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37 Tarrying Time in Galilee 갈릴리에 머무른 기간

Paper 137

Tarrying Time in Galilee 갈릴리에 머무른 기간

1. Choosing the First Four Apostles 첫 번째 네 명의 제자를 택함
Andrew and Peter 안드레와 베드로
James and John 야고보와 요한
2. Choosing Philip and Nathaniel 빌립과 나다니엘을 택함
3. The Visit to Capernaum 가버나움 방문
4. The Wedding at Cana 가나의 결혼식
5. Back in Capernaum 가버나움으로 돌아옴
6. The Events of a Sabbath Day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들
7. Four Months of Training 4개월의 훈련
8. Sermon on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

137:0.1 (1524.1) EARLY on Saturday morning, February 23, A.D. 26, Jesus came down from the hills to rejoin John’s company encamped at Pella. All that day Jesus mingled with the multitude. He ministered to a lad who had injured himself in a fall and journeyed to the near-by village of Pella to deliver the boy safely into the hands of his parents. 서기 26년(32세-31세 6개월) 2월 23일 토요일 이른 아침, 예수님은 펠라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요한의 무리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내내 군중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낙상(굴러 떨어짐)을 입어 몸을 다친 젊은이 하나를 보살폈으며, 그 소년을 부모에게 안전하게 데려다주려고 근처의 마을 펠라까지 여행하셨습니다.

1. Choosing the First Four Apostles 첫 번째 네 명의 제자를 택함

170806 막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6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17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18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19 When he had gone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in a boat, preparing their nets. 20 Without dela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men and followed him.

137:1.1 (1524.2) During this Sabbath two of John’s leading disciples spent much time with Jesus. Of all John’s followers one named Andrew was the most profoundly impressed with Jesus; he accompanied him on the trip to Pella with the injured boy. On the way back to John’s rendezvous he asked Jesus many questions, and just before reaching their destination, the two paused for a short talk, during which Andrew said: “I have observed you ever since you came to Capernaum, and I believe you are the new Teacher, and though I do not understand all your teaching, I have fully made up my mind to follow you; I would sit at your feet and learn the whole truth about the new kingdom.” And Jesus, with hearty assurance, welcomed Andrew as the first of his apostles, that group of twelve who were to labor with him in the work of establishing the new kingdom of God in the hearts of men. 이 안식일 동안 요한의 수제자(首弟子) 두 명이 예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제자들 중에서 안드레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상당한 소년을 데리고 펠라로 가는 여행길에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요한의 모임장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예수님께 많은 질문을 하였으며, 그들 두 사람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기 바로 직전에 잠시 이야기를 하려고 멈추었을 때, 안드레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이 가버나움에 오신 이래부터 당신을 계속 지켜보았으며, 당신이 바로 그 새로운 선생님이신 것을 믿으며; 당신의 가르침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당신을 따르기로 마음을 확실히 정하였습니다. 당신께 복종하면서 새로운 왕국에 대한 모든 진리를 배우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확신으로, 자신과 함께 사람들의 심정에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될 열 두 명의 그룹에서 첫 번째 사도로 그를 환영하셨습니다.

137:1.2 (1524.3) Andrew was a silent observer of, and sincere believer in, John’s work, and he had a very able and enthusiastic brother, named Simon, who was one of John’s foremost disciples. It would not be amiss to say that Simon was one of John’s chief supporters. 안드레는 요한의 사역을 말없이 지켜보고,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는 요한의 수제자(首弟子)로 있는, 아주 유능하고 적극적인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요한의 우두머리 지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37:1.3 (1524.4) Soon after Jesus and Andrew returned to the camp, Andrew sought out his brother, Simon, and taking him aside, informed him that he had settled in his own mind that Jesus was the great Teacher, and that he had pledged himself as a disciple. He went on to say that Jesus had accepted his proffer of service and suggested that he (Simon) likewise go to Jesus and offer himself for fellowship in the service of the new kingdom. Said Simon: “Ever since this man came to work in Zebedee’s shop, I have believed he was sent by God, but what about John? Are we to forsake him? Is this the right thing to do?” Whereupon they agreed to go at once to consult John. John was saddened by the thought of losing two of his able advisers and most promising disciples, but he bravely answered their inquiries, saying: “This is but the beginning; presently will my work end, and we shall all become his disciples.” Then Andrew beckoned to Jesus to draw aside while he announced that his brother desired to join himself to the service of the new kingdom. And in welcoming Simon as his second apostle, Jesus said: “Simon, your enthusiasm is commendable, but it is dangerous to the work of the kingdom. I admonish you to become more thoughtful in your speech. I would change your name to Peter.” 예수님과 안드레가 야영지로 돌아온 직후,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찾아서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예수를 위대한 스승으로 받아들였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봉사에 대한 서약을 받아들였다고 덧붙여 말하면서, 마찬가지로 시몬에게도 예수님께로 가서 새로운 왕국의 봉사에 스스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시몬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세베대의 일터에 일하러 왔을 때부터, 나는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믿었지만, 요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를 버려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래서 그들은 곧 요한에게 가서 의논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요한은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두 충고자들을 잃는다는 생각으로 슬펐으나,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용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의 임무는 곧 끝날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안드레는 예수님을 한쪽 옆으로 불러내어, 자기 동생도 역시 새로운 왕국의 일을 하는데 참여하길 원하고 있다고 그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시몬을 자신의 두 번째 사도로 환영하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너의 정열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은 왕국의 일에 있어서는 위험하다. 나는 네가 언행에 있어서 좀 더 사려가 깊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네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고자 하노라.”

137:1.4 (1525.1) The parents of the injured lad who lived at Pella had besought Jesus to spend the night with them, to make their house his home, and he had promised. Before leaving Andrew and his brother, Jesus said, “Early on the morrow we go into Galilee.” 펠라에 사는 부상당한 소년의 부모가 자기 집에서 그 날 밤 자신들과 함께 거처하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예수님은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그의 동생을 떠나시기 전에,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갈릴리로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7:1.5 (1525.2) After Jesus had returned to Pella for the night, and while Andrew and Simon were yet discussing the nature of their servic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forthcoming kingdom,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arrived upon the scene, having just returned from their long and futile searching in the hills for Jesus. When they heard Simon Peter tell how he and his brother, Andrew, had become the first accepted counselors of the new kingdom, and that they were to leave with their new Master on the morrow for Galilee, both James and John were sad. They had known Jesus for some time, and they loved him. They had searched for him many days in the hills, and now they returned to learn that others had been preferred before them. They inquired where Jesus had gone and made haste to find him. 예수께서 그 날 밤을 지내려고 펠라로 돌아오신 후, 안드레와 시몬이 다가올 왕국 설립에 있어서 자신들이 맡을 봉사의 본질에 대해 여전히 토론하고 있는 동안,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동산에서 예수님을 찾아 오랜 시간을 헤매다가 헛걸음을 한 뒤 막 돌아와 그 자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어떻게 자신들이 새로운 왕국의 첫 번째로 받아들여진 조언자들이 되었다는 것과 그들이 내일 그들의 새 주님과 함께 갈릴리로 떠날 예정이라는 것을 말해 주자, 야고보와 요한은 서글펐습니다. 그들은 얼마동안 예수를 알고 있었고,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언덕 위에서 여러 날 헤매다가 이제 돌아오게 되자,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방을 물은 후에, 그를 찾아 서둘러 떠났습니다.

137:1.6 (1525.3) Jesus was asleep when they reached his abode, but they awakened him, saying: “How is it that, while we who have so long lived with you are searching in the hills for you, you prefer others before us and choose Andrew and Simon as your first associates in the new kingdom?” Jesus answered them, “Be calm in your hearts and ask yourselves, ‘who directed that you should search for the Son of Man when he was about his Father’s business?’” After they had recited the details of their long search in the hills, Jesus further instructed them: “You should learn to search for the secret of the new kingdom in your hearts and not in the hills. That which you sought was already present in your souls. You are indeed my brethren — you needed not to be received by me — already were you of the kingdom, and you should be of good cheer, making ready also to go with us tomorrow into Galilee.” John then made bold to ask, “But, Master, will James and I be associates with you in the new kingdom, even as Andrew and Simon?” And Jesus, laying a hand on the shoulder of each of them, said: “My brethren, you were already with me in the spirit of the kingdom, even before these others made request to be received. You, my brethren, have no need to make request for entrance into the kingdom; you have been with me in the kingdom from the beginning. Before men, others may take precedence over you, but in my heart did I also number you in the councils of the kingdom, even before you thought to make this request of me. And even so might you have been first before men had you not been absent engaged in a well-intentioned but self-appointed task of seeking for one who was not lost. In the coming kingdom, be not mindful of those things which foster your anxiety but rather at all times concern yourselves only with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who is in heaven.” 그들이 예수님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에 예수님은 잠들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깨워서 말하였습니다. “당신과 그토록 오래 살았던 우리가 산에서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그동안 당신은 우리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 하며 안드레와 시몬을 새로운 왕국의 첫 번째 동료들로 선택하셨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심정을 진정시키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를 찾아 나서라고 누가 너희를 이끌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언덕에서 오랫동안 그를 찾아 다녔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심정 속에 있는 새로운 왕국의 비밀 찾기를 배워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찾던 것은 이미 너희의 혼(魂)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너희는 진정 나의 형제─나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필요조차 없는 형제─들이고, 이미 왕국에 들어와 있었으니, 마땅히 기운을 내서 너희도 내일 우리와 함께 갈릴리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러자 요한은, “그러면 주(主)여, 야고보와 저도 안드레와 시몬처럼 새로운 왕국에서 당신의 동료가 되는 것입니까?”라고 대담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 각각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심지어 너희는 이 다른 사람들이 받아달라고 요청하기도 전에, 이미 왕국의 영 안에서 나와 함께 있었노라. 나의 형제들인 너희는 왕국에 들어오기 위해 요청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는 맨 처음부터 나와 함께 왕국 안에 있었느니라. 사람들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너희의 앞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내 심정 속에서는 너희가 내게 이렇게 청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왕국 협의회 안에서 나는 너희를 헤아리고 있었노라. 그리고 좋은-의도였지만, 잃어버리지도 않은 사람을 찾아 나서려고 스스로(자아) 임명한 과업에 몰두하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도 첫 번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가오는 왕국에서는, 걱정을 키우는 그러한 일들에 마음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너희 자신을 염려하라.”

137:1.7 (1525.4) James and John received the rebuke in good grace; never more were they envious of Andrew and Simon. And they made ready, with their two associate apostles, to depart for Galilee the next morning. From this day on the term apostle was employed to distinguish the chosen family of Jesus’ advisers from the vast multitude of believing disciples who subsequently followed him. 야고보와 요한은 그 책망을 선한 은혜 안에서 받아들였고, 안드레와 시몬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동료 사도와 함께 다음날 아침 갈릴리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 날부터, 예수님의 선택된 조언자들 일행과, 훗날 그를 따르던 광대한 무리의 믿는 제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137:1.8 (1525.5) Late that evening, James, John, Andrew, and Simon held converse with John the Baptist, and with tearful eye but steady voice the stalwart Judean prophet surrendered two of his leading disciples to become the apostles of the Galilean Prince of the coming kingdom. 그 날 저녁 늦게, 야고보, 요한, 안드레, 시몬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눈물이 고였지만, 침착한 음성으로 그 강직한 유대 예언자는 자신의 수제자(首弟子) 두 사람을 다가오는 왕국의 갈릴리 영주의 사도로 넘겨주었습니다.

2. Choosing Philip and Nathaniel 빌립과 나다니엘을 택함

170813 요1:43-51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43 The next day Jesus decided to leave for Galilee. Finding Philip, he said to him, “Follow me.” 44 Philip, like Andrew and Peter, was from the town of Bethsaida. 45 Philip found Nathanael and told him, “We have found the one Moses wrote about in the Law, and about whom the prophets also wrote—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 46 “Nazareth! Can anything good come from there?” Nathanael asked. “Come and see,” said Philip. 47 When Jesus saw Nathanael approaching, he said of him, “Here is a true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thing false.” 48 “How do you know me?” Nathanael asked. Jesus answered, “I saw you while you were still under the fig tree before Philip called you.” 49 Then Nathanael declared,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 the King of Israel.” 50 Jesus said,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shall see greater things than that.” 51 He then added, “I tell you the truth, you shall see heaven open,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137:2.1 (1526.1) Sunday morning, February 24, A.D. 26, Jesus took leave of John the Baptist by the river near Pella, never again to see him in the flesh. 서기 26년 2월 24일 일요일 아침에,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과 펠라 근처의 강가에서 헤어졌으며, 육신으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137:2.2 (1526.2) That day, as Jesus and his four disciple-apostles departed for Galilee, there was a great tumult in the camp of John’s followers. The first great division was about to take place. The day before, John had made his positive pronouncement to Andrew and Ezra that Jesus was the Deliverer. Andrew decided to follow Jesus, but Ezra rejected the mild-mannered carpenter of Nazareth, proclaiming to his associates: “The Prophet Daniel declares that the Son of Man will come with the clouds of heaven, in power and great glory. This Galilean carpenter, this Capernaum boatbuilder, cannot be the Deliverer. Can such a gift of God come out of Nazareth? This Jesus is a relative of John, and through much kindness of heart has our teacher been deceived. Let us remain aloof from this false Messiah.” When John rebuked Ezra for these utterances, he drew away with many disciples and hastened south. And this group continued to baptize in John’s name and eventually founded a sect of those who believed in John but refused to accept Jesus. A remnant of this group persists in Mesopotamia even to this day. 예수님과 그의 네 제자-사도가 갈릴리로 떠나던 그날, 요한의 추종자 캠프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의 큰 분열이 발생하려 했습니다. 그 전날, 요한은 안드레와 에즈라에게 예수님이 해방자라고 확실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으나, 에즈라는 온화한-성품의 나사렛 목수를 거부하였는데,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선지자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이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올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갈릴리의 목수이자 가버나움에서 배를 만드는 이 사람은 그 해방자가 될 수가 없다. 그런 하나님의 선물이 어떻게 나사렛으로부터 나올 수 있겠는가? 이 예수가 요한의 친척이고, 우리 선생님은 심성이 너무 착하기 때문에 속은 것이다. 이 거짓 메시아를 가까이 하지 말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요한이 그를 꾸짖자, 그는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곧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들은 요한의 이름으로 계속 세례를 주었으며, 결국에는 요한은 믿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하나의 교파를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 집단들의 잔재가 메소포타미아에 남아있습니다.

137:2.3 (1526.3) While this trouble was brewing among John’s followers, Jesus and his four disciple-apostles were well on their way toward Galilee. Before they crossed the Jordan, to go by way of Nain to Nazareth, Jesus, looking ahead and up the road, saw one Philip of Bethsaida with a friend coming toward them. Jesus had known Philip aforetime, and he was also well known to all four of the new apostles. He was on his way with his friend Nathaniel to visit John at Pella to learn more about the reported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and he was delighted to greet Jesus. Philip had been an admirer of Jesus ever since he first came to Capernaum. But Nathaniel, who lived at Cana of Galilee, did not know Jesus. Philip went forward to greet his friends while Nathaniel rested under the shade of a tree by the roadside.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예수님과 그의 네 제자-사도들은 아무 탈 없이 갈릴리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나인을 지나 나사렛으로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기 바로 전에, 길 앞쪽을 향해 바라보던 예수님의 눈에 벳새다의 빌립이 친구와 함께 그들에게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또한 새로운 4 명의 사도들 모두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나다니엘과 함께, 들려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요한을 방문하러 펠라로 가는 길이었으며, 예수님을 만나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처음 왔을 때부터 예수님을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의 가나에 살고 있던 나다니엘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습니다. 빌립은 그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앞으로 나아갔고, 그 동안 나다니엘은 길가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137:2.4 (1526.4) Peter took Philip to one side and proceeded to explain that they, referring to himself, Andrew, James, and John, had all become associates of Jesus in the new kingdom and strongly urged Philip to volunteer for service. Philip was in a quandary. What should he do? Here, without a moment’s warning — on the roadside near the Jordan — there had come up for immediate decision the most momentous question of a lifetime. By this time he was in earnest converse with Peter, Andrew, and John while Jesus was outlining to James the trip through Galilee and on to Capernaum. Finally, Andrew suggested to Philip, “Why not ask the Teacher?” 베드로는 빌립을 한 쪽으로 데리고 나가, 자신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모두 언급하며 예수님의 새로운 왕국의 동료가 되었다고 설명했으며, 빌립에게도 봉사에 자원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빌립은 난처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곳에서, 단 한 번의 예고도 없이─요단강가 노상(路上)에서─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를 즉석에서 결정해야만 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함께 아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 동안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으로 가는 여정의 대체적인 일정을 야고보에게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안드레가 빌립에게, “선생님께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137:2.5 (1526.5) It suddenly dawned on Philip that Jesus was a really great man, possibly the Messiah, and he decided to abide by Jesus’ decision in this matter; and he went straight to him, asking, “Teacher, shall I go down to John or shall I join my friends who follow you?” And Jesus answered, “Follow me.” Philip was thrilled with the assurance that he had found the Deliverer. 빌립은 예수께서 실제로 위대한 인물이고 아마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으며, 이 일에 대해 예수님의 결정을 따르기로 결심하였고, 곧장 예수께로 가서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요한을 보러 길을 내려가야 합니까, 아니면 당신을 따르는 내 친구들과 같이 가야 합니까?”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은 자기가 해방자를 찾았다는 확신으로 인해 감격스러웠습니다.

137:2.6 (1526.6) Philip now motioned to the group to remain where they were while he hurried back to break the news of his decision to his friend Nathaniel, who still tarried behind under the mulberry tree, turning over in his mind the many things which he had heard concerning John the Baptist, the coming kingdom, and the expected Messiah. Philip broke in upon these meditations, exclaiming, “I have found the Deliverer, him of whom Moses and the prophets wrote and whom John has proclaimed.” Nathaniel, looking up, inquired, “Whence comes this teacher?” And Philip replied, “He is 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 the carpenter, more recently residing at Capernaum.” And then, somewhat shocked, Nathaniel asked, “Can any such good thing come out of Nazareth?” But Philip, taking him by the arm, said, “Come and see.” 아직도 뽕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 나다니엘에게 자신이 결정한 소식을 알리려고 급히 그에게로 가면서, 빌립은 일행에게 그 자리에 그냥 남아있어 달라고 손짓으로 표시하였으며, 나다니엘은 세례 요한과 다가오는 왕국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해 자기가 들어왔던 많은 것들을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의 명상을 깨뜨리면서, “나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하고 요한이 선포하였던 해방자를 발견하였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다니엘이 그를 쳐다보면서, “이 선생님은 어디 출신이신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그는 요셉의 아들인 목수인데, 최근에는 가버나움에 사셨던 나사렛의 예수이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약간 놀란 나다니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의 팔을 끌면서, “가서 만나보자.”라고 말하였습니다.

137:2.7 (1527.1) Philip led Nathaniel to Jesus, who, looking benignly into the face of the sincere doubter, said: “Behold a genuine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 deceit. Follow me.” And Nathaniel, turning to Philip, said: “You are right. He is indeed a master of men. I will also follow, if I am worthy.” And Jesus nodded to Nathaniel, again saying, “Follow me.” 빌립이 나다니엘을 예수께로 데려갔으며, 그는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는 얼굴을 인자하게 들여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그의 안에는 아무 거짓이 없도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나다니엘은 빌립을 돌아보며, “네 말이 맞다. 그는 진정 사람들의 주(主)이시다. 나도 자격이 된다면, 따르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에게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7:2.8 (1527.2) Jesus had now assembled one half of his future corps of intimate associates, five who had for some time known him and one stranger, Nathaniel. Without further delay they crossed the Jordan and, going by the village of Nain, reached Nazareth late that evening. 이제 예수님은 그의 가까운 동료 즉 앞날을 위한 동지들의 절반을 모았는데, 그들 중 다섯은 그가 얼마 동안 친분이 있었고, 하나는 전혀 생소한 사람 나다니엘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지체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나인 마을을 지나 그날 저녁 늦게 나사렛에 도착하였습니다.

137:2.9 (1527.3) They all remained overnight with Joseph in Jesus’ boyhood home. The associates of Jesus little understood why their new-found teacher was so concerned with completely destroying every vestige of his writing which remained about the home in the form of the ten commandments and other mottoes and sayings. But this proceeding, together with the fact that they never saw him subsequently write — except upon the dust or in the sand — made a deep impression upon their minds.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소년시절을 지낸 집에서 요셉과 함께 그 날 밤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의 동료들은, 새로 만나게 된 자기들의 선생님이 집에 있는 십계명이나 다른 금언과 경구의 형태로 쓰인 자신의 필체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는데 왜 그리도 신경을 쓰시는지 거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그 이후로부터 그가 아무 곳에도 글씨를 쓰는 것을─흙이나 모래 위를 제외하고는─그들이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3. The Visit to Capernaum 가버나움 방문

170820 요2:1-2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1 On the third day a wedding took place at Cana in Galilee. Jesus’ mother was there, 2 and Jesus and his disciples had also been invited to the wedding.

137:3.1 (1527.4) The next day Jesus sent his apostles on to Cana, since all of them were invited to the wedding of a prominent young woman of that town, while he prepared to pay a hurried visit to his mother at Capernaum, stopping at Magdala to see his brother Jude. 그들 모두 마을에서 명성 있는 집안의 처녀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날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나로 보내셨으며, 그 동안 그는 급히 가버나움에 있는 자기 어머니를 방문하는 길에, 동생 유다를 만나기 위해 막달라에 들르셨습니다.

137:3.2 (1527.5) Before leaving Nazareth, the new associates of Jesus told Joseph and other members of Jesus’ family about the wonderful events of the then recent past and gave free expression to their belief that Jesus was the long-expected deliverer. And these members of Jesus’ family talked all this over, and Joseph said: “Maybe, after all, Mother was right — maybe our strange brother is the coming king.” 나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의 새로운 동료들은 요셉과 예수님의 다른 가족들에게, 지난 얼마 동안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에 대해 말했고, 예수님은 자신들이 오래 기다려오던 해방자(구원자)라는 믿음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결국 어머니가 옳았는가보다. – 우리 이상한 형님이, 오실 그 왕일지도 모른다.”

137:3.3 (1527.6) Jude was present at Jesus’ baptism and, with his brother James, had become a firm believer in Jesus’ mission on earth. Although both James and Jude were much perplexed as to the nature of their brother’s mission, their mother had resurrected all her early hopes of Jesus a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and she encouraged her sons to have faith in their brother as the deliverer of Israel. 유다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의 지상 사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야고보와 유다 두 사람은 자기 형이 맡은 사명의 본질에 대해서 무척 혼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의 어머니는 다윗의 아들인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해 일찍이 자기가 기대하던 희망을 되살려 내었으며 그들의 형이 이스라엘의 해방자(구원자)임을 신앙하도록 자기 아들들을 독려했습니다.

137:3.4 (1527.7) Jesus arrived in Capernaum Monday night, but he did not go to his own home, where lived James and his mother; he went directly to the home of Zebedee. All his friends at Capernaum saw a great and pleasant change in him. Once more he seemed to be comparatively cheerful and more like himself as he was during the earlier years at Nazareth. For years previous to his baptism and the isolation periods just before and just after, he had grown increasingly serious and self-contained. Now he seemed quite like his old self to all of them. There was about him something of majestic import and exalted aspect, but he was once again lighthearted and joyful. 예수님은 월요일 밤(AD 26, 2월 25일)에 가버나움에 도착하였으나, 야고보와 어머니가 살고 있던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세베대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그의 모든 친구들은 그에게 대단히 유쾌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상당히 즐거워 보였고, 나사렛 어린 시절의 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세례 받기 전 여러 해 동안, 그리고 고립 기간의 직전과 직후에, 그는 점점 더 심각해졌었고 더욱 자신을 절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두에게 옛 모습과 아주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기품 있는 인격과 고상한 모습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워했습니다.

137:3.5 (1528.1) Mary was thrilled with expectation. She anticipated that the promise of Gabriel was nearing fulfillment. She expected all Palestine soon to be startled and stunned by the miraculous revelation of her son as the supernatural king of the Jews. But to all of the many questions which his mother, James, Jude, and Zebedee asked, Jesus only smilingly replied: “It is better that I tarry here for a while; I must do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마리아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녀는 가브리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가까워졌다고 예상하였습니다. 그녀는 곧 자기 아들이 초자연적인 유대의 왕으로서 행할 기적 같은 계시로 모든 팔레스타인이 깜짝 놀라 소스라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야고보, 유다, 세베대가 퍼붓는 많은 모든 질문에 예수님은 단지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당분간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만 합니다.”

137:3.6 (1528.2) On the next day, Tuesday, they all journeyed over to Cana for the wedding of Naomi, which was to take place on the following day. And in spite of Jesus’ repeated warnings that they tell no man about him “until the Father’s hour shall come,” they insisted on quietly spreading the news abroad that they had found the Deliverer. They each confidently expected that Jesus would inaugurate his assumption of Messianic authority at the forthcoming wedding at Cana, and that he would do so with great power and sublime grandeur. They remembered w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e phenomena attendant upon his baptism, and they believed that his future course on earth would be marked by increasing manifestations of supernatural wonders and miraculous demonstrations. Accordingly, the entire countryside was preparing to gather together at Cana for the wedding feast of Naomi and Johab the son of Nathan. 다음 날 화요일(AD 26, 2월 26일)에, 그들은 모두 그 다음 날로 예정된 나오미의 결혼식(結婚式)에 참석하러 가나를 향하여 여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간이 올 때까지” 자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거듭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해방자(구원자)를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은밀하게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들 각자가, 다가올 가나의 결혼식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적 권위 수락을 시작하실 것이며 대단한 권능과 숭고한 위엄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 가운데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일어났던 현상에 대해 이미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의 지상생활에서 다가올 과정에는 초자연적 경이(驚異)들이 더욱 드러날 것과 기적적인 실증들을 남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온 시골 사람들은 나오미와 나단의 아들인 요합의 결혼 잔치를 위해 가나에 함께 모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37:3.7 (1528.3) Mary had not been so joyous in years. She journeyed to Cana in the spirit of the queen mother on the way to witness the coronation of her son. Not since he was thirteen years old had Jesus’ family and friends seen him so carefree and happy, so thoughtful and understanding of the wishes and desires of his associates, so touchingly sympathetic. And so they all whispered among themselves, in small groups, wondering what was going to happen. What would this strange person do next? How would he usher in the glory of the coming kingdom? And they were all thrilled with the thought that they were to be present to see the revelation of the might and power of Israel’s God. 마리아는 몇 년 동안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즉위식을 보려고 행차하는 황태후의 기분으로 가나를 향해 여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열세 살 되던 해 이후로, 그렇게 염려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며, 주변 사람들의 소원과 희망을 그렇게 헤아리고 이해하며, 그렇게 감동적으로 공감하는 그의 모습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슨 일이 일어날려는 지에 궁금해 하면서 속삭였습니다. 이 이상한 사람이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그는 다가올 왕국의 영광을 어떻게 열어 보일 것인가?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는 현장에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떨렸습니다.

4. The Wedding at Cana 가나의 결혼식

170827 요2:3-11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3 When the wine was gone, Jesus’ mother said to him, “They have no more wine.” 4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 Jesus replied, “My time has not yet come.” 5 His mother said to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 6 Nearby stood six stone water jars, the kind used by the Jews for ceremonial washing, each holding from twenty to thirty gallons. 7 Jesus said to the servants, “Fill the jars with water”; so they filled them to the brim. 8 Then he told them, “Now draw some out and take it to the master of the banquet.” They did so, 9 and the master of the banquet tasted the water that had been turned into wine. He did not realize where it had come from, though the servants who had drawn the water knew. Then he called the bridegroom aside 10 and said, “Everyone brings out the choice wine first and then the cheaper wine after the guests have had too much to drink; but you have saved the best till now.” 11 This, the first of his miraculous signs, Jesus performed in Cana of Galilee. He thus revealed his glory, and his disciples put their faith in him.

137:4.1 (1528.4) By noon on Wednesday almost a thousand guests had arrived in Cana, more than four times the number bidden to the wedding feast. It was a Jewish custom to celebrate weddings on Wednesday, and the invitations had been sent abroad for the wedding one month previously. In the forenoon and early afternoon it appeared more like a public reception for Jesus than a wedding. Everybody wanted to greet this near-famous Galilean, and he was most cordial to all, young and old, Jew and gentile. And everybody rejoiced when Jesus consented to lead the preliminary wedding procession. 수요일 정오까지, 결혼 잔치에 초청한 수의 네 배가 넘는, 거의 1천 명의 손님들이 가나에 도착하였습니다. 결혼식은 수요일(AD26. 2. 27)에 축하하는 것이 유대관습이었으며, 초청장은 결혼식 한 달 전에 보내졌습니다.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이것은 결혼식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위한 공식 연회장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거의 유명한 이 갈릴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하였는데, 예수님은 젊은이와 노인, 유대인과 이교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아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결혼 예비 의식을 인도하겠다고 동의하자 모두 기뻐했습니다.

137:4.2 (1528.5) Jesus was now thoroughly self-conscious regarding his human existence, his divine pre-existence, and the status of his combined, or fused, human and divine natures. With perfect poise he could at one moment enact the human role or immediately assume the personality prerogatives of the divine nature.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인간 존재와, 인간 이전의 신적 존재, 그리고 인간과 신적 본성이 결합되고, 또는 융합된 상태를 철저히 스스로 자각(자아-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인간의 역할을 하거나, 또는 즉각적으로 신적 본성의 고유성 특권을 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137:4.3 (1528.6) As the day wore on, Jesus became increasingly conscious that the people were expecting him to perform some wonder; more especially he recognized that his family and his six disciple-apostles were looking for him appropriately to announce his forthcoming kingdom by some startling and supernatural manifestation. 그 날, 시간이 경과하자,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이적 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특히 자신의 가족과 여섯 제자-사도들까지도 어떤 놀랄만하고 초자연적인 표현으로 다가올 왕국을 그가 적절히 공표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37:4.4 (1529.1) Early in the afternoon Mary summoned James, and together they made bold to approach Jesus to inquire if he would admit them to his confidence to the extent of informing them at what hour and at what point in connection with the wedding ceremonies he had planned to manifest himself as the “supernatural one.” No sooner had they spoken of these matters to Jesus than they saw they had aroused his characteristic indignation. He said only: “If you love me, then be willing to tarry with me while I wait upon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But the eloquence of his rebuke lay in the expression of his face. 이른 오후, 마리아는 야고보를 불러 함께 예수께로 가서, 결혼 예식과 관련하여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에서 “초자연적 존재”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계획을, 자기들을 믿고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언급하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특유의 분개를 일으켰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동안 나와 함께 기꺼이 기다리라.” 그러나 얼굴 표정에는 그의 책망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137:4.5 (1529.2) This move of his mother was a great disappointment to the human Jesus, and he was much sobered by his reaction to her suggestive proposal that he permit himself to indulge in some outward demonstration of his divinity. That was one of the very things he had decided not to do when so recently isolated in the hills. For several hours Mary was much depressed. She said to James: “I cannot understand him; what can it all mean? Is there no end to his strange conduct?” James and Jude tried to comfort their mother, while Jesus withdrew for an hour’s solitude. But he returned to the gathering and was once more lighthearted and joyous.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인간 예수님에게 큰 실망이었고, 그의 신성을 얼마간 외부로 나타내서 자기만족에 빠지도록 허락하라는 그녀의 은근한 제안에 대해 자신이 반응한 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최근에 그가 언덕에 홀로 있을 때, 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로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 마리아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야고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그를 이해할 수 없단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이상한 행위는 언제 끝나는가?” 야고보와 유다는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고, 한편 예수님은 한 시간 동안 홀로 있으려고 떠나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임에 돌아오자,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워했습니다.

137:4.6 (1529.3) The wedding proceeded with a hush of expectancy, but the entire ceremony was finished and not a move, not a word, from the honored guest. Then it was whispered about that the carpenter and boatbuilder, announced by John as “the Deliverer,” would show his hand during the evening festivities, perhaps at the wedding supper. But all expectance of such a demonstration was effectually removed from the minds of his six disciple-apostles when he called them together just before the wedding supper and, in great earnestness, said: “Think not that I have come to this place to work some wonder for the gratification of the curious or for the conviction of those who doubt. Rather are we here to wait upon the will of our Father who is in heaven.” But when Mary and the others saw him in consultation with his associates, they were fully persuaded in their own minds that something extraordinary was about to happen. And they all sat down to enjoy the wedding supper and the evening of festive good fellowship. 결혼식은 기대감으로 숨을 죽이고 진행되었으나, 귀빈으로부터 어떤 행동이나 한마디의 말도 없이, 예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러자, 요한에 의해 “해방자(구원자)”라고 공표되었던 목수이자 배 제작자가 저녁 잔치에, 어쩌면 결혼 만찬에서 자기 기량을 보일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증에 대한 모든 기대는 여섯 제자-사도들의 마음에서부터 실제로 제거되었는데, 저녁식사 바로 전에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불러서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호기심을 가진 자들을 충족시키거나 의심하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어떤 이적을 행하러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섬기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그가 동료들과 회의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특별한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결혼 만찬과 잔치 분위기로 교제하는 저녁을 즐기려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137:4.7 (1529.4) The father of the bridegroom had provided plenty of wine for all the guests bidden to the marriage feast, but how was he to know that the marriage of his son was to become an event so closely associated with the expected manifestation of Jesus as the Messianic deliverer? He was delighted to have the honor of numbering the celebrated Galilean among his guests, but before the wedding supper was over, the servants brought him the disconcerting news that the wine was running short. By the time the formal supper had ended and the guests were strolling about in the garden, the mother of the bridegroom confided to Mary that the supply of wine was exhausted. And Mary confidently said: “Have no worry — I will speak to my son. He will help us.” And thus did she presume to speak, notwithstanding the rebuke of but a few hours before.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 피로연에 올 모든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충분한 술을 준비했었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고대하던 메시아적 해방자(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나타내심과 그렇게 가깝게 관련된 사건이 되어간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는 유명한 갈릴리 사람을 그의 손님으로 모시는 영광으로 기뻐했지만, 결혼 만찬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들은 그에게 포도주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당황스러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무렵에 공식적인 만찬은 끝났고, 손님들은 정원을 거닐고 있을 즈음에, 신랑의 어머니는 마리아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 아들에게 말하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겨우 몇 시간 전에 꾸지람을 들었는데도, 그녀는 이렇게 주제넘게 말했습니다.

137:4.8 (1529.5) Throughout a period of many years, Mary had always turned to Jesus for help in every crisis of their home life at Nazareth so that it was only natural for her to think of him at this time. But this ambitious mother had still other motives for appealing to her eldest son on this occasion. As Jesus was standing alone in a corner of the garden, his mother approached him, saying, “My son, they have no wine.” And Jesus answered, “My good woman, what have I to do with that?” Said Mary, “But I believe your hour has come; cannot you help us?” Jesus replied: “Again I declare that I have not come to do things in this wise. Why do you trouble me again with these matters?” And then, breaking down in tears, Mary entreated him, “But, my son, I promised them that you would help us; won’t you please do something for me?” And then spoke Jesus: “Woman, what have you to do with making such promises? See that you do it not again. We must in all things wait upon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여러 해 동안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가정생활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항상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녀가 그를 생각한 것은 단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야심이 있는 어머니가 자기 큰아들에게 이 경우에 부탁을 하는 데에는 다른 동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정원 한 쪽에 혼자 서 계실 때에, 그의 어머니가 가까이 와서 말하기를, “내 아들아, 그들에게 포도주가 다 떨어졌느니라.” 그리자 예수님은, “선한 여인이시여, 내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시간이 왔다고 믿는다.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내가 선언합니다만, 나는 이런 식의 일을 행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일들로 또 나를 괴롭히십니까?” 그러자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애원하기를, “그렇지만 내 아들아, 나는 그들에게 네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제발 나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까? 다시는 그런 약속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섬겨야만 합니다.”

137:4.9 (1530.1) Mary the mother of Jesus was crushed; she was stunned! As she stood there before him motionless, with the tears streaming down her face, the human heart of Jesus was overcome with compassion for the woman who had borne him in the flesh; and bending forward, he laid his hand tenderly upon her head, saying: “Now, now, Mother Mary, grieve not over my apparently hard sayings, for have I not many times told you that I have come only to do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Most gladly would I do what you ask of me if it were a part of the Father’s will — “ and Jesus stopped short, he hesitated. Mary seemed to sense that something was happening. Leaping up, she threw her arms around Jesus’ neck, kissed him, and rushed off to the servants’ quarters, saying, “Whatever my son says, that do.” But Jesus said nothing. He now realized that he had already said — or rather desirefully thought — too much.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풀이 꺾였으며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자, 예수님의 인간적 심정은 자신을 낳은 여인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굽혀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말하였습니다. “자, 자, 어머니 마리아여, 겉으로 보기에 매정한 나의 말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단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온 것이라고 내가 여러 번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게 부탁하시는 일이 아버지 뜻의 일부분이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하겠는데─” 예수님은 잠시 멈추었고, 망설였습니다. 마리아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예수님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 후, 하인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면서, “내 아들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이미 너무 많은 말을─아니 차라리 바램이 넘치는 생각을─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37:4.10 (1530.2) Mary was dancing with glee. She did not know how the wine would be produced, but she confidently believed that she had finally persuaded her first-born son to assert his authority, to dare to step forth and claim his position and exhibit his Messianic power. And, because of the presence and association of certain universe powers and personalities, of which all those present were wholly ignorant, she was not to be disappointed. The wine Mary desired and which Jesus, the God-man, humanly and sympathetically wished for, was forthcoming. 마리아는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녀는 포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지는 몰랐지만, 자기가 마침내 자기 맏아들이 그의 권위를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지위를 선포하고 메시아의 권능을 드러내도록 설득하였다고 자신 있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특정한 우주의 권능과 고유성들의 현존과 연합 때문에, 그녀는 실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원했고 하나님-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적인 공감으로 바랐던 포도주가 막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137:4.11 (1530.3) Near at hand stood six waterpots of stone, filled with water, holding about twenty gallons apiece. This water was intended for subsequent use in the final purification ceremonies of the wedding celebration. The commotion of the servants about these huge stone vessels, under the busy direction of his mother, attracted Jesus’ attention, and going over, he observed that they were drawing wine out of them by the pitcherful. 가까운 곳에는 각각 20갤런(76리터) 정도 들어가는 돌로 만들어진 물동이 여섯 개가 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 물은 나중에 결혼 축하연 마지막 정결예식에 쓰려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바쁜 지도 아래, 하인들이 그 큰 돌 물동이들 주위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이 예수님의 눈길을 끌어, 그곳으로 가셔서, 그들이 물동이로부터 주전자로 포도주를 퍼 가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137:4.12 (1530.4) It was gradually dawning upon Jesus what had happened. Of all persons present at the marriage feast of Cana, Jesus was the most surprised. Others had expected him to work a wonder, but that was just what he had purposed not to do. And then the Son of Man recalled the admonition of his Personalized Thought Adjuster in the hills. He recounted how the Adjuster had warned him about the inability of any power or personality to deprive him of the creator prerogative of independence of time. On this occasion power transformers, midwayers, and all other required personalities were assembled near the water and other necessary elements, and in the face of the expressed wish of the Universe Creator Sovereign, there was no escaping the instantaneous appearance of wine. And this occurrence was made doubly certain since the Personalized Adjuster had signified that the execution of the Son’s desire was in no way a contravention of the Father’s will.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예수님은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가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이적 행할 것을 기대했었지만, 바로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지 않으려고 결정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 사람의 아들은 언덕 위에서 받았던 자기 고유성이 구현된 생각 조율자의 경고를 기억했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자 특권을 어떤 권능이나 고유성도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고 그 조율자가 어떻게 경고했었는지를 회상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권능 변환자들, 중도자들, 그리고 모든 필요한 다른 고유성들이 물과 필요한 기타 요소들 주위에 집합해 있었고, 우주적 창조자 주권자가 표현한 소망의 면전에서,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들의 소망을 집행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음을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가 알렸기 때문에 이중으로 확실해졌습니다.

137:4.13 (1530.5) But this was in no sense a miracle. No law of nature was modified, abrogated, or even transcended. Nothing happened but the abrogation of time in association with the celestial assembly of the chemical elements requisite for the elaboration of the wine. At Cana on this occasion the agents of the Creator made wine just as they do by the ordinary natural processes except that they did it independently of time and with the intervention of superhuman agencies in the matter of the space assembly of the necessary chemical ingredients.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자연법칙도 수정되었거나 폐지되었거나 혹은 초월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를 합성하기 위해 필요한 화학적 요소들을 천상적으로 조립하는 것과 관련하여, 시간을 폐지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나에서 이 경우에 창조주 대리자들은, 그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화학적 요소들을 공간에서 조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초인간 대리자들이 개입했다는 것 외에는, 평범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137:4.14 (1531.1) Furthermore it was evident that the enactment of this so-called miracle was not contrary to the will of the Paradise Father, else it would not have transpired, since Jesus had already subjected himself in all things to the Father’s will. 게다가 소위 이 기적의 실행은 천국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음이 명백하였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모든 일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37:4.15 (1531.2) When the servants drew this new wine and carried it to the best man, the “ruler of the feast,” and when he had tasted it, he called to the bridegroom, saying: “It is the custom to set out first the good wine and, when the guests have well drunk, to bring forth the inferior fruit of the vine; but you have kept the best of the wine until the last of the feast.” 하인들이 이 새 포도주를 퍼내어 “잔치의 사회자”인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그는 포도주를 맛본 후 신랑을 부르며 말하였습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후에는 포도나무의 질이 낮은 열매를 내놓는 것이 관습이지만, 당신은 잔치가 끝날 때까지 제일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137:4.16 (1531.3) Mary and the disciples of Jesus were greatly rejoiced at the supposed miracle which they thought Jesus had intentionally performed, but Jesus withdrew to a sheltered nook of the garden and engaged in serious thought for a few brief moments. He finally decided that the episode was beyond his personal control under the circumstances and, not being adverse to his Father’s will, was inevitable. When he returned to the people, they regarded him with awe; they all believed in him as the Messiah. But Jesus was sorely perplexed, knowing that they believed in him only because of the unusual occurrence which they had just inadvertently beheld. Again Jesus retired for a season to the housetop that he might think it all over.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대하던 기적을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였다고 생각하고 기쁨을 크게 즐거워했지만, 예수님은 정원의 아늑한 외진 곳으로 물러나 잠시 동안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 일화는 그 상황 에서 그의 개인적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과, 또한 그의 아버지의 뜻에도 위반되지 않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경외심으로 그를 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척 당황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여느 때와 달리 뜻하지 않게 막 벌어진 사건 때문에 자기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이 모든 것을 검토하려고 다시 지붕으로 물러가셨습니다.

137:4.17 (1531.4) Jesus now fully comprehended that he must constantly be on guard lest his indulgence of sympathy and pity become responsible for repeated episodes of this sort. Nevertheless, many similar events occurred before the Son of Man took final leave of his mortal life in the flesh. 예수님은 이제, 공감과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는 주의해야만 이런 종류의 반복된 일화들에 책임질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사건들이 사람의 아들의 육신의 생명이 마치기 전에 여러 번 발생했었습니다.

5. Back in Capernaum 가버나움으로 돌아옴

170903 요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After this he went down to Capernaum with his mother and brothers and his disciples. There they stayed for a few days.

137:5.1 (1531.5) Though many of the guests remained for the full week of wedding festivities, Jesus, with his newly chosen disciple-apostles — James, John, Andrew, Peter, Philip, and Nathaniel — departed very early the next morning for Capernaum, going away without taking leave of anyone. Jesus’ family and all his friends in Cana were much distressed because he so suddenly left them, and Jude, Jesus’ youngest brother, set out in search of him. Jesus and his apostles went directly to the home of Zebedee at Bethsaida. On this journey Jesus talked over many things of importance to the coming kingdom with his newly chosen associates and especially warned them to make no mention of the turning of the water into wine. He also advised them to avoid the cities of Sepphoris and Tiberias in their future work. 많은 손님들은 결혼 연회가 있는 그 주간 내내 머물러 있었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새로 뽑은 제자-사도들 – 야고보, 요한,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니엘 –을 데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다음 날 아침(AD 26. 2. 28. 목) 일찍 가버나움으로 떠났습니다. 가나에 있던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모두 그가 그렇게 갑자기 떠났기 때문에 매우 슬퍼하였으며, 예수님의 막내 동생인 유다는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직접 벳새다에 있는 세베데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 여행 도중에 예수님은 새로 뽑은 동료들에게, 도래할 왕국에 대해 중요한 일들을 많이 이야기해 주었으며,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말 것을 그들에게 특별히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앞으로 일을 할 때, 세포리스와 티베리우스 도시들을 피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137:5.2 (1531.6) After supper that evening, in this home of Zebedee and Salome, there was held one of the most important conferences of all Jesus’ earthly career. Only the six apostles were present at this meeting; Jude arrived as they were about to separate. These six chosen men had journeyed from Cana to Bethsaida with Jesus, walking, as it were, on air. They were alive with expectancy and thrilled with the thought of having been selected as close associates of the Son of Man. But when Jesus set out to make clear to them who he was and what was to be his mission on earth and how it might possibly end, they were stunned. They could not grasp what he was telling them. They were speechless; even Peter was crushed beyond expression. Only the deep-thinking Andrew dared to make reply to Jesus’ words of counsel. When Jesus perceived that they did not comprehend his message, when he saw that their ideas of the Jewish Messiah were so completely crystallized, he sent them to their rest while he walked and talked with his brother Jude. And before Jude took leave of Jesus, he said with much feeling: “My father-brother, I never have understood you. I do not know of a certainty whether you are what my mother has taught us, and I do not fully comprehend the coming kingdom, but I do know you are a mighty man of God. I heard the voice at the Jordan, and I am a believer in you, no matter who you are.” And when he had spoken, he departed, going to his own home at Magdala. 그 날 밤 저녁식사 후에, 세베대와 살로메의 집에서, 예수님의 모든 지상(地上)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가 열렸습니다. 단지 여섯 명의 사도들만이 그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유다는 그들이 막 헤어지려고 할 때 도착하였습니다. 선택받은 이 여섯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나에서부터 벳새다까지 마치 공중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대감으로 인하여 활기가 넘쳤고 사람의 아들의 측근동료로 선택되었다는 생각으로 전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가 누구이며, 땅에서 그의 사명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자, 그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가 하시는 말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으며; 베드로까지도 아무 말을 못하고 낙심하였습니다. 단지 생각이 깊은 안드레만이 예수님의 조언의 말들에 대해 감히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고, 또한 그들 안에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관념이 그렇게 완벽하게 구체화되어 있는 것을 보셨을 때, 그는 그들이 쉴 수 있도록 보내셨으며, 그 동안에 그는 동생 유다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작별하기 전에, 흥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형님이시여, 나는 당신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가르친 그 분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고, 다가올 그 왕국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아는 것은 당신이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요단강에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막달라에 있는 자기 집으로 떠났습니다.

137:5.3 (1532.1) That night Jesus did not sleep. Donning his evening wraps, he sat out on the lake shore thinking, thinking until the dawn of the next day. In the long hours of that night of meditation Jesus came clearly to comprehend that he never would be able to make his followers see him in any other light than as the long-expected Messiah. At last he recognized that there was no way to launch his message of the kingdom except as the fulfillment of John’s prediction and as the one for whom the Jews were looking. After all, though he was not the Davidic type of Messiah, he was truly the fulfillment of the prophetic utterances of the more spiritually minded of the olden seers. Never again did he wholly deny that he was the Messiah. He decided to leave the final untangling of this complicated situation to the outworking of the Father’s will. 그 날 밤 예수님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밤 외투를 두르고 호숫가에 앉아서 다음날 새벽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그 날 밤의 긴 명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온 메시아 이외의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보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요한의 예언이 이루어진 자와 유대인들이 찾고 있던 자로서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전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다윗과 같은 종류의 메시아는 아니었지만, 좀 더 영적인 생각을 지닌 옛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들을 실제로 이루시는 자였습니다. 그는 다시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 복잡한 경우의 마지막 실마리를 푸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에 맡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37:5.4 (1532.2) The next morning Jesus joined his friends at breakfast, but they were a cheerless group. He visited with them and at the end of the meal gathered them about him, saying: “It is my Father’s will that we tarry hereabouts for a season. You have heard John say that he came to prepare the way for the kingdom; therefore it behooves us to await the completion of John’s preaching. When the forerunner of the Son of Man shall have finished his work, we will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tidings of the kingdom.” He directed his apostles to return to their nets while he made ready to go with Zebedee to the boatshop, promising to see them the next day at the synagogue, where he was to speak, and appointing a conference with them that Sabbath afternoon. 다음 날(AD 26. 3. 1 금) 아침 예수님은 친구(사도)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과 이야기하였고, 식사 후에 자신의 주위에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얼마동안 체류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너희들은, 왕국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는 요한의 말을 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이 설교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의 아들의 선구자(先驅者)가 일을 완결할 때, 우리가 왕국의 좋은 소식의 선포를 시작할 것이다.” 그는 사도들에게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으며, 한편 자신도 세베대와 함께 배 작업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음 날(AD 26, 3. 2 토) 그가 설교하기로 되어있는 회당에서 만날 것과 안식일 오후에는 함께 회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6. The Events of a Sabbath Day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들

170910 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0 Once, having been asked by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Jesus replied, “The kingdom of God does not come with your careful observation, 21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137:6.1 (1532.3) Jesus’ first public appearance following his baptism was in the Capernaum synagogue on Sabbath, March 2, A.D. 26. The synagogue was crowded to overflowing. The story of the baptism in the Jordan was now augmented by the fresh news from Cana about the water and the wine. Jesus gave seats of honor to his six apostles, and seated with them were his brothers in the flesh James and Jude. His mother, having returned to Capernaum with James the evening before, was also present, being seated in the women’s section of the synagogue. The entire audience was on edge; they expected to behold some extraordinary manifestation of supernatural power which would be a fitting testimony to the nature and authority of him who was that day to speak to them. But they were destined to disappointment.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예수님의 첫 번째 공적 출현은 안식일인 서기 26년 3월 2일(토)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습니다. 그 회당에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서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요단강에서의 세례 이야기는 이제 물과 포도주에 대한 가나로부터의 새로운 소식으로 불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사도들을 귀빈석에 앉혔고, 육신으로 자신의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도 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야고보와 함께 전날 밤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던 그의 어머니도 역시 그곳에 계셨는데, 그녀는 회당의 여인들 구역에 앉아 계셨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긴장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설교하기로 되어있는 그 분의 본성과 권위에 어울리는 증거가 되는 어떤 초자연적 권능의 비범한 현시를 목격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7:6.2 (1532.4) When Jesus stood up, the ruler of the synagogue handed him the Scripture roll, and he read from the Prophet Isaiah: “Thus says the Lord: ‘The heaven is my throne, and the earth is my footstool. Where is the house that you built for me? And where is the place of my dwelling? All these things have my hands made,’ says the Lord. ‘But to this man will I look, even to him who is poor and of a contrite spirit, and who trembles at my word.’ Hear the word of the Lord, you who tremble and fear: ‘Your brethren hated you and cast you out for my name’s sake.’ But let the Lord be glorified. He shall appear to you in joy, and all others shall be ashamed. A voice from the city, a voice from the temple, a voice from the Lord says: ‘Before she travailed, she brought forth;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s heard such a thing? Shall the earth be made to bring forth in one day? Or can a nation be born at once? But thus says the Lord: ‘Behold I will extend peace like a river, and the glory of even the gentiles shall be like a flowing stream. As one whom his mother comforts, so will I comfort you. And you shall be comforted even in Jerusalem. And when you see these things, your heart shall rejoice.’” 예수께서 일어서자, 회당장은 그에게 성서 두루마리를 건네주었으며,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부터 읽었습니다.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66:1-2). 떨고 두려워하는 너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리라.’ 그러나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기쁨으로 너희에게 오실 것이며, 다른 모든 이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성읍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오며, 성전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리니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목소리로다. 이르시기를 ‘시온은 진통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냐 땅이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사66:5-8)? 그러나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평강을 강같이, 심지어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라.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도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심정이 기쁨을 향유하리라(사66:12-14).’”

137:6.3 (1533.1) When he had finished this reading, Jesus handed the roll back to its keeper. Before sitting down, he simply said: “Be patient and you shall see the glory of God; even so shall it be with all those who tarry with me and thus learn to do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And the people went to their homes, wondering what was the meaning of all this. 이 낭독을 마치고, 예수께서는 두루마리를 관리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자리에 앉기 전에 그는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라,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나와 함께 머물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이렇게 배우는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아해 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37:6.4 (1533.2) That afternoon Jesus and his apostles, with James and Jude, entered a boat and pulled down the shore a little way, where they anchored while he talked to them about the coming kingdom. And they understood more than they had on Thursday night. 그 날(AD 26. 3. 2. 토) 오후에 예수님과 야고보와 유다를 포함한 사도들은 배를 타고 해변을 따라 좀 떨어진 곳으로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래할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그들은 거기에다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목요일 밤보다는 더 많이 이해하였습니다.

137:6.5 (1533.3) Jesus instructed them to take up their regular duties until “the hour of the kingdom comes.” And to encourage them, he set an example by going back regularly to work in the boatshop. In explaining that they should spend three hours every evening in study and preparation for their future work, Jesus further said: “We will all remain hereabout until the Father bids me call you. Each of you must now return to his accustomed work just as if nothing had happened. Tell no man about me and remember that my kingdom is not to come with noise and glamor, but rather must it come through the great change which my Father will have wrought in your hearts and in the hearts of those who shall be called to join you in the councils of the kingdom. You are now my friends; I trust you and I love you; you are soon to become my personal associates. Be patient, be gentle. Be ever obedient to the Father’s will. Make yourselves ready for the call of the kingdom. While you will experience great joy in the service of my Father, you should also be prepared for trouble, for I warn you that it will be only through much tribulation that many will enter the kingdom. But those who have found the kingdom, their joy will be full, and they shall be called the blest of all the earth. But do not entertain false hope; the world will stumble at my words. Even you, my friends, do not fully perceive what I am unfolding to your confused minds. Make no mistake; we go forth to labor for a generation of sign seekers. They will demand wonder-working as the proof that I am sent by my Father, and they will be slow to recognize in the revelation of my Father’s love the credentials of my mission.”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왕국이 다가오는 시간”까지는 그들의 정규적인 직무에 몰두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 자신도 정규적으로 배 작업장에서 일하러 돌아감으로써 모범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앞날 일을 위한 공부와 준비를 위해 매일 저녁 세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덧붙여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너희를 부르라고 청할 때까지, 우리 모두는 이 근처에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들 각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각 늘 하던 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무에게도 나에 대해 말하지 말고, 나의 왕국은 소란스럽고 화려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심정과 왕국의 협의회에 너희와 합류하도록 요청받아야 할 자들의 심정에 나의 아버지께서 일하실 커다란 변화를 통해서 내 왕국이 와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희는 이제 나의 친구들이다. 나는 너희를 신뢰하며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는 곧 나의 개인적 동료가 될 것이다. 인내하며 관대하라. 항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라. 왕국의 부르심에 너희 자신을 준비하라. 내 아버지에 대한 봉사에서 너희는 커다란 기쁨을 체험할 것이지만, 한편으로 너희는 또한 고난에 대비해야만 할 것이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주의를 준대로, 오로지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많은 사람이 왕국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을 발견한 자들은 기쁨으로 넘칠 것이며, 모든 세상에서 복을 받은 자로 불릴 것이다. 그렇지만 거짓된 희망을 품지 말라; 세상은 내 말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심지어는 나의 친구들인 너희들도, 너희의 혼란스런 마음에 내가 펼쳐 보이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오해하지 말라; 우리는 표적을 찾는 자들의 세대를 향해 수고하러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내가 나의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는 증거로 이적-행하기를 요구할 것이며, 그들은 나의 아버지의 사랑의 계시 안에서 내 사명에 대한 신임장을 더디 알아볼 것이다.”

137:6.6 (1533.4) That evening, when they had returned to the land, before they went their way, Jesus, standing by the water’s edge, prayed: “My Father, I thank you for these little ones who, in spite of their doubts, even now believe. And for their sakes have I set myself apart to do your will. And now may they learn to be one, even as we are one.” 그 날 밤 그들이 육지로 돌아와서 그들 각자의 길로 떠나기 전에, 예수님은 물가에 서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시여, 이들 작은 사람들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들은 의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믿고 있습니다. 저들을 위하여,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고자 나를 따로 구별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하나라는 것을 저들이 배우게 하여 주십시오.”

7. Four Months of Training 4개월의 훈련

170917 요15:14-15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15 I no longer call you servants, because a servant does not know his master’s business. Instead, I have called you friends, for everything that I learned from my Father I have made known to you.

137:7.1 (1533.5) For four long months — March, April, May, and June — this tarrying time continued; Jesus held over one hundred long and earnest, though cheerful and joyous, sessions with these six associates and his own brother James. Owing to sickness in his family, Jude seldom was able to attend these classes. James, Jesus’ brother, did not lose faith in him, but during these months of delay and inaction Mary nearly despaired of her son. Her faith, raised to such heights at Cana, now sank to new low levels. She could only fall back on her so oft-repeated exclamation: “I cannot understand him. I cannot figure out what it all means.” But James’s wife did much to bolster Mary’s courage. 4개월─3월, 4월, 5월, 6월─에 걸치는 이 긴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명의 동료들과 친동생 야고보에게 100번이 넘는 길고도 진지한, 그러나 유쾌하고 즐거운 강의를 하셨습니다. 유다는 집안에 질병이 있어서 거의 이 강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그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았으나, 이 긴 기다림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간 동안, 마리아는 자기 아들에 대해 거의 포기했습니다. 가나에서 그렇게 고조되었던 그녀의 신앙은 이제 새롭게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자주 되풀이했던 푸념으로 돌아갈 수 있을 뿐이었는데: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헤아릴 수가 없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아내는 마리아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137:7.2 (1534.1) Throughout these four months these seven believers, one his own brother in the flesh, were getting acquainted with Jesus; they were getting used to the idea of living with this God-man. Though they called him Rabbi, they were learning not to be afraid of him. Jesus possessed that matchless grace of personality which enabled him so to live among them that they were not dismayed by his divinity. They found it really easy to be “friends with God,” God incarnate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This time of waiting severely tested the entire group of believers. Nothing, absolutely nothing, miraculous happened. Day by day they went about their ordinary work, while night after night they sat at Jesus’ feet. And they were held together by his matchless personality and by the gracious words which he spoke to them evening upon evening. 이러한 4개월의 기간을 통하여, 친동생 한명이 포함된 이들 일곱 명의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점점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하나님-사람과 살고 있다는 관념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들이 그를 랍비라고 부르기는 하였지만,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비길 데 없는 은혜로운 고유성을 갖고 계셔서,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어, 그들이 자신의 신성으로 인하여 당황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는 것이 실제로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은, 믿는 자들의 전체 무리를 혹독하게 시험하였습니다. 기적 같은 일은 아무 것도, 절대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을 해나갔고, 밤에는 예수님의 곁에서 함께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할 데 없는 예수님의 고유성과, 저녁마다 그가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들로 단합되어 갔습니다.

137:7.3 (1534.2) This period of waiting and teaching was especially hard on Simon Peter. He repeatedly sought to persuade Jesus to launch forth with the preaching of the kingdom in Galilee while John continued to preach in Judea. But Jesus’ reply to Peter ever was: “Be patient, Simon. Make progress. We shall be none too ready when the Father calls.” And Andrew would calm Peter now and then with his more seasoned and philosophic counsel. Andrew was tremendously impressed with the human naturalness of Jesus. He never grew weary of contemplating how one who could live so near God could be so friendly and considerate of men. 이 기다림과 배움의 기간은, 특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이 유대 지방에서 설교를 계속하는 동안에 갈릴리에서 왕국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자고, 반복하여 예수님을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시몬아, 인내심을 가져라. 발전하도록 해라.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가 좀 더 노련하고 철학적인 조언으로 베드로를 종종 진정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에 굉장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 살 수 있는 자가 어떻게 인간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사려가 깊을 수 있는 지를 생각할 때마다 결코 싫증나지 않았습니다.

137:7.4 (1534.3) Throughout this entire period Jesus spoke in the synagogue but twice. By the end of these many weeks of waiting the reports about his baptism and the wine of Cana had begun to quiet down. And Jesus saw to it that no more apparent miracles happened during this time. But even though they lived so quietly at Bethsaida, reports of the strange doings of Jesus had been carried to Herod Antipas, who in turn sent spies to ascertain what he was about. But Herod was more concerned about the preaching of John. He decided not to molest Jesus, whose work continued along so quietly at Capernaum. 이 기간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은 회당에서 단지 두 번 설교하셨습니다. 이러한 여러 주간 동안의 기다림이 끝날 무렵, 그의 세례와 가나에서의 포도주에 관한 소문은 잠잠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에 더 이상의 명백한 기적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벳새다에서 그렇게 조용히 지내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예수의 행적에 대한 소식은 헤롯 안티파스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그는 곧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하려고 첩자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의 설교에 신경을 더욱 썼습니다. 그(헤롯)는 예수님을 괴롭히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예수님의 일은 가버나움에서 아주 조용히 계속되었습니다.

137:7.5 (1534.4) In this time of waiting Jesus endeavored to teach his associates what their attitude should be toward the various religious groups and the political parties of Palestine. Jesus’ words always were, “We are seeking to win all of them, but we are not of any of them.” 기다리는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다른 종교적 집단과 정치적 당파에 대해 그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관하여 자기 동료들을 가르치기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들 전부를 설복하고자 애쓰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는 않느니라.”

137:7.6 (1534.5) The scribes and rabbis, taken together, were called Pharisees. They referred to themselves as the “associates.” In many ways they were the progressive group among the Jews, having adopted many teachings not clearly found in the Hebrew scriptures, such as belief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 doctrine only mentioned by a later prophet, Daniel. 서기관들과 랍비들은 함께 모아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동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유대인들 중에서 진보적인 무리들이었으며, 히브리 경전에 분명하게 기초를 두지 않은 많은 가르침들을 채택하였는데, 예를 들면 후기의 예언자 다니엘만이 언급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교리였습니다.

137:7.7 (1534.6) The Sadducees consisted of the priesthood and certain wealthy Jews. They were not such sticklers for the details of law enforcement. The Pharisees and Sadducees were really religious parties, rather than sects.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과 특정한 부유층의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집행에서 세부적인 면에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분파(分派)라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종교적인 당파들이었습니다.

137:7.8 (1534.7) The Essenes were a true religious sect, originating during the Maccabean revolt, whose requirements were in some respects more exacting than those of the Pharisees. They had adopted many Persian beliefs and practices, lived as a brotherhood in monasteries, refrained from marriage, and had all things in common. They specialized in teachings about angels. 에세네 사람들은 진정한 종교적 분파로서 마카비 가(家)의 반란 동안, 시작되었는데, 어떤 면에서 그들의 자격조건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엄격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많은 믿음들과 실천들을 받아들였고, 수도원에서 형제신분으로 살면서 결혼을 금하였으며, 모든 소유물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에 관한 가르침을 전문적으로 다루었습니다.

137:7.9 (1535.1) The Zealots were a group of intense Jewish patriots. They advocated that any and all methods were justified in the struggle to escape the bondage of the Roman yoke. 열심당원들은 열렬한 유대 애국자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멍에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투쟁에는 어떤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주장했습니다.

137:7.10 (1535.2) The Herodians were a purely political party that advocated emancipation from the direct Roman rule by a restoration of the Herodian dynasty. 헤롯당원들은 순수한 정치적 집단으로써 헤롯 왕조를 복원하여 로마의 직접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137:7.11 (1535.3) In the very midst of Palestine there lived the Samaritans, with whom “the Jews had no dealings,” notwithstanding that they held many views similar to the Jewish teachings. 팔레스타인 한가운데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가르침과 많이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137:7.12 (1535.4) All of these parties and sects, including the smaller Nazarite brotherhood, believed in the sometime coming of the Messiah. They all looked for a national deliverer. But Jesus was very positive in making it clear that he and his disciples would not become allied to any of these schools of thought or practice. The Son of Man was to be neither a Nazarite nor an Essene. 비교적 작은 집단인 나실인 형제들을 포함하여, 이 모든 집단들과 분파들은 언젠가 도래할 메시아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민족적 해방자(구원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그의 제자들이 사상이나 관습을 지닌 이 학파들 중 어느 쪽과도 관련되지 않을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밝히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나실인이 되는 것도 아님은 물론, 에세네도 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137:7.13 (1535.5) While Jesus later directed that the apostles should go forth, as John had, preaching the gospel and instructing believers, he laid emphasis on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tidings of the kingdom of heaven.” He unfailingly impressed upon his associates that they must “show forth love, compassion, and sympathy.” He early taught his followers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a spiritual experience having to do with the enthronement of God in the hearts of men.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도들이 떠나가야만 한다고 나중에 지시하셨지만, 그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데 중점을 두셨습니다. 그는 자기 동료들이 “사랑과 연민과 공감을 보여야만 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심정들안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과 관계되는 영적 체험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가르치셨습니다.

137:7.14 (1535.6) As they thus tarried before embarking on their active public preaching, Jesus and the seven spent two evenings each week at the synagogue in the study of the Hebrew scriptures. In later years after seasons of intense public work, the apostles looked back upon these four months as the most precious and profitable of all their association with the Master. Jesus taught these men all they could assimilate. He did not make the mistake of overteaching them. He did not precipitate confusion by the presentation of truth too far beyond their capacity to comprehend. 그들이 활발하게 대중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과 일곱 명의 제자들은 히브리 성서를 공부하려고 일주일에 이틀 저녁을 회당에서 보냈습니다. 격렬하게 대중을 위한 시절이 지난 후에, 사도들은 이 4개월이 주(主)님과 함께 지냈던 모든 나날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도움이 되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들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지나치게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너무 뛰어넘어 진리를 제시함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8. Sermon on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

170924 막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137:8.1 (1535.7) On Sabbath, June 22, shortly before they went out on their first preaching tour and about ten days after John’s imprisonment, Jesus occupied the synagogue pulpit for the second time since bringing his apostles to Capernaum. 6월 22일(토) 안식일에, 그들이 첫 번째 설교여행을 떠나기 직전, 요한이 투옥된 후 10일 정도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가버나움으로 데리고 오신 이래 두 번째 회당 설교를 맡았습니다(AD 26. 3.2 토 첫 설교).

137:8.2 (1535.8) A few days before the preaching of this sermon on “The Kingdom,” as Jesus was at work in the boatshop, Peter brought him the news of John’s arrest. Jesus laid down his tools once more, removed his apron, and said to Peter: “The Father’s hour has come. Let us make ready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 설교를 하시기 며칠 전, 예수께서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일하고 계셨을 때,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베드로가 전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더 연장을 내려놓고 작업복을 벗으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때가 왔노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하자.”

137:8.3 (1535.9) Jesus did his last work at the carpenter bench on this Tuesday, June 18, A.D. 26. Peter rushed out of the shop and by midafternoon had rounded up all of his associates, and leaving them in a grove by the shore, he went in quest of Jesus. But he could not find him, for the Master had gone to a different grove to pray. And they did not see him until late that evening when he returned to Zebedee’s house and asked for food. The next day he sent his brother James to ask for the privilege of speaking in the synagogue the coming Sabbath day. And the ruler of the synagogue was much pleased that Jesus was again willing to conduct the service. 예수께서 목공소에서 마지막으로 작업을 하신 날은 서기 26년 6월 18일 화요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목공소에서 달려 나갔고, 오후 중반까지 모든 동료들을 모아 호숫가의 작은 숲에 두고서, 예수님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는데, 주(主)님이 다른 작은 숲으로 기도하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그 날 저녁 늦게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오셔서 음식을 청하실 때까지는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돌아오는 안식일에 설교할 기회를 부탁하려고 동생 야고보를 회당으로 보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다시 예배를 기꺼이 인도하려 한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37:8.4 (1536.1) Before Jesus preached this memorable sermon on the kingdom of God, the first pretentious effort of his public career, he read from the Scriptures these passages: “You shall be to me a kingdom of priests, a holy people. Yahweh is our judge, Yahweh is our lawgiver, Yahweh is our king; he will save us. Yahweh is my king and my God. He is a great king over all the earth. Loving-kindness is upon Israel in this kingdom. Blessed be the glory of the Lord for he is our King.”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억에 남을만한, 즉 공생애에서 첫 번째로 당당한 성과였던, 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성서에서 다음의 몇 구절들을 읽으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6a),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33:22),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시84:3b), 여호와는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시47:2b), 인자(仁慈)가 이 나라 이스라엘 위에 있을지어다(시138:2a), 그는 우리의 왕이시니(시89:18) 주님의 영광은 복되도다(겔3;12b).”

137:8.5 (1536.2) When he had finished reading, Jesus said: 다 읽으신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7:8.6 (1536.3) “I have come to proclaim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And this kingdom shall include the worshiping souls of Jew and gentile, rich and poor, free and bond, for my Father is no respecter of persons; his love and his mercy are over all. “나는 아버지 나라의 설립을 선포하려고 왔노라. 이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얽매인 자들의 경배하는 혼들을 포함할 것이니, 내 아버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라;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두에게 주시느니라.”

137:8.7 (1536.4) “The Father in heaven sends his spirit to indwell the minds of men, and when I shall have finished my work on earth, likewise shall the Spirit of Truth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And the spirit of my Father and the Spirit of Truth shall establish you in the coming kingdom of spiritual understanding and divine righteousness.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The Son of Man will not lead forth armies in battle for the establishment of a throne of power or a kingdom of worldly glory. When my kingdom shall have come, you shall know the Son of Man as the Prince of Peace, the revelation of the everlasting Father. The children of this world fight for the establishment and enlargement of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my disciples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y their moral decisions and by their spirit victories; and when they once enter therein, they shall find joy, righteousness, and eternal life.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하도록 그의 영(靈)을 보내신다. 내가 지상에서 내 일을 완결할 때,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영과 진리의 영은, 너희들이 영적 이해와 신적 공의에 속한 다가오는 나라에 있도록 확증할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사람의 아들은 권능의 보좌 혹은 세속적 영광의 나라를 설립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 내 나라가 도래하면,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평화의 영주로서, 영속하는 아버지의 계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이 세상 나라의 설립과 확장을 위하여 다투지만, 나의 제자들은 그들의 도덕적 결정과 그들의 영 승리들에 의해서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라. 그들이 일단 거기로 들어가면, 그들은 기쁨과 공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137:8.8 (1536.5) “Those who first seek to enter the kingdom, thus beginning to strive for a nobility of character like that of my Father, shall presently possess all else that is needful. But I say to you in all sincerity: Unless you seek entrance into the kingdom with the faith and trusting dependence of a little child, you shall in no wise gain admission. “먼저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내 아버지가 지니신 것과 같은, 성품의 고귀함을 얻으려고 애쓰기 시작하는 자들은, 즉시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소유할 것이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모든 성실함으로 이르노니, 어린아이의 신앙과 신뢰하는 믿음(의존)으로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으면, 너희는 도저히 입국이 허가되지 않을 것이라.

137:8.9 (1536.6) “Be not deceived by those who come saying here is the kingdom or there is the kingdom, for my Father’s kingdom concerns not things visible and material. And this kingdom is even now among you, for where the spirit of God teaches and leads the soul of man, there in reality is the kingdom of heaven. And this kingdom of God is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여기에 왕국이 있다’ 혹은 ‘저기에 왕국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 내 아버지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지금도 너희들 가운데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혼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거기에, 실제로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성령(聖靈) 안에 있는 공의, 평화, 그리고 기쁨이라.

137:8.10 (1536.7) “John did indeed baptize you in token of repentance and for the remission of your sins, but when you enter the heavenly kingdom,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너희 죄 사함을 위해 참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성령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을 것이다.

171001 눅8: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After this, Jesus traveled about from one town and village to another,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he Twelve were with him,

137:8.11 (1536.8) “In my Father’s kingdom there shall be neither Jew nor gentile, only those who seek perfection through service, for I declare that he who would be great in my Father’s kingdom must first become server of all. If you are willing to serve your fellows, you shall sit down with me in my kingdom, even as, by serving in the similitude of the creature, I shall presently sit down with my Father in his kingdom.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을 것이며, 단지 섬김으로 완전하기를 구하는 자들만 있을 것이며,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면 먼저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 동료들을 섬기고자 한다면, 너희는 나의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 것인데, 마치 창조물의 모습으로 섬겨서 내가 아버지 나라에서 내 아버지와 함께 곧 앉아 있게 되는 것과 같다.

137:8.12 (1536.9) “This new kingdom is like a seed growing in the good soil of a field. It does not attain full fruit quickly. There is an interval of time betwee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in the soul of man and that hour when the kingdom ripens into the full fruit of everlasting righteousness and eternal salvation. “새로운 이 나라는 밭의 비옥한 땅에서 자라나는 씨와 같다. 그것은 충만한 열매를 빨리 맺지 않는다. 사람의 혼에 나라를 세우는 것과 나라가 영속하는 공의와 영원한 구원의 충만한 열매로 무르익는 시간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137:8.13 (1536.10) “And this kingdom which I declare to you is not a reign of power and plenty. The kingdom of heaven is not a matter of meat and drink but rather a life of progressive righteousness and increasing joy in the perfecting service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For has not the Father said of his children of the world, ‘It is my will that they should eventually be perfect, even as I am perfect.’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이 나라는 권능과 풍요로 다스리는 곳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완전히 섬기면서 진보하는 공의와 기쁨이 증가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내가 완전한 것 같이 그들이 결국 완전해야만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37:8.14 (1537.1) “I have come to preach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I have not come to add to the heavy burdens of those who would enter this kingdom. I proclaim the new and better way, and those who are able to enter the coming kingdom shall enjoy the divine rest. And whatever it shall cost you in the things of the world, no matter what price you may pay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you shall receive manyfold more of joy and spiritual progress in this world, and in the age to come eternal life. “나는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노라. 이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더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새롭고 더 나은 길을 선포하노니, 다가오는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들은 신적 휴식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에 있어서 너희가 치르는 비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떤 값을 지불하더라도, 너희는 이 세상에서 여러 배의 많은 기쁨과 영적 진보를 받게 될 것이며, 다가오는 시대에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137:8.15 (1537.2) “Entrance into the Father’s kingdom waits not upon marching armies, upon overturned kingdoms of this world, nor upon the breaking of captive yokes.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all who enter therein shall find abundant liberty and joyous salvation.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 나라들을 뒤엎는 군대의 행진이나 포로의 멍에를 깨뜨려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자들은 풍부한 해방과 기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137:8.16 (1537.3) “This kingdom is an everlasting dominion. Those who enter the kingdom shall ascend to my Father; they will certainly attain the right hand of his glory in Paradise. And all wh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shall become the sons of God, and in the age to come so shall they ascend to the Father. And I have not come to call the would-be righteous but sinners and all who hunger and thirst for the righteousness of divine perfection. “이 나라는 영속하는 주권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나의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천국에서 그의 영광의 우편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 될 것이며, 다가오는 시대에 그들은 그렇게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의롭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신적 완전의 공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모든 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다.

137:8.17 (1537.4) “John came preaching repentance to prepare you for the kingdom; now have I come proclaiming faith, the gift of God, as the price of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If you would but believe that my Father loves you with an infinite love, then you are in the kingdom of God.” “요한은 그 나라를 위해 너희를 준비시키려고 회개를 설교하려고 왔다; 나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하나님의 선물, 신앙을 선포하러 왔다. 너희는 내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다.”

137:8.18 (1537.5) When he had thus spoken, he sat down. All who heard him were astonished at his words. His disciples marveled. But the people were not prepared to receive the good news from the lips of this God-man. About one third who heard him believed the message even though they could not fully comprehend it; about one third prepared in their hearts to reject such a purely spiritual concept of the expected kingdom, while the remaining one third could not grasp his teaching, many truly believing that he “was beside himself.” 그는 그렇게 말을 하시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씀들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나님-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었던 약 1/3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약 1/3은 기대하던 나라에 대해 그토록 순수한 영적 개념을 거부하려고 그들의 심정으로 각오하였고, 반면에 그 나머지 1/3은 그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참으로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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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5 After Pentecost 오순절 이후

Paper 195

After Pentecost 오순절 이후

Reasons for the triumph of Christianity in the Occident 서양에서 기독교가 승리한 이유들
Early Christian compromises 초기 기독교의 타협들
1. Influence of the Greeks 그리스인(人)들의 영향
2. The Roman Influence 로마의 영향
3. Under the Roman Empire 로마 제국 아래에서
4. The European Dark Ages 유럽의 암흑기
5. The Modern Problem 현대의 문제점
6. Materialism 물질주의
7. The Vulnerability of Materialism 물질주의 취약성
8. Secular Totalitarianism 세속적 전체주의
9. Christianity’s Problem 기독교의 문제
10. The Future 앞 날

170115 진리의 영(11) – 오순절 이후 1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195:0.1 (2069.1) THE results of Peter’s preaching on the day of Pentecost were such as to decide the future policies, and to determine the plans, of the majority of the apostles in their efforts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Peter was the real founder of the Christian church; Paul carried the Christian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he Greek believers carried it to the whole Roman Empire.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노력에 있어서, 사도들 대부분의 미래 정책(政策)을 정하고, 계획들을 결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회의 실제 설립자였으며, 바울은 기독교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전달했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로마 제국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195:0.2 (2069.2) Although the tradition-bound and priest-ridden Hebrews, as a people, refused to accept either Jesus’ gospel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or Peter’s and Paul’s proclamation of the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Christ (subsequent Christianity), the rest of the Roman Empire was found to be receptive to the evolving Christian teachings. Western civilization was at this time intellectual, war weary, and thoroughly skeptical of all existing religions and universe philosophies. The peoples of the Western world, the beneficiaries of Greek culture, had a revered tradition of a great past. They could contemplate the inheritance of great accomplishments in philosophy, art, literature, and political progress. But with all these achievements they had no soul-satisfying religion. Their spiritual longings remained unsatisfied. 히브리인들은 전통에 매여 있고, 제사장(사제)들의 지배를 받는 민족으로서, 예수님의 복음 즉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과 사람의 형제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중에 기독교가 된, 베드로와 바울의 선포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도 수용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로마 제국은 진화되어가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양 문명은 지적이었고, 전쟁에 지쳐 있었으며, 기존의 모든 종교와 보편적 철학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의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서양 세계 민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혜택을 누리면서, 위대한 과거 전통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학, 예술, 문학과 정치적 진보에 있어서 물려받은 위대한 업적을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魂)을 만족시키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갈망은 채워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95:0.3 (2069.3) Upon such a stage of human society the teachings of Jesus, embraced in the Christian message, were suddenly thrust. A new order of living was thus presented to the hungry hearts of these Western peoples. This situation meant immediate conflict between the older religious practices and the new Christianized version of Jesus’ message to the world. Such a conflict must result in either decided victory for the new or for the old or in some degree of compromise. History shows that the struggle ended in compromise. Christianity presumed to embrace too much for any one people to assimilate in one or two generations. It was not a simple spiritual appeal, such as Jesus had presented to the souls of men; it early struck a decided attitude on religious rituals, education, magic, medicine, art, literature, law, government, morals, sex regulation, polygamy, and, in limited degree, even slavery. Christianity came not merely as a new religion — something all the Roman Empire and all the Orient were waiting for — but as a new order of human society. And as such a pretension it quickly precipitated the social-moral clash of the ages. The ideals of Jesus, as they were reinterpreted by Greek philosophy and socialized in Christianity, now boldly challenged the traditions of the human race embodied in the ethics, morality, and religions of Western civilization. 그런 인간 사회의 무대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독교 메시지에 담겨 갑자기 밀려왔습니다. 새 삶의 질서가 이렇게 서양 사람들의 갈급한 심정에 제시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오래된 종교 관습들과 새 기독교화된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메시지 사이의 즉각적인 충돌을 의미합니다. 그런 충돌의 결과는 새 것이나 옛 것 중에서 승리가 결정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협으로 마무리됩니다.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너무 많이 수용하려 했기 때문에 한 민족이 한 두 세대 안에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혼에게 제시한 바와 같은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찍부터 종교 의식, 교육, 마술, 성(性)에 대한 규칙, 일부다처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노예제도에 대해서까지 분명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기독교는 전(全) 로마 제국과 동양 전체가 기다리던 어떤 새 종교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새 질서로서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적 도덕적 충돌을 급하게 재촉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상(理想)들은 그리스 철학으로 재해석되고, 기독교로 사회화되었고, 지금은 서양 문명의 윤리, 도덕, 종교에 구현된 인류의 전통에 대담하게 도전하였습니다.

195:0.4 (2069.4) At first, Christianity won as converts only the lower social and economic strata. But by the beginning of the second century the very best of Greco-Roman culture was increasingly turning to this new order of Christian belief, this new concept of the purpose of living and the goal of existence. 처음에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만 개종시켰습니다. 그러나 2세기가 시작되면서, 최상의 그리스-로마 문화가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새 질서 즉 인생의 목적과 존재의 목표에 대한 새 개념으로 점점 더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170122 진리의 영(12) – 오순절 이후 2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95:0.5 (2070.1) How did this new message of Jewish origin, which had almost failed in the land of its birth, so quickly and effectively capture the very best minds of the Roman Empire? The triumph of Christianity over the philosophic religions and the mystery cults was due to: 어떻게 유대인의 기원을 가진 이 새로운 메시지가, 태어난 유대 땅에서는 거의 실패했는데, 그렇게 빨리, 효과적으로 로마 제국에 있는 최고 지성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독교가 철학적 종교와 신비 종파들에게 승리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95:0.6 (2070.2) 1. Organization. Paul was a great organizer and his successors kept up the pace he set.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그가 정해 놓은 조직을 유지하였습니다.

195:0.7 (2070.3) 2. Christianity was thoroughly Hellenized. It embraced the best in Greek philosophy as well as the cream of Hebrew theology. 2. 기독교가 철저히 헬라(그리스)화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최고의 것까지 포괄하였습니다.

195:0.8 (2070.4) 3. But best of all, it contained a new and great ideal, the echo of the life bestowal of Jesus and the reflection of his message of salvation for all mankind. 3.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理想, ideal), 즉 예수의 생명 수여에서 생긴 메아리(반향反響)이며,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메시지가 반영된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195:0.9 (2070.5) 4. The Christian leaders were willing to make such compromises with Mithraism that the better half of its adherents were won over to the Antioch cult. 4.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기꺼이 타협해서, 미트라교 추종자들의 절반이상이 안디옥 종파로 전향(轉向)되도록 했습니다.

195:0.10 (2070.6) 5. Likewise did the next and later generations of Christian leaders make such further compromises with paganism that even the Roman emperor Constantine was won to the new religion. 5. 마찬가지로, 그 다음 및 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異敎徒)와 더 많이 타협하여, 로마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새 종교로 넘어왔습니다.

195:0.11 (2070.7) But the Christians made a shrewd bargain with the pagans in that they adopted the ritualistic pageantry of the pagan while compelling the pagan to accept the Hellenized version of Pauline Christianity. They made a better bargain with the pagans than they did with the Mithraic cult, but even in that earlier compromise they came off more than conquerors in that they succeeded in eliminating the gross immoralities and also numerous other reprehensible practices of the Persian mystery.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 예식의 허례(虛禮)를 받아들이는 한편 이교도가 헬라식 버전의 바울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교도들과 영리한 거래를 했습니다. 그들은 미트라 종파와 거래한 것보다 이교도들과 더 이익이 되는 거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의 타협에서,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 신비교의 극심한 부도덕은 물론 비난받을 만한 수많은 다른 풍습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는 점에 있어서 정복자 이상의 몫을 감당했습니다.

195:0.12 (2070.8) Wisely or unwisely, these early leaders of Christianity deliberately compromised the ideals of Jesus in an effort to save and further many of his ideas. And they were eminently successful. But mistake not! these compromised ideals of the Master are still latent in his gospel, and they will eventually assert their full power upon the world. 지혜로웠든 그렇지 않았든, 이러한 기독교 초기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상(理想, ideal)들을 계획적으로 타협했으며, 더 많은 예수님의 관념(觀念)들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탁월하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타협된 주(主)님의 이상(理想, ideal)들은 여전히 그의 복음 안에 잠복하고 있으며, 결국 세상에 그 이상들의 온전한 권능을 주장할 것입니다.

195:0.13 (2070.9) By this paganization of Christianity the old order won many minor victories of a ritualistic nature, but the Christians gained the ascendancy in that: 이렇게 이교화(異敎化)됨으로써 옛 체제는 예식의 성질을 띤 사소한 승리를 여러 번 거두었지만,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주도권을 얻었습니다.

195:0.14 (2070.10) 1. A new and enormously higher note in human morals was struck. 1. 인간의 도덕에 있어서, 새롭게 그리고 엄청나게 높은 음률(音律)을 부르짖었습니다.

195:0.15 (2070.11) 2. A new and greatly enlarged concept of God was given to the world. 2.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확대되고 새로운 개념을 세상에 주었습니다.

195:0.16 (2070.12) 3. The hope of immortality became a part of the assurance of a recognized religion. 3. 불멸의 희망이, 인정받은 종교에 담긴 확신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195:0.17 (2070.13) 4. Jesus of Nazareth was given to man’s hungry soul. 4. 나사렛 예수님이 굶주린 사람의 혼에게 주어졌습니다.

195:0.18 (2070.14) Many of the great truths taught by Jesus were almost lost in these early compromises, but they yet slumber in this religion of paganized Christianity, which was in turn the Pauline version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the Son of Man. And Christianity, even before it was paganized, was first thoroughly Hellenized. Christianity owes much, very much, to the Greeks. It was a Greek, from Egypt, who so bravely stood up at Nicaea and so fearlessly challenged this assembly that it dared not so obscure the concept of the nature of Jesus that the real truth of his bestowal might have been in danger of being lost to the world. This Greek’s name was Athanasius, and but for the eloquence and the logic of this believer, the persuasions of Arius would have triumphed.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위대한 진리의 대부분이 이러한 초기의 타협(妥協)으로 거의 유실(遺失)되었지만, 그것들은 이교화(異敎化)된 이 기독교, 즉 순서에 따라,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바울 판 버전 안에 아직도 잠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는 이교화(異敎化) 되기도 전에, 먼저 철저히 헬라(그리스)화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이, 너무나도 많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집트Egypt에서 온 그리스인Greek이 니케아Nicaea에서 용감하게 일어나, 두려움 없이 한 회의에 도전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예수님의 본성에 관한 개념이 감히 가려져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참된 진리가 세상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였으며, 이 신자의 웅변과 논리가 없었다면, 아리우스Arius의 확신이 승리했을 것입니다.

1. Influence of the Greeks 그리스인들의 영향

170129 진리의 영(13) – 그리스인들의 영향 행17:22-23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95:1.1 (2071.1)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started in earnest on that eventful day when the Apostle Paul stood before the council of the Areopagus in Athens and told the Athenians about “the Unknown God.” There, under the shadow of the Acropolis, this Roman citizen proclaimed to these Greeks his version of the new religion which had taken origin in the Jewish land of Galilee. And there was something strangely alike in Greek philosophy and many of the teachings of Jesus. They had a common goal — both aimed at the emergence of the individual. The Greek, at social and political emergence; Jesus, at moral and spiritual emergence. The Greek taught intellectual liberalism leading to political freedom; Jesus taught spiritual liberalism leading to religious liberty. These two ideas put together constituted a new and mighty charter for human freedom; they presaged man’s social, political, and spiritual liberty. 기독교의 헬라(그리스)화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있는 아레오파고스Areopagus의 의회(議會)에 출두하여, 아테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이야기했던 의미심장한 그 날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서, 이 로마 시민은 그리스인들에게 유대 땅 갈릴리에서 발생한 새로운 종교에 대해 자신의 버전(예수의 복음+기독교 해석베드로+유대교 도덕가말리엘+헬라철학필로+신비주의미트라+이교도화)을 선포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그리스 철학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많은 것들과 비슷했습니다. 그것들은 공통된 목표 즉 둘 다 고유성(개인)의 창발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사회•정치적 고유성의 창발을, 예수님은 도덕적•영적 고유성의 창발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지적 자유주의를 가르쳐서 정치적 자유로 이끌었으며, 예수님은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쳐서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두 관념들이 함께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로우면서도 강력한 헌장(憲章)이 되었고,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및 영적 해방의 전조(前兆)가 되었습니다.

195:1.2 (2071.2) Christianity came into existence and triumphed over all contending religions primarily because of two things: 기독교가 존재하게 되고, 경쟁하는 모든 종교들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 두 가지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1.3 (2071.3) 1. The Greek mind was willing to borrow new and good ideas even from the Jews. 1. 그리스인들은 마음으로부터 유대인들이라 해도 새롭고 좋은 관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195:1.4 (2071.4) 2. Paul and his successors were willing but shrewd and sagacious compromisers; they were keen theologic traders. 2. 바울과 후계자들은 기꺼이, 하지만 현명하고 총명하게 타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학(神學)을 거래하는 명민한 거래자들이었습니다.

195:1.5 (2071.5) At the time Paul stood up in Athens preaching “Christ and Him Crucified,” the Greeks were spiritually hungry; they were inquiring, interested, and actually looking for spiritual truth. Never forget that at first the Romans fought Christianity, while the Greeks embraced it, and that it was the Greeks who literally forced the Romans subsequently to accept this new religion, as then modified, as a part of Greek culture. 바울이 아테네에서 일어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라고 설교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궁금하여 질문하면서, 관심을 가졌으며, 실제로 영적 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기독교와 싸웠던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그리스인들은 그 후, 그리스 문화의 일부분으로 수정된 이 새 종교를 로마인들이 받아들이도록 나중에 문자 그대로 강요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195:1.6 (2071.6) The Greek revered beauty, the Jew holiness, but both peoples loved truth. For centuries the Greek had seriously thought and earnestly debated about all human problems — social, economic, political, and philosophic — except religion. Few Greeks had paid much attention to religion; they did not take even their own religion very seriously. For centuries the Jews had neglected these other fields of thought while they devoted their minds to religion. They took their religion very seriously, too seriously. As illuminated by the content of Jesus’ message, the united product of the centuries of the thought of these two peoples now became the driving power of a new order of human society and, to a certain extent, of a new order of human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숭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신성함을 숭배했지만 둘 다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들은 모든 인간 문제, 즉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열심히 논의했지만 종교는 제외하였습니다. 종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그리스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대해서까지도 매우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이러한 다른 분야의 생각은 소홀한 반면에 종교에는 자신들의 마음을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매우 진지하게, 너무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 세기 동안 이 두 민족의 사상(思想)이 연합된 산물이 이제 새 체제의 인간 사회에, 어느 정도는 새 체제의 인간의 종교적 믿음과 관습에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195:1.7 (2071.7) The influence of Greek culture had already penetrated the lands of the western Mediterranean when Alexander spread Hellenistic civilization over the near-Eastern world. The Greeks did very well with their religion and their politics as long as they lived in small city-states, but when the Macedonian king dared to expand Greece into an empire, stretching from the Adriatic to the Indus, trouble began. The art and philosophy of Greece were fully equal to the task of imperial expansion, but not so with Greek political administration or religion. After the city-states of Greece had expanded into empire, their rather parochial gods seemed a little queer. The Greeks were really searching for one God, a greater and better God, when the Christianized version of the older Jewish religion came to them.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알렉산더가 헬라(그리스) 문명을 근동(近東) 세계에 퍼뜨렸을 때 이미 서부 지중해 지방에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작은 도시국가 안에 사는 동안에는 종교와 정치를 대단히 잘 처리했지만, 마케도니아Macedonian 왕이 아드리아Adriatic 해(海)로부터 인더스Indus 강까지 뻗어 나가면서, 그리스를 대담하게 하나의 제국으로 확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 확대의 과업과 충분하게 동등했지만, 그리스의 정치 행정이나 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제국으로 확대된 이후에, 상당히 지엽적인 그들의 신(神)들은 다소 괴상하게 보였습니다. 오래된 유대 종교의 기독교화된 해석 버전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들은 진실로 한분 하나님, 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195:1.8 (2072.1) The Hellenistic Empire, as such, could not endure. Its cultural sway continued on, but it endured only after securing from the West the Roman political genius for empire administration and after obtaining from the East a religion whose one God possessed empire dignity. 그리스 제국은 그런 상태로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 문화적 지배력은 계속되었지만, 서방으로부터 제국의 행정을 위하여 로마의 정치적 재능이 확보되고, 동방으로부터 제국의 존엄을 갖춘 한 분 하나님의 종교를 얻은 뒤에 비로소 오래 견디어 냈습니다.

195:1.9 (2072.2)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Hellenistic culture had already attained its highest levels; its retrogression had begun; learning was advancing but genius was declining. It was at this very time that the ideas and ideals of Jesus, which were partially embodied in Christianity, became a part of the salvage of Greek culture and learning.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고대(古代) 그리스 문화는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학문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재능은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기독교에 부분적으로 구현되어 있던, 예수님의 관념과 이상이, 그리스 문화와 학문을 구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195:1.10 (2072.3) Alexander had charged on the East with the cultural gift of the civilization of Greece; Paul assaulted the West with the Christian version of The Gospel of Jesus . And wherever the Greek culture prevailed throughout the West, there Hellenized Christianity took root.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가지고 동방으로 진격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복음의 기독교 버전을 가지고 서방을 공략했습니다. 그리고 서방 전역에 걸쳐 그리스 문화가 우세한 어는 곳에든지, 헬라(그리스)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195:1.11 (2072.4) The Eastern version of the message of Jesus, notwithstanding that it remained more true to his teachings, continued to follow the uncompromising attitude of Abner. It never progressed as did the Hellenized version and was eventually lost in the Islamic movement. 예수 메시지의 동방 버전은, 그의 가르침에 더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는 아브너의 태도를 계속 따랐습니다. 그것은 결코 헬라(그리스)화된 버전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결국 이슬람 운동 안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2. The Roman Influence 로마의 영향

170205 진리의 영(14) – 로마의 영향 행17:24-25 24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4 “The God who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is the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does not live in temples built by hands. 25 And he is not served by human hands, as if he needed anything, because he himself gives all men life and breath and everything else.

195:2.1 (2072.5) The Romans bodily took over Greek culture, putting representative government in the place of government by lot. And presently this change favored Christianity in that Rome brought into the whole Western world a new tolerance for strange languages, peoples, and even religions. 로마인들은, 추첨에 의한 정부 대신에 대의(代議) 정부(政府)를 채택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생소한 언어와 민족, 심지어 종교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용의 태도를 모든 서방 세계에 유지했다는 면에서, 이 변화는 곧바로 기독교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195:2.2 (2072.6) Much of the early persecution of Christians in Rome was due solely to their unfortunate use of the term “kingdom” in their preaching. The Romans were tolerant of any and all religions but very resentful of anything that savored of political rivalry. And so, when these early persecutions, due so largely to misunderstanding, died out, the field for religious propaganda was wide open. The Roman was interested in political administration; he cared little for either art or religion, but he was unusually tolerant of both. 로마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초기에 박해한 대부분은 단지 설교할 때 불행하게도 “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모두 관대했지만, 정치적 경쟁의 냄새가 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오해 때문에 생긴 이 초기의 박해가 끝났을 때, 종교적 포교의 무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로마인은 정치 행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술이나 종교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관대하였습니다.

195:2.3 (2072.7) Oriental law was stern and arbitrary; Greek law was fluid and artistic; Roman law was dignified and respect-breeding. Roman education bred an unheard-of and stolid loyalty. The early Romans were politically devoted and sublimely consecrated individuals. They were honest, zealous, and dedicated to their ideals, but without a religion worthy of the name. Small wonder that their Greek teachers were able to persuade them to accept Paul’s Christianity. 동양의 법은 엄격하고 독단적(원칙이 없음)이었고, 그리스의 법은 유연하고 예술적이었으며, 로마의 법은 위엄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의 교육은 전대미문의 무조건적 충성을 가르쳤습니다. 초기의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헌신적이고 숭고하게 삶을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상(理想)에 대해 성실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헌신적이었지만, 그 이름에 마땅한 종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그리스인 선생들이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5:2.4 (2072.8) And these Romans were a great people. They could govern the Occident because they did govern themselves. Such unparalleled honesty, devotion, and stalwart self-control was ideal soil for the reception and growth of Christianity.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훌륭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西洋)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할 데 없는 정직, 헌신 그리고 굳센 자제심은 기독교를 수용하여 성장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토양(土壤)이었습니다.

195:2.5 (2072.9) It was easy for these Greco-Romans to become just as spiritually devoted to an institutional church as they were politically devoted to the state. The Romans fought the church only when they feared it as a competitor of the state. Rome, having little national philosophy or native culture, took over Greek culture for its own and boldly adopted Christ as its moral philosophy. Christianity became the moral culture of Rome but hardly its religion in the sense of being the individual experience in spiritual growth of those who embraced the new religion in such a wholesale manner. True, indeed, many individuals did penetrate beneath the surface of all this state religion and found for the nourishment of their souls the real values of the hidden meanings held within the latent truths of Hellenized and paganized Christianity. 이 그리스-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국가에 헌신한 것처럼, 제도화(制度化)된 교회에 영적으로 헌신적이었던 것은 수월한 일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교회가 국가에 대한 경쟁자로서 그들이 두려워했을 때에만 교회와 싸웠습니다. 로마는, 민족의 철학이나 고유한 토착 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이어받았고,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그 도덕적인 철학으로 채택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의 도덕 문화가 되었지만, 도매(都賣)방식으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영적 성장에서 개인의 체험이 된다는 의미에서는 도저히 로마의 종교가 되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개인이 이 모든 국가 종교의 표면 밑으로 파고들었고, 그들 혼의 영양(營養)을 얻기 위하여 헬라(그리스)화 되고 이교(異敎)화된 기독교에 잠재된 진리 안에 숨어 있는 의미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195:2.6 (2073.1) The Stoic and his sturdy appeal to “nature and conscience” had only the better prepared all Rome to receive Christ, at least in an intellectual sense. The Roman was by nature and training a lawyer; he revered even the laws of nature. And now, in Christianity, he discerned in the laws of nature the laws of God. A people that could produce Cicero and Vergil were ripe for Paul’s Hellenized Christianity. 스토아(금욕주의) 철학과 “자연과 양심”에 대한 그들의 불굴의 호소는, 로마 전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적어도 지적 의미에서, 더 낫게 준비하였을 뿐입니다. 로마인은 본성과 훈련의 면에서 법률가였습니다. 그들은 자연법칙까지 존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기독교 안에서, 자연법칙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식별해냈습니다. 키케로Cicero와 버질Vergil을 낳을 수 있었던 민족은 바울의 헬라(그리스)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큼 무르익었습니다.

195:2.7 (2073.2) And so did these Romanized Greeks force both Jews and Christians to philosophize their religion, to co-ordinate its ideas and systematize its ideals, to adapt religious practices to the existing current of life. And all this was enormously helped by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into Greek and by the later recording of the New Testament in the Greek tongue. 그래서 이 로마화된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 그들의 종교를 철학화하고, 그 관념들을 통합하고 그 이상들을 체계화하며, 종교관습을 기존에 있던 생명의 흐름에 적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히브리어 경전(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나중에 신약 성경이 헬라(그리스)어로 기록되어 대단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195:2.8 (2073.3) The Greeks, in contrast with the Jews and many other peoples, had long provisionally believed in immortality, some sort of survival after death, and since this was the very heart of Jesus’ teaching, it was certain that Christianity would make a strong appeal to them.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나 다른 많은 민족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잠정적으로 불멸(不滅), 즉 죽은 뒤에 어떤 식으로든 생존한다는 것을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분명히 그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195:2.9 (2073.4) A succession of Greek-cultural and Roman-political victories had consolidated the Mediterranean lands into one empire, with one language and one culture, and had made the Western world ready for one God. Judaism provided this God, but Judaism was not acceptable as a religion to these Romanized Greeks. Philo helped some to mitigate their objections, but Christianity revealed to them an even better concept of one God, and they embraced it readily. 그리스 문화적 승리와 로마의 정치적 승리가 연속되어 지중해의 땅은 하나의 언어(言語)와 하나의 문화(文化)를 가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었고, 서양 세계가 하나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유대교가 이 하나님을 제공했지만, 유대교는 로마화된 이 그리스인들에게 종교로 수용될 수 없었습니다. 필로Philo가 그들의 거부감을 완화되도록 어느 정도 도왔지만, 기독교는 그들에게 더 나은 하나의 하나님 개념을 드러냈으며, 그들은 준비된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3. Under the Roman Empire 로마제국 아래에서

170212 진리의 영(15) – 로마제국 아래에서 막9: 36-37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6 He took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among them. Taking him in his arms, he said to them, 37 “Whoever welcomes one of these little children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does not welcome me but the one who sent me.”

195:3.1 (2073.5) After the consolidation of Roman political rule and after the dissemination of Christianity, the Christians found themselves with one God, a great religious concept, but without empire. The Greco-Romans found themselves with a great empire but without a God to serve as the suitable religious concept for empire worship and spiritual unification. The Christians accepted the empire; the empire adopted Christianity. The Roman provided a unity of political rule; the Greek, a unity of culture and learning; Christianity, a unity of religious thought and practice. 로마의 정치적인 통치가 강화되고,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기독교들은 자신들이 한 분 하나님, 즉 위대한 종교 개념을 소유했지만, 제국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로마인들Greco-Romans은 자신들에게 위대한 제국은 있었지만, 제국 숭배와 영적 통일에 합당한 종교적 개념으로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帝國)은 기독교를 채택하였습니다. 로마는 정치적 통치의 통합을 제공하였고, 그리스는 문화와 학문의 통합을 제공하였으며, 기독교는 종교적 사고와 관습의 통합을 마련했습니다.

195:3.2 (2073.6) Rome overcame the tradition of nationalism by imperial universalism and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made it possible for different races and nations at least nominally to accept one religion. 로마는 제국의 보편주의로 민족주의의 전통을 극복하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종족과 나라들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수용하도록 하였습니다.

195:3.3 (2073.7) Christianity came into favor in Rome at a time when there was great contention between the vigorous teachings of the Stoics and the salvation promises of the mystery cults. Christianity came with refreshing comfort and liberating power to a spiritually hungry people whose language had no word for “unselfishness.” 기독교는 로마에서 스토아 철학자(Stoics금욕주의자 禁慾主義者)의 왕성한 가르침과 신비(神秘)주의 종파들의 구원 약속들 사이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독교는 신선한 위로의 말씀과 해방하는 권능으로, 자신들의 언어에 “비(非)이기심unselfishness”이라는 단어가 없는, 영적으로 굶주린 민족에게 다가왔습니다.

195:3.4 (2073.8) That which gave greatest power to Christianity was the way its believers lived lives of service and even the way they died for their faith during the earlier times of drastic persecution. 기독교는 그 신자들이 살았던 봉사의 생애와 심지어 초기의 격렬한 박해 기간에 신앙을 위해 순교했던 점을 통해 매우 큰 권능을 얻었습니다.

195:3.5 (2073.9) The teaching regarding Christ’s love for children soon put an end to the widespread practice of exposing children to death when they were not wanted, particularly girl babies.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한 것에 관한 가르침은, 아이를 원하지 않을 때, 특히 여자 아기들을 내버려 죽게 했던, 만연한 관습을 곧 종식시켰습니다.

195:3.6 (2074.1) The early plan of Christian worship was largely taken over from the Jewish synagogue, modified by the Mithraic ritual; later on, much pagan pageantry was added. The backbone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consisted of Christianized Greek proselytes to Judaism. 기독교 예배의 초기 방식은 대부분 유대교의 회당에서 이어받았고, 미트라교의 예배 의식(儀式)에 의해 수정되었으며, 나중에, 많은 이교도의 허식(虛飾)이 추가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근간은 유대교로 전향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195:3.7 (2074.2) The second century after Christ was the best time in all the world’s history for a good religion to make progress in the Western world. During the first century Christianity had prepared itself, by struggle and compromise, to take root and rapidly spread. Christianity adopted the emperor; later, he adopted Christianity. This was a great age for the spread of a new religion. There was religious liberty; travel was universal and thought was untrammeled. 그리스도 이후 2세기는 전 세계 역사에서 좋은 종교가 서방 세계에서 발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였습니다. 1세기에 기독교는 투쟁과 타협으로, 뿌리를 내리고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황제를 받아들였고, 나중에 황제는 기독교를 채택했습니다. 이때는 새 종교가 전파되는 위대한 시기였습니다. 종교적 자유가 있었고, 여행이 보편화되었으며 사상(思想)은 제한 받지 않았습니다.

195:3.8 (2074.3) The spiritual impetus of nominally accepting Hellenized Christianity came to Rome too late to prevent the well-started moral decline or to compensate for the already well-established and increasing racial deterioration. This new religion was a cultural necessity for imperial Rome, and it is exceedingly unfortunate that it did not become a means of spiritual salvation in a larger sense. 로마가 헬라(그리스)화된 기독교를 명목적으로 받아들인 영적 추진력은 너무 늦어져서 이미 시작된 도덕의 쇠퇴를 막거나, 벌써 단단히 뿌리를 내려서 확장되고 있는 종족의 퇴보를 보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새 종교는 제국의 로마에게 문화적 필수품이었고, 더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195:3.9 (2074.4) Even a good religion could not save a great empire from the sure results of lack of individual participation in the affairs of government, from overmuch paternalism, overtaxation and gross collection abuses, unbalanced trade with the Levant which drained away the gold, amusement madness, Roman standardization, the degradation of woman, slavery and race decadence, physical plagues, and a state church which became institutionalized nearly to the point of spiritual barrenness. 훌륭한 종교라도, 개인적 참여가 부족한 정부 업무의 당연한 결과로부터, 과도한 온정주의(溫情主義, 간섭정치), 과중한 세금과 극심한 징수 폐해, 금(金)을 고갈시킨 레반트와의 불균형 거래, 유흥의 광란, 로마식 표준화, 여성의 지위 격하, 노예 제도와 종족의 타락, 육체적인 전염병, 그리고 거의 영적 불모지에 이르도록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 큰 제국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195:3.10 (2074.5) Conditions, however, were not so bad at Alexandria. The early schools continued to hold much of Jesus’ teachings free from compromise. Pantaenus taught Clement and then went on to follow Nathaniel in proclaiming Christ in India. While some of the ideals of Jesus were sacrificed in the building of Christianity, it should in all fairness be recorded that, by the end of the second century, practically all the great minds of the Greco-Roman world had become Christian. The triumph was approaching completion. 그러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상황은 그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초기의 학교들은 타협되지 않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많이 지켰습니다. 판타에누스Pantaenus는 클레멘트Clement를 가르친 후에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나다니엘Nathaniel을 따라갔습니다. 기독교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상(理想)들의 얼마가 희생된 반면에, 공정하게 말해서, 2세기 말(末)에, 사실 그리스•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마음(지성知性)들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승리는 완결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195:3.11 (2074.6) And this Roman Empire lasted sufficiently long to insure the survival of Christianity even after the empire collapsed. But we have often conjectured what would have happened in Rome and in the world if it had been the gospel of the kingdom which had been accepted in the place of Greek Christianity.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기독교의 생존이 보장되도록 이 로마 제국은 충분히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헬라)적 기독교 대신에,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더라면, 로마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우리는 때때로 추측해 보아야 합니다.

4. The European Dark Ages 유럽의 암흑기

170219 진리의 영(16) – 유럽의 암흑기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195:4.1 (2074.7) The church, being an adjunct to society and the ally of politics, was doomed to share in the intellectual and spiritual decline of the so-called European “dark ages.” During this time, religion became more and more monasticized, asceticized, and legalized. In a spiritual sense, Christianity was hibernating. Throughout this period there existed, alongside this slumbering and secularized religion, a continuous stream of mysticism, a fantastic spiritual experience bordering on unreality and philosophically akin to pantheism. 교회는 사회의 부속물이 되고 정치의 협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럽의 암흑기”로 불리는 이 시기의 지적이며 영적인 퇴보를 함께 나누어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종교는 점점 더 수도원(修道院)화되어 은둔적이 되고, 금욕화(禁慾化)되어 고행(苦行)적이 되었으며, 합법화되어 공인되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기독교는 동면(冬眠, 겨울잠)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이러한 무기력하게 잠들어 버리고, 세속화된 종교에 발맞추어, 신비주의의 흐름이 계속되었고, 비현실에 접해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범신론(汎神論, 자연숭배)에 가까운 허황된 영적 체험이 존재했습니다.

195:4.2 (2074.8) During these dark and despairing centuries, religion became virtually secondhanded again. The individual was almost lost before the overshadowing authority, tradition, and dictation of the church. A new spiritual menace arose in the creation of a galaxy of “saints” who were assumed to have special influence at the divine courts, and who, therefore, if effectively appealed to, would be able to intercede in man’s behalf before the Gods. 이러한 어둡고 절망적인 여러 세기 동안, 사실상 종교는 다시, 효력이 다 된 중고품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압도적 권위와 전통 그리고 명령 앞에서 개인적 고유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영적 위험이 발생하여 기라성 같은 “성자(聖者)들” 무리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신적 재판정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탄원하면, 하나님들Gods 앞에서 사람들 대신, 이들이 중재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95:4.3 (2075.1) But Christianity was sufficiently socialized and paganized that, while it was impotent to stay the oncoming dark ages, it was the better prepared to survive this long period of moral darkness and spiritual stagnation. And it did persist on through the long night of Western civilization and was still functioning as a moral influence in the world when the renaissance dawned. The rehabilitation of Christianity, following the passing of the dark ages, resulted in bringing into existence numerous sects of the Christian teachings, beliefs suited to special intellectual, emotional, and spiritual types of human personality. And many of these special Christian groups, or religious families, still persist at the time of the making of this presentation. 그러나 기독교는 충분히 사회화(社會化)되고 이교화되어서, 다가오는 암흑기를 막아내기에는 무기력하였지만, 반면에 이러한 오랜 기간의 도덕적 어두움과 영적 침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방 문명의 긴 밤이 지나는 동안 줄곧 버텼으며, 문예부흥(르네상스)이 밝아왔을 때 여전히 도덕적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고 있었습니다. 암흑(暗黑)기가 지난 후, 뒤를 이어 일어난 기독교의 회복은 여러 종파들의 기독교적 가르침과 믿음을 낳았는데, 이들은 특별한 지적, 감정적, 그리고 인간 고유성의 영적 유형에 적합했습니다. 그리고 이 특별한 기독교 단체들 즉 다수의 종교 집단이 이 발표를 작성하는 이 시간에도 여전히 지속(持續)해 있습니다.

195:4.4 (2075.2) Christianity exhibits a history of having originated out of the unintended transformation of the religion of Jesus into a religion about Jesus. It further presents the history of having experienced Hellenization, paganization, secularization, institutionalization, intellectual deterioration, spiritual decadence, moral hibernation, threatened extinction, later rejuvenation, fragmentation, and more recent relative rehabilitation. Such a pedigree is indicative of inherent vitality and the possession of vast recuperative resources. And this same Christianity is now present in the civilized world of Occidental peoples and stands face to face with a struggle for existence which is even more ominous than those eventful crises which have characterized its past battles for dominance. 기독교는 예수님의 종교가 예수님에 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질(變質)된 것에서 기원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헬라)화, 이교화(異敎化), 세속화, 제도화, 지적 퇴보, 영적 타락, 도덕적 동면, 멸절의 위협, 나중의 회생(回生), 분열,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상대적(相對的) 회복을 겪은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족보는 선천적 생명력과, 광대한 회복의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독교가 서양 사람의 문명 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며, 그것은 지배권을 얻으려 했던 과거 투쟁의 특징을 나타냈던 파란만장한 위기보다 훨씬 더 심상치 않은, 생존(生存) 투쟁에 마주쳐 있습니다.

195:4.5 (2075.3) Religion is now confronted by the challenge of a new age of scientific minds and materialistic tendencies. In this gigantic struggle between the secular and the spiritual, the religion of Jesus will eventually triumph. 종교는 새로운 시대의 과학적 지성(마음)과 물질주의적 경향의 도전에 지금 직면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 속에서, 예수님의 종교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5. The Modern Problem 현대의 문제점

170226 진리의 영(17) – 현대의 문제점 눅12: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his kingdom, and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195:5.1 (2075.4) The twentieth century has brought new problems for Christianity and all other religions to solve. The higher a civilization climbs, the more necessitous becomes the duty to “seek first the realities of heaven” in all of man’s efforts to stabilize society and facilitate the solution of its material problems. 20세기는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들이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였습니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 사회의 물질적인 문제들을 쉽게 해결하려고 사람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 가운데 “먼저 하늘의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해지고 있습니다.

195:5.2 (2075.5) Truth often becomes confusing and even misleading when it is dismembered, segregated, isolated, and too much analyzed. Living truth teaches the truth seeker aright only when it is embraced in wholeness and as a living spiritual reality, not as a fact of material science or an inspiration of intervening art. 진리는 분할되고, 격리되고, 고립되고, 너무 심하게 분석될 때, 혼돈되고 심지어 오도(誤導)되기까지 합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물질적 과학의 사실이나 중재하는 기술의 영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적 실체로서 전체 안에서 포옹될 때에만 진리를 찾는 자들을 바르게 가르칩니다.

195:5.3 (2075.6) Religion is the revelation to man of his divine and eternal destiny. Religion is a purely personal and spiritual experience and must forever be distinguished from man’s other high forms of thought, such as: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적이며 영원한 운명의 계시입니다. 종교는 순전히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며, 다음과 같이, 사람이 지닌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언제까지나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195:5.4 (2075.7) 1. Man’s logical attitude toward the things of material reality.1. 물질적 실체인 사물들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인 태도.

195:5.5 (2075.8) 2. Man’s aesthetic appreciation of beauty contrasted with ugliness. 2. 추한 것과 대비된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심미적인 올바른 이해.

195:5.6 (2075.9) 3. Man’s ethical recognition of social obligations and political duty. 3. 사람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의무에 대한 윤리적 인식(認識).

195:5.7 (2075.10) 4. Even man’s sense of human morality is not, in and of itself, religious. 4. 심지어 인간 도덕성에 대한 사람의 감각도, 그 안에도 종교성이 없으며 그 자체로서도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195:5.8 (2075.11) Religion is designed to find those values in the universe which call forth faith, trust, and assurance; religion culminates in worship. Religion discovers for the soul those supreme values which are in contrast with the relative values discovered by the mind. Such superhuman insight can be had only through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종교는 우주에서 신앙과 신뢰 그리고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가치들을 발견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종교는 경배(敬拜)하는 가운데 절정에 이릅니다. 종교는 혼을 위하여, 마음으로 발견한 상대적 가치들과는 대조가 되는 이러한 최극의 가치들을 찾아냅니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참된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만 소유될 수 있습니다.

195:5.9 (2075.12) A lasting social system without a morality predicated on spiritual realities can no more be maintained than could the solar system without gravity. 영적 실체들에 입각한 도덕성이 없이 지속되는 사회체제는 중력(重力) 없는 태양계처럼 더욱 더 유지될 수 없습니다.

195:5.10 (2076.1) Do not try to satisfy the curiosity or gratify all the latent adventure surging within the soul in one short life in the flesh. Be patient! be not tempted to indulge in a lawless plunge into cheap and sordid adventure. Harness your energies and bridle your passions; be calm while you await the majestic unfolding of an endless career of progressive adventure and thrilling discovery. 육신으로 사는 한 번의 짧은 일생에서, 호기심을 채우려 하거나 또는 혼 안에서 솟구치는 모든 잠재된 모험심을 만족시키려고 시도하지 말라. 인내하라! 저속하고 비열한 모험에 멋대로 돌진하는 탐닉의 유혹에 빠지지 마라. 너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너의 정열(情熱)에 굴레를 씌워라. 진보적인 모험과 스릴로 가슴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침착하라.

195:5.11 (2076.2) In confusion over man’s origin, do not lose sight of his eternal destiny. Forget not that Jesus loved even little children, and that he forever made clear the great worth of human personality. 사람의 기원(起源)에 대한 혼란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라. 예수께서 어린아이들까지도 사랑하였던 것과, 인간 고유성의 위대한 가치를 언제까지나 분명히 밝히신 것을 잊지 말라.

195:5.12 (2076.3) As you view the world, remember that the black patches of evil which you see are shown against a white background of ultimate good. You do not view merely white patches of good which show up miserably against a black background of evil. 너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너희가 보는 검은 악의 조각들은 궁극적 선의 흰 바탕과 대조해서 보인다는 것을 기억하라. 너는 그저 검은 악의 바탕에 대비하여 초라하게 보이는 선(善)의 흰 조각들만 바라보지 말라.

195:5.13 (2076.4) When there is so much good truth to publish and proclaim, why should men dwell so much upon the evil in the world just because it appears to be a fact? The beauties of the spiritual values of truth are more pleasurable and uplifting than is the phenomenon of evil. 널리 공포하고 선포해야할 선한 진리가 그렇게도 많이 있는 때에, 왜 단지 세상의 악이 사실로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이 악(惡)에 몰두해야만 하는가? 진리가 지닌 영적 가치들의 아름다움(美)은 악의 현상보다 더욱 즐겁게 하며 사람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195:5.14 (2076.5) In religion, Jesus advocated and followed the method of experience, even as modern science pursues the technique of experiment. We find God through the leadings of spiritual insight, but we approach this insight of the soul through the love of the beautiful, the pursuit of truth, loyalty to duty, and the worship of divine goodness. But of all these values, love is the true guide to real insight.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같이, 종교에서 예수님은 체험의 방법을 주장하고 따르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 진리의 추구, 의무에 충실함, 그리고 신적 선을 경배함으로써 이 혼의 통찰력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치 중에서,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인도하는 참된 안내자입니다.

6. Materialism 물질주의

170305 진리의 영 18 – 물질주의 1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195:6.1 (2076.6) Scientists have unintentionally precipitated mankind into a materialistic panic; they have started an unthinking run on the moral bank of the ages, but this bank of human experience has vast spiritual resources; it can stand the demands being made upon it. Only unthinking men become panicky about the spiritual assets of the human race. When the materialistic-secular panic is over, the religion of Jesus will not be found bankrupt. The spiritual bank of the kingdom of heaven will be paying out faith, hope, and moral security to all who draw upon it “in His name.” 과학자들은 뜻하지 않게 인류를 물질주의(物質主義)적 공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도덕의 은행(銀行)에 경솔하게 지불청구를 시작했지만, 이 인간 체험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요구되었던 청구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만이 인류의 영적 자산들에 대하여 공포로 전전긍긍해 합니다. 물질주의적-세속적 공황이 끝날 때, 예수의 종교는 파산(破産)되지 않은 것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적 은행은 “그의 이름으로” 인출(引出)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과 소망 그리고 도덕적 보증을 지불해줄 것입니다.

195:6.2 (2076.7) No matter what the apparent conflict between materialism and the teachings of Jesus may be, you can rest assured that, in the ages to come, the teachings of the Master will fully triumph. In reality, true religion cannot become involved in any controversy with science; it is in no way concerned with material things. Religion is simply indifferent to, but sympathetic with, science, while it supremely concerns itself with the scientist. 비록 물질주의와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 명백한 충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가오는 시대에 주(主)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참된 종교는 과학과의 어떤 논쟁에도 휘말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도 물질적인 것들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단순히 과학에 대해 개의(介意)하지 않지만, 과학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종교는 그 과학자와 최상으로supremely 관련되어 있습니다.

195:6.3 (2076.8) The pursuit of mere knowledge, without the attendant interpretation of wisdom and the spiritual insight of religious experience, eventually leads to pessimism and human despair. A little knowledge is truly disconcerting. 지혜에 수반된 해석과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영적 통찰력이 없는, 단순한 지식 추구는 결국 비관주의와 인간적 절망으로 이끕니다. 얕은 지식이 참으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195:6.4 (2076.9) At the time of this writing the worst of the materialistic age is over; the day of a better understanding is already beginning to dawn. The higher minds of the scientific world are no longer wholly materialistic in their philosophy, but the rank and file of the people still lean in that direction as a result of former teachings. But this age of physical realism is only a passing episode in man’s life on earth. Modern science has left true religion — the teachings of Jesus as translated in the lives of his believers — untouched. All science has done is to destroy the childlike illusions of the misinterpretations of life. 이것을 기록할 때, 최악의 물질주의적 시대가 끝났으며, 보다 나은 이해(理解)의 날이 이미 동터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세상에서 고(高)차원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에 있어서 더 이상 전적으로 물질주의적이지 않지만, 일반인들은 이전의 가르침의 결과로 인하여, 여전히 물질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리적 사실주의(寫實主義) 시대는 땅에서 사는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지나가는 에피소드(일화(逸話)에 불과할 뿐입니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신자들의 삶으로 번역되는 예수의 가르침들-를 손대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과학이 이룩한 모든 업적은, 삶을 그릇되게 풀이한 유치한 환상을 부서뜨린 것입니다.

195:6.5 (2077.1) Science is a quantitative experience, religion a qualitative experience, as regards man’s life on earth. Science deals with phenomena; religion, with origins, values, and goals. To assign causes as an explanation of physical phenomena is to confess ignorance of ultimates and in the end only leads the scientist straight back to the first great cause — the Universal Father of Paradise. 세상 사람의 일생을, 과학으로 보면 양적(量的) 체험이고, 종교로 보면 질적(質的) 체험입니다. 과학은 현상을 다루고, 종교는 기원, 가치, 그리고 목표를 다룹니다. 원인들을 물리적 현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궁극의 것들(최종결과)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며, 결국 과학자들을 처음의 위대한 원인 즉 천국 우주의 아버지께로 곧장 되돌아가도록 인도할 뿐입니다.

195:6.6 (2077.2) The violent swing from an age of miracles to an age of machines has proved altogether upsetting to man. The cleverness and dexterity of the false philosophies of mechanism belie their very mechanistic contentions. The fatalistic agility of the mind of a materialist forever disproves his assertions that the universe is a blind and purposeless energy phenomenon. 기적의 시대로부터 기계의 시대로의 격렬한 변동은 사람을 아주 당황스럽게 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계론의 거짓된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이 바로 그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냅니다. 물질주의자 마음에 있는 숙명론(宿命論)적 민첩함은 우주가 맹목적이고 목적이 없는 에너지 현상이라는 그의 주장의 그릇됨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195:6.7 (2077.3) The mechanistic naturalism of some supposedly educated men and the thoughtless secularism of the man in the street are both exclusively concerned with things; they are barren of all real values, sanctions, and satisfactions of a spiritual nature, as well as being devoid of faith, hope, and eternal assurances. One of the great troubles with modern life is that man thinks he is too busy to find time for spiritual meditation and religious devotion.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와 거리에 흔히 있는 분별없는 사람의 세속주의는 둘 다 오로지 사물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과 소망 그리고 영원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영적 본성을 지닌 모든 참된 가치, 규약, 그리고 만족감도 없습니다. 현대 생활의 커다란 문제들 중의 하나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묵상(默想)과 종교적 헌신을 위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95:6.8 (2077.4) Materialism reduces man to a soulless automaton and constitutes him merely an arithmetical symbol finding a helpless place in the mathematical formula of an unromantic and mechanistic universe. But whence comes all this vast universe of mathematics without a Master Mathematician? Science may expatiate on the conservation of matter, but religion validates the conservation of men’s souls — it concerns their experience with spiritual realities and eternal values. 물질주의는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 기계로 격하시키고, 그를 낭만이 없는 기계적 우주의 수학 공식에서 무력한 자리를 찾는 단순히 산술적 기호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광대한 수학적 우주가 주(主) 수학자가 없이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은 질량의 보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만, 종교는 사람들의 혼이 확실히 보존되게 합니다. 종교는 영적 실체들과 영원한 가치들의 체험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170312 진리의 영 19 – 물질주의 2 시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Teach me to do your will, for you are my God; may your good Spirit lead me on level ground.

195:6.9 (2077.5) The materialistic sociologist of today surveys a community, makes a report thereon, and leaves the people as he found them. Nineteen hundred years ago, unlearned Galileans surveyed Jesus giving his life as a spiritual contribution to man’s inner experience and then went out and turned the whole Roman Empire upside down. 오늘날의 물질주의적 사회학자들은 공동체를 조사하고, 즉시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발견했던 그대로 버려둡니다. 1,900년 전에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적 체험에 대한 영적 기여로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있는 예수님을 살펴본 후에는 밖으로 나가 로마제국 전체를 뒤집어버렸습니다.

195:6.10 (2077.6) But religious leaders are making a great mistake when they try to call modern man to spiritual battle with the trumpet blasts of the Middle Ages. Religion must provide itself with new and up-to-date slogans. Neither democracy nor any other political panacea will take the place of spiritual progress. False religions may represent an evasion of reality, but Jesus in his gospel introduced mortal man to the very entrance upon an eternal reality of spiritual progression.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중세(中世) 시대의 트럼펫(나팔) 소리로 현대인들을 영적 전투에 나서도록 불러내려고 시도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종교는 새로운 첨단의 표어(標語)들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정치적 만병통치약이라도 영적 진보를 대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종교들은 현실에서의 도피에 해당되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영적 진보의 영원한 실체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입구로 데려가셨습니다.

195:6.11 (2077.7) To say that mind “emerged” from matter explains nothing. If the universe were merely a mechanism and mind were unapart from matter, we would never have two differing interpretations of any observed phenomenon. The concept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are not inherent in either physics or chemistry. A machine cannot know, much less know truth, hunger for righteousness, and cherish goodness. 마음이 물질로부터 “출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주가 단지 기계 작용이고 마음이 물질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관찰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 두 가지의 다른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眞)와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에 대한 개념들은 본래부터 물리학이나 화학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계는 진리, 옳은 것에 대한 간절함을 알지도 못하고, 선의 소중함도 모르며, 이것들을 알 수도 없습니다.

195:6.12 (2077.8) Science may be physical, but the mind of the truth-discerning scientist is at once supermaterial. Matter knows not truth, neither can it love mercy nor delight in spiritual realities. Moral convictions based on spiritual enlightenment and rooted in human experience are just as real and certain as mathematical deductions based on physical observations, but on another and higher level. 과학은 물리적일 수 있지만, 진리를 식별하는 과학자의 마음은 동시에 물질을 초월(超越)합니다. 물질은 진리를 모르며,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들을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계몽에 근거하며 인간 체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신념들은, 물리적 관측에 기초를 둔 수학적 추론들처럼 똑같이 실제적이며 확실하지만 다른 더 높은 차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95:6.13 (2077.9) If men were only machines, they would react more or less uniformly to a material universe. Individuality, much less personality, would be nonexistent. 사람들이 기계들에 불과하다면, 물질적 우주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일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개별 존재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고유성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195:6.14 (2077.10) The fact of the absolute mechanism of Paradise at the center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in the presence of the unqualified volition of the Second Source and Center, makes forever certain that determiners are not the exclusive law of the cosmos. Materialism is there, but it is not exclusive; mechanism is there, but it is not unqualified; determinism is there, but it is not alone. 모든 우주의 중심에 있는 천국의 절대적 기계 작용의 사실은, 둘째근원이며 중심이신 분의 분별이 불가능한unqualified 의지의 현존 안에서, 결정자(決定者)들이 우주cosmos의 독점적 법칙이 아님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합니다. 물질주의가 있지만 독점적이지 않습니다. 기능구조가 있지만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결정론이 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5:6.15 (2078.1) The finite universe of matter would eventually become uniform and deterministic but for the combined presence of mind and spirit. The influence of the cosmic mind constantly injects spontaneity into even the material worlds.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마음과 영의 결합된 현존이 없다면, 결국 획일적이고 결정론적일 것입니다. 우주cosmos 마음의 영향력은 물질세계들에도 끊임없이 자발성을 주입합니다.

195:6.16 (2078.2) Freedom or initiative in any realm of existence is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degree of spiritual influence and cosmic-mind control; that is, in human experience, the degree of the actuality of doing “the Father’s will.” And so, when you once start out to find God, that is the conclusive proof that God has already found you. 존재의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나 진취성은, 영적 영향과 우주cosmos-마음이 통제하는 정도, 즉 인간의 체험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정도에 정비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찾기로 나서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발견하셨다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195:6.17 (2078.3) The sincere pursuit of goodness, beauty, and truth leads to God. And every scientific discovery demonstrates the existence of both freedom and uniformity in the universe. The discoverer was free to make the discovery. The thing discovered is real and apparently uniform, or else it could not have become known as a thing. 선(善)과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에 대한 진지한 추구는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 자유와 균일성이 둘 다 존재하고 있음을 실증합니다. 발견하는 사람은 발견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발견된 사물은 실제이며 명백히 균일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물로서 알려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7. The Vulnerability of Materialism 물질주의의 취약성

170319 진리의 영 20 – 물질주의의 취약성 1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195:7.1 (2078.4) How foolish it is for material-minded man to allow such vulnerable theories as those of a mechanistic universe to deprive him of the vast spiritual resources of the personal experience of true religion. Facts never quarrel with real spiritual faith; theories may. Better that science should be devoted to the destruction of superstition rather than attempting the overthrow of religious faith — human belief in spiritual realities and divine values. 물질적-마음을 가진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이론과 같이 그렇게 취약한 이론들이 참된 종교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광대한 영적 자원들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가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요. 사실들은 결코 참된 영적 신앙과 다투지 않습니다. 이론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과학은 종교적 신앙─영적 실체들과 신적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신(迷信)을 없애는 데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195:7.2 (2078.5) Science should do for man materially what religion does for him spiritually: extend the horizon of life and enlarge his personality. True science can have no lasting quarrel with true religion. The “scientific method” is merely an intellectual yardstick wherewith to measure material adventures and physical achievements. But being material and wholly intellectual, it is utterly useless in the evaluation of spiritual realities and religious experiences. 종교가 영적으로, 사람을 위해 일생의 지평을 넓히고 그의 고유성을 증대시키듯이, 과학은 물질적으로, 그를 위하여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도록 다툴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은 물질적인 모험들과 물리적인 성취들을 측정하는 지적 척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전적으로 지적인 “과학적인 방법”은, 영적 실체들과 종교적 체험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195:7.3 (2078.6) The inconsistency of the modern mechanist is: If this were merely a material universe and man only a machine, such a man would be wholly unable to recognize himself as such a machine, and likewise would such a machine-man be wholly unconscious of the fact of the existence of such a material universe. The materialistic dismay and despair of a mechanistic science has failed to recognize the fact of the spirit-indwelt mind of the scientist whose very supermaterial insight formulates these mistaken and self-contradictory concepts of a materialistic universe.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이 단지 기계라면, 그러한 사람은 그 자신을 그러한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적-사람은 그러한 물질적 우주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완전히 의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계론적 과학의 물질주의적 낙담과 절망은 바로 자신의 초(超)물질적 통찰력을 지닌 영이-내주된 과학자의 마음이 이들 잘못된 자기-모순의 물질주의적 우주 개념들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7.4 (2078.7) Paradise values of eternity and infinity,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are concealed within the facts of the phenomena of the universes of time and space. But it requires the eye of faith in a spirit-born mortal to detect and discern these spiritual values.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에 대한 영원성과 무한성의 천국 가치들은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우주 현상의 사실들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가치들을 감지하고 분간하기 위해서는, 영으로-태어난 사람이 지닌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195:7.5 (2078.8) The realities and values of spiritual progress are not a “psychologic projection” — a mere glorified daydream of the material mind. Such things are the spiritual forecasts of the indwelling Adjuster, the spirit of God living in the mind of man. And let not your dabblings with the faintly glimpsed findings of “relativity” disturb your concepts of the eternity and infinity of God. And in all your solicitation concerning the necessity for self-expression do not make the mistake of failing to provide for Adjuster-expression, the manifestation of your real and better self. 영적 진보의 실체와 가치들은 “심리적 투사”, 즉 단순히 물질적 마음이 영화롭게 꾸민 백일몽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영, 내주하는 조절자의 영적 전조(前兆)입니다. 그리고 “상대성”을 발견해 내는 어렴풋한 이해와 가벼운 접근으로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에 대한 우리 개념이 혼란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자아-표현의 필요성과 관련되는 우리의 그 모든 간절함이, 우리의 참되고 더욱 나은 자아의 표시, 조절자를 표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195:7.6 (2079.1) If this were only a material universe, material man would never be able to arrive at the concept of the mechanistic character of such an exclusively material existence. This very mechanistic concept of the universe is in itself a nonmaterial phenomenon of mind, and all mind is of nonmaterial origin, no matter how thoroughly it may appear to be materially conditioned and mechanistically controlled.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었다면, 물질적 사람은 결코 그렇게 배타적으로 물질적인 실재의 기계론적 성격 개념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 그 자체가 마음의 비물질적 현상입니다. 모든 마음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속속들이 물질적으로 제약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비물질적 기원에서 비롯됩니다.

195:7.7 (2079.2) The partially evolved mental mechanism of mortal man is not overendowed with consistency and wisdom. Man’s conceit often outruns his reason and eludes his logic. 사람의 부분적으로 진화된 정신적 기능구조는 일관성과 지혜를 과도히 부여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만심은 종종 그의 이성(理性)을 뛰어넘고 그의 논리를 벗어납니다.

195:7.8 (2079.3) The very pessimism of the most pessimistic materialist is, in and of itself, sufficient proof that the universe of the pessimist is not wholly material. Both optimism and pessimism are concept reactions in a mind conscious of values as well as of facts. If the universe were truly what the materialist regards it to be, man as a human machine would then be devoid of all conscious recognition of that very fact. Without the consciousness of the concept of values within the spirit-born mind, the fact of universe materialism and the mechanistic phenomena of universe operation would be wholly unrecognized by man. One machine cannot be conscious of the nature or value of another machine. 대부분의 염세적인 물질주의자의 바로 그 염세주의가, 자체적으로 저절로, 염세주의자의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낙관주의와 염세주의는 둘 모두 사실 뿐 아니라 가치를 의식하는 마음 안에 있는 개념적 반응입니다. 우주가 정말로 물질주의자들이 그렇다고 간주하는 것이었다면, 그러면 인간 기계인 사람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모든 의식적(意識的) 자각이 결여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영으로 태어난 마음속에 가치들에 대한 개념의 인식이 없다면, 우주 물질주의의 사실과 우주 운행의 기계론적 현상은 절대로 사람에 의해 감지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본성이나 가치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195:7.9 (2079.4) A mechanistic philosophy of life and the universe cannot be scientific because science recognizes and deals only with materials and facts. Philosophy is inevitably superscientific. Man is a material fact of nature, but his life is a phenomenon which transcends the material levels of nature in that it exhibits the control attributes of mind and the creative qualities of spirit. 과학은 오직 물질들과 사실들만을 인지하고 취급하기 때문에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적이 될 수 없습니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초(超)과학적입니다. 사람은 자연의 물질적 사실이지만 그의 생명은 마음의 통제 속성들과 영의 창조적 본질특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자연의 물질적 차원들을 초월하는 현상입니다.

195:7.10 (2079.5) The sincere effort of man to become a mechanist represents the tragic phenomenon of that man’s futile effort to commit intellectual and moral suicide. But he cannot do it.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지적·도덕적으로 자살하려고 사람이 헛된 노력을 기울이는 비극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195:7.11 (2079.6) If the universe were only material and man only a machine, there would be no science to embolden the scientist to postulate this mechanization of the universe. Machines cannot measure, classify, nor evaluate themselves. Such a scientific piece of work could be executed only by some entity of supermachine status. 우주가 오직 물질적이며 사람이 단지 기계였다면, 과학자들에게 이런 우주의 기계화를 가정하도록 격려할 과학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계들은 측정하거나 구분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과학적 작업은 초(超)기계적 지위의 실존개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195:7.12 (2079.7) If universe reality is only one vast machine, then man must be outside of the universe and apart from it in order to recognize such a fact and become conscious of the insight of such an evaluation. 우주 실체가 단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라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러한 평가에 대한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하여, 우주 밖에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170326 진리의 영 21 – 물질주의의 취약성 2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

195:7.13 (2079.8) If man is only a machine, by what technique does this man come to believe or claim to know that he is only a machine? The experience of self-conscious evaluation of one’s self is never an attribute of a mere machine. A self-conscious and avowed mechanist is the best possible answer to mechanism. If materialism were a fact, there could be no self-conscious mechanist. It is also true that one must first be a moral person before one can perform immoral acts. 사람이 기계에 불과하다면,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기법으로 자신이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또는 안다고 주장할까요?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의식하여 평가하는 체험은 단순한 기계의 속성이 결코 아닙니다. 자아-의식적이면서 스스로 기계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기계론에 대해 가능한 최선의 대답입니다. 물질주의가 사실이라면, 자아-의식적인 기계론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가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 전에 먼저 그 자는 도덕적 개인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또한 참말입니다.

195:7.14 (2079.9) The very claim of materialism implies a supermaterial consciousness of the mind which presumes to assert such dogmas. A mechanism might deteriorate, but it could never progress. Machines do not think, create, dream, aspire, idealize, hunger for truth, or thirst for righteousness. They do not motivate their lives with the passion to serve other machines and to choose as their goal of eternal progression the sublime task of finding God and striving to be like him. Machines are never intellectual, emotional, aesthetic, ethical, moral, or spiritual.물질주의의 바로 그 주장은 그러한 독단을 주장한다고 추정하는 마음의 초(超)물질적 의식을 암시합니다. 기계론은 악화될 수는 있지만, 결코 진보할 수는 없습니다. 기계는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뜻을 품거나, 이상화하거나, 진리를 간절히 찾거나, 또는 올바름에 목마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영원히 진보할 목표로서 하나님을 찾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숭고한 과업을 선택하는 열정으로 그들의 삶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기계들은 결코 지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또는 영적이지 않습니다.

195:7.15 (2079.10) Art proves that man is not mechanistic, but it does not prove that he is spiritually immortal. Art is mortal morontia, the intervening field between man, the material, and man, the spiritual. Poetry is an effort to escape from material realities to spiritual values.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죽게 될 사람의 부활체적morontia 즉 물질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사이에 개재(介在)되는 분야입니다. 시(詩)는 물질적 실체에서 영적 가치로 도피하려는 노력입니다.

195:7.16 (2080.1) In a high civilization, art humanizes science, while in turn it is spiritualized by true religion — insight into spiritual and eternal values. Art represents the human and time-space evaluation of reality. Religion is the divine embrace of cosmic values and connotes eternal progression in spiritual ascension and expansion. The art of time is dangerous only when it becomes blind to the spirit standards of the divine patterns which eternity reflects as the reality shadows of time. True art is the effective manipulation of the material things of life; religion is the ennobling transformation of the material facts of life, and it never ceases in its spiritual evaluation of art. 높은 문명에서 예술은 과학을 인간답게 만드는 한편 다음에, 그것은 참된 종교 –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통찰 -에 의해 영적으로 변화됩니다. 예술은 실체에 대한 인간과 시공간의 평가를 나타냅니다. 종교는 우주cosmic의 가치들을 신적으로 끌어안는 것이며, 영적 상승과 확장에 있어서 영원한 진보를 내포합니다. 시간의 예술은, 시간 속 실체의 그림자로써 영원성이 반영하는 신적 형태의 영적 표준을 예술이 보지 못할 때에만 위험합니다. 참된 예술은 인생에서 물질적 사물들을 효과적으로 조종하는 것이며; 종교는 인생에서 물질적 사실을 고상하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예술에 대하여 끊임없이 영적 평가를 내립니다.

