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71 Development of the State 국가의 발전

Paper 71

Development of the State 국가의 발전

1. The Embryonic State 초기(初期미발달) 국가
2. The Evolution of Representative Government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진화
3. The Ideals of Statehood 국가의 이상(理想)들
4. Progressive Civilization 진보적 문명
5. The Evolution of Competition 경쟁의 진화
6. The Profit Motive 이익(利益) 동기(動機)
7. Education 교육
8. The Character of Statehood 국가의 특성

71:0.1 (800.1) THE state is a useful evolution of civilization; it represents society’s net gain from the ravages and sufferings of war. Even statecraft is merely the accumulated technique for adjusting the competitive contest of force between the struggling tribes and nations. 국가는 문명의 유익한 진화입니다. 전쟁의 참해(慘害참혹한 손해)와 재해(災害재앙으로 인한 피해)로부터 사회가 얻은 순(純)이익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국정(國政나라의 운영)조차 분투하는 부족들과 나라들 사이에서 경쟁하는 세력 다툼을 조절하는 축적된 기법일 뿐입니다.

71:0.2 (800.2) The modern state is the institution which survived in the long struggle for group power. Superior power eventually prevailed, and it produced a creature of fact — the state — together with the moral myth of the absolute obligation of the citizen to live and die for the state. But the state is not of divine genesis; it was not even produced by volitionally intelligent human action; it is purely an evolutionary institution and was wholly automatic in origin. 현대 국가는 집단 권력을 위해 오랜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도입니다. 결국 상위 권력이 이겼으며, 국가를 위해 살고 죽는 시민의 절대 의무(義務)라는 도덕적 신화와 함께, 그것은 현실의 창조물-국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신적 내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의지적 지능 인간 행위로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화적 제도이며 완전히 자동적으로 발생했습니다.

1. The Embryonic State 초기(初期미발달) 국가

71:1.1 (800.3) The state is a territorial social regulative organization, and the strongest, most efficient, and enduring state is composed of a single nation whose people have a common language, mores, and institutions. 국가는 지역적인 사회 규정 조직으로, 가장 강력하고 능률적이며 지속적인 국가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되며, 그 민족은 공통적 언어, 관습 및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71:1.2 (800.4) The early states were small and were all the result of conquest. They did not originate in voluntary associations. Many were founded by conquering nomads, who would swoop down on peaceful herders or settled agriculturists to overpower and enslave them. Such states, resulting from conquest, were, perforce, stratified; classes were inevitable, and class struggles have ever been selective. 초기의 국가들은 소규모로 모두 정복의 결과였습니다. 그것들은 자발적 연합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정복하는 유목민들이 여러 국가들을 세웠으며, 그들은 평화로운 목자들이나 정착한 농민들을 급습하여 제압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들곤 했습니다. 정복으로 생긴 그런 국가들은 부득이 층을 이루었습니다. 사회계급이 필연적이었고, 계급투쟁들이 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71:1.3 (800.5) The northern tribes of the American red men never attained real statehood. They never progressed beyond a loose confederation of tribes, a very primitive form of state. Their nearest approach was the Iroquois federation, but this group of six nations never quite functioned as a state and failed to survive because of the absence of certain essentials to modern national life, such as: 아메리카 홍인들 중 북쪽 부족들은 결코 실제적인 국가 지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느슨한 부족 동맹, 즉 아주 원시적인 국가 형태를 넘어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퀴이(북아메리카 원주민) 연맹이 국가에 가장 근접했었지만, 여섯 민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사실 국가로서 활동하지 못했고 살아남지 못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현대의 국가적 생존에 반드시 정해진 필수 요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71:1.4 (800.6) 1. Acquirement and inheritance of private property. 사유 재산의 취득과 상속.

71:1.5 (800.7) 2. Cities plus agriculture and industry. 도시들 이외에 농업과 산업.

71:1.6 (800.8) 3. Helpful domestic animals. 유용하게 사육되어 길든 동물들.

71:1.7 (800.9) 4. Practical family organization. These red men clung to the mother-family and nephew inheritance. 실용적인 가족 조직. 이 홍인들은 모계 가족과 조카 상속을 고수했습니다.

71:1.8 (800.10) 5. Definite territory. 한계가 뚜렷한 영토.

71:1.9 (800.11) 6. A strong executive head. 강력한 실행 지도자.

71:1.10 (800.12) 7. Enslavement of captives — they either adopted or massacred them. 포로들의 노예화 – 그들은 입양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71:1.11 (800.13) 8. Decisive conquests. 결정적인 정복들

71:1.12 (800.14) The red men were too democratic; they had a good government, but it failed. Eventually they would have evolved a state had they not prematurely encountered the more advanced civilization of the white man, who was pursuing the governmental methods of the Greeks and the Romans. 홍인들은 너무 민주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정치형태를 지녔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훨씬 진보한 백인의 문명과 너무 일찍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결국 서서히 국가를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백인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정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71:1.13 (801.1) The successful Roman state was based on: 성공적인 로마 국가는 다음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71:1.14 (801.2) 1. The father-family. 부계-가족.

71:1.15 (801.3) 2. Agriculture and the domestication of animals. 농업과 동물 길들이기.

71:1.16 (801.4) 3. Condensation of population — cities. 인구 집중 – 도시들.

71:1.17 (801.5) 4. Private property and land. 사유재산과 사유지.

71:1.18 (801.6) 5. Slavery — classes of citizenship. 노예 제도 – 시민 계급.

71:1.19 (801.7) 6. Conquest and reorganization of weak and backward peoples. 약하고 퇴보한 민족들을 정복하고 재조직.

71:1.20 (801.8) 7. Definite territory with roads. 도로들이 있는 한계가 뚜렷한 영토.

71:1.21 (801.9) 8. Personal and strong rulers. 개인적이고 강력한 통치자들.

71:1.22 (801.10) The great weakness in Roman civilization, and a factor in the ultimate collapse of the empire, was the supposed liberal and advanced provision for the emancipation of the boy at twenty-one and the unconditional release of the girl so that she was at liberty to marry a man of her own choosing or to go abroad in the land to become immoral. The harm to society consisted not in these reforms themselves but rather in the sudden and extensive manner of their adoption. The collapse of Rome indicates what may be expected when a state undergoes too rapid extension associated with internal degeneration. 로마 문명의 최대의 약점이자, 제국의 궁극적 붕괴의 요인은 자유롭게 앞 선 것으로 추정된 규정이었는데, 소년을 21세에 부권(父權)에서 해방하고, 소녀를 무조건 방임(放任돌보지 않고 내버려 둠)해서 소녀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남자와 결혼하거나 해외로 나가 부도덕하게 되도록, 제멋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 입은 손상(損傷)은 이 개혁들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갑자기 널리 채택한 방법에 있었습니다. 국가가 내부의 타락과 관련해서 너무 빠르게 확장하면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지 로마의 붕괴가 나타냅니다.

71:1.23 (801.11) The embryonic state was made possible by the decline of the blood bond in favor of the territorial, and such tribal federations were usually firmly cemented by conquest. While a sovereignty that transcends all minor struggles and group differences is the characteristic of the true state, still, many classes and castes persist in the later state organizations as remnants of the clans and tribes of former days. The later and larger territorial states had a long and bitter struggle with these smaller consanguineous clan groups, the tribal government proving a valuable transition from family to state authority. During later times many clans grew out of trades and other industrial associations. 지역을 위한 혈연 결속이 몰락하여 초기(初期미발달) 국가가 가능했으며, 그런 부족 연맹은 대개 정복으로 굳게 결합되었습니다. 모든 사소한 투쟁들과 집단의 차이점들을 초월하는 통치권이 참된 국가의 특성인 반면에, 여러 계급과 특권계급들이 이전 시대의 씨족들과 부족들의 흔적으로써 후대의 국가 조직들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더 큰 영토적 국가들은, 이런 작은 혈족의 씨족 집단들, 가족에서 국가 권위로 가치 있는 과도기(過渡期)임을 입증하는 부족 정부와 오랫동안 호된 투쟁들을 했습니다. 후대에 여러 씨족들은 상업 및 다른 산업적 조합에서 생겼습니다.

71:1.24 (801.12) Failure of state integration results in retrogression to prestate conditions of governmental techniques, such as the feudalism of the European Middle Ages. During these dark ages the territorial state collapsed, and there was a reversion to the small castle groups, the reappearance of the clan and tribal stages of development. Similar semistates even now exist in Asia and Africa, but not all of them are evolutionary reversions; many are the embryonic nucleuses of states of the future. 국가 통합의 실패의 결과는 중세 유럽 시대의 봉건 제도처럼, 통치 기법이 국가-이전의 상황으로 퇴보합니다. 이 암흑기에 지역적 국가는 붕괴했고, 작은 성(城) 집단들로 되돌아갔으며, 씨족 및 부족 단계의 발전이 재현(再現다시 나타남)되었습니다. 비슷한 준(準)국가들이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가 진화적으로 복귀한 것이 아닙니다. 다수는 미래 국가의 초기(初期미발달) 중심부분들이기 때문입니다.

2. The Evolution of Representative Government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진화

71:2.1 (801.13) Democracy, while an ideal, is a product of civilization, not of evolution. Go slowly! select carefully! for the dangers of democracy are: 민주주의는 이상(理想)인 동시에 문명의 산물이며, 진화의 산물이 아닙니다. 속도를 늦추십시오! 신중히 선택하십시오!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위험들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71:2.2 (801.14) 1. Glorification of mediocrity. 평범의 미화(美化).

71:2.3 (801.15) 2. Choice of base and ignorant rulers. 속되고 무지한 통치자들을 선출함.

71:2.4 (801.16) 3. Failure to recognize the basic facts of social evolution. 사회적 진화의 기본 사실들을 알아보지 못함.

71:2.5 (801.17) 4. Danger of universal suffrage in the hands of uneducated and indolent majorities. 일반적 선거권이 교육 받지 못한 게으른 대다수의 손에 있는 위험.

71:2.6 (801.18) 5. Slavery to public opinion; the majority is not always right. 여론에 예속(隷屬매임)됨, 대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71:2.7 (802.1) Public opinion, common opinion, has always delayed society; nevertheless, it is valuable, for, while retarding social evolution, it does preserve civilization. Education of public opinion is the only safe and true method of accelerating civilization; force is only a temporary expedient, and cultural growth will increasingly accelerate as bullets give way to ballots. Public opinion, the mores, is the basic and elemental energy in social evolution and state development, but to be of state value it must be nonviolent in expression. 여론, 일반적 견해가 항상 사회를 지연(遲延더디게 함)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여론이 소중한 이유는, 사회적 진화를 방해하면서도 문명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여론의 교육이 문명을 가속하는 안전하고 참된 유일한 방법입니다. 강압은 일시적 방편일 뿐이며 총알이 투표에 양보할 때 문화의 성장이 점차 가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론, 즉 관습은 사회적 진화와 국가 발전에서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에너지이지만, 국가에 유익되려면 비폭력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71:2.8 (802.2) The measure of the advance of society is directly determined by the degree to which public opinion can control personal behavior and state regulation through nonviolent expression. The really civilized government had arrived when public opinion was clothed with the powers of personal franchise. Popular elections may not always decide things rightly, but they represent the right way even to do a wrong thing. Evolution does not at once produce superlative perfection but rather comparative and advancing practical adjustment. 사회 진보의 척도는, 여론이 개인의 행실과 국가 규정을 비폭력적 표현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직접 결정됩니다. 여론이 개인적 선거권의 권능을 부여받을 때, 실제로 문명화된 정부가 도래했습니다. 대중 선거가 항상 바르게 사태를 결정할 수 없겠지만, 그릇된 일을 해도 그것들은 올바른 방식을 대표합니다. 진화는 즉시 최상의 완전함이 아니라 오히려 비교적 진보하는 실용적 조율을 낳습니다.

71:2.9 (802.3) There are ten steps, or stages, to the evolution of a practical and efficient form of representative government, and these are: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실용적이며 능률적 형태의 진화로 나아가는 10 단계 또는 국면(局面)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71:2.10 (802.4) 1. Freedom of the person. Slavery, serfdom, and all forms of human bondage must disappear. 개인의 자유. 노예제도, 농노(農奴) 및 모든 형태의 인간 속박은 사라져야 합니다.

71:2.11 (802.5) 2. Freedom of the mind. Unless a free people are educated — taught to think intelligently and plan wisely — freedom usually does more harm than good. 마음의 자유. 속박 없는 민족이 교육 – 지적으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계획하도록 –되지 않으면, 자유는 대개 유익하기보다 해롭습니다.

71:2.12 (802.6) 3. The reign of law. Liberty can be enjoyed only when the will and whims of human rulers are replaced by legislative enactments in accordance with accepted fundamental law. 법의 통치. 인간 통치자들의 의지와 변덕이, 일반에게 인정된 기본법에 따르는 입법부의 법규로 대체될 때에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71:2.13 (802.7) 4. Freedom of speech. Representative government is unthinkable without freedom of all forms of expression for human aspirations and opinions. 언론의 자유. 인간의 열망과 견해를 표현하는 모든 형태의 자유 없이는 대의정치(代議政治)를 고려할 가치가 없습니다.

71:2.14 (802.8) 5. Security of property. No government can long endure if it fails to provide for the right to enjoy personal property in some form. Man craves the right to use, control, bestow, sell, lease, and bequeath his personal property. 재산의 보장. 어떤 형태로 개인적 재산을 누릴 권리를 제공하지 못하면 어떤 정부도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개인 재산을 사용하고 통제하며 증여하고 팔고 빌려주며 물려줄 권리를 열망합니다.

71:2.15 (802.9) 6. The right of petition. Representative government assumes the right of citizens to be heard. The privilege of petition is inherent in free citizenship. 청원권(請願權 국민이 법률에 정한 절차에 따라 손해의 구제, 공무원의 파면, 법률·명령·규칙 등의 제정이나 개폐 따위의 일을 국회·관공서·지방 의회 따위에 청구하는 권리). 대의정치는 시민들이 말할 권리를 마땅히 여깁니다. 청원권은 자유 시민권에 본래적입니다.

71:2.16 (802.10) 7. The right to rule. It is not enough to be heard; the power of petition must progress to the actual management of the government. 통치권(統治權).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청원 권력은 정부를 실제로 관리하는 데까지 진보해야만 합니다.

71:2.17 (802.11) 8. Universal suffrage. Representative government presupposes an intelligent, efficient, and universal electorate. The character of such a government will ever be determined by the character and caliber of those who compose it. As civilization progresses, suffrage, while remaining universal for both sexes, will be effectively modified, regrouped, and otherwise differentiated. 일반적 선거권. 대의정치(代議政治)는 지능적이며, 유능하고, 일반적 유권자를 전제로 합니다. 정부(政府)를 구성하는 자들의 특성과 역량으로 그런 정부의 특성이 늘 결정될 것입니다. 남녀 양성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남아있는 선거권은, 문명의 진보에 따라, 효과적으로 수정되고 재편되며, 그렇지 않으면 분화(分化)될 것입니다.

71:2.18 (802.12) 9. Control of public servants. No civil government will be serviceable and effective unless the citizenry possess and use wise techniques of guiding and controlling officeholders and public servants. 공복(公僕공무원)들을 통제함. 시민들이 관공리(官公吏)들과 공복(公僕공무원)들을 이끌고 통제하는 현명한 기법을 소유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부도 실용적이며 효과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71:2.19 (802.13) 10. Intelligent and trained representation. The survival of democracy is dependent on successful representative government; and that is conditioned upon the practice of electing to public offices only those individuals who are technically trained, intellectually competent, socially loyal, and morally fit. Only by such provisions can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be preserved. 지능적이며 훈련된 대표단. 민주주의의 생존은 성공적인 대의정치(代議政治)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적으로 훈련되고, 지적으로 유능하며, 사회적으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적합한 그런 개인들만을 공직(公職국가 및 공공단체의 직무)으로 선출하는 관례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준비에 의해서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1. The Ideals of Statehood 국가의 이상(理想)들

71:3.1 (803.1) The political or administrative form of a government is of little consequence provided it affords the essentials of civil progress — liberty, security, education, and social co-ordination. It is not what a state is but what it does that determines the course of social evolution. And after all, no state can transcend the moral values of its citizenry as exemplified in their chosen leaders. Ignorance and selfishness will insure the downfall of even the highest type of government. 정부의 정치적 또는 경영적 형태가 시민 진보에 필수적인 해방, 안전, 교육 및 사회적 통합을 제공한다면 거의 대수롭지 않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무엇을 하는가?’가 사회적 진화의 과정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택한 지도자들로 예증되듯이, 어떤 국가도 시민의 도덕적 가치들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무지와 이기심은 최고 유형의 정부라도 반드시 멸망시킬 것입니다.

71:3.2 (803.2) Much as it is to be regretted, national egotism has been essential to social survival. The chosen people doctrine has been a prime factor in tribal welding and nation building right on down to modern times. But no state can attain ideal levels of functioning until every form of intolerance is mastered; it is everlastingly inimical to human progress. And intolerance is best combated by the co-ordination of science, commerce, play, and religion.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국가적 이기주의는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선민(選民택한 민족) 신조는 현대까지 부족의 결속과 국가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모든 형태의 편협성을 통달할 때에 비로소 국가는 이상적 활동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보에 끝없이 해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편협을 상대로 항쟁하는 최선은 과학, 상업, 놀이 및 종교의 협조입니다.

71:3.3 (803.3) The ideal state functions under the impulse of three mighty and co-ordinated drives: 이상적인 국가는 다음 강력하게 통합하는 세 가지 추진력의 충동으로 작용합니다.

71:3.4 (803.4) 1. Love loyalty derived from the realization of human brotherhood. 인간 형제 사랑의 실현에서 기원된 사랑의 충성.

71:3.5 (803.5) 2. Intelligent patriotism based on wise ideals. 현명한 이상(理想)에 근거한 지능적 애국심.

71:3.6 (803.6) 3. Cosmic insight interpreted in terms of planetary facts, needs, and goals. 행성의 사실, 필요 및 목표의 관점에서 해석된 질서우주 통찰력.

71:3.7 (803.7) The laws of the ideal state are few in number, and they have passed out of the negativistic taboo age into the era of the positive progress of individual liberty consequent upon enhanced self-control. The exalted state not only compels its citizens to work but also entices them into profitable and uplifting utilization of the increasing leisure which results from toil liberation by the advancing machine age. Leisure must produce as well as consume. 이상적 국가의 법은 그 수(數)가 거의 없으며, 부정적 금기 시대에서 벗어나, 강화된 자아-조정의 결과로 일어난 개인적 자유의 적극적 진보의 시대로 옮겨갔습니다. 높은 수준의 국가는 시민들이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진보하는 기계 시대로 인해 노고에서 해방의 결과로 늘어난 여가를 유익하고 상향(上向)적으로 사용하도록 그들을 이끕니다. 여가는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해야만 합니다.

71:3.8 (803.8) No society has progressed very far when it permits idleness or tolerates poverty. But poverty and dependence can never be eliminated if the defective and degenerate stocks are freely supported and permitted to reproduce without restraint. 나태(懶怠)를 허용하거나 빈곤을 묵인하면, 어떤 사회도 아주 멀리까지 진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함이 있고 퇴화한 혈통들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자유롭게 생식(生殖)을 허용하면, 빈곤과 의존성은 결코 제거할 수 없게 됩니다.

71:3.9 (803.9) A moral society should aim to preserve the self-respect of its citizenry and afford every normal individual adequate opportunity for self-realization. Such a plan of social achievement would yield a cultural society of the highest order. Social evolution should be encouraged by governmental supervision which exercises a minimum of regulative control. That state is best which co-ordinates most while governing least. 도덕 사회는 시민의 자아-존중을 보존하고, 모든 정상적 개인들에게 자아-실현의 적절한 기회 제공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사회적 성취 계획은 가장 높은 계층의 문화적 사회를 낳을 것입니다. 최소한으로 규제적 통제를 행사하는 정치적 감독으로 사회적 진화를 촉진해야만 합니다. 최소로 다스리면서 최고로 통합하는 국가가 최선입니다.

71:3.10 (803.10) The ideals of statehood must be attained by evolution, by the slow growth of civic consciousness, the recognition of the obligation and privilege of social service. At first men assume the burdens of government as a duty, following the end of the administration of political spoilsmen, but later on they seek such ministry as a privilege, as the greatest honor. The status of any level of civilization is faithfully portrayed by the caliber of its citizens who volunteer to accept the responsibilities of statehood. 국가의 이상(理想)들은 진화로, 시민 의식, 즉 사회적 봉사의 의무와 특권에 대한 인식이 완만히 성장하여 도달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정부의 부담을 정치적 이권(利權) 운동자들의 경영 목표를 따라 의무로 떠맡지만, 나중에 그들은 그런 직무를 특권, 즉 가장 큰 명예로써 추구합니다. 문명화 수준의 상태는 국가의 책임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시민들의 역량으로 충실히 표현됩니다.

71:3.11 (803.11) In a real commonwealth the business of governing cities and provinces is conducted by experts and is managed just as are all other forms of economic and commercial associations of people. 국민에 속한 다른 모든 형태의 경제적 상업적 협회들처럼 참된 민주 국가(연방聯邦 자치권을 가진 여러 국가가 연합하여 구성한 국가. 공통의 주권을 가지며, 대내적으로는 상호 독립의 관계를 가지면서 대외적으로는 국제법상의 외교권을 가지는 단일 주권적 연합 국가)에서는 전문가들이 도시들과 지방들을 다스리는 직무를 수행하고 관리합니다.

71:3.12 (803.12) In advanced states, political service is esteemed as the highest devotion of the citizenry. The greatest ambition of the wisest and noblest of citizens is to gain civil recognition, to be elected or appointed to some position of governmental trust, and such governments confer their highest honors of recognition for service upon their civil and social servants. Honors are next bestowed in the order named upon philosophers, educators, scientists, industrialists, and militarists. Parents are duly rewarded by the excellency of their children, and purely religious leaders, being ambassadors of a spiritual kingdom, receive their real rewards in another world. 진보적 국가에서는 정치적 봉사가 시민의 가장 최고의 헌신으로 존중됩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고상한 시민들의 가장 큰 포부(抱負)는 시민의 인정을 얻고, 정부가 위임한 어떤 지위에 선출되거나 지명되는 것이며, 그런 정부들은 시민 및 사회의 공무원들에게 봉사를 인정하는 최고의 서훈(敍勳훈장)을 수여합니다. 그 다음의 서훈(敍勳훈장)은 철학자들, 교육자들, 과학자들, 산업인들 및 군인들에게 수여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경칭(敬稱존대의 칭호)으로 정당하게 보상받으며, 영적 (하나님)나라의 대사(大使)들인 순수한 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그들의 실제 보상들을 받습니다.

4. Progressive Civilization 진보적 문명

71:4.1 (804.1) Economics, society, and government must evolve if they are to remain. Static conditions on an evolutionary world are indicative of decay; only those institutions which move forward with the evolutionary stream persist. 경제, 사회 및 정부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진화되어야 합니다. 진화 세계에서 정지된 상황은 부패의 표지입니다. 진화의 흐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제도들만이 살아남습니다.

71:4.2 (804.2) The progressive program of an expanding civilization embraces: 확장하는 문명의 진보 과정은 다음을 포함합니다.

71:4.3 (804.3) 1. Preservation of individual liberties. 개인적 해방의 보존.

71:4.4 (804.4) 2. Protection of the home. 가정의 보호.

71:4.5 (804.5) 3. Promotion of economic security. 경제적 안전의 증진.

71:4.6 (804.6) 4. Prevention of disease. 질병의 예방.

71:4.7 (804.7) 5. Compulsory education. 의무 교육.

71:4.8 (804.8) 6. Compulsory employment. 의무 고용.

71:4.9 (804.9) 7. Profitable utilization of leisure. 여가 시간의 유익한 활용.

71:4.10 (804.10) 8. Care of the unfortunate. 불우한 자들을 보살핌.

71:4.11 (804.11) 9. Race improvement. 인종 개량.

71:4.12 (804.12) 10. Promotion of science and art. 과학과 예술의 증진.

71:4.13 (804.13) 11. Promotion of philosophy — wisdom. 철학 – 지혜의 증진.

71:4.14 (804.14) 12. Augmentation of cosmic insight — spirituality. 질서우주 통찰력 – 영성(靈性)의 증대.

71:4.15 (804.15) And this progress in the arts of civilization leads directly to the realization of the highest human and divine goals of mortal endeavor — the social achievement of the brotherhood of man and the personal status of God-consciousness, which becomes revealed in the supreme desire of every individual to do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그리고 문명의 기술에서 이런 진보는 필사자가 노력하는 최고의 인간적·신적 목표들의 실현으로 직접 인도합니다. 필사자 노력의 목표들은 인간의 형제 사랑과 하나님을 의식하는 개인적 상태의 사회적 성취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모든 개인들의 최극 열망으로 계시됩니다.

71:4.16 (804.16) The appearance of genuine brotherhood signifies that a social order has arrived in which all men delight in bearing one another’s burdens; they actually desire to practice the golden rule. But such an ideal society cannot be realized when either the weak or the wicked lie in wait to take unfair and unholy advantage of those who are chiefly actuated by devotion to the service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n such a situation only one course is practical: The “golden rulers” may establish a progressive society in which they live according to their ideals while maintaining an adequate defense against their benighted fellows who might seek either to exploit their pacific predilections or to destroy their advancing civilization. 참된 형제 사랑의 출현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짐을 기쁘게 감당하는 사회적 질서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황금률을 실천하려고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善)의 봉사에 헌신하여 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연약한 자들이나 사악한 자들이 부당하게 터무니없이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그런 이상적 사회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한 가지 과정만이 실질적입니다. 그 “황금률을 지키는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그들의 선호(選好)도를 이용하거나 진보하는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려는 미개한 동료들에 대항하여 적절히 방어하면서 그들의 이상들에 따라 살면서 진보적 사회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71:4.17 (804.17) Idealism can never survive on an evolving planet if the idealists in each generation permit themselves to be exterminated by the baser orders of humanity. And here is the great test of idealism: Can an advanced society maintain that military preparedness which renders it secure from all attack by its war-loving neighbors without yielding to the temptation to employ this military strength in offensive operations against other peoples for purposes of selfish gain or national aggrandizement? National survival demands preparedness, and religious idealism alone can prevent the prostitution of preparedness into aggression. Only love, brotherhood, can prevent the strong from oppressing the weak. 더 낮은 계층의 인간들이 각 세대의 이상주의자들을 몰살하도록 허용하면, 진화하는 행성에서 이상주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상주의의 가장 큰 시험이 있습니다. 이기적 이득이나 국가적 증대의 목적을 위해 다른 민족을 공격하는 작전으로 이 군사력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좋아하는 이웃들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히 방어하면서 군사적으로 대비하는 진보적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 국가적 생존은 전시에 대한 대비를 필요로 하며 종교적 이상주의(理想主義)만이 대비(對備미리 준비함)가 침략으로 악용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즉 형제사랑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게 막을 수 있습니다.

  1. The Evolution of Competition 경쟁의 진화

71:5.1 (805.1) Competition is essential to social progress, but competition, unregulated, breeds violence. In current society, competition is slowly displacing war in that it determines the individual’s place in industry, as well as decreeing the survival of the industries themselves. (Murder and war differ in their status before the mores, murder having been outlawed since the early days of society, while war has never yet been outlawed by mankind as a whole.) 경쟁은 사회적 진보에 필수적이지만, 규제되지 않는 경쟁은 폭력을 발생시킵니다. 현재 사회에서, 경쟁이 산업들 자체의 생존을 정할 뿐 아니라 산업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경쟁은 점차 전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살인과 전쟁은 관습 앞에서 그 지위가 다른데, 살인은 사회의 초기 시절 이후로 금지된 반면에 전쟁은 인류 전체로서 지금까지 금지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71:5.2 (805.2) The ideal state undertakes to regulate social conduct only enough to take violence out of individual competition and to prevent unfairness in personal initiative. Here is a great problem in statehood: How can you guarantee peace and quiet in industry, pay the taxes to support state power, and at the same time prevent taxation from handicapping industry and keep the state from becoming parasitical or tyrannical? 이상(理想)적 국가는 개인적 경쟁에서 폭력을 없애고, 고유적 창의성에서 불공정을 예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사회적 행위를 규정하는 책임을 집니다. 여기에 국가의 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산업에서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고, 국가 권력을 지원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동시에 산업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과세를 막으면서 국가가 기생충이나 폭군이 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71:5.3 (805.3) Throughout the earlier ages of any world, competition is essential to progressive civilization. As the evolution of man progresses, co-operation becomes increasingly effective. In advanced civilizations co-operation is more efficient than competition. Early man is stimulated by competition. Early evolution is characterized by the survival of the biologically fit, but later civilizations are the better promoted by intelligent co-operation, understanding fraternity, and spiritual brotherhood. 어떤 세상에서도 초기 시대에는 내내, 경쟁이 진보적 문명에 필수적입니다. 사람의 진화가 진척되면서, 협력이 점차 효과를 나타냅니다. 진보한 문명들에서는, 협력이 경쟁보다 훨씬 능률적입니다. 초기 사람은 경쟁으로 자극됩니다. 초기 진화는 생물학적으로 적합해야 살아남는 특성을 지니지만, 후대의 문명들은 지능적 협력, 분별력 있는 형제 관계 및 영적 형제사랑으로 더 낫게 증진됩니다.

71:5.4 (805.4) True, competition in industry is exceedingly wasteful and highly ineffective, but no attempt to eliminate this economic lost motion should be countenanced if such adjustments entail even the slightest abrogation of any of the basic liberties of the individual. 사실, 산업에서 경쟁은 매우 낭비가 많고 심히 비효율적이지만, 이 경제적 손실 활동을 제거하려는 그런 조율들이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아주 조금이라도 폐지한다면, 그런 시도를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6. The Profit Motive 이익(利益) 동기(動機)

71:6.1 (805.5) Present-day profit-motivated economics is doomed unless profit motives can be augmented by service motives. Ruthless competition based on narrow-minded self-interest is ultimately destructive of even those things which it seeks to maintain. Exclusive and self-serving profit motivation is incompatible with Christian ideals — much more incompatible with the teachings of Jesus. 봉사(奉仕) 동기(動機)들이 이익(利益) 동기(動機)들을 강화하지 않으면 오늘날 이익에 동기(動機)가 부여된 경제는 운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편협한 자아-이익에 토대를 둔 무자비한 경쟁은, 경쟁이 유지하려는 것들까지 궁극적으로 파괴시킵니다. 배타적인 자아-봉사 이익 동기는 기독교 이상(理想)과 모순되며 –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더욱 모순됩니다.

71:6.2 (805.6) In economics, profit motivation is to service motivation what fear is to love in religion. But the profit motive must not be suddenly destroyed or removed; it keeps many otherwise slothful mortals hard at work. It is not necessary, however, that this social energy arouser be forever selfish in its objectives. 경제에서 이익 동기와 봉사 동기의 관계는, 종교에서 두려움과 사랑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익 동기는 갑자기 파괴되거나 제거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대다수의 게으른 필사자들을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회적 에너지 격려제가 그 목적들에서 언제나 이기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71:6.3 (805.7) The profit motive of economic activities is altogether base and wholly unworthy of an advanced order of society; nevertheless, it is an indispensable factor throughout the earlier phases of civilization. Profit motivation must not be taken away from men until they have firmly possessed themselves of superior types of nonprofit motives for economic striving and social serving — the transcendent urges of superlative wisdom, intriguing brotherhood, and excellency of spiritual attainment. 진보한 사회 계층에게, 경제 활동의 이익 동기는 모두 수준이 낮고 전부 어울리지 않지만, 그것은 문명의 초기 단계들 내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경제적 노력과 사회적 봉사 – 최상의 지혜, 매력적인 형제사랑 및 영적 도달의 탁월성을 위해 뛰어난 유형의 비(非)이익 동기들을 스스로 견고하게 갖출 때까지는 사람들로부터 이익 동기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7. Education 교육

71:7.1 (806.1) The enduring state is founded on culture, dominated by ideals, and motivated by service. The purpose of education should be acquirement of skill, pursuit of wisdom, realization of selfhood, and attainment of spiritual values. 오래 지속적인 국가는, 이상(理想)이 두드러지고, 봉사의 동기를 지닌, 문화에 근거를 둡니다. 교육의 목적은, 기술 습득, 지혜 추구, 자아실현 및 영적 가치의 도달이 되어야 합니다.

71:7.2 (806.2) In the ideal state, education continues throughout life, and philosophy sometime becomes the chief pursuit of its citizens. The citizens of such a commonwealth pursue wisdom as an enhancement of insight into the significance of human relations, the meanings of reality, the nobility of values, the goals of living, and the glories of cosmic destiny. 이상(理想)적인 국가에서 교육은 평생 계속되고 때때로 그 시민들은 주로 철학을 추구합니다. 그런 민주 국가의 시민들은, 인간관계의 중요성, 실체의 의미들, 가치의 고결함, 삶의 목표들 및 질서우주 운명의 영광들을 간파하는 통찰력의 강화로써 지혜를 추구합니다.

71:7.3 (806.3) Urantians should get a vision of a new and higher cultural society. Education will jump to new levels of value with the passing of the purely profit-motivated system of economics. Education has too long been localistic, militaristic, ego exalting, and success seeking; it must eventually become world-wide, idealistic, self-realizing, and cosmic grasping. 지구(유란시아)인들은 새롭고 높은 문명사회의 전망(展望)을 가져야 합니다. 교육은, 순전히 이익 동기의 경제 체제를 지나가면서 새로운 가치의 수준들로 도약할 것입니다. 교육은 너무 오랫동안 지방(地方)편중(偏重)적, 군사(軍事)우선(優先)주의적, 자기(自己)찬미(讚美) 및 성공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반드시 세계적(世界的), 이상적(理想的), 자아(自我)-실현(實現)적 및 질서우주를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71:7.4 (806.4) Education recently passed from the control of the clergy to that of lawyers and businessmen. Eventually it must be given over to the philosophers and the scientists. Teachers must be free beings, real leaders, to the end that philosophy, the search for wisdom, may become the chief educational pursuit. 교육은 최근에 성직자의 통제에서 법률가와 사업가의 통제로 이탈(離脫)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 양도(讓渡)되어야만 합니다. 철학, 지혜의 탐구가 교육의 주된 추구(追求)가 될 수 있도록 끝까지, 교사들은 자유로운 존재, 참된 지도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71:7.5 (806.5) Education is the business of living; it must continue throughout a lifetime so that mankind may gradually experience the ascending levels of mortal wisdom, which are: 교육은 생활의 직무입니다. 그것은 평생 내내 계속 이어져야하며, 그래서 인류는 점차 상승하는 필사자 지혜의 수준을 다음과 같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71:7.6 (806.6) 1. The knowledge of things. 사물들에 대한 지식.

71:7.7 (806.7) 2. The realization of meanings. 의미들의 자각(自覺).

71:7.8 (806.8) 3. The appreciation of values. 가치들의 판단.

71:7.9 (806.9) 4. The nobility of work — duty. 일의 숭고함 – 의무.

71:7.10 (806.10) 5. The motivation of goals — morality. 목표들의 동기부여(動機附輿) – 도덕성.

71:7.11 (806.11) 6. The love of service — character. 봉사 사랑 – 성품.

71:7.12 (806.12) 7. Cosmic insight — spiritual discernment. 질서우주적 통찰력 – 영적 분별력.

71:7.13 (806.13) And then, by means of these achievements, many will ascend to the mortal ultimate of mind attainment, God-consciousness. 그리고 그 후 이런 성취로, 많은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의 궁극적 마음 도달까지 상승할 것입니다.

8. The Character of Statehood 국가의 특성

71:8.1 (806.14) The only sacred feature of any human government is the division of statehood into the three domains of executive, legislative, and judicial functions. The universe is administered in accordance with such a plan of segregation of functions and authority. Aside from this divine concept of effective social regulation or civil government, it matters little what form of state a people may elect to have provided the citizenry is ever progressing toward the goal of augmented self-control and increased social service. The intellectual keenness, economic wisdom, social cleverness, and moral stamina of a people are all faithfully reflected in statehood. 어떤 인간 정부라도 유일하게 지닌 신성한 특성은 국가를 행정과 입법 및 사법 기능의 세 영역으로 분할한 것입니다. 우주는 기능과 권한을 그렇게 분리하는 계획에 따라서 경영됩니다. 효과적인 사회 규정 또는 시민 정부의 이 신적 개념을 제외하고, 시민이 강화된 자아-통제 및 증진된 사회봉사의 목표를 향해 항상 진보하고 있다면, 국민이 선택한 국가의 형태가 어떠한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의 지적(知的) 예민성, 경제적 지혜, 사회적 능숙함 및 도덕적 끈기는 모두 국가에 충실히 반영됩니다.

71:8.2 (806.15) The evolution of statehood entails progress from level to level, as follows: 국가의 진화는 다음과 같이 단계별 진보를 필요로 합니다.

71:8.3 (806.16) 1. The creation of a threefold government of executive, legislative, and judicial branches.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의 삼중적 정부의 창립.

71:8.4 (806.17) 2. The freedom of social, political, and religious activities. 사회적, 정치적, 및 종교적 활동의 자유.

71:8.5 (807.1) 3. The abolition of all forms of slavery and human bondage.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와 인간 속박 폐지.

71:8.6 (807.2) 4. The ability of the citizenry to control the levying of taxes. 세금 징수를 통제할 일반시민의 능력.

71:8.7 (807.3) 5. The establishment of universal education — learning extended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보편적 교육의 확립 – 요람에서 무덤까지 확장된 학습.

71:8.8 (807.4) 6. The proper adjustment between local and national governments. 지방과 국가 정부 사이의 적절한 조율.

71:8.9 (807.5) 7. The fostering of science and the conquest of disease. 과학의 육성과 질병의 정복.

71:8.10 (807.6) 8. The due recognition of sex equality and the co-ordinated functioning of men and women in the home, school, and church, with specialized service of women in industry and government. 성적(性的) 평등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산업과 정부에서 여성들의 전문적 봉사와 더불어, 가정, 학교 및 교회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통합적 활동.

71:8.11 (807.7) 9. The elimination of toiling slavery by machine invention and the subsequent mastery of the machine age. 기계의 발명과 연속적인 기계 시대의 숙달로 고생스러운 노예 상태를 제거함.

71:8.12 (807.8) 10. The conquest of dialects — the triumph of a universal language. 지방 사투리의 정복 – 보편적 언어의 승리.

71:8.13 (807.9) 11. The ending of war — international adjudication of national and racial differences by continental courts of nations presided over by a supreme planetary tribunal automatically recruited from the periodically retiring heads of the continental courts. The continental courts are authoritative; the world court is advisory — moral. 전쟁의 종료 – 대륙 법정들에서 정기적으로 은퇴하는 지도자들 중에서 자동적으로 모집된 최극 행성 재판소가 관할하는 국가들의 대륙적 법정들이 국가적·인종적 차이를 국제적으로 판결함. 대륙적 법정들은 권위가 있습니다. 세계 법정은 도덕적으로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71:8.14 (807.10) 12. The world-wide vogue of the pursuit of wisdom — the exaltation of philosophy. The evolution of a world religion, which will presage the entrance of the planet upon the earlier phases of settlement in light and life.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지혜 추구 – 철학의 찬미. 행성이 빛과 생명의 초기 단계에 정착하여 진입하는 전조(前兆징조)가 될 세계 종교의 진화.

71:8.15 (807.11) These are the prerequisites of progressive government and the earmarks of ideal statehood. Urantia is far from the realization of these exalted ideals, but the civilized races have made a beginning — mankind is on the march toward higher evolutionary destinies. 이것들이 진보적 정부의 선행조건들이며 이상적 국가의 특징입니다. 지구(유란시아)는 이렇게 고귀한 이상(理想)들의 실현과 아주 다르지만, 문명화된 인종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인류는 더 높은 진화적 운명들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71:8.16 (807.12) [Sponsored by a Melchizedek of Nebadon.][네바돈의 멜기세덱이 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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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2 Government on a Neighboring Planet 이웃 행성의 정부(政府)

Paper 72

Government on a Neighboring Planet  이웃 행성의 정부(政府)

1. The Continental Nation 대륙 국가
2. Political Organization 정치적 조직
3. The Home Life 가정 생활
4. The Educational System 교육 체계
5. Industrial Organization 산업 조직
6. Old-Age Insurance 노년(老年) 보험
7. Taxation 과세(課稅)
8. The Special Colleges 특수 대학들
9. The Plan of Universal Suffrage 일반 선거권의 계획
10. Dealing with Crime 범죄 정책
11. Military Preparedness 군비(軍備군사 대비)
12. The Other Nations 다른 나라들

72:0.1 (808.1) BY PERMISSION of Lanaforge and with the approval of the Most Highs of Edentia, I am authorized to narrate something of the social, moral, and political life of the most advanced human race living on a not far-distant planet belonging to the Satania system. 라나훠지의 허락과 에덴시아 지고자의 승인으로, 사타니아 체계에 속했으며 멀지 않은 행성에 사는 가장 진보된 인간 종족의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 중 일부를 내가 이야기하도록 권한을 받았습니다.

72:0.2 (808.2) Of all the Satania worlds which became isolated because of participation in the Lucifer rebellion, this planet has experienced a history most like that of Urantia. The similarity of the two spheres undoubtedly explains why permission to make this extraordinary presentation was granted, for it is most unusual for the system rulers to consent to the narration on one planet of the affairs of another. 루시퍼의 반란에 참여하여 고립된 전(全) 사타니아 세계들 중에서, 이 행성은 지구(유란시아)와 가장 비슷한 역사를 겪었습니다. 이 특별한 발표가 허락된 이유의 설명은 분명히 두 구체의 유사성 때문인데, 체계 통치자들이 한 행성에 다른 행성의 업무를 말하도록 동의하는 일은 아주 예외적이기 때문입니다.

72:0.3 (808.3) This planet, like Urantia, was led astray by the disloyalty of its Planetary Prince in connection with the Lucifer rebellion. It received a Material Son shortly after Adam came to Urantia, and this Son also defaulted, leaving the sphere isolated, since a Magisterial Son has never been bestowed upon its mortal races. 루시퍼 반란과 관련하여 이 행성도 행성 왕자가 불충하여 지구(유란시아)처럼 타락했습니다. 아담이 지구(유란시아)에 도착한 직후 물질 아들이 이 행성에 도착했으며, 이 아들도 불이행(不履行태만)하여, 그 구체가 고립되었는데, 치안(治安) 아들이 그 행성의 필사 종족들에게 증여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입니다.

1. The Continental Nation 대륙 국가

72:1.1 (808.4) Notwithstanding all these planetary handicaps a very superior civilization is evolving on an isolated continent about the size of Australia. This nation numbers about 140 million. Its people are a mixed race, predominantly blue and yellow, having a slightly greater proportion of violet than the so-called white race of Urantia. These different races are not yet fully blended, but they fraternize and socialize very acceptably. The average length of life on this continent is now ninety years, fifteen per cent higher than that of any other people on the planet. 이 행성의 모든 불리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아주 우수한 문명이 대략 오스트레일리아 규모의 고립된 대륙에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인구는 약 140,000,000명입니다. 그 민족은 주로 청인과 황인으로 혼합된 인종이며, 지구(유란시아)에서 소위 백색 인종보다 보라색 (혈통) 비율이 약간 더 많습니다. 이 다양한 인종들은 아직 충분히 혼합되지 않았지만, 아주 흡족하게 형제처럼 사귀며 친교를 나눕니다. 이 대륙에서 평균 수명은 현재 90년이며, 그 행성에 사는 다른 민족보다 15퍼센트 높습니다.

72:1.2 (808.5) The industrial mechanism of this nation enjoys a certain great advantage derived from the unique topography of the continent. The high mountains, on which heavy rains fall eight months in the year, are situated at the very center of the country. This natural arrangement favors the utilization of water power and greatly facilitates the irrigation of the more arid western quarter of the continent. 이 나라의 산업 구조는 대륙의 독특한 지형으로부터 특정한 혜택을 크게 누립니다. 연 8개월간 호우(豪雨줄기차게 퍼붓는 비)가 내리는 높은 산맥이 그 나라 한 복판에 있습니다. 이 자연적 배치로 수력의 활용이 용이하고, 대륙의 건조한 서쪽 4분의 1에 관개(灌漑물을 끌어댐)가 아주 수월합니다.

72:1.3 (808.6) These people are self-sustaining, that is, they can live indefinitely without importing anything from the surrounding nations. Their natural resources are replete, and by scientific techniques they have learned how to compensate for their deficiencies in the essentials of life. They enjoy a brisk domestic commerce but have little foreign trade owing to the universal hostility of their less progressive neighbors. 이 국민들은 자아-유지, 즉 그들은 주변국에서 아무 것도 수입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천연 자원은 충분하며, 과학 기술로 본질적인 생활의 부족들을 메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활발한 국내 교역을 누리지만, 그들보다 덜 진보한 이웃 국가들의 전반적 적개심 때문에 외국 무역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72:1.4 (808.7) This continental nation, in general, followed the evolutionary trend of the planet: The development from the tribal stage to the appearance of strong rulers and kings occupied thousands of years. The unconditional monarchs were succeeded by many different orders of government — abortive republics, communal states, and dictators came and went in endless profusion. This growth continued until about five hundred years ago when, during a politically fermenting period, one of the nation’s powerful dictator-triumvirs had a change of heart. He volunteered to abdicate upon condition that one of the other rulers, the baser of the remaining two, also vacate his dictatorship. Thus was the sovereignty of the continent placed in the hands of one ruler. The unified state progressed under strong monarchial rule for over one hundred years, during which there evolved a masterful charter of liberty. 이 대륙 국가는 대체로 행성의 진화적 추세를 따랐습니다. 부족 단계에서 강력한 통치자들과 왕들이 출현하기까지 수 천 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절대 군주들을 다른 여러 계층의 정부(政府)가 뒤따랐는데 – 실패로 끝난 공화국들, 공동 정부(政府) 및 독재자들이 끝없이 허다하게 왔다가 갔습니다. 약 500년 전까지 이런 성장이 계속되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국가의 강력한 독재자-3집정관(執政官) 중 하나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다른 통치자들 중 하나, 즉 남은 둘 중 낮은 자 역시 독재권을 사퇴한다는 조건 하에 자발적으로 퇴임했습니다. 그래서 대륙의 주권이 한 통치자에게 맡겨졌습니다. 통합 국가는 100년 이상 강한 군주 통치 아래에서 진보했으며, 그 동안 훌륭한 자유 헌장(憲章약속의 규범)을 서서히 발전시켰습니다.

72:1.5 (809.1) The subsequent transition from monarchy to a representative form of government was gradual, the kings remaining as mere social or sentimental figureheads, finally disappearing when the male line of descent ran out. The present republic has now been in existence just two hundred years, during which time there has been a continuous progression toward the governmental techniques about to be narrated, the last developments in industrial and political realms having been made within the past decade. 그 후 군주제에서 대의제 형태의 정부로 점차 전환되어, 왕들은 단순히 사회적 또는 정서적 명목상의 대표자로 남았으며, 남성 계통의 혈통이 끝나자 결국 사라졌습니다. 현(現) 공화국은 꼭 200년 되었는데, 그 동안 이야기 하려는 정부(政府)의 기법들을 향하여 계속 진보했으며, 산업과 정치 영역에서 최근의 발전은 지난 10년 이내에 이루어졌습니다.

2. Political Organization 정치적 조직

72:2.1 (809.2) This continental nation now has a representative government with a centrally located national capital. The central government consists of a strong federation of one hundred comparatively free states. These states elect their governors and legislators for ten years, and none are eligible for re-election. State judges are appointed for life by the governors and confirmed by their legislatures, which consist of one representative for each one hundred thousand citizens. 이 대륙 국가는, 중앙에 위치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지금 대의 정부(政府)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앙 정부(政府)는 상당히 자주적인 100개 주(州)의 강력한 연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주(州)들은 10년 임기의 주지사들과 입법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며, 누구도 재선될 수 없습니다. 주 재판관들은 주지사들의 종신 임명과 시민 100,000명 당 대표 1인으로 구성된 입법부의 승인을 받습니다.

72:2.2 (809.3) There are five different types of metropolitan government, depending on the size of the city, but no city is permitted to have more than one million inhabitants. On the whole, these municipal governing schemes are very simple, direct, and economical. The few offices of city administration are keenly sought by the highest types of citizens. 도시의 크기에 따라 5가지 다른 유형의 도시(市) 정부(政府)가 있지만, 1 백만 거주민 이상의 도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들 자치도시 정부(政府) 기획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경제적입니다. 최고 유형의 시민들이 소수의 도시 경영 공직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72:2.3 (809.4) The federal government embraces three co-ordinate divisions: executive, legislative, and judicial. The federal chief executive is elected every six years by universal territorial suffrage. He is not eligible for re-election except upon the petition of at least seventy-five state legislatures concurred in by the respective state governors, and then but for one term. He is advised by a supercabinet composed of all living ex-chief executives. 연방 정부(政府)는 세 개의 통합 부서, 행정부와 입법부 및 사법부를 포함합니다. 연방 정부의 수반(首班)은 6년마다 전체 지역 투표로 선출됩니다. 그는 75개 이상의 주(州) 의원들의 요청과 각 주(州)지사들의 동의(同意)의 경우를 제외하고 재선(再選)될 수 없지만, 그 때는 단 한 번의 임기(任期)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전직(前職) 수반(首班)들로 구성된 초(超)내각이 그에게 조언합니다.

72:2.4 (809.5) The legislative division embraces three houses: 입법부는 다음 3개의 의회를 포함합니다.

72:2.5 (809.6) 1. The upper house is elected by industrial, professional, agricultural, and other groups of workers, balloting in accordance with economic function. 상원(上院)은 산업, 전문직, 농업 및 다른 집단의 노동자들이 선출하며, 경제적 활동에 따라 투표합니다.

72:2.6 (809.7) 2. The lower house is elected by certain organizations of society embracing the social, political, and philosophic groups not included in industry or the professions. All citizens in good standing participate in the election of both classes of representatives, but they are differently grouped, depending on whether the election pertains to the upper or lower house. 하원(下院)은 산업이나 전문직을 제외한 사회적, 정치적 및 철학적 집단들을 포함하는 특정한 사회 조직체들이 선출합니다. 정상적 신분의 모든 시민들은 두 부류의 대표자들 선출에 참여하지만, 그 선거가 상원(上院) 또는 하원(下院) 어디에 관계되었느냐에 따라 그들은 다르게 분류됩니다.

72:2.7 (809.8) 3. The third house — the elder statesmen — embraces the veterans of civic service and includes many distinguished persons nominated by the chief executive, by the regional (subfederal) executives, by the chief of the supreme tribunal, and by the presiding officers of either of the other legislative houses. This group is limited to one hundred, and its members are elected by the majority action of the elder statesmen themselves. Membership is for life, and when vacancies occur, the person receiving the largest ballot among the list of nominees is thereby duly elected. The scope of this body is purely advisory, but it is a mighty regulator of public opinion and exerts a powerful influence upon all branches of the government. 제 3원(院), 즉 원로 정치가들은 노련한 시민 봉사자들을 받아들이고, 수반(首班), 지역(하위 연방) 실행자들, 최고 재판소장 및 상하 양원(兩院)을 관할하는 관리들이 추천하는 여러 저명한 인사들을 포함합니다. 이 집단은 100명으로 제한되며, 원로 정치가들 자체의 다수결(多數決) 행위로 그 회원들을 선출합니다. 회원자격은 종신(終身)으로, 공석(空席)이 발생하면, 지명자 목록 중 최다득표자가 그에 따라 정식으로 선출됩니다. 이 단체의 범위는 조언뿐이지만, 강력하게 여론을 단속하고 정부의 모든 지부(支部)에 유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72:2.8 (810.1) Very much of the federal administrative work is carried on by the ten regional (subfederal) authorities, each consisting of the association of ten states. These regional divisions are wholly executive and administrative, having neither legislative nor judicial functions. The ten regional executives are the personal appointees of the federal chief executive, and their term of office is concurrent with his — six years. The federal supreme tribunal approves the appointment of these ten regional executives, and while they may not be reappointed, the retiring executive automatically becomes the associate and adviser of his successor. Otherwise, these regional chiefs choose their own cabinets of administrative officials. 각각 10개의 관련된 주(州)들로 구성된, 10개의 지역(하위 연방) 당국들이 연방 경영 업무의 대부분을 수행합니다. 이 지역 부서들은 전부 실행과 경영만 하며, 입법이나 사법 기능은 없습니다. 10명의 지역 실행자들은 연방 수반(首班)이 친히 임명하며, 그들의 공직 임기는 그의 임기 – 6년과 같습니다. 연방 최고 재판소가 10명의 이 지역 실행자들의 임명을 승인하며, 그들은 재(再)임명될 수 없지만, 은퇴한 실행자들은 자동으로 자기 후임자의 동료 및 충고자가 됩니다. 그밖에 이 지역 수석들은 행정 관리들로 구성된 자신들의 내각을 선정합니다.

72:2.9 (810.2) This nation is adjudicated by two major court systems — the law courts and the socioeconomic courts. The law courts function on the following three levels: 이 나라는 두 가지 주요 법정 체계 – 법률 법정들과 사회경제 법정들-로 판결합니다. 법률 법정들은 다음 3단계로 활동합니다.

72:2.10 (810.3) 1. Minor courts of municipal and local jurisdiction, whose decisions may be appealed to the high state tribunals. 소(小) 법정들은 도시와 지방을 관할하며, 그 결정은 주(州) 고등 재판소에 상소될 수도 있습니다.

72:2.11 (810.4) 2. State supreme courts, whose decisions are final in all matters not involving the federal government or jeopardy of citizenship rights and liberties. The regional executives are empowered to bring any case at once to the bar of the federal supreme court. 주(州) 최고 법정들, 그 결정은 모든 문제에서 최종적이지만 연방 정부 또는 시민의 권리와 해방의 유죄 위험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지역 실행자들은 어떤 사례든지 즉시 연방 최고 법정의 재판으로 가져갈 권한이 있습니다.

72:2.12 (810.5) 3. Federal supreme court — the high tribunal for the adjudication of national contentions and the appellate cases coming up from the state courts. This supreme tribunal consists of twelve men over forty and under seventy-five years of age who have served two or more years on some state tribunal, and who have been appointed to this high position by the chief executive with the majority approval of the supercabinet and the third house of the legislative assembly. All decisions of this supreme judicial body are by at least a two-thirds vote. 연방 최고 법정 – 국가적 논쟁들과 주(州) 법정들에서 상정된 항소 사건들을 판결하는 고등 재판소. 이 최고 재판소는 40세 이상 75세 미만의 남성 12명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2년 이상 어떤 주(州) 법정에서 봉사하고, 초(超)내각 및 입법부에 속한 제3원(院) 대다수의 승인을 받아 수반(首班)이 이런 고위직에 임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최고 사법 단체의 모든 결정들은 3분의 2 이상의 투표로 내려집니다.

72:2.13 (810.6) The socioeconomic courts function in the following three divisions: 사회경제적 법정들은 다음 3부서로 활동합니다.

72:2.14 (810.7) 1. Parental courts, associated with the legislative and executive divisions of the home and social system. 부모 법정들은 가정과 사회 체계의 입법 및 행정부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72:2.15 (810.8) 2. Educational courts — the juridical bodies connected with the state and regional school systems and associated with the executive and legislative branches of the educational administrative mechanism. 교육 법정들 –주(州)와 지역 학교 체계들과 연결되며 교육 경영 기구의 행정 및 입법 부서들과 관련된 사법 단체들.

72:2.16 (810.9) 3. Industrial courts — the jurisdictional tribunals vested with full authority for the settlement of all economic misunderstandings. 산업(産業) 법정들 – 모든 경제적 오해를 해결하는 전권(全權)을 부여받은 사법 재판소들입니다.

72:2.17 (810.10) The federal supreme court does not pass upon socioeconomic cases except upon the three-quarters vote of the third legislative branch of the national government, the house of elder statesmen. Otherwise, all decisions of the parental, educational, and industrial high courts are final. 연방 최고 법정은 국가 정부(政府)의 셋째 입법부, 즉 원로 정치가들의 제3원에서 4분의 3의 투표를 얻은 경우를 제외하고 사회경제적 사례들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밖에, 부모, 교육 및 산업 고등 법정들의 결정들은 모두 최종적입니다.

3. The Home Life 가정 생활

72:3.1 (811.1) On this continent it is against the law for two families to live under the same roof. And since group dwellings have been outlawed, most of the tenement type of buildings have been demolished. But the unmarried still live in clubs, hotels, and other group dwellings. The smallest homesite permitted must provide fifty thousand square feet of land. All land and other property used for home purposes are free from taxation up to ten times the minimum homesite allotment. 이 대륙에서 한 집에 두 가족이 사는 것은 법률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집단 주거는 불법이므로 빌딩 유형의 주택은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미혼자들은 여전히 클럽들, 호텔들 및 다른 집단 거주지에서 살아갑니다. 허용된 최소 대지로 50,000 평방피트(1,405평=4,645㎡)의 땅을 마련해야 합니다. 주택을 짓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땅과 기타 재산은 최소한 대지 몫의 10배까지 면세됩니다.

72:3.2 (811.2) The home life of this people has greatly improved during the last century. Attendance of parents, both fathers and mothers, at the parental schools of child culture is compulsory. Even the agriculturists who reside in small country settlements carry on this work by correspondence, going to the near-by centers for oral instruction once in ten days — every two weeks, for they maintain a five-day week. 이 민족의 가정생활은 지난 세기에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자녀를 훈육하는 부모 학교들에 부모들 즉,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농부들도 통신(通信)으로 이 일을 계속하며, 구두(口頭) 강의를 위해 10일 즉 2주마다 한 번씩 가까운 센터들로 갑니다. 그들은 5일을 한 주(週)로 지키기 때문입니다.

72:3.3 (811.3) The average number of children in each family is five, and they are under the full control of their parents or, in case of the demise of one or both, under that of the guardians designated by the parental courts. It is considered a great honor for any family to be awarded the guardianship of a full orphan. Competitive examinations are held among parents, and the orphan is awarded to the home of those displaying the best parental qualifications. 각 가정의 평균 자녀 수(數)는 다섯이며, 그들은 완전히 부모의 통제를 받든지, 부모 중 하나 또는 둘 다 사망한 경우, 부모 법정들이 지정한 후견인들의 통제를 받습니다. 어떤 가정이든지 완전한 고아의 후견인(後見人) 자격 재정(裁定)을 커다란 영예로 여깁니다. 경쟁적 심사가 부모들 사이에 거행되고, 최고의 부모 자격을 나타낸 가정에 고아가 맡겨집니다.

72:3.4 (811.4) These people regard the home as the basic institution of their civilization. It is expected that the most valuable part of a child’s education and character training will be secured from his parents and at home, and fathers devote almost as much attention to child culture as do mothers. 이 민족은 가정을 그들 문명의 기본적 제도로 여깁니다. 부모들과 가정에서 자녀 교육과 성품 훈련 중 가장 소중한 부분을 책임질 것이며, 아버지들도 어머니들처럼 거의 비슷하게 자녀 훈육에 열중합니다.

72:3.5 (811.5) All sex instruction is administered in the home by parents or by legal guardians. Moral instruction is offered by teachers during the rest periods in the school shops, but not so with religious training, which is deemed to be the exclusive privilege of parents, religion being looked upon as an integral part of home life. Purely religious instruction is given publicly only in the temples of philosophy, no such exclusively religious institutions as the Urantia churches having developed among this people. In their philosophy, religion is the striving to know God and to manifest love for one’s fellows through service for them, but this is not typical of the religious status of the other nations on this planet. Religion is so entirely a family matter among these people that there are no public places devoted exclusively to religious assembly. Politically, church and state, as Urantians are wont to say, are entirely separate, but there is a strange overlapping of religion and philosophy. 모든 성(性)교육은 가정에서 부모들이나 법적 후견인들이 합니다. 도덕 훈련은 학교 실습실에서 쉬는 시간에 선생들이 하지만, 종교적 훈련은 그렇지 않고 부모들의 독점적 특권으로 여겨지며, 종교는 가정생활의 필수적 부분으로 간주됩니다. 아주 종교적인 교육은 철학의 전당에서만 공개적으로 제공되며, 지구(유란시아) 교회들 같이 그런 독점적인 종교적 기관들은 이 민족 사이에서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철학에서, 종교는 하나님을 알고 동료를 향한 봉사를 통해 자기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려는 노력이지만, 이것이 이 행성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전형적인 종교적 상태는 아닙니다. 종교는 이 민족 사이에서 완전히 가족 문제이므로 종교 모임 전용으로 바쳐진 공적 장소들은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지구(유란시아)인들이 늘 말하듯이,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종교와 철학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72:3.6 (811.6) Until twenty years ago the spiritual teachers (comparable to Urantia pastors), who visit each family periodically to examine the children to ascertain if they have been properly instructed by their parents, were under governmental supervision. These spiritual advisers and examiners are now under the direction of the newly created Foundation of Spiritual Progress, an institution supported by voluntary contributions. Possibly this institution may not further evolve until after the arrival of a Paradise Magisterial Son. 20년 전까지 영적 선생들(지구, 유란시아의 목사에 해당하는)이 정부(政府)의 감독 아래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적절히 교육했는지 확인하려고 정기적으로 각 가정을 방문해서 자녀들을 검사했습니다. 이 영적 충고자들과 검사관들은 지금 새로 창립된 영 진보 재단(財團), 즉 자발적 기부금으로 후원받는 기관의 관리 아래에 있습니다. 아마 이 기관은 천국 치안 아들이 도착한 후에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72:3.7 (811.7) Children remain legally subject to their parents until they are fifteen, when the first initiation into civic responsibility is held. Thereafter, every five years for five successive periods similar public exercises are held for such age groups at which their obligations to parents are lessened, while new civic and social responsibilities to the state are assumed. Suffrage is conferred at twenty, the right to marry without parental consent is not bestowed until twenty-five, and children must leave home on reaching the age of thirty. 어린이들은 15살까지 자기 부모들에게 법적으로 맡겨져 있으며, 그 때 시민의 책임을 처음 이행하게 됩니다. 그 후 5년마다 5회 연속적인 기간에 그런 또래 집단을 위해 비슷한 공적 행사들이 열려, 부모들에 대한 자녀들의 의무는 줄어드는 반면에,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민의 사회적 책임들을 떠맡습니다. 투표권은 20세에 주어지고,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할 권리는 25세까지 부여되지 않으며, 30세가 되면 자녀들은 가정을 떠나야 합니다.

72:3.8 (812.1) Marriage and divorce laws are uniform throughout the nation. Marriage before twenty — the age of civil enfranchisement — is not permitted. Permission to marry is only granted after one year’s notice of intention, and after both bride and groom present certificates showing that they have been duly instructed in the parental schools regarding the responsibilities of married life. 결혼 및 이혼 법률들은 나라 전체에 걸쳐서 동일합니다. 시민 선거권의 연령인 20세 이전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결혼 허가는 결혼 의사를 통지 1년 후, 신부와 신랑 둘 다 결혼 생활의 책임에 대해 부모 학교들에서 충분히 훈련받았음을 보이는 증명서를 제시한 후에 겨우 교부됩니다.

72:3.9 (812.2) Divorce regulations are somewhat lax, but decrees of separation, issued by the parental courts, may not be had until one year after application therefor has been recorded, and the year on this planet is considerably longer than on Urantia. Notwithstanding their easy divorce laws, the present rate of divorces is only one tenth that of the civilized races of Urantia. 이혼 규정은 다소 느슨하지만, 부모 법정들이 발행하는 별거 판결은 이혼을 위해 신청서가 등록된 후 1년까지 받지 못할 수 있으며, 이 행성에서 1년은 지구(유란시아)보다 상당히 깁니다. 쉬운 이혼 법률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혼율은 지구(유란시아)의 문명화 종족들의 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4. The Educational System 교육 체계

72:4.1 (812.3) The educational system of this nation is compulsory and coeducational in the precollege schools that the student attends from the ages of five to eighteen. These schools are vastly different from those of Urantia. There are no classrooms, only one study is pursued at a time, and after the first three years all pupils become assistant teachers, instructing those below them. Books are used only to secure information that will assist in solving the problems arising in the school shops and on the school farms. Much of the furniture used on the continent and the many mechanical contrivances — this is a great age of invention and mechanization — are produced in these shops. Adjacent to each shop is a working library where the student may consult the necessary reference books. Agriculture and horticulture are also taught throughout the entire educational period on the extensive farms adjoining every local school. 이 나라의 교육 체계는 대학 이전에는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남녀공학이며 5세에서 18세까지 학교에 출석합니다. 이 학교들은 지구(유란시아)의 학교들과 매우 다릅니다. 교실이 없고, 한 번에 한 과목만 이행(履行)하며, 처음 3년이 지난 후 모든 학생들은 조교(助敎)들이 되어, 하급생(下級生)들을 가르칩니다. 학교 실습장들과 학교 농장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움이 될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 책들이 사용됩니다. 그 대륙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가구(家具)와 여러 기계적 발명품들이 – 이때는 발명과 기계화의 중요한 시대이므로 – 이런 실습 작업장에서 생산됩니다. 각 실습소 부근에 학생들이 필요한 참고 서적들을 찾을 수 있는 활용 도서관이 있습니다. 농업과 원예술도 모든 지역 학교 인근의 광대한 농장에서 전(全) 학기 내내 교육됩니다.

72:4.2 (812.4) The feeble-minded are trained only in agriculture and animal husbandry, and are committed for life to special custodial colonies where they are segregated by sex to prevent parenthood, which is denied all subnormals. These restrictive measures have been in operation for seventy-five years; the commitment decrees are handed down by the parental courts. 정신박약자들은 농업과 축산업만 훈련하고, 특별 보호 이주지들에 일생동안 위탁되어, 모든 저능자들에게 금지되어 있는 부모신분을 지니지 못하도록 성(性)별로 분리됩니다. 이러한 제한 조처는 75년 동안 운영되었으며, 부모 법정들이 위탁 판결을 언도합니다.

72:4.3 (812.5) Everyone takes one month’s vacation each year. The precollege schools are conducted for nine months out of the year of ten, the vacation being spent with parents or friends in travel. This travel is a part of the adult-education program and is continued throughout a lifetime, the funds for meeting such expenses being accumulated by the same methods as those employed in old-age insurance. 모든 학생들은 매년 1개월 동안 방학합니다. 대학 이전(以前)의 학교들은 1년 10개월 중 9개월간 운영되고, 방학은 부모들 또는 친구들과 여행하며 보냅니다. 이 여행은 성인-교육 프로그램의 부분이며, 일생 계속되는데, 그런 경비에 쓰는 자금은 연금 보험에서 사용하는 동일한 방법으로 축적합니다.

72:4.4 (812.6) One quarter of the school time is devoted to play — competitive athletics — the pupils progressing in these contests from the local, through the state and regional, and on to the national trials of skill and prowess. Likewise, the oratorical and musical contests, as well as those in science and philosophy, occupy the attention of students from the lower social divisions on up to the contests for national honors. 수업시간 중 1/4은 놀이 – 경쟁적 운동들 –에 소요되며, 학생들은 지방에서부터, 주(州)와 지역을 거쳐, 기술과 역량을 겨루는 국가적 예선까지 계속 이렇게 시합하면서 전진합니다. 또한, 과학과 철학의 경쟁 뿐 아니라 웅변과 음악 경연들이, 낮은 사회적 부문에서 국가적 영예를 얻는 경연들까지, 학생들의 관심을 차지합니다.

72:4.5 (812.7) The school government is a replica of the national government with its three correlated branches, the teaching staff functioning as the third or advisory legislative division. The chief object of education on this continent is to make every pupil a self-supporting citizen. 학교 체제는 서로 관련된 3부서를 지닌 국가 정부(政府)의 복사판으로, 교직(敎職)은 셋째 또는 조언하는 입법부로 기능합니다. 이 대륙에서 교육의 주된 목적은 모든 학생들을 자립(自立)하는 시민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72:4.6 (813.1) Every child graduating from the precollege school system at eighteen is a skilled artisan. Then begins the study of books and the pursuit of special knowledge, either in the adult schools or in the colleges. When a brilliant student completes his work ahead of schedule, he is granted an award of time and means wherewith he may execute some pet project of his own devising. The entire educational system is designed to adequately train the individual. 18세에 대학 이전(以前) 학교 체계를 졸업하는 모든 아이는 노련한 숙련공입니다. 그 후는 성인 학교들 또는 대학교에서 책을 연구하며 특별한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훌륭한 학생이 계획에 앞서 자신의 업무를 완료하면, 그에게 시간과 수단이 상으로 주어져,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어떤 좋아하는 계획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전체 교육 체계는 개인을 충분히 훈련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5. Industrial Organization 산업 조직

72:5.1 (813.2) The industrial situation among this people is far from their ideals; capital and labor still have their troubles, but both are becoming adjusted to the plan of sincere co-operation. On this unique continent the workers are increasingly becoming shareholders in all industrial concerns; every intelligent laborer is slowly becoming a small capitalist. 이 민족의 산업 상황은 그들의 이상(理想)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본과 노동은 여전히 자체 분쟁들이 있지만 둘 다 진지하게 협력하려는 계획으로 조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이 대륙에서 근로자들은 점차 모든 산업 사업체들에서 주주(株主)들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지능적 노동자는 서서히 소규모 자본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72:5.2 (813.3) Social antagonisms are lessening, and good will is growing apace. No grave economic problems have arisen out of the abolition of slavery (over one hundred years ago) since this adjustment was effected gradually by the liberation of two per cent each year. Those slaves who satisfactorily passed mental, moral, and physical tests were granted citizenship; many of these superior slaves were war captives or children of such captives. Some fifty years ago they deported the last of their inferior slaves, and still more recently they are addressing themselves to the task of reducing the numbers of their degenerate and vicious classes. 사회적 대립들은 감소하고 있으며 신용(信用)은 신속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100년 훨씬 이전에) 노예 제도의 폐지로 심각한 어떤 경제적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매년 2%씩 해방하여 이런 조율이 점차 실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도덕적, 및 육체적 테스트를 만족스럽게 통과한 노예들은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우수한 이 노예들 대부분은 전쟁 포로들이나 그런 포로들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약 50년 전에 그들은 마지막 남은 자신들의 열등한 노예들을 국외로 추방했고, 퇴화되고 타락한 계급의 수(數)를 감량하는 업무에 최근에도 여전히 스스로 역점을 두어 다루고 있습니다. 

72:5.3 (813.4) These people have recently developed new techniques for the adjustment of industrial misunderstandings and for the correction of economic abuses which are marked improvements over their older methods of settling such problems. Violence has been outlawed as a procedure in adjusting either personal or industrial differences. Wages, profits, and other economic problems are not rigidly regulated, but they are in general controlled by the industrial legislatures, while all disputes arising out of industry are passed upon by the industrial courts. 이 민족은 최근에 산업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고 경제적 남용을 바로잡는 새로운 기법들을 개발했는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구식(舊式)들보다 현저히 개선된 것입니다. 개인이나 산업적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으로써 폭력은 금지되었습니다. 임금(賃金), 이익(利益) 및 다른 경제적 문제들은 엄격히 규제되지 않지만, 대개 산업 입법기관들이 통제하는 반면에 산업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분쟁들은 산업(産業) 법정들이 판결합니다.

72:5.4 (813.5) The industrial courts are only thirty years old but are functioning very satisfactorily. The most recent development provides that hereafter the industrial courts shall recognize legal compensation as falling in three divisions: 산업(産業) 법정들은 겨우 30년이지만 아주 만족스럽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향후 산업(産業) 법정들은 다음 3분야로 분류되는 법적 수당(手當)을 승인할 것이라고 가장 최근의 개선(改善)안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72:5.5 (813.6) 1. Legal rates of interest on invested capital. 투입 자본의 법정(法定) 이율(利率).

72:5.6 (813.7) 2. Reasonable salary for skill employed in industrial operations. 산업 활동에 사용된 기술을 위한 적정(適正) 급여(給與).

72:5.7 (813.8) 3. Fair and equitable wages for labor. 정당한 적정 노임(勞賃).

72:5.8 (813.9) These shall first be met in accordance with contract, or in the face of decreased earnings they shall share proportionally in transient reduction. And thereafter all earnings in excess of these fixed charges shall be regarded as dividends and shall be prorated to all three divisions: capital, skill, and labor. 이것들은 먼저 계약에 따라 지급될 것이며, 혹은 소득이 감소한 경우 그들은 일시적 감소에 비례하여 몫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이 고정 비용을 초과하는 모든 수익(收益)은 배당금으로 간주될 것이며 세 분야, 즉 자본, 기술 및 노동에 비례 배분될 것입니다.

72:5.9 (813.10) Every ten years the regional executives adjust and decree the lawful hours of daily gainful toil. Industry now operates on a five-day week, working four and playing one. These people labor six hours each working day and, like students, nine months in the year of ten. Vacation is usually spent in travel, and new methods of transportation having been so recently developed, the whole nation is travel bent. The climate favors travel about eight months in the year, and they are making the most of their opportunities. 매 10년마다 지역 실행자들이 법정 1일 수익 노동 시간을 조율하여 선포합니다. 현재 산업체는 주(淍) 5일 중 4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운영합니다. 이 민족은 출근 평일 6시간씩 일하며, 학생들처럼 1년 10개월 중 9개월간 일합니다. 대개 휴가는 여행으로 사용하며 새로운 운송 수단들이 아주 최근에 개발되어 전 국민이 여행에 빠져 있습니다. 1년에 약 8개월은 여행하기에 유리한 기후로 그들은 최대한 그 기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72:5.10 (813.11) Two hundred years ago the profit motive was wholly dominant in industry, but today it is being rapidly displaced by other and higher driving forces. Competition is keen on this continent, but much of it has been transferred from industry to play, skill, scientific achievement, and intellectual attainment. It is most active in social service and governmental loyalty. Among this people public service is rapidly becoming the chief goal of ambition. The richest man on the continent works six hours a day in the office of his machine shop and then hastens over to the local branch of the school of statesmanship, where he seeks to qualify for public service. 200년 전에는 이익(利益) 동기(動機)가 전(全) 산업계를 지배했지만, 오늘날 다른 더 높은 추진력이 신속하게 대신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 대륙에서 경쟁은 극심하지만, 그 중 대부분이 산업에서 경기(競技), 기술, 과학적 성취 및 지적 달성으로 옮겨졌습니다. 경쟁은 사회적 봉사와 정부에 충성하는 일에 가장 적극적입니다. 이 민족 가운데 공직(公職)이 빠르게 포부(抱負미래 희망)의 주된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대륙 최고의 부자는 자신의 기계 공장에 속한 회사에서 하루 6시간 일한 후, 정치가 양성 학교의 지역 지부에 급히 달려가, 공직(公職) 자격을 갖추려합니다.

72:5.11 (814.1) Labor is becoming more honorable on this continent, and all able-bodied citizens over eighteen work either at home and on farms, at some recognized industry, on the public works where the temporarily unemployed are absorbed, or else in the corps of compulsory laborers in the mines. 노동은 이 대륙에서 더 명예로워지고 있으며, 18세 이상 모든 신체 건강한 시민들은 집과 농장에서, 인정된 산업체에서, 임시 실직자들을 흡수하는 공공사업에서, 아니면 광산의 의무 근로 집단에서 일합니다.

72:5.12 (814.2) These people are also beginning to foster a new form of social disgust — disgust for both idleness and unearned wealth. Slowly but certainly they are conquering their machines. Once they, too, struggled for political liberty and subsequently for economic freedom. Now are they entering upon the enjoyment of both while in addition they are beginning to appreciate their well-earned leisure, which can be devoted to increased self-realization. 또한 이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혐오감 – 나태와 불로소득(不勞所得)의 재산에 대한 혐오감 – 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더디지만 확실히 그들은 자신들의 구성 체계들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한때 정치적 해방을 위해, 그 후 경제적 자유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둘 다 누리면서 한편 그 위에 자아-실현 증진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자기노력으로 얻은 여가(餘暇)를 충분히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6. Old-Age Insurance 노년(老年) 보험

72:6.1 (814.3) This nation is making a determined effort to replace the self-respect-destroying type of charity by dignified government-insurance guarantees of security in old age. This nation provides every child an education and every man a job; therefore can it successfully carry out such an insurance scheme for the protection of the infirm and aged. 이 나라는 노년의 안전을 당당히 보증하는 정부-보험으로, 자존심-파괴 유형의 부양(扶養돌봄)을 대치하려고 단호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모든 어린이에게는 교육을, 모든 어른에게는 직업을 제공하기 때문에, 병든 자들과 노인들을 보호하려는 그런 보험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72:6.2 (814.4) Among this people all persons must retire from gainful pursuit at sixty-five unless they secure a permit from the state labor commissioner which will entitle them to remain at work until the age of seventy. This age limit does not apply to government servants or philosophers. The physically disabled or permanently crippled can be placed on the retired list at any age by court order countersigned by the pension commissioner of the regional government. 이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70세까지 남아서 일하게 될 권리 허가를 주(州) 노동 위원장에게서 얻지 못하면, 65세에 유급(有給) 종사에서 은퇴해야 합니다. 이 연령 제한은 정부 공무원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체적 장애자(障碍者)들이나 영구적 불구자(不具者)들은, 지역 정부의 연금 위원장이 승인한 법정 명령으로 나이와 관계없이 퇴직 명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72:6.3 (814.5) The funds for old-age pensions are derived from four sources: 노년 연금 기금은 다음 네 가지 출처로 조성됩니다.

72:6.4 (814.6) 1. One day’s earnings each month are requisitioned by the federal government for this purpose, and in this country everybody works. 연방 정부가 이 목적으로 매월 일당 소득을 징발(徵發)하며, 이 나라에서는 모두 일합니다.

72:6.5 (814.7) 2. Bequests — many wealthy citizens leave funds for this purpose. 유산(遺産) – 부유한 여러 시민들이 이 목적으로 기금을 남깁니다.

72:6.6 (814.8) 3. The earnings of compulsory labor in the state mines. After the conscript workers support themselves and set aside their own retirement contributions, all excess profits on their labor are turned over to this pension fund. 주(州) 광산의 의무 노동 이득. 징발된 노동자들이 자기들 생계비와 은퇴 보험료를 떼어놓은 후, 그들의 노동에서 얻는 모든 초과 소득이 이 연금 기금으로 전환됩니다.

72:6.7 (814.9) 4. The income from natural resources. All natural wealth on the continent is held as a social trust by the federal government, and the income therefrom is utilized for social purposes, such as disease prevention, education of geniuses, and expenses of especially promising individuals in the statesmanship schools. One half of the income from natural resources goes to the old-age pension fund. 천연자원에서 생긴 수입. 연방 정부가 사회 신탁으로 그 대륙의 모든 천연자원을 소유하며, 그것에서 발생한 소득은 사회적 목적, 즉 질병 예방, 천재들 교육 및 정치가 학교에서 특별히 유망한 개인들 경비로 사용됩니다. 천연자원 소득의 절반은 노년 연금 기금으로 들어갑니다.

72:6.8 (814.10) Although state and regional actuarial foundations supply many forms of protective insurance, old-age pensions are solely administered by the federal government through the ten regional departments. 주(州) 및 지역 보험 통계 재단들이 여러 형태의 보호적 보험을 제공하지만, 노년 연금은 연방 정부가 10개 지역 부서들을 통해 단독으로 운영합니다.

72:6.9 (814.11) These government funds have long been honestly administered. Next to treason and murder, the heaviest penalties meted out by the courts are attached to betrayal of public trust. Social and political disloyalty are now looked upon as being the most heinous of all crimes. 이 정부 기금은 오랫동안 정직하게 운영되었습니다. 반역과 살인 다음으로 법정이 할당한 최고 형벌은 공적 신뢰에 대한 배반에 내려집니다. 사회적 및 정치적 불충은 이제 모든 범죄 중 가장 극악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7. Taxation 과세(課稅)

72:7.1 (815.1) The federal government is paternalistic only in the administration of old-age pensions and in the fostering of genius and creative originality; the state governments are slightly more concerned with the individual citizen, while the local governments are much more paternalistic or socialistic. The city (or some subdivision thereof) concerns itself with such matters as health, sanitation, building regulations, beautification, water supply, lighting, heating, recreation, music, and communication. 연방정부는 노령(老齡) 연금의 경영 및 천재적인 창조적 독창성의 육성만 가족처럼 보살핍니다. 주(州) 정부들이 약간 더 개별 시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지역 정부들이 훨씬 더 가족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도시(또는 그에 속한 몇 부서들)는, 건강, 위생, 건축 규정, 미화, 상수도, 조명, 난방, 오락, 음악 및 통신 등과 같은 자체 문제들에 관여합니다.

72:7.2 (815.2) In all industry first attention is paid to health; certain phases of physical well-being are regarded as industrial and community prerogatives, but individual and family health problems are matters of personal concern only. In medicine, as in all other purely personal matters, it is increasingly the plan of government to refrain from interfering. 모든 산업에서 첫째 관심은 건강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단계의 육체적 복지는 산업과 공동체의 특권으로 간주되지만, 개인과 가족의 건강 문제는 오직 개인적으로 주의(注意)해야 할 사항입니다. 완전히 개인적인 다른 모든 문제들처럼, 질병 치료에 대한 정부의 계획은 점차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72:7.3 (815.3) Cities have no taxing power, neither can they go in debt. They receive per capita allowances from the state treasury and must supplement such revenue from the earnings of their socialistic enterprises and by licensing various commercial activities. 도시들은 과세(課稅)하는 권한도 없고, 빚을 질 수도 없습니다. 도시들은 주(州) 정부 기금에서 1인당 수당(手當)액을 받고, 그들의 사회주의적 기업들의 소득과 다양한 상업 활동의 허가(許可)로 얻은 그런 수익을 보충해야만 합니다.

72:7.4 (815.4) The rapid-transit facilities, which make it practical greatly to extend the city boundaries, are under municipal control. The city fire departments are supported by the fire-prevention and insurance foundations, and all buildings, in city or country, are fireproof — have been for over seventy-five years. 도시 고속 수송 시설들은 도시의 범위를 실제로 크게 확장하므로, 시(市)의 조종 아래에 있습니다. 화재-예방 및 보험 재단들이 도시의 소방서들을 지원하며, 도시와 지방의 모든 건물들은 75년이 넘게 불연성(不燃性불에 타지 않게)으로 지어졌습니다.

72:7.5 (815.5) There are no municipally appointed peace officers; the police forces are maintained by the state governments. This department is recruited almost entirely from the unmarried men between twenty-five and fifty. Most of the states assess a rather heavy bachelor tax, which is remitted to all men joining the state police. In the average state the police force is now only one tenth as large as it was fifty years ago. 시에서 임명한 경찰관들은 없습니다. 주(州) 정부들이 경찰력을 유지합니다. 이 부서는 거의 다 25세에서 50세 사이에 있는 미혼 남자들을 모집합니다. 대부분의 주(州)들은 상당히 비중이 큰 미혼 과세를 부과하며, 주(州) 경찰에 가입한 모든 남자들은 면제됩니다. 지금 평균적으로 주(州) 경찰력은 50년 전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72:7.6 (815.6) There is little or no uniformity among the taxation schemes of the one hundred comparatively free and sovereign states as economic and other conditions vary greatly in different sections of the continent. Every state has ten basic constitutional provisions which cannot be modified except by consent of the federal supreme court, and one of these articles prevents levying a tax of more than one per cent on the value of any property in any one year, homesites, whether in city or country, being exempted. 경제 및 다른 상황이 대륙의 다른 구역마다 아주 다양하므로, 상당히 자유로운 주권을 지닌 100개 주(州)들 중에서 동일한 과세 계획은 거의 또는 전혀 없습니다. 주(州)마다 기본적인 10개의 헌법조항들이 있는데, 연방 최극 법정의 허락이 없이 변경될 수 없으며, 이 항목 중 하나는 어느 한 해라도 어떤 재산 가치에 대해 1% 이상의 세금 부과를 금지하며, 대지(垈地)는 도시나 지방에 관계없이 면세입니다.

72:7.7 (815.7) The federal government cannot go in debt, and a three-fourths referendum is required before any state can borrow except for purposes of war. Since the federal government cannot incur debt, in the event of war the National Council of Defense is empowered to assess the states for money, as well as for men and materials, as it may be required. But no debt may run for more than twenty-five years. 연방 정부는 빚을 질 수 없으며, 전쟁 목적을 제외하고 어떤 주(州)도 돈을 빌리기 전에 4분의 3의 국민투표가 요구됩니다. 연방 정부는 빚을 질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의 경우, 국방 위원회가 필요시 주(州)들에게 인력(人力)과 물자(物資) 뿐 아니라 자금(資金)도 부과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빚도 결코 25년 이상 빌릴 수 없습니다.

72:7.8 (815.8) Income to support the federal government is derived from the following five sources: 연방정부를 유지하는 수입의 출처는 다음의 다섯 가지입니다.

72:7.9 (815.9) 1. Import duties. All imports are subject to a tariff designed to protect the standard of living on this continent, which is far above that of any other nation on the planet. These tariffs are set by the highest industrial court after both houses of the industrial congress have ratified the recommendations of the chief executive of economic affairs, who is the joint appointee of these two legislative bodies. The upper industrial house is elected by labor, the lower by capital. 수입 관세. 이 대륙의 생활수준을 보호하도록 계획된 관세가 모든 수입품에 부과되며, 그것은 행성의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훨씬 높습니다. 산업 국회의 양원(兩院)이 경제 업무를 맡은 수석 실행자의 추천을 비준(批准)한 후 최고 산업 법정이 이 관세를 정하는데, 이 수석 실행자는 두 입법 기관들의 공동 피(被)임명자입니다. 노동계가 산업 상원 위원을, 자본계가 하원을 선출합니다.

72:7.10 (816.1) 2. Royalties. The federal government encourages invention and original creations in the ten regional laboratories, assisting all types of geniuses — artists, authors, and scientists — and protecting their patents. In return the government takes one half the profits realized from all such inventions and creations, whether pertaining to machines, books, artistry, plants, or animals. 특허권 사용료. 연방정부는 10개 지역의 연구소에 종사하는 모든 분야의 천재들 – 예술가들, 작가들, 과학자들 – 을 지원하며 그들의 특허권을 보호하면서, 발명과 독창적 창작을 권장합니다. 그 대신 정부는, 기계, 책, 예술품, 식물, 또는 동물 중 어디에 속하든지, 그런 모든 발명들과 창작들에서 얻은 이익의 절반을 취합니다.

72:7.11 (816.2) 3. Inheritance tax. The federal government levies a graduated inheritance tax ranging from one to fifty per cent, depending on the size of an estate as well as on other conditions. 상속세. 연방정부는, 재산의 크기와 다른 조건들에 따라서, 1%에서 50%까지 누진 상속세를 부과합니다.

72:7.12 (816.3) 4. Military equipment. The government earns a considerable sum from the leasing of military and naval equipment for commercial and recreational usages. 군수 장비. 정부는 육군 및 해군 장비를 상업 및 오락 용도로 대여(貸與)하여 상당한 금액을 얻습니다.

72:7.13 (816.4) 5. Natural resources. The income from natural resources, when not fully required for the specific purposes designated in the charter of federal statehood, is turned into the national treasury. 천연자원. 천연자원에서 얻는 수입은, 연방 국가 헌장에 명시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전액이 요구되지 않을 경우, 국고로 환수됩니다.

72:7.14 (816.5) Federal appropriations, except war funds assessed by the National Council of Defense, are originated in the upper legislative house, concurred in by the lower house, approved by the chief executive, and finally validated by the federal budget commission of one hundred. The members of this commission are nominated by the state governors and elected by the state legislatures to serve for twenty-four years, one quarter being elected every six years. Every six years this body, by a three-fourths ballot, chooses one of its number as chief, and he thereby becomes director-controller of the federal treasury. 연방정부의 예산은, 국방 위원회가 부과한 전쟁 자금을 제외하고, 입법하는 상원의 발의(發議)로, 하원의 동의를 얻어, 수석 실행자가 승인하고, 최종적으로 100명의 연방 예산 위원회가 비준(批准확인절차)합니다. 이 위원회의 회원들은 주(州) 지사들의 지명으로, 24년간 봉사하되, 6년마다 1/4씩 주(州) 의회가 선출합니다. 이 기관은 6년마다 3/4의 투표로, 회원 중 하나를 수석으로 선택하며, 그렇게 그는 연방 재무부의 관리-조정자가 됩니다.

8. The Special Colleges 특수 학부들

72:8.1 (816.6) In addition to the basic compulsory education program extending from the ages of five to eighteen, special schools are maintained as follows: 5세부터 18세까지 계속되는 기본 의무 교육 외에 특수학교들이 다음과 같이 유지됩니다.

72:8.2 (816.7) 1. Statesmanship schools. These schools are of three classes: national, regional, and state. The public offices of the nation are grouped in four divisions. The first division of public trust pertains principally to the national administration, and all officeholders of this group must be graduates of both regional and national schools of statesmanship. Individuals may accept political, elective, or appointive office in the second division upon graduating from any one of the ten regional schools of statesmanship; their trusts concern responsibilities in the regional administration and the state governments. Division three includes state responsibilities, and such officials are only required to have state degrees of statesmanship. The fourth and last division of officeholders are not required to hold statesmanship degrees, such offices being wholly appointive. They represent minor positions of assistantship, secretaryships, and technical trusts which are discharged by the various learned professions functioning in governmental administrative capacities. 정치인 양성 학교들. 이 학교들은 국가와 지역과 주(州)의 세 등급이 있습니다. 국가의 공직은 네 분야로 분류됩니다. 공적 책무의 첫 분야는 주로 국가 경영에 관련되며, 이 집단의 모든 공무원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지역 및 국가 학교를 둘 다 졸업해야 합니다. 개인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10개 지역 학교들 중 어느 하나를 졸업하고 둘째 분야의 정치적 선택직이나 임명직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책무는 지역 경영과 주(州) 정부에 관련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분야는 주(州)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며, 그런 공무원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주(州) 학위만 소지하면 됩니다. 마지막 넷째 분야의 공무원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학위가 요구되지 않으며, 그런 직책들은 모두 지명됩니다. 그들은, 정부의 경영 관련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학문적 직업 출신들로서 사소한 직책들, 즉 보좌역, 비서직 및 기술 책무들을 맡습니다.

72:8.3 (816.8) Judges of the minor and state courts hold degrees from the state schools of statesmanship. Judges of the jurisdictional tribunals of social, educational, and industrial matters hold degrees from the regional schools. Judges of the federal supreme court must hold degrees from all these schools of statesmanship. 소(小) 및 주(州) 법정들의 재판관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주(州) 학교의 학위를 소지합니다. 사회적, 교육적 및 산업적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소들의 재판관들은 지역 학교들의 학위를 소지합니다. 연방 최극 법정의 재판관들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이 세 학교의 학위를 모두 소지해야만 합니다.

72:8.4 (817.1) 2. Schools of philosophy. These schools are affiliated with the temples of philosophy and are more or less associated with religion as a public function. 철학 학교들. 이 학교들은 철학의 전당(殿堂)들에 속해 있고 공적 기능으로써 다소 종교와 관련됩니다.

72:8.5 (817.2) 3. Institutions of science. These technical schools are co-ordinated with industry rather than with the educational system and are administered under fifteen divisions. 과학 기관들. 이 기술학교들은 교육 체계 보다 산업체와 통합하여, 15개 분야로 경영됩니다.

72:8.6 (817.3) 4. Professional training schools. These special institutions provide the technical training for the various learned professions, twelve in number. 직업 훈련 학교들. 이 특수 기관들은 12가지 다양한 학문적 직업을 위해 기술 훈련을 제공합니다.

72:8.7 (817.4) 5. Military and naval schools. Near the national headquarters and at the twenty-five coastal military centers are maintained those institutions devoted to the military training of volunteer citizens from eighteen to thirty years of age. Parental consent is required before twenty-five in order to gain entrance to these schools. 육군 및 해군 학교들. 국가 본부 근처 및 25개 연안 군사 중심지에는, 18세에서 30세까지 자원하는 시민들을 위한 군사 훈련에 몰두하는 그런 기관들이 있습니다. 25세 이전에 이 학교들에 입학하려면 부모의 동의가 요구됩니다.

9. The Plan of Universal Suffrage 일반 선거권의 계획

72:9.1 (817.5) Although candidates for all public offices are restricted to graduates of the state, regional, or federal schools of statesmanship, the progressive leaders of this nation discovered a serious weakness in their plan of universal suffrage and about fifty years ago made constitutional provision for a modified scheme of voting which embraces the following features: 모든 공직 후보자들은 주(州), 지역 또는 연방의 정치인 양성 학교 졸업생들로 제한되지만, 이 나라의 진보적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일반 선거권 계획에 있는 심각한 약점을 발견했으며, 약 50년 전에 다음의 특성들을 포함한 개선된 투표 기획을 위한 헌법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72:9.2 (817.6) 1. Every man and woman of twenty years and over has one vote. Upon attaining this age, all citizens must accept membership in two voting groups: They will join the first in accordance with their economic function — industrial, professional, agricultural, or trade; they will enter the second group according to their political, philosophic, and social inclinations. All workers thus belong to some economic franchise group, and these guilds, like the noneconomic associations, are regulated much as is the national government with its threefold division of powers. Registration in these groups cannot be changed for twelve years.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한 표의 투표권이 있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모든 시민들은 두 선거 집단의 회원권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제 활동 – 산업, 전문직, 농업, 또는 상업 -에 따라 첫 집단의 회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철학적, 및 사회적 경향에 따라 둘째 집단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근로자들은 경제적 선거권 집단에 속하며, 이 단체들은, 비경제적 협회들과 마찬가지로, 삼중적 삼권 분립의 국가 정부와 아주 비슷하게 규정됩니다. 이 집단에 등록되면 12년 동안 변경할 수 없습니다.

72:9.3 (817.7) 2. Upon nomination by the state governors or by the regional executives and by the mandate of the regional supreme councils, individuals who have rendered great service to society, or who have demonstrated extraordinary wisdom in government service, may have additional votes conferred upon them not oftener than every five years and not to exceed nine such superfranchises. The maximum suffrage of any multiple voter is ten. Scientists, inventors, teachers, philosophers, and spiritual leaders are also thus recognized and honored with augmented political power. These advanced civic privileges are conferred by the state and regional supreme councils much as degrees are bestowed by the special colleges, and the recipients are proud to attach the symbols of such civic recognition, along with their other degrees, to their lists of personal achievements. 주(州) 지사들 혹은 지역 실행자들의 지명과 지역 최극 회의의 명령으로, 사회에 크게 봉사했거나 정부에 봉사하면서 비범한 지혜를 드러냈던 개인들은 5년 이상마다 그들에게 추가 투표수가 부여되지만 그렇게 특별한 선거권은 9표를 넘을 수 없습니다. 복수 투표자의 최대 투표권은 10표입니다. 과학자들, 발명가들, 교사들, 철학자들, 및 영적 지도자들 역시 인정받아 확대된 정치권력으로 영예롭게 됩니다. 특수 대학들이 학위들을 수여하는 것처럼 아주 비슷하게, 주(州) 및 지역 최극 의회들이 이 진보적 시민 특권들을 수여하며, 수상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성취 목록에 다른 학위들과 함께 그러한 시민 표창의 상징 첨부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72:9.4 (817.8) 3. All individuals sentenced to compulsory labor in the mines and all governmental servants supported by tax funds are, for the periods of such services, disenfranchised. This does not apply to aged persons who may be retired on pensions at sixty-five. 광산에서 의무 노동이 선고된 모든 개인들과 세금 재원으로 유지되는 모든 정부 공무원들은 그렇게 근무하는 동안에는 선거권이 없습니다. 이것은 65세에 연금을 받고 은퇴하는 노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72:9.5 (817.9) 4. There are five brackets of suffrage reflecting the average yearly taxes paid for each half-decade period. Heavy taxpayers are permitted extra votes up to five. This grant is independent of all other recognition, but in no case can any person cast over ten ballots. 5년 마다 납부한 연(年)평균 세금을 반영한 다섯 부류의 선거권이 있습니다. 비중이 큰 납세자(納稅者)들은 추가 투표권이 5표까지 허용됩니다. 이 허가는 다른 모든 승인과 관계없지만, 누구도 10표 이상 투표할 수 없습니다.

72:9.6 (818.1) 5. At the time this franchise plan was adopted, the territorial method of voting was abandoned in favor of the economic or functional system. All citizens now vote as members of industrial, social, or professional groups, regardless of their residence. Thus the electorate consists of solidified, unified, and intelligent groups who elect only their best members to positions of governmental trust and responsibility. There is one exception to this scheme of functional or group suffrage: The election of a federal chief executive every six years is by nation-wide ballot, and no citizen casts over one vote. 이 선거권 계획이 채택되자, 경제 및 기능적 체계를 위해 지역적 투표 방식이 버려졌습니다. 모든 시민들은 이제 자기 거주지와 무관하게 산업적, 사회적, 또는 전문적 집단의 회원으로서 투표합니다. 그래서 유권자(有權者)들은, 정부의 신뢰와 책임을 맡은 자리에 최상의 회원들만 선출하는, 단결되고, 통일된, 지능적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기능적 또는 집단 선거권 기획에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연방 수석 실행자의 선출은 6년마다 전국적 투표로 이뤄지고, 어떤 시민도 한 표 이상 투표하지 못합니다.

72:9.7 (818.2) Thus, except in the election of the chief executive, suffrage is exercised by economic, professional, intellectual, and social groupings of the citizenry. The ideal state is organic, and every free and intelligent group of citizens represents a vital and functioning organ within the larger governmental organism. 그래서 수석 실행자의 선출만 제외하고, 경제적, 전문적, 지적 및 사회적 시민 집단들이 선거권을 행사합니다. 이상적(理想的) 주(州)는 유기적(有機的)이며, 자유롭고 지능적인 모든 시민 집단들은 거대 정부 조직체 내부에서 중요한 기능적 기관을 의미합니다.

72:9.8 (818.3) The schools of statesmanship have power to start proceedings in the state courts looking toward the disenfranchisement of any defective, idle, indifferent, or criminal individual. These people recognize that, when fifty per cent of a nation is inferior or defective and possesses the ballot, such a nation is doomed. They believe the dominance of mediocrity spells the downfall of any nation. Voting is compulsory, heavy fines being assessed against all who fail to cast their ballots. 정치인 양성 학교들은, 모든 심신장애자, 태만자, 무관심자, 또는 범죄자 개인의 선거권 박탈을 위해 주(州) 법정들에서 소송절차를 시작할 권한이 있습니다. 국민의 50퍼센트가 열등하거나 심신장애자로서 투표권이 있는 그런 나라는 멸망한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자가 지배하면 어떤 나라든지 멸망하게 된다고 그들이 믿습니다. 투표는 의무적이며,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모든 자들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됩니다.

10. Dealing with Crime 범죄 정책

72:10.1 (818.4) The methods of this people in dealing with crime, insanity, and degeneracy, while in some ways pleasing, will, no doubt, in others prove shocking to most Urantians. Ordinary criminals and the defectives are placed, by sexes, in different agricultural colonies and are more than self-supporting. The more serious habitual criminals and the incurably insane are sentenced to death in the lethal gas chambers by the courts. Numerous crimes aside from murder, including betrayal of governmental trust, also carry the death penalty, and the visitation of justice is sure and swift. 이 민족이 범죄, 정신 이상, 퇴보를 다루는 방법은 어떤 면에서 호감이 가지만, 다른 면에서 대부분의 지구(유란시아)인들에게 충격적일 것입니다. 보통 범죄자들과 정신장애자들은 성별(性別)로 다른 농업 이주지에 배치되며 자급(自給)을 넘어섭니다. 더 심각한 상습 범죄자들과 불치(不治)의 정신 이상자들은 가스 도살실에서 처형되도록 법정들이 판결합니다. 살인범 이외에, 정부의 신뢰를 배반한 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범죄자들도 사형에 해당되며, 재판의 실행은 분명하며 즉각적입니다.

72:10.2 (818.5) These people are passing out of the negative into the positive era of law. Recently they have gone so far as to attempt the prevention of crime by sentencing those who are believed to be potential murderers and major criminals to life service in the detention colonies. If such convicts subsequently demonstrate that they have become more normal, they may be either paroled or pardoned. The homicide rate on this continent is only one per cent of that among the other nations. 이 민족은 법의 부정적 시대로부터 긍정적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들은 잠재적 살인자들과 주요 범죄자들이 되리라고 믿어지는 자들에게 이주지에 종신 근무하도록 구류(拘留)를 선고하여 범죄를 예방하는 시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죄수들이 더 정상적이 되었다고 나중에 증명되면, 그들은 가석방(假釋放)되거나 사면(赦免)될 수도 있습니다. 이 대륙에서의 살인 비율은 다른 나라들 살인 비율의 1퍼센트에 불과합니다.

72:10.3 (818.6) Efforts to prevent the breeding of criminals and defectives were begun over one hundred years ago and have already yielded gratifying results. There are no prisons or hospitals for the insane. For one reason, there are only about ten per cent as many of these groups as are found on Urantia. 범죄자들과 정신 이상자들의 번식을 예방하려는 노력이 100년 전 이상부터 시작되었고, 이미 흡족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신 이상자들을 위한 교도소들이나 병원들이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지구(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이 집단의 거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1. Military Preparedness 군비(軍備군사 대비)

72:11.1 (818.7) Graduates of the federal military schools may be commissioned as “guardians of civilization” in seven ranks, in accordance with ability and experience, by the president of the National Council of Defense. This council consists of twenty-five members, nominated by the highest parental, educational, and industrial tribunals, confirmed by the federal supreme court, and presided over ex officio by the chief of staff of co-ordinated military affairs. Such members serve until they are seventy years of age. 국가 방위 회의 위원장이 연방 군사학교 졸업생들을 그들의 능력과 체험에 따라서 7개 계급의 “문명의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이 회의는, 최고 가정 재판소, 최고 교육 재판소 및 최고 산업 재판소가 지명하고, 연방 최극 재판소가 승인한, 2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합된 군사 업무들의 참모장이 직권에 의해 관할합니다. 그러한 구성원들은 70세까지 근무합니다.

72:11.2 (819.1) The courses pursued by such commissioned officers are four years in length and are invariably correlated with the mastery of some trade or profession. Military training is never given without this associated industrial, scientific, or professional schooling. When military training is finished, the individual has, during his four years’ course, received one half of the education imparted in any of the special schools where the courses are likewise four years in length. In this way the creation of a professional military class is avoided by providing this opportunity for a large number of men to support themselves while securing the first half of a technical or professional training. 그렇게 임명된 장교들이 수행한 과정 기간은 4년이며, 어떤 무역 또는 전문직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습니다. 관련 산업, 과학 또는 전문적 학교교육 없이 군사 훈련은 결코 시행되지 않습니다. 군사 훈련이 완료되면, 개인은 4년 과정 동안에, 마찬가지로 4년 과정 길이의 특수학교에서 수행된 교육의 절반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 및 전문 훈련의 처음 절반을 확보하면서, 대부분의 남성들이 스스로 부양하는 이런 기회 제공으로, 직업적 군사 부류의 창설을 피합니다.

72:11.3 (819.2) Military service during peacetime is purely voluntary, and the enlistments in all branches of the service are for four years, during which every man pursues some special line of study in addition to the mastery of military tactics. Training in music is one of the chief pursuits of the central military schools and of the twenty-five training camps distributed about the periphery of the continent. During periods of industrial slackness many thousands of unemployed are automatically utilized in upbuilding the military defenses of the continent on land and sea and in the air. 평시(平時) 군복무는 순전히 자발적이고, 모든 분야의 병적 근무 기간은 4년이며, 그 동안 각 사람은 군사 전술의 통달에 어떤 특별 분야의 연구를 수행합니다. 음악 훈련은 중앙의 군사 학교들과 대륙의 둘레에 분산된 25개 훈련소에서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산업적 침체기에는 수천의 실직자들이, 육지와 바다 및 공중에서 대륙의 군사 방어력을 발전하는데 자동으로 활용됩니다.

72:11.4 (819.3) Although these people maintain a powerful war establishment as a defense against invasion by the surrounding hostile peoples, it may be recorded to their credit that they have not in over one hundred years employed these military resources in an offensive war. They have become civilized to that point where they can vigorously defend civilization without yielding to the temptation to utilize their war powers in aggression. There have been no civil wars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united continental state, but during the last two centuries these people have been called upon to wage nine fierce defensive conflicts, three of which were against mighty confederations of world powers. Although this nation maintains adequate defense against attack by hostile neighbors, it pays far more attention to the training of statesmen, scientists, and philosophers. 이 민족이 주변의 호전적 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방어로 강력한 전쟁 체제를 유지하지만, 그들이 지난 100년 이상 공격적 전쟁에 이 군사 자원들을 사용하지 않은 공적은 기록할만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쟁 능력을 침략에 사용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강력하게 문명화를 방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문명화되었습니다. 통일된 대륙 국가가 설립된 이후 내란이 없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9차례의 맹렬한 방어 전투를 수행했는데, 그 중 3차례는 세계 강대국들의 강력한 동맹국에 대항한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호전적인 이웃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적절한 방위를 유지하지만, 이 나라는 정치인들, 과학자들 및 철학자들의 훈련에 훨씬 더 많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72:11.5 (819.4) When at peace with the world, all mobile defense mechanisms are quite fully employed in trade, commerce, and recreation. When war is declared, the entire nation is mobilized. Throughout the period of hostilities military pay obtains in all industries, and the chiefs of all military departments become members of the chief executive’s cabinet. 세계와 평시(平時)에는, 기동(機動) 가능한 모든 방어 장비들은 무역, 상업 및 휴양을 위해 아주 충분히 사용됩니다. 전쟁이 선포되면 전(全) 국가가 동원됩니다. 전쟁 기간 내내 모든 산업체들이 군사적 임금을 지불하며, 군사 부문의 모든 수석들이 최고 행정 내각의 구성원들이 됩니다.

12. The Other Nations 다른 나라들

72:12.1 (819.5) Although the society and government of this unique people are in many respects superior to those of the Urantia nations, it should be stated that on the other continents (there are eleven on this planet) the governments are decidedly inferior to the more advanced nations of Urantia. 이 독특한 민족의 사회와 정부가 여러 면에서 지구(유란시아) 나라들보다 우월하지만, 다른 대륙들(이 행성에는 11개의 대륙들이 있습니다)에 있는 정부들은 지구(유란시아)의 선진국들에 비해 확실히 열등한 것은 분명합니다.

72:12.2 (819.6) Just now this superior government is planning to establish ambassadorial relations with the inferior peoples, and for the first time a great religious leader has arisen who advocates the sending of missionaries to these surrounding nations. We fear they are about to make the mistake that so many others have made when they have endeavored to force a superior culture and religion upon other races. What a wonderful thing could be done on this world if this continental nation of advanced culture would only go out and bring to itself the best of the neighboring peoples and then, after educating them, send them back as emissaries of culture to their benighted brethren! Of course, if a Magisterial Son should soon come to this advanced nation, great things could quickly happen on this world. 지금 당장 우월한 이 정부(政府)는 열등한 민족들과 대사(大使) 관계를 수립하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이 주변 국가들에게 선교사들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가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그토록 여러 다른 나라들이 다른 인종들에게 우월한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려고 애쓰면서 범했던 실수를 그들이 행할까봐 우리는 염려합니다. 진보된 문화를 지닌 이 대륙 국가가 단지 이웃 민족들에게 가서 그 중 최고의 사람들을 데려와, 그들을 교육시킨 후, 문화의 사자(使者)로 그들을 다시 그들의 미개한 형제들에게 보낸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 세계에 일어나겠는가! 물론 진보된 이 나라에 치안 아들이 곧 도래하면, 엄청난 일들이 신속히 이 세계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72:12.3 (820.1) This recital of the affairs of a neighboring planet is made by special permission with the intent of advancing civilization and augmenting governmental evolution on Urantia. Much more could be narrated that would no doubt interest and intrigue Urantians, but this disclosure covers the limits of our permissive mandate. 지구(유란시아)에서 문명을 개선하고 정부(政府)의 진화를 증대하려는 의도로 특별 허가를 받아 이웃 행성의 업무들을 이렇게 상술(詳述)합니다. 분명히 지구(유란시아)인들의 관심과 흥미를 자아낼 것들을 더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허용된 명령의 한계까지 다룹니다.

72:12.4 (820.2) Urantians should, however, take note that their sister sphere in the Satania family has benefited by neither magisterial nor bestowal missions of the Paradise Sons. Neither are the various peoples of Urantia set off from each other by such disparity of culture as separates the continental nation from its planetary fellows. 하지만 지구(유란시아)인들은 사타니아 과(科가족 체계)에 속한 자매 구체가 어떤 치안 또는 증여 사명을 지닌 천국 아들들의 혜택이 없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지구(유란시아)의 다양한 민족은, 그 행성의 다른 나라들에서 대륙 국가를 분리하는 것과 같은 그런 문화의 불균형으로, 서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72:12.5 (820.3) The pouring out of  Spirit of Truth provides the spiritual foundation for the realization of great achievements in the interests of the human race of the bestowal world. Urantia is therefore far better prepared for the more immediate realization of a planetary government with its laws, mechanisms, symbols, conventions, and language — all of which could contribute so mightily to the establishment of world-wide peace under law and could lead to the sometime dawning of a real age of spiritual striving; and such an age is the planetary threshold to the utopian ages of light and life. 진리의 영이 부어지면 증여 세계에 속한 인류의 이익에 엄청난 업적을 실현하는 영적 토대가 마련됩니다. 그러므로 지구(유란시아)는 법률, 기계장치, 상징, 관습 및 언어로 행성 정부를 더 직접적으로 실현할 준비가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 모든 것들은 법 아래에서 세계적 평화 수립에 아주 힘차게 기여할 수 있고, 언젠가 영적으로 분투하는 실제 시대의 태동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런 시대는 행성이 빛과 생명의 이상향(理想鄕) 시대로 넘어가는 출입구이기 때문입니다.

72:12.6 (820.4) [Presented by a Melchizedek of Nebadon.] [네바돈의 멜기세덱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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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3 The Garden of Eden 에덴 동산

Paper 73

The Garden of Eden 에덴 동산

Tabamantia’s inspection 타바만시아의 시찰
1. The Nodites and the Amadonites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2. Planning for the Garden 동산을 위한 계획
3. The Garden Site 동산의 위치
4. Establishing the Garden 동산의 건립
5. The Garden Home 동산 가정(家庭)
6. The Tree of Life 생명나무
7. The Fate of Eden 에덴의 숙명(宿命)

73:0.1 (821.1) THE cultural decadence and spiritual poverty resulting from the Caligastia downfall and consequent social confusion had little effect on the physical or biologic status of the Urantia peoples. Organic evolution proceeded apace, quite regardless of the cultural and moral setback which so swiftly followed the disaffection of Caligastia and Daligastia. And there came a time in the planetary history, almost forty thousand years ago, when the Life Carriers on duty took note that, from a purely biologic standpoint, the developmental progress of the Urantia races was nearing its apex. The Melchizedek receivers, concurring in this opinion, readily agreed to join the Life Carriers in a petition to the Most Highs of Edentia asking that Urantia be inspected with a view to authorizing the dispatch of biologic uplifters, a Material Son and Daughter. 칼리가스티아 몰락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서 유래된 문화적 쇠퇴와 영적 빈곤은 지구(유란시아) 민족들의 육체적 또는 생물학적 상태에는 영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불충(不忠)에 신속히 뒤따랐던 문화적·도덕적 후퇴에도 전혀 관계없이, 유기적 진화는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행성 역사에서 거의 4만 년 전에, 임무 중이던 생명 운반자들이, 순전히 생물학적 입장에서, 지구(유란시아) 인종들의 발달 진보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주목했습니다.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은 이 의견에 동의하여 생명운반자들과 합류하여, 에덴시아의 지고자(至高者)들에게 생물학적 향상자들, 즉 물질 아들과 딸의 파송 허락을 검토하도록 지구를 시찰해 달라고 기꺼이 간청하였습니다.

73:0.2 (821.2) This request was addressed to the Most Highs of Edentia because they had exercised direct jurisdiction over many of Urantia’s affairs ever since Caligastia’s downfall and the temporary vacation of authority on Jerusem. 이 요청은 에덴시아의 지고자들에게 제출되었는데, 그들이 칼라가스티아의 몰락과 예루셈에서 일시적 권위의 공석(空席) 이후로 지구(유란시아)의 여러 업무에 대한 직접적 관할권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73:0.3 (821.3) Tabamantia, sovereign supervisor of the series of decimal or experimental worlds, came to inspect the planet and, after his survey of racial progress, duly recommended that Urantia be granted Material Sons. In a little less than one hundred years from the time of this inspection, Adam and Eve, a Material Son and Daughter of the local system, arrived and began the difficult task of attempting to untangle the confused affairs of a planet retarded by rebellion and resting under the ban of spiritual isolation. 그래서 십진(十進)법 실험적 세계들 계열의 주권적 감독자, 타바만시아가 행성을 시찰하러 왔고, 인종 진화의 조사 후에, 지구(유란시아)에 물질아들들을 허락해달라고 정식으로 추천했습니다. 이 시찰(視察두루 다시며 사정을 살핌) 후 100년이 조금 안 되었을 때, 지역 체계의 물질 아들과 딸, 아담과 이브가 도착했고, 반란으로 지체되고 영적 고립의 금지령(禁止令) 아래에서 정체 중인 행성의 혼란한 업무를 해결하려는 어려운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1. The Nodites and the Amadonites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73:1.1 (821.4) On a normal planet the arrival of the Material Son would ordinarily herald the approach of a great age of invention, material progress, and intellectual enlightenment. The post-Adamic era is the great scientific age of most worlds, but not so on Urantia. Though the planet was peopled by races physically fit, the tribes languished in the depths of savagery and moral stagnation. 정상적 행성에서 물질아들의 출현은 대개 발명과 물질적 진보 및 지적 계몽의 위대한 시대에 접근하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아담-이후 시대는 대부분의 세계들에서 위대한 과학적 시대이지만, 지구(유란시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성에 육체적으로 적합한 인종들이 살고 있었지만, 부족들은 야만과 도덕적 부패의 수렁에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73:1.2 (821.5) Ten thousand years after the rebellion practically all the gains of the Prince’s administration had been effaced; the races of the world were little better off than if this misguided Son had never come to Urantia. Only among the Nodites and the Amadonites was there persistence of the traditions of Dalamatia and the culture of the Planetary Prince. 반란 후 10,000년이 되자, 왕자가 경영했던 모든 공적이 실제로 없어졌습니다. 미혹된 이 아들이 지구(유란시아)에 오지 않았던 것보다 세계의 인종들은 더 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사이에서만 달라마시아의 전통들과 행성 왕자의 문화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73:1.3 (821.6) The Nodites were the descendants of the rebel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their name deriving from their first leader, Nod, onetime chairman of the Dalamatia commission on industry and trade. The Amadonites were the descendants of those Andonites who chose to remain loyal with Van and Amadon. “Amadonite” is more of a cultural and religious designation than a racial term; racially considered the Amadonites were essentially Andonites. “Nodite” is both a cultural and racial term, for the Nodites themselves constituted the eighth race of Urantia. 놋-사람들은 왕자의 참모진 중에서 반란 요원들의 후손들이었으며, 그 이름은 자신들의 첫 지도자 놋에서 유래하는데, 놋은 한 때 달라마시아의 산업과 무역 위원회 의장이었습니다. 아마돈-사람들은 반과 아마돈과 함께 충성하기로 선택했던 그 안돈-사람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아마돈 사람”은 종족 용어라기보다는 문화적이며 종교적 명칭이며, 인종적으로 아마돈 사람들은 본래 안돈-사람들이었습니다. “놋-사람”은 문화적이며 인종적 용어인데, 놋-사람들 자신들이 지구(유란시아)에서 8번째 인종이었기 때문입니다.

73:1.4 (822.1) There existed a traditional enmity between the Nodites and the Amadonites. This feud was constantly coming to the surface whenever the offspring of these two groups would try to engage in some common enterprise. Even later, in the affairs of Eden, it was exceedingly difficult for them to work together in peace.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사이에는 전통적인 불화가 있었습니다. 이 두 집단의 자손이 어떤 공동 기획에 관계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표면에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에덴의 업무에서도 함께 평온히 일하는 것이 그들에게 매우 어려웠습니다.

73:1.5 (822.2) Shortly after the destruction of Dalamatia the followers of Nod became divided into three major groups. The central group remained in the immediate vicinity of their original home near the headwaters of the Persian Gulf. The eastern group migrated to the highland regions of Elam just east of the Euphrates valley. The western group was situated on the northeastern Syrian shores of the Mediterranean and in adjacent territory. 달라마시아의 파멸 직후, 놋의 추종자들은 세 주요 집단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중앙 집단은 페르시아 만(灣) 상류 부근 원래 그들이 고향 바로 근처에 남았습니다. 동쪽 집단은 유프라테스 계곡 바로 동쪽 엘람 산악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서쪽 집단은 지중해의 북동 시리아 해변 및 인접 지역에 위치를 정했습니다.

73:1.6 (822.3) These Nodites had freely mated with the Sangik races and had left behind an able progeny. And some of the descendants of the rebellious Dalamatians subsequently joined Van and his loyal followers in the lands north of Mesopotamia. Here, in the vicinity of Lake Van and the southern Caspian Sea region, the Nodites mingled and mixed with the Amadonites, and they were numbered among the “mighty men of old.” 이 놋-사람들은 산긱 종족들과 자유로이 짝지어 유능한 자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반역한 달라마시아인(人)들의 일부 후손들이 후에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들에서 반과 그의 충성된 추종자들과 합세했습니다. 반 호수와 남쪽 카스피 해 지역 근처 이곳에서 놋-사람들은 아마돈-사람들과 뒤섞여 혼합되었고, 그들은 “고대의 용사들(창6:4)”로 간주되었습니다.

73:1.7 (822.4) Prior to the arrival of Adam and Eve these groups — Nodites and Amadonites — were the most advanced and cultured races on earth. 아담과 이브가 출현하기 전에 이 집단들 –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이 지상에서 가장 진보하고 문화가 발달된 인종들이었습니다.

2. Planning for the Garden 동산을 위한 계획

73:2.1 (822.5)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prior to Tabamantia’s inspection, Van and his associates, from their highland headquarters of world ethics and culture, had been preaching the advent of a promised Son of God, a racial uplifter, a teacher of truth, and the worthy successor of the traitorous Caligastia. Though the majority of the world’s inhabitants of those days exhibited little or no interest in such a prediction, those who were in immediate contact with Van and Amadon took such teaching seriously and began to plan for the actual reception of the promised Son. 타바만시아의 검열 전(前) 거의 100년 동안, 반과 그의 동료들은, 세계 윤리와 문화의 고지(高地)의 본부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인종 향상자, 진리의 교사 및 반역한 칼리가스티아의 훌륭한 계승자의 도래(到來)를 전도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계 거주민들은 그런 예언에 거의 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반과 아마돈 측근의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약속된 아들을 실제로 맞이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73:2.2 (822.6) Van told his nearest associates the story of the Material Sons on Jerusem; what he had known of them before ever he came to Urantia. He well knew that these Adamic Sons always lived in simple but charming garden homes and proposed, eighty-three years before the arrival of Adam and Eve, that they devote themselves to the proclamation of their advent and to the preparation of a garden home for their reception. 반은 자기 최측근 동료들에게 일찍이 자신이 지구(유란시아)에 오기 전에 알고 있었던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이 아담 아들들이 수수하지만 매력적인 동산 가옥들에 항상 살았음을 잘 알았으며,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83년 전에 그들의 도래(到來)를 선포하고 그들을 영접할 동산 가옥 준비에 헌신하자고 제안했습니다.

73:2.3 (822.7) From their highland headquarters and from sixty-one far-scattered settlements, Van and Amadon recruited a corps of over three thousand willing and enthusiastic workers who, in solemn assembly, dedicated themselves to this mission of preparing for the promised — at least expected — Son. 그들의 고지(高地) 본부와 멀리 산재(散在)한 61개의 정착지들에서, 반과 아마돈은 자발적으로 열심을 내는 3천 이상의 일손들 무리를 모집했는데, 그들은 엄숙한 집회에서 약속된 – 적어도 기대하는 – 아들을 위해 준비하는 이 사명에 헌신했습니다.

73:2.4 (822.8) Van divided his volunteers into one hundred companies with a captain over each and an associate who served on his personal staff as a liaison officer, keeping Amadon as his own associate. These commissions all began in earnest their preliminary work, and the committee on location for the Garden sallied forth in search of the ideal spot. 반은 자신의 지원자들을 100 중대(中隊)로 나누었고 각 중대마다 중대장 1명과 연락 장교로서 자신의 개인 참모로 근무했던 동료 1명을 두었으며, 아마돈을 자신의 동료로 두었습니다. 이 책임을 맡은 장교들은 모두 열심히 준비 작업을 시작하였고, 동산의 위치를 선정하는 위원회는 이상적인 지점을 찾아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73:2.5 (822.9) Although Caligastia and Daligastia had been deprived of much of their power for evil, they did everything possible to frustrate and hamper the work of preparing the Garden. But their evil machinations were largely offset by the faithful activities of the almost ten thousand loyal midway creatures who so tirelessly labored to advance the enterprise.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는 악행의 능력을 많이 박탈당했지만, 동산을 준비하는 과업을 좌절시키고 방해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음모는 이 기획을 추진하려고 꾸준히 수고했던 충성스러운 중도 창조물들 거의 1만 명의 신실한 활동으로 대부분 상쇄되었습니다.

3. The Garden Site 동산의 위치

73:3.1 (823.1) The committee on location was absent for almost three years. It reported favorably concerning three possible locations: The first was an island in the Persian Gulf; the second, the river location subsequently occupied as the second garden; the third, a long narrow peninsula — almost an island — projecting westward from the eastern shores of the Mediterranean Sea. 위치 선정 위원회는 거의 3년 간 자리를 비웠습니다. 가능한 세 장소를 호의적으로 보고했습니다. 첫째는 페르시아 만의 섬이었고, 둘째는 나중에 두 번째 동산으로 사용된 강 유역이었으며, 셋째는 지중해의 동쪽 연안에서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 좁은 반도(半島)로 거의 섬이었습니다.

73:3.2 (823.2) The committee almost unanimously favored the third selection. This site was chosen, and two years were occupied in transferring the world’s cultural headquarters, including the tree of life, to this Mediterranean peninsula. All but a single group of the peninsula dwellers peaceably vacated when Van and his company arrived.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세 번째 선택을 지지했습니다. 이 위치로 선정되고, 생명나무를 포함해서 세계의 문화 본부들을 이 지중해 반도로 이전하는데 2년이 걸렸습니다. 반과 그의 동료들이 도착했을 때, 한 집단 외에 모든 반도 거주자들은 평화롭게 떠나갔습니다.

73:3.3 (823.3) This Mediterranean peninsula had a salubrious climate and an equable temperature; this stabilized weather was due to the encircling mountains and to the fact that this area was virtually an island in an inland sea. While it rained copiously on the surrounding highlands, it seldom rained in Eden proper. But each night, from the extensive network of artificial irrigation channels, a “mist would go up” to refresh the vegetation of the Garden. 이 지중해 반도는 기후가 쾌적하고 기온이 온화했습니다. 안정된 이 날씨는 둘러싸고 있는 산맥들과 이 지역이 실제로 내해(內海육지에서 가까운)의 섬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주위의 고지(高地)에는 비가 많이 왔지만, 에덴 자체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밤마다, 인공적 관개 수로의 광범위한 망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와서(창2:6)” 동산의 식물들을 새롭게 했습니다.

73:3.4 (823.4) The coast line of this land mass was considerably elevated, and the neck connecting with the mainland was only twenty-seven miles wide at the narrowest point. The great river that watered the Garden came down from the higher lands of the peninsula and flowed east through the peninsular neck to the mainland and thence across the lowlands of Mesopotamia to the sea beyond. It was fed by four tributaries which took origin in the coastal hills of the Edenic peninsula, and these are the “four heads” of the river which “went out of Eden,” and which later became confused with the branches of the rivers surrounding the second garden. 이 대륙의 해안선은 상당히 높이 솟아 있었고, 본토와 연결된 목-부분(지협地峽)은 가장 좁은 지점의 폭이 겨우 43.5 킬로미터였습니다. 동산에 물을 대는 큰 강은 반도의 더 높은 지대로부터 내려와 동쪽으로 흘러 반도의 목-부분을 통하여 본토로 갔으며 거기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를 가로질러 그 너머의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에덴 반도의 해안가 언덕에 기원을 둔 네 개의 지류(支流)가 흘렀는데, 이것들이 “에덴에서 나간(창2:10a)” 강의 “네 개의 수원(水源물의 근원, 창2:10b)”이고, 나중에 두 번째 동산을 둘러싼 강의 지류들과 혼동되었습니다.

73:3.5 (823.5) The mountains surrounding the Garden abounded in precious stones and metals, though these received very little attention. The dominant idea was to be the glorification of horticulture and the exaltation of agriculture. 동산을 둘러싼 산맥에는 진귀한 돌들과 금속이 풍부했지만, 그것들은 거의 주의를 끌지 않았습니다. 주(主)된 사고방식은 원예를 기리고 농업을 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73:3.6 (823.6) The site chosen for the Garden was probably the most beautiful spot of its kind in all the world, and the climate was then ideal. Nowhere else was there a location which could have lent itself so perfectly to becoming such a paradise of botanic expression. In this rendezvous the cream of the civilization of Urantia was forgathering. Without and beyond, the world lay in darkness, ignorance, and savagery. Eden was the one bright spot on Urantia; it was naturally a dream of loveliness, and it soon became a poem of exquisite and perfected landscape glory. 동산으로 선정된 장소는 아마 온 세계에서 그런 종류로 가장 아름다운 지점이었고, 당시에 기후도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식물로써 천국을 표현하게 된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 약속의 장소에 지구(유란시아) 문명의 정수(精髓)가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 너머 세상은 어두움과 무지와 미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에덴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자연히 사랑스러운 꿈이었고, 또한 곧 절묘하고 완벽한 절경의 시(詩)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 Establishing the Garden 동산의 건립

73:4.1 (823.7) When Material Sons, the biologic uplifters, begin their sojourn on an evolutionary world, their place of abode is often called the Garden of Eden because it is characterized by the floral beauty and the botanic grandeur of Edentia, the constellation capital. Van well knew of these customs and accordingly provided that the entire peninsula be given over to the Garden. Pasturage and animal husbandry were projected for the adjoining mainland. Of animal life, only the birds and the various domesticated species were to be found in the park. Van’s instructions were that Eden was to be a garden, and only a garden. No animals were ever slaughtered within its precincts. All flesh eaten by the Garden workers throughout all the years of construction was brought in from the herds maintained under guard on the mainland. 물질 아들들, 즉 생물학적 향상(向上)자들이 진화 세계에 머물기 시작할 때, 그들의 거처를 흔히 에덴동산으로 부르는데, 그것이 별자리 수도(首都), 에덴시아 아름다운 꽃과 화려(華麗)한 식물의 특징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반은 이 관습을 잘 알고 있어서 그에 따라 반도 전체를 동산으로 꾸미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인접한 본토를 위해 목축과 동물 사육이 계획되었습니다. 동물 생명 중에서 새들과 여러 길들인 종류만 공원에서 발견되게 했습니다. 반의 지시에 따라 에덴은 동산, 오로지 동산으로 꾸며졌습니다. 그 동산 내에서는 어떤 동물도 도살하지 않았습니다. 건설하던 여러 해 내내, 동산의 일군들이 먹었던 모든 고기는 본토의 보호로 유지되던 가축에서 들여왔습니다.

73:4.2 (824.1) The first task was the building of the brick wall across the neck of the peninsula. This once completed, the real work of landscape beautification and home building could proceed unhindered. 첫 과제는 반도의 목-부분을 가로 질러서 벽돌담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일단 완성되자, 실제적 조경(造景) 작업과 주택 건설이 제약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73:4.3 (824.2) A zoological garden was created by building a smaller wall just outside the main wall; the intervening space, occupied by all manner of wild beasts, served as an additional defense against hostile attacks. This menagerie was organized in twelve grand divisions, and walled paths led between these groups to the twelve gates of the Garden, the river and its adjacent pastures occupying the central area. 동물원은 본(本) 성벽 바로 밖에 더 작은 벽을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온갖 야수(野獸)들이 그 사이 공간을 차지했으며, 적의 공격에 대비해 추가적 방어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물원은 12대(大)구획으로 정리되었고, 이 집단들 사이에 벽이 있는 통로들이, 동산의 12대문들, 강 및 중앙지역을 차지하는 인접 목초지로 인도했습니다.

73:4.4 (824.3) In the preparation of the Garden only volunteer laborers were employed; no hirelings were ever used. They cultivated the Garden and tended their herds for support; contributions of food were also received from near-by believers. And this great enterprise was carried through to completion in spite of the difficulties attendant upon the confused status of the world during these troublous times. 동산 준비에 자원하는 일군들만 고용되었고, 임금(賃金)을 받는 일꾼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산을 경작했고, 생활을 위해 가축 떼를 길렀습니다. 인근의 믿는 자들도 식량을 기부했습니다. 그래서 이 어수선한 시절에 혼란 상태의 세계에 수반된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거대한 사업은 마칠 때까지 수행되었습니다.

73:4.5 (824.4) But it was a cause for great disappointment when Van, not knowing how soon the expected Son and Daughter might come, suggested that the younger generation also be trained in the work of carrying on the enterprise in case their arrival should be delayed. This seemed like an admission of lack of faith on Van’s part and made considerable trouble, caused many desertions; but Van went forward with his plan of preparedness, meantime filling the places of the deserters with younger volunteers. 그러나 기대하던 아들과 딸이 얼마나 곧 올지 모르고, 지체되어 도착할 경우에 그 과업 수행의 업무에 젊은 세대 또한 훈련되어야 한다고 반이 제안하자, 커다란 실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반의 편에서 신앙의 부족을 인정하는 듯이 보였고, 상당한 곤란이 일어나 이탈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반은 준비된 계획을 진척하였고, 동시에 젊은 자원자들이 이탈자들을 대신 채웠습니다.

5. The Garden Home 동산 가정(家庭)

73:5.1 (824.5) At the center of the Edenic peninsula was the exquisite stone temple of the Universal Father, the sacred shrine of the Garden. To the north the administrative headquarters was established; to the south were built the homes for the workers and their families; to the west was provided the allotment of ground for the proposed schools of the educational system of the expected Son, while in the “east of Eden” were built the domiciles intended for the promised Son and his immediate offspring. The architectural plans for Eden provided homes and abundant land for one million human beings. 에덴 반도의 중심에는 우주 아버지의 절묘한 석조 성전(聖殿), 즉 동산의 신성한 성소(聖所)가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경영 본부들이 세워졌고, 남쪽에는 일군들과 그 가족을 위한 집들이 지어졌으며, 서쪽에는 예정된 아들의 교육 체계에 속하여 제안된 학교들을 위해 분배된 땅이 제공되었고, 한편 ‘에덴의 동쪽’에는 약속된 아들과 그의 직계 자손을 위해 마련된 거주지들이 건축되었습니다. 에덴을 위한 건축 계획은 백만 명의 인간들을 위한 집들과 넓은 땅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73:5.2 (824.6) At the time of Adam’s arrival, though the Garden was only one-fourth finished, it had thousands of miles of irrigation ditches and more than twelve thousand miles of paved paths and roads. There were a trifle over five thousand brick buildings in the various sectors, and the trees and plants were almost beyond number. Seven was the largest number of houses composing any one cluster in the park. And though the structures of the Garden were simple, they were most artistic. The roads and paths were well built, and the landscaping was exquisite. 아담이 도착했을 때, 동산은 4분의 1만 완비되었지만, 수천 마일의 관개 수로와 19,200 킬로미터가 넘는 포장된 보도(步道)와 도로가 있었습니다. 여러 구역에 5,000 동(棟)이 조금 넘는 벽돌 건물들이 있었으며, 나무와 식물은 거의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공원의 집단 주택을 구성하는 집들은 일곱 채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산의 건축물들은 단순했지만, 대부분 예술적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도로들이 잘 놓아졌고 조경(造景)은 절묘했습니다.

73:5.3 (824.7) The sanitary arrangements of the Garden were far in advance of anything that had been attempted theretofore on Urantia. The drinking water of Eden was kept wholesome by the strict observance of the sanitary regulations designed to conserve its purity. During these early times much trouble came about from neglect of these rules, but Van gradually impressed upon his associates the importance of allowing nothing to fall into the water supply of the Garden. 동산의 위생시설은 그때까지 지구(유란시아)에서 시도된 어떤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에덴의 음료수는 그 깨끗함을 보존하려고 만든 위생규정을 엄격히 지켜서 위생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이 초기 시대에는 이런 규칙들을 소홀히 하여 곤란한 일들이 많았지만, 반은 점차 동료들에게 동산의 상수도에 아무 것도 빠지지 않도록 하는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3:5.4 (825.1) Before the later establishment of a sewage-disposal system the Edenites practiced the scrupulous burial of all waste or decomposing material. Amadon’s inspectors made their rounds each day in search for possible causes of sickness. Urantians did not again awaken to the importance of the prevention of human diseases until the later times of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Before the disruption of the Adamic regime a covered brick-conduit disposal system had been constructed which ran beneath the walls and emptied into the river of Eden almost a mile beyond the outer or lesser wall of the Garden. 나중에 하수처리 체계가 설립되기 전에 에덴-사람들은 모든 쓰레기와 부패물들을 항상 빈틈없이 매장했습니다. 아마돈의 조사관들은 매일 순찰하면서 질병이 일어날 원인을 찾았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까지 지구(유란시아)인들은 다시는 인간의 질병을 예방하는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담의 체제가 붕괴되기 전에, 벽돌 도랑으로 덮은 폐기물 처리 체계가 세워졌고, 이것은 담 밑으로 이어져 동산의 바깥 작은 담 너머 거의 1.6킬로미터 떨어진 에덴의 강으로 흘렀습니다.

