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5. Fatherly and Brotherly Love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140:5.1 (1573.3) From the Sermon on the Mount to the discourse of the Last Supper, Jesus taught his followers to manifest fatherly love rather than brotherly love. Brotherly love would love your neighbor as you love yourself, and that would be adequate fulfillment of the “golden rule.” But fatherly affection would require that you should love your fellow mortals as Jesus loves you. 산상수훈에서 최후 만찬의 강론까지,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형제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황금률”을 충분히 이행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애정은, 예수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가 동료 필사자들을 사랑해야만할 것을 요구하노라.

140:5.2 (1573.4) Jesus loves mankind with a dual affection. He lived on earth as a twofold personality — human and divine. As the Son of God he loves man with a fatherly love — he is man’s Creator, his universe Father. As the Son of Man, Jesus loves mortals as a brother — he was truly a man among men. 예수님은 이중 애정으로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땅에서 이중 – 인간적이며 신적 -고유성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사람의 창조자, 자기 우주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형제로 필사자들을 사랑하십니다. – 그는 참으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140:5.3 (1573.5) Jesus did not expect his followers to achieve an impossible manifestation of brotherly love, but he did expect them to so strive to be like God — to be perfect even as the Father in heaven is perfect — that they could begin to look upon man as God looks upon his creatures and therefore could begin to love men as God loves them — to show forth the beginnings of a fatherly affection. In the course of these exhortations to the twelve apostles, Jesus sought to reveal this new concept of fatherly love as it is related to certain emotional attitudes concerned in making numerous environmental social adjustments.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형제 사랑의 성취를 기대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되도록 – 분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들을 대하시듯,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사람들을 사랑하여 – 아버지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향한 이 권고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이 새 개념 – 그것이 수많은 사회 환경적 조절에 관련된 어떤 감정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듯이 – 을 계시하려고 애쓰셨습니다.

140:5.4 (1573.6) The Master introduced this momentous discourse by calling attention to four faith attitudes as the prelude to the subsequent portrayal of his four transcendent and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in contrast to the limitations of mere brotherly love. 주(主)님은,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대조하여,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네 가지 초월적 최극 반응들로 이루어진 후반부 묘사에 대한 전주곡(前奏曲)으로, 신앙의 네 가지 태도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셨습니다.

