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Paper 194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 증여(贈與)

The new gospel about Jesus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The mission of the Spirit of Truth 진리의 영의 사명
Man’s threefold spiritual endowment 사람의 3중적 영적 증여
The seven higher spiritual influences 더 높은 7가지 영적 영향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 교회의 시작

161030 진리의 영1 – 하나님 나라의 복음 행2: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194:0.1 (2059.1) ABOUT one o’clock, as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were engaged in prayer, they all became aware of a strange presence in the room. At the same time these disciples all became conscious of a new and profound sense of spiritual joy, security, and confidence. This new consciousness of spiritual strength was immediately followed by a strong urge to go out and publicly proclaim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the good news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약 1시 경에, 120명의 신자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들 모두 이상한 존재가 그 방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영적 기쁨과 안심함 그리고 확신을 주는 새로운 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힘을 새롭게 느끼게 되자, 이들은 즉시 밖에 나가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소식을 선포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습니다.

194:0.2 (2059.2) Peter stood up and declared that this must be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 Master had promised them and proposed that they go to the temple and begin the proclamation of the good news committed to their hands. And they did just what Peter suggested.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것이 바로 주(主)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셨던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이 분명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에 가서 자신들의 손에 맡겨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했습니다.

194:0.3 (2059.3) These men had been trained and instructed that the gospel which they should preach was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sonship of man, but at just this moment of spiritual ecstasy and personal triumph, the best tidings, the greatest news, these men could think of was the fact of the risen Master. And so they went forth, endowed with power from on high, preaching glad tidings to the people — even salvation through Jesus — but they unintentionally stumbled into the error of substituting some of the facts associated with the gospel for the gospel message itself. Peter unwittingly led off in this mistake, and others followed after him on down to Paul, who created a new religion out of the new version of the good news.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포해야할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의 자녀 관계라고 훈련과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최상의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 예수님을 통한 구원까지 전파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게 복음의 내용 자체를 복음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로 바꾸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앞장서서 이런 잘못을 행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랐으며, 바울에게까지 이어져, 바울은 기쁜 소식을 새롭게 해석한 새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194:0.4 (2059.4)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the fact of the fatherhood of God, coupled with the resultant truth of the sonship-brotherhood of men. Christianity, as it developed from that day, is: the fact of God a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in association with the experience of believer-fellowship with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사실과, 이와 함께 그 결과 인간의 아들됨과 형제 신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그 날부터 발전하여, 부활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이 친교를 나누는 경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194:0.5 (2059.5) It is not strange that these spirit-infused men should have seized upon this opportunity to express their feelings of triumph over the forces which had sought to destroy their Master and end the influence of his teachings. At such a time as this it was easier to remember their personal association with Jesus and to be thrilled with the assurance that the Master still lived, that their friendship had not ended, and that the spirit had indeed come upon them even as he had promised. 영에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이, 주(主)님을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없애려 했던 세력을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을 드러낼 이 기회를 잡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그들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셔서 자신들과의 사귐이 끝나지 않았으며, 그의 약속대로 그 영이 정말로 자신들에게 오셨다는 확신으로 감동되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194:0.6 (2059.6) These believers felt themselves suddenly translated into another world, a new existence of joy, power, and glory. The Master had told them the kingdom would come with power, and some of them thought they were beginning to discern what he meant. 이 신자들은 자신들이 갑자기 기쁨과 권능 그리고 영광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졌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 중 몇 몇은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0.7 (2059.7) And when all of this is taken into consideration, it is not difficult to understand how these men came to preach a new gospel about Jesus in the place of their former message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이러한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간의 형제 신분이라는 이전의 메시지 대신에 예수님에 대한 새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The Pentecost Sermon 오순절 설교

161106 진리의 영2 – 오순절 설교 행2:36-41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194:1.1 (2060.1) The apostles had been in hiding for forty days. This day happened to be the Jewish festival of Pentecost, and thousands of visitors from all parts of the world were in Jerusalem. Many arrived for this feast, but a majority had tarried in the city since the Passover. Now these frightened apostles emerged from their weeks of seclusion to appear boldly in the temple, where they began to preach the new message of a risen Messiah. And all the disciples were likewise conscious of having received some new spiritual endowment of insight and power.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로서 세계 각지로부터 수천 명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축제를 위해 왔지만, 대부분은 유월절 이후에도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던 사도들이 몇 주간의 은거에서 벗어나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나, 그곳에서 부활한 메시아의 새 메시지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도 똑같이 어떤 새로운 영적 통찰력과 권능이 자신들에게 부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1.2 (2060.2) It was about two o’clock when Peter stood up in that very place where his Master had last taught in this temple, and delivered that impassioned appeal which resulted in the winning of more than two thousand souls. The Master had gone, but they suddenly discovered that this story about him had great power with the people. No wonder they were led on into the further proclamation of that which vindicated their former devotion to Jesus and at the same time so constrained men to believe in him. Six of the apostles participated in this meeting: Peter, Andrew, James, John, Philip, and Matthew. They talked for more than an hour and a half and delivered messages in Greek, Hebrew, and Aramaic, as well as a few words in even other tongues with which they had a speaking acquaintance. 베드로가 오후 2시 쯤 주님께서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셨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열정적으로 호소했고, 그 결과 거의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떠나 가셨지만, 사도들은, 그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권능이 있음을 갑작스럽게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헌신이 올바른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더 나아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강요하는 선포로 당연히 이끌렸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여섯 명의 사도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였습니다. 그들은 1시간 30분 이상 이야기하면서, 헬라어,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로 메시지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씩 설교하였습니다.

