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70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

Paper 170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

1.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의 개념들
2.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예수의 나라 개념
Sin and forgiveness 죄와 용서
3. In Relation to Righteousness 의(義 바른 도리)와 관련하여
4. 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5. Later Ideas of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의 후기 사상
Social brotherhood and spiritual brotherhood 사회적 형제 공동체와 영적 형제 공동체
Another and greater John the Baptist 또 다른 위대한 세례 요한
Christianity and the Jesus gospel 기독교와 예수 복음

231203 하늘나라 마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70:0.1 (1858.1) SATURDAY afternoon, March 11, Jesus preached his last sermon at Pella. This was among the notable addresses of his public ministry, embracing a full and complete discussion of the kingdom of heaven. He was aware of the confusion which existed in the minds of his apostles and disciples regarding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terms “kingdom of heaven” and “kingdom of God,” which he used as interchangeable designations of his bestowal mission. Although the very term kingdom of heaven should have been enough to separate what it stood for from all connection with earthly kingdoms and temporal governments, it was not. The idea of a temporal king was too deep-rooted in the Jewish mind thus to be dislodged in a single generation. Therefore Jesus did not at first openly oppose this long-nourished concept of the kingdom. 3월 11일(AD30) 토요일 오후,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는 그의 대중 사역 중 주목할 만한 연설로, 하늘나라에 대해 충분히 완전한 논의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증여 사명에 대해 바꿔서 사용했던 명칭, “하늘나라”와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해 자기 사도와 제자들 마음에 있는 혼란을 알아차렸습니다. 바로 하늘나라라는 용어는 땅의 나라들 및 일시적 정부들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그 의미를 분리하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세적 왕의 개념이 유대인의 마음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한 세대에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는 처음에 이렇게 오래 품어온 나라 개념을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170:0.2 (1858.2) This Sabbath afternoon the Master sought to clarify the teaching about the kingdom of heaven; he discussed the subject from every viewpoint and endeavored to make clear the many different senses in which the term had been used. In this narrative we will amplify the address by adding numerous statements made by Jesus on previous occasions and by including some remarks made only to the apostles during the evening discussions of this same day. We will also make certain comments dealing with the subsequent outworking of the kingdom idea as it is related to the later Christian church. 이 안식일 오후에 주(主)님은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고 용어가 사용된 여러 다른 의미를 명백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전의 경우에 예수께서 하신 여러 진술을 덧붙이고 바로 이날 저녁 논의 중 사도들에게만 했던 몇 가지 소견을 포함해서 그 연설을 상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라 개념이 후대 기독 교회와 관련되어 있어서 차후 나라 개념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논평을 할 것입니다.

1.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하늘나라의 개념들

231210 하늘나라의 개념들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1.1 (1858.3) In connection with the recital of Jesus’ sermon it should be noted that throughout the Hebrew scriptures there was a dual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prophets presented the kingdom of God as: 예수 설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관련해서, 히브리 성서 전체에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중 개념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70:1.2 (1858.4) 1. A present reality; and as 현재의 현실(사9:7, 단6:26)

170:1.3 (1858.5) 2. A future hope — when the kingdom would be realized in fullness upon the appearance of the Messiah. This is the kingdom concept which John the Baptist taught. 미래의 소망 – 메시아의 출현으로 나라가 충만히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나라 개념입니다(마3:1-2, 사9:6-7, 11:1-10, 옵1:21, 눅1:32-33, 삼하7:12, 대상17:12).

170:1.4 (1858.6) From the very first Jesus and the apostles taught both of these concepts. There were two other ideas of the kingdom which should be borne in mind: 예수와 사도들은 아주 처음부터 이 두 개념 다 가르쳤습니다. 명심해야 할 나라에 대한 다른 두 개념이 있었습니다(마4:17, 23, 막1:14-15, 눅9:2, 행28:31).

170:1.5 (1858.7) 3. The later Jewish concept of a world-wide and transcendental kingdom of supernatural origin and miraculous inauguration. 초자연적 기원과 기적적 출범에 속한 세계적인 초월적 나라에 대한 후기 유대인의 개념(사2:2-4, 시72:1-19, 슥14:7-11).

170:1.6 (1858.8) 4. The Persian teachings portraying the establishment of a divine kingdom as the achievement of the triumph of good over evil at the end of the world. 세상의 종말에 선(善)이 악(惡)을 이긴 성취로 신적 나라가 확립된다고 묘사하는 페르시아의 가르침들.

170:1.7 (1858.9) Just before the advent of Jesus on earth, the Jews combined and confused all of these ideas of the kingdom into their apocalyptic concept of the Messiah’s coming to establish the age of the Jewish triumph, the eternal age of God’s supreme rule on earth, the new world, the era in which all mankind would worship Yahweh. In choosing to utilize this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Jesus elected to appropriate the most vital and culminating heritage of both the Jewish and Persian religions. 예수가 지상에 강림하기 직전에, 유대인들은 나라에 대한 이 모든 개념을, 메시아가 오셔서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 지상에서 하느님이 최고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 새 세상, 모든 인류가 야훼를 경배하게 될 시대를 세운다는 자기들의 종말론적 개념으로 결합하여 혼동했습니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이런 개념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유대 및 페르시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절정기의 유산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170:1.8 (1859.1) The kingdom of heaven, as it has been understood and misunderstood down through the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embraced four distinct groups of ideas: 기독교 시대의 수 세기 내내 이해되고 오해되었듯이 하늘나라는 별개의 네 집단에 속한 개념들을 포함했습니다(욥32:8, 사63:11, 겔37:14, 마10:20, 눅17:21, 요17:21-23, 롬8:9-11, 고전3:16-17, 고후6:16, 갈2:20, 요일3:24, 4:12-15, 계21:3).

170:1.9 (1859.2) 1. The concept of the Jews. 유대인들의 개념.

170:1.10 (1859.3) 2. The concept of the Persians. 페르시아인들의 개념(마4:23, 9:35, 24:14, 막1:14-15).

170:1.11 (1859.4) 3. The personal-experience concept of Jesus —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you.” 예수의 개인적-체험 개념 – “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170:1.12 (1859.5) 4. The composite and confused concepts which the founders and promulgators of Christianity have sought to impress upon the world. 기독교 창시자들과 선포자들이 세상에 감명을 주려고 애써 합성한 혼란한 개념.

