께서 잠시 멈추어 그 거지를 지켜보셨습니다. 그가 타고난 이 소경을 가만히 보다가, 한 번 더 자신의 지상 사명으로 산헤드린과 다른 유대 지도자들과 종교 교사들의 눈길을 끌 방법에 대해 그의 마음에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64:3.2 (1811.3) As the Master stood there before the blind man, engrossed in deep thought, Nathaniel, pondering the possible cause of this man’s blindness, asked: “Master, who did sin, this man or his parents, that he should be born blind?” 주께서 거기 시각 장애인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다니엘이 이 사람이 시각을 잃어버린 가능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며 여쭈었습니다. “주여,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타고난 것은 누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했습니까(요9:2)?”

164:3.3 (1811.4) The rabbis taught that all such cases of blindness from birth were caused by sin. Not only were children conceived and born in sin, but a child could be born blind as a punishment for some specific sin committed by its father. They even taught that a child itself might sin before it was born into the world. They also taught that such defects could be caused by some sin or other indulgence of the mother while carrying the child. 랍비(유대 율법 교사)들은 날 때부터 시각을 잃은 그런 모든 경우는 죄 때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죄 중에 잉태되어 태어날 뿐만 아니라 아이 아버지가 범한 어떤 특정 죄에 대한 처벌로 아이가 시각을 잃고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스스로 죄를 범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아이를 잉태하는 동안 엄마의 어떤 죄나 다른 방종 때문에 그런 결함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164:3.4 (1811.5) There was, throughout all these regions, a lingering belief in reincarnation. The older Jewish teachers, together with Plato, Philo, and many of the Essenes, tolerated the theory that men may reap in one incarnation what they have sown in a previous existence; thus in one life they were believed to be expiating the sins committed in preceding lives. The Master found it difficult to make men believe that their souls had not had previous existences. 이런 지역 전체에 환생(還生)에 대한 믿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더 오래된 유대교 교사들은 플라톤, 필로와 여러 에세네파 신도들과 함께 사람들이 전생에서 뿌린 것을 하나의 재탄생으로 거둘 수도 있다는 이론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생애에서 이전 생애들에서 범한 죄악들이 속죄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혼(魂)은 전생(前生)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그들에게 믿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64:3.5 (1811.6) However, inconsistent as it seems, while such blindness was supposed to be the result of sin, the Jews held that it was meritorious in a high degree to give alms to these blind beggars. It was the custom of these blind men constantly to chant to the passers-by, “O tenderhearted, gain merit by assisting the blind.”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시각을 잃는 것이 죄의 결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런 눈먼 거지들에게 동냥을 주는 것은 대단히 칭찬할만하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했습니다. 이런 눈먼 사람들은 행인들에게 “아, 인정이 많은 분이여, 시각 장애인을 도와서 공덕을 얻으소서.”라고 계속 외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230101 시각 장애인, 요시야의 치유 요9:3-12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3 “Neither this man nor his parents sinned,” said Jesus, “but this happened so that the works of God might be displayed in him. 4 As long as it is day, we must do the works of him who sent me. Night is coming, when no one can work. 5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6 After saying this, he spit on the ground, made some mud with the saliva, and put it on the man’s eyes. 7 “Go,” he told him, “wash in the Pool of Siloam” (this word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home seeing. 8 His neighbors and those who had formerly seen him begging asked, “Isn’t this the same man who used to sit and beg?” 9 Some claimed that he was. Others said, “No, he only looks like him.” But he himself insisted, “I am the man.” 10 “How then were your eyes opened?” they asked. 11 He replied, “The man they call Jesus made some mud and put it on my eyes. He told me to go to Siloam and wash. So I went and washed, and then I could see.” 12 “Where is this man?” they asked him. “I don’t know,” he said.

164:3.6 (1811.7) Jesus entered into the discussion of this case with Nathaniel and Thomas, not only because he had already decided to use this blind man as the means of that day bringing his mission once more prominently to the notice of the Jewish leaders, but also because he always encouraged his apostles to seek for the true causes of all phenomena, natural or spiritual. He had often warned them to avoid the common tendency to assign spiritual causes to commonplace physical events. 예수께서 나다니엘 및 도마와 이 일로 논의를 시작하신 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눈길에 자신의 사명이 한 번 더 눈에 띄도록 이끄는 그날의 방법으로 이 시각 장애인을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사도들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현상의 참된 원인을 찾도록 언제나 격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종 그들에게 흔히 있는 물리적 사건을 영적 원인의 탓으로 돌리는 일반적 성향을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164:3.7 (1812.1) Jesus decided to use this beggar in his plans for that day’s work, but before doing anything for the blind man, Josiah by name, he proceeded to answer Nathaniel’s question. Said the Master: “Neither did this man sin nor his parents that the works of God might be manifest in him. This blindness has come upon him in the natural course of events, but we must now do the works of Him who sent me, while it is still day, for the night will certainly come when it will be impossible to do the work we are about to perform. When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but in only a little while I will not be with you.” 예수께서 그날 일을 위한 자기 계획에 이 거지를 사용하기로 정했지만, 요시야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에게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나다니엘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그에게서 하느님 행위의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이 시각 상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의 경과로 그에게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이제 나를 보낸 그분의 행위를 행해야 하느니라, 아직 낮이지만, 우리가 막 행하려는 행위를 할 수 없는 밤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지만, 조금 있으면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라(요9:3-5).”

164:3.8 (1812.2) When Jesus had spoken, he said to Nathaniel and Thomas: “Let us create the sight of this blind man on this Sabbath day that the scribes and Pharisees may have the full occasion which they seek for accusing the Son of Man.” Then, stooping over, he spat on the ground and mixed the clay with the spittle, and speaking of all this so that the blind man could hear, he went up to Josiah and put the clay over his sightless eyes, saying: “Go, my son, wash away this clay in the pool of Siloam, and immediately you shall receive your sight.” And when Josiah had so washed in the pool of Siloam, he returned to his friends and family, seeing. 예수께서 답하신 다음, 그가 나다니엘과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기회를 본격적으로 갖도록 이 안식일에 우리가 이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자.” 그런 다음 그가 허리를 굽혀 땅에 침을 뱉고 흙과 침을 섞어서, 그 시각 장애인이 들을 수 있도록 이 모든 일을 말하면서, 요시야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시력이 없는 눈에 그 진흙을 덮어 붙이며, “내 아들아, 가서, 실로암 못에서 이 진흙을 씻어내면, 즉시 네 시력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실로암 못에서 그렇게 씻었을 때, 그는 눈을 떠 보면서, 자기 친구들과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요9:6-7).

164:3.9 (1812.3) Having always been a beggar, he knew nothing else; so, when the first excitement of the creation of his sight had passed, he returned to his usual place of alms-seeking. His friends, neighbors, and all who had known him aforetime, when they observed that he could see, all said, “Is this not Josiah the blind beggar?” Some said it was he, while others said, “No, it is one like him, but this man can see.” But when they asked the man himself, he answered, “I am he.” 언제나 거지였던 그는 그 외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이 떠지는 첫 흥분 상태가 지나가자, 그는 평소 구걸(求乞)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친구들, 이웃들과 원래 그를 알던 모두 그가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아차리자 모두 “이 사람이 시각 장애인 거지 요시야가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인데 이 사람은 볼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인에게 묻자, 그는 “내가 그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9:8-9).

164:3.10 (1812.4) When they began to inquire of him how he was able to see, he answered them: “A man called Jesus came by this way, and when talking about me with his friends, he made clay with spittle, anointed my eyes, and directed that I should go and wash in the pool of Siloam. I did what this man told me, and immediately I received my sight. And that is only a few hours ago. I do not yet know the meaning of much that I see.” And when the people who began to gather about him asked where they could find the strange man who had healed him, Josiah could answer only that he did not know.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가 볼 수 있었는지 묻기 시작하자, 그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이리로 와서, 친구들과 내 얘기를 한 다음, 그가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내 눈에 바르고, 내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내게 말한 것을 했고, 즉시 나는 시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과 몇 시간 전(前)입니다. 나는 내가 보는 많은 의미를 아직 모릅니다.” 그 주위로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를 치료한 낯선 사람을 자신들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요시야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요9:10-12).

230108 진흙과 침을 사용한 3가지 이유 요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4 Now the day on which Jesus had made the mud and opened the man’s eyes was a Sabbath.

164:3.11 (1812.5) This is one of the strangest of all the Master’s miracles. This man did not ask for healing. He did not know that the Jesus who had directed him to wash at Siloam, and who had promised him vision, was the prophet of Galilee who had preached in Jerusalem during the feast of tabernacles. This man had little faith that he would receive his sight, but the people of that day had great faith in the efficacy of the spittle of a great or holy man; and from Jesus’ conversation with Nathaniel and Thomas, Josiah had concluded that his would-be benefactor was a great man, a learned teacher or a holy prophet; accordingly he did as Jesus directed him. 이것은 주님의 모든 기적에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사람은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지시하고 자신에게 시력을 약속한 예수가 장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했던 갈릴리의 선지자인 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시력을 얻으리라는 신앙이 거의 없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위대하거나 거룩한 사람의 침이 효험이 있다고 엄청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다니엘 및 도마와 나눈 대화에서, 요시야는 자신에게 은인(恩人)이 될 분이 위대한 사람, 학식이 있는 교사나 거룩한 선지자라고 추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자신에게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164:3.12 (1812.6) Jesus made use of the clay and the spittle and directed him to wash in the symbolic pool of Siloam for three reasons: 예수께서 세 가지 이유로 진흙과 침을 사용하여 상징적인 실로암 못에서 그에게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64:3.13 (1812.7) 1. This was not a miracle response to the individual’s faith. This was a wonder which Jesus chose to perform for a purpose of his own, but which he so arranged that this man might derive lasting benefit therefrom.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대한 기적적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하기로 택하고, 그는 이 사람이 그것에서 지속적인 혜택을 얻도록 그렇게 조정(調整)한, 이적이었습니다.

164:3.14 (1813.1) 2. As the blind man had not asked for healing, and since the faith he had was slight, these material acts were suggested for the purpose of encouraging him. He did believe in the superstition of the efficacy of spittle, and he knew the pool of Siloam was a semisacred place. But he would hardly have gone there had it not been necessary to wash away the clay of his anointing. There was just enough ceremony about the transaction to induce him to act. 시각 장애인이 치료를 요청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이 약했기 때문에, 그를 격려하려고, 이런 물질적인 행위를 꺼냈습니다. 그는 미신적인 침의 효험을 믿었고, 실로암 못을 어느 정도 신성한 장소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발랐던 진흙을 씻어낼 필요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거기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행동하도록 이끄는 처리에 대한 충분한 형식일 뿐이었습니다.

164:3.15 (1813.2) 3. But Jesus had a third reason for resorting to these material means in connection with this unique transaction: This was a miracle wrought purely in obedience to his own choosing, and thereby he desired to teach his followers of that day and all subsequent ages to refrain from despising or neglecting material means in the healing of the sick. He wanted to teach them that they must cease to regard miracles as the only method of curing human diseases. 그러나 예수께서 이런 독특한 처리에 관해 이런 물질적 방법을 사용한 셋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일어난 기적이었고, 그것에 대해 그는 당시와 이후 모든 세대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환자를 치료할 때 물질적 방법을 얕보거나 게을리하지 않도록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기적을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164:3.16 (1813.3) Jesus gave this man his sight by miraculous working, on this Sabbath morning and in Jerusalem near the temple, for the prime purpose of making this act an open challenge to the Sanhedrin and all the Jewish teachers and religious leaders. This was his way of proclaiming an open break with the Pharisees. He was always positive in everything he did. And it was for the purpose of bringing these matters before the Sanhedrin that Jesus brought his two apostles to this man early in the afternoon of this Sabbath day and deliberately provoked those discussions which compelled the Pharisees to take notice of the miracle. 예수는 이런 행위로 산헤드린과 모든 유대 교사들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주요한 목적을 위해서, 이 안식일 아침에 성전 근처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여 이 사람에게 그의 시력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는다고 선포하는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항상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런 문제를 산헤드린 앞에 제기하려고 자기 두 사도를 일찍 이 사람에게 데려왔고, 이 안식일 오후에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기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토론을 일으켰습니다(요9:14).

4. Josiah Before the Sanhedrin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230115 첫 번째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요9:13-23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13 They brought to the Pharisees the man who had been blind. 14 Now the day on which Jesus had made the mud and opened the man’s eyes was a Sabbath. 15 Therefore the Pharisees also asked him how he had received his sight. “He put mud on my eyes,” the man replied, “and I washed, and now I see.” 16 Some of the Pharisees said, “This man is not from God, for he does not keep the Sabbath.” But others asked, “How can a sinner perform such signs?” So they were divided. 17 Then they turned again to the blind man, “What have you to say about him? It was your eyes he opened.” The man replied, “He is a prophet.” 18 They still did not believe that he had been blind and had received his sight until they sent for the man’s parents. 19 “Is this your son?” they asked. “Is this the one you say was born blind? How is it that now he can see?” 20 “We know he is our son,” the parents answered, “and we know he was born blind. 21 But how he can see now, or who opened his eyes, we don’t know. Ask him. He is of age; he will speak for himself.” 22 His parents said thi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 who already had decided that anyone who acknowledged that Jesus was the Messiah w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23 That was why his parents said, “He is of age; ask him.”

164:4.1 (1813.4) By midafternoon the healing of Josiah had raised such a discussion around the temple that the leaders of the Sanhedrin decided to convene the council in its usual temple meeting place. And they did this in violation of a standing rule which forbade the meeting of the Sanhedrin on the Sabbath day. Jesus knew that Sabbath breaking would be one of the chief charges to be brought against him when the final test came, and he desired to be brought before the Sanhedrin for adjudication of the charge of having healed a blind man on the Sabbath day, when the very session of the high Jewish court sitting in judgment on him for this act of mercy would be deliberating on these matters on the Sabbath day and in direct violation of their own self-imposed laws. 이른 오후(3~4 p.m. 전후)까지 요시야의 치유가 성전 주변에서 너무 토론을 일으켜서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평소 성전 모임 장소에서 의회를 소집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산헤드린의 모임을 금지한 정관(定款 기본 규칙)을 어기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최후 시험이 왔을 때, 안식일 위반이 자신을 고발하는 하나의 주요한 혐의가 될 것을 알았고, 이런 자비의 행위로 그를 재판하는 바로 그 유대 최고 법정 회의가 안식일에 이런 문제를 심의하게 되어 바로 자신들이 시행한 법을 직접 위반하도록, 그는 안식일에 시각 장애인을 치료한 혐의에 대한 판결로 산헤드린 앞에 넘겨지기를 원했습니다.

164:4.2 (1813.5) But they did not call Jesus before them; they feared to. Instead, they sent forthwith for Josiah. After some preliminary questioning, the spokesman for the Sanhedrin (about fifty members being present) directed Josiah to tell them what had happened to him. Since his healing that morning Josiah had learned from Thomas, Nathaniel, and others that the Pharisees were angry about his healing on the Sabbath, and that they were likely to make trouble for all concerned; but Josiah did not yet perceive that Jesus was he who was called the Deliverer. So, when the Pharisees questioned him, he said: “This man came along, put clay upon my eyes, told me to go wash in Siloam, and I do now see.”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앞에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즉시 요시야를 부르러 보냈습니다. 약간의 사전 질문 후에, 약 50명이 참석한 산헤드린의 대변인이 요시야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가 치유된 그날 아침 이후, 요시야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자신의 치유에 대해 화를 내고, 그들이 관련된 모두에게 소란을 일으킬 것 같다는 사실을 도마,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예수가 해방자로 불리는 분임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그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이 사람이 나타나서, 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내게 말했고, 이제 나는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요9:13-15).

164:4.3 (1813.6) One of the older Pharisees, after making a lengthy speech, said: “This man cannot be from God because you can see that he does not observe the Sabbath. He violates the law, first, in making the clay, then, in sending this beggar to wash in Siloam on the Sabbath day. Such a man cannot be a teacher sent from God.” 나이 든 바리새인 하나가 길게 연설한 다음에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니, 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없습니다. 그는 먼저 진흙을 만든 다음에 이 거지를 보내서 안식일에 실로암에서 씻게 하여서, 율법을 어깁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요9:16a).”

164:4.4 (1813.7) Then one of the younger men who secretly believed in Jesus, said: “If this man is not sent by God, how can he do these things? We know that one who is a common sinner cannot perform such miracles. We all know this beggar and that he was born blind; now he sees. Will you still say that this prophet does all these wonders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And for every Pharisee who dared to accuse and denounce Jesus one would arise to ask entangling and embarrassing questions, so that a serious division arose among them. The presiding officer saw whither they were drifting, and in order to allay the discussion, he prepared further to question the man himself. Turning to Josiah, he said: “What do you have to say about this man, this Jesus, whom you claim opened your eyes?” And Josiah answered, “I think he is a prophet.” 그때 몰래 예수를 믿던 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평범한 죄인이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고 우리가 압니다. 우리 모두 이 거지와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아는데, 그는 이제 봅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 선지자가 악령들 괴수(魁首)의 권세로 이런 모든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려 합니까?” 감히 예수를 고발하고 비난했던 바리새인마다 한 사람씩 일어나 난처하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하곤 해서, 그들 중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자는 그들이 어디로 헤매는지 보고 토론을 가라앉히려고, 그는 당사자에게 더 질문하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는 요시야를 향해 말했습니다. “너는 이 사람, 네 눈을 뜨게 했다고 네가 주장하는 이 예수에 대해 너는 할 말이 있느냐?” 요시야가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는 선지자입니다(요9:16b-17).”

164:4.5 (1814.1) The leaders were greatly troubled and, knowing not what else to do, decided to send for Josiah’s parents to learn whether he had actually been born blind. They were loath to believe that the beggar had been healed. 지도자들은 아주 난처해하면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요시야가 정말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는지 알려고 그의 부모를 부르러 보내기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그 거지가 치유된 것을 믿는 것이 꺼림칙했습니다(요9:18).

164:4.6 (1814.2) It was well known about Jerusalem, not only that Jesus was denied entrance into all synagogues, but that all who believed in his teaching were likewise cast out of the synagogue, excommunicated from the congregation of Israel; and this meant denial of all rights and privileges of every sort throughout all Jewry except the right to buy the necessaries of life. 예수께서 모든 회당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믿는 모든 자도 똑같이 회당에서 쫓겨나, 이스라엘 회중에서 파문(破門)당하는 것도 예루살렘 주변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생활필수품을 살 권리 외에는 모든 유대 민족 전체에서 모든 권리와 모든 종류의 특권이 거부된다는 의미였습니다.

164:4.7 (1814.3) When, therefore, Josiah’s parents, poor and fear-burdened souls, appeared before the august Sanhedrin, they were afraid to speak freely. Said the spokesman of the court: “Is this your son? and do we understand aright that he was born blind? If this is true, how is it that he can now see?” And then Josiah’s father, seconded by his mother, answered: “We know that this is our son, and that he was born blind, but how it is that he has come to see, or who it was that opened his eyes, we know not. Ask him; he is of age; let him speak for himself.” 따라서 요시야의 부모, 가난과 두려움에 짓눌린 혼(魂)들이 위엄있는 산헤드린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무서워서 구애받지 않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법정 대변인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냐? 그리고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고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지금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그러자 요시야의 어머니가 지지하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가 우리 아들이고 그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혹은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는 성인이니까 그에게 물으소서. 그가 직접 말하게 하소서(요9:19-23).”

230122 두 번째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야 요9:24-34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24 A second time they summoned the man who had been blind. “Give glory to God by telling the truth,” they said. “We know this man is a sinner.” 25 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26 Then they asked him, “What did he do to you? How did he open your eyes?” 27 He answered, “I have told you already and you did not listen. Why do you want to hear it again? Do you want to become his disciples too?” 28 Then they hurled insults at him and said, “You are this fellow’s disciple! We are disciples of Moses! 29 We know that God spoke to Moses, but as for this fellow, we don’t even know where he comes from.” 30 The man answered, “Now that is remarkable! You don’t know where he comes from, yet he opened my eyes. 31 We know that God does not listen to sinners. He listens to the godly person who does his will. 32 Nobody has ever heard of opening the eyes of a man born blind. 33 If this man were not from God, he could do nothing.” 34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164:4.8 (1814.4) They now called Josiah up before them a second time. They were not getting along well with their scheme of holding a formal trial, and some were beginning to feel strange about doing this on the Sabbath; accordingly, when they recalled Josiah, they attempted to ensnare him by a different mode of attack. The officer of the court spoke to the former blind man, saying: “Why do you not give God the glory for this? why do you not tell us the whole truth about what happened? We all know that this man is a sinner. Why do you refuse to discern the truth? You know that both you and this man stand convicted of Sabbath breaking. Will you not atone for your sin by acknowledging God as your healer, if you still claim that your eyes have this day been opened?” 그들은 이제 자신들 앞에 요시야를 두 번째 불렀습니다. 그들은 정식으로 재판하려는 그들의 획책(劃策)이 잘되지 않았고, 일부는 안식일에 이렇게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시야를 되불렀을 때 그들은 다른 공격방식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집행관이 이전의 시각 장애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이런 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가? 너는 왜 일어난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느냐? 우리 모두 이 사람을 죄인으로 아노라. 너는 왜 진실을 분간하려 하지 않느냐? 너와 이 사람 둘 다 안식일 파괴죄의 선고를 받고 있음을 네가 아느니라. 네가 여전히 네 눈이 오늘 떠졌다고 주장한다면, 하느님을 너희 치료자로 인정하여, 네 죄를 속죄(贖罪 면죄)하지 않겠느냐(요9:24)?”

164:4.9 (1814.5) But Josiah was neither dumb nor lacking in humor; so he replied to the officer of the court: “Whether this man is a sinner, I know not; but one thing I do know — that, whereas I was blind, now I see.” And since they could not entrap Josiah, they sought further to question him, asking: “Just how did he open your eyes? what did he actually do to you? what did he say to you? did he ask you to believe in him?” 그러나 요시야는 어리석지도 유머가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정관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나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요시야를 함정에 빠뜨릴 수 없어서, 더 캐내어 물으려고 질문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했느냐? 그가 정말로 너에게 무엇을 했느냐? 그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느냐? 그가 너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했느냐(요9:25-26)?”

164:4.10 (1814.6) Josiah replied, somewhat impatiently: “I have told you exactly how it all happened, and if you did not believe my testimony, why would you hear it again? Would you by any chance also become his disciples?” When Josiah had thus spoken, the Sanhedrin broke up in confusion, almost violence, for the leaders rushed upon Josiah, angrily exclaiming: “You may talk about being this man’s disciple, but we are disciples of Moses, and we are the teachers of the laws of God. We know that God spoke through Moses, but as for this man Jesus, we know not whence he is.” 요시야는 약간 짜증을 내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당신들에게 그대로 말했는데. 당신들이 내 증언을 믿지 않는다면, 왜 다시 들으려 합니까? 혹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요시야가 이렇게 말하자, 지도자들이 요시야에게 갑자기 덤벼들어 “너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들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율법 선생들이라. 우리는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말한 것을 알지만 이 사람 예수에 관해서, 우리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노라.”라고 화내며 외쳤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혼란해져서 거의 격렬하게 흩어졌습니다(요9:27-29).

164:4.11 (1814.7) Then Josiah, standing upon a stool, shouted abroad to all who could hear, saying: “Hearken, you who claim to be the teachers of all Israel, while I declare to you that herein is a great marvel since you confess that you know not whence this man is, and yet you know of a certainty, from the testimony which you have heard, that he opened my eyes. We all know that God does not perform such works for the ungodly; that God would do such a thing only at the request of a true worshiper — for one who is holy and righteous. You know that not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have you ever heard of the opening of the eyes of one who was born blind. Look, then, all of you, upon me and realize what has been done this day in Jerusalem! I tell you, if this man were not from God, he could not do this.” And as the Sanhedrists departed in anger and confusion, they shouted to him: “You were altogether born in sin, and do you now presume to teach us? Maybe you were not really born blind, and even if your eyes were opened on the Sabbath day, this was done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And they went at once to the synagogue to cast out Josiah. 그러자 요시야가 걸상 위에 서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자에게 널리 외쳤습니다. “자칭 모든 이스라엘의 선생들이라는 당신들은 들으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은, 당신들이 이 사람의 출신을 모른다고 고백하니 여기에 아주 놀라운 일이 있도다, 그러나 당신들이 들은 증언으로, 당신들은 그가 내 눈을 뜨게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도다. 하느님은 신앙 없는 자를 위해 그런 일을 행하지 않으며, 하느님은 진실한 경배자 – 거룩하고 의로운 자의 요구에만 그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압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이 떠졌다는 것을 당신들이 들은 적이 없음을 당신들도 압니다. 그러니, 당신들 모두 나를 보고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을 실제로 느껴보시라!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그가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 그러자 산헤드린 회원들은 분노와 혼란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네가 아주 죄 가운데 태어났는데, 이제는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 어쩌면 너는 사실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안식일에 네 눈이 떠졌지만, 악령 괴수의 권세로 이렇게 되었도다.” 그들은 요시야를 쫓아내려고 즉시 회당으로 갔습니다(요9:30-34).

164:4.12 (1815.1) Josiah entered this trial with meager ideas about Jesus and the nature of his healing. Most of the daring testimony which he so cleverly and courageously bore before this supreme tribunal of all Israel developed in his mind as the trial proceeded along such unfair and unjust lines. 요시야는 예수와 그 치유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모르는 상태로 이 재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온 이스라엘의 이런 최고 법정 앞에서 그렇게 영리하고 용감하게 행한 대부분의 대담한 증언은 재판이 그렇게 편파적이고 부당한 노선에 따라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에서 전개되었습니다.

5. Teaching in Solomon’s Porch 솔로몬 행각의 가르침

230129 설교자로 산 요시야 요10:22-33, 36-39, 9:35-38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9:35-38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164:5.1 (1815.2) All of the time this Sabbath-breaking session of the Sanhedrin was in progress in one of the temple chambers, Jesus was walking about near at hand, teaching the people in Solomon’s Porch, hoping that he would be summoned before the Sanhedrin where he could tell them the good news of the liberty and joy of divine sonship in the kingdom of God. But they were afraid to send for him. They were always disconcerted by these sudden and public appearances of Jesus in Jerusalem. The very occasion they had so ardently sought, Jesus now gave them, but they feared to bring him before the Sanhedrin even as a witness, and even more they feared to arrest him. 성전의 한 회의실에서 이런 안식일 파기(破棄)에 대한 산헤드린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예수는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신적 아들(자녀)된 자유와 기쁨의 복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솔로몬 행각(行閣 주랑 현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바로 가까이에서 거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부르러 보내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갑자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언제나 쩔쩔맸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찾던 그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산헤드린 앞에 그를 증인으로 데려오기도 두려워했고, 체포하기는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164:5.2 (1815.3) This was midwinter in Jerusalem, and the people sought the partial shelter of Solomon’s Porch; and as Jesus lingered, the crowds asked him many questions, and he taught them for more than two hours. Some of the Jewish teachers sought to entrap him by publicly asking him: “How long will you hold us in suspense? If you are the Messiah, why do you not plainly tell us?” Said Jesus: “I have told you about myself and my Father many times, but you will not believe me. Can you not see that the works I do in my Father’s name bear witness for me? But many of you believe not because you belong not to my fold. The teacher of truth attracts only those who hunger for the truth and who thirst for righteousness. My sheep hear my voice and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And to all who follow my teaching I give eternal life; they shall never perish, and no one shall snatch them out of my hand. My Father, who has given me these children, is greater than all, so that no one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The Father and I are one.” Some of the unbelieving Jews rushed over to where they were still building the temple to pick up stones to cast at Jesus, but the believers restrained them.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한겨울이었고,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의 한쪽을 피난처로 찾았습니다. 예수께서 거닐었을 때, 군중이 그에게 여러 질문을 했고, 그는 2시간이 넘게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일부 유대교 선생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공개적으로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려 하십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왜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 자신과 내 아버지에 대해 여러 번 말했지만,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의 증인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너희 중 여럿이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의 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진리의 선생은 진리에 굶주리고 공의에 목마른 자들만 끌어들이느니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고 나는 내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라. 그들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하느니라. 이 자녀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믿지 않는 일부 유대인이 예수에게 던질 돌을 주우려고 여전히 건축 중인 성전 쪽으로 돌진했지만 믿는 자들이 그들을 말렸습니다(요10:22-31).

164:5.3 (1815.4) Jesus continued his teaching: “Many loving works have I shown you from the Father, so that now would I inquire for which one of these good works do you think to stone me?” And then answered one of the Pharisees: “For no good work would we stone you but for blasphemy, inasmuch as you, being a man, dare to make yourself equal with God.” And Jesus answered: “You charge the Son of Man with blasphemy because you refused to believe me when I declared to you that I was sent by God. If I do not the works of God, believe me not, but if I do the works of God, even though you believe not in me, I should think you would believe the works. But that you may be certain of what I proclaim, let me again assert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and that, as the Father dwells in me, so will I dwell in every one who believes this gospel.” And when the people heard these words, many of them rushed out to lay hands upon the stones to cast at him, but he passed out through the temple precincts; and meeting Nathaniel and Thomas, who had been in attendance upon the session of the Sanhedrin, he waited with them near the temple until Josiah came from the council chamber. 예수께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여러 일을 보였는데 그런즉 이제 내가 묻노니, 이런 선한 일 중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그러자 바리새인 중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선한 일 때문에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 때문이니, 당신은 사람이면서 감히 자신을 하느님과 같다고 하기 때문이라(요10:32-3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신성 모독으로 비난하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보냈다고 내가 너희에게 밝혔을 때,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나는 너희가 그 일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노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는 것을, 너희가 아마 확신할 수도 있도록, 내가 다시 단언(斷言)하노니,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주하는 것처럼,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 안에 내가 내주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자, 그들 중 여럿이 돌 위에 손을 얹어 그에게 던지려고 달려 나왔지만, 그는 성전 경내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했던 나다니엘과 도마를 만나서, 요시야가 대회의실에서 나올 때까지, 성전 근처에서 그들과 함께 기다렸습니다(요10:36-39).

164:5.4 (1816.1) Jesus and the two apostles did not go in search of Josiah at his home until they heard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When they came to his house, Thomas called him out in the yard, and Jesus, speaking to him, said: “Josiah, do you believe in the Son of God?” And Josiah answered, “Tell me who he is that I may believe in him.” And Jesus said: “You have both seen and heard him, and it is he who now speaks to you.” And Josiah said, “Lord, I believe,” and falling down, he worshiped. 예수와 두 사도는 요시야가 회당에서 쫓겨났다고 듣기까지 그를 찾으러 그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의 집에 이르자, 도마가 그를 마당으로 불렀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요시야야,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느냐?” 요시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를 믿을 수 있도록 그가 누구인지 제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를 보고 그의 말도 들었으며, 지금 너에게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시야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요9:35-38).

164:5.5 (1816.2) When Josiah learned that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he was at first greatly downcast, but he was much encouraged when Jesus directed that he should immediately prepare to go with them to the camp at Pella. This simple-minded man of Jerusalem had indeed been cast out of a Jewish synagogue, but behold the Creator of a universe leading him forth to become associated with the spiritual nobility of that day and generation. 요시야는 자신이 회당에서 쫓겨났음을 알게 되자, 그는 처음에 아주 풀이 죽었지만, 그가 즉시 그들과 함께 펠라 야영지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예수께서 지시하시자, 그는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순진한 이 사람은 정말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났지만, 이후 그를 그날 그 세대의 영적으로 고귀한 집단의 동료가 되도록 인도하는 우주의 창조자를 보십시오.

164:5.6 (1816.3) And now Jesus left Jerusalem, not again to return until near the time when he prepared to leave this world. With the two apostles and Josiah the Master went back to Pella. And Josiah proved to be one of the recipients of the Master’s miraculous ministry who turned out fruitfully, for he became a lifelong preacher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할 때가 다가오기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두 사도와 요시야와 함께 펠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풍성한 결실로 끝난 주님의 기적 사역의 수혜자(受惠者 은혜를 입은 자) 중 하나임을 입증했는데, 그가 하느님 나라 복음의 평생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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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5 The Perean Mission Begins 페레아 전도 시작

Paper 165

The Perean Mission Begins 페레아 전도 시작

1. At the Pella Camp 펠라 야영지에서
2. Sermon on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3. Sabbath Sermon at Pella 펠라에서 안식일 설교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바라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numbered 바로 너희 머리카락에 번호를 매기느니라.”
4. Dividing the Inheritance 유산 나누기
Parable of the foolish rich man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을 것이니라”
“What shall it profit if you gain the whole world…?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
5. Talks to the Apostles on Wealth 재산에 대해 사도들에게 하신 강연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6. Answer to Peter’s Question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230205 페레아 전도 시작 요10: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Then Jesus went back across the Jordan to the place where John had been baptizing in the early days. There he stayed,

165:0.1 (1817.1) ON TUESDAY, January 3, A.D. 30, Abner, the former chief of the twelve apostles of John the Baptist, a Nazarite and onetime head of the Nazarite school at Engedi, now chief of the seventy messengers of the kingdom, called his associates together and gave them final instructions before sending them on a mission to all of the cities and villages of Perea. This Perean mission continued for almost three months and was the last ministry of the Master. From these labors Jesus went directly to Jerusalem to pass through his final experiences in the flesh. The seventy, supplemented by the periodic labors of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worked in the following cities and towns and some fifty additional villages: Zaphon, Gadara, Macad, Arbela, Ramath, Edrei, Bosora, Caspin, Mispeh, Gerasa, Ragaba, Succoth, Amathus, Adam, Penuel, Capitolias, Dion, Hatita, Gadda, Philadelphia, Jogbehah, Gilead, Beth-Nimrah, Tyrus, Elealah, Livias, Heshbon, Callirrhoe, Beth-Peor, Shittim, Sibmah, Medeba, Beth-Meon, Areopolis, and Aroer. AD 30년 1월 3일 화요일에, 세례 요한의 12 사도 중 이전(以前) 수석, 나실인으로 한때 엔게디 나실인 학교의 수장이었고, 지금은 하느님 나라 70인 메신저 중 수석 아브너가 자기 동료를 함께 불러서,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전도하러 그들을 보내기 전에,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지시했습니다. 이번 페레아 전도는 거의 석 달간 계속되었고, 주님의 마지막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다가 예수께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육신으로 최종적인 체험을 하셨습니다. 70인은, 예수와 12사도의 주기적인 수고로 보완을 받아, 다음의 도시, 도읍과 약 50개의 추가 마을에서 일했습니다. 자폰, 가다라, 마캇, 아르벨라, 라맛, 에드레이, 보소라, 카스핀, 미스페, 게라사, 라가바, 수콧, 아마투스, 아담, 페누엘, 카피톨리아스, 디온, 하티타, 갓다, 필라델피아, 욕베하, 길르앗, 벳-님라, 티루스, 엘르알라, 리비아스, 헤스본, 칼릴로에, 벳-브올, 싯팀, 십마, 메베바, 벳-므온, 아레오폴리스, 아로에르.

165:0.2 (1817.2) Throughout this tour of Perea the women’s corps, now numbering sixty-two, took over most of the work of ministration to the sick. This was the final period of the development of the higher spiritual aspect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there was, accordingly, an absence of miracle working. No other part of Palestine was so thoroughly worked by the apostles and disciples of Jesus, and in no other region did the better classes of citizens so generally accept the Master’s teaching. 이제 62명이 된 여성단(團)은 이번 페레아 여행 내내, 환자를 돌보는 대부분의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때는 하느님 나라 복음의 더 영적인 측면이 발전하는 최종 시기였으며, 따라서 기적 행위가 없었습니다. 사도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아주 철저히 일했으며,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더 나은 계층의 시민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그토록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5:0.3 (1817.3) Perea at this time was about equally gentile and Jewish, the Jews having been generally removed from these regions during the times of Judas Maccabee. Perea was the most beautiful and picturesque province of all Palestine. It was generally referred to by the Jews as “the land beyond the Jordan.” 이때 페레아에는 거의 비슷한 수(數)의 이방인과 유대인이 있었고, 대체로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 시절에 이런 지역에서 이동했습니다. 페레아는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림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이 그곳을 “요단 저편 땅”으로 불렀습니다.

165:0.4 (1817.4) Throughout this period Jesus divided his time between the camp at Pella and trips with the twelve to assist the seventy in the various cities where they taught and preached. Under Abner’s instructions the seventy baptized all believers, although Jesus had not so charged them. 이 기간 내내 예수는 펠라의 야영지에, 그리고 70인이 가르치고 전도했던 여러 도시에서 그들을 지원하려고 12 사도와 함께 여행하는 데에, 자신의 시간을 분배했습니다. 예수께서 70인에게 그렇게 맡기지 않았지만, 아브너의 지시에 따라 70인은 모든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 At the Pella Camp 펠라 야영지에서

230212 기적이 없는 절정 단계 요10:41-42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41 Then many came to Him and said, “John performed no sign, but all the things that John spoke about this Man were true.” 42 And many believed in Him there.

165:1.1 (1817.5) By the middle of January more than twelve hundred persons were gathered together at Pella, and Jesus taught this multitude at least once each day when he was in residence at the camp, usually speaking at nine o’clock in the morning if not prevented by rain.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taught each afternoon. The evenings Jesus reserved for the usual sessions of questions and answers with the twelve and other advanced disciples. The evening groups averaged about fifty. 1월 중순까지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펠라에 모였고, 예수께서 야영지에 계실 때 매일 적어도 한 번 이런 무리를 가르쳤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보통 아침 9시에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매일 오후에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 12 사도 및 다른 진보한 제자들과 평소의 질의응답 시간을 저녁마다 잡아두었습니다. 저녁 그룹은 평균 50명 정도였습니다.

165:1.2 (1817.6) By the middle of March, the time when Jesus began his journey toward Jerusalem, over four thousand persons composed the large audience which heard Jesus or Peter preach each morning. The Master chose to terminate his work on earth when the interest in his message had reached a high point, the highest point attained under this second or nonmiraculous phase of the progress of the kingdom. While three quarters of the multitude were truth seekers, there were also present a large number of Pharisees from Jerusalem and elsewhere, together with many doubters and cavilers.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셨던 3월 중순에는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예수님이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큰 청중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메시지에 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고, 하느님 나라의 진보 중 이런 두 번째 즉 기적이 없는 단계에서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지상에서 자신의 과업을 끝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군중의 3/4이 진리 구도자(求道者)들이었지만, 의혹을 품고 트집 잡는 여러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온 여러 바리새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165:1.3 (1818.1) Jesus and the twelve apostles devoted much of their time to the multitude assembled at the Pella camp. The twelve paid little or no attention to the field work, only going out with Jesus to visit Abner’s associates from time to time. Abner was very familiar with the Perean district since this was the field in which his former master, John the Baptist, had done most of his work. After beginning the Perean mission, Abner and the seventy never returned to the Pella camp. 예수와 12 사도는 펠라 야영지에 모인 군중에게 자신들의 시간을 많이 쏟았습니다. 12 사도는 현장 과업에 거의 또는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때때로 아브너의 동료들을 방문하려고 예수와 함께 나갔을 뿐이었습니다. 아브너는 페레아 지역을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이전 선생, 세례 요한이 대부분의 일을 했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페레아 전도가 시작된 후, 아브너와 70인은 펠라 야영지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 Sermon on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230219 참된 목자를 따르고 있나요? 요10:1-6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 “Very truly I tell you Pharisees, anyone who does not enter the sheep pen by the gate, but climbs in by some other way, is a thief and a robber. 2 The one who enters by the gate is the shepherd of the sheep. 3 The gatekeeper opens the gate for him, and 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4 When he has brought out all his own, he goes on ahead of them, and his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5 But they will never follow a stranger; in fact, they will run away from him because they do not recognize a stranger’s voice.” 6 Jesus used this figure of speech, but the Pharisees did not understand what he was telling them.

165:2.1 (1818.2) A company of over three hundred Jerusalemites, Pharisees and others, followed Jesus north to Pella when he hastened away from the jurisdiction of the Jewish rulers at the ending of the feast of the dedication; and it was in the presence of these Jewish teachers and leaders, as well as in the hearing of the twelve apostles, that Jesus preached the sermon on the “Good Shepherd.” After half an hour of informal discussion, speaking to a group of about one hundred, Jesus said: 봉헌절이 끝날 때 예수께서 유대 통치자들의 관할권에서 급히 떠나자, 300명이 넘는 예루살렘 사람들, 바리새인들 및 다른 사람들이 펠라까지 북쪽으로 그를 따라갔습니다. 이런 유대 선생들과 지도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12 사도가 듣고 있을 때, 예수께서 “선한 목자(요10:11)”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격식을 가리지 않고 30분간 토론한 후, 약 100명의 일행에게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65:2.2 (1818.3) “On this night I have much to tell you, and since many of you are my disciples and some of you my bitter enemies, I will present my teaching in a parable, so that you may each take for yourself that which finds a reception in your heart. “오늘 밤에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은데, 너희 중 내 제자가 많고 일부는 내게 원한이 있는 대적들이므로 내가 비유로 내 가르침을 전할 것이니, 각자 마음에 이해되는 것을 스스로 취해도 되느니라.

165:2.3 (1818.4) “Tonight, here before me are men who would be willing to die for me and for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some of them will so offer themselves in the years to come; and here also are some of you, slaves of tradition, who have followed me down from Jerusalem, and who, with your darkened and deluded leaders, seek to kill the Son of Man.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shall judge both of you, the true shepherds and the false shepherds. If the false shepherd were blind, he would have no sin, but you claim that you see; you profess to be teachers in Israel; therefore does your sin remain upon you. “오늘 밤 여기 내 앞에는 기꺼이 나와 하느님 나라의 이 복음을 위해 죽으려는 자들이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 그렇게 자신을 바치리라. 그리고 또한 여기에 너희 중 일부, 전통의 노예들은 예루살렘에서 나를 따라 내려와 어두워져 착각에 빠진 너희 지도자들과 함께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가 지금 육신으로 사는 생활로 너희 참된 목자들과 거짓 목자들을 판가름하리라. 거짓 목자가 눈이 멀었다면, 그에게 아무 죄가 없을 것이나, 너희가 본다고 우기면서 이스라엘의 선생들이라고 주장하니, 너희 죄가 너희에게 여전히 남아있느니라(요9:41).

165:2.4 (1818.5) “The true shepherd gathers his flock into the fold for the night in times of danger. And when the morning has come, he enters into the fold by the door, and when he calls, the sheep know his voice. Every shepherd who gains entrance to the sheepfold by any other means than by the door is a thief and a robber. The true shepherd enters the fold after the porter has opened the door for him, and his sheep, knowing his voice, come out at his word; and when they that are his are thus brought forth, the true shepherd goes before them; he leads the way and the sheep follow him. His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they will not follow a stranger. They will flee from the stranger because they know not his voice. This multitude which is gathered about us here a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but when we speak to them, they know the shepherd’s voice, and they follow after us; at least, those who hunger for truth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do. Some of you are not of my fold; you know not my voice, and you do not follow me. And because you are false shepherds, the sheep know not your voice and will not follow you.” “참된 목자는 밤, 위험할 때 자기 양 떼를 우리 안으로 모으느니라. 그리고 아침이 오면, 그가 문으로 우리에 들어가, 그가 부르면,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느니라. 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양우리에 들어가는 목자는 모두 도둑이며 강도이니라. 참된 목자는 문지기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준 다음에, 우리에 들어가며,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 그의 양들은 그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오느니라. 그의 양 떼가 이렇게 쏟아져 나오면, 참된 목자는 그들 앞에서 가느니라. 그는 길을 인도하고 양들은 그를 따르느니라. 그의 양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들이 그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라. 그들은 낯선 자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들이 낯선 자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그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기 우리 주위에 모인 이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은 우리의 뒤를 따르나니, 적어도 진리에 굶주리고 공의에 목마른 자들은 그러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내 우리에 속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너희는 나를 따르지 않느니라. 너희는 거짓 목자들이므로, 양들이 너희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너희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요10:1~5).”

165:2.5 (1819.1) And when Jesus had spoken this parable, no one asked him a question. After a time he began again to speak and went on to discuss the parable: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자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면서 계속 비유를 화제로 삼았습니다.

165:2.6 (1819.2) “You who would be the undershepherds of my Father’s flocks must not only be worthy leaders, but you must also feed the flock with good food; you are not true shepherds unless you lead your flocks into green pastures and beside still waters. “내 아버지 양 떼의 부(副)목자들이 되려는 너희는 그에 어울리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너희는 또한 좋은 양식으로 양 떼를 먹여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푸른 목초지(牧草地)와 잔잔한 물가로 너희 양 떼를 인도하지 않으면 너희는 참된 목자들이 아니라(시23:2).

230226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보십니까? 요10:7-21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65:2.7 (1819.3) “And now, lest some of you too easily comprehend this parable, I will declare that I am both the door to the Father’s sheepfold and at the same time the true shepherd of my Father’s flocks. Every shepherd who seeks to enter the fold without me shall fail, and the sheep will not hear his voice. I, with those who minister with me, am the door. Every soul who enters upon the eternal way by the means I have created and ordained shall be saved and will be able to go on to the attainment of the eternal pastures of Paradise. “그리고 이제 너희 일부가 이 비유를 너무 쉽게 이해하지 않도록, 나는 아버지 양 우리의 문이며 동시에 내 아버지 양 떼의 참된 목자임을 내가 선언하노라. 나 없이 우리에 들어가려는 목자마다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니라. 나는, 나와 함께 돌보는 자들과 함께, 문이라. 내가 만들고 정한 방법으로 영원한 길에 들어가는 모든 혼(魂)은 구원을 얻고 계속해서 영원한 천국 목초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요10:7-9).

165:2.8 (1819.4) “But I also am the true shepherd who is willing even to lay down his life for the sheep. The thief breaks into the fold only to steal, and to kill, and to destroy; but I have come that you all may have life and have it more abundantly. He who is a hireling, when danger arises, will flee and allow the sheep to be scattered and destroyed; but the true shepherd will not flee when the wolf comes; he will protect his flock and, if necessary, lay down his life for his sheep. Verily, verily, I say to you, friends and enemies, I am the true shepherd; I know my own and my own know me. I will not flee in the face of danger. I will finish this service of the completion of my Father’s will, and I will not forsake the flock which the Father has intrusted to my keeping. 그러나 나는 또한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내던지는 참된 목자이니라. 도둑은 단지 훔치고 죽이며 파괴하려고 우리에 침입하지만, 내가 온 것은 너희 모두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삯꾼은 위험이 닥치면 도망하여 양들이 흩어져 멸망하도록 놔둘 것이라. 그러나 참된 목자는 이리가 올 때 도망하지 않으리라. 그는 자기 양 떼를 보호하고 필요하면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지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 친구들과 대적자들에게 이르노니, 나는 참된 목자이니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아느니라. 나는 위험에 직면하여 도망하지 않으리라. 나는 내 아버지의 뜻을 마치는 이 봉사를 마무리 지을 것이며, 아버지께서 지키라고 내게 맡기신 양 떼를 내버리지 않으리라(요10:10-15).

165:2.9 (1819.5) “But I have many other sheep not of this fold, and these words are true not only of this world. These other sheep also hear and know my voice, and I have promised the Father that they shall all be brought into one fold, one brotherhood of the sons of God. And then shall you all know the voice of one shepherd, the true shepherd, and shall all acknowledge the fatherhood of God.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말은 이 세상에만 해당하지 않느니라. 이런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며, 그들 모두 한 우리, 하느님 아들(자녀)들의 한 형제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겠다고 내가 아버지께 약속했느니라. 그러면 너희 모두 한 목자, 참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보며,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모두 인정할 것이라(요10:16).

165:2.10 (1819.6) “And so shall you know why the Father loves me and has put all of his flocks in this domain in my hands for keeping; it is because the Father knows that I will not falter in the safeguarding of the sheepfold, that I will not desert my sheep, and that, if it shall be required, I will not hesitate to lay down my life in the service of his manifold flocks. But, mind you, if I lay down my life, I will take it up again. No man nor any other creature can take away my life. I have the right and the power to lay down my life, and I have the same power and right to take it up again. You cannot understand this, but I received such authority from my Father even before this world was.”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여 이 영역의 모든 자기 양 떼를 내 손에 맡겨 지키게 한 이유를 너희가 알리라. 그것은 내가 양우리의 보호에 흔들리지 않고, 내 양들을 버리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그의 다양한 양 떼를 돌보면서 망설임 없이 내 목숨을 내던질 것을 아버지가 알기 때문이라. 하지만, 내가 내 목숨을 내던진다면, 내가 그것을 다시 얻을 것임을 너희는 명심하라.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떤 창조물도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는 내 목숨을 내던질 권리와 권세가 있으며, 나는 그것을 다시 얻을 바로 그 권세와 권리가 있느니라. 너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에게서 그런 권한을 받았느니라(요10:17-18).”

165:2.11 (1819.7) When they heard these words, his apostles were confused, his disciples were amazed, while the Pharisees from Jerusalem and around about went out into the night, saying, “He is either mad or has a devil.” But even some of the Jerusalem teachers said: “He speaks like one having authority; besides, who ever saw one having a devil open the eyes of a man born blind and do all of the wonderful things which this man has done?” 그들이 이런 말씀을 듣자, 그의 사도들은 어리둥절했고, 그의 제자들은 깜짝 놀랐으며,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온 바리새인들은 “그는 미쳤거나 악령이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밤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일부 선생들조차 “그는 권세 있는 사람처럼 말하며, 게다가 악령 들린 사람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사람이 했던 모든 놀라운 일들을 하는 것을, 누가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요10:19-21).

165:2.12 (1819.8) On the morrow about half of these Jewish teachers professed belief in Jesus, and the other half in dismay returned to Jerusalem and their homes. 다음날 이런 유대 선생 중 거의 절반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고, 나머지 절반은 당황하여 예루살렘과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 Sabbath Sermon at Pella 펠라에서 안식일 설교

230305 신뢰와 영적 준비 눅12:1-12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165:3.1 (1819.9) By the end of January the Sabbath-afternoon multitudes numbered almost three thousand. On Saturday, January 28, Jesus preached the memorable sermon on “Trust and Spiritual Preparedness.” After preliminary remarks by Simon Peter, the Master said: 1월 말까지 안식일 오후에 모인 무리는 거의 3천 명에 달했습니다. 1월 28일 토요일, 예수님은 “신뢰와 영적 준비”에 대해 잊지 못할 설교를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예비 발언이 끝난 후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5:3.2 (1820.1) “What I have many times said to my apostles and to my disciples, I now declare to this multitude: Beware of the leaven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born of prejudice and nurtured in traditional bondage, albeit many of these Pharisees are honest of heart and some of them abide here as my disciples. Presently all of you shall understand my teaching, for there is nothing now covered that shall not be revealed. That which is now hid from you shall all be made known when the Son of Man has completed his mission on earth and in the flesh. “내가 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했던 것을 이제 이 무리에게 선언하노라: 이들 바리새인 중에는 심정이 정직한 사람이 많고 그중 일부는 내 제자로 여기 남아있지만, 바리새인의 누룩(고칠 수 없는 낡은 습관)을 조심할지니, 그것은 편견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인 굴레 속에서 자란 위선(僞善)이니라. 즉시 너희 모두 내 가르침을 알아들을 것이니, 이제 감춰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지금 너희에게 감춰진 것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지상에서 육신으로 자기 사명을 마무리하면 모두 알려질 것이라(마10:26).

165:3.3 (1820.2) “Soon, very soon, will the things which our enemies now plan in secrecy and in darkness be brought out into the light and be proclaimed from the housetops. But I say to you, my friends, when they seek to destroy the Son of Man, be not afraid of them. Fear not those who, although they may be able to kill the body, after that have no more power over you. I admonish you to fear none, in heaven or on earth, but to rejoice in the knowledge of Him who has power to deliver you from all unrighteousness and to present you blameless before the judgment seat of a universe. 곧, 아주 곧, 우리 대적들이 지금 몰래 어둠 속에서 계획하는 것들이 빛 가운데로 폭로되어 세상에 선포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 내 친구들에게 이르노니, 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죽이려 할 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몸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후 더 이상 너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하늘과 땅에서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를 모든 불의에서 구원하여 우주의 법정 앞에 너희를 떳떳하게 하는 권세 있는 그를 아는 지식으로 다만 기뻐하라(마10:27-28, 눅12:3-5, 유1:24).

165:3.4 (1820.3) “Are not five sparrows sold for two pennies? And yet, when these birds flit about in quest of their sustenance, not one of them exists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Father, the source of all life. To the seraphic guardians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numbered. And if all of this is true, why should you live in fear of the many trifles which come up in your daily lives? I say to you: Fear not; you are of much more value than many sparrows.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래도 이런 새들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날아다닐 때, 모든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를 모르면, 그 중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느니라. 세라핌 수호자들에게는 너희 머리카락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느니라. 이 모두가 사실이면, 너희가 왜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여러 참새보다 훨씬 더 소중하니라(마10:29-31, 눅12:6-7).

165:3.5 (1820.4) “All of you who have had the courage to confess faith in my gospel before men I will presently acknowledge before the angels of heaven; but he who shall knowingly deny the truth of my teachings before men shall be denied by his guardian of destiny even before the angels of heaven.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복음을 신앙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있는 너희 모두를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즉시 인정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진리를 고의로 부인하는 자는, 자기 운명의 수호자가 하늘의 천사들 앞에 서기도 전에 부인할 것이라(마10:32-33, 눅12:8-9).

165:3.6 (1820.5) “Say what you will about the Son of Man, and it shall be forgiven you; but he who presumes to blaspheme against God shall hardly find forgiveness. When men go so far as knowingly to ascribe the doings of God to the forces of evil, such deliberate rebels will hardly seek forgiveness for their sins. “너희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 대해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그것은 용서받을 것이라. 그러나, 감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고의로 하느님의 행위를 심지어 악의 세력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하면, 그런 의도적인 반역자들은 거의 자신들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마12:31-32, 눅12:10).

165:3.7 (1820.6) “And when our enemies bring you before the rulers of the synagogues and before other high authorities, be not concerned about what you should say and be not anxious as to how you should answer their questions, for the spirit that dwells within you shall certainly teach you in that very hour what you should say in honor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그리고 우리 대적들이 너희를 회당의 통치자들과 다른 고위 당국 앞에 데려갈 때,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고, 너희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 것이니, 너희 안에 내주하는 영(靈)이 하느님 나라 복음을 받들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시간에 반드시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라(마10:19-20, 막13:11, 눅12:11-12, 21:12-15).

165:3.8 (1820.7) “How long will you tarry in the valley of decision? Why do you halt between two opinions? Why should Jew or gentile hesitate to accept the good news that he is a son of the eternal God? How long will it take us to persuade you to enter joyfully into your spiritual inheritance? I came into this world to reveal the Father to you and to lead you to the Father. The first I have done, but the last I may not do without your consent; the Father never compels any man to enter the kingdom. The invitation ever has been and always will be: Whosoever will, let him come and freely partake of the water of life.” “너희는 결단의 때에 얼마나 꾸물대려느냐? 너희는 두 판단 사이에서 왜 멈추느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신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복음 받아들이기를 왜 주저해야 하느냐? 너희가 너희 영적 유산에 기쁘게 참여하도록 우리가 너희를 설득하기에 얼마나 걸리겠느냐?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내고 너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려고 이 세상에 왔느니라. 내가 처음을 했지만, 너희 찬성(贊成) 없이, 나는 마지막을 할 수 없느니라.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느니라. 초청은 늘 있었고 언제나 있을 것이라.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생명의 물을 자유롭게 마시라(마11:27, 계22:17b).”

165:3.9 (1820.8)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many went forth to be baptized by the apostles in the Jordan while he listened to the questions of those who remained.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많은 사람이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나섰고 예수는 남아 있는 자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요10:42).

4. Dividing the Inheritance 유산 나누기

230312 하늘에 보물을 저축하기 눅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65:4.1 (1821.1) As the apostles baptized believers, the Master talked with those who tarried. And a certain young man said to him: “Master, my father died leaving much property to me and my brother, but my brother refuses to give me that which is my own. Will you, then, bid my brother divide this inheritance with me?” Jesus was mildly indignant that this material-minded youth should bring up for discussion such a question of business; but he proceeded to use the occasion for the impartation of further instruction. Said Jesus: “Man, who made me a divider over you? Where did you get the idea that I give attention to the material affairs of this world?” And then, turning to all who were about him, he said: “Take heed and keep yourselves free from covetousness; a man’s life consists not in the abundance of the things which he may possess. Happiness comes not from the power of wealth, and joy springs not from riches. Wealth, in itself, is not a curse, but the love of riches many times leads to such devotion to the things of this world that the soul becomes blinded to the beautiful attractions of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kingdom of God on earth and to the joys of eternal life in heaven. 사도들이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주님은 꾸물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 아버지가 저와 제 형제에게 많은 재산을 남기고 돌아가셨으나 제 형제가 제 것을 제게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제 형에게 지시하여 이 유산을 저와 나누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예수는 물질에 집착하는 이 젊은이가 그런 용건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 가볍게 분개했으나, 추가로 교훈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계속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누가 나를 네 일에 대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내가 이 세상의 물질적 업무를 돌본다는 생각을 너는 어디에서 얻었느냐?” 그런 후 자기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돌아서서 그가 말했습니다. “조심하여 탐욕에 빠지지 말라. 사람의 생명은 그가 소유한 많은 것에 있지 않으니라. 행복은 부(富)의 힘에서 오지 않으며, 기쁨은 재물에서 나오지 않느니라. 재산 자체는 저주가 아니지만, 재물에 대한 사랑은 여러 번 이 세상 것들에 그렇게 헌신하도록 이어져 혼(魂)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영적 실체들에 대한 아름다운 매력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들에 대해 눈이 멀게 되느니라(눅12:13-15).

165:4.2 (1821.2) “Let me tell you a story of a certain rich man whose ground brought forth plentifully; and when he had become very rich, he began to reason with himself, saying: ‘What shall I do with all my riches? I now have so much that I have no place to store my wealth.’ And when he had meditated on his problem, he said: ‘This I will do; I will pull down my barns and build greater ones, and thus will I have abundant room in which to store my fruits and my goods. Then can I say to my soul, soul, you have much wealth laid up for many years; take now your ease; eat, drink, and be merry, for you are rich and increased in goods.’ “내가 소산이 풍성한 땅을 가진 어떤 부자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이르겠노라. 그가 매우 부유해지자, 그는 스스로 의논하여 말하기 시작했느니라. ‘나의 이 모든 재물로 내가 무엇을 할까? 이제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내 재산을 저장할 곳이 없구나.’ 그가 자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 후, 그가 말했더라. ‘나는 이렇게 하리라. 내가 내 곳간을 헐고 훨씬 큰 것들을 지으리라, 그러면 나는 내 과실류와 물건을 저장할 넉넉한 공간을 가지게 되리라. 그러면 나는 내 혼(魂)에게 말할 수 있으니, 혼(魂)아, 너는 여러 해 저장한 많은 재산이 있도다. 너는 이제 쉬라. 먹고 마시고 즐기라, 네가 부요하고 재산이 늘었기 때문이니라 (눅12:16-19).’

165:4.3 (1821.3) “But this rich man was also foolish. In providing for the material requirements of his mind and body, he had failed to lay up treasures in heaven for the satisfaction of the spirit and for the salvation of the soul. And even then he was not to enjoy the pleasure of consuming his hoarded wealth, for that very night was his soul required of him. That night there came the brigands who broke into his house to kill him, and after they had plundered his barns, they burned that which remained. And for the property which escaped the robbers his heirs fell to fighting among themselves. This man laid up treasures for himself on earth, but he was not rich toward God.” “그러나 이 부자는 또한 어리석었느니라. 그의 마음과 몸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면서 영(靈)의 만족과 혼(魂)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 보물을 끝내 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설령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저축한 재산을 소비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으니, 바로 그날 밤 그에게서 그의 혼(魂)이 불려 갔기 때문이니라. 그날 밤 강도들이 그의 집에 침입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곳간을 약탈한 후에 남은 것을 불태웠더라. 그리고 강도들이 놓친 재산 때문에, 그의 상속인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더라. 이 사람은 땅에서 자기를 위해 보물을 모았지만, 그는 하느님을 향해 부유하지 않았더라(눅12:20-21).”

165:4.4 (1821.4) Jesus thus dealt with the young man and his inheritance because he knew that his trouble was covetousness. Even if this had not been the case, the Master would not have interfered, for he never meddled with the temporal affairs of even his apostles, much less his disciples. 예수께서 이렇게 젊은이와 그의 유산을 다룬 것은, 그의 고민이 탐욕임을 예수께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주께서 참견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는 자기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자기 사도들의 현세적인 일에도 결코, 참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0326 마음이 결정하는 인간 운명 눅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165:4.5 (1821.5) When Jesus had finished his story, another man rose up and asked him: “Master, I know that your apostles have sold all their earthly possessions to follow you, and that they have all things in common as do the Essenes, but would you have all of us who are your disciples do likewise? Is it a sin to possess honest wealth?” And Jesus replied to this question: “My friend, it is not a sin to have honorable wealth; but it is a sin if you convert the wealth of material possessions into treasures which may absorb your interests and divert your affections from devotion to the spiritual pursuits of the kingdom. There is no sin in having honest possessions on earth provided your treasure is in heaven,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wealth which leads to covetousness and selfishness and that which is held and dispensed in the spirit of stewardship by those who have an abundance of this world’s goods, and who so bountifully contribute to the support of those who devote all their energi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Many of you who are here and without money are fed and lodged in yonder tented city because liberal men and women of means have given funds to your host, David Zebedee, for such purposes. 예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사도들이 당신을 따르려고 자신들의 세상 재산을 다 팔았고, 그들은 에세네파(派) 신도들이 하듯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을 제가 알지만,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가 모두 마찬가지로 하기를 바라십니까? 정직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내 친구여, 정당한 재산을 가지는 것이 죄(罪)는 아니라. 그러나 네가 풍부한 물질적 재산을 보물로 바꾸어 너의 관심을 빼앗고 하느님 나라의 영적 추구에 대한 헌신에서 너의 애정을 딴 데로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죄(罪)니라. 너희 보물이 하늘에 있다면 땅에서 정직한 재산을 갖는 것이 죄(罪)는 아니니,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심정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눅12:34).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끄는 재산과 이 세상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사역에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자들을 지원하려고 그렇게 아낌없이 기부하는 자들이 청지기(재산 관리인) 직무의 정신으로 맡아서 분배하는 재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느니라. 그런 목적으로 재력 있는, 아끼지 않는 남성들과 여성들이 너희 접대자 다윗 세베대에게 재원을 주었기 때문에, 너희 중 여기서 돈 없이 있는 대부분이 저기 야영 도시에서 먹고 투숙하고 있느니라.

165:4.6 (1822.1) “But never forget that, after all, wealth is unenduring. The love of riches all too often obscures and even destroys the spiritual vision. Fail not to recognize the danger of wealth’s becoming, not your servant, but your master.” “그러나 어쨌든, 재산은 절대로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말라. 재산에 대한 사랑이 영적 시력을 어둡게 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너무 흔하니라. 재산이 너희 종이 아니라 너희 주인이 되는 위험성을 반드시 분간하라.”

165:4.7 (1822.2) Jesus did not teach nor countenance improvidence, idleness, indifference to providing the physical necessities for one’s family, or dependence upon alms. But he did teach that the material and temporal must be subordinated to the welfare of the soul and the progress of the spiritual nature in the kingdom of heaven. 예수께서 절약 정신이 없는 것, 게으름, 가족의 육체적 필요를 마련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나 자선에 대한 의존을 가르치지도, 묵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인 세상의 것은, 혼(魂)의 행복과 하늘나라에 있는 영적 본성의 진보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65:4.8 (1822.3) Then, as the people went down by the river to witness the baptizing, the first man came privately to Jesus about his inheritance inasmuch as he thought Jesus had dealt harshly with him; and when the Master had again heard him, he replied: “My son, why do you miss the opportunity to feed upon the bread of life on a day like this in order to indulge your covetous disposition? Do you not know that the Jewish laws of inheritance will be justly administered if you will go with your complaint to the court of the synagogue? Can you not see that my work has to do with making sure that you know about your heavenly inheritance? Have you not read the Scripture: ‘There is he who waxes rich by his wariness and much pinching, and this is the portion of his reward: Whereas he says, I have found rest and now shall be able to eat continually of my goods, yet he knows not what time shall bring upon him, and also that he must leave all these things to others when he dies.’ Have you not read the commandment: ‘You shall not covet.’ And again, ‘They have eaten and filled themselves and waxed fat, and then did they turn to other gods.’ Have you read in the Psalms that ‘the Lord abhors the covetous,’ and that ‘the little a righteous man has is better than the riches of many wicked.’ ‘If riches increase, set not your heart upon them.’ Have you read where Jeremiah said, ‘Let not the rich man glory in his riches’; and Ezekiel spoke truth when he said, ‘With their mouths they make a show of love, but their hearts are set upon their own selfish gain.’” 그 후, 사람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눈앞에서 보려고 강가로 내려갈 때, 처음에 왔던 사람이 예수께서 자신을 엄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여 자기 유산의 일로 은밀히 예수께 왔습니다. 주께서 다시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너는 왜 너의 탐내는 성향을 채우려고 오늘 같은 날에 생명의 양식을 먹을 기회를 놓치느냐? 네가 회당 법정에 너의 고충을 가지고 가면, 유산에 대한 유대교 율법이 마땅하게 시행될 것을 네가 모르느냐? 너의 하늘 유산에 대해 네가 알도록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내 일임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네가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부유해지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돌아갈 몫은 이러하다. 나는 휴식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재산으로 계속 먹고 즐기리라.”라고 그가 말하지만, 그는 어떤 시간이 자기에게 임할지, 자기가 죽을 때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겨야 한다는 것도 모르느니라(집11:18-19).’ 너는 계명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탐내지 말라(출20:17, 신5:21).’ 그리고 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점차 살찌게 되어, 그 후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이켰더라(신31:20).’ 너는 ‘주께서 탐욕을 부리는 자들을 아주 싫어하느니라(시10:3b).’ 그리고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들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37:16).’라는 시편을 읽어보았느냐.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b).’ 예레미야가 ‘부자는 자기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9:23c).’고 말한 곳을 읽어보았느냐. 그리고 에스겔이 ‘그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그들의 심정으로는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에 가치를 두느니라(겔33:31b).’라고 말할 때 그는 진리를 말했느니라.”

165:4.9 (1822.4) Jesus sent the young man away, saying to him, “My son, what shall it profit you if you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your own soul?” “여보게 젊은이, 네가 온 세상을 얻고 너 자신의 혼(魂)을 잃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마16:26, 막8:36, 눅9:25)?”

230326 물질생활의 심판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65:4.10 (1822.5) To another standing near by who asked Jesus how the wealthy would stand in the day of judgment, he replied: “I have come to judge neither the rich nor the poor, but the lives men live will sit in judgment on all. Whatever else may concern the wealthy in the judgment, at least three questions must be answered by all who acquire great wealth, and these questions are: 근처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이 심판 날에 부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 예수께 물어보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생활이 모두를 심판하리라. 무엇이든 간에 심판의 때에 부자들과 관련하여, 큰 재산을 얻은 모든 자는 적어도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하며, 이 질문들은 다음과 같으니라.

165:4.11 (1822.6) “1. How much wealth did you accumulate? “너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느냐?

165:4.12 (1822.7) “2. How did you get this wealth? “너는 이런 재산을 어떻게 얻었느냐?

165:4.13 (1822.8) “3. How did you use your wealth?” “너는 너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165:4.14 (1822.9) Then Jesus went into his tent to rest for a while before the evening meal. When the apostles had finished with the baptizing, they came also and would have talked with him about wealth on earth and treasure in heaven, but he was asleep. 그런 후 예수께서 저녁 식사 전에 잠시 쉬러 자기 텐트로 들어갔습니다. 사도들이 세례 베풀기를 마치자, 그들도 와서 세상의 재산과 하늘의 보물에 대하여 그와 얘기하려 했지만, 그는 자고 계셨습니다.

5. Talks to the Apostles on Wealth 재산에 대해 사도들에게 하신 강연

230402 헌신과 필요 공급 눅12:22-40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165:5.1 (1823.1) That evening after supper, when Jesus and the twelve gathered together for their daily conference, Andrew asked: “Master, while we were baptizing the believers, you spoke many words to the lingering multitude which we did not hear. Would you be willing to repeat these words for our benefit?” And in response to Andrew’s request, Jesus said: 그날 저녁 식사 후, 예수께서 12사도와 일일 회의로 함께 모였을 때, 안드레가 여쭈었습니다. “주여, 저희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당신께서 꾸물거리는 군중에게 저희가 듣지 못한 많은 말을 했습니다. 저희를 위해 이 말씀을 반복해 주시겠습니까?” 안드레의 요청에 응답하여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165:5.2 (1823.2) “Yes, Andrew, I will speak to you about these matters of wealth and self-support, but my words to you, the apostles, must be somewhat different from those spoken to the disciples and the multitude since you have forsaken everything, not only to follow me, but to be ordained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lready have you had several years’ experience, and you know that the Father whose kingdom you proclaim will not forsake you. You have dedicated your lives to the ministry of the kingdom; therefore be not anxious or worried about the things of the temporal life, what you shall eat, nor yet for your body, what you shall wear. The welfare of the soul is more than food and drink; the progress in the spirit is far above the need of raiment. When you are tempted to doubt the sureness of your bread, consider the ravens; they sow not neither reap, they have no storehouses or barns, and yet the Father provides food for every one of them that seeks it. And of how much more value are you than many birds! Besides, all of your anxiety or fretting doubts can do nothing to supply your material needs. Which of you by anxiety can add a handbreadth to your stature or a day to your life? Since such matters are not in your hands, why do you give anxious thought to any of these problems? “그래, 안드레야, 내가 너희에게 재산과 자급(自給 자기가 마련함)의 이런 일에 대해 말할 것이지만, 사도들인 너희에게 하는 내 말은 제자들과 군중에게 한 그런 말과 어느 정도 달라야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대사들로 임직했기 때문이라. 이미 너희는 수년간 겪어서, 너희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아버지가 너희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사역에 너희 평생을 바쳤으니, 현세의 생활 일들, 즉 무엇을 먹을까 또는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도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라. 혼(魂)의 행복이 먹고 마시는 것보다 중요하므로, 영(靈)의 진보는 의복의 필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라. 너희가 너희 생계의 확신에 의혹이 일어날 때, 까마귀를 헤아려 보라. 까마귀는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나 헛간도 없지만, 아버지는 양식을 찾는 까마귀마다 그것을 주시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허다한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냐! 게다가 너희 모든 걱정이나 애타는 의심으로 너희 물질적 필요를 아예 채울 수 없느니라. 너희 중 누가 걱정으로 너희 키를 한 뼘 더하거나 너희 목숨에 하루를 더할 수 있느냐? 그런 문제들은 너희 손에 있지 않은데 너희는 왜 이런 문제들로 걱정스럽게 생각하느냐(마6:25-27, 31, 눅12:22-26)?

165:5.3 (1823.3)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they toil not, neither do they spin; yet I say to you,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arrayed like one of these. If God so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alive today and tomorrow is cut down and cast into the fire, how much more shall he clothe you, the ambassadors of the heavenly kingdom. O you of little faith! When you wholeheartedly devote yourselves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should not be of doubtful minds concerning the support of yourselves or the families you have forsaken. If you give your lives truly to the gospel, you shall live by the gospel. If you are only believing disciples, you must earn your own bread and contribute to the sustenance of all who teach and preach and heal. If you are anxious about your bread and water, wherein are you different from the nations of the world who so diligently seek such necessities? Devote yourselves to your work, believing that both the Father and I know that you have need of all these things. Let me assure you, once and for all, that, if you dedicate your liv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all your real needs shall be supplied. Seek the greater thing, and the lesser will be found therein; ask for the heavenly, and the earthly shall be included. The shadow is certain to follow the substance.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헤아려 보라.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실을 만들지도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환희의 절정에 있던 솔로몬조차 이런 꽃 중 하나처럼 차려입지 않았느니라. 오늘 살아 있다가 내일 꺾여 불에 던져지는 들풀을 하느님이 그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늘나라 대사들인 너희를 얼마나 잘 입히시겠느냐. 오, 너희 신앙이 적은 자들아! 너희가 하느님 나라 복음의 선포에 전심으로 헌신할 때, 너희는 자신들이나 너희가 버린 가족들의 부양(扶養 생활을 돌봄)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희가 진심으로 복음에 너희 목숨을 드린다면 너희는 복음으로 살 것이라. 너희가 단지 믿는 제자들이라면, 너희는 자기 양식을 벌고, 가르치고 전하며 고치는 모든 자의 생계(生計)에 기부해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너희 음식에 대해 걱정한다면, 그런 필수품을 아주 열심히 찾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와 내가 둘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너희 일에 헌신하라. 내가 최종적으로 단언하건대, 너희가 하느님 나라의 일에 너희 목숨을 헌신하면, 너희 모든 실제 필요가 공급될 것이라.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러면 더 작은 것이 거기서 발견될 것이라. 하늘의 것을 구하면, 땅의 것이 포함되리라. 그림자는 반드시 본체를 따르느니라(마6:28-33, 눅12:27-31).

165:5.4 (1823.4) “You are only a small group, but if you have faith, if you will not stumble in fear, I declare that it is my Father’s good pleasure to give you this kingdom. You have laid up your treasures where the purse waxes not old, where no thief can despoil, and where no moth can destroy. And as I told the people,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너희는 적은 무리에 불과하나, 너희에게 신앙이 있고, 너희가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선언하노니, 이런 하느님 나라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 내 아버지의 선한 기쁨이니라. 너희는 너희 지갑이 낡아지지 않고, 어떤 도둑도 약탈할 수 없고, 좀이 해하지 못하는 곳에 너희 보물을 저축하라.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듯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으리라(마6:19-21, 눅12:32-34).

165:5.5 (1824.1) “But in the work which is just ahead of us, and in that which remains for you after I go to the Father, you will be grievously tried. You must all be on your watch against fear and doubts. Every one of you, gird up the loins of your minds and let your lamps be kept burning. Keep yourselves like men who are watch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the marriage feas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you may quickly open to him. Such watchful servants are blessed by the master who finds them faithful at such a great moment. Then will the master make his servants sit down while he himself serves them. Verily, verily, I say to you that a crisis is just ahead in your lives, and it behooves you to watch and be ready. “우리 바로 앞에 놓인 일과 내가 아버지께 간 다음에 너희에게 남아 있는 것에서, 너희는 비통하게 시험을 받을 것이라. 너희는 두려움과 의심에 대비하여 모두 경계해야만 하느니라. 너희 각자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너희 등불을 계속 켜 두라. 결혼 잔치에서 돌아오는 자기 주인을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자신을 지켜서, 주인이 와서 두드리면 너희가 빨리 문을 열 수 있도록 하라. 그렇게 주의 깊은 하인들은 그런 중요한 순간에 충실한 종들을 발견한 주인의 축복을 받느니라. 그러면 주인이 자기 하인들을 앉혀서 자신이 직접 그들을 섬기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삶에서 위기가 바로 앞에 있으며, 너희는 마땅히 경계하고 준비해야 하느니라(눅12:35-38).

165:5.6 (1824.2) “You well understand that no man would suffer his house to be broken into if he knew what hour the thief was to come. Be you also on watch for yourselves, for in an hour that you least suspect and in a manner you think not, shall the Son of Man depart.”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안다면 자기 집에 도둑이 들도록 놔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너희가 잘 알고 있느니라. 너희도 스스로 경계하라, 너희가 가장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에,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떠날 것이기 때문이라(눅12:39-40).”

165:5.7 (1824.3) For some minutes the twelve sat in silence. Some of these warnings they had heard before but not in the setting presented to them at this time. 열두 사도는 몇 분간 말없이 앉았습니다. 이런 경고 중 일부는 그들이 전에 들어 봤지만, 이때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아니었습니다.

6. Answer to Peter’s Question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230416 진실로 검증된 신앙 눅12:41-53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65:6.1 (1824.4) As they sat thinking, Simon Peter asked: “Do you speak this parable to us, your apostles, or is it for all the disciples?” And Jesus answered: 그들이 앉아서 생각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이런 비유를 당신의 사도들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인가요, 아니면 모든 제자에게 하신 말씀인가요(눅12:41)?”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165:6.2 (1824.5) “In the time of testing, a man’s soul is revealed; trial discloses what really is in the heart. When the servant is tested and proved, then may the lord of the house set such a servant over his household and safely trust this faithful steward to see that his children are fed and nurtured. Likewise, will I soon know who can be trusted with the welfare of my children when I shall have returned to the Father. As the lord of the household shall set the true and tried servant over the affairs of his family, so will I exalt those who endure the trials of this hour in the affairs of my kingdom. “극히 곤란한 때에, 사람의 혼이 드러나리라. 시련(試鍊)이 심정에 무엇이 실제로 있는지 들추어내느니라. 하인이 시험을 받아 입증된 다음에, 집주인은 그런 하인에게 자기 집 안을 감독하며, 자기 자녀를 먹이고 양육하도록 충실한 이런 청지기를 마음 놓고 신뢰하느니라. 똑같이, 내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누가 내 자녀들의 행복을 맡을 수 있는지 내가 곧 알 것이니라. 집주인이 진실하고 검증된 하인을 자기 가족 업무의 감독자로 정하듯이, 나는 내 하느님 나라 업무에서 이런 시련의 시간을 견디는 자들을 대단히 칭찬하리라(마24:45-47, 눅12:42-44).

165:6.3 (1824.6) “But if the servant is slothful and begins to say in his heart, ‘My master delays his coming,’ and begins to mistreat his fellow servants and to eat and drink with the drunken, then the lord of that servant will come at a time when he looks not for him and, finding him unfaithful, will cast him out in disgrace. Therefore you do well to prepare yourselves for that day when you will be visited suddenly and in an unexpected manner. Remember, much has been given to you; therefore will much be required of you. Fiery trials are drawing near you. I have a baptism to be baptized with, and I am on watch until this is accomplished. You preach peace on earth, but my mission will not bring peace in the material affairs of men — not for a time, at least. Division can only be the result where two members of a family believe in me and three members reject this gospel. Friends, relatives, and loved ones are destined to be set against each other by the gospel you preach. True, each of these believers shall have great and lasting peace in his own heart, but peace on earth will not come until all are willing to believe and enter into their glorious inheritance of sonship with God. Nevertheless, go in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to all nations, to every man, woman, and child.” “그러나 하인이 게을러 자기 심정으로 ‘내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말하기 시작하여, 자기 동료 하인들을 학대하고 술에 취한 자들과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그런 하인의 주인이 하인을 찾지 않는 때에 와서 성실하지 않은 하인을 발견하고 그를 수치스럽게 쫓아내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돌연(突然) 예기치 않게 닥칠 그날을 준비하는 것이, 온당하니라. 너희에게 많이 주어졌으니, 너희에게 많이 요구될 것을 기억하라. 격렬한 시련이 너희에게 다가오고 있느니라.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어서 이것이 마치기까지 나는 깨어있느니라. 너희가 지상에 평화를 전하지만, 내 사명은 사람의 물질적인 업무에 아무튼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가족 중 두 명이 나를 믿고 세 명이 이 복음을 거부하는 곳에서, 분열이 그 결과일 뿐이라. 너희가 전하는 복음으로 친구들, 친척들 및 사랑하는 자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어 있느니라(마24:48-51, 눅12:45-46, 48b, 50-53). 정확히, 이런 신자들 각자는 자기 심정에 커다란 지속적인 평화를 가질 것이나, 모든 사람이 기꺼이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상속에 참여하기까지, 지상에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 그렇지만 온 세상에 들어가, 모든 나라, 모든 남녀와 어린이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마28:19a, 막16:15).”

165:6.4 (1824.7) And this was the end of a full and busy Sabbath day. On the morrow Jesus and the twelve went into the cities of northern Perea to visit with the seventy, who were working in these regions under Abner’s supervision. 그리고 이것은 풍성하고 바쁜 안식일의 끝이었습니다. 이튿날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넬의 감독에 따라 이런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70인을 방문하러 페레아 북부 도시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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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6 Last Visit to Northern Perea 마지막 북(北) 페레아 방문

Paper 166

Last Visit to Northern Perea 마지막 북(北) 페레아 방문

1. The Pharisees at Ragaba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Ceremonial hand washing 의식용 손 씻기
2. The Ten Lepers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3. The Sermon at Gerasa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The straight and narrow way 곧고 좁은 길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첫째가 나중되는 자가 많으니라.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4. Teaching About Accidents 재난에 대한 가르침
5. The Congregation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의 회중
The later ministry and death of Abner 아브너의 말년 사역과 죽음

230423 예수 복음의 근거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66:0.1 (1825.1) FROM February 11 to 20, Jesus and the twelve made a tour of all the cities and villages of northern Perea where the associates of Abner and the members of the women’s corps were working. They found these messengers of the gospel meeting with success, and Jesus repeatedly called the attention of his apostles to the fact that the gospel of the kingdom could spread without the accompaniment of miracles and wonders. 2월 11일(토)부터 20일(월)까지,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너의 동료들과 여성 단원들이 일하고 있는 북(北)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순회(巡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복음의 메신저들이 훌륭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적과 이적을 동반하지 않고도 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도들의 주의(注意)를 거듭하여 환기(喚起)시켰습니다.

166:0.2 (1825.2) This entire mission of three months in Perea was successfully carried on with little help from the twelve apostles, and the gospel from this time on reflected, not so much Jesus’ personality, as his teachings. But his followers did not long follow his instructions, for soon after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they departed from his teachings and began to build the early church around the miraculous concepts and the glorified memories of his divine-human personality. 페레아에서 3개월간의 이 모든 선교(宣敎)는 거의 열두 사도의 도움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이때부터 복음은 예수의 인격(고유성)이라기보다 그의 가르침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오래되지 않아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 직후 그의 가르침에서 이탈하여 기적적인 개념과 그의 신적-인간적 인격(고유성)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억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 The Pharisees at Ragaba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230430 더 중요한 요구사항 눅11:37-43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66:1.1 (1825.3) On Sabbath, February 18, Jesus was at Ragaba, where there lived a wealthy Pharisee named Nathaniel; and since quite a number of his fellow Pharisees were following Jesus and the twelve around the country, he made a breakfast on this Sabbath morning for all of them, about twenty in number, and invited Jesus as the guest of honor. 2월 18일(AD 30) 안식일에 예수는 나다니엘이라는 부유한 바리새인이 살았던 라가바에 계셨습니다. 그 지방 주변에서 제법 많은 그 동료가 예수와 열두 사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안식일 아침에 20명쯤 되는 그들 모두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예수를 귀빈(貴賓)으로 초대했습니다(눅11:37).

166:1.2 (1825.4) By the time Jesus arrived at this breakfast, most of the Pharisees, with two or three lawyers, were already there and seated at the table. The Master immediately took his seat at the left of Nathaniel without going to the water basins to wash his hands. Many of the Pharisees, especially those favorable to Jesus’ teachings, knew that he washed his hands only for purposes of cleanliness, that he abhorred these purely ceremonial performances; so they were not surprised at his coming directly to the table without having twice washed his hands. But Nathaniel was shocked by this failure of the Master to comply with the strict requirements of Pharisaic practice. Neither did Jesus wash his hands, as did the Pharisees, after each course of food nor at the end of the meal. 예수께서 이 아침 식사에 도착하셨을 때, 바리새인들 대부분은 두셋의 율법사와 함께 이미 거기에 있었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주님은 손을 씻으러 물동이로 가지 않고 나다니엘의 왼쪽에 바로 앉았습니다. 여러 바리새인, 특히 예수의 가르침에 호의적인 자들은, 그가 청결의 목적으로만 그의 손을 씻고, 그가 이런 순전한 의식용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손을 두 번 씻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주께서 바리새인의 엄격한 규칙 습관을 따르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음식의 각 요리를 먹은 후에 또는 식후에도 그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눅11:38).

166:1.3 (1825.5) After considerable whispering between Nathaniel and an unfriendly Pharisee on his right and after much lifting of eyebrows and sneering curling of lips by those who sat opposite the Master, Jesus finally said: “I had thought that you invited me to this house to break bread with you and perchance to inquire of me concerning the proclamation of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but I perceive that you have brought me here to witness an exhibition of ceremonial devotion to your own self-righteousness. That service you have now done me; what next will you honor me with as your guest on this occasion?” 나다니엘과 그 오른편의 악의를 지닌 바리새인 사이에 상당한 귓속말을 하고, 주님의 맞은편에 앉은 자들이 사뭇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비쭉여 비웃은 다음에, 마침내 주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이 집에 나를 초대하여 너와 함께 식사하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 선포에 대해 어쩌면 내게 질문하리라고 생각했노라. 그러나 너 자신의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에 대한 의식용 헌신의 표시를 보라고 네가 나를 여기 데려온 것으로 알겠노라. 네가 지금 내게 그렇게 접대했으니, 네가 이 기회에 너의 손님으로서 나에게 다음의 어떤 것으로 경의를 표할 것이냐?”

