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34
The Transition Years 과도기(過渡期) 시절
1. The Thirtieth Year (A.D. 24) 30세 되던 해 (서기 24년)
Return to Nazareth 나사렛으로 돌아오심
Marriage of Simon; marriage of Jude 시몬의 결혼; 유다의 결혼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隊商카라반) 여행
3. The Urmia Lectures 우르미아 강연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주권 –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및 주권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Solitary wanderings 단독 여행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 체류함
End of the Lucifer Rebellion 루시퍼 반란의 종말
The sovereignty of Nebadon 네바돈의 주권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Visit with John at Jerusalem 요한과 예루살렘에 들르다
Working in Zebedee’s boatshop 세베대의 선박(船舶)제작소에서 작업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34:0.1 (1483.1) DURING the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carefully studied the people he met and the countries through which he passed, and at about this time he reached his final decision as to the remainder of his life on earth. He had fully considered and now finally approved the plan which provided that he be born of Jewish parents in Palestine, and he therefore deliberately returned to Galilee to await the beginning of his lifework as a public teacher of truth; he began to lay plans for a public career in the land of his father Joseph’s people, and he did this of his own free will. 지중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만났던 사람들과 거쳐 갔던 나라들에 관하여 주의 깊게 연구하였으며, 이 무렵, 땅에서 보내야하는 여생(餘生)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계획을 충분하게 고려하였고 이제 그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대중(大衆)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필생의 사명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요셉의 민족의 땅에서 공생애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것을 행하셨습니다.
134:0.2 (1483.2) Jesus had found out through personal and human experience that Palestine was the best place in all the Roman world wherein to set forth the closing chapters, and to enact the final scenes, of his life on earth. For the first time he became fully satisfied with the program of openly manifesting his true nature and of revealing his divine identity among the Jews and gentiles of his native Palestine. He definitely decided to finish his life on earth and to complete his career of mortal existence in the same land in which he entered the human experience as a helpless babe. His Urantia career began among the Jews in Palestine, and he chose to terminate his life in Palestine and among the Jews. 예수님은 개인적인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이 모든 로마 제국에서,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章)을 마련하고, 최종 장면을 연출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자신이 태어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의 참된 성품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계획으로 충분히 만족(滿足)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기력한 아기로서 인간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에서 지상 생애를 반드시 끝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경력을 완성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1. The Thirtieth Year (A.D. 24)서른 살 되던 해(서기 24년)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134:1.1 (1483.3) After taking leave of Gonod and Ganid at Charax (in December of A.D. 23), Jesus returned by way of Ur to Babylon, where he joined a desert caravan that was on its way to Damascus. From Damascus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nly a few hours at Capernaum, where he paused to call on Zebedee’s family. There he met his brother James, who had sometime previously come over to work in his place in Zebedee’s boatshop. After talking with James and Jude (who also chanced to be in Capernaum) and after turning over to his brother James the little house which John Zebedee had managed to buy, Jesus went on to Nazareth. AD 23년 12월, 카락스Charax에서 고노드와 가니드를 떠나보낸 후에, 예수님은 우르Ur를 경유하여 바빌론Babylon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사막의 대상caravan과 합세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부터 나사렛Nazareth으로 돌아가는 도중, 가버나움Capernaum에 단 몇 시간 동안만 들렸을 때, 거기에서 세베대Zebedee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동생 야고보James를 만났으며, 야고보는 세베대의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님 대신 일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우연히 가버나움에 들렸었던 유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요한 세베대가 매입하여 관리하던 작은 집을 동생 야고보에게 넘겨준 다음, 계속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134:1.2 (1483.4) At the end of his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received sufficient money to meet his living expenses almost up to the time of the beginning of his public ministry. But aside from Zebedee of Capernaum and the people whom he met on this extraordinary trip, the world never knew that he made this journey. His family always believed that he spent this time in study at Alexandria. Jesus never confirmed these beliefs, neither did he make open denial of such misunderstandings. 지중해 여행을 마쳤을 때,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세베대와 이 특별한 여행에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이 기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냈었다고 언제나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옳다고 확인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러한 오해들을 드러내놓고 부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134:1.3 (1483.5) During his stay of a few weeks at Nazareth, Jesus visited with his family and friends, spent some time at the repair shop with his brother Joseph, but devoted most of his attention to Mary and Ruth. Ruth was then nearly fifteen years old, and this was Jesus’ first opportunity to have long talks with her since she had become a young woman. 나사렛에 머물던 몇 주간 동안, 예수님은 가족과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동생 요셉과 수리소에서 함께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관심은 마리아Mary와 룻Ruth에게 두었습니다. 룻은 그 때 거의 15살이었는데, 누이가 처녀가 된 이래로, 예수님이 그녀와 오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34:1.4 (1484.1) Both Simon and Jude had for some time wanted to get married, but they had disliked to do this without Jesus’ consent; accordingly they had postponed these events, hoping for their eldest brother’s return. Though they all regarded James as the head of the family in most matters, when it came to getting married, they wanted the blessing of Jesus. So Simon and Jude were married at a double wedding in early March of this year, A.D. 24. All the older children were now married; only Ruth, the youngest, remained at home with Mary. 시몬Simon과 유다Jude는 한 동안 결혼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동의 없이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맏형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으로 결혼을 미루었습니다. 비록 그들 모두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를 가장(家長)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이 임박해지자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는 이 해 AD 24년 3월 초순에 합동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이든 아이들은 이제 모두 결혼하였고, 가장 나이가 어린 룻만이 마리아와 함께 집에 남았습니다.
134:1.5 (1484.2) Jesus visited with the individual members of his family quite normally and naturally, but when they were all together, he had so little to say that they remarked about it among themselves. Mary especially was disconcerted by this unusually peculiar behavior of her first-born son. 예수님은 가족들을 개인별로 만날 때는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있었을 때에는 거의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그것에 대해 한마디씩 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맏아들의 이상한 태도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134:1.6 (1484.3) About the time Jesus was preparing to leave Nazareth, the conductor of a large caravan which was passing through the city was taken violently ill, and Jesus, being a linguist, volunteered to take his place. Since this trip would necessitate his absence for a year, and inasmuch as all his brothers were married and his mother was living at home with Ruth, Jesus called a family conference at which he proposed that his mother and Ruth go to Capernaum to live in the home which he had so recently given to James. Accordingly, a few days after Jesus left with the caravan, Mary and Ruth moved to Capernaum, where they lived for the rest of Mary’s life in the home that Jesus had provided. Joseph and his family moved into the old Nazareth home.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이 도시를 지나가던 어느 큰 대상(카라반)의 안내자가 심한 병에 걸렸는데, 외국어에 능통하였던 예수께서 그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이 여행 때문에 일 년 동안 집을 비워야 했고, 동생들이 모두 결혼해서 집에는 어머니와 룻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최근에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던 가버나움 집으로 어머니와 룻이 이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대상들과 떠난 며칠 뒤에, 마리아와 룻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리아의 여생(餘生) 동안 예수께서 마련하신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나사렛의 고향집으로 들어왔습니다.
134:1.7 (1484.4) This was one of the more unusual years in the inner experience of the Son of Man; great progress was made in effecting working harmony between his human mind and the indwelling Adjuster. The Adjuster had been actively engaged in reorganizing the thinking and in rehearsing the mind for the great events which were in the not then distant future. The personality of Jesus was preparing for his great change in attitude toward the world. These were the in-between times, the transition stage of that being who began life as God appearing as man, and who was now making ready to complete his earth career as man appearing as God. AD24년, 이 해는 사람의 아들의 내적 체험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몇 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인간 마음과 내주하는 조절자 사이에서 조화(調和)를 이루는 일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장래에 일어날 위대한 사건들을 위하여, 조절자는 예수님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훈련시키는 일(rehearsing)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유성은 세상을 향한 태도에 있어서 큰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들은 양단의 중간 시기, 인간으로 나타난 하나님으로서의 일생(一生)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나타난 사람으로서의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려고 이제 준비하는 과도기였습니다.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카라반) 여행
-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134:2.1 (1484.5) It was the first of April, A.D. 24, when Jesus left Nazareth on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Sea region. The caravan which Jesus joined as its conductor was going from Jerusalem by way of Damascus and Lake Urmia through Assyria, Media, and Parthia to the southeastern Caspian Sea region. It was a full year before he returned from this journey. 예수께서 나사렛을 출발하여 대상caravan들과 함께 카스피Caspian 해(海)로 여행을 떠난 것은 기원 후 24년 4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안내자로서 합세하였던 그 대상(隊商)은 예루살렘Jerusalem을 출발하여 다마스쿠스Damascus와 우르미아Urmia 호수(湖水)를 경유하고 앗시리아Assyria, 메디아Media, 파르티아Parthia를 거쳐 남동부 카스피 지역으로 갔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134:2.2 (1484.6) For Jesus this caravan trip was another adventure of exploration and personal ministry. He had an interesting experience with his caravan family — passengers, guards, and camel drivers. Scores of men, women, and children residing along the route followed by the caravan lived richer lives as a result of their contact with Jesus, to them, the extraordinary conductor of a commonplace caravan. Not all who enjoyed these occasions of his personal ministry profited thereby, but the vast majority of those who met and talked with him were made better for the remainder of their natural lives.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대상 여행은 탐험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역하는 또 다른 모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대상 일행들─승객들, 안내원들, 낙타 부리는 자들─과 함께 흥미 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대상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살고 있었던 많은 남녀 어른들과 아이들은,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대상을 이끄는 비범(非凡)한 안내자로 보였던 예수님과 접촉한 결과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사역하였던 이 기회들을 누렸던 사람들 전부가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더 나은 여생(餘生)을 누렸습니다.
