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6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

Paper 6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

  1. Identity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정체성
  2. Nature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본성
  3. Ministry of the Father’s Love 아버지 사랑의 돌봄
  4. Attributes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속성들
    Omnipotence, omnipresence, omniscience 전능(全能), 전재(全在), 전지(全知)
  5. Limitations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한계
  6. The Spirit Mind 영 마음
  7.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고유성
  8. Realization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실체화

170510 요1:18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이 그분을 알리셨다.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God the One and Only, who is at the Father’s side, has made him known.

6:0.1 (73.1) THE Eternal Son is the perfect and final expression of the “first” personal and absolute concept of the Universal Father. Accordingly, whenever and however the Father personally and absolutely expresses himself, he does so through his Eternal Son, who ever has been, now is, and ever will be, the living and divine Word. And this Eternal Son is residential at the center of all things, in association with, and immediately enshrouding the personal presence of, the Eternal and Universal Father.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첫 번째” 고유한 절대적 개념에 대한 완전한 최종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고유적이며 절대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표현하는 방법마다, 영원 아들을 통하여 그렇게 행하시는데, 영원 아들은 언제나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고, 언제나 그러하실, 살아 계신 신적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 아들은 영원 우주 아버지와 연합하면서 그 고유적 현존을 즉각적으로 감싸는, 만물의 중심에 거(居)하십니다.

6:0.2 (73.2) We speak of God’s “first” thought and allude to an impossible time origin of the Eternal Son for the purpose of gaining access to the thought channels of the human intellect. Such distortions of language represent our best efforts at contact-compromise with the time-bound minds of mortal creatures. In the sequential sense the Universal Father never could have had a first thought, nor could the Eternal Son ever have had a beginning. But I was instructed to portray the realities of eternity to the time-limited minds of mortals by such symbols of thought and to designate the relationships of eternity by such time concepts of sequentiality. 우리는 인간 지성의 생각 통로로 가는 접근경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첫 번째” 생각을 말하고 영원 아들의 불가능한 시간 기원에 대하여 암시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왜곡은 시간에-매인 필사 창조물의 마음과 접촉-절충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노력을 뜻합니다. 순차적 의미로, 우주 아버지께서 첫 번째 생각을 하셨을 수도 없고, 영원 아들이 시작하신 때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간에-제한을 받는 필사자의 마음에 그러한 생각의 상징들로 영원의 실체들을 묘사하고, 그러한 순차성의 시간 개념으로 영원성의 관계들을 나타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6:0.3 (73.3) The Eternal Son is the spiritual personalization of the Paradise Father’s universal and infinite concept of divine reality, unqualified spirit, and absolute personality. And thereby does the Son constitute the divine revelation of the creator identity of the Universal Father. The perfect personality of the Son discloses that the Father is actually the eternal and universal source of all the meanings and values of the spiritual, the volitional, the purposeful, and the personal. 영원 아들은, 신적 실체, 분별이 불가능한 영, 그리고 절대 고유성으로 구성된 천국 아버지의 우주적 무한한 개념이 영적(靈的) 고유성화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창조자 정체성을 구성하여 신적으로 계시하십니다. 아들의 완전한 고유성은, 아버지께서 실제로 영적, 의지적, 목적적, 그리고 고유적인 모든 의미와 가치의 영원한 우주적 근원임을 드러냅니다.

6:0.4 (73.4) In an effort to enable the finite mind of time to form some sequential concept of the relationships of the eternal and infinite beings of the Paradise Trinity, we utilize such license of conception as to refer to the “Father’s first personal, universal, and infinite concept.” It is impossible for me to convey to the human mind any adequate idea of the eternal relations of the Deities; therefore do I employ such terms as will afford the finite mind something of an idea of the relationship of these eternal beings in the subsequent eras of time. We believe the Son sprang from the Father; we are taught that both are unqualifiedly eternal. It is apparent, therefore, that no time creature can ever fully comprehend this mystery of a Son who is derived from the Father, and yet who is co-ordinately eternal with the Father himself. 시간 속에 사는 유한한 마음에 천국 삼위일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한 어떤 순차적 개념을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첫 번째 고유적, 우주적, 그리고 무한한 개념”을 그렇게 언급하도록 허락된 개념을 사용합니다. 신(神)들의 영원한 관계에 대한 어떤 적절한 관념을 인간 마음에 전달하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차후 시대에 이 영원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한 다소의 관념을 유한한 마음에게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고 믿고 있으며, 우리는 두 분 모두 무조건unqualifiedly 영원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유래되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 자신과 동등하게 영원한, 아들의 이 신비를, 어떤 시간적 창조물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1. Identity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정체성

170517 요1:1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John 1:1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6:1.1 (73.5) The Eternal Son is the original and only-begotten Son of God. He is God the Son, the Second Person of Deity and the associate creator of all things. As the Father is the First Great Source and Center, so the Eternal Son is the Second Great Source and Center. 영원 아들은 하나님께서 최초에 하나만 얻은 독생자이십니다. 그는 아들 하나님이시며, 신(神)의 두 번째 개인이시고, 만물의 부(副)창조자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첫 번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이신 것처럼, 영원 아들은 두 번째 위대한 근원이며 중심이십니다.

6:1.2 (74.1) The Eternal Son is the spiritual center and the divine administrator of the spiritual government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 Universal Father is first a creator and then a controller; the Eternal Son is first a cocreator and then a spiritual administrator. “God is spirit,” and the Son is a personal revelation of that spirit.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the Volitional Absolute;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is the Personality Absolute. 영원 아들은 온 우주의 영적 정부에서 영적 중심이시며, 신적 경영자입니다. 우주 아버지는 첫째로 창조자이시고, 그 다음으로는 조정자이십니다. 영원 아들은 첫째로 공동 창조자이시고, 그 다음으로는 영적 행정관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아들은 영이신 하나님의 개인적 계시이십니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의지적 절대자Volitional Absolute이시며, 둘째 근원이며 중심은 고유성 절대자Personality Absolute이십니다.

6:1.3 (74.2) The Universal Father never personally functions as a creator except in conjunction with the Son or with the co-ordinate action of the Son. Had the New Testament writer referred to the Eternal Son, he would have uttered the truth when he wrote: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우주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하거나 아들과 나란히 행동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창조자로서 몸소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을 때 신약의 저자(著者)가 영원 아들을 언급했었더라면 진리를 말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170518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 John 1:1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6:1.4 (74.3) When a Son of the Eternal Son appeared on Urantia, those who fraternized with this divine being in human form alluded to him as “He who was from the beginning, whom we have heard, whom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om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even the Word of life.” And this bestowal Son came forth from the Father just as truly as did the Original Son, as is suggested in one of his earthly prayers: “And now, O my Father, glorify me with your own 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you before this world was.” 영원 아들의 한 아들이 지구(유란시아)에 나타났을 때, 사람의 모습을 입은 이 신적 존재와 친하게 사귄 사람들은, 그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라고 언급했습니다. 최초의 아들이 참으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수여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왔고, 이것은 그가 땅에서 하신 기도 중 하나에 제시된 바와 같습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John 17:5 KJV)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ine own 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6:1.5 (74.4) The Eternal Son is known by different names in various universes. In the central universe he is known as the Co-ordinate Source, the Cocreator, and the Associate Absolute. On Uversa, the headquarters of the superuniverse, we designate the Son as the Co-ordinate Spirit Center and as the Eternal Spirit Administrator. On Salvington, the headquarters of your local universe, this Son is of record as the Second Eternal Source and Center. The Melchizedeks speak of him as the Son of Sons. On your world, but not in your system of inhabited spheres, this Original Son has been confused with a co-ordinate Creator Son, Michael of Nebadon, who bestowed himself upon the mortal races of Urantia. 영원 아들은 여러 우주에서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앙 우주에서 그분은 동등한 근원, 공동 창조자, 부(副)절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우주 본부 우버르사에서 우리는 그 아들을 동등한 영 중심, 영원 영 행정관으로 부릅니다. 너희 지역 우주 본부 구원자별에서 이 아들은 두 번째 영원 근원과 중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들은 그를 아들 중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물이 거주하는 구체로 된 너희 체계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너희 세계에서 이 최초의 아들은 한 동격의 창조자 아들, 네바돈의 미가엘과 혼동되어 왔는데, 그는 유란시아의 필사 종족들에게 자신을 수여하셨습니다.

6:1.6 (74.5) Although any of the Paradise Sons may fittingly be called Sons of God, we are in the habit of reserving the designation “the Eternal Son” for this Original Son,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cocreator with the Universal Father of the central universe of power and perfection and cocreator of all other divine Sons who spring from the infinite Deities. 천국 아들들 가운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 적절히 불릴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 최초의 아들, 두 번째 근원이며 중심, 우주의 아버지와 함께 권능과 완전성으로 이루어진 중앙 우주의 공동 창조자, 무한 신들로부터 솟아오른 다른 모든 신적 아들들의 공동 창조자를 부를 때 습관적으로 “영원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2. Nature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본성

170525 요14:9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John 14:9 KJV) Jesus saith unto him, Have I been so long time with you, and yet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and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6:2.1 (74.6) The Eternal Son is just as changeless and infinitely dependable as the Universal Father. He is also just as spiritual as the Father, just as truly an unlimited spirit. To you of lowly origin the Son would appear to be more personal since he is one step nearer you in approachability than is the Universal Father.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으시고 무한히 신뢰할 만하십니다. 그는 바로 아버지와 똑같이 영적이시며, 참으로 똑같이 제한이 없는 영이십니다. 낮은 기원을 지닌 너희에게 그 분은 우주 아버지보다 접근성에서 한발자국 더 너희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 좀 더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6:2.2 (74.7) The Eternal Son is the eternal Word of God. He is wholly like the Father; in fact, the Eternal Son is God the Father personally manifest to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us it was and is and forever will be true of the Eternal Son and of all the co-ordinate Creator Sons: “He who has seen the Son has seen the Father.” 영원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그는 온통 아버지와 같으시며; 사실, 영원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에 개인적으로 드러낸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원 아들과 동등한 모든 창조주 아들에 대해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는 이 말은 전에도 진실했고, 지금도 진실하며, 그리고 언제까지나 진실일 것입니다.

6:2.3 (74.8) In nature the Son is wholly like the spirit Father. When we worship the Universal Father, actually we at the same time worship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God the Son is just as divinely real and eternal in nature as God the Father. 본성에 있어서 아들은 온통 영 아버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우주 아버지를 경배할 때, 실제로 우리는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을 동시에 경배합니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처럼 그렇게 본성에 있어서 신적으로 실재하며 영원하십니다.

6:2.4 (75.1) The Son not only possesses all the Father’s infinite and transcendent righteousness, but the Son is also reflective of all the Father’s holiness of character. The Son shares the Father’s perfection and jointly shares the responsibility of aiding all creatures of imperfection in their spiritual efforts to attain divine perfection.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무한하고 초월적인 공의(公義)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아들은 또한 아버지의 모든 거룩한 성품까지도 반영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성을 함께 공유하며, 신적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저들의 영적 노력 가운데 있는 모든 불완전성의 창조물들을 도와주는 책임도 함께 공유하십니다.

170526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6:2.5 (75.2) The Eternal Son possesses all the Father’s character of divinity and attributes of spirituality. The Son is the fullness of God’s absoluteness in personality and spirit, and these qualities the Son reveals in his personal management of the spiritual government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영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신성의 성품과 영성(靈性)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은 고유성과 영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성의 충만함이며, 영원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정부를 개인적으로 경영하면서 이러한 본질 특성을 드러내십니다.

6:2.6 (75.3) God is, indeed, a universal spirit; God is spirit; and this spirit nature of the Father is focalized and personalized in the Deity of the Eternal Son. In the Son all spiritual characteristics are apparently greatly enhanced by differentiation from the universalit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And as the Father shares his spirit nature with the Son, so do they together just as fully and unreservedly share the divine spirit with the Conjoint Actor, the Infinite Spirit. 하나님은, 참으로, 우주적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 영 본성은 영원 아들의 신(神)으로 집중되고 개인성화 됩니다. 아들 안에서, 모든 영적 성품들은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보편성으로부터 구별되어, 대단히 명백하게 증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의 영 본성을 아들과 함께 공유하듯이, 그들은 공동 행위자, 무한 영과 더불어, 신적 영을 마찬가지로 충분하게 거리낌 없이 함께 공유하십니다.

6:2.7 (75.4) In the love of truth and in the creation of beauty the Father and the Son are equal except that the Son appears to devote himself more to the realization of the exclusively spiritual beauty of universal values. 아들이 우주적 가치에 대해 전적으로 영적인 아름다움(美)의 실현에 자신을 더욱 헌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버지와 아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함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

6:2.8 (75.5) In divine goodness I discern no difference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The Father loves his universe children as a father; the Eternal Son looks upon all creatures both as father and as brother. 신적 선(善)에 있어서, 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의 우주 자녀들을 아버지로서 사랑하시며,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물들을 아버지와 형제로서 바라보십니다.

3. Ministry of the Father’s Love 아버지 사랑의 돌봄

170531 대상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love endures forever.

6:3.1 (75.6) The Son shares the justice and righteousness of the Trinity but overshadows these divinity traits by the infinite personalization of the Father’s love and mercy; the Son is the revelation of divine love to the universes. As God is love, so the Son is mercy. The Son cannot love more than the Father, but he can show mercy to creatures in one additional way, for he not only is a primal creator like the Father, but he is also the Eternal Son of that same Father, thereby sharing in the sonship experience of all other sons of the Universal Father. 아들은 삼위일체의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공유하지만, 이러한 신성의 특성들(정의와 공의)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무한한 고유성 구현으로 그 빛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아들은 우주에 대한 신적 사랑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아들은 자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는 한 가지 추가적 방법으로 창조물들에게 자비를 보여 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아버지처럼 최초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일한 아버지의 영원 아들로서, 우주 아버지의 다른 모든 아들들의 지닌 아들관계 체험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6:3.2 (75.7) The Eternal Son is the great mercy minister to all creation. Mercy is the essence of the Son’s spiritual character. The mandates of the Eternal Son, as they go forth over the spirit circuits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are keyed in tones of mercy.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물에게 위대한 자비의 봉사자이십니다. 자비는 아들의 영 성품의 본질입니다. 영원 아들의 명령이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영 순환회로들을 건너 나아갈 때, 그 명령은 자비의 음정으로 조율됩니다.

6:3.3 (75.8) To comprehend the love of the Eternal Son, you must first perceive its divine source, the Father, who is love, and then behold the unfolding of this infinite affection in the far-flung ministry of the Infinite Spirit and his almost limitless host of ministering personalities. 영원 아들의 사랑을 이해하려면, 그것의 신적 근원, 사랑이신 아버지를 너희가 먼저 파악해야만 하며, 그 다음에, 무한 영(靈)과 그의 거의 한없는 섬김의 고유성 무리들이 멀리까지 미치는 섬김에서, 이 무한한 애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170601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6:3.4 (75.9) The ministry of the Eternal Son is devoted to the revelation of the God of love to the universe of universes. This divine Son is not engaged in the ignoble task of trying to persuade his gracious Father to love his lowly creatures and to show mercy to the wrongdoers of time. How wrong to envisage the Eternal Son as appealing to the Universal Father to show mercy to his lowly creatures on the material worlds of space! Such concepts of God are crude and grotesque. Rather should you realize that all the merciful ministrations of the Sons of God are a direct revelation of the Father’s heart of universal love and infinite compassion. The Father’s love is the real and eternal source of the Son’s mercy. 영원 아들의 봉사는 온 우주에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계시) 데에 바쳐집니다. 이 신적 아들은 그의 인자한 아버지가 미천한 창조물들을 사랑하도록 설득하고, 시간 속에 살면서 그릇된 행동을 한 자들에게 자비를 보이도록 설득하려고 애쓰는 미천한 일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공간의 물질세계에 있는 그의 낮은 창조물들을 위하여 우주 아버지가 자비를 보여주시도록 간청하는 영원 아들을 그려보는 것은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유치하고 기괴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든 자비로운 직무는 우주의 사랑과 무한한 연민을 가진 아버지의 진심을 직접 계시하는 것임을, 너희는 깨달아야만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베푸는 자비의 실재이자 영원한 근원입니다.

6:3.5 (75.10) God is love, the Son is mercy. Mercy is applied love, the Father’s love in action in the person of his Eternal Son. The love of this universal Son is likewise universal. As love is comprehended on a sex planet, the love of God is more comparable to the love of a father, while the love of the Eternal Son is more like the affection of a mother. Crude, indeed, are such illustrations, but I employ them in the hope of conveying to the human mind the thought that there is a difference, not in divine content but in quality and technique of expression, between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love of the Son.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아들은 자비이십니다. 자비는 적용된 사랑, 그의 영원 아들의 개인 안에서 행하여지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우주 아들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우주적입니다. 사랑이 남녀 성(性)의 구별이 있는 행성에서 이해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더 견줄만하고 반면에, 영원 아들의 사랑은 어머니의 애정과 더 비슷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정말로 미숙하기 그지없지만, 나는 그것들을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 사이에, 그 신적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과 표현의 기법에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인간 마음에 전달하려는 희망으로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4. Attributes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속성

170607 골1: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계신 분입니다. He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the firstborn over all creation.

6:4.1 (76.1) The Eternal Son motivates the spirit level of cosmic reality; the spiritual power of the Son is absolute in relation to all universe actualities. He exercises perfect control over the interassociation of all undifferentiated spirit energy and over all actualized spirit reality through his absolute grasp of spirit gravity. All pure unfragmented spirit and all spiritual beings and values are responsive to the infinite drawing power of the primal Son of Paradise. And if the eternal future should witness the appearance of an unlimited universe, the spirit gravity and the spirit power of the Original Son will be found wholly adequate for the spiritual control and effective administration of such a boundless creation. 영원 아들은 질서 우주에 있는 실체의 영 수준을 자극하십니다. 아들의 영적 권능은 모든 우주 실제 사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그는 영 중력(重力)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장악(파악)을 통하여, 차별화되지 않은 모든 영 에너지의 상호연합과 실제화된 모든 영 실체에 대해 완전한 조정을 행사하십니다. 순수하고 단편화되지 않은 모든 영과 모든 영적 존재와 가치는, 최초의 천국 아들의 무한히 끌어 당기는 권능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미래가 무제한적 우주의 출현을 목격하는 경우, 기원 아들의 영 중력과 영 권능은, 그러한 한없는 창조에 대한 영적 조정과 효과적인 관리에 온전히 적합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6:4.2 (76.2) The Son is omnipotent only in the spiritual realm. In the eternal economy of universe administration, wasteful and needless repetition of function is never encountered; the Deities are not given to useless duplication of universe ministry. 아들은 영적 영역 안에서만 전능(全能)하십니다. 우주 관리의 영원한 섭리 안에서, 낭비적이고 불필요한 기능적 반복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神)들은 우주 돌봄에서 쓸모없이 중복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6:4.3 (76.3) The omnipresence of the Original Son constitutes the spiritual unity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 spiritual cohesion of all creation rests upon the everywhere active presence of the divine spirit of the Eternal Son. When we conceive of the Father’s spiritual presence, we find it difficult to differentiate it in our thinking from the spiritual presence of the Eternal Son. The spirit of the Father is eternally resident in the spirit of the Son. 기원 아들의 전재(全在)는 우주들의 우주의 영적 통일을 구성합니다. 모든 창조의 영적 응집은 도처에 있는 영원 아들의 신적 영의 능동적인 현존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영적 현존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사고(思考) 속에서 그것을 영원 아들의 영적 현존과 구별하기 어려움을 발견합니다. 아버지의 영은 영원히 아들의 영 안에 거(居)하십니다.

6:4.4 (76.4) The Father must be spiritually omnipresent, but such omnipresence appears to be inseparable from the everywhere spirit activities of the Eternal Son. We do, however, believe that in all situations of Father-Son presence of a dual spiritual nature the spirit of the Son is co-ordinate with the spirit of the Father. 아버지는 영적으로 전재(全在)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러한 전재(全在)는 영원 아들의 모든 곳에서의 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원적(二元的)인 영적 본성을 갖는 아버지-아들 현존의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아들의 영이 아버지의 영과 합동한다고 믿습니다.

170608 골1:16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과 만물이 다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powers or rulers or authoritie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6:4.5 (76.5) In his contact with personality, the Father acts in the personality circuit. In his personal and detectable contact with spiritual creation, he appears in the fragments of the totality of his Deity, and these Father fragments have a solitary, unique, and exclusive function wherever and whenever they appear in the universes. In all such situations the spirit of the Son is co-ordinate with the spiritual function of the fragmented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고유성과의 접촉에 있어서, 아버지는 고유성 순환회로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영적 창조물에 대한 아버지의 개인적이며 탐지 가능한 접촉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신(神)의 전체성의 단편들 안에서 나타나시며, 아버지의 이 단편들은 그들이 우주들에서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나든지 단독적이며 독특한, 배타적 기능을 갖습니다. 그러한 모든 경우에도 아들의 영은 우주 아버지의 단편화된 현존의 영적 기능과 합동하십니다.

6:4.6 (76.6) Spiritually the Eternal Son is omnipresent. The spirit of the Eternal Son is most certainly with you and around you, but not within you and a part of you like the Mystery Monitor. The indwelling Father fragment adjusts the human mind to progressively divine attitudes, whereupon such an ascending mind becomes increasingly responsive to the spiritual drawing power of the all-powerful spirit-gravity circuit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영원 아들은 영적으로 전재(全在)하십니다. 영원 아들의 영은 가장 분명하게 너희와 함께 하시고 너희 주위에 계시지만, 신비 감시자처럼 너희 안에 너희의 일부로서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주하는 아버지의 단편은 인간 마음을 점진적으로 신적 태도에 맞도록 조절하여, 그렇게 상승하는 마음은 둘째근원이며 중심의 모든-권능을 지닌 영-중력 순환회로의 영적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점점 더 응답하게 됩니다.

6:4.7 (76.7) The Original Son is universally and spiritually self-conscious. In wisdom the Son is the full equal of the Father. In the realms of knowledge, omniscience, we cannot distinguish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Sources; like the Father, the Son knows all; he is never surprised by any universe event; he comprehends the end from the beginning. 기원 아들은 우주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아-의식적이십니다. 지혜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하십니다. 지식의 영역, 전지(全知)함에 있어서, 우리는 첫째근원과 둘째 근원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처럼 아들도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아들은 어떠한 우주 결과에도 결코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시작부터 끝을 이해하십니다.

170609 골1:17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이 있기 전에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He is before all things, and 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

6:4.8 (77.1) The Father and the Son really know the number and whereabouts of all the spirits and spiritualized beings in the universe of universes. Not only does the Son know all things by virtue of his own omnipresent spirit, but the Son, equally with the Father and the Conjoint Actor, is fully cognizant of the vast reflectivity intelligence of the Supreme Being, which intelligence is at all times aware of all things that transpire on all the world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nd there are other ways in which the Paradise Son is omniscient. 아버지와 아들은 우주들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영들과 영성화된 존재들의 숫자와 소재(所在)를 정말로 다 아십니다. 아들은 자신의 전재(全在)하는 영으로 만물을 아실뿐만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 및 공동행위자와 동등하게, 최극 존재의 방대한 반영적 지성을 충만하게 인지하시는데, 그 지성은 일곱 초우주에 속한 모든 세계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언제나 아십니다. 그리고 천국 아들이 전지(全知)하신 다른 방법들도 있습니다.

6:4.9 (77.2) The Eternal Son, as a loving, merciful, and ministering spiritual personality, is wholly and infinitely equal with the Universal Father, while in all those merciful and affectionate personal contacts with the ascendant beings of the lower realms the Eternal Son is just as kind and considerate, just as patient and long-suffering, as are his Paradise Sons in the local universes who so frequently bestow themselves up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사랑스럽고, 자비롭게 봉사하시는 영적 고유성으로서의 영원 아들은, 전적으로 무한하게 우주 아버지와 동일하시지만, 반면에 더 낮은 영역의 상승하는 존재들과의 모든 자비롭고 애정 어린 개인적 접촉에 있어서, 영원 아들은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 그렇게도 자주 자신들을 수여하는 지역우주들의 천국 아들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친절하시고 자상하시며, 그렇게 인내하시고 참을성이 있으십니다.

6:4.10 (77.3) It is needless further to expatiate on the attributes of the Eternal Son. With the exceptions noted, it is only necessary to study the spiritual attributes of God the Father to understand and correctly evaluate the attributes of God the Son. 영원 아들의 속성에 관하여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급했던 예외들과 함께, 아들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다만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속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5. Limitations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한계

170613 요5:19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아들은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Jesus gave them this answer: “I tell you the truth, the Son can do nothing by himself; he can do only what he sees his Father doing, because whatever the Father does the Son also does.

6:5.1 (77.4) The Eternal Son does not personally function in the physical domains, nor does he function, except through the Conjoint Actor, in the levels of mind ministry to creature beings. But these qualifications do not in any manner otherwise limit the Eternal Son in the full and free exercise of all the divine attributes of spiritual omniscience, omnipresence, and omnipotence. 영원 아들은 물리적 권역에서 개인적으로 기능할 수 없으며, 공동행위자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물에게 마음 돌봄의 수준에서 기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은, 영적인 전지, 편재(遍在), 그리고 전능이라는 모든 신적 속성을 충만하고 자유롭게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영원 아들을 달리 제한하지 않습니다.

6:5.2 (77.5) The Eternal Son does not personally pervade the potentials of spirit inherent in the infinity of the Deity Absolute, but as these potentials become actual, they come within the all-powerful grasp of the spirit-gravity circuit of the Son. 영원 아들은 신(神) 절대자의 무한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영 잠재를 몸소 가득 퍼지게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잠재들이 실제적이 되면서, 그것들은 아들의 영-중력 순환회로의 모든-권능을 지닌 장악 안에 들어옵니다.

6:5.3 (77.6) Personality is the exclusive gift of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derives personality from the Father, but he does not, without the Father, bestow personality. The Son gives origin to a vast spirit host, but such derivations are not personalities. When the Son creates personality, he does so in conjunction with the Father or with the Conjoint Creator, who may act for the Father in such relationships. The Eternal Son is thus a cocreator of personalities, but he bestows personality upon no being and of himself, alone, never creates personal beings. This limitation of action does not, however, deprive the Son of the ability to create any or all types of other-than-personal reality. 고유성은 우주 아버지의 배타적 선물입니다. 영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고유성을 얻으셨지만, 아들은 아버지 없이 고유성을 증여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은 광대한 영 무리를 기원시키지만, 그러한 파생체들은 고유성들이 아닙니다. 아들이 고유성을 창조할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하든지 혹은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를 대신할 수도 있는, 공동창조주와 함께 하십니다. 그와 같이 영원 아들은 고유성들의 공동창조자이지만, 그는 어떤 존재에게도 고유성을 증여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개인적 존재를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아무튼, 행위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개인적-실체-이외의 일부 또는 모든 다른 유형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아들에게서 빼앗지는 않습니다.

170614 창1:26 그리고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6:5.4 (77.7) The Eternal Son is limited in transmittal of creator prerogatives. The Father, in eternalizing the Original Son, bestowed upon him the power and privilege of subsequently joining with the Father in the divine act of producing additional Sons possessing creative attributes, and this they have done and now do. But when these co-ordinate Sons have been produced, the prerogatives of creatorship are apparently not further transmissible. The Eternal Son transmits creatorship powers only to the first or direct personalization. Therefore, when the Father and the Son unite to personalize a Creator Son, they achieve their purpose; but the Creator Son thus brought into existence is never able to transmit or delegate the prerogatives of creatorship to the various orders of Sons which he may subsequently create, notwithstanding that, in the highest local universe Sons, there does appear a very limited reflection of the creative attributes of a Creator Son. 영원 아들은 창조자 특권을 물려주는 데에 있어서 제한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기원 아들을 영원하게 하면서, 창조적 속성을 지닌 추가 아들들을 낳는 신적 행위 가운데, 계속하여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권능과 특권을 그에게 부여하셨고, 그들(아버지와 영원 아들)은 이것을 해오셨고, 지금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동 아들들이 나오게 되면, 창조자로서의 특권은 더 이상 물려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영원 아들은 창조자로서의 권능을 오직 최초의, 또는 직접적 고유성 구현에만 물려줍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창조주 아들을 고유성화 하려고 결합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출현된 창조주 아들은, 가장 높은 지역우주 아들 안에서, 창조주 아들의 창조적 속성의 매우 제한된 반영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창조할지 모르는 다양한 계층의 아들들에게 창조자신분의 특권을 결코 물려주거나 또는 위임할 수 없습니다.

6:5.5 (78.1) The Eternal Son, as an infinite and exclusively personal being, cannot fragmentize his nature, cannot distribute and bestow individualized portions of his selfhood upon other entities or persons as do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Infinite Spirit. But the Son can and does bestow himself as an unlimited spirit to bathe all creation and unceasingly draw all spirit personalities and spiritual realities to himself. 영원 아들은, 무한하고 배타적으로 고유적인 존재로서, 우주 아버지나 무한 영이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성을 단편화 시킬 수 없으며, 그의 자아신분의 개별화된 부분을 다른 실재들이나 개인들에게 분배할 수도 없고 증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모든 창조계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무제한적 영으로서 자신을 증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으며 모든 영 고유성들과 영적 실체들을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끌어들이십니다.

6:5.6 (78.2) Ever remember, the Eternal Son is the personal portrayal of the spirit Father to all creation. The Son is personal and nothing but personal in the Deity sense; such a divine and absolute personality cannot be disintegrated or fragmentized. God the Father and God the Spirit are truly personal, but they are also everything else in addition to being such Deity personalities.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물들에게 영 아버지의 고유적 묘사임을 늘 기억하라. 아들은 고유적이며 신(神) 감각에 있어서 단지 고유적일 뿐입니다. 그러한 신적이며 절대적인 고유성은 분해될 수도 없고 단편화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 하나님은 참으로 고유적이시지만, 그들은 그러한 신(神) 고유성 존재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것이십니다.

6:5.7 (78.3) Though the Eternal Son cannot personally participate in the bestowal of the Thought Adjusters, he did sit in council with the Universal Father in the eternal past, approving the plan and pledging endless co-operation, when the Father, in projecting the bestowal of the Thought Adjusters, proposed to the Son, “Let us make mortal man in our own image.” And as the spirit fragment of the Father dwells within you, so does the spirit presence of the Son envelop you, while these two forever work as one for your spiritual advancement. 비록 영원 아들이 생각조절자 증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영원한 과거에 우주 아버지와의 협의에 참가하셨고, 아버지가 생각조절자 증여를 기획하면서 아들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따라서 필사 사람을 만들자”라고 제안하셨을 때, 그 계획을 승인하고 끝없는 협조를 서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 단편이 너희 속에 거(居)하는 것과 같이, 아들의 영 현존이 너희를 감싸며, 동시에 이 둘은 하나가 되어 너희의 영적 전진을 위하여 언제까지나 일하십니다.

6. The Spirit Mind 영 마음

170615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며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내가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6:6.1 (78.4) The Eternal Son is spirit and has mind, but not a mind or a spirit which mortal mind can comprehend. Mortal man perceives mind on the finite, cosmic, material, and personal levels. Man also observes mind phenomena in living organisms functioning on the subpersonal (animal) level, but it is difficult for him to grasp the nature of mind when associated with supermaterial beings and as a part of exclusive spirit personalities. Mind must, however, be differently defined when it refers to the spirit level of existence, and when it is used to denote spirit functions of intelligence. That kind of mind which is directly allied with spirit is comparable neither to that mind which co-ordinates spirit and matter nor to that mind which is allied only with matter. 영원 아들은 영이시고 마음을 가졌지만, 필사자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나 영은 아닙니다. 필사 사람은 유한한, 질서우주의, 물질적이며 개인적 차원에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또한 사람은 하위-개인적(동물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 안의 마음 현상도 관찰하지만, 초물질적 존재와 배타적 영 고유성들의 한 부분으로서 연합될 때, 마음의 본성을 파악하는 일이 그에게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이 존재의 영 차원을 언급할 때와, 그것이 지능존재의 영 기능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될 때는, 다르게 정의(定意)되어야만 합니다. 영과 직접적으로 결연을 맺은 그러한 종류의 마음은, 영과 물질을 합동시키는 마음이나 혹은 오직 물질과 결연을 맺은 마음 그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6:6.2 (78.5) Spirit is ever conscious, minded, and possessed of varied phases of identity. Without mind in some phase there would be no spiritual consciousness in the fraternity of spirit beings. The equivalent of mind, the ability to know and be known, is indigenous to Deity. Deity may be personal, prepersonal, superpersonal, or impersonal, but Deity is never mindless, that is, never without the ability at least to communicate with similar entities, beings, or personalities. 영은 정체성의 다양한 위상들을 항상 의식하고, 유념하고,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떤 위상에서 마음이 없다면, 영 존재들의 형제우애에 영적 의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상당하는 것, 즉 알고 알려지는 능력은 신(神)에게 있어서 타고난 것입니다. 신(神)은 개인적, 전(前)개인적, 초(超)개인적, 또는 미(未)개인적일 수도 있으나, 신(神)은 결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슷한 실재들, 존재들, 혹은 고유성들과 최소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코 없을 수는 없습니다.

6:6.3 (78.6) The mind of the Eternal Son is like that of the Father but unlike any other mind in the universe, and with the mind of the Father it is ancestor to the diverse and far-flung minds of the Conjoint Creator. The mind of the Father and the Son, that intellect which is ancestral to the absolute mind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perhaps best illustrated in the premind of a Thought Adjuster, for, though these Father fragments are entirely outside of the mind circuits of the Conjoint Actor, they have some form of premind; they know as they are known; they enjoy the equivalent of human thinking. 영원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의 그것과 같지만, 우주에 있는 어느 다른 마음과도 같지 않으며,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 그것은 공동창조주의 다양하고 멀리-퍼지는 마음들의 조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절대적 마음의 원조(元祖)인 지성은, 아마도 생각조절자의 전(前)마음으로 가장 잘 설명되는데, 이는, 아버지의 이 단편들이 전적으로 공동행위자의 마음 순환회로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前)마음의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알려진 그대로 알고 있고;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동등한 것을 누립니다.

6:6.4 (78.7) The Eternal Son is wholly spiritual; man is very nearly entirely material; therefore much pertaining to the spirit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to his seven spiritual spheres encircling Paradise and to the nature of the impersonal creations of the Paradise Son, will have to await your attainment of spirit status following your completion of the morontia ascension of the local universe of Nebadon. And then, as you pass through the superuniverse and on to Havona, many of these spirit-concealed mysteries will clarify as you begin to be endowed with the “mind of the spirit” — spiritual insight. 영원 아들은 온전히 영적(靈的)이시며; 사람은 거의 온통 물질적입니다; 따라서 영원 아들의 영 고유성, 천국을 에워 도는 그의 일곱 개의 영적 구체들, 그리고 천국 아들의 미(未)개인적 창조계들의 본성에 관한 많은 것들은, 너희가 네바돈 지역우주에서 모론시아 상승의 완성을 마치고 나서 너의 영 지위 달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희가 초우주를 지나 하보나에 이르면서, 너희가”영의 마음”─영적 통찰력─자질을 부여받음에 따라, 이러한 영-숨겨진 비밀들의 대부분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7.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고유성

170616 히1:3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6:7.1 (79.1) The Eternal Son is that infinite personality from whose unqualified personality fetters the Universal Father escaped by the technique of trinitization, and by virtue of which he has ever since continued to bestow himself in endless profusion upon his ever-expanding universe of Creators and creatures. The Son is absolute personality; God is father personality — the source of personality, the bestower of personality, the cause of personality. Every personal being derives personality from the Universal Father just as the Original Son eternally derives his personality from the Paradise Father.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를 속박한 바로 그 분별불가적 고유성으로부터 삼위일체화의 기법에 의해 탈출한, 그 무한한 고유성이며, 그 덕분으로 그는 그 후로 늘 계속 창조주들과 창조물들의 늘-팽창하는 그의 우주 위에 끝없는 풍부함으로 자신을 증여해 왔습니다. 아들은 절대 고유성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고유성─고유성의 근원, 고유성의 증여자, 고유성의 원인─이십니다. 모든 개인적 존재는, 기원 아들이 천국 아버지로부터 그의 고유성을 영원히 얻은 것과 같이, 우주 아버지로부터 고유성을 얻습니다.

6:7.2 (79.2) The personality of the Paradise Son is absolute and purely spiritual, and this absolute personality is also the divine and eternal pattern, first, of the Father’s bestowal of personality upon the Conjoint Actor and, subsequently, of his bestowal of personality upon the myriads of his creatures throughout a far-flung universe. 천국 아들의 고유성은 절대적이고, 순수하게 영적이며, 이 절대 고유성은 또한 신적이며 영원한 원형 틀인데, 우선, 공동행위자에 대한 아버지의 고유성 증여의 원형 틀이며, 다음으로는, 멀리-퍼지는 우주에 두루 그의 수많은 창조물에 대한 고유성 증여의 원형 틀입니다.

6:7.3 (79.3) The Eternal Son is truly a merciful minister, a divine spirit, a spiritual power, and a real personality. The Son is the spiritual and personal nature of God made manifest to the universes — the sum and substance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divested of all that which is nonpersonal, extradivine, nonspiritual, and pure potential. But it is impossible to convey to the human mind a word picture of the beauty and grandeur of the supernal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Everything that tends to obscure the Universal Father operates with almost equal influence to prevent the conceptual recognition of the Eternal Son. You must await your attainment of Paradise, and then you will understand why I was unable to portray the character of this absolute personality to the understanding of the finite mind. 영원 아들은 진실로 자비로운 성직자이시고, 신적 영이시며, 영적 권능이시고, 실제 고유성이십니다. 아들은 우주에 현시된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이고 고유적인 본성─비(非)개인적이고, 가외(加外여분의)신성이며, 비(非)영적이고, 순수하게 잠재적인 모든 것을 벗겨낸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전체이자 본체─입니다. 그러나 영원 아들의 숭고한 고유성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말의 묘사로 인간 마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 아버지를 가려서 희미하게 이끄는 모든 것이, 거의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영원 아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막도록 영향을 줍니다. 너희는 너희의 천국 달성을 기다려야만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왜 유한한 마음이 이해하도록 이 절대 고유성의 특성을 묘사할 수 없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8. Realization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실체화

170620 요5:17-18 17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 나도 일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똑같은 자리에 올려 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이유로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17 Jesus said to them,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 18 For this reason the Jews tried all the harder to kill him; not only was he breaking the Sabbath, but he was even calling God his own Father, making himself equal with God.

6:8.1 (79.4) Concerning identity, nature, and other attributes of personality, the Eternal Son is the full equal, the perfect complement, and the eternal counterpart of the Universal Father. In the same sense that God is the Universal Father, the Son is the Universal Mother. And all of us, high and low, constitute their universal family. 고유성의 정체성과 본성 그리고 기타 속성들에 관해서 살펴보면,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와 충만히 동등한 분이시고 완전한 보완자이시며 그리고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짝이십니다. 하나님이 우주 아버지이신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본다면, 아들은 우주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신분이 높든 낮든 그 분들의 우주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6:8.2 (79.5) To appreciate the character of the Son, you should study the revelation of the divine character of the Father; they are forever and inseparably one. As divine personalities they are virtually indistinguishable by the lower orders of intelligence. They are not so difficult of separate recognition by those whose origin is in the creative acts of the Deities themselves. Beings of nativity in the central universe and on Paradise discern the Father and the Son not only as one personal unity of universal control but also as two separate personalities functioning in definite domains of universe administration. 아들의 성품을 올바르게 알기 위하여, 당신들은 아버지의 신적 성격에 대한 계시를 연구해야만 합니다. 그 분들은 언제까지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적 고유성으로서, 그 분들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지능존재에게는 실제로 분별될 수 없습니다. 신(神) 자신들의 창조적 활동 안에 기원을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중앙우주와 천국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우주를 조정하는 하나의 고유적 통일체일 뿐 아니라 우주 관리의 한정된 권역 안에서 기능하는 두 개의 분리된 고유성임을 식별합니다.

6:8.3 (79.6) As persons you may conceive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as separate individuals, for they indeed are; but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es they are so intertwined and interrelated that it is not always possi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m. When, in the affairs of the universes, the Father and the Son are encountered in confusing interassociations, it is not always profitable to attempt to segregate their operations; merely recall that God is the initiating thought and the Son is the expressionful word. In each local universe this inseparability is personalized in the divinity of the Creator Son, who stands for both Father and Son to the creatures of ten million inhabited worlds. 개인으로서의 당신들은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을 분리된 개별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그 분들이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들의 관리에 있어서 그분들은 너무도 서로 얽혀있고,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그들 사이를 식별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우주의 사무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혼란스러운 상호연합 속에서 만나게 될 때, 그 분들의 활동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항상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창시(創始)하는 생각이고, 아들은 표현이 풍부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각 지역우주에서 이 분리할 수 없음은 창조주 아들의 신성 안에서 고유성화 되어있으며, 그는 천만 거주세계의 창조물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 모두를 대표하십니다.

170621 계20:12 그리고 나는 죽은 사람들이 모두 그 보좌 앞에 서 있고 책들이 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들에 기록된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And I saw the dead, great and small,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books were opened. Another book was opened, which is the book of life. The dead were judged according to what they had done as recorded in the books.

6:8.4 (80.1) The Eternal Son is infinite, but he is approachable through the persons of his Paradise Sons and through the patient ministry of the Infinite Spirit. Without the bestowal service of the Paradise Sons and the loving ministry of the creatures of the Infinite Spirit, beings of material origin could hardly hope to attain the Eternal Son. And it is equally true: With the help and guidance of these celestial agencies the God-conscious mortal will certainly attain Paradise and sometime stand in the personal presence of this majestic Son of Sons. 영원 아들은 무한하시지만, 그의 천국 아들들의 개인을 통하여, 그리고 무한 영의 인내하는 돌봄을 통하여 그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천국 아들들이 베푸는 증여 봉사와 무한 영의 창조물들에 대한 사랑의 돌봄 없이는, 물질적 기원을 지닌 존재들이 영원 아들에게 도달할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똑같이 참 말입니다. 하나님을-의식하는 필사자는, 이 하늘 대리자들의 도움과 안내로 확실히 천국에 도달할 것이며, 언젠가는 이 장엄한 아들들 중의 아들의 고유적 현존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6:8.5 (80.2) Even though the Eternal Son is the pattern of mortal personality attainment, you find it easier to grasp the reality of both the Father and the Spirit because the Father is the actual bestower of your human personality and the Infinite Spirit is the absolute source of your mortal mind. But as you ascend in the Paradise path of spiritual progression, the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will become increasingly real to you, and the reality of his infinitely spiritual mind will become more discernible to your progressively spiritualizing mind. 비록 영원 아들이 필사자의 고유성들이 도달해야 하는 원형틀이지만, 당신들은 아버지와 영, 두 분의 실체 파악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희에게 인간 고유성을 실제로 증여하는 분이시고, 무한 영은 당신들 필사자가 지닌 마음의 절대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진보하는 천국 경로로 당신들이 상승함에 따라, 영원 아들의 고유성은 당신들에게 점점 더 실제가 될 것이고, 그의 무한히 영적인 마음의 실체는 점진적으로 영성화 되어가는 당신들의 마음으로 더 많이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6:8.6 (80.3) Never can the concept of the Eternal Son shine brightly in your material or subsequent morontial mind; not until you spiritize and commence your spirit ascension will the comprehension of the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begin to equal the vividness of your concept of the personality of the Creator Son of Paradise origin who, in person and as a person, onetime incarnated and lived on Urantia as a man among men. 영원 아들의 개념은 너희의 물질적 마음 또는 그 이후의 모론시아 마음에서 결코 환하게 빛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영(靈)이 되어 너희 영(靈)의 상승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몸소 인간으로서, 한때 사람 사이에서 사람으로 육신을 갖고 유란시아에서 살았던 천국 기원에 속한 창조주 아들의 고유성 개념을 너희가 명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170621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6:8.7 (80.4) Throughout your local universe experience the Creator Son, whose personality is comprehensible by man, must compensate for your inability to grasp the full significance of the more exclusively spiritual, but none the less personal, Eternal Son of Paradise. As you progress through Orvonton and Havona, as you leave behind you the vivid picture and deep memories of the Creator Son of your local universe, the passing of this material and morontia experience will be compensated by ever-enlarging concepts and intensifying comprehension of the Eternal Son of Paradise, whose reality and nearness will ever augment as you progress Paradiseward. 너희가 속해 있는 지역우주 체험 전체를 통해서, 인간에 의해 그 고유성이 이해될 수 있는 창조주 아들은, 더욱 배타적으로 영적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천국 영원 아들에 대한 충만한 중요성을 파악할 수 없는 너희의 무능력을 보완하셔야만 합니다. 너희가 오르본톤과 하보나를 거쳐 진보함에 따라서, 너희가 너희 지역우주의 창조주 아들에 대한 생생한 모습과 깊은 기억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갈 때, 거쳐서 지나가는 이 물질적인 체험과 부활체(모론시아) 체험은 천국의 영원 아들에 대해 계속 확장되는 개념과 강화되는 이해에 의하여 보완될 것이며, 그의 실체와 친숙함은 너희가 천국을 향하여 진보함에 따라 항상 증대될 것이다.

6:8.8 (80.5) The Eternal Son is a grand and glorious personality. Although it is beyond the powers of the mortal and material mind to grasp the actuality of the personality of such an infinite being, doubt not, he is a person. I know whereof I speak. Times almost without number I have stood in the divine presence of this Eternal Son and then journeyed forth in the universe to execute his gracious bidding. 영원 아들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고유성이십니다. 그처럼 무한한 존재가 지닌 고유성의 실제 파악은 필사자와 물질적 마음이 지닌 권능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의심할 바 없이, 그 분은 하나의 개인이십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셀 수 없이 수많은 시간을 영원 아들의 신적 현존 속에 서 있었고, 그 후 그의 인자하신 명령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주를 향해 여행을 떠나왔습니다.

6:8.9 (80.6) [Indited by a Divine Counselor assigned to formulate this statement depicting the Eternal Son of Paradise.] [천국의 영원 아들을 설명하는 이 글을 작성하도록 배정된 신적 조언자가 진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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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2 The Sojourn at Rome 로마 체류(滯留) 기간

Paper 132

The Sojourn at Rome 로마 체류(滯留) 기간

Influence on thirty-two religious leaders
1. True Values
2. Good and Evil
3. Truth and Faith
4. Personal Ministry
To the Roman senator
To the Roman soldier
To the speaker at the forum
To the poor man, falsely accused
5. Counseling the Rich Man
6. Social Ministry
7. Trips About Rome
The thoughtless pagan
“Let’s you and I make a new religion.”

132:0.1 (1455.1) SINCE Gonod carried greetings from the princes of India to Tiberius, the Roman ruler, on the third day after their arrival in Rome the two Indians and Jesus appeared before him. The morose emperor was unusually cheerful on this day and chatted long with the trio. And when they had gone from his presence, the emperor, referring to Jesus, remarked to the aide standing on his right, “If I had that fellow’s kingly bearing and gracious manner, I would be a real emperor, eh?” 인도의 왕자들이 로마의 통치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에게 보내는 서신을 고노드가 가지고 왔으므로, 로마에 도착한지 3일 후에 이 두 인도인들과 예수는 티베리우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성미가 괴팍한 이 황제는 그날따라 평소와는 달리 매우 기분이 좋았고 이 세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앞에서 물러가자, 이 황제는 오른 쪽에 서 있던 측근에게 예수에 대해,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왕다운 자태와 우아한 태도를 가졌다면, 나도 진짜 황제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132:0.2 (1455.2) While at Rome, Ganid had regular hours for study and for visiting places of interest about the city. His father had much business to transact, and desiring that his son grow up to become a worthy successor in the management of his vast commercial interests, he thought the time had come to introduce the boy to the business world. There were many citizens of India in Rome, and often one of Gonod’s own employees would accompany him as interpreter so that Jesus would have whole days to himself; this gave him time in which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this city of two million inhabitants. He was frequently to be found in the forum, the center of political, legal, and business life. He often went up to the Capitolium and pondered the bondage of ignorance in which these Romans were held as he beheld this magnificent temple dedicated to Jupiter, Juno, and Minerva. He also spent much time on Palatine hill, where were located the emperor’s residence, the temple of Apollo, and the Greek and Latin libraries.로마에 있는 동안, 가니드는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그 도시에서 흥미로운 곳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고노드는 사업상의 많은 거래가 하였으며, 자기 아들이 성장해서 자신의 뒤를 따라, 거대한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관리하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여서, 이 소년에게 상업계의 현실을 보여 줄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로마에는 많은 인도 시민들이 있었고, 고노드가 직접 채용한 사람들 중 하나가 그를 위해 통역을 자주 맡아 주었기 때문에, 예수는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여 예수는 2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에 대하여 정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 사법, 및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는 광장(廣場)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캐피토리움Capitolium에 종종 올라갔고 거기서 쥬피터Jupiter와 쥬노Juno와 미네르바Minerva에게 바쳐진 이 웅장한 신전을 보면서, 이 로마인들이 붙들려 있는 무지한 속박에 대해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팔라틴 언덕 Palatine hill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황제의 저택과 아폴로Apollo 신전 그리고 그리스와 라틴 도서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32:0.3 (1455.3) At this time the Roman Empire included all of southern Europe, Asia Minor, Syria, Egypt, and northwest Africa; and its inhabitants embraced the citizens of every country of the Eastern Hemisphere. His desire to study and mingle with this cosmopolitan aggregation of Urantia mortals was the chief reason why Jesus consented to make this journey. 당시 로마 제국은 남부 유럽 전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북서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곳의 주민들 중 동반구(東半球)에 위치한 나라의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행에 동참하기로 승낙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세계적 집결지에서 세상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2:0.4 (1455.4) Jesus learned much about men while in Rome, but the most valuable of all the manifold experiences of his six months’ sojourn in that city was his contact with, and influence upon, the religious leaders of the empire’s capital. Before the end of the first week in Rome Jesus had sought out, and had made the acquaintance of, the worth-while leaders of the Cynics, the Stoics, and the mystery cults, in particular the Mithraic group. Whether or not it was apparent to Jesus that the Jews were going to reject his mission, he most certainly foresaw that his messengers were presently coming to Rome to proclaim the kingdom of heaven; and he therefore set about, in the most amazing manner, to prepare the way for the better and more certain reception of their message. He selected five of the leading Stoics, eleven of the Cynics, and sixteen of the mystery-cult leaders and spent much of his spare time for almost six months in intimate association with these religious teachers. And this was his method of instruction: Never once did he attack their errors or even mention the flaws in their teachings. In each case he would select the truth in what they taught and then proceed so to embellish and illuminate this truth in their minds that in a very short time this enhancement of the truth effectively crowded out the associated error; and thus were these Jesus-taught men and women prepared for the subsequent recognition of additional and similar truths in the teachings of the early Christian missionaries. It was this early acceptance of the teachings of the gospel preachers which gave that powerful impetus to the rapid spread of Christianity in Rome and from there throughout the empire.예수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그가 이 도시에서 6개월의 다양한 체류 경험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었던 것은, 그 제국의 수도(首都)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첫 주간(週間)이 지나가기 전에, 예수는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신비적 종파들, 그리고 특히 미트라 숭배 집단의 훌륭한 지도자들을 찾았으며 그들과 친숙해졌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를 분명히 알고 있었는지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는 자신의 사자(使者)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로마로 올 것임을 아주 확실히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이 전하게 될 복음이 좀 더 수월하고 확실히 수용되도록 미리 그 길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토아학파에서 뛰어난 5명, 견유학파에서 11명, 그리고 신비 종파의 지도자들 중에서 16명을 선택하였으며, 이 종교 교사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거의 6개월 동안 자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의 실책들을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고 그들의 가르침이 내포하는 결점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경우마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를 분리한 후에 이 진리가 그들의 정신 속에서 조정되고 밝게 빛나도록 유도하여,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진리의 강화로, 관련된 오류를 효과적으로 밀어내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쳤던 이 남녀들은, 나중에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훈 속에서 좀 더 첨부된 비슷한 진리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복음 전파자들의 가르침이 이런 방식으로 일찍부터 수용되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부터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강력한 촉진제가 제공되었습니다.

132:0.5 (1456.1) The significance of this remarkable doing can the better be understood when we record the fact that, out of this group of thirty-two Jesus-taught religious leaders in Rome, only two were unfruitful; the thirty became pivotal individuals in the establishment of Christianity in Rome, and certain of them also aided in turning the chief Mithraic temple into the first Christian church of that city. We who view human activities from behind the scenes and in the light of nineteen centuries of time recognize just three factors of paramount value in the early setting of the stage for the rapid spread of Christianity throughout Europe, and they are: 주목할 만한 이 업적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로마에서 가르쳤던 32명의 종교 지도자들 중 오직 두 명만이 결실을 맺지 못했으며, 30명은 로마에서의 기독교 설립에 있어서 중심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미드라교 신전이 그 도시의 첫 기독교 교회로 바뀌도록 공헌하기도 하였습니다. 19세기 시대의 관점에서 고려해 볼 때, 유럽 전역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는 무대를 위해 탁월한 가치를 갖는 세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2:0.6 (1456.2) 1. The choosing and holding of Simon Peter as an apostle. 1. 시몬 베드로를 사도(使徒)로 선택하고 유지함.

132:0.7 (1456.3) 2. The talk in Jerusalem with Stephen, whose death led to the winning of Saul of Tarsus. 2. 자신의 죽음으로 다소의 사울을 얻게 된 스데반과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대화.

132:0.8 (1456.4) 3. The preliminary preparation of these thirty Romans for the subsequent leadership of the new religion in Rome and throughout the empire. 3. 로마와 제국 전역에서 새로운 종교 지도자가 되도록 준비시킨 30명의 이 로마인들.

132:0.9 (1456.5) Through all their experiences, neither Stephen nor the thirty chosen ones ever realized that they had once talked with the man whose name became the subject of their religious teaching. Jesus’ work in behalf of the original thirty-two was entirely personal. In his labors for these individuals the scribe of Damascus never met more than three of them at one time, seldom more than two, while most often he taught them singly. And he could do this great work of religious training because these men and women were not tradition bound; they were not victims of a settled preconception as to all future religious developments.스데반과 선택받은 30명의 로마인들도, 자신들의 모든 경험 전반에 걸쳐서, 자기들이 한 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 자신들의 종교적 가르침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이 32명을 위한 예수의 활동은 온전히 사적(私的)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을 준비시키는 수고에 있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은 결코 동시에 세 사람 이상을 만나지 않았으며, 두 사람 이상인 경우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 그들을 한 사람씩 가르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종교적 훈련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전통에 매어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들은, 미래의 모든 종교적 진보와는 달리, 고정된 선입견의 희생자들이 아니었습니다.

132:0.10 (1456.6) Many were the times in the years so soon to follow that Peter, Paul, and the other Christian teachers in Rome heard about this scribe of Damascus who had preceded them, and who had so obviously (and as they supposed unwittingly) prepared the way for their coming with the new gospel. Though Paul never really surmised the identity of this scribe of Damascus, he did, a short time before his death, because of the similarity of personal descriptions, reach the conclusion that the “tentmaker of Antioch” was also the “scribe of Damascus.” On one occasion, while preaching in Rome, Simon Peter, on listening to a description of the Damascus scribe, surmised that this individual might have been Jesus but quickly dismissed the idea, knowing full well (so he thought) that the Master had never been in Rome.몇 년 후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신속하게 이들의 뒤를 따랐으며, 베드로와 바울 및 로마에 왔던 다른 기독교 선생들은 자기들보다 먼저 와서, 자기들이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매우 분명히 그 길을 준비해 놓았던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의 정체를 한 번도 실제적으로 추측한 적이 없었지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그에 대한 개인적 설명들의 유사성을 근거로, “안디옥의 천막 짓는 이” 가 바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한 번은, 시몬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하는 동안,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어쩌면 이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추측하였지만, 그는 자기 스승이 로마에 온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1. True Values 참된 가치

160720 수요 예수51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

132:1.1 (1456.7) It was with Angamon, the leader of the Stoics, that Jesus had an all-night talk early during his sojourn in Rome. This man subsequently became a great friend of Paul and proved to be one of the strong supporters of the Christian church at Rome. In substance,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taught Angamon: 로마 체류기간의 초기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지도자인 앙가몬Angamon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바울의 훌륭한 친구가 되었고, 로마에서 기독교 교회를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앙가몬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현대 언어로 다시 요약하여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1.2 (1457.1) The standard of true values must be looked for in the spiritual world and on divine levels of eternal reality. To an ascending mortal all lower and material standards must be recognized as transient, partial, and inferior. The scientist, as such, is limited to the discovery of the relatedness of material facts. Technically, he has no right to assert that he is either materialist or idealist, for in so doing he has assumed to forsake the attitude of a true scientist since any and all such assertions of attitude are the very essence of philosophy. 참된 가치관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와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차원들에서 찾아야만 한다. 사람에게 저급하고 물질적인 모든 기준들은 과도기적이고, 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인지되어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적 사실들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면에 국한하여 영향을 끼친다. 기술적으로 볼 때, 과학자는 자신이 물질주의자나 혹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는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태도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바로 철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를 거부하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132:1.3 (1457.2) Unless the moral insight and the spiritual attainment of mankind are proportionately augmented, the unlimited advancement of a purely materialistic culture may eventually become a menace to civilization. A purely materialistic science harbors within itself the potential seed of the destruction of all scientific striving, for this very attitude presages the ultimate collapse of a civilization which has abandoned its sense of moral values and has repudiated its spiritual goal of attainment. 만약 인류의 도덕적 통찰력과 영적 달성이 균형이 잡힌 비율로 증대되지 않는다면, 물질적 문화의 무제한적인 발전은 결국 문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물질적인 과학은 모든 과학적 투쟁성과를 파괴하는 잠재적 씨앗을 그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속성은, 한 문명이 스스로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감각sense of moral values을 포기하면서 영적 달성의 목표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궁극적 붕괴를 가져오는 전조가 된다.

132:1.4 (1457.3) The materialistic scientist and the extreme idealist are destined always to be at loggerheads. This is not true of those scientists and idealists who are in possession of a common standard of high moral values and spiritual test levels. In every age scientists and religionists must recognize that they are on trial before the bar of human need. They must eschew all warfare between themselves while they strive valiantly to justify their continued survival by enhanced devotion to the service of human progress. If the so-called science or religion of any age is false, then must it either purify its activities or pass away before the emergence of a material science or spiritual religion of a truer and more worthy order. 물질적인 과학자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는 항상 서로 투쟁하면서 다투게 되어 있다. 이것은 높은 도덕적 가치와 영적 시험 차원의 상식적 기준을 소유한 과학자와 이상주의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모든 시대에, 과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은 인간의 진보를 이루는 임무에 더욱 더 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분투하는 한편, 그들은 서로 간의 모든 전쟁을 피해가야만 한다. 만약에 어떤 시대의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좀 더 진실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질서의 물질적 과학 또는 영적 종교가 시작되기 전에 그것들의 활동들은 정화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2. Good and Evil160727 수요 예수52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선과 악GOOD AND EVIL)

132:2.1 (1457.4) Mardus was the acknowledged leader of the Cynics of Rome, and he became a great friend of the scribe of Damascus. Day after day he conversed with Jesus, and night upon night he listened to his supernal teaching. Among the more important discussions with Mardus was the one designed to answer this sincere Cynic’s question about good and evil. In substance, and in twentieth-century phraseology, Jesus said: 마르두스Mardus는 로마에서 유명한 견유학파Cynics 지도자였으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서기관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밤에는 그의 고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 토론 가운데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내용들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2.2 (1457.5) My brother, good and evil are merely words symbolizing relative levels of human comprehension of the observable universe. If you are ethically lazy and socially indifferent, you can take as your standard of good the current social usages. If you are spiritually indolent and morally unprogressive, you may take as your standards of good the religious practices and traditions of your contemporaries. But the soul that survives time and emerges into eternity must make a living and personal choice between good and evil as they are determined by the true values of the spiritual standards established by the divine spirit which the Father in heaven has sent to dwell within the heart of man. This indwelling spirit is the standard of personality survival.나의 형제여, 선(善)과 악(惡)이란 말은, 관찰이 가능한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상대적 차원을 상징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만일 네가 윤리적으로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다면, 선에 대한 너의 기준으로, 현재의 사회적 관례들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다면, 너는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행과 전통을 네 선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시간의 세계에서 생존하여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혼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마음 안에 거하도록 보내준 거룩한 영에 의해 세워주신 영적인 기준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에 따라서 선과 악 사이에서 생명력 있는 개인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내주(內住)하는 영이 개인성(고유성) 생존의 기준이다.

132:2.3 (1457.6) Goodness, like truth, is always relative and unfailingly evil-contrasted. It is the perception of these qualities of goodness and truth that enables the evolving souls of men to make those personal decisions of choice which are essential to eternal survival.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이란 항상 상대적이며, 반드시 악과 대조된다. 이들 선과 진리의 특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진전하는 혼이 영원한 생존에 필수적인 선택을 개인이 결정할 수 있게 한다.

132:2.4 (1458.1) The spiritually blind individual who logically follows scientific dictation, social usage, and religious dogma stands in grave danger of sacrificing his moral freedom and losing his spiritual liberty. Such a soul is destined to become an intellectual parrot, a social automaton, and a slave to religious authority. 과학적 명령과 사회적 관례 그리고 종교적 교리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는,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개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자유를 희생하고 영적 자유를 잃어버리는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한 혼은 지적 앵무새나 사회적 자동기계나 종교적 권력의 노예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132:2.5 (1458.2) Goodness is always growing toward new levels of the increasing liberty of moral self-realization and spiritual personality attainment — the discovery of, and identification with, the indwelling Adjuster. An experience is good when it heightens the appreciation of beauty, augments the moral will, enhances the discernment of truth, enlarges the capacity to love and serve one’s fellows, exalts the spiritual ideals, and unifies the supreme human motives of time with the eternal plans of the indwelling Adjuster, all of which lead directly to an increased desire to do the Father’s will, thereby fostering the divine passion to find God and to be more like him. 선(善)은 도덕적인 자아실현과 영적 개인성의 달성 — 내주하는 아버지의 영을 발견하고 더불어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을 향한 증대되는 자유의 새로운 단계들을 향하여 항상 성장한다. 체험은, 아름다움(美)을 깊이 이해하도록 자극하고, 도덕적 의지를 강화시키며, 진리에 대한 식별력을 증대시키고, 동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힘을 확대하며, 영적 이상을 고양(高揚)시키고,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이 지닌 최상의 동기와 내주하는 아버지 영의 영원한 계획과 통합할 때, 선(善)하며,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적으로 인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더욱 닮아가려는 거룩한 열망을 성숙시킵니다.

132:2.6 (1458.3) As you ascend the universe scale of creature development, you will find increasing goodness and diminishing evil in perfect accordance with your capacity for goodness-experience and truth-discernment. The ability to entertain error or experience evil will not be fully lost until the ascending human soul achieves final spirit levels. 네가 피조물이 발전하는 우주적인 기준이 상승함에 따라 즉 선을 체험하고 진리를 식별하는 너의 수용능력과 온전한 조화 가운데, 너는 증대되는 선과 감소하는 악을 발견할 것이다. 상승하는 인간의 혼이 최종적 영적 단계를 성취할 때까지는, 실수하고 악을 경험하는 능력을 온전히 상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132:2.7 (1458.4) Goodness is living, relative, always progressing, invariably a personal experience, and everlastingly correlated with the discernment of truth and beauty. Goodness is found in the recognition of the positive truth-values of the spiritual level, which must, in human experience, be contrasted with the negative counterpart — the shadows of potential evil. 선(善)은 살아있고, 상대적이며, 항상 진보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眞)와 아름다움(美)을 식별하는 것과 영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선은 영적 차원의 긍정적 진리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가운데 발견되며, 그것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부정적인 상응 즉 잠재적인 악의 그림자와 대비되어야만 한다.

132:2.8 (1458.5) Until you attain Paradise levels, goodness will always be more of a quest than a possession, more of a goal than an experience of attainment. But even as you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you experience increasing satisfaction in the partial attainment of goodness. The presence of goodness and evil in the world is in itself positive proof of the existence and reality of man’s moral will, the personality, which thus identifies these values and is also able to choose between them. 네가 천국의 차원들에 도달할 때까지, 선은 항상 성취한 체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표가 될 것이며, 소유라기보다는 계속적인 추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할지라도, 부분적인 선의 성취 가운데, 더욱 충만해져가는 만족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에 선과 악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사람의 도덕적 의지의 존재와 실체, 그리고 이들 가치들을 감정하고,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성의 존재와 실체의 명확한 증거이다.

132:2.9 (1458.6) By the time of the attainment of Paradise the ascending mortal’s capacity for identifying the self with true spirit values has become so enlarged as to result in the attainment of the perfection of the possession of the light of life. Such a perfected spirit personality becomes so wholly, divinely, and spiritually unified with the positive and supreme qualities of goodness, beauty, and truth that there remains no possibility that such a righteous spirit would cast any negative shadow of potential evil when exposed to the searching luminosity of the divine light of the infinite Rulers of Paradise. In all such spirit personalities, goodness is no longer partial, contrastive, and comparative; it has become divinely complete and spiritually replete; it approaches the purity and perfection of the Supreme. 천국에 도달하는 시기에 이르면, 자아를 진정한 영적 가치들로 자기화할 수 있는, 상승하는 존재의 수용능력은 생명의 빛을 소유하는 완전성의 성취라는 결과를 낳기까지 그렇게 확대된다. 그렇게 완전해진 영 개인성은, 너무나 전적으로, 거룩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선함(善),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의 적극적이며 최상의 특성과 통합되며, 무한한 천국 통치자의 거룩한 빛이 밝히 드러날 때, 정의로운 영은 그 어떠한 잠재적 악의 부정적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한 모든 영적 개인성에서, 선(善)은 더 이상 부분적이거나, 대조적이거나, 비교 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최상 존재의 순수함과 완전성에 가까워진다.

132:2.10 (1458.7) The possibility of evil is necessary to moral choosing, but not the actuality thereof. A shadow is only relatively real. Actual evil is not necessary as a personal experience. Potential evil acts equally well as a decision stimulus in the realms of moral progress on the lower levels of spiritual development. Evil becomes a reality of personal experience only when a moral mind makes evil its choice.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성은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상대적으로 실재할 뿐이다. 실제적 악은 하나의 개인적 체험으로서 필연적이지 않다. 잠재적인 악은, 영적 발전의 낮은 차원에 대한 도덕적 진보의 영역 가운데, 결단의 자극제로 동일하게 적절히 작용한다. 악은 오직 도덕적 마음이 악을 선택했을 때에만, 하나의 개인적 체험의 실체가 된다.

3. Truth and Faith160810 수요 예수53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진리와 신앙TRUTH AND FAITH)

132:3.1 (1459.1) Nabon was a Greek Jew and foremost among the leaders of the chief mystery cult in Rome, the Mithraic. While this high priest of Mithraism held many conferences with the Damascus scribe, he was most permanently influenced by their discussion of truth and faith one evening. Nabon had thought to make a convert of Jesus and had even suggested that he return to Palestine as a Mithraic teacher. He little realized that Jesus was preparing him to become one of the early converts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the substance of Jesus’ teaching was: 나본Nabon은 그리스 유대인이었고, 로마에서 최고 신비종교였던 미트라교의 지도자들 중에서 지도자였습니다. 미트라교Mithraism의 이 고위 사제는, 다마스커스의 서기관Damascus scribe과의 여러 번의 만남 중에서, 어느 날 저녁 나누었던 진리와 신앙에 관한 토론으로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본은 예수를 개종시켜서 미트라교의 선생이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록 그에게 제의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초기 개종자들 중의 하나로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요지를 현대 용어로 다시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3.2 (1459.2) Truth cannot be defined with words, only by living. Truth is always more than knowledge. Knowledge pertains to things observed, but truth transcends such purely material levels in that it consorts with wisdom and embraces such imponderables as human experience, even spiritual and living realities. Knowledge originates in science; wisdom, in true philosophy; truth, in the religious experience of spiritual living. Knowledge deals with facts; wisdom, with relationships; truth, with reality values. 진리는 말이 아니라, 단지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되어질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과 관련되어 있지만, 진리는 그렇게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들을 초월하며, 그 안에서 지혜와 조화를 이루어 결합되고,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간의 체험이 되게 하며, 게다가 영적이고 살아있는 실체들로 받아들이게 한다. 지식은 과학에서,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서,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지식은 사실들을, 지혜는 관계들을, 진리는 실체에 대한 가치들을 다룬다.

132:3.3 (1459.3) Man tends to crystallize science, formulate philosophy, and dogmatize truth because he is mentally lazy in adjusting to the progressive struggles of living, while he is also terribly afraid of the unknown. Natural man is slow to initiate changes in his habits of thinking and in his techniques of living. 사람은 과학을 결정화하고, 철학을 정형화하며, 진리를 교리화(敎理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삶의 발전적인 투쟁에 적응시키는 일에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또 한편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기 사고방식이나 살아가는 기법들의 변화를 시도하는데 있어서 둔하다.

132:3.4 (1459.4) Revealed truth, personally discovered truth, is the supreme delight of the human soul; it is the joint creation of the material mind and the indwelling spirit. The eternal salvation of this truth-discerning and beauty-loving soul is assured by that hunger and thirst for goodness which leads this mortal to develop a singleness of purpose to do the Father’s will, to find God and to become like him. There is never conflict between true knowledge and truth. There may be conflict between knowledge and human beliefs, beliefs colored with prejudice, distorted by fear, and dominated by the dread of facing new facts of material discovery or spiritual progress.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이 누리는 최상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사람을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132:3.5 (1459.5) But truth can never become man’s possession without the exercise of faith. This is true because man’s thoughts, wisdom, ethics, and ideals will never rise higher than his faith, his sublime hope. And all such true faith is predicated on profound reflection, sincere self-criticism, and uncompromising moral consciousness. Faith is the inspiration of the spiritized creative imagination. 그러나 진리는 신앙의 실천 없이는 절대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생각들과 지혜 그리고 윤리와 이상들은 그 자신의 신앙 즉 자신의 최고의 희망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참된 신앙은 심오한 반영과,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세워진다. 신앙은 영성화된 창조적 상상력의 영감이다.

132:3.6 (1459.6) Faith acts to release the superhuman activities of the divine spark, the immortal germ, that lives within the mind of man, and which is the potential of eternal survival. Plants and animals survive in time by the technique of passing on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identical particles of themselves. The human soul (personality) of man survives mortal death by identity association with this indwelling spark of divinity, which is immortal, and which functions to perpetuate the human personality upon a continuing and higher level of progressive universe existence. The concealed seed of the human soul is an immortal spirit. The second generation of the soul is the first of a succession of personality manifestations of spiritual and progressing existences, terminating only when this divine entity attains the source of its existence, the personal source of all existence, God, the Universal Father.신앙은 불멸의 씨앗인 거룩한 불꽃의 초인간적 활동들이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데, 그 씨앗은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영원한 생존에 대한 잠재력이다. 식물들과 동물들은, 자기와 동일한 입자들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하는 기법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존한다. 사람의 인간 혼(개인성)은 내주하는 이 신성(神性)의 불꽃과 본성적으로 연합함으로써 이 세상의 죽음에서 살아남는데, 그 불꽃은 불멸하는 것으로, 인간의 개인성이 지속적이며 더 높은 차원의 진보적 우주 실재로서 영속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 혼의 그 숨겨진 씨앗은 하나의 불멸하는 영이다. 혼의 두 번째 세대는, 영적이고 진보하는 실재들의 개인성 현시이며, 이것은 오직 이 신성한 실존개체가 그 실재의 근원, 모든 실재의 개인적 근원, 하나님, 우주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에만 끝나는 그 개인성 현시의 첫 번째 계승이다.

132:3.7 (1459.7) Human life continues — survives — because it has a universe function, the task of finding God. The faith-activated soul of man cannot stop short of the attainment of this goal of destiny; and when it does once achieve this divine goal, it can never end because it has become like God — eternal.인간의 생명은 계속 이어져 생존한다. 이는 그것이 하나의 우주 기능의 과제 즉 하나님을 찾아내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신앙이 활성화된 사람의 혼은, 이러한 운명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지할 수 없으며, 일단 이러한 신성한 목적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끝날 수 없다.

132:3.8 (1460.1) Spiritual evolution is an experience of the increasing and voluntary choice of goodness attended by an equal and progressive diminution of the possibility of evil. With the attainment of finality of choice for goodness and of completed capacity for truth appreciation, there comes into existence a perfection of beauty and holiness whose righteousness eternally inhibits the possibility of the emergence of even the concept of potential evil. Such a God-knowing soul casts no shadow of doubting evil when functioning on such a high spirit level of divine goodness.영적 진화는, 선(善)을 점점 더 많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하나의 체험이며, 그로써 악하게 될 가능성이 대등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감소되는 것을 성취한다. 선(善)에 대한 선택의 최종과 진리의 깊은 인식에 대한 완벽한 수용능력을 달성하면서, 그 정의righteousness가 잠재적 악의 개념조차도 발생하게 될 가능성을 영원히 차단하는 아름다움(美)과 거룩함에 대한 완전성이 실재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혼은, 거룩한 선이라는 높은 영적 차원에서 작용할 때, 의심을 일으킬 만한 어떤 악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다.