166:1.4 (1826.1) When the Master had thus spoken, they cast their eyes upon the table and remained silent. And since no one spoke, Jesus continued: “Many of you Pharisees are here with me as friends, some are even my disciples, but the majority of the Pharisees are persistent in their refusal to see the light and acknowledge the truth, even when the work of the gospel is brought before them in great power. How carefully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s and the platters while the spiritual-food vessels are filthy and polluted! You make sure to present a pious and holy appearance to the people, but your inner souls are filled with self-righteousness, covetousness, extortion, and all manner of spiritual wickedness. Your leaders even dare to plot and plan the murder of the Son of Man. Do not you foolish men understand that the God of heaven looks at the inner motives of the soul as well as on your outer pretenses and your pious professions? Think not that the giving of alms and the paying of tithes will cleanse you from unrighteousness and enable you to stand clean in the presence of the Judge of all men. Woe upon you Pharisees who have persisted in rejecting the light of life! You are meticulous in tithing and ostentatious in almsgiving, but you knowingly spurn the visitation of God and reject the revelation of his love. Though it is all right for you to give attention to these minor duties, you should not have left these weightier requirements undone. Woe upon all who shun justice, spurn mercy, and reject truth! Woe upon all those who despise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while they seek the chief seats in the synagogue and crave flattering salutations in the market places!”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식탁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계속하셨습니다. “너희 중 여러 바리새인이 친구들로서 나와 함께 여기에 있고 일부는 심지어 내 제자들이지만, 바리새인들 대부분은 그들 앞에 복음의 행위가 큰 권세로 주어져도, 빛을 보고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도다. 너희가 얼마나 신중하게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지만, 영적 양식의 그릇이 더럽게 오염되어 있는가(마23:25, 눅11:39)! 너희가 사람들에게 위선적인 거룩한 모습을 확실히 보이려 하지만 너희 내부의 혼(魂)들은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 탐욕, 강탈(强奪) 및 온갖 방식의 영적 사악함이 가득 차 있도다(마23:28). 너희 지도자들은 감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살해를 꾀하고 계획까지 하도다.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의 하느님이 너희 외적인 겉치레와 너희 위선적인 신앙고백만 아니라 혼(魂)의 내적 동기(動機)를 보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눅16:15)? 자선을 베풀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해서 너희가 불의(不義)에서 깨끗해지고 너희가 모든 사람의 심판자 앞에서 깨끗하게 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생명의 빛을 고집스럽게 거절하는 너희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으리라! 너희가 십일조에 매우 신중하고 보란 듯이 자선(慈善)하지만, 너희는 고의로 하느님의 은총을 경멸하고 그의 사랑의 계시를 거절하도다(마23:23, 눅11:42). 너희가 이런 사소한 본분에 주의하는 것이 괜찮아도, 이렇게 더 중요한 요구사항을 그대로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정의(正義)를 피하고, 자비를 경멸하며, 진리를 거절하는 모든 자에게 화 있으리라! 아버지의 계시를 멸시하면서, 회당의 윗자리를 추구하며 시장에서 아첨하는 인사(人事)를 열망하는 모든 자에게 화 있으리라(마23:6-7, 막12:38-39, 눅11:43)!”

230507 하늘나라의 열린 문 눅11:45-54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166:1.5 (1826.2) When Jesus would have risen to depart, one of the lawyers who was at the table, addressing him, said: “But, Master, in some of your statements you reproach us also. Is there nothing good in the scribes, the Pharisees, or the lawyers?” And Jesus, standing, replied to the lawyer: “You, like the Pharisees, delight in the first places at the feasts and in wearing long robes while you put heavy burdens, grievous to be borne, on men’s shoulders. And when the souls of men stagger under these heavy burdens, you will not so much as lift with one of your fingers. Woe upon you who take your greatest delight in building tombs for the prophets your fathers killed! And that you consent to what your fathers did is made manifest when you now plan to kill those who come in this day doing what the prophets did in their day — proclaiming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revealing the mercy of the heavenly Father. But of all the generations that are past, the blood of the prophets and the apostles shall be required of this perverse and self-righteous generation. Woe upon all of you lawyers who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from the common people! You yourselves refuse to enter into the way of truth, and at the same time you would hinder all others who seek to enter therein. But you cannot thus shut up the doors of the kingdom of heaven; these we have opened to all who have the faith to enter, and these portals of mercy shall not be closed by the prejudice and arrogance of false teachers and untrue shepherds who are like whited sepulchres which, while outwardly they appear beautiful, are inwardly full of dead men’s bones and all manner of spiritual uncleanness.” 예수께서 떠나려고 일어나시자, 식탁에 있던 율법사 한 사람이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의 말씀 중 일부에서 당신은 저희 또한 책망하십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또는 율법사들에게는 올바른 것이 없습니까?” 그러자 예수는, 선 채로 율법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너희는 바리새인들처럼 잔치의 상석에서 긴 예복을 즐기면서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로 짊어지게 하도다. 사람의 혼(魂)들이 이렇게 무거운 짐 아래서, 휘청거릴 때, 너희는 손가락 하나조차 들어 올리지 않으리라. 너희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위해 무덤 세우기를 최고로 즐거워하는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그리고 선지자들이 당시에 했던, 하느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의 자비를 계시하는 것을 오늘날 와서 행하는 자들을 너희가 이제 죽이려고 계획할 때, 너희 조상들이 한 것에 너희가 동의하는 것이 명백하니라. 하지만 이렇게 고집스러운 독선(獨善 자기만 옳다고 하는 행동)적인 세대가 지나간 모든 세대 중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요구하리라. 서민에게서 지식의 열쇠를 제거한 너희 율법사 모두에게 화 있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진리의 길로 들어가기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동시에 너희는 그 안에 들어가려는 다른 모든 사람을 방해하곤 했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우리가 들어갈 신앙이 있는 모두에게 이런 문들을 열었고,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영적 더러움으로 가득한, 거짓 교사들과 거짓 목자들의 편견과 오만으로, 이런 자비의 입구들이 닫히지 않으리라(마23:13, 27-29, 35-36, 눅11:45-48, 52).”

166:1.6 (1826.3) And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at Nathaniel’s table, he went out of the house without partaking of food. And of the Pharisees who heard these words, some became believers in his teaching and entered into the kingdom, but the larger number persisted in the way of darkness, becoming all the more determined to lie in wait for him that they might catch some of his words which could be used to bring him to trial and judgment before the Sanhedrin at Jerusalem. 그리고 예수께서 나다니엘의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그는 함께 먹지 않고 집을 떠났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 중 일부는 그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으나, 더 많은 수가 어둠의 길을 고집하여,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 그를 검거하여 재판에 사용될 그의 일부 말씀을 자신들이 캐내려고 숨어서 그를 기다리기로 더욱더 결정하게 되었습니다(눅11:53-54).

166:1.7 (1827.1) There were just three things to which the Pharisees paid particular attention: 바리새인들이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은 바로 세 가지였습니다.

166:1.8 (1827.2) 1. The practice of strict tithing. 엄격한 십일조 관행.

166:1.9 (1827.3) 2. Scrupulous observance of the laws of purification. 빈틈없는 정화(淨化)법 준수.

166:1.10 (1827.4) 3. Avoidance of association with all non-Pharisees.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과 관계 회피.

166:1.11 (1827.5) At this time Jesus sought to expose the spiritual barrenness of the first two practices, while he reserved his remarks designed to rebuke the Pharisees’ refusal to engage in social intercourse with non-Pharisees for another and subsequent occasion when he would again be dining with many of these same men. 이때 예수는 영적으로 알맹이가 없는 처음 두 관행을 폭로하려 했지만, 바리새인이 아닌 사람들과 사회적인 교류 참여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거절을 꾸짖으려는 그의 언급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 중 여럿과 다시 식사하는 나중의 또 다른 기회를 위해 훗날로 미뤘습니다.

2. The Ten Lepers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230514 감사와 애정이 깊은 자비 눅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66:2.1 (1827.6) The next day Jesus went with the twelve over to Amathus, near the border of Samaria, and as they approached the city, they encountered a group of ten lepers who sojourned near this place. Nine of this group were Jews, one a Samaritan. Ordinarily these Jews would have refrained from all association or contact with this Samaritan, but their common affliction was more than enough to overcome all religious prejudice. They had heard much of Jesus and his earlier miracles of healing, and since the seventy made a practice of announcing the time of Jesus’ expected arrival when the Master was out with the twelve on these tours, the ten lepers had been made aware that he was expected to appear in this vicinity at about this time; and they were, accordingly, posted here on the outskirts of the city where they hoped to attract his attention and ask for healing. When the lepers saw Jesus drawing near them, not daring to approach him, they stood afar off and cried to him: “Master, have mercy on us; cleanse us from our affliction. Heal us as you have healed others.” 다음 날(AD30.2.19. 일요일) 예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사마리아 변경 근처의 아마투스로 건너가셨고, 그들이 도시에 접근하자, 이곳 근처에 머물던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이 중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대개 이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과 모든 사귐이나 접촉을 꺼렸을 것이지만, 그들의 공통된 고통은 모든 종교적 편견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초기 치유 기적에 대해 많이 들었고, 70인 사도가, 주께서 이런 여행에 열두 사도와 함께 외출하는 예수님의 예상 도착 시간을, 습관적으로 알렸기 때문에, 열 명의 나환자(癩患者)는 그가 이 무렵 이 부근에 나타나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주의를 끌어 치유를 요청하기를 바라며 이곳 도시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환자(癩患者 한센병)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자,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 서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고통에서 우리를 고쳐주소서. 당신께서 다른 이들을 치유했듯이 우리를 치유하소서(눅17:11-13).”

166:2.2 (1827.7) Jesus had just been explaining to the twelve why the gentiles of Perea, together with the less orthodox Jews, were more willing to believe the gospel preached by the seventy than were the more orthodox and tradition-bound Jews of Judea. He had called their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ir message had likewise been more readily received by the Galileans, and even by the Samaritans. But the twelve apostles were hardly yet willing to entertain kind feelings for the long-despised Samaritans.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왜 페레아의 이방인들이, 덜 정통적인 유대인들과 함께, 더 정통적이고 전통에 묶인 유대의 유대인들보다, 70인 사도가 전파한 복음을 기꺼이 더 믿는지 막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찬가지로 갈릴리인(人)들과 심지어 사마리아인(人)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더 쉽게 받아들였던 사실에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는 오래 괄시 받던 사마리아인(人)들에 대한 친절한 감정을 아직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166:2.3 (1827.8) Accordingly, when Simon Zelotes observed the Samaritan among the lepers, he sought to induce the Master to pass on into the city without even hesitating to exchange greetings with them. Said Jesus to Simon: “But what if the Samaritan loves God as well as the Jews? Should we sit in judgment on our fellow men? Who can tell? if we make these ten men whole, perhaps the Samaritan will prove more grateful even than the Jews. Do you feel certain about your opinions, Simon?” And Simon quickly replied, “If you cleanse them, you will soon find out.” And Jesus replied: “So shall it be, Simon, and you will soon know the truth regarding the gratitude of men and the loving mercy of God.” 그래서 시몬 젤로떼가 나환자들 사이에서 사마리아인(人)을 알아보자, 주님을 설득하여 그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멈춰 서지 않고, 도시로 나아가도록 애썼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우리가 우리 동료를 판가름해야 하느냐? 누가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런 열 명을 건강하게 한다면, 아마 사마리아인(人)이 유대인들보다도 더 고마움을 표할 것이라. 시몬아, 너는 네 의견에 확신이 있느냐?” 그러자 시몬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고치면, 당신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시몬아, 그렇게 될 것이며, 너는 사람들의 감사와 하느님의 애정이 깊은 자비에 관한 진리를 곧 알게 될 것이니라.”

166:2.4 (1827.9) Jesus, going near the lepers, said: “If you would be made whole, go forthwith and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s required by the law of Moses.” And as they went, they were made whole. But when the Samaritan saw that he was being healed, he turned back and, going in quest of Jesus, began to glorify God with a loud voice. And when he had found the Master, he fell on his knees at his feet and gave thanks for his cleansing. The nine others, the Jews, had also discovered their healing, and while they also were grateful for their cleansing, they continued on their way to show themselves to the priests. 예수께서 나환자들에게 가까이 가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건강해지면 바로 가서 모세의 율법대로 사제들에게 너희 모습을 보이라.” 그리고 그들이 가다가, 그들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은 자신이 치유된 것을 알자, 그는 되돌아서, 예수를 찾으러 가면서, 큰 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을 발견하자, 그는,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자신의 깨끗해짐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도 자신의 치유를 깨닫고, 자신들의 깨끗해짐에 대해 감사하면서, 사제들에게 모습을 보이려고 계속 길을 갔습니다(눅17:14-16).

166:2.5 (1828.1) As the Samaritan remained kneeling at Jesus’ feet, the Master, looking about at the twelve, especially at Simon Zelotes, said: “Were not ten cleansed? Where, then, are the other nine, the Jews? Only one, this alien, has returned to give glory to God.” And then he said to the Samaritan, “Arise and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사마리아인(人)이 여전히 예수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주께서 열두 사도, 특히 시몬 젤로떼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열 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러면 다른 아홉 명의 유대인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한 명만 하느님에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왔느니라.” 그런 후 그가 사마리아인(人)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네 길을 가라. 너의 신앙이 너를 건강하게 만들었느니라(눅17:17-19).”

166:2.6 (1828.2) Jesus looked again at his apostles as the stranger departed. And the apostles all looked at Jesus, save Simon Zelotes, whose eyes were downcast. The twelve said not a word. Neither did Jesus speak; it was not necessary that he should. 그 사람이 떠나자 예수께서 다시 자기 사도들을 보셨습니다. 눈을 내리깐, 시몬 젤로떼만 제외하고 사도들 모두 예수를 보았습니다. 열두 사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66:2.7 (1828.3) Though all ten of these men really believed they had leprosy, only four were thus afflicted. The other six were cured of a skin disease which had been mistaken for leprosy. But the Samaritan really had leprosy. 이런 열 명 모두 자신들이 나병(한센병)에 걸렸다고 정말로 믿었지만, 네 명만 그렇게 병에 걸려 고통을 겪었습니다. 다른 여섯 명은 나병(癩病)으로 잘못 알았던 피부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人)은 정말 나병(한센병)에 걸렸습니다.

166:2.8 (1828.4) Jesus enjoined the twelve to say nothing about the cleansing of the lepers, and as they went on into Amathus, he remarked: “You see how it is that the children of the house, even when they are insubordinate to their Father’s will, take their blessings for granted. They think it a small matter if they neglect to give thanks when the Father bestows healing upon them, but the strangers, when they receive gifts from the head of the house, are filled with wonder and are constrained to give thanks in recognition of the good things bestowed upon them.” And still the apostles said nothing in reply to the Master’s words.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나환자(癩患者)들의 깨끗해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했고, 그들이 아마투스로 들어갈 때, 말했습니다. “너희는 집의 자녀들이 자기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때도,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아느니라. 그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치료하실 때, 감사하지 않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지만, 남들은 가장(家長)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놀라움으로 뿌듯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한 것들을 알아보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그러자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3. The Sermon at Gerasa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230521 누가 구원을 받을까? 눅13:22-30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166:3.1 (1828.5) As Jesus and the twelve visited with the messengers of the kingdom at Gerasa, one of the Pharisees who believed in him asked this question: “Lord, will there be few or many really saved?” And Jesus, answering, said: 예수님과 열두 사도가 게라사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신저들과 이야기했을 때, 그를 믿던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이 적을까요, 아니면 많을까요?”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했습니다(눅13:22-23).

166:3.2 (1828.6) “You have been taught that only the children of Abraham will be saved; that only the gentiles of adoption can hope for salvation. Some of you have reasoned that, since the Scriptures record that only Caleb and Joshua from among all the hosts that went out of Egypt lived to enter the promised land, only a comparatively few of those who seek the kingdom of heaven shall find entrance thereto.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만 구원받을 것이며, 양자로 입양된 이방인들만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배웠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성서에 이집트를 떠난 모든 무리 중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하느님 나라를 찾는 자 중에서 비교적 적은 수만 거기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느니라(민14:30, 38, 26:65, 32:11-12).

166:3.3 (1828.7) “You also have another saying among you, and one that contains much truth: That the way which leads to eternal life is straight and narrow, that the door which leads thereto is likewise narrow so that, of those who seek salvation, few can find entrance through this door. You also have a teaching that the way which leads to destruction is broad, that the entrance thereto is wide, and that there are many who choose to go this way. And this proverb is not without its meaning. But I declare that salvation is first a matter of your personal choosing. Even if the door to the way of life is narrow, it is wide enough to admit all who sincerely seek to enter, for I am that door. And the Son will never refuse entrance to any child of the universe who, by faith, seeks to find the Father through the Son. 너희는 너희 중 다른 격언도 있는데,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곧고 좁으며, 거기로 인도하는 문도 마찬가지로 좁아서, 구원을 찾는 자 중에서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여러 실태를 담고 있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거기로 들어가는 입구도 넓어서, 이 길을 가려고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가르침도 너희에게 있느니라. 이런 속담은 그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구원은 먼저 너희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이니라. 생명의 길로 가는 문이 좁다고 해도, 진심으로 들어가려고 찾는 모두를 받아 들일만큼 넓으니, 내가 그 문이기 때문이라. 그리고 아들은, 신앙으로,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우주의 어떤 자녀라도 들어가기를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니라(마7:13-14, 눅13:24).

166:3.4 (1829.1) “But herein is the danger to all who would postpone their entrance into the kingdom while they continue to pursue the pleasures of immaturity and indulge the satisfactions of selfishness: Having refused to enter the kingdom as a spiritual experience, they may subsequently seek entrance thereto when the glory of the better way becomes revealed in the age to come. And when, therefore, those who spurned the kingdom when I came in the likeness of humanity seek to find an entrance when it is revealed in the likeness of divinity, then will I say to all such selfish ones: I know not whence you are. You had your chance to prepare for this heavenly citizenship, but you refused all such proffers of mercy; you rejected all invitations to come while the door was open. Now, to you who have refused salvation, the door is shut. This door is not open to those who would enter the kingdom for selfish glory. Salvation is not for those who are unwilling to pay the price of wholehearted dedication to doing my Father’s will. When in spirit and soul you have turned your backs upon the Father’s kingdom, it is useless in mind and body to stand before this door and knock, saying, ‘Lord, open to us; we would also be great in the kingdom.’ Then will I declare that you are not of my fold. I will not receive you to be among those who have fought the good fight of faith and won the reward of unselfish service in the kingdom on earth. And when you say, ‘Did we not eat and drink with you, and did you not teach in our streets?’ then shall I again declare that you are spiritual strangers; that we were not fellow servants in the Father’s ministry of mercy on earth; that I do not know you; and then shall the Judge of all the earth say to you: ‘Depart from us, all you who have taken delight in the works of iniquity.’ “그러나 미숙한 쾌락을 계속 추구하고 이기심의 만족을 채우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미루는 모든 자에게 이 점에서 위험이 있도다. 영적 체험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그들이, 그 후에 다가오는 시대에 더 나은 길의 영광이 계시될 때, 거기로 들어가려 할 수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왔을 때 하느님 나라를 거절한 자들이 신성(神性)의 모습이 계시될 때 들어가려고 애쓴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이기적인 모든 자에게 말하리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노라. 너희는 이런 하늘의 시민권을 준비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모든 자비의 제안(提案)을 거절했도다. 너희는 문이 열려 있는 동안 오라는 모든 초대를 거절했도다. 이제 구원을 거절한 너희에게는 문이 닫혔도다. 이 문은 이기적 영광을 위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는 열려 있지 않으니라. 구원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전심으로 헌신하는 값을 마지못해 치르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영(靈)과 혼(魂)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외면하면서, 마음과 몸으로 이 문 앞에서 서서 두드리며, ‘주님, 우리에게 문을 여소서,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느니라. 그때 너희는 내 우리 안의 양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선언하리라. 나는, 신앙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전6:12a, 딤후4:7a),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타적인 섬김의 보상을 얻은 자들 사이에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가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당신께서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면, 너희는 영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역에서 동료 봉사자들이 아니었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내가 다시 선언하리라. 그러면 온 지상의 심판자가 너희에게 ‘사악한 일을 즐겼던 너희는 다 우리에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눅13:25-27).

166:3.5 (1829.2) “But fear not; every one who sincerely desires to find eternal life by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God shall certainly find such everlasting salvation. But you who refuse this salvation will some day see the prophets of the seed of Abraham sit down with the believers of the gentile nations in this glorified kingdom to partake of the bread of life and to refresh themselves with the water thereof. And they who shall thus take the kingdom in spiritual power and by the persistent assaults of living faith will come from the north and the south and from the east and the west. And, behold,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ose who are last will many times be first.”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 얻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런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이런 구원을 거절하는 너희는 언젠가, 아브라함 자손의 선지자들이 이렇게 영화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이방 민족의 신자들과 함께 앉아서 생명의 빵을 먹고 거기의 물로 기운을 되찾는 것을 볼 것이라. 그리고 이렇게 영적 권세와 살아있는 신앙의 집요한 공격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그들이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에서 올 것이라. 그리고 보라, 먼저 된 많은 자들이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자들이 여러 번 먼저 되리라(마8:11, 19:30, 20:16, 막10:31, 눅13:28-30).”

166:3.6 (1829.3) This was indeed a new and strange version of the old and familiar proverb of the straight and narrow way. 이것은 곧고 좁은 길이라는 오래되어 잘 알려진 속담을 정말로 새롭게 설명한 생소한 해석이었습니다.

166:3.7 (1829.4) Slowly the apostles and many of the disciples were learning the meaning of Jesus’ early declaration: “Unless you are born again, born of the spirit, you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Nevertheless, to all who are honest of heart and sincere in faith, it remains eternally true: “Behold, I stand at the doors of men’s hearts and knock, and if any man will open to me, I will come in and sup with him and will feed him with the bread of life; we shall be one in spirit and purpose, and so shall we ever be brethren in the long and fruitful service of the search for the Paradise Father.” And so, whether few or many are to be saved altogether depends on whether few or many will heed the invitation: “I am the door, I am the new and living way, and whosoever wills may enter to embark upon the endless truth-search for eternal life.” 사도들과 여러 제자는 “너희가 거듭나, 영(靈)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너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3).”라는 예수의 초기 선언의 의미를 서서히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심정이 정직하고 신앙이 진실한 모든 이에게 영원히 진실로 남아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사람들의 심정 문간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게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를 생명의 빵으로 먹이리라(계3:20). 우리는 영(靈)과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천국 아버지를 찾는, 오래도록 열매가 많이 열리는 섬김 가운데 우리는 그렇게 늘 형제가 될 것이라.” 따라서 소수가 구원되는지, 다수가 구원되는지는 “나는 문이라(요10:7, 9), 나는 새롭게 살아 있는 길이며(요14:6),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영생의 끝없는 진리-추구의 시작에 참여할 수 있느니라.”라는 초대에 소수나 다수가 주의를 기울일지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166:3.8 (1829.5) Even the apostles were unable fully to comprehend his teaching as to the necessity for using spiritual force for the purpose of breaking through all material resistance and for surmounting every earthly obstacle which might chance to stand in the way of grasping the all-important spiritual values of the new life in the spirit as the liberated sons of God. 사도들조차, 모든 물질적 저항을 돌파하고, 해방된 하느님의 아들(자녀)들로서 영(靈) 안에서 새 생명에 속한 가장 중요한 영적 가치의 파악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모든 현세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영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4. Teaching About Accidents 재난에 대한 가르침

230528 무엇으로 영적 은혜가 결정되는가? 눅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166:4.1 (1830.1) While most Palestinians ate only two meals a day, it was the custom of Jesus and the apostles, when on a journey, to pause at midday for rest and refreshment. And it was at such a noontide stop on the way to Philadelphia that Thomas asked Jesus: “Master, from hearing your remarks as we journeyed this morning, I would like to inquire whether spiritual beings are concerned in the production of strange and extraordinary events in the material world and, further, to ask whether the angels and other spirit beings are able to prevent accidents.” 팔레스타인 사람 대부분은 하루에 두 끼만 먹었으나, 예수와 사도들은 여행할 때 한낮에 잠시 멈춰 쉬면서 기운을 차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로 가는 도중에 그렇게 한낮에 멈추었을 때 도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오늘 아침에 우리가 여행할 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 존재들이 물질계에서 기이하고 비상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는지, 게다가 천사들과 다른 영(靈) 존재들이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지, 제가 질문하고 싶습니다.”

166:4.2 (1830.2) In answer to Thomas’s inquiry, Jesus said: “Have I been so long with you, and yet you continue to ask me such questions? Have you failed to observe how the Son of Man lives as one with you and consistently refuses to employ the forces of heaven for his personal sustenance? Do we not all live by the same means whereby all men exist? Do you see the power of the spiritual world manifested in the material life of this world, save for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and the sometime healing of his afflicted children?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여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오래 너와 같이 있었는데도, 내게 그런 질문을 계속하느냐? 너희는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이 너희와 하나가 되어 살면서 자기 개인의 생계를 위해 하늘의 기세를 시종일관 사용하려 하지 않는지 네가 지켜보지 않았느냐? 우리 모두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느냐? 너는 아버지의 계시와 때때로 그의 고통받는 자녀들의 치유를 제외하고, 이 세상의 물질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영적 세계의 권세를 보고 있느냐?

166:4.3 (1830.3) “All too long have your fathers believed that prosperity was the token of divine approval; that adversity was the proof of God’s displeasure. I declare that such beliefs are superstitions. Do you not observe that far greater numbers of the poor joyfully receive the gospel and immediately enter the kingdom? If riches evidence divine favor, why do the rich so many times refuse to believe this good news from heaven? “너희 조상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번영은 신적 찬성의 신호이고 불행은 하느님이 진노한 증거라고 믿었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그런 믿음은 미신적 관습이니라. 너희는, 훨씬 더 많은 가난한 자가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여 즉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느냐? 재산이 신적 은혜의 증거라면 부자들은 어째서 하늘의 이 복음을 그토록 여러 번 믿으려 하지 않는가?

166:4.4 (1830.4) “The Father causes his rain to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the sun likewise shines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You know about those Galileans whose blood Pilate mingled with the sacrifices, but I tell you these Galileans were not in any manner sinners above all their fellows just because this happened to them. You also know about the eighteen men upon whom the tower of Siloam fell, killing them. Think not that these men who were thus destroyed were offenders above all their brethren in Jerusalem. These folks were simply innocent victims of one of the accidents of time. “아버지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자신의 비를 내리시고,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햇빛을 비추느니라(마5:45). 너희는 빌라도가 희생제물에 피를 섞은 그런 갈릴리인(人)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네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갈릴리인(人)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면에서 그들의 어떤 동료들보다 죄인들이 아니었느니라. 너희는 또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에 대해 아느니라. 그렇게 죽은 이런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어떤 형제들보다 범죄자들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사람들은 시간의 돌발 사고 중 하나의 무고한 희생자들이었을 뿐이니라(눅13:1-4).

166:4.5 (1830.5) “There are three groups of events which may occur in your lives: “너희 삶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들은 세 가지 종류니라.

166:4.6 (1830.6) “1. You may share in those normal happenings which are a part of the life you and your fellows live on the face of the earth. 너희는 지구상에서 너희와 너희 동료가 사는 생활의 일부인 그런 평범한 사건들을 함께 나눌 수도 있느니라.

166:4.7 (1830.7) “2. You may chance to fall victim to one of the accidents of nature, one of the mischances of men, knowing full well that such occurrences are in no way prearranged or otherwise produced by the spiritual forces of the realm. 너희는 자연계의 돌발 사고 중 하나, 사람들의 재난 중 하나에 우연히 희생될 수도 있는데, 그런 사건들은 영역의 영적 기세들이 예정한 것도, 또한 그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느니라.

166:4.8 (1830.8) “3. You may reap the harvest of your direct efforts to comply with the natural laws governing the world.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연법칙을 좇는 직접적인 너희 노력의 결과를 거둘 수도 있느니라.

166:4.9 (1830.9) “There was a certain man who planted a fig tree in his yard, and when he had many times sought fruit thereon and found none, he called the vinedressers before him and said: ‘Here have I come these three seasons looking for fruit on this fig tree and have found none. Cut down this barren tree; why should it encumber the ground?’ But the head gardener answered his master: ‘Let it alone for one more year so that I may dig around it and put on fertilizer, and then, next year, if it bears no fruit, it shall be cut down.’ And when they had thus complied with the laws of fruitfulness, since the tree was living and good, they were rewarded with an abundant yield. “어떤 사람이 자기 마당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곧이어 여러 번 열매를 구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그가 자기 앞에 포도원 일꾼들을 불러 말했더라.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아 삼 년을 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도다. 이런 메마른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째서 그것이 땅을 거치적거리게 하느냐?’ 그러나 정원사 단장이 그의 주인에게 대답했더라. ‘1년간 그대로 둬서 제가 땅을 두루 파서 거름을 준 다음 내년에 열매가 없으면 베어 버릴 것이라.’ 그들이 그렇게 열매 맺는 법칙을 따르자, 나무가 살아서 튼튼해져서, 그들은 풍부한 수확으로 보상받았더라(눅13:6-9).

166:4.10 (1831.1) “In the matter of sickness and health, you should know that these bodily states are the result of material causes; health is not the smile of heaven, neither is affliction the frown of God. “질병과 건강 문제에서, 너희는 이런 육체적 상태는 물질적 원인의 결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건강은 하늘의 은총이 아니며, 질병도 하느님의 화난 얼굴이 아니라.

166:4.11 (1831.2) “The Father’s human children have equal capacity for the reception of material blessings; therefore does he bestow things physical upon the children of men without discrimination. When it comes to the bestowal of spiritual gifts, the Father is limited by man’s capacity for receiving these divine endowments. Although the Father is no respecter of persons, in the bestowal of spiritual gifts he is limited by man’s faith and by his willingness always to abide by the Father’s will.” “아버지의 인간 자녀들은 물질적 축복을 받아들이는 동등한 능력이 있도다. 따라서 그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육신의 것들을 차별 없이 주시느니라. 영적 은혜를 주실 때, 아버지는 이런 신적 자질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용력에 의해 제한되느니라. 아버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지만, 영적 은혜를 주실 때, 그는 사람의 신앙과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그의 기꺼이 하는 마음(자발성)으로 제한되느니라.”

166:4.12 (1831.3) As they journeyed on toward Philadelphia, Jesus continued to teach them and to answer their questions having to do with accidents, sickness, and miracles, but they were not able fully to comprehend this instruction. One hour of teaching will not wholly change the beliefs of a lifetime, and so Jesus found it necessary to reiterate his message, to tell again and again that which he wished them to understand; and even then they failed to grasp the meaning of his earth mission until after his death and resurrection. 그들이 필라델피아를 향해 여행을 계속하면서, 예수께서 계속 그들을 가르치고 재난, 질병 및 기적에 관련된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지만,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의 가르침으로 평생의 믿음이 완전히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을 몇 번이고 말할 필요를 간파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그들은 그의 지상 사명의 의미를 끝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5. The Congregation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의 회중

230604 예수 복음을 믿고 가르친 아브너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66:5.1 (1831.4) Jesus and the twelve were on their way to visit Abner and his associates, who were preaching and teaching in Philadelphia. Of all the cities of Perea, in Philadelphia the largest group of Jews and gentiles, rich and poor, learned and unlearned, embraced the teachings of the seventy, thereby entering into the kingdom of heaven. The synagogue of Philadelphia had never been subject to the supervision of the Sanhedrin at Jerusalem and therefore had never been closed to the teachings of Jesus and his associates. At this very time, Abner was teaching three times a day in the Philadelphia synagogue. 예수와 열두 사도는 필라델피아에서 전도하고 가르치는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을 방문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페레아의 모든 도시 중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유대인과 이방인 집단,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들이 70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하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회당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의 감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예수와 그 동료들의 가르침을 금지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회당에서 하루에 세 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166:5.2 (1831.5) This very synagogue later on became a Christian church and was the missionary headquarters for the promulgation of the gospel through the regions to the east. It was long a stronghold of the Master’s teachings and stood alone in this region as a center of Christian learning for centuries. 바로 이 회당이 나중에 기독교 교회가 되었고 그 지역을 통해 동쪽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본부였습니다. 그곳은 오랫동안 주(主)의 가르침의 본거지였고, 이 지역에서 수 세기 동안 독보적인 기독교 학습의 중심지였습니다.

166:5.3 (1831.6) The Jews at Jerusalem had always had trouble with the Jews of Philadelphia. And after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the Jerusalem church, of which James the Lord’s brother was head, began to have serious difficulties with the Philadelphia congregation of believers. Abner became the head of the Philadelphia church, continuing as such until his death. And this estrangement with Jerusalem explains why nothing is heard of Abner and his work in the Gospel records of the New Testament. This feud between Jerusalem and Philadelphia lasted throughout the lifetimes of James and Abner and continued for some time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Philadelphia was really the headquarters of the early church in the south and east as Antioch was in the north and west.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필라델피아의 유대인들과 언제나 시끄러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수장이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필라델피아 신자들 회중과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수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머물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런 반목(反目)이 신약성서의 복음서 기록에서 아브너와 그의 사역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루살렘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이런 불화는 야고보와 아브너의 일생 내내 이어졌고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얼마간 계속되었습니다. 안디옥이 북쪽과 서쪽에서 초기 교회의 본부였듯이, 필라델피아는 남쪽과 동쪽에서 초기 교회의 실제 본부였습니다.

166:5.4 (1831.7) It was the apparent misfortune of Abner to be at variance with all of the leaders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He fell out with Peter and James (Jesus’ brother) over questions of administration and the jurisdiction of the Jerusalem church; he parted company with Paul over differences of philosophy and theology. Abner was more Babylonian than Hellenic in his philosophy, and he stubbornly resisted all attempts of Paul to remake the teachings of Jesus so as to present less that was objectionable, first to the Jews, then to the Greco-Roman believers in the mysteries. 아브너가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든 지도자와 불화를 겪은 것은 명백히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경영과 관할권 문제로 베드로 및 야고보(예수의 형제)와 사이가 틀어졌고, 그는 철학과 신학의 차이로 바울과 뜻을 달리했습니다. 아브너는 그리스 철학보다 바빌로니아 철학에 더 가까웠고, 그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나중에 신비를 믿는 그리스·로마의 신자들에게 불쾌한 것을 덜 제시하려고 예수의 가르침을 개조하려는 바울의 모든 시도에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166:5.5 (1832.1) Thus was Abner compelled to live a life of isolation. He was head of a church which was without standing at Jerusalem. He had dared to defy James the Lord’s brother, who was subsequently supported by Peter. Such conduct effectively separated him from all his former associates. Then he dared to withstand Paul. Although he was wholly sympathetic with Paul in his mission to the gentiles, and though he supported him in his contentions with the church at Jerusalem, he bitterly opposed the version of Jesus’ teachings which Paul elected to preach. In his last years Abner denounced Paul as the “clever corrupter of the life teachings of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the living God.” 이렇게 아브너는 고립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신분이 없는 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베드로가 지지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게 감히 도전했습니다. 그는 그런 행위로 자기의 이전 동료들로부터 실제로 헤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대담하게 바울에게 저항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완전히 공감했고,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지지했지만, 그는 바울이 전하려고 뽑아낸 예수 가르침의 변형을 몹시 반대했습니다. 말년에 아브너는 바울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삶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부패시킨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166:5.6 (1832.2) During the later years of Abner and for some time thereafter, the believers at Philadelphia held more strictly to the religion of Jesus, as he lived and taught, than any other group on earth. 아브너의 말년과 그 후 얼마간, 필라델피아의 신자들은 예수께서 살고 가르쳤던 대로 지상에 있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예수의 종교를 훨씬 더 순전하게 고수했습니다.

166:5.7 (1832.3) Abner lived to be 89 years old, dying at Philadelphia on the 21st day of November, A.D. 74. And to the very end he was a faithful believer in, and teacher of, the gospel of the heavenly kingdom. 아브너는 89세까지 살다가 AD74년 11월 21일에 필라델피아에서 별세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충실하게 믿는 신자이며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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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7 The Visit to Philadelphia 필라델피아 방문

Paper 167

The Visit to Philadelphia 필라델피아 방문

1. Breakfast with the Pharisees 바리새인들과 아침식사
Healing the believer 믿는 자의 치유
“…sit not down in the chief seat…”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2. Parable of the Great Supper 만찬의 비유
3. The Woman with the Spirit of Infirmity 허약한 기질의 여인
4. The Message from Bethany 베다니에서 온 메시지
5. On the Way to Bethany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바리새인과 세리(稅吏)
Teaching about marriage 결혼에 대한 가르침
6. Blessing the Little Children 어린이들을 축복함
Beauty as an influence to worship 경배하는 영향력으로서 아름다움
7. The Talk About Angels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

230611 길교회의 미래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7:0.1 (1833.1) THROUGHOUT this period of the Perean ministry, when mention is made of Jesus and the apostles visiting the various localities where the seventy were at work, it should be recalled that, as a rule, only ten were with him since it was the practice to leave at least two of the apostles at Pella to instruct the multitude. As Jesus prepared to go on to Philadelphia, Simon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returned to the Pella encampment to teach the crowds there assembled. When the Master left the camp at Pella to visit about Perea, it was not uncommon for from three to five hundred of the campers to follow him. When he arrived at Philadelphia, he was accompanied by over six hundred followers. 이런 페레아 사역 기간 내내, 70인이 활동하는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예수와 사도들을 언급할 때, 적어도 사도 중 두 명은 펠라에 남겨서 군중을 가르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10명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필라델피아로 갈 준비를 하자,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 안드레는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 거기에 모인 군중을 가르쳤습니다. 주(主)께서 펠라 야영지를 떠나 페레아 인근을 방문할 때, 보통 300명에서 500명의 야영자들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가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600명이 넘는 추종자들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167:0.2 (1833.2) No miracles had attended the recent preaching tour through the Decapolis, and, excepting the cleansing of the ten lepers, thus far there had been no miracles on this Perean mission. This was a period when the gospel was proclaimed with power, without miracles, and most of the time without the personal presence of Jesus or even of his apostles. 최근에 데카폴리스 여러 곳의 전도 여행에는 기적이 없었고, 10명의 나환자가 깨끗해진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이 페레아 선교에 기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기적 없이, 대부분 시간에 예수님이나 그 사도들조차 친히 그 자리에 없는 가운데 복음이 권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167:0.3 (1833.3) Jesus and the ten apostles arrived at Philadelphia on Wednesday, February 22, and spent Thursday and Friday resting from their recent travels and labors. That Friday night James spoke in the synagogue, and a general council was called for the following evening. They were much rejoiced over the progress of the gospel at Philadelphia and among the near-by villages. The messengers of David also brought word of the further advancement of the kingdom throughout Palestine, as well as good news from Alexandria and Damascus. 예수와 열 명의 사도는 (AD30년) 2월 22일 수요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최근의 여행과 수고로 지친 몸을 쉬면서 목요일과 금요일을 보냈습니다. 그 금요일 밤에 야고보가 회당에서 설교했고, 다음 날 저녁에 총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와 바로 이웃 마을에서 복음이 진행되는 상태를 매우 기뻐했습니다. 다윗의 메신저들도 알렉산드리아와 다마스쿠스에서 들려온 좋은 소식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하느님 나라가 더욱 촉진된다는 소식도 가져왔습니다.

1. Breakfast with the Pharisees 바리새인들과 아침식사

230618 복 받는 비결 눅14:1-14a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167:1.1 (1833.4) There lived in Philadelphia a very wealthy and influential Pharisee who had accepted the teachings of Abner, and who invited Jesus to his house Sabbath morning for breakfast. It was known that Jesus was expected in Philadelphia at this time; so a large number of visitors, among them many Pharisees, had come over from Jerusalem and from elsewhere. Accordingly, about forty of these leading men and a few lawyers were bidden to this breakfast, which had been arranged in honor of the Master. 필라델피아에 아브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아주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 살았는데, 그가 안식일 아침에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눅14:1a). 이때 예수께서 필라델피아에 오기로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방문자 중에 여러 바리새인이 예루살렘과 다른 지역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력자 중 약 40명과 율법사 몇 명이 주님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 조찬에 초대되었습니다.

167:1.2 (1833.5) As Jesus lingered by the door, speaking with Abner, and after the host had seated himself, there came into the room one of the leading Pharisees of Jerusalem, a member of the Sanhedrin, and as was his habit, he made straight for the seat of honor at the left of the host. But since this place had been reserved for the Master and that on the right for Abner, the host beckoned the Jerusalem Pharisee to sit four seats to the left, and this dignitary was much offended because he did not receive the seat of honor. 예수께서 아브너와 이야기하면서 문 옆에 머무셨고, 집주인이 앉은 후 예루살렘의 유력한 바리새인 중 한 사람, 산헤드린의 회원이 방으로 들어와 자기 습관대로 집주인의 왼쪽 주빈(主賓)석으로 바로 갔습니다(눅14:7a). 그러나 이 자리는 주님을 위해, 오른쪽 자리는 아브너를 위해 예약되어 있어서, 집주인이 예루살렘 바리새인에게 네 자리 왼쪽에 앉도록 손짓하자, 이 고위 성직자는 주빈석을 받지 못해서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167:1.3 (1834.1) Soon they were all seated and enjoying the visiting among themselves since the majority of those present were disciples of Jesus or else were friendly to the gospel. Only his enemies took notice of the fact that he did not observe the ceremonial washing of his hands before he sat down to eat. Abner washed his hands at the beginning of the meal but not during the serving. 그렇게 참석한 대부분은 예수의 제자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복음에 우호적이어서 그들은 곧 모두 앉아서 서로 방문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대적들만이 그가 식사 자리에 앉기 전에 손 씻는 예식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주목했습니다(눅14:1b). 아브너는 식사를 시작할 때 손을 씻었으나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는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167:1.4 (1834.2) Near the end of the meal there came in from the street a man long afflicted with a chronic disease and now in a dropsical condition. This man was a believer, having recently been baptized by Abner’s associates. He made no request of Jesus for healing, but the Master knew full well that this afflicted man came to this breakfast hoping thereby to escape the crowds which thronged him and thus be more likely to engage his attention. This man knew that few miracles were then being performed; however, he had reasoned in his heart that his sorry plight might possibly appeal to the Master’s compassion. And he was not mistaken, for, when he entered the room, both Jesus and the self-righteous Pharisee from Jerusalem took notice of him. The Pharisee was not slow to voice his resentment that such a one should be permitted to enter the room. But Jesus looked upon the sick man and smiled so benignly that he drew near and sat down upon the floor. As the meal was ending, the Master looked over his fellow guests and then, after glancing significantly at the man with dropsy, said: “My friends, teachers in Israel and learned lawyers, I would like to ask you a question: Is it lawful to heal the sick and afflicted on the Sabbath day, or not?” But those who were there present knew Jesus too well; they held their peace; they answered not his question. 식사를 마칠 무렵, 오랫동안 만성병을 앓다가 지금은 수종(水腫 부종, 체액의 유출로 붓는) 상태인 한 사람이 거리에서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최근에 아브너의 동료들에게 세례를 받은 믿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앓고 있는 이 사람이 예수에게 모여드는 군중을 피해서 주님의 관심을 더 끌려는 기대로 이 조찬에 왔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에 기적이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고 알았지만, 자신의 딱한 처지가 아마 주님의 연민(憐愍)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자기 심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잘못 생각하지 않은 것은, 그가 방에 들어가자, 예수와 예루살렘의 독선적인 바리새인 모두 그를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 방에 들어오도록 허용한 것에 주저하지 않고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병자를 바라보며, 너무 따스한 미소를 보내서, 그가 다가와 바닥에 앉았습니다. 식사가 끝날 때, 주께서 동료 손님들을 둘러본 다음, 수종에 걸린 사람을 유심히 보신 후 말했습니다. “내 친구들, 이스라엘의 선생과 학식 있는 율법사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질문이 있노라. 안식일에 병으로 앓는 자를 고치는 것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은 잠자코 있으면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눅14:2-4a).

167:1.5 (1834.3) Then went Jesus over to where the sick man sat and, taking him by the hand, said: “Arise and go your way. You have not asked to be healed, but I know the desire of your heart and the faith of your soul.” Before the man left the room, Jesus returned to his seat and, addressing those at the table, said: “Such works my Father does, not to tempt you into the kingdom, but to reveal himself to those who are already in the kingdom. You can perceive that it would be like the Father to do just such things because which one of you, having a favorite animal that fell in the well on the Sabbath day, would not go right out and draw him up?” And since no one would answer him, and inasmuch as his host evidently approved of what was going on, Jesus stood up and spoke to all present: “My brethren, when you are bidden to a marriage feast, sit not down in the chief seat, lest, perchance, a more honored man than you has been invited, and the host will have to come to you and request that you give your place to this other and honored guest. In this event, with shame you will be required to take a lower place at the table. When you are bidden to a feast, it would be the part of wisdom, on arriving at the festive table, to seek for the lowest place and take your seat therein, so that, when the host looks over the guests, he may say to you: ‘My friend, why sit in the seat of the least? come up higher’; and thus will such a one have glory in the presence of his fellow guests. Forget not, every one who exalts himself shall be humbled, while he who truly humbles himself shall be exalted. Therefore, when you entertain at dinner or give a supper, invite not always your friends, your brethren, your kinsmen, or your rich neighbors that they in return may bid you to their feasts, and thus will you be recompensed. When you give a banquet, sometimes bid the poor, the maimed, and the blind. In this way you shall be blessed in your heart, for you well know that the lame and the halt cannot repay you for your loving ministry.” 그다음 예수께서 병자가 앉은 곳으로 가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일어나 네 길을 가라. 네가 치유를 요청하지 않았으나, 나는 네 마음의 소망과 네 혼의 신앙을 알고 있노라.” 그 사람이 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식탁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하는 이런 일은 너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니라. 너희 중 하나가 아끼던 짐승이 안식일에, 우물에 빠지면 바로 나가 그것을 끌어올리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차릴 수 있느니라.” 그에게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집주인이 무슨 일이 있는지 분명히 좋게 생각하자, 예수께서 일어나 참석한 모든 자에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너희가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아마 너희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잔치에 초대받아, 집주인이 너희에게 와서 이렇게 존경받는 다른 손님에게 너희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라. 이런 경우, 너희는 부끄럽게 식탁의 낮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너희가 잔치에 초대받아 잔치 식탁에 이르면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서 거기에 너희 자리를 잡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되리니, 집주인이 손님들을 살펴보고 그가 너희에게 ‘내 친구여, 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가? 더 높이 올라오라.’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그런 사람은 그의 동료 손님들 앞에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 잊지 말지니, 자기를 높이는 자마다 낮아지고 진실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만찬에 초대하거나 저녁 식사를 대접할 때, 언제나 너희 친구, 너희 형제, 너희 친척이나 너희 부유한 이웃을 초대하지 말지니, 그들이 답례로 너희를 그들의 잔치에 초대하여 너희는 보상받게 되리라. 너희가 연회를 베풀 때, 때로는 가난한 자, 장애인과 시각 장애인들을 초대하라. 이렇게 하면 너희는 너희 심정에 복을 받으리니, 장애인과 저는 자들은 너희의 애정 어린 봉사에 너희에게 보답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잘 알기 때문이라(눅14:4b-14a).”

2. Parable of the Great Supper 만찬의 비유

230625 초대장의 의미 눅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7:2.1 (1835.1) As Jesus finished speaking at the breakfast table of the Pharisee, one of the lawyers present, desiring to relieve the silence, thoughtlessly said: “Blessed is he who shall eat bread in the kingdom of God” — that being a common saying of those days. And then Jesus spoke a parable, which even his friendly host was compelled to take to heart. He said: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아침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참석한 율법사 중 하나가 침묵에서 누그러뜨리려고 무심코 “하느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을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당시의 흔히 하는 말을 했습니다(눅14:15).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지지하던 집주인도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없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167:2.2 (1835.2) “A certain ruler gave a great supper, and having bidden many guests, he dispatched his servants at suppertime to say to those who were invited, ‘Come, for everything is now ready.’ And they all with one accord began to make excuses. The first said, ‘I have just bought a farm, and I must needs go to prove it; I pray you have me excused.’ Another said, ‘I have bought five yoke of oxen, and I must go to receive them; I pray you have me excused.’ And another said, ‘I have just married a wife, and therefore I cannot come.’ So the servants went back and reported this to their master. When the master of the house heard this, he was very angry, and turning to his servants, he said: ‘I have made ready this marriage feast; the fatlings are killed, and all is in readiness for my guests, but they have spurned my invitation; they have gone every man after his lands and his merchandise, and they even show disrespect to my servants who bid them come to my feast. Go out quickly, therefore, into the streets and lanes of the city, out into the highways and the byways, and bring hither the poor and the outcast, the blind and the lame, that the marriage feast may have guests.’ And the servants did as their lord commanded, and even then there was room for more guests. Then said the lord to his servants: ‘Go now out into the roads and the countryside and constrain those who are there to come in that my house may be filled. I declare that none of those who were first bidden shall taste of my supper.’ And the servants did as their master commanded, and the house was filled.” “어떤 통치자가 만찬을 베풀고,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때 자기 하인들을 초청한 자들에게 보내서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내가 막 농장을 샀으니 확인하러 가봐야 합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소 다섯 멍에를 샀으니 받으러 가야 합니다. 너그러이 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막 아내를 맞이했으니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런 일을 보고했습니다. 집주인이 이런 일을 듣자, 크게 노하여 자기 하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내가 이 결혼 잔치를 준비하여 살찌운 가축들을 잡고 내 손님들을 위해 모두 준비했으나 그들이 내 초청을 거절했도다. 그들은 각자 자기 땅을 얻으러, 자기 물품을 거래하러 갔고, 내 잔치에 오도록 초청했던 내 하인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는구나. 그러니 빨리 도시의 중심가와 골목길로, 큰길과 샛길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 시각 장애인들과 저는 자들을 여기로 데려와 결혼 잔치에 손님들이 있게 하라.’ 그러자 하인들이 자기 주인의 명령대로 했으나 그때까지도 손님을 위한 자리가 더 있었더라. 그때 주인이 자기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길거리와 시골로 나가서 거기에 있는 자들을 강권(强勸 오지 않을 수 없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내가 선언하노니, 먼저 초대받은 자 중 누구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더니, 집이 가득하더라(눅14:16-24).”

167:2.3 (1835.3) And when they heard these words, they departed; every man went to his own place. At least one of the sneering Pharisees present that morning comprehended the meaning of this parable, for he was baptized that day and made public confession of his faith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bner preached on this parable that night at the general council of believers. 그들은 이런 말을 듣고 떠나 각자 자기 자리로 갔습니다. 적어도 그날 아침에 참석하여 비웃던 바리새인 중 하나가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했는데, 그는 그날 세례를 받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자기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너는 그날 밤 신자들의 총회에서 이 비유로 설교했습니다.

167:2.4 (1835.4) The next day all of the apostles engaged in the philosophic exercise of endeavoring to interpret the meaning of this parable of the great supper. Though Jesus listened with interest to all of these differing interpretations, he steadfastly refused to offer them further help in understanding the parable. He would only say, “Let every man find out the meaning for himself and in his own soul.” 다음날(AD 30, 2. 26 일요일) 모든 사도가 만찬의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애쓰는 철학적 과제에 참여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서로 다른 모든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들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더 이상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자 자신과 자신의 혼(魂)으로 그 의미를 알아내라.”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3. The Woman with the Spirit of Infirmity 허약한 기질의 여인

230702 자유와 생명은 무시로 필요한 것 눅13:10-17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67:3.1 (1835.5) Abner had arranged for the Master to teach in the synagogue on this Sabbath day, the first time Jesus had appeared in a synagogue since they had all been closed to his teachings by order of the Sanhedrin. At the conclusion of the service Jesus looked down before him upon an elderly woman who wore a downcast expression, and who was much bent in form. This woman had long been fear-ridden, and all joy had passed out of her life. As Jesus stepped down from the pulpit, he went over to her and, touching her bowed-over form on the shoulder, said: “Woman, if you would only believe, you could be wholly loosed from your spirit of infirmity.” And this woman, who had been bowed down and bound up by the depressions of fear for more than eighteen years, believed the words of the Master and by faith straightened up immediately. When this woman saw that she had been made straight, she lifted up her voice and glorified God. 아브너는 이 안식일(AD30. 2. 25 토)에 주(主)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도록 준비했는데, 산헤드린의 명령으로 회당에서 그의 가르침을 모두 닫은 이후 예수께서 처음 회당에 나타났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 예수께서 우울(憂鬱)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있는, 몸이 많이 굽은 노년의 여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었고 삶에서 모든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설교단에서 내려오자, 그녀에게 건너가서 그녀의 구부러진 형태의 어깨에 손을 대며 말했습니다. “여인아, 네가 단지 믿고자 하면, 너의 허약한 기질에서 완전히 풀려날 수 있으리라.” 그러자 18년 이상 두려움의 우울증으로 풀이 죽어 묶여 있던 이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으로 즉시 곧게 펴졌습니다. 이 여인은 꼿꼿해진 자신을 보자,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눅13:10-13).

167:3.2 (1836.1) Notwithstanding that this woman’s affliction was wholly mental, her bowed-over form being the result of her depressed mind, the people thought that Jesus had healed a real physical disorder. Although the congregation of the synagogue at Philadelphia was friendly toward the teachings of Jesus,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was an unfriendly Pharisee. And as he shared the opinion of the congregation that Jesus had healed a physical disorder, and being indignant because Jesus had presumed to do such a thing on the Sabbath, he stood up before the congregation and said: “Are there not six days in which men should do all their work? In these working days come, therefore, and be healed, but not on the Sabbath day.” 이 여인의 고통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으로, 그녀의 구부러진 형태는 우울한 마음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육체적 장애를 고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당의 회중은 예수의 가르침을 찬성했지만, 회당장의 대표는 우호적이지 않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육체적 장애를 고쳤다는 회중의 의견을 나누다가 예수께서 감히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분개하여, 회중 앞에 일어서서 그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모두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일하는 날에 와서 고침을 받으라, 그러나 안식일에는 아니라(눅13:14).”

167:3.3 (1836.2) When the unfriendly ruler had thus spoken, Jesus returned to the speaker’s platform and said: “Why play the part of hypocrites? Does not every one of you, on the Sabbath, loose his ox from the stall and lead him forth for watering? If such a service is permissible on the Sabbath day, should not this woman, a daughter of Abraham who has been bound down by evil these eighteen years, be loosed from this bondage and led forth to partake of the waters of liberty and life, even on this Sabbath day?” And as the woman continued to glorify God, his critic was put to shame, and the congregation rejoiced with her that she had been healed. 적개심을 가진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자, 예수께서 연설자의 연단으로 돌아가 말했습니다. “왜 위선자 측의 태도를 취하느냐? 안식일에 너희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소를 풀어 물을 먹이러 끌어내지 않느냐? 안식일에 그런 수고가 허용된다면, 이렇게 18년간 불행하게 묶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이런 안식일에라도 이런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와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이끌려 나와야 하지 않느냐?” 그 여인이 하느님께 계속 영광을 돌리자, 예수님을 혹평하던 자는 면목을 잃었고, 회중은 여인이 치유된 것을 그녀와 함께 기뻐했습니다(눅13:15-17).

167:3.4 (1836.3) As a result of his public criticism of Jesus on this Sabbath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was deposed, and a follower of Jesus was put in his place. 이 안식일에 그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결과로 회당장의 대표는 해임되었고, 예수의 추종자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167:3.5 (1836.4) Jesus frequently delivered such victims of fear from their spirit of infirmity, from their depression of mind, and from their bondage of fear. But the people thought that all such afflictions were either physical disorders or possession of evil spirits. 예수는 종종 그런 두려움의 희생자들을 그들의 허약한 기질에서, 그들의 우울한 마음에서, 그들 두려움의 속박에서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모든 고통은 육체적 장애나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67:3.6 (1836.5) Jesus taught again in the synagogue on Sunday, and many were baptized by Abner at noon on that day in the river which flowed south of the city. On the morrow Jesus and the ten apostles would have started back to the Pella encampment but for the arrival of one of David’s messengers, who brought an urgent message to Jesus from his friends at Bethany, near Jerusalem. 예수께서 일요일(AD30. 2.26)에 다시 회당에서 가르쳤고, 많은 사람이 그날 정오에 도시의 남쪽으로 흐르는 강에서 아브너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예수와 열 명의 사도는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하려 했으나 다윗 메신저 중 하나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있는 그의 친구들로부터 예수께 긴급 메시지를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4. The Message from Bethany 베다니에서 온 메시지

230709 예수 믿는 새 근거를 찾으라 요11:1-16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67:4.1 (1836.6) Very late on Sunday night, February 26, a runner from Bethany arrived at Philadelphia, bringing a message from Martha and Mary which said, “Lord, he whom you love is very sick.” This message reached Jesus at the close of the evening conference and just as he was taking leave of the apostles for the night. At first Jesus made no reply. There occurred one of those strange interludes, a time when he appeared to be in communication with something outside of, and beyond, himself. And then, looking up, he addressed the messenger in the hearing of the apostles, saying: “This sickness is really not to the death. Doubt not that it may be used to glorify God and exalt the Son.” (AD30) 2월 26일 아주 늦은 일요일 밤에 베다니에서 온 전달자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그가 매우 아픕니다.”라고 말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메시지를 가져왔습니다. 이 메시지는 저녁 회의가 끝나서 예수께서 밤에 사도들에게 막 작별하고 있을 때 예수께 전해졌습니다. 예수는 처음에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자기 외부 및 그 너머의 무언가와 대화하듯이 보였던 그런 낯선 막간의 시간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 그는, 올려다보며, 사도들이 듣는 가운데 메신저에게 “이 병은 실제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것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들을 높이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요11:1-4).

167:4.2 (1837.1) Jesus was very fond of Martha, Mary, and their brother, Lazarus; he loved them with a fervent affection. His first and human thought was to go to their assistance at once, but another idea came into his combined mind. He had almost given up hope that the Jewish leaders at Jerusalem would ever accept the kingdom, but he still loved his people, and there now occurred to him a plan whereby the scribes and Pharisees of Jerusalem might have one more chance to accept his teachings; and he decided, his Father willing, to make this last appeal to Jerusalem the most profound and stupendous outward working of his entire earth career. The Jews clung to the idea of a wonder-working deliverer. And though he refused to stoop to the performance of material wonders or to the enactment of temporal exhibitions of political power, he did now ask the Father’s consent for the manifestation of his hitherto unexhibited power over life and death. 예수께서 마르다, 마리아와 그들의 형제 나사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요11:5). 그는 열렬한 애정으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인간적 생각은 즉시 그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었으나, 그의 결합한 마음에 다른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했고,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기회를 한 번 더 가질 수도 있는 계획이 그에게 이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별일이 없다면, 예루살렘에 대한 이 마지막 호소를 자기의 전(全) 지상 생애에서 가장 뜻깊고 엄청난 외적 활동이 되도록 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행하는 구원자의 개념에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질적 이적의 실행이나 정치적 권력을 일시적으로 과시(誇示)해서 보일 정도로 비굴해지지 않았으나, 그는 이제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은 생살권(生殺權 살리고 죽이는 권리)을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의 승낙(承諾)을 구했습니다.

167:4.3 (1837.2) The Jews were in the habit of burying their dead on the day of their demise; this was a necessary practice in such a warm climate. It often happened that they put in the tomb one who was merely comatose, so that on the second or even the third day, such a one would come forth from the tomb. But it was the belief of the Jews that, while the spirit or soul might linger near the body for two or three days, it never tarried after the third day; that decay was well advanced by the fourth day, and that no one ever returned from the tomb after the lapse of such a period. And it was for these reasons that Jesus tarried yet two full days in Philadelphia before he made ready to start for Bethany. 유대인들은 죽은 자들을 죽은 날에 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온난한 기후에서 필요한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혼수상태의 사람을 무덤에 두어서 둘째 날 혹은 셋째 날에도, 그런 사람이 종종 무덤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영(靈)이나 혼(魂)이 이삼일 동안 육체 곁에 서성거리지만, 삼일 이후에 절대로 지체하지 않고, 넷째 날에 부패가 진행되기 쉬워서, 그런 기간이 지난 후 절대로 아무도 무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 베다니로 출발할 준비를 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꼬박 이틀을 (AD30. 2월 28일 화요일까지) 더 머물렀습니다(요11:6).

167:4.4 (1837.3) Accordingly, early on Wednesday morning he said to his apostles: “Let us prepare at once to go into Judea again.” And when the apostles heard their Master say this, they drew off by themselves for a time to take counsel of one another. James assumed the direction of the conference, and they all agreed that it was only folly to allow Jesus to go again into Judea, and they came back as one man and so informed him. Said James: “Master, you were in Jerusalem a few weeks back, and the leaders sought your death, while the people were minded to stone you. At that time you gave these men their chance to receive the truth, and we will not permit you to go again into Judea.” 따라서 수요일 아침 일찍 그가 자기 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즉시 다시 유대로 가기 위해 준비하자.” 사도들은 주님의 이 말을 듣자, 그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물러나 서로 의논했습니다. 야고보가 회의를 통솔했으며,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유대로 들어가도록 놔두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라고 모두 동감하여, 그들은 한 사람처럼 돌아와 그에게 그렇게 알렸습니다.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지난번(장막절) 몇 주간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이려 했고,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162.7.6). 그때 당신께서 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를 주셨으니, 우리는 당신께서 다시 유대로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요11:7-8).”

167:4.5 (1837.4) Then said Jesus: “But do you not understand that there are twelve hours of the day in which work may safely be done? If a man walks in the day, he does not stumble inasmuch as he has light. If a man walks in the night, he is liable to stumble since he is without light. As long as my day lasts, I fear not to enter Judea. I would do one more mighty work for these Jews; I would give them one more chance to believe, even on their own terms — conditions of outward glory and the visible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the Father and the love of the Son. Besides, do you not realize that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and I would go to awake him out of this sleep!” 그러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너희는 하루에 안전하게 일할 수도 있는 시간으로 열두 시간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그가 빛이 있어서, 넘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이 밤에 다니면 그는 빛이 없어서, 넘어지기 쉬우니라. 내 일이 지속되는 한 내가 유대로 들어가기가 두렵지 않도다. 나는 이런 유대인들을 위해 한 번 더 강력한 일을 행할 것이라.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방식으로 – 외적 영광의 현상과 아버지의 권능과 아들의 사랑을 눈으로 보기까지, 한 번 더 믿을 기회를 주려고 하노라. 게다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가서 그를 이런 잠에서 깨우려 한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냐(요11:9-11)!”

167:4.6 (1837.5) Then said one of the apostles: “Master, if Lazarus has fallen asleep, then will he the more surely recover.” It was the custom of the Jews at that time to speak of death as a form of sleep, but as the apostles did not understand that Jesus meant that Lazarus had departed from this world, he now said plainly: “Lazarus is dead. And I am glad for your sakes, even if the others are not thereby saved, that I was not there, to the end that you shall now have new cause to believe in me; and by that which you will witness, you should all be strengthened in preparation for that day when I shall take leave of you and go to the Father.” 그러자 사도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더 확실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당시 죽음을 수면의 형태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지만, 나사로가 이 세상을 떴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말한 것을,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그가 이제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다른 이들이 그로 인해 구원받지 못할지라도, 너희가 이제 나를 믿을 새로운 근거를 가지도록, 내가 거기에 없었음을, 너희를 위해 내가 기뻐하노라. 그리고 너희가 눈앞에서 볼 것으로 인해, 내가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갈 그날을 대비하여 너희 모두 힘을 얻어야 하리라(요11:12-15a).”

167:4.7 (1838.1) When they could not persuade him to refrain from going into Judea, and when some of the apostles were loath even to accompany him, Thomas addressed his fellows, saying: “We have told the Master our fears, but he is determined to go to Bethany. I am satisfied it means the end; they will surely kill him, but if that is the Master’s choice, then let us acquit ourselves like men of courage; let us go also that we may die with him.” And it was ever so; in matters requiring deliberate and sustained courage, Thomas was always the mainstay of the twelve apostles. 그들은 그가 유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권유할 수 없었고, 일부 사도는 그와 동행하기조차 싫어하자, 도마가 자기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두려움을 말했으나 그는 베다니에 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끝을 뜻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를 죽일 것이지만, 그것이 주님의 선택이라면 용감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처신합시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을 수 있도록 함께 갑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습니다. 신중하고 지속된 용기가 필요한 문제에서, 도마는 언제나 열두 사도의 중심이었습니다(요11:15b-16).

5. On the Way to Bethany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230716 구원의 조건과 영예로운 결혼 눅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67:5.1 (1838.2) On the way to Judea Jesus was followed by a company of almost fifty of his friends and enemies. At their noon lunchtime, on Wednesday, he talked to his apostles and this group of followers on the “Terms of Salvation,” and at the end of this lesson told the parable of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a tax collector). Said Jesus: “You see, then, that the Father gives salvation to the children of men, and this salvation is a free gift to all who have the faith to receive sonship in the divine family. There is nothing man can do to earn this salvation. Works of self-righteousness cannot buy the favor of God, and much praying in public will not atone for lack of living faith in the heart. Men you may deceive by your outward service, but God looks into your souls. What I am telling you is well illustrated by two men who went into the temple to pray, the one a Pharisee and the other a publican. The Pharisee stood and prayed to himself: ‘O God, I thank you that I am not like the rest of men, extortioners, unlearned, unjust, adulterers, or even like this publican. I fast twice a week; I give tithes of all that I get.’ But the publican, standing afar off, would not so much as lift his eyes to heaven but smote his breast, saying, ‘God be merciful to me a sinner.’ I tell you that the publican went home with God’s approval rather than the Pharisee, for every one who exalts himself shall be humbled, but he who humbles himself shall be exalted.” 유대로 가는 길에 50명 가까운 예수의 친구와 대적들 일행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수요일(AD30. 3.1) 정오 점심시간에 그가 자기 사도들과 이렇게 따르는 무리에게 “구원의 조건”에 대해 말했고, 이 교훈의 끝에 바리새인과 세리(稅吏 세금 징수관)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이 구원은 신적 가족으로 자녀의 신분을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진 모두에게 무료로 주는 선물임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독선적(獨善的 혼자만이 옳다는) 행위로 하느님의 은혜를 살 수 없으며, 공개적인 많은 기도로 심정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이 없는 것을 보태어 채울 수 없느니라. 너희가 외적 봉사로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너희 혼(魂)들의 속을 들여다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성전으로 기도하러 들어간 두 사람, 바리새인 하나와 다른 세리 하나로 잘 설명되느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신에게 기도했느니라. ‘오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 강탈자, 무식한 자, 불의한 자, 간음한 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눈을 하늘로 들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했더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보다 오히려 세리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집으로 갔으니,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질 것이지만, 자신을 낮추는 그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니라(눅18:9-14).”

167:5.2 (1838.3) That night, in Jericho, the unfriendly Pharisees sought to entrap the Master by inducing him to discuss marriage and divorce, as did their fellows one time in Galilee, but Jesus artfully avoided their efforts to bring him into conflict with their laws concerning divorce. As the publican and the Pharisee illustrated good and bad religion, their divorce practices served to contrast the better marriage laws of the Jewish code with the disgraceful laxity of the Pharisaic interpretations of these Mosaic divorce statutes. The Pharisee judged himself by the lowest standard; the publican squared himself by the highest ideal. Devotion, to the Pharisee, was a means of inducing self-righteous inactivity and the assurance of false spiritual security; devotion, to the publican, was a means of stirring up his soul to the realization of the need for repentance, confession, and the acceptance, by faith, of merciful forgiveness. The Pharisee sought justice; the publican sought mercy. The law of the universe is: Ask and you shall receive; seek and you shall find. 그날 밤 여리고에서 적개심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 한때 자기 동료들이 했듯이(147.6.4) 결혼과 이혼에 관해 의논하도록 주님을 꾀어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지만(마19:3, 막10:2), 예수는 이혼에 관한 그들의 율법과 충돌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을 솜씨 좋게 피했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선한 종교와 나쁜 종교의 실례가 되었듯이, 그들의 이혼 관습은 유대 율법의 더 나은 결혼 법규와 이런 모세의 이혼법령에 대해 바리새(형식주의 및 위선)적으로 해석하는 수치스러운 방종을 대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가장 낮은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했고, 세리는 가장 높은 이상(理想)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헌신은 독선적(獨善的 자기 혼자만이 옳다는) 게으름과 거짓된 영적 방심의 확신으로 이끄는 수단이었습니다. 세리에게 헌신은 회개와 고백 및 신앙으로 자비로운 용서를 받아들일 필요를 깨닫도록 자기 혼(魂)을 일으키는 수단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정의를 추구했고 세리는 자비를 추구했습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렇습니다. 구하면 너희가 받을 것이라. 찾으면 너희가 찾을 것이라(마7:7-8, 눅11:9-10).

167:5.3 (1838.4) Though Jesus refused to be drawn into a controversy with the Pharisees concerning divorce, he did proclaim a positive teaching of the highest ideals regarding marriage. He exalted marriage as the most ideal and highest of all human relationships. Likewise, he intimated strong disapproval of the lax and unfair divorce practices of the Jerusalem Jews, who at that time permitted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the most trifling of reasons, such as being a poor cook, a faulty housekeeper, or for no better reason than that he had become enamored of a better-looking woman. 예수는 이혼에 관해 바리새인과 논쟁에 말려들기를 물리쳤지만, 결혼에 관해 최고 이상(理想)의 긍정적 가르침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결혼을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이상(理想)적인 최고로 높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시 요리에 서투르고, 살림을 잘 꾸리지 못한다는 아주 하찮은 이유나 아무 이유 없이 남편이 더 잘생긴 여성에게 반했다고, 남성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도록 허용했던, 예루살렘 유대인의 태만하고 부당한 이혼 관행에 대해 강한 반대를 드러냈습니다.

167:5.4 (1839.1) The Pharisees had even gone so far as to teach that divorce of this easy variety was a special dispensation granted the Jewish people, particularly the Pharisees. And so, while Jesus refused to make pronouncements dealing with marriage and divorce, he did most bitterly denounce these shameful floutings of the marriage relationship and pointed out their injustice to women and children. He never sanctioned any divorce practice which gave man any advantage over woman; the Master countenanced only those teachings which accorded women equality with men.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쉬운 다양한 이혼이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허락된 특별 섭리라고 가르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해 선언하기를 거절했지만, 그는 이렇게 못된 경멸적 태도의 결혼 관계를 가장 통렬히 공격했고 여성과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불법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유리한 어떤 이혼 관행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대등한 입장을 주는 그런 가르침들만 지지했습니다.

167:5.5 (1839.2) Although Jesus did not offer new mandates governing marriage and divorce, he did urge the Jews to live up to their own laws and higher teachings. He constantly appealed to the written Scriptures in his effort to improve their practices along these social lines. While thus upholding the high and ideal concepts of marriage, Jesus skillfully avoided clashing with his questioners about the social practices represented by either their written laws or their much-cherished divorce privileges. 예수께서 결혼과 이혼을 결정하는 새 명령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과 더 높은 가르침들에 이르기까지 살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이런 사회적 방침을 따라 그들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끊임없이 기록된 성서에 호소했습니다. 이렇게 높고 이상적(理想的)인 결혼 개념을 지지하면서, 예수는 그들의 성문법이나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이혼 특권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관행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하는 자들과 충돌하는 것을 능숙하게 피했습니다.

167:5.6 (1839.3) It was very difficult for the apostles to understand the Master’s reluctance to make positive pronouncements relative to scientific,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They did not fully realize that his earth mission was exclusively concerned with revelations of spiritual and religious truths. 사도들은 과학적,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단정적으로 발표하기를 꺼리는 주님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지상 사명이 오로지 영적, 종교적 진리의 계시에 관련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167:5.7 (1839.4) After Jesus had talked about marriage and divorce, later on that evening his apostles privately asked many additional questions, and his answers to these inquiries relieved their minds of many misconceptions. At the conclusion of this conference Jesus said: “Marriage is honorable and is to be desired by all men. The fact that the Son of Man pursues his earth mission alone is in no way a reflection on the desirability of marriage. That I should so work is the Father’s will, but this same Father has directed the creation of male and female, and it is the divine will that men and women should find their highest service and consequent joy in the establishment of homes for the reception and training of children, in the creation of whom these parents become copartners with the Makers of heaven and earth. And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to his wife, and they two shall become as one.” 예수께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씀한 후, 그날 저녁 늦게 그의 사도들이 은밀히 여러 추가 질문을 했고, 이런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여러 그릇된 생각들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런 회의의 마지막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결혼은 영예로운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바랄 것이니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홀로 자기 지상 사명을 추구하는 사실은 결혼의 바람직함에 대한 반영이 절대로 아니니라. 내가 그렇게 일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지만, 바로, 이 아버지는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지시하셨고, 남성들과 여성들이 자녀들을 받아들여 훈련하는 가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최고 봉사와 결과로 일어나는 기쁨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신적 뜻이며 이런 부모들은 그들을 창조하면서 하늘과 땅의 조물주들과 협조자가 되느니라.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에게 연합(충실히 대)하여 그들 둘이 하나로 될 것이라(창2:24, 마19:4-5, 막10:6-8, 엡5:31).”

167:5.8 (1839.5) And in this way Jesus relieved the minds of the apostles of many worries about marriage and cleared up many misunderstandings regarding divorce; at the same time he did much to exalt their ideals of social union and to augment their respect for women and children and for the home. 그리고 이렇게 예수는 결혼에 대해 많이 근심하는 사도들의 마음을 안심시켰고 이혼에 관한 여러 오해를 풀었습니다. 동시에 사회적 연합에 대한 그들의 이상(理想)을 높이고 여성과 자녀들, 가정에 대한 그들의 존중을 증대하려고 많이 진력했습니다.

6. Blessing the Little Children 어린이들을 축복함

230723 경배의 체질로 성장하기 막10: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67:6.1 (1839.6) That evening Jesus’ message regarding marriage and the blessedness of children spread all over Jericho, so that the next morning, long before Jesus and the apostles prepared to leave, even before breakfast time, scores of mothers came to where Jesus lodged, bringing their children in their arms and leading them by their hands, and desired that he bless the little ones. When the apostles went out to view this assemblage of mothers with their children, they endeavored to send them away, but these women refused to depart until the Master laid his hands on their children and blessed them. And when the apostles loudly rebuked these mothers, Jesus, hearing the tumult, came out and indignantly reproved them, saying: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to me;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Verily, verily, I say to you, whosoever receives not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hardly enter therein to grow up to the full stature of spiritual manhood.” 그날 저녁(AD30. 3.1 수) 결혼과 어린이들의 행복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가 온 여리고에 퍼져서, 다음 날 아침, 예수와 사도들이 떠나려고 준비하기 훨씬 이전, 심지어 아침 식사 시간 전에, 수십 명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안고 그들의 손을 이끌며 예수께서 묵은 곳에 와서 그가 그 어린이들을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들이 밖으로 나가 이렇게 모인 어머니와 자녀들을 보고 그들을 내쫓으려 했으나, 이 여성들은 주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기까지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이 어머니들을 큰 소리로 꾸짖자, 소동을 들은 예수께서 나와 성을 내는 기색으로 그들을 나무라며 말했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하고 그들을 금하지 말지니, 하늘나라가 그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도저히 그 안에 들어가 영적으로 완전히 장성한 수준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라(마19:13-14, 막10:13-15, 눅18:15-17).”

167:6.2 (1840.1) And when the Master had spoken to his apostles, he received all of the children, laying his hands on them, while he spoke words of courage and hope to their mothers. 주께서 자기 사도들에게 말한 뒤 곧 모든 어린이를 맞아들이며 그들에게 손을 얹으면서 그 어머니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씀을 했습니다(마19:15, 막10:16).

167:6.3 (1840.2) Jesus often talked to his apostles about the celestial mansions and taught that the advancing children of God must there grow up spiritually as children grow up physically on this world. And so does the sacred oftentimes appear to be the common, as on this day these children and their mothers little realized that the onlooking intelligences of Nebadon beheld the children of Jericho playing with the Creator of a universe. 예수는 자주 천상의 저택들에 대해 자기 사도들에게 말했고,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성장하듯이, 하느님의 진보하는 자녀들은 거기에서 영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관찰하는 네바돈의 지능 존재들이 우주의 창조주와 놀고 있는 여리고의 자녀들을 바라본다고 이날 이런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신성한 것은 자주 평범한 듯합니다.

167:6.4 (1840.3) Woman’s status in Palestine was much improved by Jesus’ teaching; and so it would have been throughout the world if his followers had not departed so far from that which he painstakingly taught them. 팔레스타인에서 여성의 지위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자신들에게 공들여 가르친 데서 그렇게 멀리 떠나지 않았더라면 전 세계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167:6.5 (1840.4) It was also at Jericho, in connection with the discussion of the early religious training of children in habits of divine worship, that Jesus impressed upon his apostles the great value of beauty as an influence leading to the urge to worship, especially with children. The Master by precept and example taught the value of worshiping the Creator in the midst of the natural surroundings of creation. He preferred to commune with the heavenly Father amidst the trees and among the lowly creatures of the natural world. He rejoiced to contemplate the Father through the inspiring spectacle of the starry realms of the Creator Sons. 또한 여리고에서, 신적 경배의 체질로 어린이들을 어릴 적에 종교적으로 훈련하는 논의와 관련하여, 예수는 경배의 충동으로 이끄는 영향력으로써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아름다움의 위대한 가치를 자기 사도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주님은 교훈과 모범을 통해 창조의 자연환경 속에서 창조주를 경배하는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오히려 자연 세계의 초라한 창조물 사이에서 하늘 아버지와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창조자 아들들의 별이 총총한 영역의 감동적 장관을 통해 아버지를 깊이 상세하게 곰곰이 생각하기를 기뻐했습니다.

167:6.6 (1840.5) When it is not possible to worship God in the tabernacles of nature, men should do their best to provide houses of beauty, sanctuaries of appealing simplicity and artistic embellishment, so that the highest of human emotions may be aroused in association with the intellectual approach to spiritual communion with God. Truth, beauty, and holiness are powerful and effective aids to true worship. But spirit communion is not promoted by mere massive ornateness and overmuch embellishment with man’s elaborate and ostentatious art. Beauty is most religious when it is most simple and naturelike. How unfortunate that little children should have their first introduction to concepts of public worship in cold and barren rooms so devoid of the beauty appeal and so empty of all suggestion of good cheer and inspiring holiness! The child should be introduced to worship in nature’s outdoors and later accompany his parents to public houses of religious assembly which are at least as materially attractive and artistically beautiful as the home in which he is daily domiciled. 자연의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과 영적으로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지적 접근과 관련하여 최고의 인간 감정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집, 매력적인 간소(簡素 간략하여 꾸밈이 없음)한 예술적 장식의 경배당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진리,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참된 경배에 강력하게 효과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교한 과시적(誇示的) 예술로 꾸민 거대한 화려함과 너무 많은 장식만으로 영(靈) 친교가 진척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가장 꾸밈없이 자연과 같을 때 가장 종교적입니다. 어린이들이 아름다움의 매력이 그토록 전혀 없고 기분 좋게 감동적인 거룩함의 모든 암시적 낌새가 도무지 없는 차갑고 메마른 방에서 공적 예배의 개념을 그들이 처음 대면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어린이는 자연의 야외에서 경배를 대면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가 매일 거주하는 집처럼 적어도 상당히 매력적이며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종교적 모임의 공적 경배당에 자기 부모와 함께 가야 합니다.

7. The Talk About Angels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

230730 혼(魂)을 안내하는 천사(天使)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167:7.1 (1840.6) As they journeyed up the hills from Jericho to Bethany, Nathaniel walked most of the way by the side of Jesus, and their discussion of children in relation to the kingdom of heaven led indirectly to the consideration of the ministry of angels. Nathaniel finally asked the Master this question: “Seeing that the high priest is a Sadducee, and since the Sadducees do not believe in angels, what shall we teach the people regarding the heavenly ministers?” Then, among other things, Jesus said: 그들이 여리고에서 베다니로 언덕을 오를 때, 나다니엘은 거의 내내 예수 옆에서 걸었고,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논의가 부차적으로 천사의 사역에 대한 항목으로 이어졌습니다(113.1.1,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나다니엘이 결국 주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두개인(人)인 것으로 보아서, 사두개인들은 천사를 믿지 않으니, 우리는 하늘 사역자들에 관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그러자 여러 말 가운데서 예수는 다음의 말도 했습니다.

167:7.2 (1841.1) “The angelic hosts are a separate order of created beings; they are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aterial order of mortal creatures, and they function as a distinct group of universe intelligences. Angels are not of that group of creatures called ‘the Sons of God’ in the Scriptures; neither are they the glorified spirits of mortal men who have gone on to progress through the mansions on high. Angels are a direct creation, and they do not reproduce themselves. The angelic hosts have only a spiritual kinship with the human race. As man progresses in the journey to the Father in Paradise, he does traverse a state of being at one time analogous to the state of the angels, but mortal man never becomes an angel. “천사 무리는 창조된 존재 중 독립된 계층이니라. 그들은 필사 창조물의 물질 계층과 완전히 다르며, 그들은 우주 지능 존재 중 별개의 집단으로 활동하느니라. 천사들은 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들’로 불리는 창조물 집단 소속이 아니라. 그들은 높은 곳의 저택들(요14:2)을 통해 계속 진보한 필사자들의 영화(靈化)된 영(靈)들도 아니니라. 천사들은 직접 창조되며 그들은 스스로 생식하지 않느니라. 천사 무리는 인류와 영적(靈的) 유사성(類似性)만 있느니라. 사람이 천국의 아버지를 향한 여정으로 전진할 때, 그는 한때 천사의 상태와 유사(類似)한 존재 상태로 횡단(橫斷)하지만, 필사 사람은 절대로 천사가 되지 않느니라.

167:7.3 (1841.2) “The angels never die, as man does. The angels are immortal unless, perchance, they become involved in sin as did some of them with the deceptions of Lucifer. The angels are the spirit servants in heaven, and they are neither all-wise nor all-powerful. But all of the loyal angels are truly pure and holy. “천사들은 결코, 사람처럼 죽지 않느니라. 천사 중 일부가 루시퍼의 속임수에 휩쓸렸듯이 어쩌다 죄에 말려들지 않는 한, 그들은 불멸이니라. 천사들은 하늘의 영(靈) 봉사자들이며, 그들은 모든 점에서 현명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으니라. 그러나 모든 충성스러운 천사들은 참으로 순전(純全)하고 거룩하니라.

167:7.4 (1841.3) “And do you not remember that I said to you once before that, if you had your spiritual eyes anointed, you would then see the heavens opened and behol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It is by the ministry of the angels that one world may be kept in touch with other worlds, for have I not repeatedly told you that I have other sheep not of this fold? And these angels are not the spies of the spirit world who watch upon you and then go forth to tell the Father the thoughts of your heart and to report on the deeds of the flesh. The Father has no need of such service inasmuch as his own spirit lives within you. But these angelic spirits do function to keep one part of the heavenly creation informed concerning the doings of other and remote parts of the universe. And many of the angels, while functioning in the government of the Father and the universes of the Sons, are assigned to the service of the human races. When I taught you that many of these seraphim are ministering spirits, I spoke not in figurative language nor in poetic strains. And all this is true, regardless of your difficulty in comprehending such matters. 너희 영적 눈이 기름 부음을 받으면 하늘이 열려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라고 내가 전에 한번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느냐(요1:51)? 천사들의 사역으로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접촉을 유지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이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나에게 있다(165.2.9, 요10:16)고 내가 너희에게 두고두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이런 천사들은 너희를 감시한 다음 너희 심정의 생각을 아버지께 말하고 육체의 행위를 보고하도록 나간 영(靈) 세계의 첩자(諜者)들이 아니라. 아버지는 너희 안에 그 자신의 영(靈)이 살고 계시므로(겔37:14, 마10:20, 고전3:16, 요일3:24, 4:13) 그런 봉사가 필요 없으시니라. 그러나 이런 천사 영(靈)들은 하늘 창조계의 한 부분에게 우주의 다른 먼 부분의 행위에 관해 계속 알려주기 위해 활동하느니라. 그리고 여러 천사는 아버지의 정부(政府)와 아들들의 우주에서 활동하면서, 인류에게 봉사하도록 배정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런 세라핌들은 사역하는 영(靈)들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쳤을 때(히1:14), 나는 비유적 언어나 시적 가락으로 말하지 않았느니라. 너희가 그런 문제를 이해하기에 어렵더라도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니라.

167:7.5 (1841.4) “Many of these angels are engaged in the work of saving men, for have I not told you of the seraphic joy when one soul elects to forsake sin and begin the search for God? I did even tell you of the joy in the presence of the angels of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ereby indicating the existence of other and higher orders of celestial beings who are likewise concerned in the spiritual welfare and with the divine progress of mortal man. 이런 천사 중 여럿이 사람을 구원하는 과업에 관여하는데, 그래서 한 혼(魂)이 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을 찾기 시작할 때 천사의 기쁨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더냐? 내가 회개하는 한 죄인에 대한 하늘 천사들의 기쁨에 대해 심지어 너희에게 말해서 필사 인간의 영적 행복과 신적 진보에 똑같이 관여하는 다른, 더 높은 천상 존재 계층의 존재를 가리켰느니라(눅15:10).

167:7.6 (1841.5) “Also are these angels very much concerned with the means whereby man’s spirit is released from the tabernacles of the flesh and his soul escorted to the mansions in heaven. Angels are the sure and heavenly guides of the soul of man during that uncharted and indefinite period of time which intervenes between the death of the flesh and the new life in the spirit abodes.” “또한 이런 천사들은 사람의 영(靈)이 육체(육신의 장막)에서 벗어나 그의 혼(魂)을 하늘의 저택들로 호송하는 수단과 굉장히 관련되어 있느니라. 천사들은 육신의 죽음과 영(靈) 거처의 새 생명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애매한 기간에 사람 혼(魂)에 대한 확실한 하늘의 안내자들이니라.”

167:7.7 (1841.6) And he would have spoken further with Nathaniel regarding the ministry of angels, but he was interrupted by the approach of Martha, who had been informed that the Master was drawing near to Bethany by friends who had observed him ascending the hills to the east. And she now hastened to greet him. 그리고 그는 나다니엘과 천사들의 사역에 관해 더 이야기하려 했으나, 동쪽에 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을 알아본 친구들로부터 그가 베다니로 다가온다고 들었던 마르다가 접근하자 그는 중간에 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서둘러 그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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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8 The Resurrection of Lazarus 나사로의 부활

Paper 168

The Resurrection of Lazarus 나사로의 부활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부활이요 생활이라(요11:25)…”
1. At the Tomb of Lazarus 나사로의 무덤에서
2. The Resurrection of Lazarus 나사로의 부활
3. Meeting of the Sanhedrin 산헤드린 모임
“It is better that one man die…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으니라…”
4. The Answer to Prayer 기도에 대한 응답
5. What Became of Lazarus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230806 나사로 부활의 서막 요11:17-33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168:0.1 (1842.1) IT WAS shortly after noon when Martha started out to meet Jesus as he came over the brow of the hill near Bethany. Her brother, Lazarus, had been dead four days and had been laid away in their private tomb at the far end of the garden late on Sunday afternoon. The stone at the entrance of the tomb had been rolled in place on the morning of this day, Thursday. 마르다가 베다니 근처 언덕마루를 넘어오신 예수님을 만나러 나섰을 때는 정오(AD30. 3.2. 목) 직후였습니다(요11:20a). 그녀의 남동생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요11:17) 일요일(AD30. 2.26) 오후 늦게 정원 맨 끝에 있는 개인 무덤에 안장(安葬)되었습니다. 목요일 오늘 아침에 무덤 입구의 돌을 제자리로 굴렸습니다.

