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40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12사도의 임직(任職)

Paper 140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12사도의 임직(任職)

1. Preliminary Instruction 예비 교육
2. The Ordination 임직
3. The Ordination Sermon 임직 설교
The “Sermon on the Mount” “산상 설교”
4.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와 형제의 사랑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 the humble…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공의(公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meek… 온유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pure in heart…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mourn…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merciful… 긍휼이 여기는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분쟁 조정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도다
6. The Evening of the Ordination 성직 임명일 저녁
“I look beyond the act…” “나는 행위 너머를 보느니라.”
Concerning divorcement 이혼에 관하여
Justice and mercy 정의(正義)와 자비
“They do well — trouble them not.” “그들은 잘하고 있으니 – 그냥 두어라.”
7. The Week Following the Ordination 성직 임명 다음 주간
8. Thursday Afternoon on the Lake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 Doing the Father’s Will 아버지의 뜻을 행함
(2) Political attitude 정치적 태도
(3) Social attitude 사회적 태도
(4) Economic attitude 경제적 태도
(5) Personal religion 개인적 종교
9. The Day of Consecration 성직 봉헌(奉獻)일
10. The Evening After the Consecration 봉헌일 저녁

12사도의 임직 예비 교육 마8:11-12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1 I say to you that many will come from the east and the west, and will take their places at the feast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in the kingdom of heaven. 12 But the subjects of the kingdom will be thrown outside, into the darkness, where there will be weeping and gnashing of teeth.”

140:0.1 (1568.1) JUST before noon on Sunday, January 12, A.D. 27, Jesus called the apostles together for their ordination as public preacher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twelve were expecting to be called almost any day; so this morning they did not go out far from the shore to fish. Several of them were lingering near the shore repairing their nets and tinkering with their fishing paraphernalia.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정오 직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공적 설교자들로 임직(任職직무를 맡김)하려고 사도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12 사도들은 거의 어느 때나 소명(召命불러주심)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고기 잡으러 호숫가에서 멀리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물 손질과 고기잡이 도구의 수선 작업을 하며 호숫가 근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40:0.2 (1568.2) As Jesus started down the seashore calling the apostles, he first hailed Andrew and Peter, who were fishing near the shore; next he signaled to James and John, who were in a boat near by, visiting with their father, Zebedee, and mending their nets. Two by two he gathered up the other apostles, and when he had assembled all twelve, he journeyed with them to the highlands north of Capernaum, where he proceeded to instruct them in preparation for their formal ordination. 예수님은 호숫가로 내려가기 시작하시면서 사도들을 부르셨는데, 첫째 안드레와 베드로를 큰 소리로 불렀는데 그들은 호숫가 근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을 하셨는데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근처 배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둘씩 다른 사도들을 모았으며, 12사도를 다 모아 가버나움 북쪽 고지로 여행하셨고, 거기에서 그는 공식 임직 준비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40:0.3 (1568.3) For once all twelve of the apostles were silent; even Peter was in a reflective mood. At last the long-waited-for hour had come! They were going apart with the Master to participate in some sort of solemn ceremony of personal consecration and collective dedication to the sacred work of representing their Master in the proclamation of the coming of his Father’s kingdom. 일단 열 두 사도들 모두 침묵했으며 베드로조차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래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다가온 예수님의 아버지 나라를 선포하면서 주님을 대표하는 신성한 사명에 개인적으로 봉헌하고 집단적으로 헌신하는 엄숙한 예식에 참여하려고 주님과 떨어져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 Preliminary Instruction 예비 교육

140:1.1 (1568.4) Before the formal ordination service Jesus spoke to the twelve as they were seated about him: “My brethren, this hour of the kingdom has come. I have brought you apart here with me to present you to the Father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Some of you heard me speak of this kingdom in the synagogue when you first were called. Each of you has learned more about the Father’s kingdom since you have been with me working in the cities around about the Sea of Galilee. But just now I have something more to tell you concerning this kingdom. 정식 임직(任職) 예배 전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자신 주위에 앉히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 (하나님) 나라가 왔느니라. 나는 너희를 아버지께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로 소개하려고 나와 함께 여기에 따로 데려왔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처음 부름 받았을 때 회당에서 이 나라 대해 내 말을 들었느니라. 너희는 갈릴리 바다 근처 인근 도시들에서 나와 함께 일해 왔던 지금까지 너희 각자는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더 배웠느니라.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나라에 대해 너희에게 말할 것이 더 있노라.

140:1.2 (1568.5) “The new kingdom which my Father is about to set up in the hearts of his earth children is to be an everlasting dominion. There shall be no end of this rule of my Father in the hearts of those who desire to do his divine will. I declare to you that my Father is not the God of Jew or gentile. Many shall come from the east and from the west to sit down with us in the Father’s kingdom, while many of the children of Abraham will refuse to enter this new brotherhood of the rule of the Father’s spirit in the hearts of the children of men. “내 아버지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의 심정에 바로 세우실 새 나라는 불후(현재부터 미래까지 없어지지 않을)의 영토가 될 것이다. 그(아버지)의 신적 뜻을 행하려는 자들의 심정에서 내 아버지의 이 다스림은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자리하는 반면에, 아브라함의 많은 자녀들은 사람 자녀들의 심정에서 다스리는 아버지의 영의 이 새로운 형제 됨에 들어가기를 거절할 것이다.

140:1.3 (1568.6) “The power of this kingdom shall consist, not in the strength of armies nor in the might of riches, but rather in the glory of the divine spirit that shall come to teach the minds and rule the hearts of the reborn citizens of this heavenly kingdom, the sons of God. This is the brotherhood of love wherein righteousness reigns, and whose battle cry shall be: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to all men. This kingdom, which you are so soon to go forth proclaiming, is the desire of the good men of all ages, the hope of all the earth, and the fulfillment of the wise promises of all the prophets. “이 나라의 권능은 군사력이나 부(富)의 세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하늘나라의 거듭난 시민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가르치고, 심정을 다스리려고 오실 신적 영의 영광에 있느니라. 이것이 사랑의 형제 됨이며, 그 안에는 공의(公義)가 다스리고 그 슬로건은 ‘세상에는 평화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한 뜻이라.’ 너희가 곧 나가서 선포할 이 나라는 모든 세대의 선한 이들의 바램이고, 온 세상의 희망이며, 모든 선지자들의 지혜로운 약속들의 성취이니라.

12사도의 임직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140:1.4 (1569.1) “But for you, my children, and for all others who would follow you into this kingdom, there is set a severe test. Faith alone will pass you through its portals, but you must bring forth the fruits of my Father’s spirit if you would continue to ascend in the progressive life of the divine fellowship. Verily, verily, I say to you, not every one who says, ‘Lord, Lord,’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rather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그러나 나의 자녀들아, 너희와 이 나라로 너희를 따라오려는 모든 이들에게 엄한 시험이 놓여 있다. 오직 신앙faith으로 너희가 하나님 나라의 정문을 통과하겠지만, 너희가 신적 교제의 진보적 일생에서 계속 상승하려면, 너희는 내 아버지의 영(靈)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140:1.5 (1569.2) “Your message to the world shall be: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in finding these, all other things essential to eternal survival shall be secured therewith. And now would I make it plain to you that this kingdom of my Father will not come with an outward show of power or with unseemly demonstration. You are not to go hence 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saying, ‘it is here’ or ‘it is there,’ for this kingdom of which you preach is God within you. “세상에 전할 너희 메시지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공의(公義)를 구하라, 이것들을 찾으면서, 영원한 생존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이 그와 함께 확보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노니, 내 아버지의 이 나라는 권력의 외적 과시나 흉한 증거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갈 때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전하는 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40:1.6 (1569.3) “Whosoever would become great in my Father’s kingdom shall become a minister to all; and whosoever would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come the server of his brethren. But when you are once truly received as citizens in the heavenly kingdom, you are no longer servants but sons, sons of the living God. And so shall this kingdom progress in the world until it shall break down every barrier and bring all men to know my Father and believe in the saving truth which I have come to declare. Even now is the kingdom at hand, and some of you will not die until you have seen the reign of God come in great power.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자기 형제들의 시중드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일단 진실로 하늘나라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면, 너희는 더 이상 종들이 아니라, 아들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들이 내 아버지를 알도록 하며 내가 선포하러 온 구원의 진리를 믿게 될 때까지, 세상에서 진보하리라. 심지어 지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 중 일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가 큰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140:1.7 (1569.4) “And this which your eyes now behold, this small beginning of twelve commonplace men, shall multiply and grow until eventually the whole earth shall be filled with the praise of my Father. And it will not be so much by the words you speak as by the lives you live that men will know you have been with me and have learned of the realities of the kingdom. And while I would lay no grievous burdens upon your minds, I am about to put upon your souls the solemn responsibility of representing me in the world when I shall presently leave you as I now represent my Father in this life which I am living in the flesh.” And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he stood up. “그리고 너희 눈으로 지금 보는 이것, 평범한 열두 명의 이 미약한 출발이, 결국 온 땅이 내 아버지의 찬미로 가득할 때까지, 늘어나고 성장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전하는 말보다 너희가 사는 삶으로, 사람들은 너희가 나와 함께 있어서 그 나라의 실체를 배웠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 생으로 지금 아버지를 대표하듯이, 내가 곧 너희를 떠날 때, 세상에 나를 나타내는 엄숙한 책임을 너희 혼에 지워주려 하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2. The Ordination 임직

140:2.1 (1569.5) Jesus now instructed the twelve mortals who had just listened to his declaration concerning the kingdom to kneel in a circle about him. Then the Master placed his hands upon the head of each apostle, beginning with Judas Iscariot and ending with Andrew. When he had blessed them, he extended his hands and prayed: 예수님은 이제, 나라에 관한 자신의 선언을 바로 들은 12 필사자들에게 자기 주위에 원을 그리며 무릎을 꿇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후, 주(主)님은 가룟 유다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안드레까지, 각 사도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축복하신 후, 손을 뻗어 기도하셨습니다.

140:2.2 (1569.6) “My Father, I now bring to you these men, my messengers. From among our children on earth I have chosen these twelve to go forth to represent me as I came forth to represent you. Love them and be with them as you have loved and been with me. And now, my Father, give these men wisdom as I place all the affairs of the coming kingdom in their hands. And I would, if it is your will, tarry on earth a time to help them in their labors for the kingdom. And again, my Father, I thank you for these men, and I commit them to your keeping while I go on to finish the work you have given me to do.” “내 아버지, 저는 이제 저의 메신저들인 이들을 당신 앞에 데려왔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대표하려고 온 것처럼, 저를 대신하여 내보내려고 세상의 우리 자녀들 중에서 열둘을 제가 택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셔서 함께 했듯이, 그들을 사랑하고 함께 하소서. 그리고 이제 아버지여,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직무들을 저들의 손에 맡기오니, 이 사람들에게 지혜(智慧)를 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할 저들을 도우려고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아버지여, 이들로 인해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께서 제가 하도록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계속하는 동안 저들을 당신의 보호 아래에 맡깁니다.”

140:2.3 (1570.1) When Jesus had finished praying, the apostles remained each man bowed in his place. And it was many minutes before even Peter dared lift up his eyes to look upon the Master. One by one they embraced Jesus, but no man said aught. A great silence pervaded the place while a host of celestial beings looked down upon this solemn and sacred scene — the Creator of a universe placing the affairs of the divine brotherhood of man under the direction of human minds.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자, 사도들은 각자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한동안 감히 눈을 들어 주(主)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 명씩 예수님과 포옹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천상존재들의 무리가 이 엄숙하고 신성한 – 우주의 창조자가 사람의 신적 형제 됨의 직무들을 인간 마음의 지도 아래에 맡기시는-장면을 내려다보는 동안, 그 곳은 깊은 침묵이 가득 찼습니다.

3. The Ordination Sermon 임직 설교

임직설교1 마5:1-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And seeing the multitudes, he went up into a mountain: and when he was set, his disciples came unto him: 2 And he opened his mouth, and taught them, saying, 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4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6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10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1 Blessed are ye,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for my sake. 12 Rejoice, and be exceeding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so persecuted they the prophets which were before you. 13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14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15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th light unto all that are in the house. 16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KJV).

140:3.1 (1570.2) Then Jesus spoke, saying: “Now that you are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you have thereby become a class of men separate and distinct from all other men on earth. You are not now as men among men but as the enlightened citizens of another and heavenly country among the ignorant creatures of this dark world. It is not enough that you live as you were before this hour, but henceforth must you live as those who have tasted the glories of a better life and have been sent back to earth as ambassadors of the Sovereign of that new and better world. Of the teacher more is expected than of the pupil; of the master more is exacted than of the servant. Of the citizens of the heavenly kingdom more is required than of the citizens of the earthly rule. Some of the things which I am about to say to you may seem hard, but you have elected to represent me in the world even as I now represent the Father; and as my agents on earth you will be obligated to abide by those teachings and practices which are reflective of my ideals of mortal living on the worlds of space, and which I exemplify in my earth life of revealing the Father who is in heaven.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들이며, 따라서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고 구별된 부류의 사람들이 되었느니라. 이제 너희는 사람들 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두운 이 세상의 무지한 창조물 중에서, 또 다른 하늘나라의 계몽된 시민들이니라. 너희는 이 시간 이전에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으니, 이후로는 새롭게 더 나은 그 세계의 주권자의 대사들처럼 더 나은 일생의 영광을 맛보고 지상에 다시 파송된 자들처럼 살아야만 하느니라. 학생보다 선생이 더 많이 하도록 요청되며, 하인보다 주인에게 더 많이 요구되느니라. 땅의 통치에 속한 시민들보다 하늘나라의 시민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려는 어떤 것들은 어렵게 보일지 모르나, 내가 지금 아버지를 대신하듯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신하도록 선택되었느니라. 땅에서 나의 대리자들로서 너희는, 공간 세계들에서 필사자 생활에 대한 내 관념을 반영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계시하는 내 지상 생활로 본을 보이는, 그런 가르침들과 실천들로 살아야할 의무가 있으리라.

140:3.2 (1570.3) “I send you forth to proclaim liberty to the spiritual captives, joy to those in the bondage of fear, and to heal the sick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When you find my children in distress, speak encouragingly to them, saying: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적 포로들에게 해방을, 두려움에 묶인 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도록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가 곤란 중에 있는 내 자녀를 보거든, 다음의 말로 그들을 격려하라.

140:3.3 (1570.4)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the humble, for theirs are the treasures of the kingdom of heaven.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의 보물들이 그들의 것임이요.

140:3.4 (1570.5)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공의(公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채워질 것임이요.

140:3.5 (1570.6) “Happy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140:3.6 (1570.7) “Happy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140:3.7 (1570.8) “And even so speak to my children these further words of spiritual comfort and promise: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영적 위로와 약속의 이 말들을 더욱 일러 주어라.

140:3.8 (1570.9) “Happy are they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Happy are they who weep, for they shall receive the spirit of rejoicing.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기쁨의 영(靈)을 받을 것임이요.

140:3.9 (1570.10) “Happy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40:3.10 (1570.11) “Happy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sons of God. “화평케 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40:3.11 (1570.12)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Happy are you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Rejoice and be exceedingly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공의(公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3.12 (1570.13) “My brethren, as I send you forth,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salt with a saving savor. But if this salt has lost its savo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rodden under foot of men. “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내보낼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니라. 그러나 만일 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0:3.13 (1570.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upon a hill cannot be hid.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be led to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그리고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그렇게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인도하라.

임직설교2 마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8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these things, the crowds were amazed at his teaching, 29 because he taught as one who had authority, and not as their teachers of the law.

140:3.14 (1571.1) “I am sending you out into the world to represent me and to act as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and as you go forth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put your trust in the Father whose messengers you are. Do not forcibly resist injustice; put not your trust in the arm of the flesh. If your neighbor smit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Be willing to suffer injustice rather than to go to law among yourselves. In kindness and with mercy minister to all who are in distress and in need. “나를 대표하고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 행하도록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니, 너희가 나가서 기쁜 소식을 선포할 때, 너희를 사자(使者메신저)로 보내신 아버지를 신뢰하라. 불의(不義)에 억지로 힘으로 저항하지 말고; 육신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 네 이웃이 네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그에게 돌려대라. 너희 사이에 법에 호소하기보다는 불의(不義)를 기꺼이 당하라. 친절과 자비로, 곤란과 곤궁에 처한 모든 이들을, 섬기라.

140:3.15 (1571.2)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and pray for those who despitefully use you. And whatsoever you believe that I would do to men, do you also to them.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너희를 악의로 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행하리라고 너희가 믿는 대로, 너희 또한 그들에게 행하라.

140:3.16 (1571.3) “Your Father in heaven makes the sun to shine on the evil as well as upon the good; likewise he sends rain on the just and the unjust. You are the sons of God; even more, you are now the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Be merciful, even as God is merciful, and in the eternal future of the kingdom you shall be perfect, even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선한 자들뿐만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해를 비춰주신다. 마찬가지로 옳거나 그른 모든 자들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게다가 너희는 지금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들이다. 하나님이 자비하시듯이 자비하며, 너희 하늘 아버지가 완전하듯이, 나라의 영원한 미래에 너희는 완전해지리라.

140:3.17 (1571.4) “You are commissioned to save men, not to judge them. At the end of your earth life you will all expect mercy; therefore do I require of you during your mortal life that you show mercy to all of your brethren in the flesh. Make not the mistake of trying to pluck a mote out of your brother’s eye when there is a beam in your own eye. Having first cast the beam out of your own eye, you can the better see to cast the mote out of your brother’s eye. “너희는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하도록 임명되었느니라. 너희 지상 생애의 끝에 너희 모두 자비를 기대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노니, 너희 필사 생애 동안 너희는 네 모든 육신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보이라. 네 눈에 들보가 있는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뽑으려고 실수하지 말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뽑아내야, 네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뺄 수 있게 잘 볼 수 있으리라.

140:3.18 (1571.5) “Discern the truth clearly; live the righteous life fearlessly; and so shall you be my apostles and my Father’s ambassadors. You have heard it said: ‘If the blind lead the blind, they both shall fall into the pit.’ If you would guide others into the kingdom, you must yourselves walk in the clear light of living truth. In all the business of the kingdom I exhort you to show just judgment and keen wisdom. Present not that which is holy to dogs, neither cast your pearls before swine, lest they trample your gems under foot and turn to rend you. “진리를 선명히 분별하라. 두려워 말고 공의(公義)의 삶을 살라. 그러면 너희는 나의 사도들과 내 아버지의 대사들이 되리라. 너희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 들었느니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려면, 너희 스스로 살아있는 진리의 선명한 빛으로 걸어가야만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에서 내가 권하노니, 너희는 올바른 판단과 명민한 지혜를 보이라. 개들과 돼지들이 너희 보물들을 발로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지 않도록,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들을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140:3.19 (1571.6) “I warn you against false prophets who will come to you in sheep’s clothing, while on the inside they are as ravening wolves. By their fruits you shall know them. Do men gather grapes from thorns or figs from thistles? Even so, every good tree brings forth good fruit, but the corrupt tree bears evil fruit. A good tree cannot yield evil fruit, neither can a corrupt tree produce good fruit. Every tree that does not bring forth good fruit is presently hewn down and cast into the fire. In gaining an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it is the motive that counts. My Father looks into the hearts of men and judges by their inner longings and their sincere intentions.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속에는 탐욕스러운 늑대들이니라. 그들의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리라.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더냐? 그래도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부패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부패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생산할 수도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즉시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동기(動機행위의 원인)로 평가되느니라. 내 아버지는 사람의 심정을 들여다보시고, 그들 내면의 갈망과 진실한 의도들을 판단하시니라.

140:3.20 (1571.7) “In the great day of the kingdom judgment, many will say to me,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by your name do many wonderful works?’ But I will be compelled to say 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ou who are false teachers.’ But every one who hears this charge and sincerely executes his commission to represent me before men even as I have represented my Father to you, shall find an abundant entrance into my service and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ly Father.” “(하나님) 나라 심판의 큰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당신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니, 거짓 교사들인 너희는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나 이 명령을 듣고, 내가 아버지를 너희에게 나타내듯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나타내라는 임무를 진정으로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섬기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풍족히 들어가리라.”

140:3.21 (1571.8) Never before had the apostles heard Jesus speak in this way, for he had talked to them as one having supreme authority.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bout sundown, but no man asked Jesus a question. 예수께서 최극 권세를 지닌 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해 질 무렵 산에서 내려왔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4.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140:4.1 (1572.1) The so-called “Sermon on the Mount” is not The Gospel of Jesus . It does contain much helpful instruction, but it was Jesus’ ordination charge to the twelve apostles. It was the Master’s personal commission to those who were to go on preaching the gospel and aspiring to represent him in the world of men even as he was so eloquently and perfectly representative of his Father.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유익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임직하는 열 두 사도들에게 주신 훈시였습니다. 그것은 주(主)님께서 그렇게 생생하고 완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대표하셨듯이, 사람들의 세상에서 계속 복음을 설교하고 그를 대표하려는 자들에게 직접주신 주님의 위임사항(부탁)이었습니다.

140:4.2 (1572.2)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salt with a saving savor. But if this salt has lost its savo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rodden under foot of men.” “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내보낼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니라. 그러나 만일 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0:4.3 (1572.3) In Jesus’ time salt was precious. It was even used for money. The modern word “salary” is derived from salt. Salt not only flavors food, but it is also a preservative. It makes other things more tasty, and thus it serves by being spent. 예수님 당시 소금은 귀중했습니다. 소금은 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현대 용어 ‘급여'(Salary)’는 소금(salt)에서 파생합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만 아니라 또한 방부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을 더욱 맛있게 하고, 그렇게 소모됨으로 봉사합니다.

140:4.4 (1572.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be led to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그리고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그렇게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인도하라.

140:4.5 (1572.5) While light dispels darkness, it can also be so “blinding” as to confuse and frustrate. We are admonished to let our light so shine that our fellows will be guided into new and godly paths of enhanced living. Our light should so shine as not to attract attention to self. Even one’s vocation can be utilized as an effective “reflector” for the dissemination of this light of life.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만 한편, 빛은 또한 그렇게 혼란과 좌절에 빠지도록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빛을 비추어 우리 동료들을 향상된 생활 즉 새롭고 경건한 방향으로 이끌라고 권고를 받노라. 우리의 빛은 자신에게 주의를 끌도록 비추지 말아야만 하리라. 사람의 직업도 이 생명의 빛을 퍼뜨리는 효과적인 “반사체”로 이용될 수 있느니라.

140:4.6 (1572.6) Strong characters are not derived from not doing wrong but rather from actually doing right. Unselfishness is the badge of human greatness. The highest levels of self-realization are attained by worship and service. The happy and effective person is motivated, not by fear of wrongdoing, but by love of right doing. 강건한 성품은 잘못을 행하지 않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옳은 일을 행함으로 얻어지느니라. 비(非)이기심은 인간적 위대함의 표지(標識)라. 최고 수준의 자아-실현은 경배와 봉사로 달성되느니라. 복된 유능한 사람은 잘못할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바른 행동을 사랑하는 동기로 행하느니라.

140:4.7 (1572.7) “By their fruits you shall know them.” Personality is basically changeless; that which changes — grows — is the moral character. The major error of modern religions is negativism. The tree which bears no fruit is “hewn down and cast into the fire.” Moral worth cannot be derived from mere repression — obeying the injunction “Thou shalt not.” Fear and shame are unworthy motivations for religious living. Religion is valid only when it reveals the fatherhood of God and enhances the brotherhood of men. “그들의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리라.” 고유성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변하는 – 성장하는 -것은 도덕적 성품이다. 현대 종교들이 주된 실수는 부정(소극)주의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도덕적 가치는 단순한 억압 –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에 순종해서 얻을 수 없다. 종교생활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가치 없는 동기니라. 종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고 사람의 형제 됨을 향상시킬 때만 정당하니라.

140:4.8 (1572.8) An effective philosophy of living is formed by a combination of cosmic insight and the total of one’s emotional reactions to the social and economic environment. Remember: While inherited urges cannot be fundamentally modified, emotional responses to such urges can be changed; therefore the moral nature can be modified, character can be improved. In the strong character emotional responses are integrated and co-ordinated, and thus is produced a unified personality. Deficient unification weakens the moral nature and engenders unhappiness. 효과적인 생활철학은, 질서우주 통찰력과, 사회 및 경제적 환경에 대한 모든 감정적 반응들이 결합되어 형성된다. 다음을 기억하라. 타고난 충동은 근본적으로 변경될 수 없는 반면에, 그런 충동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본성은 변경될 수 있고 성품은 향상될 수 있다. 강건한 성품에서 감정적 반응들이 통합되고 조화되며, 그렇게 해서 통합된 고유성이 생긴다. 불완전한 통합이 도덕적 본성을 약화시키고 불행을 일으킨다.

140:4.9 (1572.9) Without a worthy goal, life becomes aimless and unprofitable, and much unhappiness results. Jesus’ discourse at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constitutes a master philosophy of life. Jesus exhorted his followers to exercise experiential faith. He admonished them not to depend on mere intellectual assent, credulity, and established authority. 가치 있는 목표가 없다면, 인생은 정처 없이 무익하며 많은 불행이 일어난다. 열 두 사도 임직식에서 주신 예수님의 강론은 최상의 인생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체험적 신앙을 실행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는 단순한 지적 동의, 쉽게 믿는 경향, 및 확립된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고 사도들을 훈계하셨습니다.

140:4.10 (1573.1) Education should be a technique of learning (discovering) the better methods of gratifying our natural and inherited urges, and happiness is the resulting total of these enhanced techniques of emotional satisfactions. Happiness is little dependent on environment, though pleasing surroundings may greatly contribute thereto. 교육은 우리의 본성적인 타고난 충동을 만족시키는 더 좋은 방법을 배우고(발견하는) 기법이 되어야 하며, 행복은 감정을 만족시키는 이 향상된 기법들의 결과적 총합이다. 즐거운 환경이 행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해도, 행복은 거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140:4.11 (1573.2) Every mortal really craves to be a complete person, to b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and such attainment is possible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the “universe is truly fatherly.”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듯이 필사자마다 정말 완비된(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며, 결국 “우주는 참으로 아버지답기” 때문에 그러한 달성이 가능하다.

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140:5.1 (1573.3) From the Sermon on the Mount to the discourse of the Last Supper, Jesus taught his followers to manifest fatherly love rather than brotherly love. Brotherly love would love your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 and that would be adequate fulfillment of the “golden rule.” But fatherly affection would require that you should love your fellow mortals as Jesus loves you. 산상수훈에서 최후 만찬의 강론까지,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형제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황금률”을 충분히 이행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애정은, 예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가 동료 필사자들을 사랑해야만할 것을 요구하노라.

140:5.2 (1573.4) Jesus loves mankind with a dual affection. He lived on earth as a twofold personality — human and divine. As the Son of God he loves man with a fatherly love — he is man’s Creator, his universe Father. As the Son of Man, Jesus loves mortals as a brother — he was truly a man among men. 예수님은 이중 애정으로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땅에서 이중 – 인간적이며 신적 -고유성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사람의 창조자, 자기 우주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형제로 필사자들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참으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140:5.3 (1573.5) Jesus did not expect his followers to achieve an impossible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but he did expect them to so strive to be like God — to b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 that they could begin to look upon man as God looks upon his creatures and therefore could begin to love men as God loves them — to show forth the beginnings of a fatherly affection. In the course of these exhortations to the twelve apostles, Jesus sought to reveal this new concept of fatherly love as it is related to certain emotional attitudes concerned in making numerous environmental social adjustments.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형제 사랑의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도록 – 분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들을 대하시듯,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사람들을 사랑하여 – 아버지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향한 이 권고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이 새 개념 – 그것이 수많은 사회 환경적 조절에 관련된 어떤 감정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듯이 – 을 계시하려고 애쓰셨습니다.

140:5.4 (1573.6) The Master introduced this momentous discourse by calling attention to four faith attitudes as the prelude to the subsequent portrayal of his four transcendent and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in contrast to the limitations of mere brotherly love. 주(主)님은,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대조하여,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네 가지 초월적 최극 반응들로 이루어진 후반부 묘사에 대한 전주곡(前奏曲)으로, 신앙의 네 가지 태도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셨습니다.

140:5.5 (1573.7) He first talked about those who were poor in spirit, hungered after righteousness, endured meekness, and who were pure in heart. Such spirit-discerning mortals could be expected to attain such levels of divine selflessness as to be able to attempt the amazing exercise of fatherly affection; that even as mourners they would be empowered to show mercy, promote peace, and endure persecutions, and throughout all of these trying situations to love even unlovely mankind with a fatherly love. A father’s affection can attain levels of devotion that immeasurably transcend a brother’s affection. 그는 먼저 영이 가난한 자들, 공의(公義)에 굶주린 자들, 온유함을 지속하는 자들, 심정이 청결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영(靈)을 인식하는 그런 필사자들은 아버지의 애정을 놀랍게 실행하는 시도를 할 만큼 신적 비(非)이기심의 그런 수준들에 도달하기를 기대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도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증진시키며, 박해를 견디고, 이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하는 권능을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애정은, 형제의 애정을 헤아릴 수 없이 초월하는 헌신의 수준들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140:5.6 (1573.8) The faith and the love of these beatitudes strengthen moral character and create happiness. Fear and anger weaken character and destroy happiness. This momentous sermon started out upon the note of happiness. 이 지극한(최극) 행복(팔복)의 신앙과 사랑은 도덕적 성품을 강화하고 행복을 창조합니다. 공포와 분노는 성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합니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의 선율(旋律 멜로디)에서 나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2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7 (1573.9) 1.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 the humble.” To a child, happiness is the satisfaction of immediate pleasure craving. The adult is willing to sow seeds of self-denial in order to reap subsequent harvests of augmented happiness. In Jesus’ times and since, happiness has all too often been associated with the idea of the possession of wealth. In the story of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praying in the temple, the one felt rich in spirit — egotistical; the other felt “poor in spirit” — humble. One was self-sufficient; the other was teachable and truth-seeking. The poor in spirit seek for goals of spiritual wealth — for God. And such seekers after truth do not have to wait for rewards in a distant future; they are rewarded now. They find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their own hearts, and they experience such happiness now.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도다.” 아이들의 행복은 바로 쾌락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행복을 늘려 수확하려고 자기를 부인하는 씨를 기꺼이 뿌려서 나중에 거두려 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의 소유라는 관념과 흔히 너무 관련되어 왔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은 (단기적) 영이 부요함 – 자기중심의 이기적 상태 –을 느꼈고, 세리는 “영이 가난함” – 겸손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은 자아-만족(자만)하였고, 다른 사람은 배우려 하면서 진리를-추구했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장기적) 영적 부요의 목표 즉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진리의 탐구자들은 먼 미래의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상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에서 하늘의 나라를 발견하며, 그러한 행복을 지금 체험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3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140:5.8 (1574.1) 2.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Only those who feel poor in spirit will ever hunger for righteousness. Only the humble seek for divine strength and crave spiritual power. But it is most dangerous to knowingly engage in spiritual fasting in order to improve one’s appetite for spiritual endowments. Physical fasting becomes dangerous after four or five days; one is apt to lose all desire for food. Prolonged fasting, either physical or spiritual, tends to destroy hunger. “공의(公義)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채워질 것임이요.” 영의 가난함을 느끼는 자들만이 언제나 공의에 굶주릴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만이 신적 능력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영적 자질의 욕구를 개선하려고 고의로 영적 금식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위험합니다. 육체적 금식은 4, 5일이 지나면 위험해지며, 그 사람은 식욕을 모두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장기간 금식은 배고픔을 없애는 경향이 있습니다.

140:5.9 (1574.2) Experiential righteousness is a pleasure, not a duty. Jesus’ righteousness is a dynamic love — fatherly-brotherly affection. It is not the negative or thou-shalt-not type of righteousness. How could one ever hunger for something negative — something “not to do”? 체험적 공의는 기쁨이며,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의는 역동적 사랑 – 아버지-형제의 애정입니다. 그것은 부정적이거나 ‘하지 말라’는 유형의 공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부정적인 것 –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사람이 계속 바랄 수 있겠습니까?

140:5.10 (1574.3) It is not so easy to teach a child mind these first two of the beatitudes, but the mature mind should grasp their significance. 어린애 같은 사람의 마음에 팔복의 처음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숙한 마음은 그 중요성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4 – 온유함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140:5.11 (1574.4) 3. “Happy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Genuine meekness has no relation to fear. It is rather an attitude of man co-operating with God — “Your will be done.” It embraces patience and forbearance and is motivated by an unshakable faith in a lawful and friendly universe. It masters all temptations to rebel against the divine leading. Jesus was the ideal meek man of Urantia, and he inherited a vast universe.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협력하는 사람의 태도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그것은 인내와 참을성을 담고 있으며, 합법적이며 우호적인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신적 이끄심에 반항하는 모든 유혹을 정복합니다. 예수님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광대한 우주를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5 – 심정 청결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140:5.12 (1574.5) 4. “Happy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Spiritual purity is not a negative quality, except that it does lack suspicion and revenge. In discussing purity, Jesus did not intend to deal exclusively with human sex attitudes. He referred more to that faith which man should have in his fellow man; that faith which a parent has in his child, and which enables him to love his fellows even as a father would love them. A father’s love need not pamper, and it does not condone evil, but it is always anticynical. Fatherly love has singleness of purpose, and it always looks for the best in man; that is the attitude of a true parent.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영적 청결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부정적 특성이 아닙니다. 청결(순결)을 논하면서, 예수님은 인간의 성(性)적 태도만 다루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가져야만 하는 신앙; 어버이가 자녀에게 가지는 신앙, 아버지가 사랑하듯이 동료를 사랑하게 하는 신앙에 더 주의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버릇없는 말이나 행동)을 받아줄 필요가 없으며, 악을 눈감아주지 않지만, 언제나 동기의 진지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에만 골똘하며, 그것은 항상 인간에게서 최선을 찾습니다. 그것이 참 부모의 자세입니다.

140:5.13 (1574.6) To see God — by faith — means to acquire true spiritual insight. And spiritual insight enhances Adjuster guidance, and these in the end augment God-consciousness. And when you know the Father, you are confirmed in the assurance of divine sonship, and you can increasingly love each of your brothers in the flesh, not only as a brother — with brotherly love — but also as a father — with fatherly affection. 하나님을 보는 것- 신앙으로 -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습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적 통찰력은 조율자의 안내를 강화하며, 결국 하나님-의식을 증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적 아들신분이라는 확신이 굳어지고, 너희는 점점 더 서로 육신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 형제의 사랑으로 -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 아버지의 애정 – 으로, 사랑할 수 있느니라.

140:5.14 (1574.7) It is easy to teach this admonition even to a child. Children are naturally trustful, and parents should see to it that they do not lose that simple faith. In dealing with children, avoid all deception and refrain from suggesting suspicion. Wisely help them to choose their heroes and select their lifework. 이 훈계는 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습니다. 아이들은 자연히 남을 잘 믿으며,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 단순한 신앙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모든 속임수를 피하고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삼가라. 자기 영웅들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 과업을 고르도록 현명히 그들을 도우라.

140:5.15 (1574.8) And then Jesus went on to instruct his followers in the realization of the chief purpose of all human struggling — perfection — even divine attainment. Always he admonished them: “Be you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He did not exhort the twelve to love their neighbors as they loved themselves. That would have been a worthy achievement; it would have indicated the achievement of brotherly love. He rather admonished his apostles to love men as he had loved them — to love with a fatherly as well as a brotherly affection. And he illustrated this by pointing out four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그 후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모든 인간의 주된 분투의 목적 – 온전 – 신적 달성까지-의 실현을 계속 지시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는 그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이르셨습니다. 그는 12사도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성취였어야 했으며, 형제의 사랑의 성취를 드러냈어야 합니다. 그는 오히려 사도들에게 자신(예수)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 형제의 애정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애정으로 –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사랑이 지닌 네 가지 최극 반응들을 가리켜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6 – 애통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140:5.16 (1575.1) 1. “Happy are they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So-called common sense or the best of logic would never suggest that happiness could be derived from mourning. But Jesus did not refer to outward or ostentatious mourning. He alluded to an emotional attitude of tenderheartedness. It is a great error to teach boys and young men that it is unmanly to show tenderness or otherwise to give evidence of emotional feeling or physical suffering. Sympathy is a worthy attribute of the male as well as the female. It is not necessary to be calloused in order to be manly. This is the wrong way to create courageous men. The world’s great men have not been afraid to mourn. Moses, the mourner, was a greater man than either Samson or Goliath. Moses was a superb leader, but he was also a man of meekness. Being sensitive and responsive to human need creates genuine and lasting happiness, while such kindly attitudes safeguard the soul from the destructive influences of anger, hate, and suspicion.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소위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행복이 애통에서 얻을 수 있다고 결코 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면적이거나 허식적 애통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다정(多情)한 감정적 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다정함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의 느낌이나 육체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이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공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훌륭한 속성입니다. 남자답기 위해 무정(無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정함은 용감한 남자를 만드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애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애통(哀痛)자 모세는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민감히 인간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은 진정 길이 변하지 않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그런 인정(人情) 많은 태도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의심의 해로운 영향에서 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7 – 긍휼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140:5.17 (1575.2) 2. “Happy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Mercy here denotes the height and depth and breadth of the truest friendship — loving-kindness. Mercy sometimes may be passive, but here it is active and dynamic — supreme fatherliness. A loving parent experiences little difficulty in forgiving his child, even many times. And in an unspoiled child the urge to relieve suffering is natural. Children are normally kind and sympathetic when old enough to appreciate actual conditions.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자비는 가장 참된 우정 – 자애(慈愛)의 높이와 깊이와 폭을 뜻합니다. 자비는 종종 수동적일지 모르나, 여기에서 자비는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 최극의 아버지다움입니다. 애정이 깊은 부모는 여러 번 자녀를 용서해도 거의 어렵지 않음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리고 버릇없이 자라지 않은 아이의 경우, 고통을 덜어주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습니다. 실제 형편을 헤아릴 만큼 충분한 나이의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정(情공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8 – 화평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140:5.18 (1575.3) 3. “Happy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sons of God.” Jesus’ hearers were longing for military deliverance, not for peacemakers. But Jesus’ peace is not of the pacific and negative kind. In the face of trials and persecutions he said, “My peace I leave with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This is the peace that prevents ruinous conflicts. Personal peace integrates personality. Social peace prevents fear, greed, and anger. Political peace prevents race antagonisms, national suspicions, and war. Peacemaking is the cure of distrust and suspicion. “화평하게 하는 자(분쟁 조정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청중(聽衆)들은 평화를 만드는 분쟁 조정자가 아니라 군사적 해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온순한 소극적 종류가 아닙니다. 재판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남기노라,” “너희 심정에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괴적인 분쟁을 예방하는 평화입니다. 개인적 평화는 고유성을 통합합니다. 사회적 평화는 두려움과 탐욕과 분노를 예방합니다. 정치적 평화는 인종적 반목과 국가적 의심 그리고 전쟁을 예방합니다. 화평(분쟁 조정)은 불신과 의심의 치료제입니다.

140:5.19 (1575.4) Children can easily be taught to function as peacemakers. They enjoy team activities; they like to play together. Said the Master at another time: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shall find it.” 아이들은 화평(분쟁조정)자로 활동하도록 쉽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체 활동들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함께 놀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나,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려고 하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9 – 공의를 위한 박해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20 (1575.5) 4.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Happy are you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Rejoice and be exceedingly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공의(公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5.21 (1575.6) So often persecution does follow peace. But young people and brave adults never shun difficulty or danger.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And a fatherly love can freely do all these things — things which brotherly love can hardly encompass. And progress has always been the final harvest of persecution. 종종 박해가 화평을 따릅니다. 그러나 청년들과 용감한 어른들은 어려움과 위험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든 것들 – 형제의 사랑이 거의 이룰 수 없는 것들 –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박해의 최종 수확물이었습니다.

140:5.22 (1575.7) Children always respond to the challenge of courage. Youth is ever willing to “take a dare.” And every child should early learn to sacrifice. 아이들은 항상 용기에 도전할 때 반응합니다. 청년들은 언제나 자진해서 “도전에 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기를 배워야만 합니다.

140:5.23 (1575.8) And so it is revealed that the beatitude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re based on faith and love and not on law — ethics and duty. 그래서 산상수훈의 지복(至福지극한 팔복)은 신앙과 사랑에 근거를 두며, 법 – 윤리와 의무 –에 근거를 두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140:5.24 (1575.9) Fatherly love delights in returning good for evil — doing good in retaliation for injustice. 아버지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 – 불의를 선행으로 갚아서 – 답례하기를 기뻐합니다.

6. The Evening of the Ordination 성직 임명일 저녁

율법을 밝히러 오신 예수님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140:6.1 (1576.1) Sunday evening, on reaching the home of Zebedee from the highlands north of Capernaum, Jesus and the twelve partook of a simple meal. Afterward, while Jesus went for a walk along the beach, the twelve talked among themselves. After a brief conference, while the twins built a small fire to give them warmth and more light, Andrew went out to find Jesus, and when he had overtaken him, he said: “Master, my brethren are unable to comprehend what you have said about the kingdom. We do not feel able to begin this work until you have given us further instruction. I have come to ask you to join us in the garden and help u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your words.” And Jesus went with Andrew to meet with the apostles. 일요일 저녁, 가버나움 북쪽 산지에서 세베대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과 12사도들은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동안, 사도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했습니다. 간단한 회의 후 쌍둥이 형제가 따뜻하게 하며 불을 밝히려고 작은 불을 피우는 동안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으러 나가,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主)여, 내 형제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 가르쳐 주실 때까지 이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원에 있는 우리들과 함께 하셔서, 당신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드레와 함께 사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140:6.2 (1576.2) When he had entered the garden, he gathered the apostles around him and taught them further, saying: “You find it difficult to receive my message because you would build the new teaching directly upon the old, but I declare that you must be reborn. You must start out afresh as little children and be willing to trust my teaching and believe in God.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cannot be made to conform to that which is. You have wrong ideas of the Son of Man and his mission on earth.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thinking that I have come to set aside the law and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l, to enlarge and illuminate. I come not to transgress the law but rather to write these new commandments on the tablets of your hearts. 정원으로 들어가신 후 그는 사도들을 주위에 모아 그들을 더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옛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하기 때문에 내 메시지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만, 내가 명백히 말하는데, 너희는 거듭나야만 하니라. 너희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시작해야만 하며, 기꺼이 내 가르침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은 현재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만들어질 수 없노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과 땅에서 그의 사명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느니라.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잘못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려 함이 아니라 성취하고, 확장하며 밝히러 왔노라. 나는 율법을 어기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심정의 서판에 새 계명을 쓰러 왔노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지(意志)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For I say unto you, That except 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e shall in no case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140:6.3 (1576.3) “I demand of you a righteousness that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ose who seek to obtain the Father’s favor by almsgiving, prayer, and fasting. If you would enter the kingdom, you must have a righteousness that consists in love, mercy, and truth — the sincere desire to do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나는 너희에게 자선(慈善)과 기도와 금식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얻으려는 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설 의로움을 요구하노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랑과 자비와 진리로 이루어진 의로움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신실한 갈망 -을 가져야만 하니라.”

140:6.4 (1576.4) Then said Simon Peter: “Master, if you have a new commandment, we would hear it. Reveal the new way to us.” Jesus answered Peter: “You have heard it said by those who teach the law: ‘You shall not kill; that whosoever kills shall be subject to judgment.’ But I look beyond the act to uncover the motive. I declare to you that every 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is in danger of condemnation. He who nurses hatred in his heart and plans vengeance in his mind stands in danger of judgment. You must judge your fellows by their deeds; the Father in heaven judges by the intent.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主)여, 새 계명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새 길을 보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한 것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행위 너머에 있는 감춰진 동기를 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노니,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죄 판결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노라. 자기 심정에 증오를 품고 마음으로 복수를 계획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느니라. 너희는 동료들을 그 행위로 심판해야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의도를 심판하시니라.

140:6.5 (1576.5) “You have heard the teachers of the law say,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But I say to you that every man who looks upon a woman with intent to lust after her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You can only judge men by their acts, but my Father looks into the hearts of his children and in mercy adjudges them in accordance with their intents and real desires.”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선생들의 말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욕정의 의도로 여자를 보는 자는 누구든지 이미 심정(마음)에서 그녀와 간음했느니라. 너희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내 아버지는 자녀의 심정을 들여다보시며 자비로 그들의 의도와 실제 갈망에 따라 그들을 판결하신다.”

180729 하늘나라를 세우러 오신 예수님 마19:7-8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7 “Why then,” they asked, “did Moses command that a man give his wife a certificate of divorce and send her away?” 8 Jesus replied, “Moses permitted you to divorce your wives because your hearts were hard. But it was not this way from the beginning.

140:6.6 (1576.6) Jesus was minded to go on discussing the other commandments when James Zebedee interrupted him, asking: “Master, what shall we teach the people regarding divorcement? Shall we allow a man to divorce his wife as Moses has directed?” And when Jesus heard this question, he said: “I have not come to legislate but to enlighten. I have come not to reform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rather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It is not the will of the Father that I should yield to the temptation to teach you rules of government, trade, or social behavior, which, while they might be good for today, would be far from suitable for the society of another age. I am on earth solely to comfort the minds, liberate the spirits, and save the souls of men. But I will say, concerning this question of divorcement, that, while Moses looked with favor upon such things, it was not so in the days of Adam and in the Garden.” 예수님은 다른 계명들을 계속 의논하려고 하셨지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저희는 사람들에게 이혼(離婚)에 대해 무엇을 가르칠까요? 모세의 지시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나는 법(法)을 제정하러 온 것이 아니라 (통찰하여) 깨우치러 왔노라. 나는 이 세상 나라를 개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왔노라. 정부, 무역, 사회적 행동 규칙들을 너희에게 가르치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늘날에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세대의 사회에는 거의 적합하지 않느니라. 나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영을 해방시키며, 혼을 구하려고 이 땅에 있노라. 그러나 이 이혼의 문제에 관해 내가 말하노니, 모세는 그런 일들에 찬성했지만, 아담의 시절, (에덴)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느니라.”

140:6.7 (1577.1) After the apostles had talked among themselves for a short time, Jesus went on to say: “Always must you recognize the two viewpoints of all mortal conduct —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ways of the flesh and the way of the spirit; the estimate of time and the viewpoint of eternity.” And though the twelve could not comprehend all that he taught them, they were truly helped by this instruction. 잠시 사도들끼리 얘기한 후,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너희는 필사자의 모든 행위를 두 가지 관점 – 인간적 관점과 신적 관점; 육신의 방식과 영의 방식; 시간적 평가와 영원의 관점 -으로 항상 인식해야만 한다.” 12 사도들은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가르침으로 그들은 참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180805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마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19 Lay not up for yourselves treasures up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oth corrupt, and where thieves break through and steal: 20 Bu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neither moth nor rust doth corrupt,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through nor steal: 21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140:6.8 (1577.2) And then said Jesus: “But you will stumble over my teaching because you are wont to interpret my message literally; you are slow to discern the spirit of my teaching. Again must you remember that you are my messengers; you are beholden to live your lives as I have in spirit lived mine. You are my personal representatives; but do not err in expecting all men to live as you do in every particular. Also must you remember that I have sheep not of this flock, and that I am beholden to them also, to the end that I must provide for them the pattern of doing the will of God while living the life of the mortal nature.”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메시지를 습관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 가르침으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느니라. 너희는 내 가르침의 영을 더디 깨닫느니라. 너희가 나의 메신저들임을 다시 기억해야만 하니라. 내가 영으로 내 삶을 살았듯이 너희의 삶을 살도록 너희는 은혜를 입었느니라. 너희는 나의 개인적 대표자들이니라. 그러나 모든 면에서 너희가 행하듯이 모든 이들이 살리라고 기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 또한 나는 이 무리가 아닌 양떼들을 지니며, 필사자 본성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본(本)을 그들에게 끝까지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음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만 하니라.

140:6.9 (1577.3) Then asked Nathaniel: “Master, shall we give no place to justice? The law of Moses says,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What shall we say?” And Jesus answered: “You shall return good for evil. My messengers must not strive with men, but be gentle toward all. Measure for measure shall not be your rule. The rulers of men may have such laws, but not so in the kingdom; mercy always shall determine your judgments and love your conduct. And if these are hard sayings, you can even now turn back. If you find the requirements of apostleship too hard, you may return to the less rigorous pathway of discipleship.” 그러자 나다니엘이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우리가 정의(正義)에게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 나의 메신저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모든 이에게 온유 하라. 당한 대로 갚는 것이 너희 규정이 되지 않게 하라. 사람의 통치자들은 그런 규정들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그렇지 않다. 자비가 항상 너희의 판단을 결정할 것이며 사랑이 너희 행위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너희는 이제라도 되돌아 갈 수 있다. 사도 직분의 요구조건이 너희에게 너무 어려우면, 너희는 덜 엄격한 제자 직분의 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140:6.10 (1577.4) On hearing these startling words, the apostles drew apart by themselves for a while, but they soon returned, and Peter said: “Master, we would go on with you; not one of us would turn back. We are fully prepared to pay the extra price; we will drink the cup. We would be apostles, not merely disciples.” 이 놀라운 말씀들을 듣고 사도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떨어져 있었지만, 곧 돌아와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主)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대가(代價)를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시겠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제자가 아닌 사도가 되겠습니다.”

140:6.11 (1577.5)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Be willing, then, to take up your responsibilities and follow me. Do your good deeds in secret; when you give alms, let not the left hand know what the right hand does. And when you pray, go apart by yourselves and use not vain repetitions and meaningless phrases. Always remember that the Father knows what you need even before you ask him. And be not given to fasting with a sad countenance to be seen by men. As my chosen apostles, now set apart for the service of the kingdom, lay not up for yourselves treasures on earth, but by your unselfish service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for where your treasures are, there will your hearts be also.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기꺼이 너희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너희 선행을 은밀히 행하라. 너희가 자선(慈善선의를 베품)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고 기도할 때 홀로 따로 하며, 헛된 반복과 무의미한 빈말을 사용하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서 알고 계심을 항상 기억하라.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표정으로 금식하지 말라. 내가 택한 사도로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위해 구별하여,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사심 없는 봉사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왜냐하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0812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마6:33-34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33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34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140:6.12 (1577.6) “The lamp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your eye is generous,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But if your eye is selfish, the whole body will be filled with darkness. If the very light which is in you is turned to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편견 없이, 사심이 없음)하면 너의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너의 눈이 이기적이면 온 몸이 어두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네게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140:6.13 (1577.7) And then Thomas asked Jesus if they should “continue having everything in common.” Said the Master: “Yes, my brethren, I would that we should live together as one understanding family. You are intrusted with a great work, and I crave your undivided service. You know that it has been well said: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You cannot sincerely worship God and at the same time wholeheartedly serve mammon. Having now enlisted unreservedly in the work of the kingdom, be not anxious for your lives; much less be concerned with what you shall eat or what you shall drink; nor yet for your bodies, what clothing you shall wear. Already have you learned that willing hands and earnest hearts shall not go hungry. And now, when you prepare to devote all of your energi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be assured that the Father will not be unmindful of your needs.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when you have found entrance thereto, all things needful shall be added to you. Be not, therefore, unduly anxious for the morrow. Sufficient for the day is the trouble thereof.” 그러자 도마가 예수께 자신들이 “계속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하는지”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내 형제들아, 이해심이 많은 한 가족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를 내가 바라노라. 너희는 위대한 업무를 맡았으니, 너희가 집중해서 봉사하기를 내가 열망하노라. 너희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잘 알려진 말을 알고 있다. 너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동시에 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온전히 편입되었으니, 너희 목숨을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걱정하지 말라.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지 더 염려하지 말라. 자발적인 노력과 진지한 심정이 굶주리지 않을 것임을 너희가 이미 배웠느니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 나라의 일에 헌신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에 무관심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고 너희가 거기로 들어가면, 필요한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지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그 날의 근심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140:6.14 (1578.1) When Jesus saw they were disposed to stay up all night to ask questions, he said to them: “My brethren, you are earthen vessels; it is best for you to go to your rest so as to be ready for the morrow’s work.” But sleep had departed from their eyes. Peter ventured to request of his Master that “I have just a little private talk with you. Not that I would have secrets from my brethren, but I have a troubled spirit, and if, perchance, I should deserve a rebuke from my Master, I could the better endure it alone with you.” And Jesus said, “Come with me, Peter” — leading the way into the house. When Peter returned from the presence of his Master much cheered and greatly encouraged, James decided to go in to talk with Jesus. And so on through the early hours of the morning, the other apostles went in one by one to talk with the Master. When they had all held personal conferences with him save the twins, who had fallen asleep, Andrew went in to Jesus and said: “Master, the twins have fallen asleep in the garden by the fire; shall I arouse them to inquire if they would also talk with you?” And Jesus smilingly said to Andrew, “They do well — trouble them not.” And now the night was passing; the light of another day was dawning.사도들이 밤새워 질문하려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흙으로 만든 그릇들이라. 내일 일을 준비하기 위해 가서 쉬는 것이 최선이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습니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主)님께 요청했습니다. “저는 아주 잠깐 주님과 사적으로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형제들로부터 비밀을 지니려는 것이 아니지만, 저는 정신(영)이 곤란합니다. 혹시 주님의 꾸중을 들어야 한다면 주님과 홀로 달게 받겠습니다.” 예수님은 집으로 이끄시면서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主)님 앞에서 돌아온 베드로가 아주 활기차게 고조되어 격려받자, 야고보도 예수님과 의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이른 아침까지 다른 사도들도 계속 하나씩 주(主)님과 면담하러 갔습니다. 잠들었던 쌍둥이들을 제외한 그들 모두 예수님과 개인적 면담을 했을 때, 안드레가 예수께 가서 여쭈었습니다. “주(主)님! 쌍둥이들은 정원의 불 옆에서 잠들었는데 저들도 주님과 면담할 지 깨워 물어볼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미소를 지으며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잘하고 있으니 – 그냥 두어라.” 이제 밤이 지나 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7. The Week Following the Ordination 성직 임명 다음 주간

180819 2가지 지상 사명의 동기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140:7.1 (1578.2) After a few hours’ sleep, when the twelve were assembled for a late breakfast with Jesus, he said: “Now must you begin your work of preaching the glad tidings and instructing believers. Make ready to go to Jerusalem.” After Jesus had spoken, Thomas mustered up courage to say: “I know, Master, that we should now be ready to enter upon the work, but I fear we are not yet able to accomplish this great undertaking. Would you consent for us to stay hereabouts for just a few days more before we begin the work of the kingdom?” And when Jesus saw that all of his apostles were possessed by this same fear, he said: “It shall be as you have requested; we will remain here over the Sabbath day.” 몇 시간 잠든 후, 12사도들이 예수님과 늦은 아침 식사로 모였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기쁜 소식을 설교하고 신자들 가르치는 임무를 시작해야 하니라.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후 도마가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주(主)여, 지금 우리가 임무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이 위대한 과업을 아직 성취할 수 없을지 두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며칠만 더 이 근처에 머물러도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도들도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요청대로 할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까지 여기 머물러 있을 것이라.”

140:7.2 (1578.3) For weeks and weeks small groups of earnest truth seekers, together with curious spectators, had been coming to Bethsaida to see Jesus. Already word about him had spread over the countryside; inquiring groups had come from cities as far away as Tyre, Sidon, Damascus, Caesarea, and Jerusalem. Heretofore, Jesus had greeted these people and taught them concerning the kingdom, but the Master now turned this work over to the twelve. Andrew would select one of the apostles and assign him to a group of visitors, and sometimes all twelve of them were so engaged. 몇 주 동안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진정으로 진리를 찾는 작은 그룹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벳새다로 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지방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호기심 있는 무리들이 티레, 시돈, 다마스쿠스, 케자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같은 먼 도시로부터 왔습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이들을 맞아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쳤지만, 주님은 이제 이 일을 12사도들에게 맡겼습니다. 안드레는 사도들 중 한 명씩 택하여 방문 무리들을 맡겼으며 가끔 12사도들 모두 그렇게 그 일을 맡았습니다.

140:7.3 (1578.4) For two days they worked, teaching by day and holding private conferences late into the night. On the third day Jesus visited with Zebedee and Salome while he sent his apostles off to “go fishing, seek carefree change, or perchance visit your families.” On Thursday they returned for three more days of teaching. 그들은 이틀간 일했는데, 낮에는 가르치고 밤늦도록 사적 모임을 가졌습니다. 삼일 째,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고기 잡거나 홀가분하게 기분전환 하거나 혹은 가족을 방문하라.”고 보내는 동안, 자신은 세베대 및 살로메와 대화하셨습니다. 3일 더 가르치려고 그들은 목요일에 돌아왔습니다.

140:7.4 (1578.5) During this week of rehearsing, Jesus many times repeated to his apostles the two great motives of his postbaptismal mission on earth: 이 연습 주간에, 예수님은 세례이후 자신의 지상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動機)를 사도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140:7.5 (1578.6) 1. To reveal the Father to man. 아버지를 사람에게 계시함.

140:7.6 (1578.7) 2. To lead men to become son-conscious — to faith-realize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the Most High. 사람들이 지고자(至高者)의 자녀임을 신앙으로 깨달아, 아들-의식이 들도록 인도함.

140:7.7 (1579.1) One week of this varied experience did much for the twelve; some even became over self-confident. At the last conference, the night after the Sabbath, Peter and James came to Jesus, saying, “We are ready — let us now go forth to take the kingdom.” To which Jesus replied, “May your wisdom equal your zeal and your courage atone for your ignorance.” 한 주간의 이 다양한 체험은 12사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몇 사도들은 자아-확신(자신감)이 지나쳤습니다. 안식일이 끝난 밤, 마지막 회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준비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취하러 나가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지혜가 너희의 열정과 같고, 너희 용기가 너희 무지를 보상(報償갚아줌)하기를 바라노라.”

140:7.8 (1579.2) Though the apostles failed to comprehend much of his teaching, they did not fail to grasp the significance of the charmingly beautiful life he lived with them.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지냈던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의 중요성은 파악했습니다.

8. Thursday Afternoon on the Lake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80826 아버지의 뜻을 행함(1)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rule: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140:8.1 (1579.3) Jesus well knew that his apostles were not fully assimilating his teachings. He decided to give some special instruction to Peter, James, and John, hoping they would be able to clarify the ideas of their associates. He saw that, while some features of the idea of a spiritual kingdom were being grasped by the twelve, they steadfastly persisted in attaching these new spiritual teachings directly onto their old and entrenched literal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as a restoration of David’s throne and the re-establishment of Israel as a temporal power on earth. Accordingly, on Thursday afternoon Jesus went out from the shore in a boat with Peter, James, and John to talk over the affairs of the kingdom. This was a four hours’ teaching conference, embracing scores of questions and answers, and may most profitably be put in this record by reorganizing the summary of this momentous afternoon as it was given by Simon Peter to his brother, Andrew, the following morning: 예수님은 사도들이 자신의 가르침들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동료들에게 가르침의 관념들을 분명히 설명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다소 특별한 가르침을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2사도들이 영적 나라의 관념의 어떤 특성들을 이해하는 반면에,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와 땅에서 현세적 권능으로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그들의 오랫동안 확립된 문자적 개념들 위에 직접적으로 새로운 이 영적 가르침들을 첨가하려고, 굽히지 않고 집착했음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논의하려고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한 4시간의 수업(교수敎授회의會議)로, 시몬 베드로가 다음 날 아침에 형 안드레에게 주었던 이 중요한 오후 요약을 재구성하여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 것입니다.

140:8.2 (1579.4) 1. Doing the Father’s will. Jesus’ teaching to trust in the overcare of the heavenly Father was not a blind and passive fatalism. He quoted with approval, on this afternoon, an old Hebrew saying: “He who will not work shall not eat.” He pointed to his own experience as sufficient commentary on his teachings. His precepts about trusting the Father must not be adjudged by the social or economic conditions of modern times or any other age. His instruction embraces the ideal principles of living near God in all ages and on all worlds. 아버지의 뜻을 행함. 하늘 아버지의 보호를 신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맹목적이며 수동적인 운명론(運命論숙명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날 오후에, 오래된 히브리 속담에 동의하며 인용하셨습니다. “일하지 않으려는 자는 먹지 말라.”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가르침들을 충분히 설명(주석)했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함에 대한 그의 교훈들은 현대나 다른 시대의 사회적 또는 경제적 상황으로 판단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의 교훈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이상적 원리들을 포함합니다.

140:8.3 (1579.5) Jesus made clear to the three the difference between the requirements of apostleship and discipleship. And even then he did not forbid the exercise of prudence and foresight by the twelve. What he preached against was not forethought but anxiety, worry. He taught the active and alert submission to God’s will. In answer to many of their questions regarding frugality and thriftiness, he simply called attention to his life as carpenter, boatmaker, and fisherman, and to his careful organization of the twelve. He sought to make it clear that the world is not to be regarded as an enemy; that the circumstances of life constitute a divine dispensation working along with the children of God. 예수님은 세 사도들에게 사도의 신분과 제자의 신분 자격 차이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12사도들이 검약(儉約아껴 씀)과 선견(先見내다 봄)의 실천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반대하신 설교는 예상(豫想미리 생각함)이 아니라 걱정·근심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기민하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검약(儉約아껴 씀)과 검소(儉素수수함)에 대한 사도들의 많은 질문에 대답으로, 그는 단지 목수, 배-제작자, 어부였던 자신의 일생과 12사도의 신중한 자신의 조직을 환기(喚起)시켰습니다. 세상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생활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작용하는 신적 섭리의 요소라고 그는 분명히 밝히려 애쓰셨습니다.

180902 아버지의 뜻을 행함(2) 마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44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140:8.4 (1579.6) Jesus had great difficulty in getting them to understand his personal practice of nonresistance. He absolutely refused to defend himself, and it appeared to the apostles that he would be pleased if they would pursue the same policy. He taught them not to resist evil, not to combat injustice or injury, but he did not teach passive tolerance of wrongdoing. And he made it plain on this afternoon that he approved of the social punishment of evildoers and criminals, and that the civil government must sometimes employ force for the maintenance of social order and in the execution of justice.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무저항 실천을 이해시키는데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는 무조건 자기 방어를 거부하셨으며, 사도들이 동일한 정책을 추구한다면 그가 기뻐하실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악에 저항하지 말고, 불법이나 손해(損害)와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범죄를 수동적으로 참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날 오후에, 악인들과 범죄자들의 사회적 처벌을 찬성하셨으며, 국가 정부가 때로는 사회 질서 유지와 정의 실행으로 무력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140:8.5 (1579.7) He never ceased to warn his disciples against the evil practice of retaliation; he made no allowance for revenge, the idea of getting even. He deplored the holding of grudges. He disallowed the idea of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He discountenanced the whole concept of private and personal revenge, assigning these matters to civil government, on the one hand, and to the judgment of God, on the other. He made it clear to the three that his teachings applied to the individual, not the state. He summarized his instructions up to that time regarding these matters, as: 그는 사도들에게 보복(報復앙갚음)하는 악행(惡行)에 대항하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는 복수(復讎), 즉 원수 갚는 관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평(원한)을 품는 것도 개탄(慨嘆분함과 걱정으로 탄식)하셨습니다.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복수(復讎)의 모든 개념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한편으로는 국가 정부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된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는 이 문제들에 대해 그 때까지 자신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140:8.6 (1580.1) Love your enemies — remember the moral claims of human brotherhood.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 인간의 형제 됨이라는 도덕적 요구를 기억하라.

140:8.7 (1580.2) The futility of evil: A wrong is not righted by vengeance. Do not make the mistake of fighting evil with its own weapons. 악은 무용성(無用性쓸데없음): 잘못은 보복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악 자체의 무기로 악과 싸우는 잘못을 행하지 말라.

140:8.8 (1580.3) Have faith — confidence in the eventual triumph of divine justice and eternal goodness. 신앙, 즉 신적 정의(正義올바른 도리)와 영원한 선(善)이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라.

180909 정치적 태도 마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Caesar’s,” they replied. Then he said to them,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140:8.9 (1580.4) 2. Political attitude. He cautioned his apostles to be discreet in their remarks concerning the strained relations then existing between the Jewish people and the Roman government; he forbade them to become in any way embroiled in these difficulties. He was always careful to avoid the political snares of his enemies, ever making reply, “Render 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which are God’s.” He refused to have his attention diverted from his mission of establishing a new way of salvation; he would not permit himself to be concerned about anything else. In his personal life he was always duly observant of all civil laws and regulations; in all his public teachings he ignored the civic, social, and economic realms. He told the three apostles that he was concerned only with the principles of man’s inner and personal spiritual life. 정치적 태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유대 민족과 로마정부 사이에 그 때 존재하는 긴장관계에 대해 비평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여하튼 이 어려움들에 휩쓸리는 것을 그가 금하셨습니다. 그는 늘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답하시면서, 적들의 정치적 함정을 피하려고 언제나 조심하셨습니다. 그는 구원의 새 길을 세우는 자신의 사명에서 딴 데로 주의(注意)돌리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것에 관여되도록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생활에서, 그는 항상 모든 시민법과 규정을 당연히 지켰습니다. 그는 모든 공적 가르침에서 시민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은 무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내적·개인적 영적 생활의 원리들에만 자신이 관련되었다고 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0:8.10 (1580.5) Jesus was not, therefore, a political reformer. He did not come to reorganize the world; even if he had done this, it would have been applicable only to that day and generation. Nevertheless, he did show man the best way of living, and no generation is exempt from the labor of discovering how best to adapt Jesus’ life to its own problems. But never make the mistake of identifying Jesus’ teachings with any political or economic theory, with any social or industrial system. 따라서 예수님은 정치적 개혁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재조직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그러셨더라도, 그것은 그 당시 세대에만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에게 최선으로 사는 길을 보이셨으며, 어떤 세대도 자기 문제들에 최선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적응시키는 방법을 찾는 수고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론, 어떤 사회적 또는 산업적 체계와 동일시하는 실수를 결코 저지르지 말라.

180916 사회적 태도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140:8.11 (1580.6) 3. Social attitude. The Jewish rabbis had long debated the question: Who is my neighbor? Jesus came presenting the idea of active and spontaneous kindness, a love of one’s fellow men so genuine that it expanded the neighborhood to include the whole world, thereby making all men one’s neighbors. But with all this, Jesus was interested only in the individual, not the mass. Jesus was not a sociologist, but he did labor to break down all forms of selfish isolation. He taught pure sympathy, compassion. Michael of Nebadon is a mercy-dominated Son; compassion is his very nature. 사회적 태도. 유대 랍비들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친절 관념을 제시하셨습니다. 동료 인간들을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셔서 이웃됨이 전(全) 세계를 포함하도록 확장하셔서,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이웃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님은 집단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모든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부수려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순수한 공감, 연민을 가르치셨습니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비에-사로잡힌 아들이시며, 연민은 바로 그의 본성입니다.

140:8.12 (1580.7) The Master did not say that men should never entertain their friends at meat, but he did say that his followers should make feasts for the poor and the unfortunate. Jesus had a firm sense of justice, but it was always tempered with mercy. He did not teach his apostles that they were to be imposed upon by social parasites or professional alms-seekers. The nearest he came to making sociological pronouncements was to say, “Judge not, that you be not judged.” 주(主)님은 사람들이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버림받은) 자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확고한 정의감을 지니셨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비로 조절되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식객(食客하는 일없이 얻어먹는 사람)들이나 직업적 자선-구걸자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회학적 선언에 가장 밀접했던 말씀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였습니다.

140:8.13 (1580.8) He made it clear that indiscriminate kindness may be blamed for many social evils. The following day Jesus definitely instructed Judas that no apostolic funds were to be given out as alms except upon his request or upon the joint petition of two of the apostles. In all these matters it was the practice of Jesus always to say, “Be as wise as serpents but as harmless as doves.” It seemed to be his purpose in all social situations to teach patience, tolerance, and forgiveness. 그는 분별없는 친절이 많은 사회악의 책임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다음날 예수님은 자신의 요구나 사도들 2명의 공동 요청이 아니면, 사도의 기금(재산)을 자선(구제)금으로 주지 말라고, 유다에게 단호히 지시하셨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예수님은 늘 습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인내, 관용 그리고 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그의 목적인 듯했습니다.

140:8.14 (1581.1) The family occupied the very center of Jesus’ philosophy of life — here and hereafter. He based his teachings about God on the family, while he sought to correct the Jewish tendency to overhonor ancestors. He exalted family life as the highest human duty but made it plain that family relationships must not interfere with religious obligations. He calle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family is a temporal institution; that it does not survive death. Jesus did not hesitate to give up his family when the family ran counter to the Father’s will. He taught the new and larger brotherhood of man — the sons of God. In Jesus’ time divorce practices were lax in Palestine and throughout the Roman Empire. He repeatedly refused to lay down laws regarding marriage and divorce, but many of Jesus’ early followers had strong opinions on divorce and did not hesitate to attribute them to him. All of the New Testament writers held to these more stringent and advanced ideas about divorce except John Mark. 가족은 여기와 향후 예수님의 생활 철학에서 바로 핵심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가족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가르친 반면에 조상들을 과도히 공경하는 유대인의 경향을 바로잡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가정생활을 최상의 인간적 의무로 격찬했지만 가족관계가 종교적 책임에 저촉(抵觸거슬림)하지 말아야한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는 가족이 현세적 제도이며, 죽음 이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거스를 때, 자기 가족을 주저함없이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새롭고 폭넓게 사람의 형제 됨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 전역에서 이혼풍습이 넘쳤습니다. 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칙 규정을 거듭해서 거부하셨지만, 예수님의 초기 추종자들 대부분은 이혼에 대해 확고한 의견들을 지녔고, 그것들을 서슴없이 예수님의 의견으로 돌렸습니다. 요한 마가를 제외하고 모든 신약(新約) 성서(聖書)의 저자들은 이혼에 대해 더 엄중하고 진보적인 이 관념들을 고수했습니다.

180923 경제적 태도 눅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140:8.15 (1581.2) 4. Economic attitude. Jesus worked, lived, and traded in the world as he found it. He was not an economic reformer, although he did frequently call attention to the injustice of the unequal distribution of wealth. But he did not offer any suggestions by way of remedy. He made it plain to the three that, while his apostles were not to hold property, he was not preaching against wealth and property, merely its unequal and unfair distribution. He recognized the need for social justice and industrial fairness, but he offered no rules for their attainment. 경제적 태도. 예수님은 자신이 파악한 대로 세상에서 일하였고 사셨으며 거래하셨습니다. 그가 경제 개혁가는 아니었지만, 부(富)의 불평등한 분배의 부당함에 자주 환기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지책으로 어떤 제안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그의 사도들이 재산을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함은, 부와 재산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지 불평등하고 부당한 분배에 대한 설교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는 사회적 정의와 산업적 공평의 필요를 인정했지만, 그 달성을 위해 어떤 규율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140:8.16 (1581.3) He never taught his followers to avoid earthly possessions, only his twelve apostles. Luke, the physician, was a strong believer in social equality, and he did much to interpret Jesus’ sayings in harmony with his personal beliefs. Jesus never personally directed his followers to adopt a communal mode of life; he made no pronouncement of any sort regarding such matters. 그는 열 두 사도들을 제외한 그의 추종자들에게 현세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누가는 사회적 평등의 강한 신봉자였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자신의 개인적 믿음들과 조화되게 많이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추종자들이 공동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직접 지시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문제들에 관해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140:8.17 (1581.4) Jesus frequently warned his listeners against covetousness, declaring that “a man’s happiness consists not in the abundance of his material possessions.” He constantly reiterated, “What shall it profit a man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 He made no direct attack on the possession of property, but he did insist that it is eternally essential that spiritual values come first. In his later teachings he sought to correct many erroneous Urantia views of life by narrating numerous parables which he presented in the course of his public ministry. Jesus never intended to formulate economic theories; he well knew that each age must evolve its own remedies for existing troubles. And if Jesus were on earth today, living his life in the flesh, he would be a great disappointment to the majority of good men and women for the simple reason that he would not take sides in present-day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disputes. He would remain grandly aloof while teaching you how to perfect your inner spiritual life so as to render you manyfold more competent to attack the solution of your purely human problems.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탐욕에 대해 자주 경고하시면서, “사람의 행복은 그의 물질적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변함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는 재산의 소유에 대해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가 먼저라는 영원한 본질을 주장하셨습니다. 후기 가르침에서 그는 대중 사역의 과정에서 제시한 수많은 비유들을 얘기하여 지구(유란시아)의 잘못된 여러 인생의 관점들을 바로잡으려고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경제이론을 세우려는 의도가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시대마다 당면 문제에 대한 자체의 개선책을 끌어내야만 함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신으로 사시면서 오늘날 지상에 계셨다면, 그가 오늘날의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분쟁에서 어떤 편도 들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에게 큰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너희를 몇 배나 유능하게 만들어 순전히 너희 인간 문제들의 해결에 달려들도록, 너희 내적인 영적 생활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숭고하게 초연(超然현실에 참견하지 않음)할 것입니다.

140:8.18 (1581.5) Jesus would make all men Godlike and then stand by sympathetically while these sons of God solve their own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problems. It was not wealth that he denounced, but what wealth does to the majority of its devotees. On this Thursday afternoon Jesus first told his associates that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같이 만들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공감을 나타내시며 곁에 계실 것입니다. 그가 비난하신 것은 부유함이 아니라, 그 부유함이 광신적으로 부(富)를 의지하는 대다수에게 행하는 것(영향)이었습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180930 개인적 종교1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140:8.19 (1581.6) 5. Personal religion. You, as did his apostles, should the better understand Jesus’ teachings by his life. He lived a perfected life on Urantia, and his unique teachings can only be understood when that life is visualized in its immediate background. It is his life, and not his lessons to the twelve or his sermons to the multitudes, that will assist most in revealing the Father’s divine character and loving personality. 개인적 종교. 너희는, 그의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그의 가르침을 더 온전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지구(유란시아)에서 완성된 일생을 사셨고, 직접적인 배경 안에서 그 생애가 구체적으로 그려질 때에만, 그의 유일한 가르침들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신적 성품과 애정 어린 고유성을 드러내도록 최대로 도움이 될 것은, 예수님의 일생이지, 열 두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들이나 대중들에게 주신 그의 설교가 아닙니다.

140:8.20 (1582.1) Jesus did not attack the teachings of the Hebrew prophets or the Greek moralists. The Master recognized the many good things which these great teachers stood for, but he had come down to earth to teach something additional, “the voluntary conformity of man’s will to God’s will.” Jesus did not want simply to produce a religious man, a mortal wholly occupied with religious feelings and actuated only by spiritual impulses. Could you have had but one look at him, you would have known that Jesus was a real man of great experience in the things of this world. The teachings of Jesus in this respect have been grossly perverted and much misrepresented all down through the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you have also held perverted ideas about the Master’s meekness and humility. What he aimed at in his life appears to have been a superb self-respect. He only advised man to humble himself that he might become truly exalted; what he really aimed at was true humility toward God. He placed great value upon sincerity — a pure heart. Fidelity was a cardinal virtue in his estimate of character, while courage was the very heart of his teachings. “Fear not” was his watchword, and patient endurance his ideal of strength of character. The teachings of Jesus constitute a religion of valor, courage, and heroism. And this is just why he chose as his personal representatives twelve commonplace men, the majority of whom were rugged, virile, and manly fishermen. 예수님은 히브리 선지자들이나 그리스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주(主)님은 이 위대한 선생들이 대표했던 여러 좋은 것들을 인정하셨지만, 그는 추가적인 어떤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사람 의지의 자발적 순종(順從)”을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종교인, 즉 종교적 감정으로 가득 차서 영적 충동만으로 움직이는 필사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한 번만이라도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일에서 위대한 체험을 하신 진정한 사람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여러 세기의 기독교 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왜곡되었고 굉장히 와전(訛傳사실과 다르게 전해짐)되었습니다. 너희들도 주(主)님의 온유함과 겸손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품어 왔습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최상의 자아-존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람이 겸손해야 진실로 고귀해질 수 있다고 충고만 하셨습니다. 그가 실제로 목표삼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성실–순수한 심정-에 위대한 가치를 두셨습니다. 충성은 그가 성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미덕이었던 반면에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그의 표어였고, 끈기 있는 인내는 강건한 성품에 대한 그의 이상(理想완전한 상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맹(勇猛용감), 용기(勇氣굳셈) 및 영웅심(英雄心)의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개인적 대표자들로서 12명의 평범한 사람들, 즉 대다수가 소박하고 힘차며 씩씩한 어부들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140:8.21 (1582.2) Jesus had little to say about the social vices of his day; seldom did he make reference to moral delinquency. He was a positive teacher of true virtue. He studiously avoided the negative method of imparting instruction; he refused to advertise evil. He was not even a moral reformer. He well knew, and so taught his apostles, that the sensual urges of mankind are not suppressed by either religious rebuke or legal prohibitions. His few denunciations were largely directed against pride, cruelty, oppression, and hypocrisy. 예수님은 그 시대의 사회악(社會惡)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 비행(非行)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참된 미덕을 가르치는 선생이셨습니다. 그는 가르치실 때 부정적 방법을 신중히 피하셨습니다. 그는 악이 선전(宣傳)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도덕적 개혁가도 아니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관능적 충동이 종교적 비난이나 법적 금지로 억제되지 않음을 잘 아셨고,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몇 가지 비난은 주로 자만(自慢스스로 자랑함), 잔인(殘忍인정없이 모짐), 억압(抑壓억지로 억누름), 위선(僞善겉으로만 착한 체함)을 향했습니다.

140:8.22 (1582.3) Jesus did not vehemently denounce even the Pharisees, as did John. He knew many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were honest of heart; he understood their enslaving bondage to religious traditions. Jesus laid great emphasis on “first making the tree good.” He impressed the three that he valued the whole life, not just a certain few special virtues. 예수님은 요한이 했듯이 바리새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심정이 정직했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종교적 전통에 노예로 속박된 그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것”에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자신은 몇 가지 특별한 미덕들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평가한다고 명심하게 했습니다.

181007 개인적 종교2(성장) 마13:31-32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1 He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 32 Though it is the smallest of all your seeds, yet when it grows, it is the largest of garden plants and becomes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ome and perch in its branches.”

140:8.23 (1582.4) The one thing which John gained from this day’s teaching was that the heart of Jesus’ religion consisted in the acquirement of a compassionate character coupled with a personality motivated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요한은 이 날 가르침에서 얻은 한 가지는 예수님 종교의 핵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고유성과 연결된 온정(溫情따뜻한 공감)의 성격 획득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40:8.24 (1582.5) Peter grasped the idea that the gospel they were about to proclaim was really a fresh beginning for the whole human race. He conveyed this impression subsequently to Paul, who formulated therefrom his doctrine of Christ as “the second Adam.” 베드로는 그들이 선포할 복음이 정말로 온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관념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이 감동적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두 번째 아담”이라는 자신의 교리를 고안했습니다.

140:8.25 (1582.6) James grasped the thrilling truth that Jesus wanted his children on earth to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citizens of the completed heavenly kingdom. 야고보는 예수님의 자녀들이 땅에서 이미 완성된 하늘나라의 시민들인 것처럼 살기를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감격적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140:8.26 (1582.7) Jesus knew men were different, and he so taught his apostles. He constantly exhorted them to refrain from trying to mold the disciples and believers according to some set pattern. He sought to allow each soul to develop in its own way, a perfecting and separate individual before God. In answer to one of Peter’s many questions, the Master said: “I want to set men free so that they can start out afresh as little children upon the new and better life.” Jesus always insisted that true goodness must be unconscious, in bestowing charity not allowing the left hand to know what the right hand does. 예수님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게 사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제자들과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틀에 따라 만들려고 하지 말라고 항상 타이르셨습니다. 그는 각자(혼)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독립된 개인(個人)을 개발하도록 놔두기 바라셨습니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主)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처럼 새롭게 더 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방하기를 바라노라.” 예수님은 참된 선(善)은 의식하지 않게, 즉 구제(救濟)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만 한다고 항상 주장하셨습니다.

140:8.27 (1583.1) The three apostles were shocked this afternoon when they realized that their Master’s religion made no provision for spiritual self-examination. All religions before and after the times of Jesus, even Christianity, carefully provide for conscientious self-examination. But not so with the religion of Jesus of Nazareth. Jesus’ philosophy of life is without religious introspection. The carpenter’s son never taught character building; he taught character growth, declaring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But Jesus said nothing which would proscribe self-analysis as a prevention of conceited egotism. 세 사도들은 주(主)님의 종교는 영적 자기-반성을 위한 규정이 없음을 깨닫고 이날 오후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시대 이전과 이후의 모든 종교는, 기독교도, 양심적인 자기-반성을 신중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철학은 종교적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인격 도야(陶冶 교육, 훈련, 형성, 개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선언하시면서, 인격 성장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만한 자기과시(自己誇示)벽(癖병, 버릇)의 예방책으로써 자아-분석을 금지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81014 개인적 종교3 마13:45-46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5 “Again,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erchant looking for fine pearls. 46 When he found one of great value, he went away and sold everything he had and bought it.

140:8.28 (1583.2) The right to enter the kingdom is conditioned by faith, personal belief. The cost of remaining in the progressive ascent of the kingdom is the pearl of great price, in order to possess which a man sells all that he has.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권리는 신앙, 개인적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적 상승을 유지하는 비용은,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얻으려는 값비싼 진주입니다.

140:8.29 (1583.3) The teaching of Jesus is a religion for everybody, not alone for weaklings and slaves. His religion never became crystallized (during his day) into creeds and theological laws; he left not a line of writing behind him. His life and teachings were bequeathed the universe as an inspirational and idealistic inheritance suitable for the spiritual guidance and moral instruction of all ages on all worlds. And even today, Jesus’ teaching stands apart from all religions, as such, albeit it is the living hope of every one of them. 예수님의 가르침은 약한 사람들과 노예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의 종교는 그 당시 결코 신조들과 신학적 법칙으로 구체화(명확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뒤에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온 세상의 모든 세대에게 영적 안내와 도덕적 교훈에 알맞게 영감을 주는 이상주의(理想主義)적 유산으로서 우주에 증여(贈與선물로 줌)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모든 종교들에게 살아있는 희망이지만, 모든 종교들과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140:8.30 (1583.4) Jesus did not teach his apostles that religion is man’s only earthly pursuit; that was the Jewish idea of serving God. But he did insist that religion was the exclusive business of the twelve. Jesus taught nothing to deter his believers from the pursuit of genuine culture; he only detracted from the tradition-bound religious schools of Jerusalem. He was liberal, big-hearted, learned, and tolerant. Self-conscious piety had no place in his philosophy of righteous living. 예수님은 종교를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추구할 것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열 두 사도들이 전념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자들에게 진정한 문화의 추구를 막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에 묶여있던 예루살렘의 종교학파들에서 신자들을 단지 떼어놓으셨습니다. 그는 개방적이고, 마음이 넓으며, 박식했고, 너그러웠습니다. 과도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경건은 정의롭게 사는 그의 철학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40:8.31 (1583.5) The Master offered no solutions for the nonreligious problems of his own age nor for any subsequent age. Jesus wished to develop spiritual insight into eternal realities and to stimulate initiative in the originality of living; he concerned himself exclusively with the underlying and permanent spiritual needs of the human race. He revealed a goodness equal to God. He exalted love — truth, beauty, and goodness — as the divine ideal and the eternal reality. 주(主)님은 자신의 세대나 후세대의 비(非)종교적 문제들을 위해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독창적 삶을 주도하도록 격려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는 인류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영적 필요에만 오로지 관여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선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사랑-진(眞), 미(美), 선(善)-을 신적 이상과 영원한 실체로 높였습니다.

140:8.32 (1583.6) The Master came to create in man a new spirit, a new will — to impart a new capacity for knowing the truth, experiencing compassion, and choosing goodness — the will to be in harmony with God’s will, coupled with the eternal urge to becom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주(主)님은 사람 안에 새로운 영,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여 – 진리를 알고, 온정(溫情따뜻한 공감)을 체험하며, 선을 선택하는 새 능력,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충동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려는 의지를 나눠주려고 오셨습니다.

9. The Day of Consecration 성직 봉헌(奉獻)일

181021 봉헌(奉獻) 명령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He said to them,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140:9.1 (1583.7) The next Sabbath day Jesus devoted to his apostles, journeying back to the highland where he had ordained them; and there, after a long and beautifully touching personal message of encouragement, he engaged in the solemn act of the consecration of the twelve. This Sabbath afternoon Jesus assembled the apostles around him on the hillside and gave them into the hands of his heavenly Father in preparation for the day when he would be compelled to leave them alone in the world. There was no new teaching on this occasion, just visiting and communion. 그 다음 안식일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임직했던 고지(高地)로 돌아가, 그들에게 전념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친히 길고 아주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 열 두 사도의 엄숙한 성직 봉헌식을 시작했습니다.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님은 산 중턱에서 사도들을 주위에 모아, 세상에 그들만 남겨놓을 날을 대비하여 하늘 아버지의 보호에 그들을 맡겼습니다. 이때 새 가르침은 없었고, 환담(歡談즐거운 이야기)과 교제만 나누었습니다.

140:9.2 (1584.1) Jesus reviewed many features of the ordination sermon, delivered on this same spot, and then, calling them before him one by one, he commissioned them to go forth in the world as his representatives. The Master’s consecration charge was: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Liberate spiritual captives, comfort the oppressed, and minister to the afflicted.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예수님은 바로 이 자리에서 전했던 임직 설교의 여러 요점을 살피신 후 그들을 하나씩 자신 앞에 불러서 그의 대리자로 세상에 나가도록 임명했습니다. 주(主)님의 봉헌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 영적 포로를 해방하고, 억눌린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0:9.3 (1584.2) Jesus advised them to take neither money nor extra clothing, saying,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hire.” And finally he said: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 the midst of wolves; be you therefore as wise as serpents and as harmless as doves. But take heed, for your enemies will bring you up before their councils, while in their synagogues they will castigate you. Before governors and rulers you will be brought because you believe this gospel, and your very testimony shall be a witness for me to them. And when they lead you to judgment, be not anxious about what you shall say, for the spirit of my Father indwells you and will at such a time speak through you. Some of you will be put to death, and before you establish the kingdom on earth, you will be hated by many peoples because of this gospel; but fear not; I will be with you, and my spirit shall go before you into all the world. And my Father’s presence will abide with you while you go first to the Jews, then to the gentiles.”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이나 여벌옷을 지니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꾼이 자기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그러나 조심할지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징계할 것이기 때문이라. 총독들과 통치자들 앞에 너희가 끌려가리니, 너희가 이 복음을 믿기 때문이며, 바로 너희의 증언이 그들에게 나를 위한 증거가 되리라.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재판에 넘길 때 너희가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계셔서,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 말씀하리라. 너희 중 더러는 죽을 것이며, 너희가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리라.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내 영이 너희보다 먼저 온 세상에 가리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는 유대인들에게요,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의 임재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140:9.4 (1584.3) And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they journeyed back to their home in Zebedee’s house.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그들은 세베대의 집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갔습니다.

10. The Evening After the Consecration 봉헌일 저녁

140:10.1 (1584.4) That evening while teaching in the house, for it had begun to rain, Jesus talked at great length, trying to show the twelve what they must be, not what they must do. They knew only a religion that imposed the doing of certain things as the means of attaining righteousness — salvation. But Jesus would reiterate, “In the kingdom you must be righteous in order to do the work.” Many times did he repeat, “Be you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All the while was the Master explaining to his bewildered apostles that the salvation which he had come to bring to the world was to be had only by believing, by simple and sincere faith. Said Jesus: “John preached a baptism of repentance, sorrow for the old way of living. You are to proclaim the baptism of fellowship with God. Preach repentance to those who stand in need of such teaching, but to those already seeking sincere entrance to the kingdom, open the doors wide and bid them enter into the joyous fellowship of the sons of God.” But it was a difficult task to persuade these Galilean fishermen that, in the kingdom, being righteous, by faith, must precede doing righteousness in the daily life of the mortals of earth. 비가 오기 시작해서 그 날 저녁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예수님은 장시간 말씀하시면서, 열 두 사도들이 해야만 할 것이 아니라 되어야만 할 것을 보이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들은 의로움 즉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써 어떤 것들 행하기를 강요하는 종교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면 너희가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고 반복하시곤 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시므로 너희도 완전해지라.”고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당황하는 사도들에게 계속 주님께서 설명하셨던 것은, 그가 세상에 가져온 구원은 믿음, 즉 단순하며 신실한 신앙만으로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회개의 세례, 즉 옛 생활방식의 참회를 전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세례를 선포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회개를 전하라, 그러나 이미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즐거운 사귐에 들어가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의(義)를 행하는 것보다 앞서야만 한다고 이 갈릴리 어부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40:10.2 (1584.5) Another great handicap in this work of teaching the twelve was their tendency to take highly idealistic and spiritual principles of religious truth and remake them into concrete rules of personal conduct. Jesus would present to them the beautiful spirit of the soul’s attitude, but they insisted on translating such teachings into rules of personal behavior. Many times, when they did make sure to remember what the Master said, they were almost certain to forget what he did not say. But they slowly assimilated his teaching because Jesus was all that he taught. What they could not gain from his verbal instruction, they gradually acquired by living with him. 열둘을 가르치는 이 일의 또 다른 큰 어려움은, 종교적 진리의 높은 이상적·영적 원리들을 취해서 고유(개인)적 행동의 구체적 규칙들로 개조하려는 그들의 경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영(정신)을 그들에게 나타내곤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가르침들을 고유(개인)적 행위의 규칙들로 고집스럽게 해석했습니다. 여러 번, 그들은 주(主)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확실히 기억했을 때, 그가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거의 여지없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셨던 모두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천천히 흡수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은, 그와 함께 살면서 사도들은 서서히 얻었습니다.

140:10.3 (1585.1) It was not apparent to the apostles that their Master was engaged in living a life of spiritual inspiration for every person of every age on every world of a far-flung universe. Notwithstanding what Jesus told them from time to time, the apostles did not grasp the idea that he was doing a work on this world but for all other worlds in his vast creation. Jesus lived his earth life on Urantia, not to set a personal example of mortal living for the men and women of this world, but rather to create a high spiritual and inspirational ideal for all mortal beings on all worlds. 그들의 주(主)님이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고유자)들을 위해 영적 영감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 사도들에게는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가 자신의 광대한 창조계에 있는 다른 모든 세상을 위해서도, 이 세상에서 일하셨다는 관념을, 사도들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지상 생활을 사셨던 것은, 이 세상 남녀들을 위한 필사자 삶의 개인(고유)적 모범(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상들의 모든 필사 존재들을 위해 높은 영적·영감적 이상(理想)을 창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81104 자녀-아버지 관계와 천국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140:10.4 (1585.2) This same evening Thomas asked Jesus: “Master, you say that we must become as little children before we can gain entrance to the Father’s kingdom, and yet you have warned us not to be deceived by false prophets nor to become guilty of casting our pearls before swine. Now, I am honestly puzzled. I cannot understand your teaching.” Jesus replied to Thomas: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Ever you insist on making literal all that I teach. When I asked you to become as little children as the price of entering the kingdom, I referred not to ease of deception, mere willingness to believe, nor to quickness to trust pleasing strangers. What I did desire that you should gather from the illustration was the child-father relationship. You are the child, and it is your Father’s kingdom you seek to enter. There is present that natural affection between every normal child and its father which insures an understanding and loving relationship, and which forever precludes all disposition to bargain for the Father’s love and mercy. And the gospel you are going forth to preach has to do with a salvation growing out of the faith-realization of this very and eternal child-father relationship.” 이 날 저녁에 도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어린아이처럼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도 말고, 우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죄를 범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합니다.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는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늘 문자대로 고집하느니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내가 요구했던 것은, 쉽게 속거나, 단순히 기꺼이 믿거나, 호감(好感)이 가는 낯선 이를 바로 신뢰하라는 말이 아니었느니라. 그 예증에서 너희가 얻어야만 한다고 내가 바랐던 것은, 자녀-아버지 관계였노라. 너희는 어린아이요, 너희가 들어가려는 곳은 너희 아버지의 나라이니라. 모든 정상적 어린이와 그 아버지 사이에는 자연스런 애정이 있어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보증(保證)하며,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거래하려는 모든 경향을 언제나 가로막느니라. 너희가 나가 전하려는 복음은 바로 이 영원한 자녀-아버지 관계의 신앙-깨달음에서 생긴 구원과 관계있느니라.”

140:10.5 (1585.3) The one characteristic of Jesus’ teaching was that the morality of his philosophy originated in the personal relation of the individual to God — this very child-father relationship. Jesus placed emphasis on the individual, not on the race or nation. While eating supper, Jesus had the talk with Matthew in which he explained that the morality of any act is determined by the individual’s motive. Jesus’ morality was always positive. The golden rule as restated by Jesus demands active social contact; the older negative rule could be obeyed in isolation. Jesus stripped morality of all rules and ceremonies and elevated it to majestic levels of spiritual thinking and truly righteous living. 예수님의 가르침의 한 가지 특징은 그 철학의 도덕성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고유적 관계 – 바로 이 자녀-아버지 관계 –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종이나 나라가 아니라 개인에게 비중을 두셨습니다. 저녁 식사하면서, 예수님은 마태와 이야기하면서 어떤 행동의 도덕성은 개인의 동기가 결정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도덕성은 항상 긍정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새로 말씀하신 황금률은 적극적인 사회적 교제를 요구합니다. 오래된 부정적 규칙은 고립되어 지켜졌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성에서 모든 규칙들과 예식들을 벗겨내고 도덕성을 영적 사고와 진실로 의롭게 사는 위엄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140:10.6 (1585.4) This new religion of Jesus was not without its practical implications, but whatever of practical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value there is to be found in his teaching is the natural outworking of this inner experience of the soul as it manifests the fruits of the spirit in the spontaneous daily ministry of genuin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예수님의 이 새 종교는 실천적 암시(暗示넌지시 깨우치는 내용)들이 없지 않았지만, 실천적인 정치적·사회적 혹은 경제적 가치에 속한 무엇이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든지, 혼의 이 내적 체험의 자연스런 결실이며, 그것은 진정한 고유적 종교 체험에서 우러나온 매일의 사역(봉사)에서 영의 열매들이 증명되는 것과 같습니다.

181111 나무가 결정하는 열매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Likewise every good tree bears good fruit, but a bad tree bears bad fruit.

140:10.7 (1585.5) After Jesus and Matthew had finished talking, Simon Zelotes asked, “But, Master, are all men the sons of God?” And Jesus answered: “Yes, Simon, all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at is the good news you are going to proclaim.” But the apostles could not grasp such a doctrine; it was a new, strange, and startling announcement. And it was because of his desire to impress this truth upon them that Jesus taught his followers to treat all men as their brothers. 예수께서 마태와 대화를 마치자, 시몬 젤로떼가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主)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인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시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것이 너희가 선포할 복음이라.”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교리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이상하며,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진리를 추종자들에게 심어주려는 소망 때문에, 모든 사람을 자기 형제들로 대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40:10.8 (1585.6) In response to a question asked by Andrew, the Master made it clear that the morality of his teaching was inseparable from the religion of his living. He taught morality, not from the nature of man, but from the relation of man to God. 안드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주(主)님은 그 가르침의 도덕성은 그 삶의 종교와 분리할 수 없었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는 사람 본성의 도덕성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도덕성을 가르치셨습니다.

140:10.9 (1585.7) John asked Jesus, “Master, what is the kingdom of heaven?” And Jesus answered: “The kingdom of heaven consists in these three essentials: first, recognition of the fact of the sovereignty of God; second, belief in the truth of sonship with God; and third, faith in the effectiveness of the supreme human desire to do the will of God — to be like God. And this is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hat by faith every mortal may have all these essentials of salvation.” 요한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하늘나라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본질이니라. 첫째 하나님 주권의 사실 인정, 둘째 하나님의 아들 됨의 진리 믿음, 셋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하나님 같이 되려는 – 최극 인간 소망의 효과성을 신앙함.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니라. 신앙으로 모든 필사자는 이 모든 구원의 본질을 소유할 수 있느니라.”

140:10.10 (1586.1) And now the week of waiting was over, and they prepared to depart on the morrow for Jerusalem.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끝났고, 그들은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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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89 The Resurrection 부활

Paper 189

The Resurrection 부활

1. The Morontia Transit 모론시아 전환
2. The Material Body of Jesus 예수의 물질 몸
3. The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섭리시대적 부활
Departur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고유성화 조율자의 출발
4. Discovery of the Empty Tomb 빈 무덤의 발견
The five women 다섯 여성들
Jesus appears to Mary Magdalene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5. Peter and John at the Tomb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와 요한
Second appearance — to Mary Magdalene 막달라 마리아에게 두 번째 출현하심

160327 부활1-부활의 실상 마28:1-6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189:0.1 (2020.1) SOON after the burial of Jesus on Friday afternoon, the chief of the archangels of Nebadon, then present on Urantia, summoned his council of the resurrection of sleeping will creatures and entered upon the consideration of a possible technique for the restoration of Jesus. These assembled sons of the local universe, the creatures of Michael, did this on their own responsibility; Gabriel had not assembled them. By midnight they had arrived at the conclusion that the creature could do nothing to facilitate the resurrection of the Creator. They were disposed to accept the advice of Gabriel, who instructed them that, since Michael had “laid down his life of his own free will, he also had power to take it up again in accordance with his own determination.” Shortly after the adjournment of this council of the archangels, the Life Carriers, and their various associates in the work of creature rehabilitation and morontia creation,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Jesus, being in personal command of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then on Urantia, spoke these words to the anxious waiting watchers: 금요일(AD 30. 4. 7.) 오후, 예수님을 장사지낸 직후, 그때 유란시아에 있었던 네바돈의 수석 천사장이 잠자는 의지 창조물들의 부활을 논의하는 회의를 소집했으며, 예수님의 회복을 위해 가능한 기법을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집된 이 지역우주의 아들들, 즉 미가엘의 창조물들은 자신들의 책임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가브리엘이 그들을 소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그들은 창조자의 부활을 돕기 위해 창조물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미가엘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생명을 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을 지녔느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준 가브리엘의 충고를 그들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창조물의 회복과 모론시아 창조계의 업무에 있어서, 천사장들, 생명 운반자들 및 그들의 다양한 동료들로 구성된 이 회의를 마친 직후, 당시 유란시아에 있는 천상의 무리들을 직접 지휘하던 예수님의 고유성(固有性)화 조율자는 애타게 기다리는 구경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9:0.2 (2020.2) “Not one of you can do aught to assist your Creator-father in the return to life. As a mortal of the realm he has experienced mortal death; as the Sovereign of a universe he still lives. That which you observe is the mortal transit of Jesus of Nazareth from life in the flesh to life in the morontia. The spirit transit of this Jesus was completed at the time I separated myself from his personality and became your temporary director. Your Creator-father has elected to pass through the whole of the experience of his mortal creatures, from birth on the material worlds, on through natural death and the resurrection of the morontia, into the status of true spirit existence. A certain phase of this experience you are about to observe, but you may not participate in it. Those things which you ordinarily do for the creature, you may not do for the Creator. A Creator Son has within himself the power to bestow himself in the likeness of any of his created sons; he has within himself the power to lay down his observable life and to take it up again; and he has this power because of the direct command of the Paradise Father, and I know whereof I speak.” 너희 창조자-아버지가 살아나도록 너희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느니라. 영역의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사람으로 그는 필사 죽음을 체험하셨고, 우주 주권자로서 그는 여전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라. 너희가 목격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이 육신의 생명에서 모론시아의 생명으로 이동하는 필사자 전환이니라. 예수님의 이 영 전환은 내가 그의 고유성에서 스스로 분리하여 잠시 너희 관리자가 되었을 때 완료되었느니라. 너희 창조자-아버지는 자신의 필사 창조물들 전체 체험, 즉 물질세계들에서 탄생하여 자연적 죽음과 모론시아 부활을 거쳐 참된 영 존재의 상태가 이르기로 선택했느니라. 너희가 이 체험의 단계를 보겠지만, 너희가 그것에 참여할 수는 없느니라. 너희가 보통 창조물을 위해 하는 그것들을 너희는 창조자를 위해서 할 수 없느니라. 창조자 아들은 자신이 창조한 아들들의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증여할 권능을 자신 안에 갖고 계시니라. 그는 자신 안에 지켜야 할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능이 있기 때문이라. 그는 천국 아버지의 직접 명령으로 이 권능을 지니시며,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느니라.”

189:0.3 (2020.3) When they heard the Personalized Adjuster so speak, they all assumed the attitude of anxious expectancy, from Gabriel down to the most humble cherubim. They saw the mortal body of Jesus in the tomb; they detected evidences of the universe activity of their beloved Sovereign; and not understanding such phenomena, they waited patiently for developments. 그들이 고유성(固有性)화 조율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브리엘로부터 아래로 가장 낮은 신분의 케루빔 천사들까지 그들은 모두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있는 예수님의 필사 시신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주권자의 우주 활동의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상황을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1. The Morontia Transit 모론시아 전환

180401 190421 200412 부활체(모론시아) 전환 요10:17-18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 The reason my Father loves me is that I lay down my life–only to take it up again. 18 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 I received from my Father.”

200412 눅24:1-3 1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1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very early in the morning, the women took the spices they had prepared and went to the tomb. 2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tomb, 3 but when they entered, they did not find the body of the Lord Jesus.

189:1.1 (2020.4) At two forty-five Sunday morning, the Paradise incarnation commission, consisting of seven unidentified Paradise personalities, arrived on the scene and immediately deployed themselves about the tomb. At ten minutes before three, intense vibrations of commingled material and morontia activities began to issue from Joseph’s new tomb, and at two minutes past three o’clock, this Sunday morning, April 9, A.D. 30, the resurrected morontia form and personality of Jesus of Nazareth came forth from the tomb. 일요일 오전 245에, 미(未)확인된 일곱 천국 고유성들로 구성된 천국 성육신(成肉身) 위원회가 그 현장에 도착했고, 즉시 무덤 주위에 배치되었습니다. 310분 전, 혼합된 물질과 모론시아(영과 물질의 중간 상태) 활동으로 강렬한 진동요셉의 새 무덤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AD 3049, 이 일요일 오전 32에, 나사렛 예수님의 부활한 모론시아 형체와 고유성이 그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189:1.2 (2021.1) After the resurrected Jesus emerged from his burial tomb, the body of flesh in which he had lived and wrought on earth for almost thirty-six years was still lying there in the sepulchre niche, undisturbed and wrapped in the linen sheet, just as it had been laid to rest by Joseph and his associates on Friday afternoon. Neither was the stone before the entrance of the tomb in any way disturbed; the seal of Pilate was still unbroken; the soldiers were still on guard. The temple guards had been on continuous duty; the Roman guard had been changed at midnight. None of these watchers suspected that the object of their vigil had risen to a new and higher form of existence, and that the body which they were guarding was now a discarded outer covering which had no further connection with the delivered and resurrected morontia personality of Jesus. 매장한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께서 나오신 후, 그가 약 36년 동안 사시고 지상에서 행하셨던 육신은 금요일 오후에 요셉과 그 동료들이 눕혔던 그대로, 훼손 없이 세마포에 싸여 묘실에 아직 뉘여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 앞의 바위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빌라도의 봉인도 여전히 파손되지 않았으며, 군인들도 여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계속 근무 중이었고, 로마 경비병은 한밤중(밤12시)에 교체되었습니다. 이 당직자들 누구도 그들의 감시 대상이 새롭게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살아나 그들이 지키던 시신이 이제, 해방되고 부활한 예수님의 모론시아(부활체) 고유성과 더 이상 관계없이 버려진 바깥 덮개임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189:1.3 (2021.2) Mankind is slow to perceive that, in all that is personal, matter is the skeleton of morontia, and that both are the reflected shadow of enduring spirit reality. How long before you will regard time as the moving image of eternity and space as the fleeting shadow of Paradise realities? 인류는 개인적인 모든 면에서 물질은 모론시아의 뼈대이며, 둘(물질과 모론시아)은 영속적인 영 실체가 반사된 그림자임을 천천히 파악합니다. 얼마나 오래있어야, 너희는 시간을 영원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공간을 천국 실체들의 쏜살같은 그림자로 간주하겠는가?

189:1.4 (2021.3) As far as we can judge, no creature of this universe nor any personality from another universe had anything to do with this morontia resurrection of Jesus of Nazareth. On Friday he laid down his life as a mortal of the realm; on Sunday morning he took it up again as a morontia being of the system of Satania in Norlatiadek. There is much about the resurrection of Jesus which we do not understand. But we know that it occurred as we have stated and at about the time indicated. We can also record that all known phenomena associated with this mortal transit, or morontia resurrection, occurred right there in Joseph’s new tomb, where the mortal material remains of Jesus lay wrapped in burial cloths. 우리가 판단하는 한, 이 우주의 어떤 창조물이나 다른 우주에 있는 어떤 고유성나사렛 예수의 이 모론시아 부활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영역의 필사자로서 생명을 버리셨고, 일요일 아침에 그는 놀라시아덱의 사타니아 체계에 속한 모론시아 존재로 다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술하고 지적한 그 무렵에 부활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또한, 이 필사자 전환이나 모론시아 부활과 관련되어 알려진 모든 현상이, 예수님의 필사자 물질적 유해(遺骸)가 수의에 싸였던, 요셉의 새 무덤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음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189:1.5 (2021.4) We know that no creature of the local universe participated in this morontia awakening. We perceived the seven personalities of Paradise surround the tomb, but we did not see them do anything in connection with the Master’s awakening. Just as soon as Jesus appeared beside Gabriel, just above the tomb, the seven personalities from Paradise signalized their intention of immediate departure for Uversa. 지역 우주의 어떤 창조물도 이 모론시아 부활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무덤을 둘러싼 천국의 일곱 고유성들을 감지했지만, 주님(主)의 부활과 연결된 어떤 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 바로 위, 가브리엘 옆에 나타나는 순간에, 천국에서 온 일곱 고유성들은 즉시 유버르사로 떠나겠다는 자신들의 의도를 알렸습니다.

189:1.6 (2021.5) Let us forever clarify the concept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by making the following statements: 다음의 진술로 예수님의 부활 개념을 언제나 분명히 하십시오.

189:1.7 (2021.6) 1. His material or physical body was not a part of the resurrected personality. When Jesus came forth from the tomb, his body of flesh remained undisturbed in the sepulchre. He emerged from the burial tomb without moving the stones before the entrance and without disturbing the seals of Pilate. 그의 물질 즉 물리적 시신은 부활한 고유성의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자, 그의 육체의 시신은 묘실에 훼손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는 입구 앞에 있는 돌들을 움직이지 않은 채, 빌라도의 봉인을 훼손하지 않고, 매장된 무덤에서 나타났습니다.

189:1.8 (2021.7) 2. He did not emerge from the tomb as a spirit nor as Michael of Nebadon; he did not appear in the form of the Creator Sovereign, such as he had had before his incarnation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on Urantia. 그는 ()이나 네바돈의 미가엘로서 무덤에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지구(유란시아)에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성육신(成肉身)하기 이전처럼 창조자 주권자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89:1.9 (2021.8) 3. He did come forth from this tomb of Joseph in the very likeness of the morontia personalities of those who, as resurrected morontia ascendant beings, emerge from the resurrection halls of the first mansion world of this local system of Satania. And the presence of the Michael memorial in the center of the vast court of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number one leads us to conjecture that the Master’s resurrection on Urantia was in some way fostered on this, the first of the system mansion worlds. 그는, 부활한 모론시아 상승 존재들처럼, 사타니아 이 지역 체계의 첫 저택 세계의 부활실들에서 나오는 모론시아 고유성들과 아주 똑같은 모습으로, 요셉의 이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1번 저택 세계에 속한 부활실들의 넓은 뜰 중앙에 있는 미가엘 기념관의 존재로 인해 우리들은 지구(유란시아)에서 ()님의 부활이 이 첫 체계 저택 세계들에서 어떤 방법으로 촉진되었다고 추측합니다.

189:1.10 (2022.1) The first act of Jesus on arising from the tomb was to greet Gabriel and instruct him to continue in executive charge of universe affairs under Immanuel, and then he directed the chief of the Melchizedeks to convey his brotherly greetings to Immanuel. He thereupon asked the Most High of Edentia for the certification of the Ancients of Days as to his mortal transit; and turning to the assembled morontia groups of the seven mansion worlds, here gathered together to greet and welcome their Creator as a creature of their order, Jesus spoke the first words of the postmortal career. Said the morontia Jesus: “Having finished my life in the flesh, I would tarry here for a short time in transition form that I may more fully know the life of my ascendant creatures and further reveal the will of my Father in Paradise.”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행위가브리엘을 맞이하고 임마누엘 밑에서 우주업무의 집행책임을 계속하도록 그에게 지시하셨으며, 그 후 그는 수석 멜기세덱에게 자기 형제의 인사를 임마누엘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그는 자신의 필사자 전환에 대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확인이 있었는지 에덴시아의 지고(至高)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들 계층의 창조물로서 자신들의 창조자를 환영하고 영접하려고 여기에 함께 모였던, 일곱 저택 세계들의 소집된 모론시아 집단들을 향해, 예수님은 필사자이후 생애의 첫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론시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으로 내 생애를 마쳤으니, 나는 상승하는 내 창조물들의 일생을 완전히 더 알고,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더 계시할 수 있도록, 과도기 형태로 잠시 여기에 머물고자 하노라.”

189:1.11 (2022.2) After Jesus had spoken, he signaled to the Personalized Adjuster, and all universe intelligences who had been assembled on Urantia to witness the resurrection were immediately dispatched to their respective universe assignments. 예수님은 말씀 후, 고유성화 조율자에게 신호로 알리자, 부활을 보려고 유란시아에 소집된 모든 우주 지능존재들각자 우주 임지로 즉시 돌아갔습니다.

189:1.12 (2022.3) Jesus now began the contacts of the morontia level, being introduced, as a creature, to the requirements of the life he had chosen to live for a short time on Urantia. This initiation into the morontia world required more than an hour of earth time and was twice interrupted by his desire to communicate with his former associates in the flesh as they came out from Jerusalem wonderingly to peer into the empty tomb to discover what they considered evidence of his resurrection. 예수님은 이제 유란시아에 잠시 살려고 선택했던 일생의 요청에 대하여, 창조물로서, 입문(入門)하게 된, 모론시아 수준의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모론시아 세계로 들어가는 이 시작은 지구 시간으로 한 시간 이상 걸렸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그의 부활의 증거로 여길 것을 찾으려고 빈 무덤 안을 이상히 여겨 응시하는, 그의 예전 동료들과 육신으로 소통하려는, 그의 요망으로 두 번 중단되었습니다.

189:1.13 (2022.4) Now is the mortal transit of Jesus —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the Son of Man — completed. The transitory experience of the Master as a personality midway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has begun. And he has done all this through power inherent within himself; no personality has rendered him any assistance. He now lives as Jesus of morontia, and as he begins this morontia life, the material body of his flesh lies there undisturbed in the tomb. The soldiers are still on guard, and the seal of the governor about the rocks has not yet been broken. 이제 예수님의 필사자 전환 –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의 모론시아 부활-이 완료되었습니다. 물질과 영 사이 중간 고유성으로서 ()님의 일시적 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님은 자신 안에 본래 있는 권능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해내셨습니다. 어떤 고유성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모론시아의 예수님으로 사시면서, 이 모론시아 생활을 시작할 때, 물질적 육체의 시신은 훼손 없이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군인들은 여전히 지키고 있고, 바위 근처 총독의 봉인은 아직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1. The Material Body of Jesus 예수의 물질 몸

230409 예수의 물질 몸 눅24:1-3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189:2.1 (2022.5) At ten minutes past three o’clock, as the resurrected Jesus fraternized with the assembled morontia personalities from the seven mansion worlds of Satania, the chief of archangels — the angels of the resurrection — approached Gabriel and asked for the mortal body of Jesus. Said the chief of the archangels: “We may not participate in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the bestowal experience of Michael our sovereign, but we would have his mortal remains put in our custody for immediate dissolution. We do not propose to employ our technique of dematerialization; we merely wish to invoke the process of accelerated time. It is enough that we have seen the Sovereign live and die on Urantia; the hosts of heaven would be spared the memory of enduring the sight of the slow decay of the human form of the Creator and Upholder of a universe. In the name of the celestial intelligences of all Nebadon, I ask for a mandate giving me the custody of the mortal body of Jesus of Nazareth and empowering us to proceed with its immediate dissolution.” 오전 3시 10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에서 모인 모론시아 고유성들과 친교를 나누는 동안에, 부활 천사들의 수석 천사장이 가브리엘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필사 몸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석 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가엘 우리 주권자의 증여 체험 중 모론시아 부활에 참여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그의 필사 유해(遺骸)의 즉각적 분해를 우리가 맡고자 합니다. 우리는 비(非)물질화하는 우리 기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가속화 과정을 행하려 할 뿐입니다. 우리는 주권자가 유란시아에서 사시고 돌아가신 것을 보았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늘의 무리들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유지자의 인간 형태가 점차 부패하는 광경을 계속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네바돈 천상의 지능 존재들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님의 필사 몸을 제가 관리하여 우리가 즉각적 분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명해 주십시오.”

189:2.2 (2023.1) And when Gabriel had conferred with the senior Most High of Edentia, the archangel spokesman for the celestial hosts was given permission to make such disposition of the physical remains of Jesus as he might determine. 그리고 가브리엘이 에덴시아의 선임 지고(至高)자와 의논한 후, 천상 무리의 천사장 대변자는 그의 결정대로 예수님의 물리적 유해(遺骸)를 그렇게 처분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189:2.3 (2023.2) After the chief of archangels had been granted this request, he summoned to his assistance many of his fellows, together with a numerous host of the representatives of all orders of celestial personalities, and then, with the aid of the Urantia midwayers, proceeded to take possession of Jesus’ physical body. This body of death was a purely material creation; it was physical and literal; it could not be removed from the tomb as the morontia form of the resurrection had been able to escape the sealed sepulchre. By the aid of certain morontia auxiliary personalities, the morontia form can be made at one time as of the spirit so that it can become indifferent to ordinary matter, while at another time it can become discernible and contactable to material beings, such as the mortals of the realm. 천사장들의 수석은, 이 요청이 허락된 후, 그는 모든 천상 계층의 고유성들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무리와 함께, 자기 여러 동료를 자기 조력자로 소집한 다음 유란시아 중도자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물리적 몸체를 손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체(遺體)는 순수하게 물질적 창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모론시아 형태가 봉인된 묘실을 빠져나갈 수 있었듯이, 무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특정한 모론시아 보조(補助) 고유성들의 도움으로, 모론시아 형태가 한때는 영(靈)으로 만들어져 보통의 물질에 작용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에, 다른 때는 영역의 필사자들처럼 물질적 존재들에게 식별되거나 접촉될 수 있습니다.

189:2.4 (2023.3) As they made ready to remove the body of Jesus from the tomb preparatory to according it the dignified and reverent disposal of near-instantaneous dissolution, it was assigned the secondary Urantia midwayers to roll away the stones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 The larger of these two stones was a huge circular affair, much like a millstone, and it moved in a groove chiseled out of the rock, so that it could be rolled back and forth to open or close the tomb. When the watching Jewish guards and the Roman soldiers, in the dim light of the morning, saw this huge stone begin to roll away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 apparently of its own accord — without any visible means to account for such motion — they were seized with fear and panic, and they fled in haste from the scene. The Jews fled to their homes, afterward going back to report these doings to their captain at the temple. The Romans fled to the fortress of Antonia and reported what they had seen to the centurion as soon as he arrived on duty. 거의 순간적인 분해를 품위 있고 경건하게 처리하려는 준비로,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유해를 옮기려고 준비되자, 유란시아 2차 중도자들에게 무덤 입구에서 돌들을 치우게 했습니다. 이런 두 개의 돌 중 큰 것은, 거의 맷돌처럼 거대한 원형이었고, 바위에 끌로 깎아낸 홈을 따라 움직였는데, 무덤을 열거나 닫도록 앞뒤로 굴릴 수 있었습니다. 경계하는 유대의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이, 새벽 어스레한 빛 가운데, 언뜻 보기에 저절로 – 그런 움직임을 밝힐 가시적 수단도 없이 – 이 커다란 돌이 무덤 입구에서 구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 현장에서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으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돌아와 성전에 있는 그들의 지휘관에게 이런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아 요새까지 달아났다가 백부장이 근무하러 오자마자 자신들이 보았던 것을 보고했습니다(마28:4).

189:2.5 (2023.4) The Jewish leaders began the sordid business of supposedly getting rid of Jesus by offering bribes to the traitorous Judas, and now, when confronted with this embarrassing situation, instead of thinking of punishing the guards who deserted their post, they resorted to bribing these guards and the Roman soldiers. They paid each of these twenty men a sum of money and instructed them to say to all: “While we slept during the nighttime, his disciples came upon us and took away the body.” And the Jewish leaders made solemn promises to the soldiers to defend them before Pilate in case it should ever come to the governor’s knowledge that they had accepted a bribe. 유대 지도자들은 반역자 유다에게 뇌물을 줘서 결국 예수를 제거하려는 야비한 거래를 시작했으며, 이제 이런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자, 자기 경계 구역에서 도망한 그 경비병들을 처벌할 생각 대신에, 그들은 이런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을 매수(買收)했습니다. 그들은 이 20명에게 각각 돈을 주었고 모두에게 “우리가 밤에 자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시신(屍身)을 가져갔습니다.”라고 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군인들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언젠가 총독에게 알려질 경우, 빌라도 앞에서 그들을 변호하겠다고 군인들에게 엄숙히 약속했습니다(마28:12-15).

189:2.6 (2023.5) The Christian belief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has been based on the fact of the “empty tomb.” It was indeed a fact that the tomb was empty, but this is not the truth of the resurrection. The tomb was truly empty when the first believers arrived, and this fact, associated with that of the undoubted resurrection of the Master, led to the formulation of a belief which was not true: the teaching that the material and mortal body of Jesus was raised from the grave. Truth having to do with spiritual realities and eternal values cannot always be built up by a combination of apparent facts. Although individual facts may be materially true, it does not follow that the association of a group of facts must necessarily lead to truthful spiritual conclusions.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 믿음은 “빈 무덤”의 사실에 근거해 왔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었지만, 이것이 부활의 진실은 아닙니다. 첫 번째 신자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실제로 비어있었고,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주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실이 아니었던 믿음, 즉 예수의 물질적인 필사 몸이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가르침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영적 실체 및 영원한 가치와 관련된 진리는 언제나 명백한 사실의 조합으로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 사실이 실질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지만, 여러 사실의 조합이 반드시 올바른 영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89:2.7 (2023.6) The tomb of Joseph was empty, not because the body of Jesus had been rehabilitated or resurrected, but because the celestial hosts had been granted their request to afford it a special and unique dissolution, a return of the “dust to dust,” without the intervention of the delays of time and without the operation of the ordinary and visible processes of mortal decay and material corruption. 요셉의 무덤이 비어있었던 것은 예수의 몸이 회복되거나 부활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 지연이 개입되지 않고 치명적인 부패와 물질적 부패의 일반적인 가시적 과정의 작용 없이 “먼지에서 먼지로(시104:29)” 되돌아가는, 특별하고 독특하게 분해하려는, 천상 무리의 요청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마28:6, 막16:6, 눅24:3).

189:2.8 (2024.1) The mortal remains of Jesus underwent the same natural process of elemental disintegration as characterizes all human bodies on earth except that, in point of time, this natural mode of dissolution was greatly accelerated, hastened to that point where it became well-nigh instantaneous. 예수님의 유해(遺骸)는, 이런 자연적 분해 방식이 매우 가속되어, 거의 순간에 가까울 정도로 빨라졌다는 점을 제외하고, 지상의 모든 인간 시신의 특징인 원소 분해와 똑같은 자연적 과정을 겪었습니다.

189:2.9 (2024.2) The true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of Michael are spiritual in nature, albeit this teaching is corroborated by the testimony of many mortals of the realm who met, recognized, and communed with the resurrected morontia Master. He became a part of the personal experience of almost one thousand human beings before he finally took leave of Urantia. 이 가르침은 부활한 모론시아 주님을 만나서, 알아보고, 그와 친하게 이야기했던 영역의 여러 필사자의 증언으로 확증됨에도 불구하고, 미가엘 부활의 진정한 증거는 사실상 영적입니다. 그가 결국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거의 1,000명 인간의 개인적 체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 The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섭리(攝理)적 부활

160403 부활2 – 부활의 은총(섭리적 부활)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189:3.1 (2024.3) A little after half past four o’clock this Sunday morning, Gabriel summoned the archangels to his side and made ready to inaugurate the general resurrection of the termination of the Adamic dispensation on Urantia. When the vast host of the seraphim and the cherubim concerned in this great event had been marshaled in proper formation, the morontia Michael appeared before Gabriel, saying: “As my Father has life in himself, so has he given it to the Son to have life in himself. Although I have not yet fully resumed the exercise of universe jurisdiction, this self-imposed limitation does not in any manner restrict the bestowal of life upon my sleeping sons; let the roll call of the planetary resurrection begin.” 이 일요일 아침 4시 30분이 조금 지났을 때, 가브리엘은 천사장들을 그의 옆에 소환하여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섭리 종결에 대한 일반 부활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에 관련된 세라핌 천사들과 케루빔 천사들의 광대한 무리가 적절한 형태로 정렬하자, 모론시아 미가엘이 가브리엘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자신 안에 생명이 있듯이 아들 안에 생명이 있도록 그에게 생명을 주셨느니라. 내가 아직 완전히 우주 관할권 행사를 되찾지 않았지만, 이런 자진(自進) 제한이 어떤 식으로도 내 잠자는 아들들에게 증여하는 생명을 제한하지 않느니라. 행성 부활의 호출을 시작하라.”

189:3.2 (2024.4) The circuit of the archangels then operated for the first time from Urantia. Gabriel and the archangel hosts moved to the place of the spiritual polarity of the planet; and when Gabriel gave the signal, there flashed to the first of the system mansion worlds the voice of Gabriel, saying: “By the mandate of Michael, let the dead of a Urantia dispensation rise!” Then all the survivors of the human races of Urantia who had fallen asleep since the days of Adam, and who had not already gone on to judgment, appeared in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in readiness for morontia investiture. And in an instant of time the seraphim and their associates made ready to depart for the mansion worlds. Ordinarily these seraphic guardians, onetime assigned to the group custody of these surviving mortals, would have been present at the moment of their awaking in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but they were on this world itself at this time because of the necessity of Gabriel’s presence here in connection with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Jesus. 그때 천사장들의 회로가 유란시아로부터 처음으로 작동했습니다. 가브리엘과 천사장 무리가 행성의 영적 극성(極性)의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가브리엘이 신호를 보내자, 체계 저택 세계들 중 첫째에 가브리엘의 소리가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 유란시아 섭리에 속한 죽은 자들은 일어나라!” 그러자 아담 시절 이후로 잠들었고, 아직 심판을 받지 않은 유란시아의 인류 중 모든 생존자가 모론시아 임명 준비를 위해 저택세계의 부활실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라핌 천사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저택 세계들로 떠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생존하는 필사자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도록 이전에 배정된, 이 수호 세라핌 천사들은 그들이 깨어나는 순간에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모론시아 부활과 관련하여 여기에 가브리엘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때 이 세계에 있었습니다.

189:3.3 (2024.5) Notwithstanding that countless individuals having personal seraphic guardians and those achieving the requisite attainment of spiritual personality progress had gone on to mansonia during the ages subsequent to the times of Adam and Eve, and though there had been many special and millennial resurrections of Urantia sons, this was the third of the planetary roll calls, or complete dispensational resurrections. The first occurred at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the second during the time of Adam, and this, the third, signalized the morontia resurrection, the mortal transit, of Jesus of Nazareth. 고유한 수호 세라핌 천사들을 지닌 무수한 개인들과 영적 고유성 진보의 필수적 도달에 이른 자들이 아담과 이브 시절 이후 시대에 저택 세계에 갔고, 유란시아 아들들의 여러 특별 및 천년의 부활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행성 점호 중 셋째, 즉 완비된 섭리적 부활들이었습니다. 첫째는 행성 왕자가 도착했을 때 일어났고, 둘째는 아담 시대 동안에, 그리고 이 셋째는 모론시아 부활, 나사렛 예수의 필사자 변이를 신호로 알렸습니다.

189:3.4 (2024.6) When the signal of the planetary resurrection had been received by the chief of archangels,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the Son of Man relinquished his authority over the celestial hosts assembled on Urantia, turning all these sons of the local universe back to the jurisdiction of their respective commanders. And when he had done this, he departed for Salvington to register with Immanuel the completion of the mortal transit of Michael. And he was immediately followed by all the celestial host not required for duty on Urantia. But Gabriel remained on Urantia with the morontia Jesus. 천사장들의 수석이 행성 부활의 신호를 받았을 때, 인자(人子)의 고유(固有)화 조율자가, 지역 우주의 이 아들들이 자신들이 속한 각 사령관 관할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유란시아에 모인 천상의 무리에게 행사하던 자신의 권위에서 손을 뗐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마쳤을 때, 그는 임마누엘에게 미가엘의 필사자 변이(變移)의 완료를 등록하려고 샐빙톤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직무가 필요하지 않은 천상의 모든 무리가 즉시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모론시아 예수님과 함께 유란시아에 남았습니다.

189:3.5 (2025.1) And this is the recital of the events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as viewed by those who saw them as they really occurred, free from the limitations of partial and restricted human vision. 그리고 이것이,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인간 시야의 한계들이 없는, 그것들이 정말 일어났던 대로 그것들을 보았던 자들이 바라본, 예수의 부활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1. Discovery of the Empty Tomb 빈 무덤의 발견

160410 부활3-빈 무덤 막16:1-11 막28:1-10 23:55-24:12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9:4.1 (2025.2) As we approach the tim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on this early Sunday morning, it should be recalled that the ten apostles were sojourning at the home of Elijah and Mary Mark, where they were asleep in the upper chamber, resting on the very couches whereon they reclined during the last supper with their Master. This Sunday morning they were all there assembled except Thomas. Thomas was with them for a few minutes late Saturday night when they first got together, but the sight of the apostles, coupled with the thought of what had happened to Jesus, was too much for him. He looked his associates over and immediately left the room, going to the home of Simon in Bethpage, where he thought to grieve over his troubles in solitude. The apostles all suffered, not so much from doubt and despair as from fear, grief, and shame. 우리가 이 일요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한 시간을 다룰 때, 10명의 사도는 그들의 주님과 마지막 만찬(晩餐) 동안 자신들이 기댔던 그 소파에 앉아서, 잠들었던 윗방,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 머물러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요일 새벽에 도마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거기에 모였습니다. 도마는 그들이 처음 모였던 토요일 밤늦게 잠시 그들과 같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모습이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이 연상(聯想)되어 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료들을 대충 훑어보고 즉시 방을 떠나,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 가서, 홀로 마음 아파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들 모두 의심과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 슬픔과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189:4.2 (2025.3) At the home of Nicodemus there were gathered together, with David Zebedee and Joseph of Arimathea, some twelve or fifteen of the more prominent of the Jerusalem disciples of Jesus.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there were some fifteen or twenty of the leading women believers. Only these women abode in Joseph’s house, and they had kept close within during the hours of the Sabbath day and the evening after the Sabbath, so that they were ignorant of the military guard on watch at the tomb; neither did they know that a second stone had been rolled in front of the tomb, and that both of these stones had been placed under the seal of Pilate. 니고데모의 집에 다윗 세베대, 아리마대 요셉과 더 탁월한 예수의 예루살렘 제자가 약 12명이나 15명이 함께 모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약 15명이나 20명의 지도적 여성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들만 요셉의 집에 머물러, 안식일과 안식일 후 저녁까지 숨어있어서, 그들은 무덤을 경계하는 군 경비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 돌이 무덤 앞에 굴려져 있음도 몰랐고, 이 돌들에 있는 빌라도의 인봉(印封)도 몰랐습니다.

189:4.3 (2025.4) A little before three o’clock this Sunday morning, when the first signs of day began to appear in the east, five of the women started out for the tomb of Jesus. They had prepared an abundance of special embalming lotions, and they carried many linen bandages with them. It was their purpose more thoroughly to give the body of Jesus its death anointing and more carefully to wrap it up with the new bandages. 일요일 새벽 3시 조금 전, 날이 밝는 첫 낌새가 동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다섯 명의 여성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다량의 향유(香油) 로션을 준비하고, 그것들과 함께 세마포 붕대를 많이 가져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몸에 시신용 기름을 더 철저히 바르고 새로운 붕대로 시신을 더 정성을 들여 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4.4 (2025.5) The women who went on this mission of anointing Jesus’ body were: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the Alpheus twins, Salome the mother of the Zebedee brothers, Joanna the wife of Chuza, and Susanna the daughter of Ezra of Alexandria.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갔던 여성들은 막달라 마리아, 알페오 쌍둥이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 추자의 아내 요안나, 알렉산드리아 출신 에즈라의 딸 수산나였습니다.

189:4.5 (2025.6) It was about half past three o’clock when the five women, laden with their ointments, arrived before the empty tomb. As they passed out of the Damascus gate, they encountered a number of soldiers fleeing into the city more or less panic-stricken, and this caused them to pause for a few minutes; but when nothing more developed, they resumed their journey. 연고를 짊어진 다섯 여성이 빈 무덤 앞에 3시 30분 때쯤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 문밖을 지나쳤을 때, 거의 허둥대며 도시로 달아나는 여러 군사를 우연히 만나서 잠시 멈췄지만, 더 이상의 일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은 계속 이동했습니다.

189:4.6 (2025.7) They were greatly surprised to see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inasmuch as they had said among themselves on the way out, “Who will help us roll away the stone?” They set down their burdens and began to look upon one another in fear and with great amazement. While they stood there, atremble with fear, Mary Magdalene ventured around the smaller stone and dared to enter the open sepulchre. This tomb of Joseph was in his garden on the hillside on the eastern side of the road, and it also faced toward the east. By this hour there was just enough of the dawn of a new day to enable Mary to look back to the place where the Master’s body had lain and to discern that it was gone. In the recess of stone where they had laid Jesus, Mary saw only the folded napkin where his head had rested and the bandages wherewith he had been wrapped lying intact and as they had rested on the stone before the celestial hosts removed the body. The covering sheet lay at the foot of the burial niche. 그들은 자기들끼리 길을 가면서 “누가 우리를 도와서 돌을 굴려 치울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덤 입구에서 치워져 있는 돌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두려워하며 깜짝 놀라 서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서 있는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돌을 돌아서 대담하게 열린 매장지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의 이 무덤은 길의 동편 경사진 언덕에 있는 그의 동산에 있었는데 또한 동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시간은 막 새날이 충분히 밝아서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놓인 곳을 돌아보고 그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눕혔던 우묵한 바위에서, 천상의 무리가 시신을 이동하기 전 그들이 돌에 두었던 대로, 마리아는 그의 머리가 있던 곳에 접힌 수건과 그를 감쌌던 붕대가 그대로 놓인 것을 봤을 뿐입니다. 시신을 덮었던 천은 묘소 중 오목하게 파인 발 부분에 있었습니다.

189:4.7 (2026.1) After Mary had tarried in the doorway of the tomb for a few moments (she did not see distinctly when she first entered the tomb), she saw that Jesus’ body was gone and in its place only these grave cloths, and she uttered a cry of alarm and anguish. All the women were exceedingly nervous; they had been on edge ever since meeting the panicky soldiers at the city gate, and when Mary uttered this scream of anguish, they were terror-stricken and fled in great haste. And they did not stop until they had run all the way to the Damascus gate. By this time Joanna was conscience-stricken that they had deserted Mary; she rallied her companions, and they started back for the tomb. (마리아는 무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뚜렷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무덤 문간에 잠시 기다린 후, 그녀는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고 그곳에서 이런 수의(壽衣)들만 보고, 놀라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습니다. 여성들 모두 몹시 초조(焦燥)했습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공황(恐惶) 상태에 빠진 군인들을 만난 이후 계속 안절부절못했고, 마리아가 고통스럽게 이렇게 비명을 지르자, 그들은 겁에 질려 몹시 급하게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 문까지 내내 달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안나는 자신들이 마리아를 버려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동료를 불러 모아 다시 무덤으로 출발했습니다.

189:4.8 (2026.2) As they drew near the sepulchre, the frightened Magdalene, who was even more terrorized when she failed to find her sisters waiting when she came out of the tomb, now rushed up to them, excitedly exclaiming: “He is not there — they have taken him away!” And she led them back to the tomb, and they all entered and saw that it was empty. 마리아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기다리던 자매들을 발견하지 못해서, 훨씬 더 무서웠던, 놀란 마리아는, 그들이 매장지에 가까이 이르자, 이제 그들에게 달려가서 흥분하여 소리쳤습니다. “그가 거기에 없어요. – 저들이 그를 데려갔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무덤으로 다시 이끌었고 그들은 모두 들어가서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았습니다.

189:4.9 (2026.3) All five of the women then sat down on the stone near the entrance and talked over the situation. It had not yet occurred to them that Jesus had been resurrected. They had been by themselves over the Sabbath, and they conjectured that the body had been moved to another resting place. But when they pondered such a solution of their dilemma, they were at a loss to account for the orderly arrangement of the grave cloths; how could the body have been removed since the very bandages in which it was wrapped were left in position and apparently intact on the burial shelf? 당시 다섯 명의 여성 모두 입구 근처의 바위에 앉아 그 사태를 의논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생각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들끼리 있었고, 그들은 시신을 다른 무덤으로 옮겼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곤란한 그런 상황을 풀어보려고 곰곰이 생각했을 때, 그들은 단정히 정돈된 수의(壽衣)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시신을 쌌던 그 붕대가 제자리에, 매장 선반에 분명히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는데, 시신을 어떻게 옮길 수 있었을까?

189:4.10 (2026.4) As these women sat there in the early hours of the dawn of this new day, they looked to one side and observed a silent and motionless stranger. For a moment they were again frightened, but Mary Magdalene, rushing toward him and addressing him as if she thought he might be the caretaker of the garden, said, “Where have you taken the Master? Where have they laid him? Tell us that we may go and get him.” When the stranger did not answer Mary, she began to weep. Then spoke Jesus to them, saying, “Whom do you seek?” Mary said: “We seek for Jesus who was laid to rest in Joseph’s tomb, but he is gone. Do you know where they have taken him?” Then said Jesus: “Did not this Jesus tell you, even in Galilee, that he would die, but that he would rise again?” These words startled the women, but the Master was so changed that they did not yet recognize him with his back turned to the dim light. And as they pondered his words, he addressed the Magdalene with a familiar voice, saying, “Mary.” And when she heard that word of well-known sympathy and affectionate greeting, she knew it was the voice of the Master, and she rushed to kneel at his feet while she exclaimed, “My Lord, and my Master!” And all of the other women recognized that it was the Master who stood before them in glorified form, and they quickly knelt before him. 이 여인들이 이런 새날이 밝아오는 이른 시간에 거기에 앉아 있었을 때, 그들은 한쪽을 바라보며 말없이 움직이지 않는 낯선 사람을 봤습니다. 잠시 그들은 다시 두려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에게 달려가 그를 동산 관리인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어디로 데려갔나요? 그들이 그를 어디에 두었나요? 우리가 그를 데려가게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낯선 이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지 않았을 때,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무덤에 영면(永眠)하도록 눕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도, 이 예수가, 그는 죽을 것이지만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여성들이 이 말에 깜짝 놀랐지만, 주님이 그토록 바뀌어서 그들은 희미한 빛을 등지고 있는 그를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친숙한 목소리로 막달라에게 말을 걸면서, “마리아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익숙한 공감과 다정한 인사의 말을 듣자, 그녀는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였음을 알았기에, 급히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主)시여!” 그러자 다른 모든 여성이 자기들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던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앞에 곧 무릎을 꿇었습니다.

189:4.11 (2027.1) These human eyes were enabled to see the morontia form of Jesus because of the special ministry of the transformers and the midwayers in association with certain of the morontia personalities then accompanying Jesus. 그때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론시아 몇 고유성들과 함께 변환자들과 중도자들의 특별한 돌봄 때문에 예수님의 모론시아 모습을 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189:4.12 (2027.2) As Mary sought to embrace his feet, Jesus said: “Touch me not, Mary, for I am not as you knew me in the flesh. In this form will I tarry with you for a season before I ascend to the Father. But go, all of you, now and tell my apostles — and Peter — that I have risen, and that you have talked with me.” 마리아가 그의 발을 얼싸안으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마리아야, 나는 육신으로 네가 알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내가 아버지께 오르기 전에 이 모습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잠시 있으리라. 그러니 이제 너희 모두 가서 내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내가 살아났고 너희가 나와 이야기했다고 알리라.”

189:4.13 (2027.3) After these women had recovered from the shock of their amazement, they hastened back to the city and to the home of Elijah Mark, where they related to the ten apostles all that had happened to them; but the apostles were not inclined to believe them. They thought at first that the women had seen a vision, but when Mary Magdalene repeated the words which Jesus had spoken to them, and when Peter heard his name, he rushed out of the upper chamber, followed closely by John, in great haste to reach the tomb and see these things for himself. 이 여성들은 놀란 충격에서 회복된 후, 그들은 도시로 서둘러 엘리야 마가의 집에 돌아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사도 10명에게 이야기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여성들이 환상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했던 말을 막달라 마리아가 반복했을 때, 베드로가 자기 이름을 듣고, 아주 급하게 무덤에 이르러 스스로 이것들을 보려고, 그는 윗방에서 뛰쳐 나갔는데, 요한이 바짝 따라갔습니다.

189:4.14 (2027.4) The women repeated the story of talking with Jesus to the other apostles, but they would not believe; and they would not go to find out for themselves as had Peter and John. 여성들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님과 대화한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처럼 스스로 진의를 파악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1. Peter and John at the Tomb 무덤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

210411 믿는 용기를 가지라 요20:3-8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3 S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started for the tomb. 4 Both were running,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 5 He bent over and looked in at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but did not go in. 6 Then Simon Peter, who was behind him, arrived and went into the tomb. He saw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7 as well as the burial cloth that had been around Jesus’ head. The cloth was folded up by itself, separate from the linen. 8 Finally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side. He saw and believed.

189:5.1 (2027.5) As the two apostles raced for Golgotha and the tomb of Joseph, Peter’s thoughts alternated between fear and hope; he feared to meet the Master, but his hope was aroused by the story that Jesus had sent special word to him. He was half persuaded that Jesus was really alive; he recalled the promise to rise on the third day. Strange to relate, this promise had not occurred to him since the crucifixion until this moment as he hurried north through Jerusalem. As John hastened out of the city, a strange ecstasy of joy and hope welled up in his soul. He was half convinced that the women really had seen the risen Master. 두 사도가 골고다와 요셉의 무덤을 향해 달리면서, 베드로의 생각은 두려움과 소망으로 엇갈렸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에 두려웠지만, 예수께서 그에게 특별한 소식을 보냈다는 이야기로 인해 그의 소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정말 살아계셨다고 반쯤 확신했습니다. 그는 사흘에 살아나는 약속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십자가 처형 이후로, 그가 예루살렘을 거쳐 북쪽으로 서둘러 가는 이 순간까지, 이 약속이 그에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도시 밖으로 서둘러 가면서, 기묘한 기쁨과 소망의 희열이 그의 혼(魂)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는 여성들이 부활한 주님을 정말 봤다고 반쯤 확신했습니다.

189:5.2 (2027.6) John, being younger than Peter, outran him and arrived first at the tomb. John tarried at the door, viewing the tomb, and it was just as Mary had described it. Very soon Simon Peter rushed up and, entering, saw the same empty tomb with the grave cloths so peculiarly arranged. And when Peter had come out, John also went in and saw it all for himself, and then they sat down on the stone to ponder the meaning of what they had seen and heard. And while they sat there, they turned over in their minds all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Jesus, but they could not clearly perceive what had happened.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어서 베드로를 앞질러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무덤을 관찰하면서 입구에 머물렀는데 마리아가 꼭 말한 대로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내 달려와 들어가 그렇게 특별히 정돈된 수의(壽衣)가 있는 똑같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나오자 요한도 들어가 모든 것을 직접 본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려고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그들은 예수에 관해 자신들이 들었던 모두를 이리저리 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일어났던 일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89:5.3 (2027.7) Peter at first suggested that the grave had been rifled, that enemies had stolen the body, perhaps bribed the guards. But John reasoned that the grave would hardly have been left so orderly if the body had been stolen, and he also raised the question as to how the bandages happened to be left behind, and so apparently intact. And again they both went back into the tomb more closely to examine the grave cloths. As they came out of the tomb the second time, they found Mary Magdalene returned and weeping before the entrance. Mary had gone to the apostles believing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grave, but when they all refused to believe her report, she became downcast and despairing. She longed to go back near the tomb, where she thought she had heard the familiar voice of Jesus. 베드로는 처음에 무덤이 약탈당했고, 대적들이 경비병들에게 매수하여 시신을 훔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시신이 도난당했다면 무덤이 그렇게 정연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득했고, 붕대들이 어떻게 공교롭게 뒤에 남았는지 그리고 그렇게 분명히 손대지 않은 채였는지에 대해 또한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다시 무덤으로 되들어가 더 자세히 수의(壽衣)들을 검사했습니다. 그들이 무덤 밖으로 두 번째 나왔을 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와 입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음을 믿으면서 사도들에게 갔지만 그들 모두 그녀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자, 그녀는 풀이 죽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덤 근처, 자신이 예수님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던 장소로 간절히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189:5.4 (2027.8) As Mary lingered after Peter and John had gone, the Master again appeared to her, saying: “Be not doubting; have the courage to believe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Go back to my apostles and again tell them that I have risen, that I will appear to them, and that presently I will go before them into Galilee as I promised.”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후 마리아가 근처를 서성거릴 때, 주(主)께서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믿는 용기를 가지라. 내 사도들에게 돌아가 내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며 내가 약속한 대로 그들에 앞서 갈릴리로 곧 갈 것이라고 다시 말하라.”

189:5.5 (2028.1) Mary hurried back to the Mark home and told the apostles she had again talked with Jesus, but they would not believe her. But when Peter and John returned, they ceased to ridicule and became filled with fear and apprehension. 마리아는 급히 마가의 집으로 돌아가 사도들에게 예수님과 또다시 대화한 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녀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오자, 그들은 비웃지 않고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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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2 The Universe of Universes 우주들의 우주

Paper 12

The Universe of Universes 우주들의 우주

  1.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주(主)우주의 공간 수준들
  2. The Domains of the Unqualified Absolute 무제한 절대자의 권역
  3. Universal Gravity 우주의 중력
  4. Space and Motion 공간과 운동
  5. Space and Time 공간과 시간
  6. Universal Overcontrol 우주의 전반적-조정
  7. The Part and the Whole 부분과 전체
  8. Matter, Mind, and Spirit 물질, 마음 및 영
  9. Personal Realities 고유적 실체들

12:0.1 (128.1) THE immensity of the far-flung creation of the Universal Father is utterly beyond the grasp of finite imagination; the enormousness of the master universe staggers the concept of even my order of being. But the mortal mind can be taught much about the plan and arrangement of the universes; you can know something of their physical organization and marvelous administration; you may learn much about the various groups of intelligent beings who inhabit the seven superuniverses of time and the central universe of eternity. 우주 아버지의 멀리 퍼지는 창조의 광대함은 유한한 상상력의 파악을 철저하게 초월합니다. 주(主)우주의 거대함은 내 계층의 존재가 지닌 개념까지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필사자 마음은 우주들의 계획과 배열에 관해 많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우주들의 물리적 조직과 놀라운 경영에 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시간의 일곱 초우주들과 영원한 중앙우주에 거주하는 지능 존재들의 다양한 집단들에 관해 많이 배울 수도 있다.

12:0.2 (128.2) In principle, that is, in eternal potential, we conceive of material creation as being infinite because the Universal Father is actually infinite, but as we study and observe the total material creation, we know that at any given moment in time it is limited, although to your finite minds it is comparatively limitless, virtually boundless. 원칙적으로, 즉 영원한 잠재성에서, 우리는, 우주 아버지가 실제로 무한하시므로, 물질 창조를 무한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총 물질 창조를 연구하고 관찰하듯이, 너희 유한한 마음들에 총 물질 창조는 비교적 제한이 없으며, 사실 끝없지만, 시간의 어떤 순간에도, 총 물질 창조는 유한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2:0.3 (128.3) We are convinced, from the study of physical law and from the observation of the starry realms, that the infinite Creator is not yet manifest in finality of cosmic expression, that much of the cosmic potential of the Infinite is still self-contained and unrevealed. To created beings the master universe might appear to be almost infinite, but it is far from finished; there are still physical limits to the material creation, and the experiential revelation of the eternal purpose is still in progress. 물리적 법칙을 연구하고 별이 빛나는 영역들을 관찰하여, 무한한 창조자가 아직 최종적인 질서우주 표현으로 드러나지 않고, 무한자의 질서우주 잠재성의 대부분은 여전히 독립적(자아-억제, 자신 안에 포함되어 있음)이며 계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창조된 존재들에게, 주(主)우주는 거의 무한한 듯이 보이겠지만, 완성은 당치도 않습니다. 물질 창조에는 여전히 물리적 한계들이 있고, 영원한 목적의 체험적 계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1.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주(主)우주의 공간 수준들

12:1.1 (128.4) The universe of universes is not an infinite plane, a boundless cube, nor a limitless circle; it certainly has dimensions. The laws of physical organization and administration prove conclusively that the whole vast aggregation of force-energy and matter-power functions ultimately as a space unit, as an organized and co-ordinated whole. The observable behavior of the material creation constitutes evidence of a physical universe of definite limits. The final proof of both a circular and delimited universe is afforded by the, to us, well-known fact that all forms of basic energy ever swing around the curved path of the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in obedience to the incessant and absolute pull of Paradise gravity. 우주들의 우주는 무한 평면, 즉 끝없는 입방체도 아니고, 끝없는 원형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규모를 갖고 있습니다. 물리적 조직과 경영의 법칙들은 기세-에너지와 물질-권능(동력, 힘)의 거대한 전체 집단이 궁극적으로 어떤 공간 단위로, 조직되고 통합-협동된 전체로 기능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합니다. 물질 창조의 관찰 행위는 물리적 우주가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원형이며 한계가 정해진 우주의 최종적 증명은, 기초 에너지의 모든 형태들이 천국 중력의 끊임없이 절대적으로 당기는 힘에 복종하여 주(主)우주의 공간 수준들의 곡선 경로 둘레를 언제나 회전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12:1.2 (128.5) The successive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constitute the major divisions of pervaded space — total creation, organized and partially inhabited or yet to be organized and inhabited. If the master universe were not a series of elliptical space levels of lessened resistance to motion, alternating with zones of relative quiescence, we conceive that some of the cosmic energies would be observed to shoot off on an infinite range, off on a straight-line path into trackless space; but we never find force, energy, or matter thus behaving; ever they whirl, always swinging onward in the tracks of the great space circuits. 주(主)우주의 연속적인 공간 수준들은 침투 공간 – 총 창조, 조직되어 부분적으로 거주하거나 아직 조직되어 거주하게 될 -의 주요 부분들을 구성합니다. 주(主)우주가 상대적인 고요한 지대들과 교대하면서, 운동에 대해 저항이 축소된 일련의 타원 공간 수준들이 아니었다면, 약간의 질서우주 에너지들이 궤도 없는 공간 안으로, 무한한 범위, 즉 직선 경로로 발사하는 것이 관찰되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는 기세, 에너지, 또는 물질을 전혀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휘돌아 회전하는데, 커다란 공간 회로들의 궤도를 따라 앞으로 항상 회전합니다.