195:7.17 (2080.2) How foolish to presume that an automaton could conceive a philosophy of automatism, and how ridiculous that it should presume to form such a concept of other and fellow automatons! 자동장치가 자동화주의 철학을 생각해 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것이 또 다른 동료 자동장치들의 개념을 형성한다고 추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요!

195:7.18 (2080.3) Any scientific interpretation of the material universe is valueless unless it provides due recognition for the scientist. No appreciation of art is genuine unless it accords recognition to the artist. No evaluation of morals is worth while unless it includes the moralist. No recognition of philosophy is edifying if it ignores the philosopher, and religion cannot exist without the real experience of the religionist who, in and through this very experience, is seeking to find God and to know him. Likewise is the universe of universes without significance apart from the I AM, the infinite God who made it and unceasingly manages it.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과학자를 마땅히 인식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예술에 대한 어떤 이해도, 그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진짜가 아닙니다. 도덕에 대한 어떤 평가도, 그 도덕가를 포함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철학에 관한 어떤 인식도, 그 철학자를 무시하면 교훈이 되지 않으며, 종교는 그 종교가의 진정한 체험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는 바로 이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그칠 줄 모르고 관리하는 무한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195:7.19 (2080.4) Mechanists — humanists — tend to drift with the material currents. Idealists and spiritists dare to use their oars with intelligence and vigor in order to modify the apparently purely material course of the energy streams. 기계론자들─인본주의자들─은 물질적 흐름에 따라서 떠내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상주의자들과 영성주의자들은 에너지 흐름에서 순전히 물질적 과정으로 보이는 것을 수정하려고 지능과 활력으로 감히 노를 젓습니다.

195:7.20 (2080.5) Science lives by the mathematics of the mind; music expresses the tempo of the emotions. Religion is the spiritual rhythm of the soul in time-space harmony with the higher and eternal melody measurements of Infinity. Religious experience is something in human life which is truly supermathematical. 과학은 마음(지성)의 수학으로 살아가며, 음악은 감성의 템포(박자)를 표현합니다. 종교는, 무한성의 더 높고 영원한 멜로디(선율)에 대한 측정과, 시공에서 조화를 이룬, 혼의 영적 리듬입니다. 종교적 체험은 인생에서 진실로 초(超)수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95:7.21 (2080.6) In language, an alphabet represents the mechanism of materialism, while the words expressive of the meaning of a thousand thoughts, grand ideas, and noble ideals — of love and hate, of cowardice and courage — represent the performances of mind within the scope defined by both material and spiritual law, directed by the assertion of the will of personality, and limited by the inherent situational endowment. 언어에서, 하나의 알파벳은 물질주의의 기계 장치를 대표하는 반면에 수많은 생각, 커다란 관념, 그리고 사랑과 미움, 비겁과 용기에 관한 고상한 이상(理想ideal)의 의미를 표현하는 낱말들은, 물질적이며 영적인 법칙에 의해 정의되고, 고유성의 의지가 주장하는 바에 의해 지시를 받으며, 본래부터 있는 상황의 자질에 따라 제한받는, 범위 안에서 마음의 행위들을 묘사합니다.

195:7.22 (2080.7) The universe is not like the laws, mechanisms, and the uniformities which the scientist discovers, and which he comes to regard as science, but rather like the curious, thinking, choosing, creative, combining, and discriminating scientist who thus observes universe phenomena and classifies the mathematical facts inherent in the mechanistic phases of the material side of creation. Neither is the universe like the art of the artist, but rather like the striving, dreaming, aspiring, and advancing artist who seeks to transcend the world of material things in an effort to achieve a spiritual goal.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게 되는 그러한 법칙, 기계 작용, 획일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는 호기심이 있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조적이며, 통합하고, 식별하는 과학자, 즉 이렇게 우주 현상을 관찰하고, 창조에서 물질 면의 기계적 단계에 본래부터 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하는 과학자(科學者)와 같습니다. 우주는 예술가의 예술과는 다르게, 오히려 영적 목표에 이르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의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예술가, 즉 분투하고, 꿈꾸며, 열망하고, 전진하는 예술가와 같습니다.

195:7.23 (2080.8) The scientist, not science, perceives the reality of an evolving and advancing universe of energy and matter. The artist, not art, demonstrates the existence of the transient morontia world intervening between material existence and spiritual liberty. The religionist, not religion, prov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realities and divine values which are to be encountered in the progress of eternity.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예술이 아니라 예술가(藝術家)가 물질 존재와 영적 해방 사이에 개재하는 과도기의 부활체적morontia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 줍니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가(宗敎家)가 영원한 진보에서 마주치게 될 영적 실체들과 신적 가치가 존재함을 증명합니다.

8. Secular Totalitarianism 세속적 전체주의

170402 진리의 영 22 – 세속적 전체주의 1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In his pride the wicked does not seek him; in all his thoughts there is no room for God.

195:8.1 (2081.1) But even after materialism and mechanism have been more or less vanquished, the devastating influence of twentieth-century secularism will still blight the spiritual experience of millions of unsuspecting souls. 그러나 물질주의와 기계론이 얼마큼 정복되어진 이후라 할지라도, 20세기 세속주의의 지독한 영향은, 수백만의 영문을 모르는 혼의 영적 체험들을 여전히 망치게 할 것이다.

195:8.2 (2081.2) Modern secularism has been fostered by two world-wide influences. The father of secularism was the narrow-minded and godless attitude of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so-called science — atheistic science. The mother of modern secularism was the totalitarian medieval Christian church. Secularism had its inception as a rising protest against the almost complete domination of Western civilization by the institutionalized Christian church. 현대 세속주의는 두 가지의 범세계적인 영향에 의해 육성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소위 과학─무신론적 과학이라고 하는 19세기와 20세기의 편협하고도 하나님이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전체주의적 중세(中世) 기독교 교회였습니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 교회에 의한 서양 문명의 거의 완벽한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항거로 시작되었습니다.

195:8.3 (2081.3) At the time of this revelation, the prevailing intellectual and philosophical climate of both European and American life is decidedly secular — humanistic. For three hundred years Western thinking has been progressively secularized. Religion has become more and more a nominal influence, largely a ritualistic exercise. The majority of professed Christians of Western civilization are unwittingly actual secularists. 이 계시(啓示)가 주어진 때에,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적·철학적 풍조는 단연코 세속적 – 인본주의적입니다. 300년 동안 서양의 사상(思想)은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었습니다. 종교는 점점 더 명목상의 영향, 주로 의식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대부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실제적 세속주의자들입니다.

195:8.4 (2081.4) It required a great power, a mighty influence, to free the thinking and living of the Western peoples from the withering grasp of a totalitarian ecclesiastical domination. Secularism did break the bonds of church control, and now in turn it threatens to establish a new and godless type of mastery over the hearts and minds of modern man. The tyrannical and dictatorial political state is the direct offspring of scientific materialism and philosophic secularism. Secularism no sooner frees man from the domination of the institutionalized church than it sells him into slavish bondage to the totalitarian state. Secularism frees man from ecclesiastical slavery only to betray him into the tyranny of political and economic slavery. 전체주의적 교회가 지배하는 손아귀에서 시들어가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을 해방하려면 거대한 권능과 강력한 영향력이 요구되었습니다. 세속주의는 교회가 통제하는 사슬을 깨뜨렸으며, 이제는 다음 차례로 그것이 현대인들의 심정과 마음에 새롭게 하나님 없는 유형의 지배력을 확립하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압제와 독재적인 정치 형태는 과학적 물질주의와 철학적 세속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입니다. 세속주의가 제도화된 교회의 지배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자마자, 그것은 전체주의 국가에 사람을 노예처럼 사슬에 묶어 팔아버립니다. 세속주의는 교회의 노예 상태에 있던 사람을 해방시켜 정치적·경제적 노예 상태의 압제로 팔아넘길 뿐입니다.

195:8.5 (2081.5) Materialism denies God, secularism simply ignores him; at least that was the earlier attitude. More recently, secularism has assumed a more militant attitude, assuming to take the place of the religion whose totalitarian bondage it onetime resisted. Twentieth-century secularism tends to affirm that man does not need God. But beware! this godless philosophy of human society will lead only to unrest, animosity, unhappiness, war, and world-wide disaster. 물질주의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속주의는 단순히 하나님을 무시(無視)하는데, 적어도 그것이 초기의 태도였습니다. 최근에 세속주의는 한 때 종교의 전체주의적 속박에 저항하였던 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이, 더욱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인간 사회의 하나님 없는 이 철학은 오직 불안, 증오, 불행, 전쟁, 그리고 세계적인 재난으로 이끌 것입니다.

195:8.6 (2081.6) Secularism can never bring peace to mankind. Nothing can take the place of God in human society. But mark you well! do not be quick to surrender the beneficent gains of the secular revolt from ecclesiastical totalitarianism. Western civilization today enjoys many liberties and satisfactions as a result of the secular revolt. The great mistake of secularism was this: In revolting against the almost total control of life by religious authority, and after attaining the liberation from such ecclesiastical tyranny, the secularists went on to institute a revolt against God himself, sometimes tacitly and sometimes openly. 세속주의는 인류에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담아 들으십시오!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한 세속적 항거의 유익한 이점들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서양 문명은 오늘날 세속적 항거의 결과로, 많은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엄청난 오류는 이것이었습니다. 종교의 권위가 거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는 것을 항거하여, 그러한 교회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얻은 후에, 세속주의자들은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공개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항거를 계속하기 시작했습니다.

170409 진리의 영 23 – 세속적 전체주의Secular Totalitarianism 2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The fool says in his heart, “There is no God.” They are corrupt, their deeds are vile; there is no one who does good.

195:8.7 (2081.7) To the secularistic revolt you(we) owe the amazing creativity of American industrialism and the unprecedented material progress of Western civilization. And because the secularistic revolt went too far and lost sight of God and true religion, there also followed the unlooked-for harvest of world wars and international unsettledness. 우리가 미국 산업주의의 놀라운 창조성과 서양 문명의 전례 없는 물질적 진보를 얻은 것은 세속주의의 항거(抗拒) 덕택입니다. 그리고 세속주의의 항거가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과 참된 종교를 놓쳤기 때문에, 세계 전쟁과 국제적 불안정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또한 뒤따랐습니다.

195:8.8 (2081.8) It is not necessary to sacrifice faith in God in order to enjoy the blessings of the modern secularistic revolt: tolerance, social service, democratic government, and civil liberties.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secularists to antagonize true religion in order to promote science and to advance education. 현대의 세속주의적 항거가 가져온 축복, 즉 관용, 사회적 봉사, 민주적 정부,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세속주의자들은 과학을 증진시키고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참 종교를 적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195:8.9 (2082.1) But secularism is not the sole parent of all these recent gains in the enlargement of living. Behind the gains of the twentieth century are not only science and secularism but also the unrecognized and unacknowledged spiritual workings of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of Nazareth. 그러나 세속주의가 생활의 확대로 최근에 얻은 이 모든 이익을 가져온 유일한 근원은 아닙니다. 20세기에 얻은 이익의 이면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뿐만이 아니라, 인식되지 않고 인정받지 않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의 영적 작용이 있습니다.

195:8.10 (2082.2) Without God, without religion, scientific secularism can never co-ordinate its forces, harmonize its divergent and rivalrous interests, races, and nationalisms. This secularistic human society, notwithstanding its unparalleled materialistic achievement, is slowly disintegrating. The chief cohesive force resisting this disintegration of antagonism is nationalism. And nationalism is the chief barrier to world peace. 하나님도 없고, 종교도 없는, 과학적 세속주의는 결코 그 세력들을 통합할 수도 없고, 그것의 서로 다른 경쟁적 이권과 종족과 민족주의를 조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세속주의적 인간 사회는, 비할 데 없는 물질주의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의 붕괴를 막는 주요한 응집 세력은 민족주의입니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평화의 주요한 장애물입니다.

195:8.11 (2082.3) The inherent weakness of secularism is that it discards ethics and religion for politics and power. You simply cannot establish the brotherhood of men while ignoring or denying the fatherhood of God. 세속주의가 본래부터 지닌 약점은 정치와 권력을 위해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서, 사람들의 형제 신분을 절대로 이룩할 수 없습니다.

195:8.12 (2082.4) Secular social and political optimism is an illusion. Without God, neither freedom and liberty, nor property and wealth will lead to peace. 세속의 사회적·정치적 낙관주의는 망상(妄想)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나 해방도, 재산이나 부요함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195:8.13 (2082.5) The complete secularization of science, education, industry, and society can lead only to disaster. During the first third of the twentieth century Urantians killed more human beings than were killed during the whole of the Christian dispensation up to that time. And this is only the beginning of the dire harvest of materialism and secularism; still more terrible destruction is yet to come. 과학, 교육, 산업, 그리고 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20세기의 초반 1/3 기간 동안, 유란시아인들은 그 때까지 기독교 섭리를 통틀어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부터 얻은 비참한 추수의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훨씬 더 끔찍한 파괴는 이제부터 다가올 것입니다.

9. Christianity’s Problem 기독교의 문제

170416 진리의 영 24 – 기독교의 문제 1 마22:31-32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1 But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have you not read what God said to you, 32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195:9.1 (2082.6) Do not overlook the value of your spiritual heritage, the river of truth running down through the centuries, even to the barren times of a materialistic and secular age. In all your worthy efforts to rid yourselves of the superstitious creeds of past ages, make sure that you hold fast the eternal truth. But be patient! when the present superstition revolt is over, the truths of Jesus’ gospel will persist gloriously to illuminate a new and better way. 너희의 영적 유산(遺産), 즉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시대의 황폐한 시절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통해 흘러 내려온 진리의 강(江)의 가치를 간과하지 말라. 지나간 시대의 미신적인 신조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확신 가운데 영원한 진리를 견고히 붙잡고 있으라. 그러나 인내하라! 미신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 끝나면, 새롭고 더 좋은 길을 조명하기 위하여, 예수 복음의 진리가 영광스럽게 지속될 것이다.

195:9.2 (2082.7) But paganized and socialized Christianity stands in need of new contact with the uncompromised teachings of Jesus; it languishes for lack of a new vision of the Master’s life on earth. A new and fuller revelation of the religion of Jesus is destined to conquer an empire of materialistic secularism and to overthrow a world sway of mechanistic naturalism. Urantia is now quivering on the very brink of one of its most amazing and enthralling epochs of social readjustment, moral quickening, and spiritual enlightenment. 그러나 이교화 되고 사회화된 기독교는 타협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과 새롭게 접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지상에서 사신 주(主)님의 일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부족하여 침체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종교가 주는 새롭고 더 충만한 계시가 물질주의적 세속주의의 제국을 정복하고,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무너뜨리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유란시아는 이제 사회적 재조정, 도덕적 소생(蘇生), 영적 깨우침에 속한 가장 놀랍고 매혹적인 시대의 그 고비에서 지금 부르르 떨고 있습니다.

195:9.3 (2082.8) The teachings of Jesus, even though greatly modified, survived the mystery cults of their birthtime, the ignorance and superstition of the dark ages, and are even now slowly triumphing over the materialism, mechanism, and secularism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such times of great testing and threatened defeat are always times of great revelation. 예수의 가르침은, 비록 크게 변경되기는 했어도, 태동될 당시의 신비 종파들,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迷信)에서 살아남았으며, 이제는 20세기의 물질주의, 기계론, 세속주의에 대하여 서서히 승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시험과 패배의 위협이 있는 시기는 항상 위대한 계시가 주어지는 시기입니다.

195:9.4 (2082.9) Religion does need new leaders, spiritual men and women who will dare to depend solely on Jesus and his incomparable teachings. If Christianity persists in neglecting its spiritual mission while it continues to busy itself with social and material problems, the spiritual renaissance must await the coming of these new teachers of Jesus’ religion who will be exclusively devoted to the spiritual regeneration of men. And then will these spirit-born souls quickly supply the leadership and inspiration requisite for the social, moral, economic, and political reorganization of the world.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들, 즉 예수님과 그의 비할 수 없는 가르침에만 감히 의존하려는 영적 남자와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적 물질적 문제에 계속 바쁜 가운데 자신의 영적 사명에 대해 지속적으로 소홀히 하면, 영적(靈的) 르네상스(부흥)는 사람들의 영적 회복에만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예수 종교의 이러한 새로운 선생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 후, 영으로-태어난 이 혼(사람)들은 세상의 사회적,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재조직에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靈感)을 신속히 공급할 것입니다.

195:9.5 (2083.1) The modern age will refuse to accept a religion which is inconsistent with facts and out of harmony with its highest conception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The hour is striking for a rediscovery of the true and original foundations of present-day distorted and compromised Christianity — the real life and teachings of Jesus. 현대는 사실과 모순되고, 진리(眞)·아름다움(美)·선(善)의 최고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것입니다. 현 시대의 왜곡되고 타협된 기독교의 참된 본래의 기초(基礎) 즉 예수님의 참된 일생과 가르침을 다시 발견할 시간의 종이 울리고 있습니다.

170423 진리의 영 25 – 기독교의 문제Christianity’s Problem 2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through whom we have gained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now stand. And we rejoice in the hope of the glory of God.

195:9.6 (2083.2) Primitive man lived a life of superstitious bondage to religious fear. Modern, civilized men dread the thought of falling under the dominance of strong religious convictions. Thinking man has always feared to be held by a religion. When a strong and moving religion threatens to dominate him, he invariably tries to rationalize, traditionalize, and institutionalize it, thereby hoping to gain control of it. By such procedure, even a revealed religion becomes man-made and man-dominated. Modern men and women of intelligence evade the religion of Jesus because of their fears of what it will do to them — and with them. And all such fears are well founded. The religion of Jesus does, indeed, dominate and transform its believers, demanding that men dedicate their lives to seeking for a knowledge of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and requiring that the energies of living be consecrated to the unselfish service of the brotherhood of man. 원시인은 종교적 두려움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현대 문명인들은 강력한 종교적 신념의 지배에 붙잡힐까봐 두려워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에 사로잡힐까봐 항상 염려해왔습니다. 강력하게 감동시키는 종교가 사람을 지배하려고 위협할 때, 그는 변함없이 그것을 합리화•전통화•제도화하려고 시도하며, 그렇게 그 종교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으로 계시된 종교까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지배하게 됩니다. 총명한 현대의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 또 그들을 가지고―무엇을 할까봐 두려움 때문에 회피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두려움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참으로, 그 신자들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는데,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애쓰도록 삶을 드리라고 요청하며, 삶의 에너지로 사람의 형제 정신에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195:9.7 (2083.3) Selfish men and women simply will not pay such a price for even the greatest spiritual treasure ever offered mortal man. Only when man has become sufficiently disillusioned by the sorrowful disappointments attendant upon the foolish and deceptive pursuits of selfishness, and subsequent to the discovery of the barrenness of formalized religion, will he be disposed to turn wholeheartedly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religion of Jesus of Nazareth. 이기적인 남자와 여자들은 이제까지 사람에게 제공된 가장 위대한 영적 보물에 대하여서도 단순히 그 값을 치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리석게 자신을 속이는 이기심(利己心)을 추구하다가 그에 따른 비참한 실망감으로 충분히 환멸을 느끼게 되고, 형식화된 종교의 황폐함을 발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나사렛 예수의 종교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195:9.8 (2083.4) The world needs more firsthand religion. Even Christianity — the best of the relig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 is not only a religion about Jesus, but it is so largely one which men experience secondhand. They take their religion wholly as handed down by their accepted religious teachers. What an awakening the world would experience if it could only see Jesus as he really lived on earth and know, firsthand, his life-giving teachings! Descriptive words of things beautiful cannot thrill like the sight thereof, neither can creedal words inspire men’s souls like the experience of knowing the presence of God. But expectant faith will ever keep the hope-door of man’s soul open for the entrance of the eternal spiritual realities of the divine values of the worlds beyond. 세상은 직접적인 종교를 더욱 필요로 합니다. 20세기에서 최상의 종교인 기독교조차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사람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인정된 종교 선생들이 전달해준 그대로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이 실제로 이 세상에 사셨던 원래 그대로의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들을, 직접적으로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큰 깨우침을 체험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는 말씀들은, 그것을 직접 보는 것만큼 전율을 줄 수 없으며, 또한 교리(敎理) 말씀도 하나님의 현존을 아는 체험만큼 사람의 혼에 영감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신앙은, 저 건너 여러 세상에서 신적 가치를 지닌 영원한 영적 실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람의 혼 안에서 희망의-문을 언제나 열어 놓을 것입니다.

195:9.9 (2083.5) Christianity has dared to lower its ideals before the challenge of human greed, war-madness, and the lust for power; but the religion of Jesus stands as the unsullied and transcendent spiritual summons, calling to the best there is in man to rise above all these legacies of animal evolution and, by grace, attain the moral heights of true human destiny. 기독교는 인간의 탐욕, 전쟁의 광기, 그리고 권력을 얻으려는 욕망의 도전 앞에서 자신의 이상(理想)을 과감히 낮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종교는 동물적 진화의 이 모든 유산들을 넘어서서 사람 안에 있는 최상의 것을 향하여, 은혜로써,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정상에 도달하라고 외치면서, 순결하고 초월적인 영적 호소로 서 있습니다.

195:9.10 (2083.6) Christianity is threatened by slow death from formalism, overorganization, intellectualism, and other nonspiritual trends. The modern Christian church is not such a brotherhood of dynamic believers as Jesus commissioned continuously to effect the spiritual transformation of successive generations of mankind. 기독교는 형식주의, 지나친 조직화, 주지주의(主知主義), 그리고 다른 비(非)영적 경향들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 교회는 예수께서 연속된 인류 세대를 지속적으로 영적 변환을 발휘하도록 임명한, 그런 역동적 신자들의 형제 신분이 아닙니다.

195:9.11 (2083.7) So-called Christianity has become a social and cultural movement as well as a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The stream of modern Christianity drains many an ancient pagan swamp and many a barbarian morass; many olden cultural watersheds drain into this present-day cultural stream as well as the high Galilean tablelands which are supposed to be its exclusive source. 소위 기독교는 종교적인 믿음과 관습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운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흐름은 많은 고대 이교도의 늪과 야만적 습지(濕地)에서 물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은 옛 문화의 분수령이 그 순전히 그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갈릴리 고원(高原)은 물론 이 현대 문화의 물줄기 안으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10. The Future 앞 날

170430 진리의 영 26 – 앞 날 1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195:10.1 (2084.1) Christianity has indeed done a great service for this world, but what is now most needed is Jesus. The world needs to see Jesus living again on earth in the experience of spirit-born mortals who effectively reveal the Master to all men. It is futile to talk about a revival of primitive Christianity; you must go forward from where you find yourselves. Modern culture must become spiritually baptized with a new revelation of Jesus’ life and illuminated with a new understanding of his gospel of eternal salvation. And when Jesus becomes thus lifted up, he will draw all men to himself. Jesus’ disciples should be more than conquerors, even overflowing sources of inspiration and enhanced living to all men. Religion is only an exalted humanism until it is made divine by the discovery of the reality of the presence of God in personal experience. 기독교는 이 세상을 위해 정말로 위대한 봉사를 해왔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세상이 필요한 것은 지상에서 다시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며, 주(主)님은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체험적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납니다.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말하는 것은 무익합니다. 너희는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느니라. 현대 문화는 예수 일생의 새로운 계시로 영적 세례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주는 예수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빛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높이 들려질 때, 그는 자신에게로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복자 그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靈感)과 증진된 생활의 흘러넘치는 근원까지도 되어야만 합니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 현존의 실체를 발견하여 신성하게 되기 전에는 단지 고양된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불과합니다.

195:10.2 (2084.2) The beauty and sublimity, the humanity and divinity, the simplicity and uniqueness, of Jesus’ life on earth present such a striking and appealing picture of man-saving and God-revealing that the theologians and philosophers of all time should be effectively restrained from daring to form creeds or create theological systems of spiritual bondage out of such a transcendental bestowal of God in the form of man. In Jesus the universe produced a mortal man in whom the spirit of love triumphed over the material handicaps of time and overcame the fact of physical origin.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인간성과 신성, 소박함과 독특성은 그렇게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을-계시하는 놀라운 매력적인 장면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시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그렇게 사람 모습의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속박하는 교리를 형성하거나 신학적 체계를 만들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제지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주는 인간을 만들었으며, 그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의 영은 시간의 물질적 장애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물리적 기원의 사실을 극복했습니다.

195:10.3 (2084.3) Ever bear in mind — God and men need each other. They are mutually necessary to the full and final attainment of eternal personality experience in the divine destiny of universe finality.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들은 우주 최종의 신적 운명에 있어서 영원한 고유성 체험을 충분히 최종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195:10.4 (2084.4)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was probably the greatest pronouncement Jesus ever made, next to the declaration that his Father is a living and loving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아마도,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 사랑의 영이라는 선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일찍이 행하신 가장 위대한 선언(宣言)이었습니다.

195:10.5 (2084.5) In winning souls for the Master, it is not the first mile of compulsion, duty, or convention that will transform man and his world, but rather the second mile of free service and liberty-loving devotion that betokens the Jesusonian reaching forth to grasp his brother in love and sweep him on under spiritual guidance toward the higher and divine goal of mortal existence. Christianity even now willingly goes the first mile, but mankind languishes and stumbles along in moral darkness because there are so few genuine second-milers — so few professed followers of Jesus who really live and love as he taught his disciples to live and love and serve. 주(主)를 위한 혼(사람)들을 얻기 위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요나 의무나 관습으로 처음 1km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낌없이 봉사하며 자발적 사랑의 헌신으로 1km를 더 가는 것이며,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 사랑으로 형제를 붙잡고, 인간 존재로서 더 높고 신적인 목표를 향해 영적 인도를 받도록 이끄는 예수 공동체(Jesusonian)를 나타냅니다. 기독교는 지금도 기꺼이 처음에는 1km를 나아가지만, 진정으로 두 번째 1km를 더 내딛는 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도덕적 암흑 가운데에서 시들어 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살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정말 살고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95:10.6 (2084.6) The call to the adventure of building a new and transformed human society by means of the spiritual rebirth of Jesus’ brotherhood of the kingdom should thrill all who believe in him as men have not been stirred since the days when they walked about on earth as his companions in the flesh. 하나님 나라의 예수 형제 신분으로서 영적으로 거듭나 새롭게 변환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의 부름을 받으면, 육신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 땅 위에서 거닐었던 시절 이후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감동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은 기쁨으로 떨릴 것입니다.

170507 진리의 영 27 – 앞 날 2 마12: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Jesus knew their thoughts and said to them, “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ruined, and every city or household divided against itself will not stand.
195:10.7 (2084.7) No social system or political regime which denies the reality of God can contribute in any constructive and lasting manner to the advancement of human civilization. But Christianity, as it is subdivided and secularized today, presents the greatest single obstacle to its further advancement; especially is this true concerning the Orient. 하나님의 실체를 부인(否認)하는 사회적 체계나 정치적 제도는 인간 문명의 진보에 건설적이며 지속적인 어떤 방법으로도 기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되어 그것이 더욱 진보하는데 가장 큰 유일한 장애가 됩니다. 특별히 이것은 동양에 관해 참말입니다.

195:10.8 (2084.8) Ecclesiasticism is at once and forever incompatible with that living faith, growing spirit, and firsthand experience of the faith-comrades of Jesus in the brotherhood of man in the spiritual association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praiseworthy desire to preserve traditions of past achievement often leads to the defense of outgrown systems of worship. The well-meant desire to foster ancient thought systems effectually prevents the sponsoring of new and adequate means and methods designed to satisfy the spiritual longings of the expanding and advancing minds of modern men. Likewise, the Christian churches of the twentieth century stand as great, but wholly unconscious, obstacles to the immediate advance of the real gospel — the teachings of Jesus of Nazareth. 교회 중심주의는 동시에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신앙, 성장하는 영, 그리고 하늘나라의 영적 연합으로 사람의 형제신분을 이루는 예수님의 신앙-동료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거 업적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칭찬할 만한 욕망은 종종 낡은 경배 체계의 방어로 이끌립니다. 고대(古代) 사상 체계들을 육성하려는 선의의 욕망은, 현대인들의 확장되며 진보하는 영적 갈망을 채우도록 고안된, 새롭고 적절한 수단과 방법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방해합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기독교 교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참된 복음 –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들의 즉각적 진보에 커다란 장애물로 서 있습니다.

195:10.9 (2085.1) Many earnest persons who would gladly yield loyalty to the Christ of the gospel find it very difficult enthusiastically to support a church which exhibits so little of the spirit of his life and teachings, and which they have been erroneously taught he founded. Jesus did not found the so-called Christian church, but he has, in every manner consistent with his nature, fostered it as the best existent exponent of his lifework on earth. 복음의 그리스도에게 기쁨으로 충성하려는 진지한 여러 사람들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의 정신spirit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를 열심히 지지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며, 그들은 그런 교회를 그가 세웠다고 잘못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소위 기독교 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본성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그의 지상 일생의 일에 대해 존재하는 최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습니다.

195:10.10 (2085.2) If the Christian church would only dare to espouse the Master’s program, thousands of apparently indifferent youths would rush forward to enlist in such a spiritual undertaking, and they would not hesitate to go all the way through with this great adventure. 기독교 교회가 주(主)님의 계획(프로그램)을 감히 지지하기만 한다면, 언뜻 보기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영적 약속에 참여하려고 앞으로 몰려들 것이며, 그들은 이 커다란 모험을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195:10.11 (2085.3) Christianity is seriously confronted with the doom embodied in one of its own slogans: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The non-Christian world will hardly capitulate to a sect-divided Christendom. The living Jesus is the only hope of a possible unification of Christianity. The true church — the Jesus brotherhood — is invisible, spiritual, and is characterized by unity, not necessarily by uniformity. Uniformity is the earmark of the physical world of mechanistic nature. Spiritual unity is the fruit of faith union with the living Jesus. The visible church should refuse longer to handicap the progress of the invisible and spiritual brotherhood of the kingdom of God. And this brotherhood is destined to become a living organism in contrast to an institutionalized social organization. It may well utilize such social organizations, but it must not be supplanted by them. 기독교는, “스스로 분쟁하는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는 자신이 지닌 표어(標語) 중 하나에 담겨 있는 운명에 심각하게 직면해 있습니다. 비(非) 기독교 세계는 종파로 나뉜 기독교계에 좀처럼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기독교 통일이 가능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참된 교회 – 예수님의 형제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어쩔 수 없는 획일성이 아니라, 통일성의 특징을 지닙니다. 획일성은 기계적 성질을 지닌 물리적 세계의 표시입니다. 영적 통일은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신앙적 연합의 열매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형제신분을 진전시키는 데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신분은 제도화된 사회 조직과는 대조로, 살아있는 유기체가 될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회 조직들을 잘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에게 결코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195:10.12 (2085.4) But the Christianity of even the twentieth century must not be despised. It is the product of the combined moral genius of the God-knowing men of many races during many ages, and it has truly been one of the greatest powers for good on earth, and therefore no man should lightly regard it, notwithstanding its inherent and acquired defects. Christianity still contrives to move the minds of reflective men with mighty moral emotions. 그러나 20세기의 기독교라고 해도 무시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여러 종족 중에서 하나님을-아는 사람들이 통합된 도덕적 진수(眞髓)의 산물이며, 진실로 지상에서 선(善)을 위한 가장 큰 세력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것이 선천적이며 후천적인 결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구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강한 도덕적 감정으로 반성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195:10.13 (2085.5) But there is no excuse for the involvement of the church in commerce and politics; such unholy alliances are a flagrant betrayal of the Master. And the genuine lovers of truth will be slow to forget that this powerful institutionalized church has often dared to smother newborn faith and persecute truth bearers who chanced to appear in unorthodox raiment. 그러나 교회가 상업(商業)과 정치에 관련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부정(不淨)한 관계는 주(主)님에 대한 극악무도한 배반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순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종종 새로 태어난 신앙을 감히 질식시키며, 정통이 아닌 차림으로 우연히 나타난 진리의 사자(使者)들을 박해해왔음을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195:10.14 (2085.6) It is all too true that such a church would not have survived unless there had been men in the world who preferred such a style of worship. Many spiritually indolent souls crave an ancient and authoritative religion of ritual and sacred traditions. Human evolution and spiritual progress are hardly sufficient to enable all men to dispense with religious authority. And the invisible brotherhood of the kingdom may well include these family groups of various social and temperamental classes if they are only willing to become truly spirit-led sons of God. But in this brotherhood of Jesus there is no place for sectarian rivalry, group bitterness, nor assertions of moral superiority and spiritual infallibility. 세상에 그러한 형태의 경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한 많은 사람들은 의식(儀式)적이고 신성한 전통(傳統)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권위적 종교를 갈망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 권위가 없이 지내도록 만들기에는 인간의 진화와 영적 진보가 도무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형제신분은 여러 사회적 기질적 등급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가족 단체가 진실로 영으로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되려고만 한다면, 그들을 포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형제신분에는, 그 어떤 종파적 경쟁이나 집단적 원한 또는 도덕적 우월성과 영적 무오성(無誤性)에 대한 주장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170514 진리의 영 28 – 앞 날 3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But he said, “I must preach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towns also, because that is why I was sent.”

195:10.15 (2086.1) These various groupings of Christians may serve to accommodate numerous different types of would-be believers among the various peoples of Western civilization, but such division of Christendom presents a grave weakness when it attempts to carry The Gospel of Jesus to Oriental peoples. These races do not yet understand that there is a religion of Jesus separate, and somewhat apart, from Christianity, which has more and more become a religion about Jesus.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다양한 집단화(集團化)는 서방 문명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신자가 되려고 하는 수많은 다른 유형을 받아들이는 일에 기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계의 분열은, 예수님의 복음을 동양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심각한 약점을 제공합니다. 이 종족들은, 점점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고 있는 기독교와는 얼마큼 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10.16 (2086.2) The great hope of Urantia lies in the possibility of a new revelation of Jesus with a new and enlarged presentation of his saving message which would spiritually unite in loving service the numerous families of his present-day professed followers. 유란시아의 위대한 희망은 예수님의 계시를 새롭게 드러내는 가능성에 달려 있는데, 이 계시는,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추종자 집단들을 사랑의 봉사를 통해 영적으로 연합시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유익한 메시지를 새롭게 확대하여, 함께 제시되어야 합니다.

195:10.17 (2086.3) Even secular education could help in this great spiritual renaissance if it would pay more attention to the work of teaching youth how to engage in life planning and character progression. The purpose of all education should be to foster and further the supreme purpose of life, the development of a majestic and well-balanced personality. There is great need for the teaching of moral discipline in the place of so much self-gratification. Upon such a foundation religion may contribute its spiritual incentive to the enlargement and enrichment of mortal life, even to the security and enhancement of life eternal. 세속적 교육이라도, 청년들에게 인생 계획과 인격 진보를 시작하도록 더 많이 주의를 기울여 가르치려고 한다면, 이 위대한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삶의 최대의 목적, 즉 훌륭하게 균형이 잡힌 고유성(개인성)을 개발하고 더욱 육성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 대신에 도덕적 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합니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종교는 필사 인간의 생활이 확대되고 풍성하며,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강화시키는 영적 자극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195:10.18 (2086.4) Christianity is an extemporized religion, and therefore must it operate in low gear. High-gear spiritual performances must await the new revelation and the more general acceptance of the real religion of Jesus. But Christianity is a mighty religion, seeing that the commonplace disciples of a crucified carpenter set in motion those teachings which conquered the Roman world in three hundred years and then went on to triumph over the barbarians who overthrew Rome. This same Christianity conquered — absorbed and exalted — the whole stream of Hebrew theology and Greek philosophy. And then, when this Christian religion became comatose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as a result of an overdose of mysteries and paganism, it resurrected itself and virtually reconquered the whole Western world. Christianity contains enough of Jesus’ teachings to immortalize it. 기독교는 급조(急造)된 종교이므로, 저속(低速) 기어로 작용되어야만 합니다. 고속 기어의 영적 실행들은 예수님의 참 종교가 새롭게 계시되고, 더욱 널리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저들의 가르침을 시작하여 300년 안에 로마세계를 정복하고, 그 후에 계속하여, 로마를 타도한 야만인들까지 이겨낸 것을 보면,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바로 이 기독교가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헬라) 철학의 전체 흐름을 흡수하고 향상시켜 정복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기독교 종파는 신비종파와 이교(異敎)도에 지나치게 빠져든 결과로 1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혼수상태에 놓였을 때, 기독교는 스스로 다시 일어나 실질적으로 서방 세계 전체를 다시 정복했습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불멸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195:10.19 (2086.5) If Christianity could only grasp more of Jesus’ teachings, it could do so much more in helping modern man to solve his new and increasingly complex problems.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더 많이 파악할 수만 있다면, 현대인들이 새롭게 증가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더욱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5:10.20 (2086.6) Christianity suffers under a great handicap because it has become identified in the minds of all the world as a part of the social system, the industrial life, and the moral standards of Western civilization; and thus has Christianity unwittingly seemed to sponsor a society which staggers under the guilt of tolerating science without idealism, politics without principles, wealth without work, pleasure without restraint, knowledge without character, power without conscience, and industry without morality. 기독교는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서방 문명의 사회 체계, 산업 생활, 그리고 도덕 기준의 일부로서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에 커다란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독교는 뜻하지 않게, 이상주의가 없는 과학,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는 재물, 억제되지 않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양심 없는 권력 그리고 도덕성이 없는 산업을 묵인(黙認)하는 범죄 아래에서 비틀거리는 사회를 후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5:10.21 (2086.7) The hope of modern Christianity is that it should cease to sponsor the social systems and industrial policies of Western civilization while it humbly bows itself before the cross it so valiantly extols, there to learn anew from Jesus of Nazareth the greatest truths mortal man can ever hear — the living gospel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을 후원하는 일을 중지해야만 하며, 동시에 기독교는 자신이 그렇게 대담하게 극찬하는 십자가(十字架)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거기에서 나사렛 예수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들을 수 있던 가장 위대한 진리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신분이라는 살아있는 복음을 새롭게 배우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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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40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12사도의 임직(任職)

Paper 140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12사도의 임직(任職)

1. Preliminary Instruction 예비 교육
2. The Ordination 임직
3. The Ordination Sermon 임직 설교
The “Sermon on the Mount” “산상 설교”
4.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와 형제의 사랑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 the humble…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공의(公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meek… 온유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pure in heart…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mourn…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merciful… 긍휼이 여기는 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 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분쟁 조정자)는 행복하도다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도다
6. The Evening of the Ordination 성직 임명일 저녁
“I look beyond the act…” “나는 행위 너머를 보느니라.”
Concerning divorcement 이혼에 관하여
Justice and mercy 정의(正義)와 자비
“They do well — trouble them not.” “그들은 잘하고 있으니 – 그냥 두어라.”
7. The Week Following the Ordination 성직 임명 다음 주간
8. Thursday Afternoon on the Lake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 Doing the Father’s Will 아버지의 뜻을 행함
(2) Political attitude 정치적 태도
(3) Social attitude 사회적 태도
(4) Economic attitude 경제적 태도
(5) Personal religion 개인적 종교
9. The Day of Consecration 성직 봉헌(奉獻)일
10. The Evening After the Consecration 봉헌일 저녁

12사도의 임직 예비 교육 마8:11-12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1 I say to you that many will come from the east and the west, and will take their places at the feast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in the kingdom of heaven. 12 But the subjects of the kingdom will be thrown outside, into the darkness, where there will be weeping and gnashing of teeth.”

140:0.1 (1568.1) JUST before noon on Sunday, January 12, A.D. 27, Jesus called the apostles together for their ordination as public preacher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twelve were expecting to be called almost any day; so this morning they did not go out far from the shore to fish. Several of them were lingering near the shore repairing their nets and tinkering with their fishing paraphernalia.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정오 직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공적 설교자들로 임직(任職직무를 맡김)하려고 사도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12 사도들은 거의 어느 때나 소명(召命불러주심)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고기 잡으러 호숫가에서 멀리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그물 손질과 고기잡이 도구의 수선 작업을 하며 호숫가 근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140:0.2 (1568.2) As Jesus started down the seashore calling the apostles, he first hailed Andrew and Peter, who were fishing near the shore; next he signaled to James and John, who were in a boat near by, visiting with their father, Zebedee, and mending their nets. Two by two he gathered up the other apostles, and when he had assembled all twelve, he journeyed with them to the highlands north of Capernaum, where he proceeded to instruct them in preparation for their formal ordination. 예수님은 호숫가로 내려가기 시작하시면서 사도들을 부르셨는데, 첫째 안드레와 베드로를 큰 소리로 불렀는데 그들은 호숫가 근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을 하셨는데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근처 배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둘씩 다른 사도들을 모았으며, 12사도를 다 모아 가버나움 북쪽 고지로 여행하셨고, 거기에서 그는 공식 임직 준비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40:0.3 (1568.3) For once all twelve of the apostles were silent; even Peter was in a reflective mood. At last the long-waited-for hour had come! They were going apart with the Master to participate in some sort of solemn ceremony of personal consecration and collective dedication to the sacred work of representing their Master in the proclamation of the coming of his Father’s kingdom. 일단 열 두 사도들 모두 침묵했으며 베드로조차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래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다가온 예수님의 아버지 나라를 선포하면서 주님을 대표하는 신성한 사명에 개인적으로 봉헌하고 집단적으로 헌신하는 엄숙한 예식에 참여하려고 주님과 떨어져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 Preliminary Instruction 예비 교육

140:1.1 (1568.4) Before the formal ordination service Jesus spoke to the twelve as they were seated about him: “My brethren, this hour of the kingdom has come. I have brought you apart here with me to present you to the Father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Some of you heard me speak of this kingdom in the synagogue when you first were called. Each of you has learned more about the Father’s kingdom since you have been with me working in the cities around about the Sea of Galilee. But just now I have something more to tell you concerning this kingdom. 정식 임직(任職) 예배 전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자신 주위에 앉히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 (하나님) 나라가 왔느니라. 나는 너희를 아버지께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로 소개하려고 나와 함께 여기에 따로 데려왔느니라. 너희 중 일부는 처음 부름 받았을 때 회당에서 이 나라 대해 내 말을 들었느니라. 너희는 갈릴리 바다 근처 인근 도시들에서 나와 함께 일해 왔던 지금까지 너희 각자는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더 배웠느니라.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나라에 대해 너희에게 말할 것이 더 있노라.

140:1.2 (1568.5) “The new kingdom which my Father is about to set up in the hearts of his earth children is to be an everlasting dominion. There shall be no end of this rule of my Father in the hearts of those who desire to do his divine will. I declare to you that my Father is not the God of Jew or gentile. Many shall come from the east and from the west to sit down with us in the Father’s kingdom, while many of the children of Abraham will refuse to enter this new brotherhood of the rule of the Father’s spirit in the hearts of the children of men. “내 아버지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의 심정에 바로 세우실 새 나라는 불후(현재부터 미래까지 없어지지 않을)의 영토가 될 것이다. 그(아버지)의 신적 뜻을 행하려는 자들의 심정에서 내 아버지의 이 다스림은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자리하는 반면에, 아브라함의 많은 자녀들은 사람 자녀들의 심정에서 다스리는 아버지의 영의 이 새로운 형제 됨에 들어가기를 거절할 것이다.

140:1.3 (1568.6) “The power of this kingdom shall consist, not in the strength of armies nor in the might of riches, but rather in the glory of the divine spirit that shall come to teach the minds and rule the hearts of the reborn citizens of this heavenly kingdom, the sons of God. This is the brotherhood of love wherein righteousness reigns, and whose battle cry shall be: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to all men. This kingdom, which you are so soon to go forth proclaiming, is the desire of the good men of all ages, the hope of all the earth, and the fulfillment of the wise promises of all the prophets. “이 나라의 권능은 군사력이나 부(富)의 세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하늘나라의 거듭난 시민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가르치고, 심정을 다스리려고 오실 신적 영의 영광에 있느니라. 이것이 사랑의 형제 됨이며, 그 안에는 공의(公義)가 다스리고 그 슬로건은 ‘세상에는 평화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한 뜻이라.’ 너희가 곧 나가서 선포할 이 나라는 모든 세대의 선한 이들의 바램이고, 온 세상의 희망이며, 모든 선지자들의 지혜로운 약속들의 성취이니라.

12사도의 임직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140:1.4 (1569.1) “But for you, my children, and for all others who would follow you into this kingdom, there is set a severe test. Faith alone will pass you through its portals, but you must bring forth the fruits of my Father’s spirit if you would continue to ascend in the progressive life of the divine fellowship. Verily, verily, I say to you, not every one who says, ‘Lord, Lord,’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rather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그러나 나의 자녀들아, 너희와 이 나라로 너희를 따라오려는 모든 이들에게 엄한 시험이 놓여 있다. 오직 신앙faith으로 너희가 하나님 나라의 정문을 통과하겠지만, 너희가 신적 교제의 진보적 일생에서 계속 상승하려면, 너희는 내 아버지의 영(靈)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140:1.5 (1569.2) “Your message to the world shall be: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in finding these, all other things essential to eternal survival shall be secured therewith. And now would I make it plain to you that this kingdom of my Father will not come with an outward show of power or with unseemly demonstration. You are not to go hence 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saying, ‘it is here’ or ‘it is there,’ for this kingdom of which you preach is God within you. “세상에 전할 너희 메시지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공의(公義)를 구하라, 이것들을 찾으면서, 영원한 생존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이 그와 함께 확보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노니, 내 아버지의 이 나라는 권력의 외적 과시나 흉한 증거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갈 때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전하는 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40:1.6 (1569.3) “Whosoever would become great in my Father’s kingdom shall become a minister to all; and whosoever would be first among you, let him become the server of his brethren. But when you are once truly received as citizens in the heavenly kingdom, you are no longer servants but sons, sons of the living God. And so shall this kingdom progress in the world until it shall break down every barrier and bring all men to know my Father and believe in the saving truth which I have come to declare. Even now is the kingdom at hand, and some of you will not die until you have seen the reign of God come in great power.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자기 형제들의 시중드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일단 진실로 하늘나라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면, 너희는 더 이상 종들이 아니라, 아들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들이 내 아버지를 알도록 하며 내가 선포하러 온 구원의 진리를 믿게 될 때까지, 세상에서 진보하리라. 심지어 지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 중 일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가 큰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140:1.7 (1569.4) “And this which your eyes now behold, this small beginning of twelve commonplace men, shall multiply and grow until eventually the whole earth shall be filled with the praise of my Father. And it will not be so much by the words you speak as by the lives you live that men will know you have been with me and have learned of the realities of the kingdom. And while I would lay no grievous burdens upon your minds, I am about to put upon your souls the solemn responsibility of representing me in the world when I shall presently leave you as I now represent my Father in this life which I am living in the flesh.” And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he stood up. “그리고 너희 눈으로 지금 보는 이것, 평범한 열두 명의 이 미약한 출발이, 결국 온 땅이 내 아버지의 찬미로 가득할 때까지, 늘어나고 성장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전하는 말보다 너희가 사는 삶으로, 사람들은 너희가 나와 함께 있어서 그 나라의 실체를 배웠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 생으로 지금 아버지를 대표하듯이, 내가 곧 너희를 떠날 때, 세상에 나를 나타내는 엄숙한 책임을 너희 혼에 지워주려 하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2. The Ordination 임직

140:2.1 (1569.5) Jesus now instructed the twelve mortals who had just listened to his declaration concerning the kingdom to kneel in a circle about him. Then the Master placed his hands upon the head of each apostle, beginning with Judas Iscariot and ending with Andrew. When he had blessed them, he extended his hands and prayed: 예수님은 이제, 나라에 관한 자신의 선언을 바로 들은 12 필사자들에게 자기 주위에 원을 그리며 무릎을 꿇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후, 주(主)님은 가룟 유다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안드레까지, 각 사도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축복하신 후, 손을 뻗어 기도하셨습니다.

140:2.2 (1569.6) “My Father, I now bring to you these men, my messengers. From among our children on earth I have chosen these twelve to go forth to represent me as I came forth to represent you. Love them and be with them as you have loved and been with me. And now, my Father, give these men wisdom as I place all the affairs of the coming kingdom in their hands. And I would, if it is your will, tarry on earth a time to help them in their labors for the kingdom. And again, my Father, I thank you for these men, and I commit them to your keeping while I go on to finish the work you have given me to do.” “내 아버지, 저는 이제 저의 메신저들인 이들을 당신 앞에 데려왔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대표하려고 온 것처럼, 저를 대신하여 내보내려고 세상의 우리 자녀들 중에서 열둘을 제가 택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셔서 함께 했듯이, 그들을 사랑하고 함께 하소서. 그리고 이제 아버지여,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직무들을 저들의 손에 맡기오니, 이 사람들에게 지혜(智慧)를 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할 저들을 도우려고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내 아버지여, 이들로 인해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께서 제가 하도록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계속하는 동안 저들을 당신의 보호 아래에 맡깁니다.”

140:2.3 (1570.1) When Jesus had finished praying, the apostles remained each man bowed in his place. And it was many minutes before even Peter dared lift up his eyes to look upon the Master. One by one they embraced Jesus, but no man said aught. A great silence pervaded the place while a host of celestial beings looked down upon this solemn and sacred scene — the Creator of a universe placing the affairs of the divine brotherhood of man under the direction of human minds.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자, 사도들은 각자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한동안 감히 눈을 들어 주(主)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한 명씩 예수님과 포옹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천상존재들의 무리가 이 엄숙하고 신성한 – 우주의 창조자가 사람의 신적 형제 됨의 직무들을 인간 마음의 지도 아래에 맡기시는-장면을 내려다보는 동안, 그 곳은 깊은 침묵이 가득 찼습니다.

3. The Ordination Sermon 임직 설교

임직설교1 마5:1-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And seeing the multitudes, he went up into a mountain: and when he was set, his disciples came unto him: 2 And he opened his mouth, and taught them, saying, 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4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6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10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1 Blessed are ye,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for my sake. 12 Rejoice, and be exceeding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so persecuted they the prophets which were before you. 13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14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15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th light unto all that are in the house. 16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KJV).

140:3.1 (1570.2) Then Jesus spoke, saying: “Now that you are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you have thereby become a class of men separate and distinct from all other men on earth. You are not now as men among men but as the enlightened citizens of another and heavenly country among the ignorant creatures of this dark world. It is not enough that you live as you were before this hour, but henceforth must you live as those who have tasted the glories of a better life and have been sent back to earth as ambassadors of the Sovereign of that new and better world. Of the teacher more is expected than of the pupil; of the master more is exacted than of the servant. Of the citizens of the heavenly kingdom more is required than of the citizens of the earthly rule. Some of the things which I am about to say to you may seem hard, but you have elected to represent me in the world even as I now represent the Father; and as my agents on earth you will be obligated to abide by those teachings and practices which are reflective of my ideals of mortal living on the worlds of space, and which I exemplify in my earth life of revealing the Father who is in heaven.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들이며, 따라서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고 구별된 부류의 사람들이 되었느니라. 이제 너희는 사람들 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두운 이 세상의 무지한 창조물 중에서, 또 다른 하늘나라의 계몽된 시민들이니라. 너희는 이 시간 이전에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으니, 이후로는 새롭게 더 나은 그 세계의 주권자의 대사들처럼 더 나은 일생의 영광을 맛보고 지상에 다시 파송된 자들처럼 살아야만 하느니라. 학생보다 선생이 더 많이 하도록 요청되며, 하인보다 주인에게 더 많이 요구되느니라. 땅의 통치에 속한 시민들보다 하늘나라의 시민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려는 어떤 것들은 어렵게 보일지 모르나, 내가 지금 아버지를 대신하듯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신하도록 선택되었느니라. 땅에서 나의 대리자들로서 너희는, 공간 세계들에서 필사자 생활에 대한 내 관념을 반영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계시하는 내 지상 생활로 본을 보이는, 그런 가르침들과 실천들로 살아야할 의무가 있으리라.

140:3.2 (1570.3) “I send you forth to proclaim liberty to the spiritual captives, joy to those in the bondage of fear, and to heal the sick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When you find my children in distress, speak encouragingly to them, saying: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적 포로들에게 해방을, 두려움에 묶인 자들에게 기쁨을 선포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도록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가 곤란 중에 있는 내 자녀를 보거든, 다음의 말로 그들을 격려하라.

140:3.3 (1570.4)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the humble, for theirs are the treasures of the kingdom of heaven.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의 보물들이 그들의 것임이요.

140:3.4 (1570.5)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공의(公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채워질 것임이요.

140:3.5 (1570.6) “Happy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140:3.6 (1570.7) “Happy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140:3.7 (1570.8) “And even so speak to my children these further words of spiritual comfort and promise: “그리고 내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영적 위로와 약속의 이 말들을 더욱 일러 주어라.

140:3.8 (1570.9) “Happy are they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Happy are they who weep, for they shall receive the spirit of rejoicing.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기쁨의 영(靈)을 받을 것임이요.

140:3.9 (1570.10) “Happy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40:3.10 (1570.11) “Happy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sons of God. “화평케 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40:3.11 (1570.12)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Happy are you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Rejoice and be exceedingly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공의(公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3.12 (1570.13) “My brethren, as I send you forth,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salt with a saving savor. But if this salt has lost its savo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rodden under foot of men. “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내보낼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니라. 그러나 만일 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0:3.13 (1570.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upon a hill cannot be hid.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be led to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그리고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그렇게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인도하라.

임직설교2 마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8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these things, the crowds were amazed at his teaching, 29 because he taught as one who had authority, and not as their teachers of the law.

140:3.14 (1571.1) “I am sending you out into the world to represent me and to act as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and as you go forth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put your trust in the Father whose messengers you are. Do not forcibly resist injustice; put not your trust in the arm of the flesh. If your neighbor smit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Be willing to suffer injustice rather than to go to law among yourselves. In kindness and with mercy minister to all who are in distress and in need. “나를 대표하고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 행하도록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니, 너희가 나가서 기쁜 소식을 선포할 때, 너희를 사자(使者메신저)로 보내신 아버지를 신뢰하라. 불의(不義)에 억지로 힘으로 저항하지 말고; 육신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 네 이웃이 네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그에게 돌려대라. 너희 사이에 법에 호소하기보다는 불의(不義)를 기꺼이 당하라. 친절과 자비로, 곤란과 곤궁에 처한 모든 이들을, 섬기라.

140:3.15 (1571.2)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and pray for those who despitefully use you. And whatsoever you believe that I would do to men, do you also to them.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너희를 악의로 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행하리라고 너희가 믿는 대로, 너희 또한 그들에게 행하라.

140:3.16 (1571.3) “Your Father in heaven makes the sun to shine on the evil as well as upon the good; likewise he sends rain on the just and the unjust. You are the sons of God; even more, you are now the ambassadors of my Father’s kingdom. Be merciful, even as God is merciful, and in the eternal future of the kingdom you shall be perfect, even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선한 자들뿐만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게도 해를 비춰주신다. 마찬가지로 옳거나 그른 모든 자들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게다가 너희는 지금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들이다. 하나님이 자비하시듯이 자비하며, 너희 하늘 아버지가 완전하듯이, 나라의 영원한 미래에 너희는 완전해지리라.

140:3.17 (1571.4) “You are commissioned to save men, not to judge them. At the end of your earth life you will all expect mercy; therefore do I require of you during your mortal life that you show mercy to all of your brethren in the flesh. Make not the mistake of trying to pluck a mote out of your brother’s eye when there is a beam in your own eye. Having first cast the beam out of your own eye, you can the better see to cast the mote out of your brother’s eye. “너희는 심판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하도록 임명되었느니라. 너희 지상 생애의 끝에 너희 모두 자비를 기대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노니, 너희 필사 생애 동안 너희는 네 모든 육신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보이라. 네 눈에 들보가 있는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뽑으려고 실수하지 말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뽑아내야, 네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뺄 수 있게 잘 볼 수 있으리라.

140:3.18 (1571.5) “Discern the truth clearly; live the righteous life fearlessly; and so shall you be my apostles and my Father’s ambassadors. You have heard it said: ‘If the blind lead the blind, they both shall fall into the pit.’ If you would guide others into the kingdom, you must yourselves walk in the clear light of living truth. In all the business of the kingdom I exhort you to show just judgment and keen wisdom. Present not that which is holy to dogs, neither cast your pearls before swine, lest they trample your gems under foot and turn to rend you. “진리를 선명히 분별하라. 두려워 말고 공의(公義)의 삶을 살라. 그러면 너희는 나의 사도들과 내 아버지의 대사들이 되리라. 너희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 들었느니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려면, 너희 스스로 살아있는 진리의 선명한 빛으로 걸어가야만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에서 내가 권하노니, 너희는 올바른 판단과 명민한 지혜를 보이라. 개들과 돼지들이 너희 보물들을 발로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지 않도록,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들을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140:3.19 (1571.6) “I warn you against false prophets who will come to you in sheep’s clothing, while on the inside they are as ravening wolves. By their fruits you shall know them. Do men gather grapes from thorns or figs from thistles? Even so, every good tree brings forth good fruit, but the corrupt tree bears evil fruit. A good tree cannot yield evil fruit, neither can a corrupt tree produce good fruit. Every tree that does not bring forth good fruit is presently hewn down and cast into the fire. In gaining an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it is the motive that counts. My Father looks into the hearts of men and judges by their inner longings and their sincere intentions.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속에는 탐욕스러운 늑대들이니라. 그들의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리라.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더냐? 그래도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부패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부패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생산할 수도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즉시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동기(動機행위의 원인)로 평가되느니라. 내 아버지는 사람의 심정을 들여다보시고, 그들 내면의 갈망과 진실한 의도들을 판단하시니라.

140:3.20 (1571.7) “In the great day of the kingdom judgment, many will say to me,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by your name do many wonderful works?’ But I will be compelled to say 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ou who are false teachers.’ But every one who hears this charge and sincerely executes his commission to represent me before men even as I have represented my Father to you, shall find an abundant entrance into my service and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ly Father.” “(하나님) 나라 심판의 큰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고, 당신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니, 거짓 교사들인 너희는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나 이 명령을 듣고, 내가 아버지를 너희에게 나타내듯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나타내라는 임무를 진정으로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섬기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풍족히 들어가리라.”

140:3.21 (1571.8) Never before had the apostles heard Jesus speak in this way, for he had talked to them as one having supreme authority.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bout sundown, but no man asked Jesus a question. 예수께서 최극 권세를 지닌 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해 질 무렵 산에서 내려왔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4.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140:4.1 (1572.1) The so-called “Sermon on the Mount” is not The Gospel of Jesus . It does contain much helpful instruction, but it was Jesus’ ordination charge to the twelve apostles. It was the Master’s personal commission to those who were to go on preaching the gospel and aspiring to represent him in the world of men even as he was so eloquently and perfectly representative of his Father.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유익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임직하는 열 두 사도들에게 주신 훈시였습니다. 그것은 주(主)님께서 그렇게 생생하고 완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대표하셨듯이, 사람들의 세상에서 계속 복음을 설교하고 그를 대표하려는 자들에게 직접주신 주님의 위임사항(부탁)이었습니다.

140:4.2 (1572.2)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salt with a saving savor. But if this salt has lost its savo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rodden under foot of men.” “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내보낼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니라. 그러나 만일 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0:4.3 (1572.3) In Jesus’ time salt was precious. It was even used for money. The modern word “salary” is derived from salt. Salt not only flavors food, but it is also a preservative. It makes other things more tasty, and thus it serves by being spent. 예수님 당시 소금은 귀중했습니다. 소금은 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현대 용어 ‘급여'(Salary)’는 소금(salt)에서 파생합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만 아니라 또한 방부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들을 더욱 맛있게 하고, 그렇게 소모됨으로 봉사합니다.

140:4.4 (1572.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be led to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그리고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그렇게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인도하라.

140:4.5 (1572.5) While light dispels darkness, it can also be so “blinding” as to confuse and frustrate. We are admonished to let our light so shine that our fellows will be guided into new and godly paths of enhanced living. Our light should so shine as not to attract attention to self. Even one’s vocation can be utilized as an effective “reflector” for the dissemination of this light of life.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만 한편, 빛은 또한 그렇게 혼란과 좌절에 빠지도록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빛을 비추어 우리 동료들을 향상된 생활 즉 새롭고 경건한 방향으로 이끌라고 권고를 받노라. 우리의 빛은 자신에게 주의를 끌도록 비추지 말아야만 하리라. 사람의 직업도 이 생명의 빛을 퍼뜨리는 효과적인 “반사체”로 이용될 수 있느니라.

140:4.6 (1572.6) Strong characters are not derived from not doing wrong but rather from actually doing right. Unselfishness is the badge of human greatness. The highest levels of self-realization are attained by worship and service. The happy and effective person is motivated, not by fear of wrongdoing, but by love of right doing. 강건한 성품은 잘못을 행하지 않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옳은 일을 행함으로 얻어지느니라. 비(非)이기심은 인간적 위대함의 표지(標識)라. 최고 수준의 자아-실현은 경배와 봉사로 달성되느니라. 복된 유능한 사람은 잘못할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바른 행동을 사랑하는 동기로 행하느니라.

140:4.7 (1572.7) “By their fruits you shall know them.” Personality is basically changeless; that which changes — grows — is the moral character. The major error of modern religions is negativism. The tree which bears no fruit is “hewn down and cast into the fire.” Moral worth cannot be derived from mere repression — obeying the injunction “Thou shalt not.” Fear and shame are unworthy motivations for religious living. Religion is valid only when it reveals the fatherhood of God and enhances the brotherhood of men. “그들의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리라.” 고유성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변하는 – 성장하는 -것은 도덕적 성품이다. 현대 종교들이 주된 실수는 부정(소극)주의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도덕적 가치는 단순한 억압 –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에 순종해서 얻을 수 없다. 종교생활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가치 없는 동기니라. 종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고 사람의 형제 됨을 향상시킬 때만 정당하니라.

140:4.8 (1572.8) An effective philosophy of living is formed by a combination of cosmic insight and the total of one’s emotional reactions to the social and economic environment. Remember: While inherited urges cannot be fundamentally modified, emotional responses to such urges can be changed; therefore the moral nature can be modified, character can be improved. In the strong character emotional responses are integrated and co-ordinated, and thus is produced a unified personality. Deficient unification weakens the moral nature and engenders unhappiness. 효과적인 생활철학은, 질서우주 통찰력과, 사회 및 경제적 환경에 대한 모든 감정적 반응들이 결합되어 형성된다. 다음을 기억하라. 타고난 충동은 근본적으로 변경될 수 없는 반면에, 그런 충동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변화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본성은 변경될 수 있고 성품은 향상될 수 있다. 강건한 성품에서 감정적 반응들이 통합되고 조화되며, 그렇게 해서 통합된 고유성이 생긴다. 불완전한 통합이 도덕적 본성을 약화시키고 불행을 일으킨다.

140:4.9 (1572.9) Without a worthy goal, life becomes aimless and unprofitable, and much unhappiness results. Jesus’ discourse at the ordination of the twelve constitutes a master philosophy of life. Jesus exhorted his followers to exercise experiential faith. He admonished them not to depend on mere intellectual assent, credulity, and established authority. 가치 있는 목표가 없다면, 인생은 정처 없이 무익하며 많은 불행이 일어난다. 열 두 사도 임직식에서 주신 예수님의 강론은 최상의 인생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체험적 신앙을 실행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는 단순한 지적 동의, 쉽게 믿는 경향, 및 확립된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고 사도들을 훈계하셨습니다.

140:4.10 (1573.1) Education should be a technique of learning (discovering) the better methods of gratifying our natural and inherited urges, and happiness is the resulting total of these enhanced techniques of emotional satisfactions. Happiness is little dependent on environment, though pleasing surroundings may greatly contribute thereto. 교육은 우리의 본성적인 타고난 충동을 만족시키는 더 좋은 방법을 배우고(발견하는) 기법이 되어야 하며, 행복은 감정을 만족시키는 이 향상된 기법들의 결과적 총합이다. 즐거운 환경이 행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해도, 행복은 거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140:4.11 (1573.2) Every mortal really craves to be a complete person, to b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and such attainment is possible because in the last analysis the “universe is truly fatherly.”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듯이 필사자마다 정말 완비된(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며, 결국 “우주는 참으로 아버지답기” 때문에 그러한 달성이 가능하다.

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140:5.1 (1573.3) From the Sermon on the Mount to the discourse of the Last Supper, Jesus taught his followers to manifest fatherly love rather than brotherly love. Brotherly love would love your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 and that would be adequate fulfillment of the “golden rule.” But fatherly affection would require that you should love your fellow mortals as Jesus loves you. 산상수훈에서 최후 만찬의 강론까지,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형제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황금률”을 충분히 이행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애정은, 예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가 동료 필사자들을 사랑해야만할 것을 요구하노라.

140:5.2 (1573.4) Jesus loves mankind with a dual affection. He lived on earth as a twofold personality — human and divine. As the Son of God he loves man with a fatherly love — he is man’s Creator, his universe Father. As the Son of Man, Jesus loves mortals as a brother — he was truly a man among men. 예수님은 이중 애정으로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땅에서 이중 – 인간적이며 신적 -고유성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사람의 창조자, 자기 우주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형제로 필사자들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참으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140:5.3 (1573.5) Jesus did not expect his followers to achieve an impossible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but he did expect them to so strive to be like God — to b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 that they could begin to look upon man as God looks upon his creatures and therefore could begin to love men as God loves them — to show forth the beginnings of a fatherly affection. In the course of these exhortations to the twelve apostles, Jesus sought to reveal this new concept of fatherly love as it is related to certain emotional attitudes concerned in making numerous environmental social adjustments.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형제 사랑의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도록 – 분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들을 대하시듯,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사람들을 사랑하여 – 아버지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향한 이 권고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이 새 개념 – 그것이 수많은 사회 환경적 조절에 관련된 어떤 감정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듯이 – 을 계시하려고 애쓰셨습니다.

140:5.4 (1573.6) The Master introduced this momentous discourse by calling attention to four faith attitudes as the prelude to the subsequent portrayal of his four transcendent and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in contrast to the limitations of mere brotherly love. 주(主)님은,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대조하여,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네 가지 초월적 최극 반응들로 이루어진 후반부 묘사에 대한 전주곡(前奏曲)으로, 신앙의 네 가지 태도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셨습니다.

140:5.5 (1573.7) He first talked about those who were poor in spirit, hungered after righteousness, endured meekness, and who were pure in heart. Such spirit-discerning mortals could be expected to attain such levels of divine selflessness as to be able to attempt the amazing exercise of fatherly affection; that even as mourners they would be empowered to show mercy, promote peace, and endure persecutions, and throughout all of these trying situations to love even unlovely mankind with a fatherly love. A father’s affection can attain levels of devotion that immeasurably transcend a brother’s affection. 그는 먼저 영이 가난한 자들, 공의(公義)에 굶주린 자들, 온유함을 지속하는 자들, 심정이 청결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영(靈)을 인식하는 그런 필사자들은 아버지의 애정을 놀랍게 실행하는 시도를 할 만큼 신적 비(非)이기심의 그런 수준들에 도달하기를 기대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도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증진시키며, 박해를 견디고, 이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하는 권능을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애정은, 형제의 애정을 헤아릴 수 없이 초월하는 헌신의 수준들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140:5.6 (1573.8) The faith and the love of these beatitudes strengthen moral character and create happiness. Fear and anger weaken character and destroy happiness. This momentous sermon started out upon the note of happiness. 이 지극한(최극) 행복(팔복)의 신앙과 사랑은 도덕적 성품을 강화하고 행복을 창조합니다. 공포와 분노는 성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합니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의 선율(旋律 멜로디)에서 나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2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7 (1573.9) 1.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 the humble.” To a child, happiness is the satisfaction of immediate pleasure craving. The adult is willing to sow seeds of self-denial in order to reap subsequent harvests of augmented happiness. In Jesus’ times and since, happiness has all too often been associated with the idea of the possession of wealth. In the story of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praying in the temple, the one felt rich in spirit — egotistical; the other felt “poor in spirit” — humble. One was self-sufficient; the other was teachable and truth-seeking. The poor in spirit seek for goals of spiritual wealth — for God. And such seekers after truth do not have to wait for rewards in a distant future; they are rewarded now. They find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their own hearts, and they experience such happiness now.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도다.” 아이들의 행복은 바로 쾌락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행복을 늘려 수확하려고 자기를 부인하는 씨를 기꺼이 뿌려서 나중에 거두려 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의 소유라는 관념과 흔히 너무 관련되어 왔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은 (단기적) 영이 부요함 – 자기중심의 이기적 상태 –을 느꼈고, 세리는 “영이 가난함” – 겸손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은 자아-만족(자만)하였고, 다른 사람은 배우려 하면서 진리를-추구했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장기적) 영적 부요의 목표 즉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진리의 탐구자들은 먼 미래의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상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에서 하늘의 나라를 발견하며, 그러한 행복을 지금 체험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3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140:5.8 (1574.1) 2.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Only those who feel poor in spirit will ever hunger for righteousness. Only the humble seek for divine strength and crave spiritual power. But it is most dangerous to knowingly engage in spiritual fasting in order to improve one’s appetite for spiritual endowments. Physical fasting becomes dangerous after four or five days; one is apt to lose all desire for food. Prolonged fasting, either physical or spiritual, tends to destroy hunger. “공의(公義)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채워질 것임이요.” 영의 가난함을 느끼는 자들만이 언제나 공의에 굶주릴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만이 신적 능력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영적 자질의 욕구를 개선하려고 고의로 영적 금식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위험합니다. 육체적 금식은 4, 5일이 지나면 위험해지며, 그 사람은 식욕을 모두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장기간 금식은 배고픔을 없애는 경향이 있습니다.

140:5.9 (1574.2) Experiential righteousness is a pleasure, not a duty. Jesus’ righteousness is a dynamic love — fatherly-brotherly affection. It is not the negative or thou-shalt-not type of righteousness. How could one ever hunger for something negative — something “not to do”? 체험적 공의는 기쁨이며,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의는 역동적 사랑 – 아버지-형제의 애정입니다. 그것은 부정적이거나 ‘하지 말라’는 유형의 공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부정적인 것 –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사람이 계속 바랄 수 있겠습니까?

140:5.10 (1574.3) It is not so easy to teach a child mind these first two of the beatitudes, but the mature mind should grasp their significance. 어린애 같은 사람의 마음에 팔복의 처음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숙한 마음은 그 중요성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4 – 온유함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140:5.11 (1574.4) 3. “Happy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Genuine meekness has no relation to fear. It is rather an attitude of man co-operating with God — “Your will be done.” It embraces patience and forbearance and is motivated by an unshakable faith in a lawful and friendly universe. It masters all temptations to rebel against the divine leading. Jesus was the ideal meek man of Urantia, and he inherited a vast universe.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협력하는 사람의 태도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그것은 인내와 참을성을 담고 있으며, 합법적이며 우호적인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신적 이끄심에 반항하는 모든 유혹을 정복합니다. 예수님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광대한 우주를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5 – 심정 청결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140:5.12 (1574.5) 4. “Happy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Spiritual purity is not a negative quality, except that it does lack suspicion and revenge. In discussing purity, Jesus did not intend to deal exclusively with human sex attitudes. He referred more to that faith which man should have in his fellow man; that faith which a parent has in his child, and which enables him to love his fellows even as a father would love them. A father’s love need not pamper, and it does not condone evil, but it is always anticynical. Fatherly love has singleness of purpose, and it always looks for the best in man; that is the attitude of a true parent.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영적 청결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부정적 특성이 아닙니다. 청결(순결)을 논하면서, 예수님은 인간의 성(性)적 태도만 다루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가져야만 하는 신앙; 어버이가 자녀에게 가지는 신앙, 아버지가 사랑하듯이 동료를 사랑하게 하는 신앙에 더 주의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버릇없는 말이나 행동)을 받아줄 필요가 없으며, 악을 눈감아주지 않지만, 언제나 동기의 진지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에만 골똘하며, 그것은 항상 인간에게서 최선을 찾습니다. 그것이 참 부모의 자세입니다.

140:5.13 (1574.6) To see God — by faith — means to acquire true spiritual insight. And spiritual insight enhances Adjuster guidance, and these in the end augment God-consciousness. And when you know the Father, you are confirmed in the assurance of divine sonship, and you can increasingly love each of your brothers in the flesh, not only as a brother — with brotherly love — but also as a father — with fatherly affection. 하나님을 보는 것- 신앙으로 -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습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적 통찰력은 조율자의 안내를 강화하며, 결국 하나님-의식을 증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적 아들신분이라는 확신이 굳어지고, 너희는 점점 더 서로 육신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 형제의 사랑으로 -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 아버지의 애정 – 으로, 사랑할 수 있느니라.

140:5.14 (1574.7) It is easy to teach this admonition even to a child. Children are naturally trustful, and parents should see to it that they do not lose that simple faith. In dealing with children, avoid all deception and refrain from suggesting suspicion. Wisely help them to choose their heroes and select their lifework. 이 훈계는 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습니다. 아이들은 자연히 남을 잘 믿으며,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 단순한 신앙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모든 속임수를 피하고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삼가라. 자기 영웅들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 과업을 고르도록 현명히 그들을 도우라.

140:5.15 (1574.8) And then Jesus went on to instruct his followers in the realization of the chief purpose of all human struggling — perfection — even divine attainment. Always he admonished them: “Be you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He did not exhort the twelve to love their neighbors as they loved themselves. That would have been a worthy achievement; it would have indicated the achievement of brotherly love. He rather admonished his apostles to love men as he had loved them — to love with a fatherly as well as a brotherly affection. And he illustrated this by pointing out four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그 후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모든 인간의 주된 분투의 목적 – 온전 – 신적 달성까지-의 실현을 계속 지시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는 그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이르셨습니다. 그는 12사도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성취였어야 했으며, 형제의 사랑의 성취를 드러냈어야 합니다. 그는 오히려 사도들에게 자신(예수)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 형제의 애정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애정으로 –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사랑이 지닌 네 가지 최극 반응들을 가리켜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6 – 애통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140:5.16 (1575.1) 1. “Happy are they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So-called common sense or the best of logic would never suggest that happiness could be derived from mourning. But Jesus did not refer to outward or ostentatious mourning. He alluded to an emotional attitude of tenderheartedness. It is a great error to teach boys and young men that it is unmanly to show tenderness or otherwise to give evidence of emotional feeling or physical suffering. Sympathy is a worthy attribute of the male as well as the female. It is not necessary to be calloused in order to be manly. This is the wrong way to create courageous men. The world’s great men have not been afraid to mourn. Moses, the mourner, was a greater man than either Samson or Goliath. Moses was a superb leader, but he was also a man of meekness. Being sensitive and responsive to human need creates genuine and lasting happiness, while such kindly attitudes safeguard the soul from the destructive influences of anger, hate, and suspicion.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소위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행복이 애통에서 얻을 수 있다고 결코 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면적이거나 허식적 애통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다정(多情)한 감정적 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다정함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의 느낌이나 육체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이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공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훌륭한 속성입니다. 남자답기 위해 무정(無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정함은 용감한 남자를 만드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애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애통(哀痛)자 모세는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민감히 인간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은 진정 길이 변하지 않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그런 인정(人情) 많은 태도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의심의 해로운 영향에서 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7 – 긍휼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140:5.17 (1575.2) 2. “Happy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Mercy here denotes the height and depth and breadth of the truest friendship — loving-kindness. Mercy sometimes may be passive, but here it is active and dynamic — supreme fatherliness. A loving parent experiences little difficulty in forgiving his child, even many times. And in an unspoiled child the urge to relieve suffering is natural. Children are normally kind and sympathetic when old enough to appreciate actual conditions.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자비는 가장 참된 우정 – 자애(慈愛)의 높이와 깊이와 폭을 뜻합니다. 자비는 종종 수동적일지 모르나, 여기에서 자비는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 최극의 아버지다움입니다. 애정이 깊은 부모는 여러 번 자녀를 용서해도 거의 어렵지 않음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리고 버릇없이 자라지 않은 아이의 경우, 고통을 덜어주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습니다. 실제 형편을 헤아릴 만큼 충분한 나이의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정(情공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8 – 화평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140:5.18 (1575.3) 3. “Happy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sons of God.” Jesus’ hearers were longing for military deliverance, not for peacemakers. But Jesus’ peace is not of the pacific and negative kind. In the face of trials and persecutions he said, “My peace I leave with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This is the peace that prevents ruinous conflicts. Personal peace integrates personality. Social peace prevents fear, greed, and anger. Political peace prevents race antagonisms, national suspicions, and war. Peacemaking is the cure of distrust and suspicion. “화평하게 하는 자(분쟁 조정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청중(聽衆)들은 평화를 만드는 분쟁 조정자가 아니라 군사적 해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온순한 소극적 종류가 아닙니다. 재판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남기노라,” “너희 심정에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괴적인 분쟁을 예방하는 평화입니다. 개인적 평화는 고유성을 통합합니다. 사회적 평화는 두려움과 탐욕과 분노를 예방합니다. 정치적 평화는 인종적 반목과 국가적 의심 그리고 전쟁을 예방합니다. 화평(분쟁 조정)은 불신과 의심의 치료제입니다.

140:5.19 (1575.4) Children can easily be taught to function as peacemakers. They enjoy team activities; they like to play together. Said the Master at another time: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shall find it.” 아이들은 화평(분쟁조정)자로 활동하도록 쉽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체 활동들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함께 놀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나,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려고 하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9 – 공의를 위한 박해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20 (1575.5) 4.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Happy are you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Rejoice and be exceedingly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공의(公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5.21 (1575.6) So often persecution does follow peace. But young people and brave adults never shun difficulty or danger.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And a fatherly love can freely do all these things — things which brotherly love can hardly encompass. And progress has always been the final harvest of persecution. 종종 박해가 화평을 따릅니다. 그러나 청년들과 용감한 어른들은 어려움과 위험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든 것들 – 형제의 사랑이 거의 이룰 수 없는 것들 –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박해의 최종 수확물이었습니다.

140:5.22 (1575.7) Children always respond to the challenge of courage. Youth is ever willing to “take a dare.” And every child should early learn to sacrifice. 아이들은 항상 용기에 도전할 때 반응합니다. 청년들은 언제나 자진해서 “도전에 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기를 배워야만 합니다.

140:5.23 (1575.8) And so it is revealed that the beatitude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re based on faith and love and not on law — ethics and duty. 그래서 산상수훈의 지복(至福지극한 팔복)은 신앙과 사랑에 근거를 두며, 법 – 윤리와 의무 –에 근거를 두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140:5.24 (1575.9) Fatherly love delights in returning good for evil — doing good in retaliation for injustice. 아버지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 – 불의를 선행으로 갚아서 – 답례하기를 기뻐합니다.

6. The Evening of the Ordination 성직 임명일 저녁

율법을 밝히러 오신 예수님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140:6.1 (1576.1) Sunday evening, on reaching the home of Zebedee from the highlands north of Capernaum, Jesus and the twelve partook of a simple meal. Afterward, while Jesus went for a walk along the beach, the twelve talked among themselves. After a brief conference, while the twins built a small fire to give them warmth and more light, Andrew went out to find Jesus, and when he had overtaken him, he said: “Master, my brethren are unable to comprehend what you have said about the kingdom. We do not feel able to begin this work until you have given us further instruction. I have come to ask you to join us in the garden and help u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your words.” And Jesus went with Andrew to meet with the apostles. 일요일 저녁, 가버나움 북쪽 산지에서 세베대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과 12사도들은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동안, 사도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했습니다. 간단한 회의 후 쌍둥이 형제가 따뜻하게 하며 불을 밝히려고 작은 불을 피우는 동안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으러 나가,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主)여, 내 형제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 가르쳐 주실 때까지 이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원에 있는 우리들과 함께 하셔서, 당신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드레와 함께 사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140:6.2 (1576.2) When he had entered the garden, he gathered the apostles around him and taught them further, saying: “You find it difficult to receive my message because you would build the new teaching directly upon the old, but I declare that you must be reborn. You must start out afresh as little children and be willing to trust my teaching and believe in God.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cannot be made to conform to that which is. You have wrong ideas of the Son of Man and his mission on earth.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thinking that I have come to set aside the law and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l, to enlarge and illuminate. I come not to transgress the law but rather to write these new commandments on the tablets of your hearts. 정원으로 들어가신 후 그는 사도들을 주위에 모아 그들을 더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옛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하기 때문에 내 메시지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만, 내가 명백히 말하는데, 너희는 거듭나야만 하니라. 너희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시작해야만 하며, 기꺼이 내 가르침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은 현재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만들어질 수 없노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과 땅에서 그의 사명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느니라.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줄로 잘못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려 함이 아니라 성취하고, 확장하며 밝히러 왔노라. 나는 율법을 어기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심정의 서판에 새 계명을 쓰러 왔노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지(意志)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For I say unto you, That except 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e shall in no case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140:6.3 (1576.3) “I demand of you a righteousness that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ose who seek to obtain the Father’s favor by almsgiving, prayer, and fasting. If you would enter the kingdom, you must have a righteousness that consists in love, mercy, and truth — the sincere desire to do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나는 너희에게 자선(慈善)과 기도와 금식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얻으려는 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설 의로움을 요구하노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랑과 자비와 진리로 이루어진 의로움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신실한 갈망 -을 가져야만 하니라.”

140:6.4 (1576.4) Then said Simon Peter: “Master, if you have a new commandment, we would hear it. Reveal the new way to us.” Jesus answered Peter: “You have heard it said by those who teach the law: ‘You shall not kill; that whosoever kills shall be subject to judgment.’ But I look beyond the act to uncover the motive. I declare to you that every 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is in danger of condemnation. He who nurses hatred in his heart and plans vengeance in his mind stands in danger of judgment. You must judge your fellows by their deeds; the Father in heaven judges by the intent.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主)여, 새 계명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새 길을 보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한 것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행위 너머에 있는 감춰진 동기를 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노니,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죄 판결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노라. 자기 심정에 증오를 품고 마음으로 복수를 계획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느니라. 너희는 동료들을 그 행위로 심판해야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의도를 심판하시니라.

140:6.5 (1576.5) “You have heard the teachers of the law say,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But I say to you that every man who looks upon a woman with intent to lust after her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You can only judge men by their acts, but my Father looks into the hearts of his children and in mercy adjudges them in accordance with their intents and real desires.”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선생들의 말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욕정의 의도로 여자를 보는 자는 누구든지 이미 심정(마음)에서 그녀와 간음했느니라. 너희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내 아버지는 자녀의 심정을 들여다보시며 자비로 그들의 의도와 실제 갈망에 따라 그들을 판결하신다.”

180729 하늘나라를 세우러 오신 예수님 마19:7-8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7 “Why then,” they asked, “did Moses command that a man give his wife a certificate of divorce and send her away?” 8 Jesus replied, “Moses permitted you to divorce your wives because your hearts were hard. But it was not this way from the beginning.

140:6.6 (1576.6) Jesus was minded to go on discussing the other commandments when James Zebedee interrupted him, asking: “Master, what shall we teach the people regarding divorcement? Shall we allow a man to divorce his wife as Moses has directed?” And when Jesus heard this question, he said: “I have not come to legislate but to enlighten. I have come not to reform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rather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It is not the will of the Father that I should yield to the temptation to teach you rules of government, trade, or social behavior, which, while they might be good for today, would be far from suitable for the society of another age. I am on earth solely to comfort the minds, liberate the spirits, and save the souls of men. But I will say, concerning this question of divorcement, that, while Moses looked with favor upon such things, it was not so in the days of Adam and in the Garden.” 예수님은 다른 계명들을 계속 의논하려고 하셨지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저희는 사람들에게 이혼(離婚)에 대해 무엇을 가르칠까요? 모세의 지시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나는 법(法)을 제정하러 온 것이 아니라 (통찰하여) 깨우치러 왔노라. 나는 이 세상 나라를 개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왔노라. 정부, 무역, 사회적 행동 규칙들을 너희에게 가르치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늘날에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세대의 사회에는 거의 적합하지 않느니라. 나는 오직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영을 해방시키며, 혼을 구하려고 이 땅에 있노라. 그러나 이 이혼의 문제에 관해 내가 말하노니, 모세는 그런 일들에 찬성했지만, 아담의 시절, (에덴)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느니라.”

140:6.7 (1577.1) After the apostles had talked among themselves for a short time, Jesus went on to say: “Always must you recognize the two viewpoints of all mortal conduct —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ways of the flesh and the way of the spirit; the estimate of time and the viewpoint of eternity.” And though the twelve could not comprehend all that he taught them, they were truly helped by this instruction. 잠시 사도들끼리 얘기한 후,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너희는 필사자의 모든 행위를 두 가지 관점 – 인간적 관점과 신적 관점; 육신의 방식과 영의 방식; 시간적 평가와 영원의 관점 -으로 항상 인식해야만 한다.” 12 사도들은 예수께서 가르친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가르침으로 그들은 참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180805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마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19 Lay not up for yourselves treasures up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oth corrupt, and where thieves break through and steal: 20 Bu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neither moth nor rust doth corrupt,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through nor steal: 21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140:6.8 (1577.2) And then said Jesus: “But you will stumble over my teaching because you are wont to interpret my message literally; you are slow to discern the spirit of my teaching. Again must you remember that you are my messengers; you are beholden to live your lives as I have in spirit lived mine. You are my personal representatives; but do not err in expecting all men to live as you do in every particular. Also must you remember that I have sheep not of this flock, and that I am beholden to them also, to the end that I must provide for them the pattern of doing the will of God while living the life of the mortal nature.”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메시지를 습관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 가르침으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느니라. 너희는 내 가르침의 영을 더디 깨닫느니라. 너희가 나의 메신저들임을 다시 기억해야만 하니라. 내가 영으로 내 삶을 살았듯이 너희의 삶을 살도록 너희는 은혜를 입었느니라. 너희는 나의 개인적 대표자들이니라. 그러나 모든 면에서 너희가 행하듯이 모든 이들이 살리라고 기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 또한 나는 이 무리가 아닌 양떼들을 지니며, 필사자 본성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본(本)을 그들에게 끝까지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음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만 하니라.

140:6.9 (1577.3) Then asked Nathaniel: “Master, shall we give no place to justice? The law of Moses says,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What shall we say?” And Jesus answered: “You shall return good for evil. My messengers must not strive with men, but be gentle toward all. Measure for measure shall not be your rule. The rulers of men may have such laws, but not so in the kingdom; mercy always shall determine your judgments and love your conduct. And if these are hard sayings, you can even now turn back. If you find the requirements of apostleship too hard, you may return to the less rigorous pathway of discipleship.” 그러자 나다니엘이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우리가 정의(正義)에게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 나의 메신저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모든 이에게 온유 하라. 당한 대로 갚는 것이 너희 규정이 되지 않게 하라. 사람의 통치자들은 그런 규정들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그렇지 않다. 자비가 항상 너희의 판단을 결정할 것이며 사랑이 너희 행위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너희는 이제라도 되돌아 갈 수 있다. 사도 직분의 요구조건이 너희에게 너무 어려우면, 너희는 덜 엄격한 제자 직분의 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140:6.10 (1577.4) On hearing these startling words, the apostles drew apart by themselves for a while, but they soon returned, and Peter said: “Master, we would go on with you; not one of us would turn back. We are fully prepared to pay the extra price; we will drink the cup. We would be apostles, not merely disciples.” 이 놀라운 말씀들을 듣고 사도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떨어져 있었지만, 곧 돌아와서,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主)여, 우리는 당신과 함께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대가(代價)를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시겠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제자가 아닌 사도가 되겠습니다.”

140:6.11 (1577.5)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Be willing, then, to take up your responsibilities and follow me. Do your good deeds in secret; when you give alms, let not the left hand know what the right hand does. And when you pray, go apart by yourselves and use not vain repetitions and meaningless phrases. Always remember that the Father knows what you need even before you ask him. And be not given to fasting with a sad countenance to be seen by men. As my chosen apostles, now set apart for the service of the kingdom, lay not up for yourselves treasures on earth, but by your unselfish service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for where your treasures are, there will your hearts be also.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기꺼이 너희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너희 선행을 은밀히 행하라. 너희가 자선(慈善선의를 베품)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고 기도할 때 홀로 따로 하며, 헛된 반복과 무의미한 빈말을 사용하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서 알고 계심을 항상 기억하라.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표정으로 금식하지 말라. 내가 택한 사도로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위해 구별하여,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사심 없는 봉사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왜냐하면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심정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0812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마6:33-34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33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34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140:6.12 (1577.6) “The lamp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your eye is generous,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But if your eye is selfish, the whole body will be filled with darkness. If the very light which is in you is turned to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편견 없이, 사심이 없음)하면 너의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너의 눈이 이기적이면 온 몸이 어두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네게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140:6.13 (1577.7) And then Thomas asked Jesus if they should “continue having everything in common.” Said the Master: “Yes, my brethren, I would that we should live together as one understanding family. You are intrusted with a great work, and I crave your undivided service. You know that it has been well said: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You cannot sincerely worship God and at the same time wholeheartedly serve mammon. Having now enlisted unreservedly in the work of the kingdom, be not anxious for your lives; much less be concerned with what you shall eat or what you shall drink; nor yet for your bodies, what clothing you shall wear. Already have you learned that willing hands and earnest hearts shall not go hungry. And now, when you prepare to devote all of your energies to the work of the kingdom, be assured that the Father will not be unmindful of your needs.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when you have found entrance thereto, all things needful shall be added to you. Be not, therefore, unduly anxious for the morrow. Sufficient for the day is the trouble thereof.” 그러자 도마가 예수께 자신들이 “계속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하는지” 여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내 형제들아, 이해심이 많은 한 가족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를 내가 바라노라. 너희는 위대한 업무를 맡았으니, 너희가 집중해서 봉사하기를 내가 열망하노라. 너희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잘 알려진 말을 알고 있다. 너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동시에 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온전히 편입되었으니, 너희 목숨을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걱정하지 말라. 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지 더 염려하지 말라. 자발적인 노력과 진지한 심정이 굶주리지 않을 것임을 너희가 이미 배웠느니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 나라의 일에 헌신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에 무관심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고 너희가 거기로 들어가면, 필요한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지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그 날의 근심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140:6.14 (1578.1) When Jesus saw they were disposed to stay up all night to ask questions, he said to them: “My brethren, you are earthen vessels; it is best for you to go to your rest so as to be ready for the morrow’s work.” But sleep had departed from their eyes. Peter ventured to request of his Master that “I have just a little private talk with you. Not that I would have secrets from my brethren, but I have a troubled spirit, and if, perchance, I should deserve a rebuke from my Master, I could the better endure it alone with you.” And Jesus said, “Come with me, Peter” — leading the way into the house. When Peter returned from the presence of his Master much cheered and greatly encouraged, James decided to go in to talk with Jesus. And so on through the early hours of the morning, the other apostles went in one by one to talk with the Master. When they had all held personal conferences with him save the twins, who had fallen asleep, Andrew went in to Jesus and said: “Master, the twins have fallen asleep in the garden by the fire; shall I arouse them to inquire if they would also talk with you?” And Jesus smilingly said to Andrew, “They do well — trouble them not.” And now the night was passing; the light of another day was dawning.사도들이 밤새워 질문하려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흙으로 만든 그릇들이라. 내일 일을 준비하기 위해 가서 쉬는 것이 최선이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습니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主)님께 요청했습니다. “저는 아주 잠깐 주님과 사적으로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형제들로부터 비밀을 지니려는 것이 아니지만, 저는 정신(영)이 곤란합니다. 혹시 주님의 꾸중을 들어야 한다면 주님과 홀로 달게 받겠습니다.” 예수님은 집으로 이끄시면서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主)님 앞에서 돌아온 베드로가 아주 활기차게 고조되어 격려받자, 야고보도 예수님과 의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이른 아침까지 다른 사도들도 계속 하나씩 주(主)님과 면담하러 갔습니다. 잠들었던 쌍둥이들을 제외한 그들 모두 예수님과 개인적 면담을 했을 때, 안드레가 예수께 가서 여쭈었습니다. “주(主)님! 쌍둥이들은 정원의 불 옆에서 잠들었는데 저들도 주님과 면담할 지 깨워 물어볼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미소를 지으며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잘하고 있으니 – 그냥 두어라.” 이제 밤이 지나 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7. The Week Following the Ordination 성직 임명 다음 주간

180819 2가지 지상 사명의 동기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The Spirit himself testifie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God’s children.

140:7.1 (1578.2) After a few hours’ sleep, when the twelve were assembled for a late breakfast with Jesus, he said: “Now must you begin your work of preaching the glad tidings and instructing believers. Make ready to go to Jerusalem.” After Jesus had spoken, Thomas mustered up courage to say: “I know, Master, that we should now be ready to enter upon the work, but I fear we are not yet able to accomplish this great undertaking. Would you consent for us to stay hereabouts for just a few days more before we begin the work of the kingdom?” And when Jesus saw that all of his apostles were possessed by this same fear, he said: “It shall be as you have requested; we will remain here over the Sabbath day.” 몇 시간 잠든 후, 12사도들이 예수님과 늦은 아침 식사로 모였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기쁜 소식을 설교하고 신자들 가르치는 임무를 시작해야 하니라.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후 도마가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주(主)여, 지금 우리가 임무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이 위대한 과업을 아직 성취할 수 없을지 두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며칠만 더 이 근처에 머물러도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도들도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요청대로 할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까지 여기 머물러 있을 것이라.”

140:7.2 (1578.3) For weeks and weeks small groups of earnest truth seekers, together with curious spectators, had been coming to Bethsaida to see Jesus. Already word about him had spread over the countryside; inquiring groups had come from cities as far away as Tyre, Sidon, Damascus, Caesarea, and Jerusalem. Heretofore, Jesus had greeted these people and taught them concerning the kingdom, but the Master now turned this work over to the twelve. Andrew would select one of the apostles and assign him to a group of visitors, and sometimes all twelve of them were so engaged. 몇 주 동안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진정으로 진리를 찾는 작은 그룹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벳새다로 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지방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호기심 있는 무리들이 티레, 시돈, 다마스쿠스, 케자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같은 먼 도시로부터 왔습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이들을 맞아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쳤지만, 주님은 이제 이 일을 12사도들에게 맡겼습니다. 안드레는 사도들 중 한 명씩 택하여 방문 무리들을 맡겼으며 가끔 12사도들 모두 그렇게 그 일을 맡았습니다.

140:7.3 (1578.4) For two days they worked, teaching by day and holding private conferences late into the night. On the third day Jesus visited with Zebedee and Salome while he sent his apostles off to “go fishing, seek carefree change, or perchance visit your families.” On Thursday they returned for three more days of teaching. 그들은 이틀간 일했는데, 낮에는 가르치고 밤늦도록 사적 모임을 가졌습니다. 삼일 째,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고기 잡거나 홀가분하게 기분전환 하거나 혹은 가족을 방문하라.”고 보내는 동안, 자신은 세베대 및 살로메와 대화하셨습니다. 3일 더 가르치려고 그들은 목요일에 돌아왔습니다.

140:7.4 (1578.5) During this week of rehearsing, Jesus many times repeated to his apostles the two great motives of his postbaptismal mission on earth: 이 연습 주간에, 예수님은 세례이후 자신의 지상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動機)를 사도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140:7.5 (1578.6) 1. To reveal the Father to man. 아버지를 사람에게 계시함.

140:7.6 (1578.7) 2. To lead men to become son-conscious — to faith-realize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the Most High. 사람들이 지고자(至高者)의 자녀임을 신앙으로 깨달아, 아들-의식이 들도록 인도함.

140:7.7 (1579.1) One week of this varied experience did much for the twelve; some even became over self-confident. At the last conference, the night after the Sabbath, Peter and James came to Jesus, saying, “We are ready — let us now go forth to take the kingdom.” To which Jesus replied, “May your wisdom equal your zeal and your courage atone for your ignorance.” 한 주간의 이 다양한 체험은 12사도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몇 사도들은 자아-확신(자신감)이 지나쳤습니다. 안식일이 끝난 밤, 마지막 회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준비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취하러 나가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지혜가 너희의 열정과 같고, 너희 용기가 너희 무지를 보상(報償갚아줌)하기를 바라노라.”

140:7.8 (1579.2) Though the apostles failed to comprehend much of his teaching, they did not fail to grasp the significance of the charmingly beautiful life he lived with them.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지냈던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의 중요성은 파악했습니다.

8. Thursday Afternoon on the Lake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80826 아버지의 뜻을 행함(1)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rule: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140:8.1 (1579.3) Jesus well knew that his apostles were not fully assimilating his teachings. He decided to give some special instruction to Peter, James, and John, hoping they would be able to clarify the ideas of their associates. He saw that, while some features of the idea of a spiritual kingdom were being grasped by the twelve, they steadfastly persisted in attaching these new spiritual teachings directly onto their old and entrenched literal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as a restoration of David’s throne and the re-establishment of Israel as a temporal power on earth. Accordingly, on Thursday afternoon Jesus went out from the shore in a boat with Peter, James, and John to talk over the affairs of the kingdom. This was a four hours’ teaching conference, embracing scores of questions and answers, and may most profitably be put in this record by reorganizing the summary of this momentous afternoon as it was given by Simon Peter to his brother, Andrew, the following morning: 예수님은 사도들이 자신의 가르침들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동료들에게 가르침의 관념들을 분명히 설명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다소 특별한 가르침을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2사도들이 영적 나라의 관념의 어떤 특성들을 이해하는 반면에,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와 땅에서 현세적 권능으로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그들의 오랫동안 확립된 문자적 개념들 위에 직접적으로 새로운 이 영적 가르침들을 첨가하려고, 굽히지 않고 집착했음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논의하려고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한 4시간의 수업(교수敎授회의會議)로, 시몬 베드로가 다음 날 아침에 형 안드레에게 주었던 이 중요한 오후 요약을 재구성하여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 것입니다.

140:8.2 (1579.4) 1. Doing the Father’s will. Jesus’ teaching to trust in the overcare of the heavenly Father was not a blind and passive fatalism. He quoted with approval, on this afternoon, an old Hebrew saying: “He who will not work shall not eat.” He pointed to his own experience as sufficient commentary on his teachings. His precepts about trusting the Father must not be adjudged by the social or economic conditions of modern times or any other age. His instruction embraces the ideal principles of living near God in all ages and on all worlds. 아버지의 뜻을 행함. 하늘 아버지의 보호를 신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맹목적이며 수동적인 운명론(運命論숙명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날 오후에, 오래된 히브리 속담에 동의하며 인용하셨습니다. “일하지 않으려는 자는 먹지 말라.”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가르침들을 충분히 설명(주석)했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함에 대한 그의 교훈들은 현대나 다른 시대의 사회적 또는 경제적 상황으로 판단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의 교훈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사는 이상적 원리들을 포함합니다.

140:8.3 (1579.5) Jesus made clear to the three the difference between the requirements of apostleship and discipleship. And even then he did not forbid the exercise of prudence and foresight by the twelve. What he preached against was not forethought but anxiety, worry. He taught the active and alert submission to God’s will. In answer to many of their questions regarding frugality and thriftiness, he simply called attention to his life as carpenter, boatmaker, and fisherman, and to his careful organization of the twelve. He sought to make it clear that the world is not to be regarded as an enemy; that the circumstances of life constitute a divine dispensation working along with the children of God. 예수님은 세 사도들에게 사도의 신분과 제자의 신분 자격 차이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12사도들이 검약(儉約아껴 씀)과 선견(先見내다 봄)의 실천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반대하신 설교는 예상(豫想미리 생각함)이 아니라 걱정·근심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기민하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검약(儉約아껴 씀)과 검소(儉素수수함)에 대한 사도들의 많은 질문에 대답으로, 그는 단지 목수, 배-제작자, 어부였던 자신의 일생과 12사도의 신중한 자신의 조직을 환기(喚起)시켰습니다. 세상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생활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작용하는 신적 섭리의 요소라고 그는 분명히 밝히려 애쓰셨습니다.

180902 아버지의 뜻을 행함(2) 마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44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140:8.4 (1579.6) Jesus had great difficulty in getting them to understand his personal practice of nonresistance. He absolutely refused to defend himself, and it appeared to the apostles that he would be pleased if they would pursue the same policy. He taught them not to resist evil, not to combat injustice or injury, but he did not teach passive tolerance of wrongdoing. And he made it plain on this afternoon that he approved of the social punishment of evildoers and criminals, and that the civil government must sometimes employ force for the maintenance of social order and in the execution of justice.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무저항 실천을 이해시키는데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는 무조건 자기 방어를 거부하셨으며, 사도들이 동일한 정책을 추구한다면 그가 기뻐하실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악에 저항하지 말고, 불법이나 손해(損害)와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범죄를 수동적으로 참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날 오후에, 악인들과 범죄자들의 사회적 처벌을 찬성하셨으며, 국가 정부가 때로는 사회 질서 유지와 정의 실행으로 무력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140:8.5 (1579.7) He never ceased to warn his disciples against the evil practice of retaliation; he made no allowance for revenge, the idea of getting even. He deplored the holding of grudges. He disallowed the idea of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He discountenanced the whole concept of private and personal revenge, assigning these matters to civil government, on the one hand, and to the judgment of God, on the other. He made it clear to the three that his teachings applied to the individual, not the state. He summarized his instructions up to that time regarding these matters, as: 그는 사도들에게 보복(報復앙갚음)하는 악행(惡行)에 대항하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는 복수(復讎), 즉 원수 갚는 관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평(원한)을 품는 것도 개탄(慨嘆분함과 걱정으로 탄식)하셨습니다.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복수(復讎)의 모든 개념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한편으로는 국가 정부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된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는 이 문제들에 대해 그 때까지 자신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140:8.6 (1580.1) Love your enemies — remember the moral claims of human brotherhood.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 인간의 형제 됨이라는 도덕적 요구를 기억하라.

140:8.7 (1580.2) The futility of evil: A wrong is not righted by vengeance. Do not make the mistake of fighting evil with its own weapons. 악은 무용성(無用性쓸데없음): 잘못은 보복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악 자체의 무기로 악과 싸우는 잘못을 행하지 말라.

140:8.8 (1580.3) Have faith — confidence in the eventual triumph of divine justice and eternal goodness. 신앙, 즉 신적 정의(正義올바른 도리)와 영원한 선(善)이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라.

180909 정치적 태도 마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Caesar’s,” they replied. Then he said to them,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140:8.9 (1580.4) 2. Political attitude. He cautioned his apostles to be discreet in their remarks concerning the strained relations then existing between the Jewish people and the Roman government; he forbade them to become in any way embroiled in these difficulties. He was always careful to avoid the political snares of his enemies, ever making reply, “Render 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which are God’s.” He refused to have his attention diverted from his mission of establishing a new way of salvation; he would not permit himself to be concerned about anything else. In his personal life he was always duly observant of all civil laws and regulations; in all his public teachings he ignored the civic, social, and economic realms. He told the three apostles that he was concerned only with the principles of man’s inner and personal spiritual life. 정치적 태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유대 민족과 로마정부 사이에 그 때 존재하는 긴장관계에 대해 비평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여하튼 이 어려움들에 휩쓸리는 것을 그가 금하셨습니다. 그는 늘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답하시면서, 적들의 정치적 함정을 피하려고 언제나 조심하셨습니다. 그는 구원의 새 길을 세우는 자신의 사명에서 딴 데로 주의(注意)돌리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것에 관여되도록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생활에서, 그는 항상 모든 시민법과 규정을 당연히 지켰습니다. 그는 모든 공적 가르침에서 시민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은 무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내적·개인적 영적 생활의 원리들에만 자신이 관련되었다고 세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0:8.10 (1580.5) Jesus was not, therefore, a political reformer. He did not come to reorganize the world; even if he had done this, it would have been applicable only to that day and generation. Nevertheless, he did show man the best way of living, and no generation is exempt from the labor of discovering how best to adapt Jesus’ life to its own problems. But never make the mistake of identifying Jesus’ teachings with any political or economic theory, with any social or industrial system. 따라서 예수님은 정치적 개혁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재조직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그러셨더라도, 그것은 그 당시 세대에만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에게 최선으로 사는 길을 보이셨으며, 어떤 세대도 자기 문제들에 최선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적응시키는 방법을 찾는 수고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론, 어떤 사회적 또는 산업적 체계와 동일시하는 실수를 결코 저지르지 말라.

180916 사회적 태도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140:8.11 (1580.6) 3. Social attitude. The Jewish rabbis had long debated the question: Who is my neighbor? Jesus came presenting the idea of active and spontaneous kindness, a love of one’s fellow men so genuine that it expanded the neighborhood to include the whole world, thereby making all men one’s neighbors. But with all this, Jesus was interested only in the individual, not the mass. Jesus was not a sociologist, but he did labor to break down all forms of selfish isolation. He taught pure sympathy, compassion. Michael of Nebadon is a mercy-dominated Son; compassion is his very nature. 사회적 태도. 유대 랍비들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친절 관념을 제시하셨습니다. 동료 인간들을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셔서 이웃됨이 전(全) 세계를 포함하도록 확장하셔서,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이웃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님은 집단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모든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부수려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순수한 공감, 연민을 가르치셨습니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비에-사로잡힌 아들이시며, 연민은 바로 그의 본성입니다.

140:8.12 (1580.7) The Master did not say that men should never entertain their friends at meat, but he did say that his followers should make feasts for the poor and the unfortunate. Jesus had a firm sense of justice, but it was always tempered with mercy. He did not teach his apostles that they were to be imposed upon by social parasites or professional alms-seekers. The nearest he came to making sociological pronouncements was to say, “Judge not, that you be not judged.” 주(主)님은 사람들이 친구들을 식사에 초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버림받은) 자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확고한 정의감을 지니셨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비로 조절되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식객(食客하는 일없이 얻어먹는 사람)들이나 직업적 자선-구걸자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회학적 선언에 가장 밀접했던 말씀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였습니다.

140:8.13 (1580.8) He made it clear that indiscriminate kindness may be blamed for many social evils. The following day Jesus definitely instructed Judas that no apostolic funds were to be given out as alms except upon his request or upon the joint petition of two of the apostles. In all these matters it was the practice of Jesus always to say, “Be as wise as serpents but as harmless as doves.” It seemed to be his purpose in all social situations to teach patience, tolerance, and forgiveness. 그는 분별없는 친절이 많은 사회악의 책임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다음날 예수님은 자신의 요구나 사도들 2명의 공동 요청이 아니면, 사도의 기금(재산)을 자선(구제)금으로 주지 말라고, 유다에게 단호히 지시하셨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예수님은 늘 습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인내, 관용 그리고 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그의 목적인 듯했습니다.

140:8.14 (1581.1) The family occupied the very center of Jesus’ philosophy of life — here and hereafter. He based his teachings about God on the family, while he sought to correct the Jewish tendency to overhonor ancestors. He exalted family life as the highest human duty but made it plain that family relationships must not interfere with religious obligations. He calle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family is a temporal institution; that it does not survive death. Jesus did not hesitate to give up his family when the family ran counter to the Father’s will. He taught the new and larger brotherhood of man — the sons of God. In Jesus’ time divorce practices were lax in Palestine and throughout the Roman Empire. He repeatedly refused to lay down laws regarding marriage and divorce, but many of Jesus’ early followers had strong opinions on divorce and did not hesitate to attribute them to him. All of the New Testament writers held to these more stringent and advanced ideas about divorce except John Mark. 가족은 여기와 향후 예수님의 생활 철학에서 바로 핵심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가족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가르친 반면에 조상들을 과도히 공경하는 유대인의 경향을 바로잡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가정생활을 최상의 인간적 의무로 격찬했지만 가족관계가 종교적 책임에 저촉(抵觸거슬림)하지 말아야한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는 가족이 현세적 제도이며, 죽음 이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거스를 때, 자기 가족을 주저함없이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새롭고 폭넓게 사람의 형제 됨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 전역에서 이혼풍습이 넘쳤습니다. 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칙 규정을 거듭해서 거부하셨지만, 예수님의 초기 추종자들 대부분은 이혼에 대해 확고한 의견들을 지녔고, 그것들을 서슴없이 예수님의 의견으로 돌렸습니다. 요한 마가를 제외하고 모든 신약(新約) 성서(聖書)의 저자들은 이혼에 대해 더 엄중하고 진보적인 이 관념들을 고수했습니다.

180923 경제적 태도 눅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140:8.15 (1581.2) 4. Economic attitude. Jesus worked, lived, and traded in the world as he found it. He was not an economic reformer, although he did frequently call attention to the injustice of the unequal distribution of wealth. But he did not offer any suggestions by way of remedy. He made it plain to the three that, while his apostles were not to hold property, he was not preaching against wealth and property, merely its unequal and unfair distribution. He recognized the need for social justice and industrial fairness, but he offered no rules for their attainment. 경제적 태도. 예수님은 자신이 파악한 대로 세상에서 일하였고 사셨으며 거래하셨습니다. 그가 경제 개혁가는 아니었지만, 부(富)의 불평등한 분배의 부당함에 자주 환기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지책으로 어떤 제안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그의 사도들이 재산을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함은, 부와 재산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지 불평등하고 부당한 분배에 대한 설교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는 사회적 정의와 산업적 공평의 필요를 인정했지만, 그 달성을 위해 어떤 규율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140:8.16 (1581.3) He never taught his followers to avoid earthly possessions, only his twelve apostles. Luke, the physician, was a strong believer in social equality, and he did much to interpret Jesus’ sayings in harmony with his personal beliefs. Jesus never personally directed his followers to adopt a communal mode of life; he made no pronouncement of any sort regarding such matters. 그는 열 두 사도들을 제외한 그의 추종자들에게 현세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누가는 사회적 평등의 강한 신봉자였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자신의 개인적 믿음들과 조화되게 많이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추종자들이 공동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직접 지시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문제들에 관해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140:8.17 (1581.4) Jesus frequently warned his listeners against covetousness, declaring that “a man’s happiness consists not in the abundance of his material possessions.” He constantly reiterated, “What shall it profit a man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 He made no direct attack on the possession of property, but he did insist that it is eternally essential that spiritual values come first. In his later teachings he sought to correct many erroneous Urantia views of life by narrating numerous parables which he presented in the course of his public ministry. Jesus never intended to formulate economic theories; he well knew that each age must evolve its own remedies for existing troubles. And if Jesus were on earth today, living his life in the flesh, he would be a great disappointment to the majority of good men and women for the simple reason that he would not take sides in present-day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disputes. He would remain grandly aloof while teaching you how to perfect your inner spiritual life so as to render you manyfold more competent to attack the solution of your purely human problems.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탐욕에 대해 자주 경고하시면서, “사람의 행복은 그의 물질적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변함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는 재산의 소유에 대해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가 먼저라는 영원한 본질을 주장하셨습니다. 후기 가르침에서 그는 대중 사역의 과정에서 제시한 수많은 비유들을 얘기하여 지구(유란시아)의 잘못된 여러 인생의 관점들을 바로잡으려고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경제이론을 세우려는 의도가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시대마다 당면 문제에 대한 자체의 개선책을 끌어내야만 함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신으로 사시면서 오늘날 지상에 계셨다면, 그가 오늘날의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분쟁에서 어떤 편도 들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에게 큰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너희를 몇 배나 유능하게 만들어 순전히 너희 인간 문제들의 해결에 달려들도록, 너희 내적인 영적 생활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숭고하게 초연(超然현실에 참견하지 않음)할 것입니다.

140:8.18 (1581.5) Jesus would make all men Godlike and then stand by sympathetically while these sons of God solve their own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problems. It was not wealth that he denounced, but what wealth does to the majority of its devotees. On this Thursday afternoon Jesus first told his associates that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같이 만들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공감을 나타내시며 곁에 계실 것입니다. 그가 비난하신 것은 부유함이 아니라, 그 부유함이 광신적으로 부(富)를 의지하는 대다수에게 행하는 것(영향)이었습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님은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180930 개인적 종교1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140:8.19 (1581.6) 5. Personal religion. You, as did his apostles, should the better understand Jesus’ teachings by his life. He lived a perfected life on Urantia, and his unique teachings can only be understood when that life is visualized in its immediate background. It is his life, and not his lessons to the twelve or his sermons to the multitudes, that will assist most in revealing the Father’s divine character and loving personality. 개인적 종교. 너희는, 그의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그의 가르침을 더 온전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지구(유란시아)에서 완성된 일생을 사셨고, 직접적인 배경 안에서 그 생애가 구체적으로 그려질 때에만, 그의 유일한 가르침들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신적 성품과 애정 어린 고유성을 드러내도록 최대로 도움이 될 것은, 예수님의 일생이지, 열 두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들이나 대중들에게 주신 그의 설교가 아닙니다.

140:8.20 (1582.1) Jesus did not attack the teachings of the Hebrew prophets or the Greek moralists. The Master recognized the many good things which these great teachers stood for, but he had come down to earth to teach something additional, “the voluntary conformity of man’s will to God’s will.” Jesus did not want simply to produce a religious man, a mortal wholly occupied with religious feelings and actuated only by spiritual impulses. Could you have had but one look at him, you would have known that Jesus was a real man of great experience in the things of this world. The teachings of Jesus in this respect have been grossly perverted and much misrepresented all down through the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you have also held perverted ideas about the Master’s meekness and humility. What he aimed at in his life appears to have been a superb self-respect. He only advised man to humble himself that he might become truly exalted; what he really aimed at was true humility toward God. He placed great value upon sincerity — a pure heart. Fidelity was a cardinal virtue in his estimate of character, while courage was the very heart of his teachings. “Fear not” was his watchword, and patient endurance his ideal of strength of character. The teachings of Jesus constitute a religion of valor, courage, and heroism. And this is just why he chose as his personal representatives twelve commonplace men, the majority of whom were rugged, virile, and manly fishermen. 예수님은 히브리 선지자들이나 그리스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주(主)님은 이 위대한 선생들이 대표했던 여러 좋은 것들을 인정하셨지만, 그는 추가적인 어떤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사람 의지의 자발적 순종(順從)”을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종교인, 즉 종교적 감정으로 가득 차서 영적 충동만으로 움직이는 필사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한 번만이라도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일에서 위대한 체험을 하신 진정한 사람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여러 세기의 기독교 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왜곡되었고 굉장히 와전(訛傳사실과 다르게 전해짐)되었습니다. 너희들도 주(主)님의 온유함과 겸손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품어 왔습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최상의 자아-존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람이 겸손해야 진실로 고귀해질 수 있다고 충고만 하셨습니다. 그가 실제로 목표삼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성실–순수한 심정-에 위대한 가치를 두셨습니다. 충성은 그가 성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미덕이었던 반면에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그의 표어였고, 끈기 있는 인내는 강건한 성품에 대한 그의 이상(理想완전한 상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맹(勇猛용감), 용기(勇氣굳셈) 및 영웅심(英雄心)의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개인적 대표자들로서 12명의 평범한 사람들, 즉 대다수가 소박하고 힘차며 씩씩한 어부들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140:8.21 (1582.2) Jesus had little to say about the social vices of his day; seldom did he make reference to moral delinquency. He was a positive teacher of true virtue. He studiously avoided the negative method of imparting instruction; he refused to advertise evil. He was not even a moral reformer. He well knew, and so taught his apostles, that the sensual urges of mankind are not suppressed by either religious rebuke or legal prohibitions. His few denunciations were largely directed against pride, cruelty, oppression, and hypocrisy. 예수님은 그 시대의 사회악(社會惡)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 비행(非行)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참된 미덕을 가르치는 선생이셨습니다. 그는 가르치실 때 부정적 방법을 신중히 피하셨습니다. 그는 악이 선전(宣傳)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도덕적 개혁가도 아니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관능적 충동이 종교적 비난이나 법적 금지로 억제되지 않음을 잘 아셨고,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몇 가지 비난은 주로 자만(自慢스스로 자랑함), 잔인(殘忍인정없이 모짐), 억압(抑壓억지로 억누름), 위선(僞善겉으로만 착한 체함)을 향했습니다.

140:8.22 (1582.3) Jesus did not vehemently denounce even the Pharisees, as did John. He knew many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were honest of heart; he understood their enslaving bondage to religious traditions. Jesus laid great emphasis on “first making the tree good.” He impressed the three that he valued the whole life, not just a certain few special virtues. 예수님은 요한이 했듯이 바리새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심정이 정직했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종교적 전통에 노예로 속박된 그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것”에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그는 세 사도들에게, 자신은 몇 가지 특별한 미덕들이 아니라, 일생 전체를 평가한다고 명심하게 했습니다.

181007 개인적 종교2(성장) 마13:31-32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1 He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 32 Though it is the smallest of all your seeds, yet when it grows, it is the largest of garden plants and becomes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ome and perch in its branches.”

140:8.23 (1582.4) The one thing which John gained from this day’s teaching was that the heart of Jesus’ religion consisted in the acquirement of a compassionate character coupled with a personality motivated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요한은 이 날 가르침에서 얻은 한 가지는 예수님 종교의 핵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고유성과 연결된 온정(溫情따뜻한 공감)의 성격 획득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40:8.24 (1582.5) Peter grasped the idea that the gospel they were about to proclaim was really a fresh beginning for the whole human race. He conveyed this impression subsequently to Paul, who formulated therefrom his doctrine of Christ as “the second Adam.” 베드로는 그들이 선포할 복음이 정말로 온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관념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이 감동적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두 번째 아담”이라는 자신의 교리를 고안했습니다.

140:8.25 (1582.6) James grasped the thrilling truth that Jesus wanted his children on earth to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citizens of the completed heavenly kingdom. 야고보는 예수님의 자녀들이 땅에서 이미 완성된 하늘나라의 시민들인 것처럼 살기를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감격적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140:8.26 (1582.7) Jesus knew men were different, and he so taught his apostles. He constantly exhorted them to refrain from trying to mold the disciples and believers according to some set pattern. He sought to allow each soul to develop in its own way, a perfecting and separate individual before God. In answer to one of Peter’s many questions, the Master said: “I want to set men free so that they can start out afresh as little children upon the new and better life.” Jesus always insisted that true goodness must be unconscious, in bestowing charity not allowing the left hand to know what the right hand does. 예수님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게 사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제자들과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틀에 따라 만들려고 하지 말라고 항상 타이르셨습니다. 그는 각자(혼)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독립된 개인(個人)을 개발하도록 놔두기 바라셨습니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主)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처럼 새롭게 더 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방하기를 바라노라.” 예수님은 참된 선(善)은 의식하지 않게, 즉 구제(救濟)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만 한다고 항상 주장하셨습니다.

140:8.27 (1583.1) The three apostles were shocked this afternoon when they realized that their Master’s religion made no provision for spiritual self-examination. All religions before and after the times of Jesus, even Christianity, carefully provide for conscientious self-examination. But not so with the religion of Jesus of Nazareth. Jesus’ philosophy of life is without religious introspection. The carpenter’s son never taught character building; he taught character growth, declaring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But Jesus said nothing which would proscribe self-analysis as a prevention of conceited egotism. 세 사도들은 주(主)님의 종교는 영적 자기-반성을 위한 규정이 없음을 깨닫고 이날 오후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시대 이전과 이후의 모든 종교는, 기독교도, 양심적인 자기-반성을 신중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철학은 종교적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인격 도야(陶冶 교육, 훈련, 형성, 개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선언하시면서, 인격 성장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만한 자기과시(自己誇示)벽(癖병, 버릇)의 예방책으로써 자아-분석을 금지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81014 개인적 종교3 마13:45-46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5 “Again,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erchant looking for fine pearls. 46 When he found one of great value, he went away and sold everything he had and bought it.

140:8.28 (1583.2) The right to enter the kingdom is conditioned by faith, personal belief. The cost of remaining in the progressive ascent of the kingdom is the pearl of great price, in order to possess which a man sells all that he has.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권리는 신앙, 개인적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적 상승을 유지하는 비용은,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얻으려는 값비싼 진주입니다.

140:8.29 (1583.3) The teaching of Jesus is a religion for everybody, not alone for weaklings and slaves. His religion never became crystallized (during his day) into creeds and theological laws; he left not a line of writing behind him. His life and teachings were bequeathed the universe as an inspirational and idealistic inheritance suitable for the spiritual guidance and moral instruction of all ages on all worlds. And even today, Jesus’ teaching stands apart from all religions, as such, albeit it is the living hope of every one of them. 예수님의 가르침은 약한 사람들과 노예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의 종교는 그 당시 결코 신조들과 신학적 법칙으로 구체화(명확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뒤에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온 세상의 모든 세대에게 영적 안내와 도덕적 교훈에 알맞게 영감을 주는 이상주의(理想主義)적 유산으로서 우주에 증여(贈與선물로 줌)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모든 종교들에게 살아있는 희망이지만, 모든 종교들과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140:8.30 (1583.4) Jesus did not teach his apostles that religion is man’s only earthly pursuit; that was the Jewish idea of serving God. But he did insist that religion was the exclusive business of the twelve. Jesus taught nothing to deter his believers from the pursuit of genuine culture; he only detracted from the tradition-bound religious schools of Jerusalem. He was liberal, big-hearted, learned, and tolerant. Self-conscious piety had no place in his philosophy of righteous living. 예수님은 종교를 사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추구할 것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열 두 사도들이 전념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자들에게 진정한 문화의 추구를 막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에 묶여있던 예루살렘의 종교학파들에서 신자들을 단지 떼어놓으셨습니다. 그는 개방적이고, 마음이 넓으며, 박식했고, 너그러웠습니다. 과도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경건은 정의롭게 사는 그의 철학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40:8.31 (1583.5) The Master offered no solutions for the nonreligious problems of his own age nor for any subsequent age. Jesus wished to develop spiritual insight into eternal realities and to stimulate initiative in the originality of living; he concerned himself exclusively with the underlying and permanent spiritual needs of the human race. He revealed a goodness equal to God. He exalted love — truth, beauty, and goodness — as the divine ideal and the eternal reality. 주(主)님은 자신의 세대나 후세대의 비(非)종교적 문제들을 위해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독창적 삶을 주도하도록 격려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는 인류의 근원적이며 변하지 않는 영적 필요에만 오로지 관여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선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사랑-진(眞), 미(美), 선(善)-을 신적 이상과 영원한 실체로 높였습니다.

140:8.32 (1583.6) The Master came to create in man a new spirit, a new will — to impart a new capacity for knowing the truth, experiencing compassion, and choosing goodness — the will to be in harmony with God’s will, coupled with the eternal urge to becom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주(主)님은 사람 안에 새로운 영,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여 – 진리를 알고, 온정(溫情따뜻한 공감)을 체험하며, 선을 선택하는 새 능력,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충동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려는 의지를 나눠주려고 오셨습니다.

9. The Day of Consecration 성직 봉헌(奉獻)일

181021 봉헌(奉獻) 명령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He said to them,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140:9.1 (1583.7) The next Sabbath day Jesus devoted to his apostles, journeying back to the highland where he had ordained them; and there, after a long and beautifully touching personal message of encouragement, he engaged in the solemn act of the consecration of the twelve. This Sabbath afternoon Jesus assembled the apostles around him on the hillside and gave them into the hands of his heavenly Father in preparation for the day when he would be compelled to leave them alone in the world. There was no new teaching on this occasion, just visiting and communion. 그 다음 안식일에 예수님은 사도들을 임직했던 고지(高地)로 돌아가, 그들에게 전념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친히 길고 아주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 열 두 사도의 엄숙한 성직 봉헌식을 시작했습니다.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님은 산 중턱에서 사도들을 주위에 모아, 세상에 그들만 남겨놓을 날을 대비하여 하늘 아버지의 보호에 그들을 맡겼습니다. 이때 새 가르침은 없었고, 환담(歡談즐거운 이야기)과 교제만 나누었습니다.

140:9.2 (1584.1) Jesus reviewed many features of the ordination sermon, delivered on this same spot, and then, calling them before him one by one, he commissioned them to go forth in the world as his representatives. The Master’s consecration charge was: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Liberate spiritual captives, comfort the oppressed, and minister to the afflicted.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예수님은 바로 이 자리에서 전했던 임직 설교의 여러 요점을 살피신 후 그들을 하나씩 자신 앞에 불러서 그의 대리자로 세상에 나가도록 임명했습니다. 주(主)님의 봉헌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 영적 포로를 해방하고, 억눌린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0:9.3 (1584.2) Jesus advised them to take neither money nor extra clothing, saying,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hire.” And finally he said: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 the midst of wolves; be you therefore as wise as serpents and as harmless as doves. But take heed, for your enemies will bring you up before their councils, while in their synagogues they will castigate you. Before governors and rulers you will be brought because you believe this gospel, and your very testimony shall be a witness for me to them. And when they lead you to judgment, be not anxious about what you shall say, for the spirit of my Father indwells you and will at such a time speak through you. Some of you will be put to death, and before you establish the kingdom on earth, you will be hated by many peoples because of this gospel; but fear not; I will be with you, and my spirit shall go before you into all the world. And my Father’s presence will abide with you while you go first to the Jews, then to the gentiles.”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이나 여벌옷을 지니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꾼이 자기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그러나 조심할지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징계할 것이기 때문이라. 총독들과 통치자들 앞에 너희가 끌려가리니, 너희가 이 복음을 믿기 때문이며, 바로 너희의 증언이 그들에게 나를 위한 증거가 되리라.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재판에 넘길 때 너희가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계셔서,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 말씀하리라. 너희 중 더러는 죽을 것이며, 너희가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리라.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내 영이 너희보다 먼저 온 세상에 가리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는 유대인들에게요,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의 임재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140:9.4 (1584.3) And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they journeyed back to their home in Zebedee’s house.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그들은 세베대의 집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갔습니다.

10. The Evening After the Consecration 봉헌일 저녁

140:10.1 (1584.4) That evening while teaching in the house, for it had begun to rain, Jesus talked at great length, trying to show the twelve what they must be, not what they must do. They knew only a religion that imposed the doing of certain things as the means of attaining righteousness — salvation. But Jesus would reiterate, “In the kingdom you must be righteous in order to do the work.” Many times did he repeat, “Be you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All the while was the Master explaining to his bewildered apostles that the salvation which he had come to bring to the world was to be had only by believing, by simple and sincere faith. Said Jesus: “John preached a baptism of repentance, sorrow for the old way of living. You are to proclaim the baptism of fellowship with God. Preach repentance to those who stand in need of such teaching, but to those already seeking sincere entrance to the kingdom, open the doors wide and bid them enter into the joyous fellowship of the sons of God.” But it was a difficult task to persuade these Galilean fishermen that, in the kingdom, being righteous, by faith, must precede doing righteousness in the daily life of the mortals of earth. 비가 오기 시작해서 그 날 저녁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예수님은 장시간 말씀하시면서, 열 두 사도들이 해야만 할 것이 아니라 되어야만 할 것을 보이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들은 의로움 즉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써 어떤 것들 행하기를 강요하는 종교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면 너희가 의롭게 되어야만 한다.”고 반복하시곤 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시므로 너희도 완전해지라.”고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당황하는 사도들에게 계속 주님께서 설명하셨던 것은, 그가 세상에 가져온 구원은 믿음, 즉 단순하며 신실한 신앙만으로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회개의 세례, 즉 옛 생활방식의 참회를 전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세례를 선포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회개를 전하라, 그러나 이미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즐거운 사귐에 들어가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의(義)를 행하는 것보다 앞서야만 한다고 이 갈릴리 어부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40:10.2 (1584.5) Another great handicap in this work of teaching the twelve was their tendency to take highly idealistic and spiritual principles of religious truth and remake them into concrete rules of personal conduct. Jesus would present to them the beautiful spirit of the soul’s attitude, but they insisted on translating such teachings into rules of personal behavior. Many times, when they did make sure to remember what the Master said, they were almost certain to forget what he did not say. But they slowly assimilated his teaching because Jesus was all that he taught. What they could not gain from his verbal instruction, they gradually acquired by living with him. 열둘을 가르치는 이 일의 또 다른 큰 어려움은, 종교적 진리의 높은 이상적·영적 원리들을 취해서 고유(개인)적 행동의 구체적 규칙들로 개조하려는 그들의 경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영(정신)을 그들에게 나타내곤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가르침들을 고유(개인)적 행위의 규칙들로 고집스럽게 해석했습니다. 여러 번, 그들은 주(主)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확실히 기억했을 때, 그가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거의 여지없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셨던 모두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천천히 흡수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은, 그와 함께 살면서 사도들은 서서히 얻었습니다.

140:10.3 (1585.1) It was not apparent to the apostles that their Master was engaged in living a life of spiritual inspiration for every person of every age on every world of a far-flung universe. Notwithstanding what Jesus told them from time to time, the apostles did not grasp the idea that he was doing a work on this world but for all other worlds in his vast creation. Jesus lived his earth life on Urantia, not to set a personal example of mortal living for the men and women of this world, but rather to create a high spiritual and inspirational ideal for all mortal beings on all worlds. 그들의 주(主)님이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고유자)들을 위해 영적 영감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 사도들에게는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가 자신의 광대한 창조계에 있는 다른 모든 세상을 위해서도, 이 세상에서 일하셨다는 관념을, 사도들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지구(유란시아)에서 지상 생활을 사셨던 것은, 이 세상 남녀들을 위한 필사자 삶의 개인(고유)적 모범(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상들의 모든 필사 존재들을 위해 높은 영적·영감적 이상(理想)을 창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81104 자녀-아버지 관계와 천국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140:10.4 (1585.2) This same evening Thomas asked Jesus: “Master, you say that we must become as little children before we can gain entrance to the Father’s kingdom, and yet you have warned us not to be deceived by false prophets nor to become guilty of casting our pearls before swine. Now, I am honestly puzzled. I cannot understand your teaching.” Jesus replied to Thomas: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Ever you insist on making literal all that I teach. When I asked you to become as little children as the price of entering the kingdom, I referred not to ease of deception, mere willingness to believe, nor to quickness to trust pleasing strangers. What I did desire that you should gather from the illustration was the child-father relationship. You are the child, and it is your Father’s kingdom you seek to enter. There is present that natural affection between every normal child and its father which insures an understanding and loving relationship, and which forever precludes all disposition to bargain for the Father’s love and mercy. And the gospel you are going forth to preach has to do with a salvation growing out of the faith-realization of this very and eternal child-father relationship.” 이 날 저녁에 도마가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어린아이처럼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도 말고, 우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죄를 범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합니다.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는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늘 문자대로 고집하느니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내가 요구했던 것은, 쉽게 속거나, 단순히 기꺼이 믿거나, 호감(好感)이 가는 낯선 이를 바로 신뢰하라는 말이 아니었느니라. 그 예증에서 너희가 얻어야만 한다고 내가 바랐던 것은, 자녀-아버지 관계였노라. 너희는 어린아이요, 너희가 들어가려는 곳은 너희 아버지의 나라이니라. 모든 정상적 어린이와 그 아버지 사이에는 자연스런 애정이 있어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보증(保證)하며,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거래하려는 모든 경향을 언제나 가로막느니라. 너희가 나가 전하려는 복음은 바로 이 영원한 자녀-아버지 관계의 신앙-깨달음에서 생긴 구원과 관계있느니라.”

140:10.5 (1585.3) The one characteristic of Jesus’ teaching was that the morality of his philosophy originated in the personal relation of the individual to God — this very child-father relationship. Jesus placed emphasis on the individual, not on the race or nation. While eating supper, Jesus had the talk with Matthew in which he explained that the morality of any act is determined by the individual’s motive. Jesus’ morality was always positive. The golden rule as restated by Jesus demands active social contact; the older negative rule could be obeyed in isolation. Jesus stripped morality of all rules and ceremonies and elevated it to majestic levels of spiritual thinking and truly righteous living. 예수님의 가르침의 한 가지 특징은 그 철학의 도덕성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고유적 관계 – 바로 이 자녀-아버지 관계 –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종이나 나라가 아니라 개인에게 비중을 두셨습니다. 저녁 식사하면서, 예수님은 마태와 이야기하면서 어떤 행동의 도덕성은 개인의 동기가 결정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도덕성은 항상 긍정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새로 말씀하신 황금률은 적극적인 사회적 교제를 요구합니다. 오래된 부정적 규칙은 고립되어 지켜졌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성에서 모든 규칙들과 예식들을 벗겨내고 도덕성을 영적 사고와 진실로 의롭게 사는 위엄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140:10.6 (1585.4) This new religion of Jesus was not without its practical implications, but whatever of practical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value there is to be found in his teaching is the natural outworking of this inner experience of the soul as it manifests the fruits of the spirit in the spontaneous daily ministry of genuin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예수님의 이 새 종교는 실천적 암시(暗示넌지시 깨우치는 내용)들이 없지 않았지만, 실천적인 정치적·사회적 혹은 경제적 가치에 속한 무엇이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든지, 혼의 이 내적 체험의 자연스런 결실이며, 그것은 진정한 고유적 종교 체험에서 우러나온 매일의 사역(봉사)에서 영의 열매들이 증명되는 것과 같습니다.

181111 나무가 결정하는 열매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Likewise every good tree bears good fruit, but a bad tree bears bad fruit.

140:10.7 (1585.5) After Jesus and Matthew had finished talking, Simon Zelotes asked, “But, Master, are all men the sons of God?” And Jesus answered: “Yes, Simon, all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at is the good news you are going to proclaim.” But the apostles could not grasp such a doctrine; it was a new, strange, and startling announcement. And it was because of his desire to impress this truth upon them that Jesus taught his followers to treat all men as their brothers. 예수께서 마태와 대화를 마치자, 시몬 젤로떼가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主)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인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시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것이 너희가 선포할 복음이라.”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교리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이상하며,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진리를 추종자들에게 심어주려는 소망 때문에, 모든 사람을 자기 형제들로 대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40:10.8 (1585.6) In response to a question asked by Andrew, the Master made it clear that the morality of his teaching was inseparable from the religion of his living. He taught morality, not from the nature of man, but from the relation of man to God. 안드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주(主)님은 그 가르침의 도덕성은 그 삶의 종교와 분리할 수 없었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는 사람 본성의 도덕성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도덕성을 가르치셨습니다.

140:10.9 (1585.7) John asked Jesus, “Master, what is the kingdom of heaven?” And Jesus answered: “The kingdom of heaven consists in these three essentials: first, recognition of the fact of the sovereignty of God; second, belief in the truth of sonship with God; and third, faith in the effectiveness of the supreme human desire to do the will of God — to be like God. And this is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hat by faith every mortal may have all these essentials of salvation.” 요한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主)여, 하늘나라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답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본질이니라. 첫째 하나님 주권의 사실 인정, 둘째 하나님의 아들 됨의 진리 믿음, 셋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 하나님 같이 되려는 – 최극 인간 소망의 효과성을 신앙함. 이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니라. 신앙으로 모든 필사자는 이 모든 구원의 본질을 소유할 수 있느니라.”

140:10.10 (1586.1) And now the week of waiting was over, and they prepared to depart on the morrow for Jerusalem.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끝났고, 그들은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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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89 The Resurrection 부활

Paper 189

The Resurrection 부활

1. The Morontia Transit 모론시아 전환
2. The Material Body of Jesus 예수의 물질 몸
3. The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섭리시대적 부활
Departur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고유성화 조율자의 출발
4. Discovery of the Empty Tomb 빈 무덤의 발견
The five women 다섯 여성들
Jesus appears to Mary Magdalene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5. Peter and John at the Tomb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와 요한
Second appearance — to Mary Magdalene 막달라 마리아에게 두 번째 출현하심

160327 부활1-부활의 실상 마28:1-6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189:0.1 (2020.1) SOON after the burial of Jesus on Friday afternoon, the chief of the archangels of Nebadon, then present on Urantia, summoned his council of the resurrection of sleeping will creatures and entered upon the consideration of a possible technique for the restoration of Jesus. These assembled sons of the local universe, the creatures of Michael, did this on their own responsibility; Gabriel had not assembled them. By midnight they had arrived at the conclusion that the creature could do nothing to facilitate the resurrection of the Creator. They were disposed to accept the advice of Gabriel, who instructed them that, since Michael had “laid down his life of his own free will, he also had power to take it up again in accordance with his own determination.” Shortly after the adjournment of this council of the archangels, the Life Carriers, and their various associates in the work of creature rehabilitation and morontia creation,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Jesus, being in personal command of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then on Urantia, spoke these words to the anxious waiting watchers: 금요일(AD 30. 4. 7.) 오후, 예수님을 장사지낸 직후, 그때 유란시아에 있었던 네바돈의 수석 천사장이 잠자는 의지 창조물들의 부활을 논의하는 회의를 소집했으며, 예수님의 회복을 위해 가능한 기법을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집된 이 지역우주의 아들들, 즉 미가엘의 창조물들은 자신들의 책임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가브리엘이 그들을 소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그들은 창조자의 부활을 돕기 위해 창조물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미가엘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생명을 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을 지녔느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준 가브리엘의 충고를 그들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창조물의 회복과 모론시아 창조계의 업무에 있어서, 천사장들, 생명 운반자들 및 그들의 다양한 동료들로 구성된 이 회의를 마친 직후, 당시 유란시아에 있는 천상의 무리들을 직접 지휘하던 예수님의 고유성(固有性)화 조율자는 애타게 기다리는 구경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89:0.2 (2020.2) “Not one of you can do aught to assist your Creator-father in the return to life. As a mortal of the realm he has experienced mortal death; as the Sovereign of a universe he still lives. That which you observe is the mortal transit of Jesus of Nazareth from life in the flesh to life in the morontia. The spirit transit of this Jesus was completed at the time I separated myself from his personality and became your temporary director. Your Creator-father has elected to pass through the whole of the experience of his mortal creatures, from birth on the material worlds, on through natural death and the resurrection of the morontia, into the status of true spirit existence. A certain phase of this experience you are about to observe, but you may not participate in it. Those things which you ordinarily do for the creature, you may not do for the Creator. A Creator Son has within himself the power to bestow himself in the likeness of any of his created sons; he has within himself the power to lay down his observable life and to take it up again; and he has this power because of the direct command of the Paradise Father, and I know whereof I speak.” 너희 창조자-아버지가 살아나도록 너희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느니라. 영역의 필사(必死반드시 죽는) 사람으로 그는 필사 죽음을 체험하셨고, 우주 주권자로서 그는 여전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라. 너희가 목격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이 육신의 생명에서 모론시아의 생명으로 이동하는 필사자 전환이니라. 예수님의 이 영 전환은 내가 그의 고유성에서 스스로 분리하여 잠시 너희 관리자가 되었을 때 완료되었느니라. 너희 창조자-아버지는 자신의 필사 창조물들 전체 체험, 즉 물질세계들에서 탄생하여 자연적 죽음과 모론시아 부활을 거쳐 참된 영 존재의 상태가 이르기로 선택했느니라. 너희가 이 체험의 단계를 보겠지만, 너희가 그것에 참여할 수는 없느니라. 너희가 보통 창조물을 위해 하는 그것들을 너희는 창조자를 위해서 할 수 없느니라. 창조자 아들은 자신이 창조한 아들들의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증여할 권능을 자신 안에 갖고 계시니라. 그는 자신 안에 지켜야 할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능이 있기 때문이라. 그는 천국 아버지의 직접 명령으로 이 권능을 지니시며,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느니라.”

189:0.3 (2020.3) When they heard the Personalized Adjuster so speak, they all assumed the attitude of anxious expectancy, from Gabriel down to the most humble cherubim. They saw the mortal body of Jesus in the tomb; they detected evidences of the universe activity of their beloved Sovereign; and not understanding such phenomena, they waited patiently for developments. 그들이 고유성(固有性)화 조율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브리엘로부터 아래로 가장 낮은 신분의 케루빔 천사들까지 그들은 모두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있는 예수님의 필사 시신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주권자의 우주 활동의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상황을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1. The Morontia Transit 모론시아 전환

180401 190421 200412 부활체(모론시아) 전환 요10:17-18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 The reason my Father loves me is that I lay down my life–only to take it up again. 18 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 I received from my Father.”