134:2.3 (1484.7) Of all his world travels this Caspian Sea trip carried Jesus nearest to the Orient and enabled him to gain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Far-Eastern peoples. He made intimate and personal contact with every one of the surviving races of Urantia excepting the red. He equally enjoyed his personal ministry to each of these varied races and blended peoples, and all of them were receptive to the living truth which he brought them. The Europeans from the Far West and the Asiatics from the Far East alike gave attention to his words of hope and eternal life and were equally influenced by the life of loving service and spiritual ministry which he so graciously lived among them. 그의 모든 여행 중에서 이 카스피 해의 여행은 예수님께서 동방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래서 그는 극동(極東)지방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홍인종을 제외하고 지구에 살아남아 있는 각 종족들과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접촉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여러 인종들과 혼합 사람들 각자에게 동등하게 개인적으로 베푼 사역활동을 즐겼으며, 그들 모두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살아있는 진리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극서(極西)지방에서 온 유럽인들Europeans이나 극동지방에서 온 아시아인들Asiatics은,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그의 말에 똑같이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들 가운데 예수께서 그토록 인자하게 사셨던 사랑의 봉사와 영적 사역에 의하여 똑같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134:2.4 (1485.1) The caravan trip was successful in every way. This was a most interesting episode in the human life of Jesus, for he functioned during this year in an executive capacity, being responsible for the material intrusted to his charge and for the safe conduct of the travelers making up the caravan party. And he most faithfully, efficiently, and wisely discharged his multiple duties. 그 대상caravan 여행은 모든 점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 일생에서 매우 흥미 있는 에피소드(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해에 집행(執行)하는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물질과 카라반(대상) 일행을 이루고 있던 여행자들의 안전한 행위를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신실하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현명하게 여러 가지 임무들을 처리하였습니다.
134:2.5 (1485.2) On the return from the Caspian region, Jesus gave up the direction of the caravan at Lake Urmia, where he tarried for slightly over two weeks. He returned as a passenger with a later caravan to Damascus, where the owners of the camels besought him to remain in their service. Declining this offer, he journeyed on with the caravan train to Capernaum, arriving the first of April, A.D. 25. No longer did he regard Nazareth as his home. Capernaum had become the home of Jesus, James, Mary, and Ruth. But Jesus never again lived with his family; when in Capernaum he made his home with the Zebedees. 카스피 지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은 우르미아Urmia 호수에서 대상 안내자의 자리를 사직하고 2주가 약간 넘게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대상 대열에 승객으로 합세하여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그 낙타들의 주인은 그에게 남아서 같이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가는 대상들과 함께 계속 여행하여 AD 25년 4월 1일에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사렛Nazareth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이 예수와 야고보James와 마리아Mary와 룻Ruth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다시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으며, 가버나움에 있을 때에는 세베대Zebedees의 집에 자신의 거처(居處)를 정하였습니다.
3. The Urmia Lectures우르미아에서의 강연
134:3.1 (1485.3) On the way to the Caspian Sea, Jesus had stopped several days for rest and recuperation at the old Persian city of Urmia on the western shores of Lake Urmia. On the largest of a group of islands situated a short distance offshore near Urmia was located a large building — a lecture amphitheater — dedicated to the “spirit of religion.” This structure was really a temple of the philosophy of religions. 카스피 해(海)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휴식과 원기회복을 위하여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페르시아 도시인 우르미아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우르미아 근처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에는 큰 건물 – 원형극장식의 강연 장소 – 이 “종교의 정신spirit”에 봉헌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종교 철학을 다루는 사원(寺院)이었습니다.
134:3.2 (1485.4) This temple of religion had been built by a wealthy merchant citizen of Urmia and his three sons. This man was Cymboyton, and he numbered among his ancestors many diverse peoples. 이 종교 사원은 우르미아의 시민인 어느 부유한 상인(商人)과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심보이톤Cymboyton이었으며, 그의 선조들 중에는 다른 여러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134:3.3 (1485.5) The lectures and discussions in this school of religion began at ten o’clock every morning in the week. The afternoon sessions started at three o’clock, and the evening debates opened at eight o’clock. Cymboyton or one of his three sons always presided at these sessions of teaching, discussion, and debate. The founder of this unique school of religions lived and died without ever revealing his personal religious beliefs. 이 종교학교의 강의와 토론은 주 중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오후 수업은 3시에 시작하였으며, 저녁 토론회는 8시에 열렸습니다. 심보이톤Cymboyton이나 그의 세 아들들 중의 하나가 이 강의•논의•토론 시간에 언제나 사회(司會)를 보았습니다. 독특한 이 종교 학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밝히지 않은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34:3.4 (1485.6) On several occasions Jesus participated in these discussions, and before he left Urmia, Cymboyton arranged with Jesus to sojourn with them for two weeks on his return trip and give twenty-four lectures on “The Brotherhood of Men,” and to conduct twelve evening sessions of questions, discussions, and debates on his lectures in particular and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general.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이 논의에 참여했고, 우르미아를 떠나기 전에, 심보이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는 길에 그들과 2주간 동안 머물러 있도록 조정하여, “사람들의 형제신분The Brotherhood of Men”이라는 주제로 24번 강의하고, 특히 그의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토의하고 토론하는 저녁 시간을 12회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134:3.5 (1485.7) In accordance with this arrangement, Jesus stopped off on the return trip and delivered these lectures. This was the most systematic and formal of all the Master’s teaching on Urantia. Never before or after did he say so much on one subject as was contained in these lectures and discussions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reality these lectures were on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이러한 일정에 따라 예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우르미아에 들려 계획된 강의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계셨던 주님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형식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형제신분에 대하여, 이 강의들과 토의들에서처럼, 그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강의들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사람의 나라Kingdoms of Men”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34:3.6 (1486.1) More than thirty religions and religious cults were represented on the faculty of this temple of religious philosophy. These teachers were chosen, supported, and fully accredited by their respective religious groups. At this time there were about seventy-five teachers on the faculty, and they lived in cottages each accommodating about a dozen persons. Every new moon these groups were changed by the casting of lots. Intolerance, a contentious spirit, or any other disposition to interfere with the smooth running of the community would bring about the prompt and summary dismissal of the offending teacher. He would be unceremoniously dismissed, and his alternate in waiting would be immediately installed in his place. 30개가 넘는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들이, 종교 철학 전당의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수진들이 대표하는 각 종교 집단이 이 선생들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충분히 인가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약 75명의 선생들이 교수진으로 활동하였고, 그들은 각 집마다 약 12명이 함께 사는 사택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초승달이 뜰 때마다 이 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제비를 뽑아서 교체되었습니다. 편협함, 다투기를 좋아하는 정신, 또는 공동체를 순조롭게 운영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다른 경향을 나타나는 경우에는, 위반한 선생으로서 그 즉시 즉각적으로 해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예식을 거치지 않고 해직되었고, 교대 대기자가 곧 그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134:3.7 (1486.2) These teachers of the various religions made a great effort to show how similar their religions were in regard to the fundamental things of this life and the next. There was but one doctrine which had to be accepted in order to gain a seat on this faculty — every teacher must represent a religion which recognized God — some sort of supreme Deity. There were five independent teachers on the faculty who did not represent any organized religion, and it was as such an independent teacher that Jesus appeared before them. 다양한 종교들을 대표하는 이 선생들은 이생과 다음 생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종교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보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교수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원칙만이 적용되었습니다. 각 선생은 하나님 – 어떤 종류의 최고의 신(神)supreme Deity – 을 인정하는 종교를 대표해야만 했습니다. 교수진 가운데에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 독립된 5명의 선생들이 있었는데, 예수는 그러한 독립된 선생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34:3.8 (1486.3) [When we, the midwayers, first prepared the summary of Jesus’ teachings at Urmia, there arose a disagreement between the seraphim of the churches and the seraphim of progress as to the wisdom of including these teachings in the Urantia Revelation. Condit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prevailing in both religion and human governments, are so different from those prevailing in Jesus’ day that it was indeed difficult to adapt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to the problems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as these world functions are existent in the twentieth century. We were never able to formulate a statement of the Master’s teachings which was acceptable to both groups of these seraphim of planetary government. Finall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appointed a commission of three of our number to prepare our view of the Master’s Urmia teachings as adapted to twentieth-century religious and political conditions on Urantia. Accordingly, we three secondary midwayers completed such an adaptation of Jesus’ teachings, restating his pronouncements as we would apply them to present-day world conditions, and we now present these statements as they stand after having been edited b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우리 중도자들이 우르미아에서 예수님 교훈의 요약을 처음 준비했을 때, 교회의 세라핌천사들과 진보의 세라핌천사들 사이에, 유란시아 계시에 이런 가르침들을 포함하는 지혜에 관하여 불일치가 일어났습니다. 중교와 인간 정부(政府) 둘 다 만연한 20세기의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 만연한 그런 상황과 아주 달라서, 이러한 세계 기능들이 20세기에 현존하듯이, 우르미아에서 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들의 나라 문제들에 적응시키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행성 정부(政府)에 속한 이런 세라핌천사의 두 집단이 받아들일 주님의 교훈에 대한 진술을 결코 공식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우리 회원 중 3명의 위원회를 지명하여, 유란시아의 20세기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상황에 적합하게, 주님의 우르미아 교훈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준비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 2차 중도자 셋은 예수 교훈을 오늘날 세계 상황에 적용하듯이 그의 선언을 새로 진술하여, 그렇게 예수 교훈의 번안(飜案)을 완료했으며,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편집한 후 그대로, 우리는 이제 이 진술문을 제시합니다.]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170111 수요 예수73 (30세-AD24) 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134:4.1 (1486.4) The brotherhood of men is founded on the fatherhood of God. The family of God is derived from the love of God — God is love. God the Father divinely loves his children, all of them. 사람의 형제신분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기인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을 신적으로 사랑하십니다.