12:1.3 (129.1) Proceeding outward from Paradise through the horizontal extension of pervaded space, the master universe is existent in six concentric ellipses, the space levels encircling the central Isle: 침투 공간의 수평 확장을 통하여 천국에서 밖으로 진행하면서, 주(主)우주는 여섯 동심원 타원들, 중앙 섬을 도는 공간 수준들 안에 실존합니다.

12:1.4 (129.2) 1. The Central Universe — Havona. 중앙 우주 – 하보나

12:1.5 (129.3) 2. The Seven Superuniverses. 일곱 초우주

12:1.6 (129.4) 3. The First Outer Space Level. 제1 외부 공간수준

12:1.7 (129.5) 4. The Second Outer Space Level. 제2 외부 공간수준

12:1.8 (129.6) 5. The Third Outer Space Level. 제3 외부 공간수준

12:1.9 (129.7) 6. The Fourth and Outermost Space Level. 제4 최-외부 공간 수준

12:1.10 (129.8) Havona, the central universe, is not a time creation; it is an eternal existence. This never-beginning, never-ending universe consists of one billion spheres of sublime perfection and is surrounded by the enormous dark gravity bodies. At the center of Havona is the stationary and absolutely stabilized Isle of Paradise, surrounded by its twenty-one satellites. Owing to the enormous encircling masses of the dark gravity bodies about the fringe of the central universe, the mass content of this central creation is far in excess of the total known mass of all seven sectors of the grand universe. 중앙 우주인 하보나는, 시간 창조가 아니며; 그것은 영원한 실존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우주는 10억의 숭고한 완전 구체들로 구성되며 거대한 암흑 중력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보나 중심에는, 고정되어 절대적으로 안정된 천국 섬이 있는데, 21개 위성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중앙우주 테두리 부근을 둘러싸고 있는 암흑 중력체들의 거대한 질량들 때문에, 이 중앙 창조의 질량 내용물은 대우주의 모든 일곱 부분들의 알려진 총 질량을 훨씬 초과합니다.

12:1.11 (129.9) The Paradise-Havona System, the eternal universe encircling the eternal Isle, constitutes the perfect and eternal nucleus of the master universe; all seven of the superuniverses and all regions of outer space revolve in established orbits around the gigantic central aggregation of the Paradise satellites and the Havona spheres. 천국-하보나 체계는, 영원한 섬을 도는 영원한 우주이며, 주(主)우주의 완전하고 영원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일곱 초우주들과 모든 외부 공간 지역들은 천국 위성들과 하보나 구체들의 거대한 중앙 집합체 둘레의 확정된 궤도를 그리며 회전합니다.

12:1.12 (129.10) The Seven Superuniverses are not primary physical organizations; nowhere do their boundaries divide a nebular family, neither do they cross a local universe, a prime creative unit. Each superuniverse is simply a geographic space clustering of approximately one seventh of the organized and partially inhabited post-Havona creation, and each is about equal in the number of local universes embraced and in the space encompassed. Nebadon, your local universe, is one of the newer creations in Orvonton, the seventh superuniverse. 일곱 초우주들은 1차 물리적 조직들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도 초우주들의 경계선들은 성운 족(族)을 분할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지역우주, 즉 시원적 창조 단위를 가로지르지 않습니다. 각 초우주는 단지 조직되어 부분적으로 거주하는 하보나-이후 창조의 약 7분의 1로 이루어진 지리적 공간 군(群)이며, 각 초우주는 포함된 지역우주의 수와 둘러싸인 공간이 거의 똑같습니다. 너희의 지역우주 네바돈은, 일곱 번째 초우주 오르본톤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들 중 하나입니다.

12:1.13 (129.11) The Grand Universe is the present organized and inhabited creation. It consist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with an aggregate evolutionary potential of around seven trillion inhabited planets, not to mention the eternal spheres of the central creation. But this tentative estimate takes no account of architectural administrative spheres, neither does it include the outlying groups of unorganized universes. The present ragged edge of the grand universe, its uneven and unfinished periphery, together with the tremendously unsettled condition of the whole astronomical plot, suggests to our star students that even the seven superuniverses are, as yet, uncompleted. As we move from within, from the divine center outward in any one direction, we do, eventually, come to the outer limits of the organized and inhabited creation; we come to the outer limits of the grand universe. And it is near this outer border, in a far-off corner of such a magnificent creation, that your local universe has its eventful existence. 대우주는 현재 조직되어 거주하는 창조계입니다. 그것은, 중앙 창조의 영원한 구체들은 물론 약 7조 개의 거주 행성들의 집합적 진화 잠재성을 지닌, 일곱 초우주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이 잠정적 추정치는 건축 경영 구체들을 고려하지 않았고, 미(未)조직된 우주들의 바깥 집단들도 포함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우주의 울퉁불퉁한 현 경계, 그것의 고르지 않으며 미(未)완결된 바깥둘레는, 천문학상 전체 구상의 엄청나게 불안정한 상태와 함께, 별을 연구하는 우리들에게, 일곱 초우주들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안에서, 신적 중심에서 밖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우리는 결국 조직된 거주 창조계의 외부 한계점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대우주의 외부 한계들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많은 실존을 지닌 너희 지역우주는 그러한 장엄한 창조계에서 먼 구석에 있는 이 외부 경계선 근처에 있습니다.

12:1.14 (129.12) The Outer Space Levels. Far out in space, at an enormous distance from the seven inhabited superuniverses, there are assembling vast and unbelievably stupendous circuits of force and materializing energies. Between the energy circuit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nd this gigantic outer belt of force activity, there is a space zone of comparative quiet, which varies in width but averages about four hundred thousand light-years. These space zones are free from star dust — cosmic fog. Our students of these phenomena are in doubt as to the exact status of the space-forces existing in this zone of relative quiet which encircles the seven superuniverses. But about one-half million light-years beyond the periphery of the present grand universe we observe the beginnings of a zone of an unbelievable energy action which increases in volume and intensity for over twenty-five million light-years. These tremendous wheels of energizing forces are situated in the first outer space level, a continuous belt of cosmic activity encircling the whole of the known, organized, and inhabited creation. 외부 공간 수준들. 공간에서 바깥 멀리, 일곱 거주 초우주들에서 먼 거리에, 거대하고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기세와 물질화되는 에너지 회로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일곱 초우주들의 에너지 회로들과 이 거대한 기세 활동의 외부 띠 사이에는, 비교적 조용한 공간 지대가 있으며, 너비는 다양하지만 평균 약 400,000광년입니다. 이 공간 지대들에는 별 먼지─질서우주 안개─가 없습니다. 이 현상들을 연구하는 우리 학생들은 일곱 초우주들을 회전하는, 상대적 고요한 이 지대에 존재하는 공간-기세들의 정확한 상태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우주 가장자리를 지나 약 500,000광년 거리에서 우리는 2,500만 광년 이상으로 부피와 농도가 증가하는 믿을 수 없는 에너지 활동의 지대가 시작하는 것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에너지화 하는 기세들의 이 거대한 회전 운동들은, 첫째 외부 공간 수준, 즉 알려지고 조직된 거주 창조계 전체를 회전하는 질서우주 활동의 연속적 띠에 위치해 있습니다.

12:1.15 (130.1) Still greater activities are taking place beyond these regions, for the Uversa physicists have detected early evidence of force manifestations more than fifty million light-years beyond the outermost ranges of the phenomena in the first outer space level. These activities undoubtedly presage the organization of the material creations of the second outer space level of the master universe. 더욱 거대한 활동들이 이 지역들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유버르사 물리학자들이 첫째 외부 공간 수준에 있는 현상의 가장 바깥의 범위들을 5,000만 광년 이상 벗어난 곳에서 기세가 나타난 초기 증거를 탐지했기 때문입니다. 이 활동들은 틀림없이 주(主)우주의 제2 외부 공간 수준의 물질적 창조계의 조직의 전조가 됩니다.

12:1.16 (130.2) The central universe is the creation of eternity; the seven superuniverses are the creations of time; the four outer space levels are undoubtedly destined to eventuate-evolve the ultimacy of creation. And there are those who maintain that the Infinite can never attain full expression short of infinity; and therefore do they postulate an additional and unrevealed creation beyond the fourth and outermost space level, a possible ever-expanding, never-ending universe of infinity. In theory we do not know how to limit either the infinity of the Creator or the potential infinity of creation, but as it exists and is administered, we regard the master universe as having limitations, as being definitely delimited and bounded on its outer margins by open space. 중앙우주는 영원의 창조계입니다. 일곱 초우주들은 시간의 창조계들입니다. 4개의 외부 공간 수준들은 틀림없이 창조계의 궁극까지 결국 진화할 운명입니다. 그리고 무한자는 무한성이 부족한 충만한 표현에 도달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넷째 가장 바깥의 공간 수준, 즉 계속 확대가 가능하고, 결코 끝이 없는 무한성의 우주 너머에, 부가적이며 밝혀지지 않은 창조를 가정합니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창조자의 무한성이나 창조의 잠재적 무한성을 어떻게 제한하는지 모르지만, 주(主)우주가 존재하며 경영되고 있듯이, 우리는, 열린 공간에 의해 주(主)우주의 바깥 테두리에 분명히 정해진 범위와 한계가 있는 것처럼, 주(主)우주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2. The Domains of the Unqualified Absolute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권역

12:2.1 (130.3) When Urantia astronomers peer through their increasingly powerful telescopes into the mysterious stretches of outer space and there behold the amazing evolution of almost countless physical universes, they should realize that they are gazing upon the mighty outworking of the unsearchable plans of the Architects of the Master Universe. True, we do possess evidences which are suggestive of the presence of certain Paradise personality influences here and there throughout the vast energy manifestations now characteristic of these outer regions, but from the larger viewpoint the space regions extending beyond the outer border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re generally recognized as constituting the domains of the Unqualified Absolute. 지구(유란시아)의 천문학자들이 점점 더 강력한 망원경으로 신비하게 넓게 펼쳐진 외부 공간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거의 헤아릴 수 없는 물리적 우주들의 놀라운 진화를 바라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주(主)우주 고안건축가들의 불가사의한 계획들의 대단한 성취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지금 이 외부 지역들의 광대한 에너지 특성이 두루 여기저기에 나타난 특정 천국 고유성 영향들의 현존을 암시하는 증거들을 갖고 있지만, 더 큰 관점에서 본다면 일곱 초우주들의 외부 경계들 너머로 확장하는 공간 지역들은 일반적으로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권역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2:2.2 (130.4) Although the unaided human eye can see only two or three nebulae outside the borders of the superuniverse of Orvonton, your telescopes literally reveal millions upon millions of these physical universes in process of formation. Most of the starry realms visually exposed to the search of your present-day telescopes are in Orvonton, but with photographic technique the larger telescopes penetrate far beyond the borders of the grand universe into the domains of outer space, where untold universes are in process of organization. And there are yet other millions of universes beyond the range of your present instruments. 인간의 육안만으로 오르본톤 초우주의 경계들 밖에 두 세 성운(星雲)밖에 볼 수 없지만, 너희의 망원경은 형성 과정에 있는 수백만의 이 물리적 우주들을 글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너희의 현대 망원경으로 탐색해서 눈에 드러난 대부분의 별 영역들은 오르본톤 안에 있지만, 사진 기법을 이용한 더 큰 망원경은 대우주의 경계들을 훨씬 넘어서 외부 공간의 권역들을 간파하며, 그곳에는 언급되지 않은 우주들이 조직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너희가 가진 현재 도구들의 범위를 초월한 수백만의 다른 우주들이 또 있다.

12:2.3 (130.5) In the not-distant future, new telescopes will reveal to the wondering gaze of Urantian astronomers no less than 375 million new galaxies in the remote stretches of outer space. At the same time these more powerful telescopes will disclose that many island universes formerly believed to be in outer space are really a part of the galactic system of Orvonton. The seven superuniverses are still growing; the periphery of each is gradually expanding; new nebulae are constantly being stabilized and organized; and some of the nebulae which Urantian astronomers regard as extragalactic are actually on the fringe of Orvonton and are traveling along with us. 멀지 않은 장래에, 새로운 망원경들이 멀리 넓게 펼쳐진 외부 공간에서 적어도 3억 7,500만 개 이상의 새로운 은하계들을 지구(유란시아) 천문학자들의 경탄하는 눈앞에 드러낼 것입니다. 동시에, 더욱 강력한 이 망원경들은 전에 외부 공간에 있는 것으로 믿었던 많은 섬 우주들이 실제로는 오르본톤에 속한 은하 체계의 부분임을 드러낼 것입니다. 일곱 초우주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각 초우주의 가장자리는 점차 확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성운들이 끊임없이 안정되면서 조직되고 있습니다. 지구(유란시아)의 천문학자들이 은하계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몇 몇 성운들은 실제로 오르본톤의 가장자리에 있고 우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12:2.4 (131.1) The Uversa star students observe that the grand universe is surrounded by the ancestors of a series of starry and planetary clusters which completely encircle the present inhabited creation as concentric rings of outer universes upon universes. The physicists of Uversa calculate that the energy and matter of these outer and uncharted regions already equal many times the total material mass and energy charge embraced in all seven superuniverses. We are informed that the metamorphosis of cosmic force in these outer space levels is a function of the Paradise force organizers. We also know that these forces are ancestral to those physical energies which at present activate the grand universe. The Orvonton power directors, howev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se far-distant realms, neither are the energy movements therein discernibly connected with the power circuits of the organized and inhabited creations. 유버르사 별 연구생들은 대우주가 일련의 별들과 행성 군(群)들의 조상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관찰하는데, 이것들은 우주들에 있는 외부 우주들로 구성된 동심고리들로써 현재 거주 창조계를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유버르사의 물리학자들은 이 외부에 있는 미지의 지역들의 에너지와 물질이, 이미 모든 일곱 초우주들을 포함하는 총 물질의 질량과 에너지 전하량(電荷量)의 여러 배에 달(達)한다고 계산합니다. 우리는 이 외부 공간 수준들에 있는 질서우주 기세의 변형은 이 천국 기세 조직자들의 기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기세들이 대우주를 지금 활성화하는 그 물리적 에너지들의 조상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본톤 권능(힘 동력) 지도자들은 멀리 떨어진 이 영역들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있는 에너지 운동들은 조직된 거주 창조계의 권능 회로들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12:2.5 (131.2) We know very little of the significance of these tremendous phenomena of outer space. A greater creation of the future is in process of formation. We can observe its immensity, we can discern its extent and sense its majestic dimensions, but otherwise we know little more about these realms than do the astronomers of Urantia. As far as we know, no material beings on the order of humans, no angels or other spirit creatures, exist in this outer ring of nebulae, suns, and planets. This distant domain is beyond the jurisdiction and administration of the superuniverse governments. 우리는 외부 공간의 이 거대한 현상의 중요성을 거의 모릅니다. 더욱 위대한 미래의 창조가 형성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광대함을 관찰할 수 있고, 그 정도를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장엄한 규모를 느낄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우리는 지구(유란시아)의 천문학자들이 아는 것보다 이 영역들에 대해 더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인간 계층의 물질적 존재들이나, 천사들이나 다른 영 창조물들은 이 외부 고리의 성운과 태양들과 행성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이 권역은 초우주 정부의 관할과 경영 너머에 있습니다.

12:2.6 (131.3) Throughout Orvonton it is believed that a new type of creation is in process, an order of universes destined to become the scene of the future activities of the assembling Corps of the Finality; and if our conjectures are correct, then the endless future may hold for all of you the same enthralling spectacles that the endless past has held for your seniors and predecessors. 새로운 유형의 창조, 집결하는 최종자 무리단의 미래 활동의 무대가 되기로 정해진 우주들의 계층이 형성 중에 있다고 오르본톤에 널리 믿어집니다. 우리 추측이 맞는다면, 끝없는 과거가 너희 연장자들과 전임자들을 위해 유지해왔던 동일하게 매혹적인 광경을, 끝없는 미래가 너희 모두를 위해 유지할 것입니다.

3. Universal Gravity 우주의 중력

12:3.1 (131.4) All forms of force-energy — material, mindal, or spiritual — are alike subject to those grasps, those universal presences, which we call gravity. Personality also is responsive to gravity — to the Father’s exclusive circuit; but though this circuit is exclusive to the Father, he is not excluded from the other circuits; the Universal Father is infinite and acts over all four absolute-gravity circuits in the master universe: 모든 형태의 기세-에너지 – 물질적, 마음적, 또는 영적 -는 우리가 중력이라고 부르는 그 끌어당기는 우주의 현존들에 마찬가지로 종속됩니다. 고유성 역시 중력에 대해 ─ 아버지의 독점적 회로에 대해─응답합니다. 그러나 이 회로가 아버지에게 독점적이어도, 그는 다른 회로들로부터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주 아버지는 무한하고 주(主)우주에서 네 절대-중력 회로들 모두에 걸쳐 활동합니다.

12:3.2 (131.5) 1. The Personality Gravity of the Universal Father.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 중력.

12:3.3 (131.6) 2. The Spirit Gravity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영 중력.

12:3.4 (131.7) 3. The Mind Gravity of the Conjoint Actor. 공동 행위자의 마음 중력.

12:3.5 (131.8) 4. The Cosmic Gravity of the Isle of Paradise. 천국 섬의 질서우주 중력.

12:3.6 (131.9) These four circuits are not related to the nether Paradise force center; they are neither force, energy, nor power circuits. They are absolute presence circuits and like God are independent of time and space. 이 네 회로들은 하부 천국 기세 중심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세, 에너지 그리고 권능(힘, 동력) 회로들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절대 현존 회로들이며 하나님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해 독립적입니다.

12:3.7 (132.1) In this connection it is interesting to record certain observations made on Uversa during recent millenniums by the corps of gravity researchers. This expert group of workers has arrived at the following conclusions regarding the different gravity systems of the master universe: 이와 관련하여, 중력 연구단이 최근 수천 년 동안 유버르사에서 얻은 분명한 관찰결과의 기록은 흥미롭습니다. 이 전문 작업 집단은 주(主)우주의 다른 중력 체계들에 관하여 다음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12:3.8 (132.2) 1. Physical Gravity. Having formulated an estimate of the summation of the entire physical-gravity capacity of the grand universe, they have laboriously effected a comparison of this finding with the estimated total of absolute gravity presence now operative. These calculations indicate that the total gravity action on the grand universe is a very small part of the estimated gravity pull of Paradise, computed on the basis of the gravity response of basic physical units of universe matter. These investigators reach the amazing conclusion that the central universe and the surrounding seven superuniverses are at the present time making use of only about five per cent of the active functioning of the Paradise absolute-gravity grasp. In other words: At the present moment about ninety-five per cent of the active cosmic-gravity action of the Isle of Paradise, computed on this totality theory, is engaged in controlling material systems beyond the borders of the present organized universes. These calculations all refer to absolute gravity; linear gravity is an interactive phenomenon which can be computed only by knowing the actual Paradise gravity. 물리적 중력. 대우주의 전체 물리적-중력 용량의 합계를 공식적으로 추산하여, 그들은 현재 작동하는 절대 중력 현존의 총 추정치와 이 결과를 애써서 비교했습니다. 이 계산의 결과, 대우주에서 총 중력 활동은, 우주 물질의 기초 물리적 단위들의 중력 응답에 기초하여 계산된, 천국의 추정된 중력이 당기는 힘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임을 가리킵니다. 이 연구원들은, 중앙우주와 주변의 일곱 초우주들이 현재 시점에서 천국 절대-중력이 장악한 활동 기능 중 약 5%만 사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총체 이론으로 계산해서, 현재 천국 섬의 활동적인 질서우주-중력 활동의 약 95%는, 현재 조직된 우주들의 경계 너머에 있는 물질적 체계들을 조정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계산의 결과들은 모두 절대 중력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직선 중력은 오직 실제의 천국 중력을 알아야만 계산될 수 있는 상호작용적 현상입니다.

12:3.9 (132.3) 2. Spiritual Gravity. By the same technique of comparative estimation and calculation these researchers have explored the present reaction capacity of spirit gravity and, with the co-operation of Solitary Messengers and other spirit personalities, have arrived at the summation of the active spirit gravity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And it is most instructive to note that they find about the same value for the actual and functional presence of spirit gravity in the grand universe that they postulate for the present total of active spirit gravity. In other words: At the present time practically the entire spirit gravity of the Eternal Son, computed on this theory of totality, is observable as functioning in the grand universe. If these findings are dependable, we may conclude that the universes now evolving in outer space are at the present time wholly nonspiritual. And if this is true, it would satisfactorily explain why spirit-endowed beings are in possession of little or no information about these vast energy manifestations aside from knowing the fact of their physical existence. 영적 중력. 이 연구가들은 동일한 비교 추정(推定)과 계산 기법으로 영 중력의 현재 반응(반작용) 용량을 탐구해 왔으며, 단독 사자들 및 다른 영 고유성들의 협조로,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실제적인 영 중력의 합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영 중력의 현재 총합이라고 그들이 가정한 것에 해당하는, 대우주에 있는 영 중력의 실제적 및 기능적 현존을 위해 거의 동일한 값을 그들이 발견하였다는 정보는 매우 교훈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총체론(總體論)으로 계산된, 영원 아들의 현재 실천적인 전체 영 중력은 대우주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관찰될 수 있습니다. 이 결과들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외부 공간에서 진화하는 우주들이 현재 전적으로 비(非)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부여된 존재들이, 그들의 물리적 실존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제외하고, 이 광대한 에너지가 나타나는 것에 관해 거의 또는 전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이유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것입니다.

12:3.10 (132.4) 3. Mind Gravity. By these same principles of comparative computation these experts have attacked the problem of mind-gravity presence and response. The mind unit of estimation was arrived at by averaging three material and three spiritual types of mentality, although the type of mind found in the power directors and their associates proved to be a disturbing factor in the effort to arrive at a basic unit for mind-gravity estimation. There was little to impede the estimation of the present capacity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for mind-gravity function in accordance with this theory of totality. Although the findings in this instance are not so conclusive as in the estimates of physical and spirit gravity, they are, comparatively considered, very instructive, even intriguing. These investigators deduce that about eighty-five per cent of the mind-gravity response to the intellectual drawing of the Conjoint Actor takes origin in the existing grand universe. This would suggest the possibility that mind activities are involved in connection with the observable physical activities now in progress throughout the realms of outer space. While this estimate is probably far from accurate, it accords, in principle, with our belief that intelligent force organizers are at present directing universe evolution in the space levels beyond the present outer limits of the grand universe. Whatever the nature of this postulated intelligence, it is apparently not spirit-gravity responsive. 마음 중력. 상대적 계산의 이 동일한 원칙들로 이 전문가들은 마음-중력 현존과 응답(반작용)의 문제에 도전해 왔습니다. 비록 권능(힘 동력) 지도자들과 그들의 동료들 안에서 발견된 마음 유형이, 마음-중력 추정의 기초 단위에 도달하려는 노력에 방해 요소임이 증명되었지만, 정신력의 세 가지 물질 및 세 가지 영적 유형들을 평균화하여 추정하는 마음 단위에 도달했습니다. 이 총체론(總體論)에 따라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현재 마음-중력 기능의 용량에 대한 추정에 방해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경우의 결과들이 물질 및 영 중력의 추정치의 경우처럼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고려해서, 그것들은 매우 교훈적이고, 심지어는 흥미롭습니다. 이 연구자들은 공동 행위자의 지능적 끌어당김에 대한 마음-중력 응답(반작용)의 약 85%가 존재하는 대우주에서 기원된다고 추론합니다. 이것은, 마음 활동들이 외부 공간의 영역들에 두루 지금 진보하고 있는 관찰 가능한 물리적 활동들과 관련하여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암시할 것입니다. 이 추정이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아도, 원칙적으로, 대우주의 현 외부 한계선을 넘어서는 우주 수준에서 지능적 기세 조직자들이 현재 우주 진화를 지도하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과 일치합니다. 가정된 지능의 본질이 어떻든지, 그것은 분명히 영-중력 응답이 아닙니다.

12:3.11 (133.1) But all these computations are at best estimates based on assumed laws. We think they are fairly reliable. Even if a few spirit beings were located in outer space, their collective presence would not markedly influence calculations involving such enormous measurements. 그러나 이 모든 계산의 결과들은 기껏해야 가정된 법칙들을 토대로 추정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상당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영 존재들이 외부 공간에 있다고 해도, 그들의 집합적 현존은 그런 거대한 측정치들을 포함하는 계산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12:3.12 (133.2) Personality Gravity is noncomputable. We recognize the circuit, but we cannot measure either qualitative or quantitative realities responsive thereto. 고유성 중력은 계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회로를 인식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는 질적 또는 양적 실체들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4. Space and Motion 공간과 운동

12:4.1 (133.3) All units of cosmic energy are in primary revolution, are engaged in the execution of their mission, while swinging around the universal orbit. The universes of space and their component systems and worlds are all revolving spheres, moving along the endless circuits of the master universe space levels. Absolutely nothing is stationary in all the master universe except the very center of Havona, the eternal Isle of Paradise, the center of gravity. 질서우주의 모든 에너지 단위들은 1차 회전을 하면서, 그들의 사명 수행에 관여하는 동시에, 우주 궤도주위를 회전합니다. 공간의 우주들과 그 구성 체계들 및 세계들은 모두 회전하는 구체들이며, 주(主)우주 공간 수준의 끝없는 회로들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보나의 정중앙, 중력의 중심, 영원한 천국 섬을 제외하고 주(主)우주 전체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12:4.2 (133.4) The Unqualified Absolute is functionally limited to space, but we are not so sure about the relation of this Absolute to motion. Is motion inherent therein? We do not know. We know that motion is not inherent in space; even the motions of space are not innate. But we are not so sure about the relation of the Unqualified to motion. Who, or what, is really responsible for the gigantic activities of force-energy transmutations now in progress out beyond the borders of the present seven superuniverses? Concerning the origin of motion we have the following opinions: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는 기능적으로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운동에 대한 이 절대자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확신하지 못합니다. 운동이 그 점(그 관계)에서 본래적인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운동이 공간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공간의 운동들도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운동에 대한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확신하지 않습니다. 현재 일곱 초우주들의 경계 너머에서 지금 진보하는 기세-에너지 변형의 거대한 활동들을 실제로 누가 또는 무엇이 책임지고 있는가? 운동의 기원에 관해 우리는 다음의 견해들을 갖고 있습니다.

12:4.3 (133.5) 1. We think the Conjoint Actor initiates motion in space. 우리는 공동 행위자가 공간에서 운동을 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12:4.4 (133.6) 2. If the Conjoint Actor produces the motions of space, we cannot prove it. 공동 행위자가 공간의 운동들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12:4.5 (133.7) 3. The Universal Absolute does not originate initial motion but does equalize and control all of the tensions originated by motion. 우주 절대자가 개시 운동의 근원은 아니지만, 운동으로 발생한 모든 긴장들을 균등하게 조정합니다.

12:4.6 (133.8) In outer space the force organizers are apparently responsible for the production of the gigantic universe wheels which are now in process of stellar evolution, but their ability so to function must have been made possible by some modification of the spac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외부 공간에서 기세 조직자들은 현재 별의 진화 과정에 있는 거대한 우주 선회(旋回소용돌이)들의 생성을 명백히 책임지지만, 그렇게 기능하는 그들의 능력은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공간 현존의 어떤 변형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12:4.7 (133.9) Space is, from the human viewpoint, nothing — negative; it exists only as related to something positive and nonspatial. Space is, however, real. It contains and conditions motion. It even moves. Space motions may be roughly classified as follows: 공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무(無아무 것도 아님) -부정적─입니다; 그것은 긍정적이고 비(非)공간적인 어떤 것과 관련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공간은 실재합니다. 그것은 운동을 담고 조정합니다. 그것(공간)도 움직입니다. 공간 운동들은 대략 다음처럼 분류해도 됩니다.

12:4.8 (133.10) 1. Primary motion — space respiration, the motion of space itself. 1차 운동 – 공간 호흡, 공간 자체의 운동.

12:4.9 (133.11) 2. Secondary motion — the alternate directional swings of the successive space levels. 2차 운동 – 연속적 공간 수준들이 교대로 방향이 바뀌는 회전.

12:4.10 (133.12) 3. Relative motions — relative in the sense that they are not evaluated with Paradise as a base point. Primary and secondary motions are absolute, motion in relation to unmoving Paradise. 상대적 운동들 – 그것들은 천국을 기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상대적입니다. 1차 및 2차 운동들은 절대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천국과 관련된 운동입니다.

12:4.11 (133.13) 4. Compensatory or correlating movement designed to co-ordinate all other motions. 다른 모든 운동들을 통합-협동하도록 고안된 보상 또는 관련된 움직임.

12:4.12 (134.1) The present relationship of your sun and its associated planets, while disclosing many relative and absolute motions in space, tends to convey the impression to astronomic observers that you are comparatively stationary in space, and that the surrounding starry clusters and streams are engaged in outward flight at ever-increasing velocities as your calculations proceed outward in space. But such is not the case. You fail to recognize the present outward and uniform expansion of the physical creations of all pervaded space. Your own local creation (Nebadon) participates in this movement of universal outward expansion. The entire seven superuniverses participate in the two-billion-year cycles of space respiration along with the outer regions of the master universe. 너희 태양과 관련된 행성들의 현재 관계는, 공간에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많은 운동들을 나타내는 동시에, 천문학 관찰자들에게, 너희가 상대적으로 공간에 고정되어 있으며, 공간 밖으로 너희 계산이 진행되면서, 주변의 별 집단과 흐름들이 계속 증가하는 속도로 밖으로 비행(飛行)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모든 침투(浸透) 공간의 물리적 창조계가 현재 밖으로 일정하게 팽창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희 자신의 지역 우주(네바돈)는 밖으로 우주가 확장되는 이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 일곱 초우주들 전체는 주(主)우주의 외부 지역들과 함께 20억 년 주기의 공간 호흡에 참여하고 있다.

12:4.13 (134.2) When the universes expand and contract, the material masses in pervaded space alternately move against and with the pull of Paradise gravity. The work that is done in moving the material energy mass of creation is space work but not power-energy work. 우주들이 확장하고 축소할 때, 침투 공간에 있는 물질의 질량들은 천국 중력이 당기는 힘에 교대로, 맞서고 함께 끌려가면서 움직입니다. 창조계의 물질적 에너지 질량을 움직이는 데 행해진 그 작업은 공간 작업이지 권능(힘 동력)-에너지 작업은 아닙니다.

12:4.14 (134.3) Although your spectroscopic estimations of astronomic velocities are fairly reliable when applied to the starry realms belonging to your superuniverse and its associate superuniverses, such reckonings with reference to the realms of outer space are wholly unreliable. Spectral lines are displaced from the normal towards the violet by an approaching star; likewise these lines are displaced towards the red by a receding star. Many influences interpose to make it appear that the recessional velocity of the external universes increases at the rate of more than one hundred miles a second for every million light-years increase in distance. By this method of reckoning, subsequent to the perfection of more powerful telescopes, it will appear that these far-distant systems are in flight from this part of the universe at the unbelievable rate of more than thirty thousand miles a second. But this apparent speed of recession is not real; it results from numerous factors of error embracing angles of observation and other time-space distortions. 천문학 속도들에 대한 너희 분광기 추정치들이 너희 초우주와 관련된 초우주들에 속하는 별의 영역에 적용될 때 상당히 신뢰할 만해도, 외부 공간의 영역들과 관련된 그러한 계산은 전혀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다. 스펙트럼의 광선들은 다가오는 별에 의해 표준에서 보라색 방향으로 옮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광선들은 후퇴하는 별에 의해 빨간색 방향으로 옮겨집니다. 많은 영향들이 중간에 껴들어, 외부 우주들의 후퇴 속도가, 매 1백만 광년 거리가 증가할 때마다, 초당 100마일(160 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계산 방법으로 후에 더 강력한 망원경들이 완성되어, 멀리 있는 이 체계들이, 초당 3만 마일(48280 킬러미터) 이상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우주의 이 부분에서 비행(飛行)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후퇴 속도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찰 각도와 다른 시간-공간의 왜곡을 포함하는 수많은 잘못된 요소들 때문에 생깁니다.

12:4.15 (134.4) But the greatest of all such distortions arises because the vast universes, of outer space, in the realms next to the domain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seem to be revolving in a direction opposite to that of the grand universe. That is, these myriads of nebulae and their accompanying suns and spheres are at the present time revolving clockwise about the central creation. The seven superuniverses revolve about Paradise in a counterclockwise direction. It appears that the second outer universe of galaxies, like the seven superuniverses, revolves counterclockwise about Paradise. And the astronomic observers of Uversa think they detect evidence of revolutionary movements in a third outer belt of far-distant space which are beginning to exhibit directional tendencies of a clockwise nature. 그러나 그런 모든 것 중 가장 큰 왜곡은 일곱 초우주들의 영역 다음의 영역에서, 외부 공간의 광대한 우주들이 대우주의 그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발생됩니다. 즉, 이 무수한 성운들과 거기에 달려있는 태양들과 구체들은, 현재 시점에서 중앙 창조계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일곱 초우주들은 천국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합니다. 일곱 초우주들과 마찬가지로, 은하계들 중 2차 외부 우주도 천국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유버르사의 천문 관찰자들은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제3 외부 지대에서 회전 운동들의 증거를 자신들이 탐지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대는 시계 방향 본성의 방향성들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2:4.16 (134.5) It is probable that these alternate directions of successive space processions of the universes have something to do with the intramaster universe gravity technique of the Universal Absolute, which consists of a co-ordination of forces and an equalization of space tensions. Motion as well as space is a complement or equilibrant of gravity. 우주들의 이 연속적 공간 진행의 교대(交代) 방향들은, 우주 절대자가 가진 주(主)우주 내부 사이에 있는 우주 중력 기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이 기법은 기세들의 통합-협동과 공간 긴장들의 평형으로 구성됩니다. 운동도, 공간도 마찬가지로, 중력을 보충하는 평형력입니다.

5. Space and Time 공간과 시간

12:5.1 (134.6) Like space, time is a bestowal of Paradise, but not in the same sense, only indirectly. Time comes by virtue of motion and because mind is inherently aware of sequentiality. From a practical viewpoint, motion is essential to time, but there is no universal time unit based on motion except in so far as the Paradise-Havona standard day is arbitrarily so recognized. The totality of space respiration destroys its local value as a time source. 공간처럼, 시간은 천국의 증여지만, 같은 의미가 아니라 다만 간접적으로 그렇습니다. 시간은 운동에 의해 발생되며 마음은 본래부터 순차성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실질적 관점에서, 운동은 시간에 필수적이지만, 천국-하보나 표준일이 임의로 그렇게 인식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운동에 기초한 우주 시간 단위는 없습니다. 공간 호흡의 전체성은 시간 근원으로서 지역적 가치를 파괴합니다.

12:5.2 (135.1) Space is not infinite, even though it takes origin from Paradise; not absolute, for it is pervaded by the Unqualified Absolute. We do not know the absolute limits of space, but we do know that the absolute of time is eternity. 공간은 천국에 기원을 두지만, 무한하지 않으며, 절대적이지 않은데, 공간은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가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간의 절대적 한계를 모르지만, 시간의 절대가 영원임을 알고 있습니다.

12:5.3 (135.2) Time and space are inseparable only in the time-space creations, the seven superuniverses. Nontemporal space (space without time) theoretically exists, but the only truly nontemporal place is Paradise area. Nonspatial time (time without space) exists in mind of the Paradise level of function. 시간과 공간은 단지 시간-공간 창조계, 일곱 초우주들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비(非)시간적 공간(시간이 없는 공간)은 이론적으로 존재하지만, 참으로 비(非)시간적 장소는 천국 지역뿐입니다. 비(非)공간적 시간(공간이 없는 시간)은 천국 수준에서 기능하는 마음 안에 존재합니다.

12:5.4 (135.3) The relatively motionless midspace zones impinging on Paradise and separating pervaded from unpervaded space are the transition zones from time to eternity, hence the necessity of Paradise pilgrims becoming unconscious during this transit when it is to culminate in Paradise citizenship. Time-conscious visitors can go to Paradise without thus sleeping, but they remain creatures of time. 천국에 맞닿아, 비(非)침투(浸透) 공간에서 침투(浸透) 공간을 구분하는 비교적 움직이지 않는 중간공간 지대들은 시간에서 영원에 이르는 과도기 지대들이며, 따라서 천국 순례자들은 이 과도기(이동) 중에 무의식이 될 필요성이 생기며, 과도기(이동)는 천국 시민권을 얻을 때 절정에 이릅니다. 시간-의식 방문자들은 그렇게 잠들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지만, 그들은 시간의 창조물로 남아 있습니다.

12:5.5 (135.4) Relationships to time do not exist without motion in space, but consciousness of time does. Sequentiality can consciousize time even in the absence of motion. Man’s mind is less time-bound than space-bound because of the inherent nature of mind. Even during the days of the earth life in the flesh, though man’s mind is rigidly space-bound, the creative human imagination is comparatively time free. But time itself is not genetically a quality of mind. 시간에 대한 관계는 공간에서 운동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시간 의식은 존재합니다. 순차성은 운동이 없어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의 선천적인 본성 때문에, 공간-경계적이라기보다 덜 시간-경계적입니다. 심지어 육신의 지상 생애 동안, 사람의 마음은 엄밀히 공간-경계적이지만,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은 비교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유전학적으로 마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12:5.6 (135.5) There are three different levels of time cognizance: 세 가지 다른 수준의 시간 인식이 있습니다.

12:5.7 (135.6) 1. Mind-perceived time — consciousness of sequence, motion, and a sense of duration. 마음이 감지하는 시간 – 순차, 운동 의식과 지속 기간의 감각.

12:5.8 (135.7) 2. Spirit-perceived time — insight into motion Godward and the awareness of the motion of ascent to levels of increasing divinity. 영이 감지하는 시간 – 하나님을 향한 운동 방향의 통찰력과 증가하는 신성의 수준으로 상승하는 운동의 자각.

12:5.9 (135.8) 3. Personality creates a unique time sense out of insight into Reality plus a consciousness of presence and an awareness of duration. 고유성은 실체를 향한 통찰력에서 독특한 시간 감각과 그것에 덧붙여 현존 의식과 지속 기간의 자각을 만들어냅니다.

12:5.10 (135.9) Unspiritual animals know only the past and live in the present. Spirit-indwelt man has powers of prevision (insight); he may visualize the future. Only forward-looking and progressive attitudes are personally real. Static ethics and traditional morality are just slightly superanimal. Nor is stoicism a high order of self-realization. Ethics and morals become truly human when they are dynamic and progressive, alive with universe reality. 비(非)영적 동물들은 과거만 알고 현재에서 살아갑니다. 영-내주(內住)의 사람은 선견(통찰력)의 권능을 소유합니다. 그는 미래를 생생하게 마음에 그릴수도 있습니다. 앞을 보는 진보적 태도들만이 개인적으로는 실제적입니다. 정적(靜的) 윤리와 전통적 도덕성은 약간만 초(超)동물적입니다. 금욕주의(스토아철학)도 높은 계층의 자아-실현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그것들이 역동적이고 진보적이며, 우주 실체와 함께 살아 있을 때, 참으로 인간답게 됩니다.

12:5.11 (135.10) The human personality is not merely a concomitant of time-and-space events; the human personality can also act as the cosmic cause of such events. 인간의 고유성은 단순히 시간-과-공간 사건들의 부수물이 아니며; 인간의 고유성은 그런 사건들의 질서우주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6. Universal Overcontrol 우주의 전반적-조정

12:6.1 (135.11) The universe is nonstatic. Stability is not the result of inertia but rather the product of balanced energies, co-operative minds, co-ordinated morontias, spirit overcontrol, and personality unification. Stability is wholly and always proportional to divinity. 우주는 정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정성은 불(不)활동(活動)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균형 잡힌 에너지들, 협력적 마음들, 통합-협동하는 모론시아들, 영 전반적-조정, 그리고 고유성 통일의 결과입니다. 안정성은 전적으로 항상 신성에 비례합니다.

12:6.2 (135.12) In the physical control of the master universe the Universal Father exercises priority and primacy through the Isle of Paradise; God is absolute in the spiritual administration of the cosmos in the person of the Eternal Son. Concerning the domains of mind, the Father and the Son function co-ordinately in the Conjoint Actor. 주(主)우주의 물리적 조정에 우주 아버지는 천국 섬을 통해 우선권과 수위성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아들의 개인 안에 있는 질서우주의 영적 경영에 있어서 절대적이십니다. 마음의 분야에 관해, 아버지와 아들은 공동 행위자 안에서 통합-협동적으로 기능하십니다.

12:6.3 (136.1)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ssists in the maintenance of the equilibrium and co-ordination of the combined physical and spiritual energies and organizations by the absoluteness of his grasp of the cosmic mind and by the exercise of his inherent and universal physical- and spiritual-gravity complements. Whenever and wherever there occurs a liaison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such a mind phenomenon is an act of the Infinite Spirit. Mind alone can interassociate the physical forces and energies of the material level with the spiritual powers and beings of the spirit level.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질서우주 마음의 절대적 장악과 선천적이며 우주의 물리적- 및 영적-중력 보완의 실행으로, 결합된 물리적 및 영적 에너지들과 조직들의 평형과 통합-협동의 유지를 돕습니다. 그리고 물질적 현상과 영적 현상 사이의 연결, 즉 마음 현상이 일어나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무한 영의 활동입니다. 마음 홀로 물질 수준의 물리적 기세와 에너지를 영 수준의 영적 권능(동력 힘)들 및 존재들과 상호-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12:6.4 (136.2) In all your contemplation of universal phenomena, make certain that you take into consideration the interrelation of physical, intellectual, and spiritual energies, and that due allowance is made for the unexpected phenomena attendant upon their unification by personality and for the unpredictable phenomena resulting from the actions and reactions of experiential Deity and the Absolutes. 우주적 현상에 대한 모든 심사숙고(深思熟考)에서, 너희는 물리적 지적 그리고 영적 에너지들의 상호관계를 반드시 고려하고, 고유성으로 그것들을 통일하면서 수반되는 예기치 못한 현상들과, 체험적 신(神)과 절대자들의 활동 및 반응의 결과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현상들을 반드시 참작해야 합니다.

12:6.5 (136.3) The universe is highly predictable only in the quantitative or gravity-measurement sense; even the primal physical forces are not responsive to linear gravity, nor are the higher mind meanings and true spirit values of ultimate universe realities. Qualitatively, the universe is not highly predictable as regards new associations of forces, either physical, mindal, or spiritual, although many such combinations of energies or forces become partially predictable when subjected to critical observation. When matter, mind, and spirit are unified by creature personality, we are unable fully to predict the decisions of such a freewill being. 우주는 양적 즉 중력-측정 의미만 대단히 예측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1차 물리적 기세는 직선 중력에 응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궁극 우주 실체들의 상급 마음 의미들과 참된 영 가치들도 역시 그렇지(직선 중력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우주는, 그러한 많은 에너지들 또는 기세들의 결합을 정밀히 관찰하면 부분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물리적, 마음적, 또는 영적 기세의 새로운 연합에 관해서는 아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물질, 마음 그리고 영을 창조물 고유성이 통일하면, 우리는 그런 자유의지 존재의 결정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12:6.6 (136.4) All phases of primordial force, nascent spirit, and other nonpersonal ultimates appear to react in accordance with certain relatively stable but unknown laws and are characterized by a latitude of performance and an elasticity of response which are often disconcerting when encountered in the phenomena of a circumscribed and isolated situation. What is the explanation of this unpredictable freedom of reaction disclosed by these emerging universe actualities? These unknown, unfathomable unpredictables — whether pertaining to the behavior of a primordial unit of force, the reaction of an unidentified level of mind, or the phenomenon of a vast preuniverse in the making in the domains of outer space — probably disclose the activities of the Ultimate and the presence-performances of the Absolutes, which antedate the function of all universe Creators. 원초 기세, 발생 초기의 영, 그리고 다른 비(非)고유적 궁극 존재들의 모든 위상들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법칙들에 따라 반응하는 듯하며, 제한되고 고립된 상황의 현상으로 종종 혼란에 처할 때, 넓은 범위의 실행과 탄력성으로 응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창발하는 우주 실제성으로 드러난 예측할 수 없는 이 반응의 자유를 무엇이 설명하는가? 미지(未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이것들은 – 원초적 기세 단위의 행태, 미(未)확인된 마음 수준의 반응, 또는 외부 공간의 영역에서 생성되는 광대한 우주-이전(以前)의 현상에 속하든지 – 아마 모든 우주 창조자들의 기능보다 앞선, 궁극자의 활동들과 절대자들의 현존-행위들을 나타낼 것입니다.

12:6.7 (136.5) We do not really know, but we surmise that such amazing versatility and such profound co-ordination signify the presence and performance of the Absolutes, and that such diversity of response in the face of apparently uniform causation discloses the reaction of the Absolutes, not only to the immediate and situational causation, but also to all other related causations throughout the entire master universe. 우리는 정말 모르지만, 그렇게 놀라운 융통성과 그렇게 심오한 통합-협동은 그 절대자들의 현존 및 행위를 의미하며, 외관상 획일적인 원인에 대해 그런 다양한 응답은, 즉각적이며 상황적 원인에 대해서 뿐 아니라 전체 주(主)우주에 걸쳐 다른 모든 관련 원인에 대한 절대자들의 반응을 나타낸다고, 우리는 추측합니다.

12:6.8 (136.6) Individuals have their guardians of destiny; planets, systems, constellations, universes, and superuniverses each have their respective rulers who labor for the good of their domains. Havona and even the grand universe are watched over by those intrusted with such high responsibilities. But who fosters and cares for the fundamental needs of the master universe as a whole, from Paradise to the fourth and outermost space level? Existentially such overcare is probably attributable to the Paradise Trinity, but from an experiential viewpoint the appearance of the post-Havona universes is dependent on: 개인들은 자기 운명 수호자가 있습니다. 행성들, 체계들, 별자리들, 우주들, 그리고 초우주들 각각은 그들의 권역들의 복지를 위해 수고하는 각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하보나와 대우주도 그러한 높은 책임이 위임된 분들이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4번째 가장 바깥쪽 공간 수준까지, 누가 전체로서 주(主)우주의 기본적 필요를 돌보고 보살피는가?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보살핌은 아마 천국 삼위일체께 있겠지만, 체험적 관점에서 보면, 하보나-이후 우주들의 상황은 다음에 달려 있습니다.

12:6.9 (136.7) 1. The Absolutes in potential. 잠재성에서 절대자들.

12:6.10 (136.8) 2. The Ultimate in direction. 방향에서 궁극자.

12:6.11 (137.1) 3. The Supreme in evolutionary co-ordination. 진화의 통합-협동에서 최극자.

12:6.12 (137.2) 4. The Architects of the Master Universe in administration prior to the appearance of specific rulers. 특정 통치자들의 출현하기 전 경영에서 주(主)우주 건축가들.

12:6.13 (137.3) The Unqualified Absolute pervades all space. We are not altogether clear as to the exact status of the Deity and Universal Absolutes, but we know the latter functions wherever the Deity and Unqualified Absolutes function. The Deity Absolute may be universally present but hardly space present. The Ultimate is, or sometime will be, space present to the outer margins of the fourth space level. We doubt that the Ultimate will ever have a space presence beyond the periphery of the master universe, but within this limit the Ultimate is progressively integrating the creative organization of the potentials of the three Absolutes.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는 모든 공간에 침투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신(神)과 우주 절대자들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신(神)과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들이 기능하는 곳마다 후자(우주의 절대자)가 기능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神) 절대자는 우주적으로 현존하시지만 공간 현존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궁극자는 제4 공간 수준의 외부 경계에 공간 현존하거나 언젠가 현존할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자가 심지어 주(主)우주의 가장자리를 넘어서 공간 현존할 지 의혹을 품지만, 이 한계 안에서 궁극자는 세 절대자들의 잠재성을 창조적으로 조직하려고 점진적으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7. The Part and the Whole 부분과 전체

12:7.1 (137.4) There is operative throughout all time and space and with regard to all reality of whatever nature an inexorable and impersonal law which is equivalent to the function of a cosmic providence. Mercy characterizes God’s attitude of love for the individual; impartiality motivates God’s attitude toward the total. The will of God does not necessarily prevail in the part — the heart of any one personality — but his will does actually rule the whole, the universe of universes.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쳐, 본질이 어떠해도 모든 실체에 관해 작용하는 움직이지 않고 개인과 관계가 없는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은 질서우주 섭리의 기능에 해당됩니다. 자비는 개인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태도의 성격을 나타내며, 공평은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부분 – 어떤 한 고유성의 심정 –에서 우세하지는 않으나 그의 뜻은 전체, 우주들의 우주를 실제로 다스립니다.

12:7.2 (137.5) In all his dealings with all his beings it is true that the laws of God are not inherently arbitrary. To you, with your limited vision and finite viewpoint, the acts of God must often appear to be dictatorial and arbitrary. The laws of God are merely the habits of God, his way of repeatedly doing things; and he ever does all things well. You observe that God does the same thing in the same way, repeatedly, simply because that is the best way to do that particular thing in a given circumstance; and the best way is the right way, and therefore does infinite wisdom always order it done in that precise and perfect manner. You should also remember that nature is not the exclusive act of Deity; other influences are present in those phenomena which man calls nature. 모든 그의 존재들을 다루시는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의 법칙들은 본래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제한된 선견(先見 비전)과 유한한 관점을 지닌 너희에게, 하나님의 행동들은 자주 독재적이고 독단적인 것처럼 틀림없이 보인다. 하나님의 법칙들은 단지 하나님의 관습들, 반복적으로 행하시는 그의 방법입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들을 잘 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같은 것을 같은 방법으로 단순히 반복하시는 것을 관찰하는데,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특별한 그 일을 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법이 옳은 방법이므로 무한한 지혜는 엄밀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도록 항상 명령합니다. 너희는 또한 자연 현상이 신(神)의 독단적 행위가 아님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이 자연이라 부르는 그 현상에는 다른 영향들이 있습니다.

12:7.3 (137.6) It is repugnant to the divine nature to suffer any sort of deterioration or ever to permit the execution of any purely personal act in an inferior way. It should be made clear, however, that, if, in the divinity of any situation, in the extremity of any circumstance, in any case where the course of supreme wisdom might indicate the demand for different conduct — if the demands of perfection might for any reason dictate another method of reaction, a better one, then and there would the all-wise God function in that better and more suitable way. That would be the expression of a higher law, not the reversal of a lower law. 어떤 종류의 퇴보를 겪거나 순전히 개인적 행위를 열등한 방법으로 행하도록 늘 허용하는 것은 신적 본성에 모순됩니다. 그러나 어떤 신적 상황에서, 어떤 극단의 환경에서, 최극 지혜의 과정이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경우에 – 어떤 이유로 완전을 요구하는 다른 방법, 더 나은 반응의 방법을 지시한다면, 그 때 거기에서 모든-지혜이신 하나님은 더 유익하고 더 적절한 방법으로 기능하심을 명백히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더 낮은 원래 판결의 파기(破棄무효로 함)가 아니라, 더 높은 법칙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12:7.4 (137.7) God is not a habit-bound slave to the chronicity of the repetition of his own voluntary acts. There is no conflict among the laws of the Infinite; they are all perfections of the infallible nature; they are all the unquestioned acts expressive of faultless decisions. Law is the unchanging reaction of an infinite, perfect, and divine mind. The acts of God are all volitional notwithstanding this apparent sameness. In God there “is no variableness neither shadow of changing.” But all this which can be truly said of the Universal Father cannot be said with equal certainty of all his subordinate intelligences or of his evolutionary creatures. 하나님은 자신의 자발적 활동들의 만성적 반복에 고질적(痼疾的)인 노예가 아니십니다. 무한자의 법칙들 사이에 어떤 마찰도 없으며, 그것들은 모두 오류 없는 본성의 완전한 법칙들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결점 없는 결정을 표현하는 명백한 행위들입니다. 법칙은 무한하고 완전한 신적 마음의 변함없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행위들은 외관상 이렇게 동일하게 보여도 모두 의지적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약1:17).” 그러나 우주 아버지에 대해 참으로 말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모든 그의 종속된 지능존재들이나 그의 진화적 창조물들에 대한 동일한 확실성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12:7.5 (137.8) Because God is changeless, therefore can you depend, in all ordinary circumstances, on his doing the same thing in the same identical and ordinary way. God is the assurance of stability for all created things and beings. He is God; therefore he changes not.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므로 너희는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일상적 방법으로 동일한 것을 행하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모든 사물들과 존재들을 위한 안정성의 보증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셔서 변하지 않으십니다.

12:7.6 (138.1) And all this steadfastness of conduct and uniformity of action is personal, conscious, and highly volitional, for the great God is not a helpless slave to his own perfection and infinity. God is not a self-acting automatic force; he is not a slavish law-bound power. God is neither a mathematical equation nor a chemical formula. He is a freewill and primal personality. He is the Universal Father, a being surcharged with personality and the universal fount of all creature personality. 그리고 이 모든 확고한 행위와 한결같은 행동은 개인적, 의식적이며 대단히 의지적인데 위대한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성과 무한성에 대해 힘없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행동하는 자동적 기세가 아니며; 그는 법칙에 묶인 노예적인 권능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학 방정식도, 화학식도 아닙니다. 그는 자유 의지의 1차 고유성이십니다. 그는 우주 아버지, 고유성으로 과충전(過充電)된 존재이시며 모든 창조물 고유성의 우주적 원천이십니다.

12:7.7 (138.2) The will of God does not uniformly prevail in the heart of the God-seeking material mortal, but if the time frame is enlarged beyond the moment to embrace the whole of the first life, then does God’s will become increasingly discernible in the spirit fruits which are borne in the lives of the spirit-led children of God. And then, if human life is further enlarged to include the morontia experience, the divine will is observed to shine brighter and brighter in the spiritualizing acts of those creatures of time who have begun to taste the divine delights of experiencing the relationship of the personality of man with the person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을 찾는 물질적 필사자의 심정에서 한결같이 압도적이지 않지만, 시간의 틀이 순간을 넘어, 첫 생애 전체를 포함할 만큼 확장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자녀들의 삶에 태어난 영 열매들로 점점 더 식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인생이 더욱 확장되어 모론시아 체험을 포함하게 되면, 신적 뜻은,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과 함께 사람의 고유성을 체험하는 신적 기쁨의 관계를 맛보기 시작한 시간의 그 창조물들이 영화(靈化)되는 행위들에서 점점 더 밝게 빛남을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12:7.8 (138.3)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present the paradox of the part and the whole on the level of personality. God loves each individual as an individual child in the heavenly family. Yet God thus loves every individual; he is no respecter of persons, and the universality of his love brings into being a relationship of the whole, the universal brotherhood.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형제 됨은 고유성 수준에서 부분과 전체의 역설(逆說)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을 하늘 가족의 개별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모든 개인을 사랑하시지만, 그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그 사랑의 보편성은 전체, 우주적 형제 됨의 관계를 낳습니다.

12:7.9 (138.4) The love of the Father absolutely individualizes each personality as a unique child of the Universal Father, a child without duplicate in infinity, a will creature irreplaceable in all eternity. The Father’s love glorifies each child of God, illuminating each member of the celestial family, sharply silhouetting the unique nature of each personal being against the impersonal levels that lie outside the fraternal circuit of the Father of all. The love of God strikingly portrays the transcendent value of each will creature, unmistakably reveals the high value which the Universal Father has placed upon each and every one of his children from the highest creator personality of Paradise status to the lowest personality of will dignity among the savage tribes of men in the dawn of the human species on some evolutionary world of time and space. 아버지의 사랑은 각 고유성을 우주 아버지의 독특한 자녀, 무한에서 중복되지 않는 자녀, 모든 영원에서 둘도 없는 의지 창조물로서, 절대적으로, 개별적으로 다루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각 자녀를 영화롭게 하며, 천상의 가족의 각 구성원들을 비추시고, 모두의 아버지의 형제우애 회로 밖에 놓인 미(未)고유적 수준들을 배경으로 각 고유적 존재의 독특한 본성을 선명한 윤곽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각 의지 창조물의 초월적 가치를 두드러지게 묘사하며, 천국 지위의 가장 높은 창조자 고유성에서 시간과 공간의 어떤 진화 세계에 있는 인종의 여명기에 있는 인간의 야만족들 중에서 의지 존엄성을 지닌 가장 낮은 고유성까지, 우주 아버지가 그의 각 자녀들 모두에게 두신 높은 가치를 반드시 드러냅니다.

12:7.10 (138.5) This very love of God for the individual brings into being the divine family of all individuals, the universal brotherhood of the freewill children of the Paradise Father. And this brotherhood, being universal, is a relationship of the whole. Brotherhood, when universal, discloses not the each relationship, but the all relationship. Brotherhood is a reality of the total and therefore discloses qualities of the whole in contradistinction to qualities of the part.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바로 이 사랑은, 모든 개인들의 신적 가족, 천국 아버지의 자유 의지 자녀들이 우주적 형제 됨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적 형제 됨은 전체의 관계입니다. 형제 됨은, 우주적일 때, 각자 관계가 아니라 모든 관계를 나타냅니다. 형제 됨은 총체의 실체이므로 부분의 본질과 대비하여 전체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12:7.11 (138.6) Brotherhood constitutes a fact of relationship between every personality in universal existence. No person can escape the benefits or the penalties that may come as a result of relationship to other persons. The part profits or suffers in measure with the whole. The good effort of each man benefits all men; the error or evil of each man augments the tribulation of all men. As moves the part, so moves the whole. As the progress of the whole, so the progress of the part. The relative velocities of part and whole determine whether the part is retarded by the inertia of the whole or is carried forward by the momentum of the cosmic brotherhood. 형제 됨은 우주 실존에서 모든 고유성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만듭니다. 어떤 개인도 다른 개인들과 관계의 결과에서 발생하는 이익이나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분은 전체를 기준으로 이익을 얻거나 고통을 겪습니다. 각 사람의 선한 노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됩니다. 각 사람의 잘못이나 악은 모든 사람들의 시련을 증대시킵니다. 부분이 움직이는 대로, 전체도 움직입니다. 전체의 진보에 따라, 부분이 진보합니다. 부분과 전체의 상대적 속도는, 부분이 전체의 관성으로 지체되든지 아니면 질서우주 형제 됨의 추진력으로 추진되어 결정됩니다.

12:7.12 (139.1) It is a mystery that God is a highly personal self-conscious being with residential headquarters, and at the same time personally present in such a vast universe and personally in contact with such a well-nigh infinite number of beings. That such a phenomenon is a mystery beyond human comprehension should not in the least lessen your faith. Do not allow the magnitude of the infinity, the immensity of the eternity, and the grandeur and glory of the matchless character of God to overawe, stagger, or discourage you; for the Father is not very far from any one of you; he dwells within you, and in him do we all literally move, actually live, and veritably have our being. 하나님은 거주 본부들에 계시는 대단히 고유적인 자아-의식 존재인 동시에 그런 광대한 우주에 개인적으로 계시며 그렇게 거의 무한한 숫자의 존재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심은 신비입니다. 그런 현상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라는 사실이 너희의 신앙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할 수 없는 성품이 지닌, 무한성의 크기, 영원의 광대함, 그리고 장엄함과 영광이, 너희를 위압하거나 동요시키거나 낙담하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희 중 누구로부터도 아주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희 안에 내주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 글자그대로 움직이며, 실제로 살고, 진정으로 우리 존재가 있습니다.

12:7.13 (139.2) Even though the Paradise Father functions through his divine creators and his creature children, he also enjoys the most intimate inner contact with you, so sublime, so highly personal, that it is even beyond my comprehension — that mysterious communion of the Father fragment with the human soul and with the mortal mind of its actual indwelling. Knowing what you do of these gifts of God, you therefore know that the Father is in intimate touch, not only with his divine associates, but also with his evolutionary mortal children of time. The Father indeed abides on Paradise, but his divine presence also dwells in the minds of men. 천국 아버지가 그의 신적 창조자들과 그의 창조물 자녀들을 통해 기능하셔도, 그는 또한 너희와 가장 친밀한 내적 접촉을 즐기시는데, 그렇게 숭고하고, 대단히 개인적이어서, 아버지 단편과 인간 혼 및 그것이 실제 내주하는 필사자 마음과 교제하는 신비는 심지어 나의 이해를 벗어난다. 하나님의 이 선물들로 너희는 무엇을 하는지 알므로, 아버지가 그의 신적 동료들뿐만 아니라 시간의 진화하는 필사자 자녀들과도 친밀하게 접촉하심을 너희가 안다. 아버지는 정말 천국에 거하시지만, 그의 신적 현존은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십니다.

12:7.14 (139.3) Even though the spirit of a Son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even though a Son once dwelt with you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even though the seraphim personally guard and guide you, how can any of these divine beings of the Second and Third Centers ever hope to come as near to you or to understand you as fully as the Father, who has given a part of himself to be in you, to be your real and divine, even your eternal, self? 아들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졌고, 아들이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너희와 함께 한 때 거했으며, 치천사(熾天使, 성할, 불길이 거센-타오르는 자들)가 너희를 개인적으로 지키고 안내한다고 해도, 둘째 및 셋째 중심들의 이 신적 존재들 중 어느 누가 아버지처럼 너희에게 가까이 오고, 너희를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너의 참된 신적 자아, 심지어 너의 영원한 자아가 되려고, 너희 안에 자신의 일부를 주셨습니다.

8. Matter, Mind, and Spirit 물질, 마음, 그리고 영

12:8.1 (139.4) “God is spirit,” but Paradise is not. The material universe is always the arena wherein take place all spiritual activities; spirit beings and spirit ascenders live and work on physical spheres of material reality.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이 아닙니다. 물질적 우주는 항상 모든 영적 활동들이 일어나는 장(場)입니다; 영 존재들과 영 상승자들은 물질적 실체의 물리적 구체(球體)에서 살고 일합니다.

12:8.2 (139.5) The bestowal of cosmic force, the domain of cosmic gravity, is the function of the Isle of Paradise. All original force-energy proceeds from Paradise, and the matter for the making of untold universes now circulates throughout the master universe in the form of a supergravity presence which constitutes the force-charge of pervaded space. 질서우주 기세의 증여(贈與), 질서우주 중력의 영역은 천국 섬의 기능입니다. 모든 기원적 기세-에너지는 천국에서 비롯되며, 무수한 우주들을 생성하는 물질이, 침투(浸透) 공간의 기세-전하를 구성하는 초(超)중력 현존의 형태로, 현재 주(主)우주 전체에 순환하고 있습니다.

12:8.3 (139.6) Whatever the transformations of force in the outlying universes, having gone out from Paradise, it journeys on subject to the never-ending, ever-present, unfailing pull of the eternal Isle, obediently and inherently swinging on forever around the eternal space paths of the universes. Physical energy is the one reality which is true and steadfast in its obedience to universal law. Only in the realms of creature volition has there been deviation from the divine paths and the original plans. Power and energy are the universal evidences of the stability, constancy, and eternity of the central Isle of Paradise. 변경의 우주들에서 어떤 기세의 변환들이던지, 천국에서 나와서, 그것은 끝이 없고, 항상 존재하며, 영원한 섬의 확실히 당기는 힘에 지배를 받아 계속 운행하며, 우주들의 영원한 공간 경로들 주위를 언제나 충실히 본래부터 회전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에너지는 우주 법칙에 참으로 변함없이 복종하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창조물 의지의 영역에서만 신적 경로들과 기원적 계획들로부터 이탈이 있었습니다. 권능(힘)과 에너지는 천국 중앙 섬의 안정성, 불변성, 그리고 영원성의 우주적 증거들입니다.

12:8.4 (139.7) The bestowal of spirit and the spiritualization of personalities, the domain of spiritual gravity, is the realm of the Eternal Son. And this spirit gravity of the Son, ever drawing all spiritual realities to himself, is just as real and absolute as is the all-powerful material grasp of the Isle of Paradise. But material-minded man is naturally more familiar with the material manifestations of a physical nature than with the equally real and mighty operations of a spiritual nature which are discerned only by the spiritual insight of the soul. 영의 증여와 고유성들의 영성화, 영적 중력의 권역은 영원 아들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적 실체들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는 아들의 이 영 중력은, 천국 섬의 만능의 물질적 장악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이고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마음의 사람은 혼의 영적 통찰력으로만 식별되는 영적 본성에 속한, 동등하게 실제적이고 강력한 작용들의 경우보다 물리적 본성의 물질적 표현에 당연히 더 익숙합니다.

12:8.5 (140.1) As the mind of any personality in the universe becomes more spiritual — Godlike — it becomes less responsive to material gravity. Reality, measured by physical-gravity response, is the antithesis of reality as determined by quality of spirit content. Physical-gravity action is a quantitative determiner of nonspirit energy; spiritual-gravity action is the qualitative measure of the living energy of divinity. 우주에서 어떤 고유성의 마음이 하나님처럼 더욱 영적이 되면, 그것은 물질 중력에 덜 응답하게 됩니다. 물리적-중력 응답으로 측정되는 실체는, 영 내용의 질(質)로 결정되는 실체와 정반대입니다. 물리적-중력 활동은 비(非)영 에너지의 양(量)적 결정자입니다; 영적-중력 활동은 신성(神性)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측정하는 질적 척도입니다.

12:8.6 (140.2) What Paradise is to the physical creation, and what the Eternal Son is to the spiritual universe, the Conjoint Actor is to the realms of mind — the intelligent universe of material, morontial, and spiritual beings and personalities. 물리적 창조에 대한 천국의 관계, 영적 우주에 대한 영원 아들의 관계는, 마음의 영역들에 대한 공동 행위자의 관계 – 물질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영적 존재들과 고유성들의 지능적 우주 –와 같습니다.

12:8.7 (140.3) The Conjoint Actor reacts to both material and spiritual realities and therefore inherently becomes the universal minister to all intelligent beings, beings who may represent a union of both the material and spiritual phases of creation. The endowment of intelligence, the ministry to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in the phenomenon of mind, is the exclusive domain of the Conjoint Actor, who thus becomes the partner of the spiritual mind, the essence of the morontia mind, and the substance of the material mind of the evolutionary creatures of time. 공동 행위자는 물리적, 영적 실체들 둘 모두에 반응하므로 모든 지능 존재들, 창조의 물질적 및 영적 위상들 둘의 연합을 나타낼 존재들에 대해 우주적 사역자가 됩니다. 지능의 부여(附與), 물질적이며 영적인 마음 현상에 대한 사역은 공동 행위자의 독자적 권역이며, 그래서 그는 영적 마음의 동반자, 모론시아 마음의 핵심, 그리고 시간의 진화적 창조물들의 물질적 마음의 본체가 됩니다.

12:8.8 (140.4) Mind is the technique whereby spirit realities become experiential to creature personalities. And in the last analysis the unifying possibilities of even human mind, the ability to co-ordinate things, ideas, and values, is supermaterial. 마음은 그것으로 영 실체들이 창조물 고유성들에게 체험적이 되는 기법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 마음의 통합 가능성, 즉 사물, 관념 및 가치들을 통합-협동하는 능력도 초(超)물질적입니다.

12:8.9 (140.5) Though it is hardly possible for the mortal mind to comprehend the seven levels of relative cosmic reality, the human intellect should be able to grasp much of the meaning of three functioning levels of finite reality: 필사자 마음이 상대적 질서우주 실체의 일곱 수준들을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인간 지성은 유한 실체의 세 기능 수준들의 의미를 많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12:8.10 (140.6) 1. Matter. Organized energy which is subject to linear gravity except as it is modified by motion and conditioned by mind. 물질. 운동으로 변경되고 마음으로 좌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직선 중력에 종속되는 조직화된 에너지.

12:8.11 (140.7) 2. Mind. Organized consciousness which is not wholly subject to material gravity, and which becomes truly liberated when modified by spirit. 마음. 완전히 물질 중력에 종속되지 않으며, 영으로 변경될 때 참으로 해방되는 조직화된 의식.

12:8.12 (140.8) 3. Spirit. The highest personal reality. True spirit is not subject to physical gravity but eventually becomes the motivating influence of all evolving energy systems of personality dignity. 영. 가장 높은 고유적 실체. 참된 영은 물리적 중력에 종속되지 않지만, 결국 고유성 존엄의 진화하는 모든 에너지 체계를 움직이는 영향력이 됩니다.

12:8.13 (140.9) The goal of existence of all personalities is spirit; material manifestations are relative, and the cosmic mind intervenes between these universal opposites. The bestowal of mind and the ministration of spirit are the work of the associate persons of Deity, the Infinite Spirit and the Eternal Son. Total Deity reality is not mind but spirit-mind — mind-spirit unified by personality. Nevertheless the absolutes of both the spirit and the thing converge in the person of the Universal Father. 모든 고유성들의 실존 목표는 영입니다. 물질적 표현들은 상대적이고, 질서우주 마음은 이 우주의 정반대들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마음의 증여와 영의 봉사는 신(神)의 관련된 개인들, 무한 영과 영원 아들의 일입니다. 총체적 신(神) 실체는 마음이 아니라 영-마음, 즉 고유성으로 통일된 마음-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 사물 둘의 절대들은 우주 아버지의 개인person 안으로 수렴(收斂한데 모아짐)합니다.

12:8.14 (140.10) On Paradise the three energies, physical, mindal, and spiritual, are co-ordinate. In the evolutionary cosmos energy-matter is dominant except in personality, where spirit, through the mediation of mind, is striving for the mastery. Spirit is the fundamental reality of the personality experience of all creatures because God is spirit. Spirit is unchanging, and therefore, in all personality relations, it transcends both mind and matter, which are experiential variables of progressive attainment. 천국에서 물리적, 마음의, 영적 세 에너지들은 통합-협동적입니다. 진화적 질서우주에서 에너지-물질은, 고유성 안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배적인데, 그곳(고유성 안)에서는 마음의 중재를 통하여 영이 지배하려고 분투합니다. 영은 모든 창조물들의 고유성 체험의 기본적 실체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은 불변하므로 모든 고유성 관계들에서 마음과 물질 둘 다 초월하며, 그것들은 진보적 달성의 체험적 변수들입니다.

12:8.15 (140.11) In cosmic evolution matter becomes a philosophic shadow cast by mind in the presence of spirit luminosity of divine enlightenment, but this does not invalidate the reality of matter-energy. Mind, matter, and spirit are equally real, but they are not of equal value to personality in the attainment of divinity. Consciousness of divinity is a progressive spiritual experience. 질서우주의 진화에서 물질은, 신적 계몽의 영 발광체의 현존에, 마음이 투영한 철학적 그림자가 되지만, 이것은 물질-에너지의 실체를 무효로 만들지 않습니다. 마음, 물질, 그리고 영은 똑같이 실제적이지만, 그것들은 신성(神性)을 달성하는 고유성에 대해 같은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신성(神性)의 의식은 진보적인 영적 체험입니다.

12:8.16 (141.1) The brighter the shining of the spiritualized personality (the Father in the universe, the fragment of potential spirit personality in the individual creature), the greater the shadow cast by the intervening mind upon its material investment. In time, man’s body is just as real as mind or spirit, but in death, both mind (identity) and spirit survive while the body does not. A cosmic reality can be nonexistent in personality experience. And so your Greek figure of speech — the material as the shadow of the more real spirit substance — does have a philosophic significance. 영성(靈性)화된 고유성(우주에 있는 아버지, 개별 창조물 안에 있는 잠재적 영 고유성의 단편)이 밝게 빛날수록, 물질적 외피(外皮)에 개재(介在사이에 끼어있는)하는 마음이 투영한 그림자는 더 짙어집니다. 시간 안에서 사람의 몸은 마음이나 영처럼 아주 실제적이지만, 죽으면, 마음(정체성)과 영은 둘 다 살아남는 반면에 몸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질서우주적 실체는 고유성 체험으로 실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그리스인의 비유적 표현─물질은 더 실제적인 영 본체의 그림자─은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9. Personal Realities 고유적 실체들

12:9.1 (141.2) Spirit is the basic personal reality in the universes, and personality is basic to all progressing experience with spiritual reality. Every phase of personality experience on every successive level of universe progression swarms with clues to the discovery of alluring personal realities. Man’s true destiny consists in the creation of new and spirit goals and then in responding to the cosmic allurements of such supernal goals of nonmaterial value. 영은 우주들에서 기본적인 고유적 실체이며, 고유성은 영적 실체와 함께 진보하는 모든 체험에 기본적입니다. 우주 진보의 모든 연속적 수준에서 고유성 체험의 모든 차원은 매혹적인 고유적 실체들을 발견하는 단서로 가득합니다. 사람의 참된 운명은 새로운 영 목표들을 만들고 그 후 비(非)물질적 가치를 지닌 그런 고상한 목표들의 질서우주적 매혹에 응답하는 데에 있습니다.

12:9.2 (141.3) Love is the secret of beneficial association between personalities. You cannot really know a person as the result of a single contact. You cannot appreciatingly know music through mathematical deduction, even though music is a form of mathematical rhythm. The number assigned to a telephone subscriber does not in any manner identify the personality of that subscriber or signify anything concerning his character. 사랑은 고유성들 사이에 유익한 관계의 비밀입니다. 너희는 단 한 번 접촉한 결과로 어떤 사람을 실제로 알 수 없다. 너희는, 음악이 수학적 리듬의 형태라도, 수학적 추론으로 음악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전화 가입자에게 배정된 번호는 그 가입자의 고유성을 어떤 방법으로도 확인하거나 그의 성품에 관해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12:9.3 (141.4) Mathematics, material science, is indispensable to the intelligent discussion of the material aspects of the universe, but such knowledge is not necessarily a part of the higher realization of truth or of the personal appreciation of spiritual realities. Not only in the realms of life but even in the world of physical energy, the sum of two or more things is very often something more than, or something different from, the predictable additive consequences of such unions. The entire science of mathematics, the whole domain of philosophy, the highest physics or chemistry, could not predict or know that the union of two gaseous hydrogen atoms with one gaseous oxygen atom would result in a new and qualitatively superadditive substance — liquid water. The understanding knowledge of this one physiochemical phenomenon should have prevented the development of materialistic philosophy and mechanistic cosmology. 수학, 물질과학은 우주의 물질적 면들에 대한 지능적 토론에 필수적이지만, 그런 지식이 반드시 고등 진리의 자각이나 영적 실체들에 대한 고유적 인식의 부분은 아닙니다. 생명의 영역만 아니라 물리적 에너지의 세계에서도,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들의 합은 그러한 연합의 예측 가능한 덧셈 결과 보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거나, 그것과 다른 어떤 것인 경우가 매우 종종 있습니다. 수학의 전체 과학, 철학의 전체 권역, 최고의 물리학이나 화학은, 수소 기체 2원자들과 산소 기체 1원자의 연합의 결과가 질적으로 새로운 초(超)덧셈 본질 – 액체 물 –임을 예견하거나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이 한 가지 물리화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지식은 물질적 철학과 기계적 우주론의 발달을 저지했어야 합니다.

12:9.4 (141.5) Technical analysis does not reveal what a person or a thing can do. For example: Water is used effectively to extinguish fire. That water will put out fire is a fact of everyday experience, but no analysis of water could ever be made to disclose such a property. Analysis determines that water is composed of hydrogen and oxygen; a further study of these elements discloses that oxygen is the real supporter of combustion and that hydrogen will itself freely burn. 기술적 분석은 사람이나 사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드러내지 않습니다. 실례로 물은 불을 끄는 데에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물이 불을 끄리라는 것은 매일 경험하는 사실이지만, 물을 분석해서 그런 특성을 밝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석은 물이 수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요소들을 더 연구하면 산소가 연소를 실제로 지원하고 수소는 스스로 자유롭게 연소할 것임을 드러냅니다.

12:9.5 (141.6) Your religion is becoming real because it is emerging from the slavery of fear and the bondage of superstition. Your philosophy struggles for emancipation from dogma and tradition. Your science is engaged in the agelong contest between truth and error while it fights for deliverance from the bondage of abstraction, the slavery of mathematics, and the relative blindness of mechanistic materialism. 너희 종교는 두려움의 노예와 미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으므로 실제가 되어가고 있다. 너희 철학은 독단론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투쟁하고 있다. 너희 과학은, 추상(抽象)의 속박, 수학의 노예, 기계론적 물질주의의 상대적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싸우면서, 진리와 오류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 중에 있다.

12:9.6 (142.1) Mortal man has a spirit nucleus. The mind is a personal-energy system existing around a divine spirit nucleus and functioning in a material environment. Such a living relationship of personal mind and spirit constitutes the universe potential of eternal personality. Real trouble, lasting disappointment, serious defeat, or inescapable death can come only after self-concepts presume fully to displace the governing power of the central spirit nucleus, thereby disrupting the cosmic scheme of personality identity. 필사 사람은 영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신적 영 핵 주위에 존재하며 물질적 환경에서 기능하는 고유적-에너지 체계입니다. 고유적 마음과 영의 살아있는 그런 관계는 영원한 고유성의 우주 잠재력을 구성합니다. 자아-개념이 중앙의 영 핵이 지닌 지배하는 권능(힘)을 완전히 쫓아내서, 고유성 정체성이 지닌 질서우주적 기획이 부서진다고 추정한 이후에 비로소 실제적인 곤란, 계속되는 실망, 심각한 패배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올 수 있습니다.

12:9.7 (142.2) [Presented by a Perfector of Wisdom acting by authority of the Ancients of Days.] [옛적부터 늘 계신이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지혜의 완전자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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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66 The Planetary Prince of Urantia 유란시아의 행성 왕자

Paper 66

The Planetary Prince of Urantia 유란시아의 행성 왕자

1. Prince Caligastia 칼리가스티아 왕자
2. The Prince’s Staff 왕자의 참모진
3. Dalamatia — The City of the Prince 달라마시아─왕자의 도시
4. Early Days of the One Hundred 100인의 초기 시절
5. Organization of the One Hundred 100인의 조직
(1) The council on food and material welfare 식량과 물질 복지 위원회
(2) The board of animal domestication and utilization 동물 길들이기와 활용(活用)회(會)
(3) The advisers regarding the conquest of predatory animals 육식동물 정복에 대한 고문(顧問)들
(4) The faculty on dissemination and conservation of knowledge 지식 보급과 보존 교직원
(5) The commission on industry and trade 산업과 무역 위원회
(6) The college of revealed religion 계시된 종교의 대학
(7) The guardians of health and life 건강과 생명의 수호자들
(8) The planetary council on art and science 예술과 과학 담당 행성 위원회
(9) The governors of advanced tribal relations 증진된 부족 관계의 통치자들
(10) The supreme court of tribal co-ordination and racial co-operation 부족의 통합-협동 및 종족의 협동 담당하는 대법원
6. The Prince’s Reign 왕자의 통치
7. Life in Dalamatia 달라마시아 생활
8. Misfortunes of Caligastia 칼리가스티아의 불행

66:0.1 (741.1) THE advent of a Lanonandek Son on an average world signifies that will, the ability to choose the path of eternal survival, has developed in the mind of primitive man. But on Urantia the Planetary Prince arrived almost half a million years after the appearance of human will. 일반 세계에 라노난덱 아들의 도래(到來)는 의지(意志), 영원한 생존의 경로를 선택하는 능력이 원시인의 마음에 개발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지구(유란시아)에서 행성 왕자는 인간 의지가 출현된 후 거의 500,000년에 도착했습니다.

66:0.2 (741.2) About five hundred thousand years ago and concurrent with the appearance of the six colored or Sangik races, Caligastia, the Planetary Prince, arrived on Urantia. There were almost one-half billion primitive human beings on earth at the time of the Prince’s arrival, and they were well scattered over Europe, Asia, and Africa. The Prince’s headquarters, established in Mesopotamia, was at about the center of world population. 약 500,000년 전, 여섯 유색 인종 또는 산긱 종족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행성 왕자 칼리가스티아가 지구(유란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왕자가 도착했을 때 지구에는 약 5억 명의 원시 인간이 있었고,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상당히 흩어져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세워진 왕자의 본부는 세계 인구의 중심 근처에 있었습니다.

1. Prince Caligastia 칼리가스티아 왕자

66:1.1 (741.3) Caligastia was a Lanonandek Son, number 9,344 of the secondary order. He was experienced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affairs of the local universe in general and, during later ages, with the management of the local system of Satania in particular. 칼리가스티아는 라노난덱 아들로, 2차 계급에서 9,344번이었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지역 우주의 행정 직무에 경험이 있었고, 후대에는 특히 사타니아 지역 체계를 관리했습니다.

66:1.2 (741.4) Prior to the reign of Lucifer in Satania, Caligastia had been attached to the council of the Life Carrier advisers on Jerusem. Lucifer elevated Caligastia to a position on his personal staff, and he acceptably filled five successive assignments of honor and trust. 루시퍼가 사타니아를 통치하기 전, 칼리가스티아는 예루셈에서 생명 운반자 충고자 협의회에 부속되어 있었습니다. 루시퍼는 칼리가스티아를 자신의 직속 참모진의 지위로 진급시켰고, 그는 5번 계속 영예와 신뢰의 임무를 마음에 들도록 충족시켰습니다.

66:1.3 (741.5) Caligastia very early sought a commission as Planetary Prince, but repeatedly, when his request came up for approval in the constellation councils, it would fail to receive the assent of the Constellation Fathers. Caligastia seemed especially desirous of being sent as planetary ruler to a decimal or life-modification world. His petition had several times been disapproved before he was finally assigned to Urantia. 칼리가스티아는 아주 일찍이 행성 왕자의 임무를 얻으려했지만, 그의 요청이 별자리 협의회의 승인을 위해 상정될 때, 별자리 아버지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곤 했습니다. 칼리가스티아는 10진(十進)법 즉 생명-변형 세계에 행성 통치자로 파송되기를 특히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지구(유란시아)에 배정되기 전, 그의 청원은 여러 번 기각되었었습니다.

66:1.4 (741.6) Caligastia went forth from Jerusem to his trust of world dominion with an enviable record of loyalty and devotion to the welfare of the universe of his origin and sojourn, notwithstanding a certain characteristic restlessness coupled with a tendency to disagree with the established order in certain minor matters. 칼리가스티아는, 어떤 사소한 문제들에서 기존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향과 함께 어떤 특성적 불안이 있었지만, 자신이 태어나 머문 우주의 복지에 충성하고 헌신한 바람직한 경력을 가지고, 예루셈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임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66:1.5 (741.7) I was present on Jerusem when the brilliant Caligastia departed from the system capital. No prince of the planets ever embarked upon a career of world rulership with a richer preparatory experience or with better prospects than did Caligastia on that eventful day one-half million years ago. One thing is certain: As I executed my assignment of putting the narrative of that event on the broadcasts of the local universe, I never for one moment entertained even in the slightest degree any idea that this noble Lanonandek would so shortly betray his sacred trust of planetary custody and so horribly stain the fair name of his exalted order of universe sonship. I really regarded Urantia as being among the five or six most fortunate planets in all Satania in that it was to have such an experienced, brilliant, and original mind at the helm of world affairs. I did not then comprehend that Caligastia was insidiously falling in love with himself; I did not then so fully understand the subtleties of personality pride. 명석한 칼리가스티아가 체계의 수도에서 떠나갈 때, 나는 예루셈에 있었습니다. 어떤 행성 왕자도 50만 년 전 그 중요한 날 칼리가스티아보다 더 풍부한 예비적 경험이나 더 나은 전망으로 세계 통치 생애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내가 지역 우주의 방송에 그 사건을 서술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한 순간도, 이 고귀한 라노난덱이 그렇게 빨리 행성을 감독하는 자신의 거룩한 의무를 배반하고, 우주 아들이 된 자신의 높은 신분 계급의 깨끗한 이름을 그렇게 끔찍하게 더럽히리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경험이 있고, 명석하며, 독창적인 마음이 세계의 업무를 주관한다는 점에 있어서, 정말로 지구(유란시아)가 모든 사타니아에서 가장 운 좋은 대여섯 행성들에 포함된다고 여겼습니다. 나는 그 때, 칼리가스티아가 교활하게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음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때 미묘한 고유성 자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 The Prince’s Staff 왕자의 참모진

66:2.1 (742.1) The Planetary Prince of Urantia was not sent out on his mission alone but was accompanied by the usual corps of assistants and administrative helpers. 지구(유란시아)의 행성 왕자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단독이 아니라, 통상적인 보좌관과 행정 조력자 일행을 대동하여 파송을 받았습니다.

66:2.2 (742.2) At the head of this group was Daligastia, the associate-assistant of the Planetary Prince. Daligastia was also a secondary Lanonandek Son, being number 319,407 of that order. He ranked as an assistant at the time of his assignment as Caligastia’s associate. 이 집단의 수뇌부에는 행성 왕자의 동료 보좌관 달리가스티아가 있었습니다. 달리가스티아 역시 2차 라노난덱 아들로, 그 계층에서 319,407번이었습니다. 그는 칼리가스티아의 동료로 배정될 때 보좌관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66:2.3 (742.3) The planetary staff included a large number of angelic co-operators and a host of other celestial beings assigned to advance the interests and promote the welfare of the human races. But from your standpoint the most interesting group of all were the corporeal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Caligastia one hundred. 행성 참모진은 수많은 천사 협력자들과 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고 복지를 향상하도록 배정된 다른 많은 천상의 존재들을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관점에서 전체 중 가장 흥미로운 집단은 왕자 참모진의 육체를 지닌 회원들이었습니다. – 때때로 칼리가스티아 100인이라고 불렸습니다.

66:2.4 (742.4) These one hundred rematerialized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were chosen by Caligastia from over 785,000 ascendant citizens of Jerusem who volunteered for embarkation on the Urantia adventure. Each one of the chosen one hundred was from a different planet, and none of them were from Urantia. 왕자의 참모진 중에서 재(再)물질화된 이 100명의 회원들은, 지구(유란시아) 모험을 착수하기로 자원한 785,000명의 상승하는 예루셈 시민들 중에서 칼리가스티아가 선택했습니다. 선택된 100명 각자는 서로 다른 행성 출신으로, 아무도 지구(유란시아) 출신은 없었습니다.

66:2.5 (742.5) These Jerusemite volunteers were brought by seraphic transport direct from the system capital to Urantia, and upon arrival they were held enseraphimed until they could be provided with personality forms of the dual nature of special planetary service, literal bodies consisting of flesh and blood but also attuned to the life circuits of the system. 예루셈의 자원자들은 천사(天使)의 수송선으로 체계 수도에서 직접 지구(유란시아)로 왔고, 도착 후 그들은 특별한 행성 봉사를 위해 이중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 형태, 즉 글자 그대로의 살과 피로 구성된 동시에 체계의 생명 회로에 조율된 육체가 제공되기까지 천사들 안에 실려 있었습니다.

66:2.6 (742.6) Sometime before the arrival of these one hundred Jerusem citizens, the two supervising Life Carriers resident on Urantia, having previously perfected their plans, petitioned Jerusem and Edentia for permission to transplant the life plasm of one hundred selected survivors of the Andon and Fonta stock into the material bodies to be projected for the corporeal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The request was granted on Jerusem and approved on Edentia. 이 100명의 예루셈 시민들이 도착하기 얼마 전, 지구(유란시아)에 거주하며 감독하는 두 생명 운반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완성하고, 안돈과 폰타의 혈통에서 선택된 생존자 100명의 생명 원형질을, 왕자의 참모진 중 육체를 지닌 회원들을 위해 설계된 물질 육체로, 이식을 허락해달라고 예루셈과 에덴시아에 청원했습니다. 그 요청은 예루셈의 허락과 에덴시아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66:2.7 (742.7) Accordingly, fifty males and fifty females of the Andon and Fonta posterity, representing the survival of the best strains of that unique race, were chosen by the Life Carriers. With one or two exceptions these Andonite contributors to the advancement of the race were strangers to one another. They were assembled from widely separated places by co-ordinated Thought Adjuster direction and seraphic guidance at the threshold of the planetary headquarters of the Prince. Here the one hundred human subjects were given into the hands of the highly skilled volunteer commission from Avalon, who directed the material extraction of a portion of the life plasm of these Andon descendants. This living material was then transferred to the material bodies constructed for the use of the one hundred Jerusemite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Meantime, these newly arrived citizens of the system capital were held in the sleep of seraphic transport. 따라서 생명 운반자들은 안돈과 폰타의 후손 중에서 남자 50명과 여자 50명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그 독특한 인종 중에서 살아남은 최상의 혈통을 대표합니다. 하나 또는 둘을 제외하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이 안돈 사람들은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들로부터 통합-협동했던 생각 조율자의 지도(指導)와 천사(天使)의 안내로 왕자의 행성 본부 입구에 모였습니다. 여기서 100명 인간 피(被)실험자들은 아발론에서 온 고도로 능숙한 자원자 위원회의 손에 맡겨졌고, 그들은 이 안돈족속들의 생명 원형질 일부의 물질적 적출(摘出)을 지도했습니다. 살아있는 이 물질은 그 후, 왕자의 참모진 100명 예루셈 회원들이 사용하도록 구성된 물질 몸체로 옮겨졌습니다. 그 동안, 새로 도착한 이 체계 수도의 시민들은 천사의 운송선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66:2.8 (742.8) These transactions, together with the literal creation of special bodies for the Caligastia one hundred, gave origin to numerous legends, many of which subsequently became confused with the later traditions concerning the planetary installation of Adam and Eve. 이 처리들은, 칼리가스티아 100인을 위해 글자 그대로 특별한 몸체의 창조와 더불어, 수많은 전설을 낳았으며, 그 대부분은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취임한 것과 관련된 후대의 전통들과 나중에 혼동되었습니다.

66:2.9 (743.1) The entire transaction of repersonalization, from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seraphic transports bearing the one hundred Jerusem volunteers until they became conscious, threefold beings of the realm, consumed exactly ten days. 재(再)고유성 구현의 전체 처리는, 100명의 예루셈 자원자들을 실은 천사 수송선이 도착한 때부터, 그 영역에서 3중적 존재들인 그들이 제정신이 들기까지 정확히 10일이 소요되었습니다.

3. Dalamatia — The City of the Prince 달라마시아─왕자의 도시

6:3.1 (743.2) The headquarters of the Planetary Prince was situated in the Persian Gulf region of those days, in the district corresponding to later Mesopotamia. 행성 왕자의 본부는 당시 페르시아 만(灣) 지역, 후대 메소포타미아에 해당하는 지구(地區)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66:3.2 (743.3) The climate and landscape in the Mesopotamia of those times were in every way favorable to the undertakings of the Prince’s staff and their assistants, very different from conditions which have sometimes since prevailed. It was necessary to have such a favoring climate as a part of the natural environment designed to induce primitive Urantians to make certain initial advances in culture and civilization. The one great task of those ages was to transform man from a hunter to a herder, with the hope that later on he would evolve into a peace-loving, home-abiding farmer. 그 시대 메소포타미아의 기후와 전망은 모든 면에서 왕자의 참모진과 그들의 보좌관들이 일하기에 유리했으며, 널리 알려진 이후 종종 맞이했던 조건들과 매우 달랐습니다. 원시 지구(유란시아)인들이 문화와 문명에서 반드시 초기의 진보를 위해 유도하도록 고안된 자연 환경의 일부로써 그렇게 순조로운 기후가 필요했습니다. 그 시대 큰 과업 중 하나는, 나중에 평화를-사랑하고, 집에-거주하는 농부로 진화하리라는 희망으로, 사람을 사냥꾼에서 목자(牧者)로 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66:3.3 (743.4) The headquarters of the Planetary Prince on Urantia was typical of such stations on a young and developing sphere. The nucleus of the Prince’s settlement was a very simple but beautiful city, enclosed within a wall forty feet high. This world center of culture was named Dalamatia in honor of Daligastia. 지구(유란시아)에 있는 행성 왕자의 본부는 신흥 발전 구체에 있는 그런 전형적인 기지(基地)였습니다. 왕자가 정착한 중심부는 매우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였고, 40피트(12미터) 높이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 세계적인 문화 중심지는 달리가스티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달라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66:3.4 (743.5) The city was laid out in ten subdivisions with the headquarters mansions of the ten councils of the corporeal staff situated at the centers of these subdivisions. Centermost in the city was the temple of the unseen Father. The administrative headquarters of the Prince and his associates was arranged in twelve chambers immediately grouped about the temple itself. 그 도시는 10개의 구역들로 배열되었는데, 이 구역들의 중심에는 육체를 지닌 참모진의 10개 의회의 본부 저택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왕자와 동료들의 경영 본부는 성전 자체 주위 바로 가까이에 모여 있는 12개의 회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66:3.5 (743.6) The buildings of Dalamatia were all one story except the council headquarters, which were two stories, and the central temple of the Father of all, which was small but three stories in height. 달라마시아의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었고, 2층으로 된 의회 본부와 규모는 작지만 3층 높이로 된 만유의 아버지의 중앙 성전만 예외였습니다.

66:3.6 (743.7) The city represented the best practices of those early days in building material — brick. Very little stone or wood was used. Home building and village architecture among the surrounding peoples were greatly improved by the Dalamatian example. 그 도시는 당시 초기 시절에 건축 재료로 벽돌을 사용한 최고의 관행을 드러냈습니다. 돌이나 나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주변 민족들의 집 건물과 마을 건축술은 달라마시아의 본보기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66:3.7 (743.8) Near the Prince’s headquarters there dwelt all colors and strata of human beings. And it was from these near-by tribes that the first students of the Prince’s schools were recruited. Although these early schools of Dalamatia were crude, they provided all that could be done for the men and women of that primitive age. 왕자의 본부 근처에는 모든 유색 및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리고 근처의 이 부족들로부터 왕자의 학교들에 첫 학생들이 모집되었습니다. 달라마시아의 이 초기 학교들은 있는 그대로였지만, 그 원시 시대의 남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공했습니다.

66:3.8 (743.9) The Prince’s corporeal staff continuously gathered about them the superior individuals of the surrounding tribes and, after training and inspiring these students, sent them back as teachers and leaders of their respective peoples.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은 주변 부족들 중에서 우수한 개인들을 자신들 주위에 계속 모았으며, 이 학생들을 훈련하고 영감(靈感)을 준 다음, 그들을 각 민족들의 선생과 리더(지도자)로서 돌려보냈습니다.

4. Early Days of the One Hundred 100인의 초기 시절

66:4.1 (743.10) The arrival of the Prince’s staff created a profound impression. While it required almost a thousand years for the news to spread abroad, those tribes near the Mesopotamian headquarters were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teachings and conduct of the one hundred new sojourners on Urantia. And much of your subsequent mythology grew out of the garbled legends of these early days when these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were repersonalized on Urantia as supermen. 왕자의 참모진의 도착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소식이 널리 퍼지기까지 거의 1,000년이 걸렸지만, 메소포타미아 본부 근처의 그 부족들은 새로 지구(유란시아)에 머물게 된 그 100인의 가르침과 행동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후일 너희의 많은 신화(神話)들은, 왕자 참모진의 이 요원들이 지구(유란시아)에서 초(超)인간으로 재(再)고유성화되자, 이 초기 시절의 왜곡된 전설에서 생겨났습니다.

66:4.2 (744.1) The serious obstacle to the good influence of such extraplanetary teachers is the tendency of mortals to regard them as gods, but aside from the technique of their appearance on earth the Caligastia one hundred — fifty men and fifty women — did not resort to supernatural methods nor superhuman manipulations. 그런 행성 밖에서 온 선생들의 훌륭한 영향력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은 필사자들이 그들을 신과 같은 존재들로 간주하려는 경향이었지만, 그들이 세상에 출현한 기법을 제외하고 칼리가스티아 100인 – 남자 50명과 여자 50명 -은 초자연적인 방법이나 초인간적인 조종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66:4.3 (744.2) But the corporeal staff were nonetheless superhuman. They began their mission on Urantia as extraordinary threefold beings: 그러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유란시아)에서 특별한 다음의 삼중 존재로서 사명을 시작했습니다.

66:4.4 (744.3) 1. They were corporeal and relatively human, for they embodied the actual life plasm of one of the human races, the Andonic life plasm of Urantia. 그들은 육체를 지닌, 비교적 인간이었는데, 그들이 인간종족 중 하나의 실제 생명 원형질, 즉 지구(유란시아)의 안돈의 생명 원형질을 구현했기 때문입니다.

66:4.5 (744.4) These one hundred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were divided equally as to sex and in accordance with their previous mortal status. Each person of this group was capable of becoming coparental to some new order of physical being, but they had been carefully instructed to resort to parenthood only under certain conditions. It is customary for the corporeal staff of a Planetary Prince to procreate their successors sometime prior to retiring from special planetary service. Usually this is at, or shortly after,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Adam and Eve. 왕자의 참모진에서 이 100명의 요원들은 똑같이 성별로 나뉘었는데, 이전 필사자 신분에 따랐습니다. 이 집단의 각자는, 어떤 새로운 계층의 육체적 존재에게, 함께 부모가 되는 능력이 있었지만, 특별한 조건에서만 어버이 신분을 지니도록 조심스럽게 지시받았습니다. 행성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은 특별 행성 업무에서 언젠가 은퇴 전에 후계자를 낳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대개 이것은 행성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는 시기 또는 그 직후에 일어납니다.

66:4.6 (744.5) These special beings therefore had little or no idea as to what type of material creature would be produced by their sexual union. And they never did know; before the time for such a step in the prosecution of their world work the entire regime was upset by rebellion, and those who later functioned in the parental role had been isolated from the life currents of the system. 그러므로 특별한 이 존재들은 자신들의 성(性)적 연합으로 어떤 유형의 물질 창조물이 태어나는지 거의 또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몰랐는데, 그들이 세계의 일을 수행하는 그런 단계가 이르기 전에, 모든 체제가 반란으로 전복되었고, 나중에 부모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그 체계의 생명 흐름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6:4.7 (744.6) In skin color and language these materialized members of Caligastia’s staff followed the Andonic race. They partook of food as did the mortals of the realm with this difference: The re-created bodies of this group were fully satisfied by a nonflesh diet. This was one of the considerations which determined their residence in a warm region abounding in fruits and nuts. The practice of subsisting on a nonflesh diet dates from the times of the Caligastia one hundred, for this custom spread near and far to affect the eating habits of many surrounding tribes, groups of origin in the once exclusively meat-eating evolutionary races.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물질화된 이 요원들은, 피부색과 언어는 안돈 종족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들처럼 음식을 섭취했지만 다음의 이런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재(再)창조된 이 집단의 육체들은 비(非)육식 식이요법으로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이것은 풍성한 과일과 견과들이 있는 따뜻한 지역에 거주하도록 결정한 고려 사항들 중 하나였습니다. 고기 없는 식이요법을 유지하는 관습은 칼리가스티아 100인의 시대부터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이 관습은 가까운 곳과 먼 곳에 퍼져있는, 둘러싼 부족들, 한 때 순전히 고기만 먹던 진화 종족들에서 기원된 집단들의 식사 습관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66:4.8 (744.7) 2. The one hundred were material but superhuman beings, having been reconstituted on Urantia as unique men and women of a high and special order. 100인은 물질적이지만 초인간적인 존재였고, 높고 특별한 계층의 독특한 남자들과 여자들로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재(再)조직되었습니다.

66:4.9 (744.8) This group, while enjoying provisional citizenship on Jerusem, were as yet unfused with their Thought Adjusters; and when they volunteered and were accepted for planetary service in liaison with the descending orders of sonship, their Adjusters were detached. But these Jerusemites were superhuman beings — they possessed souls of ascendant growth. During the mortal life in the flesh the soul is of embryonic estate; it is born (resurrected) in the morontia life and experiences growth through the successive morontia worlds. And the souls of the Caligastia one hundred had thus expanded through the progressive experiences of the seven mansion worlds to citizenship status on Jerusem. 이 집단은, 예루셈에서 임시 시민 신분을 누렸지만, 아직 생각 조율자와 융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원하고, 아들됨의 하강 계층들과 연결되어 행성 봉사로 허락되자, 그들의 조율자들은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셈 사람들은 초인간적 존재였습니다. – 그들은 상승하며 성장하는 혼을 소유했습니다. 육체로 필사자의 생애를 사는 동안, 혼은 배(胚 미발달된 태아)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혼)은 모론시아 생명으로 태어나고(부활되고) 연속적인 모론시아 세계들을 거쳐 성장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칼리가스티아 100인의 혼들은 7 저택 세계의 진보의 체험을 통해 예루셈의 시민권 신분까지 그렇게 성장합니다.

66:4.10 (744.9) In conformity to their instructions the staff did not engage in sexual reproduction, but they did painstakingly study their personal constitutions, and they carefully explored every imaginable phase of intellectual (mind) and morontia (soul) liaison. And it was during the thirty-third year of their sojourn in Dalamatia, long before the wall was completed, that number two and number seven of the Danite group accidentally discovered a phenomenon attendant upon the liaison of their morontia selves (supposedly nonsexual and nonmaterial); and the result of this adventure proved to be the first of the primary midway creatures. This new being was wholly visible to the planetary staff and to their celestial associates but was not visible to the men and women of the various human tribes. Upon authority of the Planetary Prince the entire corporeal staff undertook the production of similar beings, and all were successful, following the instructions of the pioneer Danite pair. Thus did the Prince’s staff eventually bring into being the original corps of 50,000 primary midwayers. 자신들이 받은 지시에 따라 참모진은 성(性)적 생식에 관계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개인적 체질을 힘들여 연구했고, 지적 (마음)과 모론시아 (혼)을 연결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단계를 신중히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달라마시아에 머문 지 33년째 해, 성벽이 완성되기 훨씬 전에, 단의 집단 중 2번과 7번이 자신들의 (아마 무성(無性 남녀 구별이 없는)의 비非물질적 모론시아 자아들의 연결에 수반된 현상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모험의 결과로 첫째 1차 중도 창조물이 드러났습니다. 새로운 이 존재는 행성 참모진과 천상(天上)의 동료들에게는 온전히 눈에 보였지만, 여러 인간 부족의 남녀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성 왕자의 허락으로, 전체 육체를 지닌 참모진은 동일한 존재의 생산에 착수했고, 개척자 단 쌍(커플 no 2&7)의 지시에 따라 모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왕자의 참모진은 결국 1차 중도자 50,000명으로 최초의 단체를 만들어냈습니다.

66:4.11 (745.1) These mid-type creatures were of great service in carrying on the affairs of the world’s headquarters. They were invisible to human beings, but the primitive sojourners at Dalamatia were taught about these unseen semispirits, and for ages they constituted the sum total of the spirit world to these evolving mortals. 이 중간-유형의 창조물들은 세계 본부의 일을 수행하면서 위대한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달라마시아의 원시 체류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반(半)영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그들은 진화하는 이 필사자들에게 전체 영 세계의 구성요소였습니다.

66:4.12 (745.2) 3. The Caligastia one hundred were personally immortal, or undying. There circulated through their material forms the antidotal complements of the life currents of the system; and had they not lost contact with the life circuits through rebellion, they would have lived on indefinitely until the arrival of a subsequent Son of God, or until their sometime later release to resume the interrupted journey to Havona and Paradise. 칼리가스티아 100인은 개별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물질적 형태를 통해 체계에 속한 생명 흐름들의 해독(解毒) 보완물들이 순환되었으며 그들이 반란을 통해 생명 회로와 접촉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도착하기까지, 또는 중단되었던 하보나와 천국을 향한 여행을 회복해서 언젠가 그 후에 풀려날 때까지, 기한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66:4.13 (745.3) These antidotal complements of the Satania life currents were derived from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a shrub of Edentia which was sent to Urantia by the Most Highs of Norlatiadek at the time of Caligastia’s arrival. In the days of Dalamatia this tree grew in the central courtyard of the temple of the unseen Father, and it was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that enabled the material and otherwise mortal beings of the Prince’s staff to live on indefinitely as long as they had access to it. 사타니아 생명 흐름의 이 해독 보완물들은, 칼리가스티아가 도착할 때 놀라시아덱의 지고자가 지구(유란시아)에 보낸 에덴시아의 관목(灌木) 즉 생명나무의 열매에서 추출했습니다. 달라마시아의 시대에, 이 나무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성전 뜰 중앙에서 자랐으며, 왕자 참모진의 물질적 존재들과 다른 필사 존재들은 생명나무의 열매에 접근할 수 있는 한 기한 없이 계속 살 수 있었습니다.

66:4.14 (745.4) While of no value to the evolutionary races, this supersustenance was quite sufficient to confer continuous life upon the Caligastia one hundred and also upon the one hundred modified Andonites who were associated with them. 진화하는 종족들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칼리가스티아 100인들과 또한 그들과 관련되어 변형된 100인의 안돈-사람들은 이 초(超)영양분(營養分)에서 끊임없는 생명을 충분히 얻었습니다.

66:4.15 (745.5) It should be explained in this connection that, at the time the one hundred Andonites contributed their human germ plasm to the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the Life Carriers introduced into their mortal bodies the complement of the system circuits; and thus were they enabled to live on concurrently with the staff, century after century, in defiance of physical death. 이것과 관련해서, 100명의 안돈 사람들이 인간의 근원적 원형질을 왕자의 참모진 회원들에게 기증할 당시, 생명 운반자들이 그들의 필사 육체에 체계 회로의 보완물을 삽입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육체적 죽음과 무관하게 여러 세기 동안 참모진과 동시에 살 수 있었음이 설명되어져야만 합니다.

66:4.16 (745.6) Eventually the one hundred Andonites were made aware of their contribution to the new forms of their superiors, and these same one hundred children of the Andon tribes were kept at headquarters as the personal attendants of the Prince’s corporeal staff. 결국, 100명의 안돈 사람들은 상관들의 새로운 형태에 자신들이 기여했음을 알게 되었고, 바로 이 100명의 안돈 부족 자녀들은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의 개인 수행원으로 본부에 남아 있었습니다.

5. Organization of the One Hundred 100인의 조직

66:5.1 (745.7) The one hundred were organized for service in ten autonomous councils of ten members each. When two or more of these ten councils met in joint session, such liaison gatherings were presided over by Daligastia. These ten groups were constituted as follows: 100인들은 각각 1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자치 협의회를 구성하여 봉사하도록 조직되었습니다. 이 10인 협의회들 중 두 개 이상이 공동 회의로 모일 때, 그런 연결 회합들은 달리가스티아가 관장했습니다. 이 10인 집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66:5.2 (745.8) 1. The council on food and material welfare. This group was presided over by Ang. Food, water, clothes, and the material advancement of the human species were fostered by this able corps. They taught well digging, spring control, and irrigation. They taught those from the higher altitudes and from the north improved methods of treating skins for use as clothing, and weaving was later introduced by the teachers of art and science. 식량과 물질 복지 위원회. 이 집단은 앙이 관장(管掌)했습니다. 이 유능한 집단은 인류의 식품, 물, 의복, 그리고 물질적인 증진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물 파기, 샘물 통제, 그리고 관개(灌漑물 대는 일)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높은 고지(高地)와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가죽을 처리하여 의복으로 사용하는 개량된 방법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기술과 과학 선생들은 천 짜는 법을 소개했습니다

66:5.3 (746.1) Great advances were made in methods of food storage. Food was preserved by cooking, drying, and smoking; it thus became the earliest property. Man was taught to provide for the hazards of famine, which periodically decimated the world. 식품 저장법에서 큰 진보가 있었습니다. 식품은 익히고, 말리며, 그을려서 보존했습니다. 그래서 식품은 가장 최초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주기적으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굶주림의 위험을 대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66:5.4 (746.2) 2. The board of animal domestication and utilization. This council was dedicated to the task of selecting and breeding those animals best adapted to help human beings in bearing burdens and transporting themselves, to supply food, and later on to be of service in the cultivation of the soil. This able corps was directed by Bon. 동물 길들이기와 활용(活用)회(會). 이 위원회는 짐을 지며 자신들을 운송하는 인간 존재들을 돕고, 식품을 공급하며, 후에 땅을 경작하는 봉사에 가장 적합한 그 동물들을 선택하고 사육하는 임무에 전념했습니다. 유능한 이 대원들은 본이 지도했습니다.

66:5.5 (746.3) Several types of useful animals, now extinct, were tamed, together with some that have continued as domesticated animals to the present day. Man had long lived with the dog, and the blue man had already been successful in taming the elephant. The cow was so improved by careful breeding as to become a valuable source of food; butter and cheese became common articles of human diet. Men were taught to use oxen for burden bearing, but the horse was not domesticated until a later date. The members of this corps first taught men to use the wheel for the facilitation of traction. 오늘날까지 길들여진 동물로 계속해 온 어떤 것들과 함께, 지금은 멸종된 몇 종류의 유용한 동물들이 길들여졌습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개와 함께 살았고, 청인은 벌써 코끼리를 성공적으로 길들였습니다. 소는 가치 있는 식품 자원이 되도록 신중히 품종을 개량하여 향상시켰습니다. 버터와 치즈는 인간 식단에서 흔한 품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짐을 나르도록 소 이용법을 배웠지만, 말은 후대까지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무리의 회원들은 쉽게 끌어당기도록 바퀴 사용법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66:5.6 (746.4) It was in these days that carrier pigeons were first used, being taken on long journeys for the purpose of sending messages or calls for help. Bon’s group were successful in training the great fandors as passenger birds, but they became extinct more than thirty thousand years ago. 이 무렵에, 소식을 전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목적으로 먼 여행에 가지고 갔던 전서구(傳書鳩통신에 이용하는 훈련된 비둘기)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본의 집단은 여객용으로 거대한 환도르들을 성공적으로 훈련했지만, 그것들은 30,000년 훨씬 전에 멸종되었습니다.

66:5.7 (746.5) 3. The advisers regarding the conquest of predatory animals. It was not enough that early man should try to domesticate certain animals, but he must also learn how to protect himself from destruction by the remainder of the hostile animal world. This group was captained by Dan. 육식동물 정복에 대한 고문(顧問)들. 초기 사람은 특정한 동물들을 길들이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는 공격적인 동물 세계의 나머지 동물들로 인해 죽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이 집단은 단이 통솔했습니다.

66:5.8 (746.6) The purpose of an ancient city wall was to protect against ferocious beasts as well as to prevent surprise attacks by hostile humans. Those living without the walls and in the forest were dependent on tree dwellings, stone huts, and the maintenance of night fires. It was therefore very natural that these teachers should devote much time to instructing their pupils in the improvement of human dwellings. By employing improved techniques and by the use of traps, great progress was made in animal subjugation. 고대 도시 성벽의 목적은 적대적 인간들의 기습뿐만 아니라 사나운 짐승들에 대항해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벽이 없거나 숲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 위의 집, 바위 움막, 그리고 밤에 불 피워 놓는 것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생들은 제자들이 인간 거주지를 개선하도록 많은 시간을 바쳐 지도해야만 한 것은 아주 당연했습니다. 개선된 기법을 사용하고 덫을 이용해서, 동물 정복은 큰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66:5.9 (746.7) 4. The faculty on dissemination and conservation of knowledge. This group organized and directed the purely educational endeavors of those early ages. It was presided over by Fad. The educational methods of Fad consisted in supervision of employment accompanied by instruction in improved methods of labor. Fad formulated the first alphabet and introduced a writing system. This alphabet contained twenty-five characters. For writing material these early peoples utilized tree barks, clay tablets, stone slabs, a form of parchment made of hammered hides, and a crude form of paperlike material made from wasps’ nests. The Dalamatia library, destroyed soon after the Caligastia disaffection, comprised more than two million separate records and was known as the “house of Fad.” 지식 보급과 보존 교직원. 이 집단은 초기 그 시대의 순전한 교육적 노력을 조직하고 지도했습니다. 팟이 관장했습니다. 팟의 교육 방법은 개량된 노동 방법 훈련에 동반된 고용 관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팟은 첫 알파벳을 만들어 기록체계를 도입했습니다. 이 알파벳은 25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초기 사람들은, 글 쓰는 재료로 나무껍질과 진흙 판, 석판, 두드린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형태, 그리고 말벌 집으로 만든 어설픈 형태의 종이와 같은 물질을 이용했습니다. 달라마시아 도서관은 칼리가스티아의 이반(離反배반하고 떠남) 직후 파괴되었는데, 2백만 개 이상의 분리된 기록들로 구성되었고 “팟의 집”으로 알려졌습니다.

66:5.10 (746.8) The blue man was partial to alphabet writing and made the greatest progress along such lines. The red man preferred pictorial writing, while the yellow races drifted into the use of symbols for words and ideas, much like those they now employ. But the alphabet and much more was subsequently lost to the world during the confusion attendant upon rebellion. The Caligastia defection destroyed the hope of the world for a universal language, at least for untold ages. 청인은 알파벳 기록을 특히 좋아해서 그 방면으로 가장 크게 진보했습니다. 홍인은 그림 기록을 더 좋아한 반면에, 황인은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단어들과 관념을 나타내는 기호(記號) 사용으로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반란에 따른 혼란으로 나중에 알파벳과 훨씬 많은 것들이 세계에 분실되었습니다.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은, 적어도 무수히 긴 세월동안, 보편적 언어를 위한 세상의 희망을 파괴했습니다.

66:5.11 (747.1) 5. The commission on industry and trade. This council was employed in fostering industry within the tribes and in promoting trade between the various peace groups. Its leader was Nod. Every form of primitive manufacture was encouraged by this corps. They contributed directly to the elevation of standards of living by providing many new commodities to attract the fancy of primitive men. They greatly expanded the trade in the improved salt produced by the council on science and art. 산업과 무역 위원회. 이 위원회는 부족들 안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여러 평화로운 집단들 사이에서 무역을 증진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그 지도자는 놋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원시 제조업의 모든 형태를 권장했습니다. 원시인들의 상상력을 끄는 많은 새 상품들을 제공하여 생활의 질을 직접 고양하는 일에, 그들은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 위원회가 생산한 개선된 소금의 무역을 널리 확장했습니다.

66:5.12 (747.2) It was among these enlightened groups educated in the Dalamatia schools that the first commercial credit was practiced. From a central exchange of credits they secured tokens which were accepted in lieu of the actual objects of barter. The world did not improve upon these business methods for hundreds of thousands of years. 달라마시아 학교에서 교육받은 계몽된 이 집단 중에서 최초로 상업적 신용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중앙 신용 교환소에서, 실제 물건들을 교환하는 대신으로 인정된 토큰을 확보했습니다. 세계는 수 십 만년동안 이 매매방법을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66:5.13 (747.3) 6. The college of revealed religion. This body was slow in functioning. Urantia civilization was literally forged out between the anvil of necessity and the hammers of fear. But this group had made considerable progress in their attempt to substitute Creator fear for creature fear (ghost worship) before their labors were interrupted by the later confusion attendant upon the secession upheaval. The head of this council was Hap. 계시된 종교의 대학. 이 집단은 기능적으로 느리게 진행했습니다. 지구(유란시아)의 문명은 글자 그대로 필요성의 모루와 두려움의 망치 사이에서 연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룹은, 이탈(離脫)의 격변에 동반된 후대의 혼란으로 인해서 그들의 수고가 방해받기 전에 창조물의 두려움(귀신 숭배)을 창조자 경외심으로 치환하려는 시도에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이 위원회의 수장(首長)은 합이었습니다.

66:5.14 (747.4) None of the Prince’s staff would present revelation to complicate evolution; they presented revelation only as the climax of their exhaustion of the forces of evolution. But Hap did yield to the desire of the inhabitants of the city for the establishment of a form of religious service. His group provided the Dalamatians with the seven chants of worship and also gave them the daily praise-phrase and eventually taught them “the Father’s prayer,” which was: 왕자의 참모진 중 누구도 진화를 복잡하게 하는 계시를 나타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화의 기세가 고갈된 절정에서만 계시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합은 종교적 예배 형태를 설립하려는 도시 거주자들의 열망에 양보했습니다. 그의 그룹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에게 7개의 경배(敬拜)송(頌)을 제공했고, 또한 매일 찬양구절을 주었으며 결국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66:5.15 (747.5) “Father of all, whose Son we honor, look down upon us with favor. Deliver us from the fear of all save you. Make us a pleasure to our divine teachers and forever put truth on our lips. Deliver us from violence and anger; give us respect for our elders and that which belongs to our neighbors. Give us this season green pastures and fruitful flocks to gladden our hearts. We pray for the hastening of the coming of the promised uplifter, and we would do your will on this world as others do on worlds beyond.” “만유의 아버지여, 아들에게 우리가 영광을 돌리오니, 은혜로 우리를 굽어보소서. 당신 외에 모든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 신적 교사들에게 우리가 기쁨이 되게 하시고 언제나 우리 입술에 진리를 두소서. 폭력과 분노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 어른들을 공경하고 우리 이웃들에 속한 것을 존중하게 하소서. 이 계절에 우리 심정을 기쁘게 할 푸른 풀밭과 다산(多産)의 양떼를 주소서. 약속된 제고자(提高者, 향상시키는 지도자)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오며, 저 세상에서 타인들이 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66:5.16 (747.6) Although the Prince’s staff were limited to natural means and ordinary methods of race improvement, they held out the promise of the Adamic gift of a new race as the goal of subsequent evolutionary growth upon the attainment of the height of biologic development. 왕자의 참모진은 종족을 개량하는 자연적 수단들과 평범한 방법들에 제한되었지만, 생물학적 발전의 경지에 도달된 그 결과로 일어나는 진화적 성장의 목표로서 새 종족인 아담의-선물을 약속했습니다.

66:5.17 (747.7) 7. The guardians of health and life. This council was concerned with the introduction of sanitation and the promotion of primitive hygiene and was led by Lut. 건강과 생명의 수호자들. 이 위원회는 위생(衛生)을 소개하고 원시적 위생(衛生)건강법 증진에 관련시키는 일에 종사했으며, 룻이 이끌었습니다.

66:5.18 (747.8) Its members taught much that was lost during the confusion of subsequent ages, never to be rediscovered until the twentieth century. They taught mankind that cooking, boiling and roasting, was a means of avoiding sickness; also that such cooking greatly reduced infant mortality and facilitated early weaning. 그 회원들은 이후 시대의 혼란기에 소멸되어, 20세기까지 다시 발견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류에게 익히고, 끓이고, 굽는 것이 질병을 피하는 방법임을 가르쳤고, 또한 그런 요리법이 유아 사망을 크게 줄이고, 일찍 젖떼기를 돕는다고 가르쳤습니다.

66:5.19 (747.9) Many of the early teachings of Lut’s guardians of health persisted among the tribes of earth on down to the days of Moses, even though they became much garbled and were greatly changed. 룻의 건강 수호자들이 초기에 가르친 대부분이 많이 왜곡되고 크게 변경되었지만, 지상의 부족들 사이에서, 모세의 시절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66:5.20 (748.1) The great obstacle in the way of promoting hygiene among these ignorant peoples consisted in the fact that the real causes of many diseases were too small to be seen by the naked eye, and also because they all held fire in superstitious regard. It required thousands of years to persuade them to burn refuse. In the meantime they were urged to bury their decaying rubbish. The great sanitary advance of this epoch came from the dissemination of knowledge regarding the health-giving and disease-destroying properties of sunlight. 무지한 이 민족들 사이에서 위생을 증진하는 길에 놓인 큰 장애물은, 많은 질병 발생의 실제 원인들이 너무 작아서 맨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또한 그들은 모두 항상 미신적 관점으로 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쓰레기를 태우도록 설득하는 데 수 천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썩어가고 있는 쓰레기들을 땅에 파묻도록 권면을 받았습니다. 이 신(新)시대의 위대한 위생 진보는, 햇빛이 건강을 제공하고 질병을 없애는 특성이 있다는 지식이 보급되어 이루어졌습니다.

66:5.21 (748.2) Before the Prince’s arrival, bathing had been an exclusively religious ceremonial. It was indeed difficult to persuade primitive men to wash their bodies as a health practice. Lut finally induced the religious teachers to include cleansing with water as a part of the purification ceremonies to be practiced in connection with the noontime devotions, once a week, in the worship of the Father of all. 왕자가 도래하기 전, 목욕은 순전히 종교적 예식이었습니다. 원시인들에게 건강 관습으로써 몸을 씻으라고 설득하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룻은 마침내 종교 교사들이 물로 씻는 것을, 매주 한 번 만유의 아버지를 경배하는 정오 헌신과 관련하여 실행해야 할 정결 예식의 일부로 포함하도록 유도했습니다.

66:5.22 (748.3) These guardians of health also sought to introduce handshaking in substitution for saliva exchange or blood drinking as a seal of personal friendship and as a token of group loyalty. But when out from under the compelling pressure of the teachings of their superior leaders, these primitive peoples were not slow in reverting to their former health-destroying and disease-breeding practices of ignorance and superstition. 또한 이 건강 수호자들은 개인적 우정의 보증과 집단 충성 징조로 침을 교환하거나 피 시음 대신에 악수를 소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위 지도자들이 가르친 강압에서 벗어나자, 이 원시 민족들은 건강을 파괴하고 질병을 번식시키는 무지하고 미신적인 과거의 실행들로 신속히 되돌아갔습니다.

66:5.23 (748.4) 8. The planetary council on art and science. This corps did much to improve the industrial technique of early man and to elevate his concepts of beauty. Their leader was Mek. 예술과 과학 담당 행성 위원회. 이 무리들은 초기 인간의 산업 기법을 증진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의 고양(高揚향상)에 많은 기여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멕이었습니다.

66:5.24 (748.5) Art and science were at a low ebb throughout the world, but the rudiments of physics and chemistry were taught the Dalamatians. Pottery was advanced, decorative arts were all improved, and the ideals of human beauty were greatly enhanced. But music made little progress until after the arrival of the violet race. 예술과 과학은 세계 전역에서 쇠퇴기에 있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은 물리와 화학의 기본을 배웠습니다. 도기 제조법이 발달했고, 장식 미술이 모두 증진되었으며, 인간 아름다움의 이상(理想)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보라 종족이 출현하기까지 거의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66:5.25 (748.6) These primitive men would not consent to experiment with steam power, notwithstanding the repeated urgings of their teachers; never could they overcome their great fear of the explosive power of confined steam. They were, however, finally persuaded to work with metals and fire, although a piece of red-hot metal was a terrorizing object to early man. 이 원시인들은, 그들의 교사들이 거듭 재촉했지만, 증기력(蒸氣力) 실험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억압된 증기의 폭발력에 대한 큰 두려움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금속 조각이 초기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마침내 금속과 불로 일하도록 설득되었습니다.

66:5.26 (748.7) Mek did a great deal to advance the culture of the Andonites and to improve the art of the blue man. A blend of the blue man with the Andon stock produced an artistically gifted type, and many of them became master sculptors. They did not work in stone or marble, but their works of clay, hardened by baking, adorned the gardens of Dalamatia. 멕은 안돈-사람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청인의 예술을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청인과 안돈 혈통의 혼혈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유형들을 낳았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조각의 장인(匠人)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위나 대리석으로 일하지 않았지만, 불에 구워 단단해진 진흙 작품으로 달라마시아 동산을 장식했습니다.

66:5.27 (748.8) Great progress was made in the home arts, most of which were lost in the long and dark ages of rebellion, never to be rediscovered until modern times. 큰 진보는 가내(家內) 예술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긴 반역의 암흑기에 사라졌으며, 현대까지 결코 재(再)발견되지 않았습니다.

66:5.28 (748.9) 9. The governors of advanced tribal relations. This was the group intrusted with the work of bringing human society up to the level of statehood. Their chief was Tut. 증진된 부족 관계의 통치자들. 이 그룹은 인간 사회를 국가지위의 수준으로 향상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툿이었습니다.

66:5.29 (748.10) These leaders contributed much to bringing about intertribal marriages. They fostered courtship and marriage after due deliberation and full opportunity to become acquainted. The purely military war dances were refined and made to serve valuable social ends. Many competitive games were introduced, but these ancient folk were a serious people; little humor graced these early tribes. Few of these practices survived the subsequent disintegration of planetary insurrection. 이 지도자들은 부족 간에 결혼하도록 많이 기여했습니다. 그들은 적절히 숙고하고 잘 아는 사이가 되도록 충분한 기회를 가진 뒤에 구애하고 결혼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순수한 군사적 전쟁 무용(춤)들은 세련되게 다듬어져 가치 있는 사회적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사용되었습니다. 많은 경기 종목들이 소개되었지만, 고대의 이 사람들은 심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초기 이 부족들을 아름답게 꾸밀 유머는 거의 없었습니다. 행성 반란에 뒤따른 분열로 이 관행들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66:5.30 (749.1) Tut and his associates labored to promote group associations of a peaceful nature, to regulate and humanize warfare, to co-ordinate intertribal relations, and to improve tribal governments. In the vicinity of Dalamatia there developed a more advanced culture, and these improved social relations were very helpful in influencing more remote tribes. But the pattern of civilization prevailing at the Prince’s headquarters was quite different from the barbaric society evolving elsewhere, just as the twentieth-century society of Capetown, South Africa, is totally unlike the crude culture of the diminutive Bushmen to the north. 툿과 그의 동료들은, 평화로운 기질의 집단 관계를 증진하고, 전쟁을 규제하고 인간답게 만들며, 종족 간의 관계를 통합하고, 부족 정부를 개선하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달라마시아 근처에서 더 진보된 문화가 개발되었고, 개발된 이 사회적 관계들은 더 멀리 있는 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본부에서 압도적인 문명의 원본들은 다른 곳에서 진화하는 야만적 사회와는 아주 달랐는데, 마치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20세기 사회가 북쪽에 있는 왜소한 부시맨의 투박한 문화와 전적으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66:5.31 (749.2) 10. The supreme court of tribal co-ordination and racial co-operation. This supreme council was directed by Van and was the court of appeals for all of the other nine special commissions charged with the supervision of human affairs. This council was one of wide function, being intrusted with all matters of earthly concern which were not specifically assigned to the other groups. This selected corps had been approved by the Constellation Fathers of Edentia before they were authorized to assume the functions of the supreme court of Urantia. 부족의 통합-협동 및 종족의 협동 담당하는 대법원. 이 최고 위원회는 반이 지도했고, 인간사의 감독을 위탁받은 9개의 모두 다른 특별 위원회의 상소(上訴)를 맡은 법정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다른 집단들에게 특별히 배정되지 않은 이 세상의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맡고 있는, 폭넓은 기능의 위원회였습니다. 선택받은 이 집단은 지구(유란시아)의 대법원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인가받기 전에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들이 승인했습니다.

6. The Prince’s Reign 왕자의 통치

66:6.1 (749.3) The degree of a world’s culture is measured by the social heritage of its native beings, and the rate of cultural expansion is wholly determined by the ability of its inhabitants to comprehend new and advanced ideas. 세계의 문화 수준은 원주민들의 사회적 유산으로 측정되며, 그 문화의 확장 속도는 전적으로 거주자들이 새롭게 진보한 관념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결정됩니다.

66:6.2 (749.4) Slavery to tradition produces stability and co-operation by sentimentally linking the past with the present, but it likewise stifles initiative and enslaves the creative powers of the personality. The whole world was caught in the stalemate of tradition-bound mores when the Caligastia one hundred arrived and began the proclamation of the new gospel of individual initiative within the social groups of that day. But this beneficent rule was so soon interrupted that the races never have been wholly liberated from the slavery of custom; fashion still unduly dominates Urantia. 전통에 예속되면 과거와 현재를 정서적으로 연결하여 안정과 협동을 얻지만, 동시에 창의력을 억압하고 고유성이 지닌 창조적 권능을 노예로 만듭니다. 칼리가스티아 100인이 도착하여 당시 사회 그룹 안에서 개인적 창의력이라는 새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온 세계는 전통에-속박된 사회 관습의 교착(膠着진전이 없는)상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이 통치는 곧 바로 중단되어 종족들은 관습의 노예에서 온전히 해방된 적이 없었습니다. 관습이 여전히 지구(유란시아)를 부당하게 위압하고 있습니다.

66:6.3 (749.5) The Caligastia one hundred — graduates of the Satania mansion worlds — well knew the arts and culture of Jerusem, but such knowledge is nearly valueless on a barbaric planet populated by primitive humans. These wise beings knew better than to undertake the sudden transformation, or the en masse uplifting, of the primitive races of that day. They well understood the slow evolution of the human species, and they wisely refrained from any radical attempts at modifying man’s mode of life on earth. 칼리가스티아 100인─사타니아 저택세계 졸업생들─은 예루셈의 예술과 문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원시 인간들이 사는 미개한 행성에서 그런 지식은 거의 가치가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이 존재들은 느닷없는 변환이나 당시 원시 종족들의 일괄 향상에 착수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종족들의 느린 진화를 잘 이해했고, 지구에 사는 사람의 생활 방식을 변경하는 급진적 시도를 현명하게 억제했습니다.

66:6.4 (749.6) Each of the ten planetary commissions set about slowly and naturally to advance the interests intrusted to them. Their plan consisted in attracting the best minds of the surrounding tribes and, after training them, sending them back to their people as emissaries of social uplift. 10개의 행성 위원회 각각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관심사항들을 서서히 자연스럽게 증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주변 부족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여, 그들을 훈련시킨 후, 그들을 자기 민족에게 돌려보내서 사회적 향상의 증진을 일으키는 사자(使者부탁받은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66:6.5 (749.7) Foreign emissaries were never sent to a race except upon the specific request of that people. Those who labored for the uplift and advancement of a given tribe or race were always natives of that tribe or race. The one hundred would not attempt to impose the habits and mores of even a superior race upon another tribe. Always they patiently worked to uplift and advance the time-tried mores of each race. The simple folk of Urantia brought their social customs to Dalamatia, not to exchange them for new and better practices, but to have them uplifted by contact with a higher culture and by association with superior minds. The process was slow but very effectual. 그 민족이 특별히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외국 사자(使者)를 그 민족에게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부족이나 종족의 향상과 증진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언제나 그 부족이나 종족의 원주민이었습니다. 100인은 심지어 우수한 종족의 습관이나 사회관습을 다른 부족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오래 조성된 각 종족의 사회관습을 향상하고 증진하기 위해 끈기 있게 일했습니다. 단순한 지구(유란시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관습을 달라마시아로 가져왔는데, 새롭게 더 나은 관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등 문화와 접촉하고 우수한 마음을 지닌 자들과 관련되어 그것들을 향상시켰습니다. 그 과정은 느렸지만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66:6.6 (750.1) The Dalamatia teachers sought to add conscious social selection to the purely natural selection of biologic evolution. They did not derange human society, but they did markedly accelerate its normal and natural evolution. Their motive was progression by evolution and not revolution by revelation. The human race had spent ages in acquiring the little religion and morals it had, and these supermen knew better than to rob mankind of these few advances by the confusion and dismay which always result when enlightened and superior beings undertake to uplift the backward races by overteaching and overenlightenment. 달라마시아 교사들은 생물학적 진화의 순전한 자연적 선택에 의식적인 사회적 선택을 덧붙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았고, 그 사회의 정상적이며 자연적인 진화를 뚜렷하게 가속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진화에 의한 진보였으며 계시에 의한 변혁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종족은 그들이 갖고 있는 미미한 종교와 도덕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계몽된 우수한 존재들이 퇴보한 종족들을 과도한 교훈과 과도한 계몽으로 향상시키려고 할 때 그 결과로 반드시 생기는 혼란과 낙담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이러한 증진을 인류로부터 빼앗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 초인간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66:6.7 (750.2) When Christian missionaries go into the heart of Africa, where sons and daughters are supposed to remain under the control and direction of their parents throughout the lifetime of the parents, they only bring about confusion and the breakdown of all authority when they seek, in a single generation, to supplant this practice by teaching that these children should be free from all parental restraint after they have attained the age of twenty-one. 아프리카 중심부에서 자녀들은 부모 생전에 부모의 통제와 지도 가운데 있기로 되어 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기에 들어가, 자녀들이 21살이 된 후에는, 부모의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야만 된다고 가르쳐서, 한 세대 안에, 이 관습을 바꾸려고 하면, 그들은 혼란과 모든 권위의 붕괴만 가져올 뿐입니다.

7. Life in Dalamatia 달라마시아 생활

66:7.1 (750.3) The Prince’s headquarters, though exquisitely beautiful and designed to awe the primitive men of that age, was altogether modest. The buildings were not especially large as it was the motive of these imported teachers to encourage the eventual development of agriculture through the introduction of animal husbandry. The land provision within the city walls was sufficient to provide for pasturage and gardening for the support of a population of about twenty thousand. 왕자의 본부는 절묘히 아름답게 설계되어 당시 원시인들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전체적으로 수수했습니다. 이 외인(外人다른 곳에서 온)교사들의 목적은 동물 낙농법을 도입하여 그 결과로 인해 농업이 개발되도록 격려하는 것이므로 건물들은 특별히 크지 않았습니다. 도시 성벽 내부에 공급된 땅은 약 20,000명의 인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목초지와 정원을 제공했습니다.

66:7.2 (750.4) The interiors of the central temple of worship and the ten council mansions of the supervising groups of supermen were indeed beautiful works of art. And while the residential buildings were models of neatness and cleanliness, everything was very simple and altogether primitive in comparison with later-day developments. At this headquarters of culture no methods were employed which did not naturally belong on Urantia. 중앙의 경배하는 성전과 초(超)인간들로 구성된 10개 위원회 감독 집단들의 관저들 내부는 정말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거용 건물들은 산뜻하고 깔끔한 스타일이었지만, 뒤에 개발된 것들과 비교해서 모두 아주 단순했고 전체적으로 소박했습니다. 이 문화의 본부에는, 본래 지구(유란시아)에 속하지 않는 다른 방법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66:7.3 (750.5) The Prince’s corporeal staff presided over simple and exemplary abodes which they maintained as homes designed to inspire and favorably impress the student observers sojourning at the world’s social center and educational headquarters.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들은 단순하며 훌륭한 주거지들을 관장했는데, 그들은 세계적인 사회 중심지와 교육의 본부에 머물면서 학생 관찰자들에게 영감과 좋은 인상을 주도록 고안된 집으로 유지했습니다.

66:7.4 (750.6) The definite order of family life and the living of one family together in one residence of comparatively settled location date from these times of Dalamatia and were chiefly due to the example and teachings of the one hundred and their pupils. The home as a social unit never became a success until the supermen and superwomen of Dalamatia led mankind to love and plan for their grandchildren and their grandchildren’s children. Savage man loves his child, but civilized man loves also his grandchild. 가정생활의 뚜렷한 질서와 비교적 안정된 장소로 된 한 주거지에서 한 가족이 같이 사는 것은 달라마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로 그 100인과 그들의 학생들의 모범과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정은, 달라마시아 초인간적 남자와 여자들이 인간들을 지도하여 그들이 자기 손자들과 그 손자들의 자손들을 사랑하고 계획하도록 이끌 때까지,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미개인은 자녀를 사랑하지만, 문명인은 손자와 손녀들 역시 사랑합니다.

66:7.5 (750.7) The Prince’s staff lived together as fathers and mothers. True, they had no children of their own, but the fifty pattern homes of Dalamatia never sheltered less than five hundred adopted little ones assembled from the superior families of the Andonic and Sangik races; many of these children were orphans. They were favored with the discipline and training of these superparents; and then, after three years in the schools of the Prince (they entered from thirteen to fifteen), they were eligible for marriage and ready to receive their commissions as emissaries of the Prince to the needy tribes of their respective races. 왕자의 참모진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함께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직계 자녀들은 없었지만, 달라마시아에서 모델이 된 50 가정들은, 안돈과 산긱 종족들의 우월한 가정들로부터 모여 입양된 500명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호했는데, 이 아이들 대부분은 고아였습니다. 그들은 이 초인 부모들의 훈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그 후 왕자의 학교들에서 3년 과정(13세에서 15세 사이에 입학함)을 마친 후, 그들은 결혼 자격을 갖추고, 그들 각 인종들 중 필요한 부족들에게 왕자의 사자(使者)로서 임명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66:7.6 (751.1) Fad sponsored the Dalamatia plan of teaching that was carried out as an industrial school in which the pupils learned by doing, and through which they worked their way by the daily performance of useful tasks. This plan of education did not ignore thinking and feeling in the development of character; but it gave first place to manual training. The instruction was individual and collective. The pupils were taught by both men and women and by the two acting conjointly. One half of this group instruction was by sexes; the other half was coeducational. Students were taught manual dexterity as individuals and were socialized in groups or classes. They were trained to fraternize with younger groups, older groups, and adults, as well as to do teamwork with those of their own ages. They were also familiarized with such associations as family groups, play squads, and school classes. 팟은 학생들이 실습으로 배워서, 그것을 통해 매일 유익한 과제들을 실행하여 자신들의 방법대로 일했던 산업학교를 운영했던 달라마시아 교육 계획을 후원했습니다. 이 교육 계획은 성품 개발에 있어서 사고(思考)와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드는 훈련을 첫 번째 자리에 두었습니다. 훈련은 개인적이며 집단적이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그리고 남녀가 공동으로 행함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그룹 훈련의 절반(半)은 성별로 진행했고, 나머지 절반은 남녀공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개인별로 수공(手工)기술을 배웠고 그룹이나 학급 단위로 학습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또래와 팀워크(협동작업)만이 아니라 연하의 그룹들, 연상의 그룹들 및 어른들과 친하게 사귀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가족 그룹들, 놀이 소그룹들, 및 학교 학급들 같은 그런 교제도 익숙해졌습니다.

66:7.7 (751.2) Among the later students trained in Mesopotamia for work with their respective races were Andonites from the highlands of western India together with representatives of the red men and the blue men; still later a small number of the yellow race were also received. 각 종족들과 함께 일하도록 메소포타미아에서 훈련받은 나중의 학생들 중에 서부 인도의 고지대 출신 안돈-사람들이 있었고 홍인들과 청인들의 대표들도 있었습니다. 더 나중에는 소수의 황인종들도 받아들였습니다.

66:7.8 (751.3) Hap presented the early races with a moral law. This code was known as “The Father’s Way” and consisted of the following seven commands: 합은 초기 인종들에게 도덕률을 제시했습니다. 이 법전은 “아버지의 길(道)”이라고 알려졌는데 다음의 7계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66:7.9 (751.4) 1. You shall not fear nor serve any God but the Father of all. 만유의 아버지 외에 어떤 하나님도 경외하거나 섬기지 말라.

66:7.10 (751.5) 2. You shall not disobey the Father’s Son, the world’s ruler, nor show disrespect to his superhuman associates. 세계의 통치자이신, 아버지의 아들을 거역하지 말고, 그의 초인간 동료들을 존중하라.

66:7.11 (751.6) 3. You shall not speak a lie when called before the judges of the people. 사람들의 재판관 앞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거짓말하지 말라.

66:7.12 (751.7) 4. You shall not kill men, women, or children. 남자, 여자 및 어린이들을 죽이지 말라.

66:7.13 (751.8) 5. You shall not steal your neighbor’s goods or cattle. 이웃의 물건이나 가축을 도둑질하지 말라.

66:7.14 (751.9) 6. You shall not touch your friend’s wife. 네 친구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

66:7.15 (751.10) 7. You shall not show disrespect to your parents or to the elders of the tribe. 너희 부모와 부족 어른들을 존경심이 없는 태도를 보이지 말라.

66:7.16 (751.11) This was the law of Dalamatia for almost three hundred thousand years. And many of the stones on which this law was inscribed now lie beneath the waters off the shores of Mesopotamia and Persia. It became the custom to hold one of these commands in mind for each day of the week, using it for salutations and mealtime thanksgiving. 이것은 거의 300,000년 동안 달라마시아의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이 새겨진 여러 돌들이 지금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의 해안가에서 떨어져 있는 바다 밑에 묻혀 있습니다. 주 중 매일 이 계명들 중 하나를 마음에 새겨 인사할 때와 식사시간의 감사에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66:7.17 (751.12) The time measurement of these days was the lunar month, this period being reckoned as twenty-eight days. That, with the exception of day and night, was the only time reckoning known to the early peoples. The seven-day week was introduced by the Dalamatia teachers and grew out of the fact that seven was one fourth of twenty-eight. The significance of the number seven in the superuniverse undoubtedly afforded them opportunity to introduce a spiritual reminder into the common reckoning of time. But there is no natural origin for the weekly period. 이 당시 시간 측정은 태음월(太陰月음력 한 달)이었고, 이 기간은 28일로 계산했습니다. 낮과 밤을 제외한 이것만이 초기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간 계산이었습니다. 7일의 한 주간을 달라마시아 교사들이 소개했으며, 7일이 28일의 4분의 1이라는 사실에서 싹텄습니다. 초(超)우주에서 숫자7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일반적인 시간 계산에 영적 암시를 도입하도록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즉 1주일의 기간은 자연적으로 기원된 것이 아닙니다.

66:7.18 (751.13) The country around the city was quite well settled within a radius of one hundred miles. Immediately surrounding the city, hundreds of graduates of the Prince’s schools engaged in animal husbandry and otherwise carried out the instruction they had received from his staff and their numerous human helpers. A few engaged in agriculture and horticulture. 그 도시 주위의 지방은 반경 100마일(160km)까지 아주 잘 정착되었습니다. 그 도시 인접 둘레에서 왕자의 학교들을 졸업한 수백 명이 동물 낙농업에 종사했고, 다른 사람들은 왕자의 참모진과 수많은 인간 조력자들에게서 받아들였던 내용들을 실행했습니다. 몇 명은 농사와 원예에 종사했습니다.

66:7.19 (751.14) Mankind was not consigned to agricultural toil as the penalty of supposed sin. “In the sweat of your face shall you eat the fruit of the fields” was not a sentence of punishment pronounced because of man’s participation in the follies of the Lucifer rebellion under the leadership of the traitorous Caligastia. The cultivation of the soil is inherent in the establishment of an advancing civilization on the evolutionary worlds, and this injunction was the center of all teaching of the Planetary Prince and his staff throughout the three hundred thousand years which intervened between their arrival on Urantia and those tragic days when Caligastia threw in his lot with the rebel Lucifer. Work with the soil is not a curse; rather is it the highest blessing to all who are thus permitted to enjoy the most human of all human activities. 인류는 죄로 여겨진 것에 대한 형벌로 농사하는 수고에 할당되지 않았습니다. “너희 얼굴에 땀을 흘려야 들의 열매를 먹게 되리라.”는 반역자 칼리가스티아의 지도 밑에서 사람이 어리석은 루시퍼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선고된 징벌의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경작은 진화 세계에서 진보하는 문명의 설립에 본래적인 것이며, 이 명령은 행성 왕자와 그의 참모진이 지구(유란시아)에 도착한 때와 칼리가스티아가 반역자 루시퍼와 함께 하기로 운명을 던졌던 그 비극적인 시대 사이에 있었던 300,000년 내내, 그들이 준 모든 교훈의 핵심이었습니다. 흙으로 하는 일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인간의 활동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그렇게 누리도록 허용된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66:7.20 (752.1) At the outbreak of the rebellion, Dalamatia had a resident population of almost six thousand. This number includes the regular students but does not embrace the visitors and observers, who always numbered more than one thousand. But you can have little or no concept of the marvelous progress of those faraway times; practically all of the wonderful human gains of those days were wiped out by the horrible confusion and abject spiritual darkness which followed the Caligastia catastrophe of deception and sedition. 반역이 발발하였을 때, 달라마시아에는 거의 6,000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숫자 속에는 정규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항상 1,000명 이상의 숫자를 유지하는 방문자들과 관찰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 먼 옛날 시대에 있었던 믿기 어려운 진보에 대한 개념을 거의 또는 전혀 가질 수 없으며; 그 당시에 훌륭한 인간들이 획득하였던 모든 것들은, 속임수와 선동으로 점철된 칼리가스티아 파멸 이후에 따라왔던 비천한 영적 암흑기와 끔찍스러운 혼란에 의해서 실천적으로 사라졌습니다.

8. Misfortunes of Caligastia 칼리가스티아의 불행

66:8.1 (752.2) In looking back over the long career of Caligastia, we find only one outstanding feature of his conduct that might have challenged attention; he was ultraindividualistic. He was inclined to take sides with almost every party of protest, and he was usually sympathetic with those who gave mild expression to implied criticism. We detect the early appearance of this tendency to be restless under authority, to mildly resent all forms of supervision. While slightly resentful of senior counsel and somewhat restive under superior authority, nonetheless, whenever a test had come, he had always proved loyal to the universe rulers and obedient to the mandates of the Constellation Fathers. No real fault was ever found in him up to the time of his shameful betrayal of Urantia. 칼리가스티아의 긴 생애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의 행위에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오직 한 가지 현저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항의집단의 편을 드는 경향이 있었고, 암시적 비평을 은근히 표현하는 자들에게 보통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권한 아래에서 불안해하고, 모든 형태의 감독에 완곡히 분개하는 이 경향의 현상을 초기에 간파했습니다. 선임자의 조언에 약간 분개하고, 상관의 권위 아래에서 다소 반항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시행될 때마다, 그는 항상 우주 통치자들에게 충성을 증명했고 별자리 아버지들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지구(유란시아)에서 그의 부끄러운 배반의 때까지 어떤 실제적 과실도 결코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66:8.2 (752.3) It should be noted that both Lucifer and Caligastia had been patiently instructed and lovingly warned respecting their critical tendencies and the subtle development of their pride of self and its associated exaggeration of the feeling of self-importance. But all of these attempts to help had been misconstrued as unwarranted criticism and as unjustified interference with personal liberties. Both Caligastia and Lucifer judged their friendly advisers as being actuated by the very reprehensible motives which were beginning to dominate their own distorted thinking and misguided planning. They judged their unselfish advisers by their own evolving selfishness.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 둘 다, 그들의 비판적 경향과 미묘하게 개발된 자기 자랑과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 중요시하는 과대 감정에 대해, 참을성 있게 지도를 받고 애정으로 경고를 받아왔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도우려는 이런 모든 시도들이 근거 없는 비판과 개인적 자유를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해왔습니다.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둘 다, 자신들의 친절한 충고자들이, 자신들의 왜곡된 생각과 잘못된 계획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아주 괘씸한 동기(動機)들로 행동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하는 이기심으로, 사심-없는 충고자들을 판단했습니다.

66:8.3 (752.4) From the arrival of Prince Caligastia, planetary civilization progressed in a fairly normal manner for almost three hundred thousand years. Aside from being a life-modification sphere and therefore subject to numerous irregularities and unusual episodes of evolutionary fluctuation, Urantia progressed very satisfactorily in its planetary career up to the times of the Lucifer rebellion and the concurrent Caligastia betrayal. All subsequent history has been definitely modified by this catastrophic blunder as well as by the later failure of Adam and Eve to fulfill their planetary mission. 칼리가스티아 왕자가 도착한 후, 행성 문명은 거의 300,000년 동안 상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진보했습니다. 생명-변형의 구체로, 그로 인해 수많은 변칙들과 진화적 불안정의 특이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루시퍼의 반란과 동시에 발생한 칼리가스티아 배반의 시대까지, 지구(유란시아)는 그 행성 경력에 있어서 매우 만족스럽게 진보했습니다. 이후 모든 역사는 나중에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의 행성 사명 성취를 실패한 것과 이 비극적 대(大)실책(失策)으로 명백히 변경되었습니다.

66:8.4 (752.5) The Prince of Urantia went into darkness at the time of the Lucifer rebellion, thus precipitating the long confusion of the planet. He was subsequently deprived of sovereign authority by the co-ordinate action of the constellation rulers and other universe authorities. He shared the inevitable vicissitudes of isolated Urantia down to the time of Adam’s sojourn on the planet and contributed something to the miscarriage of the plan to uplift the mortal races through the infusion of the lifeblood of the new violet race — the descendants of Adam and Eve. 지구(유란시아)의 왕자는 루시퍼 반란 당시 어두움에 빠졌으며 그래서 행성은 갑자기 오랜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별자리 통치자들의 통합-협동 행위와 다른 우주 권세들로 인해 주권적 권위를 빼앗겼습니다. 그는 아담이 행성에 머무르던 시대까지 고립된 지구(유란시아)의 필연적인 흥망(興亡)을 함께 나누었고, 새로운 보라 인종 –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 –의 생혈(生血활력의 근원)의 주입으로 필사 종족들을 향상하는 계획이 실패하도록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66:8.5 (753.1) The power of the fallen Prince to disturb human affairs was enormously curtailed by the mortal incarnation of Machiventa Melchizedek in the days of Abraham; and subsequently, during the life of Michael in the flesh, this traitorous Prince was finally shorn of all authority on Urantia. 인간들의 일들을 어지럽히는 타락한 왕자의 권능은 아브라함 당시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필사자 육신(成育)화로 막대하게 박탈되었습니다. 나중에 미가엘의 육신생애기간에 이 배반한 왕자는 지구(유란시아)에서 모든 권세를 최종적으로 빼앗겼습니다.