200412 눅24:1-3 1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1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very early in the morning, the women took the spices they had prepared and went to the tomb. 2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tomb, 3 but when they entered, they did not find the body of the Lord Jesus.

189:1.1 (2020.4) At two forty-five Sunday morning, the Paradise incarnation commission, consisting of seven unidentified Paradise personalities, arrived on the scene and immediately deployed themselves about the tomb. At ten minutes before three, intense vibrations of commingled material and morontia activities began to issue from Joseph’s new tomb, and at two minutes past three o’clock, this Sunday morning, April 9, A.D. 30, the resurrected morontia form and personality of Jesus of Nazareth came forth from the tomb. 일요일 오전 245에, 미(未)확인된 일곱 천국 고유성들로 구성된 천국 성육신(成肉身) 위원회가 그 현장에 도착했고, 즉시 무덤 주위에 배치되었습니다. 310분 전, 혼합된 물질과 모론시아(영과 물질의 중간 상태) 활동으로 강렬한 진동요셉의 새 무덤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AD 3049, 이 일요일 오전 32에, 나사렛 예수님의 부활한 모론시아 형체와 고유성이 그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189:1.2 (2021.1) After the resurrected Jesus emerged from his burial tomb, the body of flesh in which he had lived and wrought on earth for almost thirty-six years was still lying there in the sepulchre niche, undisturbed and wrapped in the linen sheet, just as it had been laid to rest by Joseph and his associates on Friday afternoon. Neither was the stone before the entrance of the tomb in any way disturbed; the seal of Pilate was still unbroken; the soldiers were still on guard. The temple guards had been on continuous duty; the Roman guard had been changed at midnight. None of these watchers suspected that the object of their vigil had risen to a new and higher form of existence, and that the body which they were guarding was now a discarded outer covering which had no further connection with the delivered and resurrected morontia personality of Jesus. 매장한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께서 나오신 후, 그가 약 36년 동안 사시고 지상에서 행하셨던 육신은 금요일 오후에 요셉과 그 동료들이 눕혔던 그대로, 훼손 없이 세마포에 싸여 묘실에 아직 뉘여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 앞의 바위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빌라도의 봉인도 여전히 파손되지 않았으며, 군인들도 여전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계속 근무 중이었고, 로마 경비병은 한밤중(밤12시)에 교체되었습니다. 이 당직자들 누구도 그들의 감시 대상이 새롭게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살아나 그들이 지키던 시신이 이제, 해방되고 부활한 예수님의 모론시아(부활체) 고유성과 더 이상 관계없이 버려진 바깥 덮개임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189:1.3 (2021.2) Mankind is slow to perceive that, in all that is personal, matter is the skeleton of morontia, and that both are the reflected shadow of enduring spirit reality. How long before you will regard time as the moving image of eternity and space as the fleeting shadow of Paradise realities? 인류는 개인적인 모든 면에서 물질은 모론시아의 뼈대이며, 둘(물질과 모론시아)은 영속적인 영 실체가 반사된 그림자임을 천천히 파악합니다. 얼마나 오래있어야, 너희는 시간을 영원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공간을 천국 실체들의 쏜살같은 그림자로 간주하겠는가?

189:1.4 (2021.3) As far as we can judge, no creature of this universe nor any personality from another universe had anything to do with this morontia resurrection of Jesus of Nazareth. On Friday he laid down his life as a mortal of the realm; on Sunday morning he took it up again as a morontia being of the system of Satania in Norlatiadek. There is much about the resurrection of Jesus which we do not understand. But we know that it occurred as we have stated and at about the time indicated. We can also record that all known phenomena associated with this mortal transit, or morontia resurrection, occurred right there in Joseph’s new tomb, where the mortal material remains of Jesus lay wrapped in burial cloths. 우리가 판단하는 한, 이 우주의 어떤 창조물이나 다른 우주에 있는 어떤 고유성나사렛 예수의 이 모론시아 부활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영역의 필사자로서 생명을 버리셨고, 일요일 아침에 그는 놀라시아덱의 사타니아 체계에 속한 모론시아 존재로 다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술하고 지적한 그 무렵에 부활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또한, 이 필사자 전환이나 모론시아 부활과 관련되어 알려진 모든 현상이, 예수님의 필사자 물질적 유해(遺骸)가 수의에 싸였던, 요셉의 새 무덤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음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189:1.5 (2021.4) We know that no creature of the local universe participated in this morontia awakening. We perceived the seven personalities of Paradise surround the tomb, but we did not see them do anything in connection with the Master’s awakening. Just as soon as Jesus appeared beside Gabriel, just above the tomb, the seven personalities from Paradise signalized their intention of immediate departure for Uversa. 지역 우주의 어떤 창조물도 이 모론시아 부활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무덤을 둘러싼 천국의 일곱 고유성들을 감지했지만, 주님(主)의 부활과 연결된 어떤 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 바로 위, 가브리엘 옆에 나타나는 순간에, 천국에서 온 일곱 고유성들은 즉시 유버르사로 떠나겠다는 자신들의 의도를 알렸습니다.

189:1.6 (2021.5) Let us forever clarify the concept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by making the following statements: 다음의 진술로 예수님의 부활 개념을 언제나 분명히 하십시오.

189:1.7 (2021.6) 1. His material or physical body was not a part of the resurrected personality. When Jesus came forth from the tomb, his body of flesh remained undisturbed in the sepulchre. He emerged from the burial tomb without moving the stones before the entrance and without disturbing the seals of Pilate. 그의 물질 즉 물리적 시신은 부활한 고유성의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자, 그의 육체의 시신은 묘실에 훼손 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는 입구 앞에 있는 돌들을 움직이지 않은 채, 빌라도의 봉인을 훼손하지 않고, 매장된 무덤에서 나타났습니다.

189:1.8 (2021.7) 2. He did not emerge from the tomb as a spirit nor as Michael of Nebadon; he did not appear in the form of the Creator Sovereign, such as he had had before his incarnation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on Urantia. 그는 ()이나 네바돈의 미가엘로서 무덤에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지구(유란시아)에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성육신(成肉身)하기 이전처럼 창조자 주권자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89:1.9 (2021.8) 3. He did come forth from this tomb of Joseph in the very likeness of the morontia personalities of those who, as resurrected morontia ascendant beings, emerge from the resurrection halls of the first mansion world of this local system of Satania. And the presence of the Michael memorial in the center of the vast court of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number one leads us to conjecture that the Master’s resurrection on Urantia was in some way fostered on this, the first of the system mansion worlds. 그는, 부활한 모론시아 상승 존재들처럼, 사타니아 이 지역 체계의 첫 저택 세계의 부활실들에서 나오는 모론시아 고유성들과 아주 똑같은 모습으로, 요셉의 이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1번 저택 세계에 속한 부활실들의 넓은 뜰 중앙에 있는 미가엘 기념관의 존재로 인해 우리들은 지구(유란시아)에서 ()님의 부활이 이 첫 체계 저택 세계들에서 어떤 방법으로 촉진되었다고 추측합니다.

189:1.10 (2022.1) The first act of Jesus on arising from the tomb was to greet Gabriel and instruct him to continue in executive charge of universe affairs under Immanuel, and then he directed the chief of the Melchizedeks to convey his brotherly greetings to Immanuel. He thereupon asked the Most High of Edentia for the certification of the Ancients of Days as to his mortal transit; and turning to the assembled morontia groups of the seven mansion worlds, here gathered together to greet and welcome their Creator as a creature of their order, Jesus spoke the first words of the postmortal career. Said the morontia Jesus: “Having finished my life in the flesh, I would tarry here for a short time in transition form that I may more fully know the life of my ascendant creatures and further reveal the will of my Father in Paradise.”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행위가브리엘을 맞이하고 임마누엘 밑에서 우주업무의 집행책임을 계속하도록 그에게 지시하셨으며, 그 후 그는 수석 멜기세덱에게 자기 형제의 인사를 임마누엘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그는 자신의 필사자 전환에 대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확인이 있었는지 에덴시아의 지고(至高)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들 계층의 창조물로서 자신들의 창조자를 환영하고 영접하려고 여기에 함께 모였던, 일곱 저택 세계들의 소집된 모론시아 집단들을 향해, 예수님은 필사자이후 생애의 첫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론시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으로 내 생애를 마쳤으니, 나는 상승하는 내 창조물들의 일생을 완전히 더 알고,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더 계시할 수 있도록, 과도기 형태로 잠시 여기에 머물고자 하노라.”

189:1.11 (2022.2) After Jesus had spoken, he signaled to the Personalized Adjuster, and all universe intelligences who had been assembled on Urantia to witness the resurrection were immediately dispatched to their respective universe assignments. 예수님은 말씀 후, 고유성화 조율자에게 신호로 알리자, 부활을 보려고 유란시아에 소집된 모든 우주 지능존재들각자 우주 임지로 즉시 돌아갔습니다.

189:1.12 (2022.3) Jesus now began the contacts of the morontia level, being introduced, as a creature, to the requirements of the life he had chosen to live for a short time on Urantia. This initiation into the morontia world required more than an hour of earth time and was twice interrupted by his desire to communicate with his former associates in the flesh as they came out from Jerusalem wonderingly to peer into the empty tomb to discover what they considered evidence of his resurrection. 예수님은 이제 유란시아에 잠시 살려고 선택했던 일생의 요청에 대하여, 창조물로서, 입문(入門)하게 된, 모론시아 수준의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모론시아 세계로 들어가는 이 시작은 지구 시간으로 한 시간 이상 걸렸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그의 부활의 증거로 여길 것을 찾으려고 빈 무덤 안을 이상히 여겨 응시하는, 그의 예전 동료들과 육신으로 소통하려는, 그의 요망으로 두 번 중단되었습니다.

189:1.13 (2022.4) Now is the mortal transit of Jesus —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the Son of Man — completed. The transitory experience of the Master as a personality midway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has begun. And he has done all this through power inherent within himself; no personality has rendered him any assistance. He now lives as Jesus of morontia, and as he begins this morontia life, the material body of his flesh lies there undisturbed in the tomb. The soldiers are still on guard, and the seal of the governor about the rocks has not yet been broken. 이제 예수님의 필사자 전환 –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의 모론시아 부활-이 완료되었습니다. 물질과 영 사이 중간 고유성으로서 ()님의 일시적 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님은 자신 안에 본래 있는 권능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해내셨습니다. 어떤 고유성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모론시아의 예수님으로 사시면서, 이 모론시아 생활을 시작할 때, 물질적 육체의 시신은 훼손 없이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군인들은 여전히 지키고 있고, 바위 근처 총독의 봉인은 아직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1. The Material Body of Jesus 예수의 물질 몸

230409 예수의 물질 몸 눅24:1-3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189:2.1 (2022.5) At ten minutes past three o’clock, as the resurrected Jesus fraternized with the assembled morontia personalities from the seven mansion worlds of Satania, the chief of archangels — the angels of the resurrection — approached Gabriel and asked for the mortal body of Jesus. Said the chief of the archangels: “We may not participate in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the bestowal experience of Michael our sovereign, but we would have his mortal remains put in our custody for immediate dissolution. We do not propose to employ our technique of dematerialization; we merely wish to invoke the process of accelerated time. It is enough that we have seen the Sovereign live and die on Urantia; the hosts of heaven would be spared the memory of enduring the sight of the slow decay of the human form of the Creator and Upholder of a universe. In the name of the celestial intelligences of all Nebadon, I ask for a mandate giving me the custody of the mortal body of Jesus of Nazareth and empowering us to proceed with its immediate dissolution.” 오전 3시 10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에서 모인 모론시아 고유성들과 친교를 나누는 동안에, 부활 천사들의 수석 천사장이 가브리엘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필사 몸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석 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가엘 우리 주권자의 증여 체험 중 모론시아 부활에 참여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그의 필사 유해(遺骸)의 즉각적 분해를 우리가 맡고자 합니다. 우리는 비(非)물질화하는 우리 기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가속화 과정을 행하려 할 뿐입니다. 우리는 주권자가 유란시아에서 사시고 돌아가신 것을 보았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늘의 무리들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유지자의 인간 형태가 점차 부패하는 광경을 계속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네바돈 천상의 지능 존재들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님의 필사 몸을 제가 관리하여 우리가 즉각적 분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명해 주십시오.”

189:2.2 (2023.1) And when Gabriel had conferred with the senior Most High of Edentia, the archangel spokesman for the celestial hosts was given permission to make such disposition of the physical remains of Jesus as he might determine. 그리고 가브리엘이 에덴시아의 선임 지고(至高)자와 의논한 후, 천상 무리의 천사장 대변자는 그의 결정대로 예수님의 물리적 유해(遺骸)를 그렇게 처분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189:2.3 (2023.2) After the chief of archangels had been granted this request, he summoned to his assistance many of his fellows, together with a numerous host of the representatives of all orders of celestial personalities, and then, with the aid of the Urantia midwayers, proceeded to take possession of Jesus’ physical body. This body of death was a purely material creation; it was physical and literal; it could not be removed from the tomb as the morontia form of the resurrection had been able to escape the sealed sepulchre. By the aid of certain morontia auxiliary personalities, the morontia form can be made at one time as of the spirit so that it can become indifferent to ordinary matter, while at another time it can become discernible and contactable to material beings, such as the mortals of the realm. 천사장들의 수석은, 이 요청이 허락된 후, 그는 모든 천상 계층의 고유성들의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무리와 함께, 자기 여러 동료를 자기 조력자로 소집한 다음 유란시아 중도자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물리적 몸체를 손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체(遺體)는 순수하게 물질적 창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모론시아 형태가 봉인된 묘실을 빠져나갈 수 있었듯이, 무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특정한 모론시아 보조(補助) 고유성들의 도움으로, 모론시아 형태가 한때는 영(靈)으로 만들어져 보통의 물질에 작용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에, 다른 때는 영역의 필사자들처럼 물질적 존재들에게 식별되거나 접촉될 수 있습니다.

189:2.4 (2023.3) As they made ready to remove the body of Jesus from the tomb preparatory to according it the dignified and reverent disposal of near-instantaneous dissolution, it was assigned the secondary Urantia midwayers to roll away the stones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 The larger of these two stones was a huge circular affair, much like a millstone, and it moved in a groove chiseled out of the rock, so that it could be rolled back and forth to open or close the tomb. When the watching Jewish guards and the Roman soldiers, in the dim light of the morning, saw this huge stone begin to roll away from the entrance of the tomb, apparently of its own accord — without any visible means to account for such motion — they were seized with fear and panic, and they fled in haste from the scene. The Jews fled to their homes, afterward going back to report these doings to their captain at the temple. The Romans fled to the fortress of Antonia and reported what they had seen to the centurion as soon as he arrived on duty. 거의 순간적인 분해를 품위 있고 경건하게 처리하려는 준비로,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유해를 옮기려고 준비되자, 유란시아 2차 중도자들에게 무덤 입구에서 돌들을 치우게 했습니다. 이런 두 개의 돌 중 큰 것은, 거의 맷돌처럼 거대한 원형이었고, 바위에 끌로 깎아낸 홈을 따라 움직였는데, 무덤을 열거나 닫도록 앞뒤로 굴릴 수 있었습니다. 경계하는 유대의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이, 새벽 어스레한 빛 가운데, 언뜻 보기에 저절로 – 그런 움직임을 밝힐 가시적 수단도 없이 – 이 커다란 돌이 무덤 입구에서 구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 현장에서 허둥지둥 달아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으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돌아와 성전에 있는 그들의 지휘관에게 이런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아 요새까지 달아났다가 백부장이 근무하러 오자마자 자신들이 보았던 것을 보고했습니다(마28:4).

189:2.5 (2023.4) The Jewish leaders began the sordid business of supposedly getting rid of Jesus by offering bribes to the traitorous Judas, and now, when confronted with this embarrassing situation, instead of thinking of punishing the guards who deserted their post, they resorted to bribing these guards and the Roman soldiers. They paid each of these twenty men a sum of money and instructed them to say to all: “While we slept during the nighttime, his disciples came upon us and took away the body.” And the Jewish leaders made solemn promises to the soldiers to defend them before Pilate in case it should ever come to the governor’s knowledge that they had accepted a bribe. 유대 지도자들은 반역자 유다에게 뇌물을 줘서 결국 예수를 제거하려는 야비한 거래를 시작했으며, 이제 이런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자, 자기 경계 구역에서 도망한 그 경비병들을 처벌할 생각 대신에, 그들은 이런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을 매수(買收)했습니다. 그들은 이 20명에게 각각 돈을 주었고 모두에게 “우리가 밤에 자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시신(屍身)을 가져갔습니다.”라고 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군인들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언젠가 총독에게 알려질 경우, 빌라도 앞에서 그들을 변호하겠다고 군인들에게 엄숙히 약속했습니다(마28:12-15).

189:2.6 (2023.5) The Christian belief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has been based on the fact of the “empty tomb.” It was indeed a fact that the tomb was empty, but this is not the truth of the resurrection. The tomb was truly empty when the first believers arrived, and this fact, associated with that of the undoubted resurrection of the Master, led to the formulation of a belief which was not true: the teaching that the material and mortal body of Jesus was raised from the grave. Truth having to do with spiritual realities and eternal values cannot always be built up by a combination of apparent facts. Although individual facts may be materially true, it does not follow that the association of a group of facts must necessarily lead to truthful spiritual conclusions. 예수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 믿음은 “빈 무덤”의 사실에 근거해 왔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었지만, 이것이 부활의 진실은 아닙니다. 첫 번째 신자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실제로 비어있었고, 이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주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사실이 아니었던 믿음, 즉 예수의 물질적인 필사 몸이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가르침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영적 실체 및 영원한 가치와 관련된 진리는 언제나 명백한 사실의 조합으로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 사실이 실질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지만, 여러 사실의 조합이 반드시 올바른 영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89:2.7 (2023.6) The tomb of Joseph was empty, not because the body of Jesus had been rehabilitated or resurrected, but because the celestial hosts had been granted their request to afford it a special and unique dissolution, a return of the “dust to dust,” without the intervention of the delays of time and without the operation of the ordinary and visible processes of mortal decay and material corruption. 요셉의 무덤이 비어있었던 것은 예수의 몸이 회복되거나 부활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 지연이 개입되지 않고 치명적인 부패와 물질적 부패의 일반적인 가시적 과정의 작용 없이 “먼지에서 먼지로(시104:29)” 되돌아가는, 특별하고 독특하게 분해하려는, 천상 무리의 요청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마28:6, 막16:6, 눅24:3).

189:2.8 (2024.1) The mortal remains of Jesus underwent the same natural process of elemental disintegration as characterizes all human bodies on earth except that, in point of time, this natural mode of dissolution was greatly accelerated, hastened to that point where it became well-nigh instantaneous. 예수님의 유해(遺骸)는, 이런 자연적 분해 방식이 매우 가속되어, 거의 순간에 가까울 정도로 빨라졌다는 점을 제외하고, 지상의 모든 인간 시신의 특징인 원소 분해와 똑같은 자연적 과정을 겪었습니다.

189:2.9 (2024.2) The true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of Michael are spiritual in nature, albeit this teaching is corroborated by the testimony of many mortals of the realm who met, recognized, and communed with the resurrected morontia Master. He became a part of the personal experience of almost one thousand human beings before he finally took leave of Urantia. 이 가르침은 부활한 모론시아 주님을 만나서, 알아보고, 그와 친하게 이야기했던 영역의 여러 필사자의 증언으로 확증됨에도 불구하고, 미가엘 부활의 진정한 증거는 사실상 영적입니다. 그가 결국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거의 1,000명 인간의 개인적 체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 The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섭리(攝理)적 부활

160403 부활2 – 부활의 은총(섭리적 부활) Dispensational resurrection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189:3.1 (2024.3) A little after half past four o’clock this Sunday morning, Gabriel summoned the archangels to his side and made ready to inaugurate the general resurrection of the termination of the Adamic dispensation on Urantia. When the vast host of the seraphim and the cherubim concerned in this great event had been marshaled in proper formation, the morontia Michael appeared before Gabriel, saying: “As my Father has life in himself, so has he given it to the Son to have life in himself. Although I have not yet fully resumed the exercise of universe jurisdiction, this self-imposed limitation does not in any manner restrict the bestowal of life upon my sleeping sons; let the roll call of the planetary resurrection begin.” 이 일요일 아침 4시 30분이 조금 지났을 때, 가브리엘은 천사장들을 그의 옆에 소환하여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섭리 종결에 대한 일반 부활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에 관련된 세라핌 천사들과 케루빔 천사들의 광대한 무리가 적절한 형태로 정렬하자, 모론시아 미가엘이 가브리엘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자신 안에 생명이 있듯이 아들 안에 생명이 있도록 그에게 생명을 주셨느니라. 내가 아직 완전히 우주 관할권 행사를 되찾지 않았지만, 이런 자진(自進) 제한이 어떤 식으로도 내 잠자는 아들들에게 증여하는 생명을 제한하지 않느니라. 행성 부활의 호출을 시작하라.”

189:3.2 (2024.4) The circuit of the archangels then operated for the first time from Urantia. Gabriel and the archangel hosts moved to the place of the spiritual polarity of the planet; and when Gabriel gave the signal, there flashed to the first of the system mansion worlds the voice of Gabriel, saying: “By the mandate of Michael, let the dead of a Urantia dispensation rise!” Then all the survivors of the human races of Urantia who had fallen asleep since the days of Adam, and who had not already gone on to judgment, appeared in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in readiness for morontia investiture. And in an instant of time the seraphim and their associates made ready to depart for the mansion worlds. Ordinarily these seraphic guardians, onetime assigned to the group custody of these surviving mortals, would have been present at the moment of their awaking in the resurrection halls of mansonia, but they were on this world itself at this time because of the necessity of Gabriel’s presence here in connection with the morontia resurrection of Jesus. 그때 천사장들의 회로가 유란시아로부터 처음으로 작동했습니다. 가브리엘과 천사장 무리가 행성의 영적 극성(極性)의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가브리엘이 신호를 보내자, 체계 저택 세계들 중 첫째에 가브리엘의 소리가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 유란시아 섭리에 속한 죽은 자들은 일어나라!” 그러자 아담 시절 이후로 잠들었고, 아직 심판을 받지 않은 유란시아의 인류 중 모든 생존자가 모론시아 임명 준비를 위해 저택세계의 부활실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라핌 천사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저택 세계들로 떠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생존하는 필사자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도록 이전에 배정된, 이 수호 세라핌 천사들은 그들이 깨어나는 순간에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의 모론시아 부활과 관련하여 여기에 가브리엘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때 이 세계에 있었습니다.

189:3.3 (2024.5) Notwithstanding that countless individuals having personal seraphic guardians and those achieving the requisite attainment of spiritual personality progress had gone on to mansonia during the ages subsequent to the times of Adam and Eve, and though there had been many special and millennial resurrections of Urantia sons, this was the third of the planetary roll calls, or complete dispensational resurrections. The first occurred at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Planetary Prince, the second during the time of Adam, and this, the third, signalized the morontia resurrection, the mortal transit, of Jesus of Nazareth. 고유한 수호 세라핌 천사들을 지닌 무수한 개인들과 영적 고유성 진보의 필수적 도달에 이른 자들이 아담과 이브 시절 이후 시대에 저택 세계에 갔고, 유란시아 아들들의 여러 특별 및 천년의 부활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행성 점호 중 셋째, 즉 완비된 섭리적 부활들이었습니다. 첫째는 행성 왕자가 도착했을 때 일어났고, 둘째는 아담 시대 동안에, 그리고 이 셋째는 모론시아 부활, 나사렛 예수의 필사자 변이를 신호로 알렸습니다.

189:3.4 (2024.6) When the signal of the planetary resurrection had been received by the chief of archangels, the Personalized Adjuster of the Son of Man relinquished his authority over the celestial hosts assembled on Urantia, turning all these sons of the local universe back to the jurisdiction of their respective commanders. And when he had done this, he departed for Salvington to register with Immanuel the completion of the mortal transit of Michael. And he was immediately followed by all the celestial host not required for duty on Urantia. But Gabriel remained on Urantia with the morontia Jesus. 천사장들의 수석이 행성 부활의 신호를 받았을 때, 인자(人子)의 고유(固有)화 조율자가, 지역 우주의 이 아들들이 자신들이 속한 각 사령관 관할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유란시아에 모인 천상의 무리에게 행사하던 자신의 권위에서 손을 뗐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마쳤을 때, 그는 임마누엘에게 미가엘의 필사자 변이(變移)의 완료를 등록하려고 샐빙톤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직무가 필요하지 않은 천상의 모든 무리가 즉시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모론시아 예수님과 함께 유란시아에 남았습니다.

189:3.5 (2025.1) And this is the recital of the events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as viewed by those who saw them as they really occurred, free from the limitations of partial and restricted human vision. 그리고 이것이,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인간 시야의 한계들이 없는, 그것들이 정말 일어났던 대로 그것들을 보았던 자들이 바라본, 예수의 부활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1. Discovery of the Empty Tomb 빈 무덤의 발견

160410 부활3-빈 무덤 막16:1-11 막28:1-10 23:55-24:12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9:4.1 (2025.2) As we approach the tim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on this early Sunday morning, it should be recalled that the ten apostles were sojourning at the home of Elijah and Mary Mark, where they were asleep in the upper chamber, resting on the very couches whereon they reclined during the last supper with their Master. This Sunday morning they were all there assembled except Thomas. Thomas was with them for a few minutes late Saturday night when they first got together, but the sight of the apostles, coupled with the thought of what had happened to Jesus, was too much for him. He looked his associates over and immediately left the room, going to the home of Simon in Bethpage, where he thought to grieve over his troubles in solitude. The apostles all suffered, not so much from doubt and despair as from fear, grief, and shame. 우리가 이 일요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한 시간을 다룰 때, 10명의 사도는 그들의 주님과 마지막 만찬(晩餐) 동안 자신들이 기댔던 그 소파에 앉아서, 잠들었던 윗방,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 머물러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요일 새벽에 도마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거기에 모였습니다. 도마는 그들이 처음 모였던 토요일 밤늦게 잠시 그들과 같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모습이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이 연상(聯想)되어 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료들을 대충 훑어보고 즉시 방을 떠나,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 가서, 홀로 마음 아파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들 모두 의심과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 슬픔과 수치심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189:4.2 (2025.3) At the home of Nicodemus there were gathered together, with David Zebedee and Joseph of Arimathea, some twelve or fifteen of the more prominent of the Jerusalem disciples of Jesus.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there were some fifteen or twenty of the leading women believers. Only these women abode in Joseph’s house, and they had kept close within during the hours of the Sabbath day and the evening after the Sabbath, so that they were ignorant of the military guard on watch at the tomb; neither did they know that a second stone had been rolled in front of the tomb, and that both of these stones had been placed under the seal of Pilate. 니고데모의 집에 다윗 세베대, 아리마대 요셉과 더 탁월한 예수의 예루살렘 제자가 약 12명이나 15명이 함께 모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약 15명이나 20명의 지도적 여성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들만 요셉의 집에 머물러, 안식일과 안식일 후 저녁까지 숨어있어서, 그들은 무덤을 경계하는 군 경비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 돌이 무덤 앞에 굴려져 있음도 몰랐고, 이 돌들에 있는 빌라도의 인봉(印封)도 몰랐습니다.

189:4.3 (2025.4) A little before three o’clock this Sunday morning, when the first signs of day began to appear in the east, five of the women started out for the tomb of Jesus. They had prepared an abundance of special embalming lotions, and they carried many linen bandages with them. It was their purpose more thoroughly to give the body of Jesus its death anointing and more carefully to wrap it up with the new bandages. 일요일 새벽 3시 조금 전, 날이 밝는 첫 낌새가 동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다섯 명의 여성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다량의 향유(香油) 로션을 준비하고, 그것들과 함께 세마포 붕대를 많이 가져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몸에 시신용 기름을 더 철저히 바르고 새로운 붕대로 시신을 더 정성을 들여 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4.4 (2025.5) The women who went on this mission of anointing Jesus’ body were: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the Alpheus twins, Salome the mother of the Zebedee brothers, Joanna the wife of Chuza, and Susanna the daughter of Ezra of Alexandria.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갔던 여성들은 막달라 마리아, 알페오 쌍둥이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 추자의 아내 요안나, 알렉산드리아 출신 에즈라의 딸 수산나였습니다.

189:4.5 (2025.6) It was about half past three o’clock when the five women, laden with their ointments, arrived before the empty tomb. As they passed out of the Damascus gate, they encountered a number of soldiers fleeing into the city more or less panic-stricken, and this caused them to pause for a few minutes; but when nothing more developed, they resumed their journey. 연고를 짊어진 다섯 여성이 빈 무덤 앞에 3시 30분 때쯤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 문밖을 지나쳤을 때, 거의 허둥대며 도시로 달아나는 여러 군사를 우연히 만나서 잠시 멈췄지만, 더 이상의 일이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은 계속 이동했습니다.

189:4.6 (2025.7) They were greatly surprised to see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inasmuch as they had said among themselves on the way out, “Who will help us roll away the stone?” They set down their burdens and began to look upon one another in fear and with great amazement. While they stood there, atremble with fear, Mary Magdalene ventured around the smaller stone and dared to enter the open sepulchre. This tomb of Joseph was in his garden on the hillside on the eastern side of the road, and it also faced toward the east. By this hour there was just enough of the dawn of a new day to enable Mary to look back to the place where the Master’s body had lain and to discern that it was gone. In the recess of stone where they had laid Jesus, Mary saw only the folded napkin where his head had rested and the bandages wherewith he had been wrapped lying intact and as they had rested on the stone before the celestial hosts removed the body. The covering sheet lay at the foot of the burial niche. 그들은 자기들끼리 길을 가면서 “누가 우리를 도와서 돌을 굴려 치울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덤 입구에서 치워져 있는 돌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두려워하며 깜짝 놀라 서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서 있는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돌을 돌아서 대담하게 열린 매장지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의 이 무덤은 길의 동편 경사진 언덕에 있는 그의 동산에 있었는데 또한 동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시간은 막 새날이 충분히 밝아서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놓인 곳을 돌아보고 그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눕혔던 우묵한 바위에서, 천상의 무리가 시신을 이동하기 전 그들이 돌에 두었던 대로, 마리아는 그의 머리가 있던 곳에 접힌 수건과 그를 감쌌던 붕대가 그대로 놓인 것을 봤을 뿐입니다. 시신을 덮었던 천은 묘소 중 오목하게 파인 발 부분에 있었습니다.

189:4.7 (2026.1) After Mary had tarried in the doorway of the tomb for a few moments (she did not see distinctly when she first entered the tomb), she saw that Jesus’ body was gone and in its place only these grave cloths, and she uttered a cry of alarm and anguish. All the women were exceedingly nervous; they had been on edge ever since meeting the panicky soldiers at the city gate, and when Mary uttered this scream of anguish, they were terror-stricken and fled in great haste. And they did not stop until they had run all the way to the Damascus gate. By this time Joanna was conscience-stricken that they had deserted Mary; she rallied her companions, and they started back for the tomb. (마리아는 무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뚜렷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무덤 문간에 잠시 기다린 후, 그녀는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고 그곳에서 이런 수의(壽衣)들만 보고, 놀라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습니다. 여성들 모두 몹시 초조(焦燥)했습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공황(恐惶) 상태에 빠진 군인들을 만난 이후 계속 안절부절못했고, 마리아가 고통스럽게 이렇게 비명을 지르자, 그들은 겁에 질려 몹시 급하게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다마스쿠스 문까지 내내 달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안나는 자신들이 마리아를 버려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녀가 동료를 불러 모아 다시 무덤으로 출발했습니다.

189:4.8 (2026.2) As they drew near the sepulchre, the frightened Magdalene, who was even more terrorized when she failed to find her sisters waiting when she came out of the tomb, now rushed up to them, excitedly exclaiming: “He is not there — they have taken him away!” And she led them back to the tomb, and they all entered and saw that it was empty. 마리아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기다리던 자매들을 발견하지 못해서, 훨씬 더 무서웠던, 놀란 마리아는, 그들이 매장지에 가까이 이르자, 이제 그들에게 달려가서 흥분하여 소리쳤습니다. “그가 거기에 없어요. – 저들이 그를 데려갔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무덤으로 다시 이끌었고 그들은 모두 들어가서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았습니다.

189:4.9 (2026.3) All five of the women then sat down on the stone near the entrance and talked over the situation. It had not yet occurred to them that Jesus had been resurrected. They had been by themselves over the Sabbath, and they conjectured that the body had been moved to another resting place. But when they pondered such a solution of their dilemma, they were at a loss to account for the orderly arrangement of the grave cloths; how could the body have been removed since the very bandages in which it was wrapped were left in position and apparently intact on the burial shelf? 당시 다섯 명의 여성 모두 입구 근처의 바위에 앉아 그 사태를 의논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생각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들끼리 있었고, 그들은 시신을 다른 무덤으로 옮겼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곤란한 그런 상황을 풀어보려고 곰곰이 생각했을 때, 그들은 단정히 정돈된 수의(壽衣)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시신을 쌌던 그 붕대가 제자리에, 매장 선반에 분명히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는데, 시신을 어떻게 옮길 수 있었을까?

189:4.10 (2026.4) As these women sat there in the early hours of the dawn of this new day, they looked to one side and observed a silent and motionless stranger. For a moment they were again frightened, but Mary Magdalene, rushing toward him and addressing him as if she thought he might be the caretaker of the garden, said, “Where have you taken the Master? Where have they laid him? Tell us that we may go and get him.” When the stranger did not answer Mary, she began to weep. Then spoke Jesus to them, saying, “Whom do you seek?” Mary said: “We seek for Jesus who was laid to rest in Joseph’s tomb, but he is gone. Do you know where they have taken him?” Then said Jesus: “Did not this Jesus tell you, even in Galilee, that he would die, but that he would rise again?” These words startled the women, but the Master was so changed that they did not yet recognize him with his back turned to the dim light. And as they pondered his words, he addressed the Magdalene with a familiar voice, saying, “Mary.” And when she heard that word of well-known sympathy and affectionate greeting, she knew it was the voice of the Master, and she rushed to kneel at his feet while she exclaimed, “My Lord, and my Master!” And all of the other women recognized that it was the Master who stood before them in glorified form, and they quickly knelt before him. 이 여인들이 이런 새날이 밝아오는 이른 시간에 거기에 앉아 있었을 때, 그들은 한쪽을 바라보며 말없이 움직이지 않는 낯선 사람을 봤습니다. 잠시 그들은 다시 두려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에게 달려가 그를 동산 관리인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어디로 데려갔나요? 그들이 그를 어디에 두었나요? 우리가 그를 데려가게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낯선 이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지 않았을 때,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무덤에 영면(永眠)하도록 눕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도, 이 예수가, 그는 죽을 것이지만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여성들이 이 말에 깜짝 놀랐지만, 주님이 그토록 바뀌어서 그들은 희미한 빛을 등지고 있는 그를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친숙한 목소리로 막달라에게 말을 걸면서, “마리아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익숙한 공감과 다정한 인사의 말을 듣자, 그녀는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였음을 알았기에, 급히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主)시여!” 그러자 다른 모든 여성이 자기들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던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앞에 곧 무릎을 꿇었습니다.

189:4.11 (2027.1) These human eyes were enabled to see the morontia form of Jesus because of the special ministry of the transformers and the midwayers in association with certain of the morontia personalities then accompanying Jesus. 그때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론시아 몇 고유성들과 함께 변환자들과 중도자들의 특별한 돌봄 때문에 예수님의 모론시아 모습을 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189:4.12 (2027.2) As Mary sought to embrace his feet, Jesus said: “Touch me not, Mary, for I am not as you knew me in the flesh. In this form will I tarry with you for a season before I ascend to the Father. But go, all of you, now and tell my apostles — and Peter — that I have risen, and that you have talked with me.” 마리아가 그의 발을 얼싸안으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마리아야, 나는 육신으로 네가 알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내가 아버지께 오르기 전에 이 모습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잠시 있으리라. 그러니 이제 너희 모두 가서 내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내가 살아났고 너희가 나와 이야기했다고 알리라.”

189:4.13 (2027.3) After these women had recovered from the shock of their amazement, they hastened back to the city and to the home of Elijah Mark, where they related to the ten apostles all that had happened to them; but the apostles were not inclined to believe them. They thought at first that the women had seen a vision, but when Mary Magdalene repeated the words which Jesus had spoken to them, and when Peter heard his name, he rushed out of the upper chamber, followed closely by John, in great haste to reach the tomb and see these things for himself. 이 여성들은 놀란 충격에서 회복된 후, 그들은 도시로 서둘러 엘리야 마가의 집에 돌아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사도 10명에게 이야기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여성들이 환상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했던 말을 막달라 마리아가 반복했을 때, 베드로가 자기 이름을 듣고, 아주 급하게 무덤에 이르러 스스로 이것들을 보려고, 그는 윗방에서 뛰쳐 나갔는데, 요한이 바짝 따라갔습니다.

189:4.14 (2027.4) The women repeated the story of talking with Jesus to the other apostles, but they would not believe; and they would not go to find out for themselves as had Peter and John. 여성들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님과 대화한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처럼 스스로 진의를 파악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1. Peter and John at the Tomb 무덤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

210411 믿는 용기를 가지라 요20:3-8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3 S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started for the tomb. 4 Both were running,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 5 He bent over and looked in at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but did not go in. 6 Then Simon Peter, who was behind him, arrived and went into the tomb. He saw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7 as well as the burial cloth that had been around Jesus’ head. The cloth was folded up by itself, separate from the linen. 8 Finally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side. He saw and believed.

189:5.1 (2027.5) As the two apostles raced for Golgotha and the tomb of Joseph, Peter’s thoughts alternated between fear and hope; he feared to meet the Master, but his hope was aroused by the story that Jesus had sent special word to him. He was half persuaded that Jesus was really alive; he recalled the promise to rise on the third day. Strange to relate, this promise had not occurred to him since the crucifixion until this moment as he hurried north through Jerusalem. As John hastened out of the city, a strange ecstasy of joy and hope welled up in his soul. He was half convinced that the women really had seen the risen Master. 두 사도가 골고다와 요셉의 무덤을 향해 달리면서, 베드로의 생각은 두려움과 소망으로 엇갈렸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에 두려웠지만, 예수께서 그에게 특별한 소식을 보냈다는 이야기로 인해 그의 소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정말 살아계셨다고 반쯤 확신했습니다. 그는 사흘에 살아나는 약속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십자가 처형 이후로, 그가 예루살렘을 거쳐 북쪽으로 서둘러 가는 이 순간까지, 이 약속이 그에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도시 밖으로 서둘러 가면서, 기묘한 기쁨과 소망의 희열이 그의 혼(魂)에서 솟아났습니다. 그는 여성들이 부활한 주님을 정말 봤다고 반쯤 확신했습니다.

189:5.2 (2027.6) John, being younger than Peter, outran him and arrived first at the tomb. John tarried at the door, viewing the tomb, and it was just as Mary had described it. Very soon Simon Peter rushed up and, entering, saw the same empty tomb with the grave cloths so peculiarly arranged. And when Peter had come out, John also went in and saw it all for himself, and then they sat down on the stone to ponder the meaning of what they had seen and heard. And while they sat there, they turned over in their minds all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Jesus, but they could not clearly perceive what had happened.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어서 베드로를 앞질러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무덤을 관찰하면서 입구에 머물렀는데 마리아가 꼭 말한 대로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내 달려와 들어가 그렇게 특별히 정돈된 수의(壽衣)가 있는 똑같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나오자 요한도 들어가 모든 것을 직접 본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려고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그들은 예수에 관해 자신들이 들었던 모두를 이리저리 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일어났던 일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89:5.3 (2027.7) Peter at first suggested that the grave had been rifled, that enemies had stolen the body, perhaps bribed the guards. But John reasoned that the grave would hardly have been left so orderly if the body had been stolen, and he also raised the question as to how the bandages happened to be left behind, and so apparently intact. And again they both went back into the tomb more closely to examine the grave cloths. As they came out of the tomb the second time, they found Mary Magdalene returned and weeping before the entrance. Mary had gone to the apostles believing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grave, but when they all refused to believe her report, she became downcast and despairing. She longed to go back near the tomb, where she thought she had heard the familiar voice of Jesus. 베드로는 처음에 무덤이 약탈당했고, 대적들이 경비병들에게 매수하여 시신을 훔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시신이 도난당했다면 무덤이 그렇게 정연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득했고, 붕대들이 어떻게 공교롭게 뒤에 남았는지 그리고 그렇게 분명히 손대지 않은 채였는지에 대해 또한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다시 무덤으로 되들어가 더 자세히 수의(壽衣)들을 검사했습니다. 그들이 무덤 밖으로 두 번째 나왔을 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와 입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음을 믿으면서 사도들에게 갔지만 그들 모두 그녀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자, 그녀는 풀이 죽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덤 근처, 자신이 예수님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던 장소로 간절히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189:5.4 (2027.8) As Mary lingered after Peter and John had gone, the Master again appeared to her, saying: “Be not doubting; have the courage to believe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Go back to my apostles and again tell them that I have risen, that I will appear to them, and that presently I will go before them into Galilee as I promised.”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후 마리아가 근처를 서성거릴 때, 주(主)께서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믿는 용기를 가지라. 내 사도들에게 돌아가 내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며 내가 약속한 대로 그들에 앞서 갈릴리로 곧 갈 것이라고 다시 말하라.”

189:5.5 (2028.1) Mary hurried back to the Mark home and told the apostles she had again talked with Jesus, but they would not believe her. But when Peter and John returned, they ceased to ridicule and became filled with fear and apprehension. 마리아는 급히 마가의 집으로 돌아가 사도들에게 예수님과 또다시 대화한 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녀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오자, 그들은 비웃지 않고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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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6 The Faith of Jesus 예수님의 신앙

Paper 196

The Faith of Jesus 예수님의 신앙

Jesus’ living faith in God 예수님의 살아있는 하나님 신앙
“Seek first the kingdom of heaven.”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
“Why do you call me good?”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What prayer meant to Jesus  예수님의 기도 해석
Jesus’ childlike faith in God 어린애 같은 예수님의 하나님 신앙
1. Jesus — The Man 예수 – 인간
2. The Religion of Jesus 예수님의 종교
The religion about Jesus 예수님에 대한 종교
Religion as a personal experience 종교는 개인적 체험
3. The Supremacy of Religion 종교의 최극위
Fact, idea, and relation 사실, 관념 및 관계
Reason, wisdom, and faith 이성, 지혜 및 신앙
Thing, meaning, and value 사물, 의미 및 가치
Unless a divine lover lived in man… 신적 사랑이 사람 안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Morality and religion 도덕성과 종교
The Father is living love…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랑이십니다….

170521 예수님의 신앙 1 – 서론 1 시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Teach me to do your will, for you are my God; may your good Spirit lead me on level ground.

196:0.1 (2087.1) JESUS enjoyed a sublime and wholehearted faith in God. He experienced the ordinary ups and downs of mortal existence, but he never religiously doubted the certainty of God’s watchcare and guidance. His faith was the outgrowth of the insight born of the activity of the divine presence, his indwelling Adjuster. His faith was neither tradition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was wholly personal and purely spiritual. 예수님은 숭고한 신앙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누리셨습니다. 그는 필사(必死) 존재의 일반적인 기복(높아짐과 낮아짐起伏)을 겪으셨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해 결코 신앙적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신적 현존 즉, 내재(內在)하는 조절자의 활동에서 발생한 통찰력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온전히 개인적이며 순전히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196:0.2 (2087.2) The human Jesus saw God as being holy, just, and great, as well as being true, beautiful, and good. All these attributes of divinity he focused in his mind as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Jesus’ God wa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Holy One of Israel” and “The living and loving Father in heaven.” The concept of God as a Father was not original with Jesus, but he exalted and elevated the idea into a sublime experience by achieving a new revelation of God and by proclaiming that every mortal creature is a child of this Father of love, a son of God.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며 위대하신 분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신성의 속성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마음에 모아서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며 동시에 “살아계시며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 개념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성취하고, 모든 필사(必死) 창조물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여, 그 개념(하나님 아버지)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향상시켰습니다.

196:0.3 (2087.3) Jesus did not cling to faith in God as would a struggling soul at war with the universe and at death grips with a hostile and sinful world; he did not resort to faith merely as a consolation in the midst of difficulties or as a comfort in threatened despair; faith was not just an illusory compensation for the unpleasant realities and the sorrows of living. In the very face of all the natural difficulties and the temporal contradictions of mortal existence, he experienced the tranquillity of supreme and unquestioned trust in God and felt the tremendous thrill of living, by faith, in the very presence of the heavenly Father. And this triumphant faith was a living experience of actual spirit attainment. Jesus’ great contribution to the values of human experience was not that he revealed so many new ideas about the Father in heaven, but rather that he so magnificently and humanly demonstrated a new and higher type of living faith in God. Never on all the worlds of this universe, in the life of any one mortal, did God ever become such a living reality as in the human experience of Jesus of Nazareth. 예수님은, 우주와의 전쟁에서 분투하는 사람(혼)이나 적개심과 죄로 가득한 세상과 사생결단을 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어려움 가운데에서 위안이나, 절망의 위협 중에 얻는 위로로서 신앙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에 대한 허상(虛像)적 보상(報償)이 아니었습니다. 필사(必死) 존재가 겪는 모든 자연스런 곤경과 현세의 모순에 바로 직면해서, 그는 최상의 평온을 누리면서 의심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존전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거둔 신앙은 실제로 영에 도달한 살아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인간 체험의 가치에 대해 예수께서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새 관념을 많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을 장엄하게 인간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어느 한 필사(必死)자의 일생에,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토록 살아있는 실체가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170528 예수님의 신앙 2 – 서론 2 막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196:0.4 (2087.4) In the Master’s life on Urantia, this and all other worlds of the local creation discover a new and higher type of religion, religion based on personal spiritual relations with the Universal Father and wholly validated by the supreme authority of genuine personal experience. This living faith of Jesus was more than an intellectual reflection, and it was not a mystic meditation. 주(主)님의 지상(유란시아) 생활에서, 지역 창조의 이 세계와 다른 모든 세계들은,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종교, 우주 아버지와 개인적인 영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으며, 진정한 개인적 체험의 최극 권위에 의해 전적으로 확인된 종교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이 살아있는 신앙은 지적(知的)인 반사 이상(以上)이었으며, 신비적 명상이 아니었습니다.

196:0.5 (2087.5) Theology may fix, formulate, define, and dogmatize faith, but in the human life of Jesus faith was personal, living, original, spontaneous, and purely spiritual. This faith was not reverence for tradition nor a mere intellectual belief which he held as a sacred creed, but rather a sublime experience and a profound conviction which securely held him. His faith was so real and all-encompassing that it absolutely swept away any spiritual doubts and effectively destroyed every conflicting desire. Nothing was able to tear him away from the spiritual anchorage of this fervent, sublime, and undaunted faith. Even in the face of apparent defeat or in the throes of disappointment and threatening despair, he calmly stood in the divine presence free from fear and fully conscious of spiritual invincibility. Jesus enjoyed the invigorating assurance of the possession of unflinching faith, and in each of life’s trying situations he unfailingly exhibited an unquestioning loyalty to the Father’s will. And this superb faith was undaunted even by the cruel and crushing threat of an ignominious death.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착시키고, 공식화하며, 정의(定意)하고, 교리화(독단적으로 단정)하겠지만, 예수님의 인간 일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있으며, 근원적이고, 자발적이며, 순전히 영적이었습니다. 이 신앙은 전통에 대한 숭배도 아니었고, 그가 신성한 신조(信條)로 지녔던 단순한 지적 믿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를 단단히 붙든 숭고한 체험이자 깊은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너무나 실제적이며 모든 것을 포괄했기 때문에, 그 어떤 영적 의심들도 절대적으로 쓸어버리고, 상반되는 모든 욕망을 실질적으로 파괴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이 열렬하고 숭고한 불굴(不屈)의 신앙이 닻을 내린 영적 정박지(碇泊地)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명백한 패배에 직면하거나 또는 실망과 위협적인 절망의 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불패)을 충만히 의식하면서 신적 현존 앞에서 차분하게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축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활력을 불어넣는 확신을 향유하였으며, 일생의 시험적인 각각의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충성을, 끊임없이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장엄한 신앙은 심지어 치욕스러운 죽음의 잔인하고 압도적인 위협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196:0.6 (2088.1) In a religious genius, strong spiritual faith so many times leads directly to disastrous fanaticism, to exaggeration of the religious ego, but it was not so with Jesus. He was not unfavorably affected in his practical life by his extraordinary faith and spirit attainment because this spiritual exaltation was a wholly unconscious and spontaneous soul expression of his personal experience with God. 종교적 특성에 있어서, 강한 영적 신앙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비참한 광신(狂信), 종교적 과대 자아로 직접 이끌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생활에 있어서 특별한 신앙과 영적 달성으로 인해서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고양(高揚)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체험이 전적으로 무의식적이며 자발적인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170604 예수님의 신앙 3 – 서론 3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unto you.

196:0.7 (2088.2) The all-consuming and indomitable spiritual faith of Jesus never became fanatical, for it never attempted to run away with his well-balanced intellectual judgments concerning the proportional values of practical and commonplace social, economic, and moral life situations. The Son of Man was a splendidly unified human personality; he was a perfectly endowed divine being; he was also magnificently co-ordinated as a combined human and divine being functioning on earth as a single personality. Always did the Master co-ordinate the faith of the soul with the wisdom-appraisals of seasoned experience. Personal faith, spiritual hope, and moral devotion were always correlated in a matchless religious unity of harmonious association with the keen realization of the reality and sacredness of all human loyalties — personal honor, family love, religious obligation, social duty, and economic necessity. 온통 절실하며 굴복할 줄 모르는 예수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신앙은 실제적이며 평범한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생활 상황의 비례적 가치에 관한 그의 잘 균형이 잡힌 지적 판단에서 결코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훌륭하게 통합된 인간 고유성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증여된 신적 존재였습니다. 그는 또한 이 땅에서 인간 존재와 신적 존재가 결합하여 훌륭하게 통합된 하나의 고유성으로 활동하는 존재이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혼의 신앙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의 평가로 조화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인간적 충성─개인적 명예, 가족적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의무, 그리고 경제적 필요성─의 현실과 신성함에 대한 선명한 자각(깨달음)과 조화롭게 연합하여 비길 데 없는 종교적 통일성 안에서, 개인적 신앙, 영적 소망 그리고 도덕적 헌신은 항상 서로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96:0.8 (2088.3) The faith of Jesus visualized all spirit values as being found in the kingdom of God; therefore he said, “Seek first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w in the advanced and ideal fellowship of the kingdom the achievement and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The very heart of the prayer which he taught his disciples was,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Having thus conceived of the kingdom as comprising the will of God, he devoted himself to the cause of its realization with amazing self-forgetfulness and unbounded enthusiasm. But in all his intense mission and throughout his extraordinary life there never appeared the fury of the fanatic nor the superficial frothiness of the religious egotist. 예수님의 신앙은 모든 영 가치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진보된 이상적 친교 안에서 “하나님 뜻”이 성취(이루어짐)와 완성(실현)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라를 이해했기에, 그는 그것을 실현하는 운동에 놀랄 정도로 자신을-잊어버리고, 한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극심한 임무와 그의 특별한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종교적 이기주의자의 피상적 천박함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6:0.9 (2088.4) The Master’s entire life was consistently conditioned by this living faith, this sublime religious experience. This spiritual attitude wholly dominated his thinking and feeling, his believing and praying, his teaching and preaching. This personal faith of a son in the certainty and security of the guidance and protection of the heavenly Father imparted to his unique life a profound endowment of spiritual reality. And yet, despite this very deep consciousness of close relationship with divinity, this Galilean, God’s Galilean, when addressed as Good Teacher, instantly replied, “Why do you call me good?” When we stand confronted by such splendid self-forgetfulness, we begin to understand how the Universal Father found it possible so fully to manifest himself to him and reveal himself through him to the mortals of the realms. 주(主)님의 일생 전체는 한결같이 이 살아있는 신앙,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영적 태도는 그의 사고와 느낌, 그의 믿음과 기도, 그의 가르침과 설교를 전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의 확신과 보장에 대한 아들의 이 개인적 신앙은 그의 독특한 일생에 있어서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신성과 가까운 관계의 바로 이 깊은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갈릴리인, 하나님의 갈릴리인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렸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라고 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훌륭한 자아-망각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우주 아버지가 그에게 자신을 그렇게 충분히 나타내고 그 영역들의 필사자들에게 그를 통한 자기 계시가 어떻게 발견이 가능한지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170611 예수님의 신앙 4 – 서론 4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My food,” said Jesus,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196:0.10 (2088.5) Jesus brought to God, as a man of the realm, the greatest of all offerings: the consecration and dedication of his own will to the majestic service of doing the divine will. Jesus always and consistently interpreted religion wholly in terms of the Father’s will. When you study the career of the Master, as concerns prayer or any other feature of the religious life, look not so much for what he taught as for what he did. Jesus never prayed as a religious duty. To him prayer was a sincere expression of spiritual attitude, a declaration of soul loyalty, a recital of personal devotion, an expression of thanksgiving, an avoidance of emotional tension, a prevention of conflict, an exaltation of intellection, an ennoblement of desire, a vindication of moral decision, an enrichment of thought, an invigoration of higher inclinations, a consecration of impulse, a clarification of viewpoint, a declaration of faith, a transcendental surrender of will, a sublime assertion of confidence, a revelation of courage, the proclamation of discovery, a confession of supreme devotion, the validation of consecration, a technique for the adjustment of difficulties, and the mighty mobilization of the combined soul powers to withstand all human tendencies toward selfishness, evil, and sin. He lived just such a life of prayerful consecra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ended his life triumphantly with just such a prayer. The secret of his unparalleled religious life was this consciousness of the presence of God; and he attained it by intelligent prayer and sincere worship — unbroken communion with God — and not by leadings, voices, visions, or extraordinary religious practices. 예수님은 그 영역의 사람으로서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은 신적 뜻을 행하는 장엄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봉헌하고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일관되게 종교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셨습니다. 종교적 생활의 기도나 혹은 다른 면들에 관하여, 주(主)의 생애를 공부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보기보다는,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은 종교적 의무로서 기도를 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진지한 표현, 혼의 충성에 대한 선언. 개인적 헌신에 대한 낭독, 감사의 표현, 감정적 긴장의 방지, 갈등의 예방, 지적 사고의 고양(高揚), 욕망을 고귀하게 만듦, 도덕적 결정의 입증, 생각의 풍성함, 더욱 높은 성향의 활력화, 충동의 봉헌, 관점의 해명, 신앙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양도), 자신감의 숭고한 단언, 용기의 계시, 발견의 선언, 최극 헌신의 고백, 봉헌의 확인, 어려움의 조절기법, 그리고 이기심, 악,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인간 성향을 물리치려고 결합한 혼의 권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기도하며 헌신하는 바로 그러한 일생을 사셨으며, 바로 그러한 기도로 자신의 일생을 승리로 마치셨습니다. 그의 비교될 수없는 종교적 일생의 비밀은 하나님 현존에 대한 이 의식(意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능적 기도와 진지한 경배─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로 얻었으며 인도됨이나, 음성이나, 환상 또는 비상한 종교적 관습에 의해 얻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196:0.11 (2089.1)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religion was a living experience, a direct and personal movement from spiritual reverence to practical righteousness. The faith of Jesus bore the transcendent fruits of the divine spirit. His faith was not immature and credulous like that of a child, but in many ways it did resemble the unsuspecting trust of the child mind. Jesus trusted God much as the child trusts a parent. He had a profound confidence in the universe — just such a trust as the child has in its parental environment. Jesus’ wholehearted faith in the fundamental goodness of the universe very much resembled the child’s trust in the security of its earthly surroundings. He depended on the heavenly Father as a child leans upon its earthly parent, and his fervent faith never for one moment doubted the certainty of the heavenly Father’s overcare. He was not disturbed seriously by fears, doubts, and skepticism. Unbelief did not inhibit the free and original expression of his life. He combined the stalwart and intelligent courage of a full-grown man with the sincere and trusting optimism of a believing child. His faith grew to such heights of trust that it was devoid of fear.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종교는 살아있는 체험, 영적 경외심에서부터 실질적인 공의로 넘어가는 직접적이고 개인적 활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신적 영의 초월적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아이의 것처럼 미숙하거나 경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아이의 마음처럼 의심하지 않는 신뢰와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게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신뢰하듯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은 우주를 깊이 신뢰하셨습니다. 우주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예수님의 전심을 다하는 신앙은 지상 환경의 안전함을 믿는 아이의 신뢰와 매우 흡사하였습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지상의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의지하셨고, 그의 열렬한 신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지나친 보호에 대한 확신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회의(懷疑)로 인하여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신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롭고 기원적인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성장한 어른의 건장하고 지적인 용기와, 믿는 아이가 지닌 순수하게 신뢰하는 낙천성을 결합하셨습니다. 그의 신앙은 두려움이 없는 그러한 신뢰의 경지까지 성장하셨습니다.

170618 예수님의 신앙 5 –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서론 5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And he sai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change and become like little children,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196:0.12 (2089.2) The faith of Jesus attained the purity of a child’s trust. His faith was so absolute and undoubting that it responded to the charm of the contact of fellow beings and to the wonders of the universe. His sense of dependence on the divine was so complete and so confident that it yielded the joy and the assurance of absolute personal security. There was no hesitating pretense in his religious experience. In this giant intellect of the full-grown man the faith of the child reigned supreme in all matters relating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t is not strange that he once said, “Except you become as a little child, you shall not enter the kingdom.” Notwithstanding that Jesus’ faith was childlike, it was in no sense childish. 예수님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지닌 신뢰의 순수성에 도달하셨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렇게 절대적이고 의심이 없어서 다른 동료 존재들과의 만남에 대한 매력과 우주의 경이로움들에 반응하였습니다. 신적인 것에 대한 그의 의존 감각은 그렇게 완벽하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여 그것은 절대적 개인적 안전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낳았습니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주저하는 티가 전혀 없었습니다. 충분히-성장한 사람의 이 위대한 지성 안에서 어린아이의 신앙이 종교적 인식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을 최고로 지배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너희가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습니다.

170625 예수님의 신앙 6 – 나를 따르라 요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Jesus said this to indicate the kind of death by which Peter would glorify God. Then he said to him, “Follow me!”

JESUS WANTS US TO BELIEVE WITH HIM
196:0.13 (2089.3) Jesus does not require his disciples to believe in him but rather to believe with him, believe in the reality of the love of God and in full confidence accept the security of the assurance of sonship with the heavenly Father. The Master desires that all his followers should fully share his transcendent faith. Jesus most touchingly challenged his followers, not only to believe what he believed, but also to believe as he believed. This is the full significance of his one supreme requirement, “Follow me.”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함께 믿되, 하나님 사랑이 실체임을 믿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관계에 대한 확신이 보장됨을 충만한 자신감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주(主)님은 모든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초월적 신앙을 충분히 나누어 가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믿었던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처럼 믿으라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장 비장하게 도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는 그의 한 가지 최상의 요구가 지닌 충분한 의미(意味)입니다.

170702 예수님의 신앙 7 – 하나님의 뜻 실천, 신앙으로 살아감 요6: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will but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196:0.14 (2090.1) Jesus’ earthly life was devoted to one great purpose — doing the Father’s will, living the human life religiously and by faith. The faith of Jesus was trusting, like that of a child, but it was wholly free from presumption. He made robust and manly decisions, courageously faced manifold disappointments, resolutely surmounted extraordinary difficulties, and unflinchingly confronted the stern requirements of duty. It required a strong will and an unfailing confidence to believe what Jesus believed and as he believed. 예수님의 지상 일생은 단 한 가지의 목적─아버지의 뜻을 행함, 인간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감─에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전혀 주제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건하고 당당하게 결정을 내리셨으며, 수많은 실망들에 용감하게 대처하였고, 특별한 어려움들을 단호히 극복하셨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들에 망설임 없이 직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믿었던 것을 믿고, 그가 믿은 대로 믿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끊임없는 자신감이 요구되었습니다.

  1. Jesus — The Man 예수─인간

170709 예수님의 신앙 8 – 인간 예수의 헌신 1 Jesus — The Man 마22:37-39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 Jesus replied: ”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38 This is 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 39 And the second is like i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0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

196:1.1 (2090.2) Jesus’ devotion to the Father’s will and the service of man was even more than mortal decision and human determination; it was a wholehearted consecration of himself to such an unreserved bestowal of love. No matter how great the fact of the sovereignty of Michael, you must not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men. The Master has ascended on high as a man, as well as God; he belongs to men; men belong to him. How unfortunate that religion itself should be so misinterpreted as to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struggling mortals! Let not the discussions of the humanity or the divinity of the Christ obscure the saving truth that Jesus of Nazareth was a religious man who, by faith, achieved the knowing and the doing of the will of God; he was the most truly religious man who has ever lived on Urantia. 아버지의 뜻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대한 예수님의 헌신은 필사자의 결정과 인간의 결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아낌없는 사랑의 증여를 향해 전심을 다한 예수님 자신의 헌신이었습니다. 미가엘의 주권의 사실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너희는 인간 예수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주(主)님은 하나님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속하시며, 사람들은 그에 속합니다. 종교가 스스로, 분투하는 필사자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떼어놓을 정도로 그렇게 잘못 해석되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토론들 때문에 나사렛 예수께서 신앙이 깊은 사람이시며,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행함을 성취하셨다는 구원의 진리가 흐려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는 이제까지 유란시아에 살았던 최상의 참된 신앙인이셨습니다.

170716 예수님의 신앙 9 – 평범한 인간 예수 2 막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David himself calls him ‘Lord.’ How then can he be his son?”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delight.

196:1.2 (2090.3) The time is ripe to witness the figurative resurrection of the human Jesus from his burial tomb amidst the theological traditions and the religious dogmas of nineteen centuries. Jesus of Nazareth must not be longer sacrificed to even the splendid concept of the glorified Christ. What a transcendent service if, through this revelation, the Son of Man should be recovered from the tomb of traditional theology and be presented as the living Jesus to the church that bears his name, and to all other religions! Surely the Christian fellowship of believers will not hesitate to make such adjustments of faith and of practices of living as will enable it to “follow after” the Master in the demonstration of his real life of religious devo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of consecration to the unselfish service of man. Do professed Christians fear the exposure of a self-sufficient and unconsecrated fellowship of social respectability and selfish economic maladjustment? Does institutional Christianity fear the possible jeopardy, or even the overthrow, of traditional ecclesiastical authority if the Jesus of Galilee is reinstated in the minds and souls of mortal men as the ideal of personal religious living? Indeed, the social readjustments, the economic transformations, the moral rejuvenations, and the religious revisions of Christian civilization would be drastic and revolutionary if the living religion of Jesus should suddenly supplant the theologic religion about Jesus. 19 세기의 신학적 전통과 종교적 교리 가운데 있는, 예수님이 묻힌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의 상징적인 부활을 증언할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화려한 개념으로 더는 희생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계시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그의 이름을 지닌 교회와 다른 모든 종교에, 살아 계신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인 봉사일 것인지요! 확실히 기독교 신자들의 교제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종교적 헌신과 사람을 이타적으로 섬겨 헌신하는 자신의 실제 생활로 입증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을 만큼 주저 없이 신앙과 삶의 훈련을 그렇게 조율할 것입니다. 자칭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체면과 이기적인 경제적 조절-불량의 자아-충족적이며 헌신하지 않은 친교가 폭로되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갈릴리의 예수께서 개인적인 종교적 삶의 이상(理想)으로서, 필사 사람들의 마음과 혼(), 본래대로 있다면, 제도적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위의 위험성, 또는 전복(顚覆)까지도 가능할까 두려워합니까? 예수의 살아있는 종교가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종교를 갑자기 대신(代身)한다면, 사회적 재조정·경제적 변환·도덕적 원기의 회복 및 기독교 문명의 종교적 교정이 정말로 극적이며 혁명적일 것입니다.

196:1.3 (2090.4) To “follow Jesus” means to personally share his religious faith and to enter into the spirit of the Master’s life of unselfish service for man.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human living is to find out what Jesus believed, to discover his ideals, and to strive for the achievement of his exalted life purpose. Of all human knowledge, that which is of greatest value is to know the religious life of Jesus and how he lived it. “예수 따르기”는 그의 종교적인 신앙을 개인적으로 공유하고, 사람을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한 ()님 일생의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믿었던 것을 찾아내고, 그의 이상들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여진 일생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 삶을 사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196:1.4 (2090.5) The common people heard Jesus gladly, and they will again respond to the presentation of his sincere human life of consecrated religious motivation if such truths shall again be proclaimed to the world. The people heard him gladly because he was one of them, an unpretentious layman; the world’s greatest religious teacher was indeed a layman.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즐겁게 들었으며, 그러한 진리들이 다시 세상에 선포된다면, 봉헌(奉獻)된 종교적 동기를 지닌 그의 신실한 인간적 일생의 제시에 그들은 다시 응답할 것입니다. 그는 그들 중의 한 사람, 즉 허세가 없는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교사(敎師)는 진실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196:1.5 (2091.1) It should not be the aim of kingdom believers literally to imitate the outward life of Jesus in the flesh but rather to share his faith; to trust God as he trusted God and to believe in men as he believed in men. Jesus never argued about either the fatherhood of God or the brotherhood of men; he was a living illustration of the one and a profound demonstration of the other. 나라를 믿는 자들의 목표는 겉으로 나타난 육신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문자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앙을 공유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었던 것처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이나 사람들의 형제 신분에 대하여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자의 살아있는 예증이었고 후자의 심오한 실증이었습니다.

196:1.6 (2091.2) Just as men must progress from the consciousness of the human to the realization of the divine, so did Jesus ascend from the nature of man to the consciousness of the nature of God. And the Master made this great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by the conjoint achievement of the faith of his mortal intellect and the acts of his indwelling Adjuster. The fact-realization of the attainment of totality of divinity (all the while fully conscious of the reality of humanity) was attended by seven stages of faith consciousness of progressive divinization. These stages of progressive self-realization were marked off by the following extraordinary events in the Master’s bestowal experience: 사람들이 인간의 의식(意識)으로부터 신적인 것의 실현으로 진보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하나님 본성의 의식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은 그의 필사 지성의 신앙과 내재하는 조율자의 활동이 결합된 성취로 인간으로부터 신적으로의 이 위대한 상승을 이루셨습니다. 신성의 전체성을 달성한 사실- 실현화는 (이 기간 내내 인간성의 실체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성화되는 신앙 의식의 일곱 단계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자아-실현의 단계들은 주(主)님의 증여 체험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한 사건들로 구별되었습니다.

196:1.7 (2091.3) 1. The arrival of the Thought Adjuster. 생각조율자의 도착. BC 2. 2. 11

196:1.8 (2091.4) 2. The messenger of Immanuel who appeared to him at Jerusalem when he was about twelve years old. 그가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임마누엘의 사자(使者). AD 7. 4. 8

196:1.9 (2091.5) 3. The manifestations attendant upon his baptism. 그의 세례에 수반된 현시(顯示)들. AD 26. 1. 14

196:1.10 (2091.6) 4. The experiences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변모(變貌) 산의 체험들. AD 29. 8. 15

196:1.11 (2091.7) 5. The morontia resurrection. 모론시아 부활. AD 30. 4. 9

196:1.12 (2091.8) 6. The spirit ascension. 영의 상승. AD 30. 5. 18

196:1.13 (2091.9) 7. The final embrace of the Paradise Father, conferring unlimit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그의 우주의 무제한적 주권을 수여한 천국 아버지의 최종적 품에 안김(포옹). AD 30. 5. 28

2. The Religion of Jesus 예수님의 종교

170723 예수님의 신앙 10 – 예수님의 종교 1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kjv).

196:2.1 (2091.10) Some day a reformation in the Christian church may strike deep enough to get back to the unadulterated religious teachings of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You may preach a religion about Jesus, but, perforce, you must live the religion of Jesus. In the enthusiasm of Pentecost, Peter unintentionally inaugurated a new religion, the religion of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The Apostle Paul later on transformed this new gospel into Christianity, a religion embodying his own theologic views and portraying his own personal experience with the Jesus of the Damascus road.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founded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Jesus of Galilee; Christianity is founded almost exclusively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Apostle Paul. Almost the whole of the New Testament is devoted, not to the portrayal of the significant and inspiring religious life of Jesus, but to a discussion of Paul’s religious experience and to a portrayal of his personal religious convictions. The only notable exceptions to this statement, aside from certain parts of Matthew, Mark, and Luke, are the Book of Hebrews and the Epistle of James. Even Peter, in his writing, only once reverted to the personal religious life of his Master. The New Testament is a superb Christian document, but it is only meagerly Jesusonian. 언젠가는 기독교 교회 안에서, 우리 신앙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섞이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들로 돌아가려는 개혁이 충분히 깊게 일어날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님에 대한 종교를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너희는 반드시 예수님의 종교를 살아야(실천해야)만 한다. 오순절의 열광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뜻하지 않게) 새로운 종교,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종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새로운 복음을 기독교, 그 자신의 신학적 견해들을 체현하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묘사한 종교로 변환시켰습니다(행9:1-20).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갈릴리 예수님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 종교 체험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전부는, 의미 있고 영감을 주는 예수님의 종교적 일생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토론과 그의 개인적인 종교적 확신들에 대한 묘사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 진술에 대해 유일하게 두드러진 예외들은,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 복음의 어떤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뿐입니다. 베드로마저도 그의 글 속에서 자기 주(主)님의 개인적인 종교적 일생에 단지 한번만 눈길을 돌렸을 뿐이었습니다(벧전2:21-23). 신약은 매우 훌륭한 기독교인의 문서이지만,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예수 공동체)로서 빈약할 따름입니다.

196:2.2 (2091.11) Jesus’ life in the flesh portrays a transcendent religious growth from the early ideas of primitive awe and human reverence up through years of personal spiritual communion until he finally arrived at that advanced and exalted status of the consciousness of his oneness with the Father. And thus, in one short life, did Jesus traverse that experience of religious spiritual progression which man begins on earth and ordinarily achieves only at the conclusion of his long sojourn in the spirit training schools of the successive levels of the pre-Paradise career. Jesus progressed from a purely human consciousness of the faith certainties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to the sublime spiritual heights of the positive realization of his divine nature and to the consciousness of his close association with the Universal Father in the management of a universe. He progressed from the humble status of mortal dependence which prompted him spontaneously to say to the one who called him Good Teacher, “Why do you call me good? None is good but God,” to that sublime consciousness of achieved divinity which led him to exclaim, “Which one of you convicts me of sin?” And this progressing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was an exclusively mortal achievement. And when he had thus attained divinity, he was still the same human Jesus, the Son of Man as well as the Son of God.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심과 인간적 존경심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에서부터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시기들을 거쳐서 그가 최종적으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됨을 의식하는 발전되고 고양된 지위에 도달하기까지의 탁월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은 한 번의 짧은 일생동안에, 사람이 지상에서 시작하여 천국 이전 생애에, 연속적인 단계들의 영 훈련 학교들에서 그의 오랜 체재를 마친 후에만 일반적으로 성취하는, 종교적 영적 진보의 체험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신앙 확신들의 순수한 인간 의식으로부터 그의 신적 본성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는 숭고한 영적 절정에까지, 그리고 우주 경영에 대한 우주 아버지와의 긴밀한 연관의 의식까지 진보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즉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라(마19:16-17, 막10:17-18, 눅18:18-19).”고 말하도록 한 그러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상태로부터, “너희 중의 누가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느냐?(요8:46)”라고 외치도록 그를 인도한 성취된 신성의 그 숭고한 의식의 정도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신적인 것까지의 이 진보하는 상승은 전적으로 필사자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신성을 이루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동일한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196:2.3 (2092.1) Mark, Matthew, and Luke retain something of the picture of the human Jesus as he engaged in the superb struggle to ascertain the divine will and to do that will. John presents a picture of the triumphant Jesus as he walked on earth in the full consciousness of divinity. The great mistake that has been made by those who have studied the Master’s life is that some have conceived of him as entirely human, while others have thought of him as only divine. Throughout his entire experience he was truly both human and divine, even as he yet is.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가 신적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장엄한 분투에 임하고 있었을 때의 인간 예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신성의 충만한 의식으로 지상을 거닐었던 승리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主)님의 일생을 연구한 사람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고 생각하였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오로지 신(神)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체험을 통하여 그는 진실로 인간인 동시에 신(神)이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십니다.

196:2.4 (2092.2) But the greatest mistake was made in that, while the human Jesus was recognized as having a religion, the divine Jesus (Christ) almost overnight became a religion. Paul’s Christianity made sure of the adoration of the divine Christ, but it almost wholly lost sight of the struggling and valiant human Jesus of Galilee, who, by the valor of his personal religious faith and the heroism of his indwelling Adjuster, ascended from the lowly levels of humanity to become one with divinity, thus becoming the new and living way whereby all mortals may so ascend from humanity to divinity. Mortals in all stages of spirituality and on all worlds may find in the personal life of Jesus that which will strengthen and inspire them as they progress from the lowest spirit levels up to the highest divine values,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all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그러나 가장 큰 과오는,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지신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의 기독교는 신적인 그리스도를 숭배하도록 확실히 만들었지만, 그것은 그의 개인적 종교 신앙의 용기와 그의 내재하는 조절자의 영웅적 자질로, 인간성의 낮은 차원들에서부터 신성과 하나가 되기까지 상승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든 필사자들이 그것을 통하여 인간성으로부터 신성으로 그렇게 상승할 수 있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되신 갈릴리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님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영성(靈性)의 모든 단계들과 온 세상들에 있는 필사자들은 예수님의 개인적 일생 속에서 그들이 가장 낮은 영 차원들에서부터 가장 높은 신적 가치들에 이르기까지와, 모든 개인적인 종교 체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들이 진보할 때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96:2.5 (2092.3)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the New Testament, the authors not only most profoundly believed in the divinity of the risen Christ, but they also devotedly and sincerely believed in his immediate return to earth to consummate the heavenly kingdom. This strong faith in the Lord’s immediate return had much to do with the tendency to omit from the record those references which portrayed the purely human experiences and attributes of the Master. The whole Christian movement tended away from the human picture of Jesus of Nazareth toward the exaltation of the risen Christ, the glorified and soon-returning Lord Jesus Christ.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저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깊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재림하리라고 헌신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이러한 강한 신앙은 주(主)님의 순전한 인간 체험들과 속성들을 보여주는 그러한 자료들을 기록에서 생략하려는 경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체 기독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 모습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고 곧-재림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방향으로 향하였습니다.

170730 예수님의 신앙 11 – 예수님의 종교 2 막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4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15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196:2.6 (2092.4) Jesus founded the religion of personal experience in doing the will of God and serving the human brotherhood; Paul founded a religion in which the glorified Jesus became the object of worship and the brotherhood consisted of fellow believers in the divine Christ. In the bestowal of Jesus these two concepts were potential in his divine-human life, and it is indeed a pity that his followers failed to create a unified religion which might have given proper recognition to both the human and the divine natures of the Master as they were inseparably bound up in his earth life and so gloriously set forth in the original gospel of the kingdom.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신분에 봉사하는 개인적 체험의 종교를 설립하셨습니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형제신분은 신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종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예수의 증여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은 그의 신적-인간의 일생 속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지상의 일생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도록 묶여있고 최초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영광스럽게 밝혀져 있었음으로 주(主)님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두 본성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추종자들이 통합된 종교 설립에 실패한 것은 정말 애석하다.

196:2.7 (2093.1) You would be neither shocked nor disturbed by some of Jesus’ strong pronouncements if you would only remember that he was the world’s most wholehearted and devoted religionist. He was a wholly consecrated mortal, unreservedly dedicated to doing his Father’s will. Many of his apparently hard sayings were more of a personal confession of faith and a pledge of devotion than commands to his followers. And it was this very singleness of purpose and unselfish devotion that enabled him to effect such extraordinary progress in the conquest of the human mind in one short life. Many of his declarations should be considered as a confession of what he demanded of himself rather than what he required of all his followers. In his devotion to the cause of the kingdom, Jesus burned all bridges behind him; he sacrificed all hindrances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너희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헌신적인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일부 강경한 발언들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정화(淨化)된 필사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남김없이 봉헌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명백한 강한 말씀들 중 많은 것들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신앙 고백과 헌신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오로지 한 가지 목적과 사심-없는 헌신으로 그는 한 번의 짧은 일생에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그토록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님은 지나온 다리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 있는 장애물을 모두 희생했습니다.

196:2.8 (2093.2) Jesus blessed the poor because they were usually sincere and pious; he condemned the rich because they were usually wanton and irreligious. He would equally condemn the irreligious pauper and commend the consecrated and worshipful man of wealth.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자들이 대개 방종하고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신앙이 없는 빈민을 꾸짖고, 헌신적인 신앙심 깊은 부자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196:2.9 (2093.3) Jesus led men to feel at home in the world; he delivered them from the slavery of taboo and taught them that the world was not fundamentally evil. He did not long to escape from his earthly life; he mastered a technique of acceptably doing the Father’s will while in the flesh. He attained an idealistic religious life in the very midst of a realistic world. Jesus did not share Paul’s pessimistic view of humankind. The Master looked upon men as the sons of God and foresaw a magnificent and eternal future for those who chose survival. He was not a moral skeptic; he viewed man positively, not negatively. He saw most men as weak rather than wicked, more distraught than depraved. But no matter what their status, they were all God’s children and his brethren. 예수님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편안하게 느끼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미신적인 금기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으며, 세상은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지상 생활에서 도피하기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기법에 통달하셨습니다. 그는 실제의 현실 세계 한 복판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일생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인간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갖지 않았습니다. 주(主)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보셨고, 생존을 선택한 그들 앞에 펼쳐질 장엄하고 영원한 미래를 내다 보셨습니다. 그는 도덕면에서 회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악하기보다는 연약하다고 보았으며, 타락했다기보다는 갈팡질팡한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가 어떻든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으며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196:2.10 (2093.4) He taught men to place a high value upon themselves in time and in eternity. Because of this high estimate which Jesus placed upon men, he was willing to spend himself in the unremitting service of humankind. And it was this infinite worth of the finite that made the golden rule a vital factor in his religion. What mortal can fail to be uplifted by the extraordinary faith Jesus has in him?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영원 속에서 자신들에게 높은 가치를 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두신 이 높은 평가 때문에. 그는 인간을 위한 끊임없는 봉사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유한 존재에 대한 이 무한한 가치 때문에 그는 자신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소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께서 그를 향해 지니신 특별한 신앙에 의해 높이 향상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6:2.11 (2093.5) Jesus offered no rules for social advancement; his was a religious mission, and religion is an exclusively individual experience. The ultimate goal of society’s most advanced achievement can never hope to transcend Jesus’ brotherhood of men based on the recognition of the fatherhood of God. The ideal of all social attainment can be realized only in the coming of this divine kingdom. 예수님은 사회적 발전을 위한 어떤 규율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종교적이었고, 종교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체험입니다. 사회의 가장 진보된 성취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의 깨달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형제신분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회적 달성에 대한 이상(理想)은 이 신적 나라의 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3. The Supremacy of Religion 종교의 최극위

196:3.1 (2093.6) Personal, spiritual religious experience is an efficient solvent for most mortal difficulties; it is an effective sorter, evaluator, and adjuster of all human problems. Religion does not remove or destroy human troubles, but it does dissolve, absorb, illuminate, and transcend them. True religion unifies the personality for effective adjustment to all mortal requirements. Religious faith — the positive leading of the indwelling divine presence — unfailingly enables the God-knowing man to bridge that gulf existing between the intellectual logic which recognizes the Universal First Cause as It and those positive affirmations of the soul which aver this First Cause is He, the heavenly Father of Jesus’ gospel, the personal God of human salvation. 개인적, 영적 종교 체험은 대부분의 필사자가 지닌 어려움들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문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분류자, 평가자, 그리고 조절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근심들을 없애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을 용해하고, 흡수하고, 밝혀주고, 그리고 초월합니다. 참된 종교는 모든 필사자의 요구들에 대한 효과적 조절을 위해 고유성을 통합합니다. 종교적 신앙 ─내재하는 신적 현존의 적극적 인도─ 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원인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인 논리와, 이 첫째 원인이 그 분, 즉 예수 복음의 하늘 아버지이며, 인간 구원의 개인적 하나님이라고 단언하는 혼의 적극적 선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확실히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게 합니다.

196:3.2 (2094.1) There are just three elements in universal reality: fact, idea, and relation.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dentifies these realities as science, philosophy, and truth. Philosophy would be inclined to view these activities as reason, wisdom, and faith — physical reality, intellectual reality, and spiritual reality. We are in the habit of designating these realities as thing, meaning, and value. 우주적 실체에는 꼭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실, 관념, 그리고 관계입니다. 종교적 의식은 이들 실체들을 과학, 철학, 그리고 진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철학은 이 활동들을 이성, 지혜, 그리고 신앙─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 의미, 그리고 가치로 명시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196:3.3 (2094.2) The progressive comprehension of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approaching God. The finding of God, the consciousness of identity with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the experiencing of self-completion — self-entirety, self-totality. The experiencing of total reality is the full realization of God, the finality of the God-knowing experience. 실체에 대한 진보적 이해는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에 상응합니다. 하나님의 발견, 실체와 동일한 것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완성 ─ 자아-전체성, 자아-총체성─을 체험하는 것에 상응합니다. 총체적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실현, 즉 하나님을-아는 체험의 최종성입니다.

196:3.4 (2094.3) The full summation of human life is the knowledge that man is educated by fact, ennobled by wisdom, and saved — justified — by religious faith. 인간 일생의 충만한 총합은 사람이 사실에 의해 교육되고, 지혜로 고귀해지며, 종교적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받아-구원받는다는 앎(지식)입니다.

196:3.5 (2094.4) Physical certainty consists in the logic of science; moral certainty, in the wisdom of philosophy; spiritual certainty, in the truth of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물질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으며,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있고, 영적 확실성은 참된 종교적 체험의 진리에 있습니다.

196:3.6 (2094.5) The mind of man can attain high levels of spiritual insight and corresponding spheres of divinity of values because it is not wholly material. There is a spirit nucleus in the mind of man — the Adjuster of the divine presence. There are three separate evidences of this spirit indwelling of the human mind: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영적 통찰력의 높은 차원들과 가치들의 신성에 상응하는 영역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 핵─신적 현존의 조율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이 영이 내주하시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196:3.7 (2094.6) 1. Humanitarian fellowship — love. The purely animal mind may be gregarious for self-protection, but only the spirit-indwelt intellect is unselfishly altruistic and unconditionally loving. 인도주의적 친교─사랑. 순전히 동물적 마음이 자아-보호를 위하여 집단을 이룰 수는 있지만, 영이 내주하는 지성만이 사심-없이 이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196:3.8 (2094.7) 2. Interpretation of the universe — wisdom. Only the spirit-indwelt mind can comprehend that the universe is friendly to the individual.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내주하는 마음만이 우주가 개별존재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6:3.9 (2094.8) 3. Spiritual evaluation of life — worship. Only the spirit-indwelt man can realize the divine presence and seek to attain a fuller experience in and with this foretaste of divinity. 삶의 영적 평가─경배. 오직 영이 내주하는 사람만이 신적 현존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성을 시식(試食)하면서 그 안에서 훨씬 충만한 체험을 얻으려고 추구할 수 있습니다.

196:3.10 (2094.9) The human mind does not create real values; human experience does not yield universe insight. Concerning insight, the recognition of moral values and the discernment of spiritual meanings, all that the human mind can do is to discover, recognize, interpret, and choose. 인간의 마음은 실제 가치들을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험이 우주 통찰력을 낳지 않습니다. 통찰력, 즉 도덕적 가치들의 인식과 영적 의미들의 식별에 대하여, 인간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발견하고, 인식하며, 해석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196:3.11 (2094.10) The moral values of the universe become intellectual possessions by the exercise of the three basic judgments, or choices, of the mortal mind: 우주의 도덕적 가치들은 필사 마음의 세 가지 기본적 판단들, 혹은 선택들의 실행에 의하여 지적 소유물들이 됩니다.

196:3.12 (2094.11) 1. Self-judgment — moral choice. 자아-판단─도덕적 선택.

196:3.13 (2094.12) 2. Social-judgment — ethical choice. 사회적-판단─윤리적 선택.

196:3.14 (2094.13) 3. God-judgment — religious choice. 하나님-판단─종교적 선택.

196:3.15 (2094.14) Thus it appears that all human progress is effected by a technique of conjoint revelational evolution. 이렇게 모든 인간적 진보는 공동의 계시적 진화의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196:3.16 (2094.15) Unless a divine lover lived in man, he could not unselfishly and spiritually love. Unless an interpreter lived in the mind, man could not truly realize the unity of the universe. Unless an evaluator dwelt with man, he could not possibly appraise moral values and recognize spiritual meanings. And this lover hails from the very source of infinite love; this interpreter is a part of Universal Unity; this evaluator is the child of the Center and Source of all absolute values of divine and eternal reality. 신적 연인(戀人)이 사람 안에 살지 있지 않았다면, 그는 사심(私心)없이(비이기적으로)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해석(解釋)자가 마음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평가(評價)자가 사람과 함께 거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들을 평가할 수도 없고 영적 의미들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연인(戀人)은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내려오십니다. 이 해석(解釋)자는 우주적 통일성의 일부이십니다. 이 평가(評價)자는 신적이며 영원한 실체에 담겨있는 모든 절대 가치들의 중심과 근원의 자녀이십니다.

196:3.17 (2095.1) Moral evaluation with a religious meaning — spiritual insight — connotes the individual’s choice between good and evil, truth and error, material and spiritual, human and divine, time and eternity. Human survival is in great measure dependent on consecrating the human will to the choosing of those values selected by this spirit-value sorter — the indwelling interpreter and unifier.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consists in two phases: discovery in the human mind and revelation by the indwelling divine spirit. Through oversophistication or as a result of the irreligious conduct of professed religionists, a man, or even a generation of men, may elect to suspend their efforts to discover the God who indwells them; they may fail to progress in and attain the divine revelation. But such attitudes of spiritual nonprogression cannot long persist because of the presence and influence of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s.

196:3.18 (2095.2) This profound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divine indwelling forever transcends the crude materialistic technique of the physical sciences. You cannot put spiritual joy under a microscope; you cannot weigh love in a balance; you cannot measure moral values; neither can you estimate the quality of spiritual worship.

196:3.19 (2095.3) The Hebrews had a religion of moral sublimity; the Greeks evolved a religion of beauty; Paul and his conferees founded a religion of faith, hope, and charity. Jesus revealed and exemplified a religion of love: security in the Father’s love, with joy and satisfaction consequent upon sharing this love in the service of the human brotherhood.

196:3.20 (2095.4) Every time man makes a reflective moral choice, he immediately experiences a new divine invasion of his soul. Moral choosing constitutes religion as the motive of inner response to outer conditions. But such a real religion is not a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It signifies the whole of the subjectivity of the individual engaged in a meaningful and intelligent response to total objectivity — the universe and its Maker.

196:3.21 (2095.5) The exquisite and transcendent experience of loving and being loved is not just a psychic illusion because it is so purely subjective. The one truly divine and objective reality that is associated with mortal beings, the Thought Adjuster, functions to human observation apparently as an exclusively subjective phenomenon. Man’s contact with the highest objective reality, God, is only through the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of knowing him, of worshiping him, of realizing sonship with him.

196:3.22 (2095.6) True religious worship is not a futile monologue of self-deception. Worship is a personal communion with that which is divinely real, with that which is the very source of reality. Man aspires by worship to be better and thereby eventually attains the best.

196:3.23 (2095.7) The idealization and attempted service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not a substitute for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 spiritual reality. Psychology and idealism are not the equivalent of religious reality. The projections of the human intellect may indeed originate false gods — gods in man’s image — but the true God-consciousness does not have such an origin. The God-consciousness is resident in the indwelling spirit. Many of the religious systems of man come from the formulations of the human intellect, but the God-consciousness is not necessarily a part of these grotesque systems of religious slavery.

196:3.24 (2095.8) God is not the mere invention of man’s idealism; he is the very source of all such superanimal insights and values. God is not a hypothesis formulated to unify the human concept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he is the personality of love from whom all of these universe manifestations are derived. The truth, beauty, and goodness of man’s world are unified by the increasing spirituality of the experience of mortals ascending toward Paradise realities. The unity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can only be realized in the spiritual experience of the God-knowing personality.

196:3.25 (2096.1) Morality is the essential pre-existent soil of personal God-consciousness, the personal realization of the Adjuster’s inner presence, but such morality is not the source of religious experience and the resultant spiritual insight. The moral nature is superanimal but subspiritual. Morality is equivalent to the recognition of duty, the realization of the existence of right and wrong. The moral zone intervenes between the animal and the human types of mind as morontia functions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spheres of personality attainment.

196:3.26 (2096.2) The evolutionary mind is able to discover law, morals, and ethics; but the bestowed spirit, the indwelling Adjuster, reveals to the evolving human mind the lawgiver, the Father-source of all that is true, beautiful, and good; and such an illuminated man has a religion and is spiritually equipped to begin the long and adventurous search for God.

196:3.27 (2096.3) Morality is not necessarily spiritual; it may be wholly and purely human, albeit real religion enhances all moral values, makes them more meaningful. Morality without religion fails to reveal ultimate goodness, and it also fails to provide for the survival of even its own moral values. Religion provides for the enhancement, glorification, and assured survival of everything morality recognizes and approves.

196:3.28 (2096.4) Religion stands above science, art, philosophy, ethics, and morals, but not independent of them. They are all indissolubly interrelated in human experience, personal and social. Religion is man’s supreme experience in the mortal nature, but finite language makes it forever impossible for theology ever adequately to depict real religious experience.

196:3.29 (2096.5) Religious insight possesses the power of turning defeat into higher desires and new determinations. Love is the highest motivation which man may utilize in his universe ascent. But love, divested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only a sentiment, a philosophic distortion, a psychic illusion, a spiritual deception. Love must always be redefined on successive levels of morontia and spirit progression.

196:3.30 (2096.6) Art results from man’s attempt to escape from the lack of beauty in his material environment; it is a gesture toward the morontia level. Science is man’s effort to solve the apparent riddles of the material universe. Philosophy is man’s attempt at the unification of human experience. Religion is man’s supreme gesture, his magnificent reach for final reality, his determination to find God and to be like him.

196:3.31 (2096.7) In the realm of religious experience, spiritual possibility is potential reality. Man’s forward spiritual urge is not a psychic illusion. All of man’s universe romancing may not be fact, but much, very much, is truth.

196:3.32 (2096.8) Some men’s lives are too great and noble to descend to the low level of being merely successful. The animal must adapt itself to the environment, but the religious man transcends his environment and in this way escapes the limitations of the present material world through this insight of divine love. This concept of love generates in the soul of man that superanimal effort to find truth, beauty, and goodness; and when he does find them, he is glorified in their embrace; he is consumed with the desire to live them, to do righteousness.

196:3.33 (2097.1) Be not discouraged; human evolution is still in progress, and the revelation of God to the world, in and through Jesus, shall not fail.

196:3.34 (2097.2) The great challenge to modern man is to achieve better communication with the divine Monitor that dwells within the human mind. Man’s greatest adventure in the flesh consists in the well-balanced and sane effort to advance the borders of self-consciousness out through the dim realms of embryonic soul-consciousness in a wholehearted effort to reach the borderland of spirit-consciousness — contact with the divine presence. Such an experience constitutes God-consciousness, an experience mightily confirmative of the pre-existent truth of the religious experience of knowing God. Such spirit-consciousness is the equivalent of the knowledge of the actuality of sonship with God. Otherwise, the assurance of sonship is the experience of faith.

196:3.35 (2097.3) And God-consciousness is equivalent to the integration of the self with the universe, and on its highest levels of spiritual reality. Only the spirit content of any value is imperishable. Even that which is true, beautiful, and good may not perish in human experience. If man does not choose to survive, then does the surviving Adjuster conserve those realities born of love and nurtured in service. And all these things are a part of the Universal Father. The Father is living love, and this life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And the spirit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sons — mortal men. When all is said and done, the Father idea is still the highest human concept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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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9 The Twelve Apostles 12 사도들

Paper 139

The Twelve Apostles 12 사도들

1. Andrew, the First Chosen 첫 번째로 선택된 안드레
2. Simon Peter 시몬 베드로
3. James Zebedee 야고보 세베대
4. John Zebedee 요한 세베대
5. Philip the Curious 호기심 많은 빌립
6. Honest Nathaniel 정직한 나다니엘
7. Matthew Levi 마태 레위
8. Thomas Didymus 도마 디디머스
9. and 10. James and Judas Alpheus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11. Simon the Zealot 열심당원 시몬
12. Judas Iscariot 가룟 유다

171203 12 사도들-첫 번째 선택된 안드레 1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When they saw the courage of Peter and John and realized that they were unschooled, ordinary men, they were astonished and they took note that these men had been with Jesus.

139:0.1 (1548.1) IT IS an eloquent testimony to the charm and righteousness of Jesus’ earth life that, although he repeatedly dashed to pieces the hopes of his apostles and tore to shreds their every ambition for personal exaltation, only one deserted him. 예수께서 반복하여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들의 개인적으로 높아지려는 모든 야망을 갈가리 찢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사람만이 그를 저버렸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지상(地上) 생애의 매력과 의로움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39:0.2 (1548.2) The apostles learned from Jesus about the kingdom of heaven, and Jesus learned much from them about the kingdom of men, human nature as it lives on Urantia and on the other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se twelve men represented many different types of human temperament, and they had not been made alike by schooling. Many of these Galilean fishermen carried heavy strains of gentile blood as a result of the forcible conversion of the gentile population of Galilee one hundred years previously.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에 대해서 배웠으며,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사람들의 나라, 즉 지구(유란시아) 및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다른 세계들에 살고 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많이 배우셨습니다. 이 12명의 사도들은 다양한 인간 기질(氣質)들을 대표했으며, 그들은 학교 교육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에 갈릴리의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개종시킨 결과 대부분의 이 갈릴리 어부들은 이방인의 혈통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139:0.3 (1548.3) Do not make the mistake of regarding the apostles as being altogether ignorant and unlearned. All of them, except the Alpheus twins, were graduates of the synagogue schools, having been thoroughly trained in the Hebrew scriptures and in much of the current knowledge of that day. Seven were graduates of the Capernaum synagogue schools, and there were no better Jewish schools in all Galilee. 사도들 모두가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알패오의 쌍둥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회당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으며, 히브리 성서와 그 당시 통용되는 많은 지식으로 철저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7명은 가버나움 회당 학교들의 졸업생들이었고, 모든 갈릴리에서 더 좋은 유대인 학교는 없었습니다.

139:0.4 (1548.4) When your records refer to these messengers of the kingdom as being “ignorant and unlearned,” it was intended to convey the idea that they were laymen, unlearned in the lore of the rabbis and untrained in the methods of rabbin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s. They were lacking in so-called higher education. In modern times they would certainly be considered uneducated, and in some circles of society even uncultured. One thing is certain: They had not all been put through the same rigid and stereotyped educational curriculum. From adolescence on they had enjoyed separate experiences of learning how to live. 너희의 기록들이 이 나라의 메신저들을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학문 없는 범인(행4:13)”으로 칭하는 것은, 그들이 랍비들의 지식을 배우지 못했고, 랍비들의 성서해석방법으로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문외한)들이었다는 관념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그들은 소위 고등교육(전문적 전공)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대에서 그들은 분명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로 여겨질 것이고, 심지어 어떤 사회 집단에서는 교양 없는 사람들로 간주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똑같이 경직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교육과정을 모두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춘기부터 계속 그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하였다.

1. Andrew, the First Chosen 첫 번째로 선택된 안드레

139:1.1 (1548.5) Andrew, chairman of the apostolic corps of the kingdom, was born in Capernaum. He was the oldest child in a family of five — himself, his brother Simon, and three sisters. His father, now dead, had been a partner of Zebedee in the fish-drying business at Bethsaida, the fishing harbor of Capernaum. When he became an apostle, Andrew was unmarried but made his home with his married brother, Simon Peter. Both were fishermen and partners of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나라의 사도단의 의장, 안드레는 가버나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5명-자신, 남동생 시몬, 여동생 3명-의 자녀들 중 장남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아버지는 가버나움의 어항(漁港)인 벳새다에서 생선 건조업을 하는 세베대의 동업자였습니다. 그가 사도가 되었을 때, 안드레는 미혼이었지만, 기혼 남동생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둘 다 어부였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들이었습니다.

139:1.2 (1548.6) In A.D. 26, the year he was chosen as an apostle, Andrew was 33, a full year older than Jesus and the oldest of the apostles. He sprang from an excellent line of ancestors and was the ablest man of the twelve. Excepting oratory, he was the peer of his associates in almost every imaginable ability. Jesus never gave Andrew a nickname, a fraternal designation. But even as the apostles soon began to call Jesus Master, so they also designated Andrew by a term the equivalent of Chief. 그가 사도로 선택된 서기 26년에, 안드레는 예수님 보다 만 1살이 많은 33세로 사도들 중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계의 조상을 둔 출신으로 12사도들 중에서 가장 유능했습니다. 웅변을 제외하고,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동료들과 대등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애칭(愛稱), 형제우애의 호칭을 결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바로 예수님을 주(主)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듯이, 그들은 또한 안드레를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용어로 불렀습니다.

139:1.3 (1549.1) Andrew was a good organizer but a better administrator. He was one of the inner circle of four apostles, but his appointment by Jesus as the head of the apostolic group made it necessary for him to remain on duty with his brethren while the other three enjoyed very close communion with the Master. To the very end Andrew remained dean of the apostolic corps. 안드레는 유능한 조직가였지만, 오히려 더 훌륭한 행정-관리자였습니다. 그는 네 사도들로 구성된 핵심 그룹의 하나였지만, 예수께서 그를 사도적 집단의 우두머리로 임명하셔서 그의 임무는 형제들과 함께 남아 있어야 했던 반면에, 다른 셋은 주(主)님과 매우 가깝게 사귀었습니다. 바로 마지막까지 안드레는 사도단의 장(長책임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39:1.4 (1549.2) Although Andrew was never an effective preacher, he was an efficient personal worker, being the pioneer missionary of the kingdom in that, as the first chosen apostle, he immediately brought to Jesus his brother, Simon, who subsequently became one of the greatest preachers of the kingdom. Andrew was the chief supporter of Jesus’ policy of utilizing the program of personal work as a means of training the twelve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안드레가 감명을 주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실력 있는 개인적 일꾼, 즉 첫째로 선택된 사도로서 즉시 자신의 동생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는 점에 있어서, 나라의 선구자적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시몬은 그 후 나라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나라의 메신저들로 12사도들을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개인 상대의 과업 계획을 활용하는 예수님의 정책을 받드는 1등 옹호자였습니다.

139:1.5 (1549.3) Whether Jesus privately taught the apostles or preached to the multitude, Andrew was usually conversant with what was going on; he was an understanding executive and an efficient administrator. He rendered a prompt decision on every matter brought to his notice unless he deemed the problem one beyond the domain of his authority, in which event he would take it straight to Jesus. 예수께서 사도들을 사적(私的)으로 가르치셨을 때나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셨을 때나, 안드레는 대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해하는 집행자였고 실력 있는 행정-관리자였습니다. 그는 눈에 띠는 모든 문제들을 신속히 처리했고, 그의 권한 영역을 넘어선 문제로 판단되면 그 사건을 즉시 예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171210 12 사도들-첫 번째 선택된 안드레 2 막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139:1.6 (1549.4) Andrew and Peter were very unlike in character and temperament, but it must be recorded everlastingly to their credit that they got along together splendidly. Andrew was never jealous of Peter’s oratorical ability. Not often will an older man of Andrew’s type be observed exerting such a profound influence over a younger and talented brother. Andrew and Peter never seemed to be in the least jealous of each other’s abilities or achievements. Late on the evening of the day of Pentecost, when, largely through the energetic and inspiring preaching of Peter, two thousand souls were added to the kingdom, Andrew said to his brother: “I could not do that, but I am glad I have a brother who could.” To which Peter replied: “And but for your bringing me to the Master and by your steadfastness keeping me with him, I should not have been here to do this.” Andrew and Peter were the exceptions to the rule, proving that even brothers can live together peaceably and work together effectively. 안드레와 베드로의 관계. 안드레와 베드로는 성품과 기질이 매우 달랐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잘 지낸 점은 그들의 명예로 영구히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안드레는 결코 베드로의 웅변 능력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안드레 유형(類型)의 나이 든 사람이 어리고 재능 있는 형제에게 그런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각자의 능력이나 업적에 대해 서로 조금이라도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오순절의 늦은 그날 저녁, 주로 베드로의 열광적이고 영감 있는 설교를 통하여 2,000명의 혼들이 나라에 추가되었을 때, 안드레는 자기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동생을 가져서 기쁘구나.” 거기에 베드로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형이 나를 주(主)님께 데려오지 않고, 꾸준히 나를 주(主)님 곁에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있지 않았겠지.” 형제간이라도 평화로이 함께 지내고 효과적으로 함께 일 할 수 있음을 증명하여, 안드레와 베드로는 원칙에 있어서 예외(例外)였습니다.

139:1.7 (1549.5) After Pentecost Peter was famous, but it never irritated the older Andrew to spend the rest of his life being introduced as “Simon Peter’s brother.” 안드레의 넓은 마음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에 유명해졌지만, “시몬 베드로의 형”으로 소개되면서 보낸 여생은 나이 든 안드레를 언짢게 하지 않았습니다.

139:1.8 (1549.6) Of all the apostles, Andrew was the best judge of men. He knew that trouble was brewing in the heart of Judas Iscariot even when none of the others suspected that anything was wrong with their treasurer; but he told none of them his fears. Andrew’s great service to the kingdom was in advising Peter, James, and John concerning the choice of the first missionaries who were sent out to proclaim the gospel, and also in counseling these early leaders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administrative affairs of the kingdom. Andrew had a great gift for discovering the hidden resources and latent talents of young people. 나라를 위한 안드레의 위대한 봉사. 모든 사도들 중 안드레가 사람들을 가장 잘 판단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회계가 뭔가 잘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을 때에도, 안드레는 가룟 유다의 심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걱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한 안드레의 위대한 봉사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파송될 첫 선교사들의 선택에 관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권고하고, 또한 나라의 행정 사무의 조직에 대하여 이 초기 지도자들을 조언한 것입니다. 안드레는 젊은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는 자원과 잠재적인 재능을 발견하는 탁월한 은사(恩賜)가 있었습니다.

139:1.9 (1549.7) Very soon after Jesus’ ascension on high, Andrew began the writing of a personal record of many of the sayings and doings of his departed Master. After Andrew’s death other copies of this private record were made and circulated freely among the early teachers of the Christian church. These informal notes of Andrew’s were subsequently edited, amended, altered, and added to until they made up a fairly consecutive narrative of the Master’s life on earth. The last of these few altered and amended copies was destroyed by fire at Alexandria about one hundred years after the original was written by the first chosen of the twelve apostles. 안드레의 기록. 예수님의 상승 이후 곧바로, 안드레는 떠나가신 주(主)님의 많은 말씀들과 행적들의 개인적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의 사후(死後) 이 사적(私的) 기록의 다른 사본들이 만들어져, 기독교회의 초기 선생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회람(回覽)되었습니다. 안드레의 이러한 비공식적 노트들은, 기독교회의 초기 선생들이 주(主)님의 지상 생애를 상당히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 때까지, 안드레의 기록 이후에 편집되어, 수정되고, 변경되어, 첨부되었습니다. 변경되고 수정된 마지막 몇 개의 이 사본들은, 12 사도들 중의 첫째로 선택된 사도가 원본을 기록한 지 약 100년이 지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불에 타 버렸습니다.

139:1.10 (1550.1) Andrew was a man of clear insight, logical thought, and firm decision, whose great strength of character consisted in his superb stability. His temperamental handicap was his lack of enthusiasm; he many times failed to encourage his associates by judicious commendation. And this reticence to praise the worthy accomplishments of his friends grew out of his abhorrence of flattery and insincerity. Andrew was one of those all-round, even-tempered, self-made, and successful men of modest affairs. 안드레의 장점과 단점. 안드레는 명석한 통찰력, 논리적 사고, 확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성품 중 큰 장점은 뛰어난 안정감이었습니다. 그의 기질적 단점은 열정의 부족이었는데, 그는 여러 번 사려 깊은 칭찬으로 자기 동료들을 격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친구들의 가치 있는 업적들을 칭찬하는 일에 과묵했던 이것은, 아첨이나 불성실에 대한 그의 혐오감에서 생겼습니다. 안드레는 다재다능하고, 침착하며, 자립적이고, 그만그만한 과업에 성공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139:1.11 (1550.2) Every one of the apostles loved Jesus, but it remains true that each of the twelve was drawn toward him because of some certain trait of personality which made a special appeal to the individual apostle. Andrew admired Jesus because of his consistent sincerity, his unaffected dignity. When men once knew Jesus, they were possessed with the urge to share him with their friends; they really wanted all the world to know him. 안드레가 느낀 예수님의 매력. 사도들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12명 각자마다 그에게 끌린 것은, 각 사도들에게 특별히 호감을 주는 어떤 고유성의 특색 때문이었음이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일관된 성실함과 꾸밈없는 기품 때문에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기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온 세상이 그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139:1.12 (1550.3) When the later persecutions finally scattered the apostles from Jerusalem, Andrew journeyed through Armenia, Asia Minor, and Macedonia and, after bringing many thousands into the kingdom, was finally apprehended and crucified in Patrae in Achaia. It was two full days before this robust man expired on the cross, and throughout these tragic hours he continued effectively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of the salvation of the kingdom of heaven. 안드레의 마지막 나중에 박해로 결국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을 때, 안드레는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를 지나 여행하였고, 수천 명을 나라로 인도한 후, 결국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건장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만 이틀이 걸렸는데, 이러한 비극적인 시간들 내내 그는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계속 효과적으로 선포했습니다.

2. Simon Peter 시몬 베드로

171217 시몬 베드로 1 요1:40-42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0 Andrew, Simon Peter’s brother, was one of the two who heard what John had said and who had followed Jesus. 41 The first thing Andrew did was to find his brother Simon and tell him, “We have found the Messiah” (that is, the Christ). 42 And he brought him to Jesus. Jesus looked at him and said, “You are Simon son of John. You will be called Cephas” (which, when translated, is Peter).

139:2.1 (1550.4) When Simon joined the apostles, he was thirty years of age. He was married, had three children, and lived at Bethsaida, near Capernaum. His brother, Andrew, and his wife’s mother lived with him. Both Peter and Andrew were fisher partners of the sons of Zebedee. 시몬이 사도들에 합류했을 때, 그는 30세였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세 자녀가 있었고, 가버나움 인근 벳새다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형 안드레와 장모가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둘 다 세베대의 아들들과 동업하는 어부들이었습니다.

139:2.2 (1550.5) The Master had known Simon for some time before Andrew presented him as the second of the apostles. When Jesus gave Simon the name Peter, he did it with a smile; it was to be a sort of nickname. Simon was well known to all his friends as an erratic and impulsive fellow. True, later on, Jesus did attach a new and significant import to this lightly bestowed nickname. 주(主)님은 안드레가 시몬을 두 번째 사도로 소개하기 전부터, 얼마간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그는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것은 일종의 별명이 될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모든 그의 친구들에게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동료로 유명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가볍게 주신 별명에, 나중에 새롭고 뜻 깊은 의미를 붙인 것이 사실입니다.

139:2.3 (1550.6) Simon Peter was a man of impulse, an optimist. He had grown up permitting himself freely to indulge strong feelings; he was constantly getting into difficulties because he persisted in speaking without thinking. This sort of thoughtlessness also made incessant trouble for all of his friends and associates and was the cause of his receiving many mild rebukes from his Master. The only reason Peter did not get into more trouble because of his thoughtless speaking was that he very early learned to talk over many of his plans and schemes with his brother, Andrew, before he ventured to make public proposals. 시몬 베드로는 충동적인 낙천가(樂天家)였습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자유롭게 탐닉하도록 스스로 허용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말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항상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런 식의 그의 경솔함은 또한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 모두에게 끊임없는 골칫거리가 되었고, 그가 주(主)님으로부터 가벼운 꾸중을 많이 들었던 이유였습니다. 베드로의 분별없는 말 때문에 더 심한 곤경에 빠지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과감히 공적 제안을 내놓기 전에, 많은 자기 계획들과 기획들을 그의 형 안드레와 의논하기를 아주 일찍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139:2.4 (1550.7) Peter was a fluent speaker, eloquent and dramatic. He was also a natural and inspirational leader of men, a quick thinker but not a deep reasoner. He asked many questions, more than all the apostles put together, and while the majority of these questions were good and relevant, many of them were thoughtless and foolish. Peter did not have a deep mind, but he knew his mind fairly well. He was therefore a man of quick decision and sudden action. While others talked in their astonishment at seeing Jesus on the beach, Peter jumped in and swam ashore to meet the Master. 베드로는 극적인 능변의 유창한 연사(演士)였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타고난 지도자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지만, 심오한 추론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 모두를 합한 이상으로 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이 질문의 대부분은 선하고 적절했지만, 그 중 많은 것들은 분별이 없고 어리석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마음은 없었지만, 자기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빨리 결정하고 급히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해변에서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말하는 동안,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어, 주(主)님을 만나려고 해변으로 헤엄쳤습니다.

139:2.5 (1551.1) The one trait which Peter most admired in Jesus was his supernal tenderness. Peter never grew weary of contemplating Jesus’ forbearance. He never forgot the lesson about forgiving the wrongdoer, not only seven times but seventy times and seven. He thought much about these impressions of the Master’s forgiving character during those dark and dismal days immediately following his thoughtless and unintended denial of Jesus in the high priest’s courtyard. 베드로가 가장 경탄한 예수님의 한 가지 특성은 더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관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싫증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잘못하는 사람을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안마당에서 경솔히 뜻하게 않게 예수님을 부인한 직후, 그 어둡고 우울한 며칠 주(主)님의 용서하는 성품에서 받은 이 인상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139:2.6 (1551.2) Simon Peter was distressingly vacillating; he would suddenly swing from one extreme to the other. First he refused to let Jesus wash his feet and then, on hearing the Master’s reply, begged to be washed all over. But, after all, Jesus knew that Peter’s faults were of the head and not of the heart. He was one of the most inexplicable combinations of courage and cowardice that ever lived on earth. His great strength of character was loyalty, friendship. Peter really and truly loved Jesus. And yet despite this towering strength of devotion he was so unstable and inconstant that he permitted a servant girl to tease him into denying his Lord and Master. Peter could withstand persecution and any other form of direct assault, but he withered and shrank before ridicule. He was a brave soldier when facing a frontal attack, but he was a fear-cringing coward when surprised with an assault from the rear. 시몬 베드로는 비참하리만큼 동요했습니다.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갑자기 흔들거리곤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께서 자기 발을 씻지 못하게 했다가 그 후, 주(主)님의 대답을 듣고, 온 몸을 씻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단점이 머리에 있지, 심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용기와 비겁함이 가장 희한하게 섞인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성품 중 큰 장점은 충성과 우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높이 솟는 헌신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어서 여종이 자신을 놀려 그의 주(主)님이시며 선생님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베드로는 박해나 다른 형태의 직접적인 모욕은 잘 견디었지만, 조롱 앞에서는 의기소침으로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전면 공격을 당했을 때는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후면 습격으로 놀랄 때에는 두려움으로 움츠린 겁쟁이였습니다.

139:2.7 (1551.3) Peter was the first of Jesus’ apostles to come forward to defend the work of Philip among the Samaritans and Paul among the gentiles; yet later on at Antioch he reversed himself when confronted by ridiculing Judaizers, temporarily withdrawing from the gentiles only to bring down upon his head the fearless denunciation of Paul. 베드로는, 빌립의 사마리아인들 과업과 바울의 이방인들 과업에 대하여, 예수님의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앞장서서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안디옥에서, 조롱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뒤집어, 잠시 이방인으로부터 물러나, 바울의 두려움이 없는 비난에 고개를 떨 꿀 뿐이었습니다.

139:2.8 (1551.4) He was the first one of the apostles to make wholehearted confession of Jesus’ combined humanity and divinity and the first — save Judas — to deny him. Peter was not so much of a dreamer, but he disliked to descend from the clouds of ecstasy and the enthusiasm of dramatic indulgence to the plain and matter-of-fact world of reality. 그는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통합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전심으로 고백했고, 유다를 제외하고 예수를 부인한 첫 번째 사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심한 몽상가는 아니었지만, 환희의 구름과 극적 탐닉의 열광에서, 실체의 평범한 사실 그대로의 세계로 내려오기를 싫어했습니다.

171224 시몬 베드로 2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Truly, truly, I say to you, when you were younger, you used to gird yourself and walk wherever you wished; but when you grow old, you will stretch out your hands and someone else will gird you, and bring you where you do not wish to go(NASV).”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39:2.9 (1551.5) In following Jesus, literally and figuratively, he was either leading the procession or else trailing behind — “following afar off.” But he was the outstanding preacher of the twelve; he did more than any other one man, aside from Paul, to establish the kingdom and send its messengers to 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in one generation. 베드로의 진폭 예수님을 따르면서, 문자 그대로, 비유적으로, 그는 행렬을 이끌거나 아니면 뒤에 – “멀찍이 뒤에 떨어져서” –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12명 중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제외하고, 한 세대에, 나라를 세우고, 지구의 전 지역에 메신저들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보냈습니다.

139:2.10 (1551.6) After his rash denials of the Master he found himself, and with Andrew’s sympathetic and understanding guidance he again led the way back to the fish nets while the apostles tarried to find out what was to happen after the crucifixion. When he was fully assured that Jesus had forgiven him and knew he had been received back into the Master’s fold, the fires of the kingdom burned so brightly within his soul that he became a great and saving light to thousands who sat in darkness. 베드로의 반전 주(主)님을 경솔히 부인한 후, 그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안드레의 공감하며 분별 있는 안내와 함께, 사도들이 십자가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다리며 찾는 동안, 그는 다시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가는 길로 앞장섰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음을 충분히 확신하고, 자신이 주(主)님의 신도로 복귀하여 수용되었음을 알았을 때, 나라의 불빛이 그의 혼 안에서 아주 밝게 타올라서 어둠에 앉아 있던 수천 명에게 위대한 구원의 빛이 되었습니다.

139:2.11 (1551.7) After leaving Jerusalem and before Paul became the leading spirit among the gentile Christian churches, Peter traveled extensively, visiting all the churches from Babylon to Corinth. He even visited and ministered to many of the churches which had been raised up by Paul. Although Peter and Paul differed much in temperament and education, even in theology, they worked together harmoniously for the upbuilding of the churches during their later years. 형제정신 실천 예루살렘을 떠난 뒤, 바울이 이방의 기독교회들을 이끄는 인물이 되기 전에, 베드로는 바빌론에서 고린도까지 모든 교회들을 방문하며 널리 여행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들까지도 방문하고 섬겼습니다. 비록 베드로와 바울은, 기질과 교육, 그리고 신학도 많이 달랐지만, 그들은 후년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어울려 함께 일했습니다.

139:2.12 (1552.1) Something of Peter’s style and teaching is shown in the sermons partially recorded by Luke and in the Gospel of Mark. His vigorous style was better shown in his letter known as the First Epistle of Peter; at least this was true before it was subsequently altered by a disciple of Paul. 베드로의 스타일과 교훈의 일부는 누가가 부분적으로 기록한 설교와 마가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강력한 스타일은 베드로 전서로 알려진 그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는데, 나중에 바울의 제자가 (베드로전서)를 변경하기 전까지는 이것이 사실이었습니다.

139:2.13 (1552.2) But Peter persisted in making the mistake of trying to convince the Jews that Jesus was, after all, really and truly the Jewish Messiah. Right up to the day of his death, Simon Peter continued to suffer confusion in his mind between the concepts of Jesus as the Jewish Messiah, Christ as the world’s redeemer, and the Son of Man as the revelation of God, the loving Father of all mankind. 베드로의 실수와 혼란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결국 실제로 진정한 유대인의 메시아였다고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잘못을 고집했습니다. 바로 죽는 그 날까지, 시몬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속(救贖)자는 개념과 사람의 아들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라는 개념 사이에서 계속 혼란을 겪었습니다.

139:2.14 (1552.3) Peter’s wife was a very able woman. For years she labored acceptably as a member of the women’s corps, and when Peter was driven out of Jerusalem, she accompanied him upon all his journeys to the churches as well as on all his missionary excursions. And the day her illustrious husband yielded up his life, she was thrown to the wild beasts in the arena at Rome. 베드로의 아내는 매우 유능한 여인이었습니다. 여러 해 그녀는 여인들 분대(여전도회)의 일원으로 기쁘게 수고했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자, 그녀는 그의 모든 선교여행 뿐 아니라 모든 교회로 가는 여행에 그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명한 자기 남편이 죽는 날, 그녀는 로마의 투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졌습니다.

139:2.15 (1552.4) And so this man Peter, an intimate of Jesus, one of the inner circle, went forth from Jerusalem proclaim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with power and glory until the fullness of his ministry had been accomplished; and he regarded himself as the recipient of high honors when his captors informed him that he must die as his Master had died — on the cross. And thus was Simon Peter crucified in Rome. 베드로와 사명 완수와 순교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과 친밀한, 내부자 중 하나였던, 이 사람 베드로는 그의 사역을 충만히 완수하기까지, 권능과 영광으로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를 체포한 자가, 베드로가 그의 주(主)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 죽어야만 한다고 알려주자, 자신을 높은 명예를 받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몬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3. James Zebedee 야고보 세베대

171231 야고보 세베대 1 눅9:52-54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54 When the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asked, “Lord, do you want us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m?”

139:3.1 (1552.5) James, the older of the two apostle sons of Zebedee, whom Jesus nicknamed “sons of thunder,” was thirty years old when he became an apostle. He was married, had four children, and lived near his parents in the outskirts of Capernaum, Bethsaida. He was a fisherman, plying his calling in company with his younger brother John and in association with Andrew and Simon. James and his brother John enjoyed the advantage of having known Jesus long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야고보 세베대의 가정 배경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인 사도들을 “우뢰(雨雷)의 아들들”이라고 별명을 붙였는데 둘 중에 형 야고보는 사도가 되었을 때 30세였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4 자녀를 두었으며, 가버나움 근교 벳새다에 계신 부모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어부로서 동생 요한과 한 팀으로, 안드레와 시몬의 동업자가 되어 생업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다른 어떤 사도들 보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이점(利點)이 있었습니다.

139:3.2 (1552.6) This able apostle was a temperamental contradiction; he seemed really to possess two natures, both of which were actuated by strong feelings. He was particularly vehement when his indignation was once fully aroused. He had a fiery temper when once it was adequately provoked, and when the storm was over, he was always wont to justify and excuse his anger under the pretense that it was wholly a manifestation of righteous indignation. Except for these periodic upheavals of wrath, James’s personality was much like that of Andrew. He did not have Andrew’s discretion or insight into human nature, but he was a much better public speaker. Next to Peter, unless it was Matthew, James was the best public orator among the twelve. 야고보 세베대의 기질 이 유능한 사도는 기질적인 모순 덩어리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두 본성을 가진 듯했으며, 그 두 본성은 격한 감정으로 발동했습니다. 그는 일단 분개가 충분히 치밀어 오르면, 특별히 격렬했습니다. 그는 일단 성질이 충분히 자극되면, 불같은 기질을 드러냈으며, 폭풍이 끝나면, 그는 그것이 전적으로 의로운 분개의 표현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분노를 언제나 정당화하면서 변명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주기적인 분노의 격발을 제외하면, 야고보의 고유성은 안드레와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을 꿰뚫는 안드레의 분별력이나 통찰력은 없었지만, 안드레보다 훨씬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습니다. 베드로 다음으로, 마태가 없었다면, 야고보가 12명 중 가장 우수한 대중 웅변가였습니다.

139:3.3 (1552.7) Though James was in no sense moody, he could be quiet and taciturn one day and a very good talker and storyteller the next. He usually talked freely with Jesus, but among the twelve, for days at a time he was the silent man. His one great weakness was these spells of unaccountable silence. 야고보 세베대의 약점 야고보는 감각적으로 조금도 변덕스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조용하고 말이 없다가, 다음 날에는 뛰어난 좌담(座談)의 명수이며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개 예수님과 자유롭게 이야기했지만, 12명 중에서는 한 번에 며칠씩 침묵했습니다. 그의 한 가지 큰 약점설명할 수 없는 이 침묵들이 한 차례씩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139:3.4 (1552.8) The outstanding feature of James’s personality was his ability to see all sides of a proposition. Of all the twelve, he came the nearest to grasping the real import and significance of Jesus’ teaching. He, too, was slow at first to comprehend the Master’s meaning, but ere they had finished their training, he had acquired a superior concept of Jesus’ message. James was able to understand a wide range of human nature; he got along well with the versatile Andrew, the impetuous Peter, and his self-contained brother John. 야고보 세베대의 장점 야고보의 고유성 중 눈에 띄는 점은 문제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모든 12명 중에서, 그는 예수 가르침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가장 가깝게 파악했습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주(主)님의 의미를 더디게 이해했지만, 그들이 훈련을 마치기 전에, 그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지닌 보다 높은 개념을 알아들었습니다. 야고보는 광범위한 인간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재다능한 안드레와, 충동적인 베드로말이 없는 동생 요한과 아주 잘 지냈습니다.

139:3.5 (1553.1) Though James and John had their troubles trying to work together, it was inspiring to observe how well they got along. They did not succeed quite so well as Andrew and Peter, but they did much better than would ordinarily be expected of two brothers, especially such headstrong and determined brothers. But, strange as it may seem, these two sons of Zebedee were much more tolerant of each other than they were of strangers. They had great affection for one another; they had always been happy playmates. It was these “sons of thunder” who wanted to call fire down from heaven to destroy the Samaritans who presumed to show disrespect for their Master. But the untimely death of James greatly modified the vehement temperament of his younger brother John. 야고보 세베대의 형제 관계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일하려고 애쓰면서 고생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잘 지내는 지 지켜보면 감동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아주 잘 지내지는 못했어도, 특별히 그렇게 고집 세고 단호한 형제들은, 보통의 두 형제들 사이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여도, 이 세베대의 두 아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보다는 훨씬 서로에게 더 관대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다정했고, 언제나 행복한 놀이 친구였습니다. 주(主)님께 무례를 범했다고 여겨진 사마리아인들을 죽이도록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리고 싶어 했던 자들이 이 “우뢰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때 이른 죽음으로 동생 요한의 격렬한 기질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171231-180101 야고보 세베대 2 행12:1-2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 It was about this time that King Herod arrested some who belonged to the church, intending to persecute them. 2 He had James, the brother of John, put to death with the sword.

139:3.6 (1553.2) That characteristic of Jesus which James most admired was the Master’s sympathetic affection. Jesus’ understanding interest in the small and the great, the rich and the poor, made a great appeal to him. 야고보가 가장 감탄한 예수님의 성품은 ()님의 공감적 애정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작은 자와 위대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해하는 관심이 그에게 가장 큰 매력을 주었습니다.

139:3.7 (1553.3) James Zebedee was a well-balanced thinker and planner. Along with Andrew, he was one of the more level-headed of the apostolic group. He was a vigorous individual but was never in a hurry. He was an excellent balance wheel for Peter. 야고보 세베대는 잘 균형 잡힌 사색가이며 입안자였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함께 그룹에서 더 분별 있는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활기찬 개인이었지만 절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안정시키는 뛰어난 원동력이었습니다.

139:3.8 (1553.4) He was modest and undramatic, a daily server, an unpretentious worker, seeking no special reward when he once grasped something of the real meaning of the kingdom. And even in the story about the mother of James and John, who asked that her sons be granted places on the right hand and the left hand of Jesus,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it was the mother who made this request. And when they signified that they were ready to assume such responsibilities, it should be recognized that they were cognizant of the dangers accompanying the Master’s supposed revolt against the Roman power, and that they were also willing to pay the price. When Jesus asked if they were ready to drink the cup, they replied that they were. And as concerns James, it was literally true — he did drink the cup with the Master, seeing that he was the first of the apostles to experience martyrdom, being early put to death with the sword by Herod Agrippa. James was thus the first of the twelve to sacrifice his life upon the new battle line of the kingdom. Herod Agrippa feared James above all the other apostles. He was indeed often quiet and silent, but he was brave and determined when his convictions were aroused and challenged. 그는 점잖아서 요란스럽지 않았으며, 매일 충실히 섬기며, 허세부리지 않는 일꾼으로서, 일단 나라의 참 의미의 실제를 파악하자 더 이상 특별한 보상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 자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 요청을 한 사람은 그 어머니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었다고 나타냈을 때, 로마 권력에 대한 주(主)님의 반란을 추측하였고, 그에 따르는 위험을 그들은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값을 기꺼이 치르려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 잔을 마실 준비가 되었는지 물으셨을 때,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참말이었습니다. – 그는 일찍 헤롯 아그립바의 칼에 죽게 되어, 순교했던 첫 사도로서, 주(主)님과 함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나라의 새로운 전선(戰線)에서 열 둘 중 첫째로 생명을 바쳤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야고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가끔씩 조용히 침묵했지만, 그의 확신을 자극하고 도전하면, 용감하였고 결심이 굳건했습니다.

139:3.9 (1553.5) James lived his life to the full, and when the end came, he bore himself with such grace and fortitude that even his accuser and informer, who attended his trial and execution, was so touched that he rushed away from the scene of James’s death to join himself to the disciples of Jesus. 야고보는 그의 일생을 충만히 살았으며, 종말이 오자, 그는 그토록 은혜롭게 불굴의 용기로 견디어서, 재판과 집행에 참석했던 고소인과 밀고자까지 감명을 받아, 야고보의 처형장에서 뛰쳐나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합류하였습니다.

4. John Zebedee 요한 세베대

180107 요한 세베대 1 요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7 Then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As soon as Simon Peter heard him say, “It is the Lord,” he wrapped his outer garment around him (for he had taken it off) and jumped into the water. 20 Peter turned and saw that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was following them. (This was the one who had leaned back against Jesus at the supper and had said, “Lord, who is going to betray you?”)

139:4.1 (1553.6) When he became an apostle, John was twenty-four years old and was the youngest of the twelve. He was unmarried and lived with his parents at Bethsaida; he was a fisherman and worked with his brother James in partnership with Andrew and Peter. Both before and after becoming an apostle, John functioned as the personal agent of Jesus in dealing with the Master’s family, and he continued to bear this responsibility as long as Mary the mother of Jesus lived. 가정배경 사도가 되었을 때, 요한은 24세였고, 12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는 미혼(未婚)으로 벳새다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어부였고, 형 야고보와 함께 안드레 및 베드로와 동업했습니다. 사도가 되기 전후에, 요한은 주(主)님의 가족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개인적 대리인 역할을 하였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139:4.2 (1553.7) Since John was the youngest of the twelve and so closely associated with Jesus in his family affairs, he was very dear to the Master, but it cannot be truthfully said that he w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You would hardly suspect such a magnanimous personality as Jesus to be guilty of showing favoritism, of loving one of his apostles more than the others. The fact that John was one of the three personal aides of Jesus lent further color to this mistaken idea, not to mention that John, along with his brother James, had known Jesus longer than the others. “예수께서 사랑한 그 제자로 불린 이유 요한은 12 중 가장 어렸고, 가족 업무로 예수님과 친밀히 관련되어, 주(主)님께 매우 소중했지만, “예수께서 사랑한 그 제자라고 정말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관대한 고유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사도들 중 하나를 더 사랑하는 편애를 보이는 죄가 있다고 너희는 거의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요한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알아온 것에다가, 그가 예수님의 개인적 3 비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이 잘못된 생각을 더 그럴 듯하게 만들었습니다.

139:4.3 (1554.1) Peter, James, and John were assigned as personal aides to Jesus soon after they became apostles. Shortly after the selection of the twelve and at the time Jesus appointed Andrew to act as director of the group, he said to him: “And now I desire that you assign two or three of your associates to be with me and to remain by my side, to comfort me and to minister to my daily needs.” And Andrew thought best to select for this special duty the next three first-chosen apostles. He would have liked to volunteer for such a blessed service himself, but the Master had already given him his commission; so he immediately directed that Peter, James, and John attach themselves to Jesus. 축복받은 특별한 임무와 봉사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사도가 된 직후 예수님의 개인 비서들로 배치되었습니다. 12명이 선택된 직후, 예수께서 안드레를 그 무리의 관리자로 임명하셨을 때, 그는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네가 너의 동료 중 두 세 사람을 임명하여 나와 함께 내 곁에 남아서 나를 도와 내 일상의 필요들을 보살피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안드레는 이 특별 임무에, (자기) 다음으로 선택된 3명의 첫 사도들을 뽑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축복받은 봉사에 자신이 자원하고 싶었지만, 주(主)님은 그에게 이미 임무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즉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도록 지시했습니다.

139:4.4 (1554.2) John Zebedee had many lovely traits of character, but one which was not so lovely was his inordinate but usually well-concealed conceit. His long association with Jesus made many and great changes in his character. This conceit was greatly lessened, but after growing old and becoming more or less childish, this self-esteem reappeared to a certain extent, so that, when engaged in directing Nathan in the writing of the Gospel which now bears his name, the aged apostle did not hesitate repeatedly to refer to himself 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In view of the fact that John came nearer to being the chum of Jesus than any other earth mortal, that he was his chosen personal representative in so many matters, it is not strange that he should have come to regard himself as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since he most certainly knew he was the disciple whom Jesus so frequently trusted. 요한 세베대의 특성 요한 세베대는 성품 중 사랑스러운 특성이 많았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않았던 한 가지는 과도하지만 잘 감춰진 자만(自慢 자기 과대 평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교제로 그의 성품은 많은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이 자만이 크게 줄었지만, 나이 들어 다소 유치해진 후, 이 자존심(自尊心)이 어느 정도 다시 나타나, 그가 이제 자기 이름을 담은 복음을 기록하도록 나단을 지시하면서, 노년의 사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로 거듭 언급했습니다. 요한이 세상의 다른 어떤 필사자보다 더 가까운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그토록 많은 경우에 예수께서 선택한 개인적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가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로 여기게 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예수께서 그렇게 자주 신뢰하셨던 제자였음을 가장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9:4.5 (1554.3) The strongest trait in John’s character was his dependability; he was prompt and courageous, faithful and devoted. His greatest weakness was this characteristic conceit. He was the youngest member of his father’s family and the youngest of the apostolic group. Perhaps he was just a bit spoiled; maybe he had been humored slightly too much. But the John of after years was a very different type of person than the self-admiring and arbitrary young man who joined the ranks of Jesus’ apostles when he was twenty-four. 성품의 변화 요한의 성품 중 가장 강한 특성은 그의 신뢰성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하고 용감하며, 성실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약점은 이 특징적 자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 중 막내였고 사도 그룹에서도 가장 어렸습니다. 그는 버릇이 좀 없었을지 모르는데 아마 약간 과도하게 어르면서 자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년 후 요한은, 24세에 예수님의 사도 등급에 참여했던 자화자찬하며 제멋대로 행하던 젊은이와는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39:4.6 (1554.4) Those characteristics of Jesus which John most appreciated were the Master’s love and unselfishness; these traits made such an impression on him that his whole subsequent life became dominated by the sentiment of love and brotherly devotion. He talked about love and wrote about love. This “son of thunder” became the “apostle of love”; and at Ephesus, when the aged bishop was no longer able to stand in the pulpit and preach but had to be carried to church in a chair, and when at the close of the service he was asked to say a few words to the believers, for years his only utterance was, “My little children, love one another.” 요한이 가장 높이 평가한 예수님의 특징들은, ()님의 사랑과 이기심 없는 태도였습니다. 이 특성들에 무척 감명을 받아 그 후 그의 전 생애는 사랑의 정서와 형제의 헌신으로 지배되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논하며 사랑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 “우뢰의 아들”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연로한 감독이 더 이상 설교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어서 의자에 앉은 채로 교회로 옮겨져야만 했는데, 예배가 끝나 신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하시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여러 해 동안 그는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180114 요한 세베대 2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139:4.7 (1554.5) John was a man of few words except when his temper was aroused. He thought much but said little. As he grew older, his temper became more subdued, better controlled, but he never overcame his disinclination to talk; he never fully mastered this reticence. But he was gifted with a remarkable and creative imagination. 극복하지 못한 침묵 요한은 성질이 격해진 때를 제외하면 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이 생각했지만 말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질이 많이 순해졌고, 더 조절되었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경향은 결코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과묵함을 결코 충분히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고 창조적인 상상력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139:4.8 (1555.1) There was another side to John that one would not expect to find in this quiet and introspective type. He was somewhat bigoted and inordinately intolerant. In this respect he and James were much alike — they both wanted to call down fire from heaven on the heads of the disrespectful Samaritans. When John encountered some strangers teaching in Jesus’ name, he promptly forbade them. But he was not the only one of the twelve who was tainted with this kind of self-esteem and superiority consciousness. 요한의 자존심과 우월 의식 요한에게는 이 조용하고 내성적 유형에서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소 고집이 세고 지나치게 편협했습니다. 이 면에서 그와 야고보는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무례한 사마리아인들의 머리 위에, 내리고 싶어 했습니다. 요한은, 어떤 낯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자, 즉시 그들을 제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12 명 중에서, 이 종류의 자존심과 우월 의식에 오염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39:4.9 (1555.2) John’s life was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sight of Jesus’ going about without a home as he knew how faithfully he had made provision for the care of his mother and family. John also deeply sympathized with Jesus because of his family’s failure to understand him, being aware that they were gradually withdrawing from him. This entire situation, together with Jesus’ ever deferring his slightest wish t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and his daily life of implicit trust, made such a profound impression on John that it produced marked and permanent changes in his character, changes which manifested themselves throughout his entire subsequent life. 예수께 영향 받은 변화 요한의 일생은, 예수께서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대비하셨는지 알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집 없이 지내는 모습에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과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깊이 공감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는 가장 사소한 소원도 미루지 않고 매일 무조건 신뢰하는 생활과 더불어, 이 모든 상황이 요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성품에 뚜렷한 영속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변화들은 후에 그의 전 일생에 걸쳐 드러났습니다.

139:4.10 (1555.3) John had a cool and daring courage which few of the other apostles possessed. He was the one apostle who followed right along with Jesus the night of his arrest and dared to accompany his Master into the very jaws of death. He was present and near at hand right up to the last earthly hour and was found faithfully carrying out his trust with regard to Jesus’ mother and ready to receive such additional instructions as might be given during the last moments of the Master’s mortal existence. One thing is certain, John was thoroughly dependable. John usually sat on Jesus’ right hand when the twelve were at meat. He was the first of the twelve really and fully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nd he was the first to recognize the Master when he came to them on the seashore after his resurrection. 요한의 침착한 용기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거의 갖지 못한, 침착하며 대담한 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되던 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갔고, 바로 죽음의 자리까지 대담하게 주(主)님과 동행했던 유일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함께 했으며, 세상에서 바로 마지막 시간까지도 가까이 있었으며, 예수님의 어머니에 관해 그의 신뢰를 성실히 수행했고, 주(主)님의 필사자 실존으로서 마지막 순간에도 추가 지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한데, 요한은 철저히 믿을 만했습니다. 12 사도들이 식사를 할 때, 요한은 대개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았습니다. 그는 12 중 첫째로 정말 충분히 부활을 믿었고, 부활 후 해변에서 그들에게 오셨을 때, 처음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139:4.11 (1555.4) This son of Zebedee was very closely associated with Peter in the early activities of the Christian movement, becoming one of the chief supporters of the Jerusalem church. He was the right-hand support of Peter on the day of Pentecost. 기독 운동의 초기 활동의 지지자 이 세베대의 아들은 기독 운동의 초기 활동에서 베드로와 아주 밀접히 관련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지지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순절 날 베드로의 오른팔로 지지했습니다.

139:4.12 (1555.5) Several years after the martyrdom of James, John married his brother’s widow. The last twenty years of his life he was cared for by a loving granddaughter. 요한의 말년 야고보의 순교 몇 년 후, 요한은 형의 과부와 결혼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 20년은 사랑스러운 손녀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139:4.13 (1555.6) John was in prison several times and was banished to the Isle of Patmos for a period of four years until another emperor came to power in Rome. Had not John been tactful and sagacious, he would undoubtedly have been killed as was his more outspoken brother James. As the years passed, John, together with James the Lord’s brother, learned to practice wise conciliation when they appeared before the civil magistrates. They found that a “soft answer turns away wrath.” They also learned to represent the church as a “spiritual brotherhood devoted to the social service of mankind” rather than as “the kingdom of heaven.” They taught loving service rather than ruling power — kingdom and king. “인류의 사회적 봉사에 헌신하는 영적 형제 신분”으로서의 교회 요한은 여러 번 투옥되었고, 다른 황제가 로마에서 권력을 잡기까지 4년 동안 팟모섬에 추방되었습니다. 요한이 눈치와 총명이 없었다면, 거침없었던 형 야고보처럼 그는 확실히 죽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주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국가의 재판관들 앞에 나타났을 때, 요한은 지혜롭게 화해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합니다(잠15:1).”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가 “하늘나라”라기보다는 “인류의 사회적 봉사에 헌신하는 영적 형제 신분”의 표현임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지배하는 권능 – 왕국과 왕 -보다 사랑하는 봉사를 가르쳤습니다.

139:4.14 (1555.7) When in temporary exile on Patmos, John wrote the Book of Revelation, which you now have in greatly abridged and distorted form. This Book of Revelation contains the surviving fragments of a great revelation, large portions of which were lost, other portions of which were removed, subsequent to John’s writing. It is preserved in only fragmentary and adulterated form. 요한계시록 팟모섬에 잠시 유배되었을 때, 요한은 계시록을 썼는데,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계시록은 크게 단축되고 왜곡된 형태이다. 이 계시록은 큰 계시 중 남은 단편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요한이 기록한 이후에, 커다란 부분들은 소실되었고, 다른 부분들은 제거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단편적이고 불순물이 섞여 오염된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139:4.15 (1555.8) John traveled much, labored incessantly, and after becoming bishop of the Asia churches, settled down at Ephesus. He directed his associate, Nathan, in the writing of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John,” at Ephesus, when he was ninety-nine years old. Of all the twelve apostles, John Zebedee eventually became the outstanding theologian. He died a natural death at Ephesus in A.D. 103 when he was one hundred and one years of age. 요한은 많이 여행하고, 쉼 없이 수고했으며, 아시아 교회들의 감독이 된 후 에베소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99세에 에베소에서 자기 동료 나단에게 소위 요한에 의한 복음을 쓰도록 지시했습니다. 12 사도 중에서 요한 세베대는 결국 탁월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AD 103년 에베소에서 101세의 나이로 자연사했습니다.

5. Philip the Curious 호기심 많은 빌립

180121 호기심 많은 빌립 1 요1:43-44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3 The next day Jesus decided to leave for Galilee. Finding Philip, he said to him, “Follow me.” 44 Philip, like Andrew and Peter, was from the town of Bethsaida.