134:4.2 (1486.5) The kingdom of heaven, the divine government, is founded on the fact of divine sovereignty — God is spirit. Since God is spirit, this kingdom is spiritual. The kingdom of heaven is neither materi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is a spiritu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하늘나라, 신적인 정부(政府)는 신적인 주권 –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 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 나라는 영적(靈的)입니다. 하늘나라는 물질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지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입니다.
134:4.3 (1486.6) If different religions recognize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then will all such religions remain at peace. Only when one religion assumes that it is in some way superior to all others, and that it possesses exclusive authority over other religions, will such a religion presume to be intolerant of other religions or dare to persecute other religious believers. 만약 다른 종교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한다면, 그런 모든 종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의 종교가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월하고, 그것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인 권위를 갖는 경우에, 그런 종교는 다른 종교들을 용납하지 않거나 감히 다른 종교들의 신자들을 박해(迫害)할 것입니다.
134:4.4 (1487.1) Religious peace — brotherhood — can never exist unless all religions are willing to completely divest themselves of all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fully surrender all concept of spiritual sovereignty. God alone is spirit sovereign. 종교적 평화 – 형제신분 –은 모든 종교들이 교단의 모든 권한을 자발적으로 완전히 버리고, 영적 주권에 대한 모든 관념을 전부 포기(抛棄)하지 않는 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영적 주권자이십니다.
134:4.5 (1487.2) You cannot have equality among religions (religious liberty) without having religious wars unless all religions consent to the transfer of all religious sovereignty to some superhuman level, to God himself. 모든 종교들이 모든 종교적 주권(主權)을 초인간적 수준의 하나님 자신에게 넘겨드리기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전쟁 없이 종교들 사이에 평등(종교적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134:4.6 (1487.3)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en will create religious unity (not necessarily uniformity) because any and all religious groups composed of such religious believers will be free from all notions of ecclesiastical authority — religious sovereignty. 사람들의 심정 속에 있는 하늘나라는 종교적 연합(반드시 획일적일 필요는 없지만)을 만들어 낼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종교적 신자들로 구성된 모든 종교는 교단의 권한 – 종교적 주권 –에 대한 모든 개념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4:4.7 (1487.4) God is spirit, and God gives a fragment of his spirit self to dwell in the heart of man. Spiritually, all men are equal. The kingdom of heaven is free from castes, classes, social levels, and economic groups. You are all brethren.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의 영 그 자체의 한 단편(분신分身)을 사람의 심정 안에 내주하도록 보내 주십니다. 영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합니다. 하늘나라는 신분, 특권계급, 사회적 수준이나 경제적 단체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134:4.8 (1487.5) But the moment you lose sight of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some one religion will begin to assert its superiority over other religions; and then, instead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there will start dissensions, recriminations, even religious wars, at least wars among religionists.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 주권을 잃어버리는 순간,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대신, 종교인들 사이에서 불화와 비난이 시작될 것이고 심지어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134:4.9 (1487.6) Freewill beings who regard themselves as equals, unless they mutually acknowledge themselves as subject to some supersovereignty, some authority over and above themselves, sooner or later are tempted to try out their ability to gain power and authority over other persons and groups. The concept of equality never brings peace except in the mutual recognition of some overcontrolling influence of supersovereignty. 스스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은, 그들 위에 있는 높은 권한, 즉 어떤 초(超)주권의 지배를 받는다고 서로가 인정하지 않는 한, 조만간에 다른 개인들과 단체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과 권한을 갖기 위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떤 초(超)주권의 전권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평등(平等)의 개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134:4.10 (1487.7) The Urmia religionists lived together in comparative peace and tranquillity because they had fully surrendered all their notions of religious sovereignty. Spiritually, they all believed in a sovereign God; socially, full and unchallengeable authority rested in their presiding head — Cymboyton. They well knew what would happen to any teacher who assumed to lord it over his fellow teachers. There can be no lasting religious peace on Urantia until all religious groups freely surrender all their notions of divine favor, chosen people, and religious sovereignty. Only when God the Father becomes supreme will men become religious brothers and live together in religious peace on earth. 우르미아 종교인들은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신념들을 온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스럽고 고요하게 함께 살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모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도전할 수 없는 충분한 권한은 그들을 주관하는 수장(首長), 심보이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료 선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막론하고, 그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적인 은총과 선택받은 민족 그리고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관념을 모든 종교적 집단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영구한 종교적 평화(平和)를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최극의 뜻이 될 때에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형제들이 되고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평화 속에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170118 수요 예수74 (30세-AD24) 정치적 주권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134:5.1 (1487.8) [While the Master’s teaching concerning the sovereignty of God is a truth — only complicated by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the religion about him among the world’s religions — his presentations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re vastly complicated by the political evolution of nation life during the last nineteen hundred years and more. In the times of Jesus there were only two great world powers — the Roman Empire in the West and the Han Empire in the East — and these were widely separated by the Parthian kingdom and other intervening lands of the Caspian and Turkestan regions. We have, therefore, in the following presentation departed more widely from the substance of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t the same time attempting to depict the import of such teachings as they are applicable to the peculiarly critical stage of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n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다만 세상 종교들 사이에서 그에 관한 종교가 나중에 출현되어 단지 복잡해졌을 뿐입니다. 반면에, 정치적 주권에 관한 주님의 발표는 지난 1,900여 년 동안에 국가 생활의 정치적 진화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복잡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단지 두 개의 세계적인 강국들 –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한(漢) 제국─이 있었을 뿐이며, 이 두 제국은 파르티아Parthian 왕국과 카스피Caspian와 투루키스탄Turkestan 지역의 다른 국가들 때문에 널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발표가 정치적 주권에 관해 우르미아Urmia에서 주(主)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동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 정치적 주권이 진화하는 특별한 결정적 단계에 주님의 가르침이 적용되도록 그 가르침의 의미를 서술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134:5.2 (1487.9) War on Urantia will never end so long as nations cling to the illusive notions of unlimited national sovereignty. There are only two levels of relative sovereignty on an inhabited world: the spiritual free will of the individual mortal and the collective sovereignty of mankind as a whole. Between the level of the individual human being and the level of the total of mankind, all groupings and associations are relative, transitory, and of value only in so far as they enhance the welfare, well-being, and progress of the individual and the planetary grand total — man and mankind. 국가가 무제한적인 국가 주권(主權)을 가지고 있다는 허상에 집착하는 한, 이 땅에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오직 두 가지 차원의 상대적 주권만이 있을 뿐인데 바로 인간 개개인의 영적 자유의지와 인류 전체의 집합적 주권입니다. 개별 인간 존재의 차원과 인류 전체의 차원 사이에서, 모든 단체와 연합들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오직 그들이 개별존재와 행성 전체 즉 사람과 인류의 복지와 안녕 그리고 진보를 향상(向上)시키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134:5.3 (1488.1) Religious teachers must always remember that the spiritual sovereignty of God overrides all intervening and intermediate spiritual loyalties. Someday civil rulers will learn that the Most Highs rule in the kingdoms of men. 종교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적 통치권이, 중재하고 중개하는 모든 영적 충성심에 우선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민 정부의 통치자들은 사람의 왕국들을 통치하는 지고자들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134:5.4 (1488.2) This rule of the Most Highs in the kingdoms of men is not for the especial benefit of any especially favored group of mortals. There is no such thing as a “chosen people.” The rule of the Most Highs, the overcontrollers of political evolution, is a rule designed to foster the greatest good to the greatest number of all men and for the greatest length of time. 사람들의 나라 안에 있는 지고자the Most Highs들의 이 통치는 특별히 혜택을 누리는 어떤 사람들 단체의 특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민족”과 같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고자들, 즉 정치적 진화를 위에서 총괄하는 분들의 통치는 최다수(最多數)에게, 최장(最長)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주도록 설계된 법칙입니다.