132:3.9 (1460.2) The presence of the Paradise spirit in the mind of man constitutes the revelation promise and the faith pledge of an eternal existence of divine progression for every soul seeking to achieve identity with this immortal and indwelling spirit fragment of the Universal Father.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 영의 현존은, 우주 아버지의 영원히 내주하는 이 영 단편과의 정체성 성취를 위해 애쓰는 모든 혼을 위하여, 거룩한 진보의 영원한 실재의 계시 약속과 신앙 서약을 성립시킨다.

132:3.10 (1460.3) Universe progress is characterized by increasing personality freedom because it is associated with the progressive attainment of higher and higher levels of self-understanding and consequent voluntary self-restraint. The attainment of perfection of spiritual self-restraint equals completeness of universe freedom and personal liberty. Faith fosters and maintains man’s soul in the midst of the confusion of his early orientation in such a vast universe, whereas prayer becomes the great unifier of the various inspirations of the creative imagination and the faith urges of a soul trying to identify itself with the spirit ideals of the indwelling and associated divine presence. 우주에서 진보의 특징은 개인성 해방의 증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아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자발적 자아 억제라는 더욱 높고 높은 차원들에 대한 진보적 달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적 자아 억제의 완전한 성취는, 우주의 자유와 개인적 해방의 완성과 같다. 신앙은 그러한 광대한 우주 안에서 적응하는 초기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의 혼을 돌보고 관리하며, 그에 반하여 기도는, 내주하고 연합된 신성한 존재의 영적 이상들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혼의 신앙적 충동들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다양한 영감을 놀라울 정도로 통일시켜 준다.

132:3.11 (1460.4) Nabon was greatly impressed by these words, as he was by each of his talks with Jesus. These truths continued to burn within his heart, and he was of great assistance to the later arriving preachers of Jesus’ gospel. 나본은 예수와의 다른 모든 이야기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말들에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진리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타올랐으며, 결국 그는 나중에 도착한 예수의 복음을 설교하는 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4. Personal Ministry160817 수요 예수54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개인적 사명활동PERSONAL MINISTRY)

132:4.1 (1460.5) Jesus did not devote all his leisure while in Rome to this work of preparing men and women to become future disciples in the oncoming kingdom. He spent much time gaining an intimate knowledge of all races and classes of men who lived in this, the largest and most cosmopolitan city of the world. In each of these numerous human contacts Jesus had a double purpose: He desired to learn their reactions to the life they were living in the flesh, and he was also minded to say or do something to make that life richer and more worth while. His religious teachings during these weeks were no different than those which characterized his later life as teacher of the twelve and preacher to the multitudes. 예수께서는 로마에 있는 동안,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와 그를 위한 장래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에만 그의 여가 시간을 모두 다 소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적인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인종들과 계층들로 구성된 남녀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들을 수집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육신의 삶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둘째, 그는 사람들의 일생이 더 풍부하고 가치가 있도록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행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시절의 그의 종교적 가르침들은, 그의 후반기에 있었던 열 두 제자들의 선생이었을 때와 많은 군중들의 설교자였을 때 행했던 가르침들의 특징과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132:4.2 (1460.6) Always the burden of his message was: the fact of the heavenly Father’s love and the truth of his mercy, coupled with the good news that man is a faith-son of this same God of love. Jesus’ usual technique of social contact was to draw people out and into talking with him by asking them questions. The interview would usually begin by his asking them questions and end by their asking him questions. He was equally adept in teaching by either asking or answering questions. As a rule, to those he taught the most, he said the least. Those who derived most benefit from his personal ministry were overburdened, anxious, and dejected mortals who gained much relief because of the opportunity to unburden their souls to a sympathetic and understanding listener, and he was all that and more. And when these maladjusted human beings had told Jesus about their troubles, always was he able to offer practical and immediately helpful suggestions looking toward the correction of their real difficulties, albeit he did not neglect to speak words of present comfort and immediate consolation. And invariably would he tell these distressed mortals about the love of God and impart the information, by various and sundry methods, that they were the children of this loving Father in heaven.그의 메시지의 요지는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과 그의 자비라는 진리와 함께, 사람은 이 동일한 사랑의 하나님의 신앙 아들faith-son이라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통상적인 방식은 대화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대화 가운데로 이끌어 내시곤 하셨습니다. 대화는 흔히 예수께서 그들에게 던지셨던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끝이 나곤 하였습니다. 그는 질문과 대답을 통한 가르침의 전달 모두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가장 많이 가르쳤던 사람들에게, 가장 적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사명활동을 통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과 걱정이 많고 낙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동정심이 많고 이해해 주는 이 사람에게 자신들의 혼의 짐을 내려놓게 되어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는 이러한 위로 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고민들을 털어놓았을 때, 예수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실제적 어려움을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이며 즉각적 도움이 되는 제안들을 항상 해 줄 수 있었지만, 현재의 평안과 당장에 필요한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들이 바로 사랑이 많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소식을 다양한 모든 방법으로 전하곤 하셨습니다.

132:4.3 (1461.1) In this manner, during the sojourn in Rome, Jesus personally came into affectionate and uplifting contact with upward of five hundred mortals of the realm. He thus gained a knowledge of the different races of mankind which he could never have acquired in Jerusalem and hardly even in Alexandria. He always regarded this six months as one of the richest and most informative of any like period of his earth life. 이런 식으로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 곳에 있는 500명 이상의 사람들과 넘치는 애정으로 사람의 정신을 고양하는 개인적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그는, 예루살렘이나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얻지 못한 여러 다른 인종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상 일생 중에서 이 6개월의 기간을 가장 풍부하고 유익한 시기 중의 하나로 늘 여기셨습니다.

132:4.4 (1461.2) As might have been expected, such a versatile and aggressive man could not thus function for six months in the world’s metropolis without being approached by numerous persons who desired to secure his services in connection with some business or, more often, for some project of teaching, social reform, or religious movement. More than a dozen such proffers were made, and he utilized each one as an opportunity for imparting some thought of spiritual ennoblement by well-chosen words or by some obliging service. Jesus was very fond of doing things — even little things — for all sorts of people.예측할 수 있듯이 예수처럼 재능이 많고 적극적인 사람이 세계의 중심지에서, 수많은 사업 제안이나 사람들의 교섭을 받지 않은 채로 6개월 동안 그런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빈번하게 교육 방면에서의 구체적인 프로젝트, 사회 개혁이나 종교적 운동과 관련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제의가 12번 이상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께서는 적절한 말과 친절한 봉사를 통해, 영적 고결함에 대한 사상을 주는 기회로 활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일이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132:4.5 (1461.3) He talked with a Roman senator on politics and statesmanship, and this one contact with Jesus made such an impression on this legislator that he spent the rest of his life vainly trying to induce his colleagues to change the course of the ruling policy from the idea of the government supporting and feeding the people to that of the people supporting the government. Jesus spent one evening with a wealthy slaveholder, talked about man as a son of God, and the next day this man, Claudius, gave freedom to one hundred and seventeen slaves. He visited at dinner with a Greek physician, telling him that his patients had minds and souls as well as bodies, and thus led this able doctor to attempt a more far-reaching ministry to his fellow men. He talked with all sorts of people in every walk of life. The only place in Rome he did not visit was the public baths. He refused to accompany his friends to the baths because of the sex promiscuity which there prevailed.그는 로마의 어떤 원로원 의원과 정치와 정치적 수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와의 이 한 번의 만남에 의하여 이 입법부 의원은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동료들로 하여금 정부가 국민을 후원하고 부양하는 개념으로부터 국민이 정부를 후원하는 관념으로 통치 제도의 방침을 바꾸도록 유도하려고 여생을 다해 노력하였지만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사람이라는 주제로 어떤 부유한 노예 소유자와 하루 저녁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클라우디오스Claudius라는 이 사람은 다음 날 117명의 자기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켰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저녁 식사시간에 어떤 그리스 의사를 만났는데, 그의 환자들이 육체 이외에도 마음과 혼을 갖고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었으며, 그 결과, 이 유능한 의사는 자기 이웃들을 향한 이전보다 훨씬 멀리까지 의사로서의 사명 활동에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에 속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방문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는 바로 공중목욕탕이었습니다. 난잡한 성(性) 행위가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132:4.6 (1461.4) To a Roman soldier, as they walked along the Tiber, he said: “Be brave of heart as well as of hand. Dare to do justice and be big enough to show mercy. Compel your lower nature to obey your higher nature as you obey your superiors. Revere goodness and exalt truth. Choose the beautiful in place of the ugly. Love your fellows and reach out for God with a whole heart, for God is your Father in heaven.”그는 로마의 병정과 함께 티버Tiber 강변을 걸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용감해야 한다. 대담하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성장해야 한다. 네가 상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너의 낮은 본성으로 하여금 더 높은 본성에 복종하게 해야 한다. 선을 존중하고 진리를 고양(高揚)시키기 바란다. 추한 것들 대신에 아름다운 것들을 선택하라. 너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132:4.7 (1461.5) To the speaker at the forum he said: “Your eloquence is pleasing, your logic is admirable, your voice is pleasant, but your teaching is hardly true. If you could only enjoy the inspiring satisfaction of knowing God as your spiritual Father, then you might employ your powers of speech to liberate your fellows from the bondage of darkness and from the slavery of ignorance.” This was the Marcus who heard Peter preach in Rome and became his successor. When they crucified Simon Peter, it was this man who defied the Roman persecutors and boldly continued to preach the new gospel. 공개토론회의 연사(演士)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너의 웅변술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고, 너의 논리는 감탄할 만하며, 네 목소리는 듣기에 아름답지만, 너의 가르침은 진리와 너무 거리가 멀다. 만일 네가, 너의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는 영감이 넘치는 만족을 누릴 수만 있다면, 너는 너의 동료들을 어둠의 속박과 무지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너의 연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던 마커스Marcus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도전하고 새로운 복음 설교를 계속하였던 이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132:4.8 (1462.1) Meeting a poor man who had been falsely accused, Jesus went with him before the magistrate and, having been granted special permission to appear in his behalf, made that superb address in the course of which he said: “Justice makes a nation great, and the greater a nation the more solicitous will it be to see that injustice shall not befall even its most humble citizen. Woe upon any nation when only those who possess money and influence can secure ready justice before its courts! It is the sacred duty of a magistrate to acquit the innocent as well as to punish the guilty. Upon the impartiality, fairness, and integrity of its courts the endurance of a nation depends. Civil government is founded on justice, even as true religion is founded on mercy.” The judge reopened the case, and when the evidence had been sifted, he discharged the prisoner. Of all Jesus’ activities during these days of personal ministry, this came the nearest to being a public appearance. 누명을 쓴 한 가엾은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행정관에게 가서, 그를 대변해 줄 수 있는 특별한 허락을 얻은 후에, 그 과정 중에 놀라운 연설을 하셨습니다. “공의가 한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라가 위대해질수록, 가장 미천한 시민에게까지 불의가 행해지지 않도록 더욱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단지 돈과 세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법정에서 공의를 행하려 하는 나라에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 죄지은 자를 벌주는 것뿐만 아니라, 죄 없는 자를 풀어주는 것도 행정관의 신성한 의무이다. 법정의 공명정대, 공정성, 그리고 고결성 위에 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자비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시민의 정부는 공의 위에 세워진다.” 그 재판관은 그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었으며, 증거를 면밀히 검사한 뒤에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개인적 사명적 활동 중에서, 이 사건이 공개적인 활동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5. Counseling the Rich Man160824 수요 예수55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부자에게 준 조언COUNSELING THE RICH MAN)

132:5.1 (1462.2) A certain rich man, a Roman citizen and a Stoic, became greatly interested in Jesus’ teaching, having been introduced by Angamon. After many intimate conferences this wealthy citizen asked Jesus what he would do with wealth if he had it, and Jesus answered him: “I would bestow material wealth for the enhancement of material life, even as I would minister knowledge, wisdom, and spiritual service for the enrichment of the intellectual life, the ennoblement of the social life, and the advancement of the spiritual life. I would administer material wealth as a wise and effective trustee of the resources of one generation for the benefit and ennoblement of the next and succeeding generations.”금욕주의자이며 로마시민인 어떤 부자가, 앙가몬Angamon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친숙한 만남 후, 이 부자는 예수님께 그가 만일 많은 재산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겠느냐고 물었으며,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지식은 지적생활의 풍요를 위해, 지혜는 사회생활의 고상함을 위해, 영적 봉사활동은 영적인 생활의 진보를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물질적 재산은 물질적 생활의 향상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한 세대의 자원을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자로서, 다음 세대와 계속되는 후손들의 이익과 고상함을 위하여 책임지고, 재산들을 관리할 것이다.”

132:5.2 (1462.3) But the rich man was not fully satisfied with Jesus’ answer. He made bold to ask again: “But what do you think a man in my position should do with his wealth? Should I keep it, or should I give it away?” And when Jesus perceived that he really desired to know more of the truth about his loyalty to God and his duty to men, he further answered: “My good friend, I discern that you are a sincere seeker after wisdom and an honest lover of truth; therefore am I minded to lay before you my view of the solution of your problems having to do with the responsibilities of wealth. I do this because you have asked for my counsel, and in giving you this advice, I am not concerned with the wealth of any other rich man; I am offering advice only to you and for your personal guidance. If you honestly desire to regard your wealth as a trust, if you really wish to become a wise and efficient steward of your accumulated wealth, then would I counsel you to make the following analysis of the sources of your riches: Ask yourself, and do your best to find the honest answer, whence came this wealth? And as a help in the study of the sources of your great fortune, I would suggest that you bear in mind the following ten different methods of amassing material wealth: 그러나 그 부자는 예수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어서, 그는 대담하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것을 간직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나눠 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의무에 대한 진리를 그가 진정으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예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선한 친구여, 네가 지혜를 진지하게 구하는 자이며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나는 알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재물에 대한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겠노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나의 조언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며, 이 충고는 다른 부자들의 재물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나는 오직 너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 지침이 되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진정으로 너의 재물을 하나의 신탁물로 여기며, 네가 그 축적된 재물에 대하여 현명하며 유능한 청지기가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너의 부(富)의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너에게 조언을 하고자 한다. 이 재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고, 그런 후 정직하게 대답을 찾도록 최선을 다해라. 너의 많은 재산의 출처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다음과 같이 물질적 재산 축적에 대한 열 가지 방법에 대한 제안을 고려하기를 바란다.

132:5.3 (1462.4) “1. Inherited wealth — riches derived from parents and other ancestors.1. 상속된 재산 — 부모나 다른 조상들로부터의 부(富).

132:5.4 (1462.5) “2. Discovered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uncultivated resources of mother earth.2. 발견되어진 재산 — 본래의 땅에 있지만 개발되지 않은 자원으로부터의 부.

132:5.5 (1462.6) “3. Trade wealth — riches obtained as a fair profit in the exchange and barter of material goods.3. 거래에 의해 얻은 재산 — 물질적 상품의 물물교환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얻어진 부.

132:5.6 (1462.7) “4. Unfair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unfair exploitation or the enslavement of one’s fellows.4. 부당한 재산 — 부당한 착취나 혹은 자신의 동료를 노예화함으로 얻어진 부.

132:5.7 (1463.1) “5. Interest wealth — income derived from the fair and just earning possibilities of invested capital.5. 금리로 얻은 재산 — 투자한 자본의 공정하고 정당한 수익 가능성으로부터의 수입.

132:5.8 (1463.2) “6. Genius wealth — riches accruing from the rewards of the creative and inventive endowments of the human mind.6. 타고난 재능으로 얻은 재산 — 사람의 마음속에 타고난 창조적이고 발명적인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 얻은 부.

132:5.9 (1463.3) “7. Accidental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generosity of one’s fellows or taking origin in the circumstances of life.7. 우연히 얻은 재산 — 자신의 동료의 관대함으로부터 혹은 일생의 환경에서 온 부(富).

132:5.10 (1463.4) “8. Stolen wealth — riches secured by unfairness, dishonesty, theft, or fraud.8. 훔친 재산 — 부당함, 부정직함, 도둑질, 혹은 사기에 의한 부.

132:5.11 (1463.5) “9. Trust funds — wealth lodged in your hands by your fellows for some specific use, now or in the future.9. 신탁된 기금 — 현재나 혹은 미래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사용을 위해 네 이웃들로부터 너에게 맡겨진 재산.

132:5.12 (1463.6) “10. Earned wealth — riches derived directly from your own personal labor, the fair and just reward of your own daily efforts of mind and body.10. 벌어서 모은 재산 — 네 자신의 노동, 마음과 육체를 사용하여 네가 직접 매일 수고한 것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보수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부.

132:5.13 (1463.7) “And so, my friend, if you would be a faithful and just steward of your large fortune, before God and in service to men, you must approximately divide your wealth into these ten grand divisions, and then proceed to administer each portion in accordance with the wise and honest interpretation of the laws of justice, equity, fairness, and true efficiency; albeit, the God of heaven would not condemn you if sometimes you erred, in doubtful situations, on the side of merciful and unselfish regard for the distress of the suffering victims of the unfortunate circumstances of mortal life. When in honest doubt about the equity and justice of material situations, let your decisions favor those who are in need, favor those who suffer the misfortune of undeserved hardships.”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네가 만일 너의 많은 재산에 대한 신실하고 의로운 청지기라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함에 있어서, 재산을 대략 이러한 열 가지의 부문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그런 다음, 그러한 각각의 몫을 공의, 공평, 공정성, 진정한 효율성이라는 법칙들의 현명하고 정직한 판단에 따라서 계속 관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가끔 확실치 않은 상황들에 처하여, 인간 일생의 불행한 환경 아래 고통 받는 희생자들의 괴로움을 도와주며 자비롭고 사심 없는 배려를 하는 중에서 실수를 범한다고 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물질적 상황의 공평함과 공의에 대해서 진정으로 확실하게 알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는, 궁핍한 자에게 유리하고 불행으로 부당하게 고생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132:5.14 (1463.8) After discussing these matters for several hours and in response to the rich man’s request for further and more detailed instruction, Jesus went on to amplify his advice, in substance saying: “While I offer further suggestions concerning your attitude toward wealth, I would admonish you to receive my counsel as given only to you and for your personal guidance. I speak only for myself and to you as an inquiring friend. I adjure you not to become a dictator as to how other rich men shall regard their wealth. I would advise you: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시간을 토의한 후에, 그 부자는 좀 더 자세한 가르침을 간청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자신의 충고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재산에 대한 너의 태도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제안함에 있어서, 나의 조언을 단지 너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고 네 개인적 지침으로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오직 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질문하는 친구에 대한 답변으로 말할 뿐이다. 다른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네가 명령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너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자 한다.

132:5.15 (1463.9) “1. As steward of inherited wealth you should consider its sources. You are under moral obligation to represent the past generation in the honest transmittal of legitimate wealth to succeeding generations after subtracting a fair toll for the benefit of the present generation. But you are not obligated to perpetuate any dishonesty or injustice involved in the unfair accumulation of wealth by your ancestors. Any portion of your inherited wealth which turns out to have been derived through fraud or unfairness, you may disburse in accordance with your convictions of justice, generosity, and restitution. The remainder of your legitimate inherited wealth you may use in equity and transmit in security as the trustee of one generation for another. Wise discrimination and sound judgment should dictate your decisions regarding the bequest of riches to your successors. 1. 상속되어진 재산의 청지기로서 너는 그것의 근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너는 정당한 재산에 대하여 현세대의 이득을 위한 공정한 몫을 제한 후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일에 있어서, 과거의 세대들을 대표하는 도덕적 의무 아래에 있다. 그러나 네 조상들에 의해 부당하게 축적된 재산에 내포된 어떤 부정이나 불의든지 계속 유지시킬 의무는 없다. 사기나 부당함에서 연유되었다고 밝혀진, 너에게 상속된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너는 공의와 관대함 그리고 배상에 대한 네 신념에 의거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정당하게 상속된 너의 나머지 재산은 네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신탁자로서 안전하게 전해야 한다. 네 후손들에게 재물을 전해주는 데 있어서, 현명한 식별력과 건전한 판단력이 네 의사 결정들을 좌우해야 할 것이다.

132:5.16 (1463.10) “2. Everyone who enjoys wealth as a result of discovery should remember that one individual can live on earth but a short season and should, therefore, make adequate provision for the sharing of these discoveries in helpful ways by the largest possible number of his fellow men. While the discoverer should not be denied all reward for efforts of discovery, neither should he selfishly presume to lay claim to all of the advantages and blessings to be derived from the uncovering of nature’s hoarded resources. 2. 발견에 의한 결과로 재산을 얻은 모든 사람은, 한 개별존재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기간뿐임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그러한 발견들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발견한 자의 수고의 대가가 무시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자연의 숨겨진 보물의 자원으로부터 유래한 모든 이익들과 축복들을 자신만의 것이라는 이기적인 권리 주장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132:5.17 (1464.1) “3. As long as men choose to conduct the world’s business by trade and barter, they are entitled to a fair and legitimate profit. Every tradesman deserves wages for his services; the merchant is entitled to his hire. The fairness of trade and the honest treatment accorded one’s fellows in the organized business of the world create many different sorts of profit wealth, and all these sources of wealth must be judged by the highest principles of justice, honesty, and fairness. The honest trader should not hesitate to take the same profit which he would gladly accord his fellow trader in a similar transaction. While this sort of wealth is not identical with individually earned income when business dealings are conducted on a large scale, at the same time, such honestly accumulated wealth endows its possessor with a considerable equity as regards a voice in its subsequent distribution. 3. 사람들이 세계의 상업을 위해 무역이나 물물교환을 수단으로 선택하는 한, 그들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모든 소매상인들은 자신의 봉사에 대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무역업자는 그를 고용할 권리가 있다. 이 세상의 조직화된 상업에 있어서 정당한 무역과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이익금을 창출한다. 이러한 모든 재산의 근원들은 공의와 정직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최고의 원칙들에 의해 판별되어야 한다. 정직한 무역업자는, 같은 종류의 거래를 하는 동료 무역업자들과 기꺼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똑같은 이익을 남기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재산이 큰 규모의 상업거래에 의하여 얻어졌을 때, 그것이 개별적으로 번 것과 동일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정직하게 축적되어진 재산은 나중에 그것의 분배에 있어서 소유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상당히 공평하게 나뉘어져야만 한다.

132:5.18 (1464.2) “4. No mortal who knows God and seeks to do the divine will can stoop to engage in the oppressions of wealth. No noble man will strive to accumulate riches and amass wealth-power by the enslavement or unfair exploitation of his brothers in the flesh. Riches are a moral curse and a spiritual stigma when they are derived from the sweat of oppressed mortal man. All such wealth should be restored to those who have thus been robbed or to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An enduring civilization cannot be built upon the practice of defrauding the laborer of his hire. 4. 하나님을 알고 신성한 의지를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억압에 의한 재산 착취에 가담하지 못할 것이다. 숭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노예화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지 않을 것이고 재산의 힘을 모으려고 분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억압된 사람들의 땀으로부터 얻어졌을 때, 부(富)는 도덕적 저주와 영적 오점이 된다. 그러한 모든 재산은, 그런 식으로 빼앗긴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자손과 자손의 자손에게 반환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문명은, 고용된 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습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다.

132:5.19 (1464.3) “5. Honest wealth is entitled to interest. As long as men borrow and lend, that which is fair interest may be collected provided the capital lent was legitimate wealth. First cleanse your capital before you lay claim to the interest. Do not become so small and grasping that you would stoop to the practice of usury. Never permit yourself to be so selfish as to employ money-power to gain unfair advantage over your struggling fellows. Yield not to the temptation to take usury from your brother in financial distress. 5. 정당한 재산은 이자를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빌리고 빌려주는 한, 빌려준 원금에 대하여 받을 수 있는 공정한 이자는 합법적인 재산이다. 이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네 원금을 정화시켜라. 너무나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져서, 높은 이자로 폭리를 취할 만큼 비열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무 이기적이 되어, 돈의 힘을 이용하여, 고전하는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도록 해라.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네 형제들로부터 폭리를 취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라.

132:5.20 (1464.4) “6. If you chance to secure wealth by flights of genius, if your riches are derived from the rewards of inventive endowment, do not lay claim to an unfair portion of such rewards. The genius owes something to both his ancestors and his progeny; likewise is he under obligation to the race, nation, and circumstances of his inventive discoveries; he should also remember that it was as man among men that he labored and wrought out his inventions. It would be equally unjust to deprive the genius of all his increment of wealth. And it will ever be impossible for men to establish rules and regulations applicable equally to all these problems of the equitable distribution of wealth. You must first recognize man as your brother, and if you honestly desire to do by him as you would have him do by you, the commonplace dictates of justice, honesty, and fairness will guide you in the just and impartial settlement of every recurring problem of economic rewards and social justice. 6. 만일 네가 우수한 천부적 재능에 의해 우연히 재산을 얻었다면, 만일 발명하는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 너의 재산이 주어졌다면, 그러한 보상에 대해 부당한 몫을 주장하지 마라. 비범한 자질은 그의 조상들과 그의 자손들 둘 모두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는 인류, 국가, 그리고 자신의 독창적인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 환경들에게도 의무가 있으며, 자기가 수고하여 발명한 것도, 사람들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룩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의 재산을 증식하는 비범한 재능을 박탈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불공정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의 공정한 분배에서 이들에 관한 모든 문제에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규율과 규칙들을 세운다는 것은 사람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너는 먼저 사람들이 네 형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네 의도대로 상대방을 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너도 그의 의도대로 그에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공의, 정직, 공정이라는 평범한 양심의 지시가 경제적인 보상들과 사회정의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바른 길에서 치우치지 않도록, 너를 안내해줄 것이다.

132:5.21 (1464.5) “7. Except for the just and legitimate fees earned in administration, no man should lay personal claim to that wealth which time and chance may cause to fall into his hands. Accidental riches should be regarded somewhat in the light of a trust to be expended for the benefit of one’s social or economic group. The possessors of such wealth should be accorded the major voice in the determination of the wise and effective distribution of such unearned resources. Civilized man will not always look upon all that he controls as his personal and private possession. 7. 관리를 통해서 획득한 올바르고 정당한 보수를 제외하고, 시간과 기회로 인해서 자기 손안에 떨어진 재산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개인적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연히 얻은 재산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적, 경제적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쓰이기 위한 신탁물이라는 입장에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재산의 소유자들은, 노력 없이 얻은 그러한 자원에 대한 현명하고 효력적인 분배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교양이 높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개인적이며 사적(私的)인 소유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32:5.22 (1465.1) “8. If any portion of your fortune has been knowingly derived from fraud; if aught of your wealth has been accumulated by dishonest practices or unfair methods; if your riches are the product of unjust dealings with your fellows, make haste to restore all these ill-gotten gains to the rightful owners. Make full amends and thus cleanse your fortune of all dishonest riches. 8. 만일 네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사기 행위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만일 네 재산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부정직한 일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 의해서 축적된 것이며, 만일 네 재산이 네 이웃들과의 불공정한 거래에 의한 산물이라면, 잘못 얻어진 이러한 모든 소득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주인들에게 서둘러서 반환해라. 충분한 보상을 통하여 너의 모든 부정직한 재산을 깨끗하게 만들어라.

132:5.23 (1465.2) “9. The trusteeship of the wealth of one person for the benefit of others is a solemn and sacred responsibility. Do not hazard or jeopardize such a trust. Take for yourself of any trust only that which all honest men would allow. 9.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그 재산을 신탁 관리하는 일은 하나의 중대하고 신성한 의무를 갖는다. 그러한 신용에 해를 입히거나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공정한 사람들이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양(量)만을 그 신탁금에서 네 몫으로 떼어놓아라.

132:5.24 (1465.3) “10. That part of your fortune which represents the earnings of your own mental and physical efforts — if your work has been done in fairness and equity — is truly your own. No man can gainsay your right to hold and use such wealth as you may see fit provided your exercise of this right does not work harm upon your fellows.” 10. 너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으로 얻은 네 재산은, 만약 그 일이 공정함과 공평함으로 된 것이었다면, 진정한 네 소유이다. 그러한 재산을 간직하고 사용하는 너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네가 보기에 그것이 네 이웃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132:5.25 (1465.4) When Jesus had finished counseling him, this wealthy Roman arose from his couch and, in saying farewell for the night, delivered himself of this promise: “My good friend, I perceive you are a man of great wisdom and goodness, and tomorrow I will begin the administration of all my wealth in accordance with your counsel.” 예수께서 그에게 조언을 끝내자, 이 부유한 로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약속하였습니다. “나의 선한 친구여, 나는 당신이 위대한 지혜와 선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는 내일부터 당신의 조언에 따라 나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6. Social Ministry160831 수요 예수56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사회적인 사역SOCIAL MINISTRY)

132:6.1 (1465.5) Here in Rome also occurred that touching incident in which the Creator of a universe spent several hours restoring a lost child to his anxious mother. This little boy had wandered away from his home, and Jesus found him crying in distress. He and Ganid were on their way to the libraries, but they devoted themselves to getting the child back home. Ganid never forgot Jesus’ comment: “You know, Ganid, most human beings are like the lost child. They spend much of their time crying in fear and suffering in sorrow when, in very truth, they are but a short distance from safety and security, even as this child was only a little way from home. And all those who know the way of truth and enjoy the assurance of knowing God should esteem it a privilege, not a duty, to offer guidance to their fellows in their efforts to find the satisfactions of living. Did we not supremely enjoy this ministry of restoring the child to his mother? So do those who lead men to God experience the supreme satisfaction of human service.” And from that day forward, for the remainder of his natural life, Ganid was continually on the lookout for lost children whom he might restore to their homes. 로마에서 우주의 창조주가 길 잃은 아이를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주기 위해 몇 시간 지체했던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멀리 나와 방황하며,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와 가니드는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지만, 아이의 집을 찾기 위해 전념하였습니다. 가니드는 예수께서 하셨던 다음의 말을 결코 잊지 못하였습니다. “가니드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 잃은 이 아이와 같단다. 이 아이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방황한 것처럼, 사람들은 지척에 안전과 보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 두려움 때문에 울며, 슬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확신을 누리고, 진리의 길을 아는 모든 자들은, 삶의 만족을 찾아 헤매는 자기 이웃들에게,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써, 안내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 아이에게 어머니 찾아주는 이 일을 하면서 우리가 최상의 기쁨을 누리지 않았더냐.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자들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 중 최상의 만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가니드는 길 잃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자신의 여생동안 계속하였습니다.

132:6.2 (1465.6) There was the widow with five children whose husband had been accidentally killed. Jesus told Ganid about the loss of his own father by an accident, and they went repeatedly to comfort this mother and her children, while Ganid sought money from his father to provide food and clothing. They did not cease their efforts until they had found a position for the eldest boy so that he could help in the care of the family.남편을 사고로 사별한 후, 다섯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과부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던 일에 대하여 가니드에게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로하였고, 가니드는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아서 음식과 옷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과부의 장남에게 직장을 구해 주어서 그가 가족들을 돌볼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러한 수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32:6.3 (1465.7) That night, as Gonod listened to the recital of these experiences, he said to Jesus, good-naturedly: “I propose to make a scholar or a businessman of my son, and now you start out to make a philosopher or philanthropist of him.” And Jesus smilingly replied: “Perhaps we will make him all four; then can he enjoy a fourfold satisfaction in life as his ear for the recognition of human melody will be able to recognize four tones instead of one.” Then said Gonod: “I perceive that you really are a philosopher. You must write a book for future generations.” And Jesus replied: “Not a book — my mission is to live a life in this generation and for all generations. I —” but he stopped, saying to Ganid, “My son, it is time to retire.” 그 날 밤, 고노드는 이러한 체험들에 관해서 설명을 듣다가, 예수에게 부드럽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학자나 사업가로 키우려고 하였는데, 당신은 이제 이 아이를 철학자나 자선가로 만들기로 작정하셨군요.” 그러자 예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는 당신이 말한 그 네 가지 전부를 그가 성취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귀가 한 가지 음색이 아니라 네 가지 음색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일생 네 곱절의 만족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고노드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후손들을 위하여 책을 쓰셔야 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책이 아니라 나의 사명은 이 세대와 모든 세대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멈추면서 가니드에게, “나의 아들아, 이제 잘 시간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7. Trips About Rome160921 수요 예수57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로마 주변 여행TRIPS ABOUT ROME)

132:7.1 (1466.1) Jesus, Gonod, and Ganid made five trips away from Rome to points of interest in the surrounding territory. On their visit to the northern Italian lakes Jesus had the long talk with Ganid concerning the impossibility of teaching a man about God if the man does not desire to know God. They had casually met a thoughtless pagan while on their journey up to the lakes, and Ganid was surprised that Jesus did not follow out his usual practice of enlisting the man in conversation which would naturally lead up to the discussion of spiritual questions. When Ganid asked his teacher why he evinced so little interest in this pagan, Jesus answered: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떠나 그 변방의 지역들에 있는 흥미로운 곳을 중심으로, 다섯 차례 여행을 하였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호수를 방문하였을 때,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관하여, 예수는 가니드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호수로 올라가는 길에서, 그들은 경솔한 한 이방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연스럽게 영적 질문들을 끌어내어 토의를 시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니드는 의아해 하였습니다. 가니드가 그의 선생에게 왜 이 이방인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132:7.2 (1466.2) “Ganid, the man was not hungry for truth. He was not dissatisfied with himself. He was not ready to ask for help, and the eyes of his mind were not open to receive light for the soul. That man was not ripe for the harvest of salvation; he must be allowed more time for the trials and difficulties of life to prepare him for the reception of wisdom and higher learning. Or, if we could have him live with us, we might by our lives show him the Father in heaven, and thus would he become so attracted by our lives as sons of God that he would be constrained to inquire about our Father. You cannot reveal God to those who do not seek for him; you cannot lead unwilling souls into the joys of salvation. Man must become hungry for truth as a result of the experiences of living, or he must desire to know God as the result of contact with the lives of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the divine Father before another human being can act as the means of leading such a fellow mortal to the Father in heaven. If we know God, our real business on earth is so to live as to permit the Father to reveal himself in our lives, and thus will all God-seeking persons see the Father and ask for our help in finding out more about the God who in this manner finds expression in our lives.”“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를 알고자 갈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의 마음의 눈은 혼을 위한 빛을 얻기 위해 열려있지 않았다. 저 사람은 구원의 수확을 할 준비가 되지 있지 않았다. 그가 지혜와 높은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생활의 시험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그가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줄 수도 있다. 그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삶에 매료가 된 결과로 그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당연히 우리에게 질문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다. 원하지 않는 혼을 구원의 기쁨으로 인도할 수 없단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는 체험을 통해 진리에 대하여 굶주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그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그는 신성한 아버지를 알고 지내온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을 알고자 갈망하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생활을 통해 아버지께서 자신을 계시하도록 허용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 모든 개인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아버지를 볼 것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더욱 찾기 위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132:7.3 (1466.3) It was on the visit to Switzerland, up in the mountains, that Jesus had an all-day talk with both father and son about Buddhism. Many times Ganid had asked Jesus direct questions about Buddha, but he had always received more or less evasive replies. Now, in the presence of the son, the father asked Jesus a direct question about Buddha, and he received a direct reply. Said Gonod: “I would really like to know what you think of Buddha.” And Jesus answered: 스위스를 방문하는 중 높은 산에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부자(父子)와 함께 하루 종일 불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니드는 예수에게 여러 차례 부처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들을 했었지만, 그는 항상 다소 회피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아들 앞에서, 아버지 고노드가 예수님께 부처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바로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노드가, “저는 당신이 부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진심으로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32:7.4 (1466.4) “Your Buddha was much better than your Buddhism. Buddha was a great man, even a prophet to his people, but he was an orphan prophet; by that I mean that he early lost sight of his spiritual Father, the Father in heaven. His experience was tragic. He tried to live and teach as a messenger of God, but without God. Buddha guided his ship of salvation right up to the safe harbor, right up to the entrance to the haven of mortal salvation, and there, because of faulty charts of navigation, the good ship ran aground. There it has rested these many generations, motionless and almost hopelessly stranded. And thereon have many of your people remained all these years. They live within hailing distance of the safe waters of rest, but they refuse to enter because the noble craft of the good Buddha met the misfortune of grounding just outside the harbor. And the Buddhist peoples never will enter this harbor unless they abandon the philosophic craft of their prophet and seize upon his noble spirit. Had your people remained true to the spirit of Buddha, you would have long since entered your haven of spirit tranquillity, soul rest, and assurance of salvation. “당신들의 부처는 불교보다 훨씬 뛰어났었소. 부처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자기 민족에게는 선지자와 같았지만, 그는 고아(孤兒) 선지자 이었소. 이는 그가 일찍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뜻이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 그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처럼 살고자 했고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소. 부처는 자기가 탄 구원의 배를 사람이 얻을 구원의 안식처의 입구까지, 안전한 항구의 문턱에까지는 인도하였으나, 바로 그곳에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그 훌륭한 배는 좌초되었던 것이오. 그 배는 지나간 수많은 세대들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거의 희망을 잃으면서 지금껏 그곳에 묶여 있소. 그리고 당신의 민족 대부분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소. 그들은 안식하는 안전한 바다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지만, 훌륭한 부처의 고상한 배가 항구 바로 밖에서 가라앉는 불행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하였소. 그리고 불교신자들은 그들의 선지자의 철학적 배를 포기하고 그의 고상한 마음을 포착하지 않는 한, 이 항구에 들어올 수가 없소. 당신 민족이 부처의 마음에 진실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당신들은 오래 전에 영적 고요함과 혼의 안식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안식처에 들어왔었을 것이오.”

132:7.5 (1467.1) “You see, Gonod, Buddha knew God in spirit but failed clearly to discover him in mind; the Jews discovered God in mind but largely failed to know him in spirit. Today, the Buddhists flounder about in a philosophy without God, while my people are piteously enslaved to the fear of a God without a saving philosophy of life and liberty. You have a philosophy without a God; the Jews have a God but are largely without a philosophy of living as related thereto. Buddha, failing to envision God as a spirit and as a Father, failed to provide in his teaching the moral energy and the spiritual driving power which a religion must possess if it is to change a race and exalt a nation.” “고노드여, 부처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마음속에서 그를 분명하게 발견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반면에 유대인들은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지만, 영적으로 그를 아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였소. 오늘날, 불교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철학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고, 반면에 나의 민족들은 가련하게도 생명과 해방의 구원이 되는 철학을 가지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소. 당신들은 하나님 없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관련되는 삶의 철학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있소. 마음속에 하나님을 영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바라보지 못한 부처는,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 만약에 종교가 인류를 변화시키고 한 국가를 높여주는 것이라면 —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으로 연유되는 힘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소.”

132:7.6 (1467.2) Then exclaimed Ganid: “Teacher, let’s you and I make a new religion, one good enough for India and big enough for Rome, and maybe we can trade it to the Jews for Yahweh.” And Jesus replied: “Ganid, religions are not made. The religions of men grow up over long periods of time, while the revelations of God flash upon earth in the lives of the men who reveal God to their fellows.” But they did not comprehend the meaning of these prophetic words. 그러자 가니드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 인도를 위해 충분히 훌륭하며, 로마를 위해서도 충분히 거창한 것을 만들지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종교가 야훼를 대신할 수 있도록 유대인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자라나는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자기 동료들에게 나타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 세상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예언적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132:7.7 (1467.3) That night after they had retired, Ganid could not sleep. He talked a long time with his father and finally said, “You know, father, I sometimes think Joshua is a prophet.” And his father only sleepily replied, “My son, there are others —”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로 돌아갔을 때,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였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는 어떤 때는 여호수아가 선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단지 졸음 섞인 말투로, “아들아, 다른 사람들도 있단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32:7.8 (1467.4) From this day, for the remainder of his natural life, Ganid continued to evolve a religion of his own. He was mightily moved in his own mind by Jesus’ broadmindedness, fairness, and tolerance. In all their discussions of philosophy and religion this youth never experienced feelings of resentment or reactions of antagonism. 그 날 이후, 가니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내, 자기 자신의 종교를 발전시키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편견 없는 마음과 공정함과 관대함 때문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모든 토론들 속에서, 이 젊은이는 예수에게서 한 번도 분개심의 감정이거나 반목의 반응들을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132:7.9 (1467.5) What a scene for the celestial intelligences to behold, this spectacle of the Indian lad proposing to the Creator of a universe that they make a new religion! And though the young man did not know it, they were making a new and everlasting religion right then and there — this new way of salvation, the revelation of God to man through, and in, Jesus. That which the lad wanted most to do he was unconsciously actually doing. And it was, and is, ever thus. That which the enlightened and reflective human imagination of spiritual teaching and leading wholeheartedly and unselfishly wants to do and be, becomes measurably creative in accordance with the degree of mortal dedication to the divine doing of the Father’s will. When man goes in partnership with God, great things may, and do, happen.이 인도 청년이 우주의 창조주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고 제의하는 광경은, 주시하고 있던 천상의 지적 존재들에게는 얼마나 굉장한 구경거리였는지! 비록 이 젊은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의 영원히 존속하는 새 종교 즉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이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그 때 그곳에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이 가장 하고 싶었던 그것을,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실제로는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 졌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함으로 계몽되어지고 반영되어지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 가슴으로 그리고 이기심을 버린 채, 하고 싶은 그것과 되고 싶어 하는 그것은, 아버지의 성스런 의지를 행하려는 인간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서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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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3 The Return from Rome 로마에서 돌아옴

Paper 133

The Return from Rome 로마에서 돌아옴

India’s caste system 인도의 특권계급 제도
1. Mercy and Justice 자비와 정의(正義)
2. Embarking at Tarentum 타렌툼에서 배에 오르심
The man mistreating his wife 아내를 학대하는 남성
3. At Corinth 고린도에서
Crispus,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회당장(會堂長) 크리스보
Justus, the merchant 상인(商人) 유스도
The two public women 두 매춘부
4. Personal Work in Corinth 고린도에서 개인적 활동
To the miller 제분업(製粉業)자에게
To the Roman centurion 로마 백부장에게
To the Mithraic leader 미트라(신비주의 계통)교 지도자에게
To the Epicurean teacher 에피크로스(쾌락주의) 학파 교사에게
To the Greek contractor 그리스 건축 도급자에게
To the Roman judge 로마의 법관에게
To the mistress of the Greek inn 그리스 숙박소의 여주인에게
To the Chinese merchant 중국 상인에게
To the traveler from Britain 영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To the runaway lad 가출 소년에게
To the condemned criminal 사형수에게
5. At Athens — Discourse on Science 아테네에서 – 과학에 관한 논의
6. At Ephesus — Discourse on the Soul 에베소에서 – 혼에 대한 강론
7. The Sojourn at Cyprus — Discourse on Mind 키프로스에 체류 -마음에 대한 강연
8. At Antioch 안디옥에서
9.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에서

133:0.1 (1468.1) WHEN preparing to leave Rome, Jesus said good-bye to none of his friends. The scribe of Damascus appeared in Rome without announcement and disappeared in like manner. It was a full year before those who knew and loved him gave up hope of seeing him again. Before the end of the second year small groups of those who had known him found themselves drawn together by their common interest in his teachings and through mutual memory of their good times with him. And these small groups of Stoics, Cynics, and mystery cultists continued to hold these irregular and informal meetings right up to the time of the appearance in Rome of the first preachers of the Christian religion. 로마를 떠나려는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예수께서는 자기의 친구들 중 아무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마스커스Damascus의 서기관은 예고 없이 왔다가, 같은 방법으로 예고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를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게 된 시점은 그가 떠나신 후 거의 1년이 지나갔을 때였습니다. 이 두 번째 해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를 알고 지냈던 작은 그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과 그와 함께 즐겁게 보냈던 서로의 기억들을 나누며 서로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스토아학파, 견유학파, 신비주의자들로 구성된 이 소규모의 그룹은, 비록 불규칙적이며 비공식적으로 모임을 진행하였지만,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이 로마에 오게 되었을 때까지도 계속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33:0.2 (1468.2) Gonod and Ganid had purchased so many things in Alexandria and Rome that they sent all their belongings on ahead by pack train to Tarentum, while the three travelers walked leisurely across Italy over the great Appian Way. On this journey they encountered all sorts of human beings. Many noble Roman citizens and Greek colonists lived along this road, but already the progeny of great numbers of inferior slaves were beginning to make their appearance. 고노드Gonod와 가니드Ganid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로마Rome에서 너무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그 물건들을 보내는 수송편에 미리 타렌툼Tarentum까지 보냈습니다. 그 동안 이 세 명의 여행자는 거대한 아피아 도로Appian Way를 따라 이탈리아Italy를 가로질러 한가하게 도보로 여행하였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고귀한 로마 시민들과 식민지 주민인 그리스인들이 이 길을 주변을 따라서 살고 있었으며, 수많은 비천한 노예들의 자손들도 일찍부터 그 길을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33:0.3 (1468.3) One day while resting at lunch, about halfway to Tarentum, Ganid asked Jesus a direct question as to what he thought of India’s caste system. Said Jesus: “Though human beings differ in many ways, the one from another, before God and in the spiritual world all mortals stand on an equal footing. There are only two groups of mortals in the eyes of God: those who desire to do his will and those who do not. As the universe looks upon an inhabited world, it likewise discerns two great classes: those who know God and those who do not. Those who cannot know God are reckoned among the animals of any given realm. Mankind can appropriately be divided into many classes in accordance with differing qualifications, as they may be viewed physically, mentally, socially, vocationally, or morally, but as these different classes of mortals appear before the judgment bar of God, they stand on an equal footing; God is truly no respecter of persons. Although you cannot escape the recognition of differential human abilities and endowments in matters intellectual, social, and moral, you should make no such distinctions in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en when assembled for worship in the presence of God.” 타렌툼에 거의 절반 정도 도달했을 때, 점심시간에 거리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가니드는 인도의 특권 계급 제도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통해 예수의 견해를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인간 존재들이 여러 방면에서 서로 많이 다르지만, 하나님 앞과 영적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서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는, 오직 두 그룹의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한 그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갈망하는 자들이며,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다. 우주적인 견해를 가지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을 고려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들은 주어진 영역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은 모두 동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직업적, 도덕적 등으로, 사람들이 다양하게 바라보는 모습과 서로 다른 여러 자격 조건들에 따라서 많은 계층으로 적당하게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계층들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모두 다 하나의 동등한 신분으로 서게 된다. 하나님은 진실로 개개인의 사람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지적, 사회적, 도덕적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인간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경우, 사람의 영적 형제관계 안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Mercy and Justice 자비와 정의(正義)

133:1.1 (1468.4) A very interesting incident occurred one afternoon by the roadside as they neared Tarentum. They observed a rough and bullying youth brutally attacking a smaller lad. Jesus hastened to the assistance of the assaulted youth, and when he had rescued him, he tightly held on to the offender until the smaller lad had made his escape. The moment Jesus released the little bully, Ganid pounced upon the boy and began soundly to thrash him, and to Ganid’s astonishment Jesus promptly interfered. After he had restrained Ganid and permitted the frightened boy to escape, the young man, as soon as he got his breath, excitedly exclaimed: “I cannot understand you, Teacher. If mercy requires that you rescue the smaller lad, does not justice demand the punishment of the larger and offending youth?” In answering, Jesus said: 그들이 타렌툼Tarentum에 가까이 도착한 어느 날 오후 길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거칠고 난폭한 어느 소년이 자기보다 작은 한 아이를 괴롭히는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는 폭행을 당하는 그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급히 달려갔으며, 그를 구해낸 후에는 그 작은 아이가 멀리 도망갈 때까지 그 가해자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그 어린 깡패를 놓아주는 순간, 가니드가 그 소년에게 달려들어 그를 호되게 때리기 시작하였으며, 예수께서 즉시 가니드를 저지시키자 가니드는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가니드를 말리면서, 겁먹은 그 불량소년이 도망하도록 도와주었을 때, 가니드는 숨을 돌리기 무섭게 흥분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선생님이 그 작은 어린아이를 구해야만 했다면, 그 아이보다 크고 공격적인 그 불량소년에게 벌을 주는 공의도 당연히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3:1.2 (1469.1) “Ganid, it is true, you do not understand. Mercy ministry is always the work of the individual, but justice punishment is the function of the social, governmental, or universe administrative groups. As an individual I am beholden to show mercy; I must go to the rescue of the assaulted lad, and in all consistency I may employ sufficient force to restrain the aggressor. And that is just what I did. I achieved the deliverance of the assaulted lad; that was the end of mercy ministry. Then I forcibly detained the aggressor a sufficient length of time to enable the weaker party to the dispute to make his escape, after which I withdrew from the affair. I did not proceed to sit in judgment on the aggressor, thus to pass upon his motive — to adjudicate all that entered into his attack upon his fellow — and then undertake to execute the punishment which my mind might dictate as just recompense for his wrongdoing. Ganid, mercy may be lavish, but justice is precise. Cannot you discern that no two persons are likely to agree as to the punishment which would satisfy the demands of justice? One would impose forty lashes, another twenty, while still another would advise solitary confinement as a just punishment. Can you not see that on this world such responsibilities had better rest upon the group or be administered by chosen representatives of the group? In the universe, judgment is vested in those who fully know the antecedents of all wrongdoing as well as its motivation. In civilized society and in an organized universe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presupposes the passing of just sentence consequent upon fair judgment, and such prerogatives are vested in the juridical groups of the worlds and in the all-knowing administrators of the higher universes of all creation.” “가니드야, 네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자비를 베푸는 활동은 항상 개별적인 일이지만, 공의에 의한 처벌은 사회나 정부 또는 우주를 관리하는 집단들의 기능이다. 나는 한 개별존재로서 자비를 베풀 권한이 있고, 곤경에 처한 그 아이를 구해 주어야만 하였으며, 가해자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완력을 사용하는 것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방금 내가 행한 일이었다. 나는 곤경에 처한 그 아이가 해방되도록 도와주었고 그것으로 나의 자비의 행위는 끝이 난 것이다. 그 후 나는 약한 자가 도망하기에 충분한 시간만큼 가해자를 힘으로 붙잡아 두었고, 그 후에는 그 일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가해자를 판결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고, 그가 자기 이웃을 공격하도록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그의 동기를 판결하고, 그의 그릇된 행동에 적절한 응징의 배상으로, 내 마음이 지시했었을 처벌을 가하지도 않았다. 가니드야, 자비는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것이지만, 공의는 정확한 것이다. 공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징벌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두 사람 조차도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느냐? 공정한 형벌로, 한 사람은 40대의 매를, 다른 사람은 20대의 매를, 또 어떤 다른 이는 격리 감금을 부과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책임이 집단에게 맡겨지거나 혹은 그 집단이 뽑은 대표자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모르겠느냐? 우주에서는, 그것의 동기만이 아니라 모든 그릇된 행동의 선행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는 존재들에게 심판이 맡겨져 있다. 모든 문명화된 사회와 잘 조직된 우주에서, 공의의 실행은 정당한 심판에 의한 의로운 판결 결과의 집행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특권은 세상들의 사법집단과 모든 창조에 해당되는 높은 우주들의 전지(全知)한 행정가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133:1.3 (1469.2) For days they talked about this problem of manifesting mercy and administering justice. And Ganid, at least to some extent, understood why Jesus would not engage in personal combat. But Ganid asked one last question, to which he never received a fully satisfactory answer; and that question was: “But, Teacher, if a stronger and ill-tempered creature should attack you and threaten to destroy you, what would you do? Would you make no effort to defend yourself?” Although Jesus could not fully and satisfactorily answer the lad’s question, inasmuch as he was not willing to disclose to him that he (Jesus) was living on earth as the exemplification of the Paradise Father’s love to an onlooking universe, he did say this much: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자비의 행함과 공의의 시행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니드는 예수가 개인적 싸움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이유를 부분적으로 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니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하였는데, 그는 그것에 대해 충분하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결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만약 힘이 더 세고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선생님을 공격하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예수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우주에게 천국 아버지의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밝히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133:1.4 (1469.3) “Ganid, I can well understand how some of these problems perplex you, and I will endeavor to answer your question. First, in all attacks which might be made upon my person, I would determine whether or not the aggressor was a son of God — my brother in the flesh — and if I thought such a creature did not possess moral judgment and spiritual reason, I would unhesitatingly defend myself to the full capacity of my powers of resistance, regardless of consequences to the attacker. But I would not thus assault a fellow man of sonship status, even in self-defense. That is, I would not punish him in advance and without judgment for his assault upon me. I would by every possible artifice seek to prevent and dissuade him from making such an attack and to mitigate it in case of my failure to abort it. Ganid, I have absolute confidence in my heavenly Father’s overcare; I am consecrated to doing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I do not believe that real harm can befall me; I do not believe that my lifework can really be jeopardized by anything my enemies might wish to visit upon me, and surely we have no violence to fear from our friends. I am absolutely assured that the entire universe is friendly to me — this all-powerful truth I insist on believing with a wholehearted trust in spite of all appearances to the contrary.” “가니드야, 이러한 문제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너를 무척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으며,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우선, 나는 내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공격에 대해서는, 그 가해자가 하나님의 아들 즉 육신적으로 나의 형제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것이며, 만약 그가 도덕적 판단과 영적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나는 주저 없이 가해자에게 발생될 결과에 상관없이, 내 온 힘을 다하여 나 자신을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나는 아들 관계를 이룩한 지위에 있는 이웃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폭행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은 채로 미리 그에게 응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로 하여금 그가 그러한 공격을 하지 않도록 예방하여 중지시킬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그 공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가니드야,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배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하였다. 진정한 해(害)가 나에게 미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나를 배척하는 자들이 나에게 가하려는 어떤 행동에 의해서든지 내 일생의 사명이 정말로 위태로워지리라고는 믿지 않으며, 두려워할 만한 어떤 폭행도 우리 친구들로부터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나는 모든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심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힘을 지닌 이 진리를 믿고자 한다.”

133:1.5 (1470.1) But Ganid was not fully satisfied. Many times they talked over these matters, and Jesus told him some of his boyhood experiences and also about Jacob the stone mason’s son. On learning how Jacob appointed himself to defend Jesus, Ganid said: “Oh, I begin to see! In the first place very seldom would any normal human being want to attack such a kindly person as you, and even if anyone should be so unthinking as to do such a thing, there is pretty sure to be near at hand some other mortal who will fly to your assistance, even as you always go to the rescue of any person you observe to be in distress. In my heart, Teacher, I agree with you, but in my head I still think that if I had been Jacob, I would have enjoyed punishing those rude fellows who presumed to attack you just because they thought you would not defend yourself. I presume you are fairly safe in your journey through life since you spend much of your time helping others and ministering to your fellows in distress — well, most likely there’ll always be someone on hand to defend you.” And Jesus replied: “That test has not yet come, Ganid, and when it does, we will have to abide by the Father’s will.” And that was about all the lad could get his teacher to say on this difficult subject of self-defense and nonresistance. On another occasion he did draw from Jesus the opinion that organized society had every right to employ force in the execution of its just mandates. 그러나 가니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하였고, 예수는 그에게 자기 소년시절의 체험들과 석공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수호를 자신의 일로 삼았던 사실을 듣고 나서, 가니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선생님과 같이 친절한 사람을 공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고, 만약 어떤 이가 생각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마치 선생님이 언제나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는 구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을 재빨리 도와 줄 어떤 사람이 틀림없이 가까이에 있게 된다는 것이군요. 선생님, 마음으로는 저도 동의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제가 만약 야고보였다면, 선생님이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공격했다고 여겨지는 무뢰한 사람들에 대해 처벌하는 일을 저는 매우 즐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맴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곤경에 빠진 친구들을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치셨으며, 동시에 선생님에게는 언제든지 방어해 줄 어떤 사람이 항상 곁에 있을 것이므로, 선생님의 삶의 여정이 상당히 안전하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가니드야, 그 시험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그 때가 이르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자기방어와 무저항에 관한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해 이 소년이 자기 선생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그는 다른 기회를 포착하여, 조직된 사회는 올바른 권한을 시행함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있다는 견해를 예수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2. Embarking at Tarentum 타렌툼에서 배에 오르심

133:2.1 (1470.2) While tarrying at the ship landing, waiting for the boat to unload cargo, the travelers observed a man mistreating his wife. As was his custom, Jesus intervened in behalf of the person subjected to attack. He stepped up behind the irate husband and, tapping him gently on the shoulder, said: “My friend, may I speak with you in private for a moment?” The angry man was nonplused by such an approach and, after a moment of embarrassing hesitation, stammered out — “er — why — yes, what do you want with me?” When Jesus had led him to one side, he said: “My friend, I perceive that something terrible must have happened to you; I very much desire that you tell me what could happen to such a strong man to lead him to attack his wife, the mother of his children, and that right out here before all eyes. I am sure you must feel that you have some good reason for this assault. What did the woman do to deserve such treatment from her husband? As I look upon you, I think I discern in your face the love of justice if not the desire to show mercy. I venture to say that, if you found me out by the wayside, attacked by robbers, you would unhesitatingly rush to my rescue. I dare say you have done many such brave things in the course of your life. Now, my friend, tell me what is the matter? Did the woman do something wrong, or did you foolishly lose your head and thoughtlessly assault her?” It was not so much what he said that touched this man’s heart as the kindly look and the sympathetic smile which Jesus bestowed upon him at the conclusion of his remarks. Said the man: “I perceive you are a priest of the Cynics, and I am thankful you restrained me. My wife has done no great wrong; she is a good woman, but she irritates me by the manner in which she picks on me in public, and I lose my temper. I am sorry for my lack of self-control, and I promise to try to live up to my former pledge to one of your brothers who taught me the better way many years ago. I promise you.” 화물을 내리기 위한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여행자들은 한 남자가 자기 부인을 학대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그의 습관대로, 예수께서는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는 성난 남편의 뒤로 걸어 나가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말하였습니다. “나의 친구여, 나와 잠깐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겠나?” 화난 그 남자는 그러한 접근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당황하여 주저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저~어, 그러시지요,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예수께서는 그를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친구여, 내가 보기에는 아주 끔찍한 어떤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 같아 보이는데, 무슨 일 때문에, 너 같이 건장한 사람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내, 자기 아이들의 어머니를 공격하게 했는지 내게 말을 좀 해주었으면 한다. 네가 이러한 폭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저 여인이 무슨 일을 했기에 자기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네가 자비를 베풀 의향은 없다고 하더라도, 공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네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감히 말하겠는데, 만약 네가 길가에서 도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면, 너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달려와 나를 구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네 일생의 여정에서 그러한 용감한 일을 아마 여러 번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나의 친구여, 무엇이 문제인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저 여인이 무슨 그릇된 일을 했느냐? 아니면 네가 어리석게도 이성을 잃고 생각 없이 그녀에게 폭행을 했느냐?” 이 남자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예수가 말한 내용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말을 마치면서 예수께서 그에게 보여준 친절한 표정과 동정심이 가득한 미소였습니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견유학파의 사제이신 것 같은데, 저를 말려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 아내는 그렇게 큰 그릇된 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며, 착한 여자입니다만, 공공장소에서 저를 비난하여 화를 돋우었기 때문에 제가 이성을 잃었습니다. 제가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리며, 저에게 더 나은 삶의 방법을 가르쳤던 당신의 형제들 중의 한 분에게 오래 전에 하였던 저의 서약에 맞게 살 것을 약속합니다. 정말 약속합니다.”

133:2.2 (1471.1) And then, in bidding him farewell, Jesus said: “My brother, always remember that man has no rightful authority over woman unless the woman has willingly and voluntarily given him such authority. Your wife has engaged to go through life with you, to help you fight its battles, and to assume the far greater share of the burden of bearing and rearing your children; and in return for this special service it is only fair that she receive from you that special protection which man can give to woman as the partner who must carry, bear, and nurture the children. The loving care and consideration which a man is willing to bestow upon his wife and their children are the measure of that man’s attainment of the higher levels of creative and spiritual self-consciousness. Do you not know that men and women are partners with God in that they co-operate to create beings who grow up to possess themselves of the potential of immortal souls? The Father in heaven treats the Spirit Mother of the children of the universe as one equal to himself. It is Godlike to share your life and all that relates thereto on equal terms with the mother partner who so fully shares with you that divine experience of reproducing yourselves in the lives of your children. If you can only love your children as God loves you, you will love and cherish your wife as the Father in heaven honors and exalts the Infinite Spirit, the mother of all the spirit children of a vast universe.”그런 다음, 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형제여, 여자가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남자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한, 그가 그녀에 대하여 어떤 정당한 권한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네 아내는 너와 일생을 같이 보내고,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도록 너를 돕고, 너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일에 있어서 더욱 힘든 몫을 담당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특별한 봉사에 대한 대가(代價)로, 한 남자가 자기 아이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어야만 하는 동반자로서의 그 여인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보호를, 그녀는 너로부터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한 보호와 배려는, 창조적이고 영적 자아-의식의 높은 차원에 대해 그가 도달해 있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불멸 혼의 잠재성이 스스로 소유하도록 자라나는 존재를 창조하는 데 그들이 협력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반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주의 자녀들의 영 어머니를 그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신다. 너의 자녀들의 삶 안에서, 너희 자신을 생산하는 신성한 체험을 너와 함께 그토록 충만하게 공유하는 어머니 동반자와 협력하여, 너의 일생에 관련되는 것들을 분담하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듯이, 네가 너의 자녀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광대한 우주의 모든 영 자녀의 어머니, 무한 영에게 영예를 돌리고 드높이는 것처럼, 너는 너의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133:2.3 (1471.2) As they went on board the boat, they looked back upon the scene of the teary-eyed couple standing in silent embrace. Having heard the latter half of Jesus’ message to the man, Gonod was all day occupied with meditations thereon, and he resolved to reorganize his home when he returned to India. 그들은 배에 오르면서, 눈물에 젖은 채 말 없이 포옹하며 서 있는 부부의 모습을 뒤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였던 예수의 말 중에서 후반 부분을 듣고 난 고노드는, 하루 종일 그 내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인도에 돌아가면, 자기 가정을 개혁시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133:2.4 (1471.3) The journey to Nicopolis was pleasant but slow as the wind was not favorable. The three spent many hours recounting their experiences in Rome and reminiscing about all that had happened to them since they first met in Jerusalem. Ganid was becoming imbued with the spirit of personal ministry. He began work on the steward of the ship, but on the second day, when he got into deep religious water, he called on Joshua to help him out. 니코폴리스Nicopolis로의 여정은 순탄하였지만,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아 속도가 느렸습니다. 세 사람은 로마에서 있었던 그들의 체험들에 대해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루살렘에서 서로 처음 만난 이래로 자기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가니드에게는 개인적인 사명 활동의 영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의 항해사 일을 시작하였지만, 둘째 날에, 깊은 종교적 바다에 빠지자, 자기를 도와 달라며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133:2.5 (1471.4) They spent several days at Nicopolis, the city which Augustus had founded some fifty years before as the “city of victory” in commemoration of the battle of Actium, this site being the land whereon he camped with his army before the battle. They lodged in the home of one Jeramy, a Greek proselyte of the Jewish faith, whom they had met on shipboard. The Apostle Paul spent all winter with the son of Jeramy in the same house in the course of his third missionary journey. From Nicopolis they sailed on the same boat for Corinth,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Achaia. 그들은 니코폴리스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으며, 그 도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50년 전에 악티움Actium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승리의 도시”로 세운 곳이었고, 그가 그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집단을 이끌고 야영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만나게 된 그리스 사람인, 예라미Jeramy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예라미의 아들과 함께 바로 이 집에서 겨울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같은 배를 타고 니코폴리스를 떠나 아카이아Achaia라는 로마Roman 식민지의 수도인 고린도Corinth로 항해하였습니다.

3. At Corinth고린도에서

행18:8
133:3.1 (1471.5) By the time they reached Corinth, Ganid was becoming very much interested in the Jewish religion, and so it was not strange that, one day as they passed the synagogue and saw the people going in, he requested Jesus to take him to the service. That day they heard a learned rabbi discourse on the “Destiny of Israel,” and after the service they met one Crispus, the chief ruler of this synagogue. Many times they went back to the synagogue services, but chiefly to meet Crispus. Ganid grew to be very fond of Crispus, his wife, and their family of five children. He much enjoyed observing how a Jew conducted his family life. 그들이 고린도Corinth에 도착할 즈음에, 가니드Ganid는 유대 종교에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이 유대 회당을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가 예수께 함께 경배에 참석하자고 제안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 그들은 박식한 랍비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설교를 들었으며, 경배 후에 그들은 이 회당의 가장 높은 지도자인 크리스보Crispus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회당을 여러 차례 다시 찾아갔는데, 주로 크리스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니드는 크리스보와 그의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 그의 가정을 어떻게 이끄는지 살펴보며 매우 좋아했습니다.

133:3.2 (1472.1) While Ganid studied family life, Jesus was teaching Crispus the better ways of religious living. Jesus held more than twenty sessions with this forward-looking Jew; and it is not surprising, years afterward, when Paul was preaching in this very synagogue, and when the Jews had rejected his message and had voted to forbid his further preaching in the synagogue, and when he then went to the gentiles, that Crispus with his entire family embraced the new religion, and that he became one of the chief supports of the Christian church which Paul subsequently organized at Corinth. 가니드가 가정생활을 공부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크리스보에게 종교 생활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진취적인 이 유대인과 20번 이상 만났으며, 여러 해가 지난 후, 바울이 바로 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자, 유대인들이 그의 복음을 배척하고 더 이상 그에게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므로, 그가 이방인들에게로 갔을 때, 크리스보가 그의 온 가족과 함께 그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과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에서 조직한 기독교 교회의 주요 지지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133:3.3 (1472.2) During the eighteen months Paul preached in Corinth, being later joined by Silas and Timothy, he met many others who had been taught by the “Jewish tutor of the son of an Indian merchant.” 바울은, 훗날에 실라스 그리고 디모데와 합세하여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설교를 하였을 때, “인도 상인 아들의 유대인 가정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33:3.4 (1472.3) At Corinth they met people of every race hailing from three continents. Next to Alexandria and Rome, it was the most cosmopolitan city of the Mediterranean empire. There was much to attract one’s attention in this city, and Ganid never grew weary of visiting the citadel which stood almost two thousand feet above the sea. He also spent a great deal of his spare time about the synagogue and in the home of Crispus. He was at first shocked, and later on charmed, by the status of woman in the Jewish home; it was a revelation to this young Indian. 고린도Corinth에서 그들은 세 대륙(大陸)으로부터 온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와 로마Rome 다음으로 지중해the Mediterranean 제국에 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이 있었고, 가니드는 거의 해발 2,000피트 위에 서 있는 도시를 방문하는 일에 한 번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여가시간 중 많은 부분을 유대 회당과 크리스보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유대 가정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알고 나서,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나중에는 매료되었는데, 그것이 이 젊은 인도인에게는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습니다.

133:3.5 (1472.4) Jesus and Ganid were often guests in another Jewish home, that of Justus, a devout merchant, who lived alongside the synagogue. And many times, subsequently, when the Apostle Paul sojourned in this home, did he listen to the recounting of these visits with the Indian lad and his Jewish tutor, while both Paul and Justus wondered whatever became of such a wise and brilliant Hebrew teacher. 예수와 가니드는 또 다른 유대인 가정으로부터 자주 초대를 받았는데, 회당 옆에 위치한 믿음이 깊은 상인인 유스도의 집이었습니다(행18:7). 그리고 훗날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번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인도 청년과 그의 유대인 가정교사와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러는 동안 바울과 유스도는 그토록 현명하고 총명한 유대인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133:3.6 (1472.5) When in Rome, Ganid observed that Jesus refused to accompany them to the public baths. Several times afterward the young man sought to induce Jesus further to express himself in regard to the relations of the sexes. Though he would answer the lad’s questions, he never seemed disposed to discuss these subjects at great length. One evening as they strolled about Corinth out near where the wall of the citadel ran down to the sea, they were accosted by two public women. Ganid had imbibed the idea, and rightly, that Jesus was a man of high ideals, and that he abhorred everything which partook of uncleanness or savored of evil; accordingly he spoke sharply to these women and rudely motioned them away. When Jesus saw this, he said to Ganid: “You mean well, but you should not presume thus to speak to the children of God, even though they chance to be his erring children. Who are we that we should sit in judgment on these women? Do you happen to know all of the circumstances which led them to resort to such methods of obtaining a livelihood? Stop here with me while we talk about these matters.” The courtesans were astonished at what he said even more than was Ganid. 로마에 있을 때, 가니드는 예수가 그들과 함께 공중목욕탕에 가기를 거절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젊은이는 예수로 하여금 성(性)의 관계들에 대하여 좀 더 자기 의견을 표현하도록 여러 차례 유도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청년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길게 토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그들이 성벽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 가까이로 나가서 고린도를 산보하고 있었을 때, 두 매춘부가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이상(理想)을 지닌 분으로서, 부정(不淨)한 것이나 악의 기미가 있는 모든 것을 혐오하신다고 여겼던 가니드는 이 여자들을 날카롭게 쏘아붙이면서, 그녀들에게 비키라고 거칠게 손짓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가 가니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호의는 고맙지만, 비록 어쩌다가 그들이 실수를 범했지만 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런 식으로 주제넘게 얘기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우리가 누구기에 이 여자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겠는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수단에 의지하도록 그들을 몰아붙인 모든 환경들을 네가 다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면서, 여기에 잠시 멈추자꾸나.” 매춘부들은 가니드 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말에 더 놀랐습니다.

133:3.7 (1472.6) As they stood there in the moonlight, Jesus went on to say: “There lives within every human mind a divine spirit, the gift of the Father in heaven. This good spirit ever strives to lead us to God, to help us to find God and to know God; but also within mortals there are many natural physical tendencies which the Creator put there to serve the well-being of the individual and the race. Now, oftentimes, men and women become confused in their efforts to understand themselves and to grapple with the manifold difficulties of making a living in a world so largely dominated by selfishness and sin. I perceive, Ganid, that neither of these women is willfully wicked. I can tell by their faces that they have experienced much sorrow; they have suffered much at the hands of an apparently cruel fate; they have not intentionally chosen this sort of life; they have, in discouragement bordering on despair, surrendered to the pressure of the hour and accepted this distasteful means of obtaining a livelihood as the best way out of a situation that to them appeared hopeless. Ganid, some people are really wicked at heart; they deliberately choose to do mean things, but, tell me, as you look into these now tear-stained faces, do you see anything bad or wicked?” And as Jesus paused for his reply, Ganid’s voice choked up as he stammered out his answer: “No, Teacher, I do not. And I apologize for my rudeness to them — I crave their forgiveness.” Then said Jesus: “And I bespeak for them that they have forgiven you as I speak for my Father in heaven that he has forgiven them. Now all of you come with me to a friend’s house where we will seek refreshment and plan for the new and better life ahead.” Up to this time the amazed women had not uttered a word; they looked at each other and silently followed as the men led the way. 그들은 그 곳에서 달빛 아래에 서 있었고,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물, 즉 신성한 영(靈)이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살고 계시다. 이 선한 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분을 알도록 돕는 일에 언제나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한 인간 안에는 각자와 종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주께서 넣어주신 많은 자연적인 물리적 경향들이 있다. 그래서 지금,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이기심과 죄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살면서 다양하게 겪는 어려움에 맞서 분투하면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가니드야, 이 두 여인들 중 누구도 의도적으로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슬픔을 경험했다는 것을 그들의 얼굴 표정을 통해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잔인한 숙명의 손에서 매우 심한 고통을 겪어왔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종류의 일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절망의 경계에 이르는 낙심 안에서, 그들에게 다가왔던 그 시간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어쩔 수없이 택해야 하는 생계의 수단을 취한 것이며, 자신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이러한 수단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가니드야, 어떤 자들은 진정으로 마음의 동기부터 악하다. 그런 사람들은 비열한 일들을 고의적으로 선택해서 행한다, 그러나 네가 지금 이렇게 눈물 젖은 얼굴들을 들여다보면서, 나쁘다거나 간악한 그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느냐?” 예수가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말을 멈추자, 가니드는 할 말이 없어서 머뭇거리며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그들의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처럼, 그들이 너를 용서했음을 그들을 대신하여 내가 말하노라. 자, 너희 모두 나와 함께 친구의 집으로 가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앞으로 새로운 일생을 살기 위한 계획을 세워 보자.” 놀란 여인들은 이때까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보다가 남자들이 이끄는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갔습니다.

133:3.8 (1473.1) Imagine the surprise of Justus’ wife when, at this late hour, Jesus appeared with Ganid and these two strangers, saying: “You will forgive us for coming at this hour, but Ganid and I desire a bite to eat, and we would share it with these our new-found friends, who are also in need of nourishment; and besides all this, we come to you with the thought that you will be interested in counseling with us as to the best way to help these women get a new start in life. They can tell you their story, but I surmise they have had much trouble, and their very presence here in your house testifies how earnestly they crave to know good people, and how willingly they will embrace the opportunity to show all the world — and even the angels of heaven — what brave and noble women they can become.”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예수가 가니드와 함께 이러한 두 낯선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유스도의 아내의 놀라움을 상상해 보라.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에 대해 용서하기 바라며, 가니드와 내 몫으로 약간의 음식을 주면 좋겠고, 새로 발견한 우리 친구들도 또한 양식이 필요하니, 이러한 우리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함께 이 여인들이 일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법을 조언하는 데에, 너희가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오게 되었다. 저들이 너희에게 자기들의 사연을 말하겠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많은 곤경을 겪어 왔으며, 여기 너의 집에 지금 있는 그들이 있다는 자체가, 바로 그들이 간절하게 선한 사람들 만나기를 열망하며, 자신들도 용기가 있으며 고귀한 여자가 되어 온 세상과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새롭게 될 자신들 보여줄 기회를 잡고 싶은 지 증언하고 있노라.”