139:5.1 (1556.1) Philip was the fifth apostle to be chosen, being called when Jesus and his first four apostles were on their way from John’s rendezvous on the Jordan to Cana of Galilee. Since he lived at Bethsaida, Philip had for some time known of Jesus, but it had not occurred to him that Jesus was a really great man until that day in the Jordan valley when he said, “Follow me.” Philip was also somewhat influenced by the fact that Andrew, Peter, James, and John had accepted Jesus as the Deliverer. 빌립은 다섯 번째 사도로 선택되었는데, 그는 예수님과 첫 네 사도들이 요단에서 요한을 만나고 갈릴리의 가나로 가는 도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벳새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빌립은 한동안 예수님을 알고 있었지만, 요단 계곡에서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또한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구원(해방)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139:5.2 (1556.2) Philip was twenty-seven years of age when he joined the apostles; he had recently been married, but he had no children at this time. The nickname which the apostles gave him signified “curiosity.” Philip was always wanting to be shown. He never seemed to see very far into any proposition. He was not necessarily dull, but he lacked imagination. This lack of imagination was the great weakness of his character. He was a commonplace and matter-of-fact individual. 빌립이 27세에 사도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최근에 결혼했으며, 이 때 아이는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준 별명은 “호기심”을 의미했습니다. 빌립은 언제나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어떤 제안도 결코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꼭 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상력은 모자랐습니다. 이 상상력 결핍이 성품 중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하고 사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39:5.3 (1556.3) When the apostles were organized for service, Philip was made steward; it was his duty to see that they were at all times supplied with provisions. And he was a good steward. His strongest characteristic was his methodical thoroughness; he was both mathematical and systematic. 사도들이 봉사하려고 편성할 때, 빌립은 사무장(事務長)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양식이 항상 공급되도록 살피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사무장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강한 특성은 질서정연한 철저함이었는데, 그는 엄밀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139:5.4 (1556.4) Philip came from a family of seven, three boys and four girls. He was next to the oldest, and after the resurrection he baptized his entire family into the kingdom. Philip’s people were fisherfolk. His father was a very able man, a deep thinker, but his mother was of a very mediocre family. Philip was not a man who could be expected to do big things, but he was a man who could do little things in a big way, do them well and acceptably. Only a few times in four years did he fail to have food on hand to satisfy the needs of all. Even the many emergency demands attendant upon the life they lived seldom found him unprepared. The commissary department of the apostolic family was intelligently and efficiently managed. 빌립은 3소년과 4소녀 즉 일곱 (자녀)가 있는 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둘째였는데, 부활 후, 온 가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세례를 주었습니다. 빌립의 친척들은 어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 깊은 사색가였으나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가족 출신이었습니다. 빌립은 큰일을 감당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사소한 일들을 큰 방식으로, 마음에 들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년 동안 모두의 필요를 채울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몇 번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냈던 생활에 수반된 여러 비상시(非常時)의 요구에도, 그가 준비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도 가족의 식량부서는 지혜롭게 효과적으로 관리되었습니다.

139:5.5 (1556.5) The strong point about Philip was his methodical reliability; the weak point in his make-up was his utter lack of imagination, the absence of the ability to put two and two together to obtain four. He was mathematical in the abstract but not constructive in his imagination. He was almost entirely lacking in certain types of imagination. He was the typical everyday and commonplace average man. There were a great many such men and women among the multitudes who came to hear Jesus teach and preach, and they derived great comfort from observing one like themselves elevated to an honored position in the councils of the Master; they derived courage from the fact that one like themselves had already found a high place in the affairs of the kingdom. And Jesus learned much about the way some human minds function as he so patiently listened to Philip’s foolish questions and so many times complied with his steward’s request to “be shown.” 빌립의 강점은 그의 질서정연한 확실성이었고, 기질적 약점은 전적으로 상상력이 부족해서, 둘에 둘을 더해 넷을 얻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이론적)으로 엄밀했지만, 건설적 상상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유형의 상상력은 거의 전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는 일상의 평범한 전형적인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자 왔던 군중들 가운데 그런 남녀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주()님의 의회(사도들)에서 명예로운 지위로 높여진 것을 보고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 업무에서 벌써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들을 참을성 있게 듣고, “보여 달라”는 자기 사무장의 요구에 그토록 여러 번 응하시면서, 어떤 인간들의 마음이 기능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배우셨습니다.

139:5.6 (1556.6) The one quality about Jesus which Philip so continuously admired was the Master’s unfailing generosity. Never could Philip find anything in Jesus which was small, niggardly, or stingy, and he worshiped this ever-present and unfailing liberality. 빌립이 계속 경탄했던 예수님에 관한 한 가지의 특질은 주(主)님의 끊임없는 관대함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에게서 도량이 좁고, 쩨쩨하고, 인색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고, 그는 항상 나타나는 이 끊임없는 너그러움을 존경하였습니다.

180128 호기심 많은 빌립 2 행8:5-6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5 Philip went down to a city in Samaria and proclaimed the Christthere. 6 When the crowds heard Philip and saw the miraculous signs he did, they all paid close attention to what he said.

139:5.7 (1557.1) There was little about Philip’s personality that was impressive. He was often spoken of as “Philip of Bethsaida, the town where Andrew and Peter live.” He was almost without discerning vision; he was unable to grasp the dramatic possibilities of a given situation. He was not pessimistic; he was simply prosaic. He was also greatly lacking in spiritual insight. He would not hesitate to interrupt Jesus in the midst of one of the Master’s most profound discourses to ask an apparently foolish question. But Jesus never reprimanded him for such thoughtlessness; he was patient with him and considerate of his inability to grasp the deeper meanings of the teaching. Jesus well knew that, if he once rebuked Philip for asking these annoying questions, he would not only wound this honest soul, but such a reprimand would so hurt Philip that he would never again feel free to ask questions. Jesus knew that on his worlds of space there were untold billions of similar slow-thinking mortals, and he wanted to encourage them all to look to him and always to feel free to come to him with their questions and problems. After all, Jesus was really more interested in Philip’s foolish questions than in the sermon he might be preaching. Jesus was supremely interested in men, all kinds of men. 빌립의 고유성에는 인상적인 점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베드로가 사는 성읍 벳새다의 빌립”으로 흔히 불렸습니다. 그는 분별하는 선견(先見)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극적인 가능성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비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평범했습니다. 그는 또한 영적 통찰력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는 주(主)님의 가장 심오한 강론들 중 한 강론의 중간에 망설이지 않고 명백히 어리석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가로막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경솔함에 대해 결코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으로 빌립을 대하셨으며, 가르침의 더 깊은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일단 이러한 성가신 질문들 때문에 빌립을 책망한다면, 이 정직한 혼이 상할 뿐만이 아니라, 그 견책이 빌립의 마음을 다치게 하여, 그가 다시는 자유롭게 질문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간 세계들에 비슷하게 생각이 더딘 필사자(必死者)들이 셀 수 없이 무수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들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항상 질문들과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에게 편하게 오도록 격려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전하시는 설교보다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에 실제로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최상의 관심을 두셨습니다.

139:5.8 (1557.2) The apostolic steward was not a good public speaker, but he was a very persuasive and successful personal worker. He was not easily discouraged; he was a plodder and very tenacious in anything he undertook. He had that great and rare gift of saying, “Come.” When his first convert, Nathaniel, wanted to argue about the merits and demerits of Jesus and Nazareth, Philip’s effective reply was, “Come and see.” He was not a dogmatic preacher who exhorted his hearers to “Go” — do this and do that. He met all situations as they arose in his work with “Come” — “come with me; I will show you the way.” And that is always the effective technique in all forms and phases of teaching. Even parents may learn from Philip the better way of saying to their children not “Go do this and go do that,” but rather, “Come with us while we show and share with you the better way.” 사도 사무장은 훌륭한 대중 연설가는 아니었지만, 매우 설득력 있고 성공적인 개인적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것을 맡아도 매우 끈기 있게 했습니다. 그는 오라고 말하는 훌륭하고 보기 드문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첫째로 개종시킨 나다니엘이 예수님과 나사렛의 장단점에 대해 따지려 하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효과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청중들에게 “가서”-이것을 행하고 저것을 행하라-고 훈계하는 고압적인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하다가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와서”- “나를 따라 오라; 내가 그 길을 당신들에게 보여주리라.”고 대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형태와 단계의 가르침에서 항상 효과적인 기법입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가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너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고 나눌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가자.”고 말하는 더 좋은 방법을 빌립에게 배워도 좋습니다.

139:5.9 (1557.3) The inability of Philip to adapt himself to a new situation was well shown when the Greeks came to him at Jerusalem, saying: “Sir, we desire to see Jesus.” Now Philip would have said to any Jew asking such a question, “Come.” But these men were foreigners, and Philip could remember no instructions from his superiors regarding such matters; so the only thing he could think to do was to consult the chief, Andrew, and then they both escorted the inquiring Greeks to Jesus. Likewise, when he went into Samaria preaching and baptizing believers, as he had been instructed by his Master, he refrained from laying hands on his converts in token of their having received the Spirit of Truth. This was done by Peter and John, who presently came down from Jerusalem to observe his work in behalf of the mother church.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빌립의 무능력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인들이 그에게 와서: “선생님, 우리는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잘 나타났습니다. 그 때 빌립은, 어떤 유대인이 그런 질문을 했다면 “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외국인들이었고, 빌립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윗사람들로부터 지시 받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지도자 안드레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고, 그 후 두 사도는 답변을 기대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데려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님의 지시대로, 신자(信者)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주면서 사마리아로 들어갔을 때, 그는 그들이 진리의 영을 받았다는 표시로 개종자들 위에 손 얹기를 삼갔습니다. 이것은 모(母)교회를 대신하여 그의 일을 살피려고 예루살렘에서 즉시 내려온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실행되었습니다.

139:5.10 (1557.4) Philip went on through the trying times of the Master’s death, participated in the reorganization of the twelve, and was the first to go forth to win souls for the kingdom outside of the immediate Jewish ranks, being most successful in his work for the Samaritans and in all his subsequent labors in behalf of the gospel. 빌립은 주(主)께서 죽으시는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계속 겪었는데, 12사도의 재조직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사람)들을 얻으려고 직계 유대인 계층 밖으로 제일 먼저 나아갔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그의 일과 복음을 위한 훗날의 모든 수고에서 가장 성공했습니다.

139:5.11 (1557.5) Philip’s wife, who was an efficient member of the women’s corps, became actively associated with her husband in his evangelistic work after their flight from the Jerusalem persecutions. His wife was a fearless woman. She stood at the foot of Philip’s cross encouraging him to proclaim the glad tidings even to his murderers, and when his strength failed, she began the recital of the story of salvation by faith in Jesus and was silenced only when the irate Jews rushed upon her and stoned her to death. Their eldest daughter, Leah, continued their work, later on becoming the renowned prophetess of Hierapolis. 빌립의 아내는 여성 대원들 중에서 유능한 회원으로, 예루살렘 박해를 피한 후 남편의 전도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빌립의 십자가 밑에 서서 그가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까지도 기쁜 소식을 전파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그의 힘이 다하자, 그녀는 예수를 신앙하여 구원받는 이야기를 낭송하기 시작했고, 성난 유대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돌로 그녀를 죽였을 때, 비로소 잠잠하였습니다. 맏딸 레아는 그들의 일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히에라폴리스의 저명한 여()선지자가 되었습니다.

139:5.12 (1558.1) Philip, the onetime steward of the twelve, was a mighty man in the kingdom, winning souls wherever he went; and he was finally crucified for his faith and buried at Hierapolis. 한 때 12사도의 사무장 빌립은 (하나님) 나라에서 막강한 사람으로 가는 곳마다 혼들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신앙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히에라폴리스에 묻혔습니다.

6. Honest Nathaniel 정직한 나다니엘

180204 정직한 나다니엘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th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139:6.1 (1558.2) Nathaniel, the sixth and last of the apostles to be chosen by the Master himself, was brought to Jesus by his friend Philip. He had been associated in several business enterprises with Philip and, with him, was on the way down to see John the Baptist when they encountered Jesus. 나다니엘은 주(主)님께서 6번째로 직접 선택한 사도로서, 친구 빌립이 그를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그는 여러 사업 기획으로 빌립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와 함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내려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39:6.2 (1558.3) When Nathaniel joined the apostles, he was twenty-five years old and was the next to the youngest of the group. He was the youngest of a family of seven, was unmarried, and the only support of aged and infirm parents, with whom he lived at Cana; his brothers and sister were either married or deceased, and none lived there. Nathaniel and Judas Iscariot were the two best educated men among the twelve. Nathaniel had thought to become a merchant. 나다니엘이 사도로 참여했을 때, 그는 25세로 그룹에서 두 번째로 젊었습니다. 그는 일곱 명 가족 중 막내로 미혼(未婚)이었으며, 가나에서 함께 사는 연세 들고 허약한 부모의 유일한 부양자였습니다. 그의 형들과 누나들은 결혼을 했거나 죽어서 거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나다니엘과 유다 가룟은 12명 중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니엘은 상인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39:6.3 (1558.4) Jesus did not himself give Nathaniel a nickname, but the twelve soon began to speak of him in terms that signified honesty, sincerity. He was “without guile.” And this was his great virtue; he was both honest and sincere. The weakness of his character was his pride; he was very proud of his family, his city, his reputation, and his nation, all of which is commendable if it is not carried too far. But Nathaniel was inclined to go to extremes with his personal prejudices. He was disposed to prejudge individuals in accordance with his personal opinions. He was not slow to ask the question, even before he had met Jesus, “Can any good thing come out of Nazareth?” But Nathaniel was not obstinate, even if he was proud. He was quick to reverse himself when he once looked into Jesus’ face. 예수께서 직접 나다니엘에게 별명을 주지 않으셨지만, 12 사도들은 곧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의미의 용어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간사(奸詐)가 없는” 사람으로 이것이 그의 큰 장점이었는데, 그는 정직하면서 성실했습니다. 그의 성품 중에서 단점은 (강한) 자부심이었는데; 그는 자기 가족, 도시, 명성, 민족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그 모두는 도가 지나치지 않는다면, 칭찬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개인적인 편견에서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개인적 견해로 개인들을 미리 판단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기도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서슴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자부심이 강했지만, 완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일단 예수님의 얼굴을 보자, 얼른 자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139:6.4 (1558.5) In many respects Nathaniel was the odd genius of the twelve. He was the apostolic philosopher and dreamer, but he was a very practical sort of dreamer. He alternated between seasons of profound philosophy and periods of rare and droll humor; when in the proper mood, he was probably the best storyteller among the twelve. Jesus greatly enjoyed hearing Nathaniel discourse on things both serious and frivolous. Nathaniel progressively took Jesus and the kingdom more seriously, but never did he take himself seriously. 여러 면에서 나다니엘은 12 중에서 이상야릇한 천재였습니다. 그는 사도 철학자이며 몽상가였지만, 매우 실천적인 몽상가였습니다. 그는 한 동안 심오한 철학에 빠져 있다가 얼마 동안 희한하게 익살스런 분위기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적절한 분위기에서 그는 12 중 어쩌면 최고의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지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에 대한 나다니엘의 담론 듣기를 아주 즐기셨습니다. 나다니엘은 점진적으로, 예수님과 그 나라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자신을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139:6.5 (1558.6) The apostles all loved and respected Nathaniel, and he got along with them splendidly, excepting Judas Iscariot. Judas did not think Nathaniel took his apostleship sufficiently seriously and once had the temerity to go secretly to Jesus and lodge complaint against him. Said Jesus: “Judas, watch carefully your steps; do not overmagnify your office. Who of us is competent to judge his brother? It is not the Father’s will that his children should partake only of the serious things of life. Let me repeat: I have come that my brethren in the flesh may have joy, gladness, and life more abundantly. Go then, Judas, and do well that which has been intrusted to you but leave Nathaniel, your brother, to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And the memory of this, with that of many similar experiences, long lived in the self-deceiving heart of Judas Iscariot. 사도들 모두 나다니엘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며, 그는 유다 가룟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습니다. 유다는 나다니엘이 사도직을 충분히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 무모히 예수님께 몰래 가서 그에 대해 불평을 제기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신중히 행동하라. 너의 직무를 너무 넘어서지 말라. 우리 중 누가 자기 형제를 판단할 자격이 있겠느냐? 자녀들이 삶에서 진지한 것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는데, 나는 육신으로 내 형제들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일생이 더 풍성하도록 왔노라. 유다야, 그러니 가서 너에게 맡겨진 일을 잘하고, 네 형제 나다니엘이 하나님께 스스로 설명하도록 놔두라.” 그리고 이 기억은 비슷한 여러 경험들과 함께, 자기를 기만하는 유다 가룟의 심정에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139:6.6 (1559.1) Many times, when Jesus was away on the mountain with Peter, James, and John, and things were becoming tense and tangled among the apostles, when even Andrew was in doubt about what to say to his disconsolate brethren, Nathaniel would relieve the tension by a bit of philosophy or a flash of humor; good humor, too.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산으로 멀리 떠나계실 때, 사도들 사이에서 일들이 긴박히 엉켰을 때, 그리고 안드레까지 우울한 형제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할 때, 여러 번, 나다니엘이 약간의 철학이나 혹은 번쩍이는 유머로, 그것도 기분 좋게, 긴장을 풀어주곤 했습니다.

139:6.7 (1559.2) Nathaniel’s duty was to look after the families of the twelve. He was often absent from the apostolic councils, for when he heard that sickness or anything out of the ordinary had happened to one of his charges, he lost no time in getting to that home. The twelve rested securely in the knowledge that their families’ welfare was safe in the hands of Nathaniel. 나다니엘의 임무는 12사도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주 사도 회의에 결석했는데, 그가 맡고 있는 가족들 중에서 병이나 어떤 일이 생겼다고 들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 집을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12사도들은 가족의 복지가 나다니엘의 손에 안전하게 맡겨져 있음을 알고 안심하며 지냈습니다.

139:6.8 (1559.3) Nathaniel most revered Jesus for his tolerance. He never grew weary of contemplating the broadmindedness and generous sympathy of the Son of Man. 나다니엘은 예수님의 포용력 때문에 그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의 관대한 마음과 너그러운 공감을 묵상하면서 결코 싫증나지 않았습니다.

139:6.9 (1559.4) Nathaniel’s father (Bartholomew) died shortly after Pentecost, after which this apostle went into Mesopotamia and India proclaim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His brethren never knew what became of their onetime philosopher, poet, and humorist. But he also was a great man in the kingdom and did much to spread his Master’s teachings, even though he did not participate in the organization of the subsequent Christian church. Nathaniel died in India. 나다니엘의 아버지(바돌로메)가 오순절 직후에 별세한 후, 이 사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로 가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한 때 그들의 철학자요 시인이며 익살꾼(해학가諧謔家)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나중에 기독교회의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주(主)님의 가르침을 멀리 펼치며 많이 일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인도에서 별세했습니다.

7. Matthew Levi 마태 레위

180211 마태 레위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139:7.1 (1559.5) Matthew, the seventh apostle, was chosen by Andrew. Matthew belonged to a family of tax gatherers, or publicans, but was himself a customs collector in Capernaum, where he lived. He was thirty-one years old and married and had four children. He was a man of moderate wealth, the only one of any means belonging to the apostolic corps. He was a good business man, a good social mixer, and was gifted with the ability to make friends and to get along smoothly with a great variety of people. 마태는 일곱 번째 사도로 안드레가 선택했습니다. 마태는 세금을 걷는 세리(稅吏) 가족에 속했지만, 자신은 그가 살던 가버나움에서 관세 징수원이었습니다. 그는 31세였고 결혼하여 4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부유한 사람으로, 사도단에 속한 자로서 유일한 자산가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업가였고, 사교술이 좋았으며, 친구를 만들고 아주 다양한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139:7.2 (1559.6) Andrew appointed Matthew the financial representative of the apostles. In a way he was the fiscal agent and publicity spokesman for the apostolic organization. He was a keen judge of human nature and a very efficient propagandist. His is a personality difficult to visualize, but he was a very earnest disciple and an increasing believer in the mission of Jesus and in the certainty of the kingdom. Jesus never gave Levi a nickname, but his fellow apostles commonly referred to him as the “money-getter.” 안드레는 마태를 사도들의 재정 대표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사도 조직을 위한 회계 대리인이었고 홍보(弘報)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예리하게 감정(鑑定)했으며 매우 효과적인 선전원이었습니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고유성을 지녔지만, 매우 열성적인 제자였고, 예수님의 사명과 (하나님) 나라의 확실성을 갈수록 깊이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별명을 주지 않았지만, 동료 사도들은 흔히 그를 “돈 잘 버는 자”로 불렀습니다.

139:7.3 (1559.7) Levi’s strong point was his wholehearted devotion to the cause. That he, a publican, had been taken in by Jesus and his apostles was the cause for overwhelming gratitude on the part of the former revenue collector. However, it required some little time for the rest of the apostles, especially Simon Zelotes and Judas Iscariot, to become reconciled to the publican’s presence in their midst. Matthew’s weakness was his shortsighted and materialistic viewpoint of life. But in all these matters he made great progress as the months went by. He, of course, had to be absent from many of the most precious seasons of instruction as it was his duty to keep the treasury replenished. 레위의 강점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전심(全心)으로 헌신한 점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리인 그를 받아주신 일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편에서 넘치도록 감사할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도들, 특히 시몬 젤로떼와 유다 가룟이 그들 중에 세리가 있음을 인정하기에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태의 약점은 인생을 근시적이며 물질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서 여러 달이 지나자 그는 크게 나아졌습니다. 물론 그는, 금고를 채우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에, 가장 귀중한 학습 시간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139:7.4 (1559.8) It was the Master’s forgiving disposition which Matthew most appreciated. He would never cease to recount that faith only was necessary in the business of finding God. He always liked to speak of the kingdom as “this business of finding God.” 마태가 가장 감사히 여긴 것은 주(主)님의 용서하는 성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서 신앙만이 필수적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 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139:7.5 (1560.1) Though Matthew was a man with a past, he gave an excellent account of himself, and as time went on, his associates became proud of the publican’s performances. He was one of the apostles who made extensive notes on the sayings of Jesus, and these notes were used as the basis of Isador’s subsequent narrative of the sayings and doings of Jesus, which has become known a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마태는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너무 훌륭하게 처신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동료들은 세리의 성과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광범위하게 받아 적은 사도 중 하나로, 이 노트들은 나중에 이사도르가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의 기초로 사용되었고, 마태에 의한 복음서라고 알려졌습니다.

139:7.6 (1560.2) The great and useful life of Matthew, the business man and customs collector of Capernaum, has been the means of leading thousands upon thousands of other business men, public officials, and politicians, down through the subsequent ages, also to hear that engaging voice of the Master saying, “Follow me.” Matthew really was a shrewd politician, but he was intensely loyal to Jesus and supremely devoted to the task of seeing that the messengers of the coming kingdom were adequately financed. 사업가이며 가버나움의 세관 징수원이었던, 마태의 위대하고 훌륭한 일생은, 수천 명의 다른 사업가들, 공무원들, 정치가들도, 밑으로 다음 세대들 내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主)님의 매력적인 음성을 듣도록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정말로 명석한 정치가였지만, 예수님께 열성적으로 충성했으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들에게 충분히 자금이 조달되도록 원조하는 직무에 극도로 헌신했습니다.

139:7.7 (1560.3) The presence of Matthew among the twelve was the means of keeping the doors of the kingdom wide open to hosts of downhearted and outcast souls who had regarded themselves as long since without the bounds of religious consolation. Outcast and despairing men and women flocked to hear Jesus, and he never turned one away. 12사도 중에 있었던 마태의 현존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종교적 위안의 경계선 밖에 있다고 여겨왔던 낙담하고 버림받은 수많은 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버림받고 절망하는 남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으며, 예수님은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139:7.8 (1560.4) Matthew received freely tendered offerings from believing disciples and the immediate auditors of the Master’s teachings, but he never openly solicited funds from the multitudes. He did all his financial work in a quiet and personal way and raised most of the money among the more substantial class of interested believers. He gave practically the whole of his modest fortune to the work of the Master and his apostles, but they never knew of this generosity, save Jesus, who knew all about it. Matthew hesitated openly to contribute to the apostolic funds for fear that Jesus and his associates might regard his money as being tainted; so he gave much in the names of other believers. During the earlier months, when Matthew knew his presence among them was more or less of a trial, he was strongly tempted to let them know that his funds often supplied them with their daily bread, but he did not yield. When evidence of the disdain of the publican would become manifest, Levi would burn to reveal to them his generosity, but always he managed to keep still. 마태는 믿는 제자들과 주(主)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내는 헌금을 받았지만, 결코 공개적으로 군중들에게 기금을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개인적 방법으로 모든 재정 일을 처리했고, 관심 있는 신자들 중 더 재산이 있는 계층 사이에서 대부분의 돈을 모금했습니다. 그는 사실 주(主)님과 사도들의 일에 자신의 적당한 재산 전체를 썼지만, 전부 알고 있던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들(사도)은 이 관대함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동료들이 자기 돈을 오염된 것으로 여길까 두려워서 사도들의 기금에 버젓이 기부하기를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신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냈습니다. 초기 몇 개월 동안, 마태가 그들 사이에서 자기 현존이 어느 정도 문제임을 알게 되었을 때, 마태는 그의 기금으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자주 공급했다고 그들에게 알리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를 경멸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되면, 레위는 그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려고 분노가 치밀곤 했지만, 그는 항상 잠잠히 가라앉도록 관리했습니다.

139:7.9 (1560.5) When the funds for the week were short of the estimated requirements, Levi would often draw heavily upon his own personal resources. Also, sometimes when he became greatly interested in Jesus’ teaching, he preferred to remain and hear the instruction, even though he knew he must personally make up for his failure to solicit the necessary funds. But Levi did so wish that Jesus might know that much of the money came from his pocket! He little realized that the Master knew all about it. The apostles all died without knowing that Matthew was their benefactor to such an extent that, when he went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fter the beginning of the persecutions, he was practically penniless. 한 주간의 기금이 예산보다 부족하면, 레위는 자주 자기 개인 재산에서 많이 돈을 찾아 쓰곤 하였습니다. 또한 가끔씩,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게 되면, 필요한 기금을 요청하지 못하여 심지어 그가 개인적으로 충당해야만 한다고 알았지만, 차라리 남아서 가르침 듣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많은 돈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음을 예수께서 알아주시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는, 주(主)님께서 전부 알고 계셨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마태가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나갔을 때, 그는 사실상 무일푼이었을 정도로, 마태가 그들의 후원자였음을 사도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몰랐습니다.

139:7.10 (1560.6) When these persecutions caused the believers to forsake Jerusalem, Matthew journeyed north,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He was lost to the knowledge of his former apostolic associates, but on he went, preaching and baptizing, through Syria, Cappadocia, Galatia, Bithynia, and Thrace. And it was in Thrace, at Lysimachia, that certain unbelieving Jews conspired with the Roman soldiers to encompass his death. And this regenerated publican died triumphant in the faith of a salvation he had so surely learned from the teachings of the Master during his recent sojourn on earth. 이 박해들로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자, 마태는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예전의 사도 동료들과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는 설교하고 세례를 주면서 시리아, 카파도시아, 갈라시아, 비티니아, 트레이스를 거쳐 계속 나아갔습니다. 리시마키아에 있는 트레이스에서, 어떤 믿지 않는 유대인이 그를 죽이려고 병정과 공모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된 이 세리는, 최근에 지상에 머무시던 주(主)님의 가르침에서 확실히 배웠던 구원의 신앙으로 승리를 거두며 죽었습니다.

8. Thomas Didymus 도마 디디머스

180218 도마 디디머스 1 요20:24-25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4 Now Thomas (called Didymus),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 disciples when Jesus came. 25 So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the nail mark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where the nails were,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it.”

139:8.1 (1561.1) Thomas was the eighth apostle, and he was chosen by Philip. In later times he has become known as “doubting Thomas,” but his fellow apostles hardly looked upon him as a chronic doubter. True, his was a logical, skeptical type of mind, but he had a form of courageous loyalty which forbade those who knew him intimately to regard him as a trifling skeptic. 도마는 여덟 번째 사도로, 빌립이 선택했습니다. 후에 그는 “의심하는 도마”로 알려졌지만, 동료 사도들은 조금도 그를 상습적인 의혹자(의심을 품는 사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의 마음은 논리적이며 회의적인 유형이었지만, 그는 용감히 충성하는 사람이어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하찮은 회의론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39:8.2 (1561.2) When Thomas joined the apostles, he was twenty-nine years old, was married, and had four children. Formerly he had been a carpenter and stone mason, but latterly he had become a fisherman and resided at Tarichea, situated on the west bank of the Jordan where it flows out of the Sea of Galilee, and he was regarded as the leading citizen of this little village. He had little education, but he possessed a keen, reasoning mind and was the son of excellent parents, who lived at Tiberias. Thomas had the one truly analytical mind of the twelve; he was the real scientist of the apostolic group. 도마가 사도들과 합류할 때, 그는 29세로, 결혼해서 4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목수와 석공이었지만, 나중에 어부가 되어, 갈릴리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요단강 서쪽 둑에 자리 잡은, 타리케아에 살았으며,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유지(有志)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였지만, 예리하고 논리적인 마음을 가진 훌륭한 부모의 아들이었고, 그의 부모는 티베리아스에 살았습니다. 도마는 12사도 중 참으로 분석적 마음을 지닌 유일한 사람으로, 사도 그룹에서 사실상 과학자였습니다.

139:8.3 (1561.3) The early home life of Thomas had been unfortunate; his parents were not altogether happy in their married life, and this was reflected in Thomas’s adult experience. He grew up having a very disagreeable and quarrelsome disposition. Even his wife was glad to see him join the apostles; she was relieved by the thought that her pessimistic husband would be away from home most of the time. Thomas also had a streak of suspicion which made it very difficult to get along peaceably with him. Peter was very much upset by Thomas at first, complaining to his brother, Andrew, that Thomas was “mean, ugly, and always suspicious.” But the better his associates knew Thomas, the more they liked him. They found he was superbly honest and unflinchingly loyal. He was perfectly sincere and unquestionably truthful, but he was a natural-born faultfinder and had grown up to become a real pessimist. His analytical mind had become cursed with suspicion. He was rapidly losing faith in his fellow men when he became associated with the twelve and thus came in contact with the noble character of Jesus. This association with the Master began at once to transform Thomas’s whole disposition and to effect great changes in his mental reactions to his fellow men. 도마의 초기 가정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결혼생활에서 전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도마가 어른이 되자 체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매우 까다롭고 잘 다투는 기질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내까지 그가 사도들에게 합세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녀는 비관적인 남편이 대부분 집을 떠나있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안도했습니다. 도마는 또한 의심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와 평화롭게 지내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도마로 인해 아주 너무 당황하여, 자기 형 안드레에게, 도마는 “나쁜 성격에, 싸우려하고, 항상 의심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도마를 알아 갈수록, 그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최고로 정직하고 단호하게 충성스러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성실하고, 나무랄 데 없이 진실했지만, 천부적으로 흠잡는 사람이었고, 자라서 진짜 비관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분석적인 마음은 의심으로 시달렸습니다. 그가 열둘과 관련되자, 그는 신속히 동료 인간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고상한 성품에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주(主)님과 이런 관계는 즉시 도마의 기질 전체를 바꾸기 시했고, 동료들에 대한 그의 정신적 반응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39:8.4 (1561.4) Thomas’s great strength was his superb analytical mind coupled with his unflinching courage — when he had once made up his mind. His great weakness was his suspicious doubting, which he never fully overcame throughout his whole lifetime in the flesh. 도마의 큰 장점은, 그가 일단 마음을 정하면, 뛰어난 분석적 마음에 굽힐 줄 모르는 용기가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큰 약점은 상대를 믿지 않는 의심으로, 육신의 전 생애에 걸쳐 충분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139:8.5 (1561.5) In the organization of the twelve Thomas was assigned to arrange and manage the itinerary, and he was an able director of the work and movements of the apostolic corps. He was a good executive, an excellent businessman, but he was handicapped by his many moods; he was one man one day and another man the next. He was inclined toward melancholic brooding when he joined the apostles, but contact with Jesus and the apostles largely cured him of this morbid introspection. 열둘의 조직에서 도마는 여행일정을 세우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사도 대원들의 일과 움직임에 대한 유능한 관리자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행정가,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변덕스런 기분 때문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는 어떤 사람이었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들에 합세했을 때, 그는 우울한 생각에 쏠려 있었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의 접촉으로 이 병적인 내면-성찰에서 많이 치료되었습니다.

139:8.6 (1561.6) Jesus enjoyed Thomas very much and had many long, personal talks with him. His presence among the apostles was a great comfort to all honest doubters and encouraged many troubled minds to come into the kingdom, even if they could not wholly understand everything about the spiritual and philosophic phases of the teachings of Jesus. Thomas’s membership in the twelve was a standing declaration that Jesus loved even honest doubters. 예수님은 도마와 매우 즐겁게 지내셨고 여러 번 길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사도들 중에 그의 현존(도마가 있다는 사실)은 정직하게 의혹을 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로였고, 불안한 많은 마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닌 영적이며 철학적인 단계에 대해 모두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열둘 중에 포함된 도마의 회원자격은 예수님께서 정직하게 의심이 많은 자들도 사랑하셨다는 지속적인 선언이었습니다.

139:8.7 (1562.1) The other apostles held Jesus in reverence because of some special and outstanding trait of his replete personality, but Thomas revered his Master because of his superbly balanced character. Increasingly Thomas admired and honored one who was so lovingly merciful yet so inflexibly just and fair; so firm but never obstinate; so calm but never indifferent; so helpful and so sympathetic but never meddlesome or dictatorial; so strong but at the same time so gentle; so positive but never rough or rude; so tender but never vacillating; so pure and innocent but at the same time so virile, aggressive, and forceful; so truly courageous but never rash or foolhardy; such a lover of nature but so free from all tendency to revere nature; so humorous and so playful, but so free from levity and frivolity. It was this matchless symmetry of personality that so charmed Thomas. He probably enjoyed the highest intellectual understanding and personality appreciation of Jesus of any of the twelve.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충만한 고유성이 지닌 어떤 특별하고 탁월한 특성 때문에 그를 존경했지만, 도마는 뛰어나게 균형 잡힌 성품 때문에 주님을 존경했습니다. 도마는, 그렇게 깊은 애정으로 자비하셔도 강직하게 공정하고 공평하시며, 견고하지만 완고하지 않으시고, 침착하지만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도움이 되고 공감하시면서도 간섭하거나 독재적이 아니시며, 강하신 동시에 온화하시며, 적극적이시지만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으시고, 부드럽지만 우유부단하지 않으시며, 순수하고 순진하신 동시에 씩씩하고 진취적이며 강력하시고, 진실로 용감하시나 경솔하거나 무모하지 않으시며, 자연을 사랑하시지만 자연을 숭배하는 모든 경향에서 자유로우시고, 유머가 풍부하고 쾌활하시지만 촐싹이거나 경박하지 않으신 분을 점점 더 경탄하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비할 수 없이 균형 잡힌 고유성에 그렇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열둘 중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지적으로 이해하고 고유성의 진가를 인정하고 즐거워했습니다.

180225 도마 디디머스 2 요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Then Thomas (called Didymus) said to the rest of the disciples, “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139:8.8 (1562.2) In the councils of the twelve Thomas was always cautious, advocating a policy of safety first, but if his conservatism was voted down or overruled, he was always the first fearlessly to move out in execution of the program decided upon. Again and again would he stand out against some project as being foolhardy and presumptuous; he would debate to the bitter end, but when Andrew would put the proposition to a vote, and after the twelve would elect to do that which he had so strenuously opposed, Thomas was the first to say, “Let’s go!” He was a good loser. He did not hold grudges nor nurse wounded feelings. Time and again did he oppose letting Jesus expose himself to danger, but when the Master would decide to take such risks, always was it Thomas who rallied the apostles with his courageous words, “Come on, comrades, let’s go and die with him.” 12사도 의회에서 도마는 언제나 신중했으며, 안전제일 정책을 주장했지만, 안전제일 주의가 부결되거나 취소되면, 결정된 계획의 실행에 그가 항상 제일 먼저 두려움 없이 나섰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무모하고 주제넘은 어떤 계획들을 계속 반대하곤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격렬히 논쟁하곤 했지만, 안드레가 그 제안을 투표에 붙여서, 그가 그렇게 격렬히 반대했던 것을 12사도들이 채택하기로 한 후에는, 도마가 제일 먼저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패배자(태연하게 지는 사람)였습니다. 그는 원한이나 상한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거듭, 그는 예수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주(主)께서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하려 하셨을 때, “친구들이여, 어서 갑시다. 가서 주(主)와 함께 목숨을 바칩시다.”라는 용기 있는 말로 사도들을 집결시키는 사람은 항상 도마였습니다.

139:8.9 (1562.3) Thomas was in some respects like Philip; he also wanted “to be shown,” but his outward expressions of doubt were based on entirely different intellectual operations. Thomas was analytical, not merely skeptical. As far as personal physical courage was concerned, he was one of the bravest among the twelve. 도마는 어떤 면에서 빌립과 비슷했습니다. 그도 역시 “눈으로 보기”를 원했지만, 겉으로 표현된 그의 의심은 전혀 다른 지적 작용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도마는 분석적이었고, 단순히 회의적(懷疑的)이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육체적 용기에 관해서, 그는 12사도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139:8.10 (1562.4) Thomas had some very bad days; he was blue and downcast at times. The loss of his twin sister when he was nine years old had occasioned him much youthful sorrow and had added to his temperamental problems of later life. When Thomas would become despondent, sometimes it was Nathaniel who helped him to recover, sometimes Peter, and not infrequently one of the Alpheus twins. When he was most depressed, unfortunately he always tried to avoid coming in direct contact with Jesus. But the Master knew all about this and had an understanding sympathy for his apostle when he was thus afflicted with depression and harassed by doubts. 도마는 상당히 매우 힘든 날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때로 우울하였고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9살 때, 쌍둥이 여동생을 잃어서 슬픔이 많은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 뒤 인생에서 변덕스러운 문제들이 늘어났습니다. 도마가 낙담하게 되면 그가 회복하도록, 때로는 나다니엘, 때로는 베드로, 때로는 알패오 쌍둥이들 중 하나가, 도왔습니다. 그가 아주 침울해지면, 불행히도 그는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항상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님은 이것을 모두 아셨고, 그가 그렇게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의심으로 시달릴 때, 자신의 사도를 이해하며 헤아리셨습니다.

139:8.11 (1562.5) Sometimes Thomas would get permission from Andrew to go off by himself for a day or two. But he soon learned that such a course was not wise; he early found that it was best, when he was downhearted, to stick close to his work and to remain near his associates. But no matter what happened in his emotional life, he kept right on being an apostle. When the time actually came to move forward, it was always Thomas who said, “Let’s go!” 종종 도마는 홀로 하루나 이틀 말없이 떠나도록 안드레에게 허락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런 방식이 현명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낙심했을 때 일에 매진하면서 동료들 근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최선임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정적 일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는 계속 사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오면,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항상 도마였습니다.

139:8.12 (1562.6) Thomas is the great example of a human being who has doubts, faces them, and wins. He had a great mind; he was no carping critic. He was a logical thinker; he was the acid test of Jesus and his fellow apostles. If Jesus and his work had not been genuine, it could not have held a man like Thomas from the start to the finish. He had a keen and sure sense of fact. At the first appearance of fraud or deception Thomas would have forsaken them all. Scientists may not fully understand all about Jesus and his work on earth, but there lived and worked with the Master and his human associates a man whose mind was that of a true scientist — Thomas Didymus — and he believed in Jesus of Nazareth. 도마는 의심을 품고, 그것들을 대면하고,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한 모델입니다. 그는 넓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흠잡는 비평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논리적인 사색가였고, 예수님과 동료 사도들에게 엄밀한 시금석(試金石)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일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도마 같은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 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대해 예리하고 확실한 감각을 지녔습니다. 사기나 속임수가 나타나는 첫 순간에, 도마는 그들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지상 일에 대해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나사렛 예수를 믿었던 도마 디디머스, 즉 진정한 과학자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주님과 인간 동료들과 함께 살았고 일했습니다.

139:8.13 (1563.1) Thomas had a trying time during the days of the trial and crucifixion. He was for a season in the depths of despair, but he rallied his courage, stuck to the apostles, and was present with them to welcome Jesus on the Sea of Galilee. For a while he succumbed to his doubting depression but eventually rallied his faith and courage. He gave wise counsel to the apostles after Pentecost and, when persecution scattered the believers, went to Cyprus, Crete, the North African coast, and Sicily, preach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and baptizing believers. And Thomas continued preaching and baptizing until he was apprehended by the agents of the Roman government and was put to death in Malta. Just a few weeks before his death he had begun the writing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도마는 재판과 십자가 처형의 기간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한동안 절망의 심연(深淵깊은 수렁)에 있었지만, 용기를 회복하여 사도들에 합세했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환영하려고 사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의심의 우울증에 굴복했지만, 결국 신앙과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오순절 이후 사도들에게 현명하게 조언했으며, 박해로 신도들이 흩어지자, 그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들을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키프로스, 크레데, 북 아프리카 해안, 시실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로마 정부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말타에서 죽기까지 계속 설교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불과 죽기 몇 주 전에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었습니다.

9. and 10. James and Judas Alpheus 9-10. 야고보와 유다 알페오

180304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마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139:10.1 (1563.2) James and Judas the sons of Alpheus, the twin fishermen living near Kheresa, were the ninth and tenth apostles and were chosen by James and John Zebedee. They were twenty-six years old and married, James having three children, Judas two. 알페오의 아들들, 야고보와 유다는 게라사 근처에 사는 쌍둥이 어부들로, 9번째와 10번째의 사도들이었고,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가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26세였고 결혼을 했으며, 야고보는 3명의 자녀들을, 유다는 2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139:10.2 (1563.3) There is not much to be said about these two commonplace fisherfolk. They loved their Master and Jesus loved them, but they never interrupted his discourses with questions. They understood very little about the philosophical discussions or the theological debates of their fellow apostles, but they rejoiced to find themselves numbered among such a group of mighty men. These two men were almost identical in personal appearance, mental characteristics, and extent of spiritual perception. What may be said of one should be recorded of the other. 이들 두 평범한 어부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主)님을 사랑했고, 주(主)님도 그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은 결코 질문으로 그의 강연을 가로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동료 사도들의 철학적 토의나 신학적 논쟁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그런 집단의 막강한 사람들 사이에 열거됨을 발견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개인적 용모, 정신적 특성, 영적 인식 정도가 거의 같았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말해도 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기록되어져야 했습니다.

139:10.3 (1563.4) Andrew assigned them to the work of policing the multitudes. They were the chief ushers of the preaching hours and, in fact, the general servants and errand boys of the twelve. They helped Philip with the supplies, they carried money to the families for Nathaniel, and always were they ready to lend a helping hand to any one of the apostles. 안드레는 그들에게 군중들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설교시간에 1등 안내원이었으며, 사실 12사도들의 시중을 드는, 심부름꾼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모품을 다루는 빌립을 도왔고, 나다니엘을 위해 가족들에게 돈을 전달했으며, 항상 어떤 사도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139:10.4 (1563.5) The multitudes of the common people were greatly encouraged to find two like themselves honored with places among the apostles. By their very acceptance as apostles these mediocre twins were the means of bringing a host of fainthearted believers into the kingdom. And, too, the common people took more kindly to the idea of being directed and managed by official ushers who were very much like themselves. 일반인의 무리들은 자신들과 같은 두 사람이 영예롭게 사도들 사이에 있음을 알고 크게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 평범한 쌍둥이들이 사도로 승인된 바로 그 사실이 주눅 들린 신자의 무리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오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신들과 아주 많이 비슷한 공식 안내원들이 지도하고 관리한다는 생각에 더 친절히 여겼습니다.

139:10.5 (1563.6) James and Judas, who were also called Thaddeus and Lebbeus, had neither strong points nor weak points. The nicknames given them by the disciples were good-natured designations of mediocrity. They were “the least of all the apostles”; they knew it and felt cheerful about it. 또한 다대오와 레비오로 불렸던 야고보와 유다는 장점도, 단점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준 별명은 평범하다는 착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알고 기분 좋게 느꼈습니다.

139:10.6 (1563.7) James Alpheus especially loved Jesus because of the Master’s simplicity. These twins could not comprehend the mind of Jesus, but they did grasp the sympathetic bond between themselves and the heart of their Master. Their minds were not of a high order; they might even reverently be called stupid, but they had a real experience in their spiritual natures. They believed in Jesus; they were sons of God and fellows of the kingdom. 야고보 알패오는 주(主)님의 단순함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이 쌍둥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과 주(主)님의 심정 사이에 있는 (마음이 통하는) 공감의 연대감을 파악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손을 담아도, 아둔하다고 불릴 수 있지만, 그들은 영적 본질을 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동료였습니다.

139:10.7 (1564.1) Judas Alpheus was drawn toward Jesus because of the Master’s unostentatious humility. Such humility linked with such personal dignity made a great appeal to Judas. The fact that Jesus would always enjoin silence regarding his unusual acts made a great impression on this simple child of nature. 유다 알패오는 주(主)님의 허세 없는 겸손 때문에 예수님께 끌렸습니다. 개인적 위엄을 동반한 그런 겸손이 유다에게 큰 매력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비범한 행동에 관해 항상 침묵하라고 분부한 사실은, 이 단순한 기질의 자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139:10.8 (1564.2) The twins were good-natured, simple-minded helpers, and everybody loved them. Jesus welcomed these young men of one talent to positions of honor on his personal staff in the kingdom because there are untold millions of other such simple and fear-ridden souls on the worlds of space whom he likewise wishes to welcome into active and believing fellowship with himself and his outpoured Spirit of Truth. Jesus does not look down upon littleness, only upon evil and sin. James and Judas were little, but they were also faithful. They were simple and ignorant, but they were also big-hearted, kind, and generous. 쌍둥이들은 착하고, 순진한 조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재능을 지닌 이 청년들을 (하나님) 나라의 개인 참모라는 영예로운 지위로 환영하셨는데,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과 활동적인 믿음의 사귐 안으로, 흘러나온 진리의 영과 함께, 공간 세계의 그렇게 단순하며 두려움에 떠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혼들을 환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작음이 아니라, 단지 악과 죄를 경멸하십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작았지만, 그들은 또한 신실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무지했지만, 또한 도량이 넓었고, 친절하고, 관대했습니다.

139:10.9 (1564.3) And how gratefully proud were these humble men on that day when the Master refused to accept a certain rich man as an evangelist unless he would sell his goods and help the poor. When the people heard this and beheld the twins among his counselors, they knew of a certainty that Jesus was no respecter of persons. But only a divine institution — the kingdom of heaven — could ever have been built upon such a mediocre human foundation! 어떤 부자(富者)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한, 주님께서 전도자(傳道者)로 받아주기를 거절하신 그 날, 이 겸손한 사람들은 얼마나 감사하며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쌍둥이들이 예수의 조언자들 중에 있음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적 제도─하늘나라─만이 그런 평범한 인간적 기반 위에 언제나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139:10.10 (1564.4) Only once or twice in all their association with Jesus did the twins venture to ask questions in public. Judas was once intrigued into asking Jesus a question when the Master had talked about revealing himself openly to the world. He felt a little disappointed that there were to be no more secrets among the twelve, and he made bold to ask: “But, Master, when you do thus declare yourself to the world, how will you favor us with special manifestations of your goodness?” 쌍둥이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 중에 단지 한두 번 공개적으로 감히 질문했습니다. 주(主)께서 자신을 세상에 숨김없이 드러내시겠다고 얘기했을 때, 유다가 예수님께 흥미롭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12명 사이에 더 이상 비밀이 없어진다는 것에 조금 실망을 느끼고, 그는 감히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主)여, 당신께서 그렇게 세상에 자신을 밝히시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특별히 나타내는 은혜를 어떻게 베푸시렵니까?”

139:10.11 (1564.5) The twins served faithfully until the end, until the dark days of trial, crucifixion, and despair. They never lost their heart faith in Jesus, and (save John) they were the first to believe in his resurrection. But they could not comprehend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Soon after their Master was crucified, they returned to their families and nets; their work was done. They had not the ability to go on in the more complex battles of the kingdom. But they lived and died conscious of having been honored and blessed with four years of close and personal association with a Son of God, the sovereign maker of a universe. 쌍둥이들은 끝까지, 재판과 십자가 처형과 절망의 어두운 날들까지, 성실히 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신앙하는 심정을 결코 잃지 않았고, (요한을 제외하고) 그들은 그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主)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직후, 그들은 가족에게 돌아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들의 일은 끝났습니다. 그들은 더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전투를 계속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주권적 조물주와 가깝게 4년 동안 개인적 관계를 갖는 영예와 축복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11. Simon the Zealot 열심당원 시몬

180311 열심당원 시몬 눅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Matthew, Thomas, James son of Alphaeus, Simon who was called the Zealot,

139:11.1 (1564.6) Simon Zelotes, the eleventh apostle, was chosen by Simon Peter. He was an able man of good ancestry and lived with his family at Capernaum. He was twenty-eight years old when he became attached to the apostles. He was a fiery agitator and was also a man who spoke much without thinking. He had been a merchant in Capernaum before he turned his entire attention to the patriotic organization of the Zealots. 시몬 젤로테는 11번째 사도로, 시몬 베드로가 선택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 속한 유능한 사람이었고, 가버나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소속되었을 때 28세였습니다. 그는 격렬한 선동가였으며, 또한 생각 없이 많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 조직인 열심당에 심혈을 다하기 전까지 가버나움의 상인이었습니다.

139:11.2 (1564.7) Simon Zelotes was given charge of the diversions and relaxation of the apostolic group, and he was a very efficient organizer of the play life and recreational activities of the twelve. 시몬 젤로테는 사도 그룹의 기분 전환과 휴식을 담당했으며, 그는 12사도들의 운동 생활과 오락 활동에 대해 아주 효율적인 조직가였습니다.

139:11.3 (1564.8) Simon’s strength was his inspirational loyalty. When the apostles found a man or woman who floundered in indecision about entering the kingdom, they would send for Simon. It usually required only about fifteen minutes for this enthusiastic advocate of salvation through faith in God to settle all doubts and remove all indecision, to see a new soul born into the “liberty of faith and the joy of salvation.” 시몬의 강점은 영감(靈感)을 일으키는 충성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버둥거리는 남자나 여자를 발견하면, 그들은 시몬을 부르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신앙)으로 구원된다는 이 열성적인 주창자가, 모든 의심들을 해결하고 모든 망설임을 없애고, 새로운 혼이 “신앙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는데 대개 약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39:11.4 (1565.1) Simon’s great weakness was his material-mindedness. He could not quickly change himself from a Jewish nationalist to a spiritually minded internationalist. Four years was too short a time in which to make such an intellectual and emotional transformation, but Jesus was always patient with him. 시몬의 큰 약점은 물질적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주의자로부터 영적 마음을 가진 국제주의자로, 자신을 빨리 전환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지적 감정적 변환을 이루기에 4년은 너무 짧았지만, 예수님은 항상 그를 인내하셨습니다.

139:11.5 (1565.2) The one thing about Jesus which Simon so much admired was the Master’s calmness, his assurance, poise, and inexplicable composure. 시몬이 예수에 대해 그토록 탄복한 한 가지는 주(主)님의 고요함, 그의 확신, 평정,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침착성이었습니다.

139:11.6 (1565.3) Although Simon was a rabid revolutionist, a fearless firebrand of agitation, he gradually subdued his fiery nature until he became a powerful and effective preacher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Simon was a great debater; he did like to argue. And when it came to dealing with the legalistic minds of the educated Jews or the intellectual quibblings of the Greeks, the task was always assigned to Simon. 시몬은 과격한 혁명가였고, 두려움 없이 선동하는 선동가였지만, 그가 “땅에서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을 전하는 강력하고 유능한 설교자가 되기까지, 그는 점차 불같은 성품을 가라앉혔습니다. 시몬은 뛰어난 토론자였고, 논쟁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적 마음을 가진 교육받은 유대인이나 지적 궤변의 그리스인들을 다루는 과제는 언제나 시몬이 맡았습니다.

139:11.7 (1565.4) He was a rebel by nature and an iconoclast by training, but Jesus won him for the higher concepts of the kingdom of heaven. He had always identified himself with the party of protest, but he now joined the party of progress, unlimited and eternal progression of spirit and truth. Simon was a man of intense loyalties and warm personal devotions, and he did profoundly love Jesus. 그는 천성이 반항아였고, 훈련받은 인습 타파주의자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개념을 위해 그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항의당(抗議黨)과 항상 동일시했었지만, 이제는 영과 진리의 한없이 영원한 진보, 그 진보당(進步黨)에 가입했습니다. 시몬은 강렬한 충성심따뜻하게 직접 헌신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충심으로 사랑했습니다.

139:11.8 (1565.5) Jesus was not afraid to identify himself with business men, laboring men, optimists, pessimists, philosophers, skeptics, publicans, politicians, and patriots. 예수님은 자신을 사업가, 노동자, 낙천가, 비관론자, 철학자, 회의론자, 세리, 정치가, 애국자들과 동일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139:11.9 (1565.6) The Master had many talks with Simon, but he never fully succeeded in making an internationalist out of this ardent Jewish nationalist. Jesus often told Simon that it was proper to want to see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orders improved, but he would always add: “That is not the business of the kingdom of heaven. We must be dedicated to the doing of the Father’s will. Our business is to be ambassadors of a spiritual government on high, and we must not immediately concern ourselves with aught but the representation of the will and character of the divine Father who stands at the head of the government whose credentials we bear.” It was all difficult for Simon to comprehend, but gradually he began to grasp something of the meaning of the Master’s teaching. 주(主)님은 시몬과 많이 이야기하셨지만, 이 열렬한 유대 민족주의자를 국제주의자로 만드는 데 결코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시몬에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질서들이 개선되기를 보려는 것은 적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항상 다음의 말을 덧붙이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직무가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해야만 한다. 우리의 직무는 높은 영적 정부(政府)의 대사가 되는 것이며, 신임장을 지닌 우리는 그 정부(政府)의 정상(頂上)에 계신 신적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대표하는 외에 어떤 것도 자신에 대해 바로 염려하지 말아야만 하느니라.” 시몬은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점차 주님께서 가르치신 어지간한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139:11.10 (1565.7) After the dispersion because of the Jerusalem persecutions, Simon went into temporary retirement. He was literally crushed. As a nationalist patriot he had surrendered in deference to Jesus’ teachings; now all was lost. He was in despair, but in a few years he rallied his hopes and went forth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예루살렘의 박해로 흩어진 후, 시몬은 잠간 은둔했습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는 민족주의적 애국자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항복했으며, 이제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지만, 몇 년 내에 그는 자기 소망들을 다시 모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나갔습니다.

139:11.11 (1565.8) He went to Alexandria and, after working up the Nile, penetrated into the heart of Africa, everywhere preaching the gospel of Jesus and baptizing believers. Thus he labored until he was an old man and feeble. And he died and was buried in the heart of Africa.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나일 강으로 올라가며 일한 후, 아프리카의 심장부를 통과하며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설교하며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늙고 쇠약해질 때까지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묻혔습니다.

12. Judas Iscariot 가룟 유다

180318 가룟 유다1 계22:17b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and whoever wishes, let him take the free gift of the water of life.

139:12.1 (1565.9) Judas Iscariot, the twelfth apostle, was chosen by Nathaniel. He was born in Kerioth, a small town in southern Judea. When he was a lad, his parents moved to Jericho, where he lived and had been employed in his father’s various business enterprises until he became interested in the preaching and work of John the Baptist. Judas’s parents were Sadducees, and when their son joined John’s disciples, they disowned him. 가룟 유다는 12번째 사도로서, 나다니엘이 선택했습니다. 그는 남부 유대의 작은 도시인 케리옷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모는 여리고로 이사했고, 그가 세례 요한의 설교와 일에 관심을 갖기까지는, 그곳에 살면서 자기 아버지의 여러 사업체에 종사했습니다. 유다의 부모는 사두개인이어서, 아들이 요한의 제자가 되자, 자식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139:12.2 (1566.1) When Nathaniel met Judas at Tarichea, he was seeking employment with a fish-drying enterprise at the lower end of the Sea of Galilee. He was thirty years of age and unmarried when he joined the apostles. He was probably the best-educated man among the twelve and the only Judean in the Master’s apostolic family. Judas had no outstanding trait of personal strength, though he had many outwardly appearing traits of culture and habits of training. He was a good thinker but not always a truly honest thinker. Judas did not really understand himself; he was not really sincere in dealing with himself. 나다니엘이 유다를 타리케아에서 만났을 때, 그는 갈릴리 바다의 하류 끝에 있는 생선-건조 사업체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가 될 때, 30세였고 결혼 전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12사도 중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고, 주(主)님의 사도 대원에서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개인적 장점 중에서 눈에 띠는 특성이 없었지만, 표면적으로 여러 문화적 특성(교양)과 훈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색가(思索家)였지만, 항상 참으로 정직한 사색가는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말 신실하게 자신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139:12.3 (1566.2) Andrew appointed Judas treasurer of the twelve, a position which he was eminently fitted to hold, and up to the time of the betrayal of his Master he discharged the responsibilities of his office honestly, faithfully, and most efficiently. 안드레는 유다를 12사도의 회계로 임명하였는데, 그에게 탁월하게 어울리는 자리였으며, 주(主)님을 배반하기 직전까지, 그는 자기 직무의 책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했습니다.

139:12.4 (1566.3) There was no special trait about Jesus which Judas admired above the generally attractive and exquisitely charming personality of the Master. Judas was never able to rise above his Judean prejudices against his Galilean associates; he would even criticize in his mind many things about Jesus. Him whom eleven of the apostles looked upon as the perfect man, as the “one altogether lovely and the chiefest among ten thousand,” this self-satisfied Judean often dared to criticize in his own heart. He really entertained the notion that Jesus was timid and somewhat afraid to assert his own power and authority. 보통 매력적이며 정교하게 호감을 끄는 주(主)님의 고유성 이외에, 유다가 감탄했던 예수님의 특별한 특성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결코 갈릴리 동료들에 적대적인 유대 지방 사람의 편견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에 대해서도 여러 면에서 마음으로 비판했습니다. 11 사도들이 완전한 사람, 즉 “만인(萬人) 중에서 온전히 사랑스럽고 최고으뜸이신 분”으로 간주했던 그 분을, 자아-만족(자만自滿자기로 가득해서 거드름으로 만족)이 가득한 이 유대 사람은 심정(마음)으로 감히 자주 비판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권능과 권위를 주장하기에 소심하고 어느 정도 두려워하신다는 생각을 정말로 품었습니다.

139:12.5 (1566.4) Judas was a good business man. It required tact, ability, and patience, as well as painstaking devotion, to manage the financial affairs of such an idealist as Jesus, to say nothing of wrestling with the helter-skelter business methods of some of his apostles. Judas really was a great executive, a farseeing and able financier. And he was a stickler for organization. None of the twelve ever criticized Judas. As far as they could see, Judas Iscariot was a matchless treasurer, a learned man, a loyal (though sometimes critical) apostle, and in every sense of the word a great success. The apostles loved Judas; he was really one of them. He must have believed in Jesus, but we doubt whether he really loved the Master with a whole heart. The case of Judas illustrates the truthfulness of that saying: “There is a way that seems right to a man, but the end thereof is death.” It is altogether possible to fall victim to the peaceful deception of pleasant adjustment to the paths of sin and death. Be assured that Judas was always financially loyal to his Master and his fellow apostles. Money could never have been the motive for his betrayal of the Master. 유다는 훌륭한 사업가였습니다. 몇 사도들이 혼란스런 직무 방식으로 씨름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아도, 예수님과 같은 그런 이상주의자의 재무 관리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헌신은 물론 재치와 능력 그리고 인내가 요구되었습니다. 유다는 정말로 훌륭한 집행자, 즉 선견지명이 있는 유능한 재정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직에 대해 꽤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2 중 아무도 유다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가룟 유다는 비길 데 없는 회계로, 학자였고, 충성스러운 (가끔 비판적이었던) 사도였으며, 모든 면에서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다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지만(believed), 그가 온 마음(심정)으로 주()님을 정말 사랑했었는지, 우리는 미심쩍게 여깁니다. 유다의 경우에 다음의 격언이 현실그대로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4:12, 16:25).” 죄와 사망의 길에 이르는 즐거운 조율 중에서 평화로운 속임수에 희생물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유다는 항상 재정적으로 주(主)님과 동료들에게 충성했음을 확신하라. 돈은 절대로 그가 주()님을 배반한 동기가 될 수 없었습니다.

139:12.6 (1566.5) Judas was an only son of unwise parents. When very young, he was pampered and petted; he was a spoiled child. As he grew up, he had exaggerated ideas about his self-importance. He was a poor loser. He had loose and distorted ideas about fairness; he was given to the indulgence of hate and suspicion. He was an expert at misinterpretation of the words and acts of his friends. All through his life Judas had cultivated the habit of getting even with those whom he fancied had mistreated him. His sense of values and loyalties was defective. 유다는 현명하지 못한 부모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그는 제멋대로 했으며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버릇없는 아이였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자아중요(자존, 젠체함, 거만하게 굶)에 대한 관념을 과대시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공평함에 대하여 흐리터분하고 왜곡된 관념을 가졌습니다. 그는 증오와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언행(言行)을 오해하는 달인(達人)이었습니다. 유다는 전(全) 생애를 통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복수하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그의 가치와 충성의 감각은 결함이 있었습니다.

139:12.7 (1566.6) To Jesus, Judas was a faith adventure. From the beginning the Master fully understood the weakness of this apostle and well knew the dangers of admitting him to fellowship. But it is the nature of the Sons of God to give every created being a full and equal chance for salvation and survival. Jesus wanted not only the mortals of this world but the onlookers of innumerable other worlds to know that, when doubts exist as to the sincerity and wholeheartedness of a creature’s devotion to the kingdom, it is the invariable practice of the Judges of men fully to receive the doubtful candidate. The door of eternal life is wide open to all; “whosoever will may come”; there are no restrictions or qualifications save the faith of the one who comes. 예수님에게, 유다는 신앙의 모험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주(主)님은 이 사도의 약점을 충분히 이해하셨고, 그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본성은, 모든 창조된 존재에게 구원과 생존을 위해 충분하며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물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성실하게 전심을 다해 헌신하는지 의심이 있을 때, 사람들의 심판자는 의심스러운 후보자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불변의 관례임을, 이 세상의 필사자들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세상들에서 주시하는 자들에게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은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와도 됩니다.” 거기에는 오는 사람의 신앙 이외에 어떤 제한이나 자격 조건이 없습니다.

180325 가룟 유다2 마26:14-16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4 Then one of the Twelve–the one called Judas Iscariot–went to the chief priests 15 and asked, “What are you willing to give me if I hand him over to you?” So they counted out for him thirty silver coins. 16 From then on Judas watched for an opportunity to hand him over.

139:12.8 (1567.1) This is just the reason why Jesus permitted Judas to go on to the very end, always doing everything possible to transform and save this weak and confused apostle. But when light is not honestly received and lived up to, it tends to become darkness within the soul. Judas grew intellectually regarding Jesus’ teachings about the kingdom, but he did not make progress in the acquirement of spiritual character as did the other apostles. He failed to make satisfactory personal progress in spiritual experience. 이것이, 예수께서 유다가 끝까지 계속하도록 허용하셨고, 약하고 혼란에 빠진 이 사도를 변화시켜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셨던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빛은 순전히 수용되어 그에 따라 살지 않으면, 빛은 혼에서 어둠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지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영적 성품 획득에는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 체험에서 만족스러운 개인적 진보에 실패했습니다.

139:12.9 (1567.2) Judas became increasingly a brooder over personal disappointment, and finally he became a victim of resentment. His feelings had been many times hurt, and he grew abnormally suspicious of his best friends, even of the Master. Presently he became obsessed with the idea of getting even, anything to avenge himself, yes, even betrayal of his associates and his Master. 유다는 갈수록 개인적 실망으로 속을 끓이다가 결국 원한(怨恨)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감정들은 여러 번 상처를 받았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 주(主)님까지도 비정상적으로 갈수록 공연히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내, 그는, 복수하는 일이라면, 그렇습니다. 동료들과 주(主)님까지도 배반해서, 복수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139:12.10 (1567.3) But these wicked and dangerous ideas did not take definite shape until the day when a grateful woman broke an expensive box of incense at Jesus’ feet. This seemed wasteful to Judas, and when his public protest was so sweepingly disallowed by Jesus right there in the hearing of all, it was too much. That event determined the mobilization of all the accumulated hate, hurt, malice, prejudice, jealousy, and revenge of a lifetime, and he made up his mind to get even with he knew not whom; but he crystallized all the evil of his nature upon the one innocent person in all the sordid drama of his unfortunate life just because Jesus happened to be the chief actor in the episode which marked his passing from the progressive kingdom of light into that self-chosen domain of darkness. 그러나 사악하고 위험한 이 망상들은, 감사하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료 상자를 깨뜨린 그 날까지, 뚜렷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유다에게 낭비로 여겨졌고, 공개적인 자기 항의(抗議)가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는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에 의해 전면적으로 묵살되자, 유다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축적되어 왔던 모든 미움, 상처, 원한, 편견, 질투, 평생의 복수를 총동원하기로 결심했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복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일생의 비열한 모든 드라마에서 자신의 모든 악의 본성이 무죄한 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진보하는 빛의 나라에서 스스로-선택한 그 어둠의 영역으로 유다의 통행을 표시하는 그 장면(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이 마침 주연(主演) 배우가 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39:12.11 (1567.4) The Master many times, both privately and publicly, had warned Judas that he was slipping, but divine warnings are usually useless in dealing with embittered human nature. Jesus did everything possible, consistent with man’s moral freedom, to prevent Judas’s choosing to go the wrong way. The great test finally came. The son of resentment failed; he yielded to the sour and sordid dictates of a proud and vengeful mind of exaggerated self-importance and swiftly plunged on down into confusion, despair, and depravity. 주(主)님은 여러 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그가 미끄러져 이탈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신적 경고들은 적개심을 품은 인간 본성을 다루는데 대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가지 않도록,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조화를 이루시면서,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큰 시험의 날이 마침내 다가왔습니다. 원한(怨恨)의 아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자아를-중요시하는, 거만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의 졸렬하며 비열한 명령에 굴복했고, 신속하게 혼란, 절망, 그리고 타락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39:12.12 (1567.5) Judas then entered into the base and shameful intrigue to betray his Lord and Master and quickly carried the nefarious scheme into effect. During the outworking of his anger-conceived plans of traitorous betrayal, he experienced moments of regret and shame, and in these lucid intervals he faintheartedly conceived, as a defense in his own mind, the idea that Jesus might possibly exert his power and deliver himself at the last moment. 그 후 유다는 자신의 주인이신 주(主)님을 배반하는 야비하고 치욕스러운 음모를 시작했으며, 사악한 계획을 급히 실행했습니다. 자기 분노로 잉태한 반역적 배반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후회와 수치심의 순간들을 겪었으며, 제 정신이 들었던 이 기간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변명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아마 마지막 순간에 권능을 발휘하여 예수 자신을 구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139:12.13 (1567.6) When the sordid and sinful business was all over, this renegade mortal, who thought lightly of selling his friend for thirty pieces of silver to satisfy his long-nursed craving for revenge, rushed out and committed the final act in the drama of fleeing from the realities of mortal existence — suicide. 비열하고 죄 받을 많은 일이 모두 끝나자, 오래 품었던 복수심을 채우려고 자기 친구를 은화 30개를 받고 가볍게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이 변절한 필사자는 달려 나가 필사자 실존의 실체에서 도망하여 드라마의 마지막 장에서 자살했습니다.

139:12.14 (1567.7) The eleven apostles were horrified, stunned. Jesus regarded the betrayer only with pity. The worlds have found it difficult to forgive Judas, and his name has become eschewed throughout a far-flung universe. 11명의 사도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아찔했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입니다. 세계들은 유다를 용서하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멀리-퍼진 우주 전체에서 그의 이름은 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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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8 Training the Kingdom’s Messengers 하나님 나라 메신저들의 훈련

Paper 138

Training the Kingdom’s Messengers 하나님 나라 메신저들의 훈련

1. Final Instructions 최종적 지시들
2. Choosing the Six 여섯 명 선택
3. The Call of Matthew and Simon 마태와 시몬을 부르심
Not the righteous but sinners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
4. The Call of the Twins 쌍둥이 형제를 부르심
5. The Call of Thomas and Judas 도마와 유다를 부르심
6. The Week of Intensive Training 집중적인 훈련의 주간
7. Another Disappointment 또 한번의 실망
8. First Work of the Twelve 12사도들의 첫 번째 활동
9. Five Months of Testing 5개월 동안의 시간
10. Organization of the Twelve 12사도들의 조직

171008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And they were offended in him. But Jesus said unto them,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ur, save in his own country, and in his own house.

138:0.1 (1538.1) AFTER preaching the sermon on “The Kingdom,” Jesus called the six apostles together that afternoon and began to disclose his plans for visiting the cities around and about the Sea of Galilee. His brothers James and Jude were very much hurt because they were not called to this conference. Up to this time they had regarded themselves as belonging to Jesus’ inner circle of associates. But Jesus planned to have no close relatives as members of this corps of apostolic directors of the kingdom. This failure to include James and Jude among the chosen few, together with his apparent aloofness from his mother ever since the experience at Cana, was the starting point of an ever-widening gulf between Jesus and his family. This situation continued throughout his public ministry — they very nearly rejected him — and these differences were not fully removed until after his death and resurrection. His mother constantly wavered between attitudes of fluctuating faith and hope, and increasing emotions of disappointment, humiliation, and despair. Only Ruth, the youngest, remained unswervingly loyal to her father-brother. “나라”에 대해 설교하신 후, 예수님은 그날 오후 6명의 사도들을 불러 모아서 갈릴리 바다 주변과 그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하려는 그의 계획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형제들인 야고보와 유다는 이 모임에 참석하도록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상했습니다. 그들은 이 시간까지 자신들이 예수님의 핵심 동료에 속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나라의 사도 관리자 무리의 회원에 가까운 친척을 포함하지 않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가나에서의 경험 이후 그가 어머니에게 눈에 띄게 거리감을 둔 것과 아울러 선택된 소수에서 야고보와 유다를 제외시킨 이 일은 예수님과 그의 가족 사이의 틈이 계속 벌어지게 된 시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의 공(公)사역 내내 계속되었고 ─ 그들은 거의 그를 배척했습니다. ─ 이러한 차이는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요동치는 신앙과 희망의 태도들과 실망, 수치, 절망이 점차 증가되는 감정 사이에서 항상 흔들렸습니다. 막내 룻만이 자신의 오빠이자 아버지격인 예수님에 대해 갈팡질팡하지 않고 여전히 충성스러웠습니다.

138:0.2 (1538.2) Until after the resurrection, Jesus’ entire family had very little to do with his ministry. If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save in his own country, he is not without understanding appreciation save in his own family. 부활 이후까지, 예수님의 가족 전체는 그의 사역에 거의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나라 외에서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면, 그는 자기 가족 외에서 진가를 인정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1. Final Instructions 최종적 지시들

138:1.1 (1538.3) The next day, Sunday, June 23, A.D. 26, Jesus imparted his final instructions to the six. He directed them to go forth, two and two, to teach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He forbade them to baptize and advised against public preaching. He went on to explain that later he would permit them to preach in public, but that for a season, and for many reasons, he desired them to acquire practical experience in dealing personally with their fellow men. Jesus purposed to make their first tour entirely one of personal work. Although this announcement was something of a disappointment to the apostles, still they saw, at least in part, Jesus’ reason for thus beginning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and they started out in good heart and with confident enthusiasm. He sent them forth by twos, James and John going to Kheresa, Andrew and Peter to Capernaum, while Philip and Nathaniel went to Tarichea. 다음 날, 서기 26년 6월 23일 일요일에 예수님은 6명의 사도들에게 최종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둘씩 나가서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세례 주는 것을 금하였으며 공적 설교를 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들이 공적으로 설교하도록 허락할 것이며, 당분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는 실천적 체험을 습득하기 바란다고 이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첫 번 여행이 전적으로 개인적 활동이 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러한 발표가 사도들에게 실망스러웠지만,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라 선포를 시작한 이유를 알았으며, 좋은 심정과 자신만만한 열정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게레사로, 안드레와 베드로는 가버나움으로, 빌립과 나다니엘은 타리케아로 갔습니다.

138:1.2 (1538.4) Before they began this first two weeks of service, Jesus announced to them that he desired to ordain twelve apostles to continue the work of the kingdom after his departure and authorized each of them to choose one man from among his early converts for membership in the projected corps of apostles. John spoke up, asking: “But, Master, will these six men come into our midst and share all things equally with us who have been with you since the Jordan and have heard all your teaching in preparation for this, our first labor for the kingdom?” And Jesus replied: “Yes, John, the men you choose shall become one with us, and you will teach them all that pertains to the kingdom, even as I have taught you.” After thus speaking, Jesus left them. 그들이 이러한 첫 번째 두 주간(AD26. 6.24.월~7.7.주일)의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가 떠난 후, 나라의 일을 계속할 12명의 사도들을 임명하기를 원한다고 발표하셨으며, 기획된 사도 그룹의 회원 자격으로 그의 초기 개종자들 중 한 사람씩 그들 각자가 선택하도록 권한을 주셨습니다. 요한이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主)여, 이 여섯 사람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우리와 함께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게 됩니까? 저희들은 요단 이후로 당신과 함께 있었으며, 그 나라를 위해 저희의 첫 번째 이 일을 준비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왔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요한아, 너희가 선택한 사람들은 우리와 하나가 될 것이며,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쳤듯이, 너희는 그들에게 나라에 관계된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 그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138:1.3 (1539.1) The six did not separate to go to their work until they had exchanged many words in discussion of Jesus’ instruction that each of them should choose a new apostle. Andrew’s counsel finally prevailed, and they went forth to their labors. In substance Andrew said: “The Master is right; we are too few to encompass this work. There is need for more teachers, and the Master has manifested great confidence in us inasmuch as he has intrusted us with the choosing of these six new apostles.” This morning, as they separated to go to their work, there was a bit of concealed depression in each heart. They knew they were going to miss Jesus, and besides their fear and timidity, this was not the way they had pictured the kingdom of heaven being inaugurated. 그들 각자가 새로운 사도를 한 명씩 선택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지시에 대하여 토론과 여러 의견들을 교환하기까지, 여섯 명의 사도들은 일하러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드레의 조언이 지지를 얻어,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위해 떠나갔습니다. 실제로 안드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主)님이 옳도다.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우리는 인원이 부족하다. 선생들이 더 필요하며, 주(主)님은 이 6명의 새로운 사도들을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셔서 우리에 대한 큰 신뢰를 보여주셨다.” 이 날(AD26. 6.23.주일) 아침, 그들이 일을 하러 흩어질 때, 각자의 심정에는 약간의 침울함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았고, 두려움과 겁이 난 것 외에,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것은 자신들의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138:1.4 (1539.2) It had been arranged that the six were to labor for two weeks, after which they were to return to the home of Zebedee for a conference. Meantime Jesus went over to Nazareth to visit with Joseph and Simon and other members of his family living in that vicinity. Jesus did everything humanly possible, consistent with his dedica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to retain the confidence and affection of his family. In this matter he did his full duty and more. 그 여섯 명은 2주 동안 수고하고, 그 후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와 회의하기로 정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요셉과 시몬 그리고 근처에 사는 다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가족의 신뢰와 애정을 유지하려고, 아버지의 뜻을 전심으로 행하는 것과 일치되게,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는 책임을 충실히 행하셨고 더 하셨습니다.

138:1.5 (1539.3) While the apostles were out on this mission, Jesus thought much about John, now in prison. It was a great temptation to use his potential powers to release him, but once more he resigned himself to “wait upon the Father’s will.”사도들이 이 사명으로 떠나 있는 동안, 예수님은, 현재 투옥되어 있는 요한에 대해 많이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의 잠재적 권능을 사용하여 그를 석방시키고 싶은 큰 유혹이 일어났지만, 그는 한 번 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위하여 자신을 맡겼습니다.

2. Choosing the Six 여섯 명 선택

171015 마10:2-4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2 These a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first, Simon (who is called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4 Simon the Zealot and Judas Iscariot, who betrayed him.

138:2.1 (1539.4) This first missionary tour of the six was eminently successful. They all discovered the great value of direct and personal contact with men. They returned to Jesus more fully realizing that, after all, religion is purely and wholly a matter of personal experience. They began to sense how hungry were the common people to hear words of religious comfort and spiritual good cheer. When they assembled about Jesus, they all wanted to talk at once, but Andrew assumed charge, and as he called upon them one by one, they made their formal reports to the Master and presented their nominations for the six new apostles. 이 첫 번째 여섯 명의 선교(宣敎) 여행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과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접촉이 큰 가치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종교란 순전히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의 문제임을 더욱 충분히 인식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위안과 영적 격려의 말씀을 들으려고 갈망하는지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이자(AD26. 7.8.월),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안드레가 책임을 맡아 한 사람씩 불러서, 주(主)님께 정식 보고를 드렸고, 새로운 사도로 추천할 여섯 명을 제시하였습니다.

138:2.2 (1539.5) Jesus, after each man had presented his selection for the new apostleships, asked all the others to vote upon the nomination; thus all six of the new apostles were formally accepted by all of the older six. Then Jesus announced that they would all visit these candidates and give them the call to service. 각자 새로운 사도의 신분으로 선택한 자들을 제시한 후,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지명에 대해 투표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렇게 그 새로운 사도 여섯 명 모두 더 오래된 여섯 명 모두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承認)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이 후보자들을 모두 방문해서 그들에게 봉사하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138:2.3 (1539.6) The newly selected apostles were: 새로 뽑힌 사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8:2.4 (1539.7) 1. Matthew Levi, the customs collector of Capernaum, who had his office just to the east of the city, near the borders of Batanea. He was selected by Andrew. 마태 레위는 가버나움의 세관 징수원으로서, 그의 사무실은 그 도시의 바로 동쪽, 바타니아 경계 근처에 있었습니다. 안드레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5 (1539.8) 2. Thomas Didymus, a fisherman of Tarichea and onetime carpenter and stone mason of Gadara. He was selected by Philip. 도마 디디머스는 타리케아의 어부로서, 한때는 가다라에서 목수와 석공이었습니다. 빌립이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6 (1539.9) 3. James Alpheus, a fisherman and farmer of Kheresa, was selected by James Zebedee. 야고보 알패오는 게레사의 어부(漁夫)이자 농부였으며, 야고보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7 (1539.10) 4. Judas Alpheus, the twin brother of James Alpheus, also a fisherman, was selected by John Zebedee. 유다 알패오는 야고보 알패오의 쌍둥이 형제로, 그 역시 어부였으며 요한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8 (1540.1) 5. Simon Zelotes was a high officer in the patriotic organization of the Zealots, a position which he gave up to join Jesus’ apostles. Before joining the Zealots, Simon had been a merchant. He was selected by Peter. 시몬 젤로떼는 열심당이라는 애국적 조직에서 높은 장교였는데,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 참여하려고 그 직위를 포기했습니다. 열심당에 들어가기 전에 시몬은 상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선택했습니다.

138:2.9 (1540.2) 6. Judas Iscariot was an only son of wealthy Jewish parents living in Jericho. He had become attached to John the Baptist, and his Sadducee parents had disowned him. He was looking for employment in these regions when Jesus’ apostles found him, and chiefly because of his experience with finances, Nathaniel invited him to join their ranks. Judas Iscariot was the only Judean among the twelve apostles. 가룟 유다는 여리고에 사는 어느 부유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에게 소속되었기에, 사두개인인 그의 부모는 그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지역에서 직장을 찾고 있었으며, 재정에 관한 경력이 주된 원인으로, 나다니엘이 그를 그들의 대열에 들어오도록 초청했습니다. 유다는 12명의 사도들 중에서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습니다.

138:2.10 (1540.3) Jesus spent a full day with the six, answering their questions and listening to the details of their reports, for they had many interesting and profitable experiences to relate. They now saw the wisdom of the Master’s plan of sending them out to labor in a quiet and personal manner before the launching of their more pretentious public efforts. 예수님은 여섯 사도들과 온 종일(AD26. 7.8.월) 보내면서,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이 보고한 세부적인 사실들을 경청하셨는데, 그들이 관련된 흥미 있고 유익한 체험들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욱 야심적인 공적(公的)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하고 개인적 방법으로 수고하라고 그들을 내보내신 주(主)님의 지혜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3. The Call of Matthew and Simon 마태와 시몬을 부르심

171022 마9:9-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10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Matthew’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ate with him and his disciples. 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2 On hearing this, Jesus said,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13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For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138:3.1 (1540.4) The next day Jesus and the six went to call upon Matthew, the customs collector. Matthew was awaiting them, having balanced his books and made ready to turn the affairs of his office over to his brother. As they approached the toll house, Andrew stepped forward with Jesus, who, looking into Matthew’s face, said, “Follow me.” And he arose and went to his house with Jesus and the apostles. 다음 날(AD 26. 7. 9. 화) 예수님과 여섯 사도들은 세리(세관 징수원) 마태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마태는 그의 장부를 정리해 놓고, 동생에게 그의 사무실의 관련된 일들을 넘겨줄 준비를 마친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금징수소에 접근했을 때, 안드레가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나갔으며, 예수님은 마태의 얼굴을 바라보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138:3.2 (1540.5) Matthew told Jesus of the banquet he had arranged for that evening, at least that he wished to give such a dinner to his family and friends if Jesus would approve and consent to be the guest of honor. And Jesus nodded his consent. Peter then took Matthew aside and explained that he had invited one Simon to join the apostles and secured his consent that Simon be also bidden to this feast. 마태는 그 날(AD 26. 7. 9. 화) 저녁 연회를 마련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면서, 예수께서 연회의 귀빈으로 승인하고 동의해주신다면, 적어도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그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찬성한다고 끄덕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태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시몬이라는 한 사람을 사도로 가입하도록 초청했다고 설명하면서, 시몬도 그 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138:3.3 (1540.6) After a noontide luncheon at Matthew’s house they all went with Peter to call upon Simon the Zealot, whom they found at his old place of business, which was now being conducted by his nephew. When Peter led Jesus up to Simon, the Master greeted the fiery patriot and only said, “Follow me.” 마태의 집에서 점심식사 후에, 그들은 모두 베드로와 함께 열심당원 시몬을 방문하러 가서 그가 이전에 사업을 하던 장소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그의 조카가 그 일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시몬에게 갔을 때, 주(主)님은 그 열성 애국자에게 인사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138:3.4 (1540.7) They all returned to Matthew’s home, where they talked much about politics and religion until the hour of the evening meal. The Levi family had long been engaged in business and tax gathering; therefore many of the guests bidden to this banquet by Matthew would have been denominated “publicans and sinners” by the Pharisees. 그들은 모두 마태의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 정치와 종교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레위 집안은 오랫동안 사업과 세금 징수에 종사해왔으므로; 마태가 이 연회에 초대한 많은 손님들은 바리새인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8:3.5 (1540.8) In those days, when a reception-banquet of this sort was tendered a prominent individual, it was the custom for all interested persons to linger about the banquet room to observe the guests at meat and to listen to the conversation and speeches of the men of honor. Accordingly, most of the Capernaum Pharisees were present on this occasion to observe Jesus’ conduct at this unusual social gathering. 그 당시 저명인사를 위해 이런 종류의 환영회가 열리면,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연회실에 남아 식사에 참석한 손님들을 주목하면서 귀빈과의 대담과 연설을 경청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버나움에 있는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여느 때와 다른 이러한 사교 모임에서 예수님의 행위를 관찰하기 위해 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38:3.6 (1540.9) As the dinner progressed, the joy of the diners mounted to heights of good cheer, and everybody was having such a splendid time that the onlooking Pharisees began, in their hearts, to criticize Jesus for his participation in such a lighthearted and carefree affair. Later in the evening, when they were making speeches, one of the more malignant of the Pharisees went so far as to criticize Jesus’ conduct to Peter, saying: “How dare you to teach that this man is righteous when he eats with publicans and sinners and thus lends his presence to such scenes of careless pleasure making.” Peter whispered this criticism to Jesus before he spoke the parting blessing upon those assembled. When Jesus began to speak, he said: “In coming here tonight to welcome Matthew and Simon to our fellowship, I am glad to witness your lightheartedness and social good cheer, but you should rejoice still more because many of you will find entrance into the coming kingdom of the spirit, wherein you shall more abundantly enjoy the good thing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to you who stand about criticizing me in your hearts because I have come here to make merry with these friends, let me say that I have come to proclaim joy to the socially downtrodden and spiritual liberty to the moral captives. Need I remind you that they who are whole need not a physician, but rather those who are sick? I have come, not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만찬이 무르익자, 손님들의 기쁨은 진수성찬으로 절정에 올라, 모두 그렇게 멋진 시간을 보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편안한 마음과 즐거운 파티에 참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심정)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늦게, 사람들이 연설 중에 있을 때, 악의를 많이 품은 바리새인 하나가 다음과 같은 말로 베드로에게 예수의 행위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어찌 감히 너는 이 사람이 의롭다고 가르치느냐?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으며 그렇게 경솔한 즐거움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느냐?” 예수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나누기 전에, 베드로는 이 비난을 예수님에게 속삭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마태와 시몬을 우리 동료로 환영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왔더니, 너희가 편한 마음과 좋은 친목의 분위기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내가 기쁘지만, 너희가 더욱 기뻐해야만 하는 이유는 너희 중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영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것이며, 거기서 너희는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여기에 있는 것 때문에 둘러서서 마음(심정)으로 나를 비난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사회적으로 짓밟힌 자들에게는 기쁨을 선포하고, 도덕적으로 포로가 된 자들에게는 영적 해방을 선포하러 왔노라. 건강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함을 너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느냐?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왔도다.”

138:3.7 (1541.1) And truly this was a strange sight in all Jewry: to see a man of righteous character and noble sentiments mingling freely and joyously with the common people, even with an irreligious and pleasure-seeking throng of publicans and reputed sinners. Simon Zelotes desired to make a speech at this gathering in Matthew’s house, but Andrew, knowing that Jesus did not want the coming kingdom to become confused with the Zealots’ movement, prevailed upon him to refrain from making any public remarks. 그리고 참으로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상한 광경이었는데, 의로운 성품과 고상한 정서를 지닌 사람이, 보통 사람들 심지어 경건하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세리들과 죄인으로 알려진 무리들과 자유롭고 즐겁게 어울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마태의 집에 모인 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싶었지만, 다가오는 나라가 열심당의 운동과 혼동되는 것을 예수께서 원하지 않으심을 알고 있는 안드레가 어떤 공적 소견도 말하지 않도록 그를 설득했습니다.

138:3.8 (1541.2) Jesus and the apostles remained that night in Matthew’s house, and as the people went to their homes, they spoke of but one thing: the goodness and friendliness of Jesus.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 날(AD 26. 7. 9. 화) 밤 마태의 집에서 보냈으며,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단 한 가지, 즉 예수님의 선함과 친절함만을 이야기했습니다.

4. The Call of the Twins 쌍둥이 형제를 부르심

171029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Here there is no Greek or Jew,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s in all.

138:4.1 (1541.3) On the morrow all nine of them went by boat over to Kheresa to execute the formal calling of the next two apostles, James and Judas the twin sons of Alpheus, the nominees of James and John Zebedee. The fisherman twins were expecting Jesus and his apostles and were therefore awaiting them on the shore. James Zebedee presented the Master to the Kheresa fishermen, and Jesus, gazing on them, nodded and said, “Follow me.” 다음 날(AD 26. 7. 10. 수) 그들 9명 모두, 야고보 세베대와 요한 세베대가 추천한, 다음 차례의 두 사도들, 즉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들인 야고보와 유다를 정식으로 부르기 위하여 배를 타고 게레사로 건너갔습니다. 어부였던 쌍둥이 형제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호숫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세베대가 게레사의 그 어부들에게 주(主)님을 소개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8:4.2 (1541.4) That afternoon, which they spent together, Jesus fully instructed them concerning attendance upon festive gatherings, concluding his remarks by saying: “All men are my brothers. My Father in heaven does not despise any creature of our making. The kingdom of heaven is open to all men and women. No man may close the door of mercy in the face of any hungry soul who may seek to gain an entrance thereto. We will sit at meat with all who desire to hear of the kingdom. As our Father in heaven looks down upon men, they are all alike. Refuse not therefore to break bread with Pharisee or sinner, Sadducee or publican, Roman or Jew, rich or poor, free or bond. The door of the kingdom is wide open for all who desire to know the truth and to find God.” 그들이 함께 보낸 그 날(AD 26. 7. 10. 수) 오후, 예수님은 잔치 모임의 참가에 대하여 충분히 가르치시면서, 다음의 말로 끝맺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 형제들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우리가 창조한 어떤 창조물도 무시하지 않는다. 하늘나라는 모든 남녀들에게 열려있다. 거기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어떤 굶주린 혼의 면전에서 아무도 자비의 문을 닫지 않는다. 우리는 나라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모두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사람들을 바라보실 때, 모두 똑같이 취급하신다. 따라서 바리새인이나 죄인, 사두개인이나 세리, 로마인이나 유대인,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나 묶인 자와 함께 빵을 떼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 나라의 문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넓게 열려져 있다.”

138:4.3 (1541.5) That night at a simple supper at the Alpheus home, the twin brothers were received into the apostolic family. Later in the evening Jesus gave his apostles their first lesson dealing with the origin, nature, and destiny of unclean spirits, but they could not comprehend the import of what he told them. They found it very easy to love and admire Jesus but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many of his teachings. 그날(AD 26. 7. 10. 수) 밤 알패오의 집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쌍둥이 형제들은 사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예수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불결한 영들의 기원, 본성, 운명에 관하여 처음으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일은 매우 쉬웠으나,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138:4.4 (1542.1) After a night of rest the entire party, now numbering eleven, went by boat over to Tarichea. 하루 밤을 쉰 후, 이제 11명이 된 전체 일행은 배를 타고 타리케아로 건너갔습니다(AD 26. 7. 11. 목).

5. The Call of Thomas and Judas 도마와 유다를 부르심

138:5.1 (1542.2) Thomas the fisherman and Judas the wanderer met Jesus and the apostles at the fisher-boat landing at Tarichea, and Thomas led the party to his near-by home. Philip now presented Thomas as his nominee for apostleship and Nathaniel presented Judas Iscariot, the Judean, for similar honors. Jesus looked upon Thomas and said: “Thomas, you lack faith; nevertheless, I receive you. Follow me.” To Judas Iscariot the Master said: “Judas, we are all of one flesh, and as I receive you into our midst, I pray that you will always be loyal to your Galilean brethren. Follow me.” (AD 26. 7. 11. 목) 어부였던 도마와, 방랑자 유다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타리케아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을 만났으며, 도마는 근처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안내하였습니다. 빌립은 이제 자신이 사도로 추천한 도마를 소개하였고, 나다니엘은 유대 지방 사람인 가룟 유다를 역시 정중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신앙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받아들인다. 나를 따르라.” 주(主)님은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우리는 모두 한 몸이며, 너를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처럼, 너는 항상 너의 갈릴리 형제들에게 충성하게 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나를 따르라.”

138:5.2 (1542.3) When they had refreshed themselves, Jesus took the twelve apart for a season to pray with them and to instruct them in the nature and work of the Holy Spirit, but again did they largely fail to comprehend the meaning of those wonderful truths which he endeavored to teach them. One would grasp one point and one would comprehend another, but none of them could encompass the whole of his teaching. Always would they make the mistake of trying to fit Jesus’ new gospel into their old forms of religious belief. They could not grasp the idea that Jesus had come to proclaim a new gospel of salvation and to establish a new way of finding God; they did not perceive that he was a new revelation of the Father in heaven. 그들이 기운을 차리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본성과 사역에 대해 가르치기 위하여, 한동안 12명을 데리고 떠났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그가 가르치고자 애썼던 그 놀라운 진리들의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한 면을 이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한 면을 이해하였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그의 가르침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새 복음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옛 형태의 종교적 믿음(신념)에 끼워 맞추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새로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찾는 새로운 길을 설립하러 오신 그 관념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새로운 계시였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138:5.3 (1542.4) The next day Jesus left his twelve apostles quite alone; he wanted them to become acquainted and desired that they be alone to talk over what he had taught them. The Master returned for the evening meal, and during the after-supper hours he talked to them about the ministry of seraphim, and some of the apostles comprehended his teaching. They rested for a night and the next day departed by boat for Capernaum. 다음날 (AD 26. 7/12 금) 예수님은 그의 12 사도들을 그들끼리만 남겨두셔서, 그들이 서로 친해지기를 원하였으며 자신이 가르쳤던 것들에 대해서 그들끼리만 서로 의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主)님은 저녁 식사 시간에 돌아오셨고, 식사 후에 그는 세라핌 천사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하셨는데, 사도 중 몇 명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에 쉰 후, 다음날(AD 26. 7/13 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났습니다.

138:5.4 (1542.5) Zebedee and Salome had gone to live with their son David so that their large home could be turned over to Jesus and his twelve apostles. Here Jesus spent a quiet Sabbath with his chosen messengers; he carefully outlined the plans for proclaiming the kingdom and fully explained the importance of avoiding any clash with the civil authorities, saying: “If the civil rulers are to be rebuked, leave that task to me. See that you make no denunciations of Caesar or his servants.” It was this same evening that Judas Iscariot took Jesus aside to inquire why nothing was done to get John out of prison. And Judas was not wholly satisfied with Jesus’ attitude. 세베대와 살로메는 그들의 아들 다윗과 함께 살기 위해 떠나갔기 때문에 그들의 큰 집을 예수와 그의 12사도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메신저들과 함께 조용한 안식일(AD 26. 7. 13토)을 보냈습니다. 그는 나라의 선포를 위한 계획의 윤곽을 신중히 그리셨고, 정부 당국과의 어떤 충돌이라도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시민 통치자들을 비난해야 한다면, 그 일은 내게 맡기라. 너희는 시저나 그의 신하들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말라.” 이 날 저녁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한쪽으로 모셔서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여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태도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6. The Week of Intensive Training 집중적인 훈련의 주간

171105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by a new and living way opened for us through the curtain, that is, his body,

138:6.1 (1542.6) The next week was devoted to a program of intense training. Each day the six new apostles were put in the hands of their respective nominators for a thoroughgoing review of all they had learned and experienced in preparation for the work of the kingdom. The older apostles carefully reviewed, for the benefit of the younger six, Jesus’ teachings up to that hour. Evenings they all assembled in Zebedee’s garden to receive Jesus’ instruction. 그 다음 주(AD26. 7. 14.일~20토)는 집중적인 훈련 계획에 바쳐졌습니다. 사도들이 나라의 일을 준비하면서 배우고 체험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복습하도록, 6명의 새 사도들은 매일 각자 자기를 추천한 사도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선배 사도들은 6명의 후배 사도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이 그때까지 받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복습했습니다. 저녁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지침을 받으려고 세베대의 뜰에 모였습니다.

138:6.2 (1542.7) It was at this time that Jesus established the mid-week holiday for rest and recreation. And they pursued this plan of relaxation for one day each week throughout the remainder of his material life. As a general rule, they never prosecuted their regular activities on Wednesday. On this weekly holiday Jesus would usually take himself away from them, saying: “My children, go for a day of play. Rest yourselves from the arduous labors of the kingdom and enjoy the refreshment that comes from reverting to your former vocations or from discovering new sorts of recreational activity.” While Jesus, at this period of his earth life, did not actually require this day of rest, he conformed to this plan because he knew it was best for his human associates. Jesus was the teacher — the Master; his associates were his pupils — disciples. 이즈음에 예수님은 휴식과 오락을 위하여 주중의 하루를 휴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육신적 여생(餘生) 내내, 매주 하루는 휴식하는 이 계획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수요일에는 정규 활동들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매주 이 휴일에는 보통 그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가서 하루를 즐기어라. 나라의 힘든 수고를 그치고 쉬되, 너희의 예전 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로운 오락 활동을 찾아서, 피로를 풀어라.” 지상 생애의 이 기간에 예수님은 휴식하는 이 하루가 실제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인간 동료들을 위해서 그것이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 계획을 따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주(主)님─이셨고, 그의 동료들은 그의 학생들─제자들─이었습니다.

138:6.3 (1543.1) Jesus endeavored to make clear to his apostles the difference between his teachings and his life among them and the teachings which might subsequently spring up about him. Said Jesus: “My kingdom and the gospel related thereto shall be the burden of your message. Be not sidetracked into preaching about me and about my teachings.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portray my revelation of the Father in heaven but do not be misled into the bypaths of creating legends and building up a cult having to do with beliefs and teachings about my beliefs and teachings.” But again they did not understand why he thus spoke, and no man dared to ask why he so taught them.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과 그들 중에서 생활하신 삶과, 후에 자신에 대해서 생길 수 있는 가르침들 사이의 차이점을, 사도들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와 그와 관련된 복음이 너희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하리라. 나에 대해서나 나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교하는 잘못된 곁길로 빠지지 말라.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내가 계시하는 하늘의 아버지를 묘사하라. 그러나 나의 믿음(신념)들과 가르침들에 대한 믿음(신념)들과 가르침들과 관계된 전설을 창조하고 종파(宗派)를 세우는 샛길로 잘못 인도하지 말라.” 그러나 또 다시 그들은 그가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가 왜 그렇게 자기들을 가르치시는지 감히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138:6.4 (1543.2) In these early teachings Jesus sought to avoid controversies with his apostles as far as possible excepting those involving wrong concepts of his Father in heaven. In all such matters he never hesitated to correct erroneous beliefs. There was just one motive in Jesus’ postbaptismal life on Urantia, and that was a better and truer revelation of his Paradise Father; he was the pioneer of the new and better way to God, the way of faith and love. Ever his exhortation to the apostles was: “Go seek for the sinners; find the downhearted and comfort the anxious.” 이 초기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 한, 가급적이면 사도들과 논쟁하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제기될 때에는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잘못된 믿음(신념)들을 바로잡았습니다. 지구(유란시아)에서 세례 이후에 예수님의 일생은 단 한 가지의 동기만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천국 아버지를 더 낫게 더 참되게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새롭고 더 좋은 길, 신앙과 사랑의 길의 개척자였습니다. 항상 사도들에게 주신 그의 권고는 “가서 죄인들을 찾으라. 낙담한 자들을 찾고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38:6.5 (1543.3) Jesus had a perfect grasp of the situation; he possessed unlimited power, which might have been utilized in the furtherance of his mission, but he was wholly content with means and personalities which most people would have regarded as inadequate and would have looked upon as insignificant. He was engaged in a mission of enormous dramatic possibilities, but he insisted on going about his Father’s business in the most quiet and undramatic manner; he studiously avoided all display of power. And he now planned to work quietly, at least for several months, with his twelve apostles around about the Sea of Galilee. 예수님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 추진에 사용될 무제한적 권능을 소유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충분한 것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었을 방법들과 고유성들에 전적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는 거대한 극적(劇的)인 가능성을 지닌 사명을 수행 중이셨지만,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자기 아버지의 일을 해나가도록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권능의 과시를 피하려고 몹시 애쓰셨습니다. 그는 이제 적어도 몇 달 동안 그의 12사도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조용히 일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7. Another Disappointment 또 한 번의 실망

171112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138:7.1 (1543.4) Jesus had planned for a quiet missionary campaign of five months’ personal work. He did not tell the apostles how long this was to last; they worked from week to week. And early on this first day of the week, just as he was about to announce this to his twelve apostles, Simon Peter, James Zebedee, and Judas Iscariot came to have private converse with him. Taking Jesus aside, Peter made bold to say: “Master, we come at the behest of our associates to inquire whether the time is not now ripe to enter into the kingdom. And will you proclaim the kingdom at Capernaum, or are we to move on to Jerusalem? And when shall we learn, each of us, the positions we are to occupy with you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 ” and Peter would have gone on asking further questions, but Jesus raised an admonitory hand and stopped him. And beckoning the other apostles standing near by to join them, Jesus said: “My little children, how long shall I bear with you! Have I not made it plain to you that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 have told you many times that I have not come to sit on David’s throne, and now how is it that you are inquiring which place each of you will occupy in the Father’s kingdom? Can you not perceive that I have called you as ambassadors of a spiritual kingdom? Do you not understand that soon, very soon, you are to represent me in the world and 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even as I now represent my Father who is in heaven? Can it be that I have chosen you and instructed you as messengers of the kingdom, and yet you do not comprehend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this coming kingdom of divine pre-eminence in the hearts of men? My friends, hear me once more. Banish from your minds this idea that my kingdom is a rule of power or a reign of glory. Indeed,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will presently be given into my hands, but it is not the Father’s will that we use this divine endowment to glorify ourselves during this age. In another age you shall indeed sit with me in power and glory, but it behooves us now to submit to the will of the Father and to go forth in humble obedience to execute his bidding on earth.” 예수님은 다섯 달 동안(AD26. 7월 21일 ~ 12월) 개인적으로 일하는 조용한 선교 캠페인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주일 단위로 일했습니다. 그 주간의 이 첫째 날(AD26. 7. 21. 주일) 이른 아침에, 그가 12 사도들에게 이 계획을 발표하려는 그 때, 시몬 베드로, 야고보 세베대, 유다 가룟이 예수님께 와서 사적인 면담을 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한 쪽으로 모시고 가서, 베드로가 대담하게 말했습니다. “주(主)여, 나라로 들어갈 때가 이제 무르익은 것은 아닌지 동료들의 부탁으로 여쭈려고 저희가 왔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은 나라를 가버나움에서 선포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것입니까? 그리고 나라를 설립할 때 당신과 함께 저희 각자가 맡아야 할 직위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 베드로가 계속 더 질문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훈계의 손을 드시면서 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합세하려고 근처에 서 있는 다른 사도들을 손짓으로 부르시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너희에게 명백히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다윗의 왕좌에 앉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지금 너희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차지할 각자의 직위를 묻고 있느냐? 내가 너희를 영적 나라의 대사로 불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내가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듯이, 너희는 곧, 바로 곧, 이 세상에서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서 나를 대신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나라의 메신저들로서 가르쳤는데, 사람들의 마음(심정)에 신적 탁월함으로 다가오는 이 나라의 본질과 중요성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나의 친구들아, 한 번 더 내 말을 들으라. 내 나라는 권능의 통치나 영광의 지배라는 이 관념을 마음에서 지우라. 진실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이 곧 내 손에 주어지겠지만, 이 신적 자질을 이 시대에 우리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쓰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다른 시대에, 너희는 진실로 나와 함께 권능과 영광으로 앉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이 땅에서 그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겸손히 순종함으로 출발함이 마땅하니라.”

138:7.2 (1544.1) Once more were his associates shocked, stunned. Jesus sent them away two and two to pray, asking them to return to him at noontime. On this crucial forenoon they each sought to find God, and each endeavored to cheer and strengthen the other, and they returned to Jesus as he had bidden them. 그의 동료들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을 지워 기도하러 보내시면서 점심시간까지(AD 26. 7. 21. 주일 오전)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중대한 이날 오전에 그들은 각자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썼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예수께서 명한대로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138:7.3 (1544.2) Jesus now recounted for them the coming of John, the baptism in the Jordan, the marriage feast at Cana, the recent choosing of the six, and the withdrawal from them of his own brothers in the flesh, and warned them that the enemy of the kingdom would seek also to draw them away. After this short but earnest talk the apostles all arose, under Peter’s leadership, to declare their undying devotion to their Master and to pledge their unswerving loyalty to the kingdom, as Thomas expressed it, “To this coming kingdom, no matter what it is and even if I do not fully understand it.” They all truly believed in Jesus, even though they did not fully comprehend his teaching.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온 것, 요단강에서의 세례, 가나의 혼인 잔치, 최근에 여섯 사도를 선택한 일, 그리고 자신의 친형제들을 그들로부터 제외시킨 점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면서, 하늘나라의 적(敵)이 그들도 떼어내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짧지만 진지한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모두 일어나 베드로의 지도(指導) 아래, 도마가 표현한 대로 “다가오는 이 나라가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의 주(主)님에 대한 자신들의 변치 않는 헌신을 선언했으며, 나라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두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138:7.4 (1544.3) Jesus now asked them how much money they had among them; he also inquired as to what provision had been made for their families. When it developed that they had hardly sufficient funds to maintain themselves for two weeks, he said: “It is not the will of my Father that we begin our work in this way. We will remain here by the sea two weeks and fish or do whatever our hands find to do; and in the meantime, under the guidance of Andrew, the first chosen apostle, you shall so organize yourselves as to provide for everything needful in your future work, both for the present personal ministry and also when I shall subsequently ordain you to preach the gospel and instruct believers.” They were all greatly cheered by these words; this was their first clear-cut and positive intimation that Jesus designed later on to enter upon more aggressive and pretentious public efforts.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을 위한 생활비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물었습니다. 2주간 유지할 기금도 충분하지 않음이 드러나자,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 바닷가에 두 주간을 머물면서, 물고기를 낚거나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할 일을 할 것이다. 그 동안 너희는 첫째로 선택된 사도인 안드레의 지도 아래, 현재의 개인적 사역과 또한 내가 나중에 복음을 설교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치도록 너희를 임명할 때를 위하여, 너희 앞날의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도록 너희는 자신들을 조직하라.”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두 기운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중에 좀 더 적극적이고 당당한 공적 수고를 하려고 계획하신다는, 첫 번째의 뚜렷한 긍정적 암시였습니다.

138:7.5 (1544.4) The apostles spent the remainder of the day perfecting their organization and completing arrangements for boats and nets for embarking on the morrow’s fishing as they had all decided to devote themselves to fishing; most of them had been fishermen, even Jesus was an experienced boatman and fisherman. Many of the boats which they used the next few years had been built by Jesus’ own hands. And they were good and trustworthy boats. 사도들은 모두 고기잡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조직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AD26. 7. 22. 월) 고기잡이를 시작하려고 배와 그물의 준비를 마치면서, 그 날의 나머지(AD26. 7. 21. 주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부들이었고, 예수님 자신도 노련한 뱃사람이며, 어부였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이 사용한 많은 배들은 예수께서 손수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들은 상태가 양호하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138:7.6 (1544.5) Jesus enjoined them to devote themselves to fishing for two weeks, adding, “And then will you go forth to become fishers of men.” They fished in three groups, Jesus going out with a different group each night. And they all so much enjoyed Jesus! He was a good fisherman, a cheerful companion, and an inspiring friend; the more they worked with him, the more they loved him. Said Matthew one day: “The more you understand some people, the less you admire them, but of this man, even the less I comprehend him, the more I love him.” 예수님은 그들에게 2주간(AD26. 7. 22. 월~8. 4. 일) 고기잡이에 전념하라고 이르시며 덧붙였습니다. “다음에는 너희가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고기를 잡았으며, 예수님은 매일 밤 다른 무리와 함께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그는 솜씨 좋은 어부였으며, 명랑한 동행자였고, 영감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일을 할수록, 그들은 그를 더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마태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더 알아 갈수록, 덜 칭찬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에, 그를 이해하기는 더 어려워져도,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138:7.7 (1545.1) This plan of fishing two weeks and going out to do personal work in behalf of the kingdom for two weeks was followed for more than five months, even to the end of this year of A.D. 26, until after the cessation of those special persecutions which had been directed against John’s disciples subsequent to his imprisonment. 2 주 동안 고기를 잡고 2 주 동안 나라를 위해 개인을 상대로 일하러 나가는 이 계획은 다섯 달 이상, 심지어 서기 26년의 이 해의 말까지, 요한의 투옥에 연이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대항하는 특별한 박해(迫害)가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8. First Work of the Twelve 12 사도들의 첫 번째 활동

171119 요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138:8.1 (1545.2) After disposing of the fish catches of two weeks, Judas Iscariot, the one chosen to act as treasurer of the twelve, divided the apostolic funds into six equal portions, funds for the care of dependent families having been already provided. And then near the middle of August, in the year A.D. 26, they went forth two and two to the fields of work assigned by Andrew. The first two weeks Jesus went out with Andrew and Peter, the second two weeks with James and John, and so on with the other couples in the order of their choosing. In this way he was able to go out at least once with each couple before he called them together for the beginning of their public ministry. 두 주간(AD 26. 7. 22 월-8. 4 주일)의 고기잡이를 끝낸 후, 12사도들의 회계로 행하도록 선택된 유다 가룟은, 부양가족을 돌보기 위해 이미 마련되어 있던 사도적 기금을 6등분으로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서기 26년 8월 중순 무렵에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안드레가 배치한 일터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첫 두 주일(AD26. 8. 5. 월 ~8. 18. 주일)에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두 번째 두 주일(AD26. 8. 19. 월~9. 1. 주일까지 고기 잡고, AD26. 9. 2. 월~ 9. 15. 주일까지 활동)에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순서에 따라 다른 쌍과 함께 나가셨습니다(AD26. 9. 16. 월~ 9. 29. 주일까지 고기 잡고, AD26. 9. 30. 월~AD26. 10. 13. 주일). 이런 식으로 그는 공적 사역의 시작을 위해 그들을 함께 부르기 전에, 적어도 한 번씩은 각 쌍들과 같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1 어업(AD26. 7/22월-8/4주일)& 사역(8/5월-8/18주일) – 안드레와 베드로
2 어업(8/19월-9/1주일)& 사역(9/2월-9/15주일) – 야고보와 요한
3 어업(9/16월-9/29주일)& 사역(9/30월-10/13주일)
4 어업(10/14월-10/27주일)& 사역(10/28월-11/10주일)
5 어업(11/11월-11/24주일)& 사역(11/25월-12/8주일)
6 어업(12/9월-12/22주일)& 사역(12/23월-AD27. 1/5주일)

138:8.2 (1545.3) Jesus taught them to preach the forgiveness of sin through faith in God without penance or sacrifice, and that the Father in heaven loves all his children with the same eternal love. He enjoined his apostles to refrain from discussing: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나 희생물 없이 하나님을 믿음(신앙)으로 죄 용서 받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영원한 사랑으로 그의 모든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설교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다음 사항들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셨습니다.

138:8.3 (1545.4) 1. The work and imprisonment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과업과 투옥.

138:8.4 (1545.5) 2. The voice at the baptism. Said Jesus: “Only those who heard the voice may refer to it. Speak only that which you have heard from me; speak not hearsay.” 세례 받을 때 들린 음성. 예수님은 “음성을 들었던 자들만 그것에 대해 언급할 수 있노라. 나로부터 들은 것들만 말하고; 소문(所聞)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38:8.5 (1545.6) 3. The turning of the water into wine at Cana. Jesus seriously charged them, saying, “Tell no man about the water and the wine.”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물과 포도주에 관해서 말하지 말라.”라고 엄하게 지시하셨습니다.

138:8.6 (1545.7) They had wonderful times throughout these five or six months during which they worked as fishermen every alternate two weeks, thereby earning enough money to support themselves in the field for each succeeding two weeks of missionary work for the kingdom. 그들은 대여섯 달 내내 놀라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 동안 매번 두 주씩 번갈아 어부로 일했으며, 그것으로 넉넉히 돈을 벌어, 매번 연이은 두 주간씩 나라를 위해 현장에서 선교적 일을 하는 자신들을 부양했습니다.

138:8.7 (1545.8) The common people marveled at the teaching and ministry of Jesus and his apostles. The rabbis had long taught the Jews that the ignorant could not be pious or righteous. But Jesus’ apostles were both pious and righteous; yet they were cheerfully ignorant of much of the learning of the rabbis and the wisdom of the world.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역에 놀랐습니다. 랍비들은 무지한 자는 경건하거나 의로울 수 없다고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경건하며 의로웠으나, 랍비들의 배움과 세상의 지혜의 대부분에 대해 기꺼이 무지했습니다.

138:8.8 (1545.9) Jesus made plain to his apostl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repentance of so-called good works as taught by the Jews and the change of mind by faith — the new birth — which he required as the price of admission to the kingdom. He taught his apostles that faith was the only requisite to entering the Father’s kingdom. John had taught them “repentance —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Jesus taught, “Faith is the open door for entering into the present, perfect, and eternal love of God.” Jesus did not speak like a prophet, one who comes to declare the word of God. He seemed to speak of himself as one having authority. Jesus sought to divert their minds from miracle seeking to the finding of a real and personal experience in the satisfaction and assurance of the indwelling of God’s spirit of love and saving grace.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소위 선행의 회개와 나라의 입장료로 요구되는 신앙에 의한 마음의 변화 – 새 탄생(거듭남) – 사이의 차이점을 사도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신앙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필수조건임을 사도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은 “회개(悔改) –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라.”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 “신앙은 오늘,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처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권위를 지닌 자로서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여 속죄와 확신에 대한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을 찾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전환하려고 애쓰셨습니다.

138:8.9 (1545.10) The disciples early learned that the Master had a profound respect and sympathetic regard for every human being he met, and they were tremendously impressed by this uniform and unvarying consideration which he so consistently gave to all sorts of men, women, and children. He would pause in the midst of a profound discourse that he might go out in the road to speak good cheer to a passing woman laden with her burden of body and soul. He would interrupt a serious conference with his apostles to fraternize with an intruding child. Nothing ever seemed so important to Jesus as the individual human who chanced to be in his immediate presence. He was master and teacher, but he was more — he was also a friend and neighbor, an understanding comrade. 제자들은 주(主)님께서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마다 깊은 존중과 공감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으며, 모든 계층의 남녀와 아이들에게 그렇게 일관되게 쏟는 이러한 한결같고 변함없는 배려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오한 강연 중에도 멈추고, 몸과 혼의 짐을 진 지나가는 여인을 격려하기 위하여 길로 나가셨습니다. 그는 뛰어드는 아이와 사귀려고, 사도들과의 진지한 회의를 중단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장 눈앞에서 만났던 개인이 언제나 무엇보다 중요한 듯 보였습니다. 그는 주님이며 선생님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또한 친구이며 이웃이었으며, 이해심 많은 벗이었습니다.

138:8.10 (1546.1) Though Jesus’ public teaching mainly consisted in parables and short discourses, he invariably taught his apostles by questions and answers. He would always pause to answer sincere questions during his later public discourses.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이 주로 비유와 짧은 강연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는 질문과 대답으로 변함없이 사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후일 공적 강연 중에도 진지한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언제나 멈추셨습니다.

138:8.11 (1546.2) The apostles were at first shocked by, but early became accustomed to, Jesus’ treatment of women; he made it very clear to them that women were to be accorded equal rights with men in the kingdom. 사도들은 처음에, 여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충격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익숙해졌으며; 그는 나라에서는 여인들도 남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게 됨을 그들에게 아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9. Five Months of Testing 5개월 동안의 시험

171126 5개월의 시험과 사도 조직 막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When his family heard about this, they went to take charge of him, for they said, “He is out of his mind(NIV).” And when his friends heard of it, they went out to lay hold on him: for they said, He is beside himself(KJV).

138:9.1 (1546.3) This somewhat monotonous period of alternate fishing and personal work proved to be a grueling experience for the twelve apostles, but they endured the test. With all of their grumblings, doubts, and transient dissatisfactions they remained true to their vows of devotion and loyalty to the Master. It was their personal association with Jesus during these months of testing that so endeared him to them that they all (save Judas Iscariot) remained loyal and true to him even in the dark hours of the trial and crucifixion. Real men simply could not actually desert a revered teacher who had lived so close to them and had been so devoted to them as had Jesus. Through the dark hours of the Master’s death, in the hearts of these apostles all reason, judgment, and logic were set aside in deference to just one extraordinary human emotion — the supreme sentiment of friendship-loyalty. These five months of work with Jesus led these apostles, each one of them, to regard him as the best friend he had in all the world. And it was this human sentiment, and not his superb teachings or marvelous doings, that held them together until after the resurrection and the renewal of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고기잡이와 개인적 사명을 교대로 하던, 어느 정도 단조로운 이 기간은 12사도들이 녹초가 되는 경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시험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의심 그리고 일시적 불만을 품은 채로, 주(主)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의 서약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이러한 시험하는 몇 달 동안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통해 그를 귀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재판과 십자가형의 암울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예수님께 여전히 충성하고 성실했습니다. 실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그렇게 자신들에게 친하셨고 헌신적으로 사셨던 존경하는 선생님을 실제로 단순히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주(主)께서 별세하던 어두운 시간들 내내, 이 사도들의 마음(심정)에서 오직 하나의 특별한 인간 감정─우정과 충성의 최극 정서(感想)─을 존중하여 모든 이유, 판단, 그리고 논리는 버려졌습니다. 예수님과 일하던 이 다섯 달은 이 사도들 각자가 예수님을 온 세상에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새로운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까지, 사도들을 함께 붙들어 둔 것은 이 인간의 정서였지,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나 놀라운 행적이 아니었습니다.

138:9.2 (1546.4) Not only were these months of quiet work a great test to the apostles, a test which they survived, but this season of public inactivity was a great trial to Jesus’ family. By the time Jesus was prepared to launch forth on his public work, his entire family (except Ruth) had practically deserted him. On only a few occasions did they attempt to make subsequent contact with him, and then it was to persuade him to return home with them, for they came near to believing that he was beside himself. They simply could not fathom his philosophy nor grasp his teaching; it was all too much for those of his own flesh and blood. 조용히 일한 이 몇 개월은 사도들에게 큰 시험, 그들이 살아남은 시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적 활동이 없던 이 시기는 예수님의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적 과업을 개시할 준비가 되었을 무렵, 그의 전 가족은 (룻을 제외하고) 사실상 그를 버렸습니다. 그 후 그들은 단지 몇 번만 그와 접촉을 취했고, 그것도 자기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를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그가 미쳤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의 철학을 헤아리거나 그의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피붙이들에게는 그 모든 일이 너무 벅찼습니다.

138:9.3 (1546.5) The apostles carried on their personal work in Capernaum, Bethsaida-Julias, Chorazin, Gerasa, Hippos, Magdala, Cana, Bethlehem of Galilee, Jotapata, Ramah, Safed, Gischala, Gadara, and Abila. Besides these towns they labored in many villages as well as in the countryside. By the end of this period the twelve had worked out fairly satisfactory plans for the care of their respective families. Most of the apostles were married, some had several children, but they had made such arrangements for the support of their home folks that, with some little assistance from the apostolic funds, they could devote their entire energies to the Master’s work without having to worry about the financial welfare of their families. 사도들은 가버나움, 벳새다-쥴리아스, 코라진, 게라사, 히포, 막달라, 가나, 갈릴리의 베들레헴, 요타파타, 라마, 사펫, 기샬라, 가다라, 그리고 아빌라에서 그들의 개인을 상대로 과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성읍들 이외에도 시골뿐만이 아니라 많은 마을들에서 수고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날 무렵, 12명의 사도들은 그들 각자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상당히 충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은 결혼했고, 몇 사람은 여러 자녀들이 있었지만, 사도들의 기금으로부터 얼마큼 적은 도움을 받아 식구 부양의 대책을 마련해서, 가족에 대한 재정적 복지를 걱정하지 않고 주(主)님의 일에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습니다.

10. Organization of the Twelve 12 사도들의 조직

138:10.1 (1547.1) The apostles early organized themselves in the following manner: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의 방법으로 자신들을 조직했습니다.

138:10.2 (1547.2) 1. Andrew, the first chosen apostle, was designated chairman and director general of the twelve. 제일 먼저 선택된 안드레가 12명의 의장이며 총책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138:10.3 (1547.3) 2. Peter, James, and John were appointed personal companions of Jesus. They were to attend him day and night, to minister to his physical and sundry needs, and to accompany him on those night vigils of prayer and mysterious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heaven.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개인적 동행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밤낮 그를 시중들고, 그의 육신적이고 잡다한 필요들을 섬기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기도 및 신비한 친교로 밤에 철야할 때마다 그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138:10.4 (1547.4) 3. Philip was made steward of the group. It was his duty to provide food and to see that visitors, and even the multitude of listeners at times, had something to eat. 빌립은 그룹의 사무장이 되었습니다. 음식을 제공하고 방문객이나 또는 때로 많은 청중들의 음식까지도 살피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138:10.5 (1547.5) 4. Nathaniel watched over the needs of the families of the twelve. He received regular reports as to the requirements of each apostle’s family and, making requisition on Judas, the treasurer, would send funds each week to those in need. 나다니엘은 12명 사도의 가족들의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정규적으로 각 사도 집안의 필요에 대한 보고를 받아, 회계 유다에게 청구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매주 기금을 보냈습니다.

138:10.6 (1547.6) 5. Matthew was the fiscal agent of the apostolic corps. It was his duty to see that the budget was balanced, the treasury replenished. If the funds for mutual support were not forthcoming, if donations sufficient to maintain the party were not received, Matthew was empowered to order the twelve back to their nets for a season. But this was never necessary after they began their public work; he always had sufficient funds in the treasurer’s hands to finance their activities. 마태는 사도단의 재정 담당자였습니다. 예산의 균형을 유지하고 재무가 공급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만약 공동 부양을 위한 기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일행을 유지할 충분한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12 사도들이 한동안 고기 그물들로 돌아가도록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마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이 공적 과업을 시작한 이후 결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활동에 자금을 조달하는 회계의 손에 충분한 기금이 늘 갖고 있었습니다.

138:10.7 (1547.7) 6. Thomas was manager of the itinerary. It devolved upon him to arrange lodgings and in a general way select places for teaching and preaching, thereby insuring a smooth and expeditious travel schedule. 도마는 일정 계획 관리자였습니다. 그는 숙소를 정하고, 대개 가르치고 설교할 장소들을 물색하여, 여행 일정이 순조롭고 신속하게 지켜지도록 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138:10.8 (1547.8) 7. James and Judas the twin sons of Alpheus were assigned to the management of the multitudes. It was their task to deputize a sufficient number of assistant ushers to enable them to maintain order among the crowds during the preaching.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인 야고보와 유다는 군중들 관리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설교하는 동안 충분한 수의 보조 안내원들을 임명하여 군중들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138:10.9 (1547.9) 8. Simon Zelotes was given charge of recreation and play. He managed the Wednesday programs and also sought to provide for a few hours of relaxation and diversion each day. 시몬 젤로떼는 오락과 놀이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수요일 행사를 관리했고 또한 매일 몇 시간 동안의 휴식과 기분전환을 제공하려고 애썼습니다.

138:10.10 (1547.10) 9. Judas Iscariot was appointed treasurer. He carried the bag. He paid all expenses and kept the books. He made budget estimates for Matthew from week to week and also made weekly reports to Andrew. Judas paid out funds on Andrew’s authorization. 가룟 유다는 회계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보관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비용을 지출하고 장부를 기입했습니다. 그는 매주 마태에게 예산 견적서를 주었고, 매주 안드레에게 보고했습니다. 유다는 안드레의 승인으로 기금에서 돈을 지출하였습니다.

138:10.11 (1547.11) In this way the twelve functioned from their early organization up to the time of the reorganization made necessary by the desertion of Judas, the betrayer. The Master and his disciple-apostles went on in this simple manner until Sunday, January 12, A.D. 27, when he called them together and formally ordained them as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preachers of its glad tidings. And soon thereafter they prepared to start for Jerusalem and Judea on their first public preaching tour. 이런 식으로 12명의 사도들은 배반자 유다의 이탈로 재조직할 필요가 생길 때까지, 12명의 사도들은 초기 조직부터 이런 식으로 활동했습니다.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예수께서 그들 모두를 불러 모아 정식으로 그들을 나라의 대사들과 복음의 설교자들로 임명하기 전까지, 주(主)님과 그의 제자-사도들은 이 간단한 방식으로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그 후 곧, 첫 번째 공적 설교 여행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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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0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예수님의 모론시아 출현

Paper 190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예수님의 모론시아 출현

1. Heralds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전령(傳令포고)들
2. Jesus’ Appearance at Bethany 예수님의 베다니 출현
Appearance to his brother James 형제 야고보에게 출현
Appearance to his earthly family 지상 가족들에게 출현
3. At the Home of Joseph 요셉의 집에서
4. Appearance to the Greeks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심
5. The Walk with Two Brothers 두 형제와 함께 걸으심

190:0.1 (2029.1) THE resurrected Jesus now prepares to spend a short period on Urantia for the purpose of experiencing the ascending morontia career of a mortal of the realms. Although this time of the morontia life is to be spent on the world of his mortal incarnation, it will, however, be in all respects the counterpart of the experience of Satania mortals who pass through the progressive morontia life of the seven mansion worlds of Jerusem.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영역에서 상승하는 필사자의 부활체(모론시아) 생애를 체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유란시아)에서 잠시 동안 지내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부활체(모론시아) 생명에서의 이 시간이 그가 필사자로 육신화 했던 세상에서 보내야만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예루셈에 있는 일곱 맨션세계들의 진보하는 부활체(모론시아) 일생을 거쳐 가는 사타니아 필사자들의 체험과 모든 점에서 복사판(아주 닮은 것)입니다.

190:0.2 (2029.2) All this power which is inherent in Jesus — the endowment of life — and which enabled him to rise from the dead, is the very gift of eternal life which he bestows upon kingdom believers, and which even now makes certain their resurrection from the bonds of natural death. 예수님 안에 본래부터 있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킨 이 모든 권능– 생명의 자질-은, 그가 나라를 믿는 자들에게 수여하고, 지금도 자연적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그들이 부활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드는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190:0.3 (2029.3) The mortals of the realms will arise i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with the same type of transition or morontia body that Jesus had when he arose from the tomb on this Sunday morning. These bodies do not have circulating blood, and such beings do not partake of ordinary material food; nevertheless, these morontia forms are real. When the various believers saw Jesus after his resurrection, they really saw him; they were not the self-deceived victims of visions or hallucinations. 그 영역의 필사자들은 부활의 아침에, 예수께서 이 일요일 아침에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때 가지셨던 변화된 또는 부활체(모론시아) 몸과 같은 유형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몸들 안에는 순환되는 혈액이 없으며, 그러한 존재들은 일반적인 물질 음식을 섭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체(모론시아) 형태들은 실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후에 여러 부류의 신자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실제로 그를 본 것이었으며; 그들은 환상이나 환각으로 인하여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90:0.4 (2029.4) Abiding faith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was the cardinal feature of the faith of all branches of the early gospel teaching. In Jerusalem, Alexandria, Antioch, and Philadelphia all the gospel teachers united in this implicit faith in the Master’s resurrection.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변치 않는 신앙은, 초기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지파에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필라델피아에서, 모든 복음 선생들은 주(主)님의 부활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연합되었습니다.

190:0.5 (2029.5) In viewing the prominent part which Mary Magdalene took in proclaiming the Master’s resurrection, it should be recorded that Mary was the chief spokesman for the women’s corps, as was Peter for the apostles. Mary was not chief of the women workers, but she was their chief teacher and public spokesman. Mary had become a woman of great circumspection, so that her boldness in speaking to a man whom she considered to be the caretaker of Joseph’s garden only indicates how horrified she was to find the tomb empty. It was the depth and agony of her love, the fullness of her devotion, that caused her to forget, for a moment, the conventional restraints of a Jewish woman’s approach to a strange man. 막달라 마리아가 주(主)님의 부활을 전파함에 있어서 맡았던 탁월한 역할을 볼 때,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변인이었던 것처럼, 마리아가 여자 대원들의 수석 대변인이었음이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마리아는 여자 일꾼들의 우두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수석 교사였고 공식적인 대변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신중한 여인이 되었으며, 그래서 요셉의 정원을 지키는 관리인이라고 생각한 남자에게 말을 거는 대담성은 다만 그녀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가리킬 뿐입니다. 유대 여인이 낯선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잠시 동안 잊어버린 것은, 그녀가 지닌 사랑의 깊이와 고뇌, 그녀의 헌신이 얼마나 충만했는가를 말해줍니다.

1. Heralds of the Resurrection

160417 부활4-부활의 소식 막16:1-11 막28:1-10 요20:2-10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90:1.1 (2029.6) The apostles did not want Jesus to leave them; therefore had they slighted all his statements about dying, along with his promises to rise again. They were not expecting the resurrection as it came, and they refused to believe until they were confronted with the compulsion of unimpeachable evidence and the absolute proof of their own experiences.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모든 약속들을 가볍게 여겼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의심 없는 증거들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한 절대적인 증명이 주어질 때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90:1.2 (2030.1) When the apostles refused to believe the report of the five women who represented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Mary Magdalene returned to the tomb, and the others went back to Joseph’s house, where they related their experiences to his daughter and the other women. And the women believed their report. Shortly after six o’clock the daughter of Joseph of Arimathea and the four women who had seen Jesus went over to the home of Nicodemus, where they related all these happenings to Joseph, Nicodemus, David Zebedee, and the other men there assembled. Nicodemus and the others doubted their story, doubt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they conjectured that the Jews had removed the body. Joseph and David were disposed to believe the report, so much so that they hurried out to inspect the tomb, and they found everything just as the women had described. And they were the last to so view the sepulchre, for the high priest sent 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s to the tomb at half past seven o’clock to remove the grave cloths. The captain wrapped them all up in the linen sheet and threw them over a near-by cliff. 마가의 집에 있던 사도들이 다섯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대화했다는 보고를 믿지 않고 거부하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돌아갔고, 다른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요셉의 딸과 다른 여인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들은 그들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6시가 조금 지났을 때, 예수를 보았던 아리마대 요셉의 딸과 4명의 여인들은 니고데모의 집으로 갔으며, 그들은 그 동안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그곳에 모여 있는 요셉, 니고데모, 다윗 세베대, 그리고 다른 남자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의심하였고,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그 시신을 가져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요셉과 다윗은 그 보고를 믿고 싶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무덤을 조사하기 위하여 급히 서둘러 나갔으며, 그들은 여인들이 설명한 대로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묘실을 들여다 본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는데, 대제사장이 성전 경비병들의 지휘관을 7시 30분경에 무덤에 보내어 수의를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휘관은 모든 것들을 세마포 헝겊에 싸서 근처에 있는 절벽 너머로 던져버렸습니다.

190:1.3 (2030.2) From the tomb David and Joseph went immediately to the home of Elijah Mark, where they held a conference with the ten apostles in the upper chamber. Only John Zebedee was disposed to believe, even faintly,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Peter had believed at first but, when he failed to find the Master, fell into grave doubting. They were all disposed to believe that the Jews had removed the body. David would not argue with them, but when he left, he said: “You are the apostles, and you ought to understand these things. I will not contend with you; nevertheless, I now go back to the home of Nicodemus, where I have appointed with the messengers to assemble this morning, and when they have gathered together, I will send them forth on their last mission, as heralds of the Master’s resurrection. I heard the Master say that, after he should die, he would rise on the third day, and I believe him.” And thus speaking to the dejected and forlorn ambassadors of the kingdom, this self-appointed chief of communication and intelligence took leave of the apostles. On his way from the upper chamber he dropped the bag of Judas, containing all the apostolic funds, in the lap of Matthew Levi. 무덤에서 다윗과 요셉은 바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갔으며, 그들은 그곳의 다락방에서 열 명의 사도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비록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요한 세베대만이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믿었지만, 주(主)를 만나지 못하자, 심각한 의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시신을 가져갔다고 믿으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논쟁하지는 않았지만,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사도들이니 이 일들을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다툴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이제 오늘 아침에 연락원들을 모이도록 지시해 놓은 니고데모의 집으로 돌아가겠으며,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이면, 주(主)께서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전파하는 마지막 임무를 맡길 작정입니다. 나는 주(主)께서 그가 죽은 다음 셋째 날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 말씀을 믿습니다.” 낙심하고 절망에 빠진 나라의 대사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자원한 통신과 정보의 우두머리는 사도들과 헤어졌습니다. 다락방에서 나가던 그는 사도들의 자금 전부가 들어있는 유다의 돈 주머니를 마태 레위의 무릎에 내려놓았습니다.

190:1.4 (2030.3) It was about half past nine o’clock when the last of David’s twenty-six messengers arrived at the home of Nicodemus. David promptly assembled them in the spacious courtyard and addressed them: 26명에 달하는 다윗의 연락원들 중에서 마지막 사람이 니고데모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30분경이었습니다. 다윗은 넓은 안마당에 즉시 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190:1.5 (2030.4) “Men and brethren, all this time you have served me in accordance with your oath to me and to one another, and I call you to witness that I have never yet sent out false information at your hands. I am about to send you on your last mission as volunteer messengers of the kingdom, and in so doing I release you from your oaths and thereby disband the messenger corps. Men, I declare to you that we have finished our work. No more does the Master have need of mortal messengers; he has risen from the dead. He told us before they arrested him that he would die and rise again on the third day. I have seen the tomb — it is empty. I have talked with Mary Magdalene and four other women, who have talked with Jesus. I now disband you, bid you farewell, and send you on your respective assignments, and the message which you shall bear to the believers is: ‘Jesus has risen from the dead; the tomb is empty.’” “여러분 그리고 형제들이여, 내게 그리고 서로에게 했던 맹세에 따라서, 지금까지 당신들은 나에게 봉사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 손 안에 거짓된 정보를 들려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당신들이 증언해 줄 것을 청합니다. 나는 이제 왕국의 연락원 자원자로서의, 당신들에게 당신의 마지막 임무를 띄워 보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당신들을 당신의 맹세에서 해제하며 이것으로서 연락원 무리단을 해산합니다.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우리가 우리 일을 마치었음을 선언합니다. 주(主)님은 연락원이 더 이상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저들이 그를 체포하기 전에, 우리에게 그가 죽을 것이고 그리고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무덤을 보았는데─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와 대화를 나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들을 해산하고, 작별을 고하면서, 당신들의 해당 임무로서 당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믿는 자들에게 품고 갈 마지막 소식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났고; 그 무덤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190:1.6 (2030.5) The majority of those present endeavored to persuade David not to do this. But they could not influence him. They then sought to dissuade the messengers, but they would not heed the words of doubt. And so, shortly before ten o’clock this Sunday morning, these twenty-six runners went forth as the first heralds of the mighty truth-fact of the resurrected Jesus. And they started out on this mission as they had on so many others, in fulfillment of their oath to David Zebedee and to one another. These men had great confidence in David. They departed on this assignment without even tarrying to talk with those who had seen Jesus; they took David at his word. The majority of them believed what David had told them, and even those who somewhat doubted, carried the message just as certainly and just as swiftly.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다윗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연락원들에 대한 것을 단념시키려 애썼지만, 그들은 의문스러운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요일 아침 10시 조금 전에, 26명의 이 소식 전달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였다는 막강한 진리의-사실을 전하는 첫 전령으로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다른 것에서 그렇게 했었던 것처럼, 다윗 세베대와 서로 간에 맹세를 지키면서 이 임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매우 자신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려는 머무름도 없이 이 업무를 띄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말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믿은 그들 대부분은, 그리고 어느 정도 의문을 가진 자들도, 모두 똑같이 확신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모두 똑같이 재빠르게 그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190:1.7 (2031.1) The apostles, the spiritual corps of the kingdom, are this day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where they manifest fear and express doubts, while these laymen, representing the first attempt at the socialization of the Master’s gospel of the brotherhood of man, under the orders of their fearless and efficient leader, go forth to proclaim the risen Savior of a world and a universe. And they engage in this eventful service ere his chosen representatives are willing to believe his word or to accept the evidence of eyewitnesses. 왕국의 영적 무리단인 사도들은 이 날 그 다락방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두려움을 분명히 드러냈고 불신을 나타냈으나, 반면에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의 복음을 사회화시키는 일에 대한 처음 시도를 대표하는 이 평신도들은, 그들의 두려움이 없고 유능한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서, 세계와 우주의 부활한 구원자를 전파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받은 대표자들은 그의 말씀을 믿거나 목격한 증거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들은 이 중대한 업무에 종사하였습니다.

190:1.8 (2031.2) These twenty-six were dispatched to the home of Lazarus in Bethany and to all of the believer centers, from Beersheba in the south to Damascus and Sidon in the north; and from Philadelphia in the east to Alexandria in the west. 26명의 이 사람들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과, 남쪽으로는 비엘세바에서 북쪽으로는 다마스커스와 시돈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신자들이 모여 있는 모든 처소들로 파견되었습니다.

190:1.9 (2031.3) When David had taken leave of his brethren, he went over to the home of Joseph for his mother, and they then went out to Bethany to join the waiting family of Jesus. David abode there in Bethany with Martha and Mary until after they had disposed of their earthly possessions, and he accompanied them on their journey to join their brother, Lazarus, at Philadelphia. 다윗은 형제들과 헤어진 후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요셉의 집으로 갔으며, 그 후에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예수의 가족과 합류하기 위하여 베다니로 갔습니다. 다윗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세상에서의 소유물들을 처분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들의 오빠 나사로를 만나기 위하여 떠난 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190:1.10 (2031.4) In about one week from this time John Zebedee took Mary the mother of Jesus to his home in Bethsaida. James, Jesus’ eldest brother, remained with his family in Jerusalem. Ruth remained at Bethany with Lazarus’s sisters. The rest of Jesus’ family returned to Galilee. David Zebedee left Bethany with Martha and Mary, for Philadelphia, early in June, the day after his marriage to Ruth, Jesus’ youngest sister. 이때로부터 일주일 정도 되었을 무렵, 요한 세베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벳새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남동생인 야고보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룻은 나사로의 자매들과 함께 베다니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머지 가족들은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막내 여동생인 룻과 결혼한 후인 6월 초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를 떠나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2. Jesus’ Appearance at Bethany

160424 부활5-야고보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90:2.1 (2031.5) From the time of the morontia resurrection until the hour of his spirit ascension on high, Jesus made nineteen separate appearances in visible form to his believers on earth. He did not appear to his enemies nor to those who could not make spiritual use of his manifestation in visible form. His first appearance was to the five women at the tomb; his second, to Mary Magdalene, also at the tomb. 예수님의 부활체로서의 부활이 있던 때로부터, 그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까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부활체로 각각 19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적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심을 영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첫 번째로 무덤 앞에서 다섯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두 번째 역시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90:2.2 (2031.6) The third appearance occurred about noon of this Sunday at Bethany. Shortly after noontide, Jesus’ oldest brother, James, was standing in the garden of Lazarus before the empty tomb of the resurrected brother of Martha and Mary, turning over in his mind the news brought to them about one hour previously by the messenger of David. James had always inclined to believe in his eldest brother’s mission on earth, but he had long since lost contact with Jesus’ work and had drifted into grave doubting regarding the later claims of the apostles that Jesus was the Messiah. The whole family was startled and well-nigh confounded by the news brought by the messenger. Even as James stood before Lazarus’s empty tomb, Mary Magdalene arrived on the scene and was excitedly relating to the family her experiences of the early morning hours at the tomb of Joseph. Before she had finished, David Zebedee and his mother arrived. Ruth, of course, believed the report, and so did Jude after he had talked with David and Salome. 세 번째 출현은 베다니에서 이 일요일 정오 무렵에 일어났습니다. 한낮 뒤에 조금 있다가, 예수님의 첫 번째 동생인 야고보는 나사로의 동산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부활한 빈 무덤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다윗의 연락원이 약 한 시간 전에 베다니 가족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자기 맏형의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항상 믿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활동에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였으며,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도들의 후반기 주장에 대해서는 깊은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연락원이 가져온 소식 때문에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거의 혼동되었습니다. 야고보가 나사로의 빈 무덤 앞에 서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그곳에 도착하였고, 이른 새벽 시간에 요셉의 무덤에서 가졌던 자신의 체험들을 그 가족들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가 아직 말을 하고 있을 때, 다윗 세베대와 그의 어머니 살로매가 도착하였습니다. 당연히 룻은 이 보고를 믿었으며, 유다는 다윗과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것을 믿었습니다.

