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69
Last Teaching at Pella 펠라에서 마지막 가르침
The Sanhedrin’s charges against Jesus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소
1. Parable of the Lost Son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2. Parable of the Shrewd Steward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3. The Rich Man and the Beggar 부자와 거지
4. The Father and His Kingdom 아버지의 그의 나라
Jesus lived a revelation of God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를 사셨습니다.
Elohim and Yahweh 엘로힘과 야훼
231008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의 고소 마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169:0.1 (1850.1) LATE on Monday evening, March 6, Jesus and the ten apostles arrived at the Pella camp. This was the last week of Jesus’ sojourn there, and he was very active in teaching the multitude and instructing the apostles. He preached every afternoon to the crowds and each night answered questions for the apostles and certain of the more advanced disciples residing at the camp. 3월 6일(AD30) 월요일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야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때는 예수께서 거기에 머문 마지막 주간이었고, 그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군중을 가르치고 사도들을 교육했습니다. 그는 오후마다 군중에게 설교했고, 밤마다 사도들과 야영지에 있는 좀 더 상급 제자들 일부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169:0.2 (1850.2) Word regarding the resurrection of Lazarus had reached the encampment two days before the Master’s arrival, and the entire assembly was agog. Not since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had anything occurred which so aroused the imagination of the people. And thus it was at the very height of the second phase of the public ministry of the kingdom that Jesus planned to teach this one short week at Pella and then to begin the tour of southern Perea which led right up to the final and tragic experiences of the last week in Jerusalem. 주께서 도착하기 이틀 전에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소식이 야영지에 이르렀고, 모든 집회가 흥분했습니다. 5천 명을 먹인 이후로 사람들의 심상(心狀)을 그렇게 자극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 공적 사역의 두 번째 단계가 한창일 때, 예수께서 이렇게 짧은 한 주간 펠라에서 가르친 다음, 곧장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의 최종적이고 비극적인 체험으로 통하는 남부 페레아 순회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습니다.
169:0.3 (1850.3) The Pharisees and the chief priests had begun to formulate their charges and to crystallize their accusations. They objected to the Master’s teachings on these grounds: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고소(告訴)를 공식화하고 기소 사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근거로 주님의 가르침에 반대했습니다.
169:0.4 (1850.4) 1. He is a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he receives the ungodly and even eats with them. 그는 세리(稅吏)와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그는 사악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식사합니다(마9:10-11, 11:19a, 막2;15-16, 눅5:30, 7:34, 15:1-2).
169:0.5 (1850.5) 2. He is a blasphemer; he talks about God as being his Father and thinks he is equal with God. 그는 신성 모독자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요5:17-18, 10:30, 38, 12:44-45, 17:22).
169:0.6 (1850.6) 3. He is a lawbreaker. He heals disease on the Sabbath and in many other ways flouts the sacred law of Israel. 그는 율법 위반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여러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신성한 법을 모욕합니다(마12:9-14, 막3:1-6, 눅6:6-11, 13:10-16, 14:1-4, 요5:5-16, 9:14, 16, 마12:1-2, 15:1-2, 막2:23-24, 7:1-5, 눅6:1-2, 11:37-41).
169:0.7 (1850.7) 4. He is in league with devils. He works wonders and does seeming miracles by the power of Beelzebub, the prince of devils. 그는 악령들과 결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령들의 괴수(魁首), 바알세불의 권세로 이적(異蹟)과 그럴듯한 기적(奇蹟)을 행합니다(마12:22-28, 막3:22, 눅11:14-20).
1. Parable of the Lost Son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231015 잃어버린 양과 분실한 금속조각의 이야기 눅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69:1.1 (1850.8) On Thursday afternoon Jesus talked to the multitude about the “Grace of Salvation.” In the course of this sermon he retold the story of the lost sheep and the lost coin and then added his favorit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Said Jesus: 목요일(AD30.3.9) 오후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구원의 은혜”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설교 중에 그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금속조각의 얘기를 다시 이야기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탕자(蕩子 방탕한 아들) 비유를 덧붙였습니다. 예수께서 말했습니다.
169:1.2 (1850.9) “You have been admonished by the prophets from Samuel to John that you should seek for God — search for truth. Always have they said, ‘Seek the Lord while he may be found.’ And all such teaching should be taken to heart. But I have come to show you that, while you are seeking to find God, God is likewise seeking to find you. Many times have I told you the story of the good shepherd who left the ninety and nine sheep in the fold while he went forth searching for the one that was lost, and how, when he had found the straying sheep, he laid it over his shoulder and tenderly carried it back to the fold. And when the lost sheep had been restored to the fold, you remember that the good shepherd called in his friends and bade them rejoice with him over the finding of the sheep that had been lost. Again I say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the ninety and nine just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The fact that souls are lost only increases the interest of the heavenly Father. I have come to this world to do my Father’s bidding, and it has truly been said of the Son of Man that he is a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사무엘부터 요한까지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너희는 하느님을 찾아야 –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주님을 찾아라(사55:6a).’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가르침은 심정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하느님을 찾으려 하는 동안,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이려고 내가 왔느니라. 여러 번 내가 너희에게 우리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려고 떠난 선한 목자가 길을 잃은 양을 찾아 그 양을 자기 어깨에 메어 다정하게 우리로 다시 데려왔는지 이야기했느니라. 그리고 잃어버린 양이 우리에 돌아왔을 때, 선한 목자가 자기 친구들을 불러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을 같이 축하하자고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내가 다시 말하지만, 회개가 필요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하느니라(마18:12-14, 눅15:3-7). 혼(魂)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의 관심을 더 일으킬 뿐이니라. 나는 내 아버지의 명령대로 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참이니라(마9:10-11, 11:19a, 막2:15-16, 눅7:34, 15:1-2).