194:1.3 (2060.3) The leaders of the Jews were astounded at the boldness of the apostles, but they feared to molest them because of the large numbers who believed their story.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대담함에 놀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194:1.4 (2060.4) By half past four o’clock more than two thousand new believers followed the apostles down to the pool of Siloam, where Peter, Andrew, James, and John baptized them in the Master’s name. And it was dark when they had finished with baptizing this multitude. 4시 30분 쯤 2,000명이 넘는 새 신자들은 사도들을 따라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주(主)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했습니다. 해질 녘이 되어서야,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주던 세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4:1.5 (2060.5) Pentecost was the great festival of baptism, the time for fellowshipping the proselytes of the gate, those gentiles who desired to serve Yahweh. It was, therefore, the more easy for large numbers of both the Jews and believing gentiles to submit to baptism on this day. In doing this, they were in no way disconnecting themselves from the Jewish faith. Even for some time after this the believers in Jesus were a sect within Judaism. All of them, including the apostles, were still loyal to the essential requirements of the Jewish ceremonial system. 오순절은 타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야훼를 섬기려는 이방인들 즉 할례의 의무가 없는 개종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기간으로 세례의 큰 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의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이 이 날의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유대의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동안까지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하여 그들 모두 유대의 의식적(儀式的) 체계의 기본 요구들을 여전히 신봉하였습니다.

2. The Significance of Pentecost 오순절의 의미

161113 진리의 영3 – 오순절의 의미 1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94:2.1 (2060.6) Jesus lived on earth and taught a gospel which redeemed man from the superstition that he was a child of the devil and elevated him to the dignity of a faith son of God. Jesus’ message, as he preached it and lived it in his day, was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spiritual difficulties in that day of its statement. And now that he has personally left the world, he sends in his place his Spirit of Truth, who is designed to live in man and, for each new generation, to restate the Jesus message so that every new group of mortals to appear upon the face of the earth shall have a new and up-to-date version of the gospel, just such personal enlightenment and group guidance as will prove to be an effective solvent for man’s ever-new and varied spiritual difficulties.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사람은 마귀의 자녀라는 미신에서 건져서 하나님의 신앙의 자녀라는 품격으로 사람을 높이는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당대에 설교하고 실천하신 것처럼, 그것이 진술된 그 시대 사람의 영적 고난들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대신 진리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 안에서 살아가시도록 작정되었고, 각각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진술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새로운 집단들이, 새로운 최첨단 해석 버전의 복음을 가지고, 바로 그렇게 개인적으로 깨우치고, 집단적으로 안내를 받아, 그 복음이 언제나 새롭게 발생하는 다양한 영적 어려움들을 위한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할 것입니다.

194:2.2 (2060.7) The first mission of this spirit is, of course, to foster and personalize truth, for it is the comprehension of truth that constitutes the highest form of human liberty. Next, it is the purpose of this spirit to destroy the believer’s feeling of orphanhood. Jesus having been among men, all believers would experience a sense of loneliness had not the Spirit of Truth come to dwell in men’s hearts. 이 영의 첫 번째 사명은 당연히 진리를 길러 개인화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상의 형태로 인간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의 목적은 신자들 자신이 고아(孤兒)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에 내주하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들은 고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194:2.3 (2061.1) This bestowal of the Son’s spirit effectively prepared all normal men’s minds for the subsequent universal bestowal of the Father’s spirit (the Adjuster) upon all mankind. In a certain sense, this Spirit of Truth is the spirit of both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아들의 영을 이렇게 주셔서, 뒤를 이어 모든 인류가 우주적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영(조절자)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효과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진리의 영은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 두 분의 영이십니다.

194:2.4 (2061.2) Do not make the mistake of expecting to become strongly intellectually conscious of the outpoured Spirit of Truth. The spirit never creates a consciousness of himself, only a consciousness of Michael, the Son. From the beginning Jesus taught that the spirit would not speak of himself. The proof, therefore, of your fellowship with the Spirit of Truth is not to be found in your consciousness of this spirit but rather in your experience of enhanced fellowship with Michael. 부어진 진리의 영을 지적으로 강하게 인식되기를 기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 영은 결코 자신을 의식(意識)하게 하지 않으며,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만 의식하게 하십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그 영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과 우리가 친교를 나누는 증거는 이 영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예수님과의 더욱 강화된 친교의 체험 속에서 발견됩니다.

194:2.5 (2061.3) The spirit also came to help men recall and understand the words of the Master as well as to illuminate and reinterpret his life on earth. 이 영은 또한 사람이 주(主)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도우며,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일생을 조명하고 재해석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194:2.6 (2061.4) Next, the Spirit of Truth came to help the believer to witness to the realities of Jesus’ teachings and his life as he lived it in the flesh, and as he now again lives it anew and afresh in the individual believer of each passing generation of the spirit-filled sons of God. 다음으로, 진리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사셨던 것처럼, 신자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그 일생의 실체들을 증거하도록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금 다시 사시는 것처럼, 지나가는 각 세대에서, 영으로 충만해진 하나님 자녀들 즉 각 개별 신자 안에서 새롭게 그리고 신선하게 그 실체들이 증언됩니다.

194:2.7 (2061.5) Thus it appears that the Spirit of Truth comes really to lead all believers into all truth, into the expanding knowledge of the experience of the living and growing spiritual consciousness of the reality of eternal and ascending sonship with God. 그렇게, 진리의 영은 진실로 모든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영원히 상승하는 하나님의 아들관계에 대해 생생하게 더욱 더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아는 확대된 지식으로 인도하려고 오셨습니다.