190:2.3 (2032.1) In the meantime, as they looked for James and before they found him, while he stood there in the garden near the tomb, he became aware of a near-by presence, as if someone had touched him on the shoulder; and when he turned to look, he beheld the gradual appearance of a strange form by his side. He was too much amazed to speak and too frightened to flee. And then the strange form spoke, saying: “James, I come to call you to the service of the kingdom. Join earnest hands with your brethren and follow after me.” When James heard his name spoken, he knew that it was his eldest brother, Jesus, who had addressed him. They all had more or less difficulty in recognizing the morontia form of the Master, but few of them had any trouble recognizing his voice or otherwise identifying his charming personality when he once began to communicate with them. 야고보가 아직 무덤에서 가까운 정원에 서 있었을 때, 그는 마치 누가 자기 어깨에 손을 대는 것과 같은 가까운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보는 순간, 그는 자기 옆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이상한 형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으며 동시에 너무 두려워서 도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이상한 형체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야고보야, 나는 하나님 나라의 봉사를 위해 너를 부르려고 왔노라. 네 형제들과 진지하게 하나가 되어 나를 따라 오거라.” 야고보는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자기 맏형,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주(主)의 부활체로서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그들과 함께 일단 교통을 시작하게 되면 거의 아무도 그 목소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그의 매력 있는 인품을 확인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190:2.4 (2032.2) When James perceived that Jesus was addressing him, he started to fall to his knees, exclaiming, “My father and my brother,” but Jesus bade him stand while he spoke with him. And they walked through the garden and talked for almost three minutes; talked over experiences of former days and forecast the events of the near future. As they neared the house, Jesus said, “Farewell, James, until I greet you all together.” 예수께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야고보는, 그는 “내 아버지여, 형이여”라고 소리치며 예수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원을 거닐면서 거의 3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으며, 지난날들의 체험들을 이야기하고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측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집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야고보야, 잘 있어라.”

190:2.5 (2032.3) James rushed into the house, even while they looked for him at Bethpage, exclaiming: “I have just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visited with him. He is not dead; he has risen! He vanished before me, saying, ‘Farewell until I greet you all together.’” He had scarcely finished speaking when Jude returned, and he retold the experience of meeting Jesus in the garden for the benefit of Jude. And they all began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James now announced that he would not return to Galilee, and David exclaimed: “He is seen not only by excited women; even stronghearted men have begun to see him. I expect to see him myself.” 그들이 아직도 벳바게에서 야고보를 찾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방금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하였으며,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으며,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내 앞에서 사라지시면서 ‘내가 너희 모두를 함께 만날 때까지 잘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거의 말을 마칠 무렵에 유다가 돌아왔으며, 그는 정원에서 예수를 만났던 체험을 유다를 위하여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다윗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가 흥분한 여인들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다; 강심장의 남자들조차도 그를 보기 시작하고 있다. 나도 직접 그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190:2.6 (2032.4) And David did not long wait, for the fourth appearance of Jesus to mortal recognition occurred shortly before two o’clock in this very home of Martha and Mary, when he appeared visibly before his earthly family and their friends, twenty in all. The Master appeared in the open back door, saying: “Peace be upon you. Greetings to those once near me in the flesh and fellowship for my brothers and sisters in the kingdom of heaven. How could you doubt? Why have you lingered so long before choosing to follow the light of truth with a whole heart? Come, therefore, all of you into the fellowship of the Spirit of Truth in the Father’s kingdom.” As they began to recover from the first shock of their amazement and to move toward him as if to embrace hi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그리고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두시 조금 전에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예수의 네 번째 출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윗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이 때 그는 모두 20명에 이르는 자신의 지상에서의 가족들과 그들의 친구들 앞에서 눈에 보이게 나타났습니다. 주(主)님은 열려있는 뒷문에서 나타났으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한 때 육신으로 나와 가까이 지냈고 하늘 나라에서 나의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친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노라. 어찌하여 너희가 의심할 수 있었단 말이냐? 너희들이 전심으로 진리의 빛을 따르기로 선택하기까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지체하고 있었느냐? 그러므로, 너희 모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진리의 영과의 친교로 오라.” 그들이 놀라서 충격을 받았던 처음 상태에서 점차 회복되면서 그를 끌어안으려는 듯이 그를 향하여 움직이자, 그는 그들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0:2.7 (2032.5) They all wanted to rush off to the city to tell the doubting apostles about what had happened, but James restrained them. Mary Magdalene, only, was permitted to return to Joseph’s house. James forbade their publishing abroad the fact of this morontia visit because of certain things which Jesus had said to him as they conversed in the garden. But James never revealed more of his visit with the risen Master on this day at the Lazarus home in Bethany. 그들은 모두 그 도시로 달려가서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고 싶어 하였으나, 야고보가 그들을 제지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만이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와 정원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가 자신에게 말씀한 특별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의 부활체로서의 방문에 대한 사실을 그들이 퍼뜨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부활한 주(主)와 이 날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결코 더 이상 밝히지 않았습니다.

3. At the Home of Joseph 요셉의 집에서

160501 부활6-차별 없는 부활의 예수님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190:3.1 (2033.1) The fif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to the recognition of mortal eyes occurred in the presence of some twenty-five women believers assembled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at about fifteen minutes past four o’clock on this same Sunday afternoon. Mary Magdalene had returned to Joseph’s house just a few minutes before this appearance. James, Jesus’ brother, had requested that nothing be said to the apostles concerning the Master’s appearance at Bethany. He had not asked Mary to refrain from reporting the occurrence to her sister believers. Accordingly, after Mary had pledged all the women to secrecy, she proceeded to relate what had so recently happened while she was with Jesus’ family at Bethany. And she was in the very midst of this thrilling recital when a sudden and solemn hush fell over them; they beheld in their very midst the fully visible form of the risen Jesus. He greeted them, saying: “Peace be upon you. In the fellowship of the kingdom there shall be neither Jew nor gentile, rich nor poor, free nor bond, man nor woman. You also are called to publish the good news of the liberty of mankind through the gospel of sonship with God in the kingdom of heaven. Go 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and confirming believers in the faith thereof. And while you do this, forget not to minister to the sick and strengthen those who are fainthearted and fear-ridden. And I will be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when he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while the women fell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in silence. 사람들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다섯 번째 부활체로서의 나타내심은, 같은 일요일 오후 4시 15분경에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모여 있는 약 25명의 여자 신도들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출현이 이루어지기 불과 몇 분전에 요셉의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는 주(主)께서 베다니에 나타났던 것을 “사도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리아에게 그녀의 자매 신도들에게도 “그 사건을 보고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 여인들 모두로부터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들과 함께 베다니에 있을 때 방금 전에 일어났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두근거리는 설명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고 장엄한 고요함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들 한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형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나라의 동반자 관계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속박 받는 자,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을 것이다. 또한 너희들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관계의 복음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노라. 온 세계로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 그것으로부터 신자들이 신앙에 굳건히 서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소심하고 두려움에 가득한 자들을 강건하게 하는 일과 아픈 자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땅 끝까지라도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마친 후에, 그는 여인들이 자신들의 얼굴에 모습을 녹여내고 침묵 속에서 경배하는 동안,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0:3.2 (2033.2) Of the five morontia appearances of Jesus occurring up to this time, Mary Magdalene had witnessed four. 이때까지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진 예수의 부활체 출현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네 번을 입증하였습니다.

190:3.3 (2033.3) As a result of sending out the messengers during the midforenoon and from the unconscious leakage of intimations concerning this appearance of Jesus at Joseph’s house, word began to come to the rulers of the Jews during the early evening that it was being reported about the city that Jesus had risen, and that many persons were claiming to have seen him. The Sanhedrists were thoroughly aroused by these rumors. After a hasty consultation with Annas, Caiaphas called a meeting of the Sanhedrin to convene at eight o’clock that evening. It was at this meeting that action was taken to throw out of the synagogues any person who made mention of Jesus’ resurrection. It was even suggested that anyone claiming to have seen him should be put to death; this proposal, however, did not come to a vote since the meeting broke up in confusion bordering on actual panic. They had dared to think they were through with Jesus. They were about to discover that their real trouble with the man of Nazareth had just begun. 오전 반나절이 지날 무렵에 연락원들을 파견한 결과로, 그리고 요셉의 집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암시들의 무의식적인 누설로 인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였다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났다고 주장한다는 말이 도시에 두루 퍼졌다는 소식이 저녁 무렵에는 유대인 통치자들의 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이 소문에 심각하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와 급히 의논한 후에, 그 날 저녁 8시에 모이도록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는 자는 회당에서 출교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회의에서였습니다. 그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자는 제안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 공황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회의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이 제안은 표결에 부쳐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감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과의 자신들의 진정한 문제는 단지 시작이었었다는 것을 이제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 Appearance to the Greeks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심

190:4.1 (2033.4) About half past four o’clock, at the home of one Flavius, the Master made his sixth morontia appearance to some forty Greek believers there assembled. While they were engaged in discussing the reports of the Master’s resurrection, he manifested himself in their midst, notwithstanding that the doors were securely fastened, and speaking to them, said: “Peace be upon you. While the Son of Man appeared on earth among the Jews, he came to minister to all men. In the kingdom of my Father there shall be neither Jew nor gentile; you will all be brethren — the sons of God. Go you, therefore, 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of salvation as you have received it from the ambassadors of the kingdom, and I will fellowship you in the brotherhood of the Father’s sons of faith and truth.” And when he had thus charged them, he took leave, and they saw him no more. They remained within the house all evening; they were too much overcome with awe and fear to venture forth. Neither did any of these Greeks sleep that night; they stayed awake discussing these things and hoping that the Master might again visit them. Among this group were many of the Greeks who were at Gethsemane when the soldiers arrested Jesus and Judas betrayed him with a kiss. 오후 4시 30분쯤 되었을 때, 플라비우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곳에 모여 있는 약 40명의 그리스인 신자들에게 주(主)님께서 여섯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주(主)님께서 부활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토론하고 있을 때, 문들이 견고하게 닫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 가운데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너희들에게 있으라.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 유대인으로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모든 인류를 섬기기 위하여 왔었노라.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너희는 모두 형제 — 하나님의 아들들 — 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 세계로 가서, 너희가 하늘나라 대사들로부터 받았던 대로 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면 내가 신앙과 진리를 소유한 아버지의 아들들의 형제신분으로 너희들과 동료관계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명령을 그들에게 내리신 후에 떠났으며, 그들은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녁 내내 그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경외심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서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그리스인들은 그 밤에 아무도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주(主)님께서 다시 자기들을 방문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 일들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유다가 입을 맞춤으로써 그를 배반할 때, 겟세마네에 있었던 그리스인들 대부분이 이 무리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190:4.2 (2034.1) Rumors of Jesus’ resurrection and reports concerning the many appearances to his followers are spreading rapidly, and the whole city is being wrought up to a high pitch of excitement. Already the Master has appeared to his family, to the women, and to the Greeks, and presently he manifests himself in the midst of the apostles. The Sanhedrin is soon to begin the consideration of these new problems which have been so suddenly thrust upon the Jewish rulers. Jesus thinks much about his apostles but desires that they be left alone for a few more hours of solemn reflection and thoughtful consideration before he visits them.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났다는 보고들이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그 도시 전체가 흥분되어 매우 심하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주(主)님은 이미 자기 가족들과 여인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났으며, 또한 얼마 안 있어 사도들 가운데에도 직접 나타나고 계셨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 통치자들에게 이토록 갑자기 밀어닥친 이 새로운 문제들을 재빨리 심사숙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무척 깊이 생각하셨지만, 자신이 그들을 방문하기 전에 그들끼리 몇 시간 동안 더 따로 떨어져서 진지한 반성과 사려 깊은 숙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5. The Walk with Two Brothers 두 형제들과 같이 걸어가심

160508 부활7 – 엠마오 길 두 형제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눅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90:5.1 (2034.2) At Emmaus, about seven miles west of Jerusalem, there lived two brothers, shepherds, who had spent the Passover week in Jerusalem attending upon the sacrifices, ceremonials, and feasts. Cleopas, the elder, was a partial believer in Jesus; at least he had been cast out of the synagogue. His brother, Jacob, was not a believer, although he was much intrigued by what he had heard about the Master’s teachings and works.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7 마일 떨어진 엠마오에, 목동인 두 형제들이 살았는데, 유월절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가서 희생 제사와 예식 그리고 축제에 참여하였습니다. 형인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믿었는데, 적어도 그는 나중에 회당에서 출교 당하였습니다. 그의 동생 야곱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주(主)님의 가르침과 한 일들에 관하여 들었던 내용에 무척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190:5.2 (2034.3) On this Sunday afternoon, about three miles out of Jerusalem and a few minutes before five o’clock, as these two brothers trudged along the road to Emmaus, they talked in great earnestness about Jesus, his teachings, work, and more especially concerning the rumors that his tomb was empty, and that certain of the women had talked with him. Cleopas was half a mind to believe these reports, but Jacob was insistent that the whole affair was probably a fraud. While they thus argued and debated as they made their way toward home, the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his seventh appearance, came alongside them as they journeyed on. Cleopas had often heard Jesus teach and had eaten with him at the homes of Jerusalem believers on several occasions. But he did not recognize the Master even when he spoke freely with them. 그 일요일 오후,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5시가 거의 되었을 무렵에, 이들 두 형제는 엠마오로 가는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예수님에 관하여, 그의 가르침들과 한 일들 그리고 특별히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소문과 어떤 여인들이 그와 이야기하였다는 소문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이 소문들을 반신반의하면서 믿었지만, 야곱은 그 모든 사건들이 아마 가짜일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있을 때, 그의 일곱 번째 출현으로서, 현시된 부활체 예수님께서 그들 옆으로 따라가시면서 같이 여행하였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종종 들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의 집에서 같이 식사를 나눈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主)께서 지금 자기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90:5.3 (2034.4) After walking a short way with them, Jesus said: “What were the words you exchanged so earnestly as I came upon you?” And when Jesus had spoken, they stood still and viewed him with sad surprise. Said Cleopas: “Can it be that you sojourn in Jerusalem and know not the things which have recently happened?” Then asked the Master, “What things?” Cleopas replied: “If you do not know about these matters, you are the only one in Jerusalem who has not heard these rumors concerning Jesus of Nazareth, who was a prophet mighty in word and in dee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The chief priests and our rulers delivered him up to the Romans and demanded that they crucify him. Now many of us had hoped that it was he who would deliver Israel from the yoke of the gentiles. But that is not all. It is now the third day since he was crucified, and certain women have this day amazed us by declaring that very early this morning they went to his tomb and found it empty. And these same women insist that they talked with this man; they maintain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when the women reported this to the men, two of his apostles ran to the tomb and likewise found it empty” — and here Jacob interrupted his brother to say, “but they did not see Jesus.”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조금 걸어가신 후에, “내가 너희들에게 다가올 때 그토록 진지하게 나눈 말들이 무슨 뜻이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은 잠시 서서 그를 보다가 매우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클레오파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면,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주(主)님은 “무슨 일들이냐?”라고 물었습니다. 클레오파스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일들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씀과 행위에 큰 힘이 있는 선지자였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소문들을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듣지 못한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제들과 우리 통치자들이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가 이방인들의 멍에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진지 지금이 삼일 째인데, 어떤 여인들이 바로 오늘 새벽에 그의 무덤에 갔다가 그곳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였고,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계속 우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그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두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 그리고 이 때 야곱이 자기 형의 말에 끼어들면서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90:5.4 (2035.1) As they walked along, Jesus said to them: “How slow you are to comprehend the truth! When you tell me that it is about the teachings and work of this man that you have your discussions, then may I enlighten you since I am more than familiar with these teachings. Do you not remember that this Jesus always taught that his kingdom was not of this world, and that all men, being the sons of God, should find liberty and freedom in the spiritual joy of the fellowship of the brotherhood of loving service in this new kingdom of the truth of the heavenly Father’s love? Do you not recall how this Son of Man proclaimed the salvation of God for all men, ministering to the sick and afflicted and setting free those who were bound by fear and enslaved by evil? Do you not know that this man of Nazareth told his disciples that he must go to Jerusalem, be delivered up to his enemies, who would put him to death, and that he would arise on the third day? Have you not been told all this? And have you never read in the Scriptures concerning this day of salvation for Jew and gentile, where it says that in him shall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be blessed; that he will hear the cry of the needy and save the souls of the poor who seek him; that all nations shall call him blessed? That such a Deliverer shall be as the shadow of a great rock in a weary land. That he will feed the flock like a true shepherd, gathering the lambs in his arms and tenderly carrying them in his bosom. That he will open the eyes of the spiritually blind and bring the prisoners of despair out into full liberty and light; that all who sit in darkness shall see the great light of eternal salvation. That he will bind up the brokenhearted,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of sin, and open up the prison to those who are enslaved by fear and bound by evil. That he will comfort those who mourn and bestow upon them the joy of salvation in the place of sorrow and heaviness. That he shall be the desire of all nations and the everlasting joy of those who seek righteousness. That this Son of truth and righteousness shall rise upon the world with healing light and saving power; even that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that he will really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That he will not destroy the weak but minister salvation to all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That those who believe in him shall have eternal life. That he will pour out his spirit upon all flesh, and that this Spirit of Truth shall be in each believer a well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Did you not understand how great was the gospel of the kingdom which this man delivered to you? Do you not perceive how great a salvation has come upon you?” 그들이 길을 계속 갈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참으로 진리를 더디게 깨닫는 자들이구나! 너희가 토론하던 것이 그 사람의 가르침들과 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고 네가 나에게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 가르침들에 대하여 더 익숙하니, 너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고 싶구나. 그 예수님이 자기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진리에 의한 새로운 이 나라에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형제신분의 교제를 나누는 영적 기쁨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항상 가르치셨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 사람의 아들이 병이 든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보시면서,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악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풀어주시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선포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그 나사렛 사람이, 자기는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며, 자기의 적들에게 넘겨져서, 그들이 자기를 죽이겠지만 셋째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였던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런 모든 것들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이 구원의 날에 관하여,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사람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가난한 자들의 혼을 구하고 궁핍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라는 것과, 모든 나라들이 그를 찬미하리라는 것을 성서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한 해방자는 지치고 피곤한 땅 안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그림자처럼 되실 것이니라. 그는 참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실 것이며, 그 양들을 두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아서 친절하게 데리고 다니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고 절망에 사로잡힌 자를 충분한 자유와 광명의 세계로 해방시키실 것이며, 흑암에 앉아있는 자들이 영원한 구원의 엄청난 빛을 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낙담한 자를 일으켜 주시고, 죄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하며, 공포에 노예가 되고 악으로 묶인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그는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슬픔과 비애 대신에 구원의 기쁨을 그들에게 수여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나라들의 소망이 되실 것이며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영속하는 기쁨이 되실 것이다. 이 진리와 정의(正義)의 아들은 구원의 힘과 치유의 빛과 함께 세상에 우뚝 솟아나실 것이며, 자기 민족을 그들의 죄에서 구하실 것이며, 잃었던 자들을 반드시 찾아서 구하실 것이다. 그는 연약한 자를 멸하지 않으실 것이며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육체에게 자기 영을 부어 주실 것이며, 이 진리의 영은 각 신자들 속에 영속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너희에게 전해 준 왕국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느냐? 얼마나 엄청난 구원이 너희에게 임하였는지 깨닫지 못하겠느냐?”

190:5.5 (2035.2) By this time they had come near to the village where these brothers dwelt. Not a word had these two men spoken since Jesus began to teach them as they walked along the way. Soon they drew up in front of their humble dwelling place, and Jesus was about to take leave of them, going on down the road, but they constrained him to come in and abide with them. They insisted that it was near nightfall, and that he tarry with them. Finally Jesus consented, and very soon after they went into the house, they sat down to eat. They gave him the bread to bless, and as he began to break and hand to them, their eyes were opened, and Cleopas recognized that their guest was the Master himself. And when he said, “It is the Master —,” the morontia Jesus vanished from their sight. 이 때 그들은 이 형제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가까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걸어오는 동안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로 두 형제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곧 두 형제가 살고 있는 초라한 집 앞에 도착하였고, 예수님은 그들과 헤어져서, 가던 길을 계속 내려가시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함께 들어가 묵으시도록 억지로 그에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들은 밤이 가까웠으므로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야 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허락하였고,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간 후 즉시 같이 앉아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가 축복을 빌어줄 수 있도록 그에게 빵을 드렸으며, 그가 빵을 떼어 그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은 눈을 뜨고, 클레오파스는 자기들의 손님이 바로 그 주(主) 자신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분이 주(主)님이시다 — ”라고 말하였을 때, 부활체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190:5.6 (2036.1) And then they said, the one to the other, “No wonder our hearts burned within us as he spoke to us while we walked along the road! and while he opened up to our understanding the teachings of the Scriptures!”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오면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리고 성서를 가르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동안, 우리 마음이 속에서 불타는 듯했던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190:5.7 (2036.2) They would not stop to eat. They had seen the morontia Master, and they rushed from the house, hastening back to Jerusalem to spread the good news of the risen Savior. 그들은 식사하기 위하여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체의 주(主)님을 보았으며, 부활한 구원자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집에서 달려 나가,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190:5.8 (2036.3) About nine o’clock that evening and just before the Master appeared to the ten, these two excited brothers broke in upon the apostles in the upper chamber, declaring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alked with him. And they told all that Jesus had said to them and how they had not discerned who he was until the time of the breaking of the bread. 그 날 저녁 9시 경, 그리고 주(主)께서 열 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바로 전에, 흥분한 이 두 형제는 사도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 들어갔으며, 자기들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한 모든 것과, 빵을 떼기까지 어떻게 하여 그가 누구인지를 자기들이 식별하지 못하였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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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1 Appearances to the Apostles and Other Leaders 사도들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출현

Paper 191

Appearances to the Apostles and Other Leaders 사도들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출현

Reactions of the individual apostles 사도 개인들의 반응들
1. The Appearance to Peter 베드로에게 출현
2. First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첫 출현하심
3. With the Morontia Creatures 모론시아 창조물들과 함께
Stages of morontia progression 모론시아 진보의 단계들
4. The Tenth Appearance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에서 10번째 출현
5. Second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출현
“Blessed are those in the ages to come…” “…다가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복되도다.”
6. The Alexandrian Appearance 알렉산드리아에 출현

160515 부활8 – 사도들에게 나타남을 미루신 이유 막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91:0.1 (2037.1) RESURRECTION Sunday was a terrible day in the lives of the apostles; ten of them spent the larger part of the day in the upper chamber behind barred doors. They might have fled from Jerusalem, but they were afraid of being arrested by the agents of the Sanhedrin if they were found abroad. Thomas was brooding over his troubles alone at Bethpage. He would have fared better had he remained with his fellow apostles, and he would have aided them to direct their discussions along more helpful lines. 사도들은 부활의 일요일이 무척 고통스러운 하루였습니다. 10 명의 사도들은 그 날 종일토록 그 다락방 문을 꼭꼭 걸어 닫은 채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려 했지만, 밖으로 나갔다가 발견되면 산헤드린의 앞잡이들에게 붙잡히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혼자서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벳바게에서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며, 그들의 논의에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191:0.2 (2037.2) All day long John upheld the idea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He recounted no less than five different times when the Master had affirmed he would rise again and at least three times when he alluded to the third day. John’s attitude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them, especially on his brother James and on Nathaniel. John would have influenced them more if he had not been the youngest member of the group. 요한은 하루종일 예수께서 이미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主)께서 자신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5번 이상 단언하셨고, 셋째 날이라고 3번 이상 암시하셨음을 차례로 열거하였습니다. 요한의 태도는 특별히 그의 형제 야고보와 나다니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요한이 그 무리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않았어도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191:0.3 (2037.3) Their isolation had much to do with their troubles. John Mark kept them in touch with developments about the temple and informed them as to the many rumors gaining headway in the city, but it did not occur to him to gather up news from the different groups of believers to whom Jesus had already appeared. That was the kind of service which had heretofore been rendered by the messengers of David, but they were all absent on their last assignment as heralds of the resurrection to those groups of believers who dwelt remote from Jerusalem. For the first time in all these years the apostles realized how much they had been dependent on David’s messengers for their daily information regarding the affairs of the kingdom. 그들의 고립은 그들의 어려움과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요한 마가는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계속하여 그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성 안에서 떠돌아다니는 새로운 소문들을 전해주었으나, 예수께서 이미 나타났던 다른 신자 무리들로부터는 소식을 전해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의 연락원들로부터 친절한 봉사를 받았지만, 그들은 이제 부활의 소식을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 무리들에게 전하는 임무에 배속을 받았으므로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일에 관한 매일 매일의 정보 수집에 있어서, 자신들이 지난 수년 동안 다윗의 연락원들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해 왔다는 것을 사도들은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191:0.4 (2037.4) All this day Peter characteristically vacillated emotionally between faith and doubt concerning the Master’s resurrection. Peter could not get away from the sight of the grave cloths resting there in the tomb as if the body of Jesus had just evaporated from within. “But,” reasoned Peter, “if he has risen and can show himself to the women, why does he not show himself to us, his apostles?” Peter would grow sorrowful when he thought that maybe Jesus did not come to them on account of his presence among the apostles, because he had denied him that night in Annas’s courtyard. And then would he cheer himself with the word brought by the women, “Go tell my apostles — and Peter.” But to derive encouragement from this message implied that he must believe that the women had really seen and heard the risen Master. Thus Peter alternated between faith and doubt throughout the whole day, until a little after eight o’clock, when he ventured out into the courtyard. Peter thought to remove himself from among the apostles so that he might not prevent Jesus’ coming to them because of his denial of the Master. 베드로는 본래의 특징적으로, 주(主)님의 부활에 대하여 신앙과 의심 사이에서 이 날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신이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의가 무덤 안에 남아 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살아나셨고 그 여인들에게 자신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왜 사도인 우리들에게는 보여주시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베드로는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해 자기들에게 오시지 않는 이유가, 그 날 밤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그를 부인한 자신이 사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비탄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는 그 여인들이 전해 준 “나의 사도들에게 — 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 전하라.”는 말로 위안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부터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그 여인들이 부활한 주(主)님을 정말로 보고 들었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안마당으로 나간 8시 조금 후까지, 그 날 하루 종일 신앙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主)님을 부인했던 것 때문에 예수께서 오시지 못하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하여 사도들로부터 혼자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191:0.5 (2037.5) James Zebedee at first advocated that they all go to the tomb; he was strongly in favor of doing something to get to the bottom of the mystery. It was Nathaniel who prevented them from going out in public in response to James’s urging, and he did this by reminding them of Jesus’ warning against unduly jeopardizing their lives at this time. By noontime James had settled down with the others to watchful waiting. He said little; he was tremendously disappointed because Jesus did not appear to them, and he did not know of the Master’s many appearances to other groups and individuals. 야고보 세베대는 처음에 모두 무덤으로 가 보자고 주장하였으며, 그 신비스러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말린 것은 나다니엘이었으며, 그는 이와 같은 때에 쓸데없이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렇게 하였습니다. 정오 무렵에 야고보는 안정을 되찾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으며,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에 무척 실망하였고, 주(主)님께서 개별존재들과 무리들에게 여러 번 나타났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191:0.6 (2038.1) Andrew did much listening this day. He was exceedingly perplexed by the situation and had more than his share of doubts, but he at least enjoyed a certain sense of freedom from responsibility for the guidance of his fellow apostles. He was indeed grateful that the Master had released him from the burdens of leadership before they fell upon these distracting times. 안드레는 이 날 거의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무척 당황하였고 필요 이상으로 의심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동료 사도들을 인도하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어떤 자유로운 해방감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자기들에게 임하기 전에,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짐을 주(主)께서 덜어주신 것에 대하여, 그는 정말로 고마워하였습니다.

191:0.7 (2038.2) More than once during the long and weary hours of this tragic day, the only sustaining influence of the group was the frequent contribution of Nathaniel’s characteristic philosophic counsel. He was really the controlling influence among the ten throughout the entire day. Never once did he express himself concerning either belief or disbelief in the Master’s resurrection. But as the day wore on, he became increasingly inclined toward believing that Jesus had fulfilled his promise to rise again. 비극적인 이 날 지루하고 지친 시간들 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그 무리들에게 유일한 영향력을 끼치며 지켜준 것은, 나다니엘이 자주 제시한 그의 특징적인 철학적 조언이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은 정말로 그 날 하루 종일 열 명의 사도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주(主)님의 부활에 대하여 믿는다든지 아니면 믿지 않는다든지 하는, 자기 의견을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가면서, 그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다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였음을 믿는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갔습니다.

191:0.8 (2038.3) Simon Zelotes was too much crushed to participate in the discussions. Most of the time he reclined on a couch in a corner of the room with his face to the wall; he did not speak half a dozen times throughout the whole day. His concept of the kingdom had crashed, and he could not discern that the Master’s resurrection could materially change the situation. His disappointment was very personal and altogether too keen to be recovered from on short notice, even in the face of such a stupendous fact as the resurrection. 시몬 젤로떼는 너무 낙심하여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방구석에 있는 안락의자에 기대어 벽을 향하고 누워 있었으며, 하루 종일 여섯 번 정도 이야기하였을 뿐입니다. 왕국에 대한 그의 개념은 무너졌으며, 주(主)님의 부활이 그 상황을 물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실망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고 전체적으로 너무 심화되어 있어서 빨리 회복될 수 없었으며,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여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1:0.9 (2038.4) Strange to record, the usually inexpressive Philip did much talking throughout the afternoon of this day. During the forenoon he had little to say, but all afternoon he asked questions of the other apostles. Peter was often annoyed by Philip’s questions, but the others took his inquiries good-naturedly. Philip was particularly desirous of knowing, provided Jesus had really risen from the grave, whether his body would bear the physical marks of the crucifixion. 기록하기는 이상하지만, 여느 때처럼 말이 없던 빌립이 이 날 오후 내내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오전 동안에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오후에는 줄곧 다른 사도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베드로는 빌립의 질문을 종종 귀찮아했지만, 다른 사도들은 그의 질문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정말로 무덤에서 일어났다면, 그의 몸에 십자가형의 육체적인 흔적이 남아있는지 아닌지를 특별히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191:0.10 (2038.5) Matthew was highly confused; he listened to the discussions of his fellows but spent most of the time turning over in his mind the problem of their future finances. Regardless of Jesus’ supposed resurrection, Judas was gone, David had unceremoniously turned the funds over to him, and they were without an authoritative leader. Before Matthew got around to giving serious consideration to their arguments about the resurrection, he had already seen the Master face to face. 마태는 매우 혼동이 되었으며, 동료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지만 앞으로 닥쳐올 자신들의 재정 문제를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예정된 부활을 개의치 않고, 유다는 떠나 버렸으며, 다윗은 아무 절차도 없이 자금을 자기에게 넘겼고, 자기들에게는 이제 아무도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태는 부활에 대한 그들의 논쟁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갖기도 전에, 주(主)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191:0.11 (2038.6) The Alpheus twins took little part in these serious discussions; they were fairly busy with their customary ministrations. One of them expressed the attitude of both when he said, in reply to a question asked by Philip: “We do not understand about the resurrection, but our mother says she talked with the Master, and we believe her.” 알패오 쌍둥이는 이러한 심각한 토론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습관적인 봉사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부활에 관해서 잘 납득하지 못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주(主)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말을 하였다는 데, 우리는 어머니를 믿는다.”는 말로 두 사람의 태도를 표현하였습니다.

191:0.12 (2038.7) Thomas was in the midst of one of his typical spells of despairing depression. He slept a portion of the day and walked over the hills the rest of the time. He felt the urge to rejoin his fellow apostles, but the desire to be by himself was the stronger. 도마는 자포자기하는 우울증이라는 그의 전형적인 주문 중의 하나에 걸려 그 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잠을 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동산들을 거닐면서 보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다시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혼자 있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였습니다.

191:0.13 (2038.8) The Master put off the first morontia appearance to the apostles for a number of reasons. First, he wanted them to have time, after they heard of his resurrection, to think well over what he had told them about his death and resurrection when he was still with them in the flesh. The Master wanted Peter to wrestle through with some of his peculiar difficulties before he manifested himself to them all. In the second place, he desired that Thomas should be with them at the time of his first appearance. John Mark located Thomas at the home of Simon in Bethpage early this Sunday morning, bringing word to that effect to the apostles about eleven o’clock. Any time during this day Thomas would have gone back to them if Nathaniel or any two of the other apostles had gone for him. He really wanted to return, but having left as he did the evening before, he was too proud to go back of his own accord so soon. By the next day he was so depressed that it required almost a week for him to make up his mind to return. The apostles waited for him, and he waited for his brethren to seek him out and ask him to come back to them. Thomas thus remained away from his associates until the next Saturday evening, when, after darkness had come on, Peter and John went over to Bethpage and brought him back with them. And this is also the reason why they did not go at once to Galilee after Jesus first appeared to them; they would not go without Thomas.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부활체를 보이지 않으시고 미루셨던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육신으로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사도들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기 전 특별히 베드로가 자신의 어려움들과 싸워 극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둘째, 부활의 예수님은 처음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도마가 함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도마는 토요 안식일부터 계속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 있었습니다. 요한 마가는 그 일요일 아침, 11시 경에 도마가 벳바게 시몬의 집에 있음을 사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나다니엘이나 아니면 누구든지 다른 두 사도들이 그에게 갔었다면, 도마는 이 날 언제든지 그들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전 날 저녁 사도들을 떠나올 때 행했던 자기 행동과 강한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빨리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 우울하여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기다렸고, 반면에 그는 사도들이 자기를 찾으러 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청해 주기만을 바랬습니다. 도마는 그 다음 토요일 저녁, 어둠이 깔린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벳바게로 와서 자신을 데리고 동료들에게 돌아갈 때까지 사도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그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후 그들이 즉시 갈릴리로 가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사도들은 도마 없이는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 The Appearance to Peter 베드로에게 출현

160522 부활9 –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눅24:33-34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191:1.1 (2039.1) It was near half past eight o’clock this Sunday evening when Jesus appeared to Simon Peter in the garden of the Mark home. This was his eighth morontia manifestation. Peter had lived under a heavy burden of doubt and guilt ever since his denial of the Master. All day Saturday and this Sunday he had fought the fear that, perhaps, he was no longer an apostle. He had shuddered at the fate of Judas and even thought that he, too, had betrayed his Master. All this afternoon he thought that it might be his presence with the apostles that prevented Jesus’ appearing to them, provided, of course, he had really risen from the dead. And it was to Peter, in such a frame of mind and in such a state of soul, that Jesus appeared as the dejected apostle strolled among the flowers and shrubs. 예수께서 마가의 집에 있는 정원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 일요일 저녁 8시30분경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여덟 번째 부활체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主)를 부인한 이후로 죄의식과 의심의 무거운 멍에를 지고 지내왔습니다. 토요일과 이 일요일 내내,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숙명에 몸서리를 쳤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역시 주(主)님을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정말로 살아났다면, 자기가 사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날 오후 내내 하였습니다. 낙심한 사도가 꽃밭 속에서 거닐고 있을 때 예수께서 바로 그러한 기분과 혼의 상태 속에 있는 바로 그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91:1.2 (2039.2) When Peter thought of the loving look of the Master as he passed by on Annas’s porch, and as he turned over in his mind that wonderful message brought him early that morning by the women who came from the empty tomb, “Go tell my apostles — and Peter” — as he contemplated these tokens of mercy, his faith began to surmount his doubts, and he stood still, clenching his fists, while he spoke aloud: “I believe he has risen from the dead; I will go and tell my brethren.” And as he said this, there suddenly appeared in front of him the form of a man, who spoke to him in familiar tones, saying: “Peter, the enemy desired to have you, but I would not give you up. I knew it was not from the heart that you disowned me; therefore I forgave you even before you asked; but now must you cease to think about yourself and the troubles of the hour while you prepare to carry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o those who sit in darkness. No longer should you be concerned with what you may obtain from the kingdom but rather be exercised about what you can give to those who live in dire spiritual poverty. Gird yourself, Simon, for the battle of a new day, the struggle with spiritual darkness and the evil doubtings of the natural minds of men.” 그가 안나스의 현관 앞을 지나치면서 주(主)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베드로가 생각하고, 그리고 빈 무덤에서 달려 온 여인들이 그 날 아침 일찍 자신에게 전해 준 엄청난 소식,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라는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그가 이 자비의 상징들을 심사숙고하였을 때, 그의 신앙은 의심을 극복하기 시작하였으며, 똑바로 서서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그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을 믿으며, 가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을 때, 그의 앞에 한 남자의 형체가 갑자기 나타났으며, 친숙한 목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야, 적이 너를 노렸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던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므로, 네가 요청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하였지만, 이제 너는 흑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준비를 하는 동안, 그 때의 괴로움과 네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는 왕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영적 무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 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근심하여야 한다. 시몬아 새로운 날의 전투, 사람의 본래 마음속에 있는 악한 불신들과 영적 무지와의 투쟁에 대비하거라.”

191:1.3 (2039.3) Peter and the morontia Jesus walked through the garden and talked of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for almost five minutes. Then the Master vanished from his gaze, saying, “Farewell, Peter, until I see you with your brethren.” 베드로와 부활의 예수님은 정원을 같이 걸으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에 관하여 거의 5분 동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主)는 “베드로야, 내가 너와 네 형제들을 같이 만날 때까지 잘 있거라.”라고 말하면서, 그가 보는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191:1.4 (2039.4) For a moment, Peter was overcome by the realization that he had talked with the risen Master, and that he could be sure he was still an ambassador of the kingdom. He had just heard the glorified Master exhort him to go on preaching the gospel. And with all this welling up within his heart, he rushed to the upper chamber and into the presence of his fellow apostles, exclaiming in breathless excitement: “I have seen the Master; he was in the garden. I talked with him, and he has forgiven me.” 베드로는 부활한 주(主)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아직도 왕국의 대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동안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에게 훈계하는, 영광된 주(主)의 음성을 방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가슴 속에 솟아오르면서, 동료 사도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갔으며, 흥분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주(主)를 보았으며; 그는 정원 안에 계셨다. 그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나를 용서해 주셨다.”

191:1.5 (2040.1) Peter’s declaration that he had seen Jesus in the garden made a profound impression upon his fellow apostles, and they were about ready to surrender their doubts when Andrew got up and warned them not to be too much influenced by his brother’s report. Andrew intimated that Peter had seen things which were not real before. Although Andrew did not directly allude to the vision of the night on the Sea of Galilee wherein Peter claimed to have seen the Master coming to them walking on the water, he said enough to betray to all present that he had this incident in mind. Simon Peter was very much hurt by his brother’s insinuations and immediately lapsed into crestfallen silence. The twins felt very sorry for Peter, and they both went over to express their sympathy and to say that they believed him and to reassert that their own mother had also seen the Master. 그 정원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베드로의 선언은 그의 동료 사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의심을 포기하려고 할 때 안드레가 일어나서 자기 동생의 말에 의해 너무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가 전에 실제가 아닌 것들을 보았던 사실을 암시하였습니다. 주(主)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베드로가 주장하였던 갈릴리 바다에서의 그 날 밤의 환상을 안드레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도록 말하였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자기 형의 암시에 무척 상처를 받았으며 즉시 풀이 죽어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쌍둥이 형제들은 베드로에게 그들의 깊은 공감을 말했으며,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들의 어머니도 역시 주(主)를 보았다는 사실을 거듭 말하면서 자기들은 그의 말을 믿는다고 위로하였습니다.

2. First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첫 출현하심

160529 부활10 –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9th) 요20:19-24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91:2.1 (2040.2) Shortly after nine o’clock that evening, after the departure of Cleopas and Jacob, while the Alpheus twins comforted Peter, and while Nathaniel remonstrated with Andrew, and as the ten apostles were there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with all the doors bolted for fear of arrest, the Master, in morontia form, suddenly appeared in the midst of them, saying: “Peace be upon you. Why are you so frightened when I appear, as though you had seen a spirit? Did I not tell you about these things when I was present with you in the flesh? Did I not say to you that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would deliver me up to be killed, that one of your own number would betray me, and that on the third day I would rise? Wherefore all your doubtings and all this discussion about the reports of the women, Cleopas and Jacob, and even Peter? How long will you doubt my words and refuse to believe my promises? And now that you actually see me, will you believe? Even now one of you is absent. When you are gathered together once more, and after all of you know of a certainty that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grave, go hence into Galilee.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in one another; and so shall you enter into the new service of the kingdom of heaven. I will tarry in Jerusalem with you until you are ready to go into Galilee. My peace I leave with you.” 그 날 저녁 9시가 조금 지나고, 클레오파스와 야곱이 떠난 후에, 알패오 쌍둥이들은 베드로를 위로하고 있었으며, 나다니엘이 안드레에게 충고를 하고 있을 때, 그리고 열 명의 사도들이 그 다락방에 모두 모여서 붙잡혀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든 문들을 단단히 잠그고 있을 때, 부활체 형체의 주(主)가 그 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내가 나타났을 때, 너희들이 마치 영을 본 듯이 왜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육신으로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일들에 대하여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대사제장들과 통치자들이 나를 죽음에 넘기리라는 것과, 바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하리라는 것, 그리고 셋째 날에 내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무슨 이유로 너희 모두 그 여인들과 클레오파스와 야곱 그리고 심지어 베드로의 보고에 대해서까지 논쟁하며 의심하고 있느냐? 너희는 언제까지 내 말을 의심할 것이며 내 약속을 믿지 않으려 하느냐? 지금 너희가 나를 실제로 보고 있는데, 이제는 믿겠느냐? 너희 중에 한 사람은 아직도 여기에 있지 않다. 너희들이 다시 함께 모였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너희 모두가 확실히 알고 난 후에는, 갈릴리로 가라.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신뢰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무를 것이다.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라노라.”

191:2.2 (2040.3) When the morontia Jesus had spoken to them, he vanished in an instant from their sight. And they all fell on their faces, praising God and venerating their vanished Master. This was the Master’s ninth morontia appearance. 부활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마친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라지신 주(主)를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주(主)의 아홉 번째 부활체 출현이었습니다.

3. With the Morontia Creatures 모론시아 창조물들과 함께

191:3.1 (2040.4) The next day, Monday, was spent wholly with the morontia creatures then present on Urantia. As participants in the Master’s morontia-transition experience, there had come to Urantia more than one million morontia directors and associates, together with transition mortals of various orders from the seven mansion worlds of Satania. The morontia Jesus sojourned with these splendid intelligences for forty days. He instructed them and learned from their directors the life of morontia transition as it is traversed by the mortals of the inhabited worlds of Satania as they pass through the system morontia spheres. 부활체 창조물들과 함께 다음 날 월요일, 그 때 지구에 있었던 부활체 피조물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주(主)께서 부활체로 전환하실 때, 백만이 넘는 부활체 감독들과 동료들이 사타니아의 일곱 맨션세계들로부터 다양한 계층 속에 있는 전환기의 사람들과 함께 지구에 와 있었습니다. 부활체 예수는 이 훌륭한 지적 존재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의 감독들로부터 거주하는 사타니아 세계들의 사람들이 부활체 구체들의 체계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부활체 전환의 일생에 대하여 배우셨습니다.

191:3.2 (2041.1) About midnight of this Monday the Master’s morontia form was adjusted for transition to the second stage of morontia progression. When he next appeared to his mortal children on earth, it was as a second-stage morontia being. As the Master progressed in the morontia career, it became, technically, more and more difficult for the morontia intelligences and their transforming associates to visualize the Master to mortal and material eyes. 그 월요일 자정 무렵에 부활체 주(主)님의 형체는 부활체 진보의 두 번째 단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다음에 나셨을 때는 이미 두 번째 단계의 부활체 존재가 되셨습니다. 부활체 생애에 있어서 주(主)가 진보해 가심에 따라, 사람들의 눈에 주(主)를 가시화(可視化)시키는 일이, 부활체 지적존재들과 변환을 담당한 그들의 동료들에게 점점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191:3.3 (2041.2) Jesus made the transit to the third stage of morontia on Friday, April 14; to the fourth stage on Monday, the 17th; to the fifth stage on Saturday, the 22nd; to the sixth stage on Thursday, the 27th; to the seventh stage on Tuesday, May 2; to Jerusem citizenship on Sunday, the 7th; and he entered the embrace of the Most Highs of Edentia on Sunday, the 14th. 예수님은 4월 14일 금요일에 세 번째 단계로 들어가셨고, 네 번째 단계는 17일 월요일에, 다섯 번째 단계는 22일 토요일에, 여섯 번째 단계는 27일 목요일에, 일곱 번째 단계는 5월 2일 화요일에, 7일 일요일에는 예루셈 시민의 단계로, 14일 일요일에는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91:3.4 (2041.3) In this manner did Michael of Nebadon complete his service of universe experience since he had already, in connection with his previous bestowals, experienced to the full the life of the ascendant mortals of time and space from the sojourn on the headquarters of the constellation even on to, and through, the service of the headquarters of the superuniverse. And it was by these very morontia experiences that the Creator Son of Nebadon really finished and acceptably terminated his seventh and final universe bestowal. 이전에 여러 차례 자신을 주신 증여들과 연관되어, 별자리의 본부들에 머무르는 단계로부터, 초우주의 본부들에 대한 업무에 이르기까지 또 그것을 거쳐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올라가는 사람들의 충만한 일생을 이미 체험하였으므로, 이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우주 체험에서 자신의 봉사를 완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일곱 번째이며 마지막인 증여를 실제로 끝내시고 만족스럽게 완료하신 것은 바로 이 부활체 체험들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4. The Tenth Appearance (At Philadelphia) 필라델피아에서 10번째 출현

160605 부활11 – 전도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0th) 필라델피아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91:4.1 (2041.4) The t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to mortal recognition occurred a short time after eight o’clock on Tuesday, April 11, at Philadelphia, where he showed himself to Abner and Lazarus and some one hundred and fifty of their associates, including more than fifty of the evangelistic corps of the seventy. This appearance occurred just after the opening of a special meeting in the synagogue which had been called by Abner to discuss the crucifixion of Jesus and the more recent report of the resurrection which had been brought by David’s messenger. Inasmuch as the resurrected Lazarus was now a member of this group of believers, it was not difficult for them to believe the report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예수의 열 번째 부활체 출현은 4월 11일 화요일 8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필라델피아에서 있었으며, 그곳에서 아브너와 나사로 그리고 70인의 전도 대원들 중 50명 이상이 포함된 약 150명에 이르는 그들의 동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최근에 다윗의 연락원이 전해 준 부활에 대한 소식 보다는 최근의 소식에 대해 토의하기 위하여, 아브너에 의해 소집되었던 회당에서의 특별 회의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에 이 출현이 이루어졌습니다. 부활한 나사로가 이제 이 신자들 무리의 일원(一員)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보고를 믿는 것이 그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191:4.2 (2041.5) The meeting in the synagogue was just being opened by Abner and Lazarus, who were standing together in the pulpit, when the entire audience of believers saw the form of the Master appear suddenly. He stepped forward from where he had appeared between Abner and Lazarus, neither of whom had observed him, and saluting the company, said: 회당에서의 회의가, 같이 단상(壇上)에 서있는, 아브너와 나사로에 의해 막 시작되었는데, 그 때 객석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주(主)의 형체를 보았습니다. 아브너와 나사로 사이에서 처음 나타났으므로 그들은 그를 보지 못하였으며, 그는 그곳에서 걸어 나와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4.3 (2041.6) “Peace be upon you. You all know that we have one Father in heaven, and that there is but one gospel of the kingdom — the good news of the gift of eternal life which men receive by faith. As you rejoice in your loyalty to the gospel, pray the Father of truth to shed abroad in your hearts a new and greater love for your brethren. You are to love all men as I have loved you; you are to serve all men as I have served you. With understanding sympathy and brotherly affection, fellowship all your brethren who are dedicated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news, whether they be Jew or gentile, Greek or Roman, Persian or Ethiopian. John proclaimed the kingdom in advance; you have preached the gospel in power; the Greeks already teach the good news; and I am soon to send forth the Spirit of Truth into the souls of all these, my brethren, who have so unselfishly dedicated their lives to the enlightenment of their fellows who sit in spiritual darkness. You are all the children of light; therefore stumble not into the misunderstanding entanglements of mortal suspicion and human intolerance. If you are ennobled, by the grace of faith, to love unbelievers, should you not also equally love those who are your fellow believers in the far-spreading household of faith? Remember, as you love one another,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과,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 사람들이 신앙으로 받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기쁜 소식 — 이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너희가 기쁨으로 그 복음에 충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형제들을 위해 더욱 큰 새로운 사랑이 너희 마음에서 넘치도록 진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도 모든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그들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페르시아인이든지 에티오피아인이든지,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는 너희 모든 형제들과 함께 이해와 공감 그리고 형제의 애정을 가지고 사귀라. 요한은 미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너희는 권능으로 복음을 전도해왔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쁜 소식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영적 암흑 가운데 있는 자들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애타적으로 삶을 헌신하는 모든 내 형제들의 혼속에 진리의 영을 곧 보낼 것이다. 너희들 모두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의심과 인간의 편협성에서 비롯된 오해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라. 신앙의 가족 안에서 믿음의 동료들을 사랑하듯이 너희들은 신앙의 은혜로 불신자들을 똑같이 사랑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대로,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들인 것을 알 것이다.”

191:4.4 (2042.1) “Go, then, into all the world proclaiming this gospel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to all nations and races and ever be wise in your choice of methods for presenting the good news to the different races and tribes of mankind. Freely you have received this gospel of the kingdom, and you will freely give the good news to all nations. Fear not the resistance of evil, for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s.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그러므로 온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과 사람들이 서로 형제라는 이 복음을 모든 나라들과 족속들에게 전파하고, 인류의 서로 다른 종족들과 민족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을 선택할 때 항상 지혜로우라. 너희가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대가없이 받았으니 모든 나라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대가없이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들이 끝날 때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 악한 세력의 저항을 두려워 마라.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91:4.5 (2042.2) When he had said, “My peace I leave with you,”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With the exception of one of his appearances in Galilee, where upward of five hundred believers saw him at one time, this group in Philadelphia embraced the largest number of mortals who saw him on any single occasion. 주님께서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였을 때,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그를 본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해 볼 때, 500명 이상의 신자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던, 갈릴리에서의 출현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필라델피아에서의 이 무리들의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191:4.6 (2042.3) Early the next morning, even while the apostles tarried in Jerusalem awaiting the emotional recovery of Thomas, these believers at Philadelphia went forth proclaiming that Jesus of Nazareth had risen from the dead.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도들은 도마의 감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반면에, 필라델피아의 이 신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전파하며 나아갔습니다.

191:4.7 (2042.4) The next day, Wednesday, Jesus spent without interruption in the society of his morontia associates, and during the midafternoon hours he received visiting morontia delegates from the mansion worlds of every local system of inhabited spheres throughout the constellation of Norlatiadek. And they all rejoiced to know their Creator as one of their own order of universe intelligence. 다음날인 수요일에, 예수는 자신의 부활체 동행자들과 함께 줄곧 같이 보내셨으며, 오후 반나절 동안에는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전체에서 거주되는 구체들의 각 지역 체계의 맨션세계들로부터 방문한 부활체 대표자들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기들의 창조주를 자신들의 우주 지성 계층의 하나로서 알게 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5. Second Appearance to the Apostles 사도들에게 두 번째 출현

160612 길교회 창립3주년 기념주일 부활12 – 사도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1th) 찬 160 161 159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173 요20:25-29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191:5.1 (2042.5) Thomas spent a lonesome week alone with himself in the hills around about Olivet. During this time he saw only those at Simon’s house and John Mark. It was about nine o’clock on Saturday, April 15, when the two apostles found him and took him back with them to their rendezvous at the Mark home. The next day Thomas listened to the telling of the stories of the Master’s various appearances, but he steadfastly refused to believe. He maintained that Peter had enthused them into thinking they had seen the Master. Nathaniel reasoned with him, but it did no good. There was an emotional stubbornness associated with his customary doubtfulness, and this state of mind, coupled with his chagrin at having run away from them, conspired to create a situation of isolation which even Thomas himself did not fully understand. He had withdrawn from his fellows, he had gone his own way, and now, even when he was back among them, he unconsciously tended to assume an attitude of disagreement. He was slow to surrender; he disliked to give in. Without intending it, he really enjoyed the attention paid him; he derived unconscious satisfaction from the efforts of all his fellows to convince and convert him. He had missed them for a full week, and he obtained considerable pleasure from their persistent attentions. 도마는 올리브 산 근처의 동산에서 고독한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시몬의 집에 있는 사람들과 요한 마가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찾아와서 마가의 집으로 그를 데려간 것은 4월 15일 토요일 9시 경이었습니다. 도마는 다음 날(4/16일) 주(主)께서 여러 번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옛날에 전과가 있었던(베드로의 환상) 베드로가 사도들을 감동시켜 마치 주(主)를 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다니엘이 그를 설득하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도마의 습관적인 깊은 의심 그리고 그 의심과 연결된 감정적 고집의 상태에다가 사도들로부터 도피해 버렸던 자신에 대한 분함과 화가 더해져서, 도마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동시에 발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무의식적인 분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굴복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료들이 자기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는 지난 일 주일 내내 동료들을 보고 싶었으며, 그들의 변함없는 친절에서 큰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191:5.2 (2042.6) They were having their evening meal a little after six o’clock, with Peter sitting on one side of Thomas and Nathaniel on the other, when the doubting apostle said: “I will not believe unless I see the Master with my own eyes and put my finger in the mark of the nails.” As they thus sat at supper, and while the doors were securely shut and barred, the morontia Master suddenly appeared inside the curvature of the table and, standing directly in front of Thomas, said: 오후 6시 조금 지나 저녁 식사 시간에, 베드로와 나다나엘 사이에 있던 의심이 많은 그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주(主)를 보고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문들은 아직도 견고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앉아서 그들이 식사 하고 있을 때, 부활체 주(主)께서 식탁 모서리에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도마 앞으로 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5.3 (2043.1) “Peace be upon you. For a full week have I tarried that I might appear again when you were all present to hear once more the commission to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is gospel of the kingdom. Again I tell you: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so send I you. As I have revealed the Father, so shall you reveal the divine love, not merely with words, but in your daily living. I send you forth, not to love the souls of men, but rather to love men. You are not merely to proclaim the joys of heaven but also to exhibit in your daily experience these spirit realities of the divine life since you already have eternal life, as the gift of God, through faith. When you have faith, when power from on high, the Spirit of Truth, has come upon you, you will not hide your light here behind closed doors; you will make known the love and the mercy of God to all mankind. Through fear you now flee from the facts of a disagreeable experience, but when you shall have been baptized with the Spirit of Truth, you will bravely and joyously go forth to meet the new experiences of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eternal life in the kingdom of God. You may tarry here and in Galilee for a short season while you recover from the shock of the transition from the false security of the authority of traditionalism to the new order of the authority of facts, truth, and faith in the supreme realities of living experience. Your mission to the world is founded on the fact that I lived a God-revealing life among you; on the truth that you and all other men are the sons of God; and it shall consist in the life which you will live among men — the actual and living experience of loving men and serving them, even as I have loved and served you. Let faith reveal your light to the world; let the revelation of truth open the eyes blinded by tradition; let your loving service effectually destroy the prejudice engendered by ignorance. By so drawing close to your fellow men in understanding sympathy and with unselfish devotion, you will lead them into a saving knowledge of the Father’s love. The Jews have extolled goodness; the Greeks have exalted beauty; the Hindus preach devotion; the faraway ascetics teach reverence; the Romans demand loyalty; but I require of my disciples life, even a life of loving service for your brothers in the flesh.” “평강이 너에게 있으라. 너희가 모두 함께 있을 때 내가 다시 나타나서, 온 세계로 나가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임무를 전달하려고, 내가 일주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내가 아버지를 나타낸 것처럼,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 나타내어라. 나는 사람들의 혼이 아니라, 사람들 자체를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는 하늘의 기쁨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 너희가 이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성한 생명의 영적 실체들도 보여주어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서, 위로부터의 능력인 진리의 영이 임하면, 너희들은 닫힌 문들 뒤에 너희들의 빛을 숨기지 말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에게 알리라. 너희가 지금은 두려움 때문에, 인정하기 어려운 경험적 사실에서 도피하고 있지만, 너희가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영생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용감하고 기쁘게 나아가리라. 너희는 전통주의의 권위에 근거한 거짓된 보호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체험의 최상의 실체들 속에 있는 사실들과 진리 그리고 믿음의 권위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는 충격에서 회복되는 동안, 이곳과 갈릴리에 잠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들 안에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과, 너희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긴 것처럼, 너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실제적인 체험 가운데 너희들의 일생을 통해 그 사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으로 너희 빛을 세상에 비취라. 진리를 계시하여 전통으로 멀어 있는 눈을 뜨게 하라. 너희들은 사랑의 섬김으로, 무지로 인한 선입관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라. 깊이 이해하는 동정심과 애타적인 헌신으로 너희 친구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너희는 아버지 사랑이 담긴 구원의 지식으로 그들을 인도하라. 유대인들은 선(善)을 찬양하고,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칭송하며, 힌두인들은 헌신을 강조하고, 옛 금욕주의자들은 위엄을 가르쳤고, 로마인들은 충성을 요구했지만, 나는 내 제자들에게 육신으로 너희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생을 요구하노라.”

191:5.4 (2043.2) When the Master had so spoken, he looked down into the face of Thomas and said: “And you, Thomas, who said you would not believe unless you could see me and put your finger in the nail marks of my hands, have now beheld me and heard my words; and though you see no nail marks on my hands, since I am raised in the form that you also shall have when you depart from this world, what will you say to your brethren? You will acknowledge the truth, for already in your heart you had begun to believe even when you so stoutly asserted your unbelief. Your doubts, Thomas, always most stubbornly assert themselves just as they are about to crumble. Thomas, I bid you be not faithless but believing — and I know you will believe, even with a whole heart.” 말씀을 마친 주(主)님은 도마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의 못 자국에 네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너, 도마야, 이제는 네가 나를 보았고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세상을 떠날 때 너희에게 임할 그 형체로 내가 살아났기 때문에, 내 손에서 네가 못 자국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네 형제들에게 이제는 무엇이라 말하려 하느냐? 네가 그토록 거부하면서도, 이미 네 마음으로 네가 믿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너는 진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도마야, 무너지는 순간에 너의 의심은 아주 완강히 버티려 하지만, 도마야, 너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나는 네가 전심으로 믿을 것을 알고 있다.”

191:5.5 (2043.3) When Thomas heard these words, he fell on his knees before the morontia Master and exclaimed, “I believe! My Lord and my Master!” Then said Jesus to Thomas: “You have believed, Thomas, because you have really seen and heard me. Blessed are those in the ages to come who will believe even though they have not seen with the eye of flesh nor heard with the mortal ear.”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부활체 주(主)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믿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主)시여!” 그러자 예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나를 실제로 보고 들었기 때문에 믿게 되었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의 귀로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191:5.6 (2043.4) And then, as the Master’s form moved over near the head of the table, he addressed them all, saying: “And now go all of you to Galilee, where I will presently appear to you.” After he said this,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그 후 주(主)님은 식탁 윗자리로 가셔서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모두 갈릴리로 가라, 내가 그곳에서 곧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 말씀 후에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지셨습니다.

191:5.7 (2044.1) The eleven apostles were now fully convinc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and very early the next morning, before the break of day, they started out for Galilee. 이제 열 한 사도들은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는 사실을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으며, 다음 날 이른 아침,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그들은 갈릴리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6. The Alexandrian Appearance 알렉산드리아에 출현

160619 부활13 –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2th) 요16:13-14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91:6.1 (2044.2) While the eleven apostles were on the way to Galilee, drawing near their journey’s end, on Tuesday evening, April 18, at about half past eight o’clock, Jesus appeared to Rodan and some eighty other believers, in Alexandria. This was the Master’s twelfth appearance in morontia form. Jesus appeared before these Greeks and Jews at the conclusion of the report of David’s messenger regarding the crucifixion. This messenger, being the fifth in the Jerusalem-Alexandria relay of runners, had arrived in Alexandria late that afternoon, and when he had delivered his message to Rodan, it was decided to call the believers together to receive this tragic word from the messenger himself. At about eight o’clock, the messenger, Nathan of Busiris, came before this group and told them in detail all that had been told him by the preceding runner. Nathan ended his touching recital with these words: “But David, who sends us this word, reports that the Master, in foretelling his death, declared that he would rise again.” Even as Nathan spoke, the morontia Master appeared there in full view of all. And when Nathan sat down, Jesus said: 갈릴리를 향하여 길을 떠난 열 한 명의 사도들이, 여행 목적지에 거의 도착되었을 무렵인, 4월 18일 화요일 저녁 오후 8시 30분 경, 예수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을 비롯하여 80 여명의 다른 신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주(主)께서 부활체 형태로 나타나신 12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연락원이 십자가형에 대하여 보고를 마칠 때에 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연락원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연계식으로 달리는 연락원들 중에서 다섯 번째 사람이었으며, 그 날 오후 늦게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고, 그가 소식을 로단에게 전해주었을 때, 그 연락원으로부터 이 비극적인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신자들을 모두 소집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었습니다. 8시쯤 되어서, 부시리스의 나단이라는 이 연락원은 무리들 앞으로 나와서, 자기 앞사람으로부터 들은 모든 이야기를 그들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단은 그의 감동적인 설명을 마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이 말을 전하게 한 다윗은 주(主)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였다는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확언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활체 주(主)님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나단이 자리에 앉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1:6.2 (2044.3) “Peace be upon you. That which my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to establish belongs not to a race, a nation, nor to a special group of teachers or preachers. This gospel of the kingdom belongs to both Jew and gentile, to rich and poor, to free and bond, to male and female, even to the little children. And you are all to proclaim this gospel of love and truth by the lives which you live in the flesh. You shall love one another with a new and startling affection, even as I have loved you. You will serve mankind with a new and amazing devotion, even as I have served you. And when men see you so love them, and when they behold how fervently you serve them, they will perceive that you have become faith-fellows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they will follow after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y see in your lives, to the finding of eternal salvation.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세우시려는 것은 한 민족이나 국가 또는 특정한 무리의 선생들이나 설교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자유로운 자나 속박 받는 자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육신으로 사는 그 삶들을 통하여 이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새롭고도 놀라운 애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는 새롭고도 놀라운 헌신으로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그리고 너희가 얼마나 열렬하게 그들을 섬기는지를 그들이 보게 될 때, 그들은 너희가 하늘나라 신앙의 친구들이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도 영원한 구원을 찾기 위하여, 너희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을 따라가고자 할 것이다.”

191:6.3 (2044.4)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is world, even so now send I you. You are all called to carry the good news to those who sit in darkness. This gospel of the kingdom belongs to all who believe it; it shall not be committed to the custody of mere priests. Soon will the Spirit of Truth come upon you, and he shall lead you into all truth. Go you, therefore,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s.” “내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너희 모두는 암흑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며, 단지 사제들의 역할에만 맡겨지지 않을 것이다. 곧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며,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라, 보라 내가 시대들이 끝나는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191:6.4 (2044.5) When the Master had so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All that night these believers remained there together recounting their experiences as kingdom believers and listening to the many words of Rodan and his associates. And they all believed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Imagine the surprise of David’s herald of the resurrection, who arrived the second day after this, when they replied to his announcement, saying: “Yes, we know, for we have seen him. He appeared to us day before yesterday.” 주(主)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 신자들은 그 날 밤 내내 그곳에 함께 남아서,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들로서의 체험들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로단과 그의 동료들의 많은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났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에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다윗의 사자(使者)가 자신이 전해 준 소식에 대하여 그들이 “예, 우리는 그를 보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저께 우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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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6 Baptism and the Forty Days 세례와 40일

Paper 136

Baptism and the Forty Days 세례와 40일

1. Concepts of the Expected Messiah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들
2. The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3. The Forty Days 40일
Conference with Gabriel 가브리엘과 회담
Completion of universe sovereignty 우주 주권의 완성
4. Plans for Public Work 공(公)사역 계획
The Father’s way 아버지의 길
5. The First Great Decision 첫 번째 중대한 결정
Personalized Adjuster in command 고유성화 조율자 사령관
Insensitivity of Adjuster to time 시간에 대한 조율자의 불감(不感)성
6. The Second Decision 두 번째 결정
The path of normal earthly existence 지상 존재의 정상적 경로
7. The Third Decision 세 번째 결정
Obedience to natural law 자연법칙을 준수함
8. The Fourth Decision 네 번째 결정
Refusal to compromise with evil 악과 타협 거부
9. The Fifth Decision 다섯 번째 결정
Rejection of David’s throne 다윗의 왕좌 거절
10. The Sixth Decision 여섯 번째 결정
“I will be subject to the will of my Father.” “나는 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리라.”

170628 수요 예수90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I tell you the truth: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136:0.1 (1509.1) JESUS began his public work at the height of the popular interest in John’s preaching and at a time when the Jewish people of Palestine were eagerly looking for the appearance of the Messiah. There was a great contrast between John and Jesus. John was an eager and earnest worker, but Jesus was a calm and happy laborer; only a few times in his entire life was he ever in a hurry. Jesus was a comforting consolation to the world and somewhat of an example; John was hardly a comfort or an example. He preached the kingdom of heaven but hardly entered into the happiness thereof. Though Jesus spoke of John as the greatest of the prophets of the old order, he also said that the least of those who saw the great light of the new way and entered thereby into the kingdom of heaven was indeed greater than John. 요한의 설교가 인기의 절정(絶頂)에 이르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요한은 열렬하고 진지한 일군이었지만, 예수님은 침착하고 행복한 노동자였으며; 그의 온 일생 동안 단지 몇 번을 제외하고는 결코 서두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격려를 주는 위로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모범이었으나, 요한은 도저히 위로나 모범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전파하였지만 그로 인한 행복의 세계 안으로는 거의 들어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구(舊) 서열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호평하였지만, 그는 또한 새로운 길이 되는 위대한 빛을 보고 그것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간 자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참으로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6:0.2 (1509.2) When John preached the coming kingdom, the burden of his message was: Repent! flee from the wrath to come. When Jesus began to preach, there remained the exhortation to repentance, but such a message was always followed by the gospel, the good tidings of the joy and liberty of the new kingdom.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를 전파하였을 때, 그의 메시지의 요점은 “회개하라! 앞으로 올 진노(震怒)를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설교를 시작하였을 때, 회개하라는 권고는 같았지만, 그러한 메시지에는 언제는 복음, 즉 새로운 나라의 기쁨과 자유의 행복한 소식이 뒤따랐습니다.

1. Concepts of the Expected Messiah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170705 수요 예수91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136:1.1 (1509.3) The Jews entertained many ideas about the expected deliverer, and each of these different schools of Messianic teaching was able to point to statements in the Hebrew scriptures as proof of their contentions. In a general way, the Jews regarded their national history as beginning with Abraham and culminating in the Messiah and the new age of the kingdom of God. In earlier times they had envisaged this deliverer as “the servant of the Lord,” then as “the Son of Man,” while latterly some even went so far as to refer to the Messiah as the “Son of God.” But no matter whether he was called the “seed of Abraham” or “the son of David,” all were agreed that he was to be the Messiah, the “anointed one.” Thus did the concept evolve from the “servant of the Lord” to the “son of David,” “Son of Man,” and “Son of God.” 유대인들은 고대하던 구원자(해방자)에 관한 많은 관념들을 갖고 있었으며, 메시아를 가르치는 이들 여러 다른 학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히브리 경전의 문구들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메시아와 하나님의 나라인 새 시대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이 구원자(해방자)를 “주님의 종”으로 상상하였고, 그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로, 또한 더 후대에 더러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브라함의 씨”나 “다윗의 아들”로 부르든, 상관하지 않고, 그가 메시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리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개념은 “주님의 종”으로부터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136:1.2 (1509.4) In the days of John and Jesus the more learned Jews had developed an idea of the coming Messiah as the perfected and representative Israelite, combining in himself as the “servant of the Lord” the threefold office of prophet, priest, and king. 요한과 예수님 당시에 활동하던 좀 더 유식한 유대인들은 곧 오실 메시아를 완전하게 된 대표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관념으로 개발하여 그 안에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삼중적 직분을 “주님의 종”으로 통합시켰습니다.

136:1.3 (1509.5) The Jews devoutly believed that, as Moses had delivered their fathers from Egyptian bondage by miraculous wonders, so would the coming Messiah deliver the Jewish people from Roman domination by even greater miracles of power and marvels of racial triumph. The rabbis had gathered together almost five hundred passages from the Scriptures which, notwithstanding their apparent contradictions, they averred were prophetic of the coming Messiah. And amidst all these details of time, technique, and function, they almost completely lost sight of the personality of the promised Messiah. They were looking for a restoration of Jewish national glory — Israel’s temporal exaltation — rather than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 It therefore becomes evident that Jesus of Nazareth could never satisfy this materialistic Messianic concept of the Jewish mind. Many of their reputed Messianic predictions, had they but viewed these prophetic utterances in a different light, would have very naturally prepared their minds for a recognition of Jesus as the terminator of one age and the inaugurator of a new and better dispensation of mercy and salvation for all nations.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기 선조들을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놀라운 기적으로 구했던 것처럼, 오시는 메시아는 더욱 더 큰 기적의 권능과 인종적 승리의 경이로움을 가지고 유대 백성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열렬하게 믿었습니다. 랍비들은 성서에서 거의 500 구절을 수집하였으며, 명백한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들이 오시는 메시아를 예언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기법, 기능의 세부사항에 집착하는 가운데,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고유성(인격)에 대한 시각은 거의 완벽하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보다는 유대의 민족적 영광─이스라엘의 세속적인 지위 향상─이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메시아의 개념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음이 명백해집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유명한 메시아 예언들 대부분 즉, 이 예언적 언급들을 다른 빛으로 보았었더라면, 예수님을,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자로서, 모든 민족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푸는 새롭고 더 좋은 섭리시대를 시작하는 분으로, 인식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매우 자연스럽게 준비시켰을 것입니다.

136:1.4 (1510.1) The Jews had been brought up to believe in the doctrine of the Shekinah. But this reputed symbol of the Divine Presence was not to be seen in the temple. They believed that the coming of the Messiah would effect its restoration. They held confusing ideas about racial sin and the supposed evil nature of man. Some taught that Adam’s sin had cursed the human race, and that the Messiah would remove this curse and restore man to divine favor. Others taught that God, in creating man, had put into his being both good and evil natures; that when he observed the outworking of this arrangement, he was greatly disappointed, and that “He repented that he had thus made man.” And those who taught this believed that the Messiah was to come in order to redeem man from this inherent evil nature. 유대인들은 후광(後光)의 교리를 믿도록 양육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현존의 이 유명한 상징은 성전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시는 메시아가 그것의 회복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종족의 죄와 가정(假定)된, 사람의 악한 본성에 대하여 혼동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의 죄로 인류가 저주를 받게 되었고, 메시아가 이 저주를 없애고 사람에게 신적 은총이 회복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면서 그 존재 안에 선과 악의 본성들을 모두 넣었다고 가르쳤으며; 그가 이러한 일의 결과를 보고 매우 실망하셨으며, “그렇게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가르쳤던 자들은, 이러한 본래부터 악한 본성에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36:1.5 (1510.2) The majority of the Jews believed that they continued to languish under Roman rule because of their national sins and because of the halfheartedness of the gentile proselytes. The Jewish nation had not wholeheartedly repented; therefore did the Messiah delay his coming. There was much talk about repentance; wherefore the mighty and immediate appeal of John’s preaching, “Repent and be baptized,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the kingdom of heaven could mean only one thing to any devout Jew: The coming of the Messiah.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죄 때문에,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의 반신반의하는 건성 때문에, 자신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계속 쇠약해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메시아가 오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회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그런 이유로 해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설교는 그들에게 강력하면서도 즉각적인 호소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떤 열렬한 유대인에게라도 하늘나라라는 말은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였습니다.

136:1.6 (1510.3) There was one feature of the bestowal of Michael which was utterly foreign to the Jewish conception of the Messiah, and that was the union of the two natures,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Jews had variously conceived of the Messiah as perfected human, superhuman, and even as divine, but they never entertained the concept of the union of the human and the divine. And this was the great stumbling block of Jesus’ early disciples. They grasped the human concept of the Messiah as the son of David, as presented by the earlier prophets; as the Son of Man, the superhuman idea of Daniel and some of the later prophets; and even as the Son of God, as depicted by the author of the Book of Enoch and by certain of his contemporaries; but never had they for a single moment entertained the true concept of the union in one earth personality of the two natures, the human and the divine. The incarnation of the Creator in the form of the creature had not been revealed beforehand. It was revealed only in Jesus; the world knew nothing of such things until the Creator Son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the mortals of the realm. 미가엘 증여에 있어서, 유대 메시아의 개념과 매우 다른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본성의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완전한 인간, 초인간, 그리고 신성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결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결코 생각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제시하였던 대로, 메시아에 대한 인간 개념을 다윗의 아들로서 파악했습니다. 다니엘과 후기의 여러 선지자들은 초인간적 관념인 사람의 아들로서 파악했고; 에녹서의 저자나 그의 동시대 사람들 중 일부에 의해 묘사되었던 대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가지의 본성이 이 세상의 한 고유성으로 연합한다는 참된 개념은 한 순간도 고려해본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창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주가 육신이 되심은 과거에는 한 번도 계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 계시되었으며; 창조주 아들이 육신으로 와서 그 땅의 필사자들 가운데에 거하시기 전까지, 세상은 그러한 일들을 알 수 없었습니다.

2. The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170712 수요 예수92 눅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1 When all the people were being baptized, Jesus was baptized too. And as he was praying, heaven was opened 22 and the Holy Spirit descended on him in bodily form like a dove.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whom I love; with you I am well pleased.”

136:2.1 (1510.4) Jesus was baptized at the very height of John’s preaching when Palestine was aflame with the expectancy of his message —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 when all Jewry was engaged in serious and solemn self-examination. The Jewish sense of racial solidarity was very profound. The Jews not only believed that the sins of the father might afflict his children, but they firmly believed that the sin of one individual might curse the nation. Accordingly, not all who submitted to John’s baptism regarded themselves as being guilty of the specific sins which John denounced. Many devout souls were baptized by John for the good of Israel. They feared lest some sin of ignorance on their part might delay the coming of the Messiah. They felt themselves to belong to a guilty and sin-cursed nation, and they presented themselves for baptism that they might by so doing manifest fruits of race penitence. It is therefore evident that Jesus in no sense received John’s baptism as a rite of repentance or for the remission of sins. In accepting baptism at the hands of John, Jesus was only following the example of many pious Israelites. 예수님은, 요한의 설교가 절정에 달하여 팔레스타인이 그의 메시지─“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불이 붙고, 온 유대가 심각하고 엄숙하게 자기-반성을 할 당시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인종적 연대감은 굉장히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죄가 그의 자녀들을 괴롭힌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 개별존재의 죄가 민족을 저주할 수도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아갔던 사람들 모두가, 요한이 비난하였던 특정한 죄를 자신들이 지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많은 사람들(혼들)은 이스라엘의 평안을 위하여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지연될까봐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죄가 있고 죄로 저주받은 민족에 속해 있다고 느꼈으므로, 스스로 세례를 받으러 나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족적 참회의 결실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의 의식이나 죄 사함을 위하여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요한의 손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께서 여러 독실한 유대인들의 본보기를 따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136:2.2 (1511.1) When Jesus of Nazareth went down into the Jordan to be baptized, he was a mortal of the realm who had attained the pinnacle of human evolutionary ascension in all matters related to the conquest of mind and to self-identification with the spirit. He stood in the Jordan that day a perfected mortal of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Perfect synchrony and full communication had become established between the mortal mind of Jesus and the indwelling spirit Adjuster, the divine gift of his Father in Paradise. And just such an Adjuster indwells all normal beings living on Urantia since the ascension of Michael to the headship of his universe, except that Jesus’ Adjuster had been previously prepared for this special mission by similarly indwelling another superhuman incarnated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Machiventa Melchizedek. 나사렛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마음의 정복에 관계되고 영과 함께하는 자아(自我)-정체화 달성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진화적 상승의 정점에 도달한, 그 영역의 필사자이셨습니다. 그는 그 날,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세상들 속에서 하나의 완전하게 된 필사자로 요단강에 서셨습니다. 완전한 동시성과 충만한 소통이, 예수님의 필사자 마음과 내주(內住)하는 영 조절자, 즉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신적 선물 사이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필사자 육신, 즉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육신화하여 또다른 초인간 안에 내주하심처럼 비슷하게, 예수님의 조절자가 이러한 특별 임무를 위하여 앞서서 준비되신 것을 제외하고는, 미가엘이 자기 우주의 우두머리 신분으로 상승하신 이래로, 바로 그런 조절자가 지구(유란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정상 존재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136:2.3 (1511.2) Ordinarily, when a mortal of the realm attains such high levels of personality perfection, there occur those preliminary phenomena of spiritual elevation which terminate in eventual fusion of the matured soul of the mortal with its associated divine Adjuster. And such a change was apparently due to take place in the personality experience of Jesus of Nazareth on that very day when he went down into the Jordan with his two brothers to be baptized by John. This ceremony was the final act of his purely human life on Urantia, and many superhuman observers expected to witness the fusion of the Adjuster with its indwelt mind, but they were all destined to suffer disappointment. Something new and even greater occurred. As John laid his hands upon Jesus to baptize him, the indwelling Adjuster took final leave of the perfected human soul of Joshua ben Joseph. And in a few moments this divine entity returned from Divinington as a Personalized Adjuster and chief of his kind throughout the entire local universe of Nebadon. Thus did Jesus observe his own former divine spirit descending on its return to him in personalized form. And he heard this same spirit of Paradise origin now speak,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And John, with Jesus’ two brothers, also heard these words. John’s disciples, standing by the water’s edge, did not hear these words, neither did they see the apparition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Only the eyes of Jesus beheld the Personalized Adjuster. 일반적으로, 그 영역에 있는 한 필사자가 그렇게 높은 고유성의 완전함의 차원에 도달할 때, 거기에는 필사자의 성숙한 혼이 그와 관계된 신적 조절자와의 결국 발생하는 융합으로 종결되는, 영적 고양(高揚)의 예비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예수께서 두 동생들과 함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내려가신 그 날에 나사렛 예수의 고유성 체험 속에서 일어나도록 명백하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의식(儀式)은 그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순수한 인간 일생의 마지막 행동이었으며, 많은 초인간적 관찰자들은 조절자가 자신이 내주하고 있던 마음과 융합하는 것을 목격하리라고 기대했었지만, 그들은 모두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롭고 더 큰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한이 그에게 세례를 주기 위하여 예수님 위에 손을 얹자, 내주하던 조절자가 요셉의 아들 여호수아의 완전해진 인간 혼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신적 실존개체는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되어 신별로부터 돌아왔는데, 그는 네바돈에 있는 전체 지역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 자신의 이전의 신적 영이 고유성이 구현된 형태로 자기에게로 되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 기원된 바로 그 영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두 동생들과 요한도 역시 이 말을 들었습니다. 물가에 서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말들을 듣지 못하였고,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출현도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눈에만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보였습니다.

136:2.4 (1511.3) When the returned and now exalted Personalized Adjuster had thus spoken, all was silence. And while the four of them tarried in the water, Jesus, looking up to the near-by Adjuster, prayed: “My Father who reigns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even as it is in heaven.” When he had prayed, the “heavens were opened,” and the Son of Man saw the vision, presented by the now Personalized Adjuster, of himself as a Son of God as he was before he came to earth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as he would be when the incarnated life should be finished. This heavenly vision was seen only by Jesus. 이제는 고귀한 신분이 된 고유성 구현된 조절자가 다시 돌아와 그렇게 말할 때,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 네 명이 물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예수님은 가까이에 있는 조절자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을 다스리시는 나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환영(幻影)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에 의해 제시되어진 것이었으며, 그가 육신을 입고 필사자로 내려오기 전의 자신의 모습과, 그가 육신화된 일생을 끝냈을 후에 될 그의 모습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환영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환영은 오직 예수께만 보였습니다.

136:2.5 (1512.1) It was the voic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that John and Jesus heard, speaking in behalf of the Universal Father, for the Adjuster is of, and as, the Paradise Father. Throughout the remainder of Jesus’ earth life this Personalized Adjuster was associated with him in all his labors; Jesus was in constant communion with this exalted Adjuster. 요한과 예수께서 들었던 것은, 우주 아버지를 대신해서 말했던,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목소리였는데, 왜냐하면 조절자가 천국 아버지의 일부이고, 아버지로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땅에서의 나머지 일생을 통하여, 이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그의 모든 일에 있어서 그와 함께 관련되셨으며, 예수님은 고귀한 신분이 된 이 조절자와 항상 교제하였습니다.

136:2.6 (1512.2) When Jesus was baptized, he repented of no misdeeds; he made no confession of sin. His was the baptism of consecration to the performance of the will of the heavenly Father. At his baptism he heard the unmistakable call of his Father, the final summons to be about his Father’s business, and he went away into private seclusion for forty days to think over these manifold problems. In thus retiring for a season from active personality contact with his earthly associates, Jesus, as he was and on Urantia, was following the very procedure that obtains on the morontia worlds whenever an ascending mortal fuses with the inner presence of the Universal Father.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을 때, 그는 아무런 잘못도 회개하지 않았으며; 아무 죄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헌신하는 세례였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그는 아버지의 일을 시작하라는 마지막 호출인 아버지의 명백한 부르심을 들었으며,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을 심사숙고할 수 있도록 혼자 있기 위하여 40일 동안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의 동료들과 활발한 인격(고유성) 접촉을 그렇게 얼마동안 피하심으로써, 자신이 계셨던 그대로, 부활체(모론시아) 세상들에서 상승하는 필사자가 우주 아버지의 내적 현존과 융합할 때마다 거치는 바로 그 과정을 지구(유란시아)에서 밟으셨습니다.

136:2.7 (1512.3) This day of baptism ended the purely human life of Jesus. The divine Son has found his Father, the Universal Father has found his incarnated Son, and they speak the one to the other. 세례 받은 이 날에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일생을 끝마쳤습니다. 신적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발견하였고, 우주의 아버지는 자신의 육신화한 아들을 발견하셨으며,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136:2.8 (1512.4) (Jesus was almost thirty-one and one-half years old when he was baptized. While Luke says that Jesus was baptized in the fifteenth year of the reign of Tiberius Caesar, which would be A.D. 29 since Augustus died in A.D. 14, it should be recalled that Tiberius was coemperor with Augustus for two and one-half years before the death of Augustus, having had coins struck in his honor in October, A.D. 11. The fifteenth year of his actual rule was, therefore, this very year of A.D. 26, that of Jesus’ baptism. And this was also the year that Pontius Pilate began his rule as governor of Judea.)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당시(AD 26, 1.14)에, 거의 31살 반이었습니다. 누가는 티베리우스 시저가 통치하던 15년째 해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죽었으므로, 그것은 서기 29년이 되어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에 그와 함께 2년 반 동안 함께 공동 황제로 있었고, 서기 11년 10월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였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의 실제로 통치하던 15년째 되는 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던 바로 서기 26년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해에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 The Forty Days 40일

170719 수요 예수93 막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2 At once the Spirit sent him out into the desert, 13 and he was in the desert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angels attended him.

136:3.1 (1512.5) Jesus had endured the great temptation of his mortal bestowal before his baptism when he had been wet with the dews of Mount Hermon for six weeks. There on Mount Hermon, as an unaided mortal of the realm, he had met and defeated the Urantia pretender, Caligastia, the prince of this world. That eventful day, on the universe records, Jesus of Nazareth had become the Planetary Prince of Urantia. And this Prince of Urantia, so soon to be proclaimed supreme Sovereign of Nebadon, now went into forty days of retirement to formulate the plans and determine upon the technique of proclaiming the new kingdom of God in the hearts of men.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헤르몬 산 위에서 이슬을 맞으며 6주 동안을 자신의 필사자 증여에서의 큰 유혹을 견디어 낸 적이 있었습니다. 헤르몬 산 그 위에서, 그는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어떤 도움도 없이, 지구(유란시아)의 왕위를 요구하는 세상의 영주인 칼리가스티아를 만나 그를 격퇴시켰습니다. 우주의 기록에 의하면, 그 파란만장한 날에 나사렛 예수께서는 지구(유란시아)의 행성영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곧 네바돈의 최극 주권자로 선포되어질, 지구(유란시아)의 이 영주는, 이제 사람들의 심정에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계획을 구상하고 그 기법을 결정짓기 위하여 40일 간의 은둔에 들어갔습니다.

136:3.2 (1512.6) After his baptism he entered upon the forty days of adjusting himself to the changed relationships of the world and the universe occasioned by the personalization of his Adjuster. During this isolation in the Perean hills he determined upon the policy to be pursued and the methods to be employed in the new and changed phase of earth life which he was about to inaugurate. 세례를 받은 후에, 그는 자신의 조절자가 고유성이 구현된 계기로,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해 달라진 관계에 자신을 조절하기 위한 40일을 시작했습니다. 페레아 언덕에서 혼자 계셨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새롭게 변경된 지상 일생의 국면에서, 자신이 곧 시작하여 추구해야할 정책과 사용되어질 방법들에 대하여 결정하셨습니다.

136:3.3 (1512.7) Jesus did not go into retirement for the purpose of fasting and for the affliction of his soul. He was not an ascetic, and he came forever to destroy all such notions regarding the approach to God. His reasons for seeking this retirement were entirely different from those which had actuated Moses and Elijah, and even John the Baptist. Jesus was then wholly self-conscious concerning his relation to the universe of his making and also to the universe of universes, supervised by the Paradise Father, his Father in heaven. He now fully recalled the bestowal charge and its instructions administered by his elder brother, Immanuel, ere he entered upon his Urantia incarnation. He now clearly and fully comprehended all these far-flung relationships, and he desired to be away for a season of quiet meditation so that he could think out the plans and decide upon the procedures for the prosecution of his public labors in behalf of this world and for all other worlds in his local universe. 예수님은 금식(禁食)을 목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혼에 고통을 주려고 은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행자(苦行者)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과정에서 그런 모든 개념들을 언제까지나 폐지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이러한 은둔 기간을 갖고자 하였던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심지어 세례요한이 가졌던 동기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이신 천국 아버지께서 감독하시는, 자신이 만든 우주와, 또한 우주들의 우주와의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그 때 전적으로 자의식(自意識)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지구(유란시아)에 성육신하여 들어오시기 전에 자기 맏형, 임마누엘에 의해 관리되었던 증여 임무와 그 지시들을 충분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는 이제 이 모든 광대하게 퍼져 있는 관계들을 명료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셨으며, 이 세상과 자신의 지역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세상들을 위해, 그의 대중을 위한 수고를 실행하는 계획들을 생각하고 그 과정을 결정하기 위하여 한 동안 조용히 명상하려고 떠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헤르몬 산의 보낸 6주(31세 AD25)의 마지막 날(반란 종결과 인간으로서 증여 완성으로 우주 주권 획득)과 세례일(주권 획득 공식선포).
136:3.4 (1513.1) While wandering about in the hills, seeking a suitable shelter, Jesus encountered his universe chief executive, Gabriel, the Bright and Morning Star of Nebadon. Gabriel now re-established personal communication with the Creator Son of the universe; they met directly for the first time since Michael took leave of his associates on Salvington when he went to Edentia preparatory to entering upon the Urantia bestowal. Gabriel, by direction of Immanuel and on authority of the Uversa Ancients of Days, now laid before Jesus information indicating that his bestowal experience on Urantia was practically finished so far as concerned the earning of the perfect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and the termination of the Lucifer rebellion. The former was achieved on the day of his baptism when the personalization of his Adjuster demonstrated the perfection and completion of his bestowal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and the latter was a fact of history on that day when he came down from Mount Hermon to join the waiting lad, Tiglath. Jesus was now informed, upon the highest authority of the local universe and the superuniverse, that his bestowal work was finished in so far as it affected his personal status in relation to sovereignty and rebellion. He had already had this assurance direct from Paradise in the baptismal vision and in the phenomenon of the personalization of his indwelling Thought Adjuster. 적당한 거처를 찾아 언덕을 방황하다가, 예수님은 자기 우주의 우두머리 집행자인 네바돈의 빛나는 새벽별, 즉 가브리엘을 만났습니다. 가브리엘은 이제 우주의 창조주 아들과 개인적 교통을 재수립하였으며; 미가엘이 지구(유란시아) 증여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에덴시아로 갔을 때 구원자별에서 그의 동료들과 작별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은 직접 대면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임마누엘의 지시와 유버사의 옛적으로 늘 계신 이의 권위에 근거하여, 이제 그가 우주의 완전해진 주권 획득과 루시퍼 반란의 종결에 관하여, 그의 지구(유란시아) 증여 체험이 실질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예수님 앞에 제시하였습니다. 전자(前者)는, 그의 조절자의 고유성구현이 육신으로의 그의 증여의 완전과 완성을 실증하였던 때인 그의 세례(洗禮) 날에 성취되었으며, 후자(後者)는, 그가 기다리고 있던 티글라스라는 소년을 만나러 헤르몬 산에서 내려온 그날에 성취되었던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지역우주와 초우주의 최고 권위에 근거하여, 주권과 반역에 관계되는 그의 개인적 지위에 영향을 주는 점에 있어서, 이제 그의 증여 임무가 끝이 났음을, 이제 예수님은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 받던 날에 있었던 환영(幻影)과 자신 안에 거했던 생각 조절자의 고유성 구현의 현상을 통하여, 천국으로부터 직접적인 확인을 이미 받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136:3.5 (1513.2) While he tarried on the mountain, talking with Gabriel, the Constellation Father of Edentia appeared to Jesus and Gabriel in person, saying: “The records are completed. The sovereignty of Michael number 611,121 over his universe of Nebadon rests in completion at the right hand of the Universal Father. I bring to you the bestowal release of Immanuel, your sponsor-brother for the Urantia incarnation. You are at liberty now or at any subsequent time, in the manner of your own choosing, to terminate your incarnation bestowal, ascend to the right hand of your Father, receive your sovereignty, and assume your well-earned unconditional rulership of all Nebadon. I also testify to the completion of the records of the superuniverse, by authorization of the Ancients of Days, having to do with the termination of all sin-rebellion in your universe and endowing you with full and unlimited authority to deal with any and all such possible upheavals in the future. Technically, your work on Urantia and in the flesh of the mortal creature is finished. Your course from now on is a matter of your own choosing.” 그가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시며 산에 머무는 동안,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가 예수님과 가브리엘 앞에 직접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록이 완결되었습니다. 미가엘 611,121번이 네바돈 자신의 우주에 대한 주권은 우주 아버지의 오른 손에 완성되어 놓여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후원자-형님인 임마누엘이 보낸, 지구(유란시아) 육신화 증여에 대한 해제(解除)의 소식을, 당신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은 이제 또는 이후 어느 때라도, 당신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육신화 증여를 끝내고, 당신의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가, 당신의 주권을 되돌려 받고, 당신이 마땅히 얻은 모든 네바돈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자유롭게 맡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또한 옛적으로 계신이의 권위로, 당신의 우주에서 모든 죄-반란을 종결시켰고, 미래에 있어서의 그러한 잠재적인 격동들의 어떤 것이나 혹은 모든 것을 다루기 위한, 충만하고도 무제한적 권한이 당신에게 부여된, 초우주의 기록이 완성된 것을 증언합니다. 실제적으로는 필사자의 몸을 입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당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행로는 당신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136:3.6 (1513.3) When the Most High Father of Edentia had taken leave, Jesus held long converse with Gabriel regarding the welfare of the universe and, sending greetings to Immanuel, proffered his assurance that, in the work which he was about to undertake on Urantia, he would be ever mindful of the counsel he had received in connection with the prebestowal charge administered on Salvington. 에덴시아의 지고자 아버지가 떠났을 때, 예수님은 가브리엘과 우주의 복지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나누셨고, 임마누엘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지구(유란시아)에서 그가 시작하려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구원자별에서 선서하였던, 증여 이전의 임무와 관련하여, 그가 이미 받았던 그 조언을 항상 염두에 두겠다고 확언을 전하셨습니다.

136:3.7 (1514.1) Throughout all of these forty days of isolatio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were engaged in searching for Jesus. Many times they were not far from his abiding place, but never did they find him. 혼자 계시던 이 40일 내내,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여러 번 왔었지만, 그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4. Plans for Public Work 공(公)사역 계획

170726 수요 예수94-95 눅4:1-2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1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desert, 2 where for forty days he was tempted by the devil. He ate nothing during those days, and at the end of them he was hungry.

136:4.1 (1514.2) Day by day, up in the hills, Jesus formulated the plans for the remainder of his Urantia bestowal. He first decided not to teach contemporaneously with John. He planned to remain in comparative retirement until the work of John achieved its purpose, or until John was suddenly stopped by imprisonment. Jesus well knew that John’s fearless and tactless preaching would presently arouse the fears and enmity of the civil rulers. In view of John’s precarious situation, Jesus began definitely to plan his program of public labors in behalf of his people and the world, in behalf of every inhabited world throughout his vast universe. Michael’s mortal bestowal was on Urantia but for all worlds of Nebadon. 날마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지구(유란시아) 증여의 나머지 기간을 위한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시작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요한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가 갑자기 구속되는 불상사로 중단하게 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물러서 있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그 두려움 없는 막무가내의 설교는 곧 시민 통치자들의 두려움과 반감을 유발시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불확실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민족과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광대한 우주를 망라하여 거주민이 사는 모든 세상들을 위하여, 공적 수고의 과정을 분명하게 계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가엘의 필사자 증여는 지구(유란시아)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증여는 네바돈의 모든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36:4.2 (1514.3) The first thing Jesus did, after thinking through the general plan of co-ordinating his program with John’s movement, was to review in his mind the instructions of Immanuel. Carefully he thought over the advice given him concerning his methods of labor, and that he was to leave no permanent writing on the planet. Never again did Jesus write on anything except sand. On his next visit to Nazareth, much to the sorrow of his brother Joseph, Jesus destroyed all of his writing that was preserved on the boards about the carpenter shop, and which hung upon the walls of the old home. And Jesus pondered well over Immanuel’s advice pertaining to his economic, social, and political attitude toward the world as he should find it. 예수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요한의 움직임에 맞추어 자신의 프로그램을 조정하는 대체적인 계획을 고려한 후에, 임마누엘의 지시들을 마음속에서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 이행의 방법들에 관한 것들과 그 행성에 그의 어떤 영구한 필체도 남기지 말라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래 위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은 결코 다시는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목판에 써서 목공소 주위에 걸려 있는 글씨들과 그의 고향집 벽에 걸려있던 자신의 글씨들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렸는데, 그 일은 그의 동생 요셉을 매우 서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당면하여야 할 세상에 대한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태도에 관한 임마누엘의 조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136:4.3 (1514.4) Jesus did not fast during this forty days’ isolation. The longest period he went without food was his first two days in the hills when he was so engrossed with his thinking that he forgot all about eating. But on the third day he went in search of food. Neither was he tempted during this time by any evil spirits or rebel personalities of station on this world or from any other world. 예수님은 이 40일(신으로서 증여 시작)의 고립 기간 동안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낸 가장 긴 기간은, 언덕에서 그가 너무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먹는 것조차 잊었던, 첫 2일 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에는 음식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이 세상 혹은 어떤 다른 세상의 반역적인 어떤 악의 영들이나 혹은 반역적인 고유성들에 의해 유혹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136:4.4 (1514.5) These forty days were the occasion of the final conference between the human and the divine minds, or rather the first real functioning of these two minds as now made one. The results of this momentous season of meditation demonstrated conclusively that the divine mind has triumphantly and spiritually dominated the human intellect. The mind of man has become the mind of God from this time on, and though the selfhood of the mind of man is ever present, always does this spiritualized human mind say,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이 40일 기간은, 인간적이고 신성한 마음들 사이에 최종적인 협의가 이루어진 경우였으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마음들이 이제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최초의 실제 활동이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명상 기간의 결과들은 신적 마음이 인간의 지성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해 왔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이 되었으며, 비록 사람 마음의 자아신분이 언제나 존재해 있었지만, 영성화된 이 사람의 마음은 항상,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136:4.5 (1514.6) The transactions of this eventful time were not the fantastic visions of a starved and weakened mind, neither were they the confused and puerile symbolisms which afterward gained record as the “temptations of Jesus in the wilderness.” Rather was this a season for thinking over the whole eventful and varied career of the Urantia bestowal and for the careful laying of those plans for further ministry which would best serve this world while also contributing something to the betterment of all other rebellion-isolated spheres. Jesus thought over the whole span of human life on Urantia, from the days of Andon and Fonta, down through Adam’s default, and on to the ministry of the Melchizedek of Salem. 이러한 사건이 많은 시기의 활동들은 굶주리고 허약해진 마음으로 공상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광야에서의 예수의 시험”으로 나중에 붙여진 기록처럼 혼란되고 미숙한 상징주의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전체적으로 파란이 많고 다양한 지구(유란시아) 증여의 생애를 숙고해 보고, 한편으로는 반역으로 고립된 다른 모든 구체들의 개선에 무언가 기여하면서 이 세상을 최선으로 섬기는 봉사가 되도록 추후의 사역에 대한 계획들을 신중하게 수립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돈과 폰타의 시대로부터 아담의 불이행을 거쳐 살렘의 멜기세덱의 사역에 이르기까지 지구(유란시아)의 인간 일생의 전체 여정을 두루 살펴보셨습니다.

136:4.6 (1514.7) Gabriel had reminded Jesus that there were two ways in which he might manifest himself to the world in case he should choose to tarry on Urantia for a time. And it was made clear to Jesus that his choice in this matter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either his universe sovereignty or the termination of the Lucifer rebellion. These two ways of world ministry were: 가브리엘은 그가 지구(유란시아)에 한동안 더 머물기를 선택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예수님께 상기시켰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선택은 그의 우주 주권이나 혹은 루시퍼 반역의 종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예수님께 분명하게 알렸습니다. 이 세상 사역에서의 두 가지 방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6:4.7 (1515.1) 1. His own way — the way that might seem most pleasant and profitable from the standpoint of the immediate needs of this world and the present edification of his own universe. 그 자신의 길(방법)─이 세상의 즉각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입장과 자신의 우주에서의 당면한 계발(啓發)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적절히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

136:4.8 (1515.2) 2. The Father’s way — the exemplification of a farseeing ideal of creature life visualized by the high personalities of the Paradis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e of universes.아버지의 길(방법)─우주들의 우주에 대한 천국 행정을 맡은 높은 고유성들에 의해 구상되어진 것으로, 창조물 일생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는 이상(理想)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136:4.9 (1515.3) It was thus made clear to Jesus that there were two ways in which he could orde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Each of these ways had something to be said in its favor as it might be regarded in the light of the immediate situation. The Son of Man clearly saw that his choice between these two modes of conduct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his reception of universe sovereignty; that was a matter already settled and sealed on the record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only awaited his demand in person. But it was indicated to Jesus that it would afford his Paradise brother, Immanuel, great satisfaction if he, Jesus, should see fit to finish up his earth career of incarnation as he had so nobly begun it, always subject to the Father’s will. On the third day of this isolation Jesus promised himself he would go back to the world to finish his earth career, and that in a situation involving any two ways he would always choose the Father’s will. And he lived out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always true to that resolve. Even to the bitter end he invariably subordinated his sovereign will to that of his heavenly Father. 그래서 예수님께는 지상에서의 자기 여생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이 뚜렷해졌습니다.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들 각각의 방법은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 두 가지 행동 방법들 중에서 자신이 취한 선택은 자신의 우주 주권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셨으며; 그 문제는 이미 결정되었고 우주들의 우주에서 기록으로 날인(捺印)되어서 단지 그가 직접 요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처럼, 육신화하는 그의 지상 생애도 그에 맞춰 고귀하게 완결되도록 한다면, 그의 천국 형제인 임마누엘에게 큰 만족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이 고립 기간의 3일째 되는 날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상 생애를 마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돌아갈 경우에 포함되는 두 가지 길 중에서, 항상 아버지의 뜻을 선택할 것을, 자신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머지 일생 동안 항상 이 결심에 충실하게 사셨습니다. 심지어 쓰라린 마지막까지도 그는 변함없이 그의 주권적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 아래로 종속시켰습니다.

136:4.10 (1515.4) The forty days in the mountain wilderness were not a period of great temptation but rather the period of the Master’s great decisions. During these days of lone communion with himself and his Father’s immediate presence — the Personalized Adjuster (he no longer had a personal seraphic guardian) — he arrived, one by one, at the great decisions which were to control his policies and conduct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career. Subsequently the tradition of a great temptation became attached to this period of isolation through confusion with the fragmentary narratives of the Mount Hermon struggles, and further because it was the custom to have all great prophets and human leaders begin their public careers by undergoing these supposed seasons of fasting and prayer. It had always been Jesus’ practice, when facing any new or serious decisions, to withdraw for communion with his own spirit that he might seek to know the will of God. 험악한 산 속에서의 40일은, 큰 시험을 받은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主)님께서 위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시기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직접적 현존 –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세라핌천사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았습니다.) -와의 홀로 친교를 나누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나머지 지상 생애를 위한 정책과 행위들을 통제하게 될 큰 결정들에 하나씩 도달하였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있었던 분투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뒤섞였고, 더 나아가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들이 이러한 금식과 기도의 기간을 가지고 그들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관습들 때문에,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이 나중에 이 고립의 기간에 덧붙여졌습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자신의 영과의 교제를 위하여 은둔하는 것은, 예수께서 항상 해오던 실천적 습관이었습니다.

136:4.11 (1515.5) In all this planning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ife, Jesus was always torn in his human heart by two opposing courses of conduct: 나머지 지상 일생을 위한 모든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행동 과정들로 인해 항상 심정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136:4.12 (1515.6) 1. He entertained a strong desire to win his people — and the whole world — to believe in him and to accept his new spiritual kingdom. And he well knew their ideas concerning the coming Messiah. 그는 자신을 믿고 그의 새로운 영적 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사람들 –과 온 세상 –을 설득하고 싶은 강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36:4.13 (1515.7) 2. To live and work as he knew his Father would approve, to conduct his work in behalf of other worlds in need, and to continu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to reveal the Father and show forth his divine character of love. 그의 아버지가 승인하는 삶을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살며 일을 하는 것, 곤경에 처한 다른 세상들을 위하여 그의 일을 수행하는 것과 그 나라의 설립에 있어서, 계속 아버지를 계시하며 그분의 신적 성품인 사랑을 계속 보여주는 것.

136:4.14 (1515.8) Throughout these eventful days Jesus lived in an ancient rock cavern, a shelter in the side of the hills near a village sometime called Beit Adis. He drank from the small spring which came from the side of the hill near this rock shelter. 이러한 중대한 시간들 내내, 예수님은 언젠가 베이트 아디스라고 불리던 마을에서 가까운 언덕 옆에 위치한 고대의 은신처인 바위 동굴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이 바위 피난처 가까이에 있는 언덕 옆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샘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5. The First Great Decision 첫 번째 중대한 결정

170816 수요 예수96 마26:53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Do you think I cannot call on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136:5.1 (1516.1) On the third day after beginning this conference with himself and his Personalized Adjuster, Jesus was presented with the vision of the assembled celestial hosts of Nebadon sent by their commanders to wait upon the will of their beloved Sovereign. This mighty host embraced twelve legions of seraphim and proportionate numbers of every order of universe intelligence. And the first great decision of Jesus’ isolation had to do with whether or not he would make use of these mighty personalities in connection with the ensuing program of his public work on Urantia. 자기 자신과 그의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와의 협의가 시작된 지 3일째 되는 날, 사랑하는 주권자의 뜻을 섬기라고 그들의 사령관이 보낸 네바돈 천상의 무리가 집합되어있는 환영(幻影)이 예수님에게 보였습니다. 이 강력한 무리는 12 군단의 세라핌 천사들과, 우주의 각 계층들로부터 온 균등한 숫자의 지능존재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립기간 중에 내리셨던 첫 번째 중대한 결정은, 그가 자신의 지구(유란시아)에서의 공(公)적 사역에 뒤따르는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이들 강력한 고유성들을 이용할 것인지 아닌지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36:5.2 (1516.2) Jesus decided that he would not utilize a single personality of this vast assemblage unless it should become evident that this was his Father’s will. Notwithstanding this general decision, this vast host remained with him throughout the balance of his earth life, always in readiness to obey the least expression of their Sovereign’s will. Although Jesus did not constantly behold these attendant personalities with his human eyes, his associated Personalized Adjuster did constantly behold, and could communicate with, all of them.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아버지의 뜻임이 분명해지지 않는 한, 이 광대한 집단의 한 고유성도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군단은 그들의 주권자의 뜻이 한 마디라도 표현된다면 항상 복종할 준비를 갖추고서, 그의 지상 일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내내 그와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자신의 인간 눈으로 이렇게 모여 있는 고유성들을 항상 볼 수는 없었지만,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가 그들 전부를 항상 볼 수 있었고 그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136:5.3 (1516.3) Before coming down from the forty days’ retreat in the hills, Jesus assigned the immediate command of this attendant host of universe personalities to his recently Personalized Adjuster, and for more than four years of Urantia time did these selected personalities from every division of universe intelligences obediently and respectfully function under the wise guidance of this exalted and experienced Personalized Mystery Monitor. In assuming command of this mighty assembly, the Adjuster, being a onetime part and essence of the Paradise Father, assured Jesus that in no case would these superhuman agencies be permitted to serve, or manifest themselves in connection with, or in behalf of, his earth career unless it should develop that the Father willed such intervention. Thus by one great decision Jesus voluntarily deprived himself of all superhuman co-operation in all matters having to do with the remainder of his mortal career unless the Father might independently choose to participate in some certain act or episode of the Son’s earth labors. 언덕에서 보낸 40일의 은거생활에서 내려오기 전에, 예수님은 이 대기 중인 우주 고유성들에 대한 직접적 지휘권을, 최근에 고유성이 구현된 자신의 조절자에게 맡겼으며, 지구(유란시아) 시간으로 4년 이상, 우주 지능들의 모든 부서로부터 온 선택된 이 고유성들은 복종적으로 그리고 존중심을 가지고 이 고양되고 체험을 거친 고유성이 구현된 신비 감시자의 현명한 지도 아래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 강력한 군단의 지휘를 맡으면서, 이전에 천국 아버지의 분신이었으며 핵심이었던 조절자는, 아버지께서 그러한 의도적인 개입을 전개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라도, 이들 초인간적 대리자들이 그의 지상 생애와 관련되어서나 혹은 그의 생애를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들이 드러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예수님께 확실히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중대한 결정으로, 아들의 지상 수고들 중에서 특정한 행동이나 에피소드에서 아버지께서 따로 참여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예수님은 그의 나머지 필사자 생애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서 모든 초인간적인 협조를 자발적으로 배제하였습니다.

136:5.4 (1516.4) In accepting this command of the universe hosts in attendance upon Christ Michael, the Personalized Adjuster took great pains to point out to Jesus that, while such an assembly of universe creatures could be limited in their space activities by the delegated authority of their Creator, such limitations were not operative in connection with their function in time. And this limitation was dependent on the fact that Adjusters are nontime beings when once they are personalized. Accordingly was Jesus admonished that, while the Adjuster’s control of the living intelligences placed under his command would be complete and perfect as to all matters involving space, there could be no such perfect limitations imposed regarding time. Said the Adjuster: “I will, as you have directed, enjoin the employment of this attendant host of universe intelligences in any manner in connection with your earth career except in those cases where the Paradise Father directs me to release such agencies in order that his divine will of your choosing may be accomplished, and in those instances where you may engage in any choice or act of your divine-human will which shall only involve departures from the natural earth order as to time. In all such events I am powerless, and your creatures here assembled in perfection and unity of power are likewise helpless. If your united natures once entertain such desires, these mandates of your choice will be forthwith executed. Your wish in all such matters will constitute the abridgment of time, and the thing projected is existent. Under my command this constitutes the fullest possible limitation which can be imposed upon your potential sovereignty. In my self-consciousness time is nonexistent, and therefore I cannot limit your creatures in anything related thereto.” 그리스도 미가엘을 시중드는 우주군단들에 대한 이러한 지도권을 받아들이면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는, 그러한 우주 창조물들의 집단이 그들의 창조자의 위임된 권한에 의해서 공간 활동은 제한되어질 수 있지만, 시간에 관계되는 그들의 작용에서는, 그런 제한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을 예수님에게 아주 어렵게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일단 조절자들이 고유성이 구현되면 그들이 비(非)시간 존재가 된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절자가 그의 지도 아래에 놓인 살아있는 지능체들의 통제에 있어서,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문제들의 경우에는 완벽하고도 완전하게 할 수 있지만, 시간에 관한 것에서는 그러한 완전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조절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지도대로 나는 여기 시중드는 우주 지능의 무리가 당신의 지상임무에 관계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봉사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아버지께서 당신이 선택한 그의 신적 뜻이 성취될 수도 있는 그러한 대리자들을 풀어놓으라고 그가 나에게 지도하는 경우와 또한 오직 시간에 대한 것으로서 지상의 자연 질서로부터 벗어날 것들이 포함되어질 당신의 신적-인간의 의지의 선택이나 행동을 당신이 내려야 할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그러한 사건에서는, 내가 무력하며, 권능의 완전함과 합일 안에 여기에 모여 있는 너의 창조물들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의 연합된 본성들(인성과 신성)이 일단 그러한 소망을 품는다면, 당신이 선택한 이 명령들은 당장 집행될 것입니다.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당신의 소망은 시간의 단축을 구성할 것이며, 기획된 것은 존재합니다. 나의 지도 아래에서는, 이것이 당신의 잠재 주권에 부여할 수 있는, 최대로 가능한 제한입니다. 내 자아-의식에서는, 시간이 비(非)실존이므로, 거기에 관계되는 그 어떤 것에서도 나는 당신의 창조물들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136:5.5 (1517.1) Thus did Jesus become apprised of the working out of his decision to go on living as a man among men. He had by a single decision excluded all of his attendant universe hosts of varied intelligences from participating in his ensuing public ministry except in such matters as concerned time only. It therefore becomes evident that any possible supernatural or supposedly superhuman accompaniments of Jesus’ ministry pertained wholly to the elimination of time unless the Father in heaven specifically ruled otherwise. No miracle, ministry of mercy, or any other possible event occurring in connection with Jesus’ remaining earth labors could possibly be of the nature or character of an act transcending the natural laws established and regularly working in the affairs of man as he lives on Urantia except in this expressly stated matter of time. No limits, of course, could be placed upon the manifestations of “the Father’s will.” The elimination of time in connection with the expressed desire of this potential Sovereign of a universe could only be avoided by the direct and explicit act of the will of this God-man to the effect that time, as related to the act or event in question, should not be shortened or eliminated. In order to prevent the appearance of apparent time miracles, it was necessary for Jesus to remain constantly time conscious. Any lapse of time consciousness on his part, in connection with the entertainment of definite desire, was equivalent to the enactment of the thing conceived in the mind of this Creator Son, and without the intervention of time.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에 관한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수반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의 결정으로, 그는 시간에 관한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계속적인 대중을 위한 공(公) 사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양한 우주 지능존재들 무리의 참여를 배제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공(公) 사역에서 따라다녔던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 업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특별히 다른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한, 전적으로 시간 제거에 관계된 것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남아있는 땅에서의 수고와 관련하여 발생한 어떤 기적, 자비의 사역, 또는 다른 어떤 가능성 있는 사건들은, 분명하게 여기에 서술한 시간문제를 제외하고는, 그가 지구(유란시아)에 살아가면서 사람의 관련사에서 확립되어 있고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행동의 본성이나 성품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 제한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이 잠재적 주권자가 밖으로 표현한 소망과 관련하여, 시간의 제거는, 문제가 되는 행위나 사건이 관련되는 대로, 시간이 단축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영향에 대해, 이 하나님-사람이 지닌 의지의 직접적이고도 뚜렷한 행동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시간적인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끊임없이 시간을 의식하며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그의 편에서 그 어떤 시간 의식의 착오(벗어남)가, 분명한 소망을 품는 것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이 창조자 아들의 마음속에서 착상된 것이 집행되는 것, 그리고 시간의 간섭 없이 그렇게 되는 것과 동등했습니다.

136:5.6 (1517.2) Through the supervising control of his associated and Personalized Adjuster it was possible for Michael perfectly to limit his personal earth activities with reference to space, but it was not possible for the Son of Man thus to limit his new earth status as potential Sovereign of Nebadon as regards time. And this was the actual status of Jesus of Nazareth as he went forth to begin his public ministry on Urantia. 그의 동료로서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의 감독하는 통제를 통하여, 미가엘은 공간과 연관되는 자신의 개인적 지상 활동들을 완전하게 제한하실 수 있었지만, 사람의 아들에게 있어서 시간과 관련될 때에는 잠정적인 네바돈 주권자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지상(地上)의 지위를 그렇게 제한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구(유란시아)에서의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려고 나섰을 때, 나사렛 예수의 실재 지위였습니다.

6. The Second Decision 두 번째 결정

170823 수요 예수97 마4:3-4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3 The tempter came to him and said,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bread.” 4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136:6.1 (1517.3) Having settled his policy concerning all personalities of all classes of his created intelligences, so far as this could be determined in view of the inherent potential of his new status of divinity, Jesus now turned his thoughts toward himself. What would he, now the fully self-conscious creator of all things and beings existent in this universe, do with these creator prerogatives in the recurring life situations which would immediately confront him when he returned to Galilee to resume his work among men? In fact, already, and right where he was in these lonely hills, had this problem forcibly presented itself in the matter of obtaining food. By the third day of his solitary meditations the human body grew hungry. Should he go in quest of food as any ordinary man would, or should he merely exercise his normal creative powers and produce suitable bodily nourishment ready at hand? And this great decision of the Master has been portrayed to you as a temptation — as a challenge by supposed enemies that he “command that these stones become loaves of bread.” 예수님은 자신의 새로운 신성의 지위에 선천적으로 잠재된 관점에서 결정될 수 있는 한, 자신이 창조한 지능존재들이 지닌 모든 등급의 모든 고유성에 관련된 자신의 정책을 정하게 되자, 이제 그의 생각을 그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그는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존재의 창조자임을 충분하게 자아-의식하는 지금, 이들 창조자 특권으로, 그가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즉시 부딪쳐오는 반복적 일생의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이 외로운 언덕에 계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벌써 음식을 구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이 문제가 제시되었습니다. 외로운 명상 가운데 3일째가 되자, 인간적 육신은 점점 배고프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음식을 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의 정상적 창조적 권능을 발휘하고 몸을 위해 적절한 영양분을 즉시 쓸 수 있도록 만들어낼 것인가? 이러한 주(主)님의 중대한 결정이 너희들에게는 유혹─가상의 적들이 그가 “이 돌이 빵으로 변하게 명령하도록” 도전했다고─으로 묘사되어졌습니다.

136:6.2 (1518.1) Jesus thus settled upon another and consistent policy for the remainder of his earth labors. As far as his personal necessities were concerned, and in general even in his relations with other personalities, he now deliberately chose to pursue the path of normal earthly existence; he definitely decided against a policy which would transcend, violate, or outrage his own established natural laws. But he could not promise himself, as he had already been warned by his Personalized Adjuster, that these natural laws might not, in certain conceivable circumstances, be greatly accelerated. In principle, Jesus decided that his lifework should be organized and prosecuted in accordance with natural law and in harmony with the existing social organization. The Master thereby chose a program of living which was the equivalent of deciding against miracles and wonders. Again he decided in favor of “the Father’s will”; again he surrendered everything into the hands of his Paradise Father.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나머지 지상 임무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일관된 방침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개인적 필요성에 관한 것과 일반적으로 다른 고유성들과의 그의 관계에 관한 것에서까지도, 이제 그는 이 세상의 정상적인 존재로서의 길을 신중하게 추구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자연 법칙을 초월하거나 위반하거나 어기는 정책은 피하기로 분명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고유성이 구현된 조절자에 의하여 경고를 받았던 바와 같이, 어떤 상상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자연적인 법칙이 크게 가속(加速)될 수 없다고 자신에게 약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필생의 사업은 자연적인 법에 따르고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조직에 조화를 이루면서 조직되어지고 실행되어져야만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주(主)님은 거기에서 기적이나 이적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상당하는 삶의 프로그램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천국 아버지의 손에 맡겼습니다.

136:6.3 (1518.2) Jesus’ human nature dictated that the first duty was self-preservation; that is the normal attitude of the natural man on the worlds of time and space, and it is, therefore, a legitimate reaction of a Urantia mortal. But Jesus was not concerned merely with this world and its creatures; he was living a life designed to instruct and inspire the manifold creatures of a far-flung universe.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첫 번째 의무가 자아-보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사는 자연적인 인간의 정상적인 태도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지구(유란시아) 필사자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이 세상과 그 곳의 창조물들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광대하게 퍼져있는 우주의 다양한 창조물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계획된 일생을 사셨습니다.

136:6.4 (1518.3) Before his baptismal illumination he had lived in perfect submission to the will and guidance of his heavenly Father. He emphatically decided to continue on in just such implicit mortal dependence on the Father’s will. He purposed to follow the unnatural course — he decided not to seek self-preservation. He chose to go on pursuing the policy of refusing to defend himself. He formulated his conclusions in the words of Scripture familiar to his human mind: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s from the mouth of God.” In reaching this conclusion in regard to the appetite of the physical nature as expressed in hunger for food, the Son of Man made his final declaration concerning all other urges of the flesh and the natural impulses of human nature. 세례로 조명을 받기 전에도,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인도에 완전한 복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필사자로서의 그러한 절대적 의존을 계속하기로 단호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과정을 따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 자아-보존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방침을 계속 추구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결론들을, 잘 알고 있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인간 마음에 공식화하였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8:3, 눅4:3-4).” 배고플 때 음식을 구하는 표현과 같은 육체적 성질의 식욕에 관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제 사람의 아들은 모든 다른 육체적 욕구나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충동들에 관하여 최종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136:6.5 (1518.4) His superhuman power he might possibly use for others, but for himself, never. And he pursued this policy consistently to the very end, when it was jeeringly said of him: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 because he would not.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초인간적인 권능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27:42a, 막15:31, 눅23:35).”라고 그를 조롱하여 말할 때, 그는 이러한 방침을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36:6.6 (1518.5) The Jews were expecting a Messiah who would do even greater wonders than Moses, who was reputed to have brought forth water from the rock in a desert place and to have fed their forefathers with manna in the wilderness. Jesus knew the sort of Messiah his compatriots expected, and he had all the powers and prerogatives to measure up to their most sanguine expectations, but he decided against such a magnificent program of power and glory. Jesus looked upon such a course of expected miracle working as a harking back to the olden days of ignorant magic and the degraded practices of the savage medicine men. Possibly, for the salvation of his creatures, he might accelerate natural law, but to transcend his own laws, either for the benefit of himself or the overawing of his fellow men, that he would not do. And the Master’s decision was final. 유대인들은, 사막의 바위로부터 물이 솟아나게 하고, 광야에서 만나로 그들의 선조들을 먹였다고 소문이 난 모세보다도 더 큰 이적을 베풀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포 종족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어떤 종류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장 낙관적인 기대들을 채워줄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특권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한 권능과 영광으로 장엄한 그러한 계획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행하는 과정은, 미개한 주술사들이 무지한 마술을 쓰고, 퇴화된 관습을 지녔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마도, 자기 창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가 자연의 법을 가속시키실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이익이나 동료 사람들을 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법을 초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主)님의 결정은 최종적이었습니다.

136:6.7 (1518.6) Jesus sorrowed for his people; he fully understood how they had been led up to the expectation of the coming Messiah, the time when “the earth will yield its fruits ten thousandfold, and on one vine there will be a thousand branches, and each branch will produce a thousand clusters, and each cluster will produce a thousand grapes, and each grape will produce a gallon of wine.” The Jews believed the Messiah would usher in an era of miraculous plenty. The Hebrews had long been nurtured on traditions of miracles and legends of wonders.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겼으며; 그는 그들이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러한 기대, 그가 올 때 “세상은 그 열매를 1만 배로 수확할 것이며, 한 포도나무에는 1천 개의 가지들이 있을 것이며, 각각의 가지는 1천 개의 포도송이를 생산할 것이며, 송이마다 포도알 1천 개를 맺으며, 포도 알마다 포도주 1갤런(3.79리터)을 생산하리라(사4:2, 5:10, 에녹10:18-20a).”라는 기대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풍성한 기적의 시대를 열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기적에 대한 전통들과 이적에 대한 전설들로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136:6.8 (1519.1) He was not a Messiah coming to multiply bread and wine. He came not to minister to temporal needs only; he came to reveal his Father in heaven to his children on earth, while he sought to lead his earth children to join him in a sincere effort so to live as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그는 빵과 포도주를 늘리려고 오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현세의 필요만을 보살피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오셨으며, 동시에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진지한 노력으로 그에게 연합하도록 이끌려고 애쓰셨습니다.

136:6.9 (1519.2) In this decision Jesus of Nazareth portrayed to an onlooking universe the folly and sin of prostituting divine talents and God-given abilities for personal aggrandizement or for purely selfish gain and glorification. That was the sin of Lucifer and Caligastia. 이러한 결정을 통하여, 나사렛 예수는 개인적 세력의 확장 또는 순전히 이기적인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신적 재능과 하나님께서-주신 능력을 팔아넘기는 것은 어리석으며, 죄 짓는 것임을, 지켜보고 있는 우주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죄였습니다.

136:6.10 (1519.3) This great decision of Jesus portrays dramatically the truth that selfish satisfaction and sensuous gratification, alone and of themselves, are not able to confer happiness upon evolving human beings. There are higher values in mortal existence — intellectual mastery and spiritual achievement — which far transcend the necessary gratification of man’s purely physical appetites and urges. Man’s natural endowment of talent and ability should be chiefly devoted to the development and ennoblement of his higher powers of mind and spirit. 예수님의 이 위대한 결정은, 이기적인 만족과 감성적인 희열이 홀로 그 자체만으로는 진화하는 인간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필사자 존재는 더 높은 가치들 – 지적 통달과 영적 성취 –이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의 순수한 육체적 욕구와 충동에 필요한 만족을 훨씬 더 초월합니다. 사람이 본래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능력은 자신의 더 높은 마음과 영의 권능을 개발하고 높이는 일에 주로 바쳐져야만 합니다.

136:6.11 (1519.4) Jesus thus revealed to the creatures of his universe the technique of the new and better way, the higher moral values of living and the deeper spiritual satisfactions of evolutionary human existence on the worlds of space.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우주의 창조물들에게, 더 높은 도덕적 삶의 가치와 공간의 세계에서 진화하는 인간 존재가 누릴 더 깊은 영적 만족의 새롭고 나은 길로 가는 기법을 계시하셨습니다.

7. The Third Decision 세 번째 결정

170830 수요 예수98 마4:5-6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5 Then the devil took him to the holy city and had him stand on th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6 “If you are the Son of God,” he said, “throw yourself down. For it is written: ”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and they will lift you up i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136:7.1 (1519.5) Having made his decisions regarding such matters as food and physical ministration to the needs of his material body, the care of the health of himself and his associates, there remained yet other problems to solve. What would be his attitude when confronted by personal danger? He decided to exercise normal watchcare over his human safety and to take reasonable precaution to prevent the untimely termination of his career in the flesh but to refrain from all superhuman intervention when the crisis of his life in the flesh should come. As he was formulating this decision, Jesus was seated under the shade of a tree on an overhanging ledge of rock with a precipice right there before him. He fully realized that he could cast himself off the ledge and out into space, and that nothing could happen to harm him provided he would rescind his first great decision not to invoke the interposition of his celestial intelligences in the prosecution of his lifework on Urantia, and provided he would abrogate his second decision concerning his attitude toward self-preservation. 자기 자신과 동료들의 건강관리로서 물질적 육신의 필요에 대한 음식과 육체적 보살핌과 같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을 내리자, 거기에는 아직도 풀어야할 다른 문제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개인적 위험에 당면하였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안전함에 대해 일반적인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육신의 생애에서 뜻밖의 종말을 맞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절히 조심을 하되, 육신상의 삶의 위기가 올 때, 모든 초인간적 개입을 금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구체화시키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튀어나온 바위 턱 위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는 튀어나온 그 바위에서 자신을 던져 공중으로 뛰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깨달았으며, 지구(유란시아)에서 자기 삶의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만약 자기가 천상의 지능체들의 중재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자신의 첫 번째 중대한 결정을 폐지하고 자아-보존을 향한 그의 태도에 관련된 자신의 두 번째 결정을 폐지시킨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위험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136:7.2 (1519.6) Jesus knew his fellow countrymen were expecting a Messiah who would be above natural law. Well had he been taught that Scripture: “There shall no evil befall you, neither shall any plague come near your dwelling. For he shall give his angels charge over you, to keep you in all your ways. They shall bear you up in their hands lest you dash your foot against a stone.” Would this sort of presumption, this defiance of his Father’s laws of gravity, be justified in order to protect himself from possible harm or, perchance, to win the confidence of his mistaught and distracted people? But such a course, however gratifying to the sign-seeking Jews, would be, not a revelation of his Father, but a questionable trifling with the established laws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예수님은 자기 동료 민족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매우 잘 알고 계셨습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0-12).” 그의 아버지의 중력의 법칙에 대한 도전이 되는 이런 종류의 억측이,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그를 방어하기 위하여, 또는 아마도, 잘못 가르쳐지고 잘못 길을 들어간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표적을 찾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더라도,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는 길은 아닐 것이며 단지 우주들의 우주에 세워져 있는 법칙들을 의심스럽게 하는 무익한 행동일 뿐이다.

136:7.3 (1519.7) Understanding all of this and knowing that the Master refused to work in defiance of his established laws of nature in so far as his personal conduct was concerned, you know of a certainty that he never walked on the water nor did anything else which was an outrage to his material order of administering the world; always, of course, bearing in mind that there had, as yet, been found no way whereby he could be wholly delivered from the lack of control over the element of time in connection with those matters put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주(主)께서 자신의 개인적 행위에 관해서는 자신이 세운 자연법칙을 무시하면서 일하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너희는 그가 절대로 물위를 걸어 다니신 적이 없었고, 세상을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물질 질서에 위반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물론,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의 관할 아래에 놓인 그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시간 요소에 대한 통제력의 부족에서 전반적으로 벗어나는 어떤 방법을 아직까지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점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36:7.4 (1520.1) Throughout his entire earth life Jesus was consistently loyal to this decision. No matter whether the Pharisees taunted him for a sign, or the watchers at Calvary dared him to come down from the cross, he steadfastly adhered to the decision of this hour on the hillside.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일생 내내, 끊임없이 이 결정에 충실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비웃거나, 갈보리에서 감시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소하였을 때(마27:39-44)와 상관없이, 그는 그 언덕에서 이 시간에 내렸던 결정을 꾸준하게 지켜나가셨습니다.

8. The Fourth Decision 네 번째 결정

170906 수요 예수99 마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and their sight was restored. Jesus warned them sternly, “See that no one knows about this.”

136:8.1 (1520.2) The next great problem with which this God-man wrestled and which he presently decided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concerned the question as to whether or not any of his superhuman powers should be employed for the purpose of attracting the attention and winning the adherence of his fellow men. Should he in any manner lend his universe powers to the gratification of the Jewish hankering for the spectacular and the marvelous? He decided that he should not. He settled upon a policy of procedure which eliminated all such practices as the method of bringing his mission to the notice of men. And he consistently lived up to this great decision. Even when he permitted the manifestation of numerous time-shortening ministrations of mercy, he almost invariably admonished the recipients of his healing ministry to tell no man about the benefits they had received. And always did he refuse the taunting challenge of his enemies to “show us a sign” in proof and demonstration of his divinity. 이 하나님-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심하면서 즉시 결정한 다음의 큰 문제는, 그가 자기 동료 인간들의 관심을 끌어 그들의 충실한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초인간적 권능을 조금이라도 사용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웅장함과 경탄을 열망하는 유대인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우주적인 권능을 사용할 것인가? 그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하는 방법으로서 그러한 모든 실천들을 제거하는 절차적 정책을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관되게 이 중대한 결정을 지켜나가셨습니다. 여러 번 시간을-단축시키는 자비의 섬김이 드러나도록 그가 허락하셨을 때조차도, 그가 치료하는 섬김 활동을 받은 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혜택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거의 변함없이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신성을 증명하고 실증하여서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는 대적들의 비웃는 도전을 항상 거절하셨습니다.

136:8.2 (1520.3) Jesus very wisely foresaw that the working of miracles and the execution of wonders would call forth only outward allegiance by overawing the material mind; such performances would not reveal God nor save men. He refused to become a mere wonder-worker. He resolved to become occupied with but a single task —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은, 기적들을 행하는 것과 이적을 실행하는 것은 물질적 마음을 위압하여 겉으로의 충성만 불러일으키게 될 뿐임을 매우 현명하게 내다보았습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자가 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단 한가지의 임무─하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136:8.3 (1520.4) Throughout all this momentous dialogue of Jesus’ communing with himself, there was present the human element of questioning and near-doubting, for Jesus was man as well as God. It was evident he would never be received by the Jews as the Messiah if he did not work wonders. Besides, if he would consent to do just one unnatural thing, the human mind would know of a certainty that it was in subservience to a truly divine mind. Would it be consistent with “the Father’s will” for the divine mind to make this concession to the doubting nature of the human mind? Jesus decided that it would not and cited the presence of the Personalized Adjuster as sufficient proof of divinity in partnership with humanity. 예수님이 자기 자신과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모든 중대한 대화들을 하는 동안 내내, 의문을 던지고 거의 의심하는 인간 요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적을 행하지 않으신다면,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단지 한 번이라도 비(非)자연적(초자연적)인 일을 행하기로 동의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신적 마음에 복종해서 된 것임을 인간 마음이 확실히 알 것입니다. 신적 마음이 의심을 품은 인간 마음의 본성에게 양보하는 이것은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하였으며, 단지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의 현존을 신성과 인간성과의 협력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 제시하였습니다.

136:8.4 (1520.5) Jesus had traveled much; he recalled Rome, Alexandria, and Damascus. He knew the methods of the world — how people gained their ends in politics and commerce by compromise and diplomacy. Would he utilize this knowledge in the furtherance of his mission on earth? No! He likewise decided against all compromise with the wisdom of the world and the influence of riches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He again chose to depend exclusively on the Father’s will. 예수님은 많이 여행하셨으며,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를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방법들─사람들이 정치와 상업에서 타협과 외교로 자기들의 목적을 어떻게 이루는지─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상임무를 증진하기 위해 이 지식을 이용하실 것인가? 아닙니다! 그는 왕국 설립에 있어서 세상 지혜와의 모든 타협과 부(富)의 영향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다시 결정하였습니다.

136:8.5 (1520.6) Jesus was fully aware of the short cuts open to one of his powers. He knew many ways in which the attention of the nation, and the whole world, could be immediately focused upon himself. Soon the Passover would be celebrated at Jerusalem; the city would be thronged with visitors. He could ascend the pinnacle of the temple and before the bewildered multitude walk out on the air; that would be the kind of a Messiah they were looking for. But he would subsequently disappoint them since he had not come to re-establish David’s throne. And he knew the futility of the Caligastia method of trying to get ahead of the natural, slow, and sure way of accomplishing the divine purpose. Again the Son of Man bowed obediently to the Father’s way, the Father’s will. 예수님은 그의 권능들 중 하나에 이르는 지름길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국가와 온 세상의 관심이 즉시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곧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축하가 있을 것이며, 그 도시는 방문객들로 넘칠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꼭대기에 올라 놀란 군중들 앞에서 공중에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찾고 있는 종류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좌를 다시 세우려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적 목적을 성취하는, 자연스럽고 더디지만 확실한 그 길을 앞서 가려 했던 칼리가스티아의 방법이 쓸데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136:8.6 (1521.1) Jesus chos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ankind by natural, ordinary, difficult, and trying methods, just such procedures as his earth children must subsequently follow in their work of enlarging and extending that heavenly kingdom. For well did the Son of Man know that it would be “through much tribulation that many of the children of all ages would enter into the kingdom.” Jesus was now passing through the great test of civilized man, to have power and steadfastly refuse to use it for purely selfish or personal purposes. 예수님은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며, 어렵고, 고된 방법들로 인류의 심정에 하늘 왕국을 설립하기로 선택하셨는데, 바로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지상 자녀들이 하늘 왕국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일에서 이후에 계속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많은 환난을 통해 모든 세대의 많은 자녀들이 왕국에 들어갈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문명화된 사람이 겪는 커다란 시험, 즉 권능으로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그 권능 사용하기를 꾸준히 거절하는 시험을 통과하고 계셨습니다.

136:8.7 (1521.2) In your consideration of the life and experience of the Son of Man, it should be ever borne in mind that the Son of God was incarnate in the mind of a first-century human being, not in the mind of a twentieth-century or other-century mortal. By this we mean to convey the idea that the human endowments of Jesus were of natural acquirement. He was the product of the hereditary and environmental factors of his time, plus the influence of his training and education. His humanity was genuine, natural, wholly derived from the antecedents of, and fostered by, the actual intellectual status and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s of that day and generation. While in the experience of this God-man there was always the possibility that the divine mind would transcend the human intellect, nonetheless, when, and as, his human mind functioned, it did perform as would a true mortal mind under the conditions of the human environment of that day.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체험을 고려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20세기나 혹은 다른 세기의 필사자의 마음이 아니라, 1세기의 인간 존재의 마음으로 성육신하신 점을 항상 마음에 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적 자질이 자연적 습득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그는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소들과 그의 훈련과 교육의 영향이 더해진 그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성은 참되고, 자연스러웠고,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고, 그 당시 그 세대의 실재적인 지적 상태와 사회적·경제적인 조건들로 양육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사람의 체험에는 신적 마음이 사람의 지성을 초월할 가능성이 항상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마음이 활동할 때, 그러는 동안, 신적 마음은, 마치 당시 인간적 환경 조건 아래에 순수한 필사자 마음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136:8.8 (1521.3) Jesus portrayed to all the worlds of his vast universe the folly of creating artificial situations for the purpose of exhibiting arbitrary authority or of indulging exceptional power for the purpose of enhancing moral values or accelerating spiritual progress. Jesus decided that he would not lend his mission on earth to a repetition of the disappointment of the reign of the Maccabees. He refused to prostitute his divine attributes for the purpose of acquiring unearned popularity or for gaining political prestige. He would not countenance the transmutation of divine and creative energy into national power or international prestige. Jesus of Nazareth refused to compromise with evil, much less to consort with sin. The Master triumphantly put loyalty to his Father’s will above every other earthly and temporal consideration. 예수님은, 독단적인 권위를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인위적 상황들을 만들거나, 도덕적 가치들을 강화하거나 영적 진보를 가속하려는 목적으로 이례적 권능에 탐닉하는, 어리석음을, 자신의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들에,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명을, 마카비 가(家) 통치의 실망이 반복되는데 힘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노력 없이 얻는 인기를 얻는 목적이나 정치적 명성을 얻으려고 자신의 신적 속성들을 악용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는 신적이며 창조적인 에너지를 민족적 권능이나 국제적 명성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묵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죄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악과 타협하는 것도 거부하셨습니다. 주(主)님은, 다른 세속적이며 현세적으로 고려할 모든 것 위에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는 것을, 승리한 마음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9. The Fifth Decision 다섯 번째 결정

170913 수요 예수100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Jesus said to him, “Away from me, Satan! For it is written: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136:9.1 (1521.4) Having settled such questions of policy as pertained to his individual relations to natural law and spiritual power, he turned his attention to the choice of methods to be employed in the proclamation and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John had already begun this work; how might he continue the message? How should he take over John’s mission? How should he organize his followers for effective effort and intelligent co-operation? Jesus was now reaching the final decision which would forbid that he further regard himself as the Jewish Messiah, at least as the Messiah was popularly conceived in that day. 자연 법칙과 영적 권능에 대한 그의 개별적인 관계에 적합하도록 정책적인 이런 문제들을 결정한 후, 그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설립하는데 있어서 사용될 방법들의 선택에 자신의 관심을 돌리셨습니다. 요한은 이미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메시지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한의 사명을 넘겨받을 것인가? 어떻게 그의 추종자들을 조직하여 효율적인 노력과 지적 협조를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적어도 그 당시에 대중들이 상상한대로의 메시아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으려는, 최종적인 결정에 도달하였습니다.

136:9.2 (1522.1) The Jews envisaged a deliverer who would come in miraculous power to cast down Israel’s enemies and establish the Jews as world rulers, free from want and oppression. Jesus knew that this hope would never be realized. He knew that the kingdom of heaven had to do with the overthrow of evil in the hearts of men, and that it was purely a matter of spiritual concern. He thought out the advisability of inaugurating the spiritual kingdom with a brilliant and dazzling display of power — and such a course would have been permissible and wholly within the jurisdiction of Michael — but he fully decided against such a plan. He would not compromise with the revolutionary techniques of Caligastia. He had won the world in potential by submission to the Father’s will, and he proposed to finish his work as he had begun it, and as the Son of Man. 유대인들은 해방자(구원자)를, 기적의 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적들을 쳐부수고, 유대인들을 세상의 통치자들로 만들어 주며,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자로 마음속에 그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희망이 결코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심정에서 악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영적 관련 문제였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찬란하며 눈부신 권능을 전시하는 영적 왕국의 취임식의 대안─그런 과정은 허락될 것이며 전적으로 미가엘의 관할권 안에 있었습니다.─을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한 계획을 반대하기로 완전히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칼리가스티아의 혁명적 기법들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잠재적으로 세상을 얻었으며, 자기 일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일의 마무리도 완결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136:9.3 (1522.2) You can hardly imagine what would have happened on Urantia had this God-man, now in potential possession of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once decided to unfurl the banner of sovereignty, to marshal his wonder-working battalions in militant array! But he would not compromise. He would not serve evil that the worship of God might presumably be derived therefrom. He would abide by the Father’s will. He would proclaim to an onlooking universe, “You shall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him only shall you serve.”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능을 지금 잠재적으로 소유한 이 하나님-사람이, 군사적 대형으로 기적을 행하는 군대를 집합시켜, 한 때 주권자의 깃발을 휘날렸더라면, 지구(유란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는지 너희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그것에서 유래된다고 추정할 수도 있는 악을 섬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살아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우주에게,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만을 섬겨야만 할 것이다.” 라고 선포하고자 하셨습니다.

136:9.4 (1522.3) As the days passed, with ever-increasing clearness Jesus perceived what kind of a truth-revealer he was to become. He discerned that God’s way was not going to be the easy way. He began to realize that the cup of the remainder of his human experience might possibly be bitter, but he decided to drink it. 여러 날이 지나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진리-계시자가 될 것인지를 점점 더 분명히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셨습니다. 인간 체험에 있어서 자신의 나머지 잔은 더욱 쓴맛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그 잔을 받기로 결정하셨습니다.

136:9.5 (1522.4) Even his human mind is saying good-bye to the throne of David. Step by step this human mind follows in the path of the divine. The human mind still asks questions but unfailingly accepts the divine answers as final rulings in this combined life of living as a man in the world while all the time submitting unqualifiedly to the doing of the Father’s eternal and divine will. 그의 인간적 마음까지 다윗의 왕좌에게는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이 인간 마음은 신적 경로를 한 걸음씩 따라갔습니다. 아버지의 영원하며 신적 뜻을 행하는 데 항상 무조건 복종하는 동안, 인간적 마음은 여전히 질문했지만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 연합된 일생에서 신적 대답을 최종적인 결정으로 어김없이 받아들였습니다.