169:1.3 (1851.1) “You have been taught that divine acceptance comes after your repentance and as a result of all your works of sacrifice and penitence, but I assure you that the Father accepts you even before you have repented and sends the Son and his associates to find you and bring you, with rejoicing, back to the fold, the kingdom of sonship and spiritual progress. You are all like sheep which have gone astray, and I have come to seek and to save those who are lost. “너희가 회개한 후, 너희가 행한 희생물과 참회의 모든 결과로써, 신적으로 용납된다고 너희가 배웠지만, 내가 너희에게 보증하는 것은, 너희가 회개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너희를 받아들이며, 너희를 찾아 기뻐하며 너희를 우리, 즉 아들(자녀) 됨과 영적 진보의 하느님 나라로 데려오도록 아들과 그의 동료들을 보내느니라. 너희는 모두 길을 잃은 양과 같으며,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내가 왔느니라(Mt18:11, 눅19:10).
169:1.4 (1851.2) “And you should also remember the story of the woman who, having had ten pieces of silver made into a necklace of adornment, lost one piece, and how she lit the lamp and diligently swept the house and kept up the search until she found the lost piece of silver. And as soon as she found the coin that was lost, she called together her friends and neighbors, saying,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the piece that was lost.’ So again I say, there is always joy in the presence of the angels of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and returns to the Father’s fold. And I tell you this story to impress upon you that the Father and his Son go forth to search for those who are lost, and in this search we employ all influences capable of rendering assistance in our diligent efforts to find those who are lost, those who stand in need of salvation. And so, while the Son of Man goes out in the wilderness to seek for the sheep gone astray, he also searches for the coin which is lost in the house. The sheep wanders away, unintentionally; the coin is covered by the dust of time and obscured by the accumulation of the things of men. “그리고 너희는, 은 열 조각으로 만든 장식 목걸이에서 한 조각을 잃어버린 여인이 등을 밝혀 분실한 은(銀) 조각을 찾기까지 부지런히 집을 쓸며 계속 찾았던 이야기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녀가 잃었던 조각을 찾자마자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축하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말하지만, 회개하여 아버지의 우리로 돌아오는 한 죄인에 대해 하늘의 천사들 앞에 언제나 기쁨이 있느니라(눅15:8-10). 아버지와 그 아들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나가, 이렇게 찾으면서, 잃어버린 자들, 구원이 필요한 자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찾으려고 애쓰면서 도울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우리가 사용한다는 것을 너희가 명심하게 하려고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노라. 그래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길을 잃은 양을 찾으러 광야로 나가면서, 그는 집에서 잃어버린 조각도 찾느니라. 양은 무심결에 헤매느니라. 금속조각은 세월의 먼지에 덮여 있고, 사람의 물건이 쌓여 가려 있느니라.
231022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 눅15:11-32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69:1.5 (1851.3) “And now I would like to tell you the story of a thoughtless son of a well-to-do farmer who deliberately left his father’s house and went off into a foreign land, where he fell into much tribulation. You recall that the sheep strayed away without intention, but this youth left his home with premeditation. It was like this: “이제 나는 부유한 농부의 분별없는 아들이 일부러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국(異國)으로 갔다가 여러 시련에 빠진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려고 하느니라. 양이 무심코 자기 양무리를 놓쳤다고 너희가 생각해 내지만, 이 청년은 미리 생각해서 자기 집을 떠났느니라. 이것은 다음과 같았더라.
169:1.6 (1851.4) “A certain man had two sons; one, the younger, was lighthearted and carefree, always seeking for a good time and shirking responsibility, while his older brother was serious, sober, hard-working, and willing to bear responsibility. Now these two brothers did not get along well together; they were always quarreling and bickering. The younger lad was cheerful and vivacious, but indolent and unreliable; the older son was steady and industrious, at the same time self-centered, surly, and conceited. The younger son enjoyed play but shunned work; the older devoted himself to work but seldom played. This association became so disagreeable that the younger son came to his father and said: ‘Father, give me the third portion of your possessions which would fall to me and allow me to go out into the world to seek my own fortune.’ And when the father heard this request, knowing how unhappy the young man was at home and with his older brother, he divided his property, giving the youth his share.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생은 아무 걱정이 없고 태평하여, 늘 쾌락만 좇고 책임을 회피했지만, 그의 형은 진지하고, 건전하며, 근면하여 기꺼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한데 이 두 형제는 함께 잘 지내지 못해서 그들은 언제나 말다툼하며 언쟁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쾌활하고 명랑했지만 게을러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착실하고 부지런했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적이고, 무뚝뚝하며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놀기 좋아했지만 일을 피했고, 형은 일에 몰두하여 좀처럼 놀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계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작은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떨어질 3번째 몫을 제게 주셔서, 제가 세상에 나가 제 재산을 모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가 이런 요청을 들었을 때, 청년이 집에서 형과 함께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그는 자기 재산을 나누어 청년의 몫을 주었습니다(눅15:11-12).