73:5.5 (825.2) By the time of Adam’s arrival most of the plants of that section of the world were growing in Eden. Already had many of the fruits, cereals, and nuts been greatly improved. Many modern vegetables and cereals were first cultivated here, but scores of varieties of food plants were subsequently lost to the world. 아담이 도착할 당시, 에덴에는 세계 각 지역의 식물들 대부분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많은 종류의 과일, 곡물 및 견과류들이 이미 크게 개량되었습니다. 현대의 여러 채소와 곡물이 여기에서 처음 재배되었지만, 수십 종류의 식용 식물이 나중에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73:5.6 (825.3) About five per cent of the Garden was under high artificial cultivation, fifteen per cent partially cultivated, the remainder being left in a more or less natural state pending the arrival of Adam, it being thought best to finish the park in accordance with his ideas. 동산의 약 5%는 고도의 인공 재배로, 15%는 부분적으로 재배되었으며, 나머지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어느 정도 자연 상태로 놔두었는데, 그의 생각에 따라 동산을 완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73:5.7 (825.4) And so was the Garden of Eden made ready for the reception of the promised Adam and his consort. And this Garden would have done honor to a world under perfected administration and normal control. Adam and Eve were well pleased with the general plan of Eden, though they made many changes in the furnishings of their own personal dwelling. 그래서 에덴동산은 약속된 아담과 그의 배우자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완성된 경영 및 정상적 통제 아래에 있는 세상에 영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의 개인적 거처를 많이 수정하여 꾸몄지만, 에덴의 전반적 계획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73:5.8 (825.5) Although the work of embellishment was hardly finished at the time of Adam’s arrival, the place was already a gem of botanic beauty; and during the early days of his sojourn in Eden the whole Garden took on new form and assumed new proportions of beauty and grandeur. Never before this time nor after has Urantia harbored such a beautiful and replete exhibition of horticulture and agriculture. 아담이 도착할 때, 미장(美粧) 작업은 거의 끝나지 않았지만, 그곳은 이미 식물의 아름다움으로 보석과 같았습니다. 그가 에덴에 머무르던 초기에 동산 전체는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고 아름답고 웅장하게 새로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풍부한 원예와 농업의 표현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6. The Tree of Life 생명나무

73:6.1 (825.6) In the center of the Garden temple Van planted the long-guarded tree of life, whose leaves were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and whose fruit had so long sustained him on earth. Van well knew that Adam and Eve would also be dependent on this gift of Edentia for their life maintenance after they once appeared on Urantia in material form. 반은 오랫동안 지켜온 생명나무를 동산 성전의 중앙에 심었고(계2:7), 그 잎사귀는 “민족들을 치유하기(계22:2)” 위한 것이었고, 반은 그 과실로 지상에서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유란시아에 일단 물질 형태로 나타난 후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에덴시아의 이 선물에 그들 또한 의존하게 될 것을 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73:6.2 (825.7) The Material Sons on the system capitals do not require the tree of life for sustenance. Only in the planetary repersonalization are they dependent on this adjunct to physical immortality. 체계의 수도들에 있는 물질 아들들은 생명 유지를 위해 생명나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행성에서 재(再)고유성화하면서, 그들은 육체적 불멸을 위해 이 부가물에 의존합니다.

73:6.3 (825.8)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may be a figure of speech, a symbolic designation covering a multitude of human experiences, but the “tree of life” was not a myth; it was real and for a long time was present on Urantia. When the Most Highs of Edentia approved the commission of Caligastia as Planetary Prince of Urantia and those of the one hundred Jerusem citizens as his administrative staff, they sent to the planet, by the Melchizedeks, a shrub of Edentia, and this plant grew to be the tree of life on Urantia. This form of nonintelligent life is native to the constellation headquarters spheres, being also found on the headquarters worlds of the local and superuniverses as well as on the Havona spheres, but not on the system capitals.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2:9)”는 비유적 표현 즉, 여러 인간 체험들을 포함하는 상징적 명칭일 수도 있지만, “생명나무”는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재하였고 오랫동안 유란시아에 있었습니다. 에덴시아의 지고(至高)자들이 칼리가스티아를 유란시아의 행성왕자로, 그의 경영 보좌진으로 100명의 예루셈 시민들을 임명하도록 승인하면서, 멜기세덱들을 통해 식물, 에덴시아의 관목(灌木키 작은 나무)을 행성으로 보냈으며, 이 식물이 유란시아에서 자라 생명나무가 되었습니다. 이 형태의 지능이 없는 생명은 별자리 본부 구체에 자생(自生)적이며, 하보나 구체들만이 아니라 지역우주나 초(超)우주들의 본부 세계들에서도 발견되지만, 체계의 수도들에는 없습니다.

73:6.4 (826.1) This superplant stored up certain space-energies which were antidotal to the age-producing elements of animal existence.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was like a superchemical storage battery, mysteriously releasing the life-extension force of the universe when eaten. This form of sustenance was wholly useless to the ordinary evolutionary beings on Urantia, but specifically it was serviceable to the one hundred materialized members of Caligastia’s staff and to the one hundred modified Andonites who had contributed of their life plasm to the Prince’s staff, and who, in return, were made possessors of that complement of life which made it possible for them to utilize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for an indefinite extension of their otherwise mortal existence. 이 초(超)식물은 동물 존재의 노화(老化) 요소를 해독하는 특정한 공간-에너지를 저장했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초(超)화학적 축전지 같아서, 먹으면 신비하게 수명-연장의 우주 기세(氣勢)가 흘러나왔습니다. 이 형태의 음식은 유란시아의 일반적 진화 존재들에게 전혀 쓸모없지만, 칼리가스티아의 보좌진 중에서 100명의 물질화 요원들과 왕자의 보좌진에게 자신의 생명 원형질을 기증하여 수정(修整)된 100명의 안돈-사람들에게는 특별히 쓸모가 있었는데, 그 대가로 그들은 생명 보완물의 소유자들이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무기한 연장되도록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73:6.5 (826.2) During the days of the Prince’s rule the tree was growing from the earth in the central and circular courtyard of the Father’s temple. Upon the outbreak of the rebellion it was regrown from the central core by Van and his associates in their temporary camp. This Edentia shrub was subsequently taken to their highland retreat, where it served both Van and Amadon for more than one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왕자의 통치 시절에 그 나무는 아버지의 성전에 속한 중앙 원형의 안마당에서 싹이 텄습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반과 그의 동료들이 중앙 중심에서 임시 막사로 재생시켰습니다. 이 에덴시아 관목은 나중에 고지 피난처로 옮겼으며, 거기에서 그것은 15만년 이상 반과 아마돈에게 소용되었습니다.

73:6.6 (826.3) When Van and his associates made ready the Garden for Adam and Eve, they transplanted the Edentia tree to the Garden of Eden, where, once again, it grew in a central, circular courtyard of another temple to the Father. And Adam and Eve periodically partook of its fruit for the maintenance of their dual form of physical life. 반과 그의 동료들이 아담과 이브를 위한 동산을 준비했을 때, 그들은 에덴시아 나무를 에덴동산에 옮겨 심었으며, 거기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또 다른 성전 중앙의 원형 안마당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이원적(二元的) 형태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려고 정기적으로 그 과일을 먹었습니다.

73:6.7 (826.4) When the plans of the Material Son went astray, Adam and his family were not permitted to carry the core of the tree away from the Garden. When the Nodites invaded Eden, they were told that they would become as “gods if they partook of the fruit of the tree.” Much to their surprise they found it unguarded. They ate freely of the fruit for years, but it did nothing for them; they were all material mortals of the realm; they lacked that endowment which acted as a complement to the fruit of the tree. They became enraged at their inability to benefit from the tree of life, and in connection with one of their internal wars, the temple and the tree were both destroyed by fire; only the stone wall stood until the Garden was subsequently submerged. This was the second temple of the Father to perish. 물질 아들의 계획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자, 아담과 그의 가족들이 동산에서 나무의 핵심을 옮기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에덴을 침입한 온 놋사람들은 “그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들처럼” 되리라(창3:5)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주 놀랍게 그들은 방치되어 있는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몇 년간 마음대로 과실들을 먹었지만, 그들에게 아무 영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영역의 물질적 필사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무의 과실이 보완물로 작용될 자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이익을 얻을 자신들의 무능력에 격분했고, 자신들의 내란 중 하나와 관련되어, 성전과 나무가 모두 분멸(焚滅불에 타 없어짐)되었습니다. 후일 동산이 물에 잠길 때까지 돌담만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두 번째 아버지의 성전이었습니다.

73:6.8 (826.5) And now must all flesh on Urantia take the natural course of life and death. Adam, Eve,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together with their associates, all perished in the course of time, thus becoming subject to the ascension scheme of the local universe wherein mansion world resurrection follows material death. 그래서 이제 유란시아의 모든 육체는 삶과 죽음의 자연적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아담과 이브 및 자녀들과 손자들은, 그들의 동료들과 함께 시간이 흘러 모두 죽었으며, 그렇게 물질적 죽음 뒤에 저택 세계의 부활이 있는 지역 우주의 상승 계획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7. The Fate of Eden 에덴의 숙명(宿命)

73:7.1 (826.6) After the first garden was vacated by Adam, it was occupied variously by the Nodites, Cutites, and the Suntites. It later became the dwelling place of the northern Nodites who opposed co-operation with the Adamites. The peninsula had been overrun by these lower-grade Nodites for almost four thousand years after Adam left the Garden when, in connection with the violent activity of the surrounding volcanoes and the submergence of the Sicilian land bridge to Africa, the eastern floor of the Mediterranean Sea sank, carrying down beneath the waters the whole of the Edenic peninsula. Concomitant with this vast submergence the coast line of the eastern Mediterranean was greatly elevated. And this was the end of the most beautiful natural creation that Urantia has ever harbored. The sinking was not sudden, several hundred years being required completely to submerge the entire peninsula. 아담이 첫 번째 동산을 떠난 후, 놋-사람들, 큐트-사람들 및 순트-사람들이 다양하게 그 동산을 차지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아담-사람들과 협력하기를 거절한 북쪽 놋-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반도는 아담이 동산을 떠난 뒤 거의 4천년 동안 열등한 놋-사람들이 마구 짓밟았으며, 그 때 둘러싼 화산들의 격렬한 활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시칠리아 육교의 침수(浸水)와 관련하여, 지중해 동쪽 바닥이 침몰했는데, 에덴 반도 전체를 물 밑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이 광대한 침몰과 동시에 동쪽 지중해 해안선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찍이 유란시아가 감추고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연 창조계의 종말이었습니다. 그 침몰은 갑작스럽지 않았으며, 반도 전체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73:7.2 (827.1) We cannot regard this disappearance of the Garden as being in any way a result of the miscarriage of the divine plans or as a result of the mistakes of Adam and Eve. We do not regard the submergence of Eden as anything but a natural occurrence, but it does seem to us that the sinking of the Garden was timed to occur at just about the date of the accumulation of the reserves of the violet race for undertaking the work of rehabilitating the world peoples. 우리는 이 동산의 실종을 어떤 면에서 신적 계획이 실패한 결과 또는 아담과 이브의 실수의 결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에덴의 침몰을 자연 발생이 결코 아닌 것으로 간주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동산의 침몰은 세계 민족들을 회복시키는 과업을 맡은 보라 인종의 예비군이 축적된 시기와 거의 동시에 맞춰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73:7.3 (827.2) The Melchizedeks counseled Adam not to initiate the program of racial uplift and blending until his own family had numbered one-half million. It was never intended that the Garden should be the permanent home of the Adamites. They were to become emissaries of a new life to all the world; they were to mobilize for unselfish bestowal upon the needy races of earth. 멜기세덱들은 아담에게, 아담 자신의 가족이 50만 명의 수가 될 때까지 인종적 향상과 혼합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동산은 결코 아담-사람들의 영구한 거처가 될 예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새 생명의 사자(使者부탁받은 사람)들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딱한 인종들에게 사심 없이 증여하도록 동원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3:7.4 (827.3) The instructions given Adam by the Melchizedeks implied that he was to establish racial, continental, and divisional headquarters to be in charge of his immediate sons and daughters, while he and Eve were to divide their time between these various world capitals as advisers and co-ordinators of the world-wide ministry of biologic uplift, intellectual advancement, and moral rehabilitation. 멜기세덱들이 아담에게 준 지침에는 아담이 인종별, 대륙별, 및 분야별 본부들을 세워서 그의 직계 아들들과 딸들에게 맡기는 한편 그와 이브는 생물학적 향상, 지적 진보 및 도덕적 회복에 대한 충고자들과 진행자들로서 다양한 이 세계의 수도들 중에서 그들의 시간을 분배하도록 정해졌다고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73:7.5 (827.4) [Presented by Solonia, the seraphic “voice in the Garden.”] [“동산의 음성” 세라핌천사, 솔로니아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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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4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

Paper 74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

1. Adam and Eve on Jerusem 예루셈의 아담과 이브
2. Arrival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도착
3. Adam and Eve Learn About the Planet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대해 배우다
4. The First Upheaval 첫 격변(激變)
5. Adam’s Administration 아담의 경영
6. Home Life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가정생활
7. Life in the Garden 동산의 생활
8. The Legend of Creation 창조 설화

74:0.1 (828.1) ADAM AND EVE arrived on Urantia, from the year A.D. 1934, 37,848 years ago. It was in midseason when the Garden was in the height of bloom that they arrived. At high noon and unannounced, the two seraphic transports, accompanied by the Jerusem personnel intrusted with the transportation of the biologic uplifters to Urantia, settled slowly to the surface of the revolving planet in the vicinity of the temple of the Universal Father. All the work of rematerializing the bodies of Adam and Eve was carried on within the precincts of this newly created shrine. And from the time of their arrival ten days passed before they were re-created in dual human form for presentation as the world’s new rulers. They regained consciousness simultaneously. The Material Sons and Daughters always serve together. It is the essence of their service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never to be separated. They are designed to work in pairs; seldom do they function alone. 아담과 이브는 AD 1934년으로부터 37,848년 전에 유란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동산의 꽃이 만발하여 절정의 한창 때였습니다. 정오에 예고 없이, 두 세라핌천사 수송선이 유란시아의 생물학적 향상자들의 수송 임무를 맡은 예루셈 요원들을 동반하고, 우주 아버지의 성전 부근, 자전하는 행성 표면에 천천히 착륙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신체를 재(再)물질화하는 모든 작업은 새로 지은 이 성소(聖所) 경내에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지 10일이 지나서, 세계의 새 통치자로 등장하기 위해 이원적(二元的) 인간 형태로 재창조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물질 아들들과 딸들은 언제나 함께 봉사합니다. 그들이 봉사하는 핵심은 항상 모든 곳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둘이 한 쌍이 되어 일하도록 예정되었고; 홀로 활동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1. Adam and Eve on Jerusem 예루셈의 아담과 이브

74:1.1 (828.2) The Planetary Adam and Eve of Urantia were members of the senior corps of Material Sons on Jerusem, being jointly number 14,311. They belonged to the third physical series and were a little more than eight feet in height. 유란시아의 행성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들의 선임단(先任團) 요원들이었으며, 공동번호는 14,311 이었습니다. 그들은 셋째 육체 계열에 속해 있었고 신장은 8 피트(244센티) 이상이었습니다.

74:1.2 (828.3) At the time Adam was chosen to come to Urantia, he was employed, with his mate, in the trial-and-testing physical laboratories of Jerusem. For more than fifteen thousand years they had been directors of the division of experimental energy as applied to the modification of living forms. Long before this they had been teachers in the citizenship schools for new arrivals on Jerusem. And all this should be borne in mind in connection with the narration of their subsequent conduct on Urantia. 아담이 유란시아에 가도록 선정되었을 때, 그는 아내와 예루셈의 육체 평가-테스트 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 15,000년 이상 그들은 생체형태의 변이에 적용될 실험 에너지 부서의 관리자들이었습니다. 이보다 오래 전에 그들은 예루셈에 새로 도착하는 자들을 위한 시민권 학교들의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나중에 유란시아에서 행한 이야기와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합니다.

74:1.3 (828.4) When the proclamation was issued calling for volunteers for the mission of Adamic adventure on Urantia, the entire senior corps of Material Sons and Daughters volunteered. The Melchizedek examiners, with the approval of Lanaforge and the Most Highs of Edentia, finally selected the Adam and Eve who subsequently came to function as the biologic uplifters of Urantia.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모험 사명을 위한 지원자 모집 선포가 발표되자, 물질 아들들과 딸들로 구성된 전체 선임단(先任團)이 자원했습니다. 멜기세덱 시험관들은 라나훠지와 에덴시아 지고자(至高者)들의 승인으로, 나중에 유란시아의 생물학적 향상자로서 활동할 아담과 이브를 최종 선발했습니다.

74:1.4 (828.5) Adam and Eve had remained loyal to Michael during the Lucifer rebellion; nevertheless, the pair were called before the System Sovereign and his entire cabinet for examination and instruction. The details of Urantia affairs were fully presented; they were exhaustively instructed as to the plans to be pursued in accepting the responsibilities of rulership on such a strife-torn world. They were put under joint oaths of allegiance to the Most Highs of Edentia and to Michael of Salvington. And they were duly advised to regard themselves as subject to the Urantia corps of Melchizedek receivers until that governing body should see fit to relinquish rule on the world of their assignment. 아담과 이브는 루시퍼 반란 중에 미가엘에게 여전히 충성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쌍은 심사와 훈련을 위해 체계 주권자와 그의 전(全) 내각 앞에 소집되었습니다. 유란시아의 세부 업무가 충분히 소개되었고, 그들은 그토록 분쟁으로 분열된 세계를 통치하는 책임을 맡도록 주어진 계획으로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그들은 에덴시아의 지고자(至高者)들과 샐빙턴의 미가엘에게 충성의 공동 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관리부가 세상을 다스리는 그들의 임무를 그만두도록 결정하기까지 유란시아에 있는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 무리들에게 복종하도록 정식으로 권면을 받았습니다.

74:1.5 (829.1) This Jerusem pair left behind them on the capital of Satania and elsewhere, one hundred offspring — fifty sons and fifty daughters — magnificent creatures who had escaped the pitfalls of progression, and who were all in commission as faithful stewards of universe trust at the time of their parents’ departure for Urantia. And they were all present in the beautiful temple of the Material Sons attendant upon the farewell exercises associated with the last ceremonies of the bestowal acceptance. These children accompanied their parents to the dematerialization headquarters of their order and were the last to bid them farewell and divine speed as they fell asleep in the personality lapse of consciousness which precedes the preparation for seraphic transport. The children spent some time together at the family rendezvous rejoicing that their parents were soon to become the visible heads, in reality the sole rulers, of planet 606 in the system of Satania. 이 예루셈 쌍은 사타니아 수도와 다른 곳에 100명의 자녀 – 50명의 아들과 50명의 딸 – 을 남겼는데, 이들은 진보의 함정을 벗어난 훌륭한 창조물들이었고, 그들의 부모가 유란시아로 떠날 때, 우주의 신임을 받는 충성된 청지기들로서 모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증여를 수락하는 마지막 예식과 관련된 송별 행사에 따라서 아름다운 물질 아들들의 성전에 모두 참석했습니다. 이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따라 그들 계층의 비(非)물질화(물질적 성질을 없애는) 본부들에 갔고, 세라핌천사 수송을 위한 준비에 앞서, 의식(意識)에 속한 고유성이 임시 상실로 인해 그들이 잠들 때, 마지막까지 있어서 그들에게 작별하고 신적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가 사타니아 체계의 행성 606의 눈에 보이는 수장(首長), 즉 실제 유일한 통치자들이 곧 될 것을 기뻐하면서 가족 모임에서 함께 얼마간 시간을 보냈습니다.

74:1.6 (829.2) And thus did Adam and Eve leave Jerusem amidst the acclaim and well-wishing of its citizens. They went forth to their new responsibilities adequately equipped and fully instructed concerning every duty and danger to be encountered on Urantia. 이렇게 아담과 이브는 시민들의 환호와 지지 가운데 예루셈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부닥칠 모든 임무와 어려움에 대해 적절히 채비하고 충분히 훈련되어 새로운 책임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2. Arrival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도착

74:2.1 (829.3) Adam and Eve fell asleep on Jerusem, and when they awakened in the Father’s temple on Urantia in the presence of the mighty throng assembled to welcome them, they were face to face with two beings of whom they had heard much, Van and his faithful associate Amadon. These two heroes of the Caligastia secession were the first to welcome them in their new garden home.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잠들었고, 유란시아에서 그들을 환영하려고 거대한 군중이 모인 가운데, 아버지 성전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많이 들었던 두 존재들, 반과 그의 신실한 동료 아마돈과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칼리가스티아 이탈(離脫)의 이 두 영웅이 그들의 새 동산 주택에서 처음으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74:2.2 (829.4) The tongue of Eden was an Andonic dialect as spoken by Amadon. Van and Amadon had markedly improved this language by creating a new alphabet of twenty-four letters, and they had hoped to see it become the tongue of Urantia as the Edenic culture would spread throughout the world. Adam and Eve had fully mastered this human dialect before they departed from Jerusem so that this son of Andon heard the exalted ruler of his world address him in his own tongue. 에덴의 말은 아마돈이 말했던 안돈의 말씨였습니다. 반과 아마돈은 24글자의 새 알파벳을 만들어 이 언어를 현저히 개선했고 에덴의 문화가 전(全) 세계로 퍼질 때 그것이 유란시아의 언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이 인간의 말씨를 충분히 통달했기 때문에 이 안돈의-아들은 고귀한 자기 세계의 통치자가 자신의 말씨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74:2.3 (829.5) And on that day there was great excitement and joy throughout Eden as the runners went in great haste to the rendezvous of the carrier pigeons assembled from near and far, shouting: “Let loose the birds; let them carry the word that the promised Son has come.” Hundreds of believer settlements had faithfully, year after year, kept up the supply of these home-reared pigeons for just such an occasion. 그리고 그 날 전(全) 에덴은 흥분과 기쁨이 넘쳤고, 주자(走者)들은 원근에서 모여든 전서구(傳書鳩통신에 이용하는 훈련된 비둘기)의 집결지로 급히 서둘러 나가 외쳤습니다. “새들을 풀어 놓으라. 약속의 아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새들을 통해 전하라.” 정착했던 수백 명의 신자(信者)들은 해마다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집에서 기른 이 비둘기들을 신실하게 계속 공급했습니다.

74:2.4 (829.6) As the news of Adam’s arrival spread abroad, thousands of the near-by tribesmen accepted the teachings of Van and Amadon, while for months and months pilgrims continued to pour into Eden to welcome Adam and Eve and to do homage to their unseen Father. 아담이 도착 소식이 널리 퍼지자, 인접한 수천의 부족민들이 반과 아마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한편 수개월간 순례자들이 아담과 이브를 환영하고 보이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께 경의를 표하려고 계속 에덴에 밀어닥쳤습니다.

74:2.5 (829.7) Soon after their awakening, Adam and Eve were escorted to the formal reception on the great mound to the north of the temple. This natural hill had been enlarged and made ready for the installation of the world’s new rulers. Here, at noon, the Urantia reception committee welcomed this Son and Daughter of the system of Satania. Amadon was chairman of this committee, which consisted of twelve members embracing a representative of each of the six Sangik races; the acting chief of the midwayers; Annan, a loyal daughter and spokesman for the Nodites; Noah, the son of the architect and builder of the Garden and executive of his deceased father’s plans; and the two resident Life Carriers. 아담과 이브는 깨어나자마자 성전 북쪽의 큰 언덕에서 열린 공식 환영회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이 천연 언덕은 세계의 새 통치자들의 취임을 위해 확장되어 준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정오에 유란시아 환영 위원회는 사타니아 체계의 이 아들과 딸을 환영했습니다. 아마돈은 이 위원회의 의장(議長)이었고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여섯 산긱 인종들의 각 대표, 중도자들의 임시 수석(首席); 놋-사람들의 충성스러운 딸이며 대변자 안난; 동산 설계자의 아들로서 건축자이며 선친(先親)의 계획을 실행한 노아; 및 거주하던 두 생명 운반자들을 포함했습니다.

74:2.6 (830.1) The next act was the delivery of the charge of planetary custody to Adam and Eve by the senior Melchizedek, chief of the council of receivership on Urantia.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took the oath of allegiance to the Most Highs of Norlatiadek and to Michael of Nebadon and were proclaimed rulers of Urantia by Van, who thereby relinquished the titular authority which for over one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he had held by virtue of the action of the Melchizedek receivers. 다음은 선임 멜기세덱, 유란시아 수령(受領)회 수석이 아담과 이브에게 행성 보관(保管)자의 책임을 전달하는 행사였습니다. 물질 아들과 딸은 놀라시아덱의 지고(至高)자들과 네바돈의 미가엘에게 충성을 선서했으며, 반이 그들을 유란시아의 통치자들로 선포했습니다. 반은 멜기세덱 관리자들 활동으로 인해 자신이 150,000년 이상 맡았던 직함의 권위를 그렇게 넘겨줬습니다.

74:2.7 (830.2) And Adam and Eve were invested with kingly robes on this occasion, the time of their formal induction into world rulership. Not all of the arts of Dalamatia had been lost to the world; weaving was still practiced in the days of Eden. 세상 통치권으로 공식 취임하는 날, 이 때 아담과 이브는 왕의 예복을 입었습니다. 달라마시아의 모든 기술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직조(織造)는 여전히 에덴의 시절에도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74:2.8 (830.3) Then was heard the archangels’ proclamation, and the broadcast voice of Gabriel decreed the second judgment roll call of Urantia and the resurrection of the sleeping survivors of the second dispensation of grace and mercy on 606 of Satania. The dispensation of the Prince has passed; the age of Adam, the third planetary epoch, opens amidst scenes of simple grandeur; and the new rulers of Urantia start their reign under seemingly favorable conditions, notwithstanding the world-wide confusion occasioned by lack of the co-operation of their predecessor in authority on the planet. 그 후 천사장의 선포가 있었고, 가브리엘의 음성이 방송으로, 유란시아의 두 번째 심판 점호와 사타니아 606에서 은혜와 자비의 둘째 섭리시대에 속하여 잠자는 생존자들의 부활을 포고(布告)했습니다. 왕자의 섭리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아담의 시대, 셋째 행성 신시대(新時代)가 순수하게 장엄한 장면 중에 개시되고, 행성의 권위를 지닌 전임자의 협조 부족으로 일어난 세계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외관상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유란시아의 새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3. Adam and Eve Learn About the Planet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대해 배우다

74:3.1 (830.4) And now, after their formal installation, Adam and Eve became painfully aware of their planetary isolation. Silent were the familiar broadcasts, and absent were all the circuits of extraplanetary communication. Their Jerusem fellows had gone to worlds running along smoothly with a well-established Planetary Prince and an experienced staff ready to receive them and competent to co-operate with them during their early experience on such worlds. But on Urantia rebellion had changed everything. Here the Planetary Prince was very much present, and though shorn of most of his power to work evil, he was still able to make the task of Adam and Eve difficult and to some extent hazardous. It was a serious and disillusioned Son and Daughter of Jerusem who walked that night through the Garden under the shining of the full moon, discussing plans for the next day. 그리고 이제 공식적 취임식 후,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행성 고립을 고통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방송이 없었고 외부행성 통신의 모든 회로가 두절되었습니다. 그들의 예루셈 동료들은 그런 세계들에서 자신들의 초기 체험 기간에 자신들을 수용하여 충분히 협력할 태세가 된 안정된 행성 왕자 및 숙련된 보좌진들이 있어서 순조롭게 출발하는 세계들로 갔습니다. 그러나 유란시아는 반란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에는 행성 왕자가 아직 있었으며, 악행으로 자기 권능의 대부분을 상실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의 업무를 어렵게, 어느 정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각한 환멸(幻滅)을 느낀 예루셈의 아들과 딸은 그날 밤 보름달이 비취는 정원을 거닐며 다음 날의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74:3.2 (830.5) Thus ended the first day of Adam and Eve on isolated Urantia, the confused planet of the Caligastia betrayal; and they walked and talked far into the night, their first night on earth — and it was so lonely. 고립된 유란시아, 즉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으로 혼란에 빠진 행성에서 아담과 이브의 첫날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늦게까지 걷고 이야기했으며 지상에서 그들의 첫날밤은 몹시 외로웠습니다.

74:3.3 (830.6) Adam’s second day on earth was spent in session with the planetary receivers and the advisory council. From the Melchizedeks, and their associates, Adam and Eve learned more about the details of the Caligastia rebellion and the result of that upheaval upon the world’s progress. And it was, on the whole, a disheartening story, this long recital of the mismanagement of world affairs. They learned all the facts regarding the utter collapse of the Caligastia scheme for accelerating the process of social evolution. They also arrived at a full realization of the folly of attempting to achieve planetary advancement independently of the divine plan of progression. And thus ended a sad but enlightening day — their second on Urantia. 지상에서 아담의 둘째 날은 행성 수령자(受領者)들 및 자문 위원회와 회의하며 보냈습니다. 멜기세덱들과 그들의 동료들에게서, 아담과 이브는 상세한 칼리가스티아 반역과 세상 진보에 대한 그 대격변의 결과에 대해 더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것은 낙심되는 이야기, 세상 업무를 잘못 경영했던 이런 긴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진화 과정의 가속화를 위한 칼리가스티아 기획의 철저한 붕괴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진보의 신적 계획과 독립적으로 행성 발달을 이루려는 시도의 사악(邪惡)함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해가 된 유란시아의 둘째 날을 이렇게 마쳤습니다.

74:3.4 (831.1) The third day was devoted to an inspection of the Garden. From the large passenger birds — the fandors — Adam and Eve looked down upon the vast stretches of the Garden while being carried through the air over this, the most beautiful spot on earth. This day of inspection ended with an enormous banquet in honor of all who had labored to create this garden of Edenic beauty and grandeur. And again, late into the night of their third day, the Son and his mate walked in the Garden and talked about the immensity of their problems. 셋째 날은 동산을 시찰하며 보냈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현장 위 공중에서 커다란 운송용 새들 – 판도르들 –을 타고 아담과 이브는 광활한 동산을 내려다봤습니다. 아름답고 장엄한 이 에덴을 만들려고 수고한 모든 사람들을 축하하는 풍성한 연회로 이 시찰의 날을 마쳤습니다. 또 다시 셋째 날 밤늦도록 아들과 그의 아내는 동산을 거닐면서 막대한 자신들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74:3.5 (831.2) On the fourth day Adam and Eve addressed the Garden assembly. From the inaugural mount they spoke to the people concerning their plans for the rehabilitation of the world and outlined the methods whereby they would seek to redeem the social culture of Urantia from the low levels to which it had fallen as a result of sin and rebellion. This was a great day, and it closed with a feast for the council of men and women who had been selected to assume responsibilities in the new administration of world affairs. Take note! women as well as men were in this group, and that was the first time such a thing had occurred on earth since the days of Dalamatia. It was an astounding innovation to behold Eve, a woman, sharing the honors and responsibilities of world affairs with a man. And thus ended the fourth day on earth. 넷째 날 아담과 이브는 동산 집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취임식 언덕에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재건할 자신들의 계획들에 대해 말했으며 죄와 반역의 결과로 파멸된 낮은 수준에서 유란시아의 사회적 문화를 그들이 회복할 방법의 요점을 말했습니다. 대단한 이 날은 새롭게 세상 업무의 경영 책임을 맡도록 선정된 남녀로 구성된 회의를 위한 잔치로 마쳤습니다. 이 집단에 남성들만 아니라 여성들도 있었고, 달라마시아의 시절 이후 지상에서 그런 일이 처음 일어났음을 주목하십시오! 남성과 함께 세상 업무의 영예와 책임을 공유하는 여성, 이브를 바라보는 것은 아주 대단한 혁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지상의 넷째 날이 마쳤습니다.

74:3.6 (831.3) The fifth day was occupied with the organization of the temporary government, the administration which was to function until the Melchizedek receivers should leave Urantia. 다섯째 날은 임시 정부, 즉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이 유란시아를 떠날 때까지 활동할 행정부의 조직에 전념했습니다.

74:3.7 (831.4) The sixth day was devoted to an inspection of the numerous types of men and animals. Along the walls eastward in Eden, Adam and Eve were escorted all day, viewing the animal life of the planet and arriving at a better understanding as to what must be done to bring order out of the confusion of a world inhabited by such a variety of living creatures. 여섯째 날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동물들 조사에 몰두했습니다. 에덴 동쪽으로 벽을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온종일 호위를 받으며 행성의 동물 생명을 관찰했고, 그런 다양한 창조물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74:3.8 (831.5) It greatly surprised those who accompanied Adam on this trip to observe how fully he understood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thousands upon thousands of animals shown him. The instant he glanced at an animal, he would indicate its nature and behavior. Adam could give names descriptive of the origin, nature, and function of all material creatures on sight. Those who conducted him on this tour of inspection did not know that the world’s new ruler was one of the most expert anatomists of all Satania; and Eve was equally proficient. Adam amazed his associates by describing hosts of living things too small to be seen by human eyes. 이 여행에 아담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아담에게 나타난 수천수만의 동물들이 지닌 본성과 기능을 그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지켜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그가 동물을 얼핏 보는 순간, 그는 그 본성과 습성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아담은 눈에 띄는 대로 모든 물질 창조물들의 기원, 본성 및 기능을 묘사하는 이름을 댔습니다. 이 시찰여행에서 그의 안내자들은, 새로운 세상의 통치자가 모든 사타니아에서 최고의 전문 해부학자들 중 하나임을 몰랐습니다. 이브도 같은 전문가였습니다. 아담은 육안으로 보기에 너무 작은 살아있는 것들의 무리를 설명하여 그의 동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74:3.9 (831.6) When the sixth day of their sojourn on earth was over, Adam and Eve rested for the first time in their new home in “the east of Eden.” The first six days of the Urantia adventure had been very busy, and they looked forward with great pleasure to an entire day of freedom from all activities. 그들이 지상에 머문 여섯째 날이 끝나자,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쪽”에 있는 그들의 새 집에서 처음 쉬었습니다. 유란시아를 경험한 첫 엿새는 매우 바빴으며, 그들은 모든 활동에서 벗어나는 꼬박 하루를 아주 즐겁게 기다렸습니다.

74:3.10 (831.7) But circumstances dictated otherwise. The experience of the day just past in which Adam had so intelligently and so exhaustively discussed the animal life of Urantia, together with his masterly inaugural address and his charming manner, had so won the hearts and overcome the intellects of the Garden dwellers that they were not only wholeheartedly disposed to accept the newly arrived Son and Daughter of Jerusem as rulers, but the majority were about ready to fall down and worship them as gods. 그러나 상황은 달리 전개되었습니다. 아담이 유란시아 동물 생명을 아주 지능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던 바로 전 날의 체험은, 그의 훌륭한 취임 연설과 매력적인 태도와 함께, 동산 거주자들의 심정을 사로잡고 지성을 그토록 압도해서, 그들은 새로 도착한 예루셈의 아들과 딸을 통치자들로서 전심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대다수는 그들을 신과 같은 존재들로 여겨서 땅에 엎드려 경배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었습니다.

4. The First Upheaval 첫 격변(激變)

74:4.1 (832.1) That night, the night following the sixth day, while Adam and Eve slumbered, strange things were transpiring in the vicinity of the Father’s temple in the central sector of Eden. There, under the rays of the mellow moon, hundreds of enthusiastic and excited men and women listened for hours to the impassioned pleas of their leaders. They meant well, but they simply could not understand the simplicity of the fraternal and democratic manner of their new rulers. And long before daybreak the new and temporary administrators of world affairs reached a virtually unanimous conclusion that Adam and his mate were altogether too modest and unassuming. They decided that Divinity had descended to earth in bodily form, that Adam and Eve were in reality gods or else so near such an estate as to be worthy of reverent worship. 그 날 밤, 여섯 째 날 밤에 아담과 이브가 자는 동안, 에덴의 중앙 구역, 아버지의 성전 부근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감미로운 달빛 아래 열광적으로 흥분한 수백 명의 남녀들이 자기 지도자들의 열렬한 간청에 몇 시간 동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선의(善意)를 담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새 통치자들이 지닌 우애적이며 민주적인 태도의 소박함을 단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훨씬 전에, 세상 업무를 맡은 새 임시 경영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완전히 너무 점잖고 겸손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신성(神性)이 육체 형태로 지상에 내려왔고,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신과 같은 존재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경건히 경배할 그런 높은 신분에 거의 아주 가깝다고 판결했습니다.

74:4.2 (832.2) The amazing events of the first six days of Adam and Eve on earth were entirely too much for the unprepared minds of even the world’s best men; their heads were in a whirl; they were swept along with the proposal to bring the noble pair up to the Father’s temple at high noon in order that everyone might bow down in respectful worship and prostrate themselves in humble submission. And the Garden dwellers were really sincere in all of this. 아담과 이브가 첫 엿새에 지상에서 보인 놀라운 사건들은, 최고의 세상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절하여 정중히 경배하고 엎드려 겸손히 복종하도록 정오에 고귀한 남녀를 아버지의 성전으로 모셔오자는 제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산 거주자들은 정말 이 모든 일에 진지했습니다.

74:4.3 (832.3) Van protested. Amadon was absent, being in charge of the guard of honor which had remained behind with Adam and Eve overnight. But Van’s protest was swept aside. He was told that he was likewise too modest, too unassuming; that he was not far from a god himself, else how had he lived so long on earth, and how had he brought about such a great event as the advent of Adam? And as the excited Edenites were about to seize him and carry him up to the mount for adoration, Van made his way out through the throng and, being able to communicate with the midwayers, sent their leader in great haste to Adam. 반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마돈은 밤새 아담과 이브와 함께 뒤에 남아 영예 보초를 담당했기에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의 항의는 일축되었습니다. 반 또한 너무 점잖고 너무 겸손하며, 신(god)과 같은 존재에서 멀지 않은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지상에서 그렇게 오래 살면서, 아담의 도래(到來)처럼 그런 위대한 사건을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흥분한 에덴-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가 찬미하려하자, 반은 무리를 벗어나, 중도자(中途者)들에게 통보할 수 있어서, 그들의 지도자를 황급히 아담에게 보냈습니다.

74:4.4 (832.4) It was near the dawn of their seventh day on earth that Adam and Eve heard the startling news of the proposal of these well-meaning but misguided mortals; and then, even while the passenger birds were swiftly winging to bring them to the temple, the midwayers, being able to do such things, transported Adam and Eve to the Father’s temple. It was early on the morning of this seventh day and from the mount of their so recent reception that Adam held forth in explanation of the orders of divine sonship and made clear to these earth minds that only the Father and those whom he designates may be worshiped. Adam made it plain that he would accept any honor and receive all respect, but worship never! 아담과 이브가 지상에 온지 칠일 째 새벽녘에 그들은 선의(善意)였지만 잘못 알고 있는 이 필사자들이 제안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여객용 새들이 그들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려고 신속히 날았지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중도자들이 아담과 이브를 아버지의 성전으로 옮겼습니다. 이 7일째 아침 일찍 근래에 그들을 접대하던 언덕에서 아담은 신적 아들 됨의 도리를 설명했으며 오직 아버지와 그가 지명하는 자들이 경배를 받을 수도 있다고 지상의 사람들에게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어떤 명예나 모든 존경을 받아들이겠지만, 경배는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74:4.5 (832.5) It was a momentous day, and just before noon, about the time of the arrival of the seraphic messenger bearing the Jerusem acknowledgment of the installation of the world’s rulers, Adam and Eve, moving apart from the throng, pointed to the Father’s temple and said: “Go you now to the material emblem of the Father’s invisible presence and bow down in worship of him who made us all and who keeps us living. And let this act be the sincere pledge that you never will again be tempted to worship anyone but God.” They all did as Adam directed.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stood alone on the mount with bowed heads while the people prostrated themselves about the temple. 그 날은 중요한 날이었고, 정오 직전, 세라핌천사 메신저들이 그 세계 통치자들의 취임에 대한 예루셈 승인(承認)서를 가지고 도착할 무렵에, 아담과 이브는 군중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성전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 현존의 물질적 상징으로 가서, 우리 모두를 만드셨고 우리를 살게 하시는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고 이 행위로, 너희가 하나님 외에 누구도 경배하려고 다시 유혹받지 않겠다고 신실히 서약하라.” 그들은 모두 아담이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향해 엎드려 있는 동안, 물질 아들과 딸은 고개를 숙이고 언덕에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74:4.6 (832.6) And this was the origin of the Sabbath-day tradition. Always in Eden the seventh day was devoted to the noontide assembly at the temple; long it was the custom to devote this day to self-culture. The forenoon was devoted to physical improvement, the noontime to spiritual worship, the afternoon to mind culture, while the evening was spent in social rejoicing. This was never the law in Eden, but it was the custom as long as the Adamic administration held sway on earth. 그리고 이것이 안식일 전통의 기원이었습니다. 늘 에덴에서 제7일은 성전에서 정오 집회에 바쳐졌습니다. 이 날을 자기-수양에 바치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오전은 육체 증진에, 정오는 영적 경배에, 오후는 마음 수양에 바쳤고 한편 저녁은 모여서 기뻐하며 보냈습니다. 이것은 에덴에서 결코 법이 아니었지만, 아담적 경영이 지상에서 지배하는 한 관습이었습니다.

5. Adam’s Administration 아담의 경영

74:5.1 (833.1) For almost seven years after Adam’s arrival the Melchizedek receivers remained on duty, but the time finally came when they turned the administration of world affairs over to Adam and returned to Jerusem. 아담의 도착 후 거의 7년 동안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이 근무 중이었지만, 그들이 세상 업무 경영을 아담에게 맡기고 예루셈으로 돌아갈 때가 결국 왔습니다.

74:5.2 (833.2) The farewell of the receivers occupied the whole of a day, and during the evening the individual Melchizedeks gave Adam and Eve their parting advice and best wishes. Adam had several times requested his advisers to remain on earth with him, but always were these petitions denied. The time had come when the Material Sons must assume full responsibility for the conduct of world affairs. And so, at midnight, the seraphic transports of Satania left the planet with fourteen beings for Jerusem, the translation of Van and Amadon occurring simultaneously with the departure of the twelve Melchizedeks. 수령자(受領者)들의 송별회는 하루 종일 걸렸으며, 저녁에 각 멜기세덱들이 아담과 이브에게 송별 충고와 행복을 빌었습니다. 아담은 여러 번 자기 충고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지상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간청들은 언제나 거절되었습니다. 물질 아들들이 세상 업무 수행을 완전히 책임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사타니아의 세라핌천사 수송자들이 한밤중에 14 존재들과 함께 예루셈을 향해 행성을 떠났고, 반과 아마돈의 변이(變移)도 12 멜기세덱들의 출발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74:5.3 (833.3) All went fairly well for a time on Urantia, and it appeared that Adam would, eventually, be able to develop some plan for promoting the gradual extension of the Edenic civilization. Pursuant to the advice of the Melchizedeks, he began to foster the arts of manufacture with the idea of developing trade relations with the outside world. When Eden was disrupted, there were over one hundred primitive manufacturing plants in operation, and extensive trade relations with the near-by tribes had been established. 한동안 유란시아는 모든 것이 상당히 잘 진행되었고, 결국 아담이 에덴 문명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증진 계획을 개발할 수 있는 듯했습니다. 멜기세덱들의 충고에 따라서, 그는 외부 세계와 무역 관계를 발전시키는 생각으로 제조 기술을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덴이 붕괴되었을 때, 1백 개 이상의 원시적 제조 공장들이 가동(可動) 중이었고, 인근 부족들과 폭넓은 거래 관계가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74:5.4 (833.4) For ages Adam and Eve had been instructed in the technique of improving a world in readiness for their specialized contributions to the advancement of evolutionary civilization; but now they were face to face with pressing problems,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law and order in a world of savages, barbarians, and semicivilized human beings. Aside from the cream of the earth’s population, assembled in the Garden, only a few groups, here and there, were at all ready for the reception of the Adamic culture. 오랫동안 아담과 이브는 진화적 문명 발전에 자신들이 특별히 기여하기 위한 준비로 세상을 개선하는 기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야만인들, 미개인들 및 반(半)문명 인간 존재들 세계에 법과 질서를 세우는 것과 같은 긴급한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동산에 모인 지상 사람들 중 최상류를 제외하고, 아담의 문화를 수용할 준비가 다 된 집단은 여기저기에 몇 개뿐이었습니다.

74:5.5 (833.5) Adam made a heroic and determined effort to establish a world government, but he met with stubborn resistance at every turn. Adam had already put in operation a system of group control throughout Eden and had federated all of these companies into the Edenic league. But trouble, serious trouble, ensued when he went outside the Garden and sought to apply these ideas to the outlying tribes. The moment Adam’s associates began to work outside the Garden, they met the direct and well-planned resistance of Caligastia and Daligastia. The fallen Prince had been deposed as world ruler, but he had not been removed from the planet. He was still present on earth and able, at least to some extent, to resist all of Adam’s plans for the rehabilitation of human society. Adam tried to warn the races against Caligastia, but the task was made very difficult because his archenemy was invisible to the eyes of mortals. 아담은 세계 정부를 세우려고 과감하고 단호하게 노력했지만, 그는 언제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아담은 이미 전(全) 에덴을 집단 조정 체계로 가동시켰고, 이 모든 집단을 에덴의 연맹에 연합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산 밖으로 나가서 이 관념(생각)들을 외진 부족들에게 적용시키려 하자, 분쟁, 심각한 분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아담의 동료들이 동산 외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직접적인 잘 계획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타락한 왕자는 세계의 통치자로서 해임되었지만, 이 행성에서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지상에 있었고,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인간 사회의 회복을 위한 아담의 모든 계획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인종들에게 칼리가스티아를 대비하도록 경고하려 했지만, 그의 대적(大敵)이 필사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 일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74:5.6 (833.6) Even among the Edenites there were those confused minds that leaned toward the Caligastia teaching of unbridled personal liberty; and they caused Adam no end of trouble; always were they upsetting the best-laid plans for orderly progression and substantial development. He was finally compelled to withdraw his program for immediate socialization; he fell back on Van’s method of organization, dividing the Edenites into companies of one hundred with captains over each and with lieutenants in charge of groups of ten. 에덴사람들 중에서도 방자(放恣)한(건방진) 개인적 해방이라는 칼리가스티아의 가르침에 쏠려 그렇게 혼란한 마음(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아담에게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항상 정돈된 진보와 견고한 개발을 위해 잘 세운 계획들을 뒤엎었습니다. 결국 그는 직접적 사회화를 위한 자신의 프로그램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반의 조직 방법에 의지하여, 에덴사람들을 100개의 집단으로 나누고, 각 집단마다 회장들과 10명의 집단을 맡은 부관(副官)들을 두었습니다.

74:5.7 (834.1) Adam and Eve had come to institute representative government in the place of monarchial, but they found no government worthy of the name 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For the time being Adam abandoned all effort to establish representative government, and before the collapse of the Edenic regime he succeeded in establishing almost one hundred outlying trade and social centers where strong individuals ruled in his name. Most of these centers had been organized aforetime by Van and Amadon. 아담과 이브는 군주 대신에 대의정치(代議政治)를 세우려고 왔지만, 온 지상 표면에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정부(政府)를 결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당분간 아담은 대의정치(代議政治)를 세우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나서, 에덴 정권의 붕괴 이전(前)에 그는 변경에, 자신의 이름으로 강한 개인들이 통치하는, 거의 100개의 무역 및 사회 중심들을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중심들의 대부분은 이전에 반과 아마돈이 조직했었습니다.

74:5.8 (834.2) The sending of ambassadors from one tribe to another dates from the times of Adam. This was a great forward step in the evolution of government.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대사들을 파견하는 일은 아담의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정부(政府)의 진화에서 위대한 진일보(進一步)였습니다.

6. Home Life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가정 생활

74:6.1 (834.3) The Adamic family grounds embraced a little over five square miles. Immediately surrounding this homesite, provision had been made for the care of more than three hundred thousand of the pure-line offspring. But only the first unit of the projected buildings was ever constructed. Before the size of the Adamic family outgrew these early provisions, the whole Edenic plan had been disrupted and the Garden vacated. 아담가족의 집터는 5평방 마일(13㎢)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 대지 바로 주위에 30만 이상의 순계(純系동일 형질 계통) 자손들을 돌보는 시설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계획된 건물들 중 첫 단위만 건설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담 가족 규모가 초기 이 시설들보다 커지기 전에 모든 에덴의 계획이 붕괴되었고 동산은 비워졌습니다.

74:6.2 (834.4) Adamson was the first-born of the violet race of Urantia, being followed by his sister and Eveson,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Eve was the mother of five children before the Melchizedeks left — three sons and two daughters. The next two were twins. She bore sixty-three children, thirty-two daughters and thirty-one sons, before the default. When Adam and Eve left the Garden, their family consisted of four generations numbering 1,647 pure-line descendants. They had forty-two children after leaving the Garden besides the two offspring of joint parentage with the mortal stock of earth. And this does not include the Adamic parentage to the Nodite and evolutionary races. 아담손은 맨 처음 태어난 유란시아의 보라 인종이었고, 누이와 이브손, 즉 아담과 이브의 둘째 아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멜기세덱들이 떠나기 전에 이브는 다섯 아이들 – 세 아들과 두 딸 –의 어머니였습니다. 다음 둘은 쌍둥이였습니다. 불이행(不履行의무를 이행하지 않음) 전(前)에 그녀는 자녀 63명, 즉 딸 32명과 아들 31명을 낳았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날 때, 그들의 가족은 4대를 이루었으며, 순계(純系) 자손들 수(數)는 1,647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산을 떠난 후, 지상의 필사 혈통과 공동 부모관계의 2자녀 외에도, 42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놋-종족과 진화 인종들에 대한 아담의 부모관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74:6.3 (834.5) The Adamic children did not take milk from animals when they ceased to nurse the mother’s breast at one year of age. Eve had access to the milk of a great variety of nuts and to the juices of many fruits, and knowing full well the chemistry and energy of these foods, she suitably combined them for the nourishment of her children until the appearance of teeth. 아담 자녀들은 1살에 모유를 뗄 때, 동물의 우유를 먹지 않았습니다. 이브는 다양한 견과류를 섞은 우유와 여러 과일 주스들을 먹였고, 이 음식들의 화학성질과 에너지를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치아가 나올 때까지 그녀는 자녀들의 영양(營養)을 위해 그것들을 적절히 배합했습니다.

74:6.4 (834.6) While cooking was universally employed outside of the immediate Adamic sector of Eden, there was no cooking in Adam’s household. They found their foods — fruits, nuts, and cereals — ready prepared as they ripened. They ate once a day, shortly after noontime. Adam and Eve also imbibed “light and energy” direct from certain space emanations in conjunction with the ministry of the tree of life. 불로 굽는 요리는 에덴의 아담 구역 바로 밖에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아담의 가족들은 불로 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르익어 바로 준비된 과일류, 견과류, 곡류에서 자신들의 음식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정오 직후에 먹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또한 생명나무의 도움과 관련된 어떤 공간 방사(放射)물에서 직접 “빛과 에너지”를 흡입했습니다.

74:6.5 (834.7) The bodies of Adam and Eve gave forth a shimmer of light, but they always wore clothing in conformity with the custom of their associates. Though wearing very little during the day, at eventide they donned night wraps. The origin of the traditional halo encircling the heads of supposed pious and holy men dates back to the days of Adam and Eve. Since the light emanations of their bodies were so largely obscured by clothing, only the radiating glow from their heads was discernible. The descendants of Adamson always thus portrayed their concept of individuals believed to be extraordinary in spiritual development. 아담과 이브의 신체는 미광(微光)을 발산했지만, 그들은 항상 자기 동료들의 관습에 따라서 옷을 입었습니다. 낮에는 거의 입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에는 밤 외투를 걸쳤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여겨진 사람들의 머리를 둘러싼 전통적 광륜(光輪후광)의 기원은 아담과 이브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은 대부분 옷으로 덮어 감추어서, 그들의 머리에서 발산되는 빛만 분간될 수 있었습니다. 아담손의 후손들은 영적 발전에 있어서 비범하게 여겨진 개인들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항상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74:6.6 (834.8) Adam and Eve could communicate with each other and with their immediate children over a distance of about fifty miles. This thought exchange was effected by means of the delicate gas chambers located in close proximity to their brain structures. By this mechanism they could send and receive thought oscillations. But this power was instantly suspended upon the mind’s surrender to the discord and disruption of evil. 아담과 이브는 약 50마일(80km)이 넘는 거리에서, 서로 및 직계 자녀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교환은 그들의 뇌 조직들 바로 옆에 있는 섬세한 가스실(室)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능구조로 그들은 생각의 진동(振動)을 보내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권능은 악(惡)의 분쟁과 분열에 마음이 굴복되면 즉시 중지되었습니다.

74:6.7 (835.1) The Adamic children attended their own schools until they were sixteen, the younger being taught by the elder. The little folks changed activities every thirty minutes, the older every hour. And it was certainly a new sight on Urantia to observe these children of Adam and Eve at play, joyous and exhilarating activity just for the sheer fun of it. The play and humor of the present-day races are largely derived from the Adamic stock. The Adamites all had a great appreciation of music as well as a keen sense of humor. 아담의 자녀들은 16살이 될 때까지 윗 형제자매들이 어린 형제자매들을 가르치는 그들 자신의 학교들에 다녔습니다. 어린아이들은 30분마다, 큰 아이들은 1시간마다 활동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이 아이들이 바로 순전한 재미를 위해 기뻐하며 흥겨워하는 놀이 활동을 보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분명히 새로운 광경이었습니다. 현대 인종들의 놀이와 유머는 주로 아담의 혈통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사람들은 모두 예리한 유머 감각뿐만 아니라 음악도 대단히 깊이 이해했습니다.

74:6.8 (835.2) The average age of betrothal was eighteen, and these youths then entered upon a two years’ course of instruction in preparation for the assumption of marital responsibilities. At twenty they were eligible for marriage; and after marriage they began their lifework or entered upon special preparation therefor. 평균 약혼 연령은 18세였고, 그 후 이 젊은이들은 부부의 책임을 감당하는 준비로 2년의 교육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20세에 그들은 결혼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그들은 자기 일생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그것을 위해 특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74:6.9 (835.3) The practice of some subsequent nations of permitting the royal families, supposedly descended from the gods, to marry brother to sister, dates from the traditions of the Adamic offspring — mating, as they must needs, with one another. The marriage ceremonies of the first and second generations of the Garden were always performed by Adam and Eve. 신과 같은 존재들(gods)에서 내려왔다고 여겨, 형제와 자매가 결혼하는, 왕실을 허용한, 후대 몇 나라들의 관습은, 서로 결혼해야만 했던 아담 자손의 전통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의 첫째 및 둘째 세대의 결혼 예식을, 항상 수행했습니다.

7. Life in the Garden 동산의 생활

74:7.1 (835.4) The children of Adam, except for four years’ attendance at the western schools, lived and worked in the “east of Eden.” They were trained intellectually until they were sixteen in accordance with the methods of the Jerusem schools. From sixteen to twenty they were taught in the Urantia schools at the other end of the Garden, serving there also as teachers in the lower grades. 아담의 자녀들은, 서쪽 학교들에 출석한 4년간을 빼면, “에덴의 동쪽”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셈 학교들의 방식으로 16세까지 지적(知的)으로 훈련받았습니다. 16세에서 20세까지 그들은 동산의 다른 끝에 있는 유란시아 학교들에서 배웠는데, 그곳에서 낮은 학년들의 교사들로서 봉사했습니다.

74:7.2 (835.5) The entire purpose of the western school system of the Garden was socialization. The forenoon periods of recess were devoted to practical horticulture and agriculture, the afternoon periods to competitive play. The evenings were employed in social intercourse and the cultivation of personal friendships. Religious and sexual training were regarded as the province of the home, the duty of parents. 동산의 서쪽 학교 체계의 전체적 목적은 사회화(社會化)였습니다. 방학 기간의 오전에는 원예 농업 실습에, 오후에는 시합하는 놀이에 몰두했습니다. 저녁은 사교(社交어우울려 사귐)와 개인적 우정을 양성(養成)하며 보냈습니다. 종교 및 성적(性的) 교육은 가정의 분야, 부모의 의무로 여겼습니다.

74:7.3 (835.6) The teaching in these schools included instruction regarding: 이 학교들의 가르침에는 다음에 관한 지침이 포함되었습니다.

74:7.4 (835.7) 1. Health and the care of the body. 건강과 몸의 보호.

74:7.5 (835.8) 2. The golden rule, the standard of social intercourse. 황금률, 사교(社交사귐)의 기준.

74:7.6 (835.9) 3. The relation of individual rights to group rights and community obligations. 집단 권리 및 공동체 의무에 대한 개인 권리의 관계.

74:7.7 (835.10) 4. History and culture of the various earth races. 다양한 초기 인종들의 역사와 문화.

74:7.8 (835.11) 5. Methods of advancing and improving world trade. 세계 무역의 진보와 개선 방법.

74:7.9 (835.12) 6. Co-ordination of conflicting duties and emotions. 상반(相反)되는 임무와 감정의 조정.

74:7.10 (835.13) 7. The cultivation of play, humor, and competitive substitutes for physical fighting. 육체적 투쟁을 대신하는 놀이, 유머 및 시합(試合)의 양성.

74:7.11 (835.14) The schools, in fact every activity of the Garden, were always open to visitors. Unarmed observers were freely admitted to Eden for short visits. To sojourn in the Garden a Urantian had to be “adopted.” He received instructions in the plan and purpose of the Adamic bestowal, signified his intention to adhere to this mission, and then made declaration of loyalty to the social rule of Adam and the spiritual sovereignty of the Universal Father. 학교들은, 사실 동산의 모든 활동으로, 방문자들에게 항상 개방되었습니다. 비무장(非武裝) 입회인들은 에덴에 자유롭게 단기 방문이 허락되었습니다. 유란시아인(人)이 동산에 머물려면 “입양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담 증여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교육을 받고, 이 사명에 충실하려는 자기 의도를 표명한 후, 아담의 사회적 통치와 우주 아버지의 영적 주권(主權)에 충성을 선서했습니다.

74:7.12 (836.1) The laws of the Garden were based on the older codes of Dalamatia and were promulgated under seven heads: 동산의 법은 달라마시아의 옛 법률(66.7.8-15)에 토대를 두었고, 일곱 제목으로 공포되었습니다.

74:7.13 (836.2) 1. The laws of health and sanitation. 건강과 위생의 법.

74:7.14 (836.3) 2. The social regulations of the Garden. 동산의 사회적 규정.

74:7.15 (836.4) 3. The code of trade and commerce. 교역과 상업의 규약.

74:7.16 (836.5) 4. The laws of fair play and competition. 정당한 놀이와 시합의 법.

74:7.17 (836.6) 5. The laws of home life. 가정생활의 법.

74:7.18 (836.7) 6. The civil codes of the golden rule. 황금률의 민법들. 

74:7.19 (836.8) 7. The seven commands of supreme moral rule. 최극 도덕 규칙의 일곱 계명들. 

74:7.20 (836.9) The moral law of Eden was little different from the seven commandments of Dalamatia. But the Adamites taught many additional reasons for these commands; for instance, regarding the injunction against murder, the indwelling of the Thought Adjuster was presented as an additional reason for not destroying human life. They taught that “whoso sheds man’s blood by man shall his blood be shed, for in the image of God made he man.” 에덴의 도덕법은 달라마시아의 일곱 계명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사람들은 이 계명들을 지키는 여러 추가적 이유들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에 대한 금지명령에 대해, 생각 조율자의 내주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지 말아야 하는 추가적 이유로 제시되었습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람에 의해, 그의 피도 흘리게(죽게)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가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라(창9:6).”고 그들이 가르쳤습니다.

74:7.21 (836.10) The public worship hour of Eden was noon; sunset was the hour of family worship. Adam did his best to discourage the use of set prayers, teaching that effective prayer must be wholly individual, that it must be the “desire of the soul”; but the Edenites continued to use the prayers and forms handed down from the times of Dalamatia. Adam also endeavored to substitute the offerings of the fruit of the land for the blood sacrifices in the religious ceremonies but had made little progress before the disruption of the Garden. 에덴의 공적 경배 시간은 정오였고, 해질 무렵은 가족 경배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담은, 실제 기도는 온전히 개인적이어야 하며, “혼(魂)의 열망(熱望)”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정형화된 기도들의 사용을 최선을 다해 제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에덴-사람들은 달라마시아 시절부터 내려온 기도들과 형태들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또한 아담은 종교 예식에서 피의 희생들 대신에 땅의 열매를 드리도록 애썼지만 에덴의 와해(瓦解) 이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74:7.22 (836.11) Adam endeavored to teach the races sex equality. The way Eve worked by the side of her husband made a profound impression upon all dwellers in the Garden. Adam definitely taught them that the woman, equally with the man, contributes those life factors which unite to form a new being. Theretofore, mankind had presumed that all procreation resided in the “loins of the father.” They had looked upon the mother as being merely a provision for nurturing the unborn and nursing the newborn. 아담은 인종들에게 성(性)평등(平等)을 가르치려고 애썼습니다. 이브가 남편 옆에서 일했던 방식은 동산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새 존재를 만들려고 연합하는 그런 생명 요소들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기여한다고 아담은 분명하게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이전에 인류는, 모든 생식력이 “아버지의 허리”에 있었다고 추정했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태아에 영양을 공급하고 신생아를 수유(授乳)하는 존재로만 여겼습니다.

74:7.23 (836.12) Adam taught his contemporaries all they could comprehend, but that was not very much, comparatively speaking. Nevertheless, the more intelligent of the races of earth looked forward eagerly to the time when they would be permitted to intermarry with the superior children of the violet race. And what a different world Urantia would have become if this great plan of uplifting the races had been carried out! Even as it was, tremendous gains resulted from the small amount of the blood of this imported race which the evolutionary peoples incidentally secured. 아담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두를 가르쳤지만, 비교해서 말하자면 많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지능이 높은 지상의 인종들은 보라 인종의 우수한 자녀들과 결혼이 허락될 때를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인종들을 향상하는 이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졌다면, 유란시아는 얼마나 다른 세계가 되었을 것인가! 그랬어도, 진화 민족들이 우연히 얻은, 이 유입된 인종에 속한 소량의 피에서 엄청난 이득이 발생했습니다.

74:7.24 (836.13) And thus did Adam work for the welfare and uplift of the world of his sojourn. But it was a difficult task to lead these mixed and mongrel peoples in the better way. 그리고 이렇게 아담은 자신이 머물렀던 그 세상의 행복과 향상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뒤섞여 혼합된 이 민족들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하는 일은 어려운 과업이었습니다.

8. The Legend of Creation 창조 설화

74:8.1 (836.14) The story of the creation of Urantia in six days was based on the tradition that Adam and Eve had spent just six days in their initial survey of the Garden. This circumstance lent almost sacred sanction to the time period of the week, which had been originally introduced by the Dalamatians. Adam’s spending six days inspecting the Garden and formulating preliminary plans for organization was not prearranged; it was worked out from day to day. The choosing of the seventh day for worship was wholly incidental to the facts herewith narrated. 6일간의 유란시아 창조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처음 시찰하는데 꼭 6일간 보냈다는 전통에 근거를 두었습니다(74.3). 이 상황은 달라마시아인(人)들이 최초로 소개한 한 주간(週間)의 시간에 거의 신성한 구속력을 부여했습니다(66.7.17). 아담이 동산을 시찰하고 조직화를 위한 예비 계획의 수립에 6일간 보낸 것은 예정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일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경배를 위한 제7일의 선정(選定)은 여기에 서술된 사실에서 완전히 부수적으로 일어났습니다.

74:8.2 (837.1) The legend of the making of the world in six days was an afterthought, in fact, more than thirty thousand years afterwards. One feature of the narrative, the sudden appearance of the sun and moon, may have taken origin in the traditions of the onetime sudden emergence of the world from a dense space cloud of minute matter which had long obscured both sun and moon. 6일간 세계를 창조했다는 전설은, 사실 3만년이 훨씬 지난 나중에 생긴 생각이었습니다. 그 설화 중에 일월(日月)이 별안간 출현했다는 일화(창1:16)는 일월(日月)을 오랫동안 가리고 있었던 미세한 물질로 된 짙은 공간의 구름에서 세계가 갑자기 출현했다는 옛 전통에 기원을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74:8.3 (837.2) The story of creating Eve out of Adam’s rib is a confused condensation of the Adamic arrival and the celestial surgery connected with the interchange of living substances associated with the coming of the corporeal staff of the Planetary Prince more than four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previously.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45만년 훨씬 이전에 행성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의 도래와 관련하여, 살아있는 물질 교환과 연결된 천상(天上)의 수술과 아담의 도착이 혼동된 축약입니다(66.2.7-8).

74:8.4 (837.3) The majority of the world’s peoples have been influenced by the tradition that Adam and Eve had physical forms created for them upon their arrival on Urantia. The belief in man’s having been created from clay was well-nigh universal in the Eastern Hemisphere; this tradition can be traced from the Philippine Islands around the world to Africa. And many groups accepted this story of man’s clay origin by some form of special creation in the place of the earlier beliefs in progressive creation — evolution. 대부분의 세상 민족들은 아담과 이브가 유란시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위해 창조된 육체적 형태를 지녔다는 전통에 지배되었습니다. 사람이 진흙에서 창조되었다는 믿음은 동반구(東半球)에서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필리핀군도에서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집단들은 진보적 창조 – 진화에 대한 초기 믿음들 대신에 특별한 어떤 형태의 창조로 사람이 진흙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였습니다.

74:8.5 (837.4) Away from the influences of Dalamatia and Eden, mankind tended toward the belief in the gradual ascent of the human race. The fact of evolution is not a modern discovery; the ancients understood the slow and evolutionary character of human progress. The early Greeks had clear ideas of this despite their proximity to Mesopotamia. Although the various races of earth became sadly mixed up in their notions of evolution, nevertheless, many of the primitive tribes believed and taught that they were the descendants of various animals. Primitive peoples made a practice of selecting for their “totems” the animals of their supposed ancestry. Certain North American Indian tribes believed they originated from beavers and coyotes. Certain African tribes teach that they are descended from the hyena, a Malay tribe from the lemur, a New Guinea group from the parrot.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인류는 인간 종족의 점차적 상승을 믿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진화의 사실은 현대적 발견이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진보에 대해 서서히 진화적 특성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초기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근접해 있었지만, 이에 대해 분명한 관념(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지상 인종들의 진화 개념은 딱하게도 혼란스러웠지만, 대부분의 원시 부족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동물들의 후손이라 믿었으며 이를 가르쳤습니다. 원시 민족들은 자기 조상으로 여긴 동물들을 그들의 “토템”으로 선정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은 자신들이 비버와 코요테(이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은 자신들이 하이에나, 말레이 부족은 여우원숭이, 그리고 뉴기니 집단은 앵무새의 후손이라고 가르칩니다.

74:8.6 (837.5) The Babylonians, because of immediate contact with the remnants of the civilization of the Adamites, enlarged and embellished the story of man’s creation; they taught that he had descended directly from the gods. They held to an aristocratic origin for the race which was incompatible with even the doctrine of creation out of clay. 바빌로니아인(人)들은, 아담-사람 문명의 잔재(殘滓)와 직접 접촉했기 때문에, 사람의 창조 이야기를 확대하고 재미있게 꾸몄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신과 같은 존재들로부터 바로 내려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진흙으로 창조된 교리와도 맞지 않았던, 종족의 귀족적 기원을 품었습니다.

74:8.7 (837.6) The Old Testament account of creation dates from long after the time of Moses; he never taught the Hebrews such a distorted story. But he did present a simple and condensed narrative of creation to the Israelites, hoping thereby to augment his appeal to worship the Creator, the Universal Father, whom he called the Lord God of Israel. 구약 창조 기사는 모세 시대를 한참 지나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왜곡된 이야기를 히브리인(人)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단히 요약된 창조 설화를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제시하면서, 그것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主) 하나님으로 불렀던 창조자, 우주 아버지를 경배하라는 그의 호소가 확대되기를 바랐습니다.

74:8.8 (837.7) In his early teachings, Moses very wisely did not attempt to go back of Adam’s time, and since Moses was the supreme teacher of the Hebrews, the stories of Adam became intimately associated with those of creation. That the earlier traditions recognized pre-Adamic civilization is clearly shown by the fact that later editors, intending to eradicate all reference to human affairs before Adam’s time, neglected to remove the telltale reference to Cain’s emigration to the “land of Nod,” where he took himself a wife. 모세는 자신의 초기 가르침에서 아주 지혜롭게, 아담 시대 이전으로 가려 하지 않았으며, 모세는 히브리인(人)들의 최극 스승이어서, 아담의 이야기들은 창조 이야기와 밀접히 연결되었습니다. 더 초기의 전통들은 아담-이전의 문명을 알고 있었는데, 아담 시대 이전(以前)의 인간사(人間事)들에 대한 모든 언급을 지우려 했던, 후대의 편집자들이, 카인이 이주한 “놋의 땅”에서 그가 아내를 얻었다고 내막을 폭로하는 언급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사실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74:8.9 (838.1) The Hebrews had no written language in general usage for a long time after they reached Palestine. They learned the use of an alphabet from the neighboring Philistines, who were political refugees from the higher civilization of Crete. The Hebrews did little writing until about 900 B.C., and having no written language until such a late date, they had several different stories of creation in circulation, but after the Babylonian captivity they inclined more toward accepting a modified Mesopotamian version. 히브리인(人)들은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 오랫동안, 전반적으로 사용한 문자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웃 필리스틴 사람들에게서 알파벳의 사용법을 배웠는데, 이들은 더 높은 크레테 문명의 정치적 망명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인(人)들은 기원전 900년경까지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그토록 늦게까지, 문자 언어가 없어서, 나돌던 몇 가지 다른 창조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바빌론 유수(幽囚포로생활) 후, 수정된 메소포타미아 판(版)을 수용하는 편으로 더 기울었습니다(Enûma Eliš).

74:8.10 (838.2) Jewish tradition became crystallized about Moses, and because he endeavored to trace the lineage of Abraham back to Adam, the Jews assumed that Adam was the first of all mankind. Yahweh was the creator, and since Adam was supposed to be the first man, he must have made the world just prior to making Adam. And then the tradition of Adam’s six days got woven into the story, with the result that almost a thousand years after Moses’ sojourn on earth the tradition of creation in six days was written out and subsequently credited to him. 유대인의 전통은 모세에 대한 것을 명확히 정리했고, 모세가 아브라함의 혈통을 아담까지 추적하려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담이 모든 인류의 시작이라고 당연히 여겼습니다. 야훼는 창조자였고, 아담은 첫 사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야훼는 아담을 만들기 직전에 세상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후 아담의 6일에 대한 전통이 그 이야기에 엮어 들어간 그 결과로 모세가 지상에 머문 후 거의 천년이 지난 때에, 6일간의 창조 전통이 기록되었고 나중에 모세의 공적이 되었습니다.

74:8.11 (838.3) When the Jewish priests returned to Jerusalem, they had already completed the writing of their narrative of the beginning of things. Soon they made claims that this recital was a recently discovered story of creation written by Moses. But the contemporary Hebrews of around 500 B.C. did not consider these writings to be divine revelations; they looked upon them much as later peoples regard mythological narratives. 유대교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만물의 기원에 대한 자신들의 설화 기록을 완성했습니다. 그들은 곧 이 서사시(敍事詩)가 최근에 발견된 창조 이야기로서 모세가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 경 당시의 히브리인(人)들은 이 글들을 신적 계시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민족들이 나중에 신화적 설화로 여긴 것과 아주 비슷하게, 여겼습니다.

74:8.12 (838.4) This spurious document, reputed to be the teachings of Moses, was brought to the attention of Ptolemy, the Greek king of Egypt, who had it translated into Greek by a commission of seventy scholars for his new library at Alexandria. And so this account found its place among those writings which subsequently became a part of the later collections of the “sacred scriptures” of the Hebrew and Christian religions. And through identification with these theological systems, such concepts for a long time profoundly influenced the philosophy of many Occidental peoples. 모세의 가르침들로 간주된 이 위조문서는, 이집트의 그리스(헬라) 왕 프톨레마이오스의 주목을 끌었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기의 새 도서관을 위해 70인 학자들 위원회가 그것을 그리스(헬라)어로 번역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기사(記寫기록된 글)는 나중에 히브리 및 기독교의 “신성한 경전들”에 속한 후대 모음집의 일부가 된 그런 저술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 체계들과 일체화되어, 그런 개념들이 오랫동안 여러 서양 민족들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74:8.13 (838.5) The Christian teachers perpetuated the belief in the fiat creation of the human race, and all this led directly to the formation of the hypothesis of a onetime golden age of utopian bliss and the theory of the fall of man or superman which accounted for the nonutopian condition of society. These outlooks on life and man’s place in the universe were at best discouraging since they were predicated upon a belief in retrogression rather than progression, as well as implying a vengeful Deity, who had vented wrath upon the human race in retribution for the errors of certain onetime planetary administrators. 기독교 교사들은 명령으로 인류가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보존했으며, 이 모든 것은 유토피아적 행복의 옛 황금시대에 대한 가설 형성과 사람 및 초인간의 타락으로 비(非)유토피아적 상태가 된 사회의 이유를 밝히는 이론으로 직접 이끌었습니다. 우주에 있는 생명과 인간의 신분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옛 행성 경영자들의 실수에 대한 징벌로 인류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복수심에 불타는 신(神)을 암시할 뿐 아니라,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라는 믿음에 사람들이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용기를 꺾을 뿐이었습니다.

74:8.14 (838.6) The “golden age” is a myth, but Eden was a fact, and the Garden civilization was actually overthrown. Adam and Eve carried on in the Garden for one hundred and seventeen years when, through the impatience of Eve and the errors of judgment of Adam, they presumed to turn aside from the ordained way, speedily bringing disaster upon themselves and ruinous retardation upon the developmental progression of all Urantia. “황금시대”는 신화(神話)지만, 에덴은 사실이었고, 동산 문명은 실제로 전복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117년간 살아낸 그 때, 이브의 성급함과 아담의 판단 오류로, 그들은 규정된 길에서 벗어나, 자신들에게는 재앙이, 유란시아 전체의 개발적 전진에는 파괴적인 지연(遲延더딤)을 신속히 일으켰습니다.

74:8.15 (838.7) [Narrated by Solonia, the seraphic “voice in the Garden.”] [“동산의 음성” 세라핌천사, 솔로니아가 이야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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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5 The Default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의무-불이행(不履行)

Paper 75

The Default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의무-불이행(不履行)

1. The Urantia Problem 유란시아 문제
2. Caligastia’s Plot 칼리가스티아의 음모(陰謀)
3. The Temptation of Eve 유혹에 빠진 이브
4. The Realization of Default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인식
5. Repercussions of Default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영향
6. Adam and Eve Leave the Garden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나다
7. Degradation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강등(降等)
8. The So-Called Fall of Man 소위(所謂) 사람의 타락

75:0.1 (839.1) AFTER more than one hundred years of effort on Urantia, Adam was able to see very little progress outside the Garden; the world at large did not seem to be improving much. The realization of race betterment appeared to be a long way off, and the situation seemed so desperate as to demand something for relief not embraced in the original plans. At least that is what often passed through Adam’s mind, and he so expressed himself many times to Eve. Adam and his mate were loyal, but they were isolated from their kind, and they were sorely distressed by the sorry plight of their world. 유란시아에서 100년 이상을 수고한 후에도, 아담은 동산 외부에서는 거의 진보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세계는 전체적으로 그다지 향상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족 개량의 실현은 아득해 보였고, 본래 계획이 아닌 어떤 대책이 요구될 만큼, 상황이 그토록 절망스러웠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가끔씩 아담의 마음에 떠올랐는데, 그는 이브에게 여러 번 자기 의중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담과 그의 배우자는 충직했지만, 그들은 자기 종족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이 사는 세계의 딱한 상황으로 인해 몹시 지쳤습니다.

1. The Urantia Problem 유란시아 문제

75:1.1 (839.2) The Adamic mission on experimental, rebellion-seared, and isolated Urantia was a formidable undertaking. And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early became aware of the difficulty and complexity of their planetary assignment. Nevertheless, they courageously set about the task of solving their manifold problems. But when they addressed themselves to the all-important work of eliminating the defectives and degenerates from among the human strains, they were quite dismayed. They could see no way out of the dilemma, and they could not take counsel with their superiors on either Jerusem or Edentia. Here they were, isolated and day by day confronted with some new and complicated tangle, some problem that seemed to be unsolvable. 실험적이며 반역으로 비틀려 고립된 유란시아에서 아담의-사명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 아들과 딸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행성 임무에 속한 어려움과 복잡성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양한 문제들을 푸는 과제에 용감하게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 혈통 중에서 결함자들과 퇴보자들을 제거하는 중요한 모든 과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궁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고, 예루셈이나 에덴시아에 있는 자기 상관들과 상담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고립되어 매일 새롭게 까다로운 분쟁, 즉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75:1.2 (839.3) Under normal conditions the first work of a Planetary Adam and Eve would be the co-ordination and blending of the races. But on Urantia such a project seemed just about hopeless, for the races, while biologically fit, had never been purged of their retarded and defective strains. 정상적 상황에서 행성 아담과 이브의 첫 과업은 인종들의 조정과 혼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기획안은 바로 거의 절망적으로 보였는데, 생물학적으로 적합해도, 인종들 중에서 발달이 늦고 결함이 있는 혈통이 결코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5:1.3 (839.4) Adam and Eve found themselves on a sphere wholly unprepared for the proclamation of the brotherhood of man, a world groping about in abject spiritual darkness and cursed with confusion worse confounded by the miscarriage of the mission of the preceding administration. Mind and morals were at a low level, and instead of beginning the task of effecting religious unity, they must begin all anew the work of converting the inhabitants to the most simple forms of religious belief. Instead of finding one language ready for adoption, they were confronted by the world-wide confusion of hundreds upon hundreds of local dialects. No Adam of the planetary service was ever set down on a more difficult world; the obstacles seemed insuperable and the problems beyond creature solution. 아담과 이브는 알고 보니, 사람의 형제 됨을 선포하기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구체, 즉 절망적인 영적 어둠에 둘러싸여 더듬거리며, 이전(以前) 경영진의 임무 실패로 인하여 터무니없이 지독한 혼란으로 악화된 세계에 있었습니다. 마음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고, 종교적인 연합 업무의 착수 대신에, 그들은 거주자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종교적 믿음으로 개종시키는 과업을 모두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채용할 한 언어를 찾기는커녕, 그들은 수백 가지의 지방 사투리로 인한 세계적 혼란에 직면했습니다. 행성에서 봉사하는 어떤 아담도 이보다 더 어려운 세계에 착륙한 적이 없었습니다. 장애물은 극복할 수 없고 문제들은 창조물의 해법을 넘어선 듯 했습니다.

75:1.4 (839.5) They were isolated, and the tremendous sense of loneliness which bore down upon them was all the more heightened by the early departure of the Melchizedek receivers. Only indirectly, by means of the angelic orders, could they communicate with any being off the planet. Slowly their courage weakened, their spirits drooped, and sometimes their faith almost faltered. 그들은 고립되었고,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의 조기 출발로, 그들을 짓누르는 엄청난 고독감이 더욱 더 고조되었습니다. 천사 계층들을 통해 겨우 간접적으로, 그들은 행성 외부의 어떤 존재와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용기는 점차 약해졌고, 그들의 영(靈)들은 쇠하여졌으며, 때때로 그들의 신앙도 거의 비틀거렸습니다.

75:1.5 (840.1) And this is the true picture of the consternation of these two noble souls as they pondered the tasks which confronted them. They were both keenly aware of the enormous undertaking involved in the execution of their planetary assignment. 이것이, 고귀한 이 두 혼들이 자신들을 막아섰던 업무들을 깊이 생각했을 때, 소스라친 실상입니다. 그들은 둘 다 자신들의 행성 임무 실행에 포함된 엄청난 업무를 통렬(痛烈몹시 매섭고 날카롭게)히 깨달았습니다.

75:1.6 (840.2) Probably no Material Sons of Nebadon were ever faced with such a difficult and seemingly hopeless task as confronted Adam and Eve in the sorry plight of Urantia. But they would have sometime met with success had they been more farseeing and patient. Both of them, especially Eve, were altogether too impatient; they were not willing to settle down to the long, long endurance test. They wanted to see some immediate results, and they did, but the results thus secured proved most disastrous both to themselves and to their world. 필경 네바돈의 어떤 물질 아들들도, 유란시아의 비참한 처지에서 아담과 이브가 맞섰던 그런 어려움과 외관상 절망적인 업무에 한 번도 직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더 통찰하면서 더 견디었다면, 그들은 언젠가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들 둘 다, 특히 이브가 전적으로 아주 인내심이 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길고 긴 인내력 테스트에 본격적으로 자진해서 착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어떤 결과들을 보고 싶었고, 또 행했지만, 그렇게 얻은 결과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세계에 가장 큰 파멸을 초래했습니다.

2. Caligastia’s Plot 칼리가스티아의 음모(陰謀)

75:2.1 (840.3) Caligastia paid frequent visits to the Garden and held many conferences with Adam and Eve, but they were adamant to all his suggestions of compromise and short-cut adventures. They had before them enough of the results of rebellion to produce effective immunity against all such insinuating proposals. Even the young offspring of Adam were uninfluenced by the overtures of Daligastia. And of course neither Caligastia nor his associate had power to influence any individual against his will, much less to persuade the children of Adam to do wrong. 칼리가스티아는 동산을 자주 방문했고 아담과 이브와 여러 번 회담을 했지만, 그들은 그가 제안하는 모든 타협안과 손쉬운 모험들에 완강히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묘히 환심을 사는 모든 제안들에 대해 사실 면역을 만들어낸 반역의 결과들을 자신들 앞에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의 어린 자녀들도 달리가스티아의 제안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칼리가스티아나 그의 동료는 어떤 개인에게도 그의 의지를 거슬러 영향을 미칠 권능이 없었으며, 하물며 아담의 자녀들이 잘못 하도록 설득도 할 수 없었습니다.

75:2.2 (840.4) It must be remembered that Caligastia was still the titular Planetary Prince of Urantia, a misguided but nevertheless high Son of the local universe. He was not finally deposed until the times of Christ Michael on Urantia. 칼리가스티아는 여전히 유란시아의 유명무실(有名無實)한 행성 왕자로서, 미혹되었지만, 지역 우주의 높은 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유란시아에 오신 그리스도 미가엘의 시대까지 최종적으로 퇴위되지 않았습니다.

75:2.3 (840.5) But the fallen Prince was persistent and determined. He soon gave up working on Adam and decided to try a wily flank attack on Eve. The evil one concluded that the only hope for success lay in the adroit employment of suitable persons belonging to the upper strata of the Nodite group, the descendants of his onetime corporeal-staff associates. And the plans were accordingly laid for entrapping the mother of the violet race. 타락한 왕자는 고집스럽고 단호했습니다. 그는 곧 아담에 대한 공작(工作)을 포기하고 이브에 대하여 교활한 측면 공격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악한(惡漢)은, 유일한 성공 가능성이 놋-사람, 즉 한때 육체를 지닌-참모진 동료들의 후손, 집단 중 상위 계층에 속한 적당한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데에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에 따라 보라 종족의 어머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마련되었습니다.

75:2.4 (840.6) It was farthest from Eve’s intention ever to do anything which would militate against Adam’s plans or jeopardize their planetary trust. Knowing the tendency of woman to look upon immediate results rather than to plan farsightedly for more remote effects, the Melchizedeks, before departing, had especially enjoined Eve as to the peculiar dangers besetting their isolated position on the planet and had in particular warned her never to stray from the side of her mate, that is, to attempt no personal or secret methods of furthering their mutual undertakings. Eve had most scrupulously carried out these instructions for more than one hundred years, and it did not occur to her that any danger would attach to the increasingly private and confidential visits she was enjoying with a certain Nodite leader named Serapatatia. The whole affair developed so gradually and naturally that she was taken unawares. 아담의 계획에 반대되거나 행성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위태롭게 하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는 것은 아예 이브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더 멀리 영향을 끼치도록 앞을 내다보며 계획하기보다는 즉각적 결과를 생각하는 여성의 경향을 알고, 멜기세덱들은 떠나기 전에 특별히 이브에게 행성에서 고립된 상황에 포위되는 특별한 위험들에 대해 일렀으며, 그녀의 배우자 옆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라고, 즉 공동 약속 그 이상(以上)의 개인적이거나 비밀스러운 방법들을 시도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특별히 경고했습니다. 이브는 1백년 이상 최고로 신중히 이 지침들을 수행했으며, 그녀가 세라파타시아로 불리는 어떤 놋-사람 지도자와 함께 누렸던, 갈수록 비공식인 은밀한 방문들에, 어떤 위험이 따라붙는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건 전체는 너무 서서히 자연스럽게 발전되어서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75:2.5 (840.7) The Garden dwellers had been in contact with the Nodites since the early days of Eden. From these mixed descendants of the defaulting members of Caligastia’s staff they had received much valuable help and co-operation, and through them the Edenic regime was now to meet its complete undoing and final overthrow. 동산 거주자들은 에덴의 초기부터 놋-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칼리가스티아 참모진 중에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요원들의 이 혼합된 후손들에게서, 그들은 소중한 여러 도움과 협조를 받았으며, 그들을 통해서 에덴 체제는 이제 철저한 파멸과 마침내 전복(顚覆)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3. The Temptation of Eve 유혹에 빠진 이브

75:3.1 (841.1) Adam had just finished his first one hundred years on earth when Serapatatia, upon the death of his father, came to the leadership of the western or Syrian confederation of the Nodite tribes. Serapatatia was a brown-tinted man, a brilliant descendant of the onetime chief of the Dalamatia commission on health mated with one of the master female minds of the blue race of those distant days. All down through the ages this line had held authority and wielded a great influence among the western Nodite tribes. 세라파타시아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놋-사람 부족들의 서쪽, 즉 시리아 연맹(聯盟)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아담은 지상에서 첫 100년을 바로 마쳤습니다. 세라파타시아는 갈색 피부의 남자로서, 옛 청색 인종의 뛰어난 여성 중 하나와 결혼한, 옛 달라마시아 건강 위원장의 훌륭한 후손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가문이 권력을 잡았으며 서쪽 놋-사람 부족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75:3.2 (841.2) Serapatatia had made several visits to the Garden and had become deeply impressed with the righteousness of Adam’s cause. And shortly after assuming the leadership of the Syrian Nodites, he announced his intention of establishing an affiliation with the work of Adam and Eve in the Garden. The majority of his people joined him in this program, and Adam was cheered by the news that the most powerful and the most intelligent of all the neighboring tribes had swung over almost bodily to the support of the program for world improvement; it was decidedly heartening. And shortly after this great event, Serapatatia and his new staff were entertained by Adam and Eve in their own home. 세라파타시아는 동산을 여러 번 방문했고 아담의 공의로운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시리아 놋-사람들의 지도력을 맡은 직후, 그는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업무에 가맹(加盟가입)하겠다는 자기 목적을 공표했습니다. 그의 민족 대다수가 이 프로그램에 협력했으며, 모든 이웃 부족 중 가장 강력하고 지능적인 부족이 세상 진보를 위한 프로그램 후원에 통째로 전환했다는 소식으로 아담은 기운이 났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고무적(鼓舞的기세가 돋아남)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 직후에 세라파타시아와 그의 새 보좌진은 아담과 이브의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75:3.3 (841.3) Serapatatia became one of the most able and efficient of all of Adam’s lieutenants. He was entirely honest and thoroughly sincere in all of his activities; he was never conscious, even later on, that he was being used as a circumstantial tool of the wily Caligastia. 세라파타시아는 아담의 모든 부관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실력 있는 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활동에서 아주 정직하고 철저히 신실했습니다. 그는 나중까지도 교활한 칼리가스티아의 도구에 불과한 존재로 자신이 이용되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75:3.4 (841.4) Presently, Serapatatia became the associate chairman of the Edenic commission on tribal relations, and many plans were laid for the more vigorous prosecution of the work of winning the remote tribes to the cause of the Garden. 즉시 세라파타시아는 에덴의 부족 관계 위원회의 부의장(副議長)이 되었고, 동산의 운동(運動)에서 멀리 떨어진 부족들을 설득하는 과업을 더 힘차게 수행하기 위해 여러 계획이 마련되었습니다.

75:3.5 (841.5) He held many conferences with Adam and Eve — especially with Eve — and they talked over many plans for improving their methods. One day, during a talk with Eve, it occurred to Serapatatia that it would be very helpful if, while awaiting the recruiting of large numbers of the violet race, something could be done in the meantime immediately to advance the needy waiting tribes. Serapatatia contended that, if the Nodites, as the most progressive and co-operative race, could have a leader born to them of part origin in the violet stock, it would constitute a powerful tie binding these peoples more closely to the Garden. And all of this was soberly and honestly considered to be for the good of the world since this child, to be reared and educated in the Garden, would exert a great influence for good over his father’s people. 그는 아담과 이브와 함께 – 특히 이브와 여러 회의를 했는데 그들의 방법들을 개선하는 많은 계획을 논의했습니다. 언젠가 이브와 대화 중에, 다수의 보라 종족을 모집하는 동시에 그동안 기다리는 딱한 부족들을 즉시 진전시키는 어떤 것이 행해진다면 매우 유익하리라는 생각이 세라파타시아에게 떠올랐습니다. 가장 진보적이고 협력하는 인종으로서, 놋사람들에게 보라 혈통의 일부 기원을 지닌 지도자가 태어난다면 이 민족들을 동산에 더 가깝게 단결시키는 강력한 끈이 될 것이라고 세라파타시아가 주장했습니다. 동산에서 자라서 교육받은 이 아이가 영원히 자기 아버지 민족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 모두가 세상의 선(善)이 될 것이라고 진지하게 정말로 생각되었습니다.

75:3.6 (841.6) It should again be emphasized that Serapatatia was altogether honest and wholly sincere in all that he proposed. He never once suspected that he was playing into the hands of Caligastia and Daligastia. Serapatatia was entirely loyal to the plan of building up a strong reserve of the violet race before attempting the world-wide upstepping of the confused peoples of Urantia. But this would require hundreds of years to consummate, and he was impatient; he wanted to see some immediate results — something in his own lifetime. He made it clear to Eve that Adam was oftentimes discouraged by the little that had been accomplished toward uplifting the world. 세라파타시아는 자신이 제안한 모든 점에서 아주 정직하고 완전히 신실했음이 다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결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혼란한 유란시아 민족들의 세계적 증진을 시도하기 전에, 세라파타시아는 전적으로 보라 인종의 강한 예비 인원을 증강하는 계획에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되려면 수백 년이 소요될 것이며, 그는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즉각적인 어떤 결과들, 즉 자기 평생에 어떤 것을 보려고 했습니다. 세상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성취된 것이 거의 없어서, 아담이 때때로 용기를 잃었다고, 그는 이브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75:3.7 (841.7) For more than five years these plans were secretly matured. At last they had developed to the point where Eve consented to have a secret conference with Cano, the most brilliant mind and active leader of the near-by colony of friendly Nodites. Cano was very sympathetic with the Adamic regime; in fact, he was the sincere spiritual leader of those neighboring Nodites who favored friendly relations with the Garden. 5년이 넘게 이런 계획들이 몰래 마무리되어갔습니다. 그들은 결국 이브가 카노와 비밀회의를 하기로 동의하기까지 진전시켰는데, 카노는 우호적인 놋-사람들의 근처 거류민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마음을 지닌 능동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카노는 아담 체제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사실 그는 동산과 우호적 관계를 지지했던 이웃 놋-사람들의 신실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75:3.8 (842.1) The fateful meeting occurred during the twilight hours of the autumn evening, not far from the home of Adam. Eve had never before met the beautiful and enthusiastic Cano — and he was a magnificent specimen of the survival of the superior physique and outstanding intellect of his remote progenitors of the Prince’s staff. And Cano also thoroughly believed in the righteousness of the Serapatatia project. (Outside of the Garden, multiple mating was a common practice.) 가을 저녁 황혼 무렵에, 아담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만남이 일어났습니다. 이브는 멋있고 열정적인 카노를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 그는 왕자의 보좌진에 속한 자신의 먼 선조들이 지닌 우수한 체형과 걸출(傑出)한 지성이 살아남은 훌륭한 표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카노 역시 세라파타시아 계획의 공의(公義)로움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동산 밖에서 다수 짝짓기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75:3.9 (842.2) Influenced by flattery, enthusiasm, and great personal persuasion, Eve then and there consented to embark upon the much-discussed enterprise, to add her own little scheme of world saving to the larger and more far-reaching divine plan. Before she quite realized what was transpiring, the fatal step had been taken. It was done. 미언(美言달콤한 말), 열의 및 훌륭한 개인적 설득의 영향으로, 이브는 그 때 거기서 여러 번-논의된 기획에 착수하고, 더 크고 더 원대한 신적 계획에, 세상을 구원하는 그녀 자신의 작은 계획을 보태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깨닫기 전에, 치명적인 단계를 밟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났습니다.

4. The Realization of Default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인식

75:4.1 (842.3) The celestial life of the planet was astir. Adam recognized that something was wrong, and he asked Eve to come aside with him in the Garden. And now, for the first time, Adam heard the entire story of the long-nourished plan for accelerating world improvement by operating simultaneously in two directions: the prosecution of the divine plan concomitantly with the execution of the Serapatatia enterprise. 행성의 천상 생명이 술렁였습니다. 아담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고, 이브를 동산에서 자신과 함께 나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담은 처음으로, 두 방향에서 동시에 작용하여, 세상 개선을 앞당기려고, 오래-품었던 계획의 전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라파타시아 기획의 실행에 부수적으로 신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75:4.2 (842.4) And as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thus communed in the moonlit Garden, “the voice in the Garden” reproved them for disobedience. And that voice was none other than my own announcement to the Edenic pair that they had transgressed the Garden covenant; that they had disobeyed the instructions of the Melchizedeks; that they had defaulted in the execution of their oaths of trust to the sovereign of the universe. 물질 아들과 딸이 달빛 어린 동산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동산의 목소리”가 그들의 불순종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에덴의 부부에게, 그들이 동산의 계약(契約)을 어겼고, 그들이 멜기세덱들의 지시에 불순종했으며, 우주의 주권자를 신뢰한다는 자신들의 서약 실행을 불이행(不履行)했다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통지였습니다.

75:4.3 (842.5) Eve had consented to participate in the practice of good and evil. Good is the carrying out of the divine plans; sin is a deliberate transgression of the divine will; evil is the misadaptation of plans and the maladjustment of techniques resulting in universe disharmony and planetary confusion. 이브는 선(善)과 악(惡)의 실행에 참여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선(善)은 신적 계획의 완수입니다. 죄(罪)는 신적 의지의 고의적 위반(違反)입니다. 악(惡)은 계획의 잘못된 적용과 기법의 부적응(不適應)이며, 그 결과는 우주 부조화(不調和)와 행성의 혼란입니다.

75:4.4 (842.6) Every time the Garden pair had partaken of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they had been warned by the archangel custodian to refrain from yielding to the suggestions of Caligastia to combine good and evil. They had been thus admonished: “In the day that you commingle good and evil, you shall surely become as the mortals of the realm; you shall surely die.” 동산의 부부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때마다, 선(善)과 악(惡)을 결합하는 칼리가스티아의 제안에 넘어가지 말라고, 천사장 보관(保管)자가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권고(勸告)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선(善)과 악(惡)을 뒤섞는 그 날, 너희는 반드시 영역의 필사자들처럼 될 것이라. 너희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75:4.5 (842.7) Eve had told Cano of this oft-repeated warning on the fateful occasion of their secret meeting, but Cano, not knowing the import or significance of such admonitions, had assured her that men and women with good motives and true intentions could do no evil; that she should surely not die but rather live anew in the person of their offspring, who would grow up to bless and stabilize the world. 이브는 자주 반복되었던 이 경고를 그들의 비밀 모임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때에 카노에게 말했지만, 카노는 그런 경고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몰랐으며, 선한 동기와 진실한 의도를 지닌 남성들과 여성들은 어떤 악도 행할 수 없으며, 그녀는 반드시 죽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자라서 세상을 안정시키는, 그들 자녀를 통해 다시 살 것이라고 그녀를 안심시켰습니다.

75:4.6 (842.8) Even though this project of modifying the divine plan had been conceived and executed with entire sincerity and with only the highest motives concerning the welfare of the world, it constituted evil because it represented the wrong way to achieve righteous ends, because it departed from the right way, the divine plan. 신적 계획을 변경하는 이 기획이 온전히 신실하며 세상의 복지에 관해 오직 최고의 동기를 품고 실행되었어도, 그것이 악을 만들어낸 이유는 올바른 결과를 얻기 위한 잘못된 방법에 해당했고, 올바른 방법, 즉 신적 계획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75:4.7 (843.1) True, Eve had found Cano pleasant to the eyes, and she realized all that her seducer promised by way of “new and increased knowledge of human affairs and quickened understanding of human nature as supplemental to the comprehension of the Adamic nature.” 실로 이브가 보기에 카노는 호감이 있었으며, 그녀는 “인간 업무에 대해 새롭게 늘어난 지식과 아담의 본성 이해에 보충하여 인간 본성 이해를 재촉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유혹자가 약속했던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75:4.8 (843.2) I talked to the father and mother of the violet race that night in the Garden as became my duty under the sorrowful circumstances. I listened fully to the recital of all that led up to the default of Mother Eve and gave both of them advice and counsel concerning the immediate situation. Some of this advice they followed; some they disregarded. This conference appears in your records as “the Lord God calling to Adam and Eve in the Garden and asking, ‘Where are you?’” It was the practice of later generations to attribute everything unusual and extraordinary, whether natural or spiritual, directly to the personal intervention of the Gods. 나는 그날 밤 동산에서, 슬픈 상황 중에 내 임무가 되었듯이, 보라 종족의 아버지 및 어머니와 말했습니다. 나는 어머니 이브가 불이행(不履行)에 이르게 된 모든 이야기를 충분히 경청했으며 당면한 정황에 대해 그 둘에게 충고와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충고 중 몇 가지는 따랐으며 몇 가지는 소홀히 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부르시며, ‘너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너희 기록(창3:9)에 이 논의가 나타납니다. 자연적이든지 영적이든지, 색다르게 대단한 모든 것을 하나님들이 친히 개입한 것으로 바로 돌리는 것이 후대의 관습이었습니다.

5. Repercussions of Default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영향

75:5.1 (843.3) Eve’s disillusionment was truly pathetic. Adam discerned the whole predicament and, while heartbroken and dejected, entertained only pity and sympathy for his erring mate. 이브의 환멸(幻滅환상이 깨어져 느끼는 쓰라린 허무함)은 정말 애처로웠습니다. 아담은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고, 비탄에 잠겨 낙담했지만, 잘못한 아내에게 단지 애석(哀惜가엾이 여겨 슬퍼함)함과 연민(憐愍불쌍하여 가련히 여김)만 품었습니다.

75:5.2 (843.4) It was in the despair of the realization of failure that Adam, the day after Eve’s misstep, sought out Laotta, the brilliant Nodite woman who was head of the western schools of the Garden, and with premeditation committed the folly of Eve. But do not misunderstand; Adam was not beguiled; he knew exactly what he was about; he deliberately chose to share the fate of Eve. He loved his mate with a supermortal affection, and the thought of the possibility of a lonely vigil on Urantia without her was more than he could endure. 이브가 실족한 다음 날, 아담은 실패를 인식하고 절망 가운데, 동산의 서쪽 학교들 교장이었던 훌륭한 놋-여성 라오타를 찾았으며, 그는 미리 계획하여 이브의 과오(過誤과실)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담은 미혹(迷惑)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뭘 하려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이브의 운명을 나누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초(超)필사(必死)적 애정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했으며, 그녀 없이 홀로 유란시아를 지키게 될 생각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75:5.3 (843.5) When they learned what had happened to Eve, the infuriated inhabitants of the Garden became unmanageable; they declared war on the near-by Nodite settlement. They swept out through the gates of Eden and down upon these unprepared people, utterly destroying them — not a man, woman, or child was spared. And Cano, the father of Cain yet unborn, also perished. 이브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자, 동산의 격노한 주민들은 자제할 수 없게 되어 그들은 근처 놋-사람 정착지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에덴의 문 밖으로 나가, 준비되지 않은 이 사람들을 급습(急襲)하여 그들을 완전히 – 남녀는 물론 아이도 남겨두지 않고 – 섬멸했습니다. 카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카인의 아버지도 죽었습니다.

75:5.4 (843.6) Upon the realization of what had happened, Serapatatia was overcome with consternation and beside himself with fear and remorse. The next day he drowned himself in the great river. 일어난 일을 실감(實感실제 체험으로 느껴 깨달음)하자, 세라파타시아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공포와 가책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큰 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75:5.5 (843.7) The children of Adam sought to comfort their distracted mother while their father wandered in solitude for thirty days. At the end of that time judgment asserted itself, and Adam returned to his home and began to plan for their future course of action. 아담이 30일간 홀로 헤매는 동안, 아담의 자녀들은 후회로 미칠듯한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때(30일)이 끝날 무렵 스스로 판단이 서서, 아담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미래 행로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75:5.6 (843.8) The consequences of the follies of misguided parents are so often shared by their innocent children. The upright and noble sons and daughters of Adam and Eve were overwhelmed by the inexplicable sorrow of the unbelievable tragedy which had been so suddenly and so ruthlessly thrust upon them. Not in fifty years did the older of these children recover from the sorrow and sadness of those tragic days, especially the terror of that period of thirty days during which their father was absent from home while their distracted mother was in complete ignorance of his whereabouts or fate. 죄 없는 자녀들이 잘못 인도된 자기 부모들이 범한 과오(過誤)의 결과를 그렇게 흔히 나누게 됩니다. 아담과 이브의 곧고 고결한 아들들과 딸들은 너무 갑자기 그토록 잔인하게 자신들을 밀어붙인, 설명할 수 없는 비통(悲痛)과 믿기 어려운 비극으로 억눌렸습니다. 50년이 지났어도, 이 연상의 자녀들은 그 비참한 시절의 비통과 슬픔, 후회로 미칠듯했던 그들의 어머니가 남편의 행방과 운명을 전혀 모른 채, 특별히 아버지가 집을 비웠던 30일간의 공포(恐怖)에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75:5.7 (843.9) And those same thirty days were as long years of sorrow and suffering to Eve. Never did this noble soul fully recover from the effects of that excruciating period of mental suffering and spiritual sorrow. No feature of their subsequent deprivations and material hardships ever began to compare in Eve’s memory with those terrible days and awful nights of loneliness and unbearable uncertainty. She learned of the rash act of Serapatatia and did not know whether her mate had in sorrow destroyed himself or had been removed from the world in retribution for her misstep. And when Adam returned, Eve experienced a satisfaction of joy and gratitude that never was effaced by their long and difficult life partnership of toiling service. 바로 그 30일이 이브에게 비통과 고통의 몇 년처럼 길었습니다. 이 고귀한 혼은 정신적 고통과 영적 슬픔으로 몹시 고통스러웠던 그 기간의 영향에서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파면과 물질적 고난의 어떤 점도 이브의 기억에서 외로움과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보낸 그 혹독한 날들과 무서운 밤들과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세라파타시아의 분별없는 행위에 대해 들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슬픔으로 자살했든지 아니면, 그녀의 실족에 대한 징벌로 세상에서 이동되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돌아오자, 고된 봉사에서 길고 어려운 일생의 협력으로 결코 지울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로 만족을 느꼈습니다.

75:5.8 (844.1) Time passed, but Adam was not certain of the nature of their offense until seventy days after the default of Eve, when the Melchizedek receivers returned to Urantia and assumed jurisdiction over world affairs. And then he knew they had failed. 시간이 흘렀지만, 이브의 의무-불이행(不履行) 이후 70일이 되도록, 아담은 자기들 위반의 본성이 의심스러웠는데, 그때 멜기세덱 수령자(受領者)들이 유란시아로 돌아와서 세상 업무를 맡아 관할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신들이 실패했음을 알았습니다.

75:5.9 (844.2) But still more trouble was brewing: The news of the annihilation of the Nodite settlement near Eden was not slow in reaching the home tribes of Serapatatia to the north, and presently a great host was assembling to march on the Garden. And this was the beginning of a long and bitter warfare between the Adamites and the Nodites, for these hostilities kept up long after Adam and his followers emigrated to the second garden in the Euphrates valley. There was intense and lasting “enmity between that man and the woman, between his seed and her seed.” 그러나 여전히 분쟁이 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덴 근처 놋-사람 정착지의 전멸 소식이 오래지 않아 북쪽 세라파타시아의 고향 부족들에 마을에 닿았고, 즉시 큰 무리가 동산으로 진격하려고 소집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 사이에서 오랜 쓰라린 전쟁의 시작이었는데, 아담과 그의 추종자들이 유프라테스 계곡의 둘째 동산으로 이주한 후에도 이런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 즉 그의 자손과 그녀의 자손 사이에” 격앙된 “적의(敵意)”가 계속 있었습니다(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6. Adam and Eve Leave the Garden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나다

75:6.1 (844.3) When Adam learned that the Nodites were on the march, he sought the counsel of the Melchizedeks, but they refused to advise him, only telling him to do as he thought best and promising their friendly co-operation, as far as possible, in any course he might decide upon. The Melchizedeks had been forbidden to interfere with the personal plans of Adam and Eve. 아담은 놋-사람들이 진격 중임을 알고 멜기세덱들의 조언을 구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권고하기를 거절했으며, 단지 그가 최선이라 생각한 대로 행하라고 말하면서, 그가 어떤 과정을 결정하든지 가능한 대로 친절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개인적 계획들에 멜기세덱들의 간섭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75:6.2 (844.4) Adam knew that he and Eve had failed; the presence of the Melchizedek receivers told him that, though he still knew nothing of their personal status or future fate. He held an all-night conference with some twelve hundred loyal followers who pledged themselves to follow their leader, and the next day at noon these pilgrims went forth from Eden in quest of new homes. Adam had no liking for war and accordingly elected to leave the first garden to the Nodites unopposed. 아담은 자신의 개인적 신분과 부정적인 미래 운명에 대해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지만, 멜기세덱 수령자들의 현존(있는 자체)이 그에게 둘의 실패했음을 말한 것이므로, 그는 자신과 이브가 실패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들의 지도자를 따르기로 서약한 1,200명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과 밤새 논의했고, 다음날 정오에 이 순례자들은 새 안식처들을 찾아 에덴을 출발했습니다. 아담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놋-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첫 동산을 떠나기로 정했습니다(창3:23-24).

75:6.3 (844.5) The Edenic caravan was halted on the third day out from the Garden by the arrival of the seraphic transports from Jerusem. And for the first time Adam and Eve were informed of what was to become of their children. While the transports stood by, those children who had arrived at the age of choice (twenty years) were given the option of remaining on Urantia with their parents or of becoming wards of the Most Highs of Norlatiadek. Two thirds chose to go to Edentia; about one third elected to remain with their parents. All children of prechoice age were taken to Edentia. No one could have beheld the sorrowful parting of this Material Son and Daughter and their children without realizing that the way of the transgressor is hard. These offspring of Adam and Eve are now on Edentia; we do not know what disposition is to be made of them. 에덴의 여행 행렬은 동산을 떠난 지 3일에 예루셈에서 세라핌천사 수송자들의 도착으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통지받았습니다. 수송선들이 대기 중일 때, 선택할 나이(20세)가 된 그 자녀들에게 그들의 부모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든지 아니면 놀라시아덱의 지고(至高)자들의 보호를 받든지 선택권이 주어졌습니다. 2/3는 에덴시아에 가기로 선택했고, 약 1/3은 부모와 함께 남기로 정했습니다. 선택권이 없는 나이의 모든 자녀들은 에덴시아로 데려갔습니다[당시 아담의 자녀들 4대 순혈純血 1,647명 중 20세 이상 1,236명의 2/3, 즉 824명과 20세 미만 411명을 합한 1,235명은 에덴시아로 갔고(모든 자녀의 3/4, 즉 1,235명과 이별함), 20세 이상 1/3 즉, 412명은 지상에 부모와 함께 남았음] 이 물질 아들과 딸 및 그 자녀들의 비탄에 잠긴 이별을 보면서,  위반(違反)자의 길이 험하다는 사실(잠13:15)을 생생히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 자녀들은 지금 에덴시아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75:6.4 (844.6) It was a sad, sad caravan that prepared to journey on. Could anything have been more tragic! To have come to a world in such high hopes, to have been so auspiciously received, and then to go forth in disgrace from Eden, only to lose more than three fourths of their children even before finding a new abiding place! 슬픔에 잠겨, 비통한 여행 행렬은 계속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비통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높은 희망으로 세계에 와서, 그토록 성대히 환영을 받았는데, 이제는 면목을 잃고 에덴을 출발하여, 새 거주지를 찾기도 전에 자기 자녀들 3/4 이상(以上)이나 상실(喪失사라짐)할 뿐이었으니!

7. Degradation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강등(降等)

75:7.1 (845.1) It was while the Edenic caravan was halted that Adam and Eve were informed of the nature of their transgressions and advised concerning their fate. Gabriel appeared to pronounce judgment. And this was the verdict: The Planetary Adam and Eve of Urantia are adjudged in default; they have violated the covenant of their trusteeship as the rulers of this inhabited world. 에덴의 여행 행렬이 멈춰 서 있는 동안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위반(違反)한 본질을 통지받고 자신들의 운명에 관해 권고를 받았습니다. 가브리엘이 판결을 선언하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평결입니다: 유란시아의 행성 아담과 이브는 의무를 불이행(不履行)한 것으로 선고(宣告)합니다. 그들은 이 거주 세계의 통치자들로서 수탁(受託)자의 직무 계약을 어겼습니다.

75:7.2 (845.2) While downcast by the sense of guilt, Adam and Eve were greatly cheered by the announcement that their judges on Salvington had absolved them from all charges of standing in “contempt of the universe government.” They had not been held guilty of rebellion. 죄책감으로 풀이 죽었지만, 샐빙턴 재판관들이 “우주 정부의 모욕”에 참여하는 모든 혐의에서 자신들을 사면했다는 공표를 듣고, 아담과 이브는 용기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들은 반역죄로 판결되지 않았습니다.

75:7.3 (845.3) The Edenic pair were informed that they had degraded themselves to the status of the mortals of the realm; that they must henceforth conduct themselves as man and woman of Urantia, looking to the future of the world races for their future. 에덴의 부부는 자신들이 영역의 필사자 지위로 강등(降等)되었으며, 이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세계 인종들의 앞날에 주의하면서, 유란시아의 남성과 여성으로서 처신해야만 한다고 통지받았습니다.

75:7.4 (845.4) Long before Adam and Eve left Jerusem, their instructors had fully explained to them the consequences of any vital departure from the divine plans. I had personally and repeatedly warned them, both before and after they arrived on Urantia, that reduction to the status of mortal flesh would be the certain result, the sure penalty, which would unfailingly attend default in the execution of their planetary mission. But a comprehension of the immortality status of the material order of sonship is essential to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consequences attendant upon the default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가 예루셈을 떠나기 오래 전, 그들의 교관들은 신적 계획에서 치명적으로 벗어나는 결과를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전후에, 그들 행성 사명의 실행에 있어서 의무-불이행(不履行)에 반드시 수반하는 확실한 결과, 즉 분명한 처벌은 필사자 육신의 지위로 격하(格下)됨이라고, 나도 개인적으로 반복해서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필수적으로 물질 아들신분 계층의 불멸 지위를 파악해야만, 아담과 이브의 의무-불이행(不履行)에 수반된 결과를 명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75:7.5 (845.5) 1. Adam and Eve, like their fellows on Jerusem, maintained immortal status through intellectual association with the mind-gravity circuit of the Spirit. When this vital sustenance is broken by mental disjunction, then, regardless of the spiritual level of creature existence, immortality status is lost. Mortal status followed by physical dissolution was the inevitable consequence of the intellectual default of Adam and Eve. 예루셈의 그들 동료들처럼 아담과 이브는 영에 속한 마음-중력 회로와 지적 연합을 통해서 불멸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이 생명 유지가 정신적 분리로 깨어지게 되면, 창조물 존재의 영적 수준에 관계없이, 불멸의 지위를 상실합니다. 물리적 분해의 결과로 일어난 필사자 지위는 아담과 이브의 지적 의무-불이행(不履行)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75:7.6 (845.6) 2. The Material Son and Daughter of Urantia, being also personalized in the similitude of the mortal flesh of this world, were further dependent on the maintenance of a dual circulatory system, the one derived from their physical natures, the other from the superenergy stored in the fruit of the tree of life. Always had the archangel custodian admonished Adam and Eve that default of trust would culminate in degradation of status, and access to this source of energy was denied them subsequent to their default. 이 세계의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또한 고유성이 된 유란시아의 물질 아들과 딸은 게다가 이중(二重) 순환 체계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육체적 본성에서 파생한 것과 생명나무 열매에 저장된 초(超)에너지에서 파생한 것이었습니다. 신뢰의 의무-불이행(不履行)은 지위의 강등(降等)에 이르고 그들의 의무-불이행(不履行) 이후에 그들이 이 에너지 근원에 접근하는 권리가 거부된다고, 항상 천사장 보관(保管)자가 아담과 이브에게 권고했습니다.

75:7.7 (845.7) Caligastia did succeed in trapping Adam and Eve, but he did not accomplish his purpose of leading them into open rebellion against the universe government. What they had done was indeed evil, but they were never guilty of contempt for truth, neither did they knowingly enlist in rebellion against the righteous rule of the Universal Father and his Creator Son. 칼리가스티아는 아담과 이브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성공했지만, 우주 정부에 반대하는 공개적 반역으로 그들을 유인하려는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사실 악(惡)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진리 모욕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또한 우주 아버지와 그의 창조자 아들의 공의로운 통치에 반대하는 반역에 고의로 협력하지도 않았습니다.

8. The So-Called Fall of Man 소위(所謂) 사람의 타락

75:8.1 (845.8) Adam and Eve did fall from their high estate of material sonship down to the lowly status of mortal man. But that was not the fall of man. The human race has been uplifted despite the immediate consequences of the Adamic default. Although the divine plan of giving the violet race to the Urantia peoples miscarried, the mortal races have profited enormously from the limited contribution which Adam and his descendants made to the Urantia races. 아담과 이브는 물질 아들됨의 높은 신분에서 아래 필사 사람의 낮은 신분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타락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즉각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향상되어 왔습니다. 유란시아 민족들에게 보라 인종을 증여하는 신적 계획이 실패했지만,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유란시아 인종들에게 행했던 얼마 안 되는 공헌에서 필사 인종들은 엄청난 덕을 입었습니다.

75:8.2 (846.1) There has been no “fall of ma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 is one of progressive evolution, and the Adamic bestowal left the world peoples greatly improved over their previous biologic condition. The more superior stocks of Urantia now contain inheritance factors derived from as many as four separate sources: Andonite, Sangik, Nodite, and Adamic. “사람의 타락”은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진보적 진화 중 하나이며, 아담의-증여로 세계 민족들은 이전의 생물학적 상태보다 훨씬 개선되었습니다. 더 뛰어난 유란시아의 혈통들은 무려 4가지 분리된 출처, 즉 안돈, 상긱, 놋 및 아담에서 기원된 유전 형질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75:8.3 (846.2) Adam should not be regarded as the cause of a curse on the human race. While he did fail in carrying forward the divine plan, while he did transgress his covenant with Deity, while he and his mate were most certainly degraded in creature status, notwithstanding all this, their contribution to the human race did much to advance civilization on Urantia. 아담은 인류에 대한 저주의 원인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신적 계획의 진척에 실패했고, 신(神)과의 계약을 위반(違反)했으며, 그와 그의 아내가 창조물 신분으로 정말 틀림없이 강등(降等)되었지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그들의 공헌으로 유란시아의 문명화가 많이 증진되었습니다.

75:8.4 (846.3) In estimating the results of the Adamic mission on your world, justice demands the recognition of the condition of the planet. Adam was confronted with a well-nigh hopeless task when, with his beautiful mate, he was transported from Jerusem to this dark and confused planet. But had they been guided by the counsel of the Melchizedeks and their associates, and had they been more patient, they would have eventually met with success. But Eve listened to the insidious propaganda of personal liberty and planetary freedom of action. She was led to experiment with the life plasm of the material order of sonship in that she allowed this life trust to become prematurely commingled with that of the then mixed order of the original design of the Life Carriers which had been previously combined with that of the reproducing beings once attached to the staff of the Planetary Prince. 너희 세계의 아담적 사명의 결과를 평가할 때, 정의(正義)는 행성의 상태에 대한 인식이 요구됩니다. 아담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예루셈에서 어둡고 혼란한 행성으로 옮겨졌을 때, 거의 희망이 없는 과업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멜기세덱들과 그들 동료들의 조언에 이끌려, 더 인내했더라면, 그들은 결국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브는 개인적 해방과 행위의 행성적 자유를 선전하는 교활한 주장을 경청했습니다. 그녀가 이 위탁받은 생명을 생명 운반자들이 원래 고안한 당시의 혼합 계층들의 생명 원형질과 너무 서둘러 혼합되도록 허락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아들 됨에 속한 물질 계층의 생명 원형질의 실험으로 이끌렸는데, 생명 운반자들이 원래 고안한 혼합 계층의 생명 원형질이 행성 왕자의 보좌진에 한때 배속되었던 생식 존재들의 생명 원형질과 이전에 결합되었습니다.

75:8.5 (846.4) Never, in all your ascent to Paradise, will you gain anything by impatiently attempting to circumvent the established and divine plan by short cuts, personal inventions, or other devices for improving on the way of perfection, to perfection, and for eternal perfection. 천국을 향한 너희의 모든 상승에서, 완전의·완전에 이르는·영원한 완전성을 향상하려고, 확립된 신적 계획을 성급하게 회피하는 시도, 즉 지름길(손쉬운 방법), 사적(私的) 고안(考案)들 및 다른 방책(方策)으로, 너희는 결코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75:8.6 (846.5) All in all, there probably never was a more disheartening miscarriage of wisdom on any planet in all Nebadon. But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se missteps occur in the affairs of the evolutionary universes. We are a part of a gigantic creation, and it is not strange that everything does not work in perfection; our universe was not created in perfection. Perfection is our eternal goal, not our origin. 모든 네바돈 행성을 통틀어, 이보다 더 낙담하게 하는, 지혜의 실책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오(過誤)들이 진화하는 우주의 업무에서 생기는 일은 의외(意外뜻밖)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대한 창조계의 일부이며, 모든 것이 완전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우주는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전(完全온전穩全모자람과 흠이 없음)은 우리의 영원한 목표이지, 우리의 기원(起源)이 아닙니다.

75:8.7 (846.6) If this were a mechanistic universe, if the First Great Source and Center were only a force and not also a personality, if all creation were a vast aggregation of physical matter dominated by precise laws characterized by unvarying energy actions, then might perfection obtain, even despite the incompleteness of universe status. There would be no disagreement; there would be no friction. But in our evolving universe of relative perfection and imperfection we rejoice that disagreement and misunderstanding are possible, for thereby is evidenced the fact and the act of personality in the universe. And if our creation is an existence dominated by personality, then can you be assured of the possibilities of personality survival, advancement, and achievement; we can be confident of personality growth, experience, and adventure. What a glorious universe, in that it is personal and progressive, not merely mechanical or even passively perfect! 이것이 기계론자의 우주였다면, 첫째근원 중심이 기세(氣勢)뿐이었고, 고유성이 아니었다면, 모든 창조계가, 불변의 에너지 활동으로 간주된, 정밀한 규칙으로 지배되는 광대한 물리적 물질의 집합체였다면, 심지어 우주 상태가 미완성(未完成)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완전성이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불일치도 없고, 어떤 불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 완전과 불완전에 속한 우리 진화 우주에, 불일치와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우리가 기뻐하는데, 그것이 우주에 고유성(固有性)의 사실과 행위가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창조계가 고유성(固有性)에 의해 지배되는 실존이라면, 너희가 고유성(固有性) 생존, 진보 및 성취의 가능성을 안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고유성(固有性) 성장, 체험 및 모험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단지 기계적이거나 심지어 수동적으로 완전하지 않고, 우주가 고유적이며 진보적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우주인가!

75:8.8 (846.7) [Presented by Solonia, the seraphic “voice in the Garden.”][세라핌천사 “동산의 목소리,” 솔로니아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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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6 The Second Garden 둘째 동산

Paper 76

The Second Garden 둘째 동산

1. The Edenites Enter Mesopotamia 에덴-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다
2. Cain and Abel 카인과 아벨
3. Life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 생활
The Sethite priesthood 셋-사람 사제
4. The Violet Race 보라색 인종
5. Death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죽음
Michael’s message 미가엘의 메시지
6. Survival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생존

76:0.1 (847.1) WHEN Adam elected to leave the first garden to the Nodites unopposed, he and his followers could not go west, for the Edenites had no boats suitable for such a marine adventure. They could not go north; the northern Nodites were already on the march toward Eden. They feared to go south; the hills of that region were infested with hostile tribes. The only way open was to the east, and so they journeyed eastward toward the then pleasant regions between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And many of those who were left behind later journeyed eastward to join the Adamites in their new valley home. 아담이 놋-사람들에게 맞서지 않고 첫째 동산을 떠나기로 정했을 때, 그와 추종자들은 서쪽으로 갈 수 없었는데, 에덴-사람들은 그런 해양(海洋) 모험을 위해 적절한 선박(船舶)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북(北)으로도 갈 수 없었는데; 북쪽의 놋-사람들은 이미 에덴을 향해 진격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그 지역의 구릉(丘陵)은 적대적인 부족들이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열린 길은 동쪽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들 사이 쾌적한 지역을 향해 동쪽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중에 동쪽으로 여행하여 새로운 강 유역 안식처의 아담-사람들에게 합류했습니다.

76:0.2 (847.2) Cain and Sansa were both born before the Adamic caravan had reached its destination between the rivers in Mesopotamia. Laotta, the mother of Sansa, perished at the birth of her daughter; Eve suffered much but survived, owing to superior strength. Eve took Sansa, the child of Laotta, to her bosom, and she was reared along with Cain. Sansa grew up to be a woman of great ability. She became the wife of Sargan, the chief of the northern blue races, and contributed to the advancement of the blue men of those times. 카인과 산사는 둘 다 아담의-여행 행렬이 메소포타미아 강 사이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산사의 어머니 라오타는 딸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이브도 많이 고생했지만 우월한 체력으로 인해 살아남았습니다. 이브는 라오타의 자녀, 산사를 자기 품에 안아 카인과 함께 길렀습니다. 산사는 큰 능력의 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북방 청색 인종의 족장, 사르간의 아내가 되어, 당시 청색 사람들의 진보에 기여했습니다.

1. The Edenites Enter Mesopotamia 에덴-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다

76:1.1 (847.3) It required almost a full year for the caravan of Adam to reach the Euphrates River. Finding it in flood tide, they remained camped on the plains west of the stream almost six weeks before they made their way across to the land between the rivers which was to become the second garden. 아담의 여행 행렬이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데 거의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밀물로 인해, 그들은, 둘째 동산이 되었던, 강 사이의 육지로 건너기 전에, 강 서쪽 평원에 6주간 머물러 야영했습니다.

76:1.2 (847.4) When word had reached the dwellers in the land of the second garden that the king and high priest of the Garden of Eden was marching on them, they had fled in haste to the eastern mountains. Adam found all of the desired territory vacated when he arrived. And here in this new location Adam and his helpers set themselves to work to build new homes and establish a new center of culture and religion. 둘째 동산의 땅에 거주자들이 에덴동산의 왕(王)이며 대제사장이 자신들에게로 진격 중임을 듣고, 그들은 서둘러 동쪽 산지로 달아났습니다. 아담이 도착했을 때, 자신이 희망했던 지역이 모두 비어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 새 지역에서 아담과 그의 조력자들은 새로운 안식처를 건설하고, 문화와 종교의 새 중심지를 세우려고 애썼습니다.

76:1.3 (847.5) This site was known to Adam as one of the three original selections of the committee assigned to choose possible locations for the Garden proposed by Van and Amadon. The two rivers themselves were a good natural defense in those days, and a short way north of the second garden the Euphrates and Tigris came close together so that a defense wall extending fifty-six miles could be built for the protection of the territory to the south and between the rivers. 이 지역은, 반과 아마돈이 제안한 동산을 위해, 가능한 지역을 택하도록 임명받은 위원회가 원래 선정한 세 장소 중 하나로 아담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두 강들 자체가 좋은 천연 요새였으며, 둘째 동산의 북쪽으로 짧은 통로에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서로 가까워, 남쪽에, 강들 사이에,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56마일(90km)에 달하는 방어벽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76:1.4 (847.6) After getting settled in the new Eden, it became necessary to adopt crude methods of living; it seemed entirely true that the ground had been cursed. Nature was once again taking its course. Now were the Adamites compelled to wrest a living from unprepared soil and to cope with the realities of life in the face of the natural hostilities and incompatibilities of mortal existence. They found the first garden partially prepared for them, but the second had to be created by the labor of their own hands and in the “sweat of their faces.” 새 에덴에 정착한 후, 초기 삶의 방식을 채택해야 했습니다. 땅이 저주받았다는 것은 아주 사실인 듯했기 때문입니다(창3:17b). 자연은 다시 한 번 되어가는 대로 있었습니다. 이제 아담-사람들은 미(未)개간된 토양에서 생계를 꾸리며 필사 존재의 자연적 적대상태와 모순성 앞에서 삶의 현실 모습을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 동산은 부분적으로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지만, 둘째 동산은 그들 자신의 노동과 “얼굴의 땀(창3:19a)”으로 만들어야만 함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2. Cain and Abel 카인과 아벨

76:2.1 (848.1) Less than two years after Cain’s birth, Abel was born, the first child of Adam and Eve to be born in the second garden. When Abel grew up to the age of twelve years, he elected to be a herder; Cain had chosen to follow agriculture. 카인의 출생 후 2년도 안 되어 아벨이 태어났는데, 그는 둘째 동산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의 첫 아이였습니다. 아벨이 자라서 12세에 그는 목동이 되기로 정했고, 카인은 농업을 하기로 정했습니다.

76:2.2 (848.2) Now, in those days it was customary to make offerings to the priesthood of the things at hand. Herders would bring of their flocks, farmers of the fruits of the fields; and in accordance with this custom, Cain and Abel likewise made periodic offerings to the priests. The two boys had many times argued about the relative merits of their vocations, and Abel was not slow to note that preference was shown for his animal sacrifices. In vain did Cain appeal to the traditions of the first Eden, to the former preference for the fruits of the fields. But this Abel would not allow, and he taunted his older brother in his discomfiture. 그때 당시에는 근처의 물건들을 사제에게 봉헌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목동들은 자기 양 떼를 가져오고 농부들은 밭의 수확물을 가져왔는데, 이 관습에 따라 카인과 아벨도 마찬가지로 사제들에게 정기적으로 봉헌했습니다. 두 소년은 여러 번 자기 직업의 상대적 장점에 대해 다투었고, 아벨은 자신의 동물 희생제물이 더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카인은 첫 에덴의 전통에 호소하여 이전에 밭의 수확물이 선호되었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아벨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는 쩔쩔매는 자기 형을 비웃었습니다.

76:2.3 (848.3) In the days of the first Eden, Adam had indeed sought to discourage the offering of animal sacrifice so that Cain had a justifiable precedent for his contentions. It was, however, difficult to organize the religious life of the second Eden. Adam was burdened with a thousand and one details associated with the work of building, defense, and agriculture. Being much depressed spiritually, he intrusted the organization of worship and education to those of Nodite extraction who had served in these capacities in the first garden; and in even so short a time the officiating Nodite priests were reverting to the standards and rulings of pre-Adamic times. 첫 에덴 시절에, 아담은 실로 동물 희생제물의 봉헌을 단념시키려 했기 때문에 카인의 주장에 정당한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에덴에서 종교 생활을 조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담은 건축, 방어 및 농업의 일에 관련된 수많은 세부 사항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많이 낙담해서 그는 경배와 교육의 조직을 첫 에덴에서 이런 능력으로 섬겼던 놋사람 혈통을 지닌 자들에게 맡겼습니다. 그토록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집전하는 놋사람 사제들은 아담 이전 시대의 기준과 판결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76:2.4 (848.4) The two boys never got along well, and this matter of sacrifices further contributed to the growing hatred between them. Abel knew he was the son of both Adam and Eve and never failed to impress upon Cain that Adam was not his father. Cain was not pure violet as his father was of the Nodite race later admixed with the blue and the red man and with the aboriginal Andonic stock. And all of this, with Cain’s natural bellicose inheritance, caused him to nourish an ever-increasing hatred for his younger brother. 두 소년은 결코 잘 지내지 못했고, 이 희생제물의 문제는 더욱 그들 사이에 미움이 자라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아담과 이브의 아들임을 알았고, 카인에게 아담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마음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했습니다. 카인의 아버지는 청인과 홍인 및 토종 안돈 혈통과 나중에 섞인 놋 종족이었기 때문에, 그는 순수한 보라 인종이 아니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호전적 유전성과 함께 이 모든 것 때문에, 그의 동생에 대해 미움을 품었고 늘 미움이 더해졌습니다.

76:2.5 (848.5) The boys were respectively eighteen and twenty years of age when the tension between them was finally resolved, one day, when Abel’s taunts so infuriated his bellicose brother that Cain turned upon him in wrath and slew him. 소년들이 각기 18세와 20세가 되자 그들 사이의 긴장이 어느 날 결국 분해되었는데, 아벨의 조롱으로 호전적인 형을 격노하게 되자, 카인은 그에게 맞서 화가 치밀어 그를 살해했습니다.

76:2.6 (848.6) The observation of Abel’s conduct establishes the value of environment and education as factors in character development. Abel had an ideal inheritance, and heredity lies at the bottom of all character; but the influence of an inferior environment virtually neutralized this magnificent inheritance. Abel, especially during his younger years, was greatly influenced by his unfavorable surroundings. He would have become an entirely different person had he lived to be twenty-five or thirty; his superb inheritance would then have shown itself. While a good environment cannot contribute much toward really overcoming the character handicaps of a base heredity, a bad environment can very effectively spoil an excellent inheritance, at least during the younger years of life. Good social environment and proper education are indispensable soil and atmosphere for getting the most out of a good inheritance. 아벨의 행위의 소견은 성품 계발의 요소로써 환경과 교육의 가치를 확증합니다. 아벨은 이상적(理想的) 유전 형질을 지녔고, 형질 유전이 모든 성품의 토대에 있지만 열악한 환경의 영향으로 사실상 이 장대한 유전성은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특히 어린 시절에 불리한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25세나 30세까지 살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의 훌륭한 유전성이 그때 스스로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환경이 기본 유전의 성품 장애를 정말로 극복하기에 많이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나쁜 환경은, 적어도 인생의 어린 시절에, 뛰어난 유전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해칠 수 있습니다. 좋은 사회적 환경과 적절한 교육은 좋은 유전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필수적인 토양과 분위기입니다.

76:2.7 (849.1) The death of Abel became known to his parents when his dogs brought the flocks home without their master. To Adam and Eve, Cain was fast becoming the grim reminder of their folly, and they encouraged him in his decision to leave the garden. 아벨의 개들이 주인 없이 집으로 양 떼를 데려오자 그의 부모는 아벨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카인은 아담과 이브에게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줄기차게 냉혹히 생각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권면하여 동산을 떠나도록 결정하게 했습니다.

76:2.8 (849.2) Cain’s life in Mesopotamia had not been exactly happy since he was in such a peculiar way symbolic of the default. It was not that his associates were unkind to him, but he had not been unaware of their subconscious resentment of his presence. But Cain knew that, since he bore no tribal mark, he would be killed by the first neighboring tribesmen who might chance to meet him. Fear, and some remorse, led him to repent. Cain had never been indwelt by an Adjuster, had always been defiant of the family discipline and disdainful of his father’s religion. But he now went to Eve, his mother, and asked for spiritual help and guidance, and when he honestly sought divine assistance, an Adjuster indwelt him. And this Adjuster, dwelling within and looking out, gave Cain a distinct advantage of superiority which classed him with the greatly feared tribe of Adam.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인의 생활은 정확히 말해서 행복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의무-불이행(不履行)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불친절하지 않았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그들의 잠재된 원한 의식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부족의 표시가 없어서, 우연히 그를 만날 수도 있는 첫 이웃 부족민들에게 살해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공포와 후회로 그는 회개에 이르렀습니다. 조율자가 내주한 적이 없었던 카인은 항상 가족 규율에 반항적이었고 아버지의 종교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 어머니, 이브에게 가서 영적 도움과 안내를 요청했고, 그가 정말로 신적 도움을 구했을 때, 조율자가 그에게 내주했습니다. 그리고 내주하며 보살피는 이 조율자가, 크게 두려워하던 아담 부족으로 카인을 분류하도록, 그에게 명백히 탁월한 혜택을 줬습니다.

76:2.9 (849.3) And so Cain departed for the land of Nod, east of the second Eden. He became a great leader among one group of his father’s people and did, to a certain degree, fulfill the predictions of Serapatatia, for he did promote peace between this division of the Nodites and the Adamites throughout his lifetime. Cain married Remona, his distant cousin, and their first son, Enoch, became the head of the Elamite Nodites. And for hundreds of years the Elamites and the Adamites continued to be at peace. 그래서 카인은 둘째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민족 집단 중 하나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자기 평생에 이렇게 분열된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증진했기 때문에, 그는 어느 정도 세라파타시아의 예언을 성취했습니다. 카인은 자기의 먼 사촌 레모나와 결혼했는데, 첫아들 에녹은 엘람 놋사람들의 수장(首長)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간 엘람 사람들과 아담 사람들은 계속 평화로웠습니다.