140:5.5 (1573.7) He first talked about those who were poor in spirit, hungered after righteousness, endured meekness, and who were pure in heart. Such spirit-discerning mortals could be expected to attain such levels of divine selflessness as to be able to attempt the amazing exercise of fatherly affection; that even as mourners they would be empowered to show mercy, promote peace, and endure persecutions, and throughout all of these trying situations to love even unlovely mankind with a fatherly love. A father’s affection can attain levels of devotion that immeasurably transcend a brother’s affection. 그는 먼저 영이 가난한 자들, 공의(公義)에 굶주린 자들, 온유함을 지속하는 자들, 심정이 청결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영(靈)을 인식하는 그런 필사자들은 아버지의 애정을 놀랍게 실행하는 시도를 할 만큼 신적 비(非)이기심의 그런 수준들에 도달하기를 기대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들도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증진시키며, 박해를 견디고, 이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 사랑하는 권능을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애정은, 형제의 애정을 헤아릴 수 없이 초월하는 헌신의 수준들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140:5.6 (1573.8) The faith and the love of these beatitudes strengthen moral character and create happiness. Fear and anger weaken character and destroy happiness. This momentous sermon started out upon the note of happiness. 이 지극한(최극) 행복(팔복)의 신앙과 사랑은 도덕적 성품을 강화하고 행복을 창조합니다. 공포와 분노는 성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합니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의 선율(旋律 멜로디)에서 나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2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7 (1573.9) 1. “Happy are the poor in spirit — the humble.” To a child, happiness is the satisfaction of immediate pleasure craving. The adult is willing to sow seeds of self-denial in order to reap subsequent harvests of augmented happiness. In Jesus’ times and since, happiness has all too often been associated with the idea of the possession of wealth. In the story of the Pharisee and the publican praying in the temple, the one felt rich in spirit — egotistical; the other felt “poor in spirit” — humble. One was self-sufficient; the other was teachable and truth-seeking. The poor in spirit seek for goals of spiritual wealth — for God. And such seekers after truth do not have to wait for rewards in a distant future; they are rewarded now. They find the kingdom of heaven within their own hearts, and they experience such happiness now. “영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행복하도다.” 아이들의 행복은 바로 쾌락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행복을 늘려 수확하려고 자기를 부인하는 씨를 기꺼이 뿌려서 나중에 거두려 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의 소유라는 관념과 흔히 너무 관련되어 왔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은 (단기적) 영이 부요함 – 자기중심의 이기적 상태 –을 느꼈고, 세리는 “영이 가난함” – 겸손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은 자아-만족(자만)하였고, 다른 사람은 배우려 하면서 진리를-추구했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장기적) 영적 부요의 목표 즉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진리의 탐구자들은 먼 미래의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상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에서 하늘의 나라를 발견하며, 그러한 행복을 지금 체험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3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140:5.8 (1574.1) 2. “Happy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Only those who feel poor in spirit will ever hunger for righteousness. Only the humble seek for divine strength and crave spiritual power. But it is most dangerous to knowingly engage in spiritual fasting in order to improve one’s appetite for spiritual endowments. Physical fasting becomes dangerous after four or five days; one is apt to lose all desire for food. Prolonged fasting, either physical or spiritual, tends to destroy hunger. “공의(公義)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채워질 것임이요.” 영의 가난함을 느끼는 자들만이 언제나 공의에 굶주릴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만이 신적 능력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영적 자질의 욕구를 개선하려고 고의로 영적 금식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위험합니다. 육체적 금식은 4, 5일이 지나면 위험해지며, 그 사람은 식욕을 모두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장기간 금식은 배고픔을 없애는 경향이 있습니다.

140:5.9 (1574.2) Experiential righteousness is a pleasure, not a duty. Jesus’ righteousness is a dynamic love — fatherly-brotherly affection. It is not the negative or thou-shalt-not type of righteousness. How could one ever hunger for something negative — something “not to do”? 체험적 공의는 기쁨이며,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의는 역동적 사랑 – 아버지-형제의 애정입니다. 그것은 부정적이거나 ‘하지 말라’는 유형의 공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부정적인 것 –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사람이 계속 바랄 수 있겠습니까?

140:5.10 (1574.3) It is not so easy to teach a child mind these first two of the beatitudes, but the mature mind should grasp their significance. 어린애 같은 사람의 마음에 팔복의 처음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숙한 마음은 그 중요성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4 – 온유함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140:5.11 (1574.4) 3. “Happy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Genuine meekness has no relation to fear. It is rather an attitude of man co-operating with God — “Your will be done.” It embraces patience and forbearance and is motivated by an unshakable faith in a lawful and friendly universe. It masters all temptations to rebel against the divine leading. Jesus was the ideal meek man of Urantia, and he inherited a vast universe.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임이요.”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협력하는 사람의 태도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그것은 인내와 참을성을 담고 있으며, 합법적이며 우호적인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신적 이끄심에 반항하는 모든 유혹을 정복합니다. 예수님은 지구(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광대한 우주를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5 – 심정 청결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140:5.12 (1574.5) 4. “Happy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Spiritual purity is not a negative quality, except that it does lack suspicion and revenge. In discussing purity, Jesus did not intend to deal exclusively with human sex attitudes. He referred more to that faith which man should have in his fellow man; that faith which a parent has in his child, and which enables him to love his fellows even as a father would love them. A father’s love need not pamper, and it does not condone evil, but it is always anticynical. Fatherly love has singleness of purpose, and it always looks for the best in man; that is the attitude of a true parent. “심정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영적 청결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부정적 특성이 아닙니다. 청결(순결)을 논하면서, 예수님은 인간의 성(性)적 태도만 다루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가져야만 하는 신앙; 어버이가 자녀에게 가지는 신앙, 아버지가 사랑하듯이 동료를 사랑하게 하는 신앙에 더 주의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버릇없는 말이나 행동)을 받아줄 필요가 없으며, 악을 눈감아주지 않지만, 언제나 동기의 진지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에만 골똘하며, 그것은 항상 인간에게서 최선을 찾습니다. 그것이 참 부모의 자세입니다.