66:8.6 (753.2) The doctrine of a personal devil on Urantia, though it had some foundation in the planetary presence of the traitorous and iniquitous Caligastia, was nevertheless wholly fictitious in its teachings that such a “devil” could influence the normal human mind against its free and natural choosing. Even before Michael’s bestowal on Urantia, neither Caligastia nor Daligastia was ever able to oppress mortals or to coerce any normal individual into doing anything against the human will. The free will of man is supreme in moral affairs; even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refuses to compel man to think a single thought or to perform a single act against the choosing of man’s own will. 지구(유란시아)에 있는 고유적 마귀 교리는, 배반하고 사악한 칼리가스티아의 행성 현존에 얼마의 근거가 있지만, 그런 “마귀”가 정상적 인간 마음이 지닌 자유로우며 자연적인 선택에 거슬러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르침은 완전히 허구(가짜)입니다. 미가엘의 지구(유란시아) 증여 전에도, 칼리가스티아나 달리가스티아는 결코 필사자들을 억압하거나 정상 개인들이 인간의 의지를 거슬러 어떤 것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자유 의지는 도덕적 일에 최극입니다. 내주하는 생각 조율자도 사람 자신의 선택적 의지를 거슬러 단 하나의 생각을 하거나 단 하나의 행동을 행하도록 강요하기를 거절하십니다.

66:8.7 (753.3) And now this rebel of the realm, shorn of all power to harm his former subjects, awaits the final adjudication, by the Uversa Ancients of Days, of all who participated in the Lucifer rebellion. 그리고 지금 영역의 이 반역자는 자신의 옛 수하들을 해(害)칠 모든 권능을 빼앗긴 채, 루시퍼 반란에 참여했던 모든 자들에게 선고(宣告)할 유버르사의 옛적으로 늘 계신 이들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6:8.8 (753.4) [Presented by a Melchizedek of Nebadon.][네바돈의 멜기세덱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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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1 The Eternal Isle of Paradise 천국의 영원한 섬

Paper 11

The Eternal Isle of Paradise 천국의 영원한 섬

  1. The Divine Residence 신적 거주지
  2. Nature of the Eternal Isle 영원 섬의 본질
  3. Upper Paradise 상부 천국
  4. Peripheral Paradise 주변 천국
  5. Nether Paradise 하부 천국
  6. Space Respiration 공간 호흡 작용
    Unpervaded space 비(非)침투(浸透) 공간
  7. Space Functions of Paradise 천국의 공간 기능들
    Midspace zones 중간-공간 지대들
  8. Paradise Gravity 천국 중력
    Force, energy, power 힘, 에너지, 동력
  9. The Uniqueness of Paradise 천국의 독특성

11:0.1 (118.1) PARADISE is the eternal center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e abiding place of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the Infinite Spirit, and their divine co-ordinates and associates. This central Isle is the most gigantic organized body of cosmic reality in all the master universe. Paradise is a material sphere as well as a spiritual abode. All of the intelligent creation of the Universal Father is domiciled on material abodes; hence must the absolute controlling center also be material, literal. And again it should be reiterated that spirit things and spiritual beings are real. 천국은 우주들의 우주의 영원한 중심이며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과 무한 영과 그들의 신적 통합-협동자들 및 동료들이 거주하는 장소입니다. 이 중앙 섬은 주(主)우주 전체에서 질서우주 실체 중 가장 거대하게 조직된 몸체입니다. 천국은 영적 거주지이면서 물질적 구체입니다. 우주 아버지의 모든 지능적 창조는 물질적 거주지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 조정 중심 또한 글자 그대로 물질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한 영 사물들과 영적 존재들이 실제임을 다시 반복해야만 합니다.

11:0.2 (118.2) The material beauty of Paradise consists in the magnificence of its physical perfection; the grandeur of the Isle of God is exhibited in the superb intellectual accomplishments and mind development of its inhabitants; the glory of the central Isle is shown forth in the infinite endowment of divine spirit personality — the light of life. But the depths of the spiritual beauty and the wonders of this magnificent ensemble are utterly beyond the comprehension of the finite mind of material creatures. The glory and spiritual splendor of the divine abode are impossible of mortal comprehension. And Paradise is from eternity; there are neither records nor traditions respecting the origin of this nuclear Isle of Light and Life. 천국의 물질적 아름다움은 그 물리적 완전의 장엄함에 있습니다. 하나님 섬의 웅대함은 그 주민들의 장려한 지적 성취들과 마음의 발전에서 나타납니다. 중앙 섬의 영광은 신적 영 고유성 – 생명의 빛 -의 무한한 자질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영적(靈的) 아름다움의 깊이와 이 장엄한 총체의 경이로움은 물질적 창조물들의 유한한 마음의 이해력을 철저히 넘어섭니다. 신적 거주지의 영광과 영적 광채는 필사자가 이해하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천국은 영원으로부터 있습니다. 빛과 생명의 이 핵심이 되는 섬의 기원에 관해서는 기록도 없고 전통도 없습니다.

1. The Divine Residence 신적 거주지

11:1.1 (118.3) Paradise serves many purposes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al realms, but to creature beings it exists primarily as the dwelling place of Deity. The personal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is resident at the very center of the upper surface of this well-nigh circular, but not spherical, abode of the Deities. This Paradise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is immediately surrounded by the personal presence of the Eternal Son, while they are both invested by the unspeakable glory of the Infinite Spirit. 천국은 우주 영역의 경영에서 여러 목적에 봉사하지만, 그것은 창조물 존재들에게 원래 신(神)의 거주 장소로 존재합니다. 우주 아버지의 개인적 현존은, 거의 원형이지만 구형(求刑)은 아닌 이 신들의 거주지 위쪽 표면 정중앙에 거주하십니다. 우주 아버지의 이 천국 현존은 바로 가까이 영원 아들의 개인적 현존이 둘러싸고 있으며, 두 분 모두 무한 영의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11:1.2 (118.4) God dwells, has dwelt, and everlastingly will dwell in this same central and eternal abode. We have always found him there and always will. The Universal Father is cosmically focalized, spiritually personalized, and geographically resident at this center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하나님은 바로 이 중앙 영원 거처에 거하시며, 거했고, 또 영구히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항상 그를 발견해 왔고 항상 그럴 것입니다. 우주 아버지는 (질서) 우주적으로 집중되어 있고, 영적으로 개인(고유)화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 우주들의 우주의 이 중심에 거주하십니다.

11:1.3 (118.5) We all know the direct course to pursue to find the Universal Father. You are not able to comprehend much about the divine residence because of its remoteness from you and the immensity of the intervening space, but those who are able to comprehend the meaning of these enormous distances know God’s location and residence just as certainly and literally as you know the location of New York, London, Rome, or Singapore, cities definitely and geographically located on Urantia. If you were an intelligent navigator, equipped with ship, maps, and compass, you could readily find these cities. Likewise, if you had the time and means of passage, were spiritually qualified, and had the necessary guidance, you could be piloted through universe upon universe and from circuit to circuit, ever journeying inward through the starry realms, until at last you would stand before the central shining of the spiritual glory of the Universal Father. Provided with all the necessities for the journey, it is just as possible to find the personal presence of God at the center of all things as to find distant cities on your own planet. That you have not visited these places in no way disproves their reality or actual existence. That so few of the universe creatures have found God on Paradise in no way disproves either the reality of his existence or the actuality of his spiritual person at the center of all things. 우리는 모두 우주 아버지를 찾으려고 추적하는 직선 경로를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신적 거처가 너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있는 광대한 공간 때문에 그 처소에 대해 많이 이해할 수 없지만, 이 거대한 간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마치 너희가 지구(유란시아)에 명확히 지리적으로 위치한 도시들, 뉴욕, 런던, 로마, 또는 싱가포르의 위치를 확실히 글자대로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위치와 거주지를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배와 지도 그리고 나침반을 갖춘 총명한 항해자라면, 너희는 즉시 이 도시들을 찾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희가 시간과 항해의 수단을 갖고, 영적으로 자격이 있으며, 필요한 안내를 받는다면, 너희는 우주들 위에 있는 우주들을 통과하고, 회로에서 회로로, 수많은 별들의 영역들을 거쳐 계속 안쪽으로 여행한 후, 마침내 너희는 우주 아버지의 영적 영광이 빛나는 중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행을 위한 필수품이 모두 마련되면, 너희 자신의 행성에서 먼 도시들을 찾는 것과 똑같이, 만물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개인적 현존을 찾을 수 있다. 네가 이 장소들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그 장소들의 실체 또는 실재의 존재성을 결코 반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하나님을 찾은 우주 창조물들이 그렇게 적은 숫자여도, 만물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이 실존하는 실체성이나 영적 개인의 실재성을 결코 반증하지 않습니다.

11:1.4 (119.1) The Father is always to be found at this central location. Did he move, universal pandemonium would be precipitated, for there converge in him at this residential center the universal lines of gravity from the ends of creation. Whether we trace the personality circuit back through the universes or follow the ascending personalities as they journey inward to the Father; whether we trace the lines of material gravity to nether Paradise or follow the insurging cycles of cosmic force; whether we trace the lines of spiritual gravity to the Eternal Son or follow the inward processional of the Paradise Sons of God; whether we trace out the mind circuits or follow the trillions upon trillions of celestial beings who spring from the Infinite Spirit — by any of these observations or by all of them we are led directly back to the Father’s presence, to his central abode. Here is God personally, literally, and actually present. And from his infinite being there flow the flood-streams of life, energy, and personality to all universes. 아버지는 이 중앙 위치에서 항상 발견되십니다. 그가 이동하셨다면 우주적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의 끝에서부터 우주의 중력선(重力線)들이 이 거주지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 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주들을 통하여 고유성 회로를 거슬러 추적하거나 아버지를 향해 안쪽으로 여행하면서 상승하는 고유성들을 따르든지; 우리가 아래 천국으로 물질 중력선(重力線)들을 추적하거나 질서우주 기세의 밀려오는 순환기를 따르든지; 영원 아들을 향한 영적 중력선을 추적하거나 하나님의 천국 아들들의 안쪽을 향한 행렬을 따르든지; 우리가 마음 회로들을 추적하든지 무한 영에서 솟아나온 수(數) 조(兆)의 천상의 존재들을 따르든지 – 이들 중 어떤 관측이나 모두에 의해, 우리는 아버지의 현존, 그의 중앙 거주지로 직접 이끌립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문자적으로, 실제로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무한 존재로부터 모든 우주로, 생명, 에너지 그리고 고유성이 홍수의 물줄기로 흘러나갑니다.

2. Nature of the Eternal Isle 영원한 섬의 본질

11:2.1 (119.2) Since you are beginning to glimpse the enormousness of the material universe discernible even from your astronomical location, your space position in the starry systems, it should become evident to you that such a tremendous material universe must have an adequate and worthy capital, a headquarters commensurate with the dignity and infinitude of the universal Ruler of all this vast and far-flung creation of material realms and living beings. 너희가 너희 천문학적 위치, 별이 많은 체계에 있는 너의 공간 위치에서도 물질 우주의 거대함을 희미하게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물질 우주는, 적절하고 알맞은 수도(首都), 물질적 영역과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이 모든 광대하고 광범위한 창조의 우주 통치자가 지닌 존엄과 무한에 상응(相應)하는 본부를 소유해야만 함이 너희에게 명백할 것입니다.

11:2.2 (119.3) In form Paradise differs from the inhabited space bodies: it is not spherical. It is definitely ellipsoid, being one-sixth longer in the north-south diameter than in the east-west diameter. The central Isle is essentially flat, and the distance from the upper surface to the nether surface is one tenth that of the east-west diameter. 천국의 형태는 사람이 사는 공간체와 달리, 둥글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타원체이며, 남북 직경은 동서 직경보다 길이가 1/6 더 깁니다. 중앙 섬은 본질상 편평하며, 윗면에서 아랫면까지 거리는 동서 직경 거리의 1/10입니다.

11:2.3 (119.4) These differences in dimensions, taken in connection with its stationary status and the greater out-pressure of force-energy at the north end of the Isle, make it possible to establish absolute direction in the master universe. 이 치수들의 차이는, 천국의 고정된 상태와 그 섬의 북쪽 끝에 있는 기세-에너지의 더 큰 외향-압력과 관련해서, 주(主)우주에서 절대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합니다.

11:2.4 (119.5) The central Isle is geographically divided into three domains of activity: 중앙 섬은 지리적으로 세 활동 영역으로 나뉩니다.

11:2.5 (119.6) 1. Upper Paradise. 상부 천국

11:2.6 (119.7) 2. Peripheral Paradise. 주변 천국

11:2.7 (119.8) 3. Nether Paradise. 하부 천국

11:2.8 (119.9) We speak of that surface of Paradise which is occupied with personality activities as the upper side, and the opposite surface as the nether side. The periphery of Paradise provides for activities that are not strictly personal or nonpersonal. The Trinity seems to dominate the personal or upper plane, the Unqualified Absolute the nether or impersonal plane. We hardly conceiv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as a person, but we do think of the functional space presence of this Absolute as focalized on nether Paradise. 우리는 고유성 활동이 차지하는 천국의 표면을 상부, 반대면을 하부라고 부릅니다. 천국의 주변은 엄밀하게 고유적이지 않거나 비(非)고유적 활동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고유적, 즉 윗면을 다스리시고,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는 아랫면 즉 비(非)고유적 면을 다스리시는 듯합니다. 우리는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를 조금도 개인으로 이해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절대자의 기능적 공간 현존이 하부 천국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1:2.9 (120.1) The eternal Isle is composed of a single form of materialization — stationary systems of reality. This literal substance of Paradise is a homogeneous organization of space potency not to be found elsewhere in all the wide universe of universes. It has received many names in different universes, and the Melchizedeks of Nebadon long since named it absolutum. This Paradise source material is neither dead nor alive; it is the original nonspiritual expression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t is Paradise, and Paradise is without duplicate. 영원한 섬은 단일 형태의 물질화 – 실체의 고정된 체계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이 엄밀한 물질은 넓은 우주들의 모든 우주 다른데서 발견되지 않는 공간 잠재력의 동질 조직입니다. 그것은 다른 우주들에서 여러 이름들을 받았는데,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절대소(絶對素)라고 불렀습니다. 이 천국의 근본 물질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근원적인 비(非)영적 표현입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복제품이 없습니다.

11:2.10 (120.2) It appears to us that the First Source and Center has concentrated all absolute potential for cosmic reality in Paradise as a part of his technique of self-liberation from infinity limitations, as a means of making possible subinfinite, even time-space, creation. But it does not follow that Paradise is time-space limited just because the universe of universes discloses these qualities. Paradise exists without time and has no location in space. 우리에게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무한성 한계에서 자아-해방 기법의 일부로써, 하위-무한, 즉 시간-공간, 창조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써, 천국에 있는 질서우주 실체를 위해 모든 절대 잠재성에 집중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들의 우주가 이 본질(시공의 제한을 받는)을 드러내기 때문에, 천국이 시간-공간의 제한을 받는다고 이해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시간 없이 존재하고, 공간에도 위치가 없습니다.

11:2.11 (120.3) Roughly: space seemingly originates just below nether Paradise; time just above upper Paradise. Time, as you understand it, is not a feature of Paradise existence, though the citizens of the central Isle are fully conscious of nontime sequence of events. Motion is not inherent on Paradise; it is volitional. But the concept of distance, even absolute distance, has very much meaning as it may be applied to relative locations on Paradise. Paradise is nonspatial; hence its areas are absolute and therefore serviceable in many ways beyond the concept of mortal mind. 대략: 공간은 겉으로 볼 때, 하부 천국 바로 밑에서 시작되고, 시간은 상부 천국 바로 위에서 시작됩니다. 중앙 섬의 시민들은 사건들의 시간 없는 순차를 충분하게 의식한다고 해도, 너희가 이해하는 것처럼 시간은 천국 실존의 특성이 아닙니다. 움직임은 천국에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의지적입니다. 그러나 거리의 개념은, 절대 거리조차, 천국에서 상대적 위치들에 적용될 수 있듯이, 매우 많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은 비(非)공간적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지역들은 절대적이고 따라서 필사자 마음의 개념을 초월하여 많은 점에서 유용합니다.

3. Upper Paradise 상부 천국

11:3.1 (120.4) On upper Paradise there are three grand spheres of activity, the Deity presence, the Most Holy Sphere, and the Holy Area. The vast region immediately surrounding the presence of the Deities is set aside as the Most Holy Sphere and is reserved for the functions of worship, trinitization, and high spiritual attainment. There are no material structures nor purely intellectual creations in this zone; they could not exist there. It is useless for me to undertake to portray to the human mind the divine nature and the beauteous grandeur of the Most Holy Sphere of Paradise. This realm is wholly spiritual, and you are almost wholly material. A purely spiritual reality is, to a purely material being, apparently nonexistent. 상부 천국에는 광대한 세 활동구체들, 신(神) 현존, 최고 거룩 구체, 그리고 거룩 지대가 있습니다. 즉시 신(神)들의 현존 주위의 광대한 지역은 최고 거룩 구체로서 곁에 있고, 경배, 삼위일체화, 그리고 높은 영적 달성의 기능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지대에는 물질 구조물도 없고 순수하게 지적인 창조계들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최고 거룩 구체의 신적 본성과 황홀하게 아름다운 웅장함을 인간 마음에 묘사하려는 내 시도는 헛된 일입니다. 이 영역은 전부 영적이고, 너희는 거의 전부 물질적이다. 순수하게 영적인 실체는, 순수하게 물질적인 존재에게, 외관상 실존하지 않습니다.

11:3.2 (120.5) While there are no physical materializations in the area of the Most Holy, there are abundant souvenirs of your material days in the Holy Land sectors and still more in the reminiscent historic areas of peripheral Paradise. 최고 거룩의 지대에는 물리적 물질화가 없는 반면에, 성지(聖地) 구역들에는 너희 물질적 시절의 기념품들이 풍부하며, 주변 천국의 추억의 역사 지역들에는 훨씬 많이 있습니다.

11:3.3 (120.6) The Holy Area, the outlying or residential region, is divided into seven concentric zones. Paradise is sometimes called “the Father’s House” since it is his eternal residence, and these seven zones are often designated “the Father’s Paradise mansions.” The inner or first zone is occupied by Paradise Citizens and the natives of Havona who may chance to be dwelling on Paradise. The next or second zone is the residential area of the native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of time and space. This second zone is in part subdivided into seven immense divisions, the Paradise home of the spirit beings and ascendant creatures who hail from the universes of evolutionary progression. Each of these sectors is exclusively dedicated to the welfare and advancement of the personalities of a single superuniverse, but these facilities are almost infinitely beyond the requirements of the present seven superuniverses. 거룩 지대, 밖에 있는 즉 거주 지역은 일곱 개의 동심(同心) 지대들로 나뉩니다. 천국은 때로 “아버지의 집”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그의 영원한 거처이기 때문이며, 이 일곱 지대들은 자주 “아버지의 천국 맨션들”로 불립니다. 내부 즉 첫 번째 지대는 천국 시민들과 천국에서 거주할 기회를 갖게 된 하보나의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즉 두 번째 지대는 시간과 공간의 일곱 초우주들의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입니다. 이 두 번째 지대는 거대한 일곱 구역(區域)으로 분할된 부분인데, 진화적 진보의 우주들에서 쏟아져 올라온 영 존재들과 상승하는 창조물들의 천국 고향입니다. 이 각 지구(地區)들은 단일 초우주의 고유성들의 복지와 진보에 오로지 바쳐져 있지만, 이 시설들은 현재 일곱 초우주들의 필요조건을 거의 무한하게 초월합니다.

11:3.4 (121.1) Each of the seven sectors of Paradise is subdivided into residential units suitable for the lodgment headquarters of one billion glorified individual working groups. One thousand of these units constitute a division. One hundred thousand divisions equal one congregation. Ten million congregations constitute an assembly. One billion assemblies make one grand unit. And this ascending series continues through the second grand unit, the third, and so on to the seventh grand unit. And seven of the grand units make up the master units, and seven of the master units constitute a superior unit; and thus by sevens the ascending series expands through the superior, supersuperior, celestial, supercelestial, to the supreme units. But even this does not utilize all the space available. This staggering number of residential designations on Paradise, a number beyond your concept, occupies considerably less than one per cent of the assigned area of the Holy Land. There is still plenty of room for those who are on their way inward, even for those who shall not start the Paradise climb until the times of the eternal future. 천국의 각 일곱 지구(地區)들은 10억 개의 영화롭게 된 개별 작업 집단들의 거점 본부에 알맞은 거주 단위들로 세분되어져 있습니다. 이 1천 단위들이 한 구역(區域)을 구성합니다. 10만 구역(區域)들은 1회중(會衆)과 같습니다. 1,000만 회중들이 1집회를 구성합니다. 10억 집회들이 1대(大) 단위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상승하는 시리즈들은 두 번째 대(大) 단위를 거쳐, 세 번째 대(大) 단위, 그렇게 일곱 번째 대(大) 단위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7대(大) 단위가 모여 주(主) 단위를 이루며, 7주(主)단위들은 1상(上) 단위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곱 개씩 상승하는 시리즈들은 상(上) 단위, 초(超)상(上) 단위, 천상 단위, 초(超)천상 단위를 지나 최극 단위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가능한 모든 공간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너희 개념을 초월한, 천국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거주 지정 숫자는 성지(聖地)에 배정된 지대 중 1%보다 상당히 적게 차지합니다. 안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자들, 영원한 미래의 시대까지 천국 등반을 시작하지 못할 자들을 위해서도, 충분한 자리가 여전히 있습니다.

4. Peripheral Paradise 주변 천국

11:4.1 (121.2) The central Isle ends abruptly at the periphery, but its size is so enormous that this terminal angle is relatively indiscernible within any circumscribed area. The peripheral surface of Paradise is occupied, in part, by the landing and dispatching fields for various groups of spirit personalities. Since the nonpervaded-space zones nearly impinge upon the periphery, all personality transports destined to Paradise land in these regions. Neither upper nor nether Paradise is approachable by transport supernaphim or other types of space traversers. 중앙 섬은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끝나지만,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이 끝나는 지점의 각도(角度)는 둘레의 어떤 지역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천국의 주변 표면은, 부분적으로, 영 고유성들의 다양한 집단들이 착륙하고 출발하는 장소들이 차지합니다. 비(非)침투(무물無物)-공간 지대들이 거의 주변(바깥둘레)을 침범하므로, 천국으로 향하도록 정해진, 모든 고유성 운송들은 이 지역들에 착륙합니다. 운송 초(超)천사 또는 다른 유형의 공간 횡단자들은 상부 또는 하부 천국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11:4.2 (121.3) The Seven Master Spirits have their personal seats of power and authority on the seven spheres of the Spirit, which circle about Paradise in the space between the shining orbs of the Son and the inner circuit of the Havona worlds, but they maintain force-focal headquarters on the Paradise periphery. Here the slowly circulating presences of the Seven Supreme Power Directors indicate the location of the seven flash stations for certain Paradise energies going forth to the seven superuniverses. 일곱 주(主) 영들은, 아들의 빛나는 천체들과 하보나 세계들의 내부 회로 사이의 공간에서 천국 주위를 선회하는, 영의 일곱 구체들에서 그들 개인의 권능과 권한의 자리들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천국 주변에 있는 기세-초점 본부를 유지합니다. 여기에서 서서히 회전하는 일곱 최극 권능 지도자들의 현존은, 일곱 초우주로 나아가는 어떤 천국 에너지들을 위한 일곱 섬광(閃光) 역(驛)의 위치를 나타냅니다.

11:4.3 (121.4) Here on peripheral Paradise are the enormous historic and prophetic exhibit areas assigned to the Creator Sons, dedicated to the local universes of time and space. There are just seven trillion of these historic reservations now set up or in reserve, but these arrangements all together occupy only about four per cent of that portion of the peripheral area thus assigned. We infer that these vast reserves belong to creations sometime to be situated beyond the borders of the present known and inhabited seven superuniverses. 여기 주변 천국에는, 시공의 지역 우주들에 헌신된, 창조자 아들들에게 배당된 거대한 역사적, 예언적 전시 지역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7조개의 이 역사적 보류지들이 지금 설립 또는 남겨져 있지만, 이 시설들 모두 함께 그렇게 배정된 주변 지역에서 그 부분의 약 4%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대한 이 예정지들이, 현재 알려져 있고 거주하는 일곱 초우주들의 경계선 너머에, 언젠가 있을 창조들에 속한다고 추론합니다.

11:4.4 (121.5) That portion of Paradise which has been designated for the use of the existing universes is occupied only from one to four per cent, while the area assigned to these activities is at least one million times that actually required for such purposes. Paradise is large enough to accommodate the activities of an almost infinite creation. 존재하는 우주들이 사용하도록 지정되어 온 천국의 부분은 1%에서 4%만 사용되며, 반면에 이러한 활동에 배정된 그 장소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적어도 1백만 배입니다. 천국은 거의 무한한 창조의 활동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히 큽니다.

11:4.5 (121.6) But a further attempt to visualize to you the glories of Paradise would be futile. You must wait, and ascend while you wait, for truly, “Eye has not seen, nor ear heard, neither has it entered into the mind of mortal man, the things which the Universal Father has prepared for those who survive the life in the flesh on the worlds of time and space.” 그러나 천국의 영광들을 너희에게 보이려는 더 이상의 시도는 무익할 것입니다. 너희는 기다려야만 하며, 기다리면서 상승해야만 하는데, 이는 진실로 “시공의 세계에서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는 자들을 위해, 우주 아버지가 준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필사 인간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사64:4).”

5. Nether Paradise 하부 천국

11:5.1 (122.1) Concerning nether Paradise, we know only that which is revealed; personalities do not sojourn there. It has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e affairs of spirit intelligences, nor does the Deity Absolute there function. We are informed that all physical-energy and cosmic-force circuits have their origin on nether Paradise, and that it is constituted as follows: 하부 천국에 관해, 우리는 계시된 것만 압니다. 고유성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 지능존재들의 업무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신(神) 절대자도 거기에서 기능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든 물리적-에너지와 질서우주-기세 회로들이 하부 천국에 기원이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1:5.2 (122.2) 1. Directly underneath the location of the Trinity, in the central portion of nether Paradise, is the unknown and unrevealed Zone of Infinity. 하부 천국의 중앙 부분, 즉 삼위일체의 위치 바로 직접 아래는, 알려지지 않고 계시되지 않은 무한의 지대입니다.

11:5.3 (122.3) 2. This Zone is immediately surrounded by an unnamed area. 이 지대는 바로 가까이 이름 없는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11:5.4 (122.4) 3. Occupying the outer margins of the under surface is a region having mainly to do with space potency and force-energy. The activities of this vast elliptical force center are not identifiable with the known functions of any triunity, but the primordial force-charge of space appears to be focalized in this area. This center consists of three concentric elliptical zones: The innermost is the focal point of the force-energy activities of Paradise itself; the outermost may possibly be identified with the functions of the Unqualified Absolute, but we are not certain concerning the space functions of the mid-zone. 아래 표면의 바깥 테두리는 주로 공간 잠재력과 기세-에너지와 관계된 지역이 차지합니다. 이 광대한 타원형 기세 중심의 활동들은 어느 삼원일체(三元一體)의 알려진 기능들인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지만, 공간의 원초(原初) 기세-충전(充電)이 이 지역에 초점화되는 듯합니다. 이 중심은 세 동심(同心) 타원지대로 구성됩니다. 가장 안쪽은 천국 자체의 기세-에너지 활동들의 초점입니다. 가장 바깥쪽은 분별불가(무제한) 절대자의 기능들로 정체성이 확인될 수 있지만, 우리는 중간-지대의 공간 기능들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습니다.

11:5.5 (122.5) The inner zone of this force center seems to act as a gigantic heart whose pulsations direct currents to the outermost borders of physical space. It directs and modifies force-energies but hardly drives them. The reality pressure-presence of this primal force is definitely greater at the north end of the Paradise center than in the southern regions; this is a uniformly registered difference. The mother force of space seems to flow in at the south and out at the north through the operation of some unknown circulatory system which is concerned with the diffusion of this basic form of force-energy. From time to time there are also noted differences in the east-west pressures. The forces emanating from this zone are not responsive to observable physical gravity but are always obedient to Paradise gravity. 이 기세 중심의 내부 지대는, 물리적 우주의 가장 외부에 있는 경계선까지 맥동들이 직접 흐르는 거대한 심장처럼 활동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기세-에너지들을 지도(指導)하고 변경하지만 그것들을 운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원초 기세의 실체 압력-현존은 천국 중앙의 남쪽 지역들보다 북쪽 끝에서 분명하게 더 큽니다. 이것은 균일하게 기록된 차이입니다. 공간의 모체 기세는, 이 기세-에너지의 기초 형태의 분산과 관계되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순환적 체계의 작용을 통해, 남쪽에서 흘러 들어와 북쪽에서 흘러 나가는 듯합니다. 때때로 동-서 압력에서 또한 두드러진 차이들이 있습니다. 이 지대에서 발산되는 기세들은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중력에 응답하지 않지만, 천국 중력에는 항상 순응합니다.

11:5.6 (122.6) The mid-zone of the force center immediately surrounds this area. This mid-zone appears to be static except that it expands and contracts through three cycles of activity. The least of these pulsations is in an east-west direction, the next in a north-south direction, while the greatest fluctuation is in every direction, a generalized expansion and contraction. The function of this mid-area has never been really identified, but it must have something to do with reciprocal adjustment between the inner and the outer zones of the force center. It is believed by many that the mid-zone is the control mechanism of the midspace or quiet zones which separate the successive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but no evidence or revelation confirms this. This inference is derived from the knowledge that this mid-area is in some manner related to the functioning of the nonpervaded-space mechanism of the master universe. 기세 중심의 중간-지대가 이 지역을 즉시 둘러쌉니다. 이 중간-지대는, 3가지 활동 순환주기를 통해 그것이 확대하고 축소하는 것을 제외하면, 정지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 맥동들 중 가장 적은 것은 동-서 방향에 있고, 그 다음은 북-남 방향에 있는 반면, 가장 큰 파동은 모든 방향에서, 일반화된 확대와 축소로 일어납니다. 이 중간-지역의 기능은 실제로 정체성이 확인된 적이 결코 없지만, 그것은, 기세 중심의 내부와 외부 지대 사이에서, 상호 조율과 관계된 것이 분명합니다. 중간-지대가 주(主)우주의 연속적인 공간 수준들을 분리하는 중간-공간 또는 고요한 지대들의 조정 기능구조임을 많은 자들이 믿지만, 이것을 확인하는 어떤 증거나 계시도 없습니다. 이 추론은 이 중간-지역이, 주(主)우주의 비(非)침투-공간 기능구조의 기능과 관련된 어떤 방식이라는 지식에서 유래됩니다.

11:5.7 (122.7) The outer zone is the largest and most active of the three concentric and elliptical belts of unidentified space potential. This area is the site of unimagined activities, the central circuit point of emanations which proceed spaceward in every direction to the outermost border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and on beyond to overspread the enormous and incomprehensible domains of all outer space. This space presence is entirely impersonal notwithstanding that in some undisclosed manner it seems to be indirectly responsive to the will and mandates of the infinite Deities when acting as the Trinity. This is believed to be the central focalization, the Paradise center, of the spac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외부 지대는 정체성이 확인되지 않은 공간 잠재의 세 동심(同心)인 타원형 띠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활동적입니다. 이 지역은 추측되지 않는 장소, 즉 모든 방향에서 일곱 초우주의 최외곽경계 쪽으로 공간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외부공간의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권역들을 온통 뒤덮는 그 너머로, 발산하는 중앙 회로점입니다. 이 공간 현존은, 무한 신(神)들이 삼위일체로서 행동할 때, 드러나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무한 신들)의 의지와 명령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응답하는 듯하지만, (이 공간 현존은) 전적으로 미(未)개인적입니다. 이것은 분별불가(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현존의 천국 중심, 중앙 초점화 구현인 것으로 믿어집니다.

11:5.8 (123.1) All forms of force and all phases of energy seem to be encircuited; they circulate throughout the universes and return by definite routes. But with the emanations of the activated zon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there appears to be either an outgoing or an incoming — never both simultaneously. This outer zone pulsates in agelong cycles of gigantic proportions. For a little more than one billion Urantia years the space-force of this center is outgoing; then for a similar length of time it will be incoming. And the space-force manifestations of this center are universal; they extend throughout all pervadable space. 기세의 모든 형태들과 에너지의 모든 위상들은 회로가 되는 듯합니다. 그것들은 우주 전체에 순환하고 확실한 경로들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분별불가(무제한) 절대자의 활성화된 지대에서 나오는 방사물들과 함께, 나가거나 혹은 들어오는 것으로 나타나며-결코 둘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외부 지대는 오랫동안 거대한 규모의 주기로 맥동합니다. 이 중앙의 공간-기세는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 년보다 조금 더 넘는 동안 밖으로 나아가며; 그 후 비슷한 길이의 시간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의 공간-기세 현시(顯示)들은 우주적입니다; 그것들은 침투할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두루 뻗어 나갑니다.

11:5.9 (123.2) All physical force, energy, and matter are one. All force-energy originally proceeded from nether Paradise and will eventually return thereto following the completion of its space circuit. But the energies and material organization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did not all come from nether Paradise in their present phenomenal states; space is the womb of several forms of matter and prematter. Though the outer zone of the Paradise force center is the source of space-energies, space does not originate there. Space is not force, energy, or power. Nor do the pulsations of this zone account for the respiration of space, but the incoming and outgoing phases of this zone are synchronized with the two-billion-year expansion-contraction cycles of space. 모든 물리적 기세, 에너지 그리고 물질은 하나입니다. 모든 기세-에너지는 최초 하부 천국에서 진행되었고 그 공간 회로를 완성한 후 결국 거기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들의 우주의 에너지들과 물질적 조직들 모두, 그들의 현재 현상적 상태로, 하부 천국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공간은 여러 형태의 물질과 전(前)물질의 요람(搖籃)입니다. 천국 기세 중앙의 외부 지대가 공간-에너지들의 근원이지만, 공간은 거기에서 기원되지 않습니다. 공간은 기세나 에너지 또는 권능(힘, 동력)이 아닙니다. 이 지대의 맥동들은 공간의 호흡 작용을 설명하지도 않지만, 들어오고 나가는 이 지대의 위상은 공간의 20억 년의 확대-축소 주기와 동시에 반복됩니다.

6. Space Respiration 공간 호흡 작용

11:6.1 (123.3) We do not know the actual mechanism of space respiration; we merely observe that all space alternately contracts and expands. This respiration affects both the horizontal extension of pervaded space and the vertical extensions of unpervaded space which exist in the vast space reservoirs above and below Paradise. In attempting to imagine the volume outlines of these space reservoirs, you might think of an hourglass. 우리는 공간 호흡 작용의 실제적 기능구조를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공간이 교대로 축소하고 확대하는 것을 관찰할 뿐입니다. 이 호흡 작용은 침투(浸透) 공간의 수평적 확장과 천국 위와 아래의 광대한 공간 저장소들에 존재하는 비(非)침투(浸透) 공간의 수직적 확장들 둘 모두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공간 저장소들의 부피 윤곽들을 상상하려면, 너희는 모래시계를 생각해도 좋다.

11:6.2 (123.4) As the universes of the horizontal extension of pervaded space expand, the reservoirs of the vertical extension of unpervaded space contract and vice versa. There is a confluence of pervaded and unpervaded space just underneath nether Paradise. Both types of space there flow through the transmuting regulation channels, where changes are wrought making pervadable space nonpervadable and vice versa in the contraction and expansion cycles of the cosmos. 침투(浸透) 공간인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우주들이 팽창할 때, 비(非)침투 공간인 수직적으로 확장하는 저장소들은 거꾸로 축소하는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부 천국 바로 아래에는 침투 공간과 비(非)침투 공간의 합류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두 공간 유형들은 변화시키는 규정 통로들을 통해 흐르는데, 그곳에는 질서우주의 축소와 확대 주기에서 침투(浸透)가능한 공간을 침투(浸透)불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변화가 만들어지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1:6.3 (123.5) “Unpervaded” space means: unpervaded by those forces, energies, powers, and presences known to exist in pervaded space. We do not know whether vertical (reservoir) space is destined always to function as the equipoise of horizontal (universe) space; we do not know whether there is a creative intent concerning unpervaded space; we really know very little about the space reservoirs, merely that they exist, and that they seem to counterbalance the space-expansion-contraction cycle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비침투” 공간은, 기세들, 에너지들, 권능(힘, 동력)들과 침투 공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현존들이 비(非)침투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수직 (저장소) 공간이 수평 (우주) 공간의 평형추로 항상 기능하게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비침투 공간에 관하여 창조적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공간 저장소들에 대해 정말 거의 모릅니다. 다만 그것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우주들의 우주의 공간-확대-축소 주기들을 균형 잡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11:6.4 (123.6) The cycles of space respiration extend in each phase for a little more than one billion Urantia years. During one phase the universes expand; during the next they contract. Pervaded space is now approaching the mid-point of the expanding phase, while unpervaded space nears the mid-point of the contracting phase, and we are informed that the outermost limits of both space extensions are, theoretically, now approximately equidistant from Paradise. The unpervaded-space reservoirs now extend vertically above upper Paradise and below nether Paradise just as far as the pervaded space of the universe extends horizontally outward from peripheral Paradise to and even beyond the fourth outer space level. 공간 호흡 작용의 주기들은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각 위상(단계)마다 10억 년보다 조금 더 긴 기간에 달합니다. 한 위상(단계)에서 우주들이 팽창하며; 다음 위상(단계)에서 그것들이 축소합니다. 침투 공간은 지금 확대하는 위상(단계)의 중간-지점에 접근하는 중이며 반면에, 비(非)침투 공간은 축소 위상(단계)의 중간-지점에 접근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론적으로 두 공간 확장들의 최외곽 한계들이 지금 천국에서부터 거의 등(等 같은) 거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비침투-공간 저장소는, 우주의 침투 공간이 주변 천국에서 4번째 외계 공간 차원을 향해 심지어 그것을 초월하여, 바깥쪽을 향해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바로 그만큼, 상부 천국 위와 하부 천국 아래로 수직적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11:6.5 (124.1) For a billion years of Urantia time the space reservoirs contract while the master universe and the force activities of all horizontal space expand. It thus requires a little over two billion Urantia years to complete the entire expansion-contraction cycle.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 년 동안 공간 저장소들이 축소하는 반면, 전체 수평 공간의 주(主)우주와 기세 활동들은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확대-축소 주기를 마치는 데에는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20억 년보다 약간 더 소요됩니다.

7. Space Functions of Paradise 천국의 공간 기능

11:7.1 (124.2) Space does not exist on any of the surfaces of Paradise. If one “looked” directly up from the upper surface of Paradise, one would “see” nothing but unpervaded space going out or coming in, just now coming in. Space does not touch Paradise; only the quiescent midspace zones come in contact with the central Isle. 천국의 표면 어디에도 공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 천국 상부 표면에서 직접 위를 “본다면,” 지금 막 들어오고 있는, 비(非)침투(浸透) 공간이,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공간은 천국에 닿을 수 없습니다. 고요한 중간-공간 지대들만이 중앙 섬과 접촉합니다.

11:7.2 (124.3) Paradise is the actually motionless nucleus of the relatively quiescent zones existing between pervaded and unpervaded space. Geographically these zones appear to be a relative extension of Paradise, but there probably is some motion in them. We know very little about them, but we observe that these zones of lessened space motion separate pervaded and unpervaded space. Similar zones once existed between the levels of pervaded space, but these are now less quiescent. 천국은 실제로, 침투(浸透) 공간과 비(非)침투(浸透)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비교적 고요한 지대들 중 움직이지 않는 핵입니다. 지리적으로 이 지대들은 천국의 상대적 확장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아마 어떤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우리는 약화된 이 공간 운동의 지대가 침투(浸透) 공간과 비(非)침투(浸透) 공간을 가르고 있음을 관찰합니다. 비슷한 지대들이 한 때 침투 공간의 수준들 사이에 존재했었지만, 이 지대들이 지금은 덜 고요합니다.

11:7.3 (124.4) The vertical cross section of total space would slightly resemble a Maltese cross, with the horizontal arms representing pervaded (universe) space and the vertical arms representing unpervaded (reservoir) space. The areas between the four arms would separate them somewhat as the midspace zones separate pervaded and unpervaded space. These quiescent midspace zones grow larger and larger at greater and greater distances from Paradise and eventually encompass the borders of all space and completely incapsulate both the space reservoirs and the entire horizontal extension of pervaded space. 총 공간의 수직 횡단면(橫斷面)은 몰타 십자가와 약간 비슷하며, 수평축들은 침투 (우주) 공간을, 수직축들은 비(非)침투 (저장소) 공간을 나타냅니다. 네 축들 사이에 있는 지역들은, 중간-공간 지대들이 침투 공간과 비(非)침투 공간을 갈라놓듯이, 어느 정도 네 축들을 갈라놓습니다. 고요한 이 중간-공간 지대들은 천국에서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더욱 커져서 결국 모든 공간의 경계들을 에워싸고, 공간 저장소들과 침투 공간의 전체 수평 확장을 완전히 피포(被包캡슐화)합니다.

11:7.4 (124.5) Space is neither a subabsolute condition within, nor th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neither is it a function of the Ultimate. It is a bestowal of Paradise, and the space of the grand universe and that of all outer regions is believed to be actually pervaded by the ancestral space potency of the Unqualified Absolute. From near approach to peripheral Paradise, this pervaded space extends horizontally outward through the fourth space level and beyond the periphery of the master universe, but how far beyond we do not know. 공간은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 내부의 하위-절대 조건도 아니고,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현존도 아니며, 궁극자의 기능도 아닙니다. 그것(공간)은 천국의 증여이며, 대우주와 모든 외부 지역들의 공간은,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선조(先祖) 공간 잠재력에 의해 실제로 침투되어 있다고 믿어집니다. 이 침투 공간은, 주변 천국에 가까운 접근으로부터, 제4 공간 수준을 통해 밖으로, 주(主)우주의 주변을 너머서, 수평적으로 확장하지만, 얼마나 멀리 초월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11:7.5 (124.6) If you imagine a finite, but inconceivably large, V-shaped plane situated at right angles to both the upper and lower surfaces of Paradise, with its point nearly tangent to peripheral Paradise, and then visualize this plane in elliptical revolution about Paradise, its revolution would roughly outline the volume of pervaded space. 너희가, 유한하지만, 상상할 수 없이 큰 V자 모양의 평면이 그 뾰족한 끝을 거의 주변 천국에 접한 채, 천국의 상부와 하부 표면에 직각으로 놓여있다고 상상하고, 그 다음에 이 평면이 천국 둘레를 타원형으로 회전한다고 마음으로 그려보면, 그 회전 운동이 침투 공간의 부피의 윤곽을 대략 표시할 것이다.

11:7.6 (124.7) There is an upper and a lower limit to horizontal space with reference to any given location in the universes. If one could move far enough at right angles to the plane of Orvonton, either up or down, eventually the upper or lower limit of pervaded space would be encountered. Within the known dimensions of the master universe these limits draw farther and farther apart at greater and greater distances from Paradise; space thickens, and it thickens somewhat faster than does the plane of creation, the universes. 우주들에서 어떤 주어진 위치에 대한 수평 공간에는 상부 및 하부 한계가 있습니다. 누가 오르본톤의 평면에 직각으로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충분히 멀리 움직일 수 있다면, 결국 침투 공간의 상부 또는 하부 한계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主)우주의 알려진 규모 내에서, 이 한계들은 천국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멀리 떨어집니다. 공간은 빽빽해지며, 창조 의 평면, 우주들이 빽빽해지는 것보다 어느 정도 더 빨리 빽빽해집니다.

11:7.7 (125.1) The relatively quiet zones between the space levels, such as the one separating the seven superuniverses from the first outer space level, are enormous elliptical regions of quiescent space activities. These zones separate the vast galaxies which race around Paradise in orderly procession. You may visualize the first outer space level, where untold universes are now in process of formation, as a vast procession of galaxies swinging around Paradise, bounded above and below by the midspace zones of quiescence and bounded on the inner and outer margins by relatively quiet space zones. 첫 번째 외부 공간 수준으로부터 일곱 초우주들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은, 공간 수준들 사이에 있는 비교적 조용한 지대들은, 고요한 공간 활동들의 거대한 타원형 지역들입니다. 이 지대들은 규칙적으로 진행하면서 천국 주위를 달리는 거대한 성운(星雲은하)들을 분리시킵니다. 너희는, 첫 번째 외부 공간 수준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는데, 고요한 중간-공간 지대들에 의해 위 아래로 한계가 있고, 상대적으로 조용한 공간 지대들에 의해 안쪽과 바깥쪽 테두리에서 한계가 있는, 천국 둘레를 회전하는 은하들의 거대한 행진으로서, 무수한 우주들이 지금 형성 중이다.

11:7.8 (125.2) A space level thus functions as an elliptical region of motion surrounded on all sides by relative motionlessness. Such relationships of motion and quiescence constitute a curved space path of lessened resistance to motion which is universally followed by cosmic force and emergent energy as they circle forever around the Isle of Paradise. 공간 수준은 모든 면에서 비교적 정지된 상태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운동 지역으로서 이렇게 기능합니다. 운동과 무활동의 그런 관계들은 운동에 대해 저항이 약화된 곡선 공간 경로를 이루는데, 그 운동에는, 천국 섬 주위를 영원히 회전하는, 질서우주적 기세와 창발하는 에너지가 우주적으로 따라갑니다.

11:7.9 (125.3) This alternate zoning of the master universe, in association with the alternate clockwise and counterclockwise flow of the galaxies, is a factor in the stabilization of physical gravity designed to prevent the accentuation of gravity pressure to the point of disruptive and dispersive activities. Such an arrangement exerts antigravity influence and acts as a brake upon otherwise dangerous velocities. 성운(星雲은하)들의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교대하는 흐름과 관련하여, 주(主)우주의 이 교대하는 지대 설정은 물질 중력을 안정화하는 요소이며, 이 물질 중력은 붕괴하고 분산하는 활동 지점에 대한 중력 압력의 가속화를 방지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런 배치로 반(反)중력(重力) 효과가 일어나며, 그렇지 않다면 위험한 속도에 대한 제동기(브레이크)로 작용합니다.

8. Paradise Gravity 천국 중력

11:8.1 (125.4) The inescapable pull of gravity effectively grips all the worlds of all the universes of all space. Gravity is the all-powerful grasp of the physical presence of Paradise. Gravity is the omnipotent strand on which are strung the gleaming stars, blazing suns, and whirling spheres which constitute the universal physical adornment of the eternal God, who is all things, fills all things, and in whom all things consist. 불가피한 중력의 당기는 힘이 모든 공간의 모든 우주들에 있는 모든 세계들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있습니다. 중력은 천국의 물리적 현존이 지닌 만능의 장악력입니다. 중력은 영원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물리적 장식을 구성하는 빛나는 별들, 타오르는 태양들과 소용돌이치는 구체들이 매달린 전능한 끈이며, 하나님은 만물이시고, 만물을 채우시며, 그 분 안에 만물이 존재합니다.

11:8.2 (125.5) The center and focal point of absolute material gravity is the Isle of Paradise, complemented by the dark gravity bodies encircling Havona and equilibrated by the upper and nether space reservoirs. All known emanations of nether Paradise invariably and unerringly respond to the central gravity pull operating upon the endless circuits of the elliptical space levels of the master universe. Every known form of cosmic reality has the bend of the ages, the trend of the circle, the swing of the great ellipse. 절대적 물질 중력의 중심인 초점은 천국 섬이며, 하보나를 도는 암흑 중력체들이 천국을 보완하고 상부 및 하부 공간 저장소들이 천국의 평형을 유지합니다. 하부 천국의 알려진 모든 방사물들은 주(主)우주의 타원 공간 수준들의 끝없는 회로 위에서 작동하는 중앙에서 당기는 중력에 대해 변함없이 정확하게 응답합니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질서우주 실체는 세월의 굴곡, 순환의 방향, 회전하는 거대한 타원을 소유합니다.

11:8.3 (125.6) Space is nonresponsive to gravity, but it acts as an equilibrant on gravity. Without the space cushion, explosive action would jerk surrounding space bodies. Pervaded space also exerts an antigravity influence upon physical or linear gravity; space can actually neutralize such gravity action even though it cannot delay it. Absolute gravity is Paradise gravity. Local or linear gravity pertains to the electrical stage of energy or matter; it operates within the central, super-, and outer universes, wherever suitable materialization has taken place. 공간은 중력에 대해 반응하지 않지만, 중력에 대해 평형력으로써 작용합니다. 공간 쿠션(완충물)이 없다면, 폭발 활동이 주위의 공간체들을 급히 흔들 것입니다. 침투 공간 역시 물리적이거나 직선적 중력에 대해 반(反)중력의 영향을 미칩니다. 공간은 그런 중력 활동을 지연시킬 수는 없어도 그것(중력 활동)을 실제로 중화할 수 있습니다. 절대 중력은 천국 중력입니다. 지역 또는 직선 중력은 에너지나 물질의 전기적 단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중앙, 초-, 및 외부 우주 안에서, 적절히 물질화가 발생된 어디서나 작용합니다.

11:8.4 (125.7) The numerous forms of cosmic force, physical energy, universe power, and various materializations disclose three general, though not perfectly clear-cut, stages of response to Paradise gravity: 질서우주 기세, 물리적 에너지, 우주 권능 및 다양한 물질화의 수많은 형태들은, 완전히 명쾌하지는 않지만, 천국 중력에 응답하는 일반적인 세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11:8.5 (126.1) 1. Pregravity Stages (Force). This is the first step in the individuation of space potency into the pre-energy forms of cosmic force. This state is analogous to the concept of the primordial force-charge of space, sometimes called pure energy or segregata. 중력 이전(以前) 단계들 (힘). 이것은 질서우주 기세의 에너지-이전 형태 안으로 공간 잠재력이 개별화되는 첫 단계입니다. 이 상태는 때로 순수 에너지 또는 분리소(分離素)라고 불리는, 공간의 원초적 힘-전하의 개념과 유사(비슷)합니다.

11:8.6 (126.2) 2. Gravity Stages (Energy). This modification of the force-charge of space is produced by the action of the Paradise force organizers. It signalizes the appearance of energy systems responsive to the pull of Paradise gravity. This emergent energy is originally neutral but consequent upon further metamorphosis will exhibit the so-called negative and positive qualities. We designate these stages ultimata. 중력 단계들 (에너지). 공간의 기세-전하의 이 변경은 천국 기세 조직자들의 활동으로 산출됩니다. 그것은 천국 중력의 당기는 힘에 응답하는 에너지 체계들이 나타나는 신호입니다. 이 창발 에너지는 기원적으로 중성이지만 이어진 변형의 결과 소위 음성 및 양성의 특성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계들을 궁극소(窮極素)라고 부릅니다.

11:8.7 (126.3) 3. Postgravity Stages (Universe Power). In this stage, energy-matter discloses response to the control of linear gravity. In the central universe these physical systems are threefold organizations known as triata. They are the superpower mother systems of the creations of time and space. The physical systems of the superuniverses are mobilized by the Universe Power Directors and their associates. These material organizations are dual in constitution and are known as gravita. The dark gravity bodies encircling Havona are neither triata nor gravita, and their drawing power discloses both forms of physical gravity, linear and absolute. 중력 이후 단계들 (우주 권능). 이 단계에는, 에너지-물질이 직선적 중력의 조절에 대해 응답을 나타냅니다. 중앙 우주에서 이 물리적 체계들은 삼력소(三力素)로 알려진 삼중적 조직들입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 대한 초(超)권능 모(母) 체계들입니다. 초우주들의 물리적 체계들은 우주 권능 지도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동원합니다. 이 물질적 조직들은 조성에서 이원적(二元的)이며 중력소(重力素)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보나를 돌고 있는 암흑 중력체들은 삼력소(三力素)도 아니고 중력소(重力素)도 아니며, 그것들의 이끄는 권능은 물리적 중력의 직선적이며 절대적인 두 형태들을 나타냅니다.

11:8.8 (126.4) Space potency is not subject to the interactions of any form of gravitation. This primal endowment of Paradise is not an actual level of reality, but it is ancestral to all relative functional nonspirit realities — all manifestations of force-energy and the organization of power and matter. Space potency is a term difficult to define. It does not mean that which is ancestral to space; its meaning should convey the idea of the potencies and potentials existent within space. It may be roughly conceived to include all those absolute influences and potentials which emanate from Paradise and constitute the spac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공간 잠재력은 중력의 어떤 형태의 상호작용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이 시원적 자질은 실체의 실제적 수준은 아니지만, 모든 상대적인 기능적 비(非)영 실체들 ─ 모두 나타난, 기세-에너지와 권능과 물질의 조직에게 조상이 됩니다. 공간 잠재력은 정의하기 힘든 용어입니다. 그것은 공간의 조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공간 안에 실존하는 잠재와 잠재력의 개념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천국에서 발산하고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공간 현존을 구성하는 그 모든 절대적 영향들과 잠재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략 이해가 될 것입니다.

11:8.9 (126.5) Paradise is the absolute source and the eternal focal point of all energy-matter in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 Unqualified Absolute is the revealer, regulator, and repository of that which has Paradise as its source and origin. The universal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seems to be equivalent to the concept of a potential infinity of gravity extension, an elastic tension of Paradise presence. This concept aids us in grasping the fact that everything is drawn inward towards Paradise. The illustration is crude but nonetheless helpful. It also explains why gravity always acts preferentially in the plane perpendicular to the mass, a phenomenon indicative of the differential dimensions of Paradise and the surrounding creations. 천국은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에너지-물질의 절대적 근원이며 영원한 초점입니다.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는 계시자, 규제자이며, 천국을 근원과 기원으로 둔 것의 저장소입니다.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우주적 현존은, 중력을 잠재적으로 무한히 연장하는 개념, 즉 천국 현존의 탄력적 장력(張力)에 상당하는 듯합니다. 이 개념은, 모든 것이 천국을 향해 안쪽으로 끌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표현은 미숙하지만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또한 중력이 질량에 수직인 평면에서 항상 우선적으로 활동하는 이유, 즉 천국과 둘레의 창조계의 차별적인 규모를 가르치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9. The Uniqueness of Paradise 천국의 독특성

11:9.1 (126.6) Paradise is unique in that it is the realm of primal origin and the final goal of destiny for all spirit personalities. Although it is true that not all of the lower spirit beings of the local universes are immediately destined to Paradise, Paradise still remains the goal of desire for all supermaterial personalities. 천국은 모든 영 고유성들에게, 시원(始原)적 기원 영역이며 운명의 최종 목적지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지역 우주들의 낮은 영 존재들이 모두 즉시 천국에 가는 운명은 참으로 아니지만, 천국은 모든 초(超)물질적 고유성들이 갈망하는 목적지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11:9.2 (126.7) Paradise is the geographic center of infinity; it is not a part of universal creation, not even a real part of the eternal Havona universe. We commonly refer to the central Isle as belonging to the divine universe, but it really does not. Paradise is an eternal and exclusive existence. 천국은 무한성의 지리적 중심입니다. 그것은 우주 창조의 일부가 아니며, 영원한 하보나 우주의 실제적 부분도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중앙 섬을 신적 우주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영원하며 유일한 실존입니다.

11:9.3 (127.1) In the eternity of the past, when the Universal Father gave infinite personality expression of his spirit self in the being of the Eternal Son, simultaneously he revealed the infinity potential of his nonpersonal self as Paradise. Nonpersonal and nonspiritual Paradise appears to have been the inevitable repercussion to the Father’s will and act which eternalized the Original Son. Thus did the Father project reality in two actual phases — the personal and the nonpersonal, the spiritual and the nonspiritual. The tension between them, in the face of will to action by the Father and the Son, gave existence to the Conjoint Actor and the central universe of material worlds and spiritual beings. 과거의 영원에서, 우주 아버지가 자신의 영(靈) 자아의 무한 고유성을 영원 아들의 존재로 표현하는 동시에 그는 자신의 비(非)고유적 자아의 무한 잠재성을 천국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비(非)고유적 비(非)영적 천국은 기원 아들을 영원하게 만든 아버지의 의지와 행위에 필연적 반향이 되어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실제적 두 양상(樣相)─고유적(固有的) 및 비(非)고유적, 영적(靈的) 및 비(非)영적─으로 실체를 투사(投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에 대한 의지에 직면하여, 그들 사이의 긴장상태는 공동 행위자와 물질세계들과 영적 존재들이 있는 중앙우주의 실존을 낳았습니다.

11:9.4 (127.2) When reality is differentiated into the personal and the nonpersonal (Eternal Son and Paradise), it is hardly proper to call that which is nonpersonal “Deity” unless somehow qualified. The energy and material repercussions of the acts of Deity could hardly be called Deity. Deity may cause much that is not Deity, and Paradise is not Deity; neither is it conscious as mortal man could ever possibly understand such a term. 실체를 고유적 및 비(非)고유적 (영원 아들과 천국)으로 구별할 때, 어쨌든 자격이 없으므로 비(非)고유적인 것을 “신(神)”이라 부르는 것은 도저히 적절하지 않습니다. 신(神)의 활동에 의한 에너지와 물질적 반향들은 도저히 신(神)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신(神)은 신(神)이 아닌 많은 것의 원인이 되지만, 천국은 신(神)이 아닙니다. 천국은, 필사 사람이 아마 그런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결코 의식할 수 없습니다.

11:9.5 (127.3) Paradise is not ancestral to any being or living entity; it is not a creator. Personality and mind-spirit relationships are transmissible, but pattern is not. Patterns are never reflections; they are duplications — reproductions. Paradise is the absolute of patterns; Havona is an exhibit of these potentials in actuality. 천국은 어떤 존재나 살아있는 실체에게 조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고유성과 마음-영 관계들은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형(原形)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형들은 결코 반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복제─재생산─입니다. 천국은 절대 원형들입니다. 하보나는 이 잠재성을 실제로 전시한 것입니다.

11:9.6 (127.4) God’s residence is central and eternal, glorious and ideal. His home is the beauteous pattern for all universe headquarters worlds; and the central universe of his immediate indwelling is the pattern for all universes in their ideals, organization, and ultimate destiny. 하나님의 거처는 중앙에 있고 영원하며, 영화롭고 이상(理想)적입니다. 그의 집은 모든 우주 본부 세계들을 위한 아름다운 원형입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 내재하는 중앙우주는, 이상(理想)들, 조직 및 궁극적 운명에 있어서 모든 우주들을 위한 원형입니다.

11:9.7 (127.5) Paradise is the universal headquarters of all personality activities and the source-center of all force-space and energy manifestations. Everything which has been, now is, or is yet to be, has come, now comes, or will come forth from this central abiding place of the eternal Gods. Paradise is the center of all creation, the source of all energies, and the place of primal origin of all personalities. 천국은 모든 고유성 활동들의 우주적 본부이며 모든 기세-공간 및 에너지가 나타난 근원-중심입니다. 있어 왔고, 지금 있거나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은 영원한 하나님들의 이 중앙 거주 장소로부터 왔고, 지금 오고 있거나 앞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모든 창조의 중심이고, 모든 에너지들의 근원이며, 모든 고유성들의 시원적 기원 장소입니다.

11:9.8 (127.6) After all, to mortals the most important thing about eternal Paradise is the fact that this perfect abode of the Universal Father is the real and far-distant destiny of the immortal souls of the mortal and material sons of God, the ascending creatures of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Every God-knowing mortal who has espoused the career of doing the Father’s will has already embarked upon the long, long Paradise trail of divinity pursuit and perfection attainment. And when such an animal-origin being does stand, as countless numbers now do, before the Gods on Paradise, having ascended from the lowly spheres of space, such an achievement represents the reality of a spiritual transformation bordering on the limits of supremacy. 무엇보다, 필사자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아버지의 이 완전한 거주지가, 하나님의 필사자 물질 아들들, 시간과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상승하는 창조물들의 불멸 혼에게 실제하는 멀리 떨어진 운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생애를 채택한, 하나님을-아는 모든 필사자는 신적 추구와 완전성을 달성하는 길고 긴 천국 길을 이미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동물 기원의 존재가, 지금도 무수한 숫자가 그렇듯이, 천국에서 하나님들 앞에 설 때, 낮은 공간 구체들에서 상승한, 그런 성취는 최극위의 한계에 접하는 영적 변환의 실체를 나타냅니다.

11:9.9 (127.7) [Presented by a Perfector of Wisdom commissioned thus to function by the Ancients of Days on Uversa.][유버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이가 그렇게 기능하도록 임명한 지혜의 완전자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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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6 The Faith of Jesus 예수님의 신앙

Paper 196

The Faith of Jesus 예수님의 신앙

Jesus’ living faith in God 예수님의 살아있는 하나님 신앙
“Seek first the kingdom of heaven.”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
“Why do you call me good?”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What prayer meant to Jesus  예수님의 기도 해석
Jesus’ childlike faith in God 어린애 같은 예수님의 하나님 신앙
1. Jesus — The Man 예수 – 인간
2. The Religion of Jesus 예수님의 종교
The religion about Jesus 예수님에 대한 종교
Religion as a personal experience 종교는 개인적 체험
3. The Supremacy of Religion 종교의 최극위
Fact, idea, and relation 사실, 관념 및 관계
Reason, wisdom, and faith 이성, 지혜 및 신앙
Thing, meaning, and value 사물, 의미 및 가치
Unless a divine lover lived in man… 신적 사랑이 사람 안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Morality and religion 도덕성과 종교
The Father is living love…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랑이십니다….

170521 예수님의 신앙 1 – 서론 1 시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Teach me to do your will, for you are my God; may your good Spirit lead me on level ground.

196:0.1 (2087.1) JESUS enjoyed a sublime and wholehearted faith in God. He experienced the ordinary ups and downs of mortal existence, but he never religiously doubted the certainty of God’s watchcare and guidance. His faith was the outgrowth of the insight born of the activity of the divine presence, his indwelling Adjuster. His faith was neither tradition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was wholly personal and purely spiritual. 예수님은 숭고한 신앙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누리셨습니다. 그는 필사(必死) 존재의 일반적인 기복(높아짐과 낮아짐起伏)을 겪으셨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해 결코 신앙적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신적 현존 즉, 내재(內在)하는 조절자의 활동에서 발생한 통찰력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온전히 개인적이며 순전히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196:0.2 (2087.2) The human Jesus saw God as being holy, just, and great, as well as being true, beautiful, and good. All these attributes of divinity he focused in his mind as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Jesus’ God wa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Holy One of Israel” and “The living and loving Father in heaven.” The concept of God as a Father was not original with Jesus, but he exalted and elevated the idea into a sublime experience by achieving a new revelation of God and by proclaiming that every mortal creature is a child of this Father of love, a son of God.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며 위대하신 분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신성의 속성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마음에 모아서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며 동시에 “살아계시며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 개념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성취하고, 모든 필사(必死) 창조물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여, 그 개념(하나님 아버지)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향상시켰습니다.

196:0.3 (2087.3) Jesus did not cling to faith in God as would a struggling soul at war with the universe and at death grips with a hostile and sinful world; he did not resort to faith merely as a consolation in the midst of difficulties or as a comfort in threatened despair; faith was not just an illusory compensation for the unpleasant realities and the sorrows of living. In the very face of all the natural difficulties and the temporal contradictions of mortal existence, he experienced the tranquillity of supreme and unquestioned trust in God and felt the tremendous thrill of living, by faith, in the very presence of the heavenly Father. And this triumphant faith was a living experience of actual spirit attainment. Jesus’ great contribution to the values of human experience was not that he revealed so many new ideas about the Father in heaven, but rather that he so magnificently and humanly demonstrated a new and higher type of living faith in God. Never on all the worlds of this universe, in the life of any one mortal, did God ever become such a living reality as in the human experience of Jesus of Nazareth. 예수님은, 우주와의 전쟁에서 분투하는 사람(혼)이나 적개심과 죄로 가득한 세상과 사생결단을 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어려움 가운데에서 위안이나, 절망의 위협 중에 얻는 위로로서 신앙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에 대한 허상(虛像)적 보상(報償)이 아니었습니다. 필사(必死) 존재가 겪는 모든 자연스런 곤경과 현세의 모순에 바로 직면해서, 그는 최상의 평온을 누리면서 의심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존전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거둔 신앙은 실제로 영에 도달한 살아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인간 체험의 가치에 대해 예수께서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새 관념을 많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을 장엄하게 인간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어느 한 필사(必死)자의 일생에,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토록 살아있는 실체가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170528 예수님의 신앙 2 – 서론 2 막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196:0.4 (2087.4) In the Master’s life on Urantia, this and all other worlds of the local creation discover a new and higher type of religion, religion based on personal spiritual relations with the Universal Father and wholly validated by the supreme authority of genuine personal experience. This living faith of Jesus was more than an intellectual reflection, and it was not a mystic meditation. 주(主)님의 지상(유란시아) 생활에서, 지역 창조의 이 세계와 다른 모든 세계들은,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종교, 우주 아버지와 개인적인 영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으며, 진정한 개인적 체험의 최극 권위에 의해 전적으로 확인된 종교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이 살아있는 신앙은 지적(知的)인 반사 이상(以上)이었으며, 신비적 명상이 아니었습니다.

196:0.5 (2087.5) Theology may fix, formulate, define, and dogmatize faith, but in the human life of Jesus faith was personal, living, original, spontaneous, and purely spiritual. This faith was not reverence for tradition nor a mere intellectual belief which he held as a sacred creed, but rather a sublime experience and a profound conviction which securely held him. His faith was so real and all-encompassing that it absolutely swept away any spiritual doubts and effectively destroyed every conflicting desire. Nothing was able to tear him away from the spiritual anchorage of this fervent, sublime, and undaunted faith. Even in the face of apparent defeat or in the throes of disappointment and threatening despair, he calmly stood in the divine presence free from fear and fully conscious of spiritual invincibility. Jesus enjoyed the invigorating assurance of the possession of unflinching faith, and in each of life’s trying situations he unfailingly exhibited an unquestioning loyalty to the Father’s will. And this superb faith was undaunted even by the cruel and crushing threat of an ignominious death.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착시키고, 공식화하며, 정의(定意)하고, 교리화(독단적으로 단정)하겠지만, 예수님의 인간 일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있으며, 근원적이고, 자발적이며, 순전히 영적이었습니다. 이 신앙은 전통에 대한 숭배도 아니었고, 그가 신성한 신조(信條)로 지녔던 단순한 지적 믿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를 단단히 붙든 숭고한 체험이자 깊은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너무나 실제적이며 모든 것을 포괄했기 때문에, 그 어떤 영적 의심들도 절대적으로 쓸어버리고, 상반되는 모든 욕망을 실질적으로 파괴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이 열렬하고 숭고한 불굴(不屈)의 신앙이 닻을 내린 영적 정박지(碇泊地)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명백한 패배에 직면하거나 또는 실망과 위협적인 절망의 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불패)을 충만히 의식하면서 신적 현존 앞에서 차분하게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축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활력을 불어넣는 확신을 향유하였으며, 일생의 시험적인 각각의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충성을, 끊임없이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장엄한 신앙은 심지어 치욕스러운 죽음의 잔인하고 압도적인 위협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196:0.6 (2088.1) In a religious genius, strong spiritual faith so many times leads directly to disastrous fanaticism, to exaggeration of the religious ego, but it was not so with Jesus. He was not unfavorably affected in his practical life by his extraordinary faith and spirit attainment because this spiritual exaltation was a wholly unconscious and spontaneous soul expression of his personal experience with God. 종교적 특성에 있어서, 강한 영적 신앙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비참한 광신(狂信), 종교적 과대 자아로 직접 이끌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생활에 있어서 특별한 신앙과 영적 달성으로 인해서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고양(高揚)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체험이 전적으로 무의식적이며 자발적인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170604 예수님의 신앙 3 – 서론 3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196:0.7 (2088.2) The all-consuming and indomitable spiritual faith of Jesus never became fanatical, for it never attempted to run away with his well-balanced intellectual judgments concerning the proportional values of practical and commonplace social, economic, and moral life situations. The Son of Man was a splendidly unified human personality; he was a perfectly endowed divine being; he was also magnificently co-ordinated as a combined human and divine being functioning on earth as a single personality. Always did the Master co-ordinate the faith of the soul with the wisdom-appraisals of seasoned experience. Personal faith, spiritual hope, and moral devotion were always correlated in a matchless religious unity of harmonious association with the keen realization of the reality and sacredness of all human loyalties — personal honor, family love, religious obligation, social duty, and economic necessity. 온통 절실하며 굴복할 줄 모르는 예수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신앙은 실제적이며 평범한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생활 상황의 비례적 가치에 관한 그의 잘 균형이 잡힌 지적 판단에서 결코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훌륭하게 통합된 인간 고유성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증여된 신적 존재였습니다. 그는 또한 이 땅에서 인간 존재와 신적 존재가 결합하여 훌륭하게 통합된 하나의 고유성으로 활동하는 존재이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혼의 신앙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의 평가로 조화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인간적 충성─개인적 명예, 가족적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의무, 그리고 경제적 필요성─의 현실과 신성함에 대한 선명한 자각(깨달음)과 조화롭게 연합하여 비길 데 없는 종교적 통일성 안에서, 개인적 신앙, 영적 소망 그리고 도덕적 헌신은 항상 서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96:0.8 (2088.3) The faith of Jesus visualized all spirit values as being found in the kingdom of God; therefore he said, “Seek first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w in the advanced and ideal fellowship of the kingdom the achievement and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The very heart of the prayer which he taught his disciples was,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Having thus conceived of the kingdom as comprising the will of God, he devoted himself to the cause of its realization with amazing self-forgetfulness and unbounded enthusiasm. But in all his intense mission and throughout his extraordinary life there never appeared the fury of the fanatic nor the superficial frothiness of the religious egotist. 예수님의 신앙은 모든 영 가치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진보된 이상적 친교 안에서 “하나님 뜻”이 성취(이루어짐)와 완성(실현)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라를 이해했기에, 그는 그것을 실현하는 운동에 놀랄 정도로 자신을-잊어버리고, 한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극심한 임무와 그의 특별한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종교적 이기주의자의 피상적 천박함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6:0.9 (2088.4) The Master’s entire life was consistently conditioned by this living faith, this sublime religious experience. This spiritual attitude wholly dominated his thinking and feeling, his believing and praying, his teaching and preaching. This personal faith of a son in the certainty and security of the guidance and protection of the heavenly Father imparted to his unique life a profound endowment of spiritual reality. And yet, despite this very deep consciousness of close relationship with divinity, this Galilean, God’s Galilean, when addressed as Good Teacher, instantly replied, “Why do you call me good?” When we stand confronted by such splendid self-forgetfulness, we begin to understand how the Universal Father found it possible so fully to manifest himself to him and reveal himself through him to the mortals of the realms. 주(主)님의 일생 전체는 한결같이 이 살아있는 신앙,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영적 태도는 그의 사고와 느낌, 그의 믿음과 기도, 그의 가르침과 설교를 전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의 확신과 보장에 대한 아들의 이 개인적 신앙은 그의 독특한 일생에 있어서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신성과 가까운 관계의 바로 이 깊은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갈릴리인, 하나님의 갈릴리인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렸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라고 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훌륭한 자아-망각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우주 아버지가 그에게 자신을 그렇게 충분히 나타내고 그 영역들의 필사자들에게 그를 통한 자기 계시가 어떻게 발견이 가능한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170611 예수님의 신앙 4 – 서론 4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My food,” said Jesus,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196:0.10 (2088.5) Jesus brought to God, as a man of the realm, the greatest of all offerings: the consecration and dedication of his own will to the majestic service of doing the divine will. Jesus always and consistently interpreted religion wholly in terms of the Father’s will. When you study the career of the Master, as concerns prayer or any other feature of the religious life, look not so much for what he taught as for what he did. Jesus never prayed as a religious duty. To him prayer was a sincere expression of spiritual attitude, a declaration of soul loyalty, a recital of personal devotion, an expression of thanksgiving, an avoidance of emotional tension, a prevention of conflict, an exaltation of intellection, an ennoblement of desire, a vindication of moral decision, an enrichment of thought, an invigoration of higher inclinations, a consecration of impulse, a clarification of viewpoint, a declaration of faith, a transcendental surrender of will, a sublime assertion of confidence, a revelation of courage, the proclamation of discovery, a confession of supreme devotion, the validation of consecration, a technique for the adjustment of difficulties, and the mighty mobilization of the combined soul powers to withstand all human tendencies toward selfishness, evil, and sin. He lived just such a life of prayerful consecra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ended his life triumphantly with just such a prayer. The secret of his unparalleled religious life was this consciousness of the presence of God; and he attained it by intelligent prayer and sincere worship — unbroken communion with God — and not by leadings, voices, visions, or extraordinary religious practices. 예수님은 그 영역의 사람으로서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은 신적 뜻을 행하는 장엄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봉헌하고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일관되게 종교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셨습니다. 종교적 생활의 기도나 혹은 다른 면들에 관하여, 주(主)의 생애를 공부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보기보다는,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은 종교적 의무로서 기도를 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진지한 표현, 혼의 충성에 대한 선언. 개인적 헌신에 대한 낭독, 감사의 표현, 감정적 긴장의 방지, 갈등의 예방, 지적 사고의 고양(高揚), 욕망을 고귀하게 만듦, 도덕적 결정의 입증, 생각의 풍성함, 더욱 높은 성향의 활력화, 충동의 봉헌, 관점의 해명, 신앙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양도), 자신감의 숭고한 단언, 용기의 계시, 발견의 선언, 최극 헌신의 고백, 봉헌의 확인, 어려움의 조절기법, 그리고 이기심, 악,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인간 성향을 물리치려고 결합한 혼의 권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기도하며 헌신하는 바로 그러한 일생을 사셨으며, 바로 그러한 기도로 자신의 일생을 승리로 마치셨습니다. 그의 비교될 수없는 종교적 일생의 비밀은 하나님 현존에 대한 이 의식(意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능적 기도와 진지한 경배─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로 얻었으며 인도됨이나, 음성이나, 환상 또는 비상한 종교적 관습에 의해 얻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196:0.11 (2089.1)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religion was a living experience, a direct and personal movement from spiritual reverence to practical righteousness. The faith of Jesus bore the transcendent fruits of the divine spirit. His faith was not immature and credulous like that of a child, but in many ways it did resemble the unsuspecting trust of the child mind. Jesus trusted God much as the child trusts a parent. He had a profound confidence in the universe — just such a trust as the child has in its parental environment. Jesus’ wholehearted faith in the fundamental goodness of the universe very much resembled the child’s trust in the security of its earthly surroundings. He depended on the heavenly Father as a child leans upon its earthly parent, and his fervent faith never for one moment doubted the certainty of the heavenly Father’s overcare. He was not disturbed seriously by fears, doubts, and skepticism. Unbelief did not inhibit the free and original expression of his life. He combined the stalwart and intelligent courage of a full-grown man with the sincere and trusting optimism of a believing child. His faith grew to such heights of trust that it was devoid of fear.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종교는 살아있는 체험, 영적 경외심에서부터 실질적인 공의로 넘어가는 직접적이고 개인적 활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신적 영의 초월적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아이의 것처럼 미숙하거나 경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아이의 마음처럼 의심하지 않는 신뢰와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게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신뢰하듯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은 우주를 깊이 신뢰하셨습니다. 우주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예수님의 전심을 다하는 신앙은 지상 환경의 안전함을 믿는 아이의 신뢰와 매우 흡사하였습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지상의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의지하셨고, 그의 열렬한 신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지나친 보호에 대한 확신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회의(懷疑)로 인하여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신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롭고 기원적인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성장한 어른의 건장하고 지적인 용기와, 믿는 아이가 지닌 순수하게 신뢰하는 낙천성을 결합하셨습니다. 그의 신앙은 두려움이 없는 그러한 신뢰의 경지까지 성장하셨습니다.

170618 예수님의 신앙 5 –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서론 5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196:0.12 (2089.2) The faith of Jesus attained the purity of a child’s trust. His faith was so absolute and undoubting that it responded to the charm of the contact of fellow beings and to the wonders of the universe. His sense of dependence on the divine was so complete and so confident that it yielded the joy and the assurance of absolute personal security. There was no hesitating pretense in his religious experience. In this giant intellect of the full-grown man the faith of the child reigned supreme in all matters relating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t is not strange that he once said, “Except you become as a little child, you shall not enter the kingdom.” Notwithstanding that Jesus’ faith was childlike, it was in no sense childish. 예수님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지닌 신뢰의 순수성에 도달하셨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렇게 절대적이고 의심이 없어서 다른 동료 존재들과의 만남에 대한 매력과 우주의 경이로움들에 반응하였습니다. 신적인 것에 대한 그의 의존 감각은 그렇게 완벽하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여 그것은 절대적 개인적 안전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낳았습니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주저하는 티가 전혀 없었습니다. 충분히-성장한 사람의 이 위대한 지성 안에서 어린아이의 신앙이 종교적 인식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을 최고로 지배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너희가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습니다.

170625 예수님의 신앙 6 – 나를 따르라 요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Jesus said this to indicate the kind of death by which Peter would glorify God. Then he said to him, “Follow me!”

JESUS WANTS US TO BELIEVE WITH HIM
196:0.13 (2089.3) Jesus does not require his disciples to believe in him but rather to believe with him, believe in the reality of the love of God and in full confidence accept the security of the assurance of sonship with the heavenly Father. The Master desires that all his followers should fully share his transcendent faith. Jesus most touchingly challenged his followers, not only to believe what he believed, but also to believe as he believed. This is the full significance of his one supreme requirement, “Follow me.”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함께 믿되, 하나님 사랑이 실체임을 믿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관계에 대한 확신이 보장됨을 충만한 자신감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주(主)님은 모든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초월적 신앙을 충분히 나누어 가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믿었던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처럼 믿으라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장 비장하게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는 그의 한 가지 최상의 요구가 지닌 충분한 의미(意味)입니다.

170702 예수님의 신앙 7 – 하나님의 뜻 실천, 신앙으로 살아감 요6: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will but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196:0.14 (2090.1) Jesus’ earthly life was devoted to one great purpose — doing the Father’s will, living the human life religiously and by faith. The faith of Jesus was trusting, like that of a child, but it was wholly free from presumption. He made robust and manly decisions, courageously faced manifold disappointments, resolutely surmounted extraordinary difficulties, and unflinchingly confronted the stern requirements of duty. It required a strong will and an unfailing confidence to believe what Jesus believed and as he believed. 예수님의 지상 일생은 단 한 가지의 목적─아버지의 뜻을 행함, 인간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감─에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전혀 주제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건하고 당당하게 결정을 내리셨으며, 수많은 실망들에 용감하게 대처하였고, 특별한 어려움들을 단호히 극복하셨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들에 망설임 없이 직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믿었던 것을 믿고, 그가 믿은 대로 믿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끊임없는 자신감이 요구되었습니다.

  1. Jesus — The Man 예수─인간

170709 예수님의 신앙 8 – 인간 예수의 헌신 1 Jesus — The Man 마22:37-39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 Jesus replied: ”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38 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39 And the second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0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

196:1.1 (2090.2) Jesus’ devotion to the Father’s will and the service of man was even more than mortal decision and human determination; it was a wholehearted consecration of himself to such an unreserved bestowal of love. No matter how great the fact of the sovereignty of Michael, you must not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men. The Master has ascended on high as a man, as well as God; he belongs to men; men belong to him. How unfortunate that religion itself should be so misinterpreted as to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struggling mortals! Let not the discussions of the humanity or the divinity of the Christ obscure the saving truth that Jesus of Nazareth was a religious man who, by faith, achieved the knowing and the doing of the will of God; he was the most truly religious man who has ever lived on Urantia. 아버지의 뜻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대한 예수님의 헌신은 필사자의 결정과 인간의 결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아낌없는 사랑의 증여를 향해 전심을 다한 예수님 자신의 헌신이었습니다. 미가엘의 주권의 사실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너희는 인간 예수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주(主)님은 하나님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속하시며, 사람들은 그에 속합니다. 종교가 스스로, 분투하는 필사자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떼어놓을 정도로 그렇게 잘못 해석되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토론들 때문에 나사렛 예수께서 신앙이 깊은 사람이시며,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행함을 성취하셨다는 구원의 진리가 흐려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는 이제까지 유란시아에 살았던 최상의 참된 신앙인이셨습니다.

170716 예수님의 신앙 9 – 평범한 인간 예수 2 막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How then can he be his son?”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delight.

196:1.2 (2090.3) The time is ripe to witness the figurative resurrection of the human Jesus from his burial tomb amidst the theological traditions and the religious dogmas of nineteen centuries. Jesus of Nazareth must not be longer sacrificed to even the splendid concept of the glorified Christ. What a transcendent service if, through this revelation, the Son of Man should be recovered from the tomb of traditional theology and be presented as the living Jesus to the church that bears his name, and to all other religions! Surely the Christian fellowship of believers will not hesitate to make such adjustments of faith and of practices of living as will enable it to “follow after” the Master in the demonstration of his real life of religious devo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of consecration to the unselfish service of man. Do professed Christians fear the exposure of a self-sufficient and unconsecrated fellowship of social respectability and selfish economic maladjustment? Does institutional Christianity fear the possible jeopardy, or even the overthrow, of traditional ecclesiastical authority if the Jesus of Galilee is reinstated in the minds and souls of mortal men as the ideal of personal religious living? Indeed, the social readjustments, the economic transformations, the moral rejuvenations, and the religious revisions of Christian civilization would be drastic and revolutionary if the living religion of Jesus should suddenly supplant the theologic religion about Jesus. 19 세기의 신학적 전통과 종교적 교리 가운데 있는, 예수님이 묻힌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의 상징적인 부활을 증언할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화려한 개념으로 더는 희생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계시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그의 이름을 지닌 교회와 다른 모든 종교에, 살아 계신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인 봉사일 것인지요! 확실히 기독교 신자들의 교제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종교적 헌신과 사람을 이타적으로 섬겨 헌신하는 자신의 실제 생활로 입증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만큼 주저 없이 신앙과 삶의 훈련을 그렇게 조율할 것입니다. 자칭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체면과 이기적인 경제적 조절-불량의 자아-충족적이며 헌신하지 않은 친교가 폭로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갈릴리의 예수께서 개인적인 종교적 삶의 이상(理想)으로서, 필사 사람들의 마음과 혼(), 본래대로 있다면, 제도적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위의 위험성, 또는 전복(顚覆)까지도 가능할까 두려워합니까? 예수의 살아있는 종교가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종교를 갑자기 대신(代身)한다면, 사회적 재조정·경제적 변환·도덕적 원기의 회복 및 기독교 문명의 종교적 교정이 정말로 극적이며 혁명적일 것입니다.

196:1.3 (2090.4) To “follow Jesus” means to personally share his religious faith and to enter into the spirit of the Master’s life of unselfish service for man.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human living is to find out what Jesus believed, to discover his ideals, and to strive for the achievement of his exalted life purpose. Of all human knowledge, that which is of greatest value is to know the religious life of Jesus and how he lived it. “예수 따르기”는 그의 종교적인 신앙을 개인적으로 공유하고, 사람을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한 ()님 일생의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믿었던 것을 찾아내고, 그의 이상들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여진 일생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 삶을 사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196:1.4 (2090.5) The common people heard Jesus gladly, and they will again respond to the presentation of his sincere human life of consecrated religious motivation if such truths shall again be proclaimed to the world. The people heard him gladly because he was one of them, an unpretentious layman; the world’s greatest religious teacher was indeed a layman.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즐겁게 들었으며, 그러한 진리들이 다시 세상에 선포된다면, 봉헌(奉獻)된 종교적 동기를 지닌 그의 신실한 인간적 일생의 제시에 그들은 다시 응답할 것입니다. 그는 그들 중의 한 사람, 즉 허세가 없는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교사(敎師)는 진실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196:1.5 (2091.1) It should not be the aim of kingdom believers literally to imitate the outward life of Jesus in the flesh but rather to share his faith; to trust God as he trusted God and to believe in men as he believed in men. Jesus never argued about either the fatherhood of God or the brotherhood of men; he was a living illustration of the one and a profound demonstration of the other. 나라를 믿는 자들의 목표는 겉으로 나타난 육신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문자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앙을 공유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었던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이나 사람들의 형제 신분에 대하여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자의 살아있는 예증이었고 후자의 심오한 실증이었습니다.

196:1.6 (2091.2) Just as men must progress from the consciousness of the human to the realization of the divine, so did Jesus ascend from the nature of man to the consciousness of the nature of God. And the Master made this great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by the conjoint achievement of the faith of his mortal intellect and the acts of his indwelling Adjuster. The fact-realization of the attainment of totality of divinity (all the while fully conscious of the reality of humanity) was attended by seven stages of faith consciousness of progressive divinization. These stages of progressive self-realization were marked off by the following extraordinary events in the Master’s bestowal experience: 사람들이 인간의 의식(意識)으로부터 신적인 것의 실현으로 진보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하나님 본성의 의식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은 그의 필사 지성의 신앙과 내재하는 조율자의 활동이 결합된 성취로 인간으로부터 신적으로의 이 위대한 상승을 이루셨습니다. 신성의 전체성을 달성한 사실- 실현화는 (이 기간 내내 인간성의 실체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성화되는 신앙 의식의 일곱 단계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자아-실현의 단계들은 주(主)님의 증여 체험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한 사건들로 구별되었습니다.

196:1.7 (2091.3) 1. The arrival of the Thought Adjuster. 생각조율자의 도착. BC 2. 2. 11

196:1.8 (2091.4) 2. The messenger of Immanuel who appeared to him at Jerusalem when he was about twelve years old. 그가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임마누엘의 사자(使者). AD 7. 4. 8

196:1.9 (2091.5) 3. The manifestations attendant upon his baptism. 그의 세례에 수반된 현시(顯示)들. AD 26. 1. 14

196:1.10 (2091.6) 4. The experiences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변모(變貌) 산의 체험들. AD 29. 8. 15

196:1.11 (2091.7) 5. The morontia resurrection. 모론시아 부활. AD 30. 4. 9

196:1.12 (2091.8) 6. The spirit ascension. 영의 상승. AD 30. 5. 18

196:1.13 (2091.9) 7. The final embrace of the Paradise Father, conferring unlimit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그의 우주의 무제한적 주권을 수여한 천국 아버지의 최종적 품에 안김(포옹). AD 30. 5. 28

2. The Religion of Jesus 예수님의 종교

170723 예수님의 신앙 10 – 예수님의 종교 1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kjv).

196:2.1 (2091.10) Some day a reformation in the Christian church may strike deep enough to get back to the unadulterated religious teachings of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You may preach a religion about Jesus, but, perforce, you must live the religion of Jesus. In the enthusiasm of Pentecost, Peter unintentionally inaugurated a new religion, the religion of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The Apostle Paul later on transformed this new gospel into Christianity, a religion embodying his own theologic views and portraying his own personal experience with the Jesus of the Damascus road.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founded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Jesus of Galilee; Christianity is founded almost exclusively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Apostle Paul. Almost the whole of the New Testament is devoted, not to the portrayal of the significant and inspiring religious life of Jesus, but to a discussion of Paul’s religious experience and to a portrayal of his personal religious convictions. The only notable exceptions to this statement, aside from certain parts of Matthew, Mark, and Luke, are the Book of Hebrews and the Epistle of James. Even Peter, in his writing, only once reverted to the personal religious life of his Master. The New Testament is a superb Christian document, but it is only meagerly Jesusonian. 언젠가는 기독교 교회 안에서, 우리 신앙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섞이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들로 돌아가려는 개혁이 충분히 깊게 일어날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님에 대한 종교를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너희는 반드시 예수님의 종교를 살아야(실천해야)만 한다. 오순절의 열광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뜻하지 않게) 새로운 종교,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종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새로운 복음을 기독교, 그 자신의 신학적 견해들을 체현하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묘사한 종교로 변환시켰습니다(행9:1-20).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갈릴리 예수님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 종교 체험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전부는, 의미 있고 영감을 주는 예수님의 종교적 일생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토론과 그의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들에 대한 묘사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 진술에 대해 유일하게 두드러진 예외들은,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 복음의 어떤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뿐입니다. 베드로마저도 그의 글 속에서 자기 주(主)님의 개인적인 종교적 일생에 단지 한번만 눈길을 돌렸을 뿐이었습니다(벧전2:21-23). 신약은 매우 훌륭한 기독교인의 문서이지만,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예수 공동체)로서 빈약할 따름입니다.

196:2.2 (2091.11) Jesus’ life in the flesh portrays a transcendent religious growth from the early ideas of primitive awe and human reverence up through years of personal spiritual communion until he finally arrived at that advanced and exalted status of the consciousness of his oneness with the Father. And thus, in one short life, did Jesus traverse that experience of religious spiritual progression which man begins on earth and ordinarily achieves only at the conclusion of his long sojourn in the spirit training schools of the successive levels of the pre-Paradise career. Jesus progressed from a purely human consciousness of the faith certainties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to the sublime spiritual heights of the positive realization of his divine nature and to the consciousness of his close association with the Universal Father in the management of a universe. He progressed from the humble status of mortal dependence which prompted him spontaneously to say to the one who called him Good Teacher, “Why do you call me good? None is good but God,” to that sublime consciousness of achieved divinity which led him to exclaim, “Which one of you convicts me of sin?” And this progressing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was an exclusively mortal achievement. And when he had thus attained divinity, he was still the same human Jesus, the Son of Man as well as the Son of God.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심과 인간적 존경심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에서부터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시기들을 거쳐서 그가 최종적으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됨을 의식하는 발전되고 고양된 지위에 도달하기까지의 탁월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은 한 번의 짧은 일생동안에, 사람이 지상에서 시작하여 천국 이전 생애에, 연속적인 단계들의 영 훈련 학교들에서 그의 오랜 체재를 마친 후에만 일반적으로 성취하는, 종교적 영적 진보의 체험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신앙 확신들의 순수한 인간 의식으로부터 그의 신적 본성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는 숭고한 영적 절정에까지, 그리고 우주 경영에 대한 우주 아버지와의 긴밀한 연관의 의식까지 진보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즉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라(마19:16-17, 막10:17-18, 눅18:18-19).”고 말하도록 한 그러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상태로부터, “너희 중의 누가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느냐?(요8:46)”라고 외치도록 그를 인도한 성취된 신성의 그 숭고한 의식의 정도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신적인 것까지의 이 진보하는 상승은 전적으로 필사자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신성을 이루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동일한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196:2.3 (2092.1) Mark, Matthew, and Luke retain something of the picture of the human Jesus as he engaged in the superb struggle to ascertain the divine will and to do that will. John presents a picture of the triumphant Jesus as he walked on earth in the full consciousness of divinity. The great mistake that has been made by those who have studied the Master’s life is that some have conceived of him as entirely human, while others have thought of him as only divine. Throughout his entire experience he was truly both human and divine, even as he yet is.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가 신적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장엄한 분투에 임하고 있었을 때의 인간 예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신성의 충만한 의식으로 지상을 거닐었던 승리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主)님의 일생을 연구한 사람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였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오로지 신(神)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체험을 통하여 그는 진실로 인간인 동시에 신(神)이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십니다.

196:2.4 (2092.2) But the greatest mistake was made in that, while the human Jesus was recognized as having a religion, the divine Jesus (Christ) almost overnight became a religion. Paul’s Christianity made sure of the adoration of the divine Christ, but it almost wholly lost sight of the struggling and valiant human Jesus of Galilee, who, by the valor of his personal religious faith and the heroism of his indwelling Adjuster, ascended from the lowly levels of humanity to become one with divinity, thus becoming the new and living way whereby all mortals may so ascend from humanity to divinity. Mortals in all stages of spirituality and on all worlds may find in the personal life of Jesus that which will strengthen and inspire them as they progress from the lowest spirit levels up to the highest divine values,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all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그러나 가장 큰 과오는,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지신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의 기독교는 신적인 그리스도를 숭배하도록 확실히 만들었지만, 그것은 그의 개인적 종교 신앙의 용기와 그의 내재하는 조절자의 영웅적 자질로, 인간성의 낮은 차원들에서부터 신성과 하나가 되기까지 상승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든 필사자들이 그것을 통하여 인간성으로부터 신성으로 그렇게 상승할 수 있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되신 갈릴리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님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영성(靈性)의 모든 단계들과 온 세상들에 있는 필사자들은 예수님의 개인적 일생 속에서 그들이 가장 낮은 영 차원들에서부터 가장 높은 신적 가치들에 이르기까지와, 모든 개인적인 종교 체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들이 진보할 때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96:2.5 (2092.3)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the New Testament, the authors not only most profoundly believed in the divinity of the risen Christ, but they also devotedly and sincerely believed in his immediate return to earth to consummate the heavenly kingdom. This strong faith in the Lord’s immediate return had much to do with the tendency to omit from the record those references which portrayed the purely human experiences and attributes of the Master. The whole Christian movement tended away from the human picture of Jesus of Nazareth toward the exaltation of the risen Christ, the glorified and soon-returning Lord Jesus Christ.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저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깊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재림하리라고 헌신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이러한 강한 신앙은 주(主)님의 순전한 인간 체험들과 속성들을 보여주는 그러한 자료들을 기록에서 생략하려는 경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체 기독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 모습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고 곧-재림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방향으로 향하였습니다.

170730 예수님의 신앙 11 – 예수님의 종교 2 막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196:2.6 (2092.4) Jesus founded the religion of personal experience in doing the will of God and serving the human brotherhood; Paul founded a religion in which the glorified Jesus became the object of worship and the brotherhood consisted of fellow believers in the divine Christ. In the bestowal of Jesus these two concepts were potential in his divine-human life, and it is indeed a pity that his followers failed to create a unified religion which might have given proper recognition to both the human and the divine natures of the Master as they were inseparably bound up in his earth life and so gloriously set forth in the original gospel of the kingdom.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신분에 봉사하는 개인적 체험의 종교를 설립하셨습니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형제신분은 신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종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예수의 증여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은 그의 신적-인간의 일생 속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지상의 일생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도록 묶여있고 최초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영광스럽게 밝혀져 있었음으로 주(主)님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두 본성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추종자들이 통합된 종교 설립에 실패한 것은 정말 애석하다.

196:2.7 (2093.1) You would be neither shocked nor disturbed by some of Jesus’ strong pronouncements if you would only remember that he was the world’s most wholehearted and devoted religionist. He was a wholly consecrated mortal, unreservedly dedicated to doing his Father’s will. Many of his apparently hard sayings were more of a personal confession of faith and a pledge of devotion than commands to his followers. And it was this very singleness of purpose and unselfish devotion that enabled him to effect such extraordinary progress in the conquest of the human mind in one short life. Many of his declarations should be considered as a confession of what he demanded of himself rather than what he required of all his followers. In his devotion to the cause of the kingdom, Jesus burned all bridges behind him; he sacrificed all hindrances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너희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헌신적인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일부 강경한 발언들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정화(淨化)된 필사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남김없이 봉헌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명백한 강한 말씀들 중 많은 것들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신앙 고백과 헌신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오로지 한 가지 목적과 사심-없는 헌신으로 그는 한 번의 짧은 일생에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그토록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님은 지나온 다리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 있는 장애물을 모두 희생했습니다.

196:2.8 (2093.2) Jesus blessed the poor because they were usually sincere and pious; he condemned the rich because they were usually wanton and irreligious. He would equally condemn the irreligious pauper and commend the consecrated and worshipful man of wealth.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들이 대개 방종하고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신앙이 없는 빈민을 꾸짖고, 헌신적인 신앙심 깊은 부자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196:2.9 (2093.3) Jesus led men to feel at home in the world; he delivered them from the slavery of taboo and taught them that the world was not fundamentally evil. He did not long to escape from his earthly life; he mastered a technique of acceptably doing the Father’s will while in the flesh. He attained an idealistic religious life in the very midst of a realistic world. Jesus did not share Paul’s pessimistic view of humankind. The Master looked upon men as the sons of God and foresaw a magnificent and eternal future for those who chose survival. He was not a moral skeptic; he viewed man positively, not negatively. He saw most men as weak rather than wicked, more distraught than depraved. But no matter what their status, they were all God’s children and his brethren. 예수님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편안하게 느끼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미신적인 금기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으며, 세상은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지상 생활에서 도피하기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기법에 통달하셨습니다. 그는 실제의 현실 세계 한 복판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일생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인간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갖지 않았습니다. 주(主)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보셨고, 생존을 선택한 그들 앞에 펼쳐질 장엄하고 영원한 미래를 내다 보셨습니다. 그는 도덕면에서 회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악하기보다는 연약하다고 보았으며, 타락했다기보다는 갈팡질팡한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가 어떻든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으며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196:2.10 (2093.4) He taught men to place a high value upon themselves in time and in eternity. Because of this high estimate which Jesus placed upon men, he was willing to spend himself in the unremitting service of humankind. And it was this infinite worth of the finite that made the golden rule a vital factor in his religion. What mortal can fail to be uplifted by the extraordinary faith Jesus has in him?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영원 속에서 자신들에게 높은 가치를 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두신 이 높은 평가 때문에. 그는 인간을 위한 끊임없는 봉사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유한 존재에 대한 이 무한한 가치 때문에 그는 자신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소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께서 그를 향해 지니신 특별한 신앙에 의해 높이 향상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6:2.11 (2093.5) Jesus offered no rules for social advancement; his was a religious mission, and religion is an exclusively individual experience. The ultimate goal of society’s most advanced achievement can never hope to transcend Jesus’ brotherhood of men based on the recognition of the fatherhood of God. The ideal of all social attainment can be realized only in the coming of this divine kingdom. 예수님은 사회적 발전을 위한 어떤 규율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종교적이었고, 종교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체험입니다. 사회의 가장 진보된 성취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의 깨달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형제신분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달성에 대한 이상(理想)은 이 신적 나라의 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3. The Supremacy of Religion 종교의 최극위

196:3.1 (2093.6) Personal, spiritual religious experience is an efficient solvent for most mortal difficulties; it is an effective sorter, evaluator, and adjuster of all human problems. Religion does not remove or destroy human troubles, but it does dissolve, absorb, illuminate, and transcend them. True religion unifies the personality for effective adjustment to all mortal requirements. Religious faith — the positive leading of the indwelling divine presence — unfailingly enables the God-knowing man to bridge that gulf existing between the intellectual logic which recognizes the Universal First Cause as It and those positive affirmations of the soul which aver this First Cause is He, the heavenly Father of Jesus’ gospel, the personal God of human salvation. 개인적, 영적 종교 체험은 대부분의 필사자가 지닌 어려움들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문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분류자, 평가자, 그리고 조절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근심들을 없애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을 용해하고, 흡수하고, 밝혀주고, 그리고 초월합니다. 참된 종교는 모든 필사자의 요구들에 대한 효과적 조절을 위해 고유성을 통합합니다. 종교적 신앙 ─내재하는 신적 현존의 적극적 인도─ 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원인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인 논리와, 이 첫째 원인이 그 분, 즉 예수 복음의 하늘 아버지이며, 인간 구원의 개인적 하나님이라고 단언하는 혼의 적극적 선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확실히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게 합니다.

196:3.2 (2094.1) There are just three elements in universal reality: fact, idea, and relation.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dentifies these realities as science, philosophy, and truth. Philosophy would be inclined to view these activities as reason, wisdom, and faith — physical reality, intellectual reality, and spiritual reality. We are in the habit of designating these realities as thing, meaning, and value. 우주적 실체에는 꼭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실, 관념, 그리고 관계입니다. 종교적 의식은 이들 실체들을 과학, 철학, 그리고 진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철학은 이 활동들을 이성, 지혜, 그리고 신앙─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 의미, 그리고 가치로 명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196:3.3 (2094.2) The progressive comprehension of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approaching God. The finding of God, the consciousness of identity with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the experiencing of self-completion — self-entirety, self-totality. The experiencing of total reality is the full realization of God, the finality of the God-knowing experience. 실체에 대한 진보적 이해는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에 상응합니다. 하나님의 발견, 실체와 동일한 것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완성 ─ 자아-전체성, 자아-총체성─을 체험하는 것에 상응합니다. 총체적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실현, 즉 하나님을-아는 체험의 최종성입니다.

196:3.4 (2094.3) The full summation of human life is the knowledge that man is educated by fact, ennobled by wisdom, and saved — justified — by religious faith. 인간 일생의 충만한 총합은 사람이 사실에 의해 교육되고, 지혜로 고귀해지며, 종교적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받아-구원받는다는 앎(지식)입니다.

196:3.5 (2094.4) Physical certainty consists in the logic of science; moral certainty, in the wisdom of philosophy; spiritual certainty, in the truth of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물질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으며,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있고, 영적 확실성은 참된 종교적 체험의 진리에 있습니다.

196:3.6 (2094.5) The mind of man can attain high levels of spiritual insight and corresponding spheres of divinity of values because it is not wholly material. There is a spirit nucleus in the mind of man — the Adjuster of the divine presence. There are three separate evidences of this spirit indwelling of the human mind: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영적 통찰력의 높은 차원들과 가치들의 신성에 상응하는 영역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 핵─신적 현존의 조율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이 영이 내주하시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196:3.7 (2094.6) 1. Humanitarian fellowship — love. The purely animal mind may be gregarious for self-protection, but only the spirit-indwelt intellect is unselfishly altruistic and unconditionally loving. 인도주의적 친교─사랑. 순전히 동물적 마음이 자아-보호를 위하여 집단을 이룰 수는 있지만, 영이 내주하는 지성만이 사심-없이 이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196:3.8 (2094.7) 2. Interpretation of the universe — wisdom. Only the spirit-indwelt mind can comprehend that the universe is friendly to the individual.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내주하는 마음만이 우주가 개별존재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6:3.9 (2094.8) 3. Spiritual evaluation of life — worship. Only the spirit-indwelt man can realize the divine presence and seek to attain a fuller experience in and with this foretaste of divinity. 삶의 영적 평가─경배. 오직 영이 내주하는 사람만이 신적 현존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성을 시식(試食)하면서 그 안에서 훨씬 충만한 체험을 얻으려고 추구할 수 있습니다.

196:3.10 (2094.9) The human mind does not create real values; human experience does not yield universe insight. Concerning insight, the recognition of moral values and the discernment of spiritual meanings, all that the human mind can do is to discover, recognize, interpret, and choose. 인간의 마음은 실제 가치들을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험이 우주 통찰력을 낳지 않습니다. 통찰력, 즉 도덕적 가치들의 인식과 영적 의미들의 식별에 대하여, 인간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발견하고, 인식하며, 해석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196:3.11 (2094.10) The moral values of the universe become intellectual possessions by the exercise of the three basic judgments, or choices, of the mortal mind: 우주의 도덕적 가치들은 필사 마음의 세 가지 기본적 판단들, 혹은 선택들의 실행에 의하여 지적 소유물들이 됩니다.

196:3.12 (2094.11) 1. Self-judgment — moral choice. 자아-판단─도덕적 선택.

196:3.13 (2094.12) 2. Social-judgment — ethical choice. 사회적-판단─윤리적 선택.

196:3.14 (2094.13) 3. God-judgment — religious choice. 하나님-판단─종교적 선택.

196:3.15 (2094.14) Thus it appears that all human progress is effected by a technique of conjoint revelational evolution. 이렇게 모든 인간적 진보는 공동의 계시적 진화의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196:3.16 (2094.15) Unless a divine lover lived in man, he could not unselfishly and spiritually love. Unless an interpreter lived in the mind, man could not truly realize the unity of the universe. Unless an evaluator dwelt with man, he could not possibly appraise moral values and recognize spiritual meanings. And this lover hails from the very source of infinite love; this interpreter is a part of Universal Unity; this evaluator is the child of the Center and Source of all absolute values of divine and eternal reality. 신적 연인(戀人)이 사람 안에 살지 있지 않았다면, 그는 사심(私心)없이(비이기적으로)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해석(解釋)자가 마음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평가(評價)자가 사람과 함께 거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들을 평가할 수도 없고 영적 의미들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연인(戀人)은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내려오십니다. 이 해석(解釋)자는 우주적 통일성의 일부이십니다. 이 평가(評價)자는 신적이며 영원한 실체에 담겨있는 모든 절대 가치들의 중심과 근원의 자녀이십니다.

196:3.17 (2095.1) Moral evaluation with a religious meaning — spiritual insight — connotes the individual’s choice between good and evil, truth and error, material and spiritual, human and divine, time and eternity. Human survival is in great measure dependent on consecrating the human will to the choosing of those values selected by this spirit-value sorter — the indwelling interpreter and unifier.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consists in two phases: discovery in the human mind and revelation by the indwelling divine spirit. Through oversophistication or as a result of the irreligious conduct of professed religionists, a man, or even a generation of men, may elect to suspend their efforts to discover the God who indwells them; they may fail to progress in and attain the divine revelation. But such attitudes of spiritual nonprogression cannot long persist because of the presence and influence of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s.

196:3.18 (2095.2) This profound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divine indwelling forever transcends the crude materialistic technique of the physical sciences. You cannot put spiritual joy under a microscope; you cannot weigh love in a balance; you cannot measure moral values; neither can you estimate the quality of spiritual worship.

196:3.19 (2095.3) The Hebrews had a religion of moral sublimity; the Greeks evolved a religion of beauty; Paul and his conferees founded a religion of faith, hope, and charity. Jesus revealed and exemplified a religion of love: security in the Father’s love, with joy and satisfaction consequent upon sharing this love in the service of the human brotherhood.

196:3.20 (2095.4) Every time man makes a reflective moral choice, he immediately experiences a new divine invasion of his soul. Moral choosing constitutes religion as the motive of inner response to outer conditions. But such a real religion is not a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It signifies the whole of the subjectivity of the individual engaged in a meaningful and intelligent response to total objectivity — the universe and its Maker.

196:3.21 (2095.5) The exquisite and transcendent experience of loving and being loved is not just a psychic illusion because it is so purely subjective. The one truly divine and objective reality that is associated with mortal beings, the Thought Adjuster, functions to human observation apparently as an exclusively subjective phenomenon. Man’s contact with the highest objective reality, God, is only through the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of knowing him, of worshiping him, of realizing sonship with him.

196:3.22 (2095.6) True religious worship is not a futile monologue of self-deception. Worship is a personal communion with that which is divinely real, with that which is the very source of reality. Man aspires by worship to be better and thereby eventually attains the best.

196:3.23 (2095.7) The idealization and attempted service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not a substitute for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 spiritual reality. Psychology and idealism are not the equivalent of religious reality. The projections of the human intellect may indeed originate false gods — gods in man’s image — but the true God-consciousness does not have such an origin. The God-consciousness is resident in the indwelling spirit. Many of the religious systems of man come from the formulations of the human intellect, but the God-consciousness is not necessarily a part of these grotesque systems of religious slavery.

196:3.24 (2095.8) God is not the mere invention of man’s idealism; he is the very source of all such superanimal insights and values. God is not a hypothesis formulated to unify the human concept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he is the personality of love from whom all of these universe manifestations are derived. The truth, beauty, and goodness of man’s world are unified by the increasing spirituality of the experience of mortals ascending toward Paradise realities. The unity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can only be realized in the spiritual experience of the God-knowing personality.

196:3.25 (2096.1) Morality is the essential pre-existent soil of personal God-consciousness, the personal realization of the Adjuster’s inner presence, but such morality is not the source of religious experience and the resultant spiritual insight. The moral nature is superanimal but subspiritual. Morality is equivalent to the recognition of duty, the realization of the existence of right and wrong. The moral zone intervenes between the animal and the human types of mind as morontia functions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spheres of personality attainment.

196:3.26 (2096.2) The evolutionary mind is able to discover law, morals, and ethics; but the bestowed spirit, the indwelling Adjuster, reveals to the evolving human mind the lawgiver, the Father-source of all that is true, beautiful, and good; and such an illuminated man has a religion and is spiritually equipped to begin the long and adventurous search for God.

196:3.27 (2096.3) Morality is not necessarily spiritual; it may be wholly and purely human, albeit real religion enhances all moral values, makes them more meaningful. Morality without religion fails to reveal ultimate goodness, and it also fails to provide for the survival of even its own moral values. Religion provides for the enhancement, glorification, and assured survival of everything morality recognizes and approves.

196:3.28 (2096.4) Religion stands above science, art, philosophy, ethics, and morals, but not independent of them. They are all indissolubly interrelated in human experience, personal and social. Religion is man’s supreme experience in the mortal nature, but finite language makes it forever impossible for theology ever adequately to depict real religious experience.

196:3.29 (2096.5) Religious insight possesses the power of turning defeat into higher desires and new determinations. Love is the highest motivation which man may utilize in his universe ascent. But love, divested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only a sentiment, a philosophic distortion, a psychic illusion, a spiritual deception. Love must always be redefined on successive levels of morontia and spirit progression.

196:3.30 (2096.6) Art results from man’s attempt to escape from the lack of beauty in his material environment; it is a gesture toward the morontia level. Science is man’s effort to solve the apparent riddles of the material universe. Philosophy is man’s attempt at the unification of human experience. Religion is man’s supreme gesture, his magnificent reach for final reality, his determination to find God and to be like him.

196:3.31 (2096.7) In the realm of religious experience, spiritual possibility is potential reality. Man’s forward spiritual urge is not a psychic illusion. All of man’s universe romancing may not be fact, but much, very much, is truth.

196:3.32 (2096.8) Some men’s lives are too great and noble to descend to the low level of being merely successful. The animal must adapt itself to the environment, but the religious man transcends his environment and in this way escapes the limitations of the present material world through this insight of divine love. This concept of love generates in the soul of man that superanimal effort to find truth, beauty, and goodness; and when he does find them, he is glorified in their embrace; he is consumed with the desire to live them, to do righteousness.

196:3.33 (2097.1) Be not discouraged; human evolution is still in progress, and the revelation of God to the world, in and through Jesus, shall not fail.

196:3.34 (2097.2) The great challenge to modern man is to achieve better communication with the divine Monitor that dwells within the human mind. Man’s greatest adventure in the flesh consists in the well-balanced and sane effort to advance the borders of self-consciousness out through the dim realms of embryonic soul-consciousness in a wholehearted effort to reach the borderland of spirit-consciousness — contact with the divine presence. Such an experience constitutes God-consciousness, an experience mightily confirmative of the pre-existent truth of the religious experience of knowing God. Such spirit-consciousness is the equivalent of the knowledge of the actuality of sonship with God. Otherwise, the assurance of sonship is the experience of faith.

196:3.35 (2097.3) And God-consciousness is equivalent to the integration of the self with the universe, and on its highest levels of spiritual reality. Only the spirit content of any value is imperishable. Even that which is true, beautiful, and good may not perish in human experience. If man does not choose to survive, then does the surviving Adjuster conserve those realities born of love and nurtured in service. And all these things are a part of the Universal Father. The Father is living love, and this life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And the spirit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sons — mortal men. When all is said and done, the Father idea is still the highest human concept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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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65 The Overcontrol of Evolution 진화의 전반적-조정

Paper 65

The Overcontrol of Evolution 진화의 전반적-조정

1. Life Carrier Functions 생명 운반자의 기능
(1) The physical level of electrochemistry  전기화학의 물리적 수준
(2) The usual mid-phase of quasi-morontial existence 준(準)-모론시아 실존의 통상의 중간-위상
(3) The advanced semispiritual level 진보된 반(半)영적 수준
2. The Evolutionary Panorama 진화의 개관
3. The Fostering of Evolution 진화의 육성
4. The Urantia Adventure 유란시아 모험
5. Life-Evolution Vicissitudes 생명-진화 변천
6. Evolutionary Techniques of Life 생명의 진화적 기법
7. Evolutionary Mind Levels 진화하는 마음 수준
Mechanical-nonteachable mind 기계적이며-가르칠 수 없는 마음
Nonmechanical experiencing mind 비(非)기계적이며 체험하는 마음
8. Evolution in Time and Space 시간과 공간에 있는 진화

65:0.1 (730.1) BASIC evolutionary material life — premind life — is the formulation of the Master Physical Controllers and the life-impartation ministry of the Seven Master Spirits in conjunction with the active ministration of the ordained Life Carriers. As a result of the co-ordinate function of this threefold creativity there develops organismal physical capacity for mind — material mechanisms for intelligent reaction to external environmental stimuli and, later on, to internal stimuli, influences taking origin in the organismal mind itself. 기본적인 진화의 물질 생명─전(前)마음 생명─은, 임명받은 생명운반자들의 활동적인 사역과 함께, 주(主)물리 조정자들이 형성하고 일곱 주(主) 영들이 생명을-분배한 사역입니다. 이 삼중(三重) 창조성이 통합 협동한 결과, 마음을 위해 유기체의 물리적 수용 능력 즉 외부 환경적 자극과 나중에는 유기체적 마음 자체에서 비롯된 영향력인 내부적 자극에 지능적인 반응을 위한 물질적 작용─이 개발됩니다.

65:0.2 (730.2) There are, then, three distinct levels of life production and evolution: 그 다음에, 생명 생산과 진화에는 뚜렷한 3 수준들이 있습니다.

65:0.3 (730.3) 1. The physical-energy domain — mind-capacity production. 물리적 에너지 권역 – 마음-수용능력 생산.

65:0.4 (730.4) 2. The mind ministry of the adjutant spirits — impinging upon spirit capacity. 보조 영들의 마음 사역 – 영 수용 능력에 영향을 끼침.

65:0.5 (730.5) 3. The spirit endowment of mortal mind — culminating in Thought Adjuster bestowal. 필사자 마음의 영 자질 – 생각 조율자 증여로 절정에 이름.

65:0.6 (730.6) The mechanical-nonteachable levels of organismal environmental response are the domains of the physical controllers. The adjutant mind-spirits activate and regulate the adaptative or nonmechanical-teachable types of mind — those response mechanisms of organisms capable of learning from experience. And as the spirit adjutants thus manipulate mind potentials, so do the Life Carriers exercise considerable discretionary control over the environmental aspects of evolutionary processes right up to the time of the appearance of human will — the ability to know God and the power of choosing to worship him. 유기체적 환경의 반응에 대한 기계적이며-학습이 불가능한 수준들은 물리 조정자들의 권역입니다. 보조 마음-영들은 적응할 수 있거나 비(非)기계적이며 학습이 가능한 마음의 유형들 – 체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유기체의 그런 반응 기능구조 –를 활성화하거나 규제합니다. 그리고 영 보조자들이 그렇게 마음 잠재력을 조종하듯이, 생명 운반자들은 인간의 의지 –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과 그를 경배하기로 선택하는 권능 -가 나타나기까지 진화 과정의 환경적 측면들을 상당한 재량으로 조정을 시행합니다.

65:0.7 (730.7) It is the integrated functioning of the Life Carriers, the physical controllers, and the spirit adjutants that conditions the course of organic evolution on the inhabited worlds. And this is why evolution — on Urantia or elsewhere — is always purposeful and never accidental. 거주 세계의 유기적 진화 과정의 조건은 생명 운반자들, 물리 조정자들, 그리고 영 보조자들의 통합된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구(유란시아) 또는 다른 곳의 진화가 항상 목적이 있으며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입니다.

1. Life Carrier Functions 생명 운반자의 기능

65:1.1 (730.8) The Life Carriers are endowed with potentials of personality metamorphosis which but few orders of creatures possess. These Sons of the local universe are capable of functioning in three diverse phases of being. They ordinarily perform their duties as mid-phase Sons, that being the state of their origin. But a Life Carrier in such a stage of existence could not possibly function in the electrochemical domains as a fabricator of physical energies and material particles into units of living existence. 생명 운반자들은 근소한 계층의 창조물들이 소유한 고유성 변형의 잠재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지역 우주의 이 아들들은 세 가지 다른 존재 단계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중간-위상 아들들로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기원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존 단계의 생명 운반자는, 전기 화학적 영역에서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 입자들을 살아있는 실존 단위로 제조하는 자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65:1.2 (730.9) Life Carriers are able to function and do function on the following three levels: 생명 운반자들은 다음의 세 수준들에서 기능할 수 있으며 기능합니다.

65:1.3 (730.10) 1. The physical level of electrochemistry. 전기화학의 물리적 수준.

65:1.4 (730.11) 2. The usual mid-phase of quasi-morontial existence. 준(準)-모론시아 실존의 통상의 중간-위상.

65:1.5 (730.12) 3. The advanced semispiritual level. 진보된 반(半)영적 수준.

65:1.6 (731.1) When the Life Carriers make ready to engage in life implantation, and after they have selected the sites for such an undertaking, they summon the archangel commission of Life Carrier transmutation. This group consists of ten orders of diverse personalities, including the physical controllers and their associates, and is presided over by the chief of archangels, who acts in this capacity by the mandate of Gabriel and with the permission of the Ancients of Days. When these beings are properly encircuited, they can effect such modifications in the Life Carriers as will enable them immediately to function on the physical levels of electrochemistry.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 이식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면, 그들이 그러한 작업 장소를 선정한 후, 그들은 생명 운반자 변환을 담당한 천사장 위원회를 소집합니다. 이 집단은, 물리 조정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포함된, 다양한 10계층의 고유성들로 구성되며, 천사장들의 우두머리가 관장하는데, 그는 이 자격으로 가브리엘의 명령과 옛적으로 늘 계신이의 허락을 받아 행동합니다. 이 존재들이 적절히 회로화가 되면, 그들은, 전기화학의 물리적 수준에서 그들을 즉시 기능할 수 있게 만들, 그러한 수정을 생명 운반자 안에서 실행할 수 있습니다.

65:1.7 (731.2) After the life patterns have been formulated and the material organizations have been duly completed, the supermaterial forces concerned in life propagation become forthwith active, and life is existent. Whereupon the Life Carriers are immediately returned to their normal mid-phase of personality existence, in which estate they can manipulate the living units and maneuver the evolving organisms, even though they are shorn of all ability to organize — create — new patterns of living matter. 생명 원형들이 형성되고 물질 조직들이 충분히 완료된 후, 생명 증식에 관계된 초물질 힘들이 즉시 활성화되어, 생명이 존재합니다. 그 후에 생명 운반자들은 그들의 정상적인 중간-위상의 고유성 실존으로 즉시 돌아오며, 비록 살아있는 물체의 새 원형들을 조직─창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잃었어도, 그 상태에서 그들은 살아있는 단위들을 조종하고, 진화하는 유기체들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65:1.8 (731.3) After organic evolution has run a certain course and free will of the human type has appeared in the highest evolving organisms, the Life Carriers must either leave the planet or take renunciation vows; that is, they must pledge themselves to refrain from all attempts further to influence the course of organic evolution. And when such vows are voluntarily taken by those Life Carriers who choose to remain on the planet as future advisers to those who shall be intrusted with the fostering of the newly evolved will creatures, there is summoned a commission of twelve, presided over by the chief of the Evening Stars, acting by authority of the System Sovereign and with permission of Gabriel; and forthwith these Life Carriers are transmuted to the third phase of personality existence — the semispiritual level of being. And I have functioned on Urantia in this third phase of existence ever since the times of Andon and Fonta. 유기적 진화가 특정 과정을 마치고 인간 유형의 자유의지가 가장 높은 진화 유기체들에서 나타난 후, 생명 운반자들은 그 행성을 떠나든지 아니면 포기서약을 해야만 합니다, 즉, 그들이 유기체 진화 과정에 더 영향을 끼치는 모든 시도를 그만둔다고 스스로 맹세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행성에서, 미래의 충고자들로 남기를 선택한 그 생명 운반자들의 자발적 서약들이 받아들여지면, 새롭게 진화된 의지적 창조물들의 양육이 위탁될 것이며. 체계 주권자의 권한과 가브리엘의 허락으로 활동하는 저녁별들의 우두머리가 관장하는 12인 위원회가 소집됩니다. 그리고 이 생명 운반자들은 즉시 고유성 실존의 세 번째 위상─반(半)영적 존재의 수준─으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나는 지구(유란시아)에서 안돈과 폰타의 시대 이후로 줄곧 이 세 번째 위상의 실존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65:1.9 (731.4) We look forward to a time when the universe may be settled in light and life, to a possible fourth stage of being wherein we shall be wholly spiritual, but it has never been revealed to us by what technique we may attain this desirable and advanced estate. 우리는 우주가 빛과 생명에 안정될 때, 우리가 온통 영적이 될 가능한 네 번째 존재 단계를 고대하지만, 우리가 어떤 기법으로 바람직하고 이 진보된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계시된 적이 전혀 없습니다.

2. The Evolutionary Panorama 진화의 개관

65:2.1 (731.5) The story of man’s ascent from seaweed to the lordship of earthly creation is indeed a romance of biologic struggle and mind survival. Man’s primordial ancestors were literally the slime and ooze of the ocean bed in the sluggish and warm-water bays and lagoons of the vast shore lines of the ancient inland seas, those very waters in which the Life Carriers established the three independent life implantations on Urantia. 해초(海草)로부터 땅의 창조의 주재권(主宰權)까지 인간의 상승 이야기는 정말로 생물학적 투쟁과 마음이 생존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원시 조상들은 문자 그대로 고대 내륙 바다의 광대한 해안선의 완만한 난류 만(灣)들과 개펄들의 해양 지층에 있던 점액과 분비물이었으며, 바로 그 물속에 생명 운반자들은 지구(유란시아)에 세 가지의 독립된 생명을 이식(利息)했습니다.

65:2.2 (731.6) Very few species of the early types of marine vegetation that participated in those epochal changes which resulted in the animallike borderland organisms are in existence today. The sponges are the survivors of one of these early midway types, those organisms through which the gradual transition from the vegetable to the animal took place. These early transition forms, while not identical with modern sponges, were much like them; they were true borderline organisms — neither vegetable nor animal — but they eventually led to the development of the true animal forms of life. 동물과 같이 어중간한 상태의 유기체들로 귀착된, 이 기원적 변화에 참여한 초기 유형의 해양 식물 중 극소수의 종(種)들만 오늘날 존재하고 있습니다. 해면(海綿)체들은 이 초기의 중간유형 유기체들 중 하나가 살아남은 것들이며, 그것을 통해 식물에서 동물로 점차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초기의 변이 형태들은. 현대의 해면체들과 똑같지 않지만,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것들은 참으로 어중간한 –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 유기체들이었지만 결국 진정한 동물 형태의 생명으로 발달되었습니다.

65:2.3 (732.1) The bacteria, simple vegetable organisms of a very primitive nature, are very little changed from the early dawn of life; they even exhibit a degree of retrogression in their parasitic behavior. Many of the fungi also represent a retrograde movement in evolution, being plants which have lost their chlorophyll-making ability and have become more or less parasitic. The majority of disease-causing bacteria and their auxiliary virus bodies really belong to this group of renegade parasitic fungi. During the intervening ages all of the vast kingdom of plant life has evolved from ancestors from which the bacteria have also descended. 박테리아는, 매우 원시적 본성의 단순한 식물 유기체들로서, 초기 생명의 여명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기생(寄生) 습성에서 어느 정도의 퇴화를 나타냅니다. 많은 곰팡이들도 또한 진화에 있어서 퇴행 운동을 나타내어, 엽록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려 어느 정도 기생적인 식물입니다. 병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박테리아들과 그들을 보조하는 바이러스 생체들은 정말로 변질된 기생 곰팡이(진균류眞菌類)의 이 집단에 속합니다. 중간 시대들 동안 방대한 모든 식물 생명계(生命界)는 조상들로부터 진화하였고, 박테리아는 또한 그 조상들로부터 퇴보하였습니다.

65:2.4 (732.2) The higher protozoan type of animal life soon appeared, and appeared suddenly. And from these far-distant times the ameba, the typical single-celled animal organism, has come on down but little modified. He disports himself today much as he did when he was the last and greatest achievement in life evolution. This minute creature and his protozoan cousins are to the animal creation what bacteria are to the plant kingdom; they represent the survival of the first early evolutionary steps in life differentiation together with failure of subsequent development. 동물 생명의 고등 원생동물 유형이 바로 출현하였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득한 이 시절부터 전형적인 단일 세포 동물 유기체인 아메바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내려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아메바)는 생명 진화에서 최후로 가장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 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자신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미세한 이 생물과 이것과 유사한 원생동물들은, 박테리아가 식물계에 한 것처럼, 동물 창조를 이루었습니다. 그것들은 후일에 실패한 발전과 함께 생명 분화(分化)의 초기 진화에서 살아남은 첫 단계를 대변합니다.

65:2.5 (732.3) Before long the early single-celled animal types associated themselves in communities, first on the plan of the Volvox and presently along the lines of the Hydra and jellyfish. Still later there evolved the starfish, stone lilies, sea urchins, sea cucumbers, centipedes, insects, spiders, crustaceans, and the closely related groups of earthworms and leeches, soon followed by the mollusks — the oyster, octopus, and snail. Hundreds upon hundreds of species intervened and perished; mention is made only of those which survived the long, long struggle. Such nonprogressive specimens, together with the later appearing fish family, today represent the stationary types of early and lower animals, branches of the tree of life which failed to progress. 오래지 않아 초기 단세포 동물 유형들은, 처음에는 볼복스의 방식으로 이내 히드라와 해파리 계열을 따라, 군(群)으로 관련되었습니다. 훨씬 후에는 불가사리, 바다 나리, 성게, 해삼, 지네, 곤충, 거미, 갑각류, 그리고 밀접히 관련된 지렁이와 거머리들 군(群)으로 진화되었으며, 곧 연체동물들─굴, 낙지, 달팽이─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수백 종들이 중간에 나타났다가 멸망했으며, 길고 긴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들만 언급합니다. 진보되지 못한 그런 표본들은, 나중에 나타난 어류과(魚類科)와 함께, 오늘날 초기 하등동물의 정태적 유형들, 즉 진보에 실패한 생명나무의 가지들을 대변합니다.

65:2.6 (732.4) The stage was thus set for the appearance of the first backboned animals, the fishes. From this fish family there sprang two unique modifications, the frog and the salamander. And it was the frog which began that series of progressive differentiations in animal life that finally culminated in man himself. 그렇게 최초 척추동물인 물고기가 출현할 무대가 갖추어졌습니다. 이 어류과에서 독특하게 변경된 두 가지, 개구리와 도롱뇽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개구리가 동물 생명에서 일련의 진보적 분화를 시작하여 결국 인간 자체에서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65:2.7 (732.5) The frog is one of the earliest of surviving human-race ancestors, but it also failed to progress, persisting today much as in those remote times. The frog is the only species ancestor of the early dawn races now living on the face of the earth. The human race has no surviving ancestry between the frog and the Eskimo. 개구리는 최초로 살아남은 인간-종족 조상들 중 하나지만, 그 아득한 시절처럼 오늘날도 존속하지만, 그것 역시 진보에 실패하였습니다. 개구리는 지금 지구표면에 살아있는 초기 여명기 종족들의 유일한 종(種)들 조상입니다. 인간 종족은 개구리에서 에스키모인 사이에 살아남은 조상이 없습니다.

65:2.8 (732.6) The frogs gave rise to the Reptilia, a great animal family which is virtually extinct, but which, before passing out of existence, gave origin to the whole bird family and the numerous orders of mammals. 개구리로부터 사실상 멸종한 거대한 파충류 동물과가 나왔지만, 사라지기 전에, 그것들은 전체 조류과 및 수많은 포유동물 목(目)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65:2.9 (732.7) Probably the greatest single leap of all prehuman evolution was executed when the reptile became a bird. The bird types of today — eagles, ducks, pigeons, and ostriches — all descended from the enormous reptiles of long, long ago. 인간-이전(以前)의 모든 진화에서 가장 큰 한 번의 도약은 아마 파충류가 조류가 되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조류 유형들은─독수리, 오리, 비둘기, 그리고 타조─모두 멀고 먼 옛날의 수많은 파충류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65:2.10 (732.8) The kingdom of reptiles, descended from the frog family, is today represented by four surviving divisions: two nonprogressive, snakes and lizards, together with their cousins, alligators and turtles; one partially progressive, the bird family, and the fourth, the ancestors of mammals and the direct line of descent of the human species. But though long departed, the massiveness of the passing Reptilia found echo in the elephant and mastodon, while their peculiar forms were perpetuated in the leaping kangaroos. 개구리 과에서 유래된 파충류 계는 오늘날 생존한 네 부류(문門)로 분류되는데, 진보하지 않은 두 가지 문(門)들, 즉 뱀과 도마뱀과 그들의 동류인 악어와 거북이들, 부분적으로 진보한 조류과, 넷째는 포유동물과 인간 종족으로 내려오는 직계 조상들입니다. 그러나 오래전에 떠나갔지만, 한 때의 파충류의 거대함은 코끼리와 마스토돈에서 잔향이 발견되는 반면, 그들의 독특한 형태는 뛰어 오르는 캥거루를 통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65:2.11 (733.1) Only fourteen phyla have appeared on Urantia, the fishes being the last, and no new classes have developed since birds and mammals. 지구(유란시아)에는 오직 14개의 문(問)이 출현했으며, 어류가 마지막이었고, 조류와 포유류 이후에 새로운 종류(강綱)가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65:2.12 (733.2) It was from an agile little reptilian dinosaur of carnivorous habits but having a comparatively large brain that the placental mammals suddenly sprang. These mammals developed rapidly and in many different ways, not only giving rise to the common modern varieties but also evolving into marine types, such as whales and seals, and into air navigators like the bat family. 육식성으로 민첩하고 작지만 비교적 큰 뇌를 가진 파충류 공룡으로부터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이 갑자기 솟아 나왔습니다. 이 포유동물들은 빠르게 여러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여, 공동의 현대적 변종들뿐만 아니라 고래와 물개 같은 해양 유형과 박쥐과(科)같이 공중 항해자들로 진화했습니다.

65:2.13 (733.3) Man thus evolved from the higher mammals derived principally from the western implantation of life in the ancient east-west sheltered seas. The eastern and central groups of living organisms were early progressing favorably toward the attainment of prehuman levels of animal existence. But as the ages passed, the eastern focus of life emplacement failed to attain a satisfactory level of intelligent prehuman status, having suffered such repeated and irretrievable losses of its highest types of germ plasm that it was forever shorn of the power to rehabilitate human potentialities. 사람은 그렇게 동-서쪽의 보호된 고대(古代) 바다에 생명을 이식한 서부에서 주로 유래된 고등 포유동물에서 진화했습니다. 동부와 중앙의 살아있는 유기체 집단들은 인간 이전 단계의 동물 존재에 도달하는 방향으로 초기에 유리하게 진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생명을 배치한 동부 중심은, 그것의 가장 높은 유형의 생식세포 원형질이 반복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손실들을 겪으면서, 인간 잠재성을 회복할 능력을 영구히 잃었기 때문에, 만족한 수준의 지능적 인간-이전(以前) 상태의 달성에 실패했습니다.

65:2.14 (733.4) Since the quality of the mind capacity for development in this eastern group was so definitely inferior to that of the other two groups, the Life Carriers, with the consent of their superiors, so manipulated the environment as further to circumscribe these inferior prehuman strains of evolving life. To all outward appearances the elimination of these inferior groups of creatures was accidental, but in reality it was altogether purposeful. 이 동부 집단에서 발전을 위한 마음 수용력의 질이, 다른 두 집단들보다 뚜렷하게 열등해서, 생명 운반자들은, 상관들의 허락으로, 진화하는 생명에서 열등한 이 인간-이전(以前) 혈통을 더욱 제한하도록 환경을 조종하였습니다. 외견상 열등한 이 창조물 집단의 제거는 우발적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모두 의도적이었습니다.

65:2.15 (733.5) Later in the evolutionary unfolding of intelligence, the lemur ancestors of the human species were far more advanced in North America than in other regions; and they were therefore led to migrate from the arena of western life implantation over the Bering land bridge and down the coast to southwestern Asia, where they continued to evolve and to benefit by the addition of certain strains of the central life group. Man thus evolved out of certain western and central life strains but in the central to near-eastern regions. 후에 지능의 진화적 전개에서, 인간 종족들의 여우원숭이 조상들은 다른 지역들보다 북아메리카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부 생명 이식의 장(場)에서 베링 육교를 건너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 남서부 아시아로 이주하도록 인도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계속 진화하고 중앙 생명 집단의 특정 혈통들이 첨가되어 혜택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그래서 특정 서부 및 중부 생명 혈통들에서 나왔지만 근동 지역 방향 중앙에서 진화했습니다.

65:2.16 (733.6) In this way the life that was planted on Urantia evolved until the ice age, when man himself first appeared and began his eventful planetary career. And this appearance of primitive man on earth during the ice age was not just an accident; it was by design. The rigors and climatic severity of the glacial era were in every way adapted to the purpose of fostering the production of a hardy type of human being with tremendous survival endowment. 이런 식으로 지구(유란시아)에 심어진 생명은 빙하 시대까지 진화했을 때, 사람 자신이 처음 나타나 파란 많은 행성의 생애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빙하기의 지구에 출현한 이 원시인은 단순히 우연한 일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빙하 시대의 혹독함과 기후의 가혹함은, 엄청난 생존 자질을 지닌 강인한 인간 존재 유형의 생성을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모든 면에서 수용되었습니다.

3. The Fostering of Evolution 진화의 육성

65:3.1 (733.7) It will hardly be possible to explain to the present-day human mind many of the queer and apparently grotesque occurrences of early evolutionary progress. A purposeful plan was functioning throughout all of these seemingly strange evolutions of living things, but we are not allowed arbitrarily to interfere with the development of the life patterns after they have once been set in operation. 초기 진화적 진보에서 이상하며 겉보기에 괴상한 여러 사건들을 오늘날 인간 마음에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든 전체 진화에 의도적인 계획이 기능하고 있었지만, 일단 그것들이 작동하기 시작한 후에는 생명 방식의 개발에 임의로 간섭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65:3.2 (733.8) Life Carriers may employ every possible natural resource and may utilize any and all fortuitous circumstances which will enhance the developmental progress of the life experiment, but we are not permitted mechanically to intervene in, or arbitrarily to manipulate the conduct and course of, either plant or animal evolution. 생명 운반자들은 가능한 모든 자연 자원들을 사용하고, 생명 실험의 발달 과정을 증진시킬 어떤 그리고 모든 우연한 환경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식물이나 동물 진화에 기계적으로 간섭하거나, 임의로 그 운영과 과정을 조종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65:3.3 (733.9) You have been informed that Urantia mortals evolved by way of primitive frog development, and that this ascending strain, carried in potential in a single frog, narrowly escaped extinction on a certain occasion. But it should not be inferred that the evolution of mankind would have been terminated by an accident at this juncture. At that very moment we were observing and fostering no less than one thousand different and remotely situated mutating strains of life which could have been directed into various different patterns of prehuman development. This particular ancestral frog represented our third selection, the two prior life strains having perished in spite of all our efforts toward their conservation. 너희들은 지구(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이 원시 개구리의 발전을 통해 진화되었고, 개구리 한 마리에 잠재된 이 상승하는 혈통이 특정 상황에서 가까스로 멸종을 피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가 이 중대한 때에 우연히 종결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1,00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르며 동떨어진 돌연변이 생명 혈통을 주시하며 육성했는데, 이들은 다양한 다른 형태의 인간-이전(以前) 발전으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 번째 선택한 것은 이 특별한 조상 개구리였으며, 그 전에 선택했던 두 생명 혈통들은 우리가 그것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멸종했습니다.

65:3.4 (734.1) Even the loss of Andon and Fonta before they had offspring, though delaying human evolution, would not have prevented it. Subsequent to the appearance of Andon and Fonta and before the mutating human potentials of animal life were exhausted, there evolved no less than seven thousand favorable strains which could have achieved some sort of human type of development. And many of these better stocks were subsequently assimilated by the various branches of the expanding human species. 안돈과 폰타가 자손을 낳기 전에 죽었다면 인류의 진화가 지연되었을지는 몰라도, 진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안돈과 폰타의 출현 후, 동물 생명에서 돌연 변이하는 인간의 잠재성이 고갈되기 전, 7,000개 이상의 유리한 혈통이 진화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인간 유형의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우수한 혈통들의 대부분은 다양한 갈래로 확장하는 인류 종족들에 의해 나중에 동화되었습니다.

65:3.5 (734.2) Long before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the biologic uplifters, arrive on a planet, the human potentials of the evolving animal species have been exhausted. This biologic status of animal life is disclosed to the Life Carriers by the phenomenon of the third phase of adjutant spirit mobilization, which automatically occurs concomitantly with the exhaustion of the capacity of all animal life to give origin to the mutant potentials of prehuman individuals. 생물학적 향상자들, 물질 아들과 딸이 행성에 도착하기 오래 전, 진화하는 동물 종족의 인간 잠재성이 고갈되었습니다. 동물 생명의 이 생물학적 자격은 셋째 위상의 보조 영이 동원되는 현상으로, 생명 운반자들에게 드러나는데, 그 셋째 위상의 보조 영 동원 현상은 인간-이전(以前) 개체들의 돌연변이 잠재성에 기원이 되는 모든 동물 생명의 능력이 소진되면서 동시에 자동적으로 발생합니다.

65:3.6 (734.3) Mankind on Urantia must solve its problems of mortal development with the human stocks it has — no more races will evolve from prehuman sources throughout all future time. But this fact does not preclude the possibility of the attainment of vastly higher levels of human development through the intelligent fostering of the evolutionary potentials still resident in the mortal races. That which we, the Life Carriers, do toward fostering and conserving the life strains before the appearance of human will, man must do for himself after such an event and subsequent to our retirement from active participation in evolution. In a general way, man’s evolutionary destiny is in his own hands, and scientific intelligence must sooner or later supersede the random functioning of uncontrolled natural selection and chance survival. 지구(유란시아)의 인류는 인간 혈통이 지닌 필사자 발전의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 앞으로의 모든 시간 내내, 인간-이전(以前)의 자원에서 종족들이 더 이상 진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필사 종족에 여전히 내재한 진화적 잠재성을 지능적으로 육성하여 인간의 발전을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달성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나타나기 전에, 우리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 혈통들을 육성하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하던 일을, 진화의 적극적인 참여에서 우리가 물러나는 그런 사건 이후에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대개, 사람의 진화 운명은 그들의 손에 있으며, 머지않아 과학적 지능은, 통제되지 않은 자연 선택과 우연한 생존의 무작위적 기능을 대신해야만 합니다.

65:3.7 (734.4) And in discussing the fostering of evolution, it would not be amiss to point out that, in the long future ahead, when you may sometime be attached to a corps of Life Carriers, you will have abundant and ample opportunity to offer suggestions and make any possible improvements in the plans and technique of life management and transplantation. Be patient! If you have good ideas, if your minds are fertile with better methods of administration for any part of the universal domains, you are certainly going to have an opportunity to present them to your associates and fellow administrators in the ages to come. 그리고 진화의 육성을 논의하면서, 앞으로 먼 훗날, 당신들이 어느 날 생명 운반자 군단에 배속되면, 당신들이 생명을 운영하고 이식(移植)하는 계획과 기법에서 가능한 개선책을 제안하고 조성하는 풍부하고 충분히 기회를 가질 것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너희에게 좋은 생각이 있고, 너희 마음에 우주영역의 어떤 부분을 위한 개선 경영 방법이 풍부하다면, 다가올 시대에 너희는 관련 동료 경영자들에게 그것들을 제시할 기회를 반드시 가질 것입니다.

4. The Urantia Adventure 유란시아 모험

65:4.1 (734.5)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Urantia was assigned to us as a life-experiment world. On this planet we made our sixtieth attempt to modify and, if possible, improve the Satania adaptation of the Nebadon life designs, and it is of record that we achieved numerous beneficial modifications of the standard life patterns. To be specific, on Urantia we worked out and have satisfactorily demonstrated not less than twenty-eight features of life modification which will be of service to all Nebadon throughout all future time. 지구(유란시아)가 생명-실험 세계로 우리에게 배정된 사실을 간과하지 마라. 이 행성에서 우리는 네바돈의 생명 설계들을 사타니아에 적응하도록 변경하고 가능하면 개선하려고 60번째로 시도했으며, 우리가 표준 생명 원본들에 대해 수많은 유익한 변경을 성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확히 말해서, 우리는 지구(유란시아)에서 미래 전체를 통해 네바돈 모두에게 도움이 될 28가지 이상의 생명 변형 특성들을 산출하고, 만족스럽게 증명했습니다.

65:4.2 (735.1) But the establishment of life on no world is ever experimental in the sense that something untried and unknown is attempted. The evolution of life is a technique ever progressive, differential, and variable, but never haphazard, uncontrolled, nor wholly experimental, in the accidental sense. 그러나 시도된 적이 없고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이 시도되었다는 의미에서 어떤 세계에서도 생명 정착은 결코 실험이 아닙니다. 생명의 진화는 항상 진보하고 차이가 생기며 변화무쌍하지만, 우발적인 의미에서 우연이거나 방치되거나 전적으로 실험적이지 않습니다.

65:4.3 (735.2) Many features of human life afford abundant evidence that the phenomenon of mortal existence was intelligently planned, that organic evolution is not a mere cosmic accident. When a living cell is injured, it possesses the ability to elaborate certain chemical substances which are empowered so to stimulate and activate the neighboring normal cells that they immediately begin the secretion of certain substances which facilitate healing processes in the wound; and at the same time these normal and uninjured cells begin to proliferate — they actually start to work creating new cells to replace any fellow cells which may have been destroyed by the accident. 인간 생명의 여러 특성들은, 필사자 실존의 현상이 지능적으로 계획되었으며, 유기체적 진화는 단순한 질서우주의 우연이 아니라는 풍부한 증명을 제공합니다. 살아있는 세포가 손상되면, 그것은 특정한 화학 물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 화학 물질들은 인접한 정상 세포들을 자극하고 활성화하여, 그 세포들은 즉시 특정 물질을 분비하기 시작하여 상처에서 치료 과정을 돕게 되는 동시에 이 정상적이며 상해를 받지 않은 세포들은 증식을 시작합니다. – 그것들은, 사고로 파괴된 동료 세포들을 대체하기 위해 실제로 새 세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합니다.

65:4.4 (735.3) This chemical action and reaction concerned in wound healing and cell reproduction represents the choice of the Life Carriers of a formula embracing over one hundred thousand phases and features of possible chemical reactions and biologic repercussions. More than half a million specific experiments were made by the Life Carriers in their laboratories before they finally settled upon this formula for the Urantia life experiment. 상처 치료와 세포 재생산에 관한 이 화학적 작용과 반응은, 가능한 화학적 반응과 생물학적 반동(反動) 중에서 100,000 가지가 넘는 위상과 특성들을 내포한 공식을 생명 운반자들이 선택했음을 나타냅니다. 생명 운반자들이 지구(유란시아) 생명 실험을 위해 이 공식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실험실에서 500,000번 이상 특별한 실험들을 수행하였습니다.

65:4.5 (735.4) When Urantia scientists know more of these healing chemicals, they will become more efficient in the treatment of injuries, and indirectly they will know more about controlling certain serious diseases. 지구(유란시아)의 과학자들이 이 치료하는 화학 약품들을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들은 더 효과적으로 상처를 치료할 것이며, 간접적으로 그들은 특정한 치명적 질병들을 조정하는 것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입니다.

65:4.6 (735.5) Since life was established on Urantia, the Life Carriers have improved this healing technique as it has been introduced on another Satania world, in that it affords more pain relief and exercises better control over the proliferation capacity of the associated normal cells. 생명이 지구(유란시아)에 정착된 이래, 생명 운반자들은 이 치료 기법을 개선하였으며, 고통을 더욱 줄이고, 관련된 정상 세포들의 증식 수용력을 향상하여 조정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개선된 이 기법은 사타니아의 다른 세계에 소개되었습니다.

65:4.7 (735.6) There were many unique features of the Urantia life experiment, but the two outstanding episodes were the appearance of the Andonic race prior to the evolution of the six colored peoples and the later simultaneous appearance of the Sangik mutants in a single family. Urantia is the first world in Satania where the six colored races sprang from the same human family. They ordinarily arise in diversified strains from independent mutations within the prehuman animal stock and usually appear on earth one at a time and successively over long periods of time, beginning with the red man and passing on down through the colors to indigo.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생명 실험에는 독특한 특성들이 많이 있었지만, 두 가지 현저한 사건들은, 여섯 유색 인종들이 진화하기 전에 안돈 종족이 출현한 것과, 그 후에 단일 가족에서 산긱 돌연변이(突然變異)들이 동시에 출현한 것이었습니다. 지구(유란시아)는 여섯 유색 인종들이 동일한 가계에서 솟아난 사타니아 최초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보통 인간-이전(以前) 동물 혈통 안에 있는 독립된 돌연변이에서 다양한 혈통으로 발생하며, 대개 한 번에 한 종족씩, 홍인으로 시작하여 남인에 이르도록, 오랜 기간에 걸쳐 연속해서 땅 위에 나타납니다.

65:4.8 (735.7) Another outstanding variation of procedure was the lat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As a rule, the prince appears on a planet about the time of will development; and if such a plan had been followed, Caligastia might have come to Urantia even during the lifetimes of Andon and Fonta instead of almost five hundred thousand years later, simultaneously with the appearance of the six Sangik races. 또 다른 현저한 과정의 변화는 행성왕자가 늦게 도착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자는 의지가 발생하는 시점에 행성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계획대로 시행되었었다면, 칼리가스티아는 (안돈과 폰타 출현 뒤) 거의 500,000년 이후 여섯 산긱 종족들의 출현과 동시에 (지구에 오는) 대신에, 심지어 안돈과 폰타가 살아있을 때 지구(유란시아)에 왔어야 했습니다.

65:4.9 (735.8) On an ordinary inhabited world a Planetary Prince would have been granted on the request of the Life Carriers at, or sometime after, the appearance of Andon and Fonta. But Urantia having been designated a life-modification planet, it was by preagreement that the Melchizedek observers, twelve in number, were sent as advisers to the Life Carriers and as overseers of the planet until the subsequent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These Melchizedeks came at the time Andon and Fonta made the decisions which enabled Thought Adjusters to indwell their mortal minds. 보통 거주 세계에서, 안돈과 폰타의 출현 시 또는 그 후 언젠가, 생명 운반자의 요청으로, 행성 왕자가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유란시아)는 생명-변형 행성으로 지정되었고, 나중에 행성 왕자가 도착할 때까지, 사전 합의에 따라, 12명의 멜기세덱 관찰자들이, 생명 운반자들에게는 조언자로서 그리고 행성의 감독자들로 파견되었습니다. 생각 조율자들이 필사자 마음에 내주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린 안돈과 폰타의 시대에, 이 멜기세덱들이 왔습니다.

65:4.10 (736.1) On Urantia the endeavors of the Life Carriers to improve the Satania life patterns necessarily resulted in the production of many apparently useless forms of transition life. But the gains already accrued are sufficient to justify the Urantia modifications of the standard life designs. 지구(유란시아)에서 사타니아 생명 원본들을 개선하려는 생명 운반자들의 노력은, 외견상 쓸모없는 형태의 수많은 과도기적 생명을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생겨난 소득들은, 표준 생명 설계들의 지구(유란시아) 변형들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합니다.