170:1.13 (1859.6) At different times and in varying circumstances it appears that Jesus may have presented numerous concepts of the “kingdom” in his public teachings, but to his apostles he always taught the kingdom as embracing man’s personal experience in relation to his fellows on earth and to the Father in heaven. Concerning the kingdom, his last word always was, “The kingdom is within you.” 예수께서, 서로 다른 시간, 다양한 환경에서, 공적으로 가르치실 때 수많은 “나라”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자기 사도들에게 언제나 나라는 지상의 자기 동료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인간의 개인적 체험을 포함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나라에 관한 그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였습니다.

170:1.14 (1859.7) Centuries of confusion regarding the meaning of the term “kingdom of heaven” have been due to three factors: “하늘나라”라는 용어의 의미에 관한 여러 세기의 혼동은 다음의 세 요인에 기인합니다.

170:1.15 (1859.8) 1. The confusion occasioned by observing the idea of the “kingdom” as it passed through the various progressive phases of its recasting by Jesus and his apostles. 예수와 그 사도들이 “나라” 개념을 여러 점진적 단계로 고쳐 만들면서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170:1.16 (1859.9) 2. The confusion which was inevitably associated with the transplantation of early Christianity from a Jewish to a gentile soil.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의 토양에서 이방인의 토양으로 이식되면서 필연적으로 관련된 혼란.

170:1.17 (1859.10) 3. The confusion which was inherent in the fact that Christianity became a religion which was organized about the central idea of Jesus’ person; the gospel of the kingdom became more and more a religion about him. 기독교가 예수라는 인물 중심 사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원래 들어있는 혼란. 나라의 복음은 점점 더 그에 대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2.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예수의 나라 개념

231217 아버지의 뜻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70:2.1 (1859.11) The Master made it clear that the kingdom of heaven must begin with, and be centered in, the dual concept of the truth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correlated fact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acceptance of such a teaching, Jesus declared, would liberate man from the age-long bondage of animal fear and at the same time enrich human living with the following endowments of the new life of spiritual liberty: 주님은 하늘나라가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진리와 그것과 관련된 사람의 형제 공동체라는 사실에 대한 이중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아주 오래된 동물적 두려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영적 자유의 새 생명이 그 후 주어져서 인간의 생활이 풍성해진다고 선언했습니다.

170:2.2 (1859.12) 1. The possession of new courage and augmented spiritual power. The gospel of the kingdom was to set man free and inspire him to dare to hope for eternal life. 새로운 용기와 늘어난 영적 권세의 소유. 나라의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여 그에게 대담히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했습니다(요8:32, 36, 롬8:2, 갈5:13, 단12:2, 마19:29, 25:46, 막10:30, 눅10:25, 18:18, 30, 요3:15-16, 4:14, 36, 5:24, 39, 6:40, 47, 54, 68, 8:51-52, 10:28, 11:25-26, 12:25, 50, 17:2-3, 행13:46, 48, 롬2:7, 5:21, 6:22-23, 갈6:8, 딤전1:16, 6:12, 19, 딛1:2, 3:7, 요일1:2, 2:25, 3:15, 5:11, 13, 20, 유1:21).

170:2.3 (1859.13) 2. The gospel carried a message of new confidence and true consolation for all men, even for the poor. 복음은 모든 사람, 심지어 가난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마11:5, 눅7:22).

170:2.4 (1859.14) 3. It was in itself a new standard of moral values, a new ethical yardstick wherewith to measure human conduct. It portrayed the ideal of a resultant new order of human society. 복음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가치의 기준,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새로운 윤리적 표준이었습니다. 그것의 결과로 인간 사회에 속한 새 질서의 이상(理想)이 표현되었습니다(마5:3-7:23, 눅6:20-38).

170:2.5 (1859.15) 4. It taught the pre-eminence of the spiritual compared with the material; it glorified spiritual realities and exalted superhuman ideals.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견주어 상위(上位)에 영적인 것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영적 실체들을 높여서 칭찬하고 초(超)인간적 이상(理想)들을 드높였습니다(마6:19-21, 눅12:21, 31-34, 요3:3-16).

170:2.6 (1860.1) 5. This new gospel held up spiritual attainment as the true goal of living. Human life received a new endowment of moral value and divine dignity. 이 새로운 복음은 영적 성취를 참된 삶의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도덕적 가치와 신적 존엄성을 새롭게 부여받았습니다(요4:14, 6:27, 51, 68).

170:2.7 (1860.2) 6. Jesus taught that eternal realities were the result (reward) of righteous earthly striving. Man’s mortal sojourn on earth acquired new meanings consequent upon the recognition of a noble destiny.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얻으려고 애쓴 결과(보상)라고 가르쳤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지상에 머무는 것은, 고귀한 운명을 알아본 결과,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마5:10-16, 눅6:22-35).

170:2.8 (1860.3) 7. The new gospel affirmed that human salvation is the revelation of a far-reaching divine purpose to be fulfilled and realized in the future destiny of the endless service of the salvaged sons of God. 새로운 복음은 인간의 구원이 구원받은 하느님 아들(자녀)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미래 운명으로 성취하고 실현될 광범위한 신적 목적의 계시임을 확언했습니다(시2:7, 사56:5, 마5:9, 16, 45, 눅20:36, 요1:12-13, 행17:28, 롬8:14-21, 9:26, 고후6:18, 갈3:26, 4:5-7, 엡1:5, 빌2:15, 히12:5-8, 요일3:1-2, 10, 5:2, 계21:7).

170:2.9 (1860.4) These teachings cover the expanded idea of the kingdom which was taught by Jesus. This great concept was hardly embraced in the elementary and confused kingdom teachings of John the Baptist. 이런 가르침들은 예수께서 가르쳤던 나라의 확장된 개념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개념은 세례 요한의 초보적인 혼란한 나라에는 거의 담겨 있지 않습니다.