3. Life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 생활

76:3.1 (849.4) As time passed in the second garden, the consequences of default became increasingly apparent. Adam and Eve greatly missed their former home of beauty and tranquillity as well as their children who had been deported to Edentia. It was indeed pathetic to observe this magnificent couple reduced to the status of the common flesh of the realm; but they bore their diminished estate with grace and fortitude. 둘째 동산에서 시간이 흐르자, 의무-불이행(不履行)의 결과가 점차 명백해졌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시아로 떠난 자기 아이들뿐 아니라 아름답고 평온했던 자신들의 옛집을 무척 그리워했습니다. 영역의 보통 육신 상태로 강등된 이 훌륭한 부부를 지켜보면 참으로 애처로웠지만, 그들은 우아하게 의연(依然)히 견디었습니다.

76:3.2 (849.5) Adam wisely spent most of the time training his children and their associates in civil administration, educational methods, and religious devotions. Had it not been for this foresight, pandemonium would have broken loose upon his death. As it was, the death of Adam made little difference in the conduct of the affairs of his people. But long before Adam and Eve passed away, they recognized that their children and followers had gradually learned to forget the days of their glory in Eden. And it was better for the majority of their followers that they did forget the grandeur of Eden; they were not so likely to experience undue dissatisfaction with their less fortunate environment. 아담은 자기 자녀들과 동료들에게 민정(民政), 교육 방법 및 종교적 헌신을 훈련하면서 대부분 빈틈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선견(先見)이 없었다면 그의 죽음으로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있었던 대로 아담의 죽음으로 그의 사람들의 업무 행동에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별세하기 오래전에, 그들의 자녀들과 추종자들이 에덴에서 그들의 영광의 시절을 점차 익숙하게 망각하고 있음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추종자들 대부분이 에덴의 장엄함을 잊어버림이 그들에게 더 나았습니다. 그들은 복되지 않은 환경에 대한 과도한 불만을 그렇게 겪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76:3.3 (849.6) The civil rulers of the Adamites were derived hereditarily from the sons of the first garden. Adam’s first son, Adamson (Adam ben Adam), founded a secondary center of the violet race to the north of the second Eden. Adam’s second son, Eveson, became a masterly leader and administrator; he was the great helper of his father. Eveson lived not quite so long as Adam, and his eldest son, Jansad, became the successor of Adam as the head of the Adamite tribes. 아담-사람의 시민 통치자들은 첫째 동산의 아들들로부터 세습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첫아들, 아담손(아담의 아들)은 둘째 에덴의 북쪽에 보라 인종들의 2차 중심지를 세웠습니다. 아담의 둘째 아들, 이브손은 훌륭한 지도자,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위대한 조력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브손은 아담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고, 그의 장자(長子) 얀사드가 아담-사람 종족들의 수장(首長)으로서 아담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76:3.4 (849.7) The religious rulers, or priesthood, originated with Seth, the eldest surviving son of Adam and Eve born in the second garden. He was born one hundred and twenty-nine years after Adam’s arrival on Urantia. Seth became absorbed in the work of improving the spiritual status of his father’s people, becoming the head of the new priesthood of the second garden. His son, Enos, founded the new order of worship, and his grandson, Kenan, instituted the foreign missionary service to the surrounding tribes, near and far. 종교 통치자들과 사제들은 셋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는 둘째 동산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의 생존한 장자(長子)였습니다. 그는 아담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후 129년에 태어났습니다. 셋은 자기 아버지 사람들의 영적 상태의 개선 업무에 몰두하여, 둘째 동산에 속한 새 사제들의 수장(首長)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에노스는 새로운 경배 제도를 세웠고, 그의 손자 케난은 주위 원근(遠近) 부족들에게 재외(在外) 선교사 업무를 실시했습니다.

76:3.5 (850.1) The Sethite priesthood was a threefold undertaking, embracing religion, health, and education. The priests of this order were trained to officiate at religious ceremonies, to serve as physicians and sanitary inspectors, and to act as teachers in the schools of the garden. 셋-사람 사제는 종교, 건강 및 교육의 삼중 업무를 맡았습니다. 이 계층의 사제들은 종교의식을 집례하고, 의사와 위생 검열관으로 섬기며, 정원의 학교들에서 교사들로 행동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76:3.6 (850.2) Adam’s caravan had carried the seeds and bulbs of hundreds of plants and cereals of the first garden with them to the land between the rivers; they also had brought along extensive herds and some of all the domesticated animals. Because of this they possessed great advantages over the surrounding tribes. They enjoyed many of the benefits of the previous culture of the original Garden. 아담의 여행 행렬은 첫째 동산에서 수백 가지 식물과 곡류의 종자들과 구근(球根)들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조방(粗放)적 짐승 떼와 모든 가축 중에서 얼마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주변 부족들보다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동산의 이전(以前) 문화의 혜택을 많이 누렸습니다.

76:3.7 (850.3) Up to the time of leaving the first garden, Adam and his family had always subsisted on fruits, cereals, and nuts. On the way to Mesopotamia they had, for the first time, partaken of herbs and vegetables. The eating of meat was early introduced into the second garden, but Adam and Eve never partook of flesh as a part of their regular diet. Neither did Adamson nor Eveson nor the other children of the first generation of the first garden become flesh eaters. 첫째 동산을 떠날 때까지 아담과 그의 가족들은 언제나 과일, 곡류, 견과류로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처음으로 식용 식물과 채소를 먹었습니다. 둘째 동산에 들어온 초기에 고기 먹기를 받아들였지만, 아담과 이브는 정규 식사의 일부로써 결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담손과 이브손 뿐만이 아니라 첫째 동산의 첫 세대에 속한 다른 자녀들도 결코 육(肉)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76:3.8 (850.4) The Adamites greatly excelled the surrounding peoples in cultural achievement and intellectual development. They produced the third alphabet and otherwise laid the foundations for much that was the forerunner of modern art, science, and literature. Here in the lands between the Tigris and Euphrates they maintained the arts of writing, metalworking, pottery making, and weaving and produced a type of architecture that was not excelled in thousands of years. 아담-사람들은 문화적 성취와 지적 발전에서 주위 민족들을 크게 능가했습니다. 그들은 세 번째 알파벳을 만들어냈고(66.5.9 팟 25자, 74.2.2 반과 아마돈 24자), 그 밖에, 현대적 예술, 과학 및 학문의 전조(前兆)였던 많은 것의 (前條) 토대를 놓았습니다. 여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에 있는 땅에서 그들은 글쓰기, 금속 가공, 도자기 제조 및 직조(織造)의 기술을 유지했으며, 수천 년간 능가할 수 없는 건축 유형을 만들었습니다.

76:3.9 (850.5) The home life of the violet peoples was, for their day and age, ideal. Children were subjected to courses of training in agriculture, craftsmanship, and animal husbandry or else were educated to perform the threefold duty of a Sethite: to be priest, physician, and teacher. 보라 민족들의 가정생활은 그 시절 그 시대에 이상적(理想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농업, 공예가 및 축산(畜産)의 훈련 과정을 받거나 아니면 셋-사람의 삼중 의무, 즉 사제,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76:3.10 (850.6) And when thinking of the Sethite priesthood, do not confuse those high-minded and noble teachers of health and religion, those true educators, with the debased and commercial priesthoods of the later tribes and surrounding nations. Their religious concepts of Deity and the universe were advanced and more or less accurate, their health provisions were, for their time, excellent, and their methods of education have never since been surpassed. 그리고 셋-사람 사제들을 생각할 때, 그 건강과 종교의 고결하고 고상한 교사들, 그 진정한 교육자들을, 후세 부족들과 주변 국가에 속한 천하고 상업적인 사제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神)과 우주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개념들은 진보적이며 거의 정확했으며, 그들의 건강 규정은 당시에 뛰어났고, 교육 방법은 그 후로 넘어선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4. The Violet Race 보라색 인종

76:4.1 (850.7) Adam and Eve were the founders of the violet race of men, the ninth human race to appear on Urantia. Adam and his offspring had blue eyes, and the violet peoples were characterized by fair complexions and light hair color — yellow, red, and brown. 아담과 이브는, 유란시아에 나타난 9번째 종족, 보라색 인종의 시조였습니다. 아담과 그의 자손들은 푸른 눈을 지녔고, 보라색 민족들의 특색은 흰 피부색과 밝은 황색, 홍색 및 갈색 머리카락 색이었습니다.

76:4.2 (850.8) Eve did not suffer pain in childbirth; neither did the early evolutionary races. Only the mixed races produced by the union of evolutionary man with the Nodites and later with the Adamites suffered the severe pangs of childbirth. 이브는 산고(産苦)를 겪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진화 인종들도 해산의 고통이 없었습니다.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과 함께 진화적 사람이 연합하여 생긴 혼합 인종들만이 심한 출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76:4.3 (851.1) Adam and Eve, like their brethren on Jerusem, were energized by dual nutrition, subsisting on both food and light, supplemented by certain superphysical energies unrevealed on Urantia. Their Urantia offspring did not inherit the parental endowment of energy intake and light circulation. They had a single circulation, the human type of blood sustenance. They were designedly mortal though long-lived, albeit longevity gravitated toward the human norm with each succeeding generation.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자기 형제들처럼 이중 영양 공급으로 에너지를 주입했는데, 음식과 유란시아에 미(未)계시된 초(超)물리적 에너지들로 보충했던, 빛 두 가지로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들의 유란시아 자손들은 에너지를 흡입하고 빛을 순환하는 부모의 자질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일 순환, 즉 혈액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 유형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장수(長壽)하지만 죽는 인간으로 설계되었고, 뒤를 잇는 세대마다 수명(壽命)이 인간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76:4.4 (851.2) Adam and Eve and their first generation of children did not use the flesh of animals for food. They subsisted wholly upon “the fruits of the trees.” After the first generation all of the descendants of Adam began to partake of dairy products, but many of them continued to follow a nonflesh diet. Many of the southern tribes with whom they later united were also nonflesh eaters. Later on, most of these vegetarian tribes migrated to the east and survived as now admixed in the peoples of India. 아담과 이브 및 그들의 첫 세대 자녀들은 음식으로 동물들의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나무의 열매”로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아담의 모든 자손 중 첫 세대 후에 유제품(乳製品)으로 식사하기 시작했지만, 그들 대다수는 비(非) 육식(肉食) 식습관을 계속 따랐습니다. 그들이 후에 연합했던 대다수의 남쪽 부족들도 육식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대부분의 이 채식 부족들은 동쪽으로 이주했고, 인도의 민족들과 지금 섞여서 살아남았습니다.

76:4.5 (851.3) Both the physical and spiritual visions of Adam and Eve were far superior to those of the present-day peoples. Their special senses were much more acute, and they were able to see the midwayers and the angelic hosts, the Melchizedeks, and the fallen Prince Caligastia, who several times came to confer with his noble successor. They retained the ability to see these celestial beings for over one hundred years after the default. These special senses were not so acutely present in their children and tended to diminish with each succeeding generation. 아담과 이브의 신체적·영적 시력(視力)은 현대 사람들의 그것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감각들은 훨씬 더 민감했고, 그들은 중도자들, 천사의 무리, 멜기세덱들 및 자신의 고귀한 후임자와 의논하러 여러 번 왔었던, 타락한 왕자 칼리가스티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무-불이행(不履行) 이후 1백 년 이상 이러한 천상의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특별한 감각들이 자녀들에게는 그토록 민감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음 세대마다 줄어들었습니다.

76:4.6 (851.4) The Adamic children were usually Adjuster indwelt since they all possessed undoubted survival capacity. These superior offspring were not so subject to fear as the children of evolution. So much of fear persists in the present-day races of Urantia because your ancestors received so little of Adam’s life plasm, owing to the early miscarriage of the plans for racial physical uplift. 아담의-자녀들 모두 확실히 생존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개 조율자가 아담의 자녀들에게 내주했습니다. 이 뛰어난 자손들은 진화의 자녀들처럼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유란시아의 인종들이 그토록 많이 두려움에 집착하는 이유는, 인종적 물리적 향상을 위한 계획이 초기에 실패해서, 너희 조상들이 아담 생명의 원형질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76:4.7 (851.5) The body cells of the Material Sons and their progeny are far more resistant to disease than are those of the evolutionary beings indigenous to the planet. The body cells of the native races are akin to the living disease-producing microscopic and ultramicroscopic organisms of the realm. These facts explain why the Urantia peoples must do so much by way of scientific effort to withstand so many physical disorders. You would be far more disease resistant if your races carried more of the Adamic life. 물질 아들들과 그 자녀들의 신체 세포는 행성에서 태어난 진화 존재들의 신체 세포보다 질병에 훨씬 더 내성(耐性저항력)이 있습니다. 토착 종족의 신체 세포는 살아서 질병을 일으키는 미시적이며 극미(極微)한 그 영역의 유기체들과 같은 종류입니다. 이 사실은 유란시아 사람들이 여러 물리적 질환에 잘 견디기 위해 과학적 노력의 방법으로, 그토록 공헌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너희 종족이 아담의 생명을 더 많이 지녔다면, 너희는 훨씬 더 질병을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76:4.8 (851.6) After becoming established in the second garden on the Euphrates, Adam elected to leave behind as much of his life plasm as possible to benefit the world after his death. Accordingly, Eve was made the head of a commission of twelve on race improvement, and before Adam died this commission had selected 1,682 of the highest type of women on Urantia, and these women were impregnated with the Adamic life plasm. Their children all grew up to maturity except 112, so that the world, in this way, was benefited by the addition of 1,570 superior men and women. Though these candidate mothers were selected from all the surrounding tribes and represented most of the races on earth, the majority were chosen from the highest strains of the Nodites, and they constituted the early beginnings of the mighty Andite race. These children were born and reared in the tribal surroundings of their respective mothers. 유프라테스에 둘째 동산을 건설한 후, 아담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가능한 대로 세상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생명 원형질을 많이 남기려고 결심했습니다. 따라서 이브는 인종 개량을 위해 12명 위원회의 수장(首長)이 되었고, 아담이 죽기 전에 이 위원회는 유란시아에서 최고 유형의 여성들 1,682명을 선정했으며, 이 여성들은 아담의 생명 원형질로 임신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112명을 제외하고, 모두 성숙하게 자랐으며, 이렇게 세상은 1,570명의 뛰어난 남성과 여성들이 추가되어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 어머니 후보자들은 모든 주변의 부족들에서 선정되었고, 지상의 종족 대다수를 대표했지만, 대부분은 놋사람들 중 최고 혈통에서 정선되었고, 그들은 막강한 안드-사람 종족의 초기 기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자녀들은 그들의 각 어머니의 부족적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5. Death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죽음

76:5.1 (851.7) Not long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econd Eden, Adam and Eve were duly informed that their repentance was acceptable, and that, while they were doomed to suffer the fate of the mortals of their world, they should certainly become eligible for admission to the ranks of the sleeping survivors of Urantia. They fully believed this gospel of resurrection and rehabilitation which the Melchizedeks so touchingly proclaimed to them. Their transgression had been an error of judgment and not the sin of conscious and deliberate rebellion. 둘째 에덴이 건설된 지 오래지 않아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회개가 수용되었으며, 자신들이 세계 필사자들의 운명을 겪도록 정해졌지만, 그들은 유란시아에 속한 잠자는 생존자들 계열에 들어갈 자격이 분명하다는 정식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멜기세덱들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자신들에게 선포했던 부활과 회복의 이 복음을 완전히 믿었습니다. 그들의 위반(違反)은 판단 착오였지,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반역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76:5.2 (852.1) Adam and Eve did not, as citizens of Jerusem, have Thought Adjusters, nor were they Adjuster indwelt when they functioned on Urantia in the first garden. But shortly after their reduction to mortal status they became conscious of a new presence within them and awakened to the realization that human status coupled with sincere repentance had made it possible for Adjusters to indwell them. It was this knowledge of being Adjuster indwelt that greatly heartened Adam and Eve throughout the remainder of their lives; they knew that they had failed as Material Sons of Satania, but they also knew that the Paradise career was still open to them as ascending sons of the universe.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의 시민들로서, 생각 조율자들이 없었으며, 유란시아에서 첫 동산에서 활동할 때도 조율자가 그들에게 내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필사자 신분으로 격하(格下)된 직후 그들은 자신들 내부에서 새 실존을 의식하게 되었고, 인간의 신분이 신실한 회개와 결부되어, 자신들에게 조율자들의 내주가 가능했던 실상을 깨달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여생(餘生) 내내 내주한 생각 조율자의 존재를 알고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타니아의 물질 아들들로서 실패했음을 알았지만, 우주의 상승 아들들로서 천국 생애가 자신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음도 알았습니다.

76:5.3 (852.2) Adam knew about the dispensational resurrection which occurred simultaneously with his arrival on the planet, and he believed that he and his companion would probably be repersonalized in connection with the advent of the next order of sonship. He did not know that Michael, the sovereign of this universe, was so soon to appear on Urantia; he expected that the next Son to arrive would be of the Avonal order. Even so, it was always a comfort to Adam and Eve, as well as something difficult for them to understand, to ponder the only personal message they ever received from Michael. This message, among other expressions of friendship and comfort, said: “I have given consideration to the circumstances of your default, I have remembered the desire of your hearts ever to be loyal to my Father’s will, and you will be called from the embrace of mortal slumber when I come to Urantia if the subordinate Sons of my realm do not send for you before that time.” 아담은, 자신의 행성 도착과 동시에 일어났던, 섭리시대(천계天啓)적 부활에 대해 알았으며, 그는, 아들 된 다음 계층의 도래와 관련하여, 자신과 반려자의 재(再)고유화를 필시 믿었습니다. 그는, 이 우주의 주권자 미가엘이 그렇게 곧 유란시아에 나타나시게 되었음을, 몰랐습니다. 도착할 다음 아들은 아보날 계층일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담과 이브가 미가엘로부터 받았던 유일하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깊이 생각하며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들에게 언제나 위로였습니다. 우정과 위로의 다른 표현들 가운데, 이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너희 의무-불이행(不履行)의 상황을 고려했고, 나는 내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려는 너희 심정의 소원을 기억했으며, 내가 유란시아에 갈 때, 그 전에 내 영역의 하위 아들들이 너희를 부르러 가지 않는다면, 필사 수면의 품에서 너희를 부를 것이라.”

76:5.4 (852.3) And this was a great mystery to Adam and Eve. They could comprehend the veiled promise of a possible special resurrection in this message, and such a possibility greatly cheered them, but they could not grasp the meaning of the intimation that they might rest until the time of a resurrection associated with Michael’s personal appearance on Urantia. And so the Edenic pair always proclaimed that a Son of God would sometime come, and they communicated to their loved ones the belief, at least the longing hope, that the world of their blunders and sorrows might possibly be the realm whereon the ruler of this universe would elect to function as the Paradise bestowal Son. It seemed too good to be true, but Adam did entertain the thought that strife-torn Urantia might, after all, turn out to be the most fortunate world in the system of Satania, the envied planet of all Nebadon. 이것은 아담과 이브에게 위대한 신비였습니다. 그들은 이 메시지에서 가능한 특별 부활의 숨겨진 약속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들은 그런 가능성으로 크게 기뻐했지만, 미가엘이 직접 유란시아에 나타남과 관련된 부활의 때까지 자신들이 안식(安息)할 수도 있으리라는 암시의 의미를 그들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덴의 부부는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 언젠가 오실 것이라고 선포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믿음, 적어도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전했는데, 그것은 큰 실수와 슬픔의 세계가 어쩌면 이 우주의 통치자가 천국 증여 아들로서 활동하려고 선택한 그 영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좋아서 진실이 아닌 듯했지만, 아담은, 분쟁으로 찢긴 유란시아가 결국 사타니아 체계에서 가장 복 받은 세계, 네바돈 전체가 부러워하는 행성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76:5.5 (852.4) Adam lived for 530 years; he died of what might be termed old age. His physical mechanism simply wore out; the process of disintegration gradually gained on the process of repair, and the inevitable end came. Eve had died nineteen years previously of a weakened heart. They were both buried in the center of the temple of divine service which had been built in accordance with their plans soon after the wall of the colony had been completed. And this was the origin of the practice of burying noted and pious men and women under the floors of the places of worship. 아담은 530년간 살았습니다. 그는 노년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신체 구조가 마모되었을 뿐입니다. 분해의 과정이 회복의 과정보다 점차 늘었습니다. 필연적 죽음이 왔습니다. 이브는 약해진 심장으로 19년 먼저 별세했습니다. 그들은 둘 다 거류지의 성벽이 완성된 직후, 그들의 계획에 따라 세워져, 신적 예배를 하던 성전 중앙에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으로 잘 알려진 남녀를 경배의 장소 바닥 아래에 매장하는 관습의 발단(發端)이었습니다.

76:5.6 (852.5) The supermaterial government of Urantia, under the direction of the Melchizedeks, continued, but direct physical contact with the evolutionary races had been severed. From the distant days of the arrival of the corporeal staff of the Planetary Prince, down through the times of Van and Amadon to the arrival of Adam and Eve, physical representatives of the universe government had been stationed on the planet. But with the Adamic default this regime, extending over a period of more than four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came to an end. In the spiritual spheres, angelic helpers continued to struggle in conjunction with the Thought Adjusters, both working heroically for the salvage of the individual; but no comprehensive plan for far-reaching world welfare was promulgated to the mortals of earth until the arrival of Machiventa Melchizedek, in the times of Abraham, who, with the power, patience, and authority of a Son of God, did lay the foundations for the further uplift and spiritual rehabilitation of unfortunate Urantia.멜기세 덱들의 관리 가운데, 유란시아의 초(超)물질적 정부(政府)는 계속되었지만, 진화적 인종들과 물리적인 직접적 접촉은 단절되었습니다. 행성 왕자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이 도착한 옛날부터, 반과 아마돈의 시대를 거쳐,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까지, 우주 정부(政府)의 물리적 대표자들이 이 행성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의무-불이행(不履行)과 함께, 45만 년 이상(以上) 연장되던 이 체제(體制)는 끝났습니다. 영적 구체들에서, 천사 조력자들은 생각 조율자들과 함께 계속 애쓰며, 둘 다 개인을 구하려고 영웅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시대에, 권능, 인내 및 하나님의 아들의 권한으로, 불행한 유란시아의 진전된 향상과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초를 놓았던, 멜기세덱이 도착할 때까지, 광범위한 세계 복지의 포괄적 계획은 지상의 필사자들에게 공포되지 않았습니다.

76:5.7 (853.1) Misfortune has not, however, been the sole lot of Urantia; this planet has also been the most fortunate in the local universe of Nebadon. Urantians should count it all gain if the blunders of their ancestors and the mistakes of their early world rulers so plunged the planet into such a hopeless state of confusion, all the more confounded by evil and sin, that this very background of darkness should so appeal to Michael of Nebadon that he selected this world as the arena wherein to reveal the loving personality of the Father in heaven. It is not that Urantia needed a Creator Son to set its tangled affairs in order; it is rather that the evil and sin on Urantia afforded the Creator Son a more striking background against which to reveal the matchless love, mercy, and patience of the Paradise Father. 그러나 불행이 유란시아의 유일한 몫이 아니었습니다. 이 행성은 또한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최고의 복(福)을 받았습니다. 선조들의 큰 실책들과 초기 세계 통치자들의 실수들이 이 행성을 그토록 희망 없는 혼란의 상태에 던져 넣어, 모든 것들이 악(惡)과 죄(罪)로 더욱 파멸되었다면, 바로 이 어둠의 상황이 네바돈의 미가엘의 마음을 움직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애정이 깊은 고유성을 계시할 무대로써, 이 세계를 선택하신 것을, 유란시아인(人)들은 모두 이득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유란시아는 혼란에 빠진 업무들을 바로잡기 위해 창조자 아들이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란시아의 악(惡)과 죄(罪)는 창조자 아들에게 천국 아버지의 특별히 두드러진 사랑, 자비 및 인내를 계시하기에 더욱 현저한 배경을 마련했습니다.

6. Survival of Adam and Eve 아담과 이브의 생존

76:6.1 (853.2) Adam and Eve went to their mortal rest with strong faith in the promises made to them by the Melchizedeks that they would sometime awake from the sleep of death to resume life on the mansion worlds, worlds all so familiar to them in the days preceding their mission in the material flesh of the violet race on Urantia.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유란시아에서 보라색 인종의 물질 육체로 파견되기 이전 시절에 모두 익숙했던, 저택 세계들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죽음의 잠에서 언젠가 깨어날 것이라고 멜기세덱들이 그들에게 했던 약속에 대한 강한 신앙으로 필사자의 영면(永眠)에 들어갔습니다.

76:6.2 (853.3) They did not long rest in the oblivion of the unconscious sleep of the mortals of the realm. On the third day after Adam’s death, the second following his reverent burial, the orders of Lanaforge, sustained by the acting Most High of Edentia and concurred in by the Union of Days on Salvington, acting for Michael, were placed in Gabriel’s hands, directing the special roll call of the distinguished survivors of the Adamic default on Urantia. And in accordance with this mandate of special resurrection, number twenty-six of the Urantia series, Adam and Eve were repersonalized and reassembled in the resurrection halls of the mansion worlds of Satania together with 1,316 of their associates in the experience of the first garden. Many other loyal souls had already been translated at the time of Adam’s arrival, which was attended by a dispensational adjudication of both the sleeping survivors and of the living qualified ascenders. 그들은 영역 필사자들의 무의식적 수면의 상태에 오래 잠들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죽은 뒤 3일, 그를 경건하게 매장한 지 2일 후, 에덴시아의 대리(代理) 지고자(至高者)가 승인(承認)하고, 미가엘을 대행(代行)하는 샐빙턴의 연합으로 늘 계신 이가 동의(同意)한, 라나포지의 명령서(命令書)가 가브리엘에게 제출되었는데,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의무-불이행(不履行)에 속해 있는 유명한 생존자들의 특별 점호(點呼)를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유란시아 계열 중 26호, 특별 부활의 이 명령에 따라, 아담과 이브는 첫 동산에서 겪었던 자신들의 동료 1,316명과 함께 사타니아의 저택 세계들에 있는 부활실에서 재(再)고유화 및 재(再)조립되었습니다. 다른 여러 충성된 혼(魂)들이 이미 승천해 있었는데, 아담이 도착하자, 잠자는 생존자들과 살아 검증된 상승자들에게 섭리시대(천계天啓)적 판결이 일어났습니다.

76:6.3 (853.4) Adam and Eve quickly passed through the worlds of progressive ascension until they attained citizenship on Jerusem, once again to be residents of the planet of their origin but this time as members of a different order of universe personalities. They left Jerusem as permanent citizens — Sons of God; they returned as ascendant citizens — sons of man. They were immediately attached to the Urantia service on the system capital, later being assigned membership among the four and twenty counselors who constitute the present advisory-control body of Urantia. 아담과 이브는 또다시 자신들이 기원한 행성의 거주자들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계층의 우주 고유성 요원으로서, 예루셈에서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진보적 상승 세계들을 신속히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영구 시민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예루셈을 떠났으며, 상승 시민들 – 사람의 아들들로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즉시 체계 수도에서 유란시아 업무에 배정되었고, 현(現) 유란시아 자문-조정단을 구성하는 24명 조언자들의 회원으로 나중에 임명받았습니다.

76:6.4 (854.1) And thus ends the story of the Planetary Adam and Eve of Urantia, a story of trial, tragedy, and triumph, at least personal triumph for your well-meaning but deluded Material Son and Daughter and undoubtedly, in the end, a story of ultimate triumph for their world and its rebellion-tossed and evil-harassed inhabitants. When all is summed up, Adam and Eve made a mighty contribution to the speedy civilization and accelerated biologic progress of the human race. They left a great culture on earth, but it was not possible for such an advanced civilization to survive in the face of the early dilution and the eventual submergence of the Adamic inheritance. It is the people who make a civilization; civilization does not make the people. 이렇게 유란시아 행성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시련·비극·승리의 이야기는 끝나는데, 적어도 너의 선의(善意)였지만 미혹된 물질 아들과 딸의 개인적 승리이며 그들의 세계와 반역(叛逆)에 던져져 악(惡)에 시달린 거주자들의 마침내, 확실히 궁극적인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요약하면, 아담과 이브는 신속한 문명화와 인류의 생물학적 진보의 가속화에 대단히 공헌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위대한 문화를 남겼지만, 초기에 희석되고 결국 아담의 유산이 침몰하여 그런 진보된 문명이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문명을 만듭니다. 문명이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76:6.5 (854.2) [Presented by Solonia, the seraphic “voice in the Garden.”][세라핌천사의 “동산의 음성,” 솔로니아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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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7 The Midway Creatures 중도(中途) 창조물들

Paper 77

The Midway Creatures 중도(中途) 창조물들

1. The Primary Midwayers 1차 중도자들
2. The Nodite Race 놋-사람 종족
3. The Tower of Babel 바벨탑
4. Nodite Centers of Civilization 놋-사람들의 문명 중심지들
5. Adamson and Ratta 아담선과 롸타
6. The Secondary Midwayers 2차 중도자들
7. The Rebel Midwayers 반역한 중도자들
8. The United Midwayers 연합한 중도자들
9. The Permanent Citizens of Urantia 유란시아의 영구 시민들

77:0.1 (855.1) MOST of the inhabited worlds of Nebadon harbor one or more groups of unique beings existing on a life-functioning level about midway between those of the mortals of the realms and of the angelic orders; hence are they called midway creatures. They appear to be an accident of time, but they occur so widespreadly and are so valuable as helpers that we have all long since accepted them as one of the essential orders of our combined planetary ministry. 네바돈 대부분의 거주 세계들은 영역의 필사자들과 천사 계층의 수준들 사이에 중도(中途)적 생명-활동 수준에 있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독특한 존재들의 집단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도(中途) 창조물들로 불립니다. 그들은 시간의 우연으로 나타난 듯하지만, 그들은 그토록 널리 존재하며 조력자들로서 너무 소중해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연합 행성 사역에 속한 필수 계층의 하나로 그들을 받아들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77:0.2 (855.2) On Urantia there function two distinct orders of midwayers: the primary or senior corps, who came into being back in the days of Dalamatia, and the secondary or younger group, whose origin dates from the times of Adam. 유란시아에는 별개의 두 계층의 중도자들이 활동합니다. 지나간 달라마시아 시절에 출현한 1차 혹은 선임단(先任團)과 아담 시대에 기원이 시작된 2차 혹은 젊은 집단입니다.

1. The Primary Midwayers 1차 중도자들

77:1.1 (855.3) The primary midwayers have their genesis in a unique interassociation of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on Urantia. We know of the existence of similar creatures on other worlds and in other systems, but they originated by dissimilar techniques. 1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물질적이며 영적인 중간에서 독특한 결합으로 발생합니다. 우리는 다른 세계들과 다른 체계들에 있는 유사한 창조물들의 존재를 알지만, 그들은 다른 기법으로 생겼습니다.

77:1.2 (855.4) It is well always to bear in mind that the successive bestowals of the Sons of God on an evolving planet produce marked changes in the spiritual economy of the realm and sometimes so modify the workings of the interassociation of spiritual and material agencies on a planet as to create situations indeed difficult of understanding. The status of the one hundred corporeal members of Prince Caligastia’s staff illustrates just such a unique interassociation: As ascendant morontia citizens of Jerusem they were supermaterial creatures without reproductive prerogatives. As descendant planetary ministers on Urantia they were material sex creatures capable of procreating material offspring (as some of them later did). What we cannot satisfactorily explain is how these one hundred could function in the parental role on a supermaterial level, but that is exactly what happened. A supermaterial (nonsexual) liaison of a male and a female member of the corporeal staff resulted in the appearance of the first-born of the primary midwayers. 진화 행성에서 하나님 아들들의 연속적 증여들이 그 영역의 영적 경륜(經綸)에서 명백한 변화를 만들고,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도록, 행성에서 영적 및 물질적 매개(媒介관계를 맺음)자들에 속한 상호결합의 작용을 때때로 변경합니다. 왕자 칼리가스티아의 참모진 중 100명의 육체를 지닌 요원들의 상태는 바로 그런 독특한 상호결합을 설명합니다. 예루셈의 상승 모론시아 시민들로서, 그들은 생식 특권이 없는 초(超)물질적 창조물들이었습니다. 유란시아에서 하강하는 행성 사역자로서, 그들은 (나중에 그들의 일부가 했듯이) 물질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물질적 성(性) 창조물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100명이 초(超)물질적 수준에서 어버이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 우리가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일어난 일입니다. 육체를 지닌 참모 중 남성과 여성 요원의 초(超)물질적(무성無性) 연결로 1차 중도자들에 속한 첫-태생이 출현했습니다.

77:1.3 (855.5) It was immediately discovered that a creature of this order, midway between the mortal and angelic levels, would be of great service in carrying on the affairs of the Prince’s headquarters, and each couple of the corporeal staff was accordingly granted permission to produce a similar being. This effort resulted in the first group of fifty midway creatures. 필사자와 천사 수준의 중도에 있는 이 계층의 창조물은 왕자의 본부에 속한 업무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즉시 알려졌으며, 육체를 지닌 참모진의 쌍마다 그에 따라 유사한 존재를 낳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 노력의 결과 50명의 중도 창조물들의 첫째 집단이 생겼습니다.

77:1.4 (855.6) After a year of observing the work of this unique group, the Planetary Prince authorized the reproduction of midwayers without restriction. This plan was carried out as long as the power to create continued, and the original corps of 50,000 was accordingly brought into being. 이 독특한 집단의 활동을 1년간 지켜본 후, 행성 왕자는 제한 없이 중도자들을 낳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계획은 생산의 능력이 계속되는 한 수행되었고, 따라서 5만 명의 기원단(起源團)이 생겼습니다.

77:1.5 (856.1) A period of one-half year intervened between the production of each midwayer, and when one thousand such beings had been born to each couple, no more were ever forthcoming. And there is no explanation available as to why this power was exhausted upon the appearance of the one thousandth offspring. No amount of further experimentation ever resulted in anything but failure. 각 중도자의 생산 사이에 반년의 기간이 끼어 있었고, 그런 존재들 1,000명이 각 쌍에게 태어나자, 그 이상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00번째 자손이 나타난 직후 이 권능이 소모된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실험을 더 해도 항상 실패로 끝났습니다.

77:1.6 (856.2) These creatures constituted the intelligence corps of the Prince’s administration. They ranged far and wide, studying and observing the world races and rendering other invaluable services to the Prince and his staff in the work of influencing human society remote from the planetary headquarters. 이 창조물들은 왕자의 경영에서 정보단(情報團)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종족들을 연구하고 관찰하며, 그 외 행성 본부에서 떨어져 있는 인간 사회에 영향을 주는 업무에 있어서 왕자와 그의 참모진에게 매우 귀중한 봉사를 하면서 널리 다녔습니다.

77:1.7 (856.3) This regime continued until the tragic days of the planetary rebellion, which ensnared a little over four fifths of the primary midwayers. The loyal corps entered the service of the Melchizedek receivers, functioning under the titular leadership of Van until the days of Adam. 이 체제는 비극적인 행성의 반란 시절까지 계속되었는데, 4/5가 조금 넘는 1차 중도자들이 유혹에 빠졌습니다. 충성하는 무리는, 아담의 시절까지 반의 정식 지도력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멜기세덱 수령자들의 업무에 참여했습니다.

2. The Nodite Race 놋-사람 종족

77:2.1 (856.4) While this is the narrative of the origin, nature, and function of the midway creatures of Urantia, the kinship between the two orders — primary and secondary — makes it necessary to interrupt the story of the primary midwayers at this point in order to follow out the line of descent from the rebel members of the corporeal staff of Prince Caligastia from the days of the planetary rebellion to the times of Adam. It was this line of inheritance which, in the early days of the second garden, furnished one half of the ancestry for the secondary order of midway creatures. 이것이 유란시아에 있는 중도 창조물들의 기원, 본성 및 기능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두 계층들 – 1차와 2차 – 사이의 연관은, 행성 반란의 시절에서 아담의 시대까지, 왕자 칼리가스티아의 육체를 지닌 참모진 중 반역 요원들의 족보를 규명하기 위해서, 이 시점에서 1차 중도자들의 이야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둘째 동산의 초기에 2차 중도 창조물들 계층에게 절반의 조상을 제공한 것이 이 유전 혈통이었습니다.

77:2.2 (856.5) The physical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had been constituted sex creatures for the purpose of participating in the plan of procreating offspring embodying the combined qualities of their special order united with those of the selected stock of the Andon tribes, and all of this was in anticipation of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Adam. The Life Carriers had planned a new type of mortal embracing the union of the conjoint offspring of the Prince’s staff with the first-generation offspring of Adam and Eve. They had thus projected a plan envisioning a new order of planetary creatures whom they hoped would become the teacher-rulers of human society. Such beings were designed for social sovereignty, not civil sovereignty. But since this project almost completely miscarried, we shall never know what an aristocracy of benign leadership and matchless culture Urantia was thus deprived of. For when the corporeal staff later reproduced, it was subsequent to the rebellion and after they had been deprived of their connection with the life currents of the system. 왕자의 참모진 중 육체를 지닌 요원들은, 안돈 부족 중에서 선정된 혈통의 특질과 특별히 연합된 그들 계층이 결합된 특질을 구현하는 후손을 낳는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性) 창조물들이 되었고, 이 모두는 나중에 아담의 출현을 예상한 것이었습니다. 생명 운반자들은 왕자의 참모진의 공동 후손과 아담과 이브의 첫 세대 후손의 연합을 포함하는 새 유형의 필사자를 계획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소망했던 새 유형의 행성 창조물들이 인간 사회의 교사-통치자들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계획을 설계했습니다. 그런 존재들은 시민 주권이 아니라 사회적 주권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안은 거의 완전히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유란시아가 손꼽히는 자상한 지도력과 출중한 교양을 지닌 상류계급을 이렇게 빼앗겼는지,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육체를 지닌 참모진이 나중에 자손을 낳았을 때, 반란 이후였고, 그들이 체계에 속한 생명 흐름의 연줄을 빼앗긴 이후(以後)였습니다.

77:2.3 (856.6) The postrebellion era on Urantia witnessed many unusual happenings. A great civilization — the culture of Dalamatia — was going to pieces. “The Nephilim (Nodites) were on earth in those days, and when these sons of the gods went in 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ore to them, their children were the ‘mighty men of old,’ the ‘men of renown.’” While hardly “sons of the gods,” the staff and their early descendants were so regarded by the evolutionary mortals of those distant days; even their stature came to be magnified by tradition. This, then, is the origin of the well-nigh universal folk tale of the gods who came down to earth and there with the daughters of men begot an ancient race of heroes. And all this legend became further confused with the race mixtures of the later appearing Adamites in the second garden. 반란 이후 시대에 유란시아에 유별난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문명 – 달라마시아의 문화 –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놋-사람)들이 있었고, 신과 같은 자들의 이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고대의 용사들,’ ‘명성이 있는 자들’이었더라(창6:4).” 참모진과 초기 그들의 후손들은 조금도 “신과 같은 자들의 아들들”이 아니었지만, 그런 옛날의 진화 필사자들은 그들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신장(身長)도 전승(傳承)으로 과장되었습니다. 그후, 신과 같은 자들이 지상에 내려와서 사람들의 딸들로 고대의 영웅들 족속을 낳았다는 이것이 거의 전세계 민족 설화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전설은 나중에 둘째 동산에 출현한 아담-사람들의 종족 혼합들로 더 잘못 알려졌습니다.

77:2.4 (857.1) Since the one hundred corporeal members of the Prince’s staff carried germ plasm of the Andonic human strains, it would naturally be expected that, if they engaged in sexual reproduction, their progeny would altogether resemble the offspring of other Andonite parents. But when the sixty rebels of the staff, the followers of Nod, actually engaged in sexual reproduction, their children proved to be far superior in almost every way to both the Andonite and the Sangik peoples. This unexpected excellence characterized not only physical and intellectual qualities but also spiritual capacities. 왕자의 참모진 중 육체를 지닌 100명의 요원들이 안돈의 인간 혈통들에 속한 생식질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성(性)적 번식에 착수했다면, 그들의 자손들은 모두 다른 안돈-사람 부모들의 후손들과 닮는 것이 당연히 예상될 것입니다. 그러나 60명의 반역한 참모진, 놋의 추종자들이 실제로 성적 번식에 착수하자, 그들의 자녀들은 안돈 및 상긱 민족들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훨씬 우수함이 드러났습니다. 뜻밖의 이 탁월성은 육체적, 지적 특질만이 아니라 영적 능력의 특색도 나타냈습니다.

77:2.5 (857.2) These mutant traits appearing in the first Nodite generation resulted from certain changes which had been wrought in the configuration and in the chemical constituents of the inheritance factors of the Andonic germ plasm. These changes were caused by the presence in the bodies of the staff members of the powerful life-maintenance circuits of the Satania system. These life circuits caused the chromosomes of the specialized Urantia pattern to reorganize more after the patterns of the standardized Satania specialization of the ordained Nebadon life manifestation. The technique of this germ plasm metamorphosis by the action of the system life currents is not unlike those procedures whereby Urantia scientists modify the germ plasm of plants and animals by the use of X rays. 놋-사람 첫 세대에서 출현한 이 돌연변이의 특색들은, 안돈의 생식질의 유전 요소들에 속한 배열과 화학적 성분으로 일어난 어떤 변화들의 결과였습니다. 이 변화들은 사타니아 체계의 강력한 생명-유지 회로들이 참모진 요원들의 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 회로들은 특화된 유란시아 원본의 염색체들을, 규정된 네바돈 생명 표현에 속한 표준화된 사타니아 전문화의 원본들을, 더 따르도록 개조시켰습니다. 체계 생명 흐름의 활동에 의한 이 생식질 변형 기법은 유란시아 과학자들이 X-선을 이용하여 식물과 동물의 생식질을 변경하는 그 절차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77:2.6 (857.3) Thus did the Nodite peoples arise out of certain peculiar and unexpected modifications occurring in the life plasm which had been transferred from the bodies of the Andonite contributors to those of the corporeal staff members by the Avalon surgeons. 그렇게 놋-사람 민족들은, 아발론 외과의사들이 안돈의 기부자들의 몸에서 육체를 지닌 참모 요원들의 몸으로 옮긴 생명 원형질에서 일어난, 어떤 특이한 의외의 변형으로 생겼습니다.

77:2.7 (857.4) It will be recalled that the one hundred Andonite germ plasm contributors were in turn made possessors of the organic complement of the tree of life so that the Satania life currents likewise invested their bodies. The forty-four modified Andonites who followed the staff into rebellion also mated among themselves and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better strains of the Nodite people. 100명의 안돈-사람 생식질 기부자들은 결국 생명나무의 유기 보충물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서 사타니아 생명 흐름이 똑같이 그들의 몸에 부여되었음이 생각날 것입니다. 반역한 참모진을 따랐던 44명의 변경된 안돈 사람들도 자신들끼리 짝을 지었고, 놋-사람 민족의 개선된 혈통들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77:2.8 (857.5) These two groups, embracing 104 individuals who carried the modified Andonite germ plasm, constitute the ancestry of the Nodites, the eighth race to appear on Urantia. And this new feature of human life on Urantia represents another phase of the outworking of the original plan of utilizing this planet as a life-modification world, except that this was one of the unforeseen developments. 변경된 안돈-사람 생식질을 지녔던 104명을 포함하는, 이 두 집단이 유란시아에 나타난 8번째 종족, 놋-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명의 새로운 이 특징은, 이것이 의외의 발전 중 하나라는 사실 외에, 생명-변경 세계로 이 행성을 사용하는 본래 계획의 또 다른 실행 국면을 나타냅니다.

77:2.9 (857.6) The pure-line Nodites were a magnificent race, but they gradually mingled with the evolutionary peoples of earth, and before long great deterioration had occurred. Ten thousand years after the rebellion they had lost ground to the point where their average length of life was little more than that of the evolutionary races. 순계(純系동일 형질)의 놋-사람들은 훌륭한 종족이었지만, 그들은 점차 지상의 진화 민족들과 섞였고, 얼마 후 엄청난 저하(低下수준이 낮아짐)가 일어났습니다. 반란 후 10,000년에 그들은, 평균 수명이 진화 종족의 수명에 지나지 않은 정도까지, 쇠퇴했습니다.

77:2.10 (857.7) When archaeologists dig up the clay-tablet records of the later-day Sumerian descendants of the Nodites, they discover lists of Sumerian kings running back for several thousand years; and as these records go further back, the reigns of the individual kings lengthen from around twenty-five or thirty years up to one hundred and fifty years and more. This lengthening of the reigns of these older kings signifies that some of the early Nodite rulers (immediate descendants of the Prince’s staff) did live longer than their later-day successors and also indicates an effort to stretch the dynasties back to Dalamatia. 고고학자들이 놋-사람들의 후기 수메르 후손들의 점토판 기록을 발굴했을 때, 그들은 수천 년간 거슬러 올라가는 수메르 왕들의 목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거슬러 더 올라가자, 각개 왕들의 통치가 약 25년 또는 30년에서 늘어나 150년과 그 이상에 이릅니다. 이렇게 늘어난 이 고대 왕들 통치의 의미는, 초기 일부 놋사람 통치자들(왕자 참모진의 직계 후손들)이 그들의 후대 계승자들보다 오래 살았고, 또한 왕조들을 달라마시아까지 거슬러 늘리려는 노력을 나타냅니다.

77:2.11 (857.8) The records of such long-lived individuals are also due to the confusion of months and years as time periods. This may also be observed in the Biblical genealogy of Abraham and in the early records of the Chinese. The confusion of the twenty-eight-day month, or season, with the later introduced year of more than three hundred and fifty days is responsible for the traditions of such long human lives. There are records of a man who lived over nine hundred “years.” This period represents not quite seventy years, and such lives were regarded for ages as very long, “threescore years and ten” as such a life span was later designated. 그렇게 오래 살았던 개인들의 기록은 또한 시한(時限)으로써 월수(月數)과 연수(年數)를 혼동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성서적 계보와 중국의 초기 기록들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28일의 월 또는 계절을, 나중에 도입된 350일 이상의 년과 혼동한 것은 그토록 오랜 인간 수명의 전통들 때문입니다. 900 “년” 넘게 살았던 사람의 기록들도 있습니다. 이 기간은 70년에 조금 모자라는데, 그런 수명들은 아주 오랜 나이로 여겨졌으며, 나중에 그런 수명을 “70년”으로 불렀습니다.

77:2.12 (858.1) The reckoning of time by the twenty-eight-day month persisted long after the days of Adam. But when the Egyptians undertook to reform the calendar, about seven thousand years ago, they did it with great accuracy, introducing the year of 365 days. 한 달을 28일로 하는 시간 계산은 아담의 시절 이후 오래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약 7,000년 전에, 이집트인들이 달력을 개정하려 했을 때, 그들은 1년을 365일로 도입하면서, 아주 정확하게 개정했습니다.

3. The Tower of Babel 바벨탑

77:3.1 (858.2) After the submergence of Dalamatia the Nodites moved north and east, presently founding the new city of Dilmun as their racial and cultural headquarters. And about fifty thousand years after the death of Nod, when the offspring of the Prince’s staff had become too numerous to find subsistence in the lands immediately surrounding their new city of Dilmun, and after they had reached out to intermarry with the Andonite and Sangik tribes adjoining their borders, it occurred to their leaders that something should be done to preserve their racial unity. Accordingly a council of the tribes was called, and after much deliberation the plan of Bablot, a descendant of Nod, was endorsed. 달라마시아의 침몰(沈沒) 후, 놋-사람들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겼고, 즉시 새 도시 딜문을 자기 종족의 문화적 본부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놋이 죽은 지 거의 50,000년에, 왕자 참모진의 자손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새 도시 딜문 바로 주변의 지역에서 생계가 어려워졌고, 그들의 국경에 인접한 안돈-사람들 및 상긱 부족들과 접촉하여 결혼한 후, 자기 종족의 단일성 유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생각이 났습니다. 따라서 부족 회의가 소집되었고, 여러 심의(審議살펴 의논함) 끝에 놋의 후손 바블롯의 계획을 지지했습니다.

77:3.2 (858.3) Bablot proposed to erect a pretentious temple of racial glorification at the center of their then occupied territory. This temple was to have a tower the like of which the world had never seen. It was to be a monumental memorial to their passing greatness. There were many who wished to have this monument erected in Dilmun, but others contended that such a great structure should be placed a safe distance from the dangers of the sea, remembering the traditions of the engulfment of their first capital, Dalamatia. 바블롯은 당시 그들의 점령지 중앙에 종족을 기려 과시하는 성전 세우기를 제안했습니다. 이 성전은 세상에 없었던 유형의 탑을 포함할 예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 한때의 위대함에 대한 엄청난 기념관이 될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딜문에 이 기념탑을 세우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첫 수도, 달라마시아의 침몰된 전승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커다란 건축물은 바다의 위험에서 안전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7:3.3 (858.4) Bablot planned that the new buildings should become the nucleus of the future center of the Nodite culture and civilization. His counsel finally prevailed, and construction was started in accordance with his plans. The new city was to be named Bablot after the architect and builder of the tower. This location later became known as Bablod and eventually as Babel. 바블롯은 새 건물들이 놋-사람 문화와 문명의 미래 중심의 핵심이 되도록 계획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방침이 압도했고, 그의 계획에 따라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도시는 탑의 설계자와 건축자의 이름을 따서 바블롯으로 불렀습니다. 이 지역은 후에 바블롯드로 알려졌다가, 결국 바벨로 알려졌습니다.

77:3.4 (858.5) But the Nodites were still somewhat divided in sentiment as to the plans and purposes of this undertaking. Neither were their leaders altogether agreed concerning either construction plans or usage of the buildings after they should be completed. After four and one-half years of work a great dispute arose about the object and motive for the erection of the tower. The contentions became so bitter that all work stopped. The food carriers spread the news of the dissension, and large numbers of the tribes began to forgather at the building site. Three differing views were propounded as to the purpose of building the tower: 그러나 놋-사람들은 이 사업의 계획과 목적에 관해 여전히 정서적으로 얼마간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도 건축 계획이나 건물이 완성된 후 그것들의 용도에 관해 전부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4년 반 동안 일한 후, 탑을 세우는 목적과 동기에 대해, 말다툼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논쟁이 격렬하게 되어 모든 작업이 멈췄습니다. 음식 운반자들이 의견 충돌의 소식을 퍼뜨렸고, 여러 부족이 건축용지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탑을 세우는 목적에 관해 세 가지 다른 의견이 제안되었습니다.

77:3.5 (858.6) 1. The largest group, almost one half, desired to see the tower built as a memorial of Nodite history and racial superiority. They thought it ought to be a great and imposing structure which would challenge the admiration of all future generations. 가장 큰 집단은, 거의 절반으로, 놋-사람의 역사와 종족 우월의 기념관으로 건축된 탑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후손이 탄복하게 될 거대하고 당당한 건축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77:3.6 (858.7) 2. The next largest faction wanted the tower designed to commemorate the Dilmun culture. They foresaw that Bablot would become a great center of commerce, art, and manufacture. 다음으로 큰 당파는 딜문 문화를 기념하도록 설계된 탑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바블롯이 상업, 예술 및 제조업의 거대한 중심지가 되리라고 예측했습니다.

77:3.7 (859.1) 3. The smallest and minority contingent held that the erection of the tower presented an opportunity for making atonement for the folly of their progenitors in participating in the Caligastia rebellion. They maintained that the tower should be devoted to the worship of the Father of all, that the whole purpose of the new city should be to take the place of Dalamatia — to function as the cultural and religious center for the surrounding barbarians. 가장 적은 소수 파견단은 탑을 세워 칼리가스티아 반역에 참여한 자기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배상(賠償)하는 기회로 삼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탑은 모두의 아버지 경배에 바쳐져야 하고, 새 도시의 모든 목적은, 주변 야만인들을 위한 문화적·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달라마시아를 대신해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77:3.8 (859.2) The religious group were promptly voted down. The majority rejected the teaching that their ancestors had been guilty of rebellion; they resented such a racial stigma. Having disposed of one of the three angles to the dispute and failing to settle the other two by debate, they fell to fighting. The religionists, the noncombatants, fled to their homes in the south, while their fellows fought until well-nigh obliterated. 종교적 집단은 즉시 부결(否決)되었습니다. 대다수는 자기 조상들이 반역의 죄가 있다는 가르침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종족의 치욕에 분개했습니다. 분쟁하는 세 입장 중 하나를 처리하고, 토론으로 다른 두 가지를 해결하지 못하자, 그들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전투하지 않는 신자들은 남쪽에 있는 고향으로 피했지만, 그들의 동료들은 거의 멸망하기까지 싸웠습니다.

77:3.9 (859.3) About twelve thousand years ago a second attempt to erect the tower of Babel was made. The mixed races of the Andites (Nodites and Adamites) undertook to raise a new temple on the ruins of the first structure, but there was not sufficient support for the enterprise; it fell of its own pretentious weight. This region was long known as the land of Babel.약 12, 000년 전에, 바벨탑을 세우려는 두 번째 시도가 있었습니다. 안드-사람(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의 혼합 종족들이 첫 건축물의 폐허에 새 성전을 세우려 했으나, 그 일에 충분한 지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체의 과시적 무게로 붕괴했습니다. 이 지역은 바벨의 땅으로 오랫동안 알려졌습니다.

4. Nodite Centers of Civilization 놋-사람들의 문명 중심지들

77:4.1 (859.4) The dispersion of the Nodites was an immediate result of the internecine conflict over the tower of Babel. This internal war greatly reduced the numbers of the purer Nodites and was in many ways responsible for their failure to establish a great pre-Adamic civilization. From this time on Nodite culture declined for over one hundred and twenty thousand years until it was upstepped by Adamic infusion. But even in the times of Adam the Nodites were still an able people. Many of their mixed descendants were numbered among the Garden builders, and several of Van’s group captains were Nodites. Some of the most capable minds serving on Adam’s staff were of this race. 놋-사람들의 분산은 바벨탑에 대해 치명적으로 충돌한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이 내전으로 순혈(純血) 놋-사람들의 수(數)가 많이 감소했고 여러 면에서 그들이 아담-이전(以前)에 위대한 문명을 이루지 못한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놋-사람들의 문화는, 아담의 주입으로 증진될 때까지, 120,000년 이상 쇠퇴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시대에도 놋-사람들은 여전히 유능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혼합 후손 중 다수가 동산 건설자 중에 포함되었고, 반의 집단 지휘자 중 얼마는 놋-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의 참모로 수고했던 가장 유능한 사람 중 일부도 이 종족에 속했습니다.

77:4.2 (859.5) Three out of the four great Nodite centers were established immediately following the Bablot conflict: 거대한 네 개의 놋-사람 중심지들 중 셋은 바블롯 충돌 직후에 세워졌습니다.

77:4.3 (859.6) 1. The western or Syrian Nodites. The remnants of the nationalistic or racial memorialists journeyed northward, uniting with the Andonites to found the later Nodite centers to the northwest of Mesopotamia. This was the largest group of the dispersing Nodites, and they contributed much to the later appearing Assyrian stock. 서부 즉 시리아의 놋-사람들. 민족주의나 종족의 건의자(建議者)들 중 나머지는 북쪽으로 여행했고, 안돈 사람들과 연합하여, 메소포타미아 북서쪽에 후일에 놋-사람 중심지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분산된 놋-사람들 중 가장 큰 집단이었고, 그들은 나중에 나타난 앗시리아인 종족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77:4.4 (859.7) 2. The eastern or Elamite Nodites. The culture and commerce advocates migrated in large numbers eastward into Elam and there united with the mixed Sangik tribes. The Elamites of thirty to forty thousand years ago had become largely Sangik in nature, although they continued to maintain a civilization superior to that of the surrounding barbarians. 동부 즉 엘람의 놋-사람들. 문화와 상업의 주창자들은 다수가 동쪽 엘람으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혼합된 상긱 부족들과 연합했습니다. 엘람사람들은, 주변 미개인들의 문명보다 뛰어난 문명을 계속 유지했지만, 3만에서 4만 년 전에 그들은 사실상 대부분 상긱이 되었습니다.

77:4.5 (859.8)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econd garden it was customary to allude to this near-by Nodite settlement as “the land of Nod”; and during the long period of relative peace between this Nodite group and the Adamites, the two races were greatly blended, for it became more and more the custom for the Sons of God (the Adamites) to intermarry with the daughters of men (the Nodites). 둘째 동산의 건립 후, 가까운 이 놋-사람 정착지를 “놋의 땅(창4:16)”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 놋-사람 집단과 아담-사람들 사이에 비교적 오랜 기간 평화하면서, 두 종족은 많이 혼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아담-사람들)이 사람의 딸들(놋-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이 점차 관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6:2 & 77.2.3).

77:4.6 (860.1) 3. The central or pre-Sumerian Nodites. A small group at the mouth of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maintained more of their racial integrity. They persisted for thousands of years and eventually furnished the Nodite ancestry which blended with the Adamites to found the Sumerian peoples of historic times. 중앙 즉 수메르인-이전(以前) 놋-사람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어귀의 작은 집단은 자기 종족의 본래 모습을 더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수천 년 지속하다가 유사(有史) 시대의 수메르 민족들을 세웠던 아담사람들과 혼합하여, 결국 놋-사람 조상이 되었습니다.

77:4.7 (860.2) And all this explains how the Sumerians appeared so suddenly and mysteriously on the stage of action in Mesopotamia. Investigators will never be able to trace out and follow these tribes back to the beginning of the Sumerians, who had their origin two hundred thousand years ago after the submergence of Dalamatia. Without a trace of origin elsewhere in the world, these ancient tribes suddenly loom upon the horizon of civilization with a full-grown and superior culture, embracing temples, metalwork, agriculture, animals, pottery, weaving, commercial law, civil codes, religious ceremonial, and an old system of writing. At the beginning of the historical era they had long since lost the alphabet of Dalamatia, having adopted the peculiar writing system originating in Dilmun. The Sumerian language, though virtually lost to the world, was not Semitic; it had much in common with the so-called Aryan tongues. 그리고 이 모두가 어떻게 수메르인들이 그토록 갑자기, 불가사의하게 메소포타미아의 활동 무대에 나타났는지를 설명합니다. 조사자들은, 달라마시아의 침몰 후 20만 년 전에 시작된, 수메르인들의 시초로 결코 추적하여 거슬러 좇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른 기원의 흔적이 없이, 이 고대 부족들은, 성전(聖殿)들, 금속 세공품, 농업, 동물들, 도기 제조술, 직조(織造), 상법(商法), 민법(民法)들, 종교 예식 및 옛 글쓰기 체계를 포함하여, 성숙하고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갑자기 문명의 지평선에 나타납니다. 역사 시대의 초기에 그들이 오랫동안 달라마시아의 알파벳(66.5.9)을 잃어버린 이후, 그들은 딜문에서 시작된 독특한 글쓰기 체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수메르어는 사실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셈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아리아 어(語)와 거의 같았습니다.

77:4.8 (860.3) The elaborate records left by the Sumerians describe the site of a remarkable settlement which was located on the Persian Gulf near the earlier city of Dilmun. The Egyptians called this city of ancient glory Dilmat, while the later Adamized Sumerians confused both the first and second Nodite cities with Dalamatia and called all three Dilmun. And already have archaeologists found these ancient Sumerian clay tablets which tell of this earthly paradise “where the Gods first blessed mankind with the example of civilized and cultured life.” And these tablets, descriptive of Dilmun, the paradise of men and God, are now silently resting on the dusty shelves of many museums. 수메르인들이 남긴 정교한 기록들은 딜문의 초기 도시 근처 페르시아만(灣)에 있었던, 놀라운 정착지를 묘사합니다. 이집트인들은 고대 영광의 이 도시를 딜맛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나중에 아담사람들이 된 수메르인들은 첫째와 둘째 놋 도시들을 달라마시아와 혼동했고, 셋 모두를 딜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미 이 고대 수메르인의 점토(粘土)판들을 발견했는데, 이것들은 지상의 이 천국을 “하나님들이 문명과 문화생활의 본보기로 처음 인류를 축복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과 하나님의 천국, 딜문을 묘사하는 이 서판들은, 지금 여러 박물관들의 먼지투성이의 선반들에 조용히 있습니다.

77:4.9 (860.4) The Sumerians well knew of the first and second Edens but, despite extensive intermarriage with the Adamites, continued to regard the garden dwellers to the north as an alien race. Sumerian pride in the more ancient Nodite culture led them to ignore these later vistas of glory in favor of the grandeur and paradisiacal traditions of the city of Dilmun. 수메르인들은 첫째와 둘째 에덴을 잘 알았고, 아담-사람들과 광범위하게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산 거주자들을 계속 북쪽의 이방 종족으로 여겼습니다. 수메르인들은 훨씬 고대의 놋-사람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딜문 도시의 장엄하며 천국과 같은 전통을 위해서, 이러한 나중의 영광스러운 추억을 무시했습니다.

77:4.10 (860.5) 4. The northern Nodites and Amadonites — the Vanites. This group arose prior to the Bablot conflict. These northernmost Nodites were descendants of those who had forsaken the leadership of Nod and his successors for that of Van and Amadon. 북쪽의 놋-사람들과 아마돈-사람들 – 반-사람들. 이 집단은 바블롯 충돌 이전에 생겼습니다. 북단(北端)의 이 놋-사람들은 반과 아마돈의 지도력을 위해, 놋과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력을 버린 자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77:4.11 (860.6) Some of the early associates of Van subsequently settled about the shores of the lake which still bears his name, and their traditions grew up about this locality. Ararat became their sacred mountain, having much the same meaning to later-day Vanites that Sinai had to the Hebrews. Ten thousand years ago the Vanite ancestors of the Assyrians taught that their moral law of seven commandments had been given to Van by the Gods upon Mount Ararat. They firmly believed that Van and his associate Amadon were taken alive from the planet while they were up on the mountain engaged in worship. 반의 초기 동료 중 일부는 그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지닌 호숫가 부근에 정착하였고, 이 장소 근처에서 그들의 전통들이 자랐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시나이가 지녔던 거의 같은 의미로 근대의 반-사람들에게 아라랏은 신성한 산이 되었습니다. 10,000년 전에, 앗시리아인들의 반-사람 조상들은, 아라랏 산에서 하나님들이 자신들의 도덕법 7계명들을 반에게 주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반과 그의 동료 아마돈이 산에서 경배하는 중에서 행성에서 산 채로 올라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77:4.12 (860.7) Mount Ararat was the sacred mountain of northern Mesopotamia, and since much of your tradition of these ancient times was acquired in connection with the Babylonian story of the flood, it is not surprising that Mount Ararat and its region were woven into the later Jewish story of Noah and the universal flood. 아라랏 산은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신성한 산이었고, 이러한 고대의 여러 너희 전통은 바빌로니아인의 홍수 이야기와 연결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라랏 산과 그 지역이 노아와 세계적 홍수에 관한 후대 유대인들의 이야기로 엮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77:4.13 (860.8) About 35,000 B.C. Adamson visited one of the easternmost of the old Vanite settlements to found his center of civilization. 기원 전 약 35,000년경에, 아담선이 자신의 문명 중심지를 설립하기 위해 가장 동쪽에 있는 반-사람의 옛 정착지들 중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5. Adamson and Ratta 아담선과 롸타

77:5.1 (861.1) Having delineated the Nodite antecedents of the ancestry of the secondary midwayers, this narrative should now give consideration to the Adamic half of their ancestry, for the secondary midwayers are also the grandchildren of Adamson, the first-born of the violet race of Urantia. 2차 중도자들의 조상에 속한 놋-사람 내력을 기술하면서, 이 이야기는 지금 그들 계보에서 아담적 절반을 고려해야 하는데, 2차 중도자들은 또한, 유란시아 보라 인종의 장남, 아담선의 손자들이기 때문입니다.

77:5.2 (861.2) Adamson was among that group of the children of Adam and Eve who elected to remain on earth with their father and mother. Now this eldest son of Adam had often heard from Van and Amadon the story of their highland home in the north, and sometim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econd garden he determined to go in search of this land of his youthful dreams. 아담선은 자신들의 부모와 함께 지상에 남기로 택한 아담과 이브의 자녀 무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장남은 반과 아마돈으로부터 북쪽 고지(高地)에 있는 그들의 고향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둘째 동산의 건립 후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유년기에 꿈에 그리던 이 땅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77:5.3 (861.3) Adamson was 120 years old at this time and had been the father of thirty-two pure-line children of the first garden. He wanted to remain with his parents and assist them in upbuilding the second garden, but he was greatly disturbed by the loss of his mate and their children, who had all elected to go to Edentia along with those other Adamic children who chose to become wards of the Most Highs. 이때 아담선은 120세였고 첫째 동산에 속한 32 순계(純系) 자녀들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부모들과 함께 남아서 둘째 동산을 설립하는 그들을 도우려 했지만, 그는, 지고(至高)자들의 피보호자들이 되기로 선택한, 아담의 다른 자녀들과 함께 에덴시아에 가기로 모두 결정한 자기 아내와 자녀들의 손실로 인해 많이 불안했습니다.

77:5.4 (861.4) Adamson would not desert his parents on Urantia, he was disinclined to flee from hardship or danger, but he found the associations of the second garden far from satisfying. He did much to forward the early activities of defense and construction but decided to leave for the north at the earliest opportunity. And though his departure was wholly pleasant, Adam and Eve were much grieved to lose their eldest son, to have him go out into a strange and hostile world, as they feared, never to return. 아담선은 유란시아에 자기 부모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고, 그는 고난과 위험을 피하려 하지 않았지만, 둘째 동산의 공동 사회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는 초기 방어와 건설 활동의 진척에 크게 공헌했지만 가능한 이른 기회에 북쪽으로 떠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출발은 아주 기뻤지만,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장자가 낯선 적대적 세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잃을까 봐 몹시 슬펐습니다.

77:5.5 (861.5) A company of twenty-seven followed Adamson northward in quest of these people of his childhood fantasies. In a little over three years Adamson’s party actually found the object of their adventure, and among these people he discovered a wonderful and beautiful woman, twenty years old, who claimed to be the last pure-line descendant of the Prince’s staff. This woman, Ratta, said that her ancestors were all descendants of two of the fallen staff of the Prince. She was the last of her race, having no living brothers or sisters. She had about decided not to mate, had about made up her mind to die without issue, but she lost her heart to the majestic Adamson. And when she heard the story of Eden, how the predictions of Van and Amadon had really come to pass, and as she listened to the recital of the Garden default, she was encompassed with but a single thought — to marry this son and heir of Adam. And quickly the idea grew upon Adamson. In a little more than three months they were married. 27명의 무리가 아담선의 어린 시절 환상의 이 사람들을 찾으러 북쪽으로 따라갔습니다. 3년이 조금 넘어 아담선의 일행은 자기들 모험의 목표를 실제로 발견했고, 그는 이 사람 중에서, 왕자 참모진의 최후 순계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20세 여성을 발견했습니다. 이 여성 롸타는, 자기 조상은 모두, 왕자의 타락한 참모진 중 두 사람의 후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종족에서 최후로 남았고, 살아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결혼하지 않기로 정했으며, 자손 없이 죽기로 결단했지만, 장엄한 아담선에게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에덴의 이야기, 반과 아마돈의 예언들이 정말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들었을 때, 그리고 에덴의 의무-불이행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이 아담의 아들 후계자와 결혼하려는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곧 아담선에게 점점 들어왔습니다. 3개월이 조금 지나서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77:5.6 (861.6) Adamson and Ratta had a family of sixty-seven children. They gave origin to a great line of the world’s leadership, but they did something more.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both of these beings were really superhuman. Every fourth child born to them was of a unique order. It was often invisible. Never in the world’s history had such a thing occurred. Ratta was greatly perturbed — even superstitious — but Adamson well knew of the existence of the primary midwayers, and he concluded that something similar was transpiring before his eyes. When the second strangely behaving offspring arrived, he decided to mate them, since one was male and the other female, and this is the origin of the secondary order of midwayers. Within one hundred years, before this phenomenon ceased, almost two thousand were brought into being. 아담선과 롸타는 67명의 자녀로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세상 지도력 계보의 혈통이었지만, 그들은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77.2.2). 이 두 존재가 정말 초(超)인간(超)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태어나는 네 번째 자녀는 독특한 계층에 속했습니다. 자주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역사에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롸타는 매우 불안해서 – 미신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 아담선은 1차 중도자들의 실체를 잘 알았고, 그는 비슷한 일이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상히 행동하는 둘째 자녀가 태어나자, 하나는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부부가 되게 하기로 정했는데, 이것이 2차 계층 중도자들의 기원입니다. 100년 동안, 이 현상이 멈추기 전에, 거의 2,000명이 태어났습니다.

77:5.7 (862.1) Adamson lived for 396 years. Many times he returned to visit his father and mother. Every seven years he and Ratta journeyed south to the second garden, and meanwhile the midwayers kept him informed regarding the welfare of his people. During Adamson’s life they did great service in upbuilding a new and independent world center for truth and righteousness. 아담선은 396년 살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방문하러 돌아갔습니다. 7년마다 그와 롸타는 남쪽 둘째 동산으로 여행했고, 그동안 중도자들이 그에게 그 민족들의 복지에 관해 계속 알렸습니다. 아담선의 일생, 그들은 진리와 공의(公義)의 새롭고 독립된 세계 중심지를 개량하는 일에 크게 봉사했습니다.

77:5.8 (862.2) Adamson and Ratta thus had at their command this corps of marvelous helpers, who labored with them throughout their long lives to assist in the propagation of advanced truth and in the spread of higher standards of spiritual, intellectual, and physical living. And the results of this effort at world betterment never did become fully eclipsed by subsequent retrogressions. 아담선과 롸타는 이렇게 놀라운 조력(助力)단(團)을 다스렸는데, 이들은 그들과 함께 그들이 오래 사는 내내 진보한 진리의 전파와 영적·지적 및 육체적 생활의 더 높은 기준을 전파하는 일에 지원하면서 수고했습니다. 세계를 개선하는 이 노력의 결과는 나중의 퇴보로 결코 충분히 무색해지지 않았습니다.

77:5.9 (862.3) The Adamsonites maintained a high culture for almost seven thousand years from the times of Adamson and Ratta. Later on they became admixed with the neighboring Nodites and Andonites and were also included among the “mighty men of old.” And some of the advances of that age persisted to become a latent part of the cultural potential which later blossomed into European civilization. 아담선-사람들은 아담선과 롸타의 시대로부터 거의 7,000년 동안 높은 정신문명을 유지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이웃 놋-사람들 및 안돈-사람들과 섞였고, 역시 “고대의 용사들(창6:4)”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진보의 일부는 문화적 잠재력 중 숨어 있는 부분으로 존속하다가 나중에 유럽 문명이 되었습니다.

77:5.10 (862.4) This center of civilization was situated in the region east of the southern end of the Caspian Sea, near the Kopet Dagh. A short way up in the foothills of Turkestan are the vestiges of what was onetime the Adamsonite headquarters of the violet race. In these highland sites, situated in a narrow and ancient fertile belt lying in the lower foothills of the Kopet range, there successively arose at various periods four diverse cultures respectively fostered by four different groups of Adamson’s descendants. It was the second of these groups which migrated westward to Greece and the islands of the Mediterranean. The residue of Adamson’s descendants migrated north and west to enter Europe with the blended stock of the last Andite wave coming out of Mesopotamia, and they were also numbered among the Andite-Aryan invaders of India. 이 문명 중심지는 카스피해(海)의 남단(南端) 동쪽 지역, 코펫 다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투르키스탄 산기슭에서 위로 짧은 길은 옛날 보라 종족의 아담선 본부들의 흔적입니다. 코펫 산맥의 낮은 산기슭에 놓인 좁은 고대의 비옥한 지대에 있는 이 고지대(高地帶)에, 아담선 후손들에 속한 네 개의 다른 집단들이 각각 양성(養成)한 네 개의 다양한 문화들이 다양한 시기에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 중 둘째 집단이 서쪽의 그리스와 지중해의 섬들로 이주했습니다. 나머지 아담선 후손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최후로 나온 안드-사람 떼의 혼합 혈통과 함께, 북쪽과 서쪽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갔고, 그들도 인도의 안드-사람-아리아인(人) 침입자 중에 있었습니다.

6. The Secondary Midwayers 2차 중도자들

77:6.1 (862.5) While the primary midwayers had a well-nigh superhuman origin, the secondary order are the offspring of the pure Adamic stock united with a humanized descendant of ancestors common to the parentage of the senior corps. 1차 중도자들은 거의 초(超)인간적 기원을 지녔지만, 2차 계층은, 선임단(團) 가문에 공통된 조상의 인간화 후손과 연합된, 순혈(純血) 아담 혈통의 자손입니다.

77:6.2 (862.6) Among the children of Adamson there were just sixteen of the peculiar progenitors of the secondary midwayers. These unique children were equally divided as regards sex, and each couple was capable of producing a secondary midwayer every seventy days by a combined technique of sex and nonsex liaison. And such a phenomenon was never possible on earth before that time, nor has it ever occurred since. 아담선의 자녀 중 2차 중도자들의 특이한 조상은 16명뿐이었습니다. 이 독특한 자녀들은 성별(性別)로 똑같이 나뉘었는데(8쌍), 각 쌍은 성(性) 및 무성(無性) 관계의 결합 기법으로 2차 중도자를 70일마다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그 이전에 지상에서 결코 가능한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77:6.3 (862.7) These sixteen children lived and died (except for their peculiarities) as mortals of the realm, but their electrically energized offspring live on and on, not being subject to the limitations of mortal flesh. 이 자녀들 16명은 (특이함을 제외하고) 필사자들 부류로서 살다가 죽었지만, 필사 육신의 취약점 없이, 전기(電氣)로 동력이 공급되는 그 자손은 계속 살아갑니다.

77:6.4 (862.8) Each of the eight couples eventually produced 248 midwayers, and thus did the original secondary corps — 1,984 in number — come into existence. There are eight subgroups of secondary midwayers. They are designated as A-B-C the first, second, third, and so on. And then there are D-E-F the first, second, and so on. 8쌍들은 각각 결국 중도자 248명을 낳아서, 기원적 2차단(團)은 – 1,984명이 생겼습니다. 2차 중도자들은 8개의 소집단(小集團)이 있습니다. 그들은 A-B-C 첫째, 둘째, 셋째 등으로 불립니다. 그 후 D-E-F 첫째 둘째, 등이 있습니다.

77:6.5 (862.9) After the default of Adam the primary midwayers returned to the service of the Melchizedek receivers, while the secondary group were attached to the Adamson center until his death. Thirty-three of these secondary midwayers, the chiefs of their organization at the death of Adamson, endeavored to swing the whole order over to the service of the Melchizedeks, thus effecting a liaison with the primary corps. But failing to accomplish this, they deserted their companions and went over in a body to the service of the planetary receivers. 아담의 의무-불이행 이후 1차 중도자들은 멜기세덱 수령자들의 업무로 돌아왔고, 한편 2차 집단은 아담선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소속되었습니다. 아담선이 죽을 때 이 2차 중도자들 조직의 수석들 33명이 전체 계층을 멜기세덱의 전반적 업무로 전환하여 1차단(團)과 접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지 못하자, 그들은 자기 동료들을 버리고 단체로 행성 수령자들의 업무로 넘어갔습니다.

77:6.6 (863.1) After the death of Adamson the remainder of the secondary midwayers became a strange, unorganized, and unattached influence on Urantia. From that time to the days of Machiventa Melchizedek they led an irregular and unorganized existence. They were partially brought under control by this Melchizedek but were still productive of much mischief up to the days of Christ Michael. And during his sojourn on earth they all made final decisions as to their future destiny, the loyal majority then enlisting under the leadership of the primary midwayers. 아담선이 죽은 후 남은 2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소외되어 조직이 없는 무소속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시절까지, 그들은 비정상적인 미조직 생활을 했습니다. 이 멜기세덱이 그들을 부분적으로 조정했지만, 그리스도 미가엘의 시절까지 여전히 여러 해악(害惡)을 끼쳤습니다. 그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미래 운명에 대해 최종적 결정을 내렸는데, 충성스러운 다수는 그때 1차 중도자들의 지도력에 참여했습니다.

7. The Rebel Midwayers 반역한 중도자들

77:7.1 (863.2) The majority of the primary midwayers went into sin at the time of the Lucifer rebellion. When the devastation of the planetary rebellion was reckoned up, among other losses it was discovered that of the original 50,000, 40,119 had joined the Caligastia secession. 다수의 1차 중도자들은 루시퍼 반란 당시 죄에 빠졌습니다. 행성 반란의 참해(慘害참혹한 손해)를 합산하자, 다른 손실 중, 본래 50,000명에서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 탈퇴에 합류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77:7.2 (863.3) The original number of secondary midwayers was 1,984, and of these 873 failed to align themselves with the rule of Michael and were duly interned in connection with the planetary adjudication of Urantia on the day of Pentecost. No one can forecast the future of these fallen creatures. 2차 중도자들의 원래 수(數)는 1,984명이었고, 그중 이 873명은 미가엘의 통치와 손을 잡지 못했고, 오순절 날 유란시아의 행성 판결과 관련하여 정식으로 감금(監禁)되어 있습니다. 이 타락한 창조물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77:7.3 (863.4) Both groups of rebel midwayers are now held in custody awaiting the final adjudication of the affairs of the system rebellion. But they did many strange things on earth prior to the inauguration of the present planetary dispensation. 두 집단의 반란 중도자들은 체계 반란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기다리며 지금 감금(監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現) 행성 섭리시대(천계天啓)가 시작되기 전에 지상에서 여러 이상한 행위들을 했습니다.

77:7.4 (863.5) These disloyal midwayers were able to reveal themselves to mortal eyes under certain circumstances, and especially was this true of the associates of Beelzebub, the leader of the apostate secondary midwayers. But these unique creatures must not be confused with certain of the rebel cherubim and seraphim who also were on earth up to the time of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Some of the older writers designated these rebellious midway creatures as evil spirits and demons, and the apostate seraphim as evil angels. 불충한 이 중도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필사자들 눈에 스스로 드러낼 수 있었으며, 특히 이것은 바알세불, 즉 배교(背敎신앙을 버린)한 2차 중도자들 지도자의 동료들에게 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창조물들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때까지 역시 지상에 있었던 반역한 어떤 케루빔과 세라핌 천사들로,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부 옛 작가들은, 이 반역한 중도 창조물들을 악한 영들 및 악령들로, 배교한 세라핌 천사들을 악한 천사들로 불렀습니다.

77:7.5 (863.6) On no world can evil spirits possess any mortal mind subsequent to the life of a Paradise bestowal Son. But before the days of Christ Michael on Urantia — before the universal coming of the Thought Adjusters and the pouring out of the Master’s spirit upon all flesh — these rebel midwayers were actually able to influence the minds of certain inferior mortals and somewhat to control their actions. This was accomplished in much the same way as the loyal midway creatures function when they serve as efficient contact guardians of the human minds of the Urantia reserve corps of destiny at those times when the Adjuster is, in effect, detached from the personality during a season of contact with superhuman intelligences. 천국 증여 아들의 일생 이후에, 어떤 세상도 악한 영(靈)들이 필사 마음을 결코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란시아에 그리스도 미가엘의 시절 이전(以前) – 생각 조율자들이 우주적으로 도래하고 모든 육체에 주(主)의 영(靈)이 쏟아져 나오기 전(前) – 이 반역한 중도자들이 어떤 열등한 필사자들의 마음들에 사실 영향을 미쳐서 어느 정도 그들의 행동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조율자가 초(超)인간 지능존재들과 접촉하던 기간 동안 사실상 그 고유성에서 분리될 때, 충성스러운 중도 창조물들이 유란시아 운명의 예비단(團)에 속한 인간 마음들에 유능하게 접촉하는 수호(守護)자들로서 봉사하는 그때, 그들이 활동하는 경우 이것이 아주 똑같이 이루어졌습니다.

77:7.6 (863.7) It is no mere figure of speech when the record states: “And they brought to Him all sorts of sick people, those who were possessed by devils and those who were lunatics.” Jesus knew and recognized the difference between insanity and demoniacal possession, although these states were greatly confused in the minds of those who lived in his day and generation.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 귀신들린 자들과 간질(癎疾)하는 자들을 데려왔습니다(마4:24).”라고 진술하는 기록은 단지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신병과 귀신들린 빙의(憑依)의 차이를 알고 분간하셨지만, 그 당시 세대에 살았던 자들의 마음에는 이런 상태들이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77:7.7 (863.8) Even prior to Pentecost no rebel spirit could dominate a normal human mind, and since that day even the weak minds of inferior mortals are free from such possibilities. The supposed casting out of devils since the arrival of the Spirit of Truth has been a matter of confounding a belief in demoniacal possession with hysteria, insanity, and feeble-mindedness. But just because Michael’s bestowal has forever liberated all human minds on Urantia from the possibility of demoniacal possession, do not imagine that such was not a reality in former ages. 오순절 이전에도, 어떤 반역한 영(靈)이 결코 정상(보통) 인간 마음을 지배할 수 없었으며, 그날 이후 열등한 필사자들의 연약한 마음도 그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진리의 영(靈)이 도착한 이후에 소위 악령(惡靈) 축사(逐邪내쫓음)는, 귀신들린 빙의(憑依)를 히스테리(병적 흥분), 정신병 및 정신-박약(薄弱지적장애 IQ70이하)과 혼동하는 것으로 믿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미가엘의 증여가 유란시아에 있는 모든 인간 마음들을 귀신들린 빙의(憑依) 가능성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이전(以前) 시대에 실체가 아니었다고 추측하지 말아야 합니다.

77:7.8 (864.1) The entire group of rebel midwayers is at present held prisoner by order of the Most Highs of Edentia. No more do they roam this world on mischief bent. Regardless of the presence of the Thought Adjusters, the pouring out of the Spirit of Truth upon all flesh forever made it impossible for disloyal spirits of any sort or description ever again to invade even the most feeble of human minds. Since the day of Pentecost there never again can be such a thing as demoniacal possession. 반역한 모든 중도자들은 현재 에덴시아 지고(至高)자들의 명령에 의해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해악(害惡)을 일삼으며 이 세상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생각 조율자들의 현존과 관계없이, 모든 육체에 진리의 영(靈)이 부어져서 어떤 종류, 어떤 등급의 불충한 영(靈)들이 심지어 가장 박약한 인간 마음들에 결코 다시 침입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 이후 귀신들린 빙의(憑依) 같은 그런 일은 결코 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8. The United Midwayers 연합한 중도자들

77:8.1 (864.2) At the last adjudication of this world, when Michael removed the slumbering survivors of time, the midway creatures were left behind, left to assist in the spiritual and semispiritual work on the planet. They now function as a single corps, embracing both orders and numbering 10,992. The United Midwayers of Urantia are at present governed alternately by the senior member of each order. This regime has obtained since their amalgamation into one group shortly after Pentecost. 최근의 이 세상 판결에서 미가엘이 잠자는 시간의 생존자들을 옮겼을 때, 중도 창조물들은, 행성에 있는 영적(靈的)·반(半)영적(靈的) 업무를 돕도록, 뒤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두 계층을 포함한 10,992명 수(數)의 단일단(團)으로 활동합니다. 유란시아의 연합 중도자들은 현재 각 계층의 선임 요원이 교대로 다스립니다. 오순절 직후 한 집단으로 합병된 이후 이 체제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77:8.2 (864.3) The members of the older or primary order are generally known by numerals; they are often given names such as 1-2-3 the first, 4-5-6 the first, and so on. On Urantia the Adamic midwayers are designated alphabetically in order to distinguish them from the numerical designation of the primary midwayers. 더 오래된 1차 계층 요원은 대개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첫째 1-2-3, 첫째 4-5-6 등으로 이름을 말합니다.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중도자들은, 숫자로 부르는 1차 중도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불립니다.

77:8.3 (864.4) Both orders are nonmaterial beings as regards nutrition and energy intake, but they partake of many human traits and are able to enjoy and follow your humor as well as your worship. When attached to mortals, they enter into the spirit of human work, rest, and play. But midwayers do not sleep, neither do they possess powers of procreation. In a certain sense the secondary group are differentiated along the lines of maleness and femaleness, often being spoken of as “he” or “she.” They often work together in such pairs. 두 계층은 영양 및 에너지 섭취의 관점에서 비(非)물질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인간적 특색들이 많으며 너희 유머와 경배를 누리고 행할 수 있습니다. 필사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일 때 그들은 인간 업무, 휴식 및 놀이의 영(정신)을 공감합니다. 그러나 중도자들은 잠자지 않으며 번식력(繁殖力)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차 집단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계열로 구별되며, 자주 “그” 또는 “그녀”로 불립니다. 그들은 흔히 그런 쌍으로 함께 일합니다.

77:8.4 (864.5) Midwayers are not men, neither are they angels, but secondary midwayers are, in nature, nearer man than angel; they are, in a way, of your races and are, therefore, very understanding and sympathetic in their contact with human beings; they are invaluable to the seraphim in their work for and with the various races of mankind, and both orders are indispensable to the seraphim who serve as personal guardians to mortals. 중도자들은 사람들도 아니고 천사들도 아니지만, 2차 중도자들은 사실 천사보다는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너희 인종에 속하므로 인간들과 접촉할 때, 이해와 공감이 빠릅니다. 그들은 여러 종족의 인류를 위해, 이들과 함께 일할 때, 세라핌 천사들에게 매우 소중하며, 두 계층은 필사자에게 고유적 수호(守護)자들로서 섬기는 세라핌 천사들에게 절대 필요합니다.

77:8.5 (864.6) The United Midwayers of Urantia are organized for service with the planetary seraphim in accordance with innate endowments and acquired skills, in the following groups: 유란시아의 연합한 중도자들은 타고난 재능과 습득한 기술에 따라 행성의 세라핌 천사들을 섬기도록 다음 집단들로 구성되었습니다.

77:8.6 (864.7) 1. Midway messengers. This group bear names; they are a small corps and are of great assistance on an evolutionary world in the service of quick and reliable personal communication. 중도 메신저들. 이 집단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규모 단(團)으로, 진화 세계의 신속하며 확실한 고유적 소통 업무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77:8.7 (864.8) 2. Planetary sentinels. Midwayers are the guardians, the sentinels, of the worlds of space. They perform the important duties of observers for all the numerous phenomena and types of communication which are of import to the supernatural beings of the realm. They patrol the invisible spirit realm of the planet. 행성 감시자들. 중도자들은 공간 세계들의 수호(守護)자들, 감시(監視)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역의 초(超)자연적 존재들에게 중요한, 수많은 현상과 수많은 유형의 통신에 중요한 관찰자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은 행성의 보이지 않는 영(靈) 영역을 순찰(巡察)합니다.

77:8.8 (865.1) 3. Contact personalities. In the contacts made with the mortal beings of the material worlds, such as with the subject through whom these communications were transmitted, the midway creatures are always employed. They are an essential factor in such liaisons of the spiritual and the material levels. 접촉 고유성들. 물질세계들의 필사 존재들과 접촉할 때, 이런 통신문들이 전달된 사람의 경우처럼, 중도 창조물들이 항상 사용됩니다. 그들은 영적 수준과 물질 수준의 그런 접촉에서 필수 요소입니다.

77:8.9 (865.2) 4. Progress helpers. These are the more spiritual of the midway creatures, and they are distributed as assistants to the various orders of seraphim who function in special groups on the planet. 진보 조수(助手)들. 이들은 더 영적인 중도 창조물들이며, 그들은 행성에서 특별 집단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세라핌 천사들 계층들의 조수들로 분류됩니다.

77:8.10 (865.3) Midwayers vary greatly in their abilities to make contact with the seraphim above and with their human cousins below. It is exceedingly difficult, for instance, for the primary midwayers to make direct contact with material agencies. They are considerably nearer the angelic type of being and are therefore usually assigned to working with, and ministering to, the spiritual forces resident on the planet. They act as companions and guides for celestial visitors and student sojourners, whereas the secondary creatures are almost exclusively attached to the ministry of the material beings of the realm. 중도자들은 위로 세라핌 천사들 및 아래로 인간 사촌들과 접촉하는 능력이 매우 다양합니다. 실례로, 1차 중도자들은 물질 매개자들과 직접적 접촉이 몹시 어렵습니다. 그들은 천사 유형의 존재들에 상당히 더 가까우므로 행성에 늘 있는 영적 기세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을 돌보도록 배정됩니다. 그들은 천상의 방문자들과 학생 체류자들을 위한 동반자들과 안내자들로서 행동하는 반면에 2차 창조물들은 거의 오로지 영역의 물질 존재들을 보살피도록 배속됩니다.

77:8.11 (865.4) The 1,111 loyal secondary midwayers are engaged in important missions on earth. As compared with their primary associates, they are decidedly material. They exist just outside the range of mortal vision and possess sufficient latitude of adaptation to make, at will, physical contact with what humans call “material things.” These unique creatures have certain definite powers over the things of time and space, not excepting the beasts of the realm. 1,111명의 충성스러운 2차 중도자들은 지구에서 중요한 임무에 종사합니다. 그들의 1차 동료들과 비교해서, 그들은 확실히 물질적입니다. 그들은 필사 시력의 범위 바로 바깥에 존재하며, 인간들이 “물질적 사물들”이라고 부르는 것들과 임의로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충분한 적응 범위를 소유합니다. 이 독특한 창조물들은, 영역의 짐승들도 제외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사물들에 대해 한정적인 어떤 권능이 있습니다.

77:8.12 (865.5) Many of the more literal phenomena ascribed to angels have been performed by the secondary midway creatures. When the early teachers of the gospel of Jesus were thrown into prison by the ignorant religious leaders of that day, an actual “angel of the Lord” “by night opened the prison doors and brought them forth.” But in the case of Peter’s deliverance after the killing of James by Herod’s order, it was a secondary midwayer who performed the work ascribed to an angel. 천사들의 탓으로 여기는, 더 많은 여러 문자 그대로의 현상들은 2차 중도 창조물들이 행한 것입니다. 당시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복음의 초기 교사들을 투옥했을 때, 실제 “주(主)의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었습니다(행5:19).” 아니, 헤롯의 명령으로 야고보가 죽은 후 베드로가 구출된 경우에, 2차 중도자가 천사의 탓으로 여겨진 그 일을 수행했습니다(행12:7-10).

77:8.13 (865.6) Their chief work today is that of unperceived personal-liaison associates of those men and women who constitute the planetary reserve corps of destiny. It was the work of this secondary group, ably seconded by certain of the primary corps, that brought about the co-ordination of personalities and circumstances on Urantia which finally induced the planetary celestial supervisors to initiate those petitions that resulted in the granting of the mandates making possible the series of revelations of which this presentation is a part. But it should be made clear that the midway creatures are not involved in the sordid performances taking place under the general designation of “spiritualism.” The midwayers at present on Urantia, all of whom are of honorable standing, are not connected with the phenomena of so-called “mediumship”; and they do not, ordinarily, permit humans to witness their sometimes necessary physical activities or other contacts with the material world, as they are perceived by human senses. 오늘날 그들의 주된 업무는, 운명의 행성 예비단(團)을 구성하는 그 남녀들과 눈에 띄지 않게 개인적으로-접촉하는 동료의 업무입니다. 유란시아에 있는 고유성들과 상황들의 정합(整合)을 야기한, 이 2차 집단의 업무는, 특정한 1차 단(團)이 훌륭한 지원으로, 마침내 천상의 행성 감독자들이 명령을 승인하게 된 그 청원을 시작하도록 유도했고, 이 제시의 일부인 일련의 계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중도 창조물들이 “강신술(降神術기도와 주문으로 신이 내리는 술법)”이라는 일반 명칭 아래에서 벌어지는 천한 조작극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현재 유란시아에 있는 중도자들은 모두 고결한 신분으로 소위 “영매(靈媒혼령과 인간의 매개)의 역할” 현상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인간들이, 인간의 감각들로 감지하듯이, 간혹 자신들의 필요한 물리적 활동이나 물질세계와의 다른 접촉을, 인간들이 목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9. The Permanent Citizens of Urantia 유란시아의 영구 시민

77:9.1 (865.7) Midwayers may be regarded as the first group of the permanent inhabitants to be found on the various orders of worlds throughout the universes in contrast with evolutionary ascenders like the mortal creatures and the angelic hosts. Such permanent citizens are encountered at various points in the Paradise ascent. 중도자들은, 필사 창조물들 및 천사 무리 같은 진화적 상승자들과 달리, 온 우주 세계들의 여러 계층에서 발견되는 영구 거주자 중 첫 집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 영구 시민들은 천국으로 상승하는 다양한 장소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77:9.2 (866.1) Unlike the various orders of celestial beings who are assigned to minister on a planet, the midwayers live on an inhabited world. The seraphim come and go, but the midway creatures remain and will remain, albeit they are nonetheless ministers for being natives of the planet, and they provide the one continuing regime which harmonizes and connects the changing administrations of the seraphic hosts. 행성에서 사역하도록 임명된 여러 계층의 천상 존재들과 다르게, 중도자들은 거주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세라핌 천사들은 오고 가지만, 중도 창조물들은 머물러 남아 있을 것이며, 그들은 행성의 원주민이 된 사역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라핌 천사 무리의 변화하는 경영과 일치되도록 연결하는, 하나의 연속적인 체제를 마련합니다.

77:9.3 (866.2) As actual citizens of Urantia, the midwayers have a kinship interest in the destiny of this sphere. They are a determined association, persistently working for the progress of their native planet. Their determination is suggested by the motto of their order: “What the United Midwayers undertake, the United Midwayers do.” 유란시아의 현재 시민들로서, 중도자들은 이 구체의 운명에 공통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호한 단체이며, 자신들이 태어난 행성의 진보를 위해 끊임없이 일합니다. 그들 계층의 표어로 그들의 결단이 드러납니다. “연합 중도자들이 떠맡은 일은 연합 중도자들이 행합니다.”

77:9.4 (866.3) Although their ability to traverse the energy circuits makes planetary departure feasible to any midwayer, they have individually pledged themselves not to leave the planet prior to their sometime release by the universe authorities. Midwayers are anchored on a planet until the ages of settled light and life. With the exception of 1-2-3 the first, no loyal midway creatures have ever departed from Urantia. 에너지 회로를 횡단하는 그들의 능력으로 어떤 중도자도 행성을 떠날 수 있지만, 우주 당국이 언젠가 그들을 풀어놓기 전에 행성을 떠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맹세(盟誓)했습니다. 중도자들은, 확립된 빛과 생명의 시대까지 행성에 정착해 있습니다. 1-2-3 첫째 외에, 충성된 중도 창조물들은 결코 유란시아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77:9.5 (866.4) 1-2-3 the first, the eldest of the primary order, was released from immediate planetary duties shortly after Pentecost. This noble midwayer stood steadfast with Van and Amadon during the tragic days of the planetary rebellion, and his fearless leadership was instrumental in reducing the casualties in his order. He serves at present on Jerusem as a member of the twenty-four counselors, having already functioned as governor general of Urantia once since Pentecost. 1차 계층의 최연장자, 1-2-3 첫째는, 오순절 직후 직접적 행성 직책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이 고귀한 중도자는 행성의 반란이 있던 비극의 시절에 반과 아마돈과 함께 굳건히 견디었고, 그의 대담한 지도력은 자기 계층에서 사상자 수(數)를 줄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순절 이후로 한 번 유란시아의 총독으로 활동했고, 현재 예루셈에서 24 조언자 요원으로 근무합니다.

77:9.6 (866.5) Midwayers are planet bound, but much as mortals talk with travelers from afar and thus learn about remote places on the planet, so do midwayers converse with celestial travelers to learn about the far places of the universe. So do they become conversant with this system and universe, even with Orvonton and its sister creations, and so do they prepare themselves for citizenship on the higher levels of creature existence. 중도자들은 행성에 묶여 있지만, 필사자들이 멀리서 온 여행자들과 말하여 행성의 먼 곳에 관해 배우는 것과 같이, 중도자들도 우주의 먼 곳에 대해 배우려고 천상의 여행자들과 대화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이 체계와 우주, 오르본톤과 그의 자매 창조계들까지 정통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은 높은 수준의 창조물 실존을 위한 시민권을 준비합니다.

77:9.7 (866.6) While the midwayers were brought into existence fully developed — experiencing no period of growth or development from immaturity — they never cease to grow in wisdom and experience. Like mortals they are evolutionary creatures, and they have a culture which is a bona fide evolutionary attainment. There are many great minds and mighty spirits among the Urantia midway corps. 중도자들은 충분히 발달한 존재로 – 미숙 상태에서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시기를 겪지 않고- 태어났지만, 지혜와 체험에서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필사자들처럼 그들은 진화적 창조물들이며, 그들은 성실하게 진화로 도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란시아의 중도자단(團) 가운데 위대한 마음들과 막강한 영(靈)들이 많이 있습니다.

77:9.8 (866.7) In the larger aspect the civilization of Urantia is the joint product of the Urantia mortals and the Urantia midwayers, and this is true despite the present differential between the two levels of culture, a differential which will not be compensated prior to the ages of light and life. 더 큰 측면에서 유란시아의 문명은 유란시아 필사자들과 유란시아 중도자들의 공동 산물이며, 두 문화 사이에 있는 수준이 현재 다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며, 그 차이는 빛과 생명의 시대 이전에는 상쇄(相殺서로 비김)되지 않을 것입니다.

77:9.9 (866.8) The midway culture, being the product of an immortal planetary citizenry, is relatively immune to those temporal vicissitudes which beset human civilization. The generations of men forget; the corps of midwayers remembers, and that memory is the treasure house of the traditions of your inhabited world. Thus does the culture of a planet remain ever present on that planet, and in proper circumstances such treasured memories of past events are made available, even as the story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has been given by the midwayers of Urantia to their cousins in the flesh. 불멸하는 행성 시민의 산물인 중도자 문화는, 인간의 문명을 뒤흔드는 일시적 변덕에 비교적 면역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세대들은 잊으나, 중도자들 단(團)은 기억하며, 그 기억은 너희 거주 세계 전통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래서 행성의 문화는 항상 그 행성에 존재하며, 유란시아의 중도자들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이야기도 육신으로 자기 사촌들에게 전했듯이, 적절한 상황에서 과거 사건들의 그런 소중한 기억들을 활용하게 됩니다.

77:9.10 (867.1) Midwayers are the skillful ministers who compensate that gap between the material and spiritual affairs of Urantia which appeared upon the death of Adam and Eve. They are likewise your elder brethren, comrades in the long struggle to attain a settled status of light and life on Urantia. The United Midwayers are a rebellion-tested corps, and they will faithfully enact their part in planetary evolution until this world attains the goal of the ages, until that distant day when in fact peace does reign on earth and in truth is there good will in the hearts of men. 중도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별세로 드러난 유란시아의 물질 및 영적 업무 사이에 있는 격차를 메워주는 노련한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은 너희 손위 형제들과 같고, 유란시아에서 빛과 생명의 확립된 상태에 이르도록 오래 투쟁하는 전우들입니다. 연합 중도자들은 반란의 시험을 마친 단(團)이며, 이 세계가 시대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사실 평화가 지상에 크게 유행하고, 참으로 사람들의 심정에 선의(善意)가 있게 될 그 먼 날까지, 그들은 행성 진화에 있어서 신실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행할 것입니다.

77:9.11 (867.2) Because of the valuable work performed by these midwayers, we have concluded that they are a truly essential part of the spirit economy of the realms. And where rebellion has not marred a planet’s affairs, they are of still greater assistance to the seraphim. 이 중도자들이 행한 소중한 업무로 인해, 그들이 영역의 영(靈) 경륜에서 필수적 부분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반란으로 행성 업무가 훼손되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훨씬 더 세라핌 천사들을 돕고 있습니다.

77:9.12 (867.3) The entire organization of high spirits, angelic hosts, and midway fellows is enthusiastically devoted to the furtherance of the Paradise plan for the progressive ascension and perfection attainment of evolutionary mortals, one of the supernal businesses of the universe — the superb survival plan of bringing God down to man and then, by a sublime sort of partnership, carrying man up to God and on to eternity of service and divinity of attainment — alike for mortal and midwayer. 높은 영(靈)들·천사 무리·중도자 동료들의 전체 조직은, 우주의 숭고한 업무 중 하나인, 진화 필사자들의 진보적 상승 및 완전성 도달을 위한 천국 계획의 증진에 열성적으로 헌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온 후, 고귀한 유형의 협력으로, 사람을 하나님까지 이끌어, 영원히 봉사하고 신성(神性)에 도달하는 탁월한 생존 계획으로 필사자와 중도자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77:9.13 (867.4) [Presented by an Archangel of Nebadon.][네바돈의 천사장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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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8 The Violet Race After the Days of Adam 아담 시대 이후 보라 종족

Paper 78

The Violet Race After the Days of Adam 아담 시대 이후 보라 종족

1. Racial and Cultural Distribution 종족과 문화의 분포
2. The Adamites in the Second Garden 둘째 동산의 아담-사람들
3. Early Expansions of the Adamites 아담-사람들의 초기 팽창
4. The Andites 안드-사람들
5. The Andite Migrations 안드-사람들의 이주
6. The Last Andite Dispersions 마지막 안드-사람의 분산
7. The Floods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Story of Noah 노아의 이야기
8. The Sumerians — Last of the Andites 수메르인(人)들 – 마지막 안드-사람들

78:0.1 (868.1) THE second Eden was the cradle of civilization for almost thirty thousand years. Here in Mesopotamia the Adamic peoples held forth, sending out their progeny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latterly, as amalgamated with the Nodite and Sangik tribes, were known as the Andites. From this region went those men and women who initiated the doings of historic times, and who have so enormously accelerated cultural progress on Urantia. 둘째 에덴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발상지(發祥地)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기에서 오랫동안 창도(唱導오래 말하며 이끎)했던 아담 사람들이, 자기 종족을 땅끝까지 보냈으며, 후에 놋-사람들 및 상긱 부족들과 혼합하여 안드-사람들로 알려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나온 그 남녀들이 유사(有史)시대의 행적을 시작하고, 유란시아에서 그토록 대단하게 문화적 진보를 증진했습니다.

78:0.2 (868.2) This paper depicts the planetary history of the violet race, beginning soon after the default of Adam, about 35,000 B.C., and extending down through its amalgamation with the Nodite and Sangik races, about 15,000 B.C., to form the Andite peoples and on to its final disappearance from the Mesopotamian homelands, about 2000 B.C. 이 글은 보라 종족의 행성 역사를, BC 35,000년경, 아담의 의무-불이행 직후에 시작해서, BC 15,000년경 놋-사람들 및 상긱-종족들과 혼합으로 확장되어 안드-민족을 형성하고, 이어서 BC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본국에서 최종적으로 사라지기까지 서술합니다.

1. Racial and Cultural Distribution 종족과 문화의 분포

78:1.1 (868.3) Although the minds and morals of the races were at a low level at the time of Adam’s arrival, physical evolution had gone on quite unaffected by the exigencies of the Caligastia rebellion. Adam’s contribution to the biologic status of the races, notwithstanding the partial failure of the undertaking, enormously upstepped the people of Urantia. 아담의 도착 시, 종족의 마음과 도덕은 낮은 수준이었지만, 육체적 진화는, 칼리가스티아 반란의 긴급 상황으로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종족들의 생물학적 상태에 대한 아담의 공헌은 업무의 부분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란시아의 민족들을 크게 증진했습니다.

78:1.2 (868.4) Adam and Eve also contributed much that was of value to the social, moral, and intellectual progress of mankind; civilization was immensely quickened by the presence of their offspring. But thirty-five thousand years ago the world at large possessed little culture. Certain centers of civilization existed here and there, but most of Urantia languished in savagery. Racial and cultural distribution was as follows: 또한 아담과 이브는 인류의 사회적, 도덕적 및 지적 진보에 소중한 많은 것에 공헌했습니다. 그들의 자손들이 있어서, 문명은 엄청나게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35,000년 전에, 세상에는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문명 중심지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유란시아 대부분은 미개 상태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종족과 문명의 분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78:1.3 (868.5) 1. The violet race — Adamites and Adamsonites. The chief center of Adamite culture was in the second garden, located in the triangle of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this was indeed the cradle of Occidental and Indian civilizations. The secondary or northern center of the violet race was the Adamsonite headquarters, situated east of the southern shore of the Caspian Sea near the Kopet mountains. From these two centers there went forth to the surrounding lands the culture and life plasm which so immediately quickened all the races.보라색 인종 – 아담- 아담선-사람들. 아담-사람의 문화 중심지는 둘째 동산에 있었는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지역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정말로 서양과 인도 문명의 발상지였습니다. 보라색 인종의 둘째, 즉 북쪽 중심지는 아담선-사람들의 본부였고, 코펫 산맥 근처 카스피 해(海)의 남부 해변 동쪽에 있었습니다. 이 두 중심지들에서 문화와 생명질이 주변 지역들로 나갔고, 바로 즉시 모든 종족들을 되살렸습니다.

78:1.4 (868.6) 2. Pre-Sumerians and other Nodites. There were also present in Mesopotamia, near the mouth of the rivers, remnants of the ancient culture of the days of Dalamatia. With the passing millenniums, this group became thoroughly admixed with the Adamites to the north, but they never entirely lost their Nodite traditions. Various other Nodite groups that had settled in the Levant were, in general, absorbed by the later expanding violet race. 수메르 이전(以前) 사람들과 기타 놋-사람들. 달라마시아 시절의 고대 문화의 유물 역시 그 강들의 입구 근처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습니다. 수천 년이 흘러, 이 집단은 북쪽에 있는 아담-사람들과 완전히 섞였지만, 그들은 자기들 놋-사람의 전통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대된 보라색 종족이, 레반트에 정착한 다른 다양한 놋-사람 집단을 대체로 흡수했습니다.

78:1.5 (869.1) 3. The Andonites maintained five or six fairly representative settlements to the north and east of the Adamson headquarters. They were also scattered throughout Turkestan, while isolated islands of them persisted throughout Eurasia, especially in mountainous regions. These aborigines still held the northlands of the Eurasian continent, together with Iceland and Greenland, but they had long since been driven from the plains of Europe by the blue man and from the river valleys of farther Asia by the expanding yellow race. 안돈-사람들은 아담선 본부의 북동쪽에 어지간히 대표적인 정착지 대여섯을 유지했습니다. 그들 역시 투르키스탄 전체에 흩어졌고, 한편 그들 중 고립된 집단들이 유라시아 전체에, 특히 산악 지역에 살아남았습니다. 이 토착민들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와 함께, 여전히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 지방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들은 오래전에 청인들에 의해 유럽 평야에서, 팽창하는 황인들에 의해 더 멀리 아시아의 속한 강 유역에서 쫓겨났습니다.

78:1.6 (869.2) 4. The red man occupied the Americas, having been driven out of Asia over fifty thousand years before the arrival of Adam. 홍인(紅人)은 아담의 도착 이전(以前) 5만 년에 걸쳐서 아시아 밖으로 쫓겨나 아메리카들을 차지했습니다.

78:1.7 (869.3) 5. The yellow race. The Chinese peoples were well established in control of eastern Asia. Their most advanced settlements were situated to the northwest of modern China in regions bordering on Tibet. 황인(黃人). 중국 민족들은 아주 확고히 동(東)아시아를 장악했습니다. 가장 진보한 그들의 정착지들은 현대 중국 북서쪽, 티벳 접경 지역에 있었습니다.

78:1.8 (869.4) 6. The blue race. The blue men were scattered all over Europe, but their better centers of culture were situated in the then fertile valleys of the Mediterranean basin and in northwestern Europe. Neanderthal absorption had greatly retarded the culture of the blue man, but he was otherwise the most aggressive, adventurous, and exploratory of all the evolutionary peoples of Eurasia. 청인(靑人). 청인들은 유럽 전역에 흩어졌지만, 더 좋은 그들 문화의 중심지는 당시 지중해 분지(盆地)의 비옥한 계곡과 북서 유럽에 있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을 흡수하여 청인의 문화 성장이 방해되었지만 다른 점에서 청인은 유라시아 모든 진화 민족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대담하며, 탐험을 좋아했습니다.

78:1.9 (869.5) 7. Pre-Dravidian India. The complex mixture of races in India — embracing every race on earth, but especially the green, orange, and black — maintained a culture slightly above that of the outlying regions. 드라비다인(人) 이전(以前)의 인도. 지상의 모든 인종, 특히 녹색, 주황색, 흑색을 포함하는 인도의 복잡한 인종 혼합으로 변경 지역의 문화보다 조금 높은 문화를 유지했습니다.

78:1.10 (869.6) 8. The Sahara civilization. The superior elements of the indigo race had their most progressive settlements in what is now the great Sahara desert. This indigo-black group carried extensive strains of the submerged orange and green races.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활동 영역에 현재 거대한 사하라 사막 중 가장 진보적인 정착지들이 있었습니다. 이 남색-흑색 인종 일행은 숨겨진 주황(朱黃) 및 녹인(綠人)종의 혈통을 폭넓게 지녔습니다.

78:1.11 (869.7) 9. The Mediterranean basin. The most highly blended race outside of India occupied what is now the Mediterranean basin. Here blue men from the north and Saharans from the south met and mingled with Nodites and Adamites from the east. 지중해 분지(盆地). 인도 밖에서 가장 많이 혼합된 인종은 현재 지중해 분지를 차지했습니다. 북(北)에서 온 청인(淸人)들과 남(南)에서 온 사하라인(人)들이 여기에서 만났고, 동(東)에서 온 놋-사람들 및 아담-사람들과 섞였습니다.

78:1.12 (869.8) This was the picture of the world prior to the beginnings of the great expansions of the violet race, about twenty-five thousand years ago. The hope of future civilization lay in the second garden between the rivers of Mesopotamia. Here in southwestern Asia there existed the potential of a great civilization, the possibility of the spread to the world of the ideas and ideals which had been salvaged from the days of Dalamatia and the times of Eden. 이것이, 약 2만 5천 년 전(前), 보라 종족의 거대한 팽창이 시작되기 이전(以前)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미래 문명의 소망은 메소포타미아 강들 사이에 있는 둘째 동산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 남서(南西) 아시아에 거대한 문명의 잠재성, 즉 달라마시아 시절과 에덴의 시대로부터 지켜온 관념(觀念)들과 이상(理想)들을 세상에 전개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78:1.13 (869.9) Adam and Eve had left behind a limited but potent progeny, and the celestial observers on Urantia waited anxiously to find out how these descendants of the erring Material Son and Daughter would acquit themselves. 아담과 이브는 제한적이지만 강력한 혈통을 남겼고, 유란시아에 있는 천상의 관찰자들은 실수한 물질 아들과 딸의 이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알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습니다.

2. The Adamites in the Second Garden 둘째 동산의 아담-사람들

78:2.1 (869.10) For thousands of years the sons of Adam labored along the rivers of Mesopotamia, working out their irrigation and flood-control problems to the south, perfecting their defenses to the north, and attempting to preserve their traditions of the glory of the first Eden. 수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 강들을 따라 애쓰면서, 남쪽으로 관개(灌漑 물 댐)와 치수(治水 홍수 조절)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으로 방어를 개선하며, 첫째 에덴의 훌륭한 전통을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78:2.2 (869.11) The heroism displayed in the leadership of the second garden constitutes one of the amazing and inspiring epics of Urantia’s history. These splendid souls never wholly lost sight of the purpose of the Adamic mission, and therefore did they valiantly fight off the influences of the surrounding and inferior tribes while they willingly sent forth their choicest sons and daughters in a steady stream as emissaries to the races of earth. Sometimes this expansion was depleting to the home culture, but always these superior peoples would rehabilitate themselves. 둘째 동산의 지도력으로 드러난 영웅적 행위는 유란시아 역사 중 굉장히 가슴을 뛰게 하는 서사시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혼(魂)들은 아담 사명의 목적을 완전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위 열등한 부족들의 세력을 용감히 격퇴하는 동시에 그들은 기꺼이 정선(精選 골라 뽑음)한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밀사(密使비밀 메신저)로 지상의 종족들에게 꾸준히 연달아 파송했습니다. 종종 이런 팽창으로 본토 문화가 고갈되었지만, 이 우수한 사람들은 스스로 회복하곤 했습니다.

78:2.3 (870.1) The civilization, society, and cultural status of the Adamites were far above the general level of the evolutionary races of Urantia. Only among the old settlements of Van and Amadon and the Adamsonites was there a civilization in any way comparable. But the civilization of the second Eden was an artificial structure — it had not been evolved — and was therefore doomed to deteriorate until it reached a natural evolutionary level. 아담-사람들의 문명, 사회 및 문화적 상태는 유란시아 진화 종족의 일반적 수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반과 아마돈의 옛 정착지들과 아담선-사람들 사이에만 필적할 문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문명은 진화되지 않은 인위적 구조였기에, 자연적 진화 수준에 이르기까지 퇴보할 운명이었습니다.

78:2.4 (870.2) Adam left a great intellectual and spiritual culture behind him, but it was not advanced in mechanical appliances since every civilization is limited by available natural resources, inherent genius, and sufficient leisure to insure inventive fruition. The civilization of the violet race was predicated on the presence of Adam and on the traditions of the first Eden. After Adam’s death and as these traditions grew dim through the passing millenniums, the cultural level of the Adamites steadily deteriorated until it reached a state of reciprocal balance with the status of the surrounding peoples and the naturally evolving cultural capacities of the violet race. 아담은 자기 뒤에 위대한 지적·영적 문화를 남겼지만, 모든 문명은, 가용 천연자원, 천부적 재능 및 창의적 결실을 보증할 충분한 여가로, 제한되기 때문에, 그 문화의 기계장치는 진보되지 않았습니다. 보라 인종의 문명은 아담의 실존과 첫째 에덴의 전통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아담의 별세 후, 수천 년이 지나서 이런 전통이 희미해지자, 아담-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계속 퇴보하여, 주변 민족들의 상태와 보라 인종의 자연히 진화하는 문화적 능력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78:2.5 (870.3) But the Adamites were a real nation around 19,000 B.C., numbering four and a half million, and already they had poured forth millions of their progeny into the surrounding peoples. 그러나 아담-사람들은 BC 19,000년 경, 인구 450만의 실제 국가였으며, 그들은 이미 수백만의 자기 자녀들을 주변 민족들에게 내보냈습니다.

3. Early Expansions of the Adamites 아담-사람들의 초기 팽창

78:3.1 (870.4) The violet race retained the Edenic traditions of peacefulness for many millenniums, which explains their long delay in making territorial conquests. When they suffered from population pressure, instead of making war to secure more territory, they sent forth their excess inhabitants as teachers to the other races. The cultural effect of these earlier migrations was not enduring, but the absorption of the Adamite teachers, traders, and explorers was biologically invigorating to the surrounding peoples. 보라색 인종은 수천 년간 평화로운 에덴의 전통을 지속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영토 정복을 오래 지체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인구 압력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하는 대신에, 그들의 과잉(過剩) 거주자들을 다른 인종들에게 교사로 보냈습니다. 초기 이주의 이 문화적 효과가 지속하지 않았지만, 아담-사람들 교사들, 상인들과 탐험가들을 흡수하여 주변 민족들은 생물학적으로 활력을 얻었습니다.

78:3.2 (870.5) Some of the Adamites early journeyed westward to the valley of the Nile; others penetrated eastward into Asia, but these were a minority. The mass movement of the later days was extensively northward and thence westward. It was, in the main, a gradual but unremitting northward push, the greater number making their way north and then circling westward around the Caspian Sea into Europe. 얼마의 아담-사람들은 초기에 서쪽으로 나일강 유역까지 여행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동쪽으로 아시아를 통과했지만, 이들은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후일에 집단 이동이 광범위하게 북쪽으로 거기에서 서쪽으로 있었습니다. 주로 점차 그러나 끊임없이 북쪽으로 돌격하여, 다수가 북으로 나아간 후, 서쪽으로 카스피해(海) 주변을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78:3.3 (870.6) About twenty-five thousand years ago many of the purer elements of the Adamites were well on their northern trek. And as they penetrated northward, they became less and less Adamic until, by the times of their occupation of Turkestan, they had become thoroughly admixed with the other races, particularly the Nodites. Very few of the pure-line violet peoples ever penetrated far into Europe or Asia. 약 25,000년 전에, 순수한 천성을 지닌 여러 아담-사람들은 적절히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이 북쪽으로 들어감에 따라 그들은 아담의 천성이 점차 줄었으며, 그들이 투르키스탄을 차지하면서 그들은 철저히 다른 인종들, 특히 놋-사람들과 섞였습니다. 순수-혈통의 보라 민족들은 결코 멀리 유럽이나 아시아로 거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78:3.4 (870.7) From about 30,000 to 10,000 B.C. epoch-making racial mixtures were taking place throughout southwestern Asia. The highland inhabitants of Turkestan were a virile and vigorous people. To the northwest of India much of the culture of the days of Van persisted. Still to the north of these settlements the best of the early Andonites had been preserved. And both of these superior races of culture and character were absorbed by the northward-moving Adamites. This amalgamation led to the adoption of many new ideas; it facilitated the progress of civilization and greatly advanced all phases of art, science, and social culture. BC 약 30,000년에서 10,000년까지, 신기원(新紀元)을 이루는 종족 혼합이 남서 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투르키스탄 고지 거주민들은 씩씩하고 강건한 민족이었습니다. 인도의 북서지방에는 반 시절의 문화가 많이 지속했습니다. 이 정착지들의 훨씬 북쪽에는 초기 안돈-사람의 일류 문화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이동하는 아담-사람들이 우수한 문화와 특성이 있는 이 두 인종을 흡수했습니다. 이 융합으로 새로운 여러 관념이 채택되어 문명의 진보가 촉진했으며 모든 단계의 예술, 과학 및 사회적 문화가 크게 증진했습니다.

78:3.5 (871.1) As the period of the early Adamic migrations ended, about 15,000 B.C., there were already more descendants of Adam in Europe and central Asia than anywhere else in the world, even than in Mesopotamia. The European blue races had been largely infiltrated. The lands now called Russia and Turkestan were occupied throughout their southern stretches by a great reservoir of the Adamites mixed with Nodites, Andonites, and red and yellow Sangiks. Southern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fringe were occupied by a mixed race of Andonite and Sangik peoples — orange, green, and indigo — with a sprinkling of the Adamite stock. Asia Minor and the central-eastern European lands were held by tribes that were predominantly Andonite. BC 15,000년경 초기 아담 사람의 이주 시기가 끝나자, 세상의 어떤 곳, 심지어 메소포타미아보다,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더 많은 아담의 후손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유럽의 청인종들은 대부분 그들에게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놋-사람들, 안돈-사람들 및 홍인과 황인의 상긱 종족이 섞인 커다란 아담 사람의 저장 무리가, 지금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남쪽의 확장 지역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안돈-사람들과 상긱 민족 중 주황색, 녹색 및 남색의 혼합 인종은 소수의 아담 혈통과 함께 남부 유럽과 지중해 주변을 차지했습니다. 안돈 사람들이 주축이 된 부족들이 소아시아와 중앙-동부 유럽의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78:3.6 (871.2) A blended colored race, about this time greatly reinforced by arrivals from Mesopotamia, held forth in Egypt and prepared to take over the disappearing culture of the Euphrates valley. The black peoples were moving farther south in Africa and, like the red race, were virtually isolated.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 출신들로 아주 강화된, 혼합 유색 인종이 이집트에 있어서 유프라테스 지역의 사라지는 문화를 이어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흑색 민족들은 아프리카 남쪽으로 더 이동했고, 홍인종처럼 사실상 고립되었습니다.

78:3.7 (871.3) The Saharan civilization had been disrupted by drought and that of the Mediterranean basin by flood. The blue races had, as yet, failed to develop an advanced culture. The Andonites were still scattered over the Arctic and central Asian regions. The green and orange races had been exterminated as such. The indigo race was moving south in Africa, there to begin its slow but long-continued racial deterioration. 사하라 문명은 가뭄으로,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로 붕괴하였습니다. 청색 인종들은 아직 진보된 문화를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안돈-사람들은 여전히 북극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녹색과 주황색 인종은 그 자체로 몰살했습니다. 남색 인종은 아프리카 남쪽으로 이동했고, 더디지만 오래-계속된 인종적 퇴보를 시작했습니다.

78:3.8 (871.4) The peoples of India lay stagnant, with a civilization that was unprogressing; the yellow man was consolidating his holdings in central Asia; the brown man had not yet begun his civilization on the near-by islands of the Pacific. 인도의 민족들은 후퇴하는 문명과 함께 정체되었고, 황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자기 소유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갈색인은 태평양 인근 도서(島嶼)에서 자신의 문명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78:3.9 (871.5) These racial distributions, associated with extensive climatic changes, set the world stage for the inauguration of the Andite era of Urantia civilization. These early migrations extended over a period of ten thousand years, from 25,000 to 15,000 B.C. The later or Andite migrations extended from about 15,000 to 6000 B.C. 광범위한 기후 변화와 결합한, 이런 종족의 분포로, 유란시아 문명 중 안드-사람들의 시대가 개시될 세계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초기 이동은 BC 25,000에서 15,000년까지 1만 년의 기간에 걸쳐 연장되었습니다. 후일에 안드-사람들의 이주는 BC 15,000년에서 6,000년까지 연장되었습니다.

78:3.10 (871.6) It took so long for the earlier waves of Adamites to pass over Eurasia that their culture was largely lost in transit. Only the later Andites moved with sufficient speed to retain the Edenic culture at any great distance from Mesopotamia. 아담-사람들의 초기 물결이 유라시아를 통과하기에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대부분 이동 중에 손실되었습니다. 후기 안드-사람들만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먼 거리에서 에덴 문화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4. The Andites 안드-사람들

78:4.1 (871.7) The Andite races were the primary blends of the pure-line violet race and the Nodites plus the evolutionary peoples. In general, Andites should be thought of as having a far greater percentage of Adamic blood than the modern races. In the main, the term Andite is used to designate those peoples whose racial inheritance was from one-eighth to one-sixth violet. Modern Urantians, even the northern white races, contain much less than this percentage of the blood of Adam. 안드 종족들은 순계 보라 종족과 놋 사람들에 진화 민족을 더해 1차적으로 혼합되었습니다. 보통 안드-사람들은 현대 종족보다 아담의 피를 훨씬 더 큰 비율로 가지고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주로, 안드-사람들이라는 용어는 인종적 유전형질이 1/8에서 1/6이었던 보라색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현대 유란시아 사람들은 북쪽 백인종조차 이 비율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담고 있습니다.

78:4.2 (871.8) The earliest Andite peoples took origin in the regions adjacent to Mesopotamia more than twenty-five thousand years ago and consisted of a blend of the Adamites and Nodites. The second garden was surrounded by concentric circles of diminishing violet blood, and it was on the periphery of this racial melting pot that the Andite race was born. Later on, when the migrating Adamites and Nodites entered the then fertile regions of Turkestan, they soon blended with the superior inhabitants, and the resultant race mixture extended the Andite type northward. 가장 초기의 안드-사람들은 25,000년 전 훨씬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인근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의 혼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둘째 동산은 줄어드는 보라 피의 동심원으로 둘러싸였고, 이 인종적 도가니 주변에서 안드-사람들이 탄생했습니다. 나중에 이주하는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이 당시 투르키스탄의 비옥한 지역에 들어가자, 그들은 바로 우수한 거주민들과 혼합되었고, 그 결과 혼혈이 북쪽 안드-사람 유형으로 확장되었습니다.

78:4.3 (872.1) The Andites were the best all-round human stock to appear on Urantia since the days of the pure-line violet peoples. They embraced most of the highest types of the surviving remnants of the Adamite and Nodite races and, later, some of the best strains of the yellow, blue, and green men. 안드-사람들은 순계 보라 사람들 시절 이후 유란시아에 나타난 가장 다방면에 걸친 인간 혈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 인종 중 최고 유형의 살아남은 나머지 대부분과 나중에 황인, 청인 및 녹인 중 최고의 일부 종족을 포함했습니다.

78:4.4 (872.2) These early Andites were not Aryan; they were pre-Aryan. They were not white; they were pre-white. They were neither an Occidental nor an Oriental people. But it is Andite inheritance that gives to the polyglot mixture of the so-called white races that generalized homogeneity which has been called Caucasoid. 이 초기 안드-사람들은 아리아인(人)이 아니라 아리아인(人) 이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인들이 아니라 백인들 이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사람도 아니고 동양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사람의 유전성이 소위 백인종의 다국적 혼혈인에게 코카서스 인종이라 불리는 일반화된 동종성을 줍니다.

78:4.5 (872.3) The purer strains of the violet race had retained the Adamic tradition of peace-seeking, which explains why the earlier race movements had been more in the nature of peaceful migrations. But as the Adamites united with the Nodite stocks, who were by this time a belligerent race, their Andite descendants became, for their day and age, the most skillful and sagacious militarists ever to live on Urantia. Thenceforth the movements of the Mesopotamians grew increasingly military in character and became more akin to actual conquests. 더 순수한 보라 인종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유지했는데, 이것이 초기 인종 이동이 훨씬 평화적인 이주 상태에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담-사람들이, 이 무렵 호전적 인종이었던 놋-사람 혈통과 연합하게 되자, 그들 안드-사람 후손들은 그 시대에 유란시아에서 살았던 가장 능숙하고 기민한 군사전략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의 이동은 점차 군사적이 되었고 현실적으로 정복에 가까웠습니다.

78:4.6 (872.4) These Andites were adventurous; they had roving dispositions. An increase of either Sangik or Andonite stock tended to stabilize them. But even so, their later descendants never stopped until they had circumnavigated the globe and discovered the last remote continent. 이 안드-사람들은 모험을 즐겼고, 방랑하는 경향을 지녔습니다. 상긱이나 안돈 혈통의 증가로 그들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그들의 후대 자손들은 지구를 배로 일주했으며 가장 먼 대륙을 발견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5. The Andite Migrations 안드-사람들의 이주

78:5.1 (872.5) For twenty thousand years the culture of the second garden persisted, but it experienced a steady decline until about 15,000 B.C., when the regeneration of the Sethite priesthood and the leadership of Amosad inaugurated a brilliant era. The massive waves of civilization which later spread over Eurasia immediately followed the great renaissance of the Garden consequent upon the extensive union of the Adamites with the surrounding mixed Nodites to form the Andites. 20,000년 동안 둘째 동산의 문화가 지속했지만, 15,000년 무렵까지 꾸준히 쇠퇴를 겪었으며, 그때 셋 성직(聖職)의 재건과 아모사드의 지도력으로 찬란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문명의 커다란 물결이 위대한 동산의 부흥을 즉시 뒤따랐으며 그 결과 아담-사람들이 주위의 잡다한 놋-사람들과 널리 연합하여 안드-사람들을 형성했습니다.

78:5.2 (872.6) These Andites inaugurated new advances throughout Eurasia and North Africa. From Mesopotamia through Sinkiang the Andite culture was dominant, and the steady migration toward Europe was continuously offset by new arrivals from Mesopotamia. But it is hardly correct to speak of the Andites as a race in Mesopotamia proper until near the beginning of the terminal migrations of the mixed descendants of Adam. By this time even the races in the second garden had become so blended that they could no longer be considered Adamites. 이 안드-사람들은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새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장을 통해 안드-사람 문화가 매우 세력을 떨쳤으며, 유럽을 향한 끊임없는 이주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새로 도착한 사람들로 계속 메워졌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혼합 후손들이 최종적으로 이주를 시작할 무렵까지, 안드-사람들을 진정한 메소포타미아 종족으로 일컫는 것은 도저히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렵 둘째 동산의 인종들도 너무 섞여서 더는 그들을 아담-사람들로 간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78:5.3 (872.7) The civilization of Turkestan was constantly being revived and refreshed by the newcomers from Mesopotamia, especially by the later Andite cavalrymen. The so-called Aryan mother tongue was in process of formation in the highlands of Turkestan; it was a blend of the Andonic dialect of that region with the language of the Adamsonites and later Andites. Many modern languages are derived from this early speech of these central Asian tribes who conquered Europe, India, and the upper stretches of the Mesopotamian plains. This ancient language gave the Occidental tongues all of that similarity which is called Aryan.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새로 온 사람들로, 특히 후에 안드 기병들로 끊임없이 소생되어 새로워졌습니다. 소위 아리아인(人)의 모국어가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형성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안돈 방언이 아담선-사람들 및 후대 안드-사람들의 언어가 혼합된 것이었습니다. 여러 현대 언어가 유럽·인도 및 위쪽으로 뻗은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정복한 이 중앙아시아 부족들의 이 초기 언어에서 생겼습니다. 이 고대 언어가 아리아어(語)라 일컫는 유사한 모든 점을 서양 언어에 제공했습니다.

78:5.4 (872.8) By 12,000 B.C. three quarters of the Andite stock of the world was resident in northern and eastern Europe, and when the later and final exodus from Mesopotamia took place, sixty-five per cent of these last waves of emigration entered Europe. BC 12,000년에 세상에 있는 안드-사람들의 혈통 3/4은 유럽의 북부와 동부에 거주했으며, 나중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종적 집단 대이동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주 물결의 65%가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78:5.5 (873.1) The Andites not only migrated to Europe but to northern China and India, while many groups penetrated to the ends of the earth as missionaries, teachers, and traders. They contributed considerably to the northern groups of the Saharan Sangik peoples. But only a few teachers and traders ever penetrated farther south in Africa than the headwaters of the Nile. Later on, mixed Andites and Egyptians followed down both the east and west coasts of Africa well below the equator, but they did not reach Madagascar. 안드-사람들은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으며, 한편 여러 집단이 선교사들, 교사들 및 상인들로서 땅끝까지 퍼졌습니다. 그들은 사하라의 상긱 민족들에 속한 북부 집단들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소수의 교사와 상인들은 나일강 상류보다 아프리카 훨씬 남쪽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혼합된 안드-사람들과 이집트인들이 적도 바로 아래 아프리카 동부 및 서부 해안 아래로 따라갔지만, 그들은 마다가스카르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78:5.6 (873.2) These Andites were the so-called Dravidian and later Aryan conquerors of India; and their presence in central Asia greatly upstepped the ancestors of the Turanians. Many of this race journeyed to China by way of both Sinkiang and Tibet and added desirable qualities to the later Chinese stocks. From time to time small groups made their way into Japan, Formosa, the East Indies, and southern China, though very few entered southern China by the coastal route. 이 안드-사람들은 소위 드라비다인(人)이었고 나중에 인도를 정복한 아리아인(人)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그들은 우랄알타이어족의 조상들을 크게 증진했습니다. 대부분의 이 종족은 신장과 티벳 양쪽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고 후일 중국 혈통에 매력적인 자질을 보탰습니다. 때로 작은 집단이 일본, 대만, 동인도 및 중국 남부로 들어갔지만 거의 아무도 해안 경로로 중국 남부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78:5.7 (873.3) One hundred and thirty-two of this race, embarking in a fleet of small boats from Japan, eventually reached South America and by intermarriage with the natives of the Andes established the ancestry of the later rulers of the Incas. They crossed the Pacific by easy stages, tarrying on the many islands they found along the way. The islands of the Polynesian group were both more numerous and larger then than now, and these Andite sailors, together with some who followed them, biologically modified the native groups in transit. Many flourishing centers of civilization grew up on these now submerged lands as a result of Andite penetration. Easter Island was long a religious and administrative center of one of these lost groups. But of the Andites who navigated the Pacific of long ago none but the one hundred and thirty-two ever reached the mainland of the Americas. 이 종족 중 132명이 작은 배로 선단을 이루어 일본에서 출항하여, 결국 남아메리카에 이르렀고 안데스산맥의 원주민들과 결혼하여 후대 잉카족 통치자들의 계보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도중에 발견한 여러 섬에 머무는 쉬운 단계를 거쳐서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폴리네시아 집단 군도(群島)는 지금보다 더 많고 컸으며, 이 안드-사람 항해자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일부와 함께, 이동 중에 원주민 집단들을 생물학적으로 얼마간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침수된 이 지역에서, 안드-사람들이 침투한 결과로, 번성한 여러 문명의 중심지들이 자랐습니다. 이스터섬은, 사라진 이 집단 중 하나로써, 오랫동안 종교적인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먼 옛날 태평양을 항해했던 안드-사람들 중 오직 132명만 남·북·중앙 아메리카의 본토에 이르렀습니다.

78:5.8 (873.4) The migratory conquests of the Andites continued on down to their final dispersions, from 8000 to 6000 B.C. As they poured out of Mesopotamia, they continuously depleted the biologic reserves of their homelands while markedly strengthening the surrounding peoples. And to every nation to which they journeyed, they contributed humor, art, adventure, music, and manufacture. They were skillful domesticators of animals and expert agriculturists. For the time being, at least, their presence usually improved the religious beliefs and moral practices of the older races. And so the culture of Mesopotamia quietly spread out over Europe, India, China, northern Africa, and the Pacific Islands. 안드-사람들의 이주 정복은, 그들이 최종적으로 분산되는, BC 8,000년에서 BC 6,00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자, 그들은 자기 고국의 생물학적 보존력을 계속 소모하면서, 주변 민족들을 현저히 강화했습니다. 그들이 여행한 모든 나라에 그들은 유머, 예술, 모험, 음악 및 제조업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숙련된 동물 조련사들이었고 농업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잠시 그들이 있는 동안 보통 옛 종족들의 종교적 믿음과 도덕적 풍습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유럽, 인도, 중국, 아프리카 북부 및 태평양 제도(諸島) 전역에 조용히 퍼졌습니다.

6. The Last Andite Dispersions 마지막 안드-사람들의 분산

78:6.1 (873.5) The last three waves of Andites poured out of Mesopotamia between 8000 and 6000 B.C. These three great waves of culture were forced out of Mesopotamia by the pressure of the hill tribes to the east and the harassment of the plainsmen of the west. The inhabitants of the Euphrates valley and adjacent territory went forth in their final exodus in several directions: 안드-사람들의 세 번의 마지막 물결이 BC 8,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세 번의 거대한 문화의 물결은 동쪽 고지(高地) 부족들의 압력과 서쪽 평원 주민들의 시달림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계곡과 인접 지역의 거주민들은 마지막 집단으로 대-이동할 때 여러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78:6.2 (873.6) Sixty-five per cent entered Europe by the Caspian Sea route to conquer and amalgamate with the newly appearing white races — the blend of the blue men and the earlier Andites. 65%는 카스피해(海) 경로로 유럽으로 들어가, 청인들과 초기 안드-사람들이 혼합된, 새로 나타난 백인종들을 정복하고 그들과 섞였습니다.