65:4.11 (736.2) It was our intention to produce an early manifestation of will in the evolutionary life of Urantia, and we succeeded. Ordinarily, will does not emerge until the colored races have long been in existence, usually first appearing among the superior types of the red man. Your world is the only planet in Satania where the human type of will has appeared in a precolored race. 지구(유란시아)의 진화적 생명에서 의지가 일찍 나타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도였으며,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의지는 유색 인종들이 오랫동안 존재하기까지 발생하지 않는데, 대개 홍인의 우월한 유형에서 처음 발생합니다. 너희 세계는, 사타니아에서, 유색 인종 이전에 인간 유형의 의지가 나타난 유일한 행성이다.

65:4.12 (736.3) But in our effort to provide for that combination and association of inheritance factors which finally gave rise to the mammalian ancestors of the human race, we were confronted with the necessity of permitting hundreds and thousands of other and comparatively useless combinations and associations of inheritance factors to take place. Many of these seemingly strange by-products of our efforts are certain to meet your gaze as you dig back into the planetary past, and I can well understand how puzzling some of these things must be to the limited human viewpoint. 그러나 결국 인류의 포유류 조상들에게 일어난 유전 인자들의 조합과 결합을 제공하려는 우리 노력으로, 우리는 수백 수천 가지의 상이(서로 다른相異)한 비교적 쓸모없는 유전 인자들의 조합과 결합이 발생하도록 허용할 필연성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외관상 이상한 이 여러 가지, 우리 노력의 부산물은 너희가 행성의 과거를 파헤칠 때 분명히 보게 되며,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제한된 인간의 관점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울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있다.

5. Life-Evolution Vicissitudes 생명-진화 변천

65:5.1 (736.4) It was a source of regret to the Life Carriers that our special efforts to modify intelligent life on Urantia should have been so handicapped by tragic perversions beyond our control: the Caligastia betrayal and the Adamic default. 지구(유란시아)에서 지능적 생명을 변경하려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우리의 조정을 벗어난 비극적 타락들 – 칼리가스티아 배반과 아담의 불이행(不履行)-로 인해 방해를 받은 것은 생명 운반자들에게 유감(遺憾)의 근원이었습니다.

65:5.2 (736.5) But throughout all of this biologic adventure our greatest disappointment grew out of the reversion of certain primitive plant life to the prechlorophyll levels of parasitic bacteria on such an extensive and unexpected scale. This eventuality in plant-life evolution caused many distressful diseases in the higher mammals, particularly in the more vulnerable human species. When we were confronted with this perplexing situation, we somewhat discounted the difficulties involved because we knew that the subsequent admixture of the Adamic life plasm would so reinforce the resisting powers of the resulting blended race as to make it practically immune to all diseases produced by the vegetable type of organism. But our hopes were doomed to disappointment owing to the misfortune of the Adamic default. 그러나 이 생물학적 모험 전체를 통하여 우리의 가장 큰 실망은, 어떤 원시 식물 생명이 그렇게 널리 예상치 못한 규모로 엽록소 이전 수준의 기생 박테리아로 복귀함으로 생겼습니다. 이러한 식물 생명 진화의 결과로 고등 포유동물들, 특히 더 취약한 인류에게 비참한 여러 질병들이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이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자, 우리는 관련된 어려움을 어느 정도 무시했는데, 나중에 아담의-생명 원형질의 혼합된 결과로 섞인 인종의 저항 능력을 강화하여, 식물 유형의 유기체가 일으킨 모든 질병에 실제로 면역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이행으로 인한 불운으로, 우리 희망은 실망으로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65:5.3 (736.6) The universe of universes, including this small world called Urantia, is not being managed merely to meet our approval nor just to suit our convenience, much less to gratify our whims and satisfy our curiosity. The wise and all-powerful beings who are responsible for universe management undoubtedly know exactly what they are about; and so it becomes Life Carriers and behooves mortal minds to enlist in patient waiting and hearty co-operation with the rule of wisdom, the reign of power, and the march of progress. 지구(유란시아)로 불리는 이 작은 세계를 포함하여, 우주들의 우주는 단순히 우리의 찬성을 얻거나 단지 우리의 편의에 맞게 운영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변덕을 채우고 우리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지혜롭게 우주 관리를 책임지는 모든 권능의 존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인내로 기다리며 지혜의 규정, 권능의 통치 그리고 진보의 행진에 진심으로 협력하도록 참여함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어울리고, 필사자 마음에 걸맞습니다.

65:5.4 (736.7) There are, of course, certain compensations for tribulation, such as Michael’s bestowal on Urantia. But irrespective of all such considerations, the later celestial supervisors of this planet express complete confidence in the ultimate evolutionary triumph of the human race and in the eventual vindication of our original plans and life patterns. 물론 시련에는, 지구(유란시아)에 증여된 미가엘과 같은, 어떤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고려 사항에 상관없이, 이 행성에 나중에 온 천상의 감독자들은 인류의 궁극적 진화 승리와 우리의 기원적 계획과 생명 원본들이 결국 정당화된다고 완벽한 확신을 드러냅니다.

6. Evolutionary Techniques of Life 생명의 진화적 기법

65:6.1 (737.1) It is impossible accurately to determine, simultaneously, the exact location and the velocity of a moving object; any attempt at measurement of either inevitably involves change in the other. The same sort of a paradox confronts mortal man when he undertakes the chemical analysis of protoplasm. The chemist can elucidate the chemistry of dead protoplasm, but he cannot discern either the physical organization or the dynamic performance of living protoplasm. Ever will the scientist come nearer and nearer the secrets of life, but never will he find them and for no other reason than that he must kill protoplasm in order to analyze it. Dead protoplasm weighs the same as living protoplasm, but it is not the same. 움직이는 물체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결정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한쪽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다른 쪽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필사 사람이 원형질을 화학적으로 분석할 때 똑같은 종류의 역설(逆說)에 봉착합니다. 화학자가 죽은 원형질의 화학적 성질을 밝힐 수 있지만, 살아있는 원형질의 물질적 조직이나 역동적 행태는 식별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비밀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는 있지만, 원형질을 분석하려면 그것을 죽여야만 하는 그 이유 때문에 결코 생명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은 원형질은 살아있는 원형질과 같은 질량이지만, 그 둘은 똑같지 않습니다.

65:6.2 (737.2) There is original endowment of adaptation in living things and beings. In every living plant or animal cell, in every living organism — material or spiritual — there is an insatiable craving for the attainment of ever-increasing perfection of environmental adjustment, organismal adaptation, and augmented life realization. These interminable efforts of all living things evidence the existence within them of an innate striving for perfection. 살아있는 물체와 존재들은 원래 적응하는 자질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식물이나 동물 세포,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 – 물질적이나 영적 -에는 환경적 조율과 유기체적 적응과 증대된 생명 실현을 위해 언제나-더욱 완전에 도달하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물체들의 이 끝없는 노력들은 그들 내부에 완전을 위해 타고난 투쟁이 실존함을 입증합니다.

65:6.3 (737.3) The most important step in plant evolution was the development of chlorophyll-making ability, and the second greatest advance was the evolution of the spore into the complex seed. The spore is most efficient as a reproductive agent, but it lacks the potentials of variety and versatility inherent in the seed. 식물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엽록소-생성 능력의 개발이었고, 두 번째 큰 진보는 포자(홀씨)가 복잡한 씨앗으로 진화한 것이었습니다. 포자(홀씨)는 생식체로서 가장 효과적이었지만, 씨앗에 생래적인 다양성과 변통성의 잠재성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65:6.4 (737.4) One of the most serviceable and complex episodes in the evolution of the higher types of animals consisted in the development of the ability of the iron in the circulating blood cells to perform in the double role of oxygen carrier and carbon dioxide remover. And this performance of the red blood cells illustrates how evolving organisms are able to adapt their functions to varying or changing environment. The higher animals, including man, oxygenate their tissues by the action of the iron of the red blood cells, which carries oxygen to the living cells and just as efficiently removes the carbon dioxide. But other metals can be made to serve the same purpose. The cuttlefish employs copper for this function, and the sea squirt utilizes vanadium. 고등 동물 유형의 진화에서 가장 유용하고 복잡한 사건들 중 하나는, 순환 혈구(혈액 세포)의 철분이 산소를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이중 역할의 수행 능력이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적혈구의 이 작용은 진화하는 유기체들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자신들의 기능을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람을 포함한 고등 동물들은, 살아있는 세포에 산소를 운반하고 똑같이 이산화탄소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적혈구의 철분 작용으로 그들 조직에 산소를 공급합니다. 그러나 다른 금속 성분들도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이러한 기능으로 동(銅)을 사용하고, 멍게는 바나듐을 이용합니다.

65:6.5 (737.5) The continuation of such biologic adjustments is illustrated by the evolution of teeth in the higher Urantia mammals; these attained to thirty-six in man’s remote ancestors, and then began an adaptative readjustment toward thirty-two in the dawn man and his near relatives. Now the human species is slowly gravitating toward twenty-eight. The process of evolution is still actively and adaptatively in progress on this planet. 연속적인 그런 생물학적 조율은, 지구(유란시아)의 고등 포유류의 치아(齒牙)의 진화로 설명됩니다. 치아(齒牙)는 사람의 먼 조상에서 36개에 이르렀고, 그 후 원시인과 그 가까운 친족들에서 32개로 적응하는 재조정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류는 서서히 28개로 이끌리고 있습니다. 진화 과정은 여전히 이 행성에서 활발하게 적응하면서 진행되는 중입니다.

65:6.6 (737.6) But many seemingly mysterious adjustments of living organisms are purely chemical, wholly physical. At any moment of time, in the blood stream of any human being there exists the possibility of upward of 15,000,000 chemical reactions between the hormone output of a dozen ductless glands. 그러나 겉보기에 신비한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조율은 순전히 화학적이며 전적으로 물리적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모든 인간의 혈류에는, 12가지 내분비선에서 분비된 호르몬 사이에 15,000,000개가 넘는 화학적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65:6.7 (737.7) The lower forms of plant life are wholly responsive to physical, chemical, and electrical environment. But as the scale of life ascends, one by one the mind ministries of the seven adjutant spirits become operative, and the mind becomes increasingly adjustive, creative, co-ordinative, and dominative. The ability of animals to adapt themselves to air, water, and land is not a supernatural endowment, but it is a superphysical adjustment. 하등 형태의 식물 생명은 물리적, 화학적, 전기적 환경에 전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단계가 상승하면, 일곱 보조 영들의 마음 사역이 하나씩 활동하며, 마음은 점점 더 조율적, 창조적, 통합-협동적 그리고 지배적이 됩니다. 공기, 물, 그리고 땅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동물의 능력은 초자연적인 자질이 아니라, 초(超)물리적 조율입니다.

65:6.8 (738.1) Physics and chemistry alone cannot explain how a human being evolved out of the primeval protoplasm of the early seas. The ability to learn, memory and differential response to environment, is the endowment of mind. The laws of physics are not responsive to training; they are immutable and unchanging. The reactions of chemistry are not modified by education; they are uniform and dependable. Aside from th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Absolute, electrical and chemical reactions are predictable. But mind can profit from experience, can learn from reactive habits of behavior in response to repetition of stimuli. 물리학과 화학만으로 초기 바다의 원시 원형질에서 어떻게 인간이 진화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학습 능력, 기억, 그리고 환경에 대한 차별적 반응은 마음의 자질입니다. 물리적 법칙들은 훈련에 반응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불변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화학적 반응들은 교육으로 변경되지 않으며, 그것들은 획일적이며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무제한(분별불가) 절대자의 현존을 제외하면, 전기적이며 화학적 반응들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체험에서 유익을 얻고, 반복되는 자극에 응답하여, 반응하는 행위 습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65:6.9 (738.2) Preintelligent organisms react to environmental stimuli, but those organisms which are reactive to mind ministry can adjust and manipulate the environment itself. 지능 이전의 유기체들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지만, 마음 사역에 반응하는 그 유기체들은 환경 자체를 조절하고 조종할 수 있습니다.

65:6.10 (738.3) The physical brain with its associated nervous system possesses innate capacity for response to mind ministry just as the developing mind of a personality possesses a certain innate capacity for spirit receptivity and therefore contains the potentials of spiritual progress and attainment. Intellectual, social, moral, and spiritual evolution are dependent on the mind ministry of the seven adjutant spirits and their superphysical associates. 물리적 뇌는 연결된 신경 체계와 함께 마음 사역에 반응하는 본래적 능력을 갖고 있는데, 마치 고유성을 개발하는 마음이 영 감수성(感受性)을 위한 어떤 타고난 수용능력을 소유하고 그로 인해 영적 진보와 달성의 잠재성을 포함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 진화는, 일곱 보조 영들과 그들의 초(超)물리적 동료들의 마음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

7. Evolutionary Mind Levels 진화하는 마음 수준

65:7.1 (738.4)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are the versatile mind ministers to the lower intelligent existences of a local universe. This order of mind is ministered from the local universe headquarters or from some world connected therewith, but there is influential direction of lower-mind function from the system capitals. 일곱 보조 마음-영들은 지역우주의 하등 지능 실존들에게 다재다능한 마음 사역자들입니다. 이 마음의 계급은 지역우주 본부들 또는 그와 관련된 어떤 세계가 보살피지만, 체계 중심지들이 하등-마음 기능을 영향력을 가지고 지도합니다.

65:7.2 (738.5) On an evolutionary world much, very much, depends on the work of these seven adjutants. But they are mind ministers; they are not concerned in physical evolution, the domain of the Life Carriers. Nevertheless, the perfect integration of these spirit endowments with the ordained and natural procedure of the unfolding and inherent regime of the Life Carriers is responsible for the mortal inability to discern, in the phenomenon of mind, aught but the hand of nature and the outworking of natural processes, albeit you are occasionally somewhat perplexed in explaining all of everything connected with the natural reactions of mind as it is associated with matter. And if Urantia were operating more in accordance with the original plans, you would observe even less to arrest your attention in the phenomenon of mind. 진화 세계의 아주 많은 일들이 이 일곱 보조자들의 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은 생명 운반자들의 영역인 물리적 진화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 자질들이, 생명 운반자들이 펼치는 본래 정권(政權)의 규정된 자연적 과정과 완전히 통합되어, 필사자들은, 자연의 손길과 자연적 과정의 일 외에는, 마음의 현상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마음이 물질과 관련되어 있듯이, 마음의 자연적 반응들과 연관된 모든 것의 모두를 설명하기에, 너희들은 때때로 어느 정도 갈피를 못 잡는다. 그리고 지구(유란시아)가 원래 계획에 더 일치하도록 운영되었다면, 너희는 마음의 현상에 너희의 관심을 덜 두었을 것이다.

65:7.3 (738.6) The seven adjutant spirits are more circuitlike than entitylike, and on ordinary worlds they are encircuited with other adjutant functionings throughout the local universe. On life-experiment planets, however, they are relatively isolated. And on Urantia, owing to the unique nature of the life patterns, the lower adjutants experienced far more difficulty in contacting with the evolutionary organisms than would have been the case in a more standardized type of life endowment. 일곱 보조 영들은 실재체(實在體)라기보다 회로와 같으며, 보통 세계들에서 그들은 지역우주에 널리 다른 보조 기능과 함께 회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실험 행성들에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유란시아)에서 생명 원본들의 독특한 본성 때문에, 하등 보조자들은, 더 표준화된 생명 증여 유형의 경우보다, 진화 유기체들과 접촉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65:7.4 (738.7) Again, on an average evolutionary world the seven adjutant spirits are far better synchronized with the advancing stages of animal development than they were on Urantia. With but a single exception, the adjutants experienced the greatest difficulty in contacting with the evolving minds of Urantia organisms that they had ever had in all their functioning throughout the universe of Nebadon. On this world there developed many forms of border phenomena — confusional combinations of the mechanical-nonteachable and the nonmechanical-teachable types of organismal response. 게다가, 일곱 보조 영들은 지구(유란시아)보다 보통 진화 세계에서 동물적 발달의 진전 단계들과 훨씬 낫게 동시성을 지닙니다. 그들은 네바돈의 우주에 널리 모든 기능들을 하면서, 단 하나의 예외로, 지구(유란시아) 유기체들의 진화하는 마음들과 접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세계에는 많은 형태의 경계현상들 ─ 유기체의 반응 중 기계적이며 가르칠 수 없는 유형과 비(非)기계적이며 가르칠 수 있는 유형이 뒤섞인 조합 ─이 발달되었습니다.

65:7.5 (739.1) The seven adjutant spirits do not make contact with the purely mechanical orders of organismal environmental response. Such preintelligent responses of living organisms pertain purely to the energy domains of the power centers, the physical controllers, and their associates. 일곱 보조 영들은 유기체적 환경 반응의 순전히 기계적인 계층들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지능 이전(以前)의 그런 반응들은 순전히 동력의 중심들, 물리 조정자들과 그들 동료들의 에너지 영역에 속합니다.

65:7.6 (739.2) The acquisition of the potential of the ability to learn from experience marks the beginning of the functioning of the adjutant spirits, and they function from the lowliest minds of primitive and invisible existences up to the highest types in the evolutionary scale of human beings. They are the source and pattern for the otherwise more or less mysterious behavior and incompletely understood quick reactions of mind to the material environment. Long must these faithful and always dependable influences carry forward their preliminary ministry before the animal mind attains the human levels of spirit receptivity. 체험으로 배우는 능력의 잠재성 획득은 보조 영들이 기능하는 시작을 표시하며, 그들은, 인간 존재들의 진화단계에서, 원시적이고 비(非)가시적 실존들의 최하등 마음들에서 최고등 유형까지 기능합니다. 그들은, 다른 점에서 다소 신비스러운 행위와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물질적 환경에 대한 마음의 신속한 반응의 근원과 원본들입니다. 이 신실하고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영향들은, 동물 마음이 인간 차원의 영 수용성(受容性)에 이르기 전에, 오래도록 그들의 예비 사역을 진척시켜야만 합니다.

65:7.7 (739.3) The adjutants function exclusively in the evolution of experiencing mind up to the level of the sixth phase, the spirit of worship. At this level there occurs that inevitable overlapping of ministry — the phenomenon of the higher reaching down to co-ordinate with the lower in anticipation of subsequent attainment of advanced levels of development. And still additional spirit ministry accompanies the action of the seventh and last adjutant, the spirit of wisdom. Throughout the ministry of the spirit world the individual never experiences abrupt transitions of spirit co-operation; always are these changes gradual and reciprocal. 보조자들은 여섯째 단계, 경배의 영의 수준까지, 체험하는 마음의 진화에 배타적으로 기능합니다. 이 수준에서 부득이하게 겹치는 사역 – 후에 도달하는 발전의 진보 수준을 예상하여 고등 단계가 하등 단계와 통합-조정하려고 내려와 도달하는 현상 -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추가적인 영 사역이 일곱 번째이며 마지막 보조자, 지혜의 영의 활동에 뒤따릅니다. 영 세계의 사역 전체에서, 개인은 결코 영 협력의 급진적 변이를 체험하지 않습니다. 이 변화들은 항상 점진적이고 상호적입니다.

65:7.8 (739.4) Always should the domains of the physical (electrochemical) and the mental response to environmental stimuli be differentiated, and in turn must they all be recognized as phenomena apart from spiritual activities. The domains of physical, mental, and spiritual gravity are distinct realms of cosmic reality, notwithstanding their intimate interrelations. 환경적 자극에 반응하는 물리적(전기화학적)이며 정신적 응답의 영역들은 항상 구별되어야만 하며, 차례로 그들은 모두 영적 활동들과 떨어져 있는 현상으로 인지되어야만 합니다. 물리적, 정신적, 영적 중력 영역들은, 그들의 밀접한 상호관계에도 불구하고, 질서우주 실체의 독특한 분야들입니다.

8. Evolution in Time and Space 시간과 공간에 있는 진화

65:8.1 (739.5) Time and space are indissolubly linked; there is an innate association. The delays of time are inevitable in the presence of certain space conditions. 시간과 공간은 분해 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특정한 공간 조건의 현존에서, 시간의 지연은 필연적입니다.

65:8.2 (739.6) If spending so much time in effecting the evolutionary changes of life development occasions perplexity, I would say that we cannot time the life processes to unfold any faster than the physical metamorphoses of a planet will permit. We must wait upon the natural, physical development of a planet; we have absolutely no control over geologic evolution. If the physical conditions would allow, we could arrange for the completed evolution of life in considerably less than one million years. But we are all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Supreme Rulers of Paradise, and time is nonexistent on Paradise. 생명 발달의 진화적 변화의 결과에, 그렇게 많은 시간적 소요가 당혹스럽게 여겨진다면, 우리는 행성이 허용하는 물리적 변형들보다 더 빨리 생명 과정이 전개되도록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나는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행성의 자연 발생적인 물리적 발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질학적 진화를 절대적으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 조건들이 허용한다면, 우리는 백만 년보다 상당히 짧게 생명의 진화가 완성되도록 조정(調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천국 최극 통치자들의 관할권 아래에 있으며, 천국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65:8.3 (739.7) The individual’s yardstick for time measurement is the length of his life. All creatures are thus time conditioned, and therefore do they regard evolution as being a long-drawn-out process. To those of us whose life span is not limited by a temporal existence, evolution does not seem to be such a protracted transaction. On Paradise, where time is nonexistent, these things are all present in the mind of Infinity and the acts of Eternity. 시간을 재는 개인의 척도는 그의 일생의 길이입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그렇게 시간의 제약 때문에, 진화를 오래-계속되는 과정의 존재로 여깁니다. 수명이 일시적 실존으로 제한되지 않는 우리들에게, 진화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는 처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실존하지 않는 천국에서, 무한성의 마음과 영원성의 행위에서, 이런 것들은 모두 현재입니다.

65:8.4 (739.8) As mind evolution is dependent on, and delayed by, the slow development of physical conditions, so is spiritual progress dependent on mental expansion and unfailingly delayed by intellectual retardation. But this does not mean that spiritual evolution is dependent on education, culture, or wisdom. The soul may evolve regardless of mental culture but not in the absence of mental capacity and desire — the choice of survival and the decision to achieve ever-increasing perfection —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Although survival may not depend on the possession of knowledge and wisdom, progression most certainly does. 마음 진화는 물리적 조건들의 느린 발전에 달려 있어서 지연되었듯이, 그렇게 영적 진보는 정신적 확장에 달려있고, 지적 지연으로 확실히 지연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진화가 교육, 문화, 또는 지혜에 달려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혼은 정신적 문화에 상관없이 진화될 수도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정신적 수용능력과 갈망 ─ 생존의 선택과 언제나-증가하는 완전을 성취하려는 결정─ 없이는 (진화될 수) 없습니다. 생존이 지식과 지혜의 소유에 달려있지는 않지만, 진보는 아주 확실하게 그러한 것(지식과 지혜의 소유)에 달려있습니다.

65:8.5 (740.1) In the cosmic evolutionary laboratories mind is always dominant over matter, and spirit is ever correlated with mind. Failure of these diverse endowments to synchronize and co-ordinate may cause time delays, but if the individual really knows God and desires to find him and become like him, then survival is assured regardless of the handicaps of time. Physical status may handicap mind, and mental perversity may delay spiritual attainment, but none of these obstacles can defeat the whole-souled choice of will. 질서우주의 진화 실험실에서 마음은 항상 물질을 지배하며, 영은 언제나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다양한 자질들이 동조를 이루고 통합-협동을 이루는데 실패하면, 시간의 지연(遲延)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개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그를 발견하여 그와 같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시간의 장애와 관계없이 생존이 보장됩니다. 물리적 상태가 마음을 불리하게 만들고, 정신적 왜곡이 영적 달성을 지연시킬 수도 있지만, 이 장애물 중 그 어떤 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지의 선택을 꺾을 수 없습니다.

65:8.6 (740.2) When physical conditions are ripe, sudden mental evolutions may take place; when mind status is propitious, sudden spiritual transformations may occur; when spiritual values receive proper recognition, then cosmic meanings become discernible, and increasingly the personality is released from the handicaps of time and delivered from the limitations of space. 물리적 조건들이 무르익으면, 갑자기 정신적 진화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음 상태가 순조로우면, 갑자기 영적 변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적 가치들이 적절한 인식으로 마음에 받아들일 때, 그때 질서우주 의미들을 식별하게 되고, 점점 더 고유성은 시간의 장애들에서 풀려나며, 공간의 한계에서 해방됩니다.

65:8.7 (740.3) [Sponsored by a Life Carrier of Nebadon resident on Urantia.]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네바돈의 생명 운반자가 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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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0 The Paradise Trinity 천국 삼위일체

Paper 10

The Paradise Trinity 천국 삼위일체

  1. Self-Distribution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자아-분배
  2. Deity Personalization 신(神) 고유성화
  3. The Three Persons of Deity 신(神)의 세 고유자들
  4. The Trinity Union of Deity 신(神)의 삼위일체 연합
  5. Functions of the Trinity 삼위일체의 기능들
    Finite, absonite, and absolute attitude 유한(有限), 절한(絶限) 및 절대(絶對) 태도
  6. The Stationary Sons of the Trinity 삼위일체의 고정 아들들
    Justice, evidence, and judgment 정의, 증거 및 심판
  7. The Overcontrol of Supremacy 최극위의 전반적 조정
  8. The Trinity Beyond the Finite 유한을 초월한 삼위일체
    Limits of mortal destiny 필사자 운명의 한계들

10:0.1 (108.1) THE Paradise Trinity of eternal Deities facilitates the Father’s escape from personality absolutism. The Trinity perfectly associates the limitless expression of God’s infinite personal will with the absoluteness of Deity. The Eternal Son and the various Sons of divine origin, together with the Conjoint Actor and his universe children, effectively provide for the Father’s liberation from the limitations otherwise inherent in primacy, perfection, changelessness, eternity, universality, absoluteness, and infinity. 영원한 신(神)들의 천국 삼위일체는 고유성 절대성에서 아버지의 탈피(脫皮)를 용이(容易)하게 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무한한 개인적 의지의 무제한적 표현을 신(神)의 절대성과 완전히 관련시킵니다. 영원 아들과 신적 기원의 다양한 아들들은, 공동 행위자 및 그의 우주 자녀들과 함께, 수위성, 완전, 불변, 영원, 보편성, 절대성, 그리고 무한성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과는 달리, 제한으로부터 아버지의 해방을 효과적으로 제공합니다.

10:0.2 (108.2) The Paradise Trinity effectively provides for the full expression and perfect revelation of the eternal nature of Deity. The Stationary Sons of the Trinity likewise afford a full and perfect revelation of divine justice. The Trinity is Deity unity, and this unity rests eternally upon the absolute foundations of the divine oneness of the three original and co-ordinate and coexistent personalities,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천국 삼위일체는 신(神)의 영원한 본성을 충만히 표현하고 완전한 계시를 효과적으로 제공합니다. 삼위일체 고정아들들도 마찬가지로 신적 정의(正義)를 충만하게 완전히 계시합니다. 삼위일체는 신(神) 합일이며, 이 합일은, 기원적이고 동등하며 공존하는 세 고유성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영 하나님의 신적 하나됨의 절대적 기초에 영원히 놓여 있습니다.

10:0.3 (108.3) From the present situation on the circle of eternity, looking backward into the endless past, we can discover only one inescapable inevitability in universe affairs, and that is the Paradise Trinity. I deem the Trinity to have been inevitable. As I view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time, I consider nothing else in all the universe of universes to have been inevitable. The present master universe, viewed in retrospect or in prospect, is unthinkable without the Trinity. Given the Paradise Trinity, we can postulate alternate or even multiple ways of doing all things, but without the Trinity of Father, Son, and Spirit we are unable to conceive how the Infinite could achieve threefold and co-ordinate personalization in the face of the absolute oneness of Deity. No other concept of creation measures up to the Trinity standards of the completeness of the absoluteness inherent in Deity unity coupled with the repleteness of volitional liberation inherent in the threefold personalization of Deity. 영원의 순환계에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끝없는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우주 정세에서 단 하나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천국 삼위일체입니다. 나는 삼위일체가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시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면서, 나는 그 외에 어떤 것도 우주들의 우주 전체에서 필연적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고하거나 전망해 보면, 삼위일체 없이 현재의 주(主)우주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천국 삼위일체가 있기에 우리는 만사(萬事)를 이루는 교차적 또는 다중 방법들을 추정할 수 있지만, 아버지, 아들 및 영의 삼위일체 없이 우리는 어떻게 무한자가, 신의 절대적 하나됨 앞에서, 삼중의 동등한 고유성 구현을 성취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창조 개념도, 신(神)의 삼중적 고유성 구현에 본래적인 의지적 해방의 충만함과 결부된, 신(神) 합일에 본래적인 절대성의 완전함을 이루는 삼위일체 표준들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1. Self-Distribution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자아-분배

10:1.1 (108.4) It would seem that the Father, back in eternity, inaugurated a policy of profound self-distribution. There is inherent in the selfless, loving, and lovable nature of the Universal Father something which causes him to reserve to himself the exercise of only those powers and that authority which he apparently finds it impossible to delegate or to bestow. 영원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심오한 자아-분배의 정책을 개시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주 아버지의 비이기적이고, 사랑하며, 사랑스러운 본성에는, 그가 위임하거나 증여하기에 명백히 불가능한 권능들과 권위의 행사만 자신에게 남겨놓은 어떤 것들이 본래적으로 있습니다.

10:1.2 (108.5) The Universal Father all along has divested himself of every part of himself that was bestowable on any other Creator or creature. He has delegated to his divine Sons and their associated intelligences every power and all authority that could be delegated. He has actually transferred to his Sovereign Sons, in their respective universes, every prerogative of administrative authority that was transferable. In the affairs of a local universe, he has made each Sovereign Creator Son just as perfect, competent, and authoritative as is the Eternal Son in the original and central universe. He has given away, actually bestowed, with the dignity and sanctity of personality possession, all of himself and all of his attributes, everything he possibly could divest himself of, in every way, in every age, in every place, and to every person, and in every universe except that of his central indwelling. 우주 아버지는 처음부터 다른 창조자 또는 창조물에게 증여될 수 있었던 자신의 모든 부분을 스스로 벗어버렸습니다. 그는 위임될 수 있는 모든 권능과 모든 권위를 자신의 신적 아들들과 그들의 관련된 지적존재들에게 위임해 오셨습니다. 그는 양도할 수 있는 행정 권위의 모든 특권을, 각자의 우주들에 있는 그의 주권 아들들에게 실제로 양도하셨습니다. 지역 우주의 정세에, 그는 영원 아들이 기원적 중앙 우주에서 그러하듯이 각 주권 창조자 아들을 완전하고 유능하며 권위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는 고유성 소유의 위엄 및 존엄으로, 자신의 모든 것과 자신의 속성 전체, 즉 자신이 스스로 벗어버릴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모든 방법으로, 모든 시대에,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모든 개인에게, 그리고 그의 중앙 내주를 제외한 모든 우주에서, 내어주셨고, 실제로 증여하셨습니다.

10:1.3 (109.1) Divine personality is not self-centered; self-distribution and sharing of personality characterize divine freewill selfhood. Creatures crave association with other personal creatures; Creators are moved to share divinity with their universe children; the personality of the Infinite is disclosed as the Universal Father, who shares reality of being and equality of self with two co-ordinate personalities, the Eternal Son and the Conjoint Actor. 신적 고유성은 자아-중심적이 아닙니다. 고유성의 자아-분배와 공유는 신적 자유의지 자아신분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창조물들은 다른 개인적 창조물들과의 관련을 갈망합니다. 창조자들은 그들의 우주 자녀들과 신성을 공유하려고 감동을 받습니다. 무한자의 고유성은 우주의 아버지로서 드러나는데, 우주의 아버지는 두 동등한 고유성들, 즉 영원 아들과 공동 행위자와 함께 존재의 실체 및 자아의 동등성을 공유하십니다.

10:1.4 (109.2) For knowledge concerning the Father’s personality and divine attributes we will always be dependent on the revelations of the Eternal Son, for when the conjoint act of creation was effected, when the Third Person of Deity sprang into personality existence and executed the combined concepts of his divine parents, the Father ceased to exist as the unqualified personality. With the coming into being of the Conjoint Actor and the materialization of the central core of creation, certain eternal changes took place. God gave himself as an absolute personality to his Eternal Son. Thus does the Father bestow the “personality of infinity” upon his only-begotten Son, while they both bestow the “conjoint personality” of their eternal union upon the Infinite Spirit. 아버지의 고유성과 신적 속성들에 관한 지식을 위해 우리는 항상 영원 아들의 계시에 의존될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의 공동 행위가 실행되어 신(神)의 셋째 개인이 고유성 실존으로 떠오르고 자신의 신적 부모들에 대한 결합된 개념들을 실행하였을 때, 아버지는 분별 불가의 고유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중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동 행위자가 존재로 나오며 창조의 중앙 핵의 물질화와 함께, 어떤 영원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고유성으로서의 자신을 그의 영원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한성의 고유성”을 자신의 오직 하나만-낳은(독생) 아들에게 증여하시고, 반면에 두 분 모두 무한 영에게 그들이 영원히 연합한 “공동 고유성”을 증여하십니다.

10:1.5 (109.3) For these and other reasons beyond the concept of the finite mind, it is exceedingly difficult for the human creature to comprehend God’s infinite father-personality except as it is universally revealed in the Eternal Son and, with the Son, is universally active in the Infinite Spirit. 이들 및 유한한 마음의 개념을 초월한 다른 이유들로, 인간 창조물은, 하나님의 무한한 아버지-고유성이 영원 아들 안에서 우주적으로 계시되고, 아들과 함께 무한 영 안에서 우주적으로 활동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아버지-고유성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10:1.6 (109.4) Since the Paradise Sons of God visit the evolutionary worlds and sometimes even there dwell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since these bestowals make it possible for mortal man actually to know something of the nature and character of divine personality, therefore must the creatures of the planetary spheres look to the bestowals of these Paradise Sons for reliable and trustworthy information regarding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하나님의 천국 아들들이 진화하는 세계들을 방문하고 때로 심지어 필사자 육신의 모습으로 거기에 거주하시고, 이 증여들이 필사 사람에게 신적 고유성의 본성과 성품의 어떤 것을 실제로 알리시기 때문에, 그 결과로 행성 구체들의 창조물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위해 이 천국 아들들의 증여들을 지켜봐야만 합니다.

2. Deity Personalization 신(神) 고유성화

10:2.1 (109.5) By the technique of trinitization the Father divests himself of that unqualified spirit personality which is the Son, but in so doing he constitutes himself the Father of this very Son and thereby possesses himself of unlimited capacity to become the divine Father of all subsequently created, eventuated, or other personalized types of intelligent will creatures. As the absolute and unqualified personality the Father can function only as and with the Son, but as a personal Father he continues to bestow personality upon the diverse hosts of the differing levels of intelligent will creatures, and he forever maintains personal relations of loving association with this vast family of universe children. 삼위일체화 기법으로, 아버지는 그 분별 불가의 영 고유성을 벗어버린 자신, 즉 아들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그는 스스로 바로 이 아들의 아버지가 되며, 그것에 의해, 뒤이어 지적 의지 창조물들의 모든 창조되고, 결국 생기거나 다른 고유성화 된 유형의 신적 아버지가 되는 무제한적 수용능력을 지닌 자신을 소유하십니다. 절대적이고 분별 불가한 고유성으로서 아버지는 오직 아들로서 아들과 함께 기능할 수 있지만, 개인적 아버지로서 그는 지적 의지 창조물들의 다른 수준의 다양한 무리들에게 고유성을 계속 증여하시며, 그는 우주 자녀들의 이 거대한 가족을 사랑하는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언제까지나 유지하십니다.

10:2.2 (109.6) After the Father has bestowed upon the personality of his Son the fullness of himself, and when this act of self-bestowal is complete and perfect, of the infinite power and nature which are thus existent in the Father-Son union, the eternal partners conjointly bestow those qualities and attributes which constitute still another being like themselves; and this conjoint personality, the Infinite Spirit, completes the existential personalization of Deity. 아버지가 자신의 충만함을 그의 아들의 고유성에 증여하신 후, 자아-증여의 이 행위가 완료되고 완전하며, 아버지-아들 연합에 그렇게 실존하는 무한 권능과 본성을 지닌, 영원한 동반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다른 존재를 여전히 이루는 그 질과 속성을 공동으로 증여합니다. 그리고 이 공동 고유성, 즉 무한 영은 신(神)의 실존적 고유성 구현을 완료하십니다.

10:2.3 (110.1) The Son is indispensable to the fatherhood of God. The Spirit is indispensable to the fraternity of the Second and Third Persons. Three persons are a minimum social group, but this is least of all the many reasons for believing in the inevitability of the Conjoint Actor. 아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에 절대 필요합니다. 영은 둘째와 셋째 개인들의 형제우애에 절대 필요합니다. 세 개인들은 최소의 사회집단이지만, 이것은 공동 행위자의 필연성을 믿는 모든 많은 이유들 중 가장 작은 것입니다.

10:2.4 (110.2)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the infinite father-personality, the unlimited source personality. The Eternal Son is the unqualified personality-absolute, that divine being who stands throughout all time and eternity as the perfect revelation of the personal nature of God. The Infinite Spirit is the conjoint personality, the unique personal consequence of the everlasting Father-Son union.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무한한 아버지-고유성, 무제한적 근원 고유성입니다. 영원 아들은 분별 불가 고유성-절대, 즉 하나님의 개인적 본성의 완전한 계시로서 모든 시간과 영원에 두루 계시는 신적 존재이십니다. 무한 영은 공동 고유성, 영속하는 아버지-아들 연합의 독특한 개인적 결과입니다.

10:2.5 (110.3) The personalit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the personality of infinity minus the absolute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The personality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the superadditive consequence of the union of the liberated Father-personality and the absolute Son-personality.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고유성은 무한 고유성에서 영원 아들의 절대 고유성을 뺀 것입니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고유성은 해방된 아버지-고유성과 절대 아들-고유성 연합의 초(超)부가적 결과입니다.

10:2.6 (110.4)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are unique persons; none is a duplicate; each is original; all are united.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과 무한 영은 독특한 개인들이십니다. 아무도 중복되지 않습니다. 각자가 기원적입니다. 모두 연합되어 있습니다.

10:2.7 (110.5) The Eternal Son alone experiences the fullness of divine personality relationship, consciousness of both sonship with the Father and paternity to the Spirit and of divine equality with both Father-ancestor and Spirit-associate. The Father knows the experience of having a Son who is his equal, but the Father knows no ancestral antecedents. The Eternal Son has the experience of sonship, recognition of personality ancestry, and at the same time the Son is conscious of being joint parent to the Infinite Spirit. The Infinite Spirit is conscious of twofold personality ancestry but is not parental to a co-ordinate Deity personality. With the Spirit the existential cycle of Deity personalization attains completion; the primary personalit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re experiential and are seven in number. 영원 아들은 신적 고유성 관계의 충만함, 즉 아버지의 아들 됨과 영에 대한 아버지 되심의 의식 및 아버지-조상과 영-동료 둘과 신적인 평등 의식(意識)의 충만함을 홀로 체험합니다. 아버지는 자신과 동등한 아들을 갖는 체험을 아시지만, 아버지는 조상이 되는 어떤 선행자도 없음을 아십니다. 영원 아들은 아들 됨의 체험, 고유성 선조의 인식을 갖는 동시에 아들은 무한 영의 공동 부모가 됨을 의식합니다. 무한 영은 이중적 고유성 선조를 인식하지만, 통합-협동의 신(神) 고유성에게 부모가 되지 않습니다. 영과 함께, 신(神) 고유성 구현의 실존적 주기가 완료되며;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1차 고유성들은 체험적이며, 그 수는 일곱입니다.

10:2.8 (110.6) I am of origin in the Paradise Trinity. I know the Trinity as unified Deity; I also know that the Father, Son, and Spirit exist and act in their definite personal capacities. I positively know that they not only act personally and collectively, but that they also co-ordinate their performances in various groupings, so that in the end they function in seven different singular and plural capacities. And since these seven associations exhaust the possibilities for such divinity combination, it is inevitable that the realities of the universe shall appear in seven variations of values, meanings, and personality. 나는 천국 삼위일체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는 삼위일체를 합일된 신(神)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존재하며, 그들이 뚜렷한 고유의 수용 능력으로 행동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양한 집단화로 그들의 행위를 통합-협동하여, 결국 그들이 일곱의 서로 다른 단수와 복수의 수용 능력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연합들이 그러한 신성 배합을 위한 가능성을 다 소모하여, 우주의 실체들이 가치, 의미 그리고 고유성의 일곱 변화들로 나타나게 될 것은 필연적입니다.

3. The Three Persons of Deity 신(神)의 세 고유자들

10:3.1 (110.7) Notwithstanding there is only one Deity, there are three positive and divine personalizations of Deity. Regarding the endowment of man with the divine Adjusters, the Father said: “Let us make mortal man in our own image.” Repeatedly throughout the Urantian writings there occurs this reference to the acts and doings of plural Deity, clearly showing recognition of the existence and working of the three Sources and Centers. 하나의 신(神)만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세 가지 명확하며 신적인 고유성 구현들이 있습니다. 신적 조율자들을 사람에게 주는 증여에 관하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필사 사람을 만들자.” 복수의 신의 활동과 행적들에 대한 이 언급은 지구(유란시아)의 기록들 도처에 두고두고 나타나며, 뚜렷하게 세 근원들과 중심들의 존재와 활동을 분명히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10:3.2 (110.8) We are taught that the Son and the Spirit sustain the same and equal relations to the Father in the Trinity association. In eternity and as Deities they undoubtedly do, but in time and as personalities they certainly disclose relationships of a very diverse nature. Looking from Paradise out on the universes, these relationships do seem to be very similar, but when viewed from the domains of space, they appear to be quite different. 우리는 아들과 영이 삼위일체 관련에서 아버지에 대해 동일하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배웠습니다. 영원 안에서 신(神)들로서 그들은 틀림없이 행하지만, 시간 안에서 고유성들로서 그들은 매우 다양한 본성의 관계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천국에서 우주들을 바라보면, 이 관계들은 매우 비슷하게 보이지만, 공간의 권역들에서 바라보면, 그 관계들은 매우 다르게 나타납니다.

10:3.3 (111.1) The divine Sons are indeed the “Word of God,” but the children of the Spirit are truly the “Act of God.” God speaks through the Son and, with the Son, acts through the Infinite Spirit, while in all universe activities the Son and the Spirit are exquisitely fraternal, working as two equal brothers with admiration and love for an honored and divinely respected common Father. 신적 아들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영의 자녀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아들과 함께 무한 영을 통하여 행동하시는 반면에, 모든 우주 활동에서 아들과 영은 절묘하게 형제우애, 즉 명예로우시며 신적 존경을 받는 공동의 아버지를 위해 찬미하며 사랑하는 동등한 두 형제로서 일하십니다.

10:3.4 (111.2) The Father, Son, and Spirit are certainly equal in nature, co-ordinate in being, but there are unmistakable differences in their universe performances, and when acting alone, each person of Deity is apparently limited in absoluteness.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분명히 본성이 동등하고, 존재가 통합-협동적이지만, 그들의 우주 행위에서는 명백한 차이들이 있으며, 홀로 활동할 때, 신(神)의 각 개인은 절대성에서 분명히 한정적입니다.

10:3.5 (111.3) The Universal Father, prior to his self-willed divestment of the personality, powers, and attributes which constitute the Son and the Spirit, seems to have been (philosophically considered) an unqualified, absolute, and infinite Deity. But such a theoretical First Source and Center without a Son could not in any sense of the word be considered the Universal Father; fatherhood is not real without sonship. Furthermore, the Father, to have been absolute in a total sense, must have existed at some eternally distant moment alone. But he never had such a solitary existence; the Son and the Spirit are both coeternal with the Father. The First Source and Center has always been, and will forever be, the eternal Father of the Original Son and, with the Son, the eternal progenitor of the Infinite Spirit. 우주 아버지는, 아들과 영을 구성하는 고유성, 권능, 그리고 속성들을 자신이 자아-의지적으로 벗어버리기 이전에, (철학적으로 고려할 때)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이며 무한한 신(神)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들 없이 그러한 이론적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어떤 말의 의미에서도 우주 아버지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 신분은 아들 됨 없이는 실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총체적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계셨던 아버지는 영원히 먼 어떤 순간에는 홀로 계셨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렇게 외롭게 계셨던 적이 없으며; 아들과 영 둘 모두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공존하십니다.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언제나 기원적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이셨고, 아들과 함께 무한 영의 영원한 선조이셨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입니다.

10:3.6 (111.4) We observe that the Father has divested himself of all direct manifestations of absoluteness except absolute fatherhood and absolute volition. We do not know whether volition is an inalienable attribute of the Father; we can only observe that he did not divest himself of volition. Such infinity of will must have been eternally inherent in the First Source and Center. 우리는 아버지가 절대적 아버지 신분과 절대 의지를 제외한 절대의 모든 직접적 표명을 스스로 내던지셨음을 주목합니다. 우리는, 의지가 넘겨줄 수 없는 아버지의 속성인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가 스스로 의지를 벗어 버리지 않았음을 관찰할 뿐입니다. 그러한 의지의 무한성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에 영원히 선천적이어야만 했습니다.

10:3.7 (111.5) In bestowing absoluteness of personality upon the Eternal Son, the Universal Father escapes from the fetters of personality absolutism, but in so doing he takes a step which makes it forever impossible for him to act alone as the personality-absolute. And with the final personalization of coexistent Deity — the Conjoint Actor — there ensues the critical trinitarian interdependence of the three divine personalities with regard to the totality of Deity function in absolute. 고유성의 절대를 영원 아들에게 증여하면서, 우주 아버지는 고유성 절대론의 족쇄에서 벗어나지만,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고유성-절대자로 언제까지나 홀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는 단계를 거치십니다. 그리고 공존하는 신(神) – 공동 행위자 -의 최종적 고유성 구현으로, 절대의 신(神) 기능의 총체와 관련하여, 세 신적 고유성들의 결정적인 삼위일체의 상호 의존성이 잇따라 일어납니다.

10:3.8 (111.6) God is the Father-Absolute of all personalities in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 Father is personally absolute in liberty of action, but in the universes of time and space, made, in the making, and yet to be made, the Father is not discernibly absolute as total Deity except in the Paradise Trinity. 하나님은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고유성들의 아버지-절대자이십니다.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행동의 자유가 절대적이지만, 생성되었고, 생성되고 있으며, 생성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들에서, 천국 삼위일체를 제외하고, 아버지는 총제적 신(神)으로서 분별할 수 있는 절대가 아닙니다.

10:3.9 (111.7) The First Source and Center functions outside of Havona in the phenomenal universes as follows: 첫째 근원이며 중심은 하보나 밖 현상(現象 인지할 수 있는)의 우주들에서 다음과 같이 기능하십니다.

10:3.10 (111.8) 1. As creator, through the Creator Sons, his grandsons. 창조자로서, 손자들인 창조자 아들들을 통하여.

10:3.11 (111.9) 2. As controller, through the gravity center of Paradise. 조정자로서, 천국의 중력 중심을 통하여.

10:3.12 (111.10) 3. As spirit, through the Eternal Son. 영으로서, 영원 아들을 통하여.

10:3.13 (111.11) 4. As mind, through the Conjoint Creator. 마음으로서, 공동 창조자를 통하여.

10:3.14 (111.12) 5. As a Father, he maintains parental contact with all creatures through his personality circuit. 아버지로서, 그는 자신의 고유성 회로를 통해 모든 창조물들과 어버이로서 접촉을 유지하십니다.

10:3.15 (111.13) 6. As a person, he acts directly throughout creation by his exclusive fragments — in mortal man by the Thought Adjusters. 한 개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유일한 단편들 – 필사 사람 안에 있는 생각 조율자들 –에 의해 창조 전체에서 직접 활동하십니다.

10:3.16 (111.14) 7. As total Deity, he functions only in the Paradise Trinity. 총체적 신(神)으로서, 그는 오직 천국 삼위일체 안에서만 기능하십니다.

10:3.17 (112.1) All these relinquishments and delegations of jurisdiction by the Universal Father are wholly voluntary and self-imposed. The all-powerful Father purposefully assumes these limitations of universe authority. 우주 아버지가 권한을 양도하고 위임한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스스로 맡으신 것입니다. 모든-권능의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이 우주 권위의 제한들을 취하십니다.

10:3.18 (112.2) The Eternal Son seems to function as one with the Father in all spiritual respects except in the bestowals of the God fragments and in other prepersonal activities. Neither is the Son closely identified with the intellectual activities of material creatures nor with the energy activities of the material universes. As absolute the Son functions as a person and only in the domain of the spiritual universe. 영원 아들은, 하나님 단편들의 증여와 다른 전(前)개인적 활동들을 제외하고, 모든 영적 관점에서 아버지와 하나로서 기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들은 물질 창조물들의 지적 활동이나 물질 우주들의 에너지 활동과 밀접하게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절대로서의 아들은 개인으로서 오직 영적 우주의 영역에서만 기능하십니다.

10:3.19 (112.3) The Infinite Spirit is amazingly universal and unbelievably versatile in all his operations. He performs in the spheres of mind, matter, and spirit. The Conjoint Actor represents the Father-Son association, but he also functions as himself. He is not directly concerned with physical gravity, with spiritual gravity, or with the personality circuit, but he more or less participates in all other universe activities. While apparently dependent on three existential and absolute gravity controls, the Infinite Spirit appears to exercise three supercontrols. This threefold endowment is employed in many ways to transcend and seemingly to neutralize even the manifestations of primary forces and energies, right up to the superultimate borders of absoluteness. In certain situations these supercontrols absolutely transcend even the primal manifestations of cosmic reality. 무한 영은 모든 그의 작용에서 놀랍게 우주적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십니다. 그는 마음, 물질 그리고 영의 구체들에서 수행합니다. 공동 행위자는 아버지-아들 관련을 대표하지만, 그는 또한 자신으로서 기능하십니다. 그는 물리적 중력, 영적 중력, 또는 고유성 회로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모든 다른 우주 활동들에 어느 정도 참여합니다. 겉보기에 세 실존적이며 절대적 중력 조정에 종속적인 반면에, 무한 영은 세 가지 초(超)조정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삼중 자질은, 절대(絶對)의 초(超)궁극 경계에 바로 이르도록 1차 힘들과 에너지들의 표현조차 초월하고 겉보기에 중화하는 여러 방법에 종사되어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이 초(超)조정들은 질서우주 실체의 1차 표현도 절대적으로 초월합니다.

4. The Trinity Union of Deity 신(神)의 삼위일체 연합

10:4.1 (112.4) Of all absolute associations, the Paradise Trinity (the first triunity) is unique as an exclusive association of personal Deity. God functions as God only in relation to God and to those who can know God, but as absolute Deity only in the Paradise Trinity and in relation to universe totality. 모든 절대적 관련 중 천국 삼위일체(첫째 삼원일체)는 고유적 신(神)의 유일한 관련으로서 독특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지니는 관계에서만 그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들과 지니는 관계에서만 하나님으로서 기능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천국 삼위일체 안에서, 우주 총체와 가지는 관계에서만 절대 신(神)으로 기능합니다.

10:4.2 (112.5) Eternal Deity is perfectly unified; nevertheless there are three perfectly individualized persons of Deity. The Paradise Trinity makes possible the simultaneous expression of all the diversity of the character traits and infinite powers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and his eternal co-ordinates and of all the divine unity of the universe functions of undivided Deity. 영원한 신(神)은 완전히 합일되어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개별화된 신(神)의 세 개인들이 있습니다. 천국 삼위일체는 첫째 근원이며 중심, 그의 영원한 통합-협동자들 및 분할되지 않은 신(神)의 우주 기능들의 모든 신적 연합의 성품 특성들 및 무한 권능들의 모든 다양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10:4.3 (112.6) The Trinity is an association of infinite persons functioning in a nonpersonal capacity but not in contravention of personality. The illustration is crude, but a father, son, and grandson could form a corporate entity which would be nonpersonal but nonetheless subject to their personal wills. 삼위일체는 비(非)고유적 수용능력에서 기능하는 무한 개인들의 관련이지만 고유성에 위반되지 않습니다. 미숙한 예증이지만, 아버지, 아들, 손자가, 비(非)고유적이지만, 그들의 개인 의지에 종속하는 법인(法人)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10:4.4 (112.7) The Paradise Trinity is real. It exists as the Deity union of Father, Son, and Spirit; yet the Father, the Son, or the Spirit, or any two of them, can function in relation to this selfsame Paradise Trinity. The Father, Son, and Spirit can collaborate in a non-Trinity manner, but not as three Deities. As persons they can collaborate as they choose, but that is not the Trinity. 천국 삼위일체는 실제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신(神) 연합으로 존재합니다. 그래도 아버지, 아들, 또는 영이나, 그들 중 어떤 둘도 이 동일한 천국 삼위일체와 관계하여 기능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은 비(非)-삼위일체 방법으로 협동할 수 있지만, 세 신(神)들로서 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들로서 그들은 그들의 선택을 따라 협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삼위일체가 아닙니다.

10:4.5 (112.8) Ever remember that what the Infinite Spirit does is the function of the Conjoint Actor. Both the Father and the Son are functioning in and through and as him. But it would be futile to attempt to elucidate the Trinity mystery: three as one and in one, and one as two and acting for two. 무한 영이 하는 것은 공동 행위자의 기능임을 항상 기억하라. 아버지와 아들 둘 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로서 하나 안에서 세 분이시며, 둘로서 둘을 위해 활동하는 한 분이신, 삼위일체 신비를 밝히려는 시도는 무익할 것입니다.

10:4.6 (112.9) The Trinity is so related to total universe affairs that it must be reckoned with in our attempts to explain the totality of any isolated cosmic event or personality relationship. The Trinity functions on all levels of the cosmos, and mortal man is limited to the finite level; therefore must man be content with a finite concept of the Trinity as the Trinity. 삼위일체는 총체적 우주 사무들과 관계되어 있어서, 어떤 고립된 질서우주 사건 또는 고유성 관계의 총체를 설명하려고 우리가 시도할 때, (삼위일체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삼위일체는 질서우주의 모든 수준들에서 기능하고, 필사 사람은 유한한 수준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삼위일체를, 유한한 개념의 삼위일체로 만족해야만 합니다.

10:4.7 (113.1) As a mortal in the flesh you should view the Trinity in accordance with your individual enlightenment and in harmony with the reactions of your mind and soul. You can know very little of the absoluteness of the Trinity, but as you ascend Paradiseward, you will many times experience astonishment at successive revelations and unexpected discoveries of Trinity supremacy and ultimacy, if not of absoluteness. 너희는 육체를 지닌 필사자로서 너희의 개별적 깨우침을 따라 너희 마음과 혼의 반응과 조화를 이루면서 삼위일체를 바라봐야 한다. 너희는 삼위일체의 절대를 아주 조금도 알 수 없지만, 너희가 천국으로 상승하면서, 너희가, 절대는 아니지만, 삼위일체 최극과 궁극의 연속적 계시와 의외의 발견들로 여러 번 놀랄 것이다.

5. Functions of the Trinity 삼위일체의 기능

10:5.1 (113.2) The personal Deities have attributes, but it is hardly consistent to speak of the Trinity as having attributes. This association of divine beings may more properly be regarded as having functions, such as justice administration, totality attitudes, co-ordinate action, and cosmic overcontrol. These functions are actively supreme, ultimate, and (within the limits of Deity) absolute as far as all living realities of personality value are concerned. 개인적 신(神)들은 속성들을 갖지만, 삼위일체가 속성들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일관되지 않습니다. 신적 존재들의 이 연합은 정의(正義)-경영, 총체적 태도, 통합-협동 행위, 그리고 질서우주의 전반적-조정과 같은 기능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이 기능들은 고유성 가치를 지닌 모든 살아있는 실체들에 관한 한, 활동적으로 최극, 궁극 그리고 (신神의 한계들 안에서) 절대적입니다.

10:5.2 (113.3) The functions of the Paradise Trinity are not simply the sum of the Father’s apparent endowment of divinity plus those specialized attributes that are unique in the personal existence of the Son and the Spirit. The Trinity association of the three Paradise Deities results in the evolution, eventuation, and deitization of new meanings, values, powers, and capacities for universal revelation, action, and administration. Living associations, human families, social groups, or the Paradise Trinity are not augmented by mere arithmetical summation. The group potential is always far in excess of the simple sum of the attributes of the component individuals. 천국 삼위일체의 기능들은 단순히 신성이라는 아버지의 외견적 자질 전체에, 아들과 영의 개인적 실존 안에 독특하게 있는 특화된 속성들을 더한 총합이 아닙니다. 세 천국 신(神)들의 삼위일체 관련은 우주적 계시, 행동 그리고 경영을 위한 새 의미, 가치, 권능, 그리고 수용 능력들의 진화, 결국 생겨남, 그리고 신(神) 구현화가 이루어집니다. 살아있는 관련들, 인간 가족들, 사회 집단들, 또는 천국 삼위일체는 단순한 산술적 합계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집단 잠재성은, 구성하는 개인들이 지닌 속성들의 단순한 합계를 항상 훨씬 뛰어넘습니다.

10:5.3 (113.4) The Trinity maintains a unique attitude as the Trinity towards the entire universe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And the functions of the Trinity can best be considered in relation to the universe attitudes of the Trinity. Such attitudes are simultaneous and may be multiple concerning any isolated situation or event: 삼위일체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전체 우주를 향한 삼위일체로서 독특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기능들은 삼위일체의 우주 태도들에 대한 관계를 고려함이 최선입니다. 그러한 태도들은 동시적이며, 어떤 고립된 상황이나 사건에 관해서는 다중적일 수 있습니다.

10:5.4 (113.5) 1. Attitude toward the Finite. The maximum self-limitation of the Trinity is its attitude toward the finite. The Trinity is not a person, nor is the Supreme Being an exclusive personalization of the Trinity, but the Supreme is the nearest approach to a power-personality focalization of the Trinity which can be comprehended by finite creatures. Hence the Trinity in relation to the finite is sometimes spoken of as the Trinity of Supremacy. 유한자를 향한 태도. 삼위일체가 최대로 자아를-제한함이 유한세계를 향한 태도입니다. 삼위일체는 개인이 아니며, 삼위일체의 배타적 고유성 구현인 최극 존재도 아니지만, 최극자는 유한 창조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권능-고유성 초점화 구현에 가장 접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한 세계와 관계된 삼위일체는 때로 최극위의 삼위일체라고 말합니다.

10:5.5 (113.6) 2. Attitude toward the Absonite. The Paradise Trinity has regard for those levels of existence which are more than finite but less than absolute, and this relationship is sometimes denominated the Trinity of Ultimacy. Neither the Ultimate nor the Supreme are wholly representative of the Paradise Trinity, but in a qualified sense and to their respective levels, each seems to represent the Trinity during the prepersonal eras of experiential-power development. 아(亞)절대를 향한 태도. 천국 삼위일체는 유한 이상이며 절대 이하인 실존의 수준들과 관련되며, 이 관계는 때로 궁극위의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궁극자나 최극자도 전적으로 천국 삼위일체를 대표하지 않지만, 제한된 의미와 각 수준에서, 각각은, 체험적-권능이 개발되는 전(前)고유적 시대에,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0:5.6 (113.7) 3. The Absolute Attitude of the Paradise Trinity is in relation to absolute existences and culminates in the action of total Deity. 천국 삼위일체의 절대적 태도는 절대 실존(實在)들과 관련되며 총체적 신(神)의 행동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0:5.7 (113.8) The Trinity Infinite involves the co-ordinate action of all triunity relationships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 undeified as well as deified — and hence is very difficult for personalities to grasp. In the contemplation of the Trinity as infinite, do not ignore the seven triunities; thereby certain difficulties of understanding may be avoided, and certain paradoxes may be partially resolved. 삼위일체 무한자는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모든 삼원일체(三元一體) 관계들 – 신(神)화 된 것과 비(非)신(神)화 된 -의 통합-협동 행동을 포함하며, 따라서 고유성들이 이해하기에 매우 어렵습니다. 삼위일체를 무한으로서 숙고하면서, 일곱 삼원일체(三元一體)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특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피할 수 있으며, 어떤 모순들은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10:5.8 (114.1) But I do not command language which would enable me to convey to the limited human mind the full truth and the eternal significance of the Paradise Trinity and the nature of the never-ending interassociation of the three beings of infinite perfection. 그러나 나는, 천국 삼위일체의 충만한 진리와 영원한 중요성 그리고 무한 완전한 세 존재들의 결코-끝남이 없는 상호-관련의 본성을, 제한된 인간 마음에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합니다.

6. The Stationary Sons of the Trinity 삼위일체의 고정 아들들

10:6.1 (114.2) All law takes origin in the First Source and Center; he is law. The administration of spiritual law inheres in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The revelation of law, the promulg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divine statutes, is the function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The application of law, justice, falls within the province of the Paradise Trinity and is carried out by certain Sons of the Trinity. 모든 법칙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으로부터 기원됩니다. 그는 법입니다. 영적 법칙의 경영은 둘째 근원이며 중심에게 본래 부여되어 있습니다. 법의 계시, 신적 법규의 선포와 해석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기능입니다. 법의 적용, 정의(正義)는 천국 삼위일체의 직권에 속하며, 삼위일체의 특정 아들들이 집행합니다.

10:6.2 (114.3) Justice is inherent in the universal sovereignty of the Paradise Trinity, but goodness, mercy, and truth are the universe ministry of the divine personalities, whose Deity union constitutes the Trinity. Justice is not the attitude of the Father, the Son, or the Spirit. Justice is the Trinity attitude of these personalities of love, mercy, and ministry. No one of the Paradise Deities fosters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Justice is never a personal attitude; it is always a plural function. 정의(正義)는 천국 삼위일체의 우주적 주권에 본래적이지만, 선, 자비 그리고 진리는 신적 고유성들의 우주적 사역이며, 그 신(神) 연합은 삼위일체를 구성합니다. 정의(正義)는 아버지나 아들 또는 영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의(正義)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사역의 이 고유성들이 지닌 삼위일체 태도입니다. 천국 신(神)들 중 누구도 정의(正義)의 경영을 맡고 있지 않습니다. 정의(正義)는 결코 개인적 태도가 아니며; 그것은 항상 복수(複數)의 기능입니다.

10:6.3 (114.4) Evidence, the basis of fairness (justice in harmony with mercy), is supplied by the personalit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the conjoint representative of the Father and the Son to all realms and to the minds of the intelligent beings of all creation. 증거, 공정(公正자비로 조화를 이룬 정의)의 기초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 모든 창조의 지능 존재들의 모든 영역들과 마음들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대표자의 고유성들이 제공합니다.

10:6.4 (114.5) Judgment, the final application of justice in accordance with the evidence submitted by the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is the work of the Stationary Sons of the Trinity, beings partaking of the Trinity nature of the united Father, Son, and Spirit. 심판, 무한 영의 고유성들이 제출한 증거에 따라 최종적 정의(正義)의 적용은, 삼위일체 고정 아들들의 업무이며, 이들은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영의 삼위일체 본성에 참여하는 존재들입니다.

10:6.5 (114.6) This group of Trinity Sons embraces the following personalities: 삼위일체 아들들의 이 집단은 다음의 고유성들을 포함합니다.

10:6.6 (114.7) 1. Trinitized Secrets of Supremacy. 삼위일체화 최극위 비밀들.

10:6.7 (114.8) 2. Eternals of Days. 영원부터 늘 계신이.

10:6.8 (114.9) 3. Ancients of Days. 옛적부터 늘 계신이.

10:6.9 (114.10) 4. Perfections of Days. 완전하게 늘 계신이.

10:6.10 (114.11) 5. Recents of Days. 최근부터 늘 계신이.

10:6.11 (114.12) 6. Unions of Days. 연합으로 늘 계신이.

10:6.12 (114.13) 7. Faithfuls of Days. 충심으로 늘 계신이.

10:6.13 (114.14) 8. Perfectors of Wisdom. 지혜의 완전자.

10:6.14 (114.15) 9. Divine Counselors. 신적 조언자.

10:6.15 (114.16) 10. Universal Censors. 우주 검열자.

10:6.16 (114.17) We are the children of the three Paradise Deities functioning as the Trinity, for I chance to belong to the tenth order of this group, the Universal Censors. These orders are not representative of the attitude of the Trinity in a universal sense; they represent this collective attitude of Deity only in the domains of executive judgment — justice. They were specifically designed by the Trinity for the precise work to which they are assigned, and they represent the Trinity only in those functions for which they were personalized. 우리는 삼위일체로서 기능하는 세 천국 신(神)들의 자녀들입니다. 마침 나는 이 집단의 10번째 계층인 우주 검열자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층들은 우주적 의미에서 삼위일체의 태도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행적 심판 – 정의(正義) -의 권역들에서만 신(神)의 이 집단적 태도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정받은 엄밀한 업무를 위해 삼위일체가 특별히 그들을 배정했으며, 그들이 자신들이 고유성 구현된 그 기능들에서만 삼위일체를 대표합니다.

10:6.17 (115.1) The Ancients of Days and their Trinity-origin associates mete out the just judgment of supreme fairness to the seven superuniverses. In the central universe such functions exist in theory only; there fairness is self-evident in perfection, and Havona perfection precludes all possibility of disharmony. 옛적부터 늘 계신 이와 그들의 삼위일체-기원 관련동료들은 일곱 초우주들에 최극 공정의 정당한 심판을 내립니다. 중앙 우주에서 그런 기능들은 이론으로만 존재합니다. 거기에서 공정(公正)은 완전히 자명(自明)하며, 하보나 완전은 모든 부조화의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10:6.18 (115.2) Justice is the collective thought of righteousness; mercy is its personal expression. Mercy is the attitude of love; precision characterizes the operation of law; divine judgment is the soul of fairness, ever conforming to the justice of the Trinity, ever fulfilling the divine love of God. When fully perceived and completely understood, the righteous justice of the Trinity and the merciful love of the Universal Father are coincident. But man has no such full understanding of divine justice. Thus in the Trinity, as man would view it, the personalities of Father, Son, and Spirit are adjusted to co-ordinate ministry of love and law in the experiential universes of time. 정의(正義)는 공의에 대한 집합적 생각이며, 자비는 그것의 개인적 표현입니다. 자비는 사랑의 태도이며, 정확은 법 실행의 특징입니다. 신적 심판은 공정(公正)의 혼이며, 늘 삼위일체의 정의(正義)를 따르고, 늘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성취합니다. 충분히 인식되고 완벽히 이해될 때, 삼위일체의 공의로운 정의(正義)와 우주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적 정의(正義)를 그렇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듯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의 고유성들은, 체험적 시간 우주에 있는 사랑과 법의 통합-협동 사역에 맞추십니다.

7. The Overcontrol of Supremacy 최극위의 전반적 조정

10:7.1 (115.3) The First, Second, and Third Persons of Deity are equal to each other, and they are one. “The Lord our God is one God.” There is perfection of purpose and oneness of execution in the divine Trinity of eternal Deities. The Father, the Son, and the Conjoint Actor are truly and divinely one. Of a truth it is written: “I am the first, and I am the last, and beside me there is no God.” 신(神)의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개인들은 서로 동등하고, 그들은 하나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신6:4).” 영원한 신(神)들의 신적 삼위일체 안에서 목적은 완전하고 집행은 하나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공동 행위자는 진실로 신적으로 하나입니다. 진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10:7.2 (115.4) As things appear to the mortal on the finite level, the Paradise Trinity, like the Supreme Being, is concerned only with the total — total planet, total universe, total superuniverse, total grand universe. This totality attitude exists because the Trinity is the total of Deity and for many other reasons. 유한 수준에서 필사자들에게 사물들이 나타날 때, 천국 삼위일체는, 최극 존재와 마찬가지로, 오직 총체 – 총 행성, 총 우주, 총 초우주, 총 대우주 -에 관련됩니다. 이 총체적 태도는, 삼위일체가 신(神)의 총체 때문이고 기타 여러 이유들 때문에, 존재합니다.

10:7.3 (115.5) The Supreme Being is something less and something other than the Trinity functioning in the finite universes; but within certain limits and during the present era of incomplete power-personalization, this evolutionary Deity does appear to reflect the attitude of the Trinity of Supremacy. The Father, Son, and Spirit do not personally function with the Supreme Being, but during the present universe age they collaborate with him as the Trinity. We understand that they sustain a similar relationship to the Ultimate. We often conjecture as to what will be the personal relationship between the Paradise Deities and God the Supreme when he has finally evolved, but we do not really know. 최극 존재는 유한 우주들에서 기능하는 삼위일체보다 작고, 다른, 어떤 존재이지만, 어떤 한계 내에서, 미완성 권능-고유성 구현의 현 시대에, 진화하는 이 신(神)은 최극위의 삼위일체의 태도를 반영하려고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최극존재와 개인적으로 기능하지 않지만, 현 우주 시대에 그들은 삼위일체로서 최상 존재와 협력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궁극자에 대해서 비슷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극자 하나님이 최종으로 진화되었을 때, 천국 신(神)들과 최극자 하나님 사이의 고유적 관계가 무엇일까 종종 추측하지만,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10:7.4 (115.6) We do not find the overcontrol of Supremacy to be wholly predictable. Furthermore, this unpredictability appears to be characterized by a certain developmental incompleteness, undoubtedly an earmark of the incompleteness of the Supreme and of the incompleteness of finite reaction to the Paradise Trinity. 우리는 전부 예측할 수 있는 최극위의 전반적 조정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예측 불가능성은, 어떤 발전의 미완성, 즉 틀림없이 최극자의 미완성과 천국 삼위일체에 대한 유한한 반응의 미완성의 표지로 특징되는 듯합니다.

10:7.5 (115.7) The mortal mind can immediately think of a thousand and one things — catastrophic physical events, appalling accidents, horrific disasters, painful illnesses, and world-wide scourges — and ask whether such visitations are correlated in the unknown maneuvering of this probable functioning of the Supreme Being. Frankly, we do not know; we are not really sure. But we do observe that, as time passes, all these difficult and more or less mysterious situations always work out for the welfare and progress of the universes. It may be that the circumstances of existence and the inexplicable vicissitudes of living are all interwoven into a meaningful pattern of high value by the function of the Supreme and the overcontrol of the Trinity. 필사자 마음은 수많은 것들 – 비극적인 물리적 사건들, 섬뜩한 우연들, 무서운 재난들, 고통스러운 질병들, 그리고 세계적 징벌들 -을 즉시 생각하고, 그러한 재앙들이 최극 존재의 이 개연적 기능에 대한 미지의 책략과 관계된 것은 아닌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모르며, 정말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이 어렵고 다소 신비스러운 상황들이 항상 우주들의 복지와 진보를 위해 발생함을 보고 있습니다. 실존의 상황과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변화들은 모두 최극자의 기능과 삼위일체의 전반적 조정에 의해, 높은 가치를 지닌 의미 있는 패턴으로 모두 뒤섞입니다.

10:7.6 (116.1) As a son of God you can discern the personal attitude of love in all the acts of God the Father. But you will not always be able to understand how many of the universe acts of the Paradise Trinity redound to the good of the individual mortal 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space. In the progress of eternity the acts of the Trinity will be revealed as altogether meaningful and considerate, but they do not always so appear to the creatures of time.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행위에서 사랑하시는 개인적 태도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천국 삼위일체의 우주 행위 중 얼마나 많이 공간의 진화 세계들에 있는 필사자 개인의 선(善)에 이바지하는지 언제나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원의 진보에서, 삼위일체의 행위는 전체적으로 의미 있고 신중하게 계시될 것이지만, 그것들이 시간의 창조물들에게 항상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8. The Trinity Beyond the Finite 유한을 초월한 삼위일체

10:8.1 (116.2) Many truths and facts pertaining to the Paradise Trinity can only be even partially comprehended by recognizing a function that transcends the finite. 천국 삼위일체에 속하는 많은 진리들과 사실들은 유한을 초월하는 기능을 인식해야 단지 일부라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10:8.2 (116.3) It would be inadvisable to discuss the functions of the Trinity of Ultimacy, but it may be disclosed that God the Ultimate is the Trinity manifestation comprehended by the Transcendentalers. We are inclined to the belief that the unification of the master universe is the eventuating act of the Ultimate and is probably reflective of certain, but not all, phases of the absonite overcontrol of the Paradise Trinity. The Ultimate is a qualified manifestation of the Trinity in relation to the absonite only in the sense that the Supreme thus partially represents the Trinity in relation to the finite. 궁극위 삼위일체의 기능들을 논의하는 일은 권할만하지 않겠지만, 궁극자 하나님은 초월자들이 이해하는 삼위일체 현시임은 밝혀도 됩니다. 우리는 주(主)우주의 통일이 궁극자의 궁극에 일어나는 행위이며, 전부는 아니지만, 아마 천국 삼위일체의 아(亞)절대적 전반적-조정의 어떤 위상의 반영임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지 최극자가 유한자에 대한 관계에서 삼위일체를 부분적으로 그렇게 대변한다는 의미에서만, 궁극자는 아(亞)절대자에 대한 관계에서 제한적인 삼위일체의 현시입니다.

10:8.3 (116.4)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are, in a certain sense, the constituent personalities of total Deity. Their union in the Paradise Trinity and the absolute function of the Trinity equivalate to the function of total Deity. And such completion of Deity transcends both the finite and the absonite.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은, 어떤 의미에서, 총체적 신(神)을 구성하는 고유성들입니다. 천국 삼위일체 안에서 그들의 연합과 삼위일체의 절대적 기능은 총체적 신(神)의 기능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神)의 완성은 유한자와 아(亞)절대자 둘 모두를 초월합니다.

10:8.4 (116.5) While no single person of the Paradise Deities actually fills all Deity potential, collectively all three do. Three infinite persons seem to be the minimum number of beings required to activate the prepersonal and existential potential of total Deity — the Deity Absolute. 천국 신(神)들 중 어느 한 개인도 실재로 신의 모든 잠재성을 채우지 않는 반면에, 세 분 모두 집단적으로 하십니다(신의 모든 잠재성을 채우십니다). 무한한 세 분들은 총체적 신(神) – 신(神) 절대자-의 전(前)개인적이며 실존적 잠재성을 활성화에 요구되는 최소의 존재들인 듯합니다.

10:8.5 (116.6) We know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and the Infinite Spirit as persons, but I do not personally know the Deity Absolute. I love and worship God the Father; I respect and honor the Deity Absolute. 우리는 우주 아버지, 영원 아들, 그리고 무한 영을 개인들로 알고 있지만, 나는 신(神) 절대자를 개인적으로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합니다. 나는 신(神) 절대자를 존경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10:8.6 (116.7) I once sojourned in a universe where a certain group of beings taught that the finaliters, in eternity, were eventually to become the children of the Deity Absolute. But I am unwilling to accept this solution of the mystery which enshrouds the future of the finaliters. 나는 영원 안에서 최종자가 결국 신(神) 절대자의 자녀들이 된다고 어떤 존재 집단이 가르쳤던 우주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최종자의 미래를 덮고 있는 신비를 푸는 이 해결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10:8.7 (116.8) The Corps of the Finality embrace, among others, those mortals of time and space who have attained perfection in all that pertains to the will of God. As creatures and within the limits of creature capacity they fully and truly know God. Having thus found God as the Father of all creatures, these finaliters must sometime begin the quest for the superfinite Father. But this quest involves a grasp of the absonite nature of the ultimate attributes and character of the Paradise Father. Eternity will disclose whether such an attainment is possible, but we are convinced, even if the finaliters do grasp this ultimate of divinity, they will probably be unable to attain the superultimate levels of absolute Deity. 최종자 군단은, 다른 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모든 것에서 완전을 달성한 시간과 공간의 그 필사자들을 포함합니다. 창조물들로서, 창조물 능력의 한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참으로 압니다. 하나님을 모든 창조물들의 아버지로 그렇게 발견하면, 이 최종자들은 언젠가 초(超)유한 아버지를 향한 탐구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탐구는 천국 아버지의 궁극적 속성들과 성품의 아(亞)절대 본성 파악을 포함합니다. 영원이 그러한 달성이 가능한지를 드러내겠지만, 최종자들이 이 신성의 궁극을 파악한다고 해도, 그들이 아마 절대 신(神)의 초(超)궁극 차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10:8.8 (116.9) It may be possible that the finaliters will partially attain the Deity Absolute, but even if they should, still in the eternity of eternities the problem of the Universal Absolute will continue to intrigue, mystify, baffle, and challenge the ascending and progressing finaliters, for we perceive that the unfathomability of the cosmic relationships of the Universal Absolute will tend to grow in proportions as the material universes and their spiritual administration continue to expand. 최종자들이 신(神) 절대자에게 부분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들이 그렇더라도, 영원의 영원에서 우주 절대자에 대한 문제는, 상승하고 진보하는 최종자들에게 여전히 계속 흥미를 끌고 신비 가운데 당황하게 하며 도전할 것입니다. 이는 우주 절대자의 질서우주 관계들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이, 물질적 우주들과 그들의 경영이 계속 확장됨에 따라, 성장해 나아갈 것을 우리가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10:8.9 (117.1) Only infinity can disclose the Father-Infinite. 오직 무한이 아버지-무한자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10:8.10 (117.2) [Sponsored by a Universal Censor acting by authority from the Ancients of Days resident on Uversa.][유버사에 거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이로부터 권한을 받아 활동하는 우주 검열자가 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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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9 The Twelve Apostles 12 사도들

Paper 139

The Twelve Apostles 12 사도들

1. Andrew, the First Chosen 첫 번째로 선택된 안드레
2. Simon Peter 시몬 베드로
3. James Zebedee 야고보 세베대
4. John Zebedee 요한 세베대
5. Philip the Curious 호기심 많은 빌립
6. Honest Nathaniel 정직한 나다니엘
7. Matthew Levi 마태 레위
8. Thomas Didymus 도마 디디머스
9. and 10. James and Judas Alpheus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11. Simon the Zealot 열심당원 시몬
12. Judas Iscariot 가룟 유다

171203 12 사도들-첫 번째 선택된 안드레 1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When they saw the courage of Peter and John and realized that they were unschooled, ordinary men, they were astonished and they took note that these men had been with Jesus.

139:0.1 (1548.1) IT IS an eloquent testimony to the charm and righteousness of Jesus’ earth life that, although he repeatedly dashed to pieces the hopes of his apostles and tore to shreds their every ambition for personal exaltation, only one deserted him. 예수께서 반복하여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들의 개인적으로 높아지려는 모든 야망을 갈가리 찢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사람만이 그를 저버렸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지상(地上) 생애의 매력과 의로움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39:0.2 (1548.2) The apostles learned from Jesus about the kingdom of heaven, and Jesus learned much from them about the kingdom of men, human nature as it lives on Urantia and on the other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se twelve men represented many different types of human temperament, and they had not been made alike by schooling. Many of these Galilean fishermen carried heavy strains of gentile blood as a result of the forcible conversion of the gentile population of Galilee one hundred years previously.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 대해서 배웠으며,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사람들의 나라, 즉 지구(유란시아) 및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다른 세계들에 살고 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많이 배우셨습니다. 이 12명의 사도들은 다양한 인간 기질(氣質)들을 대표했으며, 그들은 학교 교육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에 갈릴리의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개종시킨 결과 대부분의 이 갈릴리 어부들은 이방인의 혈통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139:0.3 (1548.3) Do not make the mistake of regarding the apostles as being altogether ignorant and unlearned. All of them, except the Alpheus twins, were graduates of the synagogue schools, having been thoroughly trained in the Hebrew scriptures and in much of the current knowledge of that day. Seven were graduates of the Capernaum synagogue schools, and there were no better Jewish schools in all Galilee. 사도들 모두가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알패오의 쌍둥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회당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으며, 히브리 성서와 그 당시 통용되는 많은 지식으로 철저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7명은 가버나움 회당 학교들의 졸업생들이었고, 모든 갈릴리에서 더 좋은 유대인 학교는 없었습니다.

139:0.4 (1548.4) When your records refer to these messengers of the kingdom as being “ignorant and unlearned,” it was intended to convey the idea that they were laymen, unlearned in the lore of the rabbis and untrained in the methods of rabbin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s. They were lacking in so-called higher education. In modern times they would certainly be considered uneducated, and in some circles of society even uncultured. One thing is certain: They had not all been put through the same rigid and stereotyped educational curriculum. From adolescence on they had enjoyed separate experiences of learning how to live. 너희의 기록들이 이 나라의 메신저들을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학문 없는 범인(행4:13)”으로 칭하는 것은, 그들이 랍비들의 지식을 배우지 못했고, 랍비들의 성서해석방법으로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문외한)들이었다는 관념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소위 고등교육(전문적 전공)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대에서 그들은 분명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로 여겨질 것이고, 심지어 어떤 사회 집단에서는 교양 없는 사람들로 간주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똑같이 경직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교육과정을 모두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춘기부터 계속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하였다.

1. Andrew, the First Chosen 첫 번째로 선택된 안드레

139:1.1 (1548.5) Andrew, chairman of the apostolic corps of the kingdom, was born in Capernaum. He was the oldest child in a family of five — himself, his brother Simon, and three sisters. His father, now dead, had been a partner of Zebedee in the fish-drying business at Bethsaida, the fishing harbor of Capernaum. When he became an apostle, Andrew was unmarried but made his home with his married brother, Simon Peter. Both were fishermen and partners of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나라의 사도단의 의장, 안드레는 가버나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5명-자신, 남동생 시몬, 여동생 3명-의 자녀들 중 장남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아버지는 가버나움의 어항(漁港)인 벳새다에서 생선 건조업을 하는 세베대의 동업자였습니다. 그가 사도가 되었을 때, 안드레는 미혼이었지만, 기혼 남동생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둘 다 어부였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들이었습니다.

139:1.2 (1548.6) In A.D. 26, the year he was chosen as an apostle, Andrew was 33, a full year older than Jesus and the oldest of the apostles. He sprang from an excellent line of ancestors and was the ablest man of the twelve. Excepting oratory, he was the peer of his associates in almost every imaginable ability. Jesus never gave Andrew a nickname, a fraternal designation. But even as the apostles soon began to call Jesus Master, so they also designated Andrew by a term the equivalent of Chief. 그가 사도로 선택된 서기 26년에, 안드레는 예수님 보다 만 1살이 많은 33세로 사도들 중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계의 조상을 둔 출신으로 12사도들 중에서 가장 유능했습니다. 웅변을 제외하고,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동료들과 대등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애칭(愛稱), 형제우애의 호칭을 결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바로 예수님을 주(主)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듯이, 그들은 또한 안드레를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용어로 불렀습니다.

139:1.3 (1549.1) Andrew was a good organizer but a better administrator. He was one of the inner circle of four apostles, but his appointment by Jesus as the head of the apostolic group made it necessary for him to remain on duty with his brethren while the other three enjoyed very close communion with the Master. To the very end Andrew remained dean of the apostolic corps. 안드레는 유능한 조직가였지만, 오히려 더 훌륭한 행정-관리자였습니다. 그는 네 사도들로 구성된 핵심 그룹의 하나였지만, 예수께서 그를 사도적 집단의 우두머리로 임명하셔서 그의 임무는 형제들과 함께 남아 있어야 했던 반면에, 다른 셋은 주(主)님과 매우 가깝게 사귀었습니다. 바로 마지막까지 안드레는 사도단의 장(長책임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39:1.4 (1549.2) Although Andrew was never an effective preacher, he was an efficient personal worker, being the pioneer missionary of the kingdom in that, as the first chosen apostle, he immediately brought to Jesus his brother, Simon, who subsequently became one of the greatest preachers of the kingdom. Andrew was the chief supporter of Jesus’ policy of utilizing the program of personal work as a means of training the twelve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안드레가 감명을 주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실력 있는 개인적 일꾼, 즉 첫째로 선택된 사도로서 즉시 자신의 동생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는 점에 있어서, 나라의 선구자적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시몬은 그 후 나라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나라의 메신저들로 12사도들을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개인 상대의 과업 계획을 활용하는 예수님의 정책을 받드는 1등 옹호자였습니다.

139:1.5 (1549.3) Whether Jesus privately taught the apostles or preached to the multitude, Andrew was usually conversant with what was going on; he was an understanding executive and an efficient administrator. He rendered a prompt decision on every matter brought to his notice unless he deemed the problem one beyond the domain of his authority, in which event he would take it straight to Jesus. 예수께서 사도들을 사적(私的)으로 가르치셨을 때나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셨을 때나, 안드레는 대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해하는 집행자였고 실력 있는 행정-관리자였습니다. 그는 눈에 띠는 모든 문제들을 신속히 처리했고, 그의 권한 영역을 넘어선 문제로 판단되면 그 사건을 즉시 예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171210 12 사도들-첫 번째 선택된 안드레 2 막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139:1.6 (1549.4) Andrew and Peter were very unlike in character and temperament, but it must be recorded everlastingly to their credit that they got along together splendidly. Andrew was never jealous of Peter’s oratorical ability. Not often will an older man of Andrew’s type be observed exerting such a profound influence over a younger and talented brother. Andrew and Peter never seemed to be in the least jealous of each other’s abilities or achievements. Late on the evening of the day of Pentecost, when, largely through the energetic and inspiring preaching of Peter, two thousand souls were added to the kingdom, Andrew said to his brother: “I could not do that, but I am glad I have a brother who could.” To which Peter replied: “And but for your bringing me to the Master and by your steadfastness keeping me with him, I should not have been here to do this.” Andrew and Peter were the exceptions to the rule, proving that even brothers can live together peaceably and work together effectively. 안드레와 베드로의 관계. 안드레와 베드로는 성품과 기질이 매우 달랐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잘 지낸 점은 그들의 명예로 영구히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안드레는 결코 베드로의 웅변 능력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안드레 유형(類型)의 나이 든 사람이 어리고 재능 있는 형제에게 그런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각자의 능력이나 업적에 대해 서로 조금이라도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오순절의 늦은 그날 저녁, 주로 베드로의 열광적이고 영감 있는 설교를 통하여 2,000명의 혼들이 나라에 추가되었을 때, 안드레는 자기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동생을 가져서 기쁘구나.” 거기에 베드로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형이 나를 주(主)님께 데려오지 않고, 꾸준히 나를 주(主)님 곁에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있지 않았겠지.” 형제간이라도 평화로이 함께 지내고 효과적으로 함께 일 할 수 있음을 증명하여, 안드레와 베드로는 원칙에 있어서 예외(例外)였습니다.

139:1.7 (1549.5) After Pentecost Peter was famous, but it never irritated the older Andrew to spend the rest of his life being introduced as “Simon Peter’s brother.” 안드레의 넓은 마음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에 유명해졌지만, “시몬 베드로의 형”으로 소개되면서 보낸 여생은 나이 든 안드레를 언짢게 하지 않았습니다.

139:1.8 (1549.6) Of all the apostles, Andrew was the best judge of men. He knew that trouble was brewing in the heart of Judas Iscariot even when none of the others suspected that anything was wrong with their treasurer; but he told none of them his fears. Andrew’s great service to the kingdom was in advising Peter, James, and John concerning the choice of the first missionaries who were sent out to proclaim the gospel, and also in counseling these early leaders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administrative affairs of the kingdom. Andrew had a great gift for discovering the hidden resources and latent talents of young people. 나라를 위한 안드레의 위대한 봉사. 모든 사도들 중 안드레가 사람들을 가장 잘 판단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회계가 뭔가 잘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을 때에도, 안드레는 가룟 유다의 심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걱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한 안드레의 위대한 봉사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파송될 첫 선교사들의 선택에 관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권고하고, 또한 나라의 행정 사무의 조직에 대하여 이 초기 지도자들을 조언한 것입니다. 안드레는 젊은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는 자원과 잠재적인 재능을 발견하는 탁월한 은사(恩賜)가 있었습니다.

139:1.9 (1549.7) Very soon after Jesus’ ascension on high, Andrew began the writing of a personal record of many of the sayings and doings of his departed Master. After Andrew’s death other copies of this private record were made and circulated freely among the early teachers of the Christian church. These informal notes of Andrew’s were subsequently edited, amended, altered, and added to until they made up a fairly consecutive narrative of the Master’s life on earth. The last of these few altered and amended copies was destroyed by fire at Alexandria about one hundred years after the original was written by the first chosen of the twelve apostles. 안드레의 기록. 예수님의 상승 이후 곧바로, 안드레는 떠나가신 주(主)님의 많은 말씀들과 행적들의 개인적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의 사후(死後) 이 사적(私的) 기록의 다른 사본들이 만들어져, 기독교회의 초기 선생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회람(回覽)되었습니다. 안드레의 이러한 비공식적 노트들은, 기독교회의 초기 선생들이 주(主)님의 지상 생애를 상당히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 때까지, 안드레의 기록 이후에 편집되어, 수정되고, 변경되어, 첨부되었습니다. 변경되고 수정된 마지막 몇 개의 이 사본들은, 12 사도들 중의 첫째로 선택된 사도가 원본을 기록한 지 약 100년이 지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불에 타 버렸습니다.

139:1.10 (1550.1) Andrew was a man of clear insight, logical thought, and firm decision, whose great strength of character consisted in his superb stability. His temperamental handicap was his lack of enthusiasm; he many times failed to encourage his associates by judicious commendation. And this reticence to praise the worthy accomplishments of his friends grew out of his abhorrence of flattery and insincerity. Andrew was one of those all-round, even-tempered, self-made, and successful men of modest affairs. 안드레의 장점과 단점. 안드레는 명석한 통찰력, 논리적 사고, 확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성품 중 큰 장점은 뛰어난 안정감이었습니다. 그의 기질적 단점은 열정의 부족이었는데, 그는 여러 번 사려 깊은 칭찬으로 자기 동료들을 격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친구들의 가치 있는 업적들을 칭찬하는 일에 과묵했던 이것은, 아첨이나 불성실에 대한 그의 혐오감에서 생겼습니다. 안드레는 다재다능하고, 침착하며, 자립적이고, 그만그만한 과업에 성공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139:1.11 (1550.2) Every one of the apostles loved Jesus, but it remains true that each of the twelve was drawn toward him because of some certain trait of personality which made a special appeal to the individual apostle. Andrew admired Jesus because of his consistent sincerity, his unaffected dignity. When men once knew Jesus, they were possessed with the urge to share him with their friends; they really wanted all the world to know him. 안드레가 느낀 예수님의 매력. 사도들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12명 각자마다 그에게 끌린 것은, 각 사도들에게 특별히 호감을 주는 어떤 고유성의 특색 때문이었음이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일관된 성실함과 꾸밈없는 기품 때문에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기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온 세상이 그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139:1.12 (1550.3) When the later persecutions finally scattered the apostles from Jerusalem, Andrew journeyed through Armenia, Asia Minor, and Macedonia and, after bringing many thousands into the kingdom, was finally apprehended and crucified in Patrae in Achaia. It was two full days before this robust man expired on the cross, and throughout these tragic hours he continued effectively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of the salvation of the kingdom of heaven. 안드레의 마지막 나중에 박해로 결국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을 때, 안드레는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를 지나 여행하였고, 수천 명을 나라로 인도한 후, 결국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건장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만 이틀이 걸렸는데, 이러한 비극적인 시간들 내내 그는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계속 효과적으로 선포했습니다.

2. Simon Peter 시몬 베드로

171217 시몬 베드로 1 요1:40-42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0 Andrew, Simon Peter’s brother, was one of the two who heard what John had said and who had followed Jesus. 41 The first thing Andrew did was to find his brother Simon and tell him, “We have found the Messiah” (that is, the Christ). 42 And he brought him to Jesus. Jesus looked at him and said, “You are Simon son of John. You will be called Cephas” (which, when translated, is Peter).

139:2.1 (1550.4) When Simon joined the apostles, he was thirty years of age. He was married, had three children, and lived at Bethsaida, near Capernaum. His brother, Andrew, and his wife’s mother lived with him. Both Peter and Andrew were fisher partners of the sons of Zebedee. 시몬이 사도들에 합류했을 때, 그는 30세였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세 자녀가 있었고, 가버나움 인근 벳새다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형 안드레와 장모가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둘 다 세베대의 아들들과 동업하는 어부들이었습니다.

139:2.2 (1550.5) The Master had known Simon for some time before Andrew presented him as the second of the apostles. When Jesus gave Simon the name Peter, he did it with a smile; it was to be a sort of nickname. Simon was well known to all his friends as an erratic and impulsive fellow. True, later on, Jesus did attach a new and significant import to this lightly bestowed nickname. 주(主)님은 안드레가 시몬을 두 번째 사도로 소개하기 전부터, 얼마간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그는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것은 일종의 별명이 될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모든 그의 친구들에게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동료로 유명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가볍게 주신 별명에, 나중에 새롭고 뜻 깊은 의미를 붙인 것이 사실입니다.

139:2.3 (1550.6) Simon Peter was a man of impulse, an optimist. He had grown up permitting himself freely to indulge strong feelings; he was constantly getting into difficulties because he persisted in speaking without thinking. This sort of thoughtlessness also made incessant trouble for all of his friends and associates and was the cause of his receiving many mild rebukes from his Master. The only reason Peter did not get into more trouble because of his thoughtless speaking was that he very early learned to talk over many of his plans and schemes with his brother, Andrew, before he ventured to make public proposals. 시몬 베드로는 충동적인 낙천가(樂天家)였습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자유롭게 탐닉하도록 스스로 허용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말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항상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런 식의 그의 경솔함은 또한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 모두에게 끊임없는 골칫거리가 되었고, 그가 주(主)님으로부터 가벼운 꾸중을 많이 들었던 이유였습니다. 베드로의 분별없는 말 때문에 더 심한 곤경에 빠지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과감히 공적 제안을 내놓기 전에, 많은 자기 계획들과 기획들을 그의 형 안드레와 의논하기를 아주 일찍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139:2.4 (1550.7) Peter was a fluent speaker, eloquent and dramatic. He was also a natural and inspirational leader of men, a quick thinker but not a deep reasoner. He asked many questions, more than all the apostles put together, and while the majority of these questions were good and relevant, many of them were thoughtless and foolish. Peter did not have a deep mind, but he knew his mind fairly well. He was therefore a man of quick decision and sudden action. While others talked in their astonishment at seeing Jesus on the beach, Peter jumped in and swam ashore to meet the Master. 베드로는 극적인 능변의 유창한 연사(演士)였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타고난 지도자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지만, 심오한 추론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 모두를 합한 이상으로 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이 질문의 대부분은 선하고 적절했지만, 그 중 많은 것들은 분별이 없고 어리석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마음은 없었지만, 자기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빨리 결정하고 급히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해변에서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말하는 동안,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어, 주(主)님을 만나려고 해변으로 헤엄쳤습니다.

139:2.5 (1551.1) The one trait which Peter most admired in Jesus was his supernal tenderness. Peter never grew weary of contemplating Jesus’ forbearance. He never forgot the lesson about forgiving the wrongdoer, not only seven times but seventy times and seven. He thought much about these impressions of the Master’s forgiving character during those dark and dismal days immediately following his thoughtless and unintended denial of Jesus in the high priest’s courtyard. 베드로가 가장 경탄한 예수님의 한 가지 특성은 더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관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싫증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잘못하는 사람을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안마당에서 경솔히 뜻하게 않게 예수님을 부인한 직후, 그 어둡고 우울한 며칠 주(主)님의 용서하는 성품에서 받은 이 인상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139:2.6 (1551.2) Simon Peter was distressingly vacillating; he would suddenly swing from one extreme to the other. First he refused to let Jesus wash his feet and then, on hearing the Master’s reply, begged to be washed all over. But, after all, Jesus knew that Peter’s faults were of the head and not of the heart. He was one of the most inexplicable combinations of courage and cowardice that ever lived on earth. His great strength of character was loyalty, friendship. Peter really and truly loved Jesus. And yet despite this towering strength of devotion he was so unstable and inconstant that he permitted a servant girl to tease him into denying his Lord and Master. Peter could withstand persecution and any other form of direct assault, but he withered and shrank before ridicule. He was a brave soldier when facing a frontal attack, but he was a fear-cringing coward when surprised with an assault from the rear. 시몬 베드로는 비참하리만큼 동요했습니다.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갑자기 흔들거리곤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께서 자기 발을 씻지 못하게 했다가 그 후, 주(主)님의 대답을 듣고, 온 몸을 씻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단점이 머리에 있지, 심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용기와 비겁함이 가장 희한하게 섞인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성품 중 큰 장점은 충성과 우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높이 솟는 헌신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어서 여종이 자신을 놀려 그의 주(主)님이시며 선생님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베드로는 박해나 다른 형태의 직접적인 모욕은 잘 견디었지만, 조롱 앞에서는 의기소침으로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전면 공격을 당했을 때는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후면 습격으로 놀랄 때에는 두려움으로 움츠린 겁쟁이였습니다.

139:2.7 (1551.3) Peter was the first of Jesus’ apostles to come forward to defend the work of Philip among the Samaritans and Paul among the gentiles; yet later on at Antioch he reversed himself when confronted by ridiculing Judaizers, temporarily withdrawing from the gentiles only to bring down upon his head the fearless denunciation of Paul. 베드로는, 빌립의 사마리아인들 과업과 바울의 이방인들 과업에 대하여, 예수님의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앞장서서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안디옥에서, 조롱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 잠시 이방인으로부터 물러나, 바울의 두려움이 없는 비난에 고개를 떨 꿀 뿐이었습니다.

139:2.8 (1551.4) He was the first one of the apostles to make wholehearted confession of Jesus’ combined humanity and divinity and the first — save Judas — to deny him. Peter was not so much of a dreamer, but he disliked to descend from the clouds of ecstasy and the enthusiasm of dramatic indulgence to the plain and matter-of-fact world of reality. 그는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통합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전심으로 고백했고, 유다를 제외하고 예수를 부인한 첫 번째 사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심한 몽상가는 아니었지만, 환희의 구름과 극적 탐닉의 열광에서, 실체의 평범한 사실 그대로의 세계로 내려오기를 싫어했습니다.

171224 시몬 베드로 2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Truly, truly, I say to you, when you were younger, you used to gird yourself and walk wherever you wished; but when you grow old, you will stretch out your hands and someone else will gird you, and bring you where you do not wish to go(NASV).”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39:2.9 (1551.5) In following Jesus, literally and figuratively, he was either leading the procession or else trailing behind — “following afar off.” But he was the outstanding preacher of the twelve; he did more than any other one man, aside from Paul, to establish the kingdom and send its messengers to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in one generation. 베드로의 진폭 예수님을 따르면서, 문자 그대로, 비유적으로, 그는 행렬을 이끌거나 아니면 뒤에 – “멀찍이 뒤에 떨어져서” –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12명 중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제외하고, 한 세대에, 나라를 세우고, 지구의 전 지역에 메신저들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보냈습니다.

139:2.10 (1551.6) After his rash denials of the Master he found himself, and with Andrew’s sympathetic and understanding guidance he again led the way back to the fish nets while the apostles tarried to find out what was to happen after the crucifixion. When he was fully assured that Jesus had forgiven him and knew he had been received back into the Master’s fold, the fires of the kingdom burned so brightly within his soul that he became a great and saving light to thousands who sat in darkness. 베드로의 반전 주(主)님을 경솔히 부인한 후, 그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안드레의 공감하며 분별 있는 안내와 함께, 사도들이 십자가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다리며 찾는 동안, 그는 다시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가는 길로 앞장섰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음을 충분히 확신하고, 자신이 주(主)님의 신도로 복귀하여 수용되었음을 알았을 때, 나라의 불빛이 그의 혼 안에서 아주 밝게 타올라서 어둠에 앉아 있던 수천 명에게 위대한 구원의 빛이 되었습니다.

139:2.11 (1551.7) After leaving Jerusalem and before Paul became the leading spirit among the gentile Christian churches, Peter traveled extensively, visiting all the churches from Babylon to Corinth. He even visited and ministered to many of the churches which had been raised up by Paul. Although Peter and Paul differed much in temperament and education, even in theology, they worked together harmoniously for the upbuilding of the churches during their later years. 형제정신 실천 예루살렘을 떠난 뒤, 바울이 이방의 기독교회들을 이끄는 인물이 되기 전에, 베드로는 바빌론에서 고린도까지 모든 교회들을 방문하며 널리 여행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들까지도 방문하고 섬겼습니다. 비록 베드로와 바울은, 기질과 교육, 그리고 신학도 많이 달랐지만, 그들은 후년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어울려 함께 일했습니다.

139:2.12 (1552.1) Something of Peter’s style and teaching is shown in the sermons partially recorded by Luke and in the Gospel of Mark. His vigorous style was better shown in his letter known as the First Epistle of Peter; at least this was true before it was subsequently altered by a disciple of Paul. 베드로의 스타일과 교훈의 일부는 누가가 부분적으로 기록한 설교와 마가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강력한 스타일은 베드로 전서로 알려진 그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는데, 나중에 바울의 제자가 (베드로전서)를 변경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사실이었습니다.

139:2.13 (1552.2) But Peter persisted in making the mistake of trying to convince the Jews that Jesus was, after all, really and truly the Jewish Messiah. Right up to the day of his death, Simon Peter continued to suffer confusion in his mind between the concepts of Jesus as the Jewish Messiah, Christ as the world’s redeemer, and the Son of Man as the revelation of God, the loving Father of all mankind. 베드로의 실수와 혼란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결국 실제로 진정한 유대인의 메시아였다고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잘못을 고집했습니다. 바로 죽는 그 날까지, 시몬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속(救贖)자는 개념과 사람의 아들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라는 개념 사이에서 계속 혼란을 겪었습니다.

139:2.14 (1552.3) Peter’s wife was a very able woman. For years she labored acceptably as a member of the women’s corps, and when Peter was driven out of Jerusalem, she accompanied him upon all his journeys to the churches as well as on all his missionary excursions. And the day her illustrious husband yielded up his life, she was thrown to the wild beasts in the arena at Rome. 베드로의 아내는 매우 유능한 여인이었습니다. 여러 해 그녀는 여인들 분대(여전도회)의 일원으로 기쁘게 수고했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자, 그녀는 그의 모든 선교여행 뿐 아니라 모든 교회로 가는 여행에 그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명한 자기 남편이 죽는 날, 그녀는 로마의 투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졌습니다.

139:2.15 (1552.4) And so this man Peter, an intimate of Jesus, one of the inner circle, went forth from Jerusalem proclaim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with power and glory until the fullness of his ministry had been accomplished; and he regarded himself as the recipient of high honors when his captors informed him that he must die as his Master had died — on the cross. And thus was Simon Peter crucified in Rome. 베드로와 사명 완수와 순교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내부자 중 하나였던, 이 사람 베드로는 그의 사역을 충만히 완수하기까지, 권능과 영광으로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를 체포한 자가, 베드로가 그의 주(主)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 죽어야만 한다고 알려주자, 자신을 높은 명예를 받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몬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3. James Zebedee 야고보 세베대

171231 야고보 세베대 1 눅9:52-54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54 When the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asked, “Lord, do you want us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m?”

139:3.1 (1552.5) James, the older of the two apostle sons of Zebedee, whom Jesus nicknamed “sons of thunder,”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came an apostle. He was married, had four children, and lived near his parents in the outskirts of Capernaum, Bethsaida. He was a fisherman, plying his calling in company with his younger brother John and in association with Andrew and Simon. James and his brother John enjoyed the advantage of having known Jesus long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야고보 세베대의 가정 배경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인 사도들을 “우뢰(雨雷)의 아들들”이라고 별명을 붙였는데 둘 중에 형 야고보는 사도가 되었을 때 30세였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4 자녀를 두었으며, 가버나움 근교 벳새다에 계신 부모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어부로서 동생 요한과 한 팀으로, 안드레와 시몬의 동업자가 되어 생업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다른 어떤 사도들 보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이점(利點)이 있었습니다.

139:3.2 (1552.6) This able apostle was a temperamental contradiction; he seemed really to possess two natures, both of which were actuated by strong feelings. He was particularly vehement when his indignation was once fully aroused. He had a fiery temper when once it was adequately provoked, and when the storm was over, he was always wont to justify and excuse his anger under the pretense that it was wholly a manifestation of righteous indignation. Except for these periodic upheavals of wrath, James’s personality was much like that of Andrew. He did not have Andrew’s discretion or insight into human nature, but he was a much better public speaker. Next to Peter, unless it was Matthew, James was the best public orator among the twelve. 야고보 세베대의 기질 이 유능한 사도는 기질적인 모순 덩어리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두 본성을 가진 듯했으며, 그 두 본성은 격한 감정으로 발동했습니다. 그는 일단 분개가 충분히 치밀어 오르면, 특별히 격렬했습니다. 그는 일단 성질이 충분히 자극되면, 불같은 기질을 드러냈으며, 폭풍이 끝나면, 그는 그것이 전적으로 의로운 분개의 표현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분노를 언제나 정당화하면서 변명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주기적인 분노의 격발을 제외하면, 야고보의 고유성은 안드레와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을 꿰뚫는 안드레의 분별력이나 통찰력은 없었지만, 안드레보다 훨씬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습니다. 베드로 다음으로, 마태가 없었다면, 야고보가 12명 중 가장 우수한 대중 웅변가였습니다.

139:3.3 (1552.7) Though James was in no sense moody, he could be quiet and taciturn one day and a very good talker and storyteller the next. He usually talked freely with Jesus, but among the twelve, for days at a time he was the silent man. His one great weakness was these spells of unaccountable silence. 야고보 세베대의 약점 야고보는 감각적으로 조금도 변덕스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조용하고 말이 없다가, 다음 날에는 뛰어난 좌담(座談)의 명수이며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개 예수님과 자유롭게 이야기했지만, 12명 중에서는 한 번에 며칠씩 침묵했습니다. 그의 한 가지 큰 약점설명할 수 없는 이 침묵들이 한 차례씩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139:3.4 (1552.8) The outstanding feature of James’s personality was his ability to see all sides of a proposition. Of all the twelve, he came the nearest to grasping the real import and significance of Jesus’ teaching. He, too, was slow at first to comprehend the Master’s meaning, but ere they had finished their training, he had acquired a superior concept of Jesus’ message. James was able to understand a wide range of human nature; he got along well with the versatile Andrew, the impetuous Peter, and his self-contained brother John. 야고보 세베대의 장점 야고보의 고유성 중 눈에 띄는 점은 문제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모든 12명 중에서, 그는 예수 가르침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가장 가깝게 파악했습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주(主)님의 의미를 더디게 이해했지만, 그들이 훈련을 마치기 전에, 그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지닌 보다 높은 개념을 알아들었습니다. 야고보는 광범위한 인간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재다능한 안드레와, 충동적인 베드로말이 없는 동생 요한과 아주 잘 지냈습니다.

139:3.5 (1553.1) Though James and John had their troubles trying to work together, it was inspiring to observe how well they got along. They did not succeed quite so well as Andrew and Peter, but they did much better than would ordinarily be expected of two brothers, especially such headstrong and determined brothers. But, strange as it may seem, these two sons of Zebedee were much more tolerant of each other than they were of strangers. They had great affection for one another; they had always been happy playmates. It was these “sons of thunder” who wanted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 Samaritans who presumed to show disrespect for their Master. But the untimely death of James greatly modified the vehement temperament of his younger brother John. 야고보 세베대의 형제 관계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일하려고 애쓰면서 고생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잘 지내는 지 지켜보면 감동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아주 잘 지내지는 못했어도, 특별히 그렇게 고집 세고 단호한 형제들은, 보통의 두 형제들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여도, 이 세베대의 두 아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보다는 훨씬 서로에게 더 관대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다정했고, 언제나 행복한 놀이 친구였습니다. 주(主)님께 무례를 범했다고 여겨진 사마리아인들을 죽이도록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리고 싶어 했던 자들이 이 “우뢰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때 이른 죽음으로 동생 요한의 격렬한 기질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171231-180101 야고보 세베대 2 행12:1-2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 It was about this time that King Herod arrested some who belonged to the church, intending to persecute them. 2 He had James, the brother of John, put to death with the sword.

139:3.6 (1553.2) That characteristic of Jesus which James most admired was the Master’s sympathetic affection. Jesus’ understanding interest in the small and the great, the rich and the poor, made a great appeal to him. 야고보가 가장 감탄한 예수님의 성품은 ()님의 공감적 애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작은 자와 위대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해하는 관심이 그에게 가장 큰 매력을 주었습니다.

139:3.7 (1553.3) James Zebedee was a well-balanced thinker and planner. Along with Andrew, he was one of the more level-headed of the apostolic group. He was a vigorous individual but was never in a hurry. He was an excellent balance wheel for Peter. 야고보 세베대는 잘 균형 잡힌 사색가이며 입안자였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함께 그룹에서 더 분별 있는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활기찬 개인이었지만 절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안정시키는 뛰어난 원동력이었습니다.

139:3.8 (1553.4) He was modest and undramatic, a daily server, an unpretentious worker, seeking no special reward when he once grasped something of the real meaning of the kingdom. And even in the story about the mother of James and John, who asked that her sons be granted places on the right hand and the left hand of Jesus,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it was the mother who made this request. And when they signified that they were ready to assume such responsibilities, it should be recognized that they were cognizant of the dangers accompanying the Master’s supposed revolt against the Roman power, and that they were also willing to pay the price. When Jesus asked if they were ready to drink the cup, they replied that they were. And as concerns James, it was literally true — he did drink the cup with the Master, seeing that he was the first of the apostles to experience martyrdom, being early put to death with the sword by Herod Agrippa. James was thus the first of the twelve to sacrifice his life upon the new battle line of the kingdom. Herod Agrippa feared James above all the other apostles. He was indeed often quiet and silent, but he was brave and determined when his convictions were aroused and challenged. 그는 점잖아서 요란스럽지 않았으며, 매일 충실히 섬기며, 허세부리지 않는 일꾼으로서, 일단 나라의 참 의미의 실제를 파악하자 더 이상 특별한 보상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 자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 요청을 한 사람은 그 어머니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었다고 나타냈을 때, 로마 권력에 대한 주(主)님의 반란을 추측하였고, 그에 따르는 위험을 그들은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값을 기꺼이 치르려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 잔을 마실 준비가 되었는지 물으셨을 때,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참말이었습니다. – 그는 일찍 헤롯 아그립바의 칼에 죽게 되어, 순교했던 첫 사도로서, 주(主)님과 함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나라의 새로운 전선(戰線)에서 열 둘 중 첫째로 생명을 바쳤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야고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가끔씩 조용히 침묵했지만, 그의 확신을 자극하고 도전하면, 용감하였고 결심이 굳건했습니다.

139:3.9 (1553.5) James lived his life to the full, and when the end came, he bore himself with such grace and fortitude that even his accuser and informer, who attended his trial and execution, was so touched that he rushed away from the scene of James’s death to join himself to the disciples of Jesus. 야고보는 그의 일생을 충만히 살았으며, 종말이 오자, 그는 그토록 은혜롭게 불굴의 용기로 견디어서, 재판과 집행에 참석했던 고소인과 밀고자까지 감명을 받아, 야고보의 처형장에서 뛰쳐나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합류하였습니다.

4. John Zebedee 요한 세베대

180107 요한 세베대 1 요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7 Then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As soon as Simon Peter heard him say, “It is the Lord,” he wrapped his outer garment around him (for he had taken it off) and jumped into the water. 20 Peter turned and saw that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was following them. (This was the one who had leaned back against Jesus at the supper and had said, “Lord, who is going to betray you?”)

139:4.1 (1553.6) When he became an apostle, John was twenty-four years old and was the youngest of the twelve. He was unmarried and lived with his parents at Bethsaida; he was a fisherman and worked with his brother James in partnership with Andrew and Peter. Both before and after becoming an apostle, John functioned as the personal agent of Jesus in dealing with the Master’s family, and he continued to bear this responsibility as long as Mary the mother of Jesus lived. 가정배경 사도가 되었을 때, 요한은 24세였고, 12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는 미혼(未婚)으로 벳새다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어부였고, 형 야고보와 함께 안드레 및 베드로와 동업했습니다. 사도가 되기 전후에, 요한은 주(主)님의 가족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개인적 대리인 역할을 하였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139:4.2 (1553.7) Since John was the youngest of the twelve and so closely associated with Jesus in his family affairs, he was very dear to the Master, but it cannot be truthfully said that he w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You would hardly suspect such a magnanimous personality as Jesus to be guilty of showing favoritism, of loving one of his apostles more than the others. The fact that John was one of the three personal aides of Jesus lent further color to this mistaken idea, not to mention that John, along with his brother James, had known Jesus longer than the others. “예수께서 사랑한 그 제자로 불린 이유 요한은 12 중 가장 어렸고, 가족 업무로 예수님과 친밀히 관련되어, 주(主)님께 매우 소중했지만, “예수께서 사랑한 그 제자라고 정말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관대한 고유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사도들 중 하나를 더 사랑하는 편애를 보이는 죄가 있다고 너희는 거의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요한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알아온 것에다가, 그가 예수님의 개인적 3 비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이 잘못된 생각을 더 그럴 듯하게 만들었습니다.

139:4.3 (1554.1) Peter, James, and John were assigned as personal aides to Jesus soon after they became apostles. Shortly after the selection of the twelve and at the time Jesus appointed Andrew to act as director of the group, he said to him: “And now I desire that you assign two or three of your associates to be with me and to remain by my side, to comfort me and to minister to my daily needs.” And Andrew thought best to select for this special duty the next three first-chosen apostles. He would have liked to volunteer for such a blessed service himself, but the Master had already given him his commission; so he immediately directed that Peter, James, and John attach themselves to Jesus. 축복받은 특별한 임무와 봉사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사도가 된 직후 예수님의 개인 비서들로 배치되었습니다. 12명이 선택된 직후, 예수께서 안드레를 그 무리의 관리자로 임명하셨을 때, 그는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너의 동료 중 두 세 사람을 임명하여 나와 함께 내 곁에 남아서 나를 도와 내 일상의 필요들을 보살피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안드레는 이 특별 임무에, (자기) 다음으로 선택된 3명의 첫 사도들을 뽑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축복받은 봉사에 자신이 자원하고 싶었지만, 주(主)님은 그에게 이미 임무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즉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도록 지시했습니다.

139:4.4 (1554.2) John Zebedee had many lovely traits of character, but one which was not so lovely was his inordinate but usually well-concealed conceit. His long association with Jesus made many and great changes in his character. This conceit was greatly lessened, but after growing old and becoming more or less childish, this self-esteem reappeared to a certain extent, so that, when engaged in directing Nathan in the writing of the Gospel which now bears his name, the aged apostle did not hesitate repeatedly to refer to himself 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In view of the fact that John came nearer to being the chum of Jesus than any other earth mortal, that he was his chosen personal representative in so many matters, it is not strange that he should have come to regard himself 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ince he most certainly knew he was the disciple whom Jesus so frequently trusted. 요한 세베대의 특성 요한 세베대는 성품 중 사랑스러운 특성이 많았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않았던 한 가지는 과도하지만 잘 감춰진 자만(自慢 자기 과대 평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교제로 그의 성품은 많은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이 자만이 크게 줄었지만, 나이 들어 다소 유치해진 후, 이 자존심(自尊心)이 어느 정도 다시 나타나, 그가 이제 자기 이름을 담은 복음을 기록하도록 나단을 지시하면서, 노년의 사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로 거듭 언급했습니다. 요한이 세상의 다른 어떤 필사자보다 더 가까운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그토록 많은 경우에 예수께서 선택한 개인적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가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로 여기게 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예수께서 그렇게 자주 신뢰하셨던 제자였음을 가장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9:4.5 (1554.3) The strongest trait in John’s character was his dependability; he was prompt and courageous, faithful and devoted. His greatest weakness was this characteristic conceit. He was the youngest member of his father’s family and the youngest of the apostolic group. Perhaps he was just a bit spoiled; maybe he had been humored slightly too much. But the John of after years was a very different type of person than the self-admiring and arbitrary young man who joined the ranks of Jesus’ apostles when he was twenty-four. 성품의 변화 요한의 성품 중 가장 강한 특성은 그의 신뢰성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하고 용감하며, 성실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약점은 이 특징적 자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 중 막내였고 사도 그룹에서도 가장 어렸습니다. 그는 버릇이 좀 없었을지 모르는데 아마 약간 과도하게 어르면서 자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년 후 요한은, 24세에 예수님의 사도 등급에 참여했던 자화자찬하며 제멋대로 행하던 젊은이와는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39:4.6 (1554.4) Those characteristics of Jesus which John most appreciated were the Master’s love and unselfishness; these traits made such an impression on him that his whole subsequent life became dominated by the sentiment of love and brotherly devotion. He talked about love and wrote about love. This “son of thunder” became the “apostle of love”; and at Ephesus, when the aged bishop was no longer able to stand in the pulpit and preach but had to be carried to church in a chair, and when at the close of the service he was asked to say a few words to the believers, for years his only utterance was, “My little children, love one another.” 요한이 가장 높이 평가한 예수님의 특징들은, ()님의 사랑과 이기심 없는 태도였습니다. 이 특성들에 무척 감명을 받아 그 후 그의 전 생애는 사랑의 정서와 형제의 헌신으로 지배되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논하며 사랑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 “우뢰의 아들”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연로한 감독이 더 이상 설교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어서 의자에 앉은 채로 교회로 옮겨져야만 했는데, 예배가 끝나 신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하시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여러 해 동안 그는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180114 요한 세베대 2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139:4.7 (1554.5) John was a man of few words except when his temper was aroused. He thought much but said little. As he grew older, his temper became more subdued, better controlled, but he never overcame his disinclination to talk; he never fully mastered this reticence. But he was gifted with a remarkable and creative imagination. 극복하지 못한 침묵 요한은 성질이 격해진 때를 제외하면 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이 생각했지만 말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질이 많이 순해졌고, 더 조절되었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경향은 결코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과묵함을 결코 충분히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고 창조적인 상상력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139:4.8 (1555.1) There was another side to John that one would not expect to find in this quiet and introspective type. He was somewhat bigoted and inordinately intolerant. In this respect he and James were much alike — they both wanted to call down fire from heaven on the heads of the disrespectful Samaritans. When John encountered some strangers teaching in Jesus’ name, he promptly forbade them. But he was not the only one of the twelve who was tainted with this kind of self-esteem and superiority consciousness. 요한의 자존심과 우월 의식 요한에게는 이 조용하고 내성적 유형에서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소 고집이 세고 지나치게 편협했습니다. 이 면에서 그와 야고보는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무례한 사마리아인들의 머리 위에, 내리고 싶어 했습니다. 요한은, 어떤 낯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자, 즉시 그들을 제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12 명 중에서, 이 종류의 자존심과 우월 의식에 오염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39:4.9 (1555.2) John’s life was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sight of Jesus’ going about without a home as he knew how faithfully he had made provision for the care of his mother and family. John also deeply sympathized with Jesus because of his family’s failure to understand him, being aware that they were gradually withdrawing from him. This entire situation, together with Jesus’ ever deferring his slightest wish t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and his daily life of implicit trust, made such a profound impression on John that it produced marked and permanent changes in his character, changes which manifested themselves throughout his entire subsequent life. 예수께 영향 받은 변화 요한의 일생은, 예수께서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대비하셨는지 알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집 없이 지내는 모습에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과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깊이 공감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는 가장 사소한 소원도 미루지 않고 매일 무조건 신뢰하는 생활과 더불어, 이 모든 상황이 요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성품에 뚜렷한 영속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변화들은 후에 그의 전 일생에 걸쳐 드러났습니다.

139:4.10 (1555.3) John had a cool and daring courage which few of the other apostles possessed. He was the one apostle who followed right along with Jesus the night of his arrest and dared to accompany his Master into the very jaws of death. He was present and near at hand right up to the last earthly hour and was found faithfully carrying out his trust with regard to Jesus’ mother and ready to receive such additional instructions as might be given during the last moments of the Master’s mortal existence. One thing is certain, John was thoroughly dependable. John usually sat on Jesus’ right hand when the twelve were at meat. He was the first of the twelve really and fully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nd he was the first to recognize the Master when he came to them on the seashore after his resurrection. 요한의 침착한 용기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거의 갖지 못한, 침착하며 대담한 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되던 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갔고, 바로 죽음의 자리까지 대담하게 주(主)님과 동행했던 유일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함께 했으며, 세상에서 바로 마지막 시간까지도 가까이 있었으며, 예수님의 어머니에 관해 그의 신뢰를 성실히 수행했고, 주(主)님의 필사자 실존으로서 마지막 순간에도 추가 지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한데, 요한은 철저히 믿을 만했습니다. 12 사도들이 식사를 할 때, 요한은 대개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았습니다. 그는 12 중 첫째로 정말 충분히 부활을 믿었고, 부활 후 해변에서 그들에게 오셨을 때, 처음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139:4.11 (1555.4) This son of Zebedee was very closely associated with Peter in the early activities of the Christian movement, becoming one of the chief supporters of the Jerusalem church. He was the right-hand support of Peter on the day of Pentecost. 기독 운동의 초기 활동의 지지자 이 세베대의 아들은 기독 운동의 초기 활동에서 베드로와 아주 밀접히 관련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지지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순절 날 베드로의 오른팔로 지지했습니다.

139:4.12 (1555.5) Several years after the martyrdom of James, John married his brother’s widow. The last twenty years of his life he was cared for by a loving granddaughter. 요한의 말년 야고보의 순교 몇 년 후, 요한은 형의 과부와 결혼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 20년은 사랑스러운 손녀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139:4.13 (1555.6) John was in prison several times and was banished to the Isle of Patmos for a period of four years until another emperor came to power in Rome. Had not John been tactful and sagacious, he would undoubtedly have been killed as was his more outspoken brother James. As the years passed, John, together with James the Lord’s brother, learned to practice wise conciliation when they appeared before the civil magistrates. They found that a “soft answer turns away wrath.” They also learned to represent the church as a “spiritual brotherhood devoted to the social service of mankind” rather than as “the kingdom of heaven.” They taught loving service rather than ruling power — kingdom and king. “인류의 사회적 봉사에 헌신하는 영적 형제 신분”으로서의 교회 요한은 여러 번 투옥되었고, 다른 황제가 로마에서 권력을 잡기까지 4년 동안 팟모섬에 추방되었습니다. 요한이 눈치와 총명이 없었다면, 거침없었던 형 야고보처럼 그는 확실히 죽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주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국가의 재판관들 앞에 나타났을 때, 요한은 지혜롭게 화해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잠15:1).”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가 “하늘나라”라기보다는 “인류의 사회적 봉사에 헌신하는 영적 형제 신분”의 표현임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지배하는 권능 – 왕국과 왕 -보다 사랑하는 봉사를 가르쳤습니다.

139:4.14 (1555.7) When in temporary exile on Patmos, John wrote the Book of Revelation, which you now have in greatly abridged and distorted form. This Book of Revelation contains the surviving fragments of a great revelation, large portions of which were lost, other portions of which were removed, subsequent to John’s writing. It is preserved in only fragmentary and adulterated form. 요한계시록 팟모섬에 잠시 유배되었을 때, 요한은 계시록을 썼는데,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계시록은 크게 단축되고 왜곡된 형태이다. 이 계시록은 큰 계시 중 남은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요한이 기록한 이후에, 커다란 부분들은 소실되었고, 다른 부분들은 제거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단편적이고 불순물이 섞여 오염된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139:4.15 (1555.8) John traveled much, labored incessantly, and after becoming bishop of the Asia churches, settled down at Ephesus. He directed his associate, Nathan, in the writing of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John,” at Ephesus, when he was ninety-nine years old. Of all the twelve apostles, John Zebedee eventually became the outstanding theologian. He died a natural death at Ephesus in A.D. 103 when he was one hundred and one years of age. 요한은 많이 여행하고, 쉼 없이 수고했으며, 아시아 교회들의 감독이 된 후 에베소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99세에 에베소에서 자기 동료 나단에게 소위 요한에 의한 복음을 쓰도록 지시했습니다. 12 사도 중에서 요한 세베대는 결국 탁월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AD 103년 에베소에서 101세의 나이로 자연사했습니다.

5. Philip the Curious 호기심 많은 빌립

180121 호기심 많은 빌립 1 요1:43-44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3 The next day Jesus decided to leave for Galilee. Finding Philip, he said to him, “Follow me.” 44 Philip, like Andrew and Peter, was from the town of Bethsaida.

139:5.1 (1556.1) Philip was the fifth apostle to be chosen, being called when Jesus and his first four apostles were on their way from John’s rendezvous on the Jordan to Cana of Galilee. Since he lived at Bethsaida, Philip had for some time known of Jesus, but it had not occurred to him that Jesus was a really great man until that day in the Jordan valley when he said, “Follow me.” Philip was also somewhat influenced by the fact that Andrew, Peter, James, and John had accepted Jesus as the Deliverer. 빌립은 다섯 번째 사도로 선택되었는데, 그는 예수님과 첫 네 사도들이 요단에서 요한을 만나고 갈릴리의 가나로 가는 도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벳새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빌립은 한동안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요단 계곡에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또한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구원(해방)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139:5.2 (1556.2) Philip was twenty-seven years of age when he joined the apostles; he had recently been married, but he had no children at this time. The nickname which the apostles gave him signified “curiosity.” Philip was always wanting to be shown. He never seemed to see very far into any proposition. He was not necessarily dull, but he lacked imagination. This lack of imagination was the great weakness of his character. He was a commonplace and matter-of-fact individual. 빌립이 27세에 사도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최근에 결혼했으며, 이 때 아이는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준 별명은 “호기심”을 의미했습니다. 빌립은 언제나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어떤 제안도 결코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꼭 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상력은 모자랐습니다. 이 상상력 결핍이 성품 중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하고 사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39:5.3 (1556.3) When the apostles were organized for service, Philip was made steward; it was his duty to see that they were at all times supplied with provisions. And he was a good steward. His strongest characteristic was his methodical thoroughness; he was both mathematical and systematic. 사도들이 봉사하려고 편성할 때, 빌립은 사무장(事務長)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양식이 항상 공급되도록 살피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사무장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강한 특성은 질서정연한 철저함이었는데, 그는 엄밀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139:5.4 (1556.4) Philip came from a family of seven, three boys and four girls. He was next to the oldest, and after the resurrection he baptized his entire family into the kingdom. Philip’s people were fisherfolk. His father was a very able man, a deep thinker, but his mother was of a very mediocre family. Philip was not a man who could be expected to do big things, but he was a man who could do little things in a big way, do them well and acceptably. Only a few times in four years did he fail to have food on hand to satisfy the needs of all. Even the many emergency demands attendant upon the life they lived seldom found him unprepared. The commissary department of the apostolic family was intelligently and efficiently managed. 빌립은 3소년과 4소녀 즉 일곱 (자녀)가 있는 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둘째였는데, 부활 후, 온 가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세례를 주었습니다. 빌립의 친척들은 어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 깊은 사색가였으나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가족 출신이었습니다. 빌립은 큰일을 감당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사소한 일들을 큰 방식으로, 마음에 들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년 동안 모두의 필요를 채울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몇 번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냈던 생활에 수반된 여러 비상시(非常時)의 요구에도, 그가 준비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도 가족의 식량부서는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관리되었습니다.

139:5.5 (1556.5) The strong point about Philip was his methodical reliability; the weak point in his make-up was his utter lack of imagination, the absence of the ability to put two and two together to obtain four. He was mathematical in the abstract but not constructive in his imagination. He was almost entirely lacking in certain types of imagination. He was the typical everyday and commonplace average man. There were a great many such men and women among the multitudes who came to hear Jesus teach and preach, and they derived great comfort from observing one like themselves elevated to an honored position in the councils of the Master; they derived courage from the fact that one like themselves had already found a high place in the affairs of the kingdom. And Jesus learned much about the way some human minds function as he so patiently listened to Philip’s foolish questions and so many times complied with his steward’s request to “be shown.” 빌립의 강점은 그의 질서정연한 확실성이었고, 기질적 약점은 전적으로 상상력이 부족해서, 둘에 둘을 더해 넷을 얻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이론적)으로 엄밀했지만, 건설적 상상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유형의 상상력은 거의 전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는 일상의 평범한 전형적인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자 왔던 군중들 가운데 그런 남녀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주()님의 의회(사도들)에서 명예로운 지위로 높여진 것을 보고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 업무에서 벌써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들을 참을성 있게 듣고, “보여 달라”는 자기 사무장의 요구에 그토록 여러 번 응하시면서, 어떤 인간들의 마음이 기능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배우셨습니다.

139:5.6 (1556.6) The one quality about Jesus which Philip so continuously admired was the Master’s unfailing generosity. Never could Philip find anything in Jesus which was small, niggardly, or stingy, and he worshiped this ever-present and unfailing liberality. 빌립이 계속 경탄했던 예수님에 관한 한 가지의 특질은 주(主)님의 끊임없는 관대함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에게서 도량이 좁고, 쩨쩨하고, 인색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고, 그는 항상 나타나는 이 끊임없는 너그러움을 존경하였습니다.

180128 호기심 많은 빌립 2 행8:5-6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5 Philip went down to a city in Samaria and proclaimed the Christthere. 6 When the crowds heard Philip and saw the miraculous signs he did, they all paid close attention to what he said.

139:5.7 (1557.1) There was little about Philip’s personality that was impressive. He was often spoken of as “Philip of Bethsaida, the town where Andrew and Peter live.” He was almost without discerning vision; he was unable to grasp the dramatic possibilities of a given situation. He was not pessimistic; he was simply prosaic. He was also greatly lacking in spiritual insight. He would not hesitate to interrupt Jesus in the midst of one of the Master’s most profound discourses to ask an apparently foolish question. But Jesus never reprimanded him for such thoughtlessness; he was patient with him and considerate of his inability to grasp the deeper meanings of the teaching. Jesus well knew that, if he once rebuked Philip for asking these annoying questions, he would not only wound this honest soul, but such a reprimand would so hurt Philip that he would never again feel free to ask questions. Jesus knew that on his worlds of space there were untold billions of similar slow-thinking mortals, and he wanted to encourage them all to look to him and always to feel free to come to him with their questions and problems. After all, Jesus was really more interested in Philip’s foolish questions than in the sermon he might be preaching. Jesus was supremely interested in men, all kinds of men. 빌립의 고유성에는 인상적인 점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베드로가 사는 성읍 벳새다의 빌립”으로 흔히 불렸습니다. 그는 분별하는 선견(先見)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극적인 가능성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비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평범했습니다. 그는 또한 영적 통찰력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는 주(主)님의 가장 심오한 강론들 중 한 강론의 중간에 망설이지 않고 명백히 어리석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가로막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경솔함에 대해 결코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으로 빌립을 대하셨으며, 가르침의 더 깊은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일단 이러한 성가신 질문들 때문에 빌립을 책망한다면, 이 정직한 혼이 상할 뿐만이 아니라, 그 견책이 빌립의 마음을 다치게 하여, 그가 다시는 자유롭게 질문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간 세계들에 비슷하게 생각이 더딘 필사자(必死者)들이 셀 수 없이 무수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들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항상 질문들과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에게 편하게 오도록 격려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전하시는 설교보다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에 실제로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최상의 관심을 두셨습니다.

139:5.8 (1557.2) The apostolic steward was not a good public speaker, but he was a very persuasive and successful personal worker. He was not easily discouraged; he was a plodder and very tenacious in anything he undertook. He had that great and rare gift of saying, “Come.” When his first convert, Nathaniel, wanted to argue about the merits and demerits of Jesus and Nazareth, Philip’s effective reply was, “Come and see.” He was not a dogmatic preacher who exhorted his hearers to “Go” — do this and do that. He met all situations as they arose in his work with “Come” — “come with me; I will show you the way.” And that is always the effective technique in all forms and phases of teaching. Even parents may learn from Philip the better way of saying to their children not “Go do this and go do that,” but rather, “Come with us while we show and share with you the better way.” 사도 사무장은 훌륭한 대중 연설가는 아니었지만, 매우 설득력 있고 성공적인 개인적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것을 맡아도 매우 끈기 있게 했습니다. 그는 오라고 말하는 훌륭하고 보기 드문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첫째로 개종시킨 나다니엘이 예수님과 나사렛의 장단점에 대해 따지려 하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효과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청중들에게 “가서”-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행하라-고 훈계하는 고압적인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하다가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와서”- “나를 따라 오라; 내가 그 길을 당신들에게 보여주리라.”고 대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형태와 단계의 가르침에서 항상 효과적인 기법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가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너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고 나눌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가자.”고 말하는 더 좋은 방법을 빌립에게 배워도 좋습니다.

139:5.9 (1557.3) The inability of Philip to adapt himself to a new situation was well shown when the Greeks came to him at Jerusalem, saying: “Sir, we desire to see Jesus.” Now Philip would have said to any Jew asking such a question, “Come.” But these men were foreigners, and Philip could remember no instructions from his superiors regarding such matters; so the only thing he could think to do was to consult the chief, Andrew, and then they both escorted the inquiring Greeks to Jesus. Likewise, when he went into Samaria preaching and baptizing believers, as he had been instructed by his Master, he refrained from laying hands on his converts in token of their having received the Spirit of Truth. This was done by Peter and John, who presently came down from Jerusalem to observe his work in behalf of the mother church.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빌립의 무능력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인들이 그에게 와서: “선생님, 우리는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잘 나타났습니다. 그 때 빌립은, 어떤 유대인이 그런 질문을 했다면 “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외국인들이었고, 빌립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윗사람들로부터 지시 받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지도자 안드레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고, 그 후 두 사도는 답변을 기대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데려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님의 지시대로, 신자(信者)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주면서 사마리아로 들어갔을 때, 그는 그들이 진리의 영을 받았다는 표시로 개종자들 위에 손 얹기를 삼갔습니다. 이것은 모(母)교회를 대신하여 그의 일을 살피려고 예루살렘에서 즉시 내려온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실행되었습니다.

139:5.10 (1557.4) Philip went on through the trying times of the Master’s death, participated in the reorganization of the twelve, and was the first to go forth to win souls for the kingdom outside of the immediate Jewish ranks, being most successful in his work for the Samaritans and in all his subsequent labors in behalf of the gospel. 빌립은 주(主)께서 죽으시는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계속 겪었는데, 12사도의 재조직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사람)들을 얻으려고 직계 유대인 계층 밖으로 제일 먼저 나아갔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그의 일과 복음을 위한 훗날의 모든 수고에서 가장 성공했습니다.

139:5.11 (1557.5) Philip’s wife, who was an efficient member of the women’s corps, became actively associated with her husband in his evangelistic work after their flight from the Jerusalem persecutions. His wife was a fearless woman. She stood at the foot of Philip’s cross encouraging him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even to his murderers, and when his strength failed, she began the recital of the story of salvation by faith in Jesus and was silenced only when the irate Jews rushed upon her and stoned her to death. Their eldest daughter, Leah, continued their work, later on becoming the renowned prophetess of Hierapolis. 빌립의 아내는 여성 대원들 중에서 유능한 회원으로, 예루살렘 박해를 피한 후 남편의 전도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빌립의 십자가 밑에 서서 그가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까지도 기쁜 소식을 전파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그의 힘이 다하자, 그녀는 예수를 신앙하여 구원받는 이야기를 낭송하기 시작했고, 성난 유대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돌로 그녀를 죽였을 때, 비로소 잠잠하였습니다. 맏딸 레아는 그들의 일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히에라폴리스의 저명한 여()선지자가 되었습니다.

139:5.12 (1558.1) Philip, the onetime steward of the twelve, was a mighty man in the kingdom, winning souls wherever he went; and he was finally crucified for his faith and buried at Hierapolis. 한 때 12사도의 사무장 빌립은 (하나님) 나라에서 막강한 사람으로 가는 곳마다 혼들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신앙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히에라폴리스에 묻혔습니다.

6. Honest Nathaniel 정직한 나다니엘

180204 정직한 나다니엘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th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139:6.1 (1558.2) Nathaniel, the sixth and last of the apostles to be chosen by the Master himself, was brought to Jesus by his friend Philip. He had been associated in several business enterprises with Philip and, with him, was on the way down to see John the Baptist when they encountered Jesus. 나다니엘은 주(主)님께서 6번째로 직접 선택한 사도로서, 친구 빌립이 그를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그는 여러 사업 기획으로 빌립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와 함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내려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39:6.2 (1558.3) When Nathaniel joined the apostles, he was twenty-five years old and was the next to the youngest of the group. He was the youngest of a family of seven, was unmarried, and the only support of aged and infirm parents, with whom he lived at Cana; his brothers and sister were either married or deceased, and none lived there. Nathaniel and Judas Iscariot were the two best educated men among the twelve. Nathaniel had thought to become a merchant. 나다니엘이 사도로 참여했을 때, 그는 25세로 그룹에서 두 번째로 젊었습니다. 그는 일곱 명 가족 중 막내로 미혼(未婚)이었으며, 가나에서 함께 사는 연세 들고 허약한 부모의 유일한 부양자였습니다. 그의 형들과 누나들은 결혼을 했거나 죽어서 거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나다니엘과 유다 가룟은 12명 중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니엘은 상인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39:6.3 (1558.4) Jesus did not himself give Nathaniel a nickname, but the twelve soon began to speak of him in terms that signified honesty, sincerity. He was “without guile.” And this was his great virtue; he was both honest and sincere. The weakness of his character was his pride; he was very proud of his family, his city, his reputation, and his nation, all of which is commendable if it is not carried too far. But Nathaniel was inclined to go to extremes with his personal prejudices. He was disposed to prejudge individuals in accordance with his personal opinions. He was not slow to ask the question, even before he had met Jesus, “Can any good thing come out of Nazareth?” But Nathaniel was not obstinate, even if he was proud. He was quick to reverse himself when he once looked into Jesus’ face. 예수께서 직접 나다니엘에게 별명을 주지 않으셨지만, 12 사도들은 곧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의미의 용어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간사(奸詐)가 없는” 사람으로 이것이 그의 큰 장점이었는데, 그는 정직하면서 성실했습니다. 그의 성품 중에서 단점은 (강한) 자부심이었는데; 그는 자기 가족, 도시, 명성, 민족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그 모두는 도가 지나치지 않는다면, 칭찬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개인적인 편견에서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개인적 견해로 개인들을 미리 판단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기도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서슴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자부심이 강했지만, 완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일단 예수님의 얼굴을 보자, 얼른 자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139:6.4 (1558.5) In many respects Nathaniel was the odd genius of the twelve. He was the apostolic philosopher and dreamer, but he was a very practical sort of dreamer. He alternated between seasons of profound philosophy and periods of rare and droll humor; when in the proper mood, he was probably the best storyteller among the twelve. Jesus greatly enjoyed hearing Nathaniel discourse on things both serious and frivolous. Nathaniel progressively took Jesus and the kingdom more seriously, but never did he take himself seriously. 여러 면에서 나다니엘은 12 중에서 이상야릇한 천재였습니다. 그는 사도 철학자이며 몽상가였지만, 매우 실천적인 몽상가였습니다. 그는 한 동안 심오한 철학에 빠져 있다가 얼마 동안 희한하게 익살스런 분위기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적절한 분위기에서 그는 12 중 어쩌면 최고의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지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에 대한 나다니엘의 담론 듣기를 아주 즐기셨습니다. 나다니엘은 점진적으로, 예수님과 그 나라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자신을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139:6.5 (1558.6) The apostles all loved and respected Nathaniel, and he got along with them splendidly, excepting Judas Iscariot. Judas did not think Nathaniel took his apostleship sufficiently seriously and once had the temerity to go secretly to Jesus and lodge complaint against him. Said Jesus: “Judas, watch carefully your steps; do not overmagnify your office. Who of us is competent to judge his brother? It is not the Father’s will that his children should partake only of the serious things of life. Let me repeat: I have come that my brethren in the flesh may have joy, gladness, and life more abundantly. Go then, Judas, and do well that which has been intrusted to you but leave Nathaniel, your brother, to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And the memory of this, with that of many similar experiences, long lived in the self-deceiving heart of Judas Iscariot. 사도들 모두 나다니엘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그는 유다 가룟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습니다. 유다는 나다니엘이 사도직을 충분히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 무모히 예수님께 몰래 가서 그에 대해 불평을 제기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신중히 행동하라. 너의 직무를 너무 넘어서지 말라. 우리 중 누가 자기 형제를 판단할 자격이 있겠느냐? 자녀들이 삶에서 진지한 것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는데, 나는 육신으로 내 형제들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일생이 더 풍성하도록 왔노라. 유다야, 그러니 가서 너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고, 네 형제 나다니엘이 하나님께 스스로 설명하도록 놔두라.” 그리고 이 기억은 비슷한 여러 경험들과 함께, 자기를 기만하는 유다 가룟의 심정에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139:6.6 (1559.1) Many times, when Jesus was away on the mountain with Peter, James, and John, and things were becoming tense and tangled among the apostles, when even Andrew was in doubt about what to say to his disconsolate brethren, Nathaniel would relieve the tension by a bit of philosophy or a flash of humor; good humor, too.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산으로 멀리 떠나계실 때, 사도들 사이에서 일들이 긴박히 엉켰을 때, 그리고 안드레까지 우울한 형제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할 때, 여러 번, 나다니엘이 약간의 철학이나 혹은 번쩍이는 유머로, 그것도 기분 좋게, 긴장을 풀어주곤 했습니다.

139:6.7 (1559.2) Nathaniel’s duty was to look after the families of the twelve. He was often absent from the apostolic councils, for when he heard that sickness or anything out of the ordinary had happened to one of his charges, he lost no time in getting to that home. The twelve rested securely in the knowledge that their families’ welfare was safe in the hands of Nathaniel. 나다니엘의 임무는 12사도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주 사도 회의에 결석했는데, 그가 맡고 있는 가족들 중에서 병이나 어떤 일이 생겼다고 들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 집을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12사도들은 가족의 복지가 나다니엘의 손에 안전하게 맡겨져 있음을 알고 안심하며 지냈습니다.

139:6.8 (1559.3) Nathaniel most revered Jesus for his tolerance. He never grew weary of contemplating the broadmindedness and generous sympathy of the Son of Man. 나다니엘은 예수님의 포용력 때문에 그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의 관대한 마음과 너그러운 공감을 묵상하면서 결코 싫증나지 않았습니다.

139:6.9 (1559.4) Nathaniel’s father (Bartholomew) died shortly after Pentecost, after which this apostle went into Mesopotamia and India proclaim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His brethren never knew what became of their onetime philosopher, poet, and humorist. But he also was a great man in the kingdom and did much to spread his Master’s teachings, even though he did not participate in the organization of the subsequent Christian church. Nathaniel died in India. 나다니엘의 아버지(바돌로메)가 오순절 직후에 별세한 후, 이 사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로 가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한 때 그들의 철학자요 시인이며 익살꾼(해학가諧謔家)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나중에 기독교회의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주(主)님의 가르침을 멀리 펼치며 많이 일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인도에서 별세했습니다.

7. Matthew Levi 마태 레위

180211 마태 레위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139:7.1 (1559.5) Matthew, the seventh apostle, was chosen by Andrew. Matthew belonged to a family of tax gatherers, or publicans, but was himself a customs collector in Capernaum, where he lived. He was thirty-one years old and married and had four children. He was a man of moderate wealth, the only one of any means belonging to the apostolic corps. He was a good business man, a good social mixer, and was gifted with the ability to make friends and to get along smoothly with a great variety of people. 마태는 일곱 번째 사도로 안드레가 선택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걷는 세리(稅吏) 가족에 속했지만, 자신은 그가 살던 가버나움에서 관세 징수원이었습니다. 그는 31세였고 결혼하여 4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부유한 사람으로, 사도단에 속한 자로서 유일한 자산가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업가였고, 사교술이 좋았으며, 친구를 만들고 아주 다양한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139:7.2 (1559.6) Andrew appointed Matthew the financial representative of the apostles. In a way he was the fiscal agent and publicity spokesman for the apostolic organization. He was a keen judge of human nature and a very efficient propagandist. His is a personality difficult to visualize, but he was a very earnest disciple and an increasing believer in the mission of Jesus and in the certainty of the kingdom. Jesus never gave Levi a nickname, but his fellow apostles commonly referred to him as the “money-getter.” 안드레는 마태를 사도들의 재정 대표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사도 조직을 위한 회계 대리인이었고 홍보(弘報)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예리하게 감정(鑑定)했으며 매우 효과적인 선전원이었습니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고유성을 지녔지만, 매우 열성적인 제자였고, 예수님의 사명과 (하나님) 나라의 확실성을 갈수록 깊이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별명을 주지 않았지만, 동료 사도들은 흔히 그를 “돈 잘 버는 자”로 불렀습니다.

139:7.3 (1559.7) Levi’s strong point was his wholehearted devotion to the cause. That he, a publican, had been taken in by Jesus and his apostles was the cause for overwhelming gratitude on the part of the former revenue collector. However, it required some little time for the rest of the apostles, especially Simon Zelotes and Judas Iscariot, to become reconciled to the publican’s presence in their midst. Matthew’s weakness was his shortsighted and materialistic viewpoint of life. But in all these matters he made great progress as the months went by. He, of course, had to be absent from many of the most precious seasons of instruction as it was his duty to keep the treasury replenished. 레위의 강점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전심(全心)으로 헌신한 점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리인 그를 받아주신 일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편에서 넘치도록 감사할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도들, 특히 시몬 젤로떼와 유다 가룟이 그들 중에 세리가 있음을 인정하기에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태의 약점은 인생을 근시적이며 물질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서 여러 달이 지나자 그는 크게 나아졌습니다. 물론 그는, 금고를 채우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에, 가장 귀중한 학습 시간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139:7.4 (1559.8) It was the Master’s forgiving disposition which Matthew most appreciated. He would never cease to recount that faith only was necessary in the business of finding God. He always liked to speak of the kingdom as “this business of finding God.” 마태가 가장 감사히 여긴 것은 주(主)님의 용서하는 성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서 신앙만이 필수적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 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139:7.5 (1560.1) Though Matthew was a man with a past, he gave an excellent account of himself, and as time went on, his associates became proud of the publican’s performances. He was one of the apostles who made extensive notes on the sayings of Jesus, and these notes were used as the basis of Isador’s subsequent narrative of the sayings and doings of Jesus, which has become known a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마태는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너무 훌륭하게 처신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동료들은 세리의 성과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광범위하게 받아 적은 사도 중 하나로, 이 노트들은 나중에 이사도르가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의 기초로 사용되었고, 마태에 의한 복음서라고 알려졌습니다.

139:7.6 (1560.2) The great and useful life of Matthew, the business man and customs collector of Capernaum, has been the means of leading thousands upon thousands of other business men, public officials, and politicians, down through the subsequent ages, also to hear that engaging voice of the Master saying, “Follow me.” Matthew really was a shrewd politician, but he was intensely loyal to Jesus and supremely devoted to the task of seeing that the messengers of the coming kingdom were adequately financed. 사업가이며 가버나움의 세관 징수원이었던, 마태의 위대하고 훌륭한 일생은, 수천 명의 다른 사업가들, 공무원들, 정치가들도, 밑으로 다음 세대들 내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主)님의 매력적인 음성을 듣도록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정말로 명석한 정치가였지만, 예수님께 열성적으로 충성했으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들에게 충분히 자금이 조달되도록 원조하는 직무에 극도로 헌신했습니다.