170:2.10 (1860.5) The apostles were unable to grasp the real meaning of the Master’s utterances regarding the kingdom. The subsequent distortion of Jesus’ teachings, as they are recorded in the New Testament, is because the concept of the gospel writers was colored by the belief that Jesus was then absent from the world for only a short time; that he would soon return to establish the kingdom in power and glory — just such an idea as they held while he was with them in the flesh. But Jesus did not connect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with the idea of his return to this world. That centuries have passed with no signs of the appearance of the “New Age” is in no way out of harmony with Jesus’ teaching. 사도들은 나라에 관해 주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신약 성서에 그들이 기록한 대로,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된 것은 복음서 기자(記者)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때 잠시 세상을 떠나 계시다가 곧 다시 오셔서 권세와 영광으로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 그가 자신들과 육신으로 계실 때 그들이 가졌던 바로 그런 생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나라 설립을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과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새 시대”가 출현할 조짐이 없이 수 세기가 지나간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절대로 어긋나지 않습니다(마24:27-30, 25:31-34, 막13:24-26, 14:62, 눅21:27, 계1:7).

170:2.11 (1860.6) The great effort embodied in this sermon was the attempt to translate the concept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e ideal of the idea of doing the will of God. Long had the Master taught his followers to pray: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and at this time he earnestly sought to induce them to abandon the use of the term kingdom of God in favor of the more practical equivalent, the will of God. But he did not succeed. 이 설교로 구현된 엄청난 노력은 하늘나라의 개념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개념으로 바꾸는 시도였습니다. 주님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오래 가르쳤습니다. 이때 그는 열심히 그들을 설득하여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더 실용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마6:10, 눅11:2).

231224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 마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70:2.12 (1860.7) Jesus desired to substitute for the idea of the kingdom, king, and subjects, the concept of the heavenly family, the heavenly Father, and the liberated sons of God engaged in joyful and voluntary service for their fellow men and in the sublime and intelligent worship of God the Father. 예수는 왕국, 왕, 그리고 백성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대신에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그리고 동료 사람들을 기쁘게 자발적으로 섬기면서 아버지 하느님을 숭고하게 지능적으로 경배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아들(자녀)들이라는 명확한 개념을 쓰려고 했습니다.

170:2.13 (1860.8) Up to this time the apostles had acquired a double viewpoint of the kingdom; they regarded it as: 이때까지 사도들은 나라에 대해 이중적 관점을 익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여겼습니다.

170:2.14 (1860.9) 1. A matter of personal experience then present in the hearts of true believers, and 개인적 체험 문제가 당시 참된 신자들의 심정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170:2.15 (1860.10) 2. A question of racial or world phenomena; that the kingdom was in the future, something to look forward to. 인종이나 세계 현상의 문제, 나라는 미래에 기대할 일이었습니다.

170:2.16 (1860.11) They looked upon the coming of the kingdom in the hearts of men as a gradual development, like the leaven in the dough or like the growing of the mustard seed. They believed that the coming of the kingdom in the racial or world sense would be both sudden and spectacular. Jesus never tired of telling them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their personal experience of realizing the higher qualities of spiritual living; that these realities of the spirit experience are progressively translated to new and higher levels of divine certainty and eternal grandeur. 그들은 사람들의 심정에 나라가 오는 것을, 반죽 덩어리의 누룩(효모 마13:33, 눅13:21)이나 겨자씨가 자라는 것처럼(마13:31-33, 막4:31-32, 눅13:19), 점진적 개발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인종이나 세계적 의미에서 나라가 불시에 장엄하게 다가온다고 믿었습니다(마24:29-31, 막13:24-27, 눅21:25-27, 행2:19-20, 벧후3:10, 12).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는 더 높은 영적 특성의 삶을 구현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고, 이런 영(靈) 체험의 실체들은 신적으로 확실하고 영원히 장엄한 새롭고 높은 수준으로 점차 옮겨진다고 조금도 지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170:2.17 (1860.12) On this afternoon the Master distinctly taught a new concept of the double nature of the kingdom in that he portrayed the following two phases: 이날(AD30.3.11 토) 오후에 주님은 다음의 두 단계를 묘사하면서 나라의 이중 본질에 대한 새 개념을 뚜렷이 가르쳤습니다.

170:2.18 (1860.13) “First. The kingdom of God in this world, the supreme desire to do the will of God, the unselfish love of man which yields the good fruits of improved ethical and moral conduct. “첫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 욕구, 개선된 윤리적, 도덕적 행위의 선한 열매를 맺는 인간의 이타적 사랑이니라.

170:2.19 (1861.1) “Second. The kingdom of God in heaven, the goal of mortal believers, the estate wherein the love for God is perfected, and wherein the will of God is done more divinely.” “둘째, 하늘에서 하느님 나라는 믿는 필사자들의 목표,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해지고, 하느님의 뜻이 더 신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이니라.”

170:2.20 (1861.2) Jesus taught that, by faith, the believer enters the kingdom now. In the various discourses he taught that two things are essential to faith-entrance into the kingdom: 예수는 신자(信者)들이 신앙으로 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 강연에서 그는 신앙으로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두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170:2.21 (1861.3) 1. Faith, sincerity. To come as a little child, to receive the bestowal of sonship as a gift; to submit to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without questioning and in the full confidence and genuine trustfulness of the Father’s wisdom; to come into the kingdom free from prejudice and preconception; to be open-minded and teachable like an unspoiled child. 신앙, 성실. 어린아이로 와서 아들(자녀) 됨의 증여를 선물로 받아들이기. 아버지의 지혜를 완전히 신임(信任)하고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의심 없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함. 편견과 선입관 없이 나라에 들어오기. 때 묻지 않은 어린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가르침을 잘 듣기(마18:3, 19:14, 막10:14, 눅18:16).

170:2.22 (1861.4) 2. Truth hunger. The thirst for righteousness, a change of mind, the acquirement of the motive to be like God and to find God. 진리 갈망. 의(올바름)에 대한 갈증, 마음의 변화,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을 찾으려는 동기(動機) 습득(마5:6, 요7:37-38).

170:2.23 (1861.5) Jesus taught that sin is not the child of a defective nature but rather the offspring of a knowing mind dominated by an unsubmissive will. Regarding sin, he taught that God has forgiven; that we make such forgiveness personally available by the act of forgiving our fellows. When you forgive your brother in the flesh, you thereby create the capacity in your own soul for the reception of the reality of God’s forgiveness of your own misdeeds. 예수는 죄(罪)가 결점이 있는 본성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알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의지에 사로잡힌 마음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죄에 관해서, 그는 하느님이 용서했고, 우리가 우리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로 그런 하느님의 용서를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육신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할 때, 너희는 그로 인해 너희 자신의 혼(魂) 안에 너희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느님 용서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만들어 냅니다.