169:1.7 (1851.5) “Within a few weeks the young man gathered together all his funds and set out upon a journey to a far country, and finding nothing profitable to do which was also pleasurable, he soon wasted all his inheritance in riotous living. And when he had spent all, there arose a prolonged famine in that country, and he found himself in want. And so, when he suffered hunger and his distress was great, he found employment with one of the citizens of that country, who sent him into the fields to feed swine. And the young man would fain have filled himself with the husks which the swine ate, but no one would give him anything. “몇 주안에 청년은 자기 자금을 모두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수익성 있으면서 즐거운 일을 찾지 못하자, 그는 곧 자기 모든 유산을 방종(放縱 마음대로 사용)한 생활로 낭비했습니다. 그가 다 써버렸을 때, 그 나라에 오랜 기근이 찾아와 궁핍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굶주림에 시달려 엄청난 고통이 되자, 그 나라의 한 시민에게 고용되었는데, 그가 그를 들판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청년은 돼지가 먹는 곡물 겉껍질로 채우려 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떤 것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눅15:13-16).
169:1.8 (1852.1) “One day, when he was very hungry, he came to himself and said: ‘How many hired servants of my father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while I perish with hunger, feeding swine off here in a foreign country!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 and I wi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only be willing to make me one of your hired servants.’ And when the young man had reached this decision, he arose and started out for his father’s house. “어느 날, 그가 너무 배고프자, 제정신이 돌아와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이국(異國)에서 돼지를 치며 굶주려 죽어가는 동안 내 아버지에게 고용된 하인들은 얼마나 많은 양식을 가지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가!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다만 저를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가 고용한 하인 중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청년이 이런 결심에 이르자, 그가 일어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눅15:17-20a).
169:1.9 (1852.2) “Now this father had grieved much for his son; he had missed the cheerful, though thoughtless, lad. This father loved this son and was always on the lookout for his return, so that on the day he approached his home, even while he was yet afar off, the father saw him and, being moved with loving compassion, ran out to meet him, and with affectionate greeting he embraced and kissed him. And after they had thus met, the son looked up into his father’s tearful face and said: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in your sight; I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a son’ — but the lad did not find opportunity to complete his confession because the overjoyed father said to the servants who had by this time come running up: ‘Bring quickly his best robe, the one I have saved, and put it on him and put the son’s ring on his hand and fetch sandals for his feet.’ “그때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몹시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분별이 없지만 쾌활한 소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사랑했고 항상 그가 돌아오기만을 생각해서, 그가 자기 집으로 다가가던 그날,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아버지는 그를 보면서 애정을 품고 불쌍히 여기면서 당장 그를 맞으러 나가 다정히 환영하며 얼싸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만난 후,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 저는 더 이상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대단히 기쁜 아버지가 이때 달려오는 하인들에게 ‘내가 남겨놓은 그의 가장 좋은 옷을 빨리 가져와서 입히고 그의 손에 아들의 반지를 끼우며 그의 발을 위해 가죽신을 가려오라.’ 말했기 때문에 소년은 자기 고백을 마칠 기회가 없었습니다(눅15:20b-22).
169:1.10 (1852.3) “And then, after the happy father had led the footsore and weary lad into the house, he called to his servants: ‘Bring on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make merry, for this my son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all gathered about the father to rejoice with him over the restoration of his son. “그러고 나서 행복이 가득한 아버지가 발이 아프고 지친 소년을 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가 자기 하인들에게 큰소리로 ‘나의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있고, 잃었다가 찾았으니, 살찐 송아지를 가져와 잡아서, 먹고 즐기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 모두 아버지 주위에 모여 그 아들의 회복을 그와 함께 기뻐했습니다(눅15:23-24).
169:1.11 (1852.4) “About this time, while they were celebrating, the elder son came in from his day’s work in the field, and as he drew near the house, he heard the music and the dancing. And when he came up to the back door, he called out one of the servants and inquired as to the meaning of all this festivity. And then said the servant: ‘Your long-lost brother has come home, and your father has killed the fatted calf to rejoice over his son’s safe return. Come in that you also may greet your brother and receive him back into your father’s house.’ “이 무렵 그들이 축하하는 동안 맏아들이 들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뒷문으로 다가가 그가 하인 중 하나를 불러내어 모든 이런 잔치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당신 동생이 집에 와서, 당신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자기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당신 동생을 환영하고 당신 아버지의 집으로 그를 다시 맞아들이도록 들어오십시오(눅15:25-27).’
169:1.12 (1852.5) “But when the older brother heard this, he was so hurt and angry he would not go into the house. When his father heard of his resentment of the welcome of his younger brother, he went out to entreat him. But the older son would not yield to his father’s persuasion. He answered his father, saying: ‘Here these many years have I served you, never transgressing the least of your commands, and yet you never gave me even a kid that I might make merry with my friends. I have remained here to care for you all these years, and you never made rejoicing over my faithful service, but when this your son returns, having squandered your substance with harlots, you make haste to kill the fatted calf and make merry over him.’ “그러나 형이 이 말을 듣고, 그는 너무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동생의 환영에 큰아들이 분개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간청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설득에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여러 해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명령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지만, 당신은 제게 제 친구들과 즐겁게 놀라고 새끼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에 남아 이렇게 여러 해 당신을 보살폈는데, 당신은 저의 충실한 섬김을 한 번도 기뻐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이 아들이 매춘부들과 당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자, 당신은 급히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그를 기쁘게 합니다(눅15:28-30).’