161127 진리의 영4 – 오순절의 의미 2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194:2.8 (2061.6) Jesus lived a life which is a revelation of man submitted to the Father’s will, not an example for any man literally to attempt to follow. This life in the flesh, together with his death on the cross and subsequent resurrection, presently became a new gospel of the ransom which had thus been paid in order to purchase man back from the clutch of the evil one — from the condemnation of an offended God. Nevertheless, even though the gospel did become greatly distorted, it remains a fact that this new message about Jesus carried along with it many of the fundamental truths and teachings of his earlier gospel of the kingdom. And, sooner or later, these concealed truths of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en will emerge to effectually transform the civilization of all mankind.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문자 그대로 따르는 모델로 살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육체로 사신 이 생애는 십자가 위의 죽으심과 연이어 일어난 부활과 함께, 현재 구속이라는 새로운 복음이 되었습니다. 구속은 마귀의 손아귀 즉 분노하는 하나님의 유죄 판결로부터, 인간을 다시 사기 위해 그렇게 몸값이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이 새로운 메시지가 그의 초기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근본적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사람들의 형제 신분이라는 감추어진 이 진리들이 모든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194:2.9 (2061.7) But these mistakes of the intellect in no way interfered with the believer’s great progress in growth in spirit. In less than a month after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the apostles made more individual spiritual progress than during their almost four years of personal and loving association with the Master. Neither did this substitution of the fact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for the saving gospel truth of sonship with God in any way interfere with the rapid spread of their teachings; on the contrary, this overshadowing of Jesus’ message by the new teachings about his person and resurrection seemed greatly to facilitate the preaching of the good news. 그러나 이 지적인 오류들은 신자의 영적 성장에 대한 괄목할만한 진보에 있어서 어떤 면으로든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진리의 영을 받은 후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거의 4년에 걸쳐서 주님과 개인적으로 보냈던 사랑하는 관계보다 개별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영적으로 진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라는 구원의 복음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로 대체한 것도 신속히 퍼져나가는 그들의 가르침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예수의 메시지에 드리워진 이 그늘이 오히려 기쁜 소식의 전파를 크게 촉진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4:2.10 (2061.8) The term “baptism of the spirit,” which came into such general use about this time, merely signified the conscious reception of this gift of the Spirit of Truth and the personal acknowledgment of this new spiritual power as an augmentation of all spiritual influences previously experienced by God-knowing souls. 이 무렵 “영의 세례(洗禮)”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단지 진리의 영이라는 이 선물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을 아는 혼들이 이전에 체험하였던 모든 영적인 영향력이 새로운 이 영적 권능으로 증대되었음을 개인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194:2.11 (2061.9) Sinc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man is subject to the teaching and guidance of a threefold spirit endowment: the spirit of the Father, the Thought Adjuster; the spirit of the Son, the Spirit of Truth; the spirit of the Spirit, the Holy Spirit. 진리의 영이 주어진 이후, 사람은 삼중적 영 즉, 아버지의 영(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진리의 영), 영의 영(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2.12 (2062.1) In a way, mankind is subject to the double influence of the sevenfold appeal of the universe spirit influences. The early evolutionary races of mortals are subject to the progressive contact of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Mother Spirit. As man progresses upward in the scale of intelligence and spiritual perception, there eventually come to hover over him and dwell within him the seven higher spirit influences. And these seven spirits of the advancing worlds are: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의 영향력이 주는 일곱 가지로 중복된 매력의 영향력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초기 진화 종족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주는 일곱 보조 마음-영들의 진보적 접촉 아래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적 등급과 영적 인식이 상향으로 진보하면 결국 일곱 가지의 더 높은 영의 영향이 그에게 와서 내주합니다. 진보하는 세계의 이러한 일곱 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2.13 (2062.2) 1. The bestowed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 the Thought Adjusters. 우주 아버지의 영(靈)─생각조절자.

194:2.14 (2062.3) 2. The spirit presence of the Eternal Son — the spirit gravity of the universe of universes and the certain channel of all spirit communion. 영원하신 아들의 영 현존─우주들의 우주의 영 중력과 모든 영 교제의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The spirit presence of the Infinite Spirit — the universal spirit-mind of all creation, the spiritual source of the intellectual kinship of all progressive intelligences. 무한 영(靈)의 영 현존─모든 창조의 우주 영-마음, 진보하는 모든 지능들의 지적 유사성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The spirit of the Universal Father and the Creator Son — the Spirit of Truth,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on. 우주 아버지와 창조주 아들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간주되는 진리의 영.

194:2.17 (2062.6) 5. The spirit of the Infinite Spirit and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Holy Spirit, generally regarded as the spirit of the Universe Spirit. 무한 영(靈)의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일반적으로 우주 영의 영으로 간주되는 성령.

194:2.18 (2062.7) 6. The mind-spirit of the Universe Mother Spirit — the seven adjutant mind-spirits of the local universe. 우주 어머니 영의 마음-영 ─ 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마음-영들.

194:2.19 (2062.8) 7. The spirit of the Father, Sons, and Spirits — the new-name spirit of the ascending mortals of the realms after the fusion of the mortal spirit-born soul with the Paradise Thought Adjuster and after the subsequent attainment of the divinity and glorification of the status of the Paradise Corps of the Finality. 아버지, 아들들 그리고 영들의 영─영으로 태어난 사람의 혼과 천국 생각조절자의 융합 이후 그리고 그에 따라 나중에 천국 최종단의 지위에서의 신성과 영광을 달성한 후, 영역들에서 상승하는 사람이 받는 새로운-이름의 영.

194:2.20 (2062.9) And so did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bring to the world and its peoples the last of the spirit endowment designed to aid in the ascending search for God. 그래서 그렇게 진리의 영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을 찾는 상승을 돕기 위해 계획된 최종적 영의 부으심이 일어났습니다.