78:6.3 (873.7) Ten per cent, including a large group of the Sethite priests, moved eastward through the Elamite highlands to the Iranian plateau and Turkestan. Many of their descendants were later driven into India with their Aryan brethren from the regions to the north. 큰 무리의 셋 성직자들을 포함한 10%는 동쪽으로 엘람 고지대를 거쳐 이란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 후손 중 대부분은 그 지역에서 북쪽으로 자신들의 아리아족(族) 형제들과 함께 나중에 인도로 쫓겨났습니다.

78:6.4 (874.1) Ten per cent of the Mesopotamians turned eastward in their northern trek, entering Sinkiang, where they blended with the Andite-yellow inhabitants. The majority of the able offspring of this racial union later entered China and contributed much to the immediate improvement of the northern division of the yellow race.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의 10%가 북쪽 여행 중 동쪽으로 돌아 신장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안드사람들-황색 거주민들과 섞었습니다. 이 종족 연합으로 유능한 자손 대부분은 나중에 중국으로 들어가, 북쪽 지역의 황인종이 즉각적으로 진보하도록 크게 공헌했습니다.

78:6.5 (874.2) Ten per cent of these fleeing Andites made their way across Arabia and entered Egypt. 달아나는 안드-사람들 중 10%는 아라비아를 건너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78:6.6 (874.3) Five per cent of the Andites, the very superior culture of the coastal district about the mouths of the Tigris and Euphrates who had kept themselves free from intermarriage with the inferior neighboring tribesmen, refused to leave their homes. This group represented the survival of many superior Nodite and Adamite strains.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입구 부근 해안 지역에서, 열등한 이웃 부족들과 결혼하지 않고 아주 우수한 문화를 스스로 지켰던, 5%의 안드-사람들은 고향 떠나기를 거절했습니다. 이 무리는 우수한 여러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 혈통에 속한 생존자들이었습니다.

78:6.7 (874.4) The Andites had almost entirely evacuated this region by 6000 B.C., though their descendants, largely mixed with the surrounding Sangik races and the Andonites of Asia Minor, were there to give battle to the northern and eastern invaders at a much later date. 주변의 상긱 종족들과 소아시아의 안돈-사람들과 충분히 섞인 안드-사람 자손들은 거기에서 훨씬 후일에 북쪽과 동쪽의 침략자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안드-사람들은 이 지역을 BC 6,000까지 거의 완전히 비웠습니다.

78:6.8 (874.5) The cultural age of the second garden was terminated by the increasing infiltration of the surrounding inferior stocks. Civilization moved westward to the Nile and the Mediterranean islands, where it continued to thrive and advance long after its fountainhead in Mesopotamia had deteriorated. And this unchecked influx of inferior peoples prepared the way for the later conquest of all Mesopotamia by the northern barbarians who drove out the residual strains of ability. Even in later years the cultured residue still resented the presence of these ignorant and uncouth invaders. 둘째 동산의 문화 시대는, 주변 열등한 인종의 침투가 증가하여, 끝났습니다. 문명은 서쪽 나일강과 지중해 섬들로 이동하여 거기에서 문명은 계속 번성하고 진보했으며, 오랜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근원이 퇴락했습니다. 그리고 저지되지 않은 이 열등한 민족들의 유입으로, 유능한 나머지 혈통을 몰아냈던 북쪽의 야만인들이 나중에 모든 메소포타미아를 정복되는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후대까지도 문화를 지닌 나머지는 무지하고 난폭한 이 침략자들의 존재를 여전히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7. The Floods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78:7.1 (874.6) The river dwellers were accustomed to rivers overflowing their banks at certain seasons; these periodic floods were annual events in their lives. But new perils threatened the valley of Mesopotamia as a result of progressive geologic changes to the north. 강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특정 계절마다 자신들의 제방(堤防)을 범람하는 강에 익숙했습니다. 이런 주기적 홍수는 그들의 생활에서 연례행사였습니다. 그러나 북쪽에 점진적 지질 변화의 결과로 메소포타미아 계곡은 새로운 위험에 처했습니다.

78:7.2 (874.7) For thousands of years after the submergence of the first Eden the mountains about the eastern coast of the Mediterranean and those to the northwest and northeast of Mesopotamia continued to rise. This elevation of the highlands was greatly accelerated about 5000 B.C., and this, together with greatly increased snowfall on the northern mountains, caused unprecedented floods each spring throughout the Euphrates valley. These spring floods grew increasingly worse so that eventually the inhabitants of the river regions were driven to the eastern highlands. For almost a thousand years scores of cities were practically deserted because of these extensive deluges. 첫째 에덴의 침몰 이후 수천 년 동안, 지중해 동쪽 해안 부근의 산맥과 메소포타미아의 북서쪽 및 북동쪽의 산맥은 계속 솟아올랐습니다. 고지의 이런 치솟음은 BC 5,000년 경에 매우 가속되었고, 북쪽 산맥에 엄청나게 강설량이 늘어남과 함께 이것이 유프라테스 계곡 전체에 봄마다 전례 없는 홍수를 일으켰습니다. 봄철의 이 홍수가 더욱 심해져서 결국 강 지역의 거주민들은 동쪽 고지로 쫓겨났습니다. 이런 광대한 대홍수 때문에, 거의 1천 년 동안 도시 수십 개가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78:7.3 (874.8) Almost five thousand years later, as the Hebrew priests in Babylonian captivity sought to trace the Jewish people back to Adam, they found great difficulty in piecing the story together; and it occurred to one of them to abandon the effort, to let the whole world drown in its wickedness at the time of Noah’s flood, and thus to be in a better position to trace Abraham right back to one of the three surviving sons of Noah. 거의 5,000년이 지나서, 바빌론에 사로잡혀 있던 히브리 사제들이 유대민족을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출처를 조사했을 때, 그들은 그 이야기를 서로 이어 만드는 일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하나가 그 노력을 포기하고 노아 홍수 시대의 사악함으로 전 세계가 물에 익사하여서, 노아의 살아남은 세 아들 중 하나에게 바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의 출처를 밝히는 훨씬 나은 처지에 있으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78:7.4 (875.1) The traditions of a time when water covered the whole of the earth’s surface are universal. Many races harbor the story of a world-wide flood some time during past ages. The Biblical story of Noah, the ark, and the flood is an invention of the Hebrew priesthood during the Babylonian captivity. There has never been a universal flood since life was established on Urantia. The only time the surface of the earth was completely covered by water was during those Archeozoic ages before the land had begun to appear. 물이 전(全) 지구 표면을 덮었던 시대의 전통은 보편적입니다. 많은 종족이 과거 시대 한때의 세계적 홍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노아, 방주와 홍수에 대한 성경 이야기는 바빌론에 사로잡혔던 히브리 사제들의 창작(創作 지어서 만듦)입니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된 이후 세계적 홍수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였던 유일한 때는, 육지가 출현하기 시작 전(前)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습니다.

78:7.5 (875.2) But Noah really lived; he was a wine maker of Aram, a river settlement near Erech. He kept a written record of the days of the river’s rise from year to year. He brought much ridicule upon himself by going up and down the river valley advocating that all houses be built of wood, boat fashion, and that the family animals be put on board each night as the flood season approached. He would go to the neighboring river settlements every year and warn them that in so many days the floods would come. Finally a year came in which the annual floods were greatly augmented by unusually heavy rainfall so that the sudden rise of the waters wiped out the entire village; only Noah and his immediate family were saved in their houseboat. 그러나 노아는 정말로 살았습니다. 그는, 에렉 근처 강 정착지, 아람의 포도주 제조자였습니다. 그는 해마다 강이 상승하는 때의 문서기록을 보관했습니다. 그는 홍수철이 다가오면 모든 집은 배 모양의 나무로 만들고, 밤마다 가족 동물들은 배 안에 두라고 주장하면서, 강 유역을 오르내려서 조롱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매년 이웃 강 정착지들로 가서 그렇게 여러 날 후에 홍수가 오리라고 그들에게 경고하곤 했습니다. 결국 연례 홍수가 대단한 장대비로 매우 증가하는 한 해가 왔으며 물이 갑자기 솟아올라 마을 전체를 파괴했습니다.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만 집배로 구조되었습니다.

78:7.6 (875.3) These floods completed the disruption of Andite civilization. With the ending of this period of deluge, the second garden was no more. Only in the south and among the Sumerians did any trace of the former glory remain. 이 홍수로 안드-사람들 문명이 완전히 붕괴하였습니다. 대홍수의 이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남쪽과 수메르인(人)들 사이에서만 이전 영광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78:7.7 (875.4) The remnants of this, one of the oldest civilizations, are to be found in these regions of Mesopotamia and to the northeast and northwest. But still older vestiges of the days of Dalamatia exist under the waters of the Persian Gulf, and the first Eden lies submerged under the eastern end of the Mediterranean Sea. 가장 오래된 문명 중 이 하나의 자취가 메소포타미아의 이 지역과 북동쪽 및 북서쪽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훨씬 오래된 달라마시아 시절의 흔적은 페르시아만(灣)의 바다 밑에 있으며, 첫째 동산은 지중해의 동쪽 끝 밑 수중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8. The Sumerians — Last of the Andites 수메르(人)들-마지막 안드-사람들

78:8.1 (875.5) When the last Andite dispersion broke the biologic backbone of Mesopotamian civilization, a small minority of this superior race remained in their homeland near the mouths of the rivers. These were the Sumerians, and by 6000 B.C. they had become largely Andite in extraction, though their culture was more exclusively Nodite in character, and they clung to the ancient traditions of Dalamatia. Nonetheless, these Sumerians of the coastal regions were the last of the Andites in Mesopotamia. But the races of Mesopotamia were already thoroughly blended by this late date, as is evidenced by the skull types found in the graves of this era. 마지막 안드-사람들의 분산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생물학적 대들보가 무너지자, 이 우수한 종족의 작은 소수가 강들 어귀 근처 고향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수메르인(人)들이었으며, BC 6,000년에 그들의 혈통은 대개 안드-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놋-사람들의 문화에 가까웠고, 달라마시아의 고대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그래도 해안 지역의 이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마지막 안드-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개골 유형으로 입증되었듯이, 메소포타미아의 종족들은 이 후대에 이미 철저히 혼합되었습니다.

78:8.2 (875.6) It was during the floodtimes that Susa so greatly prospered. The first and lower city was inundated so that the second or higher town succeeded the lower as the headquarters for the peculiar artcrafts of that day. With the later diminution of these floods, Ur became the center of the pottery industry. About seven thousand years ago Ur was on the Persian Gulf, the river deposits having since built up the land to its present limits. These settlements suffered less from the floods because of better controlling works and the widening mouths of the rivers. 홍수 기간에 수사는 크게 번영했습니다. 낮았던 첫 도시는 침수되어서 높은 둘째 도시가 당시 특유한 예술 공예의 본부로써 낮은 도시를 계승했습니다. 나중에 이런 홍수가 감소하면서, 우르가 도자기 공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약 7,000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만(灣)에 있었는데, 이후에 강의 퇴적물이 현재의 경계까지 땅을 쌓아 올렸습니다. 이 정착지들은 홍수의 피해가 적었는데 개선된 조정 업무와 강들의 입구가 넓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8:8.3 (875.7) The peaceful grain growers of the Euphrates and Tigris valleys had long been harassed by the raids of the barbarians of Turkestan and the Iranian plateau. But now a concerted invasion of the Euphrates valley was brought about by the increasing drought of the highland pastures. And this invasion was all the more serious because these surrounding herdsmen and hunters possessed large numbers of tamed horses. It was the possession of horses which gave them a tremendous military advantage over their rich neighbors to the south. In a short time they overran all Mesopotamia, driving forth the last waves of culture which spread out over all of Europe, western Asia, and northern Africa.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유역의 평화로운 곡식 재배자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있던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오랫동안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산악지대의 늘어난 가뭄으로 이제 유프라테스 유역이 일제히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침입은 훨씬 더 심각했는데, 이런 주변의 목축업자들과 사냥꾼들이 길들인 말들을 여러 마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말의 소유로 그들은, 남쪽의 부유한 이웃들보다, 엄청나게 군사적으로 우세했습니다. 단시간에 그들은, 유럽·서 아시아·북 아프리카 전역에 퍼진 문화의 마지막 물결을 밖으로 몰아내며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침략했습니다.

78:8.4 (876.1) These conquerors of Mesopotamia carried in their ranks many of the better Andite strains of the mixed northern races of Turkestan, including some of the Adamson stock. These less advanced but more vigorous tribes from the north quickly and willingly assimilated the residue of the civilization of Mesopotamia and presently developed into those mixed peoples found in the Euphrates valley at the beginning of historic annals. They quickly revived many phases of the passing civilization of Mesopotamia, adopting the arts of the valley tribes and much of the culture of the Sumerians. They even sought to build a third tower of Babel and later adopted the term as their national name. 메소포타미아의 이 정복자들은 병사들을 통해, 얼마의 아담선 혈통을 포함하여 투르키스탄의 혼합된 북쪽 종족 중 여러 개선된 안드-사람들 혈통을 전달했습니다. 덜 진보했지만, 더 왕성했던 북쪽 출신의 이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나머지를 빠르게 기꺼이 흡수했고, 역사적 기록의 초기에 유프라테스 계곡에서 발견된 이 혼합 민족들로 즉시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강 유역 부족들의 예술과 수메르인(人)들 문화의 대부분을 받아들여서, 메소포타미아의 소실되는 여러 단계의 문명을 급히 되살렸습니다. 그들은 셋째 바벨탑까지 건축하려 했고, 나중에 그 용어를 자신들의 국가 이름으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78:8.5 (876.2) When these barbarian cavalrymen from the northeast overran the whole Euphrates valley, they did not conquer the remnants of the Andites who dwelt about the mouth of the river on the Persian Gulf. These Sumerians were able to defend themselves because of superior intelligence, better weapons, and their extensive system of military canals, which were an adjunct to their irrigation scheme of interconnecting pools. They were a united people because they had a uniform group religion. They were thus able to maintain their racial and national integrity long after their neighbors to the northwest were broken up into isolated city-states. No one of these city groups was able to overcome the united Sumerians. 북동쪽에서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유역 전체를 침략했을 때, 그들이 페르시아만(灣) 강 유역에 거주하던 나머지 안드-사람들은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수메르인(人)들은 우수한 지성, 개선된 무기 및 광범위한 군사적 운하(運河) 체계 때문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었으며, 그 운하들은 물웅덩이들이 서로 연결된 관개(灌漑)구조에 덧붙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집단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결집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서쪽의 이웃들이 고립된 도시-국가로 분산된 오랜 후까지, 자신들의 종족과 국가적 본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집단 도시 중 누구도 결집한 수메르인(人)들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78:8.6 (876.3) And the invaders from the north soon learned to trust and prize these peace-loving Sumerians as able teachers and administrators. They were greatly respected and sought after as teachers of art and industry, as directors of commerce, and as civil rulers by all peoples to the north and from Egypt in the west to India in the east. 그리고 북쪽의 침입자들은 곧 이 평화를 사랑하는 수메르인들을 유능한 교사들이며 경영자들로서 신뢰하고 존중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서쪽의 이집트로부터 동쪽의 인도까지 모든 민족이 그들을 예술과 산업의 교사들로, 상업의 관리자들로, 시민 통치자들로서 매우 존경하고 추구했습니다.

78:8.7 (876.4) After the breakup of the early Sumerian confederation the later city-states were ruled by the apostate descendants of the Sethite priests. Only when these priests made conquests of the neighboring cities did they call themselves kings. The later city kings failed to form powerful confederations before the days of Sargon because of deity jealousy. Each city believed its municipal god to be superior to all other gods, and therefore they refused to subordinate themselves to a common leader. 초기 수메르인(人) 연방이 해체된 후, 신앙을 버린, 셋 성직자 후손들이 후기 도시-국가들을 다스렸습니다. 이 성직자들이 이웃 도시들을 정복했을 때에만 그들은 왕이라 자처했습니다. 사르곤 시절 이전에는 신을 선망(羨望)했기 때문에, 후대 도시 왕들은 강력한 연방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각 도시는 자기 도시의 신이 다른 모든 신보다 높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동 지도자를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78:8.8 (876.5) The end of this long period of the weak rule of the city priests was terminated by Sargon, the priest of Kish, who proclaimed himself king and started out on the conquest of the whole of Mesopotamia and adjoining lands. And for the time, this ended the city-states, priest-ruled and priest-ridden, each city having its own municipal god and its own ceremonial practices.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했던 키쉬의 성직자 사르곤이 메소포타미아와 인접 지대 전역의 정복을 시작했고, 오랜 기간 연약한 도시 성직자들의 통치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각 도시 자체의 신과 자체의 의례를 행하던 도시-국가들의 성직자-지배와 횡포는 끝났습니다.

78:8.9 (876.6) After the breakup of this Kish confederation there ensued a long period of constant warfare between these valley cities for supremacy. And the rulership variously shifted between Sumer, Akkad, Kish, Erech, Ur, and Susa. 이런 키쉬 연방의 해체 후, 이 계곡 도시들 사이에 주도권을 위해 전쟁이 오랜 기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통치권은 수메르, 아카드, 키쉬, 에렉, 우르 및 수사 사이에서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78:8.10 (876.7) About 2500 B.C. the Sumerians suffered severe reverses at the hands of the northern Suites and Guites. Lagash, the Sumerian capital built on flood mounds, fell. Erech held out for thirty years after the fall of Akkad. By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rule of Hammurabi the Sumerians had become absorbed into the ranks of the northern Semites, and the Mesopotamian Andites passed from the pages of history. BC 2,500년경에, 수메르인들은 북쪽 수-사람들과 구-사람들에 의해 극심한 패배를 겪었습니다. 홍수 제방에 세워진, 수메르인의 수도 라가쉬가 함락되었습니다. 에렉은 아카드의 몰락 후 30년간 지속했습니다. 함무라비 통치가 세워질 무렵, 수메르인들은 북쪽 셈-사람들 계열에 흡수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안드-사람들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78:8.11 (877.1) From 2500 to 2000 B.C. the nomads were on a rampage from the Atlantic to the Pacific. The Nerites constituted the final eruption of the Caspian group of the Mesopotamian descendants of the blended Andonite and Andite races. What the barbarians failed to do to effect the ruination of Mesopotamia, subsequent climatic changes succeeded in accomplishing. BC 2,500년에서 2,000년까지, 유목민들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날뛰었습니다. 네르-사람들은 혼합된, 안돈-사람들과 안드-사람들 종족의 메소포타미아 후손에 속한 카스피 집단의 최종적 분출로 이루어졌습니다. 야만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파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을, 이후의 기후 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78:8.12 (877.2) And this is the story of the violet race after the days of Adam and of the fate of their homeland between the Tigris and Euphrates. Their ancient civilization finally fell due to the emigration of superior peoples and the immigration of their inferior neighbors. But long before the barbarian cavalrymen conquered the valley, much of the Garden culture had spread to Asia, Africa, and Europe, there to produce the ferments which have resulted in the twentieth-century civilization of Urantia. 이것이 아담 시절 이후 보라 종족과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 그들의 고국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타국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웃들의 이입으로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미개한 기병들이 계곡을 정복하기 오래전에, 대부분의 동산 문화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에서 20세기 유란시아 문명으로 끝난 효소를 만들었습니다.

78:8.13 (877.3) [Presented by an Archangel of Nebadon.] [네바돈의 천사장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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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79 Andite Expansion in the Orient 동양에서 안드인(人) 확장

Paper 79

Andite Expansion in the Orient 동양에서 안드인(人) 확장

1. The Andites of Turkestan 투르키스탄의 안드-사람들
2. The Andite Conquest of India 안드-사람들의 인도 정복
3. Dravidian India 드라비다(人)의 인도 정복
4. The Aryan Invasion of India 아리아인(人)의 인도 침입
5. Red Man and Yellow Man 홍(紅)인종과 황(黃)인종
6. Dawn of Chinese Civilization 중국 문명의 여명(黎明)
7. The Andites Enter China 안드-사람들이 중국에 들어가다
8. Later Chinese Civilization 후대의 중국 문명

79:0.1 (878.1) ASIA is the homeland of the human race. It was on a southern peninsula of this continent that Andon and Fonta were born; in the highlands of what is now Afghanistan, their descendant Badonan founded a primitive center of culture that persisted for over one-half million years. Here at this eastern focus of the human race the Sangik peoples differentiated from the Andonic stock, and Asia was their first home, their first hunting ground, their first battlefield. Southwestern Asia witnessed the successive civilizations of Dalamatians, Nodites, Adamites, and Andites, and from these regions the potentials of modern civilization spread to the world. 아시아는 인류의 고국(故國)입니다. 안돈과 폰타는 이 대륙의 남쪽 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고지에서 그들의 후손 바도난이 원시 문화의 중심지를 세웠고, 50만 년 이상 유지되었습니다. 여기, 인류의 이 동쪽 중심지에서, 상긱 민족들은 안돈 혈통에서 분화했고, 아시아는 그들의 최초 고향, 최초 사냥터, 최초 전쟁터였습니다. 남서 아시아는 달라마시아-사람들, 놋-사람들, 아담-사람들 및 안드-사람들로 연속된 문명을 목격했으며, 이 지역에서 현대 문명의 잠재성이 세상으로 퍼졌습니다.

1. The Andites of Turkestan 투르키스탄의 안드-사람들

79:1.1 (878.2) For over twenty-five thousand years, on down to nearly 2000 B.C., the heart of Eurasia was predominantly, though diminishingly, Andite. In the lowlands of Turkestan the Andites made the westward turning around the inland lakes into Europe, while from the highlands of this region they infiltrated eastward. Eastern Turkestan (Sinkiang) and, to a lesser extent, Tibet were the ancient gateways through which these peoples of Mesopotamia penetrated the mountains to the northern lands of the yellow men. The Andite infiltration of India proceeded from the Turkestan highlands into the Punjab and from the Iranian grazing lands through Baluchistan. These earlier migrations were in no sense conquests; they were, rather, the continual drifting of the Andite tribes into western India and China. 거의 BC 2,000년까지, 25,000년간 이상 유라시아의 중심에는 점점 감소했어도 안드-사람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투르키스탄 저지에서 안드-사람들은 서쪽으로 내륙의 호수들을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간 반면에, 이 지역의 고지에서 그들은 동쪽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동(東) 투르키스탄(신장)과 조금 적게 티벳이 고대의 출입구였으며, 이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의 이 민족들은 황인들의 북부 지역으로 산맥을 관통했습니다. 안드-사람들의 인도 침투는 투르키스탄 고지에서 펀잡으로, 이란의 목초지에서 발루치스탄을 통과해서 갔습니다. 이런 초기 이주는 결코 정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부 인도와 중국으로 계속 흘러 들어간 안드 부족들이었습니다.

79:1.2 (878.3) For almost fifteen thousand years centers of mixed Andite culture persisted in the basin of the Tarim River in Sinkiang and to the south in the highland regions of Tibet, where the Andites and Andonites had extensively mingled. The Tarim valley was the easternmost outpost of the true Andite culture. Here they built their settlements and entered into trade relations with the progressive Chinese to the east and with the Andonites to the north. In those days the Tarim region was a fertile land; the rainfall was plentiful. To the east the Gobi was an open grassland where the herders were gradually turning to agriculture. This civilization perished when the rain winds shifted to the southeast, but in its day it rivaled Mesopotamia itself. 거의 15,000년간 혼합된 안드-사람들의 문화 중심지가 신장에 있는 타림 강 분지와 티베트의 고지 남쪽에서 유지되었으며, 그곳에서 안드-사람들과 안돈-사람들은 널리 섞였습니다. 타림 계곡은 전형적인 안드-사람들 문화의 최동단 전초 지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지를 세웠고, 동쪽으로 진보적인 중국인들, 북쪽으로 안돈-사람들과 무역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다림 지역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강우량(降雨量)이 풍부했습니다. 동쪽으로 고비는, 목양자들이 점차 농업으로 바꾸던, 열린 초원이었습니다. 비바람이 남동쪽으로 이동하자, 이 문명은 사라졌지만, 당시에 그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79:1.3 (878.4) By 8000 B.C. the slowly increasing aridity of the highland regions of central Asia began to drive the Andites to the river bottoms and the seashores. This increasing drought not only drove them to the valleys of the Nile, Euphrates, Indus, and Yellow rivers, but it produced a new development in Andite civilization. A new class of men, the traders, began to appear in large numbers. BC 8,000년에 중앙 아시아의 고지가 서서히 점차 건조해져서 안드-사람들은 강 하부와 해변으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증가하는 이 가뭄으로 그들은 나일, 유프라테스, 인더스 및 황하 강의 유역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새로 발전된 안드-사람들의 문명이 일어났습니다. 새 부류의 사람들, 상인들이 수없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79:1.4 (879.1) When climatic conditions made hunting unprofitable for the migrating Andites, they did not follow the evolutionary course of the older races by becoming herders. Commerce and urban life made their appearance. From Egypt through Mesopotamia and Turkestan to the rivers of China and India, the more highly civilized tribes began to assemble in cities devoted to manufacture and trade. Adonia became the central Asian commercial metropolis, being located near the present city of Ashkhabad. Commerce in stone, metal, wood, and pottery was accelerated on both land and water. 기후 조건으로 이주하는 안드-사람들이 사냥하기 어렵게 되자, 그들은 옛 종족들이 목양자들이 되었던 진화적 과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상업과 도시 생활로 그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을 거쳐 중국과 인도의 강들까지, 더 고도로 문명화된 부족들이 제조와 무역을 위해 도시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도니아는 현재 도시 아쉬카바드 근처에 있었으며, 중앙 아시아의 상업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돌·금속·나무·도기의 거래가 육지와 해상에서 촉진되었습니다.

79:1.5 (879.2) But ever-increasing drought gradually brought about the great Andite exodus from the lands south and east of the Caspian Sea. The tide of migration began to veer from northward to southward, and the Babylonian cavalrymen began to push into Mesopotamia. 그러나 끊임없이 증가하는 가뭄으로 점차 카스피해(海) 남동쪽 땅으로부터 안드-사람들의 대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주의 물결이 북에서 남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바빌론 기병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밀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79:1.6 (879.3) Increasing aridity in central Asia further operated to reduce population and to render these people less warlike; and when the diminishing rainfall to the north forced the nomadic Andonites southward, there was a tremendous exodus of Andites from Turkestan. This is the terminal movement of the so-called Aryans into the Levant and India. It culminated that long dispersal of the mixed descendants of Adam during which every Asiatic and most of the island peoples of the Pacific were to some extent improved by these superior races. 중앙 아시아에서 가뭄이 점차 심해져서 인구가 감소하고 이런 사람들의 전쟁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감소하는 강수량으로 안돈-사람 유목민들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투르키스탄으로부터 안드-사람들의 엄청난 대이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리아인(人)들이 레반트와 인도로 들어간 마지막 이동입니다. 혼합된 아담 후손들의 오랜 분산이 이것으로 정점에 이르는 동안 모든 아시아 사람과 태평양에 속한 대부분의 섬 민족들은 이 우수한 종족들로 인해 어느 정도 향상되었습니다.

79:1.7 (879.4) Thus, while they dispersed over the Eastern Hemisphere, the Andites were dispossessed of their homelands in Mesopotamia and Turkestan, for it was this extensive southward movement of Andonites that diluted the Andites in central Asia nearly to the vanishing point. 그래서 안드-사람들이 동반구에 전체에 분산되면서, 안드-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자신들의 고국과 투르키스탄에서 쫓겨났는데, 이는 안돈-사람들의 이런 광범위한 남쪽 이동으로 중앙 아시아에 있는 안드-사람들이 거의 소멸하기까지 희박해졌기 때문입니다.

79:1.8 (879.5) But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 there are traces of Andite blood among the Turanian and Tibetan peoples, as is witnessed by the blond types occasionally found in these regions. The early Chinese annals record the presence of the red-haired nomads to the north of the peaceful settlements of the Yellow River, and there still remain paintings which faithfully record the presence of both the blond-Andite and the brunet-Mongolian types in the Tarim basin of long ago.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가 지났어도, 이들 지역에서 가끔 금발 유형이 발견되었듯이, 우랄알타이어족과 티베트 민족 중에 안드-사람들 혈통의 흔적이 있습니다. 초기 중국 연대기는 황하강의 평화로운 정착지 북쪽에 머리털이 붉은 유목민들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으며, 오래전 타림 분지에 있었던 금발의 안드-사람들과 거무스름한-몽골 유형 둘 모두의 존재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그림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79:1.9 (879.6) The last great manifestation of the submerged military genius of the central Asiatic Andites was in A.D. 1200, when the Mongols under Genghis Khan began the conquest of the greater portion of the Asiatic continent. And like the Andites of old, these warriors proclaimed the existence of “one God in heaven.” The early breakup of their empire long delayed cultural intercourse between Occident and Orient and greatly handicapped the growth of the monotheistic concept in Asia. 중앙 아시아에서 안드-사람들의 잠자던 군사적 재능이 마지막으로 크게 나타난 것은 칭기즈칸 밑에서 몽골 사람들이 대부분의 아시아 대륙을 정복하기 시작했던, AD 1,200년이었습니다. 고대의 안드-사람들처럼, 이 전사들은 “하늘의 한 하느님”의 존재를 선포했습니다. 그들 제국이 초기 붕괴로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교류가 오래 지체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일신론 개념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2. The Andite Conquest of India  안드-사람들의 인도 정복

79:2.1 (879.7) India is the only locality where all the Urantia races were blended, the Andite invasion adding the last stock. In the highlands northwest of India the Sangik races came into existence, and without exception members of each penetrated the subcontinent of India in their early days, leaving behind them the most heterogeneous race mixture ever to exist on Urantia. Ancient India acted as a catch basin for the migrating races. The base of the peninsula was formerly somewhat narrower than now, much of the deltas of the Ganges and Indus being the work of the last fifty thousand years. 인도는 유란시아 모든 인종이 섞인 유일한 장소이며, 안드-사람들의 침입으로 마지막 혈통이 추가되었습니다. 인도 북서쪽 고지에서 상긱 인종들이 출현했고, 예외 없이 각 인종은 자신들의 초기에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스며들어서, 일찍이 유란시아에 있었던 가장 이질적인 종족 혼합을 뒤에 남겼습니다. 고대 인도는 이주하는 종족들의 배수조(排水槽 받아서 보내는 그릇)였습니다. 그 반도의 시작 부분이 지금보다 이전에 약간 좁았는데,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삼각주의 대부분은 지난 50,000년의 산물입니다.

79:2.2 (879.8) The earliest race mixtures in India were a blending of the migrating red and yellow races with the aboriginal Andonites. This group was later weakened by absorbing the greater portion of the extinct eastern green peoples as well as large numbers of the orange race, was slightly improved through limited admixture with the blue man, but suffered exceedingly through assimilation of large numbers of the indigo race. But the so-called aborigines of India are hardly representative of these early people; they are rather the most inferior southern and eastern fringe, which was never fully absorbed by either the early Andites or their later appearing Aryan cousins. 인도에서 가장 초기의 인종 혼합은 이주하는 홍인과 황인이 안돈-사람들 원주민들과 섞인 것이었습니다. 이 집단은, 대부분의 주황인 뿐 아니라 멸종한 동부 녹색 민족들의 많은 부분도 흡수하여 나중에 약화했으며, 얼마 안 되는 청인과 섞여서 약간 개선되었지만, 대부분의 남색 인종과 동화되어 몹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인도의 원주민들은 거의 이런 초기 민족들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가장 열등한 남부와 동부 분파 집단으로, 초기 안드-사람들이나 나중에 출현한 아리아인 계통 민족들에게 결코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79:2.3 (880.1) By 20,000 B.C. the population of western India had already become tinged with the Adamic blood, and never in the history of Urantia did any one people combine so many different races. But it was unfortunate that the secondary Sangik strains predominated, and it was a real calamity that both the blue and the red man were so largely missing from this racial melting pot of long ago; more of the primary Sangik strains would have contributed very much toward the enhancement of what might have been an even greater civilization. As it developed, the red man was destroying himself in the Americas, the blue man was disporting himself in Europe, and the early descendants of Adam (and most of the later ones) exhibited little desire to admix with the darker colored peoples, whether in India, Africa, or elsewhere. BC 20,000년에 서부 인도의 인구는 이미 아담 혈통이 가미되었고, 유란시아 역사에서 어느 한 민족이 그토록 서로 다른 인종들을 결합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상긱 종족들이 주도권을 쥔 것은 불행이었으며, 오래전 이런 인종적 도가니에서 청인과 홍인이 그렇게 대규모로 분실된 것은 정말로 참화였습니다. 더 많은 1차 상긱 종족들은 정말 위대한 문명이 향상되도록 아주 많이 공헌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개발되었듯이, 홍인은 아메리카들에서 자멸했고 청인은 유럽에서 즐겼으며, 아담의 초기 후손들(과 대부분의 나중 후손들)은 인도, 아프리카 혹은 다른 지역에서 짙은 유색 민족들과 섞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79:2.4 (880.2) About 15,000 B.C. increasing population pressure throughout Turkestan and Iran occasioned the first really extensive Andite movement toward India. For over fifteen centuries these superior peoples poured in through the highlands of Baluchistan, spreading out over the valleys of the Indus and Ganges and slowly moving southward into the Deccan. This Andite pressure from the northwest drove many of the southern and eastern inferiors into Burma and southern China but not sufficiently to save the invaders from racial obliteration. BC 15,000년경 투르키스탄과 이란 전역에서 인구 증가의 압력으로 정말로 광범위한 안드-사람들이 인도를 향해 처음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15세기가 넘게, 이 우수한 민족들이 발루치스탄 고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와, 인더스와 갠지스 계곡 전역으로 퍼졌으며, 서서히 남쪽 데칸으로 이동했습니다. 북서쪽으로부터 이런 안드-사람들의 압력으로 열등한 남부와 동부의 대다수가 버마와 중국 남부로 몰려갔지만, 민족 말살에서 침입자들을 구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79:2.5 (880.3) The failure of India to achieve the hegemony of Eurasia was largely a matter of topography; population pressure from the north only crowded the majority of the people southward into the decreasing territory of the Deccan, surrounded on all sides by the sea. Had there been adjacent lands for emigration, then would the inferiors have been crowded out in all directions, and the superior stocks would have achieved a higher civilization. 인도가 유라시아의 패권을 잡지 못한 이유는 주로 지형 문제였습니다. 북쪽의 인구 압력으로 민족의 대다수가 남쪽에 밀어닥쳐서, 모든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칸의 지역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인근에 이주할 지역이 있었다면, 열등한 자들은 사방으로 밀려 나갔을 것이고 우수한 혈통들은 높은 문명을 성취했을 것입니다.

79:2.6 (880.4) As it was, these earlier Andite conquerors made a desperate attempt to preserve their identity and stem the tide of racial engulfment by the establishment of rigid restrictions regarding intermarriage. Nonetheless, the Andites had become submerged by 10,000 B.C., but the whole mass of the people had been markedly improved by this absorption. 실제로, 이런 초기 안드-사람들은, 다른 인종 간의 결혼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인종을 삼키는 물결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습니다. 그런데도 안드-사람들은 BC 10,000년에 사라지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민족 전체가 이런 흡수로 현저히 좋아졌습니다.

79:2.7 (880.5) Race mixture is always advantageous in that it favors versatility of culture and makes for a progressive civilization, but if the inferior elements of racial stocks predominate, such achievements will be short-lived. A polyglot culture can be preserved only if the superior stocks reproduce themselves in a safe margin over the inferior. Unrestrained multiplication of inferiors, with decreasing reproduction of superiors, is unfailingly suicidal of cultural civilization. 인종 혼합은 다양한 문화를 제공하고 진보적 문명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항상 이익이 되지만, 열등한 인종 혈통 요소가 지배하면, 그런 성취는 일시적일 것입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는, 우수한 혈통들이 열등한 혈통보다 충분한 차이를 두고 생식할 때만, 보존될 수 있습니다. 우수한 자들의 생식이 줄어들면서 열등한 자들이 제한 없이 증식하면 문화적 문명은 반드시 자멸합니다.

79:2.8 (880.6) Had the Andite conquerors been in numbers three times what they were, or had they driven out or destroyed the least desirable third of the mixed orange-green-indigo inhabitants, then would India have become one of the world’s leading centers of cultural civilization and undoubtedly would have attracted more of the later waves of Mesopotamians that flowed into Turkestan and thence northward to Europe. 안드-사람 정복자들의 수가 자신들이 있었던 3배였다거나, 혼합된 주황-녹-남색 거주민 중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1/3을 쫓아내거나 멸망시켰었다면, 인도는 세계를 이끄는 문화적 문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틀림없이, 투르키스탄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북쪽 유럽으로 쇄도했던 후기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의 물결을 더 끌어들였을 것입니다.

3. Dravidian India 드라비다인(人)의 인도

79:3.1 (881.1) The blending of the Andite conquerors of India with the native stock eventually resulted in that mixed people which has been called Dravidian. The earlier and purer Dravidians possessed a great capacity for cultural achievement, which was continuously weakened as their Andite inheritance became progressively attenuated. And this is what doomed the budding civilization of India almost twelve thousand years ago. But the infusion of even this small amount of the blood of Adam produced a marked acceleration in social development. This composite stock immediately produced the most versatile civilization then on earth. 인도를 정복한 안드-사람들과 원주민 혈통의 혼합으로 결국 드라비다인(人)이라는 혼합 민족이 생겼습니다. 초기에 더 순수한 드라비다인(人)들은 문화적 성취를 위한 위대한 능력이 있었는데, 자신들의 안드-사람 유전형질이 점차 희박해짐에 따라서 계속 약해졌습니다. 이것으로 거의 12,000년 전 인도의 문명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양의 아담 혈통 주입만으로도 사회적 발전이 현저히 촉진되었습니다. 이 혼합 혈통은 즉시 당시 지상의 여러 방면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문명을 낳았습니다.

79:3.2 (881.2) Not long after conquering India, the Dravidian Andites lost their racial and cultural contact with Mesopotamia, but the later opening up of the sea lanes and the caravan routes re-established these connections; and at no time within the last ten thousand years has India ever been entirely out of touch with Mesopotamia on the west and China to the east, although the mountain barriers greatly favored western intercourse. 인도 정복 후 오래지 않아, 드라비다인(人) 안드-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자신들의 인종 및 문화적 접촉을 잃었지만, 나중에 항로와 대상(隊商) 경로가 열리자 이런 연락이 재건되었습니다. 산 장벽으로 서쪽 교류가 아주 유리했지만, 지난 10,000년 내, 인도는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 및 동쪽으로 중국과 완전히 접촉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79:3.3 (881.3) The superior culture and religious leanings of the peoples of India date from the early times of Dravidian domination and are due, in part, to the fact that so many of the Sethite priesthood entered India, both in the earlier Andite and in the later Aryan invasions. The thread of monotheism running through the religious history of India thus stems from the teachings of the Adamites in the second garden. 인도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와 종교적 경향은 드라비다인(人)이 지배한 초기 시대에서 시작하며, 부분적으로, 그토록 많은 셋 성직자들이 두 차례, 초기 안드-사람들 및 후기 아리아인(人) 침입으로 인도에 들어간 사실 때문입니다. 인도의 종교적 역사를 통해 일신론의 맥락은 둘째 동산에서 아담-사람들의 가르침에서 이렇게 유래합니다.

79:3.4 (881.4) As early as 16,000 B.C. a company of one hundred Sethite priests entered India and very nearly achieved the religious conquest of the western half of that polyglot people. But their religion did not persist. Within five thousand years their doctrines of the Paradise Trinity had degenerated into the triune symbol of the fire god. 일찍이 BC 16,000년에 셋 성직자 일행 100명이 인도에 들어갔고, 여러 언어를 말하는 그 민족의 서쪽 절반을 거의 다 종교적으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존속하지 않았습니다. 5,000 년 내에, 그들의 천국 삼위일체 교리는 불의 신(하느님, 아그니)의 삼자일치적 상징으로 퇴보했습니다.

79:3.5 (881.5) But for more than seven thousand years, down to the end of the Andite migrations, the religious status of the inhabitants of India was far above that of the world at large. During these times India bid fair to produce the leading cultural, religious, philosophic, and commercial civilization of the world. And but for the complete submergence of the Andites by the peoples of the south, this destiny would probably have been realized. 그러나 안드-사람들의 이주가 끝나기까지 7,000년 이상, 인도 거주민들의 종교적 상태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종교적 상태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이 시절 인도는 세상을 선도하는 문화적·종교적·철학적·상업적 문명을 낳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민족들에 의해 안드-사람들이 완전히 침몰하지 않았다면, 이 운명은 아마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79:3.6 (881.6) The Dravidian centers of culture were located in the river valleys, principally of the Indus and Ganges, and in the Deccan along the three great rivers flowing through the Eastern Ghats to the sea. The settlements along the seacoast of the Western Ghats owed their prominence to maritime relationships with Sumeria. 드라비다인(人)의 문화 중심지는 주로 인더스와 갠지스의 강 유역(流域)과 세 개의 큰 강들이 동쪽 산맥을 통해서 바다로 흐르는 데칸에 있었습니다. 서쪽 산맥의 해안 정착지들은 수메르와 해상 관계로 인해 두드러졌습니다.

79:3.7 (881.7) The Dravidians were among the earliest peoples to build cities and to engage in an extensive export and import business, both by land and sea. By 7000 B.C. camel trains were making regular trips to distant Mesopotamia; Dravidian shipping was pushing coastwise across the Arabian Sea to the Sumerian cities of the Persian Gulf and was venturing on the waters of the Bay of Bengal as far as the East Indies. An alphabet, together with the art of writing, was imported from Sumeria by these seafarers and merchants. 드라비다인(人)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육로와 항로로, 광범위한 수출입 업무에 종사한 최초의 민족들에 속했습니다. BC 7,000년에 낙타 행렬이 먼 메소포타미아까지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드라비다의 해운업은 아라비아해(海)을 건너 연안을 따라 페르시아만(灣)의 수메르 도시들까지 확장되었고, 벵골만(灣)의 수역으로 동(東)인도 제도(諸島)까지 갔습니다. 문장작법과 함께 자모(字母글자)가 이런 항해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수메르에서 수입되었습니다.

79:3.8 (881.8) These commercial relationships greatly contributed to the further diversification of a cosmopolitan culture, resulting in the early appearance of many of the refinements and even luxuries of urban life. When the later appearing Aryans entered India, they did not recognize in the Dravidians their Andite cousins submerged in the Sangik races, but they did find a well-advanced civilization. Despite biologic limitations, the Dravidians founded a superior civilization. It was well diffused throughout all India and has survived on down to modern times in the Deccan. 이런 상업 관계는 더욱이 세계적 문화의 다양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고, 도시 생활의 여러 세련된 것들과 사치품까지 초기에 출현했습니다. 나중에 출현한 아리아인(人)들이 인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드라비다인(人)들에게서, 상긱 인종들에 잠겨 있는, 자신들의 사촌 안드-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상당히-진보한 문명을 발견했습니다. 생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드라비다인(人)들은 우수한 문명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온 인도 전역에 잘 퍼졌으며, 데칸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았습니다.

4. The Aryan Invasion of India 아리아인(人)의 인도 침입

79:4.1 (882.1) The second Andite penetration of India was the Aryan invasion during a period of almost five hundred years in the middle of the third millennium before Christ. This migration marked the terminal exodus of the Andites from their homelands in Turkestan. 두 번째 안드-사람들의 인도 침입은, 그리스도 이전(以前) 3,000년의 중엽, 거의 500년 기간의 아리아인(人) 침입이었습니다. 이 이주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안드-사람들의 고국으로부터 그들의 마지막 집단 대이동의 표지였습니다.

79:4.2 (882.2) The early Aryan centers were scattered over the northern half of India, notably in the northwest. These invaders never completed the conquest of the country and subsequently met their undoing in this neglect since their lesser numbers made them vulnerable to absorption by the Dravidians of the south, who subsequently overran the entire peninsula except the Himalayan provinces. 초기 아리아인(人) 중심지들은 인도 북쪽 절반, 특히 북서쪽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완전히 국가를 정복하지 않았고, 나중에 히말리야 지방을 제외한 반도 전체에 급속히 퍼졌던 남부 드라비다인(人)들의 병합에 취약할 정도로 적은 수로 인해서, 나중에 그들이 이런 부주의로 파멸하게 되었습니다.

79:4.3 (882.3) The Aryans made very little racial impression on India except in the northern provinces. In the Deccan their influence was cultural and religious more than racial. The greater persistence of the so-called Aryan blood in northern India is not only due to their presence in these regions in greater numbers but also because they were reinforced by later conquerors, traders, and missionaries. Right on down to the first century before Christ there was a continuous infiltration of Aryan blood into the Punjab, the last influx being attendant upon the campaigns of the Hellenistic peoples. 아리아인(人)들은 북쪽 지방을 제외하고 인도에서 인종적 영향이 거의 없었습니다. 데칸에서 그들의 영향은 인종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이었습니다. 인도 북부에서 더 크게 소위 아리아인(人) 혈통이 지속한 것은, 이런 지역에 그들이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정복자들·상인들·선교사들로 인해 그들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이전(以前) 바로 1세기까지, 아리아인(人) 혈통이 계속 펀자브로 침투했고, 최종 유입은 헬라 민족의 출정으로 수반되었습니다.

79:4.4 (882.4) On the Gangetic plain Aryan and Dravidian eventually mingled to produce a high culture, and this center was later reinforced by contributions from the northeast, coming from China. 갠지스 평원에서 결국 아리아인(人)과 드라비다인(人)이 섞여 높은 문화를 일으켰고, 이 중심지는 나중에 중국에서 나온 북동쪽의 기여로 강화되었습니다.

79:4.5 (882.5) In India many types of social organizations flourished from time to time, from the semidemocratic systems of the Aryans to despotic and monarchial forms of government. But the most characteristic feature of society was the persistence of the great social castes that were instituted by the Aryans in an effort to perpetuate racial identity. This elaborate caste system has been preserved on down to the present time. 인도에서, 아리아인(人)의 반(半)민주적 체제(體制)에서 정부의 전제적(專制的) 군주(君主) 형태까지, 여러 유형의 사회적 조직이 때때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특징적인 사회 모습은, 인종적 정체성을 지속하려고 아리아인(人)이 제정했던, 엄청난 사회적 카스트(세습 신분 제도)의 지속이었습니다. 정교한 이 카스트 제도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79:4.6 (882.6) Of the four great castes, all but the first were established in the futile effort to prevent racial amalgamation of the Aryan conquerors with their inferior subjects. But the premier caste, the teacher-priests, stems from the Sethites; the Brahmans of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 are the lineal cultural descendants of the priests of the second garden, albeit their teachings differ greatly from those of their illustrious predecessors. 아리아인(人)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열등한 피지배자들과 인종 융합을 막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4개의 위대한 카스트 중, 첫째를 제외한 모두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첫 카스트, 교사-성직자들은 셋-사람들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의 브라만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뛰어난 선조들과 아주 다르지만, 둘째 동산 사제들의 문화적 직계 후손들입니다.

79:4.7 (882.7) When the Aryans entered India, they brought with them their concepts of Deity as they had been preserved in the lingering traditions of the religion of the second garden. But the Brahman priests were never able to withstand the pagan momentum built up by the sudden contact with the inferior religions of the Deccan after the racial obliteration of the Aryans. Thus the vast majority of the population fell into the bondage of the enslaving superstitions of inferior religions; and so it was that India failed to produce the high civilization which had been foreshadowed in earlier times. 아리아인(人)들이 인도에 들어갔을 때, 둘째 동산 종교의 전통에 남아 보전되었던, 그들은 신(神) 개념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브라만 사제들은, 아리아인(人)들의 인종 말살 이후, 데칸의 열등한 종교들과 갑작스러운 접촉으로 강화된 다신교의 기세를 결코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인구 대부분은 미신에 사로잡힌 열등한 종교의 속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인도는 초기 시대에 징조가 보였던 높은 문명 산출에 실패했습니다.

79:4.8 (882.8) The spiritual awakening of the sixth century before Christ did not persist in India, having died out even before the Mohammedan invasion. But someday a greater Gautama may arise to lead all India in the search for the living God, and then the world will observe the fruition of the cultural potentialities of a versatile people so long comatose under the benumbing influence of an unprogressing spiritual vision. 그리스도 이전 6세기의 영적 각성이, 이슬람교가 침입하기도 전에 멸종되어, 인도에서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더 위대한 고타마가 일어나 인도 전체를 이끌어 살아있는 하느님을 찾게 할 수도 있으며, 그때 세상은 후퇴하는 영적 비전의 마비된 영향 아래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다재다능한 민족의 문화적 잠재성의 열매를 지켜볼 것입니다.

79:4.9 (883.1) Culture does rest on a biologic foundation, but caste alone could not perpetuate the Aryan culture, for religion, true religion, is the indispensable source of that higher energy which drives men to establish a superior civilization based on human brotherhood. 문화는 생물학적 토대에 놓이지만, 종교, 참 종교는 인간의 형제 사랑에 근거한 우월한 문명을 세우도록 인간들을 조종하는 더 높은 에너지의 필수적 근원이기 때문에, 카스트만으로 아리아인(人) 문화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5. Red Man and Yellow Man 홍(紅)인종과 황(黃)인종

79:5.1 (883.2) While the story of India is that of Andite conquest and eventual submergence in the older evolutionary peoples, the narrative of eastern Asia is more properly that of the primary Sangiks, particularly the red man and the yellow man. These two races largely escaped that admixture with the debased Neanderthal strain which so greatly retarded the blue man in Europe, thus preserving the superior potential of the primary Sangik type. 인도의 이야기는 안드-사람 정복과 더 오래된 진화 민족 안에 마침내 침몰한 이야기지만, 동(東)아시아의 이야기는 정확히 말해서 1차 상긱, 특히 홍(紅)인종과 황(黃)인종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인종은, 유럽에서 청인(靑人)의 발달을 아주 지체시킨, 열등한 네안데르탈인(人) 혈통과 섞이는 그런 혼합을 대부분 벗어나서, 1차 상긱 유형의 우수한 잠재성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79:5.2 (883.3) While the early Neanderthalers were spread out over the entire breadth of Eurasia, the eastern wing was the more contaminated with debased animal strains. These subhuman types were pushed south by the fifth glacier, the same ice sheet which so long blocked Sangik migration into eastern Asia. And when the red man moved northeast around the highlands of India, he found northeastern Asia free from these subhuman types. The tribal organization of the red races was formed earlier than that of any other peoples, and they were the first to migrate from the central Asian focus of the Sangiks. The inferior Neanderthal strains were destroyed or driven off the mainland by the later migrating yellow tribes. But the red man had reigned supreme in eastern Asia for almost one hundred thousand years before the yellow tribes arrived. 초기 네안데르탈인(人)들은 유라시아 전역에 넓게 퍼졌던 반면에, 동쪽 부분은 뒤떨어진 동물 혈통으로 더 오염되었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이 유형들은 제5 빙하기에 남쪽으로 밀렸고, 바로 그 대륙 빙하가 그토록 오래, 상긱의 동(東)아시아 이주를 막았습니다. 홍인(紅人)이 인도 고지를 돌아 북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그는 북동 아시아에 인간에 가까운 이 유형들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홍인종의 부족 조직은 다른 어떤 민족 조직들보다 먼저 형성되었고, 그들은 상긱의 중앙아시아 중심에서 처음으로 이주했습니다. 열등한 네안데르탈 혈통들은, 나중에 이주하는 황인 부족들에게 멸망하거나 본토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홍인은, 황인 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거의 10만 년간 동(東)아시아에서 주권을 갖고 다스렸습니다.

79:5.3 (883.4) More than three hundred thousand years ago the main body of the yellow race entered China from the south as coastwise migrants. Each millennium they penetrated farther and farther inland, but they did not make contact with their migrating Tibetan brethren until comparatively recent times. 30만 년 훨씬 전에 황인종의 본대가 남쪽에서 연안(沿岸)의 이주자들로서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천년마다 그들은 더 멀리 내륙으로 침투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이주하던 티벳 형제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79:5.4 (883.5) Growing population pressure caused the northward-moving yellow race to begin to push into the hunting grounds of the red man. This encroachment, coupled with natural racial antagonism, culminated in increasing hostilities, and thus began the crucial struggle for the fertile lands of farther Asia. 인구 증가의 압력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황인종이 홍인의 사냥터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발생적인 인종적 적대감과 연결된 이런 침입으로 점차 교전 행위가 정점에 이르러서, 멀리 아시아의 비옥한 땅을 위해 쓰라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79:5.5 (883.6) The story of this agelong contest between the red and yellow races is an epic of Urantia history. For over two hundred thousand years these two superior races waged bitter and unremitting warfare. In the earlier struggles the red men were generally successful, their raiding parties spreading havoc among the yellow settlements. But the yellow man was an apt pupil in the art of warfare, and he early manifested a marked ability to live peaceably with his compatriots; the Chinese were the first to learn that in union there is strength. The red tribes continued their internecine conflicts, and presently they began to suffer repeated defeats at the aggressive hands of the relentless Chinese, who continued their inexorable march northward. 홍인종과 황인종 사이에 이 오랜 투쟁 이야기는 유란시아 역사의 서사시(敍事詩)입니다. 20만 년 이상, 우수한 이 두 인종은 쓰라리고 끈질긴 전쟁을 벌였습니다. 초기 전투에서 홍인들이 대체로 승리했고, 습격을 전개했던 그들의 부대가 황인 정착지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황인은 전술(戰術)을 영리하게 배웠고, 일찌감치 그는 동포들과 평화롭게 사는 능력을 두드러지게 나타냈습니다. 중국인들은 연합하면 강하다는 것을 최초로 배웠습니다. 홍인 부족들은 파괴적인 내부 분쟁을 계속했고, 즉시 그들은, 굽히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 행진하는, 잔인한 중국인들의 공격으로, 반복적인 패배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79:5.6 (883.7) One hundred thousand years ago the decimated tribes of the red race were fighting with their backs to the retreating ice of the last glacier, and when the land passage to the West, over the Bering isthmus, became passable, these tribes were not slow in forsaking the inhospitable shores of the Asiatic continent. It is eighty-five thousand years since the last of the pure red men departed from Asia, but the long struggle left its genetic imprint upon the victorious yellow race. The northern Chinese peoples, together with the Andonite Siberians, assimilated much of the red stock and were in considerable measure benefited thereby. 10만 년 전에, 많이 죽은 홍인 부족들이, 마지막 빙하기의 물러나는 빙판을 등지고, 싸우고 있었고, 베링 지협(地峽) 너머 서쪽에 육지 통행로가 열리자, 이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의 황량한 해안을 서슴없이 떠났습니다. 순수한 홍인들이 마지막으로 아시아를 떠난 지, 8만 5천 년이지만, 오랜 투쟁은 승리한 황인에게 유전적 흔적을 남겼습니다. 북쪽의 중국 민족들은 안돈-사람의 시베리아인(人)들과 함께 홍인 혈통을 많이 흡수해서, 상당한 정도로 이익을 얻었습니다.

79:5.7 (884.1) The North American Indians never came in contact with even the Andite offspring of Adam and Eve, having been dispossessed of their Asiatic homelands some fifty thousand years before the coming of Adam. During the age of Andite migrations the pure red strains were spreading out over North America as nomadic tribes, hunters who practiced agriculture to a small extent. These races and cultural groups remained almost completely isolated from the remainder of the world from their arrival in the Americas down to the end of the first millennium of the Christian era, when they were discovered by the white races of Europe. Up to that time the Eskimos were the nearest to white men the northern tribes of red men had ever seen.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담이 오기 전(前) 약 5만 년에 자신들의 아시아 고국을 빼앗겼고, 아담과 이브의 안드-사람 후손들과도 결코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안드-사람의 이주 기간에, 순수한 홍인 혈통은 북(北)아메리카 전역에 유목민족으로 퍼졌으며, 농사를 조금 짓던 사냥꾼들이었습니다. 이들 인종 문화 집단은, 아메리카들에 자신들이 도착할 때부터, 유럽의 백인들이 그들을 발견했던, 기독교 시대에 속한 첫 1천 년의 끝날 때까지, 나머지 세상에서 거의 완전히 고립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북쪽의 홍인 부족들이 보았던, 에스키모인(人)들이 백인들에 가장 가까웠습니다.

79:5.8 (884.2) The red and the yellow races are the only human stocks that ever achieved a high degree of civilization apart from the influences of the Andites. The oldest Amerindian culture was the Onamonalonton center in California, but this had long since vanished by 35,000 B.C. In Mexico, Central America, and in the mountains of South America the later and more enduring civilizations were founded by a race predominantly red but containing a considerable admixture of the yellow, orange, and blue. 홍인과 황인종들은 안드-사람들의 영향 없이 일찍이 고도의 문명을 성취한 유일한 인간 혈통들입니다. 가장 오래된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는 캘리포니아의 오나모나론톤 중심지이지만, 이것은 오래전 BC 35,000년에 사라졌습니다.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와 남(南)아메리카의 산악지대에, 후에 더 오래 지속된 문명들은 주로 홍인들이 세웠지만, 이들은 황색, 주황색 및 청색이 상당히 섞인 인종을 포함했습니다.

79:5.9 (884.3) These civilizations were evolutionary products of the Sangiks, notwithstanding that traces of Andite blood reached Peru. Excepting the Eskimos in North America and a few Polynesian Andites in South America, the peoples of the Western Hemisphere had no contact with the rest of the world until the end of the first millennium after Christ. In the original Melchizedek plan for the improvement of the Urantia races it had been stipulated that one million of the pure-line descendants of Adam should go to upstep the red men of the Americas. 안드-사람 혈통의 흔적이 페루에 이르렀지만, 이 문명들은 상긱 진화의 산물이었습니다. 북(北)아메리카의 에스키모인들과 남(南)아메리카에 있는 소수의 폴리네시아 안드-사람들을 제외하면, 서(西)반구의 민족들은 그리스도 이후 첫 1천 년의 끝까지 나머지 세상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유란시아 인종 개량을 위한 멜기세덱의 최초 계획에는 아담의 순계 후손 일백만 명이 아메리카들의 홍인들을 증진하도록 가야만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6. Dawn of Chinese Civilization 중국 문명의 여명(黎明)

79:6.1 (884.4) Sometime after driving the red man across to North America, the expanding Chinese cleared the Andonites from the river valleys of eastern Asia, pushing them north into Siberia and west into Turkestan, where they were soon to come in contact with the superior culture of the Andites. 홍인이 북(北)아메리카로 쫓겨서 건너간 지 얼마 후, 팽창하는 중국인들이 동(東)아시아 강 유역에서 안돈-사람들을, 북쪽 시베리아와 서쪽 투르키스탄으로 몰아서 제거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이내 안드-사람들의 우수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79:6.2 (884.5) In Burma and the peninsula of Indo-China the cultures of India and China mixed and blended to produce the successive civilizations of those regions. Here the vanished green race has persisted in larger proportion than anywhere else in the world. 버마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섞이고 혼합되어 그 지역에서 연속된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사라진 녹인(綠人)이 세계의 다른 어디보다 여기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 지속했습니다.

79:6.3 (884.6) Many different races occupied the islands of the Pacific. In general, the southern and then more extensive islands were occupied by peoples carrying a heavy percentage of green and indigo blood. The northern islands were held by Andonites and, later on, by races embracing large proportions of the yellow and red stocks. The ancestors of the Japanese people were not driven off the mainland until 12,000 B.C., when they were dislodged by a powerful southern-coastwise thrust of the northern Chinese tribes. Their final exodus was not so much due to population pressure as to the initiative of a chieftain whom they came to regard as a divine personage. 다른 여러 인종이 태평양의 제도(諸島)를 차지했습니다. 보통 녹인과 남인의 혈통을 매우 큰 비율로 지닌 민족들이 남쪽과 이후 더 광범위한 섬들을 차지했습니다. 안돈-사람들이 북쪽 섬들을 차지했고, 나중에 황인과 홍인 혈통을 많이 간직한 인종들이 차지했습니다. 일본 민족의 조상들은 BC 12,000년까지 대륙을 떠나지 않았다가, 그때 북쪽 중국 부족들이 남쪽 해안을 따라 강하게 공격하여, 그들은 밀려났습니다. 그들의 최종적 집단 대이동은 인구 압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적 인물로 여긴 지도자의 지도력 때문이었습니다.

79:6.4 (885.1) Like the peoples of India and the Levant, victorious tribes of the yellow man established their earliest centers along the coast and up the rivers. The coastal settlements fared poorly in later years as the increasing floods and the shifting courses of the rivers made the lowland cities untenable. 인도와 레반트의 민족들처럼, 승리한 황인 부족들은 초기 중심지들을 해안선을 따라서, 또 강의 상류에 세웠습니다. 홍수의 증가와 강의 물길이 바뀌어, 저지(低地낮은 땅)의 도시에 살 수 없게 되자, 해안 정착지들은 나중에 살기 어려워졌습니다.

79:6.5 (885.2) Twenty thousand years ago the ancestors of the Chinese had built up a dozen strong centers of primitive culture and learning, especially along the Yellow River and the Yangtze. And now these centers began to be reinforced by the arrival of a steady stream of superior blended peoples from Sinkiang and Tibet. The migration from Tibet to the Yangtze valley was not so extensive as in the north, neither were the Tibetan centers so advanced as those of the Tarim basin. But both movements carried a certain amount of Andite blood eastward to the river settlements. 2만 년 전, 중국인의 선조들은 강력한 원시 문명과 교육의 12 중심지를, 특별히 황허와 양쯔강을 따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중심지들은 신장(新疆)과 티베트에서 우수한 혼합 민족들이 꾸준히 흘러들어와 보강되기 시작했습니다. 티베트에서 양쯔강 계곡으로 이주는 북쪽만큼 광범위하지 않았으며, 티베트 중심지들도 타림 분지의 중심지들처럼 진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 이동으로 인해 상당한 안드-사람들의 혈통이 동쪽 강 정착지로 운반되었습니다.

79:6.6 (885.3) The superiority of the ancient yellow race was due to four great factors: 고대 황인의 우수성은 4대 요소들 때문이었습니다.

79:6.7 (885.4) 1. Genetic. Unlike their blue cousins in Europe, both the red and yellow races had largely escaped mixture with debased human stocks. The northern Chinese, already strengthened by small amounts of the superior red and Andonic strains, were soon to benefit by a considerable influx of Andite blood. The southern Chinese did not fare so well in this regard, and they had long suffered from absorption of the green race, while later on they were to be further weakened by the infiltration of the swarms of inferior peoples crowded out of India by the Dravidian-Andite invasion. And today in China there is a definite difference between the northern and southern races. 유전(遺傳)적. 유럽의 그들 청색 사촌들과 다르게, 홍인과 황인 둘 다, 대부분 열등한 인간 혈통과 혼합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미 소량의 우수한 홍인과 안돈 혈통으로 강화한, 북쪽 중국인들은, 상당한 안드-사람 혈통 유입으로 곧 이익을 얻었습니다. 남쪽 중국인들은 이 점에서 그렇게 잘 진행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녹인들을 흡수하여 오랫동안 고생했고, 게다가 후에 드라비다-안드 사람들의 침략으로 인도 밖으로 나온 열등한 민족 무리의 침입으로 더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 북쪽과 남쪽 인종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79:6.8 (885.5) 2. Social. The yellow race early learned the value of peace among themselves. Their internal peaceableness so contributed to population increase as to insure the spread of their civilization among many millions. From 25,000 to 5000 B.C. the highest mass civilization on Urantia was in central and northern China. The yellow man was first to achieve a racial solidarity — the first to attain a large-scale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civilization. 사회적. 황인은 자기들끼리 평화의 가치를 일찍 배웠습니다. 그들의 내적 평화는 인구 증가의 원인이 되어 그들의 문명이 수백만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BC 25,000년에서 5,000년까지, 유란시아에서 중요한 최고 문명은 중국의 중앙과 북부에 있었습니다. 황인은 처음으로 인종 결속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대규모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문명에 도달했습니다.

79:6.9 (885.6) The Chinese of 15,000 B.C. were aggressive militarists; they had not been weakened by an overreverence for the past, and numbering less than twelve million, they formed a compact body speaking a common language. During this age they built up a real nation, much more united and homogeneous than their political unions of historic times. BC 15,000년의 중국인들은 공격적인 군국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지나치게 공경하여 약해지지 않았으며, 1,200만 명 미만의 인구로 공통 언어를 사용하는 다부진 집단을 형성했습니다. 이 시대에 그들은, 실질적 국가를 세웠고, 역사상 유명한 시대의 정치적 연합보다 훨씬 더 단결된 단일민족이었습니다.

79:6.10 (885.7) 3. Spiritual. During the age of Andite migrations the Chinese were among the more spiritual peoples of earth. Long adherence to the worship of the One Truth proclaimed by Singlangton kept them ahead of most of the other races. The stimulus of a progressive and advanced religion is often a decisive factor in cultural development; as India languished, so China forged ahead under the invigorating stimulus of a religion in which truth was enshrined as the supreme Deity. 영적. 안드-사람들의 이주 시대에, 중국인들은 지상에서 더 영적인 민족들에 속했습니다. 싱랑톤이 선포한 하나의 진리를 오래 고수하여 그들은 다른 인종 중에서 가장 앞섰습니다. 진보적으로 앞선 종교의 자극은 종종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인도가 쇠약해질 때, 중국은, 진리를 최극 신(神)으로 소중히 여기는, 종교의 활기찬 자극 아래에서 서서히 선두에 나섰습니다(64.6.15).

79:6.11 (885.8) This worship of truth was provocative of research and fearless exploration of the laws of nature and the potentials of mankind. The Chinese of even six thousand years ago were still keen students and aggressive in their pursuit of truth. 이런 진리 경배는 자연법칙과 인류의 잠재성 연구와 대담무쌍한 탐구를 유발(誘發)했습니다. 6,000년 전까지도 중국은 여전히 명민한 학생들이며, 진리 추구에 과감했습니다.

79:6.12 (885.9) 4. Geographic. China is protected by the mountains to the west and the Pacific to the east. Only in the north is the way open to attack, and from the days of the red man to the coming of the later descendants of the Andites, the north was not occupied by any aggressive race. 지리적. 중국은 서쪽의 산맥과 동쪽의 태평양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북쪽만 공격의 길이 열려 있으며, 홍인 시절부터 후일 안드-사람의 후손들이 올 때까지, 어떤 공격적 인종도 북쪽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79:6.13 (886.1) And but for the mountain barriers and the later decline in spiritual culture, the yellow race undoubtedly would have attracted to itself the larger part of the Andite migrations from Turkestan and unquestionably would have quickly dominated world civilization. 그리고 산의 장벽이 없고, 후에 영적 문화가 쇠퇴하지 않았다면, 황인은 확실히 투르키스탄에서 이주하는 대부분의 안드-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두말할 것 없이, 신속하게 세계 문명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7. The Andites Enter China 안드-사람들이 중국에 들어가다

79:7.1 (886.2) About fifteen thousand years ago the Andites, in considerable numbers, were traversing the pass of Ti Tao and spreading out over the upper valley of the Yellow River among the Chinese settlements of Kansu. Presently they penetrated eastward to Honan, where the most progressive settlements were situated. This infiltration from the west was about half Andonite and half Andite. 약 15,000년 전에 꽤 많은 안드 사람들이 티 타오의 통로를 가로질러, 간쑤의 중국 정착지 사이에서, 황허강 상류 계곡 전체에 퍼졌습니다. 즉시 그들은, 대부분 진보한 정착지들이 있는, 동쪽 허난까지 침투했습니다. 서쪽에서부터 이런 침투는 절반쯤 안돈-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안드-사람들이었습니다.

79:7.2 (886.3) The northern centers of culture along the Yellow River had always been more progressive than the southern settlements on the Yangtze. Within a few thousand years after the arrival of even the small numbers of these superior mortals, the settlements along the Yellow River had forged ahead of the Yangtze villages and had achieved an advanced position over their brethren in the south which has ever since been maintained. 황허강을 따라서 문화의 북쪽 중심지들은 양쯔강의 남쪽 정착지들보다 언제나 더 진보적이었습니다. 적은 수(數)라도 이런 우수한 필사자들이 도착한 후, 수천 년 이내에, 황허강을 끼고 있는 정착지들이, 양쯔강 마을의 정착지들에 앞서나갔고, 그 이래 줄곧 유지되었던, 남쪽의 자기 형제들보다 진보적 위치에 도달했습니다.

79:7.3 (886.4) It was not that there were so many of the Andites, nor that their culture was so superior, but amalgamation with them produced a more versatile stock. The northern Chinese received just enough of the Andite strain to mildly stimulate their innately able minds but not enough to fire them with the restless, exploratory curiosity so characteristic of the northern white races. This more limited infusion of Andite inheritance was less disturbing to the innate stability of the Sangik type. 그것은 거기에 안드-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었거나, 그들의 문화가 그토록 우수했기 때문도 아니라, 이인종(異人種)의 융합으로 훨씬 다재다능한 혈통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북부 중국인들은, 선천적인 자신들의 유능한 마음을 부드럽게 자극하기에 적당히 안드-사람들의 혈통을 받았지만, 북쪽 백인종의 특색처럼 활동적으로 탐험을 좋아하는 호기심을 그들에게 고무할 만큼 충분히 받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안드-사람의 유전형질이 더 제한적으로 주입되어 상긱 유형의 타고난 안정성이 훨씬 적게 방해를 받았습니다.

79:7.4 (886.5) The later waves of Andites brought with them certain of the cultural advances of Mesopotamia; this is especially true of the last waves of migration from the west. They greatly improved the economic and educational practices of the northern Chinese; and while their influence upon the religious culture of the yellow race was short-lived, their later descendants contributed much to a subsequent spiritual awakening. But the Andite traditions of the beauty of Eden and Dalamatia did influence Chinese traditions; early Chinese legends place “the land of the gods” in the west. 안드-사람들의 후대 물결이 분명히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진전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특히 서쪽의 마지막 이주 물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북부 중국인들의 경제적·교육적 관례를 크게 개량했습니다. 그리고 황인의 종교적 문화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단명(短命)했지만, 후대 그들의 후손들은 차후 영적 각성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덴과 달라마시아의 아름다움에 속한 안드-사람들의 전통은 중국의 전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기 중국의 전설들은 “하느님들의 땅”을 서쪽에 둡니다.

79:7.5 (886.6) The Chinese people did not begin to build cities and engage in manufacture until after 10,000 B.C., subsequent to the climatic changes in Turkestan and the arrival of the later Andite immigrants. The infusion of this new blood did not add so much to the civilization of the yellow man as it stimulated the further and rapid development of the latent tendencies of the superior Chinese stocks. From Honan to Shensi the potentials of an advanced civilization were coming to fruit. Metalworking and all the arts of manufacture date from these days. 중국 민족은 투르키스탄의 기후 변화와 후기 안드-사람들의 이주민이 도착한 이후, BC 10,000년이 지나서 비로소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고 제조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혈통의 주입으로 황인의 문명이 불어나기보다는 오히려 우수한 중국 혈통의 잠재된 성향을 더 나아가 신속히 개발하도록 자극했습니다. 허난에서 쉔시까지, 진보된 문명의 잠재력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금속 세공술과 모든 제조 기술이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79:7.6 (886.7) The similarities between certain of the early Chinese and Mesopotamian methods of time reckoning, astronomy, and governmental administration were due to the commercial relationships between these two remotely situated centers. Chinese merchants traveled the overland routes through Turkestan to Mesopotamia even in the days of the Sumerians. Nor was this exchange one-sided — the valley of the Euphrates benefited considerably thereby, as did the peoples of the Gangetic plain. But the climatic changes and the nomadic invasions of the third millennium before Christ greatly reduced the volume of trade passing over the caravan trails of central Asia. 시간 계산, 천문학 및 정부(政府) 경영에 대한 초기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인(人)의 방법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런 두 중심지 사이의 상업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상인들은 수메르인의 시절에도 투르키스탄을 통해 메소포타미아까지 육로로 여행했습니다. 이런 교환으로 한쪽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 유프라테스 유역은, 갠지스 평야의 민족들처럼, 그것으로 인해 상당히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그리스도 이전(以前) 3,000년, 유목민 침략으로 중앙아시아의 대상(隊商) 행렬로 건너가는 교역량이 크게 줄었습니다.

8. Later Chinese Civilization 후기 중국 문명

79:8.1 (887.1) While the red man suffered from too much warfare, it is not altogether amiss to say that the development of statehood among the Chinese was delayed by the thoroughness of their conquest of Asia. They had a great potential of racial solidarity, but it failed properly to develop because the continuous driving stimulus of the ever-present danger of external aggression was lacking. 홍인(紅人)은 너무 많은 전쟁을 했던 반면에, 중국인들이 아시아를 철저히 정복했기 때문에 그들의 국가 발전이 늦어졌다고 말해도 전적으로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종을 단결하는 위대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그침이 없는 외부 침략 위험에 대해 계속 추진하는 자극이 부족해서, 그것이 적절히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79:8.2 (887.2) With the completion of the conquest of eastern Asia the ancient military state gradually disintegrated — past wars were forgotten. Of the epic struggle with the red race there persisted only the hazy tradition of an ancient contest with the archer peoples. The Chinese early turned to agricultural pursuits, which contributed further to their pacific tendencies, while a population well below the land-man ratio for agriculture still further contributed to the growing peacefulness of the country. 동(東)아시아 정복이 완료되면서, 고대 국방 국가는 점차 허물어졌습니다. – 과거 전쟁은 잊어버렸습니다. 홍인종과 투쟁했던 서사(敍事) 중에 궁술(弓術) 민족과 고대에 투쟁했던 희미한 전승(傳承)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일찍이 농경 작업에 의지하여, 평화적인 그들의 경향에 더 도움이 되었고, 게다가 농업을 위한 토지-인구 비율보다 훨씬 낮은 인구는 나라의 평화를 증대하는 일에 훨씬 더 도움이 되었습니다.

79:8.3 (887.3) Consciousness of past achievements (somewhat diminished in the present), the conservatism of an overwhelmingly agricultural people, and a well-developed family life equaled the birth of ancestor veneration, culminating in the custom of so honoring the men of the past as to border on worship. A very similar attitude prevailed among the white races in Europe for some five hundred years following the disruption of Greco-Roman civilization. 과거의 성취(현재에는 다소 줄어든)에 대한 의식, 압도적인 농민들의 보수성(保守性)과 잘 발달한 가정생활로, 경배에 가까울 만큼 과거 사람들을 아주 존중하는 관습이 절정에 달하면서, 조상 숭배의 탄생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비슷한 태도가, 그리스-로마 문명의 붕괴 뒤에, 거의 500년간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 유행되었습니다.

79:8.4 (887.4) The belief in, and worship of, the “One Truth” as taught by Singlangton never entirely died out; but as time passed, the search for new and higher truth became overshadowed by a growing tendency to venerate that which was already established. Slowly the genius of the yellow race became diverted from the pursuit of the unknown to the preservation of the known. And this is the reason for the stagnation of what had been the world’s most rapidly progressing civilization. 싱랑톤이 가르친 “하나의 진리”를 믿는 믿음과 경배는 결코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확립된 것을 존경하는 경향이 증대하여, 새롭고 더 높은 진리에 대한 추구를 짓누르게 되었습니다. 황인의 특성이 서서히, 알려지지 않은 것의 추구로부터 이미 알려진 것의 보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진보하던 문명이 침체한 이유입니다.

79:8.5 (887.5) Between 4000 and 500 B.C. the political reunification of the yellow race was consummated, but the cultural union of the Yangtze and Yellow river centers had already been effected. This political reunification of the later tribal groups was not without conflict, but the societal opinion of war remained low; ancestor worship, increasing dialects, and no call for military action for thousands upon thousands of years had rendered this people ultrapeaceful. BC 4,000년에서 500년 사이에 황인의 정치적 재(再)통일(統一)이 성취되었지만, 양쯔강과 황허강 중심지들의 문화적 연합은 이미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후기 부족 집단의 이 정치적 재(再)통일(統一)에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에 대한 사회적 소견은 여전히 낮았습니다. 조상 숭배, 방언의 증가와 수천 년 동안 군사 작전 소집이 없어서 이 민족은 과도하게 평화를 누렸습니다.

79:8.6 (887.6) Despite failure to fulfill the promise of an early development of advanced statehood, the yellow race did progressively move forward in the realization of the arts of civilization, especially in the realms of agriculture and horticulture. The hydraulic problems faced by the agriculturists in Shensi and Honan demanded group co-operation for solution. Such irrigation and soil-conservation difficulties contributed in no small measure to the development of interdependence with the consequent promotion of peace among farming groups. 진보적 국가의 초기 개발이 성취될 가망(可望)이 실패했지만, 황인은, 특히 농업과 원예 분야에서, 문명의 기술적 실현에, 진보적으로 전진했습니다. 허난과 쉔시의 농장주들이 직면한 수력(水力)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그런 관개(灌漑)와 토양-보존의 곤경은, 결과적으로 농장을 경영하는 집단 사이에 평화의 증진과 함께 상호의존의 개발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79:8.7 (887.7) Soon developments in writing, together with the establishment of schools, contributed to the dissemination of knowledge on a previously unequaled scale. But the cumbersome nature of the ideographic writing system placed a numerical limit upon the learned classes despite the early appearance of printing. And above all else, the process of social standardization and religio-philosophic dogmatization continued apace. The religious development of ancestor veneration became further complicated by a flood of superstitions involving nature worship, but lingering vestiges of a real concept of God remained preserved in the imperial worship of Shang-ti. 곧 학교들의 설립과 함께 서법(書法글 쓰는 법)이 개발되어, 이전과 견줄 수 없는 규모로 지식의 보급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인쇄술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표의문자(表意文字) 체계의 번거로운 특성으로 인해 학문적 계층의 수(數)는 제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무엇보다, 사회적 표준화와 종교-철학적 독단화 과정이 계속 빨라졌습니다. 조상 숭배의 종교적 발전은 자연 숭배를 포함하는 미신(迷信)의 쇄도로 더 악화했지만, 사라지지 않는 진짜 하느님 개념의 자취는 상제(上帝)의 황제적 경배로 보존되어 남았습니다.

79:8.8 (888.1) The great weakness of ancestor veneration is that it promotes a backward-looking philosophy. However wise it may be to glean wisdom from the past, it is folly to regard the past as the exclusive source of truth. Truth is relative and expanding; it lives always in the present, achieving new expression in each generation of men — even in each human life. 조상 숭배의 커다란 약점은 회고적(回顧的) 철학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과거에서 지혜를 수집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지만, 과거를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이며 발전합니다. 그것은 각 인간 세대에서 심지어 인간 각자의 생활로 새롭게 표현되면서, 언제나 현재에 살아있습니다.

79:8.9 (888.2) The great strength in a veneration of ancestry is the value that such an attitude places upon the family. The amazing stability and persistence of Chinese culture is a consequence of the paramount position accorded the family, for civilization is directly dependent on the effective functioning of the family; and in China the family attained a social importance, even a religious significance, approached by few other peoples. 조상 숭배의 커다란 장점은 그런 태도가 가족에 두는 가치입니다. 중국 문명의 놀라운 안정성과 지속성은 가족에 최고의 위치를 부여한 결과이며, 문명은 바로 가족의 효과적 활동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가족은, 다른 민족이 거의 접근하지 못하는, 사회적 중요성, 심지어 종교적 의미까지 도달했습니다.

79:8.10 (888.3) The filial devotion and family loyalty exacted by the growing cult of ancestor worship insured the building up of superior family relationships and of enduring family groups, all of which facilitated the following factors in the preservation of civilization: 성장하는 조상 숭배 종파가 강요하는 효성스러운 헌신과 가족에 대한 충성은 우수한 가족 관계와 지속적인 가족 집단을 확실히 확립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문명을 보존하는 다음의 요소들을 촉진했습니다.

79:8.11 (888.4) 1. Conservation of property and wealth. 재산과 부(富)의 보존.

79:8.12 (888.5) 2. Pooling of the experience of more than one generation. 한 세대 이상의 체험을 공동 관리.

79:8.13 (888.6) 3. Efficient education of children in the arts and sciences of the past. 과거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으로 효율적인 자녀 교육.

79:8.14 (888.7) 4. Development of a strong sense of duty, the enhancement of morality, and the augmentation of ethical sensitivity. 강한 의무감 개발, 도덕성 향상 및 윤리적 감성의 증대.

79:8.15 (888.8) The formative period of Chinese civilization, opening with the coming of the Andites, continues on down to the great ethical, moral, and semireligious awakening of the sixth century before Christ. And Chinese tradition preserves the hazy record of the evolutionary past; the transition from mother- to father-family, the establishment of agriculture, the development of architecture, the initiation of industry — all these are successively narrated. And this story presents, with greater accuracy than any other similar account, the picture of the magnificent ascent of a superior people from the levels of barbarism. During this time they passed from a primitive agricultural society to a higher social organization embracing cities, manufacture, metalworking, commercial exchange, government, writing, mathematics, art, science, and printing. 안드-사람들의 도래와 함께 열린, 중국 문명의 형성기는, 그리스도 이전 6세기의 위대한 윤리적, 도덕적 및 반(半)종교적 각성까지 아래로 계속됩니다. 그리고 중국의 전승은 진화적 과거에 대한 흐릿한 기록을 보존합니다. 모계(母系)에서 부계(父系)로 변천, 농업의 확립, 건축의 발전, 산업의 개시 – 이 모두가 잇달아 서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비슷한 설명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야만의 수준으로부터 우수한 민족의 장엄한 상승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 기간에 그들은 원시적 농경 사회에서, 도시, 제조업, 금속 세공술, 통상 교류, 정부(政府), 서법(書法글 쓰는 법), 수학, 예술, 과학 및 인쇄술을 포함하는, 더 높은 사회적 체제로 나아갔습니다.

79:8.16 (888.9) And so the ancient civilization of the yellow race has persisted down through the centuries. It is almost forty thousand years since the first important advances were made in Chinese culture, and though there have been many retrogressions, the civilization of the sons of Han comes the nearest of all to presenting an unbroken picture of continual progression right on down to the times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mechanical and religious developments of the white races have been of a high order, but they have never excelled the Chinese in family loyalty, group ethics, or personal morality. 그렇게 황인의 고대 문명은 여러 세기를 거쳐 아래로 지속했습니다. 중국 문화에서 중요한 첫 번째 중요한 진보 이래로 거의 40,000년이 되었고, 여러 차례 퇴보가 있었지만, 한(漢)의 아들들의 문명은 20세기 시대까지 곧장 잇따른 진보에 대해 계속 묘사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백인종들의 기계적·종교적 발전은 높은 상태였지만, 가족 충성, 집단 윤리 혹은 개인적 도덕성에서, 그들은 결코 중국인들을 넘어선 적이 없었습니다.

79:8.17 (888.10) This ancient culture has contributed much to human happiness; millions of human beings have lived and died, blessed by its achievements. For centuries this great civilization has rested upon the laurels of the past, but it is even now reawakening to envision anew the transcendent goals of mortal existence, once again to take up the unremitting struggle for never-ending progress. 이런 고대 문화는 인간 행복에 많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백만의 인간이, 그 고대 문화의 업적에 의해 혜택을 누리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이 위대한 문명은 과거의 명성에 머물렀지만, 그것은 끝없는 진보를 위한 끈질긴 분투(奮鬪)를 다시 한번 계속하려고, 필사 실존의 초월적 목표를 다시 마음에 그리며 지금도 다시 각성하고 있습니다.

79:8.18 (888.11) [Presented by an Archangel of Nebadon.] [네바돈의 천사장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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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0 ​Andite Expansion in the Occident 서양에서 안드인(人) 확장

Paper 80

Andite Expansion in the Occident 서양에서 안드인(人) 확장

1. The Adamites Enter Europe 아담-사람들이 유럽으로 들어가다
2. Climatic and Geologic Changes 기후와 지질(地質) 변화
Flooding of the Mediterranean 지중해의 범람
3. The Cro-Magnoid Blue Man 크로마뇽 청인
4. The Andite Invasions of Europe 안드-사람들의 유럽 침공
5. The Andite Conquest of Northern Europe 안드-사람들의 북유럽 정복
6. The Andites Along the Nile 나일 강변의 안드-사람들
7. Andites of the Mediterranean Isles 지중해 제도의 안드-사람들
8. The Danubian Andonites 다뉴브의 안돈-사람들
9. The Three White Races 세 종류의 백인종

80:0.1 (889.1) ALTHOUGH the European blue man did not of himself achieve a great cultural civilization, he did supply the biologic foundation which, when its Adamized strains were blended with the later Andite invaders, produced one of the most potent stocks for the attainment of aggressive civilization ever to appear on Urantia since the times of the violet race and their Andite successors. 유럽의 청인은 스스로 위대한 문화적 문명을 성취하지 않았지만, 청인의 아담화 혈통이 후기 안드인(人) 침입자들과 섞였을 때, 보라 인종과 안드-사람들 계승자들 시대 이후, 그는 유란시아에 일찍이 출현했던 진취적 문명에 이르기 위해 가장 강력한 혈통 중 하나를 생산한, 생물학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80:0.2 (889.2) The modern white peoples incorporate the surviving strains of the Adamic stock which became admixed with the Sangik races, some red and yellow but more especially the blue. There is a considerable percentage of the original Andonite stock in all the white races and still more of the early Nodite strains. 현대의 백인들은, 상긱 족속들, 일부분은 홍인과 황인이지만 특히 청인과 섞인, 아담 가계의 살아남은 혈통을 합병했습니다. 모든 백인종과 초기 놋 혈통에 더욱더, 상당한 비율의 원래 안돈-사람 혈통이 있습니다.

1. The Adamites Enter Europe 아담-사람들이 유럽으로 들어가다.

80:1.1 (889.3) Before the last Andites were driven out of the Euphrates valley, many of their brethren had entered Europe as adventurers, teachers, traders, and warriors. During the earlier days of the violet race the Mediterranean trough was protected by the Gibraltar isthmus and the Sicilian land bridge. Some of man’s very early maritime commerce was established on these inland lakes, where blue men from the north and the Saharans from the south met Nodites and Adamites from the east. 마지막 안드-사람들이 유프라테스 유역 밖으로 내몰리기 전에, 그들의 여러 동족은 모험가들, 교사들, 상인들 및 전사(戰士)들로서 유럽에 들어갔습니다. 보라 종족의 초기 시절에 지중해 해구(海溝)는 지브롤터 지협(地峽)과 시칠리아 육교(陸橋)로 막혔습니다. 사람의 아주 초기의 일부 해상 무역이 이런 내륙 호수들에 자리를 잡았고, 거기에서 북쪽의 청인들과 남쪽의 사하라 인(人)들이 동쪽의 놋-사람들 및 아담-사람들과 만났습니다.

80:1.2 (889.4) In the eastern trough of the Mediterranean the Nodites had established one of their most extensive cultures and from these centers had penetrated somewhat into southern Europe but more especially into northern Africa. The broad-headed Nodite-Andonite Syrians very early introduced pottery and agriculture in connection with their settlements on the slowly rising Nile delta. They also imported sheep, goats, cattle, and other domesticated animals and brought in greatly improved methods of metalworking, Syria then being the center of that industry. 지중해 해구(海溝)의 동쪽에서 놋-사람들은 가장 광범위한 자기 문화 중 하나를 세웠고, 이런 중심지에서 얼마간 남쪽 유럽으로 그러나 특히 북(北)아프리카로 스며들었습니다. 넓은 머리의 놋-안돈계 시리아인(人)들은, 서서히 솟아오르는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자기 정착지들과 연락하여 아주 초기에 도기 제조법과 농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양, 염소. 소 및 기타 가축을 수입했고, 크게 개량한 금속 세공술을 도입하여, 당시 시리아는 그런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80:1.3 (889.5) For more than thirty thousand years Egypt received a steady stream of Mesopotamians, who brought along their art and culture to enrich that of the Nile valley. But the ingress of large numbers of the Sahara peoples greatly deteriorated the early civilization along the Nile so that Egypt reached its lowest cultural level some fifteen thousand years ago. 3만 년 이상 이집트는 계속 흘러 들어오는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문화를 가져와서 나일강 유역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수(數)의 사하라 민족이 유입되어 나일강을 끼고 있는 초기 문명이 크게 떨어졌고 이집트는 약 15,000년 전에 가장 낮은 문화적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80:1.4 (889.6) But during earlier times there was little to hinder the westward migration of the Adamites. The Sahara was an open grazing land overspread by herders and agriculturists. These Saharans never engaged in manufacture, nor were they city builders. They were an indigo-black group which carried extensive strains of the extinct green and orange races. But they received a very limited amount of the violet inheritance before the upthrust of land and the shifting water-laden winds dispersed the remnants of this prosperous and peaceful civilization. 그러나 초기 시절에 아담-사람들의 서향(西向) 이주(移住)는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하라는 목동들과 농부들로 뒤덮인 개방된 목초지였습니다. 이 사하라인(人)들은 제조업에 종사한 적도 없었고, 도시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멸종한 녹인(人) 및 주황인(人)의 혈통을 많이 지녔던 남-흑(藍-黑)색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각의 융기(隆起)와 물로 가득한 바람의 이동으로 평화롭게 번영하는 이 문명의 자취를 흩어 버리기 전에, 아주 제한된 양(量)의 보라 유전형질을 받았습니다.

80:1.5 (890.1) Adam’s blood has been shared with most of the human races, but some secured more than others. The mixed races of India and the darker peoples of Africa were not attractive to the Adamites. They would have mixed freely with the red man had he not been far removed in the Americas, and they were kindly disposed toward the yellow man, but he was likewise difficult of access in faraway Asia. Therefore, when actuated by either adventure or altruism, or when driven out of the Euphrates valley, they very naturally chose union with the blue races of Europe. 아담의 피가 인류 대부분에게 공유되었지만, 다른 인종보다 더 많이 확보한 인종도 있었습니다. 인도의 혼합 종족들과 아프리카의 까만 민족들은 아담-사람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습니다. 홍인이 아메리카들로 멀리 이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홍인과 자유롭게 섞였을 것이고, 그들은 황인을 향해 진심으로 마음이 내켰지만, 그는 마찬가지로 멀리 아시아에서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험이나 애타주의(愛他主義)로 행하든지 혹은 유프라테스 유역 밖으로 밀려났을 때,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유럽의 청색 종족들과 연합하기를 택했습니다.

80:1.6 (890.2) The blue men, then dominant in Europe, had no religious practices which were repulsive to the earlier migrating Adamites, and there was great sex attraction between the violet and the blue races. The best of the blue men deemed it a high honor to be permitted to mate with the Adamites. Every blue man entertained the ambition of becoming so skillful and artistic as to win the affection of some Adamite woman, and it was the highest aspiration of a superior blue woman to receive the attentions of an Adamite.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청인들은, 초기에 이주하는 아담-사람들에게 불쾌한, 종교적 활동이 없었고, 보라와 청인종 사이에 커다란 성적 매력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청인들은 아담-사람들과 결혼하도록 허락되는 것을 높은 명예로 여겼습니다. 모든 청색 남성은, 어떤 아담-사람 여성의 애정을 얻을 만큼, 아주 훌륭하고 멋있게 되려는 열망을 품었고, 우수한 청색 여성에게 최고의 열망은 아담-사람의 주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80:1.7 (890.3) Slowly these migrating sons of Eden united with the higher types of the blue race, invigorating their cultural practices while ruthlessly exterminating the lingering strains of Neanderthal stock. This technique of race blending, combined with the elimination of inferior strains, produced a dozen or more virile and progressive groups of superior blue men, one of which you have denominated the Cro-Magnons. 이렇게 이주하는 에덴의 아들들은 서서히 높은 유형의 청인과 연합하며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활력을 준 반면에, 남아 있는 네안데르탈인(人) 가계의 혈통을 무자비하게 몰살했습니다. 이러한 종족 혼합의 기법은 열등한 혈통 제거와 결합하여 힘차게 진보적이며 우수한 청인 중 열둘 이상을 낳았는데, 너희는 그중 하나를 크로마뇽인(人)들이라고 불렀습니다.

80:1.8 (890.4) For these and other reasons, not the least of which was more favorable paths of migration, the early waves of Mesopotamian culture made their way almost exclusively to Europe. And it was these circumstances that determined the antecedents of modern European civilization. 이런 것들 및 다른 이유들로 인해서, 더 유리한 이주 경로가 조금도 없었지만,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초기 물결은 거의 오로지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현대 유럽 문명의 내력을 결정했습니다.

2. Climatic and Geologic Changes 기후와 지질(地質) 변화

80:2.1 (890.5) The early expansion of the violet race into Europe was cut short by certain rather sudden climatic and geologic changes. With the retreat of the northern ice fields the water-laden winds from the west shifted to the north, gradually turning the great open pasture regions of Sahara into a barren desert. This drought dispersed the smaller-statured brunets, dark-eyed but long-headed dwellers of the great Sahara plateau. 유럽에 들어간 보라 인종의 초기 확장은 오히려 갑작스러운 기후와 지질 변화로 가로막혔습니다. 북쪽의 빙원들이 물러가면서, 물이 가득한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사하라의 개방된 커다란 목초지가 점차 메마른 사막이 되었습니다. 이 가뭄으로 커다란 사하라 고원의 키가 작으며 거무스름한 피부, 검은 눈이지만 머리가 긴 거주자들이 흩어졌습니다.

80:2.2 (890.6) The purer indigo elements moved southward to the forests of central Africa, where they have ever since remained. The more mixed groups spread out in three directions: The superior tribes to the west migrated to Spain and thence to adjacent parts of Europe, forming the nucleus of the later Mediterranean long-headed brunet races. The least progressive division to the east of the Sahara plateau migrated to Arabia and thence through northern Mesopotamia and India to faraway Ceylon. The central group moved north and east to the Nile valley and into Palestine. 더 순혈(純血)의 남(藍)인 활동 영역이 중앙아프리카의 산림까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 이래 줄곧 그들은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더 섞인 집단은 세 방향으로 퍼졌습니다. 우수한 부족들은 스페인까지 서쪽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인근 유럽의 부분들에 이르러 후대에 지중해에서 긴 머리의 거무스름한 인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하라 고원의 동쪽에서 진보가 가장 덜 된 나머지는 아라비아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메소포타미아 북쪽과 인도를 통해 멀리 스리랑카에 이르렀습니다. 중앙 집단은 나일강 유역까지 북쪽과 동쪽으로 이동했고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습니다.

80:2.3 (890.7) It is this secondary Sangik substratum that suggests a certain degree of kinship among the modern peoples scattered from the Deccan through Iran, Mesopotamia, and along both shores of the Mediterranean Sea. 이런 2차 상긱 계층은, 데칸에서부터 이란,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지중해의 양쪽 해안을 따라 흩어졌던 현대 민족 사이에서 어느 정도 친족관계의 동기가 됩니다.

80:2.4 (890.8) About the time of these climatic changes in Africa, England separated from the continent, and Denmark arose from the sea, while the isthmus of Gibraltar, protecting the western basin of the Mediterranean, gave way as the result of an earthquake, quickly raising this inland lake to the level of the Atlantic Ocean. Presently the Sicilian land bridge submerged, creating one sea of the Mediterranean and connecting it with the Atlantic Ocean. This cataclysm of nature flooded scores of human settlements and occasioned the greatest loss of life by flood in all the world’s history.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기후가 변할 무렵에, 영국이 대륙에서 분리되었고, 덴마크는 바다에서 솟아올랐으며, 한편 지중해의 서쪽 분지를 보호하는 지브롤터 지협(地峽)이 지진의 결과로 무너져, 이 내륙의 호수가 대서양의 수위(水位)까지 빨리 올라갔습니다. 즉시 시칠리아 육교가 물에 잠겨, 지중해라는 하나의 바다가 만들어지면서 대서양과 연결되었습니다. 자연의 이 지각 변동으로 수십 개의 거주지가 침수되었고, 전 세계의 역사에서 홍수로 가장 크게 생명이 손실되었습니다.

80:2.5 (891.1) This engulfment of the Mediterranean basin immediately curtailed the westward movements of the Adamites, while the great influx of Saharans led them to seek outlets for their increasing numbers to the north and east of Eden. As the descendants of Adam journeyed northward from the valleys of the Tigris and Euphrates, they encountered mountainous barriers and the then expanded Caspian Sea. And for many generations the Adamites hunted, herded, and tilled the soil around their settlements scattered throughout Turkestan. Slowly this magnificent people extended their territory into Europe. But now the Adamites enter Europe from the east and find the culture of the blue man thousands of years behind that of Asia since this region has been almost entirely out of touch with Mesopotamia. 지중해 분지가 이렇게 가라앉으면서 아담-사람들은 바로 서쪽으로 이동하지 못했고, 한편 사하라인(人)의 대량 유입으로 늘어나는 숫자로 인해 그들은 에덴의 북쪽과 동쪽으로 출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유역에서부터 북쪽으로 여행하자, 그들은 산지의 장벽들과 당시 팽창하던 카스피해(海)와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여러 세대 동안 아담-사람들은 투르키스탄 전역에 흩어진 자신들의 정착지 주변에서 사냥하고, 목축하며, 땅을 경작했습니다. 서서히 이 훌륭한 민족은 자신들의 영토를 유럽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동쪽에서부터 유럽으로 들어간 아담-사람들은 이제 청인의 문화가 아시아의 문화보다 수 천 년간 뒤처진 것을 발견했는데, 이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거의 완전히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The Cro-Magnoid Blue Man 크로마뇽 청인

80:3.1 (891.2) The ancient centers of the culture of the blue man were located along all the rivers of Europe, but only the Somme now flows in the same channel which it followed during preglacial times. 청인의 고대 문화 중심지들은 유럽의 모든 강을 따라 있었지만, 빙하기 이전 시대에 따랐던 같은 경로로 현재 솜Somme강만 흐르고 있습니다.

80:3.2 (891.3) While we speak of the blue man as pervading the European continent, there were scores of racial types. Even thirty-five thousand years ago the European blue races were already a highly blended people carrying strains of both red and yellow, while on the Atlantic coastlands and in the regions of present-day Russia they had absorbed a considerable amount of Andonite blood and to the south were in contact with the Saharan peoples. But it would be fruitless to attempt to enumerate the many racial groups. 우리는 청인이 유럽 대륙에 널리 펴져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수십 유형의 인종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35,000년 전에도 유럽의 청인종들은 많이 혼합되어, 이미 홍인과 황인의 혈통을 지녔고, 한편 대서양 연안 지역과 오늘날 러시아 지역에서 그들은 안돈-사람 혈통의 상당한 양(量)을 흡수했으며, 남쪽으로 사하라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인종 집단을 열거하려는 시도는 무익할 것입니다.

80:3.3 (891.4) The European civilization of this early post-Adamic period was a unique blend of the vigor and art of the blue men with th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Adamites. The blue men were a race of great vigor, but they greatly deteriorated the cultural and spiritual status of the Adamites. It was very difficult for the latter to impress their religion upon the Cro-Magnoids because of the tendency of so many to cheat and to debauch the maidens. For ten thousand years religion in Europe was at a low ebb as compared with the developments in India and Egypt. 아담 이후 시기의 이런 초기 유럽 문명은 청인의 활력과 기술이 아담-사람들의 창조적 상상력과 독특하게 섞인 것이었습니다. 청인들은 원기가 왕성한 인종이었지만, 그들은 아담-사람들의 문화적·영적 상태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많은 아담-사람들이 청인 처녀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경향 때문에, 자기 종교를 크로마뇽인들에게 인식을 시키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1만 년 동안 유럽의 종교는 인도와 이집트의 발전에 비해서 쇠퇴기에 있었습니다.

80:3.4 (891.5) The blue men were perfectly honest in all their dealings and were wholly free from the sexual vices of the mixed Adamites. They respected maidenhood, only practicing polygamy when war produced a shortage of males. 청인들은 그들의 모든 거래에서 완전히 정직했고, 뒤섞인 아담-사람들의 성적 부도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순결을 존중했고, 일부다처제를 실행한 유일한 경우는 전쟁으로 남성이 부족할 때였습니다.

80:3.5 (891.6) These Cro-Magnon peoples were a brave and farseeing race. They maintained an efficient system of child culture. Both parents participated in these labors, and the services of the older children were fully utilized. Each child was carefully trained in the care of the caves, in art, and in flint making. At an early age the women were well versed in the domestic arts and in crude agriculture, while the men were skilled hunters and courageous warriors. 이 크로마뇽 민족은 용감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인종이었습니다. 그들은 효과적인 자녀 양육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부모 둘 다 이런 수고에 참여했고, 큰 자녀들의 도움이 충분히 활용되었습니다. 각 자녀는 동굴 지키기, 기술 및 부싯돌을 만들도록 신중히 훈련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여성들은 가사 기술과 초기 농업에 잘 숙달되었던 반면에 남성들은 숙련된 사냥꾼과 용감한 전사(戰士)들이었습니다.

80:3.6 (891.7) The blue men were hunters, fishers, and food gatherers; they were expert boatbuilders. They made stone axes, cut down trees, erected log huts, partly below ground and roofed with hides. And there are peoples who still build similar huts in Siberia. The southern Cro-Magnons generally lived in caves and grottoes. 청인들은 사냥꾼, 어부들 및 식량 채집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숙련된 보트 건조(建造)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돌도끼를 만들어, 나무를 잘라, 통나무 오두막을 세워, 일부는 땅 밑에 두고, 가죽으로 지붕처럼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여전히 비슷한 오두막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쪽 크로마뇽인들은 대개 동굴과 석굴에서 살았습니다.

80:3.7 (892.1) It was not uncommon during the rigors of winter for their sentinels standing on night guard at cave entrances to freeze to death. They had courage, but above all they were artists; the Adamic mixture suddenly accelerated creative imagination. The height of the blue man’s art was about fifteen thousand years ago, before the days when the darker-skinned races came north from Africa through Spain. 혹독한 겨울에 야간에 경비하며 서 있는 파수꾼들이 동굴 입구에서 얼어 죽는 것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용감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술가였습니다. 아담-사람들과 섞이면서 갑자기 창조적 상상력이 빨라졌습니다. 청인 예술의 절정은 약 15,000년 전 피부가 검은 인종이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에서 오기 이전(以前)이었습니다.

80:3.8 (892.2) About fifteen thousand years ago the Alpine forests were spreading extensively. The European hunters were being driven to the river valleys and to the seashores by the same climatic coercion that had turned the world’s happy hunting grounds into dry and barren deserts. As the rain winds shifted to the north, the great open grazing lands of Europe became covered by forests. These great and relatively sudden climatic modifications drove the races of Europe to change from open-space hunters to herders, and in some measure to fishers and tillers of the soil. 약 15,000년 전에 알프스산맥의 삼림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즐거운 사냥터를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으로 바꾼 바로 그 기후의 강요로 인해, 유럽의 사냥꾼들은 강 유역과 해안으로 쫓기고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북쪽으로 바뀌자, 유럽의 개방된 커다란 목초지는 삼림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하며, 비교적 갑작스러운 기후 변경으로 유럽의 인종들이 몰려서, 개방된 빈터의 사냥꾼들에서 목자들로 바뀌었고, 어느 정도는 어부들와 땅의 농부들이 되었습니다.

80:3.9 (892.3) These changes, while resulting in cultural advances, produced certain biologic retrogressions. During the previous hunting era the superior tribes had intermarried with the higher types of war captives and had unvaryingly destroyed those whom they deemed inferior. But as they commenced to establish settlements and engage in agriculture and commerce, they began to save many of the mediocre captives as slaves. And it was the progeny of these slaves that subsequently so greatly deteriorated the whole Cro-Magnon type. This retrogression of culture continued until it received a fresh impetus from the east when the final and en masse invasion of the Mesopotamians swept over Europe, quickly absorbing the Cro-Magnon type and culture and initiating the civilization of the white races. 이런 변화로 문화적인 진보를 이루었지만, 어떤 생물학적 퇴보가 일어났습니다. 이전 사냥을 하던 시대에, 우수한 부족들은 높은 유형의 전쟁 포로들과 결혼했으며, 자신들이 열등하게 여긴 사람들을 어김없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지를 세우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들은 평범한 포로들을 노예로써 많이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의 자손이 나중에 크로마뇽인 유형 전체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의 최종적이며 전반적인 침공이 유럽을 휩쓸어, 크로마뇽 유형과 문화를 신속히 흡수하고, 백인종들의 문화를 시작하면서, 동쪽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을 때까지, 이런 문화적 퇴보가 지속했습니다.

4. The Andite Invasions of Europe  안드-사람들의 유럽 침공

80:4.1 (892.4) While the Andites poured into Europe in a steady stream, there were seven major invasions, the last arrivals coming on horseback in three great waves. Some entered Europe by way of the islands of the Aegean and up the Danube valley, but the majority of the earlier and purer strains migrated to northwestern Europe by the northern route across the grazing lands of the Volga and the Don. 안드-사람들이 한결같은 흐름으로 유럽에 흘러 들어가는 동안, 커다란 7번의 침공이 있었고, 마지막 도착자들은 말을 타고 3차례의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일부는 에게해 제도를 거쳐 다뉴브 유역 내륙으로 유럽에 들어왔지만, 초기 더 순수한 혈통 대부분은 볼가강과 돈강의 목초지를 가로질러 북쪽 노선으로 북서 유럽으로 이주했습니다.

80:4.2 (892.5) Between the third and fourth invasions a horde of Andonites entered Europe from the north, having come from Siberia by way of the Russian rivers and the Baltic. They were immediately assimilated by the northern Andite tribes. 셋째와 넷째 침공 사이에 대집단의 안돈-사람들이 러시아 강들과 발트해를 거쳐 시베리아에서 와서, 북쪽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북쪽의 안드-사람 부족들에게 즉시 흡수되었습니다.

80:4.3 (892.6) The earlier expansions of the purer violet race were far more pacific than were those of their later semimilitary and conquest-loving Andite descendants. The Adamites were pacific; the Nodites were belligerent. The union of these stocks, as later mingled with the Sangik races, produced the able, aggressive Andites who made actual military conquests. 더 순수한 보라 인종의 초기 팽창은, 나중에 어느 정도 군사적이며 정복을-좋아하는 안드-사람들 후손의 팽창보다 더 평화적이었습니다. 아담-사람들은 평화적이었고, 놋-사람들은 호전적이었습니다. 이런 혈통들의 연합이 나중에 산긱 인종들과 섞여서, 실제로 군사적으로 정복했던, 유능하고 공격적인 안드-사람들을 낳았습니다.

80:4.4 (892.7) But the horse was the evolutionary factor which determined the dominance of the Andites in the Occident. The horse gave the dispersing Andites the hitherto nonexistent advantage of mobility, enabling the last groups of Andite cavalrymen to progress quickly around the Caspian Sea to overrun all of Europe. All previous waves of Andites had moved so slowly that they tended to disintegrate at any great distance from Mesopotamia. But these later waves moved so rapidly that they reached Europe as coherent groups, still retaining some measure of higher culture. 그러나 서양에서 안드-사람들의 지배를 결정했던 진화적 요소는 말(馬)이었습니다. 말은 분산되는 안드-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기동성의 이점을 주었고, 마지막 집단의 안드-사람 기병대는 카스피해(海)를 재빨리 돌아서, 진행하여 유럽 전반에 걸쳐 퍼졌습니다. 이전의 모든 안드-사람들의 물결은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먼 곳에서, 그들은 허물어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후대의 물결은 너무 빨라서, 그들은 어느 정도 높은 문화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긴밀히 결합한 집단으로 유럽에 이르렀습니다.

80:4.5 (893.1) The whole inhabited world, outside of China and the Euphrates region, had made very limited cultural progress for ten thousand years when the hard-riding Andite horsemen made their appearance in the sixth and seventh millenniums before Christ. As they moved westward across the Russian plains, absorbing the best of the blue man and exterminating the worst, they became blended into one people. These were the ancestors of the so-called Nordic races, the forefathers of the Scandinavian, German, and Anglo-Saxon peoples. 격렬한 안드-사람 기수(騎手)들이 그리스도 이전(以前) 6,000년과 7,000년에 출현했을 때, 중국과 유프라테스 지역 밖에 있는 모든 거주 세계는 1만 년 동안 문화적 진보가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 평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최고의 청인을 흡수하고 가장 열등한 자들을 몰살하면서 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혼합되었습니다. 이들이 소위 노르딕 인종의 조상, 스칸디나비아인(人)·독일인(人)·앵글로색슨 민족들의 조상들이었습니다.

80:4.6 (893.2) It was not long before the superior blue strains had been fully absorbed by the Andites throughout all northern Europe. Only in Lapland (and to a certain extent in Brittany) did the older Andonites retain even a semblance of identity.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북유럽 전체에서, 우수한 청색 혈통들이 안드-사람들에게 완전히 흡수되었습니다. 라플란드에서만 (그리고 어느 정도 브르타뉴에서) 더 오래된 안돈-사람들이 바로 비슷한 용모를 유지했습니다.

5. The Andite Conquest of Northern Europe 안드-사람들의 북유럽 정복

80:5.1 (893.3) The tribes of northern Europe were being continuously reinforced and upstepped by the steady stream of migrants from Mesopotamia through the Turkestan-south Russian regions, and when the last waves of Andite cavalry swept over Europe, there were already more men with Andite inheritance in that region than were to be found in all the rest of the world. 북유럽의 부족들은, 투르키스탄-남부 러시아 지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한결같은 흐름의 이주자들로 인해, 계속 증강되고 증진되었으며, 마지막 말을 탄, 안드-사람들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을 때, 세상의 나머지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그 지역에 안드-사람의 유전형질을 지닌 사람들이 이미 더 많이 있었습니다.

80:5.2 (893.4) For three thousand years the military headquarters of the northern Andites was in Denmark. From this central point there went forth the successive waves of conquest, which grew decreasingly Andite and increasingly white as the passing centuries witnessed the final blending of the Mesopotamian conquerors with the conquered peoples. 3,000년 간 북쪽 안드-사람들의 군사 본부는 덴마크에 있었습니다. 이 중심지에서 연속적인 정복의 물결이 시작되었고,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과 정복된 민족들이 최종적으로 섞이면서, 안드-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백인들은 점점 증가했습니다.

80:5.3 (893.5) While the blue man had been absorbed in the north and eventually succumbed to the white cavalry raiders who penetrated the south, the advancing tribes of the mixed white race met with stubborn and protracted resistance from the Cro-Magnons, but superior intelligence and ever-augmenting biologic reserves enabled them to wipe the older race out of existence. 청인은 북쪽에서 흡수되었고, 결국 남쪽으로 침투한 백인 기병 침입자들에게 굴복되었으며, 전진하는 혼합된 백인종 부족들은 크로마뇽인(人)들의 지속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우월한 지능과 계속-증대하는 생물학적 비축(備蓄)량으로 그들은 옛 종족을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80:5.4 (893.6) The decisive struggles between the white man and the blue man were fought out in the valley of the Somme. Here, the flower of the blue race bitterly contested the southward-moving Andites, and for over five hundred years these Cro-Magnoids successfully defended their territories before succumbing to the superior military strategy of the white invaders. Thor, the victorious commander of the armies of the north in the final battle of the Somme, became the hero of the northern white tribes and later on was revered as a god by some of them. 백인과 청인 사이에 결정적 투쟁은 끝까지 싸웠던 솜강 유역에서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청인의 정예병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안드-사람들과 격렬히 싸웠고, 백인 침략자들의 우수한 군사 전략에 굴복하기 이전에, 500년 이상 크로마뇽인(人)들은 자기 영토를 성공적으로 지켰습니다. 솜강의 최종 전투에서, 북쪽 승리군의 사령관 토르는 북쪽 백인 부족들의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 그들의 일부가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존경했습니다.

80:5.5 (893.7) The strongholds of the blue man which persisted longest were in southern France, but the last great military resistance was overcome along the Somme. The later conquest progressed by commercial penetration, population pressure along the rivers, and by continued intermarriage with the superiors, coupled with the ruthless extermination of the inferiors. 가장 오래 살아남은 청인의 요새는 남부 프랑스에 있었지만, 마지막 커다란 군사적 저항은 솜강을 따라서 정복되었습니다. 후일에, 상업적 침투, 강들에 따른 인구 압력 및 열등한 자들의 무자비한 근절과 함께, 우수한 자들과 계속된 결혼으로, 정복이 진행되었습니다.

80:5.6 (893.8) When the tribal council of the Andite elders had adjudged an inferior captive to be unfit, he was, by elaborate ceremony, committed to the shaman priests, who escorted him to the river and administered the rites of initiation to the “happy hunting grounds” — lethal submergence. In this way the white invaders of Europe exterminated all peoples encountered who were not quickly absorbed into their own ranks, and thus did the blue man come to an end — and quickly. 안드-사람 원로들의 부족 회의에서 열등한 포로가 부적합하다고 판결되면, 그는 정교한 예식을 거쳐 무당 제사장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이 그를 강으로 호송하고 “행복 사냥터”로 입회식을 집행하여 익사(溺死)시켰습니다. 이렇게 유럽의 백인 침략자들은 자기 계층에 빨리 흡수되지 않고 대항했던 모든 민족을 몰살했으며, 그렇게 청인은 빨리 멸종했습니다.

80:5.7 (893.9) The Cro-Magnoid blue man constituted the biologic foundation for the modern European races, but they have survived only as absorbed by the later and virile conquerors of their homelands. The blue strain contributed many sturdy traits and much physical vigor to the white races of Europe, but the humor and imagination of the blended European peoples were derived from the Andites. This Andite-blue union, resulting in the northern white races, produced an immediate lapse of Andite civilization, a retardation of a transient nature. Eventually, the latent superiority of these northern barbarians manifested itself and culminated in present-day European civilization. 크로마뇽 청인은 현대 유럽 인종의 생물학적 토대였지만, 후일 자기 고국의 강력한 정복자들에 흡수되어, 그들은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청색 혈통이 유럽의 백인종에게 튼튼한 여러 특성과 많은 신체적 활력을 주었지만, 혼합된 유럽 민족들의 유머와 상상력은 안드-사람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런 안드-청인 연합의 결과는, 북부 백인종이었고, 안드-사람 문명의 직접적 쇠퇴, 일시적 본성이 지체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북쪽 야만인들의 잠재된 우성(優性)이 나타나, 오늘날 유럽 문명이 전성기에 이르렀습니다.

80:5.8 (894.1) By 5000 B.C. the evolving white races were dominant throughout all of northern Europe, including northern Germany, northern France, and the British Isles. Central Europe was for some time controlled by the blue man and the round-headed Andonites. The latter were mainly situated in the Danube valley and were never entirely displaced by the Andites. BC 5,000년에 진화하는 백인종들이 북부 독일, 북부 프랑스 및 영국 제도를 포함하는 북유럽 전역을 지배했습니다. 청인과 둥근-머리의 안돈 사람들이 한동안 유럽 중심을 지배했습니다. 후자(안돈 사람들)는 주로 다뉴브 유역에 있었고, 결코 안드-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추방되지 않았습니다.

6. The Andites Along the Nile 나일 강변의 안드-사람들

80:6.1 (894.2) From the times of the terminal Andite migrations, culture declined in the Euphrates valley, and the immediate center of civilization shifted to the valley of the Nile. Egypt became the successor of Mesopotamia as the headquarters of the most advanced group on earth. 마지막 안드-사람들의 이주(移住) 시기로부터, 문화는 유프라테스 유역에서 쇠퇴했고, 즉시 문명의 중심지는 나일강 유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집트는 지상에서 가장 진보한 집단의 본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80:6.2 (894.3) The Nile valley began to suffer from floods shortly before the Mesopotamian valleys but fared much better. This early setback was more than compensated by the continuing stream of Andite immigrants, so that the culture of Egypt, though really derived from the Euphrates region, seemed to forge ahead. But in 5000 B.C., during the flood period in Mesopotamia, there were seven distinct groups of human beings in Egypt; all of them, save one, came from Mesopotamia. 나일 강 유역은 메소포타미아 유역에 앞서 잠시 홍수를 겪기 시작했지만, 훨씬 좋아졌습니다. 이런 초기의 퇴보는 계속된 안드-사람들의 이주(移住) 흐름으로 충분히 상쇄(相殺)되어서, 유프라테스 지역에서 정말 파생했지만, 이집트의 문화가 서서히 선두에 나서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BC 5,000년,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기간에 이집트에는 서로 다른 일곱 집단의 인간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집단을 제외하면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왔습니다.

80:6.3 (894.4) When the last exodus from the Euphrates valley occurred, Egypt was fortunate in gaining so many of the most skillful artists and artisans. These Andite artisans found themselves quite at home in that they were thoroughly familiar with river life, its floods, irrigations, and dry seasons. They enjoyed the sheltered position of the Nile valley; they were there much less subject to hostile raids and attacks than along the Euphrates. And they added greatly to the metalworking skill of the Egyptians. Here they worked iron ores coming from Mount Sinai instead of from the Black Sea regions. 유프라테스 유역에서 마지막 집단 대이동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는 복을 받아 가장 숙련된 대가(大家)들과 장인(匠人)들을 많이 확보했습니다. 이런 안드-사람들 장인(匠人)들은 강의 생활, 홍수, 관개(灌漑) 및 건기(乾期)에 속속들이 정통해서 그들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그들은 나일 유역의 보호받는 위치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변(江邊) 보다 적의 습격과 공격을 훨씬 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의 금속 세공술을 대단히 추가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흑해 지역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사용했습니다.

80:6.4 (894.5) The Egyptians very early assembled their municipal deities into an elaborate national system of gods. They developed an extensive theology and had an equally extensive but burdensome priesthood. Several different leaders sought to revive the remnants of the early religious teachings of the Sethites, but these endeavors were short-lived. The Andites built the first stone structures in Egypt. The first and most exquisite of the stone pyramids was erected by Imhotep, an Andite architectural genius, while serving as prime minister. Previous buildings had been constructed of brick, and while many stone structures had been erected in different parts of the world, this was the first in Egypt. But the art of building steadily declined from the days of this great architect. 이집트인들은 아주 일찍 자치도시의 신(神)들을 정교한 국가 신들 체제로 정리했습니다. 그들은 광대한 신학을 개발하고 마찬가지로 광대하지만 번거로운 사제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부 다른 지도자들이 셋-사람들의 초기 종교적 가르침의 잔재(殘滓자취)를 되살리려고 했지만, 이런 노력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안드-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최초로 석조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안드-사람 천재 건축가, 임호텝이, 수상으로 일할 때, 최초의 가장 세련된 석조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이전(以前)의 건물들은 벽돌로 지어졌고, 여러 석조 건축물이 세계 각지에 세워져 있었지만, 이집트에서 이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 기술은 위대한 이 건축가 시절부터 꾸준히 쇠퇴(衰退)했습니다.

80:6.5 (894.6) This brilliant epoch of culture was cut short by internal warfare along the Nile, and the country was soon overrun, as Mesopotamia had been, by the inferior tribes from inhospitable Arabia and by the blacks from the south. As a result, social progress steadily declined for more than five hundred years. 찬란한 이런 문화의 획기적(劃期的) 시대는 나일 강변의 내란으로 갑자기 끝났으며,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처럼, 황량한 아라비아의 열등한 부족들과 남쪽의 흑인들이 머지않아 나라를 마구 짓밟았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 진보는 500년 이상 꾸준히 쇠퇴했습니다.

7. Andites of the Mediterranean Isles 지중해 제도의 안드-사람들

80:7.1 (895.1) During the decline of culture in Mesopotamia there persisted for some time a superior civilization on the islands of the eastern Mediterranean.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쇠퇴하는 동안, 동쪽 지중해 제도에서 우수한 문명이 얼마간 지속했습니다.

80:7.2 (895.2) About 12,000 B.C. a brilliant tribe of Andites migrated to Crete. This was the only island settled so early by such a superior group, and it was almost two thousand years before the descendants of these mariners spread to the neighboring isles. This group were the narrow-headed, smaller-statured Andites who had intermarried with the Vanite division of the northern Nodites. They were all under six feet in height and had been literally driven off the mainland by their larger and inferior fellows. These emigrants to Crete were highly skilled in textiles, metals, pottery, plumbing, and the use of stone for building material. They engaged in writing and carried on as herders and agriculturists. BC 12,000년경, 훌륭한 안드-사람들 부족이 크레타로 이주했습니다. 이 섬은 그토록 우수한 집단이 초기에 정착했던 유일한 섬이었고, 거의 2,000년이 지나서 이 뱃사람의 후손들이 이웃 섬들까지 퍼졌습니다. 이 집단은 머리가 좁고, 작은 키의 안드-사람들로서 북쪽 놋-사람 중에서 반-사람들 분파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키는 모두 6피트(183cm) 미만으로, 그들보다 크고 열등한 동료들이 대륙에서 사실상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크레타로 이주한 이들은 직물, 금속, 도기, 배관 및 건축 자재로써 돌을 사용하는 일에 고도로 숙련되었습니다. 그들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목자들과 농업 종사자들로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80:7.3 (895.3) Almost two thousand years after the settlement of Crete a group of the tall descendants of Adamson made their way over the northern islands to Greece, coming almost directly from their highland home north of Mesopotamia. These progenitors of the Greeks were led westward by Sato, a direct descendant of Adamson and Ratta. 크레타에 정착한 후 거의 2,000년에, 키 큰 아담선의 후손들 집단이, 메소포타미아의 북쪽 고지의 고향에서 거의 바로 와서, 북쪽 섬들을 건너 그리스까지 갔습니다. 아담선과 롸타의 직계 후손, 사토가 이 그리스 선조들을 서쪽으로 인도했습니다.

80:7.4 (895.4) The group which finally settled in Greece consisted of three hundred and seventy-five of the selected and superior people comprising the end of the second civilization of the Adamsonites. These later sons of Adamson carried the then most valuable strains of the emerging white races. They were of a high intellectual order and, physically regarded, the most beautiful of men since the days of the first Eden. 결국 그리스에 정착한 집단은, 아담선의 마지막 둘째 문명을 형성하는, 선택된 우수한 사람 375명이었습니다. 아담선의 이런 후기 아들들은 당시에 생겨난 백인종 중 가장 귀중한 혈통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고도의 지적 계층에 속했고, 육체적으로 볼 때, 첫째 에덴 시절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80:7.5 (895.5) Presently Greece and the Aegean Islands region succeeded Mesopotamia and Egypt as the Occidental center of trade, art, and culture. But as it was in Egypt, so again practically all of the art and science of the Aegean world was derived from Mesopotamia except for the culture of the Adamsonite forerunners of the Greeks. All the art and genius of these latter people is a direct legacy of the posterity of Adamson, the first son of Adam and Eve, and his extraordinary second wife, a daughter descended in an unbroken line from the pure Nodite staff of Prince Caligastia. No wonder the Greeks had mythological traditions that they were directly descended from gods and superhuman beings. 즉시 그리스와 에게해 제도 지역은 무역, 예술 및 문화의 서양 중심지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아담선-사람들 선조들의 문화를 제외하고, 이집트에서 그랬듯이, 에게해 세계의 모든 예술과 과학은 사실 또다시 메소포타미아에서 파생했습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의 모든 예술과 소질은 아담선과 그의 비범한 둘째 아내의 후손에 속한 직접적 유산인데, 아담선은 아담과 이브의 첫아들이고, 그의 아내는 왕자 칼리가스티아의 순수한 놋-사람 보좌진의 계속된 가계의 계통을 잇는 딸입니다. 그리스인들이 하느님과 같은 자들과 초인간 존재들로부터 직접 내려왔다는 신화적 전통을 가졌던 것은 당연합니다.

80:7.6 (895.6) The Aegean region passed through five distinct cultural stages, each less spiritual than the preceding, and erelong the last glorious era of art perished beneath the weight of the rapidly multiplying mediocre descendants of the Danubian slaves who had been imported by the later generations of Greeks. 에게해 지역은 문화적으로 독특한 다섯 단계를 거쳤는데, 각 단계는 이전 단계보다 덜 영적이었으며, 후대의 그리스인 세대들이 들여온 다뉴브 노예의 평범한 후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무게 아래에서, 머지않아 예술의 마지막 영광스러운 세대가 사라졌습니다.

80:7.7 (895.7) It was during this age in Crete that the mother cult of the descendants of Cain attained its greatest vogue. This cult glorified Eve in the worship of the “great mother.” Images of Eve were everywhere. Thousands of public shrines were erected throughout Crete and Asia Minor. And this mother cult persisted on down to the times of Christ, becoming later incorporated in the early Christian religion under the guise of the glorification and worship of Mary the earth mother of Jesus. 이 시기에, 크레타에서 카인의 후손 중 어머니 종파가 가장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 종파는 “위대한 어머니”를 숭배하면서 이브를 찬미했습니다. 이브의 형상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수천의 공적 사당이 크레타와 소아시아 전역에 세워졌습니다. 이 어머니 종파는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계속 내려왔는데 나중에 예수의 지상 어머니 마리아의 찬미와 숭배를 가장하여 초기 기독교에 합병되었습니다.

80:7.8 (895.8) By about 6500 B.C. there had occurred a great decline in the spiritual heritage of the Andites. The descendants of Adam were widespreadly dispersed and had been virtually swallowed up in the older and more numerous human races. And this decadence of Andite civilization, together with the disappearance of their religious standards, left the spiritually impoverished races of the world in a deplorable condition. BC 6,500년경, 안드-사람들의 영적 유산이 크게 쇠퇴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널리 흩어졌고, 더 오래되고 더 숫자가 많은 인간 종족들 안으로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안드-사람들 문화의 이런 쇠퇴로, 그들의 종교적 기준이 함께 사라지면서, 영적으로 힘을 잃은 세상의 인종들은 비참한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80:7.9 (896.1) By 5000 B.C. the three purest strains of Adam’s descendants were in Sumeria, northern Europe, and Greece. The whole of Mesopotamia was being slowly deteriorated by the stream of mixed and darker races which filtered in from Arabia. And the coming of these inferior peoples contributed further to the scattering abroad of the biologic and cultural residue of the Andites. From all over the fertile crescent the more adventurous peoples poured westward to the islands. These migrants cultivated both grain and vegetables, and they brought domesticated animals with them. BC 5,000년에, 가장 순수한 아담의 후손 3 혈통이 수메르, 북유럽 및 그리스에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아라비아에서 침투한, 혼합된 거무스름한 인종들의 물결로,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열등한 민족들의 도래로 안드-사람들의 생물학적·문화적 잔재(殘滓)가 더 널리 흩어졌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전역으로부터 모험을 더 즐기는 민족들이 서쪽으로 제도들까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이주민들은 곡식과 채소를 재배했고, 길들은 동물들을 데려왔습니다.

80:7.10 (896.2) About 5000 B.C. a mighty host of progressive Mesopotamians moved out of the Euphrates valley and settled upon the island of Cyprus; this civilization was wiped out about two thousand years subsequently by the barbarian hordes from the north. BC 5,000년에 진보적인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의 강력한 무리가 유프라테스 유역에서 나와 키프로스 섬에 정착했습니다. 거의 2,000년 정도 지난 후, 북쪽의 야만적 유목민들이 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80:7.11 (896.3) Another great colony settled on the Mediterranean near the later site of Carthage. And from north Africa large numbers of Andites entered Spain and later mingled in Switzerland with their brethren who had earlier come to Italy from the Aegean Islands. 또 다른 커다란 거류민이 후대 카르타고 자리 근처 지중해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로부터 많은 안드-사람들이 스페인으로 들어갔고, 에게해 제도로부터 초기에 이탈리아로 왔던 자기 교우들과 스위스에서 나중에 섞였습니다.

80:7.12 (896.4) When Egypt followed Mesopotamia in cultural decline, many of the more able and advanced families fled to Crete, thus greatly augmenting this already advanced civilization. And when the arrival of inferior groups from Egypt later threatened the civilization of Crete, the more cultured families moved on west to Greece.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를 따라서 문화적으로 쇠퇴하자, 아주 유능하고 진보한 여러 가족이 크레타로 도피해서, 이렇게 이미 진보한 문명을 크게 증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출신의 열등한 집단이 도착하여 후에 크레타의 문명에 위협이 되자, 문화가 발달한 가족들은 서쪽 그리스로 옮겼습니다.

80:7.13 (896.5) The Greeks were not only great teachers and artists, they were also the world’s greatest traders and colonizers. Before succumbing to the flood of inferiority which eventually engulfed their art and commerce, they succeeded in planting so many outposts of culture to the west that a great many of the advances in early Greek civilization persisted in the later peoples of southern Europe, and many of the mixed descendants of these Adamsonites became incorporated in the tribes of the adjacent mainlands. 그리스인(人)들은 위대한 교사와 예술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가장 위대한 무역업자들이며 식민지 개척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기술과 상업을 삼켜버린 열등한 홍수에 쓰러지기 전에, 그들이 그토록 여러 문화의 전초기지를 서쪽에 성공적으로 심어서, 초기 그리스 문명의 여러 위대한 진보가 남유럽의 후대 민족들 안에서 지속했으며, 이런 아담선-사람들의 혼합된 후손 대부분은 인근 본토의 부족들에게 합병했습니다.

8. The Danubian Andonites 다뉴브의 안돈-사람들

80:8.1 (896.6) The Andite peoples of the Euphrates valley migrated north to Europe to mingle with the blue men and west into the Mediterranean regions to mix with the remnants of the commingled Saharans and the southern blue men. And these two branches of the white race were, and now are, widely separated by the broad-headed mountain survivors of the earlier Andonite tribes which had long inhabited these central regions. 유프라테스 계곡의 안드-사람들 민족들은 북쪽 유럽으로 이주하여 청인들과 섞였고 서쪽 지중해 지역으로 들어가 남아있는, 혼합된 사하라인(人)들 및 남부 청인들과 혼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백인의 두 분파는 이 중앙 지역에서 오래 거주하던 초기 안돈-사람들 부족 중 넓은 머리의 산악 생존자들에 의해 널리 격리되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80:8.2 (896.7) These descendants of Andon were dispersed through most of the mountainous regions of central and southeastern Europe. They were often reinforced by arrivals from Asia Minor, which region they occupied in considerable strength. The ancient Hittites stemmed directly from the Andonite stock; their pale skins and broad heads were typical of that race. This strain was carried in Abraham’s ancestry and contributed much to the characteristic facial appearance of his later Jewish descendants who, while having a culture and religion derived from the Andites, spoke a very different language. Their tongue was distinctly Andonite. 이런 안돈 후손들은 중앙 및 남동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산악 지역을 통해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당한 힘으로 차지했던 소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종종 보강되었습니다. 고대 힛(히타이트)-사람들은 안돈-사람들 혈통에서 직접 유래했습니다. 그들의 창백한 피부와 넓은 머리는 그 종족을 대표했습니다. 이런 혈통이 아브라함의 조상에 이르렀고, 안드-사람들에서 파생된 문화와 종교를 지녔던 그의 후대 유대인 후손들의 특징적인 얼굴 모습에 기여를 많이 했지만, 안드-사람들과 아주 다른 언어를 말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뚜렷하게 안돈-사람들의 언어였습니다.

80:8.3 (897.1) The tribes that dwelt in houses erected on piles or log piers over the lakes of Italy, Switzerland, and southern Europe were the expanding fringes of the African, Aegean, and, more especially, the Danubian migrations. 이탈리아, 스위스 및 남유럽의 호수 위 말뚝, 즉 통나무 기둥 위에 세운 집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아프리카, 에게해와 특히 더 다뉴브 이주민들이 팽창하던 분파였습니다.

80:8.4 (897.2) The Danubians were Andonites, farmers and herders who had entered Europe through the Balkan peninsula and were moving slowly northward by way of the Danube valley. They made pottery and tilled the land, preferring to live in the valleys. The most northerly settlement of the Danubians was at Liege in Belgium. These tribes deteriorated rapidly as they moved away from the center and source of their culture. The best pottery is the product of the earlier settlements. 다뉴브인(人)들은 안돈-사람들, 발칸 반도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 농부와 목동들이었고, 다뉴브 유역을 거쳐 서서히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곡에서 살기를 좋아하여, 도기(陶器)를 만들었고, 토지를 경작했습니다. 다뉴브인(人)의 북단(北端북쪽 끝) 정착지는 벨기에의 리에주에 있었습니다. 이 부족들은 자기 문화의 중심과 근원에서 멀어지면서 빠르게 쇠퇴했습니다. 최상의 도기(陶器)는 초기 정착지의 산물입니다.

80:8.5 (897.3) The Danubians became mother worshipers as the result of the work of the missionaries from Crete. These tribes later amalgamated with groups of Andonite sailors who came by boats from the coast of Asia Minor, and who were also mother worshipers. Much of central Europe was thus early settled by these mixed types of the broad-headed white races which practiced mother worship and the religious rite of cremating the dead, for it was the custom of the mother cultists to burn their dead in stone huts. 다뉴브인(人)들은 크레테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한 결과로 어머니 숭배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부족들은 나중에 소아시아 해안에서 배를 타고 왔던 안돈-사람들 선원 집단과 합병했는데 그들도 어머니 숭배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중앙 유럽은 이런 혼합 유형의 넓은 머리 백인종들이 그렇게 초기에 정착했으며, 그들은 어머니를 숭배하고, 죽은 자를 화장(火葬)하는 종교적 의식을 수행했는데, 돌 오두막에서 죽은 자를 태우는 것이, 어머니 종파들의 관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9. The Three White Races 세 종류의 백인종

80:9.1 (897.4) The racial blends in Europe toward the close of the Andite migrations became generalized into the three white races as follows: 안드-사람들의 이주가 마치게 되면서 유럽의 인종 혼합은 다음 세 종류의 백인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80:9.2 (897.5) 1. The northern white race. This so-called Nordic race consisted primarily of the blue man plus the Andite but also contained a considerable amount of Andonite blood, together with smaller amounts of the red and yellow Sangik. The northern white race thus encompassed these four most desirable human stocks. But the largest inheritance was from the blue man. The typical early Nordic was long-headed, tall, and blond. But long ago this race became thoroughly mixed with all of the branches of the white peoples. 북부 백인종. 소위 노르딕 인종은 청인에 안드-사람들이 더해져 처음 구성되었지만, 또한 소량의 홍인과 황인 상긱 혈통과 함께 상당한 양의 안돈-사람들 혈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부 백인종은 이렇게 가장 바람직한 4가지 인간 종족을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유전성은 청인에게서 왔습니다. 전형적인 초기 노르딕(북유럽 사람)은 머리가-길었고 키가 컸으며 금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 이 종족은 모든 백인 사람 분파와 철저히 섞였습니다.