169:1.13 (1852.6) “Since this father truly loved both of his sons, he tried to reason with this older one: ‘But, my son, you have all the while been with me, and all this which I have is yours. You could have had a kid at any time you had made friends to share your merriment. But it is only proper that you should now join with me in being glad and merry because of your brother’s return. Think of it, my son, your brother was lost and is found; he has returned alive to us!’” “이 아버지는 자기 두 아들 모두 참으로 사랑했기에 이 큰아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이 모두는 너의 것이라. 너는 친구들과 즐기려고 언제라도 새끼염소를 잡을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네 동생이 돌아왔으니 이제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마땅할 뿐이라. 생각해 보라, 내 아들아, 네 동생은 잃어버렸다가 찾았고, 그가 우리에게 살아서 돌아왔느니라(눅15:31-32)!’”
169:1.14 (1853.1) This was one of the most touching and effective of all the parables which Jesus ever presented to impress upon his hearers the Father’s willingness to receive all who seek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려 하는 모두를 흔쾌히 받아들이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청중에게 명심하게 하려고 이제껏 제시한 모든 비유 중 가장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것 중 하나였습니다.
169:1.15 (1853.2) Jesus was very partial to telling these three stories at the same time. He presented the story of the lost sheep to show that, when men unintentionally stray away from the path of life, the Father is mindful of such lost ones and goes out, with his Sons, the true shepherds of the flock, to seek the lost sheep. He then would recite the story of the coin lost in the house to illustrate how thorough is the divine searching for all who are confused, confounded, or otherwise spiritually blinded by the material cares and accumulations of life. And then he would launch forth into the telling of this parable of the lost son, the reception of the returning prodigal, to show how complete is the restoration of the lost son into his Father’s house and heart.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동시에 하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무심코 생명의 경로에서 벗어날 때, 아버지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들을 마음에 두어서 양 떼의 참 목자들, 자기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집 안에서 잃어버린 금속조각 이야기를, 물질의 걱정거리와 생활의 축적으로 당황하고, 혼란스럽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분별이 없는 모든 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신적으로 찾는지, 실례로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얼마나 완벽하게 아버지의 집과 심정 안으로 잃어버린 아들이 회복되는지 보여주려고 잃어버린 아들의 이 비유, 돌아온 탕자를 환영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습니다(눅15:3-32).
169:1.16 (1853.3) Many, many times during his years of teaching, Jesus told and retold this story of the prodigal son. This parable and the story of the good Samaritan were his favorite means of teaching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neighborliness of man. 예수께서 가르친 여러 해 동안, 그는 방탕한 아들의 이 이야기를 아주 여러 번, 말하고, 또 바꾸어 말했습니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人)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2. Parable of the Shrewd Steward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231029 영리(怜悧)한 청지기의 비유 눅16:1-14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9:2.1 (1853.4) One evening Simon Zelotes, commenting on one of Jesus’ statements, said: “Master, what did you mean when you said today that many of the children of the world are wiser in their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the kingdom since they are skillful in making friends with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 Jesus answered: 어느 날(AD30. 3.7화~11토) 저녁 시몬 젤로떼가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거론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세상의 여러 자녀가 불의(不義)한 배금(拜金 돈 숭배)과 능숙하게 친하므로 자기 세대의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고 당신께서 오늘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지요?” 예수께서 대답했습니다(눅16:8).
169:2.2 (1853.5) “Some of you, before you entered the kingdom, were very shrewd in dealing with your business associates. If you were unjust and often unfair, you were nonetheless prudent and farseeing in that you transacted your business with an eye single to your present profit and future safety. Likewise should you now so order your lives in the kingdom as to provide for your present joy while you also make certain of your future enjoyment of treasures laid up in heaven. If you were so diligent in making gains for yourselves when in the service of self, why should you show less diligence in gaining souls for the kingdom since you are now servants of the brotherhood of man and stewards of God? 너희 중 일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너희 사업 동료를 다룰 때 아주 영리했느니라. 너희가 부조리하고 종종 부당하더라도 너희가 현재의 이익과 미래 안전에 대해 성심성의로 너희 사업을 처리했다는 점에서 너희는 신중하고 선견지명이 있었느니라. 마찬가지로, 너희가 이제는, 하늘나라에 쌓아놓은 너희 미래 보물을 반드시 누리면서도 너희 현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느님 나라 안에서 너희 생활을 정리해야 하느니라. 너희가 자신을 위해 일할 때 자기를 위해 이윤을 내려고 그렇게 공들였다면, 이제 너희는 사람의 형제 공동체 봉사자들이며 하느님의 청지기들이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혼(魂)들을 얻는 일에 왜 공을 덜 들이느냐?