168:0.2 (1842.2) When Martha and Mary sent word to Jesus concerning Lazarus’s illness, they were confident the Master would do something about it. They knew that their brother was desperately sick, and though they hardly dared hope that Jesus would leave his work of teaching and preaching to come to their assistance, they had such confidence in his power to heal disease that they thought he would just speak the curative words, and Lazarus would immediately be made whole. And when Lazarus died a few hours after the messenger left Bethany for Philadelphia, they reasoned that it was because the Master did not learn of their brother’s illness until it was too late, until he had already been dead for several hours.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나사로가 발병(發病)했다고 전했을 때, 그들은 주께서 그것에 관해 뭔가를 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가 지독히 병들었음을 알았고, 예수께서 가르치고 전하는 그의 사역을 놔두고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을 감히 바라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가 치료의 말씀만 하셔도 나사로가 즉시 건강해지리라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질병을 치유하는 그의 권능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신저가 필라델피아를 향해 베다니를 떠난 지 몇 시간 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너무 늦게,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께서 자기 형제의 발병(發病)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판단했습니다.

168:0.3 (1842.3) But they, with all of their believing friends, were greatly puzzled by the message which the runner brought back Tuesday forenoon when he reached Bethany. The messenger insisted that he heard Jesus say, “…this sickness is really not to the death.” Neither could they understand why he sent no word to them nor otherwise proffered assistance. 그러나 전달자가 돌아와 베다니에 도착한 화요일 오전에 가져온 메시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믿는 모든 친구와 함께, 아주 당황(唐惶)했습니다. 메신저는 “… 이 병은 정말 죽는 병이 아니라(요11:4a).”라고 예수가 말하는 것을 자기가 들었다고 우겼습니다. 그들은 그가 왜 자신들에게 아무 말도 보내지 않고, 다른 도움도 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68:0.4 (1842.4) Many friends from near-by hamlets and others from Jerusalem came over to comfort the sorrow-stricken sisters. Lazarus and his sisters were the children of a well-to-do and honorable Jew, one who had been the leading resident of the little village of Bethany. And notwithstanding that all three had long been ardent followers of Jesus, they were highly respected by all who knew them. They had inherited extensive vineyards and olive orchards in this vicinity, and that they were wealthy was further attested by the fact that they could afford a private burial tomb on their own premises. Both of their parents had already been laid away in this tomb. 근처 작은 마을들의 여러 친구와 예루살렘의 다른 이들이 슬픔에 잠긴 자매들을 위로하려고 들렀습니다(요11:18-19).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은 작은 마을 베다니를 이끌며 살았던, 부유하고 훌륭한 유대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세 명 다 오랫동안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들이었지만 그들을 아는 모두가 그들을 아주 존경했습니다. 그들은 이 근처의 광대한 포도원과 올리브 과수원을 물려받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들 소유의 토지에 개인 무덤을 가질 여유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부유한 증거였습니다. 그들의 부모 둘 다 이미 이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168:0.5 (1842.5) Mary had given up the thought of Jesus’ coming and was abandoned to her grief, but Martha clung to the hope that Jesus would come, even up to the time on that very morning when they rolled the stone in front of the tomb and sealed the entrance. Even then she instructed a neighbor lad to keep watch down the Jericho road from the brow of the hill to the east of Bethany; and it was this lad who brought tidings to Martha that Jesus and his friends were approaching. 마리아는 예수가 오리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 슬픔에 빠졌지만, 마르다는 자신들이 무덤 앞의 돌을 굴려 입구를 봉쇄한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예수가 오리라는 기대에 매달렸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이웃 소년에게 지시하여 베다니 동쪽의 언덕마루에서 여리고 길 아래로 망을 보게 하였습니다. 이 소년이 마르다에게 예수와 그 친구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168:0.6 (1842.6) When Martha met Jesus, she fell at his feet, exclaiming, “Master,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Many fears were passing through Martha’s mind, but she gave expression to no doubt, nor did she venture to criticize or question the Master’s conduct as related to Lazarus’s death. When she had spoken, Jesus reached down and, lifting her upon her feet, said, “Only have faith, Martha, and your brother shall rise again.” Then answered Martha: “I know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of the last day; and even now I believe that whatever you shall ask of God, our Father will give you.” 마르다가 예수를 만나자, 그녀는 그의 발밑에 엎드려 외쳤습니다. “주여, 당신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마음에 여러 불안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의심을 표현하지 않았고,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된 주님의 조처를 감히 트집 잡지도 문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예수께서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마르다야, 신앙만 가지라, 너의 형제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아날 줄 압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든지, 우리 아버지가 당신에게 주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요11:20-24).”

168:0.7 (1843.1) Then said Jesus, looking straight into the eyes of Martha: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though he dies, yet shall he live. In truth, whos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really die. Martha, do you believe this?” And Martha answered the Master: “Yes, I have long believed that you are the Deliverer, the Son of the living God, even he who should come to this world.” 그러자 예수께서 마르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시며 말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사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결코 정말로 죽지 않으리라. 마르다야,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당신이 구원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에 오셔야 할 분인 것도 오랫동안 믿었습니다(요11:25-27).”

168:0.8 (1843.2) Jesus having inquired for Mary, Martha went at once into the house and, whispering to her sister, said, “The Master is here and has asked for you.” And when Mary heard this, she rose up quickly and hastened out to meet Jesus, who still tarried at the place, some distance from the house, where Martha had first met him. The friends who were with Mary, seeking to comfort her, when they saw that she rose up quickly and went out, followed her, supposing that she was going to the tomb to weep. 예수께서 마리아의 안부를 묻자, 마르다가 즉시 집으로 들어가, 여동생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주가 여기에 계셔서 너를 찾으신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서둘러 예수를 만나러 나갔는데, 그는 마르다가 그를 처음 만났던 곳,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직 그대로 계셨습니다. 마리아를 위로하려고 그녀와 함께 있던 친구들은 그녀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울려고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그녀를 따라갔습니다(요11:28-31).

168:0.9 (1843.3) Many of those present were Jesus’ bitter enemies. That is why Martha had come out to meet him alone, and also why she went in secretly to inform Mary that he had asked for her. Martha, while craving to see Jesus, desired to avoid any possible unpleasantness which might be caused by his coming suddenly into the midst of a large group of his Jerusalem enemies. It had been Martha’s intention to remain in the house with their friends while Mary went to greet Jesus, but in this she failed, for they all followed Mary and so found themselves unexpectedly in the presence of the Master. 그 자리에 있던 여럿은 예수의 신랄한 대적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르다는 그를 만나러 홀로 나왔고, 또한 그가 마리아를 찾는다고 그녀에게 은밀히 알리려고 갔으며, 마르다는 예수가 보고 싶었지만, 그의 대적들인 예루살렘의 큰 무리 가운데 그가 갑자기 와서 생길 수도 있는 가능한 어떤 다툼도 피하려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인사하러 가는 동안 마르다는 친구들과 집에 남아 있을 작정이었지만, 그들 모두 마리아를 따라가서 뜻밖에 주님 앞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못했습니다.

168:0.10 (1843.4) Martha led Mary to Jesus, and when she saw him, she fell at his feet, exclaiming, “If you had only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And when Jesus saw how they all grieved over the death of Lazarus, his soul was moved with compassion. 마르다는 마리아를 예수께 이끌었고, 그녀가 그를 보자, 그녀는 그의 발밑에 엎드려 외쳤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계시기만 했어도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모두 나사로의 죽음으로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 보시고, 그의 혼(魂)에 연민(憐愍)이 일어났습니다(요11:32-33).

168:0.11 (1843.5) When the mourners saw that Mary had gone to greet Jesus, they withdrew for a short distance while both Martha and Mary talked with the Master and received further words of comfort and exhortation to maintain strong faith in the Father and complete resignation to the divine will. 마리아가 예수께 인사하러 가는 것을 본 조문객(弔問客)들은 마르다와 마리아 둘 다 주님과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신적 뜻을 완벽히 따르도록 유지하라는 위로와 권고의 말씀을 더 받아들이는 동안 조금 떨어진 거리로 물러났습니다.

168:0.12 (1843.6) The human mind of Jesus was mightily moved by the contention between his love for Lazarus and the bereaved sisters and his disdain and contempt for the outward show of affection manifested by some of these unbelieving and murderously intentioned Jews. Jesus indignantly resented the show of forced and outward mourning for Lazarus by some of these professed friends inasmuch as such false sorrow was associated in their hearts with so much bitter enmity toward himself. Some of these Jews, however, were sincere in their mourning, for they were real friends of the family. 예수의 인간 마음은 나사로와 자매 유족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렇게 믿으려 하지 않고 살인할 작정인 일부 유대인이 겉으로 드러낸 애정 과시에 대한 그의 경멸과 모욕 사이의 다툼으로 크게 움직였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자칭 친구들 가운데 일부가 나사로를 위해 억지로 외적으로 애도하는 모습에 분연히 분개(憤慨)했는데, 그런 거짓 슬픔이 자신을 향해 그토록 심하게 신랄히 증오하는 그들의 심정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대인 중 일부는 가족의 진정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심으로 애도(哀悼)했습니다.

1. At the Tomb of Lazarus 나사로의 무덤에서

230827 나사로의 무덤에서1 요11:34-37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68:1.1 (1843.7) After Jesus had spent a few moments in comforting Martha and Mary, apart from the mourners, he asked them, “Where have you laid him?” Then Martha said, “Come and see.” And as the Master followed on in silence with the two sorrowing sisters, he wept. When the friendly Jews who followed after them saw his tears, one of them said: “Behold how he loved him. Could not he who opened the eyes of the blind have kept this man from dying?” By this time they were standing before the family tomb, a small natural cave, or declivity, in the ledge of rock which rose up some thirty feet at the far end of the garden plot. 예수께서 조문객(弔問客)들과 떨어져 마르다와 마리아를 잠시 위로한 후, “그를 어디에 눕혔느냐?”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슬퍼하는 두 자매를 말없이 따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을 뒤따르던 호의적인 유대인들이 그의 눈물을 보고 그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라. 시각 장애인의 눈을 여신 그가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을까?” 이 무렵 그들은 정원 터의 맨 끝에서 약 30피트(9.1미터)로 솟아오른 바위 턱 내리막 경사의 작은 자연 동굴, 바로 가족무덤 앞에 서 있었습니다(요11:34-37).

168:1.2 (1844.1) It is difficult to explain to human minds just why Jesus wept. While we have access to the registration of the combined human emotions and divine thoughts, as of record in the mind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we are not altogether certain about the real cause of these emotional manifestations. We are inclined to believe that Jesus wept because of a number of thoughts and feelings which were going through his mind at this time, such as: 예수가 대체 왜 우셨는지 인간의 마음에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격(고유성)화 조율자의 마음에 기록된 대로, 결합하여 기재(記載)된 인간의 감정과 신적 생각에 접근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감정적 표현의 실제 원인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런 때에 그의 마음에 지나가는 다음과 같은 여러 생각과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168:1.3 (1844.2) 1. He felt a genuine and sorrowful sympathy for Martha and Mary; he had a real and deep human affection for these sisters who had lost their brother.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진심으로 슬픔에 공감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를 잃은 이 자매들에게 진실로 깊은 인간적 애정을 지녔습니다.

168:1.4 (1844.3) 2. He was perturbed in his mind by the presence of the crowd of mourners, some sincere and some merely pretenders. He always resented these outward exhibitions of mourning. He knew the sisters loved their brother and had faith in the survival of believers. These conflicting emotions may possibly explain why he groaned as they came near the tomb. 그는 참석한 조문객 무리의 일부는 참되고 일부는 가식에 불과하여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피상적인 애도의 표현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매들이 그들의 형제를 사랑하고 신자들의 생존에 대한 신앙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감정은 어쩌면 그들이 무덤 근처로 갔을 때 그가 슬픔으로 신음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168:1.5 (1844.4) 3. He truly hesitated about bringing Lazarus back to the mortal life. His sisters really needed him, but Jesus regretted having to summon his friend back to experience the bitter persecution which he well knew Lazarus would have to endure as a result of being the subject of the greatest of all demonstrations of the divine power of the Son of Man. 그는 나사로를 지금 살아 있는 세상의 생활로 다시 데려오기를 진실로 주저했습니다. 그의 자매들은 정말로 그가 필요했지만, 예수는 자기 친구를 다시 소환하여 모진 박해에 부닥칠 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는데,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모든 신적 권능 중 최대 실증의 대상이 되는 결과로 나사로가 견뎌야 할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168:1.6 (1844.5) And now we may relate an interesting and instructive fact: Although this narrative unfolds as an apparently natural and normal event in human affairs, it has some very interesting side lights. While the messenger went to Jesus on Sunday, telling him of Lazarus’s illness, and while Jesus sent word that it was “not to the death,” at the same time he went in person up to Bethany and even asked the sisters, “Where have you laid him?” Even though all of this seems to indicate that the Master was proceeding after the manner of this life and in accordance with the limited knowledge of the human mind, nevertheless, the records of the universe reveal that Jesus’ Personalized Adjuster issued orders for the indefinite detention of Lazarus’s Thought Adjuster on the planet subsequent to Lazarus’s death, and that this order was made of record just fifteen minutes before Lazarus breathed his last. 이제 우리는 흥미롭고 도움이 되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사에서 언뜻 보기에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사건으로 전개되지만, 밝혀질 아주 흥미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메신저가 일요일에 예수께 가서 나사로의 질병에 대해 그에게 말했을 때, 예수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라고 기별을 보내는 동시에 베다니에 직접 올라가 자매들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주께서 현세의 방식을 고려하고 제한된 인간 마음의 지식에 따라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듯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나사로가 죽은 후 나사로의 생각 조율자가 행성에 기한 없이 남아 있도록 예수의 인격(고유성)화 조율자가 명령을 내렸고, 나사로가 마지막 숨을 쉬기 바로 15분 전에 이 명령이 기록되었다고 우주의 기록이 알려줍니다.

168:1.7 (1844.6) Did the divine mind of Jesus know, even before Lazarus died, that he would raise him from the dead? We do not know. We know only what we are herewith placing on record. 나사로가 죽기도 전에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되살릴 것을 예수의 신적 마음이 알았는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과 함께 기록으로 밝힌 것만 압니다.

168:1.8 (1844.7) Many of Jesus’ enemies were inclined to sneer at his manifestations of affection, and they said among themselves: “If he thought so much of this man, why did he tarry so long before coming to Bethany? If he is what they claim, why did he not save his dear friend? What is the good of healing strangers in Galilee if he cannot save those whom he loves?” And in many other ways they mocked and made light of the teachings and works of Jesus. 예수의 여러 대적은 그의 애정 표현을 비웃으려는 마음이 일어나 저희끼리 말했습니다. “그가 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생각했다면 그는 베다니에 오기 전에 왜 그렇게 오래 지체했는가? 그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그는 왜 소중한 자기 친구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구할 수 없다면 갈릴리에서 낯선 자들을 치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른 여러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과업을 조롱하고 가볍게 여겼습니다.

168:1.9 (1844.8) And so, on this Thursday afternoon at about half past two o’clock, was the stage all set in this little hamlet of Bethany for the enactment of the greatest of all works connected with the earth ministry of Michael of Nebadon,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divine power during his incarnation in the flesh, since his own resurrection occurred after he had been liberated from the bonds of mortal habitation. 그래서 이 목요일(AD30. 3. 2) 오후 2시 30분쯤, 베다니의 이 작은 마을에서, 네바돈 미가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모든 과업 중 가장 위대한 상연(上演), 자신이 직접 성육신(成肉身)하신 동안에 가장 위대한 신적 권능의 표현을 위한 무대가 모두 마련되었는데, 그 자신의 부활은 필사자 거주지(육신)의 속박에서 해방된 후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68:1.10 (1845.1) The small group assembled before Lazarus’s tomb little realized the presence near at hand of a vast concourse of all orders of celestial beings assembled under the leadership of Gabriel and now in waiting, by direction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Jesus, vibrating with expectancy and ready to execute the bidding of their beloved Sovereign. 나사로의 무덤 앞에 모든 작은 무리는 가브리엘의 지도력 아래 모든 계층의 천상 존재들이 거대한 집단으로 모여서 기대감으로 설레는 가운데, 자신들이 사랑하는 주권자의 명령을 실행할 준비를 갖추고, 이제 예수의 인격(고유성)화 조율자의 지시를 기다리며 가까이에 있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230903 나사로의 무덤에서2 요11:39-41a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168:1.11 (1845.2) When Jesus spoke those words of command, “Take away the stone,”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made ready to enact the drama of the resurrection of Lazarus in the likeness of his mortal flesh. Such a form of resurrection involves difficulties of execution which far transcend the usual technique of the resurrection of mortal creatures in morontia form and requires far more celestial personalities and a far greater organization of universe facilities. 예수께서 그런 명령의 말씀을 내려 “그 돌을 치우라.”고 말하자, 모인 천상의 무리는 나사로가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극적인 사건을 행하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런 부활의 형태는 필사 창조물을 모론시아 형태로 부활시키는 평소의 기법을 훨씬 초월하는 실행의 어려움이 필연적으로 따르며 훨씬 더 많은 천상의 인격(고유성)과 훨씬 더 큰 우주 시설의 조직이 필요합니다(요11:39a).

168:1.12 (1845.3) When Martha and Mary heard this command of Jesus directing that the stone in front of the tomb be rolled away, they were filled with conflicting emotions. Mary hoped that Lazarus was to be raised from the dead, but Martha, while to some extent sharing her sister’s faith, was more exercised by the fear that Lazarus would not be presentable, in his appearance, to Jesus, the apostles, and their friends. Said Martha: “Must we roll away the stone? My brother has now been dead four days, so that by this time decay of the body has begun.” Martha also said this because she was not certain as to why the Master had requested that the stone be removed; she thought maybe Jesus wanted only to take one last look at Lazarus. She was not settled and constant in her attitude. As they hesitated to roll away the stone, Jesus said: “Did I not tell you at the first that this sickness was not to the death? Have I not come to fulfill my promise? And after I came to you, did I not say that, if you would only believe, you should see the glory of God? Wherefore do you doubt? How long before you will believe and obey?” 마르다와 마리아는 무덤 앞의 돌을 치우라고 지시하는 예수님의 이런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은 상반(相反)된 감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기를 기대했지만, 마르다는 여동생의 신앙을 어느 정도 공유하면서도 예수님과 사도들 및 그들의 친구들에게 나사로의 모습이 남 앞에 내놓을만하지 않다는 두려움으로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돌을 치워야만 하나요? 내 동생이 죽은 지 이제 나흘이 지났으니 이때쯤이면 시신이 썩기 시작했나이다.” 마르다 역시 주께서 왜 돌을 옮기라고 했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아마 마지막으로 나사로를 한 번 보기만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안정되게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을 굴려 치우기를 주저하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너희에게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내 약속을 지키러 오지 않았더냐?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온 후, 너희가 믿기만 하면 너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무엇 때문에 너희가 의심하느냐? 너희가 믿고 순종하기 전에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요11:39b-40)?”

168:1.13 (1845.4)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his apostles, with the assistance of willing neighbors, laid hold upon the stone and rolled it away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예수께서 말을 마치자, 그의 사도들이 자원하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돌을 잡고 무덤 입구에서 그것을 굴려 치웠습니다(요11:41a).

168:1.14 (1845.5) It was the common belief of the Jews that the drop of gall on the point of the sword of the angel of death began to work by the end of the third day, so that it was taking full effect on the fourth day. They allowed that the soul of man might linger about the tomb until the end of the third day, seeking to reanimate the dead body; but they firmly believed that such a soul had gone on to the abode of departed spirits ere the fourth day had dawned.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죽음의 천사의 칼끝에서 담즙(膽汁) 방울이 사흘째 끝에 작용하기 시작하여 나흘째에 완전히 효력이 드러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혼(魂)이 사흘째 끝까지 무덤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시신(屍身)을 소생시키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혼(魂)이 넷째 날이 밝기 전에 망령(亡靈)들의 거처로 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168:1.15 (1845.6) These beliefs and opinions regarding the dead and the departure of the spirits of the dead served to make sure, in the minds of all who were now present at Lazarus’s tomb and subsequently to all who might hear of what was about to occur, that this was really and truly a case of the raising of the dead by the personal working of one who declared he wa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죽은 자와 죽은 자의 영(靈)이 떠남에 관한 이런 믿음과 일반적인 생각은 이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는 모두와 그리고 막 일어날 일에 대해 나중에 듣게 되는 모두의 마음에, 이것이 스스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한 본인의 직접적 활동으로 죽은 자가 일어나는 실제의 참된 사건이라고 확신하기에 충분했습니다(요11:25).

2. The Resurrection of Lazarus 나사로의 부활

230910 나사로의 부활 요11:41b-47 41b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68:2.1 (1845.7) As this company of some forty-five mortals stood before the tomb, they could dimly see the form of Lazarus, wrapped in linen bandages, resting on the right lower niche of the burial cave. While these earth creatures stood there in almost breathless silence, a vast host of celestial beings had swung into their places preparatory to answering the signal for action when it should be given by Gabriel, their commander. 45명 정도의 이 필사 일행이 무덤 앞에 서자, 그들은 면 붕대로 싸여 무덤 굴의 우측 아래 벽감(壁龕)에 놓인 나사로의 형체를 희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상 창조물들이 거의 숨을 죽이고 조용히 서 있는 동안, 거대한 무리의 천상 존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 가브리엘이 내릴 행동 신호에 응답할 준비로서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168:2.2 (1846.1) Jesus lifted up his eyes and said: “Father, I am thankful that you heard and granted my request. I know that you always hear me, but because of those who stand here with me, I thus speak with you, that they may believe that you have sent me into the world, and that they may know that you are working with me in that which we are about to do.” And when he had prayed, he cried with a loud voice, “Lazarus, come forth!”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 요청을 들으시고 허락하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언제나 제 말을 들으시는 줄 알지만, 여기에 저와 함께 서 있는 자들 때문에, 제가 당신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이 저를 세상에 보내셨음을 그들이 믿을 수 있고, 우리가 바로 하려는 일에 당신께서 저와 함께 일하고 있음을 그들이 알게 하려함입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1b-43)!”

168:2.3 (1846.2) Though these human observers remained motionless, the vast celestial host was all astir in unified action in obedience to the Creator’s word. In just twelve seconds of earth time the hitherto lifeless form of Lazarus began to move and presently sat up on the edge of the stone shelf whereon it had rested. His body was bound about with grave cloths, and his face was covered with a napkin. And as he stood up before them — alive — Jesus said, “Loose him and let him go.”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광대한 천상의 무리는 모두 창조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단일체로 움직였습니다. 지상의 시간으로 12초 만에 지금까지 죽었던 나사로의 형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놓여 있던 돌 선반 끝에 바로 앉았습니다. 그의 몸은 수의(襚衣)로 싸여 있었고 그 얼굴은 작은 수건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 앞에 살아서 일어나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를 풀어서 놓으라(요11:44).”

168:2.4 (1846.3) All, save the apostles, with Martha and Mary, fled to the house. They were pale with fright and overcome with astonishment. While some tarried, many hastened to their homes. 마르다 및 마리아와 함께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공포로 창백했고 경악에 사로잡혔습니다. 일부는 머물렀지만, 대부분은 각자 집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168:2.5 (1846.4) Lazarus greeted Jesus and the apostles and asked the meaning of the grave cloths and why he had awakened in the garden. Jesus and the apostles drew to one side while Martha told Lazarus of his death, burial, and resurrection. She had to explain to him that he had died on Sunday and was now brought back to life on Thursday, inasmuch as he had had no consciousness of time since falling asleep in death. 나사로가 예수와 사도들에게 인사하며 수의(襚衣)의 의미와 자신이 정원에서 깨어난 이유를 물었습니다. 마르다가 나사로에게 그의 죽음, 매장 및 부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예수와 사도들은 한쪽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그가 죽음으로 잠든 이후 내내 시간 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일요일에 죽었다가 목요일에 바로 다시 살아났음을 그에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168:2.6 (1846.5) As Lazarus came out of the tomb,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Jesus, now chief of his kind in this local universe, gave command to the former Adjuster of Lazarus, now in waiting, to resume abode in the mind and soul of the resurrected man.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 이제 이 지역 우주에서 자기 종류의 수석(首席), 예수의 인격(고유성)화 조율자가 현재 대기 중인 나사로의 이전 조율자에게 부활한 사람의 마음과 혼(魂)에 다시 머물기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68:2.7 (1846.6) Then went Lazarus over to Jesus and, with his sisters, knelt at the Master’s feet to give thanks and offer praise to God. Jesus, taking Lazarus by the hand, lifted him up, saying: “My son, what has happened to you will also be experienced by all who believe this gospel except that they shall be resurrected in a more glorious form. You shall be a living witness of the truth which I spoke —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But let us all now go into the house and partake of nourishment for these physical bodies.” 그러자 나사로는 자기 자매들과 함께 예수께로 가서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면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손으로 잡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이보게, 너에게 일어난 일은,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가 더 영광스러운 형태로 부활할 것만 제외하고, 그들 또한 겪을 것이니라. 너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내가 말한 진리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리라. 그러나 이제 모두 집으로 들어가 이 육신을 위해 함께 식사하자(요11:25).”

168:2.8 (1846.7) As they walked toward the house, Gabriel dismissed the extra groups of the assembled heavenly host while he made record of the first instance on Urantia, and the last, where a mortal creature had been resurrected in the likeness of the physical body of death. 그들이 집을 향해 걸어가자, 가브리엘은 필사 창조물이 죽은 신체의 모습으로 부활한 유란시아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를 기록하면서 모였던 특별 집단의 하늘 무리를 해산시켰습니다.

168:2.9 (1846.8) Lazarus could hardly comprehend what had occurred. He knew he had been very sick, but he could recall only that he had fallen asleep and been awakened. He was never able to tell anything about these four days in the tomb because he was wholly unconscious. Time is nonexistent to those who sleep the sleep of death. 나사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아팠던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에 있었던 이 나흘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잠을 자는 자들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68:2.10 (1846.9) Though many believed in Jesus as a result of this mighty work, others only hardened their hearts the more to reject him. By noon the next day this story had spread over all Jerusalem. Scores of men and women went to Bethany to look upon Lazarus and talk with him, and the alarmed and disconcerted Pharisees hastily called a meeting of the Sanhedrin that they might determine what should be done about these new developments. 많은 사람이 이 기적의 결과로 예수를 믿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의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를 더 배척(排斥)할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정오에 이 이야기가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많은 남녀가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를 보고 그와 이야기했고, 깜짝 놀라 당황한 바리새인들은 이 새로운 사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려고 급하게 산헤드린 모임을 소집했습니다(요11:45-47).

3. Meeting of the Sanhedrin 산헤드린 모임

230917 산헤드린의 반응 요11:47-50, 53-54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168:3.1 (1847.1) Even though the testimony of this man raised from the dead did much to consolidate the faith of the mass of believers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it had little or no influence on the attitude of the religious leaders and rulers at Jerusalem except to hasten their decision to destroy Jesus and stop his work. 죽었다가 살아난 이 사람의 증언이 하느님 나라를 복음을 믿는 수많은 신자(信者)의 신앙이 견고해지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의 태도는 예수를 죽이고 그의 활동을 막으려는 그들의 결정을 재촉한 것 외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168:3.2 (1847.2) At one o’clock the next day, Friday, the Sanhedrin met to deliberate further on the question, “What shall we do with Jesus of Nazareth?” After more than two hours of discussion and acrimonious debate, a certain Pharisee presented a resolution calling for Jesus’ immediate death, proclaiming that he was a menace to all Israel and formally committing the Sanhedrin to the decision of death, without trial and in defiance of all precedent. 다음 날(AD30. 3.3) 금요일 1시에 산헤드린은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더 심의하려고 모였습니다. 2시간이 넘게 토론과 신랄한 논쟁 후,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는 온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이라고 선포하며, 재판도 없이 모든 선결례(先決例)를 무시하고 산헤드린에 사형의 판결을 공식적으로 맡기자면서, 예수의 즉각적 사형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았습니다(요11:47).

168:3.3 (1847.3) Time and again had this august body of Jewish leaders decreed that Jesus be apprehended and brought to trial on charges of blasphemy and numerous other accusations of flouting the Jewish sacred law. They had once before even gone so far as to declare he should die, but this was the first time the Sanhedrin had gone on record as desiring to decree his death in advance of a trial. But this resolution did not come to a vote since fourteen members of the Sanhedrin resigned in a body when such an unheard-of action was proposed. While these resignations were not formally acted upon for almost two weeks, this group of fourteen withdrew from the Sanhedrin on that day, never again to sit in the council. When these resignations were subsequently acted upon, five other members were thrown out because their associates believed they entertained friendly feelings toward Jesus. With the ejection of these nineteen men the Sanhedrin was in a position to try and to condemn Jesus with a solidarity bordering on unanimity. 이렇게 위엄있는 유대 지도자 무리가 예수를 체포하여 신성 모독의 혐의와 유대의 신성한 법을 경멸한 여러 다른 죄명으로 재판에 넘길 것을 누누이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전에도 한번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하기까지 했지만, 산헤드린이 재판에 앞서 그의 죽음을 판결하려 한다는 공적인 표명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의는 그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결정이 제안되자 14명의 산헤드린 회원이 단체로 사임했기 때문에, 표결에 부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임은 거의 두 주간 공적으로 처리되지 않았지만, 그날 산헤드린에서 물러난 14명 집단은 결코 다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임이 나중에 처리되자, 5명의 다른 회원이 예수를 향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고 그들의 동료가 믿는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이들 19명의 회원이 추방되자, 산헤드린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공동 일치로 예수를 재판하고 형을 선고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168:3.4 (1847.4) The following week Lazarus and his sisters were summoned to appear before the Sanhedrin. When their testimony had been heard, no doubt could be entertained that Lazarus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Though the transactions of the Sanhedrin virtually admitted the resurrection of Lazarus, the record carried a resolution attributing this and all other wonders worked by Jesus to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with whom Jesus was declared to be in league. 다음 주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이 산헤드린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을 듣자,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의 보고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사실상 인정했지만, 의사록은, 예수가 행한 이 일과 다른 모든 이적이 악령들 괴수(魁首)의 권세의 소치로 돌리며 예수가 그들과 결탁했다고 선고하면서, 결의안을 실었습니다.

168:3.5 (1847.5) No matter what the source of his wonder-working power, these Jewish leaders were persuaded that, if he were not immediately stopped, very soon all the common people would believe in him; and further, that serious complications with the Roman authorities would arise since so many of his believers regarded him as the Messiah, Israel’s deliverer. 이적(異蹟)을 행하는 그의 권세의 근원이 무엇이든, 그를 즉시 멈추게 하지 않으면, 모든 일반인이 이내 그를 믿을 것이며, 게다가 그를 믿는 대다수가 그를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여기므로 로마 당국과 심각하게 곤란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이런 유대 지도자들이 확신했습니다(요11:48).

168:3.6 (1847.6) It was at this same meeting of the Sanhedrin that Caiaphas the high priest first gave expression to that old Jewish adage, which he so many times repeated: “It is better that one man die, than that the community perish.” 바로 이 산헤드린 모임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옛 유대 격언을 처음 표명했고, 그는 아주 여러 번 되풀이했습니다. “공동체가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으니라(요11:49-50, 18:14).”

168:3.7 (1847.7) Although Jesus had received warning of the doings of the Sanhedrin on this dark Friday afternoon, he was not in the least perturbed and continued resting over the Sabbath with friends in Bethpage, a hamlet near Bethany. Early Sunday morning Jesus and the apostles assembled, by prearrangement, at the home of Lazarus, and taking leave of the Bethany family, they started on their journey back to the Pella encampment. 예수는 이 사악한 금요일 오후에 산헤드린 소행의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으며 친구들과 함께 베다니 근처의 작은 마을 벳바게에서 안식일 내내 계속 쉬었습니다. 일요일(AD30. 3.5)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들은 예정대로, 나사로의 집에 모여 베다니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는 여행을 떠났습니다(요11:53-54).

4. The Answer to Prayer 기도에 대한 응답

230924 기도 응답 마7:7a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168:4.1 (1848.1) On the way from Bethany to Pella the apostles asked Jesus many questions, all of which the Master freely answered except those involving the details of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uch problems were beyond the comprehension capacity of his apostles; therefore did the Master decline to discuss these questions with them. Since they had departed from Bethany in secret, they were alone. Jesus therefore embraced the opportunity to say many things to the ten which he thought would prepare them for the trying days just ahead. 베다니에서 펠라로 가는 도중에 사도들이 예수께 여러 질문을 했고,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그런 세부 사항을 제외하고, 그 모든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사도들의 이해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어서 주님은 사도들과 이런 문제로 이야기하기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남몰래 베다니를 떠났기 때문에, 그들끼리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열 사도에게 눈앞에 닥친 힘든 날을 그들이 대비하도록 자신이 생각했던 여러 가지를 말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168:4.2 (1848.2) The apostles were much stirred up in their minds and spent considerable time discussing their recent experiences as they were related to prayer and its answering. They all recalled Jesus’ statement to the Bethany messenger at Philadelphia, when he said plainly, “This sickness is not really to the death.” And yet, in spite of this promise, Lazarus actually died. All that day, again and again, they reverted to the discussion of this question of the answer to prayer. 사도들의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기도와 그 응답에 관한 최근의 경험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며 토론했습니다. 그들 모두 필라델피아에서 베다니 메신저에게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요11:4).”라고 예수께서 분명히 하신 진술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있었지만,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그들은 기도 응답에 대한 이런 질문에 대해 여러 번 토의했습니다.

168:4.3 (1848.3) Jesus’ answers to their many questions may be summarized as follows: 그들의 여러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68:4.4 (1848.4) 1. Prayer is an expression of the finite mind in an effort to approach the Infinite. The making of a prayer must, therefore, be limited by the knowledge, wisdom, and attributes of the finite; likewise must the answer be conditioned by the vision, aims, ideals, and prerogatives of the Infinite. There never can be observed an unbroken continuity of material phenomena between the making of a prayer and the reception of the full spiritual answer thereto. 기도는 무한자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유한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유한자의 지식, 지혜 및 속성으로 제한됩니다. 똑같이 응답도 무한자의 미래 전망, 목적, 이상(理想) 및 특권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과 그에 대해 충분히 영적으로 응답을 받는 것 사이에 물질 현상의 계속된 연속성은 결코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168:4.5 (1848.5) 2. When a prayer is apparently unanswered, the delay often betokens a better answer, although one which is for some good reason greatly delayed. When Jesus said that Lazarus’s sickness was really not to the death, he had already been dead eleven hours. No sincere prayer is denied an answer except when the superior viewpoint of the spiritual world has devised a better answer, an answer which meets the petition of the spirit of man as contrasted with the prayer of the mere mind of man. 기도가 언뜻 보기에 응답이 되지 않으면, 어떤 타당한 이유로 응답이 많이 늦어져도, 지연(遲延)은 종종 더 나은 응답의 조짐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질병이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AD30. 2. 26 늦은 밤), 그는 이미 죽은 지 11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영적 세계의 우월한 관점으로 고안된 더 나은 응답, 인간의 단순한 마음의 기도와 대조하여 인간 영(靈)의 청원을 충족시키는 응답을 제외하고, 신실한 기도는 거부되지 않습니다.

168:4.6 (1848.6) 3. The prayers of time, when indited by the spirit and expressed in faith, are often so vast and all-encompassing that they can be answered only in eternity; the finite petition is sometimes so fraught with the grasp of the Infinite that the answer must long be postponed to await the creation of adequate capacity for receptivity; the prayer of faith may be so all-embracing that the answer can be received only on Paradise. 영(靈)으로 작성되어 신앙으로 표현된, 시간의 기도들은 자주 너무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함하여서 그것들은 영원에서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유한한 청원은 때때로 무한자의 손길을 잉태하고 있어서 적절한 수용 능력의 창조를 기다리도록 응답이 오래 미뤄져야 합니다. 신앙의 기도는 너무 모든 것을 포함하여서 천국에서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168:4.7 (1848.7) 4. The answers to the prayer of the mortal mind are often of such a nature that they can be received and recognized only after that same praying mind has attained the immortal state. The prayer of the material being can many times be answered only when such an individual has progressed to the spirit level. 필사 마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종종, 바로 그 기도하는 마음이 불멸 상태에 이른 후에만 그것들이 받아들여져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물질 존재의 기도는 그런 개인이 영(靈) 수준으로 진보했을 때만 여러 번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168:4.8 (1848.8) 5. The prayer of a God-knowing person may be so distorted by ignorance and so deformed by superstition that the answer thereto would be highly undesirable. Then must the intervening spirit beings so translate such a prayer that, when the answer arrives, the petitioner wholly fails to recognize it as the answer to his prayer. 하느님을 아는 사람의 기도는 무지로 왜곡되고 미신으로 변형되어서 그에 대한 응답이 아주 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재하는 영(靈) 존재들이 그런 기도를 아주 바꾸어서, 응답이 도착할 때, 청원자가 그것을 자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끝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맙니다.

168:4.9 (1848.9) 6. All true prayers are addressed to spiritual beings, and all such petitions must be answered in spiritual terms, and all such answers must consist in spiritual realities. Spirit beings cannot bestow material answers to the spirit petitions of even material beings. Material beings can pray effectively only when they “pray in the spirit.” 모든 참된 기도는 영적 존재들에게 전해지며, 그런 모든 청원은 영적 관점에서 응답 되어야 하고, 그런 모든 응답은 영적 실체에 있어야 합니다. 영(靈) 존재들은 심지어 물질 존재들의 영(靈) 청원에 대해 물질적 응답을 줄 수 없습니다. 물질 존재들은 “영(靈)으로 기도할” 때만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엡6:18).

168:4.10 (1849.1) 7. No prayer can hope for an answer unless it is born of the spirit and nurtured by faith. Your sincere faith implies that you have in advance virtually granted your prayer hearers the full right to answer your petitions in accordance with that supreme wisdom and that divine love which your faith depicts as always actuating those beings to whom you pray. 기도가 영(靈)으로 태어나 신앙으로 자라지 않으면, 어떤 기도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희 신앙에 의해 너희가 기도하는 그런 존재들을 언제나 행동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최고의 지혜와 신적 사랑에 따라서, 너희 신실한 신앙은, 너희가 사실상 너희 기도를 듣는 자들에게 너희 청원에 충분히 응답할 권리를 미리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68:4.11 (1849.2) 8. The child is always within his rights when he presumes to petition the parent; and the parent is always within his parental obligations to the immature child when his superior wisdom dictates that the answer to the child’s prayer be delayed, modified, segregated, transcended, or postponed to another stage of spiritual ascension. 자녀는 부모에게 요청하려 할 때 언제나 자기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는 언제나 미숙한 자녀에 대해, 자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체, 변경, 분리, 넘어서거나 영적으로 상승하는 다른 단계로 미루도록, 자신의 뛰어난 지혜로 명령할 어버이의 책임이 있습니다.

168:4.12 (1849.3) 9. Do not hesitate to pray the prayers of spirit longing; doubt not that you shall receive the answer to your petitions. These answers will be on deposit, awaiting your achievement of those future spiritual levels of actual cosmic attainment, on this world or on others, whereon it will become possible for you to recognize and appropriate the long-waiting answers to your earlier but ill-timed petitions. 영(靈) 갈망의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청원에 대한 응답을 받을 것을 의심하지 말라. 이런 응답은,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서, 그런 미래의 실제적 질서 우주 도달의 영적 수준에서 너희 성취를 기다리며 예치되어 있을 것이며, 그때, 너희는 오래 기다렸지만 시기를 놓친 너희 초기 청원에 대한 응답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8:4.13 (1849.4) 10. All genuine spirit-born petitions are certain of an answer. Ask and you shall receive. But you should remember that you are progressive creatures of time and space; therefore must you constantly reckon with the time-space factor in the experience of your personal reception of the full answers to your manifold prayers and petitions. 영(靈)에서 비롯된 모든 참된 청원은 확실히 응답받습니다. 구하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시간과 공간의 진보적 창조물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다양한 기도와 청원에 대한 너희의 완전한 개인적 응답을 받는 체험에서 항상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마7:7a, 21:22, 막11:24, 눅11:9a).

5. What Became of Lazarus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231001 부활 후 나사로의 행적 요12:10-11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68:5.1 (1849.5) Lazarus remained at the Bethany home, being the center of great interest to many sincere believers and to numerous curious individuals, until the days of the crucifixion of Jesus, when he received warning that the Sanhedrin had decreed his death. The rulers of the Jews were determined to put a stop to the further spread of the teachings of Jesus, and they well judged that it would be useless to put Jesus to death if they permitted Lazarus, who represented the very peak of his wonder-working, to live and bear testimony to the fact that Jesus had raised him from the dead. Already had Lazarus suffered bitter persecution from them. 나사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당시에, 산헤드린이 자기 죽음을 판결했다고 경고받을 때(AD30. 4. 4)까지, 여러 신실한 신자들과 수많은 호기심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관심의 중심지가 된, 베다니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유대 통치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막기로 결의했고, 예수 이적(異蹟) 활동의 바로 그 정점을 대표하는 나사로가 살아서, 예수께서 죽었던 그를 부활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증언하도록 자신들이 허용한다면, 예수를 죽여도 소용이 없게 될 것이라고 잘 판단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그들로부터 신랄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168:5.2 (1849.6) And so Lazarus took hasty leave of his sisters at Bethany, fleeing down through Jericho and across the Jordan, never permitting himself to rest long until he had reached Philadelphia. Lazarus knew Abner well, and here he felt safe from the murderous intrigues of the wicked Sanhedrin. 그래서 나사로는 베다니에서 자기 자매들에게 급히 작별하고 떠나 여리고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필라델피아에 이를 때까지 충분히 쉬지 못하면서 도피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너를 잘 알고 있었고, 여기에서 그는 사악한 산헤드린의 살인 음모(陰謀)에서 안심했습니다.

168:5.3 (1849.7) Soon after this Martha and Mary disposed of their lands at Bethany and joined their brother in Perea. Meantime, Lazarus had become the treasurer of the church at Philadelphia. He became a strong supporter of Abner in his controversy with Paul and the Jerusalem church and ultimately died, when 67 years old, of the same sickness that carried him off when he was a younger man at Bethany. 바로 뒤 이런 마르다와 마리아는 베다니의 토지를 처분하고 페레아에 있는 자신들의 형제와 합쳤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회계원(會計員)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브너가 바울 및 예루살렘 교회와 논쟁할 때 아브너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고, 결국 67세에, 베다니에서 젊은이였을 때 자신을 죽게 했던 똑같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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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69 Last Teaching at Pella 펠라에서 마지막 가르침

Paper 169

Last Teaching at Pella 펠라에서 마지막 가르침

The Sanhedrin’s charges against Jesus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소
1. Parable of the Lost Son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2. Parable of the Shrewd Steward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3. The Rich Man and the Beggar 부자와 거지
4. The Father and His Kingdom 아버지의 그의 나라
Jesus lived a revelation of God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를 사셨습니다.
Elohim and Yahweh 엘로힘과 야훼

231008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소 마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169:0.1 (1850.1) LATE on Monday evening, March 6, Jesus and the ten apostles arrived at the Pella camp. This was the last week of Jesus’ sojourn there, and he was very active in teaching the multitude and instructing the apostles. He preached every afternoon to the crowds and each night answered questions for the apostles and certain of the more advanced disciples residing at the camp. 3월 6일(AD30) 월요일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야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는 예수께서 거기에 머문 마지막 주간이었고, 그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군중을 가르치고 사도들을 교육했습니다. 그는 오후마다 군중에게 설교했고, 밤마다 사도들과 야영지에 있는 좀 더 상급 제자들 일부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169:0.2 (1850.2) Word regarding the resurrection of Lazarus had reached the encampment two days before the Master’s arrival, and the entire assembly was agog. Not since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had anything occurred which so aroused the imagination of the people. And thus it was at the very height of the second phase of the public ministry of the kingdom that Jesus planned to teach this one short week at Pella and then to begin the tour of southern Perea which led right up to the final and tragic experiences of the last week in Jerusalem. 주께서 도착하기 이틀 전에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소식이 야영지에 이르렀고, 모든 집회가 흥분했습니다. 5천 명을 먹인 이후로 사람들의 심상(心狀)을 그렇게 자극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 공적 사역의 두 번째 단계가 한창일 때, 예수께서 이렇게 짧은 한 주간 펠라에서 가르친 다음, 곧장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의 최종적이고 비극적인 체험으로 통하는 남부 페레아 순회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습니다.

169:0.3 (1850.3) The Pharisees and the chief priests had begun to formulate their charges and to crystallize their accusations. They objected to the Master’s teachings on these grounds: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고소(告訴)를 공식화하고 기소 사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근거로 주님의 가르침에 반대했습니다.

169:0.4 (1850.4) 1. He is a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he receives the ungodly and even eats with them. 그는 세리(稅吏)와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그는 사악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식사합니다(마9:10-11, 11:19a, 막2;15-16, 눅5:30, 7:34, 15:1-2).

169:0.5 (1850.5) 2. He is a blasphemer; he talks about God as being his Father and thinks he is equal with God. 그는 신성 모독자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요5:17-18, 10:30, 38, 12:44-45, 17:22).

169:0.6 (1850.6) 3. He is a lawbreaker. He heals disease on the Sabbath and in many other ways flouts the sacred law of Israel. 그는 율법 위반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여러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신성한 법을 모욕합니다(마12:9-14, 막3:1-6, 눅6:6-11, 13:10-16, 14:1-4, 요5:5-16, 9:14, 16, 마12:1-2, 15:1-2, 막2:23-24, 7:1-5, 눅6:1-2, 11:37-41).

169:0.7 (1850.7) 4. He is in league with devils. He works wonders and does seeming miracles by the power of Beelzebub, the prince of devils. 그는 악령들과 결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령들의 괴수(魁首), 바알세불의 권세로 이적(異蹟)과 그럴듯한 기적(奇蹟)을 행합니다(마12:22-28, 막3:22, 눅11:14-20).

1. Parable of the Lost Son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231015 잃어버린 양과 분실한 금속조각의 이야기 눅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69:1.1 (1850.8) On Thursday afternoon Jesus talked to the multitude about the “Grace of Salvation.” In the course of this sermon he retold the story of the lost sheep and the lost coin and then added his favorit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Said Jesus: 목요일(AD30.3.9) 오후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구원의 은혜”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설교 중에 그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금속조각의 얘기를 다시 이야기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탕자(蕩子 방탕한 아들) 비유를 덧붙였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169:1.2 (1850.9) “You have been admonished by the prophets from Samuel to John that you should seek for God — search for truth. Always have they said, ‘Seek the Lord while he may be found.’ And all such teaching should be taken to heart. But I have come to show you that, while you are seeking to find God, God is likewise seeking to find you. Many times have I told you the story of the good shepherd who left the ninety and nine sheep in the fold while he went forth searching for the one that was lost, and how, when he had found the straying sheep, he laid it over his shoulder and tenderly carried it back to the fold. And when the lost sheep had been restored to the fold, you remember that the good shepherd called in his friends and bade them rejoice with him over the finding of the sheep that had been lost. Again I say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the ninety and nine just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The fact that souls are lost only increases the interest of the heavenly Father. I have come to this world to do my Father’s bidding, and it has truly been said of the Son of Man that he is a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사무엘부터 요한까지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너희는 하느님을 찾아야 –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주님을 찾아라(사55:6a).’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가르침은 심정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하느님을 찾으려 하는 동안,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이려고 내가 왔느니라. 여러 번 내가 너희에게 우리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려고 떠난 선한 목자가 길을 잃은 양을 찾아 그 양을 자기 어깨에 메어 다정하게 우리로 다시 데려왔는지 이야기했느니라. 그리고 잃어버린 양이 우리에 돌아왔을 때, 선한 목자가 자기 친구들을 불러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을 같이 축하하자고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내가 다시 말하지만, 회개가 필요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하느니라(마18:12-14, 눅15:3-7). 혼(魂)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의 관심을 더 일으킬 뿐이니라. 나는 내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참이니라(마9:10-11, 11:19a, 막2:15-16, 눅7:34, 15:1-2).

169:1.3 (1851.1) “You have been taught that divine acceptance comes after your repentance and as a result of all your works of sacrifice and penitence, but I assure you that the Father accepts you even before you have repented and sends the Son and his associates to find you and bring you, with rejoicing, back to the fold, the kingdom of sonship and spiritual progress. You are all like sheep which have gone astray, and I have come to seek and to save those who are lost. “너희가 회개한 후, 너희가 행한 희생물과 참회의 모든 결과로써, 신적으로 용납된다고 너희가 배웠지만, 내가 너희에게 보증하는 것은, 너희가 회개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너희를 받아들이며, 너희를 찾아 기뻐하며 너희를 우리, 즉 아들(자녀) 됨과 영적 진보의 하느님 나라로 데려오도록 아들과 그의 동료들을 보내느니라. 너희는 모두 길을 잃은 양과 같으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내가 왔느니라(Mt18:11, 눅19:10).

169:1.4 (1851.2) “And you should also remember the story of the woman who, having had ten pieces of silver made into a necklace of adornment, lost one piece, and how she lit the lamp and diligently swept the house and kept up the search until she found the lost piece of silver. And as soon as she found the coin that was lost, she called together her friends and neighbors, saying,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the piece that was lost.’ So again I say, there is always joy in the presence of the angels of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and returns to the Father’s fold. And I tell you this story to impress upon you that the Father and his Son go forth to search for those who are lost, and in this search we employ all influences capable of rendering assistance in our diligent efforts to find those who are lost, those who stand in need of salvation. And so, while the Son of Man goes out in the wilderness to seek for the sheep gone astray, he also searches for the coin which is lost in the house. The sheep wanders away, unintentionally; the coin is covered by the dust of time and obscured by the accumulation of the things of men. “그리고 너희는, 은 열 조각으로 만든 장식 목걸이에서 한 조각을 잃어버린 여인이 등을 밝혀 분실한 은(銀) 조각을 찾기까지 부지런히 집을 쓸며 계속 찾았던 이야기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녀가 잃었던 조각을 찾자마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축하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말하지만, 회개하여 아버지의 우리로 돌아오는 한 죄인에 대해 하늘의 천사들 앞에 언제나 기쁨이 있느니라(눅15:8-10). 아버지와 그 아들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나가, 이렇게 찾으면서, 잃어버린 자들, 구원이 필요한 자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찾으려고 애쓰면서 도울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우리가 사용한다는 것을 너희가 명심하게 하려고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노라. 그래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길을 잃은 양을 찾으러 광야로 나가면서, 그는 집에서 잃어버린 조각도 찾느니라. 양은 무심결에 헤매느니라. 금속조각은 세월의 먼지에 덮여 있고, 사람의 물건이 쌓여 가려 있느니라.

231022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 눅15:11-32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69:1.5 (1851.3) “And now I would like to tell you the story of a thoughtless son of a well-to-do farmer who deliberately left his father’s house and went off into a foreign land, where he fell into much tribulation. You recall that the sheep strayed away without intention, but this youth left his home with premeditation. It was like this: “이제 나는 부유한 농부의 분별없는 아들이 일부러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국(異國)으로 갔다가 여러 시련에 빠진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려고 하느니라. 양이 무심코 자기 양무리를 놓쳤다고 너희가 생각해 내지만, 이 청년은 미리 생각해서 자기 집을 떠났느니라. 이것은 다음과 같았더라.

169:1.6 (1851.4) “A certain man had two sons; one, the younger, was lighthearted and carefree, always seeking for a good time and shirking responsibility, while his older brother was serious, sober, hard-working, and willing to bear responsibility. Now these two brothers did not get along well together; they were always quarreling and bickering. The younger lad was cheerful and vivacious, but indolent and unreliable; the older son was steady and industrious, at the same time self-centered, surly, and conceited. The younger son enjoyed play but shunned work; the older devoted himself to work but seldom played. This association became so disagreeable that the younger son came to his father and said: ‘Father, give me the third portion of your possessions which would fall to me and allow me to go out into the world to seek my own fortune.’ And when the father heard this request, knowing how unhappy the young man was at home and with his older brother, he divided his property, giving the youth his share.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생은 아무 걱정이 없고 태평하여, 늘 쾌락만 좇고 책임을 회피했지만, 그의 형은 진지하고, 건전하며, 근면하여 기꺼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한데 이 두 형제는 함께 잘 지내지 못해서 그들은 언제나 말다툼하며 언쟁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쾌활하고 명랑했지만 게을러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착실하고 부지런했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적이고, 무뚝뚝하며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놀기 좋아했지만 일을 피했고, 형은 일에 몰두하여 좀처럼 놀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계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떨어질 3번째 몫을 제게 주셔서, 제가 세상에 나가 제 재산을 모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가 이런 요청을 들었을 때, 청년이 집에서 형과 함께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그는 자기 재산을 나누어 청년의 몫을 주었습니다(눅15:11-12).

169:1.7 (1851.5) “Within a few weeks the young man gathered together all his funds and set out upon a journey to a far country, and finding nothing profitable to do which was also pleasurable, he soon wasted all his inheritance in riotous living. And when he had spent all, there arose a prolonged famine in that country, and he found himself in want. And so, when he suffered hunger and his distress was great, he found employment with one of the citizens of that country, who sent him into the fields to feed swine. And the young man would fain have filled himself with the husks which the swine ate, but no one would give him anything. “몇 주안에 청년은 자기 자금을 모두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수익성 있으면서 즐거운 일을 찾지 못하자, 그는 곧 자기 모든 유산을 방종(放縱 마음대로 사용)한 생활로 낭비했습니다. 그가 다 써버렸을 때, 그 나라에 오랜 기근이 찾아와 궁핍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굶주림에 시달려 엄청난 고통이 되자, 그 나라의 한 시민에게 고용되었는데, 그가 그를 들판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청년은 돼지가 먹는 곡물 겉껍질로 채우려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떤 것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눅15:13-16).

169:1.8 (1852.1) “One day, when he was very hungry, he came to himself and said: ‘How many hired servants of my father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while I perish with hunger, feeding swine off here in a foreign country!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 and I wi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only be willing to make me one of your hired servants.’ And when the young man had reached this decision, he arose and started out for his father’s house. “어느 날, 그가 너무 배고프자, 제정신이 돌아와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이국(異國)에서 돼지를 치며 굶주려 죽어가는 동안 내 아버지에게 고용된 하인들은 얼마나 많은 양식을 가지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가!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다만 저를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가 고용한 하인 중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청년이 이런 결심에 이르자, 그가 일어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눅15:17-20a).

169:1.9 (1852.2) “Now this father had grieved much for his son; he had missed the cheerful, though thoughtless, lad. This father loved this son and was always on the lookout for his return, so that on the day he approached his home, even while he was yet afar off, the father saw him and, being moved with loving compassion, ran out to meet him, and with affectionate greeting he embraced and kissed him. And after they had thus met, the son looked up into his father’s tearful face and said: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in your sight; I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a son’ — but the lad did not find opportunity to complete his confession because the overjoyed father said to the servants who had by this time come running up: ‘Bring quickly his best robe, the one I have saved, and put it on him and put the son’s ring on his hand and fetch sandals for his feet.’ “그때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몹시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분별이 없지만 쾌활한 소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사랑했고 항상 그가 돌아오기만을 생각해서, 그가 자기 집으로 다가가던 그날,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아버지는 그를 보면서 애정을 품고 불쌍히 여기면서 당장 그를 맞으러 나가 다정히 환영하며 얼싸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만난 후,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 저는 더 이상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대단히 기쁜 아버지가 이때 달려오는 하인들에게 ‘내가 남겨놓은 그의 가장 좋은 옷을 빨리 가져와서 입히고 그의 손에 아들의 반지를 끼우며 그의 발을 위해 가죽신을 가려오라.’ 말했기 때문에 소년은 자기 고백을 마칠 기회가 없었습니다(눅15:20b-22).

169:1.10 (1852.3) “And then, after the happy father had led the footsore and weary lad into the house, he called to his servants: ‘Bring on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make merry, for this my son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all gathered about the father to rejoice with him over the restoration of his son. “그러고 나서 행복이 가득한 아버지가 발이 아프고 지친 소년을 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가 자기 하인들에게 큰소리로 ‘나의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있고, 잃었다가 찾았으니, 살찐 송아지를 가져와 잡아서, 먹고 즐기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 모두 아버지 주위에 모여 그 아들의 회복을 그와 함께 기뻐했습니다(눅15:23-24).

169:1.11 (1852.4) “About this time, while they were celebrating, the elder son came in from his day’s work in the field, and as he drew near the house, he heard the music and the dancing. And when he came up to the back door, he called out one of the servants and inquired as to the meaning of all this festivity. And then said the servant: ‘Your long-lost brother has come home, and your father has killed the fatted calf to rejoice over his son’s safe return. Come in that you also may greet your brother and receive him back into your father’s house.’ “이 무렵 그들이 축하하는 동안 맏아들이 들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뒷문으로 다가가 그가 하인 중 하나를 불러내어 모든 이런 잔치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당신 동생이 집에 와서, 당신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자기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당신 동생을 환영하고 당신 아버지의 집으로 그를 다시 맞아들이도록 들어오십시오(눅15:25-27).’

169:1.12 (1852.5) “But when the older brother heard this, he was so hurt and angry he would not go into the house. When his father heard of his resentment of the welcome of his younger brother, he went out to entreat him. But the older son would not yield to his father’s persuasion. He answered his father, saying: ‘Here these many years have I served you, never transgressing the least of your commands, and yet you never gave me even a kid that I might make merry with my friends. I have remained here to care for you all these years, and you never made rejoicing over my faithful service, but when this your son returns, having squandered your substance with harlots, you make haste to kill the fatted calf and make merry over him.’ “그러나 형이 이 말을 듣고, 그는 너무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동생의 환영에 큰아들이 분개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간청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설득에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여러 해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명령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지만, 당신은 제게 제 친구들과 즐겁게 놀라고 새끼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에 남아 이렇게 여러 해 당신을 보살폈는데, 당신은 저의 충실한 섬김을 한 번도 기뻐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이 아들이 매춘부들과 당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자, 당신은 급히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그를 기쁘게 합니다(눅15:28-30).’

169:1.13 (1852.6) “Since this father truly loved both of his sons, he tried to reason with this older one: ‘But, my son, you have all the while been with me, and all this which I have is yours. You could have had a kid at any time you had made friends to share your merriment. But it is only proper that you should now join with me in being glad and merry because of your brother’s return. Think of it, my son, your brother was lost and is found; he has returned alive to us!’” “이 아버지는 자기 두 아들 모두 참으로 사랑했기에 이 큰아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이 모두는 너의 것이라. 너는 친구들과 즐기려고 언제라도 새끼염소를 잡을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네 동생이 돌아왔으니 이제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마땅할 뿐이라. 생각해 보라, 내 아들아, 네 동생은 잃어버렸다가 찾았고, 그가 우리에게 살아서 돌아왔느니라(눅15:31-32)!’”

169:1.14 (1853.1) This was one of the most touching and effective of all the parables which Jesus ever presented to impress upon his hearers the Father’s willingness to receive all who seek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려 하는 모두를 흔쾌히 받아들이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청중에게 명심하게 하려고 이제껏 제시한 모든 비유 중 가장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 중 하나였습니다.

169:1.15 (1853.2) Jesus was very partial to telling these three stories at the same time. He presented the story of the lost sheep to show that, when men unintentionally stray away from the path of life, the Father is mindful of such lost ones and goes out, with his Sons, the true shepherds of the flock, to seek the lost sheep. He then would recite the story of the coin lost in the house to illustrate how thorough is the divine searching for all who are confused, confounded, or otherwise spiritually blinded by the material cares and accumulations of life. And then he would launch forth into the telling of this parable of the lost son, the reception of the returning prodigal, to show how complete is the restoration of the lost son into his Father’s house and heart.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동시에 하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무심코 생명의 경로에서 벗어날 때, 아버지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들을 마음에 두어서 양 떼의 참 목자들, 자기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집 안에서 잃어버린 금속조각 이야기를, 물질의 걱정거리와 생활의 축적으로 당황하고, 혼란스럽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분별이 없는 모든 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신적으로 찾는지, 실례로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얼마나 완벽하게 아버지의 집과 심정 안으로 잃어버린 아들이 회복되는지 보여주려고 잃어버린 아들의 이 비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습니다(눅15:3-32).

169:1.16 (1853.3) Many, many times during his years of teaching, Jesus told and retold this story of the prodigal son. This parable and the story of the good Samaritan were his favorite means of teaching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neighborliness of man. 예수께서 가르친 여러 해 동안, 그는 방탕한 아들의 이 이야기를 아주 여러 번, 말하고, 또 바꾸어 말했습니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人)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2. Parable of the Shrewd Steward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231029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눅16:1-14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9:2.1 (1853.4) One evening Simon Zelotes, commenting on one of Jesus’ statements, said: “Master, what did you mean when you said today that many of the children of the world are wiser in their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the kingdom since they are skillful in making friends with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 Jesus answered: 어느 날(AD30. 3.7화~11토) 저녁 시몬 젤로떼가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거론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세상의 여러 자녀가 불의(不義)한 배금(拜金 돈 숭배)과 능숙하게 친하므로 자기 세대의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고 당신께서 오늘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요?”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눅16:8).

169:2.2 (1853.5) “Some of you, before you entered the kingdom, were very shrewd in dealing with your business associates. If you were unjust and often unfair, you were nonetheless prudent and farseeing in that you transacted your business with an eye single to your present profit and future safety. Likewise should you now so order your lives in the kingdom as to provide for your present joy while you also make certain of your future enjoyment of treasures laid up in heaven. If you were so diligent in making gains for yourselves when in the service of self, why should you show less diligence in gaining souls for the kingdom since you are now servants of the brotherhood of man and stewards of God? 너희 중 일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너희 사업 동료를 다룰 때 아주 영리했느니라. 너희가 부조리하고 종종 부당하더라도 너희가 현재의 이익과 미래 안전에 대해 성심성의로 너희 사업을 처리했다는 점에서 너희는 신중하고 선견지명이 있었느니라. 마찬가지로, 너희가 이제는, 하늘나라에 쌓아놓은 너희 미래 보물을 반드시 누리면서도 너희 현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느님 나라 안에서 너희 생활을 정리해야 하느니라. 너희가 자신을 위해 일할 때 자기를 위해 이윤을 내려고 그렇게 공들였다면, 이제 너희는 사람의 형제 공동체 봉사자들이며 하느님의 청지기들이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혼(魂)들을 얻는 일에 왜 공을 덜 들이느냐?

169:2.3 (1853.6) “You may all learn a lesson from the story of a certain rich man who had a shrewd but unjust steward. This steward had not only oppressed his master’s clients for his own selfish gain, but he had also directly wasted and squandered his master’s funds. When all this finally came to the ears of his master, he called the steward before him and asked the meaning of these rumors and required that he should give immediate accounting of his stewardship and prepare to turn his master’s affairs over to another. “너희 모두 영리하지만 옳지 못한 청지기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 이 청지기는 자기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 주인의 고객들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주인의 자금도 직접 낭비하고 탕진했느니라. 이 모든 일이 결국 자기 주인의 귀에 들어가자, 그가 자기 앞에 청지기를 불러 이런 소문에 담긴 의미를 묻고 즉시 청지기 직의 회계를 보고하고 자기 주인의 업무를 다른 이에게 건네줄 준비를 하라고 요구했느니라(눅16:1-2).

169:2.4 (1853.7) “Now this unfaithful steward began to say to himself: ‘What shall I do since I am about to lose this stewardship? I have not the strength to dig; to beg I am ashamed. I know what I will do to make certain that, when I am put out of this stewardship, I will be welcomed into the houses of all who do business with my master.’ And then, calling in each of his lord’s debtors, he said to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He answered, ‘A hundred measures of oil.’ Then said the steward, ‘Take your wax board bond, sit down quickly, and change it to fifty.’ Then he said to another debtor, ‘How much do you owe?’ And he replied, ‘A hundred measures of wheat.’ Then said the steward, ‘Take your bond and write fourscore.’ And this he did with numerous other debtors. And so did this dishonest steward seek to make friends for himself after he would be discharged from his stewardship. Even his lord and master, when he subsequently found out about this, was compelled to admit that his unfaithful steward had at least shown sagacity in the manner in which he had sought to provide for future days of want and adversity. “그러자 이 불충한 청지기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청지기 직을 곧 잃게 되었으니 뭘 할까? 내가 땅을 팔 힘이 없고, 구걸하려니 부끄럽구나. 내가 이 청지기 직을 잃을 때, 내 주인과 거래하는 모든 자의 집에서 환영받게 되도록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확실히 알겠구나.’ 그런 다음,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그가 첫 사람에게 ‘내 주인에게 너는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기름 180리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청지기가 말하기를 ‘밀랍 판 차용증을 가져다 빨리 앉아 그것을 90리터로 고치라.’ 그런 후 그가 다른 채무자에게 ‘너는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밀 100포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청지기가 ‘너의 차용증을 가져와 80포대로 쓰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다른 채무자를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정직한 청지기는 자신이 청지기 직에서 해고된 후에 자신을 위해 친구를 사귀려고 그렇게 애썼습니다. 그의 주(主)이며 주인조차, 나중에 이런 일에 대해 알게 되자, 자신의 불충한 청지기가 적어도 앞날의 곤궁과 역경을 대비하려고 애쓴 태도에서 보인 눈치 빠른 민첩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눅16:3-8a).

169:2.5 (1854.1) “And it is in this way that the sons of this world sometimes show more wisdom in their preparation for the future than do the children of light. I say to you who profess to be acquiring treasure in heaven: Take lessons from those who make friends with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 and likewise so conduct your lives that you make eternal friendship with the forces of righteousness in order that, when all things earthly fail, you shall be joyfully received into the eternal habitations.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의 아들(자녀)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면서 빛의 자녀들이 하는 것보다 더 슬기로움을 보이느니라. 내가 하늘의 보물을 얻는다고 공언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 불의(不義)한 배금(拜金 돈 숭배)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만사가 사라질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공의(公義)의 세력과 영원히 사귀도록 너희 삶을 그렇게 처신하라(눅16:8b-9).

169:2.6 (1854.2) “I affirm that he who is faithful in little will also be faithful in much, while he who is unrighteous in little will also be unrighteous in much. If you have not shown foresight and integrity in the affairs of this world, how can you hope to be faithful and prudent when you are trusted with the stewardship of the true riches of the heavenly kingdom? If you are not good stewards and faithful bankers, if you have not been faithful in that which is another’s, who will be foolish enough to give you great treasure in your own name? 내가 단언하노니, 적은 일에 충실한 자는 많은 일에도 충실할 것이며, 적은 일에 불의(不義)한 자는 많은 일에도 불의(不義)할 것이니라. 너희가 이 세상의 업무에서 신중(愼重)과 고결(高潔)을 보이지 않는다면, 너희가 하늘나라에 속한 참된 재물의 청지기 직을 맡을 때 너희가 충실하고 신중하기를 기대할 수 있느냐? 너희가 선한 청지기와 충실한 은행가가 아니라면, 너희가 다른 사람의 것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누가 어리석게 너희 자신의 이름으로 큰 보물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0-12)?

169:2.7 (1854.3) “And again I assert that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hold to one while he despises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mammon.” “내가 다시 단언하노니,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그가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그가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서 다른 하나를 싫어하리라. 너희가 하느님과 배금(拜金 돈 숭배)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169:2.8 (1854.4) When the Pharisees who were present heard this, they began to sneer and scoff since they were much given to the acquirement of riches. These unfriendly hearers sought to engage Jesus in unprofitable argumentation, but he refused to debate with his enemies. When the Pharisees fell to wrangling among themselves, their loud speaking attracted large numbers of the multitude encamped thereabouts; and when they began to dispute with each other, Jesus withdrew, going to his tent for the night. 참석했던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물 획득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롱하며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적대시하는 마음이 있는 청중들이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 대적들과 논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저희끼리 입씨름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근처에서 야영하던 상당수의 군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다툼하기 시작하자, 예수께서 물러나 밤을 보내시려고 자기 천막으로 갔습니다(눅16:14).

3. The Rich Man and the Beggar 부자와 거지

231105 부자와 거지 눅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9:3.1 (1854.5) When the meeting became too noisy, Simon Peter, standing up, took charge, saying: “Men and brethren, it is not seemly thus to dispute among yourselves. The Master has spoken, and you do well to ponder his words. And this is no new doctrine which he proclaimed to you. Have you not also heard the allegory of the Nazarites concerning the rich man and the beggar? Some of us heard John the Baptist thunder this parable of warning to those who love riches and covet dishonest wealth. And while this olden parable is not according to the gospel we preach, you would all do well to heed its lessons until such a time as you comprehend the new light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story as John told it was like this: 모임이 너무 떠들썩해지자, 시몬 베드로가 일어나 주도권을 잡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이렇게 서로 다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했으니, 너희는 그의 말씀을 깊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가 너희에게 선포한 새 교리가 아닙니다. 너희는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실인들의 우화도 듣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 일부는 세례 요한이 재물을 사랑하고 부정직한 재산을 몹시 탐내는 자들에게 외치며 경고하는 이 비유를 들었습니다. 오래된 이 비유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다르지만, 너희가 하늘나라의 새로운 빛을 파악하는 그런 때까지 너희 모두 그 교훈을 마음에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169:3.2 (1854.6)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named Dives, who, being clothed in purple and fine linen, lived in mirth and splendor every day. And there was a certain beggar named Lazarus, who was laid at this rich man’s gate, covered with sores and desiring to be fed with the crumbs which fell from the rich man’s table; yes, even the dogs came and licked his sores. And it came to pass that the beggar died and was carried away by the angels to rest in Abraham’s bosom. And then, presently, this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with great pomp and regal splendor. When the rich man departed from this world, he waked up in Hades, and finding himself in torment, he lifted up his eyes and beheld Abraham afar off and Lazarus in his bosom. And then Dives cried aloud: ‘Father Abraham, have mercy on me and send over Lazarus that he may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to cool my tongue, for I am in great anguish because of my punishment.’ And then Abraham replied: ‘My son, you should remember that in your lifetime you enjoyed the good things while Lazarus in like manner suffered the evil. But now all this is changed, seeing that Lazarus is comforted while you are tormented. And besides, between us and you there is a great gulf so that we cannot go to you, neither can you come over to us.’ Then said Dives to Abraham: ‘I pray you send Lazarus back to my father’s house, inasmuch as I have five brothers, that he may so testify as to prevent my brothers from coming to this place of torment.’ But Abraham said: ‘My son,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hear them.’ And then answered Dives: ‘No, No, Father Abraham! but if one go to them from the dead, they will repent.’ And then said Abraham: ‘If they hear not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even if one were to rise from the dead.’” “디베스라는 이름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자주색과 고운 면 옷을 입고 매일 희희낙락하며 호화스럽게 지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어떤 거지가 이 부자의 출입문에 있었는데, 상처투성이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들도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거지가 죽게 되자 천사들이 데려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었습니다. 그 후 이내 이 부자도 죽어 아주 화려하고 왕같이 호화롭게 묻혔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하데스(황천, 지옥)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디베스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가 제 형벌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제 혀를 식히도록 그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너의 살아생전에 네가 좋은 것들을 누리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나사로가 악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이제 네가 고통받는 동안에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 것으로 보아 이 모든 것이 바뀌느니라. 게다가 너와 우리 사이에는 아주 깊이 갈라진 틈이 있어서 우리가 너에게 갈 수도 없고 네가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느니라.’ 그러자 디베스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간청하오니, 제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제 형제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당신께서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에 돌려보내 증언하게 하소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이보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게 하라.’ 그러자 디베스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설득되지 않으리라(눅16:19-31).’”

169:3.3 (1855.1) After Peter had recited this ancient parable of the Nazarite brotherhood, and since the crowd had quieted down, Andrew arose and dismissed them for the night. Although both the apostles and his disciples frequently asked Jesus questions about the parable of Dives and Lazarus, he never consented to make comment thereon. 베드로가 나실인 공동체의 아주 오래된 이 비유를 이야기한 후, 군중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안드레가 일어나 그들을 해산시켜 잠자리에 들게 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디베스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해 예수께 종종 질문했지만, 그는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4. The Father and His Kingdom 아버지와 그의 나라

231112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1 (1855.2) Jesus always had trouble trying to explain to the apostles that, while they proclaime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the Father in heaven was not a king. At the time Jesus lived on earth and taught in the flesh, the people of Urantia knew mostly of kings and emperors in the governments of the nations, and the Jews had long contemplat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For these and other reasons, the Master thought best to designate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as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 spirit head of this brotherhood as the Father in heaven. Never did Jesus refer to his Father as a king. In his intimate talks with the apostles he always referred to himself as the Son of Man and as their elder brother. He depicted all his followers as servants of mankind and messenger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예수는 사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설립을 선포하는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왕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애써 설명하기에 언제나 고생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살면서 육신으로 가르치실 때, 유란시아 사람들은 각국 정부의 왕과 황제를 대부분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오랫동안 기대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主)님은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를 하늘나라로, 이 형제 공동체의 영(靈) 수장(首長)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를 결코 왕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친밀히 말할 때,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과 그들의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모든 자기 추종자를 인류의 하인들과 하느님 나라 복음의 메신저로 나타냈습니다.

169:4.2 (1855.3) Jesus never gave his apostles a systematic lesson concerning the personality and attributes of the Father in heaven. He never asked men to believe in his Father; he took it for granted they did. Jesus never belittled himself by offering arguments in proof of the reality of the Father. His teaching regarding the Father all centered in the declaration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that he who has seen the Son has seen the Father; that the Father, like the Son, knows all things; that only the Son really knows the Father, and he to whom the Son will reveal him; that he who knows the Son knows also the Father; and that the Father sent him into the world to reveal their combined natures and to show forth their conjoint work. He never made other pronouncements about his Father except to the woman of Samaria at Jacob’s well, when he declared, “God is spirit.” 예수는 사도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격(고유성)과 속성에 관해 결코 체계적인 교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믿으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믿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실체를 입증하는 주장을 제안하여 자신을 절대로 낮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모두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선언(요10:30),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요12:45, 14:9), 아버지는 아들처럼 모든 것을 아신다는 선언(요16:30, 요일3:20), 아들만이 아버지를 정말로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자들만 아버지를 안다는 선언(마11:27, 눅10:22), 아들을 아는 자는 아버지도 안다는 선언(요8:19, 14:7), 자신들의 연합된 본성을 드러내고(요7:16, 12:49-50) 자신들의 공동 과업을 보이려고(요5:17, 14:10, 16:15, 17:10) 아버지가 자신을 세상에 보냈다는 선언(요7:29, 17:8)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느님은 영(靈)이라.”라고 선포한 것(요4:24) 외에 자기 아버지에 대해 결코 다르게 선언하지 않았습니다(143:5.6).

169:4.3 (1856.1) You learn about God from Jesus by observing the divinity of his life, not by depending on his teachings. From the life of the Master you may each assimilate that concept of God which represents the measure of your capacity to perceive realities spiritual and divine, truths real and eternal. The finite can never hope to comprehend the Infinite except as the Infinite was focalized in the time-space personality of the finite experience of the human life of Jesus of Nazareth. 너희가 예수에게서 하느님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의 가르침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의 일생의 신성(神性)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主)님의 일생으로부터, 너희는 영적이며 신적인 실체들, 실제의 영원한 진리들을 알아차리는 너희 능력의 척도를 나타내는 그런 하느님의 개념을 각자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무한자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 일생에 속한 유한한 경험의 시공간 인격(고유성)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유한자는 절대로 무한자를 파악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169:4.4 (1856.2) Jesus well knew that God can be known only by the realities of experience; never can he be understood by the mere teaching of the mind. Jesus taught his apostles that, while they never could fully understand God, they could most certainly know him, even as they had known the Son of Man. You can know God, not by understanding what Jesus said, but by knowing what Jesus was. Jesus was a revelation of God. 예수는 하느님이 체험적 실체들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지, 단순한 마음의 가르침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사도들이 절대로 충분히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들이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을 알았던 것처럼 가장 확실히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면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231119 예수는 아버지의 계시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5 (1856.3) Except when quoting the Hebrew scriptures, Jesus referred to Deity by only two names: God and Father. And when the Master made reference to his Father as God, he usually employed the Hebrew word signifying the plural God (the Trinity) and not the word Yahweh, which stood for the progressive conception of the tribal God of the Jews. 히브리 성서를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 예수는 두 가지 이름, 하느님과 아버지로만 신(神)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자기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언급할 때, 그는 보통 복수의 하느님(삼위일체)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했고, 유대인의 종족 하느님에 대한 점진적 개념을 나타내는 야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69:4.6 (1856.4) Jesus never called the Father a king, and he very much regretted that the Jewish hope for a restored kingdom and John’s proclamation of a coming kingdom made it necessary for him to denominate his proposed spiritual brotherhood the kingdom of heaven. With the one exception — the declaration that “God is spirit” — Jesus never referred to Deity in any manner other than in terms descriptive of his own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First Source and Center of Paradise. 예수는 아버지를 결코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회복된 왕국에 대한 유대인의 희망과 다가오는 왕국에 대한 요한의 선포(마3:1-2)로 인해 자신이 제안한 영적 형제 공동체를 하늘나라로 불러야 했던 것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영(靈)이시다(요4:24).”라는 한 가지 선언을 제외하고, 예수는 천국의 첫째 근원 및 중심과 그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 외에 결코 다른 방식으로 신(神)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169:4.7 (1856.5) Jesus employed the word God to designate the idea of Deity and the word Father to designate the experience of knowing God. When the word Father is employed to denote God, it should be understood in its largest possible meaning. The word God cannot be defined and therefore stands for the infinite concept of the Father, while the term Father, being capable of partial definition, may be employed to represent the human concept of the divine Father as he is associated with man during the course of mortal existence. 예수는 신(神)에 대한 개념을 나타내려고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느님을 아는 체험을 나타내려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하느님을 나타내려고 사용될 때, 가능한 가장 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아버지의 무한한 개념을 나타내지만, 아버지라는 용어는 부분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서, 아버지가 이생의 삶의 과정에서 인간과 관련될 때, 신적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 개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169:4.8 (1856.6) To the Jews, Elohim was the God of gods, while Yahweh was the God of Israel. Jesus accepted the concept of Elohim and called this supreme group of beings God. In the place of the concept of Yahweh, the racial deity, he introduced the idea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world-wide brotherhood of man. He exalted the Yahweh concept of a deified racial Father to the idea of a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men, a divine Father of the individual believer. And he further taught that this God of universes and this Father of all men were one and the same Paradise Deity. 유대인들에게 엘로힘은 신과 같은 존재들의 하느님이었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는 엘로힘의 개념을 받아들여 이런 최극 존재 집단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종족의 신(神), 야훼의 개념 대신에, 그는 하느님의 아버지와 인간의 세계적인 형제 공동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는 신격화된 종족 아버지라는 야훼 개념을 모든 인간 자녀의 아버지, 개별 신자(信者)의 신적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격을 높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우주들의 이 하느님, 모든 인간의 이 아버지가 하나뿐인, 바로 그 천국 신(神)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69:4.9 (1856.7) Jesus never claimed to be the manifestation of Elohim (God) in the flesh. He never declared that he was a revelation of Elohim (God) to the worlds. He never taught that he who had seen him had seen Elohim (God). But he did proclaim himself as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in the flesh, and he did say that whoso had seen him had seen the Father. As the divine Son he claimed to represent only the Father. 예수는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난 엘로힘(하느님)이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대한 엘로힘(하느님)의 계시라고 절대로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 자는 엘로힘(하느님)을 본 것이라고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육신을 입은 아버지의 계시라고 선포하고, 자신을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적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만 대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69:4.10 (1857.1) He was, indeed, the Son of even the Elohim God; but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to the mortal sons of God, he chose to limit his life revelation to the portrayal of his Father’s character in so far as such a revelation might be comprehensible to mortal man. As regards the character of the other persons of the Paradise Trinity, we shall have to be content with the teaching that they are altogether like the Father, who has been revealed in personal portraiture in the life of his incarnated Son, Jesus of Nazareth. 그는 실로 엘로힘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했으나,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필사 아들들에게, 그런 계시가 필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생애 계시를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데까지 국한(局限)하기로 했습니다. 천국 삼위일체의 다른 인격(고유자)들의 성품에 관해서, 우리는, 자신이 성육신(成肉身)한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일생 안에서 인격 초상화로 그려서 계시한 아버지와 그들이 완전히 닮았다는 가르침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입니다.

231126 예수는 영적 렌즈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11 (1857.2) Although Jesus revealed the true nature of the heavenly Father in his earth life, he taught little about him. In fact, he taught only two things: that God in himself is spirit, and that, in all matters of relationship with his creatures, he is a Father. On this evening Jesus made the final pronouncement of his relationship with God when he declared: “I have come out from the Father, and I have come into the world; again, I will leave the world and go to the Father.” 예수는 자신의 지상 생활로 하늘 아버지의 참된 본성을 계시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는 하느님은 원래 영(靈)이라는 것과 자기 창조물과 모든 관계에서 그는 아버지라는 두 가지만 가르쳤습니다. 이날 저녁에 예수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노라(요16:28).”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최종 선언을 하셨습니다.

169:4.12 (1857.3) But mark you! never did Jesus say, “Whoso has heard me has heard God.” But he did say,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To hear Jesus’ teaching is not equivalent to knowing God, but to see Jesus is an experience which in itself is a revelation of the Father to the soul. The God of universes rules the far-flung creation, but it is the Father in heaven who sends forth his spirit to dwell within your minds. 그러나 주의하라! 예수는 “내 말을 듣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12:45, 14: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지만, 예수를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혼(魂)에 대한 아버지의 계시(啓示)인 체험입니다. 우주들의 하느님은 널리 퍼진 창조계를 다스리지만, 너희 마음 안에 거하도록 자기 영(靈)을 보낸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169:4.13 (1857.4) Jesus is the spiritual lens in human likeness which makes visible to the material creature Him who is invisible. He is your elder brother who, in the flesh, makes known to you a Being of infinite attributes whom not even the celestial hosts can presume fully to understand. But all of this must consist in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believer. God who is spirit can be known only as a spiritual experience. God can be revealed to the finite sons of the material worlds, by the divine Son of the spiritual realms, only as a Father. You can know the Eternal as a Father; you can worship him as the God of universes, the infinite Creator of all existences. 예수는 물질 창조물에게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이게 하는 인간 모습의 영적 렌즈입니다. 그는 천상의 무리조차 충분히 이해했다고 추정할 수 없는 무한한 속성의 존재를 살아서 너희에게 알려주는 너희 형님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개별 신자들의 개인적 체험이어야 합니다. 영(靈)이신 하느님(요4:24)은 영적 체험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적 영역의 신적 아들에 의해서, 물질세계들의 유한한 아들(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만 계시(啓示)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영원자를 아버지로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우주들의 하느님, 모든 존재의 무한한 창조자로서 그를 경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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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0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

Paper 170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

1.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의 개념들
2.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예수의 나라 개념
Sin and forgiveness 죄와 용서
3. In Relation to Righteousness 의(義 바른 도리)와 관련하여
4. 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5. Later Ideas of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의 후기 사상
Social brotherhood and spiritual brotherhood 사회적 형제 공동체와 영적 형제 공동체
Another and greater John the Baptist 또 다른 위대한 세례 요한
Christianity and the Jesus gospel 기독교와 예수 복음

231203 하늘나라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70:0.1 (1858.1) SATURDAY afternoon, March 11, Jesus preached his last sermon at Pella. This was among the notable addresses of his public ministry, embracing a full and complete discussion of the kingdom of heaven. He was aware of the confusion which existed in the minds of his apostles and disciples regarding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terms “kingdom of heaven” and “kingdom of God,” which he used as interchangeable designations of his bestowal mission. Although the very term kingdom of heaven should have been enough to separate what it stood for from all connection with earthly kingdoms and temporal governments, it was not. The idea of a temporal king was too deep-rooted in the Jewish mind thus to be dislodged in a single generation. Therefore Jesus did not at first openly oppose this long-nourished concept of the kingdom. 3월 11일(AD30) 토요일 오후,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는 그의 대중 사역 중 주목할 만한 연설로, 하늘나라에 대해 충분히 완전한 논의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증여 사명에 대해 바꿔서 사용했던 명칭, “하늘나라”와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해 자기 사도와 제자들 마음에 있는 혼란을 알아차렸습니다. 바로 하늘나라라는 용어는 땅의 나라들 및 일시적 정부들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그 의미를 분리하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세적 왕의 개념이 유대인의 마음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한 세대에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는 처음에 이렇게 오래 품어온 나라 개념을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70:0.2 (1858.2) This Sabbath afternoon the Master sought to clarify the teaching about the kingdom of heaven; he discussed the subject from every viewpoint and endeavored to make clear the many different senses in which the term had been used. In this narrative we will amplify the address by adding numerous statements made by Jesus on previous occasions and by including some remarks made only to the apostles during the evening discussions of this same day. We will also make certain comments dealing with the subsequent outworking of the kingdom idea as it is related to the later Christian church. 이 안식일 오후에 주(主)님은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고 용어가 사용된 여러 다른 의미를 명백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전의 경우에 예수께서 하신 여러 진술을 덧붙이고 바로 이날 저녁 논의 중 사도들에게만 했던 몇 가지 소견을 포함해서 그 연설을 상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라 개념이 후대 기독 교회와 관련되어 있어서 차후 나라 개념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논평을 할 것입니다.