80:9.3 (897.6) The primitive culture of Europe, which was encountered by the invading Nordics, was that of the retrograding Danubians blended with the blue man. The Nordic-Danish and the Danubian-Andonite cultures met and mingled on the Rhine as is witnessed by the existence of two racial groups in Germany today. 침입하는 노르딕들과 마주친 유럽의 원시 문화는 청인들과 섞여, 퇴보하는 다뉴브인(人)들의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독일에 두 인종 집단의 존재로 입증되듯이, 노르딕-덴마크인들과 다뉴브-안돈사람들 문화들이 라인강에서 만나 섞였습니다.

80:9.4 (897.7) The Nordics continued the trade in amber from the Baltic coast, building up a great commerce with the broadheads of the Danube valley via the Brenner Pass. This extended contact with the Danubians led these northerners into mother worship, and for several thousands of years cremation of the dead was almost universal throughout Scandinavia. This explains why remains of the earlier white races, although buried all over Europe, are not to be found — only their ashes in stone and clay urns. These white men also built dwellings; they never lived in caves. And again this explains why there are so few evidences of the white man’s early culture, although the preceding Cro-Magnon type is well preserved where it has been securely sealed up in caves and grottoes. As it were, one day in northern Europe there is a primitive culture of the retrogressing Danubians and the blue man and the next that of a suddenly appearing and vastly superior white man. 노르딕인(人)들은 발트해 연안에서부터 호박(琥珀) 무역을 계속하여, 브렌네르 고개를 거쳐 다뉴브 유역의 넓은 머리의 사람들과 큰 상거래를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다뉴브인(人)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이 북부 사람들이 어머니를 숭배하게 되었고, 수천 년간 스칸디나비아 전체에서 고인(故人 죽은 자)을 화장하는 것이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백인종들의 유해가 유럽 전역에 묻혔지만 발견되지 않고, 돌과 진흙 단지에 유골만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또한 이 백인들은 집을 건축했고 결코 동굴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크로마뇽 유형은 동굴과 석굴에 안전히 밀폐되어 잘 보존되었지만, 초기 백인종 문화의 흔적이 그토록 거의 없는 이유를 이것이 다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어느 날 북유럽에 퇴보하는 다뉴브인(人)들과 청인의 원시 문화가 있고, 다음 날 갑자기 출현한 굉장히 우수한 백인의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80:9.5 (897.8) 2. The central white race. While this group includes strains of blue, yellow, and Andite, it is predominantly Andonite. These people are broad-headed, swarthy, and stocky. They are driven like a wedge between the Nordic and Mediterranean races, with the broad base resting in Asia and the apex penetrating eastern France. 중부 백인종. 이 집단은 청색, 황색, 안드-사람들의 혈통을 포함하지만, 주로 안돈-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머리가 넓고, 피부가 거무스레하며, 키가 땅딸막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에 넓은 토대를 두고, 꼭대기는 동부 프랑스를 관통하면서, 노르딕과 지중해 종족들 사이에서 쐐기처럼 박혔습니다.

80:9.6 (898.1) For almost twenty thousand years the Andonites had been pushed farther and farther to the north of central Asia by the Andites. By 3000 B.C. increasing aridity was driving these Andonites back into Turkestan. This Andonite push southward continued for over a thousand years and, splitting around the Caspian and Black seas, penetrated Europe by way of both the Balkans and the Ukraine. This invasion included the remaining groups of Adamson’s descendants an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invasion period, carried with it considerable numbers of the Iranian Andites as well as many of the descendants of the Sethite priests. 거의 2만 년간, 안드-사람들이 안돈-사람들을 중앙아시아 북쪽으로 점점 더 멀리 떠밀었습니다. BC 3,000년에 이 안돈-사람들은 점점 건조해져서 투르키스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안돈-사람들은 1천 년 이상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나아가면서 카스피해와 흑해 주변에서 갈라져, 발칸과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침투했습니다. 이 침입에 아담선 후손들 나머지 집단이 포함되었고, 침략 기간의 후반기에 여러 셋-사람들 사제 후손들만 아니라 상당수의 이란 안드-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80:9.7 (898.2) By 2500 B.C. the westward thrust of the Andonites reached Europe. And this overrunning of all Mesopotamia, Asia Minor, and the Danube basin by the barbarians of the hills of Turkestan constituted the most serious and lasting of all cultural setbacks up to that time. These invaders definitely Andonized the character of the central European races, which have ever since remained characteristically Alpine. BC 2,500년에, 안돈-사람들의 서쪽 공격이 유럽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다뉴브 분지에 투르키스탄 구릉지의 미개인들이 이렇게 전반적으로 퍼져서 그때까지 모든 문화적 퇴보 중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퇴보가 있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중부 유럽 인종의 특성을 단호하게 안돈화하여, 이후로 줄곧 알프스 인종의 특성으로 남았습니다.

80:9.8 (898.3) 3. The southern white race. This brunet Mediterranean race consisted of a blend of the Andite and the blue man, with a smaller Andonite strain than in the north. This group also absorbed a considerable amount of secondary Sangik blood through the Saharans. In later times this southern division of the white race was infused by strong Andite elements from the eastern Mediterranean. 남부 백인종. 이 갈색 지중해 인종은 안드-사람들과 청인들의 혼합으로 구성되었는데, 북부보다 안돈-사람의 혈통이 적었습니다. 또한 이 집단은 사하라인(人)들을 통해 상당한 양의 2차 상긱 혈통을 흡수했습니다. 나중에 동부 지중해인(人)들로부터 강한 안드-사람들 요소가 백인종의 이 남부 분파에 주입되었습니다.

80:9.9 (898.4) The Mediterranean coastlands did not, however, become permeated by the Andites until the times of the great nomadic invasions of 2500 B.C. Land traffic and trade were nearly suspended during these centuries when the nomads invaded the eastern Mediterranean districts. This interference with land travel brought about the great expansion of sea traffic and trade; Mediterranean sea-borne commerce was in full swing about forty-five hundred years ago. And this development of marine traffic resulted in the sudden expansion of the descendants of the Andites throughout the entire coastal territory of the Mediterranean basin. 그러나 BC 2,500년, 유목민이 대규모로 침입하던 시절까지, 지중해 연안 지역들은 안드-사람들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유목민들이 동부 지중해 지역을 침입했던 이 여러 세기에, 육상 수송과 무역은 거의 중지되었습니다. 육상 여행의 이런 방해로 해상 수송과 무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지중해 해상-수송 상업은 약 4,500년 전에 최고조였습니다. 이런 해양 수송의 개발로 지중해 분지의 전체 해안 지역 곳곳에 안드-사람들 후손들이 갑자기 널리 퍼졌습니다.

80:9.10 (898.5) These racial mixtures laid the foundations for the southern European race, the most highly mixed of all. And since these days this race has undergone still further admixture, notably with the blue-yellow-Andite peoples of Arabia. This Mediterranean race is, in fact, so freely admixed with the surrounding peoples as to be virtually indiscernible as a separate type, but in general its members are short, long-headed, and brunet. 이런 인종적 혼합으로, 전체에서 가장 많이 혼합된, 남유럽 인종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시절 이후로 이 종족은, 뚜렷이 아라비아의 청색-황색-안드사람 민족들과 더 심하게 혼합되었습니다. 이 지중해 인종은, 독립된 유형으로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사실 주변 민족들과 아주 자유롭게 섞였지만, 대개 그 일원들은 키가 작고, 머리가 길고, 갈색 머리입니다.

80:9.11 (898.6) In the north the Andites, through warfare and marriage, obliterated the blue men, but in the south they survived in greater numbers. The Basques and the Berbers represent the survival of two branches of this race, but even these peoples have been thoroughly admixed with the Saharans. 북쪽에서 안드-사람들은 전쟁과 결혼을 통해 청인들을 말살했지만, 청인들은 남쪽에서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바스크인(人)들과 베르베르인(人)들이 살아남은 이런 두 종족 분파를 대표하지만, 이 민족들도 사하라인(人)들과 완전히 섞였습니다.

80:9.12 (898.7) This was the picture of race mixture presented in central Europe about 3000 B.C. In spite of the partial Adamic default, the higher types did blend. 이것이 BC 3,000년 경 중앙 유럽에 나타난 인종 혼합의 정세였습니다. 부분적인 아담의 의무-불이행에도 불구하고, 높은 유형들은 섞였습니다.

80:9.13 (898.8) These were the times of the New Stone Age overlapping the oncoming Bronze Age. In Scandinavia it was the Bronze Age associated with mother worship. In southern France and Spain it was the New Stone Age associated with sun worship. This was the time of the building of the circular and roofless sun temples. The European white races were energetic builders, delighting to set up great stones as tokens to the sun, much as did their later-day descendants at Stonehenge. The vogue of sun worship indicates that this was a great period of agriculture in southern Europe. 이때는 다가오는 청동기 시대와 부분적으로 겹쳐지는 신석기 시대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는 어머니 숭배와 관련된 청동기 시대였습니다. 남부 프랑스와 스페인은 태양 숭배와 관련된 신석기 시대였습니다. 이때는 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태양 신전들을 건축하던 때였습니다. 유럽의 백인종들은 활동적인 건축자들이었고, 후일 그들의 후손이 스톤헨지에 했듯이, 태양에 대한 상징으로 거대한 돌들 세우기를 좋아했습니다. 태양 숭배의 유행은 이때가 남부 유럽에서 커다란 농업의 시기였음을 나타냅니다.

80:9.14 (899.1) The superstitions of this comparatively recent sun-worshiping era even now persist in the folkways of Brittany. Although Christianized for over fifteen hundred years, these Bretons still retain charms of the New Stone Age for warding off the evil eye. They still keep thunderstones in the chimney as protection against lightning. The Bretons never mingled with the Scandinavian Nordics. They are survivors of the original Andonite inhabitants of western Europe, mixed with the Mediterranean stock. 상당히 최근에 이런 태양-숭배 시기의 미신들이 지금도 브리타니 민속(民俗)에서 지속됩니다. 1,500년 이상 기독교화했지만, 이런 브리타니인(人)들은 악마의 눈을 피하려고 신석기 시대의 부적(符籍)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번개로부터 보호하려고 굴뚝에 뇌석(雷石 번개와 함께 땅에 던져졌다고 생각했던 화석, 석기 등의 손도끼)들을 둡니다. 브리타니인(人)들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인(人)들과 절대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혈통과 섞인, 서유럽의 안돈-원주민(原住民)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80:9.15 (899.2) But it is a fallacy to presume to classify the white peoples as Nordic, Alpine, and Mediterranean. There has been altogether too much blending to permit such a grouping. At one time there was a fairly well-defined division of the white race into such classes, but widespread intermingling has since occurred, and it is no longer possible to identify these distinctions with any clarity. Even in 3000 B.C. the ancient social groups were no more of one race than are the present inhabitants of North America. 그러나 백인 민족들을 노르딕(북유럽), 알프스인(人) 및 지중해인(人)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류(誤謬그릇됨)입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많이 섞여서 그런 분류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한때 백인종을 그런 종류로 아주 명확히 분류했지만, 그 후 광범위한 혼합이 일어나서, 이제는 이런 특성들을 명료히 판정하기에 불가능합니다. 현재 북아메리카의 주민들이 하나의 인종이 아닌 것처럼, BC 3,000년에도 고대 사회적 집단은 하나의 인종이 아니었습니다.

80:9.16 (899.3) This European culture for five thousand years continued to grow and to some extent intermingle. But the barrier of language prevented the full reciprocation of the various Occidental nations. During the past century this culture has been experiencing its best opportunity for blending in the cosmopolitan population of North America; and the future of that continent will be determined by the quality of the racial factors which are permitted to enter into its present and future populations, as well as by the level of the social culture which is maintained. 유럽의 이런 문화는 5,000년간 계속 성장하며 어느 정도 섞였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으로 다양한 서양 국가의 충분한 왕래가 방해를 받았습니다. 지난 세기에 이런 문화는 북아메리카에서 국제적 인구로 섞이는 최선의 기회를 경험했습니다. 그 대륙의 미래는, 유지되는 사회적 문화의 수준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인구로 유입되도록 허락되는 인종 요소의 자질(資質)로 결정될 것입니다.

80:9.17 (899.4) [Presented by an Archangel of Nebadon.][네바돈의 천사장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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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1 Development of Modern Civilization 현대 문명의 발전

Paper 81

Development of Modern Civilization 현대 문명의 발전

1. The Cradle of Civilization 문명의 요람
2. The Tools of Civilization 문명의 도구
(1) The taming of fire 불 다루기
(2) The domestication of animals 동물 길들이기
(3) The enslavement of captives 포로의 노예삼기
(4) Private property 사유 재산
3. Cities, Manufacture, and Commerce 도시, 제조업 및 상업
4. The Mixed Races 혼합 인종들
(1) The Caucasoid races 코카서스 인종
(2) The Mongoloid races 몽골 인종
(3) The Negroid races 흑인종
5. Cultural Society 문화적 사회
Might and right 힘과 정의(正義)
6. The Maintenance of Civilization 문명의 유지
(1) Natural circumstances 자연적 환경
(2) Capital goods 자본재(資本財)
(3) Scientific knowledge 과학적 지식
(4) Human resources 인적(人的) 자원
(5) Effectiveness of material resources 물질 자원의 효율성
(6) Effectiveness of language 언어의 효율성
(7) Effectiveness of mechanical devices 기계 장치의 효율성
(8) Character of torchbearers 문화선구자의 성품
(9) The racial ideals 인종의 이상(理想)들
(10) Co-ordination of specialists 전문가들의 통합-조정
(11) Place-finding devices 구직(求職) 방책
(12) The willingness to co-operate 협력의 자발성
(13) Effective and wise leadership 효과적인 현명한 지도력
(14) Social changes 사회 변화
(15) The prevention of transitional breakdown 과도기의 몰락 예방

81:0.1 (900.1) REGARDLESS of the ups and downs of the miscarriage of the plans for world betterment projected in the missions of Caligastia and Adam, the basic organic evolution of the human species continued to carry the races forward in the scale of human progress and racial development. Evolution can be delayed but it cannot be stopped. 칼리가스티아와 아담 사명에 기획된 세상 개선을 위한 계획이 실패했던 기복(起伏)에 관계가 없이, 인류의 기본적인 유기적 진화는 인류를 인간 진보와 종족 발전의 수준으로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진화는 지체될 수 있지만 중지될 수 없습니다.

81:0.2 (900.2) The influence of the violet race, though in numbers smaller than had been planned, produced an advance in civilization which, since the days of Adam, has far exceeded the progress of mankind throughout its entire previous existence of almost a million years. 보라 인종의 영향은 계획된 것보다 작았지만, 문명의 진보를 일으켰으며, 아담의 시절 이후로 거의 1백만 년 전체의 이전 생활 내내 있었던 인류 진보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1. The Cradle of Civilization 문명의 요람

81:1.1 (900.3) For about thirty-five thousand years after the days of Adam, the cradle of civilization was in southwestern Asia, extending from the Nile valley eastward and slightly to the north across northern Arabia, through Mesopotamia, and on into Turkestan. And climate was the decisive factor in the establishment of civilization in that area. 아담의 시절 이후 약 35,000년간 문명의 요람은, 나일강 유역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약간 북쪽으로 북(北)아라비아를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투르키스탄으로 확장된, 남서 아시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문명 수립을 결정했던 요소는 기후였습니다.

81:1.2 (900.4) It was the great climatic and geologic changes in northern Africa and western Asia that terminated the early migrations of the Adamites, barring them from Europe by the expanded Mediterranean and diverting the stream of migration north and east into Turkestan. By the time of the completion of these land elevations and associated climatic changes, about 15,000 B.C., civilization had settled down to a world-wide stalemate except for the cultural ferments and biologic reserves of the Andites still confined by mountains to the east in Asia and by the expanding forests in Europe to the west.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커다란 기후와 지질 변화로 아담-사람들의 초기 이주가 끝났는데, 확장된 지중해로 그들이 유럽에서 추방되어, 북쪽과 동쪽으로 이주(移住)하는 흐름은 투르키스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육지 해발(海拔 해면에서 계산한 높이)과 관련된 기후 변화가 완료될 때쯤 거의 BC 15,000년에 문명은, 아시아의 동쪽까지 산맥과 유럽의 서쪽까지 확장되는 삼림으로 인해 여전히 갇혀 있는 안드-사람들의 문화적 효모(酵母)와 생물학적 축적을 제외하고, 세계적인 교착(膠着)상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81:1.3 (900.5) Climatic evolution is now about to accomplish what all other efforts had failed to do, that is, to compel Eurasian man to abandon hunting for the more advanced callings of herding and farming. Evolution may be slow, but it is terribly effective. 기후의 점진적 변화로, 다른 모든 노력으로 이루지 못했던 것이, 이제 막 달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유라시아 사람이 사냥을 그만두고 할 수 없이 더 진보한 목축과 농업의 생업을 하게 했습니다. 진화는 더딜 수 있지만, 대단히 실제적입니다.

81:1.4 (900.6) Since slaves were so generally employed by the earlier agriculturists, the farmer was formerly looked down on by both the hunter and the herder. For ages it was considered menial to till the soil; wherefore the idea that soil toil is a curse, whereas it is the greatest of all blessings. Even in the days of Cain and Abel the sacrifices of the pastoral life were held in greater esteem than the offerings of agriculture. 초기 농업 종사자들은 대개 노예들을 썼기 때문에, 사냥꾼과 목자들은 옛날에 농부를 무시했습니다. 오랫동안 경작(耕作 농사지음)은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작 수고를 저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에도 목축 생활의 제물을 농업의 제물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평가했습니다.

81:1.5 (900.7) Man ordinarily evolved into a farmer from a hunter by transition through the era of the herder, and this was also true among the Andites, but more often the evolutionary coercion of climatic necessity would cause whole tribes to pass directly from hunters to successful farmers. But this phenomenon of passing immediately from hunting to agriculture only occurred in those regions where there was a high degree of race mixture with the violet stock. 사람은 대개 사냥꾼에서 목자의 시대를 통해 중간단계로 인해 농부로 진화했으며, 이는 안드-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자주 기후적 필연의 진화적 강요로 모든 부족은 사냥꾼에서 바로 성공한 농부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냥에서 농업으로 즉시 넘어가는 이런 현상은 보라 혈통과 고도로 섞인 인종이 있었던 그런 지역에서만 일어났습니다.

81:1.6 (901.1) The evolutionary peoples (notably the Chinese) early learned to plant seeds and to cultivate crops through observation of the sprouting of seeds accidentally moistened or which had been put in graves as food for the departed. But throughout southwest Asia, along the fertile river bottoms and adjacent plains, the Andites were carrying out the improved agricultural techniques inherited from their ancestors, who had made farming and gardening the chief pursuits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second garden. 진화 민족들(특히 중국인들)은 우연히 축축한 종자들이나 고인(故人)을 위한 식량으로 무덤에 두었던 것에서 싹이 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일찍이 종자들을 뿌려 곡식 경작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남서 아시아 전역에, 강변의 비옥한 낮은 땅들과 인접한 평지들을 따라서 안드-사람들이 자기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개량한 농업 기술을 실행하고 있었는데, 그 조상들은 둘째 동산의 영역에서 주로 농업과 원예를 했습니다.

81:1.7 (901.2) For thousands of years the descendants of Adam had grown wheat and barley, as improved in the Garden, throughout the highlands of the upper border of Mesopotamia. The descendants of Adam and Adamson here met, traded, and socially mingled. 수천 년간 아담의 후손들은 메소포타미아 위쪽 경계의 고지 전역에서 동산에서 개량한 밀과 보리를 재배(栽培)했습니다. 아담과 아담선의 후손들은 여기에서 만나, 거래하고 허물없이 어울렸습니다.

81:1.8 (901.3) It was these enforced changes in living conditions which caused such a large proportion of the human race to become omnivorous in dietetic practice. And the combination of the wheat, rice, and vegetable diet with the flesh of the herds marked a great forward step in the health and vigor of these ancient peoples. 이렇게 강요된 생활 조건의 변화로 그렇게 인류 대부분의 식습관은 잡식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밀, 쌀과 채소 식품과 가축의 고기를 배합하여 이런 고대 민족들의 건강과 활력이 눈에 띄게 대단히 진일보(進一步)했습니다.

2. The Tools of Civilization 문명의 도구

81:2.1 (901.4) The growth of culture is predicated upon the development of the tools of civilization. And the tools which man utilized in his ascent from savagery were effective just to the extent that they released man power for the accomplishment of higher tasks. 문화의 성장은 문명의 도구 발전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야만에서 올라갈 때 사용했던 도구는 인적 자원이 더 높은 과제를 성취할 정도까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81:2.2 (901.5) You who now live amid latter-day scenes of budding culture and beginning progress in social affairs, who actually have some little spare time in which to think about society and civilization, must not overlook the fact that your early ancestors had little or no leisure which could be devoted to thoughtful reflection and social thinking. 문화가 싹트고 사회적 업무에서 진보를 시작한 현대적 상황 가운데 지금 살아가며, 사회와 문명에 관해 생각할 약간의 여유 시간이 실제로 있는 너희는 너희 초기 조상들이 신중한 성찰과 사회적 사색에 전념할 수 있는 여가가 거의 아예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81:2.3 (901.6) The first four great advances in human civilization were: 인간 문명에서 위대한 첫 4대 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81:2.4 (901.7) 1. The taming of fire. 불 다루기.

81:2.5 (901.8) 2. The domestication of animals. 동물 길들이기.

81:2.6 (901.9) 3. The enslavement of captives. 포로의 노예삼기.

81:2.7 (901.10) 4. Private property. 사유 재산.

81:2.8 (901.11) While fire, the first great discovery, eventually unlocked the doors of the scientific world, it was of little value in this regard to primitive man. He refused to recognize natural causes as explanations for commonplace phenomena. 불은 최초의 위대한 발견이었고 결국 과학 세계의 문을 열었지만, 이 점은 원시인에게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원시인은 자연적 원인을 일반적 현상의 설명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81:2.9 (901.12) When asked where fire came from, the simple story of Andon and the flint was soon replaced by the legend of how some Prometheus stole it from heaven. The ancients sought a supernatural explanation for all natural phenomena not within the range of their personal comprehension; and many moderns continue to do this. The depersonalization of so-called natural phenomena has required ages, and it is not yet completed. But the frank, honest, and fearless search for true causes gave birth to modern science: It turned astrology into astronomy, alchemy into chemistry, and magic into medicine. 불의 출처를 묻자, 안돈과 부싯돌의 단순한 이야기는 곧 어떤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쳤다는 전설로 대체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본인들의 이해 범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 초자연적 설명을 찾았으며, 여러 현대인도 계속 이렇게 합니다. 소위 자연 현상의 객관화(경험을 조직하고 통일하여 보편타당성을 가진 지식을 만드는 일)는 세월이 요구되며 그것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원인을 향해 솔직하고 정직하며 대담무쌍한 추구로 현대 과학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점성술을 천문학으로, 연금술을 화학으로, 마술을 의학으로 만들었습니다.

81:2.10 (901.13) In the premachine age the only way in which man could accomplish work without doing it himself was to use an animal. Domestication of animals placed in his hands living tools, the intelligent use of which prepared the way for both agriculture and transportation. And without these animals man could not have risen from his primitive estate to the levels of subsequent civilization. 기계 이전 시대에 사람이 스스로 일하지 않고 작업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물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손에 살아있는 도구로 놓인 동물 길들이기를 지능적으로 사용하여 농업과 수송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동물이 없이 인간은 자신의 원시적 상태에서 다음 문명의 수준으로 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81:2.11 (902.1) Most of the animals best suited to domestication were found in Asia, especially in the central to southwest regions. This was one reason why civilization progressed faster in that locality than in other parts of the world. Many of these animals had been twice before domesticated, and in the Andite age they were retamed once again. But the dog had remained with the hunters ever since being adopted by the blue man long, long before. 길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동물 대부분은 아시아 특히 남서 지역까지의 중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지역들보다 그 장소에서 문명이 더 빨리 진보했던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이런 동물 중 대부분이 이전에 두 번 길들었는데, 안드-사람들 시대에 그것들은 한 번 더 길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 청인이 길들인 이후 줄곧 개는 사냥꾼들과 함께 남아 있었습니다.

81:2.12 (902.2) The Andites of Turkestan were the first peoples to extensively domesticate the horse, and this is another reason why their culture was for so long predominant. By 5000 B.C. the Mesopotamian, Turkestan, and Chinese farmers had begun the raising of sheep, goats, cows, camels, horses, fowls, and elephants. They employed as beasts of burden the ox, camel, horse, and yak. Man was himself at one time the beast of burden. One ruler of the blue race once had one hundred thousand men in his colony of burden bearers. 투르키스탄의 안드-사람들은 넓게 말을 길들인 첫 민족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문화가 그렇게 오래 탁월했던 또 다른 이유입니다. BC 5,000년에, 메소포타미아, 투르키스탄과 중국의 농부들은 양, 염소, 암소, 낙타, 말, 가금(家禽)과 코끼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소, 낙타, 말과 야크를 운반용 짐승으로 삼았습니다. 한때 인간 자신이 운반용 짐승이었습니다. 청색 인종의 한 통치자는 한때 자신의 운반 짐꾼 거주지에 10만 명을 두었습니다.

81:2.13 (902.3) The institutions of slavery and private ownership of land came with agriculture. Slavery raised the master’s standard of living and provided more leisure for social culture. 노예 소유와 토지의 사유권 제도는 농업과 함께 왔습니다. 노예 소유는 주인의 생활 수준을 높였고, 사회적 교양을 위한 여가를 더 많이 제공했습니다.

81:2.14 (902.4) The savage is a slave to nature, but scientific civilization is slowly conferring increasing liberty on mankind. Through animals, fire, wind, water, electricity, and other undiscovered sources of energy, man has liberated, and will continue to liberate, himself from the necessity for unremitting toil. Regardless of the transient trouble produced by the prolific invention of machinery, the ultimate benefits to be derived from such mechanical inventions are inestimable. Civilization can never flourish, much less be established, until man has leisure to think, to plan, to imagine new and better ways of doing things. 야만인은 자연의 노예이지만, 과학적 문명이 인류에게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베풀고 있습니다. 동물, 불, 바람, 물, 전기와 다른 미지의 에너지 근원들을 통해, 인간은 끊임없는 수고의 숙명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했고 계속 벗어날 것입니다. 풍부한 기계 발명으로 생긴 일시적 곤란과 관계없이, 그런 기계적 발명에서 파생된 궁극적 이득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들을 행하는 새롭고 더 나은 방식을 생각하고, 계획하며 상상할 여가를 갖기까지 문명은, 확립되기는커녕, 결코 번성할 수 없습니다.

81:2.15 (902.5) Man first simply appropriated his shelter, lived under ledges or dwelt in caves. Next he adapted such natural materials as wood and stone to the creation of family huts. Lastly he entered the creative stage of home building, learned to manufacture brick and other building materials. 사람은 처음에 바위 턱 아래 살거나 동굴에 거주하면서, 자기 은신처를 단순히 확보했습니다. 다음에 그는 나무와 돌같이 그런 천연 재료를 가족 오두막을 만드는데 고쳐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벽돌과 다른 건축 자재 생산을 체득하면서, 집을 짓는 창조적 단계를 시작했습니다.

81:2.16 (902.6) The peoples of the Turkestan highlands were the first of the more modern races to build their homes of wood, houses not at all unlike the early log cabins of the American pioneer settlers. Throughout the plains human dwellings were made of brick; later on, of burned bricks. 투르키스탄 고지의 민족들은 더 현대적인 첫 인종이었는데, 아메리카 개척 이주민의 초기 통나무집과 전혀 다르지 않게, 그들은 나무로 자신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모든 평지의 인간 거주지는 벽돌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구운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81:2.17 (902.7) The older river races made their huts by setting tall poles in the ground in a circle; the tops were then brought together, making the skeleton frame for the hut, which was interlaced with transverse reeds, the whole creation resembling a huge inverted basket. This structure could then be daubed over with clay and, after drying in the sun, would make a very serviceable weatherproof habitation. 더 오랜 강 종족들은 땅에 원형으로 긴 장대를 세워 자신들의 오두막을 만들었습니다. 꼭대기는 그렇게 서로 모아서, 오두막을 위한 골조틀을 만들었고, 가로지르는 갈대를 짜서 맞췄는데, 전체 모양은 커다란 바구니를 엎어놓은 것과 닮았습니다. 그 후 이런 건축물에 진흙을 바를 수 있었는데, 햇빛에 말린 후에는 아주 실용적으로 비바람에 견디는 거처가 되었습니다.

81:2.18 (902.8) It was from these early huts that the subsequent idea of all sorts of basket weaving independently originated. Among one group the idea of making pottery arose from observing the effects of smearing these pole frameworks with moist clay. The practice of hardening pottery by baking was discovered when one of these clay-covered primitive huts accidentally burned. The arts of olden days were many times derived from the accidental occurrences attendant upon the daily life of early peoples. At least, this was almost wholly true of the evolutionary progress of mankind up to the coming of Adam. 이런 초기의 오두막에서 나중에 각종 바구니를 엮는 생각이 자유롭게 생겼습니다. 한 집단에서, 이런 장대 골조에 축축한 진흙을 바른 효과를 관찰하면서 도기(陶器)를 제조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진흙으로 이렇게 덮인 원시 오두막 중 하나가 우연히 불에 탔을 때, 구워서 도기를 굳히는 관행이 발견되었습니다. 옛날의 기술은 초기 민족들의 일상생활에 수반하는 우연한 사건에서 여러 번 파생했습니다. 적어도 이것은 아담의 도래까지 인류의 진화적 진보에 대해 거의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81:2.19 (903.1) While pottery had been first introduced by the staff of the Prince about one-half million years ago, the making of clay vessels had practically ceased for over one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Only the gulf coast pre-Sumerian Nodites continued to make clay vessels. The art of pottery making was revived during Adam’s time. The dissemination of this art was simultaneous with the extension of the desert areas of Africa, Arabia, and central Asia, and it spread in successive waves of improving technique from Mesopotamia out over the Eastern Hemisphere. 약 50만 년 전에 왕자의 참모진이 처음 도기 제조법을 소개했는데, 진흙 용기 제조는 사실상 15만 년 이상 중지되었습니다. 만(灣) 해안가의 수메르 이전 놋-사람들만 계속 진흙 용기를 제조했습니다. 도기 제조법 기술은 아담의 시절에 되살아났습니다. 아프리카,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의 사막 지역이 확장하면서 동시에 이 기술이 보급되었고, 개량한 기술의 연속적인 물결로, 이 기술은 메소포타미아 밖으로 동반구 전역에 퍼졌습니다.

81:2.20 (903.2) These civilizations of the Andite age cannot always be traced by the stages of their pottery or other arts. The smooth course of human evolution was tremendously complicated by the regimes of both Dalamatia and Eden. It often occurs that the later vases and implements are inferior to the earlier products of the purer Andite peoples. 이런 안드-사람들 시대의 문명들은 그들의 도기 제조법이나 다른 기술들의 단계들로 인해서 그 행방을 언제나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인간 진화의 순조로운 과정은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체제로 인해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후대의 항아리들과 기구들은 더 순수한 안드-사람들 민족들의 초기 생산품보다 못한 경우가 종종 일어납니다.

3. Cities, Manufacture, and Commerce 도시, 제조업 및 상업

81:3.1 (903.3) The climatic destruction of the rich, open grassland hunting and grazing grounds of Turkestan, beginning about 12,000 B.C., compelled the men of those regions to resort to new forms of industry and crude manufacturing. Some turned to the cultivation of domesticated flocks, others became agriculturists or collectors of water-borne food, but the higher type of Andite intellects chose to engage in trade and manufacture. It even became the custom for entire tribes to dedicate themselves to the development of a single industry. From the valley of the Nile to the Hindu Kush and from the Ganges to the Yellow River, the chief business of the superior tribes became the cultivation of the soil, with commerce as a side line. 투르키스탄의 풍요롭고 광활한 목초지에서 사냥하며 방목했던 대지가 BC 12,000년 무렵에 기후로 파괴되기 시작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새로운 형태의 산업과 미숙한 제조업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길들인 가축 떼를 길렀고, 다른 이들은 농부 또는 물에서 출현한 음식 채집자들이 되었지만, 더 높은 유형의 안드-사람 지성인들은 무역과 제조를 일삼기로 선택했습니다. 부족 전체가 단일 산업의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 관습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일강 유역에서 힌두쿠시산맥까지, 그리고 갠지스강에서 황허강까지, 우수한 부족들의 주요 사업은 농지 경작이었고, 상업은 부업이 되었습니다.

81:3.2 (903.4) The increase in trade and in the manufacture of raw materials into various articles of commerce was directly instrumental in producing those early and semipeaceful communities which were so influential in spreading the culture and the arts of civilization. Before the era of extensive world trade, social communities were tribal — expanded family groups. Trade brought into fellowship different sorts of human beings, thus contributing to a more speedy cross-fertilization of culture. 원료를 가공한 다양한 상업 물품의 무역과 제조의 증가는, 문명의 문화와 기술 확장에 그렇게 영향을 미쳤던 그러한 초기의 다소 평화적인 공동체들이 직접 조성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광대한 세계 무역의 시대 이전에, 사회적 공동체들은 부족으로 확장된 가족 집단이었습니다. 무역으로,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사귀게 되어, 더 신속하게 문화적으로 교류(交流)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81:3.3 (903.5) About twelve thousand years ago the era of the independent cities was dawning. And these primitive trading and manufacturing cities were always surrounded by zones of agriculture and cattle raising. While it is true that industry was promoted by the elevation of the standards of living, you should have no misconception regarding the refinements of early urban life. The early races were not overly neat and clean, and the average primitive community rose from one to two feet every twenty-five years as the result of the mere accumulation of dirt and trash. Certain of these olden cities also rose above the surrounding ground very quickly because their unbaked mud huts were short-lived, and it was the custom to build new dwellings directly on top of the ruins of the old. 거의 12,000년 전에 독립 도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시적으로 통상하고 제조하는 도시들은 언제나 농업과 목축업 지대로 둘러싸였습니다.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산업이 조성된 것이 사실이지만, 개선된 초기 도시 생활에 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기 종족들은 지나치게 산뜻하고 청결하지 않았으며, 평균적 원시 공동체는 흙과 쓰레기가 순전히 쌓인 결과로 25년마다 1피트(30㎝)에서 2피트(60㎝)가 높아졌습니다. 또한 이런 고대 도시 중 어떤 것은 주변의 지면 위로 아주 빠르게 높아졌는데 그들의 굽지 않은 진흙 오두막의 수명이 짧았고, 옛 잔해의 바로 위에 새 거주지를 짓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81:3.4 (903.6) The widespread use of metals was a feature of this era of the early industrial and trading cities. You have already found a bronze culture in Turkestan dating before 9000 B.C., and the Andites early learned to work in iron, gold, and copper, as well. But conditions were very different away from the more advanced centers of civilization. There were no distinct periods, such as the Stone, Bronze, and Iron Ages; all three existed at the same time in different localities. 금속 사용의 보급은 이 시대 초기 산업 및 무역 도시의 특징이었습니다. 너희는 BC 9,000년 이전 연대에 투르키스탄에서 이미 청동 문화를 발견했으며, 안드-사람들 역시 일찍이 철, 금 및 구리로 일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더 진보한 문명의 중심지에서 떨어진 지역의 상황은 아주 달랐습니다.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및 철기 시대와 같은 뚜렷한 기간이 없었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세 시기가 모두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81:3.5 (904.1) Gold was the first metal to be sought by man; it was easy to work and, at first, was used only as an ornament. Copper was next employed but not extensively until it was admixed with tin to make the harder bronze. The discovery of mixing copper and tin to make bronze was made by one of the Adamsonites of Turkestan whose highland copper mine happened to be located alongside a tin deposit. 사람이 처음 찾게 된 금속은 금이었습니다. 그것은 가공하기에 쉬워서 처음에 장식품으로만 쓰였습니다. 다음으로 구리가 사용되었지만, 주석을 섞어 단단한 청동을 만들기까지 널리 쓰이지 않았습니다. 투르키스탄의 아담선-사람 중 하나가 구리에 주석을 섞어 청동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고지에 구리 광산이 공교롭게 주석 매장물 옆에 있었습니다.

81:3.6 (904.2) With the appearance of crude manufacture and beginning industry, commerce quickly became the most potent influence in the spread of cultural civilization. The opening up of the trade channels by land and by sea greatly facilitated travel and the mixing of cultures as well as the blending of civilizations. By 5000 B.C. the horse was in general use throughout civilized and semicivilized lands. These later races not only had the domesticated horse but also various sorts of wagons and chariots. Ages before, the wheel had been used, but now vehicles so equipped became universally employed both in commerce and war. 미숙한 제조업이 출현하고 산업이 시작되면서, 상업이 곧 문화적 문명의 보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육지와 바다로 무역의 경로가 열려 문명의 혼합은 물론 여행과 문화의 혼합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BC 5,000년에, 말이 문명화되고 절반쯤 문명화된 전(全) 지역에 대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후대의 종족들은 길들인 말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사륜차와 전차도 갖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바퀴가 사용되었지만, 이제 그렇게 갖춘 운송 수단들은 상업과 전쟁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81:3.7 (904.3) The traveling trader and the roving explorer did more to advance historic civilization than all other influences combined. Military conquests, colonization, and missionary enterprises fostered by the later religions were also factors in the spread of culture; but these were all secondary to the trading relations, which were ever accelerated by the rapidly developing arts and sciences of industry. 여행하는 상인들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탐험가들이 다른 모든 결합한 영향력 보다 역사에 남는 진보적 문명화에 더 도움이 되었습니다. 군사적 정복, 식민지 건설 및 후대 종교들이 육성한 선교적 기획들도 문화 보급의 요소였지만, 이것들은, 신속하게 개발되는 기술과 산업 과학으로 늘 가속된 무역 관계에 모두 부차적이었습니다.

81:3.8 (904.4) Infusion of the Adamic stock into the human races not only quickened the pace of civilization, but it also greatly stimulated their proclivities toward adventure and exploration to the end that most of Eurasia and northern Africa was presently occupied by the rapidly multiplying mixed descendants of the Andites. 아담 혈통의 주입으로 인류 문명의 속도가 빨라졌고, 세상 끝까지 모험하고 탐험하는 그들의 경향을 크게 자극하여, 안드-사람들의 빨리 늘어나는 혼합 후손들이 즉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4. The Mixed Races 혼합 인종들

81:4.1 (904.5) As contact is made with the dawn of historic times, all of Eurasia, northern Africa, and the Pacific Islands is overspread with the composite races of mankind. And these races of today have resulted from a blending and reblending of the five basic human stocks of Urantia. 유사(有史)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유라시아, 북(北)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諸島) 전체는 인류의 복합 종족으로 온통 뒤덮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종족들은 유란시아의 기본적인 다섯 인간 혈통이 혼합되고 다시 섞인 결과였습니다.

81:4.2 (904.6) Each of the Urantia races was identified by certain distinguishing physical characteristics. The Adamites and Nodites were long-headed; the Andonites were broad-headed. The Sangik races were medium-headed, with the yellow and blue men tending to broad-headedness. The blue races, when mixed with the Andonite stock, were decidedly broad-headed. The secondary Sangiks were medium- to long-headed. 유란시아 각 종족은 육체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특징으로 알아봅니다.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은 머리가 길었고, 안돈-사람들은 머리가 넓었습니다. 산긱 인종들은 머리가 중간 정도였는데, 황인들과 청인들은 머리가 넓은 편이었습니다. 청색 인종은 안돈-사람 혈통과 섞이자, 확실하게 머리가 넓어졌습니다. 2차 산긱들은 중간에서 긴 머리였습니다.

81:4.3 (904.7) Although these skull dimensions are serviceable in deciphering racial origins, the skeleton as a whole is far more dependable. In the early development of the Urantia races there were originally five distinct types of skeletal structure: 이런 두개골 규모로 편리하게 종족 기원을 판별할 수 있지만, 대체로 골격이 훨씬 신빙성이 있습니다. 유란시아 인종의 초기 발전에는 원래 뚜렷한 5유형의 골격 구조가 있었습니다.

81:4.4 (904.8) 1. Andonic, Urantia aborigines. 안돈, 유란시아 원주민.

81:4.5 (904.9) 2. Primary Sangik, red, yellow, and blue. 1차 산긱, 홍인, 황인, 청인.

81:4.6 (904.10) 3. Secondary Sangik, orange, green, and indigo. 2차 산긱, 주황인, 녹인, 남인.

81:4.7 (904.11) 4. Nodites, descendants of the Dalamatians. 놋-사람들, 달라마시아인(人)들 후손

81:4.8 (904.12) 5. Adamites, the violet race. 아담-사람들, 보라 인종.

81:4.9 (904.13) As these five great racial groups extensively intermingled, continual mixture tended to obscure the Andonite type by Sangik hereditary dominance. The Lapps and the Eskimos are blends of Andonite and Sangik-blue races. Their skeletal structures come the nearest to preserving the aboriginal Andonic type. But the Adamites and the Nodites have become so admixed with the other races that they can be detected only as a generalized Caucasoid order. 이런 커다란 다섯 종족 집단은 광범위하게 섞였고, 혼합이 되풀이되면서 산긱의 유전적 우성(偶性)으로 인해 안돈-사람들의 유형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라플랜드인(人)들과 에스키모인(人)들은 안돈-사람들 및 산긱-청인종의 혼합인(人)들입니다. 그들의 골격 구조는 보존하고 있는 토착 안돈-유형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나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은 다른 인종과 많이 섞여서 그들은 일반적인 코카서스 인종 계층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뿐입니다.

81:4.10 (905.1) In general, therefore, as the human remains of the last twenty thousand years are unearthed, it will be impossi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 five original types. Study of such skeletal structures will disclose that mankind is now divided into approximately three classes: 따라서 보통 마지막 2만 년의 인간 유해(遺骸)가 발굴되어도, 다섯 가지 원래 유형을 확실히 구별(區別)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골격 구조의 연구로, 인류가 이제 대략 3종류로 분류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81:4.11 (905.2) 1. The Caucasoid — the Andite blend of the Nodite and Adamic stocks, further modified by primary and (some) secondary Sangik admixture and by considerable Andonic crossing. The Occidental white races, together with some Indian and Turanian peoples, are included in this group. The unifying factor in this division is the greater or lesser proportion of Andite inheritance. 코카서스 인종 – 1차 및 (약간의) 2차 산긱 혼합과 상당한 안돈-사람들 교잡(交雜)으로 더욱 변경되었으며, 놋-사람 및 아담-사람 혈통과 혼합된 안드-사람들. 서양의 백인종이, 일부 인도인(人)들과 우랄-알타이어 민족들과 함께 이 집단에 포함됩니다. 이런 분류를 통합하는 요소는 크거나 작은 비율로 있는 안드-사람들의 유전형질입니다.

81:4.12 (905.3) 2. The Mongoloid — the primary Sangik type, including the original red, yellow, and blue races. The Chinese and Amerinds belong to this group. In Europe the Mongoloid type has been modified by secondary Sangik and Andonic mixture; still more by Andite infusion. The Malayan and other Indonesian peoples are included in this classification, though they contain a high percentage of secondary Sangik blood. 몽골 인종 – 본래 홍인, 황인 및 청인종을 포함하는 1차 산긱 유형. 중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 집단에 속합니다. 유럽에서 몽골 인종 유형은 2차 산긱과 안돈-사람들 혼합으로 변경되었고, 안드-사람들의 주입으로 훨씬 더 변경되었습니다. 말레이 사람과 다른 인도네시아 민족들은 높은 비율의 2차 산긱 혈통을 갖고 있지만, 이 분류에 포함됩니다.

81:4.13 (905.4) 3. The Negroid — the secondary Sangik type, which originally included the orange, green, and indigo races. This is the type best illustrated by the Negro, and it will be found through Africa, India, and Indonesia wherever the secondary Sangik races located. 흑인종 –주황색, 녹색, 남색 인종을 원래 포함하는 2차 산긱 유형. 이것의 가장 최고의 실례는 흑인이며, 2차 산긱 인종이 있는 아프리카, 인도와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81:4.14 (905.5) In North China there is a certain blending of Caucasoid and Mongoloid types; in the Levant the Caucasoid and Negroid have intermingled; in India, as in South America, all three types are represented. And the skeletal characteristics of the three surviving types still persist and help to identify the later ancestry of present-day human races. 중국 북부에는 코카서스 인종과 몽골 인종이 섞인 유형이 있습니다. 레반트에서 코카서스와 흑인종이 섞였습니다. 인도에는 남아메리카처럼 모든 세 유형이 나타납니다. 살아남은 3유형의 골격 특징은 여전히 지속하며, 현대 인류의 후기 조상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5. Cultural Society 문화적 사회

81:5.1 (905.6) Biologic evolution and cultural civilization are not necessarily correlated; organic evolution in any age may proceed unhindered in the very midst of cultural decadence. But when lengthy periods of human history are surveyed, it will be observed that eventually evolution and culture become related as cause and effect. Evolution may advance in the absence of culture, but cultural civilization does not flourish without an adequate background of antecedent racial progression. Adam and Eve introduced no art of civilization foreign to the progress of human society, but the Adamic blood did augment the inherent ability of the races and did accelerate the pace of economic development and industrial progression. Adam’s bestowal improved the brain power of the races, thereby greatly hastening the processes of natural evolution.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문명이 반드시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유기적(有機的) 진화는 문화적 쇠퇴의 한복판에서도 제약 없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의 오랜 기간을 조사하면, 결국 진화와 문화는 인과관계(因果關係)처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화는 문화 없이도 증진할 수 있지만, 문화적 문명은 이전(以前) 인종적 진보의 충분한 배경 없이 번영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 사회의 진보에 낯선 문명 기술의 초보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아담의 혈통은 인종의 본래 능력을 증대시켰고, 경제 발전과 산업 진보의 속도를 진척(進陟)시켰습니다. 아담의 증여로 인종들의 지력(知力)이 개선되어서, 자연 진화의 과정이 매우 빨라졌습니다.

81:5.2 (905.7) Through agriculture, animal domestication, and improved architecture, mankind gradually escaped the worst of the incessant struggle to live and began to cast about to find wherewith to sweeten the process of living; and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striving for higher and ever higher standards of material comfort. Through manufacture and industry man is gradually augmenting the pleasure content of mortal life. 농업과 동물 사육(飼育) 및 개선된 건축술을 통해, 인류는 생존하려는 끊임없는 최악의 투쟁을 점차 모면하고 삶의 과정을 즐겁게 하는 것을 찾으려고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적 위안의 기준을 계속 더 높이려는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은 제조업과 산업을 통해 점차 필사 생활에 속한 즐거움의 용량을 점차 늘리고 있습니다.

81:5.3 (906.1) But cultural society is no great and beneficent club of inherited privilege into which all men are born with free membership and entire equality. Rather is it an exalted and ever-advancing guild of earth workers, admitting to its ranks only the nobility of those toilers who strive to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s children may live and advance in subsequent ages. And this guild of civilization exacts costly admission fees, imposes strict and rigorous disciplines, visits heavy penalties on all dissenters and nonconformists, while it confers few personal licenses or privileges except those of enhanced security against common dangers and racial perils. 그러나 문화적 사회는 모든 사람이 무료 회원권과 완전히 평등하게 태어나는 특권을 물려받은 대단히 유익한 클럽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자녀들과 후손들이 후세에 살면서 전진하도록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며 그렇게 고생하는 고귀한 계층들만 받아들이면서, 높이 계속-전진하는 지상 일꾼들의 길드(동업 조합)입니다. 그리고 이 문명의 길드(동업 조합)는 비싼 입장료를 요구하고,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을 부과(賦課)하며, 찬성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모두를 중형으로 처벌하면서, 일반적 위험과 인종적 위험에 대한 강화된 그런 보안을 제외하고, 개인적인 자유 혹은 특전은 거의 주지 않습니다.

81:5.4 (906.2) Social association is a form of survival insurance which human beings have learned is profitable; therefore are most individuals willing to pay those premiums of self-sacrifice and personal-liberty curtailment which society exacts from its members in return for this enhanced group protection. In short, the present-day social mechanism is a trial-and-error insurance plan designed to afford some degree of assurance and protection against a return to the terrible and antisocial conditions which characterized the early experiences of the human race. 사회적 조합은, 인간이 유익하다고 터득한 생존 보험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개인은, 이렇게 강화된 집단 보호의 대가로 사회가 그 일원에게 요구하는 자기-희생과 개인적-자유를 삭감하는 그런 보험료를 기꺼이 지급합니다. 결국, 오늘날 사회적 작용 원리는, 초기 인류가 겪었던 특색인, 혹독하고 반사회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게, 어느 정도 확실히 보호하도록 마련된 시행착오(試行錯誤)의 보험 계획입니다.

81:5.5 (906.3) Society thus becomes a co-operative scheme for securing civil freedom through institutions, economic freedom through capital and invention, social liberty through culture, and freedom from violence through police regulation. 사회는, 제도(制度)를 통한 시민의 자유, 자본과 발명을 통한 경제적 자유, 문화를 통한 사회적 해방과 경찰규제를 통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하려고 이렇게 협력하는 조직이 됩니다.

81:5.6 (906.4) Might does not make right, but it does enforce the commonly recognized rights of each succeeding generation. The prime mission of government is the definition of the right, the just and fair regulation of class differences, and the enforcement of equality of opportunity under the rules of law. Every human right is associated with a social duty; group privilege is an insurance mechanism which unfailingly demands the full payment of the exacting premiums of group service. And group rights, as well as those of the individual, must be protected, including the regulation of the sex propensity. 힘이 정의(正義)는 아니지만, 그것은 각 후속 세대가 일반적으로 인정한 권리를 행사합니다. 정부(政府)의 첫째 임무는 권리를 정의하고, 계층 차이를 올바르고 공정하게 규정하며, 법규 아래에서 균등하게 기회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권(人權)은 사회적 의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집단의 특권은, 집단적 돌봄에 요구되는 보험료의 완불을 확실히 요구하는 보험의 작용 원리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집단의 권리도 성적(性的) 성향의 규제와 더불어 보호되어야 합니다.

81:5.7 (906.5) Liberty subject to group regulation is the legitimate goal of social evolution. Liberty without restrictions is the vain and fanciful dream of unstable and flighty human minds. 집단 규정의 지배를 받는 해방은 사회적 진화의 정당한 목표입니다. 제한 없는 해방은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인간 마음에 속한 헛된 몽상(夢想)입니다.

6. The Maintenance of Civilization 문명의 유지

81:6.1 (906.6) While biologic evolution has proceeded ever upward, much of cultural evolution went out from the Euphrates valley in waves, which successively weakened as time passed until finally the whole of the pure-line Adamic posterity had gone forth to enrich the civilizations of Asia and Europe. The races did not fully blend, but their civilizations did to a considerable extent mix. Culture did slowly spread throughout the world. And this civilization must be maintained and fostered, for there exist today no new sources of culture, no Andites to invigorate and stimulate the slow progress of the evolution of civilization. 생물학적 진화는 늘 계속 향상했지만, 대부분의 문화적 진화는 유프라테스 유역으로부터 파도처럼 밖으로 나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침내 전체 순계(純系) 아담의 후세가 퍼져서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이 풍성할 때까지, 계속 약해졌습니다. 인종들은 완전히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문명은 상당한 정도로 혼합되었습니다. 문화는 서서히 전(全) 세계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문명은 유지되고 촉진되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새로운 문화의 원천(源泉)이 없고, 서서히 진보하는 문명의 진화에 활기를 주고 격려할 안드-사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1:6.2 (906.7) The civilization which is now evolving on Urantia grew out of, and is predicated on, the following factors: 지금 유란시아에서 진화하는 문명은 다음의 요소들에서 발전하여 커졌고, 그 요소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81:6.3 (906.8) 1. Natural circumstances. The nature and extent of a material civilization is in large measure determined by the natural resources available. Climate, weather, and numerous physical conditions are factors in the evolution of culture. 자연적 환경. 물질문명의 성질과 정도는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자원에 따라서 상당히 결정됩니다. 기후, 날씨 및 수많은 물리적 조건은 문화가 진화하는 요소들입니다.

81:6.4 (907.1) At the opening of the Andite era there were only two extensive and fertile open hunting areas in all the world. One was in North America and was overspread by the Amerinds; the other was to the north of Turkestan and was partly occupied by an Andonic-yellow race. The decisive factors in the evolution of a superior culture in southwestern Asia were race and climate. The Andites were a great people, but the crucial factor in determining the course of their civilization was the increasing aridity of Iran, Turkestan, and Sinkiang, which forced them to invent and adopt new and advanced methods of wresting a livelihood from their decreasingly fertile lands. 안드-사람들의 시대가 열릴 때, 광활하고 비옥하게 펼쳐진 사냥 지역은 전 세계에 두 곳뿐이었습니다. 하나는 북아메리카에 있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로 가득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투르키스탄의 북부였는데, 안돈-황색 인종이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남서(南西) 아시아에서 우수한 문화가 진화했던 결정적 요소는 인종과 기후였습니다. 안드-사람들은 위대한 민족이었지만, 그들 문명의 과정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는 이란, 투르키스탄 및 신장(新疆)의 건조도(乾燥度) 증가였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줄어드는 비옥한 땅에서 생계를 살아나가는 진보한 새 방법을 발명하고 채택(採擇)해야만 했습니다.

81:6.5 (907.2) The configuration of continents and other land-arrangement situations are very influential in determining peace or war. Very few Urantians have ever had such a favorable opportunity for continuous and unmolested development as has been enjoyed by the peoples of North America — protected on practically all sides by vast oceans. 대륙의 지형(地形)과 다른 토지-배치 상황은 평화 또는 전쟁을 결정할 때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북아메리카 – 사실상 사방이 광대한 바다로 보호받는 – 민족들이 누렸던 것처럼, 계속 시달리지 않고 발전하는, 그런 유리한 기회를 지녔던 유란시아인(人)들은 거의 없습니다.

81:6.6 (907.3) 2. Capital goods. Culture is never developed under conditions of poverty; leisure is essential to the progress of civilization. Individual character of moral and spiritual value may be acquired in the absence of material wealth, but a cultural civilization is only derived from those conditions of material prosperity which foster leisure combined with ambition. 자본재(資本財). 문화는 빈곤한 상황에서 결코 발전하지 않습니다. 여가(餘暇)는 문명의 진보에 필수적입니다. 도덕적이며 영적 가치를 지닌 개인의 특성은 물질적 자원 없이 얻을 수 있지만, 문화적 문명은, 야망을 겸(兼)한 여가(餘暇)를 조성하는 물질적 번영의 상황에서만 파생합니다.

81:6.7 (907.4) During primitive times life on Urantia was a serious and sober business. And it was to escape this incessant struggle and interminable toil that mankind constantly tended to drift toward the salubrious climate of the tropics. While these warmer zones of habitation afforded some remission from the intense struggle for existence, the races and tribes who thus sought ease seldom utilized their unearned leisure for the advancement of civilization. Social progress has invariably come from the thoughts and plans of those races that have, by their intelligent toil, learned how to wrest a living from the land with lessened effort and shortened days of labor and thus have been able to enjoy a well-earned and profitable margin of leisure. 원시 시대에 유란시아의 생활은 심상치 않고 냉정한 일이었습니다. 인류가 열대의 쾌적한 기후를 향해 계속 떠돌았던 경향은 이런 끊임없는 투쟁과 끝없는 싸움을 벗어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거주 지역으로 인해 강렬한 생존 투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이렇게 안락을 추구했던 종족과 부족들은 일하지 않고 얻은 여가(餘暇)를 문명의 진보를 위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진보는 항상 자신들의 지능적인 수고로, 노력을 줄이고 노동 일수를 단축하여 토지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배워서, 제힘으로 얻은 여가의 유익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던, 그런 인종의 생각과 계획에서 생깁니다.

81:6.8 (907.5) 3. Scientific knowledge. The material aspects of civilization must always await the accumulation of scientific data. It was a long time after the discovery of the bow and arrow and the utilization of animals for power purposes before man learned how to harness wind and water, to be followed by the employment of steam and electricity. But slowly the tools of civilization improved. Weaving, pottery, the domestication of animals, and metalworking were followed by an age of writing and printing. 과학적 지식. 문명의 물질적 국면은 언제나 누적된 과학적 자료를 기다려야 합니다. 활과 화살을 발견하고 동력의 목적으로 동물을 사용한 후, 사람이 바람과 물을 동력화하는 법을 배우고, 뒤를 이어, 증기와 전기를 사용하기 전에, 오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문명의 도구가 개선되었습니다. 직조(織造), 도기 제조, 동물 사육(飼育)과 금속 세공술 다음에 글쓰기와 인쇄의 시대가 뒤따랐습니다.

81:6.9 (907.6) Knowledge is power. Invention always precedes the acceleration of cultural development on a world-wide scale. Science and invention benefited most of all from the printing press, and the interaction of all these cultural and inventive activities has enormously accelerated the rate of cultural advancement. 지식은 권능입니다. 세계적 규모로 문화적 발전이 가속되기 전에, 발명이 항상 먼저 일어납니다. 과학과 발명은 무엇보다 인쇄기로부터 혜택을 받았고, 이런 문화적이고 독창적인 활동의 상호작용으로 문화적 진보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81:6.10 (907.7) Science teaches man to speak the new language of mathematics and trains his thoughts along lines of exacting precision. And science also stabilizes philosophy through the elimination of error, while it purifies religion by the destruction of superstition. 과학이 사람을 가르쳐 수학의 새 언어를 말하게 하고, 엄격하게 정확한 방침을 따라서 사람의 생각을 훈련합니다. 또한 과학은 오류를 제거하여 철학을 견고하게 하며, 한편으로 과학은 미신을 파괴하여 종교를 깨끗하게 합니다.

81:6.11 (907.8) 4. Human resources. Man power is indispensable to the spread of civilization. All things equal, a numerous people will dominate the civilization of a smaller race. Hence failure to increase in numbers up to a certain point prevents the full realization of national destiny, but there comes a point in population increase where further growth is suicidal. Multiplication of numbers beyond the optimum of the normal man-land ratio means either a lowering of the standards of living or an immediate expansion of territorial boundaries by peaceful penetration or by military conquest, forcible occupation. 인적(人的) 자원. 인력(人力)은 문명의 확산에 필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대등하면, 다수의 민족이 그보다 적은 종족의 문명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수(數)를 늘리지 않으면, 민족의 운명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지만, 더 증가하면 자멸하는 인구 증가의 단계에 이릅니다. 토지-사람의 최적 정상적 비율을 초과하는 수(數)의 증가는 생활 수준의 저하(低下) 또는 평화적 신장이나 군사 정복, 즉 강제 점령으로 영토 경계를 즉시 확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81:6.12 (908.1) You are sometimes shocked at the ravages of war, but you should recognize the necessity for producing large numbers of mortals so as to afford ample opportunity for social and moral development; with such planetary fertility there soon occurs the serious problem of overpopulation. Most of the inhabited worlds are small. Urantia is average, perhaps a trifle undersized. The optimum stabilization of national population enhances culture and prevents war. And it is a wise nation which knows when to cease growing. 너희는 종종 전쟁의 참해(慘害)로 충격을 받지만, 사회 및 도덕 발전의 충분한 기회를 마련하려면 많은 필사자의 생산이 필요함을 너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 행성의 다산(多産)과 함께 곧 인구과잉의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거주 세계들은 작습니다. 유란시아는 평균적이며, 어쩌면 약간 보통보다 작습니다. 국가 개체군의 최적 안정화로 문화가 향상하고 전쟁이 예방됩니다. 성장이 멈출 때를 아는 나라는 현명합니다.

81:6.13 (908.2) But the continent richest in natural deposits and the most advanced mechanical equipment will make little progress if the intelligence of its people is on the decline. Knowledge can be had by education, but wisdom, which is indispensable to true culture, can be secured only through experience and by men and women who are innately intelligent. Such a people are able to learn from experience; they may become truly wise. 그러나 자연 퇴적물이 가장 풍부하고 기계 장치가 가장 진보한 대륙이라도, 그 민족의 지능이 쇠약해진다면, 거의 진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지만, 참된 문화에 필수적인 지혜는 체험과 지능을 타고난 남성과 여성들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민족은 체험으로 배울 수 있고 정말로 지혜롭게 될 수 있습니다.

81:6.14 (908.3) 5. Effectiveness of material resources. Much depends on the wisdom displayed in the utilization of natural resources, scientific knowledge, capital goods, and human potentials. The chief factor in early civilization was the force exerted by wise social masters; primitive man had civilization literally thrust upon him by his superior contemporaries. Well-organized and superior minorities have largely ruled this world. 물질 자원의 효율성. 자연 자원, 과학적 지식, 자본재 및 인간 잠재성을 활용하여 발휘된 지혜에,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초기 문명의 주된 요소는 현명한 사회적 지도자들이 발휘하는 지배력이었습니다. 원시인은 그의 뛰어난 동시대 사람들이 그에게 완전히 떠안긴 문명을 소유했습니다. 잘 조직된 우수한 소수가 이 세상을 주로 다스렸습니다.

81:6.15 (908.4) Might does not make right, but might does make what is and what has been in history. Only recently has Urantia reached that point where society is willing to debate the ethics of might and right. 힘이 정의(正義)를 만들지 않지만, 힘은 역사에서 현재 있고, 있었던 것을 만듭니다. 최근에야 유란시아는, 사회가 기꺼이 힘과 정의(正義)의 윤리를 검토하는, 그런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81:6.16 (908.5) 6. Effectiveness of language. The spread of civilization must wait upon language. Live and growing languages insure the expansion of civilized thinking and planning. During the early ages important advances were made in language. Today, there is great need for further linguistic development to facilitate the expression of evolving thought. 언어의 효율성. 문명의 확산은 언어를 기다려야 합니다. 살아서 성장하는 언어가 문명화된 사상과 계획의 확장을 보증합니다. 초기 시대에, 언어에서, 중요한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진화하는 생각을 쉽게 표현하도록 훨씬 언어 발전이 크게 필요합니다.

81:6.17 (908.6) Language evolved out of group associations, each local group developing its own system of word exchange. Language grew up through gestures, signs, cries, imitative sounds, intonation, and accent to the vocalization of subsequent alphabets. Language is man’s greatest and most serviceable thinking tool, but it never flourished until social groups acquired some leisure. The tendency to play with language develops new words — slang. If the majority adopt the slang, then usage constitutes it language. The origin of dialects is illustrated by the indulgence in “baby talk” in a family group. 언어는 집단의 연합에서 진화했는데, 각 지역 집단은 자체의 단어 교환 체계를 개발했습니다. 언어는 동작, 신호, 외침, 흉내 내는 소리, 억양 및 강세를 통해 나중에 알파벳 발성까지 서서히 생겨났습니다. 언어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도구이지만, 사회 집단들이 약간의 여가를 얻기까지 번성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로 노는 성향이 새 단어 – 속어를 개발합니다. 대다수가 속어를 채택하면, 어법이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냅니다. 방언의 기원은 가족 집단의 “유아어(어른이 아기에게 말할 때 쓰는 어투)”를 받아주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81:6.18 (908.7) Language differences have ever been the great barrier to the extension of peace. The conquest of dialects must precede the spread of a culture throughout a race, over a continent, or to a whole world. A universal language promotes peace, insures culture, and augments happiness. Even when the tongues of a world are reduced to a few, the mastery of these by the leading cultural peoples mightily influences the achievement of world-wide peace and prosperity. 언어 차이는 평화의 확장에 언제나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방언의 정복이, 종족 전체에, 모든 대륙에, 또는 온 세상의, 문화 확산에 앞서야 합니다. 보편적 언어로 평화가 증진하고, 문화가 보장(保障)되며, 행복이 늘어납니다. 세상의 언어가 몇 개로 줄어들기만 해도, 문화를 주도하는 민족들이 이런 언어의 숙달로, 세계적인 평화와 번영의 성취에 대단하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81:6.19 (908.8) While very little progress has been made on Urantia toward developing an international language, much has been accomplished by the establishment of international commercial exchange. And all these international relations should be fostered, whether they involve language, trade, art, science, competitive play, or religion. 국제어의 개발을 향한 유란시아의 진보는 거의 없었지만, 국제적 통상교류의 설립으로 많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국제 관계는 그것들이 언어, 무역, 예술, 과학, 경쟁 경기나 종교를 포함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육성되어야 합니다.

81:6.20 (909.1) 7. Effectiveness of mechanical devices. The progress of civilization is direct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and possession of tools, machines, and channels of distribution. Improved tools, ingenious and efficient machines, determine the survival of contending groups in the arena of advancing civilization. 기계 장치의 효율성. 문명의 진보는 도구, 기계 및 배포의 경로와 직접 관련됩니다. 개선된 도구, 독창적이며 효율적인 기계가 진보하는 문명의 무대에서 경쟁하는 집단의 생존을 결정합니다.

81:6.21 (909.2) In the early days the only energy applied to land cultivation was man power. It was a long struggle to substitute oxen for men since this threw men out of employment. Latterly, machines have begun to displace men, and every such advance is directly contributory to the progress of society because it liberates man power for the accomplishment of more valuable tasks. 초기 시절에 토지 경작에 적용된 유일한 에너지는 인력이었습니다. 오랜 투쟁으로 인력을 황소로 대체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이 해고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기 시작했으며, 더 가치 있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인력을 해방하기 때문에, 그런 모든 향상은 사회 진보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81:6.22 (909.3) Science, guided by wisdom, may become man’s great social liberator. A mechanical age can prove disastrous only to a nation whose intellectual level is too low to discover those wise methods and sound techniques for successfully adjusting to the transition difficulties arising from the sudden loss of employment by large numbers consequent upon the too rapid invention of new types of laborsaving machinery. 과학을 지혜롭게 사용하면, 사람을 엄청나게 사회적으로 해방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유형의 노동 절약 기계가 너무 신속히 발명된 결과로 갑작스러운 대량 이직(離職)에서 발생하는 과도적 문제들에 성공적으로 조정하기에, 지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런 슬기로운 방법과 충분한 기술을 발견하지 못하는 나라에만, 기계 시대가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81:6.23 (909.4) 8. Character of torchbearers. Social inheritance enables man to stand on the shoulders of all who have preceded him, and who have contributed aught to the sum of culture and knowledge. In this work of passing on the cultural torch to the next generation, the home will ever be the basic institution. The play and social life comes next, with the school last but equally indispensable in a complex and highly organized society. 문화선구자의 성품. 사람은 사회적 유산으로 자신보다 앞섰고, 문화와 지식의 총합에 무엇이라도 공헌했던 모든 자의 어깨 위에 설 수 있게 합니다. 다음 세대에 문화적 횃불을 전하는 이런 과업에서, 가정은 언제나 기본적 제도가 될 것입니다. 놀이와 사회생활이 다음이며, 학교는 마지막이지만 동시에 복잡하며 고도로 조직된 사회에서 필수적입니다.

81:6.24 (909.5) Insects are born fully educated and equipped for life — indeed, a very narrow and purely instinctive existence. The human baby is born without an education; therefore man possesses the power, by controlling the educational training of the younger generation, greatly to modify the evolutionary course of civilization. 곤충은 충분히 교육받고, 정말, 매우 한정되고 순전히 본능적인 존재의 삶을 위해 갖추고 태어납니다. 인간 아기는 교육 없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젊은 세대의 교육 훈련을 조정하여, 문명의 진화 과정을 크게 조절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81:6.25 (909.6) The greatest twentieth-century influences contributing to the furtherance of civilization and the advancement of culture are the marked increase in world travel and the unparalleled improvements in methods of communication. But the improvement in education has not kept pace with the expanding social structure; neither has the modern appreciation of ethics developed in correspondence with growth along more purely intellectual and scientific lines. And modern civilization is at a standstill in spiritual development and the safeguarding of the home institution. 문명의 증진과 문화 발달에 공헌하는 20세기 최대 영향력은 세계 여행의 현저한 증가와 비길 데 없는 소통 방법의 개량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개선은 사회 구조의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윤리의 현대적 인식이, 순전히 더 지적이며 과학적인 방향에 따른 성장에 맞춰, 발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영적 발전과 가정 제도를 지키는 면에서 정체되어 있습니다.

81:6.26 (909.7) 9. The racial ideals. The ideals of one generation carve out the channels of destiny for immediate posterity. The quality of the social torchbearers will determine whether civilization goes forward or backward. The homes, churches, and schools of one generation predetermine the character trend of the succeeding generation. The moral and spiritual momentum of a race or a nation largely determines the cultural velocity of that civilization. 인종의 이상(理想)들. 한 세대의 이상(理想)이 직계 후손을 위한 운명의 경로를 개척해 나갑니다. 사회 선구자들의 자질이 문명이 전진할지 퇴보할지 결정할 것입니다. 한 세대의 가정, 교회, 학교가 다음 세대의 특색 방향을 미리 결정합니다. 인종 또는 나라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추진력이 그 문명의 문화적 속도를 대부분 결정합니다.

81:6.27 (909.8) Ideals elevate the source of the social stream. And no stream will rise any higher than its source no matter what technique of pressure or directional control may be employed. The driving power of even the most material aspects of a cultural civilization is resident in the least material of society’s achievements. Intelligence may control the mechanism of civilization, wisdom may direct it, but spiritual idealism is the energy which really uplifts and advances human culture from one level of attainment to another. 이상(理想)이 사회 흐름의 근원을 향상합니다. 그리고 어떤 흐름에, 어떤 압력의 기술이나 방향 제어가 사용되어도, 그 흐름의 근원보다 더 높이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문화적 문명 중 가장 물질적인 면의 추진력도 가장 물질적이지 않은 사회적 성취에 들어있습니다. 지능은 문명의 작용을 조정하며, 지혜는 그것을 관리하지만, 영적 이상주의(理想主義)는 인간의 문화를 달성의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정말로 향상하여 증진하는 에너지입니다.

81:6.28 (910.1) At first life was a struggle for existence; now, for a standard of living; next it will be for quality of thinking, the coming earthly goal of human existence. 처음에, 삶은 생존 투쟁이었지만, 지금은, 생활 수준을 위한 투쟁입니다. 다음에는 인간 생존의 다가오는 지상 목표인 생각의 특성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81:6.29 (910.2) 10. Co-ordination of specialists. Civilization has been enormously advanced by the early division of labor and by its later corollary of specialization. Civilization is now dependent on the effective co-ordination of specialists. As society expands, some method of drawing together the various specialists must be found. 전문가들의 통합-조정. 문명은, 초기의 분업과 후기 전문화의 결과로, 엄청나게 증진되었습니다. 문명은 이제 전문가들의 유능한 통합-조정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가 확장하면서, 다양한 전문가들을 협력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81:6.30 (910.3) Social, artistic, technical, and industrial specialists will continue to multiply and increase in skill and dexterity. And this diversification of ability and dissimilarity of employment will eventually weaken and disintegrate human society if effective means of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are not developed. But the intelligence which is capable of such inventiveness and such specialization should be wholly competent to devise adequate methods of control and adjustment for all problems resulting from the rapid growth of invention and the accelerated pace of cultural expansion. 사회, 예술, 기술 및 산업 전문가들은 계속 늘어나고, 기술과 재주가 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통합-조정 및 협력의 수단들이 개발되지 않으면, 이런 다양한 능력과 직업의 차이로 결국 인간 사회는 약해져서 해체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독창적이며 그렇게 전문화를 할 수 있는 지능은, 발명의 신속한 성장과 문화 팽창의 가속 속도에서 생긴 모든 문제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적당한 방법을 고안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81:6.31 (910.4) 11. Place-finding devices. The next age of social development will be embodied in a better and more effective co-operation and co-ordination of ever-increasing and expanding specialization. And as labor more and more diversifies, some technique for directing individuals to suitable employment must be devised. Machinery is not the only cause for unemployment among the civilized peoples of Urantia. Economic complexity and the steady increase of industrial and professional specialism add to the problems of labor placement. 구직(求職) 방책. 사회적으로 발전하는 차세대는 계속 증가하고 확장하는 전문화를 더 낫게,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통합-조정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이 점차 다양화할수록, 개인들에 적합한 직업으로 이끄는 어떤 기술이 고안되어야 합니다. 기계류가 유란시아의 문명 민족 중에서 실직의 유일한 원인이 아닙니다. 경제적 복잡성과 산업 및 직업적 전문분야가 꾸준히 늘어나 노동 배치 문제가 증가합니다.

81:6.32 (910.5) It is not enough to train men for work; in a complex society there must also be provided efficient methods of place finding. Before training citizens in the highly specialized techniques of earning a living, they should be trained in one or more methods of commonplace labor, trades or callings which could be utilized when they were transiently unemployed in their specialized work. No civilization can survive the long-time harboring of large classes of unemployed. In time, even the best of citizens will become distorted and demoralized by accepting support from the public treasury. Even private charity becomes pernicious when long extended to able-bodied citizens. 사람이 일하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사회에서 효율적인 구직(求職) 방법도 제공해야 합니다. 시민들에게 고도로 전문화된 생계유지 기술을 훈련하기 전에, 그들이 자신들의 전문 과업에서 잠시 실직했을 때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은 하나 이상의 평범한 노동, 상업 및 생업 방식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어떤 문명도 대규모의 실직된 부류에 오랫동안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결국 최선의 시민들도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아, 비뚤어지고 사기(士氣)가 꺾일 것입니다. 사적 자선도, 강건한 시민들에게 오래 연장되면 해롭게 됩니다.

81:6.33 (910.6) Such a highly specialized society will not take kindly to the ancient communal and feudal practices of olden peoples. True, many common services can be acceptably and profitably socialized, but highly trained and ultraspecialized human beings can best be managed by some technique of intelligent co-operation. Modernized co-ordination and fraternal regulation will be productive of longer-lived co-operation than will the older and more primitive methods of communism or dictatorial regulative institutions based on force. 그런 고도의 전문 사회는 옛사람들의 고대 공동체의 봉건 관습을 자진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여러 공동 편의들은 기꺼이 유익하게 사회화될 수 있지만, 고도의 훈련으로 초(超)특화한 인간들은 지능적 협력의 기법으로 가장 잘 관리될 수 있습니다. 현대화한 통합-조정 및 형제간의 규정이 더 오래되고 더 원시적인 공산주의 방법이나 강압에 근거한 독재 규정 기관들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협력을 낳을 것입니다.

81:6.34 (910.7) 12. The willingness to co-operate. One of the great hindrances to the progress of human society is the conflict between the interests and welfare of the larger, more socialized human groups and of the smaller, contrary-minded asocial associations of mankind, not to mention antisocially-minded single individuals. 협력의 자발성. 인간 사회 진보에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는 더 크고 더 사회화한 인간 그룹과 반사회적인 하나의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작은 반대-마음의 이기적인 단체의 이익과 복지의 갈등입니다.

81:6.35 (910.8) No national civilization long endures unless its educational methods and religious ideals inspire a high type of intelligent patriotism and national devotion. Without this sort of intelligent patriotism and cultural solidarity, all nations tend to disintegrate as a result of provincial jealousies and local self-interests. 어떤 국가의 문명도, 교육적 방법과 종교적 이상(理想)이 높은 유형의 지능적인 애국심과 국가적 헌신을 고취(鼓吹)하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능적 애국심과 문화적 결속이 없으면, 지방의 시샘과 지역적 사리사욕의 결과로 모든 국가는 붕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81:6.36 (911.1) The maintenance of world-wide civilization is dependent on human beings learning how to live together in peace and fraternity. Without effective co-ordination, industrial civilization is jeopardized by the dangers of ultraspecialization: monotony, narrowness, and the tendency to breed distrust and jealousy. 세계적 문명의 유지는 평화와 우애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인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효과적인 통합-조정이 없다면, 산업 문명은 초(超)특화의 위험성 즉, 단조로움, 편협(偏狹) 및 불신과 질투를 낳는 경향으로 위태롭게 됩니다.

81:6.37 (911.2) 13. Effective and wise leadership. In civilization much, very much, depends on an enthusiastic and effective load-pulling spirit. Ten men are of little more value than one in lifting a great load unless they lift together — all at the same moment. And such teamwork — social co-operation — is dependent on leadership. The cultural civilization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have been based upon the intelligent co-operation of the citizenry with wise and progressive leaders; and until man evolves to higher levels, civilization will continue to be dependent on wise and vigorous leadership. 효과적인 현명한 지도력. 문명의 많은, 아주 많은 것은, 열성적이고 효과적인 부하(負荷 짐)-인출(引出 끌어서 빼냄) 정신에 달려 있습니다. 10명의 사람이 모두 동시에 함께 무거운 짐을 들지 않으면, 한 사람의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협동작업 – 사회적 협력-은 지도력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문명은 현명하고 진보적인 지도자들과 함께 시민들의 지능적인 협력에 기반(基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할 때까지, 문명은 현명하고 힘찬 지도력에 계속 달려 있을 것입니다.

81:6.38 (911.3) High civilizations are born of the sagacious correlation of material wealth, intellectual greatness, moral worth, social cleverness, and cosmic insight. 높은 문명은 물질적 재산, 지적 위대함, 도덕적 가치, 사회적 재치 및 질서우주적 통찰력의 명민한 상관관계에서 태어납니다.

81:6.39 (911.4) 14. Social changes. Society is not a divine institution; it is a phenomenon of progressive evolution; and advancing civilization is always delayed when its leaders are slow in making those changes in the social organization which are essential to keeping pace with the scientific developments of the age. For all that, things must not be despised just because they are old, neither should an idea be unconditionally embraced just because it is novel and new. 사회 변화. 사회는 신적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보적 진화의 현상입니다. 전진하는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그 시대의 과학적 개발과 보조를 맞추기에 필수적인 사회 조직의 그런 변화를 더디게 만들면, 언제나 지연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이 낡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얕보지 말아야 하며, 생각(관념)이 기발하고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채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81:6.40 (911.5) Man should be unafraid to experiment with the mechanisms of society. But always should these adventures in cultural adjustment be controlled by those who are fully conversant with the history of social evolution; and always should these innovators be counseled by the wisdom of those who have had practical experience in the domains of contemplated social or economic experiment. No great social or economic change should be attempted suddenly. Time is essential to all types of human adjustment — physical, social, or economic. Only moral and spiritual adjustments can be made on the spur of the moment, and even these require the passing of time for the full outworking of their material and social repercussions. The ideals of the race are the chief support and assurance during the critical times when civilization is in transit from one level to another. 사람은 사회 작용의 실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 진화의 역사에 완전히 정통한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조율하면서 이런 모험을 언제나 조정해야 합니다. 이런 혁신자들이 언제나, 신중하게 숙고한 사회적 또는 경제적 실험의 권역에서 실제적 체험을 했던 사람들의 지혜로 조언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회적 또는 경제적 변화라도 갑자기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은 모든 유형의 인간적 조율 – 물리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에 필수적입니다. 도덕적이며 영적 조율들만 찰나에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런 것들도 물리적이며 사회적 반향이 충분히 성취되는데 시간의 경과가 필요합니다.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문명이 이동하는 결정적 시간에, 인종의 이상(理想)이 최고의 지원과 보증입니다.

81:6.41 (911.6) 15. The prevention of transitional breakdown. Society is the offspring of age upon age of trial and error; it is what survived the selective adjustments and readjustments in the successive stages of mankind’s agelong rise from animal to human levels of planetary status. The great danger to any civilization — at any one moment — is the threat of breakdown during the time of transition from the established methods of the past to those new and better, but untried, procedures of the future. 과도기의 몰락 예방.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시행착오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동물에서 행성 상태의 인간 수준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올라가는 연속적 단계에서 선택적 조율과 재조율하여 살아남은 것입니다. 문명에 대한 가장 큰 위험은 – 어느 순간이든 – 과거의 확립된 방법에서 새롭고 더 낫지만 확인되지 않은, 미래의 절차로 변천하는 기간에 몰락하는 조짐입니다.

81:6.42 (911.7) Leadership is vital to progress. Wisdom, insight, and foresight are indispensable to the endurance of nations. Civilization is never really jeopardized until able leadership begins to vanish. And the quantity of such wise leadership has never exceeded one per cent of the population. 지도력은 진보에 지극히 중요합니다. 지혜, 통찰력, 선견지명은 국가의 존속에 절대 필요합니다. 유능한 지도력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까지 문명은 실제로 전혀 위태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명한 지도력의 양(量)은 인구의 1%를 넘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81:6.43 (911.8) And it was by these rungs on the evolutionary ladder that civilization climbed to that place where those mighty influences could be initiated which have culminated in the rapidly expanding culture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only by adherence to these essentials can man hope to maintain his present-day civilizations while providing for their continued development and certain survival. 그리고 문명은, 진화적 사다리의 이런 단계를 통해, 20세기의 신속히 팽창하는 문화에서 절정에 달한 그런 강력한 영향력이 시작되는 그런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필수 요소들을 고수(固守)해서만, 사람은, 자신들의 계속된 발전과 확실한 생존을 마련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문명 유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81:6.44 (912.1) This is the gist of the long, long struggle of the peoples of earth to establish civilization since the age of Adam. Present-day culture is the net result of this strenuous evolution. Before the discovery of printing, progress was relatively slow since one generation could not so rapidly benefit from the achievements of its predecessors. But now human society is plunging forward under the force of the accumulated momentum of all the ages through which civilization has struggled. 이것이 아담 시대 이후에 문명을 세우려고 지상의 민족들이 길고 길게 분투한 요점입니다. 현대 문화는 이런 격렬한 진화의 최종 결과입니다. 인쇄술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 세대가 그 선조들의 업적에서 그렇게 순식간에 이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보가 비교적 느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 사회는, 문명이 투쟁했던 것을 통해 모든 시대의 축적된 추진력의 기세에 힘입어 앞으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81:6.45 (912.2) [Sponsored by an Archangel of Nebadon.][네바돈의 천사장이 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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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2 The Evolution of Marriage 결혼의 진화

Paper 82

The Evolution of Marriage 결혼의 진화

1. The Mating Instinct 짝짓기 본능
2. The Restrictive Taboos 제한하는 금기
3. Early Marriage Mores 초기의 결혼 관습
4. Marriage Under the Property Mores 재산 관습에 따른 결혼
5. Endogamy and Exogamy 동족(同族) 결혼과 족외(族外) 결혼
6. Racial Mixtures 종족의 혼합

82:0.1 (913.1) MARRIAGE — mating — grows out of bisexuality. Marriage is man’s reactional adjustment to such bisexuality, while the family life is the sum total resulting from all such evolutionary and adaptative adjustments. Marriage is enduring; it is not inherent in biologic evolution, but it is the basis of all social evolution and is therefore certain of continued existence in some form. Marriage has given mankind the home, and the home is the crowning glory of the whole long and arduous evolutionary struggle. 결혼–짝짓기-는 양성(兩性)에서 싹틉니다. 결혼은 그런 양성에 인간이 조율하며 반응하는 것이며, 한편 가정생활은 그런 모든 진화적인 적응 조율에서 생기는 총량입니다. 결혼은 지속적입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진화에서 선천적이지 않지만, 모든 사회적 진화의 토대이므로 어떤 형태로 계속 확실히 존재합니다. 결혼은 인류에게 가정을 제공했으며, 가정은 길고 힘든 진화적 투쟁 전체에서 최고의 영광입니다.

82:0.2 (913.2) While religious, social, and educational institutions are all essential to the survival of cultural civilization, the family is the master civilizer. A child learns most of the essentials of life from his family and the neighbors. 종교적, 사회적 및 교육적 제도는 문화적 문명의 생존에 모두 필수적이지만, 가정은 문명화의 주인입니다. 어린이는 자기 가정과 이웃들로부터 생활의 본질적인 요소 대부분을 배웁니다.

82:0.3 (913.3) The humans of olden times did not possess a very rich social civilization, but such as they had they faithfully and effectively passed on to the next generation. And you should recognize that most of these civilizations of the past continued to evolve with a bare minimum of other institutional influences because the home was effectively functioning. Today the human races possess a rich social and cultural heritage, and it should be wisely and effectively passed on to succeeding generations. The family 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must be maintained. 옛날 사람들은 아주 풍부한 사회적 문명이 없었지만, 그들이 소유했던 그대로 성실하고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부분의 과거 문명은, 가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최소한의 다른 제도적 영향과 함께 계속 진화했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봐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는 풍성한 사회적 문화 유산을 지니며, 그것은 다음의 세대들에게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교육 기관으로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1. The Mating Instinct 짝짓기 본능

82:1.1 (913.4) Notwithstanding the personality gulf between men and women, the sex urge is sufficient to insure their coming together for the reproduction of the species. This instinct operated effectively long before humans experienced much of what was later called love, devotion, and marital loyalty. Mating is an innate propensity, and marriage is its evolutionary social repercussion.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격 격차에도 불구하고, 성욕은 그들이 인종 번식을 위해 함께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본능은, 인간이 나중에 사랑, 헌신 및 부부의 충절이라고 불린 많은 것을 경험하기 훨씬 전에, 효과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짝짓기는 타고난 성향이고, 결혼은 그 진화의 사회적 반향(反響)입니다.

82:1.2 (913.5) Sex interest and desire were not dominating passions in primitive peoples; they simply took them for granted. The entire reproductive experience was free from imaginative embellishment. The all-absorbing sex passion of the more highly civilized peoples is chiefly due to race mixtures, especially where the evolutionary nature has been stimulated by the associative imagination and beauty appreciation of the Nodites and Adamites. But this Andite inheritance was absorbed by the evolutionary races in such limited amounts as to fail to provide sufficient self-control for the animal passions thus quickened and aroused by the endowment of keener sex consciousness and stronger mating urges. Of the evolutionary races, the red man had the highest sex code. 성적 흥미와 욕망은 원시 민족들의 지배적인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적 흥미와 욕망을 단순히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모든 번식 경험에는 상상하는 꾸밈이 없었습니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람들의 포괄(包括) 욕정은 주로 인종 혼합 때문이며, 진화 본성이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의 연상하는 상상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자극된 곳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진화 종족이 흡수한 이 안드-사람 유전성은 너무 제한된 분량이어서, 더 격렬한 성(性) 의식과 더 강한 짝짓는 욕구의 자질로 가속되고 야기된, 동물의 격정에 대한 자제심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진화 종족 중 홍인이 가장 높은 성(性)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82:1.3 (913.6) The regulation of sex in relation to marriage indicates: 결혼 관계에서 성(性)의 규정은 다음을 말합니다.

82:1.4 (913.7) 1. The relative progress of civilization. Civilization has increasingly demanded that sex be gratified in useful channels and in accordance with the mores. 문명의 상대적 진보. 문명은, 유용한 방향과 관례에 따라서, 성(性)이 충족되기를 점차 요구했습니다.

82:1.5 (914.1) 2. The amount of Andite stock in any people. Among such groups sex has become expressive of both the highest and the lowest in both the physical and emotional natures. 그 민족에 있는 안드-사람들 혈통의 분량. 그런 그룹 중에서, 성(性)은 최고와 최저의 모든 육체적 및 감정적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82:1.6 (914.2) The Sangik races had normal animal passion, but they displayed little imagination or appreciation of the beauty and physical attractiveness of the opposite sex. What is called sex appeal is virtually absent even in present-day primitive races; these unmixed peoples have a definite mating instinct but insufficient sex attraction to create serious problems requiring social control. 상긱 종족들은 정상적인 동물의 격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성(異性)의 아름다움과 육체적 매력에 대한 상상력과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소위 성적 매력은 오늘날 원시 종족들에게도 사실 없습니다. 섞이지 않은 이런 민족들은 분명히 짝짓는 본능이 있지만, 사회적 통제가 필요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충분한 성적 매력이 없습니다.

82:1.7 (914.3) The mating instinct is one of the dominant physical driving forces of human beings; it is the one emotion which, in the guise of individual gratification, effectively tricks selfish man into putting race welfare and perpetuation high above individual ease and personal freedom from responsibility. 짝짓는 본능은 인간을 지배하는 육체적 추진력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만족을 가장(假裝)하여, 이기적인 사람을 실제로 속여서, 개인적 안락과 책무에서 자기만의 자유보다 종족 복지와 영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의 감정입니다.

82:1.8 (914.4) As an institution, marriage, from its early beginnings down to modern times, pictures the social evolution of the biologic propensity for self-perpetuation. The perpetuation of the evolving human species is made certain by the presence of this racial mating impulse, an urge which is loosely called sex attraction. This great biologic urge becomes the impulse hub for all sorts of associated instincts, emotions, and usages — physical, intellectual, moral, and social. 결혼은, 제도로써, 그 초기 시작부터 현대까지, 자기-영속을 위한 생물학적 성향의 사회적 진화를 나타냅니다. 이런 종족의 짝짓기 충동, 막연히 성적 매력이라고 하는 충동의 존재로, 진화하는 인간종의 영속은 확실합니다. 위대한 이 생물학적 충동은 관련된 모든 종류-육체적, 지적, 도덕적 및 사회적-의 본능, 감정 및 관례를 위한 중심적 충동이 됩니다.

82:1.9 (914.5) With the savage, the food supply was the impelling motivation, but when civilization insures plentiful food, the sex urge many times becomes a dominant impulse and therefore ever stands in need of social regulation. In animals, instinctive periodicity checks the mating propensity, but since man is so largely a self-controlled being, sex desire is not altogether periodic; therefore does it become necessary for society to impose self-control upon the individual. 야만인들에게, 식량 공급은 추진하는 동기였지만, 문명이 풍성한 식량을 보증하자, 성적 충동이 여러 번 지배적인 충동이 되어서, 늘 사회적 규정을 필요로 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적 주기가 짝짓는 성향을 억누르지만, 사람은 주로 자제하는 존재여서, 성욕은 완전히 주기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회가 개인에게 자제심을 부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82:1.10 (914.6) No human emotion or impulse, when unbridled and overindulged, can produce so much harm and sorrow as this powerful sex urge. Intelligent submission of this impulse to the regulations of society is the supreme test of the actuality of any civilization. Self-control, more and more self-control, is the ever-increasing demand of advancing mankind. Secrecy, insincerity, and hypocrisy may obscure sex problems, but they do not provide solutions, nor do they advance ethics. 고삐가 풀려 지나치게 방임한 인간 감정이나 충동도, 이런 강력한 성적 충동만큼 많이 해로운 불행을 일으키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충동을 사회 규정에 지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문명화의 현실에 대한 최고의 시험입니다. 자제, 점차 더 많은 자제가 전진하는 인류에게 계속 늘어나는 요구입니다. 비밀, 불성실 및 위선이 성(性) 문제를 가릴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며, 윤리를 향상하지도 않습니다.

2. The Restrictive Taboos 제한하는 금기

82:2.1 (914.7) The story of the evolution of marriage is simply the history of sex control through the pressure of social, religious, and civil restrictions. Nature hardly recognizes individuals; it takes no cognizance of so-called morals; it is only and exclusively interested in the reproduction of the species. Nature compellingly insists on reproduction but indifferently leaves the consequential problems to be solved by society, thus creating an ever-present and major problem for evolutionary mankind. This social conflict consists in the unending war between basic instincts and evolving ethics. 결혼의 진화 이야기는 사회적·종교적·시민적 제약의 압력을 통한 성 조절의 역사일 뿐입니다. 자연은 개인들을 거의 알아보지 않습니다. 자연은 소위 도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오로지 종(種)의 번식에 관심을 둘 뿐입니다. 자연은 강제로 번식을 우기지만, 그 결과로 일어나는 문제들은 흔히 사회가 해결하도록 남겨두어서, 진화 인류에게 늘 존재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기본적 본능과 진화하는 윤리 사이의 끝없는 전쟁입니다.

82:2.2 (914.8) Among the early races there was little or no regulation of the relations of the sexes. Because of this sex license, no prostitution existed. Today, the Pygmies and other backward groups have no marriage institution; a study of these peoples reveals the simple mating customs followed by primitive races. But all ancient peoples should always be studied and judged in the light of the moral standards of the mores of their own times. 초기 인종들 사이에 남녀 관계의 규정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성적 자유 때문에, 매춘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피그미족과 다른 퇴보 집단은 아무런 결혼제도가 없습니다. 이런 민족들의 연구로 원시 종족들이 지키는 단순한 짝짓기 관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모든 고대 민족들은 언제나 그 자신들의 시대에 속한 관습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연구되고 판단되어야 합니다.

82:2.3 (915.1) Free love, however, has never been in good standing above the scale of rank savagery. The moment societal groups began to form, marriage codes and marital restrictions began to develop. Mating has thus progressed through a multitude of transitions from a state of almost complete sex license to the twentieth-century standards of relatively complete sex restriction. 그러나 자유연애는 야만적 단계의 지위 이상으로, 좋은 자리에 있던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결혼 규약과 부부의 규제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짝짓기는 거의 완벽한 성적 자유의 상태에서 20세기의 비교적 철저한 성 규제의 기준까지 수많은 과도기를 거쳐서 진보했습니다.

82:2.4 (915.2) In the earliest stages of tribal development the mores and restrictive taboos were very crude, but they did keep the sexes apart — this favored quiet, order, and industry — and the long evolution of marriage and the home had begun. The sex customs of dress, adornment, and religious practices had their origin in these early taboos which defined the range of sex liberties and thus eventually created concepts of vice, crime, and sin. But it was long the practice to suspend all sex regulations on high festival days, especially May Day. 부족이 발전하는 최초의 단계에서 관습과 제한하는 금기는 아주 미숙했지만, 그것들이 남녀를 떼어 놓아 – 이것이 평온과 질서와 근면을 촉진했으며, 결혼과 가정의 오랜 진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복, 장식 및 종교적 관습에 대한 성적 풍습은 성적 해방의 범위를 규정하는 이런 초기 금기에서 유래되었고, 이렇게 결국 부도덕, 범죄 및 죄의 개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축일, 특히 5월제(祭)에 모든 성적 규정을 중지하는 풍습은 오래되었습니다.

82:2.5 (915.3) Women have always been subject to more restrictive taboos than men. The early mores granted the same degree of sex liberty to unmarried women as to men, but it has always been required of wives that they be faithful to their husbands. Primitive marriage did not much curtail man’s sex liberties, but it did render further sex license taboo to the wife. Married women have always borne some mark which set them apart as a class by themselves, such as hairdress, clothing, veil, seclusion, ornamentation, and rings.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언제나 더 제한적인 금기에 지배되었습니다. 초기 관습은 미혼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같은 정도로 성적 해방을 허용했지만,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정숙하도록 언제나 요구되었습니다. 원시 결혼은 남성의 성적 해방을 많이 박탈하지 않았지만, 아내에게는 성적 자유를 더욱더 금지했습니다. 기혼 여성들은 언제나 꾸민 머리, 의복, 면사포, 격리, 장식품 및 반지와 같은 어떤 표시를 몸에 지녀서 그들 전체를 구별했습니다.

3. Early Marriage Mores 초기 결혼 관습

82:3.1 (915.4) Marriage is the institutional response of the social organism to the ever-present biologic tension of man’s unremitting urge to reproduction — self-propagation. Mating is universally natural, and as society evolved from the simple to the complex, there was a corresponding evolution of the mating mores, the genesis of the marital institution. Wherever social evolution has progressed to the stage at which mores are generated, marriage will be found as an evolving institution. 결혼은, 자기를 확장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생식 충동의 그침 없는 생물학적 긴장에 대한 사회적 유기 조직체의 제도적 반응입니다. 짝짓기는 일반적으로 자연발생적이며, 사회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면서, 그에 따라 진화한 짝짓기 관습이 결혼제도의 내력(來歷)입니다. 사회적 진화가 관습이 생기는 단계로 진보하면, 결혼은 진화하는 제도로 발견될 것입니다.

82:3.2 (915.5) There always have been and always will be two distinct realms of marriage: the mores, the laws regulating the external aspects of mating, and the otherwise secret and personal relations of men and women. Always has the individual been rebellious against the sex regulations imposed by society; and this is the reason for this agelong sex problem: Self-maintenance is individual but is carried on by the group; self-perpetuation is social but is secured by individual impulse. 결혼의 뚜렷한 두 가지 영역은 언제나 있었고, 항상 있을 것입니다. 관습, 짝짓기의 외적 국면을 규정하는 관례와 남성과 여성들의 은밀한 개인적 관계들의 다른 면입니다. 개인들은 언제나 사회가 강요한 성적 규정에 맞서 반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성 문제의 이유입니다. 자아-유지는 개인적이지만 집단이 수행합니다. 자아-영속(永屬)은 사회적이지만 개인의 추진력으로 확보됩니다.

82:3.3 (915.6) The mores, when respected, have ample power to restrain and control the sex urge, as has been shown among all races. Marriage standards have always been a true indicator of the current power of the mores and the functional integrity of the civil government. But the early sex and mating mores were a mass of inconsistent and crude regulations. Parents, children, relatives, and society all had conflicting interests in the marriage regulations. But in spite of all this, those races which exalted and practiced marriage naturally evolved to higher levels and survived in increased numbers. 관습이 존중되면 모든 인종 사이에서 보다시피, 성욕을 제한하고 조정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결혼 기준은 언제나 현행 관습의 힘과 시민 정부의 기능적 온전함의 참된 지표입니다. 그러나 초기 성(性) 및 짝짓기 관습은 대부분이 일관성이 없고 허술한 규정이었습니다. 부모, 자녀, 친척과 사회 모두 결혼 규정에 대해 이해관계가 서로 어긋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격찬하고 실행한 그런 종족들은 자연히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했고, 살아남은 수가 늘었습니다.

82:3.4 (915.7) In primitive times marriage was the price of social standing; the possession of a wife was a badge of distinction. The savage looked upon his wedding day as marking his entrance upon responsibility and manhood. In one age, marriage has been looked upon as a social duty; in another, as a religious obligation; and in still another, as a political requirement to provide citizens for the state. 원시 시대에 결혼은 사회적 신분의 값이었습니다. 아내 소유는 영예의 표지였습니다. 야만인은 자신이 결혼하는 날을 책임 있는 성인이 되는 표지로 여겼습니다. 어떤 시대에 결혼은 사회적 의무로, 다른 시대에는 종교적 책임으로, 또 다른 시대에는 국가의 시민이 되는 정치적 자격으로 여겼습니다.

82:3.5 (916.1) Many early tribes required feats of stealing as a qualification for marriage; later peoples substituted for such raiding forays, athletic contests and competitive games. The winners in these contests were awarded the first prize — choice of the season’s brides. Among the head-hunters a youth might not marry until he possessed at least one head, although such skulls were sometimes purchasable. As the buying of wives declined, they were won by riddle contests, a practice that still survives among many groups of the black man. 여러 초기 부족들은 결혼 자격으로 훔치는 실적을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민족들은 그런 습격 약탈을 운동 경기와 경쟁 시합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런 경기의 승자들은 한창때의 신부 중에서 선택하는 1등 상을 받았습니다. 머리 사냥꾼 중에서 청년은 적어도 머리 하나 -그런 두개골은 때로 살 수 있었지만-를 가져야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 구매가 감소하자, 여러 흑인 집단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관습인, 수수께끼 시합으로 아내들을 얻었습니다.

82:3.6 (916.2) With advancing civilization, certain tribes put the severe marriage tests of male endurance in the hands of the women; they thus were able to favor the men of their choice. These marriage tests embraced skill in hunting, fighting, and ability to provide for a family. The groom was long required to enter the bride’s family for at least one year, there to live and labor and prove that he was worthy of the wife he sought. 진보하는 문명과 함께 어떤 부족들은 남성의 인내력에 대한 엄격한 결혼 평가를 여성들의 손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남성을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결혼 평가는 사냥, 싸움 및 가족 부양 능력이 포함되었습니다. 신랑은 적어도 1년간 내내 신부 가정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살고 애쓰면서 그가 자신이 원하는 아내에 어울리는지 증명해야 했습니다.

82:3.7 (916.3) The qualifications of a wife were the ability to perform hard work and to bear children. She was required to execute a certain piece of agricultural work within a given time. And if she had borne a child before marriage, she was all the more valuable; her fertility was thus assured. 아내의 자격은 열심히 일하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어진 시간 내에 특정한 농사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결혼 전에 아이를 낳으면, 오히려 그녀는 그만큼 인정받았습니다. 그녀의 수태 능력은 이렇게 보장되었습니다.

82:3.8 (916.4) The fact that ancient peoples regarded it as a disgrace, or even a sin, not to be married, explains the origin of child marriages; since one must be married, the earlier the better. It was also a general belief that unmarried persons could not enter spiritland, and this was a further incentive to child marriages even at birth and sometimes before birth, contingent upon sex. The ancients believed that even the dead must be married. The original matchmakers were employed to negotiate marriages for deceased individuals. One parent would arrange for these intermediaries to effect the marriage of a dead son with a dead daughter of another family. 고대 민족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을 치욕 또는 죄라고까지 여겼다는 사실이 아이 결혼이 유래된 이유를 말합니다. 사람은 결혼해야 하므로, 이를수록 좋았습니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靈)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통 믿었고, 이것이, 성(性)의 여부에 따라, 출생 시에도, 때때로 출생 전에 아이 결혼을 조장하는 동기였습니다.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도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본래 결혼중매인들은 사망한 개인의 결혼을 협상했습니다. 한 부모가 사망한 아들을 다른 가족의 사망한 딸과 결혼시키려고 이런 중매인들을 주선하곤 했습니다.

82:3.9 (916.5) Among later peoples, puberty was the common age of marriage, but this has advanced in direct proportion to the progress of civilization. Early in social evolution peculiar and celibate orders of both men and women arose; they were started and maintained by individuals more or less lacking normal sex urge. 후기 민족들 사이에서, 사춘기가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나이였지만, 이것은 문명의 진보에 정비례로 발전했습니다. 사회 진화의 초기에 특이한 독신 계층의 남녀들이 생겼습니다. 정상적인 성욕이 다소 부족한 개인들이 그런 계층을 시작하고 유지했습니다.

82:3.10 (916.6) Many tribes allowed members of the ruling group to have sex relations with the bride just before she was to be given to her husband. Each of these men would give the girl a present, and this was the origin of the custom of giving wedding presents. Among some groups it was expected that a young woman would earn her dowry, which consisted of the presents received in reward for her sex service in the bride’s exhibition hall. 여러 부족이, 신부를 남편에게 주기 직전에, 지배 그룹의 일원들이 신부와 성관계를 갖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각자가 소녀에게 선물을 주곤 했으며, 이것이 결혼 선물을 주는 관습의 기원이었습니다. 일부 집단에서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지참금을 벌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신부의 전시장에서 그녀가 성(性)을 접대한 보수로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82:3.11 (916.7) Some tribes married the young men to the widows and older women and then, when they were subsequently left widowers, would allow them to marry the young girls, thus insuring, as they expressed it, that both parents would not be fools, as they conceived would be the case if two youths were allowed to mate. Other tribes limited mating to similar age groups. It was the limitation of marriage to certain age groups that first gave origin to ideas of incest. (In India there are even now no age restrictions on marriage.) 일부 부족은 젊은 남자를 과부들이나 나이 든 여성과 결혼시킨 후, 나중에 그들이 홀아비가 되면 젊은 소녀들과 결혼하도록 허락하곤 했는데, 그들의 생각대로, 두 젊은이가 결혼하는 경우, 그들의 표현대로, 부모 둘 다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이런 식으로 안전하게 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은 비슷한 나이 집단으로 결혼을 제한했습니다. 특정한 연령 집단에 결혼을 제한하여 근친상간의 관념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결혼에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82:3.12 (916.8) Under certain mores widowhood was greatly to be feared, widows being either killed or allowed to commit suicide on their husbands’ graves, for they were supposed to go over into spiritland with their spouses. The surviving widow was almost invariably blamed for her husband’s death. Some tribes burned them alive. If a widow continued to live, her life was one of continuous mourning and unbearable social restriction since remarriage was generally disapproved. 어떤 관습 밑에서 과부 신세는 매우 두려워했는데, 과부들은 살해되거나 남편 무덤에서 자살하도록 허용하여, 그들의 배우자와 함께 그들이 영(靈) 나라로 건너간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거의 언제나 살아남은 과부에게 돌렸습니다. 일부 부족은 그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과부가 계속 살아가면, 재혼은 대개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녀의 일생은 끊임없는 비탄과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제약의 생애였습니다.

82:3.13 (917.1) In olden days many practices now regarded as immoral were encouraged. Primitive wives not infrequently took great pride in their husbands’ affairs with other women. Chastity in girls was a great hindrance to marriage; the bearing of a child before marriage greatly increased a girl’s desirability as a wife since the man was sure of having a fertile companion. 옛날에는 지금 부도덕하게 여겨진 여러 관행이 장려되었습니다. 원시 아내들은 종종 다른 여성들에 대한 자기 남편의 추문을 대단히 자랑했습니다. 소녀들의 순결은 결혼에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아내로서 소녀의 매력이 대단히 늘어났는데, 남자가 생식 능력이 있는 반려자를 얻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82:3.14 (917.2) Many primitive tribes sanctioned trial marriage until the woman became pregnant, when the regular marriage ceremony would be performed; among other groups the wedding was not celebrated until the first child was born. If a wife was barren, she had to be redeemed by her parents, and the marriage was annulled. The mores demanded that every pair have children. 여러 원시 부족은 여성이 임신할 때까지 계약 결혼을 인정했으며, 그때 정식 결혼 예식이 거행되곤 했습니다. 다른 집단은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도로 찾아갔고 결혼은 취소되었습니다. 모든 쌍은 자녀를 가져야 한다고 관습이 다그쳤습니다.

82:3.15 (917.3) These primitive trial marriages were entirely free from all semblance of license; they were simply sincere tests of fecundity. The contracting individuals married permanently just as soon as fertility was established. When modern couples marry with the thought of convenient divorce in the background of their minds if they are not wholly pleased with their married life, they are in reality entering upon a form of trial marriage and one that is far beneath the status of the honest adventures of their less civilized ancestors. 이런 원시적 계약 결혼은 방종과 비슷한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진지한 생식력 테스트일 뿐이었습니다. 결혼 당사자들은, 생식력이 입증되자마자, 바로 영구히 결혼했습니다. 현대의 부부가 결혼 생활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편리하게 이혼할 생각으로 결혼하면, 그들은 실제로 계약 결혼의 형태에 접어드는 것이며, 자신들보다 덜 문명화된 조상들의 정직한 모험의 상태에 훨씬 뒤진 것입니다.

4. Marriage Under the Property Mores 재산 관습 아래의 결혼

82:4.1 (917.4) Marriage has always been closely linked with both property and religion. Property has been the stabilizer of marriage; religion, the moralizer. 결혼은 언제나 재산과 종교 모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재산은 결혼을 안정시켰고, 종교는 결혼의 도덕을 높였습니다.

82:4.2 (917.5) Primitive marriage was an investment, an economic speculation; it was more a matter of business than an affair of flirtation. The ancients married for the advantage and welfare of the group; wherefore their marriages were planned and arranged by the group, their parents and elders. And that the property mores were effective in stabilizing the marriage institution is borne out by the fact that marriage was more permanent among the early tribes than it is among many modern peoples. 원시 결혼은 투자, 경제적 투기였습니다. 그것은 연애 놀이라기보다 업무였습니다. 고대인들은 집단의 이득과 복지를 위해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집단, 그 부모들과 장로들이 결혼을 계획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이 여러 현대 민족들 사이보다는 초기 부족들 사이에서 더 영구적이었다는 사실이, 재산 관습이 결혼제도의 안정에 효과적이었음을 실증합니다.

82:4.3 (917.6) As civilization advanced and private property gained further recognition in the mores, stealing became the great crime. Adultery was recognized as a form of stealing, an infringement of the husband’s property rights; it is not therefore specifically mentioned in the earlier codes and mores. Woman started out as the property of her father, who transferred his title to her husband, and all legalized sex relations grew out of these pre-existent property rights. The Old Testament deals with women as a form of property; the Koran teaches their inferiority. Man had the right to lend his wife to a friend or guest, and this custom still obtains among certain peoples. 문명이 발전하고 사유 재산이 관습에서 더 인정을 얻게 되었을 때, 절도는 큰 죄가 되었습니다. 간통은 남편의 재산권 침해하는 절도의 형태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초기 규칙과 관습에서 분명히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그녀 아버지의 재산으로 시작하여 그녀의 소유권이 그녀 남편에게 양도되었고, 법적인 모든 성(性)관계는 이렇게 미리 있었던 재산권에서 생겼습니다. 구약(舊約)은 여성들을 재산의 형태로 다룹니다. 코란은 여성이 열등하다고 가르칩니다. 남자는 자기 아내를 친구나 손님에게 빌려줄 권리가 있었고, 이런 관습은 여전히 어떤 민족들 사이에 통용됩니다.

82:4.4 (917.7) Modern sex jealousy is not innate; it is a product of the evolving mores. Primitive man was not jealous of his wife; he was just guarding his property. The reason for holding the wife to stricter sex account than the husband was because her marital infidelity involved descent and inheritance. Very early in the march of civilization the illegitimate child fell into disrepute. At first only the woman was punished for adultery; later on, the mores also decreed the chastisement of her partner, and for long ages the offended husband or the protector father had the full right to kill the male trespasser. Modern peoples retain these mores, which allow so-called crimes of honor under the unwritten law. 현대의 성(性) 질투심은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화 관습의 산물입니다. 원시인은 자기 아내에 대해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단지 보호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에게 더 엄격한 성(性) 가치를 지키게 한 이유는 아내의 배우자에 대한 부정(不貞)이 상속과 유산을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먼 문명의 진전 초기에 사생아는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여성만 간통으로 처벌했습니다. 나중에 관습은 여자의 상대자도 처벌하도록 판결했으며, 오랫동안 화가 난 남편이나 보호자 아버지는 남성 침해자를 죽일 완전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현대 민족들은 불문율에 따라 소위 명예-침해죄를 허락하는 이런 관습을 유지합니다.

82:4.5 (917.8) Since the chastity taboo had its origin as a phase of the property mores, it applied at first to married women but not to unmarried girls. In later years, chastity was more demanded by the father than by the suitor; a virgin was a commercial asset to the father — she brought a higher price. As chastity came more into demand, it was the practice to pay the father a bride fee in recognition of the service of properly rearing a chaste bride for the husband-to-be. When once started, this idea of female chastity took such hold on the races that it became the practice literally to cage up girls, actually to imprison them for years, in order to assure their virginity. And so the more recent standards and virginity tests automatically gave origin to the professional prostitute classes; they were the rejected brides, those women who were found by the grooms’ mothers not to be virgins. 순결 금기는 재산 관습의 단계로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처음에, 미혼 소녀들이 아니라,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습니다. 후대에 구혼자보다 아버지가 더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처녀는 아버지에게 상업적 자산 – 처녀는 더 값이 나갔습니다. 순결이 더 요구되면서, 남편이 되려는 자를 위해 순결한 신부를 훌륭하게 양육한 봉사를 인정하면서, 신부 아버지에게 신부-값을 치르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여성 순결의 이런 관념이 일단 시작되면서 종족을 장악하게 되자, 소녀들의 처녀성을 보증하려고, 실제로 그들을 수년간 감금하는 것이 소녀들을 정말로 투옥하는 관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최근의 기준과 처녀성 테스트는 자동으로 전문 매춘 계급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부된 신부들, 즉, 신랑 어머니들에게 처녀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 그런 여성들이었습니다.

5. Endogamy and Exogamy 동족(同族) 결혼과 족외(族外) 결혼

82:5.1 (918.1) Very early the savage observed that race mixture improved the quality of the offspring. It was not that inbreeding was always bad, but that outbreeding was always comparatively better; therefore the mores tended to crystallize in restriction of sex relations among near relatives. It was recognized that outbreeding greatly increased the selective opportunity for evolutionary variation and advancement. The outbred individuals were more versatile and had greater ability to survive in a hostile world; the inbreeders, together with their mores, gradually disappeared. This was all a slow development; the savage did not consciously reason about such problems. But the later and advancing peoples did, and they also made the observation that general weakness sometimes resulted from excessive inbreeding. 아주 초기에 야만인은 인종 혼합으로 자손의 질이 향상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족내 교배가 언제나 나쁘지는 않았지만, 족외 교배는 언제나 비교적 더 나았습니다. 따라서 관습은 가까운 친척 사이의 성관계를 구체적으로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족외 교배가 진화적 변화와 진보를 위하여 선택하는 기회를 아주 증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족외 교배한 개인들이 더 다재다능했고, 각박한 세상에서 생존할 능력이 훨씬 컸습니다. 족내 교배자들은 자신들의 관습과 함께 점차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아주 더딘 발전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은 그런 문제에 관해 의식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진보한 민족들은 그렇게 했고, 그들은 또한 일반적 결함이 지나친 족내 교배에서 종종 일어났음을 관찰했습니다.

82:5.2 (918.2) While the inbreeding of good stock sometimes resulted in the upbuilding of strong tribes, the spectacular cases of the bad results of the inbreeding of hereditary defectives more forcibly impressed the mind of man, with the result that the advancing mores increasingly formulated taboos against all marriages among near relatives. 좋은 혈통의 족내 교배로 때때로 강한 부족이 설립되었지만, 족내 교배로 인한 유전적 장애의 나쁜 결과로 놀란 경우가 사람의 마음이 더욱 강력히 인식된 결과로, 진보하는 관습이 가까운 친척 사이의 모든 결혼을 반대하는 금기를 점차 만들어냈습니다.

82:5.3 (918.3) Religion has long been an effective barrier against outmarriage; many religious teachings have proscribed marriage outside the faith. Woman has usually favored the practice of in-marriage; man, outmarriage. Property has always influenced marriage, and sometimes, in an effort to conserve property within a clan, mores have arisen compelling women to choose husbands within their fathers’ tribes. Rulings of this sort led to a great multiplication of cousin marriages. In-mating was also practiced in an effort to preserve craft secrets; skilled workmen sought to keep the knowledge of their craft within the family. 종교는 오랫동안 족외 결혼을 반대하는 실제 장벽이었습니다. 여러 종교적 가르침은 신앙 밖의 결혼을 금지했습니다. 여성은 대개 족내 결혼의 관습을, 남성은 족외 결혼의 관습을 더 좋아했습니다. 재산은 언제나 결혼에 영향을 미쳤고, 때로 씨족 내부에 재산을 보존하려고, 자기 조상의 부족 내에서 남편을 선택하도록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이런 유형의 판결로 사촌 결혼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내부-짝짓기 또한 기술 비법을 보존하려고 행해졌습니다. 숙련된 장인들은 가족 내에서 자신들의 기술 지식을 지키려 했습니다.

82:5.4 (918.4) Superior groups, when isolated, always reverted to consanguineous mating. The Nodites for over one hundred and fifty thousand years were one of the great in-marriage groups. The later-day in-marriage mores were tremendously influenced by the traditions of the violet race, in which, at first, matings were, perforce, between brother and sister. And brother and sister marriages were common in early Egypt, Syria, Mesopotamia, and throughout the lands once occupied by the Andites. The Egyptians long practiced brother and sister marriages in an effort to keep the royal blood pure, a custom which persisted even longer in Persia. Among the Mesopotamians, before the days of Abraham, cousin marriages were obligatory; cousins had prior marriage rights to cousins. Abraham himself married his half sister, but such unions were not allowed under the later mores of the Jews. 우수한 집단은, 고립되었을 때, 언제나 동족 짝짓기로 되돌아갔습니다. 놋-사람들은 15만 년 이상 거대한 족내 결혼 집단 중 하나였습니다. 후일에 족내 결혼 관습은 보라 인종의 전통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는데, 처음에 보라 인종의 짝짓기는 부득이 남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매 결혼은 초기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와 안드-사람들이 일찍이 차지했던 전(全) 지역에서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왕족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려고 오랫동안 남매 결혼을 실행했는데, 페르시아에서 훨씬 오래 이어진 관습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사촌 결혼은 의무적이었습니다. 사촌들은 먼저 사촌들과 결혼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자기 이복 누이와 결혼했지만, 그런 결혼은 후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82:5.5 (919.1) The first move away from brother and sister marriages came about under the plural-wife mores because the sister-wife would arrogantly dominate the other wife or wives. Some tribal mores forbade marriage to a dead brother’s widow but required the living brother to beget children for his departed brother. There is no biologic instinct against any degree of in-marriage; such restrictions are wholly a matter of taboo. 남매 결혼에서 멀어진 첫 행동은, 다처(多妻) 관습 아래에서, 자매-아내가 다른 아내나 아내들을 오만하게 지배하곤 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어떤 부족의 관습은 죽은 형제의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지만, 살아있는 형제가 자기 죽은 형제를 위해 자녀들을 낳도록 규정했습니다. 족내 결혼을 반대하는 어떤 촌수의 생물학적 본능은 없습니다. 그런 제한은 전적으로 금기의 문제입니다.

82:5.6 (919.2) Outmarriage finally dominated because it was favored by the man; to get a wife from the outside insured greater freedom from in-laws. Familiarity breeds contempt; so, as the element of individual choice began to dominate mating, it became the custom to choose partners from outside the tribe. 남자들이 족외 결혼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 족외 결혼이 보급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아내를 얻으면 인척들에게서 더 큰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잘 알면 얕보기 쉬우므로, 개인 선택의 요소가 짝짓기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부족 밖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82:5.7 (919.3) Many tribes finally forbade marriages within the clan; others limited mating to certain castes. The taboo against marriage with a woman of one’s own totem gave impetus to the custom of stealing women from neighboring tribes. Later on, marriages were regulated more in accordance with territorial residence than with kinship. There were many steps in the evolution of in-marriage into the modern practice of outmarriage. Even after the taboo rested upon in-marriages for the common people, chiefs and kings were permitted to marry those of close kin in order to keep the royal blood concentrated and pure. The mores have usually permitted sovereign rulers certain licenses in sex matters. 여러 부족은 결국 씨족 내부의 결혼을 금지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은 특정 계급과 짝짓기를 제한했습니다. 자기 토템(종족 상징 자연물)의 여성과 결혼을 반대하는 금기가 이웃 부족들에게서 여성을 훔치는 관습을 촉진했습니다. 나중에 결혼은, 친척 관계보다 지역 소재에 따라 더 규제되었습니다. 족내 결혼이 족외 결혼의 현대적 관습으로 진화하는 데 여러 단계가 있었습니다. 서민을 위해 족내 결혼에 금기가 적용된 후에도, 족장들과 왕들은 왕족 혈통을 모아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가까운 혈연끼리 결혼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관습은 대개 군림하는 통치자들에게 성(性) 문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방종을 허용했습니다.

82:5.8 (919.4) The presence of the later Andite peoples had much to do with increasing the desire of the Sangik races to mate outside their own tribes. But it was not possible for out-mating to become prevalent until neighboring groups had learned to live together in relative peace. 상긱 종족들이 자기 부족 밖에서 짝을 지으려는 욕구가 증가한 것은 후대 안드 민족의 존재와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웃 집단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기를 배울 때까지, 족외-짝짓기가 널리 유행할 수 없었습니다.

82:5.9 (919.5) Outmarriage itself was a peace promoter; marriages between the tribes lessened hostilities. Outmarriage led to tribal co-ordination and to military alliances; it became dominant because it provided increased strength; it was a nation builder. Outmarriage was also greatly favored by increasing trade contacts; adventure and exploration contributed to the extension of the mating bounds and greatly facilitated the cross-fertilization of racial cultures. 족외 결혼 자체는 평화 촉진자였습니다. 부족 사이의 결혼으로 적개심이 줄었습니다. 족외 결혼으로 부족적 통합-조정과 군사 동맹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힘이 증대되어서 족외 결혼이 유행했습니다. 족외 결혼이 국가를 세웠습니다. 교역 접촉의 증가로 족외 결혼 역시 더 지지를 받았습니다. 모험과 탐험이 짝짓는 범위의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인종 문화의 상호 교류를 크게 도왔습니다.

82:5.10 (919.6) The otherwise inexplicable inconsistencies of the racial marriage mores are largely due to this outmarriage custom with its accompanying wife stealing and buying from foreign tribes, all of which resulted in a compounding of the separate tribal mores. That these taboos respecting in-marriage were sociologic, not biologic, is well illustrated by the taboos on kinship marriages, which embraced many degrees of in-law relationships, cases representing no blood relation whatsoever. 종족 결혼 관습에 속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모순은 대개, 타 부족에서 아내 절도 및 구매와 동반한, 이러한 족외결혼 관습 때문인데, 이런 모든 것들의 결과로 분리된 부족 관습이 혼합되었습니다. 족내 결혼에 관한 이런 금기들은 생물학적이지 않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은, 많은 정도의 인척 관계, 즉 혈연관계가 조금도 없는 경우를 나타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친족 결혼의 금기로 잘 설명됩니다.

6. Racial Mixtures 인종 혼합

82:6.1 (919.7) There are no pure races in the world today. The early and original evolutionary peoples of color have only two representative races persisting in the world, the yellow man and the black man; and even these two races are much admixed with the extinct colored peoples. While the so-called white race is predominantly descended from the ancient blue man, it is admixed more or less with all other races much as is the red man of the Americas. 오늘날 세상에는 순수한 인종이 없습니다. 초기의 기원적인 진화 유색 종족은 대표적인 2가지 인종만 세상에 남아 있는데, 황인종과 흑인종입니다. 이 두 인종도 멸종한 유색 종족과 많이 혼합되었습니다. 소위 백인종은 대개 고대 청인의 후손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홍인종처럼, 모든 다른 종족들과 어느 정도 섞였습니다.

82:6.2 (919.8) Of the six colored Sangik races, three were primary and three were secondary. Though the primary races — blue, red, and yellow — were in many respects superior to the three secondary peoples, it should be remembered that these secondary races had many desirable traits which would have considerably enhanced the primary peoples if their better strains could have been absorbed. 육색(六色) 상긱 인종 중 셋은 1차이고 셋은 2차였습니다. 1차 인종들 – 청인, 홍인, 황인 –은 여러 면에서 2차 세 종족보다 우수했지만, 이 2차 인종들에게는, 자신들의 더 좋은 특성들이 흡수될 수 있었더라면, 1차 종족들을 상당히 향상했었을, 여러 바람직한 특성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82:6.3 (920.1) Present-day prejudice against “half-castes,” “hybrids,” and “mongrels” arises because modern racial crossbreeding is, for the greater part, between the grossly inferior strains of the races concerned. You also get unsatisfactory offspring when the degenerate strains of the same race intermarry. 현대 인종의 잡종이 대부분 관련된 인종 중에서 아주 열등한 혈통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혼혈,” “튀기,” 및 “잡종”에 대한 현대의 편견이 생깁니다. 너희도 동족의 퇴화 혈통이 근친 결혼하면 불만스러운 자손을 얻습니다.

82:6.4 (920.2) If the present-day races of Urantia could be freed from the curse of their lowest strata of deteriorated, antisocial, feeble-minded, and outcast specimens, there would be little objection to a limited race amalgamation. And if such racial mixtures could take place between the highest types of the several races, still less objection could be offered. 오늘날 유란시아 인종들에게 열등하고, 반사회적이며, 저능하고, 폐기된 인종에 속한 최저 계층의 불행이 없다면, 제한적인 이인종(異人種) 융합에 반감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인종 혼합이 최고 유형의 몇몇 인종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면, 더구나 반대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82:6.5 (920.3) Hybridization of superior and dissimilar stocks is the secret of the creation of new and more vigorous strains. And this is true of plants, animals, and the human species. Hybridization augments vigor and increases fertility. Race mixtures of the average or superior strata of various peoples greatly increase creative potential, as is shown in the present population of the United States of North America. When such matings take place between the lower or inferior strata, creativity is diminished, as is shown by the present-day peoples of southern India. 우수한 다른 인종의 교배가 새롭고 더 강건한 혈통이 창조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 동물 및 인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잡종 번식이 생기를 증가시키고 생식 능력을 증대합니다. 다양한 종족의 평균적 혹은 우수한 계층의 인종 혼합은, 현재 북아메리카의 미국 인구에서 보듯이, 창조적인 잠재성을 크게 강화합니다. 그런 짝짓기가 낮은 열등 계층 사이에서 일어나면, 오늘날 남부 인도의 종족에서 보듯이, 창조성이 줄어듭니다. 

82:6.6 (920.4) Race blending greatly contributes to the sudden appearance of new characteristics, and if such hybridization is the union of superior strains, then these new characteristics will also be superior traits. 인종 혼합은 돌연한 새 특성의 출현에 큰 도움이 되며, 그런 교배가 우수한 혈통의 연합이라면, 이런 새 특성들도 우수한 특성이 될 것입니다.

82:6.7 (920.5) As long as present-day races are so overloaded with inferior and degenerate strains, race intermingling on a large scale would be most detrimental, but most of the objections to such experiments rest on social and cultural prejudices rather than on biological considerations. Even among inferior stocks, hybrids often are an improvement on their ancestors. Hybridization makes for species improvement because of the role of the dominant genes. Racial intermixture increases the likelihood of a larger number of the desirable dominants being present in the hybrid. 현재 인종들이 열등하고 퇴화한 혈통으로 지나친 부담이 되므로, 대규모의 인종 혼합은 가장 해롭겠지만, 그런 실험에 대한 대부분의 반대는, 생물학적 이유보다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편견에 근거합니다. 열등한 종족 중에서도, 튀기가 종종 그 조상들보다 낫습니다. 우성 유전자의 역할 때문에, 교배가 종자를 개선합니다. 인종 혼합으로, 잡종 안에 존재할, 바람직한 우성 유전성의 가능성이 더 많이 늘어납니다.

82:6.8 (920.6) For the past hundred years more racial hybridization has been taking place on Urantia than has occurred in thousands of years. The danger of gross disharmonies as a result of crossbreeding of human stocks has been greatly exaggerated. The chief troubles of “half-breeds” are due to social prejudices. 수천 년간 일어났던 것보다 과거 수백 년간 인종 교배가 유란시아에서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인간 혈통이 교배한 결과로써 심한 부조화의 위험이 많이 과장되었습니다. “잡종들”의 주된 문제는 사회적 편견 때문입니다.

82:6.9 (920.7) The Pitcairn experiment of blending the white and Polynesian races turned out fairly well because the white men and the Polynesian women were of fairly good racial strains. Interbreeding between the highest types of the white, red, and yellow races would immediately bring into existence many new and biologically effective characteristics. These three peoples belong to the primary Sangik races. Mixtures of the white and black races are not so desirable in their immediate results, neither are such mulatto offspring so objectionable as social and racial prejudice would seek to make them appear. Physically, such white-black hybrids are excellent specimens of humanity, notwithstanding their slight inferiority in some other respects. 백인 남성들과 폴리네시아 여성들이 상당한 좋은 인종 혈통들이어서, 백인과 폴리네시아인(人)을 섞는 핏케언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최고 유형의 백인, 홍인 및 황인종의 교배는 즉시 생물학적으로 효과적인 여러 새로운 특성들을 낳을 것입니다. 이런 세 종족은 1차 상긱 인종에 속합니다. 백인과 흑인의 혼합은 즉각적 결과에서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흑백 혼혈아 자손이 너무 못마땅해서 사회적이며 인종적인 편견으로 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런 흑백 혼혈들은, 몇 가지 다른 면에서 약간 열등하지만, 인류의 훌륭한 표본입니다.

82:6.10 (920.8) When a primary Sangik race amalgamates with a secondary Sangik race, the latter is considerably improved at the expense of the former. And on a small scale — extending over long periods of time — there can be little serious objection to such a sacrificial contribution by the primary races to the betterment of the secondary groups. Biologically considered, the secondary Sangiks were in some respects superior to the primary races. 1차 상긱 인종이 2차 상긱 인종과 혼합하면, 후자는 전자의 희생으로 상당히 개선됩니다. 그리고 소규모로 – 장기간에 연장될 때, 2차 집단의 개선에 대한 1차 인종의 그런 희생적 공헌에 심각한 반대가 거의 있을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고려할 때, 2차 상긱들은 몇 가지 면에서 1차 인종들보다 우월했습니다.

82:6.11 (921.1) After all, the real jeopardy of the human species is to be found in the unrestrained multiplication of the inferior and degenerate strains of the various civilized peoples rather than in any supposed danger of their racial interbreeding. 결국, 인류의 실제 위험은, 소위 어떤 인종 교배의 위험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화된 다양한 종족 중에서 열등하고 퇴화한 혈통들의 억제되지 않은 증식에서 발견됩니다.

82:6.12 (921.2) [Presented by the Chief of Seraphim stationed on Urantia.][유란시아에 배치된 수석 세라핌천사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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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3 The Marriage Institution 결혼 제도

Paper 83

The Marriage Institution 결혼 제도

1. Marriage as a Societal Institution 사회 제도로서의 결혼
2. Courtship and Betrothal 구혼(求婚)과 약혼(約婚)
3. Purchase and Dowry 아내 사들임과 지참금
4. The Wedding Ceremony 결혼식
5. Plural Marriages 복혼(複婚)
6. True Monogamy — Pair Marriage 진정한 단혼(單婚) – 일부일처(一夫一妻)
7. The Dissolution of Wedlock 혼인의 해약(解約)
8. The Idealization of Marriage 결혼의 이상화(理想化)

83:0.1 (922.1) THIS is the recital of the early beginnings of the institution of marriage. It has progressed steadily from the loose and promiscuous matings of the herd through many variations and adaptations, even to the appearance of those marriage standards which eventually culminated in the realization of pair matings, the union of one man and one woman to establish a home of the highest social order. 이것은 초기 결혼제도가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무리의 자유로운 난교(亂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짝짓기)에서 여러 변화와 적응을 거쳐, 한 쌍의 짝짓기, 최고 사회 계층의 가정을 세우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연합이 이루어져 결국 절정에 달한, 그런 결혼 기준이 출현하기까지 꾸준히 진보했습니다.

83:0.2 (922.2) Marriage has been many times in jeopardy, and the marriage mores have drawn heavily on both property and religion for support; but the real influence which forever safeguards marriage and the resultant family is the simple and innate biologic fact that men and women positively will not live without each other, be they the most primitive savages or the most cultured mortals. 결혼은 여러 번 위험에 빠졌으며, 결혼 관습은 버티기 위해서 힘겹게 재산과 종교를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그 결과로 생긴 가정을 영원히 보호하는 실질적 영향력은 남성과 여성들이, 가장 원시적인 야만인들이든지 가장 교양있는 필사자들이든지, 단연 서로 없이는 살지 않을 것이라는 순전히 타고난 생물학적 사실입니다.

83:0.3 (922.3) It is because of the sex urge that selfish man is lured into making something better than an animal out of himself. The self-regarding and self-gratifying sex relationship entails the certain consequences of self-denial and insures the assumption of altruistic duties and numerous race-benefiting home responsibilities. Herein has sex been the unrecognized and unsuspected civilizer of the savage; for this same sex impulse automatically and unerringly compels man to think and eventually leads him to love. 이기적인 사람이 자신에게서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도록 유인한 것은 성욕(性慾) 때문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자기만족의 성(性)관계가 자기절제의 결과를 남기고, 이타적 의무와 인종에-이로운 수많은 가정 책임을 확실히 떠맡습니다. 이 점에서 성(性)은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야만인들의 교화(敎化)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성(性) 충동이 자동으로 반드시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1. Marriage as a Societal Institution 사회 제도로서의 결혼

83:1.1 (922.4) Marriage is society’s mechanism designed to regulate and control those many human relations which arise out of the physical fact of bisexuality. As such an institution, marriage functions in two directions: 결혼은 양성(兩性)의 물리적 사실에서 생기는 그런 여러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조정하도록 계획된 사회 기구입니다. 그런 제도로서, 결혼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83:1.2 (922.5) 1. In the regulation of personal sex relations. 개인적 성(性)관계를 규정할 때.

83:1.3 (922.6) 2. In the regulation of descent, inheritance, succession, and social order, this being its older and original function. 이것이 더 오래된 본래 기능인데, 혈통, 유전, 상속 및 사회적 계층을 규정할 때.

83:1.4 (922.7) The family, which grows out of marriage, is itself a stabilizer of the marriage institution together with the property mores. Other potent factors in marriage stability are pride, vanity, chivalry, duty, and religious convictions. But while marriages may be approved or disapproved on high, they are hardly made in heaven. The human family is a distinctly human institution, an evolutionary development. Marriage is an institution of society, not a department of the church. True, religion should mightily influence it but should not undertake exclusively to control and regulate it. 결혼에서 발생한 가족 자체는 재산 관습과 함께 결혼제도를 안정시켰습니다. 결혼을 안정시킨 강력한 다른 요소들은 자만, 허영, 기사도, 의무 및 종교적 신념입니다. 그러나 결혼들이 하늘에서 승인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전혀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 가족은 뚜렷하게 진화로 발전한 인간 제도입니다. 결혼은 사회 제도이며, 교회의 분야가 아닙니다. 참으로 종교가 결혼에 힘차게 영향을 줘야 하지만, 독점적으로 결혼을 떠맡아 조정하고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83:1.5 (922.8) Primitive marriage was primarily industrial; and even in modern times it is often a social or business affair. Through the influence of the mixture of the Andite stock and as a result of the mores of advancing civilization, marriage is slowly becoming mutual, romantic, parental, poetical, affectionate, ethical, and even idealistic. Selection and so-called romantic love, however, were at a minimum in primitive mating. During early times husband and wife were not much together; they did not even eat together very often. But among the ancients, personal affection was not strongly linked to sex attraction; they became fond of one another largely because of living and working together. 원시 결혼은 원래 산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서도 결혼은 종종 사회나 사업적 업무입니다. 안드 혈통이 혼합된 영향과 진보하는 문명 관습의 결과로, 결혼은 서서히 상호적, 낭만적, 어버이적, 시(詩)의 감성적, 애정적, 윤리적 및 심지어 이상주의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소위 낭만적 사랑은 원시적 짝짓기에서 최소한이었습니다. 초기 시대에 남편과 아내는 별로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주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고대인들 사이에서, 개인적 애정은 성적 매력으로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고 일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2. Courtship and Betrothal 구혼(求婚)과 약혼(約婚)

83:2.1 (923.1) Primitive marriages were always planned by the parents of the boy and girl. The transition stage between this custom and the times of free choosing was occupied by the marriage broker or professional matchmaker. These matchmakers were at first the barbers; later, the priests. Marriage was originally a group affair; then a family matter; only recently has it become an individual adventure. 원시 결혼은 언제나 소년과 소녀의 부모가 계획했습니다. 이런 관습과 자유 선택의 시대 사이 과도기 단계는 결혼 중개인이나 전문 중매인이 차지했습니다. 이런 중매인들은 처음에 이발사였고, 나중에 사제들이었습니다. 결혼은 원래 집단의 업무였고, 다음에는 가족 문제였습니다. 겨우 최근에 그것은 개인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83:2.2 (923.2) Coercion, not attraction, was the approach to primitive marriage. In early times woman had no sex aloofness, only sex inferiority as inculcated by the mores. As raiding preceded trading, so marriage by capture preceded marriage by contract. Some women would connive at capture in order to escape the domination of the older men of their tribe; they preferred to fall into the hands of men of their own age from another tribe. This pseudo elopement was the transition stage between capture by force and subsequent courtship by charming. 옛날에 여성은 성(性)에 무관심하지 않았고, 관습으로 주입된 성(性) 열등감만 있었습니다. 습격이 거래보다 먼저 일어났듯이, 포획 결혼이 계약 결혼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기 부족 노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포획될 때 묵인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자기 또래의 타(他) 부족 남성들의 수중에 들어가기를 택했습니다. 위장 도망은 강제 포획과 차후 매력에 의한 구애 사이에 있는 전환 단계였습니다.