133:3.9 (1473.2) When Martha, Justus’ wife, had spread the food on the table, Jesus, taking unexpected leave of them, said: “As it is getting late, and since the young man’s father will be awaiting us, we pray to be excused while we leave you here together — three women — the beloved children of the Most High. And I will pray for your spiritual guidance while you make plans for a new and better life on earth and eternal life in the great beyond.” 유스도의 아내인 마르다가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자, 예수는 뜻밖에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이 젊은이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지고자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너희들, 세 여인을 여기에 남겨 두고 먼저 떠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너희들이 땅에서 새롭고 좀 더 나은 일생과 그 이후의 영원한 일생을 위한 계획을 짜는 동안에, 나는 너희들이 영적으로 인도 받도록 기도할 것이다.”

133:3.10 (1473.3) Thus did Jesus and Ganid take leave of the women. So far the two courtesans had said nothing; likewise was Ganid speechless. And for a few moments so was Martha, but presently she rose to the occasion and did everything for these strangers that Jesus had hoped for. The elder of these two women died a short time thereafter, with bright hopes of eternal survival, and the younger woman worked at Justus’ place of business and later became a lifelong member of the first Christian church in Corinth. 그렇게 예수와 가니드는 그 여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이때까지 두 매춘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니드 역시 마찬가지로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마르다도 말이 없었지만, 그녀는 곧 이러한 난국에 대처하여, 낯선 이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그녀에게 기대하였던 모든 일을 이행하였습니다. 이 두 여인들 중에 나이든 이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원한 삶에 대한 밝은 희망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어린 여인은 유스도의 일터에서 일하였으며, 나중에는 고린도에서의 첫 기독교 교회에서 일생동안 회원이 되었습니다.

133:3.11 (1473.4) Several times in the home of Crispus, Jesus and Ganid met one Gaius, who subsequently became a loyal supporter of Paul. During these two months in Corinth they held intimate conversations with scores of worth-while individuals, and as a result of all these apparently casual contacts more than half of the individuals so affected became members of the subsequent Christian community. 예수와 가니드는 크리스보의 집에서 가이우스라는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고린도에서 수십 명의 훌륭한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고, 비공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접촉의 결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반 이상은 훗날에 발족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133:3.12 (1473.5) When Paul first went to Corinth, he had not intended to make a prolonged visit. But he did not know how well the Jewish tutor had prepared the way for his labors. And further, he discovered that great interest had already been aroused by Aquila and Priscilla, Aquila being one of the Cynics with whom Jesus had come in contact when in Rome. This couple were Jewish refugees from Rome, and they quickly embraced Paul’s teachings. He lived with them and worked with them, for they were also tentmakers. It was because of these circumstances that Paul prolonged his stay in Corinth. 바울이 처음으로 고린도에 갔을 때, 그는 장기간 방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고에 대비하여, 그 유대인 개인교사가 길을 얼마나 잘 준비해 놓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아퀼라와 프리실라에 의해 큰 세력이 이미 조성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아퀼라는 견유학파의 한 사람이었고 로마에서 예수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 피난자들이었고 바울의 가르침을 신속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도 역시 천막을 짓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체류 기간을 연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Personal Work in Corinth고린도에서의 개인적인 일

고전3:1-2
133:4.1 (1474.1) Jesus and Ganid had many more interesting experiences in Corinth. They had close converse with a great number of persons who greatly profited by the instruction received from Jesus. 예수와 가니드는 고린도에서 재미있는 여러 일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생명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셨습니다.

133:4.2 (1474.2) The miller he taught about grinding up the grains of truth in the mill of living experience so as to render the difficult things of divine life readily receivable by even the weak and feeble among one’s fellow mortals. Said Jesus: “Give the milk of truth to those who are babes in spiritual perception. In your living and loving ministry serve spiritual food in attractive form and suited to the capacity of receptivity of each of your inquirers.” 그는 방앗간 주인에게, 거룩한 생명이란 삶의 체험이라는 방앗간에서 진리의 곡식을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데 있어서 아직 아기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우유를 주어라. 생생한 사랑의 섬김을 위해서, 네게 질문하는 각 사람이 수용하는 능력에 맞춘 매력적인 형태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라.”

133:4.3 (1474.3) To the Roman centurion he said: “Render un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and unto God the things which are God’s. The sincere service of God and the loyal service of Caesar do not conflict unless Caesar should presume to arrogate to himself that homage which alone can be claimed by Deity. Loyalty to God, if you should come to know him, would render you all the more loyal and faithful in your devotion to a worthy emperor.” 그는 로마의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시저에게 속한 것들은 시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은 하나님께 바쳐라. 시저가 오만해져서 신(神)에게만 요구되는 경의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와 황제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한 충성은, 덕망 있는 황제를 향한 네 헌신을 더욱 충성되며 신실하게 할 것이다.”

133:4.4 (1474.4) To the earnest leader of the Mithraic cult he said: “You do well to seek for a religion of eternal salvation, but you err to go in quest of such a glorious truth among man-made mysteries and human philosophies. Know you not that the mystery of eternal salvation dwells within your own soul? Do you not know that the God of heaven has sent his spirit to live within you, and that this spirit will lead all truth-loving and God-serving mortals out of this life and through the portals of death up to the eternal heights of light where God waits to receive his children? And never forget: You who know God are the sons of God if you truly yearn to be like him.” 예수님은 미트라교(敎)의 진지한 지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영원한 구원의 종교를 찾으려고 노력은 잘하고 있지만, 사람이 만든 신비들과 인간의 철학들 사이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진리를 추구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의 신비가 네 자신의 혼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어 네 안에 살게 하셨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영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여 이 세상의 생명에서 건져 죽음의 입구를 지나 영원한 최고의 빛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곳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시느니라. 네가 그와 같이 되기를 진실로 열망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133:4.5 (1474.5) To the Epicurean teacher he said: “You do well to choose the best and esteem the good, but are you wise when you fail to discern the greater things of mortal life which are embodied in the spirit realms derived from the realization of the presence of God in the human heart? The great thing in all human experience is the realization of knowing the God whose spirit lives within you and seeks to lead you forth on that long and almost endless journey of attaining the personal presence of our common Father, the God of all creation, the Lord of universes.” 예수님은 에피크로스(쾌락주의) 학파의 선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최선을 선택하고, 선을 존중히 여기는 일은 잘하고 있구나. 그러나 인간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깨닫지 못하고,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영적 영역과 그 영역에서 구현되는 인간 생명의 더 위대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과연 네가 현명한 상태일까? 인간의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자각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네 안에 거하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아버지, 모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우주들의 주님이신 그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오랜 여행, 거의 끝이 없는 여정으로, 너를 인도하기 위해 애쓰느니라.”

133:4.6 (1474.6) To the Greek contractor and builder he said: “My friend, as you build the material structures of men, grow a spiritual character in the similitude of the divine spirit within your soul. Do not let your achievement as a temporal builder outrun your attainment as a spiritual son of the kingdom of heaven. While you build the mansions of time for another, neglect not to secure your title to the mansions of eternity for yourself. Ever remember, there is a city whose foundations are righteousness and truth, and whose builder and maker is God.” 예수님은 그리스의 건축자에게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친구여, 네가 사람들의 물질적 건물들을 짓는 것처럼, 네 혼속에 있는 그 신성한 영을 닮도록 영적인 인격을 발전시켜라. 이 세상의 일시적인 건축자로서의 성취가 하늘나라의 영적 아들이 되는 일을 앞서지 않도록 하라.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시간의 맨션들을 짓는 동안, 너 자신을 위해 짓는 영원한 맨션에 대한 소유권 확보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건축하시고 창조하신 도성 즉 정의와 진리에 기초한 도성(都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133:4.7 (1474.7) To the Roman judge he said: “As you judge men, remember that you yourself will also some day come to judgment before the bar of the Rulers of a universe. Judge justly, even mercifully, even as you shall some day thus crave merciful consideration at the hands of the Supreme Arbiter. Judge as you would be judged under similar circumstances, thus being guided by the spirit of the law as well as by its letter. And even as you accord justice dominated by fairness in the light of the need of those who are brought before you, so shall you have the right to expect justice tempered by mercy when you sometime stand before the Judge of all the earth.” 예수님은 로마의 법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람들을 재판할 때, 너 자신도 언젠가는 우주 통치자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 받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공정하고 자비하게 판결하되, 너도 언젠가는 최상의 중재자의 손으로부터 자비로운 긍휼을 간청하게 될 것임을 염두에 두어라. 네가 비슷한 상황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판결하여 법의 문자뿐만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따라야 하느니라. 그리고 네 앞에 소환되어 온 사람들의 어려운 입장을 고려하여 공정함으로 조정된 정의를 베푸는 것처럼, 너도 언젠가는 온 지상의 재판관 앞에 서서 자비로 완화된 정의를 기대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133:4.8 (1475.1) To the mistress of the Greek inn he said: “Minister your hospitality as one who entertains the children of the Most High. Elevate the drudgery of your daily toil to the high levels of a fine art through the increasing realization that you minister to God in the persons whom he indwells by his spirit which has descended to live within the hearts of men, thereby seeking to transform their minds and lead their souls to the knowledge of the Paradise Father of all these bestowed gifts of the divine spirit.” 예수님은 그리스 숙박소의 여주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극이 높으신 자의 자녀들을 대접하는 사람으로서 친절을 베풀라. 사람을 향한 섬김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봉사임을 깊이 깨달아 가면서 일상적인 단조롭고 힘든 일들을 예술적인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해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려 보내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신성한 영으로 선물을 주신 천국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며 그들의 혼을 인도하려고 애쓰시느니라.

신5:7 고린도에서의 개인적인 일2
133:4.9 (1475.2) Jesus had many visits with a Chinese merchant. In saying good-bye, he admonished him: “Worship only God, who is your true spirit ancestor. Remember that the Father’s spirit ever lives within you and always points your soul-direction heavenward. If you follow the unconscious leadings of this immortal spirit, you are certain to continue on in the uplifted way of finding God. And when you do attain the Father in heaven, it will be because by seeking him you have become more and more like him. And so farewell, Chang, but only for a season, for we shall meet again in the worlds of light where the Father of spirit souls has provided many delightful stopping-places for those who are Paradise-bound.” 예수님은 어느 중국인 상인과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수님은 그에게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의 진정한 영 조상이시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아버지의 영은 언제까지나 네 안에서 너와 함께 살고 있으며, 너의 혼이 가야할 방향이 항상 하늘을 향하도록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네가 이 불멸의 영의 무의식적 인도를 따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높이 들린 길 위에서 분명하게 계속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게 되는 것은 그를 계속 추구하면서 더욱 그와 같이 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자, 미스터 장! 잘 있어라, 그러나 단지 한 시절뿐이니, 이는 우리가 다시 빛의 세계에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의 세계들은 영 혼들의 아버지께서 천국에 묶여있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즐거움이 가득한 곳들이며 방문하게 될 장소들이란다.

133:4.10 (1475.3) To the traveler from Britain he said: “My brother, I perceive you are seeking for truth, and I suggest that the spirit of the Father of all truth may chance to dwell within you. Did you ever sincerely endeavor to talk with the spirit of your own soul? Such a thing is indeed difficult and seldom yields consciousness of success; but every honest attempt of the material mind to communicate with its indwelling spirit meets with certain success, notwithstanding that the majority of all such magnificent human experiences must long remain as superconscious registrations in the souls of such God-knowing mortals.” 영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여, 나는 네가 진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노라. 모든 진리의 아버지의 영이 네 안에 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제안한다. 너는 네가 지닌 네 혼의 영(靈)과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언제라도 애쓴 적이 있었는가? 그러한 일은 참으로 어렵고, 성공에 대한 의식을 얻는 것도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물질적 마음이 그 안에서 내주하는 영과 교통하려는 모든 정직한 시도는 확실히 성공을 거두노라. 드물지만, 그런 모든 놀라운 인간 체험의 대부분이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혼 안에 초(超)의식적 등록으로서 오랫동안 남아 있노라.”

133:4.11 (1475.4) To the runaway lad Jesus said: “Remember, there are two things you cannot run away from — God and yourself. Wherever you may go, you take with you yourself and the spirit of the heavenly Father which lives within your heart. My son, stop trying to deceive yourself; settle down to the courageous practice of facing the facts of life; lay firm hold on the assurances of sonship with God and the certainty of eternal life, as I have instructed you. From this day on purpose to be a real man, a man determined to face life bravely and intelligently.” 예수님은 가출한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피해서 도망할 수 없는 두 가지 즉 하나님과 네 자신이 있음을 기억해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는 네 마음에 함께 살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영과 네 자신을 가지고 있단다. 아이야, 네 자신을 속이려는 시도를 멈추어라. 삶에 다가오는 사실들을 직면하는 용맹스러운 습성에 뿌리를 내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신하고 영원한 일생의 확실함을 굳게 붙잡으라. 지금 오늘부터, 진정한 남자, 용감하고 총명하게 삶을 직면하기로 각오를 가진 남자가 될 것임을 목적으로 두라.”

133:4.12 (1475.5) To the condemned criminal he said at the last hour: “My brother, you have fallen on evil times. You lost your way; you became entangled in the meshes of crime. From talking to you, I well know you did not plan to do the thing which is about to cost you your temporal life. But you did do this evil, and your fellows have adjudged you guilty; they have determined that you shall die. You or I may not deny the state this right of self-defense in the manner of its own choosing. There seems to be no way of humanly escaping the penalty of your wrongdoing. Your fellows must judge you by what you did, but there is a Judge to whom you may appeal for forgiveness, and who will judge you by your real motives and better intentions. You need not fear to meet the judgment of God if your repentance is genuine and your faith sincere. The fact that your error carries with it the death penalty imposed by man does not prejudice the chance of your soul to obtain justice and enjoy mercy before the heavenly courts.” 마지막 시간이 임한 사형수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여, 너는 악한 시대에 범죄로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구나. 너와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대가(代價)로 지불해야 할 만큼의 악한 일을 계획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너는 이 악을 행했고, 너의 동료들은 너를 죄인으로 심판하였으며,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너나 나나, 국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자아-방어의 이러한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부과된 벌을, 인간적으로는 피할 길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너의 동료들은 너의 행위에 의거하여 판단을 하였지만, 네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심판관이 있는데, 그는 너의 참된 동기를 살피고 훨씬 나은 의도로써 너를 심판하실 것이다. 만약 너의 참회가 순수하고 너의 신앙이 진지한 것이라면,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너의 실수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사실은, 하늘에 있는 법정에서 네 혼이 정의를 구하고 자비를 누릴 기회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133:4.13 (1476.1) Jesus enjoyed many intimate talks with a large number of hungry souls, too many to find a place in this record. The three travelers enjoyed their sojourn in Corinth. Excepting Athens, which was more renowned as an educational center, Corinth was the most important city in Greece during these Roman times, and their two months’ stay in this thriving commercial center afforded opportunity for all three of them to gain much valuable experience. Their sojourn in this city wa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of all their stops on the way back from Rome. 예수님은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갈급한 혼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 세 여행자는 고린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육의 중심지로 더욱 알려진 아테네를 제외하면, 고린도는 이러한 로마 통치 시대 동안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번성하는 이 상업의 중심지에서 두 달을 머무는 동안 그들은 가치 있는 체험들을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서의 체류는 로마에서 돌아가는 길에 들렸던 모든 장소들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133:4.14 (1476.2) Gonod had many interests in Corinth, but finally his business was finished, and they prepared to sail for Athens. They traveled on a small boat which could be carried overland on a land track from one of Corinth’s harbors to the other, a distance of ten miles. 고노드는 고린도에서 많은 수입을 얻었으며, 마침내 그의 사업상의 일을 모두 끝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테네로 항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고린도의 어느 항구에서 다른 항구까지, 육로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배로 여행하였습니다.

5. At Athens — Discourse on Science아테네에서At Athens(과학에 대한 논의)

133:5.1 (1476.3) They shortly arrived at the olden center of Greek science and learning, and Ganid was thrilled with the thought of being in Athens, of being in Greece, the cultural center of the onetime Alexandrian empire, which had extended its borders even to his own land of India. There was little business to transact; so Gonod spent most of his time with Jesus and Ganid, visiting the many points of interest and listening to the interesting discussions of the lad and his versatile teacher. 그들은 곧 그리스의 과학과 학문의 오래된 중심지에 도착하였고, 가니드는 그리스에, 그것도 아테네에 와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였는데, 그 곳이 자기 나라인 인도 국경까지 한 때 지배하였던 알렉산더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노드는 사업상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흥미 있는 여러 장소들을 방문하고, 다방면의 학식을 가진 선생이 자기 아들과 주고받는 재미있는 토의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과 가니드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33:5.2 (1476.4) A great university still thrived in Athens, and the trio made frequent visits to its halls of learning. Jesus and Ganid had thoroughly discussed the teachings of Plato when they attended the lectures in the museum at Alexandria. They all enjoyed the art of Greece, examples of which were still to be found here and there about the city. 아테네에는 커다란 대학 하나가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그 세 사람은 그 대학 강의실에 자주 들렀습니다. 예수님과 가니드는 이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열렸던 강의에 참석하여, 플라톤의 가르침을 면밀히 토론했었습니다. 그들 모두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발견되는 그리스의 예술 작품들을 관람하였습니다.

133:5.3 (1476.5) Both the father and the son greatly enjoyed the discussion on science which Jesus had at their inn one evening with a Greek philosopher. After this pedant had talked for almost three hours, and when he had finished his discourse, Jesus, in terms of modern thought, said: 어느 날 저녁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숙소에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매우 즐겁게 들었습니다. 이 현학자(衒學者)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견해를 피력하였고, 그의 말이 끝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현대적인 사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3:5.4 (1476.6) Scientists may some day measure the energy, or force manifestations, of gravitation, light, and electricity, but these same scientists can never (scientifically) tell you what these universe phenomena are. Science deals with physical-energy activities; religion deals with eternal values. True philosophy grows out of the wisdom which does its best to correlate thes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observations. There always exists the danger that the purely physical scientist may become afflicted with mathematical pride and statistical egotism, not to mention spiritual blindness. 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중력, 빛, 그리고 전기의 에너지와 힘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과학자들은 이러한 우주 현상이 무엇인지를 결코 과학적으로 말해 줄 수 없다. 과학은 물질적 에너지 작용들을 다루며, 종교는 영원한 가치들을 다룬다. 진정한 철학은, 이러한 양적인 관찰과 질적인 관찰을 연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부터 태동된다. 순전히 물질적인 과학자들은, 영적으로 눈 먼 것은 그만두고라도, 수학적 자부심과 통계학적 자기중심주의에 시달리게 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133:5.5 (1476.7) Logic is valid in the material world, and mathematics is reliable when limited in its application to physical things; but neither is to be regarded as wholly dependable or infallible when applied to life problems. Life embraces phenomena which are not wholly material. Arithmetic says that, if one man could shear a sheep in ten minutes, ten men could shear it in one minute. That is sound mathematics, but it is not true, for the ten men could not so do it; they would get in one another’s way so badly that the work would be greatly delayed. 논리는 물질적 세상에서 유효하고, 수학은 물질적인 것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지만, 일생의 문제들에 적용될 경우에는 그 두 가지 모두, 전적으로 믿을 만하거나 틀림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일생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만은 아닌 현상들을 포함한다. 만약 한 사람이 양 한 마리의 털을 깎는데 10분이 소요된다면, 수학은 열 사람이 1분에 그 양의 털을 깎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사실이 아닌데, 왜냐하면 열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들은 서로에게 방해가 되어 일이 매우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133:5.6 (1477.1) Mathematics asserts that, if one person stands for a certain unit of intellectual and moral value, ten persons would stand for ten times this value. But in dealing with human personality it would be nearer the truth to say that such a personality association is a sum equal to the square of the number of personalities concerned in the equation rather than the simple arithmetical sum. A social group of human beings in co-ordinated working harmony stands for a force far greater than the simple sum of its parts. 만약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단위의 지적(知的) 그리고 도덕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면, 수학은 열 사람이 10 배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고유성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러한 고유성의 연합은 단순한 산술적 합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련된 등식에서, 고유성들 숫자의 제곱한 것과 같은 합계가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합력하여 조화롭게 일하는 인간 사회 집단은 그 부분들의 단순한 합계보다는 훨씬 더 큰 세력을 나타낸다.

133:5.7 (1477.2) Quantity may be identified as a fact, thus becoming a scientific uniformity. Quality, being a matter of mind interpretation, represents an estimate of values, and must, therefore, remain an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When both science and religion become less dogmatic and more tolerant of criticism, philosophy will then begin to achieve unity in the intelligent comprehension of the universe. 양(量)은 하나의 사실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균일성을 갖추게 된다. 본질은 마음의 해석 문제로서, 가치들에 대한 평가를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과학과 종교 둘 모두 독단이 줄어 비평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철학은 우주에 대한 지적 이해를 통하여 합일을 이루기 시작할 것이다.

133:5.8 (1477.3) There is unity in the cosmic universe if you could only discern its workings in actuality. The real universe is friendly to every child of the eternal God. The real problem is: How can the finite mind of man achieve a logical, true, and corresponding unity of thought? This universe-knowing state of mind can be had only by conceiving that the quantitative fact and the qualitative value have a common causation in the Paradise Father. Such a conception of reality yields a broader insight into the purposeful unity of universe phenomena; it even reveals a spiritual goal of progressive personality achievement. And this is a concept of unity which can sense the unchanging background of a living universe of continually changing impersonal relations and evolving personal relationships. 너희가 우주의 작용을 실제로 인식한다면, 조화로운 우주 안에는 통일성이 존재한다. 실제 우주는 영원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호의적이다. 유한한 사람의 마음이 논리적이고 진실하며 일치하는 사고의 통일성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이다. 우주를 아는 이 마음 상태는, 양적인 사실과 질적인 가치가 천국 아버지 안에서 공통적 원인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만 소유될 수 있다. 실체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우주 현상의 의도적 통일에 대한 확대된 통찰력을 갖게 한다. 그것은 진보적 고유성 성취의 영적 목표까지도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 변하는 미(未)고유적 관계들과 진화하는 고유적 관계들에 대한 살아있는 우주에 대한 변화하지 않는 배경을 감지할 수 있는 통일성의 개념이다.

133:5.9 (1477.4) Matter and spirit and the state intervening between them are three interrelated and interassociated levels of the true unity of the real universe. Regardless of how divergent the universe phenomena of fact and value may appear to be, they are, after all, unified in the Supreme. 물질과 영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개재된 상태는, 실제 우주의 진정한 통일이 이루는 서로 관계되고 상호 연합된 세 가지 차원들이다. 사실과 가치에 대한 우주 현상이 얼마나 분산되어 보이는가에 상관없이, 그들은 어찌되었건, 최극자 안에 통합되어 있다.

133:5.10 (1477.5) Reality of material existence attaches to unrecognized energy as well as to visible matter. When the energies of the universe are so slowed down that they acquire the requisite degree of motion, then, under favorable conditions, these same energies become mass. And forget not, the mind which can alone perceive the presence of apparent realities is itself also real. And the fundamental cause of this universe of energy-mass, mind, and spirit, is eternal — it exists and consists in the nature and reactions of the Universal Father and his absolute co-ordinates. 물질 존재의 실체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인식되지 않는 에너지에게도 부여됩니다. 우주 에너지들이 속도가 매우 느려져서 필요한 운동 정도를 획득하면, 바로 이 에너지들은, 적합한 조건 속에서 질량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명백한 실체들의 현존을 단독으로 감지할 수 있는 마음 그 자체도 또한 실제라는 점을 잊지 마라. 그리고 에너지-질량, 마음 그리고 영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원하다─그것은 우주 아버지와 그의 절대 합동자들의 본성과 반응들 안에 존재하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

133:5.11 (1477.6) They were all more than astounded at the words of Jesus, and when the Greek took leave of them, he said: “At last my eyes have beheld a Jew who thinks something besides racial superiority and talks something besides religion.” And they retired for the night.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에 경탄했습니다. 그 때 그 그리스인이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인종적 우월감이나 종교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유대인을 마침내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33:5.12 (1477.7) The sojourn in Athens was pleasant and profitable, but it was not particularly fruitful in its human contacts. Too many of the Athenians of that day were either intellectually proud of their reputation of another day or mentally stupid and ignorant, being the offspring of the inferior slaves of those earlier periods when there was glory in Greece and wisdom in the minds of its people. Even then, there were still many keen minds to be found among the citizens of Athens. 아테네에서의 체류는 즐겁고 유익했지만, 인간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그렇게 특별한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과거 명성에 대하여 지적 자만심을 가졌든지. 아니면 과거의 시절에 그리스가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지혜가 있었던 때에 살았던 열등한 노예들의 후손들의 존재 즉 정신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당시에도 아테네의 시민들 중에는 명민한 마음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6. At Ephesus — Discourse on the Soul 에베소에서(혼에 대한 강론)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133:6.1 (1477.8) On leaving Athens, the travelers went by way of Troas to Ephesus,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Asia. They made many trips out to the famous temple of Artemis of the Ephesians, about two miles from the city. Artemis was the most famous goddess of all Asia Minor and a perpetuation of the still earlier mother goddess of ancient Anatolian times. The crude idol exhibited in the enormous temple dedicated to her worship was reputed to have fallen from heaven. Not all of Ganid’s early training to respect images as symbols of divinity had been eradicated, and he thought it best to purchase a little silver shrine in honor of this fertility goddess of Asia Minor. That night they talked at great length about the worship of things made with human hands. 아테네Athens를 떠난 그 여행자들은 트로아Troas를 경유하여 아시아 지방에서 로마Roman의 수도 역할을 하는 에베소Ephesus로 갔습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3.2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에베소인들의 유명한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神殿)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아르테미스Artemis는 소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女神)이었으며, 그것은 고대 아나톨리안Anatolian에서 있었던 아주 초기 시대의 어머니 여신을 이제껏 계속 보존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신을 경배하기 위해 바쳐진 거대한 사원에는 조잡한 우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가니드는 신성(神性)의 상징으로 형상을 존경하도록 일찍부터 배웠던 것들을 모두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으며, 소아시아의 이 다산(多産)의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성물함(聖物函)을 사는 것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33:6.2 (1478.1) On the third day of their stay they walked down by the river to observe the dredging of the harbor’s mouth. At noon they talked with a young Phoenician who was homesick and much discouraged; but most of all he was envious of a certain young man who had received promotion over his head. Jesus spoke comforting words to him and quoted the olden Hebrew proverb: “A man’s gift makes room for him and brings him before great men.” 그곳에 머물던 셋째 날에, 그들은 항만 입구 준설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하여 강을 따라 걸어 내려갔습니다. 점심 때, 그들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매우 풀이 죽어 있는 한 젊은 페니키아Phoenician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승진을 임명받은 어떤 젊은이를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위안의 말을 해주면서, 유대의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길을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인도한다.”(잠언18:16).

133:6.3 (1478.2) Of all the large cities they visited on this tour of the Mediterranean, they here accomplished the least of value to the subsequent work of the Christian missionaries. Christianity secured its start in Ephesus largely through the efforts of Paul, who resided here more than two years, making tents for a living and conducting lectures on religion and philosophy each night in the main audience chamber of the school of Tyrannus. 그들이 지중해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큰 도시들 중에서, 이곳에서 이룬 성과는 나중에 기독교 선교사들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효과가 부족했습니다. 기독교가 에베소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적으로 바울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2년 넘게 살았고, 생계를 위해 텐트를 제조하면서 티라누스 학파의 주요 강당에서 매일 밤 종교와 철학에 관하여 강의하였습니다.

133:6.4 (1478.3) There was a progressive thinker connected with this local school of philosophy, and Jesus had several profitable sessions with him. In the course of these talks Jesus had repeatedly used the word “soul.” This learned Greek finally asked him what he meant by “soul,” and he replied: 이 지역의 철학학파와 관련된 한 진보적인 사상가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와 몇 차례의 유익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토의를 통하여 예수님은 “혼”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 학식 있는 그리스인은 마침내 예수님께 그가 사용하는 “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133:6.5 (1478.4) “The soul is the self-reflective, truth-discerning, and spirit-perceiving part of man which forever elevates the human being above the level of the animal world. Self-consciousness, in and of itself, is not the soul. Moral self-consciousness is true human self-realization and constitutes the foundation of the human soul, and the soul is that part of man which represents the potential survival value of human experience. Moral choice and spiritual attainment, the ability to know God and the urge to be like him,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oul. The soul of man cannot exist apart from moral thinking and spiritual activity. A stagnant soul is a dying soul. But the soul of man is distinct from the divine spirit which dwells within the mind. The divine spirit arrives simultaneously with the first moral activity of the human mind, and that is the occasion of the birth of the soul. “혼은, 자아를-반영하고, 진리를-식별하고, 영을-감지하고 있는 사람의 한 부분이며, 그것은 인간존재를 동물세계의 차원을 뛰어넘어 언제까지나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다. 자아-의식 자체만으로 저절로 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자아-의식이 참된 인간 자아-실현이며 인간 혼의 기초를 이루고 있고, 혼은 사람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 체험에서 잠재적인 생존의 가치를 대표한다. 도덕적 선택과 영적 달성, 하나님을 알려는 능력과 그와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이 혼의 특징들이다. 사람의 혼은 도덕적 사고와 영적 활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정체되어 있는 혼은 죽어 가는 혼이다. 하지만 사람의 혼은 마음 안에 내주하고 있는 신성한 영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신성한 영은 인간 마음의 첫 번째 도덕적 활동과 동시에 도착하며, 그 때가 바로 혼이 탄생되는 때이다.

133:6.6 (1478.5) “The saving or losing of a soul has to do with whether or not the moral consciousness attains survival status through eternal alliance with its associated immortal spirit endowment. Salvation is the spiritualization of the self-realization of the moral consciousness, which thereby becomes possessed of survival value. All forms of soul conflict consist in the lack of harmony between the moral, or spiritual, self-consciousness and the purely intellectual self-consciousness. “혼이 구원되거나 또는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그것과 연합된 불멸하는 영적 자질과의 영원한 결합을 통하여, 생존의 지위를 달성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구원은 도덕적 의식의 자아실현에서의 영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생존의 가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혼의 갈등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자아-의식과 순수하게 지적인 자아-의식 사이의 조화 부족에서 기인된다.”

133:6.7 (1478.6) “The human soul, when matured, ennobled, and spiritualized, approaches the heavenly status in that it comes near to being an entity intervening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the material self and the divine spirit. The evolving soul of a human being is difficult of description and more difficult of demonstration because it is not discoverable by the methods of either material investigation or spiritual proving. Material science cannot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a soul, neither can pure spirit-testing. Notwithstanding the failure of both material science and spiritual standards to discover the existence of the human soul, every morally conscious mortal knows of the existence of his soul as a real and actual personal experience.” “인간의 혼은, 성숙되고 고상해지고 영성화 되었을 때,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 자체와 신성한 영 사이에 개재된intervening 하나의 실존개체의 존재로 더 가까워지면서, 하늘의 상태에 접근하게 된다. 인간 존재의 진화하는 혼은, 묘사하기가 어렵고, 그것을 실증하기란 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 조사나 혹은 영적 증명의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적 과학은 혼의 실재를 드러낼 수 없으며, 순수한 영-테스트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과학과 영적 기준 모두 인간 혼의 실재를 발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은 자신의 혼을 하나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개인적 체험으로 알고 있다.”

7. The Sojourn at Cyprus — Discourse on Mind 키프로스에서(마음에 대한 말씀)

133:7.1 (1479.1) Shortly the travelers set sail for Cyprus, stopping at Rhodes. They enjoyed the long water voyage and arrived at their island destination much rested in body and refreshed in spirit. 그 여행자들은 로데Rhodes에 잠시 머무르다가 키프로스Cyprus를 향하여 항해하였습니다. 그들은 긴 해상 여행을 즐겼으며, 육신과 영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그들의 목적지인 그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133:7.2 (1479.2) It was their plan to enjoy a period of real rest and play on this visit to Cyprus as their tour of the Mediterranean was drawing to a close. They landed at Paphos and at once began the assembly of supplies for their sojourn of several weeks in the near-by mountains. On the third day after their arrival they started for the hills with their well-loaded pack animals. 그들의 지중해 여행이 거의 끝 무렵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키프로스Cyprus 방문에서는 단지 휴식을 취하고 즐기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보Paphos에 상륙하였으며, 근처에 있는 산에서 몇 주간을 지내기 위한 생필품들을 즉시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착한 지 3일 만에 그들은 물건을 동물들에게 싣고 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133:7.3 (1479.3) For two weeks the trio greatly enjoyed themselves, and then, without warning, young Ganid was suddenly taken grievously ill. For two weeks he suffered from a raging fever, oftentimes becoming delirious; both Jesus and Gonod were kept busy attending the sick boy. Jesus skillfully and tenderly cared for the lad, and the father was amazed by both the gentleness and adeptness manifested in all his ministry to the afflicted youth. They were far from human habitations, and the boy was too ill to be moved; so they prepared as best they could to nurse him back to health right there in the mountains. 두 주 동안 이 세 사람들은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갑작스럽게도 어린 가니드가 몹시 앓게 되었습니다. 두 주일 동안 그는 심한 열로 고생을 하였고, 가끔씩 헛소리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고노드는 아픈 소년을 간호하느라 바빴습니다. 예수는 능숙하고 부드럽게 그 소년을 돌보았는데, 그 아버지는 고통 받는 소년을 돌보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의 자상함과 능숙함으로 인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있었고, 게다가 그 소년의 병은 너무 심해서 이동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 산 속에서 소년이 회복하도록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 할 뿐이었습니다.

133:7.4 (1479.4) During Ganid’s convalescence of three weeks Jesus told him many interesting things about nature and her various moods. And what fun they had as they wandered over the mountains, the boy asking questions, Jesus answering them, and the father marveling at the whole performance. 가니드가 회복하고 있던 3주 동안, 예수님은 그에게 자연과 자연의 여러 가지의 변화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배회하면서 그들이 즐겼던 것은, 그 소년이 질문을 하고 예수께서 대답을 하는 것이었고, 그 소년의 아버지는 이 모든 일에 감탄하였습니다.

133:7.5 (1479.5) The last week of their sojourn in the mountains Jesus and Ganid had a long talk on the functions of the human mind. After several hours of discussion the lad asked this question: “But, Teacher, what do you mean when you say that man experiences a higher form of self-consciousness than do the higher animals?” And as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answered: 그 산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과 가니드는 인간 마음의 작용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의 토의 끝에 그 소년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사람이 고등 동물들보다 더 높은 자아-의식의 형태를 체험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을 현대 용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3:7.6 (1479.6) My son, I have already told you much about the mind of man and the divine spirit that lives therein, but now let me emphasize that self-consciousness is a reality. When any animal becomes self-conscious, it becomes a primitive man. Such an attainment results from a co-ordination of function between impersonal energy and spirit-conceiving mind, and it is this phenomenon which warrants the bestowal of an absolute focal point for the human personality, the spirit of the Father in heaven. 아이야, 사람의 마음과 그 안에 거하는 신성한 영에 대하여 나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네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자아-의식이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떤 동물이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하나의 원시인이 된다. 그런 성취는 미(未)고유적 에너지와 영을 이해하는 마음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 작용의 결과이며, 이러한 현상은, 인간 고유성을 위한 하나의 절대적 초점(焦點)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수여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133:7.7 (1479.7) Ideas are not simply a record of sensations; ideas are sensations plus the reflective interpretations of the personal self; and the self is more than the sum of one’s sensations. There begins to be something of an approach to unity in an evolving selfhood, and that unity is derived from the indwelling presence of a part of absolute unity which spiritually activates such a self-conscious animal-origin mind. 관념들Ideas는 감각한 것들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며, 관념들이란 감각한 것들 위에 고유 자아의 반영적 해석을 덧붙인 것이며, 그 자아는 그가 감각한 것들의 전체 합계보다 큰 것이다. 진화하는 자아 신분 안에서 합일로 접근하는 그 무엇이 시작되며, 그 합일은 절대 합일의 일부분인 내주하는 현존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것이 자아-의식적인 동물-기원 마음을 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133:7.8 (1479.8) No mere animal could possess a time self-consciousness. Animals possess a physiological co-ordination of associated sensation-recognition and memory thereof, but none experience a meaningful recognition of sensation or exhibit a purposeful association of these combined physical experiences such as is manifested in the conclusions of intelligent and reflective human interpretations. And this fact of self-conscious existence, associated with the reality of his subsequent spiritual experience, constitutes man a potential son of the universe and foreshadows his eventual attainment of the Supreme Unity of the universe. 동물에 불과한 존재들은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한 자아-의식을 소유할 수 없다. 동물들은 연합된 감각-인식과 그것을 기억하는 생리학적 합동 체계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감각에 대한 의미 있는 인식을 체험한다거나 혹은 지능적이고 반영적인 인간의 해석들이 내리는 결론 속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통합된 육체적인 체험들의 의도적인 연합을 나타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자아-의식이 실재한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 뒤에 일어나는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한 실체성과 연관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잠재적인 아들이 되게 하고 결국에는 그가 우주의 최극 합일을 달성하게 됨을 예시한다.

133:7.9 (1480.1) Neither is the human self merely the sum of the successive states of consciousness. Without the effective functioning of a consciousness sorter and associator there would not exist sufficient unity to warrant the designation of a selfhood. Such an ununified mind could hardly attain conscious levels of human status. If the associations of consciousness were just an accident, the minds of all men would then exhibit the uncontrolled and random associations of certain phases of mental madness.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아는 단지 의식의 연속 상태들에 대한 합계도 아니다. 의식 분류자와 연합자의 효율적 작용 없이는, 자아 신분이라는 명칭을 정당화시킬만한 충분한 합일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통합되지 않은 마음은, 인간 지위의 의식적 수준에 거의 이를 수 없다. 만일 의식의 결합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였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들은 통제되지 못하고 되는대로 움직이는 정신적 광란의 현상들의 상태들과 연관되었음을 나타낼 것이다.

133:7.10 (1480.2) A human mind, built up solely out of the consciousness of physical sensations, could never attain spiritual levels; this kind of material mind would be utterly lacking in a sense of moral values and would be without a guiding sense of spiritual dominance which is so essential to achieving harmonious personality unity in time, and which is inseparable from personality survival in eternity. 오로지 물리적 감각의 의식으로 만들어진, 인간 마음은 영적 수준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이런 물리적 마음의 종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감각이 철저히 모자라고, 영적 영역으로 안내하는 감각이 없게 된다. 영적 영역으로 안내하는 감각은 시간 안에서 조화로운 고유성 합일을 성취하는데 너무나 필수적이고, 영원 안에서 생존하는 고유성과 떼어낼 수 없다.

133:7.11 (1480.3) The human mind early begins to manifest qualities which are supermaterial; the truly reflective human intellect is not altogether bound by the limits of time. That individuals so differ in their life performances indicates, not only the varying endowments of heredity and the different influences of the environment, but also the degree of unification with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Father which has been achieved by the self, the measure of the identification of the one with the other. 인간 마음은 초물질적인 본질들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한다. 참으로 반영적인 인간 지성은 모두 시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개인들이 일생에서 이룩한 성취들이 그토록 다른 것은, 유전형질의 다양한 자질들과 다른 환경적 영향뿐 아니라, 자아에 의해 성취되고 있는 아버지의 내주하는 영과 연합된 정도 즉, 하나와 다른 하나가 어느 정도 동일시되었는지를 가리키는 척도이다.

133:7.12 (1480.4) The human mind does not well stand the conflict of double allegiance. It is a severe strain on the soul to undergo the experience of an effort to serve both good and evil. The supremely happy and efficiently unified mind is the one wholly dedicated to the doing of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Unresolved conflicts destroy unity and may terminate in mind disruption. But the survival character of a soul is not fostered by attempting to secure peace of mind at any price, by the surrender of noble aspirations, and by the compromise of spiritual ideals; rather is such peace attained by the stalwart assertion of the triumph of that which is true, and this victory is achieved in the overcoming of evil with the potent force of good. 인간의 마음은 이중으로 충성하는 모순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선과 악 모두를 섬기려고 노력하는 체험은 혼에게 심각한 부담이 된다. 최상으로 행복하고 효과적으로 통합된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전심으로 헌신된 마음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들은 합일을 파괴하며 마음의 분열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성은, 어떤 값을 치르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시도나, 고귀한 포부를 포기하거나, 또는 영적인 이상들을 타협한다고 해서, 육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는 참된 것이 승리하기를 꿋꿋하게 주장함으로써 성취되며, 이 승리는 강력한 선(善)의 힘으로 악(惡)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33:7.13 (1480.5) The next day they departed for Salamis, where they embarked for Antioch on the Syrian coast. 다음 날 그들은 살라미스Salamis를 향해 떠났고, 그곳에서 그들은 시리아 해변에 있는 안디옥Antioch으로 출항하였습니다.

8. At Antioch 안디옥에서

133:8.1 (1480.6) Antioch was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Syria, and here the imperial governor had his residence. Antioch had half a million inhabitants; it was the third city of the empire in size and the first in wickedness and flagrant immorality. Gonod had considerable business to transact; so Jesus and Ganid were much by themselves. They visited everything about this polyglot city except the grove of Daphne. Gonod and Ganid visited this notorious shrine of shame, but Jesus declined to accompany them. Such scenes were not so shocking to Indians, but they were repellent to an idealistic Hebrew. 전9:10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안디옥Antioch은 시리아Syria 지방에서 로마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였고, 그 제국의 총독이 거주하는 공관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서,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사악함과 비도덕적 악명으로는 첫 번째였습니다. 고노드는 처리할 업무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가니드는 둘 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들은 다프니Daphne의 작은 숲을 제외하고, 여러 나라의 말들을 사용하는 이 도시의 모든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고노드와 가니드는 악명 높은 치욕의 신전을 방문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한 장면이 두 인도인들에게는 충격이 되지 않았지만, 이상주의적 히브리인에게는 불쾌했습니다.

133:8.2 (1480.7) Jesus became sober and reflective as he drew nearer Palestine and the end of their journey. He visited with few people in Antioch; he seldom went about in the city. After much questioning as to why his teacher manifested so little interest in Antioch, Ganid finally induced Jesus to say: “This city is not far from Palestine; maybe I shall come back here sometime.” 예수님은 여행이 끝나는 팔레스타인에 가까이 이를수록, 더 엄숙해지고 생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도 거의 드물었습니다. 가니드는 예수님이 안디옥에 거의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한 끝에, 결국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므로,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133:8.3 (1481.1) Ganid had a very interesting experience in Antioch. This young man had proved himself an apt pupil and already had begun to make practical use of some of Jesus’ teachings. There was a certain Indian connected with his father’s business in Antioch who had become so unpleasant and disgruntled that his dismissal had been considered. When Ganid heard this, he betook himself to his father’s place of business and held a long conference with his fellow countryman. This man felt he had been put at the wrong job. Ganid told him about the Father in heaven and in many ways expanded his views of religion. But of all that Ganid said, the quotation of a Hebrew proverb did the most good, and that word of wisdom was: “Whatso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that with all your might.” 가니드는 안디옥에서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이해가 빠른 학생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벌써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디옥에서 그의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를 하고 있었던 한 인도인이 있었는데, 그가 너무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불평까지 심해서, 그를 해고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가니드가 이 말을 듣자, 그는 아버지의 사업장으로 가서 자신의 동족인 그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니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으며, 여러 방면으로 그의 종교적 관점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니드가 말한 모든 것들 중에서 유대 속담의 인용이 그에게 가장 효력이 있었는데, 그 지혜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전9:10).

133:8.4 (1481.2) After preparing their luggage for the camel caravan, they passed on down to Sidon and thence over to Damascus, and after three days they made ready for the long trek across the desert sands. 그들은 낙타로 여행하기 위해 짐을 준비한 후, 시돈Sidon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다시 다마스쿠스Damascus를 지나, 3일 후에는 사막의 모래벌판을 횡단하는 먼 길을 위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9.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에서

잠4:7-8 7 지혜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지혜를 얻어라 그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깨달음을 얻어라. 8 지혜를 찬양하라. 지혜가 너를 높일 것이다. 지혜를 고이 간직하라.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133:9.1 (1481.3) The caravan trip across the desert was not a new experience for these much-traveled men. After Ganid had watched his teacher help with the loading of their twenty camels and observed him volunteer to drive their own animal, he exclaimed, “Teacher, is there anything that you cannot do?” Jesus only smiled, saying, “The teacher surely is not without honor in the eyes of a diligent pupil.” And so they set forth for the ancient city of Ur. 사막(沙漠)을 횡단하는 대상(카라반caravan) 여행은, 여행에 이력이 난 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 20 마리의 낙타에 짐 싣는 것을 돕고, 짐승들을 손수 이끌고 가려고 자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니드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단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눈에는 명예롭지 않은 선생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하구나.” 그렇게 그들은 고대 도시 우르Ur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133:9.2 (1481.4) Jesus was much interested in the early history of Ur, the birthplace of Abraham, and he was equally fascinated with the ruins and traditions of Susa, so much so that Gonod and Ganid extended their stay in these parts three weeks in order to afford Jesus more time to conduct his investigations and also to provide the better opportunity to persuade him to go back to India with them. 예수님은 아브라함Abraham의 출생지인 우르의 초기 역사(歷史)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수사Susa의 옛 터들과 전통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매료되었으므로,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님께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하실 수 있도록 하고, 예수께서 자신들과 함께 인도로 같이 가시도록 설득하는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 곳에서 3주간을 연장하여 머물렀습니다.

133:9.3 (1481.5) It was at Ur that Ganid had a long talk with Jesus regarding the difference between knowledge, wisdom, and truth. And he was greatly charmed with the saying of the Hebrew wise man: “Wisdom is the principal thing; therefore get wisdom. With all your quest for knowledge, get understanding. Exalt wisdom and she will promote you. She will bring you to honor if you will but embrace her.” 가니드는 우르에서 지식, 지혜, 진리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하여 예수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현인(賢人)의 다음과 같은 말에 매우 매료되었습니다. ‘지혜가 기본적인 것이니, 지혜를 얻어라. 네가 탐구한 모든 지식으로 명철을 얻어라. 지혜를 높이면, 그가 너를 높이 들 것이라. 만일 지혜를 품기만 하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133:9.4 (1481.6) At last the day came for the separation. They were all brave, especially the lad, but it was a trying ordeal. They were tearful of eye but courageous of heart. In bidding his teacher farewell, Ganid said: “Farewell, Teacher, but not forever. When I come again to Damascus, I will look for you. I love you, for I think the Father in heaven must be something like you; at least I know you are much like what you have told me about him. I will remember your teaching, but most of all, I will never forget you.” Said the father, “Farewell to a great teacher, one who has made us better and helped us to know God.” And Jesus replied, “Peace be upon you, and may the blessing of the Father in heaven ever abide with you.” And Jesus stood on the shore and watched as the small boat carried them out to their anchored ship. Thus the Master left his friends from India at Charax, never to see them again in this world; nor were they, in this world, ever to know that the man who later appeared as Jesus of Nazareth was this same friend they had just taken leave of — Joshua their teacher. 마침내 이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감했습니다. 특히 그 젊은이가 그랬지만, 이별은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시울을 적시었으나 용기를 냈습니다. 가니드는 자기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 그러나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다마스쿠스Damascus에 다시 오면,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며, 적어도 아버지에 관하여 당신이 내게 일러 준 것과 당신이 무척 비슷한 줄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들을 기억하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저는 선생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말하기를,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신 위대한 선생님에게 작별(作別)을 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평화가 당신들 위에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는 해변 가에 서서, 작은 배가 그들을 태우고, 정박하여 기다리고 있는 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主)님은 인도India에서 온 그의 친구들을 카락스Charax에서 작별하였는데, 이 세상에서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나사렛의 예수로 나타난 그 사람이, 그들이 방금 작별을 한 동일한 이 친구 – 여호수아 그들의 선생이었음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133:9.5 (1481.7) In India, Ganid grew up to become an influential man, a worthy successor of his eminent father, and he spread abroad many of the noble truths which he had learned from Jesus, his beloved teacher. Later on in life, when Ganid heard of the strange teacher in Palestine who terminated his career on a cross, though he recognized the similarity between the gospel of this Son of Man and the teachings of his Jewish tutor, it never occurred to him that these two were actually the same person. 인도에서, 가니드는 성장하여 유능한 아버지의 훌륭한 계승자로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고귀한 많은 진리들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만년(晩年)에 가니드는 십자가에서 생애를 마친 이상한 선생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의 아들의 복음과 자신의 유대인 선생님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을 발견하였지만, 이 두 사람이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였습니다.

133:9.6 (1482.1) Thus ended that chapter in the life of the Son of Man which might be termed: The mission of Joshua the teacher. 이렇게 사람의 아들의 일생에서 여호수아 선생의 사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章)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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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명제1.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제자들을 떠나고, 영으로는 충만히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갔을 때, 너희를 위해 이 세상에서 내가 한 일을 아버지께서 충분히 승인하신 후에, 그리고 나 자신의 권역에 대한 최종 주권을 받은 후에, 나는 나의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릴 것이다. 내 자녀들을 세상에 홀로 남겨두면서, 그들에게 다른 선생을 보내주는 것이 저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허락하면, 내가 모든 육체에게 진리의 영을 쏟아 부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영이 이미 너희 안에 있으니, 그 날이 되면, 너희가 지금 아버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나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선물은 살아있는 진리의 영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처음에는 이 영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겠지만, 빛의 자녀들은 모두 그를 기쁘게 전심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아는 것처럼 그가 올 때 너희는 이 영을 알게 될 것이며, 너희는 이 선물을 너희 마음속에 받아들일 것이며,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아무 도움과 인도함이 없이 너희를 떠난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내가 오직 육신으로 너희와 같이 있을 수 있다. 앞으로는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너희뿐만 아니라 나의 현존을 원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 각자와 동시에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내가 육신으로는 그렇게 너희를 떠나고 그로서 더욱 좋게 그리고 더욱 충만하게 영으로 너희와 함께 할 수도 있음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명제2. 이 새로운 선생은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 안으로 보내시고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새로운 조력자(助力者)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신이 주시는 이 자질은 진리의 글이나 율법이 아니고, 진리의 형식이나 표현으로 기능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선생은 진리에 대한 확신, 진정한 영적 차원에 있는 참된 의미에 대한 인식이며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선생은 살아있고 성장하는 진리, 확대되고, 펼쳐지며 적응하는 진리의 영입니다.

명제3. 성령이 임하신 이 사람들은 기쁨과 권능의 새 세상으로 변화된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꼈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이 사람들은, 주(主)님을 죽이려 하고 그 가르침의 영향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던 그 세력에 대해, 자신들의 승리의 감정들을 표현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들의 개인적 관련을 기억하면서, 주(主)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자신들과의 친구 관계가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약속대로 성령이 도래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자연스럽게 감동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은 자기들이 다른 세계에 있음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쁨과 힘과 영광의 새로운 생활로 갑자기 전환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주(主)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도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이 성령의 오심으로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그들 중의 일부는,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명제4.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을 전파하게 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고려되고 나면, 어떻게 하여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들의 형제신분이라는 내용의 초기 메시지 대신에 예수에 관한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제5.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로 2,000 명의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오후 2시경에, 주(主)께서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셨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열정적으로 호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선포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떠나가신 주(主)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 순간 발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들이 이전의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헌신을 정당화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강요하는 설교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여섯 명의 사도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였습니다. 그들은 1시간 30분 이상을 이야기하였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로 메시지를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씩 설교하였습니다.

명제6. 이 영의 사역은 진리를 인격화하고, 고아와 같은 모든 느낌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영의 첫 번째 임무는 물론 진리로 양육하여 인격화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최상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의 두 번째 임무는, 신자들 자신이 고아처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진리의 영이 아직 사람들 마음속에 내주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명제7. 아들의 영을 주심으로 정상적인 마음이 아버지의 영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먼저 아들의 영을 주시는 그 결과로 모든 인류에게 아버지의 영을 우주적으로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영이 부어짐으로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영을 받을 준비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진리의 영은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 두 분의 영이십니다.

명제8. 성령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예수 교훈의 실체를 강화하십니다.

다음으로, 진리의 영은 신자가 예수 가르침들의 실체와 그의 일생의 실체의 증인으로 살도록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사셨듯이,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아들들의 각 세대의 개별 신자들 안에서 다시 새롭고 신선하게 지금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진리의 영은 실제로 모든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이끌며, 영원하며, 상승하는 하나님의 아들 관계의 실체 안에 있는, 살아 성장하는 영적 의식의 체험이 확대되는 지식으로 인도하십니다.

명제9. 진리의 영은 일곱 번 영의 수여를 완료했습니다.

얼마간, 인류는 우주 영이 주는 영향들의 일곱 가지 힘의 중복된 작용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의 초기 진화 종족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일곱 가지 보조 마음-영들의 진보적 접촉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지성과 영적 인식의 단계에서 상향 진보함에 따라, 결국 일곱의 더 높은 영(靈)의 영향들이 그에게 날아와 그의 안에 내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보하는 세계들의 이 일곱 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주 아버지의 증여된 영(靈) — 생각을 조절하는 자들.

2. 영원한 아들의 영 현존 — 우주들의 우주의 영 중력과 모든 영 교제의 확실한 경로.

3. 무한한 영(靈)의 영 현존 — 모든 창조의 우주 영-마음, 진보하는 모든 지성들의 지적 유사성의 영적 근원.

4.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의 영 — 일반적으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간주되는 진리의 영.

5. 무한 영(靈)의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 — 일반적으로 우주 영의 영으로 간주되는 성령.

6. 우주 어머니 영의 마음-영 — 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마음-영들.

7. 아버지, 아들들 그리고 영들의 영 —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혼과 천국 생각조절자의 융합 이후와 그에 따르는 신성과 천국 최종의 무리군단의 지위로 영화롭게 된 이후의 영역에서 상승하는 사람들의 새로 이름을 받은 영.

명제l0. 오순절에 예수님의 종교는 모든 국가적인 제약과 종족적인 속박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모든 국가적 제약들과 종족간의 족쇄들을 깨뜨렸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해방)가 있다.”는 말은 언제까지나 진리입니다. 이 날, 진리의 영은 주(主)님으로부터 모든 사람 각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영은 자격을 갖춘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졌지만, 그들은 쏟아 부어진 영을 받는 체험을,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있었던 새로운 복음의 일부분으로 삼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명제11. 오순절은 언제나 영적 체험의 관념을 특별히 호의적인 환경에 대한 개념에서 분리시킵니다.

진리의 영을 부어주심은 모든 형식들, 의식(儀式)들, 거룩한 장소들, 그리고 진리의 영의 임재하심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특별한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영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다만 아무 소리 없이 기도하면서 그곳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영은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교외 지역에서도 부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영을 받기 위하여 뿔뿔이 헤어져 고립된 장소에서 몇 년간의 고독한 묵상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오순절은 영적 체험에 대한 관념을 특별히 호의적인 환경들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명제12. 오순절은 사랑의 인내의 두려움 없는 행위로, 증오와 분노의 악에 대항하는 권능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오순절은 사람에게 개인적 상처를 용서하는 힘과, 가장 심각한 불공평의 상황에서도 상냥할 수 있는 힘과, 무시무시한 위험에 직면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태연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사랑과 인내의 두려움 없는 행동을 통해 미움과 분노의 악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했습니다. 지구는 그 역사적으로 참혹한 피해들과 파괴적인 전쟁들을 겪어 왔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투쟁 속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좌절을 체험하였습니다. 승리자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투쟁들을 뚫고 높은 명성과 함께 떠오른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사렛 예수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그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보다 나은 문명화에 대한 비결은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의 가르침들, 사랑의 선한 뜻, 그리고 상호 신뢰 속에 깊이 묻혀 있습니다.

명제13. 인류는 영적인 접근으로만 통합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은 개인들, 집단들, 국가들 그리고 인종들의 자기주장을 줄여 나가도록 예정되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어 주기적인 파괴적 전쟁으로 터져 나온 이유는 바로 이 자기주장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인류는 영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통합될 수 있으며, 진리의 영은 세상을 향한 보편적인 영향력입니다.

명제14. 오순절은 역사의 예수께서 살아있는 체험을 위한 신적인 아들 되심을 뜻합니다.

진리의 영의 도래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복지에 심혈을 기울인 일생의 목적을 갖게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물질적 정신은 이기심 없는 이 새로운 영적 수여에 휩싸여 사라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순절은 역사적 예수께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적인 아들이 되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부어진 영의 기쁨은, 인간의 삶에서 의식적으로 체험될 때, 건강을 위한 원기 회복제이며, 마음을 위한 자극이고, 혼에는 부단한 힘이 됩니다.

명제15. 진리의 영의 영향력은 지역 우주를 통해 계속됩니다.

사람이 우주들을 통해서 올라가면서 이 영적 회로들을 이용하지만, 결코 그의 영원한 고유성의 한 부분으로 소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적 봉사를 베푸는 이 회로들은, 진리의 영이든, 성령이든, 또는 초우주 영의 현존이든지에 관계없이, 하나님 자녀들의 고유성 안에서 일어나는 가치들을 받아들여 그에 반응을 수 있습니다. 이 가치들은 하나님(칠중)을 통해 최상위에게 충실히 전달됩니다.

하나님 나라 9-성경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6 단계

성경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6 단계SIX PHASES OF THE KINGDOM IN THE BIBLE

1. 개인적인 체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2.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측면.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마10:7).

3. 초인간적인 형제정신.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4. 사람의 다음 세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5. 빛과 생명의 시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6. 예수님의 통치권.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23:42).

하나님 나라 8-새계명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

명제1. 예수님의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나는 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면서, 너희 혼에게 어떤 새로운 부담을 더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는 너희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고, 너희 마음이 친구들에게 애정을 쏟는 환희를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체험하게 하노라. 나는 흘러나오는 슬픔을 참으면서라도, 너희들과 너희 친구들에게 나의 애정을 줌으로써, 최상의 기쁨을 체험하고자 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내가 청하였을 때,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애정을 너희 앞에 높이 들어 나타내었던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 너희는 내 친구들이며, 내가 너희에게 가르쳤던 것을 너희가 기꺼이 행하기만 하면 너희는 영원히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너희는 나를 주(主)라고 불렀지만, 나는 너희를 하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내 친구가 될 것이며, 아버지께서 내게 나타내시는 것을 언제까지나 너희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라.

하나님 나라 7-예수의 종교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명제1. 예수의 종교는 7가지 필수조건을 제공하는 최종적 구원을 제공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지식과 지혜와 신앙과 진리 그리고 사랑의 조화로운 통합을 온전히 수용하여, 철학적 안정성과 윤리적 민감성과 하나님 인식 그리고 개인적 구원에 대한 적극적 확신을 완전하면서도 동시적으로 제공하는, 최초의 종교를 이루었습니다.

예수의 신앙은 인간 구원의 최종, 인간의 우주 달성의 궁극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1. 물질적 사슬에서의 구원 – 영이신 하나님과의 아들관계인 개인성을 실현하여 물질적인 사슬로부터의 구원.

2. 지적(知的) 사슬에서 구원 –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니,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함.

3. 영적 시각장애 사슬에서 구원 – 사람들의 형제우애관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모든 창조물들의 형제신분 인식, 영적 실체에 대한 봉사 발견, 영 가치의 선함에 대한 활동적 계시.

4. 자아의 미완성으로부터의 구원 – 우주의 영적 차원 달성과 조화의 영원한 실현 및 천국의 완성 실현.

5. 자아로부터의 구원 – 궁극적 마음의 우주 차원의 달성과 모든 다른 자아 존재와의 합동 달성을 통해 자아의식 한계에서 해방.

6. 시간으로부터의 구원 –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끝없는 진보를 통한 영원한 삶의 성취.

7. 유한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과 초월 존재이신 하나님 발견을 통해 성취.

명제2. 예수의 가르침들은 미신, 마술, 신화 그리고 교조주의의 종교를 최종적으로 제거하였습니다.

자연적인 종교의 마술적이고 신화적인 근원적 배경은 후대의 계시 종교와 예수의 종교인 더할 나위 없이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실체와 진리를 무효화시키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마침내 마술적인 미신들과 신화적 환상들 그리고 전통적인 교조주의(敎條主義)의 속박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초(超)물질적 가치들과 존재들의 실재 그리고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후대의 뛰어난 종교를 위한 길을, 매우 효과적으로 예비하였습니다.

명제3.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진리들이 다시 세상에 선포된다면, 성화(聖化)된 종교적 동기를 지닌 그의 진지한 인간 생애의 제시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응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즐겁게 듣는 이유는 그가 그들 중의 하나인 겸손한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선생님은 진실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제4. 예수님은 바울의 인간에 대한 염세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악하기보다는 약하다고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미신적 금기 사항들의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셨으며,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님을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지상의 자기 일생에서 도피하기를 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 실천을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셨습니다. 그는 현실 세계의 한 복판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일생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인간에 대한 염세적인 견해를 갖지 있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보셨으며, 생존을 선택한 그들 앞에 펼쳐질 장엄하고 영원한 미래를 내다 보셨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회의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을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십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악하기보다는 약하다고 보셨으며, 타락했다기보다는 마음이 산란한 상태라고 보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자신의 형제들이었습니다.

명제5. 예수께서는 복음을 자신에 대한 종교로 바꾸는 위험성에 대해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사신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 그리고 후에 생길 수도 있는 자신에 관한 가르침들 사이의 차이점을,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왕국과 거기에 관련된 복음이 너희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와 나의 가르침에 관해서 설교하는 잘못된 옆길로 빠지지 말도록 유의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하여 내가 계시한 것을 표현하라. 그러나 나의 믿음들과 가르침들에 관해서 믿음과 가르침과 관련된 전설을 창조하거나 하나의 종파를 만드는 잘못된 옆길로 빠지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이번에도 그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였으며, 그가 왜 자기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지 감히 묻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제6. 베드로는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관한 종교로 변경하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원기 왕성한 지도력 아래에서, 그리고 주(主)가 아버지께로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예수님에 대해 선한 뜻을 가진 지도자들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관한 종교라는 새롭고도 수정된 형태로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변경하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6-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THE FATHER’S WILL

명제1.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a. 부정적인 방법 –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으로 하소서.

b. 긍정적인 방법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실적 현존 앞에 실제적으로 서있기 전에 오랜 세월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사람이 영 아버지를 영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피조물 의지의 부정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적극적인 긍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선택이 이루어지고 나면, 하나님을 선택한 자녀들은 곧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과 내적인 연합이 이루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완전을 이루어 가면서, 사람의 개인성과 하나님의 개인성 즉 두 개인성은 서로 자아-의지적인 상호관계를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영원한 동반자의 관계 안에서 영원하게 연합되며, 예배의 친교 안에서, 최상의 만족을 얻게 됩니다.

명제2. 최상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체 뜻 중에서 가장 높은 유한한 표현으로 드러나십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정도까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에 이르면, 하나님의 잠재적 전능성은 우리에게 한 단계 더 실제적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근원의 첫째이며 중심 목적이며, 그것은 절대적 삼위 안에서 잠재적이 되고, 영원한 성자를 통해 개인성으로 드러나며, 무한한 성령의 모든 활동을 통해 연합되고, 천국의 영존하는 틀 안에서 영원화 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상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체 뜻 중에서 가장 높은 유한한 표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나님 나라 5-새롭고 살아있는 길

새롭고 살아있는 길THE NEW AND LIVING WAY

명제1. 예수님은 새롭게 살아있는 길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그 길을 아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는 우리 인간들의 영적인 고양(高揚)을 위해 살다가 죽으시면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확립하십니다. 그의 삶은 천국의 진리가 육체 안에서 성육신 된 것이며, 그것을 아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진리이며 참된 진리의 영이십니다.

명제2. “지상의 새롭고 살아있는 길”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맨션 세계로 다시 직접 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지상에서 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의 확립은 진리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였습니다. 루시퍼 반란으로 이 세상이 고립되어, 죽음에 처한 사람들은 맨션세계에 직접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 모든 혼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특별한 부활의 때까지 수면상태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특별 부활의 때까지 다른 편으로 건너가도록 허용되지 않았으며, 타락한 마귀는 이러한 해방 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부터 사람들은 다시 부활의 세계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제3. 예수님은 힘이 있으면서도 그 힘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거절하는 인격자로서 큰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많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럽고, 일반적이지만, 어렵고, 고된 방법들을 선택하며, 인류의 가슴속에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셨으며, 이는 앞으로 따라오는 자신의 지상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성장·확대하는 사역 속에서 겪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많은 환난을 겪음으로써 모든 세대의 많은 자녀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개인적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끊임없이 거절하는, 인격자로서의 큰 시험을 겪고 계셨습니다.

명제4. 사랑의 통찰력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을 향한 목마름을 일으키며, 사람은 그 안에서 영광스럽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내리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고상합니다. 동물은 환경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며, 신성한 사랑의 통찰력으로 현재의 물질적 세상의 한계들을 벗어납니다. 이러한 사랑의 개념은 사람의 혼속에서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을 찾도록 인도합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발견하면, 그는 그 안에서 영화롭게 됩니다. 그는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으로 살아가며, 정의(正義)를 행하려는 소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4-나라의 열쇠들

나라의 열쇠들KEYS OF THE KINGDOM

명제1. 나라의 열쇠는 성실함입니다.

나라의 열쇠는 성실함, 더욱 성실함 그리고 더욱 더 성실함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열쇠들을 사용하여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은 결심하고, 더욱 결심하고, 그리고 더욱 더 결심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도덕적 선택은 가능한대로 가장 높은 가치를 선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선택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행동의 사람이라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명제2.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간의 선택은 유한성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인간 의지의 전체 범위는 하나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엄밀히 유한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선택은 유한성을 넘어섭니다. 오직 영원만이 이러한 선택의 초(超)유한성과 절대성을 밝힐 수 있습니다.

명제3. 예수께서는 나라의 이중 개념, 즉 이 세상과 천국에서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명백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욕구 즉 윤리적으로 개선된 도덕적 행위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심 없는 사랑입니다.

둘째,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의 목표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게 성취된 곳이며, 하나님의 뜻이 더욱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명제4. 예수님은 두 가지 즉 신실한 믿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는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을 가르치셨습니다.

첫째는 신앙과 성실성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와서, 아들관계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의심 없이, 아버지의 지혜에 대한 참된 신뢰와 충만한 자신감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복종하는 것과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나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의를 향한 갈증 즉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동기로 변화된 마음입니다.

믿음에 대한 성경 구절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하나님 나라 3-하나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형제정신

하나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형제정신FATHERHOOD OF GOD AND BROTHERHOOD OF MAN

명제1. 인간의 형제정신은 보편적이므로 각자 관계의 본질인 동시에 전체 관계의 본질입니다.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은 모든 개인을 포함한 신적인 가족, 천국 아버지의 자녀, 자유의지를 지닌 자녀들 사이에 보편적인 형제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보편적 형제 정신은 전체의 관계입니다. 형제정신은 전체의 실제이며, 부분의 본질과는 대조적으로 전체라는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명제2. 형제정신은 전체로서 부분의 유익과 고통을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형제 정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인격 사이에 있는 관계의 사실로 구성됩니다. 어떤 인격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이득(利得)이나 손해를 피할 수 없습니다. 부분의 유익과 고통은 전체로서 평가됩니다. 각 사람의 훌륭한 노력은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주며, 각 사람의 잘못이나 악은 모든 사람의 시련을 더해 준다. 부분이 움직이는 대로, 전체가 움직인다. 전체의 진보가 어떠하면, 부분의 진보도 그러하다. 부분과 전체의 상대 속도는 그 부분이 전체의 관성(慣性) 때문에 늦어지든지, 우주 형제 정신의 운동량 때문에 앞으로 밀려 가든지를 결정한다.

명제3.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으셔야만, 인간이 나중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들의 의식은 사실fact에서 의미meaning를 거쳐 가치value로 나아갑니다. 창조주의 의식은 생각의 가치에서 말씀의 의미를 거쳐 행동의 사실로 나아갑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실존적 무한의 고유한 절대적 통일의 장벽을 깨뜨리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모델이 되는 우주, 완전한 인격들, 근본적인 진·선·미를 마련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으셔서, 나중에 인간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십니다. 언제나 우주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셔야만,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존재하고, 그 결과, 우주의 형제 정신이 존재하게 됩니다.

명제4.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라. 너희가 온 세상으로 나가 이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의 명령을 다시 듣도록 너희가 모두 있을 때 나타나기 위해 내가 한 주 내내 머물렀느니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그렇게 보내노라. 내가 아버지를 드러낸 것 같이, 너희도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지라.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는 하늘의 기쁨을 선포할 뿐 아니라, 매일의 체험을 통해 신적인 삶의 영적인 실체를 나타내야 하리라.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이미 가졌음이라. 너희가 지금은 여기에서 문을 닫고 숨어 있지만, 믿음을 통해, 하늘의 권능인 진리의 영이 오면, 너희는 너희 빛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에게 알리리라. 지금은 두려움 때문에 너희가 도피해 했지만,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체험 가운데 너희는 용기 있고 기쁘게 떠나가리라.”

명제5.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의 일생의 사실과 하나님 아들됨의 진리에 토대가 있습니다.

“너희는 여기 갈릴리에 잠시 머물러 전통주의(傳統主義)의 거짓된 안전감에서 살아있는 체험을 통해 얻는 최상의 실체인 사실•진리•신앙에 근거한 새로운 질서의 권위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충격에서 회복할지라. 세상에 대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와 살면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과, 너희와 모든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에 기초를 두느니라. 그리고 그 사명은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겼듯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실제적인 살아있는 체험의 일생으로 이루어지리라. 믿음이 너희의 빛을 세상에게 드러내리라. 진리의 계시가 전통으로 닫힌 눈을 뜨게 하리라. 너희 사랑의 섬김이 무지로 생긴 편견(偏見)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리라. 이해하는 공감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동료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 너희는 아버지 사랑을 아는 유익한 지식으로 저희를 이끌리라.”

명제6. 유대인은 선을, 그리스인들은 미를, 힌두교도들은 헌신을, 고행자들은 존경을, 로마인들은 충성심을 따르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봉사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선을 찬미하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숭상하며, 힌두교들은 헌신을 높이고, 금욕주의자들은 존경을 따르며, 로마인들은 충성심을 드높이지만, 나는 육체로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생을 제자들에게 요구하노라.”

하나님 나라 2-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명제1. 하나님 나라는 생명과 자유에 관한 7가지 부요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진리와 그에 관계되어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님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물적 두려움에서 사람을 해방하고, 동시에 영적 자유를 지닌 새 삶으로 인간 생활이 부요하게 될 것을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1. 새로운 용기와 증대된 영적 권능의 소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며, 영생(永生)을 소망하도록 격려합니다.

2. 그 복음은 가난한 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3. 복음 자체 안에, 도덕적 가치의 새 표준과, 인간 행위를 측량하는 새 윤리(倫理)의 척도가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체제의 인간 사회 이상을 보여줍니다.

4. 그 복음은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 보다는 상위(上位)에 있음을 말합니다. 복음은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초인간적 이상을 높입니다.

5. 이 복음은 영적 달성을 참된 삶의 목표로 제시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도덕적 가치와 신적인 위엄성을 새롭게 부여받았습니다.

6. 영원한 실체들은 땅에서 바르게 노력한 결과와 보상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땅에서 사는 이유는 고귀한 운명을 자각한 결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7. 새 복음은 인간의 구원이 원대한 신적 목적의 계시임을 확증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이 끝없이 섬기는 미래의 운명을 통해 완성되고 실현됩니다.

명제2. 예수님은 나라의 정의를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형제 정신의 모습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5 단계로 제시하셨습니다.

1. 믿는 자녀들이 개인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교를 나누는 영적 생활의 체험.

2. 복음을 믿는 자들의 소유한 형제 정신의 확장. 믿는 각자의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결과, 도덕성이 확장되어 윤리적으로 살아있는 사회의 모습.

3.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영적 존재들이 나누는 초인간적인 형제정신의 나라.

4.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전망과 더불어 영적 생활의 개선으로 발전된 새로운 사회 체제(다음 세대)의 여명(黎明)을 향한 진보.

5. 지상에서 누리는 빛과 생명의 영적 시대로서 성숙한 미래적 하나님 나라.

명제3.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중요한 모습을 5 항목으로 제시하셨습니다.

1. 개인 우선.

2. 사람의 체험에서 결정 요소인 의지.

3.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는 영적인 사귐.

4. 사람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얻는 최상의 만족.

5.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영적인 사람의 인격.

명제4. 나라를 믿는 자녀들은 영생을 가지고, 하늘(우주)을 향해 천국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한 가지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를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인생 체험을 위해 하나님을 드러내신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 사실은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토록 살아있는 진리가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성하게 의식하게 될 때, 우리는 빛과 생명의 자녀로서 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온 하늘(우주)을 향해 천국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명제5.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정신의 실제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땅에서 그 자녀들을 섬기는 봉사와 관계됩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福音)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실제와 사람이 자녀라는 진리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모든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부활 경험으로 변경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에 대한 봉사를 전파해야 합니다.

세상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믿음을 통하여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이 진리를 실제로 깨닫고 매일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각자들이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자녀(아들)이라는 진리를 직접 붙잡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 1-나라의 개념

나라의 개념CONCEPTS OF THE KINGDOM

명제1. 히브리 성서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의 현실과 미래의 소망으로 제시합니다.