1.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의 개념들

231210 하늘나라의 개념들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1.1 (1858.3) In connection with the recital of Jesus’ sermon it should be noted that throughout the Hebrew scriptures there was a dual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prophets presented the kingdom of God as: 예수 설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관련해서, 히브리 성서 전체에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중 개념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70:1.2 (1858.4) 1. A present reality; and as 현재의 현실(사9:7, 단6:26)

170:1.3 (1858.5) 2. A future hope — when the kingdom would be realized in fullness upon the appearance of the Messiah. This is the kingdom concept which John the Baptist taught. 미래의 소망 – 메시아의 출현으로 나라가 충만히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나라 개념입니다(마3:1-2, 사9:6-7, 11:1-10, 옵1:21, 눅1:32-33, 삼하7:12, 대상17:12).

170:1.4 (1858.6) From the very first Jesus and the apostles taught both of these concepts. There were two other ideas of the kingdom which should be borne in mind: 예수와 사도들은 아주 처음부터 이 두 개념 다 가르쳤습니다. 명심해야 할 나라에 대한 다른 두 개념이 있었습니다(마4:17, 23, 막1:14-15, 눅9:2, 행28:31).

170:1.5 (1858.7) 3. The later Jewish concept of a world-wide and transcendental kingdom of supernatural origin and miraculous inauguration. 초자연적 기원과 기적적 출범에 속한 세계적인 초월적 나라에 대한 후기 유대인의 개념(사2:2-4, 시72:1-19, 슥14:7-11).

170:1.6 (1858.8) 4. The Persian teachings portraying the establishment of a divine kingdom as the achievement of the triumph of good over evil at the end of the world. 세상의 종말에 선(善)이 악(惡)을 이긴 성취로 신적 나라가 확립된다고 묘사하는 페르시아의 가르침들.

170:1.7 (1858.9) Just before the advent of Jesus on earth, the Jews combined and confused all of these ideas of the kingdom into their apocalyptic concept of the Messiah’s coming to establish the age of the Jewish triumph, the eternal age of God’s supreme rule on earth, the new world, the era in which all mankind would worship Yahweh. In choosing to utilize this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Jesus elected to appropriate the most vital and culminating heritage of both the Jewish and Persian religions. 예수가 지상에 강림하기 직전에, 유대인들은 나라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을, 메시아가 오셔서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 지상에서 하느님이 최고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 새 세상, 모든 인류가 야훼를 경배하게 될 시대를 세운다는 자기들의 종말론적 개념으로 결합하여 혼동했습니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이런 개념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유대 및 페르시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절정기의 유산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170:1.8 (1859.1) The kingdom of heaven, as it has been understood and misunderstood down through the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embraced four distinct groups of ideas: 기독교 시대의 수 세기 내내 이해되고 오해되었듯이 하늘나라는 별개의 네 집단에 속한 개념들을 포함했습니다(욥32:8, 사63:11, 겔37:14, 마10:20, 눅17:21, 요17:21-23, 롬8:9-11, 고전3:16-17, 고후6:16, 갈2:20, 요일3:24, 4:12-15, 계21:3).

170:1.9 (1859.2) 1. The concept of the Jews. 유대인들의 개념.

170:1.10 (1859.3) 2. The concept of the Persians. 페르시아인들의 개념(마4:23, 9:35, 24:14, 막1:14-15).

170:1.11 (1859.4) 3. The personal-experience concept of Jesus —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you.” 예수의 개인적-체험 개념 – “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170:1.12 (1859.5) 4. The composite and confused concepts which the founders and promulgators of Christianity have sought to impress upon the world. 기독교 창시자들과 선포자들이 세상에 감명을 주려고 애써 합성한 혼란한 개념.

170:1.13 (1859.6) At different times and in varying circumstances it appears that Jesus may have presented numerous concepts of the “kingdom” in his public teachings, but to his apostles he always taught the kingdom as embracing man’s personal experience in relation to his fellows on earth and to the Father in heaven. Concerning the kingdom, his last word always was, “The kingdom is within you.” 예수께서, 서로 다른 시간, 다양한 환경에서, 공적으로 가르치실 때 수많은 “나라”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자기 사도들에게 언제나 나라는 지상의 자기 동료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인간의 개인적 체험을 포함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나라에 관한 그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였습니다.

170:1.14 (1859.7) Centuries of confusion regarding the meaning of the term “kingdom of heaven” have been due to three factors: “하늘나라”라는 용어의 의미에 관한 여러 세기의 혼동은 다음의 세 요인에 기인합니다.

170:1.15 (1859.8) 1. The confusion occasioned by observing the idea of the “kingdom” as it passed through the various progressive phases of its recasting by Jesus and his apostles. 예수와 그 사도들이 “나라” 개념을 여러 점진적 단계로 고쳐 만들면서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170:1.16 (1859.9) 2. The confusion which was inevitably associated with the transplantation of early Christianity from a Jewish to a gentile soil.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의 토양에서 이방인의 토양으로 이식되면서 필연적으로 관련된 혼란.

170:1.17 (1859.10) 3. The confusion which was inherent in the fact that Christianity became a religion which was organized about the central idea of Jesus’ person; the gospel of the kingdom became more and more a religion about him. 기독교가 예수라는 인물 중심 사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원래 들어있는 혼란. 나라의 복음은 점점 더 그에 대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2.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예수의 나라 개념

231217 아버지의 뜻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70:2.1 (1859.11) The Master made it clear that the kingdom of heaven must begin with, and be centered in, the dual concept of the truth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correlated fact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acceptance of such a teaching, Jesus declared, would liberate man from the age-long bondage of animal fear and at the same time enrich human living with the following endowments of the new life of spiritual liberty: 주님은 하늘나라가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진리와 그것과 관련된 사람의 형제 공동체라는 사실에 대한 이중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아주 오래된 동물적 두려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영적 자유의 새 생명이 그 후 주어져서 인간의 생활이 풍성해진다고 선언했습니다.

170:2.2 (1859.12) 1. The possession of new courage and augmented spiritual power. The gospel of the kingdom was to set man free and inspire him to dare to hope for eternal life. 새로운 용기와 늘어난 영적 권세의 소유. 나라의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여 그에게 대담히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했습니다(요8:32, 36, 롬8:2, 갈5:13, 단12:2, 마19:29, 25:46, 막10:30, 눅10:25, 18:18, 30, 요3:15-16, 4:14, 36, 5:24, 39, 6:40, 47, 54, 68, 8:51-52, 10:28, 11:25-26, 12:25, 50, 17:2-3, 행13:46, 48, 롬2:7, 5:21, 6:22-23, 갈6:8, 딤전1:16, 6:12, 19, 딛1:2, 3:7, 요일1:2, 2:25, 3:15, 5:11, 13, 20, 유1:21).

170:2.3 (1859.13) 2. The gospel carried a message of new confidence and true consolation for all men, even for the poor. 복음은 모든 사람, 심지어 가난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마11:5, 눅7:22).

170:2.4 (1859.14) 3. It was in itself a new standard of moral values, a new ethical yardstick wherewith to measure human conduct. It portrayed the ideal of a resultant new order of human society. 복음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가치의 기준,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새로운 윤리적 표준이었습니다. 그것의 결과로 인간 사회에 속한 새 질서의 이상(理想)이 표현되었습니다(마5:3-7:23, 눅6:20-38).

170:2.5 (1859.15) 4. It taught the pre-eminence of the spiritual compared with the material; it glorified spiritual realities and exalted superhuman ideals.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견주어 상위(上位)에 영적인 것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영적 실체들을 높여서 칭찬하고 초(超)인간적 이상(理想)들을 드높였습니다(마6:19-21, 눅12:21, 31-34, 요3:3-16).

170:2.6 (1860.1) 5. This new gospel held up spiritual attainment as the true goal of living. Human life received a new endowment of moral value and divine dignity. 이 새로운 복음은 영적 성취를 참된 삶의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도덕적 가치와 신적 존엄성을 새롭게 부여받았습니다(요4:14, 6:27, 51, 68).

170:2.7 (1860.2) 6. Jesus taught that eternal realities were the result (reward) of righteous earthly striving. Man’s mortal sojourn on earth acquired new meanings consequent upon the recognition of a noble destiny.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얻으려고 애쓴 결과(보상)라고 가르쳤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지상에 머무는 것은, 고귀한 운명을 알아본 결과,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마5:10-16, 눅6:22-35).

170:2.8 (1860.3) 7. The new gospel affirmed that human salvation is the revelation of a far-reaching divine purpose to be fulfilled and realized in the future destiny of the endless service of the salvaged sons of God. 새로운 복음은 인간의 구원이 구원받은 하느님 아들(자녀)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미래 운명으로 성취하고 실현될 광범위한 신적 목적의 계시임을 확언했습니다(시2:7, 사56:5, 마5:9, 16, 45, 눅20:36, 요1:12-13, 행17:28, 롬8:14-21, 9:26, 고후6:18, 갈3:26, 4:5-7, 엡1:5, 빌2:15, 히12:5-8, 요일3:1-2, 10, 5:2, 계21:7).

170:2.9 (1860.4) These teachings cover the expanded idea of the kingdom which was taught by Jesus. This great concept was hardly embraced in the elementary and confused kingdom teachings of John the Baptist. 이런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가르쳤던 나라의 확장된 개념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개념은 세례 요한의 초보적인 혼란한 나라에는 거의 담겨 있지 않습니다.

170:2.10 (1860.5) The apostles were unable to grasp the real meaning of the Master’s utterances regarding the kingdom. The subsequent distortion of Jesus’ teachings, as they are recorded in the New Testament, is because the concept of the gospel writers was colored by the belief that Jesus was then absent from the world for only a short time; that he would soon return to establish the kingdom in power and glory — just such an idea as they held while he was with them in the flesh. But Jesus did not connect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with the idea of his return to this world. That centuries have passed with no signs of the appearance of the “New Age” is in no way out of harmony with Jesus’ teaching. 사도들은 나라에 관해 주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신약 성서에 그들이 기록한 대로,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된 것은 복음서 기자(記者)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때 잠시 세상을 떠나 계시다가 곧 다시 오셔서 권세와 영광으로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 그가 자신들과 육신으로 계실 때 그들이 가졌던 바로 그런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나라 설립을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과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새 시대”가 출현할 조짐이 없이 수 세기가 지나간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절대로 어긋나지 않습니다(마24:27-30, 25:31-34, 막13:24-26, 14:62, 눅21:27, 계1:7).

170:2.11 (1860.6) The great effort embodied in this sermon was the attempt to translate the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e ideal of the idea of doing the will of God. Long had the Master taught his followers to pray: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and at this time he earnestly sought to induce them to abandon the use of the term kingdom of God in favor of the more practical equivalent, the will of God. But he did not succeed. 이 설교로 구현된 엄청난 노력은 하늘나라의 개념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개념으로 바꾸는 시도였습니다. 주님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오래 가르쳤습니다. 이때 그는 열심히 그들을 설득하여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더 실용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마6:10, 눅11:2).

231224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70:2.12 (1860.7) Jesus desired to substitute for the idea of the kingdom, king, and subjects, the concept of the heavenly family, the heavenly Father, and the liberated sons of God engaged in joyful and voluntary service for their fellow men and in the sublime and intelligent worship of God the Father. 예수는 왕국, 왕, 그리고 백성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대신에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그리고 동료 사람들을 기쁘게 자발적으로 섬기면서 아버지 하느님을 숭고하게 지능적으로 경배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아들(자녀)들이라는 명확한 개념을 쓰려고 했습니다.

170:2.13 (1860.8) Up to this time the apostles had acquired a double viewpoint of the kingdom; they regarded it as: 이때까지 사도들은 나라에 대해 이중적 관점을 익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여겼습니다.

170:2.14 (1860.9) 1. A matter of personal experience then present in the hearts of true believers, and 개인적 체험 문제가 당시 참된 신자들의 심정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170:2.15 (1860.10) 2. A question of racial or world phenomena; that the kingdom was in the future, something to look forward to. 인종이나 세계 현상의 문제, 나라는 미래에 기대할 일이었습니다.

170:2.16 (1860.11) They looked upon the coming of the kingdom in the hearts of men as a gradual development, like the leaven in the dough or like the growing of the mustard seed. They believed that the coming of the kingdom in the racial or world sense would be both sudden and spectacular. Jesus never tired of telling them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their personal experience of realizing the higher qualities of spiritual living; that these realities of the spirit experience are progressively translated to new and higher levels of divine certainty and eternal grandeur. 그들은 사람들의 심정에 나라가 오는 것을, 반죽 덩어리의 누룩(효모 마13:33, 눅13:21)이나 겨자씨가 자라는 것처럼(마13:31-33, 막4:31-32, 눅13:19), 점진적 개발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인종이나 세계적 의미에서 나라가 불시에 장엄하게 다가온다고 믿었습니다(마24:29-31, 막13:24-27, 눅21:25-27, 행2:19-20, 벧후3:10, 12).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는 더 높은 영적 특성의 삶을 구현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고, 이런 영(靈) 체험의 실체들은 신적으로 확실하고 영원히 장엄한 새롭고 높은 수준으로 점차 옮겨진다고 조금도 지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170:2.17 (1860.12) On this afternoon the Master distinctly taught a new concept of the double nature of the kingdom in that he portrayed the following two phases: 이날(AD30.3.11 토) 오후에 주님은 다음의 두 단계를 묘사하면서 나라의 이중 본질에 대한 새 개념을 뚜렷이 가르쳤습니다.

170:2.18 (1860.13) “First. The kingdom of God in this world, the supreme desire to do the will of God, the unselfish love of man which yields the good fruits of improved ethical and moral conduct. “첫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 욕구, 개선된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선한 열매를 맺는 인간의 이타적 사랑이니라.

170:2.19 (1861.1) “Second. The kingdom of God in heaven, the goal of mortal believers, the estate wherein the love for God is perfected, and wherein the will of God is done more divinely.” “둘째, 하늘에서 하느님 나라는 믿는 필사자들의 목표,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해지고, 하느님의 뜻이 더 신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이니라.”

170:2.20 (1861.2) Jesus taught that, by faith, the believer enters the kingdom now. In the various discourses he taught that two things are essential to faith-entrance into the kingdom: 예수는 신자(信者)들이 신앙으로 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 강연에서 그는 신앙으로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두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170:2.21 (1861.3) 1. Faith, sincerity. To come as a little child, to receive the bestowal of sonship as a gift; to submit to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without questioning and in the full confidence and genuine trustfulness of the Father’s wisdom; to come into the kingdom free from prejudice and preconception; to be open-minded and teachable like an unspoiled child. 신앙, 성실. 어린아이로 와서 아들(자녀) 됨의 증여를 선물로 받아들이기. 아버지의 지혜를 완전히 신임(信任)하고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의심 없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함. 편견과 선입관 없이 나라에 들어오기. 때 묻지 않은 어린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가르침을 잘 듣기(마18:3, 19:14, 막10:14, 눅18:16).

170:2.22 (1861.4) 2. Truth hunger. The thirst for righteousness, a change of mind, the acquirement of the motive to be like God and to find God. 진리 갈망. 의(올바름)에 대한 갈증, 마음의 변화,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을 찾으려는 동기(動機) 습득(마5:6, 요7:37-38).

170:2.23 (1861.5) Jesus taught that sin is not the child of a defective nature but rather the offspring of a knowing mind dominated by an unsubmissive will. Regarding sin, he taught that God has forgiven; that we make such forgiveness personally available by the act of forgiving our fellows. When you forgive your brother in the flesh, you thereby create the capacity in your own soul for the reception of the reality of God’s forgiveness of your own misdeeds. 예수는 죄(罪)가 결점이 있는 본성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알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의지에 사로잡힌 마음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죄에 관해서, 그는 하느님이 용서했고, 우리가 우리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로 그런 하느님의 용서를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육신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할 때, 너희는 그로 인해 너희 자신의 혼(魂) 안에 너희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느님 용서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만들어 냅니다.

170:2.24 (1861.6) By the time the Apostle John began to write the story of Jesus’ life and teachings, the early Christians had experienced so much trouble with the kingdom-of-God idea as a breeder of persecution that they had largely abandoned the use of the term. John talks much about the “eternal life.” Jesus often spoke of it as the “kingdom of life.” He also frequently referred to “the kingdom of God within you.” He once spoke of such an experience as “family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Jesus sought to substitute many terms for the kingdom but always without success. Among others, he used: the family of God, the Father’s will, the friends of God, the fellowship of believers, the brotherhood of man, the Father’s fold, the children of God, the fellowship of the faithful, the Father’s service, and the liberated sons of God. 사도 요한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의 원인이 된 하느님 나라 사상으로 너무나 고생해서 그들은 그 용어의 사용을 거의 그만두었습니다. 요한은 “영생(永生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많이 말합니다(요3:15-16,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3, 요일1:2, 2:25, 3:15, 5:11, 13, 20). 예수는 그것에 대해 “생명의 나라”로 자주 말했습니다(마19:29, 25:41, 막10:30, 눅18:30, 요11:26). 그는 또한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마10:20, 눅17:21, 요17:21-23). 그는 그런 표현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와 갖는 가족 교제”라고 한번 말했습니다. 예수는 나라 대신에 여러 용어를 쓰려고 했지만 언제나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그는 하느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 공동체, 아버지의 양떼, 하느님의 자녀들, 신실한 신자들의 교제, 아버지의 봉사 및 하느님의 자유롭게 된 아들(자녀)들을 사용했습니다(마5:9, 16, 45, 6:10, 7:21, 12:50, 23:9, 26:39, 42, 44, 막3:35, 14:36, 39, 눅8:20-21, 11:2, 20:36, 22:42, 요4:34, 5:30, 6:38-40, 7:16-17, 10:16, 12:26, 14:21, 15:10, 17:4, 21:15-17).

170:2.25 (1861.7) But he could not escape the use of the kingdom idea. It was more than fifty years later, not until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 armies, that this concept of the kingdom began to change into the cult of eternal life as its social and institutional aspects were taken over by the rapidly expanding and crystallizing Christian church. 그러나 그는 나라 관념의 사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나라 개념이 영생 종파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50여 년 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비로소 급속히 확장되고 구체화하는 기독 교회가 사회적·제도적 국면을 장악하면서부터였습니다.

3. In Relation to Righteousness 의(義 바른 도리)와 관련하여

231231 신앙적 의(義 바른 도리)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70:3.1 (1861.8) Jesus was always trying to impress upon his apostles and disciples that they must acquire, by faith, a righteousness which would exceed the righteousness of slavish works which some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paraded so vaingloriously before the world. 예수는 언제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일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세상 앞에서 그렇게 허영심이 강하게 과시했던 맹종 행위의 의(義)보다 나은 의(義 바른 도리)를 신앙으로 몸에 익혀야 함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마5:20).

170:3.2 (1861.9) Though Jesus taught that faith, simple childlike belief, is the key to the door of the kingdom, he also taught that, having entered the door, there are the progressive steps of righteousness which every believing child must ascend in order to grow up to the full stature of the robust sons of God. 예수는 신앙, 순전히 어린이다운 믿음(마18:3, 19:14, 막10:15, 눅18:17)이 하느님 나라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그는 또한 그 문으로 들어간 후 모든 믿는 자녀가 견고한 하느님 아들(자녀)들의 온전한 수준으로 자라기 위해서 상승해야 하는 의(義 바른 도리)의 점진적 단계들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약2:14-26).

170:3.3 (1861.10) It is in the consideration of the technique of receiving God’s forgiveness that the attainment of the righteousness of the kingdom is revealed. Faith is the price you pay for entrance into the family of God; but forgiveness is the act of God which accepts your faith as the price of admission. And the reception of the forgiveness of God by a kingdom believer involves a definite and actual experience and consists in the following four steps, the kingdom steps of inner righteousness: 하느님 나라의 의(義 바른 도리)에 도달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법의 사례로 드러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가족 안에 들어갈 때 너희가 치르는 값입니다. 그러나 용서(容恕)는 너희 신앙을 입장료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믿는 신자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 뚜렷한 실제 체험이 따라오며, 내적 의(義 바른 도리)의 하느님 나라 단계는 다음 4단계입니다.

170:3.4 (1862.1) 1. God’s forgiveness is made actually available and is personally experienced by man just in so far as he forgives his fellows. 사람이 자기 동료를 용서하는 한도 내에서만 그가 하느님의 용서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고 스스로 체험합니다(마6:12, 14~15, 18:21~35, 막11:25~26, 눅6:37b, 11:4a, 17:3~4, 엡4:32, 요일2:12. 집28:1~7).

170:3.5 (1862.2) 2. Man will not truly forgive his fellows unless he loves them as himself. 사람이 자기 동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170:3.6 (1862.3) 3. To thu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the highest ethics. 3. 이렇게 자신처럼 너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윤리(倫理)입니다(레19:18, 34, 마19:19b, 22:39, 막12:31, 33, 눅10:27, 롬13:9b, 갈5:14, 약2:8).

170:3.7 (1862.4) 4. Moral conduct, true righteousness, becomes, then, the natural result of such love. 그러면 도덕적 행위, 참된 의(義 바른 도리)는 그런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됩니다.

170:3.8 (1862.5) It therefore is evident that the true and inner religion of the kingdom unfailingly and increasingly tends to manifest itself in practical avenues of social service. Jesus taught a living religion that impelled its believers to engage in the doing of loving service. But Jesus did not put ethics in the place of religion. He taught religion as a cause and ethics as a result.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내적 종교는 확실히, 점차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실용적 수단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신자들이 사랑의 봉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있는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윤리를 종교의 자리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를 원인으로, 윤리를 결과로 가르쳤습니다(마20:26-27, 23:11, 막9:35, 10:43-44, 눅22:26).

170:3.9 (1862.6) The righteousness of any act must be measured by the motive; the highest forms of good are therefore unconscious. Jesus was never concerned with morals or ethics as such. He was wholly concerned with that inward and spiritual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which so certainly and directly manifests itself as outward and loving service for man. He taught that the religion of the kingdom is a genuine personal experience which no man can contain within himself; that the consciousness of being a member of the family of believers leads inevitably to the practice of the precepts of the family conduct, the service of one’s brothers and sisters in the effort to enhance and enlarge the brotherhood. 어떤 행위의 의(義 바른 도리)는 그 동기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선(善)은 무의식적입니다. 예수는 도덕이나 윤리 자체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향한 외적, 사랑의 봉사로 반드시, 바로 나타나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그런 내적, 영적 친교에 온전히 관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종교란 아무도 자신 안에서 결코 억누를 수 없는 진짜 자신만의 체험, 신자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의식(意識)은 반드시 가족 행위, 공동체를 향상하고 확장하려고 형제와 자매들을 섬기는 교훈의 실행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170:3.10 (1862.7) The religion of the kingdom is personal, individual; the fruits, the results, are familial, social. Jesus never failed to exalt the sacredness of the individual as contrasted with the community. But he also recognized that man develops his character by unselfish service; that he unfolds his moral nature in loving relations with his fellows. 하느님 나라의 종교는 개인적, 개별적입니다. 그 열매, 결과들은 가족적, 사회적입니다. 예수는 공동체와 대비하여 어김없이 개인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은 이타적 봉사로 자기 성품이 계발(啓發)되고, 자기 동료들과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 밝혀진다고 인정했습니다.

170:3.11 (1862.8) By teaching that the kingdom is within, by exalting the individual, Jesus struck the deathblow of the old society in that he ushered in the new dispensation of true social righteousness. This new order of society the world has little known because it has refused to practice the principle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en this kingdom of spiritual pre-eminence does come upon the earth, it will not be manifested in mere improved social and material conditions, but rather in the glories of those enhanced and enriched spiritual values which are characteristic of the approaching age of improved human relations and advancing spiritual attainments.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안에 있다(눅17:21b)고 가르치고, 개인을 강조하면서, 참된 사회적 의(義 바른 도리)의 새로운 섭리(신의 결정)을 알렸다는 점에서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세상은 하늘나라의 복음의 원리를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이렇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전혀 몰랐습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이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임하면, 그것은 단지 개선된 사회적, 물질적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된 인간관계와 진보하는 영적 달성에 접근하는 시대의 특징인, 향상되고 풍성한, 그런 영적 가치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4. 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240107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4.1 (1862.9) Jesus never gave a precise definition of the kingdom. At one time he would discourse on one phase of the kingdom, and at another time he would discuss a different aspect of the brotherhood of God’s reign in the hearts of men. In the course of this Sabbath afternoon’s sermon Jesus noted no less than five phases, or epochs, of the kingdom, and they were: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 그는 하느님 나라의 한 면(面)에 대해 설교했고 다른 때 그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하느님이 다스리는 형제 공동체의 다른 면(面)을 논의하곤 했습니다. 오늘 안식일 오후 설교에서 예수는 5단계나 되는 하나님 나라 획 시대를 언급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170:4.2 (1862.10) 1. The personal and inward experience of the spiritual life of the fellowship of the individual believer with God the Father. 개별 신자가 하느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영적 생활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

170:4.3 (1863.1) 2. The enlarging brotherhood of gospel believers, the social aspects of the enhanced morals and quickened ethics resulting from the reign of God’s spirit in the hearts of individual believers. 복음 신자들의 확대된 형제 공동체, 개별 신자들의 심정에서 하느님의 영(靈)이 다스리는 결과인 향상된 도덕과 소생된 윤리의 사회적 모습.

170:4.4 (1863.2) 3. The supermortal brotherhood of invisible spiritual beings which prevails on earth and in heaven, the superhuman kingdom of God. 지상과 하늘에 퍼져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超)필사 형제 공동체, 초(超)인간적 하느님 나라.

170:4.5 (1863.3) 4. The prospect of the more perfect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the advance toward the dawn of a new social order in connection with improved spiritual living — the next age of man. 하느님의 뜻이 더 완전히 성취되는 전망, 개선된 영적 생활과 관련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여명(黎明)을 향한 전진, 즉 인간의 다음 시대.

170:4.6 (1863.4) 5. The kingdom in its fullness, the future spiritual age of light and life on earth. 충만한 하느님 나라, 지상에서 빛과 생명의 미래 영적 시대.

170:4.7 (1863.5) Wherefore must we always examine the Master’s teaching to ascertain which of these five phases he may have reference to when he makes use of the term kingdom of heaven. By this process of gradually changing man’s will and thus affecting human decisions, Michael and his associates are likewise gradually but certainly changing the entire course of human evolution, social and otherwise.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가 언급하는 것이 이런 5단계 중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언제나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를 점차 변화시켜서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미가엘과 그의 동료들은 사회적 및 기타 방식으로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을 마찬가지로 점진적이지만 확실히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170:4.8 (1863.6) The Master on this occasion placed emphasis on the following five points as representing the cardinal feature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이런 경우에 주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주요한 특징을 나타나는 다음 다섯 사항을 강조했습니다.

170:4.9 (1863.7) 1. The pre-eminence of the individual. 개인의 우선(于先)성.

170:4.10 (1863.8) 2. The will as the determining factor in man’s experience. 인간 체험을 결정짓는 요소인 의지.

170:4.11 (1863.9) 3. Spiritual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아버지 하느님과 영적 교제

170:4.12 (1863.10) 4. The supreme satisfactions of the loving service of man.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최고의 만족.

170:4.13 (1863.11) 5. The transcendency of the spiritual over the material in human personality. 인간 인격(고유성)에서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것.

170:4.14 (1863.12) This world has never seriously or sincerely or honestly tried out these dynamic ideas and divine ideals of Jesus’ doctrine of the kingdom of heaven. But you should not become discouraged by the apparently slow progress of the kingdom idea on Urantia. Remember that the order of progressive evolution is subjected to sudden and unexpected periodical changes in both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worlds. The bestowal of Jesus as an incarnated Son was just such a strange and unexpected event in the spiritual life of the world. Neither make the fatal mistake, in looking for the age manifestation of the kingdom, of failing to effect its establishment within your own souls. 이 세상은 예수의 하늘나라 교리가 지닌 이런 역동적 관념과 신적 이상(理想)을 진지하거나 성실하게 또는 정직하게 손을 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유란시아에서 하느님 나라 관념이 언뜻 보기에 천천히 진행된다고 해서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진보적 진화 체제는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모두에서 돌연한, 뜻밖의 주기적 변화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육신(成肉身)한 아들로서 예수의 증여는 세상의 영적 생활에서 바로 그렇게 낯선,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대적 징후를 찾으면서 너희 자신의 혼(魂) 안에 끝내 하느님 나라를 세우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170:4.15 (1863.13) Although Jesus referred one phase of the kingdom to the future and did, on numerous occasions, intimate that such an event might appear as a part of a world crisis; and though he did likewise most certainly, on several occasions, definitely promise sometime to return to Urantia, it should be recorded that he never positively linked these two ideas together. He promised a new revelation of the kingdom on earth and at some future time; he also promised sometime to come back to this world in person; but he did not say that these two events were synonymous. From all we know these promises may, or may not, refer to the same event.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한 단계를 미래로 언급하고, 여러 차례 그런 사건이 세상 위기의 일부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암시했고(마24:29-31, 막13:24-27), 마찬가지로 그가 여러 경우에 절대로 틀림없이, 언젠가 유란시아에 돌아온다고 명백히 약속했어도, 그는 이런 두 관념을 확실히 함께 결코 관련을 짓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는 지상에서 미래에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계시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또한 언젠가 직접 이 세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 사건이 동의어(同義語)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런 약속들은 같은 사건을 언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70:4.16 (1863.14) His apostles and disciples most certainly linked these two teachings together. When the kingdom failed to materialize as they had expected, recalling the Master’s teaching concerning a future kingdom and remembering his promise to come again, they jumped to the conclusion that these promises referred to an identical event; and therefore they lived in hope of his immediate second coming to establish the kingdom in its fullness and with power and glory. And so have successive believing generations lived on earth entertaining the same inspiring but disappointing hope.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런 두 가르침을 가장 확실하게 관련지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하느님 나라가 끝내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미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내고, 다시 온다는 그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런 약속들이 동일 사건을 언급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눅21:25-28).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충만하게, 권능과 영광으로 세우기 위해서, 그가 즉시 다시 오는(재림 再臨)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잇따라 믿는 세대들이 마찬가지로 고무적(鼓舞的)이지만 실망스러운 희망을 품고 지상에서 살았습니다.

5. Later Ideas of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의 후기 사상

240114 사회적 형제 공동체 vs 영적 형제 공동체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5.1 (1864.1) Having summarized the teachings of Jesus about the kingdom of heaven, we are permitted to narrate certain later ideas which became attached to the concept of the kingdom and to engage in a prophetic forecast of the kingdom as it may evolve in the age to come.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한 후, 하느님 나라의 개념에 첨부된 특정한 후기 사상을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시대에 차츰 전개될 수도 있는 하느님 나라의 예언적 예측에 착수하도록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170:5.2 (1864.2) Throughout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propaganda, the idea of the kingdom of heaven was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then rapidly spreading notions of Greek idealism, the idea of the natural as the shadow of the spiritual — the temporal as the time shadow of the eternal. 기독교가 선포된 첫 세기 내내, 하늘나라의 관념은 당시 순식간에 퍼진 그리스 이상주의(理想主義) 개념, 자연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현세(現世)는 영원한 것의 시간적 그림자라는 관념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골2:17, 히8:5, 10:1).

170:5.3 (1864.3) But the great step which marked the transplantation of the teachings of Jesus from a Jewish to a gentile soil was taken when the Messiah of the kingdom became the Redeemer of the church, a religious and social organization growing out of the activities of Paul and his successors and based on the teachings of Jesus as they were supplemented by the ideas of Philo and the Persian doctrines of good and evil.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인의 토양에서 이방인의 토양으로 옮겨 심은 표시였던 커다란 단계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아가,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의 활동으로 생겨나,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필로의 사상과 페르시아의 선악(善惡) 교리가 추가된,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기구, 교회의 구세주가 되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170:5.4 (1864.4) The ideas and ideals of Jesus, embodied in the teaching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nearly failed of realization as his followers progressively distorted his pronouncements. The Master’s concept of the kingdom was notably modified by two great tendencies: 하느님 나라 복음의 가르침으로 구현된, 예수의 관념(觀念)과 이상(理想)은 그의 추종자들이 점차 그의 선언을 왜곡함에 따라서 거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은 커다란 두 경향으로 현저히 수정되었습니다.

170:5.5 (1864.5) 1. The Jewish believers persisted in regarding him as the Messiah. They believed that Jesus would very soon return actually to establish the world-wide and more or less material kingdom. 유대인 신자들은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그를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곧 실제로 돌아와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물질적인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70:5.6 (1864.6) 2. The gentile Christians began very early to accept the doctrines of Paul, which led increasingly to the general belief that Jesus was the Redeemer of the children of the church, the new and institutional successor of the earlier concept of the purely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kingdom. 이방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순수한 영적 형제 공동체라는 초기 개념의 새로운 제도적 후계자, 교회에 속한 자녀들의 구세주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점차 이어졌습니다(엡1:22, 5:23, 32, 골1:18).

170:5.7 (1864.7) The church, as a social outgrowth of the kingdom, would have been wholly natural and even desirable. The evil of the church was not its existence, but rather that it almost completely supplanted the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Paul’s institutionalized church became a virtual substitute for the kingdom of heaven which Jesus had proclaimed. 교회,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곁가지는 완전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해악은 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을 거의 완전히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은 것입니다. 바울이 규정한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의 사실상 대용품(代用品)이 되었습니다(롬12:5, 고전12:12, 골2:19).

170:5.8 (1864.8) But doubt not, this same kingdom of heaven which the Master taught exists within the heart of the believer, will yet be proclaimed to this Christian church, even as to all other religions, races, and nations on earth — even to every individual. 그러나 주께서 가르친 이 하늘나라가 신자(信者)의 심정 내부에 존재하며, 이제부터 이 기독교 교회, 심지어 다른 모든 종교, 인종 및 지상의 모든 국가, 모든 개인에게까지 선포될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170:5.9 (1864.9) The kingdom of Jesus’ teaching, the spiritual ideal of individual righteousness and the concept of man’s divine fellowship with God, became gradually submerged into the mystic conception of the person of Jesus as the Redeemer-Creator and spiritual head of a socialized religious community. In this way a formal and institutional church became the substitute for the individually spirit-led brotherhood of the kingdom.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개인적 의(義 바른 도리)의 영적 이상(理想)과 사람이 하느님과 신적으로 교제하는 개념은 인간 예수가 구세주-창조자이며 사회화 종교 공동체의 영적 머리라는 신비적 개념 안으로 점차 잠겼습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는 영(靈)이 개인별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형제 공동체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170:5.10 (1864.10) The church was an inevitable and useful social result of Jesus’ life and teachings; the tragedy consisted in the fact that this social reaction to the teachings of the kingdom so fully displaced the spiritual concept of the real kingdom as Jesus taught and lived it. 교회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당연하고 유용한 사회적 결과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이런 사회적 반응이, 예수께서 가르치고 사셨던 진짜 하느님 나라의 영적 개념을 추방하고 대신 그렇게 완전히 들어섰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었습니다.

170:5.11 (1865.1) The kingdom, to the Jews, was the Israelite community; to the gentiles it became the Christian church. To Jesus the kingdom was the sum of those individuals who had confessed their faith in the fatherhood of God, thereby declaring their wholehearted dedication to the doing of the will of God, thus becoming members of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유대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였으며, 이방인들에게 그것은 기독교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뜻의 실행에 자신들의 전심을 헌신하기로 선언하여,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그런 개인들의 총합이었습니다.

240128 영적 하느님 나라와 사회적 교회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5.12 (1865.2) The Master fully realized that certain social results would appear in the world as a consequence of the spread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he intended that all such desirable social manifestations should appear as unconscious and inevitable outgrowths, or natural fruits, of this inner personal experience of individual believers, this purely spiritual fellowship and communion with the divine spirit which indwells and activates all such believers.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확장된 결과로 어떤 사회적 결과가 세상에 나타날 것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바람직한 사회적 현상이 개별 신자들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 그런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여 촉진하는 신적 영(靈)과 이렇게 순전하게 영적인 사귐과 친교에서 나온, 무의식적이고 필연적인 결과, 즉 자연스러운 열매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70:5.13 (1865.3) Jesus foresaw that a social organization, or church, would follow the progress of the true spiritual kingdom, and that is why he never opposed the apostles’ practicing the rite of John’s baptism. He taught that the truth-loving soul, the one who hungers and thirsts for righteousness, for God, is admitted by faith to the spiritual kingdom; at the same time the apostles taught that such a believer is admitted to the social organization of disciples by the outward rite of baptism. 예수는 사회적 조직, 즉 교회가 참된 영적 하느님 나라의 진보를 따를 것을 내다봤고, 그래서 그는 사도들이 실행한 요한의 세례 의식(행2:38, 41, 8:12, 갈3:27)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혼(魂), 의(義)와 하느님을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5:6, 눅6:21)은 신앙으로 영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사도들은 그런 신자가 외적 세례 의식을 통해 제자들의 사회적 조직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고 가르쳤습니다.

170:5.14 (1865.4) When Jesus’ immediate followers recognized their partial failure to realize his ideal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in the hearts of men by the spirit’s domination and guidance of the individual believer, they set about to save his teaching from being wholly lost by substituting for the Master’s ideal of the kingdom the gradual creation of a visible social organization, the Christian church. And when they had accomplished this program of substitution, in order to maintain consistency and to provide for the recognition of the Master’s teaching regarding the fact of the kingdom, they proceeded to set the kingdom off into the future. The church, just as soon as it was well established, began to teach that the kingdom was in reality to appear at the culmination of the Christian age,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이 개별 신자에 대한 영(靈)의 지배와 인도로 사람들의 심정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그의 이상(理想)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알아내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회 조직, 기독교 교회를 점차 만들어 주님의 하느님 나라 이상(理想)을 대체(代替)하여서 완전히 없어지는 그의 가르침을 구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대체 계획이 완성되자, 하느님 나라의 사실에 관한 주님 가르침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알아보도록,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미래로 향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잘 설립되자마자 기독교 시대의 절정(絶頂), 즉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70:5.15 (1865.5) In this manner the kingdom became the concept of an age, the idea of a future visitation, and the ideal of the final redemption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The early Christians (and all too many of the later ones) generally lost sight of the Father-and-son idea embodied in Jesus’ teaching of the kingdom, while they substituted therefor the well-organized social fellowship of the church. The church thus became in the main a social brotherhood which effectively displaced Jesus’ concept and ideal of a spiritual brotherhood. 이런 식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대의 개념, 미래에 임한다는 사상과 지고(至高) 성도(聖徒)가 최종적으로 구속(救贖)되는 이상(理想)이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후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가르침에 담긴 아버지와-아들 사상을 전체적으로 잃어버렸고 반면에 그들은 그것 대신에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친교로 대체(代替)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예수의 영적 형제 공동체 개념과 이상(理想) 대신 들어선 사실상 사회적 형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170:5.16 (1865.6) Jesus’ ideal concept largely failed, but upon the foundation of the Master’s personal life and teachings, supplemented by the Greek and Persian concepts of eternal life and augmented by Philo’s doctrine of the temporal contrasted with the spiritual, Paul went forth to build up one of the most progressive human societies which has ever existed on Urantia. 예수의 이상적(理想的) 개념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생 개념을 추가하고, 영적인 것과 대조적인 현세적인 것에 대한 필로의 교리로 확대된, 주님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의 토대 위에, 바울은 유란시아에 일찍이 존재했던 가장 진보적인 인간 단체 중 하나를 세우려고 나섰습니다.

170:5.17 (1865.7) The concept of Jesus is still alive in the advanced religions of the world. Paul’s Christian church is the socialized and humanized shadow of what Jesus intended the kingdom of heaven to be — and what it most certainly will yet become. Paul and his successors partly transferred the issues of eternal life from the individual to the church. Christ thus became the head of the church rather than the elder brother of each individual believer in the Father’s family of the kingdom. Paul and his contemporaries applied all of Jesus’ spiritual implications regarding himself and the individual believer to the church as a group of believers; and in doing this, they struck a deathblow to Jesus’ concept of the divine kingdom in the heart of the individual believer. 예수의 개념은 세상의 진보 종교들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바울의 기독교 교회는 예수가 의도한 하늘나라의 상태 –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가장 확실히 이루어질 것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입니다.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영생의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교회로 일부분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아버지 가족의 개별 각 신자의 형(兄)보다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엡5:23, 골1:18). 바울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예수 자신과 개별 신자에 대한 그의 모든 영적 의미를 신자(信者)들 집단으로써 교회에 적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개별 신자의 심정에 있는 예수의 신적 하느님 나라 개념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240128 기독교와 예수 복음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170:5.18 (1866.1) And so, for centuries, the Christian church has labored under great embarrassment because it dared to lay claim to those mysterious powers and privileges of the kingdom, powers and privileges which can be exercised and experienced only between Jesus and his spiritual believer brothers. And thus it becomes apparent that membership in the church does not necessarily mean fellowship in the kingdom; one is spiritual, the other mainly social. 그래서 기독교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그런 신비한 권세와 특권, 예수와 그의 영적 신자 형제(자녀)들 사이에서만 행사되고 체험될 수 있는 권세와 특권에 대한 소유권을 감히 주장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커다란 부끄러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친교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하나는 영적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사회적입니다.

170:5.19 (1866.2) Sooner or later another and greater John the Baptist is due to arise proclaiming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 meaning a return to the high spiritual concept of Jesus, who proclaimed that the kingdom is the will of his heavenly Father dominant and transcendent in the heart of the believer — and doing all this without in any way referring either to the visible church on earth or to the anticipated second coming of Christ. There must come a revival of the actual teachings of Jesus, such a restatement as will undo the work of his early followers who went about to create a sociophilosophical system of belief regarding the fact of Michael’s sojourn on earth. In a short time the teaching of this story about Jesus nearly supplanted the preaching of Jesus’ gospel of the kingdom. In this way a historical religion displaced that teaching in which Jesus had blended man’s highest moral ideas and spiritual ideals with man’s most sublime hope for the future — eternal life. And that was the gospel of the kingdom. 머잖아 또 다른 더 큰 세례 요한이 일어나, 하느님 나라는 신자의 심정을 다스리는 초월적인 예수의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선포한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가는 의미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라고 선포하고 지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나 고대했던 예수 재림을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이런 모든 것을 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의 회복, 지상에 머물렀던 미가엘의 사실에 관해 사회 철학적인 믿음의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던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과업을 원상태로 돌릴 그런 재성명(再聲明 다시 공개적으로 발표)이 있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예수에 대한 이런 이야기의 가르침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 설교를 거의 대신하여 들어앉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종교가, 예수가 인간의 최고 도덕적 사상과 영적 이상(理想)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미래 희망 – 영원한 생명과 조화시킨 그런 가르침 대신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마10:7, 막1:15, 눅21:31).

170:5.20 (1866.3) It is just because the gospel of Jesus was so many-sided that within a few centuries students of the records of his teachings became divided up into so many cults and sects. This pitiful subdivision of Christian believers results from failure to discern in the Master’s manifold teachings the divine oneness of his matchless life. But someday the true believers in Jesus will not be thus spiritually divided in their attitude before unbelievers. Always we may have diversity of intellectual comprehension and interpretation, even varying degrees of socialization, but lack of spiritual brotherhood is both inexcusable and reprehensible. 단지 예수의 복음이 너무 다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몇 세기 만에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연구자들은 너무 많은 종파와 교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런 가엾은 분열은 주님의 다양한 가르침에서 그의 비길 데 없는 생애의 신적 단일성을 분별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의 참된 신자들은 불신자들 앞에서 그 태도가 이렇게 영적으로 나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적 이해와 해석의 다양성, 사회화의 정도까지 다양할 수도 있지만, 영적 형제 공동체성의 부족은 변명할 수 없고 괘씸한 것입니다.

170:5.21 (1866.4) Mistake not! there is in the teachings of Jesus an eternal nature which will not permit them forever to remain unfruitful in the hearts of thinking men. The kingdom as Jesus conceived it has to a large extent failed on earth; for the time being, an outward church has taken its place; but you should comprehend that this church is only the larval stage of the thwarted spiritual kingdom, which will carry it through this material age and over into a more spiritual dispensation where the Master’s teachings may enjoy a fuller opportunity for development. Thus does the so-called Christian church become the cocoon in which the kingdom of Jesus’ concept now slumbers. The kingdom of the divine brotherhood is still alive and will eventually and certainly come forth from this long submergence, just as surely as the butterfly eventually emerges as the beautiful unfolding of its less attractive creature of metamorphic development. 실수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에는 분별 있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언제까지나 결실하지 못한 채 남아있도록 놔두지 않을 영원한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해 낸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서 대부분 사라져갔고 당분간 표면에 나타난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 교회가 방해받은 영적 하느님 나라의 유충기(幼蟲期 애벌레 단계)일 뿐이며, 교회는 방해받은 영적 하느님 나라를 싣고 이런 물질 시대를 거쳐 주님의 가르침이 더 충만한 발전 기회를 누릴 수 있는 더 영적인 섭리(신의 결정) 시대로 치닫도록 운반할(옮겨 나를)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위 기독교 교회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이 지금 깜박 졸고 있는 고치가 됩니다. 신적 형제 공동체의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나비가 변태(變態 형태가 변함) 발달의 매력적이지 않은 생물로부터 결국 아름답게 펼치며 벗어나듯이, 신적 형제 공동체의 하느님 나라는 이런 오랜 침잠(沈潛 가라앉아 숨은 상태)에서 결국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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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1 On the Way to Jerusalem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Paper 171

On the Way to Jerusalem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promise me that these my sons shall have honor…” “저의 이 아들들이 영예를 얻을 것이라고 제게 약속하소서…”
1. The Departure from Pella 펠라 출발
David Zebedee’s later life 다윗 세베대의 노후 생활
Antioch and Philadelphia 안디옥과 필라델피아
2. On Counting the Cost 비용 계산하기
3. The Perean Tour 페레아 여행
Farewell to Abner 아브너에게 작별 인사
4. Teaching at Livias 리비아스에서 가르침
Peter and Simon and the 100 swords 베드로와 시몬과 100자루의 칼
Warning of the friendly Pharisees 우호적인 바리새인들의 경고
5. The Blind Man at Jericho 여리고의 시각 장애인
6. The Visit to Zaccheus 삭개오 방문
7. “As Jesus Passed By” “예수께서 지나가시면서”
8. Parable of the Pounds 므나(파운드)의 비유(
Nathaniel’s interpretation of the parable 나다니엘의 비유 해석

240204 섬기러 오신 사람의 아들 마20:20-28a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171:0.1 (1867.1) THE day after the memorable sermon on “The Kingdom of Heaven,” Jesus announced that on the following day he and the apostles would depart for the Passover at Jerusalem, visiting numerous cities in southern Perea on the way. “하늘나라”의 인상(印象) 짙은 설교를 한 다음 날(AD30 3. 12. 일), 예수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이튿날 출발할 것이며, 도중에 남부 페레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71:0.2 (1867.2) The address on the kingdom and the announcement that he was going to the Passover set all his followers to thinking that he was going up to Jerusalem to inaugurate the temporal kingdom of Jewish supremacy. No matter what Jesus said about the nonmaterial character of the kingdom, he could not wholly remove from the minds of his Jewish hearers the idea that the Messiah was to establish some kind of nationalistic government with headquarters at Jerusalem.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연설과 그가 유월절에 가신다는 발표로 인해 그의 모든 추종자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이 다스리는 현세적 나라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非)물질적 특성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든, 그는 자신의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에서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일종의 민족주의 정부를 설립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171:0.3 (1867.3) What Jesus said in his Sabbath sermon only tended to confuse the majority of his followers; very few were enlightened by the Master’s discourse. The leaders understood something of his teachings regarding the inner kingdom,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you,” but they also knew that he had spoken about another and future kingdom, and it was this kingdom they believed he was now going up to Jerusalem to establish. When they were disappointed in this expectation, when he was rejected by the Jews, and later on, when Jerusalem was literally destroyed, they still clung to this hope, sincerely believing that the Master would soon return to the world in great power and majestic glory to establish the promised kingdom. 예수께서 안식일(AD30, 3. 11. 토) 설교에서 하신 말씀은 그의 추종자 대부분을 혼동시키기 쉬울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강연으로 깨우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내적인 하느님 나라, 즉 “너희 안(심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눅17:21b)”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알아들었지만, 그들도 그가 말했던 또 다른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았고, 그가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기대가 어긋나, 유대인들이 그를 버렸고, 나중에 예루살렘이 글자 그대로 궤멸해버렸을 때, 그들은 여전히 이런 희망에 매달려, 주께서 곧 큰 권능과 위엄 있는 영광으로 세상에 돌아와 약속된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171:0.4 (1867.4) It was on this Sunday afternoon that Salome the mother of James and John Zebedee came to Jesus with her two apostle sons and, in the manner of approaching an Oriental potentate, sought to have Jesus promise in advance to grant whatever request she might make. But the Master would not promise; instead, he asked her,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Then answered Salome: “Master, now that you are going up to Jerusalem to establish the kingdom, I would ask you in advance to promise me that these my sons shall have honor with you, the one to sit on your right hand and the other to sit on your left hand in your kingdom.” 이 일요일(AD30 3.12) 오후에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의 어머니 살로메가 자신의 두 사도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동방의 군주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어떤 요청이든 들어준다고 미리 약속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그녀에게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살로메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이제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이니, 저의 이 아들들이 당신과 함께 영예를 얻어,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당신 우편에 다른 하나는 당신 좌편에 앉을 것을 저에게 미리 약속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마20:20-21, 막10:35-37).”

171:0.5 (1867.5) When Jesus heard Salome’s request, he said: “Woman, you know not what you ask.” And then, looking straight into the eyes of the two honor-seeking apostles, he said: “Because I have long known and loved you; because I have even lived in your mother’s house; because Andrew has assigned you to be with me at all times; therefore do you permit your mother to come to me secretly, making this unseemly request. But let me ask you: Are you able to drink the cup I am about to drink?” And without a moment for thought, James and John answered, “Yes, Master, we are able.” Said Jesus: “I am saddened that you know not why we go up to Jerusalem; I am grieved that you understand not the nature of my kingdom; I am disappointed that you bring your mother to make this request of me; but I know you love me in your hearts; therefore I declare that you shall indeed drink of my cup of bitterness and share in my humiliation, but to sit on my right hand and on my left hand is not mine to give. Such honors are reserved for those who have been designated by my Father.” 예수께서 살로메의 요청을 듣고, “여인이여, 너는 네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예를 구하는 두 사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오랫동안 알고 사랑했고, 내가 너희 어머니 집에서 살기도 했으며, 안드레가 너희에게 항상 나와 함께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너희 어머니가 몰래 내게 와서 이런 부당한 요청을 하도록 너희가 허용하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묻겠노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생각할 틈도 없이 야고보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왜 올라가는지 너희가 알지 못해서 내가 슬퍼하노라. 너희가 내 나라의 본성을 알아듣지 못해서 내 마음이 아프구나. 너희가 너희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내게 이런 요청을 하니 내가 실망스럽구나. 그러나 너희가 너희 심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알기에, 너희가 정말로 나의 쓴잔을 마시고 나의 굴욕을 함께 나눌 것이나, 내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님을 내가 선언하노라. 그런 영예는 내 아버지가 지정한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느니라(마20:22-23, 막10:38-40).

171:0.6 (1868.1) By this time someone had carried word of this conference to Peter and the other apostles, and they were highly indignant that James and John would seek to be preferred before them, and that they would secretly go with their mother to make such a request. When they fell to arguing among themselves, Jesus called them all together and said: “You well understand how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ir subjects, and how those who are great exercise authority. But it shall not be so in the kingdom of heaven. Whosoever would be great among you, let him first become your servant. He who would be first in the kingdom, let him become your minister. I declare to you that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to but to minister; and I now go up to Jerusalem to lay down my life in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and in the service of my brethren.” When the apostles heard these words, they withdrew by themselves to pray. That evening, in response to the labors of Peter, James and John made suitable apologies to the ten and were restored to the good graces of their brethren. 이 무렵 누군가가 이 회의 소식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고,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앞서 뽑혀 쓰이려 하고,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몰래 가서 그런 요청을 하려 한 것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저희끼리 다투기 시작하자, 예수께서 그들 모두 불러 모아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방인 통치자들이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리는지, 그리고 큰 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지 잘 알고 있느니라.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면 그는 먼저 너희 봉사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단언하노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왔느니라. 나는 이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내 형제들을 섬기는 일에 내 목숨을 버리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라.” 사도들은 이런 말씀을 듣자, 자기들끼리 물러나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 베드로의 수고에 응하여, 야고보와 요한이 열 사도에게 적절히 사과했고, 형제들의 선한 온정으로 되돌아갔습니다(마20:24-28a, 막10:41-45a).

171:0.7 (1868.2) In asking for places on the right hand and on the left hand of Jesus at Jerusalem, the sons of Zebedee little realized that in less than one month their beloved teacher would be hanging on a Roman cross with a dying thief on one side and another transgressor on the other side. And their mother, who was present at the crucifixion, well remembered the foolish request she had made of Jesus at Pella regarding the honors she so unwisely sought for her apostle sons.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요청하면서, 한 달도 안 되어, 자신들이 사랑하는 선생이 한쪽에는 죽어가는 도둑과 다른 쪽에는 또 다른 죄인과 함께 로마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그들의 어머니는 펠라에서 예수께 자기 사도 아들들을 위해 그렇게 분별없이 구했던 영예에 관한 어리석은 간청을 곰곰이 떠올렸습니다.

1. The Departure from Pella 펠라 출발

240211 안디옥과 필라델피아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71:1.1 (1868.3) On the forenoon of Monday, March 13, Jesus and his twelve apostles took final leave of the Pella encampment, starting south on their tour of the cities of southern Perea, where Abner’s associates were at work. They spent more than two weeks visiting among the seventy and then went directly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3월 13일 월요일 오전에, 예수와 그의 열두 사도는 드디어 펠라 야영지를 떠나 아브너의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남부 페레아 도시를 둘러보려고 남쪽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2주가 넘게 70인 사이에서 보낸 후 유월절을 보내려고 바로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171:1.2 (1868.4) When the Master left Pella, the disciples encamped with the apostles, about one thousand in number, followed after him. About one half of this group left him at the Jordan ford on the road to Jericho when they learned he was going over to Heshbon, and after he had preached the sermon on “Counting the Cost.” They went on up to Jerusalem, while the other half followed him for two weeks, visiting the towns in southern Perea. 주께서 펠라를 떠날 때, 사도들과 야영했던 거의 1천 명의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무리 중 거의 절반이 여리고 길에 있는 요단 여울에서, 그가 헤스본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비용 계산”에 대해 설교한 후에 그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절반은 2주간 그의 뒤를 따라 남부 페레아의 읍내들을 방문했습니다.

171:1.3 (1868.5) In a general way, most of Jesus’ immediate followers understood that the camp at Pella had been abandoned, but they really thought this indicated that their Master at last intended to go to Jerusalem and lay claim to David’s throne. A large majority of his followers never were able to grasp any other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no matter what he taught them, they would not give up this Jewish idea of the kingdom. 대체로 예수의 직계 추종자 중 대다수는 펠라에서 야영을 그만두고 떠나는 것을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것은 그들의 주(主)가 결국 예루살렘에 가서 다윗의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표시로 사실 생각했습니다. 그의 추종자 중 대다수는 다른 어떤 하늘나라 개념도 결코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런 유대인의 생각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171:1.4 (1868.6) Acting on the instructions of the Apostle Andrew, David Zebedee closed the visitors’ camp at Pella on Wednesday, March 15. At this time almost four thousand visitors were in residence, and this does not include the one thousand and more persons who sojourned with the apostles at what was known as the teachers’ camp, and who went south with Jesus and the twelve. Much as David disliked to do it, he sold the entire equipment to numerous buyers and proceeded with the funds to Jerusalem, subsequently turning the money over to Judas Iscariot. 사도 안드레의 지시에 따라, 다윗 세베대는 3월 15일 수요일에, 펠라에서 방문자들의 야영지를 폐쇄했습니다. 이때는 거의 4,000명의 방문자가 숙식 중이었는데, 여기에는 사도들과 함께 선생들의 야영지로 알려진 곳에 머물다가 예수 및 열두 사도와 함께 남쪽으로 간 1,000명 이상의 사람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기가 너무 싫었지만 여러 구매자에게 장비 전체를 팔아 예루살렘으로 기금을 가져가서 나중에 그 돈을 가롯 유다에게 넘겼습니다.

171:1.5 (1869.1) David was present in Jerusalem during the tragic last week, taking his mother back with him to Bethsaida after the crucifixion. While awaiting Jesus and the apostles, David stopped with Lazarus at Bethany and became tremendously agitated by the manner in which the Pharisees had begun to persecute and harass him since his resurrection. Andrew had directed David to discontinue the messenger service; and this was construed by all as an indication of the early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at Jerusalem. David found himself without a job, and he had about decided to become the self-appointed defender of Lazarus when presently the object of his indignant solicitude fled in haste to Philadelphia. Accordingly, sometime after the resurrection and also after the death of his mother, David betook himself to Philadelphia, having first assisted Martha and Mary in disposing of their real estate; and there, in association with Abner and Lazarus, he spent the remainder of his life, becoming the financial overseer of all those large interests of the kingdom which had their center at Philadelphia during the lifetime of Abner. 다윗은, 십자가 처형 후 벳새다로 자기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던, 비극적인 마지막 주간(AD30. 4.2일~8토)에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수와 사도들을 기다리면서 다윗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집에 묵었는데 나사로의 부활 이후 바리새인들이 그를 학대하고 괴롭히기 시작한 방식에 엄청나게 동요되었습니다. 안드레가 다윗에게 메신저 봉사를 중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두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하느님 나라가 머지않아 설립되는 표시로 해석했습니다. 다윗은 할 일이 없어졌고, 곧 자신이 분개한 염려의 대상이 필라델피아로 서둘러 도피하자, 그는 자칭 나사로의 옹호자가 되기로 거의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후 언젠가, 자기 어머니도 돌아가신 후, 다윗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를 도와 그들의 부동산을 처분하고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아브너 및 나사로와 함께, 아브너의 평생에 필라델피아에 중심을 둔 하느님 나라의 그렇게 많은 모든 이익의 재정 관리자가 되어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171:1.6 (1869.2) Within a short time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tioch became the headquarters of Pauline Christianity, while Philadelphia remained the center of the Abnerian kingdom of heaven. From Antioch the Pauline version of the teachings of Jesus and about Jesus spread to all the Western world; from Philadelphia the missionaries of the Abnerian version of the kingdom of heaven spread throughout Mesopotamia and Arabia until the later times when these uncompromising emissaries of the teachings of Jesus were overwhelmed by the sudden rise of Islam. 예루살렘 멸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디옥은 바울 기독교의 본부가 되었고, 반면에 필라델피아는 아브너의 하늘나라 중심지로 남았습니다. 안디옥에서 바울판 예수의 가르침 및 예수에 대한 가르침이 모든 서양에 퍼졌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아브너판 하늘나라의 선교사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전역으로 퍼졌고, 나중에 이렇게 타협하지 않는, 예수 가르침의 특사(特使 특별 임무의 사절)들이 이슬람의 급부상(急浮上)으로 압도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 On Counting the Cost 비용 계산하기

240218 비용 계산과 자발성 눅14:25-26, 28-35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171:2.1 (1869.3) When Jesus and the company of almost one thousand followers arrived at the Bethany ford of the Jordan sometimes called Bethabara, his disciples began to realize that he was not going directly to Jerusalem. While they hesitated and debated among themselves, Jesus climbed upon a huge stone and delivered that discourse which has become known as “Counting the Cost.” The Master said: 예수와 거의 1천 명의 추종자 일행이 이전에 베다바라로 불렀던 요단강의 베다니 여울에 도착하자(요1:28), 그의 제자들은 그가 맞바로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주저하며 저희끼리 논의할 때, 예수께서 큰 바위에 올라가 “비용 계산”으로 알려진 강연을 했습니다. 주(主)께서 말했습니다.

171:2.2 (1869.4) “You who would follow after me from this time on, must be willing to pay the price of wholehearted dedication to the doing of my Father’s will. If you would be my disciples, you must be willing to forsake father, mother, wife, children, brothers, and sisters. If any one of you would now be my disciple, you must be willing to give up even your life just as the Son of Man is about to offer up his life for the completion of the mission of doing the Father’s will on earth and in the flesh. “너희가 이제부터 나를 따라오려면,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전심으로 헌신하는 대가를 자발적으로 치러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너희는 부모, 아내, 자녀와 형제자매들을 자진해서 버려야만 하느니라. 너희 중 누구라도 지금 내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지상에서 육신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명을 완수하려고 자기 목숨을 이제 막 바치기 직전처럼 너희 생명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하느니라(마10:37, 눅14:25-26).

171:2.3 (1869.5) “If you are not willing to pay the full price, you can hardly be my disciple. Before you go further, you should each sit down and count the cost of being my disciple. Which one of you would undertake to build a watchtower on your lands without first sitting down to count up the cost to see whether you had money enough to complete it? If you fail thus to reckon the cost, after you have laid the foundation, you may discover that you are unable to finish that which you have begun, and therefore will all your neighbors mock you, saying, ‘Behold, this man began to build but was unable to finish his work.’ Again, what king, when he prepares to make war upon another king, does not first sit down and take counsel as to whether he will be able, with ten thousand men, to meet him who comes against him with twenty thousand? If the king cannot afford to meet his enemy because he is unprepared, he sends an embassy to this other king, even when he is yet a great way off, asking for terms of peace. “너희가 자발적으로 충분히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거의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너희가 더 나아가기 전에,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느니라. 너희 중 누가 먼저 앉아서 망대(望臺)를 완공할 정도로 충분히 돈이 있는지 알려고 비용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너희 중 누가 자기 땅에 망대(望臺)를 세우려고 손대겠느냐? 너희가 끝내 이렇게 비용을 낱낱이 계산하지 않고 만다면, 너희가 기초 공사를 한 후, 너희가 시작한 일을 마칠 수 없음을 알게 되어, 너희 모든 이웃이 ‘보라, 이 사람이 건축에 손댔지만 자기 일을 마칠 수 없었네.’라고 말하며 너희를 조롱하리라. 한편,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하려고 준비할 때, 먼저 앉아서 1만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군사로 자신을 대적해 오는 그를 대처할 수 있을지에 관해 상의하지 않겠느냐? 왕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자기 적을 맞설 수 없다면, 이런 다른 왕이 아직 상당히 멀리 있어도, 그에게 사절단을 보내 평화 협정을 요청하느니라(눅14:28-32).

171:2.4 (1870.1) “Now, then, must each of you sit down and count the cost of being my disciple. From now on you will not be able to follow after us, listening to the teaching and beholding the works; you will be required to face bitter persecutions and to bear witness for this gospel in the face of crushing disappointment. If you are unwilling to renounce all that you are and to dedicate all that you have, then are you unworthy to be my disciple. If you have already conquered yourself within your own heart, you need have no fear of that outward victory which you must presently gain when the Son of Man is rejected by the chief priests and the Sadducees and is given into the hands of mocking unbelievers. 그러니 이제 너희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너희는 가르침을 듣고 하는 일들을 보면서 우리를 따라올 수 없으리라. 너희는 호된 박해에 직면하여, 결정적인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증언해야 하리라. 너희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마지못해서 바친다면, 내 제자가 되기에 어울리지 않느니라. 너희가 너희 자신의 심정에서 이미 자신을 이겼다면,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버려서 조롱하는 불신자들의 손에 넘길 때 너희가 당장 얻고 싶은 그런 외적 승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눅14:33).

171:2.5 (1870.2) “Now should you examine yourself to find out your motive for being my disciple. If you seek honor and glory, if you are worldly minded, you are like the salt when it has lost its savor. And when that which is valued for its saltiness has lost its savor, wherewith shall it be seasoned? Such a condiment is useless; it is fit only to be cast out among the refuse. Now have I warned you to turn back to your homes in peace if you are not willing to drink with me the cup which is being prepared. Again and again have I told you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but you will not believe me.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what I say.” “이제 너희는 내 제자가 되려는 너희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을 살펴야 하느니라. 너희가 명예와 영광을 구하고, 너희가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너희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으니라. 짠맛의 가치를 가진 그것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맛을 내겠느냐? 그런 조미료는 쓸모가 없어서 쓰레기로 내던지기에 딱 맞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였노니, 너희가 준비된 잔을 나와 함께 자진해서 마시지 않으려면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너희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리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마5:13, 막9:50a, 눅14:34-35).”

171:2.6 (1870.3) Immediately after speaking these words, Jesus, leading the twelve, started off on the way to Heshbon, followed by about five hundred. After a brief delay the other half of the multitude went on up to Jerusalem. His apostles, together with the leading disciples, thought much about these words, but still they clung to the belief that, after this brief period of adversity and trial, the kingdom would certainly be set up somewhat in accordance with their long-cherished hopes. 이 말씀을 마친 후 곧,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이끌고 헤스본으로 길을 가기 시작했고, 대략 500명이 따라갔습니다. 잠시 지체한 후, 무리 중 나머지 절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사도들은 주된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을 많이 생각했지만, 이 짧은 역경과 시련의 기간 후, 자신들이 오랫동안 품었던 기대대로 하느님 나라가 어느 정도 반드시 세워지리라는 믿음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습니다.

3. The Perean Tour 페레아 여행

240225 아브너에게 작별 인사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171:3.1 (1870.4) For more than two weeks Jesus and the twelve, followed by a crowd of several hundred disciples, journeyed about in southern Perea, visiting all of the towns wherein the seventy labored. Many gentiles lived in this region, and since few were going up to the Passover feast at Jerusalem, the messengers of the kingdom went right on with their work of teaching and preaching. 예수와 열두 사도 및 뒤좇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2주 이상 남부 페레아 부근을 여행하면서 70인 사도가 수고하는 모든 읍내를 방문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많은 이방인이 살았고, 예루살렘의 유월절 잔치에 거의 올라가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 메신저들은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신들의 일을 바로 계속했습니다.

171:3.2 (1870.5) Jesus met Abner at Heshbon, and Andrew directed that the labors of the seventy should not be interrupted by the Passover feast; Jesus advised that the messengers should go forward with their work in complete disregard of what was about to happen at Jerusalem. He also counseled Abner to permit the women’s corps, at least such as desired, to go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And this was the last time Abner ever saw Jesus in the flesh. His farewell to Abner was: “My son, I know you will be true to the kingdom, and I pray the Father to grant you wisdom that you may love and understand your brethren.” 예수는 헤스본에서 아브너를 만났고, 안드레는 70인 사도의 수고가 유월절 잔치로 인해 중도에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메신저들의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는 또한 여성단(團)만이라도 원하는 대로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가도록 용납하라고 아브너에게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너가 일찍이 예수를 육신으로 본 마지막 때였습니다. 아브너에게 했던 그의 작별 인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보게, 나는 네가 하느님 나라에 충실할 것을 알고 있으며, 아버지께서 네가 너희 형제들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네게 주시도록 내가 기도하노라.”

171:3.3 (1870.6) As they traveled from city to city, large numbers of their followers deserted to go on to Jerusalem so that, by the time Jesus started for the Passover, the number of those who followed along with him day by day had dwindled to less than two hundred. 그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니는 동안, 그들을 따르던 상당수가 예루살렘에 가려고 자리를 떠서, 예수께서 유월절을 위해 출발할 무렵, 매일 그와 함께 따르던 자들의 수(數)가 2백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171:3.4 (1871.1) The apostles understood that Jesus was going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They knew that the Sanhedrin had broadcast a message to all Israel that he had been condemned to die and directing that anyone knowing his whereabouts should inform the Sanhedrin; and yet, despite all this, they were not so alarmed as they had been when he had announced to them in Philadelphia that he was going to Bethany to see Lazarus. This change of attitude from that of intense fear to a state of hushed expectancy was mostly because of Lazarus’s resurrection. They had reached the conclusion that Jesus might, in an emergency, assert his divine power and put to shame his enemies. This hope, coupled with their more profound and mature faith in the spiritual supremacy of their Master, accounted for the outward courage displayed by his immediate followers, who now made ready to follow him into Jerusalem in the very face of the open declaration of the Sanhedrin that he must die. 사도들은 예수께서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이 온 이스라엘에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그의 소재를 아는 누구나 산헤드린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명령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필라델피아에서 자신들에게 나사로를 보러 베다니로 갈 것이라고 알렸을 때처럼 그렇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두려움에서 조용한 기대감으로 이렇게 바뀐 태도는 주로 나사로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비상시에 자신의 신적 권능을 발휘하여 그의 대적들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희망은, 그들 주(主)님의 영적 패권(霸權)에 대한 더 심오한 자신들의 성숙한 신앙과 결부되어, 그가 죽어야 한다는 산헤드린의 공개 선언에 직면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제 그를 따를 준비를 마친 그의 직계 추종자들이 보여준 표면적 용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71:3.5 (1871.2) The majority of the apostles and many of his inner disciples did not believe it possible for Jesus to die; they, believing that he wa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regarded him as immortal and already triumphant over death. 대부분의 사도와 그와 친한 여러 제자는 예수가 죽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요11:25)”이라고 믿어서, 그를 이미 죽음을 이긴 불사신(不死身)으로 여겼습니다.

4. Teaching at Livias 리비아스에서 가르침

240303 변모 체험의 격려 눅13:31-35a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171:4.1 (1871.3) On Wednesday evening, March 29, Jesus and his followers encamped at Livias on their way to Jerusalem, after having completed their tour of the cities of southern Perea. It was during this night at Livias that Simon Zelotes and Simon Peter, having conspired to have delivered into their hands at this place more than one hundred swords, received and distributed these arms to all who would accept them and wear them concealed beneath their cloaks. Simon Peter was still wearing his sword on the night of the Master’s betrayal in the garden. (AD30) 3월 29일 수요일 저녁에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남부 페레아 도시들을 순회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리비아스에서 야영했습니다. 이날 밤 이곳 리비아스에서 100 자루 이상의 칼을 자기들 손에 전달받기로 공모한, 시몬 젤로떼와 시몬 베드로는 이 무기들을 받아서, 그것들을 받아서 자신들 외투 밑에 몰래 착용하려는 모두에게 분배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원에서 주를 배반하던 그날 밤에도 여전히 자기 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71:4.2 (1871.4) Early on Thursday morning before the others were awake, Jesus called Andrew and said: “Awaken your brethren! I have something to say to them.” Jesus knew about the swords and which of his apostles had received and were wearing these weapons, but he never disclosed to them that he knew such things. When Andrew had aroused his associates, and they had assembled off by themselves, Jesus said: “My children, you have been with me a long while, and I have taught you much that is needful for this time, but I would now warn you not to put your trust in the uncertainties of the flesh nor in the frailties of man’s defense against the trials and testing which lie ahead of us. I have called you apart here by yourselves that I may once more plainly tell you that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where you know the Son of Man has already been condemned to death. Again am I telling you that the Son of Man will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the chief priests and the religious rulers; that they will condemn him and then deliver him into the hands of the gentiles. And so will they mock the Son of Man, even spit upon him and scourge him, and they will deliver him up to death. And when they kill the Son of Man, be not dismayed, for I declare that on the third day he shall rise. Take heed to yourselves and remember that I have forewarned you.” 목요일(AD30. 3.30) 이른 아침, 다른 제자들이 깨기 전에 예수께서 안드레를 불러 말했습니다. “네 형제들을 깨우라! 내가 그들에게 이를 말이 있느니라.” 예수는 칼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자기 사도 중 누가 이런 무기를 받아서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일들을 알고 있다고 그들에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안드레가 자기 동료를 깨워서, 그들끼리 모였을 때,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 자녀들아, 너희가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고, 이때를 위해 필요한 것을 너희에게 많이 가르쳤지만, 나는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시련과 시험에 맞서 불확실한 육신과 인간의 덧없는 방어를 신뢰하지 말라고 너희에게 경고하노라. 내가 너희를 여기로 따로 부른 것은, 너희가 아는 대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게 이미 사형 선고를 내린, 예루살렘으로 우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내가 한 번 더 분명히 너희에게 이르고자 함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다시 이르노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대제사장들과 종교 통치자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 그들이 그에게 형을 선고한 후 이방인들의 손에 넘길 것이니라. 그래서 그들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조롱하고 침까지 뱉고 채찍질할 것이며 그들이 그를 죽게 하리라. 그리고 그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죽일 때, 낙담하지 말지니, 제 삼일에 그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가 선언하기 때문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고,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한 것을 기억하라(마16:21, 17:22b-23, 막8:31, 9:31, 10:32b-34, 눅9:22, 44, 18:31-33).”

171:4.3 (1871.5) Again were the apostles amazed, stunned; but they could not bring themselves to regard his words as literal; they could not comprehend that the Master meant just what he said. They were so blinded by their persistent belief in the temporal kingdom on earth, with headquarters at Jerusalem, that they simply could not — would not — permit themselves to accept Jesus’ words as literal. They pondered all that day as to what the Master could mean by such strange pronouncements. But none of them dared to ask him a question concerning these statements. Not until after his death did these bewildered apostles wake up to the realization that the Master had spoken to them plainly and directly in anticipation of his crucifixion. 사도들은 또 깜짝 놀라 아찔했지만, 그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은 주께서 말한 그대로 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본부가 있는 지상의 세속적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으로 눈이 멀어서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날 온종일 주께서 무슨 의도로 그렇게 이상하게 선언했는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말씀에 관하여 감히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당황했던 사도들은 그가 돌아가신 후에 비로소 주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을 분명히 내다보고 직접 자신들에게 말했던 실상을 알아차렸습니다(막9:32, 눅9:45, 18:34).

171:4.4 (1872.1) It was here at Livias, just after breakfast, that certain friendly Pharisees came to Jesus and said: “Flee in haste from these parts, for Herod, just as he sought John, now seeks to kill you. He fears an uprising of the people and has decided to kill you. We bring you this warning that you may escape.” 아침 식사 직후에, 여기 리비아스에서 우호적인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서둘러 피하십시오, 헤롯이 요한을 찾았듯이 당신을 죽이려고 지금 찾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당신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벗어나도록 이렇게 당신에게 경고합니다(눅13:31).

171:4.5 (1872.2) And this was partly true. The resurrection of Lazarus frightened and alarmed Herod, and knowing that the Sanhedrin had dared to condemn Jesus, even in advance of a trial, Herod made up his mind either to kill Jesus or to drive him out of his domains. He really desired to do the latter since he so feared him that he hoped he would not be compelled to execute him.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습니다. 헤롯은 나사로의 부활로 두려워 놀랐으며, 산헤드린이 재판도 하기 전에 감히 예수에게 형을 선고한 사실을 알고, 헤롯은 예수를 죽이거나 자기 영토에서 그를 몰아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를 두려워해서 그를 처형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후자를 정말로 원했습니다.

171:4.6 (1872.3) When Jesus heard what the Pharisees had to say, he replied: “I well know about Herod and his fear of this gospel of the kingdom. But, mistake not, he would much prefer that the Son of Man go up to Jerusalem to suffer and die at the hands of the chief priests; he is not anxious, having stained his hands with the blood of John, to become responsible for the death of the Son of Man. Go you and tell that fox that the Son of Man preaches in Perea today, tomorrow goes into Judea, and after a few days, will be perfected in his mission on earth and prepared to ascend to the Father.”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헤롯과 이 하느님 나라 복음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느니라. 그러나 잘못 생각하지 말지니, 그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생하고 대제사장들의 손에 죽는 것을 훨씬 좋아하느니라. 그는 요한의 피로 자기 손을 더럽혀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지 염려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가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오늘은 페레아에서 설교하고 내일은 유대로 들어가, 며칠 후 지상에서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 올라가려고 준비될 것이라고 그 여우에게 전하라(눅13:32).”

171:4.7 (1872.4) Then turning to his apostles, Jesus said: “From olden times the prophets have perished in Jerusalem, and it is only befitting that the Son of Man should go up to the city of the Father’s house to be offered up as the price of human bigotry and as the result of religious prejudice and spiritual blindness. O Jerusalem, Jerusalem, which kills the prophets and stones the teachers of truth! How often would I have gathered your children together even as a hen gathers her own brood under her wings, but you would not let me do it! Behold, your house is about to be left to you desolate! You will many times desire to see me, but you shall not. You will then seek but not find me.” And when he had spoken, he turned to those around him and said: “Nevertheless, let us go up to Jerusalem to attend the Passover and do that which becomes us in fulfilling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그런 다음 자기 사도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옛날부터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죽었으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아버지 집의 도시로 올라가 인간 고집불통의 값으로, 그리고 종교적 편견 및 영적 시각 상실증의 결과로 바쳐지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라.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진리의 선생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구나! 암탉이 날개 아래 자기 병아리들을 모으듯이 얼마나 자주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했으나, 내가 그렇게 하도록 너희가 놔두지 않았도다! 보라, 너의 집이 곧 황폐하게 남겨지리라! 네가 여러 번 나를 보고 싶어 할 것이나, 너희는 보지 못할 것이라. 너희가 그때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라.” 그가 말씀하신 후, 그가 자기 주변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에 참석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우리가 되도록 그렇게 하자(마23:37-38, 눅13:33-35a).”

171:4.8 (1872.5) It was a confused and bewildered group of believers who this day followed Jesus into Jericho. The apostles could discern only the certain note of final triumph in Jesus’ declarations regarding the kingdom; they just could not bring themselves to that place where they were willing to grasp the warnings of the impending setback. When Jesus spoke of “rising on the third day,” they seized upon this statement as signifying a sure triumph of the kingdom immediately following an unpleasant preliminary skirmish with the Jewish religious leaders. The “third day” was a common Jewish expression signifying “presently” or “soon thereafter.” When Jesus spoke of “rising,” they thought he referred to the “rising of the kingdom.” 이날(AD30. 3.30 목) 예수를 따라 여리고에 들어간 신자 일행은 당황하여 어리둥절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언에서 최종 승리의 어떤 낌새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박한 좌절의 경고를 기꺼이 파악하려는 데까지 바로 나아갈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제 삼일에 일어난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이 말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불쾌한 예비 논쟁 직후에 하느님 나라가 확실히 승리하는 뜻으로 붙잡았습니다. “제 삼일”은 “이내” 또는 “얼마 있다 곧”을 나타내는, 흔한 유대인들의 말투였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난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가 “하느님 나라가 일어난다”라는 말로 생각했습니다(마16:21, 17:23, 20:19, 막8:31, 9:31, 10:34, 눅9:22, 18:33, 24:7, 46).

171:4.9 (1872.6) Jesus had been accepted by these believers as the Messiah, and the Jews knew little or nothing about a suffering Messiah. They did not understand that Jesus was to accomplish many things by his death which could never have been achieved by his life. While it was the resurrection of Lazarus that nerved the apostles to enter Jerusalem, it was the memory of the transfiguration that sustained the Master at this trying period of his bestowal. 이런 신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해 조금도 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많은 것을 그의 죽음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나사로의 부활로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에 들어갔지만, 이렇게 자신을 증여하는, 견디기 어려운 시기에 주님을 격려했던 것은 변모(變貌)의 기억이었습니다.

5. The Blind Man at Jericho 여리고의 시각 장애인

240310 바디매오의 신앙 막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171:5.1 (1873.1) Late on the afternoon of Thursday, March 30, Jesus and his apostles, at the head of a band of about two hundred followers, approached the walls of Jericho. As they came near the gate of the city, they encountered a throng of beggars, among them one Bartimeus, an elderly man who had been blind from his youth. This blind beggar had heard much about Jesus and knew all about his healing of the blind Josiah at Jerusalem. He had not known of Jesus’ last visit to Jericho until he had gone on to Bethany. Bartimeus had resolved that he would never again allow Jesus to visit Jericho without appealing to him for the restoration of his sight. (AD30) 3월 30일 목요일 늦은 오후에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약 200명의 추종자 무리의 선두에서, 여리고 성곽에 가까이 갔습니다. 그들이 성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거지 무리와 마주쳤는데, 그중에 젊어서부터 보지 못하는 노인,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이 눈먼 거지는 예수에 대해 많이 들었고, 예루살렘에서 그가 눈먼 요시야를 치유한 것에 대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베다니까지 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디매오는 자기 시력의 회복을 위해 예수께 호소하지 않고는 예수께서 다시 여리고를 방문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마20:29, 막10:46, 눅18:35).

171:5.2 (1873.2) News of Jesus’ approach had been heralded throughout Jericho, and hundreds of the inhabitants flocked forth to meet him. When this great crowd came back escorting the Master into the city, Bartimeus, hearing the heavy tramping of the multitude, knew that something unusual was happening, and so he asked those standing near him what was going on. And one of the beggars replied, “Jesus of Nazareth is passing by.” When Bartimeus heard that Jesus was near, he lifted up his voice and began to cry aloud, “Jesus, Jesus, have mercy upon me!” And as he continued to cry louder and louder, some of those near to Jesus went over and rebuked him, requesting him to hold his peace; but it was of no avail; he cried only the more and the louder. 예수께서 다가오신다는 소식이 여리고에 널리 알려지자, 주민 수백 명이 그를 만나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인파가 주님을 호위(護衛)하여 도시 안으로 다시 돌아오자, 바디매오는 쿵쿵거리는 군중의 격렬한 발소리를 듣고,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서, 자기 근처에 서 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거지 중 하나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말을 듣자, 그는 자기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점점 더 큰 소리로 계속 외치자, 예수 옆에 있는 자 중 일부가 그에게 가서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더욱더 크게 외칠 뿐이었습니다(마20:30-31, 막10:47-48, 눅18:36-39).

171:5.3 (1873.3) When Jesus heard the blind man crying out, he stood still. And when he saw him, he said to his friends, “Bring the man to me.” And then they went over to Bartimeus, saying: “Be of good cheer; come with us, for the Master calls for you.” When Bartimeus heard these words, he threw aside his cloak, springing forward toward the center of the road, while those near by guided him to Jesus. Addressing Bartimeus, Jesus said: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Then answered the blind man, “I would have my sight restored.” And when Jesus heard this request and saw his faith, he said: “You shall receive your sight;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Immediately he received his sight, and he remained near Jesus, glorifying God, until the Master started on the next day for Jerusalem, and then he went before the multitude declaring to all how his sight had been restored in Jericho. 예수께서 그 시각 장애인이 외침을 들었을 때, 그는 가만히 멈춰 섰습니다. 그가 그를 보시자,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데려오라.” 그러자 그들이 바디매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기운 내라, 주께서 너를 데려오라고 하시니 우리와 함께 가자.” 바디매오가 이 말을 듣자, 그는 자기 외투를 버리고, 길 한가운데로 튀어 나갔고, 동시에 바로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그를 예수께 인도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말을 걸며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뭘 하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 시각 장애인이 “저는 제 시력이 회복되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가 이 요청을 듣고 그의 신앙을 보시자, 그가 말했습니다. “네 신앙이 너를 낫게 했으니, 너는 네 시력을 받을 것이며, 네 길을 가라.” 즉시 그는 자기 시력을 받았고, 주께서 다음 날(AD30. 3. 31 금요일)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까지, 예수 가까이에 남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 다음에, 군중 앞에 가서 자기 시력이 여리고에서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모두에게 밝혔습니다(마20:32-34, 막10:49-52, 눅18:40-43).

6. The Visit to Zaccheus 삭개오 방문

240317 삭개오의 신앙 눅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71:6.1 (1873.4) When the Master’s procession entered Jericho, it was nearing sundown, and he was minded to abide there for the night. As Jesus passed by the customs house, Zaccheus the chief publican, or tax collector, happened to be present, and he much desired to see Jesus. This chief publican was very rich and had heard much about this prophet of Galilee. He had resolved that he would see what sort of a man Jesus was the next time he chanced to visit Jericho; accordingly, Zaccheus sought to press through the crowd, but it was too great, and being short of stature, he could not see over their heads. And so the chief publican followed on with the crowd until they came near the center of the city and not far from where he lived. When he saw that he would be unable to penetrate the crowd, and thinking that Jesus might be going right on through the city without stopping, he ran on ahead and climbed up into a sycamore tree whose spreading branches overhung the roadway. He knew that in this way he could obtain a good view of the Master as he passed by. And he was not disappointed, for, as Jesus passed by, he stopped and, looking up at Zaccheus, said: “Make haste, Zaccheus, and come down, for tonight I must abide at your house.” And when Zaccheus heard these astonishing words, he almost fell out of the tree in his haste to get down, and going up to Jesus, he expressed great joy that the Master should be willing to stop at his house. 주님의 행렬이 여리고에 들어갔을 때, 해질 즈음이었고, 그는 그날 밤(AD30.3.30 목)은 그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관 옆을 지나칠 때, 세리장(稅吏長), 즉 수세 관리(收稅官吏) 삭개오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고, 그는 예수를 몹시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 세리장(稅吏長)은 큰 부자였고, 갈릴리에서 온 이 선지자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쩌다 다음에 여리고를 방문하게 되면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군중들을 헤집어 밀어제치며 나아가려 했지만, 군중은 너무 많았고, 키가 작아서, 그는 그들의 머리 위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리장(稅吏長)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의 중심부 근처에 이르기까지 군중을 바싹 뒤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군중을 꿰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께서 멈추지 않고 그 도시를 지나서 똑바로 빠져나갈 것으로 생각하자, 그는 앞으로 계속 달려서, 넓은 길로 가지들이 쭉 뻗어 늘어뜨린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주님이 스쳐 지나갈 때 자신이 그를 잘 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께서 지나가다가 멈춰서 삭개오를 올려다보며 “삭개오야, 서둘러 내려오라, 내가 오늘 밤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구나.”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이런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서둘러 내려오다 나무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고, 예수께 가서, 주께서 기꺼이 자기 집에서 여장(旅裝)을 풀려고 하셔서 너무 기쁘다고 말로 표현했습니다(눅19:1-6).