136:9.6 (1522.5) Rome was mistress of the Western world. The Son of Man, now in isolation and achieving these momentous decisions, with the hosts of heaven at his command, represented the last chance of the Jews to attain world dominion; but this earthborn Jew, who possessed such tremendous wisdom and power, declined to use his universe endowments either for the aggrandizement of himself or for the enthronement of his people. He saw, as it were, “the kingdoms of this world,” and he possessed the power to take them. The Most Highs of Edentia had resigned all these powers into his hands, but he did not want them. The kingdoms of earth were paltry things to interest the Creator and Ruler of a universe. He had only one objective, the further revelation of God to ma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the rule of the heavenly Father in the hearts of mankind. 로마는 서방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고립되어 이러한 중요한 결정들을 성취하신, 사람의 아들은, 그의 지휘 아래 하늘 군단과 함께, 유대인들이 세상 정복을 달성할 마지막 기회를 뜻하셨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은 그러한 굉장한 지혜와 권능을 소유했지만, 그의 우주적 자질들을, 자신의 확장이나 자기 민족의 왕권숭배를 위해 사용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왕국들”을 보셨으며,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셨습니다.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은 이 모든 권능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왕국들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통치자의 관심을 끌기에는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사람에게 하나님을 더욱 계시하는 것, 왕국의 설립, 인류의 심정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것뿐이었습니다.

136:9.7 (1522.6) The idea of battle, contention, and slaughter was repugnant to Jesus; he would have none of it. He would appear on earth as the Prince of Peace to reveal a God of love. Before his baptism he had again refused the offer of the Zealots to lead them in rebellion against the Roman oppressors. And now he made his final decision regarding those Scriptures which his mother had taught him, such as: “The Lord has said to me, ‘You are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you. Ask of me, and I will give you the heathen for your inheritance and the uttermost parts of the earth for your possession. You shall break them with a rod of iron; you shall dash them in pieces like a potter’s vessel.’” 전쟁, 다툼, 살육이라는 관념은 예수님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평화의 영주로 세상에게 나타나고자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그는 로마의 억압에 대항하는 반란에서 그들을 이끌어 달라는 유대 열심당들의 청을 다시 거절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쳤던 다음과 같은 성서의 구절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이방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2:7-9).’”

136:9.8 (1522.7) Jesus of Nazareth reached the conclusion that such utterances did not refer to him. At last, and finally, the human mind of the Son of Man made a clean sweep of all these Messianic difficulties and contradictions — Hebrew scriptures, parental training, chazan teaching, Jewish expectations, and human ambitious longings; once and for all he decided upon his course. He would return to Galilee and quietly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and trust his Father (the Personalized Adjuster) to work out the details of procedure day by day.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말들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사람의 아들의 인간 마음은 이러한 모든 메시아적 어려움들과 모순들─히브리 경전들, 부모의 가르침, 카잔의 가르침, 유대적 기대들, 그리고 인간 야심적 갈망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셨으며; 단번에 영원히,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왕국 선포를 시작하고, 매일 세부적인 과정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를 신뢰하기로 하셨습니다.

136:9.9 (1523.1) By these decisions Jesus set a worthy example for every person on every world throughout a vast universe when he refused to apply material tests to prove spiritual problems, when he refused presumptuously to defy natural laws. And he set an inspiring example of universe loyalty and moral nobility when he refused to grasp temporal power as the prelude to spiritual glory. 이러한 결정들에 의해, 예수님은, 영적 문제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시험들을 적용하기를 거절하고, 그가 주제넘게 자연 법칙들을 무시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광대한 우주를 망라하여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모범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적 영광의 서막으로 세속적 권능을 취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그는 우주적 충성과 도덕적 고결함에서 영감이 넘치는 모범을 세우셨습니다.

136:9.10 (1523.2) If the Son of Man had any doubts about his mission and its nature when he went up in the hills after his baptism, he had none when he came back to his fellows following the forty days of isolation and decisions. 사람의 아들이 자신의 세례 이후에 언덕으로 올라가셨을 때, 자신의 사명과 그 본질에 대하여 어떤 의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홀로 계시면서 결정하던 40일 후에 동료들에게 돌아오셨을 때에는, 그에게 어떤 의심도 전혀 없었습니다.

136:9.11 (1523.3) Jesus has formulated a program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He will not cater to the physical gratification of the people. He will not deal out bread to the multitudes as he has so recently seen it being done in Rome. He will not attract attention to himself by wonder-working, even though the Jews are expecting just that sort of a deliverer. Neither will he seek to win acceptance of a spiritual message by a show of political authority or temporal power. 예수님은 아버지의 왕국 설립을 위한 계획을 구상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물리적 만족을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로마에서 최근에 행해진 것을 목격했듯이,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비록 그런 종류의 해방자(구원자)를 기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권위 또는 세속적 권능을 보여서, 영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136:9.12 (1523.4) In rejecting these methods of enhancing the coming kingdom in the eyes of the expectant Jews, Jesus made sure that these same Jews would certainly and finally reject all of his claims to authority and divinity. Knowing all this, Jesus long sought to prevent his early followers alluding to him as the Messiah. 기대에 찬 유대인들의 눈에 다가올 왕국을 확장시키는 이런 방법들을 거절하면서, 예수님은 바로 이 유대인들이 분명히 최종적으로 모든 권한과 신성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주장들을 배척하리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초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언급하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애썼습니다.

136:9.13 (1523.5) Throughout his public ministry he was confronted with the necessity of dealing with three constantly recurring situations: the clamor to be fed, the insistence on miracles, and the final request that he allow his followers to make him king. But Jesus never departed from the decisions which he made during these days of his isolation in the Perean hills. 그의 공적 사역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발생되는 세 가지 상황들을 다루는 필연성에 직면하였는데: 먹을 것을 제공하라는 외침소리, 기적을 행하라는 주장,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 마지막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페레아 언덕에서 홀로 있던 이 여러 날 동안에 내린 결정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10. The Sixth Decision 여섯 번째 결정

136:10.1 (1523.6) On the last day of this memorable isolation, before starting down the mountain to join John and his disciples, the Son of Man made his final decision. And this decision he communicated to the Personalized Adjuster in these words, “And in all other matters, as in these now of decision-record, I pledge you I will be subject to the will of my Father.” And when he had thus spoken, he journeyed down the mountain. And his face shone with the glory of spiritual victory and moral achievement. 이 기억할만한 고립의 마지막 날,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합류하러 산에서 내려가시기 전에, 사람의 아들은 그의 마지막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이 결정을 다음과 같은 말로 고유성이 구현된 조율자에게 통보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문제에서, 이제 이 여러 기록된-결정대로, 나는 나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것을 당신께 서약합니다.” 그렇게 말씀한 후,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영적 승리와 도덕적 성취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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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2 Appearances in Galilee 갈릴리에 출현

Paper 192

Appearances in Galilee 갈릴리에 출현

1. Appearance by the Lake 호숫가에 출현
“Lads, have you caught anything?” “여보시오 친구들, 무엇을 좀 잡았소?”
2. Visiting with the Apostles Two and Two 사도들을 둘 씩 방문함
3. On the Mount of Ordination 임명하신 산에서
4. The Lakeside Gathering 호숫가에서 모임

160626 부활14 – 갈릴리와 부활의 예수님 마28:11-15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92:0.1 (2045.1) BY THE time the apostles left Jerusalem for Galilee, the Jewish leaders had quieted down considerably. Since Jesus appeared only to his family of kingdom believers, and since the apostles were in hiding and did no public preaching, the rulers of the Jews concluded that the gospel movement was, after all, effectually crushed. They were, of course, disconcerted by the increasing spread of rumors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but they depended upon the bribed guards effectively to counteract all such reports by their reiteration of the story that a band of his followers had removed the body.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까지, 유대인 지도자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침묵을 지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를 믿는 그의 가족들에게만 나타나셨고, 사도들은 숨어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통치자들은 복음 운동이 결국 효과적으로 박멸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부활의 소문이 점점 더 퍼져나가는 것 때문에 당황했지만, 경비병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들을 통해,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을 옮겨버렸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모든 소문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92:0.2 (2045.2) From this time on, until the apostles were dispersed by the rising tide of persecution, Peter was the generally recognized head of the apostolic corps. Jesus never gave him any such authority, and his fellow apostles never formally elected him to such a position of responsibility; he naturally assumed it and held it by common consent and also because he was their chief preacher. From now on public preaching became the main business of the apostles. After their return from Galilee, Matthias, whom they chose to take the place of Judas, became their treasurer. 이 시기로부터 박해로 인해 사도들이 흩어질 때까지, 베드로는 사도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시지도 않았고, 동료 사도들도 공적으로 그를 책임자로 선출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가운데, 대부분의 설교를 했던 베드로 자신이 그 위치를 당연히 받아들여 고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대중 설교는 사도들의 주요 업무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갈릴리에서 돌아온 후에는, 유다 대신에 선택한 맛디아가 그들의 회계원이 되었습니다.

192:0.3 (2045.3) During the week they tarried in Jerusalem, Mary the mother of Jesus spent much of the time with the women believers who were stopping at the home of Joseph of Arimathea. 그들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그 주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여 성도들과 함께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92:0.4 (2045.4) Early this Monday morning when the apostles departed for Galilee, John Mark went along. He followed them out of the city, and when they had passed well beyond Bethany, he boldly came up among them, feeling confident they would not send him back. 두 번째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도들이 갈릴리로 떠날 때, 요한 마가도 그들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요한 마가는 베다니를 지난 후에는, 사도들이 자기를 되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대담하게 그들과 섞였습니다.

192:0.5 (2045.5) The apostles paused several times on the way to Galilee to tell the story of their risen Master and therefore did not arrive at Bethsaida until very late on Wednesday night. It was noontime on Thursday before they were all awake and ready to partake of breakfast. 사도들은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위해 여러 번 쉬었기 때문에, 이틀 후 아주 늦은 밤에 벳새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착한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모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 Appearance by the Lake 호숫가에 출현

160703 부활15 –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92:1.1 (2045.6) About six o’clock Friday morning, April 21, the morontia Master made his thirteenth appearance, the first in Galilee, to the ten apostles as their boat drew near the shore close to the usual landing place at Bethsaida. 4월 21일 금요일 아침 6시 경, 벳새다에서, 열 명의 사도들이 탄 배가 늘 배를 두던 해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에게 부활체 주(主)께서 갈릴리 지역에서는 처음, 지금까지 13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192:1.2 (2045.7) After the apostles had spent the afternoon and early evening of Thursday in waiting at the Zebedee home, Simon Peter suggested that they go fishing. When Peter proposed the fishing trip, all of the apostles decided to go along. All night they toiled with the nets but caught no fish. They did not much mind the failure to make a catch, for they had many interesting experiences to talk over, things which had so recently happened to them at Jerusalem. But when daylight came, they decided to return to Bethsaida. As they neared the shore, they saw someone on the beach, near the boat landing, standing by a fire. At first they thought it was John Mark, who had come down to welcome them back with their catch, but as they drew nearer the shore, they saw they were mistaken — the man was too tall for John. It had occurred to none of them that the person on the shore was the Master. They did not altogether understand why Jesus wanted to meet with them amidst the scenes of their earlier associations and out in the open in contact with nature, far away from the shut-in environment of Jerusalem with its tragic associations of fear, betrayal, and death. He had told them that, if they would go into Galilee, he would meet them there, and he was about to fulfill that promise.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에는 열 한 사도들이 함께 왔지만, 시몬 젤로떼는 갈릴리에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낙담하여, 벳새다에 도착한 후에는 형제들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세베대의 집에 머물던 10명의 사도들은 목요일 오후와 초저녁을 보낸 후, 시몬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자고 제안하였을 때, 사도들 모두 동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최근에 자신들에게 발생한 사건들과 여러 흥미로운 체험들을 나누었기 때문에 고기 잡지 못한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벳새다로 돌아오던 그들은 해변에 배를 대어 두는 곳 가까이에서 모닥불 옆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가 요한 마가이며,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자신들을 환영하려고 그곳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변에 가까이 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착각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으로 보기에 그는 너무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 중 누구도 해변에 있는 그 사람이 부활의 주(主)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공포와 배반과 죽음에 비극적으로 연관된 예루살렘의 밀폐된 공간으로부터 멀리 떠나, 사도들 자신과 초기에 함께 하였던 갈릴리의 그 현장 한 가운데 즉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야외에서 주(主)께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사도들과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이루시려는 중이셨습니다.

192:1.3 (2046.1) As they dropped anchor and prepared to enter the small boat for going ashore, the man on the beach called to them, “Lads, have you caught anything?” And when they answered, “No,” he spoke again. “Cast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fish.” While they did not know it was Jesus who had directed them, with one accord they cast in the net as they had been instructed, and immediately it was filled, so much so that they were hardly able to draw it up. Now, John Zebedee was quick of perception, and when he saw the heavy-laden net, he perceived that it was the Master who had spoken to them. When this thought came into his mind, he leaned over and whispered to Peter, “It is the Master.” Peter was ever a man of thoughtless action and impetuous devotion; so when John whispered this in his ear, he quickly arose and cast himself into the water that he might the sooner reach the Master’s side. His brethren came up close behind him, having come ashore in the small boat, hauling the net of fishes after them. 그들이 닻을 내린 후 물가로 나가기 위하여 작은 배를 준비하려는데, 해변에 그 사람이 그들에게 “여보시오 친구들, 무엇을 좀 잡았소?”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바닷가로 나올 때, 다리키아Tarichea의 생선장수 어물상(魚物商)들은 햇빛에 말릴 싱싱한 고기를 직접 구입하려고 늘 그렇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아니요”라고 대답하자,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시오,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오.” 그들은 그가 예수님이신 것을 모른 채, 한 마음으로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고, 즉시 그물이 가득하여 거의 들어 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요한 세베대는 고기로 가득한 그물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주(主)이신 것을 언뜻 알아차렸습니다. 그 때 요한 세배대는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서 “저분이 주(主)이시다.”라고 속삭였습니다. 항상 경솔하고 성급하게 행동을 옮기던 베드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主)께 할 수 있는 한 빨리 가려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고기로 가득한 그물을 끌면서 작은 배를 타고 그의 뒤를 좇아서 해변으로 나왔습니다.

192:1.4 (2046.2) By this time John Mark was up and, seeing the apostles coming ashore with the heavy-laden net, ran down the beach to greet them; and when he saw eleven men instead of ten, he surmised that the unrecognized one was the risen Jesus, and as the astonished ten stood by in silence, the youth rushed up to the Master and, kneeling at his feet, said, “My Lord and my Master.” And then Jesus spoke, not as he had in Jerusalem, when he greeted them with “Peace be upon you,” but in commonplace tones he addressed John Mark: “Well, John, I am glad to see you again and in carefree Galilee, where we can have a good visit. Stay with us, John, and have breakfast.” 이 때 요한 마가가 사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해변으로 달려갔는데, 그는 10명이 아니라 11명이 해변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한 사람은 부활한 예수일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10명의 사도들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서 있는데, 그 소년은 주(主)께 달려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주(主)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라고 말하는 대신, 요한 마가에게 평상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요한아, 너를 다시 만나 반갑고, 우리가 편안히 만날 수 있는 안전한 갈릴리에서 마음껏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요한아,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도록 해라.”

192:1.5 (2046.3) As Jesus talked with the young man, the ten were so astonished and surprised that they neglected to haul the net of fish in upon the beach. Now spoke Jesus: “Bring in your fish and prepare some for breakfast. Already we have the fire and much bread.” 예수께서 소년에게 말하실 때 10 명의 사도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해변으로 고기가 들어 있는 그물 끌어올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해라. 이미 모닥불과 많은 빵이 준비되어 있다.”

192:1.6 (2046.4) While John Mark had paid homage to the Master, Peter had for a moment been shocked at the sight of the coals of fire glowing there on the beach; the scene reminded him so vividly of the midnight fire of charcoal in the courtyard of Annas, where he had disowned the Master, but he shook himself and, kneeling at the Master’s feet, exclaimed, “My Lord and my Master!” 요한 마가가 주(主)께 경의를 표하는 동안, 베드로는 해변에 숯불이 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주(主)님을 부인했던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한 밤중에 타오르던 그 숯불이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 주(主)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나의 주님, 나의 주(主)여!”라고 소리쳤습니다.

192:1.7 (2046.5) Peter then joined his comrades as they hauled in the net. When they had landed their catch, they counted the fish, and there were 153 large ones. And again was the mistake made of calling this another miraculous catch of fish. There was no miracle connected with this episode. It was merely an exercise of the Master’s preknowledge. He knew the fish were there and accordingly directed the apostles where to cast the net. 그 후 베드로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동료들과 합세하였고, 그들이 잡은 고기를 세어 보니 큰 고기만 153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물고기 잡은 또 다른 기적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다시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기적이 아니라 주(主)가 지니신 선험 지식을 실행에 옮기도록 한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가 있는 그 곳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그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192:1.8 (2047.1) Jesus spoke to them, saying: “Come now, all of you, to breakfast. Even the twins should sit down while I visit with you; John Mark will dress the fish.” John Mark brought seven good-sized fish, which the Master put on the fire, and when they were cooked, the lad served them to the ten. Then Jesus broke the bread and handed it to John, who in turn served it to the hungry apostles. When they had all been served, Jesus bade John Mark sit down while he himself served the fish and the bread to the lad. And as they ate, Jesus visited with them and recounted their many experiences in Galilee and by this very lake.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모두 이리 와서 아침 식사를 하여라.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쌍둥이 형제들도 여기 앉아 있어라. 요한 마가가 고기를 준비할 것이다.” 요한 마가는 알맞은 크기의 생선 일곱 마리를 가져왔고, 주(主)께서 그것들을 불 위에 올려놓고, 잘 익은 후, 그 소년이 그것들을 열 명의 사도들에게 배분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빵을 떼어 요한에게 주었고, 그는 시장한 사도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모두 받은 후, 예수님은 요한 마가에게 앉으라고 지시하고 그 소년에게 손수 물고기와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식사 중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하시면서 과거에 이 호수 주변과 갈릴리에서 있었던 많은 체험들을 회상하였습니다.

192:1.9 (2047.2) This was the third time Jesus had manifested himself to the apostles as a group. When Jesus first addressed them, asking if they had any fish, they did not suspect who he was because it was a common experience for these fishermen on the Sea of Galilee, when they came ashore, to be thus accosted by the fish merchants of Tarichea, who were usually on hand to buy the fresh catches for the drying establishments. 이 사건은 사도들 전체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세 번째였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그들에게 어떤 고기든지 잡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의심쩍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바닷가로 나올 때, 다리키아의 어물상(魚物商)들이 햇빛에 말릴 싱싱한 고기를 직접 구입하려고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체험을 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2:1.10 (2047.3) Jesus visited with the ten apostles and John Mark for more than an hour, and then he walked up and down the beach, talking with them two and two — but not the same couples he had at first sent out together to teach. All eleven of the apostles had come down from Jerusalem together, but Simon Zelotes grew more and more despondent as they drew near Galilee, so that, when they reached Bethsaida, he forsook his brethren and returned to his home. 예수님은 10명의 사도들과 요한 마가와 함께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셨고, 그 후 그들을 두 명씩 나누어 같이 이야기하며 해변을 거니셨습니다. 이전에 예수께서 처음에 두 명씩 짝지어 내보내시면서 가르치게 하였을 때의 짝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에는 열 한 사도들이 함께 왔지만, 시몬 젤로떼는 갈릴리에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낙담하여, 벳새다에 도착한 후에는 형제들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192:1.11 (2047.4) Before taking leave of them this morning, Jesus directed that two of the apostles should volunteer to go to Simon Zelotes and bring him back that very day. And Peter and Andrew did so. 예수님은 이 날 아침 그들을 떠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누구든지 자진하여 두 사람이 시몬 젤로떼에게 가서 그 날 당장 그를 데리고 돌아오도록 지시하셨으며,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2. Visiting with the Apostles Two and Two 사도들을 둘 씩 방문하심

160710 부활16 – 요한과 베드로와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15-23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192:2.1 (2047.5) When they had finished breakfast, and while the others sat by the fire, Jesus beckoned to Peter and to John that they should come with him for a stroll on the beach. As they walked along, Jesus said to John, “John, do you love me?” And when John answered, “Yes, Master, with all my heart,” the Master said: “Then, John, give up your intolerance and learn to love men as I have loved you. Devote your life to proving that love is the greatest thing in the world. It is the love of God that impels men to seek salvation. Love is the ancestor of all spiritual goodness, the essence of the true and the beautiful.” 그들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다른 사람들은 모닥불 옆에 남아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손짓으로 부르셔서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거닐자고 하셨습니다. 함께 걸으면서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요한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요한이 “예, 주(主)여, 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주(主)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아, 그렇다면, 참지 못하는 네 성격을 버리고,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사람들 사랑하기를 배워라.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명하는 일에 네 일생을 바쳐라. 사람들이 구원을 찾도록 추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영적 선(善)의 뿌리이며, 참되고(眞) 아름다운(美) 것의 알맹이다.”

192:2.2 (2047.6) Jesus then turned toward Peter and asked, “Peter, do you love me?” Peter answered, “Lord, you know I love you with all my soul.” Then said Jesus: “If you love me, Peter, feed my lambs. Do not neglect to minister to the weak, the poor, and the young. Preach the gospel without fear or favor; remember always that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Serve your fellow men even as I have served you; forgive your fellow mortals even as I have forgiven you. Let experience teach you the value of meditation and the power of intelligent reflection.” 그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혼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어린 자들 돌아보기를 소홀히 하지 마라. 걱정하지도 편애하지도 말고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내가 너를 섬긴 것처럼, 네 동료들을 섬기라.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네 동료 사람들을 용서해라. 명상의 가치와 지적 반성의 힘을 경험을 통해 배우라.”

192:2.3 (2047.7) After they had walked along a little farther, the Master turned to Peter and asked, “Peter, do you really love me?” And then said Simon,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And again said Jesus: “Then take good care of my sheep. Be a good and a true shepherd to the flock. Betray not their confidence in you. Be not taken by surprise at the enemy’s hand. Be on guard at all times — watch and pray.” 조금 더 걸으신 후에, 주(主)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돌아보시며 “베드로야,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잘 보살피라. 양 무리들에게 선하고 참된 목자가 되어라. 너에 대한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라. 적의 손아귀에 불시에 당하지 말라. 항상 경계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

192:2.4 (2047.8) When they had gone a few steps farther, Jesus turned to Peter and, for the third time, asked, “Peter, do you truly love me?” And then Peter, being slightly grieved at the Master’s seeming distrust of him, said with considerable feeling, “Lord, you know all things, and therefore do you know that I really and truly love you.” Then said Jesus: “Feed my sheep. Do not forsake the flock. Be an example and an inspiration to all your fellow shepherds. Love the flock as I have loved you and devote yourself to their welfare even as I have devoted my life to your welfare. And follow after me even to the end.” 몇 발자국 더 걸어간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며 세 번째로 “베드로야, 네가 진실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를 믿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주(主)의 태도에 살짝 슬퍼하는 감정을 드러내며 말하였습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정말로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무리를 버리지 마라. 너의 모든 동료 목자들에게 본이 되고 감화를 끼치라.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양 무리를 사랑하고, 네가 잘 되도록 내가 생명을 바쳤듯이 그들이 잘되도록 너 자신을 바쳐라. 그리고 끝까지 나를 따르라.”

192:2.5 (2048.1) Peter took this last statement literally — that he should continue to follow after him — and turning to Jesus, he pointed to John, asking, “If I follow on after you, what shall this man do?” And then, perceiving that Peter had misunderstood his words, Jesus said: “Peter, be not concerned about what your brethren shall do. If I will that John should tarry after you are gone, even until I come back, what is that to you? Only make sure that you follow me.” 베드로는 자신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따라간다면, 이 사람은 무엇을 하게 될까요?”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말을 오해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 형제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라. 만약 네가 떠난 후에,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요한을 머물러 있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다만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192:2.6 (2048.2) This remark spread among the brethren and was received as a statement by Jesus to the effect that John would not die before the Master returned, as many thought and hoped, to establish the kingdom in power and glory. It was this interpretation of what Jesus said that had much to do with getting Simon Zelotes back into service, and keeping him at work. 이 말이 형제들 사이에 두루 퍼졌으며, 권능과 영광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희망한 것처럼, 주(主)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시몬 젤로떼가 다시 봉사의 현장으로 돌아와 계속 일했던 것에 많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160717 부활17 – 안드레 및 야고보와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21:24-25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192:2.7 (2048.3) When they returned to the others, Jesus went for a walk and talk with Andrew and James. When they had gone a short distance, Jesus said to Andrew, “Andrew, do you trust me?” And when the former chief of the apostles heard Jesus ask such a question, he stood still and answered, “Yes, Master, of a certainty I trust you, and you know that I do.” Then said Jesus: “Andrew, if you trust me, trust your brethren more — even Peter. I once trusted you with the leadership of your brethren. Now must you trust others as I leave you to go to the Father. When your brethren begin to scatter abroad because of bitter persecutions, be a considerate and wise counselor to James my brother in the flesh when they put heavy burdens upon him which he is not qualified by experience to bear. And then go on trusting, for I will not fail you. When you are through on earth, you shall come to me.”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안드레와 야고보와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조금 걸어간 후에 예수께서 안드레에게 “안드레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도들의 전임 우두머리였던 그는 예수께서 그러한 질문을 하자 똑바로 서서 “예, 주(主)여, 저는 결단코 당신을 신뢰하며, 제가 그러하다는 것을 당신도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야, 만일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베드로를 포함하여 네 형제들을 더욱 신뢰하여라. 나는 한 때 형제들에 대한 너의 지도력을 신뢰하였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가기 위하여 너를 떠나지만, 너는 다른 형제들을 신뢰해야만 한다. 처참한 박해로 인하여 네 형제들이 멀리 흩어지게 된 후, 내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아직 체험이 부족하여, 견딜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짐이, 그에게 지워질 때, 그에게 신중하고 현명한 조언자가 되어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계속 나를 신뢰하라. 네가 이 땅에서의 일생을 마친 후에는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다.”

192:2.8 (2048.4) Then Jesus turned to James, asking, “James, do you trust me?” And of course James replied, “Yes, Master, I trust you with all my heart.” Then said Jesus: “James, if you trust me more, you will be less impatient with your brethren. If you will trust me, it will help you to be kind to the brotherhood of believers. Learn to weigh the consequences of your sayings and your doings. Remember that the reaping is in accordance with the sowing. Pray for tranquillity of spirit and cultivate patience. These graces, with living faith, shall sustain you when the hour comes to drink the cup of sacrifice. But never be dismayed; when you are through on earth, you shall also come to be with me.” 그 후 예수님은 야고보를 향하여 “야고보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야고보는 “예, 주(主)여,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야, 네가 나를 더욱 신뢰한다면, 네 형제들에 대해서 참을성을 좀 더 지니라. 나에 대한 신뢰가 너의 형제들에게 친절하도록 너를 도와줄 것이다. 네 말들과 행동들의 결과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도록 배우라.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라. 영의 평온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여라. 희생물의 잔을 마셔야 하는 시간이 도래할 때, 살아있는 신앙과 함께, 이 은혜들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당황하지 말라. 네가 이 땅을 지나게 되면, 너도 와서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160724 부활18 – 도마와 나다나엘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요1:45-49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192:2.9 (2048.5) Jesus next talked with Thomas and Nathaniel. Said he to Thomas, “Thomas, do you serve me?” Thomas replied, “Yes, Lord, I serve you now and always.” Then said Jesus: “If you would serve me, serve my brethren in the flesh even as I have served you. And be not weary in this well-doing but persevere as one who has been ordained by God for this service of love. When you have finished your service with me on earth, you shall serve with me in glory. Thomas, you must cease doubting; you must grow in faith and the knowledge of truth. Believe in God like a child but cease to act so childishly. Have courage; be strong in faith and mighty in the kingdom of God.” 예수님은 그 다음에 도마와 나다니엘과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도마야, 너는 나를 섬기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도마는 “예, 주님, 저는 지금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섬깁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나를 섬기려고 한다면, 내가 너를 섬겨왔던 것처럼, 육신의 내 형제들을 섬기라. 이처럼 온전히 행동하는 것에 지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사람답게 사랑의 봉사를 인내로 견디라. 네가 이 땅에서 나와 함께 하는 이 봉사를 마치면, 영광 안에서 나와 더불어 섬기게 될 것이다. 도마야, 너는 의심하기를 그만두어야만 한다. 너는 신앙 안에서와 진리에 대한 지식 안에서 성장하여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만두라. 용기를 가지라. 신앙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강건하여라.”

192:2.10 (2049.1) Then said the Master to Nathaniel, “Nathaniel, do you serve me?” And the apostle answered, “Yes, Master, and with an undivided affection.” Then said Jesus: “If, therefore, you serve me with a whole heart, make sure that you are devoted to the welfare of my brethren on earth with tireless affection. Admix friendship with your counsel and add love to your philosophy. Serve your fellow men even as I have served you. Be faithful to men as I have watched over you. Be less critical; expect less of some men and thereby lessen the extent of your disappointment. And when the work down here is over, you shall serve with me on high.” 그 후 주(主)님은 나다니엘에게 “나다니엘아, 너는 나를 섬기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사도는 “예, 주(主)여, 온전한 애정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섬긴다면, 이 세상에 있는 내 형제들의 행복을 위하여 네가 지칠 줄 모르는 애정으로 헌신해야 함을 명심하라. 네가 조언을 할 때 우정과 함께 하고, 네 철학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여라. 내가 너를 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들을 섬겨라. 내가 너를 돌보아준 것처럼 사람들에게 신실하여라. 비판을 줄이고, 사람들에게 기대(期待)하는 수준을 낮추어서, 너의 실망을 줄이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게 되면, 너는 나와 함께 저 높은 곳에서 섬기게 될 것이다.”

160731 부활19 – 마태와 빌립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행8:5-6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192:2.11 (2049.2) After this the Master talked with Matthew and Philip. To Philip he said, “Philip, do you obey me?” Philip answered, “Yes, Lord, I will obey you even with my life.” Then said Jesus: “If you would obey me, go then into the lands of the gentiles and proclaim this gospel. The prophets have told you that to obey is better than to sacrifice. By faith have you become a God-knowing kingdom son. There is but one law to obey — that is the command to go forth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Cease to fear men; be unafraid to preach the good news of eternal life to your fellows who languish in darkness and hunger for the light of truth. No more, Philip, shall you busy yourself with money and goods. You now are free to preach the glad tidings just as are your brethren. And I will go before you and be with you even to the end.” 그 다음에 주님은 마태와 빌립과 함께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빌립아, 너는 내 말에 순종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 주님, 당신이 제 생명을 바치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主)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해라. 선지자들은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순종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너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순종해야 유일한 한 가지 법은 네가 나가서 하나님 니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진리의 빛에 굶주리고 흑암 속에서 번민하는 네 동료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쁜 소식을 대담하게 전하라. 빌립아, 너는 더 이상 돈과 재물을 위하여 바쁘게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너는 네 형제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기쁜 소식을 자유롭게 전파하라. 나는 너의 앞에서 갈 것이며, 끝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192:2.12 (2049.3) And then, speaking to Matthew, the Master asked, “Matthew, do you have it in your heart to obey me?” Matthew answered, “Yes, Lord, I am fully dedicated to doing your will.” Then said the Master: “Matthew, if you would obey me, go forth to teach all peoples this gospel of the kingdom. No longer will you serve your brethren the material things of life; henceforth you are also to proclaim the good news of spiritual salvation. From now on have an eye single only to obeying your commission to preach this gospel of the Father’s kingdom. As I have done the Father’s will on earth, so shall you fulfill the divine commission. Remember, both Jew and gentile are your brethren. Fear no man when you proclaim the saving truths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And where I go, you shall presently come.” 그 후 주님은 마태에게 “마태야, 너는 진심으로 내 말에 순종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마태는 “예, 주님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主)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야, 만일 네가 내 말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모든 민족들에게로 가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라. 너는 더 이상 네 형제들의 일생에 필요한 물질적인 사물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아도 되며, 이제부터는 너도 영적인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하여라. 지금부터는 오직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이 복음을 전도하는 임무에만 전념하도록 하여라.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같이, 너도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네 형제라는 것을 명심해라. 너는 하늘나라 복음이라는 구원의 진리들을 전파할 때 아무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가는 곳으로, 너도 곧 오게 될 것이다.”

160807 부활20 – 알패오의 쌍둥이들과 대화하신 부활의 예수님(13th) 막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2:2.13 (2049.4) Then he walked and talked with the Alpheus twins, James and Judas, and speaking to both of them, he asked, “James and Judas, do you believe in me?” And when they both answered, “Yes, Master, we do believe,” he said: “I will soon leave you. You see that I have already left you in the flesh. I tarry only a short time in this form before I go to my Father. You believe in me — you are my apostles, and you always will be. Go on believing and remembering your association with me, when I am gone, and after you have, perchance, returned to the work you used to do before you came to live with me. Never allow a change in your outward work to influence your allegiance. Have faith in God to the end of your days on earth. Never forget that, when you are a faith son of God, all upright work of the realm is sacred. Nothing which a son of God does can be common. Do your work, therefore, from this time on, as for God. And when you are through on this world, I have other and better worlds where you shall likewise work for me. And in all of this work, on this world and on other worlds, I will work with you, and my spirit shall dwell within you.” 그 후 그는 알패오 쌍둥이,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걸으면서, 두 사람에게 “야고보와 유다야, 너희는 나를 믿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두 사람은 똑같이 “예, 주(主)여, 저희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너희를 떠날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는 벌써 너희를 떠났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이런 형체로 잠시 동안만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나를 믿었고─너희는 내 사도들이며, 또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 너희가 나와 같이 행동하기 전에 너희가 하였던 일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와 함께 했던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너희들이 외적인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너희들의 충성심을 좌우할 만한 어떤 기회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져라. 너희가 하나님의 신앙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정직한 일들이 거룩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들 중에서 하잘 것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지금부터 너희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너희가 이 세상을 마칠 때, 나에게는 너희가 여전히 나를 위하여 일하게 되는 다른 더 좋은 세상이 있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들에서, 나는 너희들과 같이 일할 것이며,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192:2.14 (2049.5) It was almost ten o’clock when Jesus returned from his visit with the Alpheus twins, and as he left the apostles, he said: “Farewell, until I meet you all on the mount of your ordination tomorrow at noontime.” When he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예수께서 알패오의 쌍둥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은 거의 10시가 되었을 무렵이었으며, 그는 사도들을 떠나시면서 “너희를 사도로 임명하였던 산에서 내일 정오에 너희 모두를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후에 그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3. On the Mount of Ordination 임명하신 산에서

160814 부활21 – 사도들을 임명했던 산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4th) 마28:16-17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92:3.1 (2050.1) At noon on Saturday, April 22, the eleven apostles assembled by appointment on the hill near Capernaum, and Jesus appeared among them. This meeting occurred on the very mount where the Master had set them apart as his apostles and as ambassadors of the Father’s kingdom on earth. And this was the Master’s four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열 한 사도들은 약속대로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동산 위에 모였으며,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의 만남은 주(主)의 사도로서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서 주께서 그들을 지정하였던 바로 그 산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主)의 14번째 부활체 출현이었습니다.

192:3.2 (2050.2) At this time the eleven apostles knelt in a circle about the Master and heard him repeat the charges and saw him re-enact the ordination scene even as when they were first set apart for the special work of the kingdom. And all of this was to them as a memory of their former consecration to the Father’s service, except the Master’s prayer. When the Master — the morontia Jesus — now prayed, it was in tones of majesty and with words of power such as the apostles had never before heard. Their Master now spoke with the rulers of the universes as one who, in his own universe, had had all power and authority committed to his hand. And these eleven men never forgot this experience of the morontia rededication to the former pledges of ambassadorship. The Master spent just one hour on this mount with his ambassadors, and when he had taken an affectionate farewell of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이 때 열 한 사도들은 주(主) 주위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무릎을 꿇었으며, 주께서 반복해서 하시는 위탁의 말씀을 들었고 나라의 특별임무를 위하여 처음 지정되었을 때처럼 사도로 임명하는 장면이 재현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주(主)의 기도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일을 위해 전에 가졌던 임명식에 대한 기억과 동일하였습니다. 부활체로서의 주(主)께서 기도하실 때, 힘이 있는 말씀과 함께 그의 음성은 장엄하였으며 지금까지 사도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주(主)께서는 그 자신의 우주 안에서 모든 힘과 권한을 손에 쥐신 분으로서 우주들의 통치자들과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전에 대사 직분의 서약 위에 부활체적으로 다시 헌신하게 된 이 체험을 결코 잊지 못하였습니다. 주(主)님은 자신의 대사들과 함께 이 산 위에서 한 시간 동안 함께 계셨으며, 그들에게 자애로운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192:3.3 (2050.3) And no one saw Jesus for a full week. The apostles really had no idea what to do, not knowing whether the Master had gone to the Father. In this state of uncertainty they tarried at Bethsaida. They were afraid to go fishing lest he come to visit them and they miss seeing him. During this entire week Jesus was occupied with the morontia creatures on earth and with the affairs of the morontia transition which he was experiencing on this world. 그리고 그 후로 한 주일 동안 아무도 예수님을 불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주(主)께서 이미 아버지께로 가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태로 그들은 벳새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들에게 왔을 때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 염려가 되어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 주일 내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있는 부활체 창조물들과 함께 계셨으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부활체 전환의 업무에 전념하셨습니다.

4. The Lakeside Gathering 호숫가에서 모임

160821 부활22 –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15th)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92:4.1 (2050.4) Word of the appearances of Jesus was spreading throughout Galilee, and every day increasing numbers of believers arrived at the Zebedee home to inquire about the Master’s resurrection and to find out the truth about these reputed appearances. Peter, early in the week, sent out word that a public meeting would be held by the seaside the next Sabbath a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예수께서 여러 번 나타났다는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졌고, 매일같이 더 많은 신자들이 주(主)의 부활에 관하여 물어보고, 그가 여러 번 보였다는 떠도는 소문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세베대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주초에, 베드로는 공개 집회가 다음 안식일 오후 3시에 그 바닷가에서 있을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192:4.2 (2050.5) Accordingly, on Saturday, April 29, at three o’clock, more than five hundred believers from the environs of Capernaum assembled at Bethsaida to hear Peter preach his first public sermon since the resurrection. The apostle was at his best, and after he had finished his appealing discourse, few of his hearers doubted that the Master had risen from the dead. 따라서, 4월 29일 토요일 3시에, 부활 이후 처음 있는 베드로의 대중 설교를 듣기 위하여 500명 이상의 신자들이 가버나움 근방으로부터 벳새다로 모였습니다. 사도는 자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그의 호소하는 강연이 다 끝난 후에는, 주(主)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청중은 거의 없었습니다.

192:4.3 (2050.6) Peter ended his sermon, saying: “We affirm that Jesus of Nazareth is not dead; we declare that he has risen from the tomb; we proclaim that we have seen him and talked with him.” Just as he finished making this declaration of faith, there by his side, in full view of all these people, the Master appeared in morontia form and, speaking to them in familiar accents, said, “Peace be upon you,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When he had thus appeared and had so spoken to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This was the fif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the risen Jesus. 베드로는 설교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돌아가시지 않았음을 단언합니다. 그가 무덤에서 살아나셨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를 보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음을 공포합니다.” 그가 신념에 찬 이 선언을 마쳤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主)께서 그의 옆에 부활체(모론시아 형체)로 나타났으며, 낯익은 어투로 그들에게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그리고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셔서 그 말씀을 그들에게 한 후에, 그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가 15번째로 나타나신 부활체(모론시아)현시였습니다.

192:4.4 (2051.1) Because of certain things said to the eleven while they were in conference with the Master on the mount of ordination, the apostles received the impression that their Master would presently make a public appearance before a group of the Galilean believers, and that, after he had done so, they were to return to Jerusalem. Accordingly, early the next day, Sunday, April 30, the eleven left Bethsaida for Jerusalem. They did considerable teaching and preaching on the way down the Jordan, so that they did not arrive at the home of the Marks in Jerusalem until late on Wednesday, May 3. 사도 임명 받은 그 산 위에서 열 한 사도들이 주(主)와 회의를 하는 동안에 들었던 특별한 말씀을 통하여, 사도들은 주(主)께서 갈릴리의 무리들 앞에서 곧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리라는 것과 그가 그렇게 한 후에는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음 날인 4월 30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열 한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벳새다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요단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여러 번 가르치고 설교하였으므로, 5월 3일 수요일 늦은 시각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192:4.5 (2051.2) This was a sad home-coming for John Mark. Just a few hours before he reached home, his father, Elijah Mark, suddenly died from a hemorrhage in the brain. Although the thought of the certainty of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did much to comfort the apostles in their grief, at the same time they truly mourned the loss of their good friend, who had been their stanch supporter even in the times of great trouble and disappointment. John Mark did all he could to comfort his mother and, speaking for her, invited the apostles to continue to make their home at her house. And the eleven made this upper chamber their headquarters until after the day of Pentecost. 요한 마가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슬픈 귀향길이었습니다. 그가 도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의 아버지 엘리야 마가가 뇌출혈로 인하여 갑자기 죽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그들의 슬픔을 많이 위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근심과 낙심에 젖어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애도하였습니다. 요한 마가는 최선을 다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사도들이 그 집에 계속 머물도록 그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열 한 명의 사도들은 오순절이 지날 때까지 이 다락방을 그들의 본부로 사용하였습니다.

192:4.6 (2051.3) The apostles had purposely entered Jerusalem after nightfall that they might not be seen by the Jewish authorities. Neither did they publicly appear in connection with the funeral of Elijah Mark. All the next day they remained in quiet seclusion in this eventful upper chamber. 사도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해가 진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그들은 엘리야 마가를 장사 지내는 동안에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란이 많은 이 다락방에서 다음 날 하루 종일 조용히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192:4.7 (2051.4) On Thursday night the apostles had a wonderful meeting in this upper chamber and all pledged themselves to go forth in the public preaching of the new gospel of the risen Lord except Thomas, Simon Zelotes, and the Alpheus twins. Already had begun the first steps of chang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 sonship with God and brotherhood with man — into the proclamation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Nathaniel opposed this shift in the burden of their public message, but he could not withstand Peter’s eloquence, neither could he overcome the enthusiasm of the disciples, especially the women believers. 목요일 밤에 사도들은 이 다락방에서 훌륭한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도마와 시몬 젤로떼 그리고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공공장소에 나가서 부활한 주님에 대한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로 모두 맹세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관계와 사람들의 형제신분─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선포로 변경시키는 첫 번째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나다니엘은 그들의 공개적인 설교 요지에서 이렇게 변경시키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베드로의 설득력을 당할 수가 없었으며, 제자들, 특히 여자 신도들의 열광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192:4.8 (2051.5) And so, under the vigorous leadership of Peter and ere the Master ascended to the Father, his well-meaning representatives began that subtle process of gradually and certainly changing the religion of Jesus into a new and modified form of religion about Jesus. 그리하여, 베드로의 원기 왕성한 지도력 아래에서, 그리고 주(主)가 아버지께로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그의 좋은-의미를 지닌 대표자들은, 예수님의 종교를 예수님에 관한 종교라는 새롭고도 수정된 형태로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변경하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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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3 Final Appearances and Ascension 마지막 출현과 상승

Paper 193

Final Appearances and Ascension 마지막 출현과 상승

The sixteenth appearance (courtyard of Nicodemus) 16번째 출현(니고데모의 안뜰)
1. The Appearance at Sychar 시카에 출현
2. The Phoenician Appearance 페니키아에 출현
3. Last Appearance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출현
4. Causes of Judas’s Downfall 유다 패망의 원인들
5. The Master’s Ascension 주님의 승천(昇天)
6. Peter Calls a Meeting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60828 부활23 – 대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 (16th) AD30. 4. 9. Am 3:30 이후 요셉 무덤 앞 1(5 여인) 2(막마) / 베다니 나사로 무덤 동산 3(약 12시) 4(가족친구 20명 pm 2시) / 요셉 집 5(25명 여인들 pm4:15) 6(40명 그리스인 플라비우스 오후4:30) 7(엠마오2형제 목동 오후5시) 8(베드로 마가 정원 pm8:30) 9(10사도들 마가 다락방 pm9) 10(전도자들 필라델피아 4/11화 am8시) 11(11사도들 막 다락방 4/16 주일 pm6) 12(로단80 알렉산드리아 4/18화 pm8:30) 13(10 사도 갈릴리 4/21 금 am6:00) 14(11사도 가버나움 고지 4/22토 12시) 15(500 벳새다 호숫가 4/29 토 pm3) 16(61이상 대표자들 니고데모 집 5/5 금 pm9) 눅24:44-48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193:0.1 (2052.1) THE sixteenth morontia manifestation of Jesus occurred on Friday, May 5, in the courtyard of Nicodemus, about nine o’clock at night. On this evening the Jerusalem believers had made their first attempt to get together since the resurrection. Assembled here at this time were the eleven apostles, the women’s corps and their associates, and about fifty other leading disciples of the Master, including a number of the Greeks. This company of believers had been visiting informally for more than half an hour when, suddenly, the morontia Master appeared in full view and immediately began to instruct them. Said Jesus: 예수님의 16번째 모론시아 출현은 5월 5일 금요일, 니고데모의 집 안마당에서 밤 9시 경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날 저녁,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以後) 처음으로, 함께 모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열 한 사도들과, 여자 대원들과 그들의 친구들, 다수의 그리스인들을 포함한 50 여명의 다른 수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신자들 무리가 30분 이상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모론시아 주(主)가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즉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0.2 (2052.2) “Peace be upon you. This is the most representative group of believers — apostles and disciples, both men and women — to which I have appeared since the time of my deliverance from the flesh. I now call you to witness that I told you beforehand that my sojourn among you must come to an end; I told you that presently I must return to the Father. And then I plainly told you how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of the Jews would deliver me up to be put to death, and that I would rise from the grave. Why, then, did you allow yourselves to become so disconcerted by all this when it came to pass? and why were you so surprised when I rose from the tomb on the third day? You failed to believe me because you heard my words without comprehending the meaning thereof.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너희들은 내가 육신에서 해방된 후에 나타난 신자들─사도들과 제자들, 남자들과 여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리들이다. 내가 이전에 너희들과 함께 하는 이 기간이 끝나게 되리라고 말한 것; 내가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을 증거 하도록 내가 너희들을 이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사제들과 유대인 통치자들이 어떻게 나를 죽이도록 넘겨주고, 그리고 내가 무덤에서 살아날 것을 분명하게 너희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 때, 너희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당황하였느냐? 그리고 내가 셋째 날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너희는 왜 그렇게 놀랐느냐? 너희는 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내 말을 믿지 못하였다.

193:0.3 (2052.3) “And now you should give ear to my words lest you again make the mistake of hearing my teaching with the mind while in your hearts you fail to comprehend the meaning. From the beginning of my sojourn as one of you, I taught you that my one purpose was to reveal my Father in heaven to his children on earth. I have lived the God-revealing bestowal that you might experience the God-knowing career. I have revealed God as your Father in heaven; I have revealed you as the sons of God on earth. It is a fact that God loves you, his sons. By faith in my word this fact becomes an eternal and living truth in your hearts. When, by living faith, you become divinely God-conscious, you are then born of the spirit as children of light and life, even the eternal life wherewith you shall ascend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attain the experience of finding God the Father on Paradise. 그러니 너희는 이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머리로 잘못 듣는 오류를 또 다시 행하지 않도록 내 말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 중에 머무는 시작부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나타내는 것이 한 가지 나의 한 가지 목적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왔노라.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생애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임을 계시하였노라. 나는 너희들을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계시하여왔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인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내 말을 믿음으로, 이 사실은 너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신앙에 의해서, 너희가 거룩히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면, 너희는 빛과 생명의 자녀로서 영으로부터 태어나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늘들의 하늘로 올라가고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체험을 성취하기까지 할 것이라.

160904 부활24 – 대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2 (16th) 마28:19-20a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a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193:0.4 (2052.4) “I admonish you ever to remember that your mission among men is to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 the reality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truth of the sonship of man. Proclaim the whole truth of the good news, not just a part of the saving gospel. Your message is not changed by my resurrection experience. Sonship with God, by faith, is still the saving truth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You are to go forth preaching the love of God and the service of man. That which the world needs most to know is: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rough faith they can actually realize, and daily experience, this ennobling truth. My bestowal should help all men to know that they are the children of God, but such knowledge will not suffice if they fail personally to faith-grasp the saving truth that they are the living spirit sons of the eternal Father.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concerned with the love of the Father and the service of his children on earth.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다음의 충고를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전파해야할 너희들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의 실체와 사람의 아들 관계의 진리니라. 너희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일부만 전하지 말고, 좋은 소식의 진리 전체를 전파하라. 너희의 메시지는 나의 부활 체험 때문에 변경될 수 없노라. 신앙으로 하나님의 아들관계가 된다는 것은 바뀔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지닌 구원의 진리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라는 진리를 전파하며 나아가라. 세상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포하노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이 진리를 실제로 깨닫고, 나날이 이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너희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그러나 그들이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있는 영적인 아들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신앙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일에 실패한다면, 그러한 지식은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버지의 사랑과 땅에서 그 자녀들의 봉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라.

193:0.5 (2053.1) “Among yourselves, here, you share the knowledge that I have risen from the dead, but that is not strange. I have the power to lay down my life and to take it up again; the Father gives such power to his Paradise Sons. You should the rather be stirred in your hearts by the knowledge that the dead of an age entered upon the eternal ascent soon after I left Joseph’s new tomb. I lived my life in the flesh to show how you can, through loving service, become God-revealing to your fellow men even as, by loving you and serving you, I have become God-revealing to you. I have lived among you as the Son of Man that you, and all other men, might know that you are all indeed the sons of God. Therefore, go you now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to all men. Love all men as I have loved you; serve your fellow mortals as I have served you.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Only tarry here in Jerusalem while I go to the Father, and until I send you the Spirit of Truth. He shall lead you into the enlarged truth, and I will go with you into all the world. I am with you always, and my peace I leave with you.” 지금 너희들은 나의 부활에 대한 지식을 서로 나누고 있지만, 나는 내 생명을 버릴 권세도, 그것을 다시 취할 권세도 가지고 있노라. 하늘 아버지가 그 권세를 주셨노라. 내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일어난 즉시 한 시대의 죽은 자들이 영원한 상승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너희 마음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사랑의 봉사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라. 이를 위해 내가 육신으로 일생을 살아왔노라. 너희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 수 있도록, 내가 사람의 아들로 너희들과 함께 살아왔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인류에게 이 하늘의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 동료들을 섬겨라. 너희가 대가없이 받았으니 대가없이 주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동안, 그리고 내가 진리의 영을 너희에게 보낼 때까지만 이곳 예루살렘에 머물러라. 그는 너희를 커다란 진리로 인도할 것이며, 너희가 온 세상으로 나아갈 때 내가 너희와 동행할 것이다.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193:0.6 (2053.2) When the Master had spoken to them,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It was near daybreak before these believers dispersed; all night they remained together, earnestly discussing the Master’s admonitions and contemplating all that had befallen them. James Zebedee and others of the apostles also told them of their experiences with the morontia Master in Galilee and recited how he had three times appeared to them. 주(主)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이 신자들이 헤어진 것은 거의 날이 샐 무렵이었습니다. 그들은 주(主)님의 훈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심사숙고하면서 밤새도록 같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세베대와 다른 사도들도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主)님과 함께 가졌던 자신들의 체험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으며, 주께서 그들에게 세 번 나타나신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1. The Appearance at Sychar 시카에 출현

160911 부활25 – 수가(시카Sychar)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7th) 요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93:1.1 (2053.3) About four o’clock on Sabbath afternoon, May 13, the Master appeared to Nalda and about seventy-five Samaritan believers near Jacob’s well, at Sychar. The believers were in the habit of meeting at this place, near where Jesus had spoken to Nalda concerning the water of life. On this day, just as they had finished their discussions of the reported resurrection, Jesus suddenly appeared before them, saying: 5월 13일 안식일 오후 4시 경에, 주(主)님은 시카에 있는 야곱의 우물 근처에서 75명가량의 사마리아인들과 날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신자들은 예수께서 생명의 물에 관하여 날다에게 말씀하였던 이 우물 근처의 이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날 부활의 소식에 대한 토의를 막 마쳤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1.2 (2053.4) “Peace be upon you. You rejoice to know that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but this will avail you nothing unless you are first born of the eternal spirit, thereby coming to possess, by faith, the gift of eternal life. If you are the faith sons of my Father, you shall never die; you shall not perish. The gospel of the kingdom has taught you that all men are the sons of God. And this good news concerning the love of the heavenly Father for his children on earth must be carried to all the world. The time has come when you worship God neither on Gerizim nor at Jerusalem, but where you are, as you are, in spirit and in truth. It is your faith that saves your souls. Salvation is the gift of God to all who believe they are his sons. But be not deceived; while salvation is the free gift of God and is bestowed upon all who accept it by faith, there follows the experience of bearing the fruits of this spirit life as it is lived in the flesh. The acceptance of the doctrine of the fatherhood of God implies that you also freely accept the associated truth of the brotherhood of man. And if man is your brother, he is even more than your neighbor, whom the Father requires you to love as yourself. Your brother, being of your own family, you will not only love with a family affection, but you will also serve as you would serve yourself. And you will thus love and serve your brother because you, being my brethren, have been thus loved and served by me. Go, then, into all the world telling this good news to all creatures of every race, tribe, and nation. My spirit shall go before you, and I will be with you always.”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고 기뻐하였지만, 너희가 먼저 영으로 태어나고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지 못한다면, 이것이 너희에게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만일 너희가 내 아버지의 신앙의 아들이라면,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만 하느니라. 너희가 게리짐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며, 어디든지 너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 안에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때가 왔노라. 너희 혼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너희의 신앙이다. 구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하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은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영적 생명의 열매를 맺는 체험이 동반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신분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람들의 형제 신분이라는 동반되는 진리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너희 형제라면, 그는 마찬가지로 너의 이웃 이상인데 , 아버지는 이웃을 너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너희에게 요구하고 있다. 너희 형제는, 너희가 속한 가족의 일원이니, 너희가 가족적 애정으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너희 자신을 섬기듯 그렇게 섬길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내 형제가 되었기에, 나의 사랑과 섬김을 그렇게 받아 왔으니 그처럼, 너희도 그렇게 너희 형제를 사랑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니 가라,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종족과 민족과 국가에 이 좋은 소식을 들려주라. 내 영이 너희 앞에서 먼저 갈 것이며,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193:1.3 (2054.1) These Samaritans were greatly astonished at this appearance of the Master, and they hastened off to the near-by towns and villages, where they published abroad the news that they had seen Jesus, and that he had talked to them. And this was the seventeenth morontia appearance of the Master. 이 사마리아인들은 주(主)의 이 출현에 크게 놀랐으며 그들은 가까운 성읍과 마을로 급히 나가서, 그들이 예수를 보았다는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였다는 소식을 그곳에서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主)의 17번째 부활체 출현 이었습니다.

2. The Phoenician Appearance 페니키아에 출현

160918 부활26 – 페니키아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8th)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93:2.1 (2054.2) The Master’s eighteenth morontia appearance was at Tyre, on Tuesday, May 16, at a little before nine o’clock in the evening. Again he appeared at the close of a meeting of believers, as they were about to disperse, saying: 주(主)의 18번째 부활체 출현은 5월 16일 화요일, 저녁 9시 조금 전에 티레에서 있었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모임을 마치고 막 흩어지려고 할 때 다시 나타났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2.2 (2054.3) “Peace be upon you. You rejoice to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risen from the dead because you thereby know that you and your brethren shall also survive mortal death. But such survival is dependent on your having been previously born of the spirit of truth-seeking and God-finding. The bread of life and the water thereof are given only to those who hunger for truth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 for God. The fact that the dead rise is not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se great truths and these universe facts are all related to this gospel in that they are a part of the result of believing the good news and are embraced in the subsequent experience of those who, by faith, become, in deed and in truth, the everlasting sons of the eternal God. My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to proclaim this salvation of sonship to all men. And so send I you abroad to preach this salvation of sonship. Salvation is the free gift of God, but those who are born of the spirit will immediately begin to show forth the fruits of the spirit in loving service to their fellow creatures. And the fruits of the divine spirit which are yielded in the lives of spirit-born and God-knowing mortals are: loving service, unselfish devotion, courageous loyalty, sincere fairness, enlightened honesty, undying hope, confiding trust, merciful ministry, unfailing goodness, forgiving tolerance, and enduring peace. If professed believers bear not these fruits of the divine spirit in their lives, they are dead; the Spirit of Truth is not in them; they are useless branches on the living vine, and they soon will be taken away. My Father requires of the children of faith that they bear much spirit fruit. If, therefore, you are not fruitful, he will dig about your roots and cut away your unfruitful branches. Increasingly, must you yield the fruits of the spirit as you progress heavenward in the kingdom of God. You may enter the kingdom as a child, but the Father requires that you grow up, by grace, to the full stature of spiritual adulthood. And when you go abroad to tell all nations the good news of this gospel, I will go before you, and my Spirit of Truth shall abide in your hearts. My peace I leave with you.”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서의 살아난 것 알게 된 것을 기뻐하라. 왜냐하면 그것에 의하여 너희들 자신과 너희 형제들도 역시 죽음에서 생존될 것을 너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존은 너희가 사전에 진리를 찾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영적 탄생이 이루어졌는지에 달려 있노라. 진리에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하며 하나님을 향한 자들에게만,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빵과 물이 주어진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니다. 이 놀라운 진리들과 우주의 사실들은 기쁜 소식을 믿은 결과에 포함된 일부분으로서 모두 이 복음과 관련되며 신앙에 의해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영속하는 아들들이 된 사람들이 그 후에 갖게 되는 체험에 포함된다. 내 아버지는 아들 관계의 이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시기 위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나도 아들관계의 이 구원을 전파하기 위하여 너희를 보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대가 없는 선물이지만, 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 동료 피조물들을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해 영의 열매를 즉시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삶에 맺히게 되는 신성한 영의 열매들은, 사랑으로 섬김, 애타적(愛他的)인 헌신, 불굴의 충성심, 진지한 공정성, 계몽된 정직성, 사라지지 않는 희망, 자신하고 있는 신뢰, 자비로운 사명활동, 시종여일한 덕, 용서하는 인내심,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평화이다. 만일 신자임을 고백한 자들이, 그들의 삶에, 신성한 영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들은 죽어 있는 것이며, 진리의 영이 그들 속에 없고, 그들은 살아있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가지들이며, 곧 잘라버리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는 신앙의 자녀들에게 영의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에게 열매가 없다면, 너희들의 뿌리들을 파내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잘라버리실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늘 방향으로 진보하면서 점점 더 많은 영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너희는 어린아이로 왕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아버지는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성숙된 온전한 형상으로 자라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너희가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모든 나라들에게 전하면서 멀리 퍼져 나갈 때, 나는 너희 앞에서 갈 것이며, 내 진리의 영은 너희들의 마음에 거할 것이다. 내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193:2.3 (2054.4) And then the Master disappeared from their sight. The next day there went out from Tyre those who carried this story to Sidon and even to Antioch and Damascus. Jesus had been with these believers when he was in the flesh, and they were quick to recognize him when he began to teach them. While his friends could not readily recognize his morontia form when made visible, they were never slow to identify his personality when he spoke to them. 그러고 나서 주(主)는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다음 날 티레를 떠나서 그들이 이 이야기를 시돈, 그리고 심지어는 안디옥과 다마스커스까지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이 신자들과 함께 계셨었으며, 그들은 그가 자기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를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부활체 형체로 눈에 보였을 때 그의 친구들은 바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였을 때 그의 고유성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3. Last Appearance in Jerusalem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출현

160925 부활27 – 예루살렘에 마지막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19th) AD30. 4. 9. Am 3:30 이후 요셉 무덤 앞 1(5 여인) 2(막마) / 베다니 나사로 무덤 동산 3(약 12시) 4(가족친구 20명 pm 2시) / 요셉 집 5(25명 여인들 pm4:15) 6(40명 그리스인 플라비우스 오후4:30) 7(엠마오2형제 목동 오후5시) 8(베드로 마가 정원 pm8:30) 9(10사도들 마가 다락방 pm9) 10(전도자들 필라델피아 4/11화 am8시) 11(11사도들 막 다락방 4/16 주일 pm6) 12(로단 80명 알렉산드리아 4/18화 pm8:30) 13(10 사도 갈릴리 4/21 금 am6:00) 14(11사도 가버나움 고지 4/22토 12시) 15(500 벳새다 호숫가 4/29 토 pm3) 16(61명 이상 대표자들 니고데모 집 5/5 금 pm9) 17(75명 사마리아인 날다 시카 5/13토 pm4) 18(페니키아 5/16 화 pm9) 18(11 사도 마가 다락방 5/18 목 아침) 18(페니키아 두로 5/16 화 pm9) 19(11명 사도 마가 다락방 5/18 목 아침) 행1:4-8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93:3.1 (2055.1) Early Thursday morning, May 18, Jesus made his last appearance on earth as a morontia personality. As the eleven apostles were about to sit down to breakfast in the upper chamber of Mary Mark’s home, Jesus appeared to them and said: 5월 18일 목요일 아침 일찍, 부활체 고유성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열 한 사도들이 마리아 마가의 다락방에서 아침 식사를 들기 위해 앉으려고 할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3:3.2 (2055.2) “Peace be upon you. I have asked you to tarry here in Jerusalem until I ascend to the Father, even until I send you the Spirit of Truth, who shall soon be poured out upon all flesh, and who shall endow you with power from on high.” Simon Zelotes interrupted Jesus, asking, “Then, Master, will you restore the kingdom, and will we see the glory of God manifested on earth?” When Jesus had listened to Simon’s question, he answered: “Simon, you still cling to your old ideas about the Jewish Messiah and the material kingdom. But you will receive spiritual power after the spirit has descended upon you, and you will presently go into all the world preaching this gospel of the kingdom. As the Father sent me into the world, so do I send you. And I wish that you would love and trust one another. Judas is no more with you because his love grew cold, and because he refused to trust you, his loyal brethren. Have you not read in the Scripture where it is written: ‘It is not good for man to be alone. No man lives to himself’? And also where it says: ‘He who would have friends must show himself friendly’? And did I not even send you out to teach, two and two, that you might not become lonely and fall into the mischief and miseries of isolation? You also well know that, when I was in the flesh, I did not permit myself to be alone for long periods. From the very beginning of our associations I always had two or three of you constantly by my side or else very near at hand even when I communed with the Father. Trust, therefore, and confide in one another. And this is all the more needful since I am this day going to leave you alone in the world. The hour has come; I am about to go to the Father.” “평강이 너희에게 있으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 높은 곳으로부터 너희에게 힘을 주는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모든 육체에게 곧 부어지리라. 그 때까지 너희는 이 곳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너희에게 부탁했었노라.” 시몬 젤로떼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며 “그렇다면 주(主)여, 당신께서 그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시몬의 질문을 다 들으신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아직도 유대인의 메시아와 물질적 왕국에 대한 옛 관념들에 매달려 있구나. 그러나 진리의 영이 너에게 임한 후에는 너도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며, 너는 곧 온 세상에 나가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기를 바라노라. 유다는 그의 사랑이 식었으며, 그의 충실한 형제인 너희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 ‘혼자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지 않다. 아무도 혼자 살 수 없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또한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호의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보내어 가르치게 했을 때에도, 너희가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고독한 해독과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둘씩 짝을 지어 보내지 않았느냐? 또한 너희도 잘 알다시피, 내가 육신으로 있을 때, 나 혼자서 오랜 기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노라. 우리가 함께 일하는 초기부터, 나는 너희들 중에 두 세 사람이 항상 내 옆에 있도록 하였고, 내가 아버지와 교제를 나눌 때에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고 서로 의탁하라.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홀로 이 세상에 남겨놓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들이 더욱 필요하다. 그 때가 왔고, 나는 곧 아버지께로 떠날 것이다.”

193:3.3 (2055.3) When he had spoken, he beckoned for them to come with him, and he led them out on the Mount of Olives, where he bade them farewell preparatory to departing from Urantia. This was a solemn journey to Olivet. Not a word was spoken by any of them from the time they left the upper chamber until Jesus paused with them on the Mount of Olives. 말씀을 마친 그는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으며, 그곳에서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셨습니다. 올리브 산으로 가는 여행은 매우 장엄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을 떠날 때부터 예수와 함께 올리브 산에서 쉴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4. Causes of Judas’s Downfall 유다 패망의 원인들

161002 부활28 – 유다 패망의 원인1 벧후3:18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가십시오. 주님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193:4.1 (2055.4) It was in the first part of the Master’s farewell message to his apostles that he alluded to the loss of Judas and held up the tragic fate of their traitorous fellow worker as a solemn warning against the dangers of social and fraternal isolation. It may be helpful to believers, in this and in future ages, briefly to review the causes of Judas’s downfall in the light of the Master’s remarks and in view of the accumulated enlightenment of succeeding centuries. 주님은 사도들에게 작별인사의 서두에서 유다 패망의 원인을 언급하셨으며, 사회적으로 고립하고, 형제우애의 친교에서 고립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함으로서 그들을 배반한, 동료 일꾼에 대한 비극적인 숙명을 거론하셨습니다. 주(主)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지나간 수세기 동안에 계속 발전되어 온 깨우침에 비추어, 유다 패망 원인들을 간단히 돌이켜 보는 일은, 현 시대와 오는 시대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3:4.2 (2055.5) As we look back upon this tragedy, we conceive that Judas went wrong, primarily, because he was very markedly an isolated personality, a personality shut in and away from ordinary social contacts. He persistently refused to confide in, or freely fraternize with, his fellow apostles. But his being an isolated type of personality would not, in and of itself, have wrought such mischief for Judas had it not been that he also failed to increase in love and grow in spiritual grace. And then, as if to make a bad matter worse, he persistently harbored grudges and fostered such psychologic enemies as revenge and the generalized craving to “get even” with somebody for all his disappointments. 우리가 이 비극을 돌이켜 볼 때, 유다는 애초부터 그의 아주 두드러지게 고립된 성격, 보통의 사회적 접촉에서 마음 문을 닫고 멀리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잘못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을 신뢰하여 속을 털어 놓거나, 거리낌 없이 형제우애를 나누며 사귀기를 끈질기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사랑을 키우고, 영적인 은혜 가운데 성장함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다면, 유다의 고립된 성격 유형 자체가 유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는 완고하게 원한을 품었으며, 복수심과 같은 심리적인 적과 자신의 모든 실망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똑같이 복수”하려는 일반화된 열망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193:4.3 (2056.1) This unfortunate combination of individual peculiarities and mental tendencies conspired to destroy a well-intentioned man who failed to subdue these evils by love, faith, and trust. That Judas need not have gone wrong is well proved by the cases of Thomas and Nathaniel, both of whom were cursed with this same sort of suspicion and overdevelopment of the individualistic tendency. Even Andrew and Matthew had many leanings in this direction; but all these men grew to love Jesus and their fellow apostles more, and not less, as time passed. They grew in grace and in a knowledge of the truth. They became increasingly more trustful of their brethren and slowly developed the ability to confide in their fellows. Judas persistently refused to confide in his brethren. When he was impelled, by the accumulation of his emotional conflicts, to seek relief in self-expression, he invariably sought the advice and received the unwise consolation of his unspiritual relatives or those chance acquaintances who were either indifferent, or actually hostile, to the welfare and progress of the spiritual realities of the heavenly kingdom, of which he was one of the twelve consecrated ambassadors on earth. 불행하게도 개인의 특성과 정신적 경향의 이런 조합이 겹쳐져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신뢰로 이러한 악을 정복하지 못했던 선의의 사람이 파멸되었습니다. 유다는 잘못에 빠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도마와 나다니엘의 경우를 통해 잘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도 이와 같은 종류의 의심과 개별적 성향이 지나치게 발달되어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안드레와 마태조차도 이러한 성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랑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료 사도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과 은혜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형제들을 신뢰하였고 동료들에게 자신을 속을 털어놓고 의탁할 수 있는 능력이 서서히 계발(啓發)되었습니다. 유다는 고집스럽게 형제들 신뢰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적 갈등들이 누적되어, 할 수 없이 자아표현의 분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한결같이, 영적이지 못한 자기 친척들이나 어쩌다 알게 된 자들의 조언과 지혜롭지 못한 위로를 찾았습니다. 유다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헌신한 열 두 대사들 중의 하나였지만, 유다가 찾았던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실체의 번영과 진보에 대해 무관심하든지 아니면 실제적인 적대자들이었습니다.

161009 부활29 – 유다 패망의 원인2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193:4.4 (2056.2) Judas met defeat in his battles of the earth struggle because of the following factors of personal tendencies and character weakness: 유다는 이 세상의 갈등과 투쟁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개인적 경향들과 성격적인 연약함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93:4.5 (2056.3) 1. He was an isolated type of human being. He was highly individualistic and chose to grow into a confirmed “shut-in” and unsociable sort of person. 그는 고립된 유형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개인(이기)주의적이었으며, 굳게 폐쇄된 채로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비사교적인 부류의 사람이 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193:4.6 (2056.4) 2. As a child, life had been made too easy for him. He bitterly resented thwarting. He always expected to win; he was a very poor loser. 어린 시절에 그는 너무 안일하게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것으로 인해 자신의 뜻이 방해 받는 것을 아주 좌절(挫折)스럽고 비통하게 여겨 분개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초라한 패배자였습니다.

193:4.7 (2056.5) 3. He never acquired a philosophic technique for meeting disappointment. Instead of accepting disappointments as a regular and commonplace feature of human existence, he unfailingly resorted to the practice of blaming someone in particular, or his associates as a group, for all his personal difficulties and disappointments. 그는 실망에 대처하는 철학적인 기법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망을 인간 존재의 삶에서 흔히 발생하는 정상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모든 어려움들과 실망스러운 일들에 대해서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자기 동료 그룹을 어김없이 비난하는 습관을 따르곤 하였습니다.

193:4.8 (2056.6) 4. He was given to holding grudges; he was always entertaining the idea of revenge. 그는 언제나 불만스런 원한의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복수(復讐)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4.9 (2056.7) 5. He did not like to face facts frankly; he was dishonest in his attitude toward life situations. 그는 사실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대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생의 상황들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193:4.10 (2056.8) 6. He disliked to discuss his personal problems with his immediate associates; he refused to talk over his difficulties with his real friends and those who truly loved him. In all the years of their association he never once went to the Master with a purely personal problem. 그는 가까운 동료들과 자기의 개인적 문제를 의논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진실한 자기 친구들과, 그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동료로 지냈던 수년 동안, 그는 자신의 순수한 개인적 문제로 한 번도 주(主)님께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93:4.11 (2056.9) 7. He never learned that the real rewards for noble living are, after all, spiritual prizes, which are not always distributed during this one short life in the flesh. 그는 고귀한 삶에 대한 진정한 보상은 결국 영적 상급-육신으로 사는 짧은 이생 동안에 항상 공급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193:4.12 (2056.10) As a result of his persistent isolation of personality, his griefs multiplied, his sorrows increased, his anxieties augmented, and his despair deepened almost beyond endurance. 그의 고집스런(완고한) 고립된 개인성의 결과로, 그의 비탄은 배가되었고, 그의 슬픔은 깊어졌으며, 그의 근심은 증대되었고, 그의 절망감은 심화되어,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거의 넘어섰습니다.

193:4.13 (2057.1) While this self-centered and ultraindividualistic apostle had many psychic, emotional, and spiritual troubles, his main difficulties were: In personality, he was isolated. In mind, he was suspicious and vengeful. In temperament, he was surly and vindictive. Emotionally, he was loveless and unforgiving. Socially, he was unconfiding and almost wholly self-contained. In spirit, he became arrogant and selfishly ambitious. In life, he ignored those who loved him, and in death, he was friendless. 자기중심적이고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이 사도가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었지만, 다음의 것들이 중요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의심이 많고 복수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기질은 무뚝뚝하고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정 면에서 사랑도 없었고 용서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는 타인을 신뢰할 수 없어서 솔직하지 못하였고 거의 전적으로 자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거만하고 이기적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무시하였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193:4.14 (2057.2) These, then, are the factors of mind and influences of evil which, taken altogether, explain why a well-meaning and otherwise onetime sincere believer in Jesus, even after several years of intimate association with his transforming personality, forsook his fellows, repudiated a sacred cause, renounced his holy calling, and betrayed his divine Master. 이러한 마음의 요소들과 악의 영향들이 함께 어우러진 것들을 통해 우리는 유다 패망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 때 선의를 가지고, 다른 면에서는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이, 심지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고유성)과 몇 년 동안의 친밀한 교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기 동료들을 버리고, 하늘의 목적을 거절하고, 거룩한 소명을 포기하며, 거룩한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5. The Master’s Ascension 주님의 승천(昇天)

161016 부활30 – 예수님의 승천 눅24:49-51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193:5.1 (2057.3) It was almost half past seven o’clock this Thursday morning, May 18, when Jesus arrived on the western slope of Mount Olivet with his eleven silent and somewhat bewildered apostles. From this location, about two thirds the way up the mountain, they could look out over Jerusalem and down upon Gethsemane. Jesus now prepared to say his last farewell to the apostles before he took leave of Urantia. As he stood there before them, without being directed they knelt about him in a circle, and the Master said: 5월 18일 목요일 아침 7시 30분경에, 예수님은 말없이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11명의 사도들과 함께 올리브 산 서쪽 기슭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산기슭에서부터 위쪽으로 3분의 2 정도 되는 위치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 있었고 겟세마네를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고 준비하셨습니다. 거기에 주님께서 그들 앞에 서시자,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주(主)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3:5.2 (2057.4) “I bade you tarry in Jerusalem until you were endowed with power from on high. I am now about to take leave of you; I am about to ascend to my Father, and soon, very soon, will we send into this world of my sojourn the Spirit of Truth; and when he has come, you shall begin the new proclamation of the gospel of the kingdom, first in Jerusalem and then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world. Love men with the love wherewith I have loved you and serve your fellow mortals even as I have served you. By the spirit fruits of your lives impel souls to believe the truth that man is a son of God, and that all men are brethren. Remember all I have taught you and the life I have lived among you. My love overshadows you, my spirit will dwell with you, and my peace shall abide upon you. Farewell.” “너희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였노라. 이제 나는 너희를 떠나려고 한다. 나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고, 곧 바로, 우리는 내가 머물렀던 이 세상에 진리의 영을 보낼 것이라. 그가 오면, 너희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에는 세상의 가장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선포(宣布)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 동료들을 섬겨라. 너희의 일생동안 영의 열매들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모든 사람들은 서로 형제라는 진리를 사람들(혼)이 믿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들과 너희들 중에 내가 살았던 그 일생을 기억하라. 나의 사랑이 너희를 보호하고,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며, 내 평강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잘 있어라.”

193:5.3 (2057.5) When the morontia Master had thus spoken,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This so-called ascension of Jesus was in no way different from his other disappearances from mortal vision during the forty days of his morontia career on Urantia. 부활체의 주(主)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그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소위 예수님의 승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지구에서 부활체의 생애를 사신 40일 동안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셨던 다른 경우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193:5.4 (2057.6) The Master went to Edentia by way of Jerusem, where the Most Highs, under the observation of the Paradise Son, released Jesus of Nazareth from the morontia state and, through the spirit channels of ascension, returned him to the status of Paradise sonship and supreme sovereignty on Salvington. 주(主)님은 예루셈을 거쳐 에덴시아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천국 아들의 감독 아래, 지고자들은 나사렛 예수를 부활체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승천하는 영적 통로를 통해, 천국 아들의 신분과 구원자별 최고 통치자의 지위로 돌아오셨습니다.

193:5.5 (2057.7) It was about seven forty-five this morning when the morontia Jesus disappeared from the observation of his eleven apostles to begin the ascent to the right hand of his Father, there to receive formal confirmation of his completed sovereignty of the universe of Nebadon. 부활체의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승천하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네바돈 우주에 대한 그의 완전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확정 받으시기 위하여, 그의 열 한 명의 사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것은 이 날 아침 7시 45분경이었습니다.

6. Peter Calls a Meeting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61023 부활31 – 승천 후 첫 모임Peter Calls a Meeting 행1:12-26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193:6.1 (2057.8) Acting upon the instruction of Peter, John Mark and others went forth to call the leading disciples together at the home of Mary Mark. By ten thirty, one hundred and twenty of the foremost disciples of Jesus living in Jerusalem had forgathered to hear the report of the farewell message of the Master and to learn of his ascension. Among this company was Mary the mother of Jesus. She had returned to Jerusalem with John Zebedee when the apostles came back from their recent sojourn in Galilee. Soon after Pentecost she returned to the home of Salome at Bethsaida. James the brother of Jesus was also present at this meeting, the first conference of the Master’s disciples to be called after the termination of his planetary career. 베드로의 지시로, 요한 마가와 다른 사람들은 수제자들을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모이도록 부르러 나갔습니다. 10시 30분에, 예루살렘에 사는 예수의 제자 120명 대부분이 주(主)님의 고별 설교와 승천(昇天) 소식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최근에 갈릴리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때, 그녀도 요한 세베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오순절 직후 벳새다에 있는 살로메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역시 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이 모임은 주(主)님의 지상 생애를 마친 후 제자들이 소집한 첫 번째 회의(會議)였습니다.

193:6.2 (2058.1) Simon Peter took it upon himself to speak for his fellow apostles and made a thrilling report of the last meeting of the eleven with their Master and most touchingly portrayed the Master’s final farewell and his ascension disappearance. It was a meeting the like of which had never before occurred on this world. This part of the meeting lasted not quite one hour. Peter then explained that they had decided to choose a successor to Judas Iscariot, and that a recess would be granted to enable the apostles to decide between the two men who had been suggested for this position, Matthias and Justus. 시몬 베드로는 자청하여 동료 사도들의 대표로 주님과 열 한 사도들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해서 흥미진지하게 설명하였고 주(主)님의 작별 인사와 승천으로 사라지시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모임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모임의 이 부분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설명하여, 이 자리에 천거된 두 사람, 맛디아와 유스도 중에서 사도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휴회(休會)하였습니다.

193:6.3 (2058.2) The eleven apostles then went downstairs, where they agreed to cast lots in order to determine which of these men should become an apostle to serve in Judas’s place. The lot fell on Matthias, and he was declared to be the new apostle. He was duly inducted into his office and then appointed treasurer. But Matthias had little part in the subsequent activities of the apostles. 그 후 열 한 사도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두 사람 중에서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가 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기로 동의하였습니다. 맛디아가 뽑혀, 그는 새 사도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는 정식으로 사도의 직책을 받은 후 회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맛디아는 거의 사도 활동의 역할이 없었습니다.

193:6.4 (2058.3) Soon after Pentecost the twins returned to their homes in Galilee. Simon Zelotes was in retirement for some time before he went forth preaching the gospel. Thomas worried for a shorter period and then resumed his teaching. Nathaniel differed increasingly with Peter regarding preaching about Jesus in the place of proclaiming the former gospel of the kingdom. This disagreement became so acute by the middle of the following month that Nathaniel withdrew, going to Philadelphia to visit Abner and Lazarus; and after tarrying there for more than a year, he went on into the lands beyond Mesopotamia preaching the gospel as he understood it. 오순절 후 쌍둥이 형제는 갈릴리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열심당 시몬은 복음을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한 동안 조용히 쉬었습니다. 도마는 그 보다 짧게 고민하다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다니엘은 예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예수에 대해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갈수록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다음 달 중순경에 이 의견 차이가 너무 깊어져서, 나다니엘이 물러나, 아브너와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갔으며, 거기서 일 년 이상 머문 후에, 메소포타미아 건너편 땅으로 가서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193:6.5 (2058.4) This left but six of the original twelve apostles to become actors on the stage of the early proclamation of the gospel in Jerusalem: Peter, Andrew, James, John, Philip, and Matthew. 원래 12 사도 중 남은 6명만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선포했던 초기 무대에서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가 그들이었습니다.

193:6.6 (2058.5) Just about noon the apostles returned to their brethren in the upper chamber and announced that Matthias had been chosen as the new apostle. And then Peter called all of the believers to engage in prayer, prayer that they might be prepared to receive the gift of the spirit which the Master had promised to send. 바로 정오 무렵에 사도들은 다락방의 형제들에게 돌아와 맛디아가 새 사도로 선출되었음을 공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主)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영의 선물을 받기 위한 준비를 위해 기도에 동참하도록 초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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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The new gospel about Jesus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The mission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의 사명
Man’s threefold spiritual endowment 사람의 3중적 영적 증여
The seven higher spiritual influences 더 높은 7가지 영적 영향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 교회의 시작

161030 진리의 영1 – 하나님 나라의 복음 행2: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194:0.1 (2059.1) ABOUT one o’clock, as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were engaged in prayer, they all became aware of a strange presence in the room. At the same time these disciples all became conscious of a new and profound sense of spiritual joy, security, and confidence. This new consciousness of spiritual strength was immediately followed by a strong urge to go out and publicly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the good news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약 1시 경에, 120명의 신자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들 모두 이상한 존재가 그 방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영적 기쁨과 안심함 그리고 확신을 주는 새로운 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힘을 새롭게 느끼게 되자, 이들은 즉시 밖에 나가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소식을 선포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194:0.2 (2059.2) Peter stood up and declared that this must be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 Master had promised them and proposed that they go to the temple and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news committed to their hands. And they did just what Peter suggested.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것이 바로 주(主)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셨던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에 가서 자신들의 손에 맡겨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했습니다.

194:0.3 (2059.3) These men had been trained and instructed that the gospel which they should preach was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sonship of man, but at just this moment of spiritual ecstasy and personal triumph, the best tidings, the greatest news, these men could think of was the fact of the risen Master. And so they went forth, endowed with power from on high, preaching glad tidings to the people — even salvation through Jesus — but they unintentionally stumbled into the error of substituting some of the facts associated with the gospel for the gospel message itself. Peter unwittingly led off in this mistake, and others followed after him on down to Paul, who created a new religion out of the new version of the good news.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포해야할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자녀 관계라고 훈련과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최상의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 예수님을 통한 구원까지 전파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게 복음의 내용 자체를 복음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로 바꾸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앞장서서 이런 잘못을 행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랐으며, 바울에게까지 이어져, 바울은 기쁜 소식을 새롭게 해석한 새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194:0.4 (2059.4)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the fact of the fatherhood of God, coupled with the resultant truth of the sonship-brotherhood of men. Christianity, as it developed from that day, is: the fact of God a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in association with the experience of believer-fellowship with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사실과, 이와 함께 그 결과 인간의 아들됨과 형제 신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그 날부터 발전하여, 부활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이 친교를 나누는 경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194:0.5 (2059.5) It is not strange that these spirit-infused men should have seized upon this opportunity to express their feelings of triumph over the forces which had sought to destroy their Master and end the influence of his teachings. At such a time as this it was easier to remember their personal association with Jesus and to be thrilled with the assurance that the Master still lived, that their friendship had not ended, and that the spirit had indeed come upon them even as he had promised. 영에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이, 주(主)님을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없애려 했던 세력을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을 드러낼 이 기회를 잡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들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셔서 자신들과의 사귐이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약속대로 그 영이 정말로 자신들에게 오셨다는 확신으로 감동되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194:0.6 (2059.6) These believers felt themselves suddenly translated into another world, a new existence of joy, power, and glory. The Master had told them the kingdom would come with power, and some of them thought they were beginning to discern what he meant. 이 신자들은 자신들이 갑자기 기쁨과 권능 그리고 영광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졌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 중 몇 몇은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0.7 (2059.7) And when all of this is taken into consideration, it is not difficult to understand how these men came to preach a new gospel about Jesus in the place of their former message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이러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신분이라는 이전의 메시지 대신에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161106 진리의 영2 – 오순절 설교 행2:36-41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194:1.1 (2060.1) The apostles had been in hiding for forty days. This day happened to be the Jewish festival of Pentecost, and thousands of visitors from all parts of the world were in Jerusalem. Many arrived for this feast, but a majority had tarried in the city since the Passover. Now these frightened apostles emerged from their weeks of seclusion to appear boldly in the temple, where they began to preach the new message of a risen Messiah. And all the disciples were likewise conscious of having received some new spiritual endowment of insight and power.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로서 세계 각지로부터 수천 명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위해 왔지만, 대부분은 유월절 이후에도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사도들이 몇 주간의 은거에서 벗어나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나, 그곳에서 부활한 메시아의 새 메시지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도 똑같이 어떤 새로운 영적 통찰력과 권능이 자신들에게 부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1.2 (2060.2) It was about two o’clock when Peter stood up in that very place where his Master had last taught in this temple, and delivered that impassioned appeal which resulted in the winning of more than two thousand souls. The Master had gone, but they suddenly discovered that this story about him had great power with the people. No wonder they were led on into the further proclamation of that which vindicated their former devotion to Jesus and at the same time so constrained men to believe in him. Six of the apostles participated in this meeting: Peter, Andrew, James, John, Philip, and Matthew. They talked for more than an hour and a half and delivered messages in Greek, Hebrew, and Aramaic, as well as a few words in even other tongues with which they had a speaking acquaintance. 베드로가 오후 2시 쯤 주님께서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셨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열정적으로 호소했고, 그 결과 거의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떠나 가셨지만, 사도들은, 그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권능이 있음을 갑작스럽게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헌신이 올바른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더 나아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강요하는 선포로 당연히 이끌렸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여섯 명의 사도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였습니다. 그들은 1시간 30분 이상 이야기하면서,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로 메시지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씩 설교하였습니다.

194:1.3 (2060.3) The leaders of the Jews were astounded at the boldness of the apostles, but they feared to molest them because of the large numbers who believed their story.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대담함에 놀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194:1.4 (2060.4) By half past four o’clock more than two thousand new believers followed the apostles down to the pool of Siloam, where Peter, Andrew, James, and John baptized them in the Master’s name. And it was dark when they had finished with baptizing this multitude. 4시 30분 쯤 2,000명이 넘는 새 신자들은 사도들을 따라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주(主)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했습니다. 해질 녘이 되어서야,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주던 세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4:1.5 (2060.5) Pentecost was the great festival of baptism, the time for fellowshipping the proselytes of the gate, those gentiles who desired to serve Yahweh. It was, therefore, the more easy for large numbers of both the Jews and believing gentiles to submit to baptism on this day. In doing this, they were in no way disconnecting themselves from the Jewish faith. Even for some time after this the believers in Jesus were a sect within Judaism. All of them, including the apostles, were still loyal to the essential requirements of the Jewish ceremonial system. 오순절은 타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야훼를 섬기려는 이방인들 즉 할례의 의무가 없는 개종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기간으로 세례의 큰 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이 이 날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유대의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동안까지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하여 그들 모두 유대의 의식적(儀式的) 체계의 기본 요구들을 여전히 신봉하였습니다.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161113 진리의 영3 – 오순절의 의미 1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94:2.1 (2060.6) Jesus lived on earth and taught a gospel which redeemed man from the superstition that he was a child of the devil and elevated him to the dignity of a faith son of God. Jesus’ message, as he preached it and lived it in his day, was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spiritual difficulties in that day of its statement. And now that he has personally left the world, he sends in his place his Spirit of Truth, who is designed to live in man and, for each new generation, to restate the Jesus message so that every new group of mortals to appear upon the face of the earth shall have a new and up-to-date version of the gospel, just such personal enlightenment and group guidance as will prove to be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ever-new and varied spiritual difficulties.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사람은 마귀의 자녀라는 미신에서 건져서 하나님의 신앙의 자녀라는 품격으로 사람을 높이는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당대에 설교하고 실천하신 것처럼, 그것이 진술된 그 시대 사람의 영적 고난들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대신 진리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 안에서 살아가시도록 작정되었고, 각각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진술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새로운 집단들이, 새로운 최첨단 해석 버전의 복음을 가지고, 바로 그렇게 개인적으로 깨우치고, 집단적으로 안내를 받아, 그 복음이 언제나 새롭게 발생하는 다양한 영적 어려움들을 위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할 것입니다.

194:2.2 (2060.7) The first mission of this spirit is, of course, to foster and personalize truth, for it is the comprehension of truth that constitutes the highest form of human liberty. Next, it is the purpose of this spirit to destroy the believer’s feeling of orphanhood. Jesus having been among men, all believers would experience a sense of loneliness had not the Spirit of Truth come to dwell in men’s hearts. 이 영의 첫 번째 사명은 당연히 진리를 길러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상의 형태로 인간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의 목적은 신자들 자신이 고아(孤兒)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들은 고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194:2.3 (2061.1) This bestowal of the Son’s spirit effectively prepared all normal men’s minds for the subsequent universal bestowal of the Father’s spirit (the Adjuster) upon all mankind. In a certain sense, this Spirit of Truth is the spirit of both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아들의 영을 이렇게 주셔서, 뒤를 이어 모든 인류가 우주적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영(조절자)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효과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진리의 영은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 두 분의 영이십니다.

194:2.4 (2061.2) Do not make the mistake of expecting to become strongly intellectually conscious of the outpoured Spirit of Truth. The spirit never creates a consciousness of himself, only a consciousness of Michael, the Son. From the beginning Jesus taught that the spirit would not speak of himself. The proof, therefore, of your fellowship with the Spirit of Truth is not to be found in your consciousness of this spirit but rather in your experience of enhanced fellowship with Michael. 부어진 진리의 영을 지적으로 강하게 인식되기를 기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 영은 결코 자신을 의식(意識)하게 하지 않으며,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만 의식하게 하십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그 영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과 우리가 친교를 나누는 증거는 이 영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예수님과의 더욱 강화된 친교의 체험 속에서 발견됩니다.

194:2.5 (2061.3) The spirit also came to help men recall and understand the words of the Master as well as to illuminate and reinterpret his life on earth. 이 영은 또한 사람이 주(主)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도우며,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일생을 조명하고 재해석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194:2.6 (2061.4) Next, the Spirit of Truth came to help the believer to witness to the realities of Jesus’ teachings and his life as he lived it in the flesh, and as he now again lives it anew and afresh in the individual believer of each passing generation of the spirit-filled sons of God. 다음으로, 진리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사셨던 것처럼, 신자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그 일생의 실체들을 증거하도록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금 다시 사시는 것처럼, 지나가는 각 세대에서, 영으로 충만해진 하나님 자녀들 즉 각 개별 신자 안에서 새롭게 그리고 신선하게 그 실체들이 증언됩니다.

194:2.7 (2061.5) Thus it appears that the Spirit of Truth comes really to lead all believers into all truth, into the expanding knowledge of the experience of the living and growing spiritual consciousness of the reality of eternal and ascending sonship with God. 그렇게, 진리의 영은 진실로 모든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영원히 상승하는 하나님의 아들관계에 대해 생생하게 더욱 더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아는 확대된 지식으로 인도하려고 오셨습니다.

161127 진리의 영4 – 오순절의 의미 2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194:2.8 (2061.6) Jesus lived a life which is a revelation of man submitted to the Father’s will, not an example for any man literally to attempt to follow. This life in the flesh, together with his death on the cross and subsequent resurrection, presently became a new gospel of the ransom which had thus been paid in order to purchase man back from the clutch of the evil one — from the condemnation of an offended God. Nevertheless, even though the gospel did become greatly distorted, it remains a fact that this new message about Jesus carried along with it many of the fundamental truths and teachings of his earlier gospel of the kingdom. And, sooner or later, these concealed truths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will emerge to effectually transform the civilization of all mankind.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문자 그대로 따르는 모델로 살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육체로 사신 이 생애는 십자가 위의 죽으심과 연이어 일어난 부활과 함께, 현재 구속이라는 새로운 복음이 되었습니다. 구속은 마귀의 손아귀 즉 분노하는 하나님의 유죄 판결로부터, 인간을 다시 사기 위해 그렇게 몸값이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이 새로운 메시지가 그의 초기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근본적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들의 형제 신분이라는 감추어진 이 진리들이 모든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194:2.9 (2061.7) But these mistakes of the intellect in no way interfered with the believer’s great progress in growth in spirit. In less than a month after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the apostles made more individual spiritual progress than during their almost four years of personal and loving association with the Master. Neither did this substitution of the fact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for the saving gospel truth of sonship with God in any way interfere with the rapid spread of their teachings; on the contrary, this overshadowing of Jesus’ message by the new teachings about his person and resurrection seemed greatly to facilitate the preaching of the good news. 그러나 이 지적인 오류들은 신자의 영적 성장에 대한 괄목할만한 진보에 있어서 어떤 면으로든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진리의 영을 받은 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거의 4년에 걸쳐서 주님과 개인적으로 보냈던 사랑하는 관계보다 개별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영적으로 진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라는 구원의 복음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로 대체한 것도 신속히 퍼져나가는 그들의 가르침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예수의 메시지에 드리워진 이 그늘이 오히려 기쁜 소식의 전파를 크게 촉진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4:2.10 (2061.8) The term “baptism of the spirit,” which came into such general use about this time, merely signified the conscious reception of this gift of the Spirit of Truth and the personal acknowledgment of this new spiritual power as an augmentation of all spiritual influences previously experienced by God-knowing souls. 이 무렵 “영의 세례(洗禮)”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단지 진리의 영이라는 이 선물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을 아는 혼들이 이전에 체험하였던 모든 영적인 영향력이 새로운 이 영적 권능으로 증대되었음을 개인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194:2.11 (2061.9) Sinc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man is subject to the teaching and guidance of a threefold spirit endowment: the spirit of the Father, the Thought Adjuster; the spirit of the Son, the Spirit of Truth; the spirit of the Spirit, the Holy Spirit. 진리의 영이 주어진 이후, 사람은 삼중적 영 즉, 아버지의 영(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진리의 영), 영의 영(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2.12 (2062.1) In a way, mankind is subject to the double influence of the sevenfold appeal of the universe spirit influences. The early evolutionary races of mortals are subject to the progressive contact of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Mother Spirit. As man progresses upward in the scale of intelligence and spiritual perception, there eventually come to hover over him and dwell within him the seven higher spirit influences. And these seven spirits of the advancing worlds are: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의 영향력이 주는 일곱 가지로 중복된 매력의 영향력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초기 진화 종족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주는 일곱 보조 마음-영들의 진보적 접촉 아래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적 등급과 영적 인식이 상향으로 진보하면 결국 일곱 가지의 더 높은 영의 영향이 그에게 와서 내주합니다. 진보하는 세계의 이러한 일곱 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2.13 (2062.2) 1. The bestowed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 the Thought Adjusters. 우주 아버지의 영(靈)─생각조절자.

194:2.14 (2062.3) 2. The spirit presence of the Eternal Son — the spirit gravity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e certain channel of all spirit communion. 영원하신 아들의 영 현존─우주들의 우주의 영 중력과 모든 영 교제의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The spirit presence of the Infinite Spirit — the universal spirit-mind of all creation, the spiritual source of the intellectual kinship of all progressive intelligences. 무한 영(靈)의 영 현존─모든 창조의 우주 영-마음, 진보하는 모든 지능들의 지적 유사성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The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 the Spirit of Truth,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on.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간주되는 진리의 영.

194:2.17 (2062.6) 5. The spirit of the Infinite Spirit and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Holy Spirit,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pirit. 무한 영(靈)의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영의 영으로 간주되는 성령.

194:2.18 (2062.7) 6. The mind-spirit of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우주 어머니 영의 마음-영 ─ 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마음-영들.

194:2.19 (2062.8) 7. The spirit of the Father, Sons, and Spirits — the new-name spirit of the ascending mortals of the realms after the fusion of the mortal spirit-born soul with the Paradise Thought Adjuster and after the subsequent attainment of the divinity and glorification of the status of the Paradise Corps of the Finality. 아버지, 아들들 그리고 영들의 영─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혼과 천국 생각조절자의 융합 이후 그리고 그에 따라 나중에 천국 최종단의 지위에서의 신성과 영광을 달성한 후, 영역들에서 상승하는 사람이 받는 새로운-이름의 영.

194:2.20 (2062.9) And so did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bring to the world and its peoples the last of the spirit endowment designed to aid in the ascending search for God. 그래서 그렇게 진리의 영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을 찾는 상승을 돕기 위해 계획된 최종적 영의 부으심이 일어났습니다.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161204 진리의 영5 – 오순절에 발생한 일 1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194:3.1 (2062.10) Many queer and strange teachings became associated with the early narratives of the day of Pentecost. In subsequent times the events of this day, on which the Spirit of Truth, the new teacher, came to dwell with mankind, have become confused with the foolish outbreaks of rampant emotionalism. The chief mission of this outpoured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is to teach men about the truths of the Father’s love and the Son’s mercy. These are the truths of divinity which men can comprehend more fully than all the other divine traits of character. The Spirit of Truth is concerned primarily with the revelation of the Father’s spirit nature and the Son’s moral character. The Creator Son, in the flesh, revealed God to men; the Spirit of Truth, in the heart, reveals the Creator Son to men. When man yields the “fruits of the spirit” in his life, he is simply showing forth the traits which the Master manifested in his own earthly life. When Jesus was on earth, he lived his life as one personality — Jesus of Nazareth. As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new teacher,” the Master has, since Pentecost, been able to live his life anew in the experience of every truth-taught believer. 가치 없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들이 오순절 날의 초기 이야기들과 연관 되었습니다. 후세에, 인류에 내주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생님으로 진리의 영이 왔던 이날의 사건들은 사납게 휩쓸린 감정주의의 어리석은 소동들과 혼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출된 이 영의 주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에 대한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다른 모든 성품의 신성한 특징들 보다 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룩한 진리들입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의 영에 대한 본성과 아들의 도덕적인 성품을 계시하는데 주된 관련이 있습니다. 창조주 아들은 육신으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으며, 진리의 영은 마음으로 창조주 아들을 사람들에게 계시합니다. 사람이 일생에 “영의 열매들”을 맺을 때, 그는 단순히 주(主)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일생 속에 나타내셨던 그 특징들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그는 하나의 고유성 – 나사렛 예수 –로서 자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주(主)는 “새로운 선생”의 내주하는 영으로서, 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신자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일생을 사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194:3.2 (2062.11) Many things which happen in the course of a human life are hard to understand, difficult to reconcile with the idea that this is a universe in which truth prevails and in which righteousness triumphs. It so often appears that slander, lies, dishonesty, and unrighteousness — sin — prevail. Does faith, after all, triumph over evil, sin, and iniquity? It does. And the life and death of Jesus are the eternal proof that the truth of goodness and the faith of the spirit-led creature will always be vindicated. They taunted Jesus on the cross, saying, “Let us see if God will come and deliver him.” It looked dark on that day of the crucifixion, but it was gloriously bright on the resurrection morning; it was still brighter and more joyous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s of pessimistic despair seek to obtain release from the burdens of life; they crave extinction in endless slumber and rest. These are the religions of primitive fear and dread. The religion of Jesus is a new gospel of faith to be proclaimed to struggling humanity. This new religion is founded on faith, hope, and love.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리가 지배하고, 공의가 승리하는 곳이 우주인데, 이러한 우주에 대한 관념과 조화시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주 죄 – 중상(中傷), 거짓말, 부정직함, 그리고 불의 –가 이기는 듯합니다. 결국에는 신앙이 악, 죄, 그리고 사악함을 이길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죽음은, 영으로 인도받는 피조물의 선(善)함과 신앙의 진실성이 항상 정당화 될 것이라는 영원한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하나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시는지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던 그 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광스럽게 빛났습니다. 오순절에는 여전히 더욱 빛나고 더욱 기쁨이 넘쳤습니다. 비관적인 절망(絶望)의 종교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끝없는 수면과 휴식 안에서 멸절(滅絶)되기를 갈망합니다. 이것들은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예수의 종교는 분투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새로운 신앙의 복음입니다. 새로운 이 종교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61211 진리의 영6 – 오순절에 발생한 일 2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194:3.3 (2063.1) To Jesus, mortal life had dealt its hardest, cruelest, and bitterest blows; and this man met these ministrations of despair with faith, courage, and the unswerving determination to do his Father’s will. Jesus met life in all its terrible reality and mastered it — even in death. He did not use religion as a release from life. The religion of Jesus does not seek to escape this life in order to enjoy the waiting bliss of another existence. The religion of Jesus provides the joy and peace of another and spiritual existence to enhance and ennoble the life which men now live in the flesh. 그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도피(逃避)로써 종교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다른 존재가 되어 축복 받을 것이라는 즐거움을 기다리면서 이생의 예수님은 가장 힘들고,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통한 일격(一擊)을 당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신앙과 용기와 확고한 결단력으로 절망적인 이 직무들에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끔찍한 모든 삶의 실체를 맞이하여, 죽음까지도 포함에서 그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삶에서 도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들이 현재 육신으로 사는 바로 그 삶을 향상시키고 고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영적 생활의 기쁨과 평강을 제공합니다.

194:3.4 (2063.2) If religion is an opiate to the people, it is not the religion of Jesus. On the cross he refused to drink the deadening drug, and his spirit, poured out upon all flesh, is a mighty world influence which leads man upward and urges him onward. The spiritual forward urge is the most powerful driving force present in this world; the truth-learning believer is the one progressive and aggressive soul on earth. 종교가 인간에게 아편(마취제)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통증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강력한 세계적 영향력입니다. 전진하는 영적 충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지상에서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194:3.5 (2063.3)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 of Jesus broke all national restrictions and racial fetters. It is forever true,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On this day the Spirit of Truth became the personal gift from the Master to every mortal. This spirit was bestowed for the purpose of qualifying believers more effectively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they mistook the experience of receiving the outpoured spirit for a part of the new gospel which they were unconsciously formulating. 오순절에 예수의 종교는 국가적 제약들과 종족간의 족쇄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은 언제까지나 진리입니다. 이 날, 진리의 영은 주(主)께서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영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적격(適格)자가 되도록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퍼부어진 영을 받는 체험을, 자신들이 무의식중에 형성하고 있었던 새 복음의 일부로 삼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194:3.6 (2063.4)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 Spirit of Truth was bestowed upon all sincere believers; this gift of the spirit did not come only to the apostles. The one hundred and twenty men and women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all received the new teacher, as did all the honest of heart throughout the whole world. This new teacher was bestowed upon mankind, and every soul received him in accordance with the love for truth and the capacity to grasp and comprehend spiritual realities. At last, true religion is delivered from the custody of priests and all sacred classes and finds its real manifestation in the individual souls of men. 진리의 영이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증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의 이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이 새로운 선생을 받았으며, 온 세상에서 정직한 심정을 지닌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고 영적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혼(사람)이 그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참된 종교가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이 관리하는 상태에서 해방되었으며, 각자 사람(혼) 안에서 참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4:3.7 (2063.5) The religion of Jesus fosters the highest type of human civilization in that it creates the highest type of spiritual personality and proclaims the sacredness of that person. 예수의 종교는 최상의 영적 고유성 유형을 만들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인간 문명 유형을 육성합니다.

161218 진리의 영7 – 오순절에 발생한 일 3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194:3.8 (2063.6)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on Pentecost made possible a religion which is neither radical nor conservative; it is neither the old nor the new; it is to be dominated neither by the old nor the young. The fact of Jesus’ earthly life provides a fixed point for the anchor of time, whil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provides for the everlasting expansion and endless growth of the religion which he lived and the gospel which he proclaimed. The spirit guides into all truth; he is the teacher of an expanding and always-growing religion of endless progress and divine unfolding. This new teacher will be forever unfolding to the truth-seeking believer that which was so divinely folded up in the person and nature of the Son of Man.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오셔서, 급진적이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종교는 오래된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지배되지도 않고, 청년들에게 지배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시간의 닻을 위한 정점(定點)을 제공합니다. 반면에 진리의 영의 수여(授與: 베풀어 주심)는 주님께서 사셨던 종교와 선포하셨던 복음의 영속적인 확장과 끝없는 성장을 마련합니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끝없는 진보와 신성이 펼쳐져서 확장되고 항상 성장하는 종교의 선생입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신성하게 감춰진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입니다.

194:3.9 (2064.1) The manifestations associated with the bestowal of the “new teacher,” and the reception of the apostles’ preaching by the men of various races and nations gathered together at Jerusalem, indicate the universality of the religion of Jesus. The gospel of the kingdom was to be identified with no particular race, culture, or language. This day of Pentecost witnessed the great effort of the spirit to liberate the religion of Jesus from its inherited Jewish fetters. Even after this demonstration of pouring out the spirit upon all flesh, the apostles at first endeavored to impose the requirements of Judaism upon their converts. Even Paul had trouble with his Jerusalem brethren because he refused to subject the gentiles to these Jewish practices. No revealed religion can spread to all the world when it makes the serious mistake of becoming permeated with some national culture or associated with established racial, social, or economic practices. “새로운 선생”의 증여(贈與:선물로 주심)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들과,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던 여러 인종과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지닌 보편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특정한 인종, 문화 또는 언어와 동일시(同一視)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순절 바로 이 날에 그 영의 위대한 수고로 예수의 종교는, 이어져 왔던 유대교의 사슬에서 분명히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모든 육체에 영이 부어졌음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처음 개종자들에게 유대교의 요구조건들을 부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이 예루살렘 형제들과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유대 관습에 복종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계시(啓示) 종교는 어떤 민족 문화에 젖어 들거나, 확립된 인종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에 빠질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습니다.

194:3.10 (2064.2)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was independent of all forms, ceremonies, sacred places, and special behavior by those who received the fullness of its manifestation. When the spirit came upon those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they were simply sitting there, having just been engaged in silent prayer. The spirit was bestowed in the country as well as in the city.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apostles to go apart to a lonely place for years of solitary meditation in order to receive the spirit. For all time, Pentecost disassociates the idea of spiritual experience from the notion of especially favorable environments.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식들, 의식(儀式)들, 거룩한 장소들, 그리고 그 영이 나타남을 충분히 받았던 사람들의 특별한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 영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단지 거기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기도에 막 들어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영은 도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영을 받기 위해 뿔뿔이 헤어져 외로운 곳에서 몇 년씩 고독하게 묵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개념이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어진다는 관념으로부터 언제나 분리시킵니다.

194:3.11 (2064.3) Pentecost, with its spiritual endowment, was designed forever to loose the religion of the Master from all dependence upon physical force; the teachers of this new religion are now equipped with spiritual weapons. They are to go out to conquer the world with unfailing forgiveness, matchless good will, and abounding love. They are equipped to overcome evil with good, to vanquish hate by love, to destroy fear with a courageous and living faith in truth. Jesus had already taught his followers that his religion was never passive; always were his disciples to be active and positive in their ministry of mercy and in their manifestations of love. No longer did these believers look upon Yahweh as “the Lord of Hosts.” They now regarded the eternal Deity as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made that progress, at least, even if they did in some measure fail fully to grasp the truth that God is also the spiritual Father of every individual. 오순절은, 영의 부어주심과 함께, 주(主)님의 종교가 물리적 힘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영원히 벗어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새로운 이 종교의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들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용서, 견줄 수 없는 선한 뜻,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며, 진리에 대해 용감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두려움을 파괴할 장비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수동적)이 아니라고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자비(慈悲)로 봉사하고 사랑을 드러낼 때,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했습니다. 이 신자들은 야훼를 더 이상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영원한 신(神)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또한 모든 각 개인의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거기까지는 진보했습니다.

194:3.12 (2064.4) Pentecost endowed mortal man with the power to forgive personal injuries, to keep sweet in the midst of the gravest injustice, to remain unmoved in the face of appalling danger, and to challenge the evils of hate and anger by the fearless acts of love and forbearance. Urantia has passed through the ravages of great and destructive wars in its history. All participants in these terrible struggles met with defeat. There was but one victor; there was only one who came out of these embittered struggles with an enhanced reputation — that was Jesus of Nazareth and his gospel of overcoming evil with good. The secret of a better civilization is bound up in the Master’s teachings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good will of love and mutual trust. 오순절은 사람에게 개인적 상처를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공평의 상황에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무시무시한 위험에 직면하여서도 여전히 태연하고,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분노의 악을 도전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이 땅은 역사(歷史) 속에서 엄청나고 파괴적인 전쟁들에 의한 참혹한 피해들을 겪어 왔습니다. 이 끔찍한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패배했습니다. 승자(勝者)는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투쟁들로부터, 높은 명성과 함께 떠오른 유일한 승자는 – 나사렛 예수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그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보다 나은 문명에 대한 비결은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님의 가르침들, 즉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한 뜻 안에 깊이 묻혀 있습니다.

16-17 진리의 영(8) –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요일 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I do not write to you because you do not know the truth, but because you do know it and because no lie comes from the truth.

194:3.13 (2065.1) Up to Pentecost, religion had revealed only man seeking for God; since Pentecost, man is still searching for God, but there shines out over the world the spectacle of God also seeking for man and sending his spirit to dwell within him when he has found him. 오순절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오순절 이후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발견한 후에는 그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의 영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장관(壯觀)을 온 세상에 비추고 있습니다.

194:3.14 (2065.2) Before the teachings of Jesus which culminated in Pentecost, women had little or no spiritual standing in the tenets of the older religions. After Pentecost, in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woman stood before God on an equality with man.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who received this special visitation of the spirit were many of the women disciples, and they shared these blessings equally with the men believers. No longer can man presume to monopolize the ministry of religious service. The Pharisee might go on thanking God that he was “not born a woman, a leper, or a gentile,” but among the followers of Jesus woman has been forever set free from all religious discriminations based on sex. Pentecost obliterated all religious discrimination founded on racial distinction, cultural differences, social caste, or sex prejudice. No wonder these believers in the new religion would cry out,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오순절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기 이전에, 여인들은 오래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영적 지위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형제 신분으로 남자들과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영을 이렇게 특별히 체험한 120명 중에 여(女)제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은 남성 신자들과 똑같이 이 축복을 누렸습니다. 남자들은 이제 종교적 예배 사역에 있어서 더 이상 독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한센병(Hansen病) 환자 또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여자는 성(性)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인종적 구별, 문화적 차이들, 사회적 특권계급, 또는 성(性)적 편견에 근간을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습니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사람들이 “주(主)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4:3.15 (2065.3) Both the mother and brother of Jesus were present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and as members of this common group of disciples, they also received the outpoured spirit. They received no more of the good gift than did their fellows. No special gift was bestowed upon the members of Jesus’ earthly family. Pentecost marked the end of special priesthoods and all belief in sacred families.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120명의 신자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도 이러한 보통 제자들의 일원으로서 부어진 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이 받은 것보다 좋은 선물을 더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집안 식구라고 해서 특별한 선물이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司祭) 신분과 거룩하게 여겨지는 가계(家系)에 대한 모든 믿음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194:3.16 (2065.4) Before Pentecost the apostles had given up much for Jesus. They had sacrificed their homes, families, friends, worldly goods, and positions. At Pentecost they gave themselves to God, and the Father and the Son responded by giving themselves to man — sending their spirits to live within men. This experience of losing self and finding the spirit was not one of emotion; it was an act of intelligent self-surrender and unreserved consecration.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들은 집, 가족, 친구, 세상의 재물과 지위를 희생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 응답으로 사람들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들의 영을 보내셔서 자신들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靈)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적으로 자아를 포기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행동이었습니다.

194:3.17 (2065.5) Pentecost was the call to spiritual unity among gospel believers. When the spirit descended on the disciples at Jerusalem, the same thing happened in Philadelphia, Alexandria, and at all other places where true believers dwelt. It was literally true that “there was but one heart and soul among the multitude of the believers.” The religion of Jesus is the most powerful unifying influence the world has ever known.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있는 영적 일치(一致)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였을 때와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참된 신자들이 거주하는 모든 다른 장소들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믿는 회중 사이에 오로지 한 가지 심정과 혼이 있었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통합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194:3.18 (2065.6) Pentecost was designed to lessen the self-assertiveness of individuals, groups, nations, and races. It is this spirit of self-assertiveness which so increases in tension that it periodically breaks loose in destructive wars. Mankind can be unified only by the spiritual approach, and the Spirit of Truth is a world influence which is universal. 오순절은 개인, 집단, 국가, 종족들의 자기-주장을 줄이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주장의 정신은 긴장을 고조(高調)시켜 주기적인 파괴적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합니다. 인류는 영적 접근을 통해서만 통합될 수 있으며, 진리의 영은 우주적인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194:3.19 (2065.7)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purifies the human heart and leads the recipient to formulate a life purpose single to the will of God and the welfare of men. The material spirit of selfishness has been swallowed up in this new spiritual bestowal of selflessness. Pentecost, then and now, signifies that the Jesus of history has become the divine Son of living experience. The joy of this outpoured spirit, when it is consciously experienced in human life, is a tonic for health, a stimulus for mind, and an unfailing energy for the soul. 진리의 영의 오심은 인간의 심정을 깨끗이 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행복)에 대한 단 하나의 일생의 목적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이기심 없는 이 새로운 영적 증여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오순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예수께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적 아들이 되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부어주신 영의 기쁨은, 인간 일생을 통해 의식적으로 겪을 때, 건강을 위해서는 큰 힘이 되고, 마음에는 자극이 되며, 혼을 위해서는 한없는 에너지가 됩니다.

194:3.20 (2065.8) Prayer did not bring the spirit on the day of Pentecost, but it did have much to do with determining the capacity of receptivity which characterized the individual believers. Prayer does not move the divine heart to liberality of bestowal, but it does so often dig out larger and deeper channels wherein the divine bestowals may flow to the hearts and souls of those who thus remember to maintain unbroken communion with their Maker through sincere prayer and true worship. 기도로 오순절에 영이 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도는 개별적 신자들을 특징짓는 수용(受容)성의 능력을 결정하는 데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가 신(神)의 심정을 움직여 아낌없이 주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기도와 참된 경배를 통하여 창조자와 중단 없이 계속 교통하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혼(魂)으로 신께서 주시는 것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확대되고 깊어진 통로를 자주 만들어 냅니다.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교회의 시작

170101 진리의 영(9) – 기독교의 시작 1 행2:32-33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God has raised this Jesus to life, and we are all witnesses of the fact. 33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대신에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 주석(해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님
194:4.1 (2066.1) When Jesus was so suddenly seized by his enemies and so quickly crucified between two thieves, his apostles and disciples were completely demoralized. The thought of the Master, arrested, bound, scourged, and crucified, was too much for even the apostles. They forgot his teachings and his warnings. He might, indeed, have been “a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but he could hardly be the Messiah they had hoped would restore the kingdom of Israel. 예수께서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셨으며, 그렇게 빨리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도들과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습니다. 체포되어, 묶여, 채찍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主)님에 대한 기억 은 사도들에게도 매우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24:19)”이셨지만,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심정에 살아계심 하나님은 마음의 교리가 아니라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
194:4.2 (2066.2) Then comes the resurrection, with its deliverance from despair and the return of their faith in the Master’s divinity. Again and again they see him and talk with him, and he takes them out on Olivet, where he bids them farewell and tells them he is going back to the Father. He has told them to tarry in Jerusalem until they are endowed with power — until the Spirit of Truth shall come. And on the day of Pentecost this new teacher comes, and they go out at once to preach their gospel with new power. They are the bold and courageous followers of a living Lord, not a dead and defeated leader. The Master lives in the hearts of these evangelists; God is not a doctrine in their minds; he has become a living presence in their souls. 그 후 부활이 오자 절망에서 일어나 주(主)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들은 여러 번 주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들을 올리브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곳에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이르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 와서 그들이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로운 선생이 오시자, 그들은 즉시 새 힘으로 그들의 복음을 전파하러 나갑니다. 그들은 패배하고 죽은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主)님은 이 복음 전파자들의 가슴(심정)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이십니다.

초기 신자들의 생활 매일 모여 성찬 찬미 말씀증거
194:4.3 (2066.3) “Day by day they continued steadfastly and with one accord in the temple and breaking bread at home. They took their food with gladness and singleness of heart, praising God and hav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spirit, and they spoke the word of God with boldness. And the multitudes of those who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soul; and not one of them said that aught of the things which he possessed was his own, and they had all things in common.”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행2:46-47a).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1b-32).

예수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 사람의 형제 신분 급격한 변경 사도들의 메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194:4.4 (2066.4) What has happened to these men whom Jesus had ordained to go forth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They have a new gospel; they are on fire with a new experience; they are filled with a new spiritual energy. Their message has suddenly shifted to the proclamation of the risen Christ: “Jesus of Nazareth, a man God approved by mighty works and wonders; him, being delivered up by the determinate counsel and foreknowledge of God, you did crucify and slay. The things which God foreshadowed by the mouth of all the prophets, he thus fulfilled. This Jesus did God raise up. God has made him both Lord and Christ. Being, by the right hand of God, exalted and having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 of the spirit, he has poured forth this which you see and hear. Repent, that your sins may be blotted out; that the Father may send the Christ, who has been appointed for you, even Jesus, whom the heaven must receive until the times of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을 나아가 전파하라 고 임명한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복음을 가졌고, 새로운 체험으로 흥분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급격히 변경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 못 박아 죽였으나(행2:22-23 ). …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8).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b).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너희가 회개하고 …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19-21a).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초림(일생 죽음 부활) 재림
194:4.5 (2066.5)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message of Jesus, had been suddenly changed into the gospel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now proclaimed the facts of hi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and preached the hope of his speedy return to this world to finish the work he began. Thus the message of the early believers had to do with preaching about the facts of his first coming and with teaching the hope of his second coming, an event which they deemed to be very near at hand.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의 메시지는,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갑자기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실들을 선포하였으며, 그가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가 이 세상으로 속히 돌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의 메시지는 그의 초림(初臨)에 대한 사실들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이 아주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사건인, 그의 재림(再臨)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리가 됨 예수가 모든 것을 결정 살아계심 죽으심 영 주심 재림 새로운 교리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예수 믿는 자들의 친교 예수를 받은 사랑에서 나옴 옛 교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늘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한 형제들의 친교 필사자 사람이 형제라는 인식에서 나옴
194:4.6 (2067.1) Christ was about to become the creed of the rapidly forming church. Jesus lives; he died for men; he gave the spirit; he is coming again. Jesus filled all their thoughts and determined all their new concepts of God and everything else. They were too much enthused over the new doctrine that “God i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to be concerned with the old message that “God is the loving Father of all men,” even of every single individual. True, a marvelous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and unexampled good will did spring up in these early communities of believers. But it was a fellowship of believers in Jesus, not a fellowship of brothers in the family kingdom of the Father in heaven. Their good will arose from the love born of the concept of Jesus’ bestowal and not from the recognition of the brotherhood of mortal man. Nevertheless, they were filled with joy, and they lived such new and unique lives that all men were attracted to their teachings about Jesus. They made the great mistake of using the living and illustrative commentary on the gospel of the kingdom for that gospel, but even that represented the greatest religion mankind had ever known. 그리스도가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교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살아 계시며,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영을 주셨으며, 다시 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그들의 모든 새로운 개념들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시다.”라는 새로운 교리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모든 개별존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옛 메시지에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형제 사랑과 전례가 없는 선한 뜻이 이러한 초기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솟아나 놀랍게 표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 였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선한 뜻은 예수님의 증여 개념에서 발생된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형제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하였으며,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모든 사람들이 매혹되는 그러한 새롭고도 독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인 주석(해설)을 바로 그 복음 대신에 사용하는 큰 오류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습니다.

170108 진리의 영(10) – 기독교의 시작 2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194:4.7 (2067.2) Unmistakably, a new fellowship was arising in the world. “The multitude who believed continued steadfastly in the apostles’ teaching and fellowship, in the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 They called each other brother and sister; they greeted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they ministered to the poor. It was a fellowship of living as well as of worship. They were not communal by decree but by the desire to share their goods with their fellow believers. They confidently expected that Jesus would return to complete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during their generation. This spontaneous sharing of earthly possessions was not a direct feature of Jesus’ teaching; it came about because these men and women so sincerely and so confidently believed that he was to return any day to finish his work and to consummate the kingdom. But the final results of this well-meant experiment in thoughtless brotherly love were disastrous and sorrow-breeding. Thousands of earnest believers sold their property and disposed of all their capital goods and other productive assets. With the passing of time, the dwindling resources of Christian “equal-sharing” came to an end — but the world did not. Very soon the believers at Antioch were taking up a collection to keep their fellow believers at Jerusalem from starving. 분명히, 새로운 친교(親交) 모임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기독교의 시작).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An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 and fellowship, and in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Kjv).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습니다. 그것은 경배의 친교만이 아니라 생활의 친교였습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재물을 동료 신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아버지의 나라 설립을 마치려고 돌아오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세상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예수 가르침의 직접적인 특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언젠가 돌아와서 자신의 일을 완성하고 그 나라를 성취하실 것이라고 이 남자와 여자들은 너무도 진지하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지만, 이렇게 경솔한 형제 사랑을 실험한 최종적 결과는 비참하였고 슬픔을 낳았습니다. 수천 명의 착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부동산을 팔았고 그들의 자본(資本)이 되는 모든 재물들과 기타 생산적인 자산 일체를 처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함께 나누는” 자산은 줄어들어 끝이 나게 되었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지 않도록 모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4.8 (2067.3) In these days they celebrated the Lord’s Supper after the manner of its establishment; that is, they assembled for a social meal of good fellowship and partook of the sacrament at the end of the meal. 이 무렵,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을, 그것이 창설된 방법에 따라서 거행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함께 모여 사이좋게 교제하면서 음식을 서로 나누고, 그 식사가 마칠 때,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194:4.9 (2067.4) At first they baptized in the name of Jesus; it was almost twenty years before they began to baptize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Baptism was all that was required for admission into the fellowship of believers. They had no organization as yet; it was simply the Jesus brotherhood.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는 신자들의 친교에 가입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아무 조직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히 예수의 형제신분이었습니다.

194:4.10 (2067.5) This Jesus sect was growing rapidly, and once more the Sadducees took notice of them. The Pharisees were little bothered about the situation, seeing that none of the teachings in any way interfered with the observance of the Jewish laws. But the Sadducees began to put the leaders of the Jesus sect in jail until they were prevailed upon to accept the counsel of one of the leading rabbis, Gamaliel, who advised them: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is of men, it will be overthrown; but if it is of God, you will not be able to overthrow them, lest haply you be found even to be fighting against God.” They decided to follow Gamaliel’s counsel, and there ensued a time of peace and quiet in Jerusalem, during which the new gospel about Jesus spread rapidly. 이 예수의 종파는 급속히 성장했고, 사두개인들은 한 번 더 그들을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상황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충돌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기 시작했고, 지도하는 랍비들 중 하나인 가말리엘의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설득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행5: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And now I say unto you,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be of men, it will come to nought: But if it be of God, ye cannot overthrow it; lest haply ye be found even to fight against God.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하였고, 예루살렘에는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이 신속하게 퍼졌습니다.

194:4.11 (2068.1) And so all went well in Jerusalem until the time of the coming of the Greeks in large numbers from Alexandria. Two of the pupils of Rodan arrived in Jerusalem and made many converts from among the Hellenists. Among their early converts were Stephen and Barnabas. These able Greeks did not so much have the Jewish viewpoint, and they did not so well conform to the Jewish mode of worship and other ceremonial practices. And it was the doings of these Greek believers that terminated the peaceful relations between the Jesus brotherhood and the Pharisees and Sadducees. Stephen and his Greek associate began to preach more as Jesus taught, and this brought them into immediate conflict with the Jewish rulers. In one of Stephen’s public sermons, when he reached the objectionable part of the discourse, they dispensed with all formalities of trial and proceeded to stone him to death on the spot.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로단의 두 생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헬라파 중에서 많은 사람이 개종(改宗)했습니다. 그들의 초기 개종자들 가운데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의 관점과 많이 달라서,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다른 예식의 관습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의 형제신분 단체와 바리새인•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스테반과 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대로 더욱 전파하기 시작하여, 그들은 곧 유대인 통치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의 대중 설교 중 하나에서, 강연(講演) 중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자, 그들은 모든 공식적 재판 절차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194:4.12 (2068.2) Stephen, the leader of the Greek colony of Jesus’ believers in Jerusalem, thus became the first martyr to the new faith and the specific cause for the formal organization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This new crisis was met by the recognition that believers could not longer go on as a sect within the Jewish faith. They all agreed that they must separate themselves from unbelievers; and within one month from the death of Stephen the church at Jerusalem had been organized under the leadership of Peter, and James the brother of Jesus had been installed as its titular head.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로운 신앙의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특별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해, 신자들은 이제는 더 유대 신앙의 한 종파로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인식(認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非)신자들과 따로 분리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습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이 안 되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아래 조직되어,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명목상 수장(首長)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4.13 (2068.3) And then broke out the new and relentless persecutions by the Jews, so that the active teachers of the new religion about Jesus, which subsequently at Antioch was called Christianity, went forth to the ends of the empire proclaiming Jesus. In carrying this message, before the time of Paul the leadership was in Greek hands; and these first missionaries, as also the later ones, followed the path of Alexander’s march of former days, going by way of Gaza and Tyre to Antioch and then over Asia Minor to Macedonia, then on to Rome an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empire. 그 후 유대인들에 의해 잔인한 박해가 새롭게 시작되어, 예수에 대해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는 의욕적인 선생들은 예수를 선포하면서 그 제국의 변방(邊方)들을 향하여 퍼져 나갔으며, 그 종교는 후에 안디옥에서 기독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바울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리스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선교사들은, 그 뒤를 이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전에 알렉산더가 행진하였던 길을 따라서,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디옥으로 갔으며, 이어서 소아시아를 지나 마케도니아로 갔고, 그 후에는 계속 로마와 그 제국의 가장 먼 지방들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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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2 The Sojourn at Rome 로마 체류(滯留) 기간

Paper 132

The Sojourn at Rome 로마 체류(滯留) 기간

Influence on thirty-two religious leaders
1. True Values
2. Good and Evil
3. Truth and Faith
4. Personal Ministry
To the Roman senator
To the Roman soldier
To the speaker at the forum
To the poor man, falsely accused
5. Counseling the Rich Man
6. Social Ministry
7. Trips About Rome
The thoughtless pagan
“Let’s you and I make a new religion.”

132:0.1 (1455.1) SINCE Gonod carried greetings from the princes of India to Tiberius, the Roman ruler, on the third day after their arrival in Rome the two Indians and Jesus appeared before him. The morose emperor was unusually cheerful on this day and chatted long with the trio. And when they had gone from his presence, the emperor, referring to Jesus, remarked to the aide standing on his right, “If I had that fellow’s kingly bearing and gracious manner, I would be a real emperor, eh?” 인도의 왕자들이 로마의 통치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에게 보내는 서신을 고노드가 가지고 왔으므로, 로마에 도착한지 3일 후에 이 두 인도인들과 예수는 티베리우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성미가 괴팍한 이 황제는 그날따라 평소와는 달리 매우 기분이 좋았고 이 세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앞에서 물러가자, 이 황제는 오른 쪽에 서 있던 측근에게 예수에 대해,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왕다운 자태와 우아한 태도를 가졌다면, 나도 진짜 황제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132:0.2 (1455.2) While at Rome, Ganid had regular hours for study and for visiting places of interest about the city. His father had much business to transact, and desiring that his son grow up to become a worthy successor in the management of his vast commercial interests, he thought the time had come to introduce the boy to the business world. There were many citizens of India in Rome, and often one of Gonod’s own employees would accompany him as interpreter so that Jesus would have whole days to himself; this gave him time in which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this city of two million inhabitants. He was frequently to be found in the forum, the center of political, legal, and business life. He often went up to the Capitolium and pondered the bondage of ignorance in which these Romans were held as he beheld this magnificent temple dedicated to Jupiter, Juno, and Minerva. He also spent much time on Palatine hill, where were located the emperor’s residence, the temple of Apollo, and the Greek and Latin libraries.로마에 있는 동안, 가니드는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그 도시에서 흥미로운 곳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고노드는 사업상의 많은 거래가 하였으며, 자기 아들이 성장해서 자신의 뒤를 따라, 거대한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관리하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기를 원하여서, 이 소년에게 상업계의 현실을 보여 줄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로마에는 많은 인도 시민들이 있었고, 고노드가 직접 채용한 사람들 중 하나가 그를 위해 통역을 자주 맡아 주었기 때문에, 예수는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여 예수는 2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에 대하여 정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 사법, 및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는 광장(廣場)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캐피토리움Capitolium에 종종 올라갔고 거기서 쥬피터Jupiter와 쥬노Juno와 미네르바Minerva에게 바쳐진 이 웅장한 신전을 보면서, 이 로마인들이 붙들려 있는 무지한 속박에 대해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팔라틴 언덕 Palatine hill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황제의 저택과 아폴로Apollo 신전 그리고 그리스와 라틴 도서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32:0.3 (1455.3) At this time the Roman Empire included all of southern Europe, Asia Minor, Syria, Egypt, and northwest Africa; and its inhabitants embraced the citizens of every country of the Eastern Hemisphere. His desire to study and mingle with this cosmopolitan aggregation of Urantia mortals was the chief reason why Jesus consented to make this journey. 당시 로마 제국은 남부 유럽 전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북서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곳의 주민들 중 동반구(東半球)에 위치한 나라의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행에 동참하기로 승낙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세계적 집결지에서 세상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들과 교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2:0.4 (1455.4) Jesus learned much about men while in Rome, but the most valuable of all the manifold experiences of his six months’ sojourn in that city was his contact with, and influence upon, the religious leaders of the empire’s capital. Before the end of the first week in Rome Jesus had sought out, and had made the acquaintance of, the worth-while leaders of the Cynics, the Stoics, and the mystery cults, in particular the Mithraic group. Whether or not it was apparent to Jesus that the Jews were going to reject his mission, he most certainly foresaw that his messengers were presently coming to Rome to proclaim the kingdom of heaven; and he therefore set about, in the most amazing manner, to prepare the way for the better and more certain reception of their message. He selected five of the leading Stoics, eleven of the Cynics, and sixteen of the mystery-cult leaders and spent much of his spare time for almost six months in intimate association with these religious teachers. And this was his method of instruction: Never once did he attack their errors or even mention the flaws in their teachings. In each case he would select the truth in what they taught and then proceed so to embellish and illuminate this truth in their minds that in a very short time this enhancement of the truth effectively crowded out the associated error; and thus were these Jesus-taught men and women prepared for the subsequent recognition of additional and similar truths in the teachings of the early Christian missionaries. It was this early acceptance of the teachings of the gospel preachers which gave that powerful impetus to the rapid spread of Christianity in Rome and from there throughout the empire.예수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그가 이 도시에서 6개월의 다양한 체류 경험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었던 것은, 그 제국의 수도(首都)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첫 주간(週間)이 지나가기 전에, 예수는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신비적 종파들, 그리고 특히 미트라 숭배 집단의 훌륭한 지도자들을 찾았으며 그들과 친숙해졌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를 분명히 알고 있었는지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는 자신의 사자(使者)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로마로 올 것임을 아주 확실히 예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이 전하게 될 복음이 좀 더 수월하고 확실히 수용되도록 미리 그 길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토아학파에서 뛰어난 5명, 견유학파에서 11명, 그리고 신비 종파의 지도자들 중에서 16명을 선택하였으며, 이 종교 교사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거의 6개월 동안 자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의 실책들을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고 그들의 가르침이 내포하는 결점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경우마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를 분리한 후에 이 진리가 그들의 정신 속에서 조정되고 밝게 빛나도록 유도하여,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진리의 강화로, 관련된 오류를 효과적으로 밀어내게 만들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쳤던 이 남녀들은, 나중에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훈 속에서 좀 더 첨부된 비슷한 진리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복음 전파자들의 가르침이 이런 방식으로 일찍부터 수용되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부터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강력한 촉진제가 제공되었습니다.

132:0.5 (1456.1) The significance of this remarkable doing can the better be understood when we record the fact that, out of this group of thirty-two Jesus-taught religious leaders in Rome, only two were unfruitful; the thirty became pivotal individuals in the establishment of Christianity in Rome, and certain of them also aided in turning the chief Mithraic temple into the first Christian church of that city. We who view human activities from behind the scenes and in the light of nineteen centuries of time recognize just three factors of paramount value in the early setting of the stage for the rapid spread of Christianity throughout Europe, and they are: 주목할 만한 이 업적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로마에서 가르쳤던 32명의 종교 지도자들 중 오직 두 명만이 결실을 맺지 못했으며, 30명은 로마에서의 기독교 설립에 있어서 중심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미드라교 신전이 그 도시의 첫 기독교 교회로 바뀌도록 공헌하기도 하였습니다. 19세기 시대의 관점에서 고려해 볼 때, 유럽 전역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는 무대를 위해 탁월한 가치를 갖는 세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32:0.6 (1456.2) 1. The choosing and holding of Simon Peter as an apostle. 1. 시몬 베드로를 사도(使徒)로 선택하고 유지함.

132:0.7 (1456.3) 2. The talk in Jerusalem with Stephen, whose death led to the winning of Saul of Tarsus. 2. 자신의 죽음으로 다소의 사울을 얻게 된 스데반과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대화.

132:0.8 (1456.4) 3. The preliminary preparation of these thirty Romans for the subsequent leadership of the new religion in Rome and throughout the empire. 3. 로마와 제국 전역에서 새로운 종교 지도자가 되도록 준비시킨 30명의 이 로마인들.

132:0.9 (1456.5) Through all their experiences, neither Stephen nor the thirty chosen ones ever realized that they had once talked with the man whose name became the subject of their religious teaching. Jesus’ work in behalf of the original thirty-two was entirely personal. In his labors for these individuals the scribe of Damascus never met more than three of them at one time, seldom more than two, while most often he taught them singly. And he could do this great work of religious training because these men and women were not tradition bound; they were not victims of a settled preconception as to all future religious developments.스데반과 선택받은 30명의 로마인들도, 자신들의 모든 경험 전반에 걸쳐서, 자기들이 한 때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 자신들의 종교적 가르침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이 32명을 위한 예수의 활동은 온전히 사적(私的)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을 준비시키는 수고에 있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은 결코 동시에 세 사람 이상을 만나지 않았으며, 두 사람 이상인 경우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 그들을 한 사람씩 가르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종교적 훈련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남자들과 여자들이 전통에 매어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들은, 미래의 모든 종교적 진보와는 달리, 고정된 선입견의 희생자들이 아니었습니다.

132:0.10 (1456.6) Many were the times in the years so soon to follow that Peter, Paul, and the other Christian teachers in Rome heard about this scribe of Damascus who had preceded them, and who had so obviously (and as they supposed unwittingly) prepared the way for their coming with the new gospel. Though Paul never really surmised the identity of this scribe of Damascus, he did, a short time before his death, because of the similarity of personal descriptions, reach the conclusion that the “tentmaker of Antioch” was also the “scribe of Damascus.” On one occasion, while preaching in Rome, Simon Peter, on listening to a description of the Damascus scribe, surmised that this individual might have been Jesus but quickly dismissed the idea, knowing full well (so he thought) that the Master had never been in Rome.몇 년 후 많은 사람들이 매우 신속하게 이들의 뒤를 따랐으며, 베드로와 바울 및 로마에 왔던 다른 기독교 선생들은 자기들보다 먼저 와서, 자기들이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매우 분명히 그 길을 준비해 놓았던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의 정체를 한 번도 실제적으로 추측한 적이 없었지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그에 대한 개인적 설명들의 유사성을 근거로, “안디옥의 천막 짓는 이” 가 바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한 번은, 시몬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하는 동안,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어쩌면 이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추측하였지만, 그는 자기 스승이 로마에 온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1. True Values 참된 가치

160720 수요 예수51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

132:1.1 (1456.7) It was with Angamon, the leader of the Stoics, that Jesus had an all-night talk early during his sojourn in Rome. This man subsequently became a great friend of Paul and proved to be one of the strong supporters of the Christian church at Rome. In substance, and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taught Angamon: 로마 체류기간의 초기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지도자인 앙가몬Angamon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바울의 훌륭한 친구가 되었고, 로마에서 기독교 교회를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앙가몬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현대 언어로 다시 요약하여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1.2 (1457.1) The standard of true values must be looked for in the spiritual world and on divine levels of eternal reality. To an ascending mortal all lower and material standards must be recognized as transient, partial, and inferior. The scientist, as such, is limited to the discovery of the relatedness of material facts. Technically, he has no right to assert that he is either materialist or idealist, for in so doing he has assumed to forsake the attitude of a true scientist since any and all such assertions of attitude are the very essence of philosophy. 참된 가치관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와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차원들에서 찾아야만 한다. 사람에게 저급하고 물질적인 모든 기준들은 과도기적이고, 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인지되어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적 사실들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면에 국한하여 영향을 끼친다. 기술적으로 볼 때, 과학자는 자신이 물질주의자나 혹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는 이유는 자신이 주장하는 태도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바로 철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를 거부하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132:1.3 (1457.2) Unless the moral insight and the spiritual attainment of mankind are proportionately augmented, the unlimited advancement of a purely materialistic culture may eventually become a menace to civilization. A purely materialistic science harbors within itself the potential seed of the destruction of all scientific striving, for this very attitude presages the ultimate collapse of a civilization which has abandoned its sense of moral values and has repudiated its spiritual goal of attainment. 만약 인류의 도덕적 통찰력과 영적 달성이 균형이 잡힌 비율로 증대되지 않는다면, 물질적 문화의 무제한적인 발전은 결국 문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물질적인 과학은 모든 과학적 투쟁성과를 파괴하는 잠재적 씨앗을 그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속성은, 한 문명이 스스로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감각sense of moral values을 포기하면서 영적 달성의 목표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궁극적 붕괴를 가져오는 전조가 된다.

132:1.4 (1457.3) The materialistic scientist and the extreme idealist are destined always to be at loggerheads. This is not true of those scientists and idealists who are in possession of a common standard of high moral values and spiritual test levels. In every age scientists and religionists must recognize that they are on trial before the bar of human need. They must eschew all warfare between themselves while they strive valiantly to justify their continued survival by enhanced devotion to the service of human progress. If the so-called science or religion of any age is false, then must it either purify its activities or pass away before the emergence of a material science or spiritual religion of a truer and more worthy order. 물질적인 과학자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는 항상 서로 투쟁하면서 다투게 되어 있다. 이것은 높은 도덕적 가치와 영적 시험 차원의 상식적 기준을 소유한 과학자와 이상주의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모든 시대에, 과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은 인간의 진보를 이루는 임무에 더욱 더 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분투하는 한편, 그들은 서로 간의 모든 전쟁을 피해가야만 한다. 만약에 어떤 시대의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좀 더 진실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질서의 물질적 과학 또는 영적 종교가 시작되기 전에 그것들의 활동들은 정화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2. Good and Evil160727 수요 예수52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선과 악GOOD AND EVIL)

132:2.1 (1457.4) Mardus was the acknowledged leader of the Cynics of Rome, and he became a great friend of the scribe of Damascus. Day after day he conversed with Jesus, and night upon night he listened to his supernal teaching. Among the more important discussions with Mardus was the one designed to answer this sincere Cynic’s question about good and evil. In substance, and in twentieth-century phraseology, Jesus said: 마르두스Mardus는 로마에서 유명한 견유학파Cynics 지도자였으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서기관에게 훌륭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밤에는 그의 고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 토론 가운데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내용들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2.2 (1457.5) My brother, good and evil are merely words symbolizing relative levels of human comprehension of the observable universe. If you are ethically lazy and socially indifferent, you can take as your standard of good the current social usages. If you are spiritually indolent and morally unprogressive, you may take as your standards of good the religious practices and traditions of your contemporaries. But the soul that survives time and emerges into eternity must make a living and personal choice between good and evil as they are determined by the true values of the spiritual standards established by the divine spirit which the Father in heaven has sent to dwell within the heart of man. This indwelling spirit is the standard of personality survival.나의 형제여, 선(善)과 악(惡)이란 말은, 관찰이 가능한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상대적 차원을 상징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만일 네가 윤리적으로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다면, 선에 대한 너의 기준으로, 현재의 사회적 관례들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진보적이지 못하다면, 너는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행과 전통을 네 선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 그러나 시간의 세계에서 생존하여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혼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마음 안에 거하도록 보내준 거룩한 영에 의해 세워주신 영적인 기준들에 대한 진정한 가치에 따라서 선과 악 사이에서 생명력 있는 개인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내주(內住)하는 영이 개인성(고유성) 생존의 기준이다.