134:5.5 (1488.3) Sovereignty is power and it grows by organization. This growth of the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is good and proper, for it tends to encompass ever-widening segments of the total of mankind. But this same growth of political organizations creates a problem at every intervening stage between the initial and natural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 the family — and the final consummation of political growth —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by all mankind, and for all mankind. 주권(主權)은 권력이며 그것은 조직에 의하여 성장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권력 조직의 성장은 유익하고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 전체의 가장 넓은 부분들을 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치조직의 성장은, 초기의 자연스러운 정치권력 – 가족(家族) – 의 조직과 최종적인 정치적 성장의 성취 – 모든 인류의, 모든 인류에 의한, 모든 인류를 위한 – 사이에 있는 모든 중간 단계마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134:5.6 (1488.4) Starting out with parental power in the family group, political sovereignty evolves by organization as families overlap into consanguineous clans which become united, for various reasons, into tribal units — superconsanguineous political groupings. And then, by trade, commerce, and conquest, tribes become unified as a nation, while nations themselves sometimes become unified by empire. 가족 집단 속에 있는 부모의 권력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 주권은 조직에 의해 진화합니다. 가족들이 혈연관계의 씨족으로 이어지고, 씨족들은 여러 이유로 부족(部族) 단위 -혈연관계를 초월한 정치적 집단들 –로 연합됩니다. 그런 다음, 무역과 상업 그리고 정복을 통해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고, 국가들 자체는 때때로 제국으로 연합됩니다.
134:5.7 (1488.5) As sovereignty passes from smaller groups to larger groups, wars are lessened. That is, minor wars between smaller nations are lessened, but the potential for greater wars is increased as the nations wielding sovereignty become larger and larger. Presently, when all the world has been explored and occupied, when nations are few, strong, and powerful, when these great and supposedly sovereign nations come to touch borders, when only oceans separate them, then will the stage be set for major wars, world-wide conflicts. So-called sovereign nations cannot rub elbows without generating conflicts and eventuating wars. 소규모의 집단에서 대규모의 집단으로 주권이 넘어감에 따라 전쟁은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국가들 간의 사소한 전쟁들은 줄어드는 반면에,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들은 커갈수록 더 큰 전쟁이 일어날 잠재성이 증가합니다. 당장에 온 세상이 탐험되어 점령되고, 나라들의 수가 얼마 안 되지만 강하고 강력하며, 이러한 엄청난 주권을 지닌 나라들의 국경이 서로 이웃하게 되고, 대양(大洋)으로만 겨우 나라들이 분리되어 있다면, 대규모의 전쟁, 즉 세계적인 충돌을 위한 무대가 준비될 것입니다. 소위 주권을 가진 국가들은, 갈등이 일어나 결국 전쟁하지 않고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습니다.
134:5.8 (1488.6) The difficulty in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from the family to all mankind, lies in the inertia-resistance exhibited on all intervening levels. Families have, on occasion, defied their clan, while clans and tribes have often been subversive of the sovereignty of the territorial state. Each new and forward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s (and has always been) embarrassed and hampered by the “scaffolding stages” of the previous developments in political organization. And this is true because human loyalties, once mobilized, are hard to change. The same loyalty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ribe, makes difficult the evolution of the supertribe — the territorial state. And the same loyalty (patriotism)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erritorial state, vastly complicates the evolutionary development of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가족으로부터 전체 인류로 확대되는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서 겪는 어려움은, 중간에 개입하는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관성(慣性)과 저항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족들은 경우에 따라 자기들의 씨족에게 도전해 왔으며, 반면에 씨족들과 부족들은 지역 국가의 주권을 종종 전복해왔습니다. 정치적 주권의 진화가 각각 새롭게 나아가는 경우 항상 언제나 그래왔지만, 정치적 조직에서, 이전에 개발된 “발판 단계”로 인해 난처해지고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 이유는, 일단 동원되면, 인간의 충성심은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족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충성심은 부족을 초월한 – 지역 국가 – 진화를 어렵게 합니다. 그리고 지역적 국가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동일한 충성심(애국심)이 모든 인류 정부의 진화적 발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듭니다.
134:5.9 (1488.7) Political sovereignty is created out of the surrender of self-determinism, first by the individual within the family and then by the families and clans in relation to the tribe and larger groupings. This progressive transfer of self-determination from the smaller to ever larger political organizations has generally proceeded unabated in the Eas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Ming and the Mogul dynasties. In the West it obtained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right on down to the end of the World War, when an unfortunate retrograde movement temporarily reversed this normal trend by re-establishing the submerged political sovereignty of numerous small groups in Europe. 정치적 주권은, 처음에는 가족 안에서 개인이, 다음에는 부족 및 더 큰 집합과 관계된 가족과 씨족들이, 자결(자아결정)주의를 버림으로 만들어집니다. 작은 데서부터 항상 더 큰 정치 조직으로 자결(自決)을 이렇게 진취적으로 양도(讓渡)하는 것은 명(明) 나라와 몽고 왕조가 세워진 뒤로, 동양에서는 대체로 줄어들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서양에서 그것은, 1천 년이 넘도록, 바로 세계 대전(大戰)이 끝날 때까지 진행되었고, 이 때 유럽에서 수많은 작은 집단들이, 사라졌던 정치적 주권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불행한 역행(逆行) 운동이 이 정상(正常)적인 경향을 일시에 바꿔 놓았습니다.
134:5.10 (1489.1) Urantia will not enjoy lasting peace until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intelligently and fully surrender their sovereign powers into the hands of the brotherhood of men — mankind government. Internationalism — Leagues of Nations — can never bring permanent peace to mankind. World-wide confederations of nations will effectively prevent minor wars and acceptably control the smaller nations, but they will not prevent world wars nor control the three, four, or five most powerful governments. In the face of real conflicts, one of these world powers will withdraw from the League and declare war. You cannot prevent nations going to war as long as they remain infected with the delusional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Internationalism is a step in the right direction. An international police force will prevent many minor wars, but it will not be effective in preventing major wars, conflicts between the great military governments of earth. 이른바 주권 국가들이 그 주권의 권력을 사람의 형제 정신―인류 정부―의 손에 총명하게, 완전히 내어주기까지, 지구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국제주의―국제 연맹―은 결코 인류에게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나라들의 세계적 연방들이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막고 작은 나라들을 만족스럽게 통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방들은 세계 전쟁을 방지하거나, 초강대국 서넛이나 다섯을 통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갈등에 직면하게 되면, 이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가 연맹으로부터 탈퇴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국가가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妄想)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미리 예방할 수 없습니다. 국제주의는 올바른 방향에로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국제 경찰력은 많은 작은 전쟁을 방지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정부들 사이의 갈등인 큰 전쟁을 방지하는 데에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134:5.11 (1489.2) As the number of truly sovereign nations (great powers) decreases, so do both opportunity and need for mankind government increase. When there are only a few really sovereign (great) powers, either they must embark on the life and death struggle for national (imperial) supremacy, or else, by voluntary surrender of certain prerogatives of sovereignty, they must create the essential nucleus of supernational power which will serve as the beginning of the real sovereignty of all mankind. 참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강대국)의 수가 줄어드는 데 따라서, 인류 정부의 기회와 필요가 늘어납니다. 정말로 주권을 가진 (큰) 강국들이 겨우 몇 나라만 있을 때는, 민족(제국) 우위성을 얻으려고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주권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여, 인류의 참된 주권의 시작으로서 사용될 초국가 권력의 필수 핵심(核心)을 만들어야 합니다.
134:5.12 (1489.3) Peace will not come to Urantia until every so-called sovereign nation surrenders its power to make war into the hands of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all mankind. Political sovereignty is innate with the peoples of the world. When all the peoples of Urantia create a world government, they have the right and the power to make such a government SOVEREIGN; and when such a representative or democratic world power controls the world’s land, air, and naval forces,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prevail — but not until then. 소위 주권 국가가 모두 전쟁을 수행할 권력을 인류의 대표 정부에게 양보할 때까지, 평화는 지구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주권은 세계의 여러 민족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지구의 모든 민족이 하나의 세계 정부를 창립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정부가 주권을 갖도록 할 권한과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 또는 민주적 세계 권력이 지구에서 세계의 육군•해군•공군을 통제할 때, 땅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가 지배할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때까지는 불가능합니다.