140:5.13 (1574.6) To see God — by faith — means to acquire true spiritual insight. And spiritual insight enhances Adjuster guidance, and these in the end augment God-consciousness. And when you know the Father, you are confirmed in the assurance of divine sonship, and you can increasingly love each of your brothers in the flesh, not only as a brother — with brotherly love — but also as a father — with fatherly affection. 하나님을 보는 것- 신앙으로 -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습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적 통찰력은 조율자의 안내를 강화하며, 결국 하나님-의식을 증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적 아들신분이라는 확신이 굳어지고, 너희는 점점 더 서로 육신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 형제의 사랑으로 -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 아버지의 애정 – 으로, 사랑할 수 있느니라.

140:5.14 (1574.7) It is easy to teach this admonition even to a child. Children are naturally trustful, and parents should see to it that they do not lose that simple faith. In dealing with children, avoid all deception and refrain from suggesting suspicion. Wisely help them to choose their heroes and select their lifework. 이 훈계는 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습니다. 아이들은 자연히 남을 잘 믿으며,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 단순한 신앙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모든 속임수를 피하고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삼가라. 자기 영웅들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 과업을 고르도록 현명히 그들을 도우라.

140:5.15 (1574.8) And then Jesus went on to instruct his followers in the realization of the chief purpose of all human struggling — perfection — even divine attainment. Always he admonished them: “Be you perfect, even as your Father in heaven is perfect.” He did not exhort the twelve to love their neighbors as they loved themselves. That would have been a worthy achievement; it would have indicated the achievement of brotherly love. He rather admonished his apostles to love men as he had loved them — to love with a fatherly as well as a brotherly affection. And he illustrated this by pointing out four supreme reactions of fatherly love: 그 후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모든 인간의 주된 분투의 목적 – 온전 – 신적 달성까지-의 실현을 계속 지시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는 그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이르셨습니다. 그는 12사도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성취였어야 했으며, 형제의 사랑의 성취를 드러냈어야 합니다. 그는 오히려 사도들에게 자신(예수)이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 형제의 애정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애정으로 –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사랑이 지닌 네 가지 최극 반응들을 가리켜 이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6 – 애통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140:5.16 (1575.1) 1. “Happy are they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So-called common sense or the best of logic would never suggest that happiness could be derived from mourning. But Jesus did not refer to outward or ostentatious mourning. He alluded to an emotional attitude of tenderheartedness. It is a great error to teach boys and young men that it is unmanly to show tenderness or otherwise to give evidence of emotional feeling or physical suffering. Sympathy is a worthy attribute of the male as well as the female. It is not necessary to be calloused in order to be manly. This is the wrong way to create courageous men. The world’s great men have not been afraid to mourn. Moses, the mourner, was a greater man than either Samson or Goliath. Moses was a superb leader, but he was also a man of meekness. Being sensitive and responsive to human need creates genuine and lasting happiness, while such kindly attitudes safeguard the soul from the destructive influences of anger, hate, and suspicion.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소위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행복이 애통에서 얻을 수 있다고 결코 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면적이거나 허식적 애통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다정(多情)한 감정적 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다정함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의 느낌이나 육체적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이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공감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훌륭한 속성입니다. 