132:2.3 (1457.6) Goodness, like truth, is always relative and unfailingly evil-contrasted. It is the perception of these qualities of goodness and truth that enables the evolving souls of men to make those personal decisions of choice which are essential to eternal survival.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이란 항상 상대적이며, 반드시 악과 대조된다. 이들 선과 진리의 특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진전하는 혼이 영원한 생존에 필수적인 선택을 개인이 결정할 수 있게 한다.

132:2.4 (1458.1) The spiritually blind individual who logically follows scientific dictation, social usage, and religious dogma stands in grave danger of sacrificing his moral freedom and losing his spiritual liberty. Such a soul is destined to become an intellectual parrot, a social automaton, and a slave to religious authority. 과학적 명령과 사회적 관례 그리고 종교적 교리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는,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개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자유를 희생하고 영적 자유를 잃어버리는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한 혼은 지적 앵무새나 사회적 자동기계나 종교적 권력의 노예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132:2.5 (1458.2) Goodness is always growing toward new levels of the increasing liberty of moral self-realization and spiritual personality attainment — the discovery of, and identification with, the indwelling Adjuster. An experience is good when it heightens the appreciation of beauty, augments the moral will, enhances the discernment of truth, enlarges the capacity to love and serve one’s fellows, exalts the spiritual ideals, and unifies the supreme human motives of time with the eternal plans of the indwelling Adjuster, all of which lead directly to an increased desire to do the Father’s will, thereby fostering the divine passion to find God and to be more like him. 선(善)은 도덕적인 자아실현과 영적 개인성의 달성 — 내주하는 아버지의 영을 발견하고 더불어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을 향한 증대되는 자유의 새로운 단계들을 향하여 항상 성장한다. 체험은, 아름다움(美)을 깊이 이해하도록 자극하고, 도덕적 의지를 강화시키며, 진리에 대한 식별력을 증대시키고, 동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힘을 확대하며, 영적 이상을 고양(高揚)시키고,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이 지닌 최상의 동기와 내주하는 아버지 영의 영원한 계획과 통합할 때, 선(善)하며,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적으로 인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더욱 닮아가려는 거룩한 열망을 성숙시킵니다.

132:2.6 (1458.3) As you ascend the universe scale of creature development, you will find increasing goodness and diminishing evil in perfect accordance with your capacity for goodness-experience and truth-discernment. The ability to entertain error or experience evil will not be fully lost until the ascending human soul achieves final spirit levels. 네가 피조물이 발전하는 우주적인 기준이 상승함에 따라 즉 선을 체험하고 진리를 식별하는 너의 수용능력과 온전한 조화 가운데, 너는 증대되는 선과 감소하는 악을 발견할 것이다. 상승하는 인간의 혼이 최종적 영적 단계를 성취할 때까지는, 실수하고 악을 경험하는 능력을 온전히 상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132:2.7 (1458.4) Goodness is living, relative, always progressing, invariably a personal experience, and everlastingly correlated with the discernment of truth and beauty. Goodness is found in the recognition of the positive truth-values of the spiritual level, which must, in human experience, be contrasted with the negative counterpart — the shadows of potential evil. 선(善)은 살아있고, 상대적이며, 항상 진보하고, 변함없는 하나의 개인적 체험이며, 진리(眞)와 아름다움(美)을 식별하는 것과 영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선은 영적 차원의 긍정적 진리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가운데 발견되며, 그것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부정적인 상응 즉 잠재적인 악의 그림자와 대비되어야만 한다.

132:2.8 (1458.5) Until you attain Paradise levels, goodness will always be more of a quest than a possession, more of a goal than an experience of attainment. But even as you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you experience increasing satisfaction in the partial attainment of goodness. The presence of goodness and evil in the world is in itself positive proof of the existence and reality of man’s moral will, the personality, which thus identifies these values and is also able to choose between them. 네가 천국의 차원들에 도달할 때까지, 선은 항상 성취한 체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표가 될 것이며, 소유라기보다는 계속적인 추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할지라도, 부분적인 선의 성취 가운데, 더욱 충만해져가는 만족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에 선과 악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사람의 도덕적 의지의 존재와 실체, 그리고 이들 가치들을 감정하고,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성의 존재와 실체의 명확한 증거이다.

132:2.9 (1458.6) By the time of the attainment of Paradise the ascending mortal’s capacity for identifying the self with true spirit values has become so enlarged as to result in the attainment of the perfection of the possession of the light of life. Such a perfected spirit personality becomes so wholly, divinely, and spiritually unified with the positive and supreme qualities of goodness, beauty, and truth that there remains no possibility that such a righteous spirit would cast any negative shadow of potential evil when exposed to the searching luminosity of the divine light of the infinite Rulers of Paradise. In all such spirit personalities, goodness is no longer partial, contrastive, and comparative; it has become divinely complete and spiritually replete; it approaches the purity and perfection of the Supreme. 천국에 도달하는 시기에 이르면, 자아를 진정한 영적 가치들로 자기화할 수 있는, 상승하는 존재의 수용능력은 생명의 빛을 소유하는 완전성의 성취라는 결과를 낳기까지 그렇게 확대된다. 그렇게 완전해진 영 개인성은, 너무나 전적으로, 거룩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선함(善), 아름다움(美), 그리고 진리(眞)의 적극적이며 최상의 특성과 통합되며, 무한한 천국 통치자의 거룩한 빛이 밝히 드러날 때, 정의로운 영은 그 어떠한 잠재적 악의 부정적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한 모든 영적 개인성에서, 선(善)은 더 이상 부분적이거나, 대조적이거나, 비교 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최상 존재의 순수함과 완전성에 가까워진다.

132:2.10 (1458.7) The possibility of evil is necessary to moral choosing, but not the actuality thereof. A shadow is only relatively real. Actual evil is not necessary as a personal experience. Potential evil acts equally well as a decision stimulus in the realms of moral progress on the lower levels of spiritual development. Evil becomes a reality of personal experience only when a moral mind makes evil its choice.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성은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상대적으로 실재할 뿐이다. 실제적 악은 하나의 개인적 체험으로서 필연적이지 않다. 잠재적인 악은, 영적 발전의 낮은 차원에 대한 도덕적 진보의 영역 가운데, 결단의 자극제로 동일하게 적절히 작용한다. 악은 오직 도덕적 마음이 악을 선택했을 때에만, 하나의 개인적 체험의 실체가 된다.

3. Truth and Faith160810 수요 예수53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진리와 신앙TRUTH AND FAITH)

132:3.1 (1459.1) Nabon was a Greek Jew and foremost among the leaders of the chief mystery cult in Rome, the Mithraic. While this high priest of Mithraism held many conferences with the Damascus scribe, he was most permanently influenced by their discussion of truth and faith one evening. Nabon had thought to make a convert of Jesus and had even suggested that he return to Palestine as a Mithraic teacher. He little realized that Jesus was preparing him to become one of the early converts to the gospel of the kingdom.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the substance of Jesus’ teaching was: 나본Nabon은 그리스 유대인이었고, 로마에서 최고 신비종교였던 미트라교의 지도자들 중에서 지도자였습니다. 미트라교Mithraism의 이 고위 사제는, 다마스커스의 서기관Damascus scribe과의 여러 번의 만남 중에서, 어느 날 저녁 나누었던 진리와 신앙에 관한 토론으로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본은 예수를 개종시켜서 미트라교의 선생이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도록 그에게 제의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초기 개종자들 중의 하나로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요지를 현대 용어로 다시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2:3.2 (1459.2) Truth cannot be defined with words, only by living. Truth is always more than knowledge. Knowledge pertains to things observed, but truth transcends such purely material levels in that it consorts with wisdom and embraces such imponderables as human experience, even spiritual and living realities. Knowledge originates in science; wisdom, in true philosophy; truth, in the religious experience of spiritual living. Knowledge deals with facts; wisdom, with relationships; truth, with reality values. 진리는 말이 아니라, 단지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되어질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의 것이다. 지식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과 관련되어 있지만, 진리는 그렇게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들을 초월하며, 그 안에서 지혜와 조화를 이루어 결합되고,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간의 체험이 되게 하며, 게다가 영적이고 살아있는 실체들로 받아들이게 한다. 지식은 과학에서,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서,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지식은 사실들을, 지혜는 관계들을, 진리는 실체에 대한 가치들을 다룬다.

132:3.3 (1459.3) Man tends to crystallize science, formulate philosophy, and dogmatize truth because he is mentally lazy in adjusting to the progressive struggles of living, while he is also terribly afraid of the unknown. Natural man is slow to initiate changes in his habits of thinking and in his techniques of living. 사람은 과학을 결정화하고, 철학을 정형화하며, 진리를 교리화(敎理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삶의 발전적인 투쟁에 적응시키는 일에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또 한편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기 사고방식이나 살아가는 기법들의 변화를 시도하는데 있어서 둔하다.

132:3.4 (1459.4) Revealed truth, personally discovered truth, is the supreme delight of the human soul; it is the joint creation of the material mind and the indwelling spirit. The eternal salvation of this truth-discerning and beauty-loving soul is assured by that hunger and thirst for goodness which leads this mortal to develop a singleness of purpose to do the Father’s will, to find God and to become like him. There is never conflict between true knowledge and truth. There may be conflict between knowledge and human beliefs, beliefs colored with prejudice, distorted by fear, and dominated by the dread of facing new facts of material discovery or spiritual progress.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이 누리는 최상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사람을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132:3.5 (1459.5) But truth can never become man’s possession without the exercise of faith. This is true because man’s thoughts, wisdom, ethics, and ideals will never rise higher than his faith, his sublime hope. And all such true faith is predicated on profound reflection, sincere self-criticism, and uncompromising moral consciousness. Faith is the inspiration of the spiritized creative imagination. 그러나 진리는 신앙의 실천 없이는 절대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생각들과 지혜 그리고 윤리와 이상들은 그 자신의 신앙 즉 자신의 최고의 희망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참된 신앙은 심오한 반영과,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세워진다. 신앙은 영성화된 창조적 상상력의 영감이다.

132:3.6 (1459.6) Faith acts to release the superhuman activities of the divine spark, the immortal germ, that lives within the mind of man, and which is the potential of eternal survival. Plants and animals survive in time by the technique of passing on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identical particles of themselves. The human soul (personality) of man survives mortal death by identity association with this indwelling spark of divinity, which is immortal, and which functions to perpetuate the human personality upon a continuing and higher level of progressive universe existence. The concealed seed of the human soul is an immortal spirit. The second generation of the soul is the first of a succession of personality manifestations of spiritual and progressing existences, terminating only when this divine entity attains the source of its existence, the personal source of all existence, God, the Universal Father.신앙은 불멸의 씨앗인 거룩한 불꽃의 초인간적 활동들이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데, 그 씨앗은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영원한 생존에 대한 잠재력이다. 식물들과 동물들은, 자기와 동일한 입자들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하는 기법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존한다. 사람의 인간 혼(개인성)은 내주하는 이 신성(神性)의 불꽃과 본성적으로 연합함으로써 이 세상의 죽음에서 살아남는데, 그 불꽃은 불멸하는 것으로, 인간의 개인성이 지속적이며 더 높은 차원의 진보적 우주 실재로서 영속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 혼의 그 숨겨진 씨앗은 하나의 불멸하는 영이다. 혼의 두 번째 세대는, 영적이고 진보하는 실재들의 개인성 현시이며, 이것은 오직 이 신성한 실존개체가 그 실재의 근원, 모든 실재의 개인적 근원, 하나님, 우주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에만 끝나는 그 개인성 현시의 첫 번째 계승이다.

132:3.7 (1459.7) Human life continues — survives — because it has a universe function, the task of finding God. The faith-activated soul of man cannot stop short of the attainment of this goal of destiny; and when it does once achieve this divine goal, it can never end because it has become like God — eternal.인간의 생명은 계속 이어져 생존한다. 이는 그것이 하나의 우주 기능의 과제 즉 하나님을 찾아내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이다. 신앙이 활성화된 사람의 혼은, 이러한 운명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지할 수 없으며, 일단 이러한 신성한 목적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끝날 수 없다.

132:3.8 (1460.1) Spiritual evolution is an experience of the increasing and voluntary choice of goodness attended by an equal and progressive diminution of the possibility of evil. With the attainment of finality of choice for goodness and of completed capacity for truth appreciation, there comes into existence a perfection of beauty and holiness whose righteousness eternally inhibits the possibility of the emergence of even the concept of potential evil. Such a God-knowing soul casts no shadow of doubting evil when functioning on such a high spirit level of divine goodness.영적 진화는, 선(善)을 점점 더 많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하나의 체험이며, 그로써 악하게 될 가능성이 대등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감소되는 것을 성취한다. 선(善)에 대한 선택의 최종과 진리의 깊은 인식에 대한 완벽한 수용능력을 달성하면서, 그 정의righteousness가 잠재적 악의 개념조차도 발생하게 될 가능성을 영원히 차단하는 아름다움(美)과 거룩함에 대한 완전성이 실재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혼은, 거룩한 선이라는 높은 영적 차원에서 작용할 때, 의심을 일으킬 만한 어떤 악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다.

132:3.9 (1460.2) The presence of the Paradise spirit in the mind of man constitutes the revelation promise and the faith pledge of an eternal existence of divine progression for every soul seeking to achieve identity with this immortal and indwelling spirit fragment of the Universal Father.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 영의 현존은, 우주 아버지의 영원히 내주하는 이 영 단편과의 정체성 성취를 위해 애쓰는 모든 혼을 위하여, 거룩한 진보의 영원한 실재의 계시 약속과 신앙 서약을 성립시킨다.

132:3.10 (1460.3) Universe progress is characterized by increasing personality freedom because it is associated with the progressive attainment of higher and higher levels of self-understanding and consequent voluntary self-restraint. The attainment of perfection of spiritual self-restraint equals completeness of universe freedom and personal liberty. Faith fosters and maintains man’s soul in the midst of the confusion of his early orientation in such a vast universe, whereas prayer becomes the great unifier of the various inspirations of the creative imagination and the faith urges of a soul trying to identify itself with the spirit ideals of the indwelling and associated divine presence. 우주에서 진보의 특징은 개인성 해방의 증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아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자발적 자아 억제라는 더욱 높고 높은 차원들에 대한 진보적 달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적 자아 억제의 완전한 성취는, 우주의 자유와 개인적 해방의 완성과 같다. 신앙은 그러한 광대한 우주 안에서 적응하는 초기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의 혼을 돌보고 관리하며, 그에 반하여 기도는, 내주하고 연합된 신성한 존재의 영적 이상들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혼의 신앙적 충동들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다양한 영감을 놀라울 정도로 통일시켜 준다.

132:3.11 (1460.4) Nabon was greatly impressed by these words, as he was by each of his talks with Jesus. These truths continued to burn within his heart, and he was of great assistance to the later arriving preachers of Jesus’ gospel. 나본은 예수와의 다른 모든 이야기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말들에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진리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타올랐으며, 결국 그는 나중에 도착한 예수의 복음을 설교하는 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4. Personal Ministry160817 수요 예수54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개인적 사명활동PERSONAL MINISTRY)

132:4.1 (1460.5) Jesus did not devote all his leisure while in Rome to this work of preparing men and women to become future disciples in the oncoming kingdom. He spent much time gaining an intimate knowledge of all races and classes of men who lived in this, the largest and most cosmopolitan city of the world. In each of these numerous human contacts Jesus had a double purpose: He desired to learn their reactions to the life they were living in the flesh, and he was also minded to say or do something to make that life richer and more worth while. His religious teachings during these weeks were no different than those which characterized his later life as teacher of the twelve and preacher to the multitudes. 예수께서는 로마에 있는 동안,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와 그를 위한 장래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일에만 그의 여가 시간을 모두 다 소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적인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인종들과 계층들로 구성된 남녀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들을 수집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육신의 삶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둘째, 그는 사람들의 일생이 더 풍부하고 가치가 있도록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행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시절의 그의 종교적 가르침들은, 그의 후반기에 있었던 열 두 제자들의 선생이었을 때와 많은 군중들의 설교자였을 때 행했던 가르침들의 특징과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132:4.2 (1460.6) Always the burden of his message was: the fact of the heavenly Father’s love and the truth of his mercy, coupled with the good news that man is a faith-son of this same God of love. Jesus’ usual technique of social contact was to draw people out and into talking with him by asking them questions. The interview would usually begin by his asking them questions and end by their asking him questions. He was equally adept in teaching by either asking or answering questions. As a rule, to those he taught the most, he said the least. Those who derived most benefit from his personal ministry were overburdened, anxious, and dejected mortals who gained much relief because of the opportunity to unburden their souls to a sympathetic and understanding listener, and he was all that and more. And when these maladjusted human beings had told Jesus about their troubles, always was he able to offer practical and immediately helpful suggestions looking toward the correction of their real difficulties, albeit he did not neglect to speak words of present comfort and immediate consolation. And invariably would he tell these distressed mortals about the love of God and impart the information, by various and sundry methods, that they were the children of this loving Father in heaven.그의 메시지의 요지는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과 그의 자비라는 진리와 함께, 사람은 이 동일한 사랑의 하나님의 신앙 아들faith-son이라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통상적인 방식은 대화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대화 가운데로 이끌어 내시곤 하셨습니다. 대화는 흔히 예수께서 그들에게 던지셨던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끝이 나곤 하였습니다. 그는 질문과 대답을 통한 가르침의 전달 모두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가장 많이 가르쳤던 사람들에게, 가장 적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사명활동을 통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과 걱정이 많고 낙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동정심이 많고 이해해 주는 이 사람에게 자신들의 혼의 짐을 내려놓게 되어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는 이러한 위로 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고민들을 털어놓았을 때, 예수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실제적 어려움을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이며 즉각적 도움이 되는 제안들을 항상 해 줄 수 있었지만, 현재의 평안과 당장에 필요한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들이 바로 사랑이 많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소식을 다양한 모든 방법으로 전하곤 하셨습니다.

132:4.3 (1461.1) In this manner, during the sojourn in Rome, Jesus personally came into affectionate and uplifting contact with upward of five hundred mortals of the realm. He thus gained a knowledge of the different races of mankind which he could never have acquired in Jerusalem and hardly even in Alexandria. He always regarded this six months as one of the richest and most informative of any like period of his earth life. 이런 식으로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그 곳에 있는 500명 이상의 사람들과 넘치는 애정으로 사람의 정신을 고양하는 개인적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그는, 예루살렘이나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얻지 못한 여러 다른 인종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상 일생 중에서 이 6개월의 기간을 가장 풍부하고 유익한 시기 중의 하나로 늘 여기셨습니다.

132:4.4 (1461.2) As might have been expected, such a versatile and aggressive man could not thus function for six months in the world’s metropolis without being approached by numerous persons who desired to secure his services in connection with some business or, more often, for some project of teaching, social reform, or religious movement. More than a dozen such proffers were made, and he utilized each one as an opportunity for imparting some thought of spiritual ennoblement by well-chosen words or by some obliging service. Jesus was very fond of doing things — even little things — for all sorts of people.예측할 수 있듯이 예수처럼 재능이 많고 적극적인 사람이 세계의 중심지에서, 수많은 사업 제안이나 사람들의 교섭을 받지 않은 채로 6개월 동안 그런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빈번하게 교육 방면에서의 구체적인 프로젝트, 사회 개혁이나 종교적 운동과 관련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제의가 12번 이상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께서는 적절한 말과 친절한 봉사를 통해, 영적 고결함에 대한 사상을 주는 기회로 활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일이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132:4.5 (1461.3) He talked with a Roman senator on politics and statesmanship, and this one contact with Jesus made such an impression on this legislator that he spent the rest of his life vainly trying to induce his colleagues to change the course of the ruling policy from the idea of the government supporting and feeding the people to that of the people supporting the government. Jesus spent one evening with a wealthy slaveholder, talked about man as a son of God, and the next day this man, Claudius, gave freedom to one hundred and seventeen slaves. He visited at dinner with a Greek physician, telling him that his patients had minds and souls as well as bodies, and thus led this able doctor to attempt a more far-reaching ministry to his fellow men. He talked with all sorts of people in every walk of life. The only place in Rome he did not visit was the public baths. He refused to accompany his friends to the baths because of the sex promiscuity which there prevailed.그는 로마의 어떤 원로원 의원과 정치와 정치적 수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와의 이 한 번의 만남에 의하여 이 입법부 의원은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동료들로 하여금 정부가 국민을 후원하고 부양하는 개념으로부터 국민이 정부를 후원하는 관념으로 통치 제도의 방침을 바꾸도록 유도하려고 여생을 다해 노력하였지만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사람이라는 주제로 어떤 부유한 노예 소유자와 하루 저녁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클라우디오스Claudius라는 이 사람은 다음 날 117명의 자기 노예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켰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저녁 식사시간에 어떤 그리스 의사를 만났는데, 그의 환자들이 육체 이외에도 마음과 혼을 갖고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었으며, 그 결과, 이 유능한 의사는 자기 이웃들을 향한 이전보다 훨씬 멀리까지 의사로서의 사명 활동에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에 속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방문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는 바로 공중목욕탕이었습니다. 난잡한 성(性) 행위가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132:4.6 (1461.4) To a Roman soldier, as they walked along the Tiber, he said: “Be brave of heart as well as of hand. Dare to do justice and be big enough to show mercy. Compel your lower nature to obey your higher nature as you obey your superiors. Revere goodness and exalt truth. Choose the beautiful in place of the ugly. Love your fellows and reach out for God with a whole heart, for God is your Father in heaven.”그는 로마의 병정과 함께 티버Tiber 강변을 걸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손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용감해야 한다. 대담하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성장해야 한다. 네가 상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너의 낮은 본성으로 하여금 더 높은 본성에 복종하게 해야 한다. 선을 존중하고 진리를 고양(高揚)시키기 바란다. 추한 것들 대신에 아름다운 것들을 선택하라. 너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132:4.7 (1461.5) To the speaker at the forum he said: “Your eloquence is pleasing, your logic is admirable, your voice is pleasant, but your teaching is hardly true. If you could only enjoy the inspiring satisfaction of knowing God as your spiritual Father, then you might employ your powers of speech to liberate your fellows from the bondage of darkness and from the slavery of ignorance.” This was the Marcus who heard Peter preach in Rome and became his successor. When they crucified Simon Peter, it was this man who defied the Roman persecutors and boldly continued to preach the new gospel. 공개토론회의 연사(演士)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너의 웅변술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고, 너의 논리는 감탄할 만하며, 네 목소리는 듣기에 아름답지만, 너의 가르침은 진리와 너무 거리가 멀다. 만일 네가, 너의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아는 영감이 넘치는 만족을 누릴 수만 있다면, 너는 너의 동료들을 어둠의 속박과 무지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 너의 연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바로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던 마커스Marcus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도전하고 새로운 복음 설교를 계속하였던 이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132:4.8 (1462.1) Meeting a poor man who had been falsely accused, Jesus went with him before the magistrate and, having been granted special permission to appear in his behalf, made that superb address in the course of which he said: “Justice makes a nation great, and the greater a nation the more solicitous will it be to see that injustice shall not befall even its most humble citizen. Woe upon any nation when only those who possess money and influence can secure ready justice before its courts! It is the sacred duty of a magistrate to acquit the innocent as well as to punish the guilty. Upon the impartiality, fairness, and integrity of its courts the endurance of a nation depends. Civil government is founded on justice, even as true religion is founded on mercy.” The judge reopened the case, and when the evidence had been sifted, he discharged the prisoner. Of all Jesus’ activities during these days of personal ministry, this came the nearest to being a public appearance. 누명을 쓴 한 가엾은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행정관에게 가서, 그를 대변해 줄 수 있는 특별한 허락을 얻은 후에, 그 과정 중에 놀라운 연설을 하셨습니다. “공의가 한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라가 위대해질수록, 가장 미천한 시민에게까지 불의가 행해지지 않도록 더욱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단지 돈과 세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법정에서 공의를 행하려 하는 나라에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 죄지은 자를 벌주는 것뿐만 아니라, 죄 없는 자를 풀어주는 것도 행정관의 신성한 의무이다. 법정의 공명정대, 공정성, 그리고 고결성 위에 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진정한 종교가 자비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시민의 정부는 공의 위에 세워진다.” 그 재판관은 그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었으며, 증거를 면밀히 검사한 뒤에 죄수를 석방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개인적 사명적 활동 중에서, 이 사건이 공개적인 활동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5. Counseling the Rich Man160824 수요 예수55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부자에게 준 조언COUNSELING THE RICH MAN)

132:5.1 (1462.2) A certain rich man, a Roman citizen and a Stoic, became greatly interested in Jesus’ teaching, having been introduced by Angamon. After many intimate conferences this wealthy citizen asked Jesus what he would do with wealth if he had it, and Jesus answered him: “I would bestow material wealth for the enhancement of material life, even as I would minister knowledge, wisdom, and spiritual service for the enrichment of the intellectual life, the ennoblement of the social life, and the advancement of the spiritual life. I would administer material wealth as a wise and effective trustee of the resources of one generation for the benefit and ennoblement of the next and succeeding generations.”금욕주의자이며 로마시민인 어떤 부자가, 앙가몬Angamon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친숙한 만남 후, 이 부자는 예수님께 그가 만일 많은 재산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겠느냐고 물었으며,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지식은 지적생활의 풍요를 위해, 지혜는 사회생활의 고상함을 위해, 영적 봉사활동은 영적인 생활의 진보를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물질적 재산은 물질적 생활의 향상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한 세대의 자원을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자로서, 다음 세대와 계속되는 후손들의 이익과 고상함을 위하여 책임지고, 재산들을 관리할 것이다.”

132:5.2 (1462.3) But the rich man was not fully satisfied with Jesus’ answer. He made bold to ask again: “But what do you think a man in my position should do with his wealth? Should I keep it, or should I give it away?” And when Jesus perceived that he really desired to know more of the truth about his loyalty to God and his duty to men, he further answered: “My good friend, I discern that you are a sincere seeker after wisdom and an honest lover of truth; therefore am I minded to lay before you my view of the solution of your problems having to do with the responsibilities of wealth. I do this because you have asked for my counsel, and in giving you this advice, I am not concerned with the wealth of any other rich man; I am offering advice only to you and for your personal guidance. If you honestly desire to regard your wealth as a trust, if you really wish to become a wise and efficient steward of your accumulated wealth, then would I counsel you to make the following analysis of the sources of your riches: Ask yourself, and do your best to find the honest answer, whence came this wealth? And as a help in the study of the sources of your great fortune, I would suggest that you bear in mind the following ten different methods of amassing material wealth: 그러나 그 부자는 예수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어서, 그는 대담하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것을 간직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나눠 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의무에 대한 진리를 그가 진정으로 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예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선한 친구여, 네가 지혜를 진지하게 구하는 자이며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나는 알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재물에 대한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의 견해를 제시하겠노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나의 조언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며, 이 충고는 다른 부자들의 재물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나는 오직 너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 지침이 되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진정으로 너의 재물을 하나의 신탁물로 여기며, 네가 그 축적된 재물에 대하여 현명하며 유능한 청지기가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너의 부(富)의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너에게 조언을 하고자 한다. 이 재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고, 그런 후 정직하게 대답을 찾도록 최선을 다해라. 너의 많은 재산의 출처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다음과 같이 물질적 재산 축적에 대한 열 가지 방법에 대한 제안을 고려하기를 바란다.

132:5.3 (1462.4) “1. Inherited wealth — riches derived from parents and other ancestors.1. 상속된 재산 — 부모나 다른 조상들로부터의 부(富).

132:5.4 (1462.5) “2. Discovered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uncultivated resources of mother earth.2. 발견되어진 재산 — 본래의 땅에 있지만 개발되지 않은 자원으로부터의 부.

132:5.5 (1462.6) “3. Trade wealth — riches obtained as a fair profit in the exchange and barter of material goods.3. 거래에 의해 얻은 재산 — 물질적 상품의 물물교환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얻어진 부.

132:5.6 (1462.7) “4. Unfair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unfair exploitation or the enslavement of one’s fellows.4. 부당한 재산 — 부당한 착취나 혹은 자신의 동료를 노예화함으로 얻어진 부.

132:5.7 (1463.1) “5. Interest wealth — income derived from the fair and just earning possibilities of invested capital.5. 금리로 얻은 재산 — 투자한 자본의 공정하고 정당한 수익 가능성으로부터의 수입.

132:5.8 (1463.2) “6. Genius wealth — riches accruing from the rewards of the creative and inventive endowments of the human mind.6. 타고난 재능으로 얻은 재산 — 사람의 마음속에 타고난 창조적이고 발명적인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 얻은 부.

132:5.9 (1463.3) “7. Accidental wealth — riches derived from the generosity of one’s fellows or taking origin in the circumstances of life.7. 우연히 얻은 재산 — 자신의 동료의 관대함으로부터 혹은 일생의 환경에서 온 부(富).

132:5.10 (1463.4) “8. Stolen wealth — riches secured by unfairness, dishonesty, theft, or fraud.8. 훔친 재산 — 부당함, 부정직함, 도둑질, 혹은 사기에 의한 부.

132:5.11 (1463.5) “9. Trust funds — wealth lodged in your hands by your fellows for some specific use, now or in the future.9. 신탁된 기금 — 현재나 혹은 미래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사용을 위해 네 이웃들로부터 너에게 맡겨진 재산.

132:5.12 (1463.6) “10. Earned wealth — riches derived directly from your own personal labor, the fair and just reward of your own daily efforts of mind and body.10. 벌어서 모은 재산 — 네 자신의 노동, 마음과 육체를 사용하여 네가 직접 매일 수고한 것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보수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부.

132:5.13 (1463.7) “And so, my friend, if you would be a faithful and just steward of your large fortune, before God and in service to men, you must approximately divide your wealth into these ten grand divisions, and then proceed to administer each portion in accordance with the wise and honest interpretation of the laws of justice, equity, fairness, and true efficiency; albeit, the God of heaven would not condemn you if sometimes you erred, in doubtful situations, on the side of merciful and unselfish regard for the distress of the suffering victims of the unfortunate circumstances of mortal life. When in honest doubt about the equity and justice of material situations, let your decisions favor those who are in need, favor those who suffer the misfortune of undeserved hardships.”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네가 만일 너의 많은 재산에 대한 신실하고 의로운 청지기라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함에 있어서, 재산을 대략 이러한 열 가지의 부문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그런 다음, 그러한 각각의 몫을 공의, 공평, 공정성, 진정한 효율성이라는 법칙들의 현명하고 정직한 판단에 따라서 계속 관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가끔 확실치 않은 상황들에 처하여, 인간 일생의 불행한 환경 아래 고통 받는 희생자들의 괴로움을 도와주며 자비롭고 사심 없는 배려를 하는 중에서 실수를 범한다고 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다. 물질적 상황의 공평함과 공의에 대해서 진정으로 확실하게 알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는, 궁핍한 자에게 유리하고 불행으로 부당하게 고생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해라.”

132:5.14 (1463.8) After discussing these matters for several hours and in response to the rich man’s request for further and more detailed instruction, Jesus went on to amplify his advice, in substance saying: “While I offer further suggestions concerning your attitude toward wealth, I would admonish you to receive my counsel as given only to you and for your personal guidance. I speak only for myself and to you as an inquiring friend. I adjure you not to become a dictator as to how other rich men shall regard their wealth. I would advise you: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시간을 토의한 후에, 그 부자는 좀 더 자세한 가르침을 간청하였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자신의 충고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재산에 대한 너의 태도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제안함에 있어서, 나의 조언을 단지 너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고 네 개인적 지침으로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오직 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질문하는 친구에 대한 답변으로 말할 뿐이다. 다른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네가 명령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너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자 한다.

132:5.15 (1463.9) “1. As steward of inherited wealth you should consider its sources. You are under moral obligation to represent the past generation in the honest transmittal of legitimate wealth to succeeding generations after subtracting a fair toll for the benefit of the present generation. But you are not obligated to perpetuate any dishonesty or injustice involved in the unfair accumulation of wealth by your ancestors. Any portion of your inherited wealth which turns out to have been derived through fraud or unfairness, you may disburse in accordance with your convictions of justice, generosity, and restitution. The remainder of your legitimate inherited wealth you may use in equity and transmit in security as the trustee of one generation for another. Wise discrimination and sound judgment should dictate your decisions regarding the bequest of riches to your successors. 1. 상속되어진 재산의 청지기로서 너는 그것의 근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너는 정당한 재산에 대하여 현세대의 이득을 위한 공정한 몫을 제한 후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일에 있어서, 과거의 세대들을 대표하는 도덕적 의무 아래에 있다. 그러나 네 조상들에 의해 부당하게 축적된 재산에 내포된 어떤 부정이나 불의든지 계속 유지시킬 의무는 없다. 사기나 부당함에서 연유되었다고 밝혀진, 너에게 상속된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너는 공의와 관대함 그리고 배상에 대한 네 신념에 의거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정당하게 상속된 너의 나머지 재산은 네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신탁자로서 안전하게 전해야 한다. 네 후손들에게 재물을 전해주는 데 있어서, 현명한 식별력과 건전한 판단력이 네 의사 결정들을 좌우해야 할 것이다.

132:5.16 (1463.10) “2. Everyone who enjoys wealth as a result of discovery should remember that one individual can live on earth but a short season and should, therefore, make adequate provision for the sharing of these discoveries in helpful ways by the largest possible number of his fellow men. While the discoverer should not be denied all reward for efforts of discovery, neither should he selfishly presume to lay claim to all of the advantages and blessings to be derived from the uncovering of nature’s hoarded resources. 2. 발견에 의한 결과로 재산을 얻은 모든 사람은, 한 개별존재가 이 땅에 살 수 있는 것은 아주 짧은 기간뿐임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그러한 발견들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발견한 자의 수고의 대가가 무시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자연의 숨겨진 보물의 자원으로부터 유래한 모든 이익들과 축복들을 자신만의 것이라는 이기적인 권리 주장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132:5.17 (1464.1) “3. As long as men choose to conduct the world’s business by trade and barter, they are entitled to a fair and legitimate profit. Every tradesman deserves wages for his services; the merchant is entitled to his hire. The fairness of trade and the honest treatment accorded one’s fellows in the organized business of the world create many different sorts of profit wealth, and all these sources of wealth must be judged by the highest principles of justice, honesty, and fairness. The honest trader should not hesitate to take the same profit which he would gladly accord his fellow trader in a similar transaction. While this sort of wealth is not identical with individually earned income when business dealings are conducted on a large scale, at the same time, such honestly accumulated wealth endows its possessor with a considerable equity as regards a voice in its subsequent distribution. 3. 사람들이 세계의 상업을 위해 무역이나 물물교환을 수단으로 선택하는 한, 그들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모든 소매상인들은 자신의 봉사에 대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무역업자는 그를 고용할 권리가 있다. 이 세상의 조직화된 상업에 있어서 정당한 무역과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이익금을 창출한다. 이러한 모든 재산의 근원들은 공의와 정직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최고의 원칙들에 의해 판별되어야 한다. 정직한 무역업자는, 같은 종류의 거래를 하는 동료 무역업자들과 기꺼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똑같은 이익을 남기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재산이 큰 규모의 상업거래에 의하여 얻어졌을 때, 그것이 개별적으로 번 것과 동일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정직하게 축적되어진 재산은 나중에 그것의 분배에 있어서 소유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상당히 공평하게 나뉘어져야만 한다.

132:5.18 (1464.2) “4. No mortal who knows God and seeks to do the divine will can stoop to engage in the oppressions of wealth. No noble man will strive to accumulate riches and amass wealth-power by the enslavement or unfair exploitation of his brothers in the flesh. Riches are a moral curse and a spiritual stigma when they are derived from the sweat of oppressed mortal man. All such wealth should be restored to those who have thus been robbed or to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An enduring civilization cannot be built upon the practice of defrauding the laborer of his hire. 4. 하나님을 알고 신성한 의지를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억압에 의한 재산 착취에 가담하지 못할 것이다. 숭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노예화하거나 부당하게 착취함으로써 부(富)를 축적하지 않을 것이고 재산의 힘을 모으려고 분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억압된 사람들의 땀으로부터 얻어졌을 때, 부(富)는 도덕적 저주와 영적 오점이 된다. 그러한 모든 재산은, 그런 식으로 빼앗긴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자손과 자손의 자손에게 반환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문명은, 고용된 노동자를 착취하는 관습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다.

132:5.19 (1464.3) “5. Honest wealth is entitled to interest. As long as men borrow and lend, that which is fair interest may be collected provided the capital lent was legitimate wealth. First cleanse your capital before you lay claim to the interest. Do not become so small and grasping that you would stoop to the practice of usury. Never permit yourself to be so selfish as to employ money-power to gain unfair advantage over your struggling fellows. Yield not to the temptation to take usury from your brother in financial distress. 5. 정당한 재산은 이자를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빌리고 빌려주는 한, 빌려준 원금에 대하여 받을 수 있는 공정한 이자는 합법적인 재산이다. 이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네 원금을 정화시켜라. 너무나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져서, 높은 이자로 폭리를 취할 만큼 비열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너무 이기적이 되어, 돈의 힘을 이용하여, 고전하는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도록 해라.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네 형제들로부터 폭리를 취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라.

132:5.20 (1464.4) “6. If you chance to secure wealth by flights of genius, if your riches are derived from the rewards of inventive endowment, do not lay claim to an unfair portion of such rewards. The genius owes something to both his ancestors and his progeny; likewise is he under obligation to the race, nation, and circumstances of his inventive discoveries; he should also remember that it was as man among men that he labored and wrought out his inventions. It would be equally unjust to deprive the genius of all his increment of wealth. And it will ever be impossible for men to establish rules and regulations applicable equally to all these problems of the equitable distribution of wealth. You must first recognize man as your brother, and if you honestly desire to do by him as you would have him do by you, the commonplace dictates of justice, honesty, and fairness will guide you in the just and impartial settlement of every recurring problem of economic rewards and social justice. 6. 만일 네가 우수한 천부적 재능에 의해 우연히 재산을 얻었다면, 만일 발명하는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 너의 재산이 주어졌다면, 그러한 보상에 대해 부당한 몫을 주장하지 마라. 비범한 자질은 그의 조상들과 그의 자손들 둘 모두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는 인류, 국가, 그리고 자신의 독창적인 발견들을 가능하게 한 환경들에게도 의무가 있으며, 자기가 수고하여 발명한 것도, 사람들 속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룩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의 재산을 증식하는 비범한 재능을 박탈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불공정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의 공정한 분배에서 이들에 관한 모든 문제에 동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규율과 규칙들을 세운다는 것은 사람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너는 먼저 사람들이 네 형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네 의도대로 상대방을 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너도 그의 의도대로 그에게 해주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공의, 정직, 공정이라는 평범한 양심의 지시가 경제적인 보상들과 사회정의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바른 길에서 치우치지 않도록, 너를 안내해줄 것이다.

132:5.21 (1464.5) “7. Except for the just and legitimate fees earned in administration, no man should lay personal claim to that wealth which time and chance may cause to fall into his hands. Accidental riches should be regarded somewhat in the light of a trust to be expended for the benefit of one’s social or economic group. The possessors of such wealth should be accorded the major voice in the determination of the wise and effective distribution of such unearned resources. Civilized man will not always look upon all that he controls as his personal and private possession. 7. 관리를 통해서 획득한 올바르고 정당한 보수를 제외하고, 시간과 기회로 인해서 자기 손안에 떨어진 재산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개인적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연히 얻은 재산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적, 경제적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쓰이기 위한 신탁물이라는 입장에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재산의 소유자들은, 노력 없이 얻은 그러한 자원에 대한 현명하고 효력적인 분배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교양이 높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개인적이며 사적(私的)인 소유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32:5.22 (1465.1) “8. If any portion of your fortune has been knowingly derived from fraud; if aught of your wealth has been accumulated by dishonest practices or unfair methods; if your riches are the product of unjust dealings with your fellows, make haste to restore all these ill-gotten gains to the rightful owners. Make full amends and thus cleanse your fortune of all dishonest riches. 8. 만일 네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사기 행위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만일 네 재산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부정직한 일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 의해서 축적된 것이며, 만일 네 재산이 네 이웃들과의 불공정한 거래에 의한 산물이라면, 잘못 얻어진 이러한 모든 소득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주인들에게 서둘러서 반환해라. 충분한 보상을 통하여 너의 모든 부정직한 재산을 깨끗하게 만들어라.

132:5.23 (1465.2) “9. The trusteeship of the wealth of one person for the benefit of others is a solemn and sacred responsibility. Do not hazard or jeopardize such a trust. Take for yourself of any trust only that which all honest men would allow. 9.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한 사람이 그 재산을 신탁 관리하는 일은 하나의 중대하고 신성한 의무를 갖는다. 그러한 신용에 해를 입히거나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공정한 사람들이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양(量)만을 그 신탁금에서 네 몫으로 떼어놓아라.

132:5.24 (1465.3) “10. That part of your fortune which represents the earnings of your own mental and physical efforts — if your work has been done in fairness and equity — is truly your own. No man can gainsay your right to hold and use such wealth as you may see fit provided your exercise of this right does not work harm upon your fellows.” 10. 너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으로 얻은 네 재산은, 만약 그 일이 공정함과 공평함으로 된 것이었다면, 진정한 네 소유이다. 그러한 재산을 간직하고 사용하는 너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네가 보기에 그것이 네 이웃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132:5.25 (1465.4) When Jesus had finished counseling him, this wealthy Roman arose from his couch and, in saying farewell for the night, delivered himself of this promise: “My good friend, I perceive you are a man of great wisdom and goodness, and tomorrow I will begin the administration of all my wealth in accordance with your counsel.” 예수께서 그에게 조언을 끝내자, 이 부유한 로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약속하였습니다. “나의 선한 친구여, 나는 당신이 위대한 지혜와 선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는 내일부터 당신의 조언에 따라 나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6. Social Ministry160831 수요 예수56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사회적인 사역SOCIAL MINISTRY)

132:6.1 (1465.5) Here in Rome also occurred that touching incident in which the Creator of a universe spent several hours restoring a lost child to his anxious mother. This little boy had wandered away from his home, and Jesus found him crying in distress. He and Ganid were on their way to the libraries, but they devoted themselves to getting the child back home. Ganid never forgot Jesus’ comment: “You know, Ganid, most human beings are like the lost child. They spend much of their time crying in fear and suffering in sorrow when, in very truth, they are but a short distance from safety and security, even as this child was only a little way from home. And all those who know the way of truth and enjoy the assurance of knowing God should esteem it a privilege, not a duty, to offer guidance to their fellows in their efforts to find the satisfactions of living. Did we not supremely enjoy this ministry of restoring the child to his mother? So do those who lead men to God experience the supreme satisfaction of human service.” And from that day forward, for the remainder of his natural life, Ganid was continually on the lookout for lost children whom he might restore to their homes. 로마에서 우주의 창조주가 길 잃은 아이를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주기 위해 몇 시간 지체했던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멀리 나와 방황하며,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와 가니드는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지만, 아이의 집을 찾기 위해 전념하였습니다. 가니드는 예수께서 하셨던 다음의 말을 결코 잊지 못하였습니다. “가니드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 잃은 이 아이와 같단다. 이 아이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방황한 것처럼, 사람들은 지척에 안전과 보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 두려움 때문에 울며, 슬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확신을 누리고, 진리의 길을 아는 모든 자들은, 삶의 만족을 찾아 헤매는 자기 이웃들에게,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써, 안내자 역할을 해야만 한다. 이 아이에게 어머니 찾아주는 이 일을 하면서 우리가 최상의 기쁨을 누리지 않았더냐.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자들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 중 최상의 만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가니드는 길 잃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자신의 여생동안 계속하였습니다.

132:6.2 (1465.6) There was the widow with five children whose husband had been accidentally killed. Jesus told Ganid about the loss of his own father by an accident, and they went repeatedly to comfort this mother and her children, while Ganid sought money from his father to provide food and clothing. They did not cease their efforts until they had found a position for the eldest boy so that he could help in the care of the family.남편을 사고로 사별한 후, 다섯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과부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던 일에 대하여 가니드에게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로하였고, 가니드는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아서 음식과 옷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과부의 장남에게 직장을 구해 주어서 그가 가족들을 돌볼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러한 수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32:6.3 (1465.7) That night, as Gonod listened to the recital of these experiences, he said to Jesus, good-naturedly: “I propose to make a scholar or a businessman of my son, and now you start out to make a philosopher or philanthropist of him.” And Jesus smilingly replied: “Perhaps we will make him all four; then can he enjoy a fourfold satisfaction in life as his ear for the recognition of human melody will be able to recognize four tones instead of one.” Then said Gonod: “I perceive that you really are a philosopher. You must write a book for future generations.” And Jesus replied: “Not a book — my mission is to live a life in this generation and for all generations. I —” but he stopped, saying to Ganid, “My son, it is time to retire.” 그 날 밤, 고노드는 이러한 체험들에 관해서 설명을 듣다가, 예수에게 부드럽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 아들을 학자나 사업가로 키우려고 하였는데, 당신은 이제 이 아이를 철학자나 자선가로 만들기로 작정하셨군요.” 그러자 예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는 당신이 말한 그 네 가지 전부를 그가 성취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귀가 한 가지 음색이 아니라 네 가지 음색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일생 네 곱절의 만족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고노드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후손들을 위하여 책을 쓰셔야 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책이 아니라 나의 사명은 이 세대와 모든 세대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멈추면서 가니드에게, “나의 아들아, 이제 잘 시간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7. Trips About Rome160921 수요 예수57 (29세-AD23) 로마 체류 기간(로마 주변 여행TRIPS ABOUT ROME)

132:7.1 (1466.1) Jesus, Gonod, and Ganid made five trips away from Rome to points of interest in the surrounding territory. On their visit to the northern Italian lakes Jesus had the long talk with Ganid concerning the impossibility of teaching a man about God if the man does not desire to know God. They had casually met a thoughtless pagan while on their journey up to the lakes, and Ganid was surprised that Jesus did not follow out his usual practice of enlisting the man in conversation which would naturally lead up to the discussion of spiritual questions. When Ganid asked his teacher why he evinced so little interest in this pagan, Jesus answered: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떠나 그 변방의 지역들에 있는 흥미로운 곳을 중심으로, 다섯 차례 여행을 하였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호수를 방문하였을 때,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관하여, 예수는 가니드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호수로 올라가는 길에서, 그들은 경솔한 한 이방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연스럽게 영적 질문들을 끌어내어 토의를 시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니드는 의아해 하였습니다. 가니드가 그의 선생에게 왜 이 이방인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132:7.2 (1466.2) “Ganid, the man was not hungry for truth. He was not dissatisfied with himself. He was not ready to ask for help, and the eyes of his mind were not open to receive light for the soul. That man was not ripe for the harvest of salvation; he must be allowed more time for the trials and difficulties of life to prepare him for the reception of wisdom and higher learning. Or, if we could have him live with us, we might by our lives show him the Father in heaven, and thus would he become so attracted by our lives as sons of God that he would be constrained to inquire about our Father. You cannot reveal God to those who do not seek for him; you cannot lead unwilling souls into the joys of salvation. Man must become hungry for truth as a result of the experiences of living, or he must desire to know God as the result of contact with the lives of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the divine Father before another human being can act as the means of leading such a fellow mortal to the Father in heaven. If we know God, our real business on earth is so to live as to permit the Father to reveal himself in our lives, and thus will all God-seeking persons see the Father and ask for our help in finding out more about the God who in this manner finds expression in our lives.”“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를 알고자 갈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의 마음의 눈은 혼을 위한 빛을 얻기 위해 열려있지 않았다. 저 사람은 구원의 수확을 할 준비가 되지 있지 않았다. 그가 지혜와 높은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생활의 시험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그가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보여 줄 수도 있다. 그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우리의 삶에 매료가 된 결과로 그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당연히 우리에게 질문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다. 원하지 않는 혼을 구원의 기쁨으로 인도할 수 없단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는 체험을 통해 진리에 대하여 굶주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그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그는 신성한 아버지를 알고 지내온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을 알고자 갈망하여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생활을 통해 아버지께서 자신을 계시하도록 허용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 모든 개인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아버지를 볼 것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더욱 찾기 위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132:7.3 (1466.3) It was on the visit to Switzerland, up in the mountains, that Jesus had an all-day talk with both father and son about Buddhism. Many times Ganid had asked Jesus direct questions about Buddha, but he had always received more or less evasive replies. Now, in the presence of the son, the father asked Jesus a direct question about Buddha, and he received a direct reply. Said Gonod: “I would really like to know what you think of Buddha.” And Jesus answered: 스위스를 방문하는 중 높은 산에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부자(父子)와 함께 하루 종일 불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니드는 예수에게 여러 차례 부처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들을 했었지만, 그는 항상 다소 회피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아들 앞에서, 아버지 고노드가 예수님께 부처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바로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노드가, “저는 당신이 부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진심으로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32:7.4 (1466.4) “Your Buddha was much better than your Buddhism. Buddha was a great man, even a prophet to his people, but he was an orphan prophet; by that I mean that he early lost sight of his spiritual Father, the Father in heaven. His experience was tragic. He tried to live and teach as a messenger of God, but without God. Buddha guided his ship of salvation right up to the safe harbor, right up to the entrance to the haven of mortal salvation, and there, because of faulty charts of navigation, the good ship ran aground. There it has rested these many generations, motionless and almost hopelessly stranded. And thereon have many of your people remained all these years. They live within hailing distance of the safe waters of rest, but they refuse to enter because the noble craft of the good Buddha met the misfortune of grounding just outside the harbor. And the Buddhist peoples never will enter this harbor unless they abandon the philosophic craft of their prophet and seize upon his noble spirit. Had your people remained true to the spirit of Buddha, you would have long since entered your haven of spirit tranquillity, soul rest, and assurance of salvation. “당신들의 부처는 불교보다 훨씬 뛰어났었소. 부처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자기 민족에게는 선지자와 같았지만, 그는 고아(孤兒) 선지자 이었소. 이는 그가 일찍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뜻이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 그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처럼 살고자 했고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소. 부처는 자기가 탄 구원의 배를 사람이 얻을 구원의 안식처의 입구까지, 안전한 항구의 문턱에까지는 인도하였으나, 바로 그곳에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그 훌륭한 배는 좌초되었던 것이오. 그 배는 지나간 수많은 세대들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거의 희망을 잃으면서 지금껏 그곳에 묶여 있소. 그리고 당신의 민족 대부분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소. 그들은 안식하는 안전한 바다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지만, 훌륭한 부처의 고상한 배가 항구 바로 밖에서 가라앉는 불행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하였소. 그리고 불교신자들은 그들의 선지자의 철학적 배를 포기하고 그의 고상한 마음을 포착하지 않는 한, 이 항구에 들어올 수가 없소. 당신 민족이 부처의 마음에 진실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당신들은 오래 전에 영적 고요함과 혼의 안식과 구원의 확신이라는 안식처에 들어왔었을 것이오.”

132:7.5 (1467.1) “You see, Gonod, Buddha knew God in spirit but failed clearly to discover him in mind; the Jews discovered God in mind but largely failed to know him in spirit. Today, the Buddhists flounder about in a philosophy without God, while my people are piteously enslaved to the fear of a God without a saving philosophy of life and liberty. You have a philosophy without a God; the Jews have a God but are largely without a philosophy of living as related thereto. Buddha, failing to envision God as a spirit and as a Father, failed to provide in his teaching the moral energy and the spiritual driving power which a religion must possess if it is to change a race and exalt a nation.” “고노드여, 부처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마음속에서 그를 분명하게 발견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반면에 유대인들은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지만, 영적으로 그를 아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였소. 오늘날, 불교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철학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고, 반면에 나의 민족들은 가련하게도 생명과 해방의 구원이 되는 철학을 가지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있소. 당신들은 하나님 없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거기에 관련되는 삶의 철학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있소. 마음속에 하나님을 영으로 그리고 아버지로 바라보지 못한 부처는,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의 종교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 만약에 종교가 인류를 변화시키고 한 국가를 높여주는 것이라면 —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으로 연유되는 힘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였소.”

132:7.6 (1467.2) Then exclaimed Ganid: “Teacher, let’s you and I make a new religion, one good enough for India and big enough for Rome, and maybe we can trade it to the Jews for Yahweh.” And Jesus replied: “Ganid, religions are not made. The religions of men grow up over long periods of time, while the revelations of God flash upon earth in the lives of the men who reveal God to their fellows.” But they did not comprehend the meaning of these prophetic words. 그러자 가니드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 인도를 위해 충분히 훌륭하며, 로마를 위해서도 충분히 거창한 것을 만들지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종교가 야훼를 대신할 수 있도록 유대인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자라나는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자기 동료들에게 나타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 세상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예언적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132:7.7 (1467.3) That night after they had retired, Ganid could not sleep. He talked a long time with his father and finally said, “You know, father, I sometimes think Joshua is a prophet.” And his father only sleepily replied, “My son, there are others —”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로 돌아갔을 때,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였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저는 어떤 때는 여호수아가 선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단지 졸음 섞인 말투로, “아들아, 다른 사람들도 있단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32:7.8 (1467.4) From this day, for the remainder of his natural life, Ganid continued to evolve a religion of his own. He was mightily moved in his own mind by Jesus’ broadmindedness, fairness, and tolerance. In all their discussions of philosophy and religion this youth never experienced feelings of resentment or reactions of antagonism. 그 날 이후, 가니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내, 자기 자신의 종교를 발전시키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편견 없는 마음과 공정함과 관대함 때문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모든 토론들 속에서, 이 젊은이는 예수에게서 한 번도 분개심의 감정이거나 반목의 반응들을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132:7.9 (1467.5) What a scene for the celestial intelligences to behold, this spectacle of the Indian lad proposing to the Creator of a universe that they make a new religion! And though the young man did not know it, they were making a new and everlasting religion right then and there — this new way of salvation, the revelation of God to man through, and in, Jesus. That which the lad wanted most to do he was unconsciously actually doing. And it was, and is, ever thus. That which the enlightened and reflective human imagination of spiritual teaching and leading wholeheartedly and unselfishly wants to do and be, becomes measurably creative in accordance with the degree of mortal dedication to the divine doing of the Father’s will. When man goes in partnership with God, great things may, and do, happen.이 인도 청년이 우주의 창조주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고 제의하는 광경은, 주시하고 있던 천상의 지적 존재들에게는 얼마나 굉장한 구경거리였는지! 비록 이 젊은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의 영원히 존속하는 새 종교 즉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이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그 때 그곳에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이 가장 하고 싶었던 그것을,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실제로는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 졌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함으로 계몽되어지고 반영되어지는 인간의 상상력이 온 가슴으로 그리고 이기심을 버린 채, 하고 싶은 그것과 되고 싶어 하는 그것은, 아버지의 성스런 의지를 행하려는 인간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서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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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3 The Return from Rome 로마에서 돌아옴

Paper 133

The Return from Rome 로마에서 돌아옴

India’s caste system 인도의 특권계급 제도
1. Mercy and Justice 자비와 정의(正義)
2. Embarking at Tarentum 타렌툼에서 배에 오르심
The man mistreating his wife 아내를 학대하는 남성
3. At Corinth 고린도에서
Crispus,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회당장(會堂長) 크리스보
Justus, the merchant 상인(商人) 유스도
The two public women 두 매춘부
4. Personal Work in Corinth 고린도에서 개인적 활동
To the miller 제분업(製粉業)자에게
To the Roman centurion 로마 백부장에게
To the Mithraic leader 미트라(신비주의 계통)교 지도자에게
To the Epicurean teacher 에피크로스(쾌락주의) 학파 교사에게
To the Greek contractor 그리스 건축 도급자에게
To the Roman judge 로마의 법관에게
To the mistress of the Greek inn 그리스 숙박소의 여주인에게
To the Chinese merchant 중국 상인에게
To the traveler from Britain 영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To the runaway lad 가출 소년에게
To the condemned criminal 사형수에게
5. At Athens — Discourse on Science 아테네에서 – 과학에 관한 논의
6. At Ephesus — Discourse on the Soul 에베소에서 – 혼에 대한 강론
7. The Sojourn at Cyprus — Discourse on Mind 키프로스에 체류 -마음에 대한 강연
8. At Antioch 안디옥에서
9.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에서

133:0.1 (1468.1) WHEN preparing to leave Rome, Jesus said good-bye to none of his friends. The scribe of Damascus appeared in Rome without announcement and disappeared in like manner. It was a full year before those who knew and loved him gave up hope of seeing him again. Before the end of the second year small groups of those who had known him found themselves drawn together by their common interest in his teachings and through mutual memory of their good times with him. And these small groups of Stoics, Cynics, and mystery cultists continued to hold these irregular and informal meetings right up to the time of the appearance in Rome of the first preachers of the Christian religion. 로마를 떠나려는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예수께서는 자기의 친구들 중 아무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마스커스Damascus의 서기관은 예고 없이 왔다가, 같은 방법으로 예고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를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게 된 시점은 그가 떠나신 후 거의 1년이 지나갔을 때였습니다. 이 두 번째 해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를 알고 지냈던 작은 그룹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과 그와 함께 즐겁게 보냈던 서로의 기억들을 나누며 서로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스토아학파, 견유학파, 신비주의자들로 구성된 이 소규모의 그룹은, 비록 불규칙적이며 비공식적으로 모임을 진행하였지만,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이 로마에 오게 되었을 때까지도 계속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33:0.2 (1468.2) Gonod and Ganid had purchased so many things in Alexandria and Rome that they sent all their belongings on ahead by pack train to Tarentum, while the three travelers walked leisurely across Italy over the great Appian Way. On this journey they encountered all sorts of human beings. Many noble Roman citizens and Greek colonists lived along this road, but already the progeny of great numbers of inferior slaves were beginning to make their appearance. 고노드Gonod와 가니드Ganid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로마Rome에서 너무 많은 물건들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그 물건들을 보내는 수송편에 미리 타렌툼Tarentum까지 보냈습니다. 그 동안 이 세 명의 여행자는 거대한 아피아 도로Appian Way를 따라 이탈리아Italy를 가로질러 한가하게 도보로 여행하였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많은 고귀한 로마 시민들과 식민지 주민인 그리스인들이 이 길을 주변을 따라서 살고 있었으며, 수많은 비천한 노예들의 자손들도 일찍부터 그 길을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33:0.3 (1468.3) One day while resting at lunch, about halfway to Tarentum, Ganid asked Jesus a direct question as to what he thought of India’s caste system. Said Jesus: “Though human beings differ in many ways, the one from another, before God and in the spiritual world all mortals stand on an equal footing. There are only two groups of mortals in the eyes of God: those who desire to do his will and those who do not. As the universe looks upon an inhabited world, it likewise discerns two great classes: those who know God and those who do not. Those who cannot know God are reckoned among the animals of any given realm. Mankind can appropriately be divided into many classes in accordance with differing qualifications, as they may be viewed physically, mentally, socially, vocationally, or morally, but as these different classes of mortals appear before the judgment bar of God, they stand on an equal footing; God is truly no respecter of persons. Although you cannot escape the recognition of differential human abilities and endowments in matters intellectual, social, and moral, you should make no such distinctions in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en when assembled for worship in the presence of God.” 타렌툼에 거의 절반 정도 도달했을 때, 점심시간에 거리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가니드는 인도의 특권 계급 제도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통해 예수의 견해를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인간 존재들이 여러 방면에서 서로 많이 다르지만, 하나님 앞과 영적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서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는, 오직 두 그룹의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한 그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갈망하는 자들이며,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다. 우주적인 견해를 가지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을 고려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들은 주어진 영역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은 모두 동물로 간주된다.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직업적, 도덕적 등으로, 사람들이 다양하게 바라보는 모습과 서로 다른 여러 자격 조건들에 따라서 많은 계층으로 적당하게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계층들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모두 다 하나의 동등한 신분으로 서게 된다. 하나님은 진실로 개개인의 사람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지적, 사회적, 도덕적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인간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경우, 사람의 영적 형제관계 안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Mercy and Justice 자비와 정의(正義)

133:1.1 (1468.4) A very interesting incident occurred one afternoon by the roadside as they neared Tarentum. They observed a rough and bullying youth brutally attacking a smaller lad. Jesus hastened to the assistance of the assaulted youth, and when he had rescued him, he tightly held on to the offender until the smaller lad had made his escape. The moment Jesus released the little bully, Ganid pounced upon the boy and began soundly to thrash him, and to Ganid’s astonishment Jesus promptly interfered. After he had restrained Ganid and permitted the frightened boy to escape, the young man, as soon as he got his breath, excitedly exclaimed: “I cannot understand you, Teacher. If mercy requires that you rescue the smaller lad, does not justice demand the punishment of the larger and offending youth?” In answering, Jesus said: 그들이 타렌툼Tarentum에 가까이 도착한 어느 날 오후 길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우 거칠고 난폭한 어느 소년이 자기보다 작은 한 아이를 괴롭히는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는 폭행을 당하는 그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급히 달려갔으며, 그를 구해낸 후에는 그 작은 아이가 멀리 도망갈 때까지 그 가해자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그 어린 깡패를 놓아주는 순간, 가니드가 그 소년에게 달려들어 그를 호되게 때리기 시작하였으며, 예수께서 즉시 가니드를 저지시키자 가니드는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가니드를 말리면서, 겁먹은 그 불량소년이 도망하도록 도와주었을 때, 가니드는 숨을 돌리기 무섭게 흥분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선생님이 그 작은 어린아이를 구해야만 했다면, 그 아이보다 크고 공격적인 그 불량소년에게 벌을 주는 공의도 당연히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3:1.2 (1469.1) “Ganid, it is true, you do not understand. Mercy ministry is always the work of the individual, but justice punishment is the function of the social, governmental, or universe administrative groups. As an individual I am beholden to show mercy; I must go to the rescue of the assaulted lad, and in all consistency I may employ sufficient force to restrain the aggressor. And that is just what I did. I achieved the deliverance of the assaulted lad; that was the end of mercy ministry. Then I forcibly detained the aggressor a sufficient length of time to enable the weaker party to the dispute to make his escape, after which I withdrew from the affair. I did not proceed to sit in judgment on the aggressor, thus to pass upon his motive — to adjudicate all that entered into his attack upon his fellow — and then undertake to execute the punishment which my mind might dictate as just recompense for his wrongdoing. Ganid, mercy may be lavish, but justice is precise. Cannot you discern that no two persons are likely to agree as to the punishment which would satisfy the demands of justice? One would impose forty lashes, another twenty, while still another would advise solitary confinement as a just punishment. Can you not see that on this world such responsibilities had better rest upon the group or be administered by chosen representatives of the group? In the universe, judgment is vested in those who fully know the antecedents of all wrongdoing as well as its motivation. In civilized society and in an organized universe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 presupposes the passing of just sentence consequent upon fair judgment, and such prerogatives are vested in the juridical groups of the worlds and in the all-knowing administrators of the higher universes of all creation.” “가니드야, 네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자비를 베푸는 활동은 항상 개별적인 일이지만, 공의에 의한 처벌은 사회나 정부 또는 우주를 관리하는 집단들의 기능이다. 나는 한 개별존재로서 자비를 베풀 권한이 있고, 곤경에 처한 그 아이를 구해 주어야만 하였으며, 가해자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완력을 사용하는 것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방금 내가 행한 일이었다. 나는 곤경에 처한 그 아이가 해방되도록 도와주었고 그것으로 나의 자비의 행위는 끝이 난 것이다. 그 후 나는 약한 자가 도망하기에 충분한 시간만큼 가해자를 힘으로 붙잡아 두었고, 그 후에는 그 일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가해자를 판결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고, 그가 자기 이웃을 공격하도록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그의 동기를 판결하고, 그의 그릇된 행동에 적절한 응징의 배상으로, 내 마음이 지시했었을 처벌을 가하지도 않았다. 가니드야, 자비는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것이지만, 공의는 정확한 것이다. 공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징벌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두 사람 조차도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느냐? 공정한 형벌로, 한 사람은 40대의 매를, 다른 사람은 20대의 매를, 또 어떤 다른 이는 격리 감금을 부과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책임이 집단에게 맡겨지거나 혹은 그 집단이 뽑은 대표자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모르겠느냐? 우주에서는, 그것의 동기만이 아니라 모든 그릇된 행동의 선행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는 존재들에게 심판이 맡겨져 있다. 모든 문명화된 사회와 잘 조직된 우주에서, 공의의 실행은 정당한 심판에 의한 의로운 판결 결과의 집행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특권은 세상들의 사법집단과 모든 창조에 해당되는 높은 우주들의 전지(全知)한 행정가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133:1.3 (1469.2) For days they talked about this problem of manifesting mercy and administering justice. And Ganid, at least to some extent, understood why Jesus would not engage in personal combat. But Ganid asked one last question, to which he never received a fully satisfactory answer; and that question was: “But, Teacher, if a stronger and ill-tempered creature should attack you and threaten to destroy you, what would you do? Would you make no effort to defend yourself?” Although Jesus could not fully and satisfactorily answer the lad’s question, inasmuch as he was not willing to disclose to him that he (Jesus) was living on earth as the exemplification of the Paradise Father’s love to an onlooking universe, he did say this much: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자비의 행함과 공의의 시행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니드는 예수가 개인적 싸움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이유를 부분적으로 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니드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하였는데, 그는 그것에 대해 충분하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결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만약 힘이 더 세고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선생님을 공격하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예수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우주에게 천국 아버지의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밝히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133:1.4 (1469.3) “Ganid, I can well understand how some of these problems perplex you, and I will endeavor to answer your question. First, in all attacks which might be made upon my person, I would determine whether or not the aggressor was a son of God — my brother in the flesh — and if I thought such a creature did not possess moral judgment and spiritual reason, I would unhesitatingly defend myself to the full capacity of my powers of resistance, regardless of consequences to the attacker. But I would not thus assault a fellow man of sonship status, even in self-defense. That is, I would not punish him in advance and without judgment for his assault upon me. I would by every possible artifice seek to prevent and dissuade him from making such an attack and to mitigate it in case of my failure to abort it. Ganid, I have absolute confidence in my heavenly Father’s overcare; I am consecrated to doing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I do not believe that real harm can befall me; I do not believe that my lifework can really be jeopardized by anything my enemies might wish to visit upon me, and surely we have no violence to fear from our friends. I am absolutely assured that the entire universe is friendly to me — this all-powerful truth I insist on believing with a wholehearted trust in spite of all appearances to the contrary.” “가니드야, 이러한 문제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너를 무척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으며,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우선, 나는 내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공격에 대해서는, 그 가해자가 하나님의 아들 즉 육신적으로 나의 형제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것이며, 만약 그가 도덕적 판단과 영적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나는 주저 없이 가해자에게 발생될 결과에 상관없이, 내 온 힘을 다하여 나 자신을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나는 아들 관계를 이룩한 지위에 있는 이웃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폭행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은 채로 미리 그에게 응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로 하여금 그가 그러한 공격을 하지 않도록 예방하여 중지시킬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그 공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가니드야,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배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하였다. 진정한 해(害)가 나에게 미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나를 배척하는 자들이 나에게 가하려는 어떤 행동에 의해서든지 내 일생의 사명이 정말로 위태로워지리라고는 믿지 않으며, 두려워할 만한 어떤 폭행도 우리 친구들로부터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나는 모든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심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힘을 지닌 이 진리를 믿고자 한다.”

133:1.5 (1470.1) But Ganid was not fully satisfied. Many times they talked over these matters, and Jesus told him some of his boyhood experiences and also about Jacob the stone mason’s son. On learning how Jacob appointed himself to defend Jesus, Ganid said: “Oh, I begin to see! In the first place very seldom would any normal human being want to attack such a kindly person as you, and even if anyone should be so unthinking as to do such a thing, there is pretty sure to be near at hand some other mortal who will fly to your assistance, even as you always go to the rescue of any person you observe to be in distress. In my heart, Teacher, I agree with you, but in my head I still think that if I had been Jacob, I would have enjoyed punishing those rude fellows who presumed to attack you just because they thought you would not defend yourself. I presume you are fairly safe in your journey through life since you spend much of your time helping others and ministering to your fellows in distress — well, most likely there’ll always be someone on hand to defend you.” And Jesus replied: “That test has not yet come, Ganid, and when it does, we will have to abide by the Father’s will.” And that was about all the lad could get his teacher to say on this difficult subject of self-defense and nonresistance. On another occasion he did draw from Jesus the opinion that organized society had every right to employ force in the execution of its just mandates. 그러나 가니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들에 대하여 여러 번 이야기하였고, 예수는 그에게 자기 소년시절의 체험들과 석공의 아들 야고보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수호를 자신의 일로 삼았던 사실을 듣고 나서, 가니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선생님과 같이 친절한 사람을 공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고, 만약 어떤 이가 생각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마치 선생님이 언제나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고는 구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을 재빨리 도와 줄 어떤 사람이 틀림없이 가까이에 있게 된다는 것이군요. 선생님, 마음으로는 저도 동의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제가 만약 야고보였다면, 선생님이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공격했다고 여겨지는 무뢰한 사람들에 대해 처벌하는 일을 저는 매우 즐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맴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곤경에 빠진 친구들을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치셨으며, 동시에 선생님에게는 언제든지 방어해 줄 어떤 사람이 항상 곁에 있을 것이므로, 선생님의 삶의 여정이 상당히 안전하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가니드야, 그 시험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그 때가 이르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자기방어와 무저항에 관한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해 이 소년이 자기 선생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그는 다른 기회를 포착하여, 조직된 사회는 올바른 권한을 시행함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있다는 견해를 예수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2. Embarking at Tarentum 타렌툼에서 배에 오르심

133:2.1 (1470.2) While tarrying at the ship landing, waiting for the boat to unload cargo, the travelers observed a man mistreating his wife. As was his custom, Jesus intervened in behalf of the person subjected to attack. He stepped up behind the irate husband and, tapping him gently on the shoulder, said: “My friend, may I speak with you in private for a moment?” The angry man was nonplused by such an approach and, after a moment of embarrassing hesitation, stammered out — “er — why — yes, what do you want with me?” When Jesus had led him to one side, he said: “My friend, I perceive that something terrible must have happened to you; I very much desire that you tell me what could happen to such a strong man to lead him to attack his wife, the mother of his children, and that right out here before all eyes. I am sure you must feel that you have some good reason for this assault. What did the woman do to deserve such treatment from her husband? As I look upon you, I think I discern in your face the love of justice if not the desire to show mercy. I venture to say that, if you found me out by the wayside, attacked by robbers, you would unhesitatingly rush to my rescue. I dare say you have done many such brave things in the course of your life. Now, my friend, tell me what is the matter? Did the woman do something wrong, or did you foolishly lose your head and thoughtlessly assault her?” It was not so much what he said that touched this man’s heart as the kindly look and the sympathetic smile which Jesus bestowed upon him at the conclusion of his remarks. Said the man: “I perceive you are a priest of the Cynics, and I am thankful you restrained me. My wife has done no great wrong; she is a good woman, but she irritates me by the manner in which she picks on me in public, and I lose my temper. I am sorry for my lack of self-control, and I promise to try to live up to my former pledge to one of your brothers who taught me the better way many years ago. I promise you.” 화물을 내리기 위한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여행자들은 한 남자가 자기 부인을 학대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그의 습관대로, 예수께서는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는 성난 남편의 뒤로 걸어 나가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말하였습니다. “나의 친구여, 나와 잠깐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겠나?” 화난 그 남자는 그러한 접근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당황하여 주저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저~어, 그러시지요,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예수께서는 그를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친구여, 내가 보기에는 아주 끔찍한 어떤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 같아 보이는데, 무슨 일 때문에, 너 같이 건장한 사람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내, 자기 아이들의 어머니를 공격하게 했는지 내게 말을 좀 해주었으면 한다. 네가 이러한 폭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저 여인이 무슨 일을 했기에 자기 남편으로부터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네가 자비를 베풀 의향은 없다고 하더라도, 공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네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감히 말하겠는데, 만약 네가 길가에서 도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면, 너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달려와 나를 구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네 일생의 여정에서 그러한 용감한 일을 아마 여러 번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나의 친구여, 무엇이 문제인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저 여인이 무슨 그릇된 일을 했느냐? 아니면 네가 어리석게도 이성을 잃고 생각 없이 그녀에게 폭행을 했느냐?” 이 남자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예수가 말한 내용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말을 마치면서 예수께서 그에게 보여준 친절한 표정과 동정심이 가득한 미소였습니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견유학파의 사제이신 것 같은데, 저를 말려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 아내는 그렇게 큰 그릇된 일은 저지르지 않았으며, 착한 여자입니다만, 공공장소에서 저를 비난하여 화를 돋우었기 때문에 제가 이성을 잃었습니다. 제가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리며, 저에게 더 나은 삶의 방법을 가르쳤던 당신의 형제들 중의 한 분에게 오래 전에 하였던 저의 서약에 맞게 살 것을 약속합니다. 정말 약속합니다.”

133:2.2 (1471.1) And then, in bidding him farewell, Jesus said: “My brother, always remember that man has no rightful authority over woman unless the woman has willingly and voluntarily given him such authority. Your wife has engaged to go through life with you, to help you fight its battles, and to assume the far greater share of the burden of bearing and rearing your children; and in return for this special service it is only fair that she receive from you that special protection which man can give to woman as the partner who must carry, bear, and nurture the children. The loving care and consideration which a man is willing to bestow upon his wife and their children are the measure of that man’s attainment of the higher levels of creative and spiritual self-consciousness. Do you not know that men and women are partners with God in that they co-operate to create beings who grow up to possess themselves of the potential of immortal souls? The Father in heaven treats the Spirit Mother of the children of the universe as one equal to himself. It is Godlike to share your life and all that relates thereto on equal terms with the mother partner who so fully shares with you that divine experience of reproducing yourselves in the lives of your children. If you can only love your children as God loves you, you will love and cherish your wife as the Father in heaven honors and exalts the Infinite Spirit, the mother of all the spirit children of a vast universe.”그런 다음, 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형제여, 여자가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남자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한, 그가 그녀에 대하여 어떤 정당한 권한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네 아내는 너와 일생을 같이 보내고,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도록 너를 돕고, 너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일에 있어서 더욱 힘든 몫을 담당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특별한 봉사에 대한 대가(代價)로, 한 남자가 자기 아이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어야만 하는 동반자로서의 그 여인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보호를, 그녀는 너로부터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한 보호와 배려는, 창조적이고 영적 자아-의식의 높은 차원에 대해 그가 도달해 있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불멸 혼의 잠재성이 스스로 소유하도록 자라나는 존재를 창조하는 데 그들이 협력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반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주의 자녀들의 영 어머니를 그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하신다. 너의 자녀들의 삶 안에서, 너희 자신을 생산하는 신성한 체험을 너와 함께 그토록 충만하게 공유하는 어머니 동반자와 협력하여, 너의 일생에 관련되는 것들을 분담하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듯이, 네가 너의 자녀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광대한 우주의 모든 영 자녀의 어머니, 무한 영에게 영예를 돌리고 드높이는 것처럼, 너는 너의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133:2.3 (1471.2) As they went on board the boat, they looked back upon the scene of the teary-eyed couple standing in silent embrace. Having heard the latter half of Jesus’ message to the man, Gonod was all day occupied with meditations thereon, and he resolved to reorganize his home when he returned to India. 그들은 배에 오르면서, 눈물에 젖은 채 말 없이 포옹하며 서 있는 부부의 모습을 뒤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였던 예수의 말 중에서 후반 부분을 듣고 난 고노드는, 하루 종일 그 내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인도에 돌아가면, 자기 가정을 개혁시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133:2.4 (1471.3) The journey to Nicopolis was pleasant but slow as the wind was not favorable. The three spent many hours recounting their experiences in Rome and reminiscing about all that had happened to them since they first met in Jerusalem. Ganid was becoming imbued with the spirit of personal ministry. He began work on the steward of the ship, but on the second day, when he got into deep religious water, he called on Joshua to help him out. 니코폴리스Nicopolis로의 여정은 순탄하였지만,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아 속도가 느렸습니다. 세 사람은 로마에서 있었던 그들의 체험들에 대해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루살렘에서 서로 처음 만난 이래로 자기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가니드에게는 개인적인 사명 활동의 영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의 항해사 일을 시작하였지만, 둘째 날에, 깊은 종교적 바다에 빠지자, 자기를 도와 달라며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133:2.5 (1471.4) They spent several days at Nicopolis, the city which Augustus had founded some fifty years before as the “city of victory” in commemoration of the battle of Actium, this site being the land whereon he camped with his army before the battle. They lodged in the home of one Jeramy, a Greek proselyte of the Jewish faith, whom they had met on shipboard. The Apostle Paul spent all winter with the son of Jeramy in the same house in the course of his third missionary journey. From Nicopolis they sailed on the same boat for Corinth,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Achaia. 그들은 니코폴리스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으며, 그 도시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50년 전에 악티움Actium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승리의 도시”로 세운 곳이었고, 그가 그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집단을 이끌고 야영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만나게 된 그리스 사람인, 예라미Jeramy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예라미의 아들과 함께 바로 이 집에서 겨울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같은 배를 타고 니코폴리스를 떠나 아카이아Achaia라는 로마Roman 식민지의 수도인 고린도Corinth로 항해하였습니다.

3. At Corinth고린도에서

행18:8
133:3.1 (1471.5) By the time they reached Corinth, Ganid was becoming very much interested in the Jewish religion, and so it was not strange that, one day as they passed the synagogue and saw the people going in, he requested Jesus to take him to the service. That day they heard a learned rabbi discourse on the “Destiny of Israel,” and after the service they met one Crispus, the chief ruler of this synagogue. Many times they went back to the synagogue services, but chiefly to meet Crispus. Ganid grew to be very fond of Crispus, his wife, and their family of five children. He much enjoyed observing how a Jew conducted his family life. 그들이 고린도Corinth에 도착할 즈음에, 가니드Ganid는 유대 종교에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이 유대 회당을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가 예수께 함께 경배에 참석하자고 제안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 그들은 박식한 랍비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설교를 들었으며, 경배 후에 그들은 이 회당의 가장 높은 지도자인 크리스보Crispus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 회당을 여러 차례 다시 찾아갔는데, 주로 크리스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니드는 크리스보와 그의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이 그의 가정을 어떻게 이끄는지 살펴보며 매우 좋아했습니다.

133:3.2 (1472.1) While Ganid studied family life, Jesus was teaching Crispus the better ways of religious living. Jesus held more than twenty sessions with this forward-looking Jew; and it is not surprising, years afterward, when Paul was preaching in this very synagogue, and when the Jews had rejected his message and had voted to forbid his further preaching in the synagogue, and when he then went to the gentiles, that Crispus with his entire family embraced the new religion, and that he became one of the chief supports of the Christian church which Paul subsequently organized at Corinth. 가니드가 가정생활을 공부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크리스보에게 종교 생활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진취적인 이 유대인과 20번 이상 만났으며, 여러 해가 지난 후, 바울이 바로 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자, 유대인들이 그의 복음을 배척하고 더 이상 그에게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므로, 그가 이방인들에게로 갔을 때, 크리스보가 그의 온 가족과 함께 그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과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에서 조직한 기독교 교회의 주요 지지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133:3.3 (1472.2) During the eighteen months Paul preached in Corinth, being later joined by Silas and Timothy, he met many others who had been taught by the “Jewish tutor of the son of an Indian merchant.” 바울은, 훗날에 실라스 그리고 디모데와 합세하여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설교를 하였을 때, “인도 상인 아들의 유대인 가정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33:3.4 (1472.3) At Corinth they met people of every race hailing from three continents. Next to Alexandria and Rome, it was the most cosmopolitan city of the Mediterranean empire. There was much to attract one’s attention in this city, and Ganid never grew weary of visiting the citadel which stood almost two thousand feet above the sea. He also spent a great deal of his spare time about the synagogue and in the home of Crispus. He was at first shocked, and later on charmed, by the status of woman in the Jewish home; it was a revelation to this young Indian. 고린도Corinth에서 그들은 세 대륙(大陸)으로부터 온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와 로마Rome 다음으로 지중해the Mediterranean 제국에 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이 있었고, 가니드는 거의 해발 2,000피트 위에 서 있는 도시를 방문하는 일에 한 번도 싫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여가시간 중 많은 부분을 유대 회당과 크리스보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유대 가정에서의 여자의 위치를 알고 나서, 처음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나중에는 매료되었는데, 그것이 이 젊은 인도인에게는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습니다.

133:3.5 (1472.4) Jesus and Ganid were often guests in another Jewish home, that of Justus, a devout merchant, who lived alongside the synagogue. And many times, subsequently, when the Apostle Paul sojourned in this home, did he listen to the recounting of these visits with the Indian lad and his Jewish tutor, while both Paul and Justus wondered whatever became of such a wise and brilliant Hebrew teacher. 예수와 가니드는 또 다른 유대인 가정으로부터 자주 초대를 받았는데, 회당 옆에 위치한 믿음이 깊은 상인인 유스도의 집이었습니다(행18:7). 그리고 훗날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번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인도 청년과 그의 유대인 가정교사와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러는 동안 바울과 유스도는 그토록 현명하고 총명한 유대인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133:3.6 (1472.5) When in Rome, Ganid observed that Jesus refused to accompany them to the public baths. Several times afterward the young man sought to induce Jesus further to express himself in regard to the relations of the sexes. Though he would answer the lad’s questions, he never seemed disposed to discuss these subjects at great length. One evening as they strolled about Corinth out near where the wall of the citadel ran down to the sea, they were accosted by two public women. Ganid had imbibed the idea, and rightly, that Jesus was a man of high ideals, and that he abhorred everything which partook of uncleanness or savored of evil; accordingly he spoke sharply to these women and rudely motioned them away. When Jesus saw this, he said to Ganid: “You mean well, but you should not presume thus to speak to the children of God, even though they chance to be his erring children. Who are we that we should sit in judgment on these women? Do you happen to know all of the circumstances which led them to resort to such methods of obtaining a livelihood? Stop here with me while we talk about these matters.” The courtesans were astonished at what he said even more than was Ganid. 로마에 있을 때, 가니드는 예수가 그들과 함께 공중목욕탕에 가기를 거절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젊은이는 예수로 하여금 성(性)의 관계들에 대하여 좀 더 자기 의견을 표현하도록 여러 차례 유도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청년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길게 토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그들이 성벽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 가까이로 나가서 고린도를 산보하고 있었을 때, 두 매춘부가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이상(理想)을 지닌 분으로서, 부정(不淨)한 것이나 악의 기미가 있는 모든 것을 혐오하신다고 여겼던 가니드는 이 여자들을 날카롭게 쏘아붙이면서, 그녀들에게 비키라고 거칠게 손짓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가 가니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호의는 고맙지만, 비록 어쩌다가 그들이 실수를 범했지만 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런 식으로 주제넘게 얘기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우리가 누구기에 이 여자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겠는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수단에 의지하도록 그들을 몰아붙인 모든 환경들을 네가 다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면서, 여기에 잠시 멈추자꾸나.” 매춘부들은 가니드 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말에 더 놀랐습니다.

133:3.7 (1472.6) As they stood there in the moonlight, Jesus went on to say: “There lives within every human mind a divine spirit, the gift of the Father in heaven. This good spirit ever strives to lead us to God, to help us to find God and to know God; but also within mortals there are many natural physical tendencies which the Creator put there to serve the well-being of the individual and the race. Now, oftentimes, men and women become confused in their efforts to understand themselves and to grapple with the manifold difficulties of making a living in a world so largely dominated by selfishness and sin. I perceive, Ganid, that neither of these women is willfully wicked. I can tell by their faces that they have experienced much sorrow; they have suffered much at the hands of an apparently cruel fate; they have not intentionally chosen this sort of life; they have, in discouragement bordering on despair, surrendered to the pressure of the hour and accepted this distasteful means of obtaining a livelihood as the best way out of a situation that to them appeared hopeless. Ganid, some people are really wicked at heart; they deliberately choose to do mean things, but, tell me, as you look into these now tear-stained faces, do you see anything bad or wicked?” And as Jesus paused for his reply, Ganid’s voice choked up as he stammered out his answer: “No, Teacher, I do not. And I apologize for my rudeness to them — I crave their forgiveness.” Then said Jesus: “And I bespeak for them that they have forgiven you as I speak for my Father in heaven that he has forgiven them. Now all of you come with me to a friend’s house where we will seek refreshment and plan for the new and better life ahead.” Up to this time the amazed women had not uttered a word; they looked at each other and silently followed as the men led the way. 그들은 그 곳에서 달빛 아래에 서 있었고,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물, 즉 신성한 영(靈)이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살고 계시다. 이 선한 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분을 알도록 돕는 일에 언제나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한 인간 안에는 각자와 종족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주께서 넣어주신 많은 자연적인 물리적 경향들이 있다. 그래서 지금,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이기심과 죄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살면서 다양하게 겪는 어려움에 맞서 분투하면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가니드야, 이 두 여인들 중 누구도 의도적으로 사악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슬픔을 경험했다는 것을 그들의 얼굴 표정을 통해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잔인한 숙명의 손에서 매우 심한 고통을 겪어왔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종류의 일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절망의 경계에 이르는 낙심 안에서, 그들에게 다가왔던 그 시간의 압력에 굴복하였고, 어쩔 수없이 택해야 하는 생계의 수단을 취한 것이며, 자신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이러한 수단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가니드야, 어떤 자들은 진정으로 마음의 동기부터 악하다. 그런 사람들은 비열한 일들을 고의적으로 선택해서 행한다, 그러나 네가 지금 이렇게 눈물 젖은 얼굴들을 들여다보면서, 나쁘다거나 간악한 그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느냐?” 예수가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말을 멈추자, 가니드는 할 말이 없어서 머뭇거리며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그들의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용서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처럼, 그들이 너를 용서했음을 그들을 대신하여 내가 말하노라. 자, 너희 모두 나와 함께 친구의 집으로 가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앞으로 새로운 일생을 살기 위한 계획을 세워 보자.” 놀란 여인들은 이때까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보다가 남자들이 이끄는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갔습니다.

133:3.8 (1473.1) Imagine the surprise of Justus’ wife when, at this late hour, Jesus appeared with Ganid and these two strangers, saying: “You will forgive us for coming at this hour, but Ganid and I desire a bite to eat, and we would share it with these our new-found friends, who are also in need of nourishment; and besides all this, we come to you with the thought that you will be interested in counseling with us as to the best way to help these women get a new start in life. They can tell you their story, but I surmise they have had much trouble, and their very presence here in your house testifies how earnestly they crave to know good people, and how willingly they will embrace the opportunity to show all the world — and even the angels of heaven — what brave and noble women they can become.”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예수가 가니드와 함께 이러한 두 낯선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유스도의 아내의 놀라움을 상상해 보라.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에 대해 용서하기 바라며, 가니드와 내 몫으로 약간의 음식을 주면 좋겠고, 새로 발견한 우리 친구들도 또한 양식이 필요하니, 이러한 우리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함께 이 여인들이 일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법을 조언하는 데에, 너희가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오게 되었다. 저들이 너희에게 자기들의 사연을 말하겠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많은 곤경을 겪어 왔으며, 여기 너의 집에 지금 있는 그들이 있다는 자체가, 바로 그들이 간절하게 선한 사람들 만나기를 열망하며, 자신들도 용기가 있으며 고귀한 여자가 되어 온 세상과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새롭게 될 자신들 보여줄 기회를 잡고 싶은 지 증언하고 있노라.”

133:3.9 (1473.2) When Martha, Justus’ wife, had spread the food on the table, Jesus, taking unexpected leave of them, said: “As it is getting late, and since the young man’s father will be awaiting us, we pray to be excused while we leave you here together — three women — the beloved children of the Most High. And I will pray for your spiritual guidance while you make plans for a new and better life on earth and eternal life in the great beyond.” 유스도의 아내인 마르다가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자, 예수는 뜻밖에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이 젊은이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지고자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너희들, 세 여인을 여기에 남겨 두고 먼저 떠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너희들이 땅에서 새롭고 좀 더 나은 일생과 그 이후의 영원한 일생을 위한 계획을 짜는 동안에, 나는 너희들이 영적으로 인도 받도록 기도할 것이다.”

133:3.10 (1473.3) Thus did Jesus and Ganid take leave of the women. So far the two courtesans had said nothing; likewise was Ganid speechless. And for a few moments so was Martha, but presently she rose to the occasion and did everything for these strangers that Jesus had hoped for. The elder of these two women died a short time thereafter, with bright hopes of eternal survival, and the younger woman worked at Justus’ place of business and later became a lifelong member of the first Christian church in Corinth. 그렇게 예수와 가니드는 그 여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이때까지 두 매춘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니드 역시 마찬가지로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마르다도 말이 없었지만, 그녀는 곧 이러한 난국에 대처하여, 낯선 이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그녀에게 기대하였던 모든 일을 이행하였습니다. 이 두 여인들 중에 나이든 이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원한 삶에 대한 밝은 희망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어린 여인은 유스도의 일터에서 일하였으며, 나중에는 고린도에서의 첫 기독교 교회에서 일생동안 회원이 되었습니다.

133:3.11 (1473.4) Several times in the home of Crispus, Jesus and Ganid met one Gaius, who subsequently became a loyal supporter of Paul. During these two months in Corinth they held intimate conversations with scores of worth-while individuals, and as a result of all these apparently casual contacts more than half of the individuals so affected became members of the subsequent Christian community. 예수와 가니드는 크리스보의 집에서 가이우스라는 사람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고린도에서 수십 명의 훌륭한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고, 비공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접촉의 결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반 이상은 훗날에 발족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133:3.12 (1473.5) When Paul first went to Corinth, he had not intended to make a prolonged visit. But he did not know how well the Jewish tutor had prepared the way for his labors. And further, he discovered that great interest had already been aroused by Aquila and Priscilla, Aquila being one of the Cynics with whom Jesus had come in contact when in Rome. This couple were Jewish refugees from Rome, and they quickly embraced Paul’s teachings. He lived with them and worked with them, for they were also tentmakers. It was because of these circumstances that Paul prolonged his stay in Corinth. 바울이 처음으로 고린도에 갔을 때, 그는 장기간 방문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고에 대비하여, 그 유대인 개인교사가 길을 얼마나 잘 준비해 놓았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아퀼라와 프리실라에 의해 큰 세력이 이미 조성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아퀼라는 견유학파의 한 사람이었고 로마에서 예수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 피난자들이었고 바울의 가르침을 신속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도 역시 천막을 짓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체류 기간을 연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Personal Work in Corinth고린도에서의 개인적인 일

고전3:1-2
133:4.1 (1474.1) Jesus and Ganid had many more interesting experiences in Corinth. They had close converse with a great number of persons who greatly profited by the instruction received from Jesus. 예수와 가니드는 고린도에서 재미있는 여러 일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생명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셨습니다.

133:4.2 (1474.2) The miller he taught about grinding up the grains of truth in the mill of living experience so as to render the difficult things of divine life readily receivable by even the weak and feeble among one’s fellow mortals. Said Jesus: “Give the milk of truth to those who are babes in spiritual perception. In your living and loving ministry serve spiritual food in attractive form and suited to the capacity of receptivity of each of your inquirers.” 그는 방앗간 주인에게, 거룩한 생명이란 삶의 체험이라는 방앗간에서 진리의 곡식을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데 있어서 아직 아기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우유를 주어라. 생생한 사랑의 섬김을 위해서, 네게 질문하는 각 사람이 수용하는 능력에 맞춘 매력적인 형태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라.”

133:4.3 (1474.3) To the Roman centurion he said: “Render un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and unto God the things which are God’s. The sincere service of God and the loyal service of Caesar do not conflict unless Caesar should presume to arrogate to himself that homage which alone can be claimed by Deity. Loyalty to God, if you should come to know him, would render you all the more loyal and faithful in your devotion to a worthy emperor.” 그는 로마의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시저에게 속한 것들은 시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은 하나님께 바쳐라. 시저가 오만해져서 신(神)에게만 요구되는 경의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와 황제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에 대한 충성은, 덕망 있는 황제를 향한 네 헌신을 더욱 충성되며 신실하게 할 것이다.”

133:4.4 (1474.4) To the earnest leader of the Mithraic cult he said: “You do well to seek for a religion of eternal salvation, but you err to go in quest of such a glorious truth among man-made mysteries and human philosophies. Know you not that the mystery of eternal salvation dwells within your own soul? Do you not know that the God of heaven has sent his spirit to live within you, and that this spirit will lead all truth-loving and God-serving mortals out of this life and through the portals of death up to the eternal heights of light where God waits to receive his children? And never forget: You who know God are the sons of God if you truly yearn to be like him.” 예수님은 미트라교(敎)의 진지한 지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영원한 구원의 종교를 찾으려고 노력은 잘하고 있지만, 사람이 만든 신비들과 인간의 철학들 사이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진리를 추구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의 신비가 네 자신의 혼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어 네 안에 살게 하셨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영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여 이 세상의 생명에서 건져 죽음의 입구를 지나 영원한 최고의 빛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곳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시느니라. 네가 그와 같이 되기를 진실로 열망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133:4.5 (1474.5) To the Epicurean teacher he said: “You do well to choose the best and esteem the good, but are you wise when you fail to discern the greater things of mortal life which are embodied in the spirit realms derived from the realization of the presence of God in the human heart? The great thing in all human experience is the realization of knowing the God whose spirit lives within you and seeks to lead you forth on that long and almost endless journey of attaining the personal presence of our common Father, the God of all creation, the Lord of universes.” 예수님은 에피크로스(쾌락주의) 학파의 선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최선을 선택하고, 선을 존중히 여기는 일은 잘하고 있구나. 그러나 인간의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깨닫지 못하고,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영적 영역과 그 영역에서 구현되는 인간 생명의 더 위대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과연 네가 현명한 상태일까? 인간의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자각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네 안에 거하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아버지, 모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우주들의 주님이신 그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오랜 여행, 거의 끝이 없는 여정으로, 너를 인도하기 위해 애쓰느니라.”

133:4.6 (1474.6) To the Greek contractor and builder he said: “My friend, as you build the material structures of men, grow a spiritual character in the similitude of the divine spirit within your soul. Do not let your achievement as a temporal builder outrun your attainment as a spiritual son of the kingdom of heaven. While you build the mansions of time for another, neglect not to secure your title to the mansions of eternity for yourself. Ever remember, there is a city whose foundations are righteousness and truth, and whose builder and maker is God.” 예수님은 그리스의 건축자에게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친구여, 네가 사람들의 물질적 건물들을 짓는 것처럼, 네 혼속에 있는 그 신성한 영을 닮도록 영적인 인격을 발전시켜라. 이 세상의 일시적인 건축자로서의 성취가 하늘나라의 영적 아들이 되는 일을 앞서지 않도록 하라.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시간의 맨션들을 짓는 동안, 너 자신을 위해 짓는 영원한 맨션에 대한 소유권 확보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건축하시고 창조하신 도성 즉 정의와 진리에 기초한 도성(都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133:4.7 (1474.7) To the Roman judge he said: “As you judge men, remember that you yourself will also some day come to judgment before the bar of the Rulers of a universe. Judge justly, even mercifully, even as you shall some day thus crave merciful consideration at the hands of the Supreme Arbiter. Judge as you would be judged under similar circumstances, thus being guided by the spirit of the law as well as by its letter. And even as you accord justice dominated by fairness in the light of the need of those who are brought before you, so shall you have the right to expect justice tempered by mercy when you sometime stand before the Judge of all the earth.” 예수님은 로마의 법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람들을 재판할 때, 너 자신도 언젠가는 우주 통치자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 받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공정하고 자비하게 판결하되, 너도 언젠가는 최상의 중재자의 손으로부터 자비로운 긍휼을 간청하게 될 것임을 염두에 두어라. 네가 비슷한 상황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판결하여 법의 문자뿐만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따라야 하느니라. 그리고 네 앞에 소환되어 온 사람들의 어려운 입장을 고려하여 공정함으로 조정된 정의를 베푸는 것처럼, 너도 언젠가는 온 지상의 재판관 앞에 서서 자비로 완화된 정의를 기대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133:4.8 (1475.1) To the mistress of the Greek inn he said: “Minister your hospitality as one who entertains the children of the Most High. Elevate the drudgery of your daily toil to the high levels of a fine art through the increasing realization that you minister to God in the persons whom he indwells by his spirit which has descended to live within the hearts of men, thereby seeking to transform their minds and lead their souls to the knowledge of the Paradise Father of all these bestowed gifts of the divine spirit.” 예수님은 그리스 숙박소의 여주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극이 높으신 자의 자녀들을 대접하는 사람으로서 친절을 베풀라. 사람을 향한 섬김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봉사임을 깊이 깨달아 가면서 일상적인 단조롭고 힘든 일들을 예술적인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해 각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려 보내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신성한 영으로 선물을 주신 천국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며 그들의 혼을 인도하려고 애쓰시느니라.

신5:7 고린도에서의 개인적인 일2
133:4.9 (1475.2) Jesus had many visits with a Chinese merchant. In saying good-bye, he admonished him: “Worship only God, who is your true spirit ancestor. Remember that the Father’s spirit ever lives within you and always points your soul-direction heavenward. If you follow the unconscious leadings of this immortal spirit, you are certain to continue on in the uplifted way of finding God. And when you do attain the Father in heaven, it will be because by seeking him you have become more and more like him. And so farewell, Chang, but only for a season, for we shall meet again in the worlds of light where the Father of spirit souls has provided many delightful stopping-places for those who are Paradise-bound.” 예수님은 어느 중국인 상인과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수님은 그에게 권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의 진정한 영 조상이시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아버지의 영은 언제까지나 네 안에서 너와 함께 살고 있으며, 너의 혼이 가야할 방향이 항상 하늘을 향하도록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네가 이 불멸의 영의 무의식적 인도를 따른다면, 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높이 들린 길 위에서 분명하게 계속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게 되는 것은 그를 계속 추구하면서 더욱 그와 같이 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자, 미스터 장! 잘 있어라, 그러나 단지 한 시절뿐이니, 이는 우리가 다시 빛의 세계에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빛의 세계들은 영 혼들의 아버지께서 천국에 묶여있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즐거움이 가득한 곳들이며 방문하게 될 장소들이란다.

133:4.10 (1475.3) To the traveler from Britain he said: “My brother, I perceive you are seeking for truth, and I suggest that the spirit of the Father of all truth may chance to dwell within you. Did you ever sincerely endeavor to talk with the spirit of your own soul? Such a thing is indeed difficult and seldom yields consciousness of success; but every honest attempt of the material mind to communicate with its indwelling spirit meets with certain success, notwithstanding that the majority of all such magnificent human experiences must long remain as superconscious registrations in the souls of such God-knowing mortals.” 영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여, 나는 네가 진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노라. 모든 진리의 아버지의 영이 네 안에 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제안한다. 너는 네가 지닌 네 혼의 영(靈)과 진지하게 이야기하려고 언제라도 애쓴 적이 있었는가? 그러한 일은 참으로 어렵고, 성공에 대한 의식을 얻는 것도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물질적 마음이 그 안에서 내주하는 영과 교통하려는 모든 정직한 시도는 확실히 성공을 거두노라. 드물지만, 그런 모든 놀라운 인간 체험의 대부분이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혼 안에 초(超)의식적 등록으로서 오랫동안 남아 있노라.”

133:4.11 (1475.4) To the runaway lad Jesus said: “Remember, there are two things you cannot run away from — God and yourself. Wherever you may go, you take with you yourself and the spirit of the heavenly Father which lives within your heart. My son, stop trying to deceive yourself; settle down to the courageous practice of facing the facts of life; lay firm hold on the assurances of sonship with God and the certainty of eternal life, as I have instructed you. From this day on purpose to be a real man, a man determined to face life bravely and intelligently.” 예수님은 가출한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피해서 도망할 수 없는 두 가지 즉 하나님과 네 자신이 있음을 기억해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는 네 마음에 함께 살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영과 네 자신을 가지고 있단다. 아이야, 네 자신을 속이려는 시도를 멈추어라. 삶에 다가오는 사실들을 직면하는 용맹스러운 습성에 뿌리를 내리라. 내가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신하고 영원한 일생의 확실함을 굳게 붙잡으라. 지금 오늘부터, 진정한 남자, 용감하고 총명하게 삶을 직면하기로 각오를 가진 남자가 될 것임을 목적으로 두라.”

133:4.12 (1475.5) To the condemned criminal he said at the last hour: “My brother, you have fallen on evil times. You lost your way; you became entangled in the meshes of crime. From talking to you, I well know you did not plan to do the thing which is about to cost you your temporal life. But you did do this evil, and your fellows have adjudged you guilty; they have determined that you shall die. You or I may not deny the state this right of self-defense in the manner of its own choosing. There seems to be no way of humanly escaping the penalty of your wrongdoing. Your fellows must judge you by what you did, but there is a Judge to whom you may appeal for forgiveness, and who will judge you by your real motives and better intentions. You need not fear to meet the judgment of God if your repentance is genuine and your faith sincere. The fact that your error carries with it the death penalty imposed by man does not prejudice the chance of your soul to obtain justice and enjoy mercy before the heavenly courts.” 마지막 시간이 임한 사형수에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형제여, 너는 악한 시대에 범죄로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올가미에 걸려들었구나. 너와 대화를 나눈 결과,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대가(代價)로 지불해야 할 만큼의 악한 일을 계획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너는 이 악을 행했고, 너의 동료들은 너를 죄인으로 심판하였으며,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너나 나나, 국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자아-방어의 이러한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부과된 벌을, 인간적으로는 피할 길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너의 동료들은 너의 행위에 의거하여 판단을 하였지만, 네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심판관이 있는데, 그는 너의 참된 동기를 살피고 훨씬 나은 의도로써 너를 심판하실 것이다. 만약 너의 참회가 순수하고 너의 신앙이 진지한 것이라면,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너의 실수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사실은, 하늘에 있는 법정에서 네 혼이 정의를 구하고 자비를 누릴 기회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133:4.13 (1476.1) Jesus enjoyed many intimate talks with a large number of hungry souls, too many to find a place in this record. The three travelers enjoyed their sojourn in Corinth. Excepting Athens, which was more renowned as an educational center, Corinth was the most important city in Greece during these Roman times, and their two months’ stay in this thriving commercial center afforded opportunity for all three of them to gain much valuable experience. Their sojourn in this city wa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of all their stops on the way back from Rome. 예수님은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갈급한 혼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 세 여행자는 고린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육의 중심지로 더욱 알려진 아테네를 제외하면, 고린도는 이러한 로마 통치 시대 동안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번성하는 이 상업의 중심지에서 두 달을 머무는 동안 그들은 가치 있는 체험들을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서의 체류는 로마에서 돌아가는 길에 들렸던 모든 장소들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133:4.14 (1476.2) Gonod had many interests in Corinth, but finally his business was finished, and they prepared to sail for Athens. They traveled on a small boat which could be carried overland on a land track from one of Corinth’s harbors to the other, a distance of ten miles. 고노드는 고린도에서 많은 수입을 얻었으며, 마침내 그의 사업상의 일을 모두 끝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테네로 항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고린도의 어느 항구에서 다른 항구까지, 육로로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배로 여행하였습니다.

5. At Athens — Discourse on Science아테네에서At Athens(과학에 대한 논의)

133:5.1 (1476.3) They shortly arrived at the olden center of Greek science and learning, and Ganid was thrilled with the thought of being in Athens, of being in Greece, the cultural center of the onetime Alexandrian empire, which had extended its borders even to his own land of India. There was little business to transact; so Gonod spent most of his time with Jesus and Ganid, visiting the many points of interest and listening to the interesting discussions of the lad and his versatile teacher. 그들은 곧 그리스의 과학과 학문의 오래된 중심지에 도착하였고, 가니드는 그리스에, 그것도 아테네에 와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였는데, 그 곳이 자기 나라인 인도 국경까지 한 때 지배하였던 알렉산더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노드는 사업상 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흥미 있는 여러 장소들을 방문하고, 다방면의 학식을 가진 선생이 자기 아들과 주고받는 재미있는 토의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과 가니드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33:5.2 (1476.4) A great university still thrived in Athens, and the trio made frequent visits to its halls of learning. Jesus and Ganid had thoroughly discussed the teachings of Plato when they attended the lectures in the museum at Alexandria. They all enjoyed the art of Greece, examples of which were still to be found here and there about the city. 아테네에는 커다란 대학 하나가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그 세 사람은 그 대학 강의실에 자주 들렀습니다. 예수님과 가니드는 이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열렸던 강의에 참석하여, 플라톤의 가르침을 면밀히 토론했었습니다. 그들 모두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발견되는 그리스의 예술 작품들을 관람하였습니다.

133:5.3 (1476.5) Both the father and the son greatly enjoyed the discussion on science which Jesus had at their inn one evening with a Greek philosopher. After this pedant had talked for almost three hours, and when he had finished his discourse, Jesus, in terms of modern thought, said: 어느 날 저녁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숙소에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매우 즐겁게 들었습니다. 이 현학자(衒學者)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견해를 피력하였고, 그의 말이 끝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현대적인 사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3:5.4 (1476.6) Scientists may some day measure the energy, or force manifestations, of gravitation, light, and electricity, but these same scientists can never (scientifically) tell you what these universe phenomena are. Science deals with physical-energy activities; religion deals with eternal values. True philosophy grows out of the wisdom which does its best to correlate these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observations. There always exists the danger that the purely physical scientist may become afflicted with mathematical pride and statistical egotism, not to mention spiritual blindness. 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중력, 빛, 그리고 전기의 에너지와 힘을 측량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과학자들은 이러한 우주 현상이 무엇인지를 결코 과학적으로 말해 줄 수 없다. 과학은 물질적 에너지 작용들을 다루며, 종교는 영원한 가치들을 다룬다. 진정한 철학은, 이러한 양적인 관찰과 질적인 관찰을 연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부터 태동된다. 순전히 물질적인 과학자들은, 영적으로 눈 먼 것은 그만두고라도, 수학적 자부심과 통계학적 자기중심주의에 시달리게 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133:5.5 (1476.7) Logic is valid in the material world, and mathematics is reliable when limited in its application to physical things; but neither is to be regarded as wholly dependable or infallible when applied to life problems. Life embraces phenomena which are not wholly material. Arithmetic says that, if one man could shear a sheep in ten minutes, ten men could shear it in one minute. That is sound mathematics, but it is not true, for the ten men could not so do it; they would get in one another’s way so badly that the work would be greatly delayed. 논리는 물질적 세상에서 유효하고, 수학은 물질적인 것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지만, 일생의 문제들에 적용될 경우에는 그 두 가지 모두, 전적으로 믿을 만하거나 틀림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일생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만은 아닌 현상들을 포함한다. 만약 한 사람이 양 한 마리의 털을 깎는데 10분이 소요된다면, 수학은 열 사람이 1분에 그 양의 털을 깎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사실이 아닌데, 왜냐하면 열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들은 서로에게 방해가 되어 일이 매우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133:5.6 (1477.1) Mathematics asserts that, if one person stands for a certain unit of intellectual and moral value, ten persons would stand for ten times this value. But in dealing with human personality it would be nearer the truth to say that such a personality association is a sum equal to the square of the number of personalities concerned in the equation rather than the simple arithmetical sum. A social group of human beings in co-ordinated working harmony stands for a force far greater than the simple sum of its parts. 만약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단위의 지적(知的) 그리고 도덕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면, 수학은 열 사람이 10 배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고유성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러한 고유성의 연합은 단순한 산술적 합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련된 등식에서, 고유성들 숫자의 제곱한 것과 같은 합계가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합력하여 조화롭게 일하는 인간 사회 집단은 그 부분들의 단순한 합계보다는 훨씬 더 큰 세력을 나타낸다.

133:5.7 (1477.2) Quantity may be identified as a fact, thus becoming a scientific uniformity. Quality, being a matter of mind interpretation, represents an estimate of values, and must, therefore, remain an experience of the individual. When both science and religion become less dogmatic and more tolerant of criticism, philosophy will then begin to achieve unity in the intelligent comprehension of the universe. 양(量)은 하나의 사실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균일성을 갖추게 된다. 본질은 마음의 해석 문제로서, 가치들에 대한 평가를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과학과 종교 둘 모두 독단이 줄어 비평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철학은 우주에 대한 지적 이해를 통하여 합일을 이루기 시작할 것이다.

133:5.8 (1477.3) There is unity in the cosmic universe if you could only discern its workings in actuality. The real universe is friendly to every child of the eternal God. The real problem is: How can the finite mind of man achieve a logical, true, and corresponding unity of thought? This universe-knowing state of mind can be had only by conceiving that the quantitative fact and the qualitative value have a common causation in the Paradise Father. Such a conception of reality yields a broader insight into the purposeful unity of universe phenomena; it even reveals a spiritual goal of progressive personality achievement. And this is a concept of unity which can sense the unchanging background of a living universe of continually changing impersonal relations and evolving personal relationships. 너희가 우주의 작용을 실제로 인식한다면, 조화로운 우주 안에는 통일성이 존재한다. 실제 우주는 영원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호의적이다. 유한한 사람의 마음이 논리적이고 진실하며 일치하는 사고의 통일성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이다. 우주를 아는 이 마음 상태는, 양적인 사실과 질적인 가치가 천국 아버지 안에서 공통적 원인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만 소유될 수 있다. 실체에 대한 그러한 개념은, 우주 현상의 의도적 통일에 대한 확대된 통찰력을 갖게 한다. 그것은 진보적 고유성 성취의 영적 목표까지도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 변하는 미(未)고유적 관계들과 진화하는 고유적 관계들에 대한 살아있는 우주에 대한 변화하지 않는 배경을 감지할 수 있는 통일성의 개념이다.

133:5.9 (1477.4) Matter and spirit and the state intervening between them are three interrelated and interassociated levels of the true unity of the real universe. Regardless of how divergent the universe phenomena of fact and value may appear to be, they are, after all, unified in the Supreme. 물질과 영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개재된 상태는, 실제 우주의 진정한 통일이 이루는 서로 관계되고 상호 연합된 세 가지 차원들이다. 사실과 가치에 대한 우주 현상이 얼마나 분산되어 보이는가에 상관없이, 그들은 어찌되었건, 최극자 안에 통합되어 있다.

133:5.10 (1477.5) Reality of material existence attaches to unrecognized energy as well as to visible matter. When the energies of the universe are so slowed down that they acquire the requisite degree of motion, then, under favorable conditions, these same energies become mass. And forget not, the mind which can alone perceive the presence of apparent realities is itself also real. And the fundamental cause of this universe of energy-mass, mind, and spirit, is eternal — it exists and consists in the nature and reactions of the Universal Father and his absolute co-ordinates. 물질 존재의 실체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인식되지 않는 에너지에게도 부여됩니다. 우주 에너지들이 속도가 매우 느려져서 필요한 운동 정도를 획득하면, 바로 이 에너지들은, 적합한 조건 속에서 질량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명백한 실체들의 현존을 단독으로 감지할 수 있는 마음 그 자체도 또한 실제라는 점을 잊지 마라. 그리고 에너지-질량, 마음 그리고 영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원하다─그것은 우주 아버지와 그의 절대 합동자들의 본성과 반응들 안에 존재하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

133:5.11 (1477.6) They were all more than astounded at the words of Jesus, and when the Greek took leave of them, he said: “At last my eyes have beheld a Jew who thinks something besides racial superiority and talks something besides religion.” And they retired for the night.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에 경탄했습니다. 그 때 그 그리스인이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인종적 우월감이나 종교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유대인을 마침내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33:5.12 (1477.7) The sojourn in Athens was pleasant and profitable, but it was not particularly fruitful in its human contacts. Too many of the Athenians of that day were either intellectually proud of their reputation of another day or mentally stupid and ignorant, being the offspring of the inferior slaves of those earlier periods when there was glory in Greece and wisdom in the minds of its people. Even then, there were still many keen minds to be found among the citizens of Athens. 아테네에서의 체류는 즐겁고 유익했지만, 인간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그렇게 특별한 결실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과거 명성에 대하여 지적 자만심을 가졌든지. 아니면 과거의 시절에 그리스가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지혜가 있었던 때에 살았던 열등한 노예들의 후손들의 존재 즉 정신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당시에도 아테네의 시민들 중에는 명민한 마음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습니다.

6. At Ephesus — Discourse on the Soul 에베소에서(혼에 대한 강론)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133:6.1 (1477.8) On leaving Athens, the travelers went by way of Troas to Ephesus,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Asia. They made many trips out to the famous temple of Artemis of the Ephesians, about two miles from the city. Artemis was the most famous goddess of all Asia Minor and a perpetuation of the still earlier mother goddess of ancient Anatolian times. The crude idol exhibited in the enormous temple dedicated to her worship was reputed to have fallen from heaven. Not all of Ganid’s early training to respect images as symbols of divinity had been eradicated, and he thought it best to purchase a little silver shrine in honor of this fertility goddess of Asia Minor. That night they talked at great length about the worship of things made with human hands. 아테네Athens를 떠난 그 여행자들은 트로아Troas를 경유하여 아시아 지방에서 로마Roman의 수도 역할을 하는 에베소Ephesus로 갔습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3.2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에베소인들의 유명한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神殿)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아르테미스Artemis는 소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女神)이었으며, 그것은 고대 아나톨리안Anatolian에서 있었던 아주 초기 시대의 어머니 여신을 이제껏 계속 보존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신을 경배하기 위해 바쳐진 거대한 사원에는 조잡한 우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가니드는 신성(神性)의 상징으로 형상을 존경하도록 일찍부터 배웠던 것들을 모두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으며, 소아시아의 이 다산(多産)의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성물함(聖物函)을 사는 것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33:6.2 (1478.1) On the third day of their stay they walked down by the river to observe the dredging of the harbor’s mouth. At noon they talked with a young Phoenician who was homesick and much discouraged; but most of all he was envious of a certain young man who had received promotion over his head. Jesus spoke comforting words to him and quoted the olden Hebrew proverb: “A man’s gift makes room for him and brings him before great men.” 그곳에 머물던 셋째 날에, 그들은 항만 입구 준설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하여 강을 따라 걸어 내려갔습니다. 점심 때, 그들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매우 풀이 죽어 있는 한 젊은 페니키아Phoenician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승진을 임명받은 어떤 젊은이를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위안의 말을 해주면서, 유대의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의 길을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인도한다.”(잠언18:16).

133:6.3 (1478.2) Of all the large cities they visited on this tour of the Mediterranean, they here accomplished the least of value to the subsequent work of the Christian missionaries. Christianity secured its start in Ephesus largely through the efforts of Paul, who resided here more than two years, making tents for a living and conducting lectures on religion and philosophy each night in the main audience chamber of the school of Tyrannus. 그들이 지중해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큰 도시들 중에서, 이곳에서 이룬 성과는 나중에 기독교 선교사들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효과가 부족했습니다. 기독교가 에베소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적으로 바울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2년 넘게 살았고, 생계를 위해 텐트를 제조하면서 티라누스 학파의 주요 강당에서 매일 밤 종교와 철학에 관하여 강의하였습니다.

133:6.4 (1478.3) There was a progressive thinker connected with this local school of philosophy, and Jesus had several profitable sessions with him. In the course of these talks Jesus had repeatedly used the word “soul.” This learned Greek finally asked him what he meant by “soul,” and he replied: 이 지역의 철학학파와 관련된 한 진보적인 사상가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와 몇 차례의 유익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토의를 통하여 예수님은 “혼”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 학식 있는 그리스인은 마침내 예수님께 그가 사용하는 “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133:6.5 (1478.4) “The soul is the self-reflective, truth-discerning, and spirit-perceiving part of man which forever elevates the human being above the level of the animal world. Self-consciousness, in and of itself, is not the soul. Moral self-consciousness is true human self-realization and constitutes the foundation of the human soul, and the soul is that part of man which represents the potential survival value of human experience. Moral choice and spiritual attainment, the ability to know God and the urge to be like him,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oul. The soul of man cannot exist apart from moral thinking and spiritual activity. A stagnant soul is a dying soul. But the soul of man is distinct from the divine spirit which dwells within the mind. The divine spirit arrives simultaneously with the first moral activity of the human mind, and that is the occasion of the birth of the soul. “혼은, 자아를-반영하고, 진리를-식별하고, 영을-감지하고 있는 사람의 한 부분이며, 그것은 인간존재를 동물세계의 차원을 뛰어넘어 언제까지나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다. 자아-의식 자체만으로 저절로 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자아-의식이 참된 인간 자아-실현이며 인간 혼의 기초를 이루고 있고, 혼은 사람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 체험에서 잠재적인 생존의 가치를 대표한다. 도덕적 선택과 영적 달성, 하나님을 알려는 능력과 그와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이 혼의 특징들이다. 사람의 혼은 도덕적 사고와 영적 활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정체되어 있는 혼은 죽어 가는 혼이다. 하지만 사람의 혼은 마음 안에 내주하고 있는 신성한 영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신성한 영은 인간 마음의 첫 번째 도덕적 활동과 동시에 도착하며, 그 때가 바로 혼이 탄생되는 때이다.

133:6.6 (1478.5) “The saving or losing of a soul has to do with whether or not the moral consciousness attains survival status through eternal alliance with its associated immortal spirit endowment. Salvation is the spiritualization of the self-realization of the moral consciousness, which thereby becomes possessed of survival value. All forms of soul conflict consist in the lack of harmony between the moral, or spiritual, self-consciousness and the purely intellectual self-consciousness. “혼이 구원되거나 또는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그것과 연합된 불멸하는 영적 자질과의 영원한 결합을 통하여, 생존의 지위를 달성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구원은 도덕적 의식의 자아실현에서의 영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생존의 가치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혼의 갈등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자아-의식과 순수하게 지적인 자아-의식 사이의 조화 부족에서 기인된다.”

133:6.7 (1478.6) “The human soul, when matured, ennobled, and spiritualized, approaches the heavenly status in that it comes near to being an entity intervening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the material self and the divine spirit. The evolving soul of a human being is difficult of description and more difficult of demonstration because it is not discoverable by the methods of either material investigation or spiritual proving. Material science cannot demonstrate the existence of a soul, neither can pure spirit-testing. Notwithstanding the failure of both material science and spiritual standards to discover the existence of the human soul, every morally conscious mortal knows of the existence of his soul as a real and actual personal experience.” “인간의 혼은, 성숙되고 고상해지고 영성화 되었을 때,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 자체와 신성한 영 사이에 개재된intervening 하나의 실존개체의 존재로 더 가까워지면서, 하늘의 상태에 접근하게 된다. 인간 존재의 진화하는 혼은, 묘사하기가 어렵고, 그것을 실증하기란 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 조사나 혹은 영적 증명의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적 과학은 혼의 실재를 드러낼 수 없으며, 순수한 영-테스트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 과학과 영적 기준 모두 인간 혼의 실재를 발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은 자신의 혼을 하나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개인적 체험으로 알고 있다.”

7. The Sojourn at Cyprus — Discourse on Mind 키프로스에서(마음에 대한 말씀)

133:7.1 (1479.1) Shortly the travelers set sail for Cyprus, stopping at Rhodes. They enjoyed the long water voyage and arrived at their island destination much rested in body and refreshed in spirit. 그 여행자들은 로데Rhodes에 잠시 머무르다가 키프로스Cyprus를 향하여 항해하였습니다. 그들은 긴 해상 여행을 즐겼으며, 육신과 영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그들의 목적지인 그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133:7.2 (1479.2) It was their plan to enjoy a period of real rest and play on this visit to Cyprus as their tour of the Mediterranean was drawing to a close. They landed at Paphos and at once began the assembly of supplies for their sojourn of several weeks in the near-by mountains. On the third day after their arrival they started for the hills with their well-loaded pack animals. 그들의 지중해 여행이 거의 끝 무렵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키프로스Cyprus 방문에서는 단지 휴식을 취하고 즐기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보Paphos에 상륙하였으며, 근처에 있는 산에서 몇 주간을 지내기 위한 생필품들을 즉시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착한 지 3일 만에 그들은 물건을 동물들에게 싣고 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133:7.3 (1479.3) For two weeks the trio greatly enjoyed themselves, and then, without warning, young Ganid was suddenly taken grievously ill. For two weeks he suffered from a raging fever, oftentimes becoming delirious; both Jesus and Gonod were kept busy attending the sick boy. Jesus skillfully and tenderly cared for the lad, and the father was amazed by both the gentleness and adeptness manifested in all his ministry to the afflicted youth. They were far from human habitations, and the boy was too ill to be moved; so they prepared as best they could to nurse him back to health right there in the mountains. 두 주 동안 이 세 사람들은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갑작스럽게도 어린 가니드가 몹시 앓게 되었습니다. 두 주일 동안 그는 심한 열로 고생을 하였고, 가끔씩 헛소리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고노드는 아픈 소년을 간호하느라 바빴습니다. 예수는 능숙하고 부드럽게 그 소년을 돌보았는데, 그 아버지는 고통 받는 소년을 돌보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의 자상함과 능숙함으로 인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있었고, 게다가 그 소년의 병은 너무 심해서 이동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 산 속에서 소년이 회복하도록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 할 뿐이었습니다.

133:7.4 (1479.4) During Ganid’s convalescence of three weeks Jesus told him many interesting things about nature and her various moods. And what fun they had as they wandered over the mountains, the boy asking questions, Jesus answering them, and the father marveling at the whole performance. 가니드가 회복하고 있던 3주 동안, 예수님은 그에게 자연과 자연의 여러 가지의 변화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배회하면서 그들이 즐겼던 것은, 그 소년이 질문을 하고 예수께서 대답을 하는 것이었고, 그 소년의 아버지는 이 모든 일에 감탄하였습니다.

133:7.5 (1479.5) The last week of their sojourn in the mountains Jesus and Ganid had a long talk on the functions of the human mind. After several hours of discussion the lad asked this question: “But, Teacher, what do you mean when you say that man experiences a higher form of self-consciousness than do the higher animals?” And as restated in modern phraseology, Jesus answered: 그 산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과 가니드는 인간 마음의 작용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의 토의 끝에 그 소년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사람이 고등 동물들보다 더 높은 자아-의식의 형태를 체험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을 현대 용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3:7.6 (1479.6) My son, I have already told you much about the mind of man and the divine spirit that lives therein, but now let me emphasize that self-consciousness is a reality. When any animal becomes self-conscious, it becomes a primitive man. Such an attainment results from a co-ordination of function between impersonal energy and spirit-conceiving mind, and it is this phenomenon which warrants the bestowal of an absolute focal point for the human personality, the spirit of the Father in heaven. 아이야, 사람의 마음과 그 안에 거하는 신성한 영에 대하여 나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네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자아-의식이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떤 동물이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하나의 원시인이 된다. 그런 성취는 미(未)고유적 에너지와 영을 이해하는 마음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 작용의 결과이며, 이러한 현상은, 인간 고유성을 위한 하나의 절대적 초점(焦點)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수여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133:7.7 (1479.7) Ideas are not simply a record of sensations; ideas are sensations plus the reflective interpretations of the personal self; and the self is more than the sum of one’s sensations. There begins to be something of an approach to unity in an evolving selfhood, and that unity is derived from the indwelling presence of a part of absolute unity which spiritually activates such a self-conscious animal-origin mind. 관념들Ideas는 감각한 것들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며, 관념들이란 감각한 것들 위에 고유 자아의 반영적 해석을 덧붙인 것이며, 그 자아는 그가 감각한 것들의 전체 합계보다 큰 것이다. 진화하는 자아 신분 안에서 합일로 접근하는 그 무엇이 시작되며, 그 합일은 절대 합일의 일부분인 내주하는 현존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것이 자아-의식적인 동물-기원 마음을 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133:7.8 (1479.8) No mere animal could possess a time self-consciousness. Animals possess a physiological co-ordination of associated sensation-recognition and memory thereof, but none experience a meaningful recognition of sensation or exhibit a purposeful association of these combined physical experiences such as is manifested in the conclusions of intelligent and reflective human interpretations. And this fact of self-conscious existence, associated with the reality of his subsequent spiritual experience, constitutes man a potential son of the universe and foreshadows his eventual attainment of the Supreme Unity of the universe. 동물에 불과한 존재들은 어떤 것도, 시간에 대한 자아-의식을 소유할 수 없다. 동물들은 연합된 감각-인식과 그것을 기억하는 생리학적 합동 체계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감각에 대한 의미 있는 인식을 체험한다거나 혹은 지능적이고 반영적인 인간의 해석들이 내리는 결론 속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통합된 육체적인 체험들의 의도적인 연합을 나타내는 경우는 전혀 없다. 자아-의식이 실재한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 뒤에 일어나는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한 실체성과 연관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잠재적인 아들이 되게 하고 결국에는 그가 우주의 최극 합일을 달성하게 됨을 예시한다.

133:7.9 (1480.1) Neither is the human self merely the sum of the successive states of consciousness. Without the effective functioning of a consciousness sorter and associator there would not exist sufficient unity to warrant the designation of a selfhood. Such an ununified mind could hardly attain conscious levels of human status. If the associations of consciousness were just an accident, the minds of all men would then exhibit the uncontrolled and random associations of certain phases of mental madness.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아는 단지 의식의 연속 상태들에 대한 합계도 아니다. 의식 분류자와 연합자의 효율적 작용 없이는, 자아 신분이라는 명칭을 정당화시킬만한 충분한 합일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통합되지 않은 마음은, 인간 지위의 의식적 수준에 거의 이를 수 없다. 만일 의식의 결합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였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들은 통제되지 못하고 되는대로 움직이는 정신적 광란의 현상들의 상태들과 연관되었음을 나타낼 것이다.

133:7.10 (1480.2) A human mind, built up solely out of the consciousness of physical sensations, could never attain spiritual levels; this kind of material mind would be utterly lacking in a sense of moral values and would be without a guiding sense of spiritual dominance which is so essential to achieving harmonious personality unity in time, and which is inseparable from personality survival in eternity. 오로지 물리적 감각의 의식으로 만들어진, 인간 마음은 영적 수준에 결코 이를 수 없다. 이런 물리적 마음의 종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감각이 철저히 모자라고, 영적 영역으로 안내하는 감각이 없게 된다. 영적 영역으로 안내하는 감각은 시간 안에서 조화로운 고유성 합일을 성취하는데 너무나 필수적이고, 영원 안에서 생존하는 고유성과 떼어낼 수 없다.

133:7.11 (1480.3) The human mind early begins to manifest qualities which are supermaterial; the truly reflective human intellect is not altogether bound by the limits of time. That individuals so differ in their life performances indicates, not only the varying endowments of heredity and the different influences of the environment, but also the degree of unification with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Father which has been achieved by the self, the measure of the identification of the one with the other. 인간 마음은 초물질적인 본질들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한다. 참으로 반영적인 인간 지성은 모두 시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개인들이 일생에서 이룩한 성취들이 그토록 다른 것은, 유전형질의 다양한 자질들과 다른 환경적 영향뿐 아니라, 자아에 의해 성취되고 있는 아버지의 내주하는 영과 연합된 정도 즉, 하나와 다른 하나가 어느 정도 동일시되었는지를 가리키는 척도이다.

133:7.12 (1480.4) The human mind does not well stand the conflict of double allegiance. It is a severe strain on the soul to undergo the experience of an effort to serve both good and evil. The supremely happy and efficiently unified mind is the one wholly dedicated to the doing of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Unresolved conflicts destroy unity and may terminate in mind disruption. But the survival character of a soul is not fostered by attempting to secure peace of mind at any price, by the surrender of noble aspirations, and by the compromise of spiritual ideals; rather is such peace attained by the stalwart assertion of the triumph of that which is true, and this victory is achieved in the overcoming of evil with the potent force of good. 인간의 마음은 이중으로 충성하는 모순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선과 악 모두를 섬기려고 노력하는 체험은 혼에게 심각한 부담이 된다. 최상으로 행복하고 효과적으로 통합된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전심으로 헌신된 마음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들은 합일을 파괴하며 마음의 분열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성은, 어떤 값을 치르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시도나, 고귀한 포부를 포기하거나, 또는 영적인 이상들을 타협한다고 해서, 육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는 참된 것이 승리하기를 꿋꿋하게 주장함으로써 성취되며, 이 승리는 강력한 선(善)의 힘으로 악(惡)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33:7.13 (1480.5) The next day they departed for Salamis, where they embarked for Antioch on the Syrian coast. 다음 날 그들은 살라미스Salamis를 향해 떠났고, 그곳에서 그들은 시리아 해변에 있는 안디옥Antioch으로 출항하였습니다.

8. At Antioch 안디옥에서

133:8.1 (1480.6) Antioch was the capital of the Roman province of Syria, and here the imperial governor had his residence. Antioch had half a million inhabitants; it was the third city of the empire in size and the first in wickedness and flagrant immorality. Gonod had considerable business to transact; so Jesus and Ganid were much by themselves. They visited everything about this polyglot city except the grove of Daphne. Gonod and Ganid visited this notorious shrine of shame, but Jesus declined to accompany them. Such scenes were not so shocking to Indians, but they were repellent to an idealistic Hebrew. 전9:10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 안디옥Antioch은 시리아Syria 지방에서 로마의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였고, 그 제국의 총독이 거주하는 공관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서,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사악함과 비도덕적 악명으로는 첫 번째였습니다. 고노드는 처리할 업무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가니드는 둘 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들은 다프니Daphne의 작은 숲을 제외하고, 여러 나라의 말들을 사용하는 이 도시의 모든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고노드와 가니드는 악명 높은 치욕의 신전을 방문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한 장면이 두 인도인들에게는 충격이 되지 않았지만, 이상주의적 히브리인에게는 불쾌했습니다.

133:8.2 (1480.7) Jesus became sober and reflective as he drew nearer Palestine and the end of their journey. He visited with few people in Antioch; he seldom went about in the city. After much questioning as to why his teacher manifested so little interest in Antioch, Ganid finally induced Jesus to say: “This city is not far from Palestine; maybe I shall come back here sometime.” 예수님은 여행이 끝나는 팔레스타인에 가까이 이를수록, 더 엄숙해지고 생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으며, 그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도 거의 드물었습니다. 가니드는 예수님이 안디옥에 거의 관심이 없는 이유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한 끝에, 결국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렇게 멀지 않으므로,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133:8.3 (1481.1) Ganid had a very interesting experience in Antioch. This young man had proved himself an apt pupil and already had begun to make practical use of some of Jesus’ teachings. There was a certain Indian connected with his father’s business in Antioch who had become so unpleasant and disgruntled that his dismissal had been considered. When Ganid heard this, he betook himself to his father’s place of business and held a long conference with his fellow countryman. This man felt he had been put at the wrong job. Ganid told him about the Father in heaven and in many ways expanded his views of religion. But of all that Ganid said, the quotation of a Hebrew proverb did the most good, and that word of wisdom was: “Whatso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that with all your might.” 가니드는 안디옥에서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이해가 빠른 학생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벌써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디옥에서 그의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를 하고 있었던 한 인도인이 있었는데, 그가 너무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불평까지 심해서, 그를 해고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가니드가 이 말을 듣자, 그는 아버지의 사업장으로 가서 자신의 동족인 그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니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으며, 여러 방면으로 그의 종교적 관점을 넓혀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니드가 말한 모든 것들 중에서 유대 속담의 인용이 그에게 가장 효력이 있었는데, 그 지혜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전9:10).

133:8.4 (1481.2) After preparing their luggage for the camel caravan, they passed on down to Sidon and thence over to Damascus, and after three days they made ready for the long trek across the desert sands. 그들은 낙타로 여행하기 위해 짐을 준비한 후, 시돈Sidon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다시 다마스쿠스Damascus를 지나, 3일 후에는 사막의 모래벌판을 횡단하는 먼 길을 위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9.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에서

잠4:7-8 7 지혜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지혜를 얻어라 그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깨달음을 얻어라. 8 지혜를 찬양하라. 지혜가 너를 높일 것이다. 지혜를 고이 간직하라.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133:9.1 (1481.3) The caravan trip across the desert was not a new experience for these much-traveled men. After Ganid had watched his teacher help with the loading of their twenty camels and observed him volunteer to drive their own animal, he exclaimed, “Teacher, is there anything that you cannot do?” Jesus only smiled, saying, “The teacher surely is not without honor in the eyes of a diligent pupil.” And so they set forth for the ancient city of Ur. 사막(沙漠)을 횡단하는 대상(카라반caravan) 여행은, 여행에 이력이 난 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 20 마리의 낙타에 짐 싣는 것을 돕고, 짐승들을 손수 이끌고 가려고 자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니드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단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눈에는 명예롭지 않은 선생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하구나.” 그렇게 그들은 고대 도시 우르Ur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133:9.2 (1481.4) Jesus was much interested in the early history of Ur, the birthplace of Abraham, and he was equally fascinated with the ruins and traditions of Susa, so much so that Gonod and Ganid extended their stay in these parts three weeks in order to afford Jesus more time to conduct his investigations and also to provide the better opportunity to persuade him to go back to India with them. 예수님은 아브라함Abraham의 출생지인 우르의 초기 역사(歷史)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수사Susa의 옛 터들과 전통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매료되었으므로,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님께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하실 수 있도록 하고, 예수께서 자신들과 함께 인도로 같이 가시도록 설득하는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 곳에서 3주간을 연장하여 머물렀습니다.

133:9.3 (1481.5) It was at Ur that Ganid had a long talk with Jesus regarding the difference between knowledge, wisdom, and truth. And he was greatly charmed with the saying of the Hebrew wise man: “Wisdom is the principal thing; therefore get wisdom. With all your quest for knowledge, get understanding. Exalt wisdom and she will promote you. She will bring you to honor if you will but embrace her.” 가니드는 우르에서 지식, 지혜, 진리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하여 예수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현인(賢人)의 다음과 같은 말에 매우 매료되었습니다. ‘지혜가 기본적인 것이니, 지혜를 얻어라. 네가 탐구한 모든 지식으로 명철을 얻어라. 지혜를 높이면, 그가 너를 높이 들 것이라. 만일 지혜를 품기만 하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133:9.4 (1481.6) At last the day came for the separation. They were all brave, especially the lad, but it was a trying ordeal. They were tearful of eye but courageous of heart. In bidding his teacher farewell, Ganid said: “Farewell, Teacher, but not forever. When I come again to Damascus, I will look for you. I love you, for I think the Father in heaven must be something like you; at least I know you are much like what you have told me about him. I will remember your teaching, but most of all, I will never forget you.” Said the father, “Farewell to a great teacher, one who has made us better and helped us to know God.” And Jesus replied, “Peace be upon you, and may the blessing of the Father in heaven ever abide with you.” And Jesus stood on the shore and watched as the small boat carried them out to their anchored ship. Thus the Master left his friends from India at Charax, never to see them again in this world; nor were they, in this world, ever to know that the man who later appeared as Jesus of Nazareth was this same friend they had just taken leave of — Joshua their teacher. 마침내 이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감했습니다. 특히 그 젊은이가 그랬지만, 이별은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시울을 적시었으나 용기를 냈습니다. 가니드는 자기 선생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 그러나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다마스쿠스Damascus에 다시 오면,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며, 적어도 아버지에 관하여 당신이 내게 일러 준 것과 당신이 무척 비슷한 줄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들을 기억하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저는 선생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말하기를,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신 위대한 선생님에게 작별(作別)을 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평화가 당신들 위에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는 해변 가에 서서, 작은 배가 그들을 태우고, 정박하여 기다리고 있는 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主)님은 인도India에서 온 그의 친구들을 카락스Charax에서 작별하였는데, 이 세상에서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나사렛의 예수로 나타난 그 사람이, 그들이 방금 작별을 한 동일한 이 친구 – 여호수아 그들의 선생이었음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133:9.5 (1481.7) In India, Ganid grew up to become an influential man, a worthy successor of his eminent father, and he spread abroad many of the noble truths which he had learned from Jesus, his beloved teacher. Later on in life, when Ganid heard of the strange teacher in Palestine who terminated his career on a cross, though he recognized the similarity between the gospel of this Son of Man and the teachings of his Jewish tutor, it never occurred to him that these two were actually the same person. 인도에서, 가니드는 성장하여 유능한 아버지의 훌륭한 계승자로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고귀한 많은 진리들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만년(晩年)에 가니드는 십자가에서 생애를 마친 이상한 선생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의 아들의 복음과 자신의 유대인 선생님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을 발견하였지만, 이 두 사람이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였습니다.

133:9.6 (1482.1) Thus ended that chapter in the life of the Son of Man which might be termed: The mission of Joshua the teacher. 이렇게 사람의 아들의 일생에서 여호수아 선생의 사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章)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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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4 The Transition Years 과도기(過渡期) 시절

Paper 134

The Transition Years 과도기(過渡期) 시절

1. The Thirtieth Year (A.D. 24) 30세 되던 해 (서기 24년)
Return to Nazareth 나사렛으로 돌아오심
Marriage of Simon; marriage of Jude 시몬의 결혼; 유다의 결혼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隊商카라반) 여행
3. The Urmia Lectures 우르미아 강연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주권 –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및 주권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Solitary wanderings 단독 여행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 체류함
End of the Lucifer Rebellion 루시퍼 반란의 종말
The sovereignty of Nebadon 네바돈의 주권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Visit with John at Jerusalem 요한과 예루살렘에 들르다
Working in Zebedee’s boatshop  세베대의 선박(船舶)제작소에서 작업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34:0.1 (1483.1) DURING the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carefully studied the people he met and the countries through which he passed, and at about this time he reached his final decision as to the remainder of his life on earth. He had fully considered and now finally approved the plan which provided that he be born of Jewish parents in Palestine, and he therefore deliberately returned to Galilee to await the beginning of his lifework as a public teacher of truth; he began to lay plans for a public career in the land of his father Joseph’s people, and he did this of his own free will. 지중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만났던 사람들과 거쳐 갔던 나라들에 관하여 주의 깊게 연구하였으며, 이 무렵, 땅에서 보내야하는 여생(餘生)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계획을 충분하게 고려하였고 이제 그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대중(大衆)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필생의 사명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요셉의 민족의 땅에서 공생애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것을 행하셨습니다.

134:0.2 (1483.2) Jesus had found out through personal and human experience that Palestine was the best place in all the Roman world wherein to set forth the closing chapters, and to enact the final scenes, of his life on earth. For the first time he became fully satisfied with the program of openly manifesting his true nature and of revealing his divine identity among the Jews and gentiles of his native Palestine. He definitely decided to finish his life on earth and to complete his career of mortal existence in the same land in which he entered the human experience as a helpless babe. His Urantia career began among the Jews in Palestine, and he chose to terminate his life in Palestine and among the Jews. 예수님은 개인적인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이 모든 로마 제국에서,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章)을 마련하고, 최종 장면을 연출하기에 최적의 장소임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자신이 태어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의 참된 성품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계획으로 충분히 만족(滿足)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기력한 아기로서 인간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에서 지상 생애를 반드시 끝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경력을 완성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으로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으로 자신의 일생을 마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1. The Thirtieth Year (A.D. 24)서른 살 되던 해(서기 24년)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134:1.1 (1483.3) After taking leave of Gonod and Ganid at Charax (in December of A.D. 23), Jesus returned by way of Ur to Babylon, where he joined a desert caravan that was on its way to Damascus. From Damascus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nly a few hours at Capernaum, where he paused to call on Zebedee’s family. There he met his brother James, who had sometime previously come over to work in his place in Zebedee’s boatshop. After talking with James and Jude (who also chanced to be in Capernaum) and after turning over to his brother James the little house which John Zebedee had managed to buy, Jesus went on to Nazareth. AD 23년 12월, 카락스Charax에서 고노드와 가니드를 떠나보낸 후에, 예수님은 우르Ur를 경유하여 바빌론Babylon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사막의 대상caravan과 합세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부터 나사렛Nazareth으로 돌아가는 도중, 가버나움Capernaum에 단 몇 시간 동안만 들렸을 때, 거기에서 세베대Zebedee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동생 야고보James를 만났으며, 야고보는 세베대의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님 대신 일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우연히 가버나움에 들렸었던 유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후, 요한 세베대가 매입하여 관리하던 작은 집을 동생 야고보에게 넘겨준 다음, 계속 나사렛으로 갔습니다.