170:2.24 (1861.6) By the time the Apostle John began to write the story of Jesus’ life and teachings, the early Christians had experienced so much trouble with the kingdom-of-God idea as a breeder of persecution that they had largely abandoned the use of the term. John talks much about the “eternal life.” Jesus often spoke of it as the “kingdom of life.” He also frequently referred to “the kingdom of God within you.” He once spoke of such an experience as “family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Jesus sought to substitute many terms for the kingdom but always without success. Among others, he used: the family of God, the Father’s will, the friends of God, the fellowship of believers, the brotherhood of man, the Father’s fold, the children of God, the fellowship of the faithful, the Father’s service, and the liberated sons of God. 사도 요한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의 원인이 된 하느님 나라 사상으로 너무나 고생해서 그들은 그 용어의 사용을 거의 그만두었습니다. 요한은 “영생(永生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많이 말합니다(요3:15-16,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3, 요일1:2, 2:25, 3:15, 5:11, 13, 20). 예수는 그것에 대해 “생명의 나라”로 자주 말했습니다(마19:29, 25:41, 막10:30, 눅18:30, 요11:26). 그는 또한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마10:20, 눅17:21, 요17:21-23). 그는 그런 표현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와 갖는 가족 교제”라고 한번 말했습니다. 예수는 나라 대신에 여러 용어를 쓰려고 했지만 언제나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그는 하느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 공동체, 아버지의 양떼, 하느님의 자녀들, 신실한 신자들의 교제, 아버지의 봉사 및 하느님의 자유롭게 된 아들(자녀)들을 사용했습니다(마5:9, 16, 45, 6:10, 7:21, 12:50, 23:9, 26:39, 42, 44, 막3:35, 14:36, 39, 눅8:20-21, 11:2, 20:36, 22:42, 요4:34, 5:30, 6:38-40, 7:16-17, 10:16, 12:26, 14:21, 15:10, 17:4, 21:15-17).

170:2.25 (1861.7) But he could not escape the use of the kingdom idea. It was more than fifty years later, not until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 armies, that this concept of the kingdom began to change into the cult of eternal life as its social and institutional aspects were taken over by the rapidly expanding and crystallizing Christian church. 그러나 그는 나라 관념의 사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나라 개념이 영생 종파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50여 년 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비로소 급속히 확장되고 구체화하는 기독 교회가 사회적·제도적 국면을 장악하면서부터였습니다.

3. In Relation to Righteousness 의(義 바른 도리)와 관련하여

231231 신앙적 의(義 바른 도리)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70:3.1 (1861.8) Jesus was always trying to impress upon his apostles and disciples that they must acquire, by faith, a righteousness which would exceed the righteousness of slavish works which some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paraded so vaingloriously before the world. 예수는 언제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일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세상 앞에서 그렇게 허영심이 강하게 과시했던 맹종 행위의 의(義)보다 나은 의(義 바른 도리)를 신앙으로 몸에 익혀야 함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마5:20).

170:3.2 (1861.9) Though Jesus taught that faith, simple childlike belief, is the key to the door of the kingdom, he also taught that, having entered the door, there are the progressive steps of righteousness which every believing child must ascend in order to grow up to the full stature of the robust sons of God. 예수는 신앙, 순전히 어린이다운 믿음(마18:3, 19:14, 막10:15, 눅18:17)이 하느님 나라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그는 또한 그 문으로 들어간 후 모든 믿는 자녀가 견고한 하느님 아들(자녀)들의 온전한 수준으로 자라기 위해서 상승해야 하는 의(義 바른 도리)의 점진적 단계들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약2:14-26).

170:3.3 (1861.10) It is in the consideration of the technique of receiving God’s forgiveness that the attainment of the righteousness of the kingdom is revealed. Faith is the price you pay for entrance into the family of God; but forgiveness is the act of God which accepts your faith as the price of admission. And the reception of the forgiveness of God by a kingdom believer involves a definite and actual experience and consists in the following four steps, the kingdom steps of inner righteousness: 하느님 나라의 의(義 바른 도리)에 도달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법의 사례로 드러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가족 안에 들어갈 때 너희가 치르는 값입니다. 그러나 용서(容恕)는 너희 신앙을 입장료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믿는 신자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 뚜렷한 실제 체험이 따라오며, 내적 의(義 바른 도리)의 하느님 나라 단계는 다음 4단계입니다.

170:3.4 (1862.1) 1. God’s forgiveness is made actually available and is personally experienced by man just in so far as he forgives his fellows. 사람이 자기 동료를 용서하는 한도 내에서만 그가 하느님의 용서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고 스스로 체험합니다(마6:12, 14~15, 18:21~35, 막11:25~26, 눅6:37b, 11:4a, 17:3~4, 엡4:32, 요일2:12. 집28:1~7).

170:3.5 (1862.2) 2. Man will not truly forgive his fellows unless he loves them as himself. 사람이 자기 동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170:3.6 (1862.3) 3. To thu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the highest ethics. 3. 이렇게 자신처럼 너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윤리(倫理)입니다(레19:18, 34, 마19:19b, 22:39, 막12:31, 33, 눅10:27, 롬13:9b, 갈5:14, 약2:8).

170:3.7 (1862.4) 4. Moral conduct, true righteousness, becomes, then, the natural result of such love. 그러면 도덕적 행위, 참된 의(義 바른 도리)는 그런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됩니다.

170:3.8 (1862.5) It therefore is evident that the true and inner religion of the kingdom unfailingly and increasingly tends to manifest itself in practical avenues of social service. Jesus taught a living religion that impelled its believers to engage in the doing of loving service. But Jesus did not put ethics in the place of religion. He taught religion as a cause and ethics as a result.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내적 종교는 확실히, 점차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실용적 수단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신자들이 사랑의 봉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있는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윤리를 종교의 자리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교를 원인으로, 윤리를 결과로 가르쳤습니다(마20:26-27, 23:11, 막9:35, 10:43-44, 눅22:26).