139:7.7 (1560.3) The presence of Matthew among the twelve was the means of keeping the doors of the kingdom wide open to hosts of downhearted and outcast souls who had regarded themselves as long since without the bounds of religious consolation. Outcast and despairing men and women flocked to hear Jesus, and he never turned one away. 12사도 중에 있었던 마태의 현존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종교적 위안의 경계선 밖에 있다고 여겨왔던 낙담하고 버림받은 수많은 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버림받고 절망하는 남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으며, 예수님은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139:7.8 (1560.4) Matthew received freely tendered offerings from believing disciples and the immediate auditors of the Master’s teachings, but he never openly solicited funds from the multitudes. He did all his financial work in a quiet and personal way and raised most of the money among the more substantial class of interested believers. He gave practically the whole of his modest fortune to the work of the Master and his apostles, but they never knew of this generosity, save Jesus, who knew all about it. Matthew hesitated openly to contribute to the apostolic funds for fear that Jesus and his associates might regard his money as being tainted; so he gave much in the names of other believers. During the earlier months, when Matthew knew his presence among them was more or less of a trial, he was strongly tempted to let them know that his funds often supplied them with their daily bread, but he did not yield. When evidence of the disdain of the publican would become manifest, Levi would burn to reveal to them his generosity, but always he managed to keep still. 마태는 믿는 제자들과 주(主)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내는 헌금을 받았지만, 결코 공개적으로 군중들에게 기금을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개인적 방법으로 모든 재정 일을 처리했고, 관심 있는 신자들 중 더 재산이 있는 계층 사이에서 대부분의 돈을 모금했습니다. 그는 사실 주(主)님과 사도들의 일에 자신의 적당한 재산 전체를 썼지만, 전부 알고 있던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들(사도)은 이 관대함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동료들이 자기 돈을 오염된 것으로 여길까 두려워서 사도들의 기금에 버젓이 기부하기를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신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냈습니다. 초기 몇 개월 동안, 마태가 그들 사이에서 자기 현존이 어느 정도 문제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마태는 그의 기금으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자주 공급했다고 그들에게 알리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를 경멸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되면, 레위는 그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려고 분노가 치밀곤 했지만, 그는 항상 잠잠히 가라앉도록 관리했습니다.

139:7.9 (1560.5) When the funds for the week were short of the estimated requirements, Levi would often draw heavily upon his own personal resources. Also, sometimes when he became greatly interested in Jesus’ teaching, he preferred to remain and hear the instruction, even though he knew he must personally make up for his failure to solicit the necessary funds. But Levi did so wish that Jesus might know that much of the money came from his pocket! He little realized that the Master knew all about it. The apostles all died without knowing that Matthew was their benefactor to such an extent that, when he went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fter the beginning of the persecutions, he was practically penniless. 한 주간의 기금이 예산보다 부족하면, 레위는 자주 자기 개인 재산에서 많이 돈을 찾아 쓰곤 하였습니다. 또한 가끔씩,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게 되면, 필요한 기금을 요청하지 못하여 심지어 그가 개인적으로 충당해야만 한다고 알았지만, 차라리 남아서 가르침 듣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많은 돈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음을 예수께서 알아주시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는, 주(主)님께서 전부 알고 계셨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마태가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나갔을 때, 그는 사실상 무일푼이었을 정도로, 마태가 그들의 후원자였음을 사도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몰랐습니다.

139:7.10 (1560.6) When these persecutions caused the believers to forsake Jerusalem, Matthew journeyed north,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He was lost to the knowledge of his former apostolic associates, but on he went, preaching and baptizing, through Syria, Cappadocia, Galatia, Bithynia, and Thrace. And it was in Thrace, at Lysimachia, that certain unbelieving Jews conspired with the Roman soldiers to encompass his death. And this regenerated publican died triumphant in the faith of a salvation he had so surely learned from the teachings of the Master during his recent sojourn on earth. 이 박해들로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자, 마태는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예전의 사도 동료들과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는 설교하고 세례를 주면서 시리아, 카파도시아, 갈라시아, 비티니아, 트레이스를 거쳐 계속 나아갔습니다. 리시마키아에 있는 트레이스에서, 어떤 믿지 않는 유대인이 그를 죽이려고 병정과 공모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된 이 세리는, 최근에 지상에 머무시던 주(主)님의 가르침에서 확실히 배웠던 구원의 신앙으로 승리를 거두며 죽었습니다.

8. Thomas Didymus 도마 디디머스

180218 도마 디디머스 1 요20:24-25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4 Now Thomas (called Didymus),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 disciples when Jesus came. 25 So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the nail mark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where the nails were,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it.”

139:8.1 (1561.1) Thomas was the eighth apostle, and he was chosen by Philip. In later times he has become known as “doubting Thomas,” but his fellow apostles hardly looked upon him as a chronic doubter. True, his was a logical, skeptical type of mind, but he had a form of courageous loyalty which forbade those who knew him intimately to regard him as a trifling skeptic. 도마는 여덟 번째 사도로, 빌립이 선택했습니다. 후에 그는 “의심하는 도마”로 알려졌지만, 동료 사도들은 조금도 그를 상습적인 의혹자(의심을 품는 사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의 마음은 논리적이며 회의적인 유형이었지만, 그는 용감히 충성하는 사람이어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하찮은 회의론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39:8.2 (1561.2) When Thomas joined the apostles, he was twenty-nine years old, was married, and had four children. Formerly he had been a carpenter and stone mason, but latterly he had become a fisherman and resided at Tarichea, situated on the west bank of the Jordan where it flows out of the Sea of Galilee, and he was regarded as the leading citizen of this little village. He had little education, but he possessed a keen, reasoning mind and was the son of excellent parents, who lived at Tiberias. Thomas had the one truly analytical mind of the twelve; he was the real scientist of the apostolic group. 도마가 사도들과 합류할 때, 그는 29세로, 결혼해서 4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목수와 석공이었지만, 나중에 어부가 되어, 갈릴리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요단강 서쪽 둑에 자리 잡은, 타리케아에 살았으며,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유지(有志)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였지만, 예리하고 논리적인 마음을 가진 훌륭한 부모의 아들이었고, 그의 부모는 티베리아스에 살았습니다. 도마는 12사도 중 참으로 분석적 마음을 지닌 유일한 사람으로, 사도 그룹에서 사실상 과학자였습니다.

139:8.3 (1561.3) The early home life of Thomas had been unfortunate; his parents were not altogether happy in their married life, and this was reflected in Thomas’s adult experience. He grew up having a very disagreeable and quarrelsome disposition. Even his wife was glad to see him join the apostles; she was relieved by the thought that her pessimistic husband would be away from home most of the time. Thomas also had a streak of suspicion which made it very difficult to get along peaceably with him. Peter was very much upset by Thomas at first, complaining to his brother, Andrew, that Thomas was “mean, ugly, and always suspicious.” But the better his associates knew Thomas, the more they liked him. They found he was superbly honest and unflinchingly loyal. He was perfectly sincere and unquestionably truthful, but he was a natural-born faultfinder and had grown up to become a real pessimist. His analytical mind had become cursed with suspicion. He was rapidly losing faith in his fellow men when he became associated with the twelve and thus came in contact with the noble character of Jesus. This association with the Master began at once to transform Thomas’s whole disposition and to effect great changes in his mental reactions to his fellow men. 도마의 초기 가정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결혼생활에서 전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도마가 어른이 되자 체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매우 까다롭고 잘 다투는 기질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내까지 그가 사도들에게 합세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녀는 비관적인 남편이 대부분 집을 떠나있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안도했습니다. 도마는 또한 의심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와 평화롭게 지내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도마로 인해 아주 너무 당황하여, 자기 형 안드레에게, 도마는 “나쁜 성격에, 싸우려하고, 항상 의심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도마를 알아 갈수록, 그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최고로 정직하고 단호하게 충성스러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성실하고, 나무랄 데 없이 진실했지만, 천부적으로 흠잡는 사람이었고, 자라서 진짜 비관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분석적인 마음은 의심으로 시달렸습니다. 그가 열둘과 관련되자, 그는 신속히 동료 인간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고상한 성품에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주(主)님과 이런 관계는 즉시 도마의 기질 전체를 바꾸기 시했고, 동료들에 대한 그의 정신적 반응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39:8.4 (1561.4) Thomas’s great strength was his superb analytical mind coupled with his unflinching courage — when he had once made up his mind. His great weakness was his suspicious doubting, which he never fully overcame throughout his whole lifetime in the flesh. 도마의 큰 장점은, 그가 일단 마음을 정하면, 뛰어난 분석적 마음에 굽힐 줄 모르는 용기가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큰 약점은 상대를 믿지 않는 의심으로, 육신의 전 생애에 걸쳐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139:8.5 (1561.5) In the organization of the twelve Thomas was assigned to arrange and manage the itinerary, and he was an able director of the work and movements of the apostolic corps. He was a good executive, an excellent businessman, but he was handicapped by his many moods; he was one man one day and another man the next. He was inclined toward melancholic brooding when he joined the apostles, but contact with Jesus and the apostles largely cured him of this morbid introspection. 열둘의 조직에서 도마는 여행일정을 세우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사도 대원들의 일과 움직임에 대한 유능한 관리자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행정가,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변덕스런 기분 때문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는 어떤 사람이었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들에 합세했을 때, 그는 우울한 생각에 쏠려 있었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의 접촉으로 이 병적인 내면-성찰에서 많이 치료되었습니다.

139:8.6 (1561.6) Jesus enjoyed Thomas very much and had many long, personal talks with him. His presence among the apostles was a great comfort to all honest doubters and encouraged many troubled minds to come into the kingdom, even if they could not wholly understand everything about the spiritual and philosophic phases of the teachings of Jesus. Thomas’s membership in the twelve was a standing declaration that Jesus loved even honest doubters. 예수님은 도마와 매우 즐겁게 지내셨고 여러 번 길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사도들 중에 그의 현존(도마가 있다는 사실)은 정직하게 의혹을 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로였고, 불안한 많은 마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닌 영적이며 철학적인 단계에 대해 모두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열둘 중에 포함된 도마의 회원자격은 예수님께서 정직하게 의심이 많은 자들도 사랑하셨다는 지속적인 선언이었습니다.

139:8.7 (1562.1) The other apostles held Jesus in reverence because of some special and outstanding trait of his replete personality, but Thomas revered his Master because of his superbly balanced character. Increasingly Thomas admired and honored one who was so lovingly merciful yet so inflexibly just and fair; so firm but never obstinate; so calm but never indifferent; so helpful and so sympathetic but never meddlesome or dictatorial; so strong but at the same time so gentle; so positive but never rough or rude; so tender but never vacillating; so pure and innocent but at the same time so virile, aggressive, and forceful; so truly courageous but never rash or foolhardy; such a lover of nature but so free from all tendency to revere nature; so humorous and so playful, but so free from levity and frivolity. It was this matchless symmetry of personality that so charmed Thomas. He probably enjoyed the highest intellectual understanding and personality appreciation of Jesus of any of the twelve.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충만한 고유성이 지닌 어떤 특별하고 탁월한 특성 때문에 그를 존경했지만, 도마는 뛰어나게 균형 잡힌 성품 때문에 주님을 존경했습니다. 도마는, 그렇게 깊은 애정으로 자비하셔도 강직하게 공정하고 공평하시며, 견고하지만 완고하지 않으시고, 침착하지만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도움이 되고 공감하시면서도 간섭하거나 독재적이 아니시며, 강하신 동시에 온화하시며, 적극적이시지만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으시고, 부드럽지만 우유부단하지 않으시며, 순수하고 순진하신 동시에 씩씩하고 진취적이며 강력하시고, 진실로 용감하시나 경솔하거나 무모하지 않으시며, 자연을 사랑하시지만 자연을 숭배하는 모든 경향에서 자유로우시고, 유머가 풍부하고 쾌활하시지만 촐싹이거나 경박하지 않으신 분을 점점 더 경탄하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비할 수 없이 균형 잡힌 고유성에 그렇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열둘 중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지적으로 이해하고 고유성의 진가를 인정하고 즐거워했습니다.

180225 도마 디디머스 2 요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Then Thomas (called Didymus) said to the rest of the disciples, “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139:8.8 (1562.2) In the councils of the twelve Thomas was always cautious, advocating a policy of safety first, but if his conservatism was voted down or overruled, he was always the first fearlessly to move out in execution of the program decided upon. Again and again would he stand out against some project as being foolhardy and presumptuous; he would debate to the bitter end, but when Andrew would put the proposition to a vote, and after the twelve would elect to do that which he had so strenuously opposed, Thomas was the first to say, “Let’s go!” He was a good loser. He did not hold grudges nor nurse wounded feelings. Time and again did he oppose letting Jesus expose himself to danger, but when the Master would decide to take such risks, always was it Thomas who rallied the apostles with his courageous words, “Come on, comrades, let’s go and die with him.” 12사도 의회에서 도마는 언제나 신중했으며, 안전제일 정책을 주장했지만, 안전제일 주의가 부결되거나 취소되면, 결정된 계획의 실행에 그가 항상 제일 먼저 두려움 없이 나섰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무모하고 주제넘은 어떤 계획들을 계속 반대하곤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격렬히 논쟁하곤 했지만, 안드레가 그 제안을 투표에 붙여서, 그가 그렇게 격렬히 반대했던 것을 12사도들이 채택하기로 한 후에는, 도마가 제일 먼저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패배자(태연하게 지는 사람)였습니다. 그는 원한이나 상한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거듭, 그는 예수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주(主)께서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하려 하셨을 때, “친구들이여, 어서 갑시다. 가서 주(主)와 함께 목숨을 바칩시다.”라는 용기 있는 말로 사도들을 집결시키는 사람은 항상 도마였습니다.

139:8.9 (1562.3) Thomas was in some respects like Philip; he also wanted “to be shown,” but his outward expressions of doubt were based on entirely different intellectual operations. Thomas was analytical, not merely skeptical. As far as personal physical courage was concerned, he was one of the bravest among the twelve. 도마는 어떤 면에서 빌립과 비슷했습니다. 그도 역시 “눈으로 보기”를 원했지만, 겉으로 표현된 그의 의심은 전혀 다른 지적 작용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도마는 분석적이었고, 단순히 회의적(懷疑的)이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육체적 용기에 관해서, 그는 12사도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139:8.10 (1562.4) Thomas had some very bad days; he was blue and downcast at times. The loss of his twin sister when he was nine years old had occasioned him much youthful sorrow and had added to his temperamental problems of later life. When Thomas would become despondent, sometimes it was Nathaniel who helped him to recover, sometimes Peter, and not infrequently one of the Alpheus twins. When he was most depressed, unfortunately he always tried to avoid coming in direct contact with Jesus. But the Master knew all about this and had an understanding sympathy for his apostle when he was thus afflicted with depression and harassed by doubts. 도마는 상당히 매우 힘든 날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때로 우울하였고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9살 때, 쌍둥이 여동생을 잃어서 슬픔이 많은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 뒤 인생에서 변덕스러운 문제들이 늘어났습니다. 도마가 낙담하게 되면 그가 회복하도록, 때로는 나다니엘, 때로는 베드로, 때로는 알패오 쌍둥이들 중 하나가, 도왔습니다. 그가 아주 침울해지면, 불행히도 그는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항상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님은 이것을 모두 아셨고, 그가 그렇게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의심으로 시달릴 때, 자신의 사도를 이해하며 헤아리셨습니다.

139:8.11 (1562.5) Sometimes Thomas would get permission from Andrew to go off by himself for a day or two. But he soon learned that such a course was not wise; he early found that it was best, when he was downhearted, to stick close to his work and to remain near his associates. But no matter what happened in his emotional life, he kept right on being an apostle. When the time actually came to move forward, it was always Thomas who said, “Let’s go!” 종종 도마는 홀로 하루나 이틀 말없이 떠나도록 안드레에게 허락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방식이 현명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낙심했을 때 일에 매진하면서 동료들 근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선임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정적 일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는 계속 사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오면,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항상 도마였습니다.

139:8.12 (1562.6) Thomas is the great example of a human being who has doubts, faces them, and wins. He had a great mind; he was no carping critic. He was a logical thinker; he was the acid test of Jesus and his fellow apostles. If Jesus and his work had not been genuine, it could not have held a man like Thomas from the start to the finish. He had a keen and sure sense of fact. At the first appearance of fraud or deception Thomas would have forsaken them all. Scientists may not fully understand all about Jesus and his work on earth, but there lived and worked with the Master and his human associates a man whose mind was that of a true scientist — Thomas Didymus — and he believed in Jesus of Nazareth. 도마는 의심을 품고, 그것들을 대면하고,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델입니다. 그는 넓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흠잡는 비평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논리적인 사색가였고, 예수님과 동료 사도들에게 엄밀한 시금석(試金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일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도마 같은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 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대해 예리하고 확실한 감각을 지녔습니다. 사기나 속임수가 나타나는 첫 순간에, 도마는 그들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지상 일에 대해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나사렛 예수를 믿었던 도마 디디머스, 즉 진정한 과학자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주님과 인간 동료들과 함께 살았고 일했습니다.

139:8.13 (1563.1) Thomas had a trying time during the days of the trial and crucifixion. He was for a season in the depths of despair, but he rallied his courage, stuck to the apostles, and was present with them to welcome Jesus on the Sea of Galilee. For a while he succumbed to his doubting depression but eventually rallied his faith and courage. He gave wise counsel to the apostles after Pentecost and, when persecution scattered the believers, went to Cyprus, Crete, the North African coast, and Sicily, preach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And Thomas continued preaching and baptizing until he was apprehended by the agents of the Roman government and was put to death in Malta. Just a few weeks before his death he had begun the writing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도마는 재판과 십자가 처형의 기간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한동안 절망의 심연(深淵깊은 수렁)에 있었지만, 용기를 회복하여 사도들에 합세했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려고 사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의심의 우울증에 굴복했지만, 결국 신앙과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오순절 이후 사도들에게 현명하게 조언했으며, 박해로 신도들이 흩어지자, 그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들을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키프로스, 크레데, 북 아프리카 해안, 시실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로마 정부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말타에서 죽기까지 계속 설교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불과 죽기 몇 주 전에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었습니다.

9. and 10. James and Judas Alpheus 9-10. 야고보와 유다 알페오

180304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마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139:10.1 (1563.2) James and Judas the sons of Alpheus, the twin fishermen living near Kheresa, were the ninth and tenth apostles and were chosen by James and John Zebedee. They were twenty-six years old and married, James having three children, Judas two. 알페오의 아들들, 야고보와 유다는 게라사 근처에 사는 쌍둥이 어부들로, 9번째와 10번째의 사도들이었고,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가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26세였고 결혼을 했으며, 야고보는 3명의 자녀들을, 유다는 2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139:10.2 (1563.3) There is not much to be said about these two commonplace fisherfolk. They loved their Master and Jesus loved them, but they never interrupted his discourses with questions. They understood very little about the philosophical discussions or the theological debates of their fellow apostles, but they rejoiced to find themselves numbered among such a group of mighty men. These two men were almost identical in personal appearance, mental characteristics, and extent of spiritual perception. What may be said of one should be recorded of the other. 이들 두 평범한 어부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主)님을 사랑했고, 주(主)님도 그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은 결코 질문으로 그의 강연을 가로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동료 사도들의 철학적 토의나 신학적 논쟁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그런 집단의 막강한 사람들 사이에 열거됨을 발견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개인적 용모, 정신적 특성, 영적 인식 정도가 거의 같았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기록되어져야 했습니다.

139:10.3 (1563.4) Andrew assigned them to the work of policing the multitudes. They were the chief ushers of the preaching hours and, in fact, the general servants and errand boys of the twelve. They helped Philip with the supplies, they carried money to the families for Nathaniel, and always were they ready to lend a helping hand to any one of the apostles. 안드레는 그들에게 군중들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설교시간에 1등 안내원이었으며, 사실 12사도들의 시중을 드는, 심부름꾼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모품을 다루는 빌립을 도왔고, 나다니엘을 위해 가족들에게 돈을 전달했으며, 항상 어떤 사도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139:10.4 (1563.5) The multitudes of the common people were greatly encouraged to find two like themselves honored with places among the apostles. By their very acceptance as apostles these mediocre twins were the means of bringing a host of fainthearted believers into the kingdom. And, too, the common people took more kindly to the idea of being directed and managed by official ushers who were very much like themselves. 일반인의 무리들은 자신들과 같은 두 사람이 영예롭게 사도들 사이에 있음을 알고 크게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 평범한 쌍둥이들이 사도로 승인된 바로 그 사실이 주눅 들린 신자의 무리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신들과 아주 많이 비슷한 공식 안내원들이 지도하고 관리한다는 생각에 더 친절히 여겼습니다.

139:10.5 (1563.6) James and Judas, who were also called Thaddeus and Lebbeus, had neither strong points nor weak points. The nicknames given them by the disciples were good-natured designations of mediocrity. They were “the least of all the apostles”; they knew it and felt cheerful about it. 또한 다대오와 레비오로 불렸던 야고보와 유다는 장점도, 단점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준 별명은 평범하다는 착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알고 기분 좋게 느꼈습니다.

139:10.6 (1563.7) James Alpheus especially loved Jesus because of the Master’s simplicity. These twins could not comprehend the mind of Jesus, but they did grasp the sympathetic bond between themselves and the heart of their Master. Their minds were not of a high order; they might even reverently be called stupid, but they had a real experience in their spiritual natures. They believed in Jesus; they were sons of God and fellows of the kingdom. 야고보 알패오는 주(主)님의 단순함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이 쌍둥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과 주(主)님의 심정 사이에 있는 (마음이 통하는) 공감의 연대감을 파악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손을 담아도, 아둔하다고 불릴 수 있지만, 그들은 영적 본질을 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동료였습니다.

139:10.7 (1564.1) Judas Alpheus was drawn toward Jesus because of the Master’s unostentatious humility. Such humility linked with such personal dignity made a great appeal to Judas. The fact that Jesus would always enjoin silence regarding his unusual acts made a great impression on this simple child of nature. 유다 알패오는 주(主)님의 허세 없는 겸손 때문에 예수님께 끌렸습니다. 개인적 위엄을 동반한 그런 겸손이 유다에게 큰 매력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비범한 행동에 관해 항상 침묵하라고 분부한 사실은, 이 단순한 기질의 자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139:10.8 (1564.2) The twins were good-natured, simple-minded helpers, and everybody loved them. Jesus welcomed these young men of one talent to positions of honor on his personal staff in the kingdom because there are untold millions of other such simple and fear-ridden souls on the worlds of space whom he likewise wishes to welcome into active and believing fellowship with himself and his outpoured Spirit of Truth. Jesus does not look down upon littleness, only upon evil and sin. James and Judas were little, but they were also faithful. They were simple and ignorant, but they were also big-hearted, kind, and generous. 쌍둥이들은 착하고, 순진한 조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재능을 지닌 이 청년들을 (하나님) 나라의 개인 참모라는 영예로운 지위로 환영하셨는데,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과 활동적인 믿음의 사귐 안으로, 흘러나온 진리의 영과 함께, 공간 세계의 그렇게 단순하며 두려움에 떠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혼들을 환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음이 아니라, 단지 악과 죄를 경멸하십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작았지만, 그들은 또한 신실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무지했지만, 또한 도량이 넓었고, 친절하고, 관대했습니다.

139:10.9 (1564.3) And how gratefully proud were these humble men on that day when the Master refused to accept a certain rich man as an evangelist unless he would sell his goods and help the poor. When the people heard this and beheld the twins among his counselors, they knew of a certainty that Jesus was no respecter of persons. But only a divine institution — the kingdom of heaven — could ever have been built upon such a mediocre human foundation! 어떤 부자(富者)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한, 주님께서 전도자(傳道者)로 받아주기를 거절하신 그 날, 이 겸손한 사람들은 얼마나 감사하며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쌍둥이들이 예수의 조언자들 중에 있음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적 제도─하늘나라─만이 그런 평범한 인간적 기반 위에 언제나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139:10.10 (1564.4) Only once or twice in all their association with Jesus did the twins venture to ask questions in public. Judas was once intrigued into asking Jesus a question when the Master had talked about revealing himself openly to the world. He felt a little disappointed that there were to be no more secrets among the twelve, and he made bold to ask: “But, Master, when you do thus declare yourself to the world, how will you favor us with special manifestations of your goodness?” 쌍둥이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 중에 단지 한두 번 공개적으로 감히 질문했습니다. 주(主)께서 자신을 세상에 숨김없이 드러내시겠다고 얘기했을 때, 유다가 예수님께 흥미롭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12명 사이에 더 이상 비밀이 없어진다는 것에 조금 실망을 느끼고, 그는 감히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主)여, 당신께서 그렇게 세상에 자신을 밝히시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특별히 나타내는 은혜를 어떻게 베푸시렵니까?”

139:10.11 (1564.5) The twins served faithfully until the end, until the dark days of trial, crucifixion, and despair. They never lost their heart faith in Jesus, and (save John) they were the first to believe in his resurrection. But they could not comprehen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Soon after their Master was crucified, they returned to their families and nets; their work was done. They had not the ability to go on in the more complex battles of the kingdom. But they lived and died conscious of having been honored and blessed with four years of close and personal association with a Son of God, the sovereign maker of a universe. 쌍둥이들은 끝까지, 재판과 십자가 처형과 절망의 어두운 날들까지, 성실히 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신앙하는 심정을 결코 잃지 않았고, (요한을 제외하고) 그들은 그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主)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직후, 그들은 가족에게 돌아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들의 일은 끝났습니다. 그들은 더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전투를 계속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주권적 조물주와 가깝게 4년 동안 개인적 관계를 갖는 영예와 축복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11. Simon the Zealot 열심당원 시몬

180311 열심당원 시몬 눅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Matthew, Thomas, James son of Alphaeus, Simon who was called the Zealot,

139:11.1 (1564.6) Simon Zelotes, the eleventh apostle, was chosen by Simon Peter. He was an able man of good ancestry and lived with his family at Capernaum. He was twenty-eight years old when he became attached to the apostles. He was a fiery agitator and was also a man who spoke much without thinking. He had been a merchant in Capernaum before he turned his entire attention to the patriotic organization of the Zealots. 시몬 젤로테는 11번째 사도로, 시몬 베드로가 선택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 속한 유능한 사람이었고, 가버나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소속되었을 때 28세였습니다. 그는 격렬한 선동가였으며, 또한 생각 없이 많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 조직인 열심당에 심혈을 다하기 전까지 가버나움의 상인이었습니다.

139:11.2 (1564.7) Simon Zelotes was given charge of the diversions and relaxation of the apostolic group, and he was a very efficient organizer of the play life and recreational activities of the twelve. 시몬 젤로테는 사도 그룹의 기분 전환과 휴식을 담당했으며, 그는 12사도들의 운동 생활과 오락 활동에 대해 아주 효율적인 조직가였습니다.

139:11.3 (1564.8) Simon’s strength was his inspirational loyalty. When the apostles found a man or woman who floundered in indecision about entering the kingdom, they would send for Simon. It usually required only about fifteen minutes for this enthusiastic advocate of salvation through faith in God to settle all doubts and remove all indecision, to see a new soul born into the “liberty of faith and the joy of salvation.” 시몬의 강점은 영감(靈感)을 일으키는 충성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버둥거리는 남자나 여자를 발견하면, 그들은 시몬을 부르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신앙)으로 구원된다는 이 열성적인 주창자가, 모든 의심들을 해결하고 모든 망설임을 없애고, 새로운 혼이 “신앙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는데 대개 약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39:11.4 (1565.1) Simon’s great weakness was his material-mindedness. He could not quickly change himself from a Jewish nationalist to a spiritually minded internationalist. Four years was too short a time in which to make such an intellectual and emotional transformation, but Jesus was always patient with him. 시몬의 큰 약점은 물질적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주의자로부터 영적 마음을 가진 국제주의자로, 자신을 빨리 전환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지적 감정적 변환을 이루기에 4년은 너무 짧았지만, 예수님은 항상 그를 인내하셨습니다.

139:11.5 (1565.2) The one thing about Jesus which Simon so much admired was the Master’s calmness, his assurance, poise, and inexplicable composure. 시몬이 예수에 대해 그토록 탄복한 한 가지는 주(主)님의 고요함, 그의 확신, 평정,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침착성이었습니다.

139:11.6 (1565.3) Although Simon was a rabid revolutionist, a fearless firebrand of agitation, he gradually subdued his fiery nature until he became a powerful and effective preacher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Simon was a great debater; he did like to argue. And when it came to dealing with the legalistic minds of the educated Jews or the intellectual quibblings of the Greeks, the task was always assigned to Simon. 시몬은 과격한 혁명가였고, 두려움 없이 선동하는 선동가였지만, 그가 “땅에서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을 전하는 강력하고 유능한 설교자가 되기까지, 그는 점차 불같은 성품을 가라앉혔습니다. 시몬은 뛰어난 토론자였고, 논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적 마음을 가진 교육받은 유대인이나 지적 궤변의 그리스인들을 다루는 과제는 언제나 시몬이 맡았습니다.

139:11.7 (1565.4) He was a rebel by nature and an iconoclast by training, but Jesus won him for the higher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He had always identified himself with the party of protest, but he now joined the party of progress, unlimited and eternal progression of spirit and truth. Simon was a man of intense loyalties and warm personal devotions, and he did profoundly love Jesus. 그는 천성이 반항아였고, 훈련받은 인습 타파주의자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개념을 위해 그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항의당(抗議黨)과 항상 동일시했었지만, 이제는 영과 진리의 한없이 영원한 진보, 그 진보당(進步黨)에 가입했습니다. 시몬은 강렬한 충성심따뜻하게 직접 헌신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충심으로 사랑했습니다.

139:11.8 (1565.5) Jesus was not afraid to identify himself with business men, laboring men, optimists, pessimists, philosophers, skeptics, publicans, politicians, and patriots. 예수님은 자신을 사업가, 노동자, 낙천가, 비관론자, 철학자, 회의론자, 세리, 정치가, 애국자들과 동일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139:11.9 (1565.6) The Master had many talks with Simon, but he never fully succeeded in making an internationalist out of this ardent Jewish nationalist. Jesus often told Simon that it was proper to want to see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orders improved, but he would always add: “That is not the business of the kingdom of heaven. We must be dedicated to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Our business is to be ambassadors of a spiritual government on high, and we must not immediately concern ourselves with aught but the representation of the will and character of the divine Father who stands at the head of the government whose credentials we bear.” It was all difficult for Simon to comprehend, but gradually he began to grasp something of the meaning of the Master’s teaching. 주(主)님은 시몬과 많이 이야기하셨지만, 이 열렬한 유대 민족주의자를 국제주의자로 만드는 데 결코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시몬에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질서들이 개선되기를 보려는 것은 적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항상 다음의 말을 덧붙이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직무가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해야만 한다. 우리의 직무는 높은 영적 정부(政府)의 대사가 되는 것이며, 신임장을 지닌 우리는 그 정부(政府)의 정상(頂上)에 계신 신적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대표하는 외에 어떤 것도 자신에 대해 바로 염려하지 말아야만 하느니라.” 시몬은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점차 주님께서 가르치신 어지간한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139:11.10 (1565.7) After the dispersion because of the Jerusalem persecutions, Simon went into temporary retirement. He was literally crushed. As a nationalist patriot he had surrendered in deference to Jesus’ teachings; now all was lost. He was in despair, but in a few years he rallied his hopes and went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예루살렘의 박해로 흩어진 후, 시몬은 잠간 은둔했습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는 민족주의적 애국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항복했으며, 이제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지만, 몇 년 내에 그는 자기 소망들을 다시 모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나갔습니다.

139:11.11 (1565.8) He went to Alexandria and, after working up the Nile, penetrated into the heart of Africa, everywhere preaching the gospel of Jesus and baptizing believers. Thus he labored until he was an old man and feeble. And he died and was buried in the heart of Africa.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나일 강으로 올라가며 일한 후, 아프리카의 심장부를 통과하며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설교하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늙고 쇠약해질 때까지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묻혔습니다.

12. Judas Iscariot 가룟 유다

180318 가룟 유다1 계22:17b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and whoever wishes, let him take the free gift of the water of life.

139:12.1 (1565.9) Judas Iscariot, the twelfth apostle, was chosen by Nathaniel. He was born in Kerioth, a small town in southern Judea. When he was a lad, his parents moved to Jericho, where he lived and had been employed in his father’s various business enterprises until he became interested in the preaching and work of John the Baptist. Judas’s parents were Sadducees, and when their son joined John’s disciples, they disowned him. 가룟 유다는 12번째 사도로서, 나다니엘이 선택했습니다. 그는 남부 유대의 작은 도시인 케리옷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모는 여리고로 이사했고, 그가 세례 요한의 설교와 일에 관심을 갖기까지는, 그곳에 살면서 자기 아버지의 여러 사업체에 종사했습니다. 유다의 부모는 사두개인이어서, 아들이 요한의 제자가 되자, 자식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139:12.2 (1566.1) When Nathaniel met Judas at Tarichea, he was seeking employment with a fish-drying enterprise at the lower end of the Sea of Galilee. He was thirty years of age and unmarried when he joined the apostles. He was probably the best-educated man among the twelve and the only Judean in the Master’s apostolic family. Judas had no outstanding trait of personal strength, though he had many outwardly appearing traits of culture and habits of training. He was a good thinker but not always a truly honest thinker. Judas did not really understand himself; he was not really sincere in dealing with himself. 나다니엘이 유다를 타리케아에서 만났을 때, 그는 갈릴리 바다의 하류 끝에 있는 생선-건조 사업체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가 될 때, 30세였고 결혼 전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12사도 중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고, 주(主)님의 사도 대원에서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개인적 장점 중에서 눈에 띠는 특성이 없었지만, 표면적으로 여러 문화적 특성(교양)과 훈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색가(思索家)였지만, 항상 참으로 정직한 사색가는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말 신실하게 자신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139:12.3 (1566.2) Andrew appointed Judas treasurer of the twelve, a position which he was eminently fitted to hold, and up to the time of the betrayal of his Master he discharged the responsibilities of his office honestly, faithfully, and most efficiently. 안드레는 유다를 12사도의 회계로 임명하였는데, 그에게 탁월하게 어울리는 자리였으며, 주(主)님을 배반하기 직전까지, 그는 자기 직무의 책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했습니다.

139:12.4 (1566.3) There was no special trait about Jesus which Judas admired above the generally attractive and exquisitely charming personality of the Master. Judas was never able to rise above his Judean prejudices against his Galilean associates; he would even criticize in his mind many things about Jesus. Him whom eleven of the apostles looked upon as the perfect man, as the “one altogether lovely and the chiefest among ten thousand,” this self-satisfied Judean often dared to criticize in his own heart. He really entertained the notion that Jesus was timid and somewhat afraid to assert his own power and authority. 보통 매력적이며 정교하게 호감을 끄는 주(主)님의 고유성 이외에, 유다가 감탄했던 예수님의 특별한 특성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결코 갈릴리 동료들에 적대적인 유대 지방 사람의 편견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서도 여러 면에서 마음으로 비판했습니다. 11 사도들이 완전한 사람, 즉 “만인(萬人) 중에서 온전히 사랑스럽고 최고으뜸이신 분”으로 간주했던 그 분을, 자아-만족(자만自滿자기로 가득해서 거드름으로 만족)이 가득한 이 유대 사람은 심정(마음)으로 감히 자주 비판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권능과 권위를 주장하기에 소심하고 어느 정도 두려워하신다는 생각을 정말로 품었습니다.

139:12.5 (1566.4) Judas was a good business man. It required tact, ability, and patience, as well as painstaking devotion, to manage the financial affairs of such an idealist as Jesus, to say nothing of wrestling with the helter-skelter business methods of some of his apostles. Judas really was a great executive, a farseeing and able financier. And he was a stickler for organization. None of the twelve ever criticized Judas. As far as they could see, Judas Iscariot was a matchless treasurer, a learned man, a loyal (though sometimes critical) apostle, and in every sense of the word a great success. The apostles loved Judas; he was really one of them. He must have believed in Jesus, but we doubt whether he really loved the Master with a whole heart. The case of Judas illustrates the truthfulness of that saying: “There is a way that seems right to a man, but the end thereof is death.” It is altogether possible to fall victim to the peaceful deception of pleasant adjustment to the paths of sin and death. Be assured that Judas was always financially loyal to his Master and his fellow apostles. Money could never have been the motive for his betrayal of the Master. 유다는 훌륭한 사업가였습니다. 몇 사도들이 혼란스런 직무 방식으로 씨름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아도, 예수님과 같은 그런 이상주의자의 재무 관리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헌신은 물론 재치와 능력 그리고 인내가 요구되었습니다. 유다는 정말로 훌륭한 집행자, 즉 선견지명이 있는 유능한 재정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직에 대해 꽤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2 중 아무도 유다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가룟 유다는 비길 데 없는 회계로, 학자였고, 충성스러운 (가끔 비판적이었던) 사도였으며, 모든 면에서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지만(believed), 그가 온 마음(심정)으로 주()님을 정말 사랑했었는지, 우리는 미심쩍게 여깁니다. 유다의 경우에 다음의 격언이 현실그대로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4:12, 16:25).” 죄와 사망의 길에 이르는 즐거운 조율 중에서 평화로운 속임수에 희생물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유다는 항상 재정적으로 주(主)님과 동료들에게 충성했음을 확신하라. 돈은 절대로 그가 주()님을 배반한 동기가 될 수 없었습니다.

139:12.6 (1566.5) Judas was an only son of unwise parents. When very young, he was pampered and petted; he was a spoiled child. As he grew up, he had exaggerated ideas about his self-importance. He was a poor loser. He had loose and distorted ideas about fairness; he was given to the indulgence of hate and suspicion. He was an expert at misinterpretation of the words and acts of his friends. All through his life Judas had cultivated the habit of getting even with those whom he fancied had mistreated him. His sense of values and loyalties was defective. 유다는 현명하지 못한 부모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그는 제멋대로 했으며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버릇없는 아이였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자아중요(자존, 젠체함, 거만하게 굶)에 대한 관념을 과대시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공평함에 대하여 흐리터분하고 왜곡된 관념을 가졌습니다. 그는 증오와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언행(言行)을 오해하는 달인(達人)이었습니다. 유다는 전(全) 생애를 통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복수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그의 가치와 충성의 감각은 결함이 있었습니다.

139:12.7 (1566.6) To Jesus, Judas was a faith adventure. From the beginning the Master fully understood the weakness of this apostle and well knew the dangers of admitting him to fellowship. But it is the nature of the Sons of God to give every created being a full and equal chance for salvation and survival. Jesus wanted not only the mortals of this world but the onlookers of innumerable other worlds to know that, when doubts exist as to the sincerity and wholeheartedness of a creature’s devotion to the kingdom, it is the invariable practice of the Judges of men fully to receive the doubtful candidate. The door of eternal life is wide open to all; “whosoever will may come”; there are no restrictions or qualifications save the faith of the one who comes. 예수님에게, 유다는 신앙의 모험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주(主)님은 이 사도의 약점을 충분히 이해하셨고, 그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본성은, 모든 창조된 존재에게 구원과 생존을 위해 충분하며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물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성실하게 전심을 다해 헌신하는지 의심이 있을 때, 사람들의 심판자는 의심스러운 후보자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불변의 관례임을, 이 세상의 필사자들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세상들에서 주시하는 자들에게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은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와도 됩니다.” 거기에는 오는 사람의 신앙 이외에 어떤 제한이나 자격 조건이 없습니다.

180325 가룟 유다2 마26:14-16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4 Then one of the Twelve–the one called Judas Iscariot–went to the chief priests 15 and asked, “What are you willing to give me if I hand him over to you?” So they counted out for him thirty silver coins. 16 From then on Judas watched for an opportunity to hand him over.

139:12.8 (1567.1) This is just the reason why Jesus permitted Judas to go on to the very end, always doing everything possible to transform and save this weak and confused apostle. But when light is not honestly received and lived up to, it tends to become darkness within the soul. Judas grew intellectually regarding Jesus’ teachings about the kingdom, but he did not make progress in the acquirement of spiritual character as did the other apostles. He failed to make satisfactory personal progress in spiritual experience. 이것이, 예수께서 유다가 끝까지 계속하도록 허용하셨고, 약하고 혼란에 빠진 이 사도를 변화시켜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셨던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빛은 순전히 수용되어 그에 따라 살지 않으면, 빛은 혼에서 어둠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지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영적 성품 획득에는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 체험에서 만족스러운 개인적 진보에 실패했습니다.

139:12.9 (1567.2) Judas became increasingly a brooder over personal disappointment, and finally he became a victim of resentment. His feelings had been many times hurt, and he grew abnormally suspicious of his best friends, even of the Master. Presently he became obsessed with the idea of getting even, anything to avenge himself, yes, even betrayal of his associates and his Master. 유다는 갈수록 개인적 실망으로 속을 끓이다가 결국 원한(怨恨)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감정들은 여러 번 상처를 받았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 주(主)님까지도 비정상적으로 갈수록 공연히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내, 그는, 복수하는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동료들과 주(主)님까지도 배반해서, 복수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139:12.10 (1567.3) But these wicked and dangerous ideas did not take definite shape until the day when a grateful woman broke an expensive box of incense at Jesus’ feet. This seemed wasteful to Judas, and when his public protest was so sweepingly disallowed by Jesus right there in the hearing of all, it was too much. That event determined the mobilization of all the accumulated hate, hurt, malice, prejudice, jealousy, and revenge of a lifetime, and he made up his mind to get even with he knew not whom; but he crystallized all the evil of his nature upon the one innocent person in all the sordid drama of his unfortunate life just because Jesus happened to be the chief actor in the episode which marked his passing from the progressive kingdom of light into that self-chosen domain of darkness. 그러나 사악하고 위험한 이 망상들은, 감사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료 상자를 깨뜨린 그 날까지, 뚜렷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유다에게 낭비로 여겨졌고, 공개적인 자기 항의(抗議)가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는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에 의해 전면적으로 묵살되자, 유다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축적되어 왔던 모든 미움, 상처, 원한, 편견, 질투, 평생의 복수를 총동원하기로 결심했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복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일생의 비열한 모든 드라마에서 자신의 모든 악의 본성이 무죄한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진보하는 빛의 나라에서 스스로-선택한 그 어둠의 영역으로 유다의 통행을 표시하는 그 장면(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이 마침 주연(主演) 배우가 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39:12.11 (1567.4) The Master many times, both privately and publicly, had warned Judas that he was slipping, but divine warnings are usually useless in dealing with embittered human nature. Jesus did everything possible, consistent with man’s moral freedom, to prevent Judas’s choosing to go the wrong way. The great test finally came. The son of resentment failed; he yielded to the sour and sordid dictates of a proud and vengeful mind of exaggerated self-importance and swiftly plunged on down into confusion, despair, and depravity. 주(主)님은 여러 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그가 미끄러져 이탈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신적 경고들은 적개심을 품은 인간 본성을 다루는데 대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가지 않도록,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조화를 이루시면서,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큰 시험의 날이 마침내 다가왔습니다. 원한(怨恨)의 아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자아를-중요시하는, 거만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의 졸렬하며 비열한 명령에 굴복했고, 신속하게 혼란, 절망, 그리고 타락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39:12.12 (1567.5) Judas then entered into the base and shameful intrigue to betray his Lord and Master and quickly carried the nefarious scheme into effect. During the outworking of his anger-conceived plans of traitorous betrayal, he experienced moments of regret and shame, and in these lucid intervals he faintheartedly conceived, as a defense in his own mind, the idea that Jesus might possibly exert his power and deliver himself at the last moment. 그 후 유다는 자신의 주인이신 주(主)님을 배반하는 야비하고 치욕스러운 음모를 시작했으며, 사악한 계획을 급히 실행했습니다. 자기 분노로 잉태한 반역적 배반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후회와 수치심의 순간들을 겪었으며, 제 정신이 들었던 이 기간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변명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아마 마지막 순간에 권능을 발휘하여 예수 자신을 구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139:12.13 (1567.6) When the sordid and sinful business was all over, this renegade mortal, who thought lightly of selling his friend for thirty pieces of silver to satisfy his long-nursed craving for revenge, rushed out and committed the final act in the drama of fleeing from the realities of mortal existence — suicide. 비열하고 죄 받을 많은 일이 모두 끝나자, 오래 품었던 복수심을 채우려고 자기 친구를 은화 30개를 받고 가볍게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이 변절한 필사자는 달려 나가 필사자 실존의 실체에서 도망하여 드라마의 마지막 장에서 자살했습니다.

139:12.14 (1567.7) The eleven apostles were horrified, stunned. Jesus regarded the betrayer only with pity. The worlds have found it difficult to forgive Judas, and his name has become eschewed throughout a far-flung universe. 11명의 사도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아찔했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입니다. 세계들은 유다를 용서하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멀리-퍼진 우주 전체에서 그의 이름은 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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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64 The Evolutionary Races of Color 진화적 유색 인종들

Paper 64

The Evolutionary Races of Color 진화적 유색 인종들

1. The Andonic Aborigines 안돈의 원주민들
2. The Foxhall Peoples 폭스홀 민족
3. The Badonan Tribes 바도난 부족들
4. The Neanderthal Races 네안데르탈인들
5. Origin of the Colored Races 유색 인종들의 기원
6. The Six Sangik Races of Urantia 유란시아의 여섯 산긱 인종
(1) The red man 홍인
(2) The orange man 주황인
(3) The yellow man 황인
(4) The green man 녹인
(5) The blue man 청인
(6) The indigo race 남인종
Purpose of the six races 여섯 인종들의 목적
7. Dispersion of the Colored Races 유색 인종들의 분산

64:0.1 (718.1) THIS is the story of the evolutionary races of Urantia from the days of Andon and Fonta, almost one million years ago, down through the times of the Planetary Prince to the end of the ice age. 이 글은 거의 100만 년 전, 안돈과 폰타의 시대로부터, 행성영주의 시대를 거쳐, 빙하기가 끝나는 때까지 지구(유란시아)의 진화적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64:0.2 (718.2) The human race is almost one million years old, and the first half of its story roughly corresponds to the pre-Planetary Prince days of Urantia. The latter half of the history of mankind begins at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and the appearance of the six colored races and roughly corresponds to the period commonly regarded as the Old Stone Age. 인류는 거의 100만 년에 이르고 있으며,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지구(유란시아)의 행성영주 시대 이전에 거의 해당합니다. 인류의 역사 후반부는 행성영주의 도착과 여섯 가지 유색 종족들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고, 보통 구석기시대로 간주되는 시기에 대체적으로 해당합니다.

1. The Andonic Aborigines 안돈의-원주민들

64:1.1 (718.3) Primitive man made his evolutionary appearance on earth a little less than one million years ago, and he had a vigorous experience. He instinctively sought to escape the danger of mingling with the inferior simian tribes. But he could not migrate eastward because of the arid Tibetan land elevations, 30,000 feet above sea level; neither could he go south nor west because of the expanded Mediterranean Sea, which then extended eastward to the Indian Ocean; and as he went north, he encountered the advancing ice. But even when further migration was blocked by the ice, and though the dispersing tribes became increasingly hostile, the more intelligent groups never entertained the idea of going southward to live among their hairy tree-dwelling cousins of inferior intellect. 원시인은 1백만 년 전보다 조금 안 되어 지구에 진화로 출현했으며, 격렬한 체험을 겪었습니다. 그는 열등한 유인원 종족들과 섞이는 위험을 피하려고 본능적으로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수면에서 3,000피트(9,114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는 건조한 티베트 고지 때문에 동쪽으로 이주할 수 없었습니다. 지중해가 확장되어 있어서 남쪽이나 서쪽으로도 갈 수 없었는데, 그 당시에 지중해는 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가면서, 그는 전진하는 빙판과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인 이주(移住)가 빙판에 막혔고, 분산되는 종족들이 점점 더 호전적이 되어갔지만, 좀 더 지능적인 집단들은, 털이 많고 나무 위에서 사는 열등한 지성의 친족들과 함께 살려고 남쪽으로 갈 생각을 결코 품지 않았습니다.

64:1.2 (718.4) Many of man’s earliest religious emotions grew out of his feeling of helplessness in the shut-in environment of this geographic situation — mountains to the right, water to the left, and ice in front. But these progressive Andonites would not turn back to their inferior tree-dwelling relatives in the south. 사람이 가장 초기에 지닌 대부분의 종교적 감정은 이러한 지형적 상황 – 오른 쪽에는 산들이, 왼쪽으로는 물, 그리고 앞은 빙판으로 갇힌 환경에서 느낀 무력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진보하는 이 안돈-사람들은 남쪽에서 나무 위에 살고 있는 열등한 그들의 친척들에게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64:1.3 (718.5) These Andonites avoided the forests in contrast with the habits of their nonhuman relatives. In the forests man has always deteriorated; human evolution has made progress only in the open and in the higher latitudes. The cold and hunger of the open lands stimulate action, invention, and resourcefulness. While these Andonic tribes were developing the pioneers of the present human race amidst the hardships and privations of these rugged northern climes, their backward cousins were luxuriating in the southern tropical forests of the land of their early common origin. 이 안돈-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친척들의 관습들과는 반대로 숲을 피하였습니다. 숲 속에서 인간은 항상 퇴보하였고; 인간 진화는 오로지 개방된 고지대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개활지의 추위와 굶주림은 행위와 발명, 그리고 기략(機略)을 자극합니다. 이 안돈의-부족들이 이렇게 어려운 북쪽 풍토에서 고난과 궁핍 가운데 현 인류의 개척자들로 발전되어가는 반면에, 그들의 퇴보하는 사촌들은 초기 공통적 기원의 땅에 있는 남부 열대림에서 사치스럽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64:1.4 (718.6) These events occurred during the times of the third glacier, the first according to the reckoning of geologists. The first two glaciers were not extensive in northern Europe. 이러한 사건들은 제 3 빙하기, 지질학자들의 계산에 제 1빙하기로 알고 있는 기간에 발생했습니다. 처음의 두 빙하는 북유럽까지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64:1.5 (718.7) During most of the ice age England was connected by land with France, while later on Africa was joined to Europe by the Sicilian land bridge. At the time of the Andonic migrations there was a continuous land path from England in the west on through Europe and Asia to Java in the east; but Australia was again isolated, which further accentuated the development of its own peculiar fauna. 대부분의 빙하기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아프리카는 나중에 시실리 육지 다리로 유럽에 붙어 있었습니다. 안돈 사람들이 이주하던 시기에, 서쪽 잉글랜드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동쪽 자바까지 계속된 육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는 다시 고립되었고, 그 자체의 독특한 동물 군의 발전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64:1.6 (719.1) 950,000 years ago the descendants of Andon and Fonta had migrated far to the east and to the west. To the west they passed over Europe to France and England. In later times they penetrated eastward as far as Java, where their bones were so recently found — the so-called Java man — and then journeyed on to Tasmania. 950,000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후손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멀리 이주하였습니다. 서쪽으로, 그들은 유럽을 지나 프랑스와 잉글랜드까지 이르렀습니다. 후대에 그들은 동쪽으로 자바까지 침투하였으며, 거기에서는 자바인으로 불리는 그들의 뼈가 아주 최근에 발견되었으며, 그 후에는 타스매니아까지 계속 여행하였습니다.

64:1.7 (719.2) The groups going west became less contaminated with the backward stocks of mutual ancestral origin than those going east, who mingled so freely with their retarded animal cousins. These unprogressive individuals drifted southward and presently mated with the inferior tribes. Later on, increasing numbers of their mongrel descendants returned to the north to mate with the rapidly expanding Andonic peoples, and such unfortunate unions unfailingly deteriorated the superior stock. Fewer and fewer of the primitive settlements maintained the worship of the Breath Giver. This early dawn civilization was threatened with extinction. 서쪽으로 간 그룹들은, 열등한 동물 사촌들과 매우 자유롭게 혼합된,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들보다, 공동 선조로부터 기원된 퇴보된 종족들에 의해서 훨씬 덜 오염되었습니다. 진보되지 못한 이러한 개인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이내 열등한 부족들과 짝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증가된 혼혈 후손들이 북쪽으로 돌아가, 빠르게 확장하는 안돈의 민족들과 짝을 지었고, 그러한 유감스러운 연합으로 우월한 혈통들이 어김없이 저하되었습니다. 원시 정착민들 중에서 호흡을 주신 분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문명의 여명은 소멸될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64:1.8 (719.3) And thus it has ever been on Urantia. Civilizations of great promise have successively deteriorated and have finally been extinguished by the folly of allowing the superior freely to procreate with the inferior. 그리고 그러한 일은 지구(유란시아)에서 계속 되었습니다. 위대한 약속을 지닌 문명이 연속적으로 저하되었고, 우월한 자들을 열등한 자들과 자유롭게 자손을 낳도록 허락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마침내 소멸되었습니다.

2. The Foxhall Peoples 폭스홀 민족

64:2.1 (719.4) 900,000 years ago the arts of Andon and Fonta and the culture of Onagar were vanishing from the face of the earth; culture, religion, and even flintworking were at their lowest ebb. 900,000년 전, 안돈과 폰타의 예술과 오나가의 문화는 지구 표면에서 사라지고 있었으며, 문화와 종교 그리고 심지어는 부싯돌 사용도 가장 낮은 쇠퇴기에 이르렀습니다.

64:2.2 (719.5) These were the times when large numbers of inferior mongrel groups were arriving in England from southern France. These tribes were so largely mixed with the forest apelike creatures that they were scarcely human. They had no religion but were crude flintworkers and possessed sufficient intelligence to kindle fire. 이 때, 많은 수의 열등한 혼혈 집단들이 프랑스 남쪽으로부터 잉글랜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부족들은 원숭이 같은 피조물들과 숲에서 대부분 섞여서 그들은 거의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없었지만, 미숙하나마 부싯돌을 다룰 수 있었고, 불을 붙이기에 충분한 지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64:2.3 (719.6) They were followed in Europe by a somewhat superior and prolific people, whose descendants soon spread over the entire continent from the ice in the north to the Alps and Mediterranean in the south. These tribes are the so-called Heidelberg race. 유럽에 그들을 뒤따라, 어느 정도 우수하고 다산(多産)하는 민족이 들어왔는데, 그들의 후손은 북쪽의 빙하 지대로부터 남쪽의 알프스와 지중해 지역까지 곧 퍼졌습니다. 이 부족들이 소위 하이델베르크 인종입니다.

64:2.4 (719.7) During this long period of cultural decadence the Foxhall peoples of England and the Badonan tribes northwest of India continued to hold on to some of the traditions of Andon and certain remnants of the culture of Onagar. 문화가 퇴보하는 이 오랜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폭스홀 민족과 인도 북서쪽의 바도난 부족들은, 얼마간의 안돈의 전통들과 오나가의 문화 중 남아있는 어떤 것들을 계속 간직했습니다.

64:2.5 (719.8) The Foxhall peoples were farthest west and succeeded in retaining much of the Andonic culture; they also preserved their knowledge of flintworking, which they transmitted to their descendants, the ancient ancestors of the Eskimos. 폭스홀 민족은 서쪽으로 가장 멀리 있었고 안돈 문화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부싯돌을 다루는 그들의 지식을 보존했고, 이것을 자신들의 후손, 즉 에스키모인의 고대 선조들에게 전수(傳授)하였습니다.

64:2.6 (719.9) Though the remains of the Foxhall peoples were the last to be discovered in England, these Andonites were really the first human beings to live in those regions. At that time the land bridge still connected France with England; and since most of the early settlements of the Andon descendants were located along the rivers and seashores of that early day, they are now under the waters of the English Channel and the North Sea, but some three or four are still above water on the English coast. 폭스홀 민족의 유물이 잉글랜드에서 마지막에 발견되었다고 해도, 이 안돈-사람들이 실제로 그 지역들에서 살았던 최초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여전히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안돈 후손들이 살았던 대부분의 초기 정착지들은 고대의 강변과 해안선을 따라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정착지)들은 지금 잉글랜드 해협과 북해(北海)의 물 밑에 있지만, 서너 개 정도는 잉글랜드 해안에서 물 위에 여전히 있습니다.

64:2.7 (720.1) Many of the more intelligent and spiritual of the Foxhall peoples maintained their racial superiority and perpetuated their primitive religious customs. And these people, as they were later admixed with subsequent stocks, journeyed on west from England after a later ice visitation and have survived as the present-day Eskimos. 폭스홀 민족 중 좀 더 지능적이고 영적인 다수(多數)는 인종적 우월성을 유지하였고, 자신들의 원시 종교 관습들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족들과 후일에 섞이게 되어, 나중에 빙하가 찾아온 후 잉글랜드에서 서쪽으로 여행하였으며, 오늘날 에스키모인들로 살아남았습니다.

3. The Badonan Tribes 바도난 부족들

64:3.1 (720.2) Besides the Foxhall peoples in the west, another struggling center of culture persisted in the east. This group was located in the foothills of the northwestern Indian highlands among the tribes of Badonan, a great-great-grandson of Andon. These people were the only descendants of Andon who never practiced human sacrifice. 서쪽에 있는 폭스홀 민족을 제외하고, 분투하는 또 다른 문화의 중심이 동쪽에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단은 안돈의 고손(高孫, 먼 후손), 바도난의 부족들 중에서 인도의 북서쪽 고원의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민족은 인간 제물을 바치지 않았던 유일한 안돈의 후손들이었습니다.

64:3.2 (720.3) These highland Badonites occupied an extensive plateau surrounded by forests, traversed by streams, and abounding in game. Like some of their cousins in Tibet, they lived in crude stone huts, hillside grottoes, and semiunderground passages. 고지대의 이 바도난-사람들은 광활한 고원을 차지했는데, 그것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천들이 가로질렀으며, 사냥감이 풍부했습니다. 그들은, 티베트에 있는 그들의 어떤 사촌들처럼, 천연 암석 오두막, 산 중턱에 있는 동굴들 그리고 반(半)지하 통로에서 살았습니다.

64:3.3 (720.4) While the tribes of the north grew more and more to fear the ice, those living near the homeland of their origin became exceedingly fearful of the water. They observed the Mesopotamian peninsula gradually sinking into the ocean, and though it emerged several times, the traditions of these primitive races grew up around the dangers of the sea and the fear of periodic engulfment. And this fear, together with their experience with river floods, explains why they sought out the highlands as a safe place in which to live. 북쪽의 부족들은 빙하를 점점 더 두려워한 반면에, 그들이 기원된 고향 근처에 사는 그 부족들은 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반도가 서서히 대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것이 몇 차례 솟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원시 종족들의 전통은 바다의 위험과 주기적인 침수의 두려움에 관하여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강물의 범람에 대한 경험과 함께, 왜 그들이 살기에 안전한 장소로써 고지(高地)를 찾았는가를 설명합니다.

64:3.4 (720.5) To the east of the Badonan peoples, in the Siwalik Hills of northern India, may be found fossils that approach nearer to transition types between man and the various prehuman groups than any others on earth. 바도난 민족의 동쪽, 인도 북부의 시왈릭 언덕에서, 땅의 다른 어떤 곳들보다 더욱 사람과 다양한 인간-이전(以前) 집단들 사이에 있는 과도기 유형에 가까이 근접한 화석들이 발견될 것입니다.

64:3.5 (720.6) 850,000 years ago the superior Badonan tribes began a warfare of extermination directed against their inferior and animalistic neighbors. In less than one thousand years most of the borderland animal groups of these regions had been either destroyed or driven back to the southern forests. This campaign for the extermination of inferiors brought about a slight improvement in the hill tribes of that age. And the mixed descendants of this improved Badonite stock appeared on the stage of action as an apparently new people — the Neanderthal race. 850,000년 전에, 우수한 바도난 부족들은 열등하고 동물적인 이웃들에 대항하여 멸종시키는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1,000년이 못되어, 이 지역의 접경지대에 있던 대부분의 동물 집단들은 멸종되거나 남쪽 숲속으로 밀려갔습니다. 열등한 종족들을 멸종시키는 이 전쟁은 그 시대에 언덕에서 살던 부족들에게 약간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향상된 이 바도난 사람 혈통이 섞인 후손들은 분명히 새로운 민족─네안데르탈인(人)─으로서 활동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4. The Neanderthal Races 네안데르탈인들

64:4.1 (720.7) The Neanderthalers were excellent fighters, and they traveled extensively. They gradually spread from the highland centers in northwest India to France on the west, China on the east, and even down into northern Africa. They dominated the world for almost half a million years until the times of the migration of the evolutionary races of color. 네안데르탈인들은 뛰어난 전사(戰士)들이었고, 먼 지역까지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점차 인도 북서쪽의 고원 중심지로부터 퍼져나가서, 서쪽으로는 프랑스,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심지어 밑으로는 아프리카 북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화하는 유색 인종들이 이주하는 시기까지, 거의 500,0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였습니다.

64:4.2 (720.8) 800,000 years ago game was abundant; many species of deer, as well as elephants and hippopotamuses, roamed over Europe. Cattle were plentiful; horses and wolves were everywhere. The Neanderthalers were great hunters, and the tribes in France were the first to adopt the practice of giving the most successful hunters the choice of women for wives. 800,000년 전에는, 사냥감들이 풍부했습니다. 코끼리들과 하마들 뿐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슴이 유럽을 돌아다녔습니다. 가축이 풍성했고, 말과 이리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뛰어난 사냥꾼들이었고, 프랑스에 있는 부족들은 가장 성공한 사냥꾼들에게 여인들 중에서 아내 선택권을 주는 관례를 처음으로 채택하였습니다.

64:4.3 (721.1) The reindeer was highly useful to these Neanderthal peoples, serving as food, clothing, and for tools, since they made various uses of the horns and bones. They had little culture, but they greatly improved the work in flint until it almost reached the levels of the days of Andon. Large flints attached to wooden handles came back into use and served as axes and picks. 이 네안데르탈 사람들에게 순록은 먹거리와 의복과 연장으로 매우 유용했는데, 그들은 뿔과 뼈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문화가 없었지만, 부싯돌 솜씨는 안돈 시절의 수준에 거의 이를 때까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나무 손잡이에 매단 큰 부싯돌이 다시 사용되었고 도끼와 곡괭이 역할을 하였습니다.

64:4.4 (721.2) 750,000 years ago the fourth ice sheet was well on its way south. With their improved implements the Neanderthalers made holes in the ice covering the northern rivers and thus were able to spear the fish which came up to these vents. Ever these tribes retreated before the advancing ice, which at this time made its most extensive invasion of Europe. 750,000년 전에, 네 번째 빙상이 남쪽으로 상당히 진행하였습니다. 개량된 도구들을 가지고, 네안데르탈인들은 북쪽의 강을 덮고 있는 얼음에 구멍을 뚫고 이 구멍으로 올라오는 물고기들을 창으로 찌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 부족들은 확장되는 빙하 앞에서 물러났는데, 이 무렵에 빙하는 유럽을 광범위하게 침공했습니다.

64:4.5 (721.3) In these times the Siberian glacier was making its southernmost march, compelling early man to move southward, back toward the lands of his origin. But the human species had so differentiated that the danger of further mingling with its nonprogressive simian relatives was greatly lessened. 이 시대에, 시베리아 빙하는 가장 남쪽까지 행진하여 초기 인간들을 남쪽으로 몰아 인간의 기원된 땅으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종족들은 매우 분화되어 진보하지 못한 유인원 친척들과 더 이상 혼합될 위험성은 현저히 줄었습니다.

64:4.6 (721.4) 700,000 years ago the fourth glacier, the greatest of all in Europe, was in recession; men and animals were returning north. The climate was cool and moist, and primitive man again thrived in Europe and western Asia. Gradually the forests spread north over land which had been so recently covered by the glacier. 700,000년 전에, 유럽에서 가장 컸던 4차 빙하가 퇴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동물들은 북쪽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기후는 서늘하고 습기가 있었으며, 원시인들은 유럽과 서(西)아시아에서 다시 번성하였습니다. 아주 최근에 빙하로 덮여 있었던 땅 위 북쪽으로 점차 숲이 퍼졌습니다.

64:4.7 (721.5) Mammalian life had been little changed by the great glacier. These animals persisted in that narrow belt of land lying between the ice and the Alps and, upon the retreat of the glacier, again rapidly spread out over all Europe. There arrived from Africa, over the Sicilian land bridge, straight-tusked elephants, broad-nosed rhinoceroses, hyenas, and African lions, and these new animals virtually exterminated the saber-toothed tigers and the hippopotamuses. 포유류 생명은 큰 빙하로 거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동물들은 빙하와 알프스 사이에 놓인 좁은 띠 모양의 지대에서 버티었고, 빙하가 물러나자 유럽 전역에 다시 급속도로 퍼졌습니다. 아프리카로부터 시칠리아 육로 다리 위로 곧은 어금니가 있는 코끼리들, 코가 넓은 코뿔소, 하이에나, 그리고 아프리카 사자들이 그곳에 도착했고, 새로운 이 동물들은 검치호(劍齒虎, 사브르 모양의 송곳니가 있는 호랑이)들과 하마들을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64:4.8 (721.6) 650,000 years ago witnessed the continuation of the mild climate. By the middle of the interglacial period it had become so warm that the Alps were almost denuded of ice and snow. 650,000년 전에, 온화한 기후가 계속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간빙기(間氷期)의 중간에 기온이 매우 따뜻해져서 알프스의 얼음과 눈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64:4.9 (721.7) 600,000 years ago the ice had reached its then northernmost point of retreat and, after a pause of a few thousand years, started south again on its fifth excursion. But there was little modification of climate for fifty thousand years. Man and the animals of Europe were little changed. The slight aridity of the former period lessened, and the alpine glaciers descended far down the river valleys. 600,000년 전에, 빙판은 북쪽 가장 먼 지점까지 물러갔고, 수천 년 동안 멈추었다가, 다섯 번째 출격이 다시 남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50,000년 동안 기후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도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기(前期)에 있던 약간의 건조함이 줄었고, 고산(高山)지대의 빙하들은 강물이 있는 계곡을 따라 멀리까지 내려왔습니다.

64:4.10 (721.8) 550,000 years ago the advancing glacier again pushed man and the animals south. But this time man had plenty of room in the wide belt of land stretching northeast into Asia and lying between the ice sheet and the then greatly expanded Black Sea extension of the Mediterranean. 550,000년 전에, 진행하는 빙하는 사람과 동물들을 다시 남쪽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람은 북동쪽으로 아시아로 뻗어 넓은 띠 모양의 땅에서 풍성한 여지(장소 餘地)를 지녔는데, 빙하 지대와 그 때 지중해 지역에 크게 확장되어 있었던 흑해 지역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64:4.11 (721.9) These times of the fourth and fifth glaciers witnessed the further spread of the crude culture of the Neanderthal races. But there was so little progress that it truly appeared as though the attempt to produce a new and modified type of intelligent life on Urantia was about to fail. For almost a quarter of a million years these primitive peoples drifted on, hunting and fighting, by spells improving in certain directions, but, on the whole, steadily retrogressing as compared with their superior Andonic ancestors. 이러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빙하기에, 네안데르탈 인종들의 미개한 문화가 더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진보가 없어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새롭게 변경된 유형의 지능적 생명을 만들려는 시도가 정말로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의 250,000년 동안, 이 원시 민족들은 떠돌아다니며 사냥과 싸움을 하였고, 끊임없이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의 우수한 안돈의-조상들과 비교해서 꾸준히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64:4.12 (721.10) During these spiritually dark ages the culture of superstitious mankind reached its lowest levels. The Neanderthalers really had no religion beyond a shameful superstition. They were deathly afraid of clouds, more especially of mists and fogs. A primitive religion of the fear of natural forces gradually developed, while animal worship declined as improvement in tools, with abundance of game, enabled these people to live with lessened anxiety about food; the sex rewards of the chase tended greatly to improve hunting skill. This new religion of fear led to attempts to placate the invisible forces behind these natural elements and culminated, later on, in the sacrificing of humans to appease these invisible and unknown physical forces. And this terrible practice of human sacrifice has been perpetuated by the more backward peoples of Urantia right on down to the twentieth century. 영적으로 어두운 이 시대에, 미신에 사로잡힌 인류 문화는 가장 낮은 차원에 도달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실제로 치욕적인 미신 이상(以上)의 아무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름, 특히 옅은 안개와 짙은 안개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했습니다. 자연의 힘들을 두려워하는 원시 종교가 점차 발전하였고, 반면에 동물숭배는 도구들이 발달되면서 감소하였는데, 먹이가 풍성하여, 이 사람들이 양식 걱정을 덜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냥에 대한 성(性)적 보상으로 수렵 기술이 크게 개선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이 새로운 종교는 이들 자연 요소들 뒤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을 달래려는 시도로 이끌었고, 나중에는 이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未知)의 물리적 힘들을 진정시키려고 사람을 희생 제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인간 희생 제물의 이 끔찍한 관례는, 지구(유란시아)의 좀 더 뒤떨어진 사람들에 의해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습니다.

64:4.13 (722.1) These early Neanderthalers could hardly be called sun worshipers. They rather lived in fear of the dark; they had a mortal dread of nightfall. As long as the moon shone a little, they managed to get along, but in the dark of the moon they grew panicky and began the sacrifice of their best specimens of manhood and womanhood in an effort to induce the moon again to shine. The sun, they early learned, would regularly return, but the moon they conjectured only returned because they sacrificed their fellow tribesmen. As the race advanced, the object and purpose of sacrifice progressively changed, but the offering of human sacrifice as a part of religious ceremonial long persisted. 초기의 이 네안데르탈인들은 거의 태양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두움을 두려워하며 살았으며, 밤이 오는 것을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달이 조금 비치는 동안에는 그런 대로 지냈지만, 달이 어두워지면 공포에 사로잡혀, 달이 다시 비치도록 유도하려는 노력으로 남녀(男女) 중 가장 나은 표본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태양이 정기적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배웠지만; 달은 오로지 자기 동료 부족민을 희생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고 추측하였습니다. 그 인종이 진보함에 따라, 희생 제물의 대상과 목적이 점차 바뀌었지만, 종교 예식의 일부로서 인간을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5. Origin of the Colored Races 유색 인종들의 기원

64:5.1 (722.2) 500,000 years ago the Badonan tribes of the northwestern highlands of India became involved in another great racial struggle. For more than one hundred years this relentless warfare raged, and when the long fight was finished, only about one hundred families were left. But these survivors were the most intelligent and desirable of all the then living descendants of Andon and Fonta. 500,000년 전에, 인도 북서쪽 고지대에 사는 바도난 부족들은 또 하나의 커다란 인종적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이 전쟁은 1백 년 이상 맹위를 떨쳤으며, 오랜 싸움이 끝났을 때, 약 1백 가구들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생존자들은 당시에 살고 있던 안돈과 폰타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가장 지능이 높고 바람직했습니다.

64:5.2 (722.3) And now, among these highland Badonites there was a new and strange occurrence. A man and woman living in the northeastern part of the then inhabited highland region began suddenly to produce a family of unusually intelligent children. This was the Sangik family, the ancestors of all of the six colored races of Urantia. 그리고 이 때, 고지대에 사는 이 바도난-사람들 가운데 새롭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람이 거주하는 고지대의 북동쪽 지역에 살던 한 남자와 여자가 갑자기 유별나게 지능이 높은 자녀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산긱 가족이었고, 지구(유란시아)의 여섯 유색 인종들의 조상들이었습니다.

64:5.3 (722.4) These Sangik children, nineteen in number, were not only intelligent above their fellows, but their skins manifested a unique tendency to turn various colors upon exposure to sunlight. Among these nineteen children were five red, two orange, four yellow, two green, four blue, and two indigo. These colors became more pronounced as the children grew older, and when these youths later mated with their fellow tribesmen, all of their offspring tended toward the skin color of the Sangik parent. 이들 산긱 자녀들은 19명이었는데, 동료들보다 지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부가 태양빛에 노출되자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독특한 성향을 나타냈습니다. 이 19명의 아이들 중에 적색이 5명, 오렌지색 2명, 황색 4명, 녹색 2명, 청색 4명, 그리고 남색이 2명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 색깔들이 더 뚜렷해졌는데, 이 젊은이들이 나중에 동료 부족들과 결혼하게 되자, 그들의 자손은 모두 산긱 부모의 피부색을 따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64:5.4 (722.5) And now I interrupt the chronological narrative, after calling attention to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at about this time, while we separately consider the six Sangik races of Urantia. 그리고 이제 나는 연대순으로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이 무렵에 도착한 행성 왕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후, 지구(유란시아)의 6 산긱 인종들을 따로따로 검토합니다.

6. The Six Sangik Races of Urantia 유란시아의 여섯 산긱 인종

64:6.1 (722.6) On an average evolutionary planet the six evolutionary races of color appear one by one; the red man is the first to evolve, and for ages he roams the world before the succeeding colored races make their appearance. The simultaneous emergence of all six races on Urantia, and in one family, was most unusual. 보통 진화하는 행성에서는, 진화하는 6 유색 인종이 하나씩 나타납니다. 홍인(紅人)이 첫째로 진화하는데, 연이어 유색인종들이 출현하기까지, 그가 여러 세대동안 세상에 돌아다닙니다. 지구(유란시아)에서 모든 6 인종들이 동시에 한 가정에서 출현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64:6.2 (723.1) The appearance of the earlier Andonites on Urantia was also something new in Satania. On no other world in the local system has such a race of will creatures evolved in advance of the evolutionary races of color. 지구(유란시아)에 일찍부터 안돈 사람이 출현한 것도 사타니아에서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지역 체계의 어떤 세상에서도, 그런 의지 창조물 인종이 진화하는 유색 인종에 앞서서 진화하지 않습니다.

64:6.3 (723.2) 1. The red man. These peoples were remarkable specimens of the human race, in many ways superior to Andon and Fonta. They were a most intelligent group and were the first of the Sangik children to develop a tribal civilization and government. They were always monogamous; even their mixed descendants seldom practiced plural mating. 홍인. 이 민족은 인류에서 주목할 만한 종(種)들로서 여러 면에서 안돈과 폰타보다 우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지능적인 집단으로, 산긱 자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부족 문명과 정부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항상 일부일처(一夫一妻)제였으며, 그들의 혼합된 후손들도 거의 복수(複數)로 짝을 짓지 않았습니다.

64:6.4 (723.3) In later times they had serious and prolonged trouble with their yellow brethren in Asia. They were aided by their early invention of the bow and arrow, but they had unfortunately inherited much of the tendency of their ancestors to fight among themselves, and this so weakened them that the yellow tribes were able to drive them off the Asiatic continent. 후일 그들은 아시아에서 황인 형제들과 심각한 장기간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활과 화살을 발명하여 도움을 받았지만, 불행히도 같은 종족끼리 싸우는 선조들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았고, 이것으로 그들이 약화되자, 황인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64:6.5 (723.4) About eighty-five thousand years ago the comparatively pure remnants of the red race went en masse across to North America, and shortly thereafter the Bering land isthmus sank, thus isolating them. No red man ever returned to Asia. But throughout Siberia, China, central Asia, India, and Europe they left behind much of their stock blended with the other colored races. 약 85,000년 전에, 비교적 순수하게 남아있던 홍인종이 한꺼번에 북아메리카로 건너갔으며, 그 직후에 베링 지역의 지협이 침몰하여, 그들은 고립되었습니다. 아시아로 돌아간 홍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유럽 전역에 그들은 다른 유색인종들과 섞인 자신들의 혈통을 많이 남겼습니다.

64:6.6 (723.5) When the red man crossed over into America, he brought along much of the teachings and traditions of his early origin. His immediate ancestors had been in touch with the later activities of the world headquarters of the Planetary Prince. But in a short time after reaching the Americas, the red men began to lose sight of these teachings, and there occurred a great decline in intellectual and spiritual culture. Very soon these people again fell to fighting so fiercely among themselves that it appeared that these tribal wars would result in the speedy extinction of this remnant of the comparatively pure red race. 홍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때, 자기들 초기 기원의 가르침과 전통들 대부분을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의 직계 조상들은 행성 왕자가 있는 세계 본부의 후기 활동들과 접촉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들에 도착한 직후, 홍인들은 이 가르침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고, 지적·영적 문화에서 크게 쇠퇴하였습니다. 바로 곧 이 민족은 다시 자기들끼리 너무 격렬히 싸움에 빠졌고, 이러한 부족 전쟁의 결과, 비교적 순수하게 남아있던 이 홍인종들은 급격히 멸종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64:6.7 (723.6) Because of this great retrogression the red men seemed doomed when, about sixty-five thousand years ago, Onamonalonton appeared as their leader and spiritual deliverer. He brought temporary peace among the American red men and revived their worship of the “Great Spirit.” Onamonalonton lived to be ninety-six years of age and maintained his headquarters among the great redwood trees of California. Many of his later descendants have come down to modern times among the Blackfoot Indians. 이 엄청난 쇠퇴로 홍인들이 파멸된 듯이 보였던 약 65,000년 전에, 오나모나론톤이 그들의 지도자와 영적 구원자로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 일시적 평화를 가져왔으며, “위대한 영”을 경배하도록 부활시켰습니다. 오나모나론톤은 96세까지 살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커다란 미국 삼나무(세쿼이아) 숲 속에 본부를 유지했습니다. 후일 대부분의 그의 후손들은 블랙푸트 인디언 가운데 현대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64:6.8 (723.7) As time passed, the teachings of Onamonalonton became hazy traditions. Internecine wars were resumed, and never after the days of this great teacher did another leader succeed in bringing universal peace among them. Increasingly the more intelligent strains perished in these tribal struggles; otherwise a great civilization would have been built upon the North American continent by these able and intelligent red men. 시간이 지나자,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들은 막연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서로 죽이는 전쟁이 다시 계속되었고, 이 위대한 선생의 시절 이후로 다른 지도자는 그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광범위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 부족 투쟁으로 훨씬 지적인 혈통들이 점점 더 소멸되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 유능하고 총명한 홍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대한 문명을 세웠을 것입니다.

64:6.9 (723.8) After crossing over to America from China, the northern red man never again came in contact with other world influences (except the Eskimo) until he was later discovered by the white man. It was most unfortunate that the red man almost completely missed his opportunity of being upstepped by the admixture of the later Adamic stock. As it was, the red man could not rule the white man, and he would not willingly serve him. In such a circumstance, if the two races do not blend, one or the other is doomed. 중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후 북부의 홍인들은, 나중에 백인들이 발견할 때까지, 에스키모를 제외하고 다른 세계의 영향들과 다시는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홍인들이 나중에 아담 혈통과 결합하여 증진될 기회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홍인들은 백인들을 지배할 수 없었으며, 기꺼이 섬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인종들이 섞이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는 망합니다.

64:6.10 (723.9) 2. The orange man. The outstanding characteristic of this race was their peculiar urge to build, to build anything and everything, even to the piling up of vast mounds of stone just to see which tribe could build the largest mound. Though they were not a progressive people, they profited much from the schools of the Prince and sent delegates there for instruction. 주황인. 이 인종의 뚜렷한 특징은 어떤 것이나 모든 것을 건축하려는 특이한 충동, 심지어 어느 부족이 가장 큰 언덕을 쌓을 수 있는지 단지 보려고, 돌로 만든 거대한 언덕을 쌓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행성) 왕자의 학교들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고, 교육을 받으려고 대표들을 파견했습니다.

64:6.11 (724.1) The orange race was the first to follow the coast line southward toward Africa as the Mediterranean Sea withdrew to the west. But they never secured a favorable footing in Africa and were wiped out of existence by the later arriving green race. 주황인종은 지중해가 서쪽으로 물러갈 때 아프리카를 향하여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처음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아프리카에서 유리한 발판을 확보하지 못했고, 나중에 도착한 녹색인종에 의해 멸종으로 파산되었습니다.

64:6.12 (724.2) Before the end came, this people lost much cultural and spiritual ground. But there was a great revival of higher living as a result of the wise leadership of Porshunta, the master mind of this unfortunate race, who ministered to them when their headquarters was at Armageddon some three hundred thousand years ago. 종말이 오기 전, 이 민족은 대부분의 문화적·영적 토대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인종은 포슌타의 현명한 지도력의 결과, 높은 생활수준으로의 커다란 부흥이 있었는데, 그는 불행한 이 종족의 주主(선생) 마음이었고, 약 300,000년 전에 그들의 본부가 아마겟돈에 있을 때 그들을 섬겼습니다.

64:6.13 (724.3) The last great struggle between the orange and the green men occurred in the region of the lower Nile valley in Egypt. This long-drawn-out battle was waged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nd at its close very few of the orange race were left alive. The shattered remnants of these people were absorbed by the green and by the later arriving indigo men. But as a race the orange man ceased to exist about one hundred thousand years ago. 주황인들과 녹색인들 사이에 최후의 거대한 투쟁이 이집트의 나일 계곡 하부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래 이어진 이 전투는 거의 100년 동안 벌어졌으며, 끝났을 무렵에는 극소수의 주황인종이 살아남았습니다. 남은 이 사람들은 흩어져서, 녹색인들과 나중에 도착한 남색인들에게 흡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100,000년 전에, 인종으로서의 주황인들은 멸망했습니다.

64:6.14 (724.4) 3. The yellow man. The primitive yellow tribes were the first to abandon the chase, establish settled communities, and develop a home life based on agriculture. Intellectually they were somewhat inferior to the red man, but socially and collectively they proved themselves superior to all of the Sangik peoples in the matter of fostering racial civilization. Because they developed a fraternal spirit, the various tribes learning to live together in relative peace, they were able to drive the red race before them as they gradually expanded into Asia. 황인. 원시적 황인 부족들은 처음으로 사냥을 그만두고, 정착된 공동체를 세우고, 농업을 토대로 가정생활을 개발했습니다. 지능적으로는 홍인들보다 약간 떨어졌지만, 그들은 사회적으로, 집단으로 인종적 문명을 조성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산긱 민족들보다 우월함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은 형제우애의 정신(영)을 개발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부족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같이 지내는 방법을 배웠으며, 아시아로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자신들 앞에 있었던 홍인종들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64:6.15 (724.5) They traveled far from the influences of the spiritual headquarters of the world and drifted into great darkness following the Caligastia apostasy; but there occurred one brilliant age among this people when Singlangton, about one hundred thousand years ago, assumed the leadership of these tribes and proclaimed the worship of the “One Truth.” 그들은 세계의 영적 본부의 영향에서 떠나 멀리까지 여행하였고, 칼리가스티아 배신 이후로 극심한 암흑세계로 떠내려갔지만, 약 100,000년 전에, 싱랑톤이 이 부족들의 지도력을 맡아 “하나의 진리”를 경배하도록 선포하였을 때, 이 민족 가운데 한 번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64:6.16 (724.6) The survival of comparatively large numbers of the yellow race is due to their intertribal peacefulness. From the days of Singlangton to the times of modern China, the yellow race has been numbered among the more peaceful of the nations of Urantia. This race received a small but potent legacy of the later imported Adamic stock. 비교적 많은 숫자의 황인종들의 생존은 부족들 간에 평화를 애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싱랑톤의 시절부터 현대 중국의 시대까지, 황인종들은 지구(유란시아)에서 더 평화로운 국가들 축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인종은 후일에 유입된 아담 혈통의 유산을 적지만 강력하게 받았습니다.

64:6.17 (724.7) 4. The green man. The green race was one of the less able groups of primitive men, and they were greatly weakened by extensive migrations in different directions. Before their dispersion these tribes experienced a great revival of culture under the leadership of Fantad, some three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ago. 녹인. 녹인종들은 원시인들 중에서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들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여러 방향으로 광대하게 이주하여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흩어지기 전 약 350,000년 전에, 이 부족들은 환타드의 지도력 아래에서 커다란 문화의 부흥을 체험했습니다.

64:6.18 (724.8) The green race split into three major divisions: The northern tribes were subdued, enslaved, and absorbed by the yellow and blue races. The eastern group were amalgamated with the Indian peoples of those days, and remnants still persist among them. The southern nation entered Africa, where they destroyed their almost equally inferior orange cousins. 녹인종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의 부족들은 황인종과 청인종에게 정복당해 노예가 되어 흡수되었습니다. 동쪽 집단은 그 당시의 인도 민족들과 혼합되었고, 남은 자들은 아직까지 그들 가운데 살아남았습니다. 남쪽 종족은 아프리카로 들어갔으며, 거기에서 자신들과 거의 똑같이 열등한 주황인 사촌들을 멸망시켰습니다.

64:6.19 (724.9) In many ways both groups were evenly matched in this struggle since each carried strains of the giant order, many of their leaders being eight and nine feet in height. These giant strains of the green man were mostly confined to this southern or Egyptian nation. 여러 면에서 두 집단은 이 투쟁에서 비슷하게 겨루었는데, 왜냐하면 두 집단들 각각 거인 종류의 혈통을 지녔기 때문이며, 그들의 많은 지도자들은 키가 8피트(2.4미터)에서 9피트(2.7미터)나 되었습니다. 녹인의 이들 거인 혈통들은 대체로 이 남쪽 또는 이집트 종족에 국한되었습니다.

64:6.20 (725.1) The remnants of the victorious green men were subsequently absorbed by the indigo race, the last of the colored peoples to develop and emigrate from the original Sangik center of race dispersion. 승리한 녹인들 중 남은 자들은 나중에 남인종에게 흡수되었는데, 남인종은 인종이 분산된 최초의 상긱 중심에서 마지막으로 발전하고 이주한 유색 민족이었습니다.

64:6.21 (725.2) 5. The blue man. The blue men were a great people. They early invented the spear and subsequently worked out the rudiments of many of the arts of modern civilization. The blue man had the brain power of the red man associated with the soul and sentiment of the yellow man. The Adamic descendants preferred them to all of the later persisting colored races. 청인. 청인종들은 위대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창을 발명하였고 나중에는 현대 문명이 나은 많은 기술들의 기초를 알아냈습니다. 그 청인종들은 황인의 혼 및 정서와 관련된 홍인의 두뇌 권능을 가졌습니다. 아담의-후손들은 나중에 존속하는 모든 유색 인종들 중에서 그들을 더 선호했습니다.

64:6.22 (725.3) The early blue men were responsive to the persuasions of the teachers of Prince Caligastia’s staff and were thrown into great confusion by the subsequent perverted teachings of those traitorous leaders. Like other primitive races they never fully recovered from the turmoil produced by the Caligastia betrayal, nor did they ever completely overcome their tendency to fight among themselves. 초기의 청인종들은 왕자 칼리가스티아의 참모진이었던 선생들의 설득에 반응하였고, 나중에는 배반한 그 지도자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의해 큰 혼돈에 빠졌습니다. 다른 원시 종족들처럼, 그들은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으로 발생한 혼란에서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경향을 완전히 극복한 적도 없었습니다.

64:6.23 (725.4) About five hundred years after Caligastia’s downfall a widespread revival of learning and religion of a primitive sort — but none the less real and beneficial — occurred. Orlandof became a great teacher among the blue race and led many of the tribes back to the worship of the true God under the name of the “Supreme Chief.” This was the greatest advance of the blue man until those later times when this race was so greatly upstepped by the admixture of the Adamic stock. 칼리가스티아의 몰락 후 약 500년이 지나서, 원시 종류-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이며 유익한-의 배움과 종교의 대폭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청인종에서 올란돌프가 위대한 선생이 되어, 많은 부족들이 “최극 우두머리”라는 이름 아래 참 하나님을 다시 경배하도록 인도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이 종족이 아담의-혈통과 섞여서 크게 증진될 때까지, 청인에게 가장 큰 진보였습니다.

64:6.24 (725.5) The European researches and explorations of the Old Stone Age have largely to do with unearthing the tools, bones, and artcraft of these ancient blue men, for they persisted in Europe until recent times. The so-called white races of Urantia are the descendants of these blue men as they were first modified by slight mixture with yellow and red, and as they were later greatly upstepped by assimilating the greater portion of the violet race. 구석기시대에 대한 유럽인들의 연구와 탐사 결과가 주로 고대의 이 청인종들의 도구들과 뼈들 그리고 예술 공예품의 발굴과 관련되는 이유는 현세까지 그들이 유럽에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지구(유란시아)에서 소위 백인종들은 이 청인종들의 후손들이며, 그들은 처음에는 황인종 및 홍인종과 약간 혼합되어 수정되었고, 나중에는 보라 인종의 많은 부분과 동화되어 크게 진보되었습니다.

64:6.25 (725.6) 6. The indigo race. As the red men were the most advanced of all the Sangik peoples, so the black men were the least progressive. They were the last to migrate from their highland homes. They journeyed to Africa, taking possession of the continent, and have ever since remained there except when they have been forcibly taken away, from age to age, as slaves. 남인종. 홍인종들이 모든 산긱 민족 중에서 가장 진보되었을 때, 흑인종들은 가장 진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지막에 그들이 살던 고지대에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로 여행하여, 그 대륙을 차지했으며, 여러 시대에 걸쳐서 노예로서 강제 옮겨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그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64:6.26 (725.7) Isolated in Africa, the indigo peoples, like the red man, received little or none of the race elevation which would have been derived from the infusion of the Adamic stock. Alone in Africa, the indigo race made little advancement until the days of Orvonon, when they experienced a great spiritual awakening. While they later almost entirely forgot the “God of Gods” proclaimed by Orvonon, they did not entirely lose the desire to worship the Unknown; at least they maintained a form of worship up to a few thousand years ago. 아프리카에서 고립된 남색 민족은, 홍인들처럼, 아담 혈통의 주입으로 얻게 되는 인종 향상을 거의 또는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홀로 있었던 남인종은, 위대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던 오르보논의 시절이 올 때까지는 거의 진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르보논이 선포한 “하나님들의 하나님”을 나중에는 거의 전적으로 잊어버렸지만, 알지 못하는 분을 경배하려는 욕구를 전적으로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수천 년 전까지 경배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64:6.27 (725.8) Notwithstanding their backwardness, these indigo peoples have exactly the same standing before the celestial powers as any other earthly race. 그들의 퇴보에도 불구하고, 이 남색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다른 모든 인종들처럼 천상(天上)의 권능 앞에 아주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64:6.28 (725.9) These were ages of intense struggles between the various races, but near the headquarters of the Planetary Prince the more enlightened and more recently taught groups lived together in comparative harmony, though no great cultural conquest of the world races had been achieved up to the time of the serious disruption of this regime by the outbreak of the Lucifer rebellion. 이 기간들은 다양한 인종들 간의 격렬한 투쟁의 시대들이었지만, 행성 왕자의 본부 근처에서 더 계몽되고 더욱 최근에 가르침을 받은 집단들은 비교적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퍼의 반란이 발생하여 이 체제가 심각하게 붕괴되는 시기까지 세계 인종들은 위대한 문화적 정복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64:6.29 (726.1) From time to time all of these different peoples experienced cultural and spiritual revivals. Mansant was a great teacher of the post-Planetary Prince days. But mention is made only of those outstanding leaders and teachers who markedly influenced and inspired a whole race. With the passing of time, many lesser teachers arose in different regions; and in the aggregate they contributed much to the sum total of those saving influences which prevented the total collapse of cultural civilization, especially during the long and dark ages between the Caligastia rebellion and the arrival of Adam. 가끔 이 다른 민족들은 문화적·영적 부흥을 체험했습니다. 만산트는 행성 왕자 이후 시대에 나타난 위대한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종 전체에 확실한 영향을 주고 영감을 일으킨 그 뛰어난 지도자들만 언급합니다. 시간이 흐르자, 여러 지역들에서 작은 선생들이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문화적 문명이 완전히 붕괴하지 않도록 유익한 영향을 행사하여 총합에 공헌했는데, 특히 칼리가스티아의 반란과 아담이 도착한 사이에 놓인 길고도 어두운 시대 동안 이바지하였습니다.

64:6.30 (726.2) There are many good and sufficient reasons for the plan of evolving either three or six colored races on the worlds of space. Though Urantia mortals may not be in a position fully to appreciate all of these reasons, we would call attention to the following: 셋 또는 여섯 유색 인종들이, 공간의 세계들에서 진화하는 계획에는 유익하고 충분한 이유들이 많습니다. 지구(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이 이러한 모든 이유들을 충분히 헤아리는 처지에 이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64:6.31 (726.3) 1. Variety is indispensable to opportunity for the wide functioning of natural selection, differential survival of superior strains. 다양성은 자연선택(자연도태)의 폭넓은 작용, 즉 우월한 혈통의 차별적 생존에 필수적인 기회입니다.

64:6.32 (726.4) 2. Stronger and better races are to be had from the interbreeding of diverse peoples when these different races are carriers of superior inheritance factors. And the Urantia races would have benefited by such an early amalgamation provided such a conjoint people could have been subsequently effectively upstepped by a thoroughgoing admixture with the superior Adamic stock. The attempt to execute such an experiment on Urantia under present racial conditions would be highly disastrous. 이 다른 인종들이 우월한 유전 인자들을 보유할 때에, 다양한 민족들의 피가 섞이면, 더 강하고 우수한 인종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공동 민족이 우수한 아담의-혈통과 철저히 섞여 나중에 효과적으로 진보되었다면, 지구(유란시아)의 인종들은 그러한 초기의 이인종(異人種) 융합으로 이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인종적 조건 아래에서, 그런 실험을 지구(유란시아)에서 실행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64:6.33 (726.5) 3. Competition is healthfully stimulated by diversification of races. 경쟁은 인종들의 다양화로 인해 건강하게 자극을 받습니다.

64:6.34 (726.6) 4. Differences in status of the races and of groups within each race are essential to the development of human tolerance and altruism. 각 인종들의 상태와 각 인종 안에 있는 집단들의 차이는 인간의 관용과 이타심의 개발에 필수적입니다.

64:6.35 (726.7) 5. Homogeneity of the human race is not desirable until the peoples of an evolving world attain comparatively high levels of spiritual development. 인간 종족의 동질성은, 진화하는 세계의 민족들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영적 개발에 이를 때까지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7. Dispersion of the Colored Races 유색 인종들의 분산

64:7.1 (726.8) When the colored descendants of the Sangik family began to multiply, and as they sought opportunity for expansion into adjacent territory, the fifth glacier, the third of geologic count, was well advanced on its southern drift over Europe and Asia. These early colored races were extraordinarily tested by the rigors and hardships of the glacial age of their origin. This glacier was so extensive in Asia that for thousands of years migration to eastern Asia was cut off. And not until the later retreat of the Mediterranean Sea, consequent upon the elevation of Arabia, was it possible for them to reach Africa. 산긱 가족의 유색 후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그들이 인근 지역으로 확장할 기회를 찾는 동안에, 다섯째 빙하, 지질학 계산으로 3번째 빙하가 남쪽으로 표류하여 유럽과 아시아 위로 상당히 전진했습니다. 초기 이 유색 인종들은 자신들이 시작된 빙하기의 혹독함과 고초로 대단히 단련을 받았습니다. 이 빙하는 아시아에 널리 확장되어 수천 년 동안 동부 아시아로의 이주(移住)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가 융기된 결과, 나중에 지중해가 퇴각할 때 비로소 그들은 아프리카로 갈 수 있었습니다.

64:7.2 (726.9) Thus it was that for almost one hundred thousand years these Sangik peoples spread out around the foothills and mingled together more or less, notwithstanding the peculiar but natural antipathy which early manifested itself between the different races. 그래서 거의 10만 년 동안 이 산긱 사람들은 다른 종족들 간에 고유하지만 자연스러운 반감(反感)이 초기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구릉지 부근에 퍼져 다소 함께 섞였습니다.

64:7.3 (726.10) Between the times of the Planetary Prince and Adam, India became the home of the most cosmopolitan population ever to be found on the face of the earth. But it was unfortunate that this mixture came to contain so much of the green, orange, and indigo races. These secondary Sangik peoples found existence more easy and agreeable in the southlands, and many of them subsequently migrated to Africa. The primary Sangik peoples, the superior races, avoided the tropics, the red man going northeast to Asia, closely followed by the yellow man, while the blue race moved northwest into Europe. 행성 왕자와 아담의 시대 사이에, 인도는 지구 표면에서 일찍이 발견된 가장 국제적인 인구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혼합은 녹인, 주황인, 그리고 남인종들을 너무 많이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2차 산긱 민족들은 남부지방에서의 생활이 더 쉽고 마음에 들어서, 그들 대부분은 나중에 아프리카로 이주하였습니다. 1차 산긱 사람들, 즉 우월한 인종들은 열대 지방을 피했는데, 홍인은 아시아를 향해 북동쪽으로 갔으며, 황인들은 그 뒤를 바로 따라갔으며, 청인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64:7.4 (727.1) The red men early began to migrate to the northeast, on the heels of the retreating ice, passing around the highlands of India and occupying all of northeastern Asia. They were closely followed by the yellow tribes, who subsequently drove them out of Asia into North America. 홍인종은, 퇴각하는 빙판의 뒤를 따라, 일찍 북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인도의 고지대 부근을 지나 아시아 동북부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황인 부족들이 그들 뒤를 바로 따라갔고, 나중에 홍인들을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몰아냈습니다.

64:7.5 (727.2) When the relatively pure-line remnants of the red race forsook Asia, there were eleven tribes, and they numbered a little over seven thousand men, women, and children. These tribes were accompanied by three small groups of mixed ancestry, the largest of these being a combination of the orange and blue races. These three groups never fully fraternized with the red man and early journeyed southward to Mexico and Central America, where they were later joined by a small group of mixed yellows and reds. These peoples all intermarried and founded a new and amalgamated race, one which was much less warlike than the pure-line red men. Within five thousand years this amalgamated race broke up into three groups, establishing the civilizations respectively of Mexico, Central America, and South America. The South American offshoot did receive a faint touch of the blood of Adam. 비교적 순수한 계통의 나머지 홍인종이 아시아를 떠났을 때, 11 부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7,000명이 약간 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부족들을 따라, 혼혈 조상을 지닌 세 개의 작은 집단이 함께 갔는데, 이들 중 가장 큰 집단은 주황인과 청인들의 조합이었습니다. 이들 세 집단은 결코 홍인종과 온전히 친하게 사귀지 않았으며, 일찍이 남쪽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로 여행하였고, 거기에서 그들은 나중에 황인종과 홍인종이 혼합된 작은 집단과 합류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서로 결혼하여 새로운 혼합 인종을 세웠으며, 이 인종은 순수한 계통의 홍인종보다는 전쟁을 훨씬 더 싫어하였습니다. 5,000년 안에, 이 혼합 인종은 3 집단으로 나뉘어져,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각자의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남아메리카 분파는 희미하게 접촉된 아담의 피를 받았습니다.

64:7.6 (727.3) To a certain extent the early red and yellow men mingled in Asia, and the offspring of this union journeyed on to the east and along the southern seacoast and, eventually, were driven by the rapidly increasing yellow race onto the peninsulas and near-by islands of the sea. They are the present-day brown men. 어느 정도까지, 초기의 홍인과 황인들은 아시아에서 섞였으며, 이 연합된 후손들은 동쪽으로 여행하여 남부 해안을 따라 결국 빠르게 늘어난 황인종에게 쫓겨 반도들과 근처 바다의 섬들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오늘날의 갈색 사람들입니다.

64:7.7 (727.4) The yellow race has continued to occupy the central regions of eastern Asia. Of all the six colored races they have survived in greatest numbers. While the yellow men now and then engaged in racial war, they did not carry on such incessant and relentless wars of extermination as were waged by the red, green, and orange men. These three races virtually destroyed themselves before they were finally all but annihilated by their enemies of other races. 황인종은 동 아시아의 중앙 지역을 계속 차지했습니다. 모든 여섯 유색 인종들 중 그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황색 사람들은 가끔 인종적 전쟁을 하지만, 홍인, 녹인, 주황인들이 행했던 그런 끊임없이 잔인한 멸종의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 인종들은, 그들의 적이었던 다른 인종들에 의해 결국 거의 전멸되기 전에, 실제로 자멸(自滅)했습니다.

64:7.8 (727.5) Since the fifth glacier did not extend so far south in Europe, the way was partially open for these Sangik peoples to migrate to the northwest; and upon the retreat of the ice the blue men, together with a few other small racial groups, migrated westward along the old trails of the Andon tribes. They invaded Europe in successive waves, occupying most of the continent. 다섯째 빙하가 유럽 남부 멀리까지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긱 사람들이 북서쪽으로 이주하는 길이 일부 열렸습니다. 빙판이 물러가자, 청인들은 소수의 다른 작은 인종 집단과 함께 안돈 부족들의 옛 흔적을 따라 서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되는 물결처럼 유럽으로 쳐들어갔고, 그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64:7.9 (727.6) In Europe they soon encountered the Neanderthal descendants of their early and common ancestor, Andon. These older European Neanderthalers had been driven south and east by the glacier and thus were in position quickly to encounter and absorb their invading cousins of the Sangik tribes. 유럽에서 그들은 초기에 공통 조상이었던 안돈의 네안데르탈 후손들을 곧 마주쳤습니다. 오래된 유럽의 이 네안데르탈인들은 빙하로 인해 남쪽과 동쪽으로 밀려 있었고, 그래서 침입하는 사촌들인 산긱 부족들을 만나 곧 병합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64:7.10 (727.7) In general and to start with, the Sangik tribes were more intelligent than, and in most ways far superior to, the deteriorated descendants of the early Andonic plainsmen; and the mingling of these Sangik tribes with the Neanderthal peoples led to the immediate improvement of the older race. It was this infusion of Sangik blood, more especially that of the blue man, which produced that marked improvement in the Neanderthal peoples exhibited by the successive waves of increasingly intelligent tribes that swept over Europe from the east. 일반적으로 무엇보다도 산긱 부족들은 초기 안돈의 평원 주민들의 열등한 후손들보다 더 지능적이었고, 대부분의 면에서 그들보다 뛰어났으며, 이 산긱 부족들과 네안데르탈인들이 섞여서, 오래된 인종(네안데르탈인)은 즉시 개선되었습니다. 네안데르탈 사람들을 현저히 진보하게 만든 상긱 피, 특히 청인의 피의 이 주입은, 동쪽에서부터 유럽을 휩쓸며 늘어나는 지능적 부족들이 파도처럼 잇달아 밀려옴으로 드러났습니다.

64:7.11 (727.8) During the following interglacial period this new Neanderthal race extended from England to India. The remnant of the blue race left in the old Persian peninsula later amalgamated with certain others, primarily the yellow; and the resultant blend, subsequently somewhat upstepped by the violet race of Adam, has persisted as the swarthy nomadic tribes of modern Arabs. 뒤따르는 간빙기(間氷期)에 새로운 이 네안데르탈 인종은 잉글랜드에서 인도까지 퍼졌습니다. 옛 페르시아 반도에 남았던 청인종의 나머지는 나중에 어떤 다른 인종들, 주로 황인종과 융합하여, 섞인 결과, 나중에 어느 정도 아담의 보라 인종에 의해 증진되었으며, 현대 아랍인들 중 거무스레한 유목 부족들로 살아남았습니다.

64:7.12 (728.1) All efforts to identify the Sangik ancestry of modern peoples must take into account the later improvement of the racial strains by the subsequent admixture of Adamic blood. 현대 민족들의 산긱 조상을 확인하려는 모든 노력은, 이후에 아담의-피가 섞여 인종적 혈통이 나중에 개량되었음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64:7.13 (728.2) The superior races sought the northern or temperate climes, while the orange, green, and indigo races successively gravitated to Africa over the newly elevated land bridge which separated the westward retreating Mediterranean from the Indian Ocean. 뛰어난 인종들은 북쪽 또는 온화한 지방을 찾았던 반면에, 주황인, 녹인, 남인종들은 새롭게 융기된 육교(陸橋)를 넘어, 연속적으로 아프리카로 이끌렸는데, 그 육교는 인도양으로부터 서쪽으로 물러가는 지중해를 분리시켰습니다.

64:7.14 (728.3) The last of the Sangik peoples to migrate from their center of race origin was the indigo man. About the time the green man was killing off the orange race in Egypt and greatly weakening himself in so doing, the great black exodus started south through Palestine along the coast; and later, when these physically strong indigo peoples overran Egypt, they wiped the green man out of existence by sheer force of numbers. These indigo races absorbed the remnants of the orange man and much of the stock of the green man, and certain of the indigo tribes were considerably improved by this racial amalgamation. 인종이 기원된 중심에서 마지막으로 이주한 산긱 민족들은 남인이었습니다. 그 무렵 녹인은 이집트에서 주황인종을 절멸시켰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들도 크게 약화되었으며, 거대한 흑인의 집단적 이동(移動)이 해안을 따라 팔레스타인을 통해 남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육체적으로 강한 이 남색 민족들이 이집트에 넘쳤을 때, 그들은 순전히 수적 위력으로 녹인들을 절멸시켰습니다. 이 남인종들은 나머지 주황인과 대부분의 녹인 혈통을 흡수하였고, 이 인종 융합으로 어떤 남색 부족들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64:7.15 (728.4) And so it appears that Egypt was first dominated by the orange man, then by the green, followed by the indigo (black) man, and still later by a mongrel race of indigo, blue, and modified green men. But long before Adam arrived, the blue men of Europe and the mixed races of Arabia had driven the indigo race out of Egypt and far south on the African continent. 그래서 이집트는 처음에는 주황인에게, 그 다음에는 녹인에게, 그 뒤에는 남(흑) 인에게, 훨씬 나중에는 남인과 청인, 그리고 수정된 녹인의 혼혈 인종에 의해서 지배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유럽의 청인들과 아라비아의 혼합 인종들은 이집트에서 남인종을 아프리카 대륙 먼 남쪽으로 몰아냈습니다.

64:7.16 (728.5) As the Sangik migrations draw to a close, the green and orange races are gone, the red man holds North America, the yellow man eastern Asia, the blue man Europe, and the indigo race has gravitated to Africa. India harbors a blend of the secondary Sangik races, and the brown man, a blend of the red and yellow, holds the islands off the Asiatic coast. An amalgamated race of rather superior potential occupies the highlands of South America. The purer Andonites live in the extreme northern regions of Europe and in Iceland, Greenland, and northeastern North America. 산긱 이주가 끝나면서, 녹인종과 주황인종들은 사라졌고, 홍인은 북아메리카, 황인은 동 아시아, 청인은 유럽을 차지하고, 남인종은 아프리카로 이끌렸습니다. 인도는 2차 산긱 혼합 인종들을 품고, 홍인과 황인이 혼합된 갈색인은 아시아 해안에서 떨어진 섬들을 차지했습니다. 훨씬 뛰어난 잠재성을 지닌 융합 인종이 남아메리카의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순수한 안돈-사람들은 유럽의 북쪽 끝 지역,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북동쪽에서 살아갑니다.

64:7.17 (728.6) During the periods of farthest glacial advance the westernmost of the Andon tribes came very near being driven into the sea. They lived for years on a narrow southern strip of the present island of England. And it was the tradition of these repeated glacial advances that drove them to take to the sea when the sixth and last glacier finally appeared. They were the first marine adventurers. They built boats and started in search of new lands which they hoped might be free from the terrifying ice invasions. And some of them reached Iceland, others Greenland, but the vast majority perished from hunger and thirst on the open sea. 빙하가 가장 먼 지역까지 확장된 시기에, 극서(極西)의 안돈 부족들은 바로 바다 근처까지 밀려갔습니다. 그들은 현재 잉글랜드 섬 남쪽의 좁고 긴 땅에서 여러 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마지막 빙하가 마침내 출현했을 때, 그들을 바다로 뛰어들도록 몰아간 것은 반복되던 이 빙하 확장이라는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최초의 해양 모험가였습니다. 그들은 배를 만들었고, 무서운 얼음 침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면서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아이슬란드에, 다른 사람들은 그린란드에 도착했지만, 대부분은 망망대해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사라졌습니다.

64:7.18 (728.7) A little more than eighty thousand years ago, shortly after the red man entered northwestern North America, the freezing over of the north seas and the advance of local ice fields on Greenland drove these Eskimo descendants of the Urantia aborigines to seek a better land, a new home; and they were successful, safely crossing the narrow straits which then separated Greenland from the northeastern land masses of North America. They reached the continent about twenty-one hundred years after the red man arrived in Alaska. Subsequently some of the mixed stock of the blue man journeyed westward and amalgamated with the later-day Eskimos, and this union was slightly beneficial to the Eskimo tribes. 약 80,000년 조금 이전에, 홍인이 북아메리카의 북서쪽으로 들어간 직후, 얼어붙은 북해와 확장되는 그린란드의 지역 빙원(氷原)의 확장에 밀려서, 지구(유란시아) 원주민인 이 에스키모 후손들은 더 좋은 땅, 새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잘되어 좁은 해협을 안전히 건넜는데, 그 해협은 당시 북아메리카 북쪽 땅 덩어리에서 그린란드를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인이 알래스카에 도착한 후 약 2,100년이 지나서 그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청인의 혼합된 혈통 중 얼마가 서쪽으로 여행하여, 후일 에스키모들과 혼합되었으며, 이 연합은 에스키모 부족들보다 약간 유익했습니다.

64:7.19 (728.8) About five thousand years ago a chance meeting occurred between an Indian tribe and a lone Eskimo group on the southeastern shores of Hudson Bay. These two tribes found it difficult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but very soon they intermarried with the result that these Eskimos were eventually absorbed by the more numerous red men. And this represents the only contact of the North American red man with any other human stock down to about one thousand years ago, when the white man first chanced to land on the Atlantic coast. 약 5,000년 전에, 허드슨 만의 남동쪽 해안에서 인디언 부족과 고립된 에스키모 집단이 만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 두 부족들은 서로 교통하기가 어려웠지만, 곧 바로 그들은 서로 결혼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에스키모인들은 수가 훨씬 많은 홍인들에게 결국 흡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약 1,000년 전에 백인이 처음 대서양 해안에 우연히 상륙했을 때, 북아메리카의 홍인이 다른 인간 혈통과 만나게 된 유일한 접촉이었습니다.

64:7.20 (729.1) The struggles of these early ages were characterized by courage, bravery, and even heroism. And we all regret that so many of those sterling and rugged traits of your early ancestors have been lost to the later-day races. While we appreciate the value of many of the refinements of advancing civilization, we miss the magnificent persistency and superb devotion of your early ancestors, which oftentimes bordered on grandeur and sublimity. 이 초기 투쟁은 용기와 용맹 그리고 영웅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너희 초기 조상들의 순수하고 강건한 그 특색들 중 너무 많은 것들이 후대의 인종들에게서 사라진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진보된 문명 개선의 많은 가치들을 이해하지만, 때로는 숭고함과 웅대함에 가까웠던, 너희 초기 조상들이 보여준 장엄한 인내와 뛰어난 헌신을 그리워한다.

64:7.21 (729.2) [Presented by a Life Carrier resident on Urantia.][유란시아에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에 의하여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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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9 Relation of the Infinite Spirit to the Universe 무한 영과 우주의 관계

Paper 9

Relation of the Infinite Spirit to the Universe 무한 영과 우주의 관계

  1. Attribut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속성들
  2. The Omnipresent Spirit 전재(全在)하는 영
  3. The Universal Manipulator 우주의 조종자
  4. The Absolute Mind 절대 마음
  5. The Ministry of Mind 마음의 돌봄
  6. The Mind-Gravity Circuit 마음-중력 회로
  7. Universe Reflectivity 우주 반사(反射)
  8.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무한 영의 고유성들
    Functional family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기능적 가족

9:0.1 (98.1) A STRANGE thing occurred when, in the presence of Paradise,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unite to personalize themselves. Nothing in this eternity situation foreshadows that the Conjoint Actor would personalize as an unlimited spirituality co-ordinated with absolute mind and endowed with unique prerogatives of energy manipulation. His coming into being completes the Father’s liberation from the bonds of centralized perfection and from the fetters of personality absolutism. And this liberation is disclosed in the amazing power of the Conjoint Creator to create beings well adapted to serve as ministering spirits even to the material creatures of the subsequently evolving universes.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천국의 현존 안에서, 자신들을 고유성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연합할 때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공동 행위자는, 절대 마음과 조화를 이루고, 에너지 조종의 유일한 특권을 수여받은 무제한적 영성으로서 고유성이 구현되는 영원한 상황에서 어떤 전조(前兆)도 없었습니다. 그(공동 행위자)의 존재의 도래(到來)는 중심에 모이는 완전의 굴레와 고유성 절대성의 사슬에서부터 아버지의 해방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 해방은 나중에 진화하는 우주들에 있는 물질 창조물에게도 사역하는 영들로서 섬기도록 잘 적응하는 존재들을 창조하는 공동 창조주의 놀라운 권능으로 드러납니다.

9:0.2 (98.2) The Father is infinite in love and volition, in spiritual thought and purpose; he is the universal upholder. The Son is infinite in wisdom and truth, in spiritual expression and interpretation; he is the universal revealer. Paradise is infinite in potential for force endowment and in capacity for energy dominance; it is the universal stabilizer. The Conjoint Actor possesses unique prerogatives of synthesis, infinite capacity to co-ordinate all existing universe energies, all actual universe spirits, and all real universe intellects;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the universal unifier of the manifold energies and diverse creations which have appeared in consequence of the divine plan and the eternal purpose of the Universal Father. 아버지는 사랑과 의지, 영적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무한합니다. 그는 우주의 유지자이십니다. 아들은 지혜와 진리에 있어서, 영적 표현과 해석에 있어서 무한하며; 그는 우주 계시자이십니다. 천국은 힘의 자질-부여를 위한 잠재력과 에너지 권역을 위한 수용능력에 있어서 무한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안정자입니다. 공동 행위자는 종합하는 독특한 특권, 즉 존재하는 모든 우주 에너지들, 모든 실재적 우주 영들, 그리고 모든 실제적 우주 지성들을 조화시키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합니다. 셋째근원이며 중심은 우주 아버지의 신적 계획과 영원한 목적의 결과로써 나타난 다중 에너지들과 다양한 창조계의 우주적 통합자이십니다.

9:0.3 (98.3) The Infinite Spirit, the Conjoint Creator, is a universal and divine minister. The Spirit unceasingly ministers the Son’s mercy and the Father’s love, even in harmony with the stable, unvarying, and righteous justice of the Paradise Trinity. His influence and personalities are ever near you; they really know and truly understand you. 무한 영, 공동 행위자는 우주적이며 신적 사역자입니다. 영은 아들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나아가 천국 삼위일체의 안정되고, 변함이 없으며, 공의로운 정의(正義)와 조화롭게, 끊임없이 사역하십니다. 그의 영향과 고유성들은 항상 너희 주변에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너희를 알고 진정으로 너희를 이해하십니다.

9:0.4 (98.4) Throughout the universes the agencies of the Conjoint Actor ceaselessly manipulate the forces and energies of all space. Like the First Source and Center, the Third is responsive to both the spiritual and the material. The Conjoint Actor is the revelation of the unity of God, in whom all things consist — things, meanings, and values; energies, minds, and spirits. 우주들에 걸쳐, 공동 행위자의 대리자들은 모든 공간의 힘들과 에너지들을 끊임없이 조종합니다. 첫째근원이며 중심과 마찬가지로, 셋째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에 응답합니다. 공동 행위자는 하나님의 합일성에 대한 계시이며, 그 안에 만물 – 사물, 의미, 그리고 가치; 에너지, 마음, 그리고 영들 –이 존재합니다.

9:0.5 (98.5) The Infinite Spirit pervades all space; he indwells the circle of eternity; and the Spirit, like the Father and the Son, is perfect and changeless — absolute. 무한 영은 모든 공간에 침투해 있습니다. 그는 영원의 순환계에 거주하십니다. 그리고 영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완전하고 변함이 없으며 ─ 절대적이십니다.

1. Attribut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속성

9:1.1 (98.6)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known by many names, all designative of relationship and in recognition of function: As God the Spirit, he is the personality co-ordinate and divine equal of God the Son and God the Father. As the Infinite Spirit, he is an omnipresent spiritual influence. As the Universal Manipulator, he is the ancestor of the power-control creatures and the activator of the cosmic forces of space. As the Conjoint Actor, he is the joint representative and partnership executive of the Father-Son. As the Absolute Mind, he is the source of the endowment of intellect throughout the universes. As the God of Action, he is the apparent ancestor of motion, change, and relationship. 셋째근원이며 중심은, 모두 관계를 가리키고 기능을 인정하는 여러 이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 하나님으로서, 그는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동등한 신적 고유성이십니다. 무한 영으로서, 그는 전재(全在)하는 영적 영향력입니다. 우주 조종자로서, 그는 권능-통제 창조물들의 조상이시며 공간의 질서 우주 힘들의 활성자이십니다. 공동 행위자로서, 그는 아버지-아들의 공동 대표자이며 동반 집행자이십니다. 절대 마음으로서, 그는 우주 전반에 걸친 지성 부여의 근원입니다. 행동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동작과 변화 그리고 관계의 명백한 조상입니다.

9:1.2 (99.1) Some of the attribut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re derived from the Father, some from the Son, while still others are not observed to be actively and personally present in either the Father or the Son — attributes that can hardly be explained except by assuming that the Father-Son partnership which eternalizes the Third Source and Center consistently functions in consonance with, and in recognition of, the eternal fact of the absoluteness of Paradise. The Conjoint Creator embodies the fullness of the combined and infinite concepts of the First and Second Persons of Deity.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어떤 속성들은 아버지로부터 기인되고 어떤 것들은 아들로부터 기인되는 반면에 여전히 다른 것들은, 아버지 또는 아들 안에서 활동적이며 개인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 셋째 근원이며 중심을 영원화하는 아버지-아들 동반자 관계가, 천국의 절대성이라는 영원한 사실과의 공명과 인식 안에서, 일치하게 기능한다는 추정 외에는 거의 설명될 수 없는 속성들이 있습니다. 공동 창조자는 신(神)의 첫째와 둘째 개인들의 결합된 무한한 개념의 충만함을 체현합니다.

9:1.3 (99.2) While you envisage the Father as an original creator and the Son as a spiritual administrator, you should think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s a universal co-ordinator, a minister of unlimited co-operation. The Conjoint Actor is the correlator of all actual reality; he is the Deity repository of the Father’s thought and the Son’s word and in action is eternally regardful of the material absoluteness of the central Isle. The Paradise Trinity has ordained the universal order of progress, and the providence of God is the domain of the Conjoint Creator and the evolving Supreme Being. No actual or actualizing reality can escape eventual relationship with the Third Source and Center. 너희가 아버지를 기원적 창조자로 상상하고 아들을 영적 운영자로 상상하는 반면에, 너희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을 우주의 조정자, 무제한적 협동의 사역자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공동 행위자는 모든 실재적 실체의 상호-관계자이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생각과 아들의 말씀이 있는 신(神) 보고(寶庫, 저장소)이시며, 행동으로 중앙 섬의 물질적 절대성을 영원히 마음에 두고 생각하십니다. 천국 삼위일체는 진보라는 우주적 질서를 제정하셨고, 하나님의 섭리는 공동 창조자와 진화하는 최극 존재의 권역입니다. 어떤 실재적 또는 실재화하는 실체도 셋째 근원이며 중심과의 결과로 일어나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9:1.4 (99.3) The Universal Father presides over the realms of pre-energy, prespirit, and personality; the Eternal Son dominates the spheres of spiritual activities; the presence of the Isle of Paradise unifies the domain of physical energy and materializing power; the Conjoint Actor operates not only as an infinite spirit representing the Son but also as a universal manipulator of the forces and energies of Paradise, thus bringing into existence the universal and absolute mind. The Conjoint Actor functions throughout the grand universe as a positive and distinct personality, especially in the higher spheres of spiritual values, physical-energy relationships, and true mind meanings. He functions specifically wherever and whenever energy and spirit associate and interact; he dominates all reactions with mind, wields great power in the spiritual world, and exerts a mighty influence over energy and matter. At all times the Third Source is expressive of the nature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우주 아버지는 에너지-이전(以前), 영-이전(以前) 그리고 고유성의 영역들을 다스리며; 영원 아들은 영적 행동들의 구체들을 지배하십니다. 천국 섬의 현존은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화 되는 권능의 권역을 통합합니다. 공동 행위자는 아들을 대표하는 무한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천국의 힘과 에너지들의 우주적 조종자로서 행하시며, 그래서 우주적 실존(實在)과 그리고 절대 마음을 낳습니다. 공동 행위자는 대우주에 두루 적극적이고 뚜렷한 고유성으로서 기능하는데, 특별히 영적 가치들, 물리적-에너지 관계들 그리고 참된 마음 의미들의 좀 더 높은 구체들에서 그러합니다. 그는 에너지와 영이 연관하고 상호작용하는 언제 어디서나 특별히 기능합니다. 그는 마음과의 모든 상호작용들을 지배하고, 영적 세계에서 거대한 권능을 발휘하며, 에너지와 물질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셋째 근원은 항상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본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9:1.5 (99.4) The Third Source and Center perfectly and without qualification shares the omnipresence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sometimes being called the Omnipresent Spirit. In a peculiar and very personal manner the God of mind shares the omniscience of the Universal Father and his Eternal Son; the knowledge of the Spirit is profound and complete. The Conjoint Creator manifests certain phases of the omnipotence of the Universal Father but is actually omnipotent only in the domain of mind. The Third Person of Deity is the intellectual center and the universal administrator of the mind realms; herein is he absolute — his sovereignty is unqualified.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첫째 근원이며 중심의 전재(全在)성을 완전하게 조건 없이 공유하며, 때로는 전재(全在) 영으로 불립니다. 특유하고 아주 개인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하나님은 우주 아버지와 그의 영원 아들의 전지성을 공유합니다. 영의 지식은 심오하고 완비되어 있습니다. 공동 창조자는 우주 아버지의 전능의 어떤 위상들을 현시하지만 마음의 권역 안에서만 실재적으로 전능합니다. 신(神)의 셋째 개인은 마음 영역들에 대해 지적 중심이며 우주적 운영자이십니다. 이 면에 있어서 그는 절대적입니다. ─그의 주권은 무제한(분별불가)적입니다.

9:1.6 (99.5) The Conjoint Actor seems to be motivated by the Father-Son partnership, but all his actions appear to recognize the Father-Paradise relationship. At times and in certain functions he seems to compensate for the incompleten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experiential Deities — God the Supreme and God the Ultimate. 공동 행위자는 아버지-아들 동반자 관계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은 아버지-천국 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때로 특정 기능들에 있어서 그는 체험적 신(神)들─최극 하나님과 궁극 하나님─의 발전의 미완성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9:1.7 (100.1) And herein is an infinite mystery: That the Infinite simultaneously revealed his infinity in the Son and as Paradise, and then there springs into existence a being equal to God in divinity, reflective of the Son’s spiritual nature, and capable of activating the Paradise pattern, a being provisionally subordinate in sovereignty but in many ways apparently the most versatile in action. And such apparent superiority in action is disclosed in an attribute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which is superior even to physical gravity — the universal manifestation of the Isle of Paradise. 그리고 여기에 무한한 신비가 있습니다. 무한자는 아들 안에서 천국으로서 자신의 무한을 동시에 계시했고, 그 후에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며, 아들의 영적 본성을 반영하고, 천국 원형틀을 활성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주권에서는 잠정적으로 종속적이지만 행동에서는 여러 면에서 명백하게 가장 다재다능한, 존재가 실존(實在)으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행동에서의 그러한 명백한 우월성은, 심지어 물리적 중력─천국 섬의 우주적 현시활동─보다 우월한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속성으로 드러납니다.

9:1.8 (100.2) In addition to this supercontrol of energy and things physical, the Infinite Spirit is superbly endowed with those attributes of patience, mercy, and love which are so exquisitely revealed in his spiritual ministry. The Spirit is supremely competent to minister love and to overshadow justice with mercy. God the Spirit possesses all the supernal kindness and merciful affection of the Original and Eternal Son. The universe of your origin is being forged out between the anvil of justice and the hammer of suffering; but those who wield the hammer are the children of mercy, the spirit offspring of the Infinite Spirit. 물리적인 에너지와 사물들에 대한 이 초월적 통제 이외에도, 무한 영은 자신의 영적 사역에 그토록 절묘하게 계시된 인내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저 속성들을 훌륭하게 부여받았습니다. 영은 사랑을 베풀고 자비로 정의(正義)를 덮기에 최극으로 적당합니다. 영 하나님은, 기원 및 영원 아들의 숭고한 친절과 자비로운 애정 전체를 소유합니다. 너희가 기원된 우주는 정의(正義)라는 모루와 고난이라는 망치 사이에서 단련된 존재이지만; 그 망치를 사용하는 자들은 자비의 자녀들, 무한 영의 영 후예들입니다.

2. The Omnipresent Spirit 전재(全在)하는 영

9:2.1 (100.3) God is spirit in a threefold sense: He himself is spirit; in his Son he appears as spirit without qualification; in the Conjoint Actor, as spirit allied with mind. And in addition to these spiritual realities, we think we discern levels of experiential spirit phenomena — the spirits of the Supreme Being, Ultimate Deity, and Deity Absolute. 하나님은 삼중적 의미에서 영이십니다. 그 자신이 영이십니다. 그는 그의 아들 안에서 무조건적으로(분별된-자격 없이) 영으로 나타나며; 공동 행위자 안에서 마음과 결연된 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 영적 실체들 이외에, 우리는 체험적 영 현상들의 단계들 ─ 최극 존재와 궁극 신(神) 그리고 신(神) 절대자의 영들─을 식별한다고 생각합니다.

9:2.2 (100.4) The Infinite Spirit is just as much a complement of the Eternal Son as the Son is a complement of the Universal Father. The Eternal Son is a spiritualized personalization of the Father; the Infinite Spirit is a personalized spiritualization of the Eternal Son and the Universal Father. 무한 영은, 아들이 우주 아버지의 보완이듯이, 바로 영원 아들의 보완이십니다. 영원 아들은 아버지가 영성화된 고유성 구현입니다. 무한 영은 영원 아들과 우주 아버지가 고유성으로 구현된 영성화(靈性化)입니다.

9:2.3 (100.5) There are many untrammeled lines of spiritual force and sources of supermaterial power linking the people of Urantia directly with the Deities of Paradise. There exist the connection of the Thought Adjusters direct with the Universal Father, the widespread influence of the spiritual-gravity urge of the Eternal Son, and the spiritual presence of the Conjoint Creator. There is a difference in function between the spirit of the Son and the spirit of the Spirit. The Third Person in his spiritual ministry may function as mind plus spirit or as spirit alone. 지구(유란시아)의 민족을 천국 신(神)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초물질적 권능의 영적 힘과 근원들의 제한을 받지 않는 여러 계통들이 있습니다. 생각 조율자들의 우주 아버지와의 직접적인 연결, 영원 아들의 영-중력 촉구의 광범위한 영향, 그리고 공동 창조자의 영적 현존이 존재합니다. 아들의 영과 영의 영 사이에는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개인은 그의 영적 사역에서, 마음과 영이 합하여 또는 영 홀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9:2.4 (100.6) In addition to these Paradise presences, Urantians benefit by the spiritual influences and activities of the local and the superuniverse, with their almost endless array of loving personalities who ever lead the true of purpose and the honest of heart upward and inward towards the ideals of divinity and the goal of supreme perfection. 이들 천국 현존들 이외에, 지구(유란시아)인들은 신성의 이상(理想)들과 최극 완전의 목표를 향하여, 목적에서의 참된 자와 심정에서의 정직한 자를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언제나 인도하는, 애정이 깊은 고유성들의 거의 끝없는 그들의 정렬과 함께, 지역우주와 초우주의 영적 영향들과 행동들로 인하여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9:2.5 (100.7) The presence of the universal spirit of the Eternal Son we know — we can unmistakably recognize it. The presence of the Infinite Spirit, the Third Person of Deity, even mortal man may know, for material creatures can actually experience the beneficence of this divine influence which functions as the Holy Spirit of local universe bestowal upon the races of mankind. Human beings can also in some degree become conscious of the Adjuster, the impersonal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These divine spirits which work for man’s uplifting and spiritualization all act in unison and in perfect co-operation. They are as one in the spiritual operation of the plans of mortal ascension and perfection attainment. 우리는 영원 아들의 우주 영의 현존을 알고 있습니다. ─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무한 영, 신(神)의 셋째 개인의 현존은 심지어 필사 사람도 알 수 있는데, 이는 물질적 창조물들이, 인류의 종족들 위에 증여한 지역우주의 성령으로 기능하는, 이 신적 영향의 혜택을 실재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들은 또한 조율자, 우주 아버지의 미(未)개인적 현존도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들어 올리고 영성화하기 위해 일하는 이들 신적 영들은, 모두 일치와 완전한 협력 가운데 활동합니다. 그들은 필사자 상승과 완전성 달성 계획들에 대한 영적 작용 안에서 하나로서 존재합니다.

3. The Universal Manipulator 우주의 조종자

9:3.1 (101.1) The Isle of Paradise is the source and substance of physical gravity; and that should be sufficient to inform you that gravity is one of the most real and eternally dependable things in the whole physical universe of universes. Gravity cannot be modified or annulled except by the forces and energies conjointly sponsored by the Father and the Son, which have been intrusted to, and are functionally associated with, the person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천국 섬은 물리적 중력의 근원이며 본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체 물리적 우주들의 우주 안에서 중력이 가장 실제적이며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사물들 중의 하나임을 너희에게 알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중력은,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으로 후원하는 힘들과 에너지들에 의하지 않고는,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데, 그것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개인에게 위탁되어 왔으며 기능적으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9:3.2 (101.2) The Infinite Spirit possesses a unique and amazing power — antigravity. This power is not functionally (observably) present in either the Father or the Son. This ability to withstand the pull of material gravity, inherent in the Third Source, is revealed in the personal reactions of the Conjoint Actor to certain phases of universe relationships. And this unique attribute is transmissible to certain of the higher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무한 영은 독특하고도 놀라운 권능–반(反)중력- 을 소유합니다. 이 권능은 아버지나 아들 안에서는 기능적으로 (관찰되도록) 나타나지 않습니다. 셋째 근원 안에 본래부터 있는, 물질적 중력의 끌어당김에 저항하는 이 능력은, 우주 관계들의 특정 위상들에 대한 공동 행위자의 개인적 반응들 안에서 계시됩니다. 그리고 독특한 이 속성은 무한 영의 특정한 높은 고유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9:3.3 (101.3) Antigravity can annul gravity within a local frame; it does so by the exercise of equal force presence. It operates only with reference to material gravity, and it is not the action of mind. The gravity-resistant phenomenon of a gyroscope is a fair illustration of the effect of antigravity but of no value to illustrate the cause of antigravity. 반(反)중력은 지역 구조 안에서 중력을 폐기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등한 힘 현존의 행사로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오직 물질적 중력과 관련하여 작용하며, 마음의 활동은 아닙니다. 자이로스코프(회전의 回轉儀)의 중력-저항 현상은 반(反)중력의 효과를 잘 예시하지만 반(反)중력의 원인을 예시하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9:3.4 (101.4) Still further does the Conjoint Actor display powers which can transcend force and neutralize energy. Such powers operate by slowing down energy to the point of materialization and by other techniques unknown to you. 게다가 더욱 공동 행위자는 힘을 초월하고 에너지를 중화시킬 수 있는 권능들을 나타냅니다. 그런 권능들은 물질화 지점까지 에너지를 늦추고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기법들로써 작용합니다.

9:3.5 (101.5) The Conjoint Creator is not energy nor the source of energy nor the destiny of energy; he is the manipulator of energy. The Conjoint Creator is action — motion, change, modification, co-ordination, stabilization, and equilibrium. The energies subject to the direct or indirect control of Paradise are by nature responsive to the act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nd his manifold agencies. 공동 창조자는 에너지도 아니고 에너지의 근원도 아니며 에너지의 운명도 아닙니다. 그는 에너지의 조종자입니다. 공동 창조자는 활동─동작, 변화, 변형, 조화, 안정, 그리고 평형─입니다. 천국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통제에 종속된 에너지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과 그의 다양한 대리자들의 활동에 대해 자연적으로 응답합니다.

9:3.6 (101.6) The universe of universes is permeated by the power-control creatur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physical controllers, power directors, power centers, and other representatives of the God of Action who have to do with the regulation and stabilization of physical energies. These unique creatures of physical function all possess varying attributes of power control, such as antigravity, which they utilize in their efforts to establish the physical equilibrium of the matter and energies of the grand universe. 우주들의 우주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권능-통제 창조물들, 즉 물리 통제자들, 권능 지도자들, 권능 중심들, 그리고 물리적 에너지들에 대한 규제와 안정에 관여해야만 하는 행동의 하나님의 다른 대표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리적 기능을 지닌 독특한 이 창조물들은 모두 반(反)중력과 같은 권능 통제의 다양한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그들은 대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물리적 평형을 수립하기 위해 애쓰면서 그것을 활용합니다.

9:3.7 (101.7) All these material activities of the God of Action appear to relate his function to the Isle of Paradise, and indeed the agencies of power are all regardful of, even dependent on, the absoluteness of the eternal Isle. But the Conjoint Actor does not act for, or in response to, Paradise. He acts, personally, for the Father and the Son. Paradise is not a person. The nonpersonal, impersonal, and otherwise not personal doing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re all volitional acts of the Conjoint Actor himself; they are not reflections, derivations, or repercussions of anything or anybody. 행동의 하나님의 이 모든 물질적 활동들은 자신의 기능을 천국 섬과 관련하여 나타나며, 실로 권능의 대리자들은 모두 영원한 섬의 절대성을 존중하고 심지어는 거기에 의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공동 행위자는 천국을 위해서, 또는 천국에 응답하여,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서 활동합니다. 천국은 개인이 아닙니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비(非)개인적, 미(未)개인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이지 않은 행함은 모두 공동 행위자 자신의 의지적인 행동들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것 또는 어떤 존재의 반영들, 파생들 또는 반향들도 아닙니다.

9:3.8 (101.8) Paradise is the pattern of infinity; the God of Action is the activator of that pattern. Paradise is the material fulcrum of infinity; the agenc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re the levers of intelligence which motivate the material level and inject spontaneity into the mechanism of the physical creation. 천국은 무한성의 원본입니다. 행동의 하나님은 그 원본의 활성자이십니다. 천국은 무한성의 물질적 받침대입니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대리자들은 물리적 창조의 기능구조 안으로 물질적 차원의 동기를 부여하고 자발성을 주입시키는 지능의 지렛대들입니다.

4. The Absolute Mind 절대 마음

9:4.1 (102.1) There is an intellectual nature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that is distinct from his physical and spiritual attributes. Such a nature is hardly contactable, but it is associable — intellectually though not personally. It is distinguishable from the physical attributes and the spiritual character of the Third Person on mind levels of function, but to the discernment of personalities this nature never functions independently of physical or spiritual manifestations. 그의 물리적이며 영적인 속성들과 구분되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지적 본성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본성에 접촉하기는 거의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렵다고 해도 지적으로는 교감이 가능합니다. 기능의 마음 차원에 있어서, 그것(지적 본성)은 셋째 개인의 물리적 속성들 및 영적 성품과 구별할 수 있지만, 이 본성은 고유성들의 식별에 있어서, 물리적 또는 영적 명시와 따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9:4.2 (102.2) The absolute mind is the mind of the Third Person; it is inseparable from the personality of God the Spirit. Mind, in functioning beings, is not separated from energy or spirit, or both. Mind is not inherent in energy; energy is receptive and responsive to mind; mind can be superimposed upon energy, but consciousness is not inherent in the purely material level. Mind does not have to be added to pure spirit, for spirit is innately conscious and identifying. Spirit is always intelligent, minded in some way. It may be this mind or that mind, it may be premind or supermind, even spirit mind, but it does the equivalent of thinking and knowing. The insight of spirit transcends, supervenes, and theoretically antedates the consciousness of mind. 절대 마음은 셋째 개인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영 하나님의 고유성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능하는 존재의 마음은 에너지, 혹은 영, 또는 그 둘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에너지 안에 본래부터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마음을 잘 받아들이고 마음에 쉽게 감응합니다. 마음은 에너지 위에 얹어놓을 수 있지만, 의식은 순수한 물질적 수준에 본래부터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영에 추가되어야만 하지 않는데, 이는 영이 태생적으로 의식적이고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영은 항상 지능적인데, 어떤 면에서는 마음적입니다. 영은 이 마음 또는 저 마음일 수 있고, 전(前)마음 또는 초(超)마음 심지어는 영 마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과 동등합니다. 영의 통찰력은 마음의 의식을 초월하고, 초래하며 이론적으로는 앞서서 일어납니다.

9:4.3 (102.3) The Conjoint Creator is absolute only in the domain of mind, in the realms of universal intelligence. The mind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infinite; it utterly transcends the active and functioning mind circuit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The mind endowment of the seven superuniverses is derived from the Seven Master Spirits, the primary personalities of the Conjoint Creator. These Master Spirits distribute mind to the grand universe as the cosmic mind, and your local universe is pervaded by the Nebadon variant of the Orvonton type of cosmic mind. 공동 창조자는 마음의 권역, 우주적 지능의 영역에서만 절대적입니다.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마음은 무한하며; 그것은 우주들의 우주의 활동적이고 기능하는 마음 순환회로들을 철저하게 초월합니다. 일곱 초우주들의 마음 자질은 일곱 주(主) 영들, 공동 창조자의 1차 고유성들로부터 파생합니다. 이들 주(主) 영들은 질서우주 마음으로서 대우주에 마음을 분배하며, 너희 지역우주는 질서우주 마음의 오르본톤 유형의 네바돈 변형으로 가득 퍼져있습니다.

9:4.4 (102.4) Infinite mind ignores time, ultimate mind transcends time, cosmic mind is conditioned by time. And so with space: The Infinite Mind is independent of space, but as descent is made from the infinite to the adjutant levels of mind, intellect must increasingly reckon with the fact and limitations of space. 무한 마음은 시간을 무시하며, 궁극적 마음은 시간을 초월하고, 질서우주 마음은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리고 공간에서도 그렇습니다. 무한 마음은 공간으로부터 독립적이지만, 무한에서 마음의 보조 차원들로 강하함에 따라, 지성은 공간의 사실과 한계들을 점점 더 고려해야만 합니다.

9:4.5 (102.5) Cosmic force responds to mind even as cosmic mind responds to spirit. Spirit is divine purpose, and spirit mind is divine purpose in action. Energy is thing, mind is meaning, spirit is value. Even in time and space, mind establishes those relative relationships between energy and spirit which are suggestive of mutual kinship in eternity. 질서우주 마음이 영에 응답하듯이, 질서우주 힘은 마음에 응답합니다. 영은 신적 목적이며, 영 마음은 행동하는 신적 목적입니다. 에너지는 사물이고, 마음은 의미이며, 영은 가치입니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은, 영원성에서 상호 친족관계임을 암시하는, 에너지와 영 사이의 그러한 상대적 관계들을 확립합니다.

9:4.6 (102.6) Mind transmutes the values of spirit into the meanings of intellect; volition has power to bring the meanings of mind to fruit in both the material and spiritual domains. The Paradise ascent involves a relative and differential growth in spirit, mind, and energy. The personality is the unifier of these components of experiential individuality. 마음은 영의 가치들을 지성의 의미들로 변형시키며; 의지 작용은 물질적이며 영적 권역들 모두에서, 마음의 의미들이 열매를 맺게 하는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천국 상승은 영, 마음 그리고 에너지에 있어서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성장을 포함합니다. 고유성은 체험적 개성을 구성하는 이들 요소들의 통합자입니다.

5. The Ministry of Mind 마음의 사역

9:5.1 (102.7)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infinite in mind. If the universe should grow to infinity, still his mind potential would be adequate to endow limitless numbers of creatures with suitable minds and other prerequisites of intellect. 셋째근원이며 중심은 마음에 있어서 무한합니다. 만일 우주가 무한을 향해 성장해야만 한다면, 그의 마음 잠재는 여전히 한없는 수의 창조물들에게, 적절한 마음들과 다른 지성의 필요조건들을 자질로 부여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9:5.2 (102.8) In the domain of created mind the Third Person, with his co-ordinate and subordinate associates, rules supreme. The realms of creature mind are of exclusive origin in the Third Source and Center; he is the bestower of mind. Even the Father fragments find it impossible to indwell the minds of men until the way has been properly prepared for them by the mind action and spiritual function of the Infinite Spirit. 창조된 마음의 권역 안에서 셋째 개인은 그의 협력하는 종속 동료들과 함께 최극을 다스립니다. 창조물 마음의 영역들은 셋째근원이며 중심 안에서 배타적으로 기원됩니다. 그는 마음의 증여자입니다. 심지어 아버지 단편들도 무한 영의 마음 행동과 영적 기능에 의해 단편들의 길이, 그들을 위해 적절히 준비되기까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합니다.

9:5.3 (103.1) The unique feature of mind is that it can be bestowed upon such a wide range of life. Through his creative and creature associates the Third Source and Center ministers to all minds on all spheres. He ministers to human and subhuman intellect through the adjutants of the local universes and, through the agency of the physical controllers, ministers even to the lowest nonexperiencing entities of the most primitive types of living things. And always is the direction of mind a ministry of mind-spirit or mind-energy personalities. 마음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그러한 광범위한 생명에게 증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창조적인 그리고 창조물 동료들을 통하여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모든 구체들에 있는 모든 마음들을 섬깁니다(사역). 그는 지역우주들의 보조자들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이하의 지성들을 섬기며(사역), 물리 조정자들의 대리자들을 통해서는 가장 원시적인 유형의 살아있는 물체들 중 가장 낮은 비(非)체험적 실재들까지 섬깁니다(사역). 그리고 마음-영 또는 마음-에너지 고유성들을 섬기는(사역) 것이 언제나 마음의 방향입니다.

9:5.4 (103.2) Since the Third Person of Deity is the source of mind, it is quite natural that the evolutionary will creatures find it easier to form comprehensible concepts of the Infinite Spirit than they do of either the Eternal Son or the Universal Father. The reality of the Conjoint Creator is disclosed imperfectly in the very existence of human mind. The Conjoint Creator is the ancestor of the cosmic mind, and the mind of man is an individualized circuit, an impersonal portion, of that cosmic mind as it is bestowed in a local universe by a Creative Daughter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신(神)의 셋째 개인이 마음의 근원이기 때문에, 진화하는 의지 창조물들이 영원 아들 또는 우주 아버지 보다는 무한 영을 이해할만한 개념을 더 쉽게 형성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공동 창조자의 실체는 바로 그 인간 마음의 실존에서 불완전하게 드러납니다. 공동 창조자는 질서우주 마음의 조상이며, 사람의 마음은 개별화된 순환회로이며, 그것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창조적 딸에 의해 지역우주에 증여되는 그 질서우주 마음의 미(未)개인적 부분입니다.

9:5.5 (103.3) Because the Third Person is the source of mind, do not presume to reckon that all phenomena of mind are divine. Human intellect is rooted in the material origin of the animal races. Universe intelligence is no more a true revelation of God who is mind than is physical nature a true revelation of the beauty and harmony of Paradise. Perfection is in nature, but nature is not perfect. The Conjoint Creator is the source of mind, but mind is not the Conjoint Creator. 셋째 개인이 마음의 근원이기 때문에, 마음의 모든 현상을 신적이라고 짐작해서 가정하면 안 됩니다. 인간 지성은 동물 종족의 물질적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리적 본성이 천국의 아름다움과 조화의 참된 계시가 아니듯이, 우주 지능은 마음이신 하나님의 참된 계시가 아닙니다. 완전성이 자연에 있지만 자연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공동 창조자는 마음의 근원이지만 마음은 공동 창조자가 아닙니다.

9:5.6 (103.4) Mind, on Urantia, is a compromise between the essence of thought perfection and the evolving mentality of your immature human nature. The plan for your intellectual evolution is, indeed, one of sublime perfection, but you are far short of that divine goal as you function in the tabernacles of the flesh. Mind is truly of divine origin, and it does have a divine destiny, but your mortal minds are not yet of divine dignity. 지구(유란시아)에서, 마음은 생각 완전성의 본질과 너희의 미성숙한 인간 본성의 진화하는 정신력 사이에 있는 절충물입니다. 너희의 지적 진화를 위한 계획은 정말로 숭고한 완전성 중 하나지만, 육신의 장막에서 너희가 기능하는 동안 너희는 그 신적 목표에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마음은 정말로 신적 기원이 있고, 신적 운명을 갖고 있지만, 너희 필사자 마음들은 아직 신적 존엄성이 없습니다.

9:5.7 (103.5) Too often, all too often, you mar your minds by insincerity and sear them with unrighteousness; you subject them to animal fear and distort them by useless anxiety. Therefore, though the source of mind is divine, mind as you know it on your world of ascension can hardly become the object of great admiration, much less of adoration or worship. The contemplation of the immature and inactive human intellect should lead only to reactions of humility. 너무나 자주, 아주 너무나 자주, 너희는 너희 마음을 불성실로 훼손하고 불의로 마음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것들을 동물적 두려움에 굴복시키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근원은 신적이지만, 상승하는 너희 세계에서는 너희가 알고 있듯이 마음은 위대한 찬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찬양이나 경배의 대상은 더욱 될 수 없습니다. 미성숙하고 비활동적인 인간 지성에 대한 깊은 사색은 오직 겸손의 반응으로 이끌어야만 합니다.

6. The Mind-Gravity Circuit 마음-중력 회로

9:6.1 (103.6) The Third Source and Center, the universal intelligence, is personally conscious of every mind, every intellect, in all creation, and he maintains a personal and perfect contact with all these physical, morontial, and spiritual creatures of mind endowment in the far-flung universes. All these activities of mind are grasped in the absolute mind-gravity circuit which focalizes in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nd is a part of the personal consciousness of the Infinite Spirit. 우주적 지능이신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모든 창조 안에 있는 각각의 마음, 각각의 지성을 개인적으로 의식하며, 그는 멀리 퍼지는 우주들 안에서 마음을 부여받은 이 모든 육체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영적 창조물들과 개인적이며 완전한 접촉을 유지하십니다. 마음의 이 모든 활동들은, 셋째 근원이며 중심에 초점을 맞춘 절대 마음-중력 회로로 장악되며, 절대 마음-중력 회로는 무한 영의 개인적 의식의 일부분입니다.

9:6.2 (103.7) Much as the Father draws all personality to himself, and as the Son attracts all spiritual reality, so does the Conjoint Actor exercise a drawing power on all minds; he unqualifiedly dominates and controls the universal mind circuit. All true and genuine intellectual values, all divine thoughts and perfect ideas, are unerringly drawn into this absolute circuit of mind. 아버지가 모든 고유성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며, 아들이 모든 영적 실체를 끌어당기는 것과 같이, 공동 행위자도 모든 마음을 잡아당기는 권능을 행사하십니다. 그는 우주적 마음 회로를 무제한적으로 지배하고 조정합니다. 모든 참되고 진정한 지적 가치들, 모든 신적 생각들과 완전한 관념들은 반드시 이 절대적인 마음의 회로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9:6.3 (104.1) Mind gravity can operate independently of material and spiritual gravity, but wherever and whenever the latter two impinge, mind gravity always functions. When all three are associated, personality gravity may embrace the material creature — physical or morontial, finite or absonite. But irrespective of this, the endowment of mind even in impersonal beings qualifies them to think and endows them with consciousness despite the total absence of personality. 마음 중력은 물질적이며 영적 중력과는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2가지 중력인 물질적 중력과 영적 중력이 충돌하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마음 중력이 기능합니다. 세 가지 모두가 연관될 때, 고유성 중력이 물질적 창조물 – 물리적 또는 모론시아적, 유한 또는 아(亞)절대 –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에 관계없이, 마음의 부여는 미(未)고유적 존재까지도 그들에게 생각하는 자격을 주고, 전적으로 고유성이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의식을 부여합니다.

9:6.4 (104.2) Selfhood of personality dignity, human or divine, immortal or potentially immortal, does not however originate in either spirit, mind, or matter; it is the bestowal of the Universal Father. Neither is the interaction of spirit, mind, and material gravity a prerequisite to the appearance of personality gravity. The Father’s circuit may embrace a mind-material being who is unresponsive to spirit gravity, or it may include a mind-spirit being who is unresponsive to material gravity. The operation of personality gravity is always a volitional act of the Universal Father. 고유성 존엄의 자아신분은, 인간적이거나 신적이거나 불멸이거나 혹은 잠재적 불멸이거나, 어찌 되었건, 영, 마음 또는 물질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 아버지가 증여하십니다. 영, 마음, 그리고 물질 중력의 상호작용도 고유성 중력이 출현하는 선행조건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회로는 영 중력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물질 존재를 포함할 수도 있으며, 혹은 물질 중력에 반응하지 않는 마음-영 존재를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고유성 중력의 작용은 항상 우주 아버지의 의지적 행위입니다.