히브리 성서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1. 오늘의 현실

2. 미래의 소망 즉, 메시아가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희망으로서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초기부터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 두 가지 개념을 다 가르쳤습니다.

3. 후일 유대인들의 개념 – 초자연적 기원과 기적으로 개시되는 세계적인 초월적 국가의 개념

4. 페르시아인의 교훈 – 세상의 종말에 선이 악을 정복하여 신의 나라가 확립됨.

명제2. 나라의 개념은 네 집단의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들은 이 모든 하나님 나라 이념을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메시아가 온다는 종말적인 개념으로 통합하고 혼합시켰습니다. 그 때는 땅과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이 최고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로서 온 인류가 야훼를 경배할 시대였습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 예수님은 유대와 페르시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정에 있었던 유산(遺産)을 이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해와 오해가 뒤섞여 있는 하나님 나라는 뚜렷하게 다른 네 집단의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1. 유대인의 개념

2. 페르시아인의 개념

3. 예수님의 개념 –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 인격적인 경험을 동반하는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대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대한 다양한 개념을 제시하셨지만, 사도들에게 언제나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있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직접 겪는 체험이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적 말씀은 언제나 “너희 안에 있는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4. 기독교의 창시자와 선포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강조하려고 애쓴 복합적이며 혼동된 개념들.

명제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래된 혼란은 세 가지 요소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대해 여기세기에 있었던 혼동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합니다.

1.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다시 진술하는 여러 진보적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동.

2. 유대교에서 이방인의 토양으로 초기의 기독교를 옮겨 심는 것과 불가피하게 연결된 혼동.

3. 기독교가 ‘예수의 인격’이라는 중심 개념에 관하여 조직된 종교가 되어갔다는 사실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혼동.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점점 더 예수에 대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0 -개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참고구절 히11:1, 요14:1, 요1:12, 엡2:8, 히12:2

I. 나라의 개념들CONCEPTS OF THE KINGDOM

II.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III. 하나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형제정신FATHERHOOD OF GOD AND BROTHERHOOD OF MAN

IV. 나라의 핵심KEYS OF THE KINGDOM

V. 살아있는 새 길THE LIVING AND NEW WAY

VI. 아버지의 뜻THE FATHER’S WILL

VII. 예수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VIII. 새계명THE NEW COMMANDMENT

* 이후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와 동일한 용어로 사용합니다.

Paper 134 The Transition Years 과도기(過渡期) 시절

Paper 134

The Transition Years 과도기(過渡期) 시절

1. The Thirtieth Year (A.D. 24) 30세 되던 해 (서기 24년)
Return to Nazareth 나사렛으로 돌아오심
Marriage of Simon; marriage of Jude 시몬의 결혼; 유다의 결혼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隊商카라반) 여행
3. The Urmia Lectures 우르미아 강연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주권 –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및 주권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Solitary wanderings 단독 여행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 체류함
End of the Lucifer Rebellion 루시퍼 반란의 종말
The sovereignty of Nebadon 네바돈의 주권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Visit with John at Jerusalem 요한과 예루살렘에 들르다
Working in Zebedee’s boatshop  세베대의 선박(船舶)제작소에서 작업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34:0.1 (1483.1) DURING the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carefully studied the people he met and the countries through which he passed, and at about this time he reached his final decision as to the remainder of his life on earth. He had fully considered and now finally approved the plan which provided that he be born of Jewish parents in Palestine, and he therefore deliberately returned to Galilee to await the beginning of his lifework as a public teacher of truth; he began to lay plans for a public career in the land of his father Joseph’s people, and he did this of his own free will. 지중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만났던 사람들과 거쳐 갔던 나라들에 관하여 주의 깊게 연구하였으며, 이 무렵, 땅에서 보내야하는 여생(餘生)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계획을 충분하게 고려하였고 이제 그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대중(大衆)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필생의 사명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요셉의 민족의 땅에서 공생애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것을 행하셨습니다.

134:0.2 (1483.2) Jesus had found out through personal and human experience that Palestine was the best place in all the Roman world wherein to set forth the closing chapters, and to enact the final scenes, of his life on earth. For the first time he became fully satisfied with the program of openly manifesting his true nature and of revealing his divine identity among the Jews and gentiles of his native Palestine. He definitely decided to finish his life on earth and to complete his career of mortal existence in the same land in which he entered the human experience as a helpless babe. His Urantia career began among the Jews in Palestine, and he chose to terminate his life in Palestine and among the Jews. 예수님은 개인적인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이 모든 로마 제국에서,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章)을 마련하고, 최종 장면을 연출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자신이 태어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의 참된 성품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계획으로 충분히 만족(滿足)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기력한 아기로서 인간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에서 지상 생애를 반드시 끝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경력을 완성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1. The Thirtieth Year (A.D. 24)서른 살 되던 해(서기 24년)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134:1.1 (1483.3) After taking leave of Gonod and Ganid at Charax (in December of A.D. 23), Jesus returned by way of Ur to Babylon, where he joined a desert caravan that was on its way to Damascus. From Damascus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nly a few hours at Capernaum, where he paused to call on Zebedee’s family. There he met his brother James, who had sometime previously come over to work in his place in Zebedee’s boatshop. After talking with James and Jude (who also chanced to be in Capernaum) and after turning over to his brother James the little house which John Zebedee had managed to buy, Jesus went on to Nazareth. AD 23년 12월, 카락스Charax에서 고노드와 가니드를 떠나보낸 후에, 예수님은 우르Ur를 경유하여 바빌론Babylon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사막의 대상caravan과 합세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부터 나사렛Nazareth으로 돌아가는 도중, 가버나움Capernaum에 단 몇 시간 동안만 들렸을 때, 거기에서 세베대Zebedee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동생 야고보James를 만났으며, 야고보는 세베대의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님 대신 일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우연히 가버나움에 들렸었던 유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요한 세베대가 매입하여 관리하던 작은 집을 동생 야고보에게 넘겨준 다음, 계속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134:1.2 (1483.4) At the end of his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received sufficient money to meet his living expenses almost up to the time of the beginning of his public ministry. But aside from Zebedee of Capernaum and the people whom he met on this extraordinary trip, the world never knew that he made this journey. His family always believed that he spent this time in study at Alexandria. Jesus never confirmed these beliefs, neither did he make open denial of such misunderstandings. 지중해 여행을 마쳤을 때,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세베대와 이 특별한 여행에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이 기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냈었다고 언제나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옳다고 확인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러한 오해들을 드러내놓고 부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134:1.3 (1483.5) During his stay of a few weeks at Nazareth, Jesus visited with his family and friends, spent some time at the repair shop with his brother Joseph, but devoted most of his attention to Mary and Ruth. Ruth was then nearly fifteen years old, and this was Jesus’ first opportunity to have long talks with her since she had become a young woman. 나사렛에 머물던 몇 주간 동안, 예수님은 가족과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동생 요셉과 수리소에서 함께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관심은 마리아Mary와 룻Ruth에게 두었습니다. 룻은 그 때 거의 15살이었는데, 누이가 처녀가 된 이래로, 예수님이 그녀와 오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34:1.4 (1484.1) Both Simon and Jude had for some time wanted to get married, but they had disliked to do this without Jesus’ consent; accordingly they had postponed these events, hoping for their eldest brother’s return. Though they all regarded James as the head of the family in most matters, when it came to getting married, they wanted the blessing of Jesus. So Simon and Jude were married at a double wedding in early March of this year, A.D. 24. All the older children were now married; only Ruth, the youngest, remained at home with Mary. 시몬Simon과 유다Jude는 한 동안 결혼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동의 없이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맏형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으로 결혼을 미루었습니다. 비록 그들 모두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를 가장(家長)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이 임박해지자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는 이 해 AD 24년 3월 초순에 합동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이든 아이들은 이제 모두 결혼하였고, 가장 나이가 어린 룻만이 마리아와 함께 집에 남았습니다.

134:1.5 (1484.2) Jesus visited with the individual members of his family quite normally and naturally, but when they were all together, he had so little to say that they remarked about it among themselves. Mary especially was disconcerted by this unusually peculiar behavior of her first-born son. 예수님은 가족들을 개인별로 만날 때는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있었을 때에는 거의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그것에 대해 한마디씩 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맏아들의 이상한 태도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134:1.6 (1484.3) About the time Jesus was preparing to leave Nazareth, the conductor of a large caravan which was passing through the city was taken violently ill, and Jesus, being a linguist, volunteered to take his place. Since this trip would necessitate his absence for a year, and inasmuch as all his brothers were married and his mother was living at home with Ruth, Jesus called a family conference at which he proposed that his mother and Ruth go to Capernaum to live in the home which he had so recently given to James. Accordingly, a few days after Jesus left with the caravan, Mary and Ruth moved to Capernaum, where they lived for the rest of Mary’s life in the home that Jesus had provided. Joseph and his family moved into the old Nazareth home.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이 도시를 지나가던 어느 큰 대상(카라반)의 안내자가 심한 병에 걸렸는데, 외국어에 능통하였던 예수께서 그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이 여행 때문에 일 년 동안 집을 비워야 했고, 동생들이 모두 결혼해서 집에는 어머니와 룻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최근에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던 가버나움 집으로 어머니와 룻이 이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대상들과 떠난 며칠 뒤에, 마리아와 룻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리아의 여생(餘生) 동안 예수께서 마련하신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나사렛의 고향집으로 들어왔습니다.

134:1.7 (1484.4) This was one of the more unusual years in the inner experience of the Son of Man; great progress was made in effecting working harmony between his human mind and the indwelling Adjuster. The Adjuster had been actively engaged in reorganizing the thinking and in rehearsing the mind for the great events which were in the not then distant future. The personality of Jesus was preparing for his great change in attitude toward the world. These were the in-between times, the transition stage of that being who began life as God appearing as man, and who was now making ready to complete his earth career as man appearing as God. AD24년, 이 해는 사람의 아들의 내적 체험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몇 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인간 마음과 내주하는 조절자 사이에서 조화(調和)를 이루는 일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장래에 일어날 위대한 사건들을 위하여, 조절자는 예수님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훈련시키는 일(rehearsing)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유성은 세상을 향한 태도에 있어서 큰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들은 양단의 중간 시기, 인간으로 나타난 하나님으로서의 일생(一生)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나타난 사람으로서의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려고 이제 준비하는 과도기였습니다.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카라반) 여행

  •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134:2.1 (1484.5) It was the first of April, A.D. 24, when Jesus left Nazareth on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Sea region. The caravan which Jesus joined as its conductor was going from Jerusalem by way of Damascus and Lake Urmia through Assyria, Media, and Parthia to the southeastern Caspian Sea region. It was a full year before he returned from this journey. 예수께서 나사렛을 출발하여 대상caravan들과 함께 카스피Caspian 해(海)로 여행을 떠난 것은 기원 후 24년 4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안내자로서 합세하였던 그 대상(隊商)은 예루살렘Jerusalem을 출발하여 다마스쿠스Damascus와 우르미아Urmia 호수(湖水)를 경유하고 앗시리아Assyria, 메디아Media, 파르티아Parthia를 거쳐 남동부 카스피 지역으로 갔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134:2.2 (1484.6) For Jesus this caravan trip was another adventure of exploration and personal ministry. He had an interesting experience with his caravan family — passengers, guards, and camel drivers. Scores of men, women, and children residing along the route followed by the caravan lived richer lives as a result of their contact with Jesus, to them, the extraordinary conductor of a commonplace caravan. Not all who enjoyed these occasions of his personal ministry profited thereby, but the vast majority of those who met and talked with him were made better for the remainder of their natural lives.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대상 여행은 탐험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역하는 또 다른 모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대상 일행들─승객들, 안내원들, 낙타 부리는 자들─과 함께 흥미 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대상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살고 있었던 많은 남녀 어른들과 아이들은,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대상을 이끄는 비범(非凡)한 안내자로 보였던 예수님과 접촉한 결과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사역하였던 이 기회들을 누렸던 사람들 전부가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더 나은 여생(餘生)을 누렸습니다.

134:2.3 (1484.7) Of all his world travels this Caspian Sea trip carried Jesus nearest to the Orient and enabled him to gain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Far-Eastern peoples. He made intimate and personal contact with every one of the surviving races of Urantia excepting the red. He equally enjoyed his personal ministry to each of these varied races and blended peoples, and all of them were receptive to the living truth which he brought them. The Europeans from the Far West and the Asiatics from the Far East alike gave attention to his words of hope and eternal life and were equally influenced by the life of loving service and spiritual ministry which he so graciously lived among them. 그의 모든 여행 중에서 이 카스피 해의 여행은 예수님께서 동방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래서 그는 극동(極東)지방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홍인종을 제외하고 지구에 살아남아 있는 각 종족들과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접촉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여러 인종들과 혼합 사람들 각자에게 동등하게 개인적으로 베푼 사역활동을 즐겼으며, 그들 모두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살아있는 진리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극서(極西)지방에서 온 유럽인들Europeans이나 극동지방에서 온 아시아인들Asiatics은,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그의 말에 똑같이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들 가운데 예수께서 그토록 인자하게 사셨던 사랑의 봉사와 영적 사역에 의하여 똑같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134:2.4 (1485.1) The caravan trip was successful in every way. This was a most interesting episode in the human life of Jesus, for he functioned during this year in an executive capacity, being responsible for the material intrusted to his charge and for the safe conduct of the travelers making up the caravan party. And he most faithfully, efficiently, and wisely discharged his multiple duties. 그 대상caravan 여행은 모든 점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 일생에서 매우 흥미 있는 에피소드(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해에 집행(執行)하는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물질과 카라반(대상) 일행을 이루고 있던 여행자들의 안전한 행위를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신실하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현명하게 여러 가지 임무들을 처리하였습니다.

134:2.5 (1485.2) On the return from the Caspian region, Jesus gave up the direction of the caravan at Lake Urmia, where he tarried for slightly over two weeks. He returned as a passenger with a later caravan to Damascus, where the owners of the camels besought him to remain in their service. Declining this offer, he journeyed on with the caravan train to Capernaum, arriving the first of April, A.D. 25. No longer did he regard Nazareth as his home. Capernaum had become the home of Jesus, James, Mary, and Ruth. But Jesus never again lived with his family; when in Capernaum he made his home with the Zebedees. 카스피 지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은 우르미아Urmia 호수에서 대상 안내자의 자리를 사직하고 2주가 약간 넘게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대상 대열에 승객으로 합세하여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그 낙타들의 주인은 그에게 남아서 같이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가는 대상들과 함께 계속 여행하여 AD 25년 4월 1일에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사렛Nazareth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이 예수와 야고보James와 마리아Mary와 룻Ruth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다시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으며, 가버나움에 있을 때에는 세베대Zebedees의 집에 자신의 거처(居處)를 정하였습니다.

3. The Urmia Lectures우르미아에서의 강연

134:3.1 (1485.3) On the way to the Caspian Sea, Jesus had stopped several days for rest and recuperation at the old Persian city of Urmia on the western shores of Lake Urmia. On the largest of a group of islands situated a short distance offshore near Urmia was located a large building — a lecture amphitheater — dedicated to the “spirit of religion.” This structure was really a temple of the philosophy of religions. 카스피 해(海)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휴식과 원기회복을 위하여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페르시아 도시인 우르미아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우르미아 근처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에는 큰 건물 – 원형극장식의 강연 장소 – 이 “종교의 정신spirit”에 봉헌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종교 철학을 다루는 사원(寺院)이었습니다.

134:3.2 (1485.4) This temple of religion had been built by a wealthy merchant citizen of Urmia and his three sons. This man was Cymboyton, and he numbered among his ancestors many diverse peoples. 이 종교 사원은 우르미아의 시민인 어느 부유한 상인(商人)과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심보이톤Cymboyton이었으며, 그의 선조들 중에는 다른 여러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134:3.3 (1485.5) The lectures and discussions in this school of religion began at ten o’clock every morning in the week. The afternoon sessions started at three o’clock, and the evening debates opened at eight o’clock. Cymboyton or one of his three sons always presided at these sessions of teaching, discussion, and debate. The founder of this unique school of religions lived and died without ever revealing his personal religious beliefs. 이 종교학교의 강의와 토론은 주 중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오후 수업은 3시에 시작하였으며, 저녁 토론회는 8시에 열렸습니다. 심보이톤Cymboyton이나 그의 세 아들들 중의 하나가 이 강의•논의•토론 시간에 언제나 사회(司會)를 보았습니다. 독특한 이 종교 학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밝히지 않은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34:3.4 (1485.6) On several occasions Jesus participated in these discussions, and before he left Urmia, Cymboyton arranged with Jesus to sojourn with them for two weeks on his return trip and give twenty-four lectures on “The Brotherhood of Men,” and to conduct twelve evening sessions of questions, discussions, and debates on his lectures in particular and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general.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이 논의에 참여했고, 우르미아를 떠나기 전에, 심보이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는 길에 그들과 2주간 동안 머물러 있도록 조정하여, “사람들의 형제신분The Brotherhood of Men”이라는 주제로 24번 강의하고, 특히 그의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토의하고 토론하는 저녁 시간을 12회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134:3.5 (1485.7) In accordance with this arrangement, Jesus stopped off on the return trip and delivered these lectures. This was the most systematic and formal of all the Master’s teaching on Urantia. Never before or after did he say so much on one subject as was contained in these lectures and discussions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reality these lectures were on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이러한 일정에 따라 예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우르미아에 들려 계획된 강의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계셨던 주님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형식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형제신분에 대하여, 이 강의들과 토의들에서처럼, 그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강의들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사람의 나라Kingdoms of Men”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34:3.6 (1486.1) More than thirty religions and religious cults were represented on the faculty of this temple of religious philosophy. These teachers were chosen, supported, and fully accredited by their respective religious groups. At this time there were about seventy-five teachers on the faculty, and they lived in cottages each accommodating about a dozen persons. Every new moon these groups were changed by the casting of lots. Intolerance, a contentious spirit, or any other disposition to interfere with the smooth running of the community would bring about the prompt and summary dismissal of the offending teacher. He would be unceremoniously dismissed, and his alternate in waiting would be immediately installed in his place. 30개가 넘는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들이, 종교 철학 전당의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수진들이 대표하는 각 종교 집단이 이 선생들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충분히 인가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약 75명의 선생들이 교수진으로 활동하였고, 그들은 각 집마다 약 12명이 함께 사는 사택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초승달이 뜰 때마다 이 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제비를 뽑아서 교체되었습니다. 편협함, 다투기를 좋아하는 정신, 또는 공동체를 순조롭게 운영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다른 경향을 나타나는 경우에는, 위반한 선생으로서 그 즉시 즉각적으로 해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예식을 거치지 않고 해직되었고, 교대 대기자가 곧 그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134:3.7 (1486.2) These teachers of the various religions made a great effort to show how similar their religions were in regard to the fundamental things of this life and the next. There was but one doctrine which had to be accepted in order to gain a seat on this faculty — every teacher must represent a religion which recognized God — some sort of supreme Deity. There were five independent teachers on the faculty who did not represent any organized religion, and it was as such an independent teacher that Jesus appeared before them. 다양한 종교들을 대표하는 이 선생들은 이생과 다음 생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종교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보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교수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원칙만이 적용되었습니다. 각 선생은 하나님 – 어떤 종류의 최고의 신(神)supreme Deity – 을 인정하는 종교를 대표해야만 했습니다. 교수진 가운데에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 독립된 5명의 선생들이 있었는데, 예수는 그러한 독립된 선생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34:3.8 (1486.3) [When we, the midwayers, first prepared the summary of Jesus’ teachings at Urmia, there arose a disagreement between the seraphim of the churches and the seraphim of progress as to the wisdom of including these teachings in the Urantia Revelation. Condit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prevailing in both religion and human governments, are so different from those prevailing in Jesus’ day that it was indeed difficult to adapt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to the problems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as these world functions are existent in the twentieth century. We were never able to formulate a statement of the Master’s teachings which was acceptable to both groups of these seraphim of planetary government. Finall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appointed a commission of three of our number to prepare our view of the Master’s Urmia teachings as adapted to twentieth-century religious and political conditions on Urantia. Accordingly, we three secondary midwayers completed such an adaptation of Jesus’ teachings, restating his pronouncements as we would apply them to present-day world conditions, and we now present these statements as they stand after having been edited b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우리 중도자들이 우르미아에서 예수님 교훈의 요약을 처음 준비했을 때, 교회의 세라핌천사들과 진보의 세라핌천사들 사이에, 유란시아 계시에 이런 가르침들을 포함하는 지혜에 관하여 불일치가 일어났습니다. 중교와 인간 정부(政府) 둘 다 만연한 20세기의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 만연한 그런 상황과 아주 달라서, 이러한 세계 기능들이 20세기에 현존하듯이, 우르미아에서 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들의 나라 문제들에 적응시키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행성 정부(政府)에 속한 이런 세라핌천사의 두 집단이 받아들일 주님의 교훈에 대한 진술을 결코 공식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우리 회원 중 3명의 위원회를 지명하여, 유란시아의 20세기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상황에 적합하게, 주님의 우르미아 교훈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준비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 2차 중도자 셋은 예수 교훈을 오늘날 세계 상황에 적용하듯이 그의 선언을 새로 진술하여, 그렇게 예수 교훈의 번안(飜案)을 완료했으며,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편집한 후 그대로, 우리는 이제 이 진술문을 제시합니다.]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170111 수요 예수73 (30세-AD24) 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134:4.1 (1486.4) The brotherhood of men is founded on the fatherhood of God. The family of God is derived from the love of God — God is love. God the Father divinely loves his children, all of them. 사람의 형제신분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기인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을 신적으로 사랑하십니다.

134:4.2 (1486.5) The kingdom of heaven, the divine government, is founded on the fact of divine sovereignty — God is spirit. Since God is spirit, this kingdom is spiritual. The kingdom of heaven is neither materi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is a spiritu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하늘나라, 신적인 정부(政府)는 신적인 주권 –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 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 나라는 영적(靈的)입니다. 하늘나라는 물질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지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입니다.

134:4.3 (1486.6) If different religions recognize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then will all such religions remain at peace. Only when one religion assumes that it is in some way superior to all others, and that it possesses exclusive authority over other religions, will such a religion presume to be intolerant of other religions or dare to persecute other religious believers. 만약 다른 종교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한다면, 그런 모든 종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의 종교가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월하고, 그것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인 권위를 갖는 경우에, 그런 종교는 다른 종교들을 용납하지 않거나 감히 다른 종교들의 신자들을 박해(迫害)할 것입니다.

134:4.4 (1487.1) Religious peace — brotherhood — can never exist unless all religions are willing to completely divest themselves of all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fully surrender all concept of spiritual sovereignty. God alone is spirit sovereign. 종교적 평화 – 형제신분 –은 모든 종교들이 교단의 모든 권한을 자발적으로 완전히 버리고, 영적 주권에 대한 모든 관념을 전부 포기(抛棄)하지 않는 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영적 주권자이십니다.

134:4.5 (1487.2) You cannot have equality among religions (religious liberty) without having religious wars unless all religions consent to the transfer of all religious sovereignty to some superhuman level, to God himself. 모든 종교들이 모든 종교적 주권(主權)을 초인간적 수준의 하나님 자신에게 넘겨드리기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전쟁 없이 종교들 사이에 평등(종교적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134:4.6 (1487.3)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en will create religious unity (not necessarily uniformity) because any and all religious groups composed of such religious believers will be free from all notions of ecclesiastical authority — religious sovereignty. 사람들의 심정 속에 있는 하늘나라는 종교적 연합(반드시 획일적일 필요는 없지만)을 만들어 낼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종교적 신자들로 구성된 모든 종교는 교단의 권한 – 종교적 주권 –에 대한 모든 개념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4:4.7 (1487.4) God is spirit, and God gives a fragment of his spirit self to dwell in the heart of man. Spiritually, all men are equal. The kingdom of heaven is free from castes, classes, social levels, and economic groups. You are all brethren.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의 영 그 자체의 한 단편(분신分身)을 사람의 심정 안에 내주하도록 보내 주십니다. 영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합니다. 하늘나라는 신분, 특권계급, 사회적 수준이나 경제적 단체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134:4.8 (1487.5) But the moment you lose sight of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some one religion will begin to assert its superiority over other religions; and then, instead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there will start dissensions, recriminations, even religious wars, at least wars among religionists.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 주권을 잃어버리는 순간,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대신, 종교인들 사이에서 불화와 비난이 시작될 것이고 심지어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134:4.9 (1487.6) Freewill beings who regard themselves as equals, unless they mutually acknowledge themselves as subject to some supersovereignty, some authority over and above themselves, sooner or later are tempted to try out their ability to gain power and authority over other persons and groups. The concept of equality never brings peace except in the mutual recognition of some overcontrolling influence of supersovereignty. 스스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은, 그들 위에 있는 높은 권한, 즉 어떤 초(超)주권의 지배를 받는다고 서로가 인정하지 않는 한, 조만간에 다른 개인들과 단체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과 권한을 갖기 위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떤 초(超)주권의 전권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평등(平等)의 개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134:4.10 (1487.7) The Urmia religionists lived together in comparative peace and tranquillity because they had fully surrendered all their notions of religious sovereignty. Spiritually, they all believed in a sovereign God; socially, full and unchallengeable authority rested in their presiding head — Cymboyton. They well knew what would happen to any teacher who assumed to lord it over his fellow teachers. There can be no lasting religious peace on Urantia until all religious groups freely surrender all their notions of divine favor, chosen people, and religious sovereignty. Only when God the Father becomes supreme will men become religious brothers and live together in religious peace on earth. 우르미아 종교인들은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신념들을 온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스럽고 고요하게 함께 살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모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도전할 수 없는 충분한 권한은 그들을 주관하는 수장(首長), 심보이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료 선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막론하고, 그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적인 은총과 선택받은 민족 그리고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관념을 모든 종교적 집단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영구한 종교적 평화(平和)를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최극의 뜻이 될 때에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형제들이 되고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평화 속에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170118 수요 예수74 (30세-AD24) 정치적 주권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134:5.1 (1487.8) [While the Master’s teaching concerning the sovereignty of God is a truth — only complicated by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the religion about him among the world’s religions — his presentations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re vastly complicated by the political evolution of nation life during the last nineteen hundred years and more. In the times of Jesus there were only two great world powers — the Roman Empire in the West and the Han Empire in the East — and these were widely separated by the Parthian kingdom and other intervening lands of the Caspian and Turkestan regions. We have, therefore, in the following presentation departed more widely from the substance of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t the same time attempting to depict the import of such teachings as they are applicable to the peculiarly critical stage of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n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다만 세상 종교들 사이에서 그에 관한 종교가 나중에 출현되어 단지 복잡해졌을 뿐입니다. 반면에, 정치적 주권에 관한 주님의 발표는 지난 1,900여 년 동안에 국가 생활의 정치적 진화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복잡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단지 두 개의 세계적인 강국들 –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한(漢) 제국─이 있었을 뿐이며, 이 두 제국은 파르티아Parthian 왕국과 카스피Caspian와 투루키스탄Turkestan 지역의 다른 국가들 때문에 널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발표가 정치적 주권에 관해 우르미아Urmia에서 주(主)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동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 정치적 주권이 진화하는 특별한 결정적 단계에 주님의 가르침이 적용되도록 그 가르침의 의미를 서술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134:5.2 (1487.9) War on Urantia will never end so long as nations cling to the illusive notions of unlimited national sovereignty. There are only two levels of relative sovereignty on an inhabited world: the spiritual free will of the individual mortal and the collective sovereignty of mankind as a whole. Between the level of the individual human being and the level of the total of mankind, all groupings and associations are relative, transitory, and of value only in so far as they enhance the welfare, well-being, and progress of the individual and the planetary grand total — man and mankind. 국가가 무제한적인 국가 주권(主權)을 가지고 있다는 허상에 집착하는 한, 이 땅에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오직 두 가지 차원의 상대적 주권만이 있을 뿐인데 바로 인간 개개인의 영적 자유의지와 인류 전체의 집합적 주권입니다. 개별 인간 존재의 차원과 인류 전체의 차원 사이에서, 모든 단체와 연합들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오직 그들이 개별존재와 행성 전체 즉 사람과 인류의 복지와 안녕 그리고 진보를 향상(向上)시키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134:5.3 (1488.1) Religious teachers must always remember that the spiritual sovereignty of God overrides all intervening and intermediate spiritual loyalties. Someday civil rulers will learn that the Most Highs rule in the kingdoms of men. 종교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적 통치권이, 중재하고 중개하는 모든 영적 충성심에 우선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민 정부의 통치자들은 사람의 왕국들을 통치하는 지고자들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134:5.4 (1488.2) This rule of the Most Highs in the kingdoms of men is not for the especial benefit of any especially favored group of mortals. There is no such thing as a “chosen people.” The rule of the Most Highs, the overcontrollers of political evolution, is a rule designed to foster the greatest good to the greatest number of all men and for the greatest length of time. 사람들의 나라 안에 있는 지고자the Most Highs들의 이 통치는 특별히 혜택을 누리는 어떤 사람들 단체의 특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민족”과 같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고자들, 즉 정치적 진화를 위에서 총괄하는 분들의 통치는 최다수(最多數)에게, 최장(最長)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주도록 설계된 법칙입니다.

134:5.5 (1488.3) Sovereignty is power and it grows by organization. This growth of the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is good and proper, for it tends to encompass ever-widening segments of the total of mankind. But this same growth of political organizations creates a problem at every intervening stage between the initial and natural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 the family — and the final consummation of political growth —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by all mankind, and for all mankind. 주권(主權)은 권력이며 그것은 조직에 의하여 성장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권력 조직의 성장은 유익하고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 전체의 가장 넓은 부분들을 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치조직의 성장은, 초기의 자연스러운 정치권력 – 가족(家族) – 의 조직과 최종적인 정치적 성장의 성취 – 모든 인류의, 모든 인류에 의한, 모든 인류를 위한 – 사이에 있는 모든 중간 단계마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134:5.6 (1488.4) Starting out with parental power in the family group, political sovereignty evolves by organization as families overlap into consanguineous clans which become united, for various reasons, into tribal units — superconsanguineous political groupings. And then, by trade, commerce, and conquest, tribes become unified as a nation, while nations themselves sometimes become unified by empire. 가족 집단 속에 있는 부모의 권력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 주권은 조직에 의해 진화합니다. 가족들이 혈연관계의 씨족으로 이어지고, 씨족들은 여러 이유로 부족(部族) 단위 -혈연관계를 초월한 정치적 집단들 –로 연합됩니다. 그런 다음, 무역과 상업 그리고 정복을 통해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고, 국가들 자체는 때때로 제국으로 연합됩니다.

134:5.7 (1488.5) As sovereignty passes from smaller groups to larger groups, wars are lessened. That is, minor wars between smaller nations are lessened, but the potential for greater wars is increased as the nations wielding sovereignty become larger and larger. Presently, when all the world has been explored and occupied, when nations are few, strong, and powerful, when these great and supposedly sovereign nations come to touch borders, when only oceans separate them, then will the stage be set for major wars, world-wide conflicts. So-called sovereign nations cannot rub elbows without generating conflicts and eventuating wars. 소규모의 집단에서 대규모의 집단으로 주권이 넘어감에 따라 전쟁은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국가들 간의 사소한 전쟁들은 줄어드는 반면에,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들은 커갈수록 더 큰 전쟁이 일어날 잠재성이 증가합니다. 당장에 온 세상이 탐험되어 점령되고, 나라들의 수가 얼마 안 되지만 강하고 강력하며, 이러한 엄청난 주권을 지닌 나라들의 국경이 서로 이웃하게 되고, 대양(大洋)으로만 겨우 나라들이 분리되어 있다면, 대규모의 전쟁, 즉 세계적인 충돌을 위한 무대가 준비될 것입니다. 소위 주권을 가진 국가들은, 갈등이 일어나 결국 전쟁하지 않고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습니다.

134:5.8 (1488.6) The difficulty in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from the family to all mankind, lies in the inertia-resistance exhibited on all intervening levels. Families have, on occasion, defied their clan, while clans and tribes have often been subversive of the sovereignty of the territorial state. Each new and forward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s (and has always been) embarrassed and hampered by the “scaffolding stages” of the previous developments in political organization. And this is true because human loyalties, once mobilized, are hard to change. The same loyalty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ribe, makes difficult the evolution of the supertribe — the territorial state. And the same loyalty (patriotism)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erritorial state, vastly complicates the evolutionary development of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가족으로부터 전체 인류로 확대되는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서 겪는 어려움은, 중간에 개입하는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관성(慣性)과 저항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족들은 경우에 따라 자기들의 씨족에게 도전해 왔으며, 반면에 씨족들과 부족들은 지역 국가의 주권을 종종 전복해왔습니다. 정치적 주권의 진화가 각각 새롭게 나아가는 경우 항상 언제나 그래왔지만, 정치적 조직에서, 이전에 개발된 “발판 단계”로 인해 난처해지고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 이유는, 일단 동원되면, 인간의 충성심은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족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충성심은 부족을 초월한 – 지역 국가 – 진화를 어렵게 합니다. 그리고 지역적 국가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동일한 충성심(애국심)이 모든 인류 정부의 진화적 발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듭니다.

134:5.9 (1488.7) Political sovereignty is created out of the surrender of self-determinism, first by the individual within the family and then by the families and clans in relation to the tribe and larger groupings. This progressive transfer of self-determination from the smaller to ever larger political organizations has generally proceeded unabated in the Eas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Ming and the Mogul dynasties. In the West it obtained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right on down to the end of the World War, when an unfortunate retrograde movement temporarily reversed this normal trend by re-establishing the submerged political sovereignty of numerous small groups in Europe. 정치적 주권은, 처음에는 가족 안에서 개인이, 다음에는 부족 및 더 큰 집합과 관계된 가족과 씨족들이, 자결(자아결정)주의를 버림으로 만들어집니다. 작은 데서부터 항상 더 큰 정치 조직으로 자결(自決)을 이렇게 진취적으로 양도(讓渡)하는 것은 명(明) 나라와 몽고 왕조가 세워진 뒤로, 동양에서는 대체로 줄어들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서양에서 그것은, 1천 년이 넘도록, 바로 세계 대전(大戰)이 끝날 때까지 진행되었고, 이 때 유럽에서 수많은 작은 집단들이, 사라졌던 정치적 주권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불행한 역행(逆行) 운동이 이 정상(正常)적인 경향을 일시에 바꿔 놓았습니다.

134:5.10 (1489.1) Urantia will not enjoy lasting peace until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intelligently and fully surrender their sovereign powers into the hands of the brotherhood of men — mankind government. Internationalism — Leagues of Nations — can never bring permanent peace to mankind. World-wide confederations of nations will effectively prevent minor wars and acceptably control the smaller nations, but they will not prevent world wars nor control the three, four, or five most powerful governments. In the face of real conflicts, one of these world powers will withdraw from the League and declare war. You cannot prevent nations going to war as long as they remain infected with the delusional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Internationalism is a step in the right direction. An international police force will prevent many minor wars, but it will not be effective in preventing major wars, conflicts between the great military governments of earth. 이른바 주권 국가들이 그 주권의 권력을 사람의 형제 정신―인류 정부―의 손에 총명하게, 완전히 내어주기까지, 지구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국제주의―국제 연맹―은 결코 인류에게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나라들의 세계적 연방들이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막고 작은 나라들을 만족스럽게 통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방들은 세계 전쟁을 방지하거나, 초강대국 서넛이나 다섯을 통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갈등에 직면하게 되면, 이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가 연맹으로부터 탈퇴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국가가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妄想)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미리 예방할 수 없습니다. 국제주의는 올바른 방향에로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국제 경찰력은 많은 작은 전쟁을 방지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정부들 사이의 갈등인 큰 전쟁을 방지하는 데에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134:5.11 (1489.2) As the number of truly sovereign nations (great powers) decreases, so do both opportunity and need for mankind government increase. When there are only a few really sovereign (great) powers, either they must embark on the life and death struggle for national (imperial) supremacy, or else, by voluntary surrender of certain prerogatives of sovereignty, they must create the essential nucleus of supernational power which will serve as the beginning of the real sovereignty of all mankind. 참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강대국)의 수가 줄어드는 데 따라서, 인류 정부의 기회와 필요가 늘어납니다. 정말로 주권을 가진 (큰) 강국들이 겨우 몇 나라만 있을 때는, 민족(제국) 우위성을 얻으려고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주권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여, 인류의 참된 주권의 시작으로서 사용될 초국가 권력의 필수 핵심(核心)을 만들어야 합니다.

134:5.12 (1489.3) Peace will not come to Urantia until every so-called sovereign nation surrenders its power to make war into the hands of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all mankind. Political sovereignty is innate with the peoples of the world. When all the peoples of Urantia create a world government, they have the right and the power to make such a government SOVEREIGN; and when such a representative or democratic world power controls the world’s land, air, and naval forces,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prevail — but not until then. 소위 주권 국가가 모두 전쟁을 수행할 권력을 인류의 대표 정부에게 양보할 때까지, 평화는 지구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주권은 세계의 여러 민족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지구의 모든 민족이 하나의 세계 정부를 창립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정부가 주권을 갖도록 할 권한과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 또는 민주적 세계 권력이 지구에서 세계의 육군•해군•공군을 통제할 때, 땅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가 지배할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때까지는 불가능합니다.

134:5.13 (1489.4) To use an important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illustration: The forty-eight states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have long enjoyed peace. They have no more wars among themselves. They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to the federal government, and through the arbitrament of war, they have abandoned all claims to the delusions of self-determination. While each state regulates its internal affairs, it is not concerned with foreign relations, tariffs, immigration, military affairs, or interstate commerce. Neither do the individual states concern themselves with matters of citizenship. The forty-eight states suffer the ravages of war only when the federal government’s sovereignty is in some way jeopardized. 19세기 및 20세기의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아메리카 연방의 48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권을 연방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전쟁의 중재를 통해서, 자체적 결정권이라는 망상에 대한 모든 주장을 버렸습니다. 각 주(州)정부가 그 내부(內部) 사무를 규제하지만, 외교 관계, 관세, 이민, 군사(軍事) 또는 주정부 간의 통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개별 주(州)는 시민권의 문제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48주는 오직 연방 정부의 주권이 어떤 면에서 위협을 받을 때에만 전쟁의 참화(慘禍)를 겪게 됩니다.

134:5.14 (1489.5) These forty-eight states, having abandoned the twin sophistries of sovereignty and self-determination, enjoy interstate peace and tranquillity. So will the nations of Urantia begin to enjoy peace when they freely surrender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into the hands of a global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the brotherhood of men. In this world state the small nations will be as powerful as the great, even as the small state of Rhode Island has its two senators in the American Congress just the same as the populous state of New York or the large state of Texas. 이 48주는 주권과 자체 결정권이라는 두 가지 궤변을 버렸고, 주 사이에서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국가들도 각자의 주권을 세계 정부 – 사람의 형제 정신의 주권 – 에 자유롭게 양보할 때 평화를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구가 많은 뉴욕 주나 큰 텍사스 주와 똑같이, 작은 로드 아이랜드 주가 미국 국회에 상원(上院) 의원 두 명을 가진 것처럼, 이 세계 국가에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만큼 강력해질 것입니다.

134:5.15 (1490.1) The limited (state) sovereignty of these forty-eight states was created by men and for men. The superstate (national) sovereignty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was created by the original thirteen of these state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men. Sometime the supernational sovereignty of the planetary government of mankind will be similarly created by nation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all men. 이 48주(州)의 제한된 주권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주를 관할하는 아메리카 연방이 가진 국가적 주권은 이 여러 주 가운데 최초의 13개 주가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주민(州民)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인류의 행성 정부의 초국가적 주권을 여러 나라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비슷한 형태로 만들 것입니다.

134:5.16 (1490.2) Citizens are not born for the benefit of governments; governments are organizations created and devised for the benefit of men. There can be no end to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short of the appearance of the government of the sovereignty of all men. All other sovereignties are relative in value, intermediate in meaning, and subordinate in status. 시민들은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고안된 조직입니다. 모든 사람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가 나타나지 못하면,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다른 주권의 가치는 상대적이며, 그 의미는 중간적이고, 그 지위는 종속적입니다.

134:5.17 (1490.3) With scientific progress, wars are going to become more and more devastating until they become almost racially suicidal. How many world wars must be fought and how many leagues of nations must fail before men will be willing to establish the government of mankind and begin to enjoy the blessings of permanent peace and thrive on the tranquillity of good will — world-wide good will — among men? 과학의 진보와 함께, 거의 인종족 자살(自殺)행위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갈수록 더 끔찍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정부를 기꺼이 세우고, 영구한 평화의 복을 누리기 시작하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세계적 선의―에서 생기는 평안을 토대로 번영하기까지, 몇 차례나 세계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얼마나 많은 국가 연맹이 실패해야만 할 것인가?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그리고 주권

170125 수요 예수75 (30세-AD24) 법, 자유, 주권 눅21:9-10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34:6.1 (1490.4) If one man craves freedom — liberty — he must remember that all other men long for the same freedom. Groups of such liberty-loving mortals cannot live together in peace without becoming subservient to such laws, rules, and regulations as will grant each person the same degree of freedom while at the same time safeguarding an equal degree of freedom for all of his fellow mortals. If one man is to be absolutely free, then another must become an absolute slave. And the relative nature of freedom is true socially,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Freedom is the gift of civilization made possible by the enforcement of LAW. 한 사람이 자유(해방)를 열망한다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역시 자기와 똑같은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해방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은, 각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그의 동료 모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양의 자유를 보장해줄, 법과 규칙 그리고 규정들을 지키지 않고서는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절대적인 노예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상대적인 속성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참됩니다. 자유는 법 집행으로 누릴 수 있는 문명의 선물입니다.

134:6.2 (1490.5) Religion makes it spiritually possible to realize the brotherhood of men, but it will require mankind government to regulate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associated with such a goal of human happiness and efficiency. 종교는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행복이나 효율성에 관계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규정하는 인류 전체의 정부(政府)가 필요할 것입니다.

134:6.3 (1490.6) There shall be wars and rumors of wars — nation will rise against nation — just as long as the world’s political sovereignty is divided up and unjustly held by a group of nation-states. England, Scotland, and Wales were always fighting each other until they gave up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reposing them in the United Kingdom. 세상의 정치적 주권이 분리되어 있으며, 국가-주정부들 집단이 불공정하게 차지하는 한, 전쟁이 있고,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 – 나라와 나라가 대항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그들이 각자의 주권을 영연방(英聯邦)에 위임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134:6.4 (1490.7) Another world war will teach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to form some sort of federation, thus creating the machinery for preventing small wars, wars between the lesser nations. But global wars will go on until the government of mankind is created. Global sovereignty will prevent global wars — nothing else can.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통해, 소위 말하는 주권 국가들은 어떤 종류의 연합정부를 형성해야 하는 지 배우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작은 전쟁, 약소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 기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전쟁은 인류 전체의 정부가 생길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지구 전체의 통제권이 세계적 전쟁들을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134:6.5 (1490.8) The forty-eight American free states live together in peace. There are among the citizens of these forty-eight states all of the various nationalities and races that live in the ever-warring nations of Europe. These Americans represent almost all the religions and religious sects and cults of the whole wide world, and yet here in North America they live together in peace. And all this is made possible because these forty-eight states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and have abandoned all notions of the supposed rights of self-determination. 미국의 독립된 48개의 주는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48개 주들의 시민들 중에는, 항상 전쟁에 시달리는 유럽의 국가들에 살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국적과 인종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 미국(美國)인들은 전 세계 모든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宗派)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북미(北美) 지역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은 이 48개 주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포기하고 자체적 결정 권리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134:6.6 (1490.9) It is not a question of armaments or disarmament. Neither does the question of conscription or voluntary military service enter into these problems of maintaining world-wide peace. If you take every form of modern mechanical armaments and all types of explosives away from strong nations, they will fight with fists, stones, and clubs as long as they cling to their delusions of the divine right of national sovereignty. 그것은 무장(武裝)과 비무장(非武裝)의 문제가 아닙니다. 징병제도 혹은 자발적 군대 복무를 선택하는 문제도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이러한 문제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강대국들로부터 현대의 기계화된 무기(武器)들과 모든 유형의 폭탄들을 다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국가적 주권을 신(神)이 준 권리라는 망상에 붙들려 있는 한, 그들은 주먹과 돌과 방망이를 가지고라도 싸울 것입니다.

134:6.7 (1491.1) War is not man’s great and terrible disease; war is a symptom, a result. The real disease is the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전쟁은 사람이 지닌 중대하고 끔직한 병이 아닙니다. 전쟁은 증상이며 결과입니다. 진짜 병은 국가적 주권이라는 바이러스입니다.

134:6.8 (1491.2) Urantia nations have not possessed real sovereignty; they never have had a sovereignty which could protect them from the ravages and devastations of world wars. In the creation of the global government of mankind, the nations are not giving up sovereignty so much as they are actually creating a real, bona fide, and lasting world sovereignty which will henceforth be fully able to protect them from all war. Local affairs will be handled by local governments; national affairs, by national governments; international affairs will be administered by global government. 이 땅의 국가들은 진정한 주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적 전쟁들의 참상과 황폐함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주권(主權)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범세계적인 인류 전체 정부를 구성하면서, 국가들은 주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진실하며 지속적으로, 이후로는 모든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을 충분히 보호해 주는 줄 수 있는 세계적 주권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 문제들은 지역 정부가, 국가적 문제들은 국가 정부가 처리하고, 국제적 문제들은 범세계 정부가 관리할 것입니다.

134:6.9 (1491.3) World peace cannot be maintained by treaties, diplomacy, foreign policies, alliances, balances of power, or any other type of makeshift juggling with the sovereignties of nationalism. World law must come into being and must be enforced by world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all mankind. 세계평화는, 조약(條約), 외교, 대외 정책, 연맹, 힘의 균형, 혹은 민족주의적 주권으로 조작하는 어떤 다른 유형의 미봉책으로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이 만들어져, 그것은 세계정부─모든 인류의 주권─에 의해 집행되어야 합니다.

134:6.10 (1491.4) The individual will enjoy far more liberty under world government. Today, the citizens of the great powers are taxed, regulated, and controlled almost oppressively, and much of this present interference with individual liberties will vanish when the national governments are willing to trustee their sovereignty as regards international affairs into the hands of global government. 세계 정부 아래에서 개인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날 강대국의 시민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세금(稅金)을 징수 당하고, 제약 받고, 통제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재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대부분의 간섭은, 국가정부가 기꺼이 국제적 문제들에 관하여 그들의 주권을 범세계적 정부에게 맡길 때 사라질 것입니다.

134:6.11 (1491.5) Under global government the national groups will be afforded a real opportunity to realize and enjoy the personal liberties of genuine democracy. The fallacy of self-determination will be ended. With global regulation of money and trade will come the new era of world-wide peace. Soon may a global language evolve, and there will be at least some hope of sometime having a global religion — or religions with a global viewpoint. 범세계적 정부 아래에서 국가 집단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개인적 자유를 실현하고 누릴 진정한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자체적인-결정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돈과 무역에 대한 범세계적 차원의 규제에 의해서 세계적 평화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곧 범세계적 언어가 진화되고, 적어도 범세계적 종교 혹은 범세계적 관점을 가진 종교들을 언젠가 소유하게 된다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134:6.12 (1491.6) Collective security will never afford peace until the collectivity includes all mankind. 집단의 안전은 그 집합체가 온 인류를 포함할 때까지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134:6.13 (1491.7) The political sovereignty of representative mankind government will bring lasting peace on earth, and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will forever insure good will among all men. And there is no other way whereby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be realized. 인류를 대표하는 정부(政府)의 정치적 주권은 지구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사람의 영적 형제신분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를 언제까지나 보장할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실현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 ~ ~ ~

134:6.15 (1491.8) After the death of Cymboyton, his sons encountered great difficulties in maintaining a peaceful faculty. The repercussions of Jesus’ teachings would have been much greater if the later Christian teachers who joined the Urmia faculty had exhibited more wisdom and exercised more tolerance. 심보이톤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들은 평화스러운 교수진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우르미아 교수진에 들어간 후대의 기독교 선생들이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관대했더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반향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134:6.16 (1491.9) Cymboyton’s eldest son had appealed to Abner at Philadelphia for help, but Abner’s choice of teachers was most unfortunate in that they turned out to be unyielding and uncompromising. These teachers sought to make their religion dominant over the other beliefs. They never suspected that the oft-referred-to lectures of the caravan conductor had been delivered by Jesus himself. 심보이톤Cymboyton의 맏아들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있는 아브너Abner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브너가 선택한 선생들은 고집이 세고 완고한 자들로 드러나 가장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다른 믿음들을 지배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대상caravan의 지휘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강의(講義)가, 예수님 자신이 강연했었던 것이라고는 결코 추측도 하지 못했습니다.

134:6.17 (1491.10) As confusion increased in the faculty, the three brothers withdrew their financial support, and after five years the school closed. Later it was reopened as a Mithraic temple and eventually burned down in connection with one of their orgiastic celebrations. 교수진 사이에서 혼란이 커지자, 세 형제들은 그들의 재정 지원을 끊었고, 5년 뒤에 그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나중에 그 학교는 미트라 신전(神殿)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결국 주신(酒神) 축제들의 하나와 연관되어 불에 타버렸습니다.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170201 수요 예수76 (31세-AD25) 31세 되시던 해(서기 25년) 눅4:1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134:7.1 (1492.1) When Jesus returned from the journey to the Caspian Sea, he knew that his world travels were about finished. He made only one more trip outside of Palestine, and that was into Syria. After a brief visit to Capernaum,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ver a few days to visit. In the middle of April he left Nazareth for Tyre. From there he journeyed on north, tarrying for a few days at Sidon, but his destination was Antioch. 예수께서 카스피Caspian 해(海)로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세상 여행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팔레스타인Palestine 밖으로 여행한 것은 한 번밖에는 더 이상 없었는데, 그것은 시리아Syria로 간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을 잠시 방문한 후, 그는 나사렛Nazareth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4월 중순에 그는 티레Tyre를 향하여 나사렛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북쪽으로 여행하여 시돈Sidon에 며칠 동안 머물렀지만, 그의 목적지는 안디옥Antioch이었습니다.

134:7.2 (1492.2) This is the year of Jesus’ solitary wanderings through Palestine and Syria. Throughout this year of travel he was known by various names in different parts of the country: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boatbuilder of Capernaum, the scribe of Damascus, and the teacher of Alexandria. 이 해에 예수님은 홀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이 해의 여행을 통하여, 그는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나사렛Nazareth의 목수, 가버나움Capernaum의 배 건조자, 다마스쿠스Damascus의 서기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선생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134:7.3 (1492.3) At Antioch the Son of Man lived for over two months, working, observing, studying, visiting, ministering, and all the while learning how man lives, how he thinks, feels, and reacts to the environment of human existence. For three weeks of this period he worked as a tentmaker. He remained longer in Antioch than at any other place he visited on this trip. Ten years later, when the Apostle Paul was preaching in Antioch and heard his followers speak of the doctrines of the Damascus scribe, he little knew that his pupils had heard the voice, and listened to the teachings, of the Master himself. 안디옥Antioch에서 사람의 아들은 일하고, 관찰하고, 공부하고, 방문하고, 봉사하면서 두 달이 넘도록 살았고, 그 동안 계속,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어떻게 인간 존재의 환경에 반응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 기간 중 3주 동안, 그는 천막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해의 여행에서 방문했던 다른 어떤 곳보다, 안디옥에 더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10년 후,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하면서, 추종자들이 다마스쿠스 서기관Damascus scribe의 신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생도들이 바로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134:7.4 (1492.4) From Antioch Jesus journeyed south along the coast to Caesarea, where he tarried for a few weeks, continuing down the coast to Joppa. From Joppa he traveled inland to Jamnia, Ashdod, and Gaza. From Gaza he took the inland trail to Beersheba, where he remained for a week. 예수님은 안디옥에서 케자리아Caesarea를 향하여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하였고, 그곳에서 몇 주를 머문 후 계속해서 해변을 따라 요파Joppa로 내려갔습니다. 요파에서 그는 잠니아Jamnia, 아쉬돗Ashdod, 가자Gaza를 향하여 내륙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가자에서부터 그는 내륙 도로를 택하여 비엘세바Beersheba로 갔고 그곳에서 일 주일동안 머물렀습니다.

134:7.5 (1492.5) Jesus then started on his final tour, as a private individual, through the heart of Palestine, going from Beersheba in the south to Dan in the north. On this journey northward he stopped at Hebron, Bethlehem (where he saw his birthplace), Jerusalem (he did not visit Bethany), Beeroth, Lebonah, Sychar, Shechem, Samaria, Geba, En-Gannim, Endor, Madon; passing through Magdala and Capernaum, he journeyed on north; and passing east of the Waters of Merom, he went by Karahta to Dan, or Caesarea-Philippi. 그 후 예수님은 사적(私的)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셨는데,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심장부를 거쳐서, 남쪽에 비엘세바Beersheba로부터 북쪽으로 단Dan까지 갔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이 여행에서, 그는 헤브론Hebron•베들레헴Bethlehem (여기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보았습니다)•예루살렘Jerusalem(베다니Bethany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비어롯Beeroth•레보나Lebonah•시카Sychar•세켐Shechem•사마리아Samaria•게바Geba•엔가님En-Gannim•엔도르Endor•마돈Madon을 들렀습니다. 그는 막달라Magdala와 가버나움Capernaum을 지나서, 북쪽으로 줄곧 여행했습니다. 메롬Merom의 우물 동쪽을 지나서, 가라타Karahta의 길로 단Dan, 곧 케자리아 빌립비Caesarea-Philippi로 갔습니다.

134:7.6 (1492.6)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now led Jesus to forsake the dwelling places of men and betake himself up to Mount Hermon that he might finish his work of mastering his human mind and complete the task of effecting his full consecration to the remainder of his lifework on earth.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는 이제 사람들의 거처를 떠나 헤르몬Hermon 산으로 가도록 예수님을 인도하였고, 그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 마음의 숙달을 마쳤으며, 이 땅에서 남은 일생의 사명에 충만히 헌신하는 과제를 완수하셨습니다.

134:7.7 (1492.7) This was one of those unusual and extraordinary epochs in the Master’s earth life on Urantia. Another and very similar one was the experience he passed through when alone in the hills near Pella just subsequent to his baptism. This period of isolation on Mount Hermon marked the termination of his purely human career, that is, the technical termination of the mortal bestowal, while the later isolatio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more divine phase of the bestowal. And Jesus lived alone with God for six weeks on the slopes of Mount Hermon. 이 때는 유란시아(지구)에서의 주님의 지상 일생에 있어서 드문, 특별한 기간이었습니다. 매우 비슷한 또 하나의 기간은, 세례를 받고 난 바로 뒤에, 주님께서 펠라Pella 근처 작은 산에서 혼자 있을 때 거쳤던 체험이었습니다. 헤르몬Hermon 산에서 이러한 고립 기간은 그의 순수한 인간적 생애의 종료,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 절차가 종결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반면에 나중에 있었던 고립기간은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에 있어서 더욱 신적인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르몬 산기슭에서 6주 동안 홀로 하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170208 수요 예수77 31세 AD25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마4:3-11

134:8.1 (1492.8) After spending some time in the vicinity of Caesarea-Philippi, Jesus made ready his supplies, and securing a beast of burden and a lad named Tiglath, he proceeded along the Damascus road to a village sometime known as Beit Jenn in the foothills of Mount Hermon. Here, near the middle of August, A.D. 25, he established his headquarters, and leaving his supplies in the custody of Tiglath, he ascended the lonely slopes of the mountain. Tiglath accompanied Jesus this first day up the mountain to a designated point about 6,000 feet above sea level, where they built a stone container in which Tiglath was to deposit food twice a week. 예수님은, 케자리아 빌립보Caesarea-Philippi 근처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후에, 생필품(生必品)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짐을 싣는 짐승과, 티글라스Tiglath라는 아이를 데리고 다마스쿠스Damascus 길을 따라 헤르몬Hermon 산기슭에 있는 한때 베이트 젠Beit Jenn이라고 알려진 마을로 나아갔습니다. 서기 25년 8월 중순 경 그곳에서 그는 본부를 정하고 물자들을 티글라스에게 맡긴 후, 인적이 드문 산비탈을 올라갔습니다. 그 첫째 날에 티글라스는 약 해발 6,000피트(1800미터) 되는 지점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였고, 그들은 그곳에 돌로 저장고를 지었으며, 티글라스가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음식을 갖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134:8.2 (1493.1) The first day, after he had left Tiglath, Jesus had ascended the mountain only a short way when he paused to pray. Among other things he asked his Father to send back the guardian seraphim to “be with Tiglath.” He requested that he be permitted to go up to his last struggle with the realities of mortal existence alone. And his request was granted. He went into the great test with only his indwelling Adjuster to guide and sustain him. 첫 날, 티글라스를 보낸 후, 예수님은 산을 약간 더 올라가서 기도하기 위해 멈추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에게 “티글라스와 함께 있도록” 수호 세라핌천사를 돌려보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로서의 현실과 마지막 투쟁까지 홀로 감당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허락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를 인도하고 지지하기 위해 내주하는 조절자와 함께 이 엄청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134:8.3 (1493.2) Jesus ate frugally while on the mountain; he abstained from all food only a day or two at a time. The superhuman beings who confronted him on this mountain, and with whom he wrestled in spirit, and whom he defeated in power, were real; they were his archenemies in the system of Satania; they were not phantasms of the imagination evolved out of the intellectual vagaries of a weakened and starving mortal who could not distinguish reality from the visions of a disordered mind. 예수님은 산에 있을 동안에 음식을 절약해서 드셨으며, 한 번에 하루나 이틀씩만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대면하였던 초인간 존재들과 영적으로 씨름을 하셨으며, 권능으로 물리쳤던 그 존재들은 실재했습니다. 그들은 사타니아Satania 체계에 있는 그의 대적(大敵)들이었으며, 마음 착란을 일으켜서 환상(幻想)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허약하고 굶주린 사람의 변덕스러운 지성에서 연유된 망상적 환영(幻影)들이 아니었습니다.

134:8.4 (1493.3) Jesus spent the last three weeks of August and the first three weeks of September on Mount Hermon. During these weeks he finished the mortal task of achieving the circles of mind-understanding and personality-control. Throughout this period of communion with his heavenly Father the indwelling Adjuster also completed the assigned services. The mortal goal of this earth creature was there attained. Only the final phase of mind and Adjuster attunement remained to be consummated. 예수님은 8월의 마지막 3주간과 9월의 첫 3주간을 헤르몬Hermon 산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마음-이해와 고유성-조정의 순환계들을 성취하는 사람의 임무를 완료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를 갖는 이 기간 동안, 내주 하는 조절자도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지상의 창조체로서의 인간 목표는 그곳에서 달성되었습니다. 다만 마음과 조절자의 조율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134:8.5 (1493.4) After more than five weeks of unbroken communion with his Paradise Father, Jesus became absolutely assured of his nature and of the certainty of his triumph over the material levels of time-space personality manifestation. He fully believed in, and did not hesitate to assert, the ascendancy of his divine nature over his human nature. 5주가 넘도록 천국 아버지와 중단 없는 친교를 나눈 뒤에, 예수님은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고유성이 시간-공간에 나타나는 물질적 차원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승리의 확실성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본성이 인간 본성의 상위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충만하게 믿게 되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34:8.6 (1493.5) Near the end of the mountain sojourn Jesus asked his Father if he might be permitted to hold conference with his Satania enemies as the Son of Man, as Joshua ben Joseph. This request was granted. During the last week on Mount Hermon the great temptation, the universe trial, occurred. Satan (representing Lucifer) and the rebellious Planetary Prince, Caligastia, were present with Jesus and were made fully visible to him. And this “temptation,” this final trial of human loyalty in the face of the misrepresentations of rebel personalities, had not to do with food, temple pinnacles, or presumptuous acts. It had not to do with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with the sovereignty of a mighty and glorious universe. The symbolism of your records was intended for the backward ages of the world’s childlike thought. And subsequent generations should understand what a great struggle the Son of Man passed through that eventful day on Mount He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요셉의 아들 여호수아Joshua라는 사람의 아들로서 사타니아Satania에 있는 자신의 적들과 회의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헤르몬 산에서의 마지막 주간에, 엄청난 유혹, 우주적 시험(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사탄(루시퍼를 대변한)과 반역적인 행성왕자 칼리가스티아Caligastia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그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혹”, 반역적인 고유성들의 잘못된 대표 권한 앞에서 인간의 충성심에 대한 이 마지막 시험은 음식이나 성전의 꼭대기 또는 무엄한 행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왕국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위력 있고 영광스러운 우주의 주권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록으로 전해진 그 상징은, 유치하게 생각하는 진부한 시대의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세대들은 그 파란만장한 날에 헤르몬 산에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했던 투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134:8.7 (1493.6) To the many proposals and counterproposals of the emissaries of Lucifer, Jesus only made reply: “May the will of my Paradise Father prevail, and you, my rebellious son, may the Ancients of Days judge you divinely. I am your Creator-father; I can hardly judge you justly, and my mercy you have already spurned. I commit you to the adjudication of the Judges of a greater universe.” 루시퍼의 사자(使者)들이 제시한 많은 제안들과 반대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천국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반역을 일으키는 나의 아들인 너에게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신적 판결이 있기를 바라노라. 나는 너의 창조주-아버지이다. 나는 너를 도저히 공정하게 판가름할 수 없으며, 너는 이미 나의 자비를 거절하였노라. 나는 너를 더 높은 우주의 재판관들의 판결에 맡기노라.

134:8.8 (1494.1) To all the Lucifer-suggested compromises and makeshifts, to all such specious proposals about the incarnation bestowal, Jesus only made reply, “The will of my Father in Paradise be done.” And when the trying ordeal was finished, the detached guardian seraphim returned to Jesus’ side and ministered to him. 루시퍼가 제안한 모든 절충안들과 미봉책들에 대하여, 성육신하신 증여에 대한 그럴듯한 모든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직,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대답하실 뿐이었습니다. 시험적인 호된 시련이 끝나자, 떠나갔던 수호 성(聖)천사가 예수의 곁으로 돌아와서 그를 섬겼습니다.

134:8.9 (1494.2) On an afternoon in late summer, amid the trees and in the silence of nature, Michael of Nebadon won the unquestion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On that day he completed the task set for Creator Sons to live to the full the incarnated life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 universe announcement of this momentous achievement was not made until the day of his baptism, months afterward, but it all really took place that day on the mountain. And when Jesus came down from his sojourn on Mount Hermon, the Lucifer rebellion in Satania and the Caligastia secession on Urantia were virtually settled. Jesus had paid the last price required of him to attain the sovereignty of his universe, which in itself regulates the status of all rebels and determines that all such future upheavals (if they ever occur) may be dealt with summarily and effectively. Accordingly, it may be seen that the so-called “great temptation” of Jesus took place sometime before his baptism and not just after that event. 늦은 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무들로 둘러싸인 자연의 정적 속에서,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의 우주의 절대적 주권을 성취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세상에서 창조주 아들들이 인간의 육신과 같은 모습으로 성육신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임무를, 그는 바로 그 날에 완성하셨습니다. 이 감격적인 성취에 대한 우주의 발표는 그로부터 몇 달 후에 있었던 그의 세례의 날까지 미루어졌지만, 그 모든 것은 산에서 그날 실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헤르몬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타니아에서의 루시퍼의 반란과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칼리가스티아의 탈퇴는 실제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우주 주권을 갖기 위하여 그에게 요구되어진 마지막 값을 이미 지불하였으며, 그것은 그 자체적으로 모든 반역 현상들을 통제하고, 그러한 모든 미래의 격변들이 (그런 것들이 만약 발생한다면) 즉시 효과적으로 다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따라서 소위 예수님의 “큰 시험”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세례 직후가 아니라 세례 이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4:8.10 (1494.3) At the end of this sojourn on the mountain, as Jesus was making his descent, he met Tiglath coming up to the rendezvous with food. Turning him back, he said only: “The period of rest is over; I must return to my Father’s business.” He was a silent and much changed man as they journeyed back to Dan, where he took leave of the lad, giving him the donkey. He then proceeded south by the same way he had come, to Capernaum.산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예수께서 하산하실 때, 그는 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던 티글라스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되돌려 보내며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휴식기간이 끝났고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노라.” 그들이 단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많이 변화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년에게 당나귀를 주고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가 왔던 같은 길을 따라 남쪽 방향의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170215 수요 예수78 기다리는 시간(31세 AD25) 마3:1-2, 5-6

134:9.1 (1494.4) It was now near the end of the summer, about the time of the day of atonement and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had a family meeting in Capernaum over the Sabbath and the next day started for Jerusalem with John the son of Zebedee, going to the east of the lake and by Gerasa and on down the Jordan valley. While he visited some with his companion on the way, John noted a great change in Jesus. 이제는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었고, 속죄의 날과 초막(草幕)절 축제가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Capernaum에서 가족모임을 가진 후, 다음 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호수의 동쪽으로 가며 게라사Gerasa를 지나서 요단Jordan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께서 동행자와 함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요한은 예수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눈치로 알아차렸습니다.

134:9.2 (1494.5) Jesus and John stopped overnight at Bethany with Lazarus and his sisters, going early the next morning to Jerusalem. They spent almost three weeks in and around the city, at least John did. Many days John went into Jerusalem alone while Jesus walked about over the near-by hills and engaged in many seasons of spiritual communion with his Father in heaven. 예수님과 요한은 베다니Bethany에서 나사로Lazarus와 그의 자매들과 함께 그날 밤 묵었으며, 다음 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의 3주를 그 도성(都城)의 안과 근처에서 보냈는데, 적어도 요한은 그랬습니다. 요한은 여러 날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한편 예수님은 근처에 있는 언덕을 거닐거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여러 차례 가지셨습니다.

134:9.3 (1494.6) Both of them were present at the solemn services of the day of atonement. John was much impressed by the ceremonies of this day of all days in the Jewish religious ritual, but Jesus remained a thoughtful and silent spectator. To the Son of Man this performance was pitiful and pathetic. He viewed it all as mis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and attributes of his Father in heaven. He looked upon the doings of this day as a travesty upon the facts of divine justice and the truths of infinite mercy. He burned to give vent to the declaration of the real truth about his Father’s loving character and merciful conduct in the universe, but his faithful Monitor admonished him that his hour had not yet come. But that night, at Bethany, Jesus did drop numerous remarks which greatly disturbed John; and John never fully understood the real significance of what Jesus said in their hearing that evening. 두 사람 모두 속죄의 날의 엄숙한 경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요한은 모든 유대 종교 의식의 날들 중 이날의 의식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생각에 잠긴 채, 조용한 구경꾼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일들이 가엾고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을 잘못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날의 모든 행위들이 신적인 정의의 사실들과 무한한 자비의 진리들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를 낸 장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는 성품과 우주에서의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위성에 대한 진정한 진리를 선포하고 싶은 열정에 타올랐지만, 신실한 감시자가 그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베다니에서, 그가 제시하였던 많은 의견들로 인해 요한은 매우 혼란되었으며, 요한은 그날 밤 예수께서 그들이 들었던 것에 대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34:9.4 (1495.1) Jesus planned to remain throughout the week of the feast of tabernacles with John. This feast was the annual holiday of all Palestine; it was the Jewish vacation time. Although Jesus did not participate in the merriment of the occasion, it was evident that he derived pleasure and experienced satisfaction as he beheld the lighthearted and joyous abandon of the young and the old. 예수님은 초막절 축제 주간 내내 요한과 함께 남아 있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 축제는 모든 팔레스타인에서 해마다 있었던 공휴일이었으며, 유대인들의 휴가철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그 절기(節氣)의 흥겨운 잔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아무 걱정 없이 기쁘게 마음껏 노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으며 만족스러워 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134:9.5 (1495.2) In the midst of the week of celebration and ere the festivities were finished, Jesus took leave of John, saying that he desired to retire to the hills where he might the better commune with his Paradise Father. John would have gone with him, but Jesus insisted that he stay through the festivities, saying: “It is not required of you to bear the burden of the Son of Man; only the watchman must keep vigil while the city sleeps in peace.” Jesus did not return to Jerusalem. After almost a week alone in the hills near Bethany, he departed for Capernaum. On the way home he spent a day and a night alone on the slopes of Gilboa, near where King Saul had taken his life; and when he arrived at , he seemed more cheerful than when he had left John in Jerusalem. 경축하는 주간의 중간, 축제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 아버지와 좀 더 긴밀한 교제하기를 위하여 언덕으로 물러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요한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요한이 그와 함께 가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의 짐을 지는 것이 요구되지 않느니라. 도시가 평화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 파수꾼만이 밤새 지켜 있어야 하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베다니Bethany 근처에 있는 언덕에서 거의 일주일을 홀로 지낸 후, 그는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울 왕King Saul이 목숨을 버렸던 장소 가까이에 있는 길보아Gilboa산 기슭에서 하루 밤과 낮을 혼자 지냈으며, 그가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요한을 떠났을 때보다도 더 쾌활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34:9.6 (1495.3) The next morning Jesus went to the chest containing his personal effects, which had remained in Zebedee’s workshop, put on his apron, and presented himself for work, saying, “It behooves me to keep busy while I wait for my hour to come.” And he worked several months, until January of the following year, in the boatshop, by the side of his brother James. After this period of working with Jesus, no matter what doubts came up to becloud James’s understanding of the lifework of the Son of Man, he never again really and wholly gave up his faith in the mission of Jesus.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은 세베대의 작업소에 남겨 두었던 자신의 소지품이 들어있는 상자(箱子)로 가서 작업복을 꺼내 입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직접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바쁘게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는 이듬 해 1월까지 동생 야고보 곁,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몇 달 동안 일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한 이 기간이 끝난 후부터, 야고보는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의 아들의 일생의 과업에 대해 어떤 의심이 떠오르든지 상관없이, 결코 다시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신앙을 다시는 정말로 그리고 모두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34:9.7 (1495.4) During this final period of Jesus’ work at the boatshop, he spent most of his time on the interior finishing of some of the larger craft. He took great pains with all his handiwork and seemed to experience the satisfaction of human achievement when he had completed a commendable piece of work. Though he wasted little time upon trifles, he was a painstaking workman when it came to the essentials of any given undertaking.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작업을 하셨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좀 더 큰 몇몇 배의 실내를 마무리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훌륭한 배를 완성시켜 칭찬할만한 작품을 마쳤을 때 인간다운 성취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들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지만, 맡은 일의 핵심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공을 많이 들이는 일꾼이셨습니다.

134:9.8 (1495.5) As time passed, rumors came to Capernaum of one John who was preaching while baptizing penitents in the Jordan, and John preached: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repent and be baptized.” Jesus listened to these reports as John slowly worked his way up the Jordan valley from the ford of the river nearest to Jerusalem. But Jesus worked on, making boats, until John had journeyed up the river to a point near Pella in the month of January of the next year, A.D. 26, when he laid down his tools, declaring, “My hour has come,” and presently presented himself to John for baptism. 시간이 지나자, 요단 강에서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설교하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가버나움에 도착했는데, 요한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예수님은 요한이 활동을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운 강의 개울로부터 요단 계곡을 따라 거슬러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는 이러한 소식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서기 26년 1월, 요한이 펠라Pella 가까이에 있는 지점까지 강을 따라 올라올 때까지, 예수님은 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이 때 그는 연장을 내려놓고, “나의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였고, 당장 세례를 받으러 요한 앞에 나섰습니다.

134:9.9 (1495.6) But a great change had been coming over Jesus. Few of the people who had enjoyed his visits and ministrations as he had gone up and down in the land ever subsequently recognized in the public teacher the same person they had known and loved as a private individual in former years. And there was a reason for this failure of his early beneficiaries to recognize him in his later role of public and authoritative teacher. For long years this transformation of mind and spirit had been in progress, and it was finished during the eventful sojourn on Mount Harmon. 그러나 엄청난 변화가 이미 예수님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지역의 땅들을 오가며 방문하고 봉사하며 보살폈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아무도,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그 선생이 이전에, 그들이 사적인 한 개인으로 알고 지내며 사랑하였던 바로 그 동일한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덕을 입은 사람들이, 그가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선생 역할로 나타난 그의 모습을 이렇게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과 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은 그 파란만장한 헤르몬Ha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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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5 John the Baptist 세례(洗禮) 요한

Paper 135

John the Baptist 세례(洗禮) 요한

1. John Becomes a Nazarite 나실인이 된 요한
2. The Death of Zacharias 사가랴의 죽음
3. The Life of a Shepherd 목자의 생활
4. The Death of Elizabeth 엘리자벳의 죽음
5.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6. John Begins to Preach 요한이 설교를 시작하다
7. John Journeys North 요한이 북쪽으로 여행하다
8. Meeting of Jesus and John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9. Forty Days of Preaching 40일간의 설교
10. John Journeys South 요한이 남쪽으로 여행가다
11. John in Prison 감옥에 갇힌 요한
12. Death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죽음

170222 수요 예수79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서론 & 나실인이 된 요한) 마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135:0.1 (1496.1) JOHN the Baptist was born March 25, 7 B.C., in accordance with the promise that Gabriel made to Elizabeth in June of the previous year. For five months Elizabeth kept secret Gabriel’s visitation; and when she told her husband, Zacharias, he was greatly troubled and fully believed her narrative only after he had an unusual dream about six weeks before the birth of John. Excepting the visit of Gabriel to Elizabeth and the dream of Zacharias, there was nothing unusual or supernatural connected with the birth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은, 일 년 전 6월에 가브리엘Gabriel이 엘리자벳Elizabeth에게 나타나서 약속한 대로, 기원 전 7년 3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5개월 동안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의 방문을 비밀로 하였으며, 그녀가 남편 사가랴Zacharias에게 말하였을 때, 그는 매우 고심했었으나 요한이 태어나기 6주 전 이상한 꿈을 꾼 후에는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을 방문한 것과 사가랴의 꿈 이외에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상하거나 초자연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135:0.2 (1496.2) On the eighth day John was circumcised according to the Jewish custom. He grew up as an ordinary child, day by day and year by year, in the small village known in those days as the City of Judah, about four miles west of Jerusalem. 8일째 되는 날에 요한은 유대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4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그 당시에는 유다Judah의 도시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그는 날이 가고 해를 거듭하면서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135:0.3 (1496.3) The most eventful occurrence in John’s early childhood was the visit, in company with his parents, to Jesus and the Nazareth family. This visit occurred in the month of June, 1 B.C., when he was a little over six years of age. 요한의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사건은 그가 부모와 함께 예수와 나사렛Nazareth의 가족들을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이 방문은 그가 6살이 조금 넘었을 때인, 기원 전 1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135:0.4 (1496.4) After their return from Nazareth John’s parents began the systematic education of the lad. There was no synagogue school in this little village; however, as he was a priest, Zacharias was fairly well educated, and Elizabeth was far better educated than the average Judean woman; she was also of the priesthood, being a descendant of the “daughters of Aaron.” Since John was an only child, they spent a great deal of time on his mental and spiritual training. Zacharias had only short periods of service at the temple in Jerusalem so that he devoted much of his time to teaching his son. 나사렛에서 돌아온 후 요한의 부모는 이 아이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는 회당 학교가 없었지만,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고, 엘리자벳도 유대의 평균적인 여인들보다는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그녀 또한 “아론의 딸들daughters of Aaron”의 후손으로 제사장의 혈통이었습니다. 요한이 독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정신적, 영적 훈련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의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하여 예루살렘Jerusalem 성전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만 봉사하였습니다.