169:2.3 (1853.6) “You may all learn a lesson from the story of a certain rich man who had a shrewd but unjust steward. This steward had not only oppressed his master’s clients for his own selfish gain, but he had also directly wasted and squandered his master’s funds. When all this finally came to the ears of his master, he called the steward before him and asked the meaning of these rumors and required that he should give immediate accounting of his stewardship and prepare to turn his master’s affairs over to another. “너희 모두 영리하지만 옳지 못한 청지기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배울 수도 있으리라. 이 청지기는 자기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자기 주인의 고객들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주인의 자금도 직접 낭비하고 탕진했느니라. 이 모든 일이 결국 자기 주인의 귀에 들어가자, 그가 자기 앞에 청지기를 불러 이런 소문에 담긴 의미를 묻고 즉시 청지기 직의 회계를 보고하고 자기 주인의 업무를 다른 이에게 건네줄 준비를 하라고 요구했느니라(눅16:1-2).
169:2.4 (1853.7) “Now this unfaithful steward began to say to himself: ‘What shall I do since I am about to lose this stewardship? I have not the strength to dig; to beg I am ashamed. I know what I will do to make certain that, when I am put out of this stewardship, I will be welcomed into the houses of all who do business with my master.’ And then, calling in each of his lord’s debtors, he said to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He answered, ‘A hundred measures of oil.’ Then said the steward, ‘Take your wax board bond, sit down quickly, and change it to fifty.’ Then he said to another debtor, ‘How much do you owe?’ And he replied, ‘A hundred measures of wheat.’ Then said the steward, ‘Take your bond and write fourscore.’ And this he did with numerous other debtors. And so did this dishonest steward seek to make friends for himself after he would be discharged from his stewardship. Even his lord and master, when he subsequently found out about this, was compelled to admit that his unfaithful steward had at least shown sagacity in the manner in which he had sought to provide for future days of want and adversity. “그러자 이 불충한 청지기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청지기 직을 곧 잃게 되었으니 뭘 할까? 내가 땅을 팔 힘이 없고, 구걸하려니 부끄럽구나. 내가 이 청지기 직을 잃을 때, 내 주인과 거래하는 모든 자의 집에서 환영받게 되도록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확실히 알겠구나.’ 그런 다음,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그가 첫 사람에게 ‘내 주인에게 너는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기름 180리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청지기가 말하기를 ‘밀랍 판 차용증을 가져다 빨리 앉아 그것을 90리터로 고치라.’ 그런 후 그가 다른 채무자에게 ‘너는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밀 100포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청지기가 ‘너의 차용증을 가져와 80포대로 쓰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다른 채무자를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정직한 청지기는 자신이 청지기 직에서 해고된 후에 자신을 위해 친구를 사귀려고 그렇게 애썼습니다. 그의 주(主)이며 주인조차, 나중에 이런 일에 대해 알게 되자, 자신의 불충한 청지기가 적어도 앞날의 곤궁과 역경을 대비하려고 애쓴 태도에서 보인 눈치 빠른 민첩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눅16:3-8a).
169:2.5 (1854.1) “And it is in this way that the sons of this world sometimes show more wisdom in their preparation for the future than do the children of light. I say to you who profess to be acquiring treasure in heaven: Take lessons from those who make friends with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 and likewise so conduct your lives that you make eternal friendship with the forces of righteousness in order that, when all things earthly fail, you shall be joyfully received into the eternal habitations.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의 아들(자녀)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면서 빛의 자녀들이 하는 것보다 더 슬기로움을 보이느니라. 내가 하늘의 보물을 얻는다고 공언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 불의(不義)한 배금(拜金 돈 숭배)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마찬가지로 세상의 만사가 사라질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공의(公義)의 세력과 영원히 사귀도록 너희 삶을 그렇게 처신하라(눅16:8b-9).
169:2.6 (1854.2) “I affirm that he who is faithful in little will also be faithful in much, while he who is unrighteous in little will also be unrighteous in much. If you have not shown foresight and integrity in the affairs of this world, how can you hope to be faithful and prudent when you are trusted with the stewardship of the true riches of the heavenly kingdom? If you are not good stewards and faithful bankers, if you have not been faithful in that which is another’s, who will be foolish enough to give you great treasure in your own name? 내가 단언하노니, 적은 일에 충실한 자는 많은 일에도 충실할 것이며, 적은 일에 불의(不義)한 자는 많은 일에도 불의(不義)할 것이니라. 너희가 이 세상의 업무에서 신중(愼重)과 고결(高潔)을 보이지 않는다면, 너희가 하늘나라에 속한 참된 재물의 청지기 직을 맡을 때 너희가 충실하고 신중하기를 기대할 수 있느냐? 너희가 선한 청지기와 충실한 은행가가 아니라면, 너희가 다른 사람의 것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누가 어리석게 너희 자신의 이름으로 큰 보물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16:10-12)?
169:2.7 (1854.3) “And again I assert that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hold to one while he despises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mammon.” “내가 다시 단언하노니,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그가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그가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서 다른 하나를 싫어하리라. 너희가 하느님과 배금(拜金 돈 숭배)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169:2.8 (1854.4) When the Pharisees who were present heard this, they began to sneer and scoff since they were much given to the acquirement of riches. These unfriendly hearers sought to engage Jesus in unprofitable argumentation, but he refused to debate with his enemies. When the Pharisees fell to wrangling among themselves, their loud speaking attracted large numbers of the multitude encamped thereabouts; and when they began to dispute with each other, Jesus withdrew, going to his tent for the night. 참석했던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물 획득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롱하며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적대시하는 마음이 있는 청중들이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 대적들과 논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저희끼리 입씨름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근처에서 야영하던 상당수의 군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다툼하기 시작하자, 예수께서 물러나 밤을 보내시려고 자기 천막으로 갔습니다(눅16:14).