9:6.5 (104.3) While mind is energy associated in purely material beings and spirit associated in purely spiritual personalities, innumerable orders of personality, including the human, possess minds that are associated with both energy and spirit. The spiritual aspects of creature mind unfailingly respond to the spirit-gravity pull of the Eternal Son; the material features respond to the gravity urge of the material universe. 마음은 순전히 물질적 존재들 안에서는 에너지와 연관되어 있고, 순전히 영적 고유성들 안에서는 영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사람을 포함하여 수많은 고유성 계층들은 에너지와 영 둘 다와 연관된 마음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창조물 마음의 영적 측면들은 반드시 영원 아들의 영-중력 당김에 응답하며, 물질적 특성들은 물질 우주의 중력 충동에 응답합니다.

9:6.6 (104.4) Cosmic mind, when not associated with either energy or spirit, is subject to the gravity demands of neither material nor spiritual circuits. Pure mind is subject only to the universal gravity grasp of the Conjoint Actor. Pure mind is close of kin to infinite mind, and infinite mind (the theoretical co-ordinate of the absolutes of spirit and energy) is apparently a law in itself. 질서 우주 마음은, 에너지나 영 그 어느 것과도 연관되지 않을 때, 물질적 또는 영적 회로들 그 어떤 것의 중력 요구에도 종속하지 않습니다. 순수 마음은 공동 행위자의 우주적 중력 장악에만 종속됩니다. 순수 마음은 무한 마음과 가까운 친족이고, 무한 마음(영 및 에너지 절대자들의 이론적인 통합자)은 외견상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입니다.

9:6.7 (104.5) The greater the spirit-energy divergence, the greater the observable function of mind; the lesser the diversity of energy and spirit, the lesser the observable function of mind. Apparently, the maximum function of the cosmic mind is in the time universes of space. Here mind seems to function in a mid-zone between energy and spirit, but this is not true of the higher levels of mind; on Paradise, energy and spirit are essentially one. 영-에너지 차이가 클수록, 마음의 관찰하는 기능도 커지며; 에너지와 영의 차이가 적을수록, 마음의 관찰 가능한 기능도 적어집니다. 외관상으로, 질서 우주 마음의 최대 기능은 공간의 시간 우주들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에너지와 영의 중간-지대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더 높은 차원들에서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에너지와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9:6.8 (104.6) The mind-gravity circuit is dependable; it emanates from the Third Person of Deity on Paradise, but not all the observable function of mind is predictable. Throughout all known creation there parallels this circuit of mind some little-understood presence whose function is not predictable. We believe that this unpredictability is partly attributable to the function of the Universal Absolute. What this function is, we do not know; what actuates it, we can only conjecture; concerning its relation to creatures, we can only speculate. 마음-중력 회로는 신뢰할 만합니다. 그것은 천국 신(神)의 셋째 개인으로부터 발산되지만, 관찰 가능한 마음의 기능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알려진 모든 창조계 전체에 걸쳐, 이 마음 회로와 평행하지만, 그 기능이 예측될 수 없는 거의 이해되지 않는 현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측 불가능성이 우주 절대자의 기능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기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지, 우리는 겨우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창조물들과의 그 기능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9:6.9 (104.7) Certain phases of the unpredictability of finite mind may be due to the incompleteness of the Supreme Being, and there is a vast zone of activities wherein the Conjoint Actor and the Universal Absolute may possibly be tangent. There is much about mind that is unknown, but of this we are sure: The Infinite Spirit is the perfect expression of the mind of the Creator to all creatures; the Supreme Being is the evolving expression of the minds of all creatures to their Creator. 유한한 마음의 예측 불가능성의 어떤 위상들은 최극 존재의 미완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 행위자와 우주 절대자가 맞닿을 가능성이 있는 광대한 활동 지대가 있습니다. 마음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확신합니다. 무한 영은 모든 창조물들에 대한 창조자 마음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최극 존재는 모든 창조물들의 마음이, 그들의 창조자에 대해, 진화하는 표현입니다.

7. Universe Reflectivity 우주 반사(反射)

9:7.1 (105.1) The Conjoint Actor is able to co-ordinate all levels of universe actuality in such manner as to make possible the simultaneous recognition of the mental,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This is the phenomenon of universe reflectivity, that unique and inexplicable power to see, hear, sense, and know all things as they transpire throughout a superuniverse, and to focalize, by reflectivity, all this information and knowledge at any desired point. The action of reflectivity is shown in perfection on each of the headquarters world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It is also operative throughout all sectors of the superuniverses and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local universes. Reflectivity finally focalizes on Paradise. 공동 행위자는 정신적, 물질적, 그리고 영적인 것을 동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우주 실제성의 모든 수준들을 통합(조정)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주 반사의 현상인데, 우주 반사는, 모든 것들이 초우주에 두루 배출될 때,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유일하며 설명할 수 없는 권능이며, 이 모든 정보와 지식을, 어떤 원하는 지점에, 반사에 의해 초점으로 모으는 권능입니다. 반사의 활동은 일곱 초우주들에 있는 각 본부 세계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또한 초우주들의 모든 구역들 구석구석과 지역 우주들의 경계 내에서 작용합니다. 반사성은 마지막으로 천국에 초점을 모읍니다.

9:7.2 (105.2) The phenomenon of reflectivity, as it is disclosed on the superuniverse headquarters worlds in the amazing performances of the reflective personalities there stationed, represents the most complex interassociation of all phases of existence to be found in all creation. Lines of spirit can be traced back to the Son, physical energy to Paradise, and mind to the Third Source; but in the extraordinary phenomenon of universe reflectivity there is a unique and exceptional unification of all three, so associated as to enable the universe rulers to know about remote conditions instantaneously, simultaneously with their occurrence. 반영성의 현상은, 초우주 본부 세계에서 그곳에 배치된 반영적 고유성들의 놀라운 행위들로 드러나는 것처럼, 모든 창조에서 발견되는 모든 실존 단계의 가장 복잡한 상호-관련됨을 나타냅니다. 영(靈)의 노선(路線)들은 아들에게로, 물리적 에너지의 노선들은 천국에로, 마음의 노선들은 셋째 근원에게로 거슬러 유래를 추적할 수 있지만; 우주 반영성의 특별한 현상에는 셋 모두가 독특하며 예외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우주 통치자들이 멀리 떨어진 사정들에 대해 발생과 동시에 즉시 알 수 있도록 관련되어 있습니다.

9:7.3 (105.3) Much of the technique of reflectivity we comprehend, but there are many phases which truly baffle us. We know that the Conjoint Actor is the universe center of the mind circuit, that he is the ancestor of the cosmic mind, and that cosmic mind operates under the dominance of the absolute mind gravity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We know further that the circuits of the cosmic mind influence the intellectual levels of all known existence; they contain the universal space reports, and just as certainly they focus in the Seven Master Spirits and converge in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우리는 반영성 기법을 많이 이해하지만, 정말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여러 단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 행위자가 마음 회로의 우주 중심이시며, 그가 질서우주 마음의 조상이시고, 질서우주 마음이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절대 마음 중력의 지배 아래에서 작용함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질서우주 마음의 회로들이 알려진 모든 실존의 지적 수준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회로들은 우주 공간 보고서들을 포함하며, 동시에 확실히 일곱 주(主) 영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셋째 근원이며 중심에 수렴(집중)합니다.

9:7.4 (105.4)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inite cosmic mind and the divine absolute mind appears to be evolving in the experiential mind of the Supreme. We are taught that, in the dawn of time, this experiential mind was bestowed upon the Supreme by the Infinite Spirit, and we conjecture that certain features of the phenomenon of reflectivity can be accounted for only by postulating the activity of the Supreme Mind. If the Supreme is not concerned in reflectivity, we are at a loss to explain the intricate transactions and unerring operations of this consciousness of the cosmos. 유한한 질서우주 마음과 신적 절대 마음 사이의 관계는 최극자의 체험적 마음에서 진화되는 듯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여명기에 이 체험적 마음이 무한 영에 의해 최극자에게 증여되었다고 배웠으며, 우리는 최극 마음의 활동을 전제함으로써만, 반영성 현상의 어떤 특성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만일 그 최극자가 반영성과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이 질서우주 의식의 복잡한 처리들과 정확한 작용들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9:7.5 (105.5) Reflectivity appears to be omniscience within the limits of the experiential finite and may represent the emergence of the presence-consciousness of the Supreme Being. If this assumption is true, then the utilization of reflectivity in any of its phases is equivalent to partial contact with the consciousness of the Supreme. 반영성은 체험적 유한의 한계들 안에서 전지(全知)인 듯이 보이고, 반영성은 최극 존재의 현존-의식이 솟아났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 가정(假定)이 사실이라면, 어떤 단계들에서도 반영성의 활용은 최극자의 의식과의 부분적인 접촉과 동등합니다.

8.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무한 영의 고유성들

9:8.1 (105.6) The Infinite Spirit possesses full power to transmit many of his powers and prerogatives to his co-ordinate and subordinate personalities and agencies. 무한 영은 자신의 권능들과 특권들의 많은 부분을 그의 협동하며 종속하는 고유성들과 대리자들에게 전달하는 충만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9:8.2 (105.7) The first Deity-creating act of the Infinite Spirit, functioning apart from the Trinity but in some unrevealed associati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personalized in the existence of the Seven Master Spirits of Paradise, the distributors of the Infinite Spirit to the universes. 무한 영의 첫 번째 신(神)-창조하는 행위는, 삼위일체와는 별개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어떤 계시되지 않은 연합으로 기능하며, 우주들에게 천국의 일곱 주(主) 영들, 즉 무한 영의 분배자들의 실존으로 고유성이 구현되었습니다.

9:8.3 (106.1) There is no direct representative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on the headquarters of a superuniverse. Each of these seven creations is dependent on one of the Master Spirits of Paradise, who acts through the seven Reflective Spirits situated at the capital of the superuniverse. 초우주의 본부에는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직접적 대표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일곱 창조계들 각각은 천국의 주(主) 영들 중 하나에게 의존하는데, 각 주(主) 영은 그 초우주의 수도에 위치를 정한 일곱 반영 영들을 통해 활동합니다.

9:8.4 (106.2) The next and continuing creative act of the Infinite Spirit is disclosed, from time to time, in the production of the Creative Spirits. Every time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become parent to a Creator Son, the Infinite Spirit becomes ancestor to a local universe Creative Spirit who becomes the close associate of that Creator Son in all subsequent universe experience. 무한 영의 그 다음에 계속하는 창조적 활동은 가끔 창조 영들의 생산으로 드러납니다.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창조자 아들에게 부모가 될 때마다, 무한 영은 뒤 따르는 모든 우주 체험에서, 그 창조자 아들의 가까운 동료인 지역우주 창조 영에 대한 조상이 됩니다.

9:8.5 (106.3) Just as it is necessary to distinguish between the Eternal Son and the Creator Sons, so it is necessary to differentiate between the Infinite Spirit and the Creative Spirits, the local universe co-ordinates of the Creator Sons. What the Infinite Spirit is to the total creation, a Creative Spirit is to a local universe. 영원 아들과 창조자 아들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듯이, 무한 영과 창조 영들, 즉 창조자 아들의 지역 우주 협동자들 사이를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 창조에 대한 무한 영의 관계는, 지역 우주에 대한 창조 영의 관계입니다.

9:8.6 (106.4) The Third Source and Center is represented in the grand universe by a vast array of ministering spirits, messengers, teachers, adjudicators, helpers, and advisers, together with supervisors of certain circuits of physical, morontial, and spiritual nature. Not all of these beings are personalities in the strict meaning of the term. Personality of the finite-creature variety is characterized by: 셋째 근원이며 중심은 물리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영적 본성의 어떤 회로들의 감독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영들, 메신저들, 선생들, 재판관들, 조력자들, 그리고 충고자들의 광대한 대열들이 대우주에서 대표합니다. 이 존재들 모두가 그 용어의 엄격한 의미에서, 고유성들은 아닙니다. 유한-창조물 종류의 고유성은 다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9:8.7 (106.5) 1. Subjective self-consciousness. 주관적 자아-의식.

9:8.8 (106.6) 2. Objective response to the Father’s personality circuit. 아버지의 고유성 회로에 대한 객관적 응답.

9:8.9 (106.7) There are creator personalities and creature personalities, and in addition to these two fundamental types there are personalit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beings who are personal to the Infinite Spirit, but who are not unqualifiedly personal to creature beings. These Third Source personalities are not a part of the Father’s personality circuit. First Source personality and Third Source personality are mutually contactable; all personality is contactable. 창조자 고유성들과 창조물 고유성들이 있으며, 기본적인 이 두 유형들 외에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고유성들이 있는데, 이들은 무한 영에게는 개인적이지만 창조물 존재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개인적이 아닙니다. 이 셋째 근원 고유성들은 아버지의 고유성 회로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첫째 근원 고유성과 셋째 근원 고유성은 상호 접촉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개인성은 접촉이 가능합니다.

9:8.10 (106.8) The Father bestows personality by his personal free will. Why he does so we can only conjecture; how he does so we do not know. Neither do we know why the Third Source bestows non-Father personality, but this the Infinite Spirit does in his own behalf, in creative conjunction with the Eternal Son and in numerous ways unknown to you. The Infinite Spirit can also act for the Father in the bestowal of First Source personality. 아버지는 자신의 개인적 자유의지로 고유성을 증여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우리는 단지 추측할 뿐이며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셋째 근원이 왜 비(非)-아버지 고유성을 증여하는지 모르지만, 이 무한 영은 자신을 위해, 영원 아들과의 창조적인 협력으로,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방법으로 이렇게 한다. 또한 무한 영은 첫째 근원 고유성의 증여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해 활동할 수 있습니다.

9:8.11 (106.9) There are numerous types of Third Source personalities. The Infinite Spirit bestows Third Source personality upon numerous groups who are not included in the Father’s personality circuit, such as certain of the power directors. Likewise does the Infinite Spirit treat as personalities numerous groups of beings, such as the Creative Spirits, who are in a class by themselves in their relations to encircuited creatures of the Father. 셋째 근원 고유성들에는 수많은 유형들이 있습니다. 무한 영은 어떤 권능 지도자들처럼, 아버지의 고유성 회로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집단들에게, 셋째 근원 고유성을 증여합니다. 창조적 영들이 회로로 연결된 아버지의 창조물들에 관하여 독립된 계층으로 있듯이, 무한 영은 수많은 무리의 존재들을 고유성으로 간주합니다.

9:8.12 (106.10) Both First Source and Third Source personalities are endowed with all and more than man associates with the concept of personality; they have minds embracing memory, reason, judgment, creative imagination, idea association, decision, choice, and numerous additional powers of intellect wholly unknown to mortals. With few exceptions the orders revealed to you possess form and distinct individuality; they are real beings. A majority of them are visible to all orders of spirit existence. 첫째 근원과 셋째 근원 고유성들 둘 다, 사람이 고유성의 개념에 관련되는 모든 것과 그 이상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억, 이성, 판단, 창조적 상상력, 관념 관련, 결정, 선택, 그리고 필사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추가적 지성의 권능을 포함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거의 예외가 없이, 너희에게 계시된 계급들은 형태와 분명한 개인성을 소유하며, 그들은 실제 존재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영 실존의 모든 계급들에게 보입니다.

9:8.13 (107.1) Even you will be able to see your spiritual associates of the lower orders as soon as you are delivered from the limited vision of your present material eyes and have been endowed with a morontia form with its enlarged sensitivity to the reality of spiritual things. 너희가 현재의 물질적 눈의 제한된 시야로부터 해방되고, 영적 사물들의 실체에 대한 확대된 감수성과 함께 모론시아 형태를 부여받자마자 너희는 낮은 계급의 너희 영적 동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9:8.14 (107.2) The functional family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s it is revealed in these narratives, falls into three great groups: 셋째 근원이며 중심의 기능적 가족은, 이 여러 글에서 밝힌 것처럼, 다음의 거대한 세 집단으로 나뉩니다.

9:8.15 (107.3) I. The Supreme Spirits. A group of composite origin that embraces, among others, the following orders: 최극 영들. 다른 것들 중에서 다음의 계급들을 포함하는 복합 기원의 집단

9:8.16 (107.4) 1. The Seven Master Spirits of Paradise. 천국의 일곱 주(主) 영들

9:8.17 (107.5) 2. The Reflective Spirits of the Superuniverses. 초우주들의 반영 영들.

9:8.18 (107.6) 3. The Creative Spirits of the Local Universes. 지역 우주들의 창조적 영들.

9:8.19 (107.7) II. The Power Directors. A group of control creatures and agencies that function throughout all organized space. 권능 지도자들. 모든 조직된 공간 전체에 걸쳐 기능하는 조정 창조물들과 대리자들의 집단.

9:8.20 (107.8) III. The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This designation does not necessarily imply that these beings are Third Source personalities though some of them are unique as will creatures. They are usually grouped in three major classifications: 무한 영의 고유성들. 그들 중 일부는 의지 창조물들로서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은, 이 존재들이 셋째 근원 고유성들임을 반드시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세 개의 주요한 계층으로 분류됩니다.

9:8.21 (107.9) 1. The Higher Personalities of the Infinite Spirit. 무한 영의 높은 고유성들.

9:8.22 (107.10) 2. The Messenger Hosts of Space. 공간의 메신저 무리.

9:8.23 (107.11) 3. The Ministering Spirits of Time. 시간의 사역 영들.

9:8.24 (107.12) These groups serve on Paradise, in the central or residential universe, in the superuniverses, and they embrace orders that function in the local universes, even to the constellations, systems, and planets. 이 집단들은 천국, 중앙 또는 거주 우주, 초우주들에서 봉사하며, 그들은 지역 우주, 심지어 별자리들과 체계들과 행성들에서도 기능하는 계층들을 포함합니다.

9:8.25 (107.13) The spirit personalities of the vast family of the Divine and Infinite Spirit are forever dedicated to the service of the ministry of the love of God and the mercy of the Son to all the intelligent creatures of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se spirit beings constitute the living ladder whereby mortal man climbs from chaos to glory. 신적인 무한 영의 광대한 가족에 속한 영 고유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시간과 공간의 진화 세계들에 있는 모든 지적 창조물들에게, 사역하는 봉사에 언제까지나 헌신되어 있습니다. 이 영 존재들은 필사 사람이 혼돈에서 영광으로 타고 올라가는, 살아있는 사다리의 구성요소입니다.

9:8.26 (107.14) [Revealed on Urantia by a Divine Counselor of Uversa commissioned by the Ancients of Days to portray the nature and work of the Infinite Spirit.][무한 영의 본성과 일을 묘사하도록,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 의해 임명된, 유버사의 신적 조언자에 의해 지구(유란시아)에 계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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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8 Training the Kingdom’s Messengers 하나님 나라 메신저들의 훈련

Paper 138

Training the Kingdom’s Messengers 하나님 나라 메신저들의 훈련

1. Final Instructions 최종적 지시들
2. Choosing the Six 여섯 명 선택
3. The Call of Matthew and Simon 마태와 시몬을 부르심
Not the righteous but sinners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
4. The Call of the Twins 쌍둥이 형제를 부르심
5. The Call of Thomas and Judas 도마와 유다를 부르심
6. The Week of Intensive Training 집중적인 훈련의 주간
7. Another Disappointment 또 한번의 실망
8. First Work of the Twelve 12사도들의 첫 번째 활동
9. Five Months of Testing 5개월 동안의 시간
10. Organization of the Twelve 12사도들의 조직

171008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And they were offended in him. But Jesus said unto them,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ur, save in his own country, and in his own house.

138:0.1 (1538.1) AFTER preaching the sermon on “The Kingdom,” Jesus called the six apostles together that afternoon and began to disclose his plans for visiting the cities around and about the Sea of Galilee. His brothers James and Jude were very much hurt because they were not called to this conference. Up to this time they had regarded themselves as belonging to Jesus’ inner circle of associates. But Jesus planned to have no close relatives as members of this corps of apostolic directors of the kingdom. This failure to include James and Jude among the chosen few, together with his apparent aloofness from his mother ever since the experience at Cana, was the starting point of an ever-widening gulf between Jesus and his family. This situation continued throughout his public ministry — they very nearly rejected him — and these differences were not fully removed until after his death and resurrection. His mother constantly wavered between attitudes of fluctuating faith and hope, and increasing emotions of disappointment, humiliation, and despair. Only Ruth, the youngest, remained unswervingly loyal to her father-brother. “나라”에 대해 설교하신 후, 예수님은 그날 오후 6명의 사도들을 불러 모아서 갈릴리 바다 주변과 그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하려는 그의 계획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유다는 이 모임에 참석하도록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상했습니다. 그들은 이 시간까지 자신들이 예수님의 핵심 동료에 속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나라의 사도 관리자 무리의 회원에 가까운 친척을 포함하지 않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가나에서의 경험 이후 그가 어머니에게 눈에 띄게 거리감을 둔 것과 아울러 선택된 소수에서 야고보와 유다를 제외시킨 이 일은 예수님과 그의 가족 사이의 틈이 계속 벌어지게 된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의 공(公)사역 내내 계속되었고 ─ 그들은 거의 그를 배척했습니다. ─ 이러한 차이는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요동치는 신앙과 희망의 태도들과 실망, 수치, 절망이 점차 증가되는 감정 사이에서 항상 흔들렸습니다. 막내 룻만이 자신의 오빠이자 아버지격인 예수님에 대해 갈팡질팡하지 않고 여전히 충성스러웠습니다.

138:0.2 (1538.2) Until after the resurrection, Jesus’ entire family had very little to do with his ministry. If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save in his own country, he is not without understanding appreciation save in his own family. 부활 이후까지, 예수님의 가족 전체는 그의 사역에 거의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나라 외에서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면, 그는 자기 가족 외에서 진가를 인정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1. Final Instructions 최종적 지시들

138:1.1 (1538.3) The next day, Sunday, June 23, A.D. 26, Jesus imparted his final instructions to the six. He directed them to go forth, two and two, to teach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He forbade them to baptize and advised against public preaching. He went on to explain that later he would permit them to preach in public, but that for a season, and for many reasons, he desired them to acquire practical experience in dealing personally with their fellow men. Jesus purposed to make their first tour entirely one of personal work. Although this announcement was something of a disappointment to the apostles, still they saw, at least in part, Jesus’ reason for thus beginning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and they started out in good heart and with confident enthusiasm. He sent them forth by twos, James and John going to Kheresa, Andrew and Peter to Capernaum, while Philip and Nathaniel went to Tarichea. 다음 날, 서기 26년 6월 23일 일요일에 예수님은 6명의 사도들에게 최종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둘씩 나가서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세례 주는 것을 금하였으며 공적 설교를 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들이 공적으로 설교하도록 허락할 것이며, 당분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는 실천적 체험을 습득하기 바란다고 이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첫 번 여행이 전적으로 개인적 활동이 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러한 발표가 사도들에게 실망스러웠지만,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라 선포를 시작한 이유를 알았으며, 좋은 심정과 자신만만한 열정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게레사로, 안드레와 베드로는 가버나움으로, 빌립과 나다니엘은 타리케아로 갔습니다.

138:1.2 (1538.4) Before they began this first two weeks of service, Jesus announced to them that he desired to ordain twelve apostles to continue the work of the kingdom after his departure and authorized each of them to choose one man from among his early converts for membership in the projected corps of apostles. John spoke up, asking: “But, Master, will these six men come into our midst and share all things equally with us who have been with you since the Jordan and have heard all your teaching in preparation for this, our first labor for the kingdom?” And Jesus replied: “Yes, John, the men you choose shall become one with us, and you will teach them all that pertains to the kingdom, even as I have taught you.” After thus speaking, Jesus left them. 그들이 이러한 첫 번째 두 주간(AD26. 6.24.월~7.7.주일)의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가 떠난 후, 나라의 일을 계속할 12명의 사도들을 임명하기를 원한다고 발표하셨으며, 기획된 사도 그룹의 회원 자격으로 그의 초기 개종자들 중 한 사람씩 그들 각자가 선택하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요한이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主)여, 이 여섯 사람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게 됩니까? 저희들은 요단 이후로 당신과 함께 있었으며, 그 나라를 위해 저희의 첫 번째 이 일을 준비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왔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요한아, 너희가 선택한 사람들은 우리와 하나가 될 것이며,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쳤듯이, 너희는 그들에게 나라에 관계된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 그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138:1.3 (1539.1) The six did not separate to go to their work until they had exchanged many words in discussion of Jesus’ instruction that each of them should choose a new apostle. Andrew’s counsel finally prevailed, and they went forth to their labors. In substance Andrew said: “The Master is right; we are too few to encompass this work. There is need for more teachers, and the Master has manifested great confidence in us inasmuch as he has intrusted us with the choosing of these six new apostles.” This morning, as they separated to go to their work, there was a bit of concealed depression in each heart. They knew they were going to miss Jesus, and besides their fear and timidity, this was not the way they had pictured the kingdom of heaven being inaugurated. 그들 각자가 새로운 사도를 한 명씩 선택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지시에 대하여 토론과 여러 의견들을 교환하기까지, 여섯 명의 사도들은 일하러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드레의 조언이 지지를 얻어,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위해 떠나갔습니다. 실제로 안드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主)님이 옳도다.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우리는 인원이 부족하다. 선생들이 더 필요하며, 주(主)님은 이 6명의 새로운 사도들을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셔서 우리에 대한 큰 신뢰를 보여주셨다.” 이 날(AD26. 6.23.주일) 아침, 그들이 일을 하러 흩어질 때, 각자의 심정에는 약간의 침울함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았고, 두려움과 겁이 난 것 외에,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것은 자신들의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138:1.4 (1539.2) It had been arranged that the six were to labor for two weeks, after which they were to return to the home of Zebedee for a conference. Meantime Jesus went over to Nazareth to visit with Joseph and Simon and other members of his family living in that vicinity. Jesus did everything humanly possible, consistent with his dedica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to retain the confidence and affection of his family. In this matter he did his full duty and more. 그 여섯 명은 2주 동안 수고하고, 그 후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와 회의하기로 정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요셉과 시몬 그리고 근처에 사는 다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가족의 신뢰와 애정을 유지하려고, 아버지의 뜻을 전심으로 행하는 것과 일치되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는 책임을 충실히 행하셨고 더 하셨습니다.

138:1.5 (1539.3) While the apostles were out on this mission, Jesus thought much about John, now in prison. It was a great temptation to use his potential powers to release him, but once more he resigned himself to “wait upon the Father’s will.”사도들이 이 사명으로 떠나 있는 동안, 예수님은, 현재 투옥되어 있는 요한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의 잠재적 권능을 사용하여 그를 석방시키고 싶은 큰 유혹이 일어났지만, 그는 한 번 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위하여 자신을 맡겼습니다.

2. Choosing the Six 여섯 명 선택

171015 마10:2-4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2 These a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first, Simon (who is called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4 Simon the Zealot and Judas Iscariot, who betrayed him.

138:2.1 (1539.4) This first missionary tour of the six was eminently successful. They all discovered the great value of direct and personal contact with men. They returned to Jesus more fully realizing that, after all, religion is purely and wholly a matter of personal experience. They began to sense how hungry were the common people to hear words of religious comfort and spiritual good cheer. When they assembled about Jesus, they all wanted to talk at once, but Andrew assumed charge, and as he called upon them one by one, they made their formal reports to the Master and presented their nominations for the six new apostles. 이 첫 번째 여섯 명의 선교(宣敎) 여행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과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접촉이 큰 가치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종교란 순전히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의 문제임을 더욱 충분히 인식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위안과 영적 격려의 말씀을 들으려고 갈망하는지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이자(AD26. 7.8.월),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안드레가 책임을 맡아 한 사람씩 불러서, 주(主)님께 정식 보고를 드렸고, 새로운 사도로 추천할 여섯 명을 제시하였습니다.

138:2.2 (1539.5) Jesus, after each man had presented his selection for the new apostleships, asked all the others to vote upon the nomination; thus all six of the new apostles were formally accepted by all of the older six. Then Jesus announced that they would all visit these candidates and give them the call to service. 각자 새로운 사도의 신분으로 선택한 자들을 제시한 후,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지명에 대해 투표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렇게 그 새로운 사도 여섯 명 모두 더 오래된 여섯 명 모두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承認)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이 후보자들을 모두 방문해서 그들에게 봉사하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138:2.3 (1539.6) The newly selected apostles were: 새로 뽑힌 사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8:2.4 (1539.7) 1. Matthew Levi, the customs collector of Capernaum, who had his office just to the east of the city, near the borders of Batanea. He was selected by Andrew. 마태 레위는 가버나움의 세관 징수원으로서, 그의 사무실은 그 도시의 바로 동쪽, 바타니아 경계 근처에 있었습니다. 안드레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5 (1539.8) 2. Thomas Didymus, a fisherman of Tarichea and onetime carpenter and stone mason of Gadara. He was selected by Philip. 도마 디디머스는 타리케아의 어부로서, 한때는 가다라에서 목수와 석공이었습니다. 빌립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6 (1539.9) 3. James Alpheus, a fisherman and farmer of Kheresa, was selected by James Zebedee. 야고보 알패오는 게레사의 어부(漁夫)이자 농부였으며, 야고보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7 (1539.10) 4. Judas Alpheus, the twin brother of James Alpheus, also a fisherman, was selected by John Zebedee. 유다 알패오는 야고보 알패오의 쌍둥이 형제로, 그 역시 어부였으며 요한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8 (1540.1) 5. Simon Zelotes was a high officer in the patriotic organization of the Zealots, a position which he gave up to join Jesus’ apostles. Before joining the Zealots, Simon had been a merchant. He was selected by Peter. 시몬 젤로떼는 열심당이라는 애국적 조직에서 높은 장교였는데,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 참여하려고 그 직위를 포기했습니다. 열심당에 들어가기 전에 시몬은 상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9 (1540.2) 6. Judas Iscariot was an only son of wealthy Jewish parents living in Jericho. He had become attached to John the Baptist, and his Sadducee parents had disowned him. He was looking for employment in these regions when Jesus’ apostles found him, and chiefly because of his experience with finances, Nathaniel invited him to join their ranks. Judas Iscariot was the only Judean among the twelve apostles. 가룟 유다는 여리고에 사는 어느 부유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에게 소속되었기에, 사두개인인 그의 부모는 그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지역에서 직장을 찾고 있었으며, 재정에 관한 경력이 주된 원인으로, 나다니엘이 그를 그들의 대열에 들어오도록 초청했습니다. 유다는 12명의 사도들 중에서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습니다.

138:2.10 (1540.3) Jesus spent a full day with the six, answering their questions and listening to the details of their reports, for they had many interesting and profitable experiences to relate. They now saw the wisdom of the Master’s plan of sending them out to labor in a quiet and personal manner before the launching of their more pretentious public efforts. 예수님은 여섯 사도들과 온 종일(AD26. 7.8.월) 보내면서,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이 보고한 세부적인 사실들을 경청하셨는데, 그들이 관련된 흥미 있고 유익한 체험들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욱 야심적인 공적(公的)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하고 개인적 방법으로 수고하라고 그들을 내보내신 주(主)님의 지혜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3. The Call of Matthew and Simon 마태와 시몬을 부르심

171022 마9:9-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10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Matthew’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ate with him and his disciples. 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2 On hearing this, Jesus said,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13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For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138:3.1 (1540.4) The next day Jesus and the six went to call upon Matthew, the customs collector. Matthew was awaiting them, having balanced his books and made ready to turn the affairs of his office over to his brother. As they approached the toll house, Andrew stepped forward with Jesus, who, looking into Matthew’s face, said, “Follow me.” And he arose and went to his house with Jesus and the apostles. 다음 날(AD 26. 7. 9. 화) 예수님과 여섯 사도들은 세리(세관 징수원) 마태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마태는 그의 장부를 정리해 놓고, 동생에게 그의 사무실의 관련된 일들을 넘겨줄 준비를 마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금징수소에 접근했을 때, 안드레가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나갔으며, 예수님은 마태의 얼굴을 바라보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138:3.2 (1540.5) Matthew told Jesus of the banquet he had arranged for that evening, at least that he wished to give such a dinner to his family and friends if Jesus would approve and consent to be the guest of honor. And Jesus nodded his consent. Peter then took Matthew aside and explained that he had invited one Simon to join the apostles and secured his consent that Simon be also bidden to this feast. 마태는 그 날(AD 26. 7. 9. 화) 저녁 연회를 마련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면서, 예수께서 연회의 귀빈으로 승인하고 동의해주신다면, 적어도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그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찬성한다고 끄덕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태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시몬이라는 한 사람을 사도로 가입하도록 초청했다고 설명하면서, 시몬도 그 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138:3.3 (1540.6) After a noontide luncheon at Matthew’s house they all went with Peter to call upon Simon the Zealot, whom they found at his old place of business, which was now being conducted by his nephew. When Peter led Jesus up to Simon, the Master greeted the fiery patriot and only said, “Follow me.” 마태의 집에서 점심식사 후에, 그들은 모두 베드로와 함께 열심당원 시몬을 방문하러 가서 그가 이전에 사업을 하던 장소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그의 조카가 그 일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시몬에게 갔을 때, 주(主)님은 그 열성 애국자에게 인사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138:3.4 (1540.7) They all returned to Matthew’s home, where they talked much about politics and religion until the hour of the evening meal. The Levi family had long been engaged in business and tax gathering; therefore many of the guests bidden to this banquet by Matthew would have been denominated “publicans and sinners” by the Pharisees. 그들은 모두 마태의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 정치와 종교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레위 집안은 오랫동안 사업과 세금 징수에 종사해왔으므로; 마태가 이 연회에 초대한 많은 손님들은 바리새인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8:3.5 (1540.8) In those days, when a reception-banquet of this sort was tendered a prominent individual, it was the custom for all interested persons to linger about the banquet room to observe the guests at meat and to listen to the conversation and speeches of the men of honor. Accordingly, most of the Capernaum Pharisees were present on this occasion to observe Jesus’ conduct at this unusual social gathering. 그 당시 저명인사를 위해 이런 종류의 환영회가 열리면,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연회실에 남아 식사에 참석한 손님들을 주목하면서 귀빈과의 대담과 연설을 경청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버나움에 있는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여느 때와 다른 이러한 사교 모임에서 예수님의 행위를 관찰하기 위해 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38:3.6 (1540.9) As the dinner progressed, the joy of the diners mounted to heights of good cheer, and everybody was having such a splendid time that the onlooking Pharisees began, in their hearts, to criticize Jesus for his participation in such a lighthearted and carefree affair. Later in the evening, when they were making speeches, one of the more malignant of the Pharisees went so far as to criticize Jesus’ conduct to Peter, saying: “How dare you to teach that this man is righteous when he eats with publicans and sinners and thus lends his presence to such scenes of careless pleasure making.” Peter whispered this criticism to Jesus before he spoke the parting blessing upon those assembled. When Jesus began to speak, he said: “In coming here tonight to welcome Matthew and Simon to our fellowship, I am glad to witness your lightheartedness and social good cheer, but you should rejoice still more because many of you will find entrance into the coming kingdom of the spirit, wherein you shall more abundantly enjoy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to you who stand about criticizing me in your hearts because I have come here to make merry with these friends, let me say that I have come to proclaim joy to the socially downtrodden and spiritual liberty to the moral captives. Need I remind you that they who are whole need not a physician, but rather those who are sick? I have come, not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만찬이 무르익자, 손님들의 기쁨은 진수성찬으로 절정에 올라, 모두 그렇게 멋진 시간을 보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편안한 마음과 즐거운 파티에 참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심정)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늦게, 사람들이 연설 중에 있을 때, 악의를 많이 품은 바리새인 하나가 다음과 같은 말로 베드로에게 예수의 행위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어찌 감히 너는 이 사람이 의롭다고 가르치느냐?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으며 그렇게 경솔한 즐거움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느냐?” 예수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나누기 전에, 베드로는 이 비난을 예수님에게 속삭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마태와 시몬을 우리 동료로 환영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왔더니, 너희가 편한 마음과 좋은 친목의 분위기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내가 기쁘지만, 너희가 더욱 기뻐해야만 하는 이유는 너희 중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영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것이며, 거기서 너희는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여기에 있는 것 때문에 둘러서서 마음(심정)으로 나를 비난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사회적으로 짓밟힌 자들에게는 기쁨을 선포하고, 도덕적으로 포로가 된 자들에게는 영적 해방을 선포하러 왔노라. 건강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너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느냐?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왔도다.”

138:3.7 (1541.1) And truly this was a strange sight in all Jewry: to see a man of righteous character and noble sentiments mingling freely and joyously with the common people, even with an irreligious and pleasure-seeking throng of publicans and reputed sinners. Simon Zelotes desired to make a speech at this gathering in Matthew’s house, but Andrew, knowing that Jesus did not want the coming kingdom to become confused with the Zealots’ movement, prevailed upon him to refrain from making any public remarks. 그리고 참으로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상한 광경이었는데, 의로운 성품과 고상한 정서를 지닌 사람이, 보통 사람들 심지어 경건하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세리들과 죄인으로 알려진 무리들과 자유롭고 즐겁게 어울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마태의 집에 모인 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싶었지만, 다가오는 나라가 열심당의 운동과 혼동되는 것을 예수께서 원하지 않으심을 알고 있는 안드레가 어떤 공적 소견도 말하지 않도록 그를 설득했습니다.

138:3.8 (1541.2) Jesus and the apostles remained that night in Matthew’s house, and as the people went to their homes, they spoke of but one thing: the goodness and friendliness of Jesus.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 날(AD 26. 7. 9. 화) 밤 마태의 집에서 보냈으며,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단 한 가지, 즉 예수님의 선함과 친절함만을 이야기했습니다.

4. The Call of the Twins 쌍둥이 형제를 부르심

171029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Here there is no Greek or Jew,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s in all.

138:4.1 (1541.3) On the morrow all nine of them went by boat over to Kheresa to execute the formal calling of the next two apostles, James and Judas the twin sons of Alpheus, the nominees of James and John Zebedee. The fisherman twins were expecting Jesus and his apostles and were therefore awaiting them on the shore. James Zebedee presented the Master to the Kheresa fishermen, and Jesus, gazing on them, nodded and said, “Follow me.” 다음 날(AD 26. 7. 10. 수) 그들 9명 모두, 야고보 세베대와 요한 세베대가 추천한, 다음 차례의 두 사도들, 즉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들인 야고보와 유다를 정식으로 부르기 위하여 배를 타고 게레사로 건너갔습니다. 어부였던 쌍둥이 형제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호숫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세베대가 게레사의 그 어부들에게 주(主)님을 소개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8:4.2 (1541.4) That afternoon, which they spent together, Jesus fully instructed them concerning attendance upon festive gatherings, concluding his remarks by saying: “All men are my brothers. My Father in heaven does not despise any creature of our making. The kingdom of heaven is open to all men and women. No man may close the door of mercy in the face of any hungry soul who may seek to gain an entrance thereto. We will sit at meat with all who desire to hear of the kingdom. As our Father in heaven looks down upon men, they are all alike. Refuse not therefore to break bread with Pharisee or sinner, Sadducee or publican, Roman or Jew, rich or poor, free or bond. The door of the kingdom is wide open for all who desire to know the truth and to find God.” 그들이 함께 보낸 그 날(AD 26. 7. 10. 수) 오후, 예수님은 잔치 모임의 참가에 대하여 충분히 가르치시면서, 다음의 말로 끝맺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 형제들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우리가 창조한 어떤 창조물도 무시하지 않는다. 하늘나라는 모든 남녀들에게 열려있다. 거기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어떤 굶주린 혼의 면전에서 아무도 자비의 문을 닫지 않는다. 우리는 나라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모두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모두 똑같이 취급하신다. 따라서 바리새인이나 죄인, 사두개인이나 세리, 로마인이나 유대인,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나 묶인 자와 함께 빵을 떼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 나라의 문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넓게 열려져 있다.”

138:4.3 (1541.5) That night at a simple supper at the Alpheus home, the twin brothers were received into the apostolic family. Later in the evening Jesus gave his apostles their first lesson dealing with the origin, nature, and destiny of unclean spirits, but they could not comprehend the import of what he told them. They found it very easy to love and admire Jesus but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many of his teachings. 그날(AD 26. 7. 10. 수) 밤 알패오의 집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쌍둥이 형제들은 사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예수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불결한 영들의 기원, 본성, 운명에 관하여 처음으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일은 매우 쉬웠으나,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138:4.4 (1542.1) After a night of rest the entire party, now numbering eleven, went by boat over to Tarichea. 하루 밤을 쉰 후, 이제 11명이 된 전체 일행은 배를 타고 타리케아로 건너갔습니다(AD 26. 7. 11. 목).

5. The Call of Thomas and Judas 도마와 유다를 부르심

138:5.1 (1542.2) Thomas the fisherman and Judas the wanderer met Jesus and the apostles at the fisher-boat landing at Tarichea, and Thomas led the party to his near-by home. Philip now presented Thomas as his nominee for apostleship and Nathaniel presented Judas Iscariot, the Judean, for similar honors. Jesus looked upon Thomas and said: “Thomas, you lack faith; nevertheless, I receive you. Follow me.” To Judas Iscariot the Master said: “Judas, we are all of one flesh, and as I receive you into our midst, I pray that you will always be loyal to your Galilean brethren. Follow me.” (AD 26. 7. 11. 목) 어부였던 도마와, 방랑자 유다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타리케아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만났으며, 도마는 근처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안내하였습니다. 빌립은 이제 자신이 사도로 추천한 도마를 소개하였고, 나다니엘은 유대 지방 사람인 가룟 유다를 역시 정중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신앙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나를 따르라.” 주(主)님은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우리는 모두 한 몸이며, 너를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처럼, 너는 항상 너의 갈릴리 형제들에게 충성하게 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나를 따르라.”

138:5.2 (1542.3) When they had refreshed themselves, Jesus took the twelve apart for a season to pray with them and to instruct them in the nature and work of the Holy Spirit, but again did they largely fail to comprehend the meaning of those wonderful truths which he endeavored to teach them. One would grasp one point and one would comprehend another, but none of them could encompass the whole of his teaching. Always would they make the mistake of trying to fit Jesus’ new gospel into their old forms of religious belief. They could not grasp the idea that Jesus had come to proclaim a new gospel of salvation and to establish a new way of finding God; they did not perceive that he was a new revelation of the Father in heaven. 그들이 기운을 차리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본성과 사역에 대해 가르치기 위하여, 한동안 12명을 데리고 떠났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그가 가르치고자 애썼던 그 놀라운 진리들의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한 면을 이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한 면을 이해하였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그의 가르침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새 복음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옛 형태의 종교적 믿음(신념)에 끼워 맞추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새로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찾는 새로운 길을 설립하러 오신 그 관념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새로운 계시였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138:5.3 (1542.4) The next day Jesus left his twelve apostles quite alone; he wanted them to become acquainted and desired that they be alone to talk over what he had taught them. The Master returned for the evening meal, and during the after-supper hours he talked to them about the ministry of seraphim, and some of the apostles comprehended his teaching. They rested for a night and the next day departed by boat for Capernaum. 다음날 (AD 26. 7/12 금) 예수님은 그의 12 사도들을 그들끼리만 남겨두셔서, 그들이 서로 친해지기를 원하였으며 자신이 가르쳤던 것들에 대해서 그들끼리만 서로 의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主)님은 저녁 식사 시간에 돌아오셨고, 식사 후에 그는 세라핌 천사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하셨는데, 사도 중 몇 명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에 쉰 후, 다음날(AD 26. 7/13 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났습니다.

138:5.4 (1542.5) Zebedee and Salome had gone to live with their son David so that their large home could be turned over to Jesus and his twelve apostles. Here Jesus spent a quiet Sabbath with his chosen messengers; he carefully outlined the plans for proclaiming the kingdom and fully explained the importance of avoiding any clash with the civil authorities, saying: “If the civil rulers are to be rebuked, leave that task to me. See that you make no denunciations of Caesar or his servants.” It was this same evening that Judas Iscariot took Jesus aside to inquire why nothing was done to get John out of prison. And Judas was not wholly satisfied with Jesus’ attitude. 세베대와 살로메는 그들의 아들 다윗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나갔기 때문에 그들의 큰 집을 예수와 그의 12사도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메신저들과 함께 조용한 안식일(AD 26. 7. 13토)을 보냈습니다. 그는 나라의 선포를 위한 계획의 윤곽을 신중히 그리셨고, 정부 당국과의 어떤 충돌이라도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시민 통치자들을 비난해야 한다면, 그 일은 내게 맡기라. 너희는 시저나 그의 신하들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말라.” 이 날 저녁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한쪽으로 모셔서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여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태도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6. The Week of Intensive Training 집중적인 훈련의 주간

171105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by a new and living way opened for us through the curtain, that is, his body,

138:6.1 (1542.6) The next week was devoted to a program of intense training. Each day the six new apostles were put in the hands of their respective nominators for a thoroughgoing review of all they had learned and experienced in preparation for the work of the kingdom. The older apostles carefully reviewed, for the benefit of the younger six, Jesus’ teachings up to that hour. Evenings they all assembled in Zebedee’s garden to receive Jesus’ instruction. 그 다음 주(AD26. 7. 14.일~20토)는 집중적인 훈련 계획에 바쳐졌습니다. 사도들이 나라의 일을 준비하면서 배우고 체험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복습하도록, 6명의 새 사도들은 매일 각자 자기를 추천한 사도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선배 사도들은 6명의 후배 사도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이 그때까지 받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복습했습니다. 저녁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지침을 받으려고 세베대의 뜰에 모였습니다.

138:6.2 (1542.7) It was at this time that Jesus established the mid-week holiday for rest and recreation. And they pursued this plan of relaxation for one day each week throughout the remainder of his material life. As a general rule, they never prosecuted their regular activities on Wednesday. On this weekly holiday Jesus would usually take himself away from them, saying: “My children, go for a day of play. Rest yourselves from the arduous labors of the kingdom and enjoy the refreshment that comes from reverting to your former vocations or from discovering new sorts of recreational activity.” While Jesus, at this period of his earth life, did not actually require this day of rest, he conformed to this plan because he knew it was best for his human associates. Jesus was the teacher — the Master; his associates were his pupils — disciples. 이즈음에 예수님은 휴식과 오락을 위하여 주중의 하루를 휴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육신적 여생(餘生) 내내, 매주 하루는 휴식하는 이 계획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수요일에는 정규 활동들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매주 이 휴일에는 보통 그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가서 하루를 즐기어라. 나라의 힘든 수고를 그치고 쉬되, 너희의 예전 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로운 오락 활동을 찾아서, 피로를 풀어라.” 지상 생애의 이 기간에 예수님은 휴식하는 이 하루가 실제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인간 동료들을 위해서 그것이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 계획을 따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주(主)님─이셨고, 그의 동료들은 그의 학생들─제자들─이었습니다.

138:6.3 (1543.1) Jesus endeavored to make clear to his apostles the difference between his teachings and his life among them and the teachings which might subsequently spring up about him. Said Jesus: “My kingdom and the gospel related thereto shall be the burden of your message. Be not sidetracked into preaching about me and about my teachings.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portray my revelation of the Father in heaven but do not be misled into the bypaths of creating legends and building up a cult having to do with beliefs and teachings about my beliefs and teachings.” But again they did not understand why he thus spoke, and no man dared to ask why he so taught them.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과 그들 중에서 생활하신 삶과, 후에 자신에 대해서 생길 수 있는 가르침들 사이의 차이점을, 사도들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와 그와 관련된 복음이 너희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하리라. 나에 대해서나 나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교하는 잘못된 곁길로 빠지지 말라.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내가 계시하는 하늘의 아버지를 묘사하라. 그러나 나의 믿음(신념)들과 가르침들에 대한 믿음(신념)들과 가르침들과 관계된 전설을 창조하고 종파(宗派)를 세우는 샛길로 잘못 인도하지 말라.” 그러나 또 다시 그들은 그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가 왜 그렇게 자기들을 가르치시는지 감히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138:6.4 (1543.2) In these early teachings Jesus sought to avoid controversies with his apostles as far as possible excepting those involving wrong concepts of his Father in heaven. In all such matters he never hesitated to correct erroneous beliefs. There was just one motive in Jesus’ postbaptismal life on Urantia, and that was a better and truer revelation of his Paradise Father; he was the pioneer of the new and better way to God, the way of faith and love. Ever his exhortation to the apostles was: “Go seek for the sinners; find the downhearted and comfort the anxious.” 이 초기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 한, 가급적이면 사도들과 논쟁하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제기될 때에는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잘못된 믿음(신념)들을 바로잡았습니다. 지구(유란시아)에서 세례 이후에 예수님의 일생은 단 한 가지의 동기만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천국 아버지를 더 낫게 더 참되게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새롭고 더 좋은 길, 신앙과 사랑의 길의 개척자였습니다. 항상 사도들에게 주신 그의 권고는 “가서 죄인들을 찾으라. 낙담한 자들을 찾고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38:6.5 (1543.3) Jesus had a perfect grasp of the situation; he possessed unlimited power, which might have been utilized in the furtherance of his mission, but he was wholly content with means and personalities which most people would have regarded as inadequate and would have looked upon as insignificant. He was engaged in a mission of enormous dramatic possibilities, but he insisted on going about his Father’s business in the most quiet and undramatic manner; he studiously avoided all display of power. And he now planned to work quietly, at least for several months, with his twelve apostles around about the Sea of Galilee. 예수님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 추진에 사용될 무제한적 권능을 소유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충분한 것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었을 방법들과 고유성들에 전적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는 거대한 극적(劇的)인 가능성을 지닌 사명을 수행 중이셨지만,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자기 아버지의 일을 해나가도록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권능의 과시를 피하려고 몹시 애쓰셨습니다. 그는 이제 적어도 몇 달 동안 그의 12사도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조용히 일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7. Another Disappointment 또 한 번의 실망

171112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138:7.1 (1543.4) Jesus had planned for a quiet missionary campaign of five months’ personal work. He did not tell the apostles how long this was to last; they worked from week to week. And early on this first day of the week, just as he was about to announce this to his twelve apostles, Simon Peter, James Zebedee, and Judas Iscariot came to have private converse with him. Taking Jesus aside, Peter made bold to say: “Master, we come at the behest of our associates to inquire whether the time is not now ripe to enter into the kingdom. And will you proclaim the kingdom at Capernaum, or are we to move on to Jerusalem? And when shall we learn, each of us, the positions we are to occupy with you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 ” and Peter would have gone on asking further questions, but Jesus raised an admonitory hand and stopped him. And beckoning the other apostles standing near by to join them, Jesus said: “My little children,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Have I not made it plain to you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 have told you many times that I have not come to sit on David’s throne, and now how is it that you are inquiring which place each of you will occupy in the Father’s kingdom? Can you not perceive that I have called you as ambassadors of a spiritual kingdom? Do you not understand that soon, very soon, you are to represent me in the world and 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even as I now represent my Father who is in heaven? Can it be that I have chosen you and instructed you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and yet you do not comprehend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this coming kingdom of divine pre-eminence in the hearts of men? My friends, hear me once more. Banish from your minds this idea that my kingdom is a rule of power or a reign of glory. Indeed,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will presently be given into my hands, but it is not the Father’s will that we use this divine endowment to glorify ourselves during this age. In another age you shall indeed sit with me in power and glory, but it behooves us now to submit to the will of the Father and to go forth in humble obedience to execute his bidding on earth.” 예수님은 다섯 달 동안(AD26. 7월 21일 ~ 12월) 개인적으로 일하는 조용한 선교 캠페인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주일 단위로 일했습니다. 그 주간의 이 첫째 날(AD26. 7. 21. 주일) 이른 아침에, 그가 12 사도들에게 이 계획을 발표하려는 그 때, 시몬 베드로, 야고보 세베대, 유다 가룟이 예수님께 와서 사적인 면담을 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한 쪽으로 모시고 가서, 베드로가 대담하게 말했습니다. “주(主)여, 나라로 들어갈 때가 이제 무르익은 것은 아닌지 동료들의 부탁으로 여쭈려고 저희가 왔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은 나라를 가버나움에서 선포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것입니까? 그리고 나라를 설립할 때 당신과 함께 저희 각자가 맡아야 할 직위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베드로가 계속 더 질문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훈계의 손을 드시면서 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합세하려고 근처에 서 있는 다른 사도들을 손짓으로 부르시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너희에게 명백히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다윗의 왕좌에 앉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지금 너희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차지할 각자의 직위를 묻고 있느냐? 내가 너희를 영적 나라의 대사로 불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내가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듯이, 너희는 곧, 바로 곧, 이 세상에서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서 나를 대신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나라의 메신저들로서 가르쳤는데, 사람들의 마음(심정)에 신적 탁월함으로 다가오는 이 나라의 본질과 중요성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나의 친구들아, 한 번 더 내 말을 들으라. 내 나라는 권능의 통치나 영광의 지배라는 이 관념을 마음에서 지우라. 진실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이 곧 내 손에 주어지겠지만, 이 신적 자질을 이 시대에 우리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쓰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다른 시대에, 너희는 진실로 나와 함께 권능과 영광으로 앉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이 땅에서 그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겸손히 순종함으로 출발함이 마땅하니라.”

138:7.2 (1544.1) Once more were his associates shocked, stunned. Jesus sent them away two and two to pray, asking them to return to him at noontime. On this crucial forenoon they each sought to find God, and each endeavored to cheer and strengthen the other, and they returned to Jesus as he had bidden them. 그의 동료들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을 지워 기도하러 보내시면서 점심시간까지(AD 26. 7. 21. 주일 오전)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중대한 이날 오전에 그들은 각자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썼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예수께서 명한대로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138:7.3 (1544.2) Jesus now recounted for them the coming of John, the baptism in the Jordan, the marriage feast at Cana, the recent choosing of the six, and the withdrawal from them of his own brothers in the flesh, and warned them that the enemy of the kingdom would seek also to draw them away. After this short but earnest talk the apostles all arose, under Peter’s leadership, to declare their undying devotion to their Master and to pledge their unswerving loyalty to the kingdom, as Thomas expressed it, “To this coming kingdom, no matter what it is and even if I do not fully understand it.” They all truly believed in Jesus, even though they did not fully comprehend his teaching.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온 것, 요단강에서의 세례, 가나의 혼인 잔치, 최근에 여섯 사도를 선택한 일, 그리고 자신의 친형제들을 그들로부터 제외시킨 점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면서, 하늘나라의 적(敵)이 그들도 떼어내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짧지만 진지한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모두 일어나 베드로의 지도(指導) 아래, 도마가 표현한 대로 “다가오는 이 나라가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의 주(主)님에 대한 자신들의 변치 않는 헌신을 선언했으며, 나라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두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138:7.4 (1544.3) Jesus now asked them how much money they had among them; he also inquired as to what provision had been made for their families. When it developed that they had hardly sufficient funds to maintain themselves for two weeks, he said: “It is not the will of my Father that we begin our work in this way. We will remain here by the sea two weeks and fish or do whatever our hands find to do; and in the meantime, under the guidance of Andrew, the first chosen apostle, you shall so organize yourselves as to provide for everything needful in your future work, both for the present personal ministry and also when I shall subsequently ordain you to preach the gospel and instruct believers.” They were all greatly cheered by these words; this was their first clear-cut and positive intimation that Jesus designed later on to enter upon more aggressive and pretentious public efforts.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을 위한 생활비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물었습니다. 2주간 유지할 기금도 충분하지 않음이 드러나자,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 바닷가에 두 주간을 머물면서, 물고기를 낚거나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할 일을 할 것이다. 그 동안 너희는 첫째로 선택된 사도인 안드레의 지도 아래, 현재의 개인적 사역과 또한 내가 나중에 복음을 설교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치도록 너희를 임명할 때를 위하여, 너희 앞날의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도록 너희는 자신들을 조직하라.”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두 기운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중에 좀 더 적극적이고 당당한 공적 수고를 하려고 계획하신다는, 첫 번째의 뚜렷한 긍정적 암시였습니다.

138:7.5 (1544.4) The apostles spent the remainder of the day perfecting their organization and completing arrangements for boats and nets for embarking on the morrow’s fishing as they had all decided to devote themselves to fishing; most of them had been fishermen, even Jesus was an experienced boatman and fisherman. Many of the boats which they used the next few years had been built by Jesus’ own hands. And they were good and trustworthy boats. 사도들은 모두 고기잡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조직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AD26. 7. 22. 월) 고기잡이를 시작하려고 배와 그물의 준비를 마치면서, 그 날의 나머지(AD26. 7. 21. 주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부들이었고, 예수님 자신도 노련한 뱃사람이며, 어부였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이 사용한 많은 배들은 예수께서 손수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들은 상태가 양호하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138:7.6 (1544.5) Jesus enjoined them to devote themselves to fishing for two weeks, adding, “And then will you go forth to become fishers of men.” They fished in three groups, Jesus going out with a different group each night. And they all so much enjoyed Jesus! He was a good fisherman, a cheerful companion, and an inspiring friend; the more they worked with him, the more they loved him. Said Matthew one day: “The more you understand some people, the less you admire them, but of this man, even the less I comprehend him, the more I love him.” 예수님은 그들에게 2주간(AD26. 7. 22. 월~8. 4. 일) 고기잡이에 전념하라고 이르시며 덧붙였습니다. “다음에는 너희가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고기를 잡았으며, 예수님은 매일 밤 다른 무리와 함께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그는 솜씨 좋은 어부였으며, 명랑한 동행자였고, 영감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일을 할수록, 그들은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마태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더 알아 갈수록, 덜 칭찬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에, 그를 이해하기는 더 어려워져도,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138:7.7 (1545.1) This plan of fishing two weeks and going out to do personal work in behalf of the kingdom for two weeks was followed for more than five months, even to the end of this year of A.D. 26, until after the cessation of those special persecutions which had been directed against John’s disciples subsequent to his imprisonment. 2 주 동안 고기를 잡고 2 주 동안 나라를 위해 개인을 상대로 일하러 나가는 이 계획은 다섯 달 이상, 심지어 서기 26년의 이 해의 말까지, 요한의 투옥에 연이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대항하는 특별한 박해(迫害)가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8. First Work of the Twelve 12 사도들의 첫 번째 활동

171119 요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138:8.1 (1545.2) After disposing of the fish catches of two weeks, Judas Iscariot, the one chosen to act as treasurer of the twelve, divided the apostolic funds into six equal portions, funds for the care of dependent families having been already provided. And then near the middle of August, in the year A.D. 26, they went forth two and two to the fields of work assigned by Andrew. The first two weeks Jesus went out with Andrew and Peter, the second two weeks with James and John, and so on with the other couples in the order of their choosing. In this way he was able to go out at least once with each couple before he called them together for the beginning of their public ministry. 두 주간(AD 26. 7. 22 월-8. 4 주일)의 고기잡이를 끝낸 후, 12사도들의 회계로 행하도록 선택된 유다 가룟은, 부양가족을 돌보기 위해 이미 마련되어 있던 사도적 기금을 6등분으로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서기 26년 8월 중순 무렵에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안드레가 배치한 일터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첫 두 주일(AD26. 8. 5. 월 ~8. 18. 주일)에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두 번째 두 주일(AD26. 8. 19. 월~9. 1. 주일까지 고기 잡고, AD26. 9. 2. 월~ 9. 15. 주일까지 활동)에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순서에 따라 다른 쌍과 함께 나가셨습니다(AD26. 9. 16. 월~ 9. 29. 주일까지 고기 잡고, AD26. 9. 30. 월~AD26. 10. 13. 주일). 이런 식으로 그는 공적 사역의 시작을 위해 그들을 함께 부르기 전에, 적어도 한 번씩은 각 쌍들과 같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1 어업(AD26. 7/22월-8/4주일)& 사역(8/5월-8/18주일) – 안드레와 베드로
2 어업(8/19월-9/1주일)& 사역(9/2월-9/15주일) – 야고보와 요한
3 어업(9/16월-9/29주일)& 사역(9/30월-10/13주일)
4 어업(10/14월-10/27주일)& 사역(10/28월-11/10주일)
5 어업(11/11월-11/24주일)& 사역(11/25월-12/8주일)
6 어업(12/9월-12/22주일)& 사역(12/23월-AD27. 1/5주일)

138:8.2 (1545.3) Jesus taught them to preach the forgiveness of sin through faith in God without penance or sacrifice, and that the Father in heaven loves all his children with the same eternal love. He enjoined his apostles to refrain from discussing: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나 희생물 없이 하나님을 믿음(신앙)으로 죄 용서 받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영원한 사랑으로 그의 모든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설교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다음 사항들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셨습니다.

138:8.3 (1545.4) 1. The work and imprisonment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과업과 투옥.

138:8.4 (1545.5) 2. The voice at the baptism. Said Jesus: “Only those who heard the voice may refer to it. Speak only that which you have heard from me; speak not hearsay.” 세례 받을 때 들린 음성. 예수님은 “음성을 들었던 자들만 그것에 대해 언급할 수 있노라. 나로부터 들은 것들만 말하고; 소문(所聞)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38:8.5 (1545.6) 3. The turning of the water into wine at Cana. Jesus seriously charged them, saying, “Tell no man about the water and the wine.”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물과 포도주에 관해서 말하지 말라.”라고 엄하게 지시하셨습니다.

138:8.6 (1545.7) They had wonderful times throughout these five or six months during which they worked as fishermen every alternate two weeks, thereby earning enough money to support themselves in the field for each succeeding two weeks of missionary work for the kingdom. 그들은 대여섯 달 내내 놀라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 동안 매번 두 주씩 번갈아 어부로 일했으며, 그것으로 넉넉히 돈을 벌어, 매번 연이은 두 주간씩 나라를 위해 현장에서 선교적 일을 하는 자신들을 부양했습니다.

138:8.7 (1545.8) The common people marveled at the teaching and ministry of Jesus and his apostles. The rabbis had long taught the Jews that the ignorant could not be pious or righteous. But Jesus’ apostles were both pious and righteous; yet they were cheerfully ignorant of much of the learning of the rabbis and the wisdom of the world.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역에 놀랐습니다. 랍비들은 무지한 자는 경건하거나 의로울 수 없다고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경건하며 의로웠으나, 랍비들의 배움과 세상의 지혜의 대부분에 대해 기꺼이 무지했습니다.

138:8.8 (1545.9) Jesus made plain to his apostl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repentance of so-called good works as taught by the Jews and the change of mind by faith — the new birth — which he required as the price of admission to the kingdom. He taught his apostles that faith was the only requisite to entering the Father’s kingdom. John had taught them “repentance —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Jesus taught, “Faith is the open door for entering into the present, perfect, and eternal love of God.” Jesus did not speak like a prophet, one who comes to declare the word of God. He seemed to speak of himself as one having authority. Jesus sought to divert their minds from miracle seeking to the finding of a real and personal experience in the satisfaction and assurance of the indwelling of God’s spirit of love and saving grace.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소위 선행의 회개와 나라의 입장료로 요구되는 신앙에 의한 마음의 변화 – 새 탄생(거듭남) – 사이의 차이점을 사도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신앙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필수조건임을 사도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은 “회개(悔改) –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라.”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 “신앙은 오늘,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권위를 지닌 자로서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여 속죄와 확신에 대한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을 찾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전환하려고 애쓰셨습니다.

138:8.9 (1545.10) The disciples early learned that the Master had a profound respect and sympathetic regard for every human being he met, and they were tremendously impressed by this uniform and unvarying consideration which he so consistently gave to all sorts of men, women, and children. He would pause in the midst of a profound discourse that he might go out in the road to speak good cheer to a passing woman laden with her burden of body and soul. He would interrupt a serious conference with his apostles to fraternize with an intruding child. Nothing ever seemed so important to Jesus as the individual human who chanced to be in his immediate presence. He was master and teacher, but he was more — he was also a friend and neighbor, an understanding comrade. 제자들은 주(主)님께서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마다 깊은 존중과 공감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으며, 모든 계층의 남녀와 아이들에게 그렇게 일관되게 쏟는 이러한 한결같고 변함없는 배려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오한 강연 중에도 멈추고, 몸과 혼의 짐을 진 지나가는 여인을 격려하기 위하여 길로 나가셨습니다. 그는 뛰어드는 아이와 사귀려고, 사도들과의 진지한 회의를 중단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장 눈앞에서 만났던 개인이 언제나 무엇보다 중요한 듯 보였습니다. 그는 주님이며 선생님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또한 친구이며 이웃이었으며, 이해심 많은 벗이었습니다.

138:8.10 (1546.1) Though Jesus’ public teaching mainly consisted in parables and short discourses, he invariably taught his apostles by questions and answers. He would always pause to answer sincere questions during his later public discourses.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이 주로 비유와 짧은 강연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는 질문과 대답으로 변함없이 사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후일 공적 강연 중에도 진지한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언제나 멈추셨습니다.

138:8.11 (1546.2) The apostles were at first shocked by, but early became accustomed to, Jesus’ treatment of women; he made it very clear to them that women were to be accorded equal rights with men in the kingdom. 사도들은 처음에, 여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충격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익숙해졌으며; 그는 나라에서는 여인들도 남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됨을 그들에게 아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9. Five Months of Testing 5개월 동안의 시험

171126 5개월의 시험과 사도 조직 막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When his family heard about this, they went to take charge of him, for they said, “He is out of his mind(NIV).” And when his friends heard of it, they went out to lay hold on him: for they said, He is beside himself(KJV).

138:9.1 (1546.3) This somewhat monotonous period of alternate fishing and personal work proved to be a grueling experience for the twelve apostles, but they endured the test. With all of their grumblings, doubts, and transient dissatisfactions they remained true to their vows of devotion and loyalty to the Master. It was their personal association with Jesus during these months of testing that so endeared him to them that they all (save Judas Iscariot) remained loyal and true to him even in the dark hours of the trial and crucifixion. Real men simply could not actually desert a revered teacher who had lived so close to them and had been so devoted to them as had Jesus. Through the dark hours of the Master’s death, in the hearts of these apostles all reason, judgment, and logic were set aside in deference to just one extraordinary human emotion — the supreme sentiment of friendship-loyalty. These five months of work with Jesus led these apostles, each one of them, to regard him as the best friend he had in all the world. And it was this human sentiment, and not his superb teachings or marvelous doings, that held them together until after the resurrection and the renewal of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고기잡이와 개인적 사명을 교대로 하던, 어느 정도 단조로운 이 기간은 12사도들이 녹초가 되는 경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시험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의심 그리고 일시적 불만을 품은 채로, 주(主)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의 서약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이러한 시험하는 몇 달 동안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통해 그를 귀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재판과 십자가형의 암울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예수님께 여전히 충성하고 성실했습니다. 실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자신들에게 친하셨고 헌신적으로 사셨던 존경하는 선생님을 실제로 단순히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주(主)께서 별세하던 어두운 시간들 내내, 이 사도들의 마음(심정)에서 오직 하나의 특별한 인간 감정─우정과 충성의 최극 정서(感想)─을 존중하여 모든 이유, 판단, 그리고 논리는 버려졌습니다. 예수님과 일하던 이 다섯 달은 이 사도들 각자가 예수님을 온 세상에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새로운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까지, 사도들을 함께 붙들어 둔 것은 이 인간의 정서였지,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나 놀라운 행적이 아니었습니다.

138:9.2 (1546.4) Not only were these months of quiet work a great test to the apostles, a test which they survived, but this season of public inactivity was a great trial to Jesus’ family. By the time Jesus was prepared to launch forth on his public work, his entire family (except Ruth) had practically deserted him. On only a few occasions did they attempt to make subsequent contact with him, and then it was to persuade him to return home with them, for they came near to believing that he was beside himself. They simply could not fathom his philosophy nor grasp his teaching; it was all too much for those of his own flesh and blood. 조용히 일한 이 몇 개월은 사도들에게 큰 시험, 그들이 살아남은 시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적 활동이 없던 이 시기는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적 과업을 개시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그의 전 가족은 (룻을 제외하고) 사실상 그를 버렸습니다. 그 후 그들은 단지 몇 번만 그와 접촉을 취했고, 그것도 자기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를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그가 미쳤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의 철학을 헤아리거나 그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피붙이들에게는 그 모든 일이 너무 벅찼습니다.

138:9.3 (1546.5) The apostles carried on their personal work in Capernaum, Bethsaida-Julias, Chorazin, Gerasa, Hippos, Magdala, Cana, Bethlehem of Galilee, Jotapata, Ramah, Safed, Gischala, Gadara, and Abila. Besides these towns they labored in many villages as well as in the countryside. By the end of this period the twelve had worked out fairly satisfactory plans for the care of their respective families. Most of the apostles were married, some had several children, but they had made such arrangements for the support of their home folks that, with some little assistance from the apostolic funds, they could devote their entire energies to the Master’s work without having to worry about the financial welfare of their families. 사도들은 가버나움, 벳새다-쥴리아스, 코라진, 게라사, 히포, 막달라, 가나, 갈릴리의 베들레헴, 요타파타, 라마, 사펫, 기샬라, 가다라, 그리고 아빌라에서 그들의 개인을 상대로 과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성읍들 이외에도 시골뿐만이 아니라 많은 마을들에서 수고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날 무렵, 12명의 사도들은 그들 각자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상당히 충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은 결혼했고, 몇 사람은 여러 자녀들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기금으로부터 얼마큼 적은 도움을 받아 식구 부양의 대책을 마련해서, 가족에 대한 재정적 복지를 걱정하지 않고 주(主)님의 일에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습니다.

10. Organization of the Twelve 12 사도들의 조직

138:10.1 (1547.1) The apostles early organized themselves in the following manner: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의 방법으로 자신들을 조직했습니다.

138:10.2 (1547.2) 1. Andrew, the first chosen apostle, was designated chairman and director general of the twelve. 제일 먼저 선택된 안드레가 12명의 의장이며 총책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138:10.3 (1547.3) 2. Peter, James, and John were appointed personal companions of Jesus. They were to attend him day and night, to minister to his physical and sundry needs, and to accompany him on those night vigils of prayer and mysterious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heaven.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개인적 동행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밤낮 그를 시중들고, 그의 육신적이고 잡다한 필요들을 섬기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기도 및 신비한 친교로 밤에 철야할 때마다 그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138:10.4 (1547.4) 3. Philip was made steward of the group. It was his duty to provide food and to see that visitors, and even the multitude of listeners at times, had something to eat. 빌립은 그룹의 사무장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제공하고 방문객이나 또는 때로 많은 청중들의 음식까지도 살피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138:10.5 (1547.5) 4. Nathaniel watched over the needs of the families of the twelve. He received regular reports as to the requirements of each apostle’s family and, making requisition on Judas, the treasurer, would send funds each week to those in need. 나다니엘은 12명 사도의 가족들의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정규적으로 각 사도 집안의 필요에 대한 보고를 받아, 회계 유다에게 청구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매주 기금을 보냈습니다.

138:10.6 (1547.6) 5. Matthew was the fiscal agent of the apostolic corps. It was his duty to see that the budget was balanced, the treasury replenished. If the funds for mutual support were not forthcoming, if donations sufficient to maintain the party were not received, Matthew was empowered to order the twelve back to their nets for a season. But this was never necessary after they began their public work; he always had sufficient funds in the treasurer’s hands to finance their activities. 마태는 사도단의 재정 담당자였습니다. 예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재무가 공급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만약 공동 부양을 위한 기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일행을 유지할 충분한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12 사도들이 한동안 고기 그물들로 돌아가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마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이 공적 과업을 시작한 이후 결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활동에 자금을 조달하는 회계의 손에 충분한 기금이 늘 갖고 있었습니다.

138:10.7 (1547.7) 6. Thomas was manager of the itinerary. It devolved upon him to arrange lodgings and in a general way select places for teaching and preaching, thereby insuring a smooth and expeditious travel schedule. 도마는 일정 계획 관리자였습니다. 그는 숙소를 정하고, 대개 가르치고 설교할 장소들을 물색하여, 여행 일정이 순조롭고 신속하게 지켜지도록 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138:10.8 (1547.8) 7. James and Judas the twin sons of Alpheus were assigned to the management of the multitudes. It was their task to deputize a sufficient number of assistant ushers to enable them to maintain order among the crowds during the preaching.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인 야고보와 유다는 군중들 관리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설교하는 동안 충분한 수의 보조 안내원들을 임명하여 군중들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138:10.9 (1547.9) 8. Simon Zelotes was given charge of recreation and play. He managed the Wednesday programs and also sought to provide for a few hours of relaxation and diversion each day. 시몬 젤로떼는 오락과 놀이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수요일 행사를 관리했고 또한 매일 몇 시간 동안의 휴식과 기분전환을 제공하려고 애썼습니다.

138:10.10 (1547.10) 9. Judas Iscariot was appointed treasurer. He carried the bag. He paid all expenses and kept the books. He made budget estimates for Matthew from week to week and also made weekly reports to Andrew. Judas paid out funds on Andrew’s authorization. 가룟 유다는 회계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보관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비용을 지출하고 장부를 기입했습니다. 그는 매주 마태에게 예산 견적서를 주었고, 매주 안드레에게 보고했습니다. 유다는 안드레의 승인으로 기금에서 돈을 지출하였습니다.

138:10.11 (1547.11) In this way the twelve functioned from their early organization up to the time of the reorganization made necessary by the desertion of Judas, the betrayer. The Master and his disciple-apostles went on in this simple manner until Sunday, January 12, A.D. 27, when he called them together and formally ordained them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preachers of its glad tidings. And soon thereafter they prepared to start for Jerusalem and Judea on their first public preaching tour. 이런 식으로 12명의 사도들은 배반자 유다의 이탈로 재조직할 필요가 생길 때까지, 12명의 사도들은 초기 조직부터 이런 식으로 활동했습니다.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불러 모아 정식으로 그들을 나라의 대사들과 복음의 설교자들로 임명하기 전까지, 주(主)님과 그의 제자-사도들은 이 간단한 방식으로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그 후 곧, 첫 번째 공적 설교 여행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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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63 The First Human Family 첫 인간 가족

Paper 63

The First Human Family 첫 인간 가족

1. Andon and Fonta 안돈과 폰타
2. The Flight of the Twins 쌍둥이의 도피
3. Andon’s Family 안돈의 가족
4. The Andonic Clans 안돈의 씨족들
5. Dispersion of the Andonites 안돈-사람들의 분산
6. Onagar — The First Truth Teacher 오나가-첫 번째 진리를 가르친 선생
7. The Survival of Andon and Fonta 안돈과 폰타의 생존

63:0.1 (711.1) URANTIA was registered as an inhabited world when the first two human beings — the twins — were eleven years old, and before they had become the parents of the first-born of the second generation of actual human beings. And the archangel message from Salvington, on this occasion of formal planetary recognition, closed with these words: 지구(유란시아)는 최초의 두 인간들─쌍둥이─이 11살이 되었을 때, 실재 인간 존재의 두 번째 세대인 첫 자녀가 태어나서 부모가 되기 전에, 거주민이 사는 세계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자별에서 온 천사장의 메시지는, 행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이 경우에,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63:0.2 (711.2) “Man-mind has appeared on 606 of Satania, and these parents of the new race shall be called Andon and Fonta. And all archangels pray that these creatures may speedily be endowed with the personal indwelling of the gift of the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사람-마음이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 나타났고, 새로운 종족의 이 부모들은 이름이 안돈과 폰타로 불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천사장들은, 이 창조물들에게 우주 아버지의 영의 선물이 속히 증여되어 개인적으로 내주하기를 기도한다.”

63:0.3 (711.3) Andon is the Nebadon name which signifies “the first Fatherlike creature to exhibit human perfection hunger.” Fonta signifies “the first Sonlike creature to exhibit human perfection hunger.” Andon and Fonta never knew these names until they were bestowed upon them at the time of fusion with their Thought Adjusters. Throughout their mortal sojourn on Urantia they called each other Sonta-an and Sonta-en, Sonta-an meaning “loved by mother,” Sonta-en signifying “loved by father.” They gave themselves these names, and the meanings are significant of their mutual regard and affection. 안돈이라는 이름은 “인간 완전의 갈망을 나타내는 최초의 아버지다운 창조물”을 의미하는 네바돈에서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폰타는 “인간 완전성의 갈망을 나타내는 최초의 아들다운 창조물”을 의미합니다. 안돈과 폰타는 자신들의 생각 조율자들과 융합되어 그 이름들을 부여받을 때까지, 이 이름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필사자로서 지구(유란시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이 서로 부른 이름은 손타-안과 손타-엔이었는데, 손타-안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고, 손타-엔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러한 이름들을 주었으며, 그 의미들은 그들의 상호 존중심과 애정을 상징했습니다.

1. Andon and Fonta 안돈과 폰타

63:1.1 (711.4) In many respects, Andon and Fonta were the most remarkable pair of human beings that have ever lived on the face of the earth. This wonderful pair, the actual parents of all mankind, were in every way superior to many of their immediate descendants, and they were radically different from all of their ancestors, both immediate and remote. 여러 가지 면에서, 안돈과 폰타는 그 때까지 지구 위에 살았던 어떤 인간 존재들보다 가장 훌륭한 쌍이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실재적 부모들인 이 놀라운 쌍은, 그들의 직계 후손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월했으며, 그들의 직계 조상들과 먼 친족 조상들 양쪽 모두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63:1.2 (711.5) The parents of this first human couple were apparently little different from the average of their tribe, though they were among its more intelligent members, that group which first learned to throw stones and to use clubs in fighting. They also made use of sharp spicules of stone, flint, and bone. 이 최초의 인간 쌍의 부모는, 비록 싸울 때 돌을 던지고 몽둥이 사용을 처음 배운 집단의 구성원들 중에서 훨씬 지능적이었지만, 겉보기에는 평균적인 그들의 부족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돌로 된 날카로운 바늘, 부싯돌, 그리고 뼈를 사용했습니다.

63:1.3 (711.6) While still living with his parents, Andon had fastened a sharp piece of flint on the end of a club, using animal tendons for this purpose, and on no less than a dozen occasions he made good use of such a weapon in saving both his own life and that of his equally adventurous and inquisitive sister, who unfailingly accompanied him on all of his tours of exploration. 아직 부모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 때, 안돈은 날카로운 부싯돌 조각을 몽둥이 끝에 붙들어 매었으며, 이것을 위하여 동물의 힘줄을 이용하였으며, 자기 생명과, 자기와 똑같이 모험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서 그가 탐험 여행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를 따라다녔던 그의 자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12번 이상이나 그러한 무기를 잘 사용하였습니다.

63:1.4 (711.7) The decision of Andon and Fonta to flee from the Primates tribes implies a quality of mind far above the baser intelligence which characterized so many of their later descendants who stooped to mate with their retarded cousins of the simian tribes. But their vague feeling of being something more than mere animals was due to the possession of personality and was augmented by the indwelling presence of the Thought Adjusters. 영장류 종족들로부터 도망하기로 한 안돈과 폰타의 결정은, 유인원 종족의 열등한 친족들과 짝을 지어 뒤떨어졌던 수많은 그들의 후손들을 특징짓는 더 낮은 지능보다, 훨씬 더 높은 마음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들 이상의 어떤 존재라는 그들의 어렴풋한 느낌은 고유성을 소유했기 때문이었고, 생각 조율자가 내주(內住)하는 현존으로 인해 그 느낌은 증대되었습니다.

2. The Flight of the Twins 쌍둥이의 도피

63:2.1 (712.1) After Andon and Fonta had decided to flee northward, they succumbed to their fears for a time, especially the fear of displeasing their father and immediate family. They envisaged being set upon by hostile relatives and thus recognized the possibility of meeting death at the hands of their already jealous tribesmen. As youngsters, the twins had spent most of their time in each other’s company and for this reason had never been overly popular with their animal cousins of the Primates tribe. Nor had they improved their standing in the tribe by building a separate, and a very superior, tree home. 안돈과 폰타는 북쪽으로 도망하기로 결정한 후, 한동안 두려움, 특히 자신들의 아버지와 직계 가족들을 분노하게 만들 두려움 때문에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품은 친척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경우를 상상했으며, 그래서 이미 그들을 시기하는 부족들의 손에 죽게 될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로서, 쌍둥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어울리며 같이 보냈으며, 이러한 이유로 영장류 종족인 그들의 동물 사촌들 사이에서 과도히 평판이 좋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별도로 매우 우월한 나무 집을 지음으로 인해, 종족 안에서 그들의 입지가 개선되지도 않았습니다.

63:2.2 (712.2) And it was in this new home among the treetops, one night after they had been awakened by a violent storm, and as they held each other in fearful and fond embrace, that they finally and fully made up their minds to flee from the tribal habitat and the home treetops. 나무 꼭대기에 새로 지은 이 집에서, 맹렬한 태풍 때문에 그들이 잠에서 깬 어느 날 밤, 그들은 공포와 애정으로 서로 껴안으면서, 그들은 부족의 거처와 나무 꼭대기 집에서 도망하기로 마음에 최종적으로 충분히 결심했습니다.

63:2.3 (712.3) They had already prepared a crude treetop retreat some half-day’s journey to the north. This was their secret and safe hiding place for the first day away from the home forests. Notwithstanding that the twins shared the Primates’ deathly fear of being on the ground at nighttime, they sallied forth shortly before nightfall on their northern trek. While it required unusual courage for them to undertake this night journey, even with a full moon, they correctly concluded that they were less likely to be missed and pursued by their tribesmen and relatives. And they safely made their previously prepared rendezvous shortly after midnight. 그들은 북쪽으로 반나절 정도 여행할 거리에 있는 천연 그대로의 나무 꼭대기에 대피소를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비밀이었으며, 집이 있는 숲으로부터 도망한 첫 날에 숨어 지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영장류 동물들처럼 쌍둥이들도 밤에 땅 위에 머무는 것이 심히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두워지기 바로 직전에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비록 보름달이 비치기는 하였으나, 이 밤에 길을 떠나기 위해 그들은 비상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부족들과 친척들이 자신들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추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정확히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정이 바로 지나서, 미리 예정된 약속한 곳에 안전히 도달했습니다.

63:2.4 (712.4) On their northward journey they discovered an exposed flint deposit and, finding many stones suitably shaped for various uses, gathered up a supply for the future. In attempting to chip these flints so that they would be better adapted for certain purposes, Andon discovered their sparking quality and conceived the idea of building fire. But the notion did not take firm hold of him at the time as the climate was still salubrious and there was little need of fire. 북쪽으로 여행하던 중, 그들은 노출된 부싯돌 퇴적층을 발견하고, 여러 가지 용도에 알맞은 모양의 돌들을 많이 찾아, 앞날의 물자로 수집해 두었습니다. 어떤 목적들을 위해 보다 적합하게 이 부싯돌들을 다듬다가, 안돈은 그것들로부터 불꽃이 튀는 특성을 발견하였고 불을 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후가 여전히 쾌적하여 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그 생각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렸습니다.

63:2.5 (712.5) But the autumn sun was getting lower in the sky, and as they journeyed northward, the nights grew cooler and cooler. Already they had been forced to make use of animal skins for warmth. Before they had been away from home one moon, Andon signified to his mate that he thought he could make fire with the flint. They tried for two months to utilize the flint spark for kindling a fire but only met with failure. Each day this couple would strike the flints and endeavor to ignite the wood. Finally, one evening about the time of the setting of the sun, the secret of the technique was unraveled when it occurred to Fonta to climb a near-by tree to secure an abandoned bird’s nest. The nest was dry and highly inflammable and consequently flared right up into a full blaze the moment the spark fell upon it. They were so surprised and startled at their success that they almost lost the fire, but they saved it by the addition of suitable fuel, and then began the first search for firewood by the parents of all mankind. 그러나 하늘에서 가을 태양이 점점 낮아지고, 그들이 북쪽으로 여행하자, 밤이 더욱 서늘해졌습니다. 그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미 동물의 가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안돈은 부싯돌로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생각을 자기 짝에게 알렸습니다. 그들은 부싯돌의 불꽃을 이용하여 불을 피우려고 두 달 동안 애썼지만 실패하기만 했습니다. 이 커플은 매일 부싯돌을 부딪쳐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애썼습니다. 마침내, 해 질 무렵의 어느 저녁, 그 기법의 비밀이 풀렸는데, 폰타가 근처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버려져 있는 새둥지를 찾아냈을 때였습니다. 그 둥우리는 건조해서 불을 쉽게 붙일 수 있었으며, 그 위에 불꽃을 튀긴 그 순간 불꽃이 확 일어나며 그 결과 즉시 타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그 불을 거의 꺼뜨릴 뻔했지만, 적당한 땔감을 더해서 불을 살렸고, 그 때 모든 인류의 조상은 처음으로 장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63:2.6 (712.6) This was one of the most joyous moments in their short but eventful lives. All night long they sat up watching their fire burn, vaguely realizing that they had made a discovery which would make it possible for them to defy climate and thus forever to be independent of their animal relatives of the southern lands. After three days’ rest and enjoyment of the fire, they journeyed on. 이것은 짧지만 그들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앉아서, 자기들이 피워 놓은 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기후에 도전하고 따라서 남쪽 땅에 사는 그들의 동물 친척들로부터 언제까지나 독립하게 될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3일 간의 휴식과 불을 즐긴 후에, 그들은 계속 여행하였습니다.

63:2.7 (712.7) The Primates ancestors of Andon had often replenished fire which had been kindled by lightning, but never before had the creatures of earth possessed a method of starting fire at will. But it was a long time before the twins learned that dry moss and other materials would kindle fire just as well as birds’ nests. 안돈의 영장류 선조들은 종종 번갯불로 붙은 불에 연료를 계속 공급한 적이 있었지만, 결코 이전에는 땅에 살았던 어떤 창조물도 자기 의지로 불을 피우는 방법을 소유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쌍둥이들은 마른 이끼와 다른 물질들도 새둥지만큼 불이 잘 붙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3. Andon’s Family 안돈의 가족

63:3.1 (713.1) It was almost two years from the night of the twins’ departure from home before their first child was born. They named him Sontad; and Sontad was the first creature to be born on Urantia who was wrapped in protective coverings at the time of birth. The human race had begun, and with this new evolution there appeared the instinct properly to care for the increasingly enfeebled infants which would characterize the progressive development of mind of the intellectual order as contrasted with the more purely animal type. 쌍둥이가 집을 떠난 밤으로부터 거의 2년이 되었을 무렵에, 그들의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손타드라고 불렀는데; 손타드는 지구(유란시아)에서 태어난 창조물들 중에서, 날 때부터 보호하는 덮개로 싸인 최초의 존재였습니다. 인류가 시작되었고, 이 새로운 진화와 함께, 점점 더 연약한 아기들을 적절히 돌보는 본능이 나타났으며, 그 아기들은 아주 순전히 동물 형태와는 대조적으로, 지적 계층의 마음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특징을 나타냈습니다.

63:3.2 (713.2) Andon and Fonta had nineteen children in all, and they lived to enjoy the association of almost half a hundred grandchildren and half a dozen great-grandchildren. The family was domiciled in four adjoining rock shelters, or semicaves, three of which were interconnected by hallways which had been excavated in the soft limestone with flint tools devised by Andon’s children. 안돈과 폰타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거의 50여명에 이르는 손자들과 6명의 증손들로 이루어진 관계를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가족들은 인접해 있는 4개의 바위 은신처들 혹은 동굴 비슷한 곳에서 살았는데, 그 중 세 개는 안돈의 자녀들이 부싯돌 연장으로 부드러운 석회석을 파낸 복도들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63:3.3 (713.3) These early Andonites evinced a very marked clannish spirit; they hunted in groups and never strayed very far from the homesite. They seemed to realize that they were an isolated and unique group of living beings and should therefore avoid becoming separated. This feeling of intimate kinship was undoubtedly due to the enhanced mind ministry of the adjutant spirits. 이러한 초기 안돈-사람들은 아주 분명한 씨족 영(정신)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집단으로 사냥했고 집터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고립되어 독특한 집단을 이루며 사는 존재들이며 따라서 따로 분리되는 일은 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 밀접한 친족관계는 의심할 여지없이 보조 영들의 증진된 마음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63:3.4 (713.4) Andon and Fonta labored incessantly for the nurture and uplift of the clan. They lived to the age of forty-two, when both were killed at the time of an earthquake by the falling of an overhanging rock. Five of their children and eleven grandchildren perished with them, and almost a score of their descendants suffered serious injuries. 안돈과 폰타는 씨족(가족)들을 양육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수고했습니다. 그들은 42살까지 살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 돌출된 바위가 떨어져 둘 다 죽었습니다. 5명과 자녀들과 11명의 손자들이 그들과 함께 죽었고, 거의 20명의 자손들도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63:3.5 (713.5) Upon the death of his parents, Sontad, despite a seriously injured foot, immediately assumed the leadership of the clan and was ably assisted by his wife, his eldest sister. Their first task was to roll up stones to effectively entomb their dead parents, brothers, sisters, and children. Undue significance should not attach to this act of burial. Their ideas of survival after death were very vague and indefinite, being largely derived from their fantastic and variegated dream life. 부모들이 죽은 후 손타드는, 발이 심하게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그 씨족의 지도력을 맡았으며, 그의 아내, 즉 제일 나이 많은 여동생이 유능하게 그를 보조했습니다. 그들의 첫 과제는, 돌을 굴려서 그들의 죽은 부모와 형제들, 자매들 그리고 자녀들을 잘 매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매장 행위에, 부당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후에 생존한다는 관념은 아주 어렴풋하고 분명하지 않았으며, (그 관념들은) 주로 자신들의 환상적이고 다채로운 꿈의 생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63:3.6 (713.6) This family of Andon and Fonta held together until the twentieth generation, when combined food competition and social friction brought about the beginning of dispersion. 안돈과 폰타의 이 가족은 20번째 세대까지 같이 살았으며, 식량 경쟁과 사회적 마찰이 결합되자 분산이 시작되었습니다.

4. The Andonic Clans 안돈의 씨족들

63:4.1 (713.7) Primitive man — the Andonites — had black eyes and a swarthy complexion, something of a cross between yellow and red. Melanin is a coloring substance which is found in the skins of all human beings. It is the original Andonic skin pigment. In general appearance and skin color these early Andonites more nearly resembled the present-day Eskimo than any other type of living human beings. They were the first creatures to use the skins of animals as a protection against cold; they had little more hair on their bodies than present-day humans. 원시인─안돈-사람들─은 검은 눈과, 노란 색과 붉은 색 사이의 혼합인 가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멜라닌은 모든 인간들의 피부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색소입니다. 그것이 원래 안돈의-피부 색소입니다. 일반적인 용모와 피부색에서, 이러한 초기 안돈-사람들은 지금-현재 살고 있는 어떤 인종 유형들보다도 에스키모인과 더 닮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동물의 가죽을 사용한 최초의 창조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인간들보다 몸에 더 많은 털이 없었습니다.

63:4.2 (713.8) The tribal life of the animal ancestors of these early men had foreshadowed the beginnings of numerous social conventions, and with the expanding emotions and augmented brain powers of these beings, there was an immediate development in social organization and a new division of clan labor. They were exceedingly imitative, but the play instinct was only slightly developed, and the sense of humor was almost entirely absent. Primitive man smiled occasionally, but he never indulged in hearty laughter. Humor was the legacy of the later Adamic race. These early human beings were not so sensitive to pain nor so reactive to unpleasant situations as were many of the later evolving mortals. Childbirth was not a painful or distressing ordeal to Fonta and her immediate progeny. 이 초기 인간의 동물 조상이 영위한 부족 생활은 수많은 사회적 집회의 시초에 전조(前兆)가 되었고, 이 존재들의 감정이 확대되고 두뇌력이 증강되면서, 즉시 사회구조가 발전되었으며 씨족 노동에서 새로운 분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흉내를 매우 잘 내었지만, 놀이 본능은 거의 발달되지 못하였고, 유머 감각은 거의 전혀 없었습니다. 원시인들은 때때로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껏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머는 후일에 아담-종족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이 초기 인간들은 나중에 진화된 대부분의 필사자들처럼 고통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불쾌한 환경에 대해서 별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출산은 폰타와 그의 직계 자손들에게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63:4.3 (714.1) They were a wonderful tribe. The males would fight heroically for the safety of their mates and their offspring; the females were affectionately devoted to their children. But their patriotism was wholly limited to the immediate clan. They were very loyal to their families; they would die without question in defense of their children, but they were not able to grasp the idea of trying to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for their grandchildren. Altruism was as yet unborn in the human heart, notwithstanding that all of the emotions essential to the birth of religion were already present in these Urantia aborigines. 그들은 경이로운 종족이었습니다. 남성들은 자기들의 배우자들과 자손들의 안전을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우려 했으며; 여성들은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애정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정신은 전적으로 직계 씨족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족에게 매우 충실하였습니다. 자기 자녀들의 방어에 있어서는 질문할 필요도 없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자기 손자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관념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종교의 탄생에 필수적인 모든 감정이 이미 이 지구(유란시아)의 원주민들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마음은 인간 심정에서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63:4.4 (714.2) These early men possessed a touching affection for their comrades and certainly had a real, although crude, idea of friendship. It was a common sight in later times, during their constantly recurring battles with the inferior tribes, to see one of these primitive men valiantly fighting with one hand while he struggled on, trying to protect and save an injured fellow warrior. Many of the most noble and highly human traits of subsequent evolutionary development were touchingly foreshadowed in these primitive peoples. 이 초기 사람들은 자기 동료들에 대하여 감동적인 애정을 갖고 있었고, 투박하기는 하지만 실제 우정의 관념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후대에, 열등한 종족들과 끊임없이 반복된 전쟁 중, 이 원시인들의 하나가 부상당한 동료 용사를 보호하고 구하려고 애쓰면서, 한 손으로는 용맹스럽게 격투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진화하여 발전된, 가장 고귀하고 높은 대부분의 인간적 특성들이 이 원시 민족들에게서 감동적으로 예견되었습니다.

63:4.5 (714.3) The original Andonic clan maintained an unbroken line of leadership until the twenty-seventh generation, when, no male offspring appearing among Sontad’s direct descendants, two rival would-be rulers of the clan fell to fighting for supremacy. 최초의 안돈 씨족은 27대까지 지도력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는데, 손타드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 남자가 태어나지 않게 되자, 그 씨족의 통치권을 얻으려는 두 경쟁자가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63:4.6 (714.4) Before the extensive dispersion of the Andonic clans a well-developed language had evolved from their early efforts to intercommunicate. This language continued to grow, and almost daily additions were made to it because of the new inventions and adaptations to environment which were developed by these active, restless, and curious people. And this language became the word of Urantia, the tongue of the early human family, until the later appearance of the colored races. 안돈의 씨족들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일찍부터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노력으로 잘 발달된 언어가 진화되었습니다. 이 언어는 계속 발달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적이고 부지런하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발명들과 환경에 대한 적응들 때문에, 거의 매일 새로운 낱말들이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후대에 여러 유색 종족들이 출현하기까지, 지구(유란시아)의 말, 즉 초기 인간 가족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63:4.7 (714.5) As time passed, the Andonic clans grew in number, and the contact of the expanding families developed friction and misunderstandings. Only two things came to occupy the minds of these peoples: hunting to obtain food and fighting to avenge themselves against some real or supposed injustice or insult at the hands of the neighboring tribes. 시간이 흐르자, 안돈의 씨족들은 점점 수가 늘어났으며, 확대되는 가족들의 접촉은 마찰과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만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양식을 얻기 위하여 사냥을 하는 일과, 이웃 종족들의 손에 의해서 어느 정도 실제적으로 당하거나 혹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가정되는 불공정한 행위와 무례함에 대해 복수하려고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63:4.8 (714.6) Family feuds increased, tribal wars broke out, and serious losses were sustained among the very best elements of the more able and advanced groups. Some of these losses were irreparable; some of the most valuable strains of ability and intelligence were forever lost to the world. This early race and its primitive civilization were threatened with extinction by this incessant warfare of the clans. 가족들 간의 불화가 증대되었고, 종족들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더 유능하고 진보된 집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계속하여 심각할 정도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손실들 중에 어떤 것들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능력과 지능을 지닌 가장 가치 있는 혈통들의 상당수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초기의 이 종족과 그들의 원시 문명은 씨족들 간의 이러한 끊임없는 전쟁들로 인하여 소멸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63:4.9 (714.7) It is impossible to induce such primitive beings long to live together in peace. Man is the descendant of fighting animals, and when closely associated, uncultured people irritate and offend each other. The Life Carriers know this tendency among evolutionary creatures and accordingly make provision for the eventual separation of developing human beings into at least three, and more often six, distinct and separate races. 그러한 원시적 존재들이 함께 평화로이 오래 살도록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싸우는 동물들의 후손이며, 가깝게 붙어 있을 때 미개한 민족들은 서로를 자극하고 적대시합니다. 생명 운반자들은 진화적 창조물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경향들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발전하는 인간 존재들을 결국 적어도 셋이나, 흔히 여섯으로 독특하면서도 분리된 종족들로 나뉘도록 준비를 합니다.

5. Dispersion of the Andonites 안돈-사람들의 분산

63:5.1 (715.1) The early Andon races did not penetrate very far into Asia, and they did not at first enter Africa. The geography of those times pointed them north, and farther and farther north these people journeyed until they were hindered by the slowly advancing ice of the third glacier. 초기의 안돈 종족들은 아시아 쪽으로 아주 깊숙이 파고들어가지 않았으며, 처음에는 아프리카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지형은 그들이 북쪽을 향하도록 가리켰으며, 서서히 확장되는 세 번째 빙하에 의해서 길이 막힐 때까지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점점 더 멀리 여행에 나섰습니다.

63:5.2 (715.2) Before this extensive ice sheet reached France and the British Isles, the descendants of Andon and Fonta had pushed on westward over Europe and had established more than one thousand separate settlements along the great rivers leading to the then warm waters of the North Sea. 확장되는 이 빙상(氷床)이 프랑스와 영국 섬들에 이르기 전, 안돈과 폰타의 후손들은 유럽 서쪽으로 밀고 나아갔고 그 당시 북해의 따뜻한 물에 이르는 거대한 강들을 따라서 천여 개 이상의 독립된 부락들을 세웠습니다.

63:5.3 (715.3) These Andonic tribes were the early river dwellers of France; they lived along the river Somme for tens of thousands of years. The Somme is the one river unchanged by the glaciers, running down to the sea in those days much as it does today. And that explains why so much evidence of the Andonic descendants is found along the course of this river valley. 이 안돈 부족들은 프랑스 강가의 초기 거주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솜 강을 따라 수만 년 동안 살았습니다. 솜 강은 빙하들로 인해 변경되지 않았던 하나의 강으로,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안돈의-후손들의 자취가 그토록 많이 이 강 유역의 진로를 따라서 발견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63:5.4 (715.4) These aborigines of Urantia were not tree dwellers, though in emergencies they still betook themselves to the treetops. They regularly dwelt under the shelter of overhanging cliffs along the rivers and in hillside grottoes which afforded a good view of the approaches and sheltered them from the elements. They could thus enjoy the comfort of their fires without being too much inconvenienced by the smoke. They were not really cave dwellers either, though in subsequent times the later ice sheets came farther south and drove their descendants to the caves. They preferred to camp near the edge of a forest and beside a stream. 지구(유란시아)의 이 원주민들은, 비상시 여전히 나무 꼭대기로 피신하였지만, 나무 위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을 따라 위에서 튀어나온 절벽의 보호 아래와, 접근로(接近路)가 잘 보이고 자연(폭풍우)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릉지의 동굴에서 통상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기 때문에 심한 불편을 겪지 않고 그들이 지펴놓은 불의 위안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후대에 빙상(氷床)들이 나중에 남쪽으로 더 내려와 그들의 후손을 동굴로 몰아넣었지만, 그들은 정말 동굴 거주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 근처와 개울가에 야영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63:5.5 (715.5) They very early became remarkably clever in disguising their partially sheltered abodes and showed great skill in constructing stone sleeping chambers, dome-shaped stone huts, into which they crawled at night. The entrance to such a hut was closed by rolling a stone in front of it, a large stone which had been placed inside for this purpose before the roof stones were finally put in place. 그들은 부분적으로 보호된 거주지를 위장하는 일에 매우 일찍부터 놀라울 정도로 영특해졌으며, 그들은 돌로 된 침실들, 둥근 모양의 돌 오두막을 건축하는 데에 놀라운 솜씨를 보였으며, 밤에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 오두막 입구는 그 앞에 있는 돌을 굴려 막았고, 지붕의 여러 돌들을 마지막으로 제자리에 두기 전, 커다란 돌은 이 목적을 위해 안에 들여 놓았습니다.

63:5.6 (715.6) The Andonites were fearless and successful hunters and, with the exception of wild berries and certain fruits of the trees, lived exclusively on flesh. As Andon had invented the stone ax, so his descendants early discovered and made effective use of the throwing stick and the harpoon. At last a tool-creating mind was functioning in conjunction with an implement-using hand, and these early humans became highly skillful in the fashioning of flint tools. They traveled far and wide in search of flint, much as present-day humans journey to the ends of the earth in quest of gold, platinum, and diamonds. 안돈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었고 노련한 사냥꾼들이었으며, 야생 베리들과 특정한 나무들의 열매를 제외하고 전적으로 고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안돈이 돌도끼를 발명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일찍부터 던지는 창과 작살을 발견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마침내 연장을 창조하는 마음은 도구를 사용하는 손과 더불어 동시에 기능하게 되었고, 초기의 이 인간들은 부싯돌로 된 연장들을 만드는데 매우 능숙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금과 백금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하여 세계 구석구석까지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싯돌을 찾아서 멀리 광범위하게 여행하였습니다.

63:5.7 (715.7) And in many other ways these Andon tribes manifested a degree of intelligence which their retrogressing descendants did not attain in half a million years, though they did again and again rediscover various methods of kindling fire.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면에서, 이 안돈 부족들은, 퇴보하는 후손들이 거듭해서 불을 피우는 다양한 방법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50만 년 동안 도달하지 못한 정도의 지능을 드러냈습니다.

6. Onagar — The First Truth Teacher 오나가-첫 번째 진리를 가르친 선생

63:6.1 (715.8) As the Andonic dispersion extended, the cultural and spiritual status of the clans retrogressed for nearly ten thousand years until the days of Onagar, who assumed the leadership of these tribes, brought peace among them, and for the first time, led all of them in the worship of the “Breath Giver to men and animals.” 안돈 사람들의 분산이 확장되면서, 씨족들의 문화적 영적 상태는 오나가의 시대까지 거의 1만 년 동안 퇴보했습니다. 그는 이 부족들의 지도력을 맡아서,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왔으며, 처음으로 그들 모두 “사람과 동물들에게 호흡을 주시는 분”께 경배하도록 인도했습니다.

63:6.2 (716.1) Andon’s philosophy had been most confused; he had barely escaped becoming a fire worshiper because of the great comfort derived from his accidental discovery of fire. Reason, however, directed him from his own discovery to the sun as a superior and more awe-inspiring source of heat and light, but it was too remote, and so he failed to become a sun worshiper. 안돈의 철학은 매우 혼동된 상태에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불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큰 위안을 얻었기 때문에 불의 숭배자가 되는 것에서 거의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성(理性)이 그를 자신의 발견(불)으로부터 훨씬 뛰어나고 장엄한 열과 빛의 근원인 태양으로 인도하였지만, 태양은 너무 멀리 있어서 태양 숭배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63:6.3 (716.2) The Andonites early developed a fear of the elements — thunder, lightning, rain, snow, hail, and ice. But hunger was the constantly recurring urge of these early days, and since they largely subsisted on animals, they eventually evolved a form of animal worship. To Andon, the larger food animals were symbols of creative might and sustaining power. From time to time it became the custom to designate various of these larger animals as objects of worship. During the vogue of a particular animal, crude outlines of it would be drawn on the walls of the caves, and later on, as continued progress was made in the arts, such an animal god was engraved on various ornaments. 안돈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연 ─ 천둥, 번개, 비, 눈, 우박, 얼음 ─에 대한 두려움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초기시대에 굶주림은 계속 반복적으로 찾아왔으며, 그들은 주로 동물을 주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 동물숭배의 형태로 진화되었습니다. 안돈에게, 양식이 되는 더 큰 동물들은 창조적 능력과 몸을 유지하는 권능의 상징이었습니다. 때로, 이러한 더 커다란 동물들을 경배의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특정한 동물이 성행하는 동안, 그 동물의 서투른 윤곽이 동굴 벽에 그려지곤 했고, 후대에는 예술이 계속 진보하여, 그러한 동물 신(神)이 여러 장신구들에 새겨졌습니다.

63:6.4 (716.3) Very early the Andonic peoples formed the habit of refraining from eating the flesh of the animal of tribal veneration. Presently, in order more suitably to impress the minds of their youths, they evolved a ceremony of reverence which was carried out about the body of one of these venerated animals; and still later on, this primitive performance developed into the more elaborate sacrificial ceremonies of their descendants. And this is the origin of sacrifices as a part of worship. This idea was elaborated by Moses in the Hebrew ritual and was preserved, in principle, by the Apostle Paul as the doctrine of atonement for sin by “the shedding of blood.” 아주 일찍부터 안돈 민족은 부족이 숭배하는 동물의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관습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내 그들 젊은이들의 마음에 더 적절히 감동을 주려고, 숭배하는 이 동물들 중 한 마리의 몸 근처에서 행하는 숭배의 예식을 진화시켰습니다. 훨씬 후에 이런 원시적 공연은, 그들의 후손들이 더욱 공을 들이는 희생 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경배의 부분으로서 희생제사의 기원입니다. 이 관념은 모세에 의해서 히브리인의 종교 예식 속으로 정교히 다듬어졌으며, 사도 바울에 의해, 원칙적으로, “피를 흘림”으로 대속하는 교리로써 유지되었습니다.

63:6.5 (716.4) That food was the all-important thing in the lives of these primitive human beings is shown by the prayer taught these simple folks by Onagar, their great teacher. And this prayer was: 이 원시 인간들의 생활에서 먹을 것이 온통 중요한 일이었음은, 그들의 위대한 선생 오나가가 단순한 이 무리들에게 가르친 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63:6.6 (716.5) “O Breath of Life, give us this day our daily food, deliver us from the curse of the ice, save us from our forest enemies, and with mercy receive us into the Great Beyond.” “오 생명의 호흡이시여, 우리에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얼음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숲 속에 있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자비롭게 저 세상으로 우리를 받으소서.”

63:6.7 (716.6) Onagar maintained headquarters on the northern shores of the ancient Mediterranean in the region of the present Caspian Sea at a settlement called Oban, the tarrying place on the westward turning of the travel trail leading up northward from the Mesopotamian southland. From Oban he sent out teachers to the remote settlements to spread his new doctrines of one Deity and his concept of the hereafter, which he called the Great Beyond. These emissaries of Onagar were the world’s first missionaries; they were also the first human beings to cook meat, the first regularly to use fire in the preparation of food. They cooked flesh on the ends of sticks and also on hot stones; later on they roasted large pieces in the fire, but their descendants almost entirely reverted to the use of raw flesh. 오나가는 현재 카스피 해(海)의 지역 고대 지중해 북쪽 해안선에 있는 오반이라고 불리는 촌락에 본부를 설치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남쪽 땅으로부터 북쪽으로 인도하는 여행 통로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에 있는, 경유지였습니다. 그는 오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착지들로 선생들을 보내어, 하나의 신(神)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교리들과 그가 저 세상이라고 불렀던 내세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나가가 보낸 이 사자(使者)들은 이 세상에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익혀서 먹은 최초의 인간들이었고, 정기적으로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마련한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막대기 끝에 고기를 달아 달구어진 돌 판 위에서 요리하였습니다. 후에는 불 속에 큰 덩어리를 통째로 굽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거의 전적으로 날고기를 먹는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63:6.8 (716.7) Onagar was born 983,323 years ago (from A.D. 1934), and he lived to be sixty-nine years of age. The record of the achievements of this master mind and spiritual leader of the pre-Planetary Prince days is a thrilling recital of the organization of these primitive peoples into a real society. He instituted an efficient tribal government, the like of which was not attained by succeeding generations in many millenniums. Never again, until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was there such a high spiritual civilization on earth. These simple people had a real though primitive religion, but it was subsequently lost to their deteriorating descendants. 오나가는 (서기 1934년으로부터) 983,323년 전에 태어났으며, 69살이 되도록 살았습니다. 행성 영주 이전 시대의 이 뛰어난 마음의 성취들과 영적 지도자의 기록은, 이 원시 민족들이 진정한 사회로 조직화되는 감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효율적인 부족 정부를 설립하였는데, 그 와 같은 것은 그 뒤로 수천 년 동안 뒤를 잇는 세대들이 이루지 못했습니다. 행성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다시는 그토록 높은 영적 문명은 지상에서 없었습니다. 단순한 이 사람들은 원시적이기는 해도 실제적 종교를 가졌지만, 그들의 퇴화된 후손들은 나중에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63:6.9 (717.1) Although both Andon and Fonta had received Thought Adjusters, as had many of their descendants, it was not until the days of Onagar that the Adjusters and guardian seraphim came in great numbers to Urantia. This was, indeed, the golden age of primitive man. 안돈과 폰타는, 그들의 여러 후손들처럼, 생각 조율자를 받았지만, 오나가의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많은 숫자의 조율자들과 보호 세라핌 천사들이 지구(유란시아)에 왔습니다. 이 시기는 정말 원시인들의 황금기였습니다.

7. The Survival of Andon and Fonta 안돈과 폰타의 생존

63:7.1 (717.2) Andon and Fonta, the splendid founders of the human race, received recognition at the time of the adjudication of Urantia upon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and in due time they emerged from the regime of the mansion worlds with citizenship status on Jerusem. Although they have never been permitted to return to Urantia, they are cognizant of the history of the race they founded. They grieved over the Caligastia betrayal, sorrowed because of the Adamic failure, but rejoiced exceedingly when announcement was received that Michael had selected their world as the theater for his final bestowal. 안돈과 폰타는 인간 종족의 빛나는 설립자들로서 행성영주가 도착하여 지구(유란시아)에 판결이 내려질 때 인정받았으며, 때가 이르자 예루셈의 시민권을 지닌 신분으로 맨션세계들의 체제에 솟아났습니다. 그들은 지구(유란시아)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지 못했지만, 자기들이 설립한 그 종족의 역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을 슬퍼하였고, 아담의 실패 때문에 비탄에 잠겼지만, 미가엘이 자기들의 세계를 자신의 최종적 증여를 위한 무대로 선택하였다는 발표를 듣고 넘치도록 기뻐했습니다.

63:7.2 (717.3) On Jerusem both Andon and Fonta were fused with their Thought Adjusters, as also were several of their children, including Sontad, but the majority of even their immediate descendants only achieved Spirit fusion. 안돈과 폰타는, 손타드를 포함한 그들의 몇 자손들처럼, 둘 다 예루셈에서 그들의 생각 조율자들과 융합되었지만, 대부분은 그들의 직계 후손들이라도 단지 영 융합을 성취했습니다.

63:7.3 (717.4) Andon and Fonta, shortly after their arrival on Jerusem, received permission from the System Sovereign to return to the first mansion world to serve with the morontia personalities who welcome the pilgrims of time from Urantia to the heavenly spheres. And they have been assigned indefinitely to this service. They sought to send greetings to Urantia in connection with these revelations, but this request was wisely denied them. 안돈과 폰타는, 예루셈에 도착한 직후, 유란시아로부터 하늘의 구체들로 오는 시간의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부활체(모론시아) 고유성들과 함께 섬기려고 첫 번째 맨션세계로 돌아가도록 체계 주권자로부터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한이 없이 이 봉사에 배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계시들과 관련하여 유란시아에 인사말을 보내려 했지만, 이 요청은 지혜롭게 거절되었습니다.

63:7.4 (717.5) And this is the recital of the most heroic and fascinating chapter in all the history of Urantia, the story of the evolution, life struggles, death, and eternal survival of the unique parents of all mankind. 그리고 이것은 유란시아의 모든 역사에서 가장 영웅적이고 황홀한 장(章), 즉 진화, 생명 투쟁들, 죽음, 그리고 모든 인류의 유일한 부모의 영원한 생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63:7.5 (717.6) [Presented by a Life Carrier resident on Urantia.] [유란시아에 거주하는 생명운반자에 의해서 제시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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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0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예수님의 모론시아 출현

Paper 190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예수님의 모론시아 출현

1. Heralds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전령(傳令포고)들
2. Jesus’ Appearance at Bethany 예수님의 베다니 출현
Appearance to his brother James 형제 야고보에게 출현
Appearance to his earthly family 지상 가족들에게 출현
3. At the Home of Joseph 요셉의 집에서
4. Appearance to the Greeks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심
5. The Walk with Two Brothers 두 형제와 함께 걸으심

190:0.1 (2029.1) THE resurrected Jesus now prepares to spend a short period on Urantia for the purpose of experiencing the ascending morontia career of a mortal of the realms. Although this time of the morontia life is to be spent on the world of his mortal incarnation, it will, however, be in all respects the counterpart of the experience of Satania mortals who pass through the progressive morontia life of the seven mansion worlds of Jerusem.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영역에서 상승하는 필사자의 부활체(모론시아) 생애를 체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유란시아)에서 잠시 동안 지내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부활체(모론시아) 생명에서의 이 시간이 그가 필사자로 육신화 했던 세상에서 보내야만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예루셈에 있는 일곱 맨션세계들의 진보하는 부활체(모론시아) 일생을 거쳐 가는 사타니아 필사자들의 체험과 모든 점에서 복사판(아주 닮은 것)입니다.

190:0.2 (2029.2) All this power which is inherent in Jesus — the endowment of life — and which enabled him to rise from the dead, is the very gift of eternal life which he bestows upon kingdom believers, and which even now makes certain their resurrection from the bonds of natural death. 예수님 안에 본래부터 있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킨 이 모든 권능– 생명의 자질-은, 그가 나라를 믿는 자들에게 수여하고, 지금도 자연적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그들이 부활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드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190:0.3 (2029.3) The mortals of the realms will arise i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with the same type of transition or morontia body that Jesus had when he arose from the tomb on this Sunday morning. These bodies do not have circulating blood, and such beings do not partake of ordinary material food; nevertheless, these morontia forms are real. When the various believers saw Jesus after his resurrection, they really saw him; they were not the self-deceived victims of visions or hallucinations. 그 영역의 필사자들은 부활의 아침에, 예수께서 이 일요일 아침에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때 가지셨던 변화된 또는 부활체(모론시아) 몸과 같은 유형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몸들 안에는 순환되는 혈액이 없으며, 그러한 존재들은 일반적인 물질 음식을 섭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체(모론시아) 형태들은 실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후에 여러 부류의 신자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실제로 그를 본 것이었으며; 그들은 환상이나 환각으로 인하여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90:0.4 (2029.4) Abiding faith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was the cardinal feature of the faith of all branches of the early gospel teaching. In Jerusalem, Alexandria, Antioch, and Philadelphia all the gospel teachers united in this implicit faith in the Master’s resurrection.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변치 않는 신앙은, 초기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지파에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모든 복음 선생들은 주(主)님의 부활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연합되었습니다.

190:0.5 (2029.5) In viewing the prominent part which Mary Magdalene took in proclaiming the Master’s resurrection, it should be recorded that Mary was the chief spokesman for the women’s corps, as was Peter for the apostles. Mary was not chief of the women workers, but she was their chief teacher and public spokesman. Mary had become a woman of great circumspection, so that her boldness in speaking to a man whom she considered to be the caretaker of Joseph’s garden only indicates how horrified she was to find the tomb empty. It was the depth and agony of her love, the fullness of her devotion, that caused her to forget, for a moment, the conventional restraints of a Jewish woman’s approach to a strange man. 막달라 마리아가 주(主)님의 부활을 전파함에 있어서 맡았던 탁월한 역할을 볼 때,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변인이었던 것처럼, 마리아가 여자 대원들의 수석 대변인이었음이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마리아는 여자 일꾼들의 우두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수석 교사였고 공식적인 대변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신중한 여인이 되었으며, 그래서 요셉의 정원을 지키는 관리인이라고 생각한 남자에게 말을 거는 대담성은 다만 그녀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가리킬 뿐입니다. 유대 여인이 낯선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잠시 동안 잊어버린 것은, 그녀가 지닌 사랑의 깊이와 고뇌, 그녀의 헌신이 얼마나 충만했는가를 말해줍니다.

1. Heralds of the Resurrection

160417 부활4-부활의 소식 막16:1-11 막28:1-10 요20:2-10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90:1.1 (2029.6) The apostles did not want Jesus to leave them; therefore had they slighted all his statements about dying, along with his promises to rise again. They were not expecting the resurrection as it came, and they refused to believe until they were confronted with the compulsion of unimpeachable evidence and the absolute proof of their own experiences.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모든 약속들을 가볍게 여겼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의심 없는 증거들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한 절대적인 증명이 주어질 때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90:1.2 (2030.1) When the apostles refused to believe the report of the five women who represented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Mary Magdalene returned to the tomb, and the others went back to Joseph’s house, where they related their experiences to his daughter and the other women. And the women believed their report. Shortly after six o’clock the daughter of Joseph of Arimathea and the four women who had seen Jesus went over to the home of Nicodemus, where they related all these happenings to Joseph, Nicodemus, David Zebedee, and the other men there assembled. Nicodemus and the others doubted their story, doubt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they conjectured that the Jews had removed the body. Joseph and David were disposed to believe the report, so much so that they hurried out to inspect the tomb, and they found everything just as the women had described. And they were the last to so view the sepulchre, for the high priest sent 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s to the tomb at half past seven o’clock to remove the grave cloths. The captain wrapped them all up in the linen sheet and threw them over a near-by cliff. 마가의 집에 있던 사도들이 다섯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대화했다는 보고를 믿지 않고 거부하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돌아갔고, 다른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요셉의 딸과 다른 여인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들은 그들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예수를 보았던 아리마대 요셉의 딸과 4명의 여인들은 니고데모의 집으로 갔으며, 그들은 그 동안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그곳에 모여 있는 요셉, 니고데모, 다윗 세베대, 그리고 다른 남자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의심하였고,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그 시신을 가져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요셉과 다윗은 그 보고를 믿고 싶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무덤을 조사하기 위하여 급히 서둘러 나갔으며, 그들은 여인들이 설명한 대로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묘실을 들여다 본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는데, 대제사장이 성전 경비병들의 지휘관을 7시 30분경에 무덤에 보내어 수의를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휘관은 모든 것들을 세마포 헝겊에 싸서 근처에 있는 절벽 너머로 던져버렸습니다.

190:1.3 (2030.2) From the tomb David and Joseph went immediately to the home of Elijah Mark, where they held a conference with the ten apostles in the upper chamber. Only John Zebedee was disposed to believe, even faintly,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Peter had believed at first but, when he failed to find the Master, fell into grave doubting. They were all disposed to believe that the Jews had removed the body. David would not argue with them, but when he left, he said: “You are the apostles, and you ought to understand these things. I will not contend with you; nevertheless, I now go back to the home of Nicodemus, where I have appointed with the messengers to assemble this morning, and when they have gathered together, I will send them forth on their last mission, as heralds of the Master’s resurrection. I heard the Master say that, after he should die, he would rise on the third day, and I believe him.” And thus speaking to the dejected and forlorn ambassadors of the kingdom, this self-appointed chief of communication and intelligence took leave of the apostles. On his way from the upper chamber he dropped the bag of Judas, containing all the apostolic funds, in the lap of Matthew Levi. 무덤에서 다윗과 요셉은 바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갔으며, 그들은 그곳의 다락방에서 열 명의 사도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비록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요한 세베대만이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믿었지만, 주(主)를 만나지 못하자, 심각한 의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시신을 가져갔다고 믿으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논쟁하지는 않았지만,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사도들이니 이 일들을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다툴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이제 오늘 아침에 연락원들을 모이도록 지시해 놓은 니고데모의 집으로 돌아가겠으며,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이면, 주(主)께서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전파하는 마지막 임무를 맡길 작정입니다. 나는 주(主)께서 그가 죽은 다음 셋째 날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 말씀을 믿습니다.” 낙심하고 절망에 빠진 나라의 대사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자원한 통신과 정보의 우두머리는 사도들과 헤어졌습니다. 다락방에서 나가던 그는 사도들의 자금 전부가 들어있는 유다의 돈 주머니를 마태 레위의 무릎에 내려놓았습니다.

190:1.4 (2030.3) It was about half past nine o’clock when the last of David’s twenty-six messengers arrived at the home of Nicodemus. David promptly assembled them in the spacious courtyard and addressed them: 26명에 달하는 다윗의 연락원들 중에서 마지막 사람이 니고데모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30분경이었습니다. 다윗은 넓은 안마당에 즉시 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190:1.5 (2030.4) “Men and brethren, all this time you have served me in accordance with your oath to me and to one another, and I call you to witness that I have never yet sent out false information at your hands. I am about to send you on your last mission as volunteer messengers of the kingdom, and in so doing I release you from your oaths and thereby disband the messenger corps. Men, I declare to you that we have finished our work. No more does the Master have need of mortal messengers; he has risen from the dead. He told us before they arrested him that he would die and rise again on the third day. I have seen the tomb — it is empty. I have talked with Mary Magdalene and four other women, who have talked with Jesus. I now disband you, bid you farewell, and send you on your respective assignments, and the message which you shall bear to the believers is: ‘Jesus has risen from the dead; the tomb is empty.’” “여러분 그리고 형제들이여, 내게 그리고 서로에게 했던 맹세에 따라서, 지금까지 당신들은 나에게 봉사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 손 안에 거짓된 정보를 들려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당신들이 증언해 줄 것을 청합니다. 나는 이제 왕국의 연락원 자원자로서의, 당신들에게 당신의 마지막 임무를 띄워 보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당신들을 당신의 맹세에서 해제하며 이것으로서 연락원 무리단을 해산합니다.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우리가 우리 일을 마치었음을 선언합니다. 주(主)님은 연락원이 더 이상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저들이 그를 체포하기 전에, 우리에게 그가 죽을 것이고 그리고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무덤을 보았는데─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와 대화를 나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들을 해산하고, 작별을 고하면서, 당신들의 해당 임무로서 당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믿는 자들에게 품고 갈 마지막 소식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고; 그 무덤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190:1.6 (2030.5) The majority of those present endeavored to persuade David not to do this. But they could not influence him. They then sought to dissuade the messengers, but they would not heed the words of doubt. And so, shortly before ten o’clock this Sunday morning, these twenty-six runners went forth as the first heralds of the mighty truth-fact of the resurrected Jesus. And they started out on this mission as they had on so many others, in fulfillment of their oath to David Zebedee and to one another. These men had great confidence in David. They departed on this assignment without even tarrying to talk with those who had seen Jesus; they took David at his word. The majority of them believed what David had told them, and even those who somewhat doubted, carried the message just as certainly and just as swiftly.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다윗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연락원들에 대한 것을 단념시키려 애썼지만, 그들은 의문스러운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요일 아침 10시 조금 전에, 26명의 이 소식 전달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였다는 막강한 진리의-사실을 전하는 첫 전령으로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다른 것에서 그렇게 했었던 것처럼, 다윗 세베대와 서로 간에 맹세를 지키면서 이 임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매우 자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려는 머무름도 없이 이 업무를 띄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말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믿은 그들 대부분은, 그리고 어느 정도 의문을 가진 자들도, 모두 똑같이 확신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모두 똑같이 재빠르게 그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190:1.7 (2031.1) The apostles, the spiritual corps of the kingdom, are this day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where they manifest fear and express doubts, while these laymen, representing the first attempt at the socialization of the Master’s gospel of the brotherhood of man, under the orders of their fearless and efficient leader, go forth to proclaim the risen Savior of a world and a universe. And they engage in this eventful service ere his chosen representatives are willing to believe his word or to accept the evidence of eyewitnesses. 왕국의 영적 무리단인 사도들은 이 날 그 다락방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두려움을 분명히 드러냈고 불신을 나타냈으나, 반면에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의 복음을 사회화시키는 일에 대한 처음 시도를 대표하는 이 평신도들은, 그들의 두려움이 없고 유능한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서, 세계와 우주의 부활한 구원자를 전파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받은 대표자들은 그의 말씀을 믿거나 목격한 증거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들은 이 중대한 업무에 종사하였습니다.

190:1.8 (2031.2) These twenty-six were dispatched to the home of Lazarus in Bethany and to all of the believer centers, from Beersheba in the south to Damascus and Sidon in the north; and from Philadelphia in the east to Alexandria in the west. 26명의 이 사람들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과, 남쪽으로는 비엘세바에서 북쪽으로는 다마스커스와 시돈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신자들이 모여 있는 모든 처소들로 파견되었습니다.

190:1.9 (2031.3) When David had taken leave of his brethren, he went over to the home of Joseph for his mother, and they then went out to Bethany to join the waiting family of Jesus. David abode there in Bethany with Martha and Mary until after they had disposed of their earthly possessions, and he accompanied them on their journey to join their brother, Lazarus, at Philadelphia. 다윗은 형제들과 헤어진 후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요셉의 집으로 갔으며, 그 후에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예수의 가족과 합류하기 위하여 베다니로 갔습니다. 다윗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세상에서의 소유물들을 처분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들의 오빠 나사로를 만나기 위하여 떠난 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190:1.10 (2031.4) In about one week from this time John Zebedee took Mary the mother of Jesus to his home in Bethsaida. James, Jesus’ eldest brother, remained with his family in Jerusalem. Ruth remained at Bethany with Lazarus’s sisters. The rest of Jesus’ family returned to Galilee. David Zebedee left Bethany with Martha and Mary, for Philadelphia, early in June, the day after his marriage to Ruth, Jesus’ youngest sister. 이때로부터 일주일 정도 되었을 무렵, 요한 세베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벳새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남동생인 야고보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룻은 나사로의 자매들과 함께 베다니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머지 가족들은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막내 여동생인 룻과 결혼한 후인 6월 초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를 떠나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2. Jesus’ Appearance at Bethany

160424 부활5-야고보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90:2.1 (2031.5) From the time of the morontia resurrection until the hour of his spirit ascension on high, Jesus made nineteen separate appearances in visible form to his believers on earth. He did not appear to his enemies nor to those who could not make spiritual use of his manifestation in visible form. His first appearance was to the five women at the tomb; his second, to Mary Magdalene, also at the tomb. 예수님의 부활체로서의 부활이 있던 때로부터, 그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까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부활체로 각각 19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적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심을 영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첫 번째로 무덤 앞에서 다섯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두 번째 역시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90:2.2 (2031.6) The third appearance occurred about noon of this Sunday at Bethany. Shortly after noontide, Jesus’ oldest brother, James, was standing in the garden of Lazarus before the empty tomb of the resurrected brother of Martha and Mary, turning over in his mind the news brought to them about one hour previously by the messenger of David. James had always inclined to believe in his eldest brother’s mission on earth, but he had long since lost contact with Jesus’ work and had drifted into grave doubting regarding the later claims of the apostles that Jesus was the Messiah. The whole family was startled and well-nigh confounded by the news brought by the messenger. Even as James stood before Lazarus’s empty tomb, Mary Magdalene arrived on the scene and was excitedly relating to the family her experiences of the early morning hours at the tomb of Joseph. Before she had finished, David Zebedee and his mother arrived. Ruth, of course, believed the report, and so did Jude after he had talked with David and Salome. 세 번째 출현은 베다니에서 이 일요일 정오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한낮 뒤에 조금 있다가, 예수님의 첫 번째 동생인 야고보는 나사로의 동산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부활한 빈 무덤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다윗의 연락원이 약 한 시간 전에 베다니 가족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자기 맏형의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항상 믿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활동에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였으며,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도들의 후반기 주장에 대해서는 깊은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연락원이 가져온 소식 때문에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거의 혼동되었습니다. 야고보가 나사로의 빈 무덤 앞에 서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그곳에 도착하였고, 이른 새벽 시간에 요셉의 무덤에서 가졌던 자신의 체험들을 그 가족들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가 아직 말을 하고 있을 때, 다윗 세베대와 그의 어머니 살로매가 도착하였습니다. 당연히 룻은 이 보고를 믿었으며, 유다는 다윗과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것을 믿었습니다.

190:2.3 (2032.1) In the meantime, as they looked for James and before they found him, while he stood there in the garden near the tomb, he became aware of a near-by presence, as if someone had touched him on the shoulder; and when he turned to look, he beheld the gradual appearance of a strange form by his side. He was too much amazed to speak and too frightened to flee. And then the strange form spoke, saying: “James, I come to call you to the service of the kingdom. Join earnest hands with your brethren and follow after me.” When James heard his name spoken, he knew that it was his eldest brother, Jesus, who had addressed him. They all had more or less difficulty in recognizing the morontia form of the Master, but few of them had any trouble recognizing his voice or otherwise identifying his charming personality when he once began to communicate with them. 야고보가 아직 무덤에서 가까운 정원에 서 있었을 때, 그는 마치 누가 자기 어깨에 손을 대는 것과 같은 가까운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보는 순간, 그는 자기 옆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이상한 형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으며 동시에 너무 두려워서 도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이상한 형체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야고보야, 나는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위해 너를 부르려고 왔노라. 네 형제들과 진지하게 하나가 되어 나를 따라 오거라.” 야고보는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자기 맏형,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주(主)의 부활체로서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그들과 함께 일단 교통을 시작하게 되면 거의 아무도 그 목소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그의 매력 있는 인품을 확인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190:2.4 (2032.2) When James perceived that Jesus was addressing him, he started to fall to his knees, exclaiming, “My father and my brother,” but Jesus bade him stand while he spoke with him. And they walked through the garden and talked for almost three minutes; talked over experiences of former days and forecast the events of the near future. As they neared the house, Jesus said, “Farewell, James, until I greet you all together.” 예수께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야고보는, 그는 “내 아버지여, 형이여”라고 소리치며 예수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원을 거닐면서 거의 3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으며, 지난날들의 체험들을 이야기하고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측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집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야고보야, 잘 있어라.”

190:2.5 (2032.3) James rushed into the house, even while they looked for him at Bethpage, exclaiming: “I have just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visited with him. He is not dead; he has risen! He vanished before me, saying, ‘Farewell until I greet you all together.’” He had scarcely finished speaking when Jude returned, and he retold the experience of meeting Jesus in the garden for the benefit of Jude. And they all began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James now announced that he would not return to Galilee, and David exclaimed: “He is seen not only by excited women; even stronghearted men have begun to see him. I expect to see him myself.” 그들이 아직도 벳바게에서 야고보를 찾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방금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하였으며,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으며,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내 앞에서 사라지시면서 ‘내가 너희 모두를 함께 만날 때까지 잘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거의 말을 마칠 무렵에 유다가 돌아왔으며, 그는 정원에서 예수를 만났던 체험을 유다를 위하여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다윗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가 흥분한 여인들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다; 강심장의 남자들조차도 그를 보기 시작하고 있다. 나도 직접 그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190:2.6 (2032.4) And David did not long wait, for the fourth appearance of Jesus to mortal recognition occurred shortly before two o’clock in this very home of Martha and Mary, when he appeared visibly before his earthly family and their friends, twenty in all. The Master appeared in the open back door, saying: “Peace be upon you. Greetings to those once near me in the flesh and fellowship for my brothers and sisters in the kingdom of heaven. How could you doubt? Why have you lingered so long before choosing to follow the light of truth with a whole heart? Come, therefore, all of you into the fellowship of the Spirit of Truth in the Father’s kingdom.” As they began to recover from the first shock of their amazement and to move toward him as if to embrace hi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그리고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두시 조금 전에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예수의 네 번째 출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윗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이 때 그는 모두 20명에 이르는 자신의 지상에서의 가족들과 그들의 친구들 앞에서 눈에 보이게 나타났습니다. 주(主)님은 열려있는 뒷문에서 나타났으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한 때 육신으로 나와 가까이 지냈고 하늘 나라에서 나의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친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노라. 어찌하여 너희가 의심할 수 있었단 말이냐? 너희들이 전심으로 진리의 빛을 따르기로 선택하기까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지체하고 있었느냐? 그러므로, 너희 모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진리의 영과의 친교로 오라.” 그들이 놀라서 충격을 받았던 처음 상태에서 점차 회복되면서 그를 끌어안으려는 듯이 그를 향하여 움직이자, 그는 그들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0:2.7 (2032.5) They all wanted to rush off to the city to tell the doubting apostles about what had happened, but James restrained them. Mary Magdalene, only, was permitted to return to Joseph’s house. James forbade their publishing abroad the fact of this morontia visit because of certain things which Jesus had said to him as they conversed in the garden. But James never revealed more of his visit with the risen Master on this day at the Lazarus home in Bethany. 그들은 모두 그 도시로 달려가서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고 싶어 하였으나, 야고보가 그들을 제지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이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와 정원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가 자신에게 말씀한 특별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의 부활체로서의 방문에 대한 사실을 그들이 퍼뜨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부활한 주(主)와 이 날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결코 더 이상 밝히지 않았습니다.

3. At the Home of Joseph 요셉의 집에서

160501 부활6-차별 없는 부활의 예수님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190:3.1 (2033.1) The fif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to the recognition of mortal eyes occurred in the presence of some twenty-five women believers assembled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at about fifteen minutes past four o’clock on this same Sunday afternoon. Mary Magdalene had returned to Joseph’s house just a few minutes before this appearance. James, Jesus’ brother, had requested that nothing be said to the apostles concerning the Master’s appearance at Bethany. He had not asked Mary to refrain from reporting the occurrence to her sister believers. Accordingly, after Mary had pledged all the women to secrecy, she proceeded to relate what had so recently happened while she was with Jesus’ family at Bethany. And she was in the very midst of this thrilling recital when a sudden and solemn hush fell over them; they beheld in their very midst the fully visible form of the risen Jesus. He greeted them, saying: “Peace be upon you. In the fellowship of the kingdom there shall be neither Jew nor gentile, rich nor poor, free nor bond, man nor woman. You also are called to publish the good news of the liberty of mankind through the gospel of sonship with God in the kingdom of heaven. Go 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and confirming believers in the faith thereof. And while you do this, forget not to minister to the sick and strengthen those who are fainthearted and fear-ridden. And I will be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when he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while the women fell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in silence. 사람들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다섯 번째 부활체로서의 나타내심은, 같은 일요일 오후 4시 15분경에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모여 있는 약 25명의 여자 신도들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출현이 이루어지기 불과 몇 분전에 요셉의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는 주(主)께서 베다니에 나타났던 것을 “사도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리아에게 그녀의 자매 신도들에게도 “그 사건을 보고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 여인들 모두로부터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베다니에 있을 때 방금 전에 일어났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두근거리는 설명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고 장엄한 고요함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들 한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형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나라의 동반자 관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속박 받는 자,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한 너희들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관계의 복음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노라. 온 세계로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그것으로부터 신자들이 신앙에 굳건히 서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소심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자들을 강건하게 하는 일과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땅 끝까지라도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마친 후에, 그는 여인들이 자신들의 얼굴에 모습을 녹여내고 침묵 속에서 경배하는 동안,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0:3.2 (2033.2) Of the five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occurring up to this time, Mary Magdalene had witnessed four. 이때까지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진 예수의 부활체 출현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네 번을 입증하였습니다.

190:3.3 (2033.3) As a result of sending out the messengers during the midforenoon and from the unconscious leakage of intimations concerning this appearance of Jesus at Joseph’s house, word began to come to the rulers of the Jews during the early evening that it was being reported about the city that Jesus had risen, and that many persons were claiming to have seen him. The Sanhedrists were thoroughly aroused by these rumors. After a hasty consultation with Annas, Caiaphas called a meeting of the Sanhedrin to convene at eight o’clock that evening. It was at this meeting that action was taken to throw out of the synagogues any person who made mention of Jesus’ resurrection. It was even suggested that anyone claiming to have seen him should be put to death; this proposal, however, did not come to a vote since the meeting broke up in confusion bordering on actual panic. They had dared to think they were through with Jesus. They were about to discover that their real trouble with the man of Nazareth had just begun. 오전 반나절이 지날 무렵에 연락원들을 파견한 결과로, 그리고 요셉의 집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암시들의 무의식적인 누설로 인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였다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났다고 주장한다는 말이 도시에 두루 퍼졌다는 소식이 저녁 무렵에는 유대인 통치자들의 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이 소문에 심각하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와 급히 의논한 후에, 그 날 저녁 8시에 모이도록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는 자는 회당에서 출교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회의에서였습니다. 그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자는 제안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 공황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회의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이 제안은 표결에 부쳐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감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과의 자신들의 진정한 문제는 단지 시작이었었다는 것을 이제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 Appearance to the Greeks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심

190:4.1 (2033.4) About half past four o’clock, at the home of one Flavius, the Master made his sixth morontia appearance to some forty Greek believers there assembled. While they were engaged in discussing the reports of the Master’s resurrection, he manifested himself in their midst, notwithstanding that the doors were securely fastened, and speaking to them, said: “Peace be upon you. While the Son of Man appeared on earth among the Jews, he came to minister to all men. In the kingdom of my Father there shall be neither Jew nor gentile; you will all be brethren — the sons of God. Go you, therefore, 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of salvation as you have received it from the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I will fellowship you in the brotherhood of the Father’s sons of faith and truth.” And when he had thus charged them, he took leave, and they saw him no more. They remained within the house all evening; they were too much overcome with awe and fear to venture forth. Neither did any of these Greeks sleep that night; they stayed awake discussing these things and hoping that the Master might again visit them. Among this group were many of the Greeks who were at Gethsemane when the soldiers arrested Jesus and Judas betrayed him with a kiss. 오후 4시 30분쯤 되었을 때, 플라비우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곳에 모여 있는 약 40명의 그리스인 신자들에게 주(主)님께서 여섯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주(主)님께서 부활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토론하고 있을 때, 문들이 견고하게 닫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 가운데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너희들에게 있으라.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 유대인으로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모든 인류를 섬기기 위하여 왔었노라.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너희는 모두 형제 — 하나님의 아들들 — 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 세계로 가서, 너희가 하늘나라 대사들로부터 받았던 대로 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면 내가 신앙과 진리를 소유한 아버지의 아들들의 형제신분으로 너희들과 동료관계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명령을 그들에게 내리신 후에 떠났으며, 그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녁 내내 그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경외심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서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그리스인들은 그 밤에 아무도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주(主)님께서 다시 자기들을 방문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일들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유다가 입을 맞춤으로써 그를 배반할 때, 겟세마네에 있었던 그리스인들 대부분이 이 무리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190:4.2 (2034.1) Rumors of Jesus’ resurrection and reports concerning the many appearances to his followers are spreading rapidly, and the whole city is being wrought up to a high pitch of excitement. Already the Master has appeared to his family, to the women, and to the Greeks, and presently he manifests himself in the midst of the apostles. The Sanhedrin is soon to begin the consideration of these new problems which have been so suddenly thrust upon the Jewish rulers. Jesus thinks much about his apostles but desires that they be left alone for a few more hours of solemn reflection and thoughtful consideration before he visits them.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났다는 보고들이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그 도시 전체가 흥분되어 매우 심하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주(主)님은 이미 자기 가족들과 여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났으며, 또한 얼마 안 있어 사도들 가운데에도 직접 나타나고 계셨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 통치자들에게 이토록 갑자기 밀어닥친 이 새로운 문제들을 재빨리 심사숙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무척 깊이 생각하셨지만, 자신이 그들을 방문하기 전에 그들끼리 몇 시간 동안 더 따로 떨어져서 진지한 반성과 사려 깊은 숙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5. The Walk with Two Brothers 두 형제들과 같이 걸어가심

160508 부활7 – 엠마오 길 두 형제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눅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90:5.1 (2034.2) At Emmaus, about seven miles west of Jerusalem, there lived two brothers, shepherds, who had spent the Passover week in Jerusalem attending upon the sacrifices, ceremonials, and feasts. Cleopas, the elder, was a partial believer in Jesus; at least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His brother, Jacob, was not a believer, although he was much intrigued by what he had heard about the Master’s teachings and works.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7 마일 떨어진 엠마오에, 목동인 두 형제들이 살았는데, 유월절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가서 희생 제사와 예식 그리고 축제에 참여하였습니다. 형인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믿었는데, 적어도 그는 나중에 회당에서 출교 당하였습니다. 그의 동생 야곱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주(主)님의 가르침과 한 일들에 관하여 들었던 내용에 무척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190:5.2 (2034.3) On this Sunday afternoon, about three miles out of Jerusalem and a few minutes before five o’clock, as these two brothers trudged along the road to Emmaus, they talked in great earnestness about Jesus, his teachings, work, and more especially concerning the rumors that his tomb was empty, and that certain of the women had talked with him. Cleopas was half a mind to believe these reports, but Jacob was insistent that the whole affair was probably a fraud. While they thus argued and debated as they made their way toward home, the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his seventh appearance, came alongside them as they journeyed on. Cleopas had often heard Jesus teach and had eaten with him at the homes of Jerusalem believers on several occasions. But he did not recognize the Master even when he spoke freely with them. 그 일요일 오후,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5시가 거의 되었을 무렵에, 이들 두 형제는 엠마오로 가는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예수님에 관하여, 그의 가르침들과 한 일들 그리고 특별히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소문과 어떤 여인들이 그와 이야기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이 소문들을 반신반의하면서 믿었지만, 야곱은 그 모든 사건들이 아마 가짜일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있을 때, 그의 일곱 번째 출현으로서, 현시된 부활체 예수님께서 그들 옆으로 따라가시면서 같이 여행하였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종종 들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의 집에서 같이 식사를 나눈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主)께서 지금 자기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90:5.3 (2034.4) After walking a short way with them, Jesus said: “What were the words you exchanged so earnestly as I came upon you?” And when Jesus had spoken, they stood still and viewed him with sad surprise. Said Cleopas: “Can it be that you sojourn in Jerusalem and know not the things which have recently happened?” Then asked the Master, “What things?” Cleopas replied: “If you do not know about these matters, you are the only one in Jerusalem who has not heard these rumors concerning Jesus of Nazareth, who was a prophet mighty in word and in dee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The chief priests and our rulers delivered him up to the Romans and demanded that they crucify him. Now many of us had hoped that it was he who would deliver Israel from the yoke of the gentiles. But that is not all. It is now the third day since he was crucified, and certain women have this day amazed us by declaring that very early this morning they went to his tomb and found it empty. And these same women insist that they talked with this man; they maintain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when the women reported this to the men, two of his apostles ran to the tomb and likewise found it empty” — and here Jacob interrupted his brother to say, “but they did not see Jesus.”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조금 걸어가신 후에, “내가 너희들에게 다가올 때 그토록 진지하게 나눈 말들이 무슨 뜻이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잠시 서서 그를 보다가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클레오파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면,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주(主)님은 “무슨 일들이냐?”라고 물었습니다. 클레오파스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일들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씀과 행위에 큰 힘이 있는 선지자였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소문들을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듣지 못한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제들과 우리 통치자들이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가 이방인들의 멍에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진지 지금이 삼일 째인데, 어떤 여인들이 바로 오늘 새벽에 그의 무덤에 갔다가 그곳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였고,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계속 우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그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두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 그리고 이 때 야곱이 자기 형의 말에 끼어들면서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90:5.4 (2035.1) As they walked along, Jesus said to them: “How slow you are to comprehend the truth! When you tell me that it is about the teachings and work of this man that you have your discussions, then may I enlighten you since I am more than familiar with these teachings. Do you not remember that this Jesus always taught that his kingdom was not of this world, and that all men, being the sons of God, should find liberty and freedom in the spiritual joy of the fellowship of the brotherhood of loving service in this new kingdom of the truth of the heavenly Father’s love? Do you not recall how this Son of Man proclaimed the salvation of God for all men, ministering to the sick and afflicted and setting free those who were bound by fear and enslaved by evil? Do you not know that this man of Nazareth told his disciples that he must go to Jerusalem, be delivered up to his enemies, who would put him to death, and that he would arise on the third day? Have you not been told all this? And have you never read in the Scriptures concerning this day of salvation for Jew and gentile, where it says that in him shall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be blessed; that he will hear the cry of the needy and save the souls of the poor who seek him; that all nations shall call him blessed? That such a Deliverer shall be as the shadow of a great rock in a weary land. That he will feed the flock like a true shepherd, gathering the lambs in his arms and tenderly carrying them in his bosom. That he will open the eyes of the spiritually blind and bring the prisoners of despair out into full liberty and light; that all who sit in darkness shall see the great light of eternal salvation. That he will bind up the brokenhearted,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of sin, and open up the prison to those who are enslaved by fear and bound by evil. That he will comfort those who mourn and bestow upon them the joy of salvation in the place of sorrow and heaviness. That he shall be the desire of all nations and the everlasting joy of those who seek righteousness. That this Son of truth and righteousness shall rise upon the world with healing light and saving power; even that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that he will really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That he will not destroy the weak but minister salvation to all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That those who believe in him shall have eternal life. That he will pour out his spirit upon all flesh, and that this Spirit of Truth shall be in each believer a well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Did you not understand how great was the gospel of the kingdom which this man delivered to you? Do you not perceive how great a salvation has come upon you?” 그들이 길을 계속 갈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참으로 진리를 더디게 깨닫는 자들이구나! 너희가 토론하던 것이 그 사람의 가르침들과 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고 네가 나에게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 가르침들에 대하여 더 익숙하니, 너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고 싶구나. 그 예수님이 자기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진리에 의한 새로운 이 나라에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형제신분의 교제를 나누는 영적 기쁨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항상 가르치셨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 사람의 아들이 병이 든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보시면서,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악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풀어주시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선포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그 나사렛 사람이, 자기는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며, 자기의 적들에게 넘겨져서, 그들이 자기를 죽이겠지만 셋째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였던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런 모든 것들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이 구원의 날에 관하여,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사람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가난한 자들의 혼을 구하고 궁핍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라는 것과, 모든 나라들이 그를 찬미하리라는 것을 성서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한 해방자는 지치고 피곤한 땅 안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그림자처럼 되실 것이니라. 그는 참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실 것이며, 그 양들을 두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아서 친절하게 데리고 다니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고 절망에 사로잡힌 자를 충분한 자유와 광명의 세계로 해방시키실 것이며, 흑암에 앉아있는 자들이 영원한 구원의 엄청난 빛을 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낙담한 자를 일으켜 주시고, 죄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하며, 공포에 노예가 되고 악으로 묶인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그는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슬픔과 비애 대신에 구원의 기쁨을 그들에게 수여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나라들의 소망이 되실 것이며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영속하는 기쁨이 되실 것이다. 이 진리와 정의(正義)의 아들은 구원의 힘과 치유의 빛과 함께 세상에 우뚝 솟아나실 것이며, 자기 민족을 그들의 죄에서 구하실 것이며, 잃었던 자들을 반드시 찾아서 구하실 것이다. 그는 연약한 자를 멸하지 않으실 것이며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육체에게 자기 영을 부어 주실 것이며, 이 진리의 영은 각 신자들 속에 영속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너희에게 전해 준 왕국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느냐? 얼마나 엄청난 구원이 너희에게 임하였는지 깨닫지 못하겠느냐?”