170:3.9 (1862.6) The righteousness of any act must be measured by the motive; the highest forms of good are therefore unconscious. Jesus was never concerned with morals or ethics as such. He was wholly concerned with that inward and spiritual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which so certainly and directly manifests itself as outward and loving service for man. He taught that the religion of the kingdom is a genuine personal experience which no man can contain within himself; that the consciousness of being a member of the family of believers leads inevitably to the practice of the precepts of the family conduct, the service of one’s brothers and sisters in the effort to enhance and enlarge the brotherhood. 어떤 행위의 의(義 바른 도리)는 그 동기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선(善)은 무의식적입니다. 예수는 도덕이나 윤리 자체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사람을 향한 외적, 사랑의 봉사로 반드시, 바로 나타나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그런 내적, 영적 친교에 온전히 관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종교란 아무도 자신 안에서 결코 억누를 수 없는 진짜 자신만의 체험, 신자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의식(意識)은 반드시 가족 행위, 공동체를 향상하고 확장하려고 형제와 자매들을 섬기는 교훈의 실행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170:3.10 (1862.7) The religion of the kingdom is personal, individual; the fruits, the results, are familial, social. Jesus never failed to exalt the sacredness of the individual as contrasted with the community. But he also recognized that man develops his character by unselfish service; that he unfolds his moral nature in loving relations with his fellows. 하느님 나라의 종교는 개인적, 개별적입니다. 그 열매, 결과들은 가족적, 사회적입니다. 예수는 공동체와 대비하여 어김없이 개인의 신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은 이타적 봉사로 자기 성품이 계발(啓發)되고, 자기 동료들과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 밝혀진다고 인정했습니다.

170:3.11 (1862.8) By teaching that the kingdom is within, by exalting the individual, Jesus struck the deathblow of the old society in that he ushered in the new dispensation of true social righteousness. This new order of society the world has little known because it has refused to practice the principle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en this kingdom of spiritual pre-eminence does come upon the earth, it will not be manifested in mere improved social and material conditions, but rather in the glories of those enhanced and enriched spiritual values which are characteristic of the approaching age of improved human relations and advancing spiritual attainments.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안에 있다(눅17:21b)고 가르치고, 개인을 강조하면서, 참된 사회적 의(義 바른 도리)의 새로운 섭리(신의 결정)을 알렸다는 점에서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세상은 하늘나라의 복음의 원리를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이렇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전혀 몰랐습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이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임하면, 그것은 단지 개선된 사회적, 물질적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된 인간관계와 진보하는 영적 달성에 접근하는 시대의 특징인, 향상되고 풍성한, 그런 영적 가치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4. 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240107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4.1 (1862.9) Jesus never gave a precise definition of the kingdom. At one time he would discourse on one phase of the kingdom, and at another time he would discuss a different aspect of the brotherhood of God’s reign in the hearts of men. In the course of this Sabbath afternoon’s sermon Jesus noted no less than five phases, or epochs, of the kingdom, and they were: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 그는 하느님 나라의 한 면(面)에 대해 설교했고 다른 때 그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하느님이 다스리는 형제 공동체의 다른 면(面)을 논의하곤 했습니다. 오늘 안식일 오후 설교에서 예수는 5단계나 되는 하나님 나라 획 시대를 언급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170:4.2 (1862.10) 1. The personal and inward experience of the spiritual life of the fellowship of the individual believer with God the Father. 개별 신자가 하느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영적 생활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

170:4.3 (1863.1) 2. The enlarging brotherhood of gospel believers, the social aspects of the enhanced morals and quickened ethics resulting from the reign of God’s spirit in the hearts of individual believers. 복음 신자들의 확대된 형제 공동체, 개별 신자들의 심정에서 하느님의 영(靈)이 다스리는 결과인 향상된 도덕과 소생된 윤리의 사회적 모습.

170:4.4 (1863.2) 3. The supermortal brotherhood of invisible spiritual beings which prevails on earth and in heaven, the superhuman kingdom of God. 지상과 하늘에 퍼져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超)필사 형제 공동체, 초(超)인간적 하느님 나라.

170:4.5 (1863.3) 4. The prospect of the more perfect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the advance toward the dawn of a new social order in connection with improved spiritual living — the next age of man. 하느님의 뜻이 더 완전히 성취되는 전망, 개선된 영적 생활과 관련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여명(黎明)을 향한 전진, 즉 인간의 다음 시대.

170:4.6 (1863.4) 5. The kingdom in its fullness, the future spiritual age of light and life on earth. 충만한 하느님 나라, 지상에서 빛과 생명의 미래 영적 시대.

170:4.7 (1863.5) Wherefore must we always examine the Master’s teaching to ascertain which of these five phases he may have reference to when he makes use of the term kingdom of heaven. By this process of gradually changing man’s will and thus affecting human decisions, Michael and his associates are likewise gradually but certainly changing the entire course of human evolution, social and otherwise.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가 언급하는 것이 이런 5단계 중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언제나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를 점차 변화시켜서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미가엘과 그의 동료들은 사회적 및 기타 방식으로 인간 진화의 전체 과정을 마찬가지로 점진적이지만 확실히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170:4.8 (1863.6) The Master on this occasion placed emphasis on the following five points as representing the cardinal feature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이런 경우에 주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주요한 특징을 나타나는 다음 다섯 사항을 강조했습니다.

170:4.9 (1863.7) 1. The pre-eminence of the individual. 개인의 우선(于先)성.

170:4.10 (1863.8) 2. The will as the determining factor in man’s experience. 인간 체험을 결정짓는 요소인 의지.

170:4.11 (1863.9) 3. Spiritual fellowship with God the Father. 아버지 하느님과 영적 교제

170:4.12 (1863.10) 4. The supreme satisfactions of the loving service of man.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최고의 만족.

170:4.13 (1863.11) 5. The transcendency of the spiritual over the material in human personality. 인간 인격(고유성)에서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것.