3. The Rich Man and the Beggar 부자와 거지
231105 부자와 거지 눅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69:3.1 (1854.5) When the meeting became too noisy, Simon Peter, standing up, took charge, saying: “Men and brethren, it is not seemly thus to dispute among yourselves. The Master has spoken, and you do well to ponder his words. And this is no new doctrine which he proclaimed to you. Have you not also heard the allegory of the Nazarites concerning the rich man and the beggar? Some of us heard John the Baptist thunder this parable of warning to those who love riches and covet dishonest wealth. And while this olden parable is not according to the gospel we preach, you would all do well to heed its lessons until such a time as you comprehend the new light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story as John told it was like this: 모임이 너무 떠들썩해지자, 시몬 베드로가 일어나 주도권을 잡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이렇게 서로 다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했으니, 너희는 그의 말씀을 깊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가 너희에게 선포한 새 교리가 아닙니다. 너희는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실인들의 우화도 듣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 일부는 세례 요한이 재물을 사랑하고 부정직한 재산을 몹시 탐내는 자들에게 외치며 경고하는 이 비유를 들었습니다. 오래된 이 비유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다르지만, 너희가 하늘나라의 새로운 빛을 파악하는 그런 때까지 너희 모두 그 교훈을 마음에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169:3.2 (1854.6)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named Dives, who, being clothed in purple and fine linen, lived in mirth and splendor every day. And there was a certain beggar named Lazarus, who was laid at this rich man’s gate, covered with sores and desiring to be fed with the crumbs which fell from the rich man’s table; yes, even the dogs came and licked his sores. And it came to pass that the beggar died and was carried away by the angels to rest in Abraham’s bosom. And then, presently, this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with great pomp and regal splendor. When the rich man departed from this world, he waked up in Hades, and finding himself in torment, he lifted up his eyes and beheld Abraham afar off and Lazarus in his bosom. And then Dives cried aloud: ‘Father Abraham, have mercy on me and send over Lazarus that he may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to cool my tongue, for I am in great anguish because of my punishment.’ And then Abraham replied: ‘My son, you should remember that in your lifetime you enjoyed the good things while Lazarus in like manner suffered the evil. But now all this is changed, seeing that Lazarus is comforted while you are tormented. And besides, between us and you there is a great gulf so that we cannot go to you, neither can you come over to us.’ Then said Dives to Abraham: ‘I pray you send Lazarus back to my father’s house, inasmuch as I have five brothers, that he may so testify as to prevent my brothers from coming to this place of torment.’ But Abraham said: ‘My son,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hear them.’ And then answered Dives: ‘No, No, Father Abraham! but if one go to them from the dead, they will repent.’ And then said Abraham: ‘If they hear not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even if one were to rise from the dead.’” “디베스라는 이름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자주색과 고운 면 옷을 입고 매일 희희낙락하며 호화스럽게 지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어떤 거지가 이 부자의 출입문에 있었는데, 상처투성이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들도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거지가 죽게 되자 천사들이 데려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었습니다. 그 후 이내 이 부자도 죽어 아주 화려하고 왕같이 호화롭게 묻혔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하데스(황천, 지옥)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디베스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가 제 형벌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제 혀를 식히도록 그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너의 살아생전에 네가 좋은 것들을 누리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나사로가 악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이제 네가 고통받는 동안에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 것으로 보아 이 모든 것이 바뀌느니라. 게다가 너와 우리 사이에는 아주 깊이 갈라진 틈이 있어서 우리가 너에게 갈 수도 없고 네가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느니라.’ 그러자 디베스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간청하오니, 제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제 형제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당신께서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에 돌려보내 증언하게 하소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이보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게 하라.’ 그러자 디베스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설득되지 않으리라(눅16:19-31).’”
169:3.3 (1855.1) After Peter had recited this ancient parable of the Nazarite brotherhood, and since the crowd had quieted down, Andrew arose and dismissed them for the night. Although both the apostles and his disciples frequently asked Jesus questions about the parable of Dives and Lazarus, he never consented to make comment thereon. 베드로가 나실인 공동체의 아주 오래된 이 비유를 이야기한 후, 군중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안드레가 일어나 그들을 해산시켜 잠자리에 들게 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디베스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해 예수께 종종 질문했지만, 그는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4. The Father and His Kingdom 아버지와 그의 나라
231112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1 (1855.2) Jesus always had trouble trying to explain to the apostles that, while they proclaime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the Father in heaven was not a king. At the time Jesus lived on earth and taught in the flesh, the people of Urantia knew mostly of kings and emperors in the governments of the nations, and the Jews had long contemplat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For these and other reasons, the Master thought best to designate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as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 spirit head of this brotherhood as the Father in heaven. Never did Jesus refer to his Father as a king. In his intimate talks with the apostles he always referred to himself as the Son of Man and as their elder brother. He depicted all his followers as servants of mankind and messenger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예수는 사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설립을 선포하는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왕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애써 설명하기에 언제나 고생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살면서 육신으로 가르치실 때, 유란시아 사람들은 각국 정부의 왕과 황제를 대부분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오랫동안 기대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主)님은 사람의 영적 형제 공동체를 하늘나라로, 이 형제 공동체의 영(靈) 수장(首長)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를 결코 왕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친밀히 말할 때,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과 그들의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모든 자기 추종자를 인류의 하인들과 하느님 나라 복음의 메신저로 나타냈습니다.