190:5.5 (2035.2) By this time they had come near to the village where these brothers dwelt. Not a word had these two men spoken since Jesus began to teach them as they walked along the way. Soon they drew up in front of their humble dwelling place, and Jesus was about to take leave of them, going on down the road, but they constrained him to come in and abide with them. They insisted that it was near nightfall, and that he tarry with them. Finally Jesus consented, and very soon after they went into the house, they sat down to eat. They gave him the bread to bless, and as he began to break and hand to them, their eyes were opened, and Cleopas recognized that their guest was the Master himself. And when he said, “It is the Master —,” the morontia Jesus vanished from their sight. 이 때 그들은 이 형제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가까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걸어오는 동안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두 형제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곧 두 형제가 살고 있는 초라한 집 앞에 도착하였고, 예수님은 그들과 헤어져서, 가던 길을 계속 내려가시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함께 들어가 묵으시도록 억지로 그에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들은 밤이 가까웠으므로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야 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허락하였고,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즉시 같이 앉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가 축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그에게 빵을 드렸으며, 그가 빵을 떼어 그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은 눈을 뜨고, 클레오파스는 자기들의 손님이 바로 그 주(主) 자신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분이 주(主)님이시다 — ”라고 말하였을 때, 부활체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190:5.6 (2036.1) And then they said, the one to the other, “No wonder our hearts burned within us as he spoke to us while we walked along the road! and while he opened up to our understanding the teachings of the Scriptures!”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오면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리고 성서를 가르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동안, 우리 마음이 속에서 불타는 듯했던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190:5.7 (2036.2) They would not stop to eat. They had seen the morontia Master, and they rushed from the house, hastening back to Jerusalem to spread the good news of the risen Savior. 그들은 식사하기 위하여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체의 주(主)님을 보았으며, 부활한 구원자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집에서 달려 나가,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190:5.8 (2036.3) About nine o’clock that evening and just before the Master appeared to the ten, these two excited brothers broke in upon the apostles in the upper chamber, declaring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And they told all that Jesus had said to them and how they had not discerned who he was until the time of the breaking of the bread. 그 날 저녁 9시 경, 그리고 주(主)께서 열 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바로 전에, 흥분한 이 두 형제는 사도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 들어갔으며, 자기들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한 모든 것과, 빵을 떼기까지 어떻게 하여 그가 누구인지를 자기들이 식별하지 못하였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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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1 Appearances to the Apostles and Other Leaders 사도들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출현

Paper 191

Appearances to the Apostles and Other Leaders 사도들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출현

Reactions of the individual apostles 사도 개인들의 반응들
1. The Appearance to Peter 베드로에게 출현
2. First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첫 출현하심
3. With the Morontia Creatures 모론시아 창조물들과 함께
Stages of morontia progression 모론시아 진보의 단계들
4. The Tenth Appearance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에서 10번째 출현
5. Second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출현
“Blessed are those in the ages to come…” “…다가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복되도다.”
6. The Alexandrian Appearance 알렉산드리아에 출현

160515 부활8 – 사도들에게 나타남을 미루신 이유 막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91:0.1 (2037.1) RESURRECTION Sunday was a terrible day in the lives of the apostles; ten of them spent the larger part of the day in the upper chamber behind barred doors. They might have fled from Jerusalem, but they were afraid of being arrested by the agents of the Sanhedrin if they were found abroad. Thomas was brooding over his troubles alone at Bethpage. He would have fared better had he remained with his fellow apostles, and he would have aided them to direct their discussions along more helpful lines. 사도들은 부활의 일요일이 무척 고통스러운 하루였습니다. 10 명의 사도들은 그 날 종일토록 그 다락방 문을 꼭꼭 걸어 닫은 채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려 했지만, 밖으로 나갔다가 발견되면 산헤드린의 앞잡이들에게 붙잡히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혼자서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벳바게에서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며, 그들의 논의에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191:0.2 (2037.2) All day long John upheld the idea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He recounted no less than five different times when the Master had affirmed he would rise again and at least three times when he alluded to the third day. John’s attitude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m, especially on his brother James and on Nathaniel. John would have influenced them more if he had not been the youngest member of the group. 요한은 하루종일 예수께서 이미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主)께서 자신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5번 이상 단언하셨고, 셋째 날이라고 3번 이상 암시하셨음을 차례로 열거하였습니다. 요한의 태도는 특별히 그의 형제 야고보와 나다니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이 그 무리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않았어도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191:0.3 (2037.3) Their isolation had much to do with their troubles. John Mark kept them in touch with developments about the temple and informed them as to the many rumors gaining headway in the city, but it did not occur to him to gather up news from the different groups of believers to whom Jesus had already appeared. That was the kind of service which had heretofore been rendered by the messengers of David, but they were all absent on their last assignment as heralds of the resurrection to those groups of believers who dwelt remote from Jerusalem. For the first time in all these years the apostles realized how much they had been dependent on David’s messengers for their daily information regarding the affairs of the kingdom. 그들의 고립은 그들의 어려움과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요한 마가는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계속하여 그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성 안에서 떠돌아다니는 새로운 소문들을 전해주었으나, 예수께서 이미 나타났던 다른 신자 무리들로부터는 소식을 전해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의 연락원들로부터 친절한 봉사를 받았지만, 그들은 이제 부활의 소식을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 무리들에게 전하는 임무에 배속을 받았으므로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일에 관한 매일 매일의 정보 수집에 있어서, 자신들이 지난 수년 동안 다윗의 연락원들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해 왔다는 것을 사도들은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191:0.4 (2037.4) All this day Peter characteristically vacillated emotionally between faith and doubt concerning the Master’s resurrection. Peter could not get away from the sight of the grave cloths resting there in the tomb as if the body of Jesus had just evaporated from within. “But,” reasoned Peter, “if he has risen and can show himself to the women, why does he not show himself to us, his apostles?” Peter would grow sorrowful when he thought that maybe Jesus did not come to them on account of his presence among the apostles, because he had denied him that night in Annas’s courtyard. And then would he cheer himself with the word brought by the women, “Go tell my apostles — and Peter.” But to derive encouragement from this message implied that he must believe that the women had really seen and heard the risen Master. Thus Peter alternated between faith and doubt throughout the whole day, until a little after eight o’clock, when he ventured out into the courtyard. Peter thought to remove himself from among the apostles so that he might not prevent Jesus’ coming to them because of his denial of the Master. 베드로는 본래의 특징적으로, 주(主)님의 부활에 대하여 신앙과 의심 사이에서 이 날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신이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의가 무덤 안에 남아 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살아나셨고 그 여인들에게 자신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사도인 우리들에게는 보여주시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베드로는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자기들에게 오시지 않는 이유가, 그 날 밤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그를 부인한 자신이 사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비탄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는 그 여인들이 전해 준 “나의 사도들에게 — 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 전하라.”는 말로 위안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부터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그 여인들이 부활한 주(主)님을 정말로 보고 들었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안마당으로 나간 8시 조금 후까지, 그 날 하루 종일 신앙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主)님을 부인했던 것 때문에 예수께서 오시지 못하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하여 사도들로부터 혼자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191:0.5 (2037.5) James Zebedee at first advocated that they all go to the tomb; he was strongly in favor of doing something to get to the bottom of the mystery. It was Nathaniel who prevented them from going out in public in response to James’s urging, and he did this by reminding them of Jesus’ warning against unduly jeopardizing their lives at this time. By noontime James had settled down with the others to watchful waiting. He said little; he was tremendously disappointed because Jesus did not appear to them, and he did not know of the Master’s many appearances to other groups and individuals. 야고보 세베대는 처음에 모두 무덤으로 가 보자고 주장하였으며, 그 신비스러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말린 것은 나다니엘이었으며, 그는 이와 같은 때에 쓸데없이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렇게 하였습니다. 정오 무렵에 야고보는 안정을 되찾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으며,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에 무척 실망하였고, 주(主)님께서 개별존재들과 무리들에게 여러 번 나타났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191:0.6 (2038.1) Andrew did much listening this day. He was exceedingly perplexed by the situation and had more than his share of doubts, but he at least enjoyed a certain sense of freedom from responsibility for the guidance of his fellow apostles. He was indeed grateful that the Master had released him from the burdens of leadership before they fell upon these distracting times. 안드레는 이 날 거의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무척 당황하였고 필요 이상으로 의심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동료 사도들을 인도하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어떤 자유로운 해방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자기들에게 임하기 전에,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짐을 주(主)께서 덜어주신 것에 대하여, 그는 정말로 고마워하였습니다.

191:0.7 (2038.2) More than once during the long and weary hours of this tragic day, the only sustaining influence of the group was the frequent contribution of Nathaniel’s characteristic philosophic counsel. He was really the controlling influence among the ten throughout the entire day. Never once did he express himself concerning either belief or disbelief in the Master’s resurrection. But as the day wore on, he became increasingly inclined toward believing that Jesus had fulfilled his promise to rise again. 비극적인 이 날 지루하고 지친 시간들 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그 무리들에게 유일한 영향력을 끼치며 지켜준 것은, 나다니엘이 자주 제시한 그의 특징적인 철학적 조언이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은 정말로 그 날 하루 종일 열 명의 사도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주(主)님의 부활에 대하여 믿는다든지 아니면 믿지 않는다든지 하는, 자기 의견을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가면서, 그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다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였음을 믿는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갔습니다.

191:0.8 (2038.3) Simon Zelotes was too much crushed to participate in the discussions. Most of the time he reclined on a couch in a corner of the room with his face to the wall; he did not speak half a dozen times throughout the whole day. His concept of the kingdom had crashed, and he could not discern that the Master’s resurrection could materially change the situation. His disappointment was very personal and altogether too keen to be recovered from on short notice, even in the face of such a stupendous fact as the resurrection. 시몬 젤로떼는 너무 낙심하여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방구석에 있는 안락의자에 기대어 벽을 향하고 누워 있었으며, 하루 종일 여섯 번 정도 이야기하였을 뿐입니다. 왕국에 대한 그의 개념은 무너졌으며, 주(主)님의 부활이 그 상황을 물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실망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고 전체적으로 너무 심화되어 있어서 빨리 회복될 수 없었으며,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여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0.9 (2038.4) Strange to record, the usually inexpressive Philip did much talking throughout the afternoon of this day. During the forenoon he had little to say, but all afternoon he asked questions of the other apostles. Peter was often annoyed by Philip’s questions, but the others took his inquiries good-naturedly. Philip was particularly desirous of knowing, provided Jesus had really risen from the grave, whether his body would bear the physical marks of the crucifixion. 기록하기는 이상하지만, 여느 때처럼 말이 없던 빌립이 이 날 오후 내내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오전 동안에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오후에는 줄곧 다른 사도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베드로는 빌립의 질문을 종종 귀찮아했지만, 다른 사도들은 그의 질문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정말로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그의 몸에 십자가형의 육체적인 흔적이 남아있는지 아닌지를 특별히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191:0.10 (2038.5) Matthew was highly confused; he listened to the discussions of his fellows but spent most of the time turning over in his mind the problem of their future finances. Regardless of Jesus’ supposed resurrection, Judas was gone, David had unceremoniously turned the funds over to him, and they were without an authoritative leader. Before Matthew got around to giving serious consideration to their arguments about the resurrection, he had already seen the Master face to face. 마태는 매우 혼동이 되었으며, 동료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지만 앞으로 닥쳐올 자신들의 재정 문제를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예정된 부활을 개의치 않고, 유다는 떠나 버렸으며, 다윗은 아무 절차도 없이 자금을 자기에게 넘겼고, 자기들에게는 이제 아무도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부활에 대한 그들의 논쟁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갖기도 전에, 주(主)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191:0.11 (2038.6) The Alpheus twins took little part in these serious discussions; they were fairly busy with their customary ministrations. One of them expressed the attitude of both when he said, in reply to a question asked by Philip: “We do not understand about the resurrection, but our mother says she talked with the Master, and we believe her.” 알패오 쌍둥이는 이러한 심각한 토론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습관적인 봉사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부활에 관해서 잘 납득하지 못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주(主)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말을 하였다는 데, 우리는 어머니를 믿는다.”는 말로 두 사람의 태도를 표현하였습니다.

191:0.12 (2038.7) Thomas was in the midst of one of his typical spells of despairing depression. He slept a portion of the day and walked over the hills the rest of the time. He felt the urge to rejoin his fellow apostles, but the desire to be by himself was the stronger. 도마는 자포자기하는 우울증이라는 그의 전형적인 주문 중의 하나에 걸려 그 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잠을 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동산들을 거닐면서 보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다시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혼자 있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였습니다.

191:0.13 (2038.8) The Master put off the first morontia appearance to the apostles for a number of reasons. First, he wanted them to have time, after they heard of his resurrection, to think well over what he had told them about his death and resurrection when he was still with them in the flesh. The Master wanted Peter to wrestle through with some of his peculiar difficulties before he manifested himself to them all. In the second place, he desired that Thomas should be with them at the time of his first appearance. John Mark located Thomas at the home of Simon in Bethpage early this Sunday morning, bringing word to that effect to the apostles about eleven o’clock. Any time during this day Thomas would have gone back to them if Nathaniel or any two of the other apostles had gone for him. He really wanted to return, but having left as he did the evening before, he was too proud to go back of his own accord so soon. By the next day he was so depressed that it required almost a week for him to make up his mind to return. The apostles waited for him, and he waited for his brethren to seek him out and ask him to come back to them. Thomas thus remained away from his associates until the next Saturday evening, when, after darkness had come on, Peter and John went over to Bethpage and brought him back with them. And this is also the reason why they did not go at once to Galilee after Jesus first appeared to them; they would not go without Thomas.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부활체를 보이지 않으시고 미루셨던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육신으로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사도들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전 특별히 베드로가 자신의 어려움들과 싸워 극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둘째, 부활의 예수님은 처음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도마가 함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도마는 토요 안식일부터 계속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 있었습니다. 요한 마가는 그 일요일 아침, 11시 경에 도마가 벳바게 시몬의 집에 있음을 사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나다니엘이나 아니면 누구든지 다른 두 사도들이 그에게 갔었다면, 도마는 이 날 언제든지 그들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전 날 저녁 사도들을 떠나올 때 행했던 자기 행동과 강한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빨리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 우울하여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기다렸고, 반면에 그는 사도들이 자기를 찾으러 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청해 주기만을 바랬습니다. 도마는 그 다음 토요일 저녁, 어둠이 깔린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벳바게로 와서 자신을 데리고 동료들에게 돌아갈 때까지 사도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그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후 그들이 즉시 갈릴리로 가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사도들은 도마 없이는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 The Appearance to Peter 베드로에게 출현

160522 부활9 –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눅24:33-34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191:1.1 (2039.1) It was near half past eight o’clock this Sunday evening when Jesus appeared to Simon Peter in the garden of the Mark home. This was his eighth morontia manifestation. Peter had lived under a heavy burden of doubt and guilt ever since his denial of the Master. All day Saturday and this Sunday he had fought the fear that, perhaps, he was no longer an apostle. He had shuddered at the fate of Judas and even thought that he, too, had betrayed his Master. All this afternoon he thought that it might be his presence with the apostles that prevented Jesus’ appearing to them, provided, of course, he had really risen from the dead. And it was to Peter, in such a frame of mind and in such a state of soul, that Jesus appeared as the dejected apostle strolled among the flowers and shrubs. 예수께서 마가의 집에 있는 정원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 일요일 저녁 8시30분경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여덟 번째 부활체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主)를 부인한 이후로 죄의식과 의심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지내왔습니다. 토요일과 이 일요일 내내,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숙명에 몸서리를 쳤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역시 주(主)님을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정말로 살아났다면, 자기가 사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날 오후 내내 하였습니다. 낙심한 사도가 꽃밭 속에서 거닐고 있을 때 예수께서 바로 그러한 기분과 혼의 상태 속에 있는 바로 그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91:1.2 (2039.2) When Peter thought of the loving look of the Master as he passed by on Annas’s porch, and as he turned over in his mind that wonderful message brought him early that morning by the women who came from the empty tomb, “Go tell my apostles — and Peter” — as he contemplated these tokens of mercy, his faith began to surmount his doubts, and he stood still, clenching his fists, while he spoke aloud: “I believe he has risen from the dead; I will go and tell my brethren.” And as he said this, there suddenly appeared in front of him the form of a man, who spoke to him in familiar tones, saying: “Peter, the enemy desired to have you, but I would not give you up. I knew it was not from the heart that you disowned me; therefore I forgave you even before you asked; but now must you cease to think about yourself and the troubles of the hour while you prepare to carry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o those who sit in darkness. No longer should you be concerned with what you may obtain from the kingdom but rather be exercised about what you can give to those who live in dire spiritual poverty. Gird yourself, Simon, for the battle of a new day, the struggle with spiritual darkness and the evil doubtings of the natural minds of men.” 그가 안나스의 현관 앞을 지나치면서 주(主)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베드로가 생각하고, 그리고 빈 무덤에서 달려 온 여인들이 그 날 아침 일찍 자신에게 전해 준 엄청난 소식,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라는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그가 이 자비의 상징들을 심사숙고하였을 때, 그의 신앙은 의심을 극복하기 시작하였으며, 똑바로 서서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을 믿으며, 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을 때, 그의 앞에 한 남자의 형체가 갑자기 나타났으며, 친숙한 목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야, 적이 너를 노렸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던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므로, 네가 요청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하였지만, 이제 너는 흑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준비를 하는 동안, 그 때의 괴로움과 네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는 왕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영적 무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 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여야 한다. 시몬아 새로운 날의 전투, 사람의 본래 마음속에 있는 악한 불신들과 영적 무지와의 투쟁에 대비하거라.”

191:1.3 (2039.3) Peter and the morontia Jesus walked through the garden and talked of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for almost five minutes. Then the Master vanished from his gaze, saying, “Farewell, Peter, until I see you with your brethren.” 베드로와 부활의 예수님은 정원을 같이 걸으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에 관하여 거의 5분 동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主)는 “베드로야, 내가 너와 네 형제들을 같이 만날 때까지 잘 있거라.”라고 말하면서, 그가 보는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191:1.4 (2039.4) For a moment, Peter was overcome by the realization that he had talked with the risen Master, and that he could be sure he was still an ambassador of the kingdom. He had just heard the glorified Master exhort him to go on preaching the gospel. And with all this welling up within his heart, he rushed to the upper chamber and into the presence of his fellow apostles, exclaiming in breathless excitement: “I have seen the Master; he was in the garden. I talked with him, and he has forgiven me.” 베드로는 부활한 주(主)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아직도 왕국의 대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동안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에게 훈계하는, 영광된 주(主)의 음성을 방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가슴 속에 솟아오르면서, 동료 사도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갔으며, 흥분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주(主)를 보았으며; 그는 정원 안에 계셨다.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를 용서해 주셨다.”

191:1.5 (2040.1) Peter’s declaration that he had seen Jesus in the garden made a profound impression upon his fellow apostles, and they were about ready to surrender their doubts when Andrew got up and warned them not to be too much influenced by his brother’s report. Andrew intimated that Peter had seen things which were not real before. Although Andrew did not directly allude to the vision of the night on the Sea of Galilee wherein Peter claimed to have seen the Master coming to them walking on the water, he said enough to betray to all present that he had this incident in mind. Simon Peter was very much hurt by his brother’s insinuations and immediately lapsed into crestfallen silence. The twins felt very sorry for Peter, and they both went over to express their sympathy and to say that they believed him and to reassert that their own mother had also seen the Master. 그 정원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베드로의 선언은 그의 동료 사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의심을 포기하려고 할 때 안드레가 일어나서 자기 동생의 말에 의해 너무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가 전에 실제가 아닌 것들을 보았던 사실을 암시하였습니다. 주(主)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베드로가 주장하였던 갈릴리 바다에서의 그 날 밤의 환상을 안드레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도록 말하였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자기 형의 암시에 무척 상처를 받았으며 즉시 풀이 죽어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쌍둥이 형제들은 베드로에게 그들의 깊은 공감을 말했으며,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들의 어머니도 역시 주(主)를 보았다는 사실을 거듭 말하면서 자기들은 그의 말을 믿는다고 위로하였습니다.

2. First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첫 출현하심

160529 부활10 –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9th) 요20:19-24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91:2.1 (2040.2) Shortly after nine o’clock that evening, after the departure of Cleopas and Jacob, while the Alpheus twins comforted Peter, and while Nathaniel remonstrated with Andrew, and as the ten apostles were there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with all the doors bolted for fear of arrest, the Master, in morontia form, suddenly appeared in the midst of them, saying: “Peace be upon you. Why are you so frightened when I appear, as though you had seen a spirit? Did I not tell you about these things when I was present with you in the flesh? Did I not say to you that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would deliver me up to be killed, that one of your own number would betray me, and that on the third day I would rise? Wherefore all your doubtings and all this discussion about the reports of the women, Cleopas and Jacob, and even Peter? How long will you doubt my words and refuse to believe my promises? And now that you actually see me, will you believe? Even now one of you is absent. When you are gathered together once more, and after all of you know of a certainty that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grave, go hence into Galilee.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in one another; and so shall you enter into the new service of the kingdom of heaven. I will tarry in Jerusalem with you until you are ready to go into Galilee. My peace I leave with you.” 그 날 저녁 9시가 조금 지나고, 클레오파스와 야곱이 떠난 후에, 알패오 쌍둥이들은 베드로를 위로하고 있었으며, 나다니엘이 안드레에게 충고를 하고 있을 때, 그리고 열 명의 사도들이 그 다락방에 모두 모여서 붙잡혀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문들을 단단히 잠그고 있을 때, 부활체 형체의 주(主)가 그 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내가 나타났을 때, 너희들이 마치 영을 본 듯이 왜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육신으로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일들에 대하여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대사제장들과 통치자들이 나를 죽음에 넘기리라는 것과, 바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하리라는 것, 그리고 셋째 날에 내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무슨 이유로 너희 모두 그 여인들과 클레오파스와 야곱 그리고 심지어 베드로의 보고에 대해서까지 논쟁하며 의심하고 있느냐? 너희는 언제까지 내 말을 의심할 것이며 내 약속을 믿지 않으려 하느냐? 지금 너희가 나를 실제로 보고 있는데, 이제는 믿겠느냐? 너희 중에 한 사람은 아직도 여기에 있지 않다. 너희들이 다시 함께 모였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너희 모두가 확실히 알고 난 후에는, 갈릴리로 가라.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신뢰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무를 것이다.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라노라.”

191:2.2 (2040.3) When the morontia Jesus had spoken to them, he vanished in an instant from their sight. And they all fell on their faces, praising God and venerating their vanished Master. This was the Master’s ninth morontia appearance. 부활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마친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라지신 주(主)를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주(主)의 아홉 번째 부활체 출현이었습니다.

3. With the Morontia Creatures 모론시아 창조물들과 함께

191:3.1 (2040.4) The next day, Monday, was spent wholly with the morontia creatures then present on Urantia. As participants in the Master’s morontia-transition experience, there had come to Urantia more than one million morontia directors and associates, together with transition mortals of various orders from the seven mansion worlds of Satania. The morontia Jesus sojourned with these splendid intelligences for forty days. He instructed them and learned from their directors the life of morontia transition as it is traversed by the mortals of the inhabited worlds of Satania as they pass through the system morontia spheres. 부활체 창조물들과 함께 다음 날 월요일, 그 때 지구에 있었던 부활체 피조물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주(主)께서 부활체로 전환하실 때, 백만이 넘는 부활체 감독들과 동료들이 사타니아의 일곱 맨션세계들로부터 다양한 계층 속에 있는 전환기의 사람들과 함께 지구에 와 있었습니다. 부활체 예수는 이 훌륭한 지적 존재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의 감독들로부터 거주하는 사타니아 세계들의 사람들이 부활체 구체들의 체계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부활체 전환의 일생에 대하여 배우셨습니다.

191:3.2 (2041.1) About midnight of this Monday the Master’s morontia form was adjusted for transition to the second stage of morontia progression. When he next appeared to his mortal children on earth, it was as a second-stage morontia being. As the Master progressed in the morontia career, it became, technically, more and more difficult for the morontia intelligences and their transforming associates to visualize the Master to mortal and material eyes. 그 월요일 자정 무렵에 부활체 주(主)님의 형체는 부활체 진보의 두 번째 단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다음에 나셨을 때는 이미 두 번째 단계의 부활체 존재가 되셨습니다. 부활체 생애에 있어서 주(主)가 진보해 가심에 따라, 사람들의 눈에 주(主)를 가시화(可視化)시키는 일이, 부활체 지적존재들과 변환을 담당한 그들의 동료들에게 점점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191:3.3 (2041.2) Jesus made the transit to the third stage of morontia on Friday, April 14; to the fourth stage on Monday, the 17th; to the fifth stage on Saturday, the 22nd; to the sixth stage on Thursday, the 27th; to the seventh stage on Tuesday, May 2; to Jerusem citizenship on Sunday, the 7th; and he entered the embrace of the Most Highs of Edentia on Sunday, the 14th. 예수님은 4월 14일 금요일에 세 번째 단계로 들어가셨고, 네 번째 단계는 17일 월요일에, 다섯 번째 단계는 22일 토요일에, 여섯 번째 단계는 27일 목요일에, 일곱 번째 단계는 5월 2일 화요일에, 7일 일요일에는 예루셈 시민의 단계로, 14일 일요일에는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91:3.4 (2041.3) In this manner did Michael of Nebadon complete his service of universe experience since he had already, in connection with his previous bestowals, experienced to the full the life of the ascendant mortals of time and space from the sojourn on the headquarters of the constellation even on to, and through, the service of the headquarters of the superuniverse. And it was by these very morontia experiences that the Creator Son of Nebadon really finished and acceptably terminated his seventh and final universe bestowal. 이전에 여러 차례 자신을 주신 증여들과 연관되어, 별자리의 본부들에 머무르는 단계로부터, 초우주의 본부들에 대한 업무에 이르기까지 또 그것을 거쳐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올라가는 사람들의 충만한 일생을 이미 체험하였으므로, 이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우주 체험에서 자신의 봉사를 완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일곱 번째이며 마지막인 증여를 실제로 끝내시고 만족스럽게 완료하신 것은 바로 이 부활체 체험들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4. The Tenth Appearance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에서 10번째 출현

160605 부활11 – 전도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0th) 필라델피아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91:4.1 (2041.4) The t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to mortal recognition occurred a short time after eight o’clock on Tuesday, April 11, at Philadelphia, where he showed himself to Abner and Lazarus and some one hundred and fifty of their associates, including more than fifty of the evangelistic corps of the seventy. This appearance occurred just after the opening of a special meeting in the synagogue which had been called by Abner to discuss the crucifixion of Jesus and the more recent report of the resurrection which had been brought by David’s messenger. Inasmuch as the resurrected Lazarus was now a member of this group of believers, it was not difficult for them to believe the report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예수의 열 번째 부활체 출현은 4월 11일 화요일 8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필라델피아에서 있었으며, 그곳에서 아브너와 나사로 그리고 70인의 전도 대원들 중 50명 이상이 포함된 약 150명에 이르는 그들의 동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최근에 다윗의 연락원이 전해 준 부활에 대한 소식 보다는 최근의 소식에 대해 토의하기 위하여, 아브너에 의해 소집되었던 회당에서의 특별 회의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에 이 출현이 이루어졌습니다. 부활한 나사로가 이제 이 신자들 무리의 일원(一員)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보고를 믿는 것이 그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191:4.2 (2041.5) The meeting in the synagogue was just being opened by Abner and Lazarus, who were standing together in the pulpit, when the entire audience of believers saw the form of the Master appear suddenly. He stepped forward from where he had appeared between Abner and Lazarus, neither of whom had observed him, and saluting the company, said: 회당에서의 회의가, 같이 단상(壇上)에 서있는, 아브너와 나사로에 의해 막 시작되었는데, 그 때 객석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주(主)의 형체를 보았습니다. 아브너와 나사로 사이에서 처음 나타났으므로 그들은 그를 보지 못하였으며, 그는 그곳에서 걸어 나와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4.3 (2041.6) “Peace be upon you. You all know that we have one Father in heaven, and that there is but one gospel of the kingdom — the good news of the gift of eternal life which men receive by faith. As you rejoice in your loyalty to the gospel, pray the Father of truth to shed abroad in your hearts a new and greater love for your brethren. You are to love all men as I have loved you; you are to serve all men as I have served you. With understanding sympathy and brotherly affection, fellowship all your brethren who are dedicated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news, whether they be Jew or gentile, Greek or Roman, Persian or Ethiopian. John proclaimed the kingdom in advance; you have preached the gospel in power; the Greeks already teach the good news; and I am soon to send forth the Spirit of Truth into the souls of all these, my brethren, who have so unselfishly dedicated their lives to the enlightenment of their fellows who sit in spiritual darkness. You are all the children of light; therefore stumble not into the misunderstanding entanglements of mortal suspicion and human intolerance. If you are ennobled, by the grace of faith, to love unbelievers, should you not also equally love those who are your fellow believers in the far-spreading household of faith? Remember, as you love one another,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과,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 사람들이 신앙으로 받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기쁜 소식 — 이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너희가 기쁨으로 그 복음에 충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형제들을 위해 더욱 큰 새로운 사랑이 너희 마음에서 넘치도록 진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도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그들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페르시아인이든지 에티오피아인이든지,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는 너희 모든 형제들과 함께 이해와 공감 그리고 형제의 애정을 가지고 사귀라. 요한은 미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너희는 권능으로 복음을 전도해왔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영적 암흑 가운데 있는 자들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애타적으로 삶을 헌신하는 모든 내 형제들의 혼속에 진리의 영을 곧 보낼 것이다. 너희들 모두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의심과 인간의 편협성에서 비롯된 오해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라. 신앙의 가족 안에서 믿음의 동료들을 사랑하듯이 너희들은 신앙의 은혜로 불신자들을 똑같이 사랑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대로,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들인 것을 알 것이다.”

191:4.4 (2042.1) “Go, then, in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to all nations and races and ever be wise in your choice of methods for presenting the good news to the different races and tribes of mankind. Freely you have received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you will freely give the good news to all nations. Fear not the resistance of evil, for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s.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그러므로 온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과 사람들이 서로 형제라는 이 복음을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하고, 인류의 서로 다른 종족들과 민족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을 선택할 때 항상 지혜로우라. 너희가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대가없이 받았으니 모든 나라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대가없이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들이 끝날 때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 악한 세력의 저항을 두려워 마라.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91:4.5 (2042.2) When he had said, “My peace I leave with you,”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With the exception of one of his appearances in Galilee, where upward of five hundred believers saw him at one time, this group in Philadelphia embraced the largest number of mortals who saw him on any single occasion. 주님께서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였을 때,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그를 본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해 볼 때, 500명 이상의 신자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던, 갈릴리에서의 출현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필라델피아에서의 이 무리들의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191:4.6 (2042.3) Early the next morning, even while the apostles tarried in Jerusalem awaiting the emotional recovery of Thomas, these believers at Philadelphia went forth proclaiming that Jesus of Nazareth had risen from the dead.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도들은 도마의 감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반면에, 필라델피아의 이 신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전파하며 나아갔습니다.

191:4.7 (2042.4) The next day, Wednesday, Jesus spent without interruption in the society of his morontia associates, and during the midafternoon hours he received visiting morontia delegates from the mansion worlds of every local system of inhabited spheres throughout the constellation of Norlatiadek. And they all rejoiced to know their Creator as one of their own order of universe intelligence. 다음날인 수요일에, 예수는 자신의 부활체 동행자들과 함께 줄곧 같이 보내셨으며, 오후 반나절 동안에는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전체에서 거주되는 구체들의 각 지역 체계의 맨션세계들로부터 방문한 부활체 대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기들의 창조주를 자신들의 우주 지성 계층의 하나로서 알게 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5. Second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출현

160612 길교회 창립3주년 기념주일 부활12 – 사도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1th) 찬 160 161 159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173 요20:25-29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191:5.1 (2042.5) Thomas spent a lonesome week alone with himself in the hills around about Olivet. During this time he saw only those at Simon’s house and John Mark. It was about nine o’clock on Saturday, April 15, when the two apostles found him and took him back with them to their rendezvous at the Mark home. The next day Thomas listened to the telling of the stories of the Master’s various appearances, but he steadfastly refused to believe. He maintained that Peter had enthused them into thinking they had seen the Master. Nathaniel reasoned with him, but it did no good. There was an emotional stubbornness associated with his customary doubtfulness, and this state of mind, coupled with his chagrin at having run away from them, conspired to create a situation of isolation which even Thomas himself did not fully understand. He had withdrawn from his fellows, he had gone his own way, and now, even when he was back among them, he unconsciously tended to assume an attitude of disagreement. He was slow to surrender; he disliked to give in. Without intending it, he really enjoyed the attention paid him; he derived unconscious satisfaction from the efforts of all his fellows to convince and convert him. He had missed them for a full week, and he obtained considerable pleasure from their persistent attentions. 도마는 올리브 산 근처의 동산에서 고독한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시몬의 집에 있는 사람들과 요한 마가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찾아와서 마가의 집으로 그를 데려간 것은 4월 15일 토요일 9시 경이었습니다. 도마는 다음 날(4/16일) 주(主)께서 여러 번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옛날에 전과가 있었던(베드로의 환상) 베드로가 사도들을 감동시켜 마치 주(主)를 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다니엘이 그를 설득하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도마의 습관적인 깊은 의심 그리고 그 의심과 연결된 감정적 고집의 상태에다가 사도들로부터 도피해 버렸던 자신에 대한 분함과 화가 더해져서, 도마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동시에 발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무의식적인 분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굴복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료들이 자기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는 지난 일 주일 내내 동료들을 보고 싶었으며, 그들의 변함없는 친절에서 큰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191:5.2 (2042.6) They were having their evening meal a little after six o’clock, with Peter sitting on one side of Thomas and Nathaniel on the other, when the doubting apostle said: “I will not believe unless I see the Master with my own eyes and put my finger in the mark of the nails.” As they thus sat at supper, and while the doors were securely shut and barred, the morontia Master suddenly appeared inside the curvature of the table and, standing directly in front of Thomas, said: 오후 6시 조금 지나 저녁 식사 시간에, 베드로와 나다나엘 사이에 있던 의심이 많은 그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주(主)를 보고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문들은 아직도 견고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앉아서 그들이 식사 하고 있을 때, 부활체 주(主)께서 식탁 모서리에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도마 앞으로 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5.3 (2043.1) “Peace be upon you. For a full week have I tarried that I might appear again when you were all present to hear once more the commission to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is gospel of the kingdom. Again I tell you: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so send I you. As I have revealed the Father, so shall you reveal the divine love, not merely with words, but in your daily living. I send you forth, not to love the souls of men, but rather to love men. You are not merely to proclaim the joys of heaven but also to exhibit in your daily experience these spirit realities of the divine life since you already have eternal life, as the gift of God, through faith. When you have faith, when power from on high, the Spirit of Truth, has come upon you, you will not hide your light here behind closed doors; you will make known the love and the mercy of God to all mankind. Through fear you now flee from the facts of a disagreeable experience, but when you shall have been baptized with the Spirit of Truth, you will bravely and joyously go forth to meet the new experiences of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eternal life in the kingdom of God. You may tarry here and in Galilee for a short season while you recover from the shock of the transition from the false security of the authority of traditionalism to the new order of the authority of facts, truth, and faith in the supreme realities of living experience. Your mission to the world is founded on the fact that I lived a God-revealing life among you; on the truth that you and all other men are the sons of God; and it shall consist in the life which you will live among men — the actual and living experience of loving men and serving them, even as I have loved and served you. Let faith reveal your light to the world; let the revelation of truth open the eyes blinded by tradition; let your loving service effectually destroy the prejudice engendered by ignorance. By so drawing close to your fellow men in understanding sympathy and with unselfish devotion, you will lead them into a saving knowledge of the Father’s love. The Jews have extolled goodness; the Greeks have exalted beauty; the Hindus preach devotion; the faraway ascetics teach reverence; the Romans demand loyalty; but I require of my disciples life, even a life of loving service for your brothers in the flesh.” “평강이 너에게 있으라. 너희가 모두 함께 있을 때 내가 다시 나타나서, 온 세계로 나가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임무를 전달하려고, 내가 일주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아버지를 나타낸 것처럼,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 나타내어라. 나는 사람들의 혼이 아니라, 사람들 자체를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는 하늘의 기쁨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 너희가 이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성한 생명의 영적 실체들도 보여주어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서, 위로부터의 능력인 진리의 영이 임하면, 너희들은 닫힌 문들 뒤에 너희들의 빛을 숨기지 말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에게 알리라. 너희가 지금은 두려움 때문에, 인정하기 어려운 경험적 사실에서 도피하고 있지만, 너희가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영생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용감하고 기쁘게 나아가리라. 너희는 전통주의의 권위에 근거한 거짓된 보호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체험의 최상의 실체들 속에 있는 사실들과 진리 그리고 믿음의 권위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는 충격에서 회복되는 동안, 이곳과 갈릴리에 잠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들 안에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과, 너희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긴 것처럼, 너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실제적인 체험 가운데 너희들의 일생을 통해 그 사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으로 너희 빛을 세상에 비취라. 진리를 계시하여 전통으로 멀어 있는 눈을 뜨게 하라. 너희들은 사랑의 섬김으로, 무지로 인한 선입관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라. 깊이 이해하는 동정심과 애타적인 헌신으로 너희 친구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너희는 아버지 사랑이 담긴 구원의 지식으로 그들을 인도하라. 유대인들은 선(善)을 찬양하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칭송하며, 힌두인들은 헌신을 강조하고, 옛 금욕주의자들은 위엄을 가르쳤고, 로마인들은 충성을 요구했지만, 나는 내 제자들에게 육신으로 너희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생을 요구하노라.”

191:5.4 (2043.2) When the Master had so spoken, he looked down into the face of Thomas and said: “And you, Thomas, who said you would not believe unless you could see me and put your finger in the nail marks of my hands, have now beheld me and heard my words; and though you see no nail marks on my hands, since I am raised in the form that you also shall have when you depart from this world, what will you say to your brethren? You will acknowledge the truth, for already in your heart you had begun to believe even when you so stoutly asserted your unbelief. Your doubts, Thomas, always most stubbornly assert themselves just as they are about to crumble. Thomas, I bid you be not faithless but believing — and I know you will believe, even with a whole heart.” 말씀을 마친 주(主)님은 도마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의 못 자국에 네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너, 도마야, 이제는 네가 나를 보았고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세상을 떠날 때 너희에게 임할 그 형체로 내가 살아났기 때문에, 내 손에서 네가 못 자국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네 형제들에게 이제는 무엇이라 말하려 하느냐? 네가 그토록 거부하면서도, 이미 네 마음으로 네가 믿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너는 진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도마야, 무너지는 순간에 너의 의심은 아주 완강히 버티려 하지만, 도마야, 너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나는 네가 전심으로 믿을 것을 알고 있다.”

191:5.5 (2043.3) When Thomas heard these words, he fell on his knees before the morontia Master and exclaimed, “I believe! My Lord and my Master!” Then said Jesus to Thomas: “You have believed, Thomas, because you have really seen and heard me. Blessed are those in the ages to come who will believe even though they have not seen with the eye of flesh nor heard with the mortal ear.”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부활체 주(主)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믿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主)시여!” 그러자 예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나를 실제로 보고 들었기 때문에 믿게 되었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의 귀로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191:5.6 (2043.4) And then, as the Master’s form moved over near the head of the table, he addressed them all, saying: “And now go all of you to Galilee, where I will presently appear to you.” After he said this,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그 후 주(主)님은 식탁 윗자리로 가셔서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모두 갈릴리로 가라, 내가 그곳에서 곧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 말씀 후에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지셨습니다.

191:5.7 (2044.1) The eleven apostles were now fully convinc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and very early the next morning, before the break of day, they started out for Galilee. 이제 열 한 사도들은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는 사실을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으며, 다음 날 이른 아침,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그들은 갈릴리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6. The Alexandrian Appearance 알렉산드리아에 출현

160619 부활13 –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2th) 요16:13-14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91:6.1 (2044.2) While the eleven apostles were on the way to Galilee, drawing near their journey’s end, on Tuesday evening, April 18, at about half past eight o’clock, Jesus appeared to Rodan and some eighty other believers, in Alexandria. This was the Master’s twelfth appearance in morontia form. Jesus appeared before these Greeks and Jews at the conclusion of the report of David’s messenger regarding the crucifixion. This messenger, being the fifth in the Jerusalem-Alexandria relay of runners, had arrived in Alexandria late that afternoon, and when he had delivered his message to Rodan, it was decided to call the believers together to receive this tragic word from the messenger himself. At about eight o’clock, the messenger, Nathan of Busiris, came before this group and told them in detail all that had been told him by the preceding runner. Nathan ended his touching recital with these words: “But David, who sends us this word, reports that the Master, in foretelling his death, declared that he would rise again.” Even as Nathan spoke, the morontia Master appeared there in full view of all. And when Nathan sat down, Jesus said: 갈릴리를 향하여 길을 떠난 열 한 명의 사도들이, 여행 목적지에 거의 도착되었을 무렵인, 4월 18일 화요일 저녁 오후 8시 30분 경, 예수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을 비롯하여 80 여명의 다른 신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주(主)께서 부활체 형태로 나타나신 12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연락원이 십자가형에 대하여 보고를 마칠 때에 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연락원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연계식으로 달리는 연락원들 중에서 다섯 번째 사람이었으며, 그 날 오후 늦게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고, 그가 소식을 로단에게 전해주었을 때, 그 연락원으로부터 이 비극적인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신자들을 모두 소집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었습니다. 8시쯤 되어서, 부시리스의 나단이라는 이 연락원은 무리들 앞으로 나와서, 자기 앞사람으로부터 들은 모든 이야기를 그들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단은 그의 감동적인 설명을 마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이 말을 전하게 한 다윗은 주(主)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였다는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확언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활체 주(主)님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나단이 자리에 앉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6.2 (2044.3) “Peace be upon you. That which my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to establish belongs not to a race, a nation, nor to a special group of teachers or preachers. This gospel of the kingdom belongs to both Jew and gentile, to rich and poor, to free and bond, to male and female, even to the little children. And you are all to proclaim this gospel of love and truth by the lives which you live in the flesh. You shall love one another with a new and startling affection, even as I have loved you. You will serve mankind with a new and amazing devotion, even as I have served you. And when men see you so love them, and when they behold how fervently you serve them, they will perceive that you have become faith-fellow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y will follow after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y see in your lives, to the finding of eternal salvation.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세우시려는 것은 한 민족이나 국가 또는 특정한 무리의 선생들이나 설교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자유로운 자나 속박 받는 자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육신으로 사는 그 삶들을 통하여 이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새롭고도 놀라운 애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는 새롭고도 놀라운 헌신으로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그리고 너희가 얼마나 열렬하게 그들을 섬기는지를 그들이 보게 될 때, 그들은 너희가 하늘나라 신앙의 친구들이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도 영원한 구원을 찾기 위하여, 너희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을 따라가고자 할 것이다.”

191:6.3 (2044.4)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is world, even so now send I you. You are all called to carry the good news to those who sit in darkness. This gospel of the kingdom belongs to all who believe it; it shall not be committed to the custody of mere priests. Soon will the Spirit of Truth come upon you, and he shall lead you into all truth. Go you, therefore,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s.” “내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너희 모두는 암흑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며, 단지 사제들의 역할에만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곧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며,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라, 보라 내가 시대들이 끝나는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191:6.4 (2044.5) When the Master had so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All that night these believers remained there together recounting their experiences as kingdom believers and listening to the many words of Rodan and his associates. And they all believ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Imagine the surprise of David’s herald of the resurrection, who arrived the second day after this, when they replied to his announcement, saying: “Yes, we know, for we have seen him. He appeared to us day before yesterday.” 주(主)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 신자들은 그 날 밤 내내 그곳에 함께 남아서,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들로서의 체험들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로단과 그의 동료들의 많은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에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다윗의 사자(使者)가 자신이 전해 준 소식에 대하여 그들이 “예, 우리는 그를 보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저께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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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6 Baptism and the Forty Days 세례와 40일

Paper 136

Baptism and the Forty Days 세례와 40일

1. Concepts of the Expected Messiah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들
2. The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3. The Forty Days 40일
Conference with Gabriel 가브리엘과 회담
Completion of universe sovereignty 우주 주권의 완성
4. Plans for Public Work 공(公)사역 계획
The Father’s way 아버지의 길
5. The First Great Decision 첫 번째 중대한 결정
Personalized Adjuster in command 고유성화 조율자 사령관
Insensitivity of Adjuster to time 시간에 대한 조율자의 불감(不感)성
6. The Second Decision 두 번째 결정
The path of normal earthly existence 지상 존재의 정상적 경로
7. The Third Decision 세 번째 결정
Obedience to natural law 자연법칙을 준수함
8. The Fourth Decision 네 번째 결정
Refusal to compromise with evil 악과 타협 거부
9. The Fifth Decision 다섯 번째 결정
Rejection of David’s throne 다윗의 왕좌 거절
10. The Sixth Decision 여섯 번째 결정
“I will be subject to the will of my Father.” “나는 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리라.”

170628 수요 예수90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I tell you the truth: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136:0.1 (1509.1) JESUS began his public work at the height of the popular interest in John’s preaching and at a time when the Jewish people of Palestine were eagerly looking for the appearance of the Messiah. There was a great contrast between John and Jesus. John was an eager and earnest worker, but Jesus was a calm and happy laborer; only a few times in his entire life was he ever in a hurry. Jesus was a comforting consolation to the world and somewhat of an example; John was hardly a comfort or an example. He preached the kingdom of heaven but hardly entered into the happiness thereof. Though Jesus spoke of John as the greatest of the prophets of the old order, he also said that the least of those who saw the great light of the new way and entered thereby into the kingdom of heaven was indeed greater than John. 요한의 설교가 인기의 절정(絶頂)에 이르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요한은 열렬하고 진지한 일군이었지만, 예수님은 침착하고 행복한 노동자였으며; 그의 온 일생 동안 단지 몇 번을 제외하고는 결코 서두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격려를 주는 위로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모범이었으나, 요한은 도저히 위로나 모범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전파하였지만 그로 인한 행복의 세계 안으로는 거의 들어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구(舊) 서열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호평하였지만, 그는 또한 새로운 길이 되는 위대한 빛을 보고 그것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간 자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참으로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6:0.2 (1509.2) When John preached the coming kingdom, the burden of his message was: Repent! flee from the wrath to come. When Jesus began to preach, there remained the exhortation to repentance, but such a message was always followed by the gospel, the good tidings of the joy and liberty of the new kingdom.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를 전파하였을 때, 그의 메시지의 요점은 “회개하라! 앞으로 올 진노(震怒)를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설교를 시작하였을 때, 회개하라는 권고는 같았지만, 그러한 메시지에는 언제는 복음, 즉 새로운 나라의 기쁨과 자유의 행복한 소식이 뒤따랐습니다.

1. Concepts of the Expected Messiah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170705 수요 예수91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136:1.1 (1509.3) The Jews entertained many ideas about the expected deliverer, and each of these different schools of Messianic teaching was able to point to statements in the Hebrew scriptures as proof of their contentions. In a general way, the Jews regarded their national history as beginning with Abraham and culminating in the Messiah and the new age of the kingdom of God. In earlier times they had envisaged this deliverer as “the servant of the Lord,” then as “the Son of Man,” while latterly some even went so far as to refer to the Messiah as the “Son of God.” But no matter whether he was called the “seed of Abraham” or “the son of David,” all were agreed that he was to be the Messiah, the “anointed one.” Thus did the concept evolve from the “servant of the Lord” to the “son of David,” “Son of Man,” and “Son of God.” 유대인들은 고대하던 구원자(해방자)에 관한 많은 관념들을 갖고 있었으며, 메시아를 가르치는 이들 여러 다른 학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히브리 경전의 문구들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메시아와 하나님의 나라인 새 시대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이 구원자(해방자)를 “주님의 종”으로 상상하였고, 그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로, 또한 더 후대에 더러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브라함의 씨”나 “다윗의 아들”로 부르든, 상관하지 않고, 그가 메시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리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개념은 “주님의 종”으로부터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136:1.2 (1509.4) In the days of John and Jesus the more learned Jews had developed an idea of the coming Messiah as the perfected and representative Israelite, combining in himself as the “servant of the Lord” the threefold office of prophet, priest, and king. 요한과 예수님 당시에 활동하던 좀 더 유식한 유대인들은 곧 오실 메시아를 완전하게 된 대표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관념으로 개발하여 그 안에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삼중적 직분을 “주님의 종”으로 통합시켰습니다.

136:1.3 (1509.5) The Jews devoutly believed that, as Moses had delivered their fathers from Egyptian bondage by miraculous wonders, so would the coming Messiah deliver the Jewish people from Roman domination by even greater miracles of power and marvels of racial triumph. The rabbis had gathered together almost five hundred passages from the Scriptures which, notwithstanding their apparent contradictions, they averred were prophetic of the coming Messiah. And amidst all these details of time, technique, and function, they almost completely lost sight of the personality of the promised Messiah. They were looking for a restoration of Jewish national glory — Israel’s temporal exaltation — rather than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 It therefore becomes evident that Jesus of Nazareth could never satisfy this materialistic Messianic concept of the Jewish mind. Many of their reputed Messianic predictions, had they but viewed these prophetic utterances in a different light, would have very naturally prepared their minds for a recognition of Jesus as the terminator of one age and the inaugurator of a new and better dispensation of mercy and salvation for all nations.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기 선조들을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놀라운 기적으로 구했던 것처럼, 오시는 메시아는 더욱 더 큰 기적의 권능과 인종적 승리의 경이로움을 가지고 유대 백성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열렬하게 믿었습니다. 랍비들은 성서에서 거의 500 구절을 수집하였으며, 명백한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들이 오시는 메시아를 예언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기법, 기능의 세부사항에 집착하는 가운데,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고유성(인격)에 대한 시각은 거의 완벽하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보다는 유대의 민족적 영광─이스라엘의 세속적인 지위 향상─이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메시아의 개념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음이 명백해집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유명한 메시아 예언들 대부분 즉, 이 예언적 언급들을 다른 빛으로 보았었더라면, 예수님을,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자로서, 모든 민족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새롭고 더 좋은 섭리시대를 시작하는 분으로, 인식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매우 자연스럽게 준비시켰을 것입니다.

136:1.4 (1510.1) The Jews had been brought up to believe in the doctrine of the Shekinah. But this reputed symbol of the Divine Presence was not to be seen in the temple. They believed that the coming of the Messiah would effect its restoration. They held confusing ideas about racial sin and the supposed evil nature of man. Some taught that Adam’s sin had cursed the human race, and that the Messiah would remove this curse and restore man to divine favor. Others taught that God, in creating man, had put into his being both good and evil natures; that when he observed the outworking of this arrangement, he was greatly disappointed, and that “He repented that he had thus made man.” And those who taught this believed that the Messiah was to come in order to redeem man from this inherent evil nature. 유대인들은 후광(後光)의 교리를 믿도록 양육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현존의 이 유명한 상징은 성전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시는 메시아가 그것의 회복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종족의 죄와 가정(假定)된, 사람의 악한 본성에 대하여 혼동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의 죄로 인류가 저주를 받게 되었고, 메시아가 이 저주를 없애고 사람에게 신적 은총이 회복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면서 그 존재 안에 선과 악의 본성들을 모두 넣었다고 가르쳤으며; 그가 이러한 일의 결과를 보고 매우 실망하셨으며, “그렇게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가르쳤던 자들은, 이러한 본래부터 악한 본성에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36:1.5 (1510.2) The majority of the Jews believed that they continued to languish under Roman rule because of their national sins and because of the halfheartedness of the gentile proselytes. The Jewish nation had not wholeheartedly repented; therefore did the Messiah delay his coming. There was much talk about repentance; wherefore the mighty and immediate appeal of John’s preaching, “Repent and be baptized,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the kingdom of heaven could mean only one thing to any devout Jew: The coming of the Messiah.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죄 때문에,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의 반신반의하는 건성 때문에, 자신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계속 쇠약해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메시아가 오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회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그런 이유로 해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설교는 그들에게 강력하면서도 즉각적인 호소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떤 열렬한 유대인에게라도 하늘나라라는 말은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였습니다.

136:1.6 (1510.3) There was one feature of the bestowal of Michael which was utterly foreign to the Jewish conception of the Messiah, and that was the union of the two natures,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Jews had variously conceived of the Messiah as perfected human, superhuman, and even as divine, but they never entertained the concept of the union of the human and the divine. And this was the great stumbling block of Jesus’ early disciples. They grasped the human concept of the Messiah as the son of David, as presented by the earlier prophets; as the Son of Man, the superhuman idea of Daniel and some of the later prophets; and even as the Son of God, as depicted by the author of the Book of Enoch and by certain of his contemporaries; but never had they for a single moment entertained the true concept of the union in one earth personality of the two natures,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incarnation of the Creator in the form of the creature had not been revealed beforehand. It was revealed only in Jesus; the world knew nothing of such things until the Creator Son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the mortals of the realm. 미가엘 증여에 있어서, 유대 메시아의 개념과 매우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본성의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완전한 인간, 초인간, 그리고 신성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결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결코 생각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제시하였던 대로, 메시아에 대한 인간 개념을 다윗의 아들로서 파악했습니다. 다니엘과 후기의 여러 선지자들은 초인간적 관념인 사람의 아들로서 파악했고; 에녹서의 저자나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일부에 의해 묘사되었던 대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가지의 본성이 이 세상의 한 고유성으로 연합한다는 참된 개념은 한 순간도 고려해본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창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주가 육신이 되심은 과거에는 한 번도 계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 계시되었으며; 창조주 아들이 육신으로 와서 그 땅의 필사자들 가운데에 거하시기 전까지, 세상은 그러한 일들을 알 수 없었습니다.

2. The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170712 수요 예수92 눅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1 When all the people were being baptized, Jesus was baptized too. And as he was praying, heaven was opened 22 and the Holy Spirit descended on him in bodily form like a dove.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whom I love; with you I am well pleased.”

136:2.1 (1510.4) Jesus was baptized at the very height of John’s preaching when Palestine was aflame with the expectancy of his message —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 when all Jewry was engaged in serious and solemn self-examination. The Jewish sense of racial solidarity was very profound. The Jews not only believed that the sins of the father might afflict his children, but they firmly believed that the sin of one individual might curse the nation. Accordingly, not all who submitted to John’s baptism regarded themselves as being guilty of the specific sins which John denounced. Many devout souls were baptized by John for the good of Israel. They feared lest some sin of ignorance on their part might delay the coming of the Messiah. They felt themselves to belong to a guilty and sin-cursed nation, and they presented themselves for baptism that they might by so doing manifest fruits of race penitence. It is therefore evident that Jesus in no sense received John’s baptism as a rite of repentance or for the remission of sins. In accepting baptism at the hands of John, Jesus was only following the example of many pious Israelites. 예수님은, 요한의 설교가 절정에 달하여 팔레스타인이 그의 메시지─“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불이 붙고, 온 유대가 심각하고 엄숙하게 자기-반성을 할 당시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인종적 연대감은 굉장히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죄가 그의 자녀들을 괴롭힌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개별존재의 죄가 민족을 저주할 수도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아갔던 사람들 모두가, 요한이 비난하였던 특정한 죄를 자신들이 지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많은 사람들(혼들)은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하여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지연될까봐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죄가 있고 죄로 저주받은 민족에 속해 있다고 느꼈으므로, 스스로 세례를 받으러 나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족적 참회의 결실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의 의식이나 죄 사함을 위하여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요한의 손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께서 여러 독실한 유대인들의 본보기를 따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136:2.2 (1511.1) When Jesus of Nazareth went down into the Jordan to be baptized, he was a mortal of the realm who had attained the pinnacle of human evolutionary ascension in all matters related to the conquest of mind and to self-identification with the spirit. He stood in the Jordan that day a perfected mortal of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Perfect synchrony and full communication had become established between the mortal mind of Jesus and the indwelling spirit Adjuster, the divine gift of his Father in Paradise. And just such an Adjuster indwells all normal beings living on Urantia since the ascension of Michael to the headship of his universe, except that Jesus’ Adjuster had been previously prepared for this special mission by similarly indwelling another superhuman incarnated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Machiventa Melchizedek. 나사렛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마음의 정복에 관계되고 영과 함께하는 자아(自我)-정체화 달성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진화적 상승의 정점에 도달한, 그 영역의 필사자이셨습니다. 그는 그 날,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세상들 속에서 하나의 완전하게 된 필사자로 요단강에 서셨습니다. 완전한 동시성과 충만한 소통이, 예수님의 필사자 마음과 내주(內住)하는 영 조절자, 즉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신적 선물 사이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필사자 육신, 즉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육신화하여 또다른 초인간 안에 내주하심처럼 비슷하게, 예수님의 조절자가 이러한 특별 임무를 위하여 앞서서 준비되신 것을 제외하고는, 미가엘이 자기 우주의 우두머리 신분으로 상승하신 이래로, 바로 그런 조절자가 지구(유란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정상 존재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136:2.3 (1511.2) Ordinarily, when a mortal of the realm attains such high levels of personality perfection, there occur those preliminary phenomena of spiritual elevation which terminate in eventual fusion of the matured soul of the mortal with its associated divine Adjuster. And such a change was apparently due to take place in the personality experience of Jesus of Nazareth on that very day when he went down into the Jordan with his two brothers to be baptized by John. This ceremony was the final act of his purely human life on Urantia, and many superhuman observers expected to witness the fusion of the Adjuster with its indwelt mind, but they were all destined to suffer disappointment. Something new and even greater occurred. As John laid his hands upon Jesus to baptize him, the indwelling Adjuster took final leave of the perfected human soul of Joshua ben Joseph. And in a few moments this divine entity returned from Divinington as a Personalized Adjuster and chief of his kind throughout the entire local universe of Nebadon. Thus did Jesus observe his own former divine spirit descending on its return to him in personalized form. And he heard this same spirit of Paradise origin now speak,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And John, with Jesus’ two brothers, also heard these words. John’s disciples, standing by the water’s edge, did not hear these words, neither did they see the apparition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Only the eyes of Jesus beheld the Personalized Adjuster. 일반적으로, 그 영역에 있는 한 필사자가 그렇게 높은 고유성의 완전함의 차원에 도달할 때, 거기에는 필사자의 성숙한 혼이 그와 관계된 신적 조절자와의 결국 발생하는 융합으로 종결되는, 영적 고양(高揚)의 예비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예수께서 두 동생들과 함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내려가신 그 날에 나사렛 예수의 고유성 체험 속에서 일어나도록 명백하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의식(儀式)은 그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순수한 인간 일생의 마지막 행동이었으며, 많은 초인간적 관찰자들은 조절자가 자신이 내주하고 있던 마음과 융합하는 것을 목격하리라고 기대했었지만, 그들은 모두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롭고 더 큰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한이 그에게 세례를 주기 위하여 예수님 위에 손을 얹자, 내주하던 조절자가 요셉의 아들 여호수아의 완전해진 인간 혼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신적 실존개체는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되어 신별로부터 돌아왔는데, 그는 네바돈에 있는 전체 지역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 자신의 이전의 신적 영이 고유성이 구현된 형태로 자기에게로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 기원된 바로 그 영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두 동생들과 요한도 역시 이 말을 들었습니다. 물가에 서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말들을 듣지 못하였고,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출현도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눈에만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보였습니다.

136:2.4 (1511.3) When the returned and now exalted Personalized Adjuster had thus spoken, all was silence. And while the four of them tarried in the water, Jesus, looking up to the near-by Adjuster, prayed: “My Father who reigns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even as it is in heaven.” When he had prayed, the “heavens were opened,” and the Son of Man saw the vision, presented by the now Personalized Adjuster, of himself as a Son of God as he was before he came to earth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as he would be when the incarnated life should be finished. This heavenly vision was seen only by Jesus. 이제는 고귀한 신분이 된 고유성 구현된 조절자가 다시 돌아와 그렇게 말할 때,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 네 명이 물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예수님은 가까이에 있는 조절자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을 다스리시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환영(幻影)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에 의해 제시되어진 것이었으며, 그가 육신을 입고 필사자로 내려오기 전의 자신의 모습과, 그가 육신화된 일생을 끝냈을 후에 될 그의 모습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환영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환영은 오직 예수께만 보였습니다.

136:2.5 (1512.1) It was the voic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that John and Jesus heard, speaking in behalf of the Universal Father, for the Adjuster is of, and as, the Paradise Father. Throughout the remainder of Jesus’ earth life this Personalized Adjuster was associated with him in all his labors; Jesus was in constant communion with this exalted Adjuster. 요한과 예수께서 들었던 것은, 우주 아버지를 대신해서 말했던,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목소리였는데, 왜냐하면 조절자가 천국 아버지의 일부이고, 아버지로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땅에서의 나머지 일생을 통하여, 이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그의 모든 일에 있어서 그와 함께 관련되셨으며, 예수님은 고귀한 신분이 된 이 조절자와 항상 교제하였습니다.

136:2.6 (1512.2) When Jesus was baptized, he repented of no misdeeds; he made no confession of sin. His was the baptism of consecration to the performance of the will of the heavenly Father. At his baptism he heard the unmistakable call of his Father, the final summons to be about his Father’s business, and he went away into private seclusion for forty days to think over these manifold problems. In thus retiring for a season from active personality contact with his earthly associates, Jesus, as he was and on Urantia, was following the very procedure that obtains on the morontia worlds whenever an ascending mortal fuses with the inner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을 때, 그는 아무런 잘못도 회개하지 않았으며; 아무 죄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헌신하는 세례였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그는 아버지의 일을 시작하라는 마지막 호출인 아버지의 명백한 부르심을 들었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을 심사숙고할 수 있도록 혼자 있기 위하여 40일 동안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의 동료들과 활발한 인격(고유성) 접촉을 그렇게 얼마동안 피하심으로써, 자신이 계셨던 그대로, 부활체(모론시아) 세상들에서 상승하는 필사자가 우주 아버지의 내적 현존과 융합할 때마다 거치는 바로 그 과정을 지구(유란시아)에서 밟으셨습니다.

136:2.7 (1512.3) This day of baptism ended the purely human life of Jesus. The divine Son has found his Father, the Universal Father has found his incarnated Son, and they speak the one to the other. 세례 받은 이 날에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일생을 끝마쳤습니다. 신적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발견하였고, 우주의 아버지는 자신의 육신화한 아들을 발견하셨으며,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136:2.8 (1512.4) (Jesus was almost thirty-one and one-half years old when he was baptized. While Luke says that Jesus was baptized in the fifteen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Caesar, which would be A.D. 29 since Augustus died in A.D. 14, it should be recalled that Tiberius was coemperor with Augustus for two and one-half years before the death of Augustus, having had coins struck in his honor in October, A.D. 11. The fifteenth year of his actual rule was, therefore, this very year of A.D. 26, that of Jesus’ baptism. And this was also the year that Pontius Pilate began his rule as governor of Judea.)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당시(AD 26, 1.14)에, 거의 31살 반이었습니다. 누가는 티베리우스 시저가 통치하던 15년째 해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죽었으므로, 그것은 서기 29년이 되어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에 그와 함께 2년 반 동안 함께 공동 황제로 있었고, 서기 11년 10월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였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의 실제로 통치하던 15년째 되는 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던 바로 서기 26년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해에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 The Forty Days 40일

170719 수요 예수93 막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2 At once the Spirit sent him out into the desert, 13 and he was in the desert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angels attended him.

136:3.1 (1512.5) Jesus had endured the great temptation of his mortal bestowal before his baptism when he had been wet with the dews of Mount Hermon for six weeks. There on Mount Hermon, as an unaided mortal of the realm, he had met and defeated the Urantia pretender, Caligastia, the prince of this world. That eventful day, on the universe records, Jesus of Nazareth had become the Planetary Prince of Urantia. And this Prince of Urantia, so soon to be proclaimed supreme Sovereign of Nebadon, now went into forty days of retirement to formulate the plans and determine upon the technique of proclaiming the new kingdom of God in the hearts of men.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헤르몬 산 위에서 이슬을 맞으며 6주 동안을 자신의 필사자 증여에서의 큰 유혹을 견디어 낸 적이 있었습니다. 헤르몬 산 그 위에서, 그는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어떤 도움도 없이, 지구(유란시아)의 왕위를 요구하는 세상의 영주인 칼리가스티아를 만나 그를 격퇴시켰습니다. 우주의 기록에 의하면, 그 파란만장한 날에 나사렛 예수께서는 지구(유란시아)의 행성영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곧 네바돈의 최극 주권자로 선포되어질, 지구(유란시아)의 이 영주는, 이제 사람들의 심정에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계획을 구상하고 그 기법을 결정짓기 위하여 40일 간의 은둔에 들어갔습니다.

136:3.2 (1512.6) After his baptism he entered upon the forty days of adjusting himself to the changed relationships of the world and the universe occasioned by the personalization of his Adjuster. During this isolation in the Perean hills he determined upon the policy to be pursued and the methods to be employed in the new and changed phase of earth life which he was about to inaugurate. 세례를 받은 후에, 그는 자신의 조절자가 고유성이 구현된 계기로,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해 달라진 관계에 자신을 조절하기 위한 40일을 시작했습니다. 페레아 언덕에서 혼자 계셨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새롭게 변경된 지상 일생의 국면에서, 자신이 곧 시작하여 추구해야할 정책과 사용되어질 방법들에 대하여 결정하셨습니다.

136:3.3 (1512.7) Jesus did not go into retirement for the purpose of fasting and for the affliction of his soul. He was not an ascetic, and he came forever to destroy all such notions regarding the approach to God. His reasons for seeking this retirement were entirely different from those which had actuated Moses and Elijah, and even John the Baptist. Jesus was then wholly self-conscious concerning his relation to the universe of his making and also to the universe of universes, supervised by the Paradise Father, his Father in heaven. He now fully recalled the bestowal charge and its instructions administered by his elder brother, Immanuel, ere he entered upon his Urantia incarnation. He now clearly and fully comprehended all these far-flung relationships, and he desired to be away for a season of quiet meditation so that he could think out the plans and decide upon the procedures for the prosecution of his public labors in behalf of this world and for all other worlds in his local universe. 예수님은 금식(禁食)을 목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혼에 고통을 주려고 은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행자(苦行者)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과정에서 그런 모든 개념들을 언제까지나 폐지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이러한 은둔 기간을 갖고자 하였던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심지어 세례요한이 가졌던 동기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이신 천국 아버지께서 감독하시는, 자신이 만든 우주와, 또한 우주들의 우주와의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그 때 전적으로 자의식(自意識)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지구(유란시아)에 성육신하여 들어오시기 전에 자기 맏형, 임마누엘에 의해 관리되었던 증여 임무와 그 지시들을 충분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는 이제 이 모든 광대하게 퍼져 있는 관계들을 명료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셨으며, 이 세상과 자신의 지역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세상들을 위해, 그의 대중을 위한 수고를 실행하는 계획들을 생각하고 그 과정을 결정하기 위하여 한 동안 조용히 명상하려고 떠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헤르몬 산의 보낸 6주(31세 AD25)의 마지막 날(반란 종결과 인간으로서 증여 완성으로 우주 주권 획득)과 세례일(주권 획득 공식선포).
136:3.4 (1513.1) While wandering about in the hills, seeking a suitable shelter, Jesus encountered his universe chief executive, Gabriel, the Bright and Morning Star of Nebadon. Gabriel now re-established personal communication with the Creator Son of the universe; they met directly for the first time since Michael took leave of his associates on Salvington when he went to Edentia preparatory to entering upon the Urantia bestowal. Gabriel, by direction of Immanuel and on authority of the Uversa Ancients of Days, now laid before Jesus information indicating that his bestowal experience on Urantia was practically finished so far as concerned the earning of the perfect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and the termination of the Lucifer rebellion. The former was achieved on the day of his baptism when the personalization of his Adjuster demonstrated the perfection and completion of his bestowal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the latter was a fact of history on that day when he came down from Mount Hermon to join the waiting lad, Tiglath. Jesus was now informed, upon the highest authority of the local universe and the superuniverse, that his bestowal work was finished in so far as it affected his personal status in relation to sovereignty and rebellion. He had already had this assurance direct from Paradise in the baptismal vision and in the phenomenon of the personalization of his indwelling Thought Adjuster. 적당한 거처를 찾아 언덕을 방황하다가, 예수님은 자기 우주의 우두머리 집행자인 네바돈의 빛나는 새벽별, 즉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가브리엘은 이제 우주의 창조주 아들과 개인적 교통을 재수립하였으며; 미가엘이 지구(유란시아) 증여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에덴시아로 갔을 때 구원자별에서 그의 동료들과 작별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은 직접 대면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임마누엘의 지시와 유버사의 옛적으로 늘 계신 이의 권위에 근거하여, 이제 그가 우주의 완전해진 주권 획득과 루시퍼 반란의 종결에 관하여, 그의 지구(유란시아) 증여 체험이 실질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예수님 앞에 제시하였습니다. 전자(前者)는, 그의 조절자의 고유성구현이 육신으로의 그의 증여의 완전과 완성을 실증하였던 때인 그의 세례(洗禮) 날에 성취되었으며, 후자(後者)는, 그가 기다리고 있던 티글라스라는 소년을 만나러 헤르몬 산에서 내려온 그날에 성취되었던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지역우주와 초우주의 최고 권위에 근거하여, 주권과 반역에 관계되는 그의 개인적 지위에 영향을 주는 점에 있어서, 이제 그의 증여 임무가 끝이 났음을, 이제 예수님은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 받던 날에 있었던 환영(幻影)과 자신 안에 거했던 생각 조절자의 고유성 구현의 현상을 통하여, 천국으로부터 직접적인 확인을 이미 받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136:3.5 (1513.2) While he tarried on the mountain, talking with Gabriel, the Constellation Father of Edentia appeared to Jesus and Gabriel in person, saying: “The records are completed. The sovereignty of Michael number 611,121 over his universe of Nebadon rests in completion at the right hand of the Universal Father. I bring to you the bestowal release of Immanuel, your sponsor-brother for the Urantia incarnation. You are at liberty now or at any subsequent time, in the manner of your own choosing, to terminate your incarnation bestowal, ascend to the right hand of your Father, receive your sovereignty, and assume your well-earned unconditional rulership of all Nebadon. I also testify to the completion of the records of the superuniverse, by authorization of the Ancients of Days, having to do with the termination of all sin-rebellion in your universe and endowing you with full and unlimited authority to deal with any and all such possible upheavals in the future. Technically, your work on Urantia and in the flesh of the mortal creature is finished. Your course from now on is a matter of your own choosing.” 그가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시며 산에 머무는 동안,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가 예수님과 가브리엘 앞에 직접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록이 완결되었습니다. 미가엘 611,121번이 네바돈 자신의 우주에 대한 주권은 우주 아버지의 오른 손에 완성되어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후원자-형님인 임마누엘이 보낸, 지구(유란시아) 육신화 증여에 대한 해제(解除)의 소식을, 당신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은 이제 또는 이후 어느 때라도, 당신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육신화 증여를 끝내고, 당신의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가, 당신의 주권을 되돌려 받고, 당신이 마땅히 얻은 모든 네바돈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자유롭게 맡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또한 옛적으로 계신이의 권위로, 당신의 우주에서 모든 죄-반란을 종결시켰고, 미래에 있어서의 그러한 잠재적인 격동들의 어떤 것이나 혹은 모든 것을 다루기 위한, 충만하고도 무제한적 권한이 당신에게 부여된, 초우주의 기록이 완성된 것을 증언합니다. 실제적으로는 필사자의 몸을 입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당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행로는 당신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136:3.6 (1513.3) When the Most High Father of Edentia had taken leave, Jesus held long converse with Gabriel regarding the welfare of the universe and, sending greetings to Immanuel, proffered his assurance that, in the work which he was about to undertake on Urantia, he would be ever mindful of the counsel he had received in connection with the prebestowal charge administered on Salvington. 에덴시아의 지고자 아버지가 떠났을 때, 예수님은 가브리엘과 우주의 복지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나누셨고, 임마누엘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지구(유란시아)에서 그가 시작하려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구원자별에서 선서하였던, 증여 이전의 임무와 관련하여, 그가 이미 받았던 그 조언을 항상 염두에 두겠다고 확언을 전하셨습니다.

136:3.7 (1514.1) Throughout all of these forty days of isolatio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were engaged in searching for Jesus. Many times they were not far from his abiding place, but never did they find him. 혼자 계시던 이 40일 내내,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여러 번 왔었지만, 그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4. Plans for Public Work 공(公)사역 계획

170726 수요 예수94-95 눅4:1-2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desert, 2 where for forty days he was temp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during those days, and at the end of them he was hungry.

136:4.1 (1514.2) Day by day, up in the hills, Jesus formulated the plans for the remainder of his Urantia bestowal. He first decided not to teach contemporaneously with John. He planned to remain in comparative retirement until the work of John achieved its purpose, or until John was suddenly stopped by imprisonment. Jesus well knew that John’s fearless and tactless preaching would presently arouse the fears and enmity of the civil rulers. In view of John’s precarious situation, Jesus began definitely to plan his program of public labors in behalf of his people and the world, in behalf of every inhabited world throughout his vast universe. Michael’s mortal bestowal was on Urantia but for all worlds of Nebadon. 날마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지구(유란시아) 증여의 나머지 기간을 위한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시작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요한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가 갑자기 구속되는 불상사로 중단하게 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물러서 있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그 두려움 없는 막무가내의 설교는 곧 시민 통치자들의 두려움과 반감을 유발시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불확실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민족과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광대한 우주를 망라하여 거주민이 사는 모든 세상들을 위하여, 공적 수고의 과정을 분명하게 계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가엘의 필사자 증여는 지구(유란시아)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증여는 네바돈의 모든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36:4.2 (1514.3) The first thing Jesus did, after thinking through the general plan of co-ordinating his program with John’s movement, was to review in his mind the instructions of Immanuel. Carefully he thought over the advice given him concerning his methods of labor, and that he was to leave no permanent writing on the planet. Never again did Jesus write on anything except sand. On his next visit to Nazareth, much to the sorrow of his brother Joseph, Jesus destroyed all of his writing that was preserved on the boards about the carpenter shop, and which hung upon the walls of the old home. And Jesus pondered well over Immanuel’s advice pertaining to his economic, social, and political attitude toward the world as he should find it. 예수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요한의 움직임에 맞추어 자신의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대체적인 계획을 고려한 후에, 임마누엘의 지시들을 마음속에서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 이행의 방법들에 관한 것들과 그 행성에 그의 어떤 영구한 필체도 남기지 말라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래 위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은 결코 다시는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목판에 써서 목공소 주위에 걸려 있는 글씨들과 그의 고향집 벽에 걸려있던 자신의 글씨들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렸는데, 그 일은 그의 동생 요셉을 매우 서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당면하여야 할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태도에 관한 임마누엘의 조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136:4.3 (1514.4) Jesus did not fast during this forty days’ isolation. The longest period he went without food was his first two days in the hills when he was so engrossed with his thinking that he forgot all about eating. But on the third day he went in search of food. Neither was he tempted during this time by any evil spirits or rebel personalities of station on this world or from any other world. 예수님은 이 40일(신으로서 증여 시작)의 고립 기간 동안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낸 가장 긴 기간은, 언덕에서 그가 너무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먹는 것조차 잊었던, 첫 2일 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에는 음식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이 세상 혹은 어떤 다른 세상의 반역적인 어떤 악의 영들이나 혹은 반역적인 고유성들에 의해 유혹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136:4.4 (1514.5) These forty days were the occasion of the final conference between the human and the divine minds, or rather the first real functioning of these two minds as now made one. The results of this momentous season of meditation demonstrated conclusively that the divine mind has triumphantly and spiritually dominated the human intellect. The mind of man has become the mind of God from this time on, and though the selfhood of the mind of man is ever present, always does this spiritualized human mind say,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이 40일 기간은, 인간적이고 신성한 마음들 사이에 최종적인 협의가 이루어진 경우였으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마음들이 이제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최초의 실제 활동이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명상 기간의 결과들은 신적 마음이 인간의 지성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해 왔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이 되었으며, 비록 사람 마음의 자아신분이 언제나 존재해 있었지만, 영성화된 이 사람의 마음은 항상,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136:4.5 (1514.6) The transactions of this eventful time were not the fantastic visions of a starved and weakened mind, neither were they the confused and puerile symbolisms which afterward gained record as the “temptations of Jesus in the wilderness.” Rather was this a season for thinking over the whole eventful and varied career of the Urantia bestowal and for the careful laying of those plans for further ministry which would best serve this world while also contributing something to the betterment of all other rebellion-isolated spheres. Jesus thought over the whole span of human life on Urantia, from the days of Andon and Fonta, down through Adam’s default, and on to the ministry of the Melchizedek of Salem. 이러한 사건이 많은 시기의 활동들은 굶주리고 허약해진 마음으로 공상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광야에서의 예수의 시험”으로 나중에 붙여진 기록처럼 혼란되고 미숙한 상징주의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전체적으로 파란이 많고 다양한 지구(유란시아) 증여의 생애를 숙고해 보고, 한편으로는 반역으로 고립된 다른 모든 구체들의 개선에 무언가 기여하면서 이 세상을 최선으로 섬기는 봉사가 되도록 추후의 사역에 대한 계획들을 신중하게 수립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돈과 폰타의 시대로부터 아담의 불이행을 거쳐 살렘의 멜기세덱의 사역에 이르기까지 지구(유란시아)의 인간 일생의 전체 여정을 두루 살펴보셨습니다.

136:4.6 (1514.7) Gabriel had reminded Jesus that there were two ways in which he might manifest himself to the world in case he should choose to tarry on Urantia for a time. And it was made clear to Jesus that his choice in this matter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either his universe sovereignty or the termination of the Lucifer rebellion. These two ways of world ministry were: 가브리엘은 그가 지구(유란시아)에 한동안 더 머물기를 선택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예수님께 상기시켰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선택은 그의 우주 주권이나 혹은 루시퍼 반역의 종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 분명하게 알렸습니다. 이 세상 사역에서의 두 가지 방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6:4.7 (1515.1) 1. His own way — the way that might seem most pleasant and profitable from the standpoint of the immediate needs of this world and the present edification of his own universe. 그 자신의 길(방법)─이 세상의 즉각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입장과 자신의 우주에서의 당면한 계발(啓發)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적절히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

136:4.8 (1515.2) 2. The Father’s way — the exemplification of a farseeing ideal of creature life visualized by the high personalities of the Paradis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e of universes.아버지의 길(방법)─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천국 행정을 맡은 높은 고유성들에 의해 구상되어진 것으로, 창조물 일생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는 이상(理想)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136:4.9 (1515.3) It was thus made clear to Jesus that there were two ways in which he could orde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Each of these ways had something to be said in its favor as it might be regarded in the light of the immediate situation. The Son of Man clearly saw that his choice between these two modes of conduct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his reception of universe sovereignty; that was a matter already settled and sealed on the record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only awaited his demand in person. But it was indicated to Jesus that it would afford his Paradise brother, Immanuel, great satisfaction if he, Jesus, should see fit to finish up his earth career of incarnation as he had so nobly begun it, always subject to the Father’s will. On the third day of this isolation Jesus promised himself he would go back to the world to finish his earth career, and that in a situation involving any two ways he would always choose the Father’s will. And he lived out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always true to that resolve. Even to the bitter end he invariably subordinated his sovereign will to that of his heavenly Father. 그래서 예수님께는 지상에서의 자기 여생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이 뚜렷해졌습니다.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들 각각의 방법은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 두 가지 행동 방법들 중에서 자신이 취한 선택은 자신의 우주 주권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셨으며; 그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고 우주들의 우주에서 기록으로 날인(捺印)되어서 단지 그가 직접 요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처럼, 육신화하는 그의 지상 생애도 그에 맞춰 고귀하게 완결되도록 한다면, 그의 천국 형제인 임마누엘에게 큰 만족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이 고립 기간의 3일째 되는 날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상 생애를 마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돌아갈 경우에 포함되는 두 가지 길 중에서, 항상 아버지의 뜻을 선택할 것을, 자신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일생 동안 항상 이 결심에 충실하게 사셨습니다. 심지어 쓰라린 마지막까지도 그는 변함없이 그의 주권적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 아래로 종속시켰습니다.

136:4.10 (1515.4) The forty days in the mountain wilderness were not a period of great temptation but rather the period of the Master’s great decisions. During these days of lone communion with himself and his Father’s immediate presence — the Personalized Adjuster (he no longer had a personal seraphic guardian) — he arrived, one by one, at the great decisions which were to control his policies and conduct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career. Subsequently the tradition of a great temptation became attached to this period of isolation through confusion with the fragmentary narratives of the Mount Hermon struggles, and further because it was the custom to have all great prophets and human leaders begin their public careers by undergoing these supposed seasons of fasting and prayer. It had always been Jesus’ practice, when facing any new or serious decisions, to withdraw for communion with his own spirit that he might seek to know the will of God. 험악한 산 속에서의 40일은, 큰 시험을 받은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主)님께서 위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시기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직접적 현존 –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세라핌천사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와의 홀로 친교를 나누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나머지 지상 생애를 위한 정책과 행위들을 통제하게 될 큰 결정들에 하나씩 도달하였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분투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뒤섞였고, 더 나아가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들이 이러한 금식과 기도의 기간을 가지고 그들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관습들 때문에,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이 나중에 이 고립의 기간에 덧붙여졌습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자신의 영과의 교제를 위하여 은둔하는 것은, 예수께서 항상 해오던 실천적 습관이었습니다.

136:4.11 (1515.5) In all this planning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Jesus was always torn in his human heart by two opposing courses of conduct: 나머지 지상 일생을 위한 모든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행동 과정들로 인해 항상 심정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136:4.12 (1515.6) 1. He entertained a strong desire to win his people — and the whole world — to believe in him and to accept his new spiritual kingdom. And he well knew their ideas concerning the coming Messiah. 그는 자신을 믿고 그의 새로운 영적 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사람들 –과 온 세상 –을 설득하고 싶은 강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36:4.13 (1515.7) 2. To live and work as he knew his Father would approve, to conduct his work in behalf of other worlds in need, and to continu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to reveal the Father and show forth his divine character of love. 그의 아버지가 승인하는 삶을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살며 일을 하는 것, 곤경에 처한 다른 세상들을 위하여 그의 일을 수행하는 것과 그 나라의 설립에 있어서, 계속 아버지를 계시하며 그분의 신적 성품인 사랑을 계속 보여주는 것.

136:4.14 (1515.8) Throughout these eventful days Jesus lived in an ancient rock cavern, a shelter in the side of the hills near a village sometime called Beit Adis. He drank from the small spring which came from the side of the hill near this rock shelter. 이러한 중대한 시간들 내내, 예수님은 언젠가 베이트 아디스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가까운 언덕 옆에 위치한 고대의 은신처인 바위 동굴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이 바위 피난처 가까이에 있는 언덕 옆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샘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5. The First Great Decision 첫 번째 중대한 결정

170816 수요 예수96 마26:53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Do you think I cannot call on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136:5.1 (1516.1) On the third day after beginning this conference with himself and his Personalized Adjuster, Jesus was presented with the vision of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of Nebadon sent by their commanders to wait upon the will of their beloved Sovereign. This mighty host embraced twelve legions of seraphim and proportionate numbers of every order of universe intelligence. And the first great decision of Jesus’ isolation had to do with whether or not he would make use of these mighty personalities in connection with the ensuing program of his public work on Urantia. 자기 자신과 그의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와의 협의가 시작된 지 3일째 되는 날, 사랑하는 주권자의 뜻을 섬기라고 그들의 사령관이 보낸 네바돈 천상의 무리가 집합되어있는 환영(幻影)이 예수님에게 보였습니다. 이 강력한 무리는 12 군단의 세라핌 천사들과, 우주의 각 계층들로부터 온 균등한 숫자의 지능존재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립기간 중에 내리셨던 첫 번째 중대한 결정은, 그가 자신의 지구(유란시아)에서의 공(公)적 사역에 뒤따르는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이들 강력한 고유성들을 이용할 것인지 아닌지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36:5.2 (1516.2) Jesus decided that he would not utilize a single personality of this vast assemblage unless it should become evident that this was his Father’s will. Notwithstanding this general decision, this vast host remained with him throughout the balance of his earth life, always in readiness to obey the least expression of their Sovereign’s will. Although Jesus did not constantly behold these attendant personalities with his human eyes, his associated Personalized Adjuster did constantly behold, and could communicate with, all of them.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아버지의 뜻임이 분명해지지 않는 한, 이 광대한 집단의 한 고유성도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군단은 그들의 주권자의 뜻이 한 마디라도 표현된다면 항상 복종할 준비를 갖추고서, 그의 지상 일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내내 그와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 눈으로 이렇게 모여 있는 고유성들을 항상 볼 수는 없었지만,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그들 전부를 항상 볼 수 있었고 그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136:5.3 (1516.3) Before coming down from the forty days’ retreat in the hills, Jesus assigned the immediate command of this attendant host of universe personalities to his recently Personalized Adjuster, and for more than four years of Urantia time did these selected personalities from every division of universe intelligences obediently and respectfully function under the wise guidance of this exalted and experienced Personalized Mystery Monitor. In assuming command of this mighty assembly, the Adjuster, being a onetime part and essence of the Paradise Father, assured Jesus that in no case would these superhuman agencies be permitted to serve, or manifest themselves in connection with, or in behalf of, his earth career unless it should develop that the Father willed such intervention. Thus by one great decision Jesus voluntarily deprived himself of all superhuman co-operation in all matters having to do with the remainder of his mortal career unless the Father might independently choose to participate in some certain act or episode of the Son’s earth labors. 언덕에서 보낸 40일의 은거생활에서 내려오기 전에, 예수님은 이 대기 중인 우주 고유성들에 대한 직접적 지휘권을, 최근에 고유성이 구현된 자신의 조절자에게 맡겼으며,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4년 이상, 우주 지능들의 모든 부서로부터 온 선택된 이 고유성들은 복종적으로 그리고 존중심을 가지고 이 고양되고 체험을 거친 고유성이 구현된 신비 감시자의 현명한 지도 아래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 강력한 군단의 지휘를 맡으면서, 이전에 천국 아버지의 분신이었으며 핵심이었던 조절자는, 아버지께서 그러한 의도적인 개입을 전개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라도, 이들 초인간적 대리자들이 그의 지상 생애와 관련되어서나 혹은 그의 생애를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들이 드러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예수님께 확실히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중대한 결정으로, 아들의 지상 수고들 중에서 특정한 행동이나 에피소드에서 아버지께서 따로 참여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예수님은 그의 나머지 필사자 생애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서 모든 초인간적인 협조를 자발적으로 배제하였습니다.

136:5.4 (1516.4) In accepting this command of the universe hosts in attendance upon Christ Michael, the Personalized Adjuster took great pains to point out to Jesus that, while such an assembly of universe creatures could be limited in their space activities by the delegated authority of their Creator, such limitations were not operative in connection with their function in time. And this limitation was dependent on the fact that Adjusters are nontime beings when once they are personalized. Accordingly was Jesus admonished that, while the Adjuster’s control of the living intelligences placed under his command would be complete and perfect as to all matters involving space, there could be no such perfect limitations imposed regarding time. Said the Adjuster: “I will, as you have directed, enjoin the employment of this attendant host of universe intelligences in any manner in connection with your earth career except in those cases where the Paradise Father directs me to release such agencies in order that his divine will of your choosing may be accomplished, and in those instances where you may engage in any choice or act of your divine-human will which shall only involve departures from the natural earth order as to time. In all such events I am powerless, and your creatures here assembled in perfection and unity of power are likewise helpless. If your united natures once entertain such desires, these mandates of your choice will be forthwith executed. Your wish in all such matters will constitute the abridgment of time, and the thing projected is existent. Under my command this constitutes the fullest possible limitation which can be imposed upon your potential sovereignty. In my self-consciousness time is nonexistent, and therefore I cannot limit your creatures in anything related thereto.” 그리스도 미가엘을 시중드는 우주군단들에 대한 이러한 지도권을 받아들이면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는, 그러한 우주 창조물들의 집단이 그들의 창조자의 위임된 권한에 의해서 공간 활동은 제한되어질 수 있지만, 시간에 관계되는 그들의 작용에서는, 그런 제한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을 예수님에게 아주 어렵게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일단 조절자들이 고유성이 구현되면 그들이 비(非)시간 존재가 된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절자가 그의 지도 아래에 놓인 살아있는 지능체들의 통제에 있어서,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문제들의 경우에는 완벽하고도 완전하게 할 수 있지만, 시간에 관한 것에서는 그러한 완전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조절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지도대로 나는 여기 시중드는 우주 지능의 무리가 당신의 지상임무에 관계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봉사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아버지께서 당신이 선택한 그의 신적 뜻이 성취될 수도 있는 그러한 대리자들을 풀어놓으라고 그가 나에게 지도하는 경우와 또한 오직 시간에 대한 것으로서 지상의 자연 질서로부터 벗어날 것들이 포함되어질 당신의 신적-인간의 의지의 선택이나 행동을 당신이 내려야 할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그러한 사건에서는, 내가 무력하며, 권능의 완전함과 합일 안에 여기에 모여 있는 너의 창조물들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연합된 본성들(인성과 신성)이 일단 그러한 소망을 품는다면, 당신이 선택한 이 명령들은 당장 집행될 것입니다.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당신의 소망은 시간의 단축을 구성할 것이며, 기획된 것은 존재합니다. 나의 지도 아래에서는, 이것이 당신의 잠재 주권에 부여할 수 있는, 최대로 가능한 제한입니다. 내 자아-의식에서는, 시간이 비(非)실존이므로, 거기에 관계되는 그 어떤 것에서도 나는 당신의 창조물들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136:5.5 (1517.1) Thus did Jesus become apprised of the working out of his decision to go on living as a man among men. He had by a single decision excluded all of his attendant universe hosts of varied intelligences from participating in his ensuing public ministry except in such matters as concerned time only. It therefore becomes evident that any possible supernatural or supposedly superhuman accompaniments of Jesus’ ministry pertained wholly to the elimination of time unless the Father in heaven specifically ruled otherwise. No miracle, ministry of mercy, or any other possible event occurring in connection with Jesus’ remaining earth labors could possibly be of the nature or character of an act transcending the natural laws established and regularly working in the affairs of man as he lives on Urantia except in this expressly stated matter of time. No limits, of course, could be placed upon the manifestations of “the Father’s will.” The elimination of time in connection with the expressed desire of this potential Sovereign of a universe could only be avoided by the direct and explicit act of the will of this God-man to the effect that time, as related to the act or event in question, should not be shortened or eliminated. In order to prevent the appearance of apparent time miracles, it was necessary for Jesus to remain constantly time conscious. Any lapse of time consciousness on his part, in connection with the entertainment of definite desire, was equivalent to the enactment of the thing conceived in the mind of this Creator Son, and without the intervention of time.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에 관한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수반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의 결정으로, 그는 시간에 관한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계속적인 대중을 위한 공(公) 사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양한 우주 지능존재들 무리의 참여를 배제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공(公) 사역에서 따라다녔던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 업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특별히 다른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한, 전적으로 시간 제거에 관계된 것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남아있는 땅에서의 수고와 관련하여 발생한 어떤 기적, 자비의 사역, 또는 다른 어떤 가능성 있는 사건들은, 분명하게 여기에 서술한 시간문제를 제외하고는, 그가 지구(유란시아)에 살아가면서 사람의 관련사에서 확립되어 있고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행동의 본성이나 성품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 제한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이 잠재적 주권자가 밖으로 표현한 소망과 관련하여, 시간의 제거는, 문제가 되는 행위나 사건이 관련되는 대로, 시간이 단축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영향에 대해, 이 하나님-사람이 지닌 의지의 직접적이고도 뚜렷한 행동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시간적인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끊임없이 시간을 의식하며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그의 편에서 그 어떤 시간 의식의 착오(벗어남)가, 분명한 소망을 품는 것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이 창조자 아들의 마음속에서 착상된 것이 집행되는 것, 그리고 시간의 간섭 없이 그렇게 되는 것과 동등했습니다.

136:5.6 (1517.2) Through the supervising control of his associated and Personalized Adjuster it was possible for Michael perfectly to limit his personal earth activities with reference to space, but it was not possible for the Son of Man thus to limit his new earth status as potential Sovereign of Nebadon as regards time. And this was the actual status of Jesus of Nazareth as he went forth to begin his public ministry on Urantia. 그의 동료로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감독하는 통제를 통하여, 미가엘은 공간과 연관되는 자신의 개인적 지상 활동들을 완전하게 제한하실 수 있었지만, 사람의 아들에게 있어서 시간과 관련될 때에는 잠정적인 네바돈 주권자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지상(地上)의 지위를 그렇게 제한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려고 나섰을 때, 나사렛 예수의 실재 지위였습니다.

6. The Second Decision 두 번째 결정

170823 수요 예수97 마4:3-4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3 The tempter came to him and said,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bread.” 4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136:6.1 (1517.3) Having settled his policy concerning all personalities of all classes of his created intelligences, so far as this could be determined in view of the inherent potential of his new status of divinity, Jesus now turned his thoughts toward himself. What would he, now the fully self-conscious creator of all things and beings existent in this universe, do with these creator prerogatives in the recurring life situations which would immediately confront him when he returned to Galilee to resume his work among men? In fact, already, and right where he was in these lonely hills, had this problem forcibly presented itself in the matter of obtaining food. By the third day of his solitary meditations the human body grew hungry. Should he go in quest of food as any ordinary man would, or should he merely exercise his normal creative powers and produce suitable bodily nourishment ready at hand? And this great decision of the Master has been portrayed to you as a temptation — as a challenge by supposed enemies that he “command that these stones become loaves of bread.” 예수님은 자신의 새로운 신성의 지위에 선천적으로 잠재된 관점에서 결정될 수 있는 한, 자신이 창조한 지능존재들이 지닌 모든 등급의 모든 고유성에 관련된 자신의 정책을 정하게 되자, 이제 그의 생각을 그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그는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존재의 창조자임을 충분하게 자아-의식하는 지금, 이들 창조자 특권으로, 그가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즉시 부딪쳐오는 반복적 일생의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이 외로운 언덕에 계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벌써 음식을 구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이 문제가 제시되었습니다. 외로운 명상 가운데 3일째가 되자, 인간적 육신은 점점 배고프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음식을 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의 정상적 창조적 권능을 발휘하고 몸을 위해 적절한 영양분을 즉시 쓸 수 있도록 만들어낼 것인가? 이러한 주(主)님의 중대한 결정이 너희들에게는 유혹─가상의 적들이 그가 “이 돌이 빵으로 변하게 명령하도록” 도전했다고─으로 묘사되어졌습니다.

136:6.2 (1518.1) Jesus thus settled upon another and consistent policy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abors. As far as his personal necessities were concerned, and in general even in his relations with other personalities, he now deliberately chose to pursue the path of normal earthly existence; he definitely decided against a policy which would transcend, violate, or outrage his own established natural laws. But he could not promise himself, as he had already been warned by his Personalized Adjuster, that these natural laws might not, in certain conceivable circumstances, be greatly accelerated. In principle, Jesus decided that his lifework should be organized and prosecuted in accordance with natural law and in harmony with the existing social organization. The Master thereby chose a program of living which was the equivalent of deciding against miracles and wonders. Again he decided in favor of “the Father’s will”; again he surrendered everything into the hands of his Paradise Father.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나머지 지상 임무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일관된 방침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개인적 필요성에 관한 것과 일반적으로 다른 고유성들과의 그의 관계에 관한 것에서까지도, 이제 그는 이 세상의 정상적인 존재로서의 길을 신중하게 추구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자연 법칙을 초월하거나 위반하거나 어기는 정책은 피하기로 분명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에 의하여 경고를 받았던 바와 같이, 어떤 상상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자연적인 법칙이 크게 가속(加速)될 수 없다고 자신에게 약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필생의 사업은 자연적인 법에 따르고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조직에 조화를 이루면서 조직되어지고 실행되어져야만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주(主)님은 거기에서 기적이나 이적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상당하는 삶의 프로그램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천국 아버지의 손에 맡겼습니다.

136:6.3 (1518.2) Jesus’ human nature dictated that the first duty was self-preservation; that is the normal attitude of the natural man on the worlds of time and space, and it is, therefore, a legitimate reaction of a Urantia mortal. But Jesus was not concerned merely with this world and its creatures; he was living a life designed to instruct and inspire the manifold creatures of a far-flung universe.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첫 번째 의무가 자아-보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사는 자연적인 인간의 정상적인 태도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지구(유란시아) 필사자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이 세상과 그 곳의 창조물들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광대하게 퍼져있는 우주의 다양한 창조물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계획된 일생을 사셨습니다.

136:6.4 (1518.3) Before his baptismal illumination he had lived in perfect submission to the will and guidance of his heavenly Father. He emphatically decided to continue on in just such implicit mortal dependence on the Father’s will. He purposed to follow the unnatural course — he decided not to seek self-preservation. He chose to go on pursuing the policy of refusing to defend himself. He formulated his conclusions in the words of Scripture familiar to his human mind: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s from the mouth of God.” In reaching this conclusion in regard to the appetite of the physical nature as expressed in hunger for food, the Son of Man made his final declaration concerning all other urges of the flesh and the natural impulses of human nature. 세례로 조명을 받기 전에도,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인도에 완전한 복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필사자로서의 그러한 절대적 의존을 계속하기로 단호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따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자아-보존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방침을 계속 추구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결론들을, 잘 알고 있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인간 마음에 공식화하였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8:3, 눅4:3-4).” 배고플 때 음식을 구하는 표현과 같은 육체적 성질의 식욕에 관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제 사람의 아들은 모든 다른 육체적 욕구나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충동들에 관하여 최종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136:6.5 (1518.4) His superhuman power he might possibly use for others, but for himself, never. And he pursued this policy consistently to the very end, when it was jeeringly said of him: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 because he would not.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초인간적인 권능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27:42a, 막15:31, 눅23:35).”라고 그를 조롱하여 말할 때, 그는 이러한 방침을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36:6.6 (1518.5) The Jews were expecting a Messiah who would do even greater wonders than Moses, who was reputed to have brought forth water from the rock in a desert place and to have fed their forefathers with manna in the wilderness. Jesus knew the sort of Messiah his compatriots expected, and he had all the powers and prerogatives to measure up to their most sanguine expectations, but he decided against such a magnificent program of power and glory. Jesus looked upon such a course of expected miracle working as a harking back to the olden days of ignorant magic and the degraded practices of the savage medicine men. Possibly, for the salvation of his creatures, he might accelerate natural law, but to transcend his own laws, either for the benefit of himself or the overawing of his fellow men, that he would not do. And the Master’s decision was final. 유대인들은, 사막의 바위로부터 물이 솟아나게 하고, 광야에서 만나로 그들의 선조들을 먹였다고 소문이 난 모세보다도 더 큰 이적을 베풀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포 종족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어떤 종류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장 낙관적인 기대들을 채워줄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특권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한 권능과 영광으로 장엄한 그러한 계획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행하는 과정은, 미개한 주술사들이 무지한 마술을 쓰고, 퇴화된 관습을 지녔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마도, 자기 창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가 자연의 법을 가속시키실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이익이나 동료 사람들을 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법을 초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의 결정은 최종적이었습니다.

136:6.7 (1518.6) Jesus sorrowed for his people; he fully understood how they had been led up to the expectation of the coming Messiah, the time when “the earth will yield its fruits ten thousandfold, and on one vine there will be a thousand branches, and each branch will produce a thousand clusters, and each cluster will produce a thousand grapes, and each grape will produce a gallon of wine.” The Jews believed the Messiah would usher in an era of miraculous plenty. The Hebrews had long been nurtured on traditions of miracles and legends of wonders.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겼으며; 그는 그들이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러한 기대, 그가 올 때 “세상은 그 열매를 1만 배로 수확할 것이며, 한 포도나무에는 1천 개의 가지들이 있을 것이며, 각각의 가지는 1천 개의 포도송이를 생산할 것이며, 송이마다 포도알 1천 개를 맺으며, 포도 알마다 포도주 1갤런(3.79리터)을 생산하리라(사4:2, 5:10, 에녹10:18-20a).”라는 기대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풍성한 기적의 시대를 열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기적에 대한 전통들과 이적에 대한 전설들로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136:6.8 (1519.1) He was not a Messiah coming to multiply bread and wine. He came not to minister to temporal needs only; he came to reveal his Father in heaven to his children on earth, while he sought to lead his earth children to join him in a sincere effort so to live as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그는 빵과 포도주를 늘리려고 오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현세의 필요만을 보살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오셨으며, 동시에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진지한 노력으로 그에게 연합하도록 이끌려고 애쓰셨습니다.

136:6.9 (1519.2) In this decision Jesus of Nazareth portrayed to an onlooking universe the folly and sin of prostituting divine talents and God-given abilities for personal aggrandizement or for purely selfish gain and glorification. That was the sin of Lucifer and Caligastia. 이러한 결정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는 개인적 세력의 확장 또는 순전히 이기적인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신적 재능과 하나님께서-주신 능력을 팔아넘기는 것은 어리석으며, 죄 짓는 것임을, 지켜보고 있는 우주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죄였습니다.

136:6.10 (1519.3) This great decision of Jesus portrays dramatically the truth that selfish satisfaction and sensuous gratification, alone and of themselves, are not able to confer happiness upon evolving human beings. There are higher values in mortal existence — intellectual mastery and spiritual achievement — which far transcend the necessary gratification of man’s purely physical appetites and urges. Man’s natural endowment of talent and ability should be chiefly devoted to the development and ennoblement of his higher powers of mind and spirit. 예수님의 이 위대한 결정은, 이기적인 만족과 감성적인 희열이 홀로 그 자체만으로는 진화하는 인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필사자 존재는 더 높은 가치들 – 지적 통달과 영적 성취 –이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의 순수한 육체적 욕구와 충동에 필요한 만족을 훨씬 더 초월합니다. 사람이 본래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능력은 자신의 더 높은 마음과 영의 권능을 개발하고 높이는 일에 주로 바쳐져야만 합니다.

136:6.11 (1519.4) Jesus thus revealed to the creatures of his universe the technique of the new and better way, the higher moral values of living and the deeper spiritual satisfactions of evolutionary human existence on the worlds of space.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우주의 창조물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삶의 가치와 공간의 세계에서 진화하는 인간 존재가 누릴 더 깊은 영적 만족의 새롭고 나은 길로 가는 기법을 계시하셨습니다.

7. The Third Decision 세 번째 결정

170830 수요 예수98 마4:5-6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5 Then the devil took him to the holy city and had him stand on th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6 “If you are the Son of God,” he said, “throw yourself down. For it is written: ”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and they will lift you up i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136:7.1 (1519.5) Having made his decisions regarding such matters as food and physical ministration to the needs of his material body, the care of the health of himself and his associates, there remained yet other problems to solve. What would be his attitude when confronted by personal danger? He decided to exercise normal watchcare over his human safety and to take reasonable precaution to prevent the untimely termination of his career in the flesh but to refrain from all superhuman intervention when the crisis of his life in the flesh should come. As he was formulating this decision, Jesus was seated under the shade of a tree on an overhanging ledge of rock with a precipice right there before him. He fully realized that he could cast himself off the ledge and out into space, and that nothing could happen to harm him provided he would rescind his first great decision not to invoke the interposition of his celestial intelligences in the prosecution of his lifework on Urantia, and provided he would abrogate his second decision concerning his attitude toward self-preservation. 자기 자신과 동료들의 건강관리로서 물질적 육신의 필요에 대한 음식과 육체적 보살핌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리자, 거기에는 아직도 풀어야할 다른 문제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개인적 위험에 당면하였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안전함에 대해 일반적인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육신의 생애에서 뜻밖의 종말을 맞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절히 조심을 하되, 육신상의 삶의 위기가 올 때, 모든 초인간적 개입을 금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구체화시키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튀어나온 바위 턱 위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는 튀어나온 그 바위에서 자신을 던져 공중으로 뛰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깨달았으며, 지구(유란시아)에서 자기 삶의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만약 자기가 천상의 지능체들의 중재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자신의 첫 번째 중대한 결정을 폐지하고 자아-보존을 향한 그의 태도에 관련된 자신의 두 번째 결정을 폐지시킨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위험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136:7.2 (1519.6) Jesus knew his fellow countrymen were expecting a Messiah who would be above natural law. Well had he been taught that Scripture: “There shall no evil befall you, neither shall any plague come near your dwelling. For he shall give his angels charge over you, to keep you in all your ways. They shall bear you up in their hands lest you dash your foot against a stone.” Would this sort of presumption, this defiance of his Father’s laws of gravity, be justified in order to protect himself from possible harm or, perchance, to win the confidence of his mistaught and distracted people? But such a course, however gratifying to the sign-seeking Jews, would be, not a revelation of his Father, but a questionable trifling with the established law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예수님은 자기 동료 민족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매우 잘 알고 계셨습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0-12).” 그의 아버지의 중력의 법칙에 대한 도전이 되는 이런 종류의 억측이,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그를 방어하기 위하여, 또는 아마도, 잘못 가르쳐지고 잘못 길을 들어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표적을 찾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더라도,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는 길은 아닐 것이며 단지 우주들의 우주에 세워져 있는 법칙들을 의심스럽게 하는 무익한 행동일 뿐이다.

136:7.3 (1519.7) Understanding all of this and knowing that the Master refused to work in defiance of his established laws of nature in so far as his personal conduct was concerned, you know of a certainty that he never walked on the water nor did anything else which was an outrage to his material order of administering the world; always, of course, bearing in mind that there had, as yet, been found no way whereby he could be wholly delivered from the lack of control over the element of time in connection with those matters put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주(主)께서 자신의 개인적 행위에 관해서는 자신이 세운 자연법칙을 무시하면서 일하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너희는 그가 절대로 물위를 걸어 다니신 적이 없었고, 세상을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물질 질서에 위반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물론,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의 관할 아래에 놓인 그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시간 요소에 대한 통제력의 부족에서 전반적으로 벗어나는 어떤 방법을 아직까지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점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36:7.4 (1520.1) Throughout his entire earth life Jesus was consistently loyal to this decision. No matter whether the Pharisees taunted him for a sign, or the watchers at Calvary dared him to come down from the cross, he steadfastly adhered to the decision of this hour on the hillside.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일생 내내, 끊임없이 이 결정에 충실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비웃거나, 갈보리에서 감시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소하였을 때(마27:39-44)와 상관없이, 그는 그 언덕에서 이 시간에 내렸던 결정을 꾸준하게 지켜나가셨습니다.

8. The Fourth Decision 네 번째 결정

170906 수요 예수99 마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and their sight was restored. Jesus warned them sternly, “See that no one knows about this.”

136:8.1 (1520.2) The next great problem with which this God-man wrestled and which he presently decided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concerned the question as to whether or not any of his superhuman powers should be employed for the purpose of attracting the attention and winning the adherence of his fellow men. Should he in any manner lend his universe powers to the gratification of the Jewish hankering for the spectacular and the marvelous? He decided that he should not. He settled upon a policy of procedure which eliminated all such practices as the method of bringing his mission to the notice of men. And he consistently lived up to this great decision. Even when he permitted the manifestation of numerous time-shortening ministrations of mercy, he almost invariably admonished the recipients of his healing ministry to tell no man about the benefits they had received. And always did he refuse the taunting challenge of his enemies to “show us a sign” in proof and demonstration of his divinity. 이 하나님-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심하면서 즉시 결정한 다음의 큰 문제는, 그가 자기 동료 인간들의 관심을 끌어 그들의 충실한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초인간적 권능을 조금이라도 사용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웅장함과 경탄을 열망하는 유대인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우주적인 권능을 사용할 것인가? 그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하는 방법으로서 그러한 모든 실천들을 제거하는 절차적 정책을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관되게 이 중대한 결정을 지켜나가셨습니다. 여러 번 시간을-단축시키는 자비의 섬김이 드러나도록 그가 허락하셨을 때조차도, 그가 치료하는 섬김 활동을 받은 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혜택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거의 변함없이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신성을 증명하고 실증하여서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는 대적들의 비웃는 도전을 항상 거절하셨습니다.

136:8.2 (1520.3) Jesus very wisely foresaw that the working of miracles and the execution of wonders would call forth only outward allegiance by overawing the material mind; such performances would not reveal God nor save men. He refused to become a mere wonder-worker. He resolved to become occupied with but a single task —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은, 기적들을 행하는 것과 이적을 실행하는 것은 물질적 마음을 위압하여 겉으로의 충성만 불러일으키게 될 뿐임을 매우 현명하게 내다보았습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단 한가지의 임무─하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136:8.3 (1520.4) Throughout all this momentous dialogue of Jesus’ communing with himself, there was present the human element of questioning and near-doubting, for Jesus was man as well as God. It was evident he would never be received by the Jews as the Messiah if he did not work wonders. Besides, if he would consent to do just one unnatural thing, the human mind would know of a certainty that it was in subservience to a truly divine mind. Would it be consistent with “the Father’s will” for the divine mind to make this concession to the doubting nature of the human mind? Jesus decided that it would not and cited the presenc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as sufficient proof of divinity in partnership with humanity. 예수님이 자기 자신과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모든 중대한 대화들을 하는 동안 내내, 의문을 던지고 거의 의심하는 인간 요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면,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단지 한 번이라도 비(非)자연적(초자연적)인 일을 행하기로 동의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신적 마음에 복종해서 된 것임을 인간 마음이 확실히 알 것입니다. 신적 마음이 의심을 품은 인간 마음의 본성에게 양보하는 이것은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하였으며, 단지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의 현존을 신성과 인간성과의 협력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 제시하였습니다.

136:8.4 (1520.5) Jesus had traveled much; he recalled Rome, Alexandria, and Damascus. He knew the methods of the world — how people gained their ends in politics and commerce by compromise and diplomacy. Would he utilize this knowledge in the furtherance of his mission on earth? No! He likewise decided against all compromise with the wisdom of the world and the influence of riches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He again chose to depend exclusively on the Father’s will. 예수님은 많이 여행하셨으며,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를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방법들─사람들이 정치와 상업에서 타협과 외교로 자기들의 목적을 어떻게 이루는지─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상임무를 증진하기 위해 이 지식을 이용하실 것인가? 아닙니다! 그는 왕국 설립에 있어서 세상 지혜와의 모든 타협과 부(富)의 영향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다시 결정하였습니다.

136:8.5 (1520.6) Jesus was fully aware of the short cuts open to one of his powers. He knew many ways in which the attention of the nation, and the whole world, could be immediately focused upon himself. Soon the Passover would be celebrated at Jerusalem; the city would be thronged with visitors. He could ascend the pinnacle of the temple and before the bewildered multitude walk out on the air; that would be the kind of a Messiah they were looking for. But he would subsequently disappoint them since he had not come to re-establish David’s throne. And he knew the futility of the Caligastia method of trying to get ahead of the natural, slow, and sure way of accomplishing the divine purpose. Again the Son of Man bowed obediently to the Father’s way, the Father’s will. 예수님은 그의 권능들 중 하나에 이르는 지름길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국가와 온 세상의 관심이 즉시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곧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축하가 있을 것이며, 그 도시는 방문객들로 넘칠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꼭대기에 올라 놀란 군중들 앞에서 공중에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찾고 있는 종류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좌를 다시 세우려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적 목적을 성취하는, 자연스럽고 더디지만 확실한 그 길을 앞서 가려 했던 칼리가스티아의 방법이 쓸데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136:8.6 (1521.1) Jesus chos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ankind by natural, ordinary, difficult, and trying methods, just such procedures as his earth children must subsequently follow in their work of enlarging and extending that heavenly kingdom. For well did the Son of Man know that it would be “through much tribulation that many of the children of all ages would enter into the kingdom.” Jesus was now passing through the great test of civilized man, to have power and steadfastly refuse to use it for purely selfish or personal purposes. 예수님은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며, 어렵고, 고된 방법들로 인류의 심정에 하늘 왕국을 설립하기로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지상 자녀들이 하늘 왕국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일에서 이후에 계속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많은 환난을 통해 모든 세대의 많은 자녀들이 왕국에 들어갈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문명화된 사람이 겪는 커다란 시험, 즉 권능으로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그 권능 사용하기를 꾸준히 거절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계셨습니다.

136:8.7 (1521.2) In your consideration of the life and experience of the Son of Man, it should be ever borne in mind that the Son of God was incarnate in the mind of a first-century human being, not in the mind of a twentieth-century or other-century mortal. By this we mean to convey the idea that the human endowments of Jesus were of natural acquirement. He was the product of the hereditary and environmental factors of his time, plus the influence of his training and education. His humanity was genuine, natural, wholly derived from the antecedents of, and fostered by, the actual intellectual status and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s of that day and generation. While in the experience of this God-man there was always the possibility that the divine mind would transcend the human intellect, nonetheless, when, and as, his human mind functioned, it did perform as would a true mortal mind under the conditions of the human environment of that day.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체험을 고려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20세기나 혹은 다른 세기의 필사자의 마음이 아니라, 1세기의 인간 존재의 마음으로 성육신하신 점을 항상 마음에 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적 자질이 자연적 습득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그는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소들과 그의 훈련과 교육의 영향이 더해진 그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성은 참되고, 자연스러웠고,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고, 그 당시 그 세대의 실재적인 지적 상태와 사회적·경제적인 조건들로 양육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사람의 체험에는 신적 마음이 사람의 지성을 초월할 가능성이 항상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마음이 활동할 때, 그러는 동안, 신적 마음은, 마치 당시 인간적 환경 조건 아래에 순수한 필사자 마음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136:8.8 (1521.3) Jesus portrayed to all the worlds of his vast universe the folly of creating artificial situations for the purpose of exhibiting arbitrary authority or of indulging exceptional power for the purpose of enhancing moral values or accelerating spiritual progress. Jesus decided that he would not lend his mission on earth to a repetition of the disappointment of the reign of the Maccabees. He refused to prostitute his divine attributes for the purpose of acquiring unearned popularity or for gaining political prestige. He would not countenance the transmutation of divine and creative energy into national power or international prestige. Jesus of Nazareth refused to compromise with evil, much less to consort with sin. The Master triumphantly put loyalty to his Father’s will above every other earthly and temporal consideration. 예수님은, 독단적인 권위를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인위적 상황들을 만들거나, 도덕적 가치들을 강화하거나 영적 진보를 가속하려는 목적으로 이례적 권능에 탐닉하는, 어리석음을, 자신의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들에,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명을, 마카비 가(家) 통치의 실망이 반복되는데 힘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노력 없이 얻는 인기를 얻는 목적이나 정치적 명성을 얻으려고 자신의 신적 속성들을 악용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신적이며 창조적인 에너지를 민족적 권능이나 국제적 명성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묵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죄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악과 타협하는 것도 거부하셨습니다. 주(主)님은, 다른 세속적이며 현세적으로 고려할 모든 것 위에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는 것을, 승리한 마음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9. The Fifth Decision 다섯 번째 결정

170913 수요 예수100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Jesus said to him, “Away from me, Satan! For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136:9.1 (1521.4) Having settled such questions of policy as pertained to his individual relations to natural law and spiritual power, he turned his attention to the choice of methods to be employed in the proclama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John had already begun this work; how might he continue the message? How should he take over John’s mission? How should he organize his followers for effective effort and intelligent co-operation? Jesus was now reaching the final decision which would forbid that he further regard himself as the Jewish Messiah, at least as the Messiah was popularly conceived in that day. 자연 법칙과 영적 권능에 대한 그의 개별적인 관계에 적합하도록 정책적인 이런 문제들을 결정한 후, 그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설립하는데 있어서 사용될 방법들의 선택에 자신의 관심을 돌리셨습니다. 요한은 이미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메시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한의 사명을 넘겨받을 것인가? 어떻게 그의 추종자들을 조직하여 효율적인 노력과 지적 협조를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적어도 그 당시에 대중들이 상상한대로의 메시아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으려는, 최종적인 결정에 도달하였습니다.

136:9.2 (1522.1) The Jews envisaged a deliverer who would come in miraculous power to cast down Israel’s enemies and establish the Jews as world rulers, free from want and oppression. Jesus knew that this hope would never be realized. He knew that the kingdom of heaven had to do with the overthrow of evil in the hearts of men, and that it was purely a matter of spiritual concern. He thought out the advisability of inaugurating the spiritual kingdom with a brilliant and dazzling display of power — and such a course would have been permissible and wholly within the jurisdiction of Michael — but he fully decided against such a plan. He would not compromise with the revolutionary techniques of Caligastia. He had won the world in potential by submission to the Father’s will, and he proposed to finish his work as he had begun it, and as the Son of Man. 유대인들은 해방자(구원자)를, 기적의 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적들을 쳐부수고, 유대인들을 세상의 통치자들로 만들어 주며,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자로 마음속에 그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희망이 결코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악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영적 관련 문제였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찬란하며 눈부신 권능을 전시하는 영적 왕국의 취임식의 대안─그런 과정은 허락될 것이며 전적으로 미가엘의 관할권 안에 있었습니다.─을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한 계획을 반대하기로 완전히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칼리가스티아의 혁명적 기법들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잠재적으로 세상을 얻었으며, 자기 일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일의 마무리도 완결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136:9.3 (1522.2) You can hardly imagine what would have happened on Urantia had this God-man, now in potential possession of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once decided to unfurl the banner of sovereignty, to marshal his wonder-working battalions in militant array! But he would not compromise. He would not serve evil that the worship of God might presumably be derived therefrom. He would abide by the Father’s will. He would proclaim to an onlooking universe, “You shall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him only shall you serve.”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능을 지금 잠재적으로 소유한 이 하나님-사람이, 군사적 대형으로 기적을 행하는 군대를 집합시켜, 한 때 주권자의 깃발을 휘날렸더라면, 지구(유란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는지 너희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그것에서 유래된다고 추정할 수도 있는 악을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살아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우주에게,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만을 섬겨야만 할 것이다.” 라고 선포하고자 하셨습니다.

136:9.4 (1522.3) As the days passed, with ever-increasing clearness Jesus perceived what kind of a truth-revealer he was to become. He discerned that God’s way was not going to be the easy way. He began to realize that the cup of the remainder of his human experience might possibly be bitter, but he decided to drink it. 여러 날이 지나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진리-계시자가 될 것인지를 점점 더 분명히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셨습니다. 인간 체험에 있어서 자신의 나머지 잔은 더욱 쓴맛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그 잔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36:9.5 (1522.4) Even his human mind is saying good-bye to the throne of David. Step by step this human mind follows in the path of the divine. The human mind still asks questions but unfailingly accepts the divine answers as final rulings in this combined life of living as a man in the world while all the time submitting unqualifiedly to the doing of the Father’s eternal and divine will. 그의 인간적 마음까지 다윗의 왕좌에게는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이 인간 마음은 신적 경로를 한 걸음씩 따라갔습니다. 아버지의 영원하며 신적 뜻을 행하는 데 항상 무조건 복종하는 동안, 인간적 마음은 여전히 질문했지만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 연합된 일생에서 신적 대답을 최종적인 결정으로 어김없이 받아들였습니다.

136:9.6 (1522.5) Rome was mistress of the Western world. The Son of Man, now in isolation and achieving these momentous decisions, with the hosts of heaven at his command, represented the last chance of the Jews to attain world dominion; but this earthborn Jew, who possessed such tremendous wisdom and power, declined to use his universe endowments either for the aggrandizement of himself or for the enthronement of his people. He saw, as it were, “the kingdoms of this world,” and he possessed the power to take them. The Most Highs of Edentia had resigned all these powers into his hands, but he did not want them. The kingdoms of earth were paltry things to interest the Creator and Ruler of a universe. He had only one objective, the further revelation of God to ma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the rule of the heavenly Father in the hearts of mankind. 로마는 서방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고립되어 이러한 중요한 결정들을 성취하신, 사람의 아들은, 그의 지휘 아래 하늘 군단과 함께, 유대인들이 세상 정복을 달성할 마지막 기회를 뜻하셨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은 그러한 굉장한 지혜와 권능을 소유했지만, 그의 우주적 자질들을, 자신의 확장이나 자기 민족의 왕권숭배를 위해 사용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왕국들”을 보셨으며,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은 이 모든 권능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왕국들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통치자의 관심을 끌기에는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사람에게 하나님을 더욱 계시하는 것, 왕국의 설립, 인류의 심정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것뿐이었습니다.

136:9.7 (1522.6) The idea of battle, contention, and slaughter was repugnant to Jesus; he would have none of it. He would appear on earth as the Prince of Peace to reveal a God of love. Before his baptism he had again refused the offer of the Zealots to lead them in rebellion against the Roman oppressors. And now he made his final decision regarding those Scriptures which his mother had taught him, such as: “The Lord has said to me, ‘You are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you. Ask of me, and I will give you the heathen for your inheritance and the uttermost parts of the earth for your possession. You shall break them with a rod of iron; you shall dash them in pieces like a potter’s vessel.’” 전쟁, 다툼, 살육이라는 관념은 예수님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평화의 영주로 세상에게 나타나고자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그는 로마의 억압에 대항하는 반란에서 그들을 이끌어 달라는 유대 열심당들의 청을 다시 거절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쳤던 다음과 같은 성서의 구절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이방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2:7-9).’”

136:9.8 (1522.7) Jesus of Nazareth reached the conclusion that such utterances did not refer to him. At last, and finally, the human mind of the Son of Man made a clean sweep of all these Messianic difficulties and contradictions — Hebrew scriptures, parental training, chazan teaching, Jewish expectations, and human ambitious longings; once and for all he decided upon his course. He would return to Galilee and quietly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and trust his Father (the Personalized Adjuster) to work out the details of procedure day by day.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말들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사람의 아들의 인간 마음은 이러한 모든 메시아적 어려움들과 모순들─히브리 경전들, 부모의 가르침, 카잔의 가르침, 유대적 기대들, 그리고 인간 야심적 갈망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셨으며; 단번에 영원히,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왕국 선포를 시작하고, 매일 세부적인 과정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를 신뢰하기로 하셨습니다.

136:9.9 (1523.1) By these decisions Jesus set a worthy example for every person on every world throughout a vast universe when he refused to apply material tests to prove spiritual problems, when he refused presumptuously to defy natural laws. And he set an inspiring example of universe loyalty and moral nobility when he refused to grasp temporal power as the prelude to spiritual glory. 이러한 결정들에 의해, 예수님은, 영적 문제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시험들을 적용하기를 거절하고, 그가 주제넘게 자연 법칙들을 무시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광대한 우주를 망라하여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모범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적 영광의 서막으로 세속적 권능을 취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그는 우주적 충성과 도덕적 고결함에서 영감이 넘치는 모범을 세우셨습니다.

136:9.10 (1523.2) If the Son of Man had any doubts about his mission and its nature when he went up in the hills after his baptism, he had none when he came back to his fellows following the forty days of isolation and decisions. 사람의 아들이 자신의 세례 이후에 언덕으로 올라가셨을 때, 자신의 사명과 그 본질에 대하여 어떤 의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홀로 계시면서 결정하던 40일 후에 동료들에게 돌아오셨을 때에는, 그에게 어떤 의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136:9.11 (1523.3) Jesus has formulated a program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He will not cater to the physical gratification of the people. He will not deal out bread to the multitudes as he has so recently seen it being done in Rome. He will not attract attention to himself by wonder-working, even though the Jews are expecting just that sort of a deliverer. Neither will he seek to win acceptance of a spiritual message by a show of political authority or temporal power. 예수님은 아버지의 왕국 설립을 위한 계획을 구상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물리적 만족을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로마에서 최근에 행해진 것을 목격했듯이,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비록 그런 종류의 해방자(구원자)를 기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권위 또는 세속적 권능을 보여서,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136:9.12 (1523.4) In rejecting these methods of enhancing the coming kingdom in the eyes of the expectant Jews, Jesus made sure that these same Jews would certainly and finally reject all of his claims to authority and divinity. Knowing all this, Jesus long sought to prevent his early followers alluding to him as the Messiah. 기대에 찬 유대인들의 눈에 다가올 왕국을 확장시키는 이런 방법들을 거절하면서, 예수님은 바로 이 유대인들이 분명히 최종적으로 모든 권한과 신성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주장들을 배척하리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초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언급하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애썼습니다.

136:9.13 (1523.5) Throughout his public ministry he was confronted with the necessity of dealing with three constantly recurring situations: the clamor to be fed, the insistence on miracles, and the final request that he allow his followers to make him king. But Jesus never departed from the decisions which he made during these days of his isolation in the Perean hills. 그의 공적 사역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발생되는 세 가지 상황들을 다루는 필연성에 직면하였는데: 먹을 것을 제공하라는 외침소리, 기적을 행하라는 주장,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 마지막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페레아 언덕에서 홀로 있던 이 여러 날 동안에 내린 결정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10. The Sixth Decision 여섯 번째 결정

136:10.1 (1523.6) On the last day of this memorable isolation, before starting down the mountain to join John and his disciples, the Son of Man made his final decision. And this decision he communicated to the Personalized Adjuster in these words, “And in all other matters, as in these now of decision-record, I pledge you I will be subject to the will of my Father.” And when he had thus spoken, he journeyed down the mountain. And his face shone with the glory of spiritual victory and moral achievement. 이 기억할만한 고립의 마지막 날,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합류하러 산에서 내려가시기 전에, 사람의 아들은 그의 마지막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이 결정을 다음과 같은 말로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에게 통보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문제에서, 이제 이 여러 기록된-결정대로, 나는 나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것을 당신께 서약합니다.” 그렇게 말씀한 후,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영적 승리와 도덕적 성취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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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 Relation of the Eternal Son to the Universe 영원 아들과 우주의 관계

Paper 7

Relation of the Eternal Son to the Universe 영원 아들과 우주와의 관계

  1. The Spirit-Gravity Circuit 영-중력 회로
  2. The Administration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경영
  3. Relation of the Eternal Son to the Individual 개인과 영원 아들의 관계
  4. The Divine Perfection Plans 신적 완전 계획들
  5. The Spirit of Bestowal 증여(贈與)의 영
    Bestowals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증여들
    Bestowals of the Original Michael 기원 미가엘의 증여들
  6. The Paradise Sons of God 하나님의 천국 아들들
  7. The Supreme Revelation of the Father 아버지의 최극 계시

170628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I and the Father are one.

7:0.1 (81.1) THE Original Son is ever concerned with the execution of the spiritual aspects of the Father’s eternal purpose as it progressively unfolds in the phenomena of the evolving universes with their manifold groups of living beings. We do not fully comprehend this eternal plan, but the Paradise Son undoubtedly does. 기원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이, 다양한 집단들의 살아있는 존재들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 우주의 현상들 안에서 진보적으로 펼쳐짐에 따라, 이 목적의 영적인 면을 집행하는 데에 항상 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계획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지만, 천국 아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7:0.2 (81.2) The Son is like the Father in that he seeks to bestow everything possible of himself upon his co-ordinate Sons and upon their subordinate Sons. And the Son shares the Father’s self-distributive nature in the unstinted bestowal of himself upon the Infinite Spirit, their conjoint executive. 아들은 자신과 동등한 아들들과 그들의 종속 아들들에게 자신의 가능한 모든 것들을 증여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들의 공동 실행자인 무한 영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증여하는 점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아-분배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7:0.3 (81.3) As the upholder of spirit realities,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is the eternal counterpoise of the Isle of Paradise, which so magnificently upholds all things material. Thus is the First Source and Center forever revealed in the material beauty of the exquisite patterns of the central Isle and in the spiritual values of the supernal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영 실체들의 유지자로서의 둘째 근원이며 중심은, 물질 만물을 매우 훌륭하게 유지하는 천국 섬의 영원한 평형추입니다. 이와 같이,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중앙 섬의 절묘한 원형틀의 물질적 아름다움 안에서 그리고 영원 아들의 천상의 고유성이 지닌 영적 가치 안에서 언제까지나 계시됩니다.

170629 히1:3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7:0.4 (81.4) The Eternal Son is the actual upholder of the vast creation of spirit realities and spiritual beings. The spirit world is the habit, the personal conduct, of the Son, and the impersonal realities of spirit nature are always responsive to the will and purpose of the perfect personality of the Absolute Son. 영원 아들은 영 실체들과 영적 존재들이 거하는 광대한 창조의 실질적 유지자이십니다. 영 세계는 아들의 기질, 고유적 행위이며, 영 본성의 미(未)개인적 실체들은 절대 아들의 완전한 고유성의 뜻과 목적에 항상 응답합니다.

7:0.5 (81.5) The Son is not, however, personally responsible for the conduct of all spirit personalities. The will of the personal creature is relatively free and hence determines the actions of such volitional beings. Therefore the freewill spirit world is not always truly 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of the Eternal Son, even as nature on Urantia is not truly revelatory of the perfection and immutability of Paradise and Deity. But no matter what may characterize the freewill action of man or angel, the Son’s eternal grasp of the universal gravity control of all spirit realities continues as absolute. 그러나, 아들은 모든 영 고유성들의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고유적 창조물의 의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따라서 그러한 의지적 존재들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유란시아의 자연계가 천국과 신(神)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진정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듯이, 자유의지의 영 세계가 영원 아들의 성품을 언제나 진정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나 천사의 자유의지의 행동을 어떻게 특징을 짓든지, 모든 영 실체에 대한 아들의 우주 중력조정의 영원한 장악은 절대적으로 계속됩니다.

1. The Spirit-Gravity Circuit 영-중력 회로

170630 사40:11-12 11 그는 목자처럼 자기 양떼를 보살피시며 어린 양들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그 어미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12 누가 손으로 바닷물을 되어 보고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는가? 누가 땅의 티끌을 됫박에 담아 보았으며 누가 산을 저울에 달아 보았는가? 11 He tends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gathers the lambs in his arms and carries them close to his heart; he gently leads those that have young. 12 Who has measured the waters in the hollow of his hand, or with the breadth of his hand marked off the heavens? Who has held the dust of the earth in a basket, or weighed the mountains on the scales and the hills in a balance?

7:1.1 (81.6) Everything taught concerning the immanence of God, his omnipresence, omnipotence, and omniscience, is equally true of the Son in the spiritual domains. The pure and universal spirit gravity of all creation, this exclusively spiritual circuit, leads directly back to the person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on Paradise. He presides over the control and operation of that ever-present and unerring spiritual grasp of all true spirit values. Thus does the Eternal Son exercise absolute spiritual sovereignty. He literally holds all spirit realities and all spiritualized values, as it were, in the hollow of his hand. The control of universal spiritual gravity is universal spiritual sovereignty. 하나님의 내재(內在)성, 그의 편재(遍在), 전능, 그리고 전지에 대해 가르쳐 온 모든 것은, 영의 권역에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참됩니다. 모든 창조의 순수하고 우주적인 영 중력, 즉 배타적으로 영적인 이 회로는 천국에 있는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개인에게로 직접 되돌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는 참된 모든 영 가치들에 대해 항상-현존하며 정확한 영적 장악의 조정과 작용을 관장하십니다. 그래서 영원 아들은 절대적인 영적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모든 영 실체들과 영성화한 가치들을, 말하자면, 그의 손바닥 안에 쥐고 유지하고 계십니다. 우주의 영 중력에 대한 조정이 우주의 영적 주권입니다.

7:1.2 (82.1) This gravity control of spiritual things operates independently of time and space; therefore is spirit energy undiminished in transmission. Spirit gravity never suffers time delays, nor does it undergo space diminution. It does not decrease in accordance with the square of the distance of its transmission; the circuits of pure spirit power are not retarded by the mass of the material creation. And this transcendence of time and space by pure spirit energies is inherent in the absoluteness of the Son; it is not due to the interposition of the antigravity forc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 중력 조정은 시간과 공간에 독립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영 에너지는 전달과정에서 줄어들지 않습니다. 영 중력은 시간 지연을 당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또한 그것은 공간의 감축도 겪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전달되는 거리의 제곱에 따라 줄어들지 않으며, 순수한 영 권능의 회로들은 물질적 창조의 질량에 의해 지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영 에너지로서의 시간과 공간의 이러한 초월은 영원 아들의 절대성 안에서 선천적입니다. 그것은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반(反)중력(重力) 힘의 간섭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7:1.3 (82.2) Spirit realities respond to the drawing power of the center of spiritual gravity in accordance with their qualitative value, their actual degree of spirit nature. Spirit substance (quality) is just as responsive to spirit gravity as the organized energy of physical matter (quantity) is responsive to physical gravity. Spiritual values and spirit forces are real. From the viewpoint of personality, spirit is the soul of creation; matter is the shadowy physical body. 영 실체들은 그들의 질적 가치, 즉 영 본성의 실제적 등급에 따라서 영적 중력 중심이 당기는 힘에 응답합니다. 물리적 물질(양-量)의 조직된 에너지가 물리적 중력에 응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 본체(본질)는 영 중력에 응답합니다. 영적 가치들과 영 힘들은 실제적입니다. 고유성의 관점에서 보면, 영은 창조의 혼이며; 물질은 그림자와 같은 물리적 몸체입니다.

170707 골1:17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이 있기 전에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He is before all things, and 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

7:1.4 (82.3) The reactions and fluctuations of spirit gravity are ever true to the content of spiritual values, the qualitative spiritual status of an individual or a world. This drawing power is instantly responsive to the inter- and intraspirit values of any universe situation or planetary condition. Every time a spiritual reality actualizes in the universes, this change necessitates the immediate and instantaneous readjustment of spirit gravity. Such a new spirit is actually a part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and just as certainly as mortal man becomes a spiritized being, he will attain the spiritual Son, the center and source of spirit gravity. 영 중력의 반응들과 동요들은 한 개별존재나 혹은 한 세계의 영적 가치들의 내용과 질(質)적 영적 지위에 대해 언제든지 똑같이 일치합니다. 이 당기는 권능은 모든 우주 상황 또는 행성 조건 아래에서의 상호-그리고 내부-영 가치들에 대해 즉시 응답합니다. 영적 실체가 우주 안에서 사실화될 때마다, 이러한 변화는 영 중력의 재(再)조절을 즉시 순간적으로 필요하게 합니다. 그러한 새로운 영은 실제로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필사 인간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존재가 되는 것과 똑같이, 그는 영 중력의 중심이자 근원인, 영적 아들에 도달할 것입니다.

7:1.5 (82.4) The Son’s spiritual drawing power is inherent to a lesser degree in many Paradise orders of sonship. For there do exist within the absolute spirit-gravity circuit those local systems of spiritual attraction that function in the lesser units of creation. Such subabsolute focalizations of spirit gravity are a part of the divinity of the Creator personalities of time and space and are correlated with the emerging experiential overcontrol of the Supreme Being. 아들의 영적으로 당기는 권능은, 많은 아들관계의 천국 계층들 안에서 점차 적은 정도에 있어서, 선천적입니다. 이는 점차로 더 적은 창조 단위들에서 기능하는 영적 끌어당김이 있는 그 지역 체계들이, 절대 영-중력 순환회로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 중력의 이러한 하위-절대 초점화 구현들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주 고유성들이 지닌 신성의 일부분이며, 최극 존재의 창발하는 체험적 총괄과 상호 관련되어 있습니다.

7:1.6 (82.5) Spirit-gravity pull and response thereto operate not only on the universe as a whole but also even between individuals and groups of individuals. There is a spiritual cohesiveness among the spiritual and spiritized personalities of any world, race, nation, or believing group of individuals. There is a direct attractiveness of a spirit nature between spiritually minded persons of like tastes and longings. The term kindred spirits is not wholly a figure of speech. 영-중력의 당김과 응답은 우주들에서 전체로서 만이 아니라 개별존재들과 개별존재들의 집단사이에서도 작용합니다. 어느 세계, 인종, 국가, 또는 개별존재들의 신앙 집단에도, 영적인 그리고 영으로 된 고유성들 가운데에는 영적 응집력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비슷한 기호나 열망의 마음을 가진 개인들 사이에는 영 본성의 직접적인 끌어당김이 있습니다. ‘유사(類似) 영들’이라는 단어는 전적으로 비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170711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하겠다. But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to myself.”

7:1.7 (82.6) Like the material gravity of Paradise, the spiritual gravity of the Eternal Son is absolute. Sin and rebellion may interfere with the operation of local universe circuits, but nothing can suspend the spirit gravity of the Eternal Son. The Lucifer rebellion produced many changes in your system of inhabited worlds and on Urantia, but we do not observe that the resultant spiritual quarantine of your planet in the least affected the presence and function of either the omnipresent spirit of the Eternal Son or the associated spirit-gravity circuit. 천국의 물질적 중력과 마찬가지로, 영원 아들의 영적 중력도 절대적입니다. 죄와 반란이 지역우주 순환회로들의 작용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영원 아들의 영 중력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루시퍼의 반란은 거주세계들로 이루어진 너희 체계와 지구(유란시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발생한 너희 행성의 영적 격리가 영원 아들의 편재(遍在)하는 영 또는 관련된 영-중력 순환회로의 현존과 기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지 못합니다.

7:1.8 (82.7) All reactions of the spirit-gravity circuit of the grand universe are predictable. We recognize all actions and reactions of the omnipresent spirit of the Eternal Son and find them to be dependable. In accordance with well-known laws, we can and do measure spiritual gravity just as man attempts to compute the workings of finite physical gravity. There is an unvarying response of the Son’s spirit to all spirit things, beings, and persons, and this response is always in accordance with the degree of actuality (the qualitative degree of reality) of all such spiritual values. 대우주의 영-중력 순환회로의 모든 반응들은 예측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영원 아들의 편재(遍在)하는 영의 모든 활동과 반응을 인식하며, 그것들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람이 유한한 물리적 중력의 작용을 계산해 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잘-알려진 법칙들에 따라, 우리도 영적 중력을 측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 사물들과 존재들 그리고 개인들에 대해서는 아들의 영의 변함없는 응답이 있으며, 이 응답은 언제나 그러한 모든 영적 가치들의 실제성의 정도(실체의 질적인 정도)에 따르고 있습니다.

7:1.9 (83.1) But alongside this very dependable and predictable function of the spiritual presence of the Eternal Son, there are encountered phenomena which are not so predictable in their reactions. Such phenomena probably indicate the co-ordinate action of the Deity Absolute in the realms of emerging spiritual potentials. We know that the spirit presence of the Eternal Son is the influence of a majestic and infinite personality, but we hardly regard the reactions associated with the conjectured performances of the Deity Absolute as personal. 그러나 영원 아들의 영적 현존의 바로 이러한 신뢰할 만하고 예측 가능한 기능 이외에, 그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들은 아마도 창발하는 영적 잠재 영역에서의 신(神) 절대자의 합동 활동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영원 아들의 영 현존이 장엄하고 무한한 고유성의 영향임을 알지만, 개인으로서의 신(神) 절대자의 추측된 행위와 연합된 반응이라고는 거의 여길 수 없습니다.

170712 렘31:3 그때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으므로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희를 인도하였다.’ 하고 말하였다. The LORD appeared to us in the past, saying: “I have loved you with an everlasting love; I have drawn you with loving-kindness.

7:1.10 (83.2) Viewed from the personality standpoint and by persons, the Eternal Son and the Deity Absolute appear to be related in the following way: The Eternal Son dominates the realm of actual spiritual values, whereas the Deity Absolute seems to pervade the vast domain of potential spirit values. All actual value of spirit nature finds lodgment in the gravity grasp of the Eternal Son but, if potential, then apparently in the presence of the Deity Absolute. 고유성 관점과 개인들로서 본다면, 영원 아들과 신(神) 절대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원 아들이 실질적인 영적 가치들의 권역을 지배하는 반면, 신(神) 절대자는 잠재적 영 가치들의 광대한 권역에 가득 퍼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 본성을 가진 모든 실제적 가치는 영원 아들의 중력 장악 안에서 머물러 있지만, 잠재적 가치라면, 겉으로 보기에 신(神) 절대자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입니다.

7:1.11 (83.3) Spirit seems to emerge from the potentials of the Deity Absolute; evolving spirit finds correlation in the experiential and incomplete grasps of the Supreme and the Ultimate; spirit eventually finds final destiny in the absolute grasp of the spiritual gravity of the Eternal Son. This appears to be the cycle of experiential spirit, but existential spirit is inherent in the infinity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영은 신(神) 절대자의 잠재로부터 창발하는 것으로 보이며; 진화하는 영은 최극자와 궁극자의 체험적이고 미완성의 장악 속에서 상호관련성을 발견하며; 영은 결국에는 영원 아들의 영적 중력의 절대 장악 속에서 최종 운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체험적 영의 순환주기로 보이지만, 존재적 영은 둘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 안에 본래부터 있습니다.

2. The Administration of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경영

170713 롬11:36 만물이 다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생동하며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7:2.1 (83.4) On Paradise the presence and personal activity of the Original Son is profound, absolute in the spiritual sense. As we pass outward from Paradise through Havona and into the realms of the seven superuniverses, we detect less and less of the personal activity of the Eternal Son. In the post-Havona universes the presence of the Eternal Son is personalized in the Paradise Sons, conditioned by the experiential realities of the Supreme and the Ultimate, and co-ordinated with the unlimited spirit potential of the Deity Absolute. 천국에서는 기원 아들의 현존과 그의 개인적 활동이 심오하며, 영적 의미에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하보나를 거쳐 일곱 초우주들의 영역 안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영원 아들의 개인적 활동에 대해 점점 덜 감지하게 됩니다. 하보나-이후 우주들에서는 영원 아들의 현존은, 최극자와 궁극자의 체험적 실체들에 의해 조건 지워지며, 또한 신(神) 절대자의 무제한적 영 잠재와 합동을 이루면서, 천국 아들들 안에서 개인성으로 구현됩니다.

7:2.2 (83.5) In the central universe the personal activity of the Original Son is discernible in the exquisite spiritual harmony of the eternal creation. Havona is so marvelously perfect that the spiritual status and the energy states of this pattern universe are in perfect and perpetual balance. 중앙우주에서 기원적 아들의 개인적 활동은 영원한 창조의 절묘한 영적 조화 안에서 식별됩니다. 하보나는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이 원형틀 우주의 영적 지위와 에너지 상태는 완전하고 영속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7:2.3 (83.6) In the superuniverses the Son is not personally present or resident; in these creations he maintains only a superpersonal representation. These spirit manifestations of the Son are not personal; they are not in the personality circuit of the Universal Father. We know of no better term to use than to designate them superpersonalities; and they are finite beings; they are neither absonite nor absolute. 초우주에서는 아들이 직접 현존하거나 거주하지 않으며; 이러한 창조계들에서 그는 단지 초(超)개인적 표상(表象)을 유지하실 뿐입니다. 아들의 이러한 영 현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우주 아버지의 고유성 순환 회로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부르는데 초(超)고유성들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용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유한한 존재들이며; 아(亞)절대도 아니고 절대도 아닙니다.

7:2.4 (83.7) The administration of the Eternal Son in the superuniverses, being exclusively spiritual and superpersonal, is not discernible by creature personalities. Nonetheless, the all-pervading spiritual urge of the Son’s personal influence is encountered in every phase of the activities of all sectors of the domains of the Ancients of Days. In the local universes, however, we observe the Eternal Son personally present in the persons of the Paradise Sons. Here the infinite Son spiritually and creatively functions in the persons of the majestic corps of the co-ordinate Creator Sons. 초우주들 안에서 영원 아들의 행정은, 배타적으로 영적이고 초(超)고유적이며, 창조물 고유성들에 의해 식별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개인적 영향력의, 전체에-스며드는 영적 충동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역에 속하는 모든 구역들의 모든 활동 위상 속에서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역우주에서는, 영원 아들이 천국 아들들의 개인들 속에 직접 현존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여기에서 그 무한 아들은 합동하는 창조주 아들들의 장엄한 무리단의 개인들 속에서 영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할을 하십니다.

3. Relation of the Eternal Son to the Individual 영원 아들과 개인의 관계

170718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7:3.1 (84.1) In the local universe ascent the mortals of time look to the Creator Son as the personal representative of the Eternal Son. But when they begin the ascent of the superuniverse training regime, the pilgrims of time increasingly detect the supernal presence of the inspiring spirit of the Eternal Son, and they are able to profit by the intake of this ministry of spiritual energization. In Havona the ascenders become still more conscious of the loving embrace of the all-pervading spirit of the Original Son. At no stage of the entire mortal ascension does the spirit of the Eternal Son indwell the mind or soul of the pilgrim of time, but his beneficence is ever near and always concerned with the welfare and spiritual security of the advancing children of time. 지역우주 상승에 있어서 시간의 필사자들은 창조자 아들을 영원 아들의 개인적 대표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초우주 훈련 제도의 상승을 시작하게 되면, 시간의 순례자들은 영원 아들의 영감을 주는 영의, 숭고한 현존을 점점 더 감지하게 되며, 그들은 이러한 영적 에너지 주입의 돌봄을 받아들임으로써 혜택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보나에서 그 상승자들은 전체에-스며드는 기원 아들의 영의, 사랑으로 감싼 포옹을 훨씬 많이 의식하게 됩니다. 전체 필사자 상승의 어떤 단계에서도 영원 아들의 영은 시간 순례자의 마음이나 혼 안에 내주하지 않으나, 그의 은혜 베푸심은 늘 곁에 있으며, 진보하는 시간 자녀들의 복지와 영적 보호에 항상 관련되어 있습니다.

7:3.2 (84.2) The spiritual-gravity pull of the Eternal Son constitutes the inherent secret of the Paradise ascension of surviving human souls. All genuine spirit values and all bona fide spiritualized individuals are held within the unfailing grasp of the spiritual gravity of the Eternal Son. The mortal mind, for example, initiates its career as a material mechanism and is eventually mustered into the Corps of the Finality as a well-nigh perfected spirit existence, becoming progressively less subject to material gravity and correspondingly more responsive to the inward pulling urge of spirit gravity during this entire experience. The spirit-gravity circuit literally pulls the soul of man Paradiseward. 영원 아들의 영-중력 끌어당김은 생존하는 인간 혼들의 천국 상승에 본래부터 있는 비밀입니다. 모든 진정한 영 가치들과 진실로 영성화된 개별존재들은 영원 아들의 영 중력의 확실한 장악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필사자 마음은 물질적 기능구조로서 그의 생애를 시작하고, 결국에는 거의 완전한 영 존재로서 최종의 무리단에 소집되는데, 이 전체 체험 동안 점차적으로 물질중력에 덜 지배되고 이에 대응하여 영 중력의 안쪽으로 당기는 충동에 더욱 응답합니다. 영-중력 순환회로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혼을 천국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7:3.3 (84.3) The spirit-gravity circuit is the basic channel for transmitting the genuine prayers of the believing human heart from the level of human consciousness to the actual consciousness of Deity. That which represents true spiritual value in your petitions will be seized by the universal circuit of spirit gravity and will pass immediately and simultaneously to all divine personalities concerned. Each will occupy himself with that which belongs to his personal province. Therefore, in your practical religious experience, it is immaterial whether, in addressing your supplications, you visualize the Creator Son of your local universe or the Eternal Son at the center of all things. 영-중력 순환회로는 믿음이 있는 인간 심정의 진정한 기도를 인간 의식의 차원에서 신(神)의 실재적 의식으로 전달하는 기본적인 통로입니다. 너희의 청원들 속에 있는 참된 영적 가치를 나타내는 그것은, 영 중력의 우주적 순환회로에 의해 포착될 것이고, 관계된 모든 신적 고유성들에게 즉각적이고 동시에 전달될 것입니다. 각자는 그의 개인적 분야에 속한 것을 맡아 스스로 전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실천적인 종교 체험에 있어서, 너희가 탄원을 드릴 때, 너희 지역우주의 창조자 아들을 떠 올리든지 아니면 만물의 중심에 계시는 영원 아들을 떠 올리든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170719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Though I speak with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and have not charity, I am become as sounding brass, or a tinkling cymbal(KJV).

7:3.4 (84.4) The discriminative operation of the spirit-gravity circuit might possibly be compared to the functions of the neural circuits in the material human body: Sensations travel inward over the neural paths; some are detained and responded to by the lower automatic spinal centers; others pass on to the less automatic but habit-trained centers of the lower brain, while the most important and vital incoming messages flash by these subordinate centers and are immediately registered in the highest levels of human consciousness. 영-중력 순환회로의 차별적 기능은 물질적 인간 몸 안에 있는 신경 순환회로들의 기능과 아마도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감각작용들은 신경 경로들을 통해 내부로 이동합니다. 어떤 것들은 하부의 자율적 척추 중심에 의해 억류되다가 응답합니다. 다른 것들은 덜 자율적이지만 습관적으로 훈련된, 하부의 뇌 중심에 전달되며, 한편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유입 메시지들은 이들 종속적인 중심들을 섬광처럼 지나, 즉각적으로 인간 의식의 최고 차원에 등록됩니다.

7:3.5 (84.5) But how much more perfect is the superb technique of the spiritual world! If anything originates in your consciousness that is fraught with supreme spiritual value, when once you give it expression, no power in the universe can prevent its flashing directly to the Absolute Spirit Personality of all creation. 그러나 영적 세계의 뛰어난 기법은 얼마나 더 완전한지 모른다! 최극의 영적 가치를 담은 어떤 것이든지 너희의 의식 속에 발생하고, 일단 네가 그것을 표현하면, 모든 창조의 절대 영(靈) 고유성에게 그것이 직접 번개처럼 전달되는 것을 막을 권능이 우주 안에는 전혀 없습니다.