135:0.5 (1496.5) Zacharias and Elizabeth had a small farm on which they raised sheep. They hardly made a living on this land, but Zacharias received a regular allowance from the temple funds dedicated to the priesthood. 사가랴와 엘리자벳은 양을 기르는 소규모의 목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만으로는 거의 생활이 안 되었으나, 사가랴는 제사장들에게 쓰이도록 되어있는 성전의 기금으로부터 정기적인 수당을 받았습니다.

1. John Becomes a Nazarite 나실인Nazarite이 된 요한

135:1.1 (1496.6) John had no school from which to graduate at the age of fourteen, but his parents had selected this as the appropriate year for him to take the formal Nazarite vow. Accordingly, Zacharias and Elizabeth took their son to Engedi, down by the Dead Sea. This was the southern headquarters of the Nazarite brotherhood, and there the lad was duly and solemnly inducted into this order for life. After these ceremonies and the making of the vows to abstain from all intoxicating drinks, to let the hair grow, and to refrain from touching the dead, the family proceeded to Jerusalem, where, before the temple, John completed the making of the offerings which were required of those taking Nazarite vows. 요한은 14세에 졸업하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 부모는 그의 14살이 그가 정식 나실인Nazarite으로서 맹세하기에 적당한 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엘리자벳은 그들의 아들을 사해(死海)the Dead Sea 아래에 있는 엔게디Engedi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나실인 형제회의 남부 본부였으며, 그곳에서 요한은 정식으로 경건하게, 종신토록 있을 이 계층에 가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치르면서,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죽은 자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 가족들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요한은 성전 앞에서 나실인 서약을 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헌물 바치는 일을 마쳤습니다.

135:1.2 (1496.7) John took the same life vows that had been administered to his illustrious predecessors, Samson and the prophet Samuel. A life Nazarite was looked upon as a sanctified and holy personality. The Jews regarded a Nazarite with almost the respect and veneration accorded the high priest, and this was not strange since Nazarites of lifelong consecration were the only persons, except high priests, who were ever permitted to enter the holy of holies in the temple. 요한은 유명한 전임자들인 삼손Samson과 선지자 사무엘Samuel에게 행해졌던 것과 똑같은 종신 봉헌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종신(終身) 나실인은 신성하고 거룩한 인격(고유성)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실인을 거의 대제사장과 똑같은 존경과 경의를 가졌으며, 종신토록 봉헌된 나실인들이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전의 지성소(至聖所)holy of holies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35:1.3 (1497.1) John returned home from Jerusalem to tend his father’s sheep and grew up to be a strong man with a noble character. 요한은 아버지의 양들을 보살피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고결한 인격을 지닌 강한 남자로 성장했습니다.

135:1.4 (1497.2) When sixteen years old, John, as a result of reading about Elijah, became greatly impressed with the prophet of Mount Carmel and decided to adopt his style of dress. From that day on John always wore a hairy garment with a leather girdle. At sixteen he was more than six feet tall and almost full grown. With his flowing hair and peculiar mode of dress he was indeed a picturesque youth. And his parents expected great things of this their only son, a child of promise and a Nazarite for life. 16세가 되었을 때, 요한은 엘리야Elijah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갈멜Carmel산의 선지자에게 지대한 감명(感銘)을 받게 되어 그의 복장을 본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요한은 항상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털옷을 입었습니다.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1.8미터 이상으로 자랐고 거의 완전히 자랐습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특이한 옷 모습 때문에 그는, 정말로 눈길을 끄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약속의 아이이자 종신 나실인이었던 자신들의 외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2. The Death of Zacharias 사가랴의 죽음

170301 수요 예수80 사가랴의 죽음 & 목자의 생활 단2:31-33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135:2.1 (1497.3) After an illness of several months Zacharias died in July, A.D. 12, when John was just past eighteen years of age. This was a time of great embarrassment to John since the Nazarite vow forbade contact with the dead, even in one’s own family. Although John had endeavored to comply with the restrictions of his vow regarding contamination by the dead, he doubted that he had been wholly obedient to the requirements of the Nazarite order; therefore, after his father’s burial he went to Jerusalem, where, in the Nazarite corner of the women’s court, he offered the sacrifices required for his cleansing. 몇 달 동안 병을 앓은 후, 사가랴는 서기(西紀) 12년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요한은 막 18세가 되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 중에는 자신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에게 접촉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로 요한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비록 죽은 자 때문에 몸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하여 서약(誓約)했던 규율을 따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실인 계층에게 요청되는 사항에 전적으로 복종했었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여인들의 뜰에 있는 나실인의 구역에서 자신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요구되는 희생물을 바쳤습니다.

135:2.2 (1497.4) In September of this year Elizabeth and John made a journey to Nazareth to visit Mary and Jesus. John had just about made up his mind to launch out in his lifework, but he was admonished, not only by Jesus’ words but also by his example, to return home, take care of his mother, and await the “coming of the Father’s hour.” After bidding Jesus and Mary good-bye at the end of this enjoyable visit, John did not again see Jesus until the event of his baptism in the Jordan. 이 해 9월에 엘리자벳Elizabeth과 요한John은 마리아Mary와 예수Jesus를 방문하러 나사렛Nazareth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그의 일생의 임무에 착수하려고 거의 작정하다시피 하였지만, 예수께서 말 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 본보기에 의해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아버지의 때가 도래하기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 즐거운 방문을 마치고 예수와 마리아에게 작별한 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건이 있기까지, 요한은 예수님을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135:2.3 (1497.5) John and Elizabeth returned to their home and began to lay plans for the future. Since John refused to accept the priest’s allowance due him from the temple funds, by the end of two years they had all but lost their home; so they decided to go south with the sheep herd. Accordingly, the summer that John was twenty years of age witnessed their removal to Hebron. In the so-called “wilderness of Judea” John tended his sheep along a brook that was tributary to a larger stream which entered the Dead Sea at Engedi. The Engedi colony included not only Nazarites of lifelong and time-period consecration but numerous other ascetic herdsmen who congregated in this region with their herds and fraternized with the Nazarite brotherhood. They supported themselves by sheep raising and from gifts which wealthy Jews made to the order. 요한과 엘리자벳은 집으로 돌아와 미래를 위한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이 성전 기금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제사장의 수당(手當) 받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2년 쯤 지난 후에는 그들의 집까지도 거의 처분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떼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20세 되던 그 해 여름에 그들은 헤브론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소위 “유대 광야”라고 불리는 곳에서, 요한은 엔게디로부터 사해(死海)로 합류하는 좀 더 큰 시냇물의 지류인 개울가를 따라 양을 쳤습니다. 엔게디 촌(거류민단)에는 종신(終身) 나실인들과 일시적으로 봉헌된 나실인들 뿐만이 아니라 금욕하는 수많은 다른 목자(牧者)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축 떼와 함께 이 지역에 모여서 나실인 형제회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치는 일과, 부유한 유대인이 그 계층에게 기증한 선물들로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135:2.4 (1497.6) As time passed, John returned less often to Hebron, while he made more frequent visits to Engedi. He was so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ajority of the Nazarites that he found it very difficult fully to fraternize with the brotherhood. But he was very fond of Abner, the acknowledged leader and head of the Engedi colony.시간이 지나자, 요한이 헤브론으로 돌아가는 횟수가 뜸해졌고 반면에 엔게디로 갈수록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나실인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는 그 형제회와 충분히 형제우애를 나누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엔게디 거류민단의 유명한 지도자이며 우두머리인 아브너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3. The Life of a Shepherd 목자의 생활

135:3.1 (1497.7) Along the valley of this little brook John built no less than a dozen stone shelters and night corrals, consisting of piled-up stones, wherein he could watch over and safeguard his herds of sheep and goats. John’s life as a shepherd afforded him a great deal of time for thought. He talked much with Ezda, an orphan lad of Beth-zur, whom he had in a way adopted, and who cared for the herds when he made trips to Hebron to see his mother and to sell sheep, as well as when he went down to Engedi for Sabbath services. John and the lad lived very simply, subsisting on mutton, goat’s milk, wild honey, and the edible locusts of that region. This, their regular diet, was supplemented by provisions brought from Hebron and Engedi from time to time. 이 작은 여울의 계곡을 따라, 요한은 12개가 넘는, 돌로 만든 움막과 돌을 쌓아서 밤을 지내기 위한 가축우리들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양떼와 염소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목자로서의 요한의 일생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스-주르의 고아(孤兒) 소년인 에즈다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떤 면으로는 그 소년을 이미 양자(養子)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요한이 안식일 경배를 드리려고 엔게디로 내려갔을 때는 물론이고, 어머니를 방문하거나 양을 팔기 위해 헤브론으로 갔을 때에도,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요한과 그 소년은 양고기, 염소우유, 석청, 그 지방의 식용 메뚜기를 먹으면서 매우 간소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해진 식사는 때때로 헤브론과 엔게디에서 가져오는 식량으로 보충되었습니다.

135:3.2 (1498.1) Elizabeth kept John posted about Palestinian and world affairs, and his conviction grew deeper and deeper that the time was fast approaching when the old order was to end; that he was to become the herald of the approach of a new age, “the kingdom of heaven.” This rugged shepherd was very partial to the writings of the Prophet Daniel. He read a thousand times Daniel’s description of the great image, which Zacharias had told him represented the history of the great kingdoms of the world, beginning with Babylon, then Persia, Greece, and finally Rome. John perceived that already was Rome composed of such polyglot peoples and races that it could never become a strongly cemented and firmly consolidated empire. He believed that Rome was even then divided, as Syria, Egypt, Palestine, and other provinces; and then he further read “in the days of these kings shall the God of heaven set up a kingdom which shall never be destroyed. And this kingdom shall not be left to other people but shall break in pieces and consume all these kingdoms, and it shall stand forever.”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s,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never shall be destroyed.” “And the kingdom and dominion and the greatness of the kingdom under the whole heaven shall be given to the people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whose kingdom is an everlasting kingdom, and all dominions shall serve and obey him.” 엘리자벳은 팔레스타인과 세상의 일상사에 대한 소식을 요한에게 계속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옛 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때가 빠르게 다가오면서, 그가 새 시대, “하늘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선포자가 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이 억센 목자는 선지자 다니엘의 글들을 특히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사가랴가 그에게 바빌론Babylon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Persia, 그리스Greece, 그리고 마침내 로마Rome까지 세상의 위대한 왕국들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말해 주었던, 다니엘의 커다란 우상에 대한 묘사를 천 번이나 읽었습니다. 요한은 로마Rome가 이미 다국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강하게 뭉쳐진 굳건한 통합된 제국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로마Rome가 앞으로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과 다른 영토들로 더 분열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는데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And in the days of these kings shall the God of heaven set up a kingdom, which shall never be destroyed: and the kingdom shall not be left to other people, but it shall break in pieces and consume all these kingdoms, and it shall stand for ever. (단2:4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단7:14),”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And the kingdom and dominion, and the greatness of the kingdom under the whole heaven, shall be given to the people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whose kingdom is an everlasting kingdom, and all dominions shall serve and obey him.(단7:27).”

135:3.3 (1498.2) John was never able completely to rise above the confusion produced by what he had heard from his parents concerning Jesus and by these passages which he read in the Scriptures. In Daniel he read: “I saw in the night visions,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But these words of the prophet did not harmonize with what his parents had taught him. Neither did his talk with Jesus, at the time of his visit when he was eighteen years old, correspond with these statements of the Scriptures. Notwithstanding this confusion, throughout all of his perplexity his mother assured him that his distant cousin, Jesus of Nazareth, was the true Messiah, that he had come to sit on the throne of David, and that he (John) was to become his advance herald and chief support. 요한은 예수에 관하여 부모로부터 들은 것과 성서에서 자기가 읽은 구절들 때문에 생긴 혼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에서 그는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幻想)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I saw in the night visions,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단7:13-14).”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말들은 자기 부모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18세에 예수를 방문하였을 때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도 역시 성서의 말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혼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을 일으킬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먼 사촌인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이고, 그는 장차 다윗의 왕좌에 앉을 것이며, 그(요한)는 그의 도래를 미리 알리는 자가 될 것이며 그를 지지하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135:3.4 (1498.3) From all John heard of the vice and wickedness of Rome and the dissoluteness and moral barrenness of the empire, from what he knew of the evil doings of Herod Antipas and the governors of Judea, he was minded to believe that the end of the age was impending. It seemed to this rugged and noble child of nature that the world was ripe for the end of the age of man and the dawn of the new and divine age — the kingdom of heaven. The feeling grew in John’s heart that he was to be the last of the old prophets and the first of the new. And he fairly vibrated with the mounting impulse to go forth and proclaim to all men: “Repent! Get right with God! Get ready for the end; prepare yourselves for the appearance of the new and eternal order of earth affairs, the kingdom of heaven.” 요한은 로마의 악덕과 사악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제국의 방탕함과 도덕적 결핍에 관하여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와 그가 알고 있는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 총독의 사악함으로부터, 그는 그 시대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것을 믿고 싶어 했습니다. 이 억세고 고결한 본성을 지닌 아이에게, 세상은 이제 사람의 시대가 끝나고 새롭고 신성한 시대─하늘의 왕국─가 동트기 위해 무르익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구(舊)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임과 동시에 새 시대의 첫 번째 선지자가 되리라는 느낌이 요한의 심정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박차고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하고 싶은 넘치는 충동이 끓어올라 무척 마음이 설렜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과 화해하라! 마지막 날을 위해 준비하고, 세상 일상사들의 새롭고 영원한 체제, 하늘의 왕국 도래를 위하여 너희 자신을 준비하라.”

4. The Death of Elizabeth 엘리자벳의 죽음

170308 수요 예수81 엘리자벳의 죽음 말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5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6 And he shall turn the heart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e heart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135:4.1 (1499.1) On August 17, A.D. 22, when John was twenty-eight years of age, his mother suddenly passed away. Elizabeth’s friends, knowing of the Nazarite restrictions regarding contact with the dead, even in one’s own family, made all arrangements for the burial of Elizabeth before sending for John. When he received word of the death of his mother, he directed Ezda to drive his herds to Engedi and started for Hebron. AD 22년 8월 17일, 요한이 28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직계가족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없다는 나실인의 제약 조건들을 알고 있는 엘리자벳의 친구들은, 요한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전에 엘리자벳의 장례식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그가 어머니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에즈다에게 양떼들을 엔게디로 몰고 가도록 시켰고 자신은 헤브론으로 출발했습니다.

135:4.2 (1499.2) On returning to Engedi from his mother’s funeral, he presented his flocks to the brotherhood and for a season detached himself from the outside world while he fasted and prayed. John knew only of the old methods of approach to divinity; he knew only of the records of such as Elijah, Samuel, and Daniel. Elijah was his ideal of a prophet. Elijah was the first of the teachers of Israel to be regarded as a prophet, and John truly believed that he was to be the last of this long and illustrious line of the messengers of heaven.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엔게디로 돌아와서 그는 자기 양떼를 형제회에게 기증하고, 금식과 기도를 하면서 한 계절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었습니다. 요한은 신성(神性)에 접근하는 오래된 방식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사무엘, 다니엘의 기록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에게 선지자의 이상(理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로 여겼던 이스라엘의 선생들 중에서 첫째가는 사람이었으며, 요한은 자신이 하늘 왕국의 메신저(사자)로서의 이러한 장구하게 빛나는 계열의 마지막 선지자가 되리라고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135:4.3 (1499.3) For two and a half years John lived at Engedi, and he persuaded most of the brotherhood that “the end of the age was at hand”;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about to appear.” And all his early teaching was based upon the current Jewish idea and concept of the Messiah as the promised deliverer of the Jewish nation from the domination of their gentile rulers. 2년 반 동안, 요한은 엔게디에서 살았고, “그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것” 즉 “하늘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형제회 대부분의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초기의 모든 가르침들은, 당시의 유대 관념과, 그들의 이방 통치자의 손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구원하는 약속된 메시아의 개념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135:4.4 (1499.4) Throughout this period John read much in the sacred writings which he found at the Engedi home of the Nazarites. He was especially impressed by Isaiah and by Malachi, the last of the prophets up to that time. He read and reread the last five chapters of Isaiah, and he believed these prophecies. Then he would read in Malachi: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and he shall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ward the children and the hearts of the children toward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And it was only this promise of Malachi that Elijah would return that deterred John from going forth to preach about the coming kingdom and to exhort his fellow Jews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John was ripe for the proclamation of the message of the coming kingdom, but this expectation of the coming of Elijah held him back for more than two years. He knew he was not Elijah. What did Malachi mean? Was the prophecy literal or figurative? How could he know the truth? He finally dared to think that, since the first of the prophets was called Elijah, so the last should be known, eventually, by the same name. Nevertheless, he had doubts, doubts sufficient to prevent his ever calling himself Elijah. 이 기간 내내 요한은 나실인들의 본거지인 엔게디에서 자신이 발견한 성스러운 글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이사야와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다섯 장을 읽고 또 읽었으며, 그는 이 예언들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음의 구절을 말라기에서 읽었습니다. “보라,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요한은 엘리야가 돌아온다는 말라기의 약속 때문에 곧 도래할 왕국에 대해 설교하고,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앞으로 올 진노로부터 도망갈 것을 권고하러 나아가는 것을 철회하였습니다. 요한은 곧 도래할 왕국의 메시지를 바로 선포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앞으로 올 엘리야에 대한 기대가 그로 하여금 2년 이상이나 붙들어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라기가 의미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예언은 문자그대로의 의미였을까? 아니면 상징적인 것이었을까?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그는 마침내 선지자들 중에서 첫 번째가 엘리야로 불렸으므로 마지막 선지자도 결국에는 같은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엘리야라고 부르지 않을 만큼, 그러한 생각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품었습니다.

135:4.5 (1499.5) It was the influence of Elijah that caused John to adopt his methods of direct and blunt assault upon the sins and vices of his contemporaries. He sought to dress like Elijah, and he endeavored to talk like Elijah; in every outward aspect he was like the olden prophet. He was just such a stalwart and picturesque child of nature, just such a fearless and daring preacher of righteousness. John was not illiterate, he did well know the Jewish sacred writings, but he was hardly cultured. He was a clear thinker, a powerful speaker, and a fiery denunciator. He was hardly an example to his age, but he was an eloquent rebuke. 요한이 그 시대의 사람들의 죄와 타락에 대해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공격 방법을 선택한 것은 엘리야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옷을 입었고 엘리야처럼 말하려고 애를 썼는데, 겉으로 보이는 모든 면에서 그는 옛 선지자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건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이었고,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담대한 정의로운 설교자였습니다. 요한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으며 유대의 거룩한 기록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으로 세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명철한 사색가였고 힘 있는 웅변가였으며 불같은 탄핵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설득력 있게 꾸짖었습니다.

135:4.6 (1499.6) At last he thought out the method of proclaiming the new age, the kingdom of God; he settled that he was to become the herald of the Messiah; he swept aside all doubts and departed from Engedi one day in March of A.D. 25 to begin his short but brilliant career as a public preacher.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나라 즉 새 시대를 선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는 자신이 메시아의 사자(선구자)가 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모든 의심을 쓸어버리고, AD 25년 3월 어느 날, 짧기는 하였지만 대중 설교자로서 눈부신 생애를 시작하기 위하여 엔게디를 떠났습니다.

5.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170419 수요 예수82 마3:1-2 그 무렵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하고 외쳤다.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135:5.1 (1500.1) In order to understand John’s message, account should be taken of the status of the Jewish people at the time he appeared upon the stage of action.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ll Israel had been in a quandary; they were at a loss to explain their continuous subjugation to gentile overlords. Had not Moses taught that righteousness was always rewarded with prosperity and power? Were they not God’s chosen people? Why was the throne of David desolate and vacant? In the light of the Mosaic doctrines and the precepts of the prophets the Jews found it difficult to explain their long-continued national desolation. 요한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활동 무대에 나타났던 당시 유대 민족의 처지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거의 100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속 이방 군주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설명하기가 난처했습니다. 모세가 “공의righteousness는 반드시 번영과 권능으로 보상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아니었던가? 왜 다윗의 왕좌는 황폐한 상태로 비어 있었는가? 모세의 교리와 유대 선지자들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들은 오래 계속되고 있는 자신들의 민족적 처참함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움을 발견했습니다.

135:5.2 (1500.2) About one hundred years before the days of Jesus and John a new school of religious teachers arose in Palestine, the apocalyptists. These new teachers evolved a system of belief that accounted for the sufferings and humiliation of the Jews on the ground that they were paying the penalty for the nation’s sins. They fell back onto the well-known reasons assigned to explain the Babylonian and other captivities of former times. But, so taught the apocalyptists, Israel should take heart; the days of their affliction were almost over; the discipline of God’s chosen people was about finished; God’s patience with the gentile foreigners was about exhausted. The end of Roman rule was synonymous with the end of the age and, in a certain sense, with the end of the world. These new teachers leaned heavily on the predictions of Daniel, and they consistently taught that creation was about to pass into its final stage; the kingdoms of this world were about to become the kingdom of God. To the Jewish mind of that day this was the meaning of that phrase — the kingdom of heaven — which runs throughout the teachings of both John and Jesus. To the Jews of Palestine the phrase “kingdom of heaven” had but one meaning: an absolutely righteous state in which God (the Messiah) would rule the nations of earth in perfection of power just as he ruled in heaven —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예수와 요한의 시대보다 거의 1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학파의 종교 선생들, 종말론자(終末論者)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선생들은 유대인들이 민족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둔 신앙belief 체계를 개발하여, 유대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굴욕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바빌론과 기타 포로 생활을 설명하는데 사용된, 잘 알려진 이유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용기를 내야 한다. 고통의 날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 대한 단련은 거의 끝났으며,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도 거의 고갈되었다.” 로마 통치의 종료는 시대의 종료, 즉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새로 나타난 이 선생들은 다니엘의 예언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고, 창조는 그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의 왕국들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시종일관하게 가르쳤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이것이 요한과 예수님 두 분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는 관용구 – 하늘나라 –의 의미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하늘나라”라는 구절은 단지 한 가지의 의미(意味)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메시아)께서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것과 똑같이 완전한 권능으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국가─“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의미했습니다.

135:5.3 (1500.3) In the days of John all Jews were expectantly asking, “How soon will the kingdom come?” There was a general feeling that the end of the rule of the gentile nations was drawing near. There was present throughout all Jewry a lively hope and a keen expectation that the consummation of the desire of the ages would occur during the lifetime of that generation. 요한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모두 “그 나라가 언제 옵니까?”라고 기대하면서 물었습니다. 이방 나라의 통치는 곧 끝날 것이라는 느낌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온 유대 사회에는 오랜 세대 동안에 품어왔던 갈망이 그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성취되리라는 열렬한 소망과 강렬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135:5.4 (1500.4) While the Jews differed greatly in their estimates of the nature of the coming kingdom, they were alike in their belief that the event was impending, near at hand, even at the door. Many who read the Old Testament literally looked expectantly for a new king in Palestine, for a regenerated Jewish nation delivered from its enemies and presided over by the successor of King David, the Messiah who would quickly be acknowledged as the rightful and righteous ruler of all the world. Another, though smaller, group of devout Jews held a vastly different view of this kingdom of God. They taught that the coming kingdom was not of this world, that the world was approaching its certain end, and that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were to usher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that this kingdom was to be an everlasting dominion, that sin was to be ended, and that the citizens of the new kingdom were to become immortal in their enjoyment of this endless bliss. 유대인들은 도래할 왕국의 성격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추측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건은 절박하게 임박하였고 바로 문 앞에 가까이 왔다고 그들은 똑같이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적들로부터 해방되어 재건된 유대 국가를 위해 다윗왕의 후계자인 메시아로 새로운 왕이 팔레스타인에 나타나 다스릴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기대하였는데, 그 메시아는 온 세상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빨리 인정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믿음이 깊은 유대인의 다른 집단은,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래할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세상은 확실히 종말에 가까웠다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 나라 설립을 예고하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이 나라는 영속적인 주권이 될 것이고, 죄는 그치게 될 것이며, 새 나라의 시민들은 이러한 끝없는 축복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35:5.5 (1500.5) All were agreed that some drastic purging or purifying discipline would of necessity precede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kingdom on earth. The literalists taught that a world-wide war would ensue which would destroy all unbelievers, while the faithful would sweep on to universal and eternal victory. The spiritists taught that the kingdom would be ushered in by the great judgment of God which would relegate the unrighteous to their well-deserved judgment of punishment and final destruction, at the same time elevating the believing saints of the chosen people to high seats of honor and authority with the Son of Man, who would rule over the redeemed nations in God’s name. And this latter group even believed that many devout gentiles might be admitted to the fellowship of the new kingdom. 지상에서 새 나라가 설립되기 이전에, 어떤 철저한 정화(淨化) 혹은 정제(精製)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전쟁이 잇달아 일어나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멸망하는 반면에 신실히 믿는 자들은 우주적이며 영원한 승리로 압승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으로 그 나라가 임할 것과, 그 심판으로 불의한 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심판(審判)과 최종적 파멸로 추방되는 동시에, 선택된 백성들 중에서 믿는 성자(聖者)들은 사람의 아들과 함께 명예롭고 권위 있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며, 이 사람의 아들은 회복한 국가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집단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많이 새 나라의 친교에 들어오도록 허락될 수 있다고 믿기까지 하였습니다.

135:5.6 (1501.1) Some of the Jews held to the opinion that God might possibly establish this new kingdom by direct and divine intervention, but the vast majority believed that he would interpose some representative intermediary, the Messiah. And that was the only possible meaning the term Messiah could have had in the minds of the Jews of the generation of John and Jesus. Messiah could not possibly refer to one who merely taught God’s will or proclaimed the necessity for righteous living. To all such holy persons the Jews gave the title of prophet. The Messiah was to be more than a prophet; the Messiah was to bring in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kingdom, the kingdom of God. No one who failed to do this could be the Messiah in the traditional Jewish sense.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직접적인 신적 개입으로, 새로운 이 나라 설립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품었지만, 대다수는 중재(仲裁)하는 메시아가 대리인(代理人)으로 개입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과 예수님 세대 유대인들의 마음에서 메시아라는 용어가 지닌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거나 의로운 삶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자를 언급할 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거룩한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은 선지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메시아는 선지자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메시아는 새 왕국,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이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누구라도 전통적인 유대인의 의미에서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135:5.7 (1501.2) Who would this Messiah be? Again the Jewish teachers differed. The older ones clung to the doctrine of the son of David. The newer taught that, since the new kingdom was a heavenly kingdom, the new ruler might also be a divine personality, one who had long sat at God’s right hand in heaven. And strange as it may appear, those who thus conceived of the ruler of the new kingdom looked upon him not as a human Messiah, not as a mere man, but as “the Son of Man” — a Son of God — a heavenly Prince, long held in waiting thus to assume the rulership of the earth made new. Such was the religious background of the Jewish world when John went forth proclaim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누가 이러한 메시아일 것인가? 유대 선생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교리에 집착했습니다. 새 선생들은, 새 나라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새 통치자 역시 신적인 인물,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쪽에 오래 앉아 계셨던 분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새 나라의 통치자를 이렇게 상상한 자들은 그가 인간 메시아, 즉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인 새로워진 땅을 통치하려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하늘의 영주로 보았습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였을 때, 유대 나라의 종교적 배경은 이상과 같았습니다.

135:5.8 (1501.3) It becomes apparent, therefore, that John’s announcement of the coming kingdom had not less than half a dozen different meanings in the minds of those who listened to his impassioned preaching. But no matter what significance they attached to the phrases which John employed, each of these various groups of Jewish-kingdom expectants was intrigued by the proclamations of this sincere, enthusiastic, rough-and-ready preacher of righteousness and repentance, who so solemnly exhorted his hearers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그러므로 다가오는 나라를 요한이 선포할 때, 그의 정열적 설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의 다른 뜻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사용한 구절에 그들이 어떤 의미(意味)를 부여했든지 상관없이, 이 유대 왕국을 기다리는 여러 집단은 각자, 성실하고, 열심이 있고, 올바름과 뉘우침을 부르짖는 이 투박한 설교자의 외침에 매료되었으며, 그는 청중에게 “다가올 진노로부터 도피하라.”고 매우 엄숙하게 훈계하였습니다.

6. John Begins to Preach 요한이 설교를 시작하다

170426 수요 예수83 눅3:2-3 2 안나스와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바로 그 무렵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들려왔다. 3 요한은 요단강 부근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죄를 용서받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2 during the high priesthood of Annas and Caiaphas, the word of God came to John son of Zechariah in the desert. 3 He went into all the country around the Jordan,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135:6.1 (1501.4) Early in the month of March, A.D. 25, John journeyed around the western coast of the Dead Sea and up the river Jordan to opposite Jericho, the ancient ford over which Joshua and the children of Israel passed when they first entered the promised land; and crossing over to the other side of the river, he established himself near the entrance to the ford and began to preach to the people who passed by on their way back and forth across the river. This was the most frequented of all the Jordan crossings. 서기 25년 3월 초기에, 요한은 사해 서쪽 해안의 주변을 따라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행하였는데, 그 강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약속된 땅에 처음 들어갈 때 건너갔던 고대의 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 저편으로 건너서, 여울 입구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강을 건너 오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요단 강을 건너는 모든 길목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이었습니다.

135:6.2 (1501.5) It was apparent to all who heard John that he was more than a preacher. The great majority of those who listened to this strange man who had come up from the Judean wilderness went away believing that they had heard the voice of a prophet. No wonder the souls of these weary and expectant Jews were deeply stirred by such a phenomenon. Never in all Jewish history had the devout children of Abraham so longed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or more ardently anticipated “the restoration of the kingdom.” Never in all Jewish history could John’s message,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have made such a deep and universal appeal as at the very time he so mysteriously appeared on the bank of this southern crossing of the Jordan.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요한은 설교자 이상의 사람임이 분명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올라온 이 낯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대다수(大多數)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으며 떠나갔습니다. 지친 가운데 고대하던 이 유대인의 혼들이 그런 현상에 깊이 마음이 흔들린 것은 당연했습니다. 온 유대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경건한 자손들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위로”를 고대(苦待)하거나 그렇게 열렬히 “나라가 회복되기”를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유대 역사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요한의 메시지가 요단 강 남쪽 둑을 건너 그렇게 신비롭게 나타난 바로 그 때처럼, 그렇게 깊고 널리 호소한 적도 없었습니다.

135:6.3 (1502.1) He came from the herdsmen, like Amos. He was dressed like Elijah of old, and he thundered his admonitions and poured forth his warnings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It is not surprising that this strange preacher created a mighty stir throughout all Palestine as the travelers carried abroad the news of his preaching along the Jordan. 그는 아모스처럼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옛날의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우렁차게 외쳤으며, 경고(警告)를 쏟아냈습니다. 이 이상한 설교자가 요단강 주변에서 설교한다는 소식을 여행자들이 널리 퍼뜨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 굉장한 동요가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35:6.4 (1502.2) There was still another and a new feature about the work of this Nazarite preacher: He baptized every one of his believers in the Jordan “for the remission of sins.” Although baptism was not a new ceremony among the Jews, they had never seen it employed as John now made use of it. It had long been the practice thus to baptize the gentile proselytes into the fellowship of the outer court of the temple, but never had the Jews themselves been asked to submit to the baptism of repentance. Only fifteen months intervened between the time John began to preach and baptize and his arrest and imprisonment at the instigation of Herod Antipas, but in this short time he baptized considerably over one hundred thousand penitents. 이 나실인 설교자의 활동에는 아주 특이한 새로운 특징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를 믿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요단강에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세례가 유대인 사이에서 새로운 의식(儀式)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당시 요한이 시행하듯이 세례가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개종한 자들을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 성전 밖 뜰에서 세례를 주던 관습은 오래되었지만, 유대인 자신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요한이 설교와 세례를 시작한 때부터 헤롯 안티파스의 선동으로 체포되어 갇힐 때까지 겨우 15개월의 기간이었으나, 이 짧은 기간에 그는 10만 명이 훨씬 넘는 회개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35:6.5 (1502.3) John preached four months at Bethany ford before starting north up the Jordan. Tens of thousands of listeners, some curious but many earnest and serious, came to hear him from all parts of Judea, Perea, and Samaria. Even a few came from Galilee. 요한은 요단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베다니 개울가에서 4개월 동안 설교하였습니다. 수만 명의 청중들 중에는, 더러는 호기심 때문에 경청했지만, 많은 이들은 진정으로 진지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유대, 페레아, 사마리아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오기도 하였습니다.

135:6.6 (1502.4) In May of this year, while he still lingered at Bethany ford, the priests and Levites sent a delegation out to inquire of John whether he claimed to be the Messiah, and by whose authority he preached. John answered these questioners by saying: “Go tell your masters that you have hear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as spoken by the prophet, saying,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a highway for our God.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and every mountain and hill shall be brought low; the uneven ground shall become a plain, while the rough places shall become a smooth valley; and all flesh shall see the salvation of God.’” 이 해 5월에 그가 아직도 베다니 여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지 누구의 권위로 설교 하는지 물어 보기 위해 그에게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질문들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서 너희 주인들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이르라. 이는 선지자가 말씀한 바와 같으니, ‘주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부드러운 골짜기가 될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135:6.7 (1502.5) John was a heroic but tactless preacher. One day when he was preaching and baptizing on the west bank of the Jordan, a group of Pharisees and a number of Sadducees came forward and presented themselves for baptism. Before leading them down into the water, John, addressing them as a group said: “Who warned you to flee, as vipers before the fire, from the wrath to come? I will baptize you, but I warn you to bring forth fruit worthy of sincere repentance if you would receive the remission of your sins. Tell me not that Abraham is your father. I declare that God is able of these twelve stones here before you to raise up worthy children for Abraham. And even now is the ax laid to the very roots of the trees. Every tree that brings not forth good fruit is destined to be cut down and cast into the fire.” (The twelve stones to which he referred were the reputed memorial stones set up by Joshua to commemorate the crossing of the “twelve tribes” at this very point when they first entered the promised land.) 요한은 용맹스럽기는 하였지만, 재치가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요단강의 서쪽 강둑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있는 중에, 바리새인의 집단과 몇 명의 사두개인들이 앞으로 나와 세례를 받기 위해 그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을 물로 인도하기 전에, 요한은 그 집단 전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나는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인데, 경고하노니, 만약 너희가 속죄를 받으면 진지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는데, 하나님은 이 12개의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합당한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져질 운명이다.” (그가 언급한 12개의 돌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12 지파”들이 처음으로 언약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이 건너 간을 기념하기 위해 바로 그 지점에 세워 놓았던 돌들입니다.)

135:6.8 (1502.6) John conducted classes for his disciples, in the course of which he instructed them in the details of their new life and endeavored to answer their many questions. He counseled the teachers to instruct in the spirit as well as the letter of the law. He instructed the rich to feed the poor; to the tax gatherers he said: “Extort no more than that which is assigned you.” To the soldiers he said: “Do no violence and exact nothing wrongfully — be content with your wages.” While he counseled all: “Make ready for the end of the age —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그 선생들에게, 율법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함께 가르치도록 조언하였습니다. 그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먹일 것을 가르쳤으며,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해진 세금 이외에는 더 이상 걷지 말라.” 그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그 어떤 것도 그릇된 방법으로 강요하지 말라─너희들의 보수에 만족하라.”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시대의 종말을 위해 준비하라─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7. John Journeys North 요한이 북쪽으로 여행하다.

170510 수요 예수84 눅3:16-17 16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곧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17 자기 타작 마당에서 모든 곡식을 키질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16 John answered, saying unto them all, I indeed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ightier than I cometh, the latchet of whose shoes I am not worthy to unloose: he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Ghost and with fire: 17 Whose fan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roughly purge his floor, and will gather the wheat into his garner;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fire unquenchable.

135:7.1 (1503.1) John still had confused ideas about the coming kingdom and its king. The longer he preached the more confused he became, but never did this intellectual uncertainty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coming kingdom in the least lessen his conviction of the certainty of the kingdom’s immediate appearance. In mind John might be confused, but in spirit never. He was in no doubt about the coming kingdom, but he was far from certain as to whether or not Jesus was to be the ruler of that kingdom. As long as John held to the idea of the restoration of the throne of David, the teachings of his parents that Jesus, born in the City of David, was to be the long-expected deliverer, seemed consistent; but at those times when he leaned more toward the doctrine of a spiritual kingdom and the end of the temporal age on earth, he was sorely in doubt as to the part Jesus would play in such events. Sometimes he questioned everything, but not for long. He really wished he might talk it all over with his cousin, but that was contrary to their expressed agreement. 요한은 도래할 나라와 그 왕(王)에 대하여 여전히 혼동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오래 설교를 할수록 그는 더 혼동되었지만, 도래할 나라의 성격에 관한 지적(知的) 불확실성 때문에, 그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는 확신에 대한 그의 신념이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마음으로는 혼동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래할 나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그 나라의 통치자이실지 아니실 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다윗 왕좌의 복권에 대한 관념을 고수하는 한, 다윗의 도시에서 태어난 예수께서 그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 왔던 해방자라는 자신의 부모의 가르침은 시종일관하게 보였지만, 그 당시 그가 영적 나라의 교리와 지상의 일시적인 시대의 종말을 향해 마음이 더 많이 기울게 되자, 그러한 관련사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그는 모든 것이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자기 사촌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명백한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135:7.2 (1503.2) As John journeyed north, he thought much about Jesus. He paused at more than a dozen places as he traveled up the Jordan. It was at Adam that he first made reference to “another one who is to come after me” in answer to the direct question which his disciples asked him, “Are you the Messiah?” And he went on to say: “There will come after me one who is greater than I, whose sandal strap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loose.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his shovel is in his hand thoroughly to cleanse his threshing floor; he will gather the wheat into his garner, but the chaff will he burn up with the judgment fire.” 요한은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요단강을 거슬러 여행하면서 12번 이상이나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다른 분”이라고 아담에서 처음 언급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위대하시니,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노라.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 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자기 타작마당을 샅샅이 깨끗하게 하려고 그의 손에 삽을 들고 있느니라. 알곡은 곡간에 모아들이시겠지만, 쭉정이는 심판의 불에 태우시리라.”

135:7.3 (1503.3) In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his disciples John continued to expand his teachings, from day to day adding more that was helpful and comforting compared with his early and cryptic message: “Repent and be baptized.” By this time throngs were arriving from Galilee and the Decapolis. Scores of earnest believers lingered with their adored teacher day after day.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면서, 요한은 자신의 가르침을 계속 확장했는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초기의 모호한 메시지와 비교해서, 좀 더 유익과 위로가 되는 내용을 나날이 더했습니다. 이 무렵에, 군중들은 갈릴리와 데카폴리스에서부터 몰려왔습니다. 수십 명의 진지한 신도들은 존경하는 자기 선생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함께 머물렀습니다.

8. Meeting of Jesus and John예수님과 요한의 만남

170524 수요 예수85 마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17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135:8.1 (1503.4) By December of A.D. 25, when John reached the neighborhood of Pella in his journey up the Jordan, his fame had extended throughout all Palestine, and his work had become the chief topic of conversation in all the towns about the lake of Galilee. Jesus had spoken favorably of John’s message, and this had caused many from Capernaum to join John’s cult of repentance and baptism. James and John the fishermen sons of Zebedee had gone down in December, soon after John took up his preaching position near Pella, and had offered themselves for baptism. They went to see John once a week and brought back to Jesus fresh, firsthand reports of the evangelist’s work. 서기 25년 12월이 되어, 요한이 요단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펠라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의 명성은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퍼졌고, 그의 활동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모든 마을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메시지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 받는 요한의 종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어부 야고보와 요한도, 요한이 펠라 근처에서 설교할 자리를 잡은 바로 직후인 12월에 내려갔고, 세례 받으러 나셨습니다. 그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요한을 만나러 갔고, 그 복음 전도자의 활동에 대해 생생하게 직접 얻은 보고를 가지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135:8.2 (1503.5) Jesus’ brothers James and Jude had talked about going down to John for baptism; and now that Jude had come over to Capernaum for the Sabbath services, both he and James, after listening to Jesus’ discourse in the synagogue, decided to take counsel with him concerning their plans. This was on Saturday night, January 12, A.D. 26. Jesus requested that they postpone the discussion until the following day, when he would give them his answer. He slept very little that night, being in close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heaven. He had arranged to have noontime lunch with his brothers and to advise them concerning baptism by John. That Sunday morning Jesus was working as usual in the boatshop. James and Jude had arrived with the lunch and were waiting in the lumber room for him, as it was not yet time for the midday recess, and they knew that Jesus was very regular about such matters.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는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내려가는 것에 대해 서로 논의하였으며; 이제 유다가 안식일 경배를 드리기 위해 가버나움으로 건너 왔을 때, 그와 야고보는 회당에서 예수님의 강론을 들은 뒤에, 자신들의 계획에 대하여 예수님과 상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서기 26년 1월 12일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일로 논의를 미루자고 요청하면서, 그 때 대답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긴밀히 교제 하면서 거의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는 한낮에 동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에 대하여 조언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가 점심을 갖고 도착했지만 아직 점심 휴식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목재실(木材室)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 예수께서 얼마나 규칙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5:8.3 (1504.1) Just before the noon rest, Jesus laid down his tools, removed his work apron, and merely announced to the three workmen in the room with him, “My hour has come.” He went out to his brothers James and Jude, repeating, “My hour has come — let us go to John.” And they started immediately for Pella, eating their lunch as they journeyed. This was on Sunday, January 13. They tarried for the night in the Jordan valley and arrived on the scene of John’s baptizing about noon of the next day. 점심 휴식시간 바로 전에 예수님은 연장들을 내려놓고 작업복을 벗었으며, 그와 함께 작업장에 있던 세 명의 일꾼들에게 단지 “나의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들인 야고보와 유다에게 나가서 “나의 때가 이르렀으니 함께 요한에게로 가자.”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펠라를 향해 떠났고 여행하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1월 13일 일요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단 계곡에서 그 날 밤을 지냈고, 다음 날 정오 무렵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135:8.4 (1504.2) John had just begun baptizing the candidates for the day. Scores of repentants were standing in line awaiting their turn when Jesus and his two brothers took up their positions in this line of earnest men and women who had become believers in John’s preaching of the coming kingdom. John had been inquiring about Jesus of Zebedee’s sons. He had heard of Jesus’ remarks concerning his preaching, and he was day by day expecting to see him arrive on the scene, but he had not expected to greet him in the line of baptismal candidates. 요한은 그날의 후보자들에게 세례를 막 주기 시작했습니다. 몇 십 명의 회개자들이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고, 예수님과 그의 두 동생들도 이 대열 속에 서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은 다가올 나라에 대한 요한의 설교를 믿는 열성적인 남녀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관한 예수의 소견을 들었으며,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매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줄에서 예수님께 인사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135:8.5 (1504.3) Being engrossed with the details of rapidly baptizing such a large number of converts, John did not look up to see Jesus until the Son of Man stood in his immediate presence. When John recognized Jesus, the ceremonies were halted for a moment while he greeted his cousin in the flesh and asked, “But why do you come down into the water to greet me?” And Jesus answered, “To be subject to your baptism.” John replied: “But I have need to be baptized by you. Why do you come to me?” And Jesus whispered to John: “Bear with me now, for it becomes us to set this example for my brothers standing here with me, and that the people may know that my hour has come.” 그렇게 많은 개종자들에게 빠른 시간에 세례를 주는 세세한 일들에 열중하느라 요한은 바로 앞에 사람의 아들이 서실 때까지도 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예식(禮式)은 잠시 중지되었고 그는 자신 육체의 사촌에게 인사하며 여쭈었습니다. “그렇지만 왜 당신이 나를 만나러 물속으로 내려오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의 세례를 받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째서 당신이 나에게 오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이제 참고 내 말을 들으라, 왜냐하면 이것은 나와 함께 여기에 서 있는 내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우리가 되고, 또한 사람들이 나의 때가 왔음을 알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

135:8.6 (1504.4) There was a tone of finality and authority in Jesus’ voice. John was atremble with emotion as he made ready to baptize Jesus of Nazareth in the Jordan at noon on Monday, January 14, A.D. 26. Thus did John baptize Jesus and his two brothers James and Jude. And when John had baptized these three, he dismissed the others for the day, announcing that he would resume baptisms at noon the next day. As the people were departing, the four men still standing in the water heard a strange sound, and presently there appeared for a moment an apparition immediately over the head of Jesus, and they heard a voice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A great change came over the countenance of Jesus, and coming up out of the water in silence he took leave of them, going toward the hills to the east. And no man saw Jesus again for forty days. 예수님의 음성은 단호하고 권위가 서려 있었습니다. 요한은 서기 26년 1월 14일, 월요일 정오에 요단강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준비를 하면서 감정에 북받쳐 전율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은 예수님과 그의 두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이들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그는 그날의 나머지 세례는 다음 날 정오에 계속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 여전히 물속에 서있었던 네 사람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이내 하나의 환영(幻影)이 잠깐 예수의 머리 바로 위에 나타났으며, 그들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용모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물에서 나와 그들을 떠나서 동쪽의 언덕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예수님을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35:8.7 (1504.5) John followed Jesus a sufficient distance to tell him the story of Gabriel’s visit to his mother ere either had been born, as he had heard it so many times from his mother’s lips. He allowed Jesus to continue on his way after he had said, “Now I know of a certainty that you are the Deliverer.” But Jesus made no reply. 요한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입을 통하여 수없이 들어왔던 바와 같이, 둘 중에 어느 쪽도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앞에 나타났던 가브리엘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에게 해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이제 나는 당신이 구원자(해방자)임을 확실하게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예수께서 자기 길을 계속 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9. Forty Days of Preaching 40일간의 설교

170531 수요 예수86 요1:30-32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0 This is he of whom I said, After me cometh a man which is preferred before me: for he was before me. 31 And I knew him not: but that he should be made manifest to Israel, therefore am I come baptizing with water. 32 And John bare record, saying, I saw the Spirit descending from heaven like a dove, and it abode upon him.

135:9.1 (1505.1) When John returned to his disciples (he now had some twenty-five or thirty who abode with him constantly), he found them in earnest conference, discussing what had just happened in connection with Jesus’ baptism. They were all the more astonished when John now made known to them the story of the Gabriel visitation to Mary before Jesus was born, and also that Jesus spoke no word to him even after he had told him about this. There was no rain that evening, and this group of thirty or more talked long into the starlit night. They wondered where Jesus had gone, and when they would see him again. 요한이 자기 제자들(그 당시에 약 25-30명가량이 그와 항상 함께 거주하던)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세례와 관련되어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진지하게 토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때 요한이,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을 때, 또한 심지어 그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해 주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때, 그들은 더욱 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30여명 되는 이 사람들은 별이 빛나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디로 갔는지 언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135:9.2 (1505.2) After the experience of this day the preaching of John took on new and certain notes of proclamation concerning the coming kingdom and the expected Messiah. It was a tense time, these forty days of tarrying, waiting for the return of Jesus. But John continued to preach with great power, and his disciples began at about this time to preach to the overflowing throngs which gathered around John at the Jordan. 이 날의 체험 이후에, 요한의 설교는 새롭고도 확실한 어조로 다가올 나라와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해 선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머물렀던 이 40일 은 매우 긴장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굉장한 권능으로 계속 설교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이 무렵에 요단강에서 요한 주위에 모여 넘쳐 흐르는 군중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35:9.3 (1505.3) In the course of these forty days of waiting, many rumors spread about the countryside and even to Tiberias and Jerusalem. Thousands came over to see the new attraction in John’s camp, the reputed Messiah, but Jesus was not to be seen. When the disciples of John asserted that the strange man of God had gone to the hills, many doubted the entire story. 이렇게 40일 동안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많은 소문들이 그 지방으로 퍼졌고, 그 소문들은 티베리아스와 예루살렘까지도 이르렀습니다. 수천의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야영지에 있다는 새로운 구경거리인 소문난 메시아를 보려고 모여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이상한 하나님의 사람이 산으로 갔다고 주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 전체를 의심하였습니다.

135:9.4 (1505.4) About three weeks after Jesus had left them, there arrived on the scene at Pella a new deputation from the priests and Pharisees at Jerusalem. They asked John directly if he was Elijah or the prophet that Moses promised; and when John said, “I am not,” they made bold to ask, “Are you the Messiah?” and John answered, “I am not.” Then said these men from Jerusalem: “If you are not Elijah, nor the prophet, nor the Messiah, then why do you baptize the people and create all this stir?” And John replied: “It should be for those who have heard me and received my baptism to say who I am, but I declare to you that, while I baptize with water, there has been among us one who will return to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예수께서 떠난 지 약 3주일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새로운 대표단이 펠라의 그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그가 엘리야인지 아니면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인지 직접 물었으며; 요한이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당신이 메시아인가?”라고 대담히 물었고, 요한은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온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메시아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이 모든 동요를 일으키느냐?”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나의 세례를 받은 자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겠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선언하는데,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반면에,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우리 가운데 있었느니라.”

135:9.5 (1505.5) These forty days were a difficult period for John and his disciples. What was to be the relation of John to Jesus? A hundred questions came up for discussion. Politics and selfish preferment began to make their appearance. Intense discussions grew up around the various ideas and concepts of the Messiah. Would he become a military leader and a Davidic king? Would he smite the Roman armies as Joshua had the Canaanites? Or would he come to establish a spiritual kingdom? John rather decided, with the minority, that Jesus had com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although he was not altogether clear in his own mind as to just what was to be embraced within this miss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40일의 이 기간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요한의 관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수많은 질문들이 논의의 대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정치적 흥정과 이기적인 자리다툼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들과 개념을 둘러싸고 심각한 토론들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군사 지도자가 되어 다윗과 같은 왕이 될 것인가?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취했던 것과 같이, 그는 로마 군대를 무찌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영적 나라를 세우러 올 것인가? 요한 자신도 하늘나라의 설립에 관한 임무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하는지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확실히 정하고 있지 못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소수파와 함께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세우러 왔다고 결정했습니다.

135:9.6 (1505.6) These were strenuous days in John’s experience, and he prayed for the return of Jesus. Some of John’s disciples organized scouting parties to go in search of Jesus, but John forbade, saying: “Our times are in the hands of the God of heaven; he will direct his chosen Son.” 이러한 날들은 요한의 체험에서 격렬한 나날들이었으며, 그는 예수께서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찾으러 가기 위한 수색대를 조직하였으나, 요한은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때는 하늘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가 택한 아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135:9.7 (1505.7) It was early on the morning of Sabbath, February 23, that the company of John, engaged in eating their morning meal, looked up toward the north and beheld Jesus coming to them. As he approached them, John stood upon a large rock and, lifting up his sonorous voice, said: “Behold the Son of God, the deliverer of the world! This is he of whom I have said, ‘After me there will come one who is preferred before me because he was before me.’ For this cause came I out of the wilderness to preach repentance and to baptize with water, proclaiming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now comes one who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I beheld the divine spirit descending upon this man, and I heard the voice of God declare,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2월 23일 안식일 이른 아침에, 요한의 일행이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북쪽으로 올려보다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요한은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우렁찬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해방자)를 보라! 이 사람은 내가, ‘내 뒤에 나보다 더 앞선 분이 오시는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말해왔던 그 분이라. 이 때문에 내가 광야로부터 나와서 회개를 설교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노라. 그리고 이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느니라. 나는 성령이 이 분 위에 강림하는 것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

135:9.8 (1506.1) Jesus bade them return to their food while he sat down to eat with John, his brothers James and Jude having returned to Capernaum. 예수님은 그들에게 식사를 계속하라고 말씀하시고, 한편 동생 야고보와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한과 함께 식사하시려고 앉으셨습니다.

135:9.9 (1506.2) Early in the morning of the next day he took leave of John and his disciples, going back to Galilee. He gave them no word as to when they would again see him. To John’s inquiries about his own preaching and mission Jesus only said, “My Father will guide you now and in the future as he has in the past.” And these two great men separated that morning on the banks of the Jordan, never again to greet each other in the flesh.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언제 다시 그들을 보게 될 것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설교와 사명에 대한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지난 날에 하신 것처럼 현재와 미래에도 너를 안내하실 것이다.” 이들 두 위대한 사람들은 그 날 아침 요단강 강변에서 헤어졌으며, 육신으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10. John Journeys South요한이 남쪽으로 여행가다

170607 수요 예수87 눅3:19-20 19 그러나 헤롯왕은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과 그 밖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로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도 20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둬 버렸다. 19 But when John rebuked Herod the tetrarch because of Herodias, his brother’s wife, and all the other evil things he had done, 20 Herod added this to them all: He locked John up in prison.

135:10.1 (1506.3) Since Jesus had gone north into Galilee, John felt led to retrace his steps southward. Accordingly, on Sunday morning, March 3, John and the remainder of his disciples began their journey south. About one quarter of John’s immediate followers had meantime departed for Galilee in quest of Jesus. There was a sadness of confusion about John. He never again preached as he had before baptizing Jesus. He somehow felt that the responsibility of the coming kingdom was no longer on his shoulders. He felt that his work was almost finished; he was disconsolate and lonely. But he preached, baptized, and journeyed on southward. 예수님께서는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셨기 때문에, 요한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3월 3일 일요일 아침에 요한과 나머지 제자들은 남쪽으로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그 동안에 요한의 가까운 제자들 중 사분의 일 정도는 예수님을 찾아 갈릴리로 떠났습니다. 요한에게서는 혼란에 빠진 슬픈 안색이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주기 이전에 행했던 것과 같은 설교를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쩐지 다가올 나라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거의 끝이 난 것같이 느껴졌으며, 마음 둘 곳을 잃었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면서 남쪽으로 계속 여행하였습니다.

135:10.2 (1506.4) Near the village of Adam, John tarried for several weeks, and it was here that he made the memorable attack upon Herod Antipas for unlawfully taking the wife of another man. By June of this year (A.D. 26) John was back at the Bethany ford of the Jordan, where he had begun his preaching of the coming kingdom more than a year previously. In the weeks following the baptism of Jesus the character of John’s preaching gradually changed into a proclamation of mercy for the common people, while he denounced with renewed vehemence the corrupt political and religious rulers. 아담이라는 마을 가까이에서 요한은 여러 주간 동안 머물렀으며, 헤롯 안티파스가 다른 사람의 부인을 부당하게 취한 것에 대해 이곳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해(서기 26년) 6월경에, 요한은 1년 전에, 다가올 나라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였던, 요단강의 베다니 개울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이후 몇 주 동안, 요한의 설교의 특징은 점차 보통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선포로 바뀌어 갔으며, 반면에 그는 다시 되살아난 격렬함으로 부패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공공연히 비난하였습니다.

135:10.3 (1506.5) Herod Antipas, in whose territory John had been preaching, became alarmed lest he and his disciples should start a rebellion. Herod also resented John’s public criticisms of his domestic affairs. In view of all this, Herod decided to put John in prison. Accordingly, very early in the morning of June 12, before the multitude arrived to hear the preaching and witness the baptizing, the agents of Herod placed John under arrest. As weeks passed and he was not released, his disciples scattered over all Palestine, many of them going into Galilee to join the followers of Jesus. 요한은 헤롯의 영토에서 설교하였는데, 헤롯 안티파스는 그와 그의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헤롯은 자신의 가정 문제에 대해 요한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헤롯은 요한을 투옥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6월 12일 아주 이른 아침, 군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또 세례 주는 것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기 전에, 헤롯의 부하들이 요한을 체포하였습니다. 여러 주가 지나도 그가 석방되지 않게 되자, 그의 제자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려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11. John in Prison 감옥에 갇힌 요한

170614 수요 예수88 요3:26-36, 마11:2-6 2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3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고 하라. 6 그리고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일러 주어라.’ 2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Christ was doing, he sent his disciples 3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4 Jesus replied,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 5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 6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135:11.1 (1506.6) John had a lonely and somewhat bitter experience in prison. Few of his followers were permitted to see him. He longed to see Jesus but had to be content with hearing of his work through those of his followers who had become believers in the Son of Man. He was often tempted to doubt Jesus and his divine mission. If Jesus were the Messiah, why did he do nothing to deliver him from this unbearable imprisonment? For more than a year and a half this rugged man of God’s outdoors languished in that despicable prison. And this experience was a great test of his faith in, and loyalty to, Jesus. Indeed, this whole experience was a great test of John’s faith even in God. Many times was he tempted to doubt even the genuineness of his own mission and experience. 요한은 감옥에서 외로운 가운데 다소간 쓰라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거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었지만, 추종자들 가운데 사람의 아들을 믿게 된 자들을 통해서 그가 하는 일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종종 예수님과 그의 신적 사명에 대한 의심의 유혹(誘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어째서 견디기 어려운 이 감옥생활에서 자기를 구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 살던 억센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 경멸스러운 감옥에서 일 년 반 이상이나 있으면서 괴로운 생활 가운데 시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신앙과 충성에 대한 큰 시험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이 모든 체험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요한의 신앙까지 큰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체험의 순수성까지도 의심이 드는 유혹에 여러 번이나 빠졌었습니다.

135:11.2 (1507.1) After he had been in prison several months, a group of his disciples came to him and, after reporting concerning the public activities of Jesus, said: “So you see, Teacher, that he who was with you at the upper Jordan prospers and receives all who come to him. He even feasts with publicans and sinners. You bore courageous witness to him, and yet he does nothing to effect your deliverance.” But John answered his friends: “This man can do nothing unless it has been given him by his Father in heaven. You well remember that I said, ‘I am not the Messiah, but I am one sent on before to prepare the way for him.’ And that I did. H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but the friend of the bridegroom who stands near by and hears him rejoices greatly because of the bridegroom’s voice. This, my joy, therefore is fulfilled.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I am of this earth and have declared my message. Jesus of Nazareth comes down to the earth from heaven and is above us all. The Son of Man has descended from God, and the words of God he will declare to you. For the Father in heaven gives not the spirit by measure to his own Son. The Father loves his Son and will presently put all things in the hands of this Son. He who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And these words which I speak are true and abiding.” 그가 감옥에서 여러 달을 지낸 후, 요한의 제자들 한 무리가 그에게 찾아왔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공개적인 활동들에 대해 보고를 한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상류에 있던 사람이 성공하고 있으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함께 잔치를 합니다. 선생님은 그를 용감하게 증언하였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선생님의 해방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이 사람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하였던 대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너희들은 잘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행하였느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지만, 신랑 친구는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기쁨이 이루어졌느니라. 그는 흥하여야만 하고 나는 쇠하여야만 하느니라. 나는 이 세상의 사람으로 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느니라. 나사렛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 와서 우리 모두 위에 계시느니라.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 영(靈)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셔서 즉시 이 아들의 손에 만물을 맡기시리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나의 말들은 진리이고 영구적인 것이니라.”

135:11.3 (1507.2) These disciples were amazed at John’s pronouncement, so much so that they departed in silence. John was also much agitated, for he perceived that he had uttered a prophecy. Never again did he wholly doubt the mission and divinity of Jesus. But it was a sore disappointment to John that Jesus sent him no word, that he came not to see him, and that he exercised none of his great power to deliver him from prison. But Jesus knew all about this. He had great love for John, but being now cognizant of his divine nature and knowing fully the great things in preparation for John when he departed from this world and also knowing that John’s work on earth was finished, he constrained himself not to interfere in the natural outworking of the great preacher-prophet’s career. 이 제자들은 요한의 선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너무 놀라서 그들 모두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갔습니다. 요한 역시 몹시 동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언의 말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의 사명과 신성에 대해 결코 송두리째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 말도 그에게 보내지 않는 점과 그를 만나러 오지 않는 점 그리고 그를 감옥에서 구하기 위해 큰 권능도 하나도 쓰지 않으신 점은 그에게 비통한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매우 사랑하셨지만, 이제는 자신의 신적 본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하면 그에게는 위대한 일들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또한 땅에서 요한의 일은 끝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설교자-선지자 생애의 자연스러운 끝마무리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자제하셨습니다.

135:11.4 (1507.3) This long suspense in prison was humanly unbearable. Just a few days before his death John again sent trusted messengers to Jesus, inquiring: “Is my work done? Why do I languish in prison? Are you truly the Messiah, or shall we look for another?” And when these two disciples gave this message to Jesus, the Son of Man replied: “Go back to John and tell him that I have not forgotten but to suffer me also this, for it becomes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ell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 that the poor have good tidings preached to them — and, finally, tell the beloved herald of my earth mission that he shall be abundantly blessed in the age to come if he finds no occasion to doubt and stumble over me.” And this was the last word John received from Jesus. This message greatly comforted him and did much to stabilize his faith and prepare him for the tragic end of his life in the flesh which followed so soon upon the heels of this memorable occasion. 감옥에서의 이러한 긴 불안 상태는, 인간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요한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사람들을 보내어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일은 끝난 것입니까? 왜 나는 감옥에서 괴로워해야만 합니까? 당신은 진정한 메시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들 두 제자들이 이 메시지를 예수님께 전했을 때, 사람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요한에게 돌아가서, 내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이 또한 나에게 고통이며, 이는 그것으로 우리가 모든 공의(公義)를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하라. 요한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 –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들었다는 것 – 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나의 지상 사명의 귀한 전령에게, 그가 나를 의심하거나 실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장차 다가올 시대에 넘치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전하라.” 이것이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그를 매우 안심시켰으며, 그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었고, 이 기억할 만한 사건 바로 직후에 일어났던 그의 육신의 일생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 그를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12. Death of John the Baptist 세례요한의 죽음

170621 수요 예수89 마14:5-12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5 Herod wanted to kill John, but he was afraid of the people, because they considered him a prophet. 6 On Herod’s birthday the daughter of Herodias danced for them and pleased Herod so much 7 that he promised with an oath to give her whatever she asked. 8 Prompted by her mother, she said, “Give me here on a platte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9 The king was distressed, but because of his oaths and his dinner guests, he ordered that her request be granted 10 and had John beheaded in the prison. 11 His head was brought in on a platter and given to the girl, who carried it to her mother. 12 John’s disciples came and took his body and buried it. Then they went and told Jesus.

135:12.1 (1508.1) As John was working in southern Perea when arrested, he was taken immediately to the prison of the fortress of Machaerus, where he was incarcerated until his execution. Herod ruled over Perea as well as Galilee, and he maintained residence at this time at both Julias and Machaerus in Perea. In Galilee the official residence had been moved from Sepphoris to the new capital at Tiberias. 요한이 남쪽 페레아에서 일하던 중에 체포되었을 때, 그는 즉시 마캐루스의 요새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졌고,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뿐 아니라 페레아도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 당시 페레아의 줄리아스와 마캐루스, 두 곳에 거처(居處)를 두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공관은, 세포리스로부터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겼습니다.

135:12.2 (1508.2) Herod feared to release John lest he instigate rebellion. He feared to put him to death lest the multitude riot in the capital, for thousands of Pereans believed that John was a holy man, a prophet. Therefore Herod kept the Nazarite preacher in prison, not knowing what else to do with him. Several times John had been before Herod, but never would he agree either to leave the domains of Herod or to refrain from all public activities if he were released. And this new agitation concerning Jesus of Nazareth, which was steadily increasing, admonished Herod that it was no time to turn John loose. Besides, John was also a victim of the intense and bitter hatred of Herodias, Herod’s unlawful wife. 헤롯은 요한이 반란을 선동할까봐 그를 석방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수많은 페레아인들이 요한을 거룩한 사람 즉 선지자로 믿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헤롯은 그를 죽이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그를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 나실인 설교자를 계속 교도소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롯 앞에 불려갔었지만, 석방되는 경우라도, 자기가 헤롯의 영역을 떠나거나 혹은 모든 공공 활동들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새로운 민심의 동요는, 요한을 풀어주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점을 헤롯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게다가 요한은 또한 헤롯의 불륜 아내, 헤로디아스의 맹렬하고 극심한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135:12.3 (1508.3) On numerous occasions Herod talked with John about the kingdom of heaven, and while sometimes seriously impressed with his message, he was afraid to release him from prison. 헤롯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요한과 여러 번 이야기를 하였으며, 때때로 요한의 메시지에 매우 감명을 받기도 하였지만, 교도소에서 요한을 석방하기가 두려웠습니다.

135:12.4 (1508.4) Since much building was still going on at Tiberias, Herod spent considerable time at his Perean residences, and he was partial to the fortress of Machaerus. It was a matter of several years before all the public buildings and the official residence at Tiberias were fully completed. 티베리아스에서 많은 건축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은 페레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마캐루스 요새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공공건물들과 공관이 충분하게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135:12.5 (1508.5) In celebration of his birthday Herod made a great feast in the Machaerian palace for his chief officers and other men high in the councils of the government of Galilee and Perea. Since Herodias had failed to bring about John’s death by direct appeal to Herod, she now set herself to the task of having John put to death by cunning planning. 그의 생일 축하를 위해 헤롯은 갈릴리와 페레아의 정부 의회에서 주요 관리들과 기타 고위층을 마캐루스의 궁전에 불러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헤로디아스는 헤롯에게 요한을 죽여 달라는 자신의 직접적인 청원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요한을 죽이기 위하여 간악한 계획을 세우는 일에 직접 착수했습니다.

135:12.6 (1508.6) In the course of the evening’s festivities and entertainment, Herodias presented her daughter to dance before the banqueters. Herod was very much pleased with the damsel’s performance and, calling her before him, said: “You are charming. I am much pleased with you. Ask me on this my birthday for whatever you desire, and I will give it to you, even to the half of my kingdom.” And Herod did all this while well under the influence of his many wines. The young lady drew aside and inquired of her mother what she should ask of Herod. Herodias said, “Go to Herod and ask fo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And the young woman, returning to the banquet table, said to Herod, “I request that you forthwith give me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on a platter.” 헤로디아스는 저녁 잔치들과 연회의 순서 속에 자기 딸을 연회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도록 하였습니다. 헤롯은 처녀의 공연에 매우 심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매력이 있구나. 네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였으니, 나의 생일인 오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노라.” 헤롯은 포도주에 몹시 취한 그 기운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젊은 처녀는 물러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헤롯에게 구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헤로디아스는 말하였습니다. “헤롯에게 가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그리고 젊은 처녀는 연회 식탁으로 돌아와서 헤롯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장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내게 주기를 요청하옵니다.”

135:12.7 (1508.7) Herod was filled with fear and sorrow, but because of his oath and because of all those who sat at meat with him, he would not deny the request. And Herod Antipas sent a soldier, commanding him to bring the head of John. So was John that night beheaded in the prison, the soldier bringing the head of the prophet on a platter and presenting it to the young woman at the rear of the banquet hall. And the damsel gave the platter to her mother. When John’s disciples heard of this, they came to the prison for the body of John, and after laying it in a tomb, they went and told Jesus. 헤롯은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자신이 맹세한 것과 그와 함께 앉아 회식하던 자들로 인하여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군인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요한은 교도소에서 목이 베어졌고, 그 군인은 선지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그것을 연회장 뒤에 있는 그 젊은 여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 처녀는 그 소반을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요한의 시체를 가지러 교도소로 왔으며, 그들은 요한의 시신을 무덤에 묻은 후에 예수님께 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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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5 God’s Relation to the Individual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

Paper 5

God’s Relation to the Individual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

  1. The Approach to God 하나님께 이르는 길
  2.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현존(現存)
  3. True Worship 참된 경배
  4. God in Religion 종교의 하나님
  5. The Consciousness of God 하나님 의식(意識)
  6. The God of Personality 고유성의 하나님

1702021 고전3: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5:0.1 (62.1) IF THE finite mind of man is unable to comprehend how so great and so majestic a God as the Universal Father can descend from his eternal abode in infinite perfection to fraternize with the individual human creature, then must such a finite intellect rest assurance of divine fellowship upon the truth of the fact that an actual fragment of the living God resides within the intellect of every normal-minded and morally conscious Urantia mortal.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s are a part of the eternal Deity of the Paradise Father. Man does not have to go farther than his own inner experience of the soul’s contemplation of this spiritual-reality presence to find God and attempt communion with him. 우리와 같은 유한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다음의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한한 완전성 가운데에 계시는 우주 아버지로서 그렇게 위대하고 장엄한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거처로부터 내려오셔서 개인적인 우리 인간 창조물과 어떻게 형제우애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러한 우리의 유한한 지성은, 다음의 사실에 대한 진리에 근거해서 신적 교제에 대한 확신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제적 파편이 유란시아 필사자, 즉 모든 정상적 마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의식하는 우리 지성의 내부에 거주하신다는 사실이 바로 그 진리의 근거입니다. 내주하는 생각 조율자들은 천국 아버지의 영원한 신(神)의 일부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시도하기 위하여 이 영적-실체 현존(顯存)에 관한 혼의 깊은 사색으로서의 그 자신의 내적 체험보다 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5:0.2 (62.2) God has distributed the infinity of his eternal nature throughout the existential realities of his six absolute co-ordinates, but he may, at any time, make direct personal contact with any part or phase or kind of creation through the agency of his prepersonal fragments. And the eternal God has also reserved to himself the prerogative of bestowing personality upon the divine Creators and the living creature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while he has further reserved the prerogative of maintaining direct and parental contact with all these personal beings through the personality circuit.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본성의 무한성을 그의 여섯 절대 동등자들의 존재적 실체들에 두루 분배해 오셨지만, 언제든지 그는 자신의 전(前) 고유적 prepersonal 단편의 대리자를 통하여 창조의 어떤 부분이나 위상 또는 종류와 직접적인 개인적 접촉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은 또한 신성한 창조주들과 우주들의 우주의 살아있는 창조물들에게 고유성personality을 증여하는 특권을 자신이 보유해 오셨으며, 동시에 더 나아가 그는 고유성personality 순환회로를 통하여 이 개인적 존재들 전체와 직접적이며 어버이로서의 접촉을 유지하는 특권을 보유해 오셨습니다.

1. The Approach to God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

1702023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죄인들은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씻고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Come near to God and he will come near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5:1.1 (62.3) The inability of the finite creature to approach the infinite Father is inherent, not in the Father’s aloofness, but in the finiteness and material limitations of created beings. The magnitude of the spiritual difference between the highest personality of universe existence and the lower groups of created intelligences is inconceivable. Were it possible for the lower orders of intelligence to be transported instantly into the presence of the Father himself, they would not know they were there. They would there be just as oblivious of th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as where they now are. There is a long, long road ahead of mortal man before he can consistently and within the realms of possibility ask for safe conduct into the Paradis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Spiritually, man must be translated many times before he can attain a plane that will yield the spiritual vision which will enable him to see even any one of the Seven Master Spirits. 유한한 창조물이 무한한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는 무능력함은 선천적인데, 아버지가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들의 유한함과 물질적 한계 때문입니다. 우주 실재 중 가장 높은 고유성과 창조된 지능존재들 중 가장 낮은 집단들 사이에 있는 영적 차이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능존재의 낮은 계층들이 아버지 자신의 현존 속으로 즉시 옮겨가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 있음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우주 아버지의 현존에 대해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이 가능성의 영역 내에서 우주 아버지의 천국 현존 안으로 안전히 안내받기를 일관되게 요구할 수 있기 전까지 그 앞에는 멀고도 먼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일곱 주(主)영들 중 어느 한 분이라도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의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영적으로 사람은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는 전환이 있어야만 합니다.