171:6.2 (1874.1) They went at once to the home of Zaccheus, and those who lived in Jericho were much surprised that Jesus would consent to abide with the chief publican. Even while the Master and his apostles lingered with Zaccheus before the door of his house, one of the Jericho Pharisees, standing near by, said: “You see how this man has gone to lodge with a sinner, an apostate son of Abraham who is an extortioner and a robber of his own people.” And when Jesus heard this, he looked down at Zaccheus and smiled. Then Zaccheus stood upon a stool and said: “Men of Jericho, hear me! I may be a publican and a sinner, but the great Teacher has come to abide in my house; and before he goes in, I tell you that I am going to bestow one half of all my goods upon the poor, and beginning tomorrow, if I have wrongfully exacted aught from any man, I will restore fourfold. I am going to seek salvation with all my heart and learn to do righteousness in the sight of God.” 그들은 바로 삭개오의 집으로 갔는데, 여리고에 살던 자들은 예수께서 세리장(稅吏長)의 집에 있기로 허락하셔서 매우 놀랐습니다. 주님과 그 사도들이 삭개오와 함께 그의 집 문 앞에 머물러 있는 중에도, 여리고의 바리새인 중 하나가 곁에 있다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죄인, 동족을 착취하는 강도, 아브라함의 배교한 아들과 함께 묵으러 갔는지 보라.” 예수께서 이 말을 듣자, 그는 삭개오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발판에 올라서서 말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세리이며 죄인이지만, 위대한 선생께서 내 집에 거하러 오셨느니라. 그가 들어가기 전에, 내 모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내일부터는, 내가 어떤 이에게서 조금이라도 부당하게 거두었다면, 4배로 되돌려 드릴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 심정을 다해 구원을 바라며 하느님이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기를 배우겠습니다(눅19:7-8).”

171:6.3 (1874.2) When Zaccheus had ceased speaking, Jesus said: “Today has salvation come to this home, and you have become indeed a son of Abraham.” And turning to the crowd assembled about them, Jesus said: “And marvel not at what I say nor take offense at what we do, for I have all along declared that the Son of Man has come to seek and to save that which is lost.” 삭개오가 말을 멈추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으며, 너는 실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었도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모여든 군중을 향해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놀라지 말고 우리가 하는 행동에 화내지 말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내가 내내 선언했기 때문이니라(눅19:9-10).”

171:6.4 (1874.3) They lodged with Zaccheus for the night. On the morrow they arose and made their way up the “road of robbers” to Bethany on their way to the Passover at Jerusalem. 그들은 그날 밤 삭개오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다음 날(AD30.3.31 금) 그들이 일어나 예루살렘의 유월절로 가는 길에 “강도들의 길”을 따라 베다니로 올라갔습니다.

7. “As Jesus Passed By””예수께서 지나가시면서”

240324 예수 제자의 길 행10:38b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171:7.1 (1874.4) Jesus spread good cheer everywhere he went. He was full of grace and truth. His associates never ceased to wonder at the gracious words that proceeded out of his mouth. You can cultivate gracefulness, but graciousness is the aroma of friendliness which emanates from a love-saturated soul. 예수는 어디를 가셔도 좋은 기운을 퍼뜨렸습니다. 그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경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기품(氣品 고상한 움직임)을 계발(啓發)할 수 있지만 정중(鄭重 점잖고 예의 있는 태도)함은 사랑에 흠뻑 적신 혼(魂)에서 발산하는 친절의 향내입니다(요1:14).

171:7.2 (1874.5) Goodness always compels respect, but when it is devoid of grace, it often repels affection. Goodness is universally attractive only when it is gracious. Goodness is effective only when it is attractive.선(善)은 언제나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그것이 은혜가 없으면, 그것은 종종 애정을 몰아냅니다. 선(善)은 정중할 때만 예외 없이 매력적입니다. 선(善)은 매력적일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171:7.3 (1874.6) Jesus really understood men; therefore could he manifest genuine sympathy and show sincere compassion. But he seldom indulged in pity. While his compassion was boundless, his sympathy was practical, personal, and constructive. Never did his familiarity with suffering breed indifference, and he was able to minister to distressed souls without increasing their self-pity. 예수는 정말로 사람들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심에서 우러난 공감을 표현하고, 진실한 연민(憐愍)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동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민(憐愍)은 한계가 없었지만, 그의 공감(共感)은 실질적이고, 개인적이며, 건설적이었습니다. 고통에 대한 친숙함으로 그는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았고,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혼(魂)들의 자기 연민을 키우지 않으면서 그들을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171:7.4 (1874.7) Jesus could help men so much because he loved them so sincerely. He truly loved each man, each woman, and each child. He could be such a true friend because of his remarkable insight — he knew so fully what was in the heart and in the mind of man. He was an interested and keen observer. He was an expert in the comprehension of human need, clever in detecting human longings.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 진실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토록 많이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각각의 남녀와 아이 하나하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통찰력 – 사람의 심정과 마음에 있는 것을 그토록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관심 있어 하는, 명민한 관찰자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필요를 터득한 숙달자였고, 인간의 갈망을 민첩하게 간파했습니다.

171:7.5 (1874.8) Jesus was never in a hurry. He had time to comfort his fellow men “as he passed by.” And he always made his friends feel at ease. He was a charming listener. He never engaged in the meddlesome probing of the souls of his associates. As he comforted hungry minds and ministered to thirsty souls, the recipients of his mercy did not so much feel that they were confessing to him as that they were conferring with him. They had unbounded confidence in him because they saw he had so much faith in them. 예수는 언제나 서두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면서” 자기 동료 인간들을 위로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자기 친구들이 마음을 놓도록 했습니다. 그는 귀 기울여 듣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료들의 혼(魂)들을 쓸데없이 참견하여 한 번도 캐어물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린 사람들을 위로하고 목마른 혼(魂)들을 돌볼 때, 그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에게 실토(實吐)한다기보다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그렇게 깊이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한없이 신뢰했습니다(막2:14a, 요9:1a).

171:7.6 (1875.1) He never seemed to be curious about people, and he never manifested a desire to direct, manage, or follow them up. He inspired profound self-confidence and robust courage in all who enjoyed his association. When he smiled on a man, that mortal experienced increased capacity for solving his manifold problems. 그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으며, 그는 그들에게 지시하고,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따라가려는 욕구를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즐겁게 사귀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자신감(自信感)과 강건한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가 한 사람에게 미소 지으면, 그 사람은 자기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증진되었습니다.

171:7.7 (1875.2) Jesus loved men so much and so wisely that he never hesitated to be severe with them when the occasion demanded such discipline. He frequently set out to help a person by asking for help. In this way he elicited interest, appealed to the better things in human nature.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아주 슬기롭게 사랑해서, 그들을 엄하게 바로잡아야 할 때 언제나 주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종 도움을 요청하여 사람을 도우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관심을 끌어내어, 인간 본성의 더 나은 점에 호소했습니다.

171:7.8 (1875.3) The Master could discern saving faith in the gross superstition of the woman who sought healing by touching the hem of his garment. He was always ready and willing to stop a sermon or detain a multitude while he ministered to the needs of a single person, even to a little child. Great things happened not only because people had faith in Jesus, but also because Jesus had so much faith in them. 주님은 그의 옷자락을 만져 치유되려는 여인의 터무니없는 미신(迷信)에서 구원받는 신앙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단 한 사람, 심지어 어린아이의 필요를 보살피는 동안 설교를 멈추거나 군중을 붙잡아 둘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고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신뢰(信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그들을 아주 많이 신뢰(信賴)했기 때문에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AD29.3.22 화 152.0.2~3, 마9:20-22, 막5:25-34, 눅8:43-48).

171:7.9 (1875.4) Most of the really important things which Jesus said or did seemed to happen casually, “as he passed by.” There was so little of the professional, the well-planned, or the premeditated in the Master’s earthly ministry. He dispensed health and scattered happiness naturally and gracefully as he journeyed through life. It was literally true, “He went about doing good.” 예수께서 말하거나 행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무심코 “그가 지나가시면서” 일어난 듯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에는 전문적이고, 잘 계획되거나, 미리 계획된 것이 아주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인생 여정에, 꾸밈없이, 우아하게, 건강을 베풀고 행복을 확산시켰습니다. 말 그대로 “그는 두루 다니며 선을 행했습니다(행10:38).”

171:7.10 (1875.5) And it behooves the Master’s followers in all ages to learn to minister as “they pass by” — to do unselfish good as they go about their daily duties. 주님의 추종자들답게 모든 세대에 “그들이 지나가면서” 섬기기를 익혀서, 그들은 매일 맡은 일에 열중하면서 욕심 없이 선을 행해야 합니다.

8. Parable of the Pounds 므나(파운드)의 비유

240331 능력과 충실함 눅19:11-26, 28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171:8.1 (1875.6) They did not start from Jericho until near noon since they sat up late the night before while Jesus taught Zaccheus and his family the gospel of the kingdom. About halfway up the ascending road to Bethany the party paused for lunch while the multitude passed on to Jerusalem, not knowing that Jesus and the apostles were going to abide that night on the Mount of Olives. 그들은 예수께서 삭개오와 그의 가족에게 하느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면서 전날 늦은 밤까지 앉아 있었기에 거의 정오에 여리고에서 출발했습니다. 베다니로 오르는 길의 중턱에서 일행은 점심 식사를 위해 잠시 멈추는 동안 군중은 예수와 사도들이 그날 밤 감람(橄欖)산에 묵을 것을 모르고 예루살렘으로 지나갔습니다.

171:8.2 (1875.7) The parable of the pounds, unlike the parable of the talents, which was intended for all the disciples, was spoken more exclusively to the apostles and was largely based on the experience of Archelaus and his futile attempt to gain the rule of the kingdom of Judea. This is one of the few parables of the Master to be founded on an actual historic character. It was not strange that they should have had Archelaus in mind inasmuch as the house of Zaccheus in Jericho was very near the ornate palace of Archelaus, and his aqueduct ran along the road by which they had departed from Jericho. 므나(파운드)의 비유는, 모든 제자에게 적용되는 달란트 비유와 달리, 오로지 사도들에게만 말했고, 대부분 아켈라오스의 경험과 유대 왕국을 지배하려는 그의 헛된 시도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적 인물에 근거한, 주님의 몇 안 되는 비유 중 하나입니다.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의 집이 아켈라오스의 화려한 궁전과 매우 가깝고 그의 수로(水路)가 여리고에서 출발한 길을 따라서 흘렀기 때문에 그것들이 아켈라오스를 고려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171:8.3 (1875.8) Said Jesus: “You think that the Son of Man goes up to Jerusalem to receive a kingdom, but I declare that you are doomed to disappointment. Do you not remember about a certain prince who went into a far country to receive for himself a kingdom, but even before he could return, the citizens of his province, who in their hearts had already rejected him, sent an embassy after him, saying, ‘We will not have this man to reign over us’? As this king was rejected in the temporal rule, so is the Son of Man to be rejected in the spiritual rule. Again I declare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but if the Son of Man had been accorded the spiritual rule of his people, he would have accepted such a kingdom of men’s souls and would have reigned over such a dominion of human hearts. Notwithstanding that they reject my spiritual rule over them, I will return again to receive from others such a kingdom of spirit as is now denied me. You will see the Son of Man rejected now, but in another age that which the children of Abraham now reject will be received and exalted.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왕국을 받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생각하지만, 너희가 실망에 처해있다고 내가 밝히노라. 어떤 왕자가 왕국을 받으려고 먼 나라로 갔지만,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벌써 마음으로 그를 거절한 그의 지역의 시민들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사절단을 보낸 것에 대해 너희가 기억하지 않느냐(눅19:14)? 이 왕의 현세적 통치가 거절된 것처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영적 통치가 거절될 것이니라. 내가 다시 밝히노니,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에게 자기 백성의 영적 통치가 허용되었다면, 그는 사람들의 혼(魂)들로 이루어진 그런 왕국을 받아들이고 인간 심정의 그런 통치권을 잡았을 것이니라. 그들이 자신들에 대한 내 영적 통치를 거절해도, 나는 다시 돌아와 지금 나에게 응하지 않는 그런 영(靈)의 왕국을 다른 이들로부터 받아들일 것이라. 너희는 지금 거절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볼 것이지만 다른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지금 거절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받아들여지고 높아지리라.

171:8.4 (1876.1) “And now, as the rejected nobleman of this parable, I would call before me my twelve servants, special stewards, and giving into each of your hands the sum of one pound, I would admonish each to heed well my instructions that you trade diligently with your trust fund while I am away that you may have wherewith to justify your stewardship when I return, when a reckoning shall be required of you. “그리고 이제, 이 비유에서 거절된 귀족으로서, 나는 내 앞에 내 열두 종, 특별한 청지기들을 불러서 각자의 손에 1므나(파운드)의 금액을 주면서, 내가 떨어져 있을 때 너희의 신탁 자금으로 너희가 부지런히 장사하여, 내가 돌아와 너희에게 계산이 요구될 때 너희가 그것으로 너희 청지기 직무를 제대로 했다고 보일 수 있도록, 내 지시를 각자 잘 유념하기를 내가 이르노라(눅19:11-13).

171:8.5 (1876.2) “And even if this rejected Son should not return, another Son will be sent to receive this kingdom, and this Son will then send for all of you to receive your report of stewardship and to be made glad by your gains. “이 거절된 아들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아들이 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도록 보내질 것인데, 이 아들이 그때 너희 모두를 위해 너희 청지기 직무 보고서를 받도록 파송되어 너희 이익을 기뻐하리라(눅19:15a).

171:8.6 (1876.3) “And when these stewards were subsequently called together for an accounting, the first came forward, saying, ‘Lord, with your pound I have made ten pounds more.’ And his master said to him: ‘Well done; you are a good servant; because you have proved faithful in this matter, I will give you authority over ten cities.’ And the second came, saying, ‘Your pound left with me, Lord, has made five pounds.’ And the master said, ‘I will accordingly make you ruler over five cities.’ And so on down through the others until the last of the servants, on being called to account, reported: ‘Lord, behold, here is your pound, which I have kept safely done up in this napkin. And this I did because I feared you; I believed that you were unreasonable, seeing that you take up where you have not laid down, and that you seek to reap where you have not sown.’ Then said his lord: ‘You negligent and unfaithful servant, I will judge you out of your own mouth. You knew that I reap where I have apparently not sown; therefore you knew this reckoning would be required of you. Knowing this, you should have at least given my money to the banker that at my coming I might have had it with proper interest.’ “그 후 이 청지기들이 회계 보고를 위해 함께 불러 모이자, 첫째가 말하며 나섰습니다. ‘주여, 당신의 므나(파운드)로 제가 10므나(파운드)를 더 벌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잘했구나, 너는 이 일로 너희 충실을 입증했으니 너는 성실한 하인이도다, 내가 너에게 열 개의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주리라.’ 그리고 둘째가 와서 말하기를, ‘주여, 저에게 맡긴 당신의 므나(파운드)로 5므나(파운드)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알맞게 네가 다섯 개의 도시를 다스리게 하리라.’ 그리고 기타 등등 다른 하인들을 거쳐 마지막 하인에 이르도록 책임을 묻자 보고했습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에 당신의 므나(파운드)가 있는데, 제가 이 작은 수건에 안전히 보관했습니다. 당신이 두려워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데서 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제가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말했습니다. ‘너, 게으르고 성실하지 않은 하인아, 내가 네 입으로 너를 판단하리라. 내가 분명히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둔다고 네가 알았으니, 이런 결산이 너에게 요구될 것을 네가 알고 있었도다. 이것을 알았으니,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은행업자에게 줘서 내가 올 때 적당한 이자와 함께 내가 내 돈을 갖도록 해야 했느니라(눅19:15-23).

171:8.7 (1876.4) “And then said this ruler to those who stood by: ‘Take the money from this slothful servant and give it to him who has ten pounds.’ And when they reminded the master that such a one already had ten pounds, he said: ‘To every one who has shall be given more, but from him who has not, even that which he has shall be taken away from him.’” “그런 후 이 주권자가 옆에 서 있던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게으른 하인의 돈을 취하여 열 므나(파운드)를 가진 그에게 주어라.’ 그들이 주인에게 그 사람은 이미 열 므나(파운드)를 가지고 있다고 일깨우자, 그가 말했습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에게는 그가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리라(눅19:24-26).’”

171:8.8 (1876.5) And then the apostles sought to know the difference between the meaning of this parable and that of the former parable of the talents, but Jesus would only say, in answer to their many questions: “Ponder well these words in your hearts while each of you finds out their true meaning.” 그런 후 사도들은 이 비유와 이전 달란트 비유의 의미 차이를 알려고 했으나, 예수는 그들의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너희 각자가 그것들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면서 너희 심정으로 이런 말들을 충분히 깊이 생각하라.”

171:8.9 (1876.6) It was Nathaniel who so well taught the meaning of these two parables in the after years, summing up his teachings in these conclusions: 여러 해가 지나 나다니엘이 이런 두 비유의 의미를 아주 잘 가르쳤는데, 이런 결론으로 자기 가르침을 요약했습니다.

171:8.10 (1876.7) 1. Ability is the practical measure of life’s opportunities. You will never be held responsible for the accomplishment of that which is beyond your abilities. 능력은 인생의 형편을 재는 실제 척도입니다. 너희는 자기 능력을 벗어난 성취에 대해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입니다.

171:8.11 (1876.8) 2. Faithfulness is the unerring measure of human trustworthiness. He who is faithful in little things is also likely to exhibit faithfulness in everything consistent with his endowments. 충실함은 인간의 신뢰를 재는 정확한 척도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자기 재능과 조화되는 모든 것에서도 충실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171:8.12 (1876.9) 3. The Master grants the lesser reward for lesser faithfulness when there is like opportunity. 주님은 기회가 왔을 때 더 적은 충실함에 대해서 더 적게 보상합니다.

171:8.13 (1877.1) 4. He grants a like reward for like faithfulness when there is lesser opportunity. 그는 기회가 더 적을 때 충실함과 같은 정도로 보상합니다.

171:8.14 (1877.2) When they had finished their lunch, and after the multitude of followers had gone on toward Jerusalem, Jesus, standing there before the apostles in the shade of an overhanging rock by the roadside, with cheerful dignity and a gracious majesty pointed his finger westward, saying: “Come, my brethren, let us go on into Jerusalem, there to receive that which awaits us; thus shall we fulfill the will of the heavenly Father in all things.” 그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추종자 무리가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간 후, 길가의 돌출한 바위 그늘에서 예수는 사도들 앞에 일어나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기운찬 위엄과 은혜로운 위풍으로 말했습니다. “자, 내 형제들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리라.”

171:8.15 (1877.3) And so Jesus and his apostles resumed this, the Master’s last journey to Jerusalem in the likeness of the flesh of mortal man. 그래서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필사 인간 육신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주님의 마지막 여정을 이렇게 다시 계속했습니다(눅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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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2 Going into Jerusalem 예루살렘에 들어감

Paper 172

Going into Jerusalem 예루살렘에 들어감

1. Sabbath at Bethany 베다니의 안식일
Mary anoints Jesus’ feet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기름을 바르다
Jesus rebukes Judas 예수께서 유다를 나무라다
2. Sunday Morning with the Apostles 사도들과 함께 한 일요일 아침
3. The Start for Jerusalem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
4. Visiting About the Temple 성전 근처를 방문
The widow’s mite 과부의 잔돈
5. The Apostles’ Attitude 사도들의 태도

240407 예수 평온의 비결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72:0.1 (1878.1) JESUS and the apostles arrived at Bethany shortly after four o’clock on Friday afternoon, March 31, A.D. 30. Lazarus, his sisters, and their friends were expecting them; and since so many people came every day to talk with Lazarus about his resurrection, Jesus was informed that arrangements had been made for him to stay with a neighboring believer, one Simon, the leading citizen of the little village since the death of Lazarus’s father. 예수와 사도들은 AD30년 3월 31일 금요일 오후 4시 직후에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 및 친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 그와 이야기하려고 매일 왔기 때문에, 예수는 나사로의 부친 별세 후 작은 마을을 이끄는 시민, 이웃집 신자 시몬의 집에 머물도록 준비되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172:0.2 (1878.2) That evening, Jesus received many visitors, and the common folks of Bethany and Bethpage did their best to make him feel welcome. Although many thought Jesus was now going into Jerusalem, in utter defiance of the Sanhedrin’s decree of death, to proclaim himself king of the Jews, the Bethany family — Lazarus, Martha, and Mary — more fully realized that the Master was not that kind of a king; they dimly felt that this might be his last visit to Jerusalem and Bethany. 그날 저녁, 예수께서 여러 방문자를 맞이했고, 베다니와 벳바게의 서민들은 그를 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께서 산헤드린의 사형 선고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려고,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지만, 베다니 가족 – 나사로,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이 그런 종류의 왕이 아님을 더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그가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방문하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172:0.3 (1878.3) The chief priests were informed that Jesus lodged at Bethany, but they thought best not to attempt to seize him among his friends; they decided to await his coming on into Jerusalem. Jesus knew about all this, but he was majestically calm; his friends had never seen him more composed and congenial; even the apostles were astounded that he should be so unconcerned when the Sanhedrin had called upon all Jewry to deliver him into their hands. While the Master slept that night, the apostles watched over him by twos, and many of them were girded with swords. Early the next morning they were awakened by hundreds of pilgrims who came out from Jerusalem, even on the Sabbath day, to see Jesus and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대제사장들은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머문다고 보고받았지만, 그들은 그의 친구를 사이에서 그를 체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정했습니다. 예수는 이런 모두를 알고 계셨지만, 그는 점잖고 의젓하게 침착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토록 차분하고 유쾌한 그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이 모든 유대인에게 자기들 수중에 그를 넘기라고 요구했을 때(요11:57) 그가 그렇게 태연하셔서 사도들조차 깜짝 놀랐습니다. 주께서 그날 밤 주무시는 동안 사도들은 둘씩 짝지어 그를 지켰고, 그들 대부분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안식일이었지만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아침 일찍 예수와 그가 죽은 자로부터 되살린 나사로를 보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그들은 잠에서 깼습니다(요12:9).

1. Sabbath at Bethany 베다니의 안식일

240414 마리아의 봉헌 요11:55-56, 12:1-5, 7-8, 10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72:1.1 (1878.4) Pilgrims from outside of Judea, as well as the Jewish authorities, had all been asking: “What do you think? will Jesus come up to the feast?” Therefore, when the people heard that Jesus was at Bethany, they were glad, but the chief priests and Pharisees were somewhat perplexed. They were pleased to have him under their jurisdiction, but they were a trifle disconcerted by his boldness; they remembered that on his previous visit to Bethany, Lazarus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and Lazarus was becoming a big problem to the enemies of Jesus. 유대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유대 밖에서 온 순례자들도 모두 묻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께서 잔치에 나타날까요?”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계신다는 소식을 사람들이 듣고 기뻐했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약간 헷갈렸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있어서 좋았지만, 그의 대담함으로 인해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전에 베다니를 방문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나사로가 예수의 대적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기억했습니다(요11:55-56).

172:1.2 (1878.5)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on the evening after the Sabbath, all Bethany and Bethpage joined in celebrating the arrival of Jesus by a public banquet at the home of Simon. This supper was in honor of both Jesus and Lazarus; it was tendered in defiance of the Sanhedrin. Martha directed the serving of the food; her sister Mary was among the women onlookers as it was against the custom of the Jews for a woman to sit at a public banquet. The agents of the Sanhedrin were present, but they feared to apprehend Jesus in the midst of his friends. 유월절 6일 전, 안식일이 지난 후 저녁에 모든 베다니와 벳바게 주민들이 시몬의 집에서 공개 연회(宴會)로 함께 예수의 도착을 축하했습니다. 이 만찬은 산헤드린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나사로를 축하하여 열렸습니다. 마르다는 음식 접대를 관리했고, 공중 연회에 여성이 앉아있는 것은 유대 관습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의 동생 마리아는 여성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첩보원(諜報員)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체포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요12:1-2a).

172:1.3 (1879.1) Jesus talked with Simon about Joshua of old, whose namesake he was, and recited how Joshua and the Israelites had come up to Jerusalem through Jericho. In commenting on the legend of the walls of Jericho falling down, Jesus said: “I am not concerned with such walls of brick and stone; but I would cause the walls of prejudice, self-righteousness, and hate to crumble before this preaching of the Father’s love for all men.” 예수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옛날의 여호수아에 대해 시몬과 얘기하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인(人)들이 어떻게 여리고를 통해 예루살렘에 이르렀는지 자세히 말했습니다.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린 구전(口傳)을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나는 벽돌과 돌로 만든 그런 성벽에 관심이 없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설교하기에 앞서 편견(偏見), 독선(獨善)과 증오의 성벽을 허물어 버릴 것이라(수6:20).”

172:1.4 (1879.2) The banquet went along in a very cheerful and normal manner except that all the apostles were unusually sober. Jesus was exceptionally cheerful and had been playing with the children up to the time of coming to the table. 모든 사도가 평소와 달리 진지한 것 외에, 연회는 매우 즐겁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는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고, 식탁에 올 때까지 아이들과 놀고 계셨습니다.

172:1.5 (1879.3) Nothing out of the ordinary happened until near the close of the feasting when Mary the sister of Lazarus stepped forward from among the group of women onlookers and, going up to where Jesus reclined as the guest of honor, proceeded to open a large alabaster cruse of very rare and costly ointment; and after anointing the Master’s head, she began to pour it upon his feet as she took down her hair and wiped them with it. The whole house became filled with the odor of the ointment, and everybody present was amazed at what Mary had done. Lazarus said nothing, but when some of the people murmured, showing indignation that so costly an ointment should be thus used, Judas Iscariot stepped over to where Andrew reclined and said: “Why was this ointment not sold and the money bestowed to feed the poor? You should speak to the Master that he rebuke such waste.” 잔치를 마칠 무렵,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여성 구경꾼 무리 중에서 앞으로 걸어 나와, 예수께서 주빈(主賓)으로 기대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매우 진기하고 값비싼 연고(軟膏)가 들어있는 커다란 방해석 단지를 열어서, 주님의 머리에 바른 다음에, 그녀가 자기 머리카락을 끌어내려 그것으로 그의 발을 닦으면서, 연고(軟膏)를 그의 발에 붓기 시작할 때까지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온 집이 연고(軟膏)의 향기로 충만하게 되었고, 참석한 모두가 마리아의 행위에 깜짝 놀랐습니다. 나사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몇 사람이 그렇게 값비싼 연고가 이렇게 소비되어야 하는지 분개하며 속삭이자, 가롯 유다가 안드레가 기댄 곳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왜 이 연고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데 주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주님께 말씀드려서 그가 그런 낭비를 꾸짖어야 합니다(요12:3-5).”

172:1.6 (1879.4) Jesus, knowing what they thought and hearing what they said, put his hand upon Mary’s head as she knelt by his side and, with a kindly expression upon his face, said: “Let her alone, every one of you. Why do you trouble her about this, seeing that she has done a good thing in her heart? To you who murmur and say that this ointment should have been sold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let me say that you have the poor always with you so that you may minister to them at any time it seems good to you; but I shall not always be with you; I go soon to my Father. This woman has long saved this ointment for my body at its burial, and now that it has seemed good to her to make this anointing in anticipation of my death, she shall not be denied such satisfaction. In the doing of this, Mary has reproved all of you in that by this act she evinces faith in what I have said about my death and ascension to my Father in heaven. This woman shall not be reproved for that which she has this night done; rather do I say to you that in the ages to come, wherever this gospel shall be preached throughout the whole world, what she has done will be spoken of in memory of her.” 그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는 자기 옆에 무릎을 꿇은 마리아의 머리에 그의 손을 얹고 친절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희 모두 그녀를 가만히 두라. 그녀가 자기 심정으로 선한 일을 했는데, 왜 이 일로 그녀를 괴롭히느냐? 이 연고(軟膏)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말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난한 자들과 언제나 같이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에게 좋다고 여길 때 그들을 돌볼 수 있겠지만, 나는 곧 내 아버지께 가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못할 것이라. 이 여인은 내 시신의 장례를 위해 이 연고를 오랫동안 모았고, 이제 내 죽음을 내다보고 이렇게 연고를 바르는 것을 좋게 여겼으니, 그녀에게 그런 만족이 있을 것이라. 이렇게 하여 마리아가 내 죽음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승천하는 것에 관해 내가 말한 것에 대한 신앙을 그녀가 이 행위로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너희 모두를 타일렀느니라. 이 여인은 그녀가 오늘 밤에 행한 일로 비난을 받지 않으리라.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가올 세대에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 세계에 널리, 그녀가 행한 일이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그녀를 기념할 것이니라(마26:10-13, 막14:6-9, 요12:7-8).”

172:1.7 (1879.5) It was because of this rebuke, which he took as a personal reproof, that Judas Iscariot finally made up his mind to seek revenge for his hurt feelings. Many times had he entertained such ideas subconsciously, but now he dared to think such wicked thoughts in his open and conscious mind. And many others encouraged him in this attitude since the cost of this ointment was a sum equal to the earnings of one man for one year — enough to provide bread for five thousand persons. But Mary loved Jesus; she had provided this precious ointment with which to embalm his body in death, for she believed his words when he forewarned them that he must die, and it was not to be denied her if she changed her mind and chose to bestow this offering upon the Master while he yet lived. 가롯 유다는 이런 꾸지람을 개인적 책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기 상한 감정에 대해 복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잠재의식으로 그런 생각을 품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노골적으로 의식하는 마음으로 뻔뻔하게 그토록 사악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고(軟膏)의 가격이 한 사람의 연간 수입과 맞먹는 금액으로 충분히 오천 명에게 빵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사람이 그에게 이런 태도를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그가 자신들에게 그가 죽어야 한다고 예고했을 때 그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이 귀한 연고(軟膏)를 내놓았고, 그녀가 자기 마음을 바꾸어 주께서 아직 살아계실 때 이런 봉헌에 사용하려 했다면 그녀를 물리치지 말아야 했습니다(요12:3).

172:1.8 (1879.6) Both Lazarus and Martha knew that Mary had long saved the money wherewith to buy this cruse of spikenard, and they heartily approved of her doing as her heart desired in such a matter, for they were well-to-do and could easily afford to make such an offering. 나사로와 마르다는 마리아가 이 감송(甘松) 단지를 살 돈을 오랫동안 저축한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은 부유하여 그런 봉헌을 쉽게 할 수 있어서, 그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진심으로 그녀의 행위를 지지했습니다.

172:1.9 (1880.1) When the chief priests heard of this dinner in Bethany for Jesus and Lazarus, they began to take counsel among themselves as to what should be done with Lazarus. And presently they decided that Lazarus must also die. They rightly concluded that it would be useless to put Jesus to death if they permitted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to live. 대제사장들은 예수와 나사로를 위해 베다니의 이런 만찬 소식을 듣자, 그들은 나사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저희끼리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나사로도 죽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린 나사로를 살려 두면 예수를 죽이는 것이 소용없다고 당연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요12:10).

2. Sunday Morning with the Apostles 사도들과 함께 한 일요일 아침

240421 예수 옆에 머물러 깨어 기도하라 마26:38b 마 26:38b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172:2.1 (1880.2) On this Sunday morning, in Simon’s beautiful garden, the Master called his twelve apostles around him and gave them their final instructions preparatory to entering Jerusalem. He told them that he would probably deliver many addresses and teach many lessons before returning to the Father but advised the apostles to refrain from doing any public work during this Passover sojourn in Jerusalem. He instructed them to remain near him and to “watch and pray.” Jesus knew that many of his apostles and immediate followers even then carried swords concealed on their persons, but he made no reference to this fact. 이 일요일(AD30. 4. 2.) 아침 시몬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주님은 열두 사도를 자기 측근으로 불러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아버지께 돌아가기 전에 아마 많이 연설하고 여러 교훈을 가르칠 것이지만 예루살렘에 머무는 이 유월절에 공적 업무를 그만두라고 사도들에게 충고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 옆에 머물러 “깨어 기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예수는 자기 여러 사도와 직계 추종자들이 그때까지도 몸에 칼을 숨겨 휴대한 것 알았지만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72:2.2 (1880.3) This morning’s instructions embraced a brief review of their ministry from the day of their ordination near Capernaum down to this day when they were preparing to enter Jerusalem. The apostles listened in silence; they asked no questions. 이 아침의 지시에는 가버나움 근처에서 임직(任職)한 날부터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로 준비하는 이날까지 자신들의 사역을 간략하게 검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아무 질문도 없이 조용히 경청했습니다.

172:2.3 (1880.4) Early that morning David Zebedee had turned over to Judas the funds realized from the sale of the equipment of the Pella encampment, and Judas, in turn, had placed the greater part of this money in the hands of Simon, their host, for safekeeping in anticipation of the exigencies of their entry into Jerusalem. 그날 아침 일찍 다윗 세베대는 펠라 야영지의 장비를 판매해 얻은 자금을 유다에게 넘겨줬고, 유다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급한 상황을 내다보고 보관하려고 결국 이 돈의 대부분을 주최자 시몬의 손에 맡겼습니다.

172:2.4 (1880.5) After the conference with the apostles Jesus held converse with Lazarus and instructed him to avoid the sacrifice of his life to the vengefulness of the Sanhedrin. It was in obedience to this admonition that Lazarus, a few days later, fled to Philadelphia when the officers of the Sanhedrin sent men to arrest him. 사도들과 회의한 후, 예수는 나사로와 서로 이야기하면서 산헤드린의 복수에 그의 목숨을 희생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권고에 순종하여 나사로는, 며칠 후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자신을 체포하려고 사람들을 보냈을 때, 필라델피아로 도피했습니다.

172:2.5 (1880.6) In a way, all of Jesus’ followers sensed the impending crisis, but they were prevented from fully realizing its seriousness by the unusual cheerfulness and exceptional good humor of the Master. 어느 정도, 예수의 추종자 모두 임박한 위기를 감지했지만, 주님의 여느 때와 다른 쾌활함과 드물게 좋은 기분으로 인해 그 심각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3. The Start for Jerusalem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

240428 겸손한 자로 오시는 예수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72:3.1 (1880.7) Bethany was about two miles from the temple, and it was half past one that Sunday afternoon when Jesus made ready to start for Jerusalem. He had feelings of profound affection for Bethany and its simple people. Nazareth, Capernaum, and Jerusalem had rejected him, but Bethany had accepted him, had believed in him. And it was in this small village, where almost every man, woman, and child were believers, that he chose to perform the mightiest work of his earth bestowal, the resurrection of Lazarus. He did not raise Lazarus that the villagers might believe, but rather because they already believed. 베다니는 성전에서 3.2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 준비를 마쳤을 때 일요일(AD30. 4. 2.) 오후 1시 30분이 지났습니다. 그는 베다니와 그곳의 순박한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의 호감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은 그를 버렸지만, 베다니는 그를 받아들였고, 그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남녀와 아이들이 믿는 자들이었던 이 작은 마을에서 그는 자기 지상 증여 중 가장 강력한 일, 나사로의 부활을 일으키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믿도록 나사로를 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미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2:3.2 (1880.8) All morning Jesus had thought about his entry into Jerusalem. Heretofore he had always endeavored to suppress all public acclaim of him as the Messiah, but it was different now; he was nearing the end of his career in the flesh, his death had been decreed by the Sanhedrin, and no harm could come from allowing his disciples to give free expression to their feelings, just as might occur if he elected to make a formal and public entry into the city. 예수는 아침 내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모든 대중적 환호를 감추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자기 육신의 생애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산헤드린이 그의 죽음의 판결을 알렸으며, 자신이 공적으로 소문내며 도시에 들어가기로 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제자들이 그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놔두어도 아무 손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72:3.3 (1881.1) Jesus did not decide to make this public entrance into Jerusalem as a last bid for popular favor nor as a final grasp for power. Neither did he do it altogether to satisfy the human longings of his disciples and apostles. Jesus entertained none of the illusions of a fantastic dreamer; he well knew what was to be the outcome of this visit. 예수는 대중적 호의를 위한 최후 시도나 최종 권력 쟁취로써 이런 공개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과 사도들의 인간적 열망을 채우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의 망상을 전혀 마음에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 방문의 결과가 무엇이 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172:3.4 (1881.2) Having decided upon making a public entrance into Jerusalem, the Master was confronted with the necessity of choosing a proper method of executing such a resolve. Jesus thought over all of the many more or less contradictory so-called Messianic prophesies, but there seemed to be only one which was at all appropriate for him to follow. Most of these prophetic utterances depicted a king, the son and successor of David, a bold and aggressive temporal deliverer of all Israel from the yoke of foreign domination. But there was one Scripture that had sometimes been associated with the Messiah by those who held more to the spiritual concept of his mission, which Jesus thought might consistently be taken as a guide for his projected entry into Jerusalem. This Scripture was found in Zechariah, and it said: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shout, O daughter of Jerusalem. Behold, your king comes to you. He is just and he brings salvation. He comes as the lowly one, riding upon an ass, upon a colt, the foal of an ass.”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신 주님은 그런 결심을 실행할 적절한 방법을 택할 필요에 직면했습니다. 예수는 거의 모순되는 숱한, 소위 메시아 예언들을 곰곰이 모두 생각했지만, 자신이 따르기에 모두 적절한 것은 단 하나뿐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대부분 이런 예언적 발언은 왕, 다윗의 아들이며 후계자, 모든 이스라엘을 외국 지배의 속박에서 건질 과감하고 공격적인 현세적 해방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사명에 대한 영적 개념을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 때때로 메시아와 관련지었던 성서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는 그것을 모순 없이 자기 예루살렘 입성 계획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가랴에서 이 성서 구절을 찾았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외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정의(正義)로우시며 구원을 베푸느니라. 그는 나귀를 타시니 작은 나귀, 당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자로 임하느니라(슥9:9).”

172:3.5 (1881.3) A warrior king always entered a city riding upon a horse; a king on a mission of peace and friendship always entered riding upon an ass. Jesus would not enter Jerusalem as a man on horseback, but he was willing to enter peacefully and with good will as the Son of Man on a donkey. 전투하는 왕은 언제나 말을 타고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평화와 우호(友好)의 사명 중인 왕은 언제나 나귀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말을 탄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나귀를 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서 평화적인 선한 뜻을 가지고 기꺼이 들어가려 했습니다.

172:3.6 (1881.4) Jesus had long tried by direct teaching to impress upon his apostles and his disciples that his kingdom was not of this world, that it was a purely spiritual matter; but he had not succeeded in this effort. Now, what he had failed to do by plain and personal teaching, he would attempt to accomplish by a symbolic appeal. Accordingly, right after the noon lunch, Jesus called Peter and John, and after directing them to go over to Bethpage, a neighboring village a little off the main road and a short distance northwest of Bethany, he further said: “Go to Bethpage, and when you come to the junction of the roads, you will find the colt of an ass tied there. Loose the colt and bring it back with you. If anyone asks you why you do this, merely say, ‘The Master has need of him.’” And when the two apostles had gone into Bethpage as the Master had directed, they found the colt tied near his mother in the open street and close to a house on the corner. As Peter began to untie the colt, the owner came over and asked why they did this, and when Peter answered him as Jesus had directed, the man said: “If your Master is Jesus from Galilee, let him have the colt.” And so they returned bringing the colt with them. 예수는, 자기 왕국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그것은 순전히 영적 문제임을 자기 사도들과 자기 제자들의 마음에 새기려고 직접 가르치며 오랫동안 애썼지만, 그는 이런 노력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분명한, 개인적 가르침으로 끝내 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상징적 호소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 식사 직후에,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 베다니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이웃 마을 벳바게로 건너가도록 지시한 후, 그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벳바게로 가서, 너희가 교차로에 이르면, 너희가 거기에서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리라. 그것을 풀어서 함께 데려오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나귀가 필요합니다.’라고만 말하라.” 그래서 주께서 지시한 대로 두 사도가 벳바게로 갔을 때, 그들은 트인 거리, 모퉁이 집 근처에서 그 어미 곁에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나귀 새끼를 풀기 시작하자, 주인이 다가와 그들이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었고, 예수께서 지시한 대로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너희 주님이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면, 그 나귀 새끼를 그에게 가져가라.”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그 나귀 새끼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마21:1-3, 6-7a, 막11:1-7a, 눅19:29-35a).

240505 종려주일 예루살렘의 실상(實狀) 눅19:35b-44 35b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72:3.7 (1881.5) By this time several hundred pilgrims had gathered around Jesus and his apostles. Since midforenoon the visitors passing by on their way to the Passover had tarried. Meanwhile, David Zebedee and some of his former messenger associates took it upon themselves to hasten on down to Jerusalem, where they effectively spread the report among the throngs of visiting pilgrims about the temple that Jesus of Nazareth was making a triumphal entry into the city. Accordingly, several thousand of these visitors flocked forth to greet this much-talked-of prophet and wonder-worker, whom some believed to be the Messiah. This multitude, coming out from Jerusalem, met Jesus and the crowd going into the city just after they had passed over the brow of Olivet and had begun the descent into the city. 이 무렵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예수와 그의 사도 주위에 모였습니다. 오전 중반 이후로 유월절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지나가던 방문자들이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다윗 세베대와 그의 이전 일부 메신저들은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내려가, 그들은 거기에서 성전 근처로 방문하는 여러 순례자에게 나사렛 예수가 의기양양하게 도시로 입성한다는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파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수천 명의 방문자들은 많이들 이야기하는 이 선지자, 어떤 이들이 메시아로 믿는, 이적(異蹟)을 행하는 사람에게 인사하러 밖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이 무리는, 예수와 군중이 감람산 마루를 지나 도시로 내려가기 시작한 직후에 도시로 들어가는 그들을 만났습니다(요12:18).

172:3.8 (1882.1) As the procession started out from Bethany, there was great enthusiasm among the festive crowd of disciples, believers, and visiting pilgrims, many hailing from Galilee and Perea. Just before they started, the twelve women of the original women’s corps, accompanied by some of their associates, arrived on the scene and joined this unique procession as it moved on joyously toward the city. 행렬이 베다니에서 출발하자, 잔치하는 제자들, 신자들 및 갈릴리와 페레아에서 온 여러 방문 순례자의 흥겨운 무리가 크게 열광했습니다. 그들이 출발하기 직전에, 원래 여성단(團)의 열두 여성이 그들의 일부 동료들과 함께 그 자리에 도착하여, 도시를 향해 즐겁게 움직이는 이 독특한 행렬에 끼어들었습니다.

172:3.9 (1882.2) Before they started, the Alpheus twins put their cloaks on the donkey and held him while the Master got on. As the procession moved toward the summit of Olivet, the festive crowd threw their garments on the ground and brought branches from the near-by trees in order to make a carpet of honor for the donkey bearing the royal Son, the promised Messiah. As the merry crowd moved on toward Jerusalem, they began to sing, or rather to shout in unison, the Psalm, “Hosanna to the son of David;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be the kingdom that comes down from heaven.”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알페오 쌍둥이가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에 얹고 주께서 타시는 동안 나귀를 붙들었습니다. 행렬이 감람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흥겨운 무리가 자신들의 옷을 땅에 던지고, 가까운 나무에서 가지들을 가져와, 왕족의 아들, 약속된 메시아를 태운 나귀를 위해 영예로운 융단을 만들었습니다. 즐거운 무리가 예루살렘을 향해 움직이면서 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일제히 시편 “다윗의 아들을 찬미하라.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찬미하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왕국에 복이 있음이여(시118:26).”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마21:7b-9, 막11:7b-10, 눅19:35b-38, 요12:12-14a).

172:3.10 (1882.3) Jesus was lighthearted and cheerful as they moved along until he came to the brow of Olivet, where the city and the temple towers came into full view; there the Master stopped the procession, and a great silence came upon all as they beheld him weeping. Looking down upon the vast multitude coming forth from the city to greet him, the Master, with much emotion and with tearful voice, said: “O Jerusalem, if you had only known, even you, at least in this your day, the things which belong to your peace, and which you could so freely have had! But now are these glories about to be hid from your eyes. You are about to reject the Son of Peace and turn your backs upon the gospel of salvation. The days will soon come upon you wherein your enemies will cast a trench around about you and lay siege to you on every side; they shall utterly destroy you, insomuch that not one stone shall be left upon another. And all this shall befall you because you knew not the time of your divine visitation. You are about to reject the gift of God, and all men will reject you.” 예수께서는 도시와 성전 탑들 전체가 보이는 감람산 마루에 이를 때까지 그들이 이동하는 동안 쾌활하고 즐거웠습니다. 주께서 거기서 행렬을 멈추셨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면서 모두 큰 침묵에 빠졌습니다. 자신을 맞이하려고 도시에서 나오는 엄청난 무리를 내려다보면서, 주님은 많은 감정과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라도 적어도 오늘 너에게, 너의 평화에 속한 것들, 네가 그토록 자유롭게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알기만이라도 했더라면! 그러나 이제 이런 영광이 네 눈에서 가리어지려고 하는구나. 너는 막 평화의 아들을 거부하고 구원의 복음을 저버리려는 참이로다. 너의 대적들이 너를 둘러 주변에 진지(陣地)를 파고 사방으로 너를 공격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너를 완전히 멸망시킬 그날이 너에게 곧 오리라.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너에게 닥치는 것은 네가 신적 방문의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네가 막 하느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참이며, 모든 사람이 너희를 버릴 것이라(눅19:41-44).”

172:3.11 (1882.4)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they began the descent of Olivet and presently were joined by the multitude of visitors who had come from Jerusalem waving palm branches, shouting hosannas, and otherwise expressing gleefulness and good fellowship. The Master had not planned that these crowds should come out from Jerusalem to meet them; that was the work of others. He never premeditated anything which was dramatic. 그가 말씀을 마치고 그들이 감람산을 내려가자, 예루살렘에서 온 수많은 방문자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신을 찬미하라)를 외치며, 그 밖에 매우 기뻐하며 정답게 친교를 표현하며 바로 합세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군중이 예루살렘에서 나와 자신들을 맞이하도록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극적(劇的)인 어떤 일도 결코 미리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172:3.12 (1882.5) Along with the multitude which poured out to welcome the Master, there came also many of the Pharisees and his other enemies. They were so much perturbed by this sudden and unexpected outburst of popular acclaim that they feared to arrest him lest such action precipitate an open revolt of the populace. They greatly feared the attitude of the large numbers of visitors, who had heard much of Jesus, and who, many of them, believed in him. 주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온 군중을 따라서 바리새인과 그의 다른 대적들도 많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갑작스러운 뜻밖의 대중적 환호의 분출로 인해 많이 당황하여 그런 행동이 대중의 공개적 폭동을 촉발(觸發)하지 않을까 해서 그를 체포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많이 듣고 그중 다수가 그를 믿는, 수많은 방문자의 태도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172:3.13 (1882.6) As they neared Jerusalem, the crowd became more demonstrative, so much so that some of the Pharisees made their way up alongside Jesus and said: “Teacher, you should rebuke your disciples and exhort them to behave more seemly.” Jesus answered: “It is only fitting that these children should welcome the Son of Peace, whom the chief priests have rejected. It would be useless to stop them lest in their stead these stones by the roadside cry out.” 그들이 예루살렘에 다가올수록, 군중은 더욱 시위를 벌이자, 일부 바리새인이 예수 옆에 다가와 말할 정도였습니다. “선생님, 당신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어 그들이 더 점잖게 행동하게 타일러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이 자녀들이 대제사장들이 배척(排斥)한, 평화의 아들을 이 자손들이 환영함이 마땅하니라. 길가의 이런 돌들이 그들 대신에 외치면 안 되니까 그들을 막는 것은 쓸데없느니라(눅19:39-40).”

172:3.14 (1882.7) The Pharisees hastened on ahead of the procession to rejoin the Sanhedrin, which was then in session at the temple, and they reported to their associates: “Behold, all that we do is of no avail; we are confounded by this Galilean. The people have gone mad over him; if we do not stop these ignorant ones, all the world will go after him.” 바리새인들은 당시 성전에서 회의 중인 산헤드린에 합류하러 행렬 앞으로 서둘러 가서, 자기 동료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소용이 없느니라. 이 갈릴리 사람 때문에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사람들이 그에게 미친 듯이 빠졌도다. 우리 이 무지한 자들을 막지 않으면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가리라.”

172:3.15 (1883.1) There really was no deep significance to be attached to this superficial and spontaneous outburst of popular enthusiasm. This welcome, although it was joyous and sincere, did not betoken any real or deep-seated conviction in the hearts of this festive multitude. These same crowds were equally as willing quickly to reject Jesus later on this week when the Sanhedrin once took a firm and decided stand against him, and when they became disillusioned — when they realized that Jesus was not going to establish the kingdom in accordance with their long-cherished expectations. 이렇게 피상적이고 즉흥적인 대중적 열광의 분출에 따른 깊은 의미가 정말로 없었습니다. 이런 환영은 기쁘고 진지했지만 이렇게 잔치하는 군중의 심정에 뿌리 깊은 어떤 진정한 확신의 조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군중은, 산헤드린이 일단 단호하게 그를 적대하는 태도를 결정했을 때, 그리고 예수가 오랜 염원인 자신들의 기대에 따라 왕국을 세우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그들이 환멸을 느꼈을 때, 이번 주 후반에 예수를 똑같이 기꺼이 빨리 물리쳐 버렸습니다.

172:3.16 (1883.2) But the whole city was mightily stirred up, insomuch that everyone asked, “Who is this man?” And the multitude answered, “This is the prophet of Galilee, Jesus of Nazareth.”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을 정도로 온 도시가 대단히 동요되었습니다. 군중은 “이 사람이 갈릴리의 선지자, 나사렛 예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21:10-11).

4. Visiting About the Temple 성전 근처를 방문

240512 헌금의 값어치 눅21:1-4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72:4.1 (1883.3) While the Alpheus twins returned the donkey to its owner, Jesus and the ten apostles detached themselves from their immediate associates and strolled about the temple, viewing the preparations for the Passover. No attempt was made to molest Jesus as the Sanhedrin greatly feared the people, and that was, after all, one of the reasons Jesus had for allowing the multitude thus to acclaim him. The apostles little understood that this was the only human procedure which could have been effective in preventing Jesus’ immediate arrest upon entering the city. The Master desired to give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high and low, as well as the tens of thousands of Passover visitors, this one more and last chance to hear the gospel and receive, if they would, the Son of Peace. 알페오 쌍둥이들이 나귀를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동안, 예수와 열 사도는 가까운 동료들과 떨어져, 성전 근처를 거닐며 유월절 준비를 바라보았습니다(막11:11a). 산헤드린은 사람들을 아주 두려워해서 예수를 괴롭히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그것은 결국 예수가 군중이 자신을 그렇게 환호하도록 놔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예수께서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체포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간적 조처임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높고 낮은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수만 명의 유월절 방문자에게, 복음을 듣고, 그들이 원한다면, 평화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기회를 이번에 한 번 더 주려고 했습니다.

172:4.2 (1883.4) And now, as the evening drew on and the crowds went in quest of nourishment, Jesus and his immediate followers were left alone. What a strange day it had been! The apostles were thoughtful, but speechless. Never, in their years of association with Jesus, had they seen such a day. For a moment they sat down by the treasury, watching the people drop in their contributions: the rich putting much in the receiving box and all giving something in accordance with the extent of their possessions. At last there came along a poor widow, scantily attired, and they observed as she cast two mites (small coppers) into the trumpet. And then said Jesus, calling the attention of the apostles to the widow: “Heed well what you have just seen. This poor widow cas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for all these others, from their superfluity, cast in some trifle as a gift, but this poor woman, even though she is in want, gave all that she had, even her living.” 이제 저녁이 되어 군중이 음식을 찾아 떠나자, 예수와 그의 직계 추종자들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날이었는지! 사도들은 생각에 잠겨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한 수년간 그런 날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잠시 그들은 헌금함 곁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부자들은 헌금함에 많이 넣었고 모두 자기가 소유한 정도에 따라 얼마를 넣었습니다. 마침내, 가까스로 차려입은 가난한 과부가 왔는데, 그녀가 적은 잔돈 2개를 나팔 모양 안으로 던져넣는 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과부에게 사도들을 주목시키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방금 본 것을 분명히 주의해라.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이보다 더 많이 넣었는데, 이 다른 모두는 자기 남아도는 것에서 약간의 푼돈을 거저 던져넣었지만, 이 가난한 여인은 궁핍함에도 자신이 가진 모든 생활비까지 내놓았도다(막12:41-44, 눅21:1-4).”

172:4.3 (1883.5) As the evening drew on, they walked about the temple courts in silence, and after Jesus had surveyed these familiar scenes once more, recalling his emotions in connection with previous visits, not excepting the earlier ones, he said, “Let us go up to Bethany for our rest.” Jesus, with Peter and John, went to the home of Simon, while the other apostles lodged among their friends in Bethany and Bethpage.
저녁이 다가오자, 그들은 조용히 성전 뜰을 거닐었고, 예수는 이전의 방문과 초기 방문을 포함해서 이들에 관한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면서 이런 익숙한 현장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말했습니다. “우리는 베다니로 올라가 쉬자.”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시몬의 집에 가셨고, 한편 다른 사도들은 베다니와 벳바게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막11:11b).

5. The Apostles’ Attitude 사도들의 태도

240519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및 요한의 태도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72:5.1 (1883.6) This Sunday evening as they returned to Bethany, Jesus walked in front of the apostles. Not a word was spoken until they separated after arriving at Simon’s house. No twelve human beings ever experienced such diverse and inexplicable emotions as now surged through the minds and souls of these ambassadors of the kingdom. These sturdy Galileans were confused and disconcerted; they did not know what to expect next; they were too surprised to be much afraid. They knew nothing of the Master’s plans for the next day, and they asked no questions. They went to their lodgings, though they did not sleep much, save the twins. But they did not keep armed watch over Jesus at Simon’s house. 이 일요일(AD30.4.2) 저녁에 그들이 베다니로 돌아갈 때, 예수는 사도들 앞에서 걸었습니다. 그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한 후 헤어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열두 사람도 일찍이, 이런 하느님 나라 대사들의 마음과 혼(魂)에 지금처럼 다양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던 경험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건장한 갈릴리인(人)들은 헛갈려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다음에 무엇을 기대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서 많이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주님의 계획을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숙소로 갔지만 쌍둥이들 외에, 그들은 잠을 많이 못 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몬의 집에서 무장한 채 예수를 지키지 않았습니다(요12:16a).

172:5.2 (1884.1) Andrew was thoroughly bewildered, well-nigh confused. He was the one apostle who did not seriously undertake to evaluate the popular outburst of acclaim. He was too preoccupied with the thought of his responsibility as chief of the apostolic corps to give serious consideration to the meaning or significance of the loud hosannas of the multitude. Andrew was busy watching some of his associates who he feared might be led away by their emotions during the excitement, particularly Peter, James, John, and Simon Zelotes. Throughout this day and those which immediately followed, Andrew was troubled with serious doubts, but he never expressed any of these misgivings to his apostolic associates. He was concerned about the attitude of some of the twelve who he knew were armed with swords; but he did not know that his own brother, Peter, was carrying such a weapon. And so the procession into Jerusalem made a comparatively superficial impression upon Andrew; he was too busy with the responsibilities of his office to be otherwise affected. 안드레는 너무 당황해서 거의 어찌할 바 몰랐습니다. 그는 대중의 폭발적 환호를 진지하게 평가하려고 나서지 않은 유일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사도단의 수장(首長)으로서 자기 책임의 생각에 너무 몰두하여 군중의 커다란 호산나(신神을 찬미한 말)의 의미나 중요성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 없었습니다. 안드레는 소동 중에 그들의 감정에 이끌릴까 봐 걱정했던 자기 동료 몇 명,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시몬 젤로떼를 지켜보느라 틈이 없었습니다. 이날과 그다음 며칠간 내내, 안드레는 심각한 의혹으로 괴로웠지만, 그는 이런 불안을 자기 동료 사도들에게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기에 열두 사도 중 칼로 무장한 일부의 태도를 염려했지만, 자기 동생 베드로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행렬은 안드레에게 비교적 영향이 적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직무의 책임으로 너무 바빠서 다른 점에서 영향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172:5.3 (1884.2) Simon Peter was at first almost swept off his feet by this popular manifestation of enthusiasm; but he was considerably sobered by the time they returned to Bethany that night. Peter simply could not figure out what the Master was about. He was terribly disappointed that Jesus did not follow up this wave of popular favor with some kind of a pronouncement. Peter could not understand why Jesus did not speak to the multitude when they arrived at the temple, or at least permit one of the apostles to address the crowd. Peter was a great preacher, and he disliked to see such a large, receptive, and enthusiastic audience go to waste. He would so much have liked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to that throng right there in the temple; but the Master had specifically charged them that they were to do no teaching or preaching while in Jerusalem this Passover week. The reaction from the spectacular procession into the city was disastrous to Simon Peter; by night he was sobered and inexpressibly saddened. 시몬 베드로는 처음에 이렇게 열광하는 대중의 시위로 휩쓸릴 뻔했지만, 그들이 그날 밤 베다니로 돌아왔을 때 그는 상당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이렇게 대중적으로 지지하는 파도에 여세를 몰아서 일종의 어떤 선언을 하지 않아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베드로는 대중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 이야기하거나, 적어도 사도 중 하나가 군중에게 연설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설교자였고, 그는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 열광적인, 큰 청중이 낭비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곳 성전에서 그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몹시 전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주님은 이 유월절 주간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그들이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에게 분명히 지시했었습니다. 도시로 들어가는 극적인 행렬의 반응은 시몬 베드로에게 비참했고, 밤에 그의 마음이 가라앉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습니다.

172:5.4 (1884.3) To James Zebedee, this Sunday was a day of perplexity and profound confusion; he could not grasp the purport of what was going on; he could not comprehend the Master’s purpose in permitting this wild acclaim and then in refusing to say a word to the people when they arrived at the temple. As the procession moved down Olivet toward Jerusalem, more especially when they were met by the thousands of pilgrims who poured forth to welcome the Master, James was cruelly torn by his conflicting emotions of elation and gratification at what he saw and by his profound feeling of fear as to what would happen when they reached the temple. And then was he downcast and overcome by disappointment when Jesus climbed off the donkey and proceeded to walk leisurely about the temple courts. James could not understand the reason for throwing away such a magnificent opportunity to proclaim the kingdom. By night, his mind was held firmly in the grip of a distressing and dreadful uncertainty. 야고보 세베대에게, 이 일요일은 당혹과 깊은 혼란의 날이었습니다. 그는 벌어진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미친 듯한 환호를 용납한 후 그들이 성전에 이르자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던 주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면서, 특히 더 주님을 환영하러 쏟아져 나온 순례자 수천 명을 그들이 직면했을 때, 야고보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뜻을 이뤄 기쁜 우쭐댐과 희열이 충돌하는 감정 및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것에 관해 깊은 공포심으로 몹시 어수선했습니다. 그런 후 예수께서 나귀에서 내려와 성전 뜰 주변을 느긋하게 계속 거닐 때 그는 기가 꺾였고 실망에 휩싸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그렇게 엄청난 기회를 허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밤에 그의 마음은 비참함과 지독한 불확실성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72:5.5 (1884.4) John Zebedee came somewhere near understanding why Jesus did this; at least he grasped in part the spiritual significance of this so-called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As the multitude moved on toward the temple, and as John beheld his Master sitting there astride the colt, he recalled hearing Jesus onetime quote the passage of Scripture, the utterance of Zechariah, which described the coming of the Messiah as a man of peace and riding into Jerusalem on an ass. As John turned this Scripture over in his mind, he began to comprehend the symbolic significance of this Sunday-afternoon pageant. At least, he grasped enough of the meaning of this Scripture to enable him somewhat to enjoy the episode and to prevent his becoming overmuch depressed by the apparent purposeless ending of the triumphal procession. John had a type of mind which naturally tended to think and feel in symbols. 요한 세베대는 예수께서 왜 이렇게 했는지 대략 거의 이해했습니다. 그는 적어도 소위 이렇게 승리를 축하하는 예루살렘 입성의 영적 의미를 얼마간 파악했습니다. 군중이 성전을 향해 이동할 때, 요한은 거기 나귀 새끼에 걸터앉은 자기 주님을 보면서, 예수께서 이전에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들려준, 메시아가 평화의 사람으로 와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간다고 묘사한 스가랴의 말씀(슥9:9)을 생각해 냈습니다. 요한은 자기 마음으로 이 성구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는 이 일요일 오후 행렬의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그는 행사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이 성구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해서 겉보기에 목적이 없이 끝난 승리의 행렬로 인해 그다지 의기소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상징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느끼는 경향의 마음 유형을 지녔습니다.

240526 빌립, 나다니엘, 마태 및 도마의 태도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72:5.6 (1885.1) Philip was entirely unsettled by the suddenness and spontaneity of the outburst. He could not collect his thoughts sufficiently while on the way down Olivet to arrive at any settled notion as to what all the demonstration was about. In a way, he enjoyed the performance because his Master was being honored. By the time they reached the temple, he was perturbed by the thought that Jesus might possibly ask him to feed the multitude, so that the conduct of Jesus in turning leisurely away from the crowds, which so sorely disappointed the majority of the apostles, was a great relief to Philip. Multitudes had sometimes been a great trial to the steward of the twelve. After he was relieved of these personal fears regarding the material needs of the crowds, Philip joined with Peter in the expression of disappointment that nothing was done to teach the multitude. That night Philip got to thinking over these experiences and was tempted to doubt the whole idea of the kingdom; he honestly wondered what all these things could mean, but he expressed his doubts to no one; he loved Jesus too much. He had great personal faith in the Master. 빌립은 갑작스러운 자발적 돌발로 완전히 동요되었습니다. 그는 감람산을 내려오는 동안 모든 시위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어떤 명확한 개념에 이를 만큼 자기 생각을 충분히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자기 주님이 영예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공연을 즐겼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때쯤 예수께서 아마 자신에게 군중을 먹이라고 요청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는 불안했는데, 예수께서 느긋하게 군중을 물리치는 행동으로, 사도 대부분은 그렇게 몹시 실망했지만, 빌립은 아주 안심했습니다. 군중은 때때로 열두 사도의 사무장에게 커다란 골칫거리였습니다. 그가 군중의 물질적 필요에 관하여 이런 개인적 두려움에서 안도한 후, 빌립은 베드로와 함께 군중을 가르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실망을 표현했습니다. 빌립은 그날 밤 이런 경험을 다시 생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전체 개념에 대한 의혹에 끌렸습니다. 그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심쩍었지만 자기 의혹을 아무에게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너무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믿는 신앙이 컸습니다.

172:5.7 (1885.2) Nathaniel, aside from the symbolic and prophetic aspects, came the nearest to understanding the Master’s reason for enlisting the popular support of the Passover pilgrims. He reasoned it out, before they reached the temple, that without such a demonstrative entry into Jerusalem Jesus would have been arrested by the Sanhedrin officials and cast into prison the moment he presumed to enter the city. He was not, therefore, in the least surprised that the Master made no further use of the cheering crowds when he had once got inside the walls of the city and had thus so forcibly impressed the Jewish leaders that they would refrain from placing him under immediate arrest. Understanding the real reason for the Master’s entering the city in this manner, Nathaniel naturally followed along with more poise and was less perturbed and disappointed by Jesus’ subsequent conduct than were the other apostles. Nathaniel had great confidence in Jesus’ understanding of men as well as in his sagacity and cleverness in handling difficult situations. 나다니엘은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면을 제외하고 유월절 순례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얻은 주님의 이유를 가장 가깝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성전에 도착하기 전에, 그렇게 시위하는 예루살렘 입성이 없었다면, 그가 대담하게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 산헤드린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투옥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일단 도시의 성벽 안으로 들어왔고, 이런 식으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줘서 그들이 그를 즉각 구속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가 환호하는 군중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으시는 것에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이런 식으로 도시에 들어온 진정한 이유를 이해했기에, 나다니엘은 자연히 더 침착하게 따라갔고, 다른 사도들보다 예수의 다음 행동에 불안과 실망이 적었습니다. 나다니엘은 어려운 상황을 다루는 예수의 현명함과 능숙함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이해를 크게 신뢰했습니다.

172:5.8 (1885.3) Matthew was at first nonplused by this pageant performance. He did not grasp the meaning of what his eyes were seeing until he also recalled the Scripture in Zechariah where the prophet had alluded to the rejoicing of Jerusalem because her king had come bringing salvation and riding upon the colt of an ass. As the procession moved in the direction of the city and then drew on toward the temple, Matthew became ecstatic; he was certain that something extraordinary would happen when the Master arrived at the temple at the head of this shouting multitude. When one of the Pharisees mocked Jesus, saying, “Look, everybody, see who comes here, the king of the Jews riding on an ass!” Matthew kept his hands off of him only by exercising great restraint. None of the twelve was more depressed on the way back to Bethany that evening. Next to Simon Peter and Simon Zelotes, he experienced the highest nervous tension and was in a state of exhaustion by night. But by morning Matthew was much cheered; he was, after all, a cheerful loser. 마태는 이 화려한 공연 행렬로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도 예루살렘의 왕이 구원을 가지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기뻐한다고 선지자가 언급한 스가랴서의 글귀를 생각해 낼 때까지 자기 눈이 보고 있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행렬이 도시 방향으로 이동한 후 성전을 향해 가까워지자, 마태는 황홀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무리의 선두에 있는 주께서 성전에 도착하면 엄청난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바리새인 중 하나가 예수를 업신여기며 “누가 여기에 오는지 모두 보시오, 유대인의 왕이 나귀를 타고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는 커다란 자제심을 발휘하여 겨우 그에게 자기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베다니로 돌아오는 길에 열두 사도 중 누구도 더 풀이 죽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시몬 젤로떼 다음으로 그는 신경과민으로 최고로 긴장했고, 밤에는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되자 마태는 기운이 많이 났습니다. 어쨌든 결국 그는 졌지만 씩씩한 사람이었습니다(슥9:9).

172:5.9 (1886.1) Thomas was the most bewildered and puzzled man of all the twelve. Most of the time he just followed along, gazing at the spectacle and honestly wondering what could be the Master’s motive for participating in such a peculiar demonstration. Down deep in his heart he regarded the whole performance as a little childish, if not downright foolish. He had never seen Jesus do anything like this and was at a loss to account for his strange conduct on this Sunday afternoon. By the time they reached the temple, Thomas had deduced that the purpose of this popular demonstration was so to frighten the Sanhedrin that they would not dare immediately to arrest the Master. On the way back to Bethany Thomas thought much but said nothing. By bedtime the Master’s cleverness in staging the tumultuous entry into Jerusalem had begun to make a somewhat humorous appeal, and he was much cheered up by this reaction. 도마는 모든 열두 사도 중 가장 어리둥절하여 당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며 그렇게 별난 시위에 참여하는 주님의 동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의아해하면서 단지 따라갔습니다. 그의 깊은 심정에서 그는 모든 공연이 솔직히 어리석지는 않아도 약간 유치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이 일요일(AD30. 4.2) 오후에 그의 별난 행위를 설명하기에 난처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무렵에, 도마는 이런 대중 시위의 목적은 산헤드린을 몹시 놀라게 해서 그들이 감히 주님을 즉시 체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도마는 베다니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잘 시간에, 떠들썩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도록 기획한 주님의 영리함으로 어느 정도 익살스럽게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는 이런 반응으로 기운이 많이 났습니다.

240602 시몬 젤로떼, 알페오 쌍둥이 형제, 가롯 유다의 태도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72:5.10 (1886.2) This Sunday started off as a great day for Simon Zelotes. He saw visions of wonderful doings in Jerusalem the next few days, and in that he was right, but Simon dreamed of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national rule of the Jews, with Jesus on the throne of David. Simon saw the nationalists springing into action as soon as the kingdom was announced, and himself in supreme command of the assembling military forces of the new kingdom. On the way down Olivet he even envisaged the Sanhedrin and all of their sympathizers dead before sunset of that day. He really believed something great was going to happen. He was the noisiest man in the whole multitude. By five o’clock that afternoon he was a silent, crushed, and disillusioned apostle. He never fully recovered from the depression which settled down on him as a result of this day’s shock; at least not until long after the Master’s resurrection. 시몬 젤로떼에게 이번 일요일은 위대한 날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음 며칠간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환상을 보았고, 그가 옳았지만, 시몬은, 다윗의 왕좌에 앉은 예수와 함께, 유대인의 새로운 국가 통치가 설립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시몬은 왕국이 선포되자마자 민족주의자들이 갑자기 행동하기 시작하고, 새 왕국의 소집된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가진 자신을 보았습니다. 감람산을 내려가면서, 그는 그날 해지기 전에 산헤드린과 그 동조자들이 죽는 것을 마음에 그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위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군중 전체에서 가장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날 오후 5시가 되자, 그는 잠잠히, 짓눌렸고, 쓰라린 허무감에 빠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날 충격의 결과로 가라앉은 의기소침에서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주님의 부활 후 한참이 지나서야 회복되었습니다.

172:5.11 (1886.3) To the Alpheus twins this was a perfect day. They really enjoyed it all the way through, and not being present during the time of quiet visitation about the temple, they escaped much of the anticlimax of the popular upheaval. They could not possibly understand the downcast behavior of the apostles when they came back to Bethany that evening. In the memory of the twins this was always their day of being nearest heaven on earth. This day was the satisfying climax of their whole career as apostles. And the memory of the elation of this Sunday afternoon carried them on through all of the tragedy of this eventful week, right up to the hour of the crucifixion. It was the most befitting entry of the king the twins could conceive; they enjoyed every moment of the whole pageant. They fully approved of all they saw and long cherished the memory. 알페오 쌍둥이들에게 이날은 완벽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이날 내내 즐겼으며, 성전 근처를 조용히 방문할 때 없었고, 대중적 격변의 비참한 결말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베다니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도들의 기가 꺾인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쌍둥이들의 기억에서, 이날은 언제나 그들에게 지상에서 낙원에 가장 가까웠던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사도들로서 그들의 전 생애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일요일 오후의 흔쾌한 기분의 기억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바로 그 시간까지 이렇게 사건이 많은 비극적 주간 내내 견뎠습니다. 그것은 쌍둥이들이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가장 어울리는 왕의 입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행렬 전체의 모든 순간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모든 것이 완전히 마음에 들었고 그 기억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습니다.

172:5.12 (1886.4) Of all the apostles, Judas Iscariot was the most adversely affected by this processional entry into Jerusalem. His mind was in a disagreeable ferment because of the Master’s rebuke the preceding day in connection with Mary’s anointing at the feast in Simon’s house. Judas was disgusted with the whole spectacle. To him it seemed childish, if not indeed ridiculous. As this vengeful apostle looked upon the proceedings of this Sunday afternoon, Jesus seemed to him more to resemble a clown than a king. He heartily resented the whole performance. He shared the views of the Greeks and Romans, who looked down upon anyone who would consent to ride upon an ass or the colt of an ass. By the time the triumphal procession had entered the city, Judas had about made up his mind to abandon the whole idea of such a kingdom; he was almost resolved to forsake all such farcical attempts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n he thought of the resurrection of Lazarus, and many other things, and decided to stay on with the twelve, at least for another day. Besides, he carried the bag, and he would not desert with the apostolic funds in his possession. On the way back to Bethany that night his conduct did not seem strange since all of the apostles were equally downcast and silent. 모든 사도 중 가롯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이런 입성으로 가장 해롭게 나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날(AD30.4.1. 토) 시몬 집의 잔치에서 마리아가 기름을 바른 것에 관한 주님의 꾸중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불쾌감으로 들끓었습니다. 유다는 모든 광경이 못마땅하고 아니꼬웠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어리석게 보였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꼴불견이었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이 사도는 이런 일요일 오후의 진행을 구경하면서, 자신에게 예수는 왕이라기보다는 어릿광대와 더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모든 공연을 몹시 분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나귀나 나귀 새끼를 타려는 누구든지 얕보는 그리스인(人)들과 로마인(人)들의 관점을 공유했습니다. 개선 행렬이 도시로 들어갈 때쯤, 유다는 그런 하느님 나라의 모든 개념을 버리기로 거의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그런 터무니없는 모든 시도를 버리기로 거의 결정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나사로의 부활과 다른 여러 일을 생각하며 적어도 열둘과 하루 더 계속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돈주머니를 갖고 있어서, 사도 기금을 갖고 도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베다니로 돌아오는 길에 모든 사도가 똑같이 풀이 죽어 아무 말도 없어서, 그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172:5.13 (1887.1) Judas was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ridicule of his Sadducean friends. No other single factor exerted such a powerful influence on him, in his final determination to forsake Jesus and his fellow apostles, as a certain episode which occurred just as Jesus reached the gate of the city: A prominent Sadducee (a friend of Judas’s family) rushed up to him in a spirit of gleeful ridicule and, slapping him on the back, said: “Why so troubled of countenance, my good friend; cheer up and join us all while we acclaim this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as he rides through the gates of Jerusalem seated on an ass.” Judas had never shrunk from persecution, but he could not stand this sort of ridicule. With the long-nourished emotion of revenge there was now blended this fatal fear of ridicule, that terrible and fearful feeling of being ashamed of his Master and his fellow apostles. At heart, this ordained ambassador of the kingdom was already a deserter; it only remained for him to find some plausible excuse for an open break with the Master. 유다는 자기 사두개파 친구들의 비웃음으로 굉장히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수와 자기 동료 사도들을 내버리기로 그가 결정적으로 결심하면서, 예수께서 성문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어떤 일화만큼 그에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단 하나의 다른 요소가 없었습니다. 유명한 사두개인(유다 집안의 친구)이 그에게 힘차게 달려와 명랑하게 비웃는 자세로 그의 등을 찰싹 때리며 말했습니다. “내 친한 친구여, 왜 안색이 불안한가? 기운 내어, 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나귀에 앉아 예루살렘 문으로 타고 올 때, 우리 모두 함께 그를 환호하세.” 유다는 박해로 기가 죽지 않았지만, 이런 유형의 비웃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오래 품은 복수의 감정과 함께 이렇게 치명적인 비웃음의 두려움, 자기 주님과 동료 사도들을 창피하게 여기는, 지독하게 두려워하는 감정이 이제 뒤섞였습니다. 이 임직한 하느님 나라의 대사는 마음으로 이미 탈영병(脫營兵)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서 공개적으로 주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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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3 Monday in Jerusalem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Paper 173

Monday in Jerusalem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1. Cleansing the Temple 성전 정화(淨化)
2. Challenging the Master’s Authority 주(主)의 권한(權限)에 도전함
“The baptism of John, whence was it?”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3. Parable of the Two Sons 두 아들의 비유
4. Parable of the Absent Landlord 집을 비운 지주(地主 토지의 소유자)의 비유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건축자들이 버린 돌
5. Parable of the Marriage Feast 결혼 잔치의 비유
“Destroy this temple and …I will raise it up.” “이 성전을 파괴하면 …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240609 월요일 예루살렘에서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73:0.1 (1888.1) EARLY on this Monday morning, by prearrangement, Jesus and the apostles assembled at the home of Simon in Bethany, and after a brief conference they set out for Jerusalem. The twelve were strangely silent as they journeyed on toward the temple; they had not recovered from the experience of the preceding day. They were expectant, fearful, and profoundly affected by a certain feeling of detachment growing out of the Master’s sudden change of tactics, coupled with his instruction that they were to engage in no public teaching throughout this Passover week. 이 월요일(AD30.4.3) 이른 아침에 미리 준비한 대로, 예수와 사도들은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 모여서, 간략한 의논 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습니다(요2:13). 열두 사도는 성전을 향해 가면서 이상할 만큼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날의 경험에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형세를 관망하면서 두려웠고, 이 유월절 주간 내내 공적 가르침에 참여하지 말라는 주님의 지시와 관련하여 주님의 느닷없는 작전 변경으로 일어난 어떤 분리된 느낌으로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173:0.2 (1888.2) As this group journeyed down Mount Olivet, Jesus led the way, the apostles following closely behind in meditative silence. There was just one thought uppermost in the minds of all save Judas Iscariot, and that was: What will the Master do today? The one absorbing thought of Judas was: What shall I do? Shall I go on with Jesus and my associates, or shall I withdraw? And if I am going to quit, how shall I break off? 이들 일행이 감람산을 내려가는 동안, 예수께서 앞장섰고 사도들은 묵상에 잠겨 말없이 바짝 뒤따랐습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의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른 단 한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께서 오늘 무엇을 하실까?’였습니다. 유다가 몰두한 한 가지 생각은 ‘내가 무엇을 할까? 내가 예수와 내 동료들과 함께 계속할까, 아니면 내가 빠질까? 그리고 내가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갈라질까?’였습니다.

173:0.3 (1888.3) It was about nine o’clock on this beautiful morning when these men arrived at the temple. They went at once to the large court where Jesus so often taught, and after greeting the believers who were awaiting him, Jesus mounted one of the teaching platforms and began to address the gathering crowd. The apostles withdrew for a short distance and awaited developments. 이 사람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 9시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렇게 자주 가르쳤던 넓은 뜰로 바로 가서, 그를 기다리던 신자들과 인사한 후, 예수는 가르치는 강단 중 하나에 올라가서, 모인 군중에게 연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가까운 거리로 물러나 사태의 진전을 기다렸습니다.

1. Cleansing the Temple 성전 정화(淨化)

240616 성전 정화(淨化)1 막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73:1.1 (1888.4) A huge commercial traffic had grown up in association with the services and ceremonies of the temple worship. There was the business of providing suitable animals for the various sacrifices. Though it was permissible for a worshiper to provide his own sacrifice, the fact remained that this animal must be free from all “blemish” in the meaning of the Levitical law and as interpreted by official inspectors of the temple. Many a worshiper had experienced the humiliation of having his supposedly perfect animal rejected by the temple examiners. It therefore became the more general practice to purchase sacrificial animals at the temple, and although there were several stations on near-by Olivet where they could be bought, it had become the vogue to buy these animals directly from the temple pens. Gradually there had grown up this custom of selling all kinds of sacrificial animals in the temple courts. An extensive business, in which enormous profits were made, had thus been brought into existence. Part of these gains was reserved for the temple treasury, but the larger part went indirectly into the hands of the ruling high-priestly families. 성전 경배의 예배와 의식(儀式)과 관련하여 거대한 상업적 거래가 성장했습니다(요2:14). 다양한 제물에 적합하게 동물을 제공하는 사업이 있었습니다. 예배자가 자기 제물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이런 동물은 레위기 율법의 취지와 성전 검사관의 판단에 따라 “흠”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었습니다(레22:18-25). 여러 예배자가 완벽하게 여겼던 자기 동물이 성전 심사관에게 거절되는 수치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희생 동물을 사는 것이 더 보편적인 관행이 되었고, 그들은 감람산 근처 몇 군데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런 동물을 성전 축사에서 직접 사는 것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성전 뜰에서 온갖 종류의 희생 동물을 판매하는 이런 관습이 성장했습니다. 막대한 수익을 낳는 광대한 사업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런 일부 수익은 성전 기금으로 비축되었지만, 대부분은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대제사장 가족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173:1.2 (1888.5) This sale of animals in the temple prospered because, when the worshiper purchased such an animal, although the price might be somewhat high, no more fees had to be paid, and he could be sure the intended sacrifice would not be rejected on the ground of possessing real or technical blemishes. At one time or another systems of exorbitant overcharge were practiced upon the common people, especially during the great national feasts. At one time the greedy priests went so far as to demand the equivalent of the value of a week’s labor for a pair of doves which should have been sold to the poor for a few pennies. The “sons of Annas” had already begun to establish their bazaars in the temple precincts, those very merchandise marts which persisted to the time of their final overthrow by a mob three years before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tself. 이런 성전 동물 판매가 번창한 이유는, 예배자가 그런 동물을 구매하면, 가격이 약간 높아도, 더 이상 비용이 들지 않았고, 바치려는 희생물이 실제로 엄밀하게 흠이 있다는 구실로 퇴짜맞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특히 국가적 큰 잔치 기간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값을 요구하는 다른 체계가 일반 국민에게 실시되었습니다. 어느 때 탐욕스러운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잔돈 몇 푼에 팔아야 할 비둘기 한 쌍을 일주일 노동에 해당하는 값을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안나스의 아들들”은 벌써 성전 경내에 자신들의 매장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성전 자체가 멸망하기 3년 전 폭도들이 최후에 헐어버릴 때까지 지속했던 바로 그 종합 도매 센터였습니다.

173:1.3 (1889.1) But traffic in sacrificial animals and sundry merchandise was not the only way in which the courts of the temple were profaned. At this time there was fostered an extensive system of banking and commercial exchange which was carried on right within the temple precincts. And this all came about in the following manner: During the Asmonean dynasty the Jews coined their own silver money, and it had become the practice to require the temple dues of one-half shekel and all other temple fees to be paid with this Jewish coin. This regulation necessitated that money-changers be licensed to exchange the many sorts of currency in circulation throughout Palestine and other provinces of the Roman Empire for this orthodox shekel of Jewish coining. The temple head tax, payable by all except women, slaves, and minors, was one-half shekel, a coin about the size of a ten-cent piece but twice as thick. By the times of Jesus the priests had also been exempted from the payment of temple dues. Accordingly, from the 15th to the 25th of the month preceding the Passover, accredited money-changers erected their booths in the principal cities of Palestine for the purpose of providing the Jewish people with proper money to meet the temple dues after they had reached Jerusalem. After this ten-day period these money-changers moved on to Jerusalem and proceeded to set up their exchange tables in the courts of the temple. They were permitted to charge the equivalent of from three to four cents commission for the exchange of a coin valued at about ten cents, and in case a coin of larger value was offered for exchange, they were allowed to collect double. Likewise did these temple bankers profit from the exchange of all money intended for the purchase of sacrificial animals and for the payment of vows and the making of offerings. 그러나 희생 동물과 잡다한 상품의 거래만 성전 뜰을 더럽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바로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진 은행업과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광대한 체계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다음의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아스모니아 왕조 기간에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은화를 주조했고, 그것이 성전세(稅)로 반-세겔과 다른 모든 성전 요금을 이 유대 동전으로 내도록 규정하는 관행이 되었습니다. 이런 규정으로 환전상들은 팔레스타인 전역과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유통되는 여러 종류의 화폐를 유대 주화로 공인된 이 세겔로 환전하는 허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 노예와 미성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내야 할 성전 인두세(人頭稅)는 거의 10센트짜리 동전 크기지만 두께는 2배인 반 세겔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사제들도 성전세(稅) 납부가 면제되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에 전(前) 달 15일부터 25일까지 공인된 환전상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전세(稅)로 납부할 적절한 돈을 제공하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에 간이 점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10일간이 지나면 이런 환전상들은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성전 뜰에 환전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약 10센트 가치의 동전을 환전할 때 3~4센트에 해당하는 요금을 받도록 허락되었고, 더 큰 가치의 동전을 환전하려 할 경우, 그들은 2배를 수금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성전 은행가들은 예정된 희생 동물의 구매와 서원금 지불 및 헌금 마련을 위한 모든 돈을 환전하며 이윤을 얻었습니다(마21:12, 막11:15, 눅19:45, 요2:14).

173:1.4 (1889.2) These temple money-changers not only conducted a regular banking business for profit in the exchange of more than twenty sorts of money which the visiting pilgrims would periodically bring to Jerusalem, but they also engaged in all other kinds of transactions pertaining to the banking business. Both the temple treasury and the temple rulers profited tremendously from these commercial activities. It was not uncommon for the temple treasury to hold upwards of ten million dollars while the common people languished in poverty and continued to pay these unjust levies. 이런 성전 환전상들은 방문 순례자들이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가져오곤 했던 20종류 이상의 돈을 환전하여 수익을 얻는 정기적 은행 업무를 처리할 뿐만 아니라 은행 업무에 관련된 다른 모든 종류의 거래에도 관여했습니다. 성전 기금과 성전 지배자 모두 이런 상업 활동에서 엄청나게 이익을 얻었습니다. 서민들은 가난으로 비참하게 살면서 이렇게 부당한 징수액을 계속 내는 동안 성전 기금은 일천만 불 이상 보유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173:1.5 (1889.3) In the midst of this noisy aggregation of money-changers, merchandisers, and cattle sellers, Jesus, on this Monday morning, attempted to teach the gospel of the heavenly kingdom. He was not alone in resenting this profanation of the temple; the common people, especially the Jewish visitors from foreign provinces, also heartily resented this profiteering desecration of their national house of worship. At this time the Sanhedrin itself held its regular meetings in a chamber surrounded by all this babble and confusion of trade and barter. 이 월요일(AD30. 4. 3.) 아침, 환전상들, 상인들과 가축 판매인들이 이토록 시끄럽게 모여 있는 가운데, 예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의 신성을 더럽히는 것에 분개한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서민들, 특히 이방 지역에서 온 유대 방문자들 역시 자신들의 국가적인 예배 처소에서 이렇게 부당 이득을 취하며 신성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분개했습니다. 이때 산헤드린은 매매와 물물교환으로 이렇게 정신이 어지럽도록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모든 혼란으로 둘러싸인 회의장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있었습니다.

240623 성전 정화(淨化)2 막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73:1.6 (1890.1) As Jesus was about to begin his address, two things happened to arrest his attention. At the money table of a near-by exchanger a violent and heated argument had arisen over the alleged overcharging of a Jew from Alexandria, while at the same moment the air was rent by the bellowing of a drove of some one hundred bullocks which was being driven from one section of the animal pens to another. As Jesus paused, silently but thoughtfully contemplating this scene of commerce and confusion, close by he beheld a simple-minded Galilean, a man he had once talked with in Iron, being ridiculed and jostled about by supercilious and would-be superior Judeans; and all of this combined to produce one of those strange and periodic uprisings of indignant emotion in the soul of Jesus. 예수께서 연설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나 그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가까운 환전상의 환전대(換錢臺)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에게 과잉 청구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격렬히 흥분한 언쟁이 일어난 동시에 동물 축사의 한쪽에서 다른 구역으로 몰린 일백 마리쯤 황소 떼의 우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께서 잠시 멈춰서 조용히 그러나 생각에 잠겨 이 환전하고 혼란스러운 장면을 찬찬히 볼 때, 바로 옆에서, 사람을 깔보며 잘난 체하는 유대인들이 조롱하며 난폭하게 떠밀고 있는 사람을 예수께서 보았는데, 그는 순진한 갈릴리 사람으로 예수께서 한번 이론에서 대화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결합하여 예수의 혼(魂)에서 그렇게 낯설게 주기적으로 치받는 분노의 감정 중 하나가 생겼습니다.