3. What Happened at Pentecost 오순절에 발생한 일

161204 진리의 영5 – 오순절에 발생한 일 1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194:3.1 (2062.10) Many queer and strange teachings became associated with the early narratives of the day of Pentecost. In subsequent times the events of this day, on which the Spirit of Truth, the new teacher, came to dwell with mankind, have become confused with the foolish outbreaks of rampant emotionalism. The chief mission of this outpoured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is to teach men about the truths of the Father’s love and the Son’s mercy. These are the truths of divinity which men can comprehend more fully than all the other divine traits of character. The Spirit of Truth is concerned primarily with the revelation of the Father’s spirit nature and the Son’s moral character. The Creator Son, in the flesh, revealed God to men; the Spirit of Truth, in the heart, reveals the Creator Son to men. When man yields the “fruits of the spirit” in his life, he is simply showing forth the traits which the Master manifested in his own earthly life. When Jesus was on earth, he lived his life as one personality — Jesus of Nazareth. As the indwelling spirit of the “new teacher,” the Master has, since Pentecost, been able to live his life anew in the experience of every truth-taught believer. 가치 없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들이 오순절 날의 초기 이야기들과 연관 되었습니다. 후세에, 인류에 내주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생님으로 진리의 영이 왔던 이날의 사건들은 사납게 휩쓸린 감정주의의 어리석은 소동들과 혼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출된 이 영의 주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에 대한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다른 모든 성품의 신성한 특징들 보다 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룩한 진리들입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의 영에 대한 본성과 아들의 도덕적인 성품을 계시하는데 주된 관련이 있습니다. 창조주 아들은 육신으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으며, 진리의 영은 마음으로 창조주 아들을 사람들에게 계시합니다. 사람이 일생에 “영의 열매들”을 맺을 때, 그는 단순히 주(主)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일생 속에 나타내셨던 그 특징들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그는 하나의 고유성 – 나사렛 예수 –로서 자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주(主)는 “새로운 선생”의 내주하는 영으로서, 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신자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일생을 사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194:3.2 (2062.11) Many things which happen in the course of a human life are hard to understand, difficult to reconcile with the idea that this is a universe in which truth prevails and in which righteousness triumphs. It so often appears that slander, lies, dishonesty, and unrighteousness — sin — prevail. Does faith, after all, triumph over evil, sin, and iniquity? It does. And the life and death of Jesus are the eternal proof that the truth of goodness and the faith of the spirit-led creature will always be vindicated. They taunted Jesus on the cross, saying, “Let us see if God will come and deliver him.” It looked dark on that day of the crucifixion, but it was gloriously bright on the resurrection morning; it was still brighter and more joyous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s of pessimistic despair seek to obtain release from the burdens of life; they crave extinction in endless slumber and rest. These are the religions of primitive fear and dread. The religion of Jesus is a new gospel of faith to be proclaimed to struggling humanity. This new religion is founded on faith, hope, and love.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리가 지배하고, 공의가 승리하는 곳이 우주인데, 이러한 우주에 대한 관념과 조화시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주 죄 – 중상(中傷), 거짓말, 부정직함, 그리고 불의 –가 이기는 듯합니다. 결국에는 신앙이 악, 죄, 그리고 사악함을 이길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죽음은, 영으로 인도받는 피조물의 선(善)함과 신앙의 진실성이 항상 정당화 될 것이라는 영원한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하나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시는지 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던 그 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광스럽게 빛났습니다. 오순절에는 여전히 더욱 빛나고 더욱 기쁨이 넘쳤습니다. 비관적인 절망(絶望)의 종교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끝없는 수면과 휴식 안에서 멸절(滅絶)되기를 갈망합니다. 이것들은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예수의 종교는 분투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새로운 신앙의 복음입니다. 새로운 이 종교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61211 진리의 영6 – 오순절에 발생한 일 2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194:3.3 (2063.1) To Jesus, mortal life had dealt its hardest, cruelest, and bitterest blows; and this man met these ministrations of despair with faith, courage, and the unswerving determination to do his Father’s will. Jesus met life in all its terrible reality and mastered it — even in death. He did not use religion as a release from life. The religion of Jesus does not seek to escape this life in order to enjoy the waiting bliss of another existence. The religion of Jesus provides the joy and peace of another and spiritual existence to enhance and ennoble the life which men now live in the flesh. 그는 삶에서 벗어나려는 도피(逃避)로써 종교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다른 존재가 되어 축복 받을 것이라는 즐거움을 기다리면서 이생의 예수님은 가장 힘들고,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통한 일격(一擊)을 당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신앙과 용기와 확고한 결단력으로 절망적인 이 직무들에 대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끔찍한 모든 삶의 실체를 맞이하여, 죽음까지도 포함에서 그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삶에서 도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들이 현재 육신으로 사는 바로 그 삶을 향상시키고 고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영적 생활의 기쁨과 평강을 제공합니다.

194:3.4 (2063.2) If religion is an opiate to the people, it is not the religion of Jesus. On the cross he refused to drink the deadening drug, and his spirit, poured out upon all flesh, is a mighty world influence which leads man upward and urges him onward. The spiritual forward urge is the most powerful driving force present in this world; the truth-learning believer is the one progressive and aggressive soul on earth. 종교가 인간에게 아편(마취제)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통증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강력한 세계적 영향력입니다. 전진하는 영적 충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지상에서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194:3.5 (2063.3) On the day of Pentecost the religion of Jesus broke all national restrictions and racial fetters. It is forever true,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On this day the Spirit of Truth became the personal gift from the Master to every mortal. This spirit was bestowed for the purpose of qualifying believers more effectively to preach the gospel of the kingdom, but they mistook the experience of receiving the outpoured spirit for a part of the new gospel which they were unconsciously formulating. 오순절에 예수의 종교는 국가적 제약들과 종족간의 족쇄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은 언제까지나 진리입니다. 이 날, 진리의 영은 주(主)께서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영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적격(適格)자가 되도록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퍼부어진 영을 받는 체험을, 자신들이 무의식중에 형성하고 있었던 새 복음의 일부로 삼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194:3.6 (2063.4)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 Spirit of Truth was bestowed upon all sincere believers; this gift of the spirit did not come only to the apostles. The one hundred and twenty men and women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all received the new teacher, as did all the honest of heart throughout the whole world. This new teacher was bestowed upon mankind, and every soul received him in accordance with the love for truth and the capacity to grasp and comprehend spiritual realities. At last, true religion is delivered from the custody of priests and all sacred classes and finds its real manifestation in the individual souls of men. 진리의 영이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증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의 이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남자와 여자들은 모두 이 새로운 선생을 받았으며, 온 세상에서 정직한 심정을 지닌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고 영적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혼(사람)이 그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참된 종교가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이 관리하는 상태에서 해방되었으며, 각자 사람(혼) 안에서 참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4:3.7 (2063.5) The religion of Jesus fosters the highest type of human civilization in that it creates the highest type of spiritual personality and proclaims the sacredness of that person. 예수의 종교는 최상의 영적 고유성 유형을 만들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인간 문명 유형을 육성합니다.