83:2.3 (923.3) An early type of wedding ceremony was the mimic flight, a sort of elopement rehearsal which was once a common practice. Later, mock capture became a part of the regular wedding ceremony. A modern girl’s pretensions to resist “capture,” to be reticent toward marriage, are all relics of olden customs. The carrying of the bride over the threshold is reminiscent of a number of ancient practices, among others, of the days of wife stealing. 옛날 결혼식은 모방 도주, 한때 일반적 관행이었던 일종의 도망 예행 연습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포획 흉내가 일상 결혼식의 부분이 되었습니다. 현대 소녀가 결혼 준비로 과묵하면서, “포획”에 저항하는 척 꾸미는 것은 다 고대 관습의 유물입니다. 신부를 안고 문턱을 넘는 것은 수많은 고대 관행 중 특히 아내를 훔치던 시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83:2.4 (923.4) Woman was long denied full freedom of self-disposal in marriage, but the more intelligent women have always been able to circumvent this restriction by the clever exercise of their wits. Man has usually taken the lead in courtship, but not always. Woman sometimes formally, as well as covertly, initiates marriage. And as civilization has progressed, women have had an increasing part in all phases of courtship and marriage. 여성은 결혼해서 충분히 스스로 처신하는 자유가 오랫동안 거부당했지만, 더 영리한 여성들은 언제나 자기 지혜를 똑똑하게 사용해서 이런 제한을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남자가 구혼(求婚)에 앞장섰지만,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이 때때로 남몰래 만이 아니라 정식으로 결혼을 제안합니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모든 구혼(求婚)과 결혼 단계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났습니다.

83:2.5 (923.5) Increasing love, romance, and personal selection in premarital courtship are an Andite contribution to the world races. The relations between the sexes are evolving favorably; many advancing peoples are gradually substituting somewhat idealized concepts of sex attraction for those older motives of utility and ownership. Sex impulse and feelings of affection are beginning to displace cold calculation in the choosing of life partners. 혼전 구혼(求婚)에서 사랑, 낭만 및 개인적 선택의 증가는 세계 인종에 대한 안드-사람들의 공헌입니다. 성별 사이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진보하는 여러 민족은, 유용성과 소유권의 그런 오래된 동기 대신에 성적 매력의 다소 이상화된 개념을 점차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생 동반자를 선택할 때, 성적 충동과 애정 감정이 냉정한 계산 대신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83:2.6 (923.6) The betrothal was originally equivalent to marriage; and among early peoples sex relations were conventional during the engagement. In recent times, religion has established a sex taboo on the period between betrothal and marriage. 약혼은 원래 결혼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민족들 사이에 약혼 기간의 성(性)관계는 관행적이었습니다. 최근에, 종교가 약혼과 결혼 사이 기간에 성(性) 금기를 확립했습니다.

3. Purchase and Dowry 아내 사들임과 지참금

83:3.1 (923.7) The ancients mistrusted love and promises; they thought that abiding unions must be guaranteed by some tangible security, property. For this reason, the purchase price of a wife was regarded as a forfeit or deposit which the husband was doomed to lose in case of divorce or desertion. Once the purchase price of a bride had been paid, many tribes permitted the husband’s brand to be burned upon her. Africans still buy their wives. A love wife, or a white man’s wife, they compare to a cat because she costs nothing. 고대인들은 사랑과 약속을 의심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연합은 현실적인 어떤 보호조치, 재산으로 보증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내 구입 가격은, 이혼이나 불법 유기의 경우에 남편이 손해를 보기로 정한 벌금이나 보증금으로 여겼습니다. 일단 신부 구입 가격을 지불하고 나면, 여러 부족이 남편의 소인(燒印)을 그녀에게 찍도록 허용했습니다. 아프리카인(人)들은 아직도 자기 아내를 사들입니다. 고양이는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 즉 백인의 아내를 고양이로 비유합니다.

83:3.2 (924.1) The bride shows were occasions for dressing up and decorating daughters for public exhibition with the idea of their bringing higher prices as wives. But they were not sold as animals — among the later tribes such a wife was not transferable. Neither was her purchase always just a cold-blooded money transaction; service was equivalent to cash in the purchase of a wife. If an otherwise desirable man could not pay for his wife, he could be adopted as a son by the girl’s father and then could marry. And if a poor man sought a wife and could not meet the price demanded by a grasping father, the elders would often bring pressure to bear upon the father which would result in a modification of his demands, or else there might be an elopement. 신부 쇼는 갖춰 입고 꾸민 딸들이 아내로서 그들의 값을 더 높이려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물로 팔리지 않았습니다. 후기 부족들 사이에서 그런 아내는 양도(讓渡)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구입이 언제나 냉혹한 금전 거래만은 아니었습니다. 봉사(奉仕 받들어 섬김)는 아내구입에서 현금과 같았습니다. 탐나도록 매력적인 남성이 자기 아내를 위해 값을 치를 수 없다면, 소녀의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입양한 후, 그는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남성이 아내를 얻으려 하지만 욕심 많은 아버지가 요구하는 값을 치를 수 없으면, 부족의 어른들이 종종 아버지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의 요구사항을 수정하게 만들거나, 그 외에 애인과 함께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83:3.3 (924.2) As civilization progressed, fathers did not like to appear to sell their daughters, and so, while continuing to accept the bride purchase price, they initiated the custom of giving the pair valuable presents which about equaled the purchase money. And upon the later discontinuance of payment for the bride, these presents became the bride’s dowry. 문명이 발전하면서, 아버지들은 자기 딸들을 파는 것같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신부 매입 값을 계속 받으면서, 구매 대금과 거의 같은 값진 선물을 부부에게 주는 관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후일 신부를 위한 금액이 폐지된 후, 이런 선물들은 신부의 지참금이 되었습니다.

83:3.4 (924.3) The idea of a dowry was to convey the impression of the bride’s independence, to suggest far removal from the times of slave wives and property companions. A man could not divorce a dowered wife without paying back the dowry in full. Among some tribes a mutual deposit was made with the parents of both bride and groom to be forfeited in case either deserted the other, in reality a marriage bond. During the period of transition from purchase to dowry, if the wife were purchased, the children belonged to the father; if not, they belonged to the wife’s family. 지참금의 생각은 신부의 자활(自活)하는 인상의 전달, 즉 노예 아내 및 재산 동반자의 시대와 아주 달라졌음을 암시합니다. 남성은 지참금의 전액을 갚지 않으면 지참금을 가져온 아내와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부족 중에는, 신부와 신랑의 부모와 함께 상호 예치금을 만들어, 한 편이 다른 편을 버리는 경우, 실제 결혼 보증금으로 몰수되도록 했습니다. 사들이기에서 지참금으로 이동하는 과도기에, 아내를 사들이면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속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들은 아내의 가족에 속했습니다.

4. The Wedding Ceremony 결혼식

83:4.1 (924.4) The wedding ceremony grew out of the fact that marriage was originally a community affair, not just the culmination of a decision of two individuals. Mating was of group concern as well as a personal function. 결혼은 두 개인 결정의 성취만 아니라, 원래 공동체 업무였다는 사실에서, 결혼식이 발전하여 커졌습니다. 짝짓기는 개인적 활동만이 아니라 집단적 관심사였습니다.

83:4.2 (924.5) Magic, ritual, and ceremony surrounded the entire life of the ancients, and marriage was no exception. As civilization advanced, as marriage became more seriously regarded, the wedding ceremony became increasingly pretentious. Early marriage was a factor in property interests, even as it is today, and therefore required a legal ceremony, while the social status of subsequent children demanded the widest possible publicity. Primitive man had no records; therefore must the marriage ceremony be witnessed by many persons. 마술, 의례(儀禮) 및 예식(禮式)이 고대인(人)들의 온 생활을 둘러쌌고 결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결혼이 더 진지하게 여겨지게 되자, 결혼식이 점차 자랑하여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초기 결혼은,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재산 이익(利益)의 요인이었으므로, 법적 예식이 필요했고, 게다가 차후 자녀들의 사회적 신분을 최대한 널리 알려야 했습니다. 원시인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83:4.3 (924.6) At first the wedding ceremony was more on the order of a betrothal and consisted only in public notification of intention of living together; later it consisted in formal eating together. Among some tribes the parents simply took their daughter to the husband; in other cases the only ceremony was the formal exchange of presents, after which the bride’s father would present her to the groom. Among many Levantine peoples it was the custom to dispense with all formality, marriage being consummated by sex relations. The red man was the first to develop the more elaborate celebration of weddings. 처음에 결혼식은 약혼과 더 비슷했고, 동거(同居)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알릴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결혼은 정식으로 같이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부족 중에서 부모들은 자기 딸을 남편에게 단지 데려갔습니다. 다른 경우에 유일한 예식은 정식의 선물 교환이었으며, 그 후 신부의 아버지가 그녀를 신랑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여러 레반트 민족들은 모든 예식 없이, 성(性)관계로 신방(新房)을 차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홍인이 더 정교한 혼인 잔치를 처음 개발했습니다.

83:4.4 (924.7) Childlessness was greatly dreaded, and since barrenness was attributed to spirit machinations, efforts to insure fecundity also led to the association of marriage with certain magical or religious ceremonials. And in this effort to insure a happy and fertile marriage, many charms were employed; even the astrologers were consulted to ascertain the birth stars of the contracting parties. At one time the human sacrifice was a regular feature of all weddings among well-to-do people. 아이가 없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고, 불임(不姙)을 영(靈) 간계의 탓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산 보증의 노력으로, 결혼은 어떤 마술이나 종교적 예식의 관련으로 또한 이어졌습니다. 행복한 다산 결혼을 보증하려는 이런 노력으로, 여러 부적이 사용되었습니다. 결혼 당사자들의 출생 별들을 확인하려고 점성술사들의 의견까지 들었습니다. 한때 부유한 사람들의 모든 결혼에서 인신(人身) 공양(供養)이 일상적 특색이었습니다.

83:4.5 (925.1) Lucky days were sought out, Thursday being most favorably regarded, and weddings celebrated at the full of the moon were thought to be exceptionally fortunate. It was the custom of many Near Eastern peoples to throw grain upon the newlyweds; this was a magical rite which was supposed to insure fecundity. Certain Oriental peoples used rice for this purpose. 행운의 날들을 찾았고, 목요일을 가장 좋은 날로 여겼으며, 만월(滿月)에 행하는 결혼이 특별한 행운이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여러 근동(近東) 민족은 신혼부부에게 곡물을 던지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산을 보증한다고 알려진 마술적 제의(祭儀)였습니다. 어떤 동양 민족들은 이런 목적으로 쌀을 사용했습니다.

83:4.6 (925.2) Fire and water were always considered the best means of resisting ghosts and evil spirits; hence altar fires and lighted candles, as well as the baptismal sprinkling of holy water, were usually in evidence at weddings. For a long time it was customary to set a false wedding day and then suddenly postpone the event so as to put the ghosts and spirits off the track. 불과 물은 유령들과 악령들을 격퇴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항상 여겼습니다. 따라서 세례(洗禮)에 뿌리는 성수(聖水)와 마찬가지로, 제단의 불과 촛불은 결혼식에서 대개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거짓으로 결혼일을 정한 후, 유령들과 영(靈)들을 물리치려고 갑자기 행사를 연기하는 것은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83:4.7 (925.3) The teasing of newlyweds and the pranks played upon honeymooners are all relics of those far-distant days when it was thought best to appear miserable and ill at ease in the sight of the spirits so as to avoid arousing their envy. The wearing of the bridal veil is a relic of the times when it was considered necessary to disguise the bride so that ghosts might not recognize her and also to hide her beauty from the gaze of the otherwise jealous and envious spirits. The bride’s feet must never touch the ground just prior to the ceremony.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it is still the custom under the Christian mores to stretch carpets from the carriage landing to the church altar. 신혼부부를 놀리고 신혼여행자들에게 하는 장난은, 영(靈)들의 시샘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靈)들의 눈에 비참하고 불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때, 그렇게 아주 먼 시대의 모든 잔재입니다. 면사포를 입는 것은, 유령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질투하고 시샘하는 다른 영(靈)들의 시선에서 그녀의 아름다움도 숨기도록, 신부를 위장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당시의 잔재입니다. 예식 직전에 신부의 발이 땅에 닿지 말아야 했습니다. 20세기에도 기독교 관습에 따라, 도착한 차량에서 교회 제단까지 융단(絨緞)을 까는 것이 아직도 관습입니다.

83:4.8 (925.4) One of the most ancient forms of the wedding ceremony was to have a priest bless the wedding bed to insure the fertility of the union; this was done long before any formal wedding ritual was established. During this period in the evolution of the marriage mores the wedding guests were expected to file through the bedchamber at night, thus constituting legal witness to the consummation of marriage. 결혼식의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는 결혼의 다산을 보증하려고 사제가 결혼 동침(同寢)을 축복(祝福)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공식적인 결혼제의(祭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결혼 관습이 진화하는 이런 시기에, 하객들은 밤에 침실을 통해 지나가도록 예정되어서, 결혼 성사의 법적 증인이 되었습니다.

83:4.9 (925.5) The luck element, that in spite of all premarital tests certain marriages turned out bad, led primitive man to seek insurance protection against marriage failure; led him to go in quest of priests and magic. And this movement culminated directly in modern church weddings. But for a long time marriage was generally recognized as consisting in the decisions of the contracting parents — later of the pair — while for the last five hundred years church and state have assumed jurisdiction and now presume to make pronouncements of marriage. 혼전(婚前)의 모든 시험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혼은 불행해졌다는 행운 요소로 인해서, 원시인(人)은 결혼 실패를 막으려고 보증을 찾게 되었고, 사제들과 마술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바로 현대 교회 결혼으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결혼은 일반적으로 계약하는 부모들(나중에는 그 쌍)의 결정이라고 인정되었던 반면에 지난 500년 동안에 교회와 국가가 관할권을 떠맡았고, 지금은 대담하게 결혼을 선언합니다.

  1. Plural Marriages 복혼(複婚)

83:5.1 (925.6) In the early history of marriage the unmarried women belonged to the men of the tribe. Later on, a woman had only one husband at a time. This practice of one-man-at-a-time was the first step away from the promiscuity of the herd. While a woman was allowed but one man, her husband could sever such temporary relationships at will. But these loosely regulated associations were the first step toward living pairwise in distinction to living herdwise. In this stage of marriage development children usually belonged to the mother. 초기 결혼 역사에서 미혼 여성들은 부족의 남성들에게 속했습니다. 나중에 한 여성은 한 번에 한 남편만 있었습니다. 한 번에 한 남성이라는 이런 관례는 무리의 집단적 난혼(亂婚)을 떠나는 첫 단계였습니다. 한 여성에게는 한 남성뿐이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런 일시적 관계를 마음대로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헐겁게 규정하는 이런 관계는 무리로 사는 것과 구별되어 짝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였습니다. 결혼 발전의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대개 어머니에게 속했습니다.

83:5.2 (925.7) The next step in mating evolution was the group marriage. This communal phase of marriage had to intervene in the unfolding of family life because the marriage mores were not yet strong enough to make pair associations permanent. The brother and sister marriages belonged to this group; five brothers of one family would marry five sisters of another. All over the world the looser forms of communal marriage gradually evolved into various types of group marriage. And these group associations were largely regulated by the totem mores. Family life slowly and surely developed because sex and marriage regulation favored the survival of the tribe itself by insuring the survival of larger numbers of children. 짝짓기 진화의 다음 단계는 집단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의 이런 공동 단계가 가족생활의 전개에 개입된 것은, 결혼 관습이 쌍의 결합을 영속하게 할 정도로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매 결혼이 이런 집단에 속했습니다. 한 가정의 다섯 형제가 다른 가정의 다섯 자매와 결혼하곤 했습니다. 전 세계에 더 헐거운 형태의 공동 결혼이 점차 다양한 유형의 집단 결혼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집단 결합은 대개 토템(가족·종족의 상징으로 숭배하는 자연물·동물) 관습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가족생활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발전했는데, 성(性)과 결혼 규정으로, 더 많은 수의 자녀들이 살아남도록 지켜져서, 부족 자체의 생존이 유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83:5.3 (926.1) Group marriages gradually gave way before the emerging practices of polygamy — polygyny and polyandry — among the more advanced tribes. But polyandry was never general, being usually limited to queens and rich women; furthermore, it was customarily a family affair, one wife for several brothers. Caste and economic restrictions sometimes made it necessary for several men to content themselves with one wife. Even then, the woman would marry only one, the others being loosely tolerated as “uncles” of the joint progeny. 더 진보한 부족 중에서, 복혼(複婚)-일부다처(一夫多妻)와 일처다부(一妻多夫)-관행이 출현하기 전에, 집단 결혼은 점차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일처다부는, 보통 여왕들과 부유한 여성들에게 한정되어서,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관례상 여러 형제가 한 아내와 사는 집안일이었습니다. 카스트(특권계급)와 경제적 제한으로 때때로 여러 남성이 한 아내로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설령 그래도, 여성은 단 하나와 결혼하고, 나머지는 공동 자녀의 “삼촌들”로서 어렴풋이 묵인되었습니다.

83:5.4 (926.2) The Jewish custom requiring that a man consort with his deceased brother’s widow for the purpose of “raising up seed for his brother,” was the custom of more than half the ancient world. This was a relic of the time when marriage was a family affair rather than an individual association. 남성이 “자기 형제에게 씨가 있게(창38:8)” 하려고 죽은 형제의 과부와 사귀도록 요구한 유대인 관습은 고대 세계 절반 이상의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결혼이 개인 결합이기보다 집안일이었던, 시대의 잔재였습니다.

83:5.5 (926.3) The institution of polygyny recognized, at various times, four sorts of wives: 일부다처(一夫多妻) 제도는 여러 차례에 네 종류의 아내를 인정했습니다.

83:5.6 (926.4) 1. The ceremonial or legal wives. 정식 법적 아내들.

83:5.7 (926.5) 2. Wives of affection and permission. 애정으로 허락된 아내들.

83:5.8 (926.6) 3. Concubines, contractual wives. 첩, 계약 아내들.

83:5.9 (926.7) 4. Slave wives. 노예 아내들.

83:5.10 (926.8) True polygyny, where all the wives are of equal status and all the children equal, has been very rare. Usually, even with plural marriages, the home was dominated by the head wife, the status companion. She alone had the ritual wedding ceremony, and only the children of such a purchased or dowered spouse could inherit unless by special arrangement with the status wife. 모든 아내가 동등한 자격으로, 모든 자녀가 동등한, 진정한 일부다처(一夫多妻)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대개, 복혼(複婚)이라도, 반려자 자격이 있는 수석 아내가 가정을 좌우했습니다. 그녀만 제의(祭儀)적 결혼식을 했고, 자격이 있는 아내의 특별한 합의가 없는 한, 그렇게 구매하고 지참금을 낸 배우자의 자녀들만 상속(相續)할 수 있었습니다.

83:5.11 (926.9) The status wife was not necessarily the love wife; in early times she usually was not. The love wife, or sweetheart, did not appear until the races were considerably advanced, more particularly after the blending of the evolutionary tribes with the Nodites and Adamites. 자격이 있는 아내가 반드시 사랑하는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그녀는 대개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화 부족들이 놋-사람들 및 아담-사람들과 혼합된 이후 특히 더, 종족들이 상당히 진보했을 때까지, 사랑하는 아내, 즉 연인은 등장(登場)하지 않았습니다.

83:5.12 (926.10) The taboo wife — one wife of legal status — created the concubine mores. Under these mores a man might have only one wife, but he could maintain sex relations with any number of concubines. Concubinage was the steppingstone to monogamy, the first move away from frank polygyny. The concubines of the Jews, Romans, and Chinese were very frequently the handmaidens of the wife. Later on, as among the Jews, the legal wife was looked upon as the mother of all children born to the husband. 금기 아내–법적 자격이 있는 한 아내-가 첩 관습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관습에 따라 남성은 한 명의 아내만 있었지만, 그는 첩들이 몇이라도 성(性)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축첩(蓄妾)이 일부일처(一夫一妻)제의 발판, 명백한 일부다처(一夫多妻)에서 멀어지는 첫 조처였습니다. 유대인, 로마인과 중국인의 첩들은 아주 빈번히 아내의 하녀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 사이에서 그렇듯이, 법적 아내를 남편에게 태어난 모든 자녀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83:5.13 (926.11) The olden taboos on sex relations with a pregnant or nursing wife tended greatly to foster polygyny. Primitive women aged very early because of frequent childbearing coupled with hard work. (Such overburdened wives only managed to exist by virtue of the fact that they were put in isolation one week out of each month when they were not heavy with child.) Such a wife often grew tired of bearing children and would request her husband to take a second and younger wife, one able to help with both childbearing and the domestic work. The new wives were therefore usually hailed with delight by the older spouses; there existed nothing on the order of sex jealousy. 임신하거나 수유(授乳) 중인 아내와 성(性)관계에 대한 오래된 금기가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조장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원시 여성들은 잦은 해산과 힘든 노동이 결부되어 아주 일찍 늙었습니다. (그렇게 과로한 아내들은 자녀를 임신하지 않았을 때, 매달 일주일씩 그들이 격리되었다는 사실 덕분에 겨우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는 자녀를 낳느라 자주 지쳐서, 해산하고 가사(家事)를 도울 수 있는, 두 번째로 더 젊은 아내를 얻으라고 남편에게 요청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든 배우자들은 대개 새 아내들을 기쁘게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거기에는 성적 시샘의 종류가 전혀 없었습니다.

83:5.14 (926.12) The number of wives was only limited by the ability of the man to provide for them. Wealthy and able men wanted large numbers of children, and since the infant mortality was very high, it required an assembly of wives to recruit a large family. Many of these plural wives were mere laborers, slave wives. 아내의 수(數)는 그들을 부양할 남성의 능력으로만 제한되었습니다. 부유하고 능력 있는 남성들은 많은 수(數)의 자녀를 원했고, 유아 사망률이 아주 높아서, 대가족을 만들려면 아내들을 모아야 했습니다. 이런 복수(複數) 아내들의 여럿은 단순히 노동하는 노예 아내들이었습니다.

83:5.15 (927.1) Human customs evolve, but very slowly. The purpose of a harem was to build up a strong and numerous body of blood kin for the support of the throne. A certain chief was once convinced that he should not have a harem, that he should be contented with one wife; so he promptly dismissed his harem. The dissatisfied wives went to their homes, and their offended relatives swept down on the chief in wrath and did away with him then and there. 인간의 관습은 진화하지만 아주 느립니다. 후궁의 목적은 왕권을 유지하려고 강한 여러 혈연관계 집단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족장은 한때 자신이 후궁을 가지지 말고, 한 아내로 만족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자기 후궁을 해산시켰습니다. 불만스러운 아내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기분이 상한 그들의 친척들이 격노하여 족장을 급습했고 즉시 그를 죽였습니다.

6. True Monogamy — Pair Marriage 진정한 단혼(單婚) – 일부일처(一夫一妻)

83:6.1 (927.2) Monogamy is monopoly; it is good for those who attain this desirable state, but it tends to work a biologic hardship on those who are not so fortunate. But quite regardless of the effect on the individual, monogamy is decidedly best for the children. 단혼(單婚)은 독점입니다. 이런 바람직한 상태에 이른 자들에게는 좋지만,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은 자들에게는 생물학적 곤란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전혀 상관없이, 단혼(單婚)이 자녀들에게는 단연코 가장 좋습니다.

83:6.2 (927.3) The earliest monogamy was due to force of circumstances, poverty. Monogamy is cultural and societal, artificial and unnatural, that is, unnatural to evolutionary man. It was wholly natural to the purer Nodites and Adamites and has been of great cultural value to all advanced races. 가장 초기의 단혼(單婚)은 환경의 힘,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단혼(單婚)은 문화적, 사회적이고, 인위적으로 꾸며낸, 즉, 진화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순수한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에게 완전히 자연스러웠으며, 모든 진보한 인종에게 문화적 가치가 컸습니다.

83:6.3 (927.4) The Chaldean tribes recognized the right of a wife to impose a premarital pledge upon her spouse not to take a second wife or concubine; both the Greeks and the Romans favored monogamous marriage. Ancestor worship has always fostered monogamy, as has the Christian error of regarding marriage as a sacrament. Even the elevation of the standard of living has consistently militated against plural wives. By the time of Michael’s advent on Urantia practically all of the civilized world had attained the level of theoretical monogamy. But this passive monogamy did not mean that mankind had become habituated to the practice of real pair marriage. 갈대아 부족들은, 둘째 아내나 첩을 취하지 않도록 배우자에게, 혼전 서약을 부과하는 아내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그리스인(人)과 로마인(人) 모두 단혼(單婚) 결혼을 지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결혼을 성례(聖禮)로 여기는 잘못을 한 것처럼, 조상 숭배는 언제나 단혼(單婚)을 조장했습니다. 생활 수준의 향상까지도 일관되게 복수 아내를 방해했습니다. 유란시아에 미가엘이 출현할 때까지 모든 문명화된 세상은 실지로 이론상 단혼(單婚)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동적 단혼(單婚)은, 인류가 진정한 일부일처제의 관행에 익숙해졌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83:6.4 (927.5) While pursuing the monogamic goal of the ideal pair marriage, which is, after all, something of a monopolistic sex association, society must not overlook the unenviable situation of those unfortunate men and women who fail to find a place in this new and improved social order, even when having done their best to co-operate with, and enter into, its requirements. Failure to gain mates in the social arena of competition may be due to insurmountable difficulties or multitudinous restrictions which the current mores have imposed. Truly, monogamy is ideal for those who are in, but it must inevitably work great hardship on those who are left out in the cold of solitary existence. 결국 독점적인 성(性) 결합과 같은 이상적인 일부일처제의 단혼(單婚)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사회는, 남녀들이 사회 제도의 요청에 최선으로 협력하고 참여했음에도, 이렇게 새롭게 개선된 사회 제도에서 자리를 찾지 못해, 유감스러운 그런 남녀들이 선망의 대상이 못 되는 상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쟁의 사회적 무대에서 배우자를 얻지 못한 것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나 현행 관습이 부과한 다양한 제약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단혼(單婚)은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상적이지만, 춥게 홀로 살도록 버려진 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83:6.5 (927.6) Always have the unfortunate few had to suffer that the majority might advance under the developing mores of evolving civilization; but always should the favored majority look with kindness and consideration on their less fortunate fellows who must pay the price of failure to attain membership in the ranks of those ideal sex partnerships which afford the satisfaction of all biologic urges under the sanction of the highest mores of advancing social evolution. 언제나 불행한 소수는, 대다수가 진화하는 문명에 속한 발전 도상의 관습 아래에서 진보하는 것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혜택받은 대다수는, 진보하는 사회적 진화 중 최고 관습의 규약 아래에서 모든 생물학적 충동에 만족을 주는, 그런 이상적 성(性) 배우자권 계층의 회원 자격에 이르지 못한 값을 치러야 했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동료를 언제나 친절과 배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83:6.6 (927.7) Monogamy always has been, now is, and forever will be the idealistic goal of human sex evolution. This ideal of true pair marriage entails self-denial, and therefore does it so often fail just because one or both of the contracting parties are deficient in that acme of all human virtues, rugged self-control. 단혼(單婚)은 언제나 인간의 성(性) 진화의 이상적 목표였고, 지금도 그러며,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참된 일부일처제의 이런 이상(理想)에 극기(克己)가 필요하므로, 결혼 당사자 중 하나 혹은 둘 다, 오로지 모든 인간 미덕의 절정, 엄격한 자제(自制)가 모자라서 그토록 자주 실패합니다.

83:6.7 (927.8) Monogamy is the yardstick which measures the advance of social civilization as distinguished from purely biologic evolution. Monogamy is not necessarily biologic or natural, but it is indispensable to the immediate maintenance and further development of social civilization. It contributes to a delicacy of sentiment, a refinement of moral character, and a spiritual growth which are utterly impossible in polygamy. A woman never can become an ideal mother when she is all the while compelled to engage in rivalry for her husband’s affections. 단혼(單婚)은 순전히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되는, 사회적 문명의 진보를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단혼(單婚)은 반드시 생물학적 혹은 자연발생적이지 않아도, 사회 문명의 즉각적 정비(整備)와 추가 발전에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감정의 섬세함, 세련된 도덕적 특성 및 복혼(複婚)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영적 성장에 기여(寄與)합니다. 여성은, 자기 남편의 애정을 위해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내내, 결코 이상적인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83:6.8 (928.1) Pair marriage favors and fosters that intimate understanding and effective co-operation which is best for parental happiness, child welfare, and social efficiency. Marriage, which began in crude coercion, is gradually evolving into a magnificent institution of self-culture, self-control, self-expression, and self-perpetuation. 일부일처제는 부모의 행복, 자녀의 복지 및 사회적 증진에 최선(最善)인, 친밀한 이해 및 효과적 협력을 뒷받침하고 촉진합니다. 미숙한 강압으로 시작된 결혼은 자기 수양(修攘), 자제(自制 극기), 자기표현 및 자기 영속(永續)의 훌륭한 제도로 점차 진화하고 있습니다.

7. The Dissolution of Wedlock 혼인의 해약(解約)

83:7.1 (928.2) In the early evolution of the marital mores, marriage was a loose union which could be terminated at will, and the children always followed the mother; the mother-child bond is instinctive and has functioned regardless of the developmental stage of the mores. 혼인 관습의 초기 진화에서, 결혼은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느슨한 연합이었고, 자녀들은 언제나 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어머니-자녀 결속은 본능적이며, 관습의 발전 단계와 관계없이 작용했습니다.

83:7.2 (928.3) Among primitive peoples only about one half the marriages proved satisfactory. The most frequent cause for separation was barrenness, which was always blamed on the wife; and childless wives were believed to become snakes in the spirit world. Under the more primitive mores, divorce was had at the option of the man alone, and these standards have persisted to the twentieth century among some peoples. 원시 민족 중 절반 정도만 결혼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알았습니다. 가장 빈번한 별거의 원인은 불임(不姙)이었고, 언제나 아내에게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아이가 없는 아내들은 영(靈) 세계에서 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원시적인 관습에 따라, 이혼(離婚)은 남성만의 선택권이었으며, 이런 기준은 어떤 민족 중에서 20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83:7.3 (928.4) As the mores evolved, certain tribes developed two forms of marriage: the ordinary, which permitted divorce, and the priest marriage, which did not allow for separation. The inauguration of wife purchase and wife dowry, by introducing a property penalty for marriage failure, did much to lessen separation. And, indeed, many modern unions are stabilized by this ancient property factor. 관습이 진화하면서, 어떤 부족들은 2가지 형태의 결혼을 발전시켰습니다. 이혼을 허락하는 일상 결혼과 별거를 허락하지 않는 성직자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실패에 대한 재산 위약금을 도입한, 아내구입과 아내 지참금의 시작으로 별거(別居)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여러 현대적 연합은 이런 고대의 재산 요소로 안정됩니다.

83:7.4 (928.5) The social pressure of community standing and property privileges has always been potent in the maintenance of the marriage taboos and mores. Down through the ages marriage has made steady progress and stands on advanced ground in the modern world, notwithstanding that it is threateningly assailed by widespread dissatisfaction among those peoples where individual choice — a new liberty — figures most largely. While these upheavals of adjustment appear among the more progressive races as a result of suddenly accelerated social evolution, among the less advanced peoples marriage continues to thrive and slowly improve under the guidance of the older mores. 공동체 존속과 재산 특권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결혼 금기와 관습의 유지에 언제나 유력했습니다. 개인적 선택–새로운 해방-이 가장 크게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민족 중에 만연(漫然)한 불만(不滿)으로 결혼이 위협적으로 습격을 받지만, 대대로 결혼은 한결같이 진보했고, 결혼은 현대 세계에서 진보한 지반에 서 있습니다. 조율 중인 이런 격변이, 갑자기 가속된 사회적 진화의 결과로서, 더 진보한 인종 중에서 나타나지만, 덜 진보한 민족 중에서, 더 오랜 관습의 안내에 따라, 결혼은 계속 번영하고 서서히 향상하고 있습니다.

83:7.5 (928.6) The new and sudden substitution of the more ideal but extremely individualistic love motive in marriage for the older and long-established property motive, has unavoidably caused the marriage institution to become temporarily unstable. Man’s marriage motives have always far transcended actual marriage morals, and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the Occidental ideal of marriage has suddenly far outrun the self-centered and but partially controlled sex impulses of the races. The presence of large numbers of unmarried persons in any society indicates the temporary breakdown or the transition of the mores. 결혼에서 더 이상적이지만 극도로 개인주의적 사랑 동기가 더 오래된, 옛 재산 동기를 갑자기 새롭게 대체하여, 어쩔 수 없이 결혼제도가 일시적으로 흔들거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결혼 동기는 현행의 결혼 도덕을 언제나 훨씬 초월했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서양의 결혼 이상(理想)은, 자기-중심적이지만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류의 성(性) 충동을 갑자기 훨씬 앞질렀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도, 많은 미혼(未婚) 사람의 존재는 일시적 붕괴나 관습의 과도기를 나타냅니다.

83:7.6 (928.7) The real test of marriage, all down through the ages, has been that continuous intimacy which is inescapable in all family life. Two pampered and spoiled youths, educated to expect every indulgence and full gratification of vanity and ego, can hardly hope to make a great success of marriage and home building — a lifelong partnership of self-effacement, compromise, devotion, and unselfish dedication to child culture. 대대로 모든 세대에서, 결혼에 대한 진정한 시험은, 모든 가정생활에서 불가피한, 부단한 친밀함이었습니다. 모든 방종(放縱)과 허영과 자만을 완전히 채우도록 교육받은, 제멋대로 버릇없이 행동하는 두 젊은이는 결혼과 가정(家庭) 세우기 – 자기를 삼가고, 양보하며, 헌신하고, 자녀 양육에 이타적으로 헌신하는 평생 배우자 됨에, 크게 성공하기를 도저히 바랄 수 없습니다. 

83:7.7 (929.1) The high degree of imagination and fantastic romance entering into courtship is largely responsible for the increasing divorce tendencies among modern Occidental peoples, all of which is further complicated by woman’s greater personal freedom and increased economic liberty. Easy divorce, when the result of lack of self-control or failure of normal personality adjustment, only leads directly back to those crude societal stages from which man has emerged so recently and as the result of so much personal anguish and racial suffering. 구혼(求婚)에 들어가는 높은 정도의 상상력과 환상적인 낭만이, 현대 서양 민족 중에서 점점 증가하는 이혼 경향에 주로 책임이 있으며, 여성의 개인적 자유가 커지고, 경제적 해방이 증대하여, 이 모두가 더 악화합니다. 자제(自制) 부족이나 정상적인 인격 조율 실패의 결과로, 쉬운 이혼(離婚)은, 사람이 아주 최근에, 그렇게 많은 개인적인 번민과 인종적 고통의 결과로써, 벗어났던, 그런 미숙한 사회적 단계로 바로 되돌아가게 할 뿐입니다.

83:7.8 (929.2) But just so long as society fails to properly educate children and youths, so long as the social order fails to provide adequate premarital training, and so long as unwise and immature youthful idealism is to be the arbiter of the entrance upon marriage, just so long will divorce remain prevalent. And in so far as the social group falls short of providing marriage preparation for youths, to that extent must divorce function as the social safety valve which prevents still worse situations during the ages of the rapid growth of the evolving mores. 그러나 사회가 아이들과 젊은이를 적절히 교육하지 못하고, 사회 계층이 충분히 혼전 훈련을 제공하지 못하며, 분별없이 미숙한 젊은이 특유의 이상주의(理想主義)가 결혼의 중재자가 되는 한, 이혼(離婚)은 바로 그렇게 오래 널리 유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집단이 젊은이를 위한 결혼 준비의 마련에 미흡한 한, 그 정도까지, 이혼(離婚)은, 진화 관습의 급속한 성장 시대에, 더 악화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사회적 안전밸브로서 작용해야 합니다.

83:7.9 (929.3) The ancients seem to have regarded marriage just about as seriously as some present-day people do. And it does not appear that many of the hasty and unsuccessful marriages of modern times are much of an improvement over the ancient practices of qualifying young men and women for mating. The great inconsistency of modern society is to exalt love and to idealize marriage while disapproving of the fullest examination of both. 고대인(人)들은 바로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하듯이 결혼을 거의 진지하게 여긴 듯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조급하고, 실패한 여러 결혼은, 젊은 남녀가 짝지을 자격을 준 고대 관행을 넘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커다란 모순은, 사랑의 격찬과 결혼의 이상화(理想化), 둘 모두를 완전히 점검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격찬하고 결혼을 이상화(理想化)하는 것입니다.

8. The Idealization of Marriage 결혼의 이상화(理想化)

83:8.1 (929.4) Marriage which culminates in the home is indeed man’s most exalted institution, but it is essentially human; it should never have been called a sacrament. The Sethite priests made marriage a religious ritual; but for thousands of years after Eden, mating continued as a purely social and civil institution. 가정에서 절정에 이르는 결혼은 정말 인간의 가장 고귀한 제도이지만, 본질상 인간적입니다. 그것은 결코 성례(聖禮)라고 부르지 말아야 했습니다. 셋-사람들 사제들이 결혼을 종교 의례(儀禮)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에덴 이후 수천 년 동안, 짝짓기는 순전히 사회적 시민 제도로 지속했습니다.

83:8.2 (929.5) The likening of human associations to divine associations is most unfortunate. The union of husband and wife in the marriage-home relationship is a material function of the mortals of the evolutionary worlds. True, indeed, much spiritual progress may accrue consequent upon the sincere human efforts of husband and wife to progress, but this does not mean that marriage is necessarily sacred. Spiritual progress is attendant upon sincere application to other avenues of human endeavor. 인간의 결합을 신적 결합에 견주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습니다. 결혼-가정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진화 세계 필사자들의 물질적 활동입니다. 사실 정말로, 대부분의 영적 진보는 진보하려는 남편과 아내의 신실한 인간적 노력의 결과로 생기지만, 이것은, 결혼이 필연적으로 신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적 진보는 인간적 노력을 다른 방법에 신실히 적용할 때 따라옵니다.

83:8.3 (929.6) Neither can marriage be truly compared to the relation of the Adjuster to man nor to the fraternity of Christ Michael and his human brethren. At scarcely any point are such relationships comparable to the association of husband and wife. And it is most unfortunate that the human misconception of these relationships has produced so much confusion as to the status of marriage. 결혼은 정말로 조율자와 인간의 관계나, 그리스도 미가엘과 그의 인간 형제들의 우애에 견줄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도 그런 관계들은 단연 남편과 아내의 결합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들에 대한 인간적 오해가 결혼의 상태에 대해 그렇게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습니다.

83:8.4 (929.7) It is also unfortunate that certain groups of mortals have conceived of marriage as being consummated by divine action. Such beliefs lead directly to the concept of the indissolubility of the marital state regardless of the circumstances or wishes of the contracting parties. But the very fact of marriage dissolution itself indicates that Deity is not a conjoining party to such unions. If God has once joined any two things or persons together, they will remain thus joined until such a time as the divine will decrees their separation. But, regarding marriage, which is a human institution, who shall presume to sit in judgment, to say which marriages are unions that might be approved by the universe supervisors in contrast with those which are purely human in nature and origin? 어떤 필사자 집단이 결혼을 신적 행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낸 것도 유감스럽습니다. 그런 믿음은 계약 당사자들의 상황이나 소원에 개의(介意)치 않고, 결혼 상태에 대한 확고 불변의 개념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결혼이 해체(解體)되는 바로 그 자체의 사실이, 신(神)이 그런 연합에 대한 결합 당사자가 아님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이 일단 어떤 두 물건이나 인간들을 하나로 결합했다면, 신적 뜻이 그것들의 분리를 명하는 그런 시간까지 그것들은 그렇게 결합하여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제도인 결혼에 관해, 본성과 기원이 순전히 인간적인 결혼과 현저히 다르게, 어떤 결혼이 우주 감독자들이 허락한 연합이라고 말하면서, 감히 누가 판가름할 것입니까?

83:8.5 (930.1) Nevertheless, there is an ideal of marriage on the spheres on high. On the capital of each local system the Material Sons and Daughters of God do portray the height of the ideals of the union of man and woman in the bonds of marriage and for the purpose of procreating and rearing offspring. After all, the ideal mortal marriage is humanly sacred. 그렇지만, 높은 구체들에 결혼의 이상(理想)이 있습니다. 각 지역 체계의 수도에서, 하느님의 물질 아들들과 딸들이, 결혼의 결속과 자녀 출산과 양육의 목적으로, 남녀가 연합하는 이상적 극치를 묘사합니다. 결국 이상적(理想的)인 필사자 결혼은 인간적으로 신성합니다.

83:8.6 (930.2) Marriage always has been and still is man’s supreme dream of temporal ideality. Though this beautiful dream is seldom realized in its entirety, it endures as a glorious ideal, ever luring progressing mankind on to greater strivings for human happiness. But young men and women should be taught something of the realities of marriage before they are plunged into the exacting demands of the interassociations of family life; youthful idealization should be tempered with some degree of premarital disillusionment. 결혼은 언제나, 여전히 현세적 이상성(理想性)에 대한 인간 최극의 꿈입니다. 이 아름다운 꿈이 좀처럼 완전히 실현되지 않아도, 그것은, 인간 행복을 위해 더 크게 노력하도록 언제나 진보하는 인간을 유혹하면서, 빛나는 이상(理想)으로 지속합니다. 그러나 젊은 남녀는 서로 연합하는 가정생활의 힘든 요구에 돌입하기 전에, 그들은 결혼의 현실성을 어느 정도 배워야 합니다. 젊은이 특유의 이상화(理想化)는 어느 정도 혼전(婚前)의 환멸(幻滅)로 완화되어야 합니다.

83:8.7 (930.3) The youthful idealization of marriage should not, however, be discouraged; such dreams are the visualization of the future goal of family life. This attitude is both stimulating and helpful providing it does not produce an insensitivity to the realization of the practical and commonplace requirements of marriage and subsequent family life. 그래도 젊은이 특유의 이상화(理想化)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꿈들은 가정생활의 미래 목표를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는 것입니다. 결혼과 이어지는 가정생활의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필요의 실상에 둔감해지지 않는다면, 이런 태도는 격려와 도움이 됩니다.

83:8.8 (930.4) The ideals of marriage have made great progress in recent times; among some peoples woman enjoys practically equal rights with her consort. In concept, at least, the family is becoming a loyal partnership for rearing offspring, accompanied by sexual fidelity. But even this newer version of marriage need not presume to swing so far to the extreme as to confer mutual monopoly of all personality and individuality. Marriage is not just an individualistic ideal; it is the evolving social partnership of a man and a woman, existing and functioning under the current mores, restricted by the taboos, and enforced by the laws and regulations of society. 결혼의 이상(理想)이 최근에 크게 진보했습니다. 일부 민족에서 여성은 실지로 그녀의 배우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립니다. 적어도 개념으로 가정은, 성적(性的) 정절과 함께, 자녀를 양육하는 충실한 동반자 관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이런 결혼도 모든 고유성과 개인성에 대해 상호 독점권을 부여하도록 극심하기까지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은 개인주의적 이상(理想)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금기로 제한되고, 사회의 법률과 규정으로 시행되며, 현행 관습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진화하는 사회적 동반자 관계입니다.

83:8.9 (930.5) Twentieth-century marriages stand high in comparison with those of past ages, notwithstanding that the home institution is now undergoing a serious testing because of the problems so suddenly thrust upon the social organization by the precipitate augmentation of woman’s liberties, rights so long denied her in the tardy evolution of the mores of past generations. 여성의 자유, 과거 세대의 관습이 마지못해 진화하는 가운데 그토록 오래 여성에게 주지 않았던 권리가 느닷없이 증대하여 사회 조직에 너무 갑자기 밀어닥친 문제들로 인하여, 가정 제도가 지금 만만찮은 시험을 견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결혼은 과거 시대와 비교하여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83:8.10 (930.6) [Presented by the Chief of Seraphim stationed on Urantia.][유란시아에 배치된 수석 세라핌천사가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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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4 Marriage and Family Life 결혼과 가정생활

Paper 84

Marriage and Family Life 결혼과 가정생활

1. Primitive Pair Associations 원시 부부 결합
2. The Early Mother-Family 초기 모계(母系)-가정
3. The Family Under Father Dominance 가부장(家父長) 가정
4. Woman’s Status in Early Society 초기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5. Woman Under the Developing Mores 발전하는 관습에 따른 여성
6. The Partnership of Man and Woman 남성과 여성의 협력
7. The Ideals of Family Life 가정생활의 이상(理想)들
8. Dangers of Self-Gratification 자아-충족의 위험들

84:0.1 (931.1) MATERIAL necessity founded marriage, sex hunger embellished it, religion sanctioned and exalted it, the state demanded and regulated it, while in later times evolving love is beginning to justify and glorify marriage as the ancestor and creator of civilization’s most useful and sublime institution, the home. And home building should be the center and essence of all educational effort. 물질적 필요가 결혼의 근거를 이루었고, 성적 갈망이 결혼을 장식했으며, 종교가 결혼을 인가하고 결혼 활동을 강화했으며, 국가가 결혼을 요구하고 규정했고, 게다가, 후대에 진화하는 사랑은, 가장 유용하고 숭고한 문명 제도, 즉 가정의 조상과 창조자로서 결혼을 정당화하고 미화(美化)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 세우기는 모든 교육적 노력의 중심과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84:0.2 (931.2) Mating is purely an act of self-perpetuation associated with varying degrees of self-gratification; marriage, home building, is largely a matter of self-maintenance, and it implies the evolution of society. Society itself is the aggregated structure of family units. Individuals are very temporary as planetary factors — only families are continuing agencies in social evolution. The family is the channel through which the river of culture and knowledge flows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짝짓기는 다양한 정도의 자아-만족(滿足)과 결부된 순전한 자아-영속(永續)의 행동입니다. 결혼, 가정 세우기는 대개 자아-유지(維持)의 문제이며, 그것은 사회의 진화를 포함합니다. 사회 자체는 가정 단위의 집합 구조입니다. 개인들은 아주 일시적인 행성 요소들입니다 – 가정만이 영속하는 사회적 진화를 일으키는 요소입니다. 가정은, 문화와 지식의 강(江)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흐르는 경로입니다.

84:0.3 (931.3) The home is basically a sociologic institution. Marriage grew out of co-operation in self-maintenance and partnership in self-perpetuation, the element of self-gratification being largely incidental. Nevertheless, the home does embrace all three of the essential functions of human existence, while life propagation makes it the fundamental human institution, and sex sets it off from all other social activities. 가정은 원래 사회 조직 제도입니다. 결혼은 자아-유지(維持)의 협력과 자아-영속(永續)의 협조로 생겼고, 자아-만족(滿足)의 요소는 대개 부수적입니다. 그렇지만, 가정은 인간 존재에 속한 모든 세 가지 본질적 작용을 포함하며, 생명 증식은 가정을 기본적인 인간 제도로 만들고, 성(性)은 다른 모든 사회적 활동들로부터 가정을 시작하게 합니다.

1. Primitive Pair Associations 원시 부부 결합

84:1.1 (931.4) Marriage was not founded on sex relations; they were incidental thereto. Marriage was not needed by primitive man, who indulged his sex appetite freely without encumbering himself with the responsibilities of wife, children, and home. 결혼은 성(性)관계에 근거를 두지 않았습니다. 성관계는 결혼에 부수하여 일어났습니다. 아내, 자녀 및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자유로이 성(性)욕을 채웠던 원시인들은 결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84:1.2 (931.5) Woman, because of physical and emotional attachment to her offspring, is dependent on co-operation with the male, and this urges her into the sheltering protection of marriage. But no direct biologic urge led man into marriage — much less held him in. It was not love that made marriage attractive to man, but food hunger which first attracted savage man to woman and the primitive shelter shared by her children. 여성은,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서적 애착 때문에, 남성과 함께하는 협력에 의존하며, 이런 충동이 그녀를 결혼의 보호 안으로 피하게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어떤 생물학적 충동도 남성을 결혼으로 이끌지 않았고 – 하물며 그를 결혼으로 가두지 않았습니다. 남성의 마음을 결혼으로 이끈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야만인을 여성에게 끌어들인 것은 먼저 식량 기갈(飢渴)과 그녀의 자녀와 공유했던 원시적 피난처였습니다.

84:1.3 (931.6) Marriage was not even brought about by the conscious realization of the obligations of sex relations. Primitive man comprehended no connection between sex indulgence and the subsequent birth of a child. It was once universally believed that a virgin could become pregnant. The savage early conceived the idea that babies were made in spiritland; pregnancy was believed to be the result of a woman’s being entered by a spirit, an evolving ghost. Both diet and the evil eye were also believed to be capable of causing pregnancy in a virgin or unmarried woman, while later beliefs connected the beginnings of life with the breath and with sunlight. 결혼은 성(性)관계의 의무에 대한 의식적 자각으로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시인은 성적 탐닉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아이 출산 사이의 관계를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때 처녀가 임신할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었습니다. 야만인은 아기들이 영(靈)의 나라에서 만들어진다고 일찍부터 생각했습니다. 임신은 진화하는 유령(幽靈), 영(靈)이 여성에게 들어간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식이 요법과 저주의 눈길도 처녀 즉 미혼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며, 게다가 후기 믿음은 생명의 시작을 호흡 및 햇빛과 연결했습니다.

84:1.4 (932.1) Many early peoples associated ghosts with the sea; hence virgins were greatly restricted in their bathing practices; young women were far more afraid of bathing in the sea at high tide than of having sex relations. Deformed or premature babies were regarded as the young of animals which had found their way into a woman’s body as a result of careless bathing or through malevolent spirit activity. Savages, of course, thought nothing of strangling such offspring at birth. 초기에 여러 민족은 유령(幽靈)을 바다와 관련지었습니다. 그래서 처녀들은 목욕 관행에 많이 제한되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성(性)관계를 갖는 것보다 만조(滿潮 밀물)때 목욕하기를 훨씬 더 두려워했습니다. 기형아(畸形兒) 즉 조산아(早産兒)들은 조심성 없는 목욕이나 심술궂은 영(靈) 행위의 결과로써 여성의 몸에 들어갈 방법을 찾은 동물의 새끼로 여겼습니다. 물론 야만인들은 그런 자녀가 태어날 때 교살(絞殺 목을 졸라 죽임)하기를 예사로 여겼습니다.

84:1.5 (932.2) The first step in enlightenment came with the belief that sex relations opened up the way for the impregnating ghost to enter the female. Man has since discovered that father and mother are equal contributors of the living inheritance factors which initiate offspring. But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many parents still endeavor to keep their children in more or less ignorance as to the origin of human life. 성(性)관계로, 임신시키는 유령(幽靈)이 여성에게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믿음에서, 계몽의 첫 단계가 따라왔습니다. 그 이후 사람은 부모가 자녀를 시작하는 살아있는 유전 인자의 동등한 공헌자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도 여러 부모는 여전히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해 자기 자녀가 어느 정도 알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84:1.6 (932.3) A family of some simple sort was insured by the fact that the reproductive function entails the mother-child relationship. Mother love is instinctive; it did not originate in the mores as did marriage. All mammalian mother love is the inherent endowment of the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and is in strength and devotion always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length of the helpless infancy of the species. 생식(生殖) 기능이 어머니-자녀 관계를 일으킨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단순한 유형의 가족이 보장되었습니다. 모성애는 본능적입니다. 그것은 결혼처럼 관습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포유동물 모성애는 지역 우주에 속한 보조 마음-영(靈)들의 선천적 증여 재질이며, 강도(剛度)와 헌신(獻身)의 정도는 언제나 그 종(種) 무력한 유아기의 길이에 정비례합니다.

84:1.7 (932.4) The mother and child relation is natural, strong, and instinctive, and one which, therefore, constrained primitive women to submit to many strange conditions and to endure untold hardships. This compelling mother love is the handicapping emotion which has always placed woman at such a tremendous disadvantage in all her struggles with man. Even at that, maternal instinct in the human species is not overpowering; it may be thwarted by ambition, selfishness, and religious conviction. 어머니와 자녀 관계는 자연스럽고, 강력하며, 본능적이어서, 원시 여성들이 여러 낯선 상황들을 감수하고 무수한 고난을 견디도록 했습니다. 강력한 이런 모성애는 남성과 함께 하는 모든 투쟁에서 여성을 항상 그토록 불리한 입장에 두었던, 약하게 만든 감정입니다. 그래도 인간종의 모성 본능은 압도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야망, 이기심 및 종교적 신념으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84:1.8 (932.5) While the mother-child association is neither marriage nor home, it was the nucleus from which both sprang. The great advance in the evolution of mating came when these temporary partnerships lasted long enough to rear the resultant offspring, for that was homemaking. 어머니-자녀 관계는 결혼도 아니고 가정도 아니지만, 그것은 두 가지가 솟아 나온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일시적 협력의 결과로 생긴 자녀를 양육하기에 충분히 오래 지속되었을 때, 그것이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짝짓기 진화에서 커다란 진보가 왔습니다.

84:1.9 (932.6) Regardless of the antagonisms of these early pairs, notwithstanding the looseness of the association, the chances for survival were greatly improved by these male-female partnerships. A man and a woman, co-operating, even aside from family and offspring, are vastly superior in most ways to either two men or two women. This pairing of the sexes enhanced survival and was the very beginning of human society. The sex division of labor also made for comfort and increased happiness. 이런 초기 부부들의 대립과 관계없이, 그 결합이 느슨했지만, 생존 기회는 이런 남녀 협동으로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가족과 자녀를 제외하고, 협동하는 남녀는 두 남자 또는 두 여자 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우월합니다. 이런 남녀 부부는 생존을 향상했고, 인간 사회의 바로 시작이었습니다. 노동의 남녀 구분도 안락을 만들고 행복을 증가시켰습니다.

  1. The Early Mother-Family 초기 모계(母系)-가정

84:2.1 (932.7) The woman’s periodic hemorrhage and her further loss of blood at childbirth early suggested blood as the creator of the child (even as the seat of the soul) and gave origin to the blood-bond concept of human relationships. In early times all descent was reckoned in the female line, that being the only part of inheritance which was at all certain. 여성의 주기적 출혈과 추가적인 분만 출혈로, 피를 아이의 창조자 (심지어 혼魂의 자리로) 연상하여, 인간관계에 속한 혈연(血緣) 개념이 최초로 생겼습니다. 초기에 모든 후손은, 아주 확실히 상속의 유일한 부분이었던, 여성 혈통으로 여겼습니다.

84:2.2 (932.8) The primitive family, growing out of the instinctive biologic blood bond of mother and child, was inevitably a mother-family; and many tribes long held to this arrangement. The mother-family was the only possible transition from the stage of group marriage in the horde to the later and improved home life of the polygamous and monogamous father-families. The mother-family was natural and biologic; the father-family is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The persistence of the mother-family among the North American red men is one of the chief reasons why the otherwise progressive Iroquois never became a real state. 본능적으로 어머니와 자녀의 생물학적 혈연에서 생긴 원시 가정은 불가피하게 모계(母系)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족은 이런 제도를 오랫동안 고수(固守)했습니다. 모계(母系)-가정은 유목민의 집단 결혼에서 일부다처와 일부일처 부계(父系)-가정들의 후기에 개선된 가정생활로 유일하게 넘어가는 단계였습니다. 모계(母系)-가정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생물학적이었습니다. 부계(父系)-가정은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이었습니다. 북(北)아메리카의 홍인(紅人) 사이에서 지속된 모계(母系)-가정이, 다른 점에서 진보적인 이로쿼이인(人)이 결코 실제 국가가 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84:2.3 (933.1) Under the mother-family mores the wife’s mother enjoyed virtually supreme authority in the home; even the wife’s brothers and their sons were more active in family supervision than was the husband. Fathers were often renamed after their own children. 모계(母系)-가정의 관습에 따라, 아내의 어머니가 가정에서 사실상 최고의 권위를 누렸습니다. 아내의 형제들과 그들의 아들들까지도 가정 관리에 남편보다 더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버지들은 흔히 자기 자녀를 따라 개명(改名)되었습니다.

84:2.4 (933.2) The earliest races gave little credit to the father, looking upon the child as coming altogether from the mother. They believed that children resembled the father as a result of association, or that they were “marked” in this manner because the mother desired them to look like the father. Later on, when the switch came from the mother-family to the father-family, the father took all credit for the child, and many of the taboos on a pregnant woman were subsequently extended to include her husband. The prospective father ceased work as the time of delivery approached, and at childbirth he went to bed, along with the wife, remaining at rest from three to eight days. The wife might arise the next day and engage in hard labor, but the husband remained in bed to receive congratulations; this was all a part of the early mores designed to establish the father’s right to the child. 아주 초기의 종족들은, 자녀를 전적으로 어머니 출신으로 여기면서, 아버지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어울리는 결과로서 아버지를 닮거나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도록 어머니가 원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렇게 “자국이 남아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후에 모계(母系)-가정에서 부계(父系)-가정으로 바뀌자, 아버지가 아이에 대한 모든 공적을 취했으며, 임신부(姙娠婦)에 대한 여러 금기가 나중에 확장되어 그녀의 남편을 포함했습니다. 아버지가 될 사람은 출산 시간이 다가오자 일을 그만두었고, 분만 중에 그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침실로 가서 3일에서 8일간 남아서 쉬었습니다. 아내는 다음날 일어나 중노동을 할 수도 있지만, 남편은 침실에 남아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세우려고 의도된 초기 관습의 일부였습니다.

84:2.5 (933.3) At first, it was the custom for the man to go to his wife’s people, but in later times, after a man had paid or worked out the bride price, he could take his wife and children back to his own people. The transition from the mother-family to the father-family explains the otherwise meaningless prohibitions of some types of cousin marriages while others of equal kinship are approved. 처음에는, 남성이 아내의 가족에게 가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후일에 남성이 신붓값을 치르거나 일해서 갚은 후,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를 자기 가족에게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모계(母系)-가정에서 부계(父系)-가정으로의 과도기(過渡期)는 동등한 다른 혈족의 결혼은 승인하는 반면에, 다른 점에서 의미 없는 사촌 결혼의 일부 유형에 대한 금제(禁制)를 설명합니다.

84:2.6 (933.4) With the passing of the hunter mores, when herding gave man control of the chief food supply, the mother-family came to a speedy end. It failed simply because it could not successfully compete with the newer father-family. Power lodged with the male relatives of the mother could not compete with power concentrated in the husband-father. Woman was not equal to the combined tasks of childbearing and of exercising continuous authority and increasing domestic power. The oncoming of wife stealing and later wife purchase hastened the passing of the mother-family. 사냥 관습이 지나가고, 사람이 목축을 주요한 식량 공급으로 장악하면서, 모계(母系)-가정이 빨리 끝났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부계(父系)-가정과 성공적으로 맞설 수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어머니의 남성 친척에게 맡긴 권능은 남편-아버지에게 집중된 권능과 맞설 수 없었습니다. 여성은 해산하고 계속된 권위와 늘어난 가사 생활력을 행사하는, 통합된 과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 도둑질과 나중의 아내구입이 다가오면서, 모계(母系)-가정은 신속히 지나갔습니다.

84:2.7 (933.5) The stupendous change from the mother-family to the father-family is one of the most radical and complete right-about-face adjustments ever executed by the human race. This change led at once to greater social expression and increased family adventure. 모계(母系)-가정에서 부계(父系)-가정으로의 엄청난 변화는 인류가 일찍이 실행했던 가장 철저하고 완전한 180도 전환 조율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변화는 즉시 더 커다란 사회적 표현과 가정 모험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3. The Family Under Father Dominance 가부장(家父長) 가정

84:3.1 (933.6) It may be that the instinct of motherhood led woman into marriage, but it was man’s superior strength, together with the influence of the mores, that virtually compelled her to remain in wedlock. Pastoral living tended to create a new system of mores, the patriarchal type of family life; and the basis of family unity under the herder and early agricultural mores was the unquestioned and arbitrary authority of the father. All society, whether national or familial, passed through the stage of the autocratic authority of a patriarchal order. 모성 본능이 여성을 결혼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여성이 결혼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은, 관습의 영향과 함께 남성의 우수한 힘이었습니다. 목축 생활이 새로운 관습 체계, 가부장적 유형의 가정생활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목자(牧者)와 초기 농업 관습 아래에서 가정 단결의 토대는 의문의 여지 없이 독단적인 아버지의 권위였습니다. 모든 사회는, 국가이든 가족이든, 가부장적 체제에 속한 독재적 권위의 단계를 겪었습니다.

84:3.2 (934.1) The scant courtesy paid womankind during the Old Testament era is a true reflection of the mores of the herdsmen. The Hebrew patriarchs were all herdsmen, as is witnessed by the saying, “The Lord is my Shepherd.” 구약(舊約) 시대에 여성을 아무렇게나 대우한 것은 목자의 관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히브리 족장들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a)”라는 말로 입증되듯이, 모두 목자였습니다.

84:3.3 (934.2) But man was no more to blame for his low opinion of woman during past ages than was woman herself. She failed to get social recognition during primitive times because she did not function in an emergency; she was not a spectacular or crisis hero. Maternity was a distinct disability in the existence struggle; mother love handicapped women in the tribal defense. 그러나 과거 시대에 여성에 대한 낮은 평가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탓이었습니다. 여성은 비상시에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시 시대에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눈부신 난국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모성(母性)은 생존 경쟁에서 뚜렷하게 무력했습니다. 모성애(母性愛)는 종족 방어에서 여성을 불리한 입장에 서게 했습니다.

84:3.4 (934.3) Primitive women also unintentionally created their dependence on the male by their admiration and applause for his pugnacity and virility. This exaltation of the warrior elevated the male ego while it equally depressed that of the female and made her more dependent; a military uniform still mightily stirs the feminine emotions. 원시 여성들도 남성의 호전성(好戰性)과 박력(迫力)을 기리고 칭찬하여 무심결에 남성을 의존했습니다. 전사(戰士)를 이렇게 칭찬하여 남성의 자존심을 높였던 반면에 여성의 자존심을 동시에 약하게 하여 더 의존하게 했습니다. 군복(軍服)은 여성의 감정을 여전히 힘차게 움직입니다.

84:3.5 (934.4) Among the more advanced races, women are not so large or so strong as men. Woman, being the weaker, therefore became the more tactful; she early learned to trade upon her sex charms. She became more alert and conservative than man, though slightly less profound. Man was woman’s superior on the battlefield and in the hunt; but at home woman has usually outgeneraled even the most primitive of men. 더 앞선 종족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크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여성은 더 눈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익혀서 자기 성적 매력을 이용했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약간 덜 해박했지만, 더 빈틈없이 신중했습니다. 남성은 전쟁터와 사냥에서 여성보다 뛰어났지만, 여성은 가정에서 대개 가장 야성적인 남성들도 작전으로 이겼습니다.

84:3.6 (934.5) The herdsman looked to his flocks for sustenance, but throughout these pastoral ages woman must still provide the vegetable food. Primitive man shunned the soil; it was altogether too peaceful, too unadventuresome. There was also an old superstition that women could raise better plants; they were mothers. In many backward tribes today, the men cook the meat, the women the vegetables, and when the primitive tribes of Australia are on the march, the women never attack game, while a man would not stoop to dig a root. 목자(牧者)들은 생계를 위해 자기 가축 떼를 돌봤지만, 이런 목축 시대에 여성은 여전히 채소 식량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원시 남성은 농작(農作)을 피했습니다. 그것은 전부 너무 온화하고, 모험적이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어머니들이어서, 그들이 식물을 잘 재배할 수 있다는 옛 미신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진보가 더딘 여러 부족에서, 남성은 고기를, 여성은 채소를 요리하고, 호주의 원시 부족이 행진할 때, 여성은 결코 사냥감을 공격하지 않는 반면에, 남성은 몸을 굽혀 근채류(根菜類 뿌리채소)를 캐지 않습니다.

84:3.7 (934.6) Woman has always had to work; at least right up to modern times the female has been a real producer. Man has usually chosen the easier path, and this inequality has existed throughout the entire history of the human race. Woman has always been the burden bearer, carrying the family property and tending the children, thus leaving the man’s hands free for fighting or hunting. 여성은 언제나 일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현대까지 여성은 실질적 생산자였습니다. 남성은 대개 더 쉬운 길을 택했고 이런 불평등은 전(全) 인류 역사 내내 나타났습니다. 여성이 가산(家産 집 재산)을 떠맡고 자녀를 돌본 까닭에, 남성의 손을 자유롭게 전투나 사냥에 전념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여성은 언제나 고생을 참는 자였습니다.

84:3.8 (934.7) Woman’s first liberation came when man consented to till the soil, consented to do what had theretofore been regarded as woman’s work. It was a great step forward when male captives were no longer killed but were enslaved as agriculturists. This brought about the liberation of woman so that she could devote more time to homemaking and child culture. 남성이 경작하기로 동의하고, 그 이전에 여성의 일로 여겼던 것을 하기로 동의했을 때, 여성의 첫 해방이 왔습니다. 남성 포로들이 더는 죽지 않고 농사짓는 노예가 되었던 것은 커다란 진보였습니다. 이것이 여성을 해방하여 여성은 가사(家事)와 자녀 양육에 시간을 더 쏟을 수 있었습니다.

84:3.9 (934.8) The provision of milk for the young led to earlier weaning of babies, hence to the bearing of more children by the mothers thus relieved of their sometimes temporary barrenness, while the use of cow’s milk and goat’s milk greatly reduced infant mortality. Before the herding stage of society, mothers used to nurse their babies until they were four and five years old. 어린아이들에게 우유를 마련하여 아기들이 더 일찍 젖을 떼게 되어서, 이렇게 때때로 일시적인 불임에서 벗어난 어머니들이 자녀를 더 많이 낳게 되었고, 게다가 소젖과 염소젖의 사용으로 유아 사망률이 크게 줄었습니다. 사회의 목축 단계 이전에는, 아기들이 4~5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들이 자기 아기들에게 젖을 먹이곤 했습니다.

84:3.10 (934.9) Decreasing primitive warfare greatly lessened the disparity between the division of labor based on sex. But women still had to do the real work while men did picket duty. No camp or village could be left unguarded day or night, but even this task was alleviated by the domestication of the dog. In general, the coming of agriculture has enhanced woman’s prestige and social standing; at least this was true up to the time man himself turned agriculturist. And as soon as man addressed himself to the tilling of the soil, there immediately ensued great improvement in methods of agriculture, extending on down through successive generations. In hunting and war man had learned the value of organization, and he introduced these techniques into industry and later, when taking over much of woman’s work, greatly improved on her loose methods of labor. 원시 전쟁의 감소로 성별에 따른 분업 사이의 격차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러나 남성들이 보초 업무를 하는 동안 여성들은 여전히 실질적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야영지나 마을도 방어 없이 밤낮으로 놔둘 수 없었지만 이런 일도 개를 길들여 다소 해결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농업이 닥쳐오면서 여성의 위신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적어도 이것은 남성이 자신을 농부로 바꾸었던 때까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성이 경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마자, 그 결과 즉시 농업 방법이 크게 개선되었고, 잇따른 세대로 퍼졌습니다. 사냥과 전쟁에서 남성은 조직의 가치를 익혔고, 이런 기법을 산업에 받아들였으며, 나중에 여성의 일을 많이 인계받았을 때, 여성의 산만한 노동 방식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4. Woman’s Status in Early Society 초기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84:4.1 (935.1) Generally speaking, during any age woman’s status is a fair criterion of the evolutionary progress of marriage as a social institution, while the progress of marriage itself is a reasonably accurate gauge registering the advances of human civilization. 보통, 어떤 시대라도 여성의 지위는, 사회 제도로서 결혼에 대한 진화적 진보의 공정한 기준인 한편, 결혼 자체의 진보는 인간 문명의 진보를 나타내는 상당히 정확한 척도입니다.

84:4.2 (935.2) Woman’s status has always been a social paradox; she has always been a shrewd manager of men; she has always capitalized man’s stronger sex urge for her own interests and to her own advancement. By trading subtly upon her sex charms, she has often been able to exercise dominant power over man, even when held by him in abject slavery. 여성의 지위는 언제나 사회적 역설(逆說)이었습니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슬기롭게 관리했습니다. 여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과 진보를 위해 남성의 더 강한 성적 충동을 이용했습니다. 남성에게 잡혀 절망적인 노예였을 때조차, 자기 성적 매력을 교묘히 흥정하여, 여성은 종종 남성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84:4.3 (935.3) Early woman was not to man a friend, sweetheart, lover, and partner but rather a piece of property, a servant or slave and, later on, an economic partner, plaything, and childbearer. Nonetheless, proper and satisfactory sex relations have always involved the element of choice and co-operation by woman, and this has always given intelligent women considerable influence over their immediate and personal standing, regardless of their social position as a sex. But man’s distrust and suspicion were not helped by the fact that women were all along compelled to resort to shrewdness in the effort to alleviate their bondage. 초기 여성은 남성에게 친구, 애인, 연인, 배우자가 아니라 오히려 재산의 일부, 하인이나 노예였고, 나중에는 경제적 동반자, 노리개 그리고 아이 낳는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적당히 만족한 성(性)관계는 언제나 여성의 선택과 협조의 요소가 필요했으며, 이것은 항상 지능적인 여성들에게, 성별로서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개인적 입장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자신들의 속박을 덜려고 계속 기민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남성의 불신과 의혹은 효과가 없었습니다.

84:4.4 (935.4) The sexes have had great difficulty in understanding each other. Man found it hard to understand woman, regarding her with a strange mixture of ignorant mistrust and fearful fascination, if not with suspicion and contempt. Many tribal and racial traditions relegate trouble to Eve, Pandora, or some other representative of womankind. These narratives were always distorted so as to make it appear that the woman brought evil upon man; and all this indicates the onetime universal distrust of woman. Among the reasons cited in support of a celibate priesthood, the chief was the baseness of woman. The fact that most supposed witches were women did not improve the olden reputation of the sex. 남녀는 서로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남성은, 여성에 관해, 의심과 경멸은 아니라 해도, 무지한 의혹과 두려운 매혹이 낯설게 뒤섞였다는 점에서 여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여러 부족과 종족의 전통은 재난을 이브, 판도라, 혹은 어떤 다른 여성 대표자에게 돌립니다. 이런 설화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악을 가져온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언제나 왜곡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은, 한때 누구나 여성이 불신당했음을 나타냅니다. 독신 사제직의 옹호에 인용된 주요한 이유는 여성의 천함이었습니다. 가장 소문난 마법사들이 여성이었다는 사실로 여성에 대한 오래된 평판이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84:4.5 (935.5) Men have long regarded women as peculiar, even abnormal. They have even believed that women did not have souls; therefore were they denied names. During early times there existed great fear of the first sex relation with a woman; hence it became the custom for a priest to have initial intercourse with a virgin. Even a woman’s shadow was thought to be dangerous. 남성들은 여성들이 유별나며, 정상이 아니라고까지 오랫동안 여겼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여성들이 혼(魂)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여성과 첫 성(性)관계에 대해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사제가 처녀와 첫 성교를 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여성의 그림자까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84:4.6 (935.6) Childbearing was once generally looked upon as rendering a woman dangerous and unclean. And many tribal mores decreed that a mother must undergo extensive purification ceremonies subsequent to the birth of a child. Except among those groups where the husband participated in the lying-in, the expectant mother was shunned, left alone. The ancients even avoided having a child born in the house. Finally, the old women were permitted to attend the mother during labor, and this practice gave origin to the profession of midwifery. During labor, scores of foolish things were said and done in an effort to facilitate delivery. It was the custom to sprinkle the newborn with holy water to prevent ghost interference. 한때 해산(解産)이 대개 여성을 위험하고 불결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출산 후 긴 정화 예식을 해야 하도록 여러 부족 관습이 정했습니다. 남편이 해산 기간에 참여했던 그런 집단을 제외하고, 출산을 앞둔 어머니를 꺼려서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것도, 피했습니다. 마침내 노파들이 분만 중인 어머니를 돌보도록 허용되었고, 이런 관행이 산파술(産婆術) 직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분만 중에, 해산을 도우려고 어리석은 여러 일을 말하고 행했습니다. 유령(幽靈)의 간섭을 막으려고 신생아에게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84:4.7 (935.7) Among the unmixed tribes, childbirth was comparatively easy, occupying only two or three hours; it is seldom so easy among the mixed races. If a woman died in childbirth, especially during the delivery of twins, she was believed to have been guilty of spirit adultery. Later on, the higher tribes looked upon death in childbirth as the will of heaven; such mothers were regarded as having perished in a noble cause. 순수한 부족 중에서 분만은, 2~3시간만 걸려서, 상당히 쉬웠습니다. 혼합 인종 중에 분만은 거의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성이 특히 쌍생아를 낳다가 분만 중에 죽으면, 그녀는 영적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나중에 고등 부족들은 출산 중 죽음을 하늘의 뜻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어머니들은 고귀한 이유로 죽었다고 간주했습니다.

84:4.8 (936.1) The so-called modesty of women respecting their clothing and the exposure of the person grew out of the deadly fear of being observed at the time of a menstrual period. To be thus detected was a grievous sin, the violation of a taboo. Under the mores of olden times, every woman, from adolescence to the end of the childbearing period, was subjected to complete family and social quarantine one full week each month. Everything she might touch, sit upon, or lie upon was “defiled.” It was for long the custom to brutally beat a girl after each monthly period in an effort to drive the evil spirit out of her body. But when a woman passed beyond the childbearing age, she was usually treated more considerately, being accorded more rights and privileges. In view of all this it was not strange that women were looked down upon. Even the Greeks held the menstruating woman as one of the three great causes of defilement, the other two being pork and garlic. 여성의 의복과 신체의 노출에 관해 소위 여성의 정숙(貞淑)은 월경 기간에 발견되는 지독한 걱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게 발견되는 것은, 무거운 죄, 금기의 위반이었습니다. 고대 관습에 따라, 사춘기에서 분만기의 끝까지 모든 여성은 매월 꼬박 1주일씩 가족과 사회적 격리를 완료해야 했습니다. 여성이 만지고, 앉으며, 누운 모든 것은 “더러워” 졌습니다. 매 월경 이후 소녀의 몸에서 악령을 몰아내려고, 난폭하게 그녀를 때리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가임기가 지나면, 그녀는 더 많은 권리와 특권을 받아서, 대개 더 상당히 대우받았습니다. 이런 모든 관점에서 여성이 멸시받은 것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人)들까지 월경하는 여성을 커다란 3가지 오염 원인 중 하나로 꼽았는데, 나머지 둘은 돼지고기와 마늘이었습니다.

84:4.9 (936.2) However foolish these olden notions were, they did some good since they gave overworked females, at least when young, one week each month for welcome rest and profitable meditation. Thus could they sharpen their wits for dealing with their male associates the rest of the time. This quarantine of women also protected men from over-sex indulgence, thereby indirectly contributing to the restriction of population and to the enhancement of self-control. 이런 옛 개념들이 아무리 어리석었어도, 그것들은 과로한 여성들에게 적어도 젊었을 때, 자유롭게 쉬고 유익하게 묵상하도록 매월 1주일씩 주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일부 쓸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머지 시간에 자기 남성 동료를 다루기 위한 자신들의 지혜를 연마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여성의 격리로 남성 역시 과도한 성적 탐닉에서 보호되어서, 부차적으로 인구 제한과 자제심 증강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84:4.10 (936.3) A great advance was made when a man was denied the right to kill his wife at will. Likewise, it was a forward step when a woman could own the wedding gifts. Later, she gained the legal right to own, control, and even dispose of property, but she was long deprived of the right to hold office in either church or state. Woman has always been treated more or less as property, right up to and in the twentieth century after Christ. She has not yet gained world-wide freedom from seclusion under man’s control. Even among advanced peoples, man’s attempt to protect woman has always been a tacit assertion of superiority. 남성이 자기 아내를 마음대로 죽일 권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결혼 선물을 지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일보했습니다. 나중에 여성은 재산을 소유하고 조정하며 처분까지 하는 법적 권리를 얻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교회나 국가에서 재직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여성은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까지, 20세기에 언제나 어느 정도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조정에서 차단된, 세계적인 자유를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진보한 민족 중에서도, 여성을 보호하려는 남성의 시도는 언제나 우월성에 대한 암묵적 주장이었습니다.

84:4.11 (936.4) But primitive women did not pity themselves as their more recently liberated sisters are wont to do. They were, after all, fairly happy and contented; they did not dare to envision a better or different mode of existence. 그러나 원시 여성들은, 더 최근에 해방된 자매들이 곧잘 하듯이, 자신들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상당히 행복하고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더 낫거나 다른 존재 방식을 감히 마음에 그리지 못했습니다.

5. Woman Under the Developing Mores 발전하는 관습에 따른 여성

84:5.1 (936.5) In self-perpetuation woman is man’s equal, but in the partnership of self-maintenance she labors at a decided disadvantage, and this handicap of enforced maternity can only be compensated by the enlightened mores of advancing civilization and by man’s increasing sense of acquired fairness. 자아-영속에서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만, 자아를-유지하는 협력에서 여성은 명백히 불리한 입장에서 온 힘을 기울이며, 강요된 모성애로 인한 이런 불이익은 발전하는 문명의 진보한 관습과 기득(旣得 이미 차지하고 있는) 공정성에 대한 남성의 체증(遞增 점차 늘어나는) 감각으로 상쇄(相殺)될 뿐입니다.

84:5.2 (936.6) As society evolved, the sex standards rose higher among women because they suffered more from the consequences of the transgression of the sex mores. Man’s sex standards are only tardily improving as a result of the sheer sense of that fairness which civilization demands. Nature knows nothing of fairness — makes woman alone suffer the pangs of childbirth. 사회가 진화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성별 기준이 더 높아졌는데, 성별 관습을 어긴 결과로 그들이 더 많이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성별 기준은 문명이 요구하는 그런 공정성에 대한 순전한 감각의 결과로서 마지못해 좋아질 뿐입니다. 자연은 공정성을 조금도 모릅니다. – 여성 홀로 분만의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둡니다.

84:5.3 (936.7) The modern idea of sex equality is beautiful and worthy of an expanding civilization, but it is not found in nature. When might is right, man lords it over woman; when more justice, peace, and fairness prevail, she gradually emerges from slavery and obscurity. Woman’s social position has generally varied inversely with the degree of militarism in any nation or age. 현대의 남녀평등 관념은 확장하는 문명에 훌륭하고 가치가 있지만,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힘이 정의(正義)일 때 남성이 여성을 좌지우지합니다. 정의, 평화 및 공정이 더 널리 보급되면, 여성은 점차 노예 상태와 낮은 신분에서 벗어납니다. 여성의 사회적 처지는 어느 민족이나 시대에도, 대개 군국주의 정도와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84:5.4 (937.1) But man did not consciously nor intentionally seize woman’s rights and then gradually and grudgingly give them back to her; all this was an unconscious and unplanned episode of social evolution. When the time really came for woman to enjoy added rights, she got them, and all quite regardless of man’s conscious attitude. Slowly but surely the mores change so as to provide for those social adjustments which are a part of the persistent evolution of civilization. The advancing mores slowly provided increasingly better treatment for females; those tribes which persisted in cruelty to them did not survive. 그러나 남성이 의식적으로나 의도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지 않았으며 그 후 점차 마지못해 여성에게 그것들을 돌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회 진화의 사건이었습니다. 여성이 부가된 권리를 실제로 누릴 때가 되자, 남성의 의식적 태도에 전혀 상관없이 여성이 그것들을 취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관습은, 문화의 지속적 진화의 일부인 그런 사회적 조율을 제공하기 위해, 변경됩니다. 진보하는 관습은, 여성을 위해 점차 더 나은 대우를 서서히 제공했습니다. 계속 여성들을 학대한 그런 부족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84:5.5 (937.2) The Adamites and Nodites accorded women increased recognition, and those group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migrating Andites have tended to be influenced by the Edenic teachings regarding women’s place in society. 아담-사람들과 놋-사람들은 여자들을 갈수록 더 인정했으며, 이주하는 안드-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그런 집단은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에 관한 에덴의 가르침으로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84:5.6 (937.3) The early Chinese and the Greeks treated women better than did most surrounding peoples. But the Hebrews were exceedingly distrustful of them. In the Occident woman has had a difficult climb under the Pauline doctrines which became attached to Christianity, although Christianity did advance the mores by imposing more stringent sex obligations upon man. Woman’s estate is little short of hopeless under the peculiar degradation which attaches to her in Mohammedanism, and she fares even worse under the teachings of several other Oriental religions. 초기 중국인과 그리스인(人)들은 대부분의 주변 민족들보다 여성들을 더 잘 대우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人)들은 여성들을 지나치게 믿지 않았습니다. 서양에서 여성은, 기독교가 남성에게 더 엄중한 성별 책임을 부과하여 관습을 진전시켰지만, 기독교에 첨부된 바울의 교리에 따라, 힘들게 올라갔습니다. 여성의 지위는 회교(回敎)에서 여성에게 부여한 특징적인 비하(卑下 업신여겨 낮춤)에 따라 거의 희망이 없으며, 여성은 다른 여러 동양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더 어렵게 살아가기까지 합니다.

84:5.7 (937.4) Science, not religion, really emancipated woman; it was the modern factory which largely set her free from the confines of the home. Man’s physical abilities became no longer a vital essential in the new maintenance mechanism; science so changed the conditions of living that man power was no longer so superior to woman power.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실제로 여성을 해방했습니다. 여성을 가정의 제약에서 충분히 해방한 것은 근대적 공장이었습니다. 새 생활 구조에서 남성의 신체 능력은 지극히 중요한 필수 요소가 더는 아니었습니다. 과학이 생활 조건을 변경하여 남성의 능력이 여성의 능력보다 이제는 뛰어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84:5.8 (937.5) These changes have tended toward woman’s liberation from domestic slavery and have brought about such a modification of her status that she now enjoys a degree of personal liberty and sex determination that practically equals man’s. Once a woman’s value consisted in her food-producing ability, but invention and wealth have enabled her to create a new world in which to function — spheres of grace and charm. Thus has industry won its unconscious and unintended fight for woman’s social and economic emancipation. And again has evolution succeeded in doing what even revelation failed to accomplish. 이런 변화들은 여성을 가사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여성의 지위가 변경되어 사실상 남성의 사정에 못지않은 어느 정도의 개인적 해방과 성별 결정을 이제 누립니다. 한때 여성의 가치는 식량 생산 능력이었으나, 발명과 부요(富饒)로 여성은 활동하는 새 세계 – 품위와 매력의 영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업이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해방을 위해 무의식적이며 의도하지 않은 투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또 진화는 계시조차 성취하지 못한 것을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84:5.9 (937.6) The reaction of enlightened peoples from the inequitable mores governing woman’s place in society has indeed been pendulumlike in its extremeness. Among industrialized races she has received almost all rights and enjoys exemption from many obligations, such as military service. Every easement of the struggle for existence has redounded to the liberation of woman, and she has directly benefited from every advance toward monogamy. The weaker always makes disproportionate gains in every adjustment of the mores in the progressive evolution of society.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를 결정하는 불공정한 관습에서 개화된 민족들의 반응은 실로 극도로 추와 같았습니다. 산업화한 인종들 사이에서 여성은 거의 모든 권리를 받아들였고 병역과 같은 여러 의무에서 면제를 누리고 있습니다. 모든 생존 경쟁의 완화로 여성이 해방되었고, 여성은 일부일처주의를 향한 모든 진보에서 즉시 혜택을 받았습니다. 약자는, 사회의 진보적 진화에서 관습이 조율될 때마다, 언제나 어울리지 않게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84:5.10 (937.7) In the ideals of pair marriage, woman has finally won recognition, dignity, independence, equality, and education; but will she prove worthy of all this new and unprecedented accomplishment? Will modern woman respond to this great achievement of social liberation with idleness, indifference, barrenness, and infidelity? Today, in the twentieth century, woman is undergoing the crucial test of her long world existence! 일부일처의 이상(理想)들로 여성은 결국 인정, 존엄성, 독립, 평등과 교육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이렇게 새로운 전례 없는 성취에 합당하다고 입증할까요? 근대 여성이 사회적 해방의 커다란 이런 성취에 나태, 무관심, 불임과 배신으로 반응할까요? 오늘날 20세기에 여성은 자신의 오랜 세계 존재에 대해 결정적인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84:5.11 (938.1) Woman is man’s equal partner in race reproduction, hence just as important in the unfolding of racial evolution; therefore has evolution increasingly worked toward the realization of women’s rights. But women’s rights are by no means men’s rights. Woman cannot thrive on man’s rights any more than man can prosper on woman’s rights. 여성은 종족 번식에서 동등한 남성의 동반자이므로, 종족 진화의 전개에서 똑같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진화는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도록 점차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권리는 결코 남성들의 권리가 아닙니다. 남성이 여성의 권리로 번영할 수 없는 것처럼 여성은 남성의 권리로 번성할 수 없습니다.

84:5.12 (938.2) Each sex has its own distinctive sphere of existence, together with its own rights within that sphere. If woman aspires literally to enjoy all of man’s rights, then, sooner or later, pitiless and emotionless competition will certainly replace that chivalry and special consideration which many women now enjoy, and which they have so recently won from men. 남녀 각각 자신의 독특한 존재 영역과 그 영역 내에서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여성이 남성의 모든 권리를 완전히 누리려 한다면, 여러 여성이 지금 누리고 있으며, 아주 최근에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얻은, 기사도와 특별 배려를, 조만간 냉혹하고 냉담한 경쟁이, 반드시 대신할 것입니다.

84:5.13 (938.3) Civilization never can obliterate the behavior gulf between the sexes. From age to age the mores change, but instinct never. Innate maternal affection will never permit emancipated woman to become man’s serious rival in industry. Forever each sex will remain supreme in its own domain, domains determined by biologic differentiation and by mental dissimilarity. 문명은 결코 남녀 간의 행동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대대로 관습은 변하지만, 본능은 변하지 않습니다. 선천적 모성애는 해방된 여성이 업계에서 남성의 심각한 경쟁자가 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각 남녀는, 생물학적 구별과 정신적 차이로 결정되는 분야들, 자기 영역에서 최고로 남을 것입니다.

84:5.14 (938.4) Each sex will always have its own special sphere, albeit they will ever and anon overlap. Only socially will men and women compete on equal terms. 각 남녀는, 자기 특유의 영역이 때때로 일부분이 중복될지라도, 항상 자기 특유의 영역을 가질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만 남성들과 여성들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것입니다.

6. The Partnership of Man and Woman 남성과 여성의 협력

84:6.1 (938.5) The reproductive urge unfailingly brings men and women together for self-perpetuation but, alone, does not insure their remaining together in mutual co-operation — the founding of a home. 번식(繁殖) 충동이 자아-영속을 위해 남녀를 확실히 결합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함께 남아 서로 협력하면서 가정을 세우도록 책임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84:6.2 (938.6) Every successful human institution embraces antagonisms of personal interest which have been adjusted to practical working harmony, and homemaking is no exception. Marriage, the basis of home building,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at antagonistic co-operation which so often characterizes the contacts of nature and society. The conflict is inevitable. Mating is inherent; it is natural. But marriage is not biologic; it is sociologic. Passion insures that man and woman will come together, but the weaker parental instinct and the social mores hold them together. 성공한 어떤 인간 제도나 실제로 활동이 조화되도록 조율한 개인적 이익의 대립을 포함하며, 가정 관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결혼, 가정 설립의 토대는 그렇게 자주 자연과 사회의 연결을 묘사하는 대립적 협력의 최고 표현입니다. 갈등(葛藤)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짝짓기는 타고난 것이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생물학적이지 않고, 사회학적입니다. 남녀가 합할 것을 열정(熱情)이 보증하지만 연약한 어버이의 본능과 사회적 관습이 그들을 단결시킵니다.

84:6.3 (938.7) Male and female are, practically regarded, two distinct varieties of the same species living in close and intimate association. Their viewpoints and entire life reactions are essentially different; they are wholly incapable of full and real comprehension of each other. Complete understanding between the sexes is not attainable. 남녀는 실제로, 밀접하게 친한 관계로 살아가는 동종(同種)의 다른 두 변종(變種)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의 관점과 전체 생활 반응은 본질상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 충분히 진실로 이해할 능력이 아예 없습니다. 남녀 사이에 완벽한 양해(諒解)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84:6.4 (938.8) Women seem to have more intuition than men, but they also appear to be somewhat less logical. Woman, however, has always been the moral standard-bearer and the spiritual leader of mankind.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 still fraternizes with destiny.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직관을 지닌 것 같지만, 그들도 약간 덜 논리적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여성은 언제나 인류의 도덕적 기수(旗手)와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요람을 흔드는 손은 여전히 운명(運命)과 친하게 사귑니다.

84:6.5 (938.9) The differences of nature, reaction, viewpoint, and thinking between men and women, far from occasioning concern, should be regarded as highly beneficial to mankind, both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Many orders of universe creatures are created in dual phases of personality manifestation. Among mortals, Material Sons, and midsoniters, this difference is described as male and female; among seraphim, cherubim, and Morontia Companions, it has been denominated positive or aggressive and negative or retiring. Such dual associations greatly multiply versatility and overcome inherent limitations, even as do certain triune associations in the Paradise-Havona system. 남녀 사이의 본성, 반응, 관점 및 사고의 차이는, 우려(憂慮)는커녕, 개별로, 공동으로 인류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 계층의 우주 창조물들은 이중 양상(樣相)으로 고유성을 표현하도록 창조됩니다. 필사자들, 물질 아들들 및 중한(中限)자들 사이에서, 이런 차이는 남성과 여성으로 언급됩니다. 세라핌천사, 케루빔과 모론시아 동반자들 사이에서, 그것은 양성적 또는 적극적 그리고 음성적 또는 소극적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런 이중 결합은, 천국-하보나 체계에서 심지어 어떤 삼자일치적 결합이 행하듯이, 융통성을 대단히 다양화하고 선천적 한계를 극복합니다.

84:6.6 (939.1) Men and women need each other in their morontial and spiritual as well as in their mortal careers. The differences in viewpoint between male and female persist even beyond the first life and throughout the local and superuniverse ascensions. And even in Havona, the pilgrims who were once men and women will still be aiding each other in the Paradise ascent. Never, even in the Corps of the Finality, will the creature metamorphose so far as to obliterate the personality trends that humans call male and female; always will these two basic variations of humankind continue to intrigue, stimulate, encourage, and assist each other; always will they be mutually dependent on co-operation in the solution of perplexing universe problems and in the overcoming of manifold cosmic difficulties. 남성들과 여성들은 필사자 생애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모론시아와 영적 생애들에서도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남녀 사이에 있는 관점의 차이는 심지어 첫 생애를 넘어 지역과 초우주 상승 내내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보나에서도, 한때 남녀였던 순례자들은 천국으로 상승하면서 여전히 서로 돕게 될 것입니다. 최종단(團)에서도, 창조물은 인간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부르는 고유성 경향의 흔적을 없애는 정도까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이런 두 기본 변종(變種)은 언제나 계속 서로에게 흥미를 갖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고, 서로 거들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협력하면서 서로 의지하여 복잡한 우주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질서우주 어려움을 극복할 것입니다.

84:6.7 (939.2) While the sexes never can hope fully to understand each other, they are effectively complementary, and though co-operation is often more or less personally antagonistic, it is capable of maintaining and reproducing society. Marriage is an institution designed to compose sex differences, meanwhile effecting the continuation of civilization and insuring the reproduction of the race. 남녀가 서로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지만, 그들은 사실상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며, 협력은 종종 거의 개인적으로 대립하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고 재생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결혼은 문명을 연장하고 인류의 재생을 보장하는 동시에 성별 차이를 진정시키도록 계획된 제도입니다.

84:6.8 (939.3) Marriage is the mother of all human institutions, for it leads directly to home founding and home maintenance, which is the structural basis of society. The family is vitally linked to the mechanism of self-maintenance; it is the sole hope of race perpetuation under the mores of civilization, while at the same time it most effectively provides certain highly satisfactory forms of self-gratification. The family is man’s greatest purely human achievement, combining as it does the evolution of the biologic relations of male and female with the social relations of husband and wife. 결혼은, 사회 조직의 토대인 가정을, 선두에 서서 바로 세우고 가정을 유지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 제도의 원천입니다. 가정은 자아-유지의 작용에 매우 중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정은 문명의 관습에 따라 인류가 영속하는 유일한 희망인 동시에 분명히 아주 만족스러운 형태의 자아-만족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공합니다. 가정은, 남녀의 생물학적 관계의 진화와 남편과 아내의 사회적 관계를 결합하는, 사람의 가장 위대한, 인간의 순전한 업적입니다.

7. The Ideals of Family Life 가정생활의 이상(理想)들

84:7.1 (939.4) Sex mating is instinctive, children are the natural result, and the family thus automatically comes into existence. As are the families of the race or nation, so is its society. If the families are good, the society is likewise good. The great cultural stability of the Jewish and of the Chinese peoples lies in the strength of their family groups. 성적 짝짓기는 본능적이고, 자녀는 자연스러운 결과여서 가정은 자동으로 생깁니다. 종족이나 국가에 속한 가정들처럼 그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들이 좋으면 마찬가지로 그 사회도 좋습니다. 유대와 중국 민족의 위대한 문화적 안정은 그들 가족 집단의 능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84:7.2 (939.5) Woman’s instinct to love and care for children conspired to make her the interested party in promoting marriage and primitive family life. Man was only forced into home building by the pressure of the later mores and social conventions; he was slow to take an interest in the establishment of marriage and home because the sex act imposes no biologic consequences upon him.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는 여성의 본능 때문에 여성은 결혼과 원시 가정생활을 촉진하는 이해당사자가 됩니다. 남성은 후일의 관습과 사회적 관습의 압력으로 가정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뿐이었습니다. 남성은, 성(性)행위가 자신에게 생물학적 영향이 없으므로 결혼과 가정의 설립에 서서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84:7.3 (939.6) Sex association is natural, but marriage is social and has always been regulated by the mores. The mores (religious, moral, and ethical), together with property, pride, and chivalry, stabilize the institutions of marriage and family. Whenever the mores fluctuate, there is fluctuation in the stability of the home-marriage institution. Marriage is now passing out of the property stage into the personal era. Formerly man protected woman because she was his chattel, and she obeyed for the same reason. Regardless of its merits this system did provide stability. Now, woman is no longer regarded as property, and new mores are emerging designed to stabilize the marriage-home institution: 성적 결합은 자연스럽지만, 결혼은 사회적이며 항상 관습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종교적, 도덕적 및 윤리적) 관습은 재산·자부심(自負心)·기사도(騎士道)와 함께 결혼과 가정 제도를 안정시킵니다. 관습이 변동할 때마다 가정-결혼제도의 안정이 오르내립니다. 결혼은 이제 재산 단계에서 개인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었기에 남성이 여성을 보호했고, 같은 이유로 여성이 복종했습니다. 그 장점에 상관없이, 이 체제가 안정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여성을 더는 재산으로 여기지 않으며 결혼-가정 제도를 안정시키려는 새 관습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84:7.4 (939.7) 1. The new role of religion — the teaching that parental experience is essential, the idea of procreating cosmic citizens, the enlarged understanding of the privilege of procreation — giving sons to the Father. 종교의 새 역할 – 부모 체험이 필수적이라는 가르침, 질서우주 시민을 낳는 생각, 자손을 아버지께 드리는 출산 특권에 대한 확장된 이해.

84:7.5 (940.1) 2. The new role of science — procreation is becoming more and more voluntary, subject to man’s control. In ancient times lack of understanding insured the appearance of children in the absence of all desire therefor. 과학의 새 역할 – 인간의 조절로, 더욱더 의도적으로 출산하게 됩니다. 고대에는, 조절에 대한 모든 욕망이 없어서, 이해 결핍 때문에 자녀의 출현이 보장되었습니다.

84:7.6 (940.2) 3. The new function of pleasure lures — this introduces a new factor into racial survival; ancient man exposed undesired children to die; moderns refuse to bear them. 의향(意向) 매력의 새 기능 – 이것이 종족 생존의 새 요소를 끌어들입니다. 고대인은 원하지 않은 자녀가 죽도록 집 밖에 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원하지 않는 자녀를 낳지 않으려 합니다.

84:7.7 (940.3) 4. The enhancement of parental instinct — each generation now tends to eliminate from the reproductive stream of the race those individuals in whom parental instinct is insufficiently strong to insure the procreation of children, the prospective parents of the next generation. 어버이다운 본능의 향상. 이제 각 세대는, 다음 세대의 예비 부모인 자녀 출산을 보증하기에 어버이다운 본능이 강하지 않은 그런 개인들을, 종족 생식의 흐름에서 몰아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84:7.8 (940.4) But the home as an institution, a partnership between one man and one woman, dates more specifically from the days of Dalamatia, about one-half million years ago, the monogamous practices of Andon and his immediate descendants having been abandoned long before. Family life, however, was not much to boast of before the days of the Nodites and the later Adamites. Adam and Eve exerted a lasting influence on all mankind;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men and women were observed working side by side in the Garden. The Edenic ideal, the whole family as gardeners, was a new idea on Urantia. 그러나 제도로서 가정,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의 동반자 관계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돈과 그 직계 후손의 일부일처 관례가 오래전에 버려졌던, 거의 50만 년 전, 달라마시아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놋-사람들과 후대 아담-사람들의 시대 이전(以前)의 가정생활은 자랑할만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온 인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성들과 여성들이 동산에서 나란히 일하는 관습이 지켜졌습니다. 원예가들로서 온 가족, 즉 에덴의 이상(理想)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84:7.9 (940.5) The early family embraced a related working group, including the slaves, all living in one dwelling. Marriage and family life have not always been identical but have of necessity been closely associated. Woman always wanted the individual family, and eventually she had her way. 초기 가정은 모두 한집에 사는, 노예들을 포함해서 관련 노동 집단을 포함했습니다. 결혼과 가정생활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필연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었습니다. 여성은 언제나 독립된 가정을 원했으며 결국 여성의 방식대로 했습니다.

84:7.10 (940.6) Love of offspring is almost universal and is of distinct survival value. The ancients always sacrificed the mother’s interests for the welfare of the child; an Eskimo mother even yet licks her baby in lieu of washing. But primitive mothers only nourished and cared for their children when very young; like the animals, they discarded them as soon as they grew up. Enduring and continuous human associations have never been founded on biologic affection alone. The animals love their children; man — civilized man — loves his children’s children. The higher the civilization, the greater the joy of parents in the children’s advancement and success; thus the new and higher realization of name pride comes into existence. 자녀 사랑은 거의 일반적이며, 명백히 생존 가치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자녀의 복지를 위해 어머니의 이익을 언제나 희생했습니다. 에스키모인(人) 어머니는 심지어 아직도 자기 아기를 씻기는 대신에 핥습니다. 그러나 원시 어머니들은 아주 어렸을 때, 자기 자녀를 기르고 보살폈을 뿐입니다. 동물들처럼, 원시 어머니들은 그들이 자라자마자 그들을 버렸습니다. 오래 이어진 인간관계는 생물학적 애정에만 근거를 둔 적이 없었습니다. 동물들은 자기 새끼를 사랑합니다. 인간 – 문명화된 인간은 자기 자녀들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문명이 높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진보와 성공을 기뻐합니다. 이렇게 긍지(矜持)라는 이름의 더 높은 새로운 인식이 생깁니다.

84:7.11 (940.7) The large families among ancient peoples were not necessarily affectional. Many children were desired because: 고대 민족들 사이에서 대가족들이 반드시 애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의 이유로 여러 자녀가 필요했습니다.

84:7.12 (940.8) 1. They were valuable as laborers. 그들이 노동자들로 유용했습니다.

84:7.13 (940.9) 2. They were old-age insurance. 그들은 노령 보험이었습니다.

84:7.14 (940.10) 3. Daughters were salable. 딸들은 팔기에 적합했습니다.

84:7.15 (940.11) 4. Family pride required extension of name. 가정의 긍지(矜持)에 이름의 확장이 필요했습니다.

84:7.16 (940.12) 5. Sons afforded protection and defense. 아들들은 보호와 방어를 감당했습니다.

84:7.17 (940.13) 6. Ghost fear produced a dread of being alone. 유령 공포로 홀로 있기를 두려워했습니다.

84:7.18 (940.14) 7. Certain religions required offspring. 어떤 종교들에는 자손이 필요했습니다.

84:7.19 (940.15) Ancestor worshipers view the failure to have sons as the supreme calamity for all time and eternity. They desire above all else to have sons to officiate in the post-mortem feasts, to offer the required sacrifices for the ghost’s progress through spiritland. 조상 숭배자들은 아들들이 없는 것을 영구히, 영원히 최악의 불행으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사후(死後) 잔치를 맡아, 영의 나라 내내 유령이 나아가도록 필요한 희생을 바칠, 아들들을 다른 무엇보다 요망합니다.

84:7.20 (941.1) Among ancient savages, discipline of children was begun very early; and the child early realized that disobedience meant failure or even death just as it did to the animals. It is civilization’s protection of the child from the natural consequences of foolish conduct that contributes so much to modern insubordination. 고대 야만인들 사이에서 자녀 훈련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는 불순종이 동물들에게 바로 그랬듯이, 실패나 죽음도 의미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어리석은 행위의 당연한 결과로부터 아이를 보호한 문명이 현대의 불순종에 아주 많이 도움이 됩니다.

84:7.21 (941.2) Eskimo children thrive on so little discipline and correction simply because they are naturally docile little animals; the children of both the red and the yellow men are almost equally tractable. But in races containing Andite inheritance, children are not so placid; these more imaginative and adventurous youths require more training and discipline. Modern problems of child culture are rendered increasingly difficult by: 에스키모 아이들은 날 때부터 유순한 어린 동물이어서, 훈련이 거의 없이 단순한 징계로 잘 자랍니다. 홍인과 황인의 아이들도 거의 비슷하게 유순합니다. 그러나 안드-사람의 유전을 지닌 인종의 아이들은 그렇게 차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더욱 상상을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젊은이들은 훈련과 징계가 더 필요합니다. 자녀 훈육의 현대적 문제는 다음의 이유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84:7.22 (941.3) 1. The large degree of race mixture. 심한 혼혈(混血).

84:7.23 (941.4) 2. Artificial and superficial education. 강요된 피상적 교육.

84:7.24 (941.5) 3. Inability of the child to gain culture by imitating parents — the parents are absent from the family picture so much of the time. 아이가 부모를 본받아서 양육될 수 없음 –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있어야 하는) 가족사진에서 너무 많은 시간 동안 없습니다.

84:7.25 (941.6) The olden ideas of family discipline were biologic, growing out of the realization that parents were creators of the child’s being. The advancing ideals of family life are leading to the concept that bringing a child into the world, instead of conferring certain parental rights, entails the supreme responsibility of human existence. 가정 훈육의 오래된 개념은 생물학적이었는데, 부모들이 아이 존재의 창조자들이라는 인식에서 생겼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친권(親權) 부여 대신에, 인간 존재에 대한 최고의 책임이 따른다는 개념으로, 가정생활의 진보한 이상(理想)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84:7.26 (941.7) Civilization regards the parents as assuming all duties, the child as having all the rights. Respect of the child for his parents arises, not in knowledge of the obligation implied in parental procreation, but naturally grows as a result of the care, training, and affection which are lovingly displayed in assisting the child to win the battle of life. The true parent is engaged in a continuous service-ministry which the wise child comes to recognize and appreciate. 문명은, 부모가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자녀는 모든 권리를 지닌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녀의 부모 존경은 부모 출산에 들어있는 채무(債務 갚을 빚)를 아는 데서 생기지 않고, 자녀가 생존 투쟁을 이기도록 도우면서 애정으로 드러난, 보살핌, 훈련과 애정의 결과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참된 부모는, 슬기로운 자녀가 알아보고 절실히 느끼도록 쉬지 않고 돌보는 섬김에 마음과 힘을 다합니다.

84:7.27 (941.8) In the present industrial and urban era the marriage institution is evolving along new economic lines. Family life has become more and more costly, while children, who used to be an asset, have become economic liabilities. But the security of civilization itself still rests on the growing willingness of one generation to invest in the welfare of the next and future generations. And any attempt to shift parental responsibility to state or church will prove suicidal to the welfare and advancement of civilization. 현재의 산업적 도시 시대에, 결혼제도는 새로운 경제 노선을 따라 진화하고 있습니다. 가정생활은 더욱더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에, 한때 자산이었던 자녀들은 경제적 채무(債務 빚)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명 자체의 보장은 한 세대가 다음 미래 세대의 복지에 기꺼이 투자하는 성장에 여전히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 책임을 국가나 교회로 옮기려는 모든 시도는 문명의 복지와 증진에 자멸을 초래할 것입니다.

84:7.28 (941.9) Marriage, with children and consequent family life, is stimulative of the highest potentials in human nature and simultaneously provides the ideal avenue for the expression of these quickened attributes of mortal personality. The family provides for the biologic perpetuation of the human species. The home is the natural social arena wherein the ethics of blood brotherhood may be grasped by the growing children. The family is the fundamental unit of fraternity in which parents and children learn those lessons of patience, altruism, tolerance, and forbearance which are so essential to the realization of brotherhood among all men. 결혼은, 자녀들과 그 결과인 가정생활과 함께, 가장 높은 인간 본성의 잠재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필사자 고유성의 이런 속성을 분발시켜 표현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마련합니다. 가정은 인간종이 생물학적으로 영속하게 합니다. 가정은, 성장하는 자녀들이 혈연적 형제 사랑의 윤리를 파악할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활동 무대입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사랑의 실현에 아주 본질적인, 참을성, 애타(愛他)주의, 너그러움과 자제심의 그런 교훈을 배우는, 기본적인 형제 우애 단위입니다.

84:7.29 (941.10) Human society would be greatly improved if the civilized races would more generally return to the family-council practices of the Andites. They did not maintain the patriarchal or autocratic form of family government. They were very brotherly and associative, freely and frankly discussing every proposal and regulation of a family nature. They were ideally fraternal in all their family government. In an ideal family filial and parental affection are both augmented by fraternal devotion. 문명화된 종족들이 더욱 전반적으로 안드-사람들의 가족-회의 관례로 돌아간다면 인간 사회는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부장(家父長)적 혹은 독재적 형태의 가정 정치체제를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친숙하게 연합하고, 가정의 본래 모습에 속한 모든 제안과 규정을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가정 정치체제에서 더할 나위 없이 우애(友愛)적이었습니다. 이상적(理想的)인 가정에서, 우애(友愛)적 헌신으로, 효성스러운 애정과 어버이다운 애정 둘 다 늘어납니다.

84:7.30 (942.1) Family life is the progenitor of true morality, the ancestor of the consciousness of loyalty to duty. The enforced associations of family life stabilize personality and stimulate its growth through the compulsion of necessitous adjustment to other and diverse personalities. But even more, a true family — a good family — reveals to the parental procreators the attitude of the Creator to his children, while at the same time such true parents portray to their children the first of a long series of ascending disclosures of the love of the Paradise parent of all universe children. 가정생활은 참된 도덕의 조상, 의무에 대한 충성 의식의 선조입니다. 강제적인 가정생활의 결합으로 고유성이 안정되고, 다른 다양한 고유성에 대해 부득이하게 필연적으로 조율하면서, 그 고유성이 활발히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더욱더, 참된 가정 – 좋은 가정은 출산 어버이에게, 자기 자녀들 대한 창조주의 태도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런 참된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일련의 긴 상승 단계 중 첫째로, 모든 우주 자녀들의 천국 부모의 사랑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묘사합니다.

8. Dangers of Self-Gratification 자아-충족의 위험들

84:8.1 (942.2) The great threat against family life is the menacing rising tide of self-gratification, the modern pleasure mania. The prime incentive to marriage used to be economic; sex attraction was secondary. Marriage, founded on self-maintenance, led to self-perpetuation and concomitantly provided one of the most desirable forms of self-gratification. It is the only institution of human society which embraces all three of the great incentives for living. 가정생활의 최고 위협은 위협적으로 증가하는, 현대의 쾌락증(症), 자아-충족의 풍조입니다. 결혼하는 주요 동기는 경제적이었고, 성적 매력은 부차적이었습니다. 자아-유지에 근거한 결혼은 자아-영속으로 이어졌고, 부수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형태의 자아-충족 중 하나를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생활의 가장 큰 동기 중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 사회의 유일한 제도입니다.

84:8.2 (942.3) Originally, property was the basic institution of self-maintenance, while marriage functioned as the unique institution of self-perpetuation. Although food satisfaction, play, and humor, along with periodic sex indulgence, were means of self-gratification, it remains a fact that the evolving mores have failed to build any distinct institution of self-gratification. And it is due to this failure to evolve specialized techniques of pleasurable enjoyment that all human institutions are so completely shot through with this pleasure pursuit. Property accumulation is becoming an instrument for augmenting all forms of self-gratification, while marriage is often viewed only as a means of pleasure. And this overindulgence, this widely spread pleasure mania, now constitutes the greatest threat that has ever been leveled at the social evolutionary institution of family life, the home. 원래 재산은 자아-유지의 기본 제도였던 반면에 결혼은 자아-영속의 유일한 제도로 기능했습니다. 음식 만족, 놀이와 유머는 간헐적인 성적 탐닉과 함께 자아-충족의 수단이었지만, 진화하는 관습이 자아-충족의 어떤 뚜렷한 제도를 세우지 못했던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즐거움에 대한 전문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이렇게 실패해서, 모든 인간 제도가 그렇게 철저히 이런 쾌락 추구로 가득합니다. 재산 축적이 모든 형태의 자아-충족을 늘리는 도구가 되어가는 한편, 결혼은 종종 쾌락의 수단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방종, 이렇게 널리 퍼진 쾌락증(症)이 이제, 가정생활의 사회 진화적 제도에 늘 퍼부어진, 최고의 위협을 만들어냅니다.

84:8.3 (942.4) The violet race introduced a new and only imperfectly realized characteristic into the experience of humankind — the play instinct coupled with the sense of humor. It was there in measure in the Sangiks and Andonites, but the Adamic strain elevated this primitive propensity into the potential of pleasure, a new and glorified form of self-gratification. The basic type of self-gratification, aside from appeasing hunger, is sex gratification, and this form of sensual pleasure was enormously heightened by the blending of the Sangiks and the Andites. 보라 인종이 새로우며, 겨우 불완전하게 실현된 특성, 즉 유머 감각과 결부된 놀이 본능을 인류의 체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적당히 상긱과 안돈-사람들에게 있었지만, 아담 혈통이 이런 원시적 경향을 쾌락의 가능성, 새로운 자아-충족의 미화된 형태로 끌어올렸습니다. 허기 채우기를 제외하고 기본적 형태의 자아-충족은 성욕 충족이며, 이런 형태의 육감적 쾌락은 상긱과 안드-사람들의 혼합으로 굉장히 강화되었습니다.

84:8.4 (942.5) There is real danger in the combination of restlessness, curiosity, adventure, and pleasure-abandon characteristic of the post-Andite races. The hunger of the soul cannot be satisfied with physical pleasures; the love of home and children is not augmented by the unwise pursuit of pleasure. Though you exhaust the resources of art, color, sound, rhythm, music, and adornment of person, you cannot hope thereby to elevate the soul or to nourish the spirit. Vanity and fashion cannot minister to home building and child culture; pride and rivalry are powerless to enhance the survival qualities of succeeding generations. 안드-사람 이후 종족들의 활동성, 호기심, 모험심과 쾌락에 빠지는 특성의 혼합에 실제적 위험이 있습니다. 혼(魂)의 굶주림은 육체적 쾌락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가정과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은 쾌락 추구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예술, 색깔, 소리, 리듬, 음악과 사람을 꾸미는 자원을 다 써도, 너희는 그것으로 혼(魂)을 높이거나 영이 향상하기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허영(虛榮)과 유행(遊行)은 가정 설립과 자녀 양육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자랑과 경쟁은 다음 세대들의 생존 특성의 향상에 무력합니다.

84:8.5 (942.6) Advancing celestial beings all enjoy rest and the ministry of the reversion directors. All efforts to obtain wholesome diversion and to engage in uplifting play are sound; refreshing sleep, rest, recreation, and all pastimes which prevent the boredom of monotony are worth while. Competitive games, storytelling, and even the taste of good food may serve as forms of self-gratification. (When you use salt to savor food, pause to consider that, for almost a million years, man could obtain salt only by dipping his food in ashes. 진보하는 천상(天上)의 존재들은 모두 휴식과 복귀 관리자들의 보살핌을 누립니다. 건전한 유희(遊戲)를 얻고 향상하는 놀이에 참여하려는 모든 노력은 정상적입니다. 단조로운 권태를 예방하는 상쾌한 잠, 휴식, 오락 및 모든 기분 전환은 가치 있습니다. 경기 종목, 이야기하기와 좋은 음식을 맛보는 것도 자아-충족의 형태로서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음식 맛을 내려고 소금을 사용하는, 거의 100만 년간, 사람이 자기 음식을 재 속에 담가서만 소금을 얻을 수 있었음을, 잠시 멈추어 생각하라.)

84:8.6 (943.1) Let man enjoy himself; let the human race find pleasure in a thousand and one ways; let evolutionary mankind explore all forms of legitimate self-gratification, the fruits of the long upward biologic struggle. Man has well earned some of his present-day joys and pleasures. But look you well to the goal of destiny! Pleasures are indeed suicidal if they succeed in destroying property, which has become the institution of self-maintenance; and self-gratifications have indeed cost a fatal price if they bring about the collapse of marriage, the decadence of family life, and the destruction of the home — man’s supreme evolutionary acquirement and civilization’s only hope of survival. 사람은 스스로 즐기라. 인류는 무수한 방법으로 쾌락을 찾으라. 진화하는 인류는 모든 형태의 정당한 자아-충족, 오랫동안 상승한 생물학적 투쟁의 결실을 탐구하라. 사람은 오늘날 즐거운 자기 쾌락의 일부를 잘 얻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운명의 목표를 잘 보라! 쾌락이 자아-유지의 제도가 된, 재산을 성공적으로 파괴한다면, 그것은 정말 자멸(自滅)적입니다. 그리고 자아-충족들이 결혼의 붕괴, 가정생활의 타락과 사람의 최고 진화적 성취이며 문명이 생존할 유일한 희망인, 가정의 파괴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정말 치명적인 대가를 치릅니다.

84:8.7 (943.2) [Presented by the Chief of Seraphim stationed on Urantia.][유란시아에 배치된 수석 세라핌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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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5 The Origins of Worship 경배의 기원들

Paper 85

The Origins of Worship 경배의 기원들

1. Worship of Stones and Hills 돌과 언덕 숭배
2. Worship of Plants and Trees 식물과 나무 숭배
3. The Worship of Animals 동물 숭배
4. Worship of the Elements 자연력(自然力) 숭배
5. Worship of the Heavenly Bodies 천체(天體) 숭배
6. Worship of Man 사람 숭배
7. The Adjutants of Worship and Wisdom 경배와 지혜의 보조자들

85:0.1 (944.1) PRIMITIVE religion had a biologic origin, a natural evolutionary development, aside from moral associations and apart from all spiritual influences. The higher animals have fears but no illusions, hence no religion. Man creates his primitive religions out of his fears and by means of his illusions. 도덕적 관련성을 제외하고 모든 영적 영향 없이, 원시 종교는 생물학적 기원을 갖고, 자연 진화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고등 동물은 두려움이 있지만, 환상(幻想)이 없어서 종교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두려움을 통해 자기 환상(幻想)에 의해 자신의 원시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85:0.2 (944.2) In the evolution of the human species, worship in its primitive manifestations appears long before the mind of man is capable of formulating the more complex concepts of life now and in the hereafter which deserve to be called religion. Early religion was wholly intellectual in nature and was entirely predicated on associational circumstances. The objects of worship were altogether suggestive; they consisted of the things of nature which were close at hand, or which loomed large in the commonplace experience of the simple-minded primitive Urantians. 인류의 진화에서 원시적 표현의 경배는 인간 마음이 종교라고 부를 만한 현재와 내세의 삶에 대해 더 복잡한 개념을 명확히 말할 수 있기 훨씬 전에 나타납니다. 초기 종교는 사실상 완전히 지적이었고, 완전히 관련된 상황에 근거했습니다. 숭배의 대상은 모두 연상적(聯想的)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가까이에 있거나 단순한 원시 유란시아 사람들의 흔한 체험에서 어렴풋이 크게 떠오른 자연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85:0.3 (944.3) When religion once evolved beyond nature worship, it acquired roots of spirit origin but was nevertheless always conditioned by the social environment. As nature worship developed, man’s concepts envisioned a division of labor in the supermortal world; there were nature spirits for lakes, trees, waterfalls, rain, and hundreds of other ordinary terrestrial phenomena. 종교가 일단 자연 숭배를 넘어서 진화하자, 그것은 영(靈) 기원의 뿌리를 얻었음에도 언제나 사회적 환경에 달려 있었습니다. 자연 숭배의 발달에 따라, 사람의 개념은 초(超)필사 세계의 분업(分業)을 상상했습니다. 호수, 나무, 폭포, 비 및 수백 가지의 다른 보통 지면(地面) 현상에 대한 자연의 영(靈)들이 있었습니다.

85:0.4 (944.4) At one time or another mortal man has worshiped everything on the face of the earth, including himself. He has also worshiped about everything imaginable in the sky and beneath the surface of the earth. Primitive man feared all manifestations of power; he worshiped every natural phenomenon he could not comprehend. The observation of powerful natural forces, such as storms, floods, earthquakes, landslides, volcanoes, fire, heat, and cold, greatly impressed the expanding mind of man. The inexplicable things of life are still termed “acts of God” and “mysterious dispensations of Providence.” 한 번쯤 필사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지면의 무엇이나 숭배했습니다. 그는 또한 하늘과 지면 아래의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무엇이나 다 숭배했습니다. 원시인은 모든 권능의 현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모든 자연 현상을 숭배했습니다. 폭풍, 홍수, 지진, 산사태, 화산, 불, 열 및 추위와 같은 강력한 자연력을 관찰하면서 팽창하는 인간의 마음에 크게 새겨졌습니다. 삶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아직도 “하느님의 행위(불가항력)”와 “불가사의한 신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1. Worship of Stones and Hills 돌과 언덕 숭배

85:1.1 (944.5) The first object to be worshiped by evolving man was a stone. Today the Kateri people of southern India still worship a stone, as do numerous tribes in northern India. Jacob slept on a stone because he venerated it; he even anointed it. Rachel concealed a number of sacred stones in her tent. 진화하는 사람이 숭배하는 최초의 대상은 돌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부 인도의 카테리 인종은, 수많은 북부 인도의 부족들이 하듯이, 여전히 돌을 숭배합니다. 야곱은 돌을 받들었기 때문에 돌 위에서 잤습니다(창28:11). 그는 그것을 성별(聖別)하여 기름까지 부었습니다(창28:18). 라헬은 자기 천막에 몇 개의 신성한 돌들을 감추었습니다(창31:19, 34).

85:1.2 (944.6) Stones first impressed early man as being out of the ordinary because of the manner in which they would so suddenly appear on the surface of a cultivated field or pasture. Men failed to take into account either erosion or the results of the overturning of soil. Stones also greatly impressed early peoples because of their frequent resemblance to animals. The attention of civilized man is arrested by numerous stone formations in the mountains which so much resemble the faces of animals and even men. But the most profound influence was exerted by meteoric stones which primitive humans beheld hurtling through the atmosphere in flaming grandeur. The shooting star was awesome to early man, and he easily believed that such blazing streaks marked the passage of a spirit on its way to earth. No wonder men were led to worship such phenomena, especially when they subsequently discovered the meteors. And this led to greater reverence for all other stones. In Bengal many worship a meteor which fell to earth in A.D. 1880. 돌들이 경작지(耕作地)나 목초지 표면에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방식 때문에, 그것들은 먼저 고대인에게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침식 작용과 땅이 뒤집힌 결과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돌들은 흔히 동물들을 닮아서 고대인들은 그것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물과 심지어 사람들의 얼굴을 아주 많이 닮은, 산에 있는 수많은 형태의 돌들이 문명인들의 주의를 끕니다. 그러나 원시인들이 웅장하게 이글거리며 대기를 뚫고 돌진하는 운석(隕石)을 보았을 때 가장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성(流星)은 고대인에게 경외심을 일으켰고, 그렇게 불타는 광선은 영(靈)이 지상으로 오는 통로의 표시라고 그는 쉽게 믿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그 후 운석(隕石)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그런 현상을 숭배하게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다른 돌들에 대한 더 큰 숭배로 이어졌습니다. 벵골에서 다수가 AD 1880년 지상에 떨어진 운석(隕石)을 숭배합니다(인도 북동부 벵갈의 시타마르히, Andhara, Muzaffarpur district, Bengal, India. Fell 1880, Dec. 2, 4 p.m. Stone. A stone weighing about 6 lb. was seen to fall and was made an object of worship in a temple built over the place of fall (L. L. Fermor, Rec. Geol. Surv. India, 1907, vol. 35, pt, 2, p. 92). The Popular Religion and Folklore of Northern India by which was published in 1896 by Crooke, Encyclopaedia of Superstitions, Folklore, and the Occult Sciences of the World by which was published in 1903 by Cora Linn Daniels, C. M. Stevans).

85:1.3 (945.1) All ancient clans and tribes had their sacred stones, and most modern peoples manifest a degree of veneration for certain types of stones — their jewels. A group of five stones was reverenced in India; in Greece it was a cluster of thirty; among the red men it was usually a circle of stones. The Romans always threw a stone into the air when invoking Jupiter. In India even to this day a stone can be used as a witness. In some regions a stone may be employed as a talisman of the law, and by its prestige an offender can be haled into court. But simple mortals do not always identify Deity with an object of reverent ceremony. Such fetishes are many times mere symbols of the real object of worship. 모든 고대의 씨족과 부족은 자신들의 신성한 돌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현대 민족들은 어떤 유형의 돌들 – 자신들의 보석들에 대해 어느 정도 높이 우러러봅니다. 인도에서는 5개 돌의 묶음을, 그리스에서는 30개 돌의 군(群)을, 홍인(紅人)들은 대개 돌로 만든 고리를 우러러봤습니다. 로마인들은 주피터(제우스)에게 빌면서 언제나 공중에 돌을 던졌습니다. 오늘날까지 인도에서 돌을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돌은 율법의 부적으로 사용되었고, 돌의 위세(威勢)로, 위반자는 법정에 끌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필사자들이 신(神)을 숭배 의식의 대상과 언제나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물(呪物)들은 숭배하는 실제 대상의 상징들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85:1.4 (945.2) The ancients had a peculiar regard for holes in stones. Such porous rocks were supposed to be unusually efficacious in curing diseases. Ears were not perforated to carry stones, but the stones were put in to keep the ear holes open. Even in modern times superstitious persons make holes in coins. In Africa the natives make much ado over their fetish stones. In fact, among all backward tribes and peoples stones are still held in superstitious veneration. Stone worship is even now widespread over the world. The tombstone is a surviving symbol of images and idols which were carved in stone in connection with beliefs in ghosts and the spirits of departed fellow beings. 고대인들은 돌들의 구멍들을 특별히 주목했습니다. 그런 다공성(多孔性) 바위들은 질병 치료에 대단히 효험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돌을 매달려고 귓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라 귓구멍을 열어두려고 돌을 넣었습니다. 현대에도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동전에 구멍을 뚫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주물 돌들을 둘러싸고 법석을 떱니다. 사실, 후진 부족들과 민족들 사이에서 여전히 돌들이 미신적으로 숭배됩니다. 돌 숭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묘비(墓碑)는, 죽은 동료 존재의 유령(有靈)들과 영(靈)들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돌에 새겨진 형상과 우상의 생존 상징입니다.

85:1.5 (945.3) Hill worship followed stone worship, and the first hills to be venerated were large stone formations. It presently became the custom to believe that the gods inhabited the mountains, so that high elevations of land were worshiped for this additional reason. As time passed, certain mountains were associated with certain gods and therefore became holy. The ignorant and superstitious aborigines believed that caves led to the underworld, with its evil spirits and demons, in contrast with the mountains, which were identified with the later evolving concepts of good spirits and deities. 언덕 숭배가 돌 숭배의 뒤를 이었고, 숭배한 첫 언덕들은 커다란 돌 형성층(層)이었습니다. 이것은 즉시 신과 같은 존재들이 산에 산다고 믿는 관습이 되어서, 땅의 고지대(高地帶)가 이런 추가적 이유로 숭배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떤 산들은 어떤 신과 같은 존재들과 관련되어서 거룩해졌습니다. 무지하게 미신에 사로잡힌 토착민들은, 나중에 선한 영(靈)들 및 신(神)들의 진화하는 개념과 동일시되었던, 산들과는 현저히 다르게, 동굴들이 악령들과 귀신들이 있는 저승으로 이어졌다고 믿었습니다.

2. Worship of Plants and Trees 식물과 나무 숭배

85:2.1 (945.4) Plants were first feared and then worshiped because of the intoxicating liquors which were derived therefrom. Primitive man believed that intoxication rendered one divine. There was supposed to be something unusual and sacred about such an experience. Even in modern times alcohol is known as “spirits.” 식물은 거기에서 술이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두렵게 여기다가 나중에 숭배했습니다. 원시인은 도취(陶醉 술에 취함)가 사람을 신적으로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체험에 대해 보통이 아닌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에도 술은 “영靈들(주정酒精 에틸알코올)”로 알려져 있습니다.

85:2.2 (945.5) Early man looked upon sprouting grain with dread and superstitious awe. The Apostle Paul was not the first to draw profound spiritual lessons from, and predicate religious beliefs on, the sprouting grain. 고대인은 무서워하는 미신적 두려움으로 싹이 트는 곡식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싹이 트는 곡식에서 심오한 영적 교훈을 얻고(고전15장 부활), 그것에 종교적 믿음의 기초를 둔 첫째가 아니었습니다.

85:2.3 (945.6) The cults of tree worship are among the oldest religious groups. All early marriages were held under the trees, and when women desired children, they would sometimes be found out in the forest affectionately embracing a sturdy oak. Many plants and trees were venerated because of their real or fancied medicinal powers. The savage believed that all chemical effects were due to the direct activity of supernatural forces. 나무 숭배의 종파(宗派)는 가장 오래된 종교 집단에 속합니다. 모든 조혼(早婚 일찍 혼인함)은 나무 아래에서 거행했고, 여성들이 자녀를 원할 때, 그들이 숲에서 애정을 담아 튼튼한 참나무를 껴안고 있는 것이, 때때로 발견되곤 했습니다. 여러 식물과 나무는 진짜 또는 가공의 약효험(藥效驗) 때문에 숭배받았습니다. 야만인들은 모든 화학적 효과가 초자연적(超自然的) 힘이 직접적 활동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85:2.4 (945.7) Ideas about tree spirits varied greatly among different tribes and races. Some trees were indwelt by kindly spirits; others harbored the deceptive and cruel. The Finns believed that most trees were occupied by kind spirits. The Swiss long mistrusted the trees, believing they contained tricky spirits. The inhabitants of India and eastern Russia regard the tree spirits as being cruel. The Patagonians still worship trees, as did the early Semites. Long after the Hebrews ceased tree worship, they continued to venerate their various deities in the groves. Except in China, there once existed a universal cult of the tree of life. 나무 정령(精靈)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른 부족과 종족 사이에서 아주 다양했습니다. 어떤 나무에는 인정 많은 정령(精靈)이 살고 있었고, 다른 것은 미혹시키는 잔인한 정령(精靈)들을 숨겼습니다. 핀란드인(人)들은 친절한 정령(精靈)이 나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믿었습니다. 스위스인(人)들은 나무에 교활한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어서 오랫동안 그것들을 의심했습니다. 인도와 동부 러시아 주민은 나무 정령(精靈)을 잔혹하게 여깁니다. 파타고니아 인(人)들은 초기 셈족처럼 아직도 나무를 숭배합니다. 히브리인(人)들은 나무 숭배를 그만둔 지 오랜 후에, 그들은 숲에서 다양한 자기 신(神)들을 계속 숭배했습니다. 중국 외에, 한때 생명 나무의 전반적 종파가 있었습니다.

85:2.5 (946.1) The belief that water or precious metals beneath the earth’s surface can be detected by a wooden divining rod is a relic of the ancient tree cults. The Maypole, the Christmas tree, and the superstitious practice of rapping on wood perpetuate certain of the ancient customs of tree worship and the later-day tree cults. 나무(개암) 점 지팡이로 지표면 아래에 물이나 귀금속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고대 나무 종파의 잔재입니다. 5월 축제 기둥, 성탄절 트리와 나무를 톡톡 두드리는 미신적 풍습은 나무 숭배와 훗날 나무 종파의 어떤 고대 관습을 언제까지나 계속하게 합니다.

85:2.6 (946.2) Many of these earliest forms of nature veneration became blended with the later evolving techniques of worship, but the earliest mind-adjutant-activated types of worship were functioning long before the newly awakening religious nature of mankind became fully responsive to the stimulus of spiritual influences. 이런 가장 초기 형태의 자연 숭배 중 대부분은 나중에 진화하는 경배 기법과 혼합되었지만, 새롭게 눈을 뜨는 인류의 종교적 본성이 영적 영향의 자극에 충분히 반응하게 되기 훨씬 전에, 가장 초기의 마음-보조-활성 경배 유형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3. The Worship of Animals 동물 숭배

85:3.1 (946.3) Primitive man had a peculiar and fellow feeling for the higher animals. His ancestors had lived with them and even mated with them. In southern Asia it was early believed that the souls of men came back to earth in animal form. This belief was a survival of the still earlier practice of worshiping animals. 원시인은 고등 동물에 대해 기묘한 동류의식을 가졌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과 교미(交尾)도 했습니다. 남(南)아시아에서 일찍부터 사람의 혼(魂)이 동물 형태로 지상에 돌아온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아주 먼 옛날에 동물을 숭배하는 관습의 유물이었습니다.

85:3.2 (946.4) Early men revered the animals for their power and their cunning. They thought the keen scent and the farseeing eyes of certain creatures betokened spirit guidance. The animals have all been worshiped by one race or another at one time or another. Among such objects of worship were creatures that were regarded as half human and half animal, such as centaurs and mermaids. 고대인들은 동물의 힘과 그 약삭빠름으로 인해 동물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동물의 예리한 후각과 먼 곳을 잘 보는 시력이 영적 인도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은 한 인종 이상에게 모두 숭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숭배의 대상 중에 켄타우로스(반인 반마)와 인어(人魚)처럼 반(半)은 인간이고 반(半)은 동물로 여겨진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85:3.3 (946.5) The Hebrews worshiped serpents down to the days of King Hezekiah, and the Hindus still maintain friendly relations with their house snakes. The Chinese worship of the dragon is a survival of the snake cults. The wisdom of the serpent was a symbol of Greek medicine and is still employed as an emblem by modern physicians. The art of snake charming has been handed down from the days of the female shamans of the snake love cult, who, as the result of daily snake bites, became immune, in fact, became genuine venom addicts and could not get along without this poison. 히브리인(人)들은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 뱀을 숭배했고, 힌두인(人)들은 여전히 자기 집 뱀들과 계속 친하게 지냅니다. 중국인의 용(龍) 숭배는 뱀 숭배의 유풍(遺風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속)입니다. 뱀의 지혜는 그리스 의술의 상징이었고 현대 의사들이 여전히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뱀 최면술은 뱀 사랑 종파의 여성 무당 시절부터 전해졌는데, 이들은 매일 뱀에게 물린 결과로 면역되었고 실제로 진짜 독 중독자(中毒者)들이 되어 이런 독 없이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85:3.4 (946.6) The worship of insects and other animals was promoted by a later misinterpretation of the golden rule — doing to others (every form of life) as you would be done by. The ancients once believed that all winds were produced by the wings of birds and therefore both feared and worshiped all winged creatures. The early Nordics thought that eclipses were caused by a wolf that devoured a portion of the sun or moon. The Hindus often show Vishnu with a horse’s head. Many times an animal symbol stands for a forgotten god or a vanished cult. Early in evolutionary religion the lamb became the typical sacrificial animal and the dove the symbol of peace and love. 곤충과 다른 동물숭배는 나중에 다른 이가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가 다른 이(모든 형태의 생명)에게 하는 황금률(147.4)로 오해(誤解)하여 조장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한때 새들의 날개가 모든 바람을 만든다고 믿었던 까닭에 날개 있는 모든 생물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습니다. 옛날 북유럽인(人)들은 해나 달의 부분을 게걸스레 먹은 늑대가 일(월)식을 일으켰다고 생각했습니다. 힌두인(人)들은 흔히 말 머리의 비슈누를 나타냅니다. 동물 상징은 자주 잊힌 신과 같은 존재나 사라진 종파를 뜻합니다. 진화 종교에서 일찍부터 어린 양은 전형적인 희생 동물이 되었고 비둘기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85:3.5 (946.7) In religion, symbolism may be either good or bad just to the extent that the symbol does or does not displace the original worshipful idea. And symbolism must not be confused with direct idolatry wherein the material object is directly and actually worshiped. 종교에서, 상징이 원래의 숭배 개념을 대체하거나 대체하지 않는 한도까지 상징적 표현이 좋거나 나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징적 표현은, 물질적 대상이 직접 실제로 숭배되는, 명백한 우상 숭배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4. Worship of the Elements 자연력(自然力) 숭배

85:4.1 (946.8) Mankind has worshiped earth, air, water, and fire. The primitive races venerated springs and worshiped rivers. Even now in Mongolia there flourishes an influential river cult. Baptism became a religious ceremonial in Babylon, and the Greeks practiced the annual ritual bath. It was easy for the ancients to imagine that the spirits dwelt in the bubbling springs, gushing fountains, flowing rivers, and raging torrents. Moving waters vividly impressed these simple minds with beliefs of spirit animation and supernatural power. Sometimes a drowning man would be refused succor for fear of offending some river god. 인류는 땅, 공기, 물과 불을 숭배했습니다. 원시 종족은 광천(鑛泉)을 받들고 강을 숭배했습니다. 지금도 몽골에서 유력한 강(江) 종파가 번성합니다. 세례는 바빌론에서 종교의식이 되었고, 그리스인(人)들은 매년 목욕 의식을 실행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부글거리는 광천(鑛泉), 분출하는 분수(噴水), 흐르는 강(江)과 맹렬한 급류에 영(靈)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움직이는 많은 물은 단순한 이런 사람들에게 영(靈) 활기(活氣 활동하는 기운)와 초자연력을 믿도록 생생하게 인상을 주었습니다. 때때로, 어떤 강(江)의 신 존재를 거스를까 두려워서 물에 빠진 사람의 구조를 거절하곤 했습니다.