169:4.2 (1855.3) Jesus never gave his apostles a systematic lesson concerning the personality and attributes of the Father in heaven. He never asked men to believe in his Father; he took it for granted they did. Jesus never belittled himself by offering arguments in proof of the reality of the Father. His teaching regarding the Father all centered in the declaration that he and the Father are one; that he who has seen the Son has seen the Father; that the Father, like the Son, knows all things; that only the Son really knows the Father, and he to whom the Son will reveal him; that he who knows the Son knows also the Father; and that the Father sent him into the world to reveal their combined natures and to show forth their conjoint work. He never made other pronouncements about his Father except to the woman of Samaria at Jacob’s well, when he declared, “God is spirit.” 예수는 사도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격(고유성)과 속성에 관해 결코 체계적인 교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믿으라고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믿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실체를 입증하는 주장을 제안하여 자신을 절대로 낮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모두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선언(요10:30),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요12:45, 14:9), 아버지는 아들처럼 모든 것을 아신다는 선언(요16:30, 요일3:20), 아들만이 아버지를 정말로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자들만 아버지를 안다는 선언(마11:27, 눅10:22), 아들을 아는 자는 아버지도 안다는 선언(요8:19, 14:7), 자신들의 연합된 본성을 드러내고(요7:16, 12:49-50) 자신들의 공동 과업을 보이려고(요5:17, 14:10, 16:15, 17:10) 아버지가 자신을 세상에 보냈다는 선언(요7:29, 17:8)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느님은 영(靈)이라.”라고 선포한 것(요4:24) 외에 자기 아버지에 대해 결코 다르게 선언하지 않았습니다(143:5.6).
169:4.3 (1856.1) You learn about God from Jesus by observing the divinity of his life, not by depending on his teachings. From the life of the Master you may each assimilate that concept of God which represents the measure of your capacity to perceive realities spiritual and divine, truths real and eternal. The finite can never hope to comprehend the Infinite except as the Infinite was focalized in the time-space personality of the finite experience of the human life of Jesus of Nazareth. 너희가 예수에게서 하느님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의 가르침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의 일생의 신성(神性)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主)님의 일생으로부터, 너희는 영적이며 신적인 실체들, 실제의 영원한 진리들을 알아차리는 너희 능력의 척도를 나타내는 그런 하느님의 개념을 각자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무한자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 일생에 속한 유한한 경험의 시공간 인격(고유성)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유한자는 절대로 무한자를 파악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169:4.4 (1856.2) Jesus well knew that God can be known only by the realities of experience; never can he be understood by the mere teaching of the mind. Jesus taught his apostles that, while they never could fully understand God, they could most certainly know him, even as they had known the Son of Man. You can know God, not by understanding what Jesus said, but by knowing what Jesus was. Jesus was a revelation of God. 예수는 하느님이 체험적 실체들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지, 단순한 마음의 가르침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사도들이 절대로 충분히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들이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을 알았던 것처럼 가장 확실히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면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231119 예수는 아버지의 계시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5 (1856.3) Except when quoting the Hebrew scriptures, Jesus referred to Deity by only two names: God and Father. And when the Master made reference to his Father as God, he usually employed the Hebrew word signifying the plural God (the Trinity) and not the word Yahweh, which stood for the progressive conception of the tribal God of the Jews. 히브리 성서를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 예수는 두 가지 이름, 하느님과 아버지로만 신(神)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자기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언급할 때, 그는 보통 복수의 하느님(삼위일체)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했고, 유대인의 종족 하느님에 대한 점진적 개념을 나타내는 야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69:4.6 (1856.4) Jesus never called the Father a king, and he very much regretted that the Jewish hope for a restored kingdom and John’s proclamation of a coming kingdom made it necessary for him to denominate his proposed spiritual brotherhood the kingdom of heaven. With the one exception — the declaration that “God is spirit” — Jesus never referred to Deity in any manner other than in terms descriptive of his own personal relationship with the First Source and Center of Paradise. 예수는 아버지를 결코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회복된 왕국에 대한 유대인의 희망과 다가오는 왕국에 대한 요한의 선포(마3:1-2)로 인해 자신이 제안한 영적 형제 공동체를 하늘나라로 불러야 했던 것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영(靈)이시다(요4:24).”라는 한 가지 선언을 제외하고, 예수는 천국의 첫째 근원 및 중심과 그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 외에 결코 다른 방식으로 신(神)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169:4.7 (1856.5) Jesus employed the word God to designate the idea of Deity and the word Father to designate the experience of knowing God. When the word Father is employed to denote God, it should be understood in its largest possible meaning. The word God cannot be defined and therefore stands for the infinite concept of the Father, while the term Father, being capable of partial definition, may be employed to represent the human concept of the divine Father as he is associated with man during the course of mortal existence. 