170:4.14 (1863.12) This world has never seriously or sincerely or honestly tried out these dynamic ideas and divine ideals of Jesus’ doctrine of the kingdom of heaven. But you should not become discouraged by the apparently slow progress of the kingdom idea on Urantia. Remember that the order of progressive evolution is subjected to sudden and unexpected periodical changes in both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worlds. The bestowal of Jesus as an incarnated Son was just such a strange and unexpected event in the spiritual life of the world. Neither make the fatal mistake, in looking for the age manifestation of the kingdom, of failing to effect its establishment within your own souls. 이 세상은 예수의 하늘나라 교리가 지닌 이런 역동적 관념과 신적 이상(理想)을 진지하거나 성실하게 또는 정직하게 손을 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유란시아에서 하느님 나라 관념이 언뜻 보기에 천천히 진행된다고 해서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진보적 진화 체제는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모두에서 돌연한, 뜻밖의 주기적 변화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육신(成肉身)한 아들로서 예수의 증여는 세상의 영적 생활에서 바로 그렇게 낯선,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대적 징후를 찾으면서 너희 자신의 혼(魂) 안에 끝내 하느님 나라를 세우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170:4.15 (1863.13) Although Jesus referred one phase of the kingdom to the future and did, on numerous occasions, intimate that such an event might appear as a part of a world crisis; and though he did likewise most certainly, on several occasions, definitely promise sometime to return to Urantia, it should be recorded that he never positively linked these two ideas together. He promised a new revelation of the kingdom on earth and at some future time; he also promised sometime to come back to this world in person; but he did not say that these two events were synonymous. From all we know these promises may, or may not, refer to the same event.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한 단계를 미래로 언급하고, 여러 차례 그런 사건이 세상 위기의 일부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암시했고(마24:29-31, 막13:24-27), 마찬가지로 그가 여러 경우에 절대로 틀림없이, 언젠가 유란시아에 돌아온다고 명백히 약속했어도, 그는 이런 두 관념을 확실히 함께 결코 관련을 짓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는 지상에서 미래에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계시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또한 언젠가 직접 이 세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 사건이 동의어(同義語)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런 약속들은 같은 사건을 언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70:4.16 (1863.14) His apostles and disciples most certainly linked these two teachings together. When the kingdom failed to materialize as they had expected, recalling the Master’s teaching concerning a future kingdom and remembering his promise to come again, they jumped to the conclusion that these promises referred to an identical event; and therefore they lived in hope of his immediate second coming to establish the kingdom in its fullness and with power and glory. And so have successive believing generations lived on earth entertaining the same inspiring but disappointing hope.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런 두 가르침을 가장 확실하게 관련지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하느님 나라가 끝내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미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내고, 다시 온다는 그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런 약속들이 동일 사건을 언급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눅21:25-28).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충만하게, 권능과 영광으로 세우기 위해서, 그가 즉시 다시 오는(재림 再臨)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잇따라 믿는 세대들이 마찬가지로 고무적(鼓舞的)이지만 실망스러운 희망을 품고 지상에서 살았습니다.

5. Later Ideas of the Kingdom 하느님 나라의 후기 사상

240114 사회적 형제 공동체 vs 영적 형제 공동체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5.1 (1864.1) Having summarized the teachings of Jesus about the kingdom of heaven, we are permitted to narrate certain later ideas which became attached to the concept of the kingdom and to engage in a prophetic forecast of the kingdom as it may evolve in the age to come.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한 후, 하느님 나라의 개념에 첨부된 특정한 후기 사상을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시대에 차츰 전개될 수도 있는 하느님 나라의 예언적 예측에 착수하도록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170:5.2 (1864.2) Throughout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propaganda, the idea of the kingdom of heaven was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then rapidly spreading notions of Greek idealism, the idea of the natural as the shadow of the spiritual — the temporal as the time shadow of the eternal. 기독교가 선포된 첫 세기 내내, 하늘나라의 관념은 당시 순식간에 퍼진 그리스 이상주의(理想主義) 개념, 자연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현세(現世)는 영원한 것의 시간적 그림자라는 관념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골2:17, 히8:5, 10:1).

170:5.3 (1864.3) But the great step which marked the transplantation of the teachings of Jesus from a Jewish to a gentile soil was taken when the Messiah of the kingdom became the Redeemer of the church, a religious and social organization growing out of the activities of Paul and his successors and based on the teachings of Jesus as they were supplemented by the ideas of Philo and the Persian doctrines of good and evil.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인의 토양에서 이방인의 토양으로 옮겨 심은 표시였던 커다란 단계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아가,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의 활동으로 생겨나,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필로의 사상과 페르시아의 선악(善惡) 교리가 추가된,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기구, 교회의 구세주가 되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170:5.4 (1864.4) The ideas and ideals of Jesus, embodied in the teaching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nearly failed of realization as his followers progressively distorted his pronouncements. The Master’s concept of the kingdom was notably modified by two great tendencies: 하느님 나라 복음의 가르침으로 구현된, 예수의 관념(觀念)과 이상(理想)은 그의 추종자들이 점차 그의 선언을 왜곡함에 따라서 거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은 커다란 두 경향으로 현저히 수정되었습니다.

170:5.5 (1864.5) 1. The Jewish believers persisted in regarding him as the Messiah. They believed that Jesus would very soon return actually to establish the world-wide and more or less material kingdom. 유대인 신자들은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그를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곧 실제로 돌아와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물질적인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70:5.6 (1864.6) 2. The gentile Christians began very early to accept the doctrines of Paul, which led increasingly to the general belief that Jesus was the Redeemer of the children of the church, the new and institutional successor of the earlier concept of the purely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kingdom. 이방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순수한 영적 형제 공동체라는 초기 개념의 새로운 제도적 후계자, 교회에 속한 자녀들의 구세주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점차 이어졌습니다(엡1:22, 5:23, 32, 골1:18).

170:5.7 (1864.7) The church, as a social outgrowth of the kingdom, would have been wholly natural and even desirable. The evil of the church was not its existence, but rather that it almost completely supplanted the Jesus concept of the kingdom. Paul’s institutionalized church became a virtual substitute for the kingdom of heaven which Jesus had proclaimed. 교회,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곁가지는 완전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해악은 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을 거의 완전히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은 것입니다. 바울이 규정한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의 사실상 대용품(代用品)이 되었습니다(롬12:5, 고전12:12, 골2:19).