5:1.2 (62.4) Our Father is not in hiding; he is not in arbitrary seclusion. He has mobilized the resources of divine wisdom in a never-ending effort to reveal himself to the children of his universal domains. There is an infinite grandeur and an inexpressible generosity connected with the majesty of his love which causes him to yearn for the association of every created being who can comprehend, love, or approach him; and it is, therefore, the limitations inherent in you, inseparable from your finite personality and material existence, that determine the time and place and circumstances in which you may achieve the goal of the journey of mortal ascension and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Father at the center of all things. 우리의 아버지는 숨어있지 않으며, 그는 제멋대로 은둔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자신의 우주 권역에 있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신적 지혜의 자원들을 끊임없는 노력으로 동원해 오셨습니다. 그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또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창조된 존재의 연합을 그가 갈망하도록 만든 그의 사랑의 장엄함에는 무한한 숭고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관대함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이 상승하는 여행 목표를 성취하고 만물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의 현존 속에 서게 되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들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유한한 고유성 그리고 물질적 실재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선천적 한계들입니다.

5:1.3 (63.1) Although the approach to the Paradise presence of the Father must await your attainment of the highest finite levels of spirit progression, you should rejoice in the recognition of the ever-present possibility of immediate communion with the bestowal spirit of the Father so intimately associated with your inner soul and your spiritualizing self. 비록 아버지의 천국 현존에 다가감은 우리가 영 진보의 최고 유한 차원들을 달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내면의 혼 그리고 우리의 영성화하는 자아와 그렇게 긴밀하게 연합된 아버지의 증여 영과 즉각적 교제가 항상-존재 가능함을 인식하며 기뻐해야만 합니다.

170228 롬8:23 이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첫열매로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곧 우리 몸이 구원받기를 갈망합니다.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as sons,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5:1.4 (63.2) The mortals of the realms of time and space may differ greatly in innate abilities and intellectual endowment, they may enjoy environments exceptionally favorable to social advancement and moral progress, or they may suffer from the lack of almost every human aid to culture and supposed advancement in the arts of civilization; but the possibilities for spiritual progress in the ascension career are equal to all; increasing levels of spiritual insight and cosmic meanings are attained quite independently of all such sociomoral differentials of the diversified material environments on the evolutionary worlds.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은 타고난 능력들과 지적 자질에 있어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발전과 도덕적 진보에 예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누릴 수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문명 예술에 있어서 문화와 예상되는 진보를 돕는 거의 모든 인간적 도움의 부족으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승하는 생애에 있어서의 영적 진보에 대한 가능성은 모두에게 동등합니다. 영적 통찰력과 우주적(cosmic) 의미의, 증가하는 차원들은 진화 세계에 있는 다양한 물질 환경들의 그러한 모든 사회-도덕적 차이들과는 매우 독립적으로 달성됩니다.

5:1.5 (63.3) However Urantia mortals may differ in their intellectual, social, economic, and even moral opportunities and endowments, forget not that their spiritual endowment is uniform and unique. They all enjoy the same divine presence of the gift from the Father, and they are all equally privileged to seek intimate personal communion with this indwelling spirit of divine origin, while they may all equally choose to accept the uniform spiritual leading of these Mystery Monitors. 그러나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지적,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는 도덕적 기회들과 자질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 자질은 동일하며 독특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동일한 신적 현존의 선물을 누리며, 그들은 모두 신적 기원을 갖고 있는 내주하는 이 영과의 긴밀한 개인적 교제를 추구하는 특권을 똑같이 누리며, 또한 그들 모두는 이 신비 감시자들의 한결같은 영적 인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에 있어서 차이가 없이 동등합니다.

5:1.6 (63.4) If mortal man is wholeheartedly spiritually motivated, unreservedly consecrated to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then, since he is so certainly and so effectively spiritually endowed by the indwelling and divine Adjuster, there cannot fail to materialize in that individual’s experience the sublime consciousness of knowing God and the supernal assurance of surviving for the purpose of finding God by the progressive experience of becoming more and more like him.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전심을 다하여 영적으로 동기를 부여받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거리낌 없이 헌신한다면, 그는 내주하는 신적 조절자를 그렇게 확실하고 효과적이며 영적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에, 갈수록 하나님을 닮아가는 진보적 체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고결한 의식과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천상의 확신이, 그 개인의 체험 속에서 체현(體現)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70301 요일3:2-3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3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2 Dear friends, now we are children of God, and what we will be has not yet been made known. But we know that when he appears,we shall be like him, for we shall see him as he is. 3 Everyone who has this hope in him purifies himself, just as he is pure.

5:1.7 (63.5) Man is spiritually indwelt by a surviving Thought Adjuster. If such a human mind is sincerely and spiritually motivated, if such a human soul desires to know God and become like him, honestly wants to do the Father’s will, there exists no negative influence of mortal deprivation nor positive power of possible interference which can prevent such a divinely motivated soul from securely ascending to the portals of Paradise. 사람 안에는 살아남는 생각 조절자가 영적으로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 마음이 진지하게 영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으며, 그러한 인간 혼이 하나님을 알고자 소망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며, 정직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신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은 혼이 천국 입구까지 안전하게 올라가는 상승(上昇)을 저지(底止)할 수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결핍으로 인한 어떤 부정적 영향도, 방해가 가능한 어떤 적극적 권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5:1.8 (63.6) The Father desires all his creatures to be in personal communion with him. He has on Paradise a place to receive all those whose survival status and spiritual nature make possible such attainment. Therefore settle in your philosophy now and forever: To each of you and to all of us, God is approachable, the Father is attainable, the way is open; the forces of divine love and the ways and means of divine administration are all interlocked in an effort to facilitate the advancement of every worthy intelligence of every universe to the Paradis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창조물들이 자신과 개인적인 교제를 누리는 가운데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는, 생존(生存) 지위와 영적 본성으로 그렇게 달성이 가능한 모든 자들을 받아들일 장소를 천국에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의 인생철학이 되게 하십시오. 각자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이시고, 아버지는 도달하여 만나 뵐 수 있는 분이시며, 그 길은 열려 있습니다. 모든 우주마다 모든 가치 있는 지능존재가 우주 아버지의 천국 현존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를 촉진시키려는 노력으로, 신적 사랑의 힘과 신적 행적의 방법과 수단들은 서로 모두 맞물려 있습니다.

5:1.9 (63.7) The fact that vast time is involved in the attainment of God makes the presence and personality of the Infinite none the less real. Your ascension is a part of the circuit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nd though you swing around it countless times, you may expect, in spirit and in status, to be ever swinging inward. You can depend upon being translated from sphere to sphere, from the outer circuits ever nearer the inner center, and some day, doubt not, you shall stand in the divine and central presence and see him, figuratively speaking, face to face. It is a question of the attainment of actual and literal spiritual levels; and these spiritual levels are attainable by any being who has been indwelt by a Mystery Monitor, and who has subsequently eternally fused with that Thought Adjuster. 하나님께 도달하기까지 광대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은, 무한자의 현존과 고유성이 실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어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승(승천)은 일곱 초우주들의 순환회로의 일부분이며, 너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둘레를 회전한다고 해도, 우리는 영과 신분 지위 안에서 안쪽을 향해 계속 휘돌아 회전하는 상태로 있음을 기대해도 됩니다. 우리는 구체에서 구체로, 외부 순환회로에서 계속 더 내부 중심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음을 믿어도 되며, 언젠가는, 우리가 신적인 중앙의 현존 안에 서게 될 것이며 상징적으로 말해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글자 그대로 영적 수준에 도달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신비 감시자가 내주하던 적이 있고, 나중에 그 생각 조절자와 영원히 융합한 어떤 존재든지, 이 영적 차원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70303 사45:15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참으로 주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Truly you are a God who hides himself, O God and Savior of Israel.

5:1.10 (64.1) The Father is not in spiritual hiding, but so many of his creatures have hidden themselves away in the mists of their own willful decisions and for the time being have separated themselves from the communion of his spirit and the spirit of his Son by the choosing of their own perverse ways and by the indulgence of the self-assertiveness of their intolerant minds and unspiritual natures. 아버지는 영적으로 숨어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그의 창조물들은, 그들 자신의 의지적 결정들의 안개 속으로 스스로 멀리 숨어 버렸으며, 그들 자신의 비뚤어진 길을 선택함하고, 그들의 편협한 마음들과 비(非)영적 본성의 자아-주장에 빠짐으로써, 그의 영과 그의 아들의 영의 교제로부터 스스로를 한동안 차단해 버렸습니다.

5:1.11 (64.2) Mortal man may draw near God and may repeatedly forsake the divine will so long as the power of choice remains. Man’s final doom is not sealed until he has lost the power to choose the Father’s will. There is never a closure of the Father’s heart to the need and the petition of his children. Only do his offspring close their hearts forever to the Father’s drawing power when they finally and forever lose the desire to do his divine will — to know him and to be like him. Likewise is man’s eternal destiny assured when Adjuster fusion proclaims to the universe that such an ascender has made the final and irrevocable choice to live the Father’s will.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있고, 선택의 권능이 남아 있는 한, 신적인 뜻을 반복적으로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최종적 파멸은 그가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는 권능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녀들의 필요와 청원에 대하여 아버지의 심정은 결코 닫히지 않습니다. 그의 신적인 뜻을 행하고자 – 그를 알고자 하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 하는 욕망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영원히 잃어버릴 때에만, 아버지의 이끄시는 권능에 대하여 그의 자손이 그들 심정의 문을 영원히 닫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승자가 아버지의 뜻을 살기로 최종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였음을, 조절자 융합이 우주에 선포할 때,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확실히 보장됩니다.

5:1.12 (64.3) The great God makes direct contact with mortal man and gives a part of his infinite and eternal and incomprehensible self to live and dwell within him. God has embarked upon the eternal adventure with man. If you yield to the leadings of the spiritual forces in you and around you, you cannot fail to attain the high destiny established by a loving God as the universe goal of his ascendant creatures from the evolutionary worlds of space. 위대하신 하나님은 죽어야 할 사람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시며 그의 내부에 살고 거주하기 위하여, 그의 무한하고 영원하며 헤아릴 수 없는 자아의 일부분을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모험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과 우리 둘레에 있는 영적 힘들의 안내를 따른다면, 우리는 공간 진화 세계들로부터 상승하는 그의 창조물들의 우주 목표로서,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그 높은 운명을 달성하는데 실패할 수 없습니다.

2.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의 현존

170307 요일4:12-13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12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if we love one another, God lives in us and his love is made complete in us. 13We know that we live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s given us of his Spirit.

5:2.1 (64.4) The physical presence of the Infinite is the reality of the material universe. The mind presence of Deity must be determined by the depth of individual intellectual experience and by the evolutionary personality level. The spiritual presence of Divinity must of necessity be differential in the universe. It is determined by the spiritual capacity of receptivity and by the degree of the consecration of the creature’s will to the doing of the divine will. 무한자의 물리적 현존은 물질 우주의 실체입니다. 신(Deity 神)의 마음 현존은 개인마다 지적 체험의 깊이와, 진화적 고유성 차원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합니다. 신성Divinity의 영적 현존은 우주에서 차별될 필요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수용력과, 신적 뜻을 행하려는 창조물의 의지가 헌신한 정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5:2.2 (64.5) God lives in every one of his spirit-born sons. The Paradise Sons always have access to the presence of God,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all of his creature personalities have access to the “bosom of the Father.” This refers to the personality circuit, whenever, wherever, and however contacted, or otherwise entails personal, self-conscious contact and communion with the Universal Father, whether at the central abode or at some other designated place, as on one of the seven sacred spheres of Paradise.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탄생한 아들들 각자 안에 살아 계십니다. 천국의 아들들Sons은 하나님의 현존인 “아버지의 오른손”에 언제나 출입할 수 있으며, 그의 모든 창조물인 고유성들은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 접촉되든지 고유성 순환회로에 관한 것이며, 혹은 그렇지 않다면, 우주 아버지가 중앙 거주지 또는 천국의 일곱 신성한 구체들 중 하나처럼, 다른 지정된 장소에서, 개인적이며 자아-의식적 접촉과 교제를 필요로 합니다.

5:2.3 (64.6) The divine presence cannot, however, be discovered anywhere in nature or even in the lives of God-knowing mortals so fully and so certainly as in your attempted communion with the indwelling Mystery Monitor, the Paradise Thought Adjuster. What a mistake to dream of God far off in the skies when the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lives within your own mind! 그러나 신적 현존은 자연의 그 어디서나 또는 심지어 하나님을-아는 사람들의 삶에서 발견되기 보다는, 내주하는 신비 감시자, 천국의 생각조절자와 우리가 교제하려고 시도할 때처럼 그렇게 충분하고 분명하게 발견될 수는 없습니다. 우주 아버지의 영이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살아계시는데, 하늘 멀리에 떨어져 있는 하나님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170308 엡5:8-9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두움 속에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믿고 빛 가운데 살고 있으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9 빛의 생활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8 For you were once darkness, but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Live as children of light 9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5:2.4 (64.7) It is because of this God fragment that indwells you that you can hope, as you progress in harmonizing with the Adjuster’s spiritual leadings, more fully to discern the presence and transforming power of those other spiritual influences that surround you and impinge upon you but do not function as an integral part of you. The fact that you are not intellectually conscious of close and intimate contact with the indwelling Adjuster does not in the least disprove such an exalted experience. The proof of fraternity with the divine Adjuster consists wholly in the nature and extent of the fruits of the spirit which are yielded in the life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believer. “By their fruits you shall know them.” 우리들에게 내주하시는 이 하나님의 단편 때문에, 우리가 조절자의 영적인 인도하심과 조화를 이루어 진보할수록,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와 마주치지만 우리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활동하지 않는, 다른 영적인 영향들의 존재와 변화시키는 권능을 우리는 더욱 온전히 식별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주하는 조절자와 가까우며 친밀한 접촉에 대해 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은, 그 높은 체험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조절자와의 형제우애관계를 나누고 있다는 증거는 전적으로 개별 신자의 생활 체험 속에서 맺는 영의 열매들의 본성과 정도로 구성됩니다. “그들의 열매로서 너희는 저희를 알지니라.”

5:2.5 (65.1) It is exceedingly difficult for the meagerly spiritualized, material mind of mortal man to experience marked consciousness of the spirit activities of such divine entities as the Paradise Adjusters. As the soul of joint mind and Adjuster creation becomes increasingly existent, there also evolves a new phase of soul consciousness which is capable of experiencing the presence, and of recognizing the spirit leadings and other supermaterial activities, of the Mystery Monitors. 빈약하게 영성화된 사람의 물질적 마음으로, 천국 조율자처럼 그런 신적 실재들의 영 활동을 뚜렷한 의식으로 체험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과 조절자가 함께 창조한 혼이 더욱 더 실재함으로, 새로운 단계의 혼 의식이 역시 진화하는데, 이것은 신비 감시자들의 영적 인도하심과 다른 초물질 활동들의 현존을 체험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5:2.6 (65.2) The entire experience of Adjuster communion is one involving moral status, mental motivation, and spiritual experience. The self-realization of such an achievement is mainly, though not exclusively, limited to the realms of soul consciousness, but the proofs are forthcoming and abundant in the manifestation of the fruits of the spirit in the lives of all such inner-spirit contactors. 조절자와 교제하는 전체의 체험은 도덕적 지위, 정신적 동기부여 그리고 영적 체험을 하나로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아-실현의 성취는, 배타적은 아니더라도, 주로 혼 의식의 영역에 국한되지만, 그 증거들은 그렇게 내부-영과 접촉하는 모든 자들의 삶 속에서 영 열매들의 표현으로 풍부히 드러나게 됩니다.

3. True Worship 참된 경배

170309 요4:23 아버지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오는데 바로 이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5:3.1 (65.3) Though the Paradise Deities, from the universe standpoint, are as one, in their spiritual relations with such beings as inhabit Urantia they are also three distinct and separate persons.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Godheads in the matter of personal appeals, communion, and other intimate relations. In the highest sense, we worship the Universal Father and him only. True, we can and do worship the Father as he is manifested in his Creator Sons, but it is the Father, directly or indirectly, who is worshiped and adored.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천국 신(Deities 神)들은 하나로 존재하시지만, 지구(유란시아)에 거주하는 그러한 존재들과 맺는 그들의 영적 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또한 별개의 분리된 세 개인들이십니다. 개인적인 호소와 친교, 그리고 다른 친밀한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신위(神位 Godheads)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최고의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 아버지, 오직 그 분만을 경배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그의 창조주 아들들 안에서 계시되는 그 아버지를 경배할 수 있고 그렇게 하지만,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경배와 찬미를 받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5:3.2 (65.4) Supplications of all kinds belong to the realm of the Eternal Son and the Son’s spiritual organization. Prayers, all formal communications, everything except adoration and worship of the Universal Father, are matters that concern a local universe; they do not ordinarily proceed out of the realm of the jurisdiction of a Creator Son. But worship is undoubtedly encircuited and dispatched to the person of the Creator by the function of the Father’s personality circuit. We further believe that such registry of the homage of an Adjuster-indwelt creature is facilitated by the Father’s spirit presence. There exists a tremendous amount of evidence to substantiate such a belief, and I know that all orders of Father fragments are empowered to register the bona fide adoration of their subjects acceptably in th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The Adjusters undoubtedly also utilize direct prepersonal channels of communication with God, and they are likewise able to utilize the spirit-gravity circuits of the Eternal Son. 모든 종류의 간청(懇請)은 영원하신 아들과 아들의 영적 조직의 영역에 속합니다. 기도, 모든 정식의 교통, 우주 아버지께 드려지는 찬미와 경배를 제외한 모든 것은 지역우주에 관련된 일들입니다. 그것들(기도들)은 대개 창조주 아들의 관할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배는 아버지의 고유성 순환회로 기능에 의해 의심할 여지없이 순환회로에 연결되어 창조주의 개인에게로 급히 전송됩니다. 더 나아가서 조절자-내주 창조물들의 그러한 경의(敬意)를 등록하는 기록은 아버지의 영 현존에 의해 용이해진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입증하는 굉장히 많은 증거가 있으며, 신성한 조언자는 아버지 단편들의 모든 계층이, 그들 주체들의 진실한 찬미를 우주 아버지의 현존 안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록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조절자들은 또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전(前)고유적 통로들을 직접 활용하며, 그들은 영원 아들의 영-중력 순환회로들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5:3.3 (65.5) Worship is for its own sake; prayer embodies a self- or creature-interest element; that is the great difference between worship and prayer. There is absolutely no self-request or other element of personal interest in true worship; we simply worship God for what we comprehend him to be. Worship asks nothing and expects nothing for the worshiper. We do not worship the Father because of anything we may derive from such veneration; we render such devotion and engage in such worship as a natural and spontaneous reaction to the recognition of the Father’s matchless personality and because of his lovable nature and adorable attributes. 경배는 그 자체를 위한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이나 창조물에게 이익이 되는 요소를 포함합니다. 이것이 경배와 기도의 커다란 차이입니다. 참된 경배에는 자신을 위한 요청이나 다른 개인적 이익의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헤아려 이해하는대로 하나님을 경배할 뿐입니다. 경배는 경배자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아버지를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비할 데 없는 고유성을 깨달음에 대해 자연스러우면서도 자발적인 반응으로서, 또한 그의 사랑할 만한 본성과 찬미할만한 속성들 때문에 그렇게 헌신을 바치고 그런 경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170310 골2:9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신적 성품이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5:3.4 (65.6) The moment the element of self-interest intrudes upon worship, that instant devotion translates from worship to prayer and more appropriately should be directed to the person of the Eternal Son or the Creator Son. But in practical religious experience there exists no reason why prayer should not be addressed to God the Father as a part of true worship. 자아-이익의 요소가 경배에 끼어드는 순간, 즉시 그 헌신은 경배에서 기도로 환원되고 오히려 영원 아들 또는 창조주 아들의 개인에게 적합하도록 방향이 옮겨집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는, 기도가 참된 경배의 일부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져서는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5:3.5 (66.1) When you deal with the practical affairs of your daily life, you are in the hands of the spirit personalities having origin in the Third Source and Center; you are co-operating with the agencies of the Conjoint Actor. And so it is: You worship God; pray to, and commune with, the Son; and work out the details of your earthly sojourn in connection with the intelligences of the Infinite Spirit operating on your world and throughout your universe. 우리가 우리 일상생활의 실제적 일들을 다룰 때, 우리는 셋째근원이며 중심에 기원을 갖는 영 고유성들의 통제 아래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공동 행위자의 대리자들과 협동하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아들에게 기도하고 그와 교제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계와 우리 우주에 두루 활동하시는 무한 영의 지능존재들과 관련하며,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일어나는 세부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5:3.6 (66.2) The Creator or Sovereign Sons who preside over the destinies of the local universes stand in the place of both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of Paradise. These Universe Sons receive,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adoration of worship and give ear to the pleas of their petitioning subjects throughout their respective creations. To the children of a local universe a Michael Son is, to all practical intents and purposes, God. He is the local universe personification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The Infinite Spirit maintains personal contact with the children of these realms through the Universe Spirits, the administrative and creative associates of the Paradise Creator Sons. 지역우주들의 운명을 주관하는 창조주 또는 주권자 아들들은 천국의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 두 분의 자리를 대신하십니다. 이 우주 아들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경배의 찬미를 받고, 그들 각자의 창조계에 두루 탄원하는 그들 백성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지역우주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모든 실제적 의도와 목적들에 대해서 미가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지역우주에 개인화로 구현된 분이십니다. 무한 영은 우주 영(靈)들, 천국 창조주 아들들의 행정적이며 창조적인 동료들을 통하여 이 영역에 속한 자녀들과 개인적 접촉을 유지하십니다.

170314 계19: 10 내가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나도 너와 예수님을 증거하는 네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다 예언의 영을 받아서 하는 것뿐이니 너는 하나님에게만 경배하여라.’ At this I fell at his feet to worship him. But he said to me, “Do not do it! I am a fellow servant with you and with your brothers who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Worship God! For the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

5:3.7 (66.3) Sincere worship connotes the mobilization of all the powers of the human personality under the dominance of the evolving soul and subject to the divine directionization of the associated Thought Adjuster. The mind of material limitations can never become highly conscious of the real significance of true worship. Man’s realization of the reality of the worship experience is chiefly determined by the developmental status of his evolving immortal soul. The spiritual growth of the soul takes place wholly independently of the intellectual self-consciousness. 진지한 경배는 진화하는 혼의 지배와 연합된 생각조절자의 신적 방향 지도 아래에서, 인간 고유성의 모든 권능이 동원됨을 의미합니다. 물질적 한계를 갖는 마음은 참된 경배의 실제 의의(意義)를 결코 깊이 의식할 수 없습니다. 경배 체험의 실체에 대한 사람의 깨달음은 주로 그의 진화하는 불멸 혼의 발달 단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혼의 영적 성장은 지적 자아-의식과는 전적으로 독립하여 일어납니다.

5:3.8 (66.4) The worship experience consists in the sublime attempt of the betrothed Adjuster to communicate to the divine Father the inexpressible longings and the unutterable aspirations of the human soul — the conjoint creation of the God-seeking mortal mind and the God-revealing immortal Adjuster. Worship is, therefore, the act of the material mind’s assenting to the attempt of its spiritualizing self, under the guidance of the associated spirit, to communicate with God as a faith son of the Universal Father. The mortal mind consents to worship; the immortal soul craves and initiates worship; the divine Adjuster presence conducts such worship in behalf of the mortal mind and the evolving immortal soul. True worship, in the last analysis, becomes an experience realized on four cosmic levels: the intellectual, the morontial, the spiritual, and the personal — the consciousness of mind, soul, and spirit, and their unification in personality. 경배 체험은 합일을 약속하는 조절자가 인간 혼의─하나님을-찾는 죽어야 할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을-계시하는 불멸의 조절자가 공동으로 창조하는─형언할 수 없는 염원들과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갈망들을, 신적 아버지에게 전달하려는 숭고한 시도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경배는, 연합된 영의 안내를 따라 그의 영성화하는 자아가 우주 아버지의 신앙 아들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시도에 물질적 마음이 동의하는 행위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의 마음은 경배에 동의하며, 불멸의 혼은 경배를 갈망하고 일으키며, 신적 조절자 현존은 죽을 인간의 마음과 진화하는 불멸 혼을 대신하여 그러한 경배로 인도합니다. 참된 경배는,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결국 네 가지의 우주적cosmic 차원; 지적, 부활체적, 영적, 그리고 고유적 차원들─마음, 혼 그리고 영의 인식과 고유성 안에서의 그것들의 통합─에서 실현되는 체험이 됩니다.

4. God in Religion 종교에서의 하나님

170419 사26:3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 You will keep in perfect peace him whose mind is steadfast, because he trusts in you.

5:4.1 (66.5) The morality of the religions of evolution drives men forward in the God quest by the motive power of fear. The religions of revelation allure men to seek for a God of love because they crave to become like him. But religion is not merely a passive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 and “surety of survival”; it is a living and dynamic experience of divinity attainment predicated on humanity service. 진화 종교들의 도덕은 하나님 탐구에 있어서, 두려움이라는 원동력에 의해 사람들을 앞으로 몰아갑니다. 계시 종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을 찾도록,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그러나 종교는 “절대적 의존”과 “생존의 보장”이라는 수동적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성 봉사에 입각한 신적 성취의 살아있는 체험이며 역동적인 체험입니다.

5:4.2 (66.6) The great and immediate service of true religion is the establishment of an enduring unity in human experience, a lasting peace and a profound assurance. With primitive man, even polytheism is a relative unification of the evolving concept of Deity; polytheism is monotheism in the making. Sooner or later, God is destined to be comprehended as the reality of values, the substance of meanings, and the life of truth. 참된 종교의 위대하며 즉각적인 봉사는, 인간 체험 속에서 지속적인 통일성, 즉 계속되는 평화와 깊은 확신의 수립입니다. 원시인에게는 다신교(多神敎) 조차 신(Deity 神)에 대한 진화적 개념이 상대적으로 통일된 것입니다. 다신교는 형성 단계에 있는 일신교(一神敎)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은 가치의 실체, 의미의 본체, 그리고 진리의 생명으로 이해되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5:4.3 (67.1) God is not only the determiner of destiny; he is man’s eternal destination. All nonreligious human activities seek to bend the universe to the distorting service of self; the truly religious individual seeks to identify the self with the universe and then to dedicate the activities of this unified self to the service of the universe family of fellow beings, human and superhuman. 하나님은 운명의 결정자이시며 사람의 영원한 목적지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종교적 활동은 우주를 자아의 왜곡된 봉사에 따르도록 추구하지만, 참으로 종교적인 개별존재는 자아를 우주와 동일시한 후, 통일된 이 자아의 행위를, 동료 존재들, 즉 인간이나 초인간으로 구성된 우주 가족에 봉사하려고 애씁니다.

5:4.4 (67.2) The domains of philosophy and art intervene between the nonreligious and the religious activities of the human self. Through art and philosophy the material-minded man is inveigled into the contemplation of the spiritual realities and universe values of eternal meanings. 철학과 예술 분야는 인간 자아의 비종교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예술과 철학을 통하여, 물질적-마음을 지닌 사람은 영원한 의미의 영적 실체와 우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유인됩니다.

5:4.5 (67.3) All religions teach the worship of Deity and some doctrine of human salvation. The Buddhist religion promises salvation from suffering, unending peace; the Jewish religion promises salvation from difficulties, prosperity predicated on righteousness; the Greek religion promised salvation from disharmony, ugliness, by the realization of beauty; Christianity promises salvation from sin, sanctity; Mohammedanism provides deliverance from the rigorous moral standards of Judaism and Christianity. The religion of Jesus is salvation from self, deliverance from the evils of creature isolation in time and in eternity. 모든 종교는 신(Deity 神)에 대한 경배와 인간 구원에 대한 교리를 가르칩니다. 불교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끝 없는 평화를 약속합니다. 유대교는 어려움으로부터 구원받는, 공의(righteousness)에 근거한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리스(헬라) 종교는 부조화와 추함으로부터 구원받는, 아름다움의 실현을 약속합니다. 기독교는 죄로부터 구원받는, 거룩함sanctity을 약속합니다. 회교(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엄격한 도덕 기준으로부터의 해방을 제공합니다. 예수의 종교는 자아로부터 구원으로, 시간과 영원 속에서 창조물이 고립되어 있는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제공합니다.

5:4.6 (67.4) The Hebrews based their religion on goodness; the Greeks on beauty; both religions sought truth. Jesus revealed a God of love, and love is all-embracing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히브리인들의 종교는 선(善)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 기초를 두며, 두 종교 모두 진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 사랑은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170420 빌2:15 그러면 삐뚤어지고 잘못된 세대 가운데서 여러분이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끗하고 순수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so that you may become blameless and pure, children of God without fault in a crooked and depraved generation, in which you shine like stars in the universe

5:4.7 (67.5) The Zoroastrians had a religion of morals; the Hindus a religion of metaphysics; the Confucianists a religion of ethics. Jesus lived a religion of service. All these religions are of value in that they are valid approaches to the religion of Jesus. Religion is destined to become the reality of the spiritual unification of all that is good, beautiful, and true in human experience.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도덕의 종교를 가졌으며, 힌두 교인들은 형이상학의 종교를 가졌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윤리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봉사의 종교를 실천하셨습니다. 이 모든 종교들은 예수님의 종교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가치가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체험 가운데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통합하는 실체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5:4.8 (67.6) The Greek religion had a watchword “Know yourself”; the Hebrews centered their teaching on “Know your God”; the Christians preach a gospel aimed at a “knowledge of the Lord Jesus Christ”; Jesus proclaimed the good news of “knowing God, and yourself as a son of God.” These differing concepts of the purpose of religion determine the individual’s attitude in various life situations and foreshadow the depth of worship and the nature of his personal habits of prayer. The spiritual status of any religion may be determined by the nature of its prayers. 그리스 종교는 “너 자신을 알라”는 표어가 있었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알라”는 가르침에 집중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목표로 하는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라”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종교의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들은 다양한 생활환경 가운데 있는 개별존재의 태도를 결정하며, 경배의 깊이와 그의 개인적 기도 습관의 본질을 미리 드러냅니다. 어떤 종교든지 그 영적 상태는 기도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5:4.9 (67.7) The concept of a semihuman and jealous God is an inevitable transition between polytheism and sublime monotheism. An exalted anthropomorphism is the highest attainment level of purely evolutionary religion. Christianity has elevated the concept of anthropomorphism from the ideal of the human to the transcendent and divine concept of the person of the glorified Christ. And this is the highest anthropomorphism that man can ever conceive. 절반(折半)의 인간으로서 질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다신교에서 숭고한 일신교(一神敎)로 넘어가는 사이에 있는 불가피한 과도기적 현상입니다. 높여진 신인 동형 동성론(神人 同形 同性論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神에 대한 사상)은 순전한 진화종교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상ideal에서부터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개인 존재로서 초월적이며 신적인 개념으로 높아진 신인 동형 동성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인 동형 동성론(신을 인격화한 것)입니다.

5:4.10 (67.8) The Christian concept of God is an attempt to combine three separate teachings: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개념은 분리된 세 가르침들을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5:4.11 (67.9) 1. The Hebrew concept — God as a vindicator of moral values, a righteous God. 히브리 개념─도덕적 가치의 옹호자로서의 공의로운 하나님.

5:4.12 (67.10) 2. The Greek concept — God as a unifier, a God of wisdom. 그리스(헬라) 개념─통합자로서의 지혜의 하느님.

5:4.13 (68.1) 3. Jesus’ concept — God as a living friend, a loving Father, the divine presence. 예수님의 개념─살아 계시는 친구로서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신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5:4.14 (68.2) It must therefore be evident that composite Christian theology encounters great difficulty in attaining consistency. This difficulty is further aggravated by the fact that the doctrines of early Christianity were generally based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ree different persons: Philo of Alexandria, Jesus of Nazareth, and Paul of Tarsus. 그러므로 혼합된 기독교 신학은 일관성 유지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어려움은, 초기 기독교 교리들이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나사렛 예수, 그리고 다소의 바울, 즉 서로 다른 이 세 사람 각자의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5:4.15 (68.3) In the study of the religious life of Jesus, view him positively. Think not so much of his sinlessness as of his righteousness, his loving service. Jesus upstepped the passive love disclosed in the Hebrew concept of the heavenly Father to the higher active and creature-loving affection of a God who is the Father of every individual, even of the wrongdoer. 예수님의 종교적 일생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 죄가 없다는 사실 보다는 그의 공의(正義)로우심과 그의 사랑스러운 봉사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에 대한 히브리 개념 속에 드러난 수동적 사랑에서, 모든 개별존재, 심지어 그릇된 행동을 범한 자에게도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더 적극적인 사랑으로 창조물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애정으로 증진시켰습니다.

5. The Consciousness of God 하나님 의식(意識)

170421 호6:3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동이 트는 것처럼 확실하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봄비같이 그가 우리에게 나오실 것이다.’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5:5.1 (68.4) Morality has its origin in the reason of self-consciousness; it is superanimal but wholly evolutionary. Human evolution embraces in its unfolding all endowments antecedent to the bestowal of the Adjusters and to the pouring out of the Spirit of Truth. But the attainment of levels of morality does not deliver man from the real struggles of mortal living. Man’s physical environment entails the battle for existence; the social surroundings necessitate ethical adjustments; the moral situations require the making of choices in the highest realms of reason; the spiritual experience (having realized God) demands that man find him and sincerely strive to be like him. 도덕은 스스로를 의식하는(자아-의식)의 이성(理性)reason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도덕은 동물 성향을 초월하지만 순전히 진화된 것입니다. 인간의 진화는 그것이 전개되면서, 조절자들이 수여되고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기 전에 있던 자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도덕 수준에 다다르는 것은 필사자의 삶에서 생기는 진짜 투쟁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물리적 환경은 살기 위한 싸움을 수반하고, 사회의 배경은 윤리적 조정을 필요로 합니다. 도덕적 상황은 이성의 가장 높은 분야에서 선택하기를 요구하며, 영적 체험(하나님을 깨달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그처럼 되도록 진지하게 애쓰기를 요구합니다.

5:5.2 (68.5) Religion is not grounded in the facts of science, the obligations of society, the assumptions of philosophy, or the implied duties of morality. Religion is an independent realm of human response to life situations and is unfailingly exhibited at all stages of human development which are postmoral. Religion may permeate all four levels of the realization of values and the enjoyment of universe fellowship: the physical or material level of self-preservation; the social or emotional level of fellowship; the moral or duty level of reason; the spiritual level of the consciousness of universe fellowship through divine worship. 종교는 과학의 사실, 사회에 대한 책임, 철학의 가정(假定), 또는 도덕이 암시하는 의무에 기초를 두지 않습니다. 종교는 생활 형편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하는 독립된 분야이며, 도덕이 생긴 뒤 인간이 성장하는 모든 단계에서, 종교는 어김없이 드러납니다. 종교는 가치를 실현하고 우주 친교를 누리는 네 가지의 모든 수준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아를 보호하는 물리적 수준, 곧 물질 수준. 친교하는 사회 수준, 곧 감정의 수준. 이성이 작용하는 도덕 수준, 곧 의무 수준. 신적 경배를 통하여 우주 친교를 의식하는 영적 수준.

5:5.3 (68.6) The fact-seeking scientist conceives of God as the First Cause, a God of force. The emotional artist sees God as the ideal of beauty, a God of aesthetics. The reasoning philosopher is sometimes inclined to posit a God of universal unity, even a pantheistic Deity. The religionist of faith believes in a God who fosters survival, the Father in heaven, the God of love. 사실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하나님을 첫째 근원, 힘force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적인 예술가는 하나님을 아름다움의 이상(理想), 미학의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이치를 따지는 철학자는 때때로, 우주를 통일하는 하나님, 심지어 범신론적 신으로 가정합니다. 신앙이 있는 종교인은 살아남는(생존) 것을 보살피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5:5.4 (68.7) Moral conduct is always an antecedent of evolved religion and a part of even revealed religion, but never the whole of religious experience. Social service is the result of moral thinking and religious living. Morality does not biologically lead to the higher spiritual levels of religious experience. The adoration of the abstract beautiful is not the worship of God; neither is exaltation of nature nor the reverence of unity the worship of God. 도덕적 행위는 언제나 진화된 종교에 앞서며, 계시된 종교의 일부가 되는 일도 있지만, 결코 종교적 체험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도덕적 생각과 종교적 생활의 결과입니다. 도덕은 생물학적으로 종교적 체험을 가지는 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추상적 아름다움을 찬미함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숭배하는 것이나 통일성을 경외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아닙니다.

5:5.5 (68.8) Evolutionary religion is the mother of the science, art, and philosophy which elevated man to the level of receptivity to revealed religion, including the bestowal of Adjusters and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The evolutionary picture of human existence begins and ends with religion, albeit very different qualities of religion, one evolutional and biological, the other revelational and periodical. And so, while religion is normal and natural to man, it is also optional. Man does not have to be religious against his will. 진화된 종교는 과학•예술•철학의 어머니요, 이것은 조절자가 수여되고 진리의 영의 오심까지 포함하여, 계시된 종교를 받아드리는 수준까지 사람을 높여 주었습니다. 인간 존재의 진화적 묘사는, 종교에서 시작하고 종교에서 끝이 납니다. 그 묘사는 종교의 질적 면에서 아주 달라서, 하나는 진화적•생물학적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적이고 주기성이 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사람에게는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한편, 또한 사람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뜻을 거역하여 종교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170425 호6:6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며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보다 나를 아는 것을 원한다. For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and acknowledgment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5:5.6 (69.1) Religious experience, being essentially spiritual, can never be fully understood by the material mind; hence the function of theology, the psychology of religion. The essential doctrine of the human realization of God creates a paradox in finite comprehension. It is well-nigh impossible for human logic and finite reason to harmonize the concept of divine immanence, God within and a part of every individual, with the idea of God’s transcendence, the divine domination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se two essential concepts of Deity must be unified in the faith-grasp of the concept of the transcendence of a personal God and in the realization of the indwelling presence of a fragment of that God in order to justify intelligent worship and validate the hope of personality survival. The difficulties and paradoxes of religion are inherent in the fact that the realities of religion are utterly beyond the mortal capacity for intellectual comprehension. 종교적 체험은 본질적으로 영적이기 때문에 물질적 마음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 즉 종교의 심리학 기능으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필수적 교리는 하나님을 제한적으로 깨닫고 이해하기 때문에 역설(逆說)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 논리와 유한한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 내부에서 각 개별존재의 일부분으로 계신다는 신적 내재성의 개념을, 우주들의 우주를 신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초월성 관념과 조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신(神)에 대한 본질적 개념은, 고유한 하나님에 대한 초월성 개념을 신앙으로 파악하고, 바로 그 하나님의 단편이, 지적 경배를 정당화하고 고유성 생존의 소망을 확증하기 위해, 내주하며 현존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합일되어야만 합니다. 종교의 실체는 지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을 철저히 벗어난다는 사실 때문에, 종교의 난제들과 역설들은 본래부터 선천적입니다.

5:5.7 (69.2) Mortal man secures three great satisfactions from religious experience, even in the days of his temporal sojourn on earth: 사람은 땅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종교적 체험에서 세 가지 큰 만족감을 얻게 됩니다.

5:5.8 (69.3) 1. Intellectually he acquires the satisfactions of a more unified human consciousness. 지적으로 사람은 더욱 통일된 인간 의식에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5:5.9 (69.4) 2. Philosophically he enjoys the substantiation of his ideals of moral values. 철학적으로 사람은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 자신의 이상(理想)이 구체화되는 것을 즐깁니다.

5:5.10 (69.5) 3. Spiritually he thrives in the experience of divine companionship, in the spiritual satisfactions of true worship. 영적으로 사람은 참된 경배에서 영적 만족을 누리면서, 신적 동반자 신분을 체험하면서 성장합니다.

5:5.11 (69.6) God-consciousness, as it is experienced by an evolving mortal of the realms, must consist of three varying factors, three differential levels of reality realization. There is first the mind consciousness — the comprehension of the idea of God. Then follows the soul consciousness — the realization of the ideal of God. Last, dawns the spirit consciousness — the realization of the spirit reality of God. By the unification of these factors of the divine realization, no matter how incomplete, the mortal personality at all times overspreads all conscious levels with a realization of the personality of God. In those mortals who have attained the Corps of the Finality all this will in time lead to the realization of the supremacy of God and may subsequently eventuate in the realization of the ultimacy of God, some phase of the absonite superconsciousness of the Paradise Father. 하나님-의식은, 그 영역의 진화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것처럼, 변화하는 세 요소들, 즉 실체를 의식하는 서로 다른 세 차원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로 마음 의식 – 하나님의 관념idea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혼 의식 – 하나님의 이상(ideal理想)을 깨닫는 것이 따라옵니다. 마지막으로 영 의식 – 하나님이 영 실체이심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신적 깨달음의 이 요소들이 통합되어, 아무리 불완전 하더라도 인간의 고유성은, 하나님의 고유성을 깨달으면서 모든 의식 차원들에 항상 가득 퍼지게 됩니다. 최종 무리단에 도달한 그 인간의 경우, 이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최극위 하나님 자각으로 이끌리고, 그 다음에는 천국 아버지의 아(亞)절대 초(超)의식의 어떤 단계인 궁극위 하나님 자각에 결국 이르게 될 것입니다.

170426 요일5: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I write these things to you who believe in the name of the Son of God so that you may know that you have eternal life.

5:5.12 (69.7) The experience of God-consciousness remains the same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ut with each advancing epoch in human knowledge the philosophic concept and the theologic definitions of God must change. God-knowingness, religious consciousness, is a universe reality, but no matter how valid (real) religious experience is, it must be willing to subject itself to intelligent criticism and reasonable philosophic interpretation; it must not seek to be a thing apart in the totality of human experience. 하나님을 의식하는 체험은 대대로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지식knowledge이 진보하는 각 신(新)시대마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신학적 정의(定意)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합니다. 종교적 의식(意識)으로 하나님을-아는 것은 우주적 실체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이 얼마나 실제로 효력이 있든지, 그것은 지능적 비평과 합당한reasonable 철학적 해석을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 종교적 의식은 전체적인 인간 체험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되도록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5:5.13 (69.8) Eternal survival of personality is wholly dependent on the choosing of the mortal mind, whose decisions determine the survival potential of the immortal soul. When the mind believes God and the soul knows God, and when, with the fostering Adjuster, they all desire God, then is survival assured. Limitations of intellect, curtailment of education, deprivation of culture, impoverishment of social status, even inferiority of the human standards of morality resulting from the unfortunate lack of educational, cultural, and social advantages, cannot invalidate the presence of the divine spirit in such unfortunate and humanly handicapped but believing individuals. The indwelling of the Mystery Monitor constitutes the inception and insures the possibility of the potential of growth and survival of the immortal soul. 고유성이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이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는데, 그 마음의 결정이 불멸의 혼이 잠재적으로 살아남는 것을 확증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믿고 혼이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양육하는 조절자와 함께 마음과 혼 모두가 하나님을 갈망할 때, 그 때 생존이 보장됩니다. 지능의 한계, 교육의 부족, 교양의 결핍, 사회적 지위의 열악함, 그리고 심지어 교육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이점이 불행하게 부족하여 초래된 인간 도덕 수준의 열등함조차, 그렇게 불행하고 인간적으로 불리한 장애가 있어도 믿음을 가진 개별존재 속에 있는 신적 영의 현존을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신비 감시자의 내주가 불멸 혼의 성장과 생존의 잠재에 대한 시초를 이루고, 그 가능성을 보장합니다.

5:5.14 (70.1) The ability of mortal parents to procreate is not predicated on their educational, cultural, social, or economic status. The union of the parental factors under natural conditions is quite sufficient to initiate offspring. A human mind discerning right and wrong and possessing the capacity to worship God, in union with a divine Adjuster, is all that is required in that mortal to initiate and foster the production of his immortal soul of survival qualities if such a spirit-endowed individual seeks God and sincerely desires to become like him, honestly elects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출산하는 인간 부모의 능력은 그들의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지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연적 환경 아래에서 어버이로서의 요소가 결합하면 아주 충분하게 자손을 낳게 됩니다. 신적 조절자와 결합해서, 옳고 그릇됨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살아남는 자질을 갖고 있는 불멸의 혼이 생산되는 시작과 육성에 필요한 모든 것이며, 그렇게 영이 부여된 개별 존재들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진지하게 갈망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정직하게 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6. The God of Personality 고유성의 하나님

170428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하겠다.’ But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to myself.”

5:6.1 (70.2) The Universal Father is the God of personalities. The domain of universe personality, from the lowest mortal and material creature of personality status to the highest persons of creator dignity and divine status, has its center and circumference in the Universal Father. God the Father is the bestower and the conservator of every personality. And the Paradise Father is likewise the destiny of all those finite personalities who wholeheartedly choose to do the divine will, those who love God and long to be like him. 우주 아버지는 고유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유성 지위의 가장 낮은 인간과 물질적 창조체로부터 창조자의 존엄과 신적 지위에 있는 가장 높은 개인에 이르기까지, 우주 고유성의 권역은 그 중심과 테두리가 우주의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고유성의 증여자인 동시에 보존자이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신적 뜻을 행하기로 마음을 다하여 선택한 모든 유한한 고유성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의 운명입니다.

5:6.2 (70.3) Personality is one of the unsolved mysteries of the universes. We are able to form adequate concepts of the factors entering into the make-up of various orders and levels of personality, but we do not fully comprehend the real nature of the personality itself. We clearly perceive the numerous factors which, when put together, constitute the vehicle for human personality, but we do not fully comprehend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such a finite personality. 고유성은 우주에서 풀리지 않은 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고유성의 다양한 계층과 수준을 구성하는데 들어가는 요소들의 적당한 개념들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고유성 자체의 실제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있을 때, 인간 고유성을 위한 매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뚜렷이 감지하지만, 우리는 그런 유한(有限)한 고유성의 본성과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5:6.3 (70.4) Personality is potential in all creatures who possess a mind endowment ranging from the minimum of self-consciousness to the maximum of God-consciousness. But mind endowment alone is not personality, neither is spirit nor physical energy. Personality is that quality and value in cosmic reality which is exclusively bestowed by God the Father upon these living systems of the associated and co-ordinated energies of matter, mind, and spirit. Neither is personality a progressive achievement. Personality may be material or spiritual, but there either is personality or there is no personality. The other-than-personal never attains the level of the personal except by the direct act of the Paradise Father. 고유성은 자아를 의식하는 최소한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식하는 최대한까지의 범위에서 마음 자질을 소유하는 모든 창조물 안에 잠재합니다. 그러나 마음 자질 자체만으로는 고유성이 아니며, 또한 영도 아니고 물리적 에너지도 아닙니다. 고유성은 물질, 마음, 그리고 영이 연합되고 조정된 에너지가 이 살아있는 조직에 아버지 하나님 홀로 증여하신, 질서가 있는 우주 실체 안에 있는 본질과 가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유성은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유성은 물질적 또는 영적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고유성이 있든지 또는 고유성이 없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고유적이지 않은 것은 천국 아버지의 직접적 활동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유적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170502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오는 그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the Father who sent me draws him,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5:6.4 (70.5) The bestowal of personality is the exclusive function of the Universal Father, the personalization of the living energy systems which he endows with the attributes of relative creative consciousness and the freewill control thereof. There is no personality apart from God the Father, and no personality exists except for God the Father. The fundamental attributes of human selfhood, as well as the absolute Adjuster nucleus of the human personality, are the bestowals of the Universal Father, acting in his exclusively personal domain of cosmic ministry. 고유성의 증여는 우주 아버지의 독점(獨占)적인 기능으로,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를 고유성화하는 것이며, 우주 아버지는 그 에너지 체계에 상대적인 창조적 의식의 속성을 부여하며, 그것에 자유의지 조정의 속성을 부여합니다. 어떤 고유성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어떤 고유성도 하나님 아버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 고유성의 핵(核)인 절대 조율자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아신분의 근본적 속성은 질서가 있는 우주적 돌봄에서 우주 아버지가 독점적인 고유 영역 가운데 행동하시며 주신 것입니다.

5:6.5 (70.6) The Adjusters of prepersonal status indwell numerous types of mortal creatures, thus insuring that these same beings may survive mortal death to personalize as morontia creatures with the potential of ultimate spirit attainment. For, when such a creature mind of personality endowment is indwelt by a fragment of the spirit of the eternal God, the prepersonal bestowal of the personal Father, then does this finite personality possess the potential of the divine and the eternal and aspire to a destiny akin to the Ultimate, even reaching out for a realization of the Absolute. 전(前)고유적 지위의 조절자들은 필사 창조물들의 수많은 유형들 속에 내주하며, 동일한 이 존재들은 필사적 죽음에서 살아남아, 궁극적으로 영에 도달하는 잠재성을 지닌 부활체적 창조물로 고유성화하도록 그렇게 보장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고유성을 받은 창조물의 마음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의 단편, 고유적 아버지의 전(前)고유적 선물이 내주할 때, 이 유한한 고유성은 신적이며 영원한 잠재성을 소유하고, 심지어 절대자의 실현에 접촉하면서 궁극자와 동족(同族)이 되는 운명을 열망합니다.

5:6.6 (71.1) Capacity for divine personality is inherent in the prepersonal Adjuster; capacity for human personality is potential in the cosmic-mind endowment of the human being. But the experiential personality of mortal man is not observable as an active and functional reality until after the material life vehicle of the mortal creature has been touched by the liberating divinity of the Universal Father, being thus launched upon the seas of experience as a self-conscious and a (relatively) self-determinative and self-creative personality. The material self is truly and unqualifiedly personal. 신적 고유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전(前)고유적 조절자 에게 본래부터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인간 존재가 받은 질서 있는 우주적 마음 안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필사 사람의 경험적 고유성은 활동적이며 기능적 실체로서 관찰할 수 없지만, 필사 창조물의 물질적 생명 매체가 우주 아버지의 해방시키는 신성에 접촉된 이후부터는, 자아 의식적, 상대적인 자아 결정적, 그리고 자아 창조적 고유성으로서 경험의 바다 위에서 항해에 나서게 됩니다. 물질적 자아는 진정으로 고유적이며 무조건적으로unqualifiedly 고유적입니다.

5:6.7 (71.2) The material self has personality and identity, temporal identity; the prepersonal spirit Adjuster also has identity, eternal identity. This material personality and this spirit prepersonality are capable of so uniting their creative attributes as to bring into existence the surviving identity of the immortal soul. 물질적 자아는 고유성과 정체성, 즉 일시적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전(前)고유적 영 조절자 역시 정체성, 즉 영원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물질적 고유성과 이러한 영 전(前)고유성은 그들의 창조적 속성들을 연합하여 불멸의 혼이라는 생존하는 정체성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170504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하겠다.’ But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to myself.”

5:6.8 (71.3) Having thus provided for the growth of the immortal soul and having liberated man’s inner self from the fetters of absolute dependence on antecedent causation, the Father stands aside. Now, man having thus been liberated from the fetters of causation response, at least as pertains to eternal destiny, and provision having been made for the growth of the immortal self, the soul, it remains for man himself to will the creation or to inhibit the creation of this surviving and eternal self which is his for the choosing. No other being, force, creator, or agency in all the wide universe of universes can interfere to any degree with the absolute sovereignty of the mortal free will, as it operates within the realms of choice, regarding the eternal destiny of the personality of the choosing mortal. As pertains to eternal survival, God has decreed the sovereignty of the material and mortal will, and that decree is absolute. 그렇게 불멸의 혼이 성장하도록 준비해 왔고, 사람의 내적 자아를 선행(先行) 원인에 묶여 절대 의존하는 속박 상태에서 풀어 놓으신 아버지는 비켜 서 계십니다. 지금, 사람은 이렇게 원인에 대해 응답하는 사슬에서 해방되어져 왔으며, 적어도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한, 불멸의 자아(自我)인 혼의 성장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선택하는 대로 자기의 것이 되는 이 살아남는 영원한 자아의 창조를 원하는지 아니면 금할 것인지는, 이제 사람 자신에게 남아 있습니다. 넓은 우주들의 우주 전체에 있는 어떤 다른 존재, 힘, 창조자, 혹은 대리자라도, 필사자가 지닌 자유 의지의 절대 주권에는 조금도 간섭할 수 없는데, 선택하는 필사자 고유성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는, 선택의 영역 안에서 자유 의지의 절대 주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존에 관하여, 하나님은 물질적 필사자 의지가 주권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해 오셨으며, 그 선포는 절대적입니다.

5:6.9 (71.4) The bestowal of creature personality confers relative liberation from slavish response to antecedent causation, and the personalities of all such moral beings, evolutionary or otherwise, are centered in the person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They are ever drawn towards his Paradise presence by that kinship of being which constitutes the vast and universal family circle and fraternal circuit of the eternal God. There is a kinship of divine spontaneity in all personality. 창조물에게 고유성을 주셔서 선행하는 원인에 대한 노예적 반응에서 상대적 해방을 수여하며, 그러한 모든 도덕적 존재들의 고유성은 진화적이든지 아니든지,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에 중심을 둡니다. 그 도덕적 존재들의 고유성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거대하고 우주적 가족 순환과 형제적 회로를 구성하는 존재의 친족 관계에 의해, 하나님의 천국 현존을 향해 이끌립니다. 모든 고유성 안에는 신적 자발성의 친족 관계가 있습니다.

5:6.10 (71.5) The personality circuit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is centered in the person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Paradise Father is personally conscious of, and in personal touch with, all personalities of all levels of self-conscious existence. And this personality consciousness of all creation exists independently of the mission of the Thought Adjusters. 우주들의 우주의 고유성 순환회로는 우주 아버지의 개인 안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천국 아버지는 모든 차원에 있는 자아-의식 존재의 모든 고유성들을 개인적으로 의식하고, 개인성으로 접촉하십니다. 그리고 전체 창조물에 대한 이 고유성 의식은 생각 조절자들의 사명과는 별도로 존재합니다.

5:6.11 (71.6) As all gravity is circuited in the Isle of Paradise, as all mind is circuited in the Conjoint Actor and all spirit in the Eternal Son, so is all personality circuited in the personal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is circuit unerringly transmits the worship of all personalities to the Original and Eternal Personality. 모든 중력은 천국 섬 안에 회로화 되어 있으며, 모든 마음은 공동 행위자 안에 회로화 되어 있고, 모든 영은 영원 아들 안에 회로화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고유성은 우주 아버지의 고유적 현존 안에 회로화 되어 있으며, 이 회로는 모든 고유성들의 경배를 기원적이며 영원한 고유성에게로 어김없이 전달합니다.

5:6.12 (71.7) Concerning those personalities who are not Adjuster indwelt: The attribute of choice-liberty is also bestowed by the Universal Father, and such persons are likewise embraced in the great circuit of divine love, the personality circuit of the Universal Father. God provides for the sovereign choice of all true personalities. No personal creature can be coerced into the eternal adventure; the portal of eternity opens only in response to the freewill choice of the freewill sons of the God of free will. 조절자가 내주하지 않는 그 고유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우주 아버지가 선택-해방의 속성을 주셨으며, 그러한 개인들은 신적 사랑의 위대한 회로,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 회로 안에 마찬가지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모든 고유성들이 주권을 가지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어떤 고유적 창조물도 영원한 모험을 하도록 강요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유 의지의 하나님에게 속한 자유 의지의 아들들이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응답에만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입구(入口)가 열립니다.

5:6.13 (72.1) And this represents my efforts to present the relation of the living God to the children of time. And when all is said and done, I can do nothing more helpful than to reiterate that God is your universe Father, and that you are all his planetary children.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시간에 속한 자녀들과의 관계를 진술하려는 나의 노력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나에게는, 하나님이 너희의 우주 아버지이며,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행성 자녀들임을 되풀이하는 것 이상으로 더 해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5:6.14 (72.2) [This is the fifth and last of the series presenting the narrative of the Universal Father by a Divine Counselor of Uversa.] [이것은 유버르사의 신적 조언자가 시리즈로 발표한 우주 아버지에 대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진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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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4 God’s Relation to the Universe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

Paper 4

God’s Relation to the Universe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

  1. The Universe Attitude of the Father 아버지의 우주적 태도
    Providence 섭리
  2. God and Nature 하느님과 자연
  3. God’s Unchanging Character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
  4. The Realization of God 하느님의 실제 상태
  5. Erroneous Ideas of God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4:0.1 (54.1) THE Universal Father has an eternal purpose pertaining to the material, intellectual, and spiritual phenomena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which he is executing throughout all time. God created the universes of his own free and sovereign will, and he created them in accordance with his all-wise and eternal purpose. It is doubtful whether anyone except the Paradise Deities and their highest associates really knows very much about the eternal purpose of God. Even the exalted citizens of Paradise hold very diverse opinions about the nature of the eternal purpose of the Deities. 우주 아버지는 우주들의 우주의 물질적, 지적 및 영적 현상에 관련된 영원한 목적을 갖고, 그는 모든 시간 내내 그 목적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의지로 우주들을 창조했고, 그는 모든 면에서 지혜롭고 영원한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창조했습니다. 천국 신(神)들과 그들의 가장 높은 동료들을 제외한 누구도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정말로 잘 알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고귀한 시민들조차 신(神)들의 영원한 목적의 본성에 대해 매우 다양한 의견들을 갖고 있습니다.

4:0.2 (54.2) It is easy to deduce that the purpose in creating the perfect central universe of Havona was purely the satisfaction of the divine nature. Havona may serve as the pattern creation for all other universes and as the finishing school for the pilgrims of time on their way to Paradise; however, such a supernal creation must exist primarily for the pleasure and satisfaction of the perfect and infinite Creators. 하보나의 완전한 중앙 우주를 창조한 목적은 순전히 신적 본성의 만족이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보나는 다른 모든 우주의 원형 창조계로서,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시간의 순례자들을 위한 마무리 학교로서, 도움이 됩니다. 그래도, 그런 천상의 창조계는 본래 완전하고 무한한 창조자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4:0.3 (54.3) The amazing plan for perfecting evolutionary mortals and, after their attainment of Paradise and the Corps of the Finality, providing further training for some undisclosed future work, does seem to be, at present, one of the chief concern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nd their many subdivisions; but this ascension scheme for spiritualizing and training the mortals of time and space is by no means the exclusive occupation of the universe intelligences. There are, indeed, many other fascinating pursuits which occupy the time and enlist the energies of the celestial hosts. 진화 필사자들을 완성하고, 그들이 천국과 최종단(最終團)에 도달한 후에, 어떤 공개되지 않은 미래 과업을 위한 추가 훈련을 마련한 놀라운 계획은 현재 일곱 초우주와 그들의 여러 세부 구역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필사자들을 영화(靈化)하고 훈련하는 이런 상승 계획은 우주 지능 존재들의 유일한 업무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시간이 소요되고, 천상 무리의 에너지를 요청하는 다른 여러 매혹적인 일이 있습니다.

1. The Universe Attitude of the Father 아버지의 우주적 태도

4:1.1 (54.4) For ages the inhabitants of Urantia have misunderstood the providence of God. There is a providence of divine outworking on your world, but it is not the childish, arbitrary, and material ministry many mortals have conceived it to be. The providence of God consists in the interlocking activities of the celestial beings and the divine spirits who, in accordance with cosmic law, unceasingly labor for the honor of God and for the spiritual advancement of his universe children. 오랫동안 유란시아의 주민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오해했습니다. 너희 세계에는 신적 업무(業務)의 섭리가 있지만, 그것은 많은 필사자가 생각했던, 유치하고, 제멋대로이며, 물질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질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과 그의 우주 자녀들의 영적 진보를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는, 천상의 존재들과 신적 영(靈)들의 맞물린 활동에 있습니다.

4:1.2 (54.5) Can you not advance in your concept of God’s dealing with man to that level where you recognize that the watchword of the universe is progress? Through long ages the human race has struggled to reach its present position. Throughout all these millenniums Providence has been working out the plan of progressive evolution. The two thoughts are not opposed in practice, only in man’s mistaken concepts. Divine providence is never arrayed in opposition to true human progress, either temporal or spiritual. Providence is always consistent with the unchanging and perfect nature of the supreme Lawmaker. 하느님께서 사람을 다루는 너희 개념에서, 우주의 표어가 진보임을 알아보는 그런 수준까지 너희가 나아갈 수 없습니까? 인류는 긴 세월 동안 현재 위치에 이르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렇게 모든 수천 년 내내 섭리는 점진적 진화 계획을 수행해 왔습니다. 두 가지 생각은 실제로는 서로 반대되지 않지만, 사람의 잘못된 개념에서만 서로 반대됩니다. 신적 섭리는, 현세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참된 인간의 진보에 결코 반대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섭리는 최고 입법자의 불변하는 완전한 본성과 언제나 일치합니다.

4:1.3 (55.1) “God is faithful” and “all his commandments are just.” “His faithfulness is established in the very skies.” “Forever, O Lord, your word is settled in heaven. Your faithfulness is to all generations; you have established the earth and it abides.” “He is a faithful Creator.” “하느님은 신실하십니다(고전1:9).” “주의 모든 계명은 의롭습니다(시119:172).” “그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습니다(시36:5).” “오, 주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으니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릅니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시119:89-90).” “그는 신실하신 창조주이십니다(벧전4:19).”

4:1.4 (55.2) There is no limitation of the forces and personalities which the Father may use to uphold his purpose and sustain his creatures. “The eternal God is our refuge, and under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 “He who dwells in the secret place of the Most High shall abide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Behold, he who keeps us shall neither slumber nor sleep.”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ose who love God,” “for the eyes of the Lord are over the righteous, and his ears are open to their prayers.” 아버지께서 자신의 목적을 유지하고 창조물들을 기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과 고유(인격들)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영원한 하느님은 우리 피난처이며 그 아래에 영원한 팔이 있도다(신33:27a).” “가장 높으신 분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91:1).” “보라,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느니라(시121:4).” “우리가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라(롬8:28).” “주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기울이시느라(벧전3:12a).”

4:1.5 (55.3) God upholds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And when new worlds are born, he “sends forth his Sons and they are created.” God not only creates, but he “preserves them all.” God constantly upholds all things material and all beings spiritual. The universes are eternally stable. There is stability in the midst of apparent instability. There is an underlying order and security in the midst of the energy upheavals and the physical cataclysms of the starry realms. 하느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돌보십니다(히1:3). 그리고 새로운 세계들이 태어날 때, 그는 “자기 아들들을 보내서 그것들을 창조하십니다(시104:30).” 하느님은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보호합니다(느9:6).” 하느님은 물질적인 만물과 영적인 모든 존재를 계속 돌보십니다. 우주들은 영원히 안정적입니다. 겉보기에 불안정한 가운데 안정성이 있습니다. 에너지 격변(激變)과 별들 영역의 물리적 격동(激動) 가운데 내재적인 질서와 안전이 있습니다.

4:1.6 (55.4) The Universal Father has not withdrawn from the management of the universes; he is not an inactive Deity. If God should retire as the present upholder of all creation, there would immediately occur a universal collapse. Except for God, there would be no such thing as reality. At this very moment, as during the remote ages of the past and in the eternal future, God continues to uphold. The divine reach extends around the circle of eternity. The universe is not wound up like a clock to run just so long and then cease to function; all things are constantly being renewed. The Father unceasingly pours forth energy, light, and life. The work of God is literal as well as spiritual. “He stretches out the north over the empty space and hangs the earth upon nothing.” 우주 아버지는 우주들의 관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활동하지 않는 신(神)이 아닙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모든 창조계의 현재 유지자로서 은퇴한다면, 즉시 우주 붕괴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외하고,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과거의 먼 시대와 영원한 미래에도, 하느님은 계속 붙잡아 돌보십니다. 신적 범위는 영원의 순환계에 두루 확장됩니다. 우주는 태엽이 감긴 만큼 바로 그렇게 오래 작동하다가 기능을 멈추는 그러한 시계처럼 감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계속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에너지와 빛과 생명을 끊임없이 쏟아부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영적인 동시에 문자 그대로입니다. “그는 북쪽 하늘을 빈 곳에 펼치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달아 놓으십니다(욥26:7).”

4:1.7 (55.5) A being of my order is able to discover ultimate harmony and to detect far-reaching and profound co-ordination in the routine affairs of universe administration. Much that seems disjointed and haphazard to the mortal mind appears orderly and constructive to my understanding. But there is very much going on in the universes that I do not fully comprehend. I have long been a student of, and am more or less conversant with, the recognized forces, energies, minds, morontias, spirits, and personalities of the local universes and the superuniverses. I have a general understanding of how these agencies and personalities operate, and I am intimately familiar with the workings of the accredited spirit intelligences of the grand universe. Notwithstanding my knowledge of the phenomena of the universes, I am constantly confronted with cosmic reactions which I cannot fully fathom. I am continually encountering apparently fortuitous conspiracies of the interassociation of forces, energies, intellects, and spirits, which I cannot satisfactorily explain. 내 계층의 존재는 궁극적 조화를 발견하고 우주 경영의 일상 업무에서 광범위한, 심오한 통합조정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필사 마음에 뒤죽박죽이며 아무렇게나 보이는 많은 것들이 내 이해에는 정연(整然)하고 구조적(構造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에는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인식된 기세, 에너지, 마음, 모론시아, 영(靈) 및 인격(고유성)들에 대한 학자였고 거의 정통합니다. 나는 이런 작용과 인격(고유성)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대우주의 공인된 영(靈) 지능 존재들의 과업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주 현상에 대한 내 지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충분히 헤아릴 수 없는 질서 우주의 반응에 끊임없이 직면합니다. 나는 기세, 에너지, 지성 및 영(靈)들에 대해서 언뜻 보기에 우연히 겹친 상호 연관성을 계속 만나고 있지만, 나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4:1.8 (55.6) I am entirely competent to trace out and to analyze the working of all phenomena directly resulting from the functioning of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the Infinite Spirit, and, to a large extent, the Isle of Paradise. My perplexity is occasioned by encountering what appears to be the performance of their mysterious co-ordinates, the three Absolutes of potentiality. These Absolutes seem to supersede matter, to transcend mind, and to supervene spirit. I am constantly confused and often perplexed by my inability to comprehend these complex transactions which I attribute to the presences and performances of the Unqualified Absolute, the Deity Absolute, and the Universal Absolute. 나는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 무한 영(靈) 및 대부분은, 천국 섬의 기능에서 직접 발생하는 모든 현상의 작용을 추적하고 분석하기에 아주 유능합니다. 나의 곤란은 그들의 신비한 동등자들, 잠재성의 세 절대자가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마주칠 때 일어납니다. 이런 절대자들은 물질을 대체하고, 마음을 초월하며, 영(靈)을 일으키는 듯합니다. 나는 무제한 절대자, 신 절대자, 및 우주 절대자의 존재와 수행으로 일어나는 이런 복잡한 업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혼란스럽고 자주 난감합니다.

4:1.9 (56.1) These Absolutes must be the not-fully-revealed presences abroad in the universe which, in the phenomena of space potency and in the function of other superultimates, render it impossible for physicists, philosophers, or even religionists to predict with certainty as to just how the primordials of force, concept, or spirit will respond to demands made in a complex reality situation involving supreme adjustments and ultimate values. 이런 절대자들은 우주에 널리 완전히-계시되지 않은 존재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공간 잠재력의 현상과 다른 초(超)궁극자들의 기능에서, 물리학자, 철학자, 심지어 종교인들도 기세, 개념 또는 영(靈)의 기본원리가 최고의 조율과 긍극적 가치를 포함하는 복잡한 현실 상황에서 만들어진 요구에 바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확실히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4:1.10 (56.2) There is also an organic unity in the universes of time and space which seems to underlie the whole fabric of cosmic events. This living presence of the evolving Supreme Being, this Immanence of the Projected Incomplete, is inexplicably manifested ever and anon by what appears to be an amazingly fortuitous co-ordination of apparently unrelated universe happenings. This must be the function of Providence — the realm of the Supreme Being and the Conjoint Actor. 또한 시간과 공간의 우주에는 질서 우주 사건에 속한 전체 구조의 기초로 보이는 유기적 통일성이 있습니다. 진화하는 최극 존재의 이 살아 있는 존재, 투사된 미완성의 이런 내재성은, 겉보기에 관련 없는 우주 사건들이 놀랍도록 우연히 통합-조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의해 때때로 설명할 수 없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섭리의 기능 즉, 최극 존재와 공동 행위자의 영역임이 틀림없습니다.

4:1.11 (56.3) I am inclined to believe that it is this far-flung and generally unrecognizable control of the co-ordination and interassociation of all phases and forms of universe activity that causes such a variegated and apparently hopelessly confused medley of physical, mental, moral, and spiritual phenomena so unerringly to work out to the glory of God and for the good of men and angels. 나는, 우주 활동의 모든 단계와 형태들을 통합-조정하고 서로 관련된, 이렇게 광범위하고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통제가, 그토록 다채롭고 겉보기에 절망적으로 혼란스러운,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및 영적 현상들의 잡동사니가 그토록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및 천사들의 선(善)을 위해 진행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4:1.12 (56.4) But in the larger sense the apparent “accidents” of the cosmos are undoubtedly a part of the finite drama of the time-space adventure of the Infinite in his eternal manipulation of the Absolutes.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질서 우주의 외견적 “우발사고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절대자들을 무한자가 영원히 조종하는 그 무한자의 시간-공간 모험의 유한한 각본(脚本)의 일부입니다.

2. God and Nature 하느님과 자연

4:2.1 (56.5) Nature is in a limited sense the physical habit of God. The conduct, or action, of God is qualified and provisionally modified by the experimental plans and the evolutionary patterns of a local universe, a constellation, a system, or a planet. God acts in accordance with a well-defined, unchanging, immutable law throughout the wide-spreading master universe; but he modifies the patterns of his action so as to contribute to the co-ordinate and balanced conduct of each universe, constellation, system, planet, and personality in accordance with the local objects, aims, and plans of the finite projects of evolutionary unfolding. 자연은 제한된 의미에서 하느님의 물리적인 습관입니다. 하느님의 행위나 행동은 지역 우주, 성좌(星座), 체계 또는 행성의 실험 계획과 진화 형태에 의해서 적합해지며 임시로 변경됩니다. 하느님은 광범위한 주(主)우주 전체를 통해서 명확하고, 변하지 않으며, 변경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지만, 진화적으로 전개되는 유한한 계획들의 지역 목적, 목표, 계획에 따라서, 각 우주•성좌•체계•행성 및 인격(고유성)의 통합-조정되어 균형 잡힌 진행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 행동 형태를 변경합니다.

4:2.2 (56.6) Therefore, nature, as mortal man understands it, presents the underlying foundation and fundamental background of a changeless Deity and his immutable laws, modified by, fluctuating because of, and experiencing upheavals through, the working of the local plans, purposes, patterns, and conditions which have been inaugurated and are being carried out by the local universe, constellation, system, and planetary forces and personalities. For example: As God’s laws have been ordained in Nebadon, they are modified by the plans established by the Creator Son and Creative Spirit of this local universe; and in addition to all this the operation of these laws has been further influenced by the errors, defaults, and insurrections of certain beings resident upon your planet and belonging to your immediate planetary system of Satania. 그러므로 필사 인간이 이해하는 것처럼, 자연은 지역 우주, 성좌, 체계, 행성의 기세와 인격(고유성)들에 의해 시작되어 수행되고 있는 지역 계획, 목적, 형태 및 조건의 작용으로 수정되고, 그로 인해 변동하고 격변을 겪는, 변함없는 신(神)과 그의 바꿀 수 없는 법칙의 근원적 토대이며 근본적인 배경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법칙들이 네바돈에서 정해졌듯이, 그것들은 이 지역 우주의 창조자 아들과 창조적 영(靈)이 세운 계획들에 의해 수정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도, 이런 법칙들의 시행은 너희 행성에 거주하고 너희 직계 행성 체계 사타니아에 속한 특정 존재들의 실수, 의무 불이행 및 반란으로 더 영향을 받았습니다.

4:2.3 (56.7) Nature is a time-space resultant of two cosmic factors: first, the immutability, perfection, and rectitude of Paradise Deity, and second, the experimental plans, executive blunders, insurrectionary errors, incompleteness of development, and imperfection of wisdom of the extra-Paradise creatures, from the highest to the lowest. Nature therefore carries a uniform, unchanging, majestic, and marvelous thread of perfection from the circle of eternity; but in each universe, on each planet, and in each individual life, this nature is modified, qualified, and perchance marred by the acts, the mistakes, and the disloyalties of the creatures of the evolutionary systems and universes; and therefore must nature ever be of a changing mood, whimsical withal, though stable underneath, and varied in accordance with the operating procedures of a local universe. 자연은 두 가지 질서 우주 요인(要因)의 시간-공간적 결과입니다. 첫째는 천국 신(神)의 불변성•완전성•정확성이고, 둘째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천국 외부에 있는 창조물들의 실험 계획, 집행 대(大)실책, 반란의 잘못, 발전의 불완전성과 지혜의 불완전성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영원의 순환계로부터 한결같고, 불변하며, 장엄하고 놀라운 완전성의 실마리를 가져오지만, 각 우주, 각 행성과 개별 각 생명에 있어서, 이 자연은 진화 체계와 우주들에 있는 창조물들의 행위•실수와 배신행위로 변경(變更)되어 제한되고 아마 훼손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밑바닥이 안정되기는 하나, 늘 변덕스럽게 변하는 풍조 가운데 있는 동시에 지역 우주의 운영 절차에 따라서 다양해야 합니다.

4:2.4 (57.1) Nature is the perfection of Paradise divided by the incompletion, evil, and sin of the unfinished universes. This quotient is thus expressive of both the perfect and the partial, of both the eternal and the temporal. Continuing evolution modifies nature by augmenting the content of Paradise perfection and by diminishing the content of the evil, error, and disharmony of relative reality. 자연은 천국의 완전성을 완성되지 않은 우주들의 불완전함, 악 그리고 죄로 나눈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몫은 완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영원한 것과 현세적인 것을 둘 다 나타냅니다. 연속적인 진화는 천국 완전성의 내용을 증대시키고, 상대적 실체의 악, 실수, 부조화의 내용을 줄여서 자연을 수정합니다.