173:1.7 (1890.2) To the amazement of his apostles, standing near at hand, who refrained from participation in what so soon followed, Jesus stepped down from the teaching platform and, going over to the lad who was driving the cattle through the court, took from him his whip of cords and swiftly drove the animals from the temple. But that was not all; he strode majestically before the wondering gaze of the thousands assembled in the temple court to the farthest cattle pen and proceeded to open the gates of every stall and to drive out the imprisoned animals. By this time the assembled pilgrims were electrified, and with uproarious shouting they moved toward the bazaars and began to overturn the tables of the money-changers. In less than five minutes all commerce had been swept from the temple. By the time the near-by Roman guards had appeared on the scene, all was quiet, and the crowds had become orderly; Jesus, returning to the speaker’s stand, spoke to the multitude: “You have this day witnessed that which is written in the Scriptures: ‘My house sha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바로 곧 뒤따를 일에 참여하지 않고, 가까이 근처에 서 있는, 그의 사도들이 놀랍게도, 예수는 가르치는 단(壇)에서 내려와, 소를 몰아 뜰을 통과하는 소년에게 가서 끈으로 된 채찍을 빼앗아 성전에서 동물들을 빨리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전 뜰에 모인 수천 명의 의아(疑訝)스러운 시선 앞에서 가장 멀리에 있는 가축 축사로 당당히 힘차게 걸어가 모든 구획의 문을 열고 갇혀 있는 동물들을 계속 몰아냈습니다. 이때 모여 있던 순례자들은 깜짝 놀라서 소란스럽게 외치며, 매장을 향해 이동하여 환전상들의 환전대를 뒤집어엎기 시작했습니다. 5분도 안 되어, 모든 거래가 성전에서 사라졌습니다. 근처 로마 경비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이 무렵에, 모두가 조용했고, 군중들은 질서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연단으로 돌아와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오늘 성서의 기록을 목격했느니라.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어야 하지만, 너희가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도다(사56:7b, 렘7:11).’”

173:1.8 (1890.3) But before he could utter other words, the great assembly broke out in hosannas of praise, and presently a throng of youths stepped out from the crowd to sing grateful hymns of appreciation that the profane and profiteering merchandisers had been ejected from the sacred temple. By this time certain of the priests had arrived on the scene, and one of them said to Jesus, “Do you not hear what the children of the Levites say?” And the Master replied, “Have you never read, ‘Out of the mouths of babes and sucklings has praise been perfected’?” And all the rest of that day while Jesus taught, guards set by the people stood watch at every archway, and they would not permit anyone to carry even an empty vessel across the temple courts. 그러나 그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많이 모인 사람이 갑자기 신(神)을 찬미하는 호산나를 외치기 시작했고, 곧 허다한 청년들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와, 신성을 더럽히고 부당 이득을 취하는 상인들이 신성한 성전에서 쫓겨난 것을, 고마워하는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때 어떤 사제들이 그 현장에 도착하여, 그중 하나가 예수께 “레위족(族) 자녀들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너는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온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시8:2, 마21:15-16)?”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쳤던 그날 내내, 사람들이 세운 경비병들이 모든 아치길마다 당직을 섰고, 그들은 누구나 빈 그릇이라도 가지고 성전 뜰을 건너도록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막11:16).

173:1.9 (1890.4) When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heard about these happenings, they were dumfounded. All the more they feared the Master, and all the more they determined to destroy him. But they were nonplused. They did not know how to accomplish his death, for they greatly feared the multitudes, who were now so outspoken in their approval of his overthrow of the profane profiteers. And all this day, a day of quiet and peace in the temple courts, the people heard Jesus’ teaching and literally hung on his words.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사건에 대해 듣고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들은 더욱더 주님을 두려워했고, 그들은 더욱더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막11:18). 그러나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부당 이득자들을 뒤엎은 주님을 이제 아주 솔직하게 찬성하고 있는 군중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어떻게 그를 죽일 것인지 몰랐습니다. 성전 뜰이 고요하고 평온했던 이날 내내,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한마디 한마디 그의 말씀에 매달렸습니다(눅19:47b-48).

173:1.10 (1890.5) This surprising act of Jesus was beyond the comprehension of his apostles. They were so taken aback by this sudden and unexpected move of their Master that they remained throughout the whole episode huddled together near the speaker’s stand; they never lifted a hand to further this cleansing of the temple. If this spectacular event had occurred the day before, at the time of Jesus’ triumphal arrival at the temple at the termination of his tumultuous procession through the gates of the city, all the while loudly acclaimed by the multitude, they would have been ready for it, but coming as it did, they were wholly unprepared to participate. 이렇게 놀랄 만한 예수의 행동은 그 사도들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갑작스럽고, 생각지도 않은 주님의 행동에 너무 깜짝 놀라서, 이런 성전 정화(淨化)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체 사건 내내, 연단(演壇) 근처에 남아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장엄한 사건이 전날(AD30.4.2. 일요일), 예수께서 도시의 문을 통해 소란스러운 행진을 마치면서 성전에 승리하며 도착한 때, 군중이 떠들썩하게 계속 환호하던 중에 일어났다면, 그들은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었지만, 일어난 바와 같이, 그들은 참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73:1.11 (1891.1) This cleansing of the temple discloses the Master’s attitude toward commercializing the practices of religion as well as his detestation of all forms of unfairness and profiteering at the expense of the poor and the unlearned. This episode also demonstrates that Jesus did not look with approval upon the refusal to employ force to protect the majority of any given human group against the unfair and enslaving practices of unjust minorities who may be able to entrench themselves behind political, financial, or ecclesiastical power. Shrewd, wicked, and designing men are not to be permitted to organize themselves for the exploitation and oppression of those who, because of their idealism, are not disposed to resort to force for self-protection or for the furtherance of their laudable life projects. 이 성전 정화(淨化)는 모든 형태의 불공정과 가난한 자들과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돈으로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을 그가 몹시 싫어할 뿐만 아니라 상업화하는 종교의 관행에 대한 주님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이 일화는 또한, 예수께서 정치적, 재정적, 또는 교회적 권력을 등에 업을 수도 있는 불의한 소수 무리의 부당하게 예속시키는 관행에 저항하여 다수의 어떤 인간 집단을 보호하는 물리력 사용에 대한 거절을 찬성하지 않으셨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교활하고, 사악하며,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방어(防禦)나 칭찬할 만한 일생의 계획을 촉진하려고 자신들의 이상주의(理想主義) 때문에 강압 수단을 쓰지 않으려는 자들을 착취(搾取)하고 억압(抑壓)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2. Challenging the Master’s Authority 주(主)의 권한(權限)에 도전함

240630 주(主)의 권한(權限)에 도전함 마21:23-27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173:2.1 (1891.2) On Sunday the triumphal entry into Jerusalem so overawed the Jewish leaders that they refrained from placing Jesus under arrest. Today, this spectacular cleansing of the temple likewise effectively postponed the Master’s apprehension. Day by day the rulers of the Jews were becoming more and more determined to destroy him, but they were distraught by two fears, which conspired to delay the hour of striking.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were unwilling to arrest Jesus in public for fear the multitude might turn upon them in a fury of resentment; they also dreaded the possibility of the Roman guards being called upon to quell a popular uprising. 일요일(AD30.4.2)에 예루살렘으로 승리를 찬미하며 입성(入城)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두려워서 예수의 구금(拘禁)을 그만두었습니다. 오늘(AD30.4.3),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하는 성전 정화(淨化) 또한 사실상 주님의 체포를 뒤로 미루게 했습니다. 날마다 유대 통치자들은 갈수록 더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두 가지 두려움으로 몹시 동요되어, 공격 시간을 늦추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군중이 분노로 격분하여 자신들에게 대들까 봐 두려워서 드러나게 예수를 체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대중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경비병들에게 요청할 가능성을 극도로 걱정했습니다.

173:2.2 (1891.3) At the noon session of the Sanhedrin it was unanimously agreed that Jesus must be speedily destroyed, inasmuch as no friend of the Master attended this meeting. But they could not agree as to when and how he should be taken into custody. Finally they agreed upon appointing five groups to go out among the people and seek to entangle him in his teaching or otherwise to discredit him in the sight of those who listened to his instruction. Accordingly, about two o’clock, when Jesus had just begun his discourse on “The Liberty of Sonship,” a group of these elders of Israel made their way up near Jesus and, interrupting him in the customary manner, asked this question: “By what authority do you do these things?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산헤드린의 정오 회의에서, 예수를 신속히 죽여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동의했는데, 이 회의에 주님의 친구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어떻게 그를 잡아 가둘 것인지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다섯 집단을 지명하여 사람들 사이로 나아가 그를 그의 가르침으로 함정에 빠뜨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가르침을 듣는 자들의 눈앞에서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래서, 2시쯤, 예수께서 “아들(자녀)이 된 자유”에 대해 막 강연하기 시작하자, 이런 이스라엘 장로 중 한 무리가 예수 근처까지 나아가 습관적 태도로 예수의 말씀을 방해하며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마21:23, 막11:27-28, 눅20:1-2)?”

173:2.3 (1891.4) It was altogether proper that the temple rulers and the officers of the Jewish Sanhedrin should ask this question of anyone who presumed to teach and perform in the extraordinary manner which had been characteristic of Jesus, especially as concerned his recent conduct in clearing the temple of all commerce. These traders and money-changers all operated by direct license from the highest rulers, and a percentage of their gains was supposed to go directly into the temple treasury. Do not forget that authority was the watchword of all Jewry. The prophets were always stirring up trouble because they so boldly presumed to teach without authority, without having been duly instructed in the rabbinic academies and subsequently regularly ordained by the Sanhedrin. Lack of this authority in pretentious public teaching was looked upon as indicating either ignorant presumption or open rebellion. At this time only the Sanhedrin could ordain an elder or teacher, and such a ceremony had to take place in the presence of at least three persons who had previously been so ordained. Such an ordination conferred the title of “rabbi” upon the teacher and also qualified him to act as a judge, “binding and loosing such matters as might be brought to him for adjudication.” 성전 통치자들과 유대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의 특징이었던 색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며, 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특히 성전의 모든 거래를 깨끗하게 치운 그의 최근 행위에 관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모두 적절했습니다. 이런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모두 최고 통치자들로부터 직접 허가를 받아 영업했고, 수익금의 일정 비율은 바로 성전 기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권한(權限)이 모든 유대인의 표어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던 이유는 그들이 마땅히 랍비 전문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계속해서 산헤드린에서 정식으로 임명받지 않은 채, 아주 대담하게 감히 권한 없이 가르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규모를 공적으로 가르치면서 이런 권한이 없는 것은, 무식해서 주제넘거나 공개적 반란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당시에 산헤드린만 장로나 선생을 임명할 수 있었고, 그런 임명식은 적어도 이전(以前)에 그렇게 임명받은 3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열려야 했습니다. 그런 임명식으로 그 선생은 “랍비”라는 직함을 받았고, 또한 “심판하도록 그에게 가져오는 그런 문제들을 구속하고 해제하는” 판사로 행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173:2.4 (1892.1) The rulers of the temple came before Jesus at this afternoon hour challenging not only his teaching but his acts. Jesus well knew that these very men had long publicly taught that his authority for teaching was Satanic, and that all his mighty works had been wrought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Therefore did the Master begin his answer to their question by asking them a counter-question. Said Jesus: “I would also like to ask you one question which, if you will answer me, I likewise will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works. The baptism of John, whence was it? Did John get his authority from heaven or from men?” 성전의 통치자들은 이날 오후 시간에 예수 앞에 와서 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예수가 가르친 권한이 사탄의 것이며, 그의 모든 기적이 악령들 괴수(魁首)의 권세로 행한 것이었다고 가르쳐 온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대(反對) 질문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는데, 너희가 나에게 대답한다면 나도 내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할 것이니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이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았느냐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받았느냐(마21:24-25a, 막11:29-30, 눅20:3-4)?”

173:2.5 (1892.2) And when his questioners heard this, they withdrew to one side to take counsel among themselves as to what answer they might give. They had thought to embarrass Jesus before the multitude, but now they found themselves much confused before all who were assembled at that time in the temple court. And their discomfiture was all the more apparent when they returned to Jesus, saying: “Concerning the baptism of John, we cannot answer; we do not know.” And they so answered the Master because they had reasoned among themselves: If we shall say from heaven, then will he say, Why did you not believe him, and perchance will add that he received his authority from John; and if we shall say from men, then might the multitude turn upon us, for most of them hold that John was a prophet; and so they were compelled to come before Jesus and the people confessing that they, the religious teachers and leaders of Israel, could not (or would not) express an opinion about John’s mission. And when they had spoken, Jesus, looking down upon them, said, “Neither will I tell you by what authority I do these things.” 질문자들이 이 말을 듣자, 그들은 한쪽으로 물러나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저희끼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군중 앞에서 예수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들은 그 시간 성전 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아주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께 돌아와서 “요한의 세례에 관해 우리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그들 계획의 실패가 오히려 또렷해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님께 대답한 이유는 그들이 저희끼리 생각해서 의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가 왜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아마 그는 자기 권한을 요한으로부터 받았다고 덧붙여 말할 것이라. 우리가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말하면, 군중 대부분이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들지도 모를 일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사람들 앞에 와서, 종교 선생들과 지도자들인 자신들은 요한의 사명에 대한 의견을 표현할 수 없거나(표현하지 않겠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하자, 예수는 그들을 낮추어보며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마21:25b-27, 막11:31-33, 눅20:5-8).

173:2.6 (1892.3) Jesus never intended to appeal to John for his authority; John had never been ordained by the Sanhedrin. Jesus’ authority was in himself and in his Father’s eternal supremacy. 예수는 요한에게 자신의 권한을 호소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은 결코 요한을 임명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권한은 그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영원한 최고 권위에 있었습니다.

173:2.7 (1892.4) In employing this method of dealing with his adversaries, Jesus did not mean to dodge the question. At first it may seem that he was guilty of a masterly evasion, but it was not so. Jesus was never disposed to take unfair advantage of even his enemies. In this apparent evasion he really supplied all his hearers with the answer to the Pharisees’ question as to the authority behind his mission. They had asserted that he performed by authority of the prince of devils. Jesus had repeatedly asserted that all his teaching and works were by the power and authority of his Father in heaven. This the Jewish leaders refused to accept and were seeking to corner him into admitting that he was an irregular teacher since he had never been sanctioned by the Sanhedrin. In answering them as he did, while not claiming authority from John, he so satisfied the people with the inference that the effort of his enemies to ensnare him was effectively turned upon themselves and was much to their discredit in the eyes of all present. 예수의 적수(敵手)들을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다루면서, 그는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뒤가 켕겨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대적들조차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경향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외견상 이렇게 피하면서, 그는 자신의 사명 배후에 있는 권한에 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기 모든 청중에게 정말로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악령들 괴수(魁首)의 권한으로 행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가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의 권세와 권한에 의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는 산헤드린의 인가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무면허 선생임을 인정하도록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그들에게 대답하여, 요한으로부터 권한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자기 대적들의 노력이 실제로 자신들을 반격하여 참석한 모든 사람의 눈에 그들이 아주 망신거리가 된 결론으로 그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족시켰습니다.

173:2.8 (1892.5) And it was this genius of the Master for dealing with his adversaries that made them so afraid of him. They attempted no more questions that day; they retired to take further counsel among themselves. But the people were not slow to discern the dishonesty and insincerity in these questions asked by the Jewish rulers. Even the common folk could not fail to distinguish between the moral majesty of the Master and the designing hypocrisy of his enemies. But the cleansing of the temple had brought the Sadducees over to the side of the Pharisees in perfecting the plan to destroy Jesus. And the Sadducees now represented a majority of the Sanhedrin. 그리고 그들이 그를 그렇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은 그의 적수(敵手)들을 다루는 주님의 이런 비범한 재능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더 이상 질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희끼리 더 의논하려고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대 통치자들이 던진 이런 질문에서 부정직과 위선(僞善)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보통 사람들도 주님의 도덕적인 당당한 품격과 그의 대적들의 흉계가 있는 위선(僞善)을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정화(淨化)는 사두개인들을 바리새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그때 산헤드린의 다수에 해당했습니다.

3. Parable of the Two Sons 두 아들의 비유

240707 두 아들의 비유 마21:28-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173:3.1 (1893.1) As the caviling Pharisees stood there in silence before Jesus, he looked down on them and said: “Since you are in doubt about John’s mission and arrayed in enmity against the teaching and the works of the Son of Man, give ear while I tell you a parable: A certain great and respected landholder had two sons, and desiring the help of his sons in the management of his large estates, he came to one of them, saying, ‘Son, go work today in my vineyard.’ And this unthinking son answered his father, saying, ‘I will not go’; but afterward he repented and went. When he had found his older son, likewise he said to him, ‘Son, go work in my vineyard.’ And this hypocritical and unfaithful son answered, ‘Yes, my father, I will go.’ But when his father had departed, he went not. Let me ask you, which of these sons really did his father’s will?”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이 거기 예수 앞에 조용히 서 있을 때, 그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요한의 사명에 대해 의심하고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가르침과 행위에 줄지어 적대시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비유에 귀를 기울이라. 어떤 아주 평판이 좋은 지주(地主 토지의 소유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자기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커다란 토지를 관리하려고, 그가 그중 하나에게 와서 ‘아들아, 오늘은 내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없는 이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가 자기 큰아들을 발견하자, 마찬가지로 그가 그에게 ‘아들아,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위선적이고 성실하지 않은 이 아들은 ‘예, 아버지, 제가 갈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떠나자,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들 중 어느 아들이 실제로 자기 아버지의 뜻대로 했는지 내가 묻노라(마21:28-31a).”

173:3.2 (1893.2) And the people spoke with one accord, saying, “The first son.” And then said Jesus: “Even so; and now do I declare that the publicans and harlots, even though they appear to refuse the call to repentance, shall see the error of their way and go on into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o make great pretensions of serving the Father in heaven while you refuse to do the works of the Father. It was not you, the Pharisees and scribes, who believed John, but rather the publicans and sinners; neither do you believe my teaching, but the common people hear my words gladly.” 사람들이 합심해서 “첫 번째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그렇도다. 이제 내가 선언하노니, 세리(稅吏)와 매춘부(賣春婦)들이 뉘우치라는 부름을 물리치는 듯해도,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엄청나게 섬기는 척하는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리라. 요한을 믿은 자들은 너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도다. 너희는 내 가르침을 믿지 않지만, 일반 사람들은 내 말을 기쁘게 듣느니라(마21:31b-32).”

173:3.3 (1893.3) Jesus did not despise the Pharisees and Sadducees personally. It was their systems of teaching and practice which he sought to discredit. He was hostile to no man, but here was occurring the inevitable clash between a new and living religion of the spirit and the older religion of ceremony, tradition, and authority.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려 했던 것은, 그들의 교육과 관행 체계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적대시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새롭고 살아있는 영(靈)의 종교와 더 오래된 의례(儀禮), 전통(傳統) 및 권한(權限)의 종교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73:3.4 (1893.4) All this time the twelve apostles stood near the Master, but they did not in any manner participate in these transactions. Each one of the twelve was reacting in his own peculiar way to the events of these closing days of Jesus’ ministry in the flesh, and each one likewise remained obedient to the Master’s injunction to refrain from all public teaching and preaching during this Passover week. 이 모든 시간에 열두 사도는 주(主)님 옆에 서 있었지만,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런 과정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열두 사도 저마다 예수께서 육신의 사역을 마감하는 이런 며칠간의 사건들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었고, 각자 마찬가지로 이 유월절 주간에 공적인 모든 가르침과 설교를 그만두라는 주님의 명령에 여전히 순종했습니다.

4. Parable of the Absent Landlord 집을 비운 지주(地主 토지의 소유자)의 비유

240714 집을 비운 지주(地主)의 비유 마21:33-46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173:4.1 (1893.5) When the chief Pharisees and the scribes who had sought to entangle Jesus with their questions had finished listening to the story of the two sons, they withdrew to take further counsel, and the Master, turning his attention to the listening multitude, told another parable: 예수를 질문으로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최고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더 의논하려고 물러나자, 주님은 경청하던 군중에게 주의를 돌려 다른 비유를 말했습니다.

173:4.2 (1893.6) “There was a good man who was a householder, and he planted a vineyard. He set a hedge about it, dug a pit for the wine press, and built a watchtower for the guards. Then he let this vineyard out to tenants while he went on a long journey into another country. And when the season of the fruits drew near, he sent servants to the tenants to receive his rental. But they took counsel among themselves and refused to give these servants the fruits due their master; instead, they fell upon his servants, beating one, stoning another, and sending the others away empty-handed. And when the householder heard about all this, he sent other and more trusted servants to deal with these wicked tenants, and these they wounded and also treated shamefully. And then the householder sent his favorite servant, his steward, and him they killed. And still, in patience and with forbearance, he dispatched many other servants, but none would they receive. Some they beat, others they killed, and when the householder had been so dealt with, he decided to send his son to deal with these ungrateful tenants, saying to himself, ‘They may mistreat my servants, but they will surely show respect for my beloved son.’ But when these unrepentant and wicked tenants saw the son, they reasoned among themselves: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then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So they laid hold on him, and after casting him out of the vineyard, they killed him. When the lord of that vineyard shall hear how they have rejected and killed his son, what will he do to those ungrateful and wicked tenants?” “부동산 소유자였던 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포도원을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원 주위에 울타리를 치며, 포도즙 짜는 기구를 위해 구덩이를 파고, 경비병을 위한 감시탑을 세웠습니다. 그다음에 그는 다른 지역으로 긴 여정을 떠나면서 이 포도원을 소작인(小作人)들에게 세주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자, 그는 자기 소작료를 받으려고 소작인들에게 하인(下人)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여 그들의 주인에게 응당 치러져야 할 수확물을 이 하인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의 하인들에게 격렬하게 덤벼들어 하나는 매질하고, 다른 하나는 돌을 던져서 쫓아버리며, 나머지는 전부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토지 소유자가 이 모든 일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다른 하인들을 보내 이런 사악한 소작인들을 처리하게 했는데, 그들은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수치스럽게 대했습니다. 그러자 토지 소유자는 자신이 아끼는 하인, 자기 청지기를 보냈는데, 그들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인내와 관용으로 여러 다른 하인을 보냈지만, 그들은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인 몇 사람을 매질하고, 나머지는 죽였으며, 토지 소유자가 그렇게 당하자,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 이 배은망덕(背恩忘德 입은 은덕을 저버림)한 소작인들을 처리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이 내 하인들을 학대했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존중할 것이다.’라고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회개하지 않고 사악한 소작인들이 아들을 보자, 저희끼리 의논했습니다. ‘이 사람이 상속자니, 가까워질 때 그를 죽이면 그 유산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그를 쫓아낸 후에 그를 죽였습니다. 그 포도원의 주인이, 그들이 자기 아들을 어떻게 버리고 죽였는지, 듣게 되면, 그가 그렇게 배은망덕(背恩忘德)하고 사악한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마21:33-40, 막12:1-9a, 눅20:9-15)?”

173:4.3 (1894.1) And when the people heard this parable and the question Jesus asked, they answered, “He will destroy those miserable men and let out his vineyard to other and honest farmers who will render to him the fruits in their season.” And when some of them who heard perceived that this parable referred to the Jewish nation and its treatment of the prophets and to the impending rejection of Jesus and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y said in sorrow, “God forbid that we should go on doing these things.” 사람들이 이 비유와 예수께서 물은 질문을 듣자, “그는 그토록 파렴치(破廉恥)한 사람들을 죽이고, 제철에 수확물을 그에게 납부할 다른 정직한 농부들에게 자기 포도원을 세줄 것입니다.”라고 그들이 대답했습니다(마21:41, 막12:9b, 눅20:16a). 이 비유를 들은 그들 중 일부는 이 비유가 유대 민족과 선지자들에 대한 그들의 대우, 그리고 예수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임박한 거절에 들어맞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들이 슬퍼하며 “하느님이여, 우리가 이런 일을 계속하지 않도록 막아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눅20:16b).

173:4.4 (1894.2) Jesus saw a group of the Sadducees and Pharisees making their way through the crowd, and he paused for a moment until they drew near him, when he said: “You know how your fathers rejected the prophets, and you well know that you are set in your hearts to reject the Son of Man.” And then, looking with searching gaze upon those priests and elders who were standing near him, Jesus said: “Did you never read in the Scripture about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jected, and which, when the people had discovered it, was made into the cornerstone? And so once more do I warn you that, if you continue to reject this gospel, presently will the kingdom of God be taken away from you and be given to a people willing to receive the good news and to bring forth the fruits of the spirit. And there is a mystery about this stone, seeing that whoso falls upon it, while he is thereby broken in pieces, shall be saved; but on whomsoever this stone falls, he will be ground to dust and his ashes scattered to the four winds.”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 무리가 군중을 뚫고 나아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잠시 멈췄다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어떻게 버렸는지 알고 있으며, 너희 마음으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버리기로 한 것을 너희도 잘 아느니라.” 그런 다음, 자신 옆에 서 있던 그 사제들과 장로들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사람들이 발견하자, 초석(礎石 주춧돌)으로 삼았다는 돌에 대해 읽어보지 못했느냐? 그래서 다시 한번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너희가 계속 이 복음을 물리치면, 즉시 하느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치워 옮겨서 기쁜 소식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영(靈)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 이 돌에 대해서 신비한 진리가 있어서, 누구나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가 산산이 부서져도 구원될 것이니라. 그러나 이 돌이 떨어지는 누구나, 그는 먼지로 잘게 부스러져, 그의 재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라(시118:22, 단2:34-35, 마21:42-44, 막12:10, 눅20:17-18).”

173:4.5 (1894.3) When the Pharisees heard these words, they understood that Jesus referred to themselves and the other Jewish leaders. They greatly desired to lay hold on him then and there, but they feared the multitude. However, they were so angered by the Master’s words that they withdrew and held further counsel among themselves as to how they might bring about his death. And that night both the Sadducees and the Pharisees joined hands in the plan to entrap him the next day.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듣자, 예수께서 자신들과 다른 유대 지도자들을 언급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를 아주 붙잡고 싶었지만,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너무 화가 나서, 물러나, 자신들이 어떻게 그를 죽일 것인지에 대해 저희끼리 더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음날 그를 함정에 빠뜨릴 계획에 힘을 합쳤습니다(마21:45-46, 막12:12, 눅20:19).

5. Parable of the Marriage Feast 결혼 잔치의 비유

240721 결혼 잔치의 비유 마22:1-13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73:5.1 (1894.4) After the scribes and rulers had withdrawn, Jesus addressed himself again to the assembled crowd and spoke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He said: 서기관들과 통치자들이 물러난 후, 예수는 모인 군중에게 다시 말을 걸며 결혼 잔치의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마22:1).

173:5.2 (1894.5)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likened to a certain king who made a marriage feast for his son and dispatched messengers to call those who had previously been invited to the feast to come, saying, ‘Everything is ready for the marriage supper at the king’s palace.’ Now, many of those who had once promised to attend, at this time refused to come. When the king heard of these rejections of his invitation, he sent other servants and messengers, saying: ‘Tell all those who were bidden, to come, for, behold, my dinner is ready. My oxen and my fatlings are killed, and all is in readiness for the celebration of the forthcoming marriage of my son.’ But again did the thoughtless make light of this call of their king, and they went their ways, one to the farm, another to the pottery, and others to their merchandise. Still others were not content thus to slight the king’s call, but in open rebellion they laid hands on the king’s messengers and shamefully mistreated them, even killing some of them. And when the king perceived that his chosen guests, even those who had accepted his preliminary invitation and had promised to attend the wedding feast, had finally rejected his call and in rebellion had assaulted and slain his chosen messengers, he was exceedingly wroth. And then this insulted king ordered out his armies and the armies of his allies and instructed them to destroy these rebellious murderers and to burn down their city.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마련하고 사전에 초대받은 자들에게 잔치에 오도록 ‘결혼 만찬이 왕궁에서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부르러 메신저들을 파견한 어떤 왕에 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많은 사람이 이때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왕은 자신의 초대를 이렇게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다른 신하들과 메신저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초대받은 모든 자에게 말하되, 보라, 내 만찬이 준비되었으니 오시오. 내 소들과 살찐 새끼 양과 송아지 등을 잡았고, 내 아들의 이번 결혼을 축하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은 이런 왕의 부름을 또다시 대수롭지 않게 보고 업신여기며, 각자의 길로, 하나는 농장으로, 다른 하나는 도자기 만드는 곳으로, 나머지는 각자 거래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왕의 부름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켜 왕의 메신저들을 붙잡아 그들을 치욕스럽게 학대했고, 심지어 그들 일부를 죽였습니다. 왕은 자신이 택한 손님들, 자신의 초대를 사전에 받아들여 결혼 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한 자들조차 결국 자신의 초청을 거절하고 폭동을 일으켜 자신이 선발한 메신저들을 습격하여 살해했음을 알아차리자, 그는 매우 격노했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모욕당한 왕은 자기 군대와 자기 동맹국의 군대를 출동시켜 이렇게 반역한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태워 버리도록 그들에게 명령했습니다(마22:2-7, 눅14:16-20).

173:5.3 (1895.1) “And when he had punished those who spurned his invitation, he appointed yet another day for the wedding feast and said to his messengers: ‘They who were first bidden to the wedding were not worthy; so go now into the parting of the ways and into the highways and even beyond the borders of the city, and as many as you shall find, bid even these strangers to come in and attend this wedding feast.’ And then these servants went out into the highways and the out-of-the-way places, and they gathered together as many as they found, good and bad, rich and poor, so that at last the wedding chamber was filled with willing guests. When all was ready, the king came in to view his guests, and much to his surprise he saw there a man without a wedding garment. The king, since he had freely provided wedding garments for all his guests, addressing this man, said: ‘Friend, how is it that you come into my guest chamber on this occasion without a wedding garment?’ And this unprepared man was speechless. Then said the king to his servants: ‘Cast out this thoughtless guest from my house to share the lot of all the others who have spurned my hospitality and rejected my call. I will have none here except those who delight to accept my invitation, and who do me the honor to wear those guest garments so freely provided for all.’” “그가 자기 초대를 경멸한 자들을 처벌하고 나서, 그는 결혼 잔치를 위해 또 다른 날을 정하고 자기 메신저들에게 말했습니다. ‘결혼에 먼저 초대받은 자들은 합당하지 않았느니라. 그러니 이제 갈림길과 큰길, 도시 경계를 넘어서까지 가서 너희가 찾는 대로 이렇게 낯선 자들까지 와서 이 결혼 잔치에 참석하게 하라.’ 그래서 이 신하들은 큰길과 외딴곳들로 가서, 그들이 찾는 대로 선한 자와 악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함께 모아서 드디어 결혼식장이 축하하는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왕이 자기 손님들을 보러 왔는데, 놀랍게도 그는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봤습니다. 왕이 자기 모든 손님에게 결혼 예복을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그가 이 사람에게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친구여, 이 행사에 결혼 예복 없이 어떻게 나의 내빈실에 들어왔습니까?’ 그러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 사람은 말을 못 했습니다. 그때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환대를 퇴짜 놓고 내 초청을 거절한 다른 모든 자의 몫을 나누도록 생각이 모자란 이 손님을 내 집에서 몰아내라. 내 초대를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두에게 그렇게 무료로 제공한 그런 손님 예복들을 입어서 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라(마22:8-13, 눅14:21-24).’”

173:5.4 (1895.2) After speaking this parable, Jesus was about to dismiss the multitude when a sympathetic believer, making his way through the crowds toward him, asked: “But, Master, how shall we know about these things? how shall we be ready for the king’s invitation? what sign will you give us whereby we shall know that you are the Son of God?” And when the Master heard this, he said, “Only one sign shall be given you.” And then, pointing to his own body, he continued, “Destroy this temple, and in three days I will raise it up.” But they did not understand him, and as they dispersed, they talked among themselves, saying, “Almost fifty years has this temple been in building, and yet he says he will destroy it and raise it up in three days.” Even his own apostles did not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this utterance, but subsequently, after his resurrection, they recalled what he had said. 이 비유를 마치고, 예수께서 군중을 막 떠나게 할 때, 호의적인 신자가 그를 향해 군중을 뚫고 나와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왕의 초대를 준비할까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알도록 어떤 표징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주께서 이 말을 듣자, 그가 말했습니다. “한 가지 표징만 너희에게 줄 것이라.” 그런 후 자기 몸(신체)을 가리키면서,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3일 안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흩어지면서 저희끼리 말하기를, “이 성전을 짓는 데 거의 50년이 걸렸는데도, 그는 자신이 그것을 헐고 3일 안에 일으켜 세울 것이라 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도들조차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의 부활 후에, 그들은 그의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요2:18-22).

173:5.5 (1895.3) About four o’clock this afternoon Jesus beckoned to his apostles and indicated that he desired to leave the temple and to go to Bethany for their evening meal and a night of rest. On the way up Olivet Jesus instructed Andrew, Philip, and Thomas that, on the morrow, they should establish a camp nearer the city which they could occupy during the remainder of the Passover week. In compliance with this instruction the following morning they pitched their tents in the hillside ravine overlooking the public camping park of Gethsemane, on a plot of ground belonging to Simon of Bethany. 이날 오후 4시쯤,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을 손짓으로 불러서, 자신이 성전을 떠나 베다니로 가서 저녁 식사와 하룻밤 쉬고 싶다고 알렸습니다. 감람산으로 오르는 중에 예수는 안드레, 빌립과 도마에게, 내일 도시 가까이에, 그들이 남은 유월절 주간에 머물 수 있는 야영지를 설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런 지시에 따라,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겟세마네의 공공 야영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비탈 계곡, 베다니 시몬이 소유한 작은 구획의 땅에 천막을 쳤습니다(눅21:37b).

173:5.6 (1896.1) Again it was a silent group of Jews who made their way up the western slope of Olivet on this Monday night. These twelve men, as never before, were beginning to sense that something tragic was about to happen. While the dramatic cleansing of the temple during the early morning had aroused their hopes of seeing the Master assert himself and manifest his mighty powers, the events of the entire afternoon only operated as an anticlimax in that they all pointed to the certain rejection of Jesus’ teaching by the Jewish authorities. The apostles were gripped by suspense and were held in the firm grasp of a terrible uncertainty. They realized that only a few short days could intervene between the events of the day just passed and the crash of an impending doom. They all felt that something tremendous was about to happen, but they knew not what to expect. They went to their various places for rest, but they slept very little. Even the Alpheus twins were at last aroused to the realization that the events of the Master’s life were moving swiftly toward their final culmination. 월요일 이날 밤에도 감람산 서쪽 비탈을 오르는 유대인의 조용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열두 사람은 전과 달리, 비참한 일이 막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인상적인 성전 정화(淨化)로 주님이 자신을 주장하고 그의 강력한 권능을 드러낸다는 희망이 그들에게 일어났지만, 오후 내내의 사건들은 유대 당국이 예수의 가르침을 분명히 거절한다는 것을 모두 가리킨다는 점에서 용두사미로 작용할 뿐이었습니다. 긴장감이 엄습하여 사도들은 무서운 불확실성에 굳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금 지나간 날의 사건들과 임박한 파멸의 충돌 사이에 짧은 며칠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모두 엄청난 일이 막 일어날 것임을 느꼈지만, 뭘 기대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쉬려고 각자의 자리로 갔지만,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알페오 쌍둥이들까지 주님 일생의 사건이 마지막 최고점을 향해 갑작스럽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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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4 Tuesday Morning in the Temple 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Paper 174

Tuesday Morning in the Temple 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Individual salutations to the twelve 열두 사도에 대한 개별 인사
1. Divine Forgiveness 신적 용서
2. Questions by the Jewish Rulers 유대 통치자들의 질문
Is it lawful to give tribute to Caesar? 카이사르에게 공세(公稅)를 바치는 것이 합법적입니까?
3. The Sadducees and the Resurrection 사두개인들과 부활
4. The Great Commandment 위대한 계명
The Deliverer, whose son is he? 해방자,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
5. The Inquiring Greeks 문의(問議)하는 그리스인
“…except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earth and dies…”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if I be lifted up…in your lives…” “내가 너희 삶에서 들어 올려지면

240728 열두 사도에 대한 개별 인사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174:0.1 (1897.1) ABOUT seven o’clock on this Tuesday morning Jesus met the apostles, the women’s corps, and some two dozen other prominent disciples at the home of Simon. At this meeting he said farewell to Lazarus, giving him that instruction which led him so soon to flee to Philadelphia in Perea, where he later became connected with the missionary movement having its headquarters in that city. Jesus also said good-bye to the aged Simon, and gave his parting advice to the women’s corps, as he never again formally addressed them. 이 화요일(AD30.4.4) 아침 7시쯤 예수는 시몬의 집에서 사도들, 여성단 및 20여 명의 중요한 다른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는 나사로에게 빨리 페레아의 필라델피아로 도피하라고 지시하면서 그에게 작별을 고했는데, 나사로는 나중에 그 도시에 본부를 둔 선교 운동에 관련되었습니다. 예수는 나이 든 시몬에게도 작별을 고했고, 여성 단(團)에 고별 권고를 했으며, 그는 정식으로 다시는 그들에게 연설하지 않았습니다.

174:0.2 (1897.2) This morning he greeted each of the twelve with a personal salutation. To Andrew he said: “Be not dismayed by the events just ahead. Keep a firm hold on your brethren and see that they do not find you downcast.” To Peter he said: “Put not your trust in the arm of flesh nor in weapons of steel. Establish yourself on the spiritual foundations of the eternal rocks.” To James he said: “Falter not because of outward appearances. Remain firm in your faith, and you shall soon know of the reality of that which you believe.” To John he said: “Be gentle; love even your enemies; be tolerant. And remember that I have trusted you with many things.” To Nathaniel he said: “Judge not by appearances; remain firm in your faith when all appears to vanish; be true to your commission as an ambassador of the kingdom.” To Philip he said: “Be unmoved by the events now impending. Remain unshaken, even when you cannot see the way. Be loyal to your oath of consecration.” To Matthew he said: “Forget not the mercy that received you into the kingdom. Let no man cheat you of your eternal reward. As you have withstood the inclinations of the mortal nature, be willing to be steadfast.” To Thomas he said: “No matter how difficult it may be, just now you must walk by faith and not by sight. Doubt not that I am able to finish the work I have begun, and that I shall eventually see all of my faithful ambassadors in the kingdom beyond.” To the Alpheus twins he said: “Do not allow the things which you cannot understand to crush you. Be true to the affections of your hearts and put not your trust in either great men or the changing attitude of the people. Stand by your brethren.” And to Simon Zelotes he said: “Simon, you may be crushed by disappointment, but your spirit shall rise above all that may come upon you. What you have failed to learn from me, my spirit will teach you. Seek the true realities of the spirit and cease to be attracted by unreal and material shadows.” And to Judas Iscariot he said: “Judas, I have loved you and have prayed that you would love your brethren. Be not weary in well doing; and I would warn you to beware the slippery paths of flattery and the poison darts of ridicule.” 그는 이날 아침 열두 사도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는 안드레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앞에 닥친 사건들로 당황하지 말라(사41:10, 렘46:27). 네 형제들을 꽉 잡고 놓지 말고 기운을 잃고 풀이 죽은 네 모습을 보이지 말라.” 그는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육신의 힘이나 강철 무기를 신뢰하지 말라(대하32:8a). 영원한 바위의 영적 토대 위에 자신을 세우라.” 그는 야고보에게 말했습니다. “겉모습 때문에 비틀거리지 말라(삼상16:7). 신앙을 굳건히 하면(히3:6), 네가 믿는 것의 실체를 곧 알게 되리라.” 그는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온유하라. 너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마5:44, 눅6:27, 35). 관대하라. 그리고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겼던 것을 기억하라.” 그는 나다니엘에게 말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요7:24).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때 네 신앙을 굳건히 하라. 하느님 나라의 대사(고후5:20)로서 너의 임무에 충실하라.” 그는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임박한 사건들로 인해 동요하지 말라(히3:14). 네가 길을 볼 수 없을 때도, 흔들리지 말라. 네가 헌신한 서약에 충성을 다하라.” 그는 마태에게 말했습니다. “너를 하느님 나라 안으로 받아들인 자비를 잊지 말라. 아무도 너를 속여 네 영원한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2:18a). 네가 필사자 본성의 성향을 잘 견딘 것처럼, 정신이 홀려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전15:58, 벧전5:9a).” 그는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바로 이제 너는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행해야 하느니라(고후5:7). 내가 시작한 일을 내가 마칠 수 있으며(요17:4a, 19:30), 내가 결국 내 충실한 대사들 모두 저편 하느님 나라에서 만날 것을 의심하지 말라.” 그는 알페오 쌍둥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희를 짓밟게 놔두지 말라. 너희 심정에 있는 연정에 충실하고 위대한 사람들이나 사람들의 변하는 태도를 신뢰하지 말라, 네 형제들을 지지하라.” 그리고 그는 시몬 젤로떼에게 말했습니다. “시몬아, 네가 실망으로 꺾일지 몰라도, 네 영(靈)은 네게 닥친 모든 것을 넘어설 것이라. 네가 나에게 배우지 못한 것을 내 영(靈)이 너에게 가르칠 것이라. 영(靈)의 참된 실체를 추구하고 실재하지 않는 물질 그림자에 홀려 끌려가는 것을 그만두라.” 그리고 그는 가롯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유다야,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네가 네 형제를 사랑하도록 기도해왔노라. 선한 일을 하면서 지치지 말라(갈6:9, 살후3:13). 내가 너에게 경고하노니, 아첨의 반들반들한 길과 비웃음의 독화살을 조심하라.”

174:0.3 (1897.3) And when he had concluded these greetings, he departed for Jerusalem with Andrew, Peter, James, and John as the other apostles set about the establishment of the Gethsemane camp, where they were to go that night, and where they made their headquarters for the remainder of the Master’s life in the flesh. About halfway down the slope of Olivet Jesus paused and visited more than an hour with the four apostles. 그리고 그가 이런 인사를 마친 후, 그는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및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났고, 그동안 다른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날 밤 가기로 되어 있고, 육신으로 사는 주님의 여생(餘生)에 자신들의 본부가 될, 겟세마네 야영지 설치에 착수했습니다. 예수는 감람산 기슭을 반쯤 내려간 곳에서 잠시 멈춰서 네 사도와 한 시간 이상 이야기했습니다.

1. Divine Forgiveness 신적 용서

240804 신적 용서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74:1.1 (1898.1) For several days Peter and James had been engaged in discussing their differences of opinion about the Master’s teaching regarding the forgiveness of sin. They had both agreed to lay the matter before Jesus, and Peter embraced this occasion as a fitting opportunity for securing the Master’s counsel. Accordingly, Simon Peter broke in on the conversation dealing with the differences between praise and worship, by asking: “Master, James and I are not in accord regarding your teachings having to do with the forgiveness of sin. James claims you teach that the Father forgives us even before we ask him, and I maintain that repentance and confession must precede the forgiveness. Which of us is right? what do you say?” 며칠간 베드로와 야고보는 죄의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그 문제를 예수께 털어놓기로 합의하고, 베드로는 주님의 가르침을 얻는 적당한 좋은 기회로 이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찬양과 경배의 차이를 다루는 대화에 끼어들어 여쭈었습니다. “주여, 야고보와 저는 죄의 용서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에 대해 일치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요청하기 전에도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당신이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저는 회개와 고백이 용서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우리 중 누가 옳은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74:1.2 (1898.2) After a short silence Jesus looked significantly at all four and answered: “My brethren, you err in your opinions because you do not comprehend the nature of those intimate and loving relations between the creature and the Creator, between man and God. You fail to grasp that understanding sympathy which the wise parent entertains for his immature and sometimes erring child. It is indeed doubtful whether intelligent and affectionate parents are ever called upon to forgive an average and normal child. Understanding relationships associated with attitudes of love effectively prevent all those estrangements which later necessitate the readjustment of repentance by the child with forgiveness by the parent. 잠시 잠자코 있다가 예수께서 네 사람 모두를 깊이 있게 바라보시며 대답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창조물과 창조주,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그토록 친밀하고 애정이 깊은 관계의 본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해서 너희 의견에 잘못이 있도다. 너희는 현명한 부모가 자기의 미숙하고 때때로 잘못에 빠진 자녀를 품는 그런 이해심 있는 공감을 끝내 파악하지 못하느니라. 총명하고 다정한 부모들이 보통 정상적인 자녀를 용서하도록 늘 요청받는지 정말로 의심스럽도다. 사랑의 태도와 결합한 이해심 있는 관계가 부모의 용서와 함께 자녀의 회개로 나중에 다시 바로잡아야 하는 그런 모든 어색한 균열을 실제로 예방하느니라.

174:1.3 (1898.3) “A part of every father lives in the child. The father enjoys priority and superiority of understanding in all matters connected with the child-parent relationship. The parent is able to view the immaturity of the child in the light of the more advanced parental maturity, the riper experience of the older partner. With the earthly child and the heavenly Father, the divine parent possesses infinity and divinity of sympathy and capacity for loving understanding. Divine forgiveness is inevitable; it is inherent and inalienable in God’s infinite understanding, in his perfect knowledge of all that concerns the mistaken judgment and erroneous choosing of the child. Divine justice is so eternally fair that it unfailingly embodies understanding mercy. “모든 아버지의 일부가 자녀 안에 살아있느니라. 아버지는 자녀-부모 관계와 연결된 모든 문제에서 우선권을 가지고 탁월하게 이해하느니라. 부모는 훨씬 앞선 어버이다운 성숙, 무르익어 사려 깊은 동반자 체험의 관점에서 자녀의 미숙함을 볼 수 있느니라. 지상의 자녀와 하늘 아버지의 경우, 신적 부모는 깊은 애정으로 이해하는 공감하는 능력에 있어서 무한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신적 용서는 당연하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이해심 안에, 자녀의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에 관한 모두를 완전히 아는 그의 지식 안에, 신적 용서는 본래 있으며 절대적이라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신적 정의는 그토록 영원히 공정해서 이해심 있는 자비를 끊임없이 구체적으로 나타내느니라.

174:1.4 (1898.4) “When a wise man understands the inner impulses of his fellows, he will love them. And when you love your brother, you have already forgiven him. This capacity to understand man’s nature and forgive his apparent wrongdoing is Godlike. If you are wise parents, this is the way you will love and understand your children, even forgive them when transient misunderstanding has apparently separated you. The child, being immature and lacking in the fuller understanding of the depth of the child-father relationship, must frequently feel a sense of guilty separation from a father’s full approval, but the true father is never conscious of any such separation. Sin is an experience of creature consciousness; it is not a part of God’s consciousness.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동료들의 내적 충동을 이해할 때, 그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너희 형제를 사랑하면, 너희는 이미 그를 용서한 것이니라.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고 환히 보이는 그의 악행을 용서하는 능력은 하느님 같은 것이니라. 너희가 지혜로운 부모들이라면 이 방법으로 너희가 너희 자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일시적인 오해로 언뜻 보기에 너희가 갈라졌을 때 용서까지 할 것이라. 자녀는 미숙하고 자녀-아버지 관계의 깊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므로 아버지의 전면적인 찬성에서 분리된 죄의식을 자주 느끼지만, 참된 아버지는 그런 분리를 절대로 의식하지 않느니라. 죄는 창조물 의식의 경험이니라. 죄는 하느님이 의식하는 부분이 아니니라.

174:1.5 (1898.5) “Your inability or unwillingness to forgive your fellows is the measure of your immaturity, your failure to attain adult sympathy, understanding, and love. You hold grudges and nurse vengefulness in direct proportion to your ignorance of the inner nature and true longings of your children and your fellow beings. Love is the outworking of the divine and inner urge of life. It is founded on understanding, nurtured by unselfish service, and perfected in wisdom.” “너희가 너희 동료를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너희의 미성숙(未成熟), 성숙한 공감, 이해 및 사랑에 이르지 못한 척도(尺度)이니라. 너희는, 너희 자녀들과 너희 동료들의 내적 본성과 참된 갈망에 대한 너희 무지(無知)에 정비례하여, 원한(怨恨)을 품고 앙심(怏心 복수심)을 키우느니라. 사랑은 신적이며 내적인 삶의 충동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니라. 그것은 이해에 기초를 두고, 이타적인 봉사로 양육을 받아 지혜로 완성되느니라.”

2. Questions by the Jewish Rulers 유대 통치자들의 질문

240811 카이사르 공세(公稅)와 이중 지혜 마22:15-22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174:2.1 (1899.1) On Monday evening there had been held a council between the Sanhedrin and some fifty additional leaders selected from among the scribes, Pharisees, and the Sadducees. It was the consensus of this meeting that it would be dangerous to arrest Jesus in public because of his hold upon the affections of the common people. It was also the opinion of the majority that a determined effort should be made to discredit him in the eyes of the multitude before he should be arrested and brought to trial. Accordingly, several groups of learned men were designated to be on hand the next morning in the temple to undertake to entrap him with difficult questions and otherwise to seek to embarrass him before the people. At last, the Pharisees, Sadducees, and even the Herodians were all united in this effort to discredit Jesus in the eyes of the Passover multitudes. 월요일(AD30.4.3) 저녁에 산헤드린과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중에서 뽑힌 50여 명이 추가된 지도자들 사이에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모임의 일치된 의견은 예수가 민중의 애정을 받고 있어서 그를 공개적으로 체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체포하여 재판하기 전에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단호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 그룹이 선정되어 다음 날 아침 성전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 앞에서 그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헤롯 당원들까지, 유월절 군중이 보는 가운데 예수의 평판(評判)을 떨어뜨리려는 이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마22:15, 막12:13, 눅20:20).

174:2.2 (1899.2) Tuesday morning, when Jesus arrived in the temple court and began to teach, he had uttered but few words when a group of the younger students from the academies, who had been rehearsed for this purpose, came forward and by their spokesman addressed Jesus: “Master, we know you are a righteous teacher, and we know that you proclaim the ways of truth, and that you serve only God, for you fear no man, and that you are no respecter of persons. We are only students, and we would know the truth about a matter which troubles us; our difficulty is this: Is it lawful for us to give tribute to Caesar? Shall we give or shall we not give?” Jesus, perceiving their hypocrisy and craftiness, said to them: “Why do you thus come to tempt me? Show me the tribute money, and I will answer you.” And when they handed him a denarius, he looked at it and said, “Whose image and superscription does this coin bear?” And when they answered him, “Caesar’s,” Jesus said,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render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화요일(AD30.4.4) 아침, 예수께서 성전 뜰에 도착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이런 목적으로 미리 연습했던 학원들의 젊은 학생 무리가 나와서 그들의 대변인을 통해 예수께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의로운 선생님인 줄 알고, 당신이 진리의 길을 선포하고, 당신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하느님만 섬기며, 당신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일 뿐이며 우리에게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려 하는데 우리의 곤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카이사르에게 공세(公稅)를 바치는 것이 합법적입니까? 우리가 내야 할까요,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할까요?” 예수께서 그들의 위선(僞善)과 간사(奸詐)함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왜 이렇게 와서 나를 시험하느냐? 내게 세금 내는 돈을 보이면, 내가 대답하리라.”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그에게 건네자, 그가 그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 동전에 누구의 초상(肖像)과 표서(表書)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그에게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마22:16-21, 막12:14-17a, 눅20:21-25).”

174:2.3 (1899.3) When he had thus answered these young scribes and their Herodian accomplices, they withdrew from his presence, and the people, even the Sadducees, enjoyed their discomfiture. Even the youths who had endeavored to entrap him marveled greatly at the unexpected sagacity of the Master’s answer. 그가 이런 젊은 서기관들과 그들과 연루된 헤롯당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자,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 물러났고, 사람들, 사두개인들까지 그들의 당혹감을 즐겼습니다.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젊은이들조차 생각지도 않은 총명한 주님의 대답에 매우 놀랐습니다(마22:22, 막12:17b, 눅20:26).

174:2.4 (1899.4) The previous day the rulers had sought to trip him before the multitude on matters of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having failed, they now sought to involve him in a damaging discussion of civil authority. Both Pilate and Herod were in Jerusalem at this time, and Jesus’ enemies conjectured that, if he would dare to advise against the payment of tribute to Caesar, they could go at once before the Roman authorities and charge him with sedition. On the other hand, if he should advise the payment of tribute in so many words, they rightly calculated that such a pronouncement would greatly wound the national pride of his Jewish hearers, thereby alienating the good will and affection of the multitude. 바로 전날 통치자들은 종교 조직의 권한 문제로 군중 앞에서 그의 잘못을 찾다가 실패했고, 이제 그들은 로마 시민법 권한의 해로운 논쟁에 그를 끌어넣으려 했습니다. 이때 빌라도와 헤롯 둘 다 예루살렘에 있었고, 예수의 대적들은, 그가 감히 카이사르에게 납부하는 공세(公稅)를 반대하도록 권한다면, 자신들이 즉시 로마 당국자들 앞에 가서 그를 반란 혐의로 고발할 수 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반면에 그가 그런 여러 말로 공세(公稅)를 납부하도록 권한다면, 그런 선언이 그의 유대인 청중들의 국민적 자부심을 크게 해쳐서, 그 때문에 군중이 좋게 생각하는 마음과 애정이 멀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정확히 판단했습니다.

174:2.5 (1899.5) In all this the enemies of Jesus were defeated since it was a well-known ruling of the Sanhedrin, made for the guidance of the Jews dispersed among the gentile nations, that the “right of coinage carried with it the right to levy taxes.” In this manner Jesus avoided their trap. To have answered “No” to their question would have been equivalent to inciting rebellion; to have answered “Yes” would have shocked the deep-rooted nationalist sentiments of that day. The Master did not evade the question; he merely employed the wisdom of making a double reply. Jesus was never evasive, but he was always wise in his dealings with those who sought to harass and destroy him. 이 모든 일에서 예수의 대적들이 패배한 것은 “주화(鑄貨)의 권리는 세금 징수의 권리를 지닌다.”라고 이방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안내하려고 만든, 산헤드린의 잘 알려진 판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는 그들의 함정을 피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다면 반란 선동에 해당했을 것이고, “예”라고 대답했다면 그 당시 뿌리 깊은 민족주의 정서에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중으로 대답하는 지혜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예수는 절대로 회피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는 자들을 언제나 슬기롭게 다루었습니다.

3. The Sadducees and the Resurrection 사두개인들과 부활

240818 산 자의 하느님 눅20:27-40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174:3.1 (1900.1) Before Jesus could get started with his teaching, another group came forward to question him, this time a company of the learned and crafty Sadducees. Their spokesman, drawing near to him, said: “Master, Moses said that if a married man should die, leaving no children, his brother should take the wife and raise up seed for the deceased brother. Now there occurred a case where a certain man who had six brothers died childless; his next brother took his wife but also soon died, leaving no children. Likewise did the second brother take the wife, but he also died leaving no offspring. And so on until all six of the brothers had had her, and all six of them passed on without leaving children. And then, after them all, the woman herself died. Now, what we would like to ask you is this: In the resurrection whose wife will she be since all seven of these brothers had her?”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기 전에, 또 다른 그룹이 그에게 질문하러 나왔는데, 이번에는 학식 있고 교활한 사두개인 일행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변인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여, 결혼한 남자가 자식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그 아내를 취하여 죽은 형을 위해 자식을 보라고 모세가 말했습니다(신25:5-6). 그런데 여섯 형제가 있는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다음 동생이 그 아내를 취했지만, 그 역시 자식 없이 곧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동생이 아내를 취했지만, 그 또한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여섯 형제 모두 그녀를 취할 때까지 계속 그랬고, 여섯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 모두 뒤따라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께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 모두 그녀를 취했으니 부활하면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될까요(마22:23-28, 막12:18-23, 눅20:27-33)?”

174:3.2 (1900.2) Jesus knew, and so did the people, that these Sadducees were not sincere in asking this question because it was not likely that such a case would really occur; and besides, this practice of the brothers of a dead man seeking to beget children for him was practically a dead letter at this time among the Jews. Nevertheless, Jesus condescended to reply to their mischievous question. He said: “You all do err in asking such questions because you know neither the Scriptures nor the living power of God. You know that the sons of this world can marry and are given in marriage, but you do not seem to understand that they who are accounted worthy to attain the worlds to com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neither marry nor are given in marriage. Those who experience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re more like the angels of heaven, and they never die. These resurrected ones are eternally the sons of God; they are the children of light resurrected into the progress of eternal life. And even your Father Moses understood this, for, in connection with his experiences at the burning bush, he heard the Father say,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And so, along with Moses, do I declare that my Father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In him you all do live, reproduce, and possess your mortal existence.” 너희 조상 모세조차 불타는 덤불의 그의 체험과 관련해 아버지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니라.’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했느니라. 그래서 나는 모세와 함께 내 아버지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라고 선언하노라. 그 안에서 너희 모두 살고, 번식하고 너희 필사 생활을 유지하느니라(출3:6, 마22:29-32, 막12:24-27, 눅20:34-38).”

174:3.3 (1900.3) When Jesus had finished answering these questions, the Sadducees withdrew, and some of the Pharisees so far forgot themselves as to exclaim, “True, true, Master, you have well answered these unbelieving Sadducees.” The Sadducees dared not ask him any more questions, and the common people marveled at the wisdom of his teaching. 예수께서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마치자, 사두개인들은 물러났고, 일부 바리새인들은 “진실로, 진실로, 주여, 당신께서 이렇게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잘 대답하셨습니다.”라고 외칠 정도로 자신을 잊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감히 더 이상 그에게 질문하지 못했고, 일반인들은 그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놀랐습니다(마22:33, 눅20:39-40).

174:3.4 (1900.4) Jesus appealed only to Moses in his encounter with the Sadducees because this religio-political sect acknowledged the validity of only the five so-called Books of Moses; they did not allow that the teachings of the prophets were admissible as a basis of doctrinal dogmas. The Master in his answer, though positively affirming the fact of the survival of mortal creatures by the technique of the resurrection, did not in any sense speak approvingly of the Pharisaic beliefs in the resurrection of the literal human body. The point Jesus wished to emphasize was: That the Father had said, “I am the God of Abraham, Isaac, and Jacob,” not I was their God.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을 마주하면서 모세에게만 호소한 이유는 이 종교-정치적 분파가 소위 모세오경(五經)만의 정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가르침들은 교리적 교의의 근거로 용납할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대답으로 필사 창조물들이 부활의 기법으로 생존한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언했지만, 어떤 의미로도 문자 그대로 인체(人體)가 부활한다는 바리새인의 믿음을 찬성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강조하려 했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니라.”라고 말한 것이지,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었다가 아닙니다(출3:6).

174:3.5 (1900.5) The Sadducees had thought to subject Jesus to the withering influence of ridicule, knowing full well that persecution in public would most certainly create further sympathy for him in the minds of the multitude. 사두개인들은, 공적인 박해로 대중들의 마음에 그를 향한 호감을 아주 확실하게, 한층 더 불러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예수를 비웃음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생각했습니다.

4. The Great Commandment 위대한 계명

240825 위대한 계명 막12:28-37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174:4.1 (1901.1) Another group of Sadducees had been instructed to ask Jesus entangling questions about angels, but when they beheld the fate of their comrades who had sought to entrap him with questions concerning the resurrection, they very wisely decided to hold their peace; they retired without asking a question. It was the prearranged plan of the confederated Pharisees, scribes, Sadducees, and Herodians to fill up the entire day with these entangling questions, hoping thereby to discredit Jesus before the people and at the same time effectively to prevent his having any time for the proclamation of his disturbing teachings. 또 다른 사두개인 그룹이 천사들에 관한 질문으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도록 지시받았지만,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자기 동료들의 최종 결과를 보자, 그들은 아주 현명하게 잠자코 있기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묻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공모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및 헤롯 당원들이 종일 이렇게 함정에 빠뜨리는 질문으로 가득 채워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평판(評判)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그가 불온한 가르침을 선포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미리 협의한 방책이었습니다.

174:4.2 (1901.2) Then came forward one of the groups of the Pharisees to ask harassing questions, and the spokesman, signaling to Jesus, said: “Master, I am a lawyer, and I would like to ask you which, in your opinion, is the greatest commandment?” Jesus answered: “There is but one commandment, and that one is the greatest of all, and that commandment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an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is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the second commandment is like this first; indeed, it springs directly therefrom, and it 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그때 바리새인 중 한 그룹이 앞으로 나와 괴롭히는 질문을 했고, 대변인이 예수께 신호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저는 율법사인데, 당신의 의견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 “오직 한 계명이 있는데, 그것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데, 그 계명은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주 우리 하느님은 하나뿐이니라. 너희는 너희 심정과 혼과 마음과 힘을 다해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위대한 계명이니라. 그리고 둘째 계명은 이 첫째와 같으니라. 참으로 그것은 바로 거기에서 일어나니, 그것은 ‘너희는 너희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것들보다 더 위대한 다른 계명이 없느니라. 이런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달려 있느니라(레19:18, 34, 신6:4-5, 막12:28-31).”

174:4.3 (1901.3) When the lawyer perceived that Jesus had answered not only in accordance with the highest concept of Jewish religion, but that he had also answered wisely in the sight of the assembled multitude, he thought it the better part of valor openly to commend the Master’s reply. Accordingly, he said: “Of a truth, Master, you have well said that God is one and there is none beside him; and that to love him with all the heart, understanding, and strength, and also to love one’s neighbor as one’s self,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we are agreed that this great commandment is much more to be regarded than all th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When the lawyer answered thus discreetly, Jesus looked down upon him and said, “My friend, I perceive that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율법사는 예수께서 유대 종교의 최고 개념에 따라 대답할 뿐만 아니라 모여 있는 군중 앞에서 현명하게 대답한 것도 눈치채고, 주님의 대답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이 더 나은 용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말했습니다. “주여, 진리에 관해, 당신께서 하느님은 하나뿐이며 그 외에 아무도 없고, 심정, 지력 및 힘을 다해 그를 사랑하고, 또한 자신처럼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로, 위대한 계명이라고 잘 말씀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계명이 모든 번제나 희생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에 저희는 찬성합니다.” 그 율법사가 이렇게 신중히 대답하자, 예수께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친구여, 내가 보니,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도다(막12:32-34a).”

174:4.4 (1901.4) Jesus spoke the truth when he referred to this lawyer as being “not far from the kingdom,” for that very night he went out to the Master’s camp near Gethsemane, professed faith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was baptized by Josiah, one of the disciples of Abner. 예수께서 이 율법사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이었는데, 바로 그날 밤 그가 겟세마네 근처 주님의 야영지로 나가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신앙한다고 고백했고, 아브너의 제자 중 하나 요시아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174:4.5 (1901.5) Two or three other group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were present and had intended to ask questions, but they were either disarmed by Jesus’ answer to the lawyer, or they were deterred by the discomfiture of all who had undertaken to ensnare him. After this no man dared to ask him another question in public. 다른 두세 그룹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자리에서 질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율법사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적개심을 풀었거나,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모든 자들이 실패하자 그들은 망설였습니다. 이후 아무도 감히 공개적으로 그에게 다른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막12:34b).

174:4.6 (1901.6) When no more questions were forthcoming, and as the noon hour was near, Jesus did not resume his teaching but was content merely to ask the Pharisees and their associates a question. Said Jesus: “Since you ask no more questions, I would like to ask you one. What do you think of the Deliverer? That is, whose son is he?” After a brief pause one of the scribes answered, “The Messiah is the son of David.” And since Jesus knew that there had been much debate, even among his own disciples, as to whether or not he was the son of David, he asked this further question: “If the Deliverer is indeed the son of David, how is it that, in the Psalm which you accredit to David, he himself, speaking in the spirit, says,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on my right hand until I make your enemies the footstool of your feet.’ If David calls him Lord, how then can he be his son?” Although the rulers, the scribes, and the chief priests made no reply to this question, they likewise refrained from asking him any more questions in an effort to entangle him. They never answered this question which Jesus put to them, but after the Master’s death they attempted to escape the difficulty by changing the interpretation of this Psalm so as to make it refer to Abraham instead of the Messiah. Others sought to escape the dilemma by disallowing that David was the author of this so-called Messianic Psalm.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는 자기 가르침을 다시 시작하지 않고 바리새인들과 그 동료들에게 그저 질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으니, 내가 너희에게 하나만 물으려 하노라. 너희는 해방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 잠시 멈춘 후 서기관 중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제자 중에서도 그가 다윗의 아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 있었음을 아시고, 그가 추가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해방자가 정말로 다윗의 아들이라면, 너희가 다윗이 말한 것으로 여기는 시편에 그 자신이 영(靈)으로 말하며 이르기를 ‘주께서 내 주에게, 내가 너희 대적을 너의 발판으로 만들기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다윗이 그를 주(主)로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그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통치자들과 서기관들 및 대사제들은 이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들은 똑같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도 더 이상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했던 이 질문에 절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주께서 돌아가신 후 그들은 이 시편이 메시아 대신에 아브라함을 말한 것으로 해석을 바꾸어 어려움을 피하려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윗이 소위 이런 메시아 시편의 저자가 아니라고 하여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시110:1, 마22:41-46, 막12:35-37a, 눅20:41-44).

174:4.7 (1902.1) A short time back the Pharisees had enjoyed the manner in which the Sadducees had been silenced by the Master; now the Sadducees were delighted by the failure of the Pharisees; but such rivalry was only momentary; they speedily forgot their time-honored differences in the united effort to stop Jesus’ teachings and doings. But throughout all of these experiences the common people heard him gladly. 얼마 전까지 바리새인들은 주님에 의해 사두개인들이 잠잠해진 방식을 즐겼습니다.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의 실패를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쟁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막으려고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차이를 금세 잊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을 통해 일반인들은 즐거이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막12:37b).

5. The Inquiring Greeks 문의(問議)하는 그리스인

240901 예수는 세상의 빛이라 요12:20-22, 37-50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174:5.1 (1902.2) About noontime, as Philip was purchasing supplies for the new camp which was that day being established near Gethsemane, he was accosted by a delegation of strangers, a group of believing Greeks from Alexandria, Athens, and Rome, whose spokesman said to the apostle: “You have been pointed out to us by those who know you; so we come to you, Sir, with the request to see Jesus, your Master.” Philip was taken by surprise thus to meet these prominent and inquiring Greek gentiles in the market place, and, since Jesus had so explicitly charged all of the twelve not to engage in any public teaching during the Passover week, he was a bit perplexed as to the right way to handle this matter. He was also disconcerted because these men were foreign gentiles. If they had been Jews or near-by and familiar gentiles, he would not have hesitated so markedly. What he did was this: He asked these Greeks to remain right where they were. As he hastened away, they supposed that he went in search of Jesus, but in reality he hurried off to the home of Joseph, where he knew Andrew and the other apostles were at lunch; and calling Andrew out, he explained the purpose of his coming, and then, accompanied by Andrew, he returned to the waiting Greeks. 정오 무렵 빌립이 겟세마네 근처에 그날 세울 새 야영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들, 알렉산드리아와 아덴 및 로마 출신의 믿는 그리스인 그룹의 대표가 그에게 인사하며 다가왔고, 그 대변인이 사도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아는 자들이 우리에게 당신을 가리켜서 우리가 당신에게 왔는데, 선생이여, 예수, 당신의 주님을 뵙고자 요청합니다.” 빌립은 이렇게 눈에 띄게 문의(問議)하는 그리스 이방인들을 시장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서 깜짝 놀랐고, 예수가 열두 사도 모두에게 유월절 주간 동안 어떤 공적 가르침에도 참여하지 말라고 아주 분명히 지시했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올바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외국 이방인들이어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이나 근처 익숙한 이방들이었다면 그가 그렇게 표나게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이 그리스인들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급히 가자, 그들은 그가 예수를 찾으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안드레와 다른 사도들이 점심 식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 요셉의 집으로 급히 떠났습니다. 안드레를 불러내, 그는 자기가 온 목적을 설명한 후, 안드레와 함께, 그는 기다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요12:20-22a).

174:5.2 (1902.3) Since Philip had about finished the purchasing of supplies, he and Andrew returned with the Greeks to the home of Joseph, where Jesus received them; and they sat near while he spoke to his apostles and a number of leading disciples assembled at this luncheon. Said Jesus: 빌립은 필요한 물품을 거의 다 구매했기 때문에, 그와 안드레는 그리스인들과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고, 예수는 거기에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그가 이 점심에 모인 자기 사도들과 주요 제자들에게 말하는 동안, 그들은 근처에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174:5.3 (1902.4) “My Father sent me to this world to reveal his loving-kindness to the children of men, but those to whom I first came have refused to receive me. True, indeed, many of you have believed my gospel for yourselves, but the children of Abraham and their leaders are about to reject me, and in so doing they will reject Him who sent me. I have freely proclaimed the gospel of salvation to this people; I have told them of sonship with joy, liberty, and life more abundant in the spirit. My Father has done many wonderful works among these fear-ridden sons of men. But truly did the Prophet Isaiah refer to this people when he wrote: ‘Lord, who has believed our teachings? And to whom has the Lord been revealed?’ Truly have the leaders of my people deliberately blinded their eyes that they see not, and hardened their hearts lest they believe and be saved. All these years have I sought to heal them of their unbelief that they might be recipients of the Father’s eternal salvation. I know that not all have failed me; some of you have indeed believed my message. In this room now are a full score of men who were once members of the Sanhedrin, or who were high in the councils of the nation, albeit even some of you still shrink from open confession of the truth lest they cast you out of the synagogue. Some of you are tempted to love the glory of men more than the glory of God. But I am constrained to show forbearance since I fear for the safety and loyalty of even some of those who have been so long near me, and who have lived so close by my side. “내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에 보내 자신의 애정이 깊은 친절을 사람의 자녀들에게 계시했으나, 내가 처음 찾아온 자들은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느니라. 참으로 정말 너희 대부분은 내 복음을 스스로 믿었지만,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막 나를 거부하려는 참이며, 그렇게 하여 그들은 나를 보낸 그분을 거부할 것이니라. 나는 이 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아낌없이 선포했도다. 나는 그들에게 아들(자녀) 된 기쁨, 자유와 영(靈) 안에서 더 풍성한 생명에 대해 말했느니라. 내 아버지는 이렇게 공포에 떠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여러 놀라운 일을 행하셨느니라.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주여, 누가 우리의 가르침을 믿었습니까? 누구에게 주님이 계시되셨습니까?’라고 썼을 때 그가 이 민족에 대해 정확하게 언급했느니라(사53:1). 참으로 내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들의 눈을 멀게 했고, 그들이 믿고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들의 심정을 완고하게 했느니라(사6:10). 나는 수년간 그들이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불신을 고치려고 애썼도다. 나는 모두가 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을 알고 있노라. 너희 중 일부는 내 메시지를 정말로 믿었느니라. 지금 이 방에는 한때 산헤드린 회원이었거나 국가 공의회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너희 중 일부조차 그들이 너희를 회당 밖으로 쫓아내지 않게 공개적인 진리의 고백을 여전히 주춤하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하느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려는 마음에 끌리고 있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오래 내 근처에 있었고, 그렇게 가까이 내 곁에 살았던 일부라도 그 안전과 충성을 염려해서 마지못해 견디도다(요12:37-43).

174:5.4 (1903.1) “In this banquet chamber I perceive there are assembled Jews and gentiles in about equal numbers, and I would address you as the first and last of such a group that I may instruct in the affairs of the kingdom before I go to my Father.” “내가 보니, 이 연회실에 거의 같은 수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였는데, 내가 내 아버지께 가기 전에 하느님 나라의 건으로 가르치는 처음이자 마지막 그런 그룹으로 너희에게 말하려 하노라.”

174:5.5 (1903.2) These Greeks had been in faithful attendance upon Jesus’ teaching in the temple. On Monday evening they had held a conference at the home of Nicodemus, which lasted until the dawn of day, and thirty of them had elected to enter the kingdom. 이 그리스인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성실하게 참석했었습니다. 그들은 월요일(AD30.4.3) 저녁 니고데모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새벽까지 계속했고, 그들 중 30명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74:5.6 (1903.3) As Jesus stood before them at this time, he perceived the end of one dispensation and the beginning of another. Turning his attention to the Greeks, the Master said: 예수께서 이때 그들 앞에서 서 있을 때, 그는 한 섭리 시대가 끝나고 다른 섭리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주의를 기울이며 주께서 말했습니다.

174:5.7 (1903.4) “He who believes this gospel, believes not merely in me but in Him who sent me. When you look upon me, you see not only the Son of Man but also Him who sent me. I am the light of the world, and whosoever will believe my teaching shall no longer abide in darkness. If you gentiles will hear me, you shall receive the words of life and shall enter forthwith into the joyous liberty of the truth of sonship with God. If my fellow countrymen, the Jews, choose to reject me and to refuse my teachings, I will not sit in judgment on them, for I came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offer it salvation. Nevertheless, they who reject me and refuse to receive my teaching shall be brought to judgment in due season by my Father and those whom he has appointed to sit in judgment on such as reject the gift of mercy and the truths of salvation. Remember, all of you, that I speak not of myself, but that I have faithfully declared to you that which the Father commanded I should reveal to the children of men. And these words which the Father directed me to speak to the world are words of divine truth, everlasting mercy, and eternal life.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단지 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나를 보낸 그분을 믿는 것이라. 너희가 나를 볼 때, 너희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뿐만 아니라 나를 보낸 그분도 보느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내 가르침을 믿는 누구든지 더 이상 어둠에 머무르지 않으리라. 너희 이방인들이 내 말을 들으면,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자녀) 된 진리의 기쁨을 주는 자유 안으로 즉시 들어가기라. 내 동포, 유대인들이 나를 거절하고 내 가르침을 거부해도 나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것이니,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고 세상에 구원을 주러 왔기 때문이니라. 그렇지만, 내 아버지와 그가 심판하도록 임명한 자들이 자비의 선물과 구원의 진리를 거절한 것에 대해, 때가 오면 나를 거절하고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들을 심판하리라. 너희 모두 기억할지니,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람의 자녀들에게 계시하도록 아버지가 명령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충실히 선포했다고 말하는 것이라.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세상에 말하라고 지시한 이런 말씀은 신적 진리, 영원한 자비 및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니라(요12:44-50).

240908 확실한 승리의 길 요12:23-36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74:5.8 (1903.5) “But to both Jew and gentile I declare the hour has about come when the Son of Man will be glorified. You well know that, except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earth and dies, it abides alone; but if it dies in good soil, it springs up again to life and bears much fruit. He who selfishly loves his life stands in danger of losing it; but he who is willing to lay down his life for my sake and the gospel’s shall enjoy a more abundant existence on earth and in heaven, life eternal. If you will truly follow me, even after I have gone to my Father, then shall you become my disciples and the sincere servants of your fellow mortals.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내가 선언하노니,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영화롭게 될 때가 거의 왔도다. 너희가 잘 알거니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밀알이 그대로 있지만, 그것이 좋은 흙에서 죽으면 다시 살아나서 열매를 많이 맺느니라. 제 목숨을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위험이 있지만, 나와 복음을 위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자는 땅과 하늘에서 더 풍성한 생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 내가 내 아버지께 간 후에도 너희가 진실로 나를 따르려면, 너희는 내 제자들이 되고 너희 동료 인간들의 신실한 하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니라(요12:23-26a).

174:5.9 (1903.6) “I know my hour is approaching, and I am troubled. I perceive that my people are determined to spurn the kingdom, but I am rejoiced to receive these truth-seeking gentiles who come here today inquiring for the way of light. Nevertheless, my heart aches for my people, and my soul is distraught by that which lies just before me. What shall I say as I look ahead and discern what is about to befall me? Shall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awful hour? No! For this very purpose have I come into the world and even to this hour. Rather will I say, and pray that you will join me: Father, glorify your name; your will be done.” “나는 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나는 어수선하도다. 나는 내 민족이 하느님 나라를 상대하지도 않기로 결심한 것을 알지만, 오늘 여기에 와서 빛의 길을 문의(問議)하며,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을 맞이하니 기쁘구나. 그렇지만 내 심정은 내 민족을 생각하니 아프고, 내 바로 앞에 놓인 일로 내 혼(婚)이 산만하도다. 내가 앞일을 생각하고 내게 막 닥칠 일을 헤아리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 끔찍한 시간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내가 아버지께 말할까? 아니라! 바로 이런 목적으로 내가 세상에 들어와 이 시간까지 왔도다. 오히려 나는 너희가 나와 함께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것을 말하리라(요12:27-28a).”

174:5.10 (1904.1) When Jesus had thus spoken,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his indwelling during prebaptismal times appeared before him, and as he paused noticeably, this now mighty spirit of the Father’s representation spoke to Jesus of Nazareth, saying: “I have glorified my name in your bestowals many times, and I will glorify it once more.”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자, 세례-이전 시절에 그에게 내주한 고유성(인격)화 조율자가 그 앞에 나타났고, 그가 분명하게 잠시 멈추자, 이제 아버지를 대표하는 이 강력한 영(靈)이 나사렛 예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의 증여들로 여러 번 내 이름을 영화롭게 했고 내가 한 번 그것을 영화롭게 하리라(요12:28b).”

174:5.11 (1904.2) While the Jews and gentiles here assembled heard no voice, they could not fail to discern that the Master had paused in his speaking while a message came to him from some superhuman source. They all said, every man to the one who was by him, “An angel has spoken to him.” 여기 모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주께서 잠시 말을 멈추신 동안 어떤 초(超)인간 근원으로부터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는 것을 그들이 끝까지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 옆 사람에게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라고 했습니다(요12:29).

174:5.12 (1904.3) Then Jesus continued to speak: “All this has not happened for my sake but for yours. I know of a certainty that the Father will receive me and accept my mission in your behalf, but it is needful that you be encouraged and be made ready for the fiery trial which is just ahead. Let me assure you that victory shall eventually crown our united efforts to enlighten the world and liberate mankind. The old order is bringing itself to judgment; the Prince of this world I have cast down; and all men shall become free by the light of the spirit which I will pour out upon all flesh after I have ascended to my Father in heaven. 그런 후 예수께서 계속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일어났느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들이고 너희를 위한 내 사명을 받아들이실 것을 확실히 알지만, 너희가 용기를 얻어서 바로 앞에 놓인 불같은 시련을 준비할 필요가 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확신을 주노니, 세상을 계몽하고 인류를 해방하려는 우리의 연합된 노력은 결국 승리로 보답이 되리라. 옛 질서는 스스로 심판에 이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 세상의 왕자를 버렸느니라. 모든 사람은, 내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올라간 후에 내가 모든 인간에게 쏟아 놓을 영(靈)의 빛으로 인해, 자유롭게 될 것이라(요12:30-31).

174:5.13 (1904.4) “And now I declare to you that I, if I be lifted up on earth and in your lives, will draw all men to myself and into the fellowship of my Father. You have believed that the Deliverer would abide on earth forever, but I declare that the Son of Man will be rejected by men, and that he will go back to the Father. Only a little while will I be with you; only a little time will the living light be among this darkened generation. Walk while you have this light so that the oncoming darkness and confusion may not overtake you. He who walks in the darkness knows not where he goes; but if you will choose to walk in the light, you shall all indeed become liberated sons of God. And now, all of you, come with me while we go back to the temple and I speak farewell words to the chief priests, the scribes, the Pharisees, the Sadducees, the Herodians, and the benighted rulers of Israel.” “이제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가 땅과 너희 삶에서 들어 올려지면 내가 모든 사람을 나 자신에게 이끌어, 내 아버지의 친교 안으로(사귀도록) 이끌 것이라. 너희는 해방자가 지상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믿었지만,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버릴 것이며, 그는 아버지께 돌아갈 것이라. 아주 잠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단지 잠시 살아 있는 빛이 이렇게 어두워진 세대 가운데 있으리라. 다가오는 어둠과 혼란이 너희를 덮쳐오지 않도록 너희에게 이 빛이 있을 때 걸어가라. 어둠 가운데 걷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너희가 빛 가운데 걷기로 결심한다면 너희 모두 참으로 해방된 하느님의 아들(자녀)들이 될 것이니라. 우리가 성전으로 돌아가, 내가 대사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 당원들 및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까지 이제, 너희 모두 나와 함께 가자(요12:32, 34-36a).”

174:5.14 (1904.5) Having thus spoken, Jesus led the way over the narrow streets of Jerusalem back to the temple. They had just heard the Master say that this was to be his farewell discourse in the temple, and they followed him in silence and in deep meditation.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는 예루살렘의 좁은 거리를 지나 성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방금 주께서 이것이 성전에서 그의 고별 설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들은 조용히 묵상에 잠겨 그를 따라갔습니다(요12:3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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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7 Wednesday, the Rest Day 수요일, 휴일(休日)

Paper 177

Wednesday, the Rest Day 수요일, 휴일(休日)

1. One Day Alone with God 하느님과 단둘이 보낸 하루
John Mark and the lunch basket 요한 마가와 점심 바구니
2. Early Home Life 어릴 때 가정생활
3. The Day at Camp
4. Judas and the Chief Priests
5. The Last Social Hour
Beware of the support of the multitude

241215 아버지와 교제하는 예수 신앙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77:0.1 (1920.1) WHEN the work of teaching the people did not press them, it was the custom of Jesus and his apostles to rest from their labors each Wednesday. On this particular Wednesday they ate breakfast somewhat later than usual, and the camp was pervaded by an ominous silence; little was said during the first half of this morning meal. At last Jesus spoke: “I desire that you rest today. Take time to think over all that has happened since we came to Jerusalem and meditate on what is just ahead, of which I have plainly told you. Make sure that the truth abides in your lives, and that you daily grow in grace.”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그들이 부대끼지 않을 때, 예수와 그 사도들이 수요일마다 수고를 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특별한 이 수요일(AD30.4.5)에 그들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아침을 먹었고, 야영지는 불길한 정적(靜寂)이 넘쳤는데, 이 아침 식사 전반부에는 아무 말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너희가 쉬기를 바라느니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온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잘 생각하고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했던 바로 앞의 일을 곰곰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진리가 너희 생활에 머물고 너희가 매일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지 반드시 확인하라.”

177:0.2 (1920.2) After breakfast the Master informed Andrew that he intended to be absent for the day and suggested that the apostles be permitted to spend the time in accordance with their own choosing, except that under no circumstances should they go within the gates of Jerusalem. 아침 식사 후에 주께서 안드레에게 자신이 하루 동안 자리를 비울 작정이라고 알리고, 사도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예루살렘 성문 내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 외에, 각자의 선택대로 시간을 보내도록 놔두라고 권했습니다.

177:0.3 (1920.3) When Jesus made ready to go into the hills alone, David Zebedee accosted him, saying: “You well know, Master, that the Pharisees and rulers seek to destroy you, and yet you make ready to go alone into the hills. To do this is folly; I will therefore send three men with you well prepared to see that no harm befalls you.” Jesus looked over the three well-armed and stalwart Galileans and said to David: “You mean well, but you err in that you fail to understand that the Son of Man needs no one to defend him. No man will lay hands on me until that hour when I am ready to lay down my life in conformity to my Father’s will. These men may not accompany me. I desire to go alone, that I may commune with the Father.” 예수께서 홀로 작은 산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할 때, 다윗 세베대가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주여, 바리새인들과 통치자들이 당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데도, 당신은 홀로 산으로 가려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니 당신이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제가 잘 준비된 세 사람을 당신과 함께 보내겠습니다.” 예수는 잘 무장된 건장한 갈릴리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뜻은 알지만,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아무도 자신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네가 잘못 생각하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 목숨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는 그때까지 아무도 내게 손대지 못하리라. 이 사람들은 나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 나는 아버지와 교제하러 홀로 가기를 원하노라.”

177:0.4 (1920.4) Upon hearing these words, David and his armed guards withdrew; but as Jesus started off alone, John Mark came forward with a small basket containing food and water and suggested that, if he intended to be away all day, he might find himself hungry. The Master smiled on John and reached down to take the basket. 이런 말씀을 듣고 다윗과 그의 무장한 경호원들이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홀로 떠나기 시작할 때, 요한 마가가 음식과 물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들고 나서며, 그가 하루 종일 떠나 계시려면 아마 시장하지 않겠냐고 말을 꺼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 바구니를 받았습니다.

1. One Day Alone with God 하느님과 단둘이 보낸 하루

2412022 간절한 전심(全心)의 결과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77:1.1 (1920.5) As Jesus was about to take the lunch basket from John’s hand, the young man ventured to say: “But, Master, you may set the basket down while you turn aside to pray and go on without it. Besides, if I should go along to carry the lunch, you would be more free to worship, and I will surely be silent. I will ask no questions and will stay by the basket when you go apart by yourself to pray.” 예수께서 요한의 손에서 점심 바구니를 막 잡으려던 참에, 젊은이가 과감히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주여, 당신은 기도하기 위해 바구니를 내려놓고 바구니 없이 계속하셔도 됩니다. 게다가 제가 도시락을 들고 따라가면, 당신은 더 구애받지 않고 경배할 수 있으며, 저는 확실히 조용히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당신께서 따로 혼자 기도하러 갈 때 바구니 옆에 있을 것입니다.”

177:1.2 (1920.6) While making this speech, the temerity of which astonished some of the near-by listeners, John had made bold to hold on to the basket. There they stood, both John and Jesus holding the basket. Presently the Master let go and, looking down on the lad, said: “Since with all your heart you crave to go with me, it shall not be denied you. We will go off by ourselves and have a good visit. You may ask me any question that arises in your heart, and we will comfort and console each other. You may start out carrying the lunch, and when you grow weary, I will help you. Follow on with me.” 근처에서 듣던 일부가 분별없는 이런 말에 깜짝 놀랐지만, 요한은 담차게 바구니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요한과 예수 둘 다 바구니를 붙들고 서 있었습니다. 주께서 바로 손을 놓고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다해 간절히 나와 함께 가려고 하니, 너를 거절할 수 없구나. 우리 둘이 떠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자. 너는 내게 네 심정에 일어나는 어떤 질문을 해도 좋고, 우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리라. 네가 먼저 도시락을 들고 나서고, 네가 피곤하면 내가 널 도우리라. 나를 뒤따라오라.”