161218 진리의 영7 – 오순절에 발생한 일 3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194:3.8 (2063.6)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on Pentecost made possible a religion which is neither radical nor conservative; it is neither the old nor the new; it is to be dominated neither by the old nor the young. The fact of Jesus’ earthly life provides a fixed point for the anchor of time, while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provides for the everlasting expansion and endless growth of the religion which he lived and the gospel which he proclaimed. The spirit guides into all truth; he is the teacher of an expanding and always-growing religion of endless progress and divine unfolding. This new teacher will be forever unfolding to the truth-seeking believer that which was so divinely folded up in the person and nature of the Son of Man.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오셔서, 급진적이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종교는 오래된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인들에게 지배되지도 않고, 청년들에게 지배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시간의 닻을 위한 정점(定點)을 제공합니다. 반면에 진리의 영의 수여(授與: 베풀어 주심)는 주님께서 사셨던 종교와 선포하셨던 복음의 영속적인 확장과 끝없는 성장을 마련합니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끝없는 진보와 신성이 펼쳐져서 확장되고 항상 성장하는 종교의 선생입니다. 이 새로운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신성하게 감춰진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입니다.

194:3.9 (2064.1) The manifestations associated with the bestowal of the “new teacher,” and the reception of the apostles’ preaching by the men of various races and nations gathered together at Jerusalem, indicate the universality of the religion of Jesus. The gospel of the kingdom was to be identified with no particular race, culture, or language. This day of Pentecost witnessed the great effort of the spirit to liberate the religion of Jesus from its inherited Jewish fetters. Even after this demonstration of pouring out the spirit upon all flesh, the apostles at first endeavored to impose the requirements of Judaism upon their converts. Even Paul had trouble with his Jerusalem brethren because he refused to subject the gentiles to these Jewish practices. No revealed religion can spread to all the world when it makes the serious mistake of becoming permeated with some national culture or associated with established racial, social, or economic practices. “새로운 선생”의 증여(贈與:선물로 주심)와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들과,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던 여러 인종과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지닌 보편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특정한 인종, 문화 또는 언어와 동일시(同一視)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순절 바로 이 날에 그 영의 위대한 수고로 예수의 종교는, 이어져 왔던 유대교의 사슬에서 분명히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모든 육체에 영이 부어졌음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처음 개종자들에게 유대교의 요구조건들을 부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이 예루살렘 형제들과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유대 관습에 복종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계시(啓示) 종교는 어떤 민족 문화에 젖어 들거나, 확립된 인종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에 빠질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습니다.

194:3.10 (2064.2) The bestowal of the Spirit of Truth was independent of all forms, ceremonies, sacred places, and special behavior by those who received the fullness of its manifestation. When the spirit came upon those assembled in the upper chamber, they were simply sitting there, having just been engaged in silent prayer. The spirit was bestowed in the country as well as in the city.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apostles to go apart to a lonely place for years of solitary meditation in order to receive the spirit. For all time, Pentecost disassociates the idea of spiritual experience from the notion of especially favorable environments.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식들, 의식(儀式)들, 거룩한 장소들, 그리고 그 영이 나타남을 충분히 받았던 사람들의 특별한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 영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단지 거기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기도에 막 들어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영은 도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골에서도 주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그 영을 받기 위해 뿔뿔이 헤어져 외로운 곳에서 몇 년씩 고독하게 묵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개념이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어진다는 관념으로부터 언제나 분리시킵니다.

194:3.11 (2064.3) Pentecost, with its spiritual endowment, was designed forever to loose the religion of the Master from all dependence upon physical force; the teachers of this new religion are now equipped with spiritual weapons. They are to go out to conquer the world with unfailing forgiveness, matchless good will, and abounding love. They are equipped to overcome evil with good, to vanquish hate by love, to destroy fear with a courageous and living faith in truth. Jesus had already taught his followers that his religion was never passive; always were his disciples to be active and positive in their ministry of mercy and in their manifestations of love. No longer did these believers look upon Yahweh as “the Lord of Hosts.” They now regarded the eternal Deity as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made that progress, at least, even if they did in some measure fail fully to grasp the truth that God is also the spiritual Father of every individual. 오순절은, 영의 부어주심과 함께, 주(主)님의 종교가 물리적 힘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영원히 벗어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새로운 이 종교의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들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용서, 견줄 수 없는 선한 뜻,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며, 진리에 대해 용감하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두려움을 파괴할 장비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수동적)이 아니라고 이미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자비(慈悲)로 봉사하고 사랑을 드러낼 때,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했습니다. 이 신자들은 야훼를 더 이상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영원한 신(神)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또한 모든 각 개인의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거기까지는 진보했습니다.

194:3.12 (2064.4) Pentecost endowed mortal man with the power to forgive personal injuries, to keep sweet in the midst of the gravest injustice, to remain unmoved in the face of appalling danger, and to challenge the evils of hate and anger by the fearless acts of love and forbearance. Urantia has passed through the ravages of great and destructive wars in its history. All participants in these terrible struggles met with defeat. There was but one victor; there was only one who came out of these embittered struggles with an enhanced reputation — that was Jesus of Nazareth and his gospel of overcoming evil with good. The secret of a better civilization is bound up in the Master’s teachings of the brotherhood of man, the good will of love and mutual trust. 오순절은 사람에게 개인적 상처를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공평의 상황에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무시무시한 위험에 직면하여서도 여전히 태연하고,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분노의 악을 도전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이 땅은 역사(歷史) 속에서 엄청나고 파괴적인 전쟁들에 의한 참혹한 피해들을 겪어 왔습니다. 이 끔찍한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패배했습니다. 승자(勝者)는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투쟁들로부터, 높은 명성과 함께 떠오른 유일한 승자는 – 나사렛 예수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그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보다 나은 문명에 대한 비결은 사람의 형제신분에 대한 주(主)님의 가르침들, 즉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한 뜻 안에 깊이 묻혀 있습니다.

16-17 진리의 영(8) – 오순절에 발생한 일 4 요일 2: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I do not write to you because you do not know the truth, but because you do know it and because no lie comes from the truth.