4:2.5 (57.2) God is not personally present in nature or in any of the forces of nature, for the phenomenon of nature is the superimposition of the imperfections of progressive evolution and, sometimes, the consequences of insurrectionary rebellion, upon the Paradise foundations of God’s universal law. As it appears on such a world as Urantia, nature can never be the adequate expression, the true representation, the faithful portrayal, of an all-wise and infinite God. 하느님은 자연이나, 자연의 어떤 힘 가운데에도 개인적으로 계시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연 현상은 하느님의 우주 법칙인 천국 토대 위에 점진적 진화의 불완전성과 때때로 반항적 반란의 결과가 포개 놓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자연은 결코 전지(全知)하고 무한한 하느님의 적절한 표현, 참된 표상(表象), 충실한 묘사가 될 수 없습니다.

4:2.6 (57.3) Nature, on your world, is a qualification of the laws of perfection by the evolutionary plans of the local universe. What a travesty to worship nature because it is in a limited, qualified sense pervaded by God; because it is a phase of the universal and, therefore, divine power! Nature also is a manifestation of the unfinished, the incomplete, the imperfect outworkings of the development, growth, and progress of a universe experiment in cosmic evolution. 너희 세계에서 자연은 지역 우주의 진화 계획으로 인해 완전한 법칙이 제한된 것입니다. 자연은 하느님에 의해 한정되고 제한된 의미로 스며들어 있으며, 자연은 우주적이어서, 하나의 신적 권능의 단계이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자연은 또한 질서 우주의 진화에서, 우주 실험의 발전, 성장, 및 진행이 마무리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결과의 표현입니다.

4:2.7 (57.4) The apparent defects of the natural world are not indicative of any such corresponding defects in the character of God. Rather are such observed imperfections merely the inevitable stop-moments in the exhibition of the ever-moving reel of infinity picturization. It is these very defect-interruptions of perfection-continuity which make it possible for the finite mind of material man to catch a fleeting glimpse of divine reality in time and space. The material manifestations of divinity appear defective to the evolutionary mind of man only because mortal man persists in viewing the phenomena of nature through natural eyes, human vision unaided by morontia mota or by revelation, its compensatory substitute on the worlds of time. 자연 세계의 외견상 결함은 하느님의 성품에 그렇게 상응하는 어떤 결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관찰된 불완전함은 무한성을 묘사하기 위해 계속 회전하는 필름 영상 가운데 있는 불가피한 정지 순간에 불과합니다. 물질적 인간의 유한한 마음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신적 실체를 순식간에 흘끗 포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완전한-연속성 중에 있는 바로 이런 결함-중지(中止)들입니다. 필사자는 타고난 눈, 모론시아 모타나 계시, 시간 세계의 보상적 대체물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인간의 시각을 통해 자연 현상을 보려고 집착하기 때문에, 신성(神性)의 물질적 표현은 진화 인간의 마음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2.8 (57.5) And nature is marred, her beautiful face is scarred, her features are seared, by the rebellion, the misconduct, the misthinking of the myriads of creatures who are a part of nature, but who have contributed to her disfigurement in time. No, nature is not God. Nature is not an object of worship. 그리고 자연은, 자연의 부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훼손의 원인이 된 무수한 창조물들의 반란, 잘못된 행실, 분별없는 생각으로 손상되었고, 자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상처를 남기고 그 모습이 시들었습니다. 결단코 자연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자연은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3. God’s Unchanging Character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

4:3.1 (57.6) All too long has man thought of God as one like himself. God is not, never was, and never will be jealous of man or any other being in the universe of universes. Knowing that the Creator Son intended man to be the masterpiece of the planetary creation, to be the ruler of all the earth, the sight of his being dominated by his own baser passions, the spectacle of his bowing down before idols of wood, stone, gold, and selfish ambition — these sordid scenes stir God and his Sons to be jealous for man, but never of him.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하느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나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그 어떤 다른 존재를 질투하지 않고, 그런 적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주 아들이 사람을 행성 창조의 걸작으로, 온 지상의 통치자로 의도했음을 알기에, 인간 자신의 저열한 욕망에 지배당한 그 모습, 즉 나무, 돌, 금, 그리고 이기적 야망의 우상 앞에 절하는 광경 – 이렇게 천한 장면들은 하느님과 그의 아들들이 인간을 잃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애쓰도록 주의를 환기하지만, 결코 인간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4:3.2 (57.7) The eternal God is incapable of wrath and anger in the sense of these human emotions and as man understands such reactions. These sentiments are mean and despicable; they are hardly worthy of being called human, much less divine; and such attitudes are utterly foreign to the perfect nature and gracious character of the Universal Father. 영원한 하느님은 이런 인간다운 감정의 의미에서, 또 사람이 그러한 반응을 이해하는 것처럼, 분노(憤怒)하거나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이런 정서들은 품위가 없고 비열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적이라고 불릴 가치가 거의 없으며, 하물며 신적으로 불릴 가치는 없습니다. 그런 태도는 우주 아버지의 완전한 본성 및 자비로운 성품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4:3.3 (58.1) Much, very much, of the difficulty which Urantia mortals have in understanding God is due to the far-reaching consequences of the Lucifer rebellion and the Caligastia betrayal. On worlds not segregated by sin, the evolutionary races are able to formulate far better ideas of the Universal Father; they suffer less from confusion, distortion, and perversion of concept.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겪는 아주 대부분의 어려움은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의 배신으로 인한 광범위한 결과 때문입니다. 죄로 격리되지 않은 세계에서, 진화 종족들은 우주 아버지에 대해 훨씬 더 나은 생각을 명확히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은 개념의 혼돈, 왜곡 및 곡해를 덜 겪습니다.

4:3.4 (58.2) God repents of nothing he has ever done, now does, or ever will do. He is all-wise as well as all-powerful. Man’s wisdom grows out of the trials and errors of human experience; God’s wisdom consists in the unqualified perfection of his infinite universe insight, and this divine foreknowledge effectively directs the creative free will. 하느님은 자신이 이전에 하셨던, 지금 행하고 있는, 앞으로 행할 어떤 일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능(全能)하실 뿐만이 아니라 전지(全知)하십니다. 사람의 지혜는 인간적 경험의 시행착오(試行錯誤)에서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그의 무한한 우주 통찰력의 절대적 완전성에 있으며, 이런 신적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창조적 자유의지를 실제로 이끕니다.

4:3.5 (58.3) The Universal Father never does anything that causes subsequent sorrow or regret, but the will creatures of the planning and making of his Creator personalities in the outlying universes, by their unfortunate choosing, sometimes occasion emotions of divine sorrow in the personalities of their Creator parents. But though the Father neither makes mistakes, harbors regrets, nor experiences sorrows, he is a being with a father’s affection, and his heart is undoubtedly grieved when his children fail to attain the spiritual levels they are capable of reaching with the assistance which has been so freely provided by the spiritual-attainment plans and the mortal-ascension policies of the universes. 우주 아버지는 나중에 슬픔이나 후회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지만, 우주 변경(邊境)에서 그의 창조자 고유성(인격)들을 계획하고 만드는 의지 창조물들은 그들의 불행한 선택으로 때때로 그들의 창조자 부모의 고유성(인격)에 신적 슬픔의 감정들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수하거나, 후회를 품거나, 슬픔을 체험하지 않지만, 그는 아버지의 애정을 가진 존재이며, 그의 자녀들이 우주들의 영적-달성 계획과 필사자-상승 정책에 의해 그토록 자유롭게 마련한 도움으로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수준에 끝내 이르지 않고 말 때 그의 심정은 여지없이 몹시 슬퍼합니다.

4:3.6 (58.4) The infinite goodness of the Father is beyond the comprehension of the finite mind of time; hence must there always be afforded a contrast with comparative evil (not sin) for the effective exhibition of all phases of relative goodness. Perfection of divine goodness can be discerned by mortal imperfection of insight only because it stands in contrastive association with relative imperfection in the relationships of time and matter in the motions of space. 아버지의 무한한 선(善)은 시간에 속한 유한한 마음의 이해력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상대적 선(善)의 모든 단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아닌) 상대적 악과 대조되는 것이 늘 주어져야 합니다. 신적 선의 완전성은 공간 운동의 시간과 물질 관계에서 상대적 불완전성과 대조적인 관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필사자의 불완전한 통찰력으로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4:3.7 (58.5) The character of God is infinitely superhuman; therefore must such a nature of divinity be personalized, as in the divine Sons, before it can even be faith-grasped by the finite mind of man. 하느님의 성품은 무한히 초인간적입니다. 따라서 신성의 그런 본성은 유한한 인간의 마음에서 바로 신앙으로 파악될 수 있기 전에 신적 아들들 안에서처럼, 인격(고유성)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4. The Realization of God 하느님의 실제 상태

4:4.1 (58.6) God is the only stationary, self-contained, and changeless being in the whole universe of universes, having no outside, no beyond, no past, and no future. God is purposive energy (creative spirit) and absolute will, and these are self-existent and universal. 하느님은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고정되어 계시며, 스스로 충분하시고, 변함이 없는 존재로, 외부도 없고, 초월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의도적 에너지(창조적 영)이자 절대 의지이며, 이것들은 스스로 존재하며, 우주적입니다.

4:4.2 (58.7) Since God is self-existent, he is absolutely independent. The very identity of God is inimical to change. “I, the Lord, change not.” God is immutable; but not until you achieve Paradise status can you even begin to understand how God can pass from simplicity to complexity, from identity to variation, from quiescence to motion, from infinity to finitude, from the divine to the human, and from unity to duality and triunity. And God can thus modify the manifestations of his absoluteness because divine immutability does not imply immobility; God has will — he is will.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므로, 그는 절대적으로 독립입니다. 하느님의 정체성 자체는 변화에 반합니다. “나, 주는 변하지 않노라.” 하느님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 신분에 도달하기까지, 하느님이 어떻게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동일성에서 변화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신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단일성에서 이원성과 삼원일체(三元一體)로 넘어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신적 불변성은 부동(움직일 수 없음, 不動)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자기 절대성의 표현을 그렇게 변형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의지가 있습니다. – 하느님은 의지입니다.

4:4.3 (58.8) God is the being of absolute self-determination; there are no limits to his universe reactions save those which are self-imposed, and his freewheel acts are conditioned only by those divine qualities and perfect attributes which inherently characterize his eternal nature. Therefore is God related to the universe as the being of final goodness plus a free will of creative infinity. 하느님은 절대적인 자기-결정의 존재입니다. 그의 우주 반응에는 스스로 부과한 것 외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의 자유로운 행위는, 그의 영원한 본성을 본질적으로 특징짓는 그런 신적 자질과 완전한 속성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최종적 선(善)의 존재이며, 더 나아가 창조적 무한성의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우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4:4.4 (58.9) The Father-Absolute is the creator of the central and perfect universe and the Father of all other Creators. Personality, goodness, and numerous other characteristics, God shares with man and other beings, but infinity of will is his alone. God is limited in his creative acts only by the sentiments of his eternal nature and by the dictates of his infinite wisdom. God personally chooses only that which is infinitely perfect, hence the supernal perfection of the central universe; and while the Creator Sons fully share his divinity, even phases of his absoluteness, they are not altogether limited by that finality of wisdom which directs the Father’s infinity of will. Hence, in the Michael order of sonship, creative free will becomes even more active, wholly divine and well-nigh ultimate, if not absolute. The Father is infinite and eternal, but to deny the possibility of his volitional self-limitation amounts to a denial of this very concept of his volitional absoluteness. 아버지-절대자는 중심적인 완전한 우주의 창조자이며 다른 모든 창조자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은 고유성(인격), 선(善) 및 기타 수많은 특성을 사람 및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지만, 의지의 무한성은 그만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의 창조 행위에서 그의 영원한 본성의 정서와 그의 무한한 지혜의 지시에 의해서만 제한됩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무한히 완전한 것만 선택하며, 여기에서 중앙 우주의 고상한 완전성이 전해 내려옵니다. 한편 창조자 아들들은 그의 신성, 그의 절대성의 단계들까지도 완전히 공유하지만, 그들은 아버지 의지의 무한성을 지시하는 지혜의 그 최종성에 의해 완전히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된 미가엘 계층에서 창조적 자유의지는 절대적이지는 않아도, 훨씬 더 활동적이고 완전히 신적이며 거의 궁극적입니다. 아버지는 무한하고 영원하지만, 그의 의지적 자기-제한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그의 의지적 절대성의 바로 이 개념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4:4.5 (59.1) God’s absoluteness pervades all seven levels of universe reality. And the whole of this absolute nature is subject to the relationship of the Creator to his universe creature family. Precision may characterize trinitarian justice in the universe of universes, but in all his vast family relationship with the creatures of time the God of universes is governed by divine sentiment. First and last — eternally — the infinite God is a Father. Of all the possible titles by which he might appropriately be known, I have been instructed to portray the God of all creation as the Universal Father. 하느님의 절대성은 우주 실체의 일곱 차원 전체에 모두 퍼져있습니다. 그리고 이 절대적 본성 전체는 창조자와 그의 우주 창조물 가족의 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우주들의 우주에서 삼위일체적 정의(正義)의 특색은 정밀도(精密度)지만 시간의 창조물들과 맺는 그의 모든 광대한 가족 관계에서 우주들의 하느님은 신적 감성으로 지배됩니다. 처음이며 마지막 – 영원히 – 무한한 하느님은 아버지입니다. 그를 적절히 알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칭호 중에서 나는 모든 창조의 하느님을 우주 아버지로 묘사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4:4.6 (59.2) In God the Father freewill performances are not ruled by power, nor are they guided by intellect alone; the divine personality is defined as consisting in spirit and manifesting himself to the universes as love. Therefore, in all his personal relations with the creature personalities of the universes,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always and consistently a loving Father. God is a Father in the highest sense of the term. He is eternally motivated by the perfect idealism of divine love, and that tender nature finds its strongest expression and greatest satisfaction in loving and being loved.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유의지 행위는 권능으로 다스려지지 않으며 지성으로만 인도되지도 않습니다. 신적 고유성은 영으로 존재하며 우주에 사랑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定意)됩니다. 그러므로 우주들의 창조체 고유성들에 대한 그의 모든 개인적 관계에 있어서, 첫째근원이며 중심이신 하나님은 항상 한결같이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단어의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신적 사랑의 완전한 이상주의에 의해 영원히 자극되시며, 그 부드러운 본성의 가장 강한 표현과 가장 큰 만족은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곳에서 발견됩니다.

4:4.7 (59.3) In science, God is the First Cause; in religion, the universal and loving Father; in philosophy, the one being who exists by himself, not dependent on any other being for existence but beneficently conferring reality of existence on all things and upon all other beings. But it requires revelation to show that the First Cause of science and the self-existent Unity of philosophy are the God of religion, full of mercy and goodness and pledged to effect the eternal survival of his children on earth. 과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첫째 원인이며, 종교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주적인 사랑의 아버지이며,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 존재를 위하여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모든 것들과 모든 다른 존재들에게, 실존이라는 실체를 자비롭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과학에서 첫째 원인이시며 철학에서 자존적 통일체가 종교의 하나님, 즉 자비와 선이 가득하고 땅 위에 있는 그의 자녀들의 영원한 생존을 보증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시가 필요합니다.

4:4.8 (59.4) We crave the concept of the Infinite, but we worship the experience-idea of God, our anywhere and any-time capacity to grasp the personality and divinity factors of our highest concept of Deity. 우리는 무한자의 개념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체험 관념, 즉 우리의 가장 높은 신(神) 개념의 고유성과 신적 요소들을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파악할 수 있다는 관념을 소중히 여깁니다.

4:4.9 (59.5) The consciousness of a victorious human life on earth is born of that creature faith which dares to challenge each recurring episode of existence when confronted with the awful spectacle of human limitations, by the unfailing declaration: Even if I cannot do this, there lives in me one who can and will do it, a part of the Father-Absolute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at is “the victory which overcomes the world, even your faith.”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인간 생활에 대한 자각은 각각 실재가 되풀이되는 에피소드에 감히 도전하는 그 창조물의 신앙에서 생깁니다. 그 신앙은, 인간적 한계들의 무서운 장면에 직면할 때, “내가 이것을 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할 수 있고 또 하실 분, 즉 우주들의 우주 아버지-절대자의 부분이, 내 안에 살고 계신다.”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는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5. Erroneous Ideas of God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1702016 사28:2 여호와께서 그들을 칠 강한 군대를 보내실 것이니 그들이 광풍과 폭우와 무서운 홍수처럼 그 땅에 밀어닥칠 것이다. See, the Lord has one who is powerful and strong. Like a hailstorm and a destructive wind, like a driving rain and a flooding downpour, he will throw it forcefully to the ground. 사29:6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뇌성과 지진과 큰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무서운 불꽃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니 the LORD Almighty will come with thunder and earthquake and great noise, with windstorm and tempest and flames of a devouring fire.

4:5.1 (59.6) Religious tradition is the imperfectly preserved record of the experiences of the God-knowing men of past ages, but such records are untrustworthy as guides for religious living or as the source of true information about the Universal Father. Such ancient beliefs have been invariably altered by the fact that primitive man was a mythmaker. 종교적 전통은 지난 시대에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이 불완전하게 보존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종교 생활의 안내서나 우주 아버지에 관한 참된 정보의 원천으로서는 믿을만하지 않습니다. 원시인이 신화(神話)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의해, 그러한 고대의 믿음들은 늘 변경되어 왔습니다.

4:5.2 (60.1) One of the greatest sources of confusion on Urantia concerning the nature of God grows out of the failure of your sacred books clearly to distinguish between the personalities of the Paradise Trinity and between Paradise Deity and the local universe creators and administrators. During the past dispensations of partial understanding, your priests and prophets failed clearly to differentiate between Planetary Princes, System Sovereigns, Constellation Fathers, Creator Sons, Superuniverse Rulers, the Supreme Being, and the Universal Father. Many of the messages of subordinate personalities, such as Life Carriers and various orders of angels, have been, in your records, presented as coming from God himself. Urantian religious thought still confuses the associate personalities of Deity with the Universal Father himself, so that all are included under one appellation.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생긴 가장 큰 혼돈의 근원들 중 하나는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성스러운 책들이 천국 삼위일체의 고유성들 사이와 천국 신(Deity 神)과 지역우주 창조자들 그리고 행정자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해서 발생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이해했던 과거 섭리 시대에는, 우리의 사제들과 선지자들이 행성영주들, 체계주권자들, 별자리 아버지들, 창조주 아들들, 초우주 통치자들, 최극 존재, 그리고 우주 아버지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생명 운반자들과 다양한 천사 계층들과 같은, 종속(하위) 고유성들이 전달한 메시지들 중 대부분이, 우리의 기록들 속에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지구(유란시아)의 종교 사상(思想)은 신(神)의 연합하는 고유성들과 우주 아버지 자신을 여전히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의 명칭 아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4:5.3 (60.2) The people of Urantia continue to suffer from the influence of primitive concepts of God. The gods who go on a rampage in the storm; who shake the earth in their wrath and strike down men in their anger; who inflict their judgments of displeasure in times of famine and flood — these are the gods of primitive religion; they are not the Gods who live and rule the universes. Such concepts are a relic of the times when men supposed that the universe was under the guidance and domination of the whims of such imaginary gods. But mortal man is beginning to realize that he lives in a realm of comparative law and order as far as concerns the administrative policies and conduct of the Supreme Creators and the Supreme Controllers. 지구(유란시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원시적 개념들의 영향에 계속 시달려 오고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 날뛰며 돌아다니는 하나님들(gods), 분노로 땅을 흔들고 화를 내면서 사람들을 때려눕히며, 굶주림과 홍수의 때에 불만의 심판을 내리는 이들은 원시적 종교의 하나님들(gods)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우주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들(Gods)이 아닙니다. 그러한 개념들은 우주가, 그러한 허구적 가상(假想)의 하나님들(gods)의 안내와 변덕스러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고 사람들이 가정했던 그 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최극 창조주들과 최극 조정자들의 행정적 정책들과 운영에 관한 한, 자신이 비교적 질서 있는 법칙의 영역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1702017 히9:22 율법에 의하면 거의 모든 것이 다 피로써 깨끗하게 되며 피흘림이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And almost all things are by the law purg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is no remission.

4:5.4 (60.3) The barbarous idea of appeasing an angry God, of propitiating an offended Lord, of winning the favor of Deity through sacrifices and penance and even by the shedding of blood, represents a religion wholly puerile and primitive, a philosophy unworthy of an enlightened age of science and truth. Such beliefs are utterly repulsive to the celestial beings and the divine rulers who serve and reign in the universes. It is an affront to God to believe, hold, or teach that innocent blood must be shed in order to win his favor or to divert the fictitious divine wrath. 희생 제물들과 고행(苦行)을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피를 흘림으로, 성난 하나님을 달래고, 감정이 상한 주님의 비위를 맞추고, 신(Deity 神)의 은혜를 얻으려는 야만적인 관념은, 완전히 미숙하고 원시적인 종교를 대표하며, 과학과 진리로 깨우친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철학을 대표합니다. 그러한 믿음들은 우주들 안에서 봉사하고 다스리는 천상의 존재들과 신성한 통치자들에게는 철저히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또는 가상적인 신적 진노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려야만 된다고 믿거나 고집부리거나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4:5.5 (60.4) The Hebrews believed that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could be no remission of sin.” They had not found deliverance from the old and pagan idea that the Gods could not be appeased except by the sight of blood, though Moses did make a distinct advance when he forbade human sacrifices and substituted therefor, in the primitive minds of his childlike Bedouin followers, the ceremonial sacrifice of animals. 히브리인들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인간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일을 금지하고, 그 대신에 동물을 제례적 희생 제물로 대신하게 하였을 때, 그의 순진한 베두인Bedouin 추종자들의 원시적 마음 안에서 뚜렷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를 보지 않고는 하나님들Gods이 달래질 수 없다는 고대의 이교적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였습니다.

4:5.6 (60.5) The bestowal of a Paradise Son on your world was inherent in the situation of closing a planetary age; it was inescapable, and it was not made necessary for the purpose of winning the favor of God. This bestowal also happened to be the final personal act of a Creator Son in the long adventure of earning the experiential sovereignty of his universe. What a travesty upon the infinite character of God! this teaching that his fatherly heart in all its austere coldness and hardness was so untouched by the misfortunes and sorrows of his creatures that his tender mercies were not forthcoming until he saw his blameless Son bleeding and dying upon the cross of Calvary! 우리 세계에 천국 아들을 주시는 증여는 한 행성 시대를 마감하는 상황 속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증여는 창조주 아들이 자신의 우주에 대한 체험적 주권을 얻는 긴 모험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친히 행동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성품을 얼마나 희화화하는지요? 전적으로 엄격한 냉담함과 완고함으로, 그의 창조물들의 불운과 슬픔을 보면서도, 아버지다운 심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기에, 그의 죄 없는 아들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것을 보기까지는, 그의 부드러운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이렇게 가르치다니요?

4:5.7 (60.6) But the inhabitants of Urantia are to find deliverance from these ancient errors and pagan superstitions respecting the nature of the Universal Father. The revelation of the truth about God is appearing, and the human race is destined to know the Universal Father in all that beauty of character and loveliness of attributes so magnificently portrayed by the Creator Son who sojourned on Urantia as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그러나 유란시아(지구)의 거주민들은 우주 아버지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고대의 잘못들과 이교적 미신들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란시아(지구)에 머물렀던 창조주 아들에 의해 그토록 숭고하게 묘사되었던 성품의 아름다움과 속성들의 사랑스러움을 지니신 우주 아버지를 모두 알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4:5.8 (61.1) [Presented by a Divine Counselor of Uversa.] [유버르사의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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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3 The Attributes of God 하느님의 속성들

Paper 3

The Attributes of God 하느님의 속성들

  1. God’s Everywhereness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
  2. God’s Infinite Power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
  3. God’s Universal Knowledge 하느님의 우주적 지식
  4. God’s Limitlessness 무제한(無制限)의 하느님
  5. The Father’s Supreme Rule 아버지의 최고 통치
    The Inevitabilities 필연성들
  6. The Father’s Primacy 아버지의 수위성(首位性)
    The benediction 강복(降福)

3:0.1 (44.1) GOD is everywhere present; the Universal Father rules the circle of eternity. But he rules in the local universes in the persons of his Paradise Creator Sons, even as he bestows life through these Sons.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s.” These Creator Sons of God are the personal expression of himself in the sectors of time and to the children of the whirling planets of the evolving universes of space.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주 아버지는 영원의 순환계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천국 창조자 아들들을 통해 생명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이런 아들들이라는 고유 존재들로 지역 우주를 다스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이 생명은 그의 아들들 안에 있습니다(요일5:11).” 하느님의 이런 창조자 아들들은 시간의 영역과 공간에서 진화하는 우주들에 속해 소용돌이치는 행성 자녀들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표현입니다.

3:0.2 (44.2) The highly personalized Sons of God are clearly discernible by the lower orders of created intelligences, and so do they compensate for the invisibility of the infinite and therefore less discernible Father. The Paradise Creator Sons of the Universal Father are a revelation of an otherwise invisible being, invisible because of the absoluteness and infinity inherent in the circle of eternity and in the personalities of the Paradise Deities. 낮은 계층의 창조된 지능 존재들은 고도로 인격(고유성)화된 하느님의 아들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어서, 그들은, 무한하여서 알아보기 어려운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태어 채웁니다. 우주 아버지의 천국 창조자 아들들은, 영원의 순환계와 천국 신(神)들의 인격(고유성)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절대성과 무한성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의 계시입니다.

3:0.3 (44.3) Creatorship is hardly an attribute of God; it is rather the aggregate of his acting nature. And this universal function of creatorship is eternally manifested as it is conditioned and controlled by all the co-ordinated attributes of the infinite and divine realit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We sincerely doubt whether any one characteristic of the divine nature can be regarded as being antecedent to the others, but if such were the case, then the creatorship nature of Deity would take precedence over all other natures, activities, and attributes. And the creatorship of Deity culminates in the universal truth of the Fatherhood of God. 창조자 되심은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행동하는 본성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이런 창조자 되심의 우주적 기능은, 첫째 근원 및 중심의 무한한 신적 실체에 속한 모든 통합-조정된 속성으로 결정되고 조정되므로 영원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신적 본성 중 어떤 한 특성이 다른 특성들에 앞선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진실로 의혹을 품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神)의 창조자 되심의 본성은 다른 모든 본성, 활동 및 속성들보다 우선(優先)할 것입니다. 신(神)의 창조자 되심은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우주적 진리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1. God’s Everywhereness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3:1.1 (44.4) The ability of the Universal Father to be everywhere present, and at the same time, constitutes his omnipresence. God alone can be in two places, in numberless places, at the same time. God is simultaneously present “in heaven above and on the earth beneath”; as the Psalmist exclaimed: “Whither shall I go from your spirit? or whither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우주 아버지의 모든 곳에 계실 수 있는 능력은 동시에 그의 전재(全在 모든 곳에 시간을 초월하여 계심)를 만들어 냅니다. 하느님 홀로 두 장소에, 수없이 많은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수2:11b)” 동시에 계십니다. 시편 기자가 외쳤듯이, “내가 당신의 영(靈)을 떠나 어디로 가며, 당신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3:1.2 (44.5) “‘I am a God at hand as well as afar off,’ says the Lord. ‘Do not I fill heaven and earth?’” The Universal Father is all the time present in all parts and in all hearts of his far-flung creation. He is “the fullness of him who fills all and in all,” and “who works all in all,” and further, the concept of his personality is such that “the heaven (universe) and heaven of heavens (universe of universes) cannot contain him.” It is literally true that God is all and in all. But even that is not all of God. The Infinite can be finally revealed only in infinity; the cause can never be fully comprehended by an analysis of effects; the living God is immeasurably greater than the sum total of creation that has come into being as a result of the creative acts of his unfettered free will. God is revealed throughout the cosmos, but the cosmos can never contain or encompass the entirety of the infinity of God. “‘나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하느님이라’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않느냐(렘23:23-24b)?’” 우주 아버지는 내내 자신의 광범위한 창조계의 전역과 모든 심정에 줄곧 있습니다.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자신의 충만함(엡1:23b)”이고 “만유의 모두를 이루시는 분(고전12:6)”이며, 더 나아가 그의 인격(고유성) 개념은 너무 커서 “하늘(우주)과 하늘들의 하늘(우주들의 우주)이 그를 담을 수 없습니다(왕상8:27).” 하느님은 모두이며 모두 안에 계신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느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무한자는 결국 무한 안에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원인은 결과의 분석으로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은 그의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지의 창조적 행위의 결과로 생긴 창조계의 총합보다 헤아릴 수 없이 크십니다. 하느님은 질서 우주 전체에 드러나지만, 질서 우주는 하느님의 무한 전체를 담을 수도, 품을 수도 없습니다.

3:1.3 (45.1) The Father’s presence unceasingly patrols the master universe. “His going forth is from the end of the heaven, and his circuit to the ends of it; and there is nothing hidden from the light thereof.” 아버지의 임재는 끊임없이 주(主) 우주를 순찰합니다. “그의 출발은 하늘 끝에서 시작하고, 그의 순회는 하늘 끝까지입니다. 그 빛에 가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시19:6).”

3:1.4 (45.2) The creature not only exists in God, but God also lives in the creature. “We know we dwell in him because he lives in us; he has given us his spirit. This gift from the Paradise Father is man’s inseparable companion.” “He is the ever-present and all-pervading God.” “The spirit of the everlasting Father is concealed in the mind of every mortal child.” “Man goes forth searching for a friend while that very friend lives within his own heart.” “The true God is not afar off; he is a part of us; his spirit speaks from within us.” “The Father lives in the child. God is always with us. He is the guiding spirit of eternal destiny.” 창조물은 하느님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창조물 안에 사십니다. “그가 자기 영(靈)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가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줄 우리가 압니다(요일4:13). 천국 아버지의 이 선물은 인간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고후9:15).” “그는 항상 존재하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느님입니다.” “영원한 아버지의 영(靈)은 모든 필사 자녀의 마음에 숨어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찾으러 떠나지만, 바로 그 친구는 그 자신의 심정에 살고 있습니다.” “참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렘23:23). 그는 우리 일부입니다. 그의 영(靈)은 우리 안에서 말씀합니다(마10:20).” “아버지는 자녀 안에 사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마28:20). 그는 영원한 운명으로 인도하는 영(靈)입니다(요14:16).”

3:1.5 (45.3) Truly of the human race has it been said, “You are of God” because “he who dwells in love dwells in God, and God in him.” Even in wrongdoing you torment the indwelling gift of God, for the Thought Adjuster must needs go through the consequences of evil thinking with the human mind of its incarceration.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거하고, 하느님도 그 안에 거하시므로(요일4:16),” “너희는 하느님께 속한다(요일4:4, 6).”라고 인류에게 정말로 말해왔습니다. 심지어 나쁜 짓을 하면 너희는 내재하는 하느님의 선물을 괴롭히는 것인데, 생각 조율자는 감금된 인간의 마음으로 악한 생각의 결과를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1.6 (45.4) The omnipresence of God is in reality a part of his infinite nature; space constitutes no barrier to Deity. God is, in perfection and without limitation, discernibly present only on Paradise and in the central universe. He is not thus observably present in the creations encircling Havona, for God has limited his direct and actual presence in recognition of the sovereignty and the divine prerogatives of the co-ordinate creators and rulers of the universes of time and space. Hence must the concept of the divine presence allow for a wide range of both mode and channel of manifestation embracing the presence circuits of the Eternal Son, the Infinite Spirit, and the Isle of Paradise. Nor is it always possi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actions of his eternal co-ordinates and agencies, so perfectly do they fulfill all the infinite requirements of his unchanging purpose. But not so with the personality circuit and the Adjusters; here God acts uniquely, directly, and exclusively.하느님의 전재(全在)는 실제로 그의 무한한 본성의 일부입니다. 공간은 신(神)에게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제한 없이 오직 천국과 중앙 우주에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시공간 우주들에서 통합-조정하는 창조자들과 통치자들의 주권과 신적 특권을 인정하여 자신의 직접적인 실제 현존을 제한했기 때문에 그는 하보나를 둘러싼 창조계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현존의 개념은 영원 아들, 무한 영(靈) 그리고 천국 섬의 현존 회로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표현 방식과 경로를 둘 다 허용해야 합니다. 또한 우주 아버지의 현존과 그의 영원한 동등자들 및 대리자들의 행위 사이를 언제나 구별할 수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그의 변하지 않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무한한 요구를 완전히 성취합니다. 그러나 인격(고유성) 회로와 조율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독특하게, 직접적이며 배타적으로 활동합니다.

3:1.7 (45.5) The Universal Controller is potentially present in the gravity circuits of the Isle of Paradise in all parts of the universe at all times and in the same degree, in accordance with the mass, in response to the physical demands for this presence, and because of the inherent nature of all creation which causes all things to adhere and consist in him. Likewise is the First Source and Center potentially present in the Unqualified Absolute, the repository of the uncreated universes of the eternal future. God thus potentially pervades the physical universe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He is the primordial foundation of the coherence of the so-called material creation. This nonspiritual Deity potential becomes actual here and there throughout the level of physical existences by the inexplicable intrusion of some one of his exclusive agencies upon the stage of universe action. 우주 조정자는 이런 현존에 대한 물리적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그에게 달라붙어 존재하는 만물의 원인이 되는 모든 창조계의 고유한 본성 때문에 질량에 따라 우주의 모든 부분에 있는 천국 섬의 중력 회로에 언제나 같은 정도로, 잠재적으로 현존합니다. 마찬가지로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한 미래의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의 저장소, 즉 무제한 절대자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의 물리적 우주에 잠재적으로 가득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는 소위 물질 창조계가 시종일관하는 원초적 토대입니다. 이런 비(非) 영적 신(神)의 잠재력은 우주 활동 무대에 그의 배타적 대리자 중 어떤 하나의 설명할 수 없는 침입 행위로 물리적 존재 수준의 전체에 걸쳐 여기저기에서 실제가 됩니다.

3:1.8 (45.6) The mind presence of God is correlated with the absolute mind of the Conjoint Actor, the Infinite Spirit, but in the finite creations it is better discerned in the everywhere functioning of the cosmic mind of the Paradise Master Spirits. Just as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potentially present in the mind circuits of the Conjoint Actor, so is he potentially present in the tensions of the Universal Absolute. But mind of the human order is a bestowal of the Daughters of the Conjoint Actor, the Divine Ministers of the evolving universes. 하느님의 마음 현존은 공동 행위자, 무한 영의 절대 마음과 서로 관련되지만 유한한 창조계에서, 천국 주(主) 영(靈)들의 질서우주 마음이 어디에서나 활동하는 유한한 창조계에서 더 잘 분별 됩니다. 첫째 근원 및 중심이 공동 행위자의 마음 회로에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처럼, 그는 우주 절대자의 긴장 속에 잠재적으로 현존합니다. 그러나 인간 계층의 마음은 공동 행위자의 딸들, 진화하는 우주들의 신적 사역자들의 증여입니다.

3:1.9 (46.1) The everywhere-present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is co-ordinated with the function of the universal spirit presence of the Eternal Son and the everlasting divine potential of the Deity Absolute. But neither the spiritual activity of the Eternal Son and his Paradise Sons nor the mind bestowals of the Infinite Spirit seem to exclude the direct action of the Thought Adjusters, the indwelling fragments of God, in the hearts of his creature children. 어디에나 현존하는 우주 아버지의 영(靈)은 영원 아들의 우주 영(靈) 현존의 기능 및 신(神) 절대자의 영원한 신적 잠재력과 조정됩니다. 그러나 영원 아들과 그의 천국 아들들의 영적 활동이나 무한 영(靈)의 마음 증여는 하느님의 창조물 자녀들의 심정에 있는 하느님의 내주하는 파편들, 생각 조율자들의 직접적 활동을 물리치는 것 같지 않습니다.

3:1.10 (46.2) Concerning God’s presence in a planet, system, constellation, or a universe, the degree of such presence in any creational unit is a measure of the degree of the evolving presence of the Supreme Being: It is determined by the en masse recognition of God and loyalty to him on the part of the vast universe organization, running down to the systems and planets themselves. Therefore it is sometimes with the hope of conserving and safeguarding these phases of God’s precious presence that, when some planets (or even systems) have plunged far into spiritual darkness, they are in a certain sense quarantined, or partially isolated from intercourse with the larger units of creation. And all this, as it operates on Urantia, is a spiritually defensive reaction of the majority of the worlds to save themselves, as far as possible, from suffering the isolating consequences of the alienating acts of a headstrong, wicked, and rebellious minority. 행성, 체계, 성좌, 우주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하여, 어떤 창조의 단위에서 그런 현존의 정도는 최극 존재의 진화하는 현존의 정도에 대한 척도입니다. 그것은 체계들과 행성 자체들에 이르기까지 경감되는 거대한 우주 조직의 일부에서 하느님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그에 대한 충성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성들 (혹은 체계들까지) 영적 어두움에 빠져들게 되면, 하느님이 귀하게 현존하는 이런 단계들을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희망으로 그들은 때때로 어떤 의미에서는 격리되거나 더 큰 창조계 단위들과의 교류에서 부분적으로 고립됩니다. 이 모든 것은 지구에서 일어났듯이, 완고하고 사악하며 반역하는 소수의 이간 행위로 고립된 결과를 겪지 않도록 가능한 한 대다수 세계가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영적으로 방어하는 반응입니다.

3:1.11 (46.3) While the Father parentally encircuits all his sons — all personalities — his influence in them is limited by the remoteness of their origin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Persons of Deity and augmented as their destiny attainment nears such levels. The fact of God’s presence in creature minds is determined by whether or not they are indwelt by Father fragments, such as the Mystery Monitors, but his effective presence is determined by the degree of co-operation accorded these indwelling Adjusters by the minds of their sojourn. 아버지는 어버이답게 자신의 모든 아들 즉 모든 인격(고유성)을 둘러싸고 계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그의 영향력은 신(神)의 둘째 및 셋째 고유자들로부터 그들의 기원이 떨어져 있어서 제한되며, 그들의 운명 성취는 그런 수준에 가까울수록 늘어납니다. 창조물의 마음들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신비 권고(眷顧)자들과 같은 하느님의 파편들이 내주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의 효과적 현존은 이렇게 내주하는 조율자들이 머무는 마음들이 그들과 일치하도록 협력하는 정도로 결정됩니다.

3:1.12 (46.4) The fluctuations of the Father’s presence are not due to the changeableness of God. The Father does not retire in seclusion because he has been slighted; his affections are not alienated because of the creature’s wrongdoing. Rather, having been endowed with the power of choice (concerning Himself), his children, in the exercise of that choice, directly determine the degree and limitations of the Father’s divine influence in their own hearts and souls. The Father has freely bestowed himself upon us without limit and without favor. He is no respecter of persons, planets, systems, or universes. In the sectors of time he confers differential honor only on the Paradise personalities of God the Sevenfold, the co-ordinate creators of the finite universes. 아버지 현존의 변동은 하느님의 변덕 때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멀리 떠나 물러나 계시지 않습니다. 그의 연정(戀情)은 창조물의 잘못 때문에 멀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 자신에 관한) 선택의 능력을 받은 그의 자녀들의 그런 선택의 행위가, 그들 자신의 심정과 혼(魂)에 대한 아버지의 신적 영향력의 정도와 한계를 직접 결정합니다. 아버지는 제한 없이, 공평하게 우리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는 사람, 행성, 체계나 우주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영역에서, 그는 칠중 하느님의 천국 고유성들, 유한한 우주의 통합-조정하는 창조자들에게만 차별적 영예를 베푸십니다.

2. God’s Infinite Power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

3:2.1 (46.5) All the universes know that “the Lord God omnipotent reigns.” The affairs of this world and other worlds are divinely supervised.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in the army of heaven and among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It is eternally true, “there is no power but of God.” 모든 우주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다스립니다(계19:6b).”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의 업무는 신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하늘의 군대와 지상의 거주자 가운데 행하십니다(단4:35b).” “하느님 외에는 권능이 없다(롬13:1).”라는 것은 영원히 진실합니다.

3:2.2 (46.6) Within the bounds of that which is consistent with the divine nature, it is literally true tha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The long-drawn-out evolutionary processes of peoples, planets, and universes are under the perfect control of the universe creators and administrators and unfold in accordance with the eternal purpose of the Universal Father, proceeding in harmony and order and in keeping with the all-wise plan of God. There is only one lawgiver. He upholds the worlds in space and swings the universes around the endless circle of the eternal circuit. 신적 본성과 일치하는 범위 내에서, “하느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마19:26b).”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민족, 행성 및 우주의 오래 끄는 진화 과정은 우주 창조자들과 경영자들의 완벽한 통제 아래에 있으며, 조화와 질서로,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지혜로운 계획에 따라 진행되면서, 우주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펼쳐집니다. 입법자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그는 공간의 세계를 유지하고, 영원한 회로의 끝없는 순환계를 따라 우주들을 회전시킵니다.

3:2.3 (47.1) Of all the divine attributes, his omnipotence, especially as it prevails in the material universe, is the best understood. Viewed as an unspiritual phenomenon, God is energy. This declaration of physical fact is predicated on the incomprehensible truth that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the primal cause of the universal physical phenomena of all space. From this divine activity all physical energy and other material manifestations are derived. Light, that is, light without heat, is another of the nonspiritual manifestations of the Deities. And there is still another form of nonspiritual energy which is virtually unknown on Urantia; it is as yet unrecognized. 모든 신적 속성 중에서, 특히 물질 우주에 널리 행해진, 그의 전능(全能)함은 가장 잘 이해됩니다. 비(非) 영적 현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에너지입니다. 물리적 사실에 대한 이런 선언은 첫째 근원 및 중심이 모든 공간의 우주 물리적 현상의 주요 원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기초합니다. 이런 신적 활동에서 모든 물리적 에너지와 기타 물질 현상이 비롯됩니다. 빛, 즉 열이 없는 빛은 신(神)들의 비(非) 영적 현상의 또 다른 현상입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는 여전히 사실상 알려지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비(非) 영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인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3:2.4 (47.2) God controls all power; he has made “a way for the lightning”; he has ordained the circuits of all energy. He has decreed the time and manner of the manifestation of all forms of energy-matter. And all these things are held forever in his everlasting grasp — in the gravitational control centering on nether Paradise. The light and energy of the eternal God thus swing on forever around his majestic circuit, the endless but orderly procession of the starry hosts composing the universe of universes. All creation circles eternally around the Paradise-Personality center of all things and beings. 하느님은 모든 권능을 다스립니다. 그는 “번개가 다니는 길(욥28:26)”을 만드셨습니다. 그는 모든 에너지 회로를 정했습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물질이 나타나는 시간과 방식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두는 언제나 그의 영원한 손아귀 – 하부 천국에 있는 중력 조정 중심에 붙들려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하느님의 빛과 에너지는 그의 장엄한 회로, 우주들의 우주를 구성하는 별 무리의 끝없지만 질서를 지키는 행렬 주위를 영원히 빙빙 돌고 있습니다. 모든 창조계는 모든 사물과 존재의 천국-인격(고유성) 중심 주위를 영원히 빙빙 돕니다.

3:2.5 (47.3) The omnipotence of the Father pertains to the everywhere dominance of the absolute level, whereon the three energies, material, mindal, and spiritual, are indistinguishable in close proximity to him — the Source of all things. Creature mind, being neither Paradise monota nor Paradise spirit, is not directly responsive to the Universal Father. God adjusts with the mind of imperfection — with Urantia mortals through the Thought Adjusters. 아버지의 전능함은 절대 수준의 모든 지배에 속해서, 물질, 마음, 영의 세 에너지는 만물의 근원인 그에게 근접할 때 분간할 수 없습니다. 천국 단일소(신성에 가까운 천국의 생생한 비非영적 에너지)도 아니고 천국 영(靈)도 아닌 창조물 마음은 우주 아버지에게 직접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불완전 마음에 맞춰서 생각 조율자들을 통해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조율합니다.

3:2.6 (47.4) The Universal Father is not a transient force, a shifting power, or a fluctuating energy. The power and wisdom of the Father are wholly adequate to cope with any and all universe exigencies. As the emergencies of human experience arise, he has foreseen them all, and therefore he does not react to the affairs of the universe in a detached way but rather in accordance with the dictates of eternal wisdom and in consonance with the mandates of infinite judgment. Regardless of appearances, the power of God is not functioning in the universe as a blind force. 우주 아버지는 변하기 쉬운 힘, 바뀌기 쉬운 권세도 아니고 요동하는 에너지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권세와 지혜는 모든 우주의 긴급 상황을 대처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합니다. 인간 경험의 긴급 상황이 일어날 때, 그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그는 우주 업무에 분리된 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지혜의 지시에 따라서, 무한한 판단력의 명령에 조화롭게 반응합니다. 겉모습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권세는 우주에서 맹목적인 힘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3:2.7 (47.5) Situations do arise in which it appears that emergency rulings have been made, that natural laws have been suspended, that misadaptations have been recognized, and that an effort is being made to rectify the situation; but such is not the case. Such concepts of God have their origin in the limited range of your viewpoint, in the finiteness of your comprehension, and in the circumscribed scope of your survey; such misunderstanding of God is due to the profound ignorance you enjoy regarding the existence of the higher laws of the realm, the magnitude of the Father’s character, the infinity of his attributes, and the fact of his free-willness. 긴급 판결이 내려지고, 자연법칙이 일시 정지되며, 잘못된 적응이 인정받고,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런 개념들은 너희 관점의 제한된 범위, 너희 이해의 유한성, 너희 조사의 제한된 범위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런 오해는 영역의 고등 법칙의 존재, 아버지 성품의 광대함, 그의 속성의 무한성, 그의 자유-의지의 사실에 관해 너희가 지닌 뿌리 깊은 무지 때문입니다.

3:2.8 (47.6) The planetary creatures of God’s spirit indwelling, scattered hither and yon throughout the universes of space, are so nearly infinite in number and order, their intellects are so diverse, their minds are so limited and sometimes so gross, their vision is so curtailed and localized, that it is almost impossible to formulate generalizations of law adequately expressive of the Father’s infinite attributes and at the same time to any degree comprehensible to these created intelligences. Therefore, to you the creature, many of the acts of the all-powerful Creator seem to be arbitrary, detached, and not infrequently heartless and cruel. But again I assure you that this is not true. God’s doings are all purposeful, intelligent, wise, kind, and eternally considerate of the best good, not always of an individual being, an individual race, an individual planet, or even an individual universe; but they are for the welfare and best good of all concerned,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n the epochs of time the welfare of the part may sometimes appear to differ from the welfare of the whole; in the circle of eternity such apparent differences are nonexistent. 공간의 우주 전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영(靈)이 내재하는 행성 창조물들의 수(數)와 계층은 거의 무한에 가깝고, 그들의 지성은 매우 다양하며, 그들의 마음은 매우 제한적이며 때로는 오해가 심하고, 그들의 시야는 매우 단축되어, 국부적이어서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적절히 표현하는 동시에 이런 창조 지능 존재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법칙을 공식화하기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전능한 창조자의 여러 행위가 너희 창조물에게는 독단적이고, 초연(超然 상황에 구애받지 않음)해 있으며, 때때로 무정하고 모질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너희에게 다시 보증합니다. 하느님의 행위는 모두 목적이 있고, 지능적이며, 지혜롭고 친절하며, 영원히 최고의 선을 고려하며, 언제나 개별 존재, 개별 종족, 개별 행성, 심지어 개별 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모두 관련자들의 복지와 최고의 선을 위한 것입니다. 시간의 획기적 시대에서, 일부의 복지는 때때로 전체의 복지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의 순환계에서는 그런 외견(겉보기)만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3:2.9 (48.1) We are all a part of the family of God, and we must therefore sometimes share in the family discipline. Many of the acts of God which so disturb and confuse us are the result of the decisions and final rulings of all-wisdom, empowering the Conjoint Actor to execute the choosing of the infallible will of the infinite mind, to enforce the decisions of the personality of perfection, whose survey, vision, and solicitude embrace the highest and eternal welfare of all his vast and far-flung creation. 우리는 모두 하느님 가족의 일부이므로 때때로 가족 양육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를 어지럽게 하며 혼란스럽게 하는 하느님의 여러 행위는 모든 지혜의 결정과 최종 판결의 결과이며, 공동 행위자가 무한한 마음에 속한 결코 잘못이 없는 의지를 선택하고, 탐색, 전망 및 심려로 그의 광대하고 넓은 범위의 창조물 모두의 최고 및 영원한 복지를 포함하는 완전한 인격(고유성)의 결정을 집행하도록 권한을 줍니다.

3:2.10 (48.2) Thus it is that your detached, sectional, finite, gross, and highly materialistic viewpoint and the limitations inherent in the nature of your being constitute such a handicap that you are unable to see, comprehend, or know the wisdom and kindness of many of the divine acts which to you seem fraught with such crushing cruelty, and which seem to be characterized by such utter indifference to the comfort and welfare, to the planetary happiness and personal prosperity, of your fellow creatures. It is because of the limits of human vision, it is because of your circumscribed understanding and finite comprehension, that you misunderstand the motives, and pervert the purposes, of God. But many things occur on the evolutionary worlds which are not the personal doings of the Universal Father. 그래서 너희의 무심하고, 편중적이며, 유한하고, 오해가 심하며, 매우 실리주의적 관점과 너희 존재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있는 제한(制限)은 너희가 그토록 참담한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고, 동료 창조물들의 안락(安樂)과 복지, 행성의 행복과 개인 번영에 그렇게 철저히 무관심한 특성으로 보이는 여러 신적 행위의 지혜와 친절을 보고, 파악하거나 알기에 무력(無力)한 그런 장애(障礙)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의 동기를 오해하고 목적을 왜곡(歪曲)하는 것은, 인간 시각의 한계, 즉 너희의 제한된 이해와 유한한 이해력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화 세계들에서는 우주 아버지가 직접 행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3:2.11 (48.3) The divine omnipotence is perfectly co-ordinated with the other attributes of the personality of God. The power of God is, ordinarily, only limited in its universe spiritual manifestation by three conditions or situations: 신적 전능(全能)은 하느님의 인격(고유성)의 다른 속성들과 완전하게 조화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일반적으로 우주에서 영적으로 드러날 때 다음의 3가지 조건이나 상황에 의해서만 제한됩니다.

3:2.12 (48.4) 1. By the nature of God, especially by his infinite love, by truth, beauty, and goodness. 하느님의 본성, 특히 그의 무한한 사랑, 진미선(眞美善)에 의해.

3:2.13 (48.5) 2. By the will of God, by his mercy ministry and fatherly relationship with the personalities of the universe. 하느님의 뜻, 그의 자비로운 돌봄과 우주의 인격(고유성)들과 아버지다운 관계로.

3:2.14 (48.6) 3. By the law of God, by the righteousness and justice of the eternal Paradise Trinity. 하느님 법 때문에, 영원한 천국 삼위일체의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로 인해.

3:2.15 (48.7) God is unlimited in power, divine in nature, final in will, infinite in attributes, eternal in wisdom, and absolute in reality. But all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Universal Father are unified in Deity and universally expressed in the Paradise Trinity and in the divine Sons of the Trinity. Otherwise, outside of Paradise and the central universe of Havona, everything pertaining to God is limited by the evolutionary presence of the Supreme, conditioned by the eventuating presence of the Ultimate, and co-ordinated by the three existential Absolutes — Deity, Universal, and Unqualified. And God’s presence is thus limited because such is the will of God. 하느님은 권능이 무한하고, 본성이 신적이며, 의지가 최종적이고, 속성이 무한하며, 지혜가 영원하고, 실체가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우주 아버지의 특성은 신(神) 안에서 통일되어 있고, 천국 삼위일체와 삼위일체 신적 아들들로 우주적으로 표현됩니다. 그와 달리, 천국과 하보나의 중앙 우주 밖에서, 하느님에 속한 모든 것은 최극 진화 존재로 제한되고, 결정적인 궁극 존재로 조절되며, 세 존재적 – 신(神), 우주 그리고 무제한 절대자들에 의해 조정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뜻이 그래서 이렇게 제한됩니다.

3. God’s Universal Knowledge 하느님의 우주적 지식

3:3.1 (48.8) “God knows all things.” The divine mind is conscious of, and conversant with, the thought of all creation. His knowledge of events is universal and perfect. The divine entities going out from him are a part of him; he who “balances the clouds” is also “perfect in knowledge.” “The eyes of the Lord are in every place.” Said your great teacher of the insignificant sparrow, “One of them shall not fall to the ground without my Father’s knowledge,” and also,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numbered.” “He tells the number of the stars; he calls them all by their names.”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요일3:20).” 신적 마음은 모든 창조물의 생각을 알고 정통해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그의 지식은 우주적이며 완전합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신적 실재들은 그의 일부입니다. “구름이 균형을 잃지 않고 떠다니게”하는 그는 또한 “지식에 완전합니다(욥37:16, 36:4).” “주님의 눈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잠15:3).” 너희 위대한 선생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내 아버지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고(마10:29).” “너희 그 머리카락도 다 헤아리십니다(마10:30).”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별들의 수(數)를 말씀하시고(사40:26), 그것들의 이름을 모두 부르십니다(시147:4).”

3:3.2 (49.1) The Universal Father is the only personality in all the universe who does actually know the number of the stars and planets of space. All the worlds of every universe are constantly within the consciousness of God. He also says: “I have surely seen the affliction of my people, I have heard their cry, and I know their sorrows.” For “the Lord looks from heaven; he beholds all the sons of men; from the place of his habitation he looks upon all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Every creature child may truly say: “He knows the way I take, and when he has tried me, I shall come forth as gold.” “God knows our downsittings and our uprisings; he understands our thoughts afar off and is acquainted with all our ways.” “All things are naked and open 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 And it should be a real comfort to every human being to understand that “he knows your frame; he remembers that you are dust.” Jesus, speaking of the living God, said, “Your Father knows what you have need of even before you ask him.” 우주 아버지는 온 우주에서 공간의 별과 행성의 수를 실제로 알고 있는 유일한 인격(고유성)입니다. 모든 우주의 세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의식 안에 있습니다. 또한 그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들의 슬픔을 알고 있노라(출3:7).”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살펴, 모든 사람의 아들(자녀)들을 보시며, 그의 거처에서 땅의 모든 주민을 바라봅니다(시33:13-14).” 모든 창조물 자녀가 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니, 그가 나를 단련하시면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하느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그는 멀리에서 우리의 생각을 이해하고 우리의 모든 길을 아십니다(시139:2-3).” “우리가 함께해야 할 그의 눈앞에 모든 것이 숨김없이 펼쳐져 있습니다(히4:13).” “그는 너희의 뼈대를 아시며, 그는 너희가 먼지임을 기억하십니다(시103:14).”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모든 인간에게 참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 “너희 아버지는 너희가 그에게 구하기 전에도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마6:8).”라고 말했습니다.

3:3.3 (49.2) God is possessed of unlimited power to know all things; his consciousness is universal. His personal circuit encompasses all personalities, and his knowledge of even the lowly creatures is supplemented indirectly through the descending series of divine Sons and directly through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s. And furthermore, the Infinite Spirit is all the time everywhere present.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는 한없는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식(意識)은 우주적입니다. 그의 개인(고유)적 회로는 모든 인격(고유성)을 포함하며, 낮은 창조물까지 아는 그의 지식은 간접적으로 하강하는 일련의 신적 아들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내주하는 생각 조율자들을 통해 보완됩니다. 그리고 게다가 무한 영(靈)은 언제든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3:3.4 (49.3) We are not wholly certain as to whether or not God chooses to foreknow events of sin. But even if God should foreknow the freewill acts of his children, such foreknowledge does not in the least abrogate their freedom. One thing is certain: God is never subjected to surprise. 하느님께서 죄의 사건들을 미리 아시는지에 대한 여부(與否)를 우리는 완전히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기 자녀들의 자유의지 행위를 미리 아신다고 해도, 그런 예지(豫知 미리 앎)가 그들의 자유를 전혀 폐기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느님은 절대로 놀라지 않으십니다.

3:3.5 (49.4) Omnipotence does not imply the power to do the nondoable, the ungodlike act. Neither does omniscience imply the knowing of the unknowable. But such statements can hardly be made comprehensible to the finite mind. The creature can hardly understand the range and limitations of the will of the Creator. 전능(全能 모두 능함)은 행할 수 없는, 신(神)답지 않은 행위를 하는 권세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지(全知 다 앎)도 알 수 없는 것을 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단지 그런 진술은 유한한 마음으로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조물은 창조주의 의지(意志)의 범위와 한계를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God’s Limitlessness 무제한(無制限)의 하느님

3:4.1 (49.5) The successive bestowal of himself upon the universes as they are brought into being in no wise lessens the potential of power or the store of wisdom as they continue to reside and repose in the central personality of Deity. In potential of force, wisdom, and love, the Father has never lessened aught of his possession nor become divested of any attribute of his glorious personality as the result of the unstinted bestowal of himself upon the Paradise Sons, upon his subordinate creations, and upon the manifold creatures thereof. 우주들이 출현할 때 우주들에 대한 자신의 연속적인 증여로 우주들이 신(神)의 중심 고유성(인격)에 계속 존재하고 휴식하면서 권능의 잠재력이나 지혜의 저장소는 절대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힘, 지혜와 사랑의 잠재력에서, 아버지는 천국 아들들, 자신 아래의 창조계들과 그 안의 다양한 창조물에게 자신을 제한 없이 증여한 결과로, 그가 소유한 어떤 것도 절대로 줄어들지 않고 그의 영광스러운 고유성(인격)의 어떤 속성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3:4.2 (49.6) The creation of every new universe calls for a new adjustment of gravity; but even if creation should continue indefinitely, eternally, even to infinity, so that eventually the material creation would exist without limitations, still the power of control and co-ordination reposing in the Isle of Paradise would be found equal to, and adequate for, the mastery, control, and co-ordination of such an infinite universe. And subsequent to this bestowal of limitless force and power upon a boundless universe, the Infinite would still be surcharged with the same degree of force and energy; the Unqualified Absolute would still be undiminished; God would still possess the same infinite potential, just as if force, energy, and power had never been poured forth for the endowment of universe upon universe. 모든 새로운 우주의 창조는 새로운 중력 조정(調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조가 무한히, 영원히 심지어 무한대까지 계속되어 결국 물질 창조가 제한 없이 존재해도, 천국 섬에 맡겨진 통제와 통합-조정하는 능력은 여전히 그렇게 무한한 우주의 지배, 통제 및 통합-조정에 적당하고 알맞은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끝없는 우주에 제한 없는 힘과 권능이 이렇게 부어진 후에도, 무한자는 여전히 마찬가지 정도의 힘과 에너지로 넘치게 충전되어 있습니다. 무제한 절대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우주에 우주를 부여하기 위해 힘, 에너지 및 권능을 절대로 쏟아붓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마찬가지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닐 것입니다.

3:4.3 (50.1) And so with wisdom: The fact that mind is so freely distributed to the thinking of the realms in no wise impoverishes the central source of divine wisdom. As the universes multiply, and beings of the realms increase in number to the limits of comprehension, if mind continues without end to be bestowed upon these beings of high and low estate, still will God’s central personality continue to embrace the same eternal, infinite, and all-wise mind.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영역의 사고방식에 그렇게 자유롭게 분배된다는 사실이 절대로 신적 지혜의 중심 원천을 메마르게 하지 않습니다. 우주들이 늘어나고, 그 영역의 존재들이 이해하는 한도까지 수적(數的)으로 불어남에 따라서, 높고 낮은 신분의 이런 존재들에게 끝없이 마음이 계속 부어진다면, 하느님의 중심 고유성(인격)은 여전히 마찬가지로 영원하고, 무한하며, 모든 지혜로운 마음을 계속 품을 것입니다.

3:4.4 (50.2) The fact that he sends forth spirit messengers from himself to indwell the men and women of your world and other worlds in no wise lessens his ability to function as a divine and all-powerful spirit personality; and there is absolutely no limit to the extent or number of such spirit Monitors which he can and may send out. This giving of himself to his creatures creates a boundless, almost inconceivable future possibility of progressive and successive existences for these divinely endowed mortals. And this prodigal distribution of himself as these ministering spirit entities in no manner diminishes the wisdom and perfection of truth and knowledge which repose in the person of the all-wise, all-knowing, and all-powerful Father. 그가 자신으로부터 영(靈) 메신저들을 보내 너희 세계와 다른 세계들의 남녀들에게 내주하게 한다는 사실이 신적이며 전능한 영(靈) 고유성(인격)으로서 활동하는 그의 능력을 조금도 줄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보낼 수 있고 보낼 수도 있는 그런 영(靈) 권고자들의 한도나 수(數)에는 정말로 제한이 없습니다. 자기 창조물들에게 이렇게 자신을 주셔서 이렇게 신적으로 부여받은 필사자들에게 무한한,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서 진보적이며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살피는 영(靈) 실재로서 자신을 이토록 아낌없이 몫마다 나누어도 모두 지혜롭고, 모두 알며 모두 전능한 아버지의 위격(位格) 안에 머무는 진리와 지식의 지혜와 완전성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3:4.5 (50.3) To the mortals of time there is a future, but God inhabits eternity. Even though I hail from near the very abiding place of Deity, I cannot presume to speak with perfection of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infinity of many of the divine attributes. Infinity of mind alone can fully comprehend infinity of existence and eternity of action. 시간의 필사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하느님은 영원에 거주합니다. 비록 내가 신(神)이 머무는 바로 그곳 근처 출신이지만, 여러 신적 속성의 무한성에 관해 완전히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무한성만이 존재의 무한성과 행위의 영원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3:4.6 (50.4) Mortal man cannot possibly know the infinitude of the heavenly Father. Finite mind cannot think through such an absolute truth or fact. But this same finite human being can actually feel — literally experience — the full and undiminished impact of such an infinite Father’s love. Such a love can be truly experienced, albeit while quality of experience is unlimited, quantity of such an experience is strictly limited by the human capacity for spiritual receptivity and by the associated capacity to love the Father in return. 필사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무한함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유한한 마음은 그런 절대 진리나 사실을 속속들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유한한 인간은 그런 무한한 아버지 사랑의 충만하며 감소하지 않는 영향력을 실제로 느껴서 – 글자 뜻 그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진실로 체험할 수 있으며, 체험의 질은 무한하지만 그런 체험의 양은 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관련된 수용 능력으로 엄격히 제한됩니다.

3:4.7 (50.5) Finite appreciation of infinite qualities far transcends the logically limited capacities of the creature because of the fact that mortal man is made in the image of God — there lives within him a fragment of infinity. Therefore man’s nearest and dearest approach to God is by and through love, for God is love. And all of such a unique relationship is an actual experience in cosmic sociology, the Creator-creature relationship — the Father-child affection. 필사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 그 내부에는 무한성의 파편이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질을 유한하게 감지하는 것은 창조물의 논리적으로 제한된 수용 능력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 결과,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장 사랑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모든 관계는 질서 우주의 사회학에서 창조주-창조물 관계, 즉 아버지-자녀의 애정이라는 실제 체험입니다.

5. The Father’s Supreme Rule 아버지의 최고 통치

3:5.1 (50.6) In his contact with the post-Havona creations, the Universal Father does not exercise his infinite power and final authority by direct transmittal but rather through his Sons and their subordinate personalities. And God does all this of his own free will. Any and all powers delegated, if occasion should arise, if it should become the choice of the divine mind, could be exercised direct; but, as a rule, such action only takes place as a result of the failure of the delegated personality to fulfill the divine trust. At such times and in the face of such default and within the limits of the reservation of divine power and potential, the Father does act independently and in accordance with the mandates of his own choice; and that choice is always one of unfailing perfection and infinite wisdom. 우주 아버지는 하보나-이후의 창조계와 접촉할 때, 그가 자신의 무한한 권세와 최종적 권위를 직접 전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아들들과 그들의 하위 고유성(인격)들을 통해 행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 모든 것을 행합니다. 예외 없이 위임된 모든 권세는, 기회가 발생하고, 신적 마음이 선택하게 된다면, 직접 행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런 행위는 위임된 고유성(인격)이 신적 신뢰를 끝내 이행하지 못한 결과로 일어날 뿐입니다. 그런 경우, 그런 불이행에 직면하여, 신적 권세와 잠재력이 보류되는 한계 내에서, 아버지는 자주적으로, 자기 선택의 명령에 따라 행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완전성과 무한한 지혜 중 하나입니다.

3:5.2 (51.1) The Father rules through his Sons; on down through the universe organization there is an unbroken chain of rulers ending with the Planetary Princes, who direct the destinies of the evolutionary spheres of the Father’s vast domains. It is no mere poetic expression that exclaims: “The earth is the Lord’s and the fullness thereof.” “He removes kings and sets up kings.” “The Most Highs rule in the kingdoms of men.” 아버지는 자기 아들들을 통해 다스리며, 우주 조직 아래에는 아버지의 광대한 영역 중 진화 구체들의 운명을 지도하는 행성 왕자들로 끝맺는 통치자들의 연속된 사슬이 있습니다. 다음의 외침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은 주님의 것이로다(시24:1a).” “그가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느니라(단2:21b).” “지극히 높은 분들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느니라(단5:21b).”

3:5.3 (51.2) In the affairs of men’s hearts the Universal Father may not always have his way; but in the conduct and destiny of a planet the divine plan prevails; the eternal purpose of wisdom and love triumphs. 사람 심정에 있는 용건들의 경우에, 우주 아버지께서 언제나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으셔도, 행성의 행위와 운명의 경우에는 신적 계획이 지배적입니다. 지혜와 사랑의 영원한 목적이 승리합니다.

3:5.4 (51.3) Said Jesus: “My Father, who gave them to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one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As you glimpse the manifold workings and view the staggering immensity of God’s well-nigh limitless creation, you may falter in your concept of his primacy, but you should not fail to accept him as securely and everlastingly enthroned at the Paradise center of all things and as the beneficent Father of all intelligent beings. There is but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above all and in all,” “and he is before all things, and in him all things consist.”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니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너희가 하느님께 속한 거의 무한한 창조의 다양한 활동을 얼핏 보고 어마어마한 광대함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탁월함에 대한 너희 개념이 흔들릴 수 있어도, 만물의 천국 중심에 안전하게 끝없이 앉아 계시고, 모든 지능적 존재들의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그분을 끝내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유 위와 만유 안에 계신 하나뿐인 하느님, 만유의 아버지(엡4:6)”만 계시며, “그는 만유보다 먼저 계시고 만유가 그 안에 있습니다(골1:17).

3:5.5 (51.4) The uncertainties of life and the vicissitudes of existence do not in any manner contradict the concept of the universal sovereignty of God. All evolutionary creature life is beset by certain inevitabilities. Consider the following: 인생의 불확실성과 존재의 성쇠(盛衰)는 하느님의 우주적 주권 개념과 어떤 방식으로든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든 진화 창조물의 삶은 확실한 필연성에 싸여 있습니다. 다음을 생각하십시오.

3:5.6 (51.5) 1. Is courage — strength of character — desirable? Then must man be reared in an environment which necessitates grappling with hardships and reacting to disappointments. 용기(인격의 강인함)가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어려움과 부딪쳐 싸우고 실망들에 대한 반응이 필요한 환경 가운데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3:5.7 (51.6) 2. Is altruism — service of one’s fellows — desirable? Then must life experience provide for encountering situations of social inequality. 애타심(동료에 대한 봉사)이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경험은 사회적 불공평과 마주치는 상황이 제공되어야만 합니다.

3:5.8 (51.7) 3. Is hope — the grandeur of trust — desirable? Then human existence must constantly be confronted with insecurities and recurrent uncertainties. 소망(신뢰의 장엄함)이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인간 실존은 불안정과 되풀이되는 불확실성에 계속 직면해야만 합니다.

3:5.9 (51.8) 4. Is faith — the supreme assertion of human thought — desirable? Then must the mind of man find itself in that troublesome predicament where it ever knows less than it can believe. 신앙(인간적 사고의 최고 주장)이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보다 언제나 더 적은 것을 아는 곤란한 곤경에 처해야 합니다.

3:5.10 (51.9) 5. Is the love of truth and the willingness to go wherever it leads, desirable? Then must man grow up in a world where error is present and falsehood always possible.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기꺼이 가는 것은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실수가 존재하고 언제나 거짓이 가능한 세상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3:5.11 (51.10) 6. Is idealism — the approaching concept of the divine — desirable? Then must man struggle in an environment of relative goodness and beauty, surroundings stimulative of the irrepressible reach for better things. 이상주의(신적인 것에 대한 접근 개념)는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상대적 선과 아름다움의 환경, 즉 더 나은 것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역량을 자극하는 주위 상황에서 투쟁해야만 합니다.

3:5.12 (51.11) 7. Is loyalty — devotion to highest duty — desirable? Then must man carry on amid the possibilities of betrayal and desertion. The valor of devotion to duty consists in the implied danger of default. 충성(최상의 의무를 향한 헌신)은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인간은 배신과 버려짐의 가능성 가운데에서 견디어야만 합니다. 의무에 헌신하는 용기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5.13 (51.12) 8. Is unselfishness — the spirit of self-forgetfulness — desirable? Then must mortal man live face to face with the incessant clamoring of an inescapable self for recognition and honor. Man could not dynamically choose the divine life if there were no self-life to forsake. Man could never lay saving hold on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potential evil to exalt and differentiate the good by contrast. 이타심(무사무욕의 헌신으로 자기를 잊은 정신)은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인정받고 명예를 얻으려고 피할 수 없는 자아의 끊임없는 외침에 직면하여 살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버려야 할 자기 생명이 없다면, 신적 삶을 역동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대조적으로 선(善)을 높이고, 구별할 잠재적 악(惡)이 없다면, 결코 구원의 공의(公義)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3:5.14 (51.13) 9. Is pleasure — the satisfaction of happiness — desirable? Then must man live in a world where the alternative of pain and the likelihood of suffering are ever-present experiential possibilities. 기쁨(행복의 만족감)은 바람직합니까? 그렇다면 인간은 괴로움의 대안(代案)들과 고통의 기회가 늘-있는 체험적 가능성의 세상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3:5.15 (52.1) Throughout the universe, every unit is regarded as a part of the whole. Survival of the part is dependent on co-operation with the plan and purpose of the whole, the wholehearted desire and perfect willingness to do the Father’s divine will. The only evolutionary world without error (the possibility of unwise judgment) would be a world without free intelligence. In the Havona universe there are a billion perfect worlds with their perfect inhabitants, but evolving man must be fallible if he is to be free. Free and inexperienced intelligence cannot possibly at first be uniformly wise. The possibility of mistaken judgment (evil) becomes sin only when the human will consciously endorses and knowingly embraces a deliberate immoral judgment. 우주 전체에서, 모든 단위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여겨집니다. 부분의 생존은 전체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협력, 아버지의 신적 뜻을 행하려는 전심의 요망과 완전한 자발성에 달려있습니다. 오류(현명하지 못한 판단의 가능성)가 없는 유일한 진화 세계는 자유로운(마음의 행동이 허용된) 지능 존재가 없는 세계일 것입니다. 하보나 우주에는 완전한 거주자들이 있는 10억 개의 완벽한 세계가 있지만, 진화하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지만 경험이 없는 지능 존재들이 처음에는 아무리 해도 한결같이 현명해질 수 없습니다. 잘못된 판단(악)의 가능성은 인간의 의지가 고의적인 비도덕적 판단을 의식적으로 찬성하고 그것을 고의로 받아들일 때만 죄가 됩니다.

3:5.16 (52.2) The full appreciation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inherent in the perfection of the divine universe. The inhabitants of the Havona worlds do not require the potential of relative value levels as a choice stimulus; such perfect beings are able to identify and choose the good in the absence of all contrastive and thought-compelling moral situations. But all such perfect beings are, in moral nature and spiritual status, what they are by virtue of the fact of existence. They have experientially earned advancement only within their inherent status. Mortal man earns even his status as an ascension candidate by his own faith and hope. Everything divine which the human mind grasps and the human soul acquires is an experiential attainment; it is a reality of personal experience and is therefore a unique possession in contrast to the inherent goodness and righteousness of the inerrant personalities of Havona. 진(眞)미(美)선(善)에 대한 온전한 인식은 신적 우주의 완전성 안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하보나 세계의 주민들은 선택의 자극으로써 상대적 가치 수준의 잠재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한 완전한 존재들은 모든 대조적이며 생각을 강요하는 도덕적 상황이 없는 중에도 선(善)을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완전한 존재들은 도덕적 본성과 영적 지위에 있어서, 실재의 사실 때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천적인 지위의 한계 안에서만 경험적으로 진보를 이룩해 왔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상승 후보자로서 자기 지위도 자신의 신앙과 소망으로 얻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혼이 획득하는 신적인 모두는 경험적 성취입니다. 그것은 고유한 경험의 실체이며, 따라서 잘못이 없는 하보나의 고유성(인격)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善)과 공의(公義)와는 대조적인 독특한 소유물입니다.