170:5.8 (1864.8) But doubt not, this same kingdom of heaven which the Master taught exists within the heart of the believer, will yet be proclaimed to this Christian church, even as to all other religions, races, and nations on earth — even to every individual. 그러나 주께서 가르친 이 하늘나라가 신자(信者)의 심정 내부에 존재하며, 이제부터 이 기독교 교회, 심지어 다른 모든 종교, 인종 및 지상의 모든 국가, 모든 개인에게까지 선포될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170:5.9 (1864.9) The kingdom of Jesus’ teaching, the spiritual ideal of individual righteousness and the concept of man’s divine fellowship with God, became gradually submerged into the mystic conception of the person of Jesus as the Redeemer-Creator and spiritual head of a socialized religious community. In this way a formal and institutional church became the substitute for the individually spirit-led brotherhood of the kingdom.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 개인적 의(義 바른 도리)의 영적 이상(理想)과 사람이 하느님과 신적으로 교제하는 개념은 인간 예수가 구세주-창조자이며 사회화 종교 공동체의 영적 머리라는 신비적 개념 안으로 점차 잠겼습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는 영(靈)이 개인별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형제 공동체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170:5.10 (1864.10) The church was an inevitable and useful social result of Jesus’ life and teachings; the tragedy consisted in the fact that this social reaction to the teachings of the kingdom so fully displaced the spiritual concept of the real kingdom as Jesus taught and lived it. 교회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당연하고 유용한 사회적 결과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이런 사회적 반응이, 예수께서 가르치고 사셨던 진짜 하느님 나라의 영적 개념을 추방하고 대신 그렇게 완전히 들어섰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었습니다.

170:5.11 (1865.1) The kingdom, to the Jews, was the Israelite community; to the gentiles it became the Christian church. To Jesus the kingdom was the sum of those individuals who had confessed their faith in the fatherhood of God, thereby declaring their wholehearted dedication to the doing of the will of God, thus becoming members of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유대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였으며, 이방인들에게 그것은 기독교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뜻의 실행에 자신들의 전심을 헌신하기로 선언하여,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그런 개인들의 총합이었습니다.

240128 영적 하느님 나라와 사회적 교회 눅17:21b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0:5.12 (1865.2) The Master fully realized that certain social results would appear in the world as a consequence of the spread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he intended that all such desirable social manifestations should appear as unconscious and inevitable outgrowths, or natural fruits, of this inner personal experience of individual believers, this purely spiritual fellowship and communion with the divine spirit which indwells and activates all such believers.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확장된 결과로 어떤 사회적 결과가 세상에 나타날 것을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바람직한 사회적 현상이 개별 신자들의 개인적인 내적 체험, 그런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여 촉진하는 신적 영(靈)과 이렇게 순전하게 영적인 사귐과 친교에서 나온, 무의식적이고 필연적인 결과, 즉 자연스러운 열매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70:5.13 (1865.3) Jesus foresaw that a social organization, or church, would follow the progress of the true spiritual kingdom, and that is why he never opposed the apostles’ practicing the rite of John’s baptism. He taught that the truth-loving soul, the one who hungers and thirsts for righteousness, for God, is admitted by faith to the spiritual kingdom; at the same time the apostles taught that such a believer is admitted to the social organization of disciples by the outward rite of baptism. 예수는 사회적 조직, 즉 교회가 참된 영적 하느님 나라의 진보를 따를 것을 내다봤고, 그래서 그는 사도들이 실행한 요한의 세례 의식(행2:38, 41, 8:12, 갈3:27)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혼(魂), 의(義)와 하느님을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5:6, 눅6:21)은 신앙으로 영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사도들은 그런 신자가 외적 세례 의식을 통해 제자들의 사회적 조직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고 가르쳤습니다.

170:5.14 (1865.4) When Jesus’ immediate followers recognized their partial failure to realize his ideal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in the hearts of men by the spirit’s domination and guidance of the individual believer, they set about to save his teaching from being wholly lost by substituting for the Master’s ideal of the kingdom the gradual creation of a visible social organization, the Christian church. And when they had accomplished this program of substitution, in order to maintain consistency and to provide for the recognition of the Master’s teaching regarding the fact of the kingdom, they proceeded to set the kingdom off into the future. The church, just as soon as it was well established, began to teach that the kingdom was in reality to appear at the culmination of the Christian age,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이 개별 신자에 대한 영(靈)의 지배와 인도로 사람들의 심정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그의 이상(理想)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알아내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회 조직, 기독교 교회를 점차 만들어 주님의 하느님 나라 이상(理想)을 대체(代替)하여서 완전히 없어지는 그의 가르침을 구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대체 계획이 완성되자, 하느님 나라의 사실에 관한 주님 가르침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알아보도록,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미래로 향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잘 설립되자마자 기독교 시대의 절정(絶頂), 즉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70:5.15 (1865.5) In this manner the kingdom became the concept of an age, the idea of a future visitation, and the ideal of the final redemption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The early Christians (and all too many of the later ones) generally lost sight of the Father-and-son idea embodied in Jesus’ teaching of the kingdom, while they substituted therefor the well-organized social fellowship of the church. The church thus became in the main a social brotherhood which effectively displaced Jesus’ concept and ideal of a spiritual brotherhood. 이런 식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대의 개념, 미래에 임한다는 사상과 지고(至高) 성도(聖徒)가 최종적으로 구속(救贖)되는 이상(理想)이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후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가르침에 담긴 아버지와-아들 사상을 전체적으로 잃어버렸고 반면에 그들은 그것 대신에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친교로 대체(代替)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예수의 영적 형제 공동체 개념과 이상(理想) 대신 들어선 사실상 사회적 형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170:5.16 (1865.6) Jesus’ ideal concept largely failed, but upon the foundation of the Master’s personal life and teachings, supplemented by the Greek and Persian concepts of eternal life and augmented by Philo’s doctrine of the temporal contrasted with the spiritual, Paul went forth to build up one of the most progressive human societies which has ever existed on Urantia. 예수의 이상적(理想的) 개념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생 개념을 추가하고, 영적인 것과 대조적인 현세적인 것에 대한 필로의 교리로 확대된, 주님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의 토대 위에, 바울은 유란시아에 일찍이 존재했던 가장 진보적인 인간 단체 중 하나를 세우려고 나섰습니다.