194:3.13 (2065.1) Up to Pentecost, religion had revealed only man seeking for God; since Pentecost, man is still searching for God, but there shines out over the world the spectacle of God also seeking for man and sending his spirit to dwell within him when he has found him. 오순절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오순절 이후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발견한 후에는 그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의 영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장관(壯觀)을 온 세상에 비추고 있습니다.

194:3.14 (2065.2) Before the teachings of Jesus which culminated in Pentecost, women had little or no spiritual standing in the tenets of the older religions. After Pentecost, in the brotherhood of the kingdom woman stood before God on an equality with man.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who received this special visitation of the spirit were many of the women disciples, and they shared these blessings equally with the men believers. No longer can man presume to monopolize the ministry of religious service. The Pharisee might go on thanking God that he was “not born a woman, a leper, or a gentile,” but among the followers of Jesus woman has been forever set free from all religious discriminations based on sex. Pentecost obliterated all religious discrimination founded on racial distinction, cultural differences, social caste, or sex prejudice. No wonder these believers in the new religion would cry out,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오순절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기 이전에, 여인들은 오래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영적 지위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여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형제 신분으로 남자들과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영을 이렇게 특별히 체험한 120명 중에 여(女)제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은 남성 신자들과 똑같이 이 축복을 누렸습니다. 남자들은 이제 종교적 예배 사역에 있어서 더 이상 독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한센병(Hansen病) 환자 또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여자는 성(性)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인종적 구별, 문화적 차이들, 사회적 특권계급, 또는 성(性)적 편견에 근간을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습니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사람들이 “주(主)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4:3.15 (2065.3) Both the mother and brother of Jesus were present among the one hundred and twenty believers, and as members of this common group of disciples, they also received the outpoured spirit. They received no more of the good gift than did their fellows. No special gift was bestowed upon the members of Jesus’ earthly family. Pentecost marked the end of special priesthoods and all belief in sacred families.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120명의 신자들 속에 있었으며, 그들도 이러한 보통 제자들의 일원으로서 부어진 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이 받은 것보다 좋은 선물을 더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집안 식구라고 해서 특별한 선물이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司祭) 신분과 거룩하게 여겨지는 가계(家系)에 대한 모든 믿음을 종식(終熄)시켰습니다.

194:3.16 (2065.4) Before Pentecost the apostles had given up much for Jesus. They had sacrificed their homes, families, friends, worldly goods, and positions. At Pentecost they gave themselves to God, and the Father and the Son responded by giving themselves to man — sending their spirits to live within men. This experience of losing self and finding the spirit was not one of emotion; it was an act of intelligent self-surrender and unreserved consecration.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들은 집, 가족, 친구, 세상의 재물과 지위를 희생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 응답으로 사람들 안에 내주하도록 자신들의 영을 보내셔서 자신들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靈)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적으로 자아를 포기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행동이었습니다.

194:3.17 (2065.5) Pentecost was the call to spiritual unity among gospel believers. When the spirit descended on the disciples at Jerusalem, the same thing happened in Philadelphia, Alexandria, and at all other places where true believers dwelt. It was literally true that “there was but one heart and soul among the multitude of the believers.” The religion of Jesus is the most powerful unifying influence the world has ever known.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있는 영적 일치(一致)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였을 때와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참된 신자들이 거주하는 모든 다른 장소들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믿는 회중 사이에 오로지 한 가지 심정과 혼이 있었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습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통합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194:3.18 (2065.6) Pentecost was designed to lessen the self-assertiveness of individuals, groups, nations, and races. It is this spirit of self-assertiveness which so increases in tension that it periodically breaks loose in destructive wars. Mankind can be unified only by the spiritual approach, and the Spirit of Truth is a world influence which is universal. 오순절은 개인, 집단, 국가, 종족들의 자기-주장을 줄이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주장의 정신은 긴장을 고조(高調)시켜 주기적인 파괴적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합니다. 인류는 영적 접근을 통해서만 통합될 수 있으며, 진리의 영은 우주적인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194:3.19 (2065.7) 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 purifies the human heart and leads the recipient to formulate a life purpose single to the will of God and the welfare of men. The material spirit of selfishness has been swallowed up in this new spiritual bestowal of selflessness. Pentecost, then and now, signifies that the Jesus of history has become the divine Son of living experience. The joy of this outpoured spirit, when it is consciously experienced in human life, is a tonic for health, a stimulus for mind, and an unfailing energy for the soul. 진리의 영의 오심은 인간의 심정을 깨끗이 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인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행복)에 대한 단 하나의 일생의 목적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이기심 없는 이 새로운 영적 증여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오순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예수께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신적 아들이 되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부어주신 영의 기쁨은, 인간 일생을 통해 의식적으로 겪을 때, 건강을 위해서는 큰 힘이 되고, 마음에는 자극이 되며, 혼을 위해서는 한없는 에너지가 됩니다.

194:3.20 (2065.8) Prayer did not bring the spirit on the day of Pentecost, but it did have much to do with determining the capacity of receptivity which characterized the individual believers. Prayer does not move the divine heart to liberality of bestowal, but it does so often dig out larger and deeper channels wherein the divine bestowals may flow to the hearts and souls of those who thus remember to maintain unbroken communion with their Maker through sincere prayer and true worship. 기도로 오순절에 영이 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도는 개별적 신자들을 특징짓는 수용(受容)성의 능력을 결정하는 데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가 신(神)의 심정을 움직여 아낌없이 주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기도와 참된 경배를 통하여 창조자와 중단 없이 계속 교통하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혼(魂)으로 신께서 주시는 것들이 흘러갈 수 있도록 확대되고 깊어진 통로를 자주 만들어 냅니다.