3:5.17 (52.3) The creatures of Havona are naturally brave, but they are not courageous in the human sense. They are innately kind and considerate, but hardly altruistic in the human way. They are expectant of a pleasant future, but not hopeful in the exquisite manner of the trusting mortal of the uncertain evolutionary spheres. They have faith in the stability of the universe, but they are utter strangers to that saving faith whereby mortal man climbs from the status of an animal up to the portals of Paradise. They love the truth, but they know nothing of its soul-saving qualities. They are idealists, but they were born that way; they are wholly ignorant of the ecstasy of becoming such by exhilarating choice. They are loyal, but they have never experienced the thrill of wholehearted and intelligent devotion to duty in the face of temptation to default. They are unselfish, but they never gained such levels of experience by the magnificent conquest of a belligerent self. They enjoy pleasure, but they do not comprehend the sweetness of the pleasure escape from the pain potential. 하보나의 창조물들은 선천적으로 용감하지만, 그들은 인간적 의미에서 용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친절하고 사려 깊지만, 인간적 방식으로 도저히 애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즐거운 미래를 기대하지만 불확실한 진화 구체들에서 신뢰하는 필사자의 절묘(絶妙)한 방식으로 희망에 차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주 안정성을 신뢰하지만, 그들은 필사 인간이 동물의 상태에서 천국의 입구까지 기어오르는 그런 구원의 신앙에 대해서 전적으로 경험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만, 혼(魂)을 구원하는 자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들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짜릿한 선택으로 그렇게 될 때의 황홀경(怳惚境)을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충성스럽지만, 의무를 저버리려는 유혹에 맞서, 전심으로, 지능을 다해 의무에 헌신하는 전율을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타적이지만 그들은 호전적인 자아를 장엄하게 정복하는 그런 수준의 경험에 결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즐거움을 누리지만, 고통의 잠재력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의 달콤함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6. The Father’s Primacy 아버지의 수위성(首位性)

3:6.1 (52.4) With divine selflessness, consummate generosity, the Universal Father relinquishes authority and delegates power, but he is still primal; his hand is on the mighty lever of the circumstances of the universal realms; he has reserved all final decisions and unerringly wields the all-powerful veto scepter of his eternal purpose with unchallengeable authority over the welfare and destiny of the outstretched, whirling, and ever-circling creation. 신적 이타심(利他心)과 완전한 아량(雅量)으로, 우주 아버지는 권위를 포기하고 권세를 위임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일 중요합니다. 그의 손은 우주 영역들이 속한 상황의 강력한 지렛대 위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최종적 판결을 남겨두고, 펼쳐져, 소용돌이치며, 항상-순환하는 창조계의 복지와 운명에 대해 도전할 수 없는 권위로 자기 영원한 목적의 전능한 거부 주권을 조금도 틀림없이 행사합니다.

3:6.2 (52.5) The sovereignty of God is unlimited; it is the fundamental fact of all creation. The universe was not inevitable. The universe is not an accident, neither is it self-existent. The universe is a work of creation and is therefore wholly subject to the will of the Creator. The will of God is divine truth, living love; therefore are the perfecting creations of the evolutionary universes characterized by goodness — nearness to divinity; by potential evil — remoteness from divinity. 하느님의 주권은 무한합니다. 그것은 모든 창조계의 근본적 사실입니다. 우주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주는 우발 사건이 아니며,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주는 창조의 작품이며 따라서 전적으로 창조주의 뜻을 따릅니다. 하느님의 뜻은 신적 진리이며, 살아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진화 우주들 가운데 완전해지는 창조계들은 신성(神性)에 가까운 선함과 신성(神性)에서 멀어진 잠재적 악(惡)이라는 특색이 있습니다.

3:6.3 (53.1) All religious philosophy, sooner or later, arrives at the concept of unified universe rule, of one God. Universe causes cannot be lower than universe effects. The source of the streams of universe life and of the cosmic mind must be above the levels of their manifestation. The human mind cannot be consistently explained in terms of the lower orders of existence. Man’s mind can be truly comprehended only by recognizing the reality of higher orders of thought and purposive will. Man as a moral being is inexplicable unless the re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is acknowledged. 모든 종교 철학은 조만간 하나뿐인 하느님이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통일된 개념에 도달합니다. 우주의 원인은 우주의 결과보다 낮을 수 없습니다. 우주 생명과 질서 우주 마음이 흐르는 근원은 그것들이 드러나는 수준들 위쪽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낮은 존재 계층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더 높은 차원의 사고와 목적에 맞는 의지의 실체를 인식해야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도덕 존재로서 인간은 우주 아버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3:6.4 (53.2) The mechanistic philosopher professes to reject the idea of a universal and sovereign will, the very sovereign will whose activity in the elaboration of universe laws he so deeply reverences. What unintended homage the mechanist pays the law-Creator when he conceives such laws to be self-acting and self-explanatory! 기계론적 철학자는 우주적인 주권적 의지, 자신이 그토록 깊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정교한 우주 법칙에서 활동하는 바로 그 주권적 의지의 개념을 거부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계론자가 그런 법칙이 스스로 작동하고 스스로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그는 법칙-창조자에게 의도한 것이 아닌,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3:6.5 (53.3) It is a great blunder to humanize God, except in the concept of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but even that is not so stupid as completely to mechanize the idea of the First Great Source and Center. 내주하는 생각 조율자의 개념을 제외하고 하느님을 인간화하는 것은 거대한 실수(失手)지만, 그것조차도 위대한 첫째 근원 및 중심의 개념을 완전히 기계화하는 것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3:6.6 (53.4) Does the Paradise Father suffer? I do not know. The Creator Sons most certainly can and sometimes do, even as do mortals.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suffer in a modified sense. I think the Universal Father does, but I cannot understand how; perhaps through the personality circuit or through the individuality of the Thought Adjusters and other bestowals of his eternal nature. He has said of the mortal races, “In all your afflictions I am afflicted.” He unquestionably experiences a fatherly and sympathetic understanding; he may truly suffer, but I do not comprehend the nature thereof. 천국 아버지가 괴로워합니까? 나는 모릅니다. 창조자 아들들은 필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틀림없이 괴로워할 수 있고 때때로 괴로워합니다. 영원 아들과 무한 영(靈)은 변형된 의미에서 괴로워합니다. 나는 우주 아버지도 그런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어떻게 그런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고유성(인격) 회로를 통해서나 생각 조율자들의 개성과 그의 영원한 본성의 다른 증여들을 통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는 필사 인류들에게 “너희의 모든 고통에서 내가 괴로워하노라(사63:9a).”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아버지답게 공감하는 이해력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는 정말로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나는 그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6.7 (53.5) The infinite and eternal Ruler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is power, form, energy, process, pattern, principle, presence, and idealized reality. But he is more; he is personal; he exercises a sovereign will, experiences self-consciousness of divinity, executes the mandates of a creative mind, pursues the satisfaction of the realization of an eternal purpose, and manifests a Father’s love and affection for his universe children. And all these more personal traits of the Father can be better understood by observing them as they were revealed in the bestowal life of Michael, your Creator Son, while he was incarnated on Urantia. 우주들의 우주의 무한하고 영원한 통치자는 권능, 형태, 에너지, 과정, 원형, 원리, 존재 및 이상화된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입니다. 그는 고유(인격)적입니다. 그는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고, 신성(神性)의 자의식을 경험으로 알며, 창조적 마음의 명령을 실행하고, 영원한 목적을 실현하는 만족을 추구하며, 자신의 우주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런 더 고유(인격)적인 모든 특성은 유란시아에 성육신(成肉身)한 너희 창조자 아들, 미가엘의 증여 생활로 계시된 대로, 그것들을 살펴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3:6.8 (53.6) God the Father loves men; God the Son serves men; God the Spirit inspires the children of the universe to the ever-ascending adventure of finding God the Father by the ways ordained by God the Sons through the ministry of the grace of God the Spirit. 아버지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아들 하느님은 사람들을 섬깁니다. 영(靈) 하느님은 우주의 자녀들이 영(靈) 하느님의 은혜의 보살핌을 통해 아들들 하느님이 정한 방법대로 아버지 하느님을 찾아 상승하는 모험을 끊임없이 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3:6.9 (53.7) [Being the Divine Counselor assigned to the presentation of the revelation of the Universal Father, I have continued with this statement of the attributes of Deity.][우주 아버지의 계시를 제시하도록 배정된 신적 조언자인, 나는 신(神)의 속성에 대한 이런 진술을 계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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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2 The Nature of God 하느님의 본성

Paper 2

The Nature of God 하느님의 본성

  1. The Infinity of God 하느님의 무한성
  2. The Father’s Eternal Perfection 아버지의 영원한 완전성
  3. Justice and Righteousness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4. The Divine Mercy 신적 자비
  5. The Love of God 하느님의 사랑
  6. The Goodness of God 하느님의 선(善)하심
  7. Divine Truth and Beauty 신적 진리와 아름다움

2:0.1 (33.1) INASMUCH as man’s highest possible concept of God is embraced within the human idea and ideal of a primal and infinite personality, it is permissible, and may prove helpful, to study certain characteristics of the divine nature which constitute the character of Deity. The nature of God can best be understood by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which Michael of Nebadon unfolded in his manifold teachings and in his superb mortal life in the flesh. The divine nature can also be better understood by man if he regards himself as a child of God and looks up to the Paradise Creator as a true spiritual Father. 하느님에 대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높은 개념은, 근원적이며 무한한 고유성에 대한 인간의 관념과 이상 안에 포함되므로, 신의 성품을 구성하는 신적 본성에 대한 어떤 특성들을 연구하는 것은,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자신의 다양한 교훈과 자신이 직접 필사자로 훌륭하게 사셨던 생애로 펼치신, 아버지 계시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고 천국의 창조주를 진정한 영적 아버지로 존경한다면, 그 사람은 신적인 본성 또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2 (33.2) The nature of God can be studied in a revelation of supreme ideas, the divine character can be envisaged as a portrayal of supernal ideals, but the most enlightening and spiritually edifying of all revelations of the divine nature is to be found in the comprehension of the religious life of Jesus of Nazareth, both before and after his attainment of full consciousness of divinity. If the incarnated life of Michael is taken as the background of the revelation of God to man, we may attempt to put in human word symbols certain ideas and ideals concerning the divine nature which may possibly contribute to a further illumination and unification of the human concept of the nature and the character of the person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하느님의 본성은 최상의 관념들이 계시가 될 때 연구될 수 있고, 신적 특성은 천상의 이상(理想)들로 묘사될 때 마음에 그려질 수 있지만, 나사렛 예수가 신성(神性)의 충만한 의식에 이르기 이전과 이후의 모든 종교적 생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신적 본성의 모든 계시 중에서 가장 분명한 통찰력과 영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가엘의 성육신한 생애를, 인간에게 하느님을 계시하는 배경으로 간주한다면, 우주 아버지 고유성의 본성과 특성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더 온전히 조명하고 통합하도록 어떻게 해서든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신적 본성에 관한 어떤 관념들과 이상(理想)들을 우리가 인간 단어의 상징으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2:0.3 (33.3) In all our efforts to enlarge and spiritualize the human concept of God, we are tremendously handicapped by the limited capacity of the mortal mind. We are also seriously handicapped in the execution of our assignment by the limitations of language and by the poverty of material which can be utilized for purposes of illustration or comparison in our efforts to portray divine values and to present spiritual meanings to the finite, mortal mind of man. All our efforts to enlarge the human concept of God would be well-nigh futile except for the fact that the mortal mind is indwelt by the bestowed Adjuster of the Universal Father and is pervaded by the Truth Spirit of the Creator Son. Depending, therefore, on the presence of these divine spirits within the heart of man for assistance in the enlargement of the concept of God, I cheerfully undertake the execution of my mandate to attempt the further portrayal of the nature of God to the mind of man.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확대하고 영성화하려고 애쓸 때, 필사자 마음의 제한된 수용 능력에 의해, 우리는 엄청난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신적 가치를 표현하고 유한한 인간의 필사자 마음에 영적 의미를 제시하려고 애쓸 때, 실례나 비교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제한과 자료의 빈곤으로 인해, 임무를 수행하면서, 중대한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사자 마음에 우주 아버지가 증여한 조율자가 내주하고, 창조주 아들의 진리 영(靈)이 충만하다는 사실이 없다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확장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거의 쓸데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개념 확장을 도우려고, 인간의 심정 내부에 이렇게 현존하는 신적 영(靈)들에 달려 있으므로, 나는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의 본성을 더 묘사하려는 내 임무를 기쁘게 수행합니다.

1. The Infinity of God 하나님의 무한성

2:1.1 (33.4) “Touching the Infinite, we cannot find him out. The divine footsteps are not known.” “His understanding is infinite and his greatness is unsearchable.” The blinding light of the Father’s presence is such that to his lowly creatures he apparently “dwells in the thick darkness.” Not only are his thoughts and plans unsearchable, but “he does great and marvelous things without number.” “God is great; we comprehend him not, neither can the number of his years be searched out.” “Will God indeed dwell on the earth? Behold, the heaven (universe) and the heaven of heavens (universe of universes) cannot contain him.”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his ways past finding out!” “우리는 무한성을 접촉하면서, 하느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신의 발자국은 알려지지 않습니다(시77:19b).” “그의 이해력은 무한하며, 그의 위대함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욥12:13, 시145:3b).” 아버지가 임재하는 눈이 부신 빛은 그의 낮은 창조물들에게 그가 명백히 “짙은 흑암에 거하실” 정도입니다(왕상8:12, 대하6:1, 출20:21, 신5:22-23). 그의 생각들과 계획들은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합니다(욥5:9, 9:10).” “하느님은 위대합니다. 우리는 그를 파악하지 못하며, 그의 연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욥36:26).” “하느님께서 참으로 땅 위에 거하실까요? 보라, 하늘(우주)과 하늘들의 하늘(우주들의 우주)가 하느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왕상8:27a, 대하2:6b, 6:18).”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간 그의 길은 추적할 수 없도다(롬11:33b)!”

2:1.2 (34.1) “There is but one God, the infinite Father, who is also a faithful Creator.” “The divine Creator is also the Universal Disposer, the source and destiny of souls. He is the Supreme Soul, the Primal Mind, and the Unlimited Spirit of all creation.” “The great Controller makes no mistakes. He is resplendent in majesty and glory.” “The Creator God is wholly devoid of fear and enmity. He is immortal, eternal, self-existent, divine, and bountiful.” “How pure and beautiful, how deep and unfathomable is the supernal Ancestor of all things!” “The Infinite is most excellent in that he imparts himself to men. He is the beginning and the end, the Father of every good and perfect purpose.”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the eternal Creator is the cause of causes.” “오직 한 분 하느님, 무한 아버지가 계시며, 또한 그는 신실한 창조자입니다(고전8:6, 엡4:6, 벧전4:19).” “신적 창조자는 또한 우주 감독자, 혼(魂)들의 근원과 운명입니다. 그는 최극 혼(魂), 수위(首位) 마음 및 온 창조계의 제한 없는 영(靈)입니다(욥34:13, 시104:30, 잠16:33, 사40:28, 41:4, 44:6, 계1:8, 17-18, 21:6, 22:13).” “위대한 조정자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위엄과 영광으로 눈부십니다(삼하22:31, 대상29:11, 사2:19).” “창조자 하느님은 두려움과 미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불멸하고, 영원하며, 자존하고, 신적이며, 풍성합니다(롬1:20, 딤전1:17, 계1:8).” “만물의 고귀한 조상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얼마나 깊고 헤아릴 수 없는가!” “무한 자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점에서 가장 탁월합니다. 그는 시작과 끝이며, 모든 선하고 완전한 목적의 아버지입니다(시84:11, 사48:12, 고전1:12, 엡1:3, 약1:17).”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영원한 창조자는 원인의 원인입니다(창1:1, 18:14, 렘32:17, 마19:26, 막10:27, 눅1:37, 18:27).”

2:1.3 (34.2) Notwithstanding the infinity of the stupendous manifestations of the Father’s eternal and universal personality, he is unqualifiedly self-conscious of both his infinity and eternity; likewise he knows fully his perfection and power. He is the only being in the universe, aside from his divine co-ordinates, who experiences a perfect, proper, and complete appraisal of himself. 아버지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고유성이 무한히 엄청나게 드러나도, 그는 자신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절대적으로 스스로 의식합니다(출3:14).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완전과 권세도 완전히 압니다. 그는, 자신의 신적 동료 외에, 자신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하며 완벽한 감정(鑑定)을 경험하는, 우주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2:1.4 (34.3) The Father constantly and unfailingly meets the need of the differential of demand for himself as it changes from time to time in various sections of his master universe. The great God knows and understands himself; he is infinitely self-conscious of all his primal attributes of perfection. God is not a cosmic accident; neither is he a universe experimenter. The Universe Sovereigns may engage in adventure; the Constellation Fathers may experiment; the system heads may practice; but the Universal Father sees the end from the beginning, and his divine plan and eternal purpose actually embrace and comprehend all the experiments and all the adventures of all his subordinates in every world, system, and constellation in every universe of his vast domains. 아버지는, 자기 주(主)우주의 다양한 구역에서 때때로 수요 차이의 필요가 변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변함없이 확실하게 그 필요를 채웁니다. 위대한 하느님은 자신을 알고 이해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근원적인 완전함의 속성을 무한하게 스스로 의식합니다. 하느님은 질서 우주의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 실험자도 아닙니다. 우주 주권자들은 모험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성좌 아버지들은 실험할 수도 있습니다. 체계 수장(首長)들은 연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을 보고, 그의 신적 계획과 영원한 목적은 실제로 자기 광대한 영역의 모든 우주에서 모든 세계, 체계와 성좌에 있는 자신의 모든 수하(手下)의 모든 실험과 모든 모험을 포함하고 파악합니다(사46:9-10).

2:1.5 (34.4) No thing is new to God, and no cosmic event ever comes as a surprise; he inhabits the circle of eternity. He is without beginning or end of days. To God there is no past, present, or future; all time is present at any given moment. He is the great and only I AM. 하느님에게 새로운 것은 없으며, 질서 우주의 어떤 사건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성의 순환에 사십니다(사57:15). 그는 시작의 시기도 없고 끝의 시기도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습니다. 모든 시간은 어느 순간에도 존재합니다. 그는 위대하시며 유일하게 스스로 계십니다(출3:14).

2:1.6 (34.5) The Universal Father is absolutely and without qualification infinite in all his attributes; and this fact, in and of itself, automatically shuts him off from all direct personal communication with finite material beings and other lowly created intelligences. 우주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속성에서 절대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그 자체로 유한한 물질 존재와 기타 낮게 창조된 지능 존재와 직접적인 모든 개인 소통으로부터 자신을 자동으로 차단합니다.

2:1.7 (34.6) And all this necessitates such arrangements for contact and communication with his manifold creatures as have been ordained, first, in the personalities of the Paradise Sons of God, who, although perfect in divinity, also often partake of the nature of the very flesh and blood of the planetary races, becoming one of you and one with you; thus, as it were, God becomes man, as occurred in the bestowal of Michael, who was called interchangeably the Son of God and the Son of Man. And second, there are the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the various orders of the seraphic hosts and other celestial intelligences who draw near to the material beings of lowly origin and in so many ways minister to them and serve them. And third, there are the impersonal Mystery Monitors, Thought Adjusters, the actual gift of the great God himself sent to indwell such as the humans of Urantia, sent without announcement and without explanation. In endless profusion they descend from the heights of glory to grace and indwell the humble minds of those mortals who possess the capacity for God-consciousness or the potential therefor.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그의 다양한 창조물들과 접촉하고 소통하기 위한 그런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 완전한 신성(神性)이면서 바로 행성 인류의 인간 본성에도 참여하여 너희 중 하나가 되고 너희와 함께하는, 하느님의 천국 아들들의 고유성들로, 이런 식으로, 이를테면,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 상호 바꿀 수 있다고 불렸던, 미가엘의 증여에서 일어났듯이, 하느님이 인간이 됩니다. 둘째, 무한 영(靈)의 고유성들, 다양한 계층의 세라핌 무리와 다른 천상의 지능 존재들이 있어서, 낮은 기원의 물질 존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주 여러모로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셋째, 비(非)고유적인 신비 권고자(眷顧者 돌봐주는 분)들, 생각 조율자들, 예고도 없고 설명도 없이 유란시아의 인간들과 같이 내주하도록 보낸 위대한 하느님 자신의 실제 선물이 있습니다. 끝없이 풍성하게, 그들은 영광의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하느님을 알아채는 능력이나 그것을 위한 잠재력을 지닌, 그런 필사자들의 겸손한 마음에 영광을 주고 그 마음에 내주합니다.

2:1.8 (35.1) In these ways and in many others, in ways unknown to you and utterly beyond finite comprehension, does the Paradise Father lovingly and willingly downstep and otherwise modify, dilute, and attenuate his infinity in order that he may be able to draw nearer the finite minds of his creature children. And so, through a series of personality distributions which are diminishingly absolute, the infinite Father is enabled to enjoy close contact with the diverse intelligences of the many realms of his far-flung universe. 이렇게 그리고 여러 다른 방식으로,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유한한 이해를 완전히 초월하는 방식으로, 천국 아버지는 자기 창조물 자녀들의 유한한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애정을 기울여 기꺼이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무한성을 완화하고 약화하며 묽게 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점점 줄어드는 일련의 고유성 분배를 거쳐, 무한 아버지는 자신의 광대한 우주의 여러 영역에 속한 다양한 지능 존재들과 긴밀한 접촉을 즐길 수 있습니다.

2:1.9 (35.2) All this he has done and now does, and evermore will continue to do, without in the least detracting from the fact and reality of his infinity, eternity, and primacy. And these things are absolutely true, notwithstanding the difficulty of their comprehension, the mystery in which they are enshrouded, or the impossibility of their being fully understood by creatures such as dwell on Urantia. 그는, 적어도 자신의 무한성, 영원성 및 수위성의 사실과 실체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행했고, 지금도 하시며 언제나 계속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들을 둘러싼 신비, 즉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것과 같은 창조물들이 그런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실제 그대로입니다.

2:1.10 (35.3) Because the First Father is infinite in his plans and eternal in his purposes, it is inherently impossible for any finite being ever to grasp or comprehend these divine plans and purposes in their fullness. Mortal man can glimpse the Father’s purposes only now and then, here and there, as they are revealed in relation to the outworking of the plan of creature ascension on its successive levels of universe progression. Though man cannot encompass the significance of infinity, the infinite Father does most certainly fully comprehend and lovingly embrace all the finity of all his children in all universes. 첫째 아버지는 자신의 계획에 있어서 무한하고 자신의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셔서, 어떤 유한한 존재도 이런 신적 계획과 그런 충만한 목적을 파악하거나 이해하기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필사 인간은 우주가 진행하는 연속적인 수준에서 창조물 상승 계획의 작업에 관해 우주 아버지의 목적이 계시될 때, 단지 때때로 여기저기에서 그것들을 얼핏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한성의 의미를 둘러볼 수 없지만, 무한 아버지는 가장 확실하게 모든 우주에 있는 모든 자기 자녀의 모든 유한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애정을 기울여 품습니다.

2:1.11 (35.4) Divinity and eternity the Father shares with large numbers of the higher Paradise beings, but we question whether infinity and consequent universal primacy is fully shared with any save his co-ordinate associates of the Paradise Trinity. Infinity of personality must, perforce, embrace all finitude of personality; hence the truth — literal truth — of the teaching which declares that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That fragment of the pure Deity of the Universal Father which indwells mortal man is a part of the infinity of the First Great Source and Center, the Father of Fathers. 아버지는 신성(神性)과 영원성을 많은 수(數)의 고등 천국 존재들과 공유하지만, 우리는, 무한성과 필연적인 우주 수위성(首位性)이 천국 삼위일체에 속한 그의 동등한 동료들 외에 누구와 완전히 공유되는지 의문시합니다. 고유성의 무한성은 필연적으로 모든 고유성의 유한성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행17:28).”라고 선언하는 가르침의 진리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필사 인간에게 내주하는 우주 아버지의 순전한 신(神)의 파편은 첫째 위대한 근원 중심, 아버지들의 아버지에 속한 무한성의 부분입니다.

2. The Father’s Eternal Perfection 아버지의 영원한 완전성

2:2.1 (35.5) Even your olden prophets understood the eternal, never-beginning, never-ending, circular nature of the Universal Father. God is literally and eternally present in his universe of universes. He inhabits the present moment with all his absolute majesty and eternal greatness. “The Father has life in himself, and this life is eternal life.” Throughout the eternal ages it has been the Father who “gives to all life.” There is infinite perfection in the divine integrity. “I am the Lord; I change not.” Our knowledge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discloses not only that he is the Father of lights, but also that in his conduct of interplanetary affairs there “is no variableness neither shadow of changing.” He “declares the end from the beginning.” He says: “My counsel shall stand; I will do all my pleasures” “according to the eternal purpose which I purposed in my Son.” Thus are the plans and purposes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like himself: eternal, perfect, and forever changeless. 당신들의 옛 선지자들도 영원하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 아버지의 순환적 본성을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모든 우주에 정말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절대적 위엄과 영원한 위대함으로 현재 순간에 존재합니다. “아버지는 자신 안에 생명을 지니며, 이 생명은 영생이라(요5:26a).” 영원히 오랫동안 내내 “모든 생명에게 주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행17:25). 신적 온전함 안에 무한한 완전성이 있습니다. “나는 주(主)이니라. 나는 변하지 않느니라(말3:6)” 온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가 빛들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행성 간 업무 수행에서 “변함도 없고 변화하는 그림자도 없다(약1:17b).”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는 “시작부터 끝을 선언합니다(사46:10a).” 그는 “내가 내 아들 안에서 목표로 삼은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엡3:11)” “내 계획이 유지될 것이라. 내가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하리라(사46:10b).”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계획과 목적은 자신처럼 영원하고 완전하며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2:2.2 (35.6) There is finality of completeness and perfection of repleteness in the mandates of the Father. “Whatsoever God does, it shall be forever; nothing can be added to it nor anything taken from it.” The Universal Father does not repent of his original purposes of wisdom and perfection. His plans are steadfast, his counsel immutable, while his acts are divine and infallible. “A thousand years in his sight are but as yesterday when it is past and as a watch in the night.” The perfection of divinity and the magnitude of eternity are forever beyond the full grasp of the circumscribed mind of mortal man. 아버지의 명령에는 완성의 최종성과 충만의 완전성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행하시는 무엇이든지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에 더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할 수도 없습니다(전3:14a).” 우주 아버지는 지혜와 완전이라는 자신의 원래 목적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의 계획은 확고하고, 그의 방침은 불변하며, 그의 행위는 신적이며 오류(誤謬)가 없습니다. “그의 눈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순간에 불과합니다(시90:4).” 신성의 완전성과 영원의 광대함은 필사 인간의 제한된 마음으로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곳에 영원히 있습니다.

2:2.3 (36.1) The reactions of a changeless God, in the execution of his eternal purpose, may seem to vary in accordance with the changing attitude and the shifting minds of his created intelligences; that is, they may apparently and superficially vary; but underneath the surface and beneath all outward manifestations, there is still present the changeless purpose, the everlasting plan, of the eternal God. 그의 영원한 목적을 실행하는, 변함없는 하느님의 반응은 자신이 창조한 지능 존재들의 변화하는 태도와 바뀌는 마음에 따라 변하는 듯합니다. 즉, 그것들은 언뜻 보기에 표면적으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 아래, 모든 외적 표현 밑에, 영원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목적, 영원한 계획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2:2.4 (36.2) Out in the universes, perfection must necessarily be a relative term, but in the central universe and especially on Paradise, perfection is undiluted; in certain phases it is even absolute. Trinity manifestations vary the exhibition of the divine perfection but do not attenuate it. 바깥 우주들에서 완전성은 필연적으로 분명히 상대적 용어이지만, 중앙우주와 특히 천국에서 완전성은 희석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단계에서 그것은 심지어 절대적입니다. 삼위일체 표현은 신적 완전성의 표시를 다양하게 하지만, 그것을 약하게 하지 않습니다.

2:2.5 (36.3) God’s primal perfection consists not in an assumed righteousness but rather in the inherent perfection of the goodness of his divine nature. He is final, complete, and perfect. There is no thing lacking in the beauty and perfection of his righteous character. And the whole scheme of living existences on the worlds of space is centered in the divine purpose of elevating all will creatures to the high destiny of the experience of sharing the Father’s Paradise perfection. God is neither self-centered nor self-contained; he never ceases to bestow himself upon all self-conscious creatures of the vast universe of universes. 하느님의 근원적 완전성은 가정(假定)된 정의(正義)가 아니라, 그의 신적 본성에 속한 선함의 내재적 완전성에 있습니다. 그는 최종적이고, 완벽하며, 완전합니다. 그의 의로운 성품에 속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간 세계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의 전체 계획은 모든 의지 창조물을 아버지 천국의 완전성을 공유하는 체험의 높은 운명으로 끌어올리는 신적 목적을 중심에 둡니다. 하느님은 자기-중심적이지도 않고 자기 안에 갇혀서 마음을 닫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광대한 온 우주에서 스스로 의식하는 모든 창조물에게 절대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내어 줍니다.

2:2.6 (36.4) God is eternally and infinitely perfect, he cannot personally know imperfection as his own experience, but he does share the consciousness of all the experience of imperfectness of all the struggling creatures of the evolutionary universes of all the Paradise Creator Sons. The personal and liberating touch of the God of perfection overshadows the hearts and encircuits the natures of all those mortal creatures who have ascended to the universe level of moral discernment. In this manner, as well as through the contacts of the divine presence, the Universal Father actually participates in the experience with immaturity and imperfection in the evolving career of every moral being of the entire universe. 하느님은 영원하고 무한히 완전하며, 그는 그 자신의 체험으로 불완전을 친히 알 수 없지만, 그는 모든 천국 창조자 아들들의 진화하는 우주에서 모두 분투하는 창조물의 모든 불완전한 체험에 대한 의식을 공유합니다. 완전에 속한 하느님의 개인적이며 자유로운 손길이 도덕적으로 분별하는 우주 수준까지 상승한 그런 모든 필사 창조물의 심정을 덮고, 그들의 본성을 둘러쌉니다. 이렇게, 신적 현존의 접촉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주 아버지는, 전(全) 우주의 모든 도덕적 존재의 진화 생애에서, 미성숙과 불완전의 체험에 실제로 참여합니다.

2:2.7 (36.5) Human limitations, potential evil, are not a part of the divine nature, but mortal experience with evil and all man’s relations thereto are most certainly a part of God’s ever-expanding self-realization in the children of time — creatures of moral responsibility who have been created or evolved by every Creator Son going out from Paradise. 인간의 한계, 잠재적 악(惡)은 신적 본성의 일부가 아니지만 악(惡)에 대한 필사자 체험과 그것에 대한 모든 인간의 관계는 시간의 자녀들-천국에서 파송된 모든 창조자 아들이 창조하고 진화시킨 도덕적 책임이 있는 창조물들-안에서 아주 확실하게, 자기-실현을 끝없이 확장하는 하느님의 일부입니다.

3. Justice and Righteousness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2:3.1 (36.6) God is righteous; therefore is he just. “The Lord is righteous in all his ways.” “‘I have not done without cause all that I have done,’ says the Lord.” “The judgments of the Lord are true and righteous altogether.” The justice of the Universal Father cannot be influenced by the acts and performances of his creatures, “for there is no iniquity with the Lord our God, no respect of persons, no taking of gifts.” 하느님은 의로우시므로 그는 공정합니다. “주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의로우십니다(시145:17a).” “‘나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이유 없이 하지 않았느니라(겔14:23b).’라고 주께서 말하느니라.” “주의 판단은 진실하며 다 의로우니라(시19:9b).” 우주 아버지의 정의(正義)는 그의 창조물들의 행위와 성과로 좌우될 수 없으니, “주 우리 하느님께는 사악도 없고, 차별 대우도 없고, 뇌물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대하19:7b).”

2:3.2 (36.7) How futile to make puerile appeals to such a God to modify his changeless decrees so that we can avoid the just consequences of the operation of his wise natural laws and righteous spiritual mandates! “Be not deceived; God is not mocked, for whatsoever a man sows that shall he also reap.” True, even in the justice of reaping the harvest of wrongdoing, this divine justice is always tempered with mercy. Infinite wisdom is the eternal arbiter which determines the proportions of justice and mercy which shall be meted out in any given circumstance. The greatest punishment (in reality an inevitable consequence) for wrongdoing and deliberate rebellion against the government of God is loss of existence as an individual subject of that government. The final result of wholehearted sin is annihilation. In the last analysis, such sin-identified individuals have destroyed themselves by becoming wholly unreal through their embrace of iniquity. The factual disappearance of such a creature is, however, always delayed until the ordained order of justice current in that universe has been fully complied with. 우리가 하느님의 지혜로운 자연법과 의로운 영적 명령이 시행된 공정한 결과를 피할 수 있도록 그의 변함없는 뜻을 변경하기 위해 그런 하느님께 철없이 간청하는 것이 얼마나 헛됩니까! “속지 말라. 하느님은 조롱당하지 않으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사실, 잘못의 결과를 거두는 정의(正義)에서도, 이런 신적 정의(正義)가 언제나 자비(慈悲)로 진정됩니다. 무한한 지혜(智慧)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의(正義)와 자비(慈悲)의 비율을 결정하는 영원한 중재자입니다. 하느님의 정부(政府)에 저항하는 범죄와 의도적 반역에 대한 가장 큰 처벌(실제로 피할 수 없는 결과)은 그런 정부(政府)의 개별 주체로서 존재를 잃는 것입니다. 진심이 담긴 죄의 최종 결과는 소멸입니다. 결국, 그렇게 죄와 똑같은 것으로 확인된 개인들은 사악(肆惡)을 받아들여 전적으로 비(非)존재가 되어 스스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창조물의 실제 소멸은 그 우주에서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규정된 질서가 완전히 준수되기까지 언제나 지연됩니다.

2:3.3 (37.1) Cessation of existence is usually decreed at the dispensational or epochal adjudication of the realm or realms. On a world such as Urantia it comes at the end of a planetary dispensation. Cessation of existence can be decreed at such times by co-ordinate action of all tribunals of jurisdiction, extending from the planetary council up through the courts of the Creator Son to the judgment tribunals of the Ancients of Days. The mandate of dissolution originates in the higher courts of the superuniverse following an unbroken confirmation of the indictment originating on the sphere of the wrongdoer’s residence; and then, when sentence of extinction has been confirmed on high, the execution is by the direct act of those judges residential on, and operating from, the headquarters of the superuniverse. 존재의 중지(中止)는 대개 각 영역이나 영역들의 섭리적 혹은 획시대적 판결이 있을 때 선언됩니다. 유란시아 같은 세계는 행성적 섭리의 마지막에 존재가 중지(中止)됩니다. 그런 때에 행성 회의로부터 창조자 아들의 법원을 거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판결 재판소에 이르는, 모든 관할 재판소의 통합 행위로 존재의 중지(中止)가 선언될 수 있습니다. 소멸(消滅)의 명령은 범죄자의 거주 영역에서 시작된 기소(起訴)가 위반(違反) 없이 확정된 후 초우주의 상급 법원에서 시작하며, 그 후 소멸형(消滅刑)이 높은 곳에서 확인되면, 초우주 본부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그런 판사들의 직접적 행위로 집행됩니다(옵1:16).

2:3.4 (37.2) When this sentence is finally confirmed, the sin-identified being instantly becomes as though he had not been. There is no resurrection from such a fate; it is everlasting and eternal. The living energy factors of identity are resolved by the transformations of time and the metamorphoses of space into the cosmic potentials whence they once emerged. As for the personality of the iniquitous one, it is deprived of a continuing life vehicle by the creature’s failure to make those choices and final decisions which would have assured eternal life. When the continued embrace of sin by the associated mind culminates in complete self-identification with iniquity, then upon the cessation of life, upon cosmic dissolution, such an isolated personality is absorbed into the oversoul of creation, becoming a part of the evolving experience of the Supreme Being. Never again does it appear as a personality; its identity becomes as though it had never been. In the case of an Adjuster-indwelt personality, the experiential spirit values survive in the reality of the continuing Adjuster. 이런 형(刑)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죄와 똑같이 확인된 존재는 즉시 그가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됩니다. 그런 숙명(宿命)에서 부활은 없으며, 그것은 영속적이며 영원합니다. 정체의 살아있는 에너지 요소들은 시간의 변환과 공간의 변형으로, 그 요소들이 원래 출현했던 질서 우주의 잠재력 안으로 분해됩니다. 사악(肆惡)한 자의 고유성에 관하여, 영원한 생명을 확보할 수 있었던 창조물들의 그런 선택들과 최종적 결정의 실패로 인해 연속적인 생명의 수단을 빼앗깁니다. 결부된 마음으로 죄를 계속 품어 완전히 사악(肆惡)으로 증명된 자기-신원이 절정에 이르면, 생명의 중지(中止)와 질서 우주적 분해로, 그렇게 고립된 고유성은 창조의 대혼(大魂)으로 흡수되어 최극 존재에 속한 진화 체험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은 결코 다시는 고유성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그 정체성은 마치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됩니다. 조율자가 내주한 고유성의 경우에, 체험적인 영(靈)의 가치는 영속하는 조율자의 실체 안에 살아남습니다.

2:3.5 (37.3) In any universe contest between actual levels of reality, the personality of the higher level will ultimately triumph over the personality of the lower level. This inevitable outcome of universe controversy is inherent in the fact that divinity of quality equals the degree of reality or actuality of any will creature. Undiluted evil, complete error, willful sin, and unmitigated iniquity are inherently and automatically suicidal. Such attitudes of cosmic unreality can survive in the universe only because of transient mercy-tolerance pending the action of the justice-determining and fairness-finding mechanisms of the universe tribunals of righteous adjudication. 어떤 우주에서든 실체의 실제 수준들 사이의 경쟁에서 상위 수준의 고유성이 결국 하위 수준의 고유성을 이길 것입니다. 우주 논쟁의 이런 필연적 결과는 질(質)적 신성(神性)이 모든 의지 창조물의 실체 또는 실재의 정도와 같다는 사실에 본래부터 들어있습니다. 희석되지 않은 악(惡), 철저한 잘못, 계획적인 죄와 누그러지지 않은 사악(肆惡)은 본질적으로 자동 자멸입니다. 그런 (질서) 우주적 비(非)-실체의 태도는, 의로운 판결에 속한 우주 재판소의 정의(正義) 결정과 공정성을 찾는 작용의 활동을 기다리는 동안 오로지 일시적인 자비-관용 때문에 우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2:3.6 (37.4) The rule of the Creator Sons in the local universes is one of creation and spiritualization. These Sons devote themselves to the effective execution of the Paradise plan of progressive mortal ascension, to the rehabilitation of rebels and wrong thinkers, but when all such loving efforts are finally and forever rejected, the final decree of dissolution is executed by forces acting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Ancients of Days. 지역 우주에서 창조주 아들들의 통치는 창조와 영화(靈化)의 통치입니다. 이런 아들들은 점진적 필사자 상승에 속한 천국 계획의 효과적 실행 및 반역자들과 잘못된 사상가들의 회복에 헌신하지만, 그러한 모든 애정이 깊은 노력이 마침내 영원토록 거부될 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재판권에 따라 행동하는 세력이 최종적인 분해의 명령을 집행합니다.

4. The Divine Mercy 신적 자비

2:4.1 (38.1) Mercy is simply justice tempered by that wisdom which grows out of perfection of knowledge and the full recognition of the natural weaknesses and environmental handicaps of finite creatures. “Our God is full of compassion, gracious, long-suffering, and plenteous in mercy.” Therefore “whosoever calls upon the Lord shall be saved,” “for he will abundantly pardon.” “The mercy of the Lord is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yes, “his mercy endures forever.” “I am the Lord who executes loving-kindness, judgment, and righteousness in the earth, for in these things I delight.” “I do not afflict willingly nor grieve the children of men,” for I am “the Father of mercies and the God of all comfort.” 자비는 지식의 완전성과 유한한 창조물의 자연적 약점과 환경적 불리한 조건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서 생기는 그런 지혜로 부드러워진 정의(正義)일 뿐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긍휼함이 풍성하고,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자비가 풍성합니다(시86:15, 145:8).”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a),” “그는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라(사55:7b).” “주의 자비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103:17)” 게다가 “그의 자비는 영원하게 지속하느니라(시107:1b).” “나는 너그러운 사랑, 공정(公正), 공의(公義)를 땅에 베푸는 주(主)니라, 나는 이런 것들을 기뻐하노라(렘9:24).” 나는 “자비의 아버지이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고후1:3)”이므로, “나는 본심으로 사람의 자녀들을 괴롭히지도 슬프게 하지도 않느니라(애3:33).”

2:4.2 (38.2) God is inherently kind, naturally compassionate, and everlastingly merciful. And never is it necessary that any influence be brought to bear upon the Father to call forth his loving-kindness. The creature’s need is wholly sufficient to insure the full flow of the Father’s tender mercies and his saving grace. Since God knows all about his children, it is easy for him to forgive. The better man understands his neighbor, the easier it will be to forgive him, even to love him.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친절하시고, 본성적으로 연민이 가득하시며, 언제나 자비로우십니다(시100:5). 그리고 그의 너그러운 사랑을 불러일으키도록 아버지께 어떤 영향력을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창조물의 필요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자비와 그의 구원의 은혜가 충만히 흐르도록 보장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합니다(시103:13-14). 하느님은 자기 자녀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용서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웃을 이해할수록, 그를 용서하고 심지어 그를 사랑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2:4.3 (38.3) Only the discernment of infinite wisdom enables a righteous God to minister justice and mercy at the same time and in any given universe situation. The heavenly Father is never torn by conflicting attitudes towards his universe children; God is never a victim of attitudinal antagonisms. God’s all-knowingness unfailingly directs his free will in the choosing of that universe conduct which perfectly, simultaneously, and equally satisfies the demands of all his divine attributes and the infinite qualities of his eternal nature. 무한한 지혜의 분별력만이 의로운 하느님께서 어떤 우주 상황에서도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베풀도록 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기 우주 자녀들을 향해 상반되는 태도로 절대로 분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태도에 관한 대립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전지(全知)함은 그의 모든 신적 속성과 그의 영원한 본성의 무한한 특성의 요구를 완전히, 동시에, 동등하게 만족시키는 그런 우주 행위를 선택하는 일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정확하게 지시합니다.

2:4.4 (38.4) Mercy is the natural and inevitable offspring of goodness and love. The good nature of a loving Father could not possibly withhold the wise ministry of mercy to each member of every group of his universe children. Eternal justice and divine mercy together constitute what in human experience would be called fairness. 자비는 선함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애정이 깊은 아버지의 선한 본성은 자기 우주 자녀에 속한 모든 집단 중 각자에게 지혜로운 자비의 돌봄을 아무리 해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영원한 정의와 신적 자비가 인간 체험에서 공정(公正)이라는 것을 함께 만들어 냅니다.

2:4.5 (38.5) Divine mercy represents a fairness technique of adjustment between the universe levels of perfection and imperfection. Mercy is the justice of Supremacy adapted to the situations of the evolving finite, the righteousness of eternity modified to meet the highest interests and universe welfare of the children of time. Mercy is not a contravention of justice but rather an understanding interpretation of the demands of supreme justice as it is fairly applied to the subordinate spiritual beings and to the material creatures of the evolving universes. Mercy is the justice of the Paradise Trinity wisely and lovingly visited upon the manifold intelligences of the creations of time and space as it is formulated by divine wisdom and determined by the all-knowing mind and the sovereign free will of the Universal Father and all his associated Creators. 신적 자비는 우주의 완전성과 불완전성 수준 사이에서 조율하는 공정한 기법을 나타냅니다. 자비는 진화하는 유한자의 입장에 맞추어 조정된 최극위의 정의(正義), 시간에 속한 자녀들의 최고 이익과 우주 행복을 충족하도록 수정된 영원(永遠)의 공의(公義)입니다. 자비는 정의(正義)에 위배 되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우주들의 하위 영적 존재들과 물질 창조물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자비는 최극 정의(正義)의 요구에 대한 사려 분별이 있는 해석입니다. 자비는 신적 지혜로 명확히 나타나고, 우주 아버지와 그의 관련된 모든 창조자의 전지한 마음과 주권적 자유의지로 결정되기 때문에, 자비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 속한 다양한 지능 존재들에게 지혜롭게 애정을 기울여 방문하는 천국 삼위일체의 정의(正義)입니다.

5. The Love of God 하느님의 사랑

2:5.1 (38.6) “God is love”; therefore his only personal attitude towards the affairs of the universe is always a reaction of divine affection. The Father loves us sufficiently to bestow his life upon us. “He mak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just and on the unjust.” “하느님은 사랑입니다(요일4:8b).” 그러므로 우주 업무에 대한 그의 유일한 개인적 태도는 언제나 신적 애정의 반응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만큼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솟아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십니다(막5:45b).”

2:5.2 (39.1) It is wrong to think of God as being coaxed into loving his children because of the sacrifices of his Sons or the intercession of his subordinate creatures, “for the Father himself loves you.” It is in response to this paternal affection that God sends the marvelous Adjusters to indwell the minds of men. God’s love is universal; “whosoever will may come.” He would “have all men be saved by coming i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He is “not willing that any should perish.” 하느님의 아들들의 희생 또는 그의 하위 창조물들의 중보 기도 때문에 하느님이 자기 자녀를 사랑하도록 설득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인 것은 “아버지가 친히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요16:27).” 이런 아버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은 놀라운 조율자들을 보내어 인간들의 마음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주적입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올 수 있습니다(계22:17b).” 그는 “모든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그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b).”

2:5.3 (39.2) The Creators are the very first to attempt to save man from the disastrous results of his foolish transgression of the divine laws. God’s love is by nature a fatherly affection; therefore does he sometimes “chasten us for our own profit, that we may be partakers of his holiness.” Even during your fiery trials remember that “in all our afflictions he is afflicted with us.” 창조주들은 인간이 신적 법칙을 어리석게 어긴 비참한 결과로부터 인간을 구하려고 맨 처음 시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본래 자애로운 애정이므로 그는 종종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단련하여 우리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히12:10b)” 하십니다. 너희가 불같은 시련 중에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그가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심(사63:9a)”을 기억하십시오.

2:5.4 (39.3) God is divinely kind to sinners. When rebels return to righteousness, they are mercifully received, “for our God will abundantly pardon.” “I am he who blots out your transgressions for my own sake, and I will not remember your sins.” “Behold what manner of love the Father has bestowed up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the sons of God.” 하느님은 죄인들에게 신적으로 친절합니다. 반역한 자들이 공의(公義)로 되돌아오면, “우리 하느님이 풍성히 용서할 것이므로(사55:7),” 그들은 자비롭게 환영받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너희 (종교적) 죄를 지워 없애는 그이며, 나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사43:25).”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식의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자녀)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보라(요일3:1a).”

2:5.5 (39.4) After all, the greatest evidence of the goodness of God and the supreme reason for loving him is the indwelling gift of the Father — the Adjuster who so patiently awaits the hour when you both shall be eternally made one. Though you cannot find God by searching, if you will submit to the leading of the indwelling spirit, you will be unerringly guided, step by step, life by life, through universe upon universe, and age by age, until you finally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Paradise person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결국,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최대 증거와 그를 사랑하는 최고 이유는 둘 다 영원히 하나가 될 때를 그토록 끈기 있게 기다리는 조율자, 즉 아버지의 내주하는 선물입니다. 너희가 탐색하여 하느님을 찾을 수 없지만, 너희가 내주하는 영(靈)의 안내에 복종한다면, 너희는 우주 아버지의 천국 고유성 앞에 마침내 설 때까지, 한 걸음씩, 한 생애씩, 우주에서 우주를 거쳐, 한 시대씩 틀림없이 인도될 것입니다.

2:5.6 (39.5) How unreasonable that you should not worship God because the limitations of human nature and the handicaps of your material creation make it impossible for you to see him. Between you and God there is a tremendous distance (physical space) to be traversed. There likewise exists a great gulf of spiritual differential which must be bridged; but notwithstanding all that physically and spiritually separates you from the Paradise personal presence of God, stop and ponder the solemn fact that God lives within you; he has in his own way already bridged the gulf. He has sent of himself, his spirit, to live in you and to toil with you as you pursue your eternal universe career. 인간 본성의 한계와 너희 물질적 창조의 장애로 인해 너희가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너희가 하느님을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은가! 너희와 하느님 사이에는 건너야 할 엄청난 거리(물리적 공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리를 놓아야만 하는 영적으로 차별된 커다란 격차가 존재합니다(눅16:26). 그러나 천국 하느님이 몸소 계신 앞에서 물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너희를 떼어놓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너희 내부에 살아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멈춰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은 이미 자기 방식으로 그 격차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는 너희가 영원한 우주 생애를 추구할 때 너희 안에 살면서 너희와 함께 수고하도록 자신, 자기 영(靈)을 보냈습니다(고전3:16).

2:5.7 (39.6) I find it easy and pleasant to worship one who is so great and at the same time so affectionately devoted to the uplifting ministry of his lowly creatures. I naturally love one who is so powerful in creation and in the control thereof, and yet who is so perfect in goodness and so faithful in the loving-kindness which constantly overshadows us. I think I would love God just as much if he were not so great and powerful, as long as he is so good and merciful. We all love the Father more because of his nature than in recognition of his amazing attributes. 나는 그렇게 위대한 동시에 자신의 낮은 창조물을 향상하는 돌봄에 그렇게 애정을 다해 헌신하는 분을 경배하는 것이, 쉽고 즐겁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창조와 그 관리에서 그렇게 강력하지만, 선함에서 그렇게 완전하고 우리를 변함없이 자애(慈愛 도타운 사랑)로 그렇게 충실하게 덮는 분을 자연히 사랑합니다. 나는 하느님이 그렇게 위대하고 강력하지 않아도, 그가 그렇게 선하고 자비하면 나는 하느님을 그만큼 사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의 놀라운 속성을 인식하기보다 그의 본성 때문에 아버지를 더 사랑합니다.

2:5.8 (39.7) When I observe the Creator Sons and their subordinate administrators struggling so valiantly with the manifold difficulties of time inherent in the evolution of the universes of space, I discover that I bear these lesser rulers of the universes a great and profound affection. After all, I think we all, including the mortals of the realms, love the Universal Father and all other beings, divine or human, because we discern that these personalities truly love us. The experience of loving is very much a direct response to the experience of being loved. Knowing that God loves me, I should continue to love him supremely, even though he were divested of all his attributes of supremacy, ultimacy, and absoluteness. 창조자 아들들과 그들의 하위 경영자들이 공간 우주의 진화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시간의 다양한 어려움과 그토록 씩씩하게 분투하는 것을 볼 때, 내가 우주들의 이런 작은 통치자들에게 크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결국 나는 영역의 필사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 우주 아버지와 신적이든 인간이든, 다른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인격(고유성)들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우리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험은 사랑받는 경험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반응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가 자신의 수위성, 궁극성, 절대성의 모든 속성을 상실했다고 해도 나는 계속 그를 지극히 사랑해야 합니다.

2:5.9 (40.1) The Father’s love follows us now and throughout the endless circle of the eternal ages. As you ponder the loving nature of God, there is only one reasonable and natural personality reaction thereto: You will increasingly love your Maker; you will yield to God an affection analogous to that given by a child to an earthly parent; for, as a father, a real father, a true father, loves his children, so the Universal Father loves and forever seeks the welfare of his created sons and daughters. 아버지의 사랑은 지금 그리고 영원한 시대의 끝없는 순환을 통해 우리를 따릅니다. 너희가 하느님의 본성을 깊이 생각하면 거기에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격(고유성)의 반응은 하나뿐입니다. 너희는 창조주를 점점 사랑할 것입니다. 너희는 자녀가 지상 부모에게 주는 것과 유사한 애정을 하느님께 드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진정한 아버지, 참된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듯이, 우주 아버지께서 자신이 창조한 아들과 딸들의 행복을 사랑하고 영원히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2:5.10 (40.2) But the love of God is an intelligent and farseeing parental affection. The divine love functions in unified association with divine wisdom and all other infinite characteristics of the perfect nature of the Universal Father. God is love, but love is not God.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the divine love for mortal beings is observed in the bestowal of the Thought Adjusters, but your greatest revelation of the Father’s love is seen in the bestowal life of his Son Michael as he lived on earth the ideal spiritual life. It is the indwelling Adjuster who individualizes the love of God to each human soul.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가 빨라 정확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으며 통찰력이 있는 어버이의 애정입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우주 아버지의 완전한 본성에 속한 다른 모든 무한한 특성들과 통합된 관계로 작용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필사자 존재들에 대한 신적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은 생각 조율자들의 증여로 관찰되지만, 아버지 사랑의 가장 큰 계시는 그의 아들 미가엘이 지상에서 이상적인 영적 생활을 살았을 때, 그의 증여 생애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각 인간 혼(魂)에 개별화하는 것은 내주하는 조율자입니다.

2:5.11 (40.3) At times I am almost pained to be compelled to portray the divine affection of the heavenly Father for his universe children by the employment of the human word symbol love. This term, even though it does connote man’s highest concept of the mortal relations of respect and devotion, is so frequently designative of so much of human relationship that is wholly ignoble and utterly unfit to be known by any word which is also used to indicate the matchless affection of the living God for his universe creatures! How unfortunate that I cannot make use of some supernal and exclusive term which would convey to the mind of man the true nature and exquisitely beautiful significance of the divine affection of the Paradise Father. 나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단어 상징을 사용하여 그의 우주 자녀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신적 애정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거의 고통스럽습니다. 이 용어는 존경과 헌신이라는 필사자 관계에 대한 인간의 최고 개념을 그 안에 담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우주 창조물들을 위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비길 데 없는 애정을 나타내도록 똑같이 사용되는 어떤 단어로 알려지기에 아주 가치 없고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그렇게 많은 부분을 너무 자주 나타냅니다! 천국 아버지의 신적 애정에 속한 참된 본성과 품위 있게 아름다운 의미를 인간의 마음에 전달할 어떤 고상하고 유일한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2:5.12 (40.4) When man loses sight of the love of a personal God, the kingdom of God becomes merely the kingdom of good. Notwithstanding the infinite unity of the divine nature, love is the dominant characteristic of all God’s personal dealings with his creatures. 사람이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하느님의 나라는 선(善)의 나라가 될 뿐입니다. 신적 본성의 무한한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하느님이 자기 창조물들을 친히 다루시는 모든 것의 지배적인 특성입니다.

6. The Goodness of God 하느님의 선(善)하심

2:6.1 (40.5) In the physical universe we may see the divine beauty, in the intellectual world we may discern eternal truth, but the goodness of God is found only in the spiritual world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In its true essence, religion is a faith-trust in the goodness of God. God could be great and absolute, somehow even intelligent and personal, in philosophy, but in religion God must also be moral; he must be good. Man might fear a great God, but he trusts and loves only a good God. This goodness of God is a part of the personality of God, and its full revelation appears only i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believing sons of God.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적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알아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선(善)하심은 개인적인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됩니다. 참된 본질에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앙-신뢰입니다. 철학에서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어쨌든 심지어 지능적이며 인격적일 수 있지만, 종교에서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이며 선해야 합니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선하신 하느님만 신뢰하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이런 선하심은 하느님 고유성(인격성)의 일부이며, 그 완전한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아들(자녀)들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납니다.

2:6.2 (40.6) Religion implies that the superworld of spirit nature is cognizant of, and responsive to, the fundamental needs of the human world. Evolutionary religion may become ethical, but only revealed religion becomes truly and spiritually moral. The olden concept that God is a Deity dominated by kingly morality was upstepped by Jesus to that affectionately touching level of intimate family morality of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than which there is none more tender and beautiful in mortal experience. 종교는 영적 본성의 초(超) 세계가 인간 세상의 근본적 필요를 인식하고 응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화 종교는 윤리적일 수도 있지만 계시 종교만이 진실로 영적으로 도덕적입니다. 하느님은 왕의 도덕성으로 지배되는 신(神)이라는 오래된 개념은 예수님에 의해 부모-자녀 관계의 친밀한 가족 도덕성의 애정 어린 감동 수준으로 증진되었고, 필사자 체험에서 그보다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2:6.3 (41.1) The “richness of the goodness of God leads erring man to repentance.” “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comes down from the Father of lights.” “God is good; he is the eternal refuge of the souls of men.” “The Lord God is merciful and gracious. He is long-suffering and abundant in goodness and truth.”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him.” “The Lord is gracious and full of compassion. He is the God of salvation.” “He heals the brokenhearted and binds up the wounds of the soul. He is man’s all-powerful benefactor.” “하느님의 풍성한 선하심이 잘못한 사람을 회개로 이끄십니다(롬2:4).”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옵니다(약1:17).” “하느님은 선하시며(나1:7a), 그는 인간 영혼의 영원한 피난처입니다(신33:27a).” “주 하느님은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십니다. 그는 오래 참으시며 선하심과 진실이 풍성하십니다(출34:6).”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함이 풍성하시니라(시111:4b). 그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라(시68:20a).” “그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도다(시147:3). 그는 사람의 전능한 은인이시라(대상29:12).”

2:6.4 (41.2) The concept of God as a king-judge, although it fostered a high moral standard and created a law-respecting people as a group, left the individual believer in a sad position of insecurity respecting his status in time and in eternity. The later Hebrew prophets proclaimed God to be a Father to Israel; Jesus revealed God as the Father of each human being. The entire mortal concept of God is transcendently illuminated by the life of Jesus. Selflessness is inherent in parental love. God loves not like a father, but as a father. He is the Paradise Father of every universe personality. 하느님을 왕-심판자로 보는 개념은 높은 도덕적 기준을 조성하고 집단으로서 법을 존중하는 백성을 만들었지만, 시간과 영원 가운데 있는 개인별 신자(信者)의 신분을 불안전한 슬픈 처지에 두었습니다. 후대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각 인간의 아버지로 계시했습니다. 전체 필사자의 하느님 개념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초월적으로 조명되었습니다. 이타심은 어버이 사랑에 본래부터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처럼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로서 사랑합니다. 그는 모든 우주 인격(고유성)의 천국 아버지입니다.

2:6.5 (41.3) Righteousness implies that God is the source of the moral law of the universe. Truth exhibits God as a revealer, as a teacher. But love gives and craves affection, seeks understanding fellowship such as exists between parent and child. Righteousness may be the divine thought, but love is a father’s attitude. The erroneous supposition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was irreconcilable with the selfless love of the heavenly Father, presupposed absence of unity in the nature of Deity and led directly to the elaboration of the atonement doctrine, which is a philosophic assault upon both the unity and the free-willness of God. 공의(公義)는 하느님이 우주 도덕 법칙의 근원임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하느님을 계시자, 교사로서 드러냅니다. 그러나 사랑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애정을 주고 갈망하며, 이해심 있는 친밀한 사귐을 추구합니다. 공의(公義)는 신적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사랑은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하늘 아버지의 이타적 사랑과 대립한다는 잘못된 추측은 신(神)의 본성에 통일성이 없다고 미리 추정하여 속죄 교리를 공들여 만들어내는 일로 직접 이어졌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통일성과 자유 의지에 대한 철학적 공격입니다.

2:6.6 (41.4) The affectionate heavenly Father, whose spirit indwells his children on earth, is not a divided personality — one of justice and one of mercy — neither does it require a mediator to secure the Father’s favor or forgiveness. Divine righteousness is not dominated by strict retributive justice; God as a father transcends God as a judge. 지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 안에 그의 영(靈)이 살고 있는 다정한 하늘 아버지는, 정의에 속한 하나의 인격과 자비에 속한 하나의 인격 즉, 분열된 인격(고유성)이 아니고, 아버지의 호의나 용서를 얻기 위한 중개자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신적 공의(公義)는 엄하게 보복하는 정의(正義)로 지배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로서 하느님은 심판자로서 하느님을 초월합니다.

2:6.7 (41.5) God is never wrathful, vengeful, or angry. It is true that wisdom does often restrain his love, while justice conditions his rejected mercy. His love of righteousness cannot help being exhibited as equal hatred for sin. The Father is not an inconsistent personality; the divine unity is perfect. In the Paradise Trinity there is absolute unity despite the eternal identities of the co-ordinates of God. 하느님은 결코 격노하고, 복수심에 불타거나 성내지 않습니다. 지혜가 종종 그의 사랑을 억누르는 한편 정의(正義)가 그의 거부된 자비를 결정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의(公義)에 대한 그의 사랑은 죄에 대한 동등한 증오(憎惡)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일관성이 없는 인격(고유성)이 아닙니다. 신적 통일성은 완전합니다. 천국 삼위일체 안에는 동등한 하느님의 영원한 신원(身元)들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통일성이 있습니다.

2:6.8 (41.6) God loves the sinner and hates the sin: such a statement is true philosophically, but God is a transcendent personality, and persons can only love and hate other persons. Sin is not a person. God loves the sinner because he is a personality reality (potentially eternal), while towards sin God strikes no personal attitude, for sin is not a spiritual reality; it is not personal; therefore does only the justice of God take cognizance of its existence. The love of God saves the sinner; the law of God destroys the sin. This attitude of the divine nature would apparently change if the sinner finally identified himself wholly with sin just as the same mortal mind may also fully identify itself with the indwelling spirit Adjuster. Such a sin-identified mortal would then become wholly unspiritual in nature (and therefore personally unreal) and would experience eventual extinction of being. Unreality, even incompleteness of creature nature, cannot exist forever in a progressingly real and increasingly spiritual universe.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하고 죄는 미워합니다. 이런 진술은 철학적으로 사실이지만, 하느님은 초월적 인격(고유성)이며, 사람(고유자들)은 다른 사람(고유자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죄는 사람(고유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격(고유성) 실체(잠재적으로 영원한)이므로 죄인을 사랑하지만, 죄를 향해서 하느님은 개인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데, 죄는 영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격적(고유적)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정의(正義)만이 그 존재를 인지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원하고, 하느님의 법이 죄를 파괴합니다. 바로 필사자 마음도 내주하는 영(靈) 조율자와 자신을 바로 완전히 동일시할 수 있는 것처럼 죄인이 마침내 자신을 완전히 죄와 동일시한다면 신적 본성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바뀔 것입니다. 그렇게 죄와 동일시된 필사자는 그때 본성으로 완전히 비(非)영적으로 되어 (그 결과로 개인으로서 실재하지 않게 되며) 최후에 존재의 소멸을 경험할 것입니다. 비(非)실재성, 창조물 본성의 불완전성(不完全性)조차 꾸준히 실제적이며, 점점 영적인 우주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2:6.9 (42.1) Facing the world of personality, God is discovered to be a loving person; facing the spiritual world, he is a personal love; in religious experience he is both. Love identifies the volitional will of God. The goodness of God rests at the bottom of the divine free-willness — the universal tendency to love, show mercy, manifest patience, and minister forgiveness. 인격(고유성)의 세계를 향하면, 하느님은 사랑하는 인격(고유)자로 발견됩니다. 영적 세계를 향하면, 하느님은 인격(고유)적 사랑입니다. 종교적 체험을 향하면, 하느님은 인격(고유)자인 동시에 인격(고유)적 사랑 둘 다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결단적 의지로 확인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인내심을 나타내며, 용서를 베푸는 우주적 경향, 즉 신적 자유-의지의 밑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7. Divine Truth and Beauty 신적 진리와 아름다움

2:7.1 (42.2) All finite knowledge and creature understanding are relative. Information and intelligence, gleaned from even high sources, is only relatively complete, locally accurate, and personally true. 모든 유한한 지식과 창조물의 이해력은 상대적입니다. 수준 높은 출처에서 수집한 정보와 지식도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국지적으로 정확하며, 개인적으로 참될 뿐입니다.

2:7.2 (42.3) Physical facts are fairly uniform, but truth is a living and flexible factor in the philosophy of the universe. Evolving personalities are only partially wise and relatively true in their communications. They can be certain only as far as their personal experience extends. That which apparently may be wholly true in one place may be only relatively true in another segment of creation. 물리적 사실은 상당히 획일적이지만, 진리는 우주 철학에서 살아 있는 유연한 요소입니다. 진화하는 인격(고유)체들은 소통에서 부분적으로만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참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이 확장하는 한에서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한 곳에서 전적으로 진실일 수 있는 것이 창조계의 다른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만 진실일 수 있습니다.

2:7.3 (42.4) Divine truth, final truth, is uniform and universal, but the story of things spiritual, as it is told by numerous individuals hailing from various spheres, may sometimes vary in details owing to this relativity in the completeness of knowledge and in the repleteness of personal experience as well as in the length and extent of that experience. While the laws and decre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First Great Source and Center are eternally, infinitely, and universally true; at the same time, their application to, and adjustment for, every universe, system, world, and created intelligence, are in accordance with the plans and technique of the Creator Sons as they function in their respective universes, as well as in harmony with the local plans and procedures of the Infinite Spirit and of all other associated celestial personalities. 신적 진리, 최종 진리는 일정하고 우주적이지만, 영적인 것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구체 출신의 수많은 개인이 말했듯이, 지식의 완전성과 개인적 체험의 충만함 및 그런 체험의 길이와 범위에서 이런 상대성 때문에, 세부 사항에서 때때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첫째 위대한 근원 및 중심의 법칙과 판결, 사고와 태도는 영원히, 무한하게 그리고 우주적으로 진실하지만, 동시에 모든 우주, 체계, 세계 및 창조된 지능 존재들을 향한 적용과 조율은 그들이 자신들의 각 우주에서 활동할 때 창조자 아들들의 계획과 기법에 따르며, 무한 영(靈)과 다른 모든 관련된 천상의 인격(고유성)들의 지역 계획과 절차에 조화되어 있습니다.

2:7.4 (42.5) The false science of materialism would sentence mortal man to become an outcast in the universe. Such partial knowledge is potentially evil; it is knowledge composed of both good and evil. Truth is beautiful because it is both replete and symmetrical. When man searches for truth, he pursues the divinely real. 물질주의(物質主義)의 거짓 과학은 필사 사람을 우주에서 추방자가 되도록 판결할 것입니다. 그런 부분적 지식은 선과 악으로 구성된 지식이므로 잠재적으로 악입니다. 진리는 충만하며 균형이 잡혀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찾을 때, 그는 신의 힘으로 실재를 뒤쫓습니다.

2:7.5 (42.6) Philosophers commit their gravest error when they are misled into the fallacy of abstraction, the practice of focusing the attention upon one aspect of reality and then of pronouncing such an isolated aspect to be the whole truth. The wise philosopher will always look for the creative design which is behind, and pre-existent to, all universe phenomena. The creator thought invariably precedes creative action. 철학자들은 실체의 한 측면에 주의를 집중한 후 그렇게 고립된 측면을 전체 진리라고 선언하는 관행인 추상의 오류로 잘못 인도될 때 그들은 가장 심각한 잘못을 저지릅니다. 현명한 철학자는 항상 모든 우주 현상 배후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하는 창조적 설계를 찾을 것입니다. 창조자의 생각은 변함없이 창조적 행동에 선행합니다.

2:7.6 (42.7) Intellectual self-consciousness can discover the beauty of truth, its spiritual quality, not only by the philosophic consistency of its concepts, but more certainly and surely by the unerring response of the ever-present Spirit of Truth. Happiness ensues from the recognition of truth because it can be acted out; it can be lived. Disappointment and sorrow attend upon error because, not being a reality, it cannot be realized in experience. Divine truth is best known by its spiritual flavor. 지적 자의식(自意識)은 진리 개념의 철학적 일관성뿐만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진리 영(靈)의 조금도 틀리지 않는 응답으로 더 확실하게, 틀림없이 진리의 아름다움, 진리의 영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실행될 수 있고, 실천될 수 있어서 진리를 알아볼 때 행복해집니다. 오류는 실체가 아니어서, 체험으로 실감할 수 없기에 실망과 슬픔이 오류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신적 진리는 영적 풍미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2:7.7 (42.8) The eternal quest is for unification, for divine coherence. The far-flung physical universe coheres in the Isle of Paradise; the intellectual universe coheres in the God of mind, the Conjoint Actor; the spiritual universe is coherent in the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But the isolated mortal of time and space coheres in God the Father through the direct relationship between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and the Universal Father. Man’s Adjuster is a fragment of God and everlastingly seeks for divine unification; it coheres with, and in, the Paradise Deit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영원한 탐구는 통일, 신적 일관성을 위한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물리적 우주는 천국의 섬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지적 우주는 마음의 하느님, 공동 행위자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영적 우주는 영원 아들의 인격(고유성)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고립된 필사자는 내주하는 생각 조율자와 우주 아버지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조율자는 하느님의 분신(分身)이며 신적 통일을 영원히 추구합니다. 그것은 첫째 근원 및 중심의 천국 신(神)과 함께 그 안에서 일관성이 있습니다.

2:7.8 (43.1) The discernment of supreme beauty is the discovery and integration of reality: The discernment of the divine goodness in the eternal truth, that is ultimate beauty. Even the charm of human art consists in the harmony of its unity.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식별은 실체를 발견하고 통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 안에서 신적 선(善)을 식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 그 통일성의 조화에 있습니다.

2:7.9 (43.2) The great mistake of the Hebrew religion was its failure to associate the goodness of God with the factual truths of science and the appealing beauty of art. As civilization progressed, and since religion continued to pursue the same unwise course of overemphasizing the goodness of God to the relative exclusion of truth and neglect of beauty, there developed an increasing tendency for certain types of men to turn away from the abstract and dissociated concept of isolated goodness. The overstressed and isolated morality of modern religion, which fails to hold the devotion and loyalty of many twentieth-century men, would rehabilitate itself if, in addition to its moral mandates, it would give equal consideration to the truths of science, philosophy, and spiritual experience, and to the beauties of the physical creation, the charm of intellectual art, and the grandeur of genuine character achievement. 히브리 종교의 가장 큰 실수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과학의 사실적 진리 및 예술의 매력적 아름다움과 관련짓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종교가 상대적으로 진리를 배제하고 아름다움을 무시하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로 그 어리석은 과정을 계속 추구함에 따라,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고립된 선에 대한 추상적이며 분리된 개념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더욱 전개되었습니다. 여러 20세기 사람들의 헌신과 충성심을 끝내 붙잡지 못한 현대 종교의 과도한 압력과 고립된 도덕성은, 그 도덕적 명령 외에, 과학, 철학, 및 영적 체험의 진리들과 물리적 창조의 아름다움, 지적 예술의 매력 및 진지한 인격 성취의 고결함을 동등하게 고려한다면, 명예를 회복할 것입니다.

2:7.10 (43.3) The religious challenge of this age is to those farseeing and forward-looking men and women of spiritual insight who will dare to construct a new and appealing philosophy of living out of the enlarged and exquisitely integrated modern concepts of cosmic truth, universe beauty, and divine goodness. Such a new and righteous vision of morality will attract all that is good in the mind of man and challenge that which is best in the human soul. Truth, beauty, and goodness are divine realities, and as man ascends the scale of spiritual living, these supreme qualities of the Eternal become increasingly co-ordinated and unified in God, who is love.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질서 우주의 진리, 우주의 아름다움 및 신적 선(善)에 대해 확장되어 절묘하게 통합된 현대적 개념에서 새롭고 매력적인 생활 철학을 구축할 용기(勇氣)로, 그런 선견지명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영적 통찰력을 지닌 남녀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새롭고 의로운 도덕성의 비전은 사람의 마음에서 선(善)한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인간 혼(魂)에 있는 최선의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진리, 아름다움 및 선(善)은 신적 실체이며, 인간이 영적 생활의 척도로 상승할수록, 영원에 속한 이런 최고의 자질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점차 통합-조정되어 통일됩니다.

2:7.11 (43.4) All truth — material, philosophic, or spiritual — is both beautiful and good. All real beauty — material art or spiritual symmetry — is both true and good. All genuine goodness — whether personal morality, social equity, or divine ministry — is equally true and beautiful. Health, sanity, and happiness are integration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as they are blended in human experience. Such levels of efficient living come about through the unification of energy systems, idea systems, and spirit systems. 물질적이든 철학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진리는 아름답고 선합니다. 물질적 예술이든 영적 균형이든 모든 진실한 아름다움은 참되고 선합니다. 개인적 도덕성이든 사회적 공정성이든 신적 사역이든 모든 진정한 선(善)은 참된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건강, 온전함, 그리고 행복은 진리, 아름다움, 선(善)이 인간 체험으로 융합된 통합체입니다. 이런 수준의 효율적 삶은 에너지 체계, 사상 체계, 그리고 영(靈) 체계의 통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7.12 (43.5) Truth is coherent, beauty attractive, goodness stabilizing. And when these values of that which is real are co-ordinated in personality experience, the result is a high order of love conditioned by wisdom and qualified by loyalty. The real purpose of all universe education is to effect the better co-ordination of the isolated child of the worlds with the larger realities of his expanding experience. Reality is finite on the human level, infinite and eternal on the higher and divine levels. 진리는 일관성이 있고, 아름다움은 매력적이며, 선(善)은 안정시킵니다. 그리고 실체인 이런 가치들이 인격(고유성) 체험으로 통합-조정되면, 그 결과는 지혜로 조절되고, 충성으로 검증(檢證)된 높은 차원의 사랑입니다.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 목적은 세상의 고립된 아이가 자신의 확장된 체험에 속한 더 큰 실체들과 더 잘 통합하여 조정하는 데 있습니다. 실체는 인간 수준에서 유한하지만, 더 높은 신적 수준에서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2:7.13 (43.6) [Presented by a Divine Counselor acting by authority of the Ancients of Days on Uversa.][유버르사에 있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신적 조언자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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