177:1.3 (1921.1) Jesus did not return to the camp that evening until after sunset. The Master spent this last day of quiet on earth visiting with this truth-hungry youth and talking with his Paradise Father. This event has become known on high as “the day which a young man spent with God in the hills.” Forever this occasion exemplifies the willingness of the Creator to fellowship the creature. Even a youth, if the desire of the heart is really supreme, can command the attention and enjoy the loving companionship of the God of a universe, actually experience the unforgettable ecstasy of being alone with God in the hills, and for a whole day. And such was the unique experience of John Mark on this Wednesday in the hills of Judea. 예수는 그날 저녁 해가 저물 때까지 야영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조용한 마지막 이날을 이렇게 진리에 굶주린 젊은이와 이야기하고 자기 천국 아버지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높은 곳에 “한 젊은이가 작은 산에서 하느님과 보낸 날”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이 경우는 창조자가 자진해서 기쁘게 창조물과 사귀려는 좋은 예가 됩니다. 젊은이도 심정의 소망이 정말로 지극하면, 우주 하느님의 주의를 끌어서 애정을 품고 가까이 사귈 수 있으며, 종일 작은 산에서 하느님과 단둘이 있는, 잊을 수 없는 황홀을 실제로 경험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수요일, 유대의 작은 산에서 요한 마가의 독특한 체험이 그랬습니다.

177:1.4 (1921.2) Jesus visited much with John, talking freely about the affairs of this world and the next. John told Jesus how much he regretted that he had not been old enough to be one of the apostles and expressed his great appreciation that he had been permitted to follow on with them since their first preaching at the Jordan ford near Jericho, except for the trip to Phoenicia. Jesus warned the lad not to become discouraged by impending events and assured him he would live to become a mighty messenger of the kingdom. 예수는 요한과 이 세상 및 다음 세상의 일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사도 중 하나가 될 만큼 충분히 나이 들지 못한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예수께 말했고, 여리고 근처 요단 여울에서 그들이 처음 설교한 이후로 페니키아로 여행할 때를 빼고, 줄곧 그들을 뒤따르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예수는 소년에게 임박한 사건들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그가 하느님 나라의 강력한 메신저로 살아갈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177:1.5 (1921.3) John Mark was thrilled by the memory of this day with Jesus in the hills, but he never forgot the Master’s final admonition, spoken just as they were about to return to the Gethsemane camp, when he said: “Well, John, we have had a good visit, a real day of rest, but see to it that you tell no man the things which I told you.” And John Mark never did reveal anything that transpired on this day which he spent with Jesus in the hills. 요한 마가는 작은 산에서 예수와 함께한 이날의 기억으로 감격했지만, 그는 자신들이 겟세마네 야영지로 막 돌아오려던 참에 그가 말하기를 “자, 요한아, 우리가 좋은 시간을 보내며, 정말로 쉬었던 날이지만, 내가 너에게 말한 것들을 아무에게도 분명히 말하지 말라.”라고 말했던, 주님의 마지막 권고를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 마가는 자신이 작은 산에서 예수와 함께 보낸 이날에 있었던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177:1.6 (1921.4) Throughout the few remaining hours of Jesus’ earth life John Mark never permitted the Master for long to get out of his sight. Always was the lad in hiding near by; he slept only when Jesus slept. 예수의 지상 생애 중 남은 몇 시간 내내, 요한 마가는 주님이 자기 눈앞에서 오랫동안 벗어나도록 절대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은 언제나 근처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주무실 때만 잠을 잤습니다.

2. Early Home Life 어릴 때 가정생활

177:2.1 (1921.5) In the course of this day’s visiting with John Mark, Jesus spent considerable time comparing their early childhood and later boyhood experiences. Although John’s parents possessed more of this world’s goods than had Jesus’ parents, there was much experience in their boyhood which was very similar. Jesus said many things which helped John better to understand his parents and other members of his family. When the lad asked the Master how he could know that he would turn out to be a “mighty messenger of the kingdom,” Jesus said:

177:2.2 (1921.6) “I know you will prove loyal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because I can depend upon your present faith and love when these qualities are grounded upon such an early training as has been your portion at home. You are the product of a home where the parents bear each other a sincere affection, and therefore you have not been overloved so as injuriously to exalt your concept of self-importance. Neither has your personality suffered distortion in consequence of your parents’ loveless maneuvering for your confidence and loyalty, the one against the other. You have enjoyed that parental love which insures laudable self-confidence and which fosters normal feelings of security. But you have also been fortunate in that your parents possessed wisdom as well as love; and it was wisdom which led them to withhold most forms of indulgence and many luxuries which wealth can buy while they sent you to the synagogue school along with your neighborhood playfellows, and they also encouraged you to learn how to live in this world by permitting you to have original experience. You came over to the Jordan, where we preached and John’s disciples baptized, with your young friend Amos. Both of you desired to go with us. When you returned to Jerusalem, your parents consented; Amos’s parents refused; they loved their son so much that they denied him the blessed experience which you have had, even such as you this day enjoy. By running away from home, Amos could have joined us, but in so doing he would have wounded love and sacrificed loyalty. Even if such a course had been wise, it would have been a terrible price to pay for experience, independence, and liberty. Wise parents, such as yours, see to it that their children do not have to wound love or stifle loyalty in order to develop independence and enjoy invigorating liberty when they have grown up to your age.

177:2.3 (1922.1) “Love, John, is the supreme reality of the universe when bestowed by all-wise beings, but it is a dangerous and oftentimes semiselfish trait as it is manifested in the experience of mortal parents. When you get married and have children of your own to rear, make sure that your love is admonished by wisdom and guided by intelligence.

177:2.4 (1922.2) “Your young friend Amos believes this gospel of the kingdom just as much as you, but I cannot fully depend upon him; I am not certain about what he will do in the years to come. His early home life was not such as would produce a wholly dependable person. Amos is too much like one of the apostles who failed to enjoy a normal, loving, and wise home training. Your whole afterlife will be more happy and dependable because you spent your first eight years in a normal and well-regulated home. You possess a strong and well-knit character because you grew up in a home where love prevailed and wisdom reigned. Such a childhood training produces a type of loyalty which assures me that you will go through with the course you have begun.”

177:2.5 (1922.3) For more than an hour Jesus and John continued this discussion of home life. The Master went on to explain to John how a child is wholly dependent on his parents and the associated home life for all his early concepts of everything intellectual, social, moral, and even spiritual since the family represents to the young child all that he can first know of either human or divine relationships. The child must derive his first impressions of the universe from the mother’s care; he is wholly dependent on the earthly father for his first ideas of the heavenly Father. The child’s subsequent life is made happy or unhappy, easy or difficult, in accordance with his early mental and emotional life, conditioned by these social and spiritual relationships of the home. A human being’s entire afterlife is enormously influenced by what happens during the first few years of existence.

177:2.6 (1922.4) It is our sincere belief that the gospel of Jesus’ teaching, founded as it is on the father-child relationship, can hardly enjoy a world-wide acceptance until such a time as the home life of the modern civilized peoples embraces more of love and more of wisdom. Notwithstanding that parents of the twentieth century possess great knowledge and increased truth for improving the home and ennobling the home life, it remains a fact that very few modern homes are such good places in which to nurture boys and girls as Jesus’ home in Galilee and John Mark’s home in Judea, albeit the acceptance of Jesus’ gospel will result in the immediate improvement of home life. The love life of a wise home and the loyal devotion of true religion exert a profound reciprocal influence upon each other. Such a home life enhances religion, and genuine religion always glorifies the home.

177:2.7 (1923.1) It is true that many of the objectionable stunting influences and other cramping features of these olden Jewish homes have been virtually eliminated from many of the better-regulated modern homes. There is, indeed, more spontaneous freedom and far more personal liberty, but this liberty is not restrained by love, motivated by loyalty, nor directed by the intelligent discipline of wisdom. As long as we teach the child to pray, “Our Father who is in heaven,” a tremendous responsibility rests upon all earthly fathers so to live and order their homes that the word father becomes worthily enshrined in the minds and hearts of all growing children.

3. The Day at Camp

177:3.1 (1923.2) The apostles spent most of this day walking about on Mount Olivet and visiting with the disciples who were encamped with them, but early in the afternoon they became very desirous of seeing Jesus return. As the day wore on, they grew increasingly anxious about his safety; they felt inexpressibly lonely without him. There was much debating throughout the day as to whether the Master should have been allowed to go off by himself in the hills, accompanied only by an errand boy. Though no man openly so expressed his thoughts, there was not one of them, save Judas Iscariot, who did not wish himself in John Mark’s place.

177:3.2 (1923.3) It was about midafternoon when Nathaniel made his speech on “Supreme Desire” to about half a dozen of the apostles and as many disciples, the ending of which was: “What is wrong with most of us is that we are only halfhearted. We fail to love the Master as he loves us. If we had all wanted to go with him as much as John Mark did, he would surely have taken us all. We stood by while the lad approached the Master and offered him the basket, but when the Master took hold of it, the lad would not let go. And so the Master left us here while he went off to the hills with basket, boy, and all.”

177:3.3 (1923.4) About four o’clock, runners came to David Zebedee bringing him word from his mother at Bethsaida and from Jesus’ mother. Several days previously David had made up his mind that the chief priests and rulers were going to kill Jesus. David knew they were determined to destroy the Master, and he was about convinced that Jesus would neither exert his divine power to save himself nor permit his followers to employ force in his defense. Having reached these conclusions, he lost no time in dispatching a messenger to his mother, urging her to come at once to Jerusalem and to bring Mary the mother of Jesus and every member of his family.

177:3.4 (1923.5) David’s mother did as her son requested, and now the runners came back to David bringing the word that his mother and Jesus’ entire family were on the way to Jerusalem and should arrive sometime late on the following day or very early the next morning. Since David did this on his own initiative, he thought it wise to keep the matter to himself. He told no one, therefore, that Jesus’ family was on the way to Jerusalem.

177:3.5 (1924.1) Shortly after noon, more than twenty of the Greeks who had met with Jesus and the twelve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arrived at the camp, and Peter and John spent several hours in conference with them. These Greeks, at least some of them, were well advanced in the knowledge of the kingdom, having been instructed by Rodan at Alexandria.

177:3.6 (1924.2) That evening, after returning to the camp, Jesus visited with the Greeks, and had it not been that such a course would have greatly disturbed his apostles and many of his leading disciples, he would have ordained these twenty Greeks, even as he had the seventy.

177:3.7 (1924.3) While all of this was going on at the camp, in Jerusalem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were amazed that Jesus did not return to address the multitudes. True, the day before, when he left the temple, he had said, “I leave your house to you desolate.” But they could not understand why he would be willing to forgo the great advantage which he had built up in the friendly attitude of the crowds. While they feared he would stir up a tumult among the people, the Master’s last words to the multitude had been an exhortation to conform in every reasonable manner with the authority of those “who sit in Moses’ seat.” But it was a busy day in the city as they simultaneously prepared for the Passover and perfected their plans for destroying Jesus.

177:3.8 (1924.4) Not many people came to the camp, for its establishment had been kept a well-guarded secret by all who knew that Jesus was expecting to stay there in place of going out to Bethany every night.

4. Judas and the Chief Priests

177:4.1 (1924.5) Shortly after Jesus and John Mark left the camp, Judas Iscariot disappeared from among his brethren, not returning until late in the afternoon. This confused and discontented apostle, notwithstanding his Master’s specific request to refrain from entering Jerusalem, went in haste to keep his appointment with Jesus’ enemies at the home of Caiaphas the high priest. This was an informal meeting of the Sanhedrin and had been appointed for shortly after ten o’clock that morning. This meeting was called to discuss the nature of the charges which should be lodged against Jesus and to decide upon the procedure to be employed in bringing him before the Roman authorities for the purpose of securing the necessary civil confirmation of the death sentence which they had already passed upon him.

177:4.2 (1924.6) On the preceding day Judas had disclosed to some of his relatives and to certain Sadducean friends of his father’s family that he had reached the conclusion that, while Jesus was a well-meaning dreamer and idealist, he was not the expected deliverer of Israel. Judas stated that he would very much like to find some way of withdrawing gracefully from the whole movement. His friends flatteringly assured him that his withdrawal would be hailed by the Jewish rulers as a great event, and that nothing would be too good for him. They led him to believe that he would forthwith receive high honors from the Sanhedrin, and that he would at last be in a position to erase the stigma of his well-meant but “unfortunate association with untaught Galileans.”

177:4.3 (1924.7) Judas could not quite believe that the mighty works of the Master had been wrought by the power of the prince of devils, but he was now fully convinced that Jesus would not exert his power in self-aggrandizement; he was at last convinced that Jesus would allow himself to be destroyed by the Jewish rulers, and he could not endure the humiliating thought of being identified with a movement of defeat. He refused to entertain the idea of apparent failure. He thoroughly understood the sturdy character of his Master and the keenness of that majestic and merciful mind, yet he derived pleasure from even the partial entertainment of the suggestion of one of his relatives that Jesus, while he was a well-meaning fanatic, was probably not really sound of mind; that he had always appeared to be a strange and misunderstood person.

177:4.4 (1925.1) And now, as never before, Judas found himself becoming strangely resentful that Jesus had never assigned him a position of greater honor. All along he had appreciated the honor of being the apostolic treasurer, but now he began to feel that he was not appreciated; that his abilities were unrecognized. He was suddenly overcome with indignation that Peter, James, and John should have been honored with close association with Jesus, and at this time, when he was on the way to the high priest’s home, he was bent on getting even with Peter, James, and John more than he was concerned with any thought of betraying Jesus. But over and above all, just then, a new and dominating thought began to occupy the forefront of his conscious mind: He had set out to get honor for himself, and if this could be secured simultaneously with getting even with those who had contributed to the greatest disappointment of his life, all the better. He was seized with a terrible conspiracy of confusion, pride, desperation, and determination. And so it must be plain that it was not for money that Judas was then on his way to the home of Caiaphas to arrange for the betrayal of Jesus.

177:4.5 (1925.2) As Judas approached the home of Caiaphas, he arrived at the final decision to abandon Jesus and his fellow apostles; and having thus made up his mind to desert the cause of the kingdom of heaven, he was determined to secure for himself as much as possible of that honor and glory which he had thought would sometime be his when he first identified himself with Jesus and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All of the apostles once shared this ambition with Judas, but as time passed they learned to admire truth and to love Jesus, at least more than did Judas.

177:4.6 (1925.3) The traitor was presented to Caiaphas and the Jewish rulers by his cousin, who explained that Judas, having discovered his mistake in allowing himself to be misled by the subtle teaching of Jesus, had arrived at the place where he wished to make public and formal renunciation of his association with the Galilean and at the same time to ask for reinstatement in the confidence and fellowship of his Judean brethren. This spokesman for Judas went on to explain that Judas recognized it would be best for the peace of Israel if Jesus should be taken into custody, and that, as evidence of his sorrow in having participated in such a movement of error and as proof of his sincerity in now returning to the teachings of Moses, he had come to offer himself to the Sanhedrin as one who could so arrange with the captain holding the orders for Jesus’ arrest that he could be taken into custody quietly, thus avoiding any danger of stirring up the multitudes or the necessity of postponing his arrest until after the Passover.

177:4.7 (1925.4) When his cousin had finished speaking, he presented Judas, who, stepping forward near the high priest, said: “All that my cousin has promised, I will do, but what are you willing to give me for this service?” Judas did not seem to discern the look of disdain and even disgust that came over the face of the hardhearted and vainglorious Caiaphas; his heart was too much set on self-glory and the craving for the satisfaction of self-exaltation.

177:4.8 (1926.1) And then Caiaphas looked down upon the betrayer while he said: “Judas, you go to the captain of the guard and arrange with that officer to bring your Master to us either tonight or tomorrow night, and when he has been delivered by you into our hands, you shall receive your reward for this service.” When Judas heard this, he went forth from the presence of the chief priests and rulers and took counsel with 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s as to the manner in which Jesus was to be apprehended. Judas knew that Jesus was then absent from the camp and had no idea when he would return that evening, and so they agreed among themselves to arrest Jesus the next evening (Thursday) after the people of Jerusalem and all of the visiting pilgrims had retired for the night.

177:4.9 (1926.2) Judas returned to his associates at the camp intoxicated with thoughts of grandeur and glory such as he had not had for many a day. He had enlisted with Jesus hoping some day to become a great man in the new kingdom. He at last realized that there was to be no new kingdom such as he had anticipated. But he rejoiced in being so sagacious as to trade off his disappointment in failing to achieve glory in an anticipated new kingdom for the immediate realization of honor and reward in the old order, which he now believed would survive, and which he was certain would destroy Jesus and all that he stood for. In its last motive of conscious intention, Judas’s betrayal of Jesus was the cowardly act of a selfish deserter whose only thought was his own safety and glorification, no matter what might be the results of his conduct upon his Master and upon his former associates.

177:4.10 (1926.3) But it was ever just that way. Judas had long been engaged in this deliberate, persistent, selfish, and vengeful consciousness of progressively building up in his mind, and entertaining in his heart, these hateful and evil desires of revenge and disloyalty. Jesus loved and trusted Judas even as he loved and trusted the other apostles, but Judas failed to develop loyal trust and to experience wholehearted love in return. And how dangerous ambition can become when it is once wholly wedded to self-seeking and supremely motivated by sullen and long-suppressed vengeance! What a crushing thing is disappointment in the lives of those foolish persons who, in fastening their gaze on the shadowy and evanescent allurements of time, become blinded to the higher and more real achievements of the everlasting attainments of the eternal worlds of divine values and true spiritual realities. Judas craved worldly honor in his mind and grew to love this desire with his whole heart; the other apostles likewise craved this same worldly honor in their minds, but with their hearts they loved Jesus and were doing their best to learn to love the truths which he taught them.

177:4.11 (1926.4) Judas did not realize it at this time, but he had been a subconscious critic of Jesus ever since John the Baptist was beheaded by Herod. Deep down in his heart Judas always resented the fact that Jesus did not save John. You should not forget that Judas had been a disciple of John before he became a follower of Jesus. And all these accumulations of human resentment and bitter disappointment which Judas had laid by in his soul in habiliments of hate were now well organized in his subconscious mind and ready to spring up to engulf him when he once dared to separate himself from the supporting influence of his brethren while at the same time exposing himself to the clever insinuations and subtle ridicule of the enemies of Jesus. Every time Judas allowed his hopes to soar high and Jesus would do or say something to dash them to pieces, there was always left in Judas’s heart a scar of bitter resentment; and as these scars multiplied, presently that heart, so often wounded, lost all real affection for the one who had inflicted this distasteful experience upon a well-intentioned but cowardly and self-centered personality. Judas did not realize it, but he was a coward. Accordingly was he always inclined to assign to Jesus cowardice as the motive which led him so often to refuse to grasp for power or glory when they were apparently within his easy reach. And every mortal man knows full well how love, even when once genuine, can, through disappointment, jealousy, and long-continued resentment, be eventually turned into actual hate.

177:4.12 (1927.1) At last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could breathe easily for a few hours. They would not have to arrest Jesus in public, and the securing of Judas as a traitorous ally insured that Jesus would not escape from their jurisdiction as he had so many times in the past.

5. The Last Social Hour

177:5.1 (1927.2) Since it was Wednesday, this evening at the camp was a social hour. The Master endeavored to cheer his downcast apostles, but that was well-nigh impossible. They were all beginning to realize that disconcerting and crushing events were impending. They could not be cheerful, even when the Master recounted their years of eventful and loving association. Jesus made careful inquiry about the families of all of the apostles and, looking over toward David Zebedee, asked if anyone had heard recently from his mother, his youngest sister, or other members of his family. David looked down at his feet; he was afraid to answer.

177:5.2 (1927.3) This was the occasion of Jesus’ warning his followers to beware of the support of the multitude. He recounted their experiences in Galilee when time and again great throngs of people enthusiastically followed them around and then just as ardently turned against them and returned to their former ways of believing and living. And then he said: “And so you must not allow yourselves to be deceived by the great crowds who heard us in the temple, and who seemed to believe our teachings. These multitudes listen to the truth and believe it superficially with their minds, but few of them permit the word of truth to strike down into the heart with living roots. Those who know the gospel only in the mind, and who have not experienced it in the heart, cannot be depended upon for support when real trouble comes. When the rulers of the Jews reach an agreement to destroy the Son of Man, and when they strike with one accord, you will see the multitude either flee in dismay or else stand by in silent amazement while these maddened and blinded rulers lead the teachers of the gospel truth to their death. And then, when adversity and persecution descend upon you, still others who you think love the truth will be scattered, and some will renounce the gospel and desert you. Some who have been very close to us have already made up their minds to desert. You have rested today in preparation for those times which are now upon us. Watch, therefore, and pray that on the morrow you may be strengthened for the days that are just ahead.”

177:5.3 (1927.4) The atmosphere of the camp was charged with an inexplicable tension. Silent messengers came and went, communicating with only David Zebedee. Before the evening had passed, certain ones knew that Lazarus had taken hasty flight from Bethany. John Mark was ominously silent after returning to camp, notwithstanding he had spent the whole day in the Master’s company. Every effort to persuade him to talk only indicated clearly that Jesus had told him not to talk.

177:5.4 (1928.1) Even the Master’s good cheer and his unusual sociability frightened them. They all felt the certain drawing upon them of the terrible isolation which they realized was about to descend with crashing suddenness and inescapable terror. They vaguely sensed what was coming, and none felt prepared to face the test. The Master had been away all day; they had missed him tremendously.

177:5.5 (1928.2) This Wednesday evening was the low-tide mark of their spiritual status up to the actual hour of the Master’s death. Although the next day was one more day nearer the tragic Friday, still, he was with them, and they passed through its anxious hours more gracefully.

177:5.6 (1928.3) It was just before midnight when Jesus, knowing this would be the last night he would ever sleep through with his chosen family on earth, said, as he dispersed them for the night: “Go to your sleep, my brethren, and peace be upon you till we rise on the morrow, one more day to do the Father’s will and experience the joy of knowing that we are his 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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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79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晩餐)

Paper 179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晩餐)

1. The Desire for Preference
2. Beginning the Supper
3. Washing the Apostles’ Feet
4. Last Words to the Betrayer
5. Establishing the Remembrance Supper

179:0.1 (1936.1) DURING the afternoon of this Thursday, when Philip reminded the Master about the approaching Passover and inquired concerning his plans for its celebration, he had in mind the Passover supper which was due to be eaten on the evening of the next day, Friday. It was the custom to begin the preparations for the celebration of the Passover not later than noon of the preceding day. And since the Jews reckoned the day as beginning at sunset, this meant that Saturday’s Passover supper would be eaten on Friday night, sometime before the midnight hour.

179:0.2 (1936.2) The apostles were, therefore, entirely at a loss to understand the Master’s announcement that they would celebrate the Passover one day early. They thought, at least some of them did, that he knew he would be placed under arrest before the time of the Passover supper on Friday night and was therefore calling them together for a special supper on this Thursday evening. Others thought that this was merely a special occasion which was to precede the regular Passover celebration.

179:0.3 (1936.3) The apostles knew that Jesus had celebrated other Passovers without the lamb; they knew that he did not personally participate in any sacrificial service of the Jewish system. He had many times partaken of the paschal lamb as a guest, but always, when he was the host, no lamb was served. It would not have been a great surprise to the apostles to have seen the lamb omitted even on Passover night, and since this supper was given one day earlier, they thought nothing of its absence.

179:0.4 (1936.4) After receiving the greetings of welcome extended by the father and mother of John Mark, the apostles went immediately to the upper chamber while Jesus lingered behind to talk with the Mark family.

179:0.5 (1936.5) It had been understood beforehand that the Master was to celebrate this occasion alone with his twelve apostles; therefore no servants were provided to wait upon them.

1. The Desire for Preference

179:1.1 (1936.6) When the apostles had been shown upstairs by John Mark, they beheld a large and commodious chamber, which was completely furnished for the supper, and observed that the bread, wine, water, and herbs were all in readiness on one end of the table. Except for the end on which rested the bread and wine, this long table was surrounded by thirteen reclining couches, just such as would be provided for the celebration of the Passover in a well-to-do Jewish household.

179:1.2 (1936.7) As the twelve entered this upper chamber, they noticed, just inside the door, the pitchers of water, the basins, and towels for laving their dusty feet; and since no servant had been provided to render this service, the apostles began to look at one another as soon as John Mark had left them, and each began to think within himself, Who shall wash our feet? And each likewise thought that it would not be he who would thus seem to act as the servant of the others.

179:1.3 (1937.1) As they stood there, debating in their hearts, they surveyed the seating arrangement of the table, taking note of the higher divan of the host with one couch on the right and eleven arranged around the table on up to opposite this second seat of honor on the host’s right.

179:1.4 (1937.2) They expected the Master to arrive any moment, but they were in a quandary as to whether they should seat themselves or await his coming and depend on him to assign them their places. While they hesitated, Judas stepped over to the seat of honor, at the left of the host, and signified that he intended there to recline as the preferred guest. This act of Judas immediately stirred up a heated dispute among the other apostles. Judas had no sooner seized the seat of honor than John Zebedee laid claim to the next preferred seat, the one on the right of the host. Simon Peter was so enraged at this assumption of choice positions by Judas and John that, as the other angry apostles looked on, he marched clear around the table and took his place on the lowest couch, the end of the seating order and just opposite to that chosen by John Zebedee. Since others had seized the high seats, Peter thought to choose the lowest, and he did this, not merely in protest against the unseemly pride of his brethren, but with the hope that Jesus, when he should come and see him in the place of least honor, would call him up to a higher one, thus displacing one who had presumed to honor himself.

179:1.5 (1937.3) With the highest and the lowest positions thus occupied, the rest of the apostles chose places, some near Judas and some near Peter, until all were located. They were seated about the U-shaped table on these reclining divans in the following order: on the right of the Master, John; on the left, Judas, Simon Zelotes, Matthew, James Zebedee, Andrew, the Alpheus twins, Philip, Nathaniel, Thomas, and Simon Peter.

179:1.6 (1937.4) They are gathered together to celebrate, at least in spirit, an institution which antedated even Moses and referred to the times when their fathers were slaves in Egypt. This supper is their last rendezvous with Jesus, and even in such a solemn setting, under the leadership of Judas the apostles are led once more to give way to their old predilection for honor, preference, and personal exaltation.

179:1.7 (1937.5) They were still engaged in voicing angry recriminations when the Master appeared in the doorway, where he hesitated a moment as a look of disappointment slowly crept over his face. Without comment he went to his place, and he did not disturb their seating arrangement.

179:1.8 (1937.6) They were now ready to begin the supper, except that their feet were still unwashed, and they were in anything but a pleasant frame of mind. When the Master arrived, they were still engaged in making uncomplimentary remarks about one another, to say nothing of the thoughts of some who had sufficient emotional control to refrain from publicly expressing their feelings.

2. Beginning the Supper

179:2.1 (1937.7) For a few moments after the Master had gone to his place, not a word was spoken. Jesus looked them all over and, relieving the tension with a smile, said: “I have great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I wanted to eat with you once more before I suffered, and realizing that my hour has come, I arranged to have this supper with you tonight, for, as concerns the morrow, we are all in the hands of the Father, whose will I have come to execute. I shall not again eat with you until you sit down with me in the kingdom which my Father will give me when I have finished that for which he sent me into this world.”

179:2.2 (1938.1) After the wine and the water had been mixed, they brought the cup to Jesus, who, when he had received it from the hand of Thaddeus, held it while he offered thanks. And when he had finished offering thanks, he said: “Take this cup and divide it among yourselves and, when you partake of it, realize that I shall not again drink with you the fruit of the vine since this is our last supper. When we sit down again in this manner, it will be in the kingdom to come.”

179:2.3 (1938.2) Jesus began thus to talk to his apostles because he knew that his hour had come. He understood that the time had come when he was to return to the Father, and that his work on earth was almost finished. The Master knew he had revealed the Father’s love on earth and had shown forth his mercy to mankind, and that he had completed that for which he came into the world, even to the receiving of all power and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Likewise, he knew Judas Iscariot had fully made up his mind to deliver him that night into the hands of his enemies. He fully realized that this traitorous betrayal was the work of Judas, but that it also pleased Lucifer, Satan, and Caligastia the prince of darkness. But he feared none of those who sought his spiritual overthrow any more than he feared those who sought to accomplish his physical death. The Master had but one anxiety, and that was for the safety and salvation of his chosen followers. And so, with the full knowledge that the Father had put all things under his authority, the Master now prepared to enact the parable of brotherly love.

3. Washing the Apostles’ Feet

179:3.1 (1938.3) After drinking the first cup of the Passover, it was the Jewish custom for the host to arise from the table and wash his hands. Later on in the meal and after the second cup, all of the guests likewise rose up and washed their hands. Since the apostles knew that their Master never observed these rites of ceremonial hand washing, they were very curious to know what he intended to do when, after they had partaken of this first cup, he arose from the table and silently made his way over to near the door, where the water pitchers, basins, and towels had been placed. And their curiosity grew into astonishment as they saw the Master remove his outer garment, gird himself with a towel, and begin to pour water into one of the foot basins. Imagine the amazement of these twelve men, who had so recently refused to wash one another’s feet, and who had engaged in such unseemly disputes about positions of honor at the table, when they saw him make his way around the unoccupied end of the table to the lowest seat of the feast, where Simon Peter reclined, and, kneeling down in the attitude of a servant, make ready to wash Simon’s feet. As the Master knelt, all twelve arose as one man to their feet; even the traitorous Judas so far forgot his infamy for a moment as to arise with his fellow apostles in this expression of surprise, respect, and utter amazement.

179:3.2 (1938.4) There stood Simon Peter, looking down into the upturned face of his Master. Jesus said nothing; it was not necessary that he should speak. His attitude plainly revealed that he was minded to wash Simon Peter’s feet. Notwithstanding his frailties of the flesh, Peter loved the Master. This Galilean fisherman was the first human being wholeheartedly to believe in the divinity of Jesus and to make full and public confession of that belief. And Peter had never since really doubted the divine nature of the Master. Since Peter so revered and honored Jesus in his heart, it was not strange that his soul resented the thought of Jesus’ kneeling there before him in the attitude of a menial servant and proposing to wash his feet as would a slave. When Peter presently collected his wits sufficiently to address the Master, he spoke the heart feelings of all his fellow apostles.

179:3.3 (1939.1) After a few moments of this great embarrassment, Peter said, “Master, do you really mean to wash my feet?” And then, looking up into Peter’s face, Jesus said: “You may not fully understand what I am about to do, but hereafter you will know the meaning of all these things.” Then Simon Peter, drawing a long breath, said, “Master, you shall never wash my feet!” And each of the apostles nodded their approval of Peter’s firm declaration of refusal to allow Jesus thus to humble himself before them.

179:3.4 (1939.2) The dramatic appeal of this unusual scene at first touched the heart of even Judas Iscariot; but when his vainglorious intellect passed judgment upon the spectacle, he concluded that this gesture of humility was just one more episode which conclusively proved that Jesus would never qualify as Israel’s deliverer, and that he had made no mistake in the decision to desert the Master’s cause.

179:3.5 (1939.3) As they all stood there in breathless amazement, Jesus said: “Peter, I declare that, if I do not wash your feet, you will have no part with me in that which I am about to perform.” When Peter heard this declaration, coupled with the fact that Jesus continued kneeling there at his feet, he made one of those decisions of blind acquiescence in compliance with the wish of one whom he respected and loved. As it began to dawn on Simon Peter that there was attached to this proposed enactment of service some signification that determined one’s future connection with the Master’s work, he not only became reconciled to the thought of allowing Jesus to wash his feet but, in his characteristic and impetuous manner, said: “Then, Master, wash not my feet only but also my hands and my head.”

179:3.6 (1939.4) As the Master made ready to begin washing Peter’s feet, he said: “He who is already clean needs only to have his feet washed. You who sit with me tonight are clean — but not all. But the dust of your feet should have been washed away before you sat down at meat with me. And besides, I would perform this service for you as a parable to illustrate the meaning of a new commandment which I will presently give you.”

179:3.7 (1939.5) In like manner the Master went around the table, in silence, washing the feet of his twelve apostles, not even passing by Judas. When Jesus had finished washing the feet of the twelve, he donned his cloak, returned to his place as host, and after looking over his bewildered apostles, said:

179:3.8 (1939.6) “Do you really understand what I have done to you? You call me Master, and you say well, for so I am. If, then, the Master has washed your feet, why was it that you were unwilling to wash one another’s feet? What lesson should you learn from this parable in which the Master so willingly does that service which his brethren were unwilling to do for one another? Verily, verily, I say to you: A servant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 neither is one who is sent greater than he who sends him. You have seen the way of service in my life among you, and blessed are you who will have the gracious courage so to serve. But why are you so slow to learn that the secret of greatness in the spiritual kingdom is not like the methods of power in the material world?

179:3.9 (1940.1) “When I came into this chamber tonight, you were not content proudly to refuse to wash one another’s feet, but you must also fall to disputing among yourselves as to who should have the places of honor at my table. Such honors the Pharisees and the children of this world seek, but it should not be so among the ambassadors of the heavenly kingdom. Do you not know that there can be no place of preferment at my table? Do you not understand that I love each of you as I do the others? Do you not know that the place nearest me, as men regard such honors, can mean nothing concerning your standing in the kingdom of heaven? You know that the kings of the gentiles have lordship over their subjects, while those who exercise this authority are sometimes called benefactors. But it shall not be so in the kingdom of heaven. He who would be great among you, let him become as the younger; while he who would be chief, let him become as one who serves. Who is the greater, he who sits at meat, or he who serves? Is it not commonly regarded that he who sits at meat is the greater? But you will observe tha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If you are willing to become fellow servants with me in doing the Father’s will, in the kingdom to come you shall sit with me in power, still doing the Father’s will in future glory.”

179:3.10 (1940.2)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the Alpheus twins brought on the bread and wine, with the bitter herbs and the paste of dried fruits, for the next course of the Last Supper.

4. Last Words to the Betrayer

179:4.1 (1940.3) For some minutes the apostles ate in silence, but under the influence of the Master’s cheerful demeanor they were soon drawn into conversation, and ere long the meal was proceeding as if nothing out of the ordinary had occurred to interfere with the good cheer and social accord of this extraordinary occasion. After some time had elapsed, in about the middle of this second course of the meal, Jesus, looking them over, said: “I have told you how much I desired to have this supper with you, and knowing how the evil forces of darkness have conspired to bring about the death of the Son of Man, I determined to eat this supper with you in this secret chamber and a day in advance of the Passover since I will not be with you by this time tomorrow night. I have repeatedly told you that I must return to the Father. Now has my hour come, but it was not required that one of you should betray me into the hands of my enemies.”

179:4.2 (1940.4) When the twelve heard this, having already been robbed of much of their self-assertiveness and self-confidence by the parable of the feet washing and the Master’s subsequent discourse, they began to look at one another while in disconcerted tones they hesitatingly inquired, “Is it I?” And when they had all so inquired, Jesus said: “While it is necessary that I go to the Father, it was not required that one of you should become a traitor to fulfill the Father’s will. This is the coming to fruit of the concealed evil in the heart of one who failed to love the truth with his whole soul. How deceitful is the intellectual pride that precedes the spiritual downfall! My friend of many years, who even now eats my bread, will be willing to betray me, even as he now dips his hand with me in the dish.”

179:4.3 (1940.5) And when Jesus had thus spoken, they all began again to ask, “Is it I?” And as Judas, sitting on the left of his Master, again asked, “Is it I?” Jesus, dipping the bread in the dish of herbs, handed it to Judas, saying, “You have said.” But the others did not hear Jesus speak to Judas. John, who reclined on Jesus’ right hand, leaned over and asked the Master: “Who is it? We should know who it is that has proved untrue to his trust.” Jesus answered: “Already have I told you, even he to whom I gave the sop.” But it was so natural for the host to give a sop to the one who sat next to him on the left that none of them took notice of this, even though the Master had so plainly spoken. But Judas was painfully conscious of the meaning of the Master’s words associated with his act, and he became fearful lest his brethren were likewise now aware that he was the betrayer.

179:4.4 (1941.1) Peter was highly excited by what had been said, and leaning forward over the table, he addressed John, “Ask him who it is, or if he has told you, tell me who is the betrayer.”

179:4.5 (1941.2) Jesus brought their whisperings to an end by saying: “I sorrow that this evil should have come to pass and hoped even up to this hour that the power of truth might triumph over the deceptions of evil, but such victories are not won without the faith of the sincere love of truth. I would not have told you these things at this, our last supper, but I desire to warn you of these sorrows and so prepare you for what is now upon us. I have told you of this because I desire that you should recall, after I have gone, that I knew about all these evil plottings, and that I forewarned you of my betrayal. And I do all this only that you may be strengthened for the temptations and trials which are just ahead.”

179:4.6 (1941.3) When Jesus had thus spoken, leaning over toward Judas, he said: “What you have decided to do, do quickly.” And when Judas heard these words, he arose from the table and hastily left the room, going out into the night to do what he had set his mind to accomplish. When the other apostles saw Judas hasten off after Jesus had spoken to him, they thought he had gone to procure something additional for the supper or to do some other errand for the Master since they supposed he still carried the bag.

179:4.7 (1941.4) Jesus now knew that nothing could be done to keep Judas from turning traitor. He started with twelve — now he had eleven. He chose six of these apostles, and though Judas was among those nominated by his first-chosen apostles, still the Master accepted him and had, up to this very hour, done everything possible to sanctify and save him, even as he had wrought for the peace and salvation of the others.

179:4.8 (1941.5) This supper, with its tender episodes and softening touches, was Jesus’ last appeal to the deserting Judas, but it was of no avail. Warning, even when administered in the most tactful manner and conveyed in the most kindly spirit, as a rule, only intensifies hatred and fires the evil determination to carry out to the full one’s own selfish projects, when love is once really dead.

5. Establishing the Remembrance Supper

179:5.1 (1941.6) As they brought Jesus the third cup of wine, the “cup of blessing,” he arose from the couch and, taking the cup in his hands, blessed it, saying: “Take this cup, all of you, and drink of it. This shall be the cup of my remembrance. This is the cup of the blessing of a new dispensation of grace and truth. This shall be to you the emblem of the bestowal and ministry of the divine Spirit of Truth. And I will not again drink this cup with you until I drink in new form with you in the Father’s eternal kingdom.”

179:5.2 (1942.1) The apostles all sensed that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was transpiring as they drank of this cup of blessing in profound reverence and perfect silence. The old Passover commemorated the emergence of their fathers from a state of racial slavery into individual freedom; now the Master was instituting a new remembrance supper as a symbol of the new dispensation wherein the enslaved individual emerges from the bondage of ceremonialism and selfishness into the spiritual joy of the brotherhood and fellowship of the liberated faith sons of the living God.

179:5.3 (1942.2) When they had finished drinking this new cup of remembrance, the Master took up the bread and, after giving thanks, broke it in pieces and, directing them to pass it around, said: “Take this bread of remembrance and eat it. I have told you that I am the bread of life. And this bread of life is the united life of the Father and the Son in one gift. The word of the Father, as revealed in the Son, is indeed the bread of life.” When they had partaken of the bread of remembrance, the symbol of the living word of truth incarnated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they all sat down.

179:5.4 (1942.3) In instituting this remembrance supper, the Master, as was always his habit, resorted to parables and symbols. He employed symbols because he wanted to teach certain great spiritual truths in such a manner as to make it difficult for his successors to attach precise interpretations and definite meanings to his words. In this way he sought to prevent successive generations from crystallizing his teaching and binding down his spiritual meanings by the dead chains of tradition and dogma. In the establishment of the only ceremony or sacrament associated with his whole life mission, Jesus took great pains to suggest his meanings rather than to commit himself to precise definitions. He did not wish to destroy the individual’s concept of divine communion by establishing a precise form; neither did he desire to limit the believer’s spiritual imagination by formally cramping it. He rather sought to set man’s reborn soul free upon the joyous wings of a new and living spiritual liberty.

179:5.5 (1942.4) Notwithstanding the Master’s effort thus to establish this new sacrament of the remembrance, those who followed after him in the intervening centuries saw to it that his express desire was effectively thwarted in that his simple spiritual symbolism of that last night in the flesh has been reduced to precise interpretations and subjected to the almost mathematical precision of a set formula. Of all Jesus’ teachings none have become more tradition-standardized.

179:5.6 (1942.5) This supper of remembrance, when it is partaken of by those who are Son-believing and God-knowing, does not need to have associated with its symbolism any of man’s puerile misinterpretations regarding the meaning of the divine presence, for upon all such occasions the Master is really present. The remembrance supper is the believer’s symbolic rendezvous with Michael. When you become thus spirit-conscious, the Son is actually present, and his spirit fraternizes with the indwelling fragment of his Father.

179:5.7 (1942.6) After they had engaged in meditation for a few moments, Jesus continued speaking: “When you do these things, recall the life I have lived on earth among you and rejoice that I am to continue to live on earth with you and to serve through you. As individuals, contend not among yourselves as to who shall be greatest. Be you all as brethren. And when the kingdom grows to embrace large groups of believers, likewise should you refrain from contending for greatness or seeking preferment between such groups.”

179:5.8 (1943.1) And this mighty occasion took place in the upper chamber of a friend. There was nothing of sacred form or of ceremonial consecration about either the supper or the building. The remembrance supper was established without ecclesiastical sanction.

179:5.9 (1943.2) When Jesus had thus established the supper of the remembrance, he said to the eleven: “And as often as you do this, do it in remembrance of me. And when you do remember me, first look back upon my life in the flesh, recall that I was once with you, and then, by faith, discern that you shall all sometime sup with me in the Father’s eternal kingdom. This is the new Passover which I leave with you, even the memory of my bestowal life, the word of eternal truth; and of my love for you, the outpouring of my Spirit of Truth upon all flesh.”

179:5.10 (1943.3) And they ended this celebration of the old but bloodless Passover in connection with the inauguration of the new supper of the remembrance, by singing, all together, the one hundred and eighteenth Ps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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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82 In Gethsemane 겟세마네에서

Paper 182

In Gethsemane 겟세마네에서

1. The Last Group Prayer
Jesus’ enlargement of the revelation of God’s name
2. Last Hour Before the Betrayal
Dispatching the runner to Abner
David Zebedee’s farewell
3. Alone in Gethsemane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182:0.1 (1963.1) IT WAS about ten o’clock this Thursday night when Jesus led the eleven apostles from the home of Elijah and Mary Mark on their way back to the Gethsemane camp. Ever since that day in the hills, John Mark had made it his business to keep a watchful eye on Jesus. John, being in need of sleep, had obtained several hours of rest while the Master had been with his apostles in the upper room, but on hearing them coming downstairs, he arose and, quickly throwing a linen coat about himself, followed them through the city, over the brook Kidron, and on to their private encampment adjacent to Gethsemane Park. And John Mark remained so near the Master throughout this night and the next day that he witnessed everything and overheard much of what the Master said from this time on to the hour of the crucifixion.

182:0.2 (1963.2) As Jesus and the eleven made their way back to camp, the apostles began to wonder about the meaning of Judas’s prolonged absence, and they spoke to one another concerning the Master’s prediction that one of them would betray him, and for the first time they suspected that all was not well with Judas Iscariot. But they did not engage in open comment about Judas until they reached the camp and observed that he was not there, waiting to receive them. When they all besieged Andrew to know what had become of Judas, their chief remarked only, “I do not know where Judas is, but I fear he has deserted us.”

1. The Last Group Prayer

182:1.1 (1963.3) A few moments after arriving at camp, Jesus said to them: “My friends and brethren, my time with you is now very short, and I desire that we draw apart by ourselves while we pray to our Father in heaven for strength to sustain us in this hour and henceforth in all the work we must do in his name.”

182:1.2 (1963.4) When Jesus had thus spoken, he led the way a short distance up on Olivet, and in full view of Jerusalem he bade them kneel on a large flat rock in a circle about him as they had done on the day of their ordination; and then, as he stood there in the midst of them glorified in the mellow moonlight, he lifted up his eyes toward heaven and prayed:

182:1.3 (1963.5) “Father, my hour has come; now glorify your Son that the Son may glorify you. I know that you have given me full authority over all living creatures in my realm, and I will give eternal life to all who will become faith sons of God. And this is eternal life, that my creatures should know you as the only true God and Father of all, and that they should believe in him whom you sent into the world. Father, I have exalted you on earth and have accomplished the work which you gave me to do. I have almost finished my bestowal upon the children of our own creation; there remains only for me to lay down my life in the flesh. And now, O my Father, glorify me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you before this world was and receive me once more at your right hand.

182:1.4 (1964.1) “I have manifested you to the men whom you chose from the world and gave to me. They are yours — as all life is in your hands — you gave them to me, and I have lived among them, teaching them the way of life, and they have believed. These men are learning that all I have comes from you, and that the life I live in the flesh is to make known my Father to the worlds. The truth which you have given to me I have revealed to them. These, my friends and ambassadors, have sincerely willed to receive your word. I have told them that I came forth from you, that you sent me into this world, and that I am about to return to you. Father, I do pray for these chosen men. And I pray for them not as I would pray for the world, but as for those whom I have chosen out of the world to represent me to the world after I have returned to your work, even as I have represented you in this world during my sojourn in the flesh. These men are mine; you gave them to me; but all things which are mine are ever yours, and all that which was yours you have now caused to be mine. You have been exalted in me, and I now pray that I may be honored in these men. I can no longer be in this world; I am about to return to the work you have given me to do. I must leave these men behind to represent us and our kingdom among men. Father, keep these men faithful as I prepare to yield up my life in the flesh. Help these, my friends, to be one in spirit, even as we are one. As long as I could be with them, I could watch over them and guide them, but now am I about to go away. Be near them, Father, until we can send the new teacher to comfort and strengthen them.

182:1.5 (1964.2) “You gave me twelve men, and I have kept them all save one, the son of revenge, who would not have further fellowship with us. These men are weak and frail, but I know we can trust them; I have proved them; they love me, even as they reverence you. While they must suffer much for my sake, I desire that they should also be filled with the joy of the assurance of sonship in the heavenly kingdom. I have given these men your word and have taught them the truth. The world may hate them, even as it has hated me, but I do not ask that you take them out of the world, only that you keep them from the evil in the world. Sanctify them in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And as you sent me into this world, even so am I about to send these men into the world. For their sakes I have lived among men and have consecrated my life to your service that I might inspire them to be purified through the truth I have taught them and the love I have revealed to them. I well know, my Father, that there is no need for me to ask you to watch over these brethren after I have gone; I know you love them even as I, but I do this that they may the better realize the Father loves mortal men even as does the Son.

182:1.6 (1964.3) “And now, my Father, I would pray not only for these eleven men but also for all others who now believe, or who may hereafter believe the gospel of the kingdom through the word of their future ministry. I want them all to be one, even as you and I are one. You are in me and I am in you, and I desire that these believers likewise be in us; that both of our spirits indwell them. If my children are one as we are one, and if they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them, all men will then believe that I came forth from you and be willing to receive the revelation of truth and glory which I have made. The glory which you gave me I have revealed to these believers. As you have lived with me in spirit, so have I lived with them in the flesh. As you have been one with me, so have I been one with them, and so will the new teacher ever be one with them and in them. And all this have I done that my brethren in the flesh may know that the Father loves them even as does the Son, and that you love them even as you love me. Father, work with me to save these believers that they may presently come to be with me in glory and then go on to join you in the Paradise embrace. Those who serve with me in humiliation, I would have with me in glory so that they may see all you have given into my hands as the eternal harvest of the seed sowing of time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I long to show my earthly brethren the glory I had with you before the founding of this world. This world knows very little of you, righteous Father, but I know you, and I have made you known to these believers, and they will make known your name to other generations. And now I promise them that you will be with them in the world even as you have been with me — even so.”

182:1.7 (1965.1) The eleven remained kneeling in this circle about Jesus for several minutes before they arose and in silence made their way back to the near-by camp.

182:1.8 (1965.2) Jesus prayed for unity among his followers, but he did not desire uniformity. Sin creates a dead level of evil inertia, but righteousness nourishes the creative spirit of individual experience in the living realities of eternal truth and in the progressive communion of the divine spirits of the Father and the Son. In the spiritual fellowship of the believer-son with the divine Father there can never be doctrinal finality and sectarian superiority of group consciousness.

182:1.9 (1965.3) The Master, during the course of this final prayer with his apostles, alluded to the fact that he had manifested the Father’s name to the world. And that is truly what he did by the revelation of God through his perfected life in the flesh. The Father in heaven had sought to reveal himself to Moses, but he could proceed no further than to cause it to be said, “I AM.” And when pressed for further revelation of himself, it was only disclosed, “I AM that I AM.” But when Jesus had finished his earth life, this name of the Father had been so revealed that the Master, who was the Father incarnate, could truly say:

182:1.10 (1965.4) I am the bread of life.

182:1.11 (1965.5) I am the living water.

182:1.12 (1965.6) I am the light of the world.

182:1.13 (1965.7) I am the desire of all ages.

182:1.14 (1965.8) I am the open door to eternal salvation.

182:1.15 (1965.9) I am the reality of endless life.

182:1.16 (1965.10) I am the good shepherd.

182:1.17 (1965.11) I am the pathway of infinite perfection.

182:1.18 (1965.12)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182:1.19 (1965.13) I am the secret of eternal survival.

182:1.20 (1965.14)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182:1.21 (1965.15) I am the infinite Father of my finite children.

182:1.22 (1965.16) I am the true vine; you are the branches.

182:1.23 (1965.17) I am the hope of all who know the living truth.

182:1.24 (1965.18) I am the living bridge from one world to another.

182:1.25 (1965.19) I am the living link between time and eternity.

182:1.26 (1965.20) Thus did Jesus enlarge the living revelation of the name of God to all generations. As divine love reveals the nature of God, eternal truth discloses his name in ever-enlarging proportions.

2. Last Hour Before the Betrayal

182:2.1 (1966.1) The apostles were greatly shocked when they returned to their camp and found Judas absent. While the eleven were engaged in a heated discussion of their traitorous fellow apostle, David Zebedee and John Mark took Jesus to one side and revealed that they had kept Judas under observation for several days, and that they knew he intended to betray him into the hands of his enemies. Jesus listened to them but only said: “My friends, nothing can happen to the Son of Man unless the Father in heaven so wills. 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all things will work together for the glory of God and the salvation of men.”

182:2.2 (1966.2) The cheerful attitude of Jesus was waning. As the hour passed, he grew more and more serious, even sorrowful. The apostles, being much agitated, were loath to return to their tents even when requested to do so by the Master himself. Returning from his talk with David and John, he addressed his last words to all eleven, saying: “My friends, go to your rest. Prepare yourselves for the work of tomorrow. Remember, we should all submit ourselves t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My peace I leave with you.” And having thus spoken, he motioned them to their tents, but as they went, he called to Peter, James, and John, saying, “I desire that you remain with me for a little while.”

182:2.3 (1966.3) The apostles fell asleep only because they were literally exhausted; they had been running short on sleep ever since their arrival in Jerusalem. Before they went to their separate sleeping quarters, Simon Zelotes led them all over to his tent, where were stored the swords and other arms, and supplied each of them with this fighting equipment. All of them received these arms and girded themselves therewith except Nathaniel. Nathaniel, in refusing to arm himself, said: “My brethren, the Master has repeatedly told us that his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and that his disciples should not fight with the sword to bring about its establishment. I believe this; I do not think the Master needs to have us employ the sword in his defense. We have all seen his mighty power and know that he could defend himself against his enemies if he so desired. If he will not resist his enemies, it must be that such a course represents his attempt to fulfill his Father’s will. I will pray, but I will not wield the sword.” When Andrew heard Nathaniel’s speech, he handed his sword back to Simon Zelotes. And so nine of them were armed as they separated for the night.

182:2.4 (1966.4) Resentment of Judas’s being a traitor for the moment eclipsed everything else in the apostles’ minds. The Master’s comment in reference to Judas, spoken in the course of the last prayer, opened their eyes to the fact that he had forsaken them.

182:2.5 (1966.5) After the eight apostles had finally gone to their tents, and while Peter, James, and John were standing by to receive the Master’s orders, Jesus called to David Zebedee, “Send to me your most fleet and trustworthy messenger.” When David brought to the Master one Jacob, once a runner on the overnight messenger service between Jerusalem and Bethsaida, Jesus, addressing him, said: “In all haste, go to Abner at Philadelphia and say: ‘The Master sends greetings of peace to you and says that the hour has come when he will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his enemies, who will put him to death, but that he will rise from the dead and appear to you shortly, before he goes to the Father, and that he will then give you guidance to the time when the new teacher shall come to live in your hearts.’” And when Jacob had rehearsed this message to the Master’s satisfaction, Jesus sent him on his way, saying: “Fear not what any man may do to you, Jacob, for this night an unseen messenger will run by your side.”

182:2.6 (1967.1) Then Jesus turned to the chief of the visiting Greeks who were encamped with them, and said: “My brother, be not disturbed by what is about to take place since I have already forewarned you. The Son of Man will be put to death at the instigation of his enemies,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of the Jews, but I will rise to be with you a short time before I go to the Father. And when you have seen all this come to pass, glorify God and strengthen your brethren.”

182:2.7 (1967.2) In ordinary circumstances the apostles would have bidden the Master a personal good night, but this evening they were so preoccupied with the sudden realization of Judas’s desertion and so overcome by the unusual nature of the Master’s farewell prayer that they listened to his good-bye salutation and went away in silence.

182:2.8 (1967.3) Jesus did say this to Andrew as he left his side that night: “Andrew, do what you can to keep your brethren together until I come again to you after I have drunk this cup. Strengthen your brethren, seeing that I have already told you all. Peace be with you.”

182:2.9 (1967.4) None of the apostles expected anything out of the ordinary to happen that night since it was already so late. They sought sleep that they might rise up early in the morning and be prepared for the worst. They thought that the chief priests would seek to apprehend their Master early in the morning as no secular work was ever done after noon on the preparation day for the Passover. Only David Zebedee and John Mark understood that the enemies of Jesus were coming with Judas that very night.

182:2.10 (1967.5) David had arranged to stand guard that night on the upper trail which led to the Bethany-Jerusalem road, while John Mark was to watch along the road coming up by the Kidron to Gethsemane. Before David went to his self-imposed task of outpost duty, he bade farewell to Jesus, saying: “Master, I have had great joy in my service with you. My brothers are your apostles, but I have delighted to do the lesser things as they should be done, and I shall miss you with all my heart when you are gone.” And then said Jesus to David: “David, my son, others have done that which they were directed to do, but this service have you done of your own heart, and I have not been unmindful of your devotion. You, too, shall some day serve with me in the eternal kingdom.”

182:2.11 (1967.6) And then, as he prepared to go on watch by the upper trail, David said to Jesus: “You know, Master, I sent for your family, and I have word by a messenger that they are tonight in Jericho. They will be here early tomorrow forenoon since it would be dangerous for them to come up the bloody way by night.” And Jesus, looking down upon David, only said: “Let it be so, David.”

182:2.12 (1967.7) When David had gone up Olivet, John Mark took up his vigil near the road which ran by the brook down to Jerusalem. And John would have remained at this post but for his great desire to be near Jesus and to know what was going on. Shortly after David left him, and when John Mark observed Jesus withdraw, with Peter, James, and John, into a near-by ravine, he was so overcome with combined devotion and curiosity that he forsook his sentinel post and followed after them, hiding himself in the bushes, from which place he saw and overheard all that transpired during those last moments in the garden and just before Judas and the armed guards appeared to arrest Jesus.

182:2.13 (1968.1) While all this was in progress at the Master’s camp, Judas Iscariot was in conference with 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s, who had assembled his men preparatory to setting out, under the leadership of the betrayer, to arrest Jesus.

3. Alone in Gethsemane

182:3.1 (1968.2) After all was still and quiet about the camp, Jesus, taking Peter, James, and John, went a short way up a near-by ravine where he had often before gone to pray and commune. The three apostles could not help recognizing that he was grievously oppressed; never before had they observed their Master to be so heavy-laden and sorrowful. When they arrived at the place of his devotions, he bade the three sit down and watch with him while he went off about a stone’s throw to pray. And when he had fallen down on his face, he prayed: “My Father, I came into this world to do your will, and so have I. I know that the hour has come to lay down this life in the flesh, and I do not shrink therefrom, but I would know that it is your will that I drink this cup. Send me the assurance that I will please you in my death even as I have in my life.”

182:3.2 (1968.3) The Master remained in a prayerful attitude for a few moments, and then, going over to the three apostles, he found them sound asleep, for their eyes were heavy and they could not remain awake. As Jesus awoke them, he said: “What! can you not watch with me even for one hour? Cannot you see that my soul is exceedingly sorrowful, even to death, and that I crave your companionship?” After the three had aroused from their slumber, the Master again went apart by himself and, falling down on the ground, again prayed: “Father, I know it is possible to avoid this cup —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you — but I have come to do your will, and while this is a bitter cup, I would drink it if it is your will.” And when he had thus prayed, a mighty angel came down by his side and, speaking to him, touched him and strengthened him.

182:3.3 (1968.4) When Jesus returned to speak with the three apostles, he again found them fast asleep. He awakened them, saying: “In such an hour I need that you should watch and pray with me — all the more do you need to pray that you enter not into temptation — wherefore do you fall asleep when I leave you?”

182:3.4 (1968.5) And then, for a third time, the Master withdrew and prayed: “Father, you see my sleeping apostles; have mercy upon them. The spirit is indeed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And now, O Father, if this cup may not pass, then would I drink i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he had finished praying, he lay for a moment prostrate on the ground. When he arose and went back to his apostles, once more he found them asleep. He surveyed them and, with a pitying gesture, tenderly said: “Sleep on now and take your rest; the time of decision is past. The hour is now upon us wherein the Son of Man will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his enemies.” As he reached down to shake them that he might awaken them, he said: “Arise, let us be going back to the camp, for, behold, he who betrays me is at hand, and the hour has come when my flock shall be scattered. But I have already told you about these things.”

182:3.5 (1968.6) During the years that Jesus lived among his followers, they did, indeed, have much proof of his divine nature, but just now are they about to witness new evidences of his humanity. Just before the greatest of all the revelations of his divinity, his resurrection, must now come the greatest proofs of his mortal nature, his humiliation and crucifixion.

182:3.6 (1969.1) Each time he prayed in the garden, his humanity laid a firmer faith-hold upon his divinity; his human will more completely became one with the divine will of his Father. Among other words spoken to him by the mighty angel was the message that the Father desired his Son to finish his earth bestowal by passing through the creature experience of death just as all mortal creatures must experience material dissolution in passing from the existence of time into the progression of eternity.

182:3.7 (1969.2) Earlier in the evening it had not seemed so difficult to drink the cup, but as the human Jesus bade farewell to his apostles and sent them to their rest, the trial grew more appalling. Jesus experienced that natural ebb and flow of feeling which is common to all human experience, and just now he was weary from work, exhausted from the long hours of strenuous labor and painful anxiety concerning the safety of his apostles. While no mortal can presume to understand the thoughts and feelings of the incarnate Son of God at such a time as this, we know that he endured great anguish and suffered untold sorrow, for the perspiration rolled off his face in great drops. He was at last convinced that the Father intended to allow natural events to take their course; he was fully determined to employ none of his sovereign power as the supreme head of a universe to save himself.

182:3.8 (1969.3) The assembled hosts of a vast creation are now hovered over this scene under the transient joint command of Gabriel and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Jesus. The division commanders of these armies of heaven have repeatedly been warned not to interfere with these transactions on earth unless Jesus himself should order them to intervene.

182:3.9 (1969.4) The experience of parting with the apostles was a great strain on the human heart of Jesus; this sorrow of love bore down on him and made it more difficult to face such a death as he well knew awaited him. He realized how weak and how ignorant his apostles were, and he dreaded to leave them. He well knew that the time of his departure had come, but his human heart longed to find out whether there might not possibly be some legitimate avenue of escape from this terrible plight of suffering and sorrow. And when it had thus sought escape, and failed, it was willing to drink the cup. The divine mind of Michael knew he had done his best for the twelve apostles; but the human heart of Jesus wished that more might have been done for them before they should be left alone in the world. Jesus’ heart was being crushed; he truly loved his brethren. He was isolated from his family in the flesh; one of his chosen associates was betraying him. His father Joseph’s people had rejected him and thereby sealed their doom as a people with a special mission on earth. His soul was tortured by baffled love and rejected mercy. It was just one of those awful human moments when everything seems to bear down with crushing cruelty and terrible agony.

182:3.10 (1969.5) Jesus’ humanity was not insensible to this situation of private loneliness, public shame, and the appearance of the failure of his cause. All these sentiments bore down on him with indescribable heaviness. In this great sorrow his mind went back to the days of his childhood in Nazareth and to his early work in Galilee. At the time of this great trial there came up in his mind many of those pleasant scenes of his earthly ministry. And it was from these old memories of Nazareth, Capernaum, Mount Hermon, and of the sunrise and sunset on the shimmering Sea of Galilee, that he soothed himself as he made his human heart strong and ready to encounter the traitor who should so soon betray him.

182:3.11 (1970.1) Before Judas and the soldiers arrived, the Master had fully regained his customary poise; the spirit had triumphed over the flesh; faith had asserted itself over all human tendencies to fear or entertain doubt. The supreme test of the full realization of the human nature had been met and acceptably passed. Once more the Son of Man was prepared to face his enemies with equanimity and in the full assurance of his invincibility as a mortal man unreservedly dedicated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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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87 The Crucifixion 십자가에 못박힘

Paper 187

The Crucifixion 십자가에 못박힘

1. On the Way to Golgotha
“Daughters of Jerusalem, weep not for me…”
Simon from Cyrene
2. The Crucifixion
3. Those Who Saw the Crucifixion
4. The Thief on the Cross
Jesus’ charge to John
5. Last Hour on the Cross
6. After the Crucifixion

187:0.1 (2004.1) AFTER the two brigands had been made ready, the soldiers, under the direction of a centurion, started for the scene of the crucifixion. The centurion in charge of these twelve soldiers was the same captain who had led forth the Roman soldiers the previous night to arrest Jesus in Gethsemane. It was the Roman custom to assign four soldiers for each person to be crucified. The two brigands were properly scourged before they were taken out to be crucified, but Jesus was given no further physical punishment; the captain undoubtedly thought he had already been sufficiently scourged, even before his condemnation.

187:0.2 (2004.2) The two thieves crucified with Jesus were associates of Barabbas and would later have been put to death with their leader if he had not been released as the Passover pardon of Pilate. Jesus was thus crucified in the place of Barabbas.

187:0.3 (2004.3) What Jesus is now about to do, submit to death on the cross, he does of his own free will. In foretelling this experience, he said: “The Father loves and sustains me because I am willing to lay down my life. But I will take it up again. No one takes my life away from me — I lay it down of myself.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I have authority to take it up. I have received such a commandment from my Father.”

187:0.4 (2004.4) It was just before nine o’clock this morning when the soldiers led Jesus from the praetorium on the way to Golgotha. They were followed by many who secretly sympathized with Jesus, but most of this group of two hundred or more were either his enemies or curious idlers who merely desired to enjoy the shock of witnessing the crucifixions. Only a few of the Jewish leaders went out to see Jesus die on the cross. Knowing that he had been turned over to the Roman soldiers by Pilate, and that he was condemned to die, they busied themselves with their meeting in the temple, whereat they discussed what should be done with his followers.

1. On the Way to Golgotha

187:1.1 (2004.5) Before leaving the courtyard of the praetorium, the soldiers placed the crossbeam on Jesus’ shoulders. It was the custom to compel the condemned man to carry the crossbeam to the site of the crucifixion. Such a condemned man did not carry the whole cross, only this shorter timber. The longer and upright pieces of timber for the three crosses had already been transported to Golgotha and, by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soldiers and their prisoners, had been firmly implanted in the ground.

187:1.2 (2004.6) According to custom the captain led the procession, carrying small white boards on which had been written with charcoal the names of the criminals and the nature of the crimes for which they had been condemned. For the two thieves the centurion had notices which gave their names, underneath which was written the one word, “Brigand.” It was the custom, after the victim had been nailed to the crossbeam and hoisted to his place on the upright timber, to nail this notice to the top of the cross, just above the head of the criminal, that all witnesses might know for what crime the condemned man was being crucified. The legend which the centurion carried to put on the cross of Jesus had been written by Pilate himself in Latin, Greek, and Aramaic, and it read: “Jesus of Nazareth — the King of the Jews.”

187:1.3 (2005.1) Some of the Jewish authorities who were yet present when Pilate wrote this legend made vigorous protest against calling Jesus the “king of the Jews.” But Pilate reminded them that such an accusation was part of the charge which led to his condemnation. When the Jews saw they could not prevail upon Pilate to change his mind, they pleaded that at least it be modified to read, “He said, ‘I am the king of the Jews.’” But Pilate was adamant; he would not alter the writing. To all further supplication he only replied,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

187:1.4 (2005.2) Ordinarily, it was the custom to journey to Golgotha by the longest road in order that a large number of persons might view the condemned criminal, but on this day they went by the most direct route to the Damascus gate, which led out of the city to the north, and following this road, they soon arrived at Golgotha, the official crucifixion site of Jerusalem. Beyond Golgotha were the villas of the wealthy, and on the other side of the road were the tombs of many well-to-do Jews.

187:1.5 (2005.3) Crucifixion was not a Jewish mode of punishment. Both the Greeks and the Romans learned this method of execution from the Phoenicians. Even Herod, with all his cruelty, did not resort to crucifixion. The Romans never crucified a Roman citizen; only slaves and subject peoples were subjected to this dishonorable mode of death. During the siege of Jerusalem, just forty years after the crucifixion of Jesus, all of Golgotha was covered by thousands upon thousands of crosses upon which, from day to day, there perished the flower of the Jewish race. A terrible harvest, indeed, of the seed-sowing of this day.

187:1.6 (2005.4) As the death procession passed along the narrow streets of Jerusalem, many of the tenderhearted Jewish women who had heard Jesus’ words of good cheer and compassion, and who knew of his life of loving ministry, could not refrain from weeping when they saw him being led forth to such an ignoble death. As he passed by, many of these women bewailed and lamented. And when some of them even dared to follow along by his side, the Master turned his head toward them and said: “Daughters of Jerusalem, weep not for me, but rather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My work is about done — soon I go to my Father — but the times of terrible trouble for Jerusalem are just beginning. Behold, the days are coming in which you shall say: Blessed are the barren and those whose breasts have never suckled their young. In those days will you pray the rocks of the hills to fall on you in order that you may be delivered from the terrors of your troubles.”

187:1.7 (2005.5) These women of Jerusalem were indeed courageous to manifest sympathy for Jesus, for it was strictly against the law to show friendly feelings for one who was being led forth to crucifixion. It was permitted the rabble to jeer, mock, and ridicule the condemned, but it was not allowed that any sympathy should be expressed. Though Jesus appreciated the manifestation of sympathy in this dark hour when his friends were in hiding, he did not want these kindhearted women to incur the displeasure of the authorities by daring to show compassion in his behalf. Even at such a time as this Jesus thought little about himself, only of the terrible days of tragedy ahead for Jerusalem and the whole Jewish nation.

187:1.8 (2006.1) As the Master trudged along on the way to the crucifixion, he was very weary; he was nearly exhausted. He had had neither food nor water since the Last Supper at the home of Elijah Mark; neither had he been permitted to enjoy one moment of sleep. In addition, there had been one hearing right after another up to the hour of his condemnation, not to mention the abusive scourgings with their accompanying physical suffering and loss of blood. Superimposed upon all this was his extreme mental anguish, his acute spiritual tension, and a terrible feeling of human loneliness.

187:1.9 (2006.2) Shortly after passing through the gate on the way out of the city, as Jesus staggered on bearing the crossbeam, his physical strength momentarily gave way, and he fell beneath the weight of his heavy burden. The soldiers shouted at him and kicked him, but he could not arise. When the captain saw this, knowing what Jesus had already endured, he commanded the soldiers to desist. Then he ordered a passerby, one Simon from Cyrene, to take the crossbeam from Jesus’ shoulders and compelled him to carry it the rest of the way to Golgotha.

187:1.10 (2006.3) This man Simon had come all the way from Cyrene, in northern Africa, to attend the Passover. He was stopping with other Cyrenians just outside the city walls and was on his way to the temple services in the city when the Roman captain commanded him to carry Jesus’ crossbeam. Simon lingered all through the hours of the Master’s death on the cross, talking with many of his friends and with his enemi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before leaving Jerusalem, he became a valiant believer in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when he returned home, he led his family into the heavenly kingdom. His two sons, Alexander and Rufus, became very effective teachers of the new gospel in Africa. But Simon never knew that Jesus, whose burden he bore, and the Jewish tutor who once befriended his injured son, were the same person.

187:1.11 (2006.4) It was shortly after nine o’clock when this procession of death arrived at Golgotha, and the Roman soldiers set themselves about the task of nailing the two brigands and the Son of Man to their respective crosses.

2. The Crucifixion

187:2.1 (2006.5) The soldiers first bound the Master’s arms with cords to the crossbeam, and then they nailed his hands to the wood. When they had hoisted this crossbeam up on the post, and after they had nailed it securely to the upright timber of the cross, they bound and nailed his feet to the wood, using one long nail to penetrate both feet. The upright timber had a large peg, inserted at the proper height, which served as a sort of saddle for supporting the body weight. The cross was not high, the Master’s feet being only about three feet from the ground. He was therefore able to hear all that was said of him in derision and could plainly see the expression on the faces of all those who so thoughtlessly mocked him. And also could those present easily hear all that Jesus said during these hours of lingering torture and slow death.

187:2.2 (2007.1) It was the custom to remove all clothes from those who were to be crucified, but since the Jews greatly objected to the public exposure of the naked human form, the Romans always provided a suitable loin cloth for all persons crucified at Jerusalem. Accordingly, after Jesus’ clothes had been removed, he was thus garbed before he was put upon the cross.

187:2.3 (2007.2) Crucifixion was resorted to in order to provide a cruel and lingering punishment, the victim sometimes not dying for several days. There was considerable sentiment against crucifixion in Jerusalem, and there existed a society of Jewish women who always sent a representative to crucifixions for the purpose of offering drugged wine to the victim in order to lessen his suffering. But when Jesus tasted this narcotized wine, as thirsty as he was, he refused to drink it. The Master chose to retain his human consciousness until the very end. He desired to meet death, even in this cruel and inhuman form, and conquer it by voluntary submission to the full human experience.

187:2.4 (2007.3) Before Jesus was put on his cross, the two brigands had already been placed on their crosses, all the while cursing and spitting upon their executioners. Jesus’ only words, as they nailed him to the crossbeam, were,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He could not have so mercifully and lovingly interceded for his executioners if such thoughts of affectionate devotion had not been the mainspring of all his life of unselfish service. The ideas, motives, and longings of a lifetime are openly revealed in a crisis.

187:2.5 (2007.4) After the Master was hoisted on the cross, the captain nailed the title up above his head, and it read in three languages, “Jesus of Nazareth — the King of the Jews.” The Jews were infuriated by this believed insult. But Pilate was chafed by their disrespectful manner; he felt he had been intimidated and humiliated, and he took this method of obtaining petty revenge. He could have written “Jesus, a rebel.” But he well knew how these Jerusalem Jews detested the very name of Nazareth, and he was determined thus to humiliate them. He knew that they would also be cut to the very quick by seeing this executed Galilean called “The King of the Jews.”

187:2.6 (2007.5) Many of the Jewish leaders, when they learned how Pilate had sought to deride them by placing this inscription on the cross of Jesus, hastened out to Golgotha, but they dared not attempt to remove it since the Roman soldiers were standing on guard. Not being able to remove the title, these leaders mingled with the crowd and did their utmost to incite derision and ridicule, lest any give serious regard to the inscription.

187:2.7 (2007.6) The Apostle John, with Mary the mother of Jesus, Ruth, and Jude, arrived on the scene just after Jesus had been hoisted to his position on the cross, and just as the captain was nailing the title above the Master’s head. John was the only one of the eleven apostles to witness the crucifixion, and even he was not present all of the time since he ran into Jerusalem to bring back his mother and her friends soon after he had brought Jesus’ mother to the scene.

187:2.8 (2007.7) As Jesus saw his mother, with John and his brother and sister, he smiled but said nothing. Meanwhile the four soldiers assigned to the Master’s crucifixion, as was the custom, had divided his clothes among them, one taking the sandals, one the turban, one the girdle, and the fourth the cloak. This left the tunic, or seamless vestment reaching down to near the knees, to be cut up into four pieces, but when the soldiers saw what an unusual garment it was, they decided to cast lots for it. Jesus looked down on them while they divided his garments, and the thoughtless crowd jeered at him.

187:2.9 (2008.1) It was well that the Roman soldiers took possession of the Master’s clothing. Otherwise, if his followers had gained possession of these garments, they would have been tempted to resort to superstitious relic worship. The Master desired that his followers should have nothing material to associate with his life on earth. He wanted to leave mankind only the memory of a human life dedicated to the high spiritual ideal of being consecrated to doing the Father’s will.

3. Those Who Saw the Crucifixion

187:3.1 (2008.2) At about half past nine o’clock this Friday morning, Jesus was hung upon the cross. Before eleven o’clock, upward of one thousand persons had assembled to witness this spectacle of the crucifixion of the Son of Man. Throughout these dreadful hours the unseen hosts of a universe stood in silence while they gazed upon this extraordinary phenomenon of the Creator as he was dying the death of the creature, even the most ignoble death of a condemned criminal.

187:3.2 (2008.3) Standing near the cross at one time or another during the crucifixion were Mary, Ruth, Jude, John, Salome (John’s mother), and a group of earnest women believers including Mary the wife of Clopas and sister of Jesus’ mother, Mary Magdalene, and Rebecca, onetime of Sepphoris. These and other friends of Jesus held their peace while they witnessed his great patience and fortitude and gazed upon his intense sufferings.

187:3.3 (2008.4) Many who passed by wagged their heads and, railing at him, said: “You who would destroy the temple and build it again in three days, save yourself. If you are the Son of God, why do you not come down from your cross?” In like manner some of the rulers of the Jews mocked him, saying, “He saved others, but himself he cannot save.” Others said, “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we will believe in you.” And later on they mocked him the more, saying: “He trusted in God to deliver him. He even claimed to be the Son of God — look at him now — crucified between two thieves.” Even the two thieves also railed at him and cast reproach upon him.

187:3.4 (2008.5) Inasmuch as Jesus would make no reply to their taunts, and since it was nearing noontime of this special preparation day, by half past eleven o’clock most of the jesting and jeering crowd had gone its way; less than fifty persons remained on the scene. The soldiers now prepared to eat lunch and drink their cheap, sour wine as they settled down for the long deathwatch. As they partook of their wine, they derisively offered a toast to Jesus, saying, “Hail and good fortune! to the king of the Jews.” And they were astonished at the Master’s tolerant regard of their ridicule and mocking.

187:3.5 (2008.6) When Jesus saw them eat and drink, he looked down upon them and said, “I thirst.” When the captain of the guard heard Jesus say, “I thirst,” he took some of the wine from his bottle and, putting the saturated sponge stopper upon the end of a javelin, raised it to Jesus so that he could moisten his parched lips.

187:3.6 (2008.7) Jesus had purposed to live without resort to his supernatural power, and he likewise elected to die as an ordinary mortal upon the cross. He had lived as a man, and he would die as a man — doing the Father’s will.

4. The Thief on the Cross

187:4.1 (2008.8) One of the brigands railed at Jesus, saying, “If you are the Son of God, why do you not save yourself and us?” But when he had reproached Jesus, the other thief, who had many times heard the Master teach, said: “Do you have no fear even of God? Do you not see that we are suffering justly for our deeds, but that this man suffers unjustly? Better that we should seek forgiveness for our sins and salvation for our souls.” When Jesus heard the thief say this, he turned his face toward him and smiled approvingly. When the malefactor saw the face of Jesus turned toward him, he mustered up his courage, fanned the flickering flame of his faith, and said, “Lord,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And then Jesus said, “Verily, veri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sometime be with me in Paradise.”

187:4.2 (2009.1) The Master had time amidst the pangs of mortal death to listen to the faith confession of the believing brigand. When this thief reached out for salvation, he found deliverance. Many times before this he had been constrained to believe in Jesus, but only in these last hours of consciousness did he turn with a whole heart toward the Master’s teaching. When he saw the manner in which Jesus faced death upon the cross, this thief could no longer resist the conviction that this Son of Man was indeed the Son of God.

187:4.3 (2009.2) During this episode of the conversion and reception of the thief into the kingdom by Jesus, the Apostle John was absent, having gone into the city to bring his mother and her friends to the scene of the crucifixion. Luke subsequently heard this story from the converted Roman captain of the guard.

187:4.4 (2009.3) The Apostle John told about the crucifixion as he remembered the event two thirds of a century after its occurrence. The other records were based upon the recital of the Roman centurion on duty who, because of what he saw and heard, subsequently believed in Jesus and entered into the full fellowship of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187:4.5 (2009.4) This young man, the penitent brigand, had been led into a life of violence and wrongdoing by those who extolled such a career of robbery as an effective patriotic protest against political oppression and social injustice. And this sort of teaching, plus the urge for adventure, led many otherwise well-meaning youths to enlist in these daring expeditions of robbery. This young man had looked upon Barabbas as a hero. Now he saw that he had been mistaken. Here on the cross beside him he saw a really great man, a true hero. Here was a hero who fired his zeal and inspired his highest ideas of moral self-respect and quickened all his ideals of courage, manhood, and bravery. In beholding Jesus, there sprang up in his heart an overwhelming sense of love, loyalty, and genuine greatness.

187:4.6 (2009.5) And if any other person among the jeering crowd had experienced the birth of faith within his soul and had appealed to the mercy of Jesus, he would have been received with the same loving consideration that was displayed toward the believing brigand.

187:4.7 (2009.6) Just after the repentant thief heard the Master’s promise that they should sometime meet in Paradise, John returned from the city, bringing with him his mother and a company of almost a dozen women believers. John took up his position near Mary the mother of Jesus, supporting her. Her son Jude stood on the other side. As Jesus looked down upon this scene, it was noontide, and he said to his mother, “Woman, behold your son!” And speaking to John, he said, “My son, behold your mother!” And then he addressed them both, saying, “I desire that you depart from this place.” And so John and Jude led Mary away from Golgotha. John took the mother of Jesus to the place where he tarried in Jerusalem and then hastened back to the scene of the crucifixion. After the Passover Mary returned to Bethsaida, where she lived at John’s home for the rest of her natural life. Mary did not live quite one year after the death of Jesus.

187:4.8 (2010.1) After Mary left, the other women withdrew for a short distance and remained in attendance upon Jesus until he expired on the cross, and they were yet standing by when the body of the Master was taken down for burial.

5. Last Hour on the Cross

187:5.1 (2010.2) Although it was early in the season for such a phenomenon, shortly after twelve o’clock the sky darkened by reason of the fine sand in the air. The people of Jerusalem knew that this meant the coming of one of those hot-wind sandstorms from the Arabian desert. Before one o’clock the sky was so dark the sun was hid, and the remainder of the crowd hastened back to the city. When the Master gave up his life shortly after this hour, less than thirty people were present, only the thirteen Roman soldiers and a group of about fifteen believers. These believers were all women except two, Jude, Jesus’ brother, and John Zebedee, who returned to the scene just before the Master expired.

187:5.2 (2010.3) Shortly after one o’clock, amidst the increasing darkness of the fierce sandstorm, Jesus began to fail in human consciousness. His last words of mercy, forgiveness, and admonition had been spoken. His last wish — concerning the care of his mother — had been expressed. During this hour of approaching death the human mind of Jesus resorted to the repetition of many passages in the Hebrew scriptures, particularly the Psalms. The last conscious thought of the human Jesus was concerned with the repetition in his mind of a portion of the Book of Psalms now known as the twentieth, twenty-first, and twenty-second Psalms. While his lips would often move, he was too weak to utter the words as these passages, which he so well knew by heart, would pass through his mind. Only a few times did those standing by catch some utterance, such as, “I know the Lord will save his anointed,” “Your hand shall find out all my enemies,” and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Jesus did not for one moment entertain the slightest doubt that he had lived in accordance with the Father’s will; and he never doubted that he was now laying down his life in the flesh in accordance with his Father’s will. He did not feel that the Father had forsaken him; he was merely reciting in his vanishing consciousness many Scriptures, among them this twenty-second Psalm, which begins with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And this happened to be one of the three passages which were spoken with sufficient clearness to be heard by those standing by.

187:5.3 (2010.4) The last request which the mortal Jesus made of his fellows was about half past one o’clock when, a second time, he said, “I thirst,” and the same captain of the guard again moistened his lips with the same sponge wet in the sour wine, in those days commonly called vinegar.

187:5.4 (2010.5) The sandstorm grew in intensity and the heavens increasingly darkened. Still the soldiers and the small group of believers stood by. The soldiers crouched near the cross, huddled together to protect themselves from the cutting sand. The mother of John and others watched from a distance where they were somewhat sheltered by an overhanging rock. When the Master finally breathed his last, there were present at the foot of his cross John Zebedee, his brother Jude, his sister Ruth, Mary Magdalene, and Rebecca, onetime of Sepphoris.

187:5.5 (2011.1) It was just before three o’clock when Jesus, with a loud voice, cried out, “It is finished!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And when he had thus spoken, he bowed his head and gave up the life struggle. When the Roman centurion saw how Jesus died, he smote his breast and said: “This was indeed a righteous man; truly he must have been a Son of God.” And from that hour he began to believe in Jesus.

187:5.6 (2011.2) Jesus died royally — as he had lived. He freely admitted his kingship and remained master of the situation throughout the tragic day. He went willingly to his ignominious death, after he had provided for the safety of his chosen apostles. He wisely restrained Peter’s trouble-making violence and provided that John might be near him right up to the end of his mortal existence. He revealed his true nature to the murderous Sanhedrin and reminded Pilate of the source of his sovereign authority as a Son of God. He started out to Golgotha bearing his own crossbeam and finished up his loving bestowal by handing over his spirit of mortal acquirement to the Paradise Father. After such a life — and at such a death — the Master could truly say, “It is finished.”

187:5.7 (2011.3) Because this was the preparation day for both the Passover and the Sabbath, the Jews did not want these bodies to be exposed on Golgotha. Therefore they went before Pilate asking that the legs of these three men be broken, that they be dispatched, so that they could be taken down from their crosses and cast into the criminal burial pits before sundown. When Pilate heard this request, he forthwith sent three soldiers to break the legs and dispatch Jesus and the two brigands.

187:5.8 (2011.4) When these soldiers arrived at Golgotha, they did accordingly to the two thieves, but they found Jesus already dead, much to their surprise. However, in order to make sure of his death, one of the soldiers pierced his left side with his spear. Though it was common for the victims of crucifixion to linger alive upon the cross for even two or three days, the overwhelming emotional agony and the acute spiritual anguish of Jesus brought an end to his mortal life in the flesh in a little less than five and one-half hours.

6. After the Crucifixion

187:6.1 (2011.5) In the midst of the darkness of the sandstorm, about half past three o’clock, David Zebedee sent out the last of the messengers carrying the news of the Master’s death. The last of his runners he dispatched to the home of Martha and Mary in Bethany, where he supposed the mother of Jesus stopped with the rest of her family.

187:6.2 (2011.6) After the death of the Master, John sent the women, in charge of Jude, to the home of Elijah Mark, where they tarried over the Sabbath day. John himself, being well known by this time to the Roman centurion, remained at Golgotha until Joseph and Nicodemus arrived on the scene with an order from Pilate authorizing them to take possession of the body of Jesus.

187:6.3 (2011.7) Thus ended a day of tragedy and sorrow for a vast universe whose myriads of intelligences had shuddered at the shocking spectacle of the crucifixion of the human incarnation of their beloved Sovereign; they were stunned by this exhibition of mortal callousness and human per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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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88 The Time of the Tomb 무덤에 있던 시간

Paper 188

The Time of the Tomb 무덤에 있던 시간

Joseph and Nicodemus before Pilate
1. The Burial of Jesus
2. Safeguarding the Tomb
3. During the Sabbath Day
What did Jesus commend to the Father’s hands?
Status of the personality of Jesus
4. Meaning of the Death on the Cross
5. Lessons from the Cross

188:0.1 (2012.1) THE day and a half that Jesus’ mortal body lay in the tomb of Joseph, the period between his death on the cross and his resurrection, is a chapter in the earth career of Michael which is little known to us. We can narrate the burial of the Son of Man and put in this record the events associated with his resurrection, but we cannot supply much information of an authentic nature about what really transpired during this epoch of about thirty-six hours, from three o’clock Friday afternoon to three o’clock Sunday morning. This period in the Master’s career began shortly before he was taken down from the cross by the Roman soldiers. He hung upon the cross about one hour after his death. He would have been taken down sooner but for the delay in dispatching the two brigands.

188:0.2 (2012.2) The rulers of the Jews had planned to have Jesus’ body thrown in the open burial pits of Gehenna, south of the city; it was the custom thus to dispose of the victims of crucifixion. If this plan had been followed, the body of the Master would have been exposed to the wild beasts.

188:0.3 (2012.3) In the meantime, Joseph of Arimathea, accompanied by Nicodemus, had gone to Pilate and asked that the body of Jesus be turned over to them for proper burial. It was not uncommon for friends of crucified persons to offer bribes to the Roman authorities for the privilege of gaining possession of such bodies. Joseph went before Pilate with a large sum of money, in case it became necessary to pay for permission to remove Jesus’ body to a private burial tomb. But Pilate would not take money for this. When he heard the request, he quickly signed the order which authorized Joseph to proceed to Golgotha and take immediate and full possession of the Master’s body. In the meantime, the sandstorm having considerably abated, a group of Jews representing the Sanhedrin had gone out to Golgotha for the purpose of making sure that Jesus’ body accompanied those of the brigands to the open public burial pits.

1. The Burial of Jesus

188:1.1 (2012.4) When Joseph and Nicodemus arrived at Golgotha, they found the soldiers taking Jesus down from the cross and the representatives of the Sanhedrin standing by to see that none of Jesus’ followers prevented his body from going to the criminal burial pits. When Joseph presented Pilate’s order for the Master’s body to the centurion, the Jews raised a tumult and clamored for its possession. In their raving they sought violently to take possession of the body, and when they did this, the centurion ordered four of his soldiers to his side, and with drawn swords they stood astride the Master’s body as it lay there on the ground. The centurion ordered the other soldiers to leave the two thieves while they drove back this angry mob of infuriated Jews. When order had been restored, the centurion read the permit from Pilate to the Jews and, stepping aside, said to Joseph: “This body is yours to do with as you see fit. I and my soldiers will stand by to see that no man interferes.”