134:5.13 (1489.4) To use an important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illustration: The forty-eight states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have long enjoyed peace. They have no more wars among themselves. They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to the federal government, and through the arbitrament of war, they have abandoned all claims to the delusions of self-determination. While each state regulates its internal affairs, it is not concerned with foreign relations, tariffs, immigration, military affairs, or interstate commerce. Neither do the individual states concern themselves with matters of citizenship. The forty-eight states suffer the ravages of war only when the federal government’s sovereignty is in some way jeopardized. 19세기 및 20세기의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아메리카 연방의 48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권을 연방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전쟁의 중재를 통해서, 자체적 결정권이라는 망상에 대한 모든 주장을 버렸습니다. 각 주(州)정부가 그 내부(內部) 사무를 규제하지만, 외교 관계, 관세, 이민, 군사(軍事) 또는 주정부 간의 통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개별 주(州)는 시민권의 문제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48주는 오직 연방 정부의 주권이 어떤 면에서 위협을 받을 때에만 전쟁의 참화(慘禍)를 겪게 됩니다.
134:5.14 (1489.5) These forty-eight states, having abandoned the twin sophistries of sovereignty and self-determination, enjoy interstate peace and tranquillity. So will the nations of Urantia begin to enjoy peace when they freely surrender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into the hands of a global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the brotherhood of men. In this world state the small nations will be as powerful as the great, even as the small state of Rhode Island has its two senators in the American Congress just the same as the populous state of New York or the large state of Texas. 이 48주는 주권과 자체 결정권이라는 두 가지 궤변을 버렸고, 주 사이에서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국가들도 각자의 주권을 세계 정부 – 사람의 형제 정신의 주권 – 에 자유롭게 양보할 때 평화를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구가 많은 뉴욕 주나 큰 텍사스 주와 똑같이, 작은 로드 아이랜드 주가 미국 국회에 상원(上院) 의원 두 명을 가진 것처럼, 이 세계 국가에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만큼 강력해질 것입니다.
134:5.15 (1490.1) The limited (state) sovereignty of these forty-eight states was created by men and for men. The superstate (national) sovereignty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was created by the original thirteen of these state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men. Sometime the supernational sovereignty of the planetary government of mankind will be similarly created by nation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all men. 이 48주(州)의 제한된 주권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주를 관할하는 아메리카 연방이 가진 국가적 주권은 이 여러 주 가운데 최초의 13개 주가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주민(州民)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인류의 행성 정부의 초국가적 주권을 여러 나라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비슷한 형태로 만들 것입니다.
134:5.16 (1490.2) Citizens are not born for the benefit of governments; governments are organizations created and devised for the benefit of men. There can be no end to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short of the appearance of the government of the sovereignty of all men. All other sovereignties are relative in value, intermediate in meaning, and subordinate in status. 시민들은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고안된 조직입니다. 모든 사람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가 나타나지 못하면,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다른 주권의 가치는 상대적이며, 그 의미는 중간적이고, 그 지위는 종속적입니다.
134:5.17 (1490.3) With scientific progress, wars are going to become more and more devastating until they become almost racially suicidal. How many world wars must be fought and how many leagues of nations must fail before men will be willing to establish the government of mankind and begin to enjoy the blessings of permanent peace and thrive on the tranquillity of good will — world-wide good will — among men? 과학의 진보와 함께, 거의 인종족 자살(自殺)행위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갈수록 더 끔찍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정부를 기꺼이 세우고, 영구한 평화의 복을 누리기 시작하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세계적 선의―에서 생기는 평안을 토대로 번영하기까지, 몇 차례나 세계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얼마나 많은 국가 연맹이 실패해야만 할 것인가?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그리고 주권
170125 수요 예수75 (30세-AD24) 법, 자유, 주권 눅21:9-10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34:6.1 (1490.4) If one man craves freedom — liberty — he must remember that all other men long for the same freedom. Groups of such liberty-loving mortals cannot live together in peace without becoming subservient to such laws, rules, and regulations as will grant each person the same degree of freedom while at the same time safeguarding an equal degree of freedom for all of his fellow mortals. If one man is to be absolutely free, then another must become an absolute slave. And the relative nature of freedom is true socially,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Freedom is the gift of civilization made possible by the enforcement of LAW. 한 사람이 자유(해방)를 열망한다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역시 자기와 똑같은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해방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은, 각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그의 동료 모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양의 자유를 보장해줄, 법과 규칙 그리고 규정들을 지키지 않고서는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절대적인 노예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상대적인 속성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참됩니다. 자유는 법 집행으로 누릴 수 있는 문명의 선물입니다.
134:6.2 (1490.5) Religion makes it spiritually possible to realize the brotherhood of men, but it will require mankind government to regulate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associated with such a goal of human happiness and efficiency. 종교는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행복이나 효율성에 관계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규정하는 인류 전체의 정부(政府)가 필요할 것입니다.
134:6.3 (1490.6) There shall be wars and rumors of wars — nation will rise against nation — just as long as the world’s political sovereignty is divided up and unjustly held by a group of nation-states. England, Scotland, and Wales were always fighting each other until they gave up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reposing them in the United Kingdom. 세상의 정치적 주권이 분리되어 있으며, 국가-주정부들 집단이 불공정하게 차지하는 한, 전쟁이 있고,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 – 나라와 나라가 대항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그들이 각자의 주권을 영연방(英聯邦)에 위임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134:6.4 (1490.7) Another world war will teach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to form some sort of federation, thus creating the machinery for preventing small wars, wars between the lesser nations. But global wars will go on until the government of mankind is created. Global sovereignty will prevent global wars — nothing else can.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통해, 소위 말하는 주권 국가들은 어떤 종류의 연합정부를 형성해야 하는 지 배우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작은 전쟁, 약소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 기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전쟁은 인류 전체의 정부가 생길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지구 전체의 통제권이 세계적 전쟁들을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134:6.5 (1490.8) The forty-eight American free states live together in peace. There are among the citizens of these forty-eight states all of the various nationalities and races that live in the ever-warring nations of Europe. These Americans represent almost all the religions and religious sects and cults of the whole wide world, and yet here in North America they live together in peace. And all this is made possible because these forty-eight states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and have abandoned all notions of the supposed rights of self-determination. 미국의 독립된 48개의 주는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48개 주들의 시민들 중에는, 항상 전쟁에 시달리는 유럽의 국가들에 살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국적과 인종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 미국(美國)인들은 전 세계 모든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宗派)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북미(北美) 지역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은 이 48개 주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포기하고 자체적 결정 권리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134:6.6 (1490.9) It is not a question of armaments or disarmament. Neither does the question of conscription or voluntary military service enter into these problems of maintaining world-wide peace. If you take every form of modern mechanical armaments and all types of explosives away from strong nations, they will fight with fists, stones, and clubs as long as they cling to their delusions of the divine right of national sovereignty. 그것은 무장(武裝)과 비무장(非武裝)의 문제가 아닙니다. 징병제도 혹은 자발적 군대 복무를 선택하는 문제도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이러한 문제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강대국들로부터 현대의 기계화된 무기(武器)들과 모든 유형의 폭탄들을 다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국가적 주권을 신(神)이 준 권리라는 망상에 붙들려 있는 한, 그들은 주먹과 돌과 방망이를 가지고라도 싸울 것입니다.
134:6.7 (1491.1) War is not man’s great and terrible disease; war is a symptom, a result. The real disease is the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전쟁은 사람이 지닌 중대하고 끔직한 병이 아닙니다. 전쟁은 증상이며 결과입니다. 진짜 병은 국가적 주권이라는 바이러스입니다.
134:6.8 (1491.2) Urantia nations have not possessed real sovereignty; they never have had a sovereignty which could protect them from the ravages and devastations of world wars. In the creation of the global government of mankind, the nations are not giving up sovereignty so much as they are actually creating a real, bona fide, and lasting world sovereignty which will henceforth be fully able to protect them from all war. Local affairs will be handled by local governments; national affairs, by national governments; international affairs will be administered by global government. 이 땅의 국가들은 진정한 주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적 전쟁들의 참상과 황폐함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주권(主權)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범세계적인 인류 전체 정부를 구성하면서, 국가들은 주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진실하며 지속적으로, 이후로는 모든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을 충분히 보호해 주는 줄 수 있는 세계적 주권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 문제들은 지역 정부가, 국가적 문제들은 국가 정부가 처리하고, 국제적 문제들은 범세계 정부가 관리할 것입니다.
134:6.9 (1491.3) World peace cannot be maintained by treaties, diplomacy, foreign policies, alliances, balances of power, or any other type of makeshift juggling with the sovereignties of nationalism. World law must come into being and must be enforced by world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all mankind. 세계평화는, 조약(條約), 외교, 대외 정책, 연맹, 힘의 균형, 혹은 민족주의적 주권으로 조작하는 어떤 다른 유형의 미봉책으로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이 만들어져, 그것은 세계정부─모든 인류의 주권─에 의해 집행되어야 합니다.