134:1.2 (1483.4) At the end of his Mediterranean journey Jesus had received sufficient money to meet his living expenses almost up to the time of the beginning of his public ministry. But aside from Zebedee of Capernaum and the people whom he met on this extraordinary trip, the world never knew that he made this journey. His family always believed that he spent this time in study at Alexandria. Jesus never confirmed these beliefs, neither did he make open denial of such misunderstandings. 지중해 여행을 마쳤을 때,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세베대와 이 특별한 여행에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이 기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냈었다고 언제나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옳다고 확인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러한 오해들을 드러내놓고 부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134:1.3 (1483.5) During his stay of a few weeks at Nazareth, Jesus visited with his family and friends, spent some time at the repair shop with his brother Joseph, but devoted most of his attention to Mary and Ruth. Ruth was then nearly fifteen years old, and this was Jesus’ first opportunity to have long talks with her since she had become a young woman. 나사렛에 머물던 몇 주간 동안, 예수님은 가족과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동생 요셉과 수리소에서 함께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관심은 마리아Mary와 룻Ruth에게 두었습니다. 룻은 그 때 거의 15살이었는데, 누이가 처녀가 된 이래로, 예수님이 그녀와 오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34:1.4 (1484.1) Both Simon and Jude had for some time wanted to get married, but they had disliked to do this without Jesus’ consent; accordingly they had postponed these events, hoping for their eldest brother’s return. Though they all regarded James as the head of the family in most matters, when it came to getting married, they wanted the blessing of Jesus. So Simon and Jude were married at a double wedding in early March of this year, A.D. 24. All the older children were now married; only Ruth, the youngest, remained at home with Mary. 시몬Simon과 유다Jude는 한 동안 결혼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동의 없이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맏형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으로 결혼을 미루었습니다. 비록 그들 모두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를 가장(家長)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이 임박해지자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는 이 해 AD 24년 3월 초순에 합동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이든 아이들은 이제 모두 결혼하였고, 가장 나이가 어린 룻만이 마리아와 함께 집에 남았습니다.

134:1.5 (1484.2) Jesus visited with the individual members of his family quite normally and naturally, but when they were all together, he had so little to say that they remarked about it among themselves. Mary especially was disconcerted by this unusually peculiar behavior of her first-born son. 예수님은 가족들을 개인별로 만날 때는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있었을 때에는 거의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그것에 대해 한마디씩 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맏아들의 이상한 태도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134:1.6 (1484.3) About the time Jesus was preparing to leave Nazareth, the conductor of a large caravan which was passing through the city was taken violently ill, and Jesus, being a linguist, volunteered to take his place. Since this trip would necessitate his absence for a year, and inasmuch as all his brothers were married and his mother was living at home with Ruth, Jesus called a family conference at which he proposed that his mother and Ruth go to Capernaum to live in the home which he had so recently given to James. Accordingly, a few days after Jesus left with the caravan, Mary and Ruth moved to Capernaum, where they lived for the rest of Mary’s life in the home that Jesus had provided. Joseph and his family moved into the old Nazareth home.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이 도시를 지나가던 어느 큰 대상(카라반)의 안내자가 심한 병에 걸렸는데, 외국어에 능통하였던 예수께서 그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는 이 여행 때문에 일 년 동안 집을 비워야 했고, 동생들이 모두 결혼해서 집에는 어머니와 룻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최근에 야고보에게 넘겨주었던 가버나움 집으로 어머니와 룻이 이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대상들과 떠난 며칠 뒤에, 마리아와 룻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마리아의 여생(餘生) 동안 예수께서 마련하신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나사렛의 고향집으로 들어왔습니다.

134:1.7 (1484.4) This was one of the more unusual years in the inner experience of the Son of Man; great progress was made in effecting working harmony between his human mind and the indwelling Adjuster. The Adjuster had been actively engaged in reorganizing the thinking and in rehearsing the mind for the great events which were in the not then distant future. The personality of Jesus was preparing for his great change in attitude toward the world. These were the in-between times, the transition stage of that being who began life as God appearing as man, and who was now making ready to complete his earth career as man appearing as God. AD24년, 이 해는 사람의 아들의 내적 체험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몇 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인간 마음과 내주하는 조절자 사이에서 조화(調和)를 이루는 일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장래에 일어날 위대한 사건들을 위하여, 조절자는 예수님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훈련시키는 일(rehearsing)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유성은 세상을 향한 태도에 있어서 큰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들은 양단의 중간 시기, 인간으로 나타난 하나님으로서의 일생(一生)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나타난 사람으로서의 땅에서의 생애를 마치려고 이제 준비하는 과도기였습니다.

2.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카스피까지 간 대상(카라반) 여행

  •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134:2.1 (1484.5) It was the first of April, A.D. 24, when Jesus left Nazareth on the caravan trip to the Caspian Sea region. The caravan which Jesus joined as its conductor was going from Jerusalem by way of Damascus and Lake Urmia through Assyria, Media, and Parthia to the southeastern Caspian Sea region. It was a full year before he returned from this journey. 예수께서 나사렛을 출발하여 대상caravan들과 함께 카스피Caspian 해(海)로 여행을 떠난 것은 기원 후 24년 4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안내자로서 합세하였던 그 대상(隊商)은 예루살렘Jerusalem을 출발하여 다마스쿠스Damascus와 우르미아Urmia 호수(湖水)를 경유하고 앗시리아Assyria, 메디아Media, 파르티아Parthia를 거쳐 남동부 카스피 지역으로 갔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134:2.2 (1484.6) For Jesus this caravan trip was another adventure of exploration and personal ministry. He had an interesting experience with his caravan family — passengers, guards, and camel drivers. Scores of men, women, and children residing along the route followed by the caravan lived richer lives as a result of their contact with Jesus, to them, the extraordinary conductor of a commonplace caravan. Not all who enjoyed these occasions of his personal ministry profited thereby, but the vast majority of those who met and talked with him were made better for the remainder of their natural lives.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대상 여행은 탐험하면서 개인적으로 사역하는 또 다른 모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대상 일행들─승객들, 안내원들, 낙타 부리는 자들─과 함께 흥미 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대상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살고 있었던 많은 남녀 어른들과 아이들은,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대상을 이끄는 비범(非凡)한 안내자로 보였던 예수님과 접촉한 결과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사역하였던 이 기회들을 누렸던 사람들 전부가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더 나은 여생(餘生)을 누렸습니다.

134:2.3 (1484.7) Of all his world travels this Caspian Sea trip carried Jesus nearest to the Orient and enabled him to gain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Far-Eastern peoples. He made intimate and personal contact with every one of the surviving races of Urantia excepting the red. He equally enjoyed his personal ministry to each of these varied races and blended peoples, and all of them were receptive to the living truth which he brought them. The Europeans from the Far West and the Asiatics from the Far East alike gave attention to his words of hope and eternal life and were equally influenced by the life of loving service and spiritual ministry which he so graciously lived among them. 그의 모든 여행 중에서 이 카스피 해의 여행은 예수님께서 동방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래서 그는 극동(極東)지방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홍인종을 제외하고 지구에 살아남아 있는 각 종족들과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접촉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여러 인종들과 혼합 사람들 각자에게 동등하게 개인적으로 베푼 사역활동을 즐겼으며, 그들 모두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살아있는 진리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극서(極西)지방에서 온 유럽인들Europeans이나 극동지방에서 온 아시아인들Asiatics은,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그의 말에 똑같이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들 가운데 예수께서 그토록 인자하게 사셨던 사랑의 봉사와 영적 사역에 의하여 똑같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134:2.4 (1485.1) The caravan trip was successful in every way. This was a most interesting episode in the human life of Jesus, for he functioned during this year in an executive capacity, being responsible for the material intrusted to his charge and for the safe conduct of the travelers making up the caravan party. And he most faithfully, efficiently, and wisely discharged his multiple duties. 그 대상caravan 여행은 모든 점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 일생에서 매우 흥미 있는 에피소드(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해에 집행(執行)하는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물질과 카라반(대상) 일행을 이루고 있던 여행자들의 안전한 행위를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신실하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현명하게 여러 가지 임무들을 처리하였습니다.

134:2.5 (1485.2) On the return from the Caspian region, Jesus gave up the direction of the caravan at Lake Urmia, where he tarried for slightly over two weeks. He returned as a passenger with a later caravan to Damascus, where the owners of the camels besought him to remain in their service. Declining this offer, he journeyed on with the caravan train to Capernaum, arriving the first of April, A.D. 25. No longer did he regard Nazareth as his home. Capernaum had become the home of Jesus, James, Mary, and Ruth. But Jesus never again lived with his family; when in Capernaum he made his home with the Zebedees. 카스피 지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은 우르미아Urmia 호수에서 대상 안내자의 자리를 사직하고 2주가 약간 넘게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대상 대열에 승객으로 합세하여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그 낙타들의 주인은 그에게 남아서 같이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가는 대상들과 함께 계속 여행하여 AD 25년 4월 1일에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사렛Nazareth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이 예수와 야고보James와 마리아Mary와 룻Ruth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다시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으며, 가버나움에 있을 때에는 세베대Zebedees의 집에 자신의 거처(居處)를 정하였습니다.

3. The Urmia Lectures우르미아에서의 강연

134:3.1 (1485.3) On the way to the Caspian Sea, Jesus had stopped several days for rest and recuperation at the old Persian city of Urmia on the western shores of Lake Urmia. On the largest of a group of islands situated a short distance offshore near Urmia was located a large building — a lecture amphitheater — dedicated to the “spirit of religion.” This structure was really a temple of the philosophy of religions. 카스피 해(海)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휴식과 원기회복을 위하여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페르시아 도시인 우르미아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우르미아 근처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에는 큰 건물 – 원형극장식의 강연 장소 – 이 “종교의 정신spirit”에 봉헌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건물은 종교 철학을 다루는 사원(寺院)이었습니다.

134:3.2 (1485.4) This temple of religion had been built by a wealthy merchant citizen of Urmia and his three sons. This man was Cymboyton, and he numbered among his ancestors many diverse peoples. 이 종교 사원은 우르미아의 시민인 어느 부유한 상인(商人)과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심보이톤Cymboyton이었으며, 그의 선조들 중에는 다른 여러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134:3.3 (1485.5) The lectures and discussions in this school of religion began at ten o’clock every morning in the week. The afternoon sessions started at three o’clock, and the evening debates opened at eight o’clock. Cymboyton or one of his three sons always presided at these sessions of teaching, discussion, and debate. The founder of this unique school of religions lived and died without ever revealing his personal religious beliefs. 이 종교학교의 강의와 토론은 주 중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오후 수업은 3시에 시작하였으며, 저녁 토론회는 8시에 열렸습니다. 심보이톤Cymboyton이나 그의 세 아들들 중의 하나가 이 강의•논의•토론 시간에 언제나 사회(司會)를 보았습니다. 독특한 이 종교 학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밝히지 않은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34:3.4 (1485.6) On several occasions Jesus participated in these discussions, and before he left Urmia, Cymboyton arranged with Jesus to sojourn with them for two weeks on his return trip and give twenty-four lectures on “The Brotherhood of Men,” and to conduct twelve evening sessions of questions, discussions, and debates on his lectures in particular and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general.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이 논의에 참여했고, 우르미아를 떠나기 전에, 심보이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는 길에 그들과 2주간 동안 머물러 있도록 조정하여, “사람들의 형제신분The Brotherhood of Men”이라는 주제로 24번 강의하고, 특히 그의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토의하고 토론하는 저녁 시간을 12회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134:3.5 (1485.7) In accordance with this arrangement, Jesus stopped off on the return trip and delivered these lectures. This was the most systematic and formal of all the Master’s teaching on Urantia. Never before or after did he say so much on one subject as was contained in these lectures and discussions on the brotherhood of men. In reality these lectures were on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이러한 일정에 따라 예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우르미아에 들려 계획된 강의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계셨던 주님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형식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형제신분에 대하여, 이 강의들과 토의들에서처럼, 그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강의들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사람의 나라Kingdoms of Men”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34:3.6 (1486.1) More than thirty religions and religious cults were represented on the faculty of this temple of religious philosophy. These teachers were chosen, supported, and fully accredited by their respective religious groups. At this time there were about seventy-five teachers on the faculty, and they lived in cottages each accommodating about a dozen persons. Every new moon these groups were changed by the casting of lots. Intolerance, a contentious spirit, or any other disposition to interfere with the smooth running of the community would bring about the prompt and summary dismissal of the offending teacher. He would be unceremoniously dismissed, and his alternate in waiting would be immediately installed in his place. 30개가 넘는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들이, 종교 철학 전당의 교수진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수진들이 대표하는 각 종교 집단이 이 선생들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충분히 인가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약 75명의 선생들이 교수진으로 활동하였고, 그들은 각 집마다 약 12명이 함께 사는 사택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초승달이 뜰 때마다 이 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제비를 뽑아서 교체되었습니다. 편협함, 다투기를 좋아하는 정신, 또는 공동체를 순조롭게 운영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다른 경향을 나타나는 경우에는, 위반한 선생으로서 그 즉시 즉각적으로 해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예식을 거치지 않고 해직되었고, 교대 대기자가 곧 그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134:3.7 (1486.2) These teachers of the various religions made a great effort to show how similar their religions were in regard to the fundamental things of this life and the next. There was but one doctrine which had to be accepted in order to gain a seat on this faculty — every teacher must represent a religion which recognized God — some sort of supreme Deity. There were five independent teachers on the faculty who did not represent any organized religion, and it was as such an independent teacher that Jesus appeared before them. 다양한 종교들을 대표하는 이 선생들은 이생과 다음 생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종교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보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교수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원칙만이 적용되었습니다. 각 선생은 하나님 – 어떤 종류의 최고의 신(神)supreme Deity – 을 인정하는 종교를 대표해야만 했습니다. 교수진 가운데에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 독립된 5명의 선생들이 있었는데, 예수는 그러한 독립된 선생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34:3.8 (1486.3) [When we, the midwayers, first prepared the summary of Jesus’ teachings at Urmia, there arose a disagreement between the seraphim of the churches and the seraphim of progress as to the wisdom of including these teachings in the Urantia Revelation. Conditions of the twentieth century, prevailing in both religion and human governments, are so different from those prevailing in Jesus’ day that it was indeed difficult to adapt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to the problems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 kingdoms of men as these world functions are existent in the twentieth century. We were never able to formulate a statement of the Master’s teachings which was acceptable to both groups of these seraphim of planetary government. Finall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appointed a commission of three of our number to prepare our view of the Master’s Urmia teachings as adapted to twentieth-century religious and political conditions on Urantia. Accordingly, we three secondary midwayers completed such an adaptation of Jesus’ teachings, restating his pronouncements as we would apply them to present-day world conditions, and we now present these statements as they stand after having been edited by the Melchizedek chairman of the revelatory commission.] [우리 중도자들이 우르미아에서 예수님 교훈의 요약을 처음 준비했을 때, 교회의 세라핌천사들과 진보의 세라핌천사들 사이에, 유란시아 계시에 이런 가르침들을 포함하는 지혜에 관하여 불일치가 일어났습니다. 중교와 인간 정부(政府) 둘 다 만연한 20세기의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 만연한 그런 상황과 아주 달라서, 이러한 세계 기능들이 20세기에 현존하듯이, 우르미아에서 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들의 나라 문제들에 적응시키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행성 정부(政府)에 속한 이런 세라핌천사의 두 집단이 받아들일 주님의 교훈에 대한 진술을 결코 공식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우리 회원 중 3명의 위원회를 지명하여, 유란시아의 20세기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상황에 적합하게, 주님의 우르미아 교훈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준비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 2차 중도자 셋은 예수 교훈을 오늘날 세계 상황에 적용하듯이 그의 선언을 새로 진술하여, 그렇게 예수 교훈의 번안(飜案)을 완료했으며,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편집한 후 그대로, 우리는 이제 이 진술문을 제시합니다.]

4.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170111 수요 예수73 (30세-AD24) 주권─신성한 것과 인간의 것 Sovereignty — Divine and Human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134:4.1 (1486.4) The brotherhood of men is founded on the fatherhood of God. The family of God is derived from the love of God — God is love. God the Father divinely loves his children, all of them. 사람의 형제신분은 하나님의 아버지신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기인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자녀들을 신적으로 사랑하십니다.

134:4.2 (1486.5) The kingdom of heaven, the divine government, is founded on the fact of divine sovereignty — God is spirit. Since God is spirit, this kingdom is spiritual. The kingdom of heaven is neither materi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is a spiritu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하늘나라, 신적인 정부(政府)는 신적인 주권 –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 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 나라는 영적(靈的)입니다. 하늘나라는 물질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지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입니다.

134:4.3 (1486.6) If different religions recognize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then will all such religions remain at peace. Only when one religion assumes that it is in some way superior to all others, and that it possesses exclusive authority over other religions, will such a religion presume to be intolerant of other religions or dare to persecute other religious believers. 만약 다른 종교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한다면, 그런 모든 종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의 종교가 어떤 면에서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월하고, 그것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인 권위를 갖는 경우에, 그런 종교는 다른 종교들을 용납하지 않거나 감히 다른 종교들의 신자들을 박해(迫害)할 것입니다.

134:4.4 (1487.1) Religious peace — brotherhood — can never exist unless all religions are willing to completely divest themselves of all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fully surrender all concept of spiritual sovereignty. God alone is spirit sovereign. 종교적 평화 – 형제신분 –은 모든 종교들이 교단의 모든 권한을 자발적으로 완전히 버리고, 영적 주권에 대한 모든 관념을 전부 포기(抛棄)하지 않는 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영적 주권자이십니다.

134:4.5 (1487.2) You cannot have equality among religions (religious liberty) without having religious wars unless all religions consent to the transfer of all religious sovereignty to some superhuman level, to God himself. 모든 종교들이 모든 종교적 주권(主權)을 초인간적 수준의 하나님 자신에게 넘겨드리기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전쟁 없이 종교들 사이에 평등(종교적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134:4.6 (1487.3) The kingdom of heaven in the hearts of men will create religious unity (not necessarily uniformity) because any and all religious groups composed of such religious believers will be free from all notions of ecclesiastical authority — religious sovereignty. 사람들의 심정 속에 있는 하늘나라는 종교적 연합(반드시 획일적일 필요는 없지만)을 만들어 낼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종교적 신자들로 구성된 모든 종교는 교단의 권한 – 종교적 주권 –에 대한 모든 개념에서 해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4:4.7 (1487.4) God is spirit, and God gives a fragment of his spirit self to dwell in the heart of man. Spiritually, all men are equal. The kingdom of heaven is free from castes, classes, social levels, and economic groups. You are all brethren.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의 영 그 자체의 한 단편(분신分身)을 사람의 심정 안에 내주하도록 보내 주십니다. 영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합니다. 하늘나라는 신분, 특권계급, 사회적 수준이나 경제적 단체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134:4.8 (1487.5) But the moment you lose sight of the spirit sovereignty of God the Father, some one religion will begin to assert its superiority over other religions; and then, instead of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there will start dissensions, recriminations, even religious wars, at least wars among religionists.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적 주권을 잃어버리는 순간, 어느 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대신, 종교인들 사이에서 불화와 비난이 시작될 것이고 심지어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134:4.9 (1487.6) Freewill beings who regard themselves as equals, unless they mutually acknowledge themselves as subject to some supersovereignty, some authority over and above themselves, sooner or later are tempted to try out their ability to gain power and authority over other persons and groups. The concept of equality never brings peace except in the mutual recognition of some overcontrolling influence of supersovereignty. 스스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은, 그들 위에 있는 높은 권한, 즉 어떤 초(超)주권의 지배를 받는다고 서로가 인정하지 않는 한, 조만간에 다른 개인들과 단체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과 권한을 갖기 위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어떤 초(超)주권의 전권으로 지배하는 영향력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평등(平等)의 개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134:4.10 (1487.7) The Urmia religionists lived together in comparative peace and tranquillity because they had fully surrendered all their notions of religious sovereignty. Spiritually, they all believed in a sovereign God; socially, full and unchallengeable authority rested in their presiding head — Cymboyton. They well knew what would happen to any teacher who assumed to lord it over his fellow teachers. There can be no lasting religious peace on Urantia until all religious groups freely surrender all their notions of divine favor, chosen people, and religious sovereignty. Only when God the Father becomes supreme will men become religious brothers and live together in religious peace on earth. 우르미아 종교인들은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신념들을 온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스럽고 고요하게 함께 살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모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도전할 수 없는 충분한 권한은 그들을 주관하는 수장(首長), 심보이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료 선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막론하고, 그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적인 은총과 선택받은 민족 그리고 종교적 주권에 대한 자신들의 모든 관념을 모든 종교적 집단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포기하기 전까지는, 영구한 종교적 평화(平和)를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최극의 뜻이 될 때에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형제들이 되고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평화 속에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5. Political Sovereignty 정치적 주권

170118 수요 예수74 (30세-AD24) 정치적 주권 단4: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134:5.1 (1487.8) [While the Master’s teaching concerning the sovereignty of God is a truth — only complicated by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the religion about him among the world’s religions — his presentations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re vastly complicated by the political evolution of nation life during the last nineteen hundred years and more. In the times of Jesus there were only two great world powers — the Roman Empire in the West and the Han Empire in the East — and these were widely separated by the Parthian kingdom and other intervening lands of the Caspian and Turkestan regions. We have, therefore, in the following presentation departed more widely from the substance of the Master’s teachings at Urmia concerning political sovereignty, at the same time attempting to depict the import of such teachings as they are applicable to the peculiarly critical stage of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n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주(主)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다만 세상 종교들 사이에서 그에 관한 종교가 나중에 출현되어 단지 복잡해졌을 뿐입니다. 반면에, 정치적 주권에 관한 주님의 발표는 지난 1,900여 년 동안에 국가 생활의 정치적 진화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복잡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단지 두 개의 세계적인 강국들 –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한(漢) 제국─이 있었을 뿐이며, 이 두 제국은 파르티아Parthian 왕국과 카스피Caspian와 투루키스탄Turkestan 지역의 다른 국가들 때문에 널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발표가 정치적 주권에 관해 우르미아Urmia에서 주(主)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동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 정치적 주권이 진화하는 특별한 결정적 단계에 주님의 가르침이 적용되도록 그 가르침의 의미를 서술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134:5.2 (1487.9) War on Urantia will never end so long as nations cling to the illusive notions of unlimited national sovereignty. There are only two levels of relative sovereignty on an inhabited world: the spiritual free will of the individual mortal and the collective sovereignty of mankind as a whole. Between the level of the individual human being and the level of the total of mankind, all groupings and associations are relative, transitory, and of value only in so far as they enhance the welfare, well-being, and progress of the individual and the planetary grand total — man and mankind. 국가가 무제한적인 국가 주권(主權)을 가지고 있다는 허상에 집착하는 한, 이 땅에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오직 두 가지 차원의 상대적 주권만이 있을 뿐인데 바로 인간 개개인의 영적 자유의지와 인류 전체의 집합적 주권입니다. 개별 인간 존재의 차원과 인류 전체의 차원 사이에서, 모든 단체와 연합들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오직 그들이 개별존재와 행성 전체 즉 사람과 인류의 복지와 안녕 그리고 진보를 향상(向上)시키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134:5.3 (1488.1) Religious teachers must always remember that the spiritual sovereignty of God overrides all intervening and intermediate spiritual loyalties. Someday civil rulers will learn that the Most Highs rule in the kingdoms of men. 종교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적 통치권이, 중재하고 중개하는 모든 영적 충성심에 우선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민 정부의 통치자들은 사람의 왕국들을 통치하는 지고자들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134:5.4 (1488.2) This rule of the Most Highs in the kingdoms of men is not for the especial benefit of any especially favored group of mortals. There is no such thing as a “chosen people.” The rule of the Most Highs, the overcontrollers of political evolution, is a rule designed to foster the greatest good to the greatest number of all men and for the greatest length of time. 사람들의 나라 안에 있는 지고자the Most Highs들의 이 통치는 특별히 혜택을 누리는 어떤 사람들 단체의 특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민족”과 같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고자들, 즉 정치적 진화를 위에서 총괄하는 분들의 통치는 최다수(最多數)에게, 최장(最長)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주도록 설계된 법칙입니다.

134:5.5 (1488.3) Sovereignty is power and it grows by organization. This growth of the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is good and proper, for it tends to encompass ever-widening segments of the total of mankind. But this same growth of political organizations creates a problem at every intervening stage between the initial and natural organization of political power — the family — and the final consummation of political growth —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by all mankind, and for all mankind. 주권(主權)은 권력이며 그것은 조직에 의하여 성장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권력 조직의 성장은 유익하고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 전체의 가장 넓은 부분들을 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치조직의 성장은, 초기의 자연스러운 정치권력 – 가족(家族) – 의 조직과 최종적인 정치적 성장의 성취 – 모든 인류의, 모든 인류에 의한, 모든 인류를 위한 – 사이에 있는 모든 중간 단계마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134:5.6 (1488.4) Starting out with parental power in the family group, political sovereignty evolves by organization as families overlap into consanguineous clans which become united, for various reasons, into tribal units — superconsanguineous political groupings. And then, by trade, commerce, and conquest, tribes become unified as a nation, while nations themselves sometimes become unified by empire. 가족 집단 속에 있는 부모의 권력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 주권은 조직에 의해 진화합니다. 가족들이 혈연관계의 씨족으로 이어지고, 씨족들은 여러 이유로 부족(部族) 단위 -혈연관계를 초월한 정치적 집단들 –로 연합됩니다. 그런 다음, 무역과 상업 그리고 정복을 통해 부족들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고, 국가들 자체는 때때로 제국으로 연합됩니다.

134:5.7 (1488.5) As sovereignty passes from smaller groups to larger groups, wars are lessened. That is, minor wars between smaller nations are lessened, but the potential for greater wars is increased as the nations wielding sovereignty become larger and larger. Presently, when all the world has been explored and occupied, when nations are few, strong, and powerful, when these great and supposedly sovereign nations come to touch borders, when only oceans separate them, then will the stage be set for major wars, world-wide conflicts. So-called sovereign nations cannot rub elbows without generating conflicts and eventuating wars. 소규모의 집단에서 대규모의 집단으로 주권이 넘어감에 따라 전쟁은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국가들 간의 사소한 전쟁들은 줄어드는 반면에,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들은 커갈수록 더 큰 전쟁이 일어날 잠재성이 증가합니다. 당장에 온 세상이 탐험되어 점령되고, 나라들의 수가 얼마 안 되지만 강하고 강력하며, 이러한 엄청난 주권을 지닌 나라들의 국경이 서로 이웃하게 되고, 대양(大洋)으로만 겨우 나라들이 분리되어 있다면, 대규모의 전쟁, 즉 세계적인 충돌을 위한 무대가 준비될 것입니다. 소위 주권을 가진 국가들은, 갈등이 일어나 결국 전쟁하지 않고는 서로 잘 지낼 수 없습니다.

134:5.8 (1488.6) The difficulty in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from the family to all mankind, lies in the inertia-resistance exhibited on all intervening levels. Families have, on occasion, defied their clan, while clans and tribes have often been subversive of the sovereignty of the territorial state. Each new and forward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is (and has always been) embarrassed and hampered by the “scaffolding stages” of the previous developments in political organization. And this is true because human loyalties, once mobilized, are hard to change. The same loyalty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ribe, makes difficult the evolution of the supertribe — the territorial state. And the same loyalty (patriotism) which makes possible the evolution of the territorial state, vastly complicates the evolutionary development of the government of all mankind. 가족으로부터 전체 인류로 확대되는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서 겪는 어려움은, 중간에 개입하는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관성(慣性)과 저항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족들은 경우에 따라 자기들의 씨족에게 도전해 왔으며, 반면에 씨족들과 부족들은 지역 국가의 주권을 종종 전복해왔습니다. 정치적 주권의 진화가 각각 새롭게 나아가는 경우 항상 언제나 그래왔지만, 정치적 조직에서, 이전에 개발된 “발판 단계”로 인해 난처해지고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인 이유는, 일단 동원되면, 인간의 충성심은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족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충성심은 부족을 초월한 – 지역 국가 – 진화를 어렵게 합니다. 그리고 지역적 국가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동일한 충성심(애국심)이 모든 인류 정부의 진화적 발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듭니다.

134:5.9 (1488.7) Political sovereignty is created out of the surrender of self-determinism, first by the individual within the family and then by the families and clans in relation to the tribe and larger groupings. This progressive transfer of self-determination from the smaller to ever larger political organizations has generally proceeded unabated in the Eas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Ming and the Mogul dynasties. In the West it obtained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right on down to the end of the World War, when an unfortunate retrograde movement temporarily reversed this normal trend by re-establishing the submerged political sovereignty of numerous small groups in Europe. 정치적 주권은, 처음에는 가족 안에서 개인이, 다음에는 부족 및 더 큰 집합과 관계된 가족과 씨족들이, 자결(자아결정)주의를 버림으로 만들어집니다. 작은 데서부터 항상 더 큰 정치 조직으로 자결(自決)을 이렇게 진취적으로 양도(讓渡)하는 것은 명(明) 나라와 몽고 왕조가 세워진 뒤로, 동양에서는 대체로 줄어들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서양에서 그것은, 1천 년이 넘도록, 바로 세계 대전(大戰)이 끝날 때까지 진행되었고, 이 때 유럽에서 수많은 작은 집단들이, 사라졌던 정치적 주권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불행한 역행(逆行) 운동이 이 정상(正常)적인 경향을 일시에 바꿔 놓았습니다.

134:5.10 (1489.1) Urantia will not enjoy lasting peace until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intelligently and fully surrender their sovereign powers into the hands of the brotherhood of men — mankind government. Internationalism — Leagues of Nations — can never bring permanent peace to mankind. World-wide confederations of nations will effectively prevent minor wars and acceptably control the smaller nations, but they will not prevent world wars nor control the three, four, or five most powerful governments. In the face of real conflicts, one of these world powers will withdraw from the League and declare war. You cannot prevent nations going to war as long as they remain infected with the delusional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Internationalism is a step in the right direction. An international police force will prevent many minor wars, but it will not be effective in preventing major wars, conflicts between the great military governments of earth. 이른바 주권 국가들이 그 주권의 권력을 사람의 형제 정신―인류 정부―의 손에 총명하게, 완전히 내어주기까지, 지구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국제주의―국제 연맹―은 결코 인류에게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나라들의 세계적 연방들이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막고 작은 나라들을 만족스럽게 통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방들은 세계 전쟁을 방지하거나, 초강대국 서넛이나 다섯을 통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실제적인 갈등에 직면하게 되면, 이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가 연맹으로부터 탈퇴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국가가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망상(妄想)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미리 예방할 수 없습니다. 국제주의는 올바른 방향에로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국제 경찰력은 많은 작은 전쟁을 방지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정부들 사이의 갈등인 큰 전쟁을 방지하는 데에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134:5.11 (1489.2) As the number of truly sovereign nations (great powers) decreases, so do both opportunity and need for mankind government increase. When there are only a few really sovereign (great) powers, either they must embark on the life and death struggle for national (imperial) supremacy, or else, by voluntary surrender of certain prerogatives of sovereignty, they must create the essential nucleus of supernational power which will serve as the beginning of the real sovereignty of all mankind. 참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강대국)의 수가 줄어드는 데 따라서, 인류 정부의 기회와 필요가 늘어납니다. 정말로 주권을 가진 (큰) 강국들이 겨우 몇 나라만 있을 때는, 민족(제국) 우위성을 얻으려고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주권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여, 인류의 참된 주권의 시작으로서 사용될 초국가 권력의 필수 핵심(核心)을 만들어야 합니다.

134:5.12 (1489.3) Peace will not come to Urantia until every so-called sovereign nation surrenders its power to make war into the hands of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all mankind. Political sovereignty is innate with the peoples of the world. When all the peoples of Urantia create a world government, they have the right and the power to make such a government SOVEREIGN; and when such a representative or democratic world power controls the world’s land, air, and naval forces,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prevail — but not until then. 소위 주권 국가가 모두 전쟁을 수행할 권력을 인류의 대표 정부에게 양보할 때까지, 평화는 지구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주권은 세계의 여러 민족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지구의 모든 민족이 하나의 세계 정부를 창립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정부가 주권을 갖도록 할 권한과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 또는 민주적 세계 권력이 지구에서 세계의 육군•해군•공군을 통제할 때, 땅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가 지배할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때까지는 불가능합니다.

134:5.13 (1489.4) To use an important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illustration: The forty-eight states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have long enjoyed peace. They have no more wars among themselves. They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to the federal government, and through the arbitrament of war, they have abandoned all claims to the delusions of self-determination. While each state regulates its internal affairs, it is not concerned with foreign relations, tariffs, immigration, military affairs, or interstate commerce. Neither do the individual states concern themselves with matters of citizenship. The forty-eight states suffer the ravages of war only when the federal government’s sovereignty is in some way jeopardized. 19세기 및 20세기의 중요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아메리카 연방의 48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권을 연방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전쟁의 중재를 통해서, 자체적 결정권이라는 망상에 대한 모든 주장을 버렸습니다. 각 주(州)정부가 그 내부(內部) 사무를 규제하지만, 외교 관계, 관세, 이민, 군사(軍事) 또는 주정부 간의 통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개별 주(州)는 시민권의 문제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48주는 오직 연방 정부의 주권이 어떤 면에서 위협을 받을 때에만 전쟁의 참화(慘禍)를 겪게 됩니다.

134:5.14 (1489.5) These forty-eight states, having abandoned the twin sophistries of sovereignty and self-determination, enjoy interstate peace and tranquillity. So will the nations of Urantia begin to enjoy peace when they freely surrender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into the hands of a global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the brotherhood of men. In this world state the small nations will be as powerful as the great, even as the small state of Rhode Island has its two senators in the American Congress just the same as the populous state of New York or the large state of Texas. 이 48주는 주권과 자체 결정권이라는 두 가지 궤변을 버렸고, 주 사이에서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의 국가들도 각자의 주권을 세계 정부 – 사람의 형제 정신의 주권 – 에 자유롭게 양보할 때 평화를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인구가 많은 뉴욕 주나 큰 텍사스 주와 똑같이, 작은 로드 아이랜드 주가 미국 국회에 상원(上院) 의원 두 명을 가진 것처럼, 이 세계 국가에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만큼 강력해질 것입니다.

134:5.15 (1490.1) The limited (state) sovereignty of these forty-eight states was created by men and for men. The superstate (national) sovereignty of the American Federal Union was created by the original thirteen of these state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men. Sometime the supernational sovereignty of the planetary government of mankind will be similarly created by nations for their own benefit and for the benefit of all men. 이 48주(州)의 제한된 주권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주를 관할하는 아메리카 연방이 가진 국가적 주권은 이 여러 주 가운데 최초의 13개 주가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주민(州民)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인류의 행성 정부의 초국가적 주권을 여러 나라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비슷한 형태로 만들 것입니다.

134:5.16 (1490.2) Citizens are not born for the benefit of governments; governments are organizations created and devised for the benefit of men. There can be no end to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vereignty short of the appearance of the government of the sovereignty of all men. All other sovereignties are relative in value, intermediate in meaning, and subordinate in status. 시민들은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고안된 조직입니다. 모든 사람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가 나타나지 못하면, 정치적 주권의 진화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다른 주권의 가치는 상대적이며, 그 의미는 중간적이고, 그 지위는 종속적입니다.

134:5.17 (1490.3) With scientific progress, wars are going to become more and more devastating until they become almost racially suicidal. How many world wars must be fought and how many leagues of nations must fail before men will be willing to establish the government of mankind and begin to enjoy the blessings of permanent peace and thrive on the tranquillity of good will — world-wide good will — among men? 과학의 진보와 함께, 거의 인종족 자살(自殺)행위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갈수록 더 끔찍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정부를 기꺼이 세우고, 영구한 평화의 복을 누리기 시작하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세계적 선의―에서 생기는 평안을 토대로 번영하기까지, 몇 차례나 세계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얼마나 많은 국가 연맹이 실패해야만 할 것인가?

6. Law, Liberty, and Sovereignty 법, 자유, 그리고 주권

170125 수요 예수75 (30세-AD24) 법, 자유, 주권 눅21:9-10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34:6.1 (1490.4) If one man craves freedom — liberty — he must remember that all other men long for the same freedom. Groups of such liberty-loving mortals cannot live together in peace without becoming subservient to such laws, rules, and regulations as will grant each person the same degree of freedom while at the same time safeguarding an equal degree of freedom for all of his fellow mortals. If one man is to be absolutely free, then another must become an absolute slave. And the relative nature of freedom is true socially,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Freedom is the gift of civilization made possible by the enforcement of LAW. 한 사람이 자유(해방)를 열망한다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역시 자기와 똑같은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해방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은, 각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그의 동료 모든 사람들에게도 같은 양의 자유를 보장해줄, 법과 규칙 그리고 규정들을 지키지 않고서는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절대적인 노예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상대적인 속성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참됩니다. 자유는 법 집행으로 누릴 수 있는 문명의 선물입니다.

134:6.2 (1490.5) Religion makes it spiritually possible to realize the brotherhood of men, but it will require mankind government to regulate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roblems associated with such a goal of human happiness and efficiency. 종교는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행복이나 효율성에 관계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규정하는 인류 전체의 정부(政府)가 필요할 것입니다.

134:6.3 (1490.6) There shall be wars and rumors of wars — nation will rise against nation — just as long as the world’s political sovereignty is divided up and unjustly held by a group of nation-states. England, Scotland, and Wales were always fighting each other until they gave up their respective sovereignties, reposing them in the United Kingdom. 세상의 정치적 주권이 분리되어 있으며, 국가-주정부들 집단이 불공정하게 차지하는 한, 전쟁이 있고,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 – 나라와 나라가 대항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그들이 각자의 주권을 영연방(英聯邦)에 위임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134:6.4 (1490.7) Another world war will teach the so-called sovereign nations to form some sort of federation, thus creating the machinery for preventing small wars, wars between the lesser nations. But global wars will go on until the government of mankind is created. Global sovereignty will prevent global wars — nothing else can.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통해, 소위 말하는 주권 국가들은 어떤 종류의 연합정부를 형성해야 하는 지 배우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작은 전쟁, 약소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 기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전쟁은 인류 전체의 정부가 생길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지구 전체의 통제권이 세계적 전쟁들을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134:6.5 (1490.8) The forty-eight American free states live together in peace. There are among the citizens of these forty-eight states all of the various nationalities and races that live in the ever-warring nations of Europe. These Americans represent almost all the religions and religious sects and cults of the whole wide world, and yet here in North America they live together in peace. And all this is made possible because these forty-eight states have surrendered their sovereignty and have abandoned all notions of the supposed rights of self-determination. 미국의 독립된 48개의 주는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48개 주들의 시민들 중에는, 항상 전쟁에 시달리는 유럽의 국가들에 살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국적과 인종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 미국(美國)인들은 전 세계 모든 종교들과 종교적 종파(宗派)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북미(北美) 지역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은 이 48개 주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포기하고 자체적 결정 권리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134:6.6 (1490.9) It is not a question of armaments or disarmament. Neither does the question of conscription or voluntary military service enter into these problems of maintaining world-wide peace. If you take every form of modern mechanical armaments and all types of explosives away from strong nations, they will fight with fists, stones, and clubs as long as they cling to their delusions of the divine right of national sovereignty. 그것은 무장(武裝)과 비무장(非武裝)의 문제가 아닙니다. 징병제도 혹은 자발적 군대 복무를 선택하는 문제도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이러한 문제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강대국들로부터 현대의 기계화된 무기(武器)들과 모든 유형의 폭탄들을 다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국가적 주권을 신(神)이 준 권리라는 망상에 붙들려 있는 한, 그들은 주먹과 돌과 방망이를 가지고라도 싸울 것입니다.

134:6.7 (1491.1) War is not man’s great and terrible disease; war is a symptom, a result. The real disease is the virus of national sovereignty. 전쟁은 사람이 지닌 중대하고 끔직한 병이 아닙니다. 전쟁은 증상이며 결과입니다. 진짜 병은 국가적 주권이라는 바이러스입니다.

134:6.8 (1491.2) Urantia nations have not possessed real sovereignty; they never have had a sovereignty which could protect them from the ravages and devastations of world wars. In the creation of the global government of mankind, the nations are not giving up sovereignty so much as they are actually creating a real, bona fide, and lasting world sovereignty which will henceforth be fully able to protect them from all war. Local affairs will be handled by local governments; national affairs, by national governments; international affairs will be administered by global government. 이 땅의 국가들은 진정한 주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적 전쟁들의 참상과 황폐함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주권(主權)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범세계적인 인류 전체 정부를 구성하면서, 국가들은 주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진실하며 지속적으로, 이후로는 모든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을 충분히 보호해 주는 줄 수 있는 세계적 주권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역 문제들은 지역 정부가, 국가적 문제들은 국가 정부가 처리하고, 국제적 문제들은 범세계 정부가 관리할 것입니다.

134:6.9 (1491.3) World peace cannot be maintained by treaties, diplomacy, foreign policies, alliances, balances of power, or any other type of makeshift juggling with the sovereignties of nationalism. World law must come into being and must be enforced by world government — the sovereignty of all mankind. 세계평화는, 조약(條約), 외교, 대외 정책, 연맹, 힘의 균형, 혹은 민족주의적 주권으로 조작하는 어떤 다른 유형의 미봉책으로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이 만들어져, 그것은 세계정부─모든 인류의 주권─에 의해 집행되어야 합니다.

134:6.10 (1491.4) The individual will enjoy far more liberty under world government. Today, the citizens of the great powers are taxed, regulated, and controlled almost oppressively, and much of this present interference with individual liberties will vanish when the national governments are willing to trustee their sovereignty as regards international affairs into the hands of global government. 세계 정부 아래에서 개인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날 강대국의 시민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세금(稅金)을 징수 당하고, 제약 받고, 통제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재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대부분의 간섭은, 국가정부가 기꺼이 국제적 문제들에 관하여 그들의 주권을 범세계적 정부에게 맡길 때 사라질 것입니다.

134:6.11 (1491.5) Under global government the national groups will be afforded a real opportunity to realize and enjoy the personal liberties of genuine democracy. The fallacy of self-determination will be ended. With global regulation of money and trade will come the new era of world-wide peace. Soon may a global language evolve, and there will be at least some hope of sometime having a global religion — or religions with a global viewpoint. 범세계적 정부 아래에서 국가 집단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개인적 자유를 실현하고 누릴 진정한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자체적인-결정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돈과 무역에 대한 범세계적 차원의 규제에 의해서 세계적 평화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곧 범세계적 언어가 진화되고, 적어도 범세계적 종교 혹은 범세계적 관점을 가진 종교들을 언젠가 소유하게 된다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134:6.12 (1491.6) Collective security will never afford peace until the collectivity includes all mankind. 집단의 안전은 그 집합체가 온 인류를 포함할 때까지는, 결코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134:6.13 (1491.7) The political sovereignty of representative mankind government will bring lasting peace on earth, and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will forever insure good will among all men. And there is no other way whereby peace on earth and good will among men can be realized. 인류를 대표하는 정부(政府)의 정치적 주권은 지구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사람의 영적 형제신분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善意)를 언제까지나 보장할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뜻이 실현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 ~ ~ ~

134:6.15 (1491.8) After the death of Cymboyton, his sons encountered great difficulties in maintaining a peaceful faculty. The repercussions of Jesus’ teachings would have been much greater if the later Christian teachers who joined the Urmia faculty had exhibited more wisdom and exercised more tolerance. 심보이톤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들은 평화스러운 교수진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우르미아 교수진에 들어간 후대의 기독교 선생들이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관대했더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반향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134:6.16 (1491.9) Cymboyton’s eldest son had appealed to Abner at Philadelphia for help, but Abner’s choice of teachers was most unfortunate in that they turned out to be unyielding and uncompromising. These teachers sought to make their religion dominant over the other beliefs. They never suspected that the oft-referred-to lectures of the caravan conductor had been delivered by Jesus himself. 심보이톤Cymboyton의 맏아들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있는 아브너Abner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브너가 선택한 선생들은 고집이 세고 완고한 자들로 드러나 가장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다른 믿음들을 지배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대상caravan의 지휘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강의(講義)가, 예수님 자신이 강연했었던 것이라고는 결코 추측도 하지 못했습니다.

134:6.17 (1491.10) As confusion increased in the faculty, the three brothers withdrew their financial support, and after five years the school closed. Later it was reopened as a Mithraic temple and eventually burned down in connection with one of their orgiastic celebrations. 교수진 사이에서 혼란이 커지자, 세 형제들은 그들의 재정 지원을 끊었고, 5년 뒤에 그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나중에 그 학교는 미트라 신전(神殿)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결국 주신(酒神) 축제들의 하나와 연관되어 불에 타버렸습니다.

7. The Thirty-First Year (A.D. 25) 31세 되던 해 (서기 25년)

170201 수요 예수76 (31세-AD25) 31세 되시던 해(서기 25년) 눅4:1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134:7.1 (1492.1) When Jesus returned from the journey to the Caspian Sea, he knew that his world travels were about finished. He made only one more trip outside of Palestine, and that was into Syria. After a brief visit to Capernaum, he went to Nazareth, stopping over a few days to visit. In the middle of April he left Nazareth for Tyre. From there he journeyed on north, tarrying for a few days at Sidon, but his destination was Antioch. 예수께서 카스피Caspian 해(海)로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세상 여행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팔레스타인Palestine 밖으로 여행한 것은 한 번밖에는 더 이상 없었는데, 그것은 시리아Syria로 간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Capernaum을 잠시 방문한 후, 그는 나사렛Nazareth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습니다. 4월 중순에 그는 티레Tyre를 향하여 나사렛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북쪽으로 여행하여 시돈Sidon에 며칠 동안 머물렀지만, 그의 목적지는 안디옥Antioch이었습니다.

134:7.2 (1492.2) This is the year of Jesus’ solitary wanderings through Palestine and Syria. Throughout this year of travel he was known by various names in different parts of the country: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boatbuilder of Capernaum, the scribe of Damascus, and the teacher of Alexandria. 이 해에 예수님은 홀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이 해의 여행을 통하여, 그는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나사렛Nazareth의 목수, 가버나움Capernaum의 배 건조자, 다마스쿠스Damascus의 서기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선생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134:7.3 (1492.3) At Antioch the Son of Man lived for over two months, working, observing, studying, visiting, ministering, and all the while learning how man lives, how he thinks, feels, and reacts to the environment of human existence. For three weeks of this period he worked as a tentmaker. He remained longer in Antioch than at any other place he visited on this trip. Ten years later, when the Apostle Paul was preaching in Antioch and heard his followers speak of the doctrines of the Damascus scribe, he little knew that his pupils had heard the voice, and listened to the teachings, of the Master himself. 안디옥Antioch에서 사람의 아들은 일하고, 관찰하고, 공부하고, 방문하고, 봉사하면서 두 달이 넘도록 살았고, 그 동안 계속,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어떻게 인간 존재의 환경에 반응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이 기간 중 3주 동안, 그는 천막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해의 여행에서 방문했던 다른 어떤 곳보다, 안디옥에 더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10년 후,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하면서, 추종자들이 다마스쿠스 서기관Damascus scribe의 신조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생도들이 바로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134:7.4 (1492.4) From Antioch Jesus journeyed south along the coast to Caesarea, where he tarried for a few weeks, continuing down the coast to Joppa. From Joppa he traveled inland to Jamnia, Ashdod, and Gaza. From Gaza he took the inland trail to Beersheba, where he remained for a week. 예수님은 안디옥에서 케자리아Caesarea를 향하여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하였고, 그곳에서 몇 주를 머문 후 계속해서 해변을 따라 요파Joppa로 내려갔습니다. 요파에서 그는 잠니아Jamnia, 아쉬돗Ashdod, 가자Gaza를 향하여 내륙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가자에서부터 그는 내륙 도로를 택하여 비엘세바Beersheba로 갔고 그곳에서 일 주일동안 머물렀습니다.

134:7.5 (1492.5) Jesus then started on his final tour, as a private individual, through the heart of Palestine, going from Beersheba in the south to Dan in the north. On this journey northward he stopped at Hebron, Bethlehem (where he saw his birthplace), Jerusalem (he did not visit Bethany), Beeroth, Lebonah, Sychar, Shechem, Samaria, Geba, En-Gannim, Endor, Madon; passing through Magdala and Capernaum, he journeyed on north; and passing east of the Waters of Merom, he went by Karahta to Dan, or Caesarea-Philippi. 그 후 예수님은 사적(私的)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셨는데,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심장부를 거쳐서, 남쪽에 비엘세바Beersheba로부터 북쪽으로 단Dan까지 갔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이 여행에서, 그는 헤브론Hebron•베들레헴Bethlehem (여기서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보았습니다)•예루살렘Jerusalem(베다니Bethany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비어롯Beeroth•레보나Lebonah•시카Sychar•세켐Shechem•사마리아Samaria•게바Geba•엔가님En-Gannim•엔도르Endor•마돈Madon을 들렀습니다. 그는 막달라Magdala와 가버나움Capernaum을 지나서, 북쪽으로 줄곧 여행했습니다. 메롬Merom의 우물 동쪽을 지나서, 가라타Karahta의 길로 단Dan, 곧 케자리아 빌립비Caesarea-Philippi로 갔습니다.

134:7.6 (1492.6)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 now led Jesus to forsake the dwelling places of men and betake himself up to Mount Hermon that he might finish his work of mastering his human mind and complete the task of effecting his full consecration to the remainder of his lifework on earth.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는 이제 사람들의 거처를 떠나 헤르몬Hermon 산으로 가도록 예수님을 인도하였고, 그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 마음의 숙달을 마쳤으며, 이 땅에서 남은 일생의 사명에 충만히 헌신하는 과제를 완수하셨습니다.

134:7.7 (1492.7) This was one of those unusual and extraordinary epochs in the Master’s earth life on Urantia. Another and very similar one was the experience he passed through when alone in the hills near Pella just subsequent to his baptism. This period of isolation on Mount Hermon marked the termination of his purely human career, that is, the technical termination of the mortal bestowal, while the later isolatio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more divine phase of the bestowal. And Jesus lived alone with God for six weeks on the slopes of Mount Hermon. 이 때는 유란시아(지구)에서의 주님의 지상 일생에 있어서 드문, 특별한 기간이었습니다. 매우 비슷한 또 하나의 기간은, 세례를 받고 난 바로 뒤에, 주님께서 펠라Pella 근처 작은 산에서 혼자 있을 때 거쳤던 체험이었습니다. 헤르몬Hermon 산에서 이러한 고립 기간은 그의 순수한 인간적 생애의 종료,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 절차가 종결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반면에 나중에 있었던 고립기간은 자신을 내어주는 수여에 있어서 더욱 신적인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르몬 산기슭에서 6주 동안 홀로 하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8. The Sojourn on Mount Hermon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170208 수요 예수77 31세 AD25 헤르몬 산에서의 체류 마4:3-11

134:8.1 (1492.8) After spending some time in the vicinity of Caesarea-Philippi, Jesus made ready his supplies, and securing a beast of burden and a lad named Tiglath, he proceeded along the Damascus road to a village sometime known as Beit Jenn in the foothills of Mount Hermon. Here, near the middle of August, A.D. 25, he established his headquarters, and leaving his supplies in the custody of Tiglath, he ascended the lonely slopes of the mountain. Tiglath accompanied Jesus this first day up the mountain to a designated point about 6,000 feet above sea level, where they built a stone container in which Tiglath was to deposit food twice a week. 예수님은, 케자리아 빌립보Caesarea-Philippi 근처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후에, 생필품(生必品)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짐을 싣는 짐승과, 티글라스Tiglath라는 아이를 데리고 다마스쿠스Damascus 길을 따라 헤르몬Hermon 산기슭에 있는 한때 베이트 젠Beit Jenn이라고 알려진 마을로 나아갔습니다. 서기 25년 8월 중순 경 그곳에서 그는 본부를 정하고 물자들을 티글라스에게 맡긴 후, 인적이 드문 산비탈을 올라갔습니다. 그 첫째 날에 티글라스는 약 해발 6,000피트(1800미터) 되는 지점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였고, 그들은 그곳에 돌로 저장고를 지었으며, 티글라스가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음식을 갖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134:8.2 (1493.1) The first day, after he had left Tiglath, Jesus had ascended the mountain only a short way when he paused to pray. Among other things he asked his Father to send back the guardian seraphim to “be with Tiglath.” He requested that he be permitted to go up to his last struggle with the realities of mortal existence alone. And his request was granted. He went into the great test with only his indwelling Adjuster to guide and sustain him. 첫 날, 티글라스를 보낸 후, 예수님은 산을 약간 더 올라가서 기도하기 위해 멈추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에게 “티글라스와 함께 있도록” 수호 세라핌천사를 돌려보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로서의 현실과 마지막 투쟁까지 홀로 감당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허락되었습니다. 그는 단지 그를 인도하고 지지하기 위해 내주하는 조절자와 함께 이 엄청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134:8.3 (1493.2) Jesus ate frugally while on the mountain; he abstained from all food only a day or two at a time. The superhuman beings who confronted him on this mountain, and with whom he wrestled in spirit, and whom he defeated in power, were real; they were his archenemies in the system of Satania; they were not phantasms of the imagination evolved out of the intellectual vagaries of a weakened and starving mortal who could not distinguish reality from the visions of a disordered mind. 예수님은 산에 있을 동안에 음식을 절약해서 드셨으며, 한 번에 하루나 이틀씩만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대면하였던 초인간 존재들과 영적으로 씨름을 하셨으며, 권능으로 물리쳤던 그 존재들은 실재했습니다. 그들은 사타니아Satania 체계에 있는 그의 대적(大敵)들이었으며, 마음 착란을 일으켜서 환상(幻想)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허약하고 굶주린 사람의 변덕스러운 지성에서 연유된 망상적 환영(幻影)들이 아니었습니다.

134:8.4 (1493.3) Jesus spent the last three weeks of August and the first three weeks of September on Mount Hermon. During these weeks he finished the mortal task of achieving the circles of mind-understanding and personality-control. Throughout this period of communion with his heavenly Father the indwelling Adjuster also completed the assigned services. The mortal goal of this earth creature was there attained. Only the final phase of mind and Adjuster attunement remained to be consummated. 예수님은 8월의 마지막 3주간과 9월의 첫 3주간을 헤르몬Hermon 산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마음-이해와 고유성-조정의 순환계들을 성취하는 사람의 임무를 완료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를 갖는 이 기간 동안, 내주 하는 조절자도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지상의 창조체로서의 인간 목표는 그곳에서 달성되었습니다. 다만 마음과 조절자의 조율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134:8.5 (1493.4) After more than five weeks of unbroken communion with his Paradise Father, Jesus became absolutely assured of his nature and of the certainty of his triumph over the material levels of time-space personality manifestation. He fully believed in, and did not hesitate to assert, the ascendancy of his divine nature over his human nature. 5주가 넘도록 천국 아버지와 중단 없는 친교를 나눈 뒤에, 예수님은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고유성이 시간-공간에 나타나는 물질적 차원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승리의 확실성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본성이 인간 본성의 상위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충만하게 믿게 되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주장하였습니다.

134:8.6 (1493.5) Near the end of the mountain sojourn Jesus asked his Father if he might be permitted to hold conference with his Satania enemies as the Son of Man, as Joshua ben Joseph. This request was granted. During the last week on Mount Hermon the great temptation, the universe trial, occurred. Satan (representing Lucifer) and the rebellious Planetary Prince, Caligastia, were present with Jesus and were made fully visible to him. And this “temptation,” this final trial of human loyalty in the face of the misrepresentations of rebel personalities, had not to do with food, temple pinnacles, or presumptuous acts. It had not to do with the kingdoms of this world but with the sovereignty of a mighty and glorious universe. The symbolism of your records was intended for the backward ages of the world’s childlike thought. And subsequent generations should understand what a great struggle the Son of Man passed through that eventful day on Mount He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요셉의 아들 여호수아Joshua라는 사람의 아들로서 사타니아Satania에 있는 자신의 적들과 회의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헤르몬 산에서의 마지막 주간에, 엄청난 유혹, 우주적 시험(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사탄(루시퍼를 대변한)과 반역적인 행성왕자 칼리가스티아Caligastia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그가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혹”, 반역적인 고유성들의 잘못된 대표 권한 앞에서 인간의 충성심에 대한 이 마지막 시험은 음식이나 성전의 꼭대기 또는 무엄한 행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왕국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위력 있고 영광스러운 우주의 주권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록으로 전해진 그 상징은, 유치하게 생각하는 진부한 시대의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세대들은 그 파란만장한 날에 헤르몬 산에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했던 투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134:8.7 (1493.6) To the many proposals and counterproposals of the emissaries of Lucifer, Jesus only made reply: “May the will of my Paradise Father prevail, and you, my rebellious son, may the Ancients of Days judge you divinely. I am your Creator-father; I can hardly judge you justly, and my mercy you have already spurned. I commit you to the adjudication of the Judges of a greater universe.” 루시퍼의 사자(使者)들이 제시한 많은 제안들과 반대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천국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반역을 일으키는 나의 아들인 너에게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신적 판결이 있기를 바라노라. 나는 너의 창조주-아버지이다. 나는 너를 도저히 공정하게 판가름할 수 없으며, 너는 이미 나의 자비를 거절하였노라. 나는 너를 더 높은 우주의 재판관들의 판결에 맡기노라.

134:8.8 (1494.1) To all the Lucifer-suggested compromises and makeshifts, to all such specious proposals about the incarnation bestowal, Jesus only made reply, “The will of my Father in Paradise be done.” And when the trying ordeal was finished, the detached guardian seraphim returned to Jesus’ side and ministered to him. 루시퍼가 제안한 모든 절충안들과 미봉책들에 대하여, 성육신하신 증여에 대한 그럴듯한 모든 제안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직,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대답하실 뿐이었습니다. 시험적인 호된 시련이 끝나자, 떠나갔던 수호 성(聖)천사가 예수의 곁으로 돌아와서 그를 섬겼습니다.

134:8.9 (1494.2) On an afternoon in late summer, amid the trees and in the silence of nature, Michael of Nebadon won the unquestion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On that day he completed the task set for Creator Sons to live to the full the incarnated life in the likeness of mortal flesh on the evolutionary worlds of time and space. The universe announcement of this momentous achievement was not made until the day of his baptism, months afterward, but it all really took place that day on the mountain. And when Jesus came down from his sojourn on Mount Hermon, the Lucifer rebellion in Satania and the Caligastia secession on Urantia were virtually settled. Jesus had paid the last price required of him to attain the sovereignty of his universe, which in itself regulates the status of all rebels and determines that all such future upheavals (if they ever occur) may be dealt with summarily and effectively. Accordingly, it may be seen that the so-called “great temptation” of Jesus took place sometime before his baptism and not just after that event. 늦은 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무들로 둘러싸인 자연의 정적 속에서,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의 우주의 절대적 주권을 성취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진화하는 세상에서 창조주 아들들이 인간의 육신과 같은 모습으로 성육신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임무를, 그는 바로 그 날에 완성하셨습니다. 이 감격적인 성취에 대한 우주의 발표는 그로부터 몇 달 후에 있었던 그의 세례의 날까지 미루어졌지만, 그 모든 것은 산에서 그날 실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헤르몬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타니아에서의 루시퍼의 반란과 지구(유란시아)에서의 칼리가스티아의 탈퇴는 실제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우주 주권을 갖기 위하여 그에게 요구되어진 마지막 값을 이미 지불하였으며, 그것은 그 자체적으로 모든 반역 현상들을 통제하고, 그러한 모든 미래의 격변들이 (그런 것들이 만약 발생한다면) 즉시 효과적으로 다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따라서 소위 예수님의 “큰 시험”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세례 직후가 아니라 세례 이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4:8.10 (1494.3) At the end of this sojourn on the mountain, as Jesus was making his descent, he met Tiglath coming up to the rendezvous with food. Turning him back, he said only: “The period of rest is over; I must return to my Father’s business.” He was a silent and much changed man as they journeyed back to Dan, where he took leave of the lad, giving him the donkey. He then proceeded south by the same way he had come, to Capernaum.산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예수께서 하산하실 때, 그는 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던 티글라스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되돌려 보내며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휴식기간이 끝났고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노라.” 그들이 단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많이 변화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년에게 당나귀를 주고 그와 작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가 왔던 같은 길을 따라 남쪽 방향의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9. The Time of Waiting 기다리는 시간

170215 수요 예수78 기다리는 시간(31세 AD25) 마3:1-2, 5-6

134:9.1 (1494.4) It was now near the end of the summer, about the time of the day of atonement and the feast of tabernacles. Jesus had a family meeting in Capernaum over the Sabbath and the next day started for Jerusalem with John the son of Zebedee, going to the east of the lake and by Gerasa and on down the Jordan valley. While he visited some with his companion on the way, John noted a great change in Jesus. 이제는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었고, 속죄의 날과 초막(草幕)절 축제가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Capernaum에서 가족모임을 가진 후, 다음 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호수의 동쪽으로 가며 게라사Gerasa를 지나서 요단Jordan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께서 동행자와 함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요한은 예수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눈치로 알아차렸습니다.

134:9.2 (1494.5) Jesus and John stopped overnight at Bethany with Lazarus and his sisters, going early the next morning to Jerusalem. They spent almost three weeks in and around the city, at least John did. Many days John went into Jerusalem alone while Jesus walked about over the near-by hills and engaged in many seasons of spiritual communion with his Father in heaven. 예수님과 요한은 베다니Bethany에서 나사로Lazarus와 그의 자매들과 함께 그날 밤 묵었으며, 다음 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거의 3주를 그 도성(都城)의 안과 근처에서 보냈는데, 적어도 요한은 그랬습니다. 요한은 여러 날 혼자서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한편 예수님은 근처에 있는 언덕을 거닐거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여러 차례 가지셨습니다.

134:9.3 (1494.6) Both of them were present at the solemn services of the day of atonement. John was much impressed by the ceremonies of this day of all days in the Jewish religious ritual, but Jesus remained a thoughtful and silent spectator. To the Son of Man this performance was pitiful and pathetic. He viewed it all as misrepresentative of the character and attributes of his Father in heaven. He looked upon the doings of this day as a travesty upon the facts of divine justice and the truths of infinite mercy. He burned to give vent to the declaration of the real truth about his Father’s loving character and merciful conduct in the universe, but his faithful Monitor admonished him that his hour had not yet come. But that night, at Bethany, Jesus did drop numerous remarks which greatly disturbed John; and John never fully understood the real significance of what Jesus said in their hearing that evening. 두 사람 모두 속죄의 날의 엄숙한 경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요한은 모든 유대 종교 의식의 날들 중 이날의 의식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생각에 잠긴 채, 조용한 구경꾼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일들이 가엾고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을 잘못 나타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날의 모든 행위들이 신적인 정의의 사실들과 무한한 자비의 진리들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를 낸 장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는 성품과 우주에서의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위성에 대한 진정한 진리를 선포하고 싶은 열정에 타올랐지만, 신실한 감시자가 그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베다니에서, 그가 제시하였던 많은 의견들로 인해 요한은 매우 혼란되었으며, 요한은 그날 밤 예수께서 그들이 들었던 것에 대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34:9.4 (1495.1) Jesus planned to remain throughout the week of the feast of tabernacles with John. This feast was the annual holiday of all Palestine; it was the Jewish vacation time. Although Jesus did not participate in the merriment of the occasion, it was evident that he derived pleasure and experienced satisfaction as he beheld the lighthearted and joyous abandon of the young and the old. 예수님은 초막절 축제 주간 내내 요한과 함께 남아 있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 축제는 모든 팔레스타인에서 해마다 있었던 공휴일이었으며, 유대인들의 휴가철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그 절기(節氣)의 흥겨운 잔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아무 걱정 없이 기쁘게 마음껏 노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으며 만족스러워 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134:9.5 (1495.2) In the midst of the week of celebration and ere the festivities were finished, Jesus took leave of John, saying that he desired to retire to the hills where he might the better commune with his Paradise Father. John would have gone with him, but Jesus insisted that he stay through the festivities, saying: “It is not required of you to bear the burden of the Son of Man; only the watchman must keep vigil while the city sleeps in peace.” Jesus did not return to Jerusalem. After almost a week alone in the hills near Bethany, he departed for Capernaum. On the way home he spent a day and a night alone on the slopes of Gilboa, near where King Saul had taken his life; and when he arrived at , he seemed more cheerful than when he had left John in Jerusalem. 경축하는 주간의 중간, 축제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 아버지와 좀 더 긴밀한 교제하기를 위하여 언덕으로 물러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요한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요한이 그와 함께 가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의 짐을 지는 것이 요구되지 않느니라. 도시가 평화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 파수꾼만이 밤새 지켜 있어야 하느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베다니Bethany 근처에 있는 언덕에서 거의 일주일을 홀로 지낸 후, 그는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울 왕King Saul이 목숨을 버렸던 장소 가까이에 있는 길보아Gilboa산 기슭에서 하루 밤과 낮을 혼자 지냈으며, 그가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요한을 떠났을 때보다도 더 쾌활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34:9.6 (1495.3) The next morning Jesus went to the chest containing his personal effects, which had remained in Zebedee’s workshop, put on his apron, and presented himself for work, saying, “It behooves me to keep busy while I wait for my hour to come.” And he worked several months, until January of the following year, in the boatshop, by the side of his brother James. After this period of working with Jesus, no matter what doubts came up to becloud James’s understanding of the lifework of the Son of Man, he never again really and wholly gave up his faith in the mission of Jesus.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은 세베대의 작업소에 남겨 두었던 자신의 소지품이 들어있는 상자(箱子)로 가서 작업복을 꺼내 입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직접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바쁘게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는 이듬 해 1월까지 동생 야고보 곁,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몇 달 동안 일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한 이 기간이 끝난 후부터, 야고보는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의 아들의 일생의 과업에 대해 어떤 의심이 떠오르든지 상관없이, 결코 다시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신앙을 다시는 정말로 그리고 모두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34:9.7 (1495.4) During this final period of Jesus’ work at the boatshop, he spent most of his time on the interior finishing of some of the larger craft. He took great pains with all his handiwork and seemed to experience the satisfaction of human achievement when he had completed a commendable piece of work. Though he wasted little time upon trifles, he was a painstaking workman when it came to the essentials of any given undertaking.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작업을 하셨던 이 기간 동안, 그는 좀 더 큰 몇몇 배의 실내를 마무리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 훌륭한 배를 완성시켜 칭찬할만한 작품을 마쳤을 때 인간다운 성취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들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지만, 맡은 일의 핵심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공을 많이 들이는 일꾼이셨습니다.

134:9.8 (1495.5) As time passed, rumors came to Capernaum of one John who was preaching while baptizing penitents in the Jordan, and John preached: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repent and be baptized.” Jesus listened to these reports as John slowly worked his way up the Jordan valley from the ford of the river nearest to Jerusalem. But Jesus worked on, making boats, until John had journeyed up the river to a point near Pella in the month of January of the next year, A.D. 26, when he laid down his tools, declaring, “My hour has come,” and presently presented himself to John for baptism. 시간이 지나자, 요단 강에서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설교하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가버나움에 도착했는데, 요한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예수님은 요한이 활동을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운 강의 개울로부터 요단 계곡을 따라 거슬러 천천히 올라오고 있다는 이러한 소식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서기 26년 1월, 요한이 펠라Pella 가까이에 있는 지점까지 강을 따라 올라올 때까지, 예수님은 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이 때 그는 연장을 내려놓고, “나의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선언하였고, 당장 세례를 받으러 요한 앞에 나섰습니다.

134:9.9 (1495.6) But a great change had been coming over Jesus. Few of the people who had enjoyed his visits and ministrations as he had gone up and down in the land ever subsequently recognized in the public teacher the same person they had known and loved as a private individual in former years. And there was a reason for this failure of his early beneficiaries to recognize him in his later role of public and authoritative teacher. For long years this transformation of mind and spirit had been in progress, and it was finished during the eventful sojourn on Mount Harmon. 그러나 엄청난 변화가 이미 예수님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지역의 땅들을 오가며 방문하고 봉사하며 보살폈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아무도,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그 선생이 이전에, 그들이 사적인 한 개인으로 알고 지내며 사랑하였던 바로 그 동일한 사람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덕을 입은 사람들이, 그가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선생 역할로 나타난 그의 모습을 이렇게 알아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마음과 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은 그 파란만장한 헤르몬Harmon 산에서의 체류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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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135 John the Baptist 세례(洗禮) 요한

Paper 135

John the Baptist 세례(洗禮) 요한

1. John Becomes a Nazarite 나실인이 된 요한
2. The Death of Zacharias 사가랴의 죽음
3. The Life of a Shepherd 목자의 생활
4. The Death of Elizabeth 엘리자벳의 죽음
5.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6. John Begins to Preach 요한이 설교를 시작하다
7. John Journeys North 요한이 북쪽으로 여행하다
8. Meeting of Jesus and John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
Baptism of Jesus 예수님의 세례
9. Forty Days of Preaching 40일간의 설교
10. John Journeys South 요한이 남쪽으로 여행가다
11. John in Prison 감옥에 갇힌 요한
12. Death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의 죽음

170222 수요 예수79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서론 & 나실인이 된 요한) 마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135:0.1 (1496.1) JOHN the Baptist was born March 25, 7 B.C., in accordance with the promise that Gabriel made to Elizabeth in June of the previous year. For five months Elizabeth kept secret Gabriel’s visitation; and when she told her husband, Zacharias, he was greatly troubled and fully believed her narrative only after he had an unusual dream about six weeks before the birth of John. Excepting the visit of Gabriel to Elizabeth and the dream of Zacharias, there was nothing unusual or supernatural connected with the birth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은, 일 년 전 6월에 가브리엘Gabriel이 엘리자벳Elizabeth에게 나타나서 약속한 대로, 기원 전 7년 3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5개월 동안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의 방문을 비밀로 하였으며, 그녀가 남편 사가랴Zacharias에게 말하였을 때, 그는 매우 고심했었으나 요한이 태어나기 6주 전 이상한 꿈을 꾼 후에는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을 방문한 것과 사가랴의 꿈 이외에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상하거나 초자연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135:0.2 (1496.2) On the eighth day John was circumcised according to the Jewish custom. He grew up as an ordinary child, day by day and year by year, in the small village known in those days as the City of Judah, about four miles west of Jerusalem. 8일째 되는 날에 요한은 유대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4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그 당시에는 유다Judah의 도시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그는 날이 가고 해를 거듭하면서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135:0.3 (1496.3) The most eventful occurrence in John’s early childhood was the visit, in company with his parents, to Jesus and the Nazareth family. This visit occurred in the month of June, 1 B.C., when he was a little over six years of age. 요한의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사건은 그가 부모와 함께 예수와 나사렛Nazareth의 가족들을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이 방문은 그가 6살이 조금 넘었을 때인, 기원 전 1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135:0.4 (1496.4) After their return from Nazareth John’s parents began the systematic education of the lad. There was no synagogue school in this little village; however, as he was a priest, Zacharias was fairly well educated, and Elizabeth was far better educated than the average Judean woman; she was also of the priesthood, being a descendant of the “daughters of Aaron.” Since John was an only child, they spent a great deal of time on his mental and spiritual training. Zacharias had only short periods of service at the temple in Jerusalem so that he devoted much of his time to teaching his son. 나사렛에서 돌아온 후 요한의 부모는 이 아이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는 회당 학교가 없었지만,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고, 엘리자벳도 유대의 평균적인 여인들보다는 교육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그녀 또한 “아론의 딸들daughters of Aaron”의 후손으로 제사장의 혈통이었습니다. 요한이 독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정신적, 영적 훈련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의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하여 예루살렘Jerusalem 성전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만 봉사하였습니다.

135:0.5 (1496.5) Zacharias and Elizabeth had a small farm on which they raised sheep. They hardly made a living on this land, but Zacharias received a regular allowance from the temple funds dedicated to the priesthood. 사가랴와 엘리자벳은 양을 기르는 소규모의 목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만으로는 거의 생활이 안 되었으나, 사가랴는 제사장들에게 쓰이도록 되어있는 성전의 기금으로부터 정기적인 수당을 받았습니다.

1. John Becomes a Nazarite 나실인Nazarite이 된 요한

135:1.1 (1496.6) John had no school from which to graduate at the age of fourteen, but his parents had selected this as the appropriate year for him to take the formal Nazarite vow. Accordingly, Zacharias and Elizabeth took their son to Engedi, down by the Dead Sea. This was the southern headquarters of the Nazarite brotherhood, and there the lad was duly and solemnly inducted into this order for life. After these ceremonies and the making of the vows to abstain from all intoxicating drinks, to let the hair grow, and to refrain from touching the dead, the family proceeded to Jerusalem, where, before the temple, John completed the making of the offerings which were required of those taking Nazarite vows. 요한은 14세에 졸업하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 부모는 그의 14살이 그가 정식 나실인Nazarite으로서 맹세하기에 적당한 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사가랴와 엘리자벳은 그들의 아들을 사해(死海)the Dead Sea 아래에 있는 엔게디Engedi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나실인 형제회의 남부 본부였으며, 그곳에서 요한은 정식으로 경건하게, 종신토록 있을 이 계층에 가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치르면서,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죽은 자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 가족들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요한은 성전 앞에서 나실인 서약을 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헌물 바치는 일을 마쳤습니다.

135:1.2 (1496.7) John took the same life vows that had been administered to his illustrious predecessors, Samson and the prophet Samuel. A life Nazarite was looked upon as a sanctified and holy personality. The Jews regarded a Nazarite with almost the respect and veneration accorded the high priest, and this was not strange since Nazarites of lifelong consecration were the only persons, except high priests, who were ever permitted to enter the holy of holies in the temple. 요한은 유명한 전임자들인 삼손Samson과 선지자 사무엘Samuel에게 행해졌던 것과 똑같은 종신 봉헌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종신(終身) 나실인은 신성하고 거룩한 인격(고유성)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실인을 거의 대제사장과 똑같은 존경과 경의를 가졌으며, 종신토록 봉헌된 나실인들이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전의 지성소(至聖所)holy of holies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35:1.3 (1497.1) John returned home from Jerusalem to tend his father’s sheep and grew up to be a strong man with a noble character. 요한은 아버지의 양들을 보살피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고결한 인격을 지닌 강한 남자로 성장했습니다.

135:1.4 (1497.2) When sixteen years old, John, as a result of reading about Elijah, became greatly impressed with the prophet of Mount Carmel and decided to adopt his style of dress. From that day on John always wore a hairy garment with a leather girdle. At sixteen he was more than six feet tall and almost full grown. With his flowing hair and peculiar mode of dress he was indeed a picturesque youth. And his parents expected great things of this their only son, a child of promise and a Nazarite for life. 16세가 되었을 때, 요한은 엘리야Elijah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갈멜Carmel산의 선지자에게 지대한 감명(感銘)을 받게 되어 그의 복장을 본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요한은 항상 가죽 허리띠를 두르고 털옷을 입었습니다.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1.8미터 이상으로 자랐고 거의 완전히 자랐습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특이한 옷 모습 때문에 그는, 정말로 눈길을 끄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약속의 아이이자 종신 나실인이었던 자신들의 외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2. The Death of Zacharias 사가랴의 죽음

170301 수요 예수80 사가랴의 죽음 & 목자의 생활 단2:31-33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135:2.1 (1497.3) After an illness of several months Zacharias died in July, A.D. 12, when John was just past eighteen years of age. This was a time of great embarrassment to John since the Nazarite vow forbade contact with the dead, even in one’s own family. Although John had endeavored to comply with the restrictions of his vow regarding contamination by the dead, he doubted that he had been wholly obedient to the requirements of the Nazarite order; therefore, after his father’s burial he went to Jerusalem, where, in the Nazarite corner of the women’s court, he offered the sacrifices required for his cleansing. 몇 달 동안 병을 앓은 후, 사가랴는 서기(西紀) 12년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요한은 막 18세가 되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 중에는 자신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에게 접촉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로 요한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비록 죽은 자 때문에 몸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하여 서약(誓約)했던 규율을 따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나실인 계층에게 요청되는 사항에 전적으로 복종했었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여인들의 뜰에 있는 나실인의 구역에서 자신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요구되는 희생물을 바쳤습니다.

135:2.2 (1497.4) In September of this year Elizabeth and John made a journey to Nazareth to visit Mary and Jesus. John had just about made up his mind to launch out in his lifework, but he was admonished, not only by Jesus’ words but also by his example, to return home, take care of his mother, and await the “coming of the Father’s hour.” After bidding Jesus and Mary good-bye at the end of this enjoyable visit, John did not again see Jesus until the event of his baptism in the Jordan. 이 해 9월에 엘리자벳Elizabeth과 요한John은 마리아Mary와 예수Jesus를 방문하러 나사렛Nazareth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한은 그의 일생의 임무에 착수하려고 거의 작정하다시피 하였지만, 예수께서 말 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인 본보기에 의해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아버지의 때가 도래하기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 즐거운 방문을 마치고 예수와 마리아에게 작별한 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건이 있기까지, 요한은 예수님을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135:2.3 (1497.5) John and Elizabeth returned to their home and began to lay plans for the future. Since John refused to accept the priest’s allowance due him from the temple funds, by the end of two years they had all but lost their home; so they decided to go south with the sheep herd. Accordingly, the summer that John was twenty years of age witnessed their removal to Hebron. In the so-called “wilderness of Judea” John tended his sheep along a brook that was tributary to a larger stream which entered the Dead Sea at Engedi. The Engedi colony included not only Nazarites of lifelong and time-period consecration but numerous other ascetic herdsmen who congregated in this region with their herds and fraternized with the Nazarite brotherhood. They supported themselves by sheep raising and from gifts which wealthy Jews made to the order. 요한과 엘리자벳은 집으로 돌아와 미래를 위한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이 성전 기금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제사장의 수당(手當) 받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2년 쯤 지난 후에는 그들의 집까지도 거의 처분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떼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20세 되던 그 해 여름에 그들은 헤브론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소위 “유대 광야”라고 불리는 곳에서, 요한은 엔게디로부터 사해(死海)로 합류하는 좀 더 큰 시냇물의 지류인 개울가를 따라 양을 쳤습니다. 엔게디 촌(거류민단)에는 종신(終身) 나실인들과 일시적으로 봉헌된 나실인들 뿐만이 아니라 금욕하는 수많은 다른 목자(牧者)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축 떼와 함께 이 지역에 모여서 나실인 형제회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치는 일과, 부유한 유대인이 그 계층에게 기증한 선물들로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135:2.4 (1497.6) As time passed, John returned less often to Hebron, while he made more frequent visits to Engedi. He was so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ajority of the Nazarites that he found it very difficult fully to fraternize with the brotherhood. But he was very fond of Abner, the acknowledged leader and head of the Engedi colony.시간이 지나자, 요한이 헤브론으로 돌아가는 횟수가 뜸해졌고 반면에 엔게디로 갈수록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나실인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는 그 형제회와 충분히 형제우애를 나누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엔게디 거류민단의 유명한 지도자이며 우두머리인 아브너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3. The Life of a Shepherd 목자의 생활

135:3.1 (1497.7) Along the valley of this little brook John built no less than a dozen stone shelters and night corrals, consisting of piled-up stones, wherein he could watch over and safeguard his herds of sheep and goats. John’s life as a shepherd afforded him a great deal of time for thought. He talked much with Ezda, an orphan lad of Beth-zur, whom he had in a way adopted, and who cared for the herds when he made trips to Hebron to see his mother and to sell sheep, as well as when he went down to Engedi for Sabbath services. John and the lad lived very simply, subsisting on mutton, goat’s milk, wild honey, and the edible locusts of that region. This, their regular diet, was supplemented by provisions brought from Hebron and Engedi from time to time. 이 작은 여울의 계곡을 따라, 요한은 12개가 넘는, 돌로 만든 움막과 돌을 쌓아서 밤을 지내기 위한 가축우리들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양떼와 염소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목자로서의 요한의 일생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스-주르의 고아(孤兒) 소년인 에즈다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떤 면으로는 그 소년을 이미 양자(養子)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요한이 안식일 경배를 드리려고 엔게디로 내려갔을 때는 물론이고, 어머니를 방문하거나 양을 팔기 위해 헤브론으로 갔을 때에도,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요한과 그 소년은 양고기, 염소우유, 석청, 그 지방의 식용 메뚜기를 먹으면서 매우 간소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해진 식사는 때때로 헤브론과 엔게디에서 가져오는 식량으로 보충되었습니다.

135:3.2 (1498.1) Elizabeth kept John posted about Palestinian and world affairs, and his conviction grew deeper and deeper that the time was fast approaching when the old order was to end; that he was to become the herald of the approach of a new age, “the kingdom of heaven.” This rugged shepherd was very partial to the writings of the Prophet Daniel. He read a thousand times Daniel’s description of the great image, which Zacharias had told him represented the history of the great kingdoms of the world, beginning with Babylon, then Persia, Greece, and finally Rome. John perceived that already was Rome composed of such polyglot peoples and races that it could never become a strongly cemented and firmly consolidated empire. He believed that Rome was even then divided, as Syria, Egypt, Palestine, and other provinces; and then he further read “in the days of these kings shall the God of heaven set up a kingdom which shall never be destroyed. And this kingdom shall not be left to other people but shall break in pieces and consume all these kingdoms, and it shall stand forever.”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s,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never shall be destroyed.” “And the kingdom and dominion and the greatness of the kingdom under the whole heaven shall be given to the people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whose kingdom is an everlasting kingdom, and all dominions shall serve and obey him.” 엘리자벳은 팔레스타인과 세상의 일상사에 대한 소식을 요한에게 계속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옛 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때가 빠르게 다가오면서, 그가 새 시대, “하늘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선포자가 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이 억센 목자는 선지자 다니엘의 글들을 특히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사가랴가 그에게 바빌론Babylon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Persia, 그리스Greece, 그리고 마침내 로마Rome까지 세상의 위대한 왕국들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말해 주었던, 다니엘의 커다란 우상에 대한 묘사를 천 번이나 읽었습니다. 요한은 로마Rome가 이미 다국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강하게 뭉쳐진 굳건한 통합된 제국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로마Rome가 앞으로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과 다른 영토들로 더 분열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는데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And in the days of these kings shall the God of heaven set up a kingdom, which shall never be destroyed: and the kingdom shall not be left to other people, but it shall break in pieces and consume all these kingdoms, and it shall stand for ever. (단2:4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단7:14),”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And the kingdom and dominion, and the greatness of the kingdom under the whole heaven, shall be given to the people of the saints of the most High, whose kingdom is an everlasting kingdom, and all dominions shall serve and obey him.(단7:27).”

135:3.3 (1498.2) John was never able completely to rise above the confusion produced by what he had heard from his parents concerning Jesus and by these passages which he read in the Scriptures. In Daniel he read: “I saw in the night visions,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But these words of the prophet did not harmonize with what his parents had taught him. Neither did his talk with Jesus, at the time of his visit when he was eighteen years old, correspond with these statements of the Scriptures. Notwithstanding this confusion, throughout all of his perplexity his mother assured him that his distant cousin, Jesus of Nazareth, was the true Messiah, that he had come to sit on the throne of David, and that he (John) was to become his advance herald and chief support. 요한은 예수에 관하여 부모로부터 들은 것과 성서에서 자기가 읽은 구절들 때문에 생긴 혼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에서 그는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幻想)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I saw in the night visions,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단7:13-14).”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의 말들은 자기 부모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18세에 예수를 방문하였을 때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도 역시 성서의 말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혼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을 일으킬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먼 사촌인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이고, 그는 장차 다윗의 왕좌에 앉을 것이며, 그(요한)는 그의 도래를 미리 알리는 자가 될 것이며 그를 지지하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135:3.4 (1498.3) From all John heard of the vice and wickedness of Rome and the dissoluteness and moral barrenness of the empire, from what he knew of the evil doings of Herod Antipas and the governors of Judea, he was minded to believe that the end of the age was impending. It seemed to this rugged and noble child of nature that the world was ripe for the end of the age of man and the dawn of the new and divine age — the kingdom of heaven. The feeling grew in John’s heart that he was to be the last of the old prophets and the first of the new. And he fairly vibrated with the mounting impulse to go forth and proclaim to all men: “Repent! Get right with God! Get ready for the end; prepare yourselves for the appearance of the new and eternal order of earth affairs, the kingdom of heaven.” 요한은 로마의 악덕과 사악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제국의 방탕함과 도덕적 결핍에 관하여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와 그가 알고 있는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 총독의 사악함으로부터, 그는 그 시대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것을 믿고 싶어 했습니다. 이 억세고 고결한 본성을 지닌 아이에게, 세상은 이제 사람의 시대가 끝나고 새롭고 신성한 시대─하늘의 왕국─가 동트기 위해 무르익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구(舊)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임과 동시에 새 시대의 첫 번째 선지자가 되리라는 느낌이 요한의 심정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박차고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하고 싶은 넘치는 충동이 끓어올라 무척 마음이 설렜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과 화해하라! 마지막 날을 위해 준비하고, 세상 일상사들의 새롭고 영원한 체제, 하늘의 왕국 도래를 위하여 너희 자신을 준비하라.”

4. The Death of Elizabeth 엘리자벳의 죽음

170308 수요 예수81 엘리자벳의 죽음 말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5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6 And he shall turn the heart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e heart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135:4.1 (1499.1) On August 17, A.D. 22, when John was twenty-eight years of age, his mother suddenly passed away. Elizabeth’s friends, knowing of the Nazarite restrictions regarding contact with the dead, even in one’s own family, made all arrangements for the burial of Elizabeth before sending for John. When he received word of the death of his mother, he directed Ezda to drive his herds to Engedi and started for Hebron. AD 22년 8월 17일, 요한이 28세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직계가족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없다는 나실인의 제약 조건들을 알고 있는 엘리자벳의 친구들은, 요한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전에 엘리자벳의 장례식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그가 어머니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에즈다에게 양떼들을 엔게디로 몰고 가도록 시켰고 자신은 헤브론으로 출발했습니다.

135:4.2 (1499.2) On returning to Engedi from his mother’s funeral, he presented his flocks to the brotherhood and for a season detached himself from the outside world while he fasted and prayed. John knew only of the old methods of approach to divinity; he knew only of the records of such as Elijah, Samuel, and Daniel. Elijah was his ideal of a prophet. Elijah was the first of the teachers of Israel to be regarded as a prophet, and John truly believed that he was to be the last of this long and illustrious line of the messengers of heaven.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엔게디로 돌아와서 그는 자기 양떼를 형제회에게 기증하고, 금식과 기도를 하면서 한 계절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었습니다. 요한은 신성(神性)에 접근하는 오래된 방식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사무엘, 다니엘의 기록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에게 선지자의 이상(理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로 여겼던 이스라엘의 선생들 중에서 첫째가는 사람이었으며, 요한은 자신이 하늘 왕국의 메신저(사자)로서의 이러한 장구하게 빛나는 계열의 마지막 선지자가 되리라고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135:4.3 (1499.3) For two and a half years John lived at Engedi, and he persuaded most of the brotherhood that “the end of the age was at hand”;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about to appear.” And all his early teaching was based upon the current Jewish idea and concept of the Messiah as the promised deliverer of the Jewish nation from the domination of their gentile rulers. 2년 반 동안, 요한은 엔게디에서 살았고, “그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것” 즉 “하늘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형제회 대부분의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초기의 모든 가르침들은, 당시의 유대 관념과, 그들의 이방 통치자의 손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구원하는 약속된 메시아의 개념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135:4.4 (1499.4) Throughout this period John read much in the sacred writings which he found at the Engedi home of the Nazarites. He was especially impressed by Isaiah and by Malachi, the last of the prophets up to that time. He read and reread the last five chapters of Isaiah, and he believed these prophecies. Then he would read in Malachi: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and he shall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ward the children and the hearts of the children toward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And it was only this promise of Malachi that Elijah would return that deterred John from going forth to preach about the coming kingdom and to exhort his fellow Jews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John was ripe for the proclamation of the message of the coming kingdom, but this expectation of the coming of Elijah held him back for more than two years. He knew he was not Elijah. What did Malachi mean? Was the prophecy literal or figurative? How could he know the truth? He finally dared to think that, since the first of the prophets was called Elijah, so the last should be known, eventually, by the same name. Nevertheless, he had doubts, doubts sufficient to prevent his ever calling himself Elijah. 이 기간 내내 요한은 나실인들의 본거지인 엔게디에서 자신이 발견한 성스러운 글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이사야와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다섯 장을 읽고 또 읽었으며, 그는 이 예언들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음의 구절을 말라기에서 읽었습니다. “보라,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요한은 엘리야가 돌아온다는 말라기의 약속 때문에 곧 도래할 왕국에 대해 설교하고,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앞으로 올 진노로부터 도망갈 것을 권고하러 나아가는 것을 철회하였습니다. 요한은 곧 도래할 왕국의 메시지를 바로 선포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앞으로 올 엘리야에 대한 기대가 그로 하여금 2년 이상이나 붙들어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말라기가 의미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예언은 문자그대로의 의미였을까? 아니면 상징적인 것이었을까?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그는 마침내 선지자들 중에서 첫 번째가 엘리야로 불렸으므로 마지막 선지자도 결국에는 같은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엘리야라고 부르지 않을 만큼, 그러한 생각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품었습니다.

135:4.5 (1499.5) It was the influence of Elijah that caused John to adopt his methods of direct and blunt assault upon the sins and vices of his contemporaries. He sought to dress like Elijah, and he endeavored to talk like Elijah; in every outward aspect he was like the olden prophet. He was just such a stalwart and picturesque child of nature, just such a fearless and daring preacher of righteousness. John was not illiterate, he did well know the Jewish sacred writings, but he was hardly cultured. He was a clear thinker, a powerful speaker, and a fiery denunciator. He was hardly an example to his age, but he was an eloquent rebuke. 요한이 그 시대의 사람들의 죄와 타락에 대해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공격 방법을 선택한 것은 엘리야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옷을 입었고 엘리야처럼 말하려고 애를 썼는데, 겉으로 보이는 모든 면에서 그는 옛 선지자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건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이었고,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담대한 정의로운 설교자였습니다. 요한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으며 유대의 거룩한 기록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으로 세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명철한 사색가였고 힘 있는 웅변가였으며 불같은 탄핵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전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설득력 있게 꾸짖었습니다.

135:4.6 (1499.6) At last he thought out the method of proclaiming the new age, the kingdom of God; he settled that he was to become the herald of the Messiah; he swept aside all doubts and departed from Engedi one day in March of A.D. 25 to begin his short but brilliant career as a public preacher.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나라 즉 새 시대를 선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는 자신이 메시아의 사자(선구자)가 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모든 의심을 쓸어버리고, AD 25년 3월 어느 날, 짧기는 하였지만 대중 설교자로서 눈부신 생애를 시작하기 위하여 엔게디를 떠났습니다.

5.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

170419 수요 예수82 마3:1-2 그 무렵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하고 외쳤다.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135:5.1 (1500.1) In order to understand John’s message, account should be taken of the status of the Jewish people at the time he appeared upon the stage of action.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ll Israel had been in a quandary; they were at a loss to explain their continuous subjugation to gentile overlords. Had not Moses taught that righteousness was always rewarded with prosperity and power? Were they not God’s chosen people? Why was the throne of David desolate and vacant? In the light of the Mosaic doctrines and the precepts of the prophets the Jews found it difficult to explain their long-continued national desolation. 요한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활동 무대에 나타났던 당시 유대 민족의 처지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거의 100년 동안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속 이방 군주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설명하기가 난처했습니다. 모세가 “공의righteousness는 반드시 번영과 권능으로 보상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아니었던가? 왜 다윗의 왕좌는 황폐한 상태로 비어 있었는가? 모세의 교리와 유대 선지자들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들은 오래 계속되고 있는 자신들의 민족적 처참함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움을 발견했습니다.

135:5.2 (1500.2) About one hundred years before the days of Jesus and John a new school of religious teachers arose in Palestine, the apocalyptists. These new teachers evolved a system of belief that accounted for the sufferings and humiliation of the Jews on the ground that they were paying the penalty for the nation’s sins. They fell back onto the well-known reasons assigned to explain the Babylonian and other captivities of former times. But, so taught the apocalyptists, Israel should take heart; the days of their affliction were almost over; the discipline of God’s chosen people was about finished; God’s patience with the gentile foreigners was about exhausted. The end of Roman rule was synonymous with the end of the age and, in a certain sense, with the end of the world. These new teachers leaned heavily on the predictions of Daniel, and they consistently taught that creation was about to pass into its final stage; the kingdoms of this world were about to become the kingdom of God. To the Jewish mind of that day this was the meaning of that phrase — the kingdom of heaven — which runs throughout the teachings of both John and Jesus. To the Jews of Palestine the phrase “kingdom of heaven” had but one meaning: an absolutely righteous state in which God (the Messiah) would rule the nations of earth in perfection of power just as he ruled in heaven —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예수와 요한의 시대보다 거의 1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학파의 종교 선생들, 종말론자(終末論者)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선생들은 유대인들이 민족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둔 신앙belief 체계를 개발하여, 유대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굴욕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바빌론과 기타 포로 생활을 설명하는데 사용된, 잘 알려진 이유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용기를 내야 한다. 고통의 날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 대한 단련은 거의 끝났으며,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도 거의 고갈되었다.” 로마 통치의 종료는 시대의 종료, 즉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새로 나타난 이 선생들은 다니엘의 예언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고, 창조는 그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의 왕국들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시종일관하게 가르쳤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이것이 요한과 예수님 두 분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는 관용구 – 하늘나라 –의 의미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하늘나라”라는 구절은 단지 한 가지의 의미(意味)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메시아)께서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것과 똑같이 완전한 권능으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국가─“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의미했습니다.

135:5.3 (1500.3) In the days of John all Jews were expectantly asking, “How soon will the kingdom come?” There was a general feeling that the end of the rule of the gentile nations was drawing near. There was present throughout all Jewry a lively hope and a keen expectation that the consummation of the desire of the ages would occur during the lifetime of that generation. 요한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모두 “그 나라가 언제 옵니까?”라고 기대하면서 물었습니다. 이방 나라의 통치는 곧 끝날 것이라는 느낌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온 유대 사회에는 오랜 세대 동안에 품어왔던 갈망이 그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성취되리라는 열렬한 소망과 강렬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135:5.4 (1500.4) While the Jews differed greatly in their estimates of the nature of the coming kingdom, they were alike in their belief that the event was impending, near at hand, even at the door. Many who read the Old Testament literally looked expectantly for a new king in Palestine, for a regenerated Jewish nation delivered from its enemies and presided over by the successor of King David, the Messiah who would quickly be acknowledged as the rightful and righteous ruler of all the world. Another, though smaller, group of devout Jews held a vastly different view of this kingdom of God. They taught that the coming kingdom was not of this world, that the world was approaching its certain end, and that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were to usher in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that this kingdom was to be an everlasting dominion, that sin was to be ended, and that the citizens of the new kingdom were to become immortal in their enjoyment of this endless bliss. 유대인들은 도래할 왕국의 성격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추측들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건은 절박하게 임박하였고 바로 문 앞에 가까이 왔다고 그들은 똑같이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적들로부터 해방되어 재건된 유대 국가를 위해 다윗왕의 후계자인 메시아로 새로운 왕이 팔레스타인에 나타나 다스릴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기대하였는데, 그 메시아는 온 세상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빨리 인정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믿음이 깊은 유대인의 다른 집단은,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래할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세상은 확실히 종말에 가까웠다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 나라 설립을 예고하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이 나라는 영속적인 주권이 될 것이고, 죄는 그치게 될 것이며, 새 나라의 시민들은 이러한 끝없는 축복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35:5.5 (1500.5) All were agreed that some drastic purging or purifying discipline would of necessity precede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kingdom on earth. The literalists taught that a world-wide war would ensue which would destroy all unbelievers, while the faithful would sweep on to universal and eternal victory. The spiritists taught that the kingdom would be ushered in by the great judgment of God which would relegate the unrighteous to their well-deserved judgment of punishment and final destruction, at the same time elevating the believing saints of the chosen people to high seats of honor and authority with the Son of Man, who would rule over the redeemed nations in God’s name. And this latter group even believed that many devout gentiles might be admitted to the fellowship of the new kingdom. 지상에서 새 나라가 설립되기 이전에, 어떤 철저한 정화(淨化) 혹은 정제(精製)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전쟁이 잇달아 일어나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멸망하는 반면에 신실히 믿는 자들은 우주적이며 영원한 승리로 압승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으로 그 나라가 임할 것과, 그 심판으로 불의한 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심판(審判)과 최종적 파멸로 추방되는 동시에, 선택된 백성들 중에서 믿는 성자(聖者)들은 사람의 아들과 함께 명예롭고 권위 있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며, 이 사람의 아들은 회복한 국가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집단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많이 새 나라의 친교에 들어오도록 허락될 수 있다고 믿기까지 하였습니다.

135:5.6 (1501.1) Some of the Jews held to the opinion that God might possibly establish this new kingdom by direct and divine intervention, but the vast majority believed that he would interpose some representative intermediary, the Messiah. And that was the only possible meaning the term Messiah could have had in the minds of the Jews of the generation of John and Jesus. Messiah could not possibly refer to one who merely taught God’s will or proclaimed the necessity for righteous living. To all such holy persons the Jews gave the title of prophet. The Messiah was to be more than a prophet; the Messiah was to bring in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kingdom, the kingdom of God. No one who failed to do this could be the Messiah in the traditional Jewish sense.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직접적인 신적 개입으로, 새로운 이 나라 설립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품었지만, 대다수는 중재(仲裁)하는 메시아가 대리인(代理人)으로 개입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과 예수님 세대 유대인들의 마음에서 메시아라는 용어가 지닌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거나 의로운 삶의 필요성을 선포하는 자를 언급할 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거룩한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은 선지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메시아는 선지자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메시아는 새 왕국,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이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누구라도 전통적인 유대인의 의미에서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135:5.7 (1501.2) Who would this Messiah be? Again the Jewish teachers differed. The older ones clung to the doctrine of the son of David. The newer taught that, since the new kingdom was a heavenly kingdom, the new ruler might also be a divine personality, one who had long sat at God’s right hand in heaven. And strange as it may appear, those who thus conceived of the ruler of the new kingdom looked upon him not as a human Messiah, not as a mere man, but as “the Son of Man” — a Son of God — a heavenly Prince, long held in waiting thus to assume the rulership of the earth made new. Such was the religious background of the Jewish world when John went forth proclaim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누가 이러한 메시아일 것인가? 유대 선생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교리에 집착했습니다. 새 선생들은, 새 나라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새 통치자 역시 신적인 인물,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쪽에 오래 앉아 계셨던 분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새 나라의 통치자를 이렇게 상상한 자들은 그가 인간 메시아, 즉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인 새로워진 땅을 통치하려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하늘의 영주로 보았습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였을 때, 유대 나라의 종교적 배경은 이상과 같았습니다.

135:5.8 (1501.3) It becomes apparent, therefore, that John’s announcement of the coming kingdom had not less than half a dozen different meanings in the minds of those who listened to his impassioned preaching. But no matter what significance they attached to the phrases which John employed, each of these various groups of Jewish-kingdom expectants was intrigued by the proclamations of this sincere, enthusiastic, rough-and-ready preacher of righteousness and repentance, who so solemnly exhorted his hearers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그러므로 다가오는 나라를 요한이 선포할 때, 그의 정열적 설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적어도 여섯 가지의 다른 뜻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사용한 구절에 그들이 어떤 의미(意味)를 부여했든지 상관없이, 이 유대 왕국을 기다리는 여러 집단은 각자, 성실하고, 열심이 있고, 올바름과 뉘우침을 부르짖는 이 투박한 설교자의 외침에 매료되었으며, 그는 청중에게 “다가올 진노로부터 도피하라.”고 매우 엄숙하게 훈계하였습니다.

6. John Begins to Preach 요한이 설교를 시작하다

170426 수요 예수83 눅3:2-3 2 안나스와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바로 그 무렵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들려왔다. 3 요한은 요단강 부근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죄를 용서받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2 during the high priesthood of Annas and Caiaphas, the word of God came to John son of Zechariah in the desert. 3 He went into all the country around the Jordan,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135:6.1 (1501.4) Early in the month of March, A.D. 25, John journeyed around the western coast of the Dead Sea and up the river Jordan to opposite Jericho, the ancient ford over which Joshua and the children of Israel passed when they first entered the promised land; and crossing over to the other side of the river, he established himself near the entrance to the ford and began to preach to the people who passed by on their way back and forth across the river. This was the most frequented of all the Jordan crossings. 서기 25년 3월 초기에, 요한은 사해 서쪽 해안의 주변을 따라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행하였는데, 그 강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약속된 땅에 처음 들어갈 때 건너갔던 고대의 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 저편으로 건너서, 여울 입구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강을 건너 오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요단 강을 건너는 모든 길목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이었습니다.

135:6.2 (1501.5) It was apparent to all who heard John that he was more than a preacher. The great majority of those who listened to this strange man who had come up from the Judean wilderness went away believing that they had heard the voice of a prophet. No wonder the souls of these weary and expectant Jews were deeply stirred by such a phenomenon. Never in all Jewish history had the devout children of Abraham so longed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or more ardently anticipated “the restoration of the kingdom.” Never in all Jewish history could John’s message,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have made such a deep and universal appeal as at the very time he so mysteriously appeared on the bank of this southern crossing of the Jordan.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요한은 설교자 이상의 사람임이 분명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올라온 이 낯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대다수(大多數)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으며 떠나갔습니다. 지친 가운데 고대하던 이 유대인의 혼들이 그런 현상에 깊이 마음이 흔들린 것은 당연했습니다. 온 유대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경건한 자손들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위로”를 고대(苦待)하거나 그렇게 열렬히 “나라가 회복되기”를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유대 역사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요한의 메시지가 요단 강 남쪽 둑을 건너 그렇게 신비롭게 나타난 바로 그 때처럼, 그렇게 깊고 널리 호소한 적도 없었습니다.

135:6.3 (1502.1) He came from the herdsmen, like Amos. He was dressed like Elijah of old, and he thundered his admonitions and poured forth his warnings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It is not surprising that this strange preacher created a mighty stir throughout all Palestine as the travelers carried abroad the news of his preaching along the Jordan. 그는 아모스처럼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옛날의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우렁차게 외쳤으며, 경고(警告)를 쏟아냈습니다. 이 이상한 설교자가 요단강 주변에서 설교한다는 소식을 여행자들이 널리 퍼뜨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 굉장한 동요가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35:6.4 (1502.2) There was still another and a new feature about the work of this Nazarite preacher: He baptized every one of his believers in the Jordan “for the remission of sins.” Although baptism was not a new ceremony among the Jews, they had never seen it employed as John now made use of it. It had long been the practice thus to baptize the gentile proselytes into the fellowship of the outer court of the temple, but never had the Jews themselves been asked to submit to the baptism of repentance. Only fifteen months intervened between the time John began to preach and baptize and his arrest and imprisonment at the instigation of Herod Antipas, but in this short time he baptized considerably over one hundred thousand penitents. 이 나실인 설교자의 활동에는 아주 특이한 새로운 특징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를 믿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요단강에 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세례가 유대인 사이에서 새로운 의식(儀式)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당시 요한이 시행하듯이 세례가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개종한 자들을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 성전 밖 뜰에서 세례를 주던 관습은 오래되었지만, 유대인 자신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요한이 설교와 세례를 시작한 때부터 헤롯 안티파스의 선동으로 체포되어 갇힐 때까지 겨우 15개월의 기간이었으나, 이 짧은 기간에 그는 10만 명이 훨씬 넘는 회개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35:6.5 (1502.3) John preached four months at Bethany ford before starting north up the Jordan. Tens of thousands of listeners, some curious but many earnest and serious, came to hear him from all parts of Judea, Perea, and Samaria. Even a few came from Galilee. 요한은 요단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베다니 개울가에서 4개월 동안 설교하였습니다. 수만 명의 청중들 중에는, 더러는 호기심 때문에 경청했지만, 많은 이들은 진정으로 진지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유대, 페레아, 사마리아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오기도 하였습니다.

135:6.6 (1502.4) In May of this year, while he still lingered at Bethany ford, the priests and Levites sent a delegation out to inquire of John whether he claimed to be the Messiah, and by whose authority he preached. John answered these questioners by saying: “Go tell your masters that you have hear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as spoken by the prophet, saying,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a highway for our God.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and every mountain and hill shall be brought low; the uneven ground shall become a plain, while the rough places shall become a smooth valley; and all flesh shall see the salvation of God.’” 이 해 5월에 그가 아직도 베다니 여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지 누구의 권위로 설교 하는지 물어 보기 위해 그에게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질문들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서 너희 주인들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이르라. 이는 선지자가 말씀한 바와 같으니, ‘주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부드러운 골짜기가 될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135:6.7 (1502.5) John was a heroic but tactless preacher. One day when he was preaching and baptizing on the west bank of the Jordan, a group of Pharisees and a number of Sadducees came forward and presented themselves for baptism. Before leading them down into the water, John, addressing them as a group said: “Who warned you to flee, as vipers before the fire, from the wrath to come? I will baptize you, but I warn you to bring forth fruit worthy of sincere repentance if you would receive the remission of your sins. Tell me not that Abraham is your father. I declare that God is able of these twelve stones here before you to raise up worthy children for Abraham. And even now is the ax laid to the very roots of the trees. Every tree that brings not forth good fruit is destined to be cut down and cast into the fire.” (The twelve stones to which he referred were the reputed memorial stones set up by Joshua to commemorate the crossing of the “twelve tribes” at this very point when they first entered the promised land.) 요한은 용맹스럽기는 하였지만, 재치가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요단강의 서쪽 강둑에서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있는 중에, 바리새인의 집단과 몇 명의 사두개인들이 앞으로 나와 세례를 받기 위해 그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을 물로 인도하기 전에, 요한은 그 집단 전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나는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인데, 경고하노니, 만약 너희가 속죄를 받으면 진지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는데, 하나님은 이 12개의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합당한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져질 운명이다.” (그가 언급한 12개의 돌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12 지파”들이 처음으로 언약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이 건너 간을 기념하기 위해 바로 그 지점에 세워 놓았던 돌들입니다.)

135:6.8 (1502.6) John conducted classes for his disciples, in the course of which he instructed them in the details of their new life and endeavored to answer their many questions. He counseled the teachers to instruct in the spirit as well as the letter of the law. He instructed the rich to feed the poor; to the tax gatherers he said: “Extort no more than that which is assigned you.” To the soldiers he said: “Do no violence and exact nothing wrongfully — be content with your wages.” While he counseled all: “Make ready for the end of the age —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그 선생들에게, 율법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함께 가르치도록 조언하였습니다. 그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먹일 것을 가르쳤으며,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해진 세금 이외에는 더 이상 걷지 말라.” 그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그 어떤 것도 그릇된 방법으로 강요하지 말라─너희들의 보수에 만족하라.”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시대의 종말을 위해 준비하라─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7. John Journeys North 요한이 북쪽으로 여행하다.

170510 수요 예수84 눅3:16-17 16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곧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17 자기 타작 마당에서 모든 곡식을 키질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16 John answered, saying unto them all, I indeed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ightier than I cometh, the latchet of whose shoes I am not worthy to unloose: he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Ghost and with fire: 17 Whose fan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roughly purge his floor, and will gather the wheat into his garner;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fire unquenchable.

135:7.1 (1503.1) John still had confused ideas about the coming kingdom and its king. The longer he preached the more confused he became, but never did this intellectual uncertainty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coming kingdom in the least lessen his conviction of the certainty of the kingdom’s immediate appearance. In mind John might be confused, but in spirit never. He was in no doubt about the coming kingdom, but he was far from certain as to whether or not Jesus was to be the ruler of that kingdom. As long as John held to the idea of the restoration of the throne of David, the teachings of his parents that Jesus, born in the City of David, was to be the long-expected deliverer, seemed consistent; but at those times when he leaned more toward the doctrine of a spiritual kingdom and the end of the temporal age on earth, he was sorely in doubt as to the part Jesus would play in such events. Sometimes he questioned everything, but not for long. He really wished he might talk it all over with his cousin, but that was contrary to their expressed agreement. 요한은 도래할 나라와 그 왕(王)에 대하여 여전히 혼동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오래 설교를 할수록 그는 더 혼동되었지만, 도래할 나라의 성격에 관한 지적(知的) 불확실성 때문에, 그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는 확신에 대한 그의 신념이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마음으로는 혼동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래할 나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그 나라의 통치자이실지 아니실 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다윗 왕좌의 복권에 대한 관념을 고수하는 한, 다윗의 도시에서 태어난 예수께서 그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 왔던 해방자라는 자신의 부모의 가르침은 시종일관하게 보였지만, 그 당시 그가 영적 나라의 교리와 지상의 일시적인 시대의 종말을 향해 마음이 더 많이 기울게 되자, 그러한 관련사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그는 모든 것이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자기 사촌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명백한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135:7.2 (1503.2) As John journeyed north, he thought much about Jesus. He paused at more than a dozen places as he traveled up the Jordan. It was at Adam that he first made reference to “another one who is to come after me” in answer to the direct question which his disciples asked him, “Are you the Messiah?” And he went on to say: “There will come after me one who is greater than I, whose sandal strap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loose.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his shovel is in his hand thoroughly to cleanse his threshing floor; he will gather the wheat into his garner, but the chaff will he burn up with the judgment fire.” 요한은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요단강을 거슬러 여행하면서 12번 이상이나 멈추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다른 분”이라고 아담에서 처음 언급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위대하시니,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노라.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 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자기 타작마당을 샅샅이 깨끗하게 하려고 그의 손에 삽을 들고 있느니라. 알곡은 곡간에 모아들이시겠지만, 쭉정이는 심판의 불에 태우시리라.”

135:7.3 (1503.3) In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his disciples John continued to expand his teachings, from day to day adding more that was helpful and comforting compared with his early and cryptic message: “Repent and be baptized.” By this time throngs were arriving from Galilee and the Decapolis. Scores of earnest believers lingered with their adored teacher day after day.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면서, 요한은 자신의 가르침을 계속 확장했는데,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초기의 모호한 메시지와 비교해서, 좀 더 유익과 위로가 되는 내용을 나날이 더했습니다. 이 무렵에, 군중들은 갈릴리와 데카폴리스에서부터 몰려왔습니다. 수십 명의 진지한 신도들은 존경하는 자기 선생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함께 머물렀습니다.

8. Meeting of Jesus and John예수님과 요한의 만남

170524 수요 예수85 마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17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135:8.1 (1503.4) By December of A.D. 25, when John reached the neighborhood of Pella in his journey up the Jordan, his fame had extended throughout all Palestine, and his work had become the chief topic of conversation in all the towns about the lake of Galilee. Jesus had spoken favorably of John’s message, and this had caused many from Capernaum to join John’s cult of repentance and baptism. James and John the fishermen sons of Zebedee had gone down in December, soon after John took up his preaching position near Pella, and had offered themselves for baptism. They went to see John once a week and brought back to Jesus fresh, firsthand reports of the evangelist’s work. 서기 25년 12월이 되어, 요한이 요단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펠라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의 명성은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퍼졌고, 그의 활동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모든 마을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메시지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 받는 요한의 종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어부 야고보와 요한도, 요한이 펠라 근처에서 설교할 자리를 잡은 바로 직후인 12월에 내려갔고, 세례 받으러 나셨습니다. 그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요한을 만나러 갔고, 그 복음 전도자의 활동에 대해 생생하게 직접 얻은 보고를 가지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135:8.2 (1503.5) Jesus’ brothers James and Jude had talked about going down to John for baptism; and now that Jude had come over to Capernaum for the Sabbath services, both he and James, after listening to Jesus’ discourse in the synagogue, decided to take counsel with him concerning their plans. This was on Saturday night, January 12, A.D. 26. Jesus requested that they postpone the discussion until the following day, when he would give them his answer. He slept very little that night, being in close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heaven. He had arranged to have noontime lunch with his brothers and to advise them concerning baptism by John. That Sunday morning Jesus was working as usual in the boatshop. James and Jude had arrived with the lunch and were waiting in the lumber room for him, as it was not yet time for the midday recess, and they knew that Jesus was very regular about such matters.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는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내려가는 것에 대해 서로 논의하였으며; 이제 유다가 안식일 경배를 드리기 위해 가버나움으로 건너 왔을 때, 그와 야고보는 회당에서 예수님의 강론을 들은 뒤에, 자신들의 계획에 대하여 예수님과 상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서기 26년 1월 12일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일로 논의를 미루자고 요청하면서, 그 때 대답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날 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긴밀히 교제 하면서 거의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는 한낮에 동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에 대하여 조언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그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배를 만드는 목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가 점심을 갖고 도착했지만 아직 점심 휴식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목재실(木材室)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 예수께서 얼마나 규칙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5:8.3 (1504.1) Just before the noon rest, Jesus laid down his tools, removed his work apron, and merely announced to the three workmen in the room with him, “My hour has come.” He went out to his brothers James and Jude, repeating, “My hour has come — let us go to John.” And they started immediately for Pella, eating their lunch as they journeyed. This was on Sunday, January 13. They tarried for the night in the Jordan valley and arrived on the scene of John’s baptizing about noon of the next day. 점심 휴식시간 바로 전에 예수님은 연장들을 내려놓고 작업복을 벗었으며, 그와 함께 작업장에 있던 세 명의 일꾼들에게 단지 “나의 때가 이르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동생들인 야고보와 유다에게 나가서 “나의 때가 이르렀으니 함께 요한에게로 가자.”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펠라를 향해 떠났고 여행하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1월 13일 일요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단 계곡에서 그 날 밤을 지냈고, 다음 날 정오 무렵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135:8.4 (1504.2) John had just begun baptizing the candidates for the day. Scores of repentants were standing in line awaiting their turn when Jesus and his two brothers took up their positions in this line of earnest men and women who had become believers in John’s preaching of the coming kingdom. John had been inquiring about Jesus of Zebedee’s sons. He had heard of Jesus’ remarks concerning his preaching, and he was day by day expecting to see him arrive on the scene, but he had not expected to greet him in the line of baptismal candidates. 요한은 그날의 후보자들에게 세례를 막 주기 시작했습니다. 몇 십 명의 회개자들이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고, 예수님과 그의 두 동생들도 이 대열 속에 서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은 다가올 나라에 대한 요한의 설교를 믿는 열성적인 남녀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관한 예수의 소견을 들었으며,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매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줄에서 예수님께 인사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135:8.5 (1504.3) Being engrossed with the details of rapidly baptizing such a large number of converts, John did not look up to see Jesus until the Son of Man stood in his immediate presence. When John recognized Jesus, the ceremonies were halted for a moment while he greeted his cousin in the flesh and asked, “But why do you come down into the water to greet me?” And Jesus answered, “To be subject to your baptism.” John replied: “But I have need to be baptized by you. Why do you come to me?” And Jesus whispered to John: “Bear with me now, for it becomes us to set this example for my brothers standing here with me, and that the people may know that my hour has come.” 그렇게 많은 개종자들에게 빠른 시간에 세례를 주는 세세한 일들에 열중하느라 요한은 바로 앞에 사람의 아들이 서실 때까지도 그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예식(禮式)은 잠시 중지되었고 그는 자신 육체의 사촌에게 인사하며 여쭈었습니다. “그렇지만 왜 당신이 나를 만나러 물속으로 내려오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의 세례를 받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째서 당신이 나에게 오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이제 참고 내 말을 들으라, 왜냐하면 이것은 나와 함께 여기에 서 있는 내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우리가 되고, 또한 사람들이 나의 때가 왔음을 알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

135:8.6 (1504.4) There was a tone of finality and authority in Jesus’ voice. John was atremble with emotion as he made ready to baptize Jesus of Nazareth in the Jordan at noon on Monday, January 14, A.D. 26. Thus did John baptize Jesus and his two brothers James and Jude. And when John had baptized these three, he dismissed the others for the day, announcing that he would resume baptisms at noon the next day. As the people were departing, the four men still standing in the water heard a strange sound, and presently there appeared for a moment an apparition immediately over the head of Jesus, and they heard a voice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A great change came over the countenance of Jesus, and coming up out of the water in silence he took leave of them, going toward the hills to the east. And no man saw Jesus again for forty days. 예수님의 음성은 단호하고 권위가 서려 있었습니다. 요한은 서기 26년 1월 14일, 월요일 정오에 요단강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준비를 하면서 감정에 북받쳐 전율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은 예수님과 그의 두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이들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그는 그날의 나머지 세례는 다음 날 정오에 계속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사람들이 떠나갈 때, 여전히 물속에 서있었던 네 사람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이내 하나의 환영(幻影)이 잠깐 예수의 머리 바로 위에 나타났으며, 그들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용모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물에서 나와 그들을 떠나서 동쪽의 언덕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예수님을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35:8.7 (1504.5) John followed Jesus a sufficient distance to tell him the story of Gabriel’s visit to his mother ere either had been born, as he had heard it so many times from his mother’s lips. He allowed Jesus to continue on his way after he had said, “Now I know of a certainty that you are the Deliverer.” But Jesus made no reply. 요한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입을 통하여 수없이 들어왔던 바와 같이, 둘 중에 어느 쪽도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앞에 나타났던 가브리엘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에게 해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이제 나는 당신이 구원자(해방자)임을 확실하게 알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예수께서 자기 길을 계속 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9. Forty Days of Preaching 40일간의 설교

170531 수요 예수86 요1:30-32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0 This is he of whom I said, After me cometh a man which is preferred before me: for he was before me. 31 And I knew him not: but that he should be made manifest to Israel, therefore am I come baptizing with water. 32 And John bare record, saying, I saw the Spirit descending from heaven like a dove, and it abode upon him.

135:9.1 (1505.1) When John returned to his disciples (he now had some twenty-five or thirty who abode with him constantly), he found them in earnest conference, discussing what had just happened in connection with Jesus’ baptism. They were all the more astonished when John now made known to them the story of the Gabriel visitation to Mary before Jesus was born, and also that Jesus spoke no word to him even after he had told him about this. There was no rain that evening, and this group of thirty or more talked long into the starlit night. They wondered where Jesus had gone, and when they would see him again. 요한이 자기 제자들(그 당시에 약 25-30명가량이 그와 항상 함께 거주하던)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세례와 관련되어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진지하게 토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때 요한이,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을 때, 또한 심지어 그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해 주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때, 그들은 더욱 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30여명 되는 이 사람들은 별이 빛나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디로 갔는지 언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135:9.2 (1505.2) After the experience of this day the preaching of John took on new and certain notes of proclamation concerning the coming kingdom and the expected Messiah. It was a tense time, these forty days of tarrying, waiting for the return of Jesus. But John continued to preach with great power, and his disciples began at about this time to preach to the overflowing throngs which gathered around John at the Jordan. 이 날의 체험 이후에, 요한의 설교는 새롭고도 확실한 어조로 다가올 나라와 기다리던 메시아에 관해 선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머물렀던 이 40일 은 매우 긴장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굉장한 권능으로 계속 설교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이 무렵에 요단강에서 요한 주위에 모여 넘쳐 흐르는 군중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35:9.3 (1505.3) In the course of these forty days of waiting, many rumors spread about the countryside and even to Tiberias and Jerusalem. Thousands came over to see the new attraction in John’s camp, the reputed Messiah, but Jesus was not to be seen. When the disciples of John asserted that the strange man of God had gone to the hills, many doubted the entire story. 이렇게 40일 동안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많은 소문들이 그 지방으로 퍼졌고, 그 소문들은 티베리아스와 예루살렘까지도 이르렀습니다. 수천의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야영지에 있다는 새로운 구경거리인 소문난 메시아를 보려고 모여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이상한 하나님의 사람이 산으로 갔다고 주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 전체를 의심하였습니다.

135:9.4 (1505.4) About three weeks after Jesus had left them, there arrived on the scene at Pella a new deputation from the priests and Pharisees at Jerusalem. They asked John directly if he was Elijah or the prophet that Moses promised; and when John said, “I am not,” they made bold to ask, “Are you the Messiah?” and John answered, “I am not.” Then said these men from Jerusalem: “If you are not Elijah, nor the prophet, nor the Messiah, then why do you baptize the people and create all this stir?” And John replied: “It should be for those who have heard me and received my baptism to say who I am, but I declare to you that, while I baptize with water, there has been among us one who will return to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예수께서 떠난 지 약 3주일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새로운 대표단이 펠라의 그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그가 엘리야인지 아니면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인지 직접 물었으며; 요한이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당신이 메시아인가?”라고 대담히 물었고, 요한은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온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메시아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이 모든 동요를 일으키느냐?”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나의 세례를 받은 자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겠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선언하는데,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반면에,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우리 가운데 있었느니라.”

135:9.5 (1505.5) These forty days were a difficult period for John and his disciples. What was to be the relation of John to Jesus? A hundred questions came up for discussion. Politics and selfish preferment began to make their appearance. Intense discussions grew up around the various ideas and concepts of the Messiah. Would he become a military leader and a Davidic king? Would he smite the Roman armies as Joshua had the Canaanites? Or would he come to establish a spiritual kingdom? John rather decided, with the minority, that Jesus had com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although he was not altogether clear in his own mind as to just what was to be embraced within this miss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heaven. 40일의 이 기간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요한의 관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수많은 질문들이 논의의 대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정치적 흥정과 이기적인 자리다툼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들과 개념을 둘러싸고 심각한 토론들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군사 지도자가 되어 다윗과 같은 왕이 될 것인가?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취했던 것과 같이, 그는 로마 군대를 무찌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영적 나라를 세우러 올 것인가? 요한 자신도 하늘나라의 설립에 관한 임무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하는지에 대하여 자기 마음을 확실히 정하고 있지 못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소수파와 함께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세우러 왔다고 결정했습니다.

135:9.6 (1505.6) These were strenuous days in John’s experience, and he prayed for the return of Jesus. Some of John’s disciples organized scouting parties to go in search of Jesus, but John forbade, saying: “Our times are in the hands of the God of heaven; he will direct his chosen Son.” 이러한 날들은 요한의 체험에서 격렬한 나날들이었으며, 그는 예수께서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찾으러 가기 위한 수색대를 조직하였으나, 요한은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때는 하늘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가 택한 아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135:9.7 (1505.7) It was early on the morning of Sabbath, February 23, that the company of John, engaged in eating their morning meal, looked up toward the north and beheld Jesus coming to them. As he approached them, John stood upon a large rock and, lifting up his sonorous voice, said: “Behold the Son of God, the deliverer of the world! This is he of whom I have said, ‘After me there will come one who is preferred before me because he was before me.’ For this cause came I out of the wilderness to preach repentance and to baptize with water, proclaiming that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And now comes one who sha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I beheld the divine spirit descending upon this man, and I heard the voice of God declare,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2월 23일 안식일 이른 아침에, 요한의 일행이 아침식사를 하는 중에 북쪽으로 올려보다가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자, 요한은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우렁찬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해방자)를 보라! 이 사람은 내가, ‘내 뒤에 나보다 더 앞선 분이 오시는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말해왔던 그 분이라. 이 때문에 내가 광야로부터 나와서 회개를 설교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노라. 그리고 이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느니라. 나는 성령이 이 분 위에 강림하는 것을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

135:9.8 (1506.1) Jesus bade them return to their food while he sat down to eat with John, his brothers James and Jude having returned to Capernaum. 예수님은 그들에게 식사를 계속하라고 말씀하시고, 한편 동생 야고보와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한과 함께 식사하시려고 앉으셨습니다.

135:9.9 (1506.2) Early in the morning of the next day he took leave of John and his disciples, going back to Galilee. He gave them no word as to when they would again see him. To John’s inquiries about his own preaching and mission Jesus only said, “My Father will guide you now and in the future as he has in the past.” And these two great men separated that morning on the banks of the Jordan, never again to greet each other in the flesh.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언제 다시 그들을 보게 될 것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설교와 사명에 대한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지난 날에 하신 것처럼 현재와 미래에도 너를 안내하실 것이다.” 이들 두 위대한 사람들은 그 날 아침 요단강 강변에서 헤어졌으며, 육신으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10. John Journeys South요한이 남쪽으로 여행가다

170607 수요 예수87 눅3:19-20 19 그러나 헤롯왕은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과 그 밖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로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도 20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둬 버렸다. 19 But when John rebuked Herod the tetrarch because of Herodias, his brother’s wife, and all the other evil things he had done, 20 Herod added this to them all: He locked John up in prison.

135:10.1 (1506.3) Since Jesus had gone north into Galilee, John felt led to retrace his steps southward. Accordingly, on Sunday morning, March 3, John and the remainder of his disciples began their journey south. About one quarter of John’s immediate followers had meantime departed for Galilee in quest of Jesus. There was a sadness of confusion about John. He never again preached as he had before baptizing Jesus. He somehow felt that the responsibility of the coming kingdom was no longer on his shoulders. He felt that his work was almost finished; he was disconsolate and lonely. But he preached, baptized, and journeyed on southward. 예수님께서는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셨기 때문에, 요한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따라서 3월 3일 일요일 아침에 요한과 나머지 제자들은 남쪽으로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그 동안에 요한의 가까운 제자들 중 사분의 일 정도는 예수님을 찾아 갈릴리로 떠났습니다. 요한에게서는 혼란에 빠진 슬픈 안색이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주기 이전에 행했던 것과 같은 설교를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쩐지 다가올 나라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거의 끝이 난 것같이 느껴졌으며, 마음 둘 곳을 잃었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면서 남쪽으로 계속 여행하였습니다.

135:10.2 (1506.4) Near the village of Adam, John tarried for several weeks, and it was here that he made the memorable attack upon Herod Antipas for unlawfully taking the wife of another man. By June of this year (A.D. 26) John was back at the Bethany ford of the Jordan, where he had begun his preaching of the coming kingdom more than a year previously. In the weeks following the baptism of Jesus the character of John’s preaching gradually changed into a proclamation of mercy for the common people, while he denounced with renewed vehemence the corrupt political and religious rulers. 아담이라는 마을 가까이에서 요한은 여러 주간 동안 머물렀으며, 헤롯 안티파스가 다른 사람의 부인을 부당하게 취한 것에 대해 이곳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해(서기 26년) 6월경에, 요한은 1년 전에, 다가올 나라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였던, 요단강의 베다니 개울가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이후 몇 주 동안, 요한의 설교의 특징은 점차 보통 사람들을 위한 자비의 선포로 바뀌어 갔으며, 반면에 그는 다시 되살아난 격렬함으로 부패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공공연히 비난하였습니다.

135:10.3 (1506.5) Herod Antipas, in whose territory John had been preaching, became alarmed lest he and his disciples should start a rebellion. Herod also resented John’s public criticisms of his domestic affairs. In view of all this, Herod decided to put John in prison. Accordingly, very early in the morning of June 12, before the multitude arrived to hear the preaching and witness the baptizing, the agents of Herod placed John under arrest. As weeks passed and he was not released, his disciples scattered over all Palestine, many of them going into Galilee to join the followers of Jesus. 요한은 헤롯의 영토에서 설교하였는데, 헤롯 안티파스는 그와 그의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헤롯은 자신의 가정 문제에 대해 요한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헤롯은 요한을 투옥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6월 12일 아주 이른 아침, 군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또 세례 주는 것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기 전에, 헤롯의 부하들이 요한을 체포하였습니다. 여러 주가 지나도 그가 석방되지 않게 되자, 그의 제자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려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11. John in Prison 감옥에 갇힌 요한

170614 수요 예수88 요3:26-36, 마11:2-6 2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3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4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고 하라. 6 그리고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일러 주어라.’ 2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Christ was doing, he sent his disciples 3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4 Jesus replied,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 5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 6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135:11.1 (1506.6) John had a lonely and somewhat bitter experience in prison. Few of his followers were permitted to see him. He longed to see Jesus but had to be content with hearing of his work through those of his followers who had become believers in the Son of Man. He was often tempted to doubt Jesus and his divine mission. If Jesus were the Messiah, why did he do nothing to deliver him from this unbearable imprisonment? For more than a year and a half this rugged man of God’s outdoors languished in that despicable prison. And this experience was a great test of his faith in, and loyalty to, Jesus. Indeed, this whole experience was a great test of John’s faith even in God. Many times was he tempted to doubt even the genuineness of his own mission and experience. 요한은 감옥에서 외로운 가운데 다소간 쓰라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거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었지만, 추종자들 가운데 사람의 아들을 믿게 된 자들을 통해서 그가 하는 일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종종 예수님과 그의 신적 사명에 대한 의심의 유혹(誘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어째서 견디기 어려운 이 감옥생활에서 자기를 구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 살던 억센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 경멸스러운 감옥에서 일 년 반 이상이나 있으면서 괴로운 생활 가운데 시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신앙과 충성에 대한 큰 시험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이 모든 체험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요한의 신앙까지 큰 시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체험의 순수성까지도 의심이 드는 유혹에 여러 번이나 빠졌었습니다.

135:11.2 (1507.1) After he had been in prison several months, a group of his disciples came to him and, after reporting concerning the public activities of Jesus, said: “So you see, Teacher, that he who was with you at the upper Jordan prospers and receives all who come to him. He even feasts with publicans and sinners. You bore courageous witness to him, and yet he does nothing to effect your deliverance.” But John answered his friends: “This man can do nothing unless it has been given him by his Father in heaven. You well remember that I said, ‘I am not the Messiah, but I am one sent on before to prepare the way for him.’ And that I did. H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but the friend of the bridegroom who stands near by and hears him rejoices greatly because of the bridegroom’s voice. This, my joy, therefore is fulfilled.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I am of this earth and have declared my message. Jesus of Nazareth comes down to the earth from heaven and is above us all. The Son of Man has descended from God, and the words of God he will declare to you. For the Father in heaven gives not the spirit by measure to his own Son. The Father loves his Son and will presently put all things in the hands of this Son. He who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And these words which I speak are true and abiding.” 그가 감옥에서 여러 달을 지낸 후, 요한의 제자들 한 무리가 그에게 찾아왔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공개적인 활동들에 대해 보고를 한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상류에 있던 사람이 성공하고 있으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함께 잔치를 합니다. 선생님은 그를 용감하게 증언하였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선생님의 해방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이 사람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하였던 대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너희들은 잘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나는 그것을 행하였느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지만, 신랑 친구는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기쁨이 이루어졌느니라. 그는 흥하여야만 하고 나는 쇠하여야만 하느니라. 나는 이 세상의 사람으로 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느니라. 나사렛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 와서 우리 모두 위에 계시느니라.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선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 영(靈)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셔서 즉시 이 아들의 손에 만물을 맡기시리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나의 말들은 진리이고 영구적인 것이니라.”

135:11.3 (1507.2) These disciples were amazed at John’s pronouncement, so much so that they departed in silence. John was also much agitated, for he perceived that he had uttered a prophecy. Never again did he wholly doubt the mission and divinity of Jesus. But it was a sore disappointment to John that Jesus sent him no word, that he came not to see him, and that he exercised none of his great power to deliver him from prison. But Jesus knew all about this. He had great love for John, but being now cognizant of his divine nature and knowing fully the great things in preparation for John when he departed from this world and also knowing that John’s work on earth was finished, he constrained himself not to interfere in the natural outworking of the great preacher-prophet’s career. 이 제자들은 요한의 선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너무 놀라서 그들 모두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갔습니다. 요한 역시 몹시 동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언의 말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의 사명과 신성에 대해 결코 송두리째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 말도 그에게 보내지 않는 점과 그를 만나러 오지 않는 점 그리고 그를 감옥에서 구하기 위해 큰 권능도 하나도 쓰지 않으신 점은 그에게 비통한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매우 사랑하셨지만, 이제는 자신의 신적 본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하면 그에게는 위대한 일들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또한 땅에서 요한의 일은 끝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설교자-선지자 생애의 자연스러운 끝마무리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자제하셨습니다.

135:11.4 (1507.3) This long suspense in prison was humanly unbearable. Just a few days before his death John again sent trusted messengers to Jesus, inquiring: “Is my work done? Why do I languish in prison? Are you truly the Messiah, or shall we look for another?” And when these two disciples gave this message to Jesus, the Son of Man replied: “Go back to John and tell him that I have not forgotten but to suffer me also this, for it becomes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ell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 that the poor have good tidings preached to them — and, finally, tell the beloved herald of my earth mission that he shall be abundantly blessed in the age to come if he finds no occasion to doubt and stumble over me.” And this was the last word John received from Jesus. This message greatly comforted him and did much to stabilize his faith and prepare him for the tragic end of his life in the flesh which followed so soon upon the heels of this memorable occasion. 감옥에서의 이러한 긴 불안 상태는, 인간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요한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사람들을 보내어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일은 끝난 것입니까? 왜 나는 감옥에서 괴로워해야만 합니까? 당신은 진정한 메시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들 두 제자들이 이 메시지를 예수님께 전했을 때, 사람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요한에게 돌아가서, 내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이 또한 나에게 고통이며, 이는 그것으로 우리가 모든 공의(公義)를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하라. 요한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 –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들었다는 것 – 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나의 지상 사명의 귀한 전령에게, 그가 나를 의심하거나 실족하지 않는다면, 그는 장차 다가올 시대에 넘치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전하라.” 이것이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그를 매우 안심시켰으며, 그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었고, 이 기억할 만한 사건 바로 직후에 일어났던 그의 육신의 일생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 그를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12. Death of John the Baptist 세례요한의 죽음

170621 수요 예수89 마14:5-12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5 Herod wanted to kill John, but he was afraid of the people, because they considered him a prophet. 6 On Herod’s birthday the daughter of Herodias danced for them and pleased Herod so much 7 that he promised with an oath to give her whatever she asked. 8 Prompted by her mother, she said, “Give me here on a platte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9 The king was distressed, but because of his oaths and his dinner guests, he ordered that her request be granted 10 and had John beheaded in the prison. 11 His head was brought in on a platter and given to the girl, who carried it to her mother. 12 John’s disciples came and took his body and buried it. Then they went and told Jesus.

135:12.1 (1508.1) As John was working in southern Perea when arrested, he was taken immediately to the prison of the fortress of Machaerus, where he was incarcerated until his execution. Herod ruled over Perea as well as Galilee, and he maintained residence at this time at both Julias and Machaerus in Perea. In Galilee the official residence had been moved from Sepphoris to the new capital at Tiberias. 요한이 남쪽 페레아에서 일하던 중에 체포되었을 때, 그는 즉시 마캐루스의 요새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졌고,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뿐 아니라 페레아도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 당시 페레아의 줄리아스와 마캐루스, 두 곳에 거처(居處)를 두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의 공관은, 세포리스로부터 새 수도인 티베리아스로 옮겼습니다.

135:12.2 (1508.2) Herod feared to release John lest he instigate rebellion. He feared to put him to death lest the multitude riot in the capital, for thousands of Pereans believed that John was a holy man, a prophet. Therefore Herod kept the Nazarite preacher in prison, not knowing what else to do with him. Several times John had been before Herod, but never would he agree either to leave the domains of Herod or to refrain from all public activities if he were released. And this new agitation concerning Jesus of Nazareth, which was steadily increasing, admonished Herod that it was no time to turn John loose. Besides, John was also a victim of the intense and bitter hatred of Herodias, Herod’s unlawful wife. 헤롯은 요한이 반란을 선동할까봐 그를 석방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수많은 페레아인들이 요한을 거룩한 사람 즉 선지자로 믿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헤롯은 그를 죽이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그를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 나실인 설교자를 계속 교도소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롯 앞에 불려갔었지만, 석방되는 경우라도, 자기가 헤롯의 영역을 떠나거나 혹은 모든 공공 활동들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새로운 민심의 동요는, 요한을 풀어주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점을 헤롯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게다가 요한은 또한 헤롯의 불륜 아내, 헤로디아스의 맹렬하고 극심한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135:12.3 (1508.3) On numerous occasions Herod talked with John about the kingdom of heaven, and while sometimes seriously impressed with his message, he was afraid to release him from prison. 헤롯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요한과 여러 번 이야기를 하였으며, 때때로 요한의 메시지에 매우 감명을 받기도 하였지만, 교도소에서 요한을 석방하기가 두려웠습니다.

135:12.4 (1508.4) Since much building was still going on at Tiberias, Herod spent considerable time at his Perean residences, and he was partial to the fortress of Machaerus. It was a matter of several years before all the public buildings and the official residence at Tiberias were fully completed. 티베리아스에서 많은 건축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은 페레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마캐루스 요새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공공건물들과 공관이 충분하게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135:12.5 (1508.5) In celebration of his birthday Herod made a great feast in the Machaerian palace for his chief officers and other men high in the councils of the government of Galilee and Perea. Since Herodias had failed to bring about John’s death by direct appeal to Herod, she now set herself to the task of having John put to death by cunning planning. 그의 생일 축하를 위해 헤롯은 갈릴리와 페레아의 정부 의회에서 주요 관리들과 기타 고위층을 마캐루스의 궁전에 불러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헤로디아스는 헤롯에게 요한을 죽여 달라는 자신의 직접적인 청원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요한을 죽이기 위하여 간악한 계획을 세우는 일에 직접 착수했습니다.

135:12.6 (1508.6) In the course of the evening’s festivities and entertainment, Herodias presented her daughter to dance before the banqueters. Herod was very much pleased with the damsel’s performance and, calling her before him, said: “You are charming. I am much pleased with you. Ask me on this my birthday for whatever you desire, and I will give it to you, even to the half of my kingdom.” And Herod did all this while well under the influence of his many wines. The young lady drew aside and inquired of her mother what she should ask of Herod. Herodias said, “Go to Herod and ask fo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And the young woman, returning to the banquet table, said to Herod, “I request that you forthwith give me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on a platter.” 헤로디아스는 저녁 잔치들과 연회의 순서 속에 자기 딸을 연회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도록 하였습니다. 헤롯은 처녀의 공연에 매우 심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매력이 있구나. 네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였으니, 나의 생일인 오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노라.” 헤롯은 포도주에 몹시 취한 그 기운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젊은 처녀는 물러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헤롯에게 구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헤로디아스는 말하였습니다. “헤롯에게 가서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그리고 젊은 처녀는 연회 식탁으로 돌아와서 헤롯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장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내게 주기를 요청하옵니다.”

135:12.7 (1508.7) Herod was filled with fear and sorrow, but because of his oath and because of all those who sat at meat with him, he would not deny the request. And Herod Antipas sent a soldier, commanding him to bring the head of John. So was John that night beheaded in the prison, the soldier bringing the head of the prophet on a platter and presenting it to the young woman at the rear of the banquet hall. And the damsel gave the platter to her mother. When John’s disciples heard of this, they came to the prison for the body of John, and after laying it in a tomb, they went and told Jesus. 헤롯은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자신이 맹세한 것과 그와 함께 앉아 회식하던 자들로 인하여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군인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요한은 교도소에서 목이 베어졌고, 그 군인은 선지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그것을 연회장 뒤에 있는 그 젊은 여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 처녀는 그 소반을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요한의 시체를 가지러 교도소로 왔으며, 그들은 요한의 시신을 무덤에 묻은 후에 예수님께 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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