4. Beginnings of the Christian Church 기독교회의 시작

170101 진리의 영(9) – 기독교의 시작 1 행2:32-33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God has raised this Jesus to life, and we are all witnesses of the fact. 33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대신에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 주석(해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님
194:4.1 (2066.1) When Jesus was so suddenly seized by his enemies and so quickly crucified between two thieves, his apostles and disciples were completely demoralized. The thought of the Master, arrested, bound, scourged, and crucified, was too much for even the apostles. They forgot his teachings and his warnings. He might, indeed, have been “a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but he could hardly be the Messiah they had hoped would restore the kingdom of Israel. 예수께서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셨으며, 그렇게 빨리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도들과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습니다. 체포되어, 묶여, 채찍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主)님에 대한 기억 은 사도들에게도 매우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24:19)”이셨지만,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심정에 살아계심 하나님은 마음의 교리가 아니라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
194:4.2 (2066.2) Then comes the resurrection, with its deliverance from despair and the return of their faith in the Master’s divinity. Again and again they see him and talk with him, and he takes them out on Olivet, where he bids them farewell and tells them he is going back to the Father. He has told them to tarry in Jerusalem until they are endowed with power — until the Spirit of Truth shall come. And on the day of Pentecost this new teacher comes, and they go out at once to preach their gospel with new power. They are the bold and courageous followers of a living Lord, not a dead and defeated leader. The Master lives in the hearts of these evangelists; God is not a doctrine in their minds; he has become a living presence in their souls. 그 후 부활이 오자 절망에서 일어나 주(主)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들은 여러 번 주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들을 올리브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곳에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이르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 와서 그들이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로운 선생이 오시자, 그들은 즉시 새 힘으로 그들의 복음을 전파하러 나갑니다. 그들은 패배하고 죽은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主)님은 이 복음 전파자들의 가슴(심정)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안에 살아있는 실재이십니다.

초기 신자들의 생활 매일 모여 성찬 찬미 말씀증거
194:4.3 (2066.3) “Day by day they continued steadfastly and with one accord in the temple and breaking bread at home. They took their food with gladness and singleness of heart, praising God and hav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spirit, and they spoke the word of God with boldness. And the multitudes of those who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soul; and not one of them said that aught of the things which he possessed was his own, and they had all things in common.”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행2:46-47a).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1b-32).

예수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 사람의 형제 신분 급격한 변경 사도들의 메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
194:4.4 (2066.4) What has happened to these men whom Jesus had ordained to go forth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fatherhood of God and the brotherhood of man? They have a new gospel; they are on fire with a new experience; they are filled with a new spiritual energy. Their message has suddenly shifted to the proclamation of the risen Christ: “Jesus of Nazareth, a man God approved by mighty works and wonders; him, being delivered up by the determinate counsel and foreknowledge of God, you did crucify and slay. The things which God foreshadowed by the mouth of all the prophets, he thus fulfilled. This Jesus did God raise up. God has made him both Lord and Christ. Being, by the right hand of God, exalted and having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 of the spirit, he has poured forth this which you see and hear. Repent, that your sins may be blotted out; that the Father may send the Christ, who has been appointed for you, even Jesus, whom the heaven must receive until the times of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의 아버지신분과 사람의 형제신분을 나아가 전파하라 고 임명한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그들은 새로운 복음을 가졌고, 새로운 체험으로 흥분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급격히 변경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 못 박아 죽였으나(행2:22-23 ). …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8).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b).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너희가 회개하고 …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19-21a).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초림(일생 죽음 부활) 재림
194:4.5 (2066.5) The gospel of the kingdom, the message of Jesus, had been suddenly changed into the gospel of the Lord Jesus Christ. They now proclaimed the facts of hi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and preached the hope of his speedy return to this world to finish the work he began. Thus the message of the early believers had to do with preaching about the facts of his first coming and with teaching the hope of his second coming, an event which they deemed to be very near at hand.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의 메시지는,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갑자기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사실들을 선포하였으며, 그가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가 이 세상으로 속히 돌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의 메시지는 그의 초림(初臨)에 대한 사실들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이 아주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사건인, 그의 재림(再臨)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리가 됨 예수가 모든 것을 결정 살아계심 죽으심 영 주심 재림 새로운 교리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예수 믿는 자들의 친교 예수를 받은 사랑에서 나옴 옛 교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늘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한 형제들의 친교 필사자 사람이 형제라는 인식에서 나옴
194:4.6 (2067.1) Christ was about to become the creed of the rapidly forming church. Jesus lives; he died for men; he gave the spirit; he is coming again. Jesus filled all their thoughts and determined all their new concepts of God and everything else. They were too much enthused over the new doctrine that “God is the Father of the Lord Jesus” to be concerned with the old message that “God is the loving Father of all men,” even of every single individual. True, a marvelous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and unexampled good will did spring up in these early communities of believers. But it was a fellowship of believers in Jesus, not a fellowship of brothers in the family kingdom of the Father in heaven. Their good will arose from the love born of the concept of Jesus’ bestowal and not from the recognition of the brotherhood of mortal man. Nevertheless, they were filled with joy, and they lived such new and unique lives that all men were attracted to their teachings about Jesus. They made the great mistake of using the living and illustrative commentary on the gospel of the kingdom for that gospel, but even that represented the greatest religion mankind had ever known. 그리스도가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교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살아 계시며,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영을 주셨으며, 다시 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그들의 모든 새로운 개념들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주 예수의 아버지시다.”라는 새로운 교리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모든 개별존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옛 메시지에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형제 사랑과 전례가 없는 선한 뜻이 이러한 초기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솟아나 놀랍게 표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 였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나라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선한 뜻은 예수님의 증여 개념에서 발생된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었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형제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하였으며,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모든 사람들이 매혹되는 그러한 새롭고도 독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생생한 예증적인 주석(해설)을 바로 그 복음 대신에 사용하는 큰 오류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습니다.