134:6.10 (1491.4) The individual will enjoy far more liberty under world government. Today, the citizens of the great powers are taxed, regulated, and controlled almost oppressively, and much of this present interference with individual liberties will vanish when the national governments are willing to trustee their sovereignty as regards international affairs into the hands of global government. 세계 정부 아래에서 개인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날 강대국의 시민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세금(稅金)을 징수 당하고, 제약 받고, 통제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재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대부분의 간섭은, 국가정부가 기꺼이 국제적 문제들에 관하여 그들의 주권을 범세계적 정부에게 맡길 때 사라질 것입니다.
134:6.11 (1491.5) Under global government the national groups will be afforded a real opportunity to realize and enjoy the personal liberties of genuine democracy. The fallacy of self-determination will be ended. With global regulation of money and trade will come the new era of world-wide peace. Soon may a global language evolve, and there will be at least some hope of sometime having a global religion — or religions with a global viewpoint. 범세계적 정부 아래에서 국가 집단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개인적 자유를 실현하고 누릴 진정한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자체적인-결정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돈과 무역에 대한 범세계적 차원의 규제에 의해서 세계적 평화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곧 범세계적 언어가 진화되고, 적어도 범세계적 종교 혹은 범세계적 관점을 가진 종교들을 언젠가 소유하게 된다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134:6.12 (1491.6) Collective security will never afford peace until the collectivity includes all mankind. 집단의 안전은 그 집합체가 온 인류를 포함할 때까지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134:6.13 (1491.7) The political sovereignty of representative mankind government will bring lasting peace on earth, and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will forever insure good will among all men. And there is no other way whereby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be realized. 인류를 대표하는 정부(政府)의 정치적 주권은 지구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사람의 영적 형제신분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를 언제까지나 보장할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실현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 ~ ~ ~
134:6.15 (1491.8) After the death of Cymboyton, his sons encountered great difficulties in maintaining a peaceful faculty. The repercussions of Jesus’ teachings would have been much greater if the later Christian teachers who joined the Urmia faculty had exhibited more wisdom and exercised more tolerance. 심보이톤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들은 평화스러운 교수진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우르미아 교수진에 들어간 후대의 기독교 선생들이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관대했더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반향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134:6.16 (1491.9) Cymboyton’s eldest son had appealed to Abner at Philadelphia for help, but Abner’s choice of teachers was most unfortunate in that they turned out to be unyielding and uncompromising. These teachers sought to make their religion dominant over the other beliefs. They never suspected that the oft-referred-to lectures of the caravan conductor had been delivered by Jesus himself. 심보이톤Cymboyton의 맏아들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있는 아브너Abner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브너가 선택한 선생들은 고집이 세고 완고한 자들로 드러나 가장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다른 믿음들을 지배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대상caravan의 지휘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강의(講義)가, 예수님 자신이 강연했었던 것이라고는 결코 추측도 하지 못했습니다.
134:6.17 (1491.10) As confusion increased in the faculty, the three brothers withdrew their financial support, and after five years the school closed. Later it was reopened as a Mithraic temple and eventually burned down in connection with one of their orgiastic celebrations. 교수진 사이에서 혼란이 커지자, 세 형제들은 그들의 재정 지원을 끊었고, 5년 뒤에 그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나중에 그 학교는 미트라 신전(神殿)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결국 주신(酒神) 축제들의 하나와 연관되어 불에 타버렸습니다.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170201 수요 예수76 (31세-AD25) 31세 되시던 해(서기 25년) 눅4:1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134:7.1 (1492.1) When Jesus returned from the journey to the Caspian Sea, he knew that his world travels were about finished. He made only one more trip outside of Palestine, and that was into Syria. After a brief visit to Capernaum,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ver a few days to visit. In the middle of April he left Nazareth for Tyre. From there he journeyed on north, tarrying for a few days at Sidon, but his destination was Antioch. 예수께서 카스피Caspian 해(海)로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세상 여행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팔레스타인Palestine 밖으로 여행한 것은 한 번밖에는 더 이상 없었는데, 그것은 시리아Syria로 간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을 잠시 방문한 후, 그는 나사렛Nazareth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4월 중순에 그는 티레Tyre를 향하여 나사렛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북쪽으로 여행하여 시돈Sidon에 며칠 동안 머물렀지만, 그의 목적지는 안디옥Antioch이었습니다.
134:7.2 (1492.2) This is the year of Jesus’ solitary wanderings through Palestine and Syria. Throughout this year of travel he was known by various names in different parts of the country: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boatbuilder of Capernaum, the scribe of Damascus, and the teacher of Alexandria. 이 해에 예수님은 홀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이 해의 여행을 통하여, 그는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나사렛Nazareth의 목수, 가버나움Capernaum의 배 건조자, 다마스쿠스Damascus의 서기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선생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134:7.3 (1492.3) At Antioch the Son of Man lived for over two months, working, observing, studying, visiting, ministering, and all the while learning how man lives, how he thinks, feels, and reacts to the environment of human existence. For three weeks of this period he worked as a tentmaker. He remained longer in Antioch than at any other place he visited on this trip. Ten years later, when the Apostle Paul was preaching in Antioch and heard his followers speak of the doctrines of the Damascus scribe, he little knew that his pupils had heard the voice, and listened to the teachings, of the Master himself. 안디옥Antioch에서 사람의 아들은 일하고, 관찰하고, 공부하고, 방문하고, 봉사하면서 두 달이 넘도록 살았고, 그 동안 계속,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어떻게 인간 존재의 환경에 반응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 기간 중 3주 동안, 그는 천막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해의 여행에서 방문했던 다른 어떤 곳보다, 안디옥에 더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10년 후,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하면서, 추종자들이 다마스쿠스 서기관Damascus scribe의 신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생도들이 바로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134:7.4 (1492.4) From Antioch Jesus journeyed south along the coast to Caesarea, where he tarried for a few weeks, continuing down the coast to Joppa. From Joppa he traveled inland to Jamnia, Ashdod, and Gaza. From Gaza he took the inland trail to Beersheba, where he remained for a week. 예수님은 안디옥에서 케자리아Caesarea를 향하여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하였고, 그곳에서 몇 주를 머문 후 계속해서 해변을 따라 요파Joppa로 내려갔습니다. 요파에서 그는 잠니아Jamnia, 아쉬돗Ashdod, 가자Gaza를 향하여 내륙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가자에서부터 그는 내륙 도로를 택하여 비엘세바Beersheba로 갔고 그곳에서 일 주일동안 머물렀습니다.
134:7.5 (1492.5) Jesus then started on his final tour, as a private individual, through the heart of Palestine, going from Beersheba in the south to Dan in the north. On this journey northward he stopped at Hebron, Bethlehem (where he saw his birthplace), Jerusalem (he did not visit Bethany), Beeroth, Lebonah, Sychar, Shechem, Samaria, Geba, En-Gannim, Endor, Madon; passing through Magdala and Capernaum, he journeyed on north; and passing east of the Waters of Merom, he went by Karahta to Dan, or Caesarea-Philippi. 그 후 예수님은 사적(私的)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셨는데,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심장부를 거쳐서, 남쪽에 비엘세바Beersheba로부터 북쪽으로 단Dan까지 갔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이 여행에서, 그는 헤브론Hebron•베들레헴Bethlehem (여기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보았습니다)•예루살렘Jerusalem(베다니Bethany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비어롯Beeroth•레보나Lebonah•시카Sychar•세켐Shechem•사마리아Samaria•게바Geba•엔가님En-Gannim•엔도르Endor•마돈Madon을 들렀습니다. 그는 막달라Magdala와 가버나움Capernaum을 지나서, 북쪽으로 줄곧 여행했습니다. 메롬Merom의 우물 동쪽을 지나서, 가라타Karahta의 길로 단Dan, 곧 케자리아 빌립비Caesarea-Philippi로 갔습니다.
134:7.6 (1492.6)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now led Jesus to forsake the dwelling places of men and betake himself up to Mount Hermon that he might finish his work of mastering his human mind and complete the task of effecting his full consecration to the remainder of his lifework on earth.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는 이제 사람들의 거처를 떠나 헤르몬Hermon 산으로 가도록 예수님을 인도하였고, 그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 마음의 숙달을 마쳤으며, 이 땅에서 남은 일생의 사명에 충만히 헌신하는 과제를 완수하셨습니다.