85:4.2 (947.1) Many things and numerous events have functioned as religious stimuli to different peoples in different ages. A rainbow is yet worshiped by many of the hill tribes of India. In both India and Africa the rainbow is thought to be a gigantic celestial snake; Hebrews and Christians regard it as “the bow of promise.” Likewise, influences regarded as beneficent in one part of the world may be looked upon as malignant in other regions. The east wind is a god in South America, for it brings rain; in India it is a devil because it brings dust and causes drought. The ancient Bedouins believed that a nature spirit produced the sand whirls, and even in the times of Moses belief in nature spirits was strong enough to insure their perpetuation in Hebrew theology as angels of fire, water, and air. 여러 사물과 수많은 사건이 다른 시대의 다른 민족들에게 종교적 자극으로 작용했습니다. 인도의 여러 고산족(高山族)은 아직도 무지개를 숭배합니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무지개를 거대한 하늘 뱀으로 여깁니다. 히브리인(人)들과 기독교인(人)들은 그것을 “약속의 활”로 생각합니다. 게다가 세상의 한 지역에서 유익한 것으로 여긴 영향력이 다른 지역에서 불길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동풍(東風)은 남아메리카에서 비가 오게 하므로 신과 같은 존재지만, 인도에서 그것은 먼지가 불고 가뭄을 일으키므로 악마입니다. 고대 베두인(人)들은 자연의 영(靈)이 모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고 믿었고, 모세 시대에도 자연의 영(靈)들에 대한 믿음은 히브리 신학에서 불, 물과 공기의 천사들로 확실히 영속할 만큼 강했습니다.

85:4.3 (947.2) Clouds, rain, and hail have all been feared and worshiped by numerous primitive tribes and by many of the early nature cults. Windstorms with thunder and lightning overawed early man. He was so impressed with these elemental disturbances that thunder was regarded as the voice of an angry god. The worship of fire and the fear of lightning were linked together and were widespread among many early groups. 수많은 원시 부족과 초기의 여러 자연 종파는 구름, 비와 우박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습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은 고대인을 위압(威壓)했습니다. 고대인은 이런 자연적 변동을 사무치게 느껴서 천둥을 성난 신의 음성으로 여겼습니다. 불의 숭배와 번개의 두려움이 함께 연결되었고, 여러 초기 집단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85:4.4 (947.3) Fire was mixed up with magic in the minds of primitive fear-ridden mortals. A devotee of magic will vividly remember one positive chance result in the practice of his magic formulas, while he nonchalantly forgets a score of negative results, out-and-out failures. Fire reverence reached its height in Persia, where it long persisted. Some tribes worshiped fire as a deity itself; others revered it as the flaming symbol of the purifying and purging spirit of their venerated deities. Vestal virgins were charged with the duty of watching sacred fires, and in the twentieth century candles still burn as a part of the ritual of many religious services. 불은 공포에 떠는 원시 필사자들의 마음에서 마술과 섞였습니다. 열성 마술 추종자는 자기 마술 주문의 실행으로 한 가지 우연한 긍정적 결과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며 반면에 그는 몇십 번의 철저한 부정적 실패의 결과는 태연하게 잊어버립니다. 불 숭배는 페르시아에서 절정에 이르러, 거기에서 오래 이어졌습니다. 어떤 부족들은 불을 신(神) 자체로 숭배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神)들의 깨끗이 정화하는 영(靈)에 대한 타오르는 상징으로 불을 숭배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화로(火爐)의 여신 베스타를 숭배하는 처녀들은 신성한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고, 20세기에 양초는 여러 종교예배 의식의 일부로 여전히 빛을 냅니다.

5. Worship of the Heavenly Bodies 천체(天體) 숭배

85:5.1 (947.4) The worship of rocks, hills, trees, and animals naturally developed up through fearful veneration of the elements to the deification of the sun, moon, and stars. In India and elsewhere the stars were regarded as the glorified souls of great men who had departed from the life in the flesh. The Chaldean star cultists considered themselves to be the children of the sky father and the earth mother. 바위, 언덕, 나무와 동물숭배는 자연력(自然力)을 두려워하는 숭배를 거처 태양,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기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했습니다. 인도와 다른 곳에서, 별들은 육체로 죽은 훌륭한 사람의 영화로운 혼(魂)들로 여겼습니다. 칼데아(갈대아) 별 종파자들은 스스로 하늘 아버지와 대지 어머니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85:5.2 (947.5) Moon worship preceded sun worship. Veneration of the moon was at its height during the hunting era, while sun worship became the chief religious ceremony of the subsequent agricultural ages. Solar worship first took extensive root in India, and there it persisted the longest. In Persia sun veneration gave rise to the later Mithraic cult. Among many peoples the sun was regarded as the ancestor of their kings. The Chaldeans put the sun in the center of “the seven circles of the universe.” Later civilizations honored the sun by giving its name to the first day of the week. 달 숭배가 태양 숭배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달 숭배는 사냥 시대에 절정이었고, 태양 숭배는 뒤이은 농경 시대의 주요한 종교의식이 되었습니다. 태양 숭배는 처음으로 인도에서 널리 정착했고, 거기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 태양 숭배는 나중에 미트라 종파를 일으켰습니다. 여러 민족 사이에서 태양은 자기 왕들의 선조로 여겨졌습니다. 칼데아(갈대아)인(人)들은 “우주의 일곱 순환계”의 중심에 태양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문명인들은 태양을 존중해서 한 주(週)의 첫날에 그 이름을 붙였습니다.

85:5.3 (947.6) The sun god was supposed to be the mystic father of the virgin-born sons of destiny who ever and anon were thought to be bestowed as saviors upon favored races. These supernatural infants were always put adrift upon some sacred river to be rescued in an extraordinary manner, after which they would grow up to become miraculous personalities and the deliverers of their peoples. 태양신은 처녀에게서 태어난 운명의 아들들의 신비의 아버지로 되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은혜를 입은 종족에게 구세주들로서 증여되었다고 때때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유아들은 항상 어떤 신성한 강에서 표류하다 비상한 방식으로 구출된 후, 기적의 인물들과 자기 민족들의 구원자들이 되도록 성장하곤 했습니다.

6. Worship of Man 사람 숭배

85:6.1 (948.1) Having worshiped everything else on the face of the earth and in the heavens above, man has not hesitated to honor himself with such adoration. The simple-minded savage makes no clear distinction between beasts, men, and gods. 지면과 하늘에 있는 다른 모두를 숭배했기에 사람은 주저 없이 그런 숭배로 자신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단순한 야만인은 짐승들, 사람들 및 신과 같은 존재들 사이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습니다.

85:6.2 (948.2) Early man regarded all unusual persons as superhuman, and he so feared such beings as to hold them in reverential awe; to some degree he literally worshiped them. Even having twins was regarded as being either very lucky or very unlucky. Lunatics, epileptics, and the feeble-minded were often worshiped by their normal-minded fellows, who believed that such abnormal beings were indwelt by the gods. Priests, kings, and prophets were worshiped; the holy men of old were looked upon as inspired by the deities. 고대인은 유별난 모든 사람을 초인간으로 여겼고, 그런 존재들을 너무 두려워하여 그들을 존경심으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정말로 그들을 숭배했습니다. 쌍생아를 갖는 것도 아주 운이 좋거나 아주 운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신 이상자들, 뇌전증(간질癎疾) 환자들과 정신 박약자들을, 그런 비정상적 존재들 안에 신과 같은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정상적인 그 동료들이 흔히 숭배했습니다. 사제들, 왕들과 선지자들은 숭배를 받았습니다. 거룩한 옛날 사람들은 신(神)들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85:6.3 (948.3) Tribal chiefs died and were deified. Later, distinguished souls passed on and were sainted. Unaided evolution never originated gods higher than the glorified, exalted, and evolved spirits of deceased humans. In early evolution religion creates its own gods. In the course of revelation the Gods formulate religion. Evolutionary religion creates its gods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mortal man; revelatory religion seeks to evolve and transform mortal man into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부족장들은 죽고 신성시되었습니다. 나중에 고귀한 사람들은 사망하고 성인(聖人)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지 않는 진화는 죽은 인간의 영화(榮化)되고, 고양되며 진화된 영혼들보다 절대로 더 높은 신과 같은 존재들을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진화의 초기에 종교는 자체의 신과 같은 존재들을 만들어 냅니다. 계시하면서 하느님들이 종교를 정해진 방식으로 명확히 나타냅니다. 진화 종교는 필사 인간의 모양과 모습으로 그 종교의 신과 같은 존재들을 만들어 냅니다. 계시 종교는 필사 사람을 하느님의 모양과 모습으로 진화시켜 바꾸고 싶어 합니다.

85:6.4 (948.4) The ghost gods, who are of supposed human origin, should be distinguished from the nature gods, for nature worship did evolve a pantheon — nature spirits elevated to the position of gods. The nature cults continued to develop along with the later appearing ghost cults, and each exerted an influence upon the other. Many religious systems embraced a dual concept of deity, nature gods and ghost gods; in some theologies these concepts are confusingly intertwined, as is illustrated by Thor, a ghost hero who was also master of the lightning. 소위 인간적 기원을 지닌 신과 같은 유령(幽靈) 존재들은 자연의 신과 같은 존재들과 구별해야 하는데, 자연 숭배는 만신-신과 같은 존재들의 신분으로 높여진 자연 영(靈)들을 진화시켰기 때문입니다(범신, 만유신). 자연 종파들은 나중에 나타나는 유령(幽靈) 종파와 함께 계속 발전했고 각각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 종교 체계는 신(神)의 이중 개념, 신과 같은 자연 존재들과 신과 같은 유령(幽靈) 존재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신학에서, 번개의 주(主)인 동시에 유령(幽靈) 영웅(英雄)인, 토르(뇌신雷神)로 설명되듯이, 이런 개념들이 혼란스럽게 뒤얽혀있습니다(80.5.4).

85:6.5 (948.5) But the worship of man by man reached its height when temporal rulers commanded such veneration from their subjects and, in substantiation of such demands, claimed to have descended from deity. 그렇지만 사람의 사람 숭배는, 세속 통치자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그런 숭배를 명령하고 신(神)의 자손이라고 자칭하며 그런 요구를 입증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7. The Adjutants of Worship and Wisdom 경배와 지혜의 보조자들

85:7.1 (948.6) Nature worship may seem to have arisen naturally and spontaneously in the minds of primitive men and women, and so it did; but there was operating all this time in these same primitive minds the sixth adjutant spirit, which had been bestowed upon these peoples as a directing influence of this phase of human evolution. And this spirit was constantly stimulating the worship urge of the human species, no matter how primitive its first manifestations might be. The spirit of worship gave definite origin to the human impulse to worship, notwithstanding that animal fear motivated the expression of worshipfulness, and that its early practice became centered upon objects of nature. 자연 숭배는 원시 남녀의 마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연히 생긴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인간 진화를 방향 짓는 영향으로서 이런 사람들에게 증여되었던 여섯째 보조 영(靈)이 바로 이런 원시 마음에서 이런 시간 내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靈)은, 그 첫 표현이 아무리 원시적이어도, 인류의 경배 충동을 계속 불러일으켰습니다. 동물적 공포가 경배의 표현을 일으키고, 그 초기 관행이 자연물에 집중되었지만, 경배의 영(靈)은 인간의 경배 충동에 명백한 출처가 되었습니다.

85:7.2 (948.7) You must remember that feeling, not thinking, was the guiding and controlling influence in all evolutionary development. To the primitive mind there is little difference between fearing, shunning, honoring, and worshiping. 모든 진화적 발전에서 인도하고 제어하는 영향력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었음을 너희가 기억해야만 합니다. 원시 마음에, 두려워하고, 회피하며, 존중하고, 경배하는 것 사이에 다른 점이 거의 없습니다.

85:7.3 (948.8) When the worship urge is admonished and directed by wisdom — meditative and experiential thinking — it then begins to develop into the phenomenon of real religion. When the seventh adjutant spirit, the spirit of wisdom, achieves effective ministration, then in worship man begins to turn away from nature and natural objects to the God of nature and to the eternal Creator of all things natural. 지혜-묵상하는 체험적 사고-가 경배 충동을 깨우치고 지도하면, 그때 실제 종교 현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일곱째 보조 영(靈), 지혜의 영(靈)이 효과적인 돌봄에 이르면, 그때 경배하면서, 사람은 자연과 자연물들에서 떠나 자연의 하느님과 자연 만물의 영원한 창조자에게 향하기 시작합니다.

85:7.4 (949.1) [Presented by a Brilliant Evening Star of Nebadon.][네바돈의 찬란한 저녁별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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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6 Early Evolution of Religion 종교의 초기 진화

Paper 86

Early Evolution of Religion 종교의 초기 진화

1. Chance: Good Luck and Bad Luck 운수(運數): 행운과 불운
2. The Personification of Chance 운수(運數)의 의인화(擬人化)
3. Death — The Inexplicable 이해할 수 없는 죽음
4. The Death-Survival Concept 죽음 – 생존 개념
5. The Ghost-Soul Concept 유령(幽靈)-혼(魂) 개념
6. The Ghost-Spirit Environment 유령(幽靈)-영(靈) 환경
7. The Function of Primitive Religion 원시 종교의 기능

86:0.1 (950.1) THE evolution of religion from the preceding and primitive worship urge is not dependent on revelation. The normal functioning of the human mind under the directive influence of the sixth and seventh mind-adjutants of universal spirit bestowal is wholly sufficient to insure such development. 이전의 원시 경배 충동으로부터 종교의 진화는 계시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주 영(靈) 증여의 여섯째 및 일곱째 마음-보조자들의 지도적 영향에 따라 인간 마음의 정상적 기능이 그런 발전을 책임지기에 아주 충분합니다.

86:0.2 (950.2) Man’s earliest prereligious fear of the forces of nature gradually became religious as nature became personalized, spiritized, and eventually deified in human consciousness. Religion of a primitive type was therefore a natural biologic consequence of the psychologic inertia of evolving animal minds after such minds had once entertained concepts of the supernatural. 종교 이전에 자연의 위력에 대한 가장 최초의 사람의 두려움은, 자연이 고유 존재화하고, 영화(靈化)하며, 결국 인간 의식에서 신으로 모시면서, 점차 종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원시 유형의 종교는, 그런 사람들이 한때 초자연적 개념을 품은 후에, 진화하는 동물 마음의 심리학적 타성(惰性)에 속한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결과였습니다.

1. Chance: Good Luck and Bad Luck 운수(運數): 행운과 불운

86:1.1 (950.3) Aside from the natural worship urge, early evolutionary religion had its roots of origin in the human experiences of chance — so-called luck, commonplace happenings. Primitive man was a food hunter. The results of hunting must ever vary, and this gives certain origin to those experiences which man interprets as good luck and bad luck. Mischance was a great factor in the lives of men and women who lived constantly on the ragged edge of a precarious and harassed existence. 자연적 경배 충동을 제외하고, 초기 진화종교는 인간의 우연한 체험 – 소위 행운, 평범한 사건에 발생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원시인은 식량을 찾아다녔습니다. 수색의 결과는 늘 변했고, 이것이, 사람이 행운과 불운으로 해석하는 그런 체험에, 분명한 기원이 됩니다. 불운은 불안정에 몹시 시달린 생존의 지친 경계에서 끊임없이 살았던 남녀의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86:1.2 (950.4) The limited intellectual horizon of the savage so concentrates the attention upon chance that luck becomes a constant factor in his life. Primitive Urantians struggled for existence, not for a standard of living; they lived lives of peril in which chance played an important role. The constant dread of unknown and unseen calamity hung over these savages as a cloud of despair which effectively eclipsed every pleasure; they lived in constant dread of doing something that would bring bad luck. Superstitious savages always feared a run of good luck; they viewed such good fortune as a certain harbinger of calamity. 행운(幸運)이 야만인의 삶에서 거듭되는 요소가 되어서, 야만인의 제한된 지적 시야(視野)는 너무나 운수(運數)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원시 유란시아인(人)들은 생활 수준이 아니라, 생존 경쟁을 했습니다. 그들은 운수(運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위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재난의 계속되는 불안이 이런 야만인들에게 모든 즐거움을 사실상 덮어 가렸던 절망의 구름처럼 닥쳤습니다. 그들은 불운(不運)이 오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계속된 불안으로 살았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힌 야만인들은 연속된 행운을 언제나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행운을 분명한 재난의 전조(前兆)로 여겼습니다.

86:1.3 (950.5) This ever-present dread of bad luck was paralyzing. Why work hard and reap bad luck — nothing for something — when one might drift along and encounter good luck — something for nothing? Unthinking men forget good luck — take it for granted — but they painfully remember bad luck. 언제나 이렇게 따르는 불운의 두려움에 무기력해졌습니다. 사람이 표류하다 행한 것이 없이 뭔가 행운을 얻는다면, 뭔가 열심히 일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불운을 왜 거두는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행운을 당연시하고 잊어버리지만, 그들은 불운을 고통스럽게 기억합니다.

86:1.4 (950.6) Early man lived in uncertainty and in constant fear of chance — bad luck. Life was an exciting game of chance; existence was a gamble. It is no wonder that partially civilized people still believe in chance and evince lingering predispositions to gambling. Primitive man alternated between two potent interests: the passion of getting something for nothing and the fear of getting nothing for something. And this gamble of existence was the main interest and the supreme fascination of the early savage mind. 고대인들은 불확실성과 운수(運數)-불운(不運)의 계속된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인생은 조마조마하게 하는 운수(運數)의 게임이었습니다. 생활은 도박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개화된 사람들이 여전히 운수(運數)를 믿고, 망설이며 도박으로 치닫는 경향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원시인은 강력한 두 세력, 대가 없이 얻는 열망과 대가를 치렀으나 다 잃는 두려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존의 도박은 초기 야만인의 마음에 최대로 중요한 최극 매력이었습니다.

86:1.5 (951.1) The later herders held the same views of chance and luck, while the still later agriculturists were increasingly conscious that crops were immediately influenced by many things over which man had little or no control. The farmer found himself the victim of drought, floods, hail, storms, pests, and plant diseases, as well as heat and cold. And as all of these natural influences affected individual prosperity, they were regarded as good luck or bad luck. 후대의 목자들도 똑같은 운수와 행운의 관점을 지녔고, 게다가 더 후대의 농업 종사자들은, 사람이 거의 또는 조금도 통제할 수 없는 많은 것으로 수확이 바로 좌우됨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더위와 추위는 물론 가뭄, 홍수, 우박, 폭풍, 해충, 식물병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자연적 작용이 개인 번영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행운이나 불운으로 여겨졌습니다.

86:1.6 (951.2) This notion of chance and luck strongly pervaded the philosophy of all ancient peoples. Even in recent times in the Wisdom of Solomon it is said: “I returned and saw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bread to the wise, nor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favor to men of skill; but fate and chance befall them all. For man knows not his fate; as fishes are taken in an evil net, and as birds are caught in a snare, so are the sons of men snared in an evil time when it falls suddenly upon them.” 운수(運數)와 행운(幸運)의 이런 개념이 모든 고대 민족들의 철학에 강하게 침투했습니다. 최근에도 솔로몬의 지혜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다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숙명(宿命)과 운수(運數)가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사람은 자기 숙명(宿命)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9:11-12)”

2. The Personification of Chance 운수(運數)의 의인화(擬人化)

86:2.1 (951.3) Anxiety was a natural state of the savage mind. When men and women fall victims to excessive anxiety, they are simply reverting to the natural estate of their far-distant ancestors; and when anxiety becomes actually painful, it inhibits activity and unfailingly institutes evolutionary changes and biologic adaptations. Pain and suffering are essential to progressive evolution. 불안(不安)은 야만인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남녀가 지나친 불안에 희생될 때, 그들은 아주 먼 자기 조상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아갈 뿐입니다. 불안이 실제로 고통스럽게 되면, 그것은 활동을 억제하고 확실히 진화적 변화와 생물학적 적응에 들어갑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진보적 진화에 절대 필요합니다.

86:2.2 (951.4) The struggle for life is so painful that certain backward tribes even yet howl and lament over each new sunrise. Primitive man constantly asked, “Who is tormenting me?” Not finding a material source for his miseries, he settled upon a spirit explanation. And so was religion born of the fear of the mysterious, the awe of the unseen, and the dread of the unknown. Nature fear thus became a factor in the struggle for existence first because of chance and then because of mystery. 삶의 투쟁이 너무 고통스러워 진보가 늦은 어떤 부족들은 새롭게 동틀 때마다 지금도 울부짖으며 한탄합니다. 원시인은 끊임없이 “누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자기 불행의 구체적 원인을 찾지 못해서, 그는 영적으로 설명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의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의 경외(敬畏)심과 알 수 없는 것의 공포(恐怖)에서,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자연 현상의 두려움은 처음에 운수(運數) 때문에, 다음에는 신비(神祕) 때문에, 이렇게 생존 경쟁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86:2.3 (951.5) The primitive mind was logical but contained few ideas for intelligent association; the savage mind was uneducated, wholly unsophisticated. If one event followed another, the savage considered them to be cause and effect. What civilized man regards as superstition was just plain ignorance in the savage. Mankind has been slow to learn that there is not necessarily any relationship between purposes and results. Human beings are only just beginning to realize that the reactions of existence appear between acts and their consequences. The savage strives to personalize everything intangible and abstract, and thus both nature and chance become personalized as ghosts — spirits — and later on as gods. 원시적 마음은 논리적이었지만 지능적으로 관련시킬 관념은 거의 없었습니다. 야만적 마음은 교육받지 못했고, 전혀 세상 물정을 몰랐습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뒤따르면, 야만인은 그것들을 원인과 결과로 여겼습니다. 문명인이 미신으로 여긴 것이 그냥 그대로 야만인에게 무지였습니다. 인류는, 의도와 결과 사이에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배우는 데 더디었습니다. 인간은, 행동과 그 결과 사이에 존재의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을 겨우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만인(野蠻人)은 만질 수 없는 추상적인 모든 것을 의인화(擬人化 사람에 비겨서 표현)하려고 해서, 자연과 운수(運數) 둘 다 유령(幽靈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으로 나타난 넋, 혼령, 혼백)-영(靈)들로 나중에 신과 같은 존재들로 의인화(擬人化 인격화)했습니다.

86:2.4 (951.6) Man naturally tends to believe that which he deems best for him, that which is in his immediate or remote interest; self-interest largely obscures logic. The difference between the minds of savage and civilized men is more one of content than of nature, of degree rather than of quality. 사람은 즉각적이든 미래의 유익이든, 자신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사로운 욕심이 주로 논리를 흐리게 합니다. 야만인과 문명인들 마음의 차이는 본성보다 내용(함유량), 질(質 바탕)보다 정도(程度 분량)의 차이입니다.

86:2.5 (951.7) But to continue to ascribe things difficult of comprehension to supernatural causes is nothing less than a lazy and convenient way of avoiding all forms of intellectual hard work. Luck is merely a term coined to cover the inexplicable in any age of human existence; it designates those phenomena which men are unable or unwilling to penetrate. Chance is a word which signifies that man is too ignorant or too indolent to determine causes. Men regard a natural occurrence as an accident or as bad luck only when they are destitute of curiosity and imagination, when the races lack initiative and adventure. Exploration of the phenomena of life sooner or later destroys man’s belief in chance, luck, and so-called accidents, substituting therefor a universe of law and order wherein all effects are preceded by definite causes. Thus is the fear of existence replaced by the joy of living.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계속 초자연적 원인의 탓으로 삼는 것은 모든 형태의 지적인 어려운 일을 회피하는 게으르고 편리한 방법과 다름없습니다. 행운(幸運)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시대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감추려고 만들어낸 용어일 뿐입니다. 행운(幸運)은 사람들이 간파할 수 없고 간파하고 싶지 않은 그런 현상을 가리킵니다. 운수(運數)는 사람이 너무 무지하고 게을러서 원인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사람들이 호기심과 상상력이 부족하고, 종족들이 독창력과 모험심이 모자랄 때만 자연적 사건을 우연(偶然) 혹은 불운(不運)으로 간주합니다. 생명 현상의 탐구가 그 때문에 명확한 원인이 모든 결과에 앞서는 법칙과 질서의 우주로 대신하면서, 조만간 운수, 행운과 소위 우연에 대한 사람의 믿음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생활의 기쁨이 존재의 두려움을 대신합니다.

86:2.6 (952.1) The savage looked upon all nature as alive, as possessed by something. Civilized man still kicks and curses those inanimate objects which get in his way and bump him. Primitive man never regarded anything as accidental; always was everything intentional. To primitive man the domain of fate, the function of luck, the spirit world, was just as unorganized and haphazard as was primitive society. Luck was looked upon as the whimsical and temperamental reaction of the spirit world; later on, as the humor of the gods. 야만인은 모든 자연을 살아 있어서, 뭔가에 사로잡힌 것으로 여겼습니다. 문명인은 자신을 방해하고 자신에게 부딪치는 그런 무생물을 여전히 걷어차며 욕합니다. 원시인은 절대로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습니다. 원시인에게 숙명(宿命)의 영역, 행운의 작용, 영(靈) 세계는 원시 사회 못지않게 체계적이지 않고 무계획적이었습니다. 행운(幸運)은 영(靈) 세계의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중에는 신과 같은 존재들의 (일시적) 기분으로 여겼습니다.

86:2.7 (952.2) But all religions did not develop from animism. Other concepts of the supernatural were contemporaneous with animism, and these beliefs also led to worship. Naturalism is not a religion — it is the offspring of religion. 그러나 모든 종교가 정령론(精靈論 만물에 영혼이 있음)에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초자연적인 다른 개념들이 정령론과 동시대에 있었고, 이런 믿음들도 숭배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주의(自然主義 자연이 실재의 전부)는 종교가 아닙니다. – 그것은 종교의 산물(産物)입니다.

3. Death — The Inexplicable 이해할 수 없는 죽음

86:3.1 (952.3) Death was the supreme shock to evolving man, the most perplexing combination of chance and mystery. Not the sanctity of life but the shock of death inspired fear and thus effectively fostered religion. Among savage peoples death was ordinarily due to violence, so that nonviolent death became increasingly mysterious. Death as a natural and expected end of life was not clear to the consciousness of primitive people, and it has required age upon age for man to realize its inevitability. 죽음은 진화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충격이었고, 운수(運數)와 신비(神祕)가 가장 복잡하게 얽힌 결합이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아니라 죽음의 충격이 두려움을 일으켜서 실제로 종교를 촉진했습니다. 포악한 민족 중에 죽음은 대개 폭력의 탓이었으므로, 비폭력적인 죽음은 점차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삶의 종말로 예상되는 죽음은 원시 민족의 의식에 이해되지 않았고, 사람이 죽음의 필연성을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86:3.2 (952.4) Early man accepted life as a fact, while he regarded death as a visitation of some sort. All races have their legends of men who did not die, vestigial traditions of the early attitude toward death. Already in the human mind there existed the nebulous concept of a hazy and unorganized spirit world, a domain whence came all that is inexplicable in human life, and death was added to this long list of unexplained phenomena. 고대인은 생명을 사실로 받아들인 한편 그는 죽음을 어떤 종류의 방문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종족은 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전설, 죽음에 대해 남아 있는 초기 태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마음에는 모호하게 조직되지 않은 영(靈) 세계,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온 영역에 대한 흐린 개념이 이미 존재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긴 이런 목록에 죽음이 추가되었습니다.

86:3.3 (952.5) All human disease and natural death was at first believed to be due to spirit influence. Even at the present time some civilized races regard disease as having been produced by “the enemy” and depend upon religious ceremonies to effect healing. Later and more complex systems of theology still ascribe death to the action of the spirit world, all of which has led to such doctrines as original sin and the fall of man. 인간의 모든 질병과 자연사(自然死)는 처음에 영(靈) 영향 탓으로 믿었습니다. 현재에도 일부 문명화된 종족은 질병을 “악마(惡魔)”가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치료하려고 종교의식에 의존합니다. 나중에 더 복잡한 신학 체계들은 여전히 죽음을 영(靈) 세계 작용의 탓으로 삼아, 그 모든 것은 원죄(原罪)와 인간의 타락과 같은 그런 교리들에 이르렀습니다.

86:3.4 (952.6) It was the realization of impotency before the mighty forces of nature, together with the recognition of human weakness before the visitations of sickness and death, that impelled the savage to seek for help from the supermaterial world, which he vaguely visualized as the source of these mysterious vicissitudes of life. 야만인이 어렴풋이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흥망성쇠(興亡盛衰) 인생의 근원으로 마음에 그렸던 초물질 세계에서 도움을 찾도록 압박한 것은, 질병과 죽음의 방문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과 함께, 강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무기력(無氣力)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4. The Death-Survival Concept 죽음 – 생존 개념

86:4.1 (952.7) The concept of a supermaterial phase of mortal personality was born of the unconscious and purely accidental association of the occurrences of everyday life plus the ghost dream. The simultaneous dreaming about a departed chief by several members of his tribe seemed to constitute convincing evidence that the old chief had really returned in some form. It was all very real to the savage who would awaken from such dreams reeking with sweat, trembling, and screaming. 필사자 고유성의 초(超)물질 단계에 대한 개념은 일상생활의 사건에 유령(幽靈) 꿈이 덧붙여진, 무의식적이며 아주 우발적인 결합에서 생겼습니다. 여러 부족 일원이 동시에 죽은 족장의 꿈을 꾸는 것은, 옛 족장이 실제로 어떤 형태로 돌아왔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식은땀과 떨림 그리고 비명과 함께 그런 꿈에서 깨어나곤 했던 야만인들에게 그것은 모두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86:4.2 (953.1) The dream origin of the belief in a future existence explains the tendency always to imagine unseen things in the terms of things seen. And presently this new dream-ghost-future-life concept began effectively to antidote the death fear associated with the biologic instinct of self-preservation. 미래 실존을 믿는 꿈의 기원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언제나 상상하려는 경향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즉시 이렇게 새로운 꿈-유령(幽靈)-미래-생활의 개념은 생물학적 자기-보존 본능과 결합한 죽음 공포를 실제로 해소하기 시작했습니다.

86:4.3 (953.2) Early man was also much concerned about his breath, especially in cold climates, where it appeared as a cloud when exhaled. The breath of life was regarded as the one phenomenon which differentiated the living and the dead. He knew the breath could leave the body, and his dreams of doing all sorts of queer things while asleep convinced him that there was something immaterial about a human being. The most primitive idea of the human soul, the ghost, was derived from the breath-dream idea-system. 고대인은 또한, 숨을 내쉴 때 자기 호흡이 구름처럼 보였던, 특히 추운 지방에서 자기 호흡에 대해 많이 염려했습니다. 생명의 호흡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유일한 현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호흡이 육체를 떠날 수 있음을 알았고, 잠잘 때 온갖 유형의 별난 일을 행하는 자기 꿈으로 인해 인간에 대해 비물질적인 뭔가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인간 혼(魂), 유령(幽靈)에 대해 가장 원시적인 관념은 호흡-꿈 관념-체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6:4.4 (953.3) Eventually the savage conceived of himself as a double — body and breath. The breath minus the body equaled a spirit, a ghost. While having a very definite human origin, ghosts, or spirits, were regarded as superhuman. And this belief in the existence of disembodied spirits seemed to explain the occurrence of the unusual, the extraordinary, the infrequent, and the inexplicable. 결국 야만인은 자신을 몸과 호흡의 이중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호흡에서 몸을 빼면 영(靈), 유령(幽靈)과 같았습니다. 아주 분명한 인간 기원을 가졌지만, 유령(幽靈)들, 즉 영(靈)들은 초인간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靈)들의 존재에 대한 이런 믿음이 유별나고, 특별하며, 드물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86:4.5 (953.4) The primitive doctrine of survival after death was not necessarily a belief in immortality. Beings who could not count over twenty could hardly conceive of infinity and eternity; they rather thought of recurring incarnations. 사후(死後) 생존의 원시적 교리는 반드시 불멸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20 이상을 셀 수 없었던 존재들은 무한(無限)과 영원(永遠)을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되풀이되는 화신(化身 육신화)을 예상했습니다.

86:4.6 (953.5) The orange race was especially given to belief in transmigration and reincarnation. This idea of reincarnation originated in the observance of hereditary and trait resemblance of offspring to ancestors. The custom of naming children after grandparents and other ancestors was due to belief in reincarnation. Some later-day races believed that man died from three to seven times. This belief (residual from the teachings of Adam about the mansion worlds), and many other remnants of revealed religion, can be found among the otherwise absurd doctrines of twentieth-century barbarians. 주황 인종은 특히 환생(還生 다시 살아남)과 윤회(輪廻 생사 반복)의 믿음에 빠졌습니다. 이런 윤회 관념은 유전(遺傳 물려받은 성격, 체질, 형상)의 관찰과 조상을 닮은 자손의 특성에서 생겼습니다. 조부모와 다른 조상의 이름을 따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 관습은 윤회(輪廻)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후기 어떤 종족들은 사람이 세 번에서 일곱 번까지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저택 세계에 대한 아담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이런 믿음과 다른 여러 계시 종교의 자취를, 다른 면에서 20세기 야만인들의 터무니없는 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86:4.7 (953.6) Early man entertained no ideas of hell or future punishment. The savage looked upon the future life as just like this one, minus all ill luck. Later on, a separate destiny for good ghosts and bad ghosts — heaven and hell — was conceived. But since many primitive races believed that man entered the next life just as he left this one, they did not relish the idea of becoming old and decrepit. The aged much preferred to be killed before becoming too infirm. 고대인은 지옥 즉 미래 형벌의 관념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야만인들은 내세(來世)를, 모든 불운을 빼고, 이생과 똑같이 여겼습니다. 나중에 선한 유령(幽靈)들과 나쁜 유령(幽靈)들을 위한 분리된 운명 –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원시 종족은 사람이 이생을 떠난 그대로 내세에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이 들어 약해진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은 너무 노쇠해지기 전에 죽는 것을 훨씬 좋게 여겼습니다.

86:4.8 (953.7) Almost every group had a different idea regarding the destiny of the ghost soul. The Greeks believed that weak men must have weak souls; so they invented Hades as a fit place for the reception of such anemic souls; these unrobust specimens were also supposed to have shorter shadows. The early Andites thought their ghosts returned to the ancestral homelands. The Chinese and Egyptians once believed that soul and body remained together. Among the Egyptians this led to careful tomb construction and efforts at body preservation. Even modern peoples seek to arrest the decay of the dead. The Hebrews conceived that a phantom replica of the individual went down to Sheol; it could not return to the land of the living. They did make that important advance in the doctrine of the evolution of the soul. 거의 모든 집단은 유령(幽靈) 혼(魂)의 운명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스인(人)들은 연약한 사람들은 연약한 혼(魂)들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핏기를 잃은 혼(魂)들을 받아들이는 적합한 장소로 하데스(지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강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한 훨씬 모자란 유령(幽靈)들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초기 안드인(人)들은 자기 유령(幽靈)들이 조상의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인(人)들과 이집트인(人)들은 혼(魂)과 몸이 함께 남아 있다고 한때 믿었습니다. 이집트인(人)들 사이에서 이것은 신중한 무덤 건축과 시신 보존의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현대인들도 사자(死者) 부패를 막으려고 합니다. 히브리인(人)들은 개인의 복제 유령(幽靈)이 스올(지옥)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산자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혼(魂)의 진화 교리에서 그렇게 중요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5. The Ghost-Soul Concept 유령(幽靈)-혼(魂) 개념

86:5.1 (953.8) The nonmaterial part of man has been variously termed ghost, spirit, shade, phantom, specter, and latterly soul. The soul was early man’s dream double; it was in every way exactly like the mortal himself except that it was not responsive to touch. The belief in dream doubles led directly to the notion that all things animate and inanimate had souls as well as men. This concept tended long to perpetuate the nature-spirit beliefs; the Eskimos still conceive that everything in nature has a spirit. 사람의 비물질적(非物質的)인 부분은 유령(幽靈), 영(靈), 사령(死靈), 망령(亡靈), 귀신(鬼神) 그리고 최근에 혼(魂)으로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혼(魂)은 고대인의 꿈과 꼭 같은 망령(亡靈)이었습니다. 그것은 접촉에 반응하지 않는 점 외에 모든 면에서 필사자 자신과 똑같았습니다. 꿈 망령의 믿음은,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사람들처럼 혼(魂)들을 지녔다는 개념으로 즉시 이어졌습니다. 이런 개념이 자연-영(靈) 믿음의 영속적 열망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스키모인(人)들은 아직도 자연의 모든 것에 영(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86:5.2 (954.1) The ghost soul could be heard and seen, but not touched. Gradually the dream life of the race so developed and expanded the activities of this evolving spirit world that death was finally regarded as “giving up the ghost.” All primitive tribes, except those little above animals, have developed some concept of the soul. As civilization advances, this superstitious concept of the soul is destroyed, and man is wholly dependent on revelation and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for his new idea of the soul as the joint creation of the God-knowing mortal mind and its indwelling divine spirit, the Thought Adjuster. 유령(幽靈) 혼(魂)을 듣고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었습니다. 점차 종족의 꿈 생활이 이렇게 진화하는 영(靈) 세계의 활동을 개발하고 확대하여, 죽음은 결국 “유령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원시 부족은, 동물보다 그렇게 나은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혼(魂)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개발했습니다. 문명이 진보하면서, 혼(魂)에 대한 이런 미신적 개념이 파괴되고, 사람은, 하느님을 아는 필사자 마음과 그곳에 내주하는 신적 영(靈), 생각 조율자가 공동으로 창조한 혼(魂)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관념을 위해, 계시와 개인적 종교 체험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86:5.3 (954.2) Early mortals usually failed to differentiate the concepts of an indwelling spirit and a soul of evolutionary nature. The savage was much confused as to whether the ghost soul was native to the body or was an external agency in possession of the body. The absence of reasoned thought in the presence of perplexity explains the gross inconsistencies of the savage view of souls, ghosts, and spirits. 초기 필사자들은 내주 영(靈)과 진화적 본성을 지닌 혼(魂)의 개념을 보통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야만인들은 유령(幽靈) 혼(魂)이 몸에서 생겼는지, 몸을 지닌 외부 작용인지 아예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혼(魂)들, 유령(幽靈)들 그리고 영(靈)들에 대한 야만적 관점의 총체적 모순은 혼란 중에 사리에 맞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86:5.4 (954.3) The soul was thought of as being related to the body as the perfume to the flower. The ancients believed that the soul could leave the body in various ways, as in: 혼(魂)은 꽃의 향기처럼 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다음의 경우처럼 다양하게 혼(魂)이 몸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86:5.5 (954.4) 1. Ordinary and transient fainting. 보통의 일시적 실신.

86:5.6 (954.5) 2. Sleeping, natural dreaming. 잠을 자는, 자연스러운 꿈.

86:5.7 (954.6) 3. Coma and unconsciousness associated with disease and accidents. 질병 및 사고와 관련된 혼수(昏睡)상태와 무의식.

86:5.8 (954.7) 4. Death, permanent departure. 죽음, 영구적 사망.

86:5.9 (954.8) The savage looked upon sneezing as an abortive attempt of the soul to escape from the body. Being awake and on guard, the body was able to thwart the soul’s attempted escape. Later on, sneezing was always accompanied by some religious expression, such as “God bless you!” 야만인들은 재채기를 혼(魂)이 몸에서 달아나려다 실패로 끝난 시도로 여겼습니다. 깨어 경계하여, 몸은 혼(魂)의 탈출 시도를 꺾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재채기에 언제나 “하느님이 축복하시길”과 같은 어떤 종교적 표현이 덧붙었습니다.

86:5.10 (954.9) Early in evolution sleep was regarded as proving that the ghost soul could be absent from the body, and it was believed that it could be called back by speaking or shouting the sleeper’s name. In other forms of unconsciousness the soul was thought to be farther away, perhaps trying to escape for good — impending death. Dreams were looked upon as the experiences of the soul during sleep while temporarily absent from the body. The savage believes his dreams to be just as real as any part of his waking experience. The ancients made a practice of awaking sleepers gradually so that the soul might have time to get back into the body. 진화의 초기에 잠은 유령(幽靈) 혼(魂)이 몸에 없을 수 있는 증거로 여겨졌으며, 잠자는 자의 이름을 말하거나 외침으로 유령(幽靈) 혼(魂)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형태의 무의식에서, 혼(魂)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 아마 영구히 달아나려는 임박한 죽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꿈은, 수면 중에 잠시 몸을 떠난 혼의 체험으로 여겨졌습니다. 야만인들은 자기 꿈을 자신이 깨어서 체험하는 부분처럼 바로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고대인들은, 혼이 몸 안으로 돌아올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잠자는 자들을 언제나 서서히 깨웠습니다.

86:5.11 (954.10) All down through the ages men have stood in awe of the apparitions of the night season, and the Hebrews were no exception. They truly believed that God spoke to them in dreams, despite the injunctions of Moses against this idea. And Moses was right, for ordinary dreams are not the methods employed by the personalities of the spiritual world when they seek to communicate with material beings. 오랜 기간 대대로, 사람들은 야간의 유령(幽靈)을 두려워했고, 히브리인(人)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도록 모세가 명령했지만, 그들은 하느님이 꿈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세계의 고유성들이 물질 존재와 소통하려 할 때, 그들은 일상적 꿈들을 그 방법들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세가 옳았습니다.

86:5.12 (954.11) The ancients believed that souls could enter animals or even inanimate objects. This culminated in the werewolf ideas of animal identification. A person could be a law-abiding citizen by day, but when he fell asleep, his soul could enter a wolf or some other animal to prowl about on nocturnal depredations. 고대인들은 혼(魂)들이 동물이나 무생물에게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의 신원을 확인하는 늑대 인간의 관념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낮에는 법을 잘 지키는 시민이 될 수 있지만, 잠이 들면, 그의 혼(魂)이 야행성 약탈로 어슬렁거리려고 늑대나 어떤 다른 동물에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86:5.13 (955.1) Primitive men thought that the soul was associated with the breath, and that its qualities could be imparted or transferred by the breath. The brave chief would breathe upon the newborn child, thereby imparting courage. Among early Christians the ceremony of bestowing the Holy Spirit was accompanied by breathing on the candidates. Said the Psalmist: “By the word of the Lord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host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It was long the custom of the eldest son to try to catch the last breath of his dying father. 원시인들은 혼(魂)이 호흡과 결합이 되어 있어서, 호흡으로 그 혼의 특성이 전달되고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용감한 추장은 갓난아이에게 입김을 내뿜어서 용기를 전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령을 증여하는 예식에서 후보자들에게 입김을 내뿜는 현상이 동반되었습니다. 시편 기자(記者)가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했습니다. 임종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붙들려는 시도는 장남의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86:5.14 (955.2) The shadow came, later on, to be feared and revered equally with the breath. The reflection of oneself in the water was also sometimes looked upon as proof of the double self, and mirrors were regarded with superstitious awe. Even now many civilized persons turn the mirror to the wall in the event of death. Some backward tribes still believe that the making of pictures, drawings, models, or images removes all or a part of the soul from the body; hence such are forbidden. 나중에, 그림자를 호흡과 동등하게 두려워하고 숭배했습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도 때로 망령(亡靈) 자아의 증거로 여겼고, 미신적 두려움으로 거울을 대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문명인(文明人)이 죽을 때 거울을 벽을 향하게 합니다. 진보가 늦은 어떤 부족들은 아직도 화상, 그림, 모형, 초상(肖像)을 만들면 육체에서 혼(魂)의 전부(全部)나 일부(一部)가 없어진다고 믿어서 그런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86:5.15 (955.3) The soul was generally thought of as being identified with the breath, but it was also located by various peoples in the head, hair, heart, liver, blood, and fat. The “crying out of Abel’s blood from the ground” is expressive of the onetime belief in the presence of the ghost in the blood. The Semites taught that the soul resided in the bodily fat, and among many the eating of animal fat was taboo. Head hunting was a method of capturing an enemy’s soul, as was scalping. In recent times the eyes have been regarded as the windows of the soul. 혼(魂)은 대개 호흡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여러 민족은 그것을 머리, 머리카락, 심장, 간, 피, 지방에 두었습니다. “땅에서 아벨의 피 소리가 호소한다(창4:10).”는 핏속에 유령(幽靈)이 있다는 옛 믿음을 나타냅니다. 셈족은 혼(魂)이 신체의 지방에 있다고 가르쳤고, 여러 사람 사이에서 동물 지방을 먹는 것은 금기(禁忌)였습니다. 머리 사냥은, 머리 가죽을 벗겼던 것처럼, 경쟁 상대의 혼(魂)을 생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최근에 눈은 혼(魂)의 창문으로 여겨졌습니다.

86:5.16 (955.4) Those who held the doctrine of three or four souls believed that the loss of one soul meant discomfort, two illness, three death. One soul lived in the breath, one in the head, one in the hair, one in the heart. The sick were advised to stroll about in the open air with the hope of recapturing their strayed souls. The greatest of the medicine men were supposed to exchange the sick soul of a diseased person for a new one, the “new birth.” 서너 혼(魂)의 교리를 고수하는 자들은, 혼(魂) 하나의 상실은 불쾌함, 혼(魂) 두 개의 상실은 질병, 혼(魂) 세 개의 상실은 죽음을 뜻한다고 믿었습니다. 한 개의 혼(魂)은 호흡에,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머리카락에, 하나는 심장에 살았습니다. 환자들은 흩어진 자기 혼(魂)들을 되찾는 희망으로 야외에서 산책하도록 조언받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주술사(呪術師)는 병든 사람의 병에 걸린 혼을 ‘새로 태어난,’ 새로운 혼(魂)과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86:5.17 (955.5) The children of Badonan developed a belief in two souls, the breath and the shadow. The early Nodite races regarded man as consisting of two persons, soul and body. This philosophy of human existence was later reflected in the Greek viewpoint. The Greeks themselves believed in three souls; the vegetative resided in the stomach, the animal in the heart, the intellectual in the head. The Eskimos believe that man has three parts: body, soul, and name. 바도난의 자녀들은 두 개의 혼(魂), 호흡과 그림자(망령)에 대한 믿음을 전개했습니다. 초기 놋 인종은 사람이 두 개체, 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철학은 나중에 그리스 관점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리스인(人)들 자신은 세 개의 혼(魂)을 믿었는데, 식물성 혼(魂)은 복부에 있고, 동물성 혼(魂) 은 심장에 있으며, 지적 혼(魂)은 머리에 있었습니다. 에스키모 인(人)들은 사람이 세 부분, 몸, 혼(魂)과 이름을 지닌다고 믿습니다.

6. The Ghost-Spirit Environment 유령(幽靈)-영(靈) 환경

86:6.1 (955.6) Man inherited a natural environment, acquired a social environment, and imagined a ghost environment. The state is man’s reaction to his natural environment, the home to his social environment, the church to his illusory ghost environment. 사람은 자연환경을 물려받았고, 사회적 환경을 습득했으며, 유령(幽靈) 환경을 상상했습니다. 국가는 자연환경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고, 가정은 사람의 사회적 환경에 대한 반응이며, 교회는 사람의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유령(幽靈) 환경에 대한 반응입니다.

86:6.2 (955.7) Very early in the history of mankind the realities of the imaginary world of ghosts and spirits became universally believed, and this newly imagined spirit world became a power in primitive society. The mental and moral life of all mankind was modified for all time by the appearance of this new factor in human thinking and acting. 인류 역사의 먼 옛날, 유령(幽靈)과 영(靈)들에 대한 상상 세계의 실체들이 널리 믿어졌고 이렇게 새로이 상상한 영(靈) 세계는 원시 사회에서 권력이 되었습니다. 인간 사고와 행위의 이런 새 요소가 출현하여 모든 인류의 정신적 및 도덕적 생활은 영구히 변경되었습니다.

86:6.3 (955.8) Into this major premise of illusion and ignorance, mortal fear has packed all of the subsequent superstition and religion of primitive peoples. This was man’s only religion up to the times of revelation, and today many of the world’s races have only this crude religion of evolution. 이런 망상(妄想)과 무지(無知)의 대전제(大前提)에, 필사자 두려움이 원시인들의 차후 모든 미신과 종교를 채워 넣었습니다. 이것은 계시의 시대까지 사람의 유일한 종교였으며, 오늘날 세계 여러 종족은 이렇게 유치한 진화 종교만 가지고 있습니다.

86:6.4 (955.9) As evolution progressed, good luck became associated with good spirits and bad luck with bad spirits. The discomfort of enforced adaptation to a changing environment was regarded as ill luck, the displeasure of the spirit ghosts. Primitive man slowly evolved religion out of his innate worship urge and his misconception of chance. Civilized man provides schemes of insurance to overcome these chance occurrences; modern science puts an actuary with mathematical reckoning in the place of fictitious spirits and whimsical gods. 진화가 진척됨에 따라 행운은 선한 영(靈)들을, 불운은 나쁜 영(靈)들과 연결하여 생각했습니다. 변하는 환경에 강제로 적응하는 불편은 불행, 영(靈) 유령(幽靈)의 노여움으로 여겨졌습니다. 원시인은 타고난 자신의 경배 충동과 운수(運數)의 잘못된 생각에서 점차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문명인은 이렇게 우연한 사건을 이겨내기 위해 보험 시책(施策)을 미리 준비합니다. 현대 과학은 지어낸 영(靈)들과 변덕스러운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 대신에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보험 회계사를 둡니다.

86:6.5 (956.1) Each passing generation smiles at the foolish superstitions of its ancestors while it goes on entertaining those fallacies of thought and worship which will give cause for further smiling on the part of enlightened posterity. 지나가는 각 세대는 그 선조들의 어리석은 미신에 미소를 보내면서, 진보한 자손의 편에서 그 이상의 미소를 보낼 근거가 될 그런 사고(思考)와 경배의 잘못된 생각을 계속 품습니다.

86:6.6 (956.2) But at last the mind of primitive man was occupied with thoughts which transcended all of his inherent biologic urges; at last man was about to evolve an art of living based on something more than response to material stimuli. The beginnings of a primitive philosophic life policy were emerging. A supernatural standard of living was about to appear, for, if the spirit ghost in anger visits ill luck and in pleasure good fortune, then must human conduct be regulated accordingly. The concept of right and wrong had at last evolved; and all of this long before the times of any revelation on earth. 그러나 마침내 원시인의 마음은 타고난 자기 생물학적 모든 충동을 초월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침내 인간은 물질적 자극에 대한 반응 이상의 어떤 것에 근거한 생활의 기술을 막 진화시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의 원시 철학적 생활 방침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영(靈) 유령(幽靈)이 화가 나서 불운이 닥치고, 기뻐서 행운이 닥치면, 그것에 따라서 인간 행동이 단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초자연적 생활 수준이 막 나타나려는 참이었습니다. 드디어 옳고 그름의 개념이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지상에 어떤 계시의 시대(時代) 보다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86:6.7 (956.3) With the emergence of these concepts, there was initiated the long and wasteful struggle to appease the ever-displeased spirits, the slavish bondage to evolutionary religious fear, that long waste of human effort upon tombs, temples, sacrifices, and priesthoods. It was a terrible and frightful price to pay, but it was worth all it cost, for man therein achieved a natural consciousness of relative right and wrong; human ethics was born! 이런 개념의 출현과 함께, 항상-화난 영(靈)들을 달래는 지루한 헛된 투쟁, 진화 종교의 두려움에 대한 노예적 속박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무덤, 신전, 희생제물과 사제직에 오랫동안 인간의 노력을 낭비했습니다. 지독하게 끔찍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 점에서 사람은 상대적인 옳고 그름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것에 들인 모든 것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윤리가 태어났습니다!

7. The Function of Primitive Religion 원시 종교의 기능

86:7.1 (956.4) The savage felt the need of insurance, and he therefore willingly paid his burdensome premiums of fear, superstition, dread, and priest gifts toward his policy of magic insurance against ill luck. Primitive religion was simply the payment of premiums on insurance against the perils of the forests; civilized man pays material premiums against the accidents of industry and the exigencies of modern modes of living. 야만인은 보험의 필요를 느껴서, 불운에 대비하여 자신의 마술적 보험 수단을 위한 두려움, 미신, 무서움과 사제 선물 때문에 부담스러운 보험료를 기꺼이 냈습니다. 원시 종교는 숲의 위험에 대비하여 보증하는 단순한 보험료 지급이었습니다. 문명인은 산업 재해와 현대 생활 방식의 긴급 사태에 대비하여 물질 보험료를 냅니다.

86:7.2 (956.5) Modern society is removing the business of insurance from the realm of priests and religion, placing it in the domain of economics. Religion is concerning itself increasingly with the insurance of life beyond the grave. Modern men, at least those who think, no longer pay wasteful premiums to control luck. Religion is slowly ascending to higher philosophic levels in contrast with its former function as a scheme of insurance against bad luck. 현대 사회는 사제와 종교의 영역에서 보험 업무를 떼어내 경제계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점차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보증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 적어도 생각하는 자들은 운(運)을 통제하려고 이제 헛된 보험료를 내지 않습니다. 종교는 불운에 대비하여 보험시책으로써 이전 기능과 현저히 다르게 더 높은 철학적 수준으로 천천히 향상하고 있습니다.

86:7.3 (956.6) But these ancient ideas of religion prevented men from becoming fatalistic and hopelessly pessimistic; they believed they could at least do something to influence fate. The religion of ghost fear impressed upon men that they must regulate their conduct, that there was a supermaterial world which was in control of human destiny. 그러나 이런 고대의 종교 관념들은 사람들이 숙명적(宿命的)이며 절망적으로 비관(悲觀)하지 않도록 예방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숙명(宿命)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령(幽靈) 공포의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규제(規制)해야 하고,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물질 세계가 있음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86:7.4 (956.7) Modern civilized races are just emerging from ghost fear as an explanation of luck and the commonplace inequalities of existence. Mankind is achieving emancipation from the bondage of the ghost-spirit explanation of ill luck. But while men are giving up the erroneous doctrine of a spirit cause of the vicissitudes of life, they exhibit a surprising willingness to accept an almost equally fallacious teaching which bids them attribute all human inequalities to political misadaptation, social injustice, and industrial competition. But new legislation, increasing philanthropy, and more industrial reorganization, however good in and of themselves, will not remedy the facts of birth and the accidents of living. Only comprehension of facts and wise manipulation within the laws of nature will enable man to get what he wants and to avoid what he does not want. Scientific knowledge, leading to scientific action, is the only antidote for so-called accidental ills. 현대 문명 종족은 운수(運數)와 일상적 생활 불평등을 설명하는 유령(幽靈) 공포에서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불운(不運)을 유령(幽靈)-영(靈)으로 설명하는 속박에서 해방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활의 부침을 영적 이유로 설명하는 잘못된 교리를 포기하면서, 그들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이 잘못된 정치적 적응, 사회적 불공평 및 산업 경쟁의 탓이라고 자신들에게 말하는, 거의 똑같이 잘못된 가르침을 의외로 기꺼이 드러내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입법, 자선 활동의 증가 및 산업 개편(改編)의 증대가 그 자체로 아무리 좋아도 출생의 사실과 생활 재해를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파악력과 자연법칙의 범위 내에 있는 현명한 조작만이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과학적 행동으로 이끄는 과학 지식이 소위 우발적 재난의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86:7.5 (957.1) Industry, war, slavery, and civil government arose in response to the social evolution of man in his natural environment; religion similarly arose as his response to the illusory environment of the imaginary ghost world. Religion was an evolutionary development of self-maintenance, and it has worked, notwithstanding that it was originally erroneous in concept and utterly illogical. 산업, 전쟁, 노예제도와 시민 정부는 자연환경 안에서 사람의 사회적 진화에 응답하여 일어났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가상적 유령(幽靈) 세계의 환상에 불과한 환경에 사람이 응답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종교는 자아-유지의 진화적 발전이었고, 그것은 원래 잘못된 구상(構想 생각의 내용)이었고 완전히 터무니없었지만, 그것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86:7.6 (957.2) Primitive religion prepared the soil of the human mind, by the powerful and awesome force of false fear, for the bestowal of a bona fide spiritual force of supernatural origin, the Thought Adjuster. And the divine Adjusters have ever since labored to transmute God-fear into God-love. Evolution may be slow, but it is unerringly effective. 원시 종교는 초자연적 기원의 진정한 영적 기세, 생각 조율자의 증여를 위해, 강력하게 무시무시한, 거짓 두려움의 기세로, 인간 마음의 토양을 미리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신적 조율자들은 하느님-두려움을 하느님-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 이래 줄곧 수고했습니다. 진화는 더디지만, 확실히 효과적입니다.

86:7.7 (957.3) [Presented by an Evening Star of Nebadon.][네바돈의 저녁별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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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7 The Ghost Cults 유령(幽靈) 종파(宗派)들

Paper 87

The Ghost Cults 유령(幽靈) 종파(宗派)들

1. Ghost Fear 유령(幽靈) 공포
2. Ghost Placation 유령(幽靈) 회유(懷柔 달래기)
3. Ancestor Worship 조상숭배(祖上崇拜)
4. Good and Bad Spirit Ghosts 선한 영(靈) 유령(幽靈)과 악한 영 유령(幽靈)
5. The Advancing Ghost Cult 진보하는 유령(幽靈) 종파
6. Coercion and Exorcism 강제(强制)와 축사(逐邪)
7. Nature of Cultism 종파(宗派)주의의 본성

87:0.1 (958.1) THE ghost cult evolved as an offset to the hazards of bad luck; its primitive religious observances were the outgrowth of anxiety about bad luck and of the inordinate fear of the dead. None of these early religions had much to do with the recognition of Deity or with reverence for the superhuman; their rites were mostly negative, designed to avoid, expel, or coerce ghosts. The ghost cult was nothing more nor less than insurance against disaster; it had nothing to do with investment for higher and future returns. 유령(幽靈) 종파는 불운의 위험을 없애려고 진화했습니다. 그런 원시 종교의식은 불운에 대한 불안과 고인(故人)의 과도한 공포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초기 종교 중 어떤 것도 신(神)을 알아보거나 초(超)인간에 대한 경의(敬意)의 표시와 깊은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례는 주로 부정적으로, 유령(幽靈)들을 피하고 물리치거나 억압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유령(幽靈) 종파는 재난에 대비한 보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미래 수익을 위한 투자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87:0.2 (958.2) Man has had a long and bitter struggle with the ghost cult. Nothing in human history is designed to excite more pity than this picture of man’s abject slavery to ghost-spirit fear. With the birth of this very fear mankind started on the upgrade of religious evolution. Human imagination cast off from the shores of self and will not again find anchor until it arrives at the concept of a true Deity, a real God. 사람은 유령(幽靈) 종파와 오래 계속된 모진 투쟁을 했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사람의 유령(幽靈)-영(靈) 공포에 대한 비참한 이런 노예 상황보다 더 측은(惻隱)함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포의 탄생과 함께 인류는 종교적 진화의 향상에 착수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아(自我)의 기슭에서 출항하여 참 신(神), 진정한 하느님의 개념에 도달하기까지 다시 닻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1. Ghost Fear 유령(幽靈) 공포

87:1.1 (958.3) Death was feared because death meant the liberation of another ghost from its physical body. The ancients did their best to prevent death, to avoid the trouble of having to contend with a new ghost. They were always anxious to induce the ghost to leave the scene of death, to embark on the journey to deadland. The ghost was feared most of all during the supposed transition period between its emergence at the time of death and its later departure for the ghost homeland, a vague and primitive concept of pseudo heaven. 죽음은 신체에서 또 다른 유령(幽靈)의 해방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죽음을 막고, 새 유령(幽靈)과 씨름해야 하는 분란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유령(幽靈)이 죽음의 현장에서 떠나서, 죽은 자의 땅으로 여정(旅程)을 시작하도록 이끌려고 열망했습니다. 죽을 때 나타나 나중에 유령(幽靈) 고국, 가짜 천당(天堂)에 대한 모호한 원시 개념으로 떠난다고 추측한 과도기에 무엇보다도 유령(幽靈)을 무서워했습니다.

87:1.2 (958.4) Though the savage credited ghosts with supernatural powers, he hardly conceived of them as having supernatural intelligence. Many tricks and stratagems were practiced in an effort to hoodwink and deceive the ghosts; civilized man still pins much faith on the hope that an outward manifestation of piety will in some manner deceive even an omniscient Deity. 야만인들은 유령(幽靈)에게 마력(魔力)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들에게 초자연적 지능이 있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령(幽靈)을 현혹하여 속이려는 노력으로 여러 속임수와 계략이 실행되었습니다. 문명인은 경건의 외적 표현이 어떤 면에서 심지어 전지(全知)한 신(神)까지 속일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많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87:1.3 (958.5) The primitives feared sickness because they observed it was often a harbinger of death. If the tribal medicine man failed to cure an afflicted individual, the sick man was usually removed from the family hut, being taken to a smaller one or left in the open air to die alone. A house in which death had occurred was usually destroyed; if not, it was always avoided, and this fear prevented early man from building substantial dwellings. It also militated against the establishment of permanent villages and cities. 원시인들은 질병이 자주 죽음의 전조(前兆)였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들은 질병을 무서워했습니다. 부족의 치료 주술사가 앓는 사람을 치료하지 못하면, 대개 아픈 사람을 가족 막사에서 옮겨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가거나 야외에서 홀로 죽도록 방치(放置)했습니다. 사망이 발생한 집은 대개 파괴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언제나 회피했고, 고대인은 이런 두려움 때문에 튼튼히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것 또한 내구성 있는 마을과 도시의 설립에 방해로 작용했습니다.

87:1.4 (958.6) The savages sat up all night and talked when a member of the clan died; they feared they too would die if they fell asleep in the vicinity of a corpse. Contagion from the corpse substantiated the fear of the dead, and all peoples, at one time or another, have employed elaborate purification ceremonies designed to cleanse an individual after contact with the dead. The ancients believed that light must be provided for a corpse; a dead body was never permitted to remain in the dark. In the twentieth century, candles are still burned in death chambers, and men still sit up with the dead. So-called civilized man has hardly yet completely eliminated the fear of dead bodies from his philosophy of life. 야만인들은 씨족 일원이 죽으면, 밤새도록 앉아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시신(屍身) 근처에서 잠들면 자신들도 죽을 것이라 두려워했습니다. 시신(屍身) 접촉으로 인한 감염(感染)으로 사망자에 대한 두려움이 입증되었고, 모든 민족은 사망자와 접촉한 후 개인을 정화(淨化)하도록 만들어진 복잡한 정화 의식을 때때로 사용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시신(屍身)에 빛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사체(死體)를 절대로 어둠에 남아 있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20세기에 시신(屍身) 안치실에 여전히 양초가 빛을 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아직도 죽은 사람과 밤새도록 있습니다. 소위 문명인은 자기 생활 철학에서 사체(死體)에 대한 공포를 아직도 완전히 몰아냈다고 할 수 없습니다.

87:1.5 (959.1) But despite all this fear, men still sought to trick the ghost. If the death hut was not destroyed, the corpse was removed through a hole in the wall, never by way of the door. These measures were taken to confuse the ghost, to prevent its tarrying, and to insure against its return. Mourners also returned from a funeral by a different road, lest the ghost follow. Backtracking and scores of other tactics were practiced to insure that the ghost would not return from the grave. The sexes often exchanged clothes in order to deceive the ghost. Mourning costumes were designed to disguise survivors; later on, to show respect for the dead and thus appease the ghosts. 그러나 이런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유령(幽靈)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사망자의 오두막이 파괴되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거치지 않고 벽의 구멍으로 시신(屍身)을 옮겼습니다. 유령(幽靈)을 헛갈리게 하고 유령(幽靈)이 머무르지 못하게 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이런 조처를 밟았습니다. 조객(弔客)들도 유령(幽靈)이 따라오지 않도록 장례식에서 다른 길로 돌아왔습니다. 유령(幽靈)이 무덤에서 확실히 돌아오지 않도록 역추적(逆追跡)과 다른 여러 술책이 실행되었습니다. 남녀는 유령(幽靈)을 속이려고 자주 서로 의복을 교환했습니다. 애도 의상은 유족들을 변장(變裝)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죽은 자에게 경의(敬意)를 드러내서 유령(幽靈)들을 회유(懷柔 달래)하려고 애도 의상이 만들어졌습니다.

2. Ghost Placation 유령(幽靈) 회유(懷柔 달래기)

87:2.1 (959.2) In religion the negative program of ghost placation long preceded the positive program of spirit coercion and supplication. The first acts of human worship were phenomena of defense, not reverence. Modern man deems it wise to insure against fire; so the savage thought it the better part of wisdom to provide insurance against ghost bad luck. The effort to secure this protection constituted the techniques and rituals of the ghost cult. 종교에서 유령(幽靈) 회유(懷柔)의 소극적 행동 계획이 영(靈) 강요(强要)와 애원(哀願)의 적극적 행동 계획보다 오래전에 행해졌습니다. 최초의 인간 숭배 행위는 경의(敬意 존경의 뜻)가 아니라 방어 현상이었습니다. 현대인은 화재에 대비한 보험 계약을 현명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은 유령(幽靈)의 불행에 대비한 보험 준비가 더 훌륭한 지혜의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보호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유령(幽靈) 종파(宗派)의 기법과 의식의 구성요소가 되었습니다.

87:2.2 (959.3) It was once thought that the great desire of a ghost was to be quickly “laid” so that it might proceed undisturbed to deadland. Any error of commission or omission in the acts of the living in the ritual of laying the ghost was sure to delay its progress to ghostland. This was believed to be displeasing to the ghost, and an angered ghost was supposed to be a source of calamity, misfortune, and unhappiness. 한때 유령(幽靈)의 간절한 희망은 빨리 “안장(安葬)”되어 조용히 죽은 자의 땅에 이른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유령(幽靈)의 안장식(安葬式)에서 산 자의 행위 중 작위(作爲)와 부작위(不作爲)의 실수는 유령(幽靈)의 땅으로 나아가는 유령(幽靈)을 반드시 더디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유령(幽靈)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여겼고, 화가 난 유령(幽靈)을 재난, 불운 및 불행의 근원으로 생각했습니다.

87:2.3 (959.4) The funeral service originated in man’s effort to induce the ghost soul to depart for its future home, and the funeral sermon was originally designed to instruct the new ghost how to get there. It was the custom to provide food and clothes for the ghost’s journey, these articles being placed in or near the grave. The savage believed that it required from three days to a year to “lay the ghost” — to get it away from the vicinity of the grave. The Eskimos still believe that the soul stays with the body three days. 장례식은 유령(幽靈) 혼(魂)을 설득하여 그 미래 고향으로 떠나게 하려는 사람의 노력에서 시작되었고, 장례 설교는 원래 새 유령(幽靈)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알리려고 계획되었습니다. 유령(幽靈)의 여정을 위해 음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관습이 있어서, 이런 물품을 무덤 속이나 근처에 두었습니다. 야만인들은 유령(幽靈)이 무덤 근처에서 떠나기 위한 “유령(幽靈)의 안장(安葬)”에 3일에서 1년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에스키모인(人)들은 혼(魂)이 몸과 함께 3일간 머문다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87:2.4 (959.5) Silence or mourning was observed after a death so that the ghost would not be attracted back home. Self-torture — wounds — was a common form of mourning. Many advanced teachers tried to stop this, but they failed. Fasting and other forms of self-denial were thought to be pleasing to the ghosts, who took pleasure in the discomfort of the living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of lurking about before their actual departure for deadland. 사후(死後) 유령(幽靈)을 다시 집으로 끌어들이지 않도록 침묵(沈默)과 애도(哀悼)의 관습을 지켰습니다. 자학(고행苦行) – 상처 –은 흔한 애도의 방식이었습니다. 진보한 여러 교사가 이것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단식(금식 절식)과 다른 형태의 금욕(禁慾 극기)이 유령(幽靈)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했고, 유령(幽靈)들이 실제로 죽은 자의 땅으로 떠나기 전, 어슬렁거리는 과도기에 산 자들의 고생을 즐긴다고 여겼습니다.

87:2.5 (959.6) Long and frequent periods of mourning inactivity were one of the great obstacles to civilization’s advancement. Weeks and even months of each year were literally wasted in this nonproductive and useless mourning. The fact that professional mourners were hired for funeral occasions indicates that mourning was a ritual, not an evidence of sorrow. Moderns may mourn the dead out of respect and because of bereavement, but the ancients did this because of fear. 길고 빈번한 무활동(게으름)의 애도기가 문명의 진보에 커다란 장애물 중 하나였습니다. 매년 몇 주, 몇 달까지도 이렇게 비생산적이며 헛된 애도로 완전히 놓쳤습니다. 장례 행사에 직업적 애도자들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은 애도(哀悼)는 슬픔의 증거가 아니라, 의식(儀式)이었음을 나타냅니다. 현대인들은 고인(故人)을 존경하고 사별(死別)했기 때문에 애도할 수도 있지만, 고대인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87:2.6 (959.7) The names of the dead were never spoken. In fact, they were often banished from the language. These names became taboo, and in this way the languages were constantly impoverished. This eventually produced a multiplication of symbolic speech and figurative expression, such as “the name or day one never mentions.” 고인(故人)의 이름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이름들은 종종 언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금기(禁忌)가 되었고 이렇게 언어들이 끊임없이 쇠퇴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결국 “아무도 꺼내지 않는 이름이나 날”과 같이 상징적 언어와 비유적 표현이 늘어났습니다.

87:2.7 (960.1) The ancients were so anxious to get rid of a ghost that they offered it everything which might have been desired during life. Ghosts wanted wives and servants; a well-to-do savage expected that at least one slave wife would be buried alive at his death. It later became the custom for a widow to commit suicide on her husband’s grave. When a child died, the mother, aunt, or grandmother was often strangled in order that an adult ghost might accompany and care for the child ghost. And those who thus gave up their lives usually did so willingly; indeed, had they lived in violation of custom, their fear of ghost wrath would have denuded life of such few pleasures as the primitives enjoyed. 고대인들은 유령(幽靈)에서 벗어나려고 너무 염려해서 그들은 아마 평생 소망했었던 모든 것을 유령(幽靈)에게 바쳤습니다. 유령(幽靈)들은 아내들과 하인들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부유한 야만인은 자신이 죽을 때 적어도 노예 아내 한 명이 산 채로 매장되기를 요구했습니다. 후에 과부(寡婦)가 자기 남편의 무덤에서 자살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죽으면 어른 유령(幽靈)이 함께 가서 아이 유령(幽靈)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 아주머니 또는 할머니가 자주 교살(絞殺 목을 졸라 죽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생명을 포기한 자들은 대개 자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실로 그들이 관습을 위반하며 살았다면, 유령(幽靈) 분노의 공포가 원시인들이 누렸던, 극히 적은 그런 삶의 즐거움을 빼앗았을 것입니다.

87:2.8 (960.2) It was customary to dispatch a large number of subjects to accompany a dead chief; slaves were killed when their master died that they might serve him in ghostland. The Borneans still provide a courier companion; a slave is speared to death to make the ghost journey with his deceased master. Ghosts of murdered persons were believed to be delighted to have the ghosts of their murderers as slaves; this notion motivated men to head hunting. 관례에 의해 죽은 추장과 함께 가도록 다수의 신하를 죽였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유령(幽靈)의 나라에서 그를 섬길 수 있도록 노예들이 살해당했습니다. 보르네오인(人)들은 아직도 여행안내 동반자를 미리 준비합니다. 노예가 창에 찔려 죽어서 자기 죽은 주인과 함께 유령(幽靈) 여행을 준비합니다. 살해된 사람들의 유령(幽靈)들은 살인자들의 유령(幽靈)들을 노예들로 즐겁게 삼는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을 사냥하게 되었습니다.

87:2.9 (960.3) Ghosts supposedly enjoyed the smell of food; food offerings at funeral feasts were once universal. The primitive method of saying grace was, before eating, to throw a bit of food into the fire for the purpose of appeasing the spirits, while mumbling a magic formula. 유령(幽靈)들이 음식 냄새를 즐긴다고 여겼습니다. 장례 잔치의 음식 제공은 한때 보편적이었습니다. 식전에 기도하는 원시적 방법은 마법 주문을 중얼거리며, 영(靈)들을 달래기 위해 불 속에 음식을 조금 불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87:2.10 (960.4) The dead were supposed to use the ghosts of the tools and weapons that were theirs in life. To break an article was to “kill it,” thus releasing its ghost to pass on for service in ghostland. Property sacrifices were also made by burning or burying. Ancient funeral wastes were enormous. Later races made paper models and substituted drawings for real objects and persons in these death sacrifices. It was a great advance in civilization when the inheritance of kin replaced the burning and burying of property. The Iroquois Indians made many reforms in funeral waste. And this conservation of property enabled them to become the most powerful of the northern red men. Modern man is not supposed to fear ghosts, but custom is strong, and much terrestrial wealth is still consumed on funeral rituals and death ceremonies. 죽은 자들은 평생 자기 도구와 무기의 유령(幽靈)들을 쓰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품을 부수는 것이 “그것을 죽이는 것”이어서, 그 물품의 유령(幽靈)들을 풀어놓아 유령(幽靈) 나라에서 가서 섬기게 했습니다. 태우거나 매장하여 재산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고대 장례식 낭비는 막대했습니다. 후에 종족들은 죽음의 희생에서 종이 모형을 만들어, 실제 사물들과 사람들 대신 그림을 사용했습니다. 가문 상속이 태우고 매장하는 재산을 대체하자 문명이 크게 진보했습니다. 이러쿼이 인디언들은 장례식 낭비를 많이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재산 보존으로 그들은 북부 홍인 중 가장 강력해졌습니다. 현대인은 유령(幽靈)을 두려워하지 않게 보이지만, 관습은 뿌리 깊으며, 아직도 현세적 재산이 장례식과 죽음 의례로 소모됩니다.

3. Ancestor Worship 조상숭배(祖上崇拜)

87:3.1 (960.5) The advancing ghost cult made ancestor worship inevitable since it became the connecting link between common ghosts and the higher spirits, the evolving gods. The early gods were simply glorified departed humans. 조상 숭배는 일반적 유령(幽靈)들과 더 높은 수준의 영(靈)들, 진화하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에 유령(幽靈) 종파의 발달로 조상 숭배가 피할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고대에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은 단지 미화(美化)된 죽은 인간들이었습니다.

87:3.2 (960.6) Ancestor worship was originally more of a fear than a worship, but such beliefs did definitely contribute to the further spread of ghost fear and worship. Devotees of the early ancestor-ghost cults even feared to yawn lest a malignant ghost enter their bodies at such a time. 조상숭배(祖上崇拜)는 원래 숭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지만, 그런 믿음들은 유령(幽靈) 공포와 숭배가 더 멀리 퍼지도록 확실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기 조상-유령 종파의 신봉자(信奉者)들은 하품할 때 악성(惡性) 유령(幽靈)이 자신들의 몸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품하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87:3.3 (960.7) The custom of adopting children was to make sure that someone would provide offerings after death for the peace and progress of the soul. The savage lived in fear of the ghosts of his fellows and spent his spare time planning for the safe conduct of his own ghost after death. 자녀 입양의 관례는 사후(死後) 혼(魂)의 평화와 진보를 위해 누군가가 제물(祭物 제사 음식)을 확실하게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은 자기 동료의 유령(幽靈)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사후(死後) 자기 유령(幽靈)의 안전 통행을 위한 계획에 나머지 자기 시간을 썼습니다.

87:3.4 (960.8) Most tribes instituted an all-souls’ feast at least once a year. The Romans had twelve ghost feasts and accompanying ceremonies each year. Half the days of the year were dedicated to some sort of ceremony associated with these ancient cults. One Roman emperor tried to reform these practices by reducing the number of feast days to 135 a year. 부족들 대부분은 적어도 매년 위령제(慰靈祭)를 마련했습니다. 로마인(人)들은 매년 12 유령제(幽靈祭)와 그에 따른 의식을 했습니다. 연중 절반을 이런 고대 종파와 관련된 어떤 유형의 의식에 바쳤습니다. 어느 로마 황제는 축일의 수(數)를 일 년에 135일로 줄여서 이런 관례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87:3.5 (961.1) The ghost cult was in continuous evolution. As ghosts were envisioned as passing from the incomplete to the higher phase of existence, so did the cult eventually progress to the worship of spirits, and even gods. But regardless of varying beliefs in more advanced spirits, all tribes and races once believed in ghosts. 유령(幽靈) 종파는 계속 진화했습니다. 유령(幽靈)들이 불완전한 단계에서 더 높은 존재 단계로 나아간다고 상상하게 되면서, 종파(宗派)는 결국 영(靈)들, 심지어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의 숭배로 진척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진보한 영(靈)들에 대한 다양한 믿음들과 관계없이, 모든 부족과 종족이 한때 유령(幽靈)을 믿었습니다.

4. Good and Bad Spirit Ghosts 선한 영(靈) 유령(幽靈)과 악한 영 유령(幽靈)

87:4.1 (961.2) Ghost fear was the fountainhead of all world religion; and for ages many tribes clung to the old belief in one class of ghosts. They taught that man had good luck when the ghost was pleased, bad luck when he was angered. 유령(幽靈) 공포가 모든 세계 종교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여러 부족은 한 종류의 유령(幽靈)에 대한 오랜 믿음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유령(幽靈)이 기뻐하면 사람에게 행운이 있었고, 유령(幽靈)이 화내면 불운이 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87:4.2 (961.3) As the cult of ghost fear expanded, there came about the recognition of higher types of spirits, spirits not definitely identifiable with any individual human. They were graduate or glorified ghosts who had progressed beyond the domain of ghostland to the higher realms of spiritland. 유령(幽靈) 공포의 종파가 확대하면서, 고등 유형의 영(靈)들, 어떤 개별 인간과 명확히 동일시할 수 없는 영(靈)들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령(幽靈)나라의 영역을 넘어서 더 높은 영(靈)나라의 영역으로 진보하여 졸업하여 미화(美化)된 유령(幽靈)들이었습니다.

87:4.3 (961.4) The notion of two kinds of spirit ghosts made slow but sure progress throughout the world. This new dual spiritism did not have to spread from tribe to tribe; it sprang up independently all over the world. In influencing the expanding evolutionary mind, the power of an idea lies not in its reality or reasonableness but rather in its vividness and the universality of its ready and simple application. 두 종류의 영(靈) 유령(幽靈) 개념은 전 세계에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발달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이중 심령술(心靈術)은 부족에서 부족으로 퍼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확장하는 진화 마음에 영향을 주는, 생각의 권능은 그 실체나 합리성이 아니라 외려 생생함과 즉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습니다.

87:4.4 (961.5) Still later the imagination of man envisioned the concept of both good and bad supernatural agencies; some ghosts never evolved to the level of good spirits. The early monospiritism of ghost fear was gradually evolving into a dual spiritism, a new concept of the invisible control of earthly affairs. At last good luck and bad luck were pictured as having their respective controllers. And of the two classes, the group that brought bad luck were believed to be the more active and numerous. 훨씬 나중에 사람의 상상력은 선(善)과 악(惡)의 초자연적 작용 모두의 개념을 마음에 그렸습니다. 어떤 유령(幽靈)들은 선한 영(靈)들의 수준으로 전혀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유령(幽靈) 공포의 초기 단일-심령술(心靈術)은 점차 이중-심령술(心靈術), 보이지 않게 세상일을 지배하는 새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행운과 불운은 각자 조종자가 있는 것으로 상상했습니다. 두 부류 중에서 불운을 가져온 집단이 더 활동적이고 더 많다고 여겼습니다.

87:4.5 (961.6) When the doctrine of good and bad spirits finally matured, it became the most widespread and persistent of all religious beliefs. This dualism represented a great religio-philosophic advance because it enabled man to account for both good luck and bad luck while at the same time believing in supermortal beings who were to some extent consistent in their behavior. The spirits could be counted on to be either good or bad; they were not thought of as being completely temperamental as the early ghosts of the monospiritism of most primitive religions had been conceived to be. Man was at last able to conceive of supermortal forces that were consistent in behavior, and this was one of the most momentous discoveries of truth in the entire history of the evolution of religion and in the expansion of human philosophy. 결국 선한 영(靈)들과 악한 영(靈)들에 대한 교리가 무르익어, 모든 종교적 믿음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서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이원론(二元論)은 사람에게 행운과 불운의 이유를 밝히는 동시에 그 행동 방식에서 어느 정도 일관된 초(超)필사 존재들을 믿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위대한 종교-철학적 진보를 의미했습니다. 영(靈)들은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확신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시 종교 대부분의 초기 단일-심령술(心靈術)에서 상상했던, 유령(幽靈)들처럼 완전히 변덕스러운 존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마침내 행동 방식에서 일관된 초(超)필사 세력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종교 진화의 전 역사와 인간 철학의 확장에서 가장 중대한 진리의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87:4.6 (961.7) Evolutionary religion has, however, paid a terrible price for the concept of dual spiritism. Man’s early philosophy was able to reconcile spirit constancy with the vicissitudes of temporal fortune only by postulating two kinds of spirits, one good and the other bad. And while this belief did enable man to reconcile the variables of chance with a concept of unchanging supermortal forces, this doctrine has ever since made it difficult for religionists to conceive of cosmic unity. The gods of evolutionary religion have generally been opposed by the forces of darkness. 그렇지만 진화 종교는 이중 심령술(心靈術)의 개념을 위해 끔찍한 값을 치렀습니다. 사람의 초기 철학은 한쪽은 선하고 다른 한쪽은 악한, 두 종류의 영(靈)들을 가정(假定)해야만, 영(靈) 불변성을 현세 운(運)의 흥망과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 때문에, 사람은 운수(運數)의 변수(變數)들을 불변의 초(超)필사 세력의 개념과 조정할 수 있었지만, 이런 교리는 이후 줄곧 종교인들이 질서 우주 통일성을 상상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암흑 세력들은 대개 진화 종교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을 반대했습니다.

87:4.7 (962.1) The tragedy of all this lies in the fact that, when these ideas were taking root in the primitive mind of man, there really were no bad or disharmonious spirits in all the world. Such an unfortunate situation did not develop until after the Caligastic rebellion and only persisted until Pentecost. The concept of good and evil as cosmic co-ordinates is,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very much alive in human philosophy; most of the world’s religions still carry this cultural birthmark of the long-gone days of the emerging ghost cults. 이 모든 비극은, 이런 인식이 사람의 원시적 마음에 뿌리를 내릴 때, 악하거나 화합이 되지 않은 영(靈) 들이 전(全) 세계에 실제로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게 애처로운 사태는 칼리가스티아 반란 이후까지 전개되지 않았고, 오순절까지만 지속되었습니다. 질서 우주 동등자들로서 선과 악의 개념은 20세기에도 인간 철학에서 아주 활동적입니다.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은 유령(幽靈) 종파가 출현하던, 오래전에 없어진 시절에 속한 이런 문화적 특징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5. The Advancing Ghost Cult 진보하는 유령(幽靈) 종파

87:5.1 (962.2) Primitive man viewed the spirits and ghosts as having almost unlimited rights but no duties; the spirits were thought to regard man as having manifold duties but no rights. The spirits were believed to look down upon man as constantly failing in the discharge of his spiritual duties. It was the general belief of mankind that ghosts levied a continuous tribute of service as the price of noninterference in human affairs, and the least mischance was laid to ghost activities. Early humans were so afraid they might overlook some honor due the gods that, after they had sacrificed to all known spirits, they did another turn to the “unknown gods,” just to be thoroughly safe. 원시인은 영(靈)들과 유령(幽靈)들은 거의 무한한 권리를 갖지만 어떤 의무도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영(靈)들은 사람이 여러 의무가 있지만 어떤 권리도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생각되었습니다. 영(靈)들은, 인간이 영적 의무 수행을 계속 실패하여 인간을 얕본다고 여겼습니다. 인류는 유령(幽靈)들이 인간 업무에 간섭하지 않는 대가로 공물을 계속 바치도록 부과했고, 최소의 불운(不運)은 유령(幽靈) 활동의 탓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었습니다. 초기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에게 마땅한 영예(榮譽)를 빠뜨렸을까 너무 두려워서, 알려진 모든 영(靈)에게 제물을 바친 후, 바로 철저히 안전하도록 “알려지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들(행17:23)”에게도 별개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87:5.2 (962.3) And now the simple ghost cult is followed by the practices of the more advanced and relatively complex spirit-ghost cult, the service and worship of the higher spirits as they evolved in man’s primitive imagination. Religious ceremonial must keep pace with spirit evolution and progress. The expanded cult was but the art of self-maintenance practiced in relation to belief in supernatural beings, self-adjustment to spirit environment. Industrial and military organizations were adjustments to natural and social environments. And as marriage arose to meet the demands of bisexuality, so did religious organization evolve in response to the belief in higher spirit forces and spiritual beings. Religion represents man’s adjustment to his illusions of the mystery of chance. Spirit fear and subsequent worship were adopted as insurance against misfortune, as prosperity policies. 그리고 이제 단순한 유령(幽靈) 종파는 더 진보하여 비교적 복잡한 영(靈)-유령(幽靈) 종파, 사람의 원시적 공상에서 진화한 고등 영(靈)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관례로 이어집니다. 종교 의례는 영(靈) 진화와 진보에 보조(步調)를 맞춰야 합니다. 확장된 종파는 초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믿음에 관해 이행된 자아-유지의 기술, 영(靈) 환경에 대한 순응(順應)에 불과했습니다. 산업 및 군사 조직은 자연 및 사회 환경에 대한 조정(調整)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성(兩性)의 요구에 맞춰 결혼이 생겼듯이 종교 조직도 고등 영(靈) 세력과 영적 존재들에 대한 믿음에 답하여 진화했습니다. 종교는 운수(運數)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환상을 인간이 조정(調整)한 것입니다. 영(靈) 공포와 그에 따른 숭배는 불운(不運)에 대비한 보험, 즉 번영 정책으로 채택되었습니다.

87:5.3 (962.4) The savage visualizes the good spirits as going about their business, requiring little from human beings. It is the bad ghosts and spirits who must be kept in good humor. Accordingly, primitive peoples paid more attention to their malevolent ghosts than to their benign spirits. 야만인들은 선한 영(靈)들이 자신들의 업무로 계속 바빠서, 인간 존재들에게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고 상상합니다. 기분이 좋은 상태로 있어야 하는 존재들은 악한 유령(幽靈)들과 영(靈)들입니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자애로운 영(靈)들보다 자신들의 사악한 유령(幽靈)들을 더 마음에 새겨 조심했습니다.

87:5.4 (962.5) Human prosperity was supposed to be especially provocative of the envy of evil spirits, and their method of retaliation was to strike back through a human agency and by the technique of the evil eye. That phase of the cult which had to do with spirit avoidance was much concerned with the machinations of the evil eye. The fear of it became almost world-wide. Pretty women were veiled to protect them from the evil eye; subsequently many women who desired to be considered beautiful adopted this practice. Because of this fear of bad spirits, children were seldom allowed out after dark, and the early prayers always included the petition, “deliver us from the evil eye.” 인간의 번영은 특히 악령들의 선망(羨望)을 도발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들이 보복 방식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 악마 눈의 기법으로 반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영(靈) 회피와 관계있는 종파의 그런 모습은 악마 눈의 간계(奸計)와 많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악마 눈에 대한 공포는 거의 세계적이 되었습니다. 예쁜 여성들은 악마 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베일로 가렸습니다. 그 후 아름다워지려는 여러 여성이 이런 관례를 골라잡았습니다. 악한 영(靈)들에 대한 이런 공포 때문에, 해가 진 뒤에 좀처럼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고, 초기 기도문에는 “우리를 악마 눈에서 구하소서.”라는 청원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87:5.5 (962.6) The Koran contains a whole chapter devoted to the evil eye and magic spells, and the Jews fully believed in them. The whole phallic cult grew up as a defense against the evil eye. The organs of reproduction were thought to be the only fetish which could render it powerless. The evil eye gave origin to the first superstitions respecting prenatal marking of children, maternal impressions, and the cult was at one time well-nigh universal. 코란은 악마 눈과 마법 주문으로 채워진 한 장(章) 전체를 포함하며,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완전히 믿었습니다. 모든 남근(男根) 숭배 종파는 악마 눈에 대비한 방어 수단으로 생겨났습니다. 생식 기관은 악마 눈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주물(呪物)로 여겨졌습니다. 악마 눈은 자녀의 태아기(胎兒期) 표시, 모성 인상에 관한 첫 미신의 기원이 되었고, 그 종파가 한때는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87:5.6 (963.1) Envy is a deep-seated human trait; therefore did primitive man ascribe it to his early gods. And since man had once practiced deception upon the ghosts, he soon began to deceive the spirits. Said he, “If the spirits are jealous of our beauty and prosperity, we will disfigure ourselves and speak lightly of our success.” Early humility was not, therefore, debasement of ego but rather an attempt to foil and deceive the envious spirits. 선망(羨望)은 뿌리 깊은 인간의 특성이므로 원시인은 그것을 자신의 초기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 탓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한때 유령(幽靈)들을 속였기 때문에, 그는 이내 영(靈)들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영(靈)들이 우리의 아름다움과 번영을 시기하고 깎아내린다면, 우리는 자신을 볼꼴 사납게 하고 자신의 성공을 하찮게 말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겸양(謙讓)은 자기의 비하(卑下)가 아니라 오히려 질투심이 강한 영(靈)들을 좌절시켜 속이려는 시도였습니다.

87:5.7 (963.2) The method adopted to prevent the spirits from becoming jealous of human prosperity was to heap vituperation upon some lucky or much loved thing or person. The custom of depreciating complimentary remarks regarding oneself or family had its origin in this way, and it eventually evolved into civilized modesty, restraint, and courtesy. In keeping with the same motive, it became the fashion to look ugly. Beauty aroused the envy of spirits; it betokened sinful human pride. The savage sought for an ugly name. This feature of the cult was a great handicap to the advancement of art, and it long kept the world somber and ugly. 인간 번영에 대한 영(靈)들의 시샘을 예방하려고 채택한 방법은 행운이 있거나 끔찍이 사랑하는 물건과 사람에게 혹평(酷評)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칭찬의 말을 경시(輕視)하는 관행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결국 문명화된 겸손(謙遜), 자제(自制) 및 정중(鄭重)으로 진화했습니다. 똑같은 동기로, 지저분하여 더럽게 보이는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아름다움은 영(靈)들의 시샘을 자극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죄가 된 인간 자만심의 표시였습니다. 야만인들은 추한 이름을 찾았습니다. 종파의 이런 특징은 예술 발달에 커다란 장애였고, 오랫동안 세상을 우울하고 추하게 만들었습니다.

87:5.8 (963.3) Under the spirit cult, life was at best a gamble, the result of spirit control. One’s future was not the result of effort, industry, or talent except as they might be utilized to influence the spirits. The ceremonies of spirit propitiation constituted a heavy burden, rendering life tedious and virtually unendurable. From age to age an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race after race has sought to improve this superghost doctrine, but no generation has ever yet dared to wholly reject it. 영(靈) 종파의 영향으로, 삶은 기껏 도박, 영(靈) 지배의 결과였습니다. 사람의 미래는, 영(靈)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이용될 경우를 제외하고, 노력, 근면 혹은 재능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영(靈)을 달래는 의식은 힘든 일이 되어, 삶을 지루하고 사실상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대대로 이어진 인종(人種)마다 이런 초(超)유령(幽靈) 교리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어떤 세대도 아직 감히 그것을 완전히 물리친 적이 없었습니다.

87:5.9 (963.4) The intention and will of the spirits were studied by means of omens, oracles, and signs. And these spirit messages were interpreted by divination, soothsaying, magic, ordeals, and astrology. The whole cult was a scheme designed to placate, satisfy, and buy off the spirits through this disguised bribery. 영(靈)들의 의도와 뜻은 징조, 신탁(神託 신의 당부) 및 표시로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靈) 메시지들은 점(占), 예언, 마술, 신성 재판(죄인 판별법) 및 점성술로 해석되었습니다. 모든 종파는 이런 위장 뇌물로 영(靈)들을 달래고, 안심시키며 매수(買收)하려는 음모(陰謀)였습니다.

87:5.10 (963.5) And thus there grew up a new and expanded world philosophy consisting in: 그래서 다음과 같이 새롭게 확장된 세계 철학이 서서히 생겼습니다.

87:5.11 (963.6) 1. Duty — those things which must be done to keep the spirits favorably disposed, at least neutral. 의무 – 영(靈)들이 호의적인 기분, 적어도 무관심하게 있도록 해야만 하는 것들.

87:5.12 (963.7) 2. Right — the correct conduct and ceremonies designed to win the spirits actively to one’s interests. 권리 – 자기 이익을 위해 활발하게 영(靈)들을 설득하려는 바른 행실과 의식들.

87:5.13 (963.8) 3. Truth — the correct understanding of, and attitude toward, spirits, and hence toward life and death. 진리 – 영(靈)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영(靈)들을 향한 태도 및 그에 따른 삶과 죽음을 향한 태도.

87:5.14 (963.9) It was not merely out of curiosity that the ancients sought to know the future; they wanted to dodge ill luck. Divination was simply an attempt to avoid trouble. During these times, dreams were regarded as prophetic, while everything out of the ordinary was considered an omen. And even today the civilized races are cursed with the belief in signs, tokens, and other superstitious remnants of the advancing ghost cult of old. Slow, very slow, is man to abandon those methods whereby he so gradually and painfully ascended the evolutionary scale of life. 고대인들이 미래를 알려는 것은 호기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점(占)은 솔직히 근심을 피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꿈은 예언으로 여겨졌고 게다가 특이한 모든 것들은 징조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문명화된 인종들이 표시, 징표 및 오래되어가는 옛 유령(幽靈) 종파의 다른 미신적 자투리를 믿고 계속 시달립니다. 사람은 그토록 서서히, 고통스럽게 생명의 진화적 단계를 기어올랐던 그런 방식을 더디게 아주 더디게 포기할 것입니다.

6. Coercion and Exorcism 강제(强制)와 축사(逐邪)

87:6.1 (963.10) When men believed in ghosts only, religious ritual was more personal, less organized, but the recognition of higher spirits necessitated the employment of “higher spiritual methods” in dealing with them. This attempt to improve upon, and to elaborate, the technique of spirit propitiation led directly to the creation of defenses against the spirits. Man felt helpless indeed before the uncontrollable forces operating in terrestrial life, and his feeling of inferiority drove him to attempt to find some compensating adjustment, some technique for evening the odds in the one-sided struggle of man versus the cosmos. 사람들이 유령(幽靈)만 믿었을 때, 종교의식은 더 개인적이고 덜 체계적이었지만, 고등 영(靈)들을 알아보면서 그들을 다루는 “고등 영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靈)을 달래는 기법을 개선하고 다듬으려는 이런 시도는 영(靈)들에 대비한 방어 설정으로 바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은 지상 생활에 영향을 주는, 막을 수 없는 세력 앞에서 정말 힘없이 느꼈고,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인간 대 질서 우주의 일방적 투쟁에서 불평등을 없애려는 어떤 기법, 보상하는 조율을 찾으려는 시도에 빠졌습니다.

87:6.2 (964.1) In the early days of the cult, man’s efforts to influence ghost action were confined to propitiation, attempts by bribery to buy off ill luck. As the evolution of the ghost cult progressed to the concept of good as well as bad spirits, these ceremonies turned toward attempts of a more positive nature, efforts to win good luck. Man’s religion no longer was completely negativistic, nor did he stop with the effort to win good luck; he shortly began to devise schemes whereby he could compel spirit co-operation. No longer does the religionist stand defenseless before the unceasing demands of the spirit phantasms of his own devising; the savage is beginning to invent weapons wherewith he may coerce spirit action and compel spirit assistance. 종파의 초기 시대에, 유령(幽靈) 행위에 영향을 주려는 사람의 노력은 달래기, 불운을 매수하는 뇌물 시도에 국한(局限)되었습니다. 유령(幽靈) 종파의 진화가 악한 영(靈)들만이 아니라 선한 영(靈)들의 개념으로 진보하면서, 이런 의식들은 더 적극적인 종류의 시도,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 쪽으로 향했습니다. 사람의 종교는 더 이상 완전히 부정적이지 않았고, 사람은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영(靈) 협력을 강요할 수 있는 기획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제일주의자들은 그 자신이 만든 영(靈) 환상의 부단한 요구 앞에서 더 이상 무방비로 서 있지 않습니다. 야만인은 영(靈) 행위를 강제하고 영(靈) 도움을 강요하는 수단을 고안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87:6.3 (964.2) Man’s first efforts at defense were directed against the ghosts. As the ages passed, the living began to devise methods of resisting the dead. Many techniques were developed for frightening ghosts and driving them away, among which may be cited the following: 방어하는 사람의 첫 노력은 유령(幽靈)들을 대비하는 쪽이었습니다. 시대가 흘러가자,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령(幽靈)들을 을러대서 몰아내기 위한 여러 기법이 개발되었는데, 그중 다음 것들이 열거될 수 있습니다.

87:6.4 (964.3) 1. Cutting off the head and tying up the body in the grave. 머리를 자르고 시체를 무덤 안에 묶어둠.

87:6.5 (964.4) 2. Stoning the death house. 죽은 자의 집에 돌을 던짐.

87:6.6 (964.5) 3. Castration or breaking the legs of the corpse. 거세하거나 시체의 다리를 부러뜨림.

87:6.7 (964.6) 4. Burying under stones, one origin of the modern tombstone. 돌 밑에 묻음, 현대 묘비의 기원 중 하나.

87:6.8 (964.7) 5. Cremation, a later-day invention to prevent ghost trouble. 화장(火葬), 유령(幽靈) 곤란을 막기 위해 후기에 고안됨.

87:6.9 (964.8) 6. Casting the body into the sea. 시체를 바다에 던져 넣기.

87:6.10 (964.9) 7. Exposure of the body to be eaten by wild animals. 들짐승이 먹도록 시체를 노출함.

87:6.11 (964.10) Ghosts were supposed to be disturbed and frightened by noise; shouting, bells, and drums drove them away from the living; and these ancient methods are still in vogue at “wakes” for the dead. Foul-smelling concoctions were utilized to banish unwelcome spirits. Hideous images of the spirits were constructed so that they would flee in haste when they beheld themselves. It was believed that dogs could detect the approach of ghosts, and that they gave warning by howling; that cocks would crow when they were near. The use of a cock as a weather vane is in perpetuation of this superstition. 유령(幽靈)들은 시끄러운 소리로 당황하여 두려워한다고 간주했습니다. 함성, 종소리 및 북소리로 살아있는 사람들로부터 유령(幽靈)들을 몰아냈습니다. 이런 고대의 방법은 “경야(經夜 밤샘)”하면서 아직도 성행 중입니다. 달갑지 않은 영(靈)들을 내쫓기 위해 악취 혼합물을 사용했습니다. 영(靈)들이 자신들을 보고 허둥지둥 달아나도록 영(靈)들의 흉측한 형상을 세웠습니다. 개들은 유령(幽靈)의 접근을 간파할 수 있어서 울부짖어 경고하고, 수탉들도 유령(幽靈)이 근접하면 울곤 한다고 여겼습니다. 풍향계(風向計)로써 수탉의 사용은 이런 미신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87:6.12 (964.11) Water was regarded as the best protection against ghosts. Holy water was superior to all other forms, water in which the priests had washed their feet. Both fire and water were believed to constitute impassable barriers to ghosts. The Romans carried water three times around the corpse;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body is sprinkled with holy water, and hand washing at the cemetery is still a Jewish ritual. Baptism was a feature of the later water ritual; primitive bathing was a religious ceremony. Only in recent times has bathing become a sanitary practice. 물은 유령(幽靈)들을 대비한 최고의 보호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성수(聖水)는 다른 모든 형태보다 뛰어났는데, 사제들이 발을 씻은 물이었습니다. 불과 물 모두 유령(幽靈)들이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을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인(人)들은 시체 주위로 물을 세 번 날랐습니다. 20세기에 성수(聖水)를 시체에 뿌리고, 공동묘지에서 손 씻기는 여전히 유대인의 의식입니다. 세례는 후대 물 의식의 특징이었습니다. 원시 시대의 목욕은 종교의식이었습니다. 비로소 최근에 목욕이 위생 관습이 되었습니다.

87:6.13 (964.12) But man did not stop with ghost coercion; through religious ritual and other practices he was soon attempting to compel spirit action. Exorcism was the employment of one spirit to control or banish another, and these tactics were also utilized for frightening ghosts and spirits. The dual-spiritism concept of good and bad forces offered man ample opportunity to attempt to pit one agency against another, for, if a powerful man could vanquish a weaker one, then certainly a strong spirit could dominate an inferior ghost. Primitive cursing was a coercive practice designed to overawe minor spirits. Later this custom expanded into the pronouncing of curses upon enemies. 그러나 사람은 유령(幽靈) 강제(强制)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종교의식과 다른 관례를 통해 사람은 이윽고 영(靈) 행위를 강요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축사(逐邪)는 하나의 영(靈)을 이용하여 또 다른 영(靈)을 조종하거나 내쫓는 것이었으며, 이런 수단들은 유령(幽靈)들과 영(靈)들을 겁을 주어 내쫓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이중-심령술(心靈術) 개념으로, 사람이 하나의 힘을 또 다른 힘과 경쟁시키는 충분한 기회로 시도한 이유는, 강한 사람이 더 약한 사람을 이길 수 있다면, 분명히 강한 영(靈)이 열등한 유령(幽靈)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시적인 저주는 작은 영(靈)들을 위압하려고 고안된 강제적(强制的) 관례였습니다. 나중이 이런 관습이 발전하여 적들에게 악담했습니다.

87:6.14 (965.1) It was long believed that by reverting to the usages of the more ancient mores the spirits and demigods could be forced into desirable action. Modern man is guilty of the same procedure. You address one another in common, everyday language, but when you engage in prayer, you resort to the older style of another generation, the so-called solemn style. 더 오래된 관행 관례로 되돌아가면, 영(靈)들과 신격화된 영웅들이 합당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현대인은 같은 절차를 범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흔히 일상어로 말을 걸지만, 기도를 시작하면, 다른 세대의 더 오래된 어조, 소위 엄숙한 어조를 사용합니다.

87:6.15 (965.2) This doctrine also explains many religious-ritual reversions of a sex nature, such as temple prostitution. These reversions to primitive customs were considered sure guards against many calamities. And with these simple-minded peoples all such performances were entirely free from what modern man would term promiscuity. 또한 이런 교리로, 성전 매춘과 같은 성적 본성의 여러 종교의식으로 복귀하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이런 원시적 관례의 복귀는 여러 재난을 대비하는 확실한 안전장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순한 사람들의 그런 모든 행위는 현대인이 난교(亂交)라고 부르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87:6.16 (965.3) Next came the practice of ritual vows, soon to be followed by religious pledges and sacred oaths. Most of these oaths were accompanied by self-torture and self-mutilation; later on, by fasting and prayer. Self-denial was subsequently looked upon as being a sure coercive; this was especially true in the matter of sex suppression. And so primitive man early developed a decided austerity in his religious practices, a belief in the efficacy of self-torture and self-denial as rituals capable of coercing the unwilling spirits to react favorably toward all such suffering and deprivation. 다음에 의식 맹세의 관습이 다가왔고, 곧 종교적 서약과 신성한 선서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런 대부분의 선서에 고행(苦行)과 자해(自害)가 있었고 나중에는 금식과 기도가 동반되었습니다. 금욕(禁慾)은 그 후 확실한 강제(强制)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성(性) 억제의 문제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원시인은 일찌감치 자기 종교적 관습에서, 반항적인 영(靈)들이 그런 모든 고통과 결핍을 향해 호의적으로 반응하도록 강제(强制)할 수 있는 의식으로써, 고행(苦行)과 금욕(禁慾)의 효험을 믿는, 단호한 금욕 생활을 개발했습니다.

87:6.17 (965.4) Modern man no longer attempts openly to coerce the spirits, though he still evinces a disposition to bargain with Deity. And he still swears, knocks on wood, crosses his fingers, and follows expectoration with some trite phrase; once it was a magical formula. 현대인은 더 이상 공공연히 영(靈)들을 강제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그는 신(神)과 거래하려는 경향을 아직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맹세하고, 부정 타지 않도록 빌며, 행운을 빌고, 어떤 상투어(常套語)와 함께 가래를 뱉습니다. 한때 그것은 마법의 주문이었습니다.

7. Nature of Cultism 종파(宗派)주의의 본성

87:7.1 (965.5) The cult type of social organization persisted because it provided a symbolism for the preservation and stimulation of moral sentiments and religious loyalties. The cult grew out of the traditions of “old families” and was perpetuated as an established institution; all families have a cult of some sort. Every inspiring ideal grasps for some perpetuating symbolism — seeks some technique for cultural manifestation which will insure survival and augment realization — and the cult achieves this end by fostering and gratifying emotion. 종파(宗派) 유형의 사회 조직은 도덕 감정과 종교적 충성을 보존하고 고무하려는 상징성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남았습니다. 종파(宗派)는 “옛 가족들”의 전통에서 발달하여, 확립된 제도로 영속했습니다. 모든 가정은 어떤 종류의 종파(宗派)를 지닙니다. 고무하는 모든 이상(理想)은 영속시키는 어떤 상징성을 붙들려고 – 확실히 생존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느낌을 증대할 문화적 표현을 위해 어떤 기법을 추구하며, 종파(宗派)는 감정을 촉진하고 채워서 이런 목적을 이룹니다.

87:7.2 (965.6) From the dawn of civilization every appealing movement in social culture or religious advancement has developed a ritual, a symbolic ceremonial. The more this ritual has been an unconscious growth, the stronger it has gripped its devotees. The cult preserved sentiment and satisfied emotion, but it has always been the greatest obstacle to social reconstruction and spiritual progress. 문명의 새벽부터, 사회적 문화나 종교적 진보에서, 매력적인 모든 운동은 의식(儀式), 상징적 의례(儀禮)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예식(禮式)이 무심코 성장할수록, 그것은 열성 추종자들을 더 강하게 끌었습니다. 종파(宗派)는 정서(情緖)를 보존하고 감정을 충족시켰지만, 그것은 사회적 재건과 영적 진보에 언제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87:7.3 (965.7) Notwithstanding that the cult has always retarded social progress, it is regrettable that so many modern believers in moral standards and spiritual ideals have no adequate symbolism — no cult of mutual support — nothing to belong to. But a religious cult cannot be manufactured; it must grow. And those of no two groups will be identical unless their rituals are arbitrarily standardized by authority. 종파(宗派)는 언제나 사회적 진보를 방해했지만, 도덕적 기준과 영적 이상(理想)을 믿는 그렇게 많은 현대인에게, 적절한 상징성을 지닌, 상호 지원할 종파(宗派), 소속할 데가 없다는 것이 딱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종파(宗派)는 제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종파(宗派)의 예식들이 권위로 자유재량으로 표준화되지 않으면, 어느 두 집단의 종파(宗派) 예식도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87:7.4 (965.8) The early Christian cult was the most effective, appealing, and enduring of any ritual ever conceived or devised, but much of its value has been destroyed in a scientific age by the destruction of so many of its original underlying tenets. The Christian cult has been devitalized by the loss of many fundamental ideas. 초기 기독 종파는 그때까지 상상하거나 고안한 어떤 예식(禮式)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매력적으로, 지속했지만, 과학 시대에 그 원래 기본 교의(敎義)의 허다한 파멸로 대부분의 그 가치가 파괴되었습니다. 기독 종파(宗派)는 여러 기본 사상의 상실로 활력을 빼앗겼습니다.

87:7.5 (965.9) In the past, truth has grown rapidly and expanded freely when the cult has been elastic, the symbolism expansile. Abundant truth and an adjustable cult have favored rapidity of social progression. A meaningless cult vitiates religion when it attempts to supplant philosophy and to enslave reason; a genuine cult grows. 과거에, 종파(宗派)가 유연하여, 상징성이 확장할 수 있을 때, 진리가 급속히 성장하고 자유롭게 확장했습니다. 풍부한 진리와 조율-가능한 종파(宗派)가 급속한 사회적 진보를 촉진했습니다. 의미 없는 종파(宗派)가 철학을 밀어내고 이성(理性)을 노예로 삼으려 하면, 그것은 종교를 해칩니다. 진짜 종파(宗派)는 자라납니다.

87:7.6 (966.1) Regardless of the drawbacks and handicaps, every new revelation of truth has given rise to a new cult, and even the restatement of the religion of Jesus must develop a new and appropriate symbolism. Modern man must find some adequate symbolism for his new and expanding ideas, ideals, and loyalties. This enhanced symbol must arise out of religious living, spiritual experience. And this higher symbolism of a higher civilization must be predicated on the concept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be pregnant with the mighty ideal of the brotherhood of man. 결점과 장애에 관계없이, 진리의 모든 새 계시가 새 종파(宗派)를 일으켰고, 예수 종교의 재(再)진술까지 새롭게 적절한 상징성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새롭게 확장한 사상(思想), 이상(理想) 및 충성(忠誠)을 위해 알맞은 어떤 상징성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향상된 상징은 종교적 생활, 영적 체험에서 발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등 문명의 이런 고등 상징성은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의 개념에 기초를 두어, 사람의 형제 됨이라는 강력한 이상(理想)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87:7.7 (966.2) The old cults were too egocentric; the new must be the outgrowth of applied love. The new cult must, like the old, foster sentiment, satisfy emotion, and promote loyalty; but it must do more: It must facilitate spiritual progress, enhance cosmic meanings, augment moral values, encourage social development, and stimulate a high type of personal religious living. The new cult must provide supreme goals of living which are both temporal and eternal — social and spiritual. 옛 종파(宗派)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새 종파(宗派)는 적용된 사랑의 산물(産物)이어야 합니다. 새 종파(宗派)는 옛 종파(宗派)처럼 정서를 촉진하고, 감정을 충족시키며, 충성을 증진해야 하지만, 그것은 더 해야 합니다. 새 종파(宗派)는 영적 진보를 촉진하고, 질서 우주의 의미를 향상하며, 도덕적 가치를 증대시키고, 사회 발전을 격려하며, 높은 유형의 개인 종교 생활을 고무해야 합니다. 새 종파(宗派)는 현세적이며 영원한 – 사회적이며 영적인 삶의 최고 목표를 제공해야 합니다.

87:7.8 (966.3) No cult can endure and contribute to the progress of social civilization and individual spiritual attainment unless it is based on the biologic, sociologic, and religious significance of the home. A surviving cult must symbolize that which is permanent in the presence of unceasing change; it must glorify that which unifies the stream of ever-changing social metamorphosis. It must recognize true meanings, exalt beautiful relations, and glorify the good values of real nobility. 어떤 종파(宗派)도 가정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및 종교적 중요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회 문명의 진보와 개인의 영적 도달을 견디고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살아남는 종파(宗派)는 끊임없는 변화에 직면하여 불변의 것을 상징화해야 합니다. 살아남는 종파는 변화무상한 사회적 변형의 흐름을 통합하는 것을 찬미해야 합니다. 살아남는 종파는 참된 의미를 알아보고, 아름다운 관계를 강화하며, 실제 고귀함의 선한 가치를 찬미해야 합니다.

87:7.9 (966.4) But the great difficulty of finding a new and satisfying symbolism is because modern men, as a group, adhere to the scientific attitude, eschew superstition, and abhor ignorance, while as individuals they all crave mystery and venerate the unknown. No cult can survive unless it embodies some masterful mystery and conceals some worthful unattainable. Again, the new symbolism must not only be significant for the group but also meaningful to the individual. The forms of any serviceable symbolism must be those which the individual can carry out on his own initiative, and which he can also enjoy with his fellows. If the new cult could only be dynamic instead of static, it might really contribute something worth while to the progress of mankind, both temporal and spiritual. 그러나 새롭게 충족시키는 상징성의 발견에 큰 곤란은, 현대인은, 집단으로써, 과학적 태도를 지지하고, 미신을 피하며, 무지를 몹시 싫어하지만, 개인들로써, 그들은 모두 신비를 열망하고 미지의 것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파(宗派)도 어떤 교묘한 신비를 포함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가치를 비밀로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새 상징성은 집단에 중요할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의미심장해야 합니다. 실용적인 상징성의 형태들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고, 그가 자기 동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새 종파(宗派)가 활기 없는 대신에 역동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현세적이며 영적으로 인류의 진보에 정말로 가치 있는 어떤 것에 공헌할 수도 있습니다.

87:7.10 (966.5) But a cult — a symbolism of rituals, slogans, or goals — will not function if it is too complex. And there must be the demand for devotion, the response of loyalty. Every effective religion unerringly develops a worthy symbolism, and its devotees would do well to prevent the crystallization of such a ritual into cramping, deforming, and stifling stereotyped ceremonials which can only handicap and retard all social, moral, and spiritual progress. No cult can survive if it retards moral growth and fails to foster spiritual progress. The cult is the skeletal structure around which grows the living and dynamic body of personal spiritual experience — true religion. 그러나 예식, 표어 및 목표의 상징성인 종파(宗派)가 너무 복잡하면, 그것은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헌신의 요구, 충성의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효과적인 종교는 확실히 가치 있는 상징성을 발전시키고, 그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그런 의식(儀式)이 모든 사회적, 도덕적 및 영적 진보를 무력하게 하고 방해할 뿐인, 경련(痙攣)을 일으켜, 기형(奇形)적으로 숨 막힐 듯한 진부한 예식(禮式)으로 결정화(結晶化)하지 못하게 잘할 것입니다. 어떤 종파(宗派)도 도덕적 성장을 방해하고 영적 진보를 촉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종파(宗派)는, 개인적 영적 체험-참된 종교의 살아 있는 역동적인 몸이 그 주위에서 자라는, 골격입니다.

87:7.11 (966.6) [Presented by a Brilliant Evening Star of Nebadon.][네바돈의 찬란한 저녁별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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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8 Fetishes, Charms, and Magic 주물(呪物)들, 부적(符籍)들 및 마술

Paper 88

Fetishes, Charms, and Magic 주물(呪物)들, 부적(符籍)들 및 마술(魔術)

1. Belief in Fetishes 주물(呪物) 믿음
2. Evolution of the Fetish 주물(呪物)의 진화
Images and idols 형상과 우상(偶像)
“Sacred Books” “신성한 책들”
3. Totemism 토템 숭배
4. Magic 마술(魔術)
5. Magical Charms 마술 부적(符籍)
6. The Practice of Magic 마술의 실제

88:0.1 (967.1) THE concept of a spirit’s entering into an inanimate object, an animal, or a human being, is a very ancient and honorable belief, having prevail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evolution of religion. This doctrine of spirit possession is nothing more nor less than fetishism. The savage does not necessarily worship the fetish; he very logically worships and reverences the spirit resident therein. 영(靈)이 무생물, 동물 혹은 인간에게 들어간다는 개념은 종교의 진화가 시작된 이래(以來) 널리 퍼져있는, 아주 오래된 명예로운 믿음입니다. 영(靈)에 사로잡히는 이런 교리는 정확히 주물(呪物)입니다. 야만인(野蠻人)은 반드시 주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속에 들어가 사는 영(靈)을 아주 논리적으로 숭배하고 공경합니다.

88:0.2 (967.2) At first, the spirit of a fetish was believed to be the ghost of a dead man; later on, the higher spirits were supposed to reside in fetishes. And so the fetish cult eventually incorporated all of the primitive ideas of ghosts, souls, spirits, and demon possession. 처음에 주물의 영(靈)은 죽은 사람의 유령(幽靈)으로 여겼습니다. 나중에 더 높은 영(靈)들이 주물(呪物)들 안에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물(呪物) 종파는 드디어 유령(幽靈), 혼(魂), 영(靈) 및 귀신(악령) 들림의 모든 원시적 관념을 통합했습니다.

1. Belief in Fetishes 주물(呪物) 믿음

88:1.1 (967.3) Primitive man always wanted to make anything extraordinary into a fetish; chance therefore gave origin to many. A man is sick, something happens, and he gets well. The same thing is true of the reputation of many medicines and the chance methods of treating disease. Objects connected with dreams were likely to be converted into fetishes. Volcanoes, but not mountains, became fetishes; comets, but not stars. Early man regarded shooting stars and meteors as indicating the arrival on earth of special visiting spirits. 원시인은 언제나 별난 것을, 주물(呪物)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이 우연히 생겼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의 병이 나아집니다. 마찬가지가 여러 약(藥)의 평판과 우연한 질병 치료법에 해당합니다. 꿈과 관련된 물체는 쉽게 주물(呪物)로 바뀌었습니다. 산(山)이 아니라 화산(火山)이 주물(呪物)이 되었고, 별이 아니라 혜성(彗星 살별, 꼬리별)이 주물(呪物)이 되었습니다. 고대인은 유성(流星 별똥별)과 운석(隕石)을 특별히 방문하는 영(靈)들이 지상에 도착하는 표시로 여겼습니다.

88:1.2 (967.4) The first fetishes were peculiarly marked pebbles, and “sacred stones” have ever since been sought by man; a string of beads was once a collection of sacred stones, a battery of charms. Many tribes had fetish stones, but few have survived as have the Kaaba and the Stone of Scone. Fire and water were also among the early fetishes, and fire worship, together with belief in holy water, still survives. 첫 주물은 특이하게 주의를 끄는 자갈이었고, 그 후 계속 사람은 “신성한 돌들”을 찾으려 했습니다. 구슬 끈은 한때 신성한 돌들의 모음, 한 벌의 작은 장식물이었습니다. 여러 부족에게 주물(呪物) 돌들이 있었지만, 카바와 스콘석(대관식 돌)처럼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불과 물도 초기 주물(呪物) 중에 있었고, 불 숭배는 거룩한 물에 대한 믿음과 함께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88:1.3 (967.5) Tree fetishes were a later development, but among some tribes the persistence of nature worship led to belief in charms indwelt by some sort of nature spirit. When plants and fruits became fetishes, they were taboo as food. The apple was among the first to fall into this category; it was never eaten by the Levantine peoples. 나무 주물(呪物)은 나중에 개발했지만, 일부 부족 중에 지속된 자연 숭배는 어떤 종류의 자연 영(靈)이 내재한 매력(魅力)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식물과 과일이 주물(呪物)이 되자, 그것들은 음식으로서 금기(禁忌)였습니다. 사과는 이런 범주로 나뉜 최초의 것 중에 속했습니다. 레반트 민족은 결코 그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88:1.4 (967.6) If an animal ate human flesh, it became a fetish. In this way the dog came to be the sacred animal of the Parsees. If the fetish is an animal and the ghost is permanently resident therein, then fetishism may impinge on reincarnation. In many ways the savages envied the animals; they did not feel superior to them and were often named after their favorite beasts. 동물이 인육(人肉)을 먹으면, 그 동물은 주물(呪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개는 파시교도(敎徒)의 신성한 동물이 되었습니다. 주물(呪物)이 동물이고, 유령(幽靈)이 그 속에 영구적으로 들어가 살면, 주물(呪物)숭배는 환생(幻生)을 침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야만인들은 동물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은 동물들보다 뛰어나다고 느끼지 못했고, 종종 자신들이 좋아하는 짐승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88:1.5 (967.7) When animals became fetishes, there ensued the taboos on eating the flesh of the fetish animal. Apes and monkeys, because of resemblance to man, early became fetish animals; later, snakes, birds, and swine were also similarly regarded. At one time the cow was a fetish, the milk being taboo while the excreta were highly esteemed. The serpent was revered in Palestine, especially by the Phoenicians, who, along with the Jews, considered it to be the mouthpiece of evil spirits. Even many moderns believe in the charm powers of reptiles. From Arabia on through India to the snake dance of the Moqui tribe of red men the serpent has been revered. 동물이 주물(呪物)이 되자, 잇따라 주물(呪物) 동물의 고기 먹기에 대한 금기(禁忌)가 일어났습니다. 꼬리 짧은 원숭이와 꼬리 있는 원숭이는 사람과 닮아서 일찍이 주물(呪物) 동물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뱀, 새 그리고 돼지도 마찬가지로 여겼습니다. 한때는 암소가 주물(呪物)이었고 우유가 금기(禁忌)였지만 배설물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특히 페니키아인(人)들이 뱀을 숭배했는데, 이들은 유대인(人)들과 함께 뱀을 악령(惡靈)의 대변자로 여겼습니다. 여러 현대인까지 파충류의 매력(魅力)을 믿습니다. 아라비아에서 인도를 거쳐 홍인(紅人) 중 모키 부족의 뱀 춤까지 뱀이 숭배되었습니다.

88:1.6 (968.1) Certain days of the week were fetishes. For ages Friday has been regarded as an unlucky day and the number thirteen as an evil numeral. The lucky numbers three and seven came from later revelations; four was the lucky number of primitive man and was derived from the early recognition of the four points of the compass. It was held unlucky to count cattle or other possessions; the ancients always opposed the taking of a census, “numbering the people.” 한 주의 어떤 날들이 주물(呪物)이었습니다. 금요일을 오랫동안 불길한 날로 여겼고, 숫자 13을 불길한 수(數)로 여겼습니다. 행운 숫자 3과 7은 나중의 계시에서 생겼습니다. 4는 원시인에게 행운의 수(數)였고 나침반의 4방위에 대한 초기 인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축이나 다른 재산을 계산하는 것은 불길하게 여겨졌습니다. 고대인들은 “사람들의 수(數)를 세는” 인구조사를 언제나 반대했습니다(대상21:1~4).

88:1.7 (968.2) Primitive man did not make an undue fetish out of sex; the reproductive function received only a limited amount of attention. The savage was natural minded, not obscene or prurient. 원시인은 성(性)에서 지나친 주물(呪物)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생식 기능에는 많지 않게 주목할 뿐이었습니다. 야만인은 꾸밈없이 순수한 성격으로,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않았습니다.

88:1.8 (968.3) Saliva was a potent fetish; devils could be driven out by spitting on a person. For an elder or superior to spit on one was the highest compliment. Parts of the human body were looked upon as potential fetishes, particularly the hair and nails. The long-growing fingernails of the chiefs were highly prized, and the trimmings thereof were a powerful fetish. Belief in skull fetishes accounts for much of later-day head-hunting. The umbilical cord was a highly prized fetish; even today it is so regarded in Africa. Mankind’s first toy was a preserved umbilical cord. Set with pearls, as was often done, it was man’s first necklace. 타액(唾液 침)은 힘센 주물(呪物)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침을 뱉어서 악령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연장자나 윗사람이 사람에게 침 뱉는 것은 최고로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인체의 부분, 특히 머리카락과 손톱 및 발톱을 잠재적 주물(呪物)들로 여겼습니다. 추장의 길게-늘어난 손톱을 대단히 소중히 여겼고, 다듬은 그것들은 강력한 주물(呪物)이었습니다. 두개골 주물(呪物) 믿음이 대부분 현대판 사람-사냥의 원인입니다. 탯줄은 대단히 소중히 여긴 주물(呪物)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에서 그것을 그렇게 여깁니다. 인류 최초의 장난감은 보존된 탯줄이었습니다. 흔히 그랬듯이, 진주를 엮은 탯줄은 사람의 첫 목걸이였습니다.

88:1.9 (968.4) Hunchbacked and crippled children were regarded as fetishes; lunatics were believed to be moon-struck. Primitive man could not distinguish between genius and insanity; idiots were either beaten to death or revered as fetish personalities. Hysteria increasingly confirmed the popular belief in witchcraft; epileptics often were priests and medicine men. Drunkenness was looked upon as a form of spirit possession; when a savage went on a spree, he put a leaf in his hair for the purpose of disavowing responsibility for his acts. Poisons and intoxicants became fetishes; they were deemed to be possessed. 척추장애아(脊椎障礙兒)와 및 지체부자유아(肢體不自由兒)를 주물(呪物)로 여겼습니다. 정신이상자는 달에 영향을 받아 미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원시인은 천재와 광기(狂氣)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백치(白癡/IQ25 2살 이하, cf. 치우癡愚/IQ 26-50 7살 이하, 노둔魯鈍/IQ51-70 12살 이하)는 맞아 죽거나 주물(呪物) 인격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히스테리(병적 흥분)는 마법에 대한 민간 신앙을 점차 뒷받침했습니다. 뇌전증(간질癎疾) 환자들은 대체로 사제와 치료 주술사들이었습니다. 만취(漫醉 술에 잔뜩 취함)는 영(靈)에 사로잡힌 형태로 여겼습니다. 야만인은 실컷 마시면,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려고 머리카락에 나뭇잎을 꽂았습니다. 독약과 알코올음료는 주물(呪物)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빙의(憑依 귀신 들림)로 여겨졌습니다.

88:1.10 (968.5) Many people looked upon geniuses as fetish personalities possessed by a wise spirit. And these talented humans soon learned to resort to fraud and trickery for the advancement of their selfish interests. A fetish man was thought to be more than human; he was divine, even infallible. Thus did chiefs, kings, priests, prophets, and church rulers eventually wield great power and exercise unbounded authority. 많은 사람이 천재들을 현명한 영(靈)에 사로잡힌 주물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능한 인간들은 자기 이기적 욕심을 추진하려고 사기(詐欺)와 속임수 쓰기를 쉽게 익혔습니다. 주물인(呪物人)은 인간 이상으로, 심지어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신적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추장, 왕, 사제, 선지자와 교회 통치자들은 결국 큰 권세를 휘둘렀고 무한한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2. Evolution of the Fetish 주물(呪物)의 진화

88:2.1 (968.6) It was a supposed preference of ghosts to indwell some object which had belonged to them when alive in the flesh. This belief explains the efficacy of many modern relics. The ancients always revered the bones of their leaders, and the skeletal remains of saints and heroes are still regarded with superstitious awe by many. Even today, pilgrimages are made to the tombs of great men. 유령(幽靈)들이 육체로 살 때 자신들에게 속했던 어떤 물건에 깃들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 현대의 유물 작용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고대인(人)들은 언제나 자기 지도자들의 유골을 숭배했고, 많은 사람이 성인(聖人)들과 영웅들의 유골을 아직도 미신적인 경외감으로 대합니다. 오늘날에도 위인(偉人)들의 무덤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

88:2.2 (968.7) Belief in relics is an outgrowth of the ancient fetish cult. The relics of modern religions represent an attempt to rationalize the fetish of the savage and thus elevate it to a place of dignity and respectability in the modern religious systems. It is heathenish to believe in fetishes and magic but supposedly all right to accept relics and miracles. 유물 믿음은 고대 주물(呪物) 종파의 산물입니다. 현대 종교의 유물은 야만인들의 주물(呪物)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를 나타내며 이런 식으로 현대 종교 체계에서 그것을 존엄과 존경할 사회적 지위의 자리로 올립니다. 주물(呪物)과 마술(魔術) 믿음은 교양이 없는 야만적이지만, 유물(遺物)과 기적(奇蹟)의 인정은 괜찮게 생각합니다.

88:2.3 (969.1) The hearth — fireplace — became more or less of a fetish, a sacred spot. The shrines and temples were at first fetish places because the dead were buried there. The fetish hut of the Hebrews was elevated by Moses to that place where it harbored a superfetish, the then existent concept of the law of God. But the Israelites never gave up the peculiar Canaanite belief in the stone altar: “And this stone which I have set up as a pillar shall be God’s house.” They truly believed that the spirit of their God dwelt in such stone altars, which were in reality fetishes. 난로(煖爐)-벽난로-는 거의 주물(呪物), 신성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당(祠堂)과 신전(神殿)은 거기에 죽은 자들이 묻혀 있어서 처음에는 주물(呪物) 장소였습니다. 모세가 히브리인(人)의 주물(呪物) 막사(幕舍)를 초(超)주물(呪物), 당시에 현존한 하느님의 율법이 간직된, 숨겨진 장소로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人)들은 돌 제단(祭壇)에 대한 독특한 가나안인(人)들의 믿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라(창28:22).” 그들은 자기 하느님의 영(靈)이, 실제로 주물(呪物)이었던, 그런 돌 제단(祭壇)에 거한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88:2.4 (969.2) The earliest images were made to preserve the appearance and memory of the illustrious dead; they were really monuments. Idols were a refinement of fetishism. The primitives believed that a ceremony of consecration caused the spirit to enter the image; likewise, when certain objects were blessed, they became charms. 가장 초기의 형상들은 뛰어난 고인(故人)들의 모습과 기억을 보존하려고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기념물이었습니다. 우상(偶像)은 주물(呪物)숭배의 극치였습니다. 원시인들은 봉헌(奉獻)식으로 영(靈)이 형상 안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 축복받으면, 그것들은 부적(符籍)이 되었습니다.

88:2.5 (969.3) Moses, in the addition of the second commandment to the ancient Dalamatian moral code, made an effort to control fetish worship among the Hebrews. He carefully directed that they should make no sort of image that might become consecrated as a fetish. He made it plain, “You shall not make a graven image or any likeness of anything that is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of the earth.” While this commandment did much to retard art among the Jews, it did lessen fetish worship. But Moses was too wise to attempt suddenly to displace the olden fetishes, and he therefore consented to the putting of certain relics alongside the law in the combined war altar and religious shrine which was the ark. 모세는 고대 달라마시아 도덕률에 둘째 계명을 덧붙여, 히브리인(人)들 사이에서 주물(呪物)숭배를 단속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히브리인(人)들이 주물(呪物)로 신성하게 될 수도 있는 모든 유형의 형상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지시했습니다. 그는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의 새긴 형상이나 모습을 만들지 말라(출20:4).”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계명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예술의 발달이 아주 많이 늦어졌지만, 주물(呪物)숭배가 줄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무 지혜로워서 갑자기 옛 주물들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제단 겸 언약궤였던 종교적 성유물함(聖遺物函) 안에 율법과 나란히 어떤 유물을 두도록 허락했습니다.

88:2.6 (969.4) Words eventually became fetishes, more especially those which were regarded as God’s words; in this way the sacred books of many religions have become fetishistic prisons incarcerating the spiritual imagination of man. Moses’ very effort against fetishes became a supreme fetish; his commandment was later used to stultify art and to retard the enjoyment and adoration of the beautiful. 말씀, 특히 더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겨진 것들이, 결국 주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종교의 신성한 책들이 사람의 영적 상상력을 가두는 주물 숭배의 감옥이 되었습니다. 주물에 반대한 모세의 바로 그 노력이 최고의 주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계명은 나중에 예술을 의미 없게 하여 아름다움의 즐거움과 찬미의 발달을 방해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88:2.7 (969.5) In olden times the fetish word of authority was a fear-inspiring doctrine, the most terrible of all tyrants which enslave men. A doctrinal fetish will lead mortal man to betray himself into the clutches of bigotry, fanaticism, superstition, intolerance, and the most atrocious of barbarous cruelties. Modern respect for wisdom and truth is but the recent escape from the fetish-making tendency up to the higher levels of thinking and reasoning. Concerning the accumulated fetish writings which various religionists hold as sacred books, it is not only believed that what is in the book is true, but also that every truth is contained in the book. If one of these sacred books happens to speak of the earth as being flat, then, for long generations, otherwise sane men and women will refuse to accept positive evidence that the planet is round. 옛날에는 권위 있는 주물(呪物) 언질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교리,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모든 폭군 중 가장 지독했습니다. 교리 주물(呪物)은 필사 사람의 마음을 꼬드겨 자신을 편견(偏見), 광신(狂信), 미신(迷信), 편협(偏狹) 및 아주 지독하게 잔인한 학대의 마수(魔手)에 넘길 것입니다. 지혜와 진리에 대한 현대의 존중은 최근에, 주물(呪物)-제조의 경향에서 더 높은 사고와 추론의 수준까지 도피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 종교인이 신성한 책들로 보유한 축적된 주물(呪物) 저작(著作)에 관해, 책의 내용이 참이며 모든 진리가 책 안에 담겨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신성한 책 중 하나에서 마침 지구가 편평하다고 말하면(사11:12 땅 사방), 오랜 세대 동안, 다른 점에서 분별 있는 남녀들이 행성이 둥글다는 명확한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88:2.8 (969.6) The practice of opening one of these sacred books to let the eye chance upon a passage, the following of which may determine important life decisions or projects, is nothing more nor less than arrant fetishism. To take an oath on a “holy book” or to swear by some object of supreme veneration is a form of refined fetishism. 중요한 인생 결정이나 계획을 결심할 수 있는 구절 내용을 우연히 눈으로 찾으려고 이런 신성한 책 중 하나를 열어젖히는 행위는 완전한 주물(呪物) 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룩한 책(성서나 다른 종교 경전)”으로 선서하거나 어떤 최고 숭배의 대상으로 맹세하는 것은, 세련된 주물(呪物)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88:2.9 (969.7) But it does represent real evolutionary progress to advance from the fetish fear of a savage chief’s fingernail trimmings to the adoration of a superb collection of letters, laws, legends, allegories, myths, poems, and chronicles which, after all, reflect the winnowed moral wisdom of many centuries, at least up to the time and event of their being assembled as a “sacred book.” 그러나 그것은, 야만인 추장의 손톱 손질의 주물(呪物) 두려움에서, 적어도 “신성한 책”으로 모아 정리한 시절과 사건까지, 결국 여러 세기의 걸러낸 도덕적 지혜를 반영하는, 편지, 율법, 전설, 우의(寓意 빗대어 표현한 풍유), 신화(神話), 시(詩) 및 연대기(年代記)의 훌륭한 수집의 찬미까지 나아간, 실제의 진화적 진보를 드러냅니다.