188:1.2 (2013.1) A crucified person could not be buried in a Jewish cemetery; there was a strict law against such a procedure. Joseph and Nicodemus knew this law, and on the way out to Golgotha they had decided to bury Jesus in Joseph’s new family tomb, hewn out of solid rock, located a short distance north of Golgotha and across the road leading to Samaria. No one had ever lain in this tomb, and they thought it appropriate that the Master should rest there. Joseph really believed that Jesus would rise from the dead, but Nicodemus was very doubtful. These former members of the Sanhedrin had kept their faith in Jesus more or less of a secret, although their fellow Sanhedrists had long suspected them, even before they withdrew from the council. From now on they were the most outspoken disciples of Jesus in all Jerusalem.

188:1.3 (2013.2) At about half past four o’clock the burial procession of Jesus of Nazareth started from Golgotha for Joseph’s tomb across the way. The body was wrapped in a linen sheet as the four men carried it, followed by the faithful women watchers from Galilee. The mortals who bore the material body of Jesus to the tomb were: Joseph, Nicodemus, John, and the Roman centurion.

188:1.4 (2013.3) They carried the body into the tomb, a chamber about ten feet square, where they hurriedly prepared it for burial. The Jews did not really bury their dead; they actually embalmed them. Joseph and Nicodemus had brought with them large quantities of myrrh and aloes, and they now wrapped the body with bandages saturated with these solutions. When the embalming was completed, they tied a napkin about the face, wrapped the body in a linen sheet, and reverently placed it on a shelf in the tomb.

188:1.5 (2013.4) After placing the body in the tomb, the centurion signaled for his soldiers to help roll the doorstone up before the entrance to the tomb. The soldiers then departed for Gehenna with the bodies of the thieves while the others returned to Jerusalem, in sorrow, to observe the Passover feast according to the laws of Moses.

188:1.6 (2013.5) There was considerable hurry and haste about the burial of Jesus because this was preparation day and the Sabbath was drawing on apace. The men hurried back to the city, but the women lingered near the tomb until it was very dark.

188:1.7 (2013.6) While all this was going on, the women were hiding near at hand so that they saw it all and observed where the Master had been laid. They thus secreted themselves because it was not permissible for women to associate with men at such a time. These women did not think Jesus had been properly prepared for burial, and they agreed among themselves to go back to the home of Joseph, rest over the Sabbath, make ready spices and ointments, and return on Sunday morning properly to prepare the Master’s body for the death rest. The women who thus tarried by the tomb on this Friday evening were: Mary Magdalene, Mary the wife of Clopas, Martha another sister of Jesus’ mother, and Rebecca of Sepphoris.

188:1.8 (2013.7) Aside from David Zebedee and Joseph of Arimathea, very few of Jesus’ disciples really believed or understood that he was due to arise from the tomb on the third day.

2. Safeguarding the Tomb

188:2.1 (2014.1) If Jesus’ followers were unmindful of his promise to rise from the grave on the third day, his enemies were not. The chief priests, Pharisees, and Sadducees recalled that they had received reports of his saying he would rise from the dead.

188:2.2 (2014.2) This Friday night, after the Passover supper, about midnight a group of the Jewish leaders gathered at the home of Caiaphas, where they discussed their fears concerning the Master’s assertions that he would rise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This meeting ended with the appointment of a committee of Sanhedrists who were to visit Pilate early the next day, bearing the official request of the Sanhedrin that a Roman guard be stationed before Jesus’ tomb to prevent his friends from tampering with it. Said the spokesman of this committee to Pilate: “Sir, we remember that this deceiver, Jesus of Nazareth, said, while he was yet alive, ‘After three days I will rise again.’ We have, therefore, come before you to request that you issue such orders as will make the sepulchre secure against his followers, at least until after the third day. We greatly fear lest his disciples come and steal him away by night and then proclaim to the people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If we should permit this to happen, this mistake would be far worse than to have allowed him to live.”

188:2.3 (2014.3) When Pilate heard this request of the Sanhedrists, he said: “I will give you a guard of ten soldiers. Go your way and make the tomb secure.” They went back to the temple, secured ten of their own guards, and then marched out to Joseph’s tomb with these ten Jewish guards and ten Roman soldiers, even on this Sabbath morning, to set them as watchmen before the tomb. These men rolled yet another stone before the tomb and set the seal of Pilate on and around these stones, lest they be disturbed without their knowledge. And these twenty men remained on watch up to the hour of the resurrection, the Jews carrying them their food and drink.

3. During the Sabbath Day

188:3.1 (2014.4) Throughout this Sabbath day the disciples and the apostles remained in hiding, while all Jerusalem discussed the death of Jesus on the cross. There were almost one and one-half million Jews present in Jerusalem at this time, hailing from all parts of the Roman Empire and from Mesopotamia.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Passover week, and all these pilgrims would be in the city to learn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to carry the report back to their homes.

188:3.2 (2014.5) Late Saturday night, John Mark summoned the eleven apostles secretly to come to the home of his father, where, just before midnight, they all assembled in the same upper chamber where they had partaken of the Last Supper with their Master two nights previously.

188:3.3 (2014.6) Mary the mother of Jesus, with Ruth and Jude, returned to Bethany to join their family this Saturday evening just before sunset. David Zebedee remained at the home of Nicodemus, where he had arranged for his messengers to assemble early Sunday morning. The women of Galilee, who prepared spices for the further embalming of Jesus’ body, tarried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188:3.4 (2014.7) We are not able fully to explain just what happened to Jesus of Nazareth during this period of a day and a half when he was supposed to be resting in Joseph’s new tomb. Apparently he died the same natural death on the cross as would any other mortal in the same circumstances. We heard him say,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We do not fully understand the meaning of such a statement inasmuch as his Thought Adjuster had long since been personalized and so maintained an existence apart from Jesus’ mortal being. The Master’s Personalized Adjuster could in no sense be affected by his physical death on the cross. That which Jesus put in the Father’s hands for the time being must have been the spirit counterpart of the Adjuster’s early work in spiritizing the mortal mind so as to provide for the transfer of the transcript of the human experience to the mansion worlds. There must have been some spiritual reality in the experience of Jesus which was analogous to the spirit nature, or soul, of the faith-growing mortals of the spheres. But this is merely our opinion — we do not really know what Jesus commended to his Father.

188:3.5 (2015.1) We know that the physical form of the Master rested there in Joseph’s tomb until about three o’clock Sunday morning, but we are wholly uncertain regarding the status of the personality of Jesus during that period of thirty-six hours. We have sometimes dared to explain these things to ourselves somewhat as follows:

188:3.6 (2015.2) 1. The Creator consciousness of Michael must have been at large and wholly free from its associated mortal mind of the physical incarnation.

188:3.7 (2015.3) 2. The former Thought Adjuster of Jesus we know to have been present on earth during this period and in personal command of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188:3.8 (2015.4) 3. The acquired spirit identity of the man of Nazareth which was built up during his lifetime in the flesh, first, by the direct efforts of his Thought Adjuster, and later, by his own perfect adjustment between the physical necessities and the spiritual requirements of the ideal mortal existence, as it was effected by his never-ceasing choice of the Father’s will, must have been consigned to the custody of the Paradise Father. Whether or not this spirit reality returned to become a part of the resurrected personality, we do not know, but we believe it did. But there are those in the universe who hold that this soul-identity of Jesus now reposes in the “bosom of the Father,” to be subsequently released for leadership of the Nebadon Corps of the Finality in their undisclosed destiny in connection with the uncreated universes of the unorganized realms of outer space.

188:3.9 (2015.5) 4. We think the human or mortal consciousness of Jesus slept during these thirty-six hours. We have reason to believe that the human Jesus knew nothing of what transpired in the universe during this period. To the mortal consciousness there appeared no lapse of time; the resurrection of life followed the sleep of death as of the same instant.

188:3.10 (2015.6) And this is about all we can place on record regarding the status of Jesus during this period of the tomb. There are a number of correlated facts to which we can allude, although we are hardly competent to undertake their interpretation.

188:3.11 (2015.7) In the vast court of the resurrection halls of the first mansion world of Satania, there may now be observed a magnificent material-morontia structure known as the “Michael Memorial,” now bearing the seal of Gabriel. This memorial was created shortly after Michael departed from this world, and it bears this inscription: “In commemoration of the mortal transit of Jesus of Nazareth on Urantia.”

188:3.12 (2016.1) There are records extant which show that during this period the supreme council of Salvington, numbering one hundred, held an executive meeting on Urantia under the presidency of Gabriel. There are also records showing that the Ancients of Days of Uversa communicated with Michael regarding the status of the universe of Nebadon during this time.

188:3.13 (2016.2) We know that at least one message passed between Michael and Immanuel on Salvington while the Master’s body lay in the tomb.

188:3.14 (2016.3) There is good reason for believing that some personality sat in the seat of Caligastia in the system council of the Planetary Princes on Jerusem which convened while the body of Jesus rested in the tomb.

188:3.15 (2016.4) The records of Edentia indicate that the Constellation Father of Norlatiadek was on Urantia, and that he received instructions from Michael during this time of the tomb.

188:3.16 (2016.5) And there is much other evidence which suggests that not all of the personality of Jesus was asleep and unconscious during this time of apparent physical death.

4. Meaning of the Death on the Cross 십자가 죽음의 의미

190414 십자가 죽음의 의미(1) 요19:17-18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7 And he bearing his cross went forth into a place called the place of a skull, which is called in the Hebrew Golgotha: 18 Where they crucified him, and two other with him, on either side one, and Jesus in the midst.

188:4.1 (2016.6) Although Jesus did not die this death on the cross to atone for the racial guilt of mortal man nor to provide some sort of effective approach to an otherwise offended and unforgiving God; even though the Son of Man did not offer himself as a sacrifice to appease the wrath of God and to open the way for sinful man to obtain salvation; notwithstanding that these ideas of atonement and propitiation are erroneous, nonetheless, there are significances attached to this death of Jesus on the cross which should not be overlooked. It is a fact that Urantia has become known among other neighboring inhabited planets as the “World of the Cross.” 예수님은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사람의 인종적 죄를 속죄하거나, 달리 분노로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효과적인 접근법을 마련하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지 않으셨습니다. 인자(人子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죄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을 여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속죄(贖罪)와 화해(和解)의 이런 관념들이 잘못이지만,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구(유란시아)는 다른 이웃 거주 행성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세계”로 알려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188:4.2 (2016.7) Jesus desired to live a full mortal life in the flesh on Urantia. Death is, ordinarily, a part of life. Death is the last act in the mortal drama. In your well-meant efforts to escape the superstitious errors of the false 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of the death on the cross, you should be careful not to make the great mistake of failing to perceive the true significance and the genuine import of the Master’s death. 예수님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육신으로 충실히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인생을 사시려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은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인간 드라마의 마지막 장(場)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거짓되게 해석하는 미신적 실수들을 피하려고 너희가 선의(善意좋은 마음)로 애쓰면서, 주(主)님의 죽음에 대한 참된 의미와 진정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188:4.3 (2016.8) Mortal man was never the property of the archdeceivers. Jesus did not die to ransom man from the clutch of the apostate rulers and fallen princes of the spheres. The Father in heaven never conceived of such crass injustice as damning a mortal soul because of the evil-doing of his ancestors. Neither was the Master’s death on the cross a sacrifice which consisted in an effort to pay God a debt which the race of mankind had come to owe him.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사람은 대형 사기꾼들의 소유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들의 변절(變節배반)한 통치자들과 타락한 왕자들의 마수(魔手검은 손)에서 몸값을 치르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죽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들의 악행 때문에 필사 인간의 혼을 파멸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지독히 부당한 처사를 고안하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서 주(主)님의 죽으심은 인류가 하나님께 갚아야 될 빚을 지불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희생물도 아니었습니다.

188:4.4 (2016.9) Before Jesus lived on earth, you might possibly have been justified in believing in such a God, but not since the Master lived and died among your fellow mortals. Moses taught the dignity and justice of a Creator God; but Jesus portrayed the love and mercy of a heavenly Father. 예수께서 지상에 사시기 전에는, 너희가 그런 하나님을 믿어도 아마 옳다고 했겠지만, 주(主)께서 너희 동료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창조자 하나님의 위엄과 정의(正義)를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188:4.5 (2016.10) The animal nature — the tendency toward evil-doing — may be hereditary, but sin is not transmitted from parent to child. Sin is the act of conscious and deliberate rebellion against the Father’s will and the Sons’ laws by an individual will creature. 동물적 본성 – 악을 행하려는 경향 –은 유전될 수도 있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죄는, 개인적 의지를 지닌 창조물이 아버지의 뜻과 아들들의 법들을 반대하는 의식적 행동이며, 의도적인 반항입니다.

188:4.6 (2017.1) Jesus lived and died for a whole universe, not just for the races of this one world. While the mortals of the realms had salvation even before Jesus lived and died on Urantia, it is nevertheless a fact that his bestowal on this world greatly illuminated the way of salvation; his death did much to make forever plain the certainty of mortal survival after death in the flesh. 예수님은 여기 한 세계의 인류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위해 사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여러 영역들의 필사자들은 구원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자신을 증여하셔서 구원의 길이 엄청나게 밝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필사(必死) 인간이 육체로 죽은 후에 생존한다는 확실성이 영원히 분명해졌습니다.

188:4.7 (2017.2) Though it is hardly proper to speak of Jesus as a sacrificer, a ransomer, or a redeemer, it is wholly correct to refer to him as a savior. He forever made the way of salvation (survival) more clear and certain; he did better and more surely show the way of salvation for all the mortals of all the worlds of the universe of Nebadon. 예수님을 희생(犧牲제물이 된)자, 속죄(贖罪몸값을 치러 자유롭게 하는)자, 또는 구속(救贖죄에서 다시 찾는)자로 말하는 것은 거의 적절하지 않지만, 그를 구원(救援죽음에서 건져낸)자로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남는) 구원의 길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했습니다. 그는 네바돈 우주의 모든 세계들에 속한 모든 필사(必死)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더 낫고 확실하게 보이셨습니다.

188:4.8 (2017.3) When once you grasp the idea of God as a true and loving Father, the only concept which Jesus ever taught, you must forthwith, in all consistency, utterly abandon all those primitive notions about God as an offended monarch, a stern and all-powerful ruler whose chief delight is to detect his subjects in wrongdoing and to see that they are adequately punished, unless some being almost equal to himself should volunteer to suffer for them, to die as a substitute and in their stead. The whole idea of ransom and atonement is incompatible with the concept of God as it was taught and exemplified by Jesus of Nazareth. The infinite love of God is not secondary to anything in the divine nature.

188:4.9 (2017.4) All this concept of atonement and sacrificial salvation is rooted and grounded in selfishness. Jesus taught that service to one’s fellows is the highest concept of the brotherhood of spirit believers. Salvation should be taken for granted by those who believe in the fatherhood of God. The believer’s chief concern should not be the selfish desire for personal salvation but rather the unselfish urge to love and, therefore, serve one’s fellows even as Jesus loved and served mortal men.

188:4.10 (2017.5) Neither do genuine believers trouble themselves so much about the future punishment of sin. The real believer is only concerned about present separation from God. True, wise fathers may chasten their sons, but they do all this in love and for corrective purposes. They do not punish in anger, neither do they chastise in retribution.

188:4.11 (2017.6) Even if God were the stern and legal monarch of a universe in which justice ruled supreme, he certainly would not be satisfied with the childish scheme of substituting an innocent sufferer for a guilty offender.

188:4.12 (2017.7) The great thing about the death of Jesus, as it is related to the enrichment of human experience and the enlargement of the way of salvation, is not the fact of his death but rather the superb manner and the matchless spirit in which he met death.

188:4.13 (2017.8) This entire idea of the ransom of the atonement places salvation upon a plane of unreality; such a concept is purely philosophic. Human salvation is real; it is based on two realities which may be grasped by the creature’s faith and thereby become incorporated into individual human experience: the fact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its correlated truth, the brotherhood of man. It is true, after all, that you are to be “forgiven your debts, even as you forgive your debtors.”

5. Lessons from the Cross

188:5.1 (2017.9) The cross of Jesus portrays the full measure of the supreme devotion of the true shepherd for even the unworthy members of his flock. It forever places all relations between God and man upon the family basis. God is the Father; man is his son. Love, the love of a father for his son, becomes the central truth in the universe relations of Creator and creature — not the justice of a king which seeks satisfaction in the sufferings and punishment of the evil-doing subject.

188:5.2 (2018.1) The cross forever shows that the attitude of Jesus toward sinners was neither condemnation nor condonation, but rather eternal and loving salvation. Jesus is truly a savior in the sense that his life and death do win men over to goodness and righteous survival. Jesus loves men so much that his love awakens the response of love in the human heart. Love is truly contagious and eternally creative. Jesus’ death on the cross exemplifies a love which is sufficiently strong and divine to forgive sin and swallow up all evil-doing. Jesus disclosed to this world a higher quality of righteousness than justice — mere technical right and wrong. Divine love does not merely forgive wrongs; it absorbs and actually destroys them. The forgiveness of love utterly transcends the forgiveness of mercy. Mercy sets the guilt of evil-doing to one side; but love destroys forever the sin and all weakness resulting therefrom. Jesus brought a new method of living to Urantia. He taught us not to resist evil but to find through him a goodness which effectually destroys evil. The forgiveness of Jesus is not condonation; it is salvation from condemnation. Salvation does not slight wrongs; it makes them right. True love does not compromise nor condone hate; it destroys it. The love of Jesus is never satisfied with mere forgiveness. The Master’s love implies rehabilitation, eternal survival. It is altogether proper to speak of salvation as redemption if you mean this eternal rehabilitation.

188:5.3 (2018.2) Jesus, by the power of his personal love for men, could break the hold of sin and evil. He thereby set men free to choose better ways of living. Jesus portrayed a deliverance from the past which in itself promised a triumph for the future. Forgiveness thus provided salvation. The beauty of divine love, once fully admitted to the human heart, forever destroys the charm of sin and the power of evil.

188:5.4 (2018.3) The sufferings of Jesus were not confined to the crucifixion. In reality, Jesus of Nazareth spent upward of twenty-five years on the cross of a real and intense mortal existence. The real value of the cross consists in the fact that it was the supreme and final expression of his love, the completed revelation of his mercy.

188:5.5 (2018.4) On millions of inhabited worlds, tens of trillions of evolving creatures who may have been tempted to give up the moral struggle and abandon the good fight of faith, have taken one more look at Jesus on the cross and then have forged on ahead, inspired by the sight of God’s laying down his incarnate life in devotion to the unselfish service of man.

188:5.6 (2018.5) The triumph of the death on the cross is all summed up in the spirit of Jesus’ attitude toward those who assailed him. He made the cross an eternal symbol of the triumph of love over hate and the victory of truth over evil when he praye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That devotion of love was contagious throughout a vast universe; the disciples caught it from their Master. The very first teacher of his gospel who was called upon to lay down his life in this service, said, as they stoned him to death, “Lay not this sin to their charge.”

188:5.7 (2018.6) The cross makes a supreme appeal to the best in man because it discloses one who was willing to lay down his life in the service of his fellow men. Greater love no man can have than this: that he would be willing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 and Jesus had such a love that he was willing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enemies, a love greater than any which had hitherto been known on earth.

188:5.8 (2019.1) On other worlds, as well as on Urantia, this sublime spectacle of the death of the human Jesus on the cross of Golgotha has stirred the emotions of mortals, while it has aroused the highest devotion of the angels.

188:5.9 (2019.2) The cross is that high symbol of sacred service, the devotion of one’s life to the welfare and salvation of one’s fellows. The cross is not the symbol of the sacrifice of the innocent Son of God in the place of guilty sinners and in order to appease the wrath of an offended God, but it does stand forever, on earth and throughout a vast universe, as a sacred symbol of the good bestowing themselves upon the evil and thereby saving them by this very devotion of love. The cross does stand as the token of the highest form of unselfish service, the supreme devotion of the full bestowal of a righteous life in the service of wholehearted ministry, even in death, the death of the cross. And the very sight of this great symbol of the bestowal life of Jesus truly inspires all of us to want to go and do likewise.

188:5.10 (2019.3) When thinking men and women look upon Jesus as he offers up his life on the cross, they will hardly again permit themselves to complain at even the severest hardships of life, much less at petty harassments and their many purely fictitious grievances. His life was so glorious and his death so triumphant that we are all enticed to a willingness to share both. There is true drawing power in the whole bestowal of Michael, from the days of his youth to this overwhelming spectacle of his death on the cross.

188:5.11 (2019.4) Make sure, then, that when you view the cross as a revelation of God, you do not look with the eyes of the primitive man nor with the viewpoint of the later barbarian, both of whom regarded God as a relentless Sovereign of stern justice and rigid law-enforcement. Rather, make sure that you see in the cross the final manifestation of the love and devotion of Jesus to his life mission of bestowal upon the mortal races of his vast universe. See in the death of the Son of Man the climax of the unfolding of the Father’s divine love for his sons of the mortal spheres. The cross thus portrays the devotion of willing affection and the bestowal of voluntary salvation upon those who are willing to receive such gifts and devotion. There was nothing in the cross which the Father required — only that which Jesus so willingly gave, and which he refused to avoid. 너희가 십자가를 하느님의 계시로 볼 때, 너희는, 하느님을 엄격한 정의(正義)와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잔인한 주권자로 여겼던, 원시인의 눈이나 후대 야만인의 관점으로 보지 않도록 분명히 하라. 오히려 너희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광대한 우주의 필사 인류에게 증여한 자기 삶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헌신의 최종 표현을 보도록 확인하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의 죽음에서 필사 구체들의 자기 아들(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신적 사랑이 펼쳐지는 절정을 보라. 이렇게 십자가는 자진해서 행하는 애정의 헌신과 그런 선물과 헌신을 기쁘게 받아들이려는 자들에게 자발적인 구원의 증여를 묘사합니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예수께서 그토록 자발적으로 주셨고 회피하지 않으려 했던 것만 있었습니다.

188:5.12 (2019.5) If man cannot otherwise appreciate Jesus and understand the meaning of his bestowal on earth, he can at least comprehend the fellowship of his mortal sufferings. No man can ever fear that the Creator does not know the nature or extent of his temporal afflictions.

188:5.13 (2019.6) We know that the death on the cross was not to effect man’s reconciliation to God but to stimulate man’s realization of the Father’s eternal love and his Son’s unending mercy, and to broadcast these universal truths to a whole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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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21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미가엘이 증여된 시기

Paper 121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미가엘이 증여된 시기

1. The Occiden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2. The Jewish People

3. Among the Gentiles

4. Gentile Philosophy

(1) The Epicurean
(2) The Stoic
(3) The Cynic
(4) The Skeptic
5. The Gentile Religions

The mystery religions
6. The Hebrew Religion

7. Jews and Gentiles

8. Previous Written Records

(1) The Gospel by Mark
(2) The Gospel of Matthew
(3) The Gospel by Luke
(4) The Gospel of John
Acknowledgment

121:0.1 (1332.1) ACTING under the supervision of a commission of twelve members of the United Brotherhood of Urantia Midwayers, conjointly sponsored by the presiding head of our order and the Melchizedek of record, I am the secondary midwayer of onetime attachment to the Apostle Andrew, and I am authorized to place on record the narrative of the life transactions of Jesus of Nazareth as they were observed by my order of earth creatures, and as they were subsequently partially recorded by the human subject of my temporal guardianship. Knowing how his Master so scrupulously avoided leaving written records behind him, Andrew steadfastly refused to multiply copies of his written narrative. A similar attitude on the part of the other apostles of Jesus greatly delayed the writing of the Gospels.

1. The Occiden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121:1.1 (1332.2) Jesus did not come to this world during an age of spiritual decadence; at the time of his birth Urantia was experiencing such a revival of spiritual thinking and religious living as it had not known in all its previous post-Adamic history nor has experienced in any era since. When Michael incarnated on Urantia, the world presented the most favorable condition for the Creator Son’s bestowal that had ever previously prevailed or has since obtained. In the centuries just prior to these times Greek culture and the Greek language had spread over Occident and near Orient, and the Jews, being a Levantine race, in nature part Occidental and part Oriental, were eminently fitted to utilize such cultural and linguistic settings for the effective spread of a new religion to both East and West. These most favorable circumstances were further enhanced by the tolerant political rule of the Mediterranean world by the Romans.

121:1.2 (1332.3) This entire combination of world influences is well illustrated by the activities of Paul, who, being in religious culture a Hebrew of the Hebrews, proclaimed the gospel of a Jewish Messiah in the Greek tongue, while he himself was a Roman citizen.

121:1.3 (1332.4) Nothing like the civilization of the times of Jesus has been seen in the Occident before or since those days. European civilization was unified and co-ordinated under an extraordinary threefold influence:

121:1.4 (1332.5) 1. The Roman political and social systems.

121:1.5 (1332.6) 2. The Grecian language and culture — and philosophy to a certain extent.

121:1.6 (1332.7) 3. The rapidly spreading influence of Jewish religious and moral teachings.

121:1.7 (1332.8) When Jesus was born, the entire Mediterranean world was a unified empire. Good road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s history, interconnected many major centers. The seas were cleared of pirates, and a great era of trade and travel was rapidly advancing. Europe did not again enjoy another such period of travel and trade until the nineteenth century after Christ.

121:1.8 (1333.1) Notwithstanding the internal peace and superficial prosperity of the Greco-Roman world, a majority of the inhabitants of the empire languished in squalor and poverty. The small upper class was rich; a miserable and impoverished lower class embraced the rank and file of humanity. There was no happy and prosperous middle class in those days; it had just begun to make its appearance in Roman society.

121:1.9 (1333.2) The first struggles between the expanding Roman and Parthian states had been concluded in the then recent past, leaving Syria in the hands of the Romans. In the times of Jesus, Palestine and Syria were enjoying a period of prosperity, relative peace, and extensive commercial intercourse with the lands to both the East and the West.

2. The Jewish People

121:2.1 (1333.3) The Jews were a part of the older Semitic race, which also included the Babylonians, the Phoenicians, and the more recent enemies of Rome, the Carthaginians. During the fore par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Jews were the most influential group of the Semitic peoples, and they happened to occupy a peculiarly strategic geographic position in the world as it was at that time ruled and organized for trade.

121:2.2 (1333.4) Many of the great highways joining the nations of antiquity passed through Palestine, which thus became the meeting place, or crossroads, of three continents. The travel, trade, and armies of Babylonia, Assyria, Egypt, Syria, Greece, Parthia, and Rome successively swept over Palestine. From time immemorial, many caravan routes from the Orient passed through some part of this region to the few good seaports of the eastern end of the Mediterranean, whence ships carried their cargoes to all the maritime Occident. And more than half of this caravan traffic passed through or near the littl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121:2.3 (1333.5) Although Palestine was the home of Jewish religious culture and the birthplace of Christianity, the Jews were abroad in the world, dwelling in many nations and trading in every province of the Roman and Parthian states.

121:2.4 (1333.6) Greece provided a language and a culture, Rome built the roads and unified an empire, but the dispersion of the Jews, with their more than two hundred synagogues and well-organized religious communities scattered hither and yon throughout the Roman world, provided the cultural centers in whic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found initial reception, and from which it subsequently sprea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world.

121:2.5 (1333.7) Each Jewish synagogue tolerated a fringe of gentile believers, “devout” or “God-fearing” men, and it was among this fringe of proselytes that Paul made the bulk of his early converts to Christianity. Even the temple at Jerusalem possessed its ornate court of the gentiles. There was very close connection between the culture, commerce, and worship of Jerusalem and Antioch. In Antioch Paul’s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121:2.6 (1333.8) The centralization of the Jewish temple worship at Jerusalem constituted alike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their monotheism and the promise of the nurture and sending forth to the world of a new and enlarged concept of that one God of all nations and Father of all mortals. The temple service at Jerusalem represented the survival of a religious cultural concept in the face of the downfall of a succession of gentile national overlords and racial persecutors.

121:2.7 (1334.1) The Jewish people of this time, although under Roman suzerainty, enjoyed a considerable degree of self-government and, remembering the then only recent heroic exploits of deliverance executed by Judas Maccabee and his immediate successors, were vibrant with the expectation of the immediate appearance of a still greater deliverer, the long-expected Messiah.

121:2.8 (1334.2)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Palestine, the kingdom of the Jews, as a semi-independent state was wrapped up in the foreign policy of the Roman government, which desired to maintain control of the Palestinian highway of travel between Syria and Egypt as well as the western terminals of the caravan routes between the Orient and the Occident. Rome did not wish any power to arise in the Levant which might curb her future expansion in these regions. The policy of intrigue which had for its object the pitting of Seleucid Syria and Ptolemaic Egypt against each other necessitated fostering Palestine as a separate and independent state. Roman policy, the degeneration of Egypt, and the progressive weakening of the Seleucids before the rising power of Parthia, explain why it was that for several generations a small and unpowerful group of Jews was able to maintain its independence against both Seleucidae to the north and Ptolemies to the south. This fortuitous liberty and independence of the political rule of surrounding and more powerful peoples the Jews attributed to the fact that they were the “chosen people,” to the direct interposition of Yahweh. Such an attitude of racial superiority made it all the harder for them to endure Roman suzerainty when it finally fell upon their land. But even in that sad hour the Jews refused to learn that their world mission was spiritual, not political.

121:2.9 (1334.3) The Jews were unusually apprehensive and suspicious during the times of Jesus because they were then ruled by an outsider, Herod the Idumean, who had seized the overlordship of Judea by cleverly ingratiating himself with the Roman rulers. And though Herod professed loyalty to the Hebrew ceremonial observances, he proceeded to build temples for many strange gods.

121:2.10 (1334.4) The friendly relations of Herod with the Roman rulers made the world safe for Jewish travel and thus opened the way for increased Jewish penetration even of distant portions of the Roman Empire and of foreign treaty nations wit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Herod’s reign also contributed much toward the further blending of Hebrew and Hellenistic philosophies.

121:2.11 (1334.5) Herod built the harbor of Caesarea, which further aided in making Palestine the crossroads of the civilized world. He died in 4 B.C., and his son Herod Antipas governed Galilee and Perea during Jesus’ youth and ministry to A.D. 39. Antipas, like his father, was a great builder. He rebuilt many of the cities of Galilee, including the important trade center of Sepphoris.

121:2.12 (1334.6) The Galileans were not regarded with full favor by the Jerusalem religious leaders and rabbinical teachers. Galilee was more gentile than Jewish when Jesus was born.

3. Among the Gentiles

121:3.1 (1334.7) Although the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 of the Roman state was not of the highest order, the widespread domestic peace and prosperity was propitious for the bestowal of Michael.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ociety of the Mediterranean world consisted of five well-defined strata:

121:3.2 (1335.1) 1. The aristocracy. The upper classes with money and official power, the privileged and ruling groups.

121:3.3 (1335.2) 2. The business groups. The merchant princes and the bankers, the traders — the big importers and exporters — the international merchants.

121:3.4 (1335.3) 3. The small middle class. Although this group was indeed small, it was very influential and provided the moral backbone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which encouraged these groups to continue in their various crafts and trades. Among the Jews many of the Pharisees belonged to this class of tradesmen.

121:3.5 (1335.4) 4. The free proletariat. This group had little or no social standing. Though proud of their freedom, they were placed at great disadvantage because they were forced to compete with slave labor. The upper classes regarded them disdainfully, allowing that they were useless except for “breeding purposes.”

121:3.6 (1335.5) 5. The slaves. Half the population of the Roman state were slaves; many were superior individuals and quickly made their way up among the free proletariat and even among the tradesmen. The majority were either mediocre or very inferior.

121:3.7 (1335.6) Slavery, even of superior peoples, was a feature of Roman military conquest. The power of the master over his slave was unqualified. The early Christian church was largely composed of the lower classes and these slaves.

121:3.8 (1335.7) Superior slaves often received wages and by saving their earnings were able to purchase their freedom. Many such emancipated slaves rose to high positions in state, church, and the business world. And it was just such possibilities that made the early Christian church so tolerant of this modified form of slavery.

121:3.9 (1335.8) There was no widespread social problem in the Roman Empire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major portion of the populace regarded themselves as belonging in that group into which they chanced to be born. There was always the open door through which talented and able individuals could ascend from the lower to the higher strata of Roman society, but the people were generally content with their social rank. They were not class conscious, neither did they look upon these class distinctions as being unjust or wrong. Christianity was in no sense an economic movement having for its purpose the amelioration of the miseries of the depressed classes.

121:3.10 (1335.9) Although woman enjoyed more freedom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an in her restricted position in Palestine, the family devotion and natural affection of the Jews far transcended that of the gentile world.

4. Gentile Philosophy

121:4.1 (1335.10) The gentiles were, from a moral standpoint, somewhat inferior to the Jews, but there was present in the hearts of the nobler gentiles abundant soil of natural goodness and potential human affection in which it was possible for the seed of Christianity to sprout and bring forth an abundant harvest of moral character and spiritual achievement. The gentile world was then dominated by four great philosophies, all more or less derived from the earlier Platonism of the Greeks. These schools of philosophy were:

121:4.2 (1335.11) 1. The Epicurean. This school of thought was dedicated to the pursuit of happiness. The better Epicureans were not given to sensual excesses. At least this doctrine helped to deliver the Romans from a more deadly form of fatalism; it taught that men could do something to improve their terrestrial status. It did effectually combat ignorant superstition.

121:4.3 (1336.1) 2. The Stoic. Stoicism was the superior philosophy of the better classes. The Stoics believed that a controlling Reason-Fate dominated all nature. They taught that the soul of man was divine; that it was imprisoned in the evil body of physical nature. Man’s soul achieved liberty by living in harmony with nature, with God; thus virtue came to be its own reward. Stoicism ascended to a sublime morality, ideals never since transcended by any purely human system of philosophy. While the Stoics professed to be the “offspring of God,” they failed to know him and therefore failed to find him. Stoicism remained a philosophy; it never became a religion. Its followers sought to attune their minds to the harmony of the Universal Mind, but they failed to envisage themselves as the children of a loving Father. Paul leaned heavily toward Stoicism when he wrote, “I have learned in whatsoever state I am, therewith to be content.”

121:4.4 (1336.2) 3. The Cynic. Although the Cynics traced their philosophy to Diogenes of Athens, they derived much of their doctrine from the remnants of the teachings of Machiventa Melchizedek. Cynicism had formerly been more of a religion than a philosophy. At least the Cynics made their religio-philosophy democratic. In the fields and in the market places they continually preached their doctrine that “man could save himself if he would.” They preached simplicity and virtue and urged men to meet death fearlessly. These wandering Cynic preachers did much to prepare the spiritually hungry populace for the later Christian missionaries. Their plan of popular preaching was much after the pattern, and in accordance with the style, of Paul’s Epistles.

121:4.5 (1336.3) 4. The Skeptic. Skepticism asserted that knowledge was fallacious, and that conviction and assurance were impossible. It was a purely negative attitude and never became widespread.

121:4.6 (1336.4) These philosophies were semireligious; they were often invigorating, ethical, and ennobling but were usually above the common people.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Cynicism, they were philosophies for the strong and the wise, not religions of salvation for even the poor and the weak.

5. The Gentile Religions

121:5.1 (1336.5) Throughout preceding ages religion had chiefly been an affair of the tribe or nation; it had not often been a matter of concern to the individual. Gods were tribal or national, not personal. Such religious systems afforded little satisfaction for the individual spiritual longings of the average person.

121:5.2 (1336.6) In the times of Jesus the religions of the Occident included:

121:5.3 (1336.7) 1. The pagan cults. These were a combination of Hellenic and Latin mythology, patriotism, and tradition.

121:5.4 (1336.8) 2. Emperor worship. This deification of man as the symbol of the state was very seriously resented by the Jews and the early Christians and led directly to the bitter persecutions of both churches by the Roman government.

121:5.5 (1337.1) 3. Astrology. This pseudo science of Babylon developed into a religion throughout the Greco-Roman Empire.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man has not been fully delivered from this superstitious belief.

121:5.6 (1337.2) 4. The mystery religions. Upon such a spiritually hungry world a flood of mystery cults had broken, new and strange religions from the Levant, which had enamored the common people and had promised them individual salvation. These religions rapidly became the accepted belief of the lower classes of the Greco-Roman world. And they did much to prepare the way for the rapid spread of the vastly superior Christian teachings, which presented a majestic concept of Deity, associated with an intriguing theology for the intelligent and a profound proffer of salvation for all, including the ignorant but spiritually hungry average man of those days.

121:5.7 (1337.3) The mystery religions spelled the end of national beliefs and resulted in the birth of the numerous personal cults. The mysteries were many but were all characterized by:

121:5.8 (1337.4) 1. Some mythical legend, a mystery — whence their name. As a rule this mystery pertained to the story of some god’s life and death and return to life, as illustrated by the teachings of Mithraism, which, for a time, were contemporary with, and a competitor of, Paul’s rising cult of Christianity.

121:5.9 (1337.5) 2. The mysteries were nonnational and interracial. They were personal and fraternal, giving rise to religious brotherhoods and numerous sectarian societies.

121:5.10 (1337.6) 3. They were, in their services, characterized by elaborate ceremonies of initiation and impressive sacraments of worship. Their secret rites and rituals were sometimes gruesome and revolting.

121:5.11 (1337.7) 4. But no matter what the nature of their ceremonies or the degree of their excesses, these mysteries invariably promised their devotees salvation, “deliverance from evil, survival after death, and enduring life in blissful realms beyond this world of sorrow and slavery.”

121:5.12 (1337.8)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confusing the teachings of Jesus with the mysteries. The popularity of the mysteries reveals man’s quest for survival, thus portraying a real hunger and thirst for personal religion and individual righteousness. Although the mysteries failed adequately to satisfy this longing, they did prepare the way for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Jesus, who truly brought to this world the bread of life and the water thereof.

121:5.13 (1337.9) Paul, in an effort to utilize the widespread adherence to the better types of the mystery religions, made certain adaptations of the teachings of Jesus so as to render them more acceptable to a larger number of prospective converts. But even Paul’s compromise of Jesus’ teachings (Christianity) was superior to the best in the mysteries in that:

121:5.14 (1337.10) 1. Paul taught a moral redemption, an ethical salvation. Christianity pointed to a new life and proclaimed a new ideal. Paul forsook magic rites and ceremonial enchantments.

121:5.15 (1337.11) 2. Christianity presented a religion which grappled with final solutions of the human problem, for it not only offered salvation from sorrow and even from death, but it also promised deliverance from sin followed by the endowment of a righteous character of eternal survival qualities.

121:5.16 (1338.1) 3. The mysteries were built upon myths. Christianity, as Paul preached it, was founded upon a historic fact: the bestowal of Michael, the Son of God, upon mankind.

121:5.17 (1338.2) Morality among the gentiles was not necessarily related to either philosophy or religion. Outside of Palestine it not always occurred to people that a priest of religion was supposed to lead a moral life. Jewish religion and subsequently the teachings of Jesus and later the evolving Christianity of Paul were the first European religions to lay one hand upon morals and the other upon ethics, insisting that religionists pay some attention to both.

121:5.18 (1338.3) Into such a generation of men, dominated by such incomplete systems of philosophy and perplexed by such complex cults of religion, Jesus was born in Palestine. And to this same generation he subsequently gave his gospel of personal religion — sonship with God.

6. The Hebrew Religion

121:6.1 (1338.4) By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before Christ the religious thought of Jerusalem had been tremendously influenced and somewhat modified by Greek cultural teachings and even by Greek philosophy. In the long contest between the views of the Eastern and Western schools of Hebrew thought, Jerusalem and the rest of the Occident and the Levant in general adopted the Western Jewish or modified Hellenistic viewpoint.

121:6.2 (1338.5) In the days of Jesus three languages prevailed in Palestine: The common people spoke some dialect of Aramaic; the priests and rabbis spoke Hebrew; the educated classes and the better strata of Jews in general spoke Greek. The early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into Greek at Alexandria was responsible in no small measure for the subsequent predominance of the Greek wing of Jewish culture and theology. And the writings of the Christian teachers were soon to appear in the same language. The renaissance of Judaism dates from the Greek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This was a vital influence which later determined the drift of Paul’s Christian cult toward the West instead of toward the East.

121:6.3 (1338.6) Though the Hellenized Jewish beliefs were very little influenced by the teachings of the Epicureans, they were very materially affected by the philosophy of Plato and the self-abnegation doctrines of the Stoics. The great inroad of Stoicism is exemplified by the Fourth Book of the Maccabees; the penetration of both Platonic philosophy and Stoic doctrines is exhibited in the Wisdom of Solomon. The Hellenized Jews brought to the Hebrew scriptures such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at they found no difficulty in conforming Hebrew theology with their revered Aristotelian philosophy. But this all led to disastrous confusion until these problems were taken in hand by Philo of Alexandria, who proceeded to harmonize and systemize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into a compact and fairly consistent system of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And it was this later teaching of combined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that prevailed in Palestine when Jesus lived and taught, and which Paul utilized as the foundation on which to build his more advanced and enlightening cult of Christianity.

121:6.4 (1338.7) Philo was a great teacher; not since Moses had there lived a man who exerted such a profound influence on the ethical and religious thought of the Occidental world. In the matter of the combination of the better elements in contemporaneous systems of ethical and religious teachings, there have been seven outstanding human teachers: Sethard, Moses, Zoroaster, Lao-tse, Buddha, Philo, and Paul.

121:6.5 (1339.1) Many, but not all, of Philo’s inconsistencies resulting from an effort to combine Greek mystical philosophy and Roman Stoic doctrines with the legalistic theology of the Hebrews, Paul recognized and wisely eliminated from his pre-Christian basic theology. Philo led the way for Paul more fully to restore the concept of the Paradise Trinity, which had long been dormant in Jewish theology. In only one matter did Paul fail to keep pace with Philo or to transcend the teachings of this wealthy and educated Jew of Alexandria, and that was the doctrine of the atonement; Philo taught deliverance from the doctrine of forgiveness only by the shedding of blood. He also possibly glimpsed the reality and presence of the Thought Adjusters more clearly than did Paul. But Paul’s theory of original sin, the doctrines of hereditary guilt and innate evil and redemption therefrom, was partially Mithraic in origin, having little in common with Hebrew theology, Philo’s philosophy, or Jesus’ teachings. Some phases of Paul’s teachings regarding original sin and the atonement were original with himself.

121:6.6 (1339.2) The Gospel of John, the last of the narratives of Jesus’ earth life, was addressed to the Western peoples and presents its story much in the light of the viewpoint of the later Alexandrian Christians, who were also disciples of the teachings of Philo.

121:6.7 (1339.3) At about the time of Christ a strange reversion of feeling toward the Jews occurred in Alexandria, and from this former Jewish stronghold there went forth a virulent wave of persecution, extending even to Rome, from which many thousands were banished. But such a campaign of misrepresentation was short-lived; very soon the imperial government fully restored the curtailed liberties of the Jews throughout the empire.

121:6.8 (1339.4) Throughout the whole wide world, no matter where the Jews found themselves dispersed by commerce or oppression, all with one accord kept their hearts centered on the holy temple at Jerusalem. Jewish theology did survive as it was interpreted and practiced at Jerusalem, notwithstanding that it was several times saved from oblivion by the timely intervention of certain Babylonian teachers.

121:6.9 (1339.5) As many as two and one-half million of these dispersed Jews used to come to Jerusalem for the celebration of their national religious festivals. And no matter what the theologic or philosophic differences of the Eastern (Babylonian) and the Western (Hellenic) Jews, they were all agreed on Jerusalem as the center of their worship and in ever looking forward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7. Jews and Gentiles

121:7.1 (1339.6) By the times of Jesus the Jews had arrived at a settled concept of their origin, history, and destiny. They had built up a rigid wall of separation between themselves and the gentile world; they looked upon all gentile ways with utter contempt. They worshiped the letter of the law and indulged a form of self-righteousness based upon the false pride of descent. They had formed preconceived notions regarding the promised Messiah, and most of these expectations envisaged a Messiah who would come as a part of their national and racial history. To the Hebrews of those days Jewish theology was irrevocably settled, forever fixed.

121:7.2 (1339.7) The teachings and practices of Jesus regarding tolerance and kindness ran counter to the long-standing attitude of the Jews toward other peoples whom they considered heathen. For generations the Jews had nourished an attitude toward the outside world which made it impossible for them to accept the Master’s teachings about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They were unwilling to share Yahweh on equal terms with the gentiles and were likewise unwilling to accept as the Son of God one who taught such new and strange doctrines.

121:7.3 (1340.1) The scribes, the Pharisees, and the priesthood held the Jews in a terrible bondage of ritualism and legalism, a bondage far more real than that of the Roman political rule. The Jews of Jesus’ time were not only held in subjugation to the law but were equally bound by the slavish demands of the traditions, which involved and invaded every domain of personal and social life. These minute regulations of conduct pursued and dominated every loyal Jew, and it is not strange that they promptly rejected one of their number who presumed to ignore their sacred traditions, and who dared to flout their long-honored regulations of social conduct. They could hardly regard with favor the teachings of one who did not hesitate to clash with dogmas which they regarded as having been ordained by Father Abraham himself. Moses had given them their law and they would not compromise.

121:7.4 (1340.2) By the time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poken interpretation of the law by the recognized teachers, the scribes, had become a higher authority than the written law itself. And all this made it easier for certain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to array the people against the acceptance of a new gospel.

121:7.5 (1340.3) These circumstances rendered it impossible for the Jews to fulfill their divine destiny as messengers of the new gospel of religious freedom and spiritual liberty. They could not break the fetters of tradition. Jeremiah had told of the “law to be written in men’s hearts,” Ezekiel had spoken of a “new spirit to live in man’s soul,” and the Psalmist had prayed that God would “create a clean heart within and renew a right spirit.” But when the Jewish religion of good works and slavery to law fell victim to the stagnation of traditionalistic inertia, the motion of religious evolution passed westward to the European peoples.

121:7.6 (1340.4) And so a different people were called upon to carry an advancing theology to the world, a system of teaching embodying the philosophy of the Greeks, the law of the Romans, the morality of the Hebrews, and the gospel of personality sanctity and spiritual liberty formulated by Paul and based on the teachings of Jesus.

121:7.7 (1340.5) Paul’s cult of Christianity exhibited its morality as a Jewish birthmark. The Jews viewed history as the providence of God — Yahweh at work. The Greeks brought to the new teaching cleare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Paul’s doctrines were influenced in theology and philosophy not only by Jesus’ teachings but also by Plato and Philo. In ethics he was inspired not only by Christ but also by the Stoics.

121:7.8 (1340.6) The gospel of Jesus, as it was embodied in Paul’s cult of Antioch Christianity, became blended with the following teachings:

121:7.9 (1340.7) 1. The philosophic reasoning of the Greek proselytes to Judaism, including some of thei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121:7.10 (1340.8) 2. The appealing teachings of the prevailing mystery cults, especially the Mithraic doctrines of redemption, atonement, and salvation by the sacrifice made by some god.

121:7.11 (1340.9) 3. The sturdy morality of the established Jewish religion.

121:7.12 (1341.1) The Mediterranean Roman Empire, the Parthian kingdom, and the adjacent peoples of Jesus’ time all held crude and primitive ideas regarding the geography of the world, astronomy, health, and disease; and naturally they were amazed by the new and startling pronouncements of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ideas of spirit possession, good and bad, applied not merely to human beings, but every rock and tree was viewed by many as being spirit possessed. This was an enchanted age, and everybody believed in miracles as commonplace occurrences.

8. Previous Written Records

121:8.1 (1341.2) As far as possible, consistent with our mandate, we have endeavored to utilize and to some extent co-ordinate the existing records having to do with the life of Jesus on Urantia. Although we have enjoyed access to the lost record of the Apostle Andrew and have benefited from the collaboration of a vast host of celestial beings who were on earth during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notably his now Personalized Adjuster), it has been our purpose also to make use of the so-called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121:8.2 (1341.3) These New Testament records had their origin in the following circumstances:

121:8.3 (1341.4) 1. The Gospel by Mark. John Mark wrote the earliest (excepting the notes of Andrew), briefest, and most simple record of Jesus’ life. He presented the Master as a minister, as man among men. Although Mark was a lad lingering about many of the scenes which he depicts, his record is in reality the Gospel according to Simon Peter. He was early associated with Peter; later with Paul. Mark wrote this record at the instigation of Peter and on the earnest petition of the church at Rome. Knowing how consistently the Master refused to write out his teachings when on earth and in the flesh, Mark, like the apostles and other leading disciples, was hesitant to put them in writing. But Peter felt the church at Rome required the assistance of such a written narrative, and Mark consented to undertake its preparation. He made many notes before Peter died in A.D. 67, and in accordance with the outline approved by Peter and for the church at Rome, he began his writing soon after Peter’s death. The Gospel was completed near the end of A.D. 68. Mark wrote entirely from his own memory and Peter’s memory. The record has since been considerably changed, numerous passages having been taken out and some later matter added at the end to replace the latter one fifth of the original Gospel, which was lost from the first manuscript before it was ever copied. This record by Mark, in conjunction with Andrew’s and Matthew’s notes, was the written basis of all subsequent Gospel narratives which sought to portray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121:8.4 (1341.5) 2. The Gospel of Matthew.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Matthew is the record of the Master’s life which was written for the edification of Jewish Christians. The author of this record constantly seeks to show in Jesus’ life that much which he did was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Matthew’s Gospel portrays Jesus as a son of David, picturing him as showing great respect for the law and the prophets.

121:8.5 (1341.6) The Apostle Matthew did not write this Gospel. It was written by Isador, one of his disciples, who had as a help in his work not only Matthew’s personal remembrance of these events but also a certain record which the latter had made of the sayings of Jesus directly after the crucifixion. This record by Matthew was written in Aramaic; Isador wrote in Greek. There was no intent to deceive in accrediting the production to Matthew. It was the custom in those days for pupils thus to honor their teachers.

121:8.6 (1342.1) Matthew’s original record was edited and added to in A.D. 40 just before he left Jerusalem to engage in evangelistic preaching. It was a private record, the last copy having been destroyed in the burning of a Syrian monastery in A.D. 416.

121:8.7 (1342.2) Isador escaped from Jerusalem in A.D. 70 after the investment of the city by the armies of Titus, taking with him to Pella a copy of Matthew’s notes. In the year 71, while living at Pella, Isador wrot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He also had with him the first four fifths of Mark’s narrative.

121:8.8 (1342.3) 3. The Gospel by Luke. Luke, the physician of Antioch in Pisidia, was a gentile convert of Paul, and he wrote quite a different story of the Master’s life. He began to follow Paul and learn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in A.D. 47. Luke preserves much of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in his record as he gathered up these facts from Paul and others. Luke presents the Master as “the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He did not formulate his many notes into the Gospel until after Paul’s death. Luke wrote in the year 82 in Achaia. He planned three books dealing with the history of Christ and Christianity but died in A.D. 90 just before he finished the second of these works, the “Acts of the Apostles.”

121:8.9 (1342.4) As material for the compilation of his Gospel, Luke first depended upon the story of Jesus’ life as Paul had related it to him. Luke’s Gospel is, therefore, in some ways the Gospel according to Paul. But Luke had other sources of information. He not only interviewed scores of eyewitnesses to the numerous episodes of Jesus’ life which he records, but he also had with him a copy of Mark’s Gospel, that is, the first four fifths, Isador’s narrative, and a brief record made in the year A.D. 78 at Antioch by a believer named Cedes. Luke also had a mutilated and much-edited copy of some notes purported to have been made by the Apostle Andrew.

121:8.10 (1342.5) 4. The Gospel of Joh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relates much of Jesus’ work in Judea and around Jerusalem which is not contained in the other records. This is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son of Zebedee, and though John did not write it, he did inspire it. Since its first writing it has several times been edited to make it appear to have been written by John himself. When this record was made, John had the other Gospels, and he saw that much had been omitted; accordingly, in the year A.D. 101 he encouraged his associate, Nathan, a Greek Jew from Caesarea, to begin the writing. John supplied his material from memory and by reference to the three records already in existence. He had no written records of his own. The Epistle known as “First John” was written by John himself as a covering letter for the work which Nathan executed under his direction.

121:8.11 (1342.6) All these writers presented honest pictures of Jesus as they saw, remembered, or had learned of him, and as their concepts of these distant events were affected by their subsequent espousal of Paul’s theology of Christianity. And these records, imperfect as they are, have been sufficient to change the course of the history of Urantia for almost two thousand years.

121:8.12 (1343.1) [Acknowledgment: In carrying out my commission to restate the teachings and retell the doings of Jesus of Nazareth, I have drawn freely upon all sources of record and planetary information. My ruling motive has been to prepare a record which will not only be enlightening to the generation of men now living, but which may also be helpful to all future generations. From the vast store of information made available to me, I have chosen that which is best suited to the accomplishment of this purpose. As far as possible I have derived my information from purely human sources. Only when such sources failed, have I resorted to those records which are superhuman. When ideas and concepts of Jesus’ life and teachings have been acceptably expressed by a human mind, I invariably gave preference to such apparently human thought patterns. Although I have sought to adjust the verbal expression the better to conform to our concept of the real meaning and the true import of the Master’s life and teachings, as far as possible, I have adhered to the actual human concept and thought pattern in all my narratives. I well know that those concepts which have had origin in the human mind will prove more acceptable and helpful to all other human minds. When unable to find the necessary concepts in the human records or in human expressions, I have next resorted to the memory resources of my own order of earth creatures, the midwayers. And when that secondary source of information proved inadequate, I have unhesitatingly resorted to the superplanetary sources of information.

121:8.13 (1343.2) The memoranda which I have collected, and from which I have prepared this narrative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 aside from the memory of the record of the Apostle Andrew — embrace thought gems and superior concepts of Jesus’ teachings assembled from more than two thousand human beings who have lived on earth from the days of Jesus down to the time of the inditing of these revelations, more correctly restatements. The revelatory permission has been utilized only when the human record and human concepts failed to supply an adequate thought pattern. My revelatory commission forbade me to resort to extrahuman sources of either information or expression until such a time as I could testify that I had failed in my efforts to find the required conceptual expression in purely human sources.

121:8.14 (1343.3) While I, with the collaboration of my eleven associate fellow midwayers and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Melchizedek of record, have portrayed this narrative in accordance with my concept of its effective arrangement and in response to my choice of immediate expression, nevertheless, the majority of the ideas and even some of the effective expressions which I have thus utilized had their origin in the minds of the men of many races who have lived on earth during the intervening generations, right on down to those who are still alive at the time of this undertaking. In many ways I have served more as a collector and editor than as an original narrator. I have unhesitatingly appropriated those ideas and concepts, preferably human, which would enable me to create the most effective portraiture of Jesus’ life, and which would qualify me to restate his matchless teachings in the most strikingly helpful and universally uplifting phraseology. In behalf of the Brotherhood of the United Midwayers of Urantia, I most gratefully acknowledge our indebtedness to all sources of record and concept which have been hereinafter utilized in the further elaboration of our restatement of Jesus’ life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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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22 Birth and Infancy of Jesus 예수님의 탄생과 유아(幼兒)기

Paper 122

Birth and Infancy of Jesus 예수님의 탄생과 유아(幼兒)기

1. Joseph and Mary
2. Gabriel Appears to Elizabeth
3. Gabriel’s Announcement to Mary
4. Joseph’s Dream
The “house of David”
5. Jesus’ Earth Parents
6. The Home at Nazareth
7. The Trip to Bethlehem
8. The Birth of Jesus
The legend of the shepherds
The three priests from Ur
The “Star of Bethlehem”
9.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
10. Herod Acts
The flight to Egypt

122:0.1 (1344.1) IT WILL hardly be possible fully to explain the many reasons which led to the selection of Palestine as the land for Michael’s bestowal, and especially as to just why the family of Joseph and Mary should have been chosen as the immediate setting for the appearance of this Son of God on Urantia.

122:0.2 (1344.2) After a study of the special report on the status of segregated worlds prepared by the Melchizedeks, in counsel with Gabriel, Michael finally chose Urantia as the planet whereon to enact his final bestowal. Subsequent to this decision Gabriel made a personal visit to Urantia, and, as a result of his study of human groups and his survey of the spiritual, intellectual, racial, and geographic features of the world and its peoples, he decided that the Hebrews possessed those relative advantages which warranted their selection as the bestowal race. Upon Michael’s approval of this decision, Gabriel appointed and dispatched to Urantia the Family Commission of Twelve — selected from among the higher orders of universe personalities — which was intrusted with the task of making an investigation of Jewish family life. When this commission ended its labors, Gabriel was present on Urantia and received the report nominating three prospective unions as being, in the opinion of the commission, equally favorable as bestowal families for Michael’s projected incarnation.

122:0.3 (1344.3) From the three couples nominated, Gabriel made the personal choice of Joseph and Mary, subsequently making his personal appearance to Mary, at which time he imparted to her the glad tidings that she had been selected to become the earth mother of the bestowal child.

1. Joseph and Mary

122:1.1 (1344.4) Joseph, the human father of Jesus (Joshua ben Joseph), was a Hebrew of the Hebrews, albeit he carried many non-Jewish racial strains which had been added to his ancestral tree from time to time by the female lines of his progenitors. The ancestry of the father of Jesus went back to the days of Abraham and through this venerable patriarch to the earlier lines of inheritance leading to the Sumerians and Nodites and, through the southern tribes of the ancient blue man, to Andon and Fonta. David and Solomon were not in the direct line of Joseph’s ancestry, neither did Joseph’s lineage go directly back to Adam. Joseph’s immediate ancestors were mechanics — builders, carpenters, masons, and smiths. Joseph himself was a carpenter and later a contractor. His family belonged to a long and illustrious line of the nobility of the common people, accentuated ever and anon by the appearance of unusual individuals who had distinguished themselves in connection with the evolution of religion on Urantia.

122:1.2 (1345.1) Mary, the earth mother of Jesus, was a descendant of a long line of unique ancestors embracing many of the most remarkable women in the racial history of Urantia. Although Mary was an average woman of her day and generation, possessing a fairly normal temperament, she reckoned among her ancestors such well-known women as Annon, Tamar, Ruth, Bathsheba, Ansie, Cloa, Eve, Enta, and Ratta. No Jewish woman of that day had a more illustrious lineage of common progenitors or one extending back to more auspicious beginnings. Mary’s ancestry, like Joseph’s, was characterized by the predominance of strong but average individuals, relieved now and then by numerous outstanding personalities in the march of civilization and the progressive evolution of religion. Racially considered, it is hardly proper to regard Mary as a Jewess. In culture and belief she was a Jew, but in hereditary endowment she was more a composite of Syrian, Hittite, Phoenician, Greek, and Egyptian stocks, her racial inheritance being more general than that of Joseph.

122:1.3 (1345.2) Of all couples living in Palestine at about the time of Michael’s projected bestowal, Joseph and Mary possessed the most ideal combination of widespread racial connections and superior average of personality endowments. It was the plan of Michael to appear on earth as an average man, that the common people might understand him and receive him; wherefore Gabriel selected just such persons as Joseph and Mary to become the bestowal parents.

2. Gabriel Appears to Elizabeth

122:2.1 (1345.3) Jesus’ lifework on Urantia was really begun by John the Baptist. Zacharias, John’s father, belonged to the Jewish priesthood, while his mother, Elizabeth, was a member of the more prosperous branch of the same large family group to which Mary the mother of Jesus also belonged. Zacharias and Elizabeth, though they had been married many years, were childless.

122:2.2 (1345.4) It was late in the month of June, 8 B.C., about three months after the marriage of Joseph and Mary, that Gabriel appeared to Elizabeth at noontide one day, just as he later made his presence known to Mary. Said Gabriel:

122:2.3 (1345.5) “While your husband, Zacharias, stands before the altar in Jerusalem, and while the assembled people pray for the coming of a deliverer, I, Gabriel, have come to announce that you will shortly bear a son who shall be the forerunner of this divine teacher, and you shall call your son John. He will grow up dedicated to the Lord your God, and when he has come to full years, he will gladden your heart because he will turn many souls to God, and he will also proclaim the coming of the soul-healer of your people and the spirit-liberator of all mankind. Your kinswoman Mary shall be the mother of this child of promise, and I will also appear to her.”

122:2.4 (1345.6) This vision greatly frightened Elizabeth. After Gabriel’s departure she turned this experience over in her mind, long pondering the sayings of the majestic visitor, but did not speak of the revelation to anyone save her husband until her subsequent visit with Mary in early February of the following year.

122:2.5 (1345.7) For five months, however, Elizabeth withheld her secret even from her husband. Upon her disclosure of the story of Gabriel’s visit, Zacharias was very skeptical and for weeks doubted the entire experience, only consenting halfheartedly to believe in Gabriel’s visit to his wife when he could no longer question that she was expectant with child. Zacharias was very much perplexed regarding the prospective motherhood of Elizabeth, but he did not doubt the integrity of his wife, notwithstanding his own advanced age. It was not until about six weeks before John’s birth that Zacharias, as the result of an impressive dream, became fully convinced that Elizabeth was to become the mother of a son of destiny, one who was to prepare the way for the coming of the Messiah.

122:2.6 (1346.1) Gabriel appeared to Mary about the middle of November, 8 B.C., while she was at work in her Nazareth home. Later on, after Mary knew without doubt that she was to become a mother, she persuaded Joseph to let her journey to the City of Judah, four miles west of Jerusalem, in the hills, to visit Elizabeth. Gabriel had informed each of these mothers-to-be of his appearance to the other. Naturally they were anxious to get together, compare experiences, and talk over the probable futures of their sons. Mary remained with her distant cousin for three weeks. Elizabeth did much to strengthen Mary’s faith in the vision of Gabriel, so that she returned home more fully dedicated to the call to mother the child of destiny whom she was so soon to present to the world as a helpless babe, an average and normal infant of the realm.

122:2.7 (1346.2) John was born in the City of Judah, March 25, 7 B.C. Zacharias and Elizabeth rejoiced greatly in the realization that a son had come to them as Gabriel had promised, and when on the eighth day they presented the child for circumcision, they formally christened him John, as they had been directed aforetime. Already had a nephew of Zacharias departed for Nazareth, carrying the message of Elizabeth to Mary proclaiming that a son had been born to her and that his name was to be John.

122:2.8 (1346.3) From his earliest infancy John was judiciously impressed by his parents with the idea that he was to grow up to become a spiritual leader and religious teacher. And the soil of John’s heart was ever responsive to the sowing of such suggestive seeds. Even as a child he was found frequently at the temple during the seasons of his father’s service, and he was tremendously impressed with the significance of all that he saw.

3. Gabriel’s Announcement to Mary

122:3.1 (1346.4) One evening about sundown, before Joseph had returned home, Gabriel appeared to Mary by the side of a low stone table and, after she had recovered her composure, said: “I come at the bidding of one who is my Master and whom you shall love and nurture. To you, Mary, I bring glad tidings when I announce that the conception within you is ordained by heaven, and that in due time you will become the mother of a son; you shall call him Joshua, and he shall inaugurate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and among men. Speak not of this matter save to Joseph and to Elizabeth, your kinswoman, to whom I have also appeared, and who shall presently also bear a son, whose name shall be John, and who will prepare the way for the message of deliverance which your son shall proclaim to men with great power and deep conviction. And doubt not my word, Mary, for this home has been chosen as the mortal habitat of the child of destiny. My benediction rests upon you, the power of the Most Highs will strengthen you, and the Lord of all the earth shall overshadow you.”

122:3.2 (1346.5) Mary pondered this visitation secretly in her heart for many weeks until of a certainty she knew she was with child, before she dared to disclose these unusual events to her husband. When Joseph heard all about this, although he had great confidence in Mary, he was much troubled and could not sleep for many nights. At first Joseph had doubts about the Gabriel visitation. Then when he became well-nigh persuaded that Mary had really heard the voice and beheld the form of the divine messenger, he was torn in mind as he pondered how such things could be. How could the offspring of human beings be a child of divine destiny? Never could Joseph reconcile these conflicting ideas until, after several weeks of thought, both he and Mary reached the conclusion that they had been chosen to become the parents of the Messiah, though it had hardly been the Jewish concept that the expected deliverer was to be of divine nature. Upon arriving at this momentous conclusion, Mary hastened to depart for a visit with Elizabeth.

122:3.3 (1347.1) Upon her return, Mary went to visit her parents, Joachim and Hannah. Her two brothers and two sisters, as well as her parents, were always very skeptical about the divine mission of Jesus, though, of course, at this time they knew nothing of the Gabriel visitation. But Mary did confide to her sister Salome that she thought her son was destined to become a great teacher.

122:3.4 (1347.2) Gabriel’s announcement to Mary was made the day following the conception of Jesus and was the only event of supernatural occurrence connected with her entire experience of carrying and bearing the child of promise.

4. Joseph’s Dream

122:4.1 (1347.3) Joseph did not become reconciled to the idea that Mary was to become the mother of an extraordinary child until after he had experienced a very impressive dream. In this dream a brilliant celestial messenger appeared to him and, among other things, said: “Joseph, I appear by command of Him who now reigns on high, and I am directed to instruct you concerning the son whom Mary shall bear, and who shall become a great light in the world. In him will be life, and his life shall become the light of mankind. He shall first come to his own people, but they will hardly receive him; but to as many as shall receive him to them will he reveal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God.” After this experience Joseph never again wholly doubted Mary’s story of Gabriel’s visit and of the promise that the unborn child was to become a divine messenger to the world.

122:4.2 (1347.4) In all these visitations nothing was said about the house of David. Nothing was ever intimated about Jesus’ becoming a “deliverer of the Jews,” not even that he was to be the long-expected Messiah. Jesus was not such a Messiah as the Jews had anticipated, but he was the world’s deliverer. His mission was to all races and peoples, not to any one group.

122:4.3 (1347.5) Joseph was not of the line of King David. Mary had more of the Davidic ancestry than Joseph. True, Joseph did go to the City of David, Bethlehem, to be registered for the Roman census, but that was because, six generations previously, Joseph’s paternal ancestor of that generation, being an orphan, was adopted by one Zadoc, who was a direct descendant of David; hence was Joseph also accounted as of the “house of David.”

122:4.4 (1347.6) Most of the so-called Messianic prophecies of the Old Testament were made to apply to Jesus long after his life had been lived on earth. For centuries the Hebrew prophets had proclaimed the coming of a deliverer, and these promises had been construed by successive generations as referring to a new Jewish ruler who would sit upon the throne of David and, by the reputed miraculous methods of Moses, proceed to establish the Jews in Palestine as a powerful nation, free from all foreign domination. Again, many figurative passages found throughout the Hebrew scriptures were subsequently misapplied to the life mission of Jesus. Many Old Testament sayings were so distorted as to appear to fit some episode of the Master’s earth life. Jesus himself onetime publicly denied any connection with the royal house of David. Even the passage, “a maiden shall bear a son,” was made to read, “a virgin shall bear a son.” This was also true of the many genealogies of both Joseph and Mary which were constructed subsequent to Michael’s career on earth. Many of these lineages contain much of the Master’s ancestry, but on the whole they are not genuine and may not be depended upon as factual. The early followers of Jesus all too often succumbed to the temptation to make all the olden prophetic utterances appear to find fulfillment in the life of their Lord and Master.

5. Jesus’ Earth Parents

122:5.1 (1348.1) Joseph was a mild-mannered man, extremely conscientious, and in every way faithful to the religious conventions and practices of his people. He talked little but thought much. The sorry plight of the Jewish people caused Joseph much sadness. As a youth, among his eight brothers and sisters, he had been more cheerful, but in the earlier years of married life (during Jesus’ childhood) he was subject to periods of mild spiritual discouragement. These temperamental manifestations were greatly improved just before his untimely death and after the economic condition of his family had been enhanced by his advancement from the rank of carpenter to the role of a prosperous contractor.

122:5.2 (1348.2) Mary’s temperament was quite opposite to that of her husband. She was usually cheerful, was very rarely downcast, and possessed an ever-sunny disposition. Mary indulged in free and frequent expression of her emotional feelings and was never observed to be sorrowful until after the sudden death of Joseph. And she had hardly recovered from this shock when she had thrust upon her the anxieties and questionings aroused by the extraordinary career of her eldest son, which was so rapidly unfolding before her astonished gaze. But throughout all this unusual experience Mary was composed, courageous, and fairly wise in her relationship with her strange and little-understood first-born son and his surviving brothers and sisters.

122:5.3 (1348.3) Jesus derived much of his unusual gentleness and marvelous sympathetic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from his father; he inherited his gift as a great teacher and his tremendous capacity for righteous indignation from his mother. In emotional reactions to his adult-life environment, Jesus was at one time like his father, meditative and worshipful, sometimes characterized by apparent sadness; but more often he drove forward in the manner of his mother’s optimistic and determined disposition. All in all, Mary’s temperament tended to dominate the career of the divine Son as he grew up and swung into the momentous strides of his adult life. In some particulars Jesus was a blending of his parents’ traits; in other respects he exhibited the traits of one in contrast with those of the other.

122:5.4 (1348.4) From Joseph Jesus secured his strict training in the usages of the Jewish ceremonials and his unusual acquaintance with the Hebrew scriptures; from Mary he derived a broader viewpoint of religious life and a more liberal concept of personal spiritual freedom.

122:5.5 (1349.1) The families of both Joseph and Mary were well educated for their time. Joseph and Mary were educated far above the average for their day and station in life. He was a thinker; she was a planner, expert in adaptation and practical in immediate execution. Joseph was a black-eyed brunet; Mary, a brown-eyed well-nigh blond type.

122:5.6 (1349.2) Had Joseph lived, he undoubtedly would have become a firm believer in the divine mission of his eldest son. Mary alternated between believing and doubting, being greatly influenced by the position taken by her other children and by her friends and relatives, but always was she steadied in her final attitude by the memory of Gabriel’s appearance to her immediately after the child was conceived.

122:5.7 (1349.3) Mary was an expert weaver and more than averagely skilled in most of the household arts of that day; she was a good housekeeper and a superior homemaker. Both Joseph and Mary were good teachers, and they saw to it that their children were well versed in the learning of that day.

122:5.8 (1349.4) When Joseph was a young man, he was employed by Mary’s father in the work of building an addition to his house, and it was when Mary brought Joseph a cup of water, during a noontime meal, that the courtship of the pair who were destined to become the parents of Jesus really began.

122:5.9 (1349.5) Joseph and Mary were married, in accordance with Jewish custom, at Mary’s home in the environs of Nazareth when Joseph was twenty-one years old. This marriage concluded a normal courtship of almost two years’ duration. Shortly thereafter they moved into their new home in Nazareth, which had been built by Joseph with the assistance of two of his brothers. The house was located near the foot of the near-by elevated land which so charmingly overlooked the surrounding countryside. In this home, especially prepared, these young and expectant parents had thought to welcome the child of promise, little realizing that this momentous event of a universe was to transpire while they would be absent from home in Bethlehem of Judea.

122:5.10 (1349.6) The larger part of Joseph’s family became believers in the teachings of Jesus, but very few of Mary’s people ever believed in him until after he departed from this world. Joseph leaned more toward the spiritual concept of the expected Messiah, but Mary and her family, especially her father, held to the idea of the Messiah as a temporal deliverer and political ruler. Mary’s ancestors had been prominently identified with the Maccabean activities of the then but recent times.

122:5.11 (1349.7) Joseph held vigorously to the Eastern, or Babylonian, views of the Jewish religion; Mary leaned strongly toward the more liberal and broader Western, or Hellenistic, interpretation of the law and the prophets.

6. The Home at Nazareth

122:6.1 (1349.8) The home of Jesus was not far from the high hill in the northerly part of Nazareth, some distance from the village spring, which was in the eastern section of the town. Jesus’ family dwelt in the outskirts of the city, and this made it all the easier for him subsequently to enjoy frequent strolls in the country and to make trips up to the top of this near-by highland, the highest of all the hills of southern Galilee save the Mount Tabor range to the east and the hill of Nain, which was about the same height. Their home was located a little to the south and east of the southern promontory of this hill and about midway between the base of this elevation and the road leading out of Nazareth toward Cana. Aside from climbing the hill, Jesus’ favorite stroll was to follow a narrow trail winding about the base of the hill in a northeasterly direction to a point where it joined the road to Sepphoris.

122:6.2 (1350.1) The home of Joseph and Mary was a one-room stone structure with a flat roof and an adjoining building for housing the animals. The furniture consisted of a low stone table, earthenware and stone dishes and pots, a loom, a lampstand, several small stools, and mats for sleeping on the stone floor. In the back yard, near the animal annex, was the shelter which covered the oven and the mill for grinding grain. It required two persons to operate this type of mill, one to grind and another to feed the grain. As a small boy Jesus often fed grain to this mill while his mother turned the grinder.

122:6.3 (1350.2) In later years, as the family grew in size, they would all squat about the enlarged stone table to enjoy their meals, helping themselves from a common dish, or pot, of food. During the winter, at the evening meal the table would be lighted by a small, flat clay lamp, which was filled with olive oil. After the birth of Martha, Joseph built an addition to this house, a large room, which was used as a carpenter shop during the day and as a sleeping room at night.

7. The Trip to Bethlehem

122:7.1 (1350.3) In the month of March, 8 B.C. (the month Joseph and Mary were married), Caesar Augustus decreed that all inhabitants of the Roman Empire should be numbered, that a census should be made which could be used for effecting better taxation. The Jews had always been greatly prejudiced against any attempt to “number the people,” and this, in connection with the serious domestic difficulties of Herod, King of Judea, had conspired to cause the postponement of the taking of this census in the Jewish kingdom for one year. Throughout all the Roman Empire this census was registered in the year 8 B.C., except in the Palestinian kingdom of Herod, where it was taken in 7 B.C., one year later.

122:7.2 (1350.4) It was not necessary that Mary should go to Bethlehem for enrollment — Joseph was authorized to register for his family — but Mary, being an adventurous and aggressive person, insisted on accompanying him. She feared being left alone lest the child be born while Joseph was away, and again, Bethlehem being not far from the City of Judah, Mary foresaw a possible pleasurable visit with her kinswoman Elizabeth.

122:7.3 (1350.5) Joseph virtually forbade Mary to accompany him, but it was of no avail; when the food was packed for the trip of three or four days, she prepared double rations and made ready for the journey. But before they actually set forth, Joseph was reconciled to Mary’s going along, and they cheerfully departed from Nazareth at the break of day.

122:7.4 (1350.6) Joseph and Mary were poor, and since they had only one beast of burden, Mary, being large with child, rode on the animal with the provisions while Joseph walked, leading the beast. The building and furnishing of a home had been a great drain on Joseph since he had also to contribute to the support of his parents, as his father had been recently disabled. And so this Jewish couple went forth from their humble home early on the morning of August 18, 7 B.C., on their journey to Bethlehem.

122:7.5 (1351.1) Their first day of travel carried them around the foothills of Mount Gilboa, where they camped for the night by the river Jordan and engaged in many speculations as to what sort of a son would be born to them, Joseph adhering to the concept of a spiritual teacher and Mary holding to the idea of a Jewish Messiah, a deliverer of the Hebrew nation.

122:7.6 (1351.2) Bright and early the morning of August 19, Joseph and Mary were again on their way. They partook of their noontide meal at the foot of Mount Sartaba, overlooking the Jordan valley, and journeyed on, making Jericho for the night, where they stopped at an inn on the highway in the outskirts of the city. Following the evening meal and after much discussion concerning the oppressiveness of Roman rule, Herod, the census enrollment, and the comparative influence of Jerusalem and Alexandria as centers of Jewish learning and culture, the Nazareth travelers retired for the night’s rest. Early in the morning of August 20 they resumed their journey, reaching Jerusalem before noon, visiting the temple, and going on to their destination, arriving at Bethlehem in midafternoon.

122:7.7 (1351.3) The inn was overcrowded, and Joseph accordingly sought lodgings with distant relatives, but every room in Bethlehem was filled to overflowing. On returning to the courtyard of the inn, he was informed that the caravan stables, hewn out of the side of the rock and situated just below the inn, had been cleared of animals and cleaned up for the reception of lodgers. Leaving the donkey in the courtyard, Joseph shouldered their bags of clothing and provisions and with Mary descended the stone steps to their lodgings below. They found themselves located in what had been a grain storage room to the front of the stalls and mangers. Tent curtains had been hung, and they counted themselves fortunate to have such comfortable quarters.

122:7.8 (1351.4) Joseph had thought to go out at once and enroll, but Mary was weary; she was considerably distressed and besought him to remain by her side, which he did.

8. The Birth of Jesus

122:8.1 (1351.5) All that night Mary was restless so that neither of them slept much. By the break of day the pangs of childbirth were well in evidence, and at noon, August 21, 7 B.C., with the help and kind ministrations of women fellow travelers, Mary was delivered of a male child. Jesus of Nazareth was born into the world, was wrapped in the clothes which Mary had brought along for such a possible contingency, and laid in a near-by manger.

122:8.2 (1351.6) In just the same manner as all babies before that day and since have come into the world, the promised child was born; and on the eighth day, according to the Jewish practice, he was circumcised and formally named Joshua (Jesus).

122:8.3 (1351.7) The next day after the birth of Jesus, Joseph made his enrollment. Meeting a man they had talked with two nights previously at Jericho, Joseph was taken by him to a well-to-do friend who had a room at the inn, and who said he would gladly exchange quarters with the Nazareth couple. That afternoon they moved up to the inn, where they lived for almost three weeks until they found lodgings in the home of a distant relative of Joseph.

122:8.4 (1351.8) The second day after the birth of Jesus, Mary sent word to Elizabeth that her child had come and received word in return inviting Joseph up to Jerusalem to talk over all their affairs with Zacharias. The following week Joseph went to Jerusalem to confer with Zacharias. Both Zacharias and Elizabeth had become possessed with the sincere conviction that Jesus was indeed to become the Jewish deliverer, the Messiah, and that their son John was to be his chief of aides, his right-hand man of destiny. And since Mary held these same ideas, it was not difficult to prevail upon Joseph to remain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so that Jesus might grow up to become the successor of David on the throne of all Israel. Accordingly, they remained in Bethlehem more than a year, Joseph meantime working some at his carpenter’s trade.

122:8.5 (1352.1) At the noontide birth of Jesus the seraphim of Urantia, assembled under their directors, did sing anthems of glory over the Bethlehem manger, but these utterances of praise were not heard by human ears. No shepherds nor any other mortal creatures came to pay homage to the babe of Bethlehem until the day of the arrival of certain priests from Ur, who were sent down from Jerusalem by Zacharias.

122:8.6 (1352.2) These priests from Mesopotamia had been told sometime before by a strange religious teacher of their country that he had had a dream in which he was informed that “the light of life” was about to appear on earth as a babe and among the Jews. And thither went these three teachers looking for this “light of life.” After many weeks of futile search in Jerusalem, they were about to return to Ur when Zacharias met them and disclosed his belief that Jesus was the object of their quest and sent them on to Bethlehem, where they found the babe and left their gifts with Mary, his earth mother. The babe was almost three weeks old at the time of their visit.

122:8.7 (1352.3) These wise men saw no star to guide them to Bethlehem. The beautiful legend of the star of Bethlehem originated in this way: Jesus was born August 21 at noon, 7 B.C. On May 29, 7 B.C., there occurred an extraordinary conjunction of Jupiter and Saturn in the constellation of Pisces. And it is a remarkable astronomic fact that similar conjunctions occurred on September 29 and December 5 of the same year. Upon the basis of these extraordinary but wholly natural events the well-meaning zealots of the succeeding generation constructed the appealing legend of the star of Bethlehem and the adoring Magi led thereby to the manger, where they beheld and worshiped the newborn babe. Oriental and near-Oriental minds delight in fairy stories, and they are continually spinning such beautiful myths about the lives of their religious leaders and political heroes. In the absence of printing, when most human knowledge was passed by word of mouth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it was very easy for myths to become traditions and for traditions eventually to become accepted as facts.

9.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

122:9.1 (1352.4) Moses had taught the Jews that every first-born son belonged to the Lord, and that, in lieu of his sacrifice as was the custom among the heathen nations, such a son might live provided his parents would redeem him by the payment of five shekels to any authorized priest. There was also a Mosaic ordinance which directed that a mother, after the passing of a certain period of time, should present herself (or have someone make the proper sacrifice for her) at the temple for purification. It was customary to perform both of these ceremonies at the same time. Accordingly, Joseph and Mary went up to the temple at Jerusalem in person to present Jesus to the priests and effect his redemption and also to make the proper sacrifice to insure Mary’s ceremonial purification from the alleged uncleanness of childbirth.

122:9.2 (1353.1) There lingered constantly about the courts of the temple two remarkable characters, Simeon a singer and Anna a poetess. Simeon was a Judean, but Anna was a Galilean. This couple were frequently in each other’s company, and both were intimates of the priest Zacharias, who had confided the secret of John and Jesus to them. Both Simeon and Anna longed for the coming of the Messiah, and their confidence in Zacharias led them to believe that Jesus was the expected deliverer of the Jewish people.

122:9.3 (1353.2) Zacharias knew the day Joseph and Mary were expected to appear at the temple with Jesus, and he had prearranged with Simeon and Anna to indicate, by the salute of his upraised hand, which one in the procession of first-born children was Jesus.

122:9.4 (1353.3) For this occasion Anna had written a poem which Simeon proceeded to sing, much to the astonishment of Joseph, Mary, and all who were assembled in the temple courts. And this was their hymn of the redemption of the first-born son:

122:9.5 (1353.4) Blessed be the Lord, the God of Israel,

122:9.6 (1353.5) For he has visited us and wrought redemption for his people;

122:9.7 (1353.6) He has raised up a horn of salvation for all of us

122:9.8 (1353.7) In the house of his servant David.

122:9.9 (1353.8) Even as he spoke by the mouth of his holy prophets —

122:9.10 (1353.9) Salvation from our enemies and from the hand of all who hate us;

122:9.11 (1353.10) To show mercy to our fathers, and remember his holy covenant —

122:9.12 (1353.11) The oath which he swore to Abraham our father,

122:9.13 (1353.12) To grant us that we, being delivered out of the hand of our enemies,

122:9.14 (1353.13) Should serve him without fear,

122:9.15 (1353.14) In holiness and righteousness before him all our days.

122:9.16 (1353.15) Yes, and you, child of promise, shall be called the prophet of the Most High;

122:9.17 (1353.16) For you shall go before the face of the Lord to establish his kingdom;

122:9.18 (1353.17) To give knowledge of salvation to his people

122:9.19 (1353.18) In the remission of their sins.

122:9.20 (1353.19) Rejoice in the tender mercy of our God because the dayspring from on high has now visited us

122:9.21 (1353.20) To shine upon those who sit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122:9.22 (1353.21) To guide our feet into ways of peace.

122:9.23 (1353.22) And now let your servant depart in peace, O Lord, according to your word,

122:9.24 (1353.23)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122:9.25 (1353.24) Which you have prepared before the face of all peoples;

122:9.26 (1353.25) A light for even the unveiling of the gentiles

122:9.27 (1353.26) And the glory of your people Israel.

122:9.28 (1353.27) On the way back to Bethlehem, Joseph and Mary were silent — confused and overawed. Mary was much disturbed by the farewell salutation of Anna, the aged poetess, and Joseph was not in harmony with this premature effort to make Jesus out to be the expected Messiah of the Jewish people.

10. Herod Acts

122:10.1 (1353.28) But the watchers for Herod were not inactive. When they reported to him the visit of the priests of Ur to Bethlehem, Herod summoned these Chaldeans to appear before him. He inquired diligently of these wise men about the new “king of the Jews,” but they gave him little satisfaction, explaining that the babe had been born of a woman who had come down to Bethlehem with her husband for the census enrollment. Herod, not being satisfied with this answer, sent them forth with a purse and directed that they should find the child so that he too might come and worship him, since they had declared that his kingdom was to be spiritual, not temporal. But when the wise men did not return, Herod grew suspicious. As he turned these things over in his mind, his informers returned and made full report of the recent occurrences in the temple, bringing him a copy of parts of the Simeon song which had been sung at the redemption ceremonies of Jesus. But they had failed to follow Joseph and Mary, and Herod was very angry with them when they could not tell him whither the pair had taken the babe. He then dispatched searchers to locate Joseph and Mary. Knowing Herod pursued the Nazareth family, Zacharias and Elizabeth remained away from Bethlehem. The boy baby was secreted with Joseph’s relatives.

122:10.2 (1354.1) Joseph was afraid to seek work, and their small savings were rapidly disappearing. Even at the time of the purification ceremonies at the temple, Joseph deemed himself sufficiently poor to warrant his offering for Mary two young pigeons as Moses had directed for the purification of mothers among the poor.

122:10.3 (1354.2) When, after more than a year of searching, Herod’s spies had not located Jesus, and because of the suspicion that the babe was still concealed in Bethlehem, he prepared an order directing that a systematic search be made of every house in Bethlehem, and that all boy babies under two years of age should be killed. In this manner Herod hoped to make sure that this child who was to become “king of the Jews” would be destroyed. And thus perished in one day sixteen boy babies in Bethlehem of Judea. But intrigue and murder, even in his own immediate family, were common occurrences at the court of Herod.

122:10.4 (1354.3) The massacre of these infants took place about the middle of October, 6 B.C., when Jesus was a little over one year of age. But there were believers in the coming Messiah even among Herod’s court attachés, and one of these, learning of the order to slaughter the Bethlehem boy babies, communicated with Zacharias, who in turn dispatched a messenger to Joseph; and the night before the massacre Joseph and Mary departed from Bethlehem with the babe for Alexandria in Egypt. In order to avoid attracting attention, they journeyed alone to Egypt with Jesus. They went to Alexandria on funds provided by Zacharias, and there Joseph worked at his trade while Mary and Jesus lodged with well-to-do relatives of Joseph’s family. They sojourned in Alexandria two full years, not returning to Bethlehem until after the death of Her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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