134:7.7 (1492.7) This was one of those unusual and extraordinary epochs in the Master’s earth life on Urantia. Another and very similar one was the experience he passed through when alone in the hills near Pella just subsequent to his baptism. This period of isolation on Mount Hermon marked the termination of his purely human career, that is, the technical termination of the mortal bestowal, while the later isolatio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more divine phase of the bestowal. And Jesus lived alone with God for six weeks on the slopes of Mount Hermon. 이 때는 유란시아(지구)에서의 주님의 지상 일생에 있어서 드문, 특별한 기간이었습니다. 매우 비슷한 또 하나의 기간은, 세례를 받고 난 바로 뒤에, 주님께서 펠라Pella 근처 작은 산에서 혼자 있을 때 거쳤던 체험이었습니다. 헤르몬Hermon 산에서 이러한 고립 기간은 그의 순수한 인간적 생애의 종료,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 절차가 종결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반면에 나중에 있었던 고립기간은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에 있어서 더욱 신적인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르몬 산기슭에서 6주 동안 홀로 하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170208 수요 예수77 31세 AD25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마4:3-11
134:8.1 (1492.8) After spending some time in the vicinity of Caesarea-Philippi, Jesus made ready his supplies, and securing a beast of burden and a lad named Tiglath, he proceeded along the Damascus road to a village sometime known as Beit Jenn in the foothills of Mount Hermon. Here, near the middle of August, A.D. 25, he established his headquarters, and leaving his supplies in the custody of Tiglath, he ascended the lonely slopes of the mountain. Tiglath accompanied Jesus this first day up the mountain to a designated point about 6,000 feet above sea level, where they built a stone container in which Tiglath was to deposit food twice a week. 예수님은, 케자리아 빌립보Caesarea-Philippi 근처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후에, 생필품(生必品)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짐을 싣는 짐승과, 티글라스Tiglath라는 아이를 데리고 다마스쿠스Damascus 길을 따라 헤르몬Hermon 산기슭에 있는 한때 베이트 젠Beit Jenn이라고 알려진 마을로 나아갔습니다. 서기 25년 8월 중순 경 그곳에서 그는 본부를 정하고 물자들을 티글라스에게 맡긴 후, 인적이 드문 산비탈을 올라갔습니다. 그 첫째 날에 티글라스는 약 해발 6,000피트(1800미터) 되는 지점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였고, 그들은 그곳에 돌로 저장고를 지었으며, 티글라스가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음식을 갖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134:8.2 (1493.1) The first day, after he had left Tiglath, Jesus had ascended the mountain only a short way when he paused to pray. Among other things he asked his Father to send back the guardian seraphim to “be with Tiglath.” He requested that he be permitted to go up to his last struggle with the realities of mortal existence alone. And his request was granted. He went into the great test with only his indwelling Adjuster to guide and sustain him. 첫 날, 티글라스를 보낸 후, 예수님은 산을 약간 더 올라가서 기도하기 위해 멈추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에게 “티글라스와 함께 있도록” 수호 세라핌천사를 돌려보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로서의 현실과 마지막 투쟁까지 홀로 감당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허락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를 인도하고 지지하기 위해 내주하는 조절자와 함께 이 엄청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134:8.3 (1493.2) Jesus ate frugally while on the mountain; he abstained from all food only a day or two at a time. The superhuman beings who confronted him on this mountain, and with whom he wrestled in spirit, and whom he defeated in power, were real; they were his archenemies in the system of Satania; they were not phantasms of the imagination evolved out of the intellectual vagaries of a weakened and starving mortal who could not distinguish reality from the visions of a disordered mind. 예수님은 산에 있을 동안에 음식을 절약해서 드셨으며, 한 번에 하루나 이틀씩만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대면하였던 초인간 존재들과 영적으로 씨름을 하셨으며, 권능으로 물리쳤던 그 존재들은 실재했습니다. 그들은 사타니아Satania 체계에 있는 그의 대적(大敵)들이었으며, 마음 착란을 일으켜서 환상(幻想)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허약하고 굶주린 사람의 변덕스러운 지성에서 연유된 망상적 환영(幻影)들이 아니었습니다.
134:8.4 (1493.3) Jesus spent the last three weeks of August and the first three weeks of September on Mount Hermon. During these weeks he finished the mortal task of achieving the circles of mind-understanding and personality-control. Throughout this period of communion with his heavenly Father the indwelling Adjuster also completed the assigned services. The mortal goal of this earth creature was there attained. Only the final phase of mind and Adjuster attunement remained to be consummated. 예수님은 8월의 마지막 3주간과 9월의 첫 3주간을 헤르몬Hermon 산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마음-이해와 고유성-조정의 순환계들을 성취하는 사람의 임무를 완료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를 갖는 이 기간 동안, 내주 하는 조절자도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지상의 창조체로서의 인간 목표는 그곳에서 달성되었습니다. 다만 마음과 조절자의 조율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134:8.5 (1493.4) After more than five weeks of unbroken communion with his Paradise Father, Jesus became absolutely assured of his nature and of the certainty of his triumph over the material levels of time-space personality manifestation. He fully believed in, and did not hesitate to assert, the ascendancy of his divine nature over his human nature. 5주가 넘도록 천국 아버지와 중단 없는 친교를 나눈 뒤에, 예수님은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고유성이 시간-공간에 나타나는 물질적 차원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승리의 확실성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본성이 인간 본성의 상위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충만하게 믿게 되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34:8.6 (1493.5) Near the end of the mountain sojourn Jesus asked his Father if he might be permitted to hold conference with his Satania enemies as the Son of Man, as Joshua ben Joseph. This request was granted. During the last week on Mount Hermon the great temptation, the universe trial, occurred. Satan (representing Lucifer) and the rebellious Planetary Prince, Caligastia, were present with Jesus and were made fully visible to him. And this “temptation,” this final trial of human loyalty in the face of the misrepresentations of rebel personalities, had not to do with food, temple pinnacles, or presumptuous acts. It had not to do with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with the sovereignty of a mighty and glorious universe. The symbolism of your records was intended for the backward ages of the world’s childlike thought. And subsequent generations should understand what a great struggle the Son of Man passed through that eventful day on Mount He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요셉의 아들 여호수아Joshua라는 사람의 아들로서 사타니아Satania에 있는 자신의 적들과 회의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헤르몬 산에서의 마지막 주간에, 엄청난 유혹, 우주적 시험(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사탄(루시퍼를 대변한)과 반역적인 행성왕자 칼리가스티아Caligastia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그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혹”, 반역적인 고유성들의 잘못된 대표 권한 앞에서 인간의 충성심에 대한 이 마지막 시험은 음식이나 성전의 꼭대기 또는 무엄한 행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왕국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위력 있고 영광스러운 우주의 주권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록으로 전해진 그 상징은, 유치하게 생각하는 진부한 시대의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세대들은 그 파란만장한 날에 헤르몬 산에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했던 투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134:8.7 (1493.6) To the many proposals and counterproposals of the emissaries of Lucifer, Jesus only made reply: “May the will of my Paradise Father prevail, and you, my rebellious son, may the Ancients of Days judge you divinely. I am your Creator-father; I can hardly judge you justly, and my mercy you have already spurned. I commit you to the adjudication of the Judges of a greater universe.” 루시퍼의 사자(使者)들이 제시한 많은 제안들과 반대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천국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반역을 일으키는 나의 아들인 너에게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신적 판결이 있기를 바라노라. 나는 너의 창조주-아버지이다. 나는 너를 도저히 공정하게 판가름할 수 없으며, 너는 이미 나의 자비를 거절하였노라. 나는 너를 더 높은 우주의 재판관들의 판결에 맡기노라.
134:8.8 (1494.1) To all the Lucifer-suggested compromises and makeshifts, to all such specious proposals about the incarnation bestowal, Jesus only made reply, “The will of my Father in Paradise be done.” And when the trying ordeal was finished, the detached guardian seraphim returned to Jesus’ side and ministered to him. 루시퍼가 제안한 모든 절충안들과 미봉책들에 대하여, 성육신하신 증여에 대한 그럴듯한 모든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직,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대답하실 뿐이었습니다. 시험적인 호된 시련이 끝나자, 떠나갔던 수호 성(聖)천사가 예수의 곁으로 돌아와서 그를 섬겼습니다.