88:2.10 (970.1) To become fetishes, words had to be considered inspired, and the invocation of supposed divinely inspired writings led directly to the establishment of the authority of the church, while the evolution of civil forms led to the fruition of the authority of the state. 주물(呪物)이 되려면, 말씀은 영감(靈感)받은 것으로 여겨졌고, 신적으로 소위 영감(靈感)받은 저작(著作)을 증거로 삼아 인용(引用)하여 바로 교회의 권위가 확립된 한편, 시민 형태의 진화는 국가 권위의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3. Totemism 토템 숭배

88:3.1 (970.2) Fetishism ran through all the primitive cults from the earliest belief in sacred stones, through idolatry, cannibalism, and nature worship, to totemism. 주물(呪物)숭배는 신성한 돌에 대한 가장 초기의 믿음으로부터 우상(偶像) 숭배, 식인(食人) 풍습과 자연(自然) 숭배를 거쳐 토템 숭배까지 모든 원시 종파 속으로 번졌습니다.

88:3.2 (970.3) Totemism is a combination of social and religious observances. Originally it was thought that respect for the totem animal of supposed biologic origin insured the food supply. Totems were at one and the same time symbols of the group and their god. Such a god was the clan personified. Totemism was one phase of the attempted socialization of otherwise personal religion. The totem eventually evolved into the flag, or national symbol, of the various modern peoples. 토템 숭배는 사회적 및 종교적 의식의 조합(組合)입니다. 처음에는, 생물학적 기원으로 추정된 토템 동물의 존중이 식량 공급을 보증한다고 믿었습니다. 토템들은 집단의 상징과 동시에 그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신과 같은 존재는 인격화한 씨족이었습니다. 토템 숭배는 다른 점에서 개인 종교의 사회화를 시도하는 한 단계였습니다. 토템 숭배는 결국 여러 현대 민족의 깃발, 즉 국가 상징으로 진화했습니다.

88:3.3 (970.4) A fetish bag, a medicine bag, was a pouch containing a reputable assortment of ghost-impregnated articles, and the medicine man of old never allowed his bag, the symbol of his power, to touch the ground. Civilized peoples in the twentieth century see to it that their flags, emblems of national consciousness, likewise never touch the ground. 주물 자루, 약 자루는 평판 좋은 유령(幽靈)이 스며든 각종 물건이 들어있는 주머니였고, 옛 치료 주술사는 자기 자루, 자기 권능의 상징을 절대로 땅에 닿지 않게 했습니다. 20세기의 문화 민족들도 똑같이 자신들의 깃발, 국가 의식의 상징이 절대로 땅에 닿지 않도록 조처합니다.

88:3.4 (970.5) The insignia of priestly and kingly office were eventually regarded as fetishes, and the fetish of the state supreme has passed through many stages of development, from clans to tribes, from suzerainty to sovereignty, from totems to flags. Fetish kings have ruled by “divine right,” and many other forms of government have obtained. Men have also made a fetish of democracy, the exaltation and adoration of the common man’s ideas when collectively called “public opinion.” One man’s opinion, when taken by itself, is not regarded as worth much, but when many men are collectively functioning as a democracy, this same mediocre judgment is held to be the arbiter of justice and the standard of righteousness. 사제직과 왕직의 휘장(徽章)은 결국 주물(呪物)로 여겼고, 국가 최고의 주물(呪物)은, 씨족에서 부족으로, 종주권(宗主權)에서 주권(主權)으로, 토템에서 깃발로,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쳤습니다. 주물(呪物) 왕들은 “신적 권리”로 통치했고, 다른 여러 형태의 정부가 유행했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사람의 통념(通念)을 높이고 찬미하며 공동으로 “여론”이라고 부르면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주물(呪物)을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의견 그 자체는 높은 가치로 여기지 않지만, 다수가 민주주의로써 공동으로 역할을 하면, 바로 이 평범한 판단은 정의(正義)의 중재(仲裁)자와 공의(公義)의 기준이 됩니다.

4. Magic 마술(魔術)

88:4.1 (970.6) Civilized man attacks the problems of a real environment through his science; savage man attempted to solve the real problems of an illusory ghost environment by magic. Magic was the technique of manipulating the conjectured spirit environment whose machinations endlessly explained the inexplicable; it was the art of obtaining voluntary spirit co-operation and of coercing involuntary spirit aid through the use of fetishes or other and more powerful spirits. 문명인은 자신의 과학을 통해 실제 환경 문제에 달려듭니다. 야만인은 마술(魔術)로 실체 없는 유령(幽靈) 환경의 실제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마술(魔術)은 그 모략(謀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설명했던, 추측된 영(靈) 환경을 조종하는 기법이었습니다. 마술(魔術)은 자발적인 영(靈) 협력을 얻고, 주물(呪物)들이나 더 강력한 다른 영(靈)들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영(靈) 조력을 강요하는 기술이었습니다.

88:4.2 (970.7) The object of magic, sorcery, and necromancy was twofold: 마술(魔術), 마법(魔法)과 강령술(降靈術)의 목적은 이중적(二重的)이었습니다.

88:4.3 (970.8) 1. To secure insight into the future. 미래의 통찰력 확보.

88:4.4 (970.9) 2. Favorably to influence environment. 유리하게 환경을 움직임.

88:4.5 (970.10) The objects of science are identical with those of magic. Mankind is progressing from magic to science, not by meditation and reason, but rather through long experience, gradually and painfully. Man is gradually backing into the truth, beginning in error, progressing in error, and finally attaining the threshold of truth. Only with the arrival of the scientific method has he faced forward. But primitive man had to experiment or perish. 과학의 목적은 모든 점에서 마술의 목적과 같습니다. 인류는 명상(瞑想)과 이성(理性)은커녕 오히려, 오랜 체험을 통해 서서히 고통스럽게, 마술에서 과학으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서서히 진리로 돌아가, 실수로 시작하여 실수 중에 진보하며 결국 진리의 문턱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의 출현에 의해서만, 사람은 앞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원시인은 실험하거나 멸망해야 했습니다.

88:4.6 (970.11) The fascination of early superstition was the mother of the later scientific curiosity. There was progressive dynamic emotion — fear plus curiosity — in these primitive superstitions; there was progressive driving power in the olden magic. These superstitions represented the emergence of the human desire to know and to control planetary environment. 초기 미신의 매력은 후기 과학적 호기심의 어머니였습니다. 이런 원시적 미신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아우른, 진보적인 역동적 감정이 있었습니다. 옛날의 마술에는 진보적인 추진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미신(迷信)은 행성 환경을 알고 조정하려는 인간 욕망의 출현에 해당했습니다.

88:4.7 (971.1) Magic gained such a strong hold upon the savage because he could not grasp the concept of natural death. The later idea of original sin helped much to weaken the grip of magic on the race in that it accounted for natural death. It was at one time not at all uncommon for ten innocent persons to be put to death because of supposed responsibility for one natural death. This is one reason why ancient peoples did not increase faster, and it is still true of some African tribes. The accused individual usually confessed guilt, even when facing death. 야만인은 자연사(自然死)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어서, 마술(魔術)이 야만인을 아주 강력하게 복종시켰습니다. 나중에 원죄의 개념이 자연사(自然死)의 이유가 되었다는 점에서 인류에 대한 마술(魔術)의 지배가 무력해지도록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하나의 자연사(自然死)에 대한 소위 책임 때문에 전혀 드물지 않게 무고한 열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이것이 고대 민족들이 더 빨리 불어나지 않았던 한 가지 이유이며 여전히 일부 아프리카 부족에 해당합니다. 고발된 개인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도 보통 죄를 자백했습니다.

88:4.8 (971.2) Magic is natural to a savage. He believes that an enemy can actually be killed by practicing sorcery on his shingled hair or fingernail trimmings. The fatality of snake bites was attributed to the magic of the sorcerer. The difficulty in combating magic arises from the fact that fear can kill. Primitive peoples so feared magic that it did actually kill, and such results were sufficient to substantiate this erroneous belief. In case of failure there was always some plausible explanation; the cure for defective magic was more magic. 마술(魔術)은 야만인에게 당연합니다. 그는, 대적의 싱글 커트(치켜 깎기)한 머리카락이나 손톱 부스러기에 마법(魔法)을 쓰면 실제로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뱀에 물린 죽음은 마법사의 마술 탓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술을 상대로 항쟁하는 어려움은, 두려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생깁니다. 원시 민족은 마술을 너무 두려워해서 마술이 실제로 그들을 죽였고, 이런 잘못된 믿음은 그런 결과로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실패의 경우, 항상 그럴듯한 어떤 변명이 있었습니다. 결함 있는 마술 치유법은 더 마술적이었습니다.

5. Magical Charms 마술 부적(符籍)

88:5.1 (971.3) Since anything connected with the body could become a fetish, the earliest magic had to do with hair and nails. Secrecy attendant upon body elimination grew up out of fear that an enemy might get possession of something derived from the body and employ it in detrimental magic; all excreta of the body were therefore carefully buried. Public spitting was refrained from because of the fear that saliva would be used in deleterious magic; spittle was always covered. Even food remnants, clothing, and ornaments could become instruments of magic. The savage never left any remnants of his meal on the table. And all this was done through fear that one’s enemies might use these things in magical rites, not from any appreciation of the hygienic value of such practices. 신체와 관련된 무엇이든 주물(呪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마술은 머리카락 및 손톱·발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신체 배설물에 수반된 비밀성은 대적이 신체에서 나온 어떤 것을 입수해서 해로운 마술로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체의 모든 배설물을 신중하게 파묻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침 뱉기는 그 타액(唾液)이 해로운 마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삼갔습니다. 뱉은 침을 언제나 덮었습니다. 음식 찌꺼기, 의복 및 장신구(裝身具)조차 마술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만인들은 식탁에서 자기 식사 찌꺼기를 절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런 습관의 위생적 가치 인식 때문이 아니라, 대적이 이런 것들을 마술 의식에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88:5.2 (971.4) Magical charms were concocted from a great variety of things: human flesh, tiger claws, crocodile teeth, poison plant seeds, snake venom, and human hair. The bones of the dead were very magical. Even the dust from footprints could be used in magic. The ancients were great believers in love charms. Blood and other forms of bodily secretions were able to insure the magic influence of love. 마술 부적(簿籍)은 인육(人肉), 호랑이 발톱, 악어 이빨, 독 있는 식물 종자, 뱀독과 사람 머리카락 등 아주 다양하게 혼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시신(屍身)의 뼈는 아주 마술적이었습니다. 발자국의 먼지조차 마술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사랑 부적(簿籍)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혈액과 다른 형태의 신체 분비물로 사랑의 마술적 영향력이 보증될 수 있었습니다.

88:5.3 (971.5) Images were supposed to be effective in magic. Effigies were made, and when treated ill or well, the same effects were believed to rest upon the real person. When making purchases, superstitious persons would chew a bit of hard wood in order to soften the heart of the seller. 형상(形像)들은 마술에 효력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조상(彫像)들이 만들어, 그것을 잘 혹은 잘못 다루면, 실제 인물에게 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매할 때, 미신적 사람들은 판매인의 심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단단한 나무 조각을 씹곤 했습니다.

88:5.4 (971.6) The milk of a black cow was highly magical; so also were black cats. The staff or wand was magical, along with drums, bells, and knots. All ancient objects were magical charms. The practices of a new or higher civilization were looked upon with disfavor because of their supposedly evil magical nature. Writing, printing, and pictures were long so regarded. 검은 젖소의 우유는 아주 마술적이었으며, 검은 고양이도 그랬습니다. 막대기나 지팡이도 북, 종 및 매듭과 마찬가지로 마술적이었습니다. 모든 고대 물건은 마술 부적(簿籍)이었습니다. 새로운 고등 문명의 관습은 소위 그 악한 마술적 본성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겨졌습니다. 저술, 인쇄 및 그림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88:5.5 (971.7) Primitive man believed that names must be treated with respect, especially names of the gods. The name was regarded as an entity, an influence distinct from the physical personality; it was esteemed equally with the soul and the shadow. Names were pawned for loans; a man could not use his name until it had been redeemed by payment of the loan. Nowadays one signs his name to a note. An individual’s name soon became important in magic. The savage had two names; the important one was regarded as too sacred to use on ordinary occasions, hence the second or everyday name — a nickname. He never told his real name to strangers. Any experience of an unusual nature caused him to change his name; sometimes it was in an effort to cure disease or to stop bad luck. The savage could get a new name by buying it from the tribal chief; men still invest in titles and degrees. But among the most primitive tribes, such as the African Bushmen, individual names do not exist. 원시인은 이름들, 특히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의 이름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이름을 물리적 고유성과 달리, 영향력 있는 개체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혼(魂)과 그림자와 똑같이 간주했습니다. 이름이 대출(貸出) 저당(抵當)물이어서 대출금 상환(償還)으로 회수(回收)될 때까지 그는 자기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기 이름을 지폐 증서에 서명합니다. 개인 이름은 곧 마술에서 중요해졌습니다. 야만인들은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평상시 사용하기에 너무 신성하다고 여겨서, 두 번째 즉 일상적 이름 –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실명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별한 현상을 겪으면 그는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때때로 질병의 치유나 불운을 멈추려는 일환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은 부족장에게서 새 이름을 사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직함과 학위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부시먼족처럼 가장 원시적인 부족들 사이에 개인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6. The Practice of Magic 마술의 실제

88:6.1 (972.1) Magic was practiced through the use of wands, “medicine” ritual, and incantations, and it was customary for the practitioner to work unclothed. Women outnumbered the men among primitive magicians. In magic, “medicine” means mystery, not treatment. The savage never doctored himself; he never used medicines except on the advice of the specialists in magic. And the voodoo doctors of the twentieth century are typical of the magicians of old. 마술은 지팡이의 사용, “주술(呪術)” 의식 및 주문을 통해 행해졌고, 치료 마술사는 옷을 벗고 일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원시 마술사 중 여성의 수(數)가 남성보다 많았습니다. 마술에서 “주술(呪術)”은 치료가 아니라 비법(신비 의식)을 의미합니다. 야만인은 절대로 자신을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술 전문가의 진찰 없이 절대로 약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의 부두교 치료 주술사들은 전형적인 고대 마술사들입니다.

88:6.2 (972.2) There was both a public and a private phase to magic. That performed by the medicine man, shaman, or priest was supposed to be for the good of the whole tribe. Witches, sorcerers, and wizards dispensed private magic, personal and selfish magic which was employed as a coercive method of bringing evil on one’s enemies. The concept of dual spiritism, good and bad spirits, gave rise to the later beliefs in white and black magic. And as religion evolved, magic was the term applied to spirit operations outside one’s own cult, and it also referred to older ghost beliefs. 마술에는 공적 및 사적 단계가 있었습니다. 주술사, 무당이나 사제가 행한 것은 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녀, 마법사와 요술쟁이들은 어떤 사람의 대적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강제적 방법으로 사용된 사적 마술, 개인적인 이기적 마술을 시행했습니다. 이중 심령술(心靈術), 선한 영(靈)과 악한 영(靈)들의 개념이 나중에 백마술과 흑마술에 대한 믿음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진화하면서, 마술은 어떤 사람의 자기 종파 외부의 영(靈) 활동에 적용된 용어였으며, 그것은 또한 더 오랜 유령(幽靈)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88:6.3 (972.3) Word combinations, the ritual of chants and incantations, were highly magical. Some early incantations finally evolved into prayers. Presently, imitative magic was practiced; prayers were acted out; magical dances were nothing but dramatic prayers. Prayer gradually displaced magic as the associate of sacrifice. 단어 조합, 영창(詠唱)과 주문(呪文)의 의식은 대단히 마술적이었습니다. 일부 초기 주문(呪文)은 결국 기도 문구로 진화했습니다. 즉시 모방 마술이 행해졌습니다. 기도 문구가 실행되었습니다. 마술 춤은 단지 극적인 기도 문구일 뿐이었습니다. 기도는 제물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으로써 점차 마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88:6.4 (972.4) Gesture, being older than speech, was the more holy and magical, and mimicry was believed to have strong magical power. The red men often staged a buffalo dance in which one of their number would play the part of a buffalo and, in being caught, would insure the success of the impending hunt. The sex festivities of May Day were simply imitative magic, a suggestive appeal to the sex passions of the plant world. The doll was first employed as a magic talisman by the barren wife.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몸짓은 더 거룩하고 마술적이었고, 흉내 내기는 강력한 마술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홍인들은 종종, 그들 중 하나가 물소 역할을 하다가 잡혀서, 임박한 사냥의 성공을 보증하곤 했던, 물소 춤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오월제의 성(性) 행사는, 식물계의 성(性) 열정을 시사하는 호소, 모방 마술에 불과했습니다. 불임(不姙) 아내가 인형을 마술 부적으로 처음 사용했습니다.

88:6.5 (972.5) Magic was the branch off the evolutionary religious tree which eventually bore the fruit of a scientific age. Belief in astrology led to the development of astronomy; belief in a philosopher’s stone led to the mastery of metals, while belief in magic numbers founded the science of mathematics. 마술은 결국 과학 시대의 열매를 맺은 진화적 종교 나무에서 갈라진 가지였습니다. 점성술의 믿음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돌에 대한 현자의 믿음이 금속의 숙달로 이어졌고, 마법 수에 대한 믿음이 수학에 속한 과학을 찾아냈습니다.

88:6.6 (972.6) But a world so filled with charms did much to destroy all personal ambition and initiative. The fruits of extra labor or of diligence were looked upon as magical. If a man had more grain in his field than his neighbor, he might be haled before the chief and charged with enticing this extra grain from the indolent neighbor’s field. Indeed, in the days of barbarism it was dangerous to know very much; there was always the chance of being executed as a black artist. 그러나 부적(簿籍)으로 그렇게 가득한 세상이 모든 개인적 포부(抱負)와 독창력을 많이 파괴했습니다. 특별 노동이나 근면의 결과는 마술적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웃보다 자기 밭에 더 많은 곡식이 있으면 그는 추장 앞으로 끌려가 게으른 이웃의 밭에서 이 여분의 곡식을 빼돌렸다고 고발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미개한 시절에 아주 많이 아는 것이 위험했습니다. 흑(黑) 사기꾼으로 처형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88:6.7 (972.7) Gradually science is removing the gambling element from life. But if modern methods of education should fail, there would be an almost immediate reversion to the primitive beliefs in magic. These superstitions still linger in the minds of many so-called civilized people. Language contains many fossils which testify that the race has long been steeped in magical superstition, such words as spellbound, ill-starred, possessions, inspiration, spirit away, ingenuity, entrancing, thunderstruck, and astonished. And intelligent human beings still believe in good luck, the evil eye, and astrology. 과학은 점차 생활에서 도박 요소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 교육 방법이 실패하면, 원시적 마술 믿음으로 거의 즉시 되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미신이 소위 문명인들의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언어는, ‘넋을 잃은,’ ‘팔자가 사나운,’ ‘홀린,’ ‘신통한,’ ‘정신 나간,’ ‘기발한,’ ‘넋 놓은,’ ‘벼락 맞은 것 같은,’ ‘너무 놀란’과 같은, 인류가 오랫동안 마술적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입증하는 여러 화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능적 인간들도 여전히 행운, 악마 눈과 점성술을 믿습니다.

88:6.8 (973.1) Ancient magic was the cocoon of modern science, indispensable in its time but now no longer useful. And so the phantasms of ignorant superstition agitated the primitive minds of men until the concepts of science could be born. Today, Urantia is in the twilight zone of this intellectual evolution. One half the world is grasping eagerly for the light of truth and the facts of scientific discovery, while the other half languishes in the arms of ancient superstition and but thinly disguised magic. 고대 마술은 현대 과학의 고치였으며, 당시에 필수적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미신의 환상(幻想)이 과학의 개념이 태어날 때까지 인간의 원시적 마음을 선동했습니다. 오늘날 유란시아는 이런 지적 진화의 황혼 지대에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은 진리의 빛과 과학적 발견의 사실을 간절히 파악하고 있지만, 다른 절반은 고대 미신과 아주 얇게 위장된 마술의 품에서 참혹하게 살고 있습니다.

88:6.9 (973.2) [Presented by a Brilliant Evening Star of Nebadon.][네바돈의 찬란한 저녁별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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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89 Sin, Sacrifice, and Atonement 죄, 희생물 및 속죄

Paper 89

Sin, Sacrifice, and Atonement 죄, 희생물 및 속죄

1. The Taboo 금기(禁忌)
2. The Concept of Sin 죄(罪)의 개념
3. Renunciation and Humiliation 금욕(禁慾)과 굴욕(屈辱)
The continence cult 금욕(禁慾) 종파
4. Origins of Sacrifice 희생물의 기원
5. Sacrifices and Cannibalism 희생물과 식인(食人) 풍습
6. Evolution of Human Sacrifice 인간 희생물의 진화
7. Modifications of Human Sacrifice 인간 희생물의 변용(變容)
Temple harlotry 성전 매춘 행위
8. Redemption and Covenants 구속(救贖 상환)과 계약(契約)
9. Sacrifices and Sacraments 희생물과 성찬(聖餐)
10. Forgiveness of Sin 죄의 용서

89:0.1 (974.1) PRIMITIVE man regarded himself as being in debt to the spirits, as standing in need of redemption. As the savages looked at it, in justice the spirits might have visited much more bad luck upon them. As time passed, this concept developed into the doctrine of sin and salvation. The soul was looked upon as coming into the world under forfeit — original sin. The soul must be ransomed; a scapegoat must be provided. The head-hunter, in addition to practicing the cult of skull worship, was able to provide a substitute for his own life, a scapeman. 원시인은 자신을 영(靈)들에게 빚져서, 구속(救贖)이 필요한 상태로 여겼습니다. 야만인들이 그것을 볼 때, 공정하게 평가해서 영(靈)들이 자신들에게 더 많은 불운으로 벌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개념이 죄(罪)와 구원(救援)의 교리로 발전했습니다. 혼(魂)은 원죄(原罪) 즉 박탈(剝奪)된 상태로 세상에 왔다고 여겼습니다. 혼(魂)은 속량(贖良)되어야 해서, 속죄의 염소가 마련되어야 했습니다. 머리-사냥꾼은, 두개골 숭배 종파의 실천에 덧붙여, 자기 생명의 대용(代用)으로, 속죄의 인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89:0.2 (974.2) The savage was early possessed with the notion that spirits derive supreme satisfaction from the sight of human misery, suffering, and humiliation. At first, man was only concerned with sins of commission, but later he became exercised over sins of omission. And the whole subsequent sacrificial system grew up around these two ideas. This new ritual had to do with the observance of the propitiation ceremonies of sacrifice. Primitive man believed that something special must be done to win the favor of the gods; only advanced civilization recognizes a consistently even-tempered and benevolent God. Propitiation was insurance against immediate ill luck rather than investment in future bliss. And the rituals of avoidance, exorcism, coercion, and propitiation all merge into one another. 야만인은 일찍이 영(靈)들이 인간의 비참, 고통 및 수치를 보면서 최고로 만족한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인간은 그저 작위(作爲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죄(罪)에 관심을 가졌지만, 나중에 부작위(不作爲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罪)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모든 희생 제도가 이런 두 개념을 중심으로 서서히 생겼습니다. 이런 새 의식(儀式)은 희생제물의 화해(和解) 의식 준수에 관련되었습니다. 원시인은 신과 같은 존재들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특별한 것을 행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진보한 문명(文明)만 모순 없이 온화하고 인정 많은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화해(和解)는 미래 행복에 대한 투자라기보다 당면한 불운에 대비한 보험이었습니다. 회피(回避), 축사(逐邪), 강제(强制) 및 화해(和解) 의식(儀式)은 서서히 모두 서로 합병(合倂)합니다.

1. The Taboo 금기(禁忌)

89:1.1 (974.3) Observance of a taboo was man’s effort to dodge ill luck, to keep from offending the spirit ghosts by the avoidance of something. The taboos were at first nonreligious, but they early acquired ghost or spirit sanction, and when thus reinforced, they became lawmakers and institution builders. The taboo is the source of ceremonial standards and the ancestor of primitive self-control. It was the earliest form of societal regulation and for a long time the only one; it is still a basic unit of the social regulative structure. 금기(禁忌)의 준수(遵守)는 불운을 재빨리 피하고, 무언가를 회피하여 영(靈) 유령(幽靈)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이었습니다. 금기(禁忌)들은 처음에 종교적이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일찌감치 유령(幽靈)이나 영(靈)의 지지를 얻었고, 그렇게 강화되자, 그것들은 입법자와 제도를 만드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금기(禁忌)는 예식(禮式) 모범의 근원이며 원시적 자제력의 원형입니다. 그것은 가장 초기 형태의 사회관습 규칙이었고 오랫동안 유일한 형태였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회 단속 구조의 기본 단위입니다.

89:1.2 (974.4) The respect which these prohibitions commanded in the mind of the savage exactly equaled his fear of the powers who were supposed to enforce them. Taboos first arose because of chance experience with ill luck; later they were proposed by chiefs and shamans — fetish men who were thought to be directed by a spirit ghost, even by a god. The fear of spirit retribution is so great in the mind of a primitive that he sometimes dies of fright when he has violated a taboo, and this dramatic episode enormously strengthens the hold of the taboo on the minds of the survivors. 야만인의 마음에서 이런 금지가 얻은 존중은 소위 금지를 시행하는 권세에 대한 야만인의 두려움과 정확히 같았습니다. 금기(禁忌)는 처음에 우연히 불운을 겪다가 생겨났습니다. 나중에는 영(靈) 유령(幽靈) 및 심지어 신과 같은 존재의 명령을 받는다고 여겨진 주물(呪物)인들, 즉 추장과 주술사들이 그것들을 제안했습니다. 원시인의 마음에 영(靈) 징벌의 두려움이 너무 커서, 금기(禁忌)를 위반했을 때, 그는 무서운 나머지 종종 죽었고, 생존자의 마음에 미치는 금기(禁忌)의 장악력은 이런 극적인 사건으로 대단히 강화됩니다.

89:1.3 (974.5) Among the earliest prohibitions were restrictions on the appropriation of women and other property. As religion began to play a larger part in the evolution of the taboo, the article resting under ban was regarded as unclean, subsequently as unholy. The records of the Hebrews are full of the mention of things clean and unclean, holy and unholy, but their beliefs along these lines were far less cumbersome and extensive than were those of many other peoples. 가장 초기의 금지 규정 중에 여성들 및 다른 재산 횡령에 대한 제한이 있었습니다. 종교가 금기(禁忌)의 진화에서 더 큰 역할을 맡기 시작하면서, 금지된 물건을 불결하게 여기다가 나중에는 부정(不淨)하게 여겼습니다. 히브리인(人)들의 기록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런 방침을 따른 그들의 믿음은 여러 다른 민족의 믿음보다 훨씬 부담이 덜하고 넓지 않았습니다.

89:1.4 (975.1) The seven commandments of Dalamatia and Eden, as well as the ten injunctions of the Hebrews, were definite taboos, all expressed in the same negative form as were the most ancient prohibitions. But these newer codes were truly emancipating in that they took the place of thousands of pre-existent taboos. And more than this, these later commandments definitely promised something in return for obedience.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일곱 계명은 히브리인(人)들의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금기(禁忌)였고, 가장 오래된 금지들과 똑같이 모두 부정적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규칙은 수천 가지 이전(以前)의 금기(禁忌)를 대신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해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이런 후대의 계명은 순종의 답례로 확실히 뭔가를 약속했습니다.

89:1.5 (975.2) The early food taboos originated in fetishism and totemism. The swine was sacred to the Phoenicians, the cow to the Hindus. The Egyptian taboo on pork has been perpetuated by the Hebraic and Islamic faiths. A variant of the food taboo was the belief that a pregnant woman could think so much about a certain food that the child, when born, would be the echo of that food. Such viands would be taboo to the child. 초기 음식 금기(禁忌)는 주물(呪物) 숭배와 토템 숭배에서 생겼습니다. 돼지는 페니키아인(人)들에게, 소는 힌두교도에게 신성시되었습니다. 헤브루인과 이슬람교 신조(信條)가 돼지고기에 대한 이집트인(人)의 금기(禁忌)를 계속 보존했습니다. 음식 금기(禁忌)의 변종은 임신부(姙娠婦)가 특정한 음식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게 되면, 태어날 때, 그 아이가 그 음식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음식은 아이에게 금기(禁忌)가 되곤 했습니다.

89:1.6 (975.3) Methods of eating soon became taboo, and so originated ancient and modern table etiquette. Caste systems and social levels are vestigial remnants of olden prohibitions. The taboos were highly effective in organizing society, but they were terribly burdensome; the negative-ban system not only maintained useful and constructive regulations but also obsolete, outworn, and useless taboos. 먹는 방법은 곧 금기(禁忌)가 되었고, 그렇게 고대와 현대의 식탁 예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적 수준은 오래된 금지 규정이 남아 있는 자취입니다. 금기(禁忌)는 사회 조직에 대단히 효과적이었지만, 몹시 번거로웠습니다. 부정하는-금지 제도는 유용하고 건설적인 규정뿐만 아니라 진부하고 케케묵은 무익한 금기(禁忌)도 유지했습니다.

89:1.7 (975.4) There would, however, be no civilized society to sit in criticism upon primitive man except for these far-flung and multifarious taboos, and the taboo would never have endured but for the upholding sanctions of primitive religion. Many of the essential factors in man’s evolution have been highly expensive, have cost vast treasure in effort, sacrifice, and self-denial, but these achievements of self-control were the real rungs on which man climbed civilization’s ascending ladder. 그러나 이렇게 널리 퍼져 다양한 금기(禁忌)를 제외하고, 원시인을 비판할 문명사회는 전혀 없을 것이며, 원시 종교의 확정하는 지지가 없었더라면 금기(禁忌)는 절대로 지속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진화하는 여러 필수 요소는 대단히 값비쌌고, 노력, 희생 및 자제(自制)에서 막대한 보물의 비용이 들었지만, 이런 자제력의 성취는, 사람이 상승하는 문명의 사다리를 기어올랐던 실제 가로대였습니다.

2. The Concept of Sin 죄(罪)의 개념

89:2.1 (975.5) The fear of chance and the dread of bad luck literally drove man into the invention of primitive religion as supposed insurance against these calamities. From magic and ghosts, religion evolved through spirits and fetishes to taboos. Every primitive tribe had its tree of forbidden fruit, literally the apple but figuratively consisting of a thousand branches hanging heavy with all sorts of taboos. And the forbidden tree always said, “Thou shalt not.” 운수(運數)에 대한 두려움과 불운(不運)에 대한 무서움이 이런 불행에 대비한 소위 보험으로써 원시 종교를 고안하도록 액면 그대로 인간을 몰아넣었습니다. 종교는 마술과 유령(幽靈)들로부터 영(靈)들과 주물(呪物)들을 거쳐 금기(禁忌)들로 진화했습니다. 원시 부족마다, 사실 사과나무지만 상징적으로 온갖 종류의 금기(禁忌)가 가득 매달린 수천 가지로 이루어진 금단(禁斷)의 열매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단(禁斷)의 나무는 항상 “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89:2.2 (975.6) As the savage mind evolved to that point where it envisaged both good and bad spirits, and when the taboo received the solemn sanction of evolving religion, the stage was all set for the appearance of the new conception of sin. The idea of sin was universally established in the world before revealed religion ever made its entry. It was only by the concept of sin that natural death became logical to the primitive mind. Sin was the transgression of taboo, and death was the penalty of sin. 야만인의 마음이 선한 영(靈)과 악한 영(靈)들을 둘 다 상상하고, 금기(禁忌)가 진화하는 종교의 정식 허가를 인정하는 그런 지점까지 진화하자, 새로운 죄(罪)의 개념이 출현할 무대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죄(罪)에 대한 관념은 계시 종교가 들어오기도 전에 세상에 널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죄(罪)의 개념에 의해서만, 자연사(自然死)가 원시인의 마음에 그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罪)는 금기(禁忌)의 위반(違反)이었고, 죽음은 죄(罪)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89:2.3 (975.7) Sin was ritual, not rational; an act, not a thought. And this entire concept of sin was fostered by the lingering traditions of Dilmun and the days of a little paradise on earth. The tradition of Adam and the Garden of Eden also lent substance to the dream of a onetime “golden age” of the dawn of the races. And all this confirmed the ideas later expressed in the belief that man had his origin in a special creation, that he started his career in perfection, and that transgression of the taboos — sin — brought him down to his later sorry plight. 죄(罪)는 합리적이지 않고, 의식(儀式 예식)적이었고, 생각이 아니라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딜문의 오랜 전통과 지상의 작은 낙원 시대가 이런 모든 죄의 개념을 촉진했습니다. 아담과 에덴동산의 전통 또한, 한때 인류 여명(黎明)기의 “황금기”에 대한 몽상에 실체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게 창조되어, 완전하게 생애를 시작했고, 금기(禁忌)의 위반(違反) – 죄(罪)로 인해 인간은 나중에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다는 믿음으로 표현된 후일의 사고방식을 이 모든 것이 확증했습니다.

89:2.4 (976.1) The habitual violation of a taboo became a vice; primitive law made vice a crime; religion made it a sin. Among the early tribes the violation of a taboo was a combined crime and sin. Community calamity was always regarded as punishment for tribal sin. To those who believed that prosperity and righteousness went together, the apparent prosperity of the wicked occasioned so much worry that it was necessary to invent hells for the punishment of taboo violators; the numbers of these places of future punishment have varied from one to five. 상습적인 금기(禁忌) 위반(違反)은 악덕(惡德)이 되었습니다. 원시법이 악덕(惡德)을 범죄로 만들었습니다. 종교가 그것을 죄(罪)로 만들었습니다. 초기 부족 중에서 금기(禁忌) 위반(違反)은 결합한 범죄(犯罪)와 죄(罪)였습니다. 공동체의 재난은 언제나 부족의 죄(罪)에 대한 처벌로 여겨졌습니다. 번영과 공의가 함께 간다고 믿던 자들에게, 악인들의 외관상 번영이 아주 많이 걱정스러워서, 금기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지옥들을 고안해야 했습니다. 장차 처벌될 이런 장소의 수(數)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다양했습니다.

89:2.5 (976.2) The idea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early appeared in primitive religion. Men would ask forgiveness at a public meeting for sins they intended to commit the following week. Confession was merely a rite of remission, also a public notification of defilement, a ritual of crying “unclean, unclean!” Then followed all the ritualistic schemes of purification. All ancient peoples practiced these meaningless ceremonies. Many apparently hygienic customs of the early tribes were largely ceremonial. 고백과 용서의 개념은 일찍이 원시 종교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다음 주에 범하려고 하는 죄에 대해 공개모임에서 용서를 구하곤 했습니다. 고백은 사면(赦免)의 의례(儀禮)에 불과했고, 또한 공개적인 오욕(汚辱) 통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는 의식(儀式)이었습니다. 그다음에 정화(淨化)의 모든 의식 계획이 뒤를 이었습니다. 모든 고대 민족은 이렇게 의미 없는 의례(儀禮)를 행했습니다. 초기 부족들의 언뜻 보기에 여러 위생 관습은 대부분 의례적이었습니다.

3. Renunciation and Humiliation 금욕(禁慾)과 굴욕(屈辱)

89:3.1 (976.3) Renunciation came as the next step in religious evolution; fasting was a common practice. Soon it became the custom to forgo many forms of physical pleasure, especially of a sexual nature. The ritual of the fast was deeply rooted in many ancient religions and has been handed down to practically all modern theologic systems of thought. 금욕(禁慾)이 종교 진화의 다음 단계로 왔습니다. 금식(禁食)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러 형태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 본성의 쾌락 없이 지내는 관습이 되었습니다. 금식(禁食)의 관례는 여러 고대 종교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사실 모든 현대 신학 사상 체계에 유전되었습니다.

89:3.2 (976.4) Just about the time barbarian man was recovering from the wasteful practice of burning and burying property with the dead, just as the economic structure of the races was beginning to take shape, this new religious doctrine of renunciation appeared, and tens of thousands of earnest souls began to court poverty. Property was regarded as a spiritual handicap. These notions of the spiritual dangers of material possession were widespreadly entertained in the times of Philo and Paul, and they have markedly influenced European philosophy ever since. 야만인이 죽은 사람의 재산을 태우고 매장하는 비경제적 관행에서 막 회복되고 있을 무렵, 인류의 경제 구조가 바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자, 금욕(禁慾)에 대한 이런 새로운 종교적 교리가 출현했으며, 수만 명의 진지한 혼(魂)들이 가난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재산은 영적 장애로 여겨졌습니다. 물질적 소유가 영적 위험 상태라는 이런 개념이 필로와 바울의 시대에 널리 수용되었고, 그것들은 이후 줄곧 유럽의 철학에 뚜렷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89:3.3 (976.5) Poverty was just a part of the ritual of the mortification of the flesh which, unfortunately, became incorporated into the writings and teachings of many religions, notably Christianity. Penance is the negative form of this ofttimes foolish ritual of renunciation. But all this taught the savage self-control, and that was a worth-while advancement in social evolution. Self-denial and self-control were two of the greatest social gains from early evolutionary religion. Self-control gave man a new philosophy of life; it taught him the art of augmenting life’s fraction by lowering the denominator of personal demands instead of always attempting to increase the numerator of selfish gratification. 가난은 공교롭게도 여러 종교 중 특히 기독교의 저작과 가르침들에 편입된 바로 금욕 예식의 일부였습니다. 참회(懺悔)는 종종 이렇게 어리석은 금욕(禁慾) 예식의 부정적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야만인에게 자제심을 가르쳤고, 그것은 사회 진화에서 상당한 진보였습니다. 극기(克己)와 자제심(自制心)은 초기 진화 종교에서 얻은 가장 큰 두 가지 사회적 수익이었습니다. 자제심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철학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이기적 충족의 분자(分子)를 언제나 확대하려고 꾀하는 대신에 개인적 요구의 분모(分母)를 낮춰서 삶의 분수(分數)를 증대하는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89:3.4 (976.6) These olden ideas of self-discipline embraced flogging and all sorts of physical torture. The priests of the mother cult were especially active in teaching the virtue of physical suffering, setting the example by submitting themselves to castration. The Hebrews, Hindus, and Buddhists were earnest devotees of this doctrine of physical humiliation. 자기 수양의 이런 오래된 관념은 태형(笞刑 매질)과 모든 종류의 육체적 고문을 포함했습니다. 모친 종파의 사제들이 스스로 거세하는 본을 보여서, 육체적 고통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히브리인(人)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이 이런 육체적 굴종(屈從) 교리의 진지한 추종자들이었습니다.

89:3.5 (976.7) All through the olden times men sought in these ways for extra credits on the self-denial ledgers of their gods. It was once customary, when under some emotional stress, to make vows of self-denial and self-torture. In time these vows assumed the form of contracts with the gods and, in that sense, represented true evolutionary progress in that the gods were supposed to do something definite in return for this self-torture and mortification of the flesh. Vows were both negative and positive. Pledges of this harmful and extreme nature are best observed today among certain groups in India. 옛날부터 줄곧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들에 속한 극기(克己) 원장부(元帳簿)에서 추가(追加) 공적(功績)을 얻으려 했습니다. 감정적인 어떤 압박을 받을 때, 극기(克己)와 고행(苦行 자기 학대)의 맹세가 한때 관습이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이런 맹세(盟誓)는 신과 같은 존재들과 계약의 형태를 취했고, 그런 의미로, 이런 고행(苦行 자기 학대)과 금욕(禁慾) 대신에 신과 같은 존재들이 확실한 뭔가를 하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진화적 진보를 나타냈습니다. 맹세(盟誓)는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로운 과격한 종류의 서약이 오늘날 인도의 특정 집단에서 가장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89:3.6 (977.1) It was only natural that the cult of renunciation and humiliation should have paid attention to sexual gratification. The continence cult originated as a ritual among soldiers prior to engaging in battle; in later days it became the practice of “saints.” This cult tolerated marriage only as an evil lesser than fornication. Many of the world’s great religions have been adversely influenced by this ancient cult, but none more markedly than Christianity. The Apostle Paul was a devotee of this cult, and his personal views are reflected in the teachings which he fastened onto Christian theology: “It is good for a man not to touch a woman.” “I would that all men were even as I myself.” “I say, therefore, to the unmarried and widows, it is good for them to abide even as I.” Paul well knew that such teachings were not a part of Jesus’ gospel, and his acknowledgment of this is illustrated by his statement, “I speak this by permission and not by commandment.” But this cult led Paul to look down upon women. And the pity of it all is that his personal opinions have long influenced the teachings of a great world religion. If the advice of the tentmaker-teacher were to be literally and universally obeyed, then would the human race come to a sudden and inglorious end. Furthermore, the involvement of a religion with the ancient continence cult leads directly to a war against marriage and the home, society’s veritable foundation and the basic institution of human progress. And it is not to be wondered at that all such beliefs fostered the formation of celibate priesthoods in the many religions of various peoples. 아주 당연하게 금욕(禁慾)과 굴욕(屈辱)의 종파는 성적 충족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금욕 종파는 전투에 참여하기 전 군인들 사이에서 의례로서 생겼습니다. 나중에 그것은 “성도들”의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 종파는 간음보다는 덜 나쁜 것으로서 결혼을 묵인할 뿐이었습니다(고전7:2, 9). 세계적으로 위대한 여러 종교가 이런 고대 종파의 악영향(惡影響)을 받았지만, 기독교보다 두드러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종파의 헌신적인 추종자였고, 그의 개인적 견해가 자신이 기독교 신학으로 고정했던 가르침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만지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1).” “나는 모든 남성이 심지어 나 자신과 같기를 원하노라(고전7:7).” “그런 까닭에, 내가 미혼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으니라(고전7:8).” 바울은 그런 가르침이 예수 복음의 부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서, 이런 그의 자백은, “내가 이렇게 말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라(고전7:6).”라는 자기 말로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종파는 바울이 여성을 대수롭지 않게 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개인적인 견해가 위대한 세계 종교의 가르침들에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천막을 만드는 교사의 충고를 글자 그대로 널리 따랐다면, 인류는 갑자기 수치스럽게 끝났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대 금욕 종파에 연루된 종교는 머지않아, 결혼과 가정, 진정한 사회의 토대이며 인간 진보의 기본 제도에 반대하는 전쟁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믿음이 다양한 민족의 여러 종교에서 독신 사제직의 형성을 촉진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89:3.7 (977.2) Someday man should learn how to enjoy liberty without license, nourishment without gluttony, and pleasure without debauchery. Self-control is a better human policy of behavior regulation than is extreme self-denial. Nor did Jesus ever teach these unreasonable views to his followers. 언젠가 사람은 방종 없는 해방, 과식 없는 영양 상태와 방탕 없이 즐겁게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제심은 극단적 극기(克己)보다 더 나은 행동 조절의 인간 방침입니다. 예수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이런 견해를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4. Origins of Sacrifice 희생물의 기원

89:4.1 (977.3) Sacrifice as a part of religious devotions, like many other worshipful rituals, did not have a simple and single origin. The tendency to bow down before power and to prostrate oneself in worshipful adoration in the presence of mystery is foreshadowed in the fawning of the dog before its master. It is but one step from the impulse of worship to the act of sacrifice. Primitive man gauged the value of his sacrifice by the pain which he suffered. When the idea of sacrifice first attached itself to religious ceremonial, no offering was contemplated which was not productive of pain. The first sacrifices were such acts as plucking hair, cutting the flesh, mutilations, knocking out teeth, and cutting off fingers. As civilization advanced, these crude concepts of sacrifice were elevated to the level of the rituals of self-abnegation, asceticism, fasting, deprivation, and the later Christian doctrine of sanctification through sorrow, suffering, and the mortification of the flesh. 종교적 헌신의 일부로써 희생물은, 여러 다른 숭배 의식들처럼, 단순한 단일기원을 갖지 않았습니다. 권세 앞에서 굴복하고 신비가 있을 때 숭배의 예찬으로 엎드리는 경향은 개가 주인 앞에서 아양을 부림에 슬쩍 견줄 수 있습니다. 숭배의 자극에서 희생물의 행위까지 한걸음에 불과합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자기 희생물의 가치를 쟀습니다. 희생물의 개념이 종교의식에 처음 부여될 때, 고통이 없는 제물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희생물은 머리채 쥐어뜯기, 살 도려내기, 수족 절단, 치아를 쳐서 뽑기 및 손가락을 잘라내는 그런 행위들이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렇게 미숙한 희생물 개념은 자기희생, 금욕주의, 금식(禁食), 궁핍 그리고 나중에는 슬픔, 고통과 금욕(禁慾)을 거쳐 기독교 성화(聖化) 교리의 수준으로 향상했습니다.

89:4.2 (977.4) Early in the evolution of religion there existed two conceptions of the sacrifice: the idea of the gift sacrifice, which connoted the attitude of thanksgiving, and the debt sacrifice, which embraced the idea of redemption. Later there developed the notion of substitution. 종교의 진화 초기에 두 가지 희생물 개념이 있었습니다. 감사의 태도가 포함된 선물 희생물과 구속(救贖 되찾는 상환) 개념이 포함된 빚 희생물의 개념이었습니다. 나중에 대속(代贖 대신 속죄함)의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89:4.3 (977.5) Man still later conceived that his sacrifice of whatever nature might function as a message bearer to the gods; it might be as a sweet savor in the nostrils of deity. This brought incense and other aesthetic features of sacrificial rituals which developed into sacrificial feasting, in time becoming increasingly elaborate and ornate. 인간은 훨씬 나중에, 어떤 종류의 희생물이라도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메시지 전달자로서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신(神)의 콧구멍에 달콤한 향기와 같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향내와 희생제의 다른 심미적 특성이 생겼고, 시간이 지나자 점차 더 공들여서 장식한 희생 축제로 발전했습니다.

89:4.4 (978.1) As religion evolved, the sacrificial rites of conciliation and propitiation replaced the older methods of avoidance, placation, and exorcism. 종교가 진화하면서, 회유(懷柔 어루만져서 달램)와 화해(和解)의 희생 의례가 더 오래된 회피, 노여움 삭이기와 축사(逐邪 귀신 내쫓는 액막이)의 방법을 대신하여 들어섰습니다.

89:4.5 (978.2) The earliest idea of the sacrifice was that of a neutrality assessment levied by ancestral spirits; only later did the idea of atonement develop. As man got away from the notion of the evolutionary origin of the race, as the traditions of the days of the Planetary Prince and the sojourn of Adam filtered down through time, the concept of sin and of original sin became widespread, so that sacrifice for accidental and personal sin evolved into the doctrine of sacrifice for the atonement of racial sin. The atonement of the sacrifice was a blanket insurance device which covered even the resentment and jealousy of an unknown god. 가장 초기의 희생물 개념은 조상 전래의 영(靈)들이 부과한 중립 과세의 개념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속죄(贖罪 죄 갚는)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인간이 인류의 진화적 기원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고, 행성 왕자 시절과 아담이 머물던 전통이 세월 속에 스며들면서, 죄(罪)와 원죄(原罪)의 개념이 퍼지게 되어서, 우발적인 개인적 죄(罪)를 위한 희생물이 종족의 죄(罪)를 위해 속죄(贖罪)하는 희생물 교리로 서서히 발전했습니다. 희생물 속죄는, 알려지지 않은 신과 같은 존재의 분노와 질투까지도 포함하는 전종목보험이었습니다.

89:4.6 (978.3) Surrounded by so many sensitive spirits and grasping gods, primitive man was face to face with such a host of creditor deities that it required all the priests, ritual, and sacrifices throughout an entire lifetime to get him out of spiritual debt.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or racial guilt, started every person out in serious debt to the spirit powers. 그렇게 많은 과민한 영(靈)들과 탐욕스러운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둘러싸인, 원시인은 그렇게 많은 채권자 신(神)들을 대면하고 있어서, 영적 빚을 면하기 위해 한평생 내내 온갖 사제, 의례와 희생물이 필요했습니다. 원죄(原罪) 즉 종족 죄책감의 교리로 모든 사람은 영(靈) 권세에 심각한 빚을 지고 시작했습니다.

89:4.7 (978.4) Gifts and bribes are given to men; but when tendered to the gods, they are described as being dedicated, made sacred, or are called sacrifices. Renunciation was the negative form of propitiation; sacrifice became the positive form. The act of propitiation included praise, glorification, flattery, and even entertainment. And it is the remnants of these positive practices of the olden propitiation cult that constitute the modern forms of divine worship. Present-day forms of worship are simply the ritualization of these ancient sacrificial techniques of positive propitiation. 사람들은 선물과 뇌물을 받지만,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드릴 때, 그것들은 바쳐지고, 신성한 것이라 말하고, 희생물로 불립니다. 금욕(禁慾)은 화해(和解)의 부정적 형태였습니다. 희생물은 긍정적 형태가 되었습니다. 화해(和解)의 행위는 찬양, 영광을 기림, 아첨 및 연회까지도 포함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화해(和解) 종파의 긍정적 관례의 이런 자취가 현대적 형태의 신적 경배를 구성합니다. 오늘날 경배 형태는 긍정적 화해에 속한 이런 고대 희생물 기법을 단순히 의식(儀式)화한 것입니다.

89:4.8 (978.5) Animal sacrifice meant much more to primitive man than it could ever mean to modern races. These barbarians regarded the animals as their actual and near kin. As time passed, man became shrewd in his sacrificing, ceasing to offer up his work animals. At first he sacrificed the best of everything, including his domesticated animals. 동물 희생물은 원시인에게, 그것이 현대 종족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뜻했습니다. 이런 야만인들은 그 동물들을 실제로 자기와 가까운 친족으로 여겼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은 제물로 바칠 때 현명하게 되어서, 일하는 자기 동물을 제물로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길들인 동물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 중 최고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89:4.9 (978.6) It was no empty boast that a certain Egyptian ruler made when he stated that he had sacrificed: 113,433 slaves, 493,386 head of cattle, 88 boats, 2,756 golden images, 331,702 jars of honey and oil, 228,380 jars of wine, 680,714 geese, 6,744,428 loaves of bread, and 5,740,352 sacks of corn. And in order to do this he must needs have sorely taxed his toiling subjects. 어떤 이집트 통치자가 자신이 제물로 바쳤다고 했을 때, 그것은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노예 113,433명, 소 493,386두, 배 88척, 금 우상 2,756개, 꿀과 기름 331,702단지, 포도주 228,380단지, 거위 680,714마리, 빵6,744,428덩어리, 옥수수 5,740,352부대. 그리고 이렇게 하려고 그는 어떻게든지 수고하는 자기 백성을 심하게 혹사해야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89:4.10 (978.7) Sheer necessity eventually drove these semisavages to eat the material part of their sacrifices, the gods having enjoyed the soul thereof. And this custom found justification under the pretense of the ancient sacred meal, a communion service according to modern usage. 순전히 어쩔 수 없어서, 이런 반(半)야만인들은 결국 자기 희생물의 물질적 부분을 먹지 않을 수 없었고, 신과 같은 존재들은 그것의 혼(魂)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고대 신성한 식사, 현대적 관례에 따르면 성찬식이라는 구실로 정당화되었습니다.

5. Sacrifices and Cannibalism 희생물과 식인(食人) 풍습

89:5.1 (978.8) Modern ideas of early cannibalism are entirely wrong; it was a part of the mores of early society. While cannibalism is traditionally horrible to modern civilization, it was a part of the social and religious structure of primitive society. Group interests dictated the practice of cannibalism. It grew up through the urge of necessity and persisted because of the slavery of superstition and ignorance. It was a social, economic, religious, and military custom. 초기 식인 풍습에 대한 현대적 관념은 완전히 잘못입니다. 그것은 초기 사회적 관습의 부분이었습니다. 식인 풍습은 전통적으로 현대 문명 사회에 끔찍하지만, 원시 사회의 사회 및 종교 구조의 일부였습니다.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식인 풍습의 관례가 결정되었습니다. 그것은 필요성의 충동을 통해 서서히 생겨나 미신과 무지의 노예 상태 때문에 지속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군사적 관습이었습니다.

89:5.2 (979.1) Early man was a cannibal; he enjoyed human flesh, and therefore he offered it as a food gift to the spirits and his primitive gods. Since ghost spirits were merely modified men, and since food was man’s greatest need, then food must likewise be a spirit’s greatest need. 초기 인간은 식인종이었습니다. 그는 인육(人肉)을 즐겼기 때문에, 그는 영(靈)들과 자신의 원시적인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그것을 음식 선물로 바쳤습니다. 유령(幽靈) 영(靈)들은 그저 수정된 인간들에 불과했고, 음식은 사람의 가장 큰 욕구였기에, 음식이 또한 영(靈)의 가장 큰 욕구였습니다.

89:5.3 (979.2) Cannibalism was once well-nigh universal among the evolving races. The Sangiks were all cannibalistic, but originally the Andonites were not, nor were the Nodites and Adamites; neither were the Andites until after they had become grossly admixed with the evolutionary races. 식인 풍습은 한때 진화 종족들 사이에서 거의 누구나 다 행했습니다. 상긱들은 모두 동족끼리 잡아먹었지만, 원래 안돈-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고,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드-사람들도 진화 종족들과 철저히 섞이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89:5.4 (979.3) The taste for human flesh grows. Having been started through hunger, friendship, revenge, or religious ritual, the eating of human flesh goes on to habitual cannibalism. Man-eating has arisen through food scarcity, though this has seldom been the underlying reason. The Eskimos and early Andonites, however, seldom were cannibalistic except in times of famine. The red men, especially in Central America, were cannibals. It was once a general practice for primitive mothers to kill and eat their own children in order to renew the strength lost in childbearing, and in Queensland the first child is still frequently thus killed and devoured. In recent times cannibalism has been deliberately resorted to by many African tribes as a war measure, a sort of frightfulness with which to terrorize their neighbors. 인육(人肉)의 취미가 늘어납니다. 굶주림, 친목, 보복이나 종교 예식을 통해 시작되어, 인육(人肉) 먹기는 상습적인 식인 풍습으로 나아갑니다. 식인(食人)은 식량 부족으로 생겼지만, 그래도 이것은 좀처럼 근원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한편 에스키모 사람들과 초기 안돈 사람들은 기근의 때 외에는 좀처럼 식인(食人)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앙 아메리아의 홍인들은 식인종들이었습니다. 한때 원시인 엄마들이 해산 중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려고 자기 자녀를 죽여서 먹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고, 퀸즐랜드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첫 아이를 종종 죽여서 먹습니다. 최근에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은 식인 풍습을 전시 수단으로써, 일부러 자기 이웃들을 협박하는 끔찍한 유형으로 사용했습니다.

89:5.5 (979.4) Some cannibalism resulted from the degeneration of once superior stocks, but it was mostly prevalent among the evolutionary races. Man-eating came on at a time when men experienced intense and bitter emotions regarding their enemies. Eating human flesh became part of a solemn ceremony of revenge; it was believed that an enemy’s ghost could, in this way, be destroyed or fused with that of the eater. It was once a widespread belief that wizards attained their powers by eating human flesh. 일부 식인 풍습은 한때 우수한 혈통의 퇴화로 생겼지만, 그것은 주로 진화 종족 중에서 널리 행해졌습니다. 식인(食人)은 사람들이 자기 대적들에 관해 격앙된 사무치는 감정을 겪었을 때 등장했습니다. 식인(食人)은 엄숙한 보복(報復) 의례의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적의 유령(幽靈)이 죽거나 먹는 사람의 유령(幽靈)과 융합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한때 요술쟁이들이 인육을 먹어서 자기들의 효험을 봤다는 통념이 만연했습니다.

89:5.6 (979.5) Certain groups of man-eaters would consume only members of their own tribes, a pseudospiritual inbreeding which was supposed to accentuate tribal solidarity. But they also ate enemies for revenge with the idea of appropriating their strength. It was considered an honor to the soul of a friend or fellow tribesman if his body were eaten, while it was no more than just punishment to an enemy thus to devour him. The savage mind made no pretensions to being consistent. 어떤 식인(食人)종 집단은 오직 자기 부족원들만 먹곤 했는데, 허위적으로 영적인 동종(同種) 번식이 부족 결속을 강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대적들의 힘을 가로챈다는 생각으로 앙갚음하려고 대적들을 먹었습니다. 친구나 동료 부족원의 몸을 먹는 것은, 그 혼(魂)에 영예지만. 이렇게 대적을 먹는 것은 적에게 단지 형벌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야만인들의 마음에는 일관된 주장이 없었습니다.

89:5.7 (979.6) Among some tribes aged parents would seek to be eaten by their children; among others it was customary to refrain from eating near relations; their bodies were sold or exchanged for those of strangers. There was considerable commerce in women and children who had been fattened for slaughter. When disease or war failed to control population, the surplus was unceremoniously eaten. 어떤 부족 중 나이 든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먹히려고 애쓰곤 했습니다. 다른 부족 중에서는 근친을 먹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을 팔거나 낯선 사람들의 시신과 교환했습니다. 도살하려고 살찌운 여성들과 아이들을 꽤 많이 거래했습니다. 질병 혹은 전쟁으로 끝내 주민의 수(數)가 조절되지 않으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잉여 수(數)를 먹었습니다.

89:5.8 (979.7) Cannibalism has been gradually disappearing because of the following influences: 식인 풍습은 다음의 영향력들로 인해 점차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89:5.9 (979.8) 1. It sometimes became a communal ceremony, the assumption of collective responsibility for inflicting the death penalty upon a fellow tribesman. The blood guilt ceases to be a crime when participated in by all, by society. The last of cannibalism in Asia was this eating of executed criminals. 그것은 종종 동료 부족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공동 책임을 인수하는 공동 의식이 되었습니다. 유혈의 죄는 전체, 사회가 참여하면,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식인 풍습은 처형된 범인들을 이렇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89:5.10 (979.9) 2. It very early became a religious ritual, but the growth of ghost fear did not always operate to reduce man-eating. 식인 풍습은 아주 초기에 종교 의례가 되었지만, 유령(幽靈) 공포의 발달이 언제나 식인(食人)을 줄이도록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89:5.11 (979.10) 3. Eventually it progressed to the point where only certain parts or organs of the body were eaten, those parts supposed to contain the soul or portions of the spirit. Blood drinking became common, and it was customary to mix the “edible” parts of the body with medicines. 결국 식인 풍습은 몸의 특정 부분이나 기관(器官)들, 혼(魂)이나 영(靈)의 부분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그런 부분들만 먹을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흔히 피를 마시게 되었고, 관습적으로 몸의 “식용” 부분을 약물과 섞었습니다.

89:5.12 (980.1) 4. It became limited to men; women were forbidden to eat human flesh. 식인 풍습은 남성들에게 한정되었고, 여성들은 인육(人肉)을 먹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89:5.13 (980.2) 5. It was next limited to the chiefs, priests, and shamans. 다음으로 족장들, 사제들과 무당들로 한정했습니다.

89:5.14 (980.3) 6. Then it became taboo among the higher tribes. The taboo on man-eating originated in Dalamatia and slowly spread over the world. The Nodites encouraged cremation as a means of combating cannibalism since it was once a common practice to dig up buried bodies and eat them. 그러더니 식인 풍습은 더 높은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禁忌)가 되었습니다. 식인(食人) 금기는 달라마시아에서 시작하여 천천히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한때 일반적 관습으로 매장한 시신을 파내서 먹었기 때문에 놋-사람들은 식인 풍습과 싸우는 수단으로 화장(火葬)을 장려했습니다.

89:5.15 (980.4) 7. Human sacrifice sounded the death knell of cannibalism. Human flesh having become the food of superior men, the chiefs, it was eventually reserved for the still more superior spirits; and thus the offering of human sacrifices effectively put a stop to cannibalism, except among the lowest tribes. When human sacrifice was fully established, man-eating became taboo; human flesh was food only for the gods; man could eat only a small ceremonial bit, a sacrament. 인간 희생물은 식인 풍습의 종말을 알렸습니다. 인육(人肉)은 우월한 사람들, 족장들의 음식이 되었고, 결국 훨씬 더 우월한 영(靈)들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부족들 사이의 식인 풍습을 제외하고, 인간 희생물의 공물(供物)이 실제로 식인 풍습을 끝냈습니다. 인간 희생물이 완전히 확립되자, 식인(食人)은 금기가 되었습니다. 인육(人肉)은 신과 같은 존재들만을 위한 음식이었습니다. 사람은 의례용 작은 조각, 성찬(聖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89:5.16 (980.5) Finally animal substitutes came into general use for sacrificial purposes, and even among the more backward tribes dog-eating greatly reduced man-eating. The dog was the first domesticated animal and was held in high esteem both as such and as food. 마지막에 희생물 용도로 동물 대용물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더 퇴보적인 부족 중에서도 구육(狗肉 개고기) 먹기로 식인(食人)이 훨씬 줄었습니다. 개는 가장 먼저 길들인 동물이었고, 그 자체와 음식으로 매우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6. Evolution of Human Sacrifice 인간 희생물의 진화

89:6.1 (980.6) Human sacrifice was an indirect result of cannibalism as well as its cure. Providing spirit escorts to the spirit world also led to the lessening of man-eating as it was never the custom to eat these death sacrifices. No race has been entirely free from the practice of human sacrifice in some form and at some time, even though the Andonites, Nodites, and Adamites were the least addicted to cannibalism. 인간 희생물은 식인 풍습의 간접적 결과뿐만 아니라 그 치료법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희생물을 먹는 것은 결코 관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영(靈) 세계로 영(靈) 호위자들을 마련하면서 또한 식인(食人)이 줄어들었습니다. 안돈-사람들, 놋-사람들과 아담-사람들이 식인 풍습에 가장 최소로 빠졌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어떤 시기에, 인간 희생물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종족은 없었습니다.

89:6.2 (980.7) Human sacrifice has been virtually universal; it persisted in the religious customs of the Chinese, Hindus, Egyptians, Hebrews, Mesopotamians, Greeks, Romans, and many other peoples, even on to recent times among the backward African and Australian tribes. The later American Indians had a civilization emerging from cannibalism and, therefore, steeped in human sacrifice, especially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The Chaldeans were among the first to abandon the sacrificing of humans for ordinary occasions, substituting therefor animals. About two thousand years ago a tenderhearted Japanese emperor introduced clay images to take the place of human sacrifices, but it was less than a thousand years ago that these sacrifices died out in northern Europe. Among certain backward tribes, human sacrifice is still carried on by volunteers, a sort of religious or ritual suicide. A shaman once ordered the sacrifice of a much respected old man of a certain tribe. The people revolted; they refused to obey. Whereupon the old man had his own son dispatch him; the ancients really believed in this custom. 인간 희생물은 사실상 누구나 다 행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 힌두인, 이집트인, 히브리인, 메소포타미아인, 그리스인, 로마인과 여러 다른 민족들의 종교 관습으로 지속했고, 심지어 퇴보적인 아프리카인과 오스트레일리아 부족 중에서 최근까지도 지속했습니다. 후대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식인 풍습에서 벗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특히 중남미에서 인간 희생물에 깊이 빠졌습니다. 칼데아인들은 일상적 행사에 인간 희생물을 그만두고 그 대신에 동물들로 대체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약 2천 년 전, 인정 많은 어느 일본 황제가 인간 희생물 대신에 진흙 형상을 받아들였지만, 이런 희생물이 북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지, 1천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퇴보적 부족 중에서 자원자들이 종교적 혹은 관례적 자살 유형의 인간 희생물을 여전히 계속합니다. 무당이 한때 어떤 부족의 아주 훌륭한 노인을 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자기 아들이 그를 죽이게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관습을 실제로 믿었습니다.

89:6.3 (980.8) There is no more tragic and pathetic experience on record, illustrative of the heart-tearing contentions between ancient and time-honored religious customs and the contrary demands of advancing civilization, than the Hebrew narrative of Jephthah and his only daughter. As was common custom, this well-meaning man had made a foolish vow, had bargained with the “god of battles,” agreeing to pay a certain price for victory over his enemies. And this price was to make a sacrifice of that which first came out of his house to meet him when he returned to his home. Jephthah thought that one of his trusty slaves would thus be on hand to greet him, but it turned out that his daughter and only child came out to welcome him home. And so, even at that late date and among a supposedly civilized people, this beautiful maiden, after two months to mourn her fate, was actually offered as a human sacrifice by her father, and with the approval of his fellow tribesmen. And all this was done in the face of Moses’ stringent rulings against the offering of human sacrifice. But men and women are addicted to making foolish and needless vows, and the men of old held all such pledges to be highly sacred. 고대의 유서(由緖) 깊은 종교적 관습과 상반되는 진보적 문명의 요구 사이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논쟁의 예증으로 기록(삿11:28-40)에 남아 있는, 입다와 그의 무남독녀에 대한 히브리 이야기보다 더 비통하고 애처로운 경험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관습대로, 좋은 뜻으로 이 사람은 어리석은 맹세를 하여, 자기 적들에게 승리한 대가를 치르기로 응하면서, “전투의 신과 같은 존재”와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가는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러 나온 자를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입다는 충실한 자기 노예 중 하나가 그렇게 그 자리에서 자신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기 외동딸이 그를 집으로 환영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후일 문명인으로 여겼던 민족 중에서도, 이 아름다운 소녀는 두 달간 자기 숙명을 슬퍼한 후, 그녀의 아버지와 동료 부족들의 승인을 얻어 실제로 인간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인간 희생물을 바치지 말라는 모세의 엄격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들은 어리석고 쓸데없는 맹세에 탐닉(耽溺 즐겨서 빠짐)했고, 옛날 사람들은 그런 모든 서약을 대단히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89:6.4 (981.1) In olden times, when a new building of any importance was started, it was customary to slay a human being as a “foundation sacrifice.” This provided a ghost spirit to watch over and protect the structure. When the Chinese made ready to cast a bell, custom decreed the sacrifice of at least one maiden for the purpose of improving the tone of the bell; the girl chosen was thrown alive into the molten metal. 옛날에는, 무엇이든 중요한 새 건축을 시작하면, “기초 희생물”로 인간을 죽이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렇게 그 건축물을 지켜보고 수호하는 유령(幽靈) 영(靈)이 생겼습니다. 중국인들은 쇳물을 부어 종(鐘)을 만들 준비를 하면서, 관습에 의해 종의 음질 개선을 위해 적어도 처녀 한 명을 희생물로 정했습니다. 선발된 소녀는 녹은 쇳물에 산 채로 던져졌습니다.

89:6.5 (981.2) It was long the practice of many groups to build slaves alive into important walls. In later times the northern European tribes substituted the walling in of the shadow of a passerby for this custom of entombing living persons in the walls of new buildings. The Chinese buried in a wall those workmen who died while constructing it. 노예들을 산 채로 중요한 방벽(防壁)의 일부를 만드는 여러 집단의 관습은 오래되었습니다. 후대에 북유럽 부족들은 새 건물의 방벽에 산 사람들을 매장하는 이런 관습 대신에 남의 눈에 띄지 않은 통행인으로 벽을 쌓았습니다. 중국인들은 건설 중에 죽은 노동자들을 벽에 묻었습니다.

89:6.6 (981.3) A petty king in Palestine, in building the walls of Jericho, “laid the foundation thereof in Abiram, his first-born, and set up the gates thereof in his youngest son, Segub.” At that late date, not only did this father put two of his sons alive in the foundation holes of the city’s gates, but his action is also recorded as being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Moses had forbidden these foundation sacrifices, but the Israelites reverted to them soon after his death. The twentieth-century ceremony of depositing trinkets and keepsakes in the cornerstone of a new building is reminiscent of the primitive foundation sacrifices. 팔레스타인의 작은 왕은 여리고 성벽을 쌓으면서, “자기 장남 아비람으로 그 토대를 세웠고, 막내아들 세굽으로 그 성문을 세웠습니다.” 후일, 이 아버지는 자기 두 아들을 산 채로 그 도시 성문의 기초 구덩이에 넣었을 뿐 아니라 그 행위는 “주의 말씀을 따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왕상16:33 벧엘의 히엘, 수6:26). 모세는 이런 기초 희생물을 금지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 바로 기초 희생물로 되돌아갔습니다. 새 건물의 초석(礎石 주춧돌)에 자질구레한 장신구들과 유품들을 두는 20세기의 의례는 원시적 기초 희생물을 생각나게 합니다.

89:6.7 (981.4) It was long the custom of many peoples to dedicate the first fruits to the spirits. And these observances, now more or less symbolic, are all survivals of the early ceremonies involving human sacrifice. The idea of offering the first-born as a sacrifice was widespread among the ancients, especially among the Phoenicians, who were the last to give it up. It used to be said upon sacrificing, “life for life.” Now you say at death, “dust to dust.” 영(靈)들에게 첫 열매를 바치는 것은 여러 민족의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이제 거의 상징적인 이런 관례들은 모두 인간 희생물과 관련된 초기 의례의 유물들입니다. 첫-아이를 희생물로 바치는 개념은 고대인들, 특히 그것을 마지막에 포기했던, 페니키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희생물을 바치면서 “생명은 생명으로(출21:23)”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죽을 때 “흙은 흙으로(전3:20)”라고 말합니다.

89:6.8 (981.5) The spectacle of Abraham constrained to sacrifice his son Isaac, while shocking to civilized susceptibilities, was not a new or strange idea to the men of those days. It was long a prevalent practice for fathers, at times of great emotional stress, to sacrifice their first-born sons. Many peoples have a tradition analogous to this story, for there once existed a world-wide and profound belief that it was necessary to offer a human sacrifice when anything extraordinary or unusual happened.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부득이 희생물로 바치는 광경(창22:9-10)은 문명화된 감수성(感受性)에 충격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롭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적으로 극심하게 긴박한 때에,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첫 번째 아들들을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오랜 관습이었습니다.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인간 희생물을 바치는 일이 필요하다는 세계적으로 뿌리가 깊은 믿음이 한때 있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이 이런 이야기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7. Modifications of Human Sacrifice 인간 희생물의 변용(變容)

89:7.1 (981.6) Moses attempted to end human sacrifices by inaugurating the ransom as a substitute. He established a systematic schedule which enabled his people to escape the worst results of their rash and foolish vows. Lands, properties, and children could be redeemed according to the established fees, which were payable to the priests. Those groups which ceased to sacrifice their first-born soon possessed great advantages over less advanced neighbors who continued these atrocious acts. Many such backward tribes were not only greatly weakened by this loss of sons, but even the succession of leadership was often broken. 모세는, 대체물로 몸값을 내고 자유롭게 되는 시대를 열어서 인간 희생물을 끝내려 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자신들의 분별없고 어리석은 맹세로 인한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일정을 확립했습니다. 토지, 재산과 자녀들은, 사제들에게 지급해야 할 정해져 있는 수수료에 따라, 상환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첫째 아이를 희생물로 바치기를 그만둔 그런 집단들은, 이렇게 잔학한 행위를 계속하던 덜 진보한 이웃들보다 커다란 이점을 빨리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퇴보한 여러 부족은 이렇게 자손들을 잃어버려서 대단히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종종 지도력의 계승조차 끊어졌습니다.

89:7.2 (982.1) An outgrowth of the passing child sacrifice was the custom of smearing blood on the house doorposts for the protection of the first-born. This was often done in connection with one of the sacred feasts of the year, and this ceremony once obtained over most of the world from Mexico to Egypt. 자녀 희생물을 빠져나가는 결과가 첫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집 문기둥에 피를 바르는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종종 그 해의 신성한 절기 중 하나와 관련하여 행해졌고, 이런 의식은 한때 멕시코에서 이집트까지 대부분의 전 세계에서 통용되었습니다.

89:7.3 (982.2) Even after most groups had ceased the ritual killing of children, it was the custom to put an infant away by itself, off in the wilderness or in a little boat on the water. If the child survived, it was thought that the gods had intervened to preserve him, as in the traditions of Sargon, Moses, Cyrus, and Romulus. Then came the practice of dedicating the first-born sons as sacred or sacrificial, allowing them to grow up and then exiling them in lieu of death; this was the origin of colonization. The Romans adhered to this custom in their scheme of colonization. 대부분의 집단이 자녀 살해 의식을 그만둔 뒤에도, 유아(幼兒)를 홀로 멀리 떨어진 광야나 물 위의 작은 배로 처치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남으면, 사르곤(78.8 & 143.4.1), 모세, 키루스와 로물루스의 전승처럼,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이 나타나 그를 보호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다음 맨 먼저 태어난 아들들을 신성한, 즉 희생물로 바쳐서, 키운 다음에 죽이는 대신에 그들을 추방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식민지 건설의 기원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건설을 계획하면서 이런 관습을 고수했습니다.

89:7.4 (982.3) Many of the peculiar associations of sex laxity with primitive worship had their origin in connection with human sacrifice. In olden times, if a woman met head-hunters, she could redeem her life by sexual surrender. Later, a maiden consecrated to the gods as a sacrifice might elect to redeem her life by dedicating her body for life to the sacred sex service of the temple; in this way she could earn her redemption money. The ancients regarded it as highly elevating to have sex relations with a woman thus engaged in ransoming her life. It was a religious ceremony to consort with these sacred maidens, and in addition, this whole ritual afforded an acceptable excuse for commonplace sexual gratification. This was a subtle species of self-deception which both the maidens and their consorts delighted to practice upon themselves. The mores always drag behind in the evolutionary advance of civilization, thus providing sanction for the earlier and more savagelike sex practices of the evolving races. 성적 방종이 원시적 숭배와 특이하게 결합한 대부분은 인간 희생물과 관련된 기원이 있습니다. 옛날에, 여성이 사람을 사냥하는 야만인을 만나면, 성적으로 항복하여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희생물로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바쳐진 처녀는 자기 몸을 평생 성전의 신성한 성적 봉사에 바쳐서 자기 생명을 상환(償還 대신 빚을 갚음)하기로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속전(贖錢 상환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렇게 자기 생명을 되찾으려고 몸값을 치르는 일에 종사하는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아주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신성한 처녀들과 자는 것은, 종교적 예식이었고, 게다가 이런 모든 의식은 평범한 성적 욕구 충족에 용인되는 변명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런 것은 처녀들과 상대자들 둘 다 자신들을 이용하기 좋아했던 교묘한 유형의 자기-기만이었습니다. 관습은, 이렇게 진화하는 종족의 더 야만인과 같은 초기의 성행위를 용인하면서, 언제나 문명의 진화적 진보 뒤에서 끌려갑니다.

89:7.5 (982.4) Temple harlotry eventually spread throughout southern Europe and Asia. The money earned by the temple prostitutes was held sacred among all peoples — a high gift to present to the gods. The highest types of women thronged the temple sex marts and devoted their earnings to all kinds of sacred services and works of public good. Many of the better classes of women collected their dowries by temporary sex service in the temples, and most men preferred to have such women for wives. 성전 매춘 행위는 결국 남유럽과 아시아에 널리 퍼졌습니다. 성전 매춘으로 번 돈은 – 하느님과 같은 자들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로 – 모든 민족 사이에서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최고 유형의 여성들이 성전 매춘 시장에 몰려들었고, 그 이득을 온갖 종류의 신성한 봉사와 공익사업에 바쳤습니다. 더 나은 계층의 여러 여성이 성전에서 일시적인 성적 봉사로 신부 지참금을 모았고, 남성의 대다수는 그런 여성들을 아내로 삼는 것을 더 좋게 여겼습니다.

8. Redemption and Covenants 구속(救贖 상환)과 계약(契約)

89:8.1 (982.5) Sacrificial redemption and temple prostitution were in reality modifications of human sacrifice. Next came the mock sacrifice of daughters. This ceremony consisted in bloodletting, with dedication to lifelong virginity, and was a moral reaction to the older temple harlotry. In more recent times virgins dedicated themselves to the service of tending the sacred temple fires. 제물로 바치는 구속(救贖 상환)과 성전 매춘은 실은 인간 희생물의 변용(變容)이었습니다. 다음에 딸들의 모조품 희생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례(儀禮)는 평생 처녀성을 바치면서 사혈(瀉血 피를 뽑아냄)하는 것이었고, 더 오래된 성전 매춘 행위에 대한 도덕적 반응이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처녀들이 신성한 성전 불을 돌보는 봉사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89:8.2 (982.6) Men eventually conceived the idea that the offering of some part of the body could take the place of the older and complete human sacrifice. Physical mutilation was also considered to be an acceptable substitute. Hair, nails, blood, and even fingers and toes were sacrificed. The later and well-nigh universal ancient rite of circumcision was an outgrowth of the cult of partial sacrifice; it was purely sacrificial, no thought of hygiene being attached thereto. Men were circumcised; women had their ears pierced. 사람들은 결국 신체의 어떤 부분을 봉헌하여 더 오래된 철저한 인간 희생물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체 절단도 허용되는 대체물로 여겨졌습니다. 머리카락, 손톱·발톱, 피와 심지어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제물로 바쳤습니다. 후기에 거의 보편적인 고대의 할례 의식은 부분적인 희생물 종파의 파생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위생학적인 고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남성들에게 할례를 행했고 여성들은 그들의 귀를 뚫었습니다.

89:8.3 (983.1) Subsequently it became the custom to bind fingers together instead of cutting them off. Shaving the head and cutting the hair were likewise forms of religious devotion. The making of eunuchs was at first a modification of the idea of human sacrifice. Nose and lip piercing is still practiced in Africa, and tattooing is an artistic evolution of the earlier crude scarring of the body. 그 후 손가락을 자르지 않고 손가락을 함께 묶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머리털을 밀고 자르기 또한 종교적 헌신의 형태였습니다. 내시(內侍) 만들기는 처음에 인간 희생물 개념의 변형이었습니다. 코와 입술 피어싱(뚫기)은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문신(文身)은 옛날에 대충 몸에 남긴 흉터의 예술적 진화입니다.

89:8.4 (983.2) The custom of sacrifice eventually became associated, as a result of advancing teachings, with the idea of the covenant. At last, the gods were conceived of as entering into real agreements with man; and this was a major step in the stabilization of religion. Law, a covenant, takes the place of luck, fear, and superstition. 희생물의 관습은, 진보한 가르침의 결과로써, 결국 계약의 개념과 연결되었습니다. 마침내 신과 같은 존재들이 실제로 인간과 계약을 맺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율법(律法), 계약(契約)이 행운, 두려움과 미신을 대신합니다.

89:8.5 (983.3) Man could never even dream of entering into a contract with Deity until his concept of God had advanced to the level whereon the universe controllers were envisioned as dependable. And man’s early idea of God was so anthropomorphic that he was unable to conceive of a dependable Deity until he himself became relatively dependable, moral, and ethical. 사람은, 우주 조정자들이 믿음직하다고 상상하는 수준으로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진보하기까지, 신(神)과 계약을 맺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초기 개념은 너무 사람의 모습과 비슷해서, 인간 스스로 비교적 믿음직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으로 되기까지는, 믿음직한 신(神)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89:8.6 (983.4) But the idea of making a covenant with the gods did finally arrive. Evolutionary man eventually acquired such moral dignity that he dared to bargain with his gods. And so the business of offering sacrifices gradually developed into the game of man’s philosophic bargaining with God. And all this represented a new device for insuring against bad luck or, rather, an enhanced technique for the more definite purchase of prosperity. Do not entertain the mistaken idea that these early sacrifices were a free gift to the gods, a spontaneous offering of gratitude or thanksgiving; they were not expressions of true worship. 그러나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과 계약을 맺는다는 개념이 마침내 왔습니다. 진화 인간이 감히 자기의 신과 같은 존재들과 흥정하는 그런 도덕적 존엄성을 드디어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물을 바치는 일은 인간이 하느님과 냉철하게 계약하는 흥정으로 서서히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운(不運)을 방지하는 새로운 방책, 혹은 오히려 더 확실하게 번영을 손에 넣는 향상된 기법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초기 희생물들이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무상으로 드리는 선물, 자발적인 보은(報恩 은혜를 갚음) 즉 감사의 공물이었다는 잘못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참된 경배의 표시가 아니었습니다.

89:8.7 (983.5) Primitive forms of prayer were nothing more nor less than bargaining with the spirits, an argument with the gods. It was a kind of bartering in which pleading and persuasion were substituted for something more tangible and costly. The developing commerce of the races had inculcated the spirit of trade and had developed the shrewdness of barter; and now these traits began to appear in man’s worship methods. And as some men were better traders than others, so some were regarded as better prayers than others. The prayer of a just man was held in high esteem. A just man was one who had paid all accounts to the spirits, had fully discharged every ritual obligation to the gods. 원시적 형태의 기도는 정확히 영(靈)들과 흥정하기, 신과 같은 존재들과 논쟁하기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탄원과 설득으로 더 실속있게 값이 비싼 것을 대체하는 일종의 물물 교환이었습니다. 종족들의 발전하는 거래로 교환하는 풍조가 심어졌고 약삭빠른 물물 교환이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 특성이 사람의 경배 방식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상인들이었듯이,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은 기도로 여겨졌습니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를 높이 존중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영(靈)들에게 모든 셈을 끝내고, 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모든 의식적 채무를 완전히 갚은 사람이었습니다.

89:8.8 (983.6) Early prayer was hardly worship; it was a bargaining petition for health, wealth, and life. And in many respects prayers have not much changed with the passing of the ages. They are still read out of books, recited formally, and written out for emplacement on wheels and for hanging on trees, where the blowing of the winds will save man the trouble of expending his own breath. 초기 기도는 도저히 경배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건강, 재산 및 생명을 위한 거래 청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기도는 오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것들을 책에서 골라 읽고, 형식적으로 낭송하며, 바람이 부는 곳에서, 사람이 호흡하는 소비의 수고를 덜게 될, 바퀴에 붙이고 나무에 매달려고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9. Sacrifices and Sacraments 희생물과 성찬(聖餐)

89:9.1 (983.7) The human sacrifice, throughout the course of the evolution of Urantian rituals, has advanced from the bloody business of man-eating to higher and more symbolic levels. The early rituals of sacrifice bred the later ceremonies of sacrament. In more recent times the priest alone would partake of a bit of the cannibalistic sacrifice or a drop of human blood, and then all would partake of the animal substitute. These early ideas of ransom, redemption, and covenants have evolved into the later-day sacramental services. And all this ceremonial evolution has exerted a mighty socializing influence. 인간 희생물은, 유란시아 관례의 진화 과정을 통해, 식인(食人)의 유혈 과업에서 더 높고 더 상징적인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희생물을 바치는 초기 관례들이 나중에 성찬(聖餐) 예식을 일으켰습니다. 더 최근에 사제 홀로 식인 희생물의 조각을 먹고 소량의 사람 피를 마신 다음 모두가 동물 대용식을 먹곤 했습니다. 속량(贖良 몸값 상환), 구속(救贖 상환)과 계약(契約)의 이런 초기 관념은 후대에 성찬식(聖餐式)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의례적 진화는 강력하게 사회화하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89:9.2 (984.1) In connection with the Mother of God cult, in Mexico and elsewhere, a sacrament of cakes and wine was eventually utilized in lieu of the flesh and blood of the older human sacrifices. The Hebrews long practiced this ritual as a part of their Passover ceremonies, and it was from this ceremonial that the later Christian version of the sacrament took its origin. 하느님 어머니 종파와 관련하여, 멕시코와 다른 곳에서, 케이크와 포도주의 성찬(聖餐)이 결국 더 오래된 인간 희생물의 살과 피의 대신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이런 예식을 자기들의 유월절 예식의 부분으로 지켰고, 이 예식에서 나중에 기독교 버전의 성찬(聖餐)이 비롯되었습니다.

89:9.3 (984.2) The ancient social brotherhoods were based on the rite of blood drinking; the early Jewish fraternity was a sacrificial blood affair. Paul started out to build a new Christian cult on “the blood of the everlasting covenant.” And while he may have unnecessarily encumbered Christianity with teachings about blood and sacrifice, he did once and for all make an end of the doctrines of redemption through human or animal sacrifices. His theologic compromises indicate that even revelation must submit to the graduated control of evolution. According to Paul, Christ became the last and all-sufficient human sacrifice; the divine Judge is now fully and forever satisfied. 고대의 사회적 형제 공동체는 피를 마시는 예식에 근거했습니다. 초기 유대교의 형제회(兄弟會)는 희생물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계약의 피” 위에 새로운 기독교 종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를 피와 희생물에 대한 가르침으로 헛되어 거치적거리게 했을지 몰라도, 인간이나 동물 희생물을 통한 구속(救贖) 교리를 단번에 영원히 끝냈습니다. 그의 신학적 절충안은 계시조차 점증하는 진화적 조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는 마지막으로 완전히 충분한 인간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신적 심판자는 이제 완전하게 영원히 만족합니다.

89:9.4 (984.3) And so, after long ages the cult of the sacrifice has evolved into the cult of the sacrament. Thus are the sacraments of modern religions the legitimate successors of those shocking early ceremonies of human sacrifice and the still earlier cannibalistic rituals. Many still depend upon blood for salvation, but it has at least become figurative, symbolic, and mystic. 그래서 오랜 세월 후에 희생물의 종파는 성찬(聖餐) 종파로 진화했습니다. 이렇게 현대 종교들의 성찬들은 그렇게 충격적인 인간 희생물의 초기 예식과 더 이른 식인 예식의 합법적인 후계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구원을 위해 피를 의지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비유적이며, 상징적이며, 신비적으로 되었습니다.

10. Forgiveness of Sin 죄의 용서

89:10.1 (984.4) Ancient man only attained consciousness of favor with God through sacrifice. Modern man must develop new techniques of achieving the self-consciousness of salvation. The consciousness of sin persists in the mortal mind, but the thought patterns of salvation therefrom have become outworn and antiquated. The reality of the spiritual need persists, but intellectual progress has destroyed the olden ways of securing peace and consolation for mind and soul. 고대인은 희생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겨우 알아챘습니다. 현대인은 스스로 구원을 알아채는데 이르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각은 필사자 마음에 남아 있지만, 거기에서 구원되는 발상 양식은 진부(陳腐)하고 고루(固陋)해졌습니다. 영적 필요의 실체는 지속하지만, 지적 진보가 마음과 혼(魂)을 위해 평화와 위로를 확보하는 오래된 방법을 파괴했습니다.

89:10.2 (984.5) Sin must be redefined as deliberate disloyalty to Deity. There are degrees of disloyalty: the partial loyalty of indecision; the divided loyalty of confliction; the dying loyalty of indifference; and the death of loyalty exhibited in devotion to godless ideals. 죄(罪)는 신(神)에 대한 의도적(意圖的) 불충(不忠)으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합니다. 불충(不忠)의 정도가 있습니다. 주저(躊躇)하는 부분적 충성, 충돌하는 분열된 충성, 관심이 없는 죽어 가는 충성과 신을 믿지 않는 이상(理想)에 대한 헌신으로 드러난 죽은 충성이 있습니다.

89:10.3 (984.6) The sense or feeling of guilt is the consciousness of the violation of the mores; it is not necessarily sin. There is no real sin in the absence of conscious disloyalty to Deity. 죄의식(罪意識)이나 죄책감(罪責感)은 관습을 위반했다는 자각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죄는 아닙니다. 신(神)에 대한 의식적인 불충(不忠)이 없으므로 실재하는 죄가 없습니다.

89:10.4 (984.7) The possibility of the recognition of the sense of guilt is a badge of transcendent distinction for mankind. It does not mark man as mean but rather sets him apart as a creature of potential greatness and ever-ascending glory. Such a sense of unworthiness is the initial stimulus that should lead quickly and surely to those faith conquests which translate the mortal mind to the superb levels of moral nobility, cosmic insight, and spiritual living; thus are all the meanings of human existence changed from the temporal to the eternal, and all values are elevated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죄의식(罪意識)을 알아보는 가능성은 인류에게 탁월한 특성이 있다는 증표(證票)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잠재적 위대성과 늘-향상하는 영광의 창조물로 구분합니다. 무가치하다는 그런 감각은 필사자 마음을 뛰어난 수준의 도덕적 고귀함, 질서 우주의 통찰력과 영적 생활로 바꾸는 그런 신앙적 극복으로 곧 확실하게 이끌어야 하는 초기의 자극입니다. 이렇게 인간 존재의 모든 의미는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변경되고, 모든 가치는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으로 향상됩니다.

89:10.5 (984.8) The confession of sin is a manful repudiation of disloyalty, but it in no wise mitigates the time-space consequences of such disloyalty. But confession — sincere recognition of the nature of sin — is essential to religious growth and spiritual progress. 죄 고백은 불충(不忠)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지만, 그런 불충(不忠)의 시공간 결과를 절대로 누그러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백, 즉 죄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인정은 종교적 성장과 영적 진보에 필수적입니다.

89:10.6 (985.1) The forgiveness of sin by Deity is the renewal of loyalty relations following a period of the human consciousness of the lapse of such relations as the consequence of conscious rebellion. The forgiveness does not have to be sought, only received as the consciousness of re-establishment of loyalty relations between the creature and the Creator. And all the loyal sons of God are happy, service-loving, and ever-progressive in the Paradise ascent. 신(神)의 죄 용서는, 의식적인 반란(叛亂)의 결과로써 그런 관계의 탈선을 인간적으로 알아채는 기간이 지난 다음에 오는, 충성 관계의 회복입니다. 용서는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창조물과 창조주 사이에서 충성 관계의 복구를 알아차림으로써 받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충성스러운 아들(자녀)들은 행복하고, 봉사를 사랑하며, 천국으로 상승하면서 언제나 진보합니다.

89:10.7 (985.2) [Presented by a Brilliant Evening Star of Nebadon.][네바돈의 찬란한 저녁별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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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90 Shamanism — Medicine Men and Priests 무술(巫術) – 주술사(呪術師)들과 사제들

Paper 90

Shamanism — Medicine Men and Priests 무술(巫術) – 주술사(呪術師)들과 사제들

1. The First Shamans — The Medicine Men 첫 무당들 – 주술사들
2. Shamanistic Practices 무술(巫術)적 관행
3. The Shamanic Theory of Disease and Death 질병과 죽음에 대한 무술(巫術)적 이론
4. Medicine Under the Shamans 무당들의 주술(呪術)
5. Priests and Rituals 사제(司祭)와 의식(儀式)

90:0.1 (986.1) THE evolution of religious observances progressed from placation, avoidance, exorcism, coercion, conciliation, and propitiation to sacrifice, atonement, and redemption. The technique of religious ritual passed from the forms of the primitive cult through fetishes to magic and miracles; and as ritual became more complex in response to man’s increasingly complex concept of the supermaterial realms, it was inevitably dominated by medicine men, shamans, and priests. 종교적 관례의 진화는 노여움 삭이기, 회피, 축사(逐邪 구마驅魔 귀신 내쫓는 액막이), 강제(强制), 회유(懷柔 어루만져서 달램)와 화해(和解)에서 희생물, 속죄(贖罪 죄의 값 치르기) 및 구속(救贖 상환해서 되찾음)으로 진보했습니다. 종교의식의 기법은 원시 종파에서 주물(呪物)을 거쳐 마술(魔術)과 기적(奇蹟)의 형태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초물질(超物質) 영역에 대해 점점 복잡해지는 인간의 개념에 응하여 의식(儀式)이 더 복잡해지면서, 주술사, 무당과 사제들이 불가피하게 의식(儀式)을 지배했습니다.

90:0.2 (986.2) In the advancing concepts of primitive man the spirit world was eventually regarded as being unresponsive to the ordinary mortal. Only the exceptional among humans could catch the ear of the gods; only the extraordinary man or woman would be heard by the spirits. Religion thus enters upon a new phase, a stage wherein it gradually becomes secondhanded; always does a medicine man, a shaman, or a priest intervene between the religionist and the object of worship. And today most Urantia systems of organized religious belief are passing through this level of evolutionary development. 원시인의 발전하는 개념에서, 영(靈) 세계는 결국 보통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과 같은 존재들의 귀에 인간 중에서 예외적인 자들만 들려 왔습니다. 영(靈)들은 비범한 남성이나 여성만 들었습니다. 종교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단계, 점점 간접적으로 듣게 되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신자(信者)와 예배의 대상 사이에 언제나 주술사, 무당 혹은 사제가 끼어듭니다. 오늘날 유란시아 대부분의 조직된 종교적 믿음 체계는 이렇게 진화적으로 발전하는 수준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90:0.3 (986.3) Evolutionary religion is born of a simple and all-powerful fear, the fear which surges through the human mind when confronted with the unknown, the inexplicable, and the incomprehensible. Religion eventually achieves the profoundly simple realization of an all-powerful love, the love which sweeps irresistibly through the human soul when awakened to the conception of the limitless affection of the Universal Father for the sons of the universe. But in between the beginning and the consummation of religious evolution, there intervene the long ages of the shamans, who presume to stand between man and God as intermediaries, interpreters, and intercessors. 진화 종교는 알려지지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밀려오는 두려움, 순전한 최고의 두려움에서 태어납니다. 종교는 결국, 우주의 아들(자녀)들을 위한 우주 아버지의 제한 없는 애정의 계획을 깨달을 때, 인간 혼(魂)을 꿰뚫고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사랑, 전능한 사랑에 대해서 심오하게 순전한 실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진화의 시작과 완전한 경지 사이에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감히 중개자, 통역자, 그리고 조정자들로서 서 있는 무당들이 오랫동안 나타납니다.

1. The First Shamans — The Medicine Men 첫 무당들 – 주술사들

90:1.1 (986.4) The shaman was the ranking medicine man, the ceremonial fetishman, and the focus personality for all the practices of evolutionary religion. In many groups the shaman outranked the war chief, marking the beginning of the church domination of the state. The shaman sometimes functioned as a priest and even as a priest-king. Some of the later tribes had both the earlier shaman-medicine men (seers) and the later appearing shaman-priests. And in many cases the office of shaman became hereditary. 무당은 상위(上位) 주술사(呪術師), 공식 주물인(呪物人) 및 모든 진화 종교 관례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여러 집단에서 무당은, 교회가 최초로 국가를 지배하는 표시로서, 전쟁 추장의 윗자리에 있었습니다. 무당은 때때로 사제(司祭), 심지어 사제-왕으로서 활동했습니다. 후기 부족 중 일부는 초기 무당-주술사(예언자)들과 후기에 나타난 무당-사제들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경우에 무당의 직책은 세습되었습니다.

90:1.2 (986.5) Since in olden times anything abnormal was ascribed to spirit possession, any striking mental or physical abnormality constituted qualification for being a medicine man. Many of these men were epileptic, many of the women hysteric, and these two types accounted for a good deal of ancient inspiration as well as spirit and devil possession. Quite a few of these earliest of priests were of a class which has since been denominated paranoiac. 옛날에 보통과 다른 것은 영(靈)에 사로잡힌 탓으로 돌렸기 때문에, 이목을 끄는 어떤 정신적 혹은 육체적 기형(畸形)이 주술사가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다수의 이런 남성은 간질(뇌전증) 환자였고, 다수의 여성은 히스테리 환자였으며, 이런 두 유형이 영(靈)과 악령(惡靈)에 들린 것뿐만 아니라 여러 고대의 영감(靈感)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최초의 사제 중 상당수는 그 후 편집증(偏執症 망상 장애) 환자로 불리는 분류에 속했습니다.

90:1.3 (987.1) While they may have practiced deception in minor matters, the great majority of the shamans believed in the fact of their spirit possession. Women who were able to throw themselves into a trance or a cataleptic fit became powerful shamanesses; later, such women became prophets and spirit mediums. Their cataleptic trances usually involved alleged communications with the ghosts of the dead. Many female shamans were also professional dancers. 그들은 사소한 문제에서 속임수를 사용했을 수 있지만 무당들 대다수는 자신이 영(靈)에 빙의(憑依 사로잡힘)된 사실을 믿었습니다. 무아경(無我境 혼수상태)이나 강경증(强硬症 갑작스러운 근육경직) 발작에 빠질 수 있던 여성들은 강력한 여성 무당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런 여성들은 선지자와 영매(靈媒)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강경증(强硬症) 혼수상태는 대개 죽은 자의 유령(幽靈)과 소통한다는 주장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러 여성 무당은 또한 전문적 무희(舞姬)들이었습니다.

90:1.4 (987.2) But not all shamans were self-deceived; many were shrewd and able tricksters. As the profession developed, a novice was required to serve an apprenticeship of ten years of hardship and self-denial to qualify as a medicine man. The shamans developed a professional mode of dress and affected a mysterious conduct. They frequently employed drugs to induce certain physical states which would impress and mystify the tribesmen. Sleight-of-hand feats were regarded as supernatural by the common folk, and ventriloquism was first used by shrewd priests. Many of the olden shamans unwittingly stumbled onto hypnotism; others induced autohypnosis by prolonged staring at their navels. 그러나 모든 무당이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수는 약삭빠른 재능 있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직업이 발전하면서, 초보자는 주술사로서 자격을 얻으려고 10년간 고난과 극기의 수습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당들은 전문적인 의복 양식을 개발했고, 신비한 행동인 체했습니다. 그들은 부족민들에게 감명을 주고 미혹시키곤 했던 특정한 신체적 상태로 이끌려고 약물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묘한 속임수 기술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겼고, 약삭빠른 사제들이 복화술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여러 옛날의 무당들은 뜻하지 않게 우연히 최면술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배꼽을 오랫동안 빤히 보면서 스스로 최면에 빠졌습니다.

90:1.5 (987.3) While many resorted to these tricks and deceptions, their reputation as a class, after all, stood on apparent achievement. When a shaman failed in his undertakings, if he could not advance a plausible alibi, he was either demoted or killed. Thus the honest shamans early perished; only the shrewd actors survived. 많은 사람이 이런 요술(妖術)과 속임수를 썼지만, 결국 그들의 탁월한 평판은 명백한 성과에 달려 있었습니다. 무당이 자기 과업에 실패했을 때, 그럴듯한 변명을 내놓을 수 없으면, 그는 좌천(左遷)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정직한 무당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약삭빠른 배우들만 살아남았습니다.

90:1.6 (987.4) It was shamanism that took the exclusive direction of tribal affairs out of the hands of the old and the strong and lodged it in the hands of the shrewd, the clever, and the farsighted. 부족 업무의 독점적 관리를 연장자(年長者)들과 강한 자들의 손에서 빼앗아 그것을 약삭빠르고, 영리하며, 앞을 내다보는 자들의 손에 맡긴 것은 무술(巫術 샤머니즘)이었습니다.

2. Shamanistic Practices 무술(巫術)적 관행

90:2.1 (987.5) Spirit conjuring was a very precise and highly complicated procedure, comparable to present-day church rituals conducted in an ancient tongue. The human race very early sought for superhuman help, for revelation; and men believed that the shaman actually received such revelations. While the shamans utilized the great power of suggestion in their work, it was almost invariably negative suggestion; only in very recent times has the technique of positive suggestion been employed. In the early development of their profession the shamans began to specialize in such vocations as rain making, disease healing, and crime detecting. To heal diseases was not, however, the chief function of a shamanic medicine man; it was, rather, to know and to control the hazards of living. 영(靈) 불러내기는 고대 언어로 행해진 현대 교회 의식에 상당하는, 아주 까다롭고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었습니다. 인류는 아주 초기부터 계시를 위해서 초(超)인간적 도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당이 실제로 그런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무당들은 자신들의 업무에서 커다란 암시의 권세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암시였습니다. 아주 최근에 와서야 긍정적인 암시의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무당들은 강우(降雨 비 내리기), 질병 치유 및 범죄를 탐지하는 그런 적성(適性)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병 치유가 무술(巫術)적 주술사의 주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의 위험 요소를 알아서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90:2.2 (987.6) Ancient black art, both religious and secular, was called white art when practiced by either priests, seers, shamans, or medicine men. The practitioners of the black art were called sorcerers, magicians, wizards, witches, enchanters, necromancers, conjurers, and soothsayers. As time passed, all such purported contact with the supernatural was classified either as witchcraft or shamancraft. 사제들, 예언자들, 무당들이나 주술사들이 종교적이며 세속적인 고대 흑마술을 실행하면 백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흑마술을 행하는 자들을 마법사, 마술사, 요술쟁이, 마녀, 요술사, 강령술사, 소환(召喚)술사 및 점쟁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초자연적인 것과 그렇게 접촉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은 마법이나 방술(方術)로 분류되었습니다.

90:2.3 (987.7) Witchcraft embraced the magic performed by earlier, irregular, and unrecognized spirits; shamancraft had to do with miracles performed by regular spirits and recognized gods of the tribe. In later times the witch became associated with the devil, and thus was the stage set for the many comparatively recent exhibitions of religious intolerance. Witchcraft was a religion with many primitive tribes. 마법은 초기의 변칙적이며 인식되지 않은 영(靈)들이 행한 마술을 포함했습니다. 방술(方術)은 정식 영(靈)들과 부족이 인정한 신과 같은 존재들이 행하는 기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녀는 악령과 관련되어서 상당히 최근에 드러난 여러 종교적 편협함의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마법은 여러 원시 부족의 종교였습니다.

90:2.4 (987.8) The shamans were great believers in the mission of chance as revelatory of the will of the spirits; they frequently cast lots to arrive at decisions. Modern survivals of this proclivity for casting lots are illustrated, not only in the many games of chance, but also in the well-known “counting-out” rhymes. Once, the person counted out must die; now, he is only it in some childish game. That which was serious business to primitive man has survived as a diversion of the modern child. 무당들은 영(靈)들의 뜻에 대한 계시로서 운수(運數)의 임무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려고 자주 제비를 뽑았습니다. 제비를 뽑는 이런 경향이 현대에 남아있는 것은, 운에 좌우되는 많은 게임만 아니라 잘 알려진, “숫자 세기(무작위로 사람을 선택하는)” 운율에도 나타납니다. 한때 뽑힌 사람은 죽어야 했는데, 이제 그는 유치한 놀이에서만 술래로 죽습니다. 원시인에게 심각한 일이었던 것은 현대 어린이의 오락으로 남아있습니다.

90:2.5 (988.1) The medicine men put great trust in signs and omens, such as, “When you hear the sound of a rustling in the tops of the mulberry trees, then shall you bestir yourself.” Very early in the history of the race the shamans turned their attention to the stars. Primitive astrology was a world-wide belief and practice; dream interpreting also became widespread. All this was soon followed by the appearance of those temperamental shamanesses who professed to be able to communicate with the spirits of the dead. 주술사들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너희는 분발할지라(삼하5:24, 대상14:15).”와 같은 징조(徵兆)와 전조(前兆)를 크게 신뢰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아주 초기에 무당들은 별들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원시적 점성술은 세계적인 믿음과 관행이었습니다. 해몽(解夢 꿈풀이)도 역시 널리 퍼졌습니다. 곧 이런 모든 것에 뒤이어 죽은 자의 영(靈)들과 소통할 수 있다고 공언하는 신경질적인 여성 무당들이 출현했습니다.

90:2.6 (988.2) Though of ancient origin, the rain makers, or weather shamans, have persisted right on down through the ages. A severe drought meant death to the early agriculturists; weather control was the object of much ancient magic. Civilized man still makes the weather the common topic of conversation. The olden peoples all believed in the power of the shaman as a rain maker, but it was customary to kill him when he failed, unless he could offer a plausible excuse to account for the failure. 기원이 오래되었지만, 강우(降雨 비 내리는) 자들 즉 기상 무당들은 대대로 바로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모진 가뭄은 초기 농업 종사자들에게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기상 조절은 여러 고대 마법의 대상이었습니다. 문명인들은 여전히 날씨를 흔히 대화의 주제로 삼습니다. 옛사람들은 모두 비 내리는 자로서 무당의 권세를 믿었지만, 그가 실패했을 때, 실패의 원인을 밝히는 그럴듯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면 그를 죽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90:2.7 (988.3) Again and again did the Caesars banish the astrologers, but they invariably returned because of the popular belief in their powers. They could not be driven out, and even in the sixteenth century after Christ the directors of Occidental church and state were the patrons of astrology. Thousands of supposedly intelligent people still believe that one may be born under the domination of a lucky or an unlucky star; that the juxtaposition of the heavenly bodies determines the outcome of various terrestrial adventures. Fortunetellers are still patronized by the credulous. 계속해서 로마 황제들이 점성가들을 추방했지만, 대중이 그들의 권세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함없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고, 그리스도 이후 16세기에도 서양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은 점성술의 후원자였습니다. 현명하다는 수많은 사람이 아직도, 사람은 운 좋거나 불길한 별의 지배하에 태어날 수 있고, 천체의 병렬 상태가 다양한 현세 모험의 과정을 결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잘 속는 자들은 여전히 점쟁이들의 고객이 되고 있습니다.

90:2.8 (988.4) The Greeks believed in the efficacy of oracular advice, the Chinese used magic as protection against demons, shamanism flourished in India, and it still openly persists in central Asia. It is an only recently abandoned practice throughout much of the world. 그리스인(人)은 신탁(神託) 충고의 효력을 믿었고, 중국인은 귀신들을 막는 보호책으로 마법을 사용했고 인도에서는 무술(巫術 샤머니즘)이 번성했으며, 그것은 여전히 중앙아시아에서 공공연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최근에야 세계 여러 곳에서 폐기된 관행입니다.

90:2.9 (988.5) Ever and anon, true prophets and teachers arose to denounce and expose shamanism. Even the vanishing red man had such a prophet within the past hundred years, the Shawnee Tenskwatawa, who predicted the eclipse of the sun in 1806 and denounced the vices of the white man. Many true teachers have appeared among the various tribes and races all through the long ages of evolutionary history. And they will ever continue to appear to challenge the shamans or priests of any age who oppose general education and attempt to thwart scientific progress. 때때로 참 선지자들과 선생들이 나타나 무술(巫術)을 비난하고 폭로했습니다. 사라지는 홍인(紅人)조차 과거 100년 이내에 그런 선지자, 즉 1806년 일식(日蝕 6/6 개기, 12/10 금환)을 예언하고 백인의 악덕을 비난한 쇼니족(族) 텐스콰타와가 있었습니다. 여러 참된 선생이 오랜 진화 역사 내내 다양한 부족과 종족 중에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 교육을 반대하고 과학적 진보를 방해하려는 모든 시대의 무당들이나 사제들에게 도전하려고 늘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90:2.10 (988.6) In many ways and by devious methods the olden shamans established their reputations as voices of God and custodians of providence. They sprinkled the newborn with water and conferred names upon them; they circumcised the males. They presided over all burial ceremonies and made due announcement of the safe arrival of the dead in spiritland. 여러 방법과 그릇된 방식으로, 옛날의 무당들은 자기 명성을 하느님의 음성과 섭리(攝理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의 관리자로 확고히 굳혔습니다. 그들은 신생아에게 물을 뿌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남성들에게 할례(割禮)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장례식을 주관하고 죽은 자들이 영(靈) 나라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마땅히 공표했습니다.

90:2.11 (988.7) The shamanic priests and medicine men often became very wealthy through the accretion of their various fees which were ostensibly offerings to the spirits. Not infrequently a shaman would accumulate practically all the material wealth of his tribe. Upon the death of a wealthy man it was customary to divide his property equally with the shaman and some public enterprise or charity. This practice still obtains in some parts of Tibet, where one half the male population belongs to this class of nonproducers. 무술(巫術)적 사제들과 주술사들은 표면상 영(靈)들에게 바치는 그들의 다양한 수수료를 축적하여 자주 매우 부유해졌습니다. 종종 무당은 실제로 자기 부족의 모든 물질 재산을 축적하곤 했습니다. 부자가 죽으면, 그의 재산을 무당과 공기업 즉 자선기금과 똑같이 나누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런 관행은 남성 인구의 절반이 이런 비(非)생산자 부류에 속하는, 티벳의 일부 지역에서 아직도 통용됩니다.

90:2.12 (989.1) The shamans dressed well and usually had a number of wives; they were the original aristocracy, being exempt from all tribal restrictions. They were very often of low-grade mind and morals. They suppressed their rivals by denominating them witches or sorcerers and very frequently rose to such positions of influence and power that they were able to dominate the chiefs or kings. 무당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대개 여러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부족의 제약 규정에서 면제된, 최초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저급한 마음과 도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경쟁자들을 마녀와 마법사로 불러서 활동을 못 하게 했고, 자신들이 족장이나 왕들을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과 권세의 그런 지위로 아주 빈번하게 높아졌습니다.

90:2.13 (989.2) Primitive man regarded the shaman as a necessary evil; he feared him but did not love him. Early man respected knowledge; he honored and rewarded wisdom. The shaman was mostly fraud, but the veneration for shamanism well illustrates the premium put upon wisdom in the evolution of the race. 원시인은 무당을 필요악(必要惡)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인간은 지식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예우하여 보상했습니다. 무당은 대부분 사기꾼이었지만, 무술(巫術 샤머니즘)에 대한 숭배로 인류의 진화에서 지혜를 장려했다는 것을 잘 예증합니다.

3. The Shamanic Theory of Disease and Death 질병과 죽음에 대한 무술(巫術)적 이론

90:3.1 (989.3) Since ancient man regarded himself and his material environment as being directly responsive to the whims of the ghosts and the fancies of the spirits, it is not strange that his religion should have been so exclusively concerned with material affairs. Modern man attacks his material problems directly; he recognizes that matter is responsive to the intelligent manipulation of mind. Primitive man likewise desired to modify and even to control the life and energies of the physical domains; and since his limited comprehension of the cosmos led him to the belief that ghosts, spirits, and gods were personally and immediately concerned with the detailed control of life and matter, he logically directed his efforts to winning the favor and support of these superhuman agencies. 고대인은 자신과 자신의 물질 환경을 유령들의 변덕과 영(靈)들의 기호에 직접 반응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종교가 오로지 물질적인 일에만 관련되었던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물질 문제에 직접 달려듭니다. 그는, 물질이 마음의 지능적 조작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원시인도 똑같이 물리적 영역의 생명과 에너지를 조절하고 조종까지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질서 우주에 대한 그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인해 유령들, 영(靈)들 그리고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이 생명과 물질의 상세한 조정에 친히, 바로 관여하고 있다는 믿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논리적으로 이런 초인간적 대리자의 은혜와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90:3.2 (989.4) Viewed in this light, much of the inexplicable and irrational in the ancient cults is understandable. The ceremonies of the cult were primitive man’s attempt to control the material world in which he found himself. And many of his efforts were directed to the end of prolonging life and insuring health. Since all diseases and death itself were originally regarded as spirit phenomena, it was inevitable that the shamans, while functioning as medicine men and priests, should also have labored as doctors and surgeons.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고대 종파의 여러 설명할 수 없고 불합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파의 의식(儀式)은 원시인이 있는 물질 세상을 조정하려는 그의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그의 노력은 생명을 연장하고 건강을 지키는 목적에 쏟았습니다. 모든 질병과 죽음 자체를 원래 영(靈) 현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무당들은 주술사들과 사제들로 활동하면서 또한 의사와 외과 의사로 불가피하게 수고해야 했습니다.

90:3.3 (989.5) The primitive mind may be handicapped by lack of facts, but it is for all that logical. When thoughtful men observe disease and death, they set about to determine the causes of these visitations, and in accordance with their understanding, the shamans and the scientists have propounded the following theories of affliction: 원시적인 마음은 사실을 몰라서 불리한 입장에 설 수도 있으나, 그것은 모두 논리적입니다. 신중한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을 관찰하면서, 그들은 이런 고난의 원인을 해결해보려고 해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무당들과 과학자들은 고통에 대한 다음의 이론을 제안했습니다.

90:3.4 (989.6) 1. Ghosts — direct spirit influences. The earliest hypothesis advanced in explanation of disease and death was that spirits caused disease by enticing the soul out of the body; if it failed to return, death ensued. The ancients so feared the malevolent action of disease-producing ghosts that ailing individuals would often be deserted without even food or water. Regardless of the erroneous basis for these beliefs, they did effectively isolate afflicted individuals and prevent the spread of contagious disease. 유령(幽靈)들 – 직접적인 영(靈)의 영향력. 질병과 죽음을 진보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가설은 영(靈)들이 혼을 유혹하여 몸 밖으로 나오도록 질병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혼(魂)이 끝내 되돌아가지 못한 결과로, 죽음이 일어났습니다. 고대인들은 질병을 일으키는 유령들의 악의적 행위를 너무 두려워해서 병약한 사람들을 음식이나 물조차 주지 않고 자주 버려두곤 했습니다. 이렇게 믿는 잘못된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로 앓는 사람들을 격리하여 전염병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90:3.5 (989.7) 2. Violence — obvious causes. The causes for some accidents and deaths were so easy to identify that they were early removed from the category of ghost action. Fatalities and wounds attendant upon war, animal combat, and other readily identifiable agencies were considered as natural occurrences. But it was long believed that the spirits were still responsible for delayed healing or for the infection of wounds of even “natural” causation. If no observable natural agent could be discovered, the spirit ghosts were still held responsible for disease and death. 폭력 – 명백한 원인. 일부 사고 및 사망의 원인은 파악하기 쉬워서 유령 활동의 범주에서 일찌감치 제외되었습니다. 전쟁, 동물과 싸움 및 기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작용에 따르는 재난과 부상은 자연 발생으로 여겼습니다. 회복이 늦어지거나 “자연스러운” 원인이라도 상처의 감염은 여전히 영(靈)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관찰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작용이 발견되지 않으면, 영(靈) 유령에게 여전히 질병과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웠습니다.

90:3.6 (990.1) Today, in Africa and elsewhere may be found primitive peoples who kill someone every time a nonviolent death occurs. Their medicine men indicate the guilty parties. If a mother dies in childbirth, the child is immediately strangled — a life for a life. 오늘날, 아프리카와 다른 곳에서 비폭력적인 사망이 발생할 때마다 누군가를 죽이는 원시 민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술사들은 죄가 있는 공범자들을 지적합니다. 산모가 출산 중에 죽으면, 바로 그 아이를 질식사시켰습니다 – 생명은 생명으로 갚습니다.

90:3.7 (990.2) 3. Magic — the influence of enemies. Much sickness was thought to be caused by bewitchment, the action of the evil eye and the magic pointing bow. At one time it was really dangerous to point a finger at anyone; it is still regarded as ill-mannered to point. In cases of obscure disease and death the ancients would hold a formal inquest, dissect the body, and settle upon some finding as the cause of death; otherwise the death would be laid to witchcraft, thus necessitating the execution of the witch responsible therefor. These ancient coroner’s inquests saved many a supposed witch’s life. Among some it was believed that a tribesman could die as a result of his own witchcraft, in which event no one was accused. 마법 – 적들의 영향력. 많은 질병이 마력(魔力), 악마 눈의 작용과 마법적으로 가리키는 활이 원인이라고 여겼습니다. 한때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손가락질은 여전히 무례하게 여깁니다. 분명하지 않은 질병과 죽음의 경우에, 고대인들은 정식으로 검시하여, 시신(屍身)을 해부하고, 일부 발견 사항을 죽음의 원인으로 결정하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곧잘 마법의 책임으로 돌려서, 그것을 초래한 마녀를 필연적으로 처형했습니다. 이런 고대 검시관의 검시가 마녀로 여겨진 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일부 사람 중에는, 부족민이 자기 마법의 결과로 죽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경우 아무도 고발당하지 않았습니다.

90:3.8 (990.3) 4. Sin — punishment for taboo violation. In comparatively recent times it has been believed that sickness is a punishment for sin, personal or racial. Among peoples traversing this level of evolution the prevailing theory is that one cannot be afflicted unless one has violated a taboo. To regard sickness and suffering as “arrows of the Almighty within them” is typical of such beliefs. The Chinese and Mesopotamians long regarded disease as the result of the action of evil demons, although the Chaldeans also looked upon the stars as the cause of suffering. This theory of disease as a consequence of divine wrath is still prevalent among many reputedly civilized groups of Urantians. 죄 – 금기 위반에 대한 처벌. 비교적 근세에 질병은, 개인적이거나 종족적이거나, 죄에 대한 처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수준의 진화를 통과하는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론은, 금기를 위반하지 않는 한 아무도 시달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과 고통을 “자신들 안에 있는 전능자의 화살(욥6:4, 시38:2)”로 여기는 것은, 전형적인 그런 믿음입니다. 중국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人)들은 오랫동안 질병을 악한 귀신들이 활동한 결과로 여겼지만, 갈대아인(人)들은 또한 별들을 고통의 원인으로 여겼습니다. 질병이 신적 진노의 결과라는 이런 이론은 문명화된 평판으로 통하는 유란시아인(人)들의 여러 집단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90:3.9 (990.4) 5. Natural causation. Mankind has been very slow to learn the material secrets of the interrelationship of cause and effect in the physical domains of energy, matter, and life. The ancient Greeks, having preserved the traditions of Adamson’s teachings, were among the first to recognize that all disease is the result of natural causes. Slowly and certainly the unfolding of a scientific era is destroying man’s age-old theories of sickness and death. Fever was one of the first human ailments to be removed from the category of supernatural disorders, and progressively the era of science has broken the fetters of ignorance which so long imprisoned the human mind. An understanding of old age and contagion is gradually obliterating man’s fear of ghosts, spirits, and gods as the personal perpetrators of human misery and mortal suffering. 자연적 원인. 인류는 에너지, 물질 및 생명의 물리적 영역에서 원인과 결과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물질적 비밀을 아주 더디게 익혔습니다. 아담선의 가르침에 대한 전통을 보존한 고대 그리스인(人)들은, 모든 질병이 자연적 원인의 결과임을 처음 알아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과학적 시대가 전개되면서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아주 오래된 이론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발열(發熱)은 초(超)자연적 질환의 범주에서 제거된 최초의 인간 질환 중 하나였고, 점차 과학의 시대가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 마음을 가두었던 무지의 속박을 깨뜨렸습니다. 노령과 감염(感染)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불행과 죽을 운명적 고통의 직접적인 가해자들로써, 인간이 두려워하는 유령(幽靈)들, 영(靈)들 및 하느님과 같은 존재들의 흔적을 점차 없애고 있습니다.

90:3.10 (990.5) Evolution unerringly achieves its end: It imbues man with that superstitious fear of the unknown and dread of the unseen which is the scaffolding for the God concept. And having witnessed the birth of an advanced comprehension of Deity, through the co-ordinate action of revelation, this same technique of evolution then unerringly sets in motion those forces of thought which will inexorably obliterate the scaffolding, which has served its purpose. 진화는 정확하게 그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미지의 미신적 두려움과 하느님 개념의 발판인 영계(靈界)에 대한 두려움을 불어 넣습니다. 그리고 계시의 조정하고 통합하는 작용을 통해서, 신(神)에 대한 진보적 이해의 탄생을 목격하면, 바로 이 진화의 기법이 그다음에 정확히 그런 사고력(思考力)을 움직여 그 목적으로 쓰였던 발판의 흔적을 가차 없이 없앨 것입니다.

4. Medicine Under the Shamans 무당들의 주술(呪術)

90:4.1 (990.6) The entire life of ancient men was prophylactic; their religion was in no small measure a technique for disease prevention. And regardless of the error in their theories, they were wholehearted in putting them into effect; they had unbounded faith in their methods of treatment, and that, in itself, is a powerful remedy. 고대인들의 평생은 질병 예방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적지 않게 질병 예방 기법이었습니다. 그들 이론의 오류에 괘념(掛念)치 않고 그들은 전심으로 그것들을 실행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치유 방식을 한없이 신뢰했고, 그것은 그 자체로 매우 효과적인 치료였습니다.

90:4.2 (991.1) The faith required to get well under the foolish ministrations of one of these ancient shamans was, after all, not materially different from that which is required to experience healing at the hands of some of his later-day successors who engage in the nonscientific treatment of disease. 이런 고대 무당 중 하나의 분별없는 봉사로 질병 치료에 필요한 신뢰는 어쨌든 후일에 비과학적 질병 치료에 종사하는 일부 그 후계자들의 손에서 경험하는 치유에 요구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90:4.3 (991.2) The more primitive tribes greatly feared the sick, and for long ages they were carefully avoided, shamefully neglected. It was a great advance in humanitarianism when the evolution of shamancraft produced priests and medicine men who consented to treat disease. Then it became customary for the entire clan to crowd into the sickroom to assist the shaman in howling the disease ghosts away. It was not uncommon for a woman to be the diagnosing shaman, while a man would administer treatment. The usual method of diagnosing disease was to examine the entrails of an animal. 더 원시적인 부족들은 환자들을 매우 두려워했고,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수치스럽게 방치하면서, 신중하게 피했습니다. 무술(巫術 무당의 방술)의 진화로 질병 진료에 찬성한 사제들과 주술사들이 배출되면서 인도주의(人道主義)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그 후 질병 유령들이 떠나가도록 무당이 아우성치는 일을 도우려고 온 부족이 병실에 밀어닥치는 일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남성이 치료를 하곤 했으며, 여성은 진단하는 무당이 되는 것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동물의 내장을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90:4.4 (991.3) Disease was treated by chanting, howling, laying on of hands, breathing on the patient, and many other techniques. In later times the resort to temple sleep, during which healing supposedly took place, became widespread. The medicine men eventually essayed actual surgery in connection with temple slumber; among the first operations was that of trephining the skull to allow a headache spirit to escape. The shamans learned to treat fractures and dislocations, to open boils and abscesses; the shamanesses became adept at midwifery. 노래 부르기, 아우성, 손을 얹기, 환자에게 입김을 내뿜기 및 여러 다른 기법으로 질병을 치료했습니다. 후대에, 성전에서 잠을 자는 동안 결국 치료가 일어났다는 방법이 널리 퍼졌습니다. 주술사들은 성전 수면과 관련하여 결국 실제로 외과 수술을 시도했습니다. 첫 수술 중 하나는 두통 영(靈)이 달아나도록 두개골에 구멍을 내는 수술이었습니다. 무당들은 골절(骨折 뼈 부러짐)과 탈구(脫臼 뼈 어긋남) 치료와 종기(腫氣)와 농양(膿瘍 고름집) 여는 법을 익혔습니다. 여성 무당들은 해산을 돕는 일에 능숙해졌습니다.

90:4.5 (991.4) It was a common method of treatment to rub something magical on an infected or blemished spot on the body, throw the charm away, and supposedly experience a cure. If anyone should chance to pick up the discarded charm, it was believed he would immediately acquire the infection or blemish. It was a long time before herbs and other real medicines were introduced. Massage was developed in connection with incantation, rubbing the spirit out of the body, and was preceded by efforts to rub medicine in, even as moderns attempt to rub liniments in. Cupping and sucking the affected parts, together with bloodletting, were thought to be of value in getting rid of a disease-producing spirit. 몸의 감염되거나 흠집 난 부분에 마법적인 것을 문지르며, 부적을 던져, 치료를 경험했다고 믿는 것이 흔한 치료법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버린 부적을 집어 들면, 즉시 감염되거나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약초와 기타 진짜 약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안마(按摩)는 문질러서 영(靈)을 몰아내는 주문(呪文) 외우기와 관련하여 발전했고, 바로 현대인들이 바르는 약을 문질러 넣듯이, 약을 문질러 넣으려는 수고가 먼저 있었습니다. 부항법(附缸法)과 환부(患部)를 빠는 것은, 사혈(瀉血 피를 뽑아냄)과 함께 질병을 일으키는 영(靈)의 제거에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90:4.6 (991.5) Since water was a potent fetish, it was utilized in the treatment of many ailments. For long it was believed that the spirit causing the sickness could be eliminated by sweating. Vapor baths were highly regarded; natural hot springs soon blossomed as primitive health resorts. Early man discovered that heat would relieve pain; he used sunlight, fresh animal organs, hot clay, and hot stones, and many of these methods are still employed. Rhythm was practiced in an effort to influence the spirits; the tom-toms were universal. 물은 강력한 주물(呪物)이어서, 여러 질병 치료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靈)이 일으킨 질병은 땀을 흘려서 없앨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한증(汗蒸)은 굉장히 중시되었습니다. 천연 온천은 곧 원시적 휴양지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대인은 통증이 열로 누그러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햇빛, 싱싱한 동물 장기(臟器), 뜨거운 찰흙과 뜨거운 돌멩이들을 사용했고 이런 방법 중 여러 가지가 아직도 사용됩니다. 영(靈)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리듬을 사용했습니다. 드럼은 보편적이었습니다.

90:4.7 (991.6) Among some people disease was thought to be caused by a wicked conspiracy between spirits and animals. This gave rise to the belief that there existed a beneficent plant remedy for every animal-caused disease. The red men were especially devoted to the plant theory of universal remedies; they always put a drop of blood in the root hole left when the plant was pulled up.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질병은 영들과 동물들 사이의 사악한 공모로 생긴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동물이 일으킨 모든 질병에 대해 유익한 식물 치료제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낳았습니다. 홍인들은 특히 만병통치의 식물 요법에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식물이 잡아 뽑힐 때 남겨 놓은 뿌리 구멍에 언제나 피 한 방울을 넣었습니다.

90:4.8 (991.7) Fasting, dieting, and counterirritants were often used as remedial measures. Human secretions, being definitely magical, were highly regarded; blood and urine were thus among the earliest medicines and were soon augmented by roots and various salts. The shamans believed that disease spirits could be driven out of the body by foul-smelling and bad-tasting medicines. Purging very early became a routine treatment, and the values of raw cocoa and quinine were among the earliest pharmaceutical discoveries. 단식, 식이요법 및 반대(유도) 자극제들이 치료책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분명히 마법적인, 인간 분비물은 굉장히 중시되었습니다. 혈액과 소변은 이렇게 가장 초기의 약제들에 속했고 이윽고 뿌리들과 다양한 소금으로 늘어났습니다. 무당들은 질병을 일으키는 영(靈)들이 악취 나는 쓴 약으로 몸 밖으로 쫓겨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공기 배기(空氣排氣)는 아주 초기에 일상적 치료법이 되었고 야생 코코아와 퀴닌의 가치는 아주 초기의 약제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90:4.9 (992.1) The Greeks were the first to evolve truly rational methods of treating the sick. Both the Greeks and the Egyptians received their medical knowledge from the Euphrates valley. Oil and wine was a very early medicine for treating wounds; castor oil and opium were used by the Sumerians. Many of these ancient and effective secret remedies lost their power when they became known; secrecy has always been essential to the successful practice of fraud and superstition. Only facts and truth court the full light of comprehension and rejoice in the illumination and enlightenment of scientific research. 그리스인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정말로 합리적 방법을 개발한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과 이집트인들은 둘 다 유프라테스 계곡에서 자신들의 의학 지식을 받았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를 치료하는 아주 초기의 약품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피마자유와 아편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고대의 효력 있는 은밀한 여러 치료법이 알려지게 되자, 그 효력을 잃었습니다. 비밀주의는 사기와 미신의 성공적인 관행에 언제나 필수적이었습니다. 사실과 진실만이 이해의 충만한 시력을 얻으려고 하며 과학 연구의 계몽(啓蒙)과 계발(啓發)을 좋아합니다.

5. Priests and Rituals 사제(司祭)와 의식(儀式)

90:5.1 (992.2) The essence of the ritual is the perfection of its performance; among savages it must be practiced with exact precision. It is only when the ritual has been correctly carried out that the ceremony possesses compelling power over the spirits. If the ritual is faulty, it only arouses the anger and resentment of the gods. Therefore, since man’s slowly evolving mind conceived that the technique of ritual was the decisive factor in its efficacy, it was inevitable that the early shamans should sooner or later evolve into a priesthood trained to direct the meticulous practice of the ritual. And so for tens of thousands of years endless rituals have hampered society and cursed civilization, have been an intolerable burden to every act of life, every racial undertaking. 의식(儀式)의 본질은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이어서, 야만인들 사이에서 의식(儀式)은 엄밀한 정확성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의식(儀式)이 정확하게 수행되었을 때만, 의례(儀禮)가 영(靈)들에 대해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의식(儀式)이 잘못되면, 신과 같은 존재들의 노염과 원한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따라서 서서히 진화하는 인간의 마음은 의식(儀式)의 기법이 그 효험 있는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해서, 초기 무당들이 머잖아 의식(儀式)의 세심한 수행을 관리하도록 훈련된 사제직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만 년 동안 끝없는 의식(儀式)이 사회를 방해하고 문명을 저주했으며 모든 삶의 행위, 모든 종족의 일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이었습니다.

90:5.2 (992.3) Ritual is the technique of sanctifying custom; ritual creates and perpetuates myths as well as contributing to the preservation of social and religious customs. Again, ritual itself has been fathered by myths. Rituals are often at first social, later becoming economic and finally acquiring the sanctity and dignity of religious ceremonial. Ritual may be personal or group in practice — or both — as illustrated by prayer, dancing, and drama. 의식(儀式)은 관습을 신성화하는 기법이어서, 의식(儀式)이 신화(神話)를 창조하고 영속시킬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 관습의 보존에 공헌합니다. 게다가 신화(神話)가 의식(儀式) 자체를 돌봤습니다. 의식(儀式)들이 흔히 처음에는 사회적이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것이 되어, 마침내 종교적 의례의 신성(神聖)과 존엄(尊嚴)을 얻게 됩니다. 의식(儀式)은 기도, 춤, 연극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90:5.3 (992.4) Words become a part of ritual, such as the use of terms like amen and selah. The habit of swearing, profanity, represents a prostitution of former ritualistic repetition of holy names. The making of pilgrimages to sacred shrines is a very ancient ritual. The ritual next grew into elaborate ceremonies of purification, cleansing, and sanctification. The initiation ceremonies of the primitive tribal secret societies were in reality a crude religious rite. The worship technique of the olden mystery cults was just one long performance of accumulated religious ritual. Ritual finally developed into the modern types of social ceremonials and religious worship, services embracing prayer, song, responsive reading, and other individual and group spiritual devotions. 아멘과 셀라(시편 39개의 시에 71회, 하박국에 3회 나옵니다. 찬양과 악기 연주 중에 음성이나 그 음을 높이거나 노래하는 사람들이 연주 중 잠시 침묵한다는 의미)와 같은 용어의 사용처럼, 단어들이 의식(儀式)의 일부가 됩니다. 욕설, 신성 모독의 습관은 성스러운 이름을 반복하는 옛날 의식(儀式)의 타락을 나타냅니다. 신성한 성지(聖地)를 순례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의식(儀式)입니다. 의식(儀式)은 다음에 정화(淨化), 죄 씻음과 성화(聖化)의 정교한 의례로 발전했습니다. 원시 부족의 비밀 공동체의 입회식은 실제로 투박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오래된 신비 종파들의 경배 기법은 축적된 종교의식이 하나로 연결된 긴 공연에 불과했습니다. 의식(儀式)은 마침내 현대적 유형의 공동체적 의례들과 및 종교적 경배, 즉 기도, 노래, 교독(交讀)과 기타 개인과 집단의 영적 헌신을 포함하는 예배로 발전했습니다.

90:5.4 (992.5) The priests evolved from shamans up through oracles, diviners, singers, dancers, weathermakers, guardians of religious relics, temple custodians, and foretellers of events, to the status of actual directors of religious worship. Eventually the office became hereditary; a continuous priestly caste arose. 사제들은 무당들로부터 신탁자, 점쟁이, 가수, 무용가, 날씨 만드는 자, 종교 유물 수호자, 성전 보관자, 사건 예언자들을 거쳐 종교적 예배를 실제로 지도하는 지위로 서서히 발전했습니다. 결국 그 직무가 세습되어서, 지속적인 사제 계급이 생겼습니다.

90:5.5 (992.6) As religion evolved, priests began to specialize according to their innate talents or special predilections. Some became singers, others prayers, and still others sacrificers; later came the orators — preachers. And when religion became institutionalized, these priests claimed to “hold the keys of heaven.” 종교가 진화하면서 사제들은 타고난 재능이나 특별한 애호에 따라 전문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수들로, 다른 사람들은 기도자들로, 또 다른 사람들은 제사하는 자들이 되었고, 나중에 연설자 즉 설교자가 등장했습니다. 종교가 제도화되자, 이런 사제들은 “하늘의 열쇠를 쥐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90:5.6 (992.7) The priests have always sought to impress and awe the common people by conducting the religious ritual in an ancient tongue and by sundry magical passes so to mystify the worshipers as to enhance their own piety and authority. The great danger in all this is that the ritual tends to become a substitute for religion. 사제들은 언제나 고대 언어로 종교의식(儀式)을 인도하고, 잡다한 마법적 손놀림으로, 예배자들을 홀리고 자신들의 경건과 권위를 강화하여, 일반인들에게 깊은 인상과 경외심을 주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위험은 의식(儀式)이 종교(宗敎)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90:5.7 (993.1) The priesthoods have done much to delay scientific development and to hinder spiritual progress, but they have contributed to the stabilization of civilization and to the enhancement of certain kinds of culture. But many modern priests have ceased to function as directors of the ritual of the worship of God, having turned their attention to theology — the attempt to define God. 사제직이 과학 발전을 지연시키고 영적 진보를 방해하는 데 크게 진력했지만, 그들은 문명을 안정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현대의 사제들이 하느님을 정의(定義)하려는 시도, 즉 신학에 관심을 돌리면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의식(儀式)의 지도자들로서 직분을 중단했습니다.

90:5.8 (993.2) It is not denied that the priests have been a millstone about the neck of the races, but the true religious leaders have been invaluable in pointing the way to higher and better realities. 사제들이 여러 인종의 목에 두른 (마소로 끌어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큰) 연자(硏子) 맷돌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참된 종교 지도자들은 더 높고 더 나은 실체들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90:5.9 (993.3) [Presented by a Melchizedek of Nebadon.][네바돈의 멜기세덱이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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