170108 진리의 영(10) – 기독교의 시작 2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194:4.7 (2067.2) Unmistakably, a new fellowship was arising in the world. “The multitude who believed continued steadfastly in the apostles’ teaching and fellowship, in the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 They called each other brother and sister; they greeted one another with a holy kiss; they ministered to the poor. It was a fellowship of living as well as of worship. They were not communal by decree but by the desire to share their goods with their fellow believers. They confidently expected that Jesus would return to complete the establishment of the Father’s kingdom during their generation. This spontaneous sharing of earthly possessions was not a direct feature of Jesus’ teaching; it came about because these men and women so sincerely and so confidently believed that he was to return any day to finish his work and to consummate the kingdom. But the final results of this well-meant experiment in thoughtless brotherly love were disastrous and sorrow-breeding. Thousands of earnest believers sold their property and disposed of all their capital goods and other productive assets. With the passing of time, the dwindling resources of Christian “equal-sharing” came to an end — but the world did not. Very soon the believers at Antioch were taking up a collection to keep their fellow believers at Jerusalem from starving. 분명히, 새로운 친교(親交) 모임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기독교의 시작).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iv). An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 and fellowship, and in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Kjv).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습니다. 그것은 경배의 친교만이 아니라 생활의 친교였습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재물을 동료 신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아버지의 나라 설립을 마치려고 돌아오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세상의 소유물을 나누는 것은 예수 가르침의 직접적인 특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언젠가 돌아와서 자신의 일을 완성하고 그 나라를 성취하실 것이라고 이 남자와 여자들은 너무도 진지하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지만, 이렇게 경솔한 형제 사랑을 실험한 최종적 결과는 비참하였고 슬픔을 낳았습니다. 수천 명의 착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부동산을 팔았고 그들의 자본(資本)이 되는 모든 재물들과 기타 생산적인 자산 일체를 처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함께 나누는” 자산은 줄어들어 끝이 나게 되었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지 않도록 모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4.8 (2067.3) In these days they celebrated the Lord’s Supper after the manner of its establishment; that is, they assembled for a social meal of good fellowship and partook of the sacrament at the end of the meal. 이 무렵,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을, 그것이 창설된 방법에 따라서 거행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함께 모여 사이좋게 교제하면서 음식을 서로 나누고, 그 식사가 마칠 때,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194:4.9 (2067.4) At first they baptized in the name of Jesus; it was almost twenty years before they began to baptize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Baptism was all that was required for admission into the fellowship of believers. They had no organization as yet; it was simply the Jesus brotherhood.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는 신자들의 친교에 가입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아무 조직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단순히 예수의 형제신분이었습니다.

194:4.10 (2067.5) This Jesus sect was growing rapidly, and once more the Sadducees took notice of them. The Pharisees were little bothered about the situation, seeing that none of the teachings in any way interfered with the observance of the Jewish laws. But the Sadducees began to put the leaders of the Jesus sect in jail until they were prevailed upon to accept the counsel of one of the leading rabbis, Gamaliel, who advised them: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is of men, it will be overthrown; but if it is of God, you will not be able to overthrow them, lest haply you be found even to be fighting against God.” They decided to follow Gamaliel’s counsel, and there ensued a time of peace and quiet in Jerusalem, during which the new gospel about Jesus spread rapidly. 이 예수의 종파는 급속히 성장했고, 사두개인들은 한 번 더 그들을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상황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떤 것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충돌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기 시작했고, 지도하는 랍비들 중 하나인 가말리엘의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설득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행5: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And now I say unto you, Refrain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counsel or this work be of men, it will come to nought: But if it be of God, ye cannot overthrow it; lest haply ye be found even to fight against God.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하였고, 예루살렘에는 평화와 안정이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이 신속하게 퍼졌습니다.

194:4.11 (2068.1) And so all went well in Jerusalem until the time of the coming of the Greeks in large numbers from Alexandria. Two of the pupils of Rodan arrived in Jerusalem and made many converts from among the Hellenists. Among their early converts were Stephen and Barnabas. These able Greeks did not so much have the Jewish viewpoint, and they did not so well conform to the Jewish mode of worship and other ceremonial practices. And it was the doings of these Greek believers that terminated the peaceful relations between the Jesus brotherhood and the Pharisees and Sadducees. Stephen and his Greek associate began to preach more as Jesus taught, and this brought them into immediate conflict with the Jewish rulers. In one of Stephen’s public sermons, when he reached the objectionable part of the discourse, they dispensed with all formalities of trial and proceeded to stone him to death on the spot.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로단의 두 생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헬라파 중에서 많은 사람이 개종(改宗)했습니다. 그들의 초기 개종자들 가운데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의 관점과 많이 달라서,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다른 예식의 관습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의 형제신분 단체와 바리새인•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스테반과 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대로 더욱 전파하기 시작하여, 그들은 곧 유대인 통치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스테반의 대중 설교 중 하나에서, 강연(講演) 중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자, 그들은 모든 공식적 재판 절차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194:4.12 (2068.2) Stephen, the leader of the Greek colony of Jesus’ believers in Jerusalem, thus became the first martyr to the new faith and the specific cause for the formal organization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This new crisis was met by the recognition that believers could not longer go on as a sect within the Jewish faith. They all agreed that they must separate themselves from unbelievers; and within one month from the death of Stephen the church at Jerusalem had been organized under the leadership of Peter, and James the brother of Jesus had been installed as its titular head.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로운 신앙의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특별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해, 신자들은 이제는 더 유대 신앙의 한 종파로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인식(認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非)신자들과 따로 분리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습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이 안 되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아래 조직되어,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명목상 수장(首長)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4.13 (2068.3) And then broke out the new and relentless persecutions by the Jews, so that the active teachers of the new religion about Jesus, which subsequently at Antioch was called Christianity, went forth to the ends of the empire proclaiming Jesus. In carrying this message, before the time of Paul the leadership was in Greek hands; and these first missionaries, as also the later ones, followed the path of Alexander’s march of former days, going by way of Gaza and Tyre to Antioch and then over Asia Minor to Macedonia, then on to Rome an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empire. 그 후 유대인들에 의해 잔인한 박해가 새롭게 시작되어, 예수에 대해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는 의욕적인 선생들은 예수를 선포하면서 그 제국의 변방(邊方)들을 향하여 퍼져 나갔으며, 그 종교는 후에 안디옥에서 기독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바울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리스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선교사들은, 그 뒤를 이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전에 알렉산더가 행진하였던 길을 따라서,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디옥으로 갔으며, 이어서 소아시아를 지나 마케도니아로 갔고, 그 후에는 계속 로마와 그 제국의 가장 먼 지방들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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