134:8.9 (1494.2) On an afternoon in late summer, amid the trees and in the silence of nature, Michael of Nebadon won the unquestion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On that day he completed the task set for Creator Sons to live to the full the incarnated life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 universe announcement of this momentous achievement was not made until the day of his baptism, months afterward, but it all really took place that day on the mountain. And when Jesus came down from his sojourn on Mount Hermon, the Lucifer rebellion in Satania and the Caligastia secession on Urantia were virtually settled. Jesus had paid the last price required of him to attain the sovereignty of his universe, which in itself regulates the status of all rebels and determines that all such future upheavals (if they ever occur) may be dealt with summarily and effectively. Accordingly, it may be seen that the so-called “great temptation” of Jesus took place sometime before his baptism and not just after that event. 늦은 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무들로 둘러싸인 자연의 정적 속에서,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의 우주의 절대적 주권을 성취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세상에서 창조주 아들들이 인간의 육신과 같은 모습으로 성육신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임무를, 그는 바로 그 날에 완성하셨습니다. 이 감격적인 성취에 대한 우주의 발표는 그로부터 몇 달 후에 있었던 그의 세례의 날까지 미루어졌지만, 그 모든 것은 산에서 그날 실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헤르몬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타니아에서의 루시퍼의 반란과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칼리가스티아의 탈퇴는 실제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우주 주권을 갖기 위하여 그에게 요구되어진 마지막 값을 이미 지불하였으며, 그것은 그 자체적으로 모든 반역 현상들을 통제하고, 그러한 모든 미래의 격변들이 (그런 것들이 만약 발생한다면) 즉시 효과적으로 다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따라서 소위 예수님의 “큰 시험”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세례 직후가 아니라 세례 이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4:8.10 (1494.3) At the end of this sojourn on the mountain, as Jesus was making his descent, he met Tiglath coming up to the rendezvous with food. Turning him back, he said only: “The period of rest is over; I must return to my Father’s business.” He was a silent and much changed man as they journeyed back to Dan, where he took leave of the lad, giving him the donkey. He then proceeded south by the same way he had come, to Capernaum.산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예수께서 하산하실 때, 그는 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던 티글라스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되돌려 보내며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휴식기간이 끝났고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노라.” 그들이 단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많이 변화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년에게 당나귀를 주고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가 왔던 같은 길을 따라 남쪽 방향의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170215 수요 예수78 기다리는 시간(31세 AD25) 마3:1-2, 5-6
134:9.1 (1494.4) It was now near the end of the summer, about the time of the day of atonement and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had a family meeting in Capernaum over the Sabbath and the next day started for Jerusalem with John the son of Zebedee, going to the east of the lake and by Gerasa and on down the Jordan valley. While he visited some with his companion on the way, John noted a great change in Jesus. 이제는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었고, 속죄의 날과 초막(草幕)절 축제가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Capernaum에서 가족모임을 가진 후, 다음 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호수의 동쪽으로 가며 게라사Gerasa를 지나서 요단Jordan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께서 동행자와 함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요한은 예수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눈치로 알아차렸습니다.
134:9.2 (1494.5) Jesus and John stopped overnight at Bethany with Lazarus and his sisters, going early the next morning to Jerusalem. They spent almost three weeks in and around the city, at least John did. Many days John went into Jerusalem alone while Jesus walked about over the near-by hills and engaged in many seasons of spiritual communion with his Father in heaven. 예수님과 요한은 베다니Bethany에서 나사로Lazarus와 그의 자매들과 함께 그날 밤 묵었으며, 다음 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의 3주를 그 도성(都城)의 안과 근처에서 보냈는데, 적어도 요한은 그랬습니다. 요한은 여러 날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한편 예수님은 근처에 있는 언덕을 거닐거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여러 차례 가지셨습니다.
134:9.3 (1494.6) Both of them were present at the solemn services of the day of atonement. John was much impressed by the ceremonies of this day of all days in the Jewish religious ritual, but Jesus remained a thoughtful and silent spectator. To the Son of Man this performance was pitiful and pathetic. He viewed it all as mis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and attributes of his Father in heaven. He looked upon the doings of this day as a travesty upon the facts of divine justice and the truths of infinite mercy. He burned to give vent to the declaration of the real truth about his Father’s loving character and merciful conduct in the universe, but his faithful Monitor admonished him that his hour had not yet come. But that night, at Bethany, Jesus did drop numerous remarks which greatly disturbed John; and John never fully understood the real significance of what Jesus said in their hearing that evening. 두 사람 모두 속죄의 날의 엄숙한 경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요한은 모든 유대 종교 의식의 날들 중 이날의 의식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생각에 잠긴 채, 조용한 구경꾼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일들이 가엾고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을 잘못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날의 모든 행위들이 신적인 정의의 사실들과 무한한 자비의 진리들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를 낸 장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는 성품과 우주에서의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위성에 대한 진정한 진리를 선포하고 싶은 열정에 타올랐지만, 신실한 감시자가 그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베다니에서, 그가 제시하였던 많은 의견들로 인해 요한은 매우 혼란되었으며, 요한은 그날 밤 예수께서 그들이 들었던 것에 대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34:9.4 (1495.1) Jesus planned to remain throughout the week of the feast of tabernacles with John. This feast was the annual holiday of all Palestine; it was the Jewish vacation time. Although Jesus did not participate in the merriment of the occasion, it was evident that he derived pleasure and experienced satisfaction as he beheld the lighthearted and joyous abandon of the young and the old. 예수님은 초막절 축제 주간 내내 요한과 함께 남아 있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 축제는 모든 팔레스타인에서 해마다 있었던 공휴일이었으며, 유대인들의 휴가철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그 절기(節氣)의 흥겨운 잔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아무 걱정 없이 기쁘게 마음껏 노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으며 만족스러워 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134:9.5 (1495.2) In the midst of the week of celebration and ere the festivities were finished, Jesus took leave of John, saying that he desired to retire to the hills where he might the better commune with his Paradise Father. John would have gone with him, but Jesus insisted that he stay through the festivities, saying: “It is not required of you to bear the burden of the Son of Man; only the watchman must keep vigil while the city sleeps in peace.” Jesus did not return to Jerusalem. After almost a week alone in the hills near Bethany, he departed for Capernaum. On the way home he spent a day and a night alone on the slopes of Gilboa, near where King Saul had taken his life; and when he arrived at , he seemed more cheerful than when he had left John in Jerusalem. 경축하는 주간의 중간, 축제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 아버지와 좀 더 긴밀한 교제하기를 위하여 언덕으로 물러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요한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요한이 그와 함께 가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의 짐을 지는 것이 요구되지 않느니라. 도시가 평화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 파수꾼만이 밤새 지켜 있어야 하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베다니Bethany 근처에 있는 언덕에서 거의 일주일을 홀로 지낸 후, 그는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울 왕King Saul이 목숨을 버렸던 장소 가까이에 있는 길보아Gilboa산 기슭에서 하루 밤과 낮을 혼자 지냈으며, 그가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요한을 떠났을 때보다도 더 쾌활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34:9.6 (1495.3) The next morning Jesus went to the chest containing his personal effects, which had remained in Zebedee’s workshop, put on his apron, and presented himself for work, saying, “It behooves me to keep busy while I wait for my hour to come.” And he worked several months, until January of the following year, in the boatshop, by the side of his brother James. After this period of working with Jesus, no matter what doubts came up to becloud James’s understanding of the lifework of the Son of Man, he never again really and wholly gave up his faith in the mission of Jesus.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은 세베대의 작업소에 남겨 두었던 자신의 소지품이 들어있는 상자(箱子)로 가서 작업복을 꺼내 입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직접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바쁘게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는 이듬 해 1월까지 동생 야고보 곁,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몇 달 동안 일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한 이 기간이 끝난 후부터, 야고보는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의 아들의 일생의 과업에 대해 어떤 의심이 떠오르든지 상관없이, 결코 다시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신앙을 다시는 정말로 그리고 모두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34:9.7 (1495.4) During this final period of Jesus’ work at the boatshop, he spent most of his time on the interior finishing of some of the larger craft. He took great pains with all his handiwork and seemed to experience the satisfaction of human achievement when he had completed a commendable piece of work. Though he wasted little time upon trifles, he was a painstaking workman when it came to the essentials of any given undertaking.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작업을 하셨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좀 더 큰 몇몇 배의 실내를 마무리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훌륭한 배를 완성시켜 칭찬할만한 작품을 마쳤을 때 인간다운 성취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들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지만, 맡은 일의 핵심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공을 많이 들이는 일꾼이셨습니다.
134:9.8 (1495.5) As time passed, rumors came to Capernaum of one John who was preaching while baptizing penitents in the Jordan, and John preached: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repent and be baptized.” Jesus listened to these reports as John slowly worked his way up the Jordan valley from the ford of the river nearest to Jerusalem. But Jesus worked on, making boats, until John had journeyed up the river to a point near Pella in the month of January of the next year, A.D. 26, when he laid down his tools, declaring, “My hour has come,” and presently presented himself to John for baptism. 시간이 지나자, 요단 강에서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설교하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가버나움에 도착했는데, 요한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예수님은 요한이 활동을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운 강의 개울로부터 요단 계곡을 따라 거슬러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는 이러한 소식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서기 26년 1월, 요한이 펠라Pella 가까이에 있는 지점까지 강을 따라 올라올 때까지, 예수님은 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이 때 그는 연장을 내려놓고, “나의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였고, 당장 세례를 받으러 요한 앞에 나섰습니다.
134:9.9 (1495.6) But a great change had been coming over Jesus. Few of the people who had enjoyed his visits and ministrations as he had gone up and down in the land ever subsequently recognized in the public teacher the same person they had known and loved as a private individual in former years. And there was a reason for this failure of his early beneficiaries to recognize him in his later role of public and authoritative teacher. For long years this transformation of mind and spirit had been in progress, and it was finished during the eventful sojourn on Mount Harmon. 그러나 엄청난 변화가 이미 예수님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지역의 땅들을 오가며 방문하고 봉사하며 보살폈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아무도,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그 선생이 이전에, 그들이 사적인 한 개인으로 알고 지내며 사랑하였던 바로 그 동일한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덕을 입은 사람들이, 그가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선생 역할로 나타난 그의 모습을 이렇게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과 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은 그 파란만장한 헤르몬Ha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