170:5.17 (1865.7) The concept of Jesus is still alive in the advanced religions of the world. Paul’s Christian church is the socialized and humanized shadow of what Jesus intended the kingdom of heaven to be — and what it most certainly will yet become. Paul and his successors partly transferred the issues of eternal life from the individual to the church. Christ thus became the head of the church rather than the elder brother of each individual believer in the Father’s family of the kingdom. Paul and his contemporaries applied all of Jesus’ spiritual implications regarding himself and the individual believer to the church as a group of believers; and in doing this, they struck a deathblow to Jesus’ concept of the divine kingdom in the heart of the individual believer. 예수의 개념은 세상의 진보 종교들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바울의 기독교 교회는 예수가 의도한 하늘나라의 상태 –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가장 확실히 이루어질 것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입니다. 바울과 그의 후계자들은 영생의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교회로 일부분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아버지 가족의 개별 각 신자의 형(兄)보다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엡5:23, 골1:18). 바울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예수 자신과 개별 신자에 대한 그의 모든 영적 의미를 신자(信者)들 집단으로써 교회에 적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개별 신자의 심정에 있는 예수의 신적 하느님 나라 개념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240128 기독교와 예수 복음 마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170:5.18 (1866.1) And so, for centuries, the Christian church has labored under great embarrassment because it dared to lay claim to those mysterious powers and privileges of the kingdom, powers and privileges which can be exercised and experienced only between Jesus and his spiritual believer brothers. And thus it becomes apparent that membership in the church does not necessarily mean fellowship in the kingdom; one is spiritual, the other mainly social. 그래서 기독교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그런 신비한 권세와 특권, 예수와 그의 영적 신자 형제(자녀)들 사이에서만 행사되고 체험될 수 있는 권세와 특권에 대한 소유권을 감히 주장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커다란 부끄러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친교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하나는 영적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사회적입니다.

170:5.19 (1866.2) Sooner or later another and greater John the Baptist is due to arise proclaiming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 meaning a return to the high spiritual concept of Jesus, who proclaimed that the kingdom is the will of his heavenly Father dominant and transcendent in the heart of the believer — and doing all this without in any way referring either to the visible church on earth or to the anticipated second coming of Christ. There must come a revival of the actual teachings of Jesus, such a restatement as will undo the work of his early followers who went about to create a sociophilosophical system of belief regarding the fact of Michael’s sojourn on earth. In a short time the teaching of this story about Jesus nearly supplanted the preaching of Jesus’ gospel of the kingdom. In this way a historical religion displaced that teaching in which Jesus had blended man’s highest moral ideas and spiritual ideals with man’s most sublime hope for the future — eternal life. And that was the gospel of the kingdom. 머잖아 또 다른 더 큰 세례 요한이 일어나, 하느님 나라는 신자의 심정을 다스리는 초월적인 예수의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선포한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가는 의미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라고 선포하고 지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나 고대했던 예수 재림을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이런 모든 것을 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의 회복, 지상에 머물렀던 미가엘의 사실에 관해 사회 철학적인 믿음의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던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과업을 원상태로 돌릴 그런 재성명(再聲明 다시 공개적으로 발표)이 있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예수에 대한 이런 이야기의 가르침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 설교를 거의 대신하여 들어앉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종교가, 예수가 인간의 최고 도덕적 사상과 영적 이상(理想)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미래 희망 – 영원한 생명과 조화시킨 그런 가르침 대신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마10:7, 막1:15, 눅21:31).

170:5.20 (1866.3) It is just because the gospel of Jesus was so many-sided that within a few centuries students of the records of his teachings became divided up into so many cults and sects. This pitiful subdivision of Christian believers results from failure to discern in the Master’s manifold teachings the divine oneness of his matchless life. But someday the true believers in Jesus will not be thus spiritually divided in their attitude before unbelievers. Always we may have diversity of intellectual comprehension and interpretation, even varying degrees of socialization, but lack of spiritual brotherhood is both inexcusable and reprehensible. 단지 예수의 복음이 너무 다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몇 세기 만에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연구자들은 너무 많은 종파와 교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런 가엾은 분열은 주님의 다양한 가르침에서 그의 비길 데 없는 생애의 신적 단일성을 분별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의 참된 신자들은 불신자들 앞에서 그 태도가 이렇게 영적으로 나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적 이해와 해석의 다양성, 사회화의 정도까지 다양할 수도 있지만, 영적 형제 공동체성의 부족은 변명할 수 없고 괘씸한 것입니다.

170:5.21 (1866.4) Mistake not! there is in the teachings of Jesus an eternal nature which will not permit them forever to remain unfruitful in the hearts of thinking men. The kingdom as Jesus conceived it has to a large extent failed on earth; for the time being, an outward church has taken its place; but you should comprehend that this church is only the larval stage of the thwarted spiritual kingdom, which will carry it through this material age and over into a more spiritual dispensation where the Master’s teachings may enjoy a fuller opportunity for development. Thus does the so-called Christian church become the cocoon in which the kingdom of Jesus’ concept now slumbers. The kingdom of the divine brotherhood is still alive and will eventually and certainly come forth from this long submergence, just as surely as the butterfly eventually emerges as the beautiful unfolding of its less attractive creature of metamorphic development. 실수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에는 분별 있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언제까지나 결실하지 못한 채 남아있도록 놔두지 않을 영원한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해 낸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서 대부분 사라져갔고 당분간 표면에 나타난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 교회가 방해받은 영적 하느님 나라의 유충기(幼蟲期 애벌레 단계)일 뿐이며, 교회는 방해받은 영적 하느님 나라를 싣고 이런 물질 시대를 거쳐 주님의 가르침이 더 충만한 발전 기회를 누릴 수 있는 더 영적인 섭리(신의 결정) 시대로 치닫도록 운반할(옮겨 나를)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위 기독교 교회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개념이 지금 깜박 졸고 있는 고치가 됩니다. 신적 형제 공동체의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나비가 변태(變態 형태가 변함) 발달의 매력적이지 않은 생물로부터 결국 아름답게 펼치며 벗어나듯이, 신적 형제 공동체의 하느님 나라는 이런 오랜 침잠(沈潛 가라앉아 숨은 상태)에서 결국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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