7:3.6 (84.6) Conversely, if your supplications are purely material and wholly self-centered, there exists no plan whereby such unworthy prayers can find lodgment in the spirit circuit of the Eternal Son. The content of any petition which is not “spirit indited” can find no place in the universal spiritual circuit; such purely selfish and material requests fall dead; they do not ascend in the circuits of true spirit values. Such words are as “sounding brass and a tinkling cymbal.” 반대로, 만일 너희가 간청한 것들이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전적으로 자아-중심적이라면, 그러한 무가치한 기도들은 영원한 아들의 영 순환회로 안에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계획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쓴” 것이 아닌 어떤 청원의 내용이든지 우주적인 영적 순환회로 안에서 머물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요청들은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은 참된 영 가치들의 순환회로들 속에서 상승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말들은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7:3.7 (85.1) It is the motivating thought, the spiritual content, that validates the mortal supplication. Words are valueless. 필사자의 탄원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동기가 되는 생각, 영적 내용입니다. 말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4. The Divine Perfection Plans 신적 완전 계획

170720 창1:26 그리고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KJV).

7:4.1 (85.2) The Eternal Son is in everlasting liaison with the Father in the successful prosecution of the divine plan of progress: the universal plan for the creation, evolution, ascension, and perfection of will creatures. And, in divine faithfulness, the Son is the eternal equal of the Father. 영원한 아들은 신적 진보의 계획: 의지 창조물의 창조, 진화, 상승 그리고 완전을 위한 우주 계획의 성공적인 실행에서, 아버지와 영속적인 접촉을 하십니다. 그리고 신적 신실함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영원히 동등하십니다.

7:4.2 (85.3) The Father and his Son are as one in the formulation and prosecution of this gigantic attainment plan for advancing the material beings of time to the perfection of eternity. This project for the spiritual elevation of the ascendant souls of space is a joint creation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y are, with the co-operation of the Infinite Spirit, engaged in associative execution of their divine purpose.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영원함의 완전을 향하여, 시간의 물질적 존재들을 전진하게 하는 이 거대한 달성 계획의 조성과 실행에서 하나로 계십니다. 공간의 상승하는 혼들의 영적 고양(高揚)을 위한 이 기획(企劃)은 아버지와 아들 공동의 창조이며, 그들은 무한 영의 협력과 함께 그들의 신적 목적의 관련된 집행에 몰두해 계십니다.

7:4.3 (85.4) This divine plan of perfection attainment embraces three unique, though marvelously correlated, enterprises of universal adventure: 완전성 달성의 이 신적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관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우주 모험의 세 가지 사업들을 포함합니다.

7:4.4 (85.5) 1. The Plan of Progressive Attainment. This is the Universal Father’s plan of evolutionary ascension, a program unreservedly accepted by the Eternal Son when he concurred in the Father’s proposal, “Let us make mortal creatures in our own image.” This provision for upstepping the creatures of time involves the Father’s bestowal of the Thought Adjusters and the endowing of material creatures with the prerogatives of personality. 1. 진보적 달성 계획. 이것은 진화적 상승에 대한 우주 아버지의 계획으로,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필사 창조물들을 만들자.”라는 아버지의 제안에 영원한 아들이 찬성하였을 때 그에 의해 기탄없이 받아들여진 프로그램입니다. 시간의 창조물들을 올라가도록 하려는 이러한 준비 속에는 생각 조절자들을 아버지가 증여하는 것과 고유성이라는 특권을 물질적 창조물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70721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7:4.5 (85.6) 2. The Bestowal Plan. The next universal plan is the great Father-revelation enterprise of the Eternal Son and his co-ordinate Sons. This is the proposal of the Eternal Son and consists of his bestowal of the Sons of God upon the evolutionary creations, there to personalize and factualize, to incarnate and make real,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mercy of the Son to the creatures of all universes. Inherent in the bestowal plan, and as a provisional feature of this ministration of love, the Paradise Sons act as rehabilitators of that which misguided creature will has placed in spiritual jeopardy. Whenever and wherever there occurs a delay in the functioning of the attainment plan, if rebellion, perchance, should mar or complicate this enterprise, then do the emergency provisions of the bestowal plan become active forthwith. The Paradise Sons stand pledged and ready to function as retrievers, to go into the very realms of rebellion and there restore the spiritual status of the spheres. And such a heroic service a co-ordinate Creator Son did perform on Urantia in connection with his experiential bestowal career of sovereignty acquirement. 2. 증여 계획. 그 다음의 우주적 계획은 영원 아들과 그의 협동 아들들의 위대한 아버지-계시 사업입니다. 이것은 영원 아들이 제안한 것이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진화 창조계에 증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고유성을 구현하고 사실화하며,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모든 우주들의 창조물들에게 육신화하고 실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증여 계획에 본래부터 있는, 그리고 이 사랑의 섬김의 일시적 모습으로서 천국 아들들은, 잘못 인도된 창조물의 의지가 영적 위험 속에 처한 것의 복구자로서 활동하십니다. 달성 계획의 기능 속에 지연이 발생할 때는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반역이 이 사업을 우연히 망치거나 복잡하게 만든다면, 증여 계획의 긴급 조치가 즉시 시행됩니다. 천국 아들들은 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 영역 속으로 가서, 거기에서 그 구체들의 영적 지위를 복구하는 구출자로 활약할 것을 서약하며 준비를 갖춥니다. 그리고 주권을 얻은 체험적 증여 생애와 관련하여, 한 협동 창조자 아들이 지구(유란시아)에서 그러한 영웅적 봉사를 수행했습니다.

7:4.6 (85.7) 3. The Plan of Mercy Ministry. When the attainment plan and the bestowal plan had been formulated and proclaimed, alone and of himself, the Infinite Spirit projected and put in operation the tremendous and universal enterprise of mercy ministry. This is the service so essential to the practical and effective operation of both the attainment and the bestowal undertakings, and the spiritual personalit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all partake of the spirit of mercy ministry which is so much a part of the nature of the Third Person of Deity. Not only in creation but also in administration, the Infinite Spirit functions truly and literally as the conjoint executive of the Father and the Son. 3. 자비 돌봄의 계획. 달성계획과 증여계획이 공식화되고 선포된 후에, 무한 영은 홀로 그리고 스스로, 자비 돌봄의 거대하고도 우주적인 사업을 기획(企劃)하고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달성사업과 증여사업 둘 모두에 대한 실천적이고 효력적인 작용에 매우 필수적인 봉사이며, 셋째근원이며 중심의 영적 고유성들은 모두 그렇게 신(神)의 셋째 개인 본성의 일부인, 자비 돌봄의 영과 함께 합니다. 창조뿐만 아니라 관리-행정에 있어서도, 무한 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집행자로서 진실 되게 그리고 문자대로 기능하십니다.

7:4.7 (86.1) The Eternal Son is the personal trustee, the divine custodian, of the Father’s universal plan of creature ascension. Having promulgated the universal mandate, “Be you perfect, even as I am perfect,” the Father intrusted the execution of this tremendous undertaking to the Eternal Son; and the Eternal Son shares the fostering of this supernal enterprise with his divine co-ordinate, the Infinite Spirit. Thus do the Deities effectively co-operate in the work of creation, control, evolution, revelation, and ministration — and if required, in restoration and rehabilitation. 영원 아들은 창조물 상승에 대한 아버지의 우주 계획의 개인적 수탁자(受託者)요, 신적 보관자이십니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는 우주적 명령을 공표한 후에, 아버지는 영원 아들에게 이 거대한 사업의 실행을 맡겼으며; 영원 아들은 자신의 신적 협조자인 무한 영과 함께 이 숭고한 사업을 육성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神)들은 창조, 조정, 진화, 계시, 그리고 보살핌에서─필요한 경우에는 복구와 재건의 경우에도─, 효과적으로 협동하십니다.

5. The Spirit of Bestowal 증여의 영

170725 요14:6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7:5.1 (86.2) The Eternal Son without reservation joined with the Universal Father in broadcasting that tremendous injunction to all creation: “Be you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avona is perfect.” And ever since, that invitation-command has motivated all the survival plans and the bestowal projects of the Eternal Son and his vast family of co-ordinate and associated Sons. And in these very bestowals the Sons of God have become to all evolutionary creature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하보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는 엄청난 명령을 모든 창조계에 방송될 때,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와 아무 조건 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계속, 그 초청-명령은 영원 아들과 그의 동등하게 연합하는 아들들의 광대한 가족의 생존 계획과 증여 기획 모두에 동기를 부여해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증여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든 진화 창조물들에게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이 되어 오셨습니다.

7:5.2 (86.3) The Eternal Son cannot contact directly with human beings as does the Father through the gift of the prepersonal Thought Adjusters, but the Eternal Son does draw near to created personalities by a series of downstepping gradations of divine sonship until he is enabled to stand in man’s presence and, at times, as man himself. 영원 아들은 아버지가 전(前)고유적 생각 조절자라는 선물을 통하여 하는 것처럼 직접 인간 존재들과 접촉하실 수 없지만, 영원 아들은 그가 인간의 현존 속에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 자체로서 나타나게 될 수 있을 때까지, 신적 아들관계의 일련의 단계적으로 낮아지는 변화에 의해, 창조된 고유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7:5.3 (86.4) The purely personal nature of the Eternal Son is incapable of fragmentation. The Eternal Son ministers as a spiritual influence or as a person, never otherwise. The Son finds it impossible to become a part of creature experience in the sense that the Father-Adjuster participates therein, but the Eternal Son compensates this limitation by the technique of bestowal. What the experience of fragmented entities means to the Universal Father, the incarnation experiences of the Paradise Sons mean to the Eternal Son. 영원 아들의 순수한 개인적 본성은 단편화 될 수 없습니다. 영원 아들은 영적 영향력으로서 또는 어떤 개인으로서 돌볼 수 있지만, 다르게는 결코 하실 수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조율자가 거기에 참여하는 그 의미에서는, 창조물 체험의 일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지만 영원 아들은 증여의 기법에 의해 이 한계를 보충합니다. 단편화된 실재들의 체험이 우주 아버지에게 주는 의미는, 천국 아들들의 육신화 체험이 영원 아들에게 주는 의미와 같습니다.

170726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7:5.4 (86.5) The Eternal Son comes not to mortal man as the divine will, the Thought Adjuster indwelling the human mind, but the Eternal Son did come to mortal man on Urantia when the divine personality of his Son, Michael of Nebadon, incarnated in the human nature of Jesus of Nazareth. To share the experience of created personalities, the Paradise Sons of God must assume the very natures of such creatures and incarnate their divine personalities as the actual creatures themselves. Incarnation, the secret of Sonarington, is the technique of the Son’s escape from the otherwise all-encompassing fetters of personality absolutism. 영원 아들은 신적 뜻, 인간 마음속에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로서 필사 사람에게 오시지 않지만, 영원 아들은 그의 아들의 신적 고유성, 네바돈의 미가엘이 나사렛의 예수의 인간 본성으로 육신화 되셨을 때 지구(유란시아)에 있는 필사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창조된 고유성들의 체험을 공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천국 아들들은 그러한 창조물들의 바로 그 본성을 취하고 실재적 창조물 자신들로서 그들의 신적 고유성들을 육신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들별의 비밀인 육신화는, 그렇지 않다면, 고유성 절대론이라는 만물을-둘러싸는 족쇄가 되는 그것에서 아들이 벗어나는 기법입니다.

7:5.5 (86.6) Long, long ago the Eternal Son bestowed himself upon each of the circuits of the central creation for the enlightenment and advancement of all the inhabitants and pilgrims of Havona, including the ascending pilgrims of time. On none of these seven bestowals did he function as either an ascender or a Havoner. He existed as himself. His experience was unique; it was not with or as a human or other pilgrim but in some way associative in the superpersonal sense. 아주 먼 옛날, 영원 아들은 상승하는 시간 순례자를 포함하여 하보나의 모든 거주민과 순례자들을 깨우치고 전진하도록 중앙 창조의 순환회로 각각에 자신을 증여하셨습니다. 일곱 번의 이 증여들 중 어느 경우에도 그는 상승자 또는 하보나 시민으로서 기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셨습니다. 그의 체험은 독특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나 다른 순례자와 함께 또는 그러한 존재로서가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초(超)개인적 의미에서 연관적이었습니다.

7:5.6 (86.7) Neither did he pass through the rest that intervenes between the inner Havona circuit and the shores of Paradise. It is not possible for him, an absolute being, to suspend consciousness of personality, for in him center all lines of spiritual gravity. And during the times of these bestowals the central Paradise lodgment of spiritual luminosity was undimmed, and the Son’s grasp of universal spirit gravity was undiminished. 뿐만 아니라 그는 내부 하보나 순환회로와 천국의 해안 사이에 끼어 있는 휴지(休止) 상태를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고유성의 의식이 중지되는 일은 절대 존재인 그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그분 안에 모든 계통의 영적 중력이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증여기간 동안, 영적 광명의 중앙 천국 거점은 빛을 잃지 않았고, 우주 영 중력에 대한 아들의 장악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70727 빌2:7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7:5.7 (87.1) The bestowals of the Eternal Son in Havona are not within the scope of human imagination; they were transcendental. He added to the experience of all Havona then and subsequently, but we do not know whether he added to the supposed experiential capacity of his existential nature. That would fall within the bestowal mystery of the Paradise Sons. We do, however, believe that whatever the Eternal Son acquired on these bestowal missions, he has ever since retained; but we do not know what it is. 하보나에서 영원 아들의 증여들은 인간이 상상하는 범위 안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초월적입니다. 그가 그 당시와 그 이후에, 전체 하보나의 체험에 포함시켰지만, 우리는 그가 그의 실존적 본성이 지녔다고 예상되는 체험적 수용능력이 포함되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 아들들의 증여 신비 속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 아들이 이 증여 임무들에서 무엇을 획득하였든지 우리는 그가 그 후로 영원히 보유하신다고 믿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7:5.8 (87.2) Whatever our difficulty in comprehending the bestowals of the Second Person of Deity, we do comprehend the Havona bestowal of a Son of the Eternal Son, who literally passed through the circuits of the central universe and actually shared those experiences which constitute an ascender’s preparation for Deity attainment. This was the original Michael, the first-born Creator Son, and he passed through the life experiences of the ascending pilgrims from circuit to circuit, personally journeying a stage of each circle with them in the days of Grandfanda, the first of all mortals to attain Havona. 신(神)의 둘째 개인의 증여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의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는 영원 아들의 한 아들의 하보나 증여를 이해하는데, 그는 중앙우주의 순환회로들을 문자적으로 통과하였고 신(神) 달성을 위한 상승자의 준비를 구성하는 그 체험들을 실재적으로 공유하였습니다. 이 분이 최초-탄생 창조자 아들인 기원적 미가엘이었으며, 그는 그랜드판다, 즉 모든 필사자들 중에서 하보나에 처음으로 도달한 자의 시대에 그들과 함께 각 순환계의 단계를 직접 여행하면서, 이 순환회로에서 다음 순환회로로 상승하는 순례자들의 일생 체험을 두루 거쳐 통과하셨습니다.

7:5.9 (87.3) Whatever else this original Michael revealed, he made the transcendent bestowal of the Original Mother Son real to the creatures of Havona. So real, that forevermore each pilgrim of time who labors in the adventure of making the Havona circuits is cheered and strengthened by the certain knowledge that the Eternal Son of God seven times abdicated the power and glory of Paradise to participate in the experiences of the time-space pilgrims on the seven circuits of progressive Havona attainment. 이 기원적 미가엘이 무엇을 계시하셨든지, 그는 기원적 어머니 아들의 초월 증여가 하보나의 창조물들에게 실제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 아들은 점진적으로 하보나에 도달하는 일곱 순환회로들에서 시간-공간 순례자들의 체험에 참여하기 위해 천국의 권능과 영광을 일곱 번이나 버렸으며, 이것을 분명하게 앎으로써, 그 증여가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하보나 순환회로를 순회하는 모험여행에서 수고하는 시간 순례자 각자는 언제까지나 늘 기운을 내고 힘을 얻게 됩니다.

170728 요14:9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Jesus answered: “Don’t you know me, Philip, even after I have been among you such a long time? Anyon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How can you say, ‘Show us the Father’?

7:5.10 (87.4) The Eternal Son is the exemplary inspiration for all the Sons of God in their ministrations of bestowal throughout the universes of time and space. The co-ordinate Creator Sons and the associate Magisterial Sons, together with other unrevealed orders of sonship, all partake of this wonderful willingness to bestow themselves upon the varied orders of creature life and as the creatures themselves. Therefore, in spirit and because of kinship of nature as well as fact of origin, it becomes true that in the bestowal of each Son of God upon the worlds of space, in and through and by these bestowals, the Eternal Son has bestowed himself upon the intelligent will creatures of the universes. 영원 아들은 시간과 공간의 우주에 두루, 모든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들의 증여 보살핌에서 본보기로서의 영감(靈感)이 됩니다. 동등한 창조자 아들들과 연합하는 집정관 아들들은, 계시되지 않은 아들관계의 다른 계층들과 함께, 창조물 삶의 다양한 계층들과 자신들이 창조물이 되어서 자신을 증여하려는 이 경이로운 자발성을 모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그리고 기원의 사실들뿐만 아니라 본성에서의 친족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각자가 공간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주는 증여에 있어서, 이들 증여 안에서, 증여를 통하여 그리고 증여에 의해서, 영원 아들이 우주의 지능적 의지 창조물들에게 자신을 증여해 왔다는 것이 참으로 진실합니다.

7:5.11 (87.5) In spirit and nature, if not in all attributes, each Paradise Son is a divinely perfect portraiture of the Original Son. It is literally true, whosoever has seen a Paradise Son has seen the Eternal Son of God. 모든 속성에 있어서는 아닐지라도, 영과 본성에 있어서, 각 천국 아들은 기원적 아들에 대해 신적으로 완전한 초상화입니다. 천국 아들을 본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이미 본 것이라는 말은 정말로 옳습니다.

6. The Paradise Sons of God 하나님의 천국 아들들

170808 욥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When the morning stars sang together, and all the sons of God shouted for joy?

7:6.1 (87.6) The lack of a knowledge of the multiple Sons of God is a source of great confusion on Urantia. And this ignorance persists in the face of such statements as the record of a conclave of these divine personalities: “When the Sons of God proclaimed joy, and all of the Morning Stars sang together.” Every millennium of sector standard time the various orders of the divine Sons forgather for their periodic conclaves.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수(多數) 있다는 지식의 부족함이 지구(유란시아)에서의 큰 혼돈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함은 이 신적 고유성들의 비밀회의에 대한 기록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쁨을 선포하였고, 모든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였다.”는 말씀을 대면할 때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구역 표준시간으로 매 천년마다, 다양한 계층의 신적 아들들이 그들의 주기적 비밀회의를 위해 함께 모입니다.

7:6.2 (87.7) The Eternal Son is the personal source of the adorable attributes of mercy and service which so abundantly characterize all orders of the descending Sons of God as they function throughout creation. All the divine nature, if not all the infinity of attributes, the Eternal Son unfailingly transmits to the Paradise Sons who go out from the eternal Isle to reveal his divine character to the universe of universes. 영원 아들은 하강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든 계층이 창조에 두루 그들이 기능하듯이 그들을 그토록 풍성하게 특징짓는 자비와 봉사의 찬미할만한 속성들의 개인적 근원입니다. 영원 아들은, 속성의 무한함 전체는 아니더라도, 모든 신적 본성을, 그의 신적 성품을 계시하기 위하여 영원한 섬으로부터 우주들의 우주에게로 내보내는 천국 아들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합니다.

7:6.3 (88.1) The Original and Eternal Son is the offspring-person of the “first” completed and infinite thought of the Universal Father. Every time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Eternal Son jointly project a new, original, identical, unique, and absolute personal thought, that very instant this creative idea is perfectly and finally personalized in the being and personality of a new and original Creator Son. In spirit nature, divine wisdom, and co-ordinate creative power, these Creator Sons are potentially equal with God the Father and God the Son. 기원적이며 영원 아들은”최초로” 완전하고 무한한 사고를 가진 우주 아버지의 후손-개인이십니다. 우주 아버지와 영원 아들이 새롭고, 기원적이고, 동일하고, 독특하고, 절대적인 개인적 사고를 함께 기획할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 이 창조적 개념은 새롭고도 기원적인 창조자 아들의 존재와 고유성 안에 완전하면서도 최종적으로 고유성이 구현됩니다. 영 본성과 신적 지혜 그리고 동등한 창조적 권능 안에서, 이 창조자 아들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함께 잠재적으로 동등합니다.

7:6.4 (88.2) The Creator Sons go out from Paradise into the universes of time an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controlling and creative agencies of the Third Source and Center, complete the organization of the local universes of progressive evolution. These Sons are not attached to, nor are they concerned with, the central and universal controls of matter, mind, and spirit. Hence are they limited in their creative acts by the pre-existence, priority, and primac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and his co-ordinate Absolutes. These Sons are able to administer only that which they bring into existence. Absolute administration is inherent in priority of existence and is inseparable from eternity of presence. The Father remains primal in the universes. 창조자 아들들은 천국에서 나와 시간의 우주들 속으로 들어가고, 셋째근원이며 중심에 속한, 통제하며 창조적인 대리자들의 협동으로, 진보적 진화를 하는 지역우주의 조직을 완성합니다. 이들 아들들은 물질과 마음과 영에 대한 중앙의 우주적인 통제에 배속되지도 않고 관여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첫째근원이며 중심과 그의 동등한 절대자들의 선재(先在)와 우선권과 수위성에 의해서, 그들의 창조적 행위들이 제한을 받습니다. 이 아들들은 그들이 실존하도록 만든 것들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관리-행정은 실존(實在)의 우선권에 있어서 본래적이며, 현존(顯存)의 영원성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주들 안에서 여전히 시원적으로(첫째로) 남아 계십니다.

7:6.5 (88.3) Much as the Creator Sons are personalized by the Father and the Son, so are the Magisterial Sons personalized by the Son and the Spirit. These are the Sons who, in the experiences of creature incarnation, earn the right to serve as the judges of survival in the creations of time and space. 창조자 아들들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고유성이 구현되는 것과 똑같이, 집정관 아들들은 아들과 영에 의해 고유성이 구현됩니다. 이들은 창조물 육신화의 체험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창조계에서 생존을 위한 심판관들로서 봉사하는 권리를 얻는 아들들입니다.

7:6.6 (88.4) The Father, Son, and Spirit also unite to personalize the versatile Trinity Teacher Sons, who range the grand universe as the supernal teachers of all personalities, human and divine. And there are numerous other orders of Paradise sonship that have not been brought to the attention of Urantia mortals.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다재다능한 삼위일체 교사 아들들을 고유성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연합하는데, 그들은 인간적이며 신적인 모든 고유성들을 가르치는 숭고한 교사들로서 대우주를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지구(유란시아) 필사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들 관계의 수많은 다른 천국 계층들이 있습니다.

7:6.7 (88.5) Between the Original Mother Son and these hosts of Paradise Sons scattered throughout all creation, there is a direct and exclusive channel of communication, a channel whose function is inherent in the quality of spiritual kinship which unites them in bonds of near-absolute spiritual association. This intersonship circuit is entirely different from the universal circuit of spirit gravity, which also centers in the person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All Sons of God who take origin in the persons of the Paradise Deities are in direct and constant communication with the Eternal Mother Son. And such communication is instantaneous; it is independent of time though sometimes conditioned by space. 기원적 어머니 아들과 전체 창조 전반에 흩어져 있는 이 천국 아들들의 무리들 사이에는,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교통의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거의-절대적인 영적 연합의 결속 안에 그들을 연합하는 영적 친족관계의 본질 속에 그 기능이 선천적으로 들어 있는 통로입니다. 이 아들관계의 내적순환회로는, 둘째 근원이며 중심의 개인 안에 역시 중심을 두고 있는 영 중력의 우주 순환회로와는 전혀 다릅니다. 천국 신(神)들의 개인들안에 기원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 전체는 영원한 어머니 아들과 직접적이고도 계속적인 교통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통은 순간적입니다; 그것은 때로 공간에 의해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는 독립적입니다.

7:6.8 (88.6) The Eternal Son not only has at all times perfect knowledge concerning the status, thoughts, and manifold activities of all orders of Paradise sonship, but he also has perfection of knowledge at all times regarding everything of spiritual value which exists in the hearts of all creatures in the primary central creation of eternity and in the secondary time creations of the co-ordinate Creator Sons. 영원 아들은 천국 아들관계의 모든 계층들의 지위와 생각들 그리고 다양한 활동들에 관하여 항상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성의 시원적(1차적) 중앙 창조 안과 동등한 창조자 아들들의 2차적 시간 창조계 안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의 심정 속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 가치에 관하여 항상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7. The Supreme Revelation of the Father 아버지에 대한 최극 계시

요14:6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7:7.1 (88.7) The Eternal Son is a complete, exclusive, universal, and final revelation of the spirit and the personality of the Universal Father. All knowledge of, and information concerning, the Father must come from the Eternal Son and his Paradise Sons. The Eternal Son is from eternity and is wholly and without spiritual qualification one with the Father. In divine personality they are co-ordinate; in spiritual nature they are equal; in divinity they are identical. 영원 아들은 우주 아버지의 영과 고유성에 대한 완전하고 배타적이며 우주적이고 최종적인 계시입니다. 아버지에 관한 모든 지식과 정보는 영원 아들과 그의 천국 아들들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영원 아들은 영원부터 계시며, 전적으로 영적 제한이 없이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 신적 고유성에 있어서 그들은 동등하십니다. 영적 본성에 있어서 그들은 대등하십니다. 신성에 있어서 그들은 동일하십니다.

7:7.2 (89.1) The character of God could not possibly be intrinsically improved upon in the person of the Son, for the divine Father is infinitely perfect, but that character and personality are amplified, by divestment of the nonpersonal and nonspiritual, for revelation to creature beings. The First Source and Center is much more than a personality, but all of the spirit qualities of the father personality of the First Source and Center are spiritually present in the absolute personality of the Eternal Son. 하나님의 성품은 아들의 개인 안에서 본질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신적 아버지가 무한히 완전하기 때문이지만, 그 성품과 고유성은 피조된 존재들의 계시를 위하여 비(非)고유적이고 비(非)영적인 것을 벗어 버림으로서 증폭됩니다. 첫째근원이며 중심은 고유성을 훨씬 뛰어넘지만,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아버지 고유성의 영 특성들 전체는 영원 아들의 절대적 고유성 안에 영적으로 존재합니다.

7:7.3 (89.2) The primal Son and his Sons are engaged in making a universal revelation of the spiritual and personal nature of the Father to all creation. In the central universe, the superuniverses, the local universes, or on the inhabited planets, it is a Paradise Son who reveals the Universal Father to men and angels. The Eternal Son and his Sons reveal the avenue of creature approach to the Universal Father. And even we of high origin understand the Father much more fully as we study the revelation of his character and personality in the Eternal Son and in the Sons of the Eternal Son. 기원 아들과 그의 아들들은 모든 창조계에 아버지의 영적 개인적 본성의 우주적 계시를 하는 일에 종사하십니다. 중앙우주, 초우주들, 지역우주들, 또는 거주민이 사는 행성들에서 천국 아들은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우주 아버지를 계시합니다. 영원 아들과 그의 아들들은 창조물이 우주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큰 길을 계시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높은 기원을 갖는 우리들도 영원 아들과 영원 아들의 아들들 안에서 그의 성품과 고유성에 대한 계시를 공부할 때 훨씬 더 풍부하게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7:7.4 (89.3) The Father comes down to you as a personality only through the divine Sons of the Eternal Son. And you attain the Father by this same living way; you ascend to the Father by the guidance of this group of divine Sons. And this remains true notwithstanding that your very personality is a direct bestowal of the Universal Father. 아버지는 영원 아들의 신적 아들들을 통해서만 고유성으로서 너희에게 내려오신다. 그리고 너희는 이 동일한 살아있는 길에 의해 아버지에게 도달한다. 너희는 신적 아들들의 이 집단의 안내에 의해 아버지에게로 상승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너희의 고유성이 우주 아버지의 직접적 증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7:7.5 (89.4) In all these widespread activities of the far-flung spiritual administration of the Eternal Son, do not forget that the Son is a person just as truly and actually as the Father is a person. Indeed, to beings of the onetime human order the Eternal Son will be more easy to approach than the Universal Father. In the progress of the pilgrims of time through the circuits of Havona, you will be competent to attain the Son long before you are prepared to discern the Father. 영원 아들의 멀리-퍼지는 영적 행정에 속하는 이 광범한 활동들 전체에서, 아버지가 개인이신 것처럼 아들이 진실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개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정말로, 한 때 인간 계층이었던 존재들에게는 영원 아들이 우주 아버지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순례자들이 하보나 순환회로들을 통해 진보할 때, 너희는 너희가 아버지를 식별할 준비를 갖추기 전에 아들에게 도달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7:7.6 (89.5) More of the character and merciful nature of the Eternal Son of mercy you should comprehend as you meditate on the revelation of these divine attributes which was made in loving service by your own Creator Son, onetime Son of Man on earth, now the exalted sovereign of your local universe — the Son of Man and the Son of God. 너희는 한 때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었고 지금은 너희 지역우주의 드높여진 주권자인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너희 자신의 창조자 아들에 의해 사랑 넘치는 봉사 속에서 만들어졌던 이 신적 속성들에 대한 계시를 너희가 묵상하면서 너희는 영원 아들의 성품과 자비로운 본성을 더 많이 이해해야만 한다.

7:7.7 (89.6) [Indited by a Divine Counselor assigned to formulate this statement depicting the Eternal Son of Paradise.] [천국의 영원 아들을 묘사하는 이 글을 작성하도록 배정된 신성한 조언자에 의해 씌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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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2 Appearances in Galilee 갈릴리에 출현

Paper 192

Appearances in Galilee 갈릴리에 출현

1. Appearance by the Lake 호숫가에 출현
“Lads, have you caught anything?” “여보시오 친구들, 무엇을 좀 잡았소?”
2. Visiting with the Apostles Two and Two 사도들을 둘 씩 방문함
3. On the Mount of Ordination 임명하신 산에서
4. The Lakeside Gathering 호숫가에서 모임

160626 부활14 – 갈릴리와 부활의 예수님 마28:11-15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92:0.1 (2045.1) BY THE time the apostles left Jerusalem for Galilee, the Jewish leaders had quieted down considerably. Since Jesus appeared only to his family of kingdom believers, and since the apostles were in hiding and did no public preaching, the rulers of the Jews concluded that the gospel movement was, after all, effectually crushed. They were, of course, disconcerted by the increasing spread of rumors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but they depended upon the bribed guards effectively to counteract all such reports by their reiteration of the story that a band of his followers had removed the body.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까지, 유대인 지도자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침묵을 지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를 믿는 그의 가족들에게만 나타나셨고, 사도들은 숨어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통치자들은 복음 운동이 결국 효과적으로 박멸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부활의 소문이 점점 더 퍼져나가는 것 때문에 당황했지만, 경비병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을 통해,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을 옮겨버렸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모든 소문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2:0.2 (2045.2) From this time on, until the apostles were dispersed by the rising tide of persecution, Peter was the generally recognized head of the apostolic corps. Jesus never gave him any such authority, and his fellow apostles never formally elected him to such a position of responsibility; he naturally assumed it and held it by common consent and also because he was their chief preacher. From now on public preaching became the main business of the apostles. After their return from Galilee, Matthias, whom they chose to take the place of Judas, became their treasurer. 이 시기로부터 박해로 인해 사도들이 흩어질 때까지, 베드로는 사도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시지도 않았고, 동료 사도들도 공적으로 그를 책임자로 선출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가운데, 대부분의 설교를 했던 베드로 자신이 그 위치를 당연히 받아들여 고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대중 설교는 사도들의 주요 업무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갈릴리에서 돌아온 후에는, 유다 대신에 선택한 맛디아가 그들의 회계원이 되었습니다.

192:0.3 (2045.3) During the week they tarried in Jerusalem, Mary the mother of Jesus spent much of the time with the women believers who were stopping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그들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그 주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여 성도들과 함께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92:0.4 (2045.4) Early this Monday morning when the apostles departed for Galilee, John Mark went along. He followed them out of the city, and when they had passed well beyond Bethany, he boldly came up among them, feeling confident they would not send him back. 두 번째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도들이 갈릴리로 떠날 때, 요한 마가도 그들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요한 마가는 베다니를 지난 후에는, 사도들이 자기를 되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대담하게 그들과 섞였습니다.

192:0.5 (2045.5) The apostles paused several times on the way to Galilee to tell the story of their risen Master and therefore did not arrive at Bethsaida until very late on Wednesday night. It was noontime on Thursday before they were all awake and ready to partake of breakfast. 사도들은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위해 여러 번 쉬었기 때문에, 이틀 후 아주 늦은 밤에 벳새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착한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모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 Appearance by the Lake 호숫가에 출현

160703 부활15 –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92:1.1 (2045.6) About six o’clock Friday morning, April 21, the morontia Master made his thirteenth appearance, the first in Galilee, to the ten apostles as their boat drew near the shore close to the usual landing place at Bethsaida. 4월 21일 금요일 아침 6시 경, 벳새다에서, 열 명의 사도들이 탄 배가 늘 배를 두던 해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에게 부활체 주(主)께서 갈릴리 지역에서는 처음, 지금까지 13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192:1.2 (2045.7) After the apostles had spent the afternoon and early evening of Thursday in waiting at the Zebedee home, Simon Peter suggested that they go fishing. When Peter proposed the fishing trip, all of the apostles decided to go along. All night they toiled with the nets but caught no fish. They did not much mind the failure to make a catch, for they had many interesting experiences to talk over, things which had so recently happened to them at Jerusalem. But when daylight came, they decided to return to Bethsaida. As they neared the shore, they saw someone on the beach, near the boat landing, standing by a fire. At first they thought it was John Mark, who had come down to welcome them back with their catch, but as they drew nearer the shore, they saw they were mistaken — the man was too tall for John. It had occurred to none of them that the person on the shore was the Master. They did not altogether understand why Jesus wanted to meet with them amidst the scenes of their earlier associations and out in the open in contact with nature, far away from the shut-in environment of Jerusalem with its tragic associations of fear, betrayal, and death. He had told them that, if they would go into Galilee, he would meet them there, and he was about to fulfill that promise.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에는 열 한 사도들이 함께 왔지만, 시몬 젤로떼는 갈릴리에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낙담하여, 벳새다에 도착한 후에는 형제들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세베대의 집에 머물던 10명의 사도들은 목요일 오후와 초저녁을 보낸 후, 시몬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자고 제안하였을 때, 사도들 모두 동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최근에 자신들에게 발생한 사건들과 여러 흥미로운 체험들을 나누었기 때문에 고기 잡지 못한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벳새다로 돌아오던 그들은 해변에 배를 대어 두는 곳 가까이에서 모닥불 옆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가 요한 마가이며,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자신들을 환영하려고 그곳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변에 가까이 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착각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으로 보기에 그는 너무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 중 누구도 해변에 있는 그 사람이 부활의 주(主)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공포와 배반과 죽음에 비극적으로 연관된 예루살렘의 밀폐된 공간으로부터 멀리 떠나, 사도들 자신과 초기에 함께 하였던 갈릴리의 그 현장 한 가운데 즉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야외에서 주(主)께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사도들과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이루시려는 중이셨습니다.

192:1.3 (2046.1) As they dropped anchor and prepared to enter the small boat for going ashore, the man on the beach called to them, “Lads, have you caught anything?” And when they answered, “No,” he spoke again. “Cast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fish.” While they did not know it was Jesus who had directed them, with one accord they cast in the net as they had been instructed, and immediately it was filled, so much so that they were hardly able to draw it up. Now, John Zebedee was quick of perception, and when he saw the heavy-laden net, he perceived that it was the Master who had spoken to them. When this thought came into his mind, he leaned over and whispered to Peter, “It is the Master.” Peter was ever a man of thoughtless action and impetuous devotion; so when John whispered this in his ear, he quickly arose and cast himself into the water that he might the sooner reach the Master’s side. His brethren came up close behind him, having come ashore in the small boat, hauling the net of fishes after them. 그들이 닻을 내린 후 물가로 나가기 위하여 작은 배를 준비하려는데, 해변에 그 사람이 그들에게 “여보시오 친구들, 무엇을 좀 잡았소?”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바닷가로 나올 때, 다리키아Tarichea의 생선장수 어물상(魚物商)들은 햇빛에 말릴 싱싱한 고기를 직접 구입하려고 늘 그렇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아니요”라고 대답하자,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시오,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오.” 그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것을 모른 채, 한 마음으로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고, 즉시 그물이 가득하여 거의 들어 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요한 세베대는 고기로 가득한 그물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주(主)이신 것을 언뜻 알아차렸습니다. 그 때 요한 세배대는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서 “저분이 주(主)이시다.”라고 속삭였습니다. 항상 경솔하고 성급하게 행동을 옮기던 베드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主)께 할 수 있는 한 빨리 가려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고기로 가득한 그물을 끌면서 작은 배를 타고 그의 뒤를 좇아서 해변으로 나왔습니다.

192:1.4 (2046.2) By this time John Mark was up and, seeing the apostles coming ashore with the heavy-laden net, ran down the beach to greet them; and when he saw eleven men instead of ten, he surmised that the unrecognized one was the risen Jesus, and as the astonished ten stood by in silence, the youth rushed up to the Master and, kneeling at his feet, said, “My Lord and my Master.” And then Jesus spoke, not as he had in Jerusalem, when he greeted them with “Peace be upon you,” but in commonplace tones he addressed John Mark: “Well, John, I am glad to see you again and in carefree Galilee, where we can have a good visit. Stay with us, John, and have breakfast.” 이 때 요한 마가가 사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해변으로 달려갔는데, 그는 10명이 아니라 11명이 해변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한 사람은 부활한 예수일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10명의 사도들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서 있는데, 그 소년은 주(主)께 달려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주(主)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라고 말하는 대신, 요한 마가에게 평상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요한아, 너를 다시 만나 반갑고, 우리가 편안히 만날 수 있는 안전한 갈릴리에서 마음껏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요한아,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도록 해라.”

192:1.5 (2046.3) As Jesus talked with the young man, the ten were so astonished and surprised that they neglected to haul the net of fish in upon the beach. Now spoke Jesus: “Bring in your fish and prepare some for breakfast. Already we have the fire and much bread.” 예수께서 소년에게 말하실 때 10 명의 사도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해변으로 고기가 들어 있는 그물 끌어올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해라. 이미 모닥불과 많은 빵이 준비되어 있다.”

192:1.6 (2046.4) While John Mark had paid homage to the Master, Peter had for a moment been shocked at the sight of the coals of fire glowing there on the beach; the scene reminded him so vividly of the midnight fire of charcoal in the courtyard of Annas, where he had disowned the Master, but he shook himself and, kneeling at the Master’s feet, exclaimed, “My Lord and my Master!” 요한 마가가 주(主)께 경의를 표하는 동안, 베드로는 해변에 숯불이 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주(主)님을 부인했던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한 밤중에 타오르던 그 숯불이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 주(主)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나의 주님, 나의 주(主)여!”라고 소리쳤습니다.

192:1.7 (2046.5) Peter then joined his comrades as they hauled in the net. When they had landed their catch, they counted the fish, and there were 153 large ones. And again was the mistake made of calling this another miraculous catch of fish. There was no miracle connected with this episode. It was merely an exercise of the Master’s preknowledge. He knew the fish were there and accordingly directed the apostles where to cast the net. 그 후 베드로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동료들과 합세하였고, 그들이 잡은 고기를 세어 보니 큰 고기만 153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물고기 잡은 또 다른 기적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다시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 주(主)가 지니신 선험 지식을 실행에 옮기도록 한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가 있는 그 곳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그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192:1.8 (2047.1) Jesus spoke to them, saying: “Come now, all of you, to breakfast. Even the twins should sit down while I visit with you; John Mark will dress the fish.” John Mark brought seven good-sized fish, which the Master put on the fire, and when they were cooked, the lad served them to the ten. Then Jesus broke the bread and handed it to John, who in turn served it to the hungry apostles. When they had all been served, Jesus bade John Mark sit down while he himself served the fish and the bread to the lad. And as they ate, Jesus visited with them and recounted their many experiences in Galilee and by this very lake.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모두 이리 와서 아침 식사를 하여라.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쌍둥이 형제들도 여기 앉아 있어라. 요한 마가가 고기를 준비할 것이다.” 요한 마가는 알맞은 크기의 생선 일곱 마리를 가져왔고, 주(主)께서 그것들을 불 위에 올려놓고, 잘 익은 후, 그 소년이 그것들을 열 명의 사도들에게 배분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빵을 떼어 요한에게 주었고, 그는 시장한 사도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모두 받은 후, 예수님은 요한 마가에게 앉으라고 지시하고 그 소년에게 손수 물고기와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식사 중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하시면서 과거에 이 호수 주변과 갈릴리에서 있었던 많은 체험들을 회상하였습니다.

192:1.9 (2047.2) This was the third time Jesus had manifested himself to the apostles as a group. When Jesus first addressed them, asking if they had any fish, they did not suspect who he was because it was a common experience for these fishermen on the Sea of Galilee, when they came ashore, to be thus accosted by the fish merchants of Tarichea, who were usually on hand to buy the fresh catches for the drying establishments. 이 사건은 사도들 전체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세 번째였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그들에게 어떤 고기든지 잡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의심쩍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바닷가로 나올 때, 다리키아의 어물상(魚物商)들이 햇빛에 말릴 싱싱한 고기를 직접 구입하려고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체험을 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2:1.10 (2047.3) Jesus visited with the ten apostles and John Mark for more than an hour, and then he walked up and down the beach, talking with them two and two — but not the same couples he had at first sent out together to teach. All eleven of the apostles had come down from Jerusalem together, but Simon Zelotes grew more and more despondent as they drew near Galilee, so that, when they reached Bethsaida, he forsook his brethren and returned to his home. 예수님은 10명의 사도들과 요한 마가와 함께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셨고, 그 후 그들을 두 명씩 나누어 같이 이야기하며 해변을 거니셨습니다. 이전에 예수께서 처음에 두 명씩 짝지어 내보내시면서 가르치게 하였을 때의 짝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에는 열 한 사도들이 함께 왔지만, 시몬 젤로떼는 갈릴리에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낙담하여, 벳새다에 도착한 후에는 형제들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192:1.11 (2047.4) Before taking leave of them this morning, Jesus directed that two of the apostles should volunteer to go to Simon Zelotes and bring him back that very day. And Peter and Andrew did so. 예수님은 이 날 아침 그들을 떠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누구든지 자진하여 두 사람이 시몬 젤로떼에게 가서 그 날 당장 그를 데리고 돌아오도록 지시하셨으며,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2. Visiting with the Apostles Two and Two 사도들을 둘 씩 방문하심

160710 부활16 – 요한과 베드로와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15-23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192:2.1 (2047.5) When they had finished breakfast, and while the others sat by the fire, Jesus beckoned to Peter and to John that they should come with him for a stroll on the beach. As they walked along, Jesus said to John, “John, do you love me?” And when John answered, “Yes, Master, with all my heart,” the Master said: “Then, John, give up your intolerance and learn to love men as I have loved you. Devote your life to proving that love is the greatest thing in the world. It is the love of God that impels men to seek salvation. Love is the ancestor of all spiritual goodness, the essence of the true and the beautiful.” 그들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른 사람들은 모닥불 옆에 남아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손짓으로 부르셔서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거닐자고 하셨습니다. 함께 걸으면서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요한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요한이 “예, 주(主)여, 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주(主)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아, 그렇다면, 참지 못하는 네 성격을 버리고,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사람들 사랑하기를 배워라.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명하는 일에 네 일생을 바쳐라. 사람들이 구원을 찾도록 추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영적 선(善)의 뿌리이며, 참되고(眞) 아름다운(美) 것의 알맹이다.”

192:2.2 (2047.6) Jesus then turned toward Peter and asked, “Peter, do you love me?” Peter answered, “Lord, you know I love you with all my soul.” Then said Jesus: “If you love me, Peter, feed my lambs. Do not neglect to minister to the weak, the poor, and the young. Preach the gospel without fear or favor; remember always that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Serve your fellow men even as I have served you; forgive your fellow mortals even as I have forgiven you. Let experience teach you the value of meditation and the power of intelligent reflection.” 그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혼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어린 자들 돌아보기를 소홀히 하지 마라. 걱정하지도 편애하지도 말고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내가 너를 섬긴 것처럼, 네 동료들을 섬기라.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네 동료 사람들을 용서해라. 명상의 가치와 지적 반성의 힘을 경험을 통해 배우라.”

192:2.3 (2047.7) After they had walked along a little farther, the Master turned to Peter and asked, “Peter, do you really love me?” And then said Simon,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And again said Jesus: “Then take good care of my sheep. Be a good and a true shepherd to the flock. Betray not their confidence in you. Be not taken by surprise at the enemy’s hand. Be on guard at all times — watch and pray.” 조금 더 걸으신 후에, 주(主)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돌아보시며 “베드로야,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잘 보살피라. 양 무리들에게 선하고 참된 목자가 되어라. 너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라. 적의 손아귀에 불시에 당하지 말라. 항상 경계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

192:2.4 (2047.8) When they had gone a few steps farther, Jesus turned to Peter and, for the third time, asked, “Peter, do you truly love me?” And then Peter, being slightly grieved at the Master’s seeming distrust of him, said with considerable feeling, “Lord, you know all things, and therefore do you know that I really and truly love you.” Then said Jesus: “Feed my sheep. Do not forsake the flock. Be an example and an inspiration to all your fellow shepherds. Love the flock as I have loved you and devote yourself to their welfare even as I have devoted my life to your welfare. And follow after me even to the end.” 몇 발자국 더 걸어간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며 세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를 믿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주(主)의 태도에 살짝 슬퍼하는 감정을 드러내며 말하였습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정말로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무리를 버리지 마라. 너의 모든 동료 목자들에게 본이 되고 감화를 끼치라.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양 무리를 사랑하고, 네가 잘 되도록 내가 생명을 바쳤듯이 그들이 잘되도록 너 자신을 바쳐라. 그리고 끝까지 나를 따르라.”

192:2.5 (2048.1) Peter took this last statement literally — that he should continue to follow after him — and turning to Jesus, he pointed to John, asking, “If I follow on after you, what shall this man do?” And then, perceiving that Peter had misunderstood his words, Jesus said: “Peter, be not concerned about what your brethren shall do. If I will that John should tarry after you are gone, even until I come back, what is that to you? Only make sure that you follow me.” 베드로는 자신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따라간다면, 이 사람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말을 오해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 형제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라. 만약 네가 떠난 후에,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요한을 머물러 있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다만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192:2.6 (2048.2) This remark spread among the brethren and was received as a statement by Jesus to the effect that John would not die before the Master returned, as many thought and hoped, to establish the kingdom in power and glory. It was this interpretation of what Jesus said that had much to do with getting Simon Zelotes back into service, and keeping him at work. 이 말이 형제들 사이에 두루 퍼졌으며, 권능과 영광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희망한 것처럼, 주(主)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시몬 젤로떼가 다시 봉사의 현장으로 돌아와 계속 일했던 것에 많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160717 부활17 – 안드레 및 야고보와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24-25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192:2.7 (2048.3) When they returned to the others, Jesus went for a walk and talk with Andrew and James. When they had gone a short distance, Jesus said to Andrew, “Andrew, do you trust me?” And when the former chief of the apostles heard Jesus ask such a question, he stood still and answered, “Yes, Master, of a certainty I trust you, and you know that I do.” Then said Jesus: “Andrew, if you trust me, trust your brethren more — even Peter. I once trusted you with the leadership of your brethren. Now must you trust others as I leave you to go to the Father. When your brethren begin to scatter abroad because of bitter persecutions, be a considerate and wise counselor to James my brother in the flesh when they put heavy burdens upon him which he is not qualified by experience to bear. And then go on trusting, for I will not fail you. When you are through on earth, you shall come to me.”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안드레와 야고보와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조금 걸어간 후에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안드레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도들의 전임 우두머리였던 그는 예수께서 그러한 질문을 하자 똑바로 서서 “예, 주(主)여, 저는 결단코 당신을 신뢰하며, 제가 그러하다는 것을 당신도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야, 만일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베드로를 포함하여 네 형제들을 더욱 신뢰하여라. 나는 한 때 형제들에 대한 너의 지도력을 신뢰하였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가기 위하여 너를 떠나지만, 너는 다른 형제들을 신뢰해야만 한다. 처참한 박해로 인하여 네 형제들이 멀리 흩어지게 된 후, 내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아직 체험이 부족하여, 견딜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짐이, 그에게 지워질 때, 그에게 신중하고 현명한 조언자가 되어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계속 나를 신뢰하라. 네가 이 땅에서의 일생을 마친 후에는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다.”

192:2.8 (2048.4) Then Jesus turned to James, asking, “James, do you trust me?” And of course James replied, “Yes, Master, I trust you with all my heart.” Then said Jesus: “James, if you trust me more, you will be less impatient with your brethren. If you will trust me, it will help you to be kind to the brotherhood of believers. Learn to weigh the consequences of your sayings and your doings. Remember that the reaping is in accordance with the sowing. Pray for tranquillity of spirit and cultivate patience. These graces, with living faith, shall sustain you when the hour comes to drink the cup of sacrifice. But never be dismayed; when you are through on earth, you shall also come to be with me.” 그 후 예수님은 야고보를 향하여 “야고보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야고보는 “예, 주(主)여,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야, 네가 나를 더욱 신뢰한다면, 네 형제들에 대해서 참을성을 좀 더 지니라. 나에 대한 신뢰가 너의 형제들에게 친절하도록 너를 도와줄 것이다. 네 말들과 행동들의 결과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도록 배우라.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라. 영의 평온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여라. 희생물의 잔을 마셔야 하는 시간이 도래할 때, 살아있는 신앙과 함께, 이 은혜들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당황하지 말라. 네가 이 땅을 지나게 되면, 너도 와서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160724 부활18 – 도마와 나다나엘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1:45-49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192:2.9 (2048.5) Jesus next talked with Thomas and Nathaniel. Said he to Thomas, “Thomas, do you serve me?” Thomas replied, “Yes, Lord, I serve you now and always.” Then said Jesus: “If you would serve me, serve my brethren in the flesh even as I have served you. And be not weary in this well-doing but persevere as one who has been ordained by God for this service of love. When you have finished your service with me on earth, you shall serve with me in glory. Thomas, you must cease doubting; you must grow in faith and the knowledge of truth. Believe in God like a child but cease to act so childishly. Have courage; be strong in faith and mighty in the kingdom of God.” 예수님은 그 다음에 도마와 나다니엘과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도마야, 너는 나를 섬기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도마는 “예, 주님, 저는 지금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섬깁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나를 섬기려고 한다면, 내가 너를 섬겨왔던 것처럼, 육신의 내 형제들을 섬기라. 이처럼 온전히 행동하는 것에 지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사람답게 사랑의 봉사를 인내로 견디라. 네가 이 땅에서 나와 함께 하는 이 봉사를 마치면, 영광 안에서 나와 더불어 섬기게 될 것이다. 도마야, 너는 의심하기를 그만두어야만 한다. 너는 신앙 안에서와 진리에 대한 지식 안에서 성장하여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만두라. 용기를 가지라. 신앙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강건하여라.”

192:2.10 (2049.1) Then said the Master to Nathaniel, “Nathaniel, do you serve me?” And the apostle answered, “Yes, Master, and with an undivided affection.” Then said Jesus: “If, therefore, you serve me with a whole heart, make sure that you are devoted to the welfare of my brethren on earth with tireless affection. Admix friendship with your counsel and add love to your philosophy. Serve your fellow men even as I have served you. Be faithful to men as I have watched over you. Be less critical; expect less of some men and thereby lessen the extent of your disappointment. And when the work down here is over, you shall serve with me on high.” 그 후 주(主)님은 나다니엘에게 “나다니엘아, 너는 나를 섬기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사도는 “예, 주(主)여, 온전한 애정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섬긴다면, 이 세상에 있는 내 형제들의 행복을 위하여 네가 지칠 줄 모르는 애정으로 헌신해야 함을 명심하라. 네가 조언을 할 때 우정과 함께 하고, 네 철학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여라. 내가 너를 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들을 섬겨라. 내가 너를 돌보아준 것처럼 사람들에게 신실하여라. 비판을 줄이고, 사람들에게 기대(期待)하는 수준을 낮추어서, 너의 실망을 줄이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게 되면, 너는 나와 함께 저 높은 곳에서 섬기게 될 것이다.”

160731 부활19 – 마태와 빌립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행8:5-6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192:2.11 (2049.2) After this the Master talked with Matthew and Philip. To Philip he said, “Philip, do you obey me?” Philip answered, “Yes, Lord, I will obey you even with my life.” Then said Jesus: “If you would obey me, go then into the lands of the gentiles and proclaim this gospel. The prophets have told you that to obey is better than to sacrifice. By faith have you become a God-knowing kingdom son. There is but one law to obey — that is the command to go forth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Cease to fear men; be unafraid to preach the good news of eternal life to your fellows who languish in darkness and hunger for the light of truth. No more, Philip, shall you busy yourself with money and goods. You now are free to preach the glad tidings just as are your brethren. And I will go before you and be with you even to the end.” 그 다음에 주님은 마태와 빌립과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빌립아, 너는 내 말에 순종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 주님, 당신이 제 생명을 바치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主)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해라. 선지자들은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순종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너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순종해야 유일한 한 가지 법은 네가 나가서 하나님 니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진리의 빛에 굶주리고 흑암 속에서 번민하는 네 동료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쁜 소식을 대담하게 전하라. 빌립아, 너는 더 이상 돈과 재물을 위하여 바쁘게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너는 네 형제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기쁜 소식을 자유롭게 전파하라. 나는 너의 앞에서 갈 것이며, 끝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192:2.12 (2049.3) And then, speaking to Matthew, the Master asked, “Matthew, do you have it in your heart to obey me?” Matthew answered, “Yes, Lord, I am fully dedicated to doing your will.” Then said the Master: “Matthew, if you would obey me, go forth to teach all peoples this gospel of the kingdom. No longer will you serve your brethren the material things of life; henceforth you are also to proclaim the good news of spiritual salvation. From now on have an eye single only to obeying your commission to preach this gospel of the Father’s kingdom. As I have done the Father’s will on earth, so shall you fulfill the divine commission. Remember, both Jew and gentile are your brethren. Fear no man when you proclaim the saving truth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ere I go, you shall presently come.” 그 후 주님은 마태에게 “마태야, 너는 진심으로 내 말에 순종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마태는 “예, 주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主)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야, 만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모든 민족들에게로 가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라. 너는 더 이상 네 형제들의 일생에 필요한 물질적인 사물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아도 되며, 이제부터는 너도 영적인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하여라. 지금부터는 오직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이 복음을 전도하는 임무에만 전념하도록 하여라.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같이, 너도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네 형제라는 것을 명심해라. 너는 하늘나라 복음이라는 구원의 진리들을 전파할 때 아무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가는 곳으로, 너도 곧 오게 될 것이다.”

160807 부활20 – 알패오의 쌍둥이들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막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2:2.13 (2049.4) Then he walked and talked with the Alpheus twins, James and Judas, and speaking to both of them, he asked, “James and Judas, do you believe in me?” And when they both answered, “Yes, Master, we do believe,” he said: “I will soon leave you. You see that I have already left you in the flesh. I tarry only a short time in this form before I go to my Father. You believe in me — you are my apostles, and you always will be. Go on believing and remembering your association with me, when I am gone, and after you have, perchance, returned to the work you used to do before you came to live with me. Never allow a change in your outward work to influence your allegiance. Have faith in God to the end of your days on earth. Never forget that, when you are a faith son of God, all upright work of the realm is sacred. Nothing which a son of God does can be common. Do your work, therefore, from this time on, as for God. And when you are through on this world, I have other and better worlds where you shall likewise work for me. And in all of this work, on this world and on other worlds, I will work with you, and my spirit shall dwell within you.” 그 후 그는 알패오 쌍둥이,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걸으면서, 두 사람에게 “야고보와 유다야, 너희는 나를 믿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똑같이 “예, 주(主)여, 저희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너희를 떠날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는 벌써 너희를 떠났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이런 형체로 잠시 동안만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나를 믿었고─너희는 내 사도들이며, 또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 너희가 나와 같이 행동하기 전에 너희가 하였던 일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와 함께 했던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너희들이 외적인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너희들의 충성심을 좌우할 만한 어떤 기회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져라. 너희가 하나님의 신앙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정직한 일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들 중에서 하잘 것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지금부터 너희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 세상을 마칠 때, 나에게는 너희가 여전히 나를 위하여 일하게 되는 다른 더 좋은 세상이 있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들에서, 나는 너희들과 같이 일할 것이며,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192:2.14 (2049.5) It was almost ten o’clock when Jesus returned from his visit with the Alpheus twins, and as he left the apostles, he said: “Farewell, until I meet you all on the mount of your ordination tomorrow at noontime.” When he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예수께서 알패오의 쌍둥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은 거의 10시가 되었을 무렵이었으며, 그는 사도들을 떠나시면서 “너희를 사도로 임명하였던 산에서 내일 정오에 너희 모두를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후에 그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3. On the Mount of Ordination 임명하신 산에서

160814 부활21 – 사도들을 임명했던 산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4th) 마28:16-17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92:3.1 (2050.1) At noon on Saturday, April 22, the eleven apostles assembled by appointment on the hill near Capernaum, and Jesus appeared among them. This meeting occurred on the very mount where the Master had set them apart as his apostles and as ambassadors of the Father’s kingdom on earth. And this was the Master’s four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열 한 사도들은 약속대로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동산 위에 모였으며,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의 만남은 주(主)의 사도로서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서 주께서 그들을 지정하였던 바로 그 산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主)의 14번째 부활체 출현이었습니다.

192:3.2 (2050.2) At this time the eleven apostles knelt in a circle about the Master and heard him repeat the charges and saw him re-enact the ordination scene even as when they were first set apart for the special work of the kingdom. And all of this was to them as a memory of their former consecration to the Father’s service, except the Master’s prayer. When the Master — the morontia Jesus — now prayed, it was in tones of majesty and with words of power such as the apostles had never before heard. Their Master now spoke with the rulers of the universes as one who, in his own universe, had had all power and authority committed to his hand. And these eleven men never forgot this experience of the morontia rededication to the former pledges of ambassadorship. The Master spent just one hour on this mount with his ambassadors, and when he had taken an affectionate farewell of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이 때 열 한 사도들은 주(主)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무릎을 꿇었으며, 주께서 반복해서 하시는 위탁의 말씀을 들었고 나라의 특별임무를 위하여 처음 지정되었을 때처럼 사도로 임명하는 장면이 재현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주(主)의 기도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일을 위해 전에 가졌던 임명식에 대한 기억과 동일하였습니다. 부활체로서의 주(主)께서 기도하실 때, 힘이 있는 말씀과 함께 그의 음성은 장엄하였으며 지금까지 사도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주(主)께서는 그 자신의 우주 안에서 모든 힘과 권한을 손에 쥐신 분으로서 우주들의 통치자들과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전에 대사 직분의 서약 위에 부활체적으로 다시 헌신하게 된 이 체험을 결코 잊지 못하였습니다. 주(主)님은 자신의 대사들과 함께 이 산 위에서 한 시간 동안 함께 계셨으며, 그들에게 자애로운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2:3.3 (2050.3) And no one saw Jesus for a full week. The apostles really had no idea what to do, not knowing whether the Master had gone to the Father. In this state of uncertainty they tarried at Bethsaida. They were afraid to go fishing lest he come to visit them and they miss seeing him. During this entire week Jesus was occupied with the morontia creatures on earth and with the affairs of the morontia transition which he was experiencing on this world. 그리고 그 후로 한 주일 동안 아무도 예수님을 불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주(主)께서 이미 아버지께로 가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태로 그들은 벳새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들에게 왔을 때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 염려가 되어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 주일 내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부활체 창조물들과 함께 계셨으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부활체 전환의 업무에 전념하셨습니다.

4. The Lakeside Gathering 호숫가에서 모임

160821 부활22 –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5th)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92:4.1 (2050.4) Word of the appearances of Jesus was spreading throughout Galilee, and every day increasing numbers of believers arrived at the Zebedee home to inquire about the Master’s resurrection and to find out the truth about these reputed appearances. Peter, early in the week, sent out word that a public meeting would be held by the seaside the next Sabbath a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예수께서 여러 번 나타났다는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졌고, 매일같이 더 많은 신자들이 주(主)의 부활에 관하여 물어보고, 그가 여러 번 보였다는 떠도는 소문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세베대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주초에, 베드로는 공개 집회가 다음 안식일 오후 3시에 그 바닷가에서 있을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192:4.2 (2050.5) Accordingly, on Saturday, April 29, at three o’clock, more than five hundred believers from the environs of Capernaum assembled at Bethsaida to hear Peter preach his first public sermon since the resurrection. The apostle was at his best, and after he had finished his appealing discourse, few of his hearers doubted that the Master had risen from the dead. 따라서, 4월 29일 토요일 3시에, 부활 이후 처음 있는 베드로의 대중 설교를 듣기 위하여 500명 이상의 신자들이 가버나움 근방으로부터 벳새다로 모였습니다. 사도는 자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그의 호소하는 강연이 다 끝난 후에는, 주(主)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청중은 거의 없었습니다.

192:4.3 (2050.6) Peter ended his sermon, saying: “We affirm that Jesus of Nazareth is not dead; we declare that he has risen from the tomb; we proclaim that we have seen him and talked with him.” Just as he finished making this declaration of faith, there by his side, in full view of all these people, the Master appeared in morontia form and, speaking to them in familiar accents, said, “Peace be upon you,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When he had thus appeared and had so spoken to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This was the fif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the risen Jesus. 베드로는 설교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돌아가시지 않았음을 단언합니다. 그가 무덤에서 살아나셨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를 보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음을 공포합니다.” 그가 신념에 찬 이 선언을 마쳤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主)께서 그의 옆에 부활체(모론시아 형체)로 나타났으며, 낯익은 어투로 그들에게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그리고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 그 말씀을 그들에게 한 후에,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가 15번째로 나타나신 부활체(모론시아)현시였습니다.

192:4.4 (2051.1) Because of certain things said to the eleven while they were in conference with the Master on the mount of ordination, the apostles received the impression that their Master would presently make a public appearance before a group of the Galilean believers, and that, after he had done so, they were to return to Jerusalem. Accordingly, early the next day, Sunday, April 30, the eleven left Bethsaida for Jerusalem. They did considerable teaching and preaching on the way down the Jordan, so that they did not arrive at the home of the Marks in Jerusalem until late on Wednesday, May 3. 사도 임명 받은 그 산 위에서 열 한 사도들이 주(主)와 회의를 하는 동안에 들었던 특별한 말씀을 통하여, 사도들은 주(主)께서 갈릴리의 무리들 앞에서 곧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리라는 것과 그가 그렇게 한 후에는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음 날인 4월 30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열 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벳새다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요단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여러 번 가르치고 설교하였으므로, 5월 3일 수요일 늦은 시각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192:4.5 (2051.2) This was a sad home-coming for John Mark. Just a few hours before he reached home, his father, Elijah Mark, suddenly died from a hemorrhage in the brain. Although the thought of the certainty of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did much to comfort the apostles in their grief, at the same time they truly mourned the loss of their good friend, who had been their stanch supporter even in the times of great trouble and disappointment. John Mark did all he could to comfort his mother and, speaking for her, invited the apostles to continue to make their home at her house. And the eleven made this upper chamber their headquarters until after the day of Pentecost. 요한 마가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슬픈 귀향길이었습니다. 그가 도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의 아버지 엘리야 마가가 뇌출혈로 인하여 갑자기 죽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그들의 슬픔을 많이 위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근심과 낙심에 젖어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애도하였습니다. 요한 마가는 최선을 다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사도들이 그 집에 계속 머물도록 그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오순절이 지날 때까지 이 다락방을 그들의 본부로 사용하였습니다.

192:4.6 (2051.3) The apostles had purposely entered Jerusalem after nightfall that they might not be seen by the Jewish authorities. Neither did they publicly appear in connection with the funeral of Elijah Mark. All the next day they remained in quiet seclusion in this eventful upper chamber. 사도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해가 진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그들은 엘리야 마가를 장사 지내는 동안에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란이 많은 이 다락방에서 다음 날 하루 종일 조용히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192:4.7 (2051.4) On Thursday night the apostles had a wonderful meeting in this upper chamber and all pledged themselves to go forth in the public preaching of the new gospel of the risen Lord except Thomas, Simon Zelotes, and the Alpheus twins. Already had begun the first steps of chang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 sonship with God and brotherhood with man — into the proclamation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Nathaniel opposed this shift in the burden of their public message, but he could not withstand Peter’s eloquence, neither could he overcome the enthusiasm of the disciples, especially the women believers. 목요일 밤에 사도들은 이 다락방에서 훌륭한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도마와 시몬 젤로떼 그리고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공공장소에 나가서 부활한 주님에 대한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로 모두 맹세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관계와 사람들의 형제신분─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선포로 변경시키는 첫 번째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나다니엘은 그들의 공개적인 설교 요지에서 이렇게 변경시키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베드로의 설득력을 당할 수가 없었으며, 제자들, 특히 여자 신도들의 열광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192:4.8 (2051.5) And so, under the vigorous leadership of Peter and ere the Master ascended to the Father, his well-meaning representatives began that subtle process of gradually and certainly changing the religion of Jesus into a new and modified form of religion about Jesus. 그리하여, 베드로의 원기 왕성한 지도력 아래에서, 그리고 주(主)가 아버지께로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그의 좋은-의미를 지닌 대표자들은, 예수님의 종교를 예수님에 관한 종교라는 새롭고도 수정된 형태로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변경하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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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3 Final Appearances and Ascension 마지막 출현과 상승

Paper 193

Final Appearances and Ascension 마지막 출현과 상승

The sixteenth appearance (courtyard of Nicodemus) 16번째 출현(니고데모의 안뜰)
1. The Appearance at Sychar 시카에 출현
2. The Phoenician Appearance 페니키아에 출현
3. Last Appearance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출현
4. Causes of Judas’s Downfall 유다 패망의 원인들
5. The Master’s Ascension 주님의 승천(昇天)
6. Peter Calls a Meeting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60828 부활23 – 대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 (16th) AD30. 4. 9. Am 3:30 이후 요셉 무덤 앞 1(5 여인) 2(막마) / 베다니 나사로 무덤 동산 3(약 12시) 4(가족친구 20명 pm 2시) / 요셉 집 5(25명 여인들 pm4:15) 6(40명 그리스인 플라비우스 오후4:30) 7(엠마오2형제 목동 오후5시) 8(베드로 마가 정원 pm8:30) 9(10사도들 마가 다락방 pm9) 10(전도자들 필라델피아 4/11화 am8시) 11(11사도들 막 다락방 4/16 주일 pm6) 12(로단80 알렉산드리아 4/18화 pm8:30) 13(10 사도 갈릴리 4/21 금 am6:00) 14(11사도 가버나움 고지 4/22토 12시) 15(500 벳새다 호숫가 4/29 토 pm3) 16(61이상 대표자들 니고데모 집 5/5 금 pm9) 눅24:44-48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193:0.1 (2052.1) THE six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occurred on Friday, May 5, in the courtyard of Nicodemus, about nine o’clock at night. On this evening the Jerusalem believers had made their first attempt to get together since the resurrection. Assembled here at this time were the eleven apostles, the women’s corps and their associates, and about fifty other leading disciples of the Master, including a number of the Greeks. This company of believers had been visiting informally for more than half an hour when, suddenly, the morontia Master appeared in full view and immediately began to instruct them. Said Jesus: 예수님의 16번째 모론시아 출현은 5월 5일 금요일, 니고데모의 집 안마당에서 밤 9시 경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 저녁,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以後) 처음으로, 함께 모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열 한 사도들과, 여자 대원들과 그들의 친구들, 다수의 그리스인들을 포함한 50 여명의 다른 수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신자들 무리가 30분 이상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모론시아 주(主)가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즉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0.2 (2052.2) “Peace be upon you. This is the most representative group of believers — apostles and disciples, both men and women — to which I have appeared since the time of my deliverance from the flesh. I now call you to witness that I told you beforehand that my sojourn among you must come to an end; I told you that presently I must return to the Father. And then I plainly told you how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of the Jews would deliver me up to be put to death, and that I would rise from the grave. Why, then, did you allow yourselves to become so disconcerted by all this when it came to pass? and why were you so surprised when I rose from the tomb on the third day? You failed to believe me because you heard my words without comprehending the meaning thereof.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너희들은 내가 육신에서 해방된 후에 나타난 신자들─사도들과 제자들, 남자들과 여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리들이다. 내가 이전에 너희들과 함께 하는 이 기간이 끝나게 되리라고 말한 것; 내가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을 증거 하도록 내가 너희들을 이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사제들과 유대인 통치자들이 어떻게 나를 죽이도록 넘겨주고, 그리고 내가 무덤에서 살아날 것을 분명하게 너희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 때, 너희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당황하였느냐? 그리고 내가 셋째 날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너희는 왜 그렇게 놀랐느냐? 너희는 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내 말을 믿지 못하였다.

193:0.3 (2052.3) “And now you should give ear to my words lest you again make the mistake of hearing my teaching with the mind while in your hearts you fail to comprehend the meaning. From the beginning of my sojourn as one of you, I taught you that my one purpose was to reveal my Father in heaven to his children on earth. I have lived the God-revealing bestowal that you might experience the God-knowing career. I have revealed God as your Father in heaven; I have revealed you as the sons of God on earth. It is a fact that God loves you, his sons. By faith in my word this fact becomes an eternal and living truth in your hearts. When, by living faith, you become divinely God-conscious, you are then born of the spirit as children of light and life, even the eternal life wherewith you shall ascend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attain the experience of finding God the Father on Paradise. 그러니 너희는 이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머리로 잘못 듣는 오류를 또 다시 행하지 않도록 내 말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 중에 머무는 시작부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나타내는 것이 한 가지 나의 한 가지 목적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왔노라.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생애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임을 계시하였노라. 나는 너희들을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계시하여왔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인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내 말을 믿음으로, 이 사실은 너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신앙에 의해서, 너희가 거룩히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면, 너희는 빛과 생명의 자녀로서 영으로부터 태어나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늘들의 하늘로 올라가고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체험을 성취하기까지 할 것이라.

160904 부활24 – 대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2 (16th) 마28:19-20a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a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193:0.4 (2052.4) “I admonish you ever to remember that your mission among men is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 the reality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truth of the sonship of man. Proclaim the whole truth of the good news, not just a part of the saving gospel. Your message is not changed by my resurrection experience. Sonship with God, by faith, is still the saving truth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are to go forth preaching the love of God and the service of man. That which the world needs most to know is: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rough faith they can actually realize, and daily experience, this ennobling truth. My bestowal should help all men to know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God, but such knowledge will not suffice if they fail personally to faith-grasp the saving truth that they are the living spirit sons of the eternal Father.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concerned with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service of his children on earth.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다음의 충고를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전파해야할 너희들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의 실체와 사람의 아들 관계의 진리니라. 너희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일부만 전하지 말고, 좋은 소식의 진리 전체를 전파하라. 너희의 메시지는 나의 부활 체험 때문에 변경될 수 없노라. 신앙으로 하나님의 아들관계가 된다는 것은 바뀔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지닌 구원의 진리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라는 진리를 전파하며 나아가라. 세상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포하노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이 진리를 실제로 깨닫고, 나날이 이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너희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그러나 그들이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있는 영적인 아들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신앙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일에 실패한다면, 그러한 지식은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버지의 사랑과 땅에서 그 자녀들의 봉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라.

193:0.5 (2053.1) “Among yourselves, here, you share the knowledge that I have risen from the dead, but that is not strange. I have the power to lay down my life and to take it up again; the Father gives such power to his Paradise Sons. You should the rather be stirred in your hearts by the knowledge that the dead of an age entered upon the eternal ascent soon after I left Joseph’s new tomb. I lived my life in the flesh to show how you can, through loving service, become God-revealing to your fellow men even as, by loving you and serving you, I have become God-revealing to you. I have lived among you as the Son of Man that you, and all other men, might know that you are all indeed the sons of God. Therefore, go you now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to all men. Love all men as I have loved you; serve your fellow mortals as I have served you.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Only tarry here in Jerusalem while I go to the Father, and until I send you the Spirit of Truth. He shall lead you into the enlarged truth, and I will go with you into all the world. I am with you always,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지금 너희들은 나의 부활에 대한 지식을 서로 나누고 있지만, 나는 내 생명을 버릴 권세도, 그것을 다시 취할 권세도 가지고 있노라. 하늘 아버지가 그 권세를 주셨노라. 내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일어난 즉시 한 시대의 죽은 자들이 영원한 상승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너희 마음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사랑의 봉사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라. 이를 위해 내가 육신으로 일생을 살아왔노라. 너희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 수 있도록, 내가 사람의 아들로 너희들과 함께 살아왔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인류에게 이 하늘의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 동료들을 섬겨라. 너희가 대가없이 받았으니 대가없이 주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동안, 그리고 내가 진리의 영을 너희에게 보낼 때까지만 이곳 예루살렘에 머물러라. 그는 너희를 커다란 진리로 인도할 것이며, 너희가 온 세상으로 나아갈 때 내가 너희와 동행할 것이다.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93:0.6 (2053.2) When the Master had spoken to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It was near daybreak before these believers dispersed; all night they remained together, earnestly discussing the Master’s admonitions and contemplating all that had befallen them. James Zebedee and others of the apostles also told them of their experiences with the morontia Master in Galilee and recited how he had three times appeared to them. 주(主)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 신자들이 헤어진 것은 거의 날이 샐 무렵이었습니다. 그들은 주(主)님의 훈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심사숙고하면서 밤새도록 같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세베대와 다른 사도들도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主)님과 함께 가졌던 자신들의 체험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으며, 주께서 그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1. The Appearance at Sychar 시카에 출현

160911 부활25 – 수가(시카Sychar)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7th) 요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93:1.1 (2053.3) About four o’clock on Sabbath afternoon, May 13, the Master appeared to Nalda and about seventy-five Samaritan believers near Jacob’s well, at Sychar. The believers were in the habit of meeting at this place, near where Jesus had spoken to Nalda concerning the water of life. On this day, just as they had finished their discussions of the reported resurrection, Jesus suddenly appeared before them, saying: 5월 13일 안식일 오후 4시 경에, 주(主)님은 시카에 있는 야곱의 우물 근처에서 75명가량의 사마리아인들과 날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신자들은 예수께서 생명의 물에 관하여 날다에게 말씀하였던 이 우물 근처의 이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날 부활의 소식에 대한 토의를 막 마쳤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1.2 (2053.4) “Peace be upon you. You rejoice to know that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but this will avail you nothing unless you are first born of the eternal spirit, thereby coming to possess, by faith, the gift of eternal life. If you are the faith sons of my Father, you shall never die; you shall not perish. The gospel of the kingdom has taught you that all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is good news concerning the love of the heavenly Father for his children on earth must be carried to all the world. The time has come when you worship God neither on Gerizim nor at Jerusalem, but where you are, as you are, in spirit and in truth. It is your faith that saves your souls. Salvation is the gift of God to all who believe they are his sons. But be not deceived; while salvation is the free gift of God and is bestowed upon all who accept it by faith, there follows the experience of bearing the fruits of this spirit life as it is lived in the flesh. The acceptance of the doctrine of the fatherhood of God implies that you also freely accept the associated truth of the brotherhood of man. And if man is your brother, he is even more than your neighbor, whom the Father requires you to love as yourself. Your brother, being of your own family, you will not only love with a family affection, but you will also serve as you would serve yourself. And you will thus love and serve your brother because you, being my brethren, have been thus loved and served by me. Go, then, into all the world telling this good news to all creatures of every race, tribe, and nation. My spirit shall go before you, and I will be with you always.”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고 기뻐하였지만, 너희가 먼저 영으로 태어나고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지 못한다면, 이것이 너희에게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만일 너희가 내 아버지의 신앙의 아들이라면,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게리짐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며, 어디든지 너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 안에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때가 왔노라. 너희 혼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너희의 신앙이다. 구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하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은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영적 생명의 열매를 맺는 체험이 동반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신분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람들의 형제 신분이라는 동반되는 진리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너희 형제라면, 그는 마찬가지로 너의 이웃 이상인데 , 아버지는 이웃을 너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너희에게 요구하고 있다. 너희 형제는, 너희가 속한 가족의 일원이니, 너희가 가족적 애정으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너희 자신을 섬기듯 그렇게 섬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형제가 되었기에, 나의 사랑과 섬김을 그렇게 받아 왔으니 그처럼, 너희도 그렇게 너희 형제를 사랑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니 가라,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종족과 민족과 국가에 이 좋은 소식을 들려주라. 내 영이 너희 앞에서 먼저 갈 것이며,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193:1.3 (2054.1) These Samaritans were greatly astonished at this appearance of the Master, and they hastened off to the near-by towns and villages, where they published abroad the news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hat he had talked to them. And this was the seventeenth morontia appearance of the Master. 이 사마리아인들은 주(主)의 이 출현에 크게 놀랐으며 그들은 가까운 성읍과 마을로 급히 나가서, 그들이 예수를 보았다는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였다는 소식을 그곳에서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主)의 17번째 부활체 출현 이었습니다.

2. The Phoenician Appearance 페니키아에 출현

160918 부활26 – 페니키아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8th)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93:2.1 (2054.2) The Master’s eighteenth morontia appearance was at Tyre, on Tuesday, May 16, at a little before nine o’clock in the evening. Again he appeared at the close of a meeting of believers, as they were about to disperse, saying: 주(主)의 18번째 부활체 출현은 5월 16일 화요일, 저녁 9시 조금 전에 티레에서 있었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모임을 마치고 막 흩어지려고 할 때 다시 나타났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2.2 (2054.3) “Peace be upon you. You rejoice to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dead because you thereby know that you and your brethren shall also survive mortal death. But such survival is dependent on your having been previously born of the spirit of truth-seeking and God-finding. The bread of life and the water thereof are given only to those who hunger for truth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 for God. The fact that the dead rise is not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se great truths and these universe facts are all related to this gospel in that they are a part of the result of believing the good news and are embraced in the subsequent experience of those who, by faith, become, in deed and in truth, the everlasting sons of the eternal God. My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to proclaim this salvation of sonship to all men. And so send I you abroad to preach this salvation of sonship. Salvation is the free gift of God, but those who are born of the spirit will immediately begin to show forth the fruits of the spirit in loving service to their fellow creatures. And the fruits of the divine spirit which are yielded in the lives of spirit-born and God-knowing mortals are: loving service, unselfish devotion, courageous loyalty, sincere fairness, enlightened honesty, undying hope, confiding trust, merciful ministry, unfailing goodness, forgiving tolerance, and enduring peace. If professed believers bear not these fruits of the divine spirit in their lives, they are dead; the Spirit of Truth is not in them; they are useless branches on the living vine, and they soon will be taken away. My Father requires of the children of faith that they bear much spirit fruit. If, therefore, you are not fruitful, he will dig about your roots and cut away your unfruitful branches. Increasingly, must you yield the fruits of the spirit as you progress heavenward in the kingdom of God. You may enter the kingdom as a child, but the Father requires that you grow up, by grace, to the full stature of spiritual adulthood. And when you go abroad to tell all nations the good news of this gospel, I will go before you, and my Spirit of Truth shall abide in your hearts. My peace I leave with you.”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서의 살아난 것 알게 된 것을 기뻐하라. 왜냐하면 그것에 의하여 너희들 자신과 너희 형제들도 역시 죽음에서 생존될 것을 너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존은 너희가 사전에 진리를 찾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영적 탄생이 이루어졌는지에 달려 있노라. 진리에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하며 하나님을 향한 자들에게만,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빵과 물이 주어진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다. 이 놀라운 진리들과 우주의 사실들은 기쁜 소식을 믿은 결과에 포함된 일부분으로서 모두 이 복음과 관련되며 신앙에 의해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영속하는 아들들이 된 사람들이 그 후에 갖게 되는 체험에 포함된다. 내 아버지는 아들 관계의 이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시기 위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나도 아들관계의 이 구원을 전파하기 위하여 너희를 보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대가 없는 선물이지만,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동료 피조물들을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해 영의 열매를 즉시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삶에 맺히게 되는 신성한 영의 열매들은, 사랑으로 섬김, 애타적(愛他的)인 헌신, 불굴의 충성심, 진지한 공정성, 계몽된 정직성, 사라지지 않는 희망, 자신하고 있는 신뢰, 자비로운 사명활동, 시종여일한 덕, 용서하는 인내심,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평화이다. 만일 신자임을 고백한 자들이, 그들의 삶에, 신성한 영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들은 죽어 있는 것이며, 진리의 영이 그들 속에 없고, 그들은 살아있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가지들이며, 곧 잘라버리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는 신앙의 자녀들에게 영의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에게 열매가 없다면, 너희들의 뿌리들을 파내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잘라버리실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늘 방향으로 진보하면서 점점 더 많은 영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너희는 어린아이로 왕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아버지는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성숙된 온전한 형상으로 자라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너희가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나라들에게 전하면서 멀리 퍼져 나갈 때, 나는 너희 앞에서 갈 것이며, 내 진리의 영은 너희들의 마음에 거할 것이다.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193:2.3 (2054.4) And then the Master disappeared from their sight. The next day there went out from Tyre those who carried this story to Sidon and even to Antioch and Damascus. Jesus had been with these believers when he was in the flesh, and they were quick to recognize him when he began to teach them. While his friends could not readily recognize his morontia form when made visible, they were never slow to identify his personality when he spoke to them. 그러고 나서 주(主)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다음 날 티레를 떠나서 그들이 이 이야기를 시돈, 그리고 심지어는 안디옥과 다마스커스까지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이 신자들과 함께 계셨었으며, 그들은 그가 자기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를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부활체 형체로 눈에 보였을 때 그의 친구들은 바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였을 때 그의 고유성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3. Last Appearance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출현

160925 부활27 – 예루살렘에 마지막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9th) AD30. 4. 9. Am 3:30 이후 요셉 무덤 앞 1(5 여인) 2(막마) / 베다니 나사로 무덤 동산 3(약 12시) 4(가족친구 20명 pm 2시) / 요셉 집 5(25명 여인들 pm4:15) 6(40명 그리스인 플라비우스 오후4:30) 7(엠마오2형제 목동 오후5시) 8(베드로 마가 정원 pm8:30) 9(10사도들 마가 다락방 pm9) 10(전도자들 필라델피아 4/11화 am8시) 11(11사도들 막 다락방 4/16 주일 pm6) 12(로단 80명 알렉산드리아 4/18화 pm8:30) 13(10 사도 갈릴리 4/21 금 am6:00) 14(11사도 가버나움 고지 4/22토 12시) 15(500 벳새다 호숫가 4/29 토 pm3) 16(61명 이상 대표자들 니고데모 집 5/5 금 pm9) 17(75명 사마리아인 날다 시카 5/13토 pm4) 18(페니키아 5/16 화 pm9) 18(11 사도 마가 다락방 5/18 목 아침) 18(페니키아 두로 5/16 화 pm9) 19(11명 사도 마가 다락방 5/18 목 아침) 행1:4-8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93:3.1 (2055.1) Early Thursday morning, May 18, Jesus made his last appearance on earth as a morontia personality. As the eleven apostles were about to sit down to breakfast in the upper chamber of Mary Mark’s home, Jesus appeared to them and said: 5월 18일 목요일 아침 일찍, 부활체 고유성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열 한 사도들이 마리아 마가의 다락방에서 아침 식사를 들기 위해 앉으려고 할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3.2 (2055.2) “Peace be upon you. I have asked you to tarry here in Jerusalem until I ascend to the Father, even until I send you the Spirit of Truth, who shall soon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and who shall endow you with power from on high.” Simon Zelotes interrupted Jesus, asking, “Then, Master, will you restore the kingdom, and will we see the glory of God manifested on earth?” When Jesus had listened to Simon’s question, he answered: “Simon, you still cling to your old ideas about the Jewish Messiah and the material kingdom. But you will receive spiritual power after the spirit has descended upon you, and you will presently go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of the kingdom.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so do I send you. And I wish that you would love and trust one another. Judas is no more with you because his love grew cold, and because he refused to trust you, his loyal brethren.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 where it is written: ‘It is not good for man to be alone. No man lives to himself’? And also where it says: ‘He who would have friends must show himself friendly’? And did I not even send you out to teach, two and two, that you might not become lonely and fall into the mischief and miseries of isolation? You also well know that, when I was in the flesh, I did not permit myself to be alone for long periods. From the very beginning of our associations I always had two or three of you constantly by my side or else very near at hand even when I communed with the Father. Trust, therefore, and confide in one another. And this is all the more needful since I am this day going to leave you alone in the world. The hour has come; I am about to go to the Father.”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 높은 곳으로부터 너희에게 힘을 주는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모든 육체에게 곧 부어지리라. 그 때까지 너희는 이 곳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너희에게 부탁했었노라.” 시몬 젤로떼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며 “그렇다면 주(主)여, 당신께서 그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시몬의 질문을 다 들으신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아직도 유대인의 메시아와 물질적 왕국에 대한 옛 관념들에 매달려 있구나. 그러나 진리의 영이 너에게 임한 후에는 너도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며, 너는 곧 온 세상에 나가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기를 바라노라. 유다는 그의 사랑이 식었으며, 그의 충실한 형제인 너희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 ‘혼자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지 않다. 아무도 혼자 살 수 없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또한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호의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보내어 가르치게 했을 때에도, 너희가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고독한 해독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둘씩 짝을 지어 보내지 않았느냐? 또한 너희도 잘 알다시피, 내가 육신으로 있을 때, 나 혼자서 오랜 기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노라. 우리가 함께 일하는 초기부터, 나는 너희들 중에 두 세 사람이 항상 내 옆에 있도록 하였고, 내가 아버지와 교제를 나눌 때에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 의탁하라.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홀로 이 세상에 남겨놓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들이 더욱 필요하다. 그 때가 왔고, 나는 곧 아버지께로 떠날 것이다.”

193:3.3 (2055.3) When he had spoken, he beckoned for them to come with him, and he led them out on the Mount of Olives, where he bade them farewell preparatory to departing from Urantia. This was a solemn journey to Olivet. Not a word was spoken by any of them from the time they left the upper chamber until Jesus paused with them on the Mount of Olives. 말씀을 마친 그는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으며, 그곳에서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셨습니다. 올리브 산으로 가는 여행은 매우 장엄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을 떠날 때부터 예수와 함께 올리브 산에서 쉴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4. Causes of Judas’s Downfall 유다 패망의 원인들

161002 부활28 – 유다 패망의 원인1 벧후3:18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가십시오. 주님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193:4.1 (2055.4) It was in the first part of the Master’s farewell message to his apostles that he alluded to the loss of Judas and held up the tragic fate of their traitorous fellow worker as a solemn warning against the dangers of social and fraternal isolation. It may be helpful to believers, in this and in future ages, briefly to review the causes of Judas’s downfall in the light of the Master’s remarks and in view of the accumulated enlightenment of succeeding centuries. 주님은 사도들에게 작별인사의 서두에서 유다 패망의 원인을 언급하셨으며, 사회적으로 고립하고, 형제우애의 친교에서 고립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함으로서 그들을 배반한, 동료 일꾼에 대한 비극적인 숙명을 거론하셨습니다. 주(主)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지나간 수세기 동안에 계속 발전되어 온 깨우침에 비추어, 유다 패망 원인들을 간단히 돌이켜 보는 일은, 현 시대와 오는 시대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3:4.2 (2055.5) As we look back upon this tragedy, we conceive that Judas went wrong, primarily, because he was very markedly an isolated personality, a personality shut in and away from ordinary social contacts. He persistently refused to confide in, or freely fraternize with, his fellow apostles. But his being an isolated type of personality would not, in and of itself, have wrought such mischief for Judas had it not been that he also failed to increase in love and grow in spiritual grace. And then, as if to make a bad matter worse, he persistently harbored grudges and fostered such psychologic enemies as revenge and the generalized craving to “get even” with somebody for all his disappointments. 우리가 이 비극을 돌이켜 볼 때, 유다는 애초부터 그의 아주 두드러지게 고립된 성격, 보통의 사회적 접촉에서 마음 문을 닫고 멀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잘못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을 신뢰하여 속을 털어 놓거나, 거리낌 없이 형제우애를 나누며 사귀기를 끈질기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사랑을 키우고, 영적인 은혜 가운데 성장함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다면, 유다의 고립된 성격 유형 자체가 유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는 완고하게 원한을 품었으며, 복수심과 같은 심리적인 적과 자신의 모든 실망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똑같이 복수”하려는 일반화된 열망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193:4.3 (2056.1) This unfortunate combination of individual peculiarities and mental tendencies conspired to destroy a well-intentioned man who failed to subdue these evils by love, faith, and trust. That Judas need not have gone wrong is well proved by the cases of Thomas and Nathaniel, both of whom were cursed with this same sort of suspicion and overdevelopment of the individualistic tendency. Even Andrew and Matthew had many leanings in this direction; but all these men grew to love Jesus and their fellow apostles more, and not less, as time passed. They grew in grace and in a knowledge of the truth. They became increasingly more trustful of their brethren and slowly developed the ability to confide in their fellows. Judas persistently refused to confide in his brethren. When he was impelled, by the accumulation of his emotional conflicts, to seek relief in self-expression, he invariably sought the advice and received the unwise consolation of his unspiritual relatives or those chance acquaintances who were either indifferent, or actually hostile, to the welfare and progress of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heavenly kingdom, of which he was one of the twelve consecrated ambassadors on earth. 불행하게도 개인의 특성과 정신적 경향의 이런 조합이 겹쳐져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신뢰로 이러한 악을 정복하지 못했던 선의의 사람이 파멸되었습니다. 유다는 잘못에 빠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마와 나다니엘의 경우를 통해 잘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도 이와 같은 종류의 의심과 개별적 성향이 지나치게 발달되어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안드레와 마태조차도 이러한 성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랑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료 사도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과 은혜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형제들을 신뢰하였고 동료들에게 자신을 속을 털어놓고 의탁할 수 있는 능력이 서서히 계발(啓發)되었습니다. 유다는 고집스럽게 형제들 신뢰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적 갈등들이 누적되어, 할 수 없이 자아표현의 분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한결같이, 영적이지 못한 자기 친척들이나 어쩌다 알게 된 자들의 조언과 지혜롭지 못한 위로를 찾았습니다. 유다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헌신한 열 두 대사들 중의 하나였지만, 유다가 찾았던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실체의 번영과 진보에 대해 무관심하든지 아니면 실제적인 적대자들이었습니다.

161009 부활29 – 유다 패망의 원인2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193:4.4 (2056.2) Judas met defeat in his battles of the earth struggle because of the following factors of personal tendencies and character weakness: 유다는 이 세상의 갈등과 투쟁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개인적 경향들과 성격적인 연약함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93:4.5 (2056.3) 1. He was an isolated type of human being. He was highly individualistic and chose to grow into a confirmed “shut-in” and unsociable sort of person. 그는 고립된 유형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개인(이기)주의적이었으며, 굳게 폐쇄된 채로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비사교적인 부류의 사람이 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193:4.6 (2056.4) 2. As a child, life had been made too easy for him. He bitterly resented thwarting. He always expected to win; he was a very poor loser. 어린 시절에 그는 너무 안일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것으로 인해 자신의 뜻이 방해 받는 것을 아주 좌절(挫折)스럽고 비통하게 여겨 분개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초라한 패배자였습니다.

193:4.7 (2056.5) 3. He never acquired a philosophic technique for meeting disappointment. Instead of accepting disappointments as a regular and commonplace feature of human existence, he unfailingly resorted to the practice of blaming someone in particular, or his associates as a group, for all his personal difficulties and disappointments. 그는 실망에 대처하는 철학적인 기법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망을 인간 존재의 삶에서 흔히 발생하는 정상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모든 어려움들과 실망스러운 일들에 대해서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자기 동료 그룹을 어김없이 비난하는 습관을 따르곤 하였습니다.

193:4.8 (2056.6) 4. He was given to holding grudges; he was always entertaining the idea of revenge. 그는 언제나 불만스런 원한의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복수(復讐)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4.9 (2056.7) 5. He did not like to face facts frankly; he was dishonest in his attitude toward life situations. 그는 사실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생의 상황들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193:4.10 (2056.8) 6. He disliked to discuss his personal problems with his immediate associates; he refused to talk over his difficulties with his real friends and those who truly loved him. In all the years of their association he never once went to the Master with a purely personal problem. 그는 가까운 동료들과 자기의 개인적 문제를 의논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진실한 자기 친구들과, 그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동료로 지냈던 수년 동안, 그는 자신의 순수한 개인적 문제로 한 번도 주(主)님께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93:4.11 (2056.9) 7. He never learned that the real rewards for noble living are, after all, spiritual prizes, which are not always distributed during this one short life in the flesh. 그는 고귀한 삶에 대한 진정한 보상은 결국 영적 상급-육신으로 사는 짧은 이생 동안에 항상 공급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193:4.12 (2056.10) As a result of his persistent isolation of personality, his griefs multiplied, his sorrows increased, his anxieties augmented, and his despair deepened almost beyond endurance. 그의 고집스런(완고한) 고립된 개인성의 결과로, 그의 비탄은 배가되었고, 그의 슬픔은 깊어졌으며, 그의 근심은 증대되었고, 그의 절망감은 심화되어,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거의 넘어섰습니다.

193:4.13 (2057.1) While this self-centered and ultraindividualistic apostle had many psychic, emotional, and spiritual troubles, his main difficulties were: In personality, he was isolated. In mind, he was suspicious and vengeful. In temperament, he was surly and vindictive. Emotionally, he was loveless and unforgiving. Socially, he was unconfiding and almost wholly self-contained. In spirit, he became arrogant and selfishly ambitious. In life, he ignored those who loved him, and in death, he was friendless. 자기중심적이고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이 사도가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었지만, 다음의 것들이 중요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의심이 많고 복수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기질은 무뚝뚝하고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정 면에서 사랑도 없었고 용서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는 타인을 신뢰할 수 없어서 솔직하지 못하였고 거의 전적으로 자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거만하고 이기적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무시하였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193:4.14 (2057.2) These, then, are the factors of mind and influences of evil which, taken altogether, explain why a well-meaning and otherwise onetime sincere believer in Jesus, even after several years of intimate association with his transforming personality, forsook his fellows, repudiated a sacred cause, renounced his holy calling, and betrayed his divine Master. 이러한 마음의 요소들과 악의 영향들이 함께 어우러진 것들을 통해 우리는 유다 패망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 때 선의를 가지고, 다른 면에서는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이, 심지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고유성)과 몇 년 동안의 친밀한 교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기 동료들을 버리고, 하늘의 목적을 거절하고, 거룩한 소명을 포기하며, 거룩한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5. The Master’s Ascension 주님의 승천(昇天)

161016 부활30 – 예수님의 승천 눅24:49-51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193:5.1 (2057.3) It was almost half past seven o’clock this Thursday morning, May 18, when Jesus arrived on the western slope of Mount Olivet with his eleven silent and somewhat bewildered apostles. From this location, about two thirds the way up the mountain, they could look out over Jerusalem and down upon Gethsemane. Jesus now prepared to say his last farewell to the apostles before he took leave of Urantia. As he stood there before them, without being directed they knelt about him in a circle, and the Master said: 5월 18일 목요일 아침 7시 30분경에, 예수님은 말없이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11명의 사도들과 함께 올리브 산 서쪽 기슭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산기슭에서부터 위쪽으로 3분의 2 정도 되는 위치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 있었고 겟세마네를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고 준비하셨습니다. 거기에 주님께서 그들 앞에 서시자,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주(主)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3:5.2 (2057.4) “I bade you tarry in Jerusalem until you were endowed with power from on high. I am now about to take leave of you; I am about to ascend to my Father, and soon, very soon, will we send into this world of my sojourn the Spirit of Truth; and when he has come, you shall begin the new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first in Jerusalem and then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world. Love men with the love wherewith I have loved you and serve your fellow mortals even as I have served you. By the spirit fruits of your lives impel souls to believe the truth that man is a son of God, and that all men are brethren. Remember all I have taught you and the life I have lived among you. My love overshadows you, my spirit will dwell with you, and my peace shall abide upon you. Farewell.” “너희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였노라. 이제 나는 너희를 떠나려고 한다. 나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고, 곧 바로, 우리는 내가 머물렀던 이 세상에 진리의 영을 보낼 것이라. 그가 오면, 너희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에는 세상의 가장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선포(宣布)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 동료들을 섬겨라. 너희의 일생동안 영의 열매들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모든 사람들은 서로 형제라는 진리를 사람들(혼)이 믿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들과 너희들 중에 내가 살았던 그 일생을 기억하라. 나의 사랑이 너희를 보호하고,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며, 내 평강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잘 있어라.”

193:5.3 (2057.5) When the morontia Master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This so-called ascension of Jesus was in no way different from his other disappearances from mortal vision during the forty days of his morontia career on Urantia. 부활체의 주(主)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그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소위 예수님의 승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지구에서 부활체의 생애를 사신 40일 동안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셨던 다른 경우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193:5.4 (2057.6) The Master went to Edentia by way of Jerusem, where the Most Highs, under the observation of the Paradise Son, released Jesus of Nazareth from the morontia state and, through the spirit channels of ascension, returned him to the status of Paradise sonship and supreme sovereignty on Salvington. 주(主)님은 예루셈을 거쳐 에덴시아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천국 아들의 감독 아래, 지고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부활체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승천하는 영적 통로를 통해, 천국 아들의 신분과 구원자별 최고 통치자의 지위로 돌아오셨습니다.

193:5.5 (2057.7) It was about seven forty-five this morning when the morontia Jesus disappeared from the observation of his eleven apostles to begin the ascent to the right hand of his Father, there to receive formal confirmation of his completed sovereignty of the universe of Nebadon. 부활체의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승천하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네바돈 우주에 대한 그의 완전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확정 받으시기 위하여, 그의 열 한 명의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것은 이 날 아침 7시 45분경이었습니다.

6. Peter Calls a Meeting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61023 부활31 – 승천 후 첫 모임Peter Calls a Meeting 행1:12-26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193:6.1 (2057.8) Acting upon the instruction of Peter, John Mark and others went forth to call the leading disciples together at the home of Mary Mark. By ten thirty, one hundred and twenty of the foremost disciples of Jesus living in Jerusalem had forgathered to hear the report of the farewell message of the Master and to learn of his ascension. Among this company was Mary the mother of Jesus. She had returned to Jerusalem with John Zebedee when the apostles came back from their recent sojourn in Galilee. Soon after Pentecost she returned to the home of Salome at Bethsaida. James the brother of Jesus was also present at this meeting, the first conference of the Master’s disciples to be called after the termination of his planetary career. 베드로의 지시로, 요한 마가와 다른 사람들은 수제자들을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모이도록 부르러 나갔습니다. 10시 30분에, 예루살렘에 사는 예수의 제자 120명 대부분이 주(主)님의 고별 설교와 승천(昇天) 소식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최근에 갈릴리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때, 그녀도 요한 세베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오순절 직후 벳새다에 있는 살로메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역시 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이 모임은 주(主)님의 지상 생애를 마친 후 제자들이 소집한 첫 번째 회의(會議)였습니다.

193:6.2 (2058.1) Simon Peter took it upon himself to speak for his fellow apostles and made a thrilling report of the last meeting of the eleven with their Master and most touchingly portrayed the Master’s final farewell and his ascension disappearance. It was a meeting the like of which had never before occurred on this world. This part of the meeting lasted not quite one hour. Peter then explained that they had decided to choose a successor to Judas Iscariot, and that a recess would be granted to enable the apostles to decide between the two men who had been suggested for this position, Matthias and Justus. 시몬 베드로는 자청하여 동료 사도들의 대표로 주님과 열 한 사도들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해서 흥미진지하게 설명하였고 주(主)님의 작별 인사와 승천으로 사라지시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모임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모임의 이 부분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설명하여, 이 자리에 천거된 두 사람, 맛디아와 유스도 중에서 사도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휴회(休會)하였습니다.

193:6.3 (2058.2) The eleven apostles then went downstairs, where they agreed to cast lots in order to determine which of these men should become an apostle to serve in Judas’s place. The lot fell on Matthias, and he was declared to be the new apostle. He was duly inducted into his office and then appointed treasurer. But Matthias had little part in the subsequent activities of the apostles. 그 후 열 한 사도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두 사람 중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가 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기로 동의하였습니다. 맛디아가 뽑혀, 그는 새 사도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는 정식으로 사도의 직책을 받은 후 회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맛디아는 거의 사도 활동의 역할이 없었습니다.

193:6.4 (2058.3) Soon after Pentecost the twins returned to their homes in Galilee. Simon Zelotes was in retirement for some time before he went forth preaching the gospel. Thomas worried for a shorter period and then resumed his teaching. Nathaniel differed increasingly with Peter regarding preaching about Jesus in the place of proclaiming the former gospel of the kingdom. This disagreement became so acute by the middle of the following month that Nathaniel withdrew, going to Philadelphia to visit Abner and Lazarus; and after tarrying there for more than a year, he went on into the lands beyond Mesopotamia preaching the gospel as he understood it. 오순절 후 쌍둥이 형제는 갈릴리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열심당 시몬은 복음을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한 동안 조용히 쉬었습니다. 도마는 그 보다 짧게 고민하다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예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예수에 대해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갈수록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다음 달 중순경에 이 의견 차이가 너무 깊어져서, 나다니엘이 물러나, 아브너와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갔으며, 거기서 일 년 이상 머문 후에, 메소포타미아 건너편 땅으로 가서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193:6.5 (2058.4) This left but six of the original twelve apostles to become actors on the stage of the early proclamation of the gospel in Jerusalem: Peter, Andrew, James, John, Philip, and Matthew. 원래 12 사도 중 남은 6명만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초기 무대에서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가 그들이었습니다.

193:6.6 (2058.5) Just about noon the apostles returned to their brethren in the upper chamber and announced that Matthias had been chosen as the new apostle. And then Peter called all of the believers to engage in prayer, prayer that they might be prepared to receive the gift of the spirit which the Master had promised to send. 바로 정오 무렵에 사도들은 다락방의 형제들에게 돌아와 맛디아가 새 사도로 선출되었음을 공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主)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영의 선물을 받기 위한 준비를 위해 기도에 동참하도록 초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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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The new gospel about Jesus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The mission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의 사명
Man’s threefold spiritual endowment 사람의 3중적 영적 증여
The seven higher spiritual influences 더 높은 7가지 영적 영향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 교회의 시작

161030 진리의 영1 – 하나님 나라의 복음 행2: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194:0.1 (2059.1) ABOUT one o’clock, as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were engaged in prayer, they all became aware of a strange presence in the room. At the same time these disciples all became conscious of a new and profound sense of spiritual joy, security, and confidence. This new consciousness of spiritual strength was immediately followed by a strong urge to go out and publicly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the good news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약 1시 경에, 120명의 신자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들 모두 이상한 존재가 그 방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영적 기쁨과 안심함 그리고 확신을 주는 새로운 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힘을 새롭게 느끼게 되자, 이들은 즉시 밖에 나가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소식을 선포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194:0.2 (2059.2) Peter stood up and declared that this must be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 Master had promised them and proposed that they go to the temple and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news committed to their hands. And they did just what Peter suggested.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것이 바로 주(主)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셨던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에 가서 자신들의 손에 맡겨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했습니다.

194:0.3 (2059.3) These men had been trained and instructed that the gospel which they should preach was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sonship of man, but at just this moment of spiritual ecstasy and personal triumph, the best tidings, the greatest news, these men could think of was the fact of the risen Master. And so they went forth, endowed with power from on high, preaching glad tidings to the people — even salvation through Jesus — but they unintentionally stumbled into the error of substituting some of the facts associated with the gospel for the gospel message itself. Peter unwittingly led off in this mistake, and others followed after him on down to Paul, who created a new religion out of the new version of the good news.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포해야할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자녀 관계라고 훈련과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최상의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 예수님을 통한 구원까지 전파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게 복음의 내용 자체를 복음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로 바꾸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앞장서서 이런 잘못을 행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랐으며, 바울에게까지 이어져, 바울은 기쁜 소식을 새롭게 해석한 새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194:0.4 (2059.4)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the fact of the fatherhood of God, coupled with the resultant truth of the sonship-brotherhood of men. Christianity, as it developed from that day, is: the fact of God a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in association with the experience of believer-fellowship with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사실과, 이와 함께 그 결과 인간의 아들됨과 형제 신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그 날부터 발전하여, 부활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이 친교를 나누는 경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194:0.5 (2059.5) It is not strange that these spirit-infused men should have seized upon this opportunity to express their feelings of triumph over the forces which had sought to destroy their Master and end the influence of his teachings. At such a time as this it was easier to remember their personal association with Jesus and to be thrilled with the assurance that the Master still lived, that their friendship had not ended, and that the spirit had indeed come upon them even as he had promised. 영에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이, 주(主)님을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없애려 했던 세력을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을 드러낼 이 기회를 잡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들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셔서 자신들과의 사귐이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약속대로 그 영이 정말로 자신들에게 오셨다는 확신으로 감동되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194:0.6 (2059.6) These believers felt themselves suddenly translated into another world, a new existence of joy, power, and glory. The Master had told them the kingdom would come with power, and some of them thought they were beginning to discern what he meant. 이 신자들은 자신들이 갑자기 기쁨과 권능 그리고 영광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졌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 중 몇 몇은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0.7 (2059.7) And when all of this is taken into consideration, it is not difficult to understand how these men came to preach a new gospel about Jesus in the place of their former message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이러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신분이라는 이전의 메시지 대신에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161106 진리의 영2 – 오순절 설교 행2:36-41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194:1.1 (2060.1) The apostles had been in hiding for forty days. This day happened to be the Jewish festival of Pentecost, and thousands of visitors from all parts of the world were in Jerusalem. Many arrived for this feast, but a majority had tarried in the city since the Passover. Now these frightened apostles emerged from their weeks of seclusion to appear boldly in the temple, where they began to preach the new message of a risen Messiah. And all the disciples were likewise conscious of having received some new spiritual endowment of insight and power.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로서 세계 각지로부터 수천 명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위해 왔지만, 대부분은 유월절 이후에도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사도들이 몇 주간의 은거에서 벗어나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나, 그곳에서 부활한 메시아의 새 메시지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도 똑같이 어떤 새로운 영적 통찰력과 권능이 자신들에게 부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1.2 (2060.2) It was about two o’clock when Peter stood up in that very place where his Master had last taught in this temple, and delivered that impassioned appeal which resulted in the winning of more than two thousand souls. The Master had gone, but they suddenly discovered that this story about him had great power with the people. No wonder they were led on into the further proclamation of that which vindicated their former devotion to Jesus and at the same time so constrained men to believe in him. Six of the apostles participated in this meeting: Peter, Andrew, James, John, Philip, and Matthew. They talked for more than an hour and a half and delivered messages in Greek, Hebrew, and Aramaic, as well as a few words in even other tongues with which they had a speaking acquaintance. 베드로가 오후 2시 쯤 주님께서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셨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열정적으로 호소했고, 그 결과 거의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떠나 가셨지만, 사도들은, 그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권능이 있음을 갑작스럽게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헌신이 올바른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더 나아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강요하는 선포로 당연히 이끌렸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여섯 명의 사도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였습니다. 그들은 1시간 30분 이상 이야기하면서,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로 메시지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씩 설교하였습니다.

194:1.3 (2060.3) The leaders of the Jews were astounded at the boldness of the apostles, but they feared to molest them because of the large numbers who believed their story.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대담함에 놀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194:1.4 (2060.4) By half past four o’clock more than two thousand new believers followed the apostles down to the pool of Siloam, where Peter, Andrew, James, and John baptized them in the Master’s name. And it was dark when they had finished with baptizing this multitude. 4시 30분 쯤 2,000명이 넘는 새 신자들은 사도들을 따라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주(主)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했습니다. 해질 녘이 되어서야,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주던 세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4:1.5 (2060.5) Pentecost was the great festival of baptism, the time for fellowshipping the proselytes of the gate, those gentiles who desired to serve Yahweh. It was, therefore, the more easy for large numbers of both the Jews and believing gentiles to submit to baptism on this day. In doing this, they were in no way disconnecting themselves from the Jewish faith. Even for some time after this the believers in Jesus were a sect within Judaism. All of them, including the apostles, were still loyal to the essential requirements of the Jewish ceremonial system. 오순절은 타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야훼를 섬기려는 이방인들 즉 할례의 의무가 없는 개종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기간으로 세례의 큰 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이 이 날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유대의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동안까지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하여 그들 모두 유대의 의식적(儀式的) 체계의 기본 요구들을 여전히 신봉하였습니다.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161113 진리의 영3 – 오순절의 의미 1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94:2.1 (2060.6) Jesus lived on earth and taught a gospel which redeemed man from the superstition that he was a child of the devil and elevated him to the dignity of a faith son of God. Jesus’ message, as he preached it and lived it in his day, was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spiritual difficulties in that day of its statement. And now that he has personally left the world, he sends in his place his Spirit of Truth, who is designed to live in man and, for each new generation, to restate the Jesus message so that every new group of mortals to appear upon the face of the earth shall have a new and up-to-date version of the gospel, just such personal enlightenment and group guidance as will prove to be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ever-new and varied spiritual difficulties.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사람은 마귀의 자녀라는 미신에서 건져서 하나님의 신앙의 자녀라는 품격으로 사람을 높이는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당대에 설교하고 실천하신 것처럼, 그것이 진술된 그 시대 사람의 영적 고난들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대신 진리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 안에서 살아가시도록 작정되었고, 각각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진술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새로운 집단들이, 새로운 최첨단 해석 버전의 복음을 가지고, 바로 그렇게 개인적으로 깨우치고, 집단적으로 안내를 받아, 그 복음이 언제나 새롭게 발생하는 다양한 영적 어려움들을 위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할 것입니다.

194:2.2 (2060.7) The first mission of this spirit is, of course, to foster and personalize truth, for it is the comprehension of truth that constitutes the highest form of human liberty. Next, it is the purpose of this spirit to destroy the believer’s feeling of orphanhood. Jesus having been among men, all believers would experience a sense of loneliness had not the Spirit of Truth come to dwell in men’s hearts. 이 영의 첫 번째 사명은 당연히 진리를 길러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상의 형태로 인간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의 목적은 신자들 자신이 고아(孤兒)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들은 고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194:2.3 (2061.1) This bestowal of the Son’s spirit effectively prepared all normal men’s minds for the subsequent universal bestowal of the Father’s spirit (the Adjuster) upon all mankind. In a certain sense, this Spirit of Truth is the spirit of both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아들의 영을 이렇게 주셔서, 뒤를 이어 모든 인류가 우주적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영(조절자)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효과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진리의 영은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 두 분의 영이십니다.

194:2.4 (2061.2) Do not make the mistake of expecting to become strongly intellectually conscious of the outpoured Spirit of Truth. The spirit never creates a consciousness of himself, only a consciousness of Michael, the Son. From the beginning Jesus taught that the spirit would not speak of himself. The proof, therefore, of your fellowship with the Spirit of Truth is not to be found in your consciousness of this spirit but rather in your experience of enhanced fellowship with Michael. 부어진 진리의 영을 지적으로 강하게 인식되기를 기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 영은 결코 자신을 의식(意識)하게 하지 않으며,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만 의식하게 하십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그 영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과 우리가 친교를 나누는 증거는 이 영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예수님과의 더욱 강화된 친교의 체험 속에서 발견됩니다.

194:2.5 (2061.3) The spirit also came to help men recall and understand the words of the Master as well as to illuminate and reinterpret his life on earth. 이 영은 또한 사람이 주(主)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도우며,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일생을 조명하고 재해석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194:2.6 (2061.4) Next, the Spirit of Truth came to help the believer to witness to the realities of Jesus’ teachings and his life as he lived it in the flesh, and as he now again lives it anew and afresh in the individual believer of each passing generation of the spirit-filled sons of God. 다음으로, 진리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사셨던 것처럼, 신자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그 일생의 실체들을 증거하도록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금 다시 사시는 것처럼, 지나가는 각 세대에서, 영으로 충만해진 하나님 자녀들 즉 각 개별 신자 안에서 새롭게 그리고 신선하게 그 실체들이 증언됩니다.

194:2.7 (2061.5) Thus it appears that the Spirit of Truth comes really to lead all believers into all truth, into the expanding knowledge of the experience of the living and growing spiritual consciousness of the reality of eternal and ascending sonship with God. 그렇게, 진리의 영은 진실로 모든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영원히 상승하는 하나님의 아들관계에 대해 생생하게 더욱 더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아는 확대된 지식으로 인도하려고 오셨습니다.

161127 진리의 영4 – 오순절의 의미 2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194:2.8 (2061.6) Jesus lived a life which is a revelation of man submitted to the Father’s will, not an example for any man literally to attempt to follow. This life in the flesh, together with his death on the cross and subsequent resurrection, presently became a new gospel of the ransom which had thus been paid in order to purchase man back from the clutch of the evil one — from the condemnation of an offended God. Nevertheless, even though the gospel did become greatly distorted, it remains a fact that this new message about Jesus carried along with it many of the fundamental truths and teachings of his earlier gospel of the kingdom. And, sooner or later, these concealed truths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will emerge to effectually transform the civilization of all mankind.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문자 그대로 따르는 모델로 살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육체로 사신 이 생애는 십자가 위의 죽으심과 연이어 일어난 부활과 함께, 현재 구속이라는 새로운 복음이 되었습니다. 구속은 마귀의 손아귀 즉 분노하는 하나님의 유죄 판결로부터, 인간을 다시 사기 위해 그렇게 몸값이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이 새로운 메시지가 그의 초기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근본적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들의 형제 신분이라는 감추어진 이 진리들이 모든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194:2.9 (2061.7) But these mistakes of the intellect in no way interfered with the believer’s great progress in growth in spirit. In less than a month after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the apostles made more individual spiritual progress than during their almost four years of personal and loving association with the Master. Neither did this substitution of the fact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for the saving gospel truth of sonship with God in any way interfere with the rapid spread of their teachings; on the contrary, this overshadowing of Jesus’ message by the new teachings about his person and resurrection seemed greatly to facilitate the preaching of the good news. 그러나 이 지적인 오류들은 신자의 영적 성장에 대한 괄목할만한 진보에 있어서 어떤 면으로든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진리의 영을 받은 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거의 4년에 걸쳐서 주님과 개인적으로 보냈던 사랑하는 관계보다 개별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영적으로 진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라는 구원의 복음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로 대체한 것도 신속히 퍼져나가는 그들의 가르침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예수의 메시지에 드리워진 이 그늘이 오히려 기쁜 소식의 전파를 크게 촉진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4:2.10 (2061.8) The term “baptism of the spirit,” which came into such general use about this time, merely signified the conscious reception of this gift of the Spirit of Truth and the personal acknowledgment of this new spiritual power as an augmentation of all spiritual influences previously experienced by God-knowing souls. 이 무렵 “영의 세례(洗禮)”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단지 진리의 영이라는 이 선물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을 아는 혼들이 이전에 체험하였던 모든 영적인 영향력이 새로운 이 영적 권능으로 증대되었음을 개인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194:2.11 (2061.9) Sinc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man is subject to the teaching and guidance of a threefold spirit endowment: the spirit of the Father, the Thought Adjuster; the spirit of the Son, the Spirit of Truth; the spirit of the Spirit, the Holy Spirit. 진리의 영이 주어진 이후, 사람은 삼중적 영 즉, 아버지의 영(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진리의 영), 영의 영(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2.12 (2062.1) In a way, mankind is subject to the double influence of the sevenfold appeal of the universe spirit influences. The early evolutionary races of mortals are subject to the progressive contact of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Mother Spirit. As man progresses upward in the scale of intelligence and spiritual perception, there eventually come to hover over him and dwell within him the seven higher spirit influences. And these seven spirits of the advancing worlds are: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의 영향력이 주는 일곱 가지로 중복된 매력의 영향력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초기 진화 종족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주는 일곱 보조 마음-영들의 진보적 접촉 아래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적 등급과 영적 인식이 상향으로 진보하면 결국 일곱 가지의 더 높은 영의 영향이 그에게 와서 내주합니다. 진보하는 세계의 이러한 일곱 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2.13 (2062.2) 1. The bestowed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 the Thought Adjusters. 우주 아버지의 영(靈)─생각조절자.

194:2.14 (2062.3) 2. The spirit presence of the Eternal Son — the spirit gravity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e certain channel of all spirit communion. 영원하신 아들의 영 현존─우주들의 우주의 영 중력과 모든 영 교제의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The spirit presence of the Infinite Spirit — the universal spirit-mind of all creation, the spiritual source of the intellectual kinship of all progressive intelligences. 무한 영(靈)의 영 현존─모든 창조의 우주 영-마음, 진보하는 모든 지능들의 지적 유사성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The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 the Spirit of Truth,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on.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간주되는 진리의 영.

194:2.17 (2062.6) 5. The spirit of the Infinite Spirit and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Holy Spirit,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pirit. 무한 영(靈)의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영의 영으로 간주되는 성령.

194:2.18 (2062.7) 6. The mind-spirit of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우주 어머니 영의 마음-영 ─ 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마음-영들.

194:2.19 (2062.8) 7. The spirit of the Father, Sons, and Spirits — the new-name spirit of the ascending mortals of the realms after the fusion of the mortal spirit-born soul with the Paradise Thought Adjuster and after the subsequent attainment of the divinity and glorification of the status of the Paradise Corps of the Finality. 아버지, 아들들 그리고 영들의 영─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혼과 천국 생각조절자의 융합 이후 그리고 그에 따라 나중에 천국 최종단의 지위에서의 신성과 영광을 달성한 후, 영역들에서 상승하는 사람이 받는 새로운-이름의 영.

194:2.20 (2062.9) And so did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bring to the world and its peoples the last of the spirit endowment designed to aid in the ascending search for God. 그래서 그렇게 진리의 영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을 찾는 상승을 돕기 위해 계획된 최종적 영의 부으심이 일어났습니다.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161204 진리의 영5 – 오순절에 발생한 일 1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194:3.1 (2062.10) Many queer and strange teachings became associated with the early narratives of the day of Pentecost. In subsequent times the events of this day, on which the Spirit of Truth, the new teacher, came to dwell with mankind, have become confused with the foolish outbreaks of rampant emotionalism. The chief mission of this outpoured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is to teach men about the truths of the Father’s love and the Son’s mercy. These are the truths of divinity which men can comprehend more fully than all the other divine traits of character. The Spirit of Truth is concerned primarily with the revelation of the Father’s spirit nature and the Son’s moral character. The Creator Son, in the flesh, revealed God to men; the Spirit of Truth, in the heart, reveals the Creator Son to men. When man yields the “fruits of the spirit” in his life, he is simply showing forth the traits which the Master manifested in his own earthly life. When Jesus was on earth, he lived his life as one personality — Jesus of Nazareth. As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new teacher,” the Master has, since Pentecost, been able to live his life anew in the experience of every truth-taught believer. 가치 없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들이 오순절 날의 초기 이야기들과 연관 되었습니다. 후세에, 인류에 내주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생님으로 진리의 영이 왔던 이날의 사건들은 사납게 휩쓸린 감정주의의 어리석은 소동들과 혼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출된 이 영의 주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에 대한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다른 모든 성품의 신성한 특징들 보다 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룩한 진리들입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의 영에 대한 본성과 아들의 도덕적인 성품을 계시하는데 주된 관련이 있습니다. 창조주 아들은 육신으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으며, 진리의 영은 마음으로 창조주 아들을 사람들에게 계시합니다. 사람이 일생에 “영의 열매들”을 맺을 때, 그는 단순히 주(主)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일생 속에 나타내셨던 그 특징들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그는 하나의 고유성 – 나사렛 예수 –로서 자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주(主)는 “새로운 선생”의 내주하는 영으로서, 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신자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일생을 사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194:3.2 (2062.11) Many things which happen in the course of a human life are hard to understand, difficult to reconcile with the idea that this is a universe in which truth prevails and in which righteousness triumphs. It so often appears that slander, lies, dishonesty, and unrighteousness — sin — prevail. Does faith, after all, triumph over evil, sin, and iniquity? It does. And the life and death of Jesus are the eternal proof that the truth of goodness and the faith of the spirit-led creature will always be vindicated. They taunted Jesus on the cross, saying, “Let us see if God will come and deliver him.” It looked dark on that day of the crucifixion, but it was gloriously bright on the resurrection morning; it was still brighter and more joyous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s of pessimistic despair seek to obtain release from the burdens of life; they crave extinction in endless slumber and rest. These are the religions of primitive fear and dread. The religion of Jesus is a new gospel of faith to be proclaimed to struggling humanity. This new religion is founded on faith, hope, and love.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리가 지배하고, 공의가 승리하는 곳이 우주인데, 이러한 우주에 대한 관념과 조화시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주 죄 – 중상(中傷), 거짓말, 부정직함, 그리고 불의 –가 이기는 듯합니다. 결국에는 신앙이 악, 죄, 그리고 사악함을 이길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죽음은, 영으로 인도받는 피조물의 선(善)함과 신앙의 진실성이 항상 정당화 될 것이라는 영원한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하나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시는지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던 그 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광스럽게 빛났습니다. 오순절에는 여전히 더욱 빛나고 더욱 기쁨이 넘쳤습니다. 비관적인 절망(絶望)의 종교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끝없는 수면과 휴식 안에서 멸절(滅絶)되기를 갈망합니다. 이것들은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예수의 종교는 분투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새로운 신앙의 복음입니다. 새로운 이 종교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61211 진리의 영6 – 오순절에 발생한 일 2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194:3.3 (2063.1) To Jesus, mortal life had dealt its hardest, cruelest, and bitterest blows; and this man met these ministrations of despair with faith, courage, and the unswerving determination to do his Father’s will. Jesus met life in all its terrible reality and mastered it — even in death. He did not use religion as a release from life. The religion of Jesus does not seek to escape this life in order to enjoy the waiting bliss of another existence. The religion of Jesus provides the joy and peace of another and spiritual existence to enhance and ennoble the life which men now live in the flesh. 그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도피(逃避)로써 종교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다른 존재가 되어 축복 받을 것이라는 즐거움을 기다리면서 이생의 예수님은 가장 힘들고,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통한 일격(一擊)을 당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신앙과 용기와 확고한 결단력으로 절망적인 이 직무들에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끔찍한 모든 삶의 실체를 맞이하여, 죽음까지도 포함에서 그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삶에서 도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들이 현재 육신으로 사는 바로 그 삶을 향상시키고 고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영적 생활의 기쁨과 평강을 제공합니다.

194:3.4 (2063.2) If religion is an opiate to the people, it is not the religion of Jesus. On the cross he refused to drink the deadening drug, and his spirit, poured out upon all flesh, is a mighty world influence which leads man upward and urges him onward. The spiritual forward urge is the most powerful driving force present in this world; the truth-learning believer is the one progressive and aggressive soul on earth. 종교가 인간에게 아편(마취제)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통증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강력한 세계적 영향력입니다. 전진하는 영적 충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지상에서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194:3.5 (2063.3)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 of Jesus broke all national restrictions and racial fetters. It is forever true,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On this day the Spirit of Truth became the personal gift from the Master to every mortal. This spirit was bestowed for the purpose of qualifying believers more effectively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they mistook the experience of receiving the outpoured spirit for a part of the new gospel which they were unconsciously formulating. 오순절에 예수의 종교는 국가적 제약들과 종족간의 족쇄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은 언제까지나 진리입니다. 이 날, 진리의 영은 주(主)께서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영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적격(適格)자가 되도록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퍼부어진 영을 받는 체험을, 자신들이 무의식중에 형성하고 있었던 새 복음의 일부로 삼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194:3.6 (2063.4)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 Spirit of Truth was bestowed upon all sincere believers; this gift of the spirit did not come only to the apostles. The one hundred and twenty men and women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all received the new teacher, as did all the honest of heart throughout the whole world. This new teacher was bestowed upon mankind, and every soul received him in accordance with the love for truth and the capacity to grasp and comprehend spiritual realities. At last, true religion is delivered from the custody of priests and all sacred classes and finds its real manifestation in the individual souls of men. 진리의 영이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증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의 이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이 새로운 선생을 받았으며, 온 세상에서 정직한 심정을 지닌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고 영적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혼(사람)이 그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참된 종교가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이 관리하는 상태에서 해방되었으며, 각자 사람(혼) 안에서 참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4:3.7 (2063.5) The religion of Jesus fosters the highest type of human civilization in that it creates the highest type of spiritual personality and proclaims the sacredness of that person. 예수의 종교는 최상의 영적 고유성 유형을 만들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인간 문명 유형을 육성합니다.

161218 진리의 영7 – 오순절에 발생한 일 3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194:3.8 (2063.6)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on Pentecost made possible a religion which is neither radical nor conservative; it is neither the old nor the new; it is to be dominated neither by the old nor the young. The fact of Jesus’ earthly life provides a fixed point for the anchor of time, whil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provides for the everlasting expansion and endless growth of the religion which he lived and the gospel which he proclaimed. The spirit guides into all truth; he is the teacher of an expanding and always-growing religion of endless progress and divine unfolding. This new teacher will be forever unfolding to the truth-seeking believer that which was so divinely folded up in the person and nature of the Son of Man.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오셔서, 급진적이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종교는 오래된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지배되지도 않고, 청년들에게 지배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시간의 닻을 위한 정점(定點)을 제공합니다. 반면에 진리의 영의 수여(授與: 베풀어 주심)는 주님께서 사셨던 종교와 선포하셨던 복음의 영속적인 확장과 끝없는 성장을 마련합니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끝없는 진보와 신성이 펼쳐져서 확장되고 항상 성장하는 종교의 선생입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신성하게 감춰진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입니다.

194:3.9 (2064.1) The manifestations associated with the bestowal of the “new teacher,” and the reception of the apostles’ preaching by the men of various races and nations gathered together at Jerusalem, indicate the universality of the religion of Jesus. The gospel of the kingdom was to be identified with no particular race, culture, or language. This day of Pentecost witnessed the great effort of the spirit to liberate the religion of Jesus from its inherited Jewish fetters. Even after this demonstration of pouring out the spirit upon all flesh, the apostles at first endeavored to impose the requirements of Judaism upon their converts. Even Paul had trouble with his Jerusalem brethren because he refused to subject the gentiles to these Jewish practices. No revealed religion can spread to all the world when it makes the serious mistake of becoming permeated with some national culture or associated with established racial, social, or economic practices. “새로운 선생”의 증여(贈與:선물로 주심)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들과,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던 여러 인종과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지닌 보편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특정한 인종, 문화 또는 언어와 동일시(同一視)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순절 바로 이 날에 그 영의 위대한 수고로 예수의 종교는, 이어져 왔던 유대교의 사슬에서 분명히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모든 육체에 영이 부어졌음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처음 개종자들에게 유대교의 요구조건들을 부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이 예루살렘 형제들과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유대 관습에 복종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계시(啓示) 종교는 어떤 민족 문화에 젖어 들거나, 확립된 인종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에 빠질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습니다.

194:3.10 (2064.2)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was independent of all forms, ceremonies, sacred places, and special behavior by those who received the fullness of its manifestation. When the spirit came upon those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they were simply sitting there, having just been engaged in silent prayer. The spirit was bestowed in the country as well as in the city.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apostles to go apart to a lonely place for years of solitary meditation in order to receive the spirit. For all time, Pentecost disassociates the idea of spiritual experience from the notion of especially favorable environments.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식들, 의식(儀式)들, 거룩한 장소들, 그리고 그 영이 나타남을 충분히 받았던 사람들의 특별한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 영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단지 거기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기도에 막 들어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영은 도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영을 받기 위해 뿔뿔이 헤어져 외로운 곳에서 몇 년씩 고독하게 묵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개념이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어진다는 관념으로부터 언제나 분리시킵니다.

194:3.11 (2064.3) Pentecost, with its spiritual endowment, was designed forever to loose the religion of the Master from all dependence upon physical force; the teachers of this new religion are now equipped with spiritual weapons. They are to go out to conquer the world with unfailing forgiveness, matchless good will, and abounding love. They are equipped to overcome evil with good, to vanquish hate by love, to destroy fear with a courageous and living faith in truth. Jesus had already taught his followers that his religion was never passive; always were his disciples to be active and positive in their ministry of mercy and in their manifestations of love. No longer did these believers look upon Yahweh as “the Lord of Hosts.” They now regarded the eternal Deity as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made that progress, at least, even if they did in some measure fail fully to grasp the truth that God is also the spiritual Father of every individual. 오순절은, 영의 부어주심과 함께, 주(主)님의 종교가 물리적 힘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영원히 벗어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새로운 이 종교의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들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용서, 견줄 수 없는 선한 뜻,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며, 진리에 대해 용감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두려움을 파괴할 장비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수동적)이 아니라고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자비(慈悲)로 봉사하고 사랑을 드러낼 때,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했습니다. 이 신자들은 야훼를 더 이상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영원한 신(神)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또한 모든 각 개인의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거기까지는 진보했습니다.

194:3.12 (2064.4) Pentecost endowed mortal man with the power to forgive personal injuries, to keep sweet in the midst of the gravest injustice, to remain unmoved in the face of appalling danger, and to challenge the evils of hate and anger by the fearless acts of love and forbearance. Urantia has passed through the ravages of great and destructive wars in its history. All participants in these terrible struggles met with defeat. There was but one victor; there was only one who came out of these embittered struggles with an enhanced reputation — that was Jesus of Nazareth and his gospel of overcoming evil with good. The secret of a better civilization is bound up in the Master’s teachings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good will of love and mutual trust. 오순절은 사람에게 개인적 상처를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공평의 상황에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무시무시한 위험에 직면하여서도 여전히 태연하고,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분노의 악을 도전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이 땅은 역사(歷史) 속에서 엄청나고 파괴적인 전쟁들에 의한 참혹한 피해들을 겪어 왔습니다. 이 끔찍한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패배했습니다. 승자(勝者)는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투쟁들로부터, 높은 명성과 함께 떠오른 유일한 승자는 – 나사렛 예수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그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보다 나은 문명에 대한 비결은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님의 가르침들, 즉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한 뜻 안에 깊이 묻혀 있습니다.

16-17 진리의 영(8) –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요일 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I do not write to you because you do not know the truth, but because you do know it and because no lie comes from the truth.

194:3.13 (2065.1) Up to Pentecost, religion had revealed only man seeking for God; since Pentecost, man is still searching for God, but there shines out over the world the spectacle of God also seeking for man and sending his spirit to dwell within him when he has found him. 오순절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오순절 이후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발견한 후에는 그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의 영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장관(壯觀)을 온 세상에 비추고 있습니다.

194:3.14 (2065.2) Before the teachings of Jesus which culminated in Pentecost, women had little or no spiritual standing in the tenets of the older religions. After Pentecost, in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woman stood before God on an equality with man.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who received this special visitation of the spirit were many of the women disciples, and they shared these blessings equally with the men believers. No longer can man presume to monopolize the ministry of religious service. The Pharisee might go on thanking God that he was “not born a woman, a leper, or a gentile,” but among the followers of Jesus woman has been forever set free from all religious discriminations based on sex. Pentecost obliterated all religious discrimination founded on racial distinction, cultural differences, social caste, or sex prejudice. No wonder these believers in the new religion would cry out,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오순절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기 이전에, 여인들은 오래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영적 지위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형제 신분으로 남자들과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영을 이렇게 특별히 체험한 120명 중에 여(女)제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은 남성 신자들과 똑같이 이 축복을 누렸습니다. 남자들은 이제 종교적 예배 사역에 있어서 더 이상 독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한센병(Hansen病) 환자 또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여자는 성(性)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인종적 구별, 문화적 차이들, 사회적 특권계급, 또는 성(性)적 편견에 근간을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습니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사람들이 “주(主)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4:3.15 (2065.3) Both the mother and brother of Jesus were present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and as members of this common group of disciples, they also received the outpoured spirit. They received no more of the good gift than did their fellows. No special gift was bestowed upon the members of Jesus’ earthly family. Pentecost marked the end of special priesthoods and all belief in sacred families.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120명의 신자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도 이러한 보통 제자들의 일원으로서 부어진 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이 받은 것보다 좋은 선물을 더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집안 식구라고 해서 특별한 선물이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司祭) 신분과 거룩하게 여겨지는 가계(家系)에 대한 모든 믿음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194:3.16 (2065.4) Before Pentecost the apostles had given up much for Jesus. They had sacrificed their homes, families, friends, worldly goods, and positions. At Pentecost they gave themselves to God, and the Father and the Son responded by giving themselves to man — sending their spirits to live within men. This experience of losing self and finding the spirit was not one of emotion; it was an act of intelligent self-surrender and unreserved consecration.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들은 집, 가족, 친구, 세상의 재물과 지위를 희생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 응답으로 사람들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들의 영을 보내셔서 자신들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靈)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적으로 자아를 포기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행동이었습니다.

194:3.17 (2065.5) Pentecost was the call to spiritual unity among gospel believers. When the spirit descended on the disciples at Jerusalem, the same thing happened in Philadelphia, Alexandria, and at all other places where true believers dwelt. It was literally true that “there was but one heart and soul among the multitude of the believers.” The religion of Jesus is the most powerful unifying influence the world has ever known.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있는 영적 일치(一致)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였을 때와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참된 신자들이 거주하는 모든 다른 장소들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믿는 회중 사이에 오로지 한 가지 심정과 혼이 있었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통합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194:3.18 (2065.6) Pentecost was designed to lessen the self-assertiveness of individuals, groups, nations, and races. It is this spirit of self-assertiveness which so increases in tension that it periodically breaks loose in destructive wars. Mankind can be unified only by the spiritual approach, and the Spirit of Truth is a world influence which is universal. 오순절은 개인, 집단, 국가, 종족들의 자기-주장을 줄이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주장의 정신은 긴장을 고조(高調)시켜 주기적인 파괴적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합니다. 인류는 영적 접근을 통해서만 통합될 수 있으며, 진리의 영은 우주적인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194:3.19 (2065.7)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purifies the human heart and leads the recipient to formulate a life purpose single to the will of God and the welfare of men. The material spirit of selfishness has been swallowed up in this new spiritual bestowal of selflessness. Pentecost, then and now, signifies that the Jesus of history has become the divine Son of living experience. The joy of this outpoured spirit, when it is consciously experienced in human life, is a tonic for health, a stimulus for mind, and an unfailing energy for the soul. 진리의 영의 오심은 인간의 심정을 깨끗이 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행복)에 대한 단 하나의 일생의 목적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이기심 없는 이 새로운 영적 증여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오순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예수께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적 아들이 되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부어주신 영의 기쁨은, 인간 일생을 통해 의식적으로 겪을 때, 건강을 위해서는 큰 힘이 되고, 마음에는 자극이 되며, 혼을 위해서는 한없는 에너지가 됩니다.

194:3.20 (2065.8) Prayer did not bring the spirit on the day of Pentecost, but it did have much to do with determining the capacity of receptivity which characterized the individual believers. Prayer does not move the divine heart to liberality of bestowal, but it does so often dig out larger and deeper channels wherein the divine bestowals may flow to the hearts and souls of those who thus remember to maintain unbroken communion with their Maker through sincere prayer and true worship. 기도로 오순절에 영이 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도는 개별적 신자들을 특징짓는 수용(受容)성의 능력을 결정하는 데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가 신(神)의 심정을 움직여 아낌없이 주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기도와 참된 경배를 통하여 창조자와 중단 없이 계속 교통하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혼(魂)으로 신께서 주시는 것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확대되고 깊어진 통로를 자주 만들어 냅니다.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교회의 시작

170101 진리의 영(9) – 기독교의 시작 1 행2:32-33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God has raised this Jesus to life, and we are all witnesses of the fact. 33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대신에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 주석(해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님
194:4.1 (2066.1) When Jesus was so suddenly seized by his enemies and so quickly crucified between two thieves, his apostles and disciples were completely demoralized. The thought of the Master, arrested, bound, scourged, and crucified, was too much for even the apostles. They forgot his teachings and his warnings. He might, indeed, have been “a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but he could hardly be the Messiah they had hoped would restore the kingdom of Israel. 예수께서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셨으며, 그렇게 빨리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도들과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습니다. 체포되어, 묶여, 채찍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主)님에 대한 기억 은 사도들에게도 매우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24:19)”이셨지만,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심정에 살아계심 하나님은 마음의 교리가 아니라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
194:4.2 (2066.2) Then comes the resurrection, with its deliverance from despair and the return of their faith in the Master’s divinity. Again and again they see him and talk with him, and he takes them out on Olivet, where he bids them farewell and tells them he is going back to the Father. He has told them to tarry in Jerusalem until they are endowed with power — until the Spirit of Truth shall come. And on the day of Pentecost this new teacher comes, and they go out at once to preach their gospel with new power. They are the bold and courageous followers of a living Lord, not a dead and defeated leader. The Master lives in the hearts of these evangelists; God is not a doctrine in their minds; he has become a living presence in their souls. 그 후 부활이 오자 절망에서 일어나 주(主)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들은 여러 번 주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들을 올리브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곳에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이르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 와서 그들이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로운 선생이 오시자, 그들은 즉시 새 힘으로 그들의 복음을 전파하러 나갑니다. 그들은 패배하고 죽은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主)님은 이 복음 전파자들의 가슴(심정)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이십니다.

초기 신자들의 생활 매일 모여 성찬 찬미 말씀증거
194:4.3 (2066.3) “Day by day they continued steadfastly and with one accord in the temple and breaking bread at home. They took their food with gladness and singleness of heart, praising God and hav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spirit, and they spoke the word of God with boldness. And the multitudes of those who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soul; and not one of them said that aught of the things which he possessed was his own, and they had all things in common.”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행2:46-47a).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1b-32).

예수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 사람의 형제 신분 급격한 변경 사도들의 메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194:4.4 (2066.4) What has happened to these men whom Jesus had ordained to go forth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They have a new gospel; they are on fire with a new experience; they are filled with a new spiritual energy. Their message has suddenly shifted to the proclamation of the risen Christ: “Jesus of Nazareth, a man God approved by mighty works and wonders; him, being delivered up by the determinate counsel and foreknowledge of God, you did crucify and slay. The things which God foreshadowed by the mouth of all the prophets, he thus fulfilled. This Jesus did God raise up. God has made him both Lord and Christ. Being, by the right hand of God, exalted and having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 of the spirit, he has poured forth this which you see and hear. Repent, that your sins may be blotted out; that the Father may send the Christ, who has been appointed for you, even Jesus, whom the heaven must receive until the times of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을 나아가 전파하라 고 임명한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복음을 가졌고, 새로운 체험으로 흥분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급격히 변경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 못 박아 죽였으나(행2:22-23 ). …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8).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b).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너희가 회개하고 …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19-21a).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초림(일생 죽음 부활) 재림
194:4.5 (2066.5)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message of Jesus, had been suddenly changed into the gospel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now proclaimed the facts of hi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and preached the hope of his speedy return to this world to finish the work he began. Thus the message of the early believers had to do with preaching about the facts of his first coming and with teaching the hope of his second coming, an event which they deemed to be very near at hand.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의 메시지는,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갑자기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실들을 선포하였으며, 그가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가 이 세상으로 속히 돌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의 메시지는 그의 초림(初臨)에 대한 사실들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이 아주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사건인, 그의 재림(再臨)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리가 됨 예수가 모든 것을 결정 살아계심 죽으심 영 주심 재림 새로운 교리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예수 믿는 자들의 친교 예수를 받은 사랑에서 나옴 옛 교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늘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한 형제들의 친교 필사자 사람이 형제라는 인식에서 나옴
194:4.6 (2067.1) Christ was about to become the creed of the rapidly forming church. Jesus lives; he died for men; he gave the spirit; he is coming again. Jesus filled all their thoughts and determined all their new concepts of God and everything else. They were too much enthused over the new doctrine that “God i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to be concerned with the old message that “God is the loving Father of all men,” even of every single individual. True, a marvelous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and unexampled good will did spring up in these early communities of believers. But it was a fellowship of believers in Jesus, not a fellowship of brothers in the family kingdom of the Father in heaven. Their good will arose from the love born of the concept of Jesus’ bestowal and not from the recognition of the brotherhood of mortal man. Nevertheless, they were filled with joy, and they lived such new and unique lives that all men were attracted to their teachings about Jesus. They made the great mistake of using the living and illustrative commentary on the gospel of the kingdom for that gospel, but even that represented the greatest religion mankind had ever known. 그리스도가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교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살아 계시며,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영을 주셨으며, 다시 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그들의 모든 새로운 개념들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시다.”라는 새로운 교리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모든 개별존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옛 메시지에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형제 사랑과 전례가 없는 선한 뜻이 이러한 초기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솟아나 놀랍게 표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 였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선한 뜻은 예수님의 증여 개념에서 발생된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형제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하였으며,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모든 사람들이 매혹되는 그러한 새롭고도 독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인 주석(해설)을 바로 그 복음 대신에 사용하는 큰 오류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습니다.

170108 진리의 영(10) – 기독교의 시작 2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194:4.7 (2067.2) Unmistakably, a new fellowship was arising in the world. “The multitude who believed continued steadfastly in the apostles’ teaching and fellowship, in the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 They called each other brother and sister; they greeted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they ministered to the poor. It was a fellowship of living as well as of worship. They were not communal by decree but by the desire to share their goods with their fellow believers. They confidently expected that Jesus would return to complete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during their generation. This spontaneous sharing of earthly possessions was not a direct feature of Jesus’ teaching; it came about because these men and women so sincerely and so confidently believed that he was to return any day to finish his work and to consummate the kingdom. But the final results of this well-meant experiment in thoughtless brotherly love were disastrous and sorrow-breeding. Thousands of earnest believers sold their property and disposed of all their capital goods and other productive assets. With the passing of time, the dwindling resources of Christian “equal-sharing” came to an end — but the world did not. Very soon the believers at Antioch were taking up a collection to keep their fellow believers at Jerusalem from starving. 분명히, 새로운 친교(親交) 모임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기독교의 시작).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An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 and fellowship, and in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Kjv).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습니다. 그것은 경배의 친교만이 아니라 생활의 친교였습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재물을 동료 신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아버지의 나라 설립을 마치려고 돌아오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세상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예수 가르침의 직접적인 특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언젠가 돌아와서 자신의 일을 완성하고 그 나라를 성취하실 것이라고 이 남자와 여자들은 너무도 진지하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지만, 이렇게 경솔한 형제 사랑을 실험한 최종적 결과는 비참하였고 슬픔을 낳았습니다. 수천 명의 착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부동산을 팔았고 그들의 자본(資本)이 되는 모든 재물들과 기타 생산적인 자산 일체를 처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함께 나누는” 자산은 줄어들어 끝이 나게 되었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지 않도록 모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4.8 (2067.3) In these days they celebrated the Lord’s Supper after the manner of its establishment; that is, they assembled for a social meal of good fellowship and partook of the sacrament at the end of the meal. 이 무렵,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을, 그것이 창설된 방법에 따라서 거행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함께 모여 사이좋게 교제하면서 음식을 서로 나누고, 그 식사가 마칠 때,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194:4.9 (2067.4) At first they baptized in the name of Jesus; it was almost twenty years before they began to baptize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Baptism was all that was required for admission into the fellowship of believers. They had no organization as yet; it was simply the Jesus brotherhood.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는 신자들의 친교에 가입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아무 조직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히 예수의 형제신분이었습니다.

194:4.10 (2067.5) This Jesus sect was growing rapidly, and once more the Sadducees took notice of them. The Pharisees were little bothered about the situation, seeing that none of the teachings in any way interfered with the observance of the Jewish laws. But the Sadducees began to put the leaders of the Jesus sect in jail until they were prevailed upon to accept the counsel of one of the leading rabbis, Gamaliel, who advised them: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is of men, it will be overthrown; but if it is of God, you will not be able to overthrow them, lest haply you be found even to be fighting against God.” They decided to follow Gamaliel’s counsel, and there ensued a time of peace and quiet in Jerusalem, during which the new gospel about Jesus spread rapidly. 이 예수의 종파는 급속히 성장했고, 사두개인들은 한 번 더 그들을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상황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충돌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기 시작했고, 지도하는 랍비들 중 하나인 가말리엘의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설득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행5: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And now I say unto you,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be of men, it will come to nought: But if it be of God, ye cannot overthrow it; lest haply ye be found even to fight against God.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하였고, 예루살렘에는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이 신속하게 퍼졌습니다.

194:4.11 (2068.1) And so all went well in Jerusalem until the time of the coming of the Greeks in large numbers from Alexandria. Two of the pupils of Rodan arrived in Jerusalem and made many converts from among the Hellenists. Among their early converts were Stephen and Barnabas. These able Greeks did not so much have the Jewish viewpoint, and they did not so well conform to the Jewish mode of worship and other ceremonial practices. And it was the doings of these Greek believers that terminated the peaceful relations between the Jesus brotherhood and the Pharisees and Sadducees. Stephen and his Greek associate began to preach more as Jesus taught, and this brought them into immediate conflict with the Jewish rulers. In one of Stephen’s public sermons, when he reached the objectionable part of the discourse, they dispensed with all formalities of trial and proceeded to stone him to death on the spot.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로단의 두 생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헬라파 중에서 많은 사람이 개종(改宗)했습니다. 그들의 초기 개종자들 가운데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의 관점과 많이 달라서,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다른 예식의 관습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의 형제신분 단체와 바리새인•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스테반과 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대로 더욱 전파하기 시작하여, 그들은 곧 유대인 통치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의 대중 설교 중 하나에서, 강연(講演) 중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자, 그들은 모든 공식적 재판 절차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194:4.12 (2068.2) Stephen, the leader of the Greek colony of Jesus’ believers in Jerusalem, thus became the first martyr to the new faith and the specific cause for the formal organization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This new crisis was met by the recognition that believers could not longer go on as a sect within the Jewish faith. They all agreed that they must separate themselves from unbelievers; and within one month from the death of Stephen the church at Jerusalem had been organized under the leadership of Peter, and James the brother of Jesus had been installed as its titular head.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로운 신앙의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특별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해, 신자들은 이제는 더 유대 신앙의 한 종파로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인식(認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非)신자들과 따로 분리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습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이 안 되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아래 조직되어,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명목상 수장(首長)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4.13 (2068.3) And then broke out the new and relentless persecutions by the Jews, so that the active teachers of the new religion about Jesus, which subsequently at Antioch was called Christianity, went forth to the ends of the empire proclaiming Jesus. In carrying this message, before the time of Paul the leadership was in Greek hands; and these first missionaries, as also the later ones, followed the path of Alexander’s march of former days, going by way of Gaza and Tyre to Antioch and then over Asia Minor to Macedonia, then on to Rome an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empire. 그 후 유대인들에 의해 잔인한 박해가 새롭게 시작되어, 예수에 대해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는 의욕적인 선생들은 예수를 선포하면서 그 제국의 변방(邊方)들을 향하여 퍼져 나갔으며, 그 종교는 후에 안디옥에서 기독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바울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리스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선교사들은, 그 뒤를 이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전에 알렉산더가 행진하였던 길을 따라서,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디옥으로 갔으며, 이어서 소아시아를 지나 마케도니아로 갔고, 그 후에는 계속 로마와 그 제국의 가장 먼 지방들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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