남자답기 위해 무정(無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정함은 용감한 남자를 만드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애통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애통(哀痛)자 모세는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민감히 인간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은 진정 길이 변하지 않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그런 인정(人情) 많은 태도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의심의 해로운 영향에서 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7 – 긍휼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140:5.17 (1575.2) 2. “Happy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Mercy here denotes the height and depth and breadth of the truest friendship — loving-kindness. Mercy sometimes may be passive, but here it is active and dynamic — supreme fatherliness. A loving parent experiences little difficulty in forgiving his child, even many times. And in an unspoiled child the urge to relieve suffering is natural. Children are normally kind and sympathetic when old enough to appreciate actual conditions.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자비는 가장 참된 우정 – 자애(慈愛)의 높이와 깊이와 폭을 뜻합니다. 자비는 종종 수동적일지 모르나, 여기에서 자비는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 최극의 아버지다움입니다. 애정이 깊은 부모는 여러 번 자녀를 용서해도 거의 어렵지 않음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리고 버릇없이 자라지 않은 아이의 경우, 고통을 덜어주려는 충동은 자연스럽습니다. 실제 형편을 헤아릴 만큼 충분한 나이의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정(情공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8 – 화평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140:5.18 (1575.3) 3. “Happy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sons of God.” Jesus’ hearers were longing for military deliverance, not for peacemakers. But Jesus’ peace is not of the pacific and negative kind. In the face of trials and persecutions he said, “My peace I leave with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This is the peace that prevents ruinous conflicts. Personal peace integrates personality. Social peace prevents fear, greed, and anger. Political peace prevents race antagonisms, national suspicions, and war. Peacemaking is the cure of distrust and suspicion. “화평하게 하는 자(분쟁 조정자)는 행복하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청중(聽衆)들은 평화를 만드는 분쟁 조정자가 아니라 군사적 해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온순한 소극적 종류가 아닙니다. 재판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남기노라,” “너희 심정에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괴적인 분쟁을 예방하는 평화입니다. 개인적 평화는 고유성을 통합합니다. 사회적 평화는 두려움과 탐욕과 분노를 예방합니다. 정치적 평화는 인종적 반목과 국가적 의심 그리고 전쟁을 예방합니다. 화평(분쟁 조정)은 불신과 의심의 치료제입니다.

140:5.19 (1575.4) Children can easily be taught to function as peacemakers. They enjoy team activities; they like to play together. Said the Master at another time: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shall find it.” 아이들은 화평(분쟁조정)자로 활동하도록 쉽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체 활동들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함께 놀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나,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려고 하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 9 – 공의를 위한 박해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140:5.20 (1575.5) 4. “Happy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Happy are you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Rejoice and be exceedingly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공의(公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가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넘치도록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5.21 (1575.6) So often persecution does follow peace. But young people and brave adults never shun difficulty or danger.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And a fatherly love can freely do all these things — things which brotherly love can hardly encompass. And progress has always been the final harvest of persecution. 종종 박해가 화평을 따릅니다. 그러나 청년들과 용감한 어른들은 어려움과 위험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든 것들 – 형제의 사랑이 거의 이룰 수 없는 것들 –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박해의 최종 수확물이었습니다.

140:5.22 (1575.7) Children always respond to the challenge of courage. Youth is ever willing to “take a dare.” And every child should early learn to sacrifice. 아이들은 항상 용기에 도전할 때 반응합니다. 청년들은 언제나 자진해서 “도전에 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기를 배워야만 합니다.

140:5.23 (1575.8) And so it is revealed that the beatitude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re based on faith and love and not on law — ethics and duty. 그래서 산상수훈의 지복(至福지극한 팔복)은 신앙과 사랑에 근거를 두며, 법 – 윤리와 의무 –에 근거를 두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140:5.24 (1575.9) Fatherly love delights in returning good for evil — doing good in retaliation for injustice. 아버지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 – 불의를 선행으로 갚아서 – 답례하기를 기뻐합니다.