예수는 신(神)에 대한 개념을 나타내려고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느님을 아는 체험을 나타내려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하느님을 나타내려고 사용될 때, 가능한 가장 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아버지의 무한한 개념을 나타내지만, 아버지라는 용어는 부분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서, 아버지가 이생의 삶의 과정에서 인간과 관련될 때, 신적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 개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169:4.8 (1856.6) To the Jews, Elohim was the God of gods, while Yahweh was the God of Israel. Jesus accepted the concept of Elohim and called this supreme group of beings God. In the place of the concept of Yahweh, the racial deity, he introduced the idea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world-wide brotherhood of man. He exalted the Yahweh concept of a deified racial Father to the idea of a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men, a divine Father of the individual believer. And he further taught that this God of universes and this Father of all men were one and the same Paradise Deity. 유대인들에게 엘로힘은 신과 같은 존재들의 하느님이었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는 엘로힘의 개념을 받아들여 이런 최극 존재 집단을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종족의 신(神), 야훼의 개념 대신에, 그는 하느님의 아버지와 인간의 세계적인 형제 공동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는 신격화된 종족 아버지라는 야훼 개념을 모든 인간 자녀의 아버지, 개별 신자(信者)의 신적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격을 높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우주들의 이 하느님, 모든 인간의 이 아버지가 하나뿐인, 바로 그 천국 신(神)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69:4.9 (1856.7) Jesus never claimed to be the manifestation of Elohim (God) in the flesh. He never declared that he was a revelation of Elohim (God) to the worlds. He never taught that he who had seen him had seen Elohim (God). But he did proclaim himself as the revelation of the Father in the flesh, and he did say that whoso had seen him had seen the Father. As the divine Son he claimed to represent only the Father. 예수는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난 엘로힘(하느님)이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대한 엘로힘(하느님)의 계시라고 절대로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본 자는 엘로힘(하느님)을 본 것이라고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육신을 입은 아버지의 계시라고 선포하고, 자신을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적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만 대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69:4.10 (1857.1) He was, indeed, the Son of even the Elohim God; but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to the mortal sons of God, he chose to limit his life revelation to the portrayal of his Father’s character in so far as such a revelation might be comprehensible to mortal man. As regards the character of the other persons of the Paradise Trinity, we shall have to be content with the teaching that they are altogether like the Father, who has been revealed in personal portraiture in the life of his incarnated Son, Jesus of Nazareth. 그는 실로 엘로힘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했으나,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필사 아들들에게, 그런 계시가 필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생애 계시를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데까지 국한(局限)하기로 했습니다. 천국 삼위일체의 다른 인격(고유자)들의 성품에 관해서, 우리는, 자신이 성육신(成肉身)한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일생 안에서 인격 초상화로 그려서 계시한 아버지와 그들이 완전히 닮았다는 가르침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입니다.
231126 예수는 영적 렌즈 요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169:4.11 (1857.2) Although Jesus revealed the true nature of the heavenly Father in his earth life, he taught little about him. In fact, he taught only two things: that God in himself is spirit, and that, in all matters of relationship with his creatures, he is a Father. On this evening Jesus made the final pronouncement of his relationship with God when he declared: “I have come out from the Father, and I have come into the world; again, I will leave the world and go to the Father.” 예수는 자신의 지상 생활로 하늘 아버지의 참된 본성을 계시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는 하느님은 원래 영(靈)이라는 것과 자기 창조물과 모든 관계에서 그는 아버지라는 두 가지만 가르쳤습니다. 이날 저녁에 예수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노라(요16:28).”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최종 선언을 하셨습니다.
169:4.12 (1857.3) But mark you! never did Jesus say, “Whoso has heard me has heard God.” But he did say,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To hear Jesus’ teaching is not equivalent to knowing God, but to see Jesus is an experience which in itself is a revelation of the Father to the soul. The God of universes rules the far-flung creation, but it is the Father in heaven who sends forth his spirit to dwell within your minds. 그러나 주의하라! 예수는 “내 말을 듣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12:45, 14: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지만, 예수를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혼(魂)에 대한 아버지의 계시(啓示)인 체험입니다. 우주들의 하느님은 널리 퍼진 창조계를 다스리지만, 너희 마음 안에 거하도록 자기 영(靈)을 보낸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169:4.13 (1857.4) Jesus is the spiritual lens in human likeness which makes visible to the material creature Him who is invisible. He is your elder brother who, in the flesh, makes known to you a Being of infinite attributes whom not even the celestial hosts can presume fully to understand. But all of this must consist in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believer. God who is spirit can be known only as a spiritual experience. God can be revealed to the finite sons of the material worlds, by the divine Son of the spiritual realms, only as a Father. You can know the Eternal as a Father; you can worship him as the God of universes, the infinite Creator of all existences. 예수는 물질 창조물에게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이게 하는 인간 모습의 영적 렌즈입니다. 그는 천상의 무리조차 충분히 이해했다고 추정할 수 없는 무한한 속성의 존재를 살아서 너희에게 알려주는 너희 형님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개별 신자들의 개인적 체험이어야 합니다. 영(靈)이신 하느님(요4:24)은 영적 체험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적 영역의 신적 아들에 의해서, 물질세계들의 유한한 아들(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만 계시(啓示)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영원자를 아버지로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우주들의 하느님, 모든 존재의 무한한 